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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료/완료 여행자료

교동도 여행후기

by 칠갑산 사랑 2017.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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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 인천 강화군 교동면 교동도 일대

여행날자 : 2017년 02월 18일 (토요일)

여행인원 : 총 2명, 칠갑산과 옆지기

여행테마 : 승용차를 이용해 교동도를 일주하며 옛 추억을 찾아 둘러보기

여행시간 : 약 07시간 동안, 10시 30여분 옆지기와 집에서 출발하여 교동도 한바퀴 둘러보고 17시 쯤 복귀 후 여행 종료

여행코스 : 애마이용 집 출발-교동대교-고구저수 -교동면사무소-대룡전통시장-강화나들길10코스-죽산포-난정리-교동향교-화개사-

               교동읍성-연산군유배지-조선시대한증막-교동대교-강화풍물시장-집으로 복귀

교동도 가는 길 : 집-88고속화도로-김포-강화-교동대교-교동도 (약 01시간 30분 소요)


 

 

옆지기와 함께 어린시절 추억을 찾아 잠시 발걸음 멈췄던 교동도에서의 시간들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여 보낸 8개월여의 시간이 흐르고 이제서야 약간의 시간을 내 교동도를 찾는 시간은 참으로 감회가 새로운 시간으로 남는다.

마음은 늘 좋아하는 산에 들어 있지만 현실이 받혀주지 않으니 가슴앓이만 했던 시간동안 몸이 많이도 망가졌다는 의사의 소견에 따라 먹고 사는 것보다 조금 더 건강한 삶에 대한 시간 투자를 약속하고 다시 바쁜 일정을 생각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약간은 무기력하고 의미없이 보내는 시간을 줄이고 활력이 넘치는 건강한 삶이길 바라며 조금은 귀찮더라도 공백기를 가졌던 블로그에서의 시간도 이제부터는 조금씩 더 늘려갈 수 있기를 바래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특히나 아이들이 자라면서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면 들수록 옆지기와의 시간이 늘어나기에 어떻게 하면 옆지기와 함께 하는 시간을 효과적이고 즐겁게 보낼 수 있을지가 노후 생활의 핵심이기에 이제부터 함께하는 시간을 조금 더 늘려보기로 마음 먹었던 하루이기도 하다. 


7년 전 홀로 배낭 둘러메고 지도를 찾아 어렵게 다녀왔던 교동도는 거리는 가까웠지만 배를 타고 신원조회를 마친 후 참으로 어렵게 다녀왔던 멀고도 멀었던 섬으로 기억되는데 작년에 새로운 다리가 생기면서 조금은 손쉽게 다녀올 수 있는 섬이 아닌 섬이 되었다는 소식에 옆지기와 함께 잠시 다녀 오기로 해 본다.

애마를 이용해 늦게 아침식사를 한 후 도로를 달려 가니 월선포 선착장 이정표가 보이고 아직도 군인들이 길을 막아 신분증을 확인하는 군사분계선 안쪽의 위험한 섬으로 기억속에 각인되는 시간이다.

그래도 새롭게 건설된 멋진 교동대교를 따라 애마를 이용해 손쉽게 다녀올 수 있음에 감사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 대룡안길에 있는 옛날 시장이기에 이름도 대륭시장이라 불리는 시장 골목으로 들어가니 7년 전 들렸을 땐 보지 못했던 많은 옛날 입간판들이 세워져 있고 벽화와 선거 홍보물 등도 붙어 있어 30여년 전 시골에서 살던 때의 추억을 회산시키는 명물로 탈바꿈되어 있다.

옛 정취를 느끼며 옆지기와 느긋하게 걸어가니 작은 선물가게가 유혹을 해 큰 딸 선물 두어개를 산 후 골목에서 팔고 있는 꽈베기와 호떡으로 허기진 배를 달래 본다.

작은 골목을 한바퀴 돌면서 어린시절을 회상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대륭시장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오래된 민가를 살펴보며 이 산객이 살았던 어린시절 고향의 옛 집을 떠올렸던 것은 아마도 그 시절이 그리워서 였을 것이다.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에 처마에 걸어 놨던 씨레기가 유일한 찬거리였던 시절이기에 더욱 그리움이 솟아 났던 시간은 아니였는지...


그렇게 대륭시장을 둘러보고 사람들로 붐비는 중국식당에 들려 짜장과 짬봉으로 점심식사를 마치고 잠시 들판 한가운데로 나 있는 시멘트 농로를 타고 바닷가로 달려가니 예전에 잠시 걸었던 강화나들길 이정목이 반겨준다.

군대 생활을 경험하지 못한 옆지기에게는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아 바닷가에 설치된 군사용 철조망을 보여주는 시간 역시 소중하기만 하다.


농로 끝자락으로 애마를 몰아 들어가니 도로 옆으로 죽산포라는 작은 간판이 보여 무작정 들어가 보니 배 한척 떠 있는 무명의 포구였다.

갯뻘로 인해 흙탕물이 되어 있는 서해바다 저 멀리 강화와 김포쪽 산들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어 사진 한장 남기고 뒤돌아 나온다.

바닷가에서 작은 그물을 손질하던 어부는 많은 여행객들을 만났는지 이 산객이 잠시 머물던 시간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물 손질에 바쁘기만 하다.


옆지기에게는 신기했던 군부대 철조망

아름다운 교동도라 생각을 하다가도 이런 군사 철조망을 보면 이곳이 군사분계선 안쪽에 있는 이북과 접해있는 장소임을 깨닭고 긴장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죽산포에서 말탄포로 잠시 넘어가다 옆지기가 별 흥미가 없어 하기에 됴동면사무소 주위에 흩어져 있는 유적지들을 둘러보고 귀경하기로 하며 뒤돌아 나오니 벌판과 민가 뒤 저 멀리 예전에 홀로 올라 끝자락에서 멋진 조망을 즐겼던 수정산이 보인다.

애마로 들어갈 수 있으면 옆지기에게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하기에 사진 한장 남기는 것으로 대신해 본다.


이제 다시 교동도의 중심부인 면사무소 근처로 뒤돌아 나와 가장 먼저 읍내리비석군을 찾아 봅니다.

교동향교와 화개사가 갈리는 갈림삼거리에 있기에 잠시 내려 사진 한장 남기고 비석에 쓰인 글들을 읽어 보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 비석들은 1970년대 새마을 사업이 한창일 때 교동의 지난날의 역사를 정립한다는 뜻에서 옛 교동의 관문이었던 남산포길 옆에다 이전 정립하였다가 1991년 다시 향교입구로 옮겼다.

39기 대부분이 겸부사의 선정비인데 이 가운데에는 거사대라는 특별한 양식의 비가 3기 포함되어있다.


읍내리 비석군을 지나 좁은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들어가니 금새 교동향교 앞이다.

먼저 와 있는 승용차 한대 옆에 애마를 주차시키고 차량통제용 바리게이트가 쳐져 있는 옆을 통해 교동향교로 올라가 본다.

교동향교는 1127년에 현유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창건되었는데 창건 당시 화개산 북쪽에 있던 것을 조선 중기에 부사 조호신이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1966년에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건물은 대성전, 동무, 서무, 명륜당, 제기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성전 안에는 5성, 송조2현 및 우리 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와 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현재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과 가을에 석전을 봉행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올리고 있으며 전교 1명과 장의 여러 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잠시 오르니 교동향교 뒷쪽으로 화개산이 올려다 보이는데 몇 년 전 홀로 와 정상에 있는 봉수대까지 만났기에 오늘은 이렇게 사진 한장 남기는 것으로 대신해 본다.

화개산은 강화 교동면 고구리에 위치한 산으로 해발 260이며  2시간이면 산행을 끝낼 수 있어 당일 교동도 여행이라면 가벼운 기분으로 산행할 수 있고 정상에서 내려다 보는 서해바다가 일품이다.  

산행은 월선포에서 대룡리 교동면사무소로 들어와 면사무소 앞에 등산로가 설치되어 있고 이곳에서 30여분 이면 8부능선에 있는 화개약수와 효자자리를 볼 수 있다.

화개산에는조선 명종 10년(1555년)에 왜란을 당하여 지현 최제운이 내성과 외성을 증축하고 성안에 군량창고를 두었다고 하는 성터가 산줄기 및 정상부분까지 훼손된 상태이지만 그대로 남아 있고 누구의 묘 인지는 모르나 매일 같이 성묘하던 손자국, 무릎 자국이 뚜렷이 남아있는 효자묘가 있고 높이가 80Cm 폭이 4미터 쯤 되는 문지와 내성의 우물로 추정되는 화개약수터가 있어 산행시 갈증을 풀어주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넓은 공간도 있다. 

산정상은 동쪽 봉우리로 이어지고 서쪽봉우리에는 봉화대가 있고 하산은 화개사로 내려올 수도 있다.


교동향교를 둘러보고 나오다 잠시 해우소를 들리는 길에 보았던 성전약수도 사진에 담아 보는데 가뭄이 심해 물은 이미 말라버린 후였기에 아쉬움이 있었다.


이제 교동향교를 둘러본 후 다시 비석군 앞 갈림삼거리에서 화개사를 잠시 들려보기로 한다.


1. 고려시대 목은 이색 선생이 공부한 곳
강화군 교동면 화개산 화개사는 고려시대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짐작하고 있는데 창건과 관련된 직접적인 자료가 아직 발견되지 않아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고려시대 문인의 문집에 교동 화개산의 사찰에 대한 기록으로 미루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려 말의 대학자인 목은 이색(1328-1396) 선생은 교동의 ‘화개산’에서 공부를 하였다고 하는데 (목은집)에는 14세 때인 1341년(고려 충혜왕 복위2년)에 친구 2명과 함께 책을 싸들고 바다 건너 교동 화개산에 들어가서 공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교동 화개산이라 했을 뿐 구체적인 공부 장소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산중의 독서처는 사찰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가 교동을 주제로 지은 한시 중에 화개산, 승방’이라는 말이 보이고 있어 이 사실을 뒷받침하며 한편 1932년 간행된 (속수증보 강도지)에는 목은 이색 선생이 공부한 곳이 ‘화개암’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상의 사실로 보아 화개산에는 고려시대에 이색이 공부하던 사찰이 있었고, 그 화개산 사찰의 전통은 오늘날 화개사가 계승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조선시대 500여 년간 지속적으로 명맥이 유지된 사찰.
조선시대 전기 이래 화개산 남쪽에는 ‘화엄사’라는 절이 있었으며 1890년대 에 ‘화개암’, 이후 ‘화개사’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 성종대인 1481년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될 당시 교동 화개산에는 화엄사와 안양사가 있었는데 이 사실은 1530년(중종25)에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간행되었고, 1656년(효종7)에 <동국여지지>에도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1760년(영조36)에 간행된 <여지도서>에는 화엄(암)사가 교동부 관청 북쪽, 화개산 남쪽 기슭에 있다고 했을 뿐, 안양사의 기록은 빠져 있다.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가람고>에도 안양사는 빠져 있는데, 1799년에 나온 <범우고>에는 화엄사와 안양사 모두 화개산의 절이지만 안양사는 폐허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18세기 중반 경에 안양사는 폐허되고 화엄사가 화개산의 유일한 사찰로 유지되었다.
한때 화엄사는 화개산 북쪽으로 옮겨져 재운암이라 부르기도 했으나, 1842년 나온 <교동부읍지>에는 화엄사가 화개산 남록에 있다는 기록이 다시 보여, 화엄사는 오래지 않아 화개산 남쪽으로 되돌아 온 것으로 생각되지만 1871년 나온 <교동부읍지>에는 화엄사를 스님 한 사람이 홀로 지키고 있다 했으니, 겨우 명맥만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895년에 간행된 <교동부읍지>의 불우조에는 화개산 남쪽, 교동부 관청 북쪽에는 ‘화개암’이라는 사찰 한 개만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화개산 남쪽에 위치한 사찰 화엄사가 화개암으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19세기 후반에 어렵게 유지되어 오던 절을 중창하면서 산 이름으로써 절 이름을 삼아 고쳐 부른 것으로 생각된다.
3. 일제시기의 화개사
1928년에는 개분 불사를 시행하여 오랜 세월로 훼손된 불상의 표면을 새로 입히고 장엄하는 개분불사를 했다는 사실은, 불상을 봉안해 온지 오랜 기간이 지났다는 점과 불사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 여건이었다는 점을 알게 해준다.
약 10년이 지난 1937년 당시 화개암은 법당 1동과 요사 1동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높다란 법당은 기와가 깨지고 기둥도 기울어 보수가 필요하였으나, 재정 여건이 어려워 계획을 세우지 못한 채 불상과 불화는 요사에 옮겨져 있었다.

3칸 22평의 요사에는 철제아미타불좌상 2점, 철제관세음보살좌상 1점과 후불탱화, 미타탱화, 칠성탱화, 산신탱화, 독성탱화, 신중탱화 등이 봉안되어 있었고 절 소유의 토지는 답이 3,663평, 대지 163평으로 합계 3,826평이었다.
불상과 불화가 격식을 갖추고 있으며, 토지도 3,800여 평에 달하여 것으로 보아, 오랜 전통을 지닌 사찰로서의 면모를 짐작하게 한다.

이 사실들은 1937년 3월에 전등사 본사와 말사의 사지를 편찬할 당시, 집필자 안석연이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 화개암을 답사하고 남긴 화개암지를 통해서 알 수 있다.
4. 조선시대 석조부도가 있음
화개사 경내에 조선시대에는 조성된 석조 부도 1점이 있다. 새겨진 글씨를 찾을 수 없어 어떤 스님의 사리를 안치한 부도인지는 알 수가 없으며 전체 형태가 아주 간략화 되어 탑신부만 있는 자그마한 규모의 석종형 부도이다.
5. 교동을 대표하는 전통 사찰
화개사는 고려시대 이래 줄곧 사격을 유지해온 교동을 대표하는 전통 사찰로서 교동읍성 안에 있던 교동부 관청의 바로 북쪽, 화개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화개사는 수백 년에 걸친 오랜 세월 동안 교동 주민들의 신앙생활의 터전이었다.
화개산 남쪽에 교동향교와 나란히 화개사가 자리하고 있으며 교동향교가 교동 주민의 교육문화의 중심지라면, 화개사는 신앙 생활과 수행의 중심지 역할을 한 곳이다.

교동향교와 더불어 화개사는 유구한 역사와 문화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수행의 공간이고, 교화의 공간이며 주민의 안식 공간이다.
화개사는 전통 사찰로서의 존엄성과 수행 환경이 존중되어야 하며 방해받지 말아야 하고 각종 공사나 개발 사업을 시행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훼손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 

화개사가 ‘전통사찰’로 등록되고, ‘전통사찰보존구역’으로 지정되어, 국가 제도의 보호 아래에서 수행 환경과 자연 풍치가 보존되기를 기대한다.


화개사 뜰 앞에서 내려다 보는 강화군과 가까운 석모도가 옛 추억을 되살리며 다시 한번 추천을 하고 있다.

젊었던 시절 옆지기와 함께 석모도에 들어 배 시간 때문에 고민을 했던 추억과 산행을 위해 몇번인가 들렸던 시간을 생각하며 잠시 그 추억에 젖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다시 나와 이제는 교동읍성을 둘러본다.

많이 허물어져 성이었는지차 분간하기 어렵지만 한쪽에 남아있는 성곽과 문으로 그나마 이곳이 성이었음을 알 수 있는 곳이다.

교동읍성의 둘레는 약 430미터이고 높이는 약 6미터로서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 성곽은 강화도 서편의 교동도에 축조된 고을성으로 1629년(인조 7)에 쌓은 것이라 한다.

성을 쌓은 목적은 예로부터 서해안의 방어를 위한 것이었으며 조선시대 후기에는 이 성 안에 삼도수군통어영의 본진이 주둔하여 왔으며 원래 이 성에는 세 곳에 문루를 갖춘 성문이 있었는데 동문에는 통삼루, 북문에는 공북루, 남문에는 유량루란 문루가 있었다고 한다.

1753년(영조 29)에는 당시의 통어사 백동원이 성곽과 여장을 고쳐 쌓았고, 1884년(고종 21)에는 통어사 이교복이 남문을 중건하고 또한 문루와 성벽을 수리하였는데 공사를 끝내지 못하였다.

그 뒤 1890년(고종 27)에도 동문과 북문을 고쳐 세웠는데 세월이 흘러 무너졌다고 하며 특히 남문의 유량루는 1921년의 폭풍으로 무너졌으나 홍예 부분만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우리나라의 서해안에는 도서와 해안을 끼고 있는 지역에서 외적의 방어를 위해 고을성을 많이 축조하여 왔는데 교동읍성 이외에도 인근의 강화읍성, 충청남도의 해미읍성과 안흥성, 전라북도의 고창읍성, 전남 진도의 남도석성 등을 들 수 있다.


교동읍성까지 돌아본 후 이제 마지막으로 연산군유배지를 둘러본다.

고구리는 일제강점기 고읍리와 구산리를 합치며 지은 지명으로 고구리 저수지 귀퉁이에 고읍리가 있으며 읍내리로 읍성을 옮기기 전까지 관아가 있던 고려시대 읍성 터다.

마을을 둘러싼 낮은 구릉 위에 남은 토성과 석축 흔적, 옥사 터(형옥지) 등을 볼 수 있으며 한기출씨는 화개산 자락 쪽을 살펴보면 옛집터들이 무수히 남아 있어 당시 마을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토성 터 남쪽엔 13세기 고려 희종이 유배 와 머물던 경원전 터도 있다.

화개산 자락 고구2리(영산골)는 옛 이름이 연산곡으로 연산군이 유배된 장소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뒷산을 영산으로 불렀던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마을엔 700년이 넘었다는 거대한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으며 주민들은 해마다 삼월삼짇날 이 나무에 치성을 드리며 마을의 안녕을 비는 대동굿을 하고 연산군 위령제도 함께 지낸다고 한다.

화개산 등산로를 따라 10여분쯤 걸어 오르면 널찍한 터를 닦고 최근 세운 연산군유배지 빗돌을 만나는데 연산군 위리안치소 추정지다.

유배 장소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어 추정지로 거론되는 세곳 중 가장 유력하다고 평가되는 이곳에 빗돌을 세웠으며 정확한 유배 지점은 아니지만 화개산에 막혀 어둑한 북서향 지형, 좌우로 우거진 울창한 수림 등이 위리안치 터로 삼았음직해 보인다.

죄인을 대상으로 인체실험에 가까운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는 연산군은 유배된 해 겨울 병을 얻어 숨을 거두는데 병이 심해진 사실을 알고 중종이 의원을 보내 구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고 전해온다.

화개산 자락, 연산군 유배 터에 흩날리는 늦가을 낙엽들이 권력의 무상함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며 화개산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옛 한증막 터, 화개약수, 조선 말 효자무덤 등도 만날 수 있다.


유배지 앞 뜰에 설치된 유배행렬 앞에서 사진 한장 남겨 본다.


다시 연산군유배지를 내려 와 마지막으로 조선시대 한증막을 찾아 보는데 찾기가 너무 어려워 한동안 헤매다 힘들게 찾은 곳이다.

도자기를 굽는 가마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옛날부터 한증막을 이렇게 좋아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하였다.

한증막에 들어갔다 땀이 흐르면 옆에 흐르는 냇가에서 땀을 닦고 몸을 식힌 후 다시 한증막을 즐겼다고 하니 아이디어가 참으로 좋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교동도를 간단히 한바퀴 돌아 나온 후 다시 교동대교를 타고 강화로 뒤돌아 나온다.


귀경하는 도중 잠시 강화풍물시장에 들려 순무와 생선종류를 사서 의미있는 여행으로 남겨 본다.

다음 주 주말과 휴일에는 또 어느곳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을지 벌써 기대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