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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료/완료 여행자료

충주 탄금대 둘러보기

by 칠갑산 사랑 2015.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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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 충청북도 충주시 탄금대와 탄금대 공원 일대

여행일자 : 2015년 08월 06일(목요일, 부용지맥 마무리 후 잠시 짬을 내 돌아보기)

여행날씨 : 폭염주의보가 있었던 너무나 무더웠던 한여름 날씨

여행온도 : 영상 26도에서 영상 35도

여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여행코스충주 탄금대와 탄금대공원 그리고 남한강과 달천

여행시간 : 약 01시간 전후 (부용지맥 산행 후 무더위 속에 잠시 둘러보기)

 

 

가야금을 타는 우륵의 고귀한 자태와 왜군에 맞서 죽음으로 나라를 지키려 했던 신립장군을 생각했던 탄금대에서의 아름다웠던 시간들 

 

 

폭염주의보가 발령되었던 날 최악의 등로를 타고 참으로 힘들게 부용지맥 산행을 무탈하게 마무리 한 후 애마를 몰고 구탄금대교를 지나니 도로 우측으로 탄금대가 보이고 여전히 무더운 한낮의 열기가 심한 시간이지만 언제 다시 들릴지 알지 못하기에 잠시 들려 사진 몇장 남기기로 한다.

 

탄금대는 충청북도 충주시 칠금동에 있는 고적지로서 충청북도 기념물 제4호로서 대문산을 중심으로 남한강 상류와 달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으며 수려한 경관과 유서깊은 고적지이다.

가야국의 악성 우륵이 신라에 귀화하여 진흥왕에게 명성이 알려져 하림궁에서 새 곡을 지어 연주하니 왕이 감동하여 충주에 살도록 하였다.

우륵은 그를 보호하던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가르치고 법지에게는 노래를 가르쳤으며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치며 여가있을 때 바위에 앉아 가야금을 타며 살았는데 탄금대라는 명칭도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곳이라는 데에서 유래한다.

또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도순변사 신립이 적은 병력으로 출전하여 이곳에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대결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고 부장 김여물과 함께 전사한 전적지이기도 하다.

탄금대에는 1953년에 세운 탄금대비를 비롯하여 1977년에 세운 악성 우륵선생추모비, 1978년에 세운 신립장군전적비, 1968년에 건립된 권태응의 감자꽃노래비, 1970년에 세운 탄금정과 그 밖에 충혼탑과 충주문화관 및 야외음악당 등이 있다.

그리고 충주댐이 준공되어 호반의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또한 탄금대 부근에 중원탑평리 칠층석탑(국보 제6호)을 비롯하여 중원 고구려비(국보 제205호) 등 귀중한 문화재가 집중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탄금대와 탄금대공원은 수많은 사연을 안고 있는 역사적 장소이다
금대는 본래 대문산이라 부르던 야산인데 기암절벽을 휘감아 돌며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과 울창한 송림으로 경치가 매우 좋은 곳으로 탄금대란 신라 진흥왕 때 우리나라 3대 악성 중 하나인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400년 전인 신라 진흥왕 때 가야국의 우륵이라는 악사는 조국의 멸망 후에 이곳에 강제로 이주당한 수많은 가야인들 중 한사람이었으며 당시 우륵은 탄금대 절벽바위를 주거지로 삼고 풍광을 감상하면서 가야금을 타는 것으로 소일했다.

그 오묘한 음률에 젖어 들어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부락을 이루고 그곳을 탄금대라 명명했다. 
탄금공원 한 켠에는 충혼탑이 하나 서 있는데 한국전쟁 당시 나라를 위해 순국한 충주 출신 전몰 장병과 경찰관, 군속, 노무자 2838인의 넋을 추모하고자 1956년에 세운 것으로 이 곳에서는 매년 6월 6일 현충일을 맞아 향사를 지낸다.

탄금정과 충혼탑 중간에는 항일시인 권태응 선생의 감자꽃 노래비가 있어 발길을 또 한번 붙잡으며 공원 군데군데에는 조각작품이 들어서 있고 소나무 군락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단란한 가족 나들이를 즐길 수도 있다.  
 
탄금대는 임진왜란 당시에 사연을 안고 있는 곳 소중한 장소이다
지금에 와서 공원으로 말끔히 단장된 탄금대는 많은 사연을 간직한 곳으로 임진왜란 당시 신립장군이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한 순국의 현장이며 현대로 넘어와서는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숨져간 넋들을 기리는 충혼탑이 세워져 있는 곳이다.

장중한 남한강 물줄기가 내려다보이는 칠금동 대문산 기슭의 탄금대가 바로 이곳이다. 
조선조로 넘어와서 임진왜란을 맞아 탄금대는 감상의 장소가 아니라 치열한 격전지로 변모하는데 신립장군의 가슴아픈 패전이 이곳에서 기록된다.

선조 25년(1592) 4월 14일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15만명의 왜군이 거침없이 서울을 향해 쳐들어가자 신립장군은 도순변사가 되어 충주 방면을 지키게 되는데 신립장군은 지형을 정찰한 뒤 조령에 진지를 확보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하고 우리 군사들의 훈련이 부족해 사지에 몰아넣지 않으면 투지를 드높일 수 없다고 판단하여 28일 새벽 8천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친다.

그러나 신립 장군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천추의 한을 품고 남한강에 투신자살하여 패장의 불명예를 쓰고 만다.

탄금정 정자에서 북쪽으로 층계를 따라 내려가면 열두대라는 층암절벽이 기다리는데 왜군과의 격전 당시 장군이 열두번이나 오르내리면서 활줄을 강물에 식히고 병사들을 독려했다 해서 열두대라는 것이다.

 

 

 

 

 

 

신립장군은 임진왜란 때 충주성 밖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접전을 벌이다 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수인데 본관은 평산이고 자는 입지이며 아버지는 생원 화국으로서 1567년(명종 22)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과 도총부도사 및 경력과 진주판관 등을 지냈다.

1583년(선조 16) 온성부사로 있을 때 두만강 방면의 여진족 추장인 니탕개가 쳐들어왔는데 니탕개는 선조 초년부터 6진에 자주 드나들며 공순의 뜻을 보였으므로 정부에서 관록을 주고 후대했으나 진장의 대우가 좋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부근의 여러 부족을 규합하여 경원부로 침입하여 아산보와 안원보를 점령했다.

이에 기병 500여 명을 동원하여 첨사 신상절과 함께 1만여 명의 군대를 물리쳤고 이 공으로 1584년 함경도북병사에 오르고 환도와 수은갑두구 등을 받았다.

1587년 전라도 흥양현에 침입한 왜구 격퇴를 위해 우방어사로서 좌방어사 변협과 함께 출진했으나 5에서 6일이 지나도 적의 기척이 없으므로 철수하여 돌아오던 중 양가의 처녀를 첩으로 삼았다는 삼사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곧 함경남도병마절도사로 다시 기용되었다.

1588년 고미포의 여진족 부락을 공격하여 적병 20여 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으나 이해 10월 갈파지보에서 수졸을 참형했다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고 동지중추부사로 물러났다 1590년에는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고 이듬해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

1592년에는 변방을 순시하는 임무를 맡아 경기와 황해 지방을 돌았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순변사가 되어 선조로부터 보검을 하사받고 김여물 등의 군관과 함께 모집한 수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충주로 출전하여 충주에 진을 치고 있을 때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군이 새재(조령)를 넘어 충주에서 6에서 7리 떨어진 단월역까지 들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왜군의 동향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 사실을 보고한 안민 등을 군중을 현혹시킨다 하여 목을 베었다.

왜군이 충주로 진격해오자 김여물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으나 수적으로 우세한 왜군에게 밀린 많은 군사들이 퇴로가 막혀 익사하면서 전투는 참패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장이다.

 

 

우륵은 생몰연대 미상으로 가야국 성열현에서 살았다고 한다.

우륵이 태어난 가야국이 어느 가야인지 또한 가실왕은 가야국 중 어느 나라 몇 대 임금인지 확실하지 않다.

한때 가실왕이 우륵에게 이르기를 모든 나라의 방언도 각각 서로 다른데 성음이 어찌 하나일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가얏고를 위해 악곡을 지으라고 하여 12곡을 지었다고 한다.

그 뒤 가야국이 어지러워지자 가얏고를 들고 제자 이문과 함께 신라 진흥왕에게 투항하였는데 왕은 그를 맞아 국원(지금의 충주)에 안치시키고 계고와 만덕 및 법지 등을 보내어 그의 업을 전습하게 하였다.

우륵은 이 세 사람의 재주를 헤아려 계고에게는 가얏고를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각각 가르쳤다.

그 후 이들은 우륵이 만든 12곡을 듣고는 이 곡들은 번잡하고 음란하여 우아하고 바르지 못하다고 하며 5곡으로 줄여 버렸다.

우륵이 이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매우 노하였으나 새로 줄인 5곡을 모두 듣고 난 뒤에는 눈물을 흘리며 즐거우면서 음란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으니 가히 아정하다(아담하고 곧바르다) 하겠다라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우륵이 지은 12곡명은 하가라도, 상가라도, 보기, 달기, 사물, 물혜, 하기물, 사자기, 거열, 사팔혜, 이사, 상기물이다.

이 중에서 보기와 사자기 및 이사를 제외한 나머지 9곡은 당시의 군현명과 같아서 해당 지방 민요의 성격을 띤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탄금대에는 또한 신립장군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열두대라는 절벽이 있다.

탄금대에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 8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 제1 선봉대를 맞아 격전을 치른 전적지이기도 한데 특히 탄금대 북쪽 남한강 언덕에 열두대라고 하는 절벽이 자리잡고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신립이 격전을 치르는 동안 12번이나 오르내리며 활줄을 물에 적셔 쏘면서 병사들을 독려했다고 한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신립은 열두대에서 남한강으로 투신해 생을 마감하게 된다.
흔히 후세의 학자들은 신립이 자신의 기마 부대를 과신한 나머지 천혜의 요새인 조령을 버리고 탄금대 벌판에 배수의 진을 친 게 임진왜란 초기 결정적인 실수 가운데 하나였다고 지적하지만 탄금대에 올라 과거 전장이었던 들판을 바라보면 신립 장군의 판단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된다.

지리적으로 기마 병을 충분히 잘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지만 당시 비가 많이 와 벌판이 물에 잠겨 생각했던 전략을 펼치지 못했다고 하니 하늘이 도와주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때문에 탄금대에는 신립의 충심을 기리는 탄금대비를 비롯해 신립 장군 순절비, 악성 우륵 선생 추모비 등이 조성돼 있다.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동시작가 권칠응선생의 감자꽃 노래비와 활쏘기를 체험할 수 있는 궁도장 그리고 조각공원이 조성돼 있어 충주시민들이 가장 사랑 하는 쉼터로 자리잡았다.

 

 

 

남한강은 강원도 오대산(五臺山, 1,563m)에서 발원하여 충청북도 북동부와 경기도 남동부를 흘러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합류하여 한강으로 흘러드는 강이다. 

남한강의 길이는 375 Km이며 유역 면적은 1만 2577 Km2로서 발원지로는 일반적으로 강원도 오대산에서 출발하는 오대천을 들지만 태백시 검룡소에서 시작하여 삼척시 하장면 일대를 지나 골지천에 합류하는 창죽천을 발원지로 보는 견해도 있다.

오대산에서 발원한 남한강은 한반도의 등줄기 산맥인 태백산맥의 서사면을 지나면서 많은 지류들이 합류되고 충청북도를 경유하여 경기도로 흘러가는데 강원도에서는 평창, 정선, 영월, 횡성, 원주를 지나 충청북도 북동부에서는 제천, 단양, 괴산, 음성, 충주를 지나고 경기도 남동부에서는 여주, 이천, 양평, 광주를 지난다.

상류 구간은 비교적 높은 산악 지대를 급류천 형태로 흐르는데 특히 오대천과 평창강(220 Km)은 해발고도 1000미터 이상의 태백산맥 준령 사이를 통과하여 500미터 이상의 고원 지대를 흐르고 하류 구간은 대략 200미터 내외의 구릉지대를 흐른다.

따라서 남한강은 하천 유로의 성격이 구간별로 큰 차이가 있는데 즉 정선, 평창, 영월, 제천, 단양을 지나는 상류부 하천은 높은 산지 사이를 심하게 사행하여 흐르는 감입곡류를 이루지만 강원도 단양에서 충주를 지나 여주, 양평 등 경기도 남부의 하류 구간에서는 고도가 갑자기 낮아지고 사행의 정도도 심하지 않다.

남한강 유역의 지질은 편마암계와 대보 및 불국사 화강암계 그리고 퇴적암계와 충적층으로 나누어지는데 특히 조선계층과 평안계층으로 이루어진 고생대 퇴적암이 집중되어 있으며 평안계는 강원도 도계와 태백 등지에 분포하는데 무연탄이 매장되어 있어 과거에 많은 광산들이 운영되었다.

조선계는 고생대 초기의 해침작용으로 해저에서 퇴적된 석회암층으로 석회암층에는 다수의 석회동굴과 돌리네, 우발라, 폴리에 등 요형 카르스트 지형이 형성되어 특이하면서도 수려한 경관을 보여준다.

남한강은 상류부에서 석회암뿐만 아니라 화강암과 퇴적암 그리고 편마암 분포 지역을 번갈아 흘러 하곡의 폭이나 깊이 등에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데 화강암이 넓게 분포한 상류부는 퇴적암이나 편마암 분포지역에 비해 하안단구의 분포가 상대적으로 미약하다.

화강암은 풍화와 침식에 대한 저항력이 약하여 쉽게 개석(하천의 침식 작용으로 평지에 골짜기를 만드는 현상)되기 때문인데 이러한 화강암 지역에서는 기반암이 노출되거나 토양이 얇게 덮인 고위 평탄면이 분포한다.

또 상류부는 한반도의 융기 축에 해당하는 태백산맥의 서사면에 위치하므로 지반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제4기 동안 빙기와 간빙기가 교대로 반복되었고 기후 변화와 함께 지반운동으로 인해 침식기준면이 변화되면서 남한강을 따라 전형적인 하안단구 지형이 형성되었다.

특히 강원도 남부와 충청북도에서는 큰 지반운동량으로 인해 하안단구 지형면들 사이에 고도차를 벌여 좁은 범위에서도 시기를 달리하는 하안단구를 쉽게 분별할 수 있다.

남한강은 북한강에 비해 유역 규모가 훨씬 커서 많은 지류천을 거느리고 있는데 대표적인 지류천으로는 오대천을 시점으로 송천, 골지천, 동대천, 남동천, 창리천, 위림천, 평창강, 옥동천, 매포천, 죽령천, 단양천, 고교천, 제천천, 덕산천, 달천, 구룡천, 영덕천, 섬강, 청미천, 금당천, 양화천, 곡수천, 복하천, 금사천, 향리천, 원계천, 흑천 등이 있다.

골지천은 정선군 임계면 송계 근처에서 임계천을 만나 여량면 아우라지로 접어들며 황병산에서 발원해 왕산면을 거쳐 흘러 들어온 송천과 합류하며 이들 세 하천은 정선 일대에서 조양강이 되고 계방산(1577봉)에서 발원한 평창강과 영월에서 합류된다.

영월읍을 중심으로 동측과 서측에서 흘러오는 남한강과 평창강을 이 지역에서는 각각 동강과 서강으로 부르는데 동강 유역은 한국에서 가장 모식적인 감입곡류하천을 자랑하며 곡률도는 무려 2.5에 이른다.

서강은 주천강과 평창강이 합쳐 이루어지는데 동강에 비해 물길이 순한 편이어서 암강이라고도 불리며 여름철 장마 때 숫강(동강)의 물이 서강보다 많아야 큰물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서강을 거슬러 가다보면 백덕산과 태기산에서 흘러내린 물길이 요선암이라는 절벽 밑에서 만나는데 요선암은 선녀들이 목욕한 바위라는 이름이 새겨진 기묘한 형상의 화강암 바위이다.

평창강이 남한강에 합류되면서 유량은 크게 증가하고 단양군에 들어서면 충주댐 건설로 형성된 충주호에 유입되는데 충주에서는 북류하는 달천이 합류되고 여주에서는 섬강이 합류되어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만난다.

태백산맥의 바람맞이 사면에 해당하는 상류부는 우리나라의 다우지를 이룬다.

아울러 해발고도 1500미터 이상의 높은 산지에서 발원한 남한강의 큰 하천에너지는 경사가 급한 산지와 깊은 하곡을 만들고 특히 측방침식으로 석회암의 하곡에 규모가 큰 하식애를 만들었다.

특히 영월의 청령포에서 과거 평창강이 흘렀던 방절리 구하도를 확인할 수 있다.

남한강에는 홍수 조절과 용수 공급 및 발전 등의 목적으로 충주댐이 건설되었는데 1985년 10월 17일 완공된 충주다목적댐은 수면면적이 97 Km2에 이르는 국내 최대 규모의 인공호이며 수력 발전의 규모도 소양강댐의 20만 KW보다 2배가 넘는다.

충주댐 건설로 도담삼봉, 옥순봉, 구담봉의 일부가 물에 잠기게 되었지만 주변에 관광 자원이 많아 정부에서는 호수를 이용한 주운관광권으로 개발하고 있다.

평창강은 천연기념물 259호인 어름치와 흰 수달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이며 생육신인 원호가 관란정에서 어린 단종을 그리며 지은 글도 전해진다.

단종의 귀양지인 영월 청령포는 어린 단종이 한양에 있는 정순왕후를 그리워하면서 오르내렸다는 노산대, 눈물을 흘리면서 손수 쌓았다는 망향탑, 그리고 처절한 유배생활을 지켜보았다는 관음송 등이 있다.

남한강 상류 구간은 내륙의 고랭지에 해당되므로 대체로 옥수수·감자·메밀 등의 작물 재배가 성하였는데 반하여 하류 구간은 저평한 충적 평야가 넓게 분포하여 미작이 성하고 채소, 사과 등 원예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중류 일대는 매장량이 많은 석회암을 원료로 시멘트 공업과 석회 분말 공업이 발달해 있는데 그 중심지는 단양과 제천이다.

특히 단양은 자연적인 높은 산지와 깊은 곡을 따라 석회동굴과 돌리네 등 각종 카르스트 지형이 발달해 있다.

 

부드럽고 깨끗한 물줄기와 남한강의 발원지인 달천은 국토의 중심부인 충청북도 괴산군에서 발원하여 동진천, 음성천등과 합류하여 충주시 가금면을 지나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달천은 달래강 또는 감천이라고도 불러지고 있으며 폭 20미터에 길이는 96 Km의 달천은 속리산 솔향기를 안고 흘러내리는 물이 화양동계곡과 선유동계곡 및 쌍곡계곡들에서 바위에 부딪치고 닳아서 한결 정제된 물이어서 무척 결이 부드럽고 깨끗하다.

이 달천의 물은 조선시대 오대산 우통수, 속리산 삼파수 등과 함께 조선 3대 좋은 물로 알려져 왔다.
달천을 따라 펼쳐지는 아름다운 관광지는 아름다운 자태로 사람들이 맞이하는데 옛날 성리학의 대가 우암 송시열선생이 풍류를 즐기며 주인됨을 자처했다고 하는 화양동계곡과 퇴계 이황이 절묘한 경치에 반해 9달 동안에 거쳐 이름을 지었다는 선유동계곡에서는 곳곳에서 부드럽고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금강산의 아름다운 일부를 옮겨 놓은 듯하여 불리워지는 소금강이 있는 쌍곡계곡과 신선이 아름다움에 반해 노닐었다는 갈론계곡 등 달천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는 아름다움과 깨끗함이 완벽에 가까울 정도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달천의 비경에 반해 수많은 학자와 문인들이 즐겨 찾아 지금도 많은 곳에서 그 발자취를 찾을 수 있는데 우암 송시열선생이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암서재 주위 바위사이에는 노송이 울창하고 밑으로 흐르는 맑은 물이 더할 수 없는 경치를 엮어내고 있으며 세계 최초의 학생용교과서인 동몽선습을 집필한 박세무 선생의 정신과 혼이 담겨있고 있는 애한정, 조선 선조때의 충청도 관찰사 서경 유근 선생이 이곳의 풍광을 사랑하여 은거하였다는 고산정에는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쓴 호산승집이라는 편액과 웅화가 쓴 고산정사기라는 명문이 쓰여져 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진주대첩의 주장 충무공 김시민과 문숙공 김제갑의 위패를 봉안하고 순국의 넋을 기리고 있는 충민사가 자리잡고 있다.
달천을 흐르는 물은 소백산맥으로 굽이굽이 이어지는 괴산의 아름다운 산들에서 흐르게 되는데 때묻지 않은 대자연의 순수를 간직하고 있는 괴산의 35 명산은 달천의 깨끗함과 함께 소중한 가치를 부여한다.

괴산의 명산 중에는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도명산, 저 멀리 당나라의 전설이 전해올 만큼 예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온 낙영산과 칠보산, 군자산, 보배산 등은 등산 애호가들이 사랑하며 즐겨 찾는 특별한 산행의 기쁨을 맛보고 있다.

또한 국내기술로 설계와 시공한 최초의 수력발전용 댐인 괴산댐이 달천을 가로질러 만들어졌으며 괴산댐은 높이 28미터, 길이 171미터의 콘크리트 중력댐으로 시설용량 2600 KW, 유역면적 671m2, 총 저수용량 1532만m2이며 괴산군 칠성면, 문광면, 청천면의 3개 면에 걸쳐있고 인근에서는 수전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처럼 깨끗한 물과 산자수려한 청정자연속에서 생산되는 농특산품은 그 가치를 더해주는데 특히 괴산의 청결고추는 그 명성이 유달리 높은데 토종고추인 쇠뿔고추를 새롭게 개량해 생산하고 있고 괴산의 전통잡곡은 청정괴산에서 생산되는 대표적인 농특산품이다.

이러한 청정 농특산품을 괴산청결고추 상설직판장에서 쉽게 믿고 구입할 수 있으며 또한 자연을 체험하며 청정 농산물을 구입할 수 있는 체험형 관광과 전국 제일의 괴산 농특산물구매 및 우리 고장 향토음식을 맛볼 수 있는 구매형 관광코스, 역사유적 및 쉼터 등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휴양형 관광코스인 그린투어를 개발하여 운영하고 있다.

 

 

이렇게 한낮 무더위속에 잠시 충주의 유명한 고적지인 탄금대에 들려 그토록 오랫동안 가슴속에 남겨 뒀던 남한강과 달천까지 고운 추억으로 남기고 나오니 이제사 완전하게 부용지맥 산행을 마무리하게 된 기분이다.

온 몸에 흐르는 땀방울을 닦으며 충주시내로 들어가 간단하게 샤워 후 귀가하는 마음이 무거워진 몸과는 달리 새털처럼 가볍게 느껴지는 것은 무탈한 부용지맥 산행을 완주한 것과 동시에 충주의 유명한 탄금대를 들려 우륵의 가야금 선율과 동시에 신립장군의 나라를 위한 정신을 가슴에 새긴 시간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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