본문 바로가기
여행자료/완료 여행자료

서산 해미산성

by 칠갑산 사랑 2023. 5. 21.
728x90

홀대모 모임에 앞서 서산의 연암산과 삼준산 산행 후 짜투리 시간을 이용해 잠시 해미읍성을 둘러본 시간,

 

지난 해 겨울 약 16년 동안 정신없이 진행한 1백두대간과 9정맥 및 6기맥 그리고 162지맥을 많은 선답자와 후답자들 특히 준희선생님의 축하를 받으며 무척지맥 청암취수장 앞 낙동강에서 무탈하게 마무리하고 오늘과 내일까지 양 이틀간 충남 아산시 외암민속마을 근처의 외암강당 커뮤니티센터에서 예정된 홀대모 21주년 모임에서 드디어 공식적인 종주영웅에 등극하게 되는데 그에 앞서 오전에 잠시 연암산과 삼준산을 둘러보고 남은 짜투리 시간을 이용해 잠시 해미읍성을 둘러 볼 기회가 생겼다.

일과 가족 여행으로 몇번인가 스치며 지났던 해미인데 이렇게 해미읍성을 들려 잠시 둘러보는 기회는 처음이기에 늦은감도 없지 않지만 그래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곳을 잠시나마 들려 그리움을 해소했다는 것에 의미를 두며 살펴 본 시간들이었다.

다만 오전 산행 후 아산으로 이동을 해야 되기 때문에 시간적인 제약으로 충분히 여유있게 둘러보지 못함은 아쉬움으로 남았지만 그래도 또 다른 여행지를 한 곳 더 알게 되었음에 감사하며 다시 기회가 되면 그때 여유롭게 사전 지식을 가지고 둘러 볼 수 있기를 바래본다.

 

해미읍성 진남문은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해미읍성의 남문()이이자 정문이다.

해미읍성에는 남문과 동문 및 서문이 있는데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남문뿐이고 붕괴되었던 동문과 서문은 1974년 다시 만들어진 것이다.

성문은 화강석으로 만든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고 문 위에는 정면 3칸과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단층 문루가 있다.

문루의 대석에 황명홍치사년신해조(皇明弘治四年辛亥造)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명나라 연호로 조선 성종 22년(1491)년에 해당하며 해미읍성이 그 해에 완공됐음을 말해준다.

진남문 북서쪽에는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깊이 판 해자가 남아 있다.

 

서산 해미읍성은 사적 제116호로서 충남 서산시 해미면에 있는 조선시대 석축 읍성으로 왜구의 해안지방 침입을 제압하기 위해 1491년(조선 성종22) 축조되었다.
읍성은 해발 130m인 북동쪽 낮은 구릉의 평지 위에 축조되었으며 둘레 1,800m, 성벽의 높이 4.9m, 성 안의 넓이 196,381㎡ 규모이다.
성벽의 석재는 위로 오를수록 점차 작은 석재가 사용되고 있으며 성벽의 안쪽은 흙으로 내탁되었다.
본래 읍성 안에는 4대문과 옹성2개소, 객사2동, 포루2동, 동헌1동 등이 조성된 큰 규모였다고 전해지며 현재는 동문, 서문, 객사지 등이 확인되어 복원중이다.

 

해미읍성 진남문을 통해 들어가자마자 우측으로 조선시대 주요 병영깃발에 대한 설명판이 보여 잠시 읽어보며 역사를 배워본다.

 

진남문 위 성벽으로 올라 방금 전 걸었던 도로 뒤 해미읍 상가지역들을 사진에 담아보고 우측 자동차들이 주차된 곳 상가에서 해미읍성 구경 후 소머리국밥으로 점심식사를 하였다.

 

진남문 위 성벽에 세워진 망루로서 망루 안에는 커다란 북이 설치되어 있는데 자금은 출입이 금지되어 사진으로만 남긴다.

깃발과 북으로 전달 사항을 알리는 교통수단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도 해 본다.

 

진남문 성벽 위에서 해미읍성 내부의 잘 정리된 잔디밭과 주막 등 건물들을 사진에 담고

 

해미읍성 건물들 뒤 저 멀리 금북정맥의 마루금이 지나는 가야산과 일락산 줄기도 사진에 담으며 옛추억을 더듬어 보고

 

주막 옆으로 나 있는 도로를 따라 해미읍성 내부 경관과 상태를 둘러보기 위해 출발하고

 

잘 관리되고 있는 소나무 조경수 아래 그네들이 설치되어 있고 그늘속 그네에는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고 있는 듯 보이고

 

해미읍성 서문은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개항기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장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었으며 정분문(靜氛門)이라고도 불렸던 관문이었다.

성안의 옥에 수감된 천주교인들 가운데 형이 확정된 사람은 서문 밖으로 끌려 나와 처형되었으니 서문 밖 일대는 사학죄인(邪學罪人)들의 공식 처형장인 셈이었다.

매질이나 교수 혹은 참수로 사형이 집행되기도 하였고 곡식을 타작하듯 메어치는 자리개질로 처형하던 돌다리도 있었다.

천주교 박해 당시 서산 해미읍성의 서문 밖 일대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가장 두려운 장소였으며 순교의 피로 얼룩진 서산 해미읍성의 서문 밖 일대는 세대가 지나면서 순교자의 열정을 기념하는 성지로 변화되었다.

1956년 유물 보존을 위해 서산성당으로 옮겨 갔던 해미읍성 형장 길의 자리개돌을 1986년 8월 29일 본래의 위치로 되돌려 놓으면서 해미읍성 서문 밖 순교지가 기념되기 시작하였다.

1989년 6월 24일 세워진 순교 현양비에는 당시 서산 해미성당 주임 신부 윤종관 가별(세례명: 가브리엘)이 짓고 쓴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비문에는 순교지의 순교 내력이 담겨 있다.

 

해미읍성 한쪽에는 국궁장도 설치되어 있어 살펴보니 다양한 연령대에 맞춰 표적지의 거리도 다르게 설치되어 있었다.

 

해미읍성 객사는 조정의 관리들이 묵어가던 일종의 귀빈 숙소이자 관아의 관원들이 국왕에 대한 예를 올리는 장소였으며 현감이 업무를 보는 동헌(東軒) 서남쪽에 있다.

1981년 발굴조사를 통하여 객사터를 발견하고 고증을 거쳐 1999년 7월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으며 옛 기록에는 객사 본채와 부속채를 포함한 면적이 약 349.25m²(105.65평)이었다고 나와 있다.

객사의 정청(政廳) 좌우로 동익헌과 서익헌이 있었으며 건물 주위에 막담이 둘러져 있었는데 탱자나무로 목책을 두른 객관이라는 뜻으로 지성관이라 불리기도 했다.

 

잘 가꿔진 드넓은 잔디밭에는 많은 젊은 청춘들이 젊음을 발산하며 연을 날리고 있었다.

 

해미읍성 외삼문은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해미읍성의 호서좌영 관아 정문이다.

효종 3년(1652) 해미에 있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을 청주로 이설한 후 해미읍성에는 충청도의 5개 병영 중 하나였던 호서좌영을 설치하고 반양리에 있던 해미동헌을 옮겨왔다.

해미읍성 외삼문은 호서좌영장을 겸직한 해미현감이 정사를 보던 동헌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원래 읍해루(揖海樓)라 하였으나 1970년대에 복원한 후 호서좌영(湖西左營)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서산 관아문(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41호)을 모방하여 복원한 2층 문루 형식이며 아래층 3칸에 문이 달려 있고 위층에는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누각이 있다.

 

해미읍성 동헌은 읍성의 정문격인 진남문을 들어서면 곧게 뻗은 길로 멀리 동헌이 보이고 동헌으로 가는 길 우측에 천주교 순교자들의 한이 서려 있는 호야나무가 탱자나무 울타리 너머 말없이 철사줄의 흔적을 두른 채 서있고 호서좌영(湖西左營)이라 써 있는 동헌의 관아문을 들어서면 동헌과 동헌부속사 등의 건물이 있으며 동헌 우측으로 난 쪽문을 나서면 망루로 오르는 계단이 이어져 있다.

계단을 오르면 망루 해발 130여m의 망루에서 내다보면 멀리 서해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동헌은 조선 효종 2년(1651년) 해미에 호서좌영을 설치하고 해미현감이 병영장으로 겸하고 인근 12개 병무행정과 포도대장 업무를 관장하던 집무실이다.

 

해미읍성 내아는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해미읍성의 관사()로서 해미읍성 관아의 관리와 그 가족들의 살림집이었다.

동헌(東軒) 서쪽의 별도로 구획된 담장 안에 있으며 동헌에서 내아로 들어가는 협문이 있다.

1981년 발굴조사를 하고 2000년 11월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는데 옛 문헌에는 내아의 면적은 약 40.99m²(12.4평)라고 적혀 있는데 정면 5칸에 측면 1.5칸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내아에 딸려 있는 부속채는 관아의 물품이 보관된 창고 출납을 담당한 하급관리 고자(庫子)가 근무했던 고자실(庫子室)이다.

 

해미읍성 옥사에 관한 설명판을 읽어보니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의 천주교와 깊은 연관이 있는 곳이다.

교도들을 투옥하고 문초하였던 역사적 진실을 바탕으로 터만 남아 있던 옥사를 발굴 작업 뒤 복원하고 재현하였다.

1935년에 간행된 해미 순교자 약사의 기록을 토대로 복원하였으며 내옥과 외옥이 있고 각각 정면 3칸의 건물로 남녀의 옥사가 구분되어 있다.

1790년부터 100여 년간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규정하여 이곳에서 투옥 및 처형을 하였는데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르고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서산 해미읍성 회화나무는 해미읍성 안에 있는 수령 약 300년으로 추정되는 회화나무로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나무 뒤에는 천주교 신자를 가두어두었던 감옥이 있었는데 1790~1880년 사이 이곳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이 나무의 동쪽으로 뻗어 있던 가지에 매달아 고문하였다고 한다.

동쪽 가지는 1940년대에 가운데 줄기는 1969년 6월 26일에 폭풍으로 부러졌으나 여러 차례 외과 수술을 시행하고 토양을 개량하여 보호하며 관리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형벌에 대한 설명판이 있어 읽어보니 조선 시대에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법에 따라 형을 받았는데 죄의 경중에 따라 태(笞), 장(杖), 도(徒), 유(流), 사(死) 이렇게 5형이 기본이다.

1. 태형과 장형 : 태형은 5형 가운데 가장 가벼운 형벌로 죄수를 형대에 묶고 하의를 내려 엉덩이를 노출시킨 다음 엉덩이를 한 대씩 때리면서 세는 형벌이다. 장형은 태형보다 무거운 형벌이며 처벌 방식은 태형과 같고 단지 회초리 크기만 다를 뿐이다.

2. 도형 : 도형은 요즘의 징역형에 해당하는 형벌로 일정 기간 동안 죄인을 관아에 구금하고 일정한 노역을 시키는 형벌이며 1년, 1년 6개월, 2년 6개월, 3년의 등급이 있었는데 지금의 징역형에 해당된다. 도형을 받는 죄인은 각각 장형도 함께 받았다.

3. 유형 : 유형 또는 유배는 큰 죄를 지은 자를 사형하지 않고 외딴 시골이나 섬 등 먼 곳으로 쫓아내 일정 기간 동안 제한된 장소에서만 살게 하는 벌로 귀양이라고도 하는데 이 제도는 삼국 시대부터 있었던 제도이다.
조선 시대에 유형은 죄의 가볍고 무거움에 따라 유배지까지 거리가 2,000리, 2,500리, 3,000리의 세 등급으로 나뉘었으나 한양에서 남쪽 끝까지 해 봐야 기껏 1,000리도 되지 않는 좁은 땅이라 빙빙 돌고 돌아 정해진 거리를 채우고 유배지로 가기도 했다.
제주도, 거제도, 흑산도는 조선의 3대 유배지였는데 그 가운데 한양에서 가장 먼 제주도는 기후 변화가 심하고 물자를 얻기도 어려워 사람이 살기 힘든 곳으로 운이 좋으면 풀려나기도 했지만 죽지 않는 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망망대해 외로운 섬은 악몽 같은 곳이었다.
반란 같은 큰 죄를 지어 유배를 당하기도 했지만 정치적 음모에 희생되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유배를 가기도 했으며 언젠가 왕이 다시 부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 떠나지만 유배지로 가다 병을 얻어 죽기도 하고 외로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당파 싸움이 치열했던 조선 시대에는 김만중, 윤선도, 정약용, 김정희, 허균 등과 같은 많은 선비와 예술가들이 유배를 가야 했으며 또 벼슬아치만 유배를 당했던 것은 아니다.

유배는 왕족을 비롯해 평민과 천민에게도 내려졌던 형벌로서 단종, 연산군, 광해군도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뒤 각각 영월, 강화도, 제주도로 유배를 떠났다.

4. 사형 : 사형은 말 그대로 사형으로 극형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살인자에게 내렸던 형벌이다.

사형에는 목을 매는 교형(絞刑)과 목을 베는 참형(斬刑) 그리고 머리와 양팔 및 양다리, 몸통 등의 여섯 부분으로 찢어 죽이는 능지처사(凌遲處死) 이렇게 세 가지가 있었다.

 

5. 형벌의 집행

조선 시대는 형벌이 단계별로 엄격하게 정해져 있었고 형벌을 집행하는 데 있어서 철저한 원칙을 두었다.

백성이 억울하게 벌을 받으면 관청에 사정을 이야기하여 풀어 달라고 할 수 있었으며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은 반드시 본인에게 판결문을 내리고 진실을 밝혀서 백성들을 함부로 처벌하지 못하도록 했다.

관리들의 법 집행이 공정한가를 감시하기 위해 암행어사를 보내기도 했으며 수령은 가벼운 죄에 대해 매질하는 태형만을 집행할 수 있었고 그 이상은 관찰사의 지시를 받아야 했다.

사형은 특별한 경우를 빼고 나라에서 심사와 토의 과정을 거쳐 왕이 직접 결정했다고 한다.

 

옥사 안에는 많은 학생들이 장난을 치면서 옛 생활을 재현하며 웃음이 끊기질 않고 있다.

 

전통 가옥은 전통 건축 양식으로 지은 집으로 각 지역에서 얻기 쉬운 재료를 활용하여 집을 지으며 각 지역의 기후나 지형에 따라 집 모양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우리나라의 전통 가옥은 크게 초가집, 기와집, 너와집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것은 지붕의 재료에 따라 나눈 것으로 농사를 짓던 평야 지역에는 볏짚으로 지붕을 이은 초가집이 많았고 양반이나 부자들은 기와를 얹은 기와집에서 살았으며 또한 나무가 많은 산간 지역에는 나무를 이용해 지붕을 만든 너와집이 많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전통 가옥인 한옥은 한옥 마을에 가면 볼 수 있는데 서울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위치한 북촌 한옥 마을과 서울 중구에 있는 남산골 한옥 마을, 전라북도 전주시에 있는 전주 한옥 마을 등이 대표적으로
이들은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거리가 있어 관광지로 유명한 곳이다.
바람이 많이 부는 제주도에서는 바람에 지붕이 날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굵은 밧줄을 그물처럼 얽어 지붕 위에 놓은 것이 특징이며 또 제주도에는 돌이 많은데 집 주위에 높은 돌담을 쌓아 강한 바람을 피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해미읍성 청허정은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해미읍성(瑞山海美邑城)에 있는 조선 시대 누정(樓亭)으로 서산 해미읍성은 1417년(태종 17)부터 1421년(세종 3) 사이에 당시 덕산(德山)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을 해미로 옮기고자 축성(築城)되었다.

서산 해미읍성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6호로 지정되었다.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자리한 해미읍성의 북동부 구릉 정상부에 청허정(淸虛亭)이 위치해 있으며 주변은 소나무 숲으로 되어 있다.

조선 시대 병마절도사 조숙기가 세웠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20권에 기록되어 있고 1872년(고종 9) 지방도인 해미현지도(海美縣地圖)에 원형의 읍성이 비교적 잘 나타나 있는데 무지개 모양의 누각이 있는 남문의 모습을 잘 볼 수 있으며 청허정고지(淸虛亭古地)라고 표기되어 있다.
1872년 이전에 훼철된 상황이었으나 1970년 해미읍성의 보수 공사가 진행되면서 1976년 콘크리트로 복원되었고 1987년 7월 보수되었다.

본래 청허정은 읍성에서 제일 높은 곳으로 서해를 바라보는 망루의 역할을 하였으며 휴식 공간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겹처마 모임지붕 건물로, 절병통으로 마감한 정자로서 시멘트로 기단을 쌓고 방형의 장초석을 놓았다.

12개의 원형 기둥을 세우고 익공계 양식으로 이익공(二翼工)을 사용하였으며 화반을 받쳤다.

안초공(按草工)도 화반과 더불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고 각 부재들마다 단청을 그려 넣었으며 우물 반자와 우물마루를 짜 넣은 후 난간은 계자 난간(鷄子欄干)을 사용하였다.

청허정 자리에는 일제 강점기 때 신사(神社)가 건립되면서 정상부로 향하는 진입로가 만들어졌는데 아직까지 남아 있으며 청허정으로 올라가는 진입로로 사용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다양한 병장기들도 전시를 하고 있다.

 

진남문 안쪽 넓은 잔디마당에서는 국악놀이 공연이 펼쳐지고 많은 여행객들이 모여 앉아 구경을 하면서 호응하고 있어 잠시 구경하고 뒤돌아 선다.

 

간단히 해미읍성을 돌아보며 사진에 담은 후 다시 진남문 앞에서 공연을 구경한 후 동쪽으로 보이는 금북정맥의 가야산과 일락산 산줄기를 사진에 담으며 해미읍성 관람을 종료한다.

 

이제 허기를 느끼기 시작하고 진남문 앞 시장통으로 들어 가 소머리국밥으로 점심식사를 해결한 후 홀대모 모임이 계획되어 있는 충남 아산시 외암민속마을 근처의 외암강당 커뮤니티센터를 향해 서산시를 출발한다.

양 이틀 간 준희 선생님을 필두로 선배님들과 후배님들 모두 모여 의미 있는 모임과 종주영웅으로서의 등극을 축하해 주시는 자리이기에 다른 모임과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시간이다.

앞으로도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만나보고 싶었고 오르고 싶었던 산줄기와 봉우리들을 만나면서 조금 더 자연과 가까워질 수 있기를 바라며 종주영웅으로서의 수양에 더욱 전념을 해야하겠다는 생각도 해 보는 시간이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