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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후기/서울의 산

서울성곽과 강북4산(백련산, 안산, 인왕산, 북악산)연계 산행후기

by 칠갑산 사랑 2017.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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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서울시의 백련산, 안산, 인왕산과 북악산 종주 등로

산행일자 : 2017년 04월 09일 (일요일)

산행날씨 : 새벽에 내린 비로 맑고 깨끗한 시야속에 멋진 조망을 즐겼던 약간 무더위를 느꼈던 전형적인 봄 날씨

산행온도 : 영상 05도에서 영상 15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녹번역-응암산골마을-관음사-은평둘레길-전망데크와 지적삼각점-홍은사거리 갈림 이정표-녹신약수터 갈림 이정표-녹번시장 갈림 이정표-

                 꿈나무마을 갈림 이정표-녹번시장 갈림 이정표-은평정 갈림 이정표-백련산(228봉, 팔각정과 태극기)-초록숲길(백련산구간)-운동기구 쉼터-

                 KBS 백련산 TV방송 중계소-배드민턴장 갈림 이정표-정원여자중학교와 백련사 갈림 이정표-삼각산정토백련사-팔각정갈림길 이정표와 백련산

                 근린공원 안내판-팔각정 버스 정류장-서울홍연초등학교-서대문문화체육회관-연희로-홍은2동마을센터-홍연교-서대문구청-안산공원-

                 나무계단-메타세쿼이아 갈림길 이정표-맥천약수터와 배드민턴장-봉화약수터 갈림 이정표-안천약수 쉼터-전망바위-헬기장-무학산

                 동봉수대터-안산정상(296봉) 봉수대-우수조망명소와 전망바위-안산에서 바라본 서울 전망데크-조망명소 갈림 이정표-전망바위-조망명소 갈림

                 이정표 복귀-안산초등학교-래미안아파트-통일로-홍제청구3차 아파트-운동기구 및 육각정자 쉼터-인호약수-인왕산 성곽길-바위 암릉길-

                 인왕산(339.9봉) 삼각점-수성동계곡 갈림 이정표-자하문로-인왕산 자락길-수성동계곡 길림 이정표-청운문학도서관과 윤동주 문학관 갈림

                 이정표-윤동주시인의 언덕-윤동주 문학관-청계천 발원지 비문-창의문-돌고래 쉼터-백악마루 갈림 이정판-북악산(342봉)-청운대(293봉)-

                 백악곡성 갈림 이정표-백악곡성(311봉)-백악촛대바위 갈림 이정표-숙정문-말바위 쉼터-와룡공원 갈림 안내판-한양도성 순성길(백악산구간)

                 전망안내도-서울시 선정 우수조망명소-삼청공원과 와룡공원 갈림 이정판-나무계단-삼청공원-삼청공원 정문-종로 11번 마을버스 정류장-

                 산행종료

산행거리 : 약 13.60 Km

산행시간 : 약 05시간 39분 (10시 43분에서 16시 22분까지)

                 때로는 빡세게 또 때로는 여유롭게 많은 사진을 담고 조망을 즐기며 진행

 

 

서울 성곽을 걸어 격동의 현장을 내려다 보며 650년의 역사를 연결했던 시간들 

 

 

어제 밤 늦게 어머님 제사를 모시고 음복과 이슬이 몇잔 나누다 보니 오늘 계획 했던 맥 산행은 또 다시 다음 기회로 밀리게 되었다.

특히나 옆지기가 긴장이 풀리면서 몸살 기운이 있어 종교생활도 못하고 누워있기에 오늘은 이 산객 홀로 예전부터 생각했던 백련산에서 시작하여 안산과 인왕산을 지나 북악산까지 이어가는 종주 산행을 생각해 본다.

예전에 산악회 산우들과 삼청공원에서 시작하여 북악산과 인왕산 지나 독립문에서 마무리했던 기억이 있기에 오늘은 그 반대반향인 백련산에서 시작해 삼청공원에서 마무리해 보려고 출발을 하지만 생각보다 가는 길이 멀어 오전 11시가 다 되어 산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내심 마음은 북한산 둘레길까지 포함해 환종주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지만 어짜피 정해진 코스가 없으니 처음 계획한 서울 성곽을 따라 강북 4산인 백련산, 안산, 인왕산, 북악산 만이라도 온전히 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몇일 사이로 완연히 따뜻해진 기온과 날씨로 인해 벌써 온 산하엔 봄꽃이 활짝 펴 삭막했던 등로를 밝혀주니 몸은 피곤해도 마음만은 부자가 되어 또 하루를 즐겁게 보내고 귀가를 한다.


어제 어머님 제사를 지내고 오랫만에 형제와 탁배기 한잔 나누다 보니 또 늦은 잠자리가 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홀로 맥 잇기 산행이라도 다녀올까 생각하는데 옆지기의 상태가 무척 불편해 보이고 살펴보니 이번에도 어김없이 몸살감기가 걸린듯 하다.

산행을 포기하려고 하니 가까운 곳이라도 다녀오라며 이것 저것 준비를 해 주기에 약만 챙겨주고 늦으막하게 가벼운 배낭 챙겨 지하철을 이용해 녹번역으로 향한다.

생각보다 더웠지만 어젯밤 내린 비로 인해 미세먼지가 사라지며 기대하지 않했던 멋진 조망으로 즐거운 산행으로 기억되는 시간이다.

안산에 올라 많은 등산객들을 피해 사진 몇장 남기고 등산객들이 뜸한 곳으로 이동해 동쪽을 살펴보니 이제부터 올라야 할 인왕산과 그 좌측으로 북한산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고 그 위 파란하늘엔 하얀 구름이 또 다른 환상의 풍경을 선사하고 있다.


두번의 환승으로 어렵게 녹번역에 도착을 하고 3번 출구를 찾아 나왔지만 산행 들머리를 찾지 못해 잠시 헤매다가 은평로가 아닌 통일로를 따라 걸어가다 앞에 보이는 에코브리지 전에 우측 골목길로 들어가며 오늘 산행을 시작하는 시간이 벌써 11시가 가까워 오는 시간이다.

젊었을 때 이곳 은평에서 잠시 살았던 시간이 있어 녹번역 주변에서의 추억도 떠 올려 본다.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니 가옥들은 모두 낡았는데 담벼락에는 예쁜 그림들이 그려져 있고 골목은 생각보다 깨끗해 의아하게 생각을 했는데 잠시 더 오르니 응암산골마을 게시판과 잘 그려진 벽화가 아름다운 건물을 만나 그 궁금증을 풀어 본다.

주거환경개선사업을 하면서 벽화 그리기 도움을 받아 새롭게 단장한 듯한 풍경이다.


응암산골마을 게시판을 지나 오르니 최근에 설치된 듯한 목재 게단이 길게 이어져 있고 그 계단을 타고 오르니 좌측으로 작은 관음사라는 간판도 보인다.

그 계단 끝자락으로 올라 잠시 뒤돌아 보니 아파트 단지 뒤로 많은 등산객들이 오르고 있는 북한산 줄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탕춘대능선이나 쪽두리봉쪽으로 갈 수 있는 비봉 능선으로 오를 수 있는 등로가 있는 산행 들머리이기도 한 곳이지만 이 산객은 오늘 북한산이 아닌 강북4산 연계 산행을 위해 그 반대 능선으로 오르고 있다.

 

잠시 더 올라 나무계단을 오르니 계단 좌우측으로 노란 개나리가 활짝 펴 반겨주고 곧이어 은평둘레길이란 주능선을 만나 우측으로 조금은 빠르게 걸어 본다.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진달래를 구경하며 완만하게 오르니 너무나 많이 설치되어 있는 이정표들을 지나 다시 깔끔하게 설치된 나무계단을 타고 걸어 본다.

잠시 더 걸어 올라 전망데크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북동쪽을 살펴보니 탕춘대 능선지나 저 멀리 북한산 비봉 능선이 깨끗한 조망에 너무나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어젯밤 내린 비로 미세먼지가 사라지며 너무나 환상의 선물을 주는 것 같아 기분까지 좋아지는 시간이다.


북쪽 방향으로는 은평구의 빼곡한 건물들을 지나 앵자봉과 서울둘레길 앵자봉 구간 그리고 잘록하게 들어간 서오릉고개와 그 좌측으로 해맞이공원인 봉산정이 나즈막한 산줄기를 이루며 이 산객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

나뭇가지에는 봄을 맞이하는 연두빛 물감이 짙어지기 시작하고 하늘은 가을을 연상시키듯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백련산에서 바라본 은평 조망명소라는 전망데크에서 시간을 보낸 후 다시 출발하니 출발하자 마자 바위 몇개가 산재되어 있는 봉우리에 올라서고 그 한가운데 바위에는 서울특별시 지적삼각점이 박혀있는데 오래된 느낌이다.

그 바위와 삼각점을 바라보며 저 멀리 올려다 보이는 삼각산을 다시 한번 담아보고 곧바로 출발한다.


올라 온 방향으로 북한산으로 갈 수 있는 생태연결다리 방향과 거리표시가 되어 있는 이정표를 지나 녹신약수터 갈림 이정표도 통과하니 바로 앞에 팔각정과 또 다른 이정표가 서 있는 안부가 내려다 보인다.

우측으로 녹번시장 하산 갈림 이정표가 서 있는 곳이다.


이제 등로는 산책로처럼 잘 정비된 넓은 등로로 바뀌고 등로 옆으로 심어진 벗나무엔 아직 봄이 오지 않았는지 꽃봉우리도 보이지 않는다.

같은 하늘 아래 이리도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꿈나무마을과 녹번시장 갈림 이정표를 지나 벤취들을 통과하니 멋진 소나무 등로가 나타나고 곧이어 운동기구들이 보이는데 겨우내 움츠러 들었던 갈색의 나무들이 벌써 연초록으로 바뀌면서 봄이 오고 있음을 빛깔로 알려주고 있다.


잠시 더 편안하게 걸어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팔각정이 보이는데 이정표에는 은평정이란 표시가 보이고 살펴보니 이곳이 바로 백련산이다.

돌계단을 타고 은평정으로 오르니 멋진 조망들이 펼쳐져 있어 잠시 흐르는 땀방울을 식히며 쉬어 간다.

서쪽으로는 은평구 지나 한강과 일산지구 그리고 고양시쪽 풍경이 한누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북쪽으로는 은평구 지나 저 멀리 앵봉산과 봉산 자락이 북쪽을 막고 있는 풍경이 또한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그 뒤 저 멀리 한북정맥 줄기와 그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노고산이 눈에 들어 온다.

참으로 어렵게 진행을 하였지만 함께하는 산친구들이 있어 외롭지 않았던 시간을 추억도 해 본다.


그렇게 백련산 정상의 은평정에서 주위 조망과 풍경을 즐긴 후 내려 와 셀카 놀이를 하면서 어렵게 사진 한장 남겨 본다.

백련산은 서울시 은편구와 서대문구에 있는 산으로서 높이 215.5미터의 낮은 산이지만 서울시내에 자리하고 있어 주말이면 응암동, 구파발, 홍은동 일대의 주민들이 자주 찾는 산이며 휴식공간으로 잘 활용되고 있다.

신라 경덕왕때 진표율사가 창건하고 무학대사가 중건한 백련사란 절이 있어 백련산이라 불리웠다.

백련산이란 이름의 유래는 백련사 뒤에 있는 산이란 데서 유래된 이름으로 응봉이라고도 한다.

매바위 축제가 있는데 이는 응암2동 마을 뒤 백련산 기슭에 있는 커다란 바위의 생김새가 마치 매가 앉아있는 모습과 닮아 매바위라고 불리우는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이름을 따 매바위 문화축제를 열어 주민이 주도하는 축제 그리고 모든 주민이 화합하고 소통하는 어울림 한마당으로 기획되고 진행되는 응암동의 축제 행사이다.


한동안 머물다 백련산 은평정을 출발해 내려가니 초록숲길(백련산구간)이란 안내판이 보이고 곧이어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는 쉼터가 나타나는데 생각보다 많은 연세드신 어르신들이 올라 와 운동을 하면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그곳을 통과하니 KBS 백련산 TV방송 중계소가 나타나고 또 다른 운동기구들을 지나쳐 내려가니 예쁜 진달래가 반겨주고 있다.


진달래의 환영을 받으며 내려가니 쉼터 옆에 이정표가 보이는데 우측으로 내려가면 백련사이고 좌측으로 내려가면 정원여자중학교란 방향표시가 보인다.

잠시 고민하다 이곳에서 우측 백련사로 내려가 잠시 둘러보고 진행하기로 한다.


가파른 계단을 타고 한동안 내려가니 포장도로가 보이고 곧이어 우측으로 삼각산정토백련사란 일주문이 보인다.

그곳으로 들어 가 살펴보니 백련사는 생각보다 크지 않은 작은 절처럼 보인다.

백과사전을 찾아 백련사를 살펴보니 백련사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동 백련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로서 한국불교태고종에 속하는데 747년(경덕왕 6) 진표율사가 창건하여 정토사라고 했으며 그뒤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세조 때에 의숙옹주의 원당이 되면서 백련사라고 고쳐 불렀는데 1399년(정종 1) 함허 화상이 중창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일반 승려들이 중건하고 1662년(현종 3)에는 법전을 중수했다.

1701년(숙종 27)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재건했고 1774년 이당의 시주로 중창했으며 1891년(고종 28)에는 경운대사가 중수했다.

현존 당우로는 극락전, 약사전, 명부전, 관음전, 삼성전, 산신각, 독성각, 범종각, 요사채 등이 있다.


백련사를 한바퀴 돌아 본 후 내려 와 이제부터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 내려가니 도로 옆 벗꽃나무들은 벗꽃을 만개하며 봄의 향연을 펼치고 있다.

잠시 더 걸어 내려가니 팔각정이 보이고 백련산 근린공원 안내판과 팔각정이란 마을버스 정류장도 보인다.

이제 가파른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가 보는 시간이다.


잠시 내려가니 도로 우측으로 홍연어울관이란 커다란 건물이 보이고 곧이어 서울홍연초등학교 건물도 서 있다.

그곳을 지나 걸어 내려가니 곧이어 서대문문화체육회관이 보이고 도로 앞 저 멀리에는 이제부터 가파르게 올라야 할 안산이 봄꽃들로 몸 치장을 마치고 기다리듯 서 있다.


횡단보도를 통해 모래내로를 건넌 후 좌측으로 걸어 홍은2동마을센터를 통과하니 우측으로 좁은 골목길이 보이고 그곳으로 빠져 나가니 우측으로 홍제천 위로 내부순환로가 이어지는 풍경이 나타난다.

그 홍제천 주변으로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고 사진 한장 남기고 좌측으로 걸어 가 홍연교를 건너 서대문구청 방향으로 진행을 한다.


홍연교를 건너 걸어가니 연희로 건너에 서대문구청이 서 있고 그 앞에서 연희로를 건너 우측에 서대문구청을 두고 걸어 올라 간다.

초록숲길과 안산자락길이란 이정표를 보고 그 방향으로 따라 올라가니 안산자락길은 다시 남쪽과 북쪽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어느쪽으로 가더라도 직진의 안산 정상 방향으로 오르면 될 것이다.


안산자락길 북쪽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가니 이곳 안산공원의 벗꽃도 거의 만개한 수준이라 가족 단위의 인근 주민들이 많이 나와 봄을 즐기고 있어 복잡하기만 하다.

인파들을 피해 빠르게 걸어 자락길 방향으로 진행하다 희미한 등로가 나 있는 능선으로 치고 오르며 산행을 이어간다.


잠시 능선을 치고 올라 1차선 포장도로에 도착하기 직전 너무나 예쁜 제비꽃을 닮아 있는 종지나물꽃을 만나 사진에 담아 본다.

종지나물은 다년생 초본으로 종자나 근경으로 번식하며 북아메리카가 원산지인 귀화식물로서 잎은 근경에서 모여 나며 잎자루는 길이 5 - 15 Cm 정도로 잎몸보다 길고 잎몸은 길이 3 - 8 Cm, 너비 4 - 10 Cm 정도로 난형 또는 신장형으로 예두에 심장저이고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다.

뿌리에서 나오는 화경에 1개씩 달리는 꽃은 4 - 6월에 피고 길이 2 Cm 정도이며 백색에 진한 자주색과 황록색의 무늬가 중앙에 있으며 열매는 길이 1 - 1.5 Cm 정도의 타원체이며 종자는 길이 2 mm 정도이고 갈색이다.

봄에 어린잎을 삶아 나물로 먹거나 겉절이 또는 데쳐서 무쳐 먹으며 된장국을 끓여 먹기도 하고 꽃은 꽃전을 부쳐 먹는다.

적용증상 및 효능에는 간장기능촉진, 감기, 거풍, 부인병, 정혈, 종기, 진해, 청열해독, 태독, 통경, 해독 등이 있다.


종지나물을 어렵게 사진에 담고 오르니 1차선 포장도로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직진의 맥천약수터 방향으로 설치되어 있는 긴 계단을 따라 굵은 땀방울을 흘려 본다.

계단 주위에는 이제 막 피어나는 연두빛 봄 빛깔이 아름답고 그 위로는 노란 개나리가 이제 그 끝자락을 물고 아쉬워 하고 있다.


한동안 지루한 계단을 타고 오르니 계단 우측으로 멋진 메타세콰이아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어 사진 몇장 남기고 다시 올라 배드민터장 한쪽에 보이는 맥천약수터로 가 보지만 이미 물이 말라 그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이어지는 긴 계단을 타고 올라 봉화약수터 갈림 이정표가 서 있는 갈림 삼거리에서 무학재역 방향의 하산 등로를 바라 본 후 우측의 안산 정상방향으로 걸어 진행하니 등로가 갑자기 온순해지며 힘들게 올라 온 다리를 쉬게한다.


봉수대 방향의 이정표를 따라 편안하게 걸어가니 이곳은 여전히 진달래가 만개하여 산객을 반기고 잠시 후 안천약수가 있는 사각정자에 도착을 하지만 이곳 약수 역시 가뭄으로 인해 물이 말라 버렸다.

이곳에서 우측 계단을 타고 안산 봉수대 방향으로 힘을 내 본다.


잠시 계단을 타고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전망바위가 나타나고 그곳으로 올라 주위 풍경과 조망을 즐기며 쉬었다 진행을 한다.

제일 먼저 북동쪽으로 보이는 서대문구와 그 넘어 북한산 전경이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을 배경으로 너무나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날씨에 그저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순간이기도 하다.


북동쪽으로는 무학재 고개 넘어 이제부터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올라야 할 인왕산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와 있다.

그 인왕산 우측 자락으로는 드넓게 펼쳐진 개나리 군락지가 노란 꽃을 피워 장관을 이루고 있다.

많은 시간 주위를 둘러보며 많은 사진을 담고 다시 등로로 복귀해 천천히 걸어 진행을 해 본다.


전망바위에서 내려 와 정상 등로를 타고 조금 걸어 오르니 이제는 등로 좌측으로 또 다른 조망처가 나타나고 그곳으로 들어가 살펴보니 안산 정상부로 부터 흘러 내려 온 미끈한 암릉이 길게 이어지며 산객의 마음을 애타게 만들고 있다.

그 넘어 무학재가 내려다 보이고 저 멀리 아차산과 용마산이 길게 줄지어 늘어 선 모습이 오늘은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 온다.

무학재 좌측으로 인왕산 오름길에 피어있는 노란 개나리가 또한 눈길을 잡는다.


다시 정상 등로로 복귀해 이제부터는 조금 빠르게 치고 오르니 사면 등로처럼 이어진 등로 끝자락에 헬기장이 나타나고 수많은 등산객들이 옹기종기 모여 식사를 하면서 쉬고 있다.

그 한쪽에는 안산등산로 안내판과 무학산 동봉수대터라는 설명판이 서 있어 한번 읽어 본 후 봉수대로 향한다.


안산 봉수대에도 수많은 등산 인파로 사진 한장 남기기 어려워 전망데크 쪽으로 가 어렵게 부탁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저 멀리 인왕산과 북한산이 여전히 아름답고 그 산자락을 타고 빙둘러 세워진 회색 고층 아파트들이 또한 새로운 풍경으로 눈길을 잡는다.

이제 오늘 산행의 반을 돌았으니 나머지 반도 무탈하게 완주할 수 있기를 바래 본다.

백과사전을 꺼내 다시 안산을 공부해 보니 안산의 안은 말안장이란 뜻이고 안이란 한자는 두 글자가 합쳐져 만들어졌는데 하나는 가죽 혁 또는 고칠 혁이고 다른 하나는 편안할 안으로서 도성 서쪽 산인 안산은 서인들이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잡아야 편안하다고 해서 안산이라고 한다는데 사실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런데 글자 뜻을 찬찬히 살펴보면 역사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많음을 알 수 있는데 인조반정으로 혁명을 일으킨 서인 세력은 정권을 잡은 후 노론으로 이어져 조선 후기까지 정권을 놓치지 않았다.

반면 동인 세력들의 근거지인 낙산의 낙이란 글자는 낙타를 뜻하며 말 마와 각각의 각이 합쳐져 만들어진 글자로 각각 말을 타고 간다는 의미로서 이는 곧 동인 세력의 분열을 뜻한다.

실제로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갈렸으며 그 때문에 이들은 한때 정권을 쟁취하기도 하나 분열을 거듭하다 결국 탄압받는 정치 세력으로 남는다.

안산은 산의 생김새가 말이나 소의 등에 짐을 실을 때 사용한 길마와 같이 생겼다 하여 길마재라고도 하며 모래재, 추모련이라고도 불렀으며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 봉우재라고도 하는데 역사적으로는 조선 시대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전투를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또 안산은 무악산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무악이라는 명칭은 한양 천도를 위해 지금의 청와대 뒤에 있는 북악산, 인왕산 등과 함께 도읍의 주산을 다투는 과정에서 태조 이성계가 안산을 무악산이라 부른 데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실학자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에는 아이가 어머니의 등에 업힌 것 같은 한성의 부아암(북한산 인수봉)이 마치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듯한 형상이므로 이를 막기 위해 안산을 어미 산, 즉 모악이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고 적고 있다.

그것이 사실이던 아니던 이런 유래가 남아 잇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산을 지키고 알리고 싶었던 사람들이 많앗다는 증거는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제 남쪽으로는 하산길과 그 절리 남산을 담아 본다.

남산 우측으로는 청계산과 관악산이 보이고 그 사이에 빼곡하게 들어 찬 서울의 빌딩들이 또 다른 숲을 이루며 거대한 도심의 답답함을 보여준다.

이제부터는 저 남산과 청계산 그리고 관악산을 바라보며 걷게 될 것이다.


잠시 더 머물며 많은 사진을 남기고 급경사 내리막 등로를 빠르게 내려가니 안산에서 바라 본 서울과 우수조망명소라는 안내판과 요상스럽게 생긴 전망바위에 도착을 해 다시 몇장의 사진을 남겨 본다.

바위 뒤쪽으로는 남산타워가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다시 인왕산과 북한산 드리고 앵봉산과 봉산 줄기도 제법 멀어진 형상으로 저 멀리 멀어져 있다.

내려가야 할 진행 방향과 지나온 방향을 살펴보니 방금 전 올라 멋진 조망을 즐겼던 조망바위가 바로 머리 위에 놓여 있어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출발한다.

좌측 백암약수터로 내려갈 예정이지만 조망명소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조망명소의 바위 위로 오르니 지나 온 안산의 거대한 바위 암릉 구석 구석에 피어 난 분홍빛 진달래와 푸르른 소나무가 어울려 멋진 동양화를 만들고 있다.


조망명소에서 다시 잠시 더 머물다 갈림 이정표로 뒤돌아 가 이제는 백암약수터 방향으로 빠르게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안산의 거대한 바위와 알록달록 물감을 펼치듯 분포되어 있는 봄꽃과 소나무가 환상이다.

잠시 더 걸어 내려가니 등로 옆으로 수줍게 피어 난 하얀 제비꽃이 웃고 있어 카메라 셔터를 눌러 본다.


내려가는 도중에 계속 보이는 인왕산과 북한산을 바라보며 내려가니 화장실이 보이고 그 아래 1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통일로 방향으로 내려간다.

지하철 3호산이 지하로 달리고 있는 무학재 북쪽의 통일로로 내려가게 되는 것이다.

이곳에서 약간의 허기를 느껴 준비한 빵과 떡으로 요기를 하고 싶었지만 장소가 마땅치 않아 조금 더 진행하다 상을 펼치기로 한다.

 

통일로로 내려가 잠시 기다렸다 횡단보도를 통해 통일로를 횡단해 오르니 도로 좌측으로 청구지벤 아파트 단지들이 보인다.

아파트를 좌측에 두고 도로 따라 오르니 이곳 아파트가 홍제청구3차 단지암을 알리는 입간판이 서 있다.

그곳 도로를 따라 지루한 시내 통과를 하는 시간인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도로가 데워지며 생각보다 무더운 시간이다.


아파트 단지를 지나자 갑자기 옛날 쪽방촌처럼 생긴 가옥들과 도로가 나타나고 그곳을 가로질러 오르니 공터에 운동기구들이 설치되어 있고 그 넘어 육각정자가 보인다.

그 육각정자로 올라 등산화를 벗고 준비한 간단한 빵과 떡 그리고 과일로 허기진 배를 채워 본다.


잠시 더 쉬고 있는데 한무리의 등산객들이 인왕산에서 내려오며 같은 정자에 머물게 되고 탁배기며 많은 음식물을 꺼내 이 산객이 쉬고 있는 햇살이 드는 쪽으로 자꾸만 침범을 해 와 말도 못하고 재빨리 자리를 뜬다.

오솔길처럼 나 있는 길을 따라 오르니 갑자기 넓은 마장바위 같은 장소를 지나고 등로 좌측의 좁은 개울가에선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정겹기만 하다.


잠시 더 오르니 분홍빛 진달래가 다시 반겨주고 힘들게 헉헉거리며 오르니 말라있는 인호약수를 지나 인왕산 성곽길 이정표를 만난다.

잠시 더 땀 흘리며 오르니 새로 단장한 인왕산 성곽길이 나타나고 그곳에서 긴 한숨을 내쉬며 잠시 쉬어 간다.

남쪽으로 새로 조성한 인왕산 성곽과 바위군 넘어 저 멀리 남산과 관악산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좌측에 인왕산 서울성곽을 두고 걸어 진행을 하니 잠시 후 가파른 철계단이 나타나는데 그 철계단을 오르며 바라 본 우측에 멋진 바위 하나가 서 있고 그 바위 틈에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 소나무 한그루가 마치 분재 소나무를 닮아 있다.

보기에는 멋지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 기구한 삶에 그저 고개가 저절로 숙여질 뿐이다.

부디 오랫동안 그곳에서 살아 남아 바위를 쪼개며 천수를 누릴 수 잇기를 바래 본다.


그 철계단을 어렵게 걸어 올라 뒤돌아 보니 서울 시내 방향으로 끊어질듯 이어지는 서울성곽이 한눈에 들어 오고 그 끝자락 지난 곳에 남산과 남산타워가 드높게 높아 보인다.

그 남산 우측 저 멀리에는 청계산이 가물거리고 그 청계산 우측으로는 이 산객이 가장 많이 오른 산중의 하나인 관악산과 삼성산이 가물거린다.


조금 더 인왕산 정상부로 걸어 오르다 이제는 남산 좌측을 살펴보니 빼곡하게 들어 선 서울시내의 회색 건물들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그 뒤에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이제는 서울의 랜드마크로서 오르고 싶어하는 롯데빌딩이 박무속에 가물거린다.

그 좌측으로는 천마지맥의 산줄기들이 흐릿하지만 뚜렷한 줄기를 이루며 옛 추억을 말해주고 있다.

이제 바위 암릉에 박혀있는 안전 철봉과 로프를 의지삼아 오르니 금새 인왕산 정상이다.


이제 천천히 주위 풍경을 살피며 오르니 금새 바위 하나가 정상을 지키고 있는 인왕산 정상에 도착을 해 바위 위에 박혀있는 삼각점을 사진에 담아 본다.

백과사전을 통해 인왕산에 대한 자료를 공부해 본다.

조선 개국 초기에 서산이라고 하다가 세종 때부터 인왕산이라 불렀는데 인왕이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의 이름으로 조선왕조를 수호하려는 뜻에서 산의 이름을 개칭하였다고 하며 서울의 진산 중 하나이다.

일제강점기에 인왕산의 표기를 인왕산(仁旺山)이라 하였으나 1995년 본래 지명인 인왕산(仁王山)으로 환원되었다.

인왕산의 높이는 338미터로서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암반이 노출된 것이 특징이며 서울의 성곽은 이 산의 능선을 따라 지나며 동쪽 산허리에 북악산길과 연결되는 인왕산길이 지난다.

인왕산에는 타포니가 발달한 토르가 많으며 주로 서울시 무악동 남쪽기슭 135미터 고도에 위치한다.

인왕산의 토르는 주빙하 기후에 의해 화학적 풍화가 진행되어 생성된 것과 후빙기에 절리 발달에 따른 차별침식으로 생성된 것이 있다고 하며 흔히 타포니는 토르와 관련되어 발달한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 화강암 토르에서 관찰되는데 인왕산 또한 그에 해당하고 토르에서 타포니가 발달한 부분은 다른 부위보다 풍화가 더욱 진전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2007년과 2008년 인왕산에서 관찰된 식물은 전체 75과 232종 38변종 5품종으로 총 275종이며 귀화종은 37종이고 주요 출현 식물은 생태계 교란 야생동, 식물인 국화과의 돼지풀, 서양등골나물 등이다.

곳곳에 약수터가 있고 경치가 아름다워 서울시민들의 유원지였으나 군사상의 이유로 출입이 통제되었지만 1993년부터 개방되었다.

인왕산은 조선시대의 명산으로 숭앙되었으며 조선 초기에 도성을 세울 때 북악을 주산, 남산을 안산, 낙산과 인왕산을 좌우 용호로 삼아 궁궐을 조성하였다.

봄에는 진달래가 만발하고 곳곳에 약수와 누대가 있었고 경지가 아름다워 이를 배경으로 그린 산수가 많은데 특히 정선의 인왕제색도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인왕산을 등산할 수 있는 코스는 총 5개이며 각각 두시간 정도면 오를 수 있고 인왕산을 종주하는데 3시간 정도가 걸린다.

제1코스 사직공원 입구, 약수터, 정상, 부암동(자하문), 제2코스는 사직터널, 성터, 정상, 부암동(자하문), 제3코스는 독립문역, 인왕산 일주문, 국사당, 선바위, 철조망문, 능선길, 범바위, 인왕천 갈림길, 정상·305능선길, 기차바위, 인왕아파트 갈림길, 홍심약수 갈림길, 부암동사무소쪽 갈림길, 하림각, 제4코스는 사직터널 전 사직공원, 북악스카이웨이, 국사당, 달팽이바위, 인왕산약수, 해골바위, 정상, 제5코스는 경복궁역, 자하문길, 영추문, 청와대 앞길, 청운중학교, 최규식 경무관 동상, 자하문, 성곽길, 정상 등이 있다.

지하철 3호선을 이용하여 경복궁역, 독립문역, 홍제역에서 하차한 후 사직공원에 가는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이제 인왕산 정상에서 내려 와 북동쪽으로 가 성곽에 기대 살펴보니 이제부터 내려갔다 많은 땀을 흘리며 올라야 할 북악산이 높게만 올려다 보이고 그 우측 아래에는 이 나라 최고의 권력자가 살고 있다 이제는 빈집이 되어 버린 푸른집이 권불십년이란 단어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만든다.

그 북악산 뒤 저 멀리에는 몇 년전 힘들게 걸었던 천마지맥의 천마산이 우뚝하고 그 좌측 가까이에는 삼각산의 미끈한 암봉들이 햇살에 반사되어 빛나고 있다.


이제 눈을 돌려 남동쪽을 살펴보니 민의의 함성이 하늘을 찔렀던 광화문 광장이 눈 앞에 펼쳐져 있고 그 좌측 뒤로 최고 권력을 가졌으면서도 큰 파도처럼 밀려오는 민의에 저항 한번 못하고 그 막강했던 권력을 놓고 철장 신세를 지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우측 끝자락의 남산 좌측으로는 이 나라 최고의 높이를 자랑하는 롯데빌딩이 우뚝 솟아 마천루를 이루고 있다.


다시 한번 북악산 아래 자리하고 있는 파란집과 그 앞의 광화문 그리고 저 멀리 보일듯 말듯 흘러가는 한강과 아차산이 멋진 조화를 이루며 오늘 하루를 아름답게 선물하고 있다.

이제 저 파란집에 사는 사람은 분노와 원망이 아닌 동경과 사랑이 넘치는 이웃으로 돌아 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제 눈을 북쪽으로 돌리니 기차바위를 이루는 거대한 암봉 넘어 저 멀리 삼각산 전경이 한누에 들어 오고 오늘 저곳 사진도 아마 이곳에서의 촬영이 마지막이 아닐까 걱정되는 시간이다.

드론까지 띄우고 인공 위성으로 1미터 크기의 사물까지 정확하게 분별해내는 시대에 사진 몇장 찍는다고 무엇이 달라질까마는 높은 자리에 앉아 잇는 사람들은 그런 걱정들만 하고 사는가 보다.

군사지역으로 묶여 시민들의 발걸음을 거부하더니 이제는 발걸음은 허락하면서도 사진 한장 남기는 것을 거부하고 있으니 그 잘못된 상황은 또 언제나 개선될 수 있을련지 아쉽기만 하다.

 

다시 눈을 돌려 가야 할 북악산 방향과 그 아래 빼곡하게 들어 선 서울 도심의 회색 빌딩들을 살펴보니 북안산 바로 아래 최고 권력자가 살았으나 지금은 비어있는 커다란 파란 지붕과 그 앞으로 옛날 임금님이 살았던 경복궁 그리고 그 앞으로 민의의 함성이 몇개월 동안 천지를 뒤흔들었던 광화문 광장이 너무나 선명하게 내려다 보인다.

그 우측 아래에는 남산과 남산타워가 우뚝하고 그 뒤 저 멀리에는 약간의 박무속에 청계산이 희미하게 드러나 있다.

사진 한가ㅣ운데 저 멀리에는 희미하지만 최근에 완공된 롯데타워가 하늘 높능 줄 모르게 올라간 풍경도 새롭게 다가온다.


그 인왕산 정상에서 내려 오며 오늘 마지막일지도 모를 북악산 방향의 풍경을 담아 본다.

정면으로 보이는 북악산 좌측 능선으로 지루하게 이어지는 계단이 벌써 이 산객의 가슴을 옥죄고 있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늘 느끼는 것은 보이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사실이고 무서운 것은 보이지 않는 곳을 가야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서울성곽은 둘레 약 17 Km로 조선왕조가 수도를 방어와 수호하기 위해 쌓은 성곽으로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1396년 1월부터 인부 11만 8천여 명을 동원하여 공사를 시작하여 49일간 지속되었으나 짧은 기간에 축조됐기 때문에 견고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1396년 8월부터 지방의 백성 약 8만 명을 징발하여 2차 공사를 시작하여 도성의 8개 성문이 이때 만들어졌다.

그러나 1422년 세종 때에 와서야 도성으로서의 면모를 갖출 수 있게 되었으며 도성은 모두 돌로 쌓였고 성가퀴를 높게 하여 방어에 만전을 기했다.

또한 수문을 증설하고 성문을 개수하거나 옮겨서 설치하여 도성 출입문으로서의 면모를 일신시켰고 순찰과 유사시의 대비를 위해 성 주위 안팎에 큰 길을 냈고 성 주위를 확장했다.


약간은 지루한 성곽을 따라 한동안 내려오니 금새 차량들이 통행하는 소음이 크게 들리기 시작하고 곧이어 서울 한양도성 순성길 안내판이 서 있는 2차선 포장도로에 도착을 해 잠시 쉬어 간다.
한양도성(사적 제10호)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도심의 경계를 표시하고 그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태조 5년(1396)에 백악(북악산), 낙타(낙산), 목멱(남산)과 인왕의 내사산 능선을 따라 축조한 이후 여러 차례 개축하였고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 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랫동안(1396~1910, 514년 동안) 도성 기능을 수행하였다. 
한양도성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는데 4대문은 북쪽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숙정문, 흥인지문, 숭례문, 돈의문이며 4소문은 서북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창의문, 혜화문, 광희문, 소의문으로 이 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멸실되었고 또한 도성 밖으로 물길을 잇기 위해 흥인지문 남쪽에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을 두었다.   
한양도성은 순성길을 따라 하루에 돌아볼 수 있지만 내사산을 중심으로 한 백악, 낙산, 남산(목멱산), 인왕산 구간과 도성이 멸실된 흥인지문, 숭례문 구간 등 6구간으로 나누어 걷기를 추천한다.


도로를 따라 좌측으로 내려가니 산책로 데크 주변으로 하얀 벗꽃이 막 피어나기 시작해 눈길을 사로잡고 사각정자를 지나자 마자 곧이어 윤동주 시인의 언덕과 서시가 새겨진 돌이 보인다.

바로 옆으로는 윤동주 문학관도 있는 듯 보인다.

윤동주는 시인으로 북간도에서 출생하였으며 일본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이듬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1941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19편의 시를 묶은 자선 시집을 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가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사후에 햇빛을 보게 되어 1948년에 유고 30편이 실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간행되었다.

주로 1938~1941년에 쓰인 그의 시에는 불안과 고독과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과 용기로 현실을 돌파하려는 강인한 정신이 표출되어 있으며 작품으로 자화상(1939)과 또 다른 고향(1948) 등이 있다.

서시는 윤동주의 유고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두에 붙여진 작품으로 서시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시집 전체의 내용을 안내해 주는 역할을 한다.
2연 9행으로 이루어진 이 시는 시간의 이동(과거 - 미래 - 현재)에 따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 부분(1~4행)은 순결한 도덕적 삶을 살고자 했던 화자의 의지와 고뇌를 과거의 시점에서 말하고 있다.

화자는 지금까지 윤리적 판단의 절대적 기준이 되는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죽는 날까지 세속적 삶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어떤 부끄럼도 없는 삶을 살기를 기원했고 그래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아주 작은 흔들림에도 괴로워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결백한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두 번째 부분(5 ~ 8행)에서는 살아 있는 존재에 대한 한없는 연민과 사랑을 나타내면서 미래의 삶에 대한 화자의 결의를 다짐하고 있다.

화자는 밤하늘에 빛나는 맑고 밝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삶의 고통에 부대끼는 모든 생명들을 사랑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길 즉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향해 꿋꿋하게 걸어가야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마지막 부분(9행)은 어두운 밤하늘과 별 그리고 바람 간의 관계를 통해서 화자가 처한 상황을 보여 주면서 도덕적 순결성에 대한 화자의 의지를 시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이 시는 현실의 어둠과 괴로움 속에서 자기의 양심을 외롭게 지키며 맑고 아름다운 삶을 살고자 했던 한 젊은 지식인의 모습을 간결한 언어와 상징어들을 통해 보여 준 작품이다.


윤동주 시인을 잠시 생각해 보고 서시 한자락을 읊어 본 후 막 피어나기 시작하는 벗꽃나무 사이를 걸어 내려가니 4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창의문로에 도착을 해 이곳에서는 우측으로 도로를 따라 조금 더 걸어 내려간다.

우측으로 윤동주 문학관이 자리한 그곳에서 창의문로를 건너 창의문 방향으로 가는데 도로 옆에는 북악산 정상쪽 약수터에서 흘러 나오는 물이 청계천 발원지라는 안내 표시석이 보인다.
2005년 동아일보에 실린 청계천 발원지에 관한 기사를 정리해 본다

서울 청계천의 발원지가 종로구 청운동 자하문길에서 북악산 정상 쪽으로 약 150m 지점의 약수터(청운동 벽산빌라 뒤편)인 것으로 처음 확인됐다.

또 청계천 발원 지점에서 약 100m 위쪽의 바위에서 고려시대 후기에 조각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애석불(높이 1.95m, 폭 0.7m)도 발견됐다.

청계천 발원지는 그동안 인왕산, 북악산, 남산으로 알려져 왔으나 구체적인 장소를 찾아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와 관련해 서울 종로구는 올해 3월부터 청계천 발원지 조사를 벌여 자하문 부근의 약수터가 청계천 물길의 시작 지점임을 확인했다고 15일 밝혔다.

 이번 조사에는 박경용 고완기 종로구 문화재보호위원, 경기대 이종태(토목환경학) 교수, 이형석 한국하천연구소 소장이 참여했으며 올해 10월 8일, 11월 2일 2차례에 걸쳐 현장조사를 실시했다.

 현장을 고증한 한 위원은 이 약수터는 과거 인근의 백운계곡에 살던 주민이 이용했던 곳이라며 아직도 지하수가 나오고 있어 청계천 발원지로 보인다고 말했다.



청계천 발원지 표지석을 읽어 보고 조금 더 걸어가니 야산에는 하얀 목련이 화사하게 피어있고 그 옆으로 최규식 경무관과 정종수 경사에 관한 설명판과 동상이 세워져 있다.

최규식 경무관은 부산시 서구 동대신동에서 출생하여 1968년 1월 21일 서울특별시 경찰국 소속의 경무로서 종로경찰서에 재직하던 중에 대간첩작전에서 부상을 입고 병원에 옮겼으나 사망하였다.

당시 최규식 경무는 자칭 CIC대원이라는 거동 수상자 30여명이 세검정으로부터 지하방면으로 행진한다는 보고를 받고 타격대 및 병력 출동을 지시하였고 같은날 오후 10시 35분경 종로구 청운동의 노상에 긴급히 출동하여 빠른 속도로 행진해오던 일당을 정지시켜 배치경찰관으로 하여금 검문 검색하도록 하였다.

이에 CIC대원으로 사칭한 일당은 검문에 불응하고 최규식 총경의 팔을 붙잡으려고 하였고 최규식 총경은 이를 뿌리치고 배치 경찰관들에게 이들을 체포할 것을 명령하자 뒤에 따라 오던 일당이 기관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투척하였다.

이 와중에 최규식 총경은 복부에 관통상을 입었으나 계속 현지에서 배치 경찰관을 지휘하며 격렬한 총격전을 전개하다 쓰러지며 간첩 1명을 사살하는 등 필사의 저지로 뒤따르던 간첩들을 분산시켜 청와대 기습을 완전 저지하였다.

그러나 최규식 총경은 부상을 입고 즉시 경찰병원으로 후송하여 치료하였으나 사망하였고 그 뒤 1968년 1월 25일 공적을 높이 사 태극무공훈장과 경무관으로의 특진이 추서되었다.

정종수 경사 역시 최규식 경무관과 함께 무장공비와 교전하던 중 순직한 분이다.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도로를 타고 오르니 금새 창의문에 도착을 하고 사진 몇장 남겨 본다.

창의문은 북문 또는 자하문이라고도 하는데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검정 근처에 있다.

1396년(태조 5) 도성을 쌓을 때 북서쪽에 세운 문으로 돌로 쌓은 홍예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 구조의 문루가 있으며 4대문 중 북대문인 숙청문이 항상 닫혀 있었으므로 경기도 양주 등 북쪽으로 통행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문을 거쳐서 왕래했다.

인조반정 때 능양군을 비롯한 의군이 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 반정을 성공시킨 유래가 있는 곳으로서 누문 다락에는 인조반정 때의 공신의 명단을 적은 게판이 있으며 1958년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창의문을 지나자마자 출입증을 작성하고 신분증을 제시한 후 받은 임시 표찰를 목에 걸고 북악산으로 들어간다.

1.21 김신조 사태 이후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었다가 많은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어렵게 시민의 품으로 돌아 왔건만 여전히 군사통제 지역으로 묶여 제대로 된 사진 한장 찍지 못하고 힘들게 성곽만 돌고 내려와야 하니 아직도 아쉬움이 남는 북악산 산행이다.

특히나 곳곳에 현역 군인들이 배치되어 사진 한장이라도 찍으려면 다가 와 사진까지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잠시 더 오르니 자북정도라는 이정석이 보이고 그곳에서 올라야 할 북악산 정상부를 올려다 보니 제법 가파른 계단이 구불 구불 이어져 오르는 모습이 마치 뱀이 흔들며 하늘로 오르는 형상이다.


잠시 더 올라 돌고래 쉼터에 도착을 해 옆에 서서 근무를 하고 있는 현역 군인에게 사진 한장 부탁하니 근무시간이라며 사진 한장 담는 것조차 힘들게 만든다.

다시 곧바로 출발 해 오르다 홀로 셀카 놀이를 하면서 몇장의 사진을 남기고 올라 등로 좌측을 살펴보니 그곳엔 여전히 아름다운 북한산 전경이 펼쳐져 있다.

조금 더 올라 지나온 인왕산이 훤히 보이는 성곽 옆 계단에서 군인 몰래 인왕산과 지나온 등로에 대한 어려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다시 끝없이 이어지고 조금씩 가파라지는 계단을 타고 오르니 이제 두 다리에 느껴지는 피로감이 더 쌓여만 간다는 느낌이다.

그렇게 오르다 힘들면 잠시 쉬어가며 주위 풍경을 사진에 담아 보는데 이것조차 현역 군인이 보면 시비가 붙을 것 같아 조용히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어렵게 담아 보는 사진들이다.


무척 가파른 마지막 오르막 계단을 타고 오르니 생각보다 힘들고 어렵다는 생각이다.

예전에 거꾸로 산행을 즐길 땐 이 정도로 힘들게 걸었던 기억이 없는 것 같은데 오늘은 생각보다 많이 어려운 시간이다.

다시 쉼터에서 잠시 더 쉬었다 마지막 힘을 내 오르니 백악마루 갈림 삼거리 안내판에 도착을 하고 우측으로 들어가 백악산 정상석과 만난다.

서울분지를 둘러싸는 내4산은 북악산, 남산, 낙산, 인왕산이고 그 중 가장 높은 것은 북쪽의 북악산으로 북한산의 남쪽 지맥의 한 봉우리로서 경복궁 북쪽에 솟아 있고 일명 백악산이라고도 한다.
성벽이 능선을 따라 보존되어 있고 4소문의 하나인 창의문 일명 자하문이 서쪽 산기슭과 인왕산과의 사이의 안부에 있어 시내 중앙지와 쉽게 연결된다. 창의문에서 정릉의 아리랑고개에 이르는 북악스카이웨이는 창의문, 팔각정, 풀장 등을 연결하는 관광도로로 울창한 숲과 서울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조망이 좋은 경승지이며 북악스카이웨이와 남동쪽 산기슭의 삼청공원은 좋은 휴식공간을 제공한다.
서쪽의 인왕산은 동쪽의 낙산과 같이 좌우용호로 일컫는 산으로 백호인 이 산 역시 화강암이 노출된 산으로 
조선 건국 당시 인왕산에는 호랑이가 많아서 호환이 자주 일어났다.

그 후 어느 임금이 산신에게 호랑이를 모두 압록강 저쪽으로 몰아내 달라고 빌었고 그래서 인왕산 호랑이가 쫓겨나게 되었는데 그 때 새끼를 가진 암호랑이가 먼길을 갈 수 없어 남겨 두었더니 그 호랑이가 낳은 새끼들이 번식하여 인왕산에는 여전히 호랑이가 들끓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동쪽 산허리에 북악에 연결되는 인왕스카이웨이가 지나며 인왕산 동사면은 고급주택가로 변했고 1920년대에 남산에 있던 국사당이 인왕산 서쪽 중턱으로 옮겨와 현재에도 무당들이 굿을 하고 산신에게 제사하는 곳이 되고 있다.

인왕산 서쪽의 안산(209m)은 무악재를 건너 연결되고 안산은 무악이라고도 하며 안산을 등지고 그 전면에 연희동과 신촌동 일대가 조선 건국 초 도읍지로 물망에 올랐던 곳으로 북서쪽에는 백련사가 있는 백련산이 있다.


북악산 일명 백악산 정상에서도 어렵게 정상석을 배경으로 사진 한장만 남긴 채 뒤돌아 나와 조금은 빠르게 성곽을 따라 걸어가니 넓은 공터가 나타나고 그 한쪽에 청운대란 이정석이 서 있다.

이곳 주위에는 암각화와 1.21 사태때 총탄이 박혀있는 소나무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청운대를 지나 이제 성곽을 가로 건너 넘어가 편안하게 걸어가니 성곽 옆으로는 예쁘게 피어 있는 분홍빛 진달래와 노란 개나리가 산객을 반기며 오랫만에 활짝 웃어 준다.

잠시 뒤 백악곡성이란 정상부가 보여 잠시 올라가니 현역 군인 한명이 말없이 뒤따르며 사진을 찍지 못하도록 무언의 압력을 넣고 있다.

힘겹게 올라 사진 한장 담으려니 촬영금지 지역이라니 어쩔 수 없어 뒤돌아 내려온 후 이정표 옆에서 사진 한장 부탁해 어렵게 담아 본다.


백악곡성을 지나 조금은 편안하게 걸어 진행을 하니 이제 등로 좌측 성곽 넘어로는 가끔 올랐던 북악스카이웨이의 팔각정이 아주 가깝게 다가 와 있다.

최근에는 광화문의 인파들로 인해 들리지 못하였지만 지난 해 말에도 큰 아이와 함께 들려 커피 한잔 마시고 몇장의 사진을 담았던 곳이기에 그 추억을 생각해 본다.


다시 조금은 빠른 발걸음을 옮기니 넓은 공터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방금 전 넘어 온 북악산 정상부를 조심스럽게 담아 본다.

이제 등로 좌측 성곽 넘어로는 남산이 아주 가깝게 보이기 시작하고 롯데 빌딩도 제법 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잠시 더 내려가 백악촛대바위에서 준비한 과일과 빵으로 허기를 달랜 후 내려가 등로 좌측을 살펴보니 예전에 밀실정치와 요정의 대명사였던 삼청각이 빤히 내려다 보인다.

맑을 청이 세 개인 삼청각은 이름 그대로 도심에서 가장 맑은 기운을 지닌 곳으로 이곳은 7.4 남북공동성명 직후 남북 적십자 대표단의 만찬이 열렸던 역사적 장소로써 오랜 세월동안 국빈 접대와 정치 회담 장소로 명성을 떨쳐왔다.

2000년 서울시가 인수하여 한국의 문화를 소개하는 전통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 해왔으며 2009년 7월부터 ㈜세종문화회관에서 운영하여 한국의 풍요로운 전통문화와 정서를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전통문화체험공간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현재 일화당에 위치한 한식당에서는 북악산 맑은 정기를 받은 약수와 천연재료를 이용한 궁중수라상과 반가요리를 선보이고 있으며 서울 유일의 자연 비경을 제공하는 라운지와 와인바 라운지 다원에서는 전통 음료와 한국적인 전통차를 비롯하여 외국손님을 위한 다양한 와인 등을 제공하여 현대와 전통이 어우러지는 멋을 선사하고 있다.
환상적인 대자연에서 진행되는 웨딩은 세련된 분위기와 엄선된 메뉴, 숙련된 웨딩 코디네이터의 맞춤 서비스를 통해, 아름다운 결혼식을 꿈꾸는 신부님들에게 생애 최고의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또한 전통공연을 위한 전용 공연장과 독특한 분위기를 자랑하는 전통 한옥 별채(청천당, 천추당, 유하정, 취한당, 동백헌)는 프리미엄 전통공연과 기업 및 가족모임, 소규모 VIP모임, 상견례, 세미나와 워크샵 등의 각종 연회 행사를 비롯하여 다례, 단소, 시조, 장구, 판소리, 한복체험, 규방공예, 비빔밥 만들기 등 내외국인을 위한 문화체험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제 세월의 변화와 함께 그 삼청각도 시민의 품으로 조금 더 가깝게 다가오는 변화를 하는 듯 해 잠시 미소를 머금어 본다.


이제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등로 우측으로는 소나무 군락지가 나타나고 곧이어 숙정문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숙정문은 본래 북대문이라고도 하였으며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산 동쪽 고개에 위치하였다.

1395년(태조 4)에 숙청문이 건립되었으나 1413년(태종 13)에 풍수학생 최양선이 왕에게 백악산 동쪽 고개와 서쪽 고개는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하므로 여기에 문을 내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두 문을 막을 것을 청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마침내 창의문 일명 자운문과 함께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들의 통행을 금하였다.

원래 이 문은 높은 산 중턱에 있어 길이 매우 험하며 문을 나서면 북한산이 앞을 가로 막아 동쪽으로 성북동 골짜기로 내려와 동소문 밖 경원가도로 나오는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그런데 서울에 들어오는 데에는 동소문을 거치는 것이 더욱 빠르고 편리하므로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이 문을 폐쇄해도 아무런 지장이 없어서 영구히 닫아 두었는데 다만 한재(가뭄으로 인한 재해)가 심할 때에 이 문을 열고 숭례문(남대문)을 닫는 풍속이 있었고 이것은 북은 음이며 남은 양인 까닭에 한재 때 양을 억제하고 음을 부양하는 음양오행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1416년(태종 16)에 처음 시작하였다.

숙청문을 열어 놓으면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지므로 항상 문을 닫았다는 속설도 전하고 있으며 그것은 이 문이 음방(여자의 방위)에 있는 까닭에 이런 말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 문은 1504년(연산군 10)에 조금 동쪽으로 옮겨 세웠는데 이 때 석문만 세우고 문루는 건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1976년 대통령의 특명으로 서울시에서 백악산 일대의 성곽을 복원할 때 태조 창건 당시의 제도에 의해 문루를 건축하고 숙정문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어느 때부터 무슨 이유로 숙정문으로 개칭했는지 알 수 없으나 1523년(중종 18) 중종실록의 기사 이후 역대 각 실록에 모두 숙정문으로 기록되고 있어 숙정문이라 호칭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531년(중종 26) 북정문, 1587년(선조 20) 숙정문으로도 표기된 것을 볼 때 정숙하고 고요한 기운을 일으킨다는 의미에서 숙정문으로 명명하지 않았나 추측된다.

다락 없는 암문인 것이 특색이며 항상 닫혀 있었기 때문에 창의문을 이에 대신해 흔히 북문이라고 하였다.



숙정문을 지나 다시 성곽을 따라 걸어가니 등로 우측으로 콘테이너 건물이 보이고 그 위로 올라 뒤돌아 보니 저 멀리 북악산 정상부가 올려다 보인다.

현역 군인이 없는 사이 어렵게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곧바로 출발한다.


등로 좌측으로는 삼청각과 북악 스카이웨이의 팔각정이 보이고 그 우측으로 돌아가며 수락산과 불암산의 암봉들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남동쪽으로는 용마산과 아차산이 길게 늘어져 있고 그 우측으로 롯데 빌딩이 높게 솟아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 온다.


이제 창의문에서 받았던 표찰을 반납하고 빠르게 내려가니 등로는 다시 완만하게 오르고 곧이어 말바위 안내소와 쉼터가 나타나지만 그곳에도 많은 산님들이 쉬면서 설명을 하고 있어 곧바로 출발한다.

그곳에서 출발하기 직전 동쪽 방향을 살펴보니 이제 불암산과 수락산의 암봉이 조금 더 선명하게 그 하부까지 보여주고 있다.


북동쪽으로는 팔각정 뒤로 보현봉의 암봉이 빼꼼히 올려다 보이는 풍경을 살핀 후 마지막으로 지나 온 북악산 정상부를 사진과 마음에 담아 본다.

이제 직진의 와룡공원과 우측의 삼청공원 갈림길에 도착을 해 마지막으로 서울성곽을 살펴본 후 우측 삼청공원 방향으로 발길을 돌린다.


우수조망명소라는 안내판이 있는 나무데크에서 살펴보니 우측 저 멀리 지나온 안산과 인왕산의 암봉이 우뚝하고 좌측으로 돌며 관악산과 남산 그리고 청계산이 보이고 그 사이에 빼곡하게 들어찬 회색 빌딩들이 또 다시 머리를 옥죄어 온다.

이렇게 자연속에 있으면 좋은 것을 무슨 욕심이 많아 또 저런 회색 빌딩속으로 들어가 아픈 머리를 감싸고 살아가야 하는지 답답한 시간이기도 하다.


다시 한번 파란집을 살펴보지만 나즈막한 산줄기에 막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지나온 안산과 인왕산의 산줄기와 암봉이 아름답게 빛나는 시간이다.


이제 남서쪽으로는 남산과 종로구 그리고 마포쪽 마을들이 보이고 그 뒤 저 멀리 관악산이 보인다.

이 산객이 너무나 자주 올랐고 앞으로도 가장 자주 올라야 할 관악산과 삼성산이기에 가슴속에 고이 담아 본다.

다음주에 다시 저곳에 올라 오늘 걸었던 이곳을 추억하는 날이 올 것도 기대를 해 본다.


그렇게 한동안 즐긴 후 이제 무거운 발걸음으로 길게 이어진 나무계단을 타고 호젓하게 삼청공원으로 향한다.

잠시 내려가니 가끔 거꾸로 올라오는 등산객과 연인들의 모습이 이색적이다.

내려가는 길에 만나는 노란 개나라조차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시간이다.


나무계단이 끝나고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된 평이한 등로를 따르니 등로 옆에 피어난 예쁜 분홍빛 진달래가 가슴에 다가온다.

부드러운 산책로가 마지막 내려가는 발끝에 힘을 북돋아 주고 있고 하루 종일 따갑게 내려 쬐던 햇살은 이제 서산 자락으로 기울어 가고 있다.


조금 더 내려가니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삼청공원에 도착을 하고 그 많은 주민들 사이를 헤치고 빠르게 걸어 드디어 오늘 산행의 종착지인 삼청공원 정문에 도착을 하다.

서울의 진산을 이루는 북악산(342m) 남동기슭에 삼청천이 이루어놓은 골짜기와 수백 년 묵은 소나무숲을 배경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1991년 현재 공원 면적 38만 735㎡이다.

삼청이란 지명은 물이 맑고 수풀이 맑고 사람의 마음 또한 맑은 곳이란 뜻에서 유래했다고 하며 또는 이 일대가 도교가 융성했던 곳으로 도교의 태청, 상청, 옥청의 3청을 말한다고도 하는데 용재총화에서는 이 곳을 도성 안에서 제일 경치가 좋은 곳이라고 했다.

1934년 3월부터 삼림공원으로 관리되다가 1940년 3월 도시계획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특히 이 공원은 140개의 계획공원 중 지리적 위치로 인해 제1호로 지정되었다.

공원의 북쪽은 1976년 서울특별시에서 복원한 조선시대의 성곽이 둘러싸고 있으며 형제약수(형제우물)·영수곡 등이 알려져 있고 다른 공원과는 달리 이 공원의 경내에는 1973년 건립한 정몽주기념비와 산책로 및 정자 등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공원 시설물이 없으며 자연을 살려 그대로 공원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 일대는 노송과 산벚나무, 진달래와 철쭉 등이 어울려 조화를 이루던 곳이었으나 미루나무와 아까시나무 등의 외래종 활엽수를 무분별하게 식목하여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죽어가고 있는 상태이다.

공원의 일부지역은 군사보호지역으로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고 있고 삼청 터널이 완공되어 성북동으로의 진입이 쉽다.

공원의 남쪽으로 경복궁과 창덕궁 및 창경궁 등이 연이어 있으며 도심 속의 산책공원으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삼청공원에서 사진 한장 남기고 내려오니 삼청공원입구라는 도로 간판이 보이고 좌측으로 조금 더 걸어 종로 11번 마을버스가 정차하는 버스 정류장에 도착을 한다.

이로써 오늘 산행은 이곳에서 마무리하고 종로 11번 마을버스를 타고 시청역으로 가 2호선 지하철을 이용해 어렵게 귀가를 하였다.

귀가하니 옆지기는 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점심까지 먹은 후 완쾌되어 쌩쌩하기만 하다.

아이들 모두 나간 사이 옆지기와 둘이 맛난 저녁을 먹으며 또 한 주일을 마감해 본다.


다음주에는 옆지기를 데리고 어디를 다녀오면 좋을지 벌써 고민되는 시간이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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