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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료/완료 여행자료

팔미도 여행후기

by 칠갑산 사랑 2019.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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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 인천시 중구 무의동 팔미도 일대

여행날자 : 2019년 01월 13일 (일요일)

여행인원 : 3450온누리산악회 총 14명

여행테마 : 인천시 연안부두 연안여객터미널에서 팔미도유람선으로 팔미도에 입도하여 도보로 산책하며 둘러보기

여행시간 : 유람선 탑승시간 포함하여 총 3시간 전후 (팔미도 왕복 1시간 40분, 팔미도 산책 및 둘러보기 약 1시간)

여행코스 : 인천시 해양광장 연안여객터미널-팔미도유람선 승선-팔미도 선착장 도착 후 하선-등대역사관-팔미도항로표지관리소-천년의광장-

               옛등대사무소-야외문화공간-팔미도옛등대-팔미도등대-전망대 해양수산부위성항법중앙사무소-둘레길-포토존-안보교육장

               40mm해안포-팔미도항로표지관리소-등대역사관-팔미도 선착장 도착 후 승선-인천시 해양광장 연안여객터미널 도착 후 하선-

               금산식당에서 밴댕이 회무침으로 식사 후 지하철로 귀경

팔미도 가는 길 : 대중교통 - 1호선 인천 지하철 동인천역 하차 후 7번 출구(맥도날드 앞)에서 12번 또는 24번 버스로 이동

                       자가용 - 인천 중구 항동7가 58-1 (해양광장 지하 공영주차장)

 

 

잊고 지냈던 섬 여행을 다시 시작하며 첫번째로 들렸던 팔미도에서의 시간들



그동안 꼭 한번 다녀오고 싶었던 팔미도 여행 일정이 산악회에 올라오고 무조건 참가 신청을 한 후 새벽 일찍 집을 나서 약속장소인 송내역으로 가니 아침 8시가 가까워져 오고 참가 신청을 한 산우님들이 차례로 도착을 해 인사 나누고 두대의 차량을 이용해 인천 연수구의 청량산 산책을 먼저 하기로 한다.

연수성당 앞에서 짧게 청량산에 올랐다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앞으로 하산해 기다리던 차량에 탑승하여 해양광장 옆 연안여객터미널에 도착을 하니 이제 아침 10시가 가까워진 시간으로 팔미도 유람선 탑승시간까지는 아직도 3시간 가까이 남아 있어 약속시간이 조금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드디어 팔미도유람선을 타고 장장 50여분 동안 인천광역시 문화관광해설사로 일하고 있는 이영해 해설사의 해설을 들으며 졸다 깨다를 반복하다 보니 드디어 꼭 한번 가 보고 싶었던 팔미도 선착장에 도착을 하고 하선을 하니 군인 한명이 인원 확인을 하고 있어 역시 이곳이 군부대 통제 지역임을 실감하게 되었다.

유람선에서 내려 제일 먼저 눈 앞으로 보이는 팔미도에서 가장 높은 등대쪽으로 빠르게 걸어 오르니 작은 옛 등대 뒤로 최신식의 거대한 등대가 제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잠시 몇장의 사진을 담으며 본격적인 팔미도 탐방을 시작해 본다.

인천 중구에 위치한 팔미도는 사주에 의하여 연결된 두개의 섬이 마치 여덟팔자처럼 양쪽으로 뻗어 내린 꼬리와 같아 팔미도라 불려졌다고 하며 인천 사람들에게는 팔미귀선 즉 낙조에 팔미도를 돌아드는 범선의 자취가 아름다워 인천팔경의 하나로 꼽혔던 해상 경승지였다.

일본과 우리정부가 체결한 통상장정에 따라 조선왕조는 1903년 6월 높이 7.9m, 지름 2m의 팔미도 (구)등탑를 만들었다.
인천항에서 남쪽으로 15.7 Km 떨어진 작은 섬인 팔미도에 우뚝 솟아 있는 하얀등대는 인천항 진입 항로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입항과 출항 선박들의 안전 운항을 위한 지표 역할을 하고 있다.

1903년 6월 1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등대 불빛을 밝힌 팔미도 등대는 지난 100년간의 임무를 수행하고 지금은 인천시 지방문화재(제40호)로 지정되어 그 자리를 지키며 보존되고 있으며 현재의 팔미도 등대는 등탑 높이 26m, 전망대, 100주년 기념 상징조형물 (천년의 빛), 위성항법보정시스템(DGPS)기준국 등의 시설과 첨단장비를 갖추고 2003년 12월에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였다.

등명기 불빛은 국내기술로 개발된 프리즘렌즈 대형 회전식 등명기로 50 Km까지 비추며 10초에 한번씩 번쩍인다.

팔미도에는 칡, 해송, 담쟁이넝쿨, 패랭이꽃 등이 서식하고 있다.


인천 연수구의 청량산을 약 1시간 정도 걸려 산책 겸 산행을 마치고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2대의 차량에 나눠 탑승한 후 연안부두 여객터미널 지하 주차장에 주차시키고 해양광장으로 올라오니 연안부두 노래 가삿말을 써 놓은 조형 이정석이 보이고 그곳에서 추억 한장 남겨 본다.

아이들과 몇번인가 왔었던 곳이지만 식사를 하기 위해 잠시 들리다 보니 해양광장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것은 아마도 처음인 듯 싶다.


해양광장에서 잠시 준비한 밥으로 아점을 해결하고 잠시 휴식을 하고 있으니 찬바람이 불며 추위를 느껴 매표소 꼭대기에 위치한 전망대로 이동해 주위 풍경을 살펴본다.

유람선 매표소가 1층에 있고 7층에는 연안부두 전경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어 많은 여행객들이 찾는 명소가 된 듯 하다.


전망대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다 아직도 배에 승선하려면 많은 시간이 남아 있어 해양광장으로 내려 와 바닷가로 가 오늘 팔미도 여행 시 타고 가야 할 노란 선상이 멋진 팔미도유람선과 수많은 배들을 사진에 담아 본다.


연안부두에 떠 있는 수많은 낚시배와 구조선 및 다양한 배들

연안부두는 서해 도서로 운항하는 여객선의 출발지로서 싱싱한 생선과 젓갈 등을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는 인천종합어시장과 수협에서 직영하는 회센타 (일반시중가의 60~70%선), 바다낚시를 즐길 수 있는 남항부두가 있는가 하면 해수탕도 여러 곳 있다.

최근에 관광특구로 지정되었으며 우렁찬 뱃고동 소리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들을수 있는 곳, 연안부두는 해양도시로 인천 중구의 상징이며 미지의 섬으로 떠나고 싶은 사람이 많이 방문하는 곳이기도 하다.
연안부두에 있는 인천종합어시장은 사시사철 늘 사람들이 붐비는데 좀 더 싱싱하고 저렴한 가격에 생선을 사려는 이들이 이 곳을 찾기 때문이다.

인천 앞바다 일대는 황금어장이라는 찬사가 부끄럽지 않은 바다낚시 천국으로 포인트는 덕적도, 풍도, 승붕도, 자월도, 이작도, 육도, 삼도, 창서, 부도, 백암, 영흥도를 모두 아우른다.

남항부두가 바로 바다낚시배들이 출항하는 곳, 개인적으로 출조하는 것은 물론 배 위에서 해상 세미나를 하거나 캠프할 곳, 해양레포츠를 알선하는 등, 여러가지 목적으로 선박을 빌려 주기도 한다.
연안부두내 친수공원에는 봄~가을 매일밤 돌고래 분수쇼가 이루어지고 친수공원내에 장미덩쿨과 소규모 동물원이 있다.



놀고 놀아도 시간이 남아 다시 연안부두 노랫말이 적혀 있는 이정석으로 가 옛날 유행했던 노래 한가락 흥얼거려 본다.


어쩌다 한 번 오는 저 배는 무슨 사연 싣고 오길래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마음마다 설레게 하나

부두에 꿈을 두고 떠나는 배야 갈매기 우는 마음 너는 알겠지

(후렴) 말해 다오 말해 다오 연안부두 떠나는 배야

바람이 불면 파도가 울고 배 떠나면 나도 운단다


안개 속에 가물 가물 정든 사람 손을 흔드네

저무는 연안부두 외로운 불빛 홀로 선 이 마음을 달래 주는데

(후렴) 말해 다오 말해 다오 연안부두 떠나는 배야




오늘 팔미도까지 타고 들어갔다 다시 이곳 연안부두로 나와야 할 팔미도유람선


인어인지 물고기인지 모를 인공 조형물이 눈길을 사로잡아 사진에 담아보고


드디어 팔미도유람선에 승선하여 팔미도로 향하고

총 3층으로 이뤄져 있는데 1층은 노래방과 여흥을 즐길 수 있도록 하였고 2층은 조용히 인천광역시 문화관광해설사가 해설을 해 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잠도 잘 수 있는 곳으로 그리고 3층은 해풍을 맞으며 잠시 다녀올 수 있는 공간으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만 팔미도 들어가는 배 시간은 계절에 따라 모두 다르기 때문에 사전에 반드시 확인한 후 연안부두 여객터미널로 가야 할 것 같다.

참고로 이번 달에는 하루에 오후 1시 2분 연안부두에서 출항하는 1번의 배편 뿐이 없었다.


인천대교를 지나 드디어 약 16 Km 거리를 달려 희미하게 보이는 팔미도가 그립기만 하고


조금 더 가깝게 다가 온 팔미도는 작은 섬 한가운데에 커다란 등대가 자리를 하고 있어 등대만 보이는 듯 다가온다.


이제 팔미도가 바로 코 앞으로 다가와 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생긴 등대이기에 의미가 있으며 6.25 전쟁 당시 치열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할 수 있도록 한 공로도 인정을 받고 있는 듯 보였다.


드디어 처음으로 팔미동 하선하여 입도하는 도로 우측으로 펼쳐진 군사지역의 해변가를 담아 본다.

다른 해안가와 별반 차이는 없지만 군사지역으로 묶여 들어갈 수 없다는 소식에 더욱 궁금증이 유발되는 곳이기도 하였다.

미세먼지 측정을 위한 장치도 있다고 들었는데 ...


드디어 등대로 오르기 전 처음 만나는 등대역사관 건물인데 한겨울 동결기이다 보니 출입도 제한되고 화장실 사용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었다.

한번쯤 들려 살펴보고 싶었는데 더욱이 시간도 충분하지 않아 해설사 따라 다니기 바쁜 시간이었다.


역사가 흐르는 팔미등 등대 안내도

저 코스를 돌고 돌아 결국 한시간 후면 다시 이곳으로 뒤돌아 나오게 될 것이다.


등대역사관 건물을 우측에 두고 나무계단을 타고 오르니 금새 콘클트 포장도로가 나타나고 그 도로를 따라 가파르게 걸어 오르니 팔미도항로표지관리소라는 입간판이 보이고 곧이어 도로 우측으로 앙증맞은 옛등대사무실이 나타난다.


옛등대사무실을 지나 계속 오르니 금새 넓은 야외문화공간이 보이는데 살펴보니 등대와 등명기에 관한 설명판들이 보인다.


야외문화공간을 지나 돌계단을 타고 오르니 금새 작은 옛등대가 앞에 보이고 그 뒤로 최신식의 거대한 새로운 등대가 한눈에 올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많은 여행객들과 함께 오륻 보니 사진 한장 남기기 어려워 힘들게 사진에 담아 본다.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혀라
1950년 9월15일 0시에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혀라.
1950년 9월14일 저녁 7시, 맥아더 사령관이 작전명령을 내리는데 암호명은 크로마이트(Chromite), 인천상륙작전(Operation Chromite) 작전계획 100-B를 감행한다.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오자 맥아더 사령관은 교착상태에 빠진 전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야간 상륙작전을 꺼내 든다.
연합군 함대가 인천항으로 진입하는 데에는 작전상 전제조건이 있었는데 바로 항로를 밝혀줄 팔미도 등대 불빛이었고 한미연합특공대가 5시간 치열한 전투끝에 인민군이 점령한 팔미도를 탈환, 15일 0시12분 한국전쟁을 승리로 이끈 빛을 밝힌다.
이 작전의 성공은 한국의 캘로(KLO) 특공대와 미 해군 클라크 대위가 숨은 공로자다.
예정시간을 조금 넘겨 망원경에 등대 불빛이 들어오자 맥아더 장군은 인천만 외항 멀리에 집결한 261척의 유엔군 함대에 발진명령을 내리고 연합함대는 팔미도 등대 불빛에 의존해 1차 목표지점인 Green Beach(월미도)에 안전하게 상륙한다.
이어 Red Beach(동구 만석동)과 Blue Beach(남구 용현5동)을 점령하고 인천 해안교두보를 확보한 후 한강을 너머 서울을 탈환하고 전황을 역전시키는 전기를 마련한 작전이었다.
팔미도등대 불빛은 인천바다의 조수간만의 차이 등으로 성공 확률이 5000분의 1에 불과한 Chromite 작전의 성공을 알리는 신호였으며 6·25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반전의 등불이었다.



불을 밝혀라라는 안내판과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지나니 다시 팔미도등대라는 안내석이 나타난다.


팔미도 등대가 1903년 6월1일 드넓은 바다를 향해 빛을 비춘다.

개항 이후 외국선박들이 제물포로 진입하는 길목에서 자주 해난사고를 당하자 일본은 서양식 항로표지 시설 설치를 요구한다.

인천 앞바다 좁은 협로 곳곳에 암초가 도사리고 있어서다.

결국 대한제국은 외·내항을 구분하는 분기점 역할을 하는 팔미도에 등대를 세운다.
우리의 손으로 만든 개화의 불꽃이었다.
근대 제국들이 선진 선박 건조술을 바탕으로 인천 앞바다를 장악했기에 제국의 배를 인도하는 '제국의 불빛'이기도 했다.
그러기에 팔미도 등대에서는 낭만의 상징보다는 100여년 전에 영국, 일본, 한국으로 이어지는 제국의 시스템이 작동한 파장을 읽어낼 수 있다.
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된 팔미도 등대는 2003년 설치 100주년을 맞아 그 임무를 마치고 근대문화유산으로 흑백사진처럼 남아 있다.
열강의 침투와 일제의 수난을 이겨내고 6·25 전쟁의 전황을 역전시킨 구국의 불빛이라는 시간의 지문을 간직한 채 인천의 대표 관광자원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100년 임무 마친 팔미도 등대
팔미도는 인천 연안부두에서 배를 타고 1시간 남짓 가면 나온다.
선착장에 도착하자, 사주로 연결된 팔(八)자처럼 보이는 두개의 섬이 한눈에 들어온다. 팔미도등대는 선착장에서 곧장 뻗어있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니, 해발 60m 나지막한 섬 정상에 서 있었다. 1903년 점등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등대다. 10초에 한 번씩 백색 섬광을 번쩍거리며, 인천항을 드나드는 선박의 밤바다를 인도하는 푯대였다.국력이 약할 때는 적들의 침략과 약탈을 안내해 주는 유도등이었고, 해양대국을 꿈꿀 때는 근현대로 나아가는 희망의 등불이었다. 백척간두의 위기에 놓인 6·25 전쟁을 승리로 이끈 구원의 빛이기도 했다. 풍운의 백년 세월을 목격하며, 버텨 낸 팔미도 등대는 오늘날 근대문화유산으로 우리 곁에 다가와 있다.  
등대를 휘감고 있는 섬 둘레길을 걸었다. 서어나무와 소사나무 군락지 사이로 불어오는 숲속 바람결에는 배릿한 바다 냄새가 묻어난다. 인천출신 극작가 함세덕 작가가 <해연(海燕, 바다제비)>에서 "사면일대 암초에 둘러싸인 깍아 세운 듯이 높이 솟아 있는 서해안의 어느 조그만 섬. 암반과 모래사장, 우변 섬 일각에 화강함 석벽으로 외곽을 둘러싸인 석회로 칠한 흰 벽의 등대가 용립해 있다"고 묘사한 팔미도를 떠올렸다.   팔미도는 인천항에서 남쪽으로 15.7㎞ 떨어져 있다. 인천시 중구 무의동 산 375번지, 해안선 1.4㎞, 면적 0.076㎢ 조그만 섬이다. 팔미도는 조선왕조실록에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익명의 섬이며, 고산자 김정호의 '청구도'에는 팔산(八山) 등으로 불렸다. 인천사람들에게는 '팔미귀선(八尾歸船)', 즉 낙조에 팔미도를 돌아드는 범선의 자취가 아름다워 인천팔경의 하나로 꼽는다.   팔미도는 서남해에서 인천으로 들어오는 길목이다보니, 지정학적으로 해상교통 흐름의 중심 기능을 담당했다. 당시 우리나라를 넘보던 열강은 다투어 이양선을 몰고와 개항장 인천을 찾았다. 인천을 자국의 정치적, 경제적 거점으로 삼아 각종 이권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획책이었다.   가장 먼저 일본이 눈독을 들였다. 인천항 개항으로 선박 운항이 빈번해졌다. 이에 등대의 효용성이 대두된 것이다. 우리정부는 일본의 강권에 못이겨 1902년 인천에 해관등대국을 설치하고 그해 팔미도, 소월미도, 북장자서, 백암 등대 건설에 착수해 이듬해에 각각 완공, 점등(點燈)한다. 대리석과 콘크리트를 섞어 세운 팔미도 등대는 높이 7.9m, 지름 약 2m이며, 10㎞ 밖에서도 불빛을 식별할 수 있다. 처음에는 석유등을 사용하다 시대발전에 따라 전기등을 사용했다. 일제와 서구열강은 북장자서와 팔미도를 길잡이로 삼아서 인천항으로 속속 진입했다. 대항해 시대 이래로 서세동점하던 제국의 파도가 동아시아로 밀려든 것이다.   팔미도 등대는 1903~2003년까지 100년 동안 등대 불빛을 밝혔다. 인천항의 길목에서 선박의 안전항해를 책임지는 자기 역할을 다했다. 이제 은퇴하고 새 등대에게 그 자리를 내준 팔미도 옛 등대는 여전히 근대 문화공간의 상징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금단의 섬, 팔미도가 2009년 개방되면서 빼어난 해변경관과 함께 등대는 관광객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다.   새 팔미도 등대는 위성항법보정시스템(GDPS) 기준국 등의 시설과 첨단 장비를 갖춘 현대식 등대로 2003년 세워졌다. 등명기는 국내기술로 개발된 프리즘렌즈 대형회전식 등명기로 10초에 한번씩 백색 섬광을 번쩍거리며, 50㎞까지 비춘다.  인천은 한국 최초의 등대라는 해양문화유적을 갖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최초 국립등대박물관은 경북 포항에 있다. 인천은 해양문화의 발신지였는데도, 해양역사의 기억을 담아낼 어떤 공간도 없다. 이는 지역문화유산을 지켜내고 발전시켜내고자 하는 고민이 없었다는 반증이다. 이제라도 인천은 지난날을 성찰하고 해양문화의 가치를 재발견해야겠다.   조우성 인천시립박물관장은 "팔미도 등대는 세계 각국의 문화와 모습을 인천 앞바다로 안내하는 역할과 동시에 세상을 바라보는 인천의 눈이었다"며 "단절된 해양성을 회복하고 인천의 바다주권 회복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등대 홍보관으로 들어가니 대부분 6.25 전쟁 당시 상황을 묘사한 내용들이었고 또한 맥아더 장군에 대한 설명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만큼 6.25 전쟁 당시 중요한 임무가 있었고 맥아더 장군에 의해 전세계적으로도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인천상륙작전이란 작전을 성공시키에 가장 중요한 임무를 부여 받아 완수한 공로가 있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해 줬으리란 짐직이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1950년 9월 15일 국제연합(UN)군이 맥아더의 지휘 아래 인천에 상륙하여 6.25전쟁의 전세를 뒤바꿔 놓았다.
6.25전쟁이 일어난 후 조선인민군은 남진을 계속하다 UN군의 참전으로 낙동강에서 교착상태를 맞게 되었다.
이 작전은 19일 한강을 건너 공격을 개시하고 20일 주력부대가 한강을 건너 26일 정오에는 중앙청에 한국 해병대가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끝났다.


Differential GPS

   

일반적으로 인공위성으로부터 지상의 GPS 수신기로 송신되는 정보는 오차를 가지게 마련인데 서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두 수신기가 있을 경우에는 두 수신기는 비슷한 오차를 갖게 된다.

DGPS는 두 수신기가 가지는 공통의 오차를 서로 상쇄시킴으로써 보다 정밀한 데이터를 얻기 위한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정밀측량에 의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고 있는 고정국에서 오차의 범위를 이동국에 전송한 후 보정하여 사용하는 방식을 취한다.


팔미도 등대에서 바라 본 북서쪽 풍경들

하지만 오늘은 미세먼지로 인해 주위 섬들이 전혀 보이지 않아 조금은 아쉬움을 남는다.


전망대에서 올려 다 본 최신식 팔미도 등대


군사지역으로 묶여 들어갈 수 없는 팔미도 동쪽의 해안가 풍경들


짧지만 의미있는 팔미도 둘레길을 걸어 본다.

다시 이곳으로 와 이 산책로를 걸어 볼 기회가 있을련지 ...


이곳 팔미도는 섬 전체가 군사지역으로 수많은 탄환들이 묻혀있어 곳곳이 이렇게 수많은 소화기를 배치해 화재에 대비하고 있었다.

즉 화재가 한번 발생하면 이 팔미도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에 송골이 묘연한 시간이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잠시 내려 가 손과 발을 바닷물에 담글 수 있었다는데 너무나 많은 쓰레기 투척으로 인해 거의 영구적으로 막았다는 해설에 조금 더 깨어 있는 국민이길 바래 본다.

후손을 위해 국토는 깨끗하게 사용합시다.


안보 교육장에서 만나는 화기들

영원히 사용될 기회가 없기를 바래본다.


40 mm 해안포


잠시 안보교육장도 둘러보고


다시 천년의광장 쪽으로 되돌아 나와 팔미도유람선이 보이는 선착장 방향을 담아본다.


해안도로 우측 바닷가에 보이는 특이한 바위들

예전에는 여름철 해수욕장도 즐기며 저곳까지 내려갔었다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 이제는 영구적으로 폐쇄했다는 소식이 아쉽기만 하다.


선착장 서쪽 해안가


이곳은 선착장 동쪽 해안가


아쉬움에 서쪽 바닷가 바위들


이어진 서쪽 바닷가 풍경


마지막으로 동쪽 바닷가도 다시 담아보고


또 다른 모습의 동쪽 바닷가


다시 연안부두로 나가야 할 팔미도유람선 전경


마지막으로 서쪽 바닷가를 살펴보니 서쪽으로 기울어 가는 햇살을 받아 바닷물이 반짝이고


다시 연안부두로 뒤돌아 나오며 보이는 인천대교를 담아보고


인천공항 방향으로 이어진 인천대교


제2경인고속도로 방향으로 이어지는 인천대교


인천대교 교각을 지나며


인천대교의 프로필은 화려한데 그 규모와 역할, 최신 토목건축기술이 접목된 인천대교는 동북아시아 중심도시 인천의 랜드마크가 되기에 충분하다.

인천대교는 18.38 K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고 세계적으로도 다섯 번째로 긴 사장교다.

바다로부터 솟은 인천대교 주탑은 238.5m, 거의 63빌딩 높이와 맞먹고 다리를 받치고 있는 교각은 10만톤의 충격, 진도 7.0의 지진, 초속 72m의 강풍에도 견딘다.

2005년 6월 시작한 공사는 2009년 10월까지 지난하고도 어려운 과정, 수많은 사람들의 땀방울과 노력을 거쳐 완성되었다.

인천대교는 인천국제공항과 송도국제도시를 불과 15분 만에 연결해 물류비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크게 낮춰 경제와 환경에 중요한 몫을 담당하고 무엇보다 세상과 사람을 더욱 빠르게 연결한다.

세계의 3대 아름다운 다리를 국내외 토목전문가들이 손꼽고 특히 야경이 눈부실만큼 아름다운 인천대교는 인천을 넘어 대한민국의 자랑이다.




드디어 팔미도를 다녀 와 연안부두 선착장에서 하선하여 육지로 걸어 나오고


아쉬움에 마지막으로 연안부두 앞바다를 사진에 담고


                                

팔미도 여행 후 근처에 있는 밴댕이 회무침으로 유명한 금산식당으로 이동해 이슬이 한잔과 함께 저녁을 해결하고


몇 년 전 소천하신 어머님이 좋아하던 음식과 반찬들이라 서울 아들집에 오시면 가능하면 모시고 가 먹었던 음식이기에 마음이 아파온 시간이었다.

이제 일년에 명절 두번 정도만 찾아 뵙고 산소에 인사 드리고 있으니 이것도 막심한 불효가 아닐까 걱정된다.


비린 음식을 왜 그리 잘 드시던지

하지만 아버님은 또 비린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으셨으니 참으로 먹거리에 많은 신경이 쓰였던 시절이다. 

하지만 그렇게에 자식들은 가리는 음식없이 모두 맛나게 잘 먹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긴 하루가 지나고 이슬이에 배까지 불러오니 온세상이 내것이 되었다.


조만간 아들 공연이 끝나면 가족들과 함께 들려 맛난 식사도 즐기고 주위 풍경도 담으며 잠시 망중한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래 본다.

이렇게 길고도 긴 하루가 지나고 다시 차량을 이용해 송내역으로 이동해 급행열차를 타고 신도림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니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귀가하여 자료를 정리해 본다.


앞으로는 산행 뿐만 아니라 섬 여행도 예전처럼 자주 즐길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