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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간제3차(미완성 완료)/백두대간 제3차 산행후기

3450온누리산악회 백두대간 우두령에서 괘방령까지 산행후기

by 칠갑산 사랑 2019.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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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경상북도 김천시와 충청북도 영동군의 백두대간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 2019 01 12 (토요일 당일산행)

산행날씨 : 오전 내내 흐리고 약간의 눈이 내렸으나 점심때부터 맑고 해가 났던 산행하기 좋았던 날씨

산행온도 : 영하 4도에서 영상 5

산행인원 : 3450온누리산악회 제7 백두대간 종주대 28명과 함께

산행코스 : 우두령(901번 미산로 2차선 포장도로, 이정석과 백두대간 종주안내도, 에코 브릿지)-이정표(황악산 7 Km, 삼도봉 10.8 Km)-산행 들머리 계단

                 이정표(바람재 4800m와 황악산 7000m, 삼도봉 10 Km)-이정표(바람재 3600m와 황악산 5800m, 우두령 1200m)와 벤취쉼터2-억새능선-

                 962.8봉 벤취쉼터2-삼성산(984.9봉, 정상석과 삼각점)-이정표(바람재 2500m와 황악산 4700m, 우두령 2300m)-이정표(바람재 2000m와

                 황악산 4200m, 우두령 2800m)-이정표(바람재 1200m와 황악산 2400m, 우두령 3600m)와 벤취쉼터-여정봉(1032.1봉, 정상이정표와

                 벤취쉼터) 이정표(황악산 3000m와 괘방령 8400m, 우두령 4400m)-961.9봉 이정표(바람재 600m와 황악산 2800m, 우두령 4200m)-

                 억새능선-바람재(이정석과 비포장 임도, 점심식사) 이정표(황악산 정상 2.3 Km, 바람재정상 0.7 Km)-억새평원-신선봉 갈림삼거리

                 이정표(황악산 1.4 Km, 바람재 0.7 Km, 신선봉 1.4 Km)-형제봉(1044.5봉, 안내판) 이정표(황악산 0.6 Km와 직지사 3.6 Km, 바람재 1.5 Km)-

                 상고대능선-황악산(1111.4봉, 정상석과 삼각점, 돌탑) 이정표(괘방령 5.4 Km, 직지사 5.0 Km, 형제봉 0.7 Km)-헬기장-돌흙막이 구간안내판-

                 이정표(괘방령 5.0 Km, 황악산 0.4 Km)-황악산 610m 이정판 조망처-이정표(괘방령 4.4 Km, 황악산 0.9 Km)-황악산 1070m 이정판-

                 백운봉 이정표(괘방령 4.3 Km, 직지사 3.8 Km, 황악산 1.2 Km)-황악산 1580m 이정판-이정표(괘방령 3.9 Km, 황악산 1.5 Km)-나무벤취 쉼터-

                 황악산 2260m 이정판과 이정표(괘방령 3.3 Km, 직지사 2.8 Km, 황악산 2.2 Km)-운수봉(천덕산 668.2봉) 이정표(괘방령 3.1 Km,

                 황악산 2.4 Km)-여시굴-여시골산(621.1봉, 정상석) 이정표(괘방령 1.5 Km, 황악산 4.0 Km)-급경사 내리막 등로-이정표(괘방령 0.8 Km,

                 황악산 4.6 Km) 임도-능선진입-비포장 임도-괘방령(906번 괘방령로 2차선 포장도로, 이정석)-괘방령산장과 장원급제길 및 영동군 매곡면

                 돌탑-산행종료-신라촌 유황오리가든에서 식사-귀경

산행거리 : 11.83 Km (스마트  Oruxmaps 자료 기준), 실제산행거리는 약 12.33 Km (산행초기 약 500 진행 후 Oruxmaps 구동)

산행시간눈 내린 등로를 타고 산친구들과 여유롭게 이야기 나누며 여유롭게 진행해 05시간 27 (1055분부터 16:23분까지)

교통편백두대간 제7 40인승 전용버스 이용

백두대간이란 ???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동쪽 해안선을 끼고 남으로 맥을 뻗어 내리다가 태백산을 거쳐 남서쪽의 지리산에 이르는 국토의 큰 줄기를 이루는 산맥을 백두대간이라 부르는데 이 산줄기를 이루는 주요 산은 백두산(2750)을 기점으로 포태산(2289), 두류산(2309) 등 해발고도 2000미터 내외의 고봉으로 이어져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을 양분한다

산줄기는 다시 남쪽으로 차일봉(1742), 철옹산(1085), 두류산(1324), 추가령(752미터)으로 이어지며 또한 동해안을 끼고 금강산(1638), 진부령(529미터), 설악산(1707.9), 오대산(1563.4), 대관령(832미터), 두타산(1352.7미터)을 거쳐 태백산(1566.7)에 닿는다.

여기서 방향을 남서쪽으로 돌려 소백산(1439.5), 죽령(689미터), 이화령(548미터), 속리산(1058.5)으로 뻗어내리고 이로부터 추풍령(221미터), 황악산(1111.4), 삼도봉(1177), 덕유산(1614), 지리산(1915)으로 이어지면서 산줄기는 끝이 난다.

신경준의 산경표에 따르면 한국의 산맥은 1개 대간과 1개 정간 및 13개 정맥 체계로 되어 있고 이러한 산줄기(산경)의 개념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잘 나타나 있다.

즉 제일 굵은 선으로 표시한 것은 대간이고 두번째 굵은 선으로 표시한 것은 정맥이며 세번째 굵은 선으로 표시한 것은 지맥 그리고 기타는 골짜기를 이루는 작은 산줄기 등으로 나타냈다

이렇듯 대간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 산줄기들은 지역을 구분짓는 경계선이 되었으며 삼국의 국경과 조선시대의 행정경계를 이루었다.

따라서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자연적 상징이며 동시에 한민족의 인문적 기반이 되는 산줄기라고 할 수 있다.

 

 

오랫만에 참가한 백두대간 산행에서 생각지도 못한 하얀 설원속을 산친구들과

살아가는 세상 야기 나누며 살아 있음을 느겼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특히 맥 잇기 산행에 대한 수많은 이론과 산행 트랙이 존재하지만 이 산객은 신산경표를 보고 맥 잇기 산행을 처음 진행하였기에 가능하면 신산경표의 산행 이론에 따라 산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오래된 인연을 통해 다시 빛바랜 추억을 꺼내보며 울고 웃었던 지난날을 반추해 보고 또 다른 사람들과 새로운 추억을 만들기 위해 길을 나서는 시간은 늘 두려움과 설레임이 공존하지만 오늘만큼은 두려움보다 설레임이 훨씬 크게 다가온다.

이 산객의 인생이 담겨있고 삶의 애환이 남아 있는 그 길을 다시는 영원히 오르지 못할 것 같다는 공포심도 있었지만 잘 이겨내고 다시 새로운 사람들과 만들어 갈 같지만 다른길로 남겨질 그곳은 또 어떤 모습으로 추억이 될지 시간이 지나 먼 발치에서 회상하는 그길은 늘 재미있고 즐거웠던 시간으로 남겨지길 바라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어린 시절 소풍가던 설레이는 마음으로 늘 입에 달고 살았던 친숙한 사당에 도착을 하니 반가운 얼굴들이 반겨주고 어색함도 잠시 갑장친구들과 새로 맡아 주관하고 있는 대장 이하 많은 종주대가 살갑게 맞이해 주니 금새 친정에 온 새색시처럼 편안함을 느껴본다.

웃고 떠들고 그저 좋아했던 산 이야기를 나누며 오늘만큼은 주름만 늘렸던 찌든 세상살이를 던져 버리고 그동안 잠들어 있던 세포들을 깨워 다시 두려움 없이 산행에 나설 수 있기를 바래 본다.


생각지도 못한 많은 눈이 내려 등로에 쌓여 있었기에 걱정으로 시작한 산행이었지만 모두가 믿었던 그대로 큰 어려움 없이 오늘 산행의 최고봉인 황악산에 도착을 하고 모두 모여 함께 단체사진 한장 남기는 시간은 또 다른 추억속으로 여행을 시작하는 여정이 되었다.

말이 필요없는 최고봉과 최정상이란 단어가 주는 중압감과 해방감이 사진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그렇게 웃음과 즐거움 가득한 표정으로 추억을 남기고 다시 남아 있는 등로를 타고 하산하는 발걸음은 무겁게 올라오던 발걸음보다는 조금 더 가벼운 발자국을 눈 위에 찍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사는 곳도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며 나이와 성별도 모두 다르지만 오직 하나 산상에서 함께 맞이하는 정상석을 두고 이렇게 하나가 될 수 있음에 또 다른 세상을 만들고 그 세상속으로 빠져 보는 하루이길 간절히 바랬던 시간이기도 하였다.


한동안 참여하지 못한 사이에 산악회에도 많은 변화의 바람이 불고 또 새로운 얼굴들이 새로운 자리를 채우며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지만 영원히 변하지 않는 갑장 친구라는 단어는 또 이렇게 한장의 소중한 추억을 남기게 되었다.

자주 만나 탁배기 한잔 기울이지 않아도 오래된 친구와 연인처럼 만나면 뭔 그리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고 웃음꽃이 피어 오르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지만 아마도 조금 더 배려해 주고 베풀어 주려는 친구들의 마음이 있기에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다시 하얀 눈 위에 앨범 한장을 만들 수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늘 하던 말처럼 남아 있는 인생에서 오랫동안 함께 산상에 올라 이런 멋진 사진 많이 남기는 그런 소띠 갑장들로 남아 있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던 시간이면서 다른 종주대의 시샘어린 눈총을 받는 느낌도 나쁘지 않았던 순간이었다.

  

최근들어 열심히 산행을 하려고 노력은 해 보지만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오랫동안 제대로 된 산행 한번 하지 못하고 참여한 백두대간 종주 산행이기에 심적 부담이 가슴 한켯을 짓누르고 그렇게 보이지 않은 압박을 받으며 도착한 901번 미산로 2차선 포장도로 위 우두령에는 벌써 하얀 눈이 소복히 쌓여 제법 겨울 산행의 정취를 풍기고 있지만 스패츠를 준비하지 못한 마음에 약간의 걱정도 밀려온다.

버스에서 내려 옛기억을 되살리며 주위를 둘러보니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에코브릿지가 앞을 가로막고 기억과는 달리 완전히 새롭게 다가오는 풍경이 조금은 낯설게 다가온다.

이곳으로 내려오기 전 잠시 찾아 본 우두령을 기억해 보니 우두령은 경북과 경남을 이저주는 수도지맥 상 우두령과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 우두령(질매재, 720미터 해발고도)은 충청북도 영동군의 상촌면 흥덕리 피남절에서 경북 김천시 구성면 마산리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한국지명총람에는 우두령 대신 산 지명인 우두산이 기록되어 있으며 지명유래에 대해 산의 모양이 소의 머리처럼 생겨 지어진 이름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우두령은 조선 후기의 지리지와 고지도에 등장하기 시작하며 여지도서(황간)의 황악산 세주 우두령이 기록되어 있고 이후 대동여지도(황간)와 동여도에 각각 우두령 우두산이 기록되어 고개와 산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1872년지방지도(황간)에도 표기자 변화 없이 우두령이 기록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곳 우두령을 질매재라고도 하는데 이 고개의 생김새가 마치 소 등에 짐을 싣거나 수레를 끌 때 안장처럼 얹는 길마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질매는 길마의 이 고장 사투리로서 이 말이 한자화해 우두령 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조각난 기억들을 맞춰 보지만 온전한 기억이 없어 다시 변해버린 풍경 그 자체를 다시 머릿속에 입력하고 에코 브릿지 넘어 우두령 이정석이 있는 곳 반대쪽으로 도로를 건너 계단을 통해 올해 들어 처음 맛보는 설경속 여행을 시작해 본다.


황악산까지 7000미터 거리라는 특이한 거리 표시의 이정표를 사진에 담고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하니 시작하자마자 가파른 오르막 등로가 앞서 진행한 종주대의 발바닥에 다져진 눈으로 인해 상당히 미끄러워 여전 조심스럽지 않다.

한발 두발 급하지 않게 조심하며 오르지만 이어진 종주대의 행렬에 방해를 주면 안될 것 같아 앞서 걸어가는 종주대의 발바닥을 따라 숨가쁘게 오르니 몇발자국 오르지 않았는데도 벌써 숨이 목구멍까지 차면서 거친 한숨만 길게 토해내고 있다.

그래도 하얀 솜이불을 덮고 줄지어 늘어 선 앙상한 나뭇가지의 응원을 받으며 잠시 걸어 오르니 등로 좌우측으로 키작은 소나무에 생각지도 못한 환상의 X-mas 트리가 만들어져 크리스마스는 지났지만 그 분위기를 생각하며 사진 몇장 남겨 본다.


두 다리에 전해지는 묵직함이 무겁지만 그래도 오랫만에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세포들이 깨어나며 세파에 찌든 몸과 마음을 자연에 맡기며 치유도 해보라 권하고 있어 이를 악물고 한발 두발 걸어 오른다.

잠시 오르다 보니 늘 사용하던 트랭글과 Oruxmaps 트랙 구동을 하지 못하고 오르고 있음을 느끼고 잠시 기계 문명에 도움을 청하고 오르니 금새 한구비 올라 등로 우측으로 초호당산 지나 달봉고개로 이어지는 갈림삼거리 이정표에 도착을 해 잠시 방풍 패딩을 벗어 배낭에 넣고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산행을 이어가 본다.

눈이 내려서 그런지 생각보다 춥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아 산행하기는 아주 좋았지만 기대했던 환상의 조망이 없어 조금은 답답한 산행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약간의 안개가 드리워진 몽환적인 등로 위에 선두가 남겨 준 흔적을 따라 조금은 완만해진 오르막 경사를 타고 등줄기와 이마에 굵은 땀방울을 흘리다 보니 한여름 종주대의 장딴지를 난도질 하던 미역줄기 나무들도 그 기세가 꺽여 고개숙인 풍경으로 초라함을 보이고 잠시 후 지독한 잡목과 잡풀들이 무성했던 무명봉에 올라 온순하게 길을 터주는 변화된 계절에 목례를 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 지독한 잡목과 잡풀들과의 투쟁은 언제나 끝이 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 산객이 산행을 할 수 없는 시간이 오면 이 지독했던 투쟁도 마무리가 되지 않을까 이 산객에게도 궁금증이 생기는 상상이다.


잠시 후 다시 온순해진 몽환적인 등로를 따라 함께하면서도 홀로 전세내듯 걷다 보니 하얀 솜사탕을 만들어 놓은 듯 이 산객의 발길을 붙잡는 짧은 억새 능선에 도착을 하고 그 능선 가운데를 통해 걸어가는 종주대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몇장의 사진으로 남기며 다른 계절에 만날 풍경을 그려 보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잠시 후 다시 소복하게 쌓여 있는 눈이 인상적인 벤취쉼터와 나뭇토막을 잘라 마치 표고버섯을 재배하듯 세워 둔 공터를 지나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약간 비켜 서 있는 삼성산 정상석이 보이고 그곳으로 들어 가 추억 한장 남겨 본다.

정상에는 앙증맞은 작은 정상석이 서 있고 그 앞에는 영동314라는 삼각점이 보이는데 산경표에도 나와 있는 나름 유명한 산에 비해 대우는 초라하기 그지 없다.

이곳 삼성산에 대한 자료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으나 인근 암자인 삼성암에서 온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직지사의 말사인 삼성암은 신라 중기에 창건되었을 정도로 유서 깊은 사찰이다.

신라시대 도선국사가 약사여래 삼불을 모실 명당을 찾다가 금오산과 수도산 그리고 이곳 삼성산을 택해 약사암, 수도암, 삼성암을 짓고 약사여래를 봉안했다는 설화가 있으며 동으로 진밭산, 동구지산, 덕대산 등이 조망되며 서쪽으로 흥덕리의 깊은 계곡이 펼쳐져 있다고 알고 올랐지만 보이는 것 하나 없이 잡목들에 둘ㄹ쌓여 있어 좋은 날씨에도 조망이나 있을까 의구심이 드는 정상이다.

이 산객이 살고 있는 서울과 안양 경계의 관악산 옆 삼성산에 자주 오르기 때문에 삼성산이란 산 이름은 참으로 정감있게 다가오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잠시 삼성산에 들려 추억 한장 남기고 다시 좌측 등로로 진행해 산행을 이어가니 중간 중간 많은 이정표들이 세워져 있고 등로는 마치 고속도로처럼 잘 정비되어 있어 그 옛날 등로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달리던 긴장감은 많이 줄어 든 느낌이다.

다시 약간의 잡목들과 억새가 반겨주는 호젓한 등로를 따르니 등로는 잠시 업다운이 반복되고 곧이어 환상적인 상고대가 겨울왕국을 연상시키듯 아름답게 피어 난 등로를 따라 전망이 좋다는 바위 암릉에 도착을 하지만 발 밑으로 보이는 것은 그저 하얀 도화지를 펼쳐 놓은 무채색의 세상 뿐이었다.

욕심을 버리고자 오르는 산행이지만 가끔은 욕심을 내보는 순간들도 있는데 오늘이 바로 그런 날로서 발 밑에 펼쳐진 또 다른 세상을 내려다 볼 수 있기를희망도 해 보는 시간이지만 모두를 가질 수 없음을 알기에 보이는 설경만으로도 만족하며 걸어 보는 산행이다.


벤취쉼터도 보이고 약간의 바위암릉들도 보이는 등로를 타고 잠시 잡목이 사라진 등로 우측으로 무채색의 세상을 살펴보며 마음속으로 그려 본 세상을 상상해 본다.

저 멀리 김천의 혁신도시가 보이고 직지사도 보일듯 말듯 다가와 있으며 삼성산이란 이름을 만들어 준 삼성암도 내려다 보인다고 그림을 그려 보지만 그래도 보이지 않는 세상이 아쉽기만 하다.

그렇게 약간의 바위들이 보이는 정상 능선을 따라 걷다 보니 마치 바닷속 우뭇가사리 세상을 만나듯 곱게 피어난 상고대를 친구삼아 보이지 않는 세상을 이 산객의 세상으로 만들어 보는 재미로 걸어 본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 진행하니 1034미터의 여정봉에 도착을 하는데 정상석은 보이지 않고 이정표에 이곳이 여정봉임을 알리는 글씨만 이곳이 여정봉임을 알려 준다.

자료를 찾아 보지만 보이는 자료는 없고 이름에서 유래한 듯한 미소가 번지는 내용이 있어 확인해 보니 이곳 여정봉은 황악산 가는 여정 중 거쳐 가는 봉우리라는 내용이 보이고 주위에는 벤치쉼터들도 보여 심신이 고단한 산객들이 쉬어갈 수 있는 곳처럼 보이기는 하였다.


여정봉에서 많은 산친구들과 멋진 추억 하나 남기고 다시 우측으로 꺽어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등로는 가파른 내리막 계단 등로로 이어지는데 이곳에서 체인젠을 해야되는지 않하고 진행해도 되는지 고민하다 체인젠 없이 조심하며 걸어 내려가 본다.

잡목에 내려 앉은 눈이 마치 솜이불을 덮어 놓은 듯 포근하게 다가오고 박약한 산중에도 사람의 키보다 더 컸다가 계절의 변화에 순응하며 고개숙인 억새 능선을 지나니 금새 앙증맞은 이정석과 벤취쉼터들 그리고 이정표와 넓은 억새공터가 보이는 바람재에 도착을 해 허기를 달래며 점심식사를 하기로 한다.

해발고도 810미터인 바람재는 예전부터 바람이 세차게 불어 풍령이라 고도 일컬어지는 곳으로 산의 모습이 소의 머리를 닮았다는 우두령과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는 영남 유생들이 추풍낙엽처럼 낙방한다는 속설이 있는 추풍령 대신에 주로 이용했다는 괘방령을 잇는 연결 지점이다.

바람재에서 괘방령을 잇는 구간에는 여우가 많이 출몰하였다는 여시골산과 속리산을 지나 낮은 구룡성 산지를 이루는 백두대간이 다시 웅장한 산세를 이루기 시작하는 황악산이 있으며, 황악산 자락에는 신라 눌지왕 2(418)에 창건된 직지사가 위치해 있다.

또한 바람재 지역은 백두대간 마루금을 단절하고 있는 폐군사시설물을 2010년 철거하고 지형 및 식생 복원한 지역으로 백두대간 생태복원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장소이다.

개인적으로 몇번인가 올랐고 특히나 일 때문에 김천에 내려왔다 황악산을 돌아 내려가며 잠시 들리곤 하였던 곳이기에 의미가 남다른 곳이지만 이름처럼 바람이 불지 않아 복 받은 종주대가 되어 이곳 바람재에서 느긋하게 맛난 점심식사까지 즐겨보는 시간이다.


눈이 내리고 미세먼지로 인해 걱정을 하면서 진행된 백두대간 산행이지만 자연의 도움으로 바람재에서 조차 바람 한점 없이 편안하게 식사를 하면서 산친구들과 나누는 걸쭉한 입담 대결이 또 한번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그렇게 맛난 식사를 끝내고 다시 조금은 가벼워진 배낭을 둘러메고 진행방향을 살펴보니 예전에 비행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공터엔 잡목과 억새가 무성하게 자랐다 계절의 변화에 순응하며 빛바랜 겨울왕국의 일원이 된 풍경이 또한 아름답게 다가온다.

이제부터 다가올 지독한 오르막 급경사가 종주대의 가슴을 울리는 것도 모른채 그저 보이는 것에 만족하며 미소짓는 얼굴로 편안하게 다시 출발한다.


하얀 눈속에 선두가 만들어 준 갈색 낙엽 등로를 따라 조금씩 고도를 높이기 시작하니 방금 전 맛나게 먹었던 식사로 인해 불러 온 배가 부담으로 다가오고 고친 숨소리를 크게 토해내며 한발 두발 걷기도 힘든 시간이 되었다.

그래도 몽환적인 등로가 조금씩 추해지는 이 산객의 얼굴과 모습을 감춰주니 다시 부담없이 거친 숨소리를 토해내고 그렇게 고도를 높여 오르니 힘들 때 잠시 쉬어가라고 등로 옆 곱게 피어난 상고대가 산객의 힘든 발걸음을 세우고 잠시 영화속 동화의 나라인 겨울왕국으로 이끌고 있다.

몇장의 상고대 사진을 담으며 힘들게 오르니 드디어 등로 우측의 신선봉에서 올라 오는 능선과 만나는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해 지난날 추억을 다시 꺼내 보는 시간이다.

김천에 고객이 있어 이곳으로 내려올 때면 늘 산행 준비를 해 내려 와 일을 마치면 이곳 황악산이나 구미의 금오산을 다녀오곤 하였는데 이곳 황악산 산행은 바로 직지사 주차장에서 시작하여 신선봉을 거쳐 백두대간 주능선을 타고 황악산에 올랐다 하산하는 코스였다.

한동안 산에 미쳐 올랐을 땐 주위 가까운 정상이 있으면 가급적 들렸다 하산하곤 하였는데 오늘은 이렇게 이곳 갈림삼거리의 이정표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스스로에게 대견하고 칭찬이 필요한 시간이 되었다.


고도가 높아지니 안개가 더욱 진하게 드리워져 있고 그에 따라 몽환적인 분위기가 더욱 산객을 유혹하고 있지만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나와의 싸움인 산행이기에 또 다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본다.

다만 고도가 높아지며 등로 양옆으로 보이는 키 작은 잡목 가지엔 눈꽃과 함께 상고대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며 이곳이 산상인지 탁한 바닷속 우뭇가사리 세상인지 분간을 못할 정도로 또 다른 세상을 만들고 있다.

많은 사진을 담으며 조금은 여유를 되찾아 천천히 걸어 진행하니 드디어 기억에서 사라졌던 형제봉 정상에 도착을 하고 이정표에 이곳이 정상임을 알리는 글씨도 보이고 그 옆으로 형제봉에 대한 해설판도 보인다.

해설판을 읽어 보니 역사적 고증을 받아 설명한 흔적은 없고 이곳 지자체에서 홍보를 위해 세워둔 설명판처럼 보이는데 많은 사람들을 위해 제대로 된 고증된 자료에 입각한 이정표와 설명판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느껴보는 시간이다.

 

앞뒤로 함께 진행하는 산우님들이 곱게 피어난 상고대 등로에 이 산객을 세우고 몇장의 사진을 담아 줘 고마운 마음이다.

잠시 후 뒤따르는 종주대들이 도착을 해 다시 형제봉을 출발하니 너무나 아름답고 멋진 상고대 터널이 만들어져 있고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우뭇가사리를 만나 잠시 시간 가는줄 모르게 놀아보는 시간도 가져 본다.

올해들어 처음 만나는 눈 산행에 기대도 못하고 참가한 산행에서 이렇게 환상적인 상고대를 만났으니 무거웠던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며 얼마 남지 않은 오늘 산행의 최고봉인 황악산도 가슴으로 느끼기 시작해 본다.


카메라 앵글을 어디에 두고 세상을 담아도 모두 작품 사진이 되는 그런 등로를 타고 조금은 여유롭게 걸어 진행을 이어가니 하얀 눈 세상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앞선 종주대의 뒷모습조차 마치 영화의 한장면처럼 아름답게 다가온다.

잠시 무명안부로 내려 앉았던 등로가 마지막 최고봉을 향해 솟구친 오르막 등로를 타고 등주기와 이마에 굵은 땀방울을 흘리다 보니 잠시 잡목이 사라지며 민둥의 등로가 이어지고 그곳에서 등로 좌측 저 멀리 바라보며 민주지산으로 이어진 환상의 파노라마에 탄성을 질렀던 추억 한조각을 기억해 내곤 살펴보지만 오늘은 이 상고대로 만족해야 한다고 알려주는 듯 하다.

이 산객은 한발 내딛기도 힘든데 앞서 진행하는 종주대의 발걸음은 더욱 가볍게 느껴지기 시작하며 그 거리가 멀어지고 있어 스스로에게 채칙도 가했던 시간이다.


잠시 평탄했던 억새능선을 지나 가파르게 반짝 오르니 드디어 오늘 최고봉이자 100대 명산에 포함된 황악산 정상에 도착을 해 그동안 몇번인가 만났던 추억을 되살리며 반가운 조우를 해 본다.

황악산(1111.4미터)은 백두대간 줄기가 추풍령에 이르러 잠시 주춤하다가 다시 솟구치기 시작한 곳에 자리잡은 능선이 길고 우람한 산으로 경북 김천시 대항면과 충북 영동군 매곡면 및 상촌면의 경계에 있다.

서남쪽에 연봉을 이룬 삼도봉과 추풍령 사이를 지나는 백두대간의 중간에 솟아 있으며 예로부터 학이 많이 찾아와 황학산으로도 불렸고 김천 시내에서 서쪽으로 12 Km쯤 떨어진 곳에 있다.

주봉인 비로봉(1111.4 미터)을 중심으로 운수봉(740미터), 백운봉(770미터)과 형제봉(1035미터), 신선봉(944미터) 등이 양쪽으로 말발굽처럼 이어져 있으며 능선이 완만하고 산괴(산의 덩어리)가 커서 웅장한 느낌을 준다.

산세는 완만해 암봉이나 절벽이 없고 수목으로 울창하며 해발 1100미터가 넘는 산 답게 동쪽으로 능여계곡 등 깊은 골짜기를 파놓아 계곡마다 비경을 감추고 있다

학이 많이 찾아온다고 해서 그 이름이 붙었으며 직지사 현판과 택리지에는 황악산이라 기록되어 있다.

소백산맥에 솟아 있으며 주위에 여시골산과 막기향산 등이 있고 능선이 사방으로 뻗어 있으며 전사면이 비교적 급경사이다.

동쪽에서 발원하는 물은 백운천을 이루어 직지천으로 흘러 들며 서쪽과 북쪽에서 발원하는 계류는 각각 장교천과 어촌천을 이룬다.

내원계곡, 운수계곡, 능연계곡 등 깊고 수려한 계곡과 맑은 물의 조화가 뛰어나고 사명폭포를 비롯한 작은 규모의 폭포가 많으며 봄에는 진달래와 목련이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다우며 수림이 울창하다.

동쪽 산록에 위치한 직지사에는 직지사석조약사여래좌상(보물 제319)와 직지사대웅전앞3층석탑(보물 제606) 및 비로전 등 문화재 5점이 보존되어 있으며 그밖에 삼성암과 운수암 및 백련암 등의 절이 있다.

이곳에서 잠시 후미를 기다리며 쉬고 있는데 구미에서 올라 왔다는 젊은 청춘 4명이 부끄러워 사진 촬영도 못하고 있어 먼저 자리를 내주고 옆에서 지켜보니 역시 젊음이 최고의 선물이자 자산처럼 보이는데 저 나이에 이 산객은 이슬이 친구하기 바빠 산 근처에는 가지도 못했으니 많은 아쉬움이 남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한동안 황악산 정상에서 시간을 보내며 함깨하는 추억을 남기고 다시 차가워진 몸을 이끌고 내리막 등로를 따라 산행을 이어가 본다.

짧은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지나 등로는 우측의 완만한 사면 등로로 이어지지만 이 산객은 좌측의 넓은 헬기장을 통해 아무도 밟지 않은 눈에 발자국을 찍고 싶어 다른 등로를 따른다.

뒤따르던 나마스테고문님이 불러세워 멋진 사진 한장 남겨 주셨기에 지면을 빌어 감사 인사를 건네 본다.

오래 전 백두대간 리딩을 하면서 만난 인연이 참으로 다양한 산행으로 이어지고 지금까지 꽤 긴 시간 함께 산행을 즐겼으니 이제 산행을 같이 하는 가람들 중 가장 오래된 인연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 본다.

이 산객보다 한참 선배이시면서도 여전히 열정적인 산행을 즐기시고 계시니 앞으로도 건강 조심하면서 오랫동안 함께 멋진 산하를 누빌 수 있기를 바래본다.

 

헬기장을 지나 나즈막한 무명봉에 돌랐다 우측으로 꺽어지는 등로를 타고 홀로 걸어 완만하게 내려가니 드디어 이곳은 지나간 발자국 하나 없이 이 산객이 최초의 발자국을 남기며 새로운 길을 열고 있다.

많은 등로에 내려 쌓인 눈을 헤치며 러썰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지 잘 알기에 앞서 진행은 못했지만 짧은 거리를 마음 놓고 잠시 옛날 기분으로 돌아가는 시간도 나쁘지 않다.

오랫만에 신나게 진행되는 산행에서 다시 한번 더 건강한 신체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예전처럼 열심히 운동하는 기해년이 되길 바래본다.


새로운 길을 만들며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드디어 우측에서 내려오는 정상적인 등로와 만나 좌측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걸어간다.

잠시 후 나즈막한 무명봉으로 오르니 등로 우측 무명봉에 돌흙막이 구간이라는 팻말이 서 있고 읽어보니 절토면보호 및 성토사면의 붕괴우려지에 설치한 돌과 흙담이 설치된 구간이란 의미이다.

다시 등줄기와 이마에 흐르는 굵은 땀방울로 인해 방풍 자켓을 벗어 배낭에 넣고 내려가니 바위로 이뤄진 바위전망대에 도착을 하지만 오늘은 보이는 조망이 없으니 그저 정상부의 바위 하나를 사진에 담는 것으로 대신해 본다.

그 바위 무명봉을 넘어 내려가니 무명봉을 우측 사면등로로 이어지는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하고 선두가 지나간 흔적이 있는 사면 등로를 타고 산행을 이어가 본다.


이제 괘방령까지 5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지나 다시 내린 눈이 종주대의 발자국에 밟혀 반질거리는 등로를 타고 조심스럽게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황악산에서 610미터 내려왔다는 이정판과 벤취쉼터가 보이고 그곳에서 잠시 등로 좌측 앞을 살펴보니 흐렸던 날씨가 맑아지면서 영동쪽 산줄기에 구름이 걸려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그 구름 위로 파란 하늘이 열리고 그 파란 하늘 위에는 또 다른 하얀 구름이 걸려 있어 신이 사는 세상이 있다면 저런 세상이 아닐까 잠시 엉뚱한 생각도 해 보는 시간이다.


이제부터 한동안 지루할 정도로 완만한 내리막 등로가 길게 이어지고 북사면으로 진행되는 등로에는 눈이 약간 다져지고 녹으면서 약간 미끄러운 등로로 변하고 있어 일부 종주대는 아이젠을 차고 산행을 진행하고 있다.

잠시 후 직진 등로에 출입금지구역이라는 안내판이 서 있는 곳 우측으로 열려 있는 등로를 따르니 이제 오늘 날머리인 괘방령까지는 4.4 Km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가 반가운 이정표이다.

하지만 지도에 표기된 백운봉을 생각하며 걸었어도 백운봉이 어디인지도 모르게 진행되고 있다.


다시 몇개의 벤취쉼터들이 보이는 무명안부를 지나 직진으로 백운봉이라 생각되는 등로가 희미하게 나 있고 우측으로 우회 사면등로가 보이는데 대부분 이곳 우측 사면 등로를 따라 진행을 하였는지 직진의 백운봉이라 생각되는 봉우리 방향으로는 발자국이 보이지 않아 아쉬움을 달래며 선두의 발자국을 따르기로 한다.

잠시 후 직지사 갈림삼거리 이정표를 지나 나무계단으로 이뤄진 오르막 등로를 타고 많은 땀방울을 등로에 뿌리다 보니 어느덧 운수봉 정상에 도착을 해 잠시 후미 기다리며 쉬어가기로 한다.

직지사 갈림삼거리에서 봤던 직지사는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에 있는 높이 1111.4미터의 황악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로서 직지사라는 이름이 붙여진 배경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전한다.

첫째는 수행을 통해 욕심과 번뇌를 버리고 마음을 비우면 자기 자신이 부처요 그 마음이 곧 불심이라는 선종의 핵심 가르침인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맨 앞 글자인 직지에서 따왔다는 것이다.

불교는 크게 교종과 선종으로 분류되는데 교종은 불교 경전에 대한 심오한 연구를 통해 철학적인 이해를 중시하고 선종은 경전에 의한 가르침보다는 사람의 마음으로 깨달음을 얻는 수행과 참선을 중시하여 신라 후기 백성과 지방 호족들로부터 크게 환영받아 발전한 후 현재까지 우리나라 불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둘째는 직지사를 창건한 아도화상이 선산에 있는 태조산에 도리사를 창건한 후 김천 황악산을 가리키며 저 산 아래에도 절을 지을 만한 훌륭한 터가 있다고 하여 곧을 직 손가락 지자를 따서 직지사라 했다는 설이 있다.

아도화상은 417(눌지왕 1) 신라 최초의 사찰로 도리사를 창건한 이듬해인 418(눌지왕 2) 직지사를 창건했다.

고구려의 승려였던 아도화상은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선산 해평면 모례라는 사람 집에 숨어 살았는데 마침 신라 왕녀가 병이 난 것을 향을 피워 고쳐 준 인연으로 신라 왕실로부터 포교를 묵인 받고 도리사와 직지사를 지었다고 전한다.

운수봉은 자료마다 제각각 다른 해발고도를 보이고 있는데 지도상에 668.2봉(천덕산)로 표기하고 있어 그 높이로 보는데 직지사의 부속 암자인 운수암의 북쪽 봉우리다.

직지사가 있는 능여계곡의 행정구역이 대항면 운수리이므로 마을 이름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되며 황악산 자락에 딸려 있는 조그만 봉우리인데 각종 이름에 차용된 것이 의아스럽다.

산 이름에 물 수자를 쓰는 특이한 봉우리로서 구름운자를 써서 언제나 구름이 머물고 골짜기에 물이 흐르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전해지는 봉우리이기도 하다.

오래 전 백두대간 산행을 하면서 앙증맞은 정상석에 적혀있던 운수봉과 비슷한 닉을 사용하는 산우님이 있어 운자를 은자로 고쳐 조금은 골려댔던 기억이 나 피식 웃어 보지만 그 앙증맞던 정상석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운수봉에서 과일 간식과 식술 목마름을 달래고 다시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무명안부를 지나 다시 계단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타고 숨가쁜 산행을 이어가 본다.

진행하다 낙엽이 진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앞을 살펴보니 저 멀리 마지막 봉우리인 여시골산이 빤히 올려다 보이는데 그리 멀지는 않아 보이지만 체력적인 어려움이 있는 이 산객에게는 제법 멀게만 느껴지는 거리이다.

다시 안부를 지나 오르니 갑자기 등로 좌측으로 안번목책과 로픅 보이고 살펴보니 여시골 안내판도 보이면서 그 옆으로 깊이를 알 수 없는 굴 하나가 보인다.

여시란 강원도, 경남, 전라도, 제주에서 쓰는 여우를 이르는 사투리(국어원)로 지금도 여시라는 말을 쓰고 있다.

옛날에 이 산과 골짜기 일대에 여우가 많이 살아서 여우가 많이 사는 골짜기에서 따온 말로 산 이름을 지어 불렀고 지금껏 내려온다는 설이 있는 곳이다.



여시굴을 사진에 담고 계속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따르다 잠시 반짝이는 햇살에 발걸음 멈추고 등로 좌측 뒤를 살펴보니 갑자기 하늘이 열리면서 방금 전 올랐다 내려 온 황악산 정상부가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올려다 보이는데 그곳에는 아직도 하얀 구름이 걸려있어 정상부는 보여주지 않는다.

계속 이어지는 등로를 타고 걸어 진행하다 잠시 뒤도아 보니 방금 전 휴식 후 내려온 운수봉이 바로 지척으로 올려다 보이고 다시 눈이 사라지고 질척이는 등로를 타고 꾸준하게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강렬한 햇살도 기울어 가며 황악산 정상부의 구름도 사라지고 그 웅장한 모습이 나뭇가지 사이로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다시 이어지는 낙엽 등로를 타고 힘들게 걸어 오르니 얼마 오르지 않아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인 여시골산에 도착을 해 잠시 가쁜 숨을 몰아 쉰 후 마지막 괘방령으로 향한다.

여시골산(620미터)은 황악산에서 북으로 가면 독특한 이름의 봉우리로서 과거 여우가 많았다 하여 유래하는데 혹자는 다른 해석을 하기도 한다.

여시는 우리말의 옅다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시골산은 물이 깊지 않은 골짜기가 있는 산이란 뜻을 해석하는 사람도 있는 듯 보인다.

어찌되었든 이름만 놓고 보면 여우가 살 수 있을 정도로 산이 높고 골이 깊은 곳임을 알 수 있는 지명들이다.

오래된 추억의 단편들이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기억을 더듬으며 오늘도 무탈하게 산행을 이어갈 수 있음에 감사한 시간이었다.



이곳 여시골산 정상부에 앞서 진행하던 종주대가 남아 아이젠을 착용하고 진행해야 한다고 알려주고 출발하지만 이 산객은 불편하고 발바닥이 아파 체인젠 없이 스틱 2개에 의지해 조심하며 내려가기로 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엷게 깔려 있던 눈들이 종주댁 밟고 내려가며 다져지고 기온이 내려가며 약간 얼었는지 어느 부분은 여간 미끄럽지 않아 조심스럽게 하산해 본다.

그렇게 한동안 걸어 내려가니 백두대간 급경사 구간이라는 안내판이 보이고 이곳엣도 내적인 갈등을 하다가 체인젠 없이 천천히 조심하며 하산하기로 하고 그냥 걸어 본다.


그렇게 한동안 걸어 내려가니 뒤따르던 종주대들은 모두 체인젠을 착용하고 이 산객을 지나쳐 빠르게 하산해 간다.

잠시 후 경사도가 조금은 완만해지고 등로 좌측으로 커다란 콘크리트 말뚝을 만나니 등로는 다시 돌 계단으로 이어지고 있다.

급할 것 없이 조심하며 천천히 걸어 진행을 이어가니 저 멀리 마을이 보이면서 다음 구간 진행해야 할 마루금이 올려다 보이고 곧이어 이정표가 서 있는 비포장 임도로 내려서며 오늘 산행도 막바지에 도착한다.


이제 비포장 임도를 따라 우측으로 걸어 내려가니 이곳은 우두령과 달리 눈이 내리다 말았는지 눈은 보이지 않고 얼었던 임도가 녹으면서 질척이는 등로로 변해 버렸다.

미끄럽고 발바닥에 달라 붙는 진흙을 인해 진행에 상당한 어려움을 느끼며 조심해 내려가니 코끗에 스치는 향기가 사뭇 고향엣 맡던 향기와 비슷해 살펴보니 아마도 매일유업영동공장에서 풍기는 냄새처럼 느껴진다.

잠시 더 내려가다 등로 좌측 앞을 보니 영동군 매탄면의 마을이 내려다 보이고 그 뒤로 이어지는 무명능선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어 사진에 담아본다.


다시 임도를 버리고 우측 능선으로 들어가니 약간의 낙엽이 깔려있어 비포장 임도보다는 산행하기 좋지만 여전히 미끄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방금 전 헤어졌던 비포장 임도와 다시 만나고 등로 좌측 바로 아래에 매일유업 영동공장이 내려다 보이면서 그 뒤 저 멀리 다음 구간 이어가야 할 가성산과 눌이산으로 이어지는 장쾌한 백두대간 마루금이 제법 웅장한 산세를 자랑하며 길게 이어지고 있다.

저 눌이산에 오르면 추풍령으로 이어지는 경부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기 때문에 그곳에 앉아 정상주 한잔 나누며 얼마 남지 않은 오늘 산행도 무탈하게 완료할 수 있도록 의지를 다졌던 기억에 웃어 본다.

그때 함께했던 산친구와 종주대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한 순간이었다.


다시 부드럽게 이어지는 소로를 통해 가볍게 걸어 내려가니 드디어 차량들이 통행하는 소음이 들리기 시작하고 갑자기 가파른 절개지가 나타나더니 906번 괘방령로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괘방령에 도착을 해 이정석 앞에서 마지막 추억 한장 남겨 본다.

괘방령(311미터)은 옛날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던 수험생들이 추풍령으로 가면 추풍낙엽처럼 과거에서 떨어진다고 해서 우회하던 고개로서 인근의 추풍령이 국가업무 수행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관로였다면 괘방령은 과거 보러 다니던 선비들이 즐겨 넘던 과거길이며 한성과 호서에서 영남을 왕래하는 장사꾼들이 관원들의 간섭을 피해 다니던 상로로서 추풍령 못지않은 큰 길이었다.

괘방 방을 써서 붙인다는 의미인데 과거에서 급제한다는 뜻이기에 이 길을 이용했다고 하나 이런 추측도 확실한 것은 아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른 한자의 괘방으로 적혀 있기 때문인데 어떤 한자를 쓰던 한글 표기는 괘방이어야 하는데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 궤방으로 적혀 있는 것은 문제가 있는 듯 보인다.

괘방령은 임진왜란 때 박이룡 장군이 왜군을 상대로 격렬한 전투를 벌여 승전을 거둔 격전지이기도 한데 박이룡(1533-1595) 장군은 황해도에서 순찰사로 있을 때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내려와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1500여 명의 의병을 모았다.

이곳 괘방령을 근거지로 삼아 김천, 지례, 개령, 선산 등지에서 여러 번 왜적을 무찔러 큰 공을 세웠다.

괘방령을 지나면 장군봉을 만나는데 무사 장군이 아니라 장가 성씨의 총각 장군(장씨 성을 가진 남자)이란 뜻을 담고 있다고 하며 인근 마을에 장씨 성을 가진 총각들이 많아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드디어 괘방령 도롱 내려 와 도로를 타고 좌측으로 조금 걸어가니 아침에 타고 온 버스가 보이고 먼저 내려 온 종주대들이 등산화에 묻어 있는 진흙을 털어내기 바쁜 모습들이 보인다.



도로를 따라 조금 더 걸어가니 도로 좌측으로 돌탑과 괘방령 안내판이 보이고 그 옆으로 장원급제길과 괘방령산장이라는 작은 이정석이 반겨준다.

이곳 영동의 장원급제길은 북쪽 금강과 남쪽 낙동강의 분수령이자 충북과 경북의 경계 지역으로 조선 시대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다니던 길로 유명하며 따라서 근래에는 대학수능능력시험이라든가 아니면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학부모들이 찾고 있는 명소가 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위에서 설명하였 듯이 옛 선비들이 인근 추풍령을 넘어 과거를 보러 가면 발음이 모조리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돌아왔지만 이 고개를 넘어가면 급제를 했다고 해서 괘방령으로 불리고 있다.
걸 괘자에 방 붙일 방자를 쓰는 괘방은 과거나 시험에 합격한 사람의 이름을 써 붙이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선비들 가운데 괘방령을 넘어가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몇 명인지 알 수는 없으나 첨단과학시대인 요즘도 괘방령의 의미를 알고 있는 수험생이나 가족이 합격을 기원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고 하니 스토리텔링이 얼마나 위력적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크게 차이나지 않게 후미까지 무탈하게 완주를 하고 등산화에 묻어 있는 진흙을 털어 낸 후 괘방령 날머리에서 멀지 않은 김천쪽 신라촌이라는 오리고기 전문점으로 이동해 하루의 피로를 풀며 허기진 배를 채워 본다.

생각보다 맛 있고 정갈하게 차려진 음식에 시간 가는줄 모르게 즐겼지만 예상 하산시간보다 늦어져 다음 손님들을 위해 약간 시간에 쫒겨 일찍 나온 점이 아쉬움으로 남을 정도로 즐겼던 시간이다.


오랫만에 느껴보는 건배사와 무용담 그리고 세상살아가는 이야기 속에 몇잔의 반주가 돌아가고 그렇게 잠들어 있던 작은 세포들을 깨워 다시 그 옛날 열정적으로 즐겼던 산행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은 채웠던 시간이었다.

홀로가면 홀로가는 대로 또 같이하면 같이하는 대로 조금씩 즐거움을 찾다보면 나이들어 산친구들과 굵은 땀방울 흠뻑 흘리고 탁배기 한잔 앞에 두고 오늘을 이야기 할 수 있는 날도 오길 바래 본다.





많은 걱정과 약간의 두려움 속에 오랫만에 함산한 백두대간 산행에서 그동안 잊고 ㅈ냈던 산행에 대한 갈증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고 무거워진 몸뚱아리를 제대로 알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조금 더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함께하는 시간이 자주 있기를 바래 본다.

반겨주고 따뜻한 이야기 들려 준 소띠 갑장 친구들에게 감사한 마음 전하며 처음으로 참여한 7기 산행을 행복하게 바라보도록 고생하며 잘 이끌어 준 주윤발 대장과 응그래 총무에게도 감사한 마음 전해 드림니다.


앞으로 언제 얼마나 자주 동행할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지만 시간되고 그리움이 커지면 언제든지 달려가 함께 걸어 볼 수 있기를 가대도 해 본다.

결코 짧지 않은 남아 있는 긴 구간과 시간도 종주대 모두 무탈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완주하는 그날까지 한마음으로 달려갈 수 있기를 바래보며 산행후기를 마무리 한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