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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맥산행(완료)/비슬지맥(낙동·완)

비슬지맥 제4구간 헐티재에서 건티재까지 산행후기

by 칠갑산 사랑 2015.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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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과 경상북도 청도군 및 창녕군의 비슬지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2015년 05월 04일과 05일 (월요일에서 화요일까지 2일 연속 산행), 2015년 5월 04일(월요일 당일 산행)

산행날씨 : 전날 비 내린 후 아침까지 짙은 안개 후 맑고 화창한 봄 날씨

산행온도 영상 08도에서 영상 23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헐티재(902번 2차선 포장도로, 대구광역시와 청도군 경계)-능선진입(반사경)-비슬지맥 주능선-바위전망대-677봉-바위전망대-778.1봉

                삼각점(용천봉)-삼봉재-이정표(헐티재 3.2 Km, 비슬산정상 1.0 Km, 용천사 2.4 Km)-비슬산정상갈림 삼거리 돌탑 이정표(헐티재 3.8 Km,

                비슬산정상 천왕봉 0.4 Km, 대견사 3.6 Km)-이정목(비슬산 0.34 Km, 휴양림 3.8 Km)-이정목(비슬산 0.14 Km, 휴양림 4.0 Km)-헬기장-

                비슬산천왕봉(1084봉) 삼각점과 정상석-비슬산정상 천왕봉 갈림 삼거리 복귀-벤취2개-바위전망대-마령재-이정표(비슬산 정상

                천왕봉 1.0 Km, 대견사 1.88 Km와 참꽃군락지 1.85 Km, 용천사 2.5 Km, 유가사 2.6 Km)-벤취2개-바위전망대-이정표(비슬산

                정상 1.6 Km, 조화봉 1.3 Km, 휴양림 3.0 Km)-월광봉(1003봉)-나무계단-참꽃군락지-이정표(천왕봉 2.3 Km, 조화봉 0.9 Km,

                전망대 0.4 Km)와 벤취3개-벤취1개-나무데크등로-대견봉 갈림 삼거리 이정표(천왕봉 2.64 Km와 월광봉 0.8 Km, 조화봉 0.3 Km,

                유가사 3.4 Km와 대견봉 0.6 Km)-기바위-참선바위-나무계단과 데크-전망대 갈림 이정표(조화봉 0.4 Km와 기바위 0.05 Km,

                유가사 3.3 Km, 전망대 0.1 Km)-대견봉 갈림삼거리 이정표(천왕봉 2.85 Km와 기바위 0.075 Km, 유가사 3.3 Km와 대견봉 0.46 Km,

                공영주차장 3.3 Km와 대견사 0.03 Km)-대견사 삼층석탑-대견사-층층바위-작은거북바위-큰거북바위-코끼리바위-대견사 마애불-대견봉

                갈림삼거리 복귀-나무계단-공영주차장 갈림 이정표(천왕봉 2.76 Km와 대견봉 0.76 Km, 톱날바위 0.2 Km와 금수암전망대 3.15 Km,

                공영주차장 5.74 Km와 관리사무소 4.69 Km)-공영주차장 갈림 이정표(천왕봉 2.8 Km와 대견봉 0.8 Km, 참꽃군락지 0.2 Km와

                금대견사 0.2 Km, 공영주차장 5.7 Km와 관리사무소 4.65 Km)-비슬산강우레이더관측소-비슬교-톱날바위-조화봉 100미터 이정표-비슬산

                해맞이 제단-비슬산 조화봉(1058봉)-능선진입-안전목책과 로프구간-로프구간-안전목책과 로프구간-비포장 임도-바위 암릉구간-

                969암봉-이정표(조화봉 1.2 Km, 군불로 4.8 Km)-이정표(조화봉 1.6 Km, 군불로 4.6 Km)-989.7암봉전망대-기차바위-암석절개지

                추락주의 경고판-비슬산 등산로 안내판-바위암릉길-오페라바위-비슬산 등산로 안내판-이정표(보림사 2.5 Km, 상수월마을정상 0.5 Km)-

                상수월마을정상 안내판-이정표(조화봉 방향, 상수월마을정상 0.4 Km, 보림사 2.2 Km)-이정표(보림사 2.4 Km, 상수월마을정상 0.2 Km)-

                철쭉지대-시멘트 포장도로-갈림 삼거리-능선진입-시멘트 포장도로-원명고개 427미터 이정판(원명마을 표지석)-535.8봉 삼각점-564봉-

                송전탑-마령산(611.3봉) 삼각점-송전탑-마령치(비포장 임도)-송전탑-507봉-송전탑-556.2봉 이정판-바위전망대-수복산(593봉,

                수봉산)-580 바위봉-비티재(20번 2차선 지방도로, 잔치국수로 점심식사)-시멘트 포장도로-비포장 임도-능선진입-277.8봉 삼각점-

                간벌지대-송전탑-2번 송전탑-변전소-342.4봉 삼각점(안산봉)-조망처 송전탑-묘봉산(514봉)-500.3봉 삼각점-364.4봉 삼각점-송전탑

                벌목지대-광산재(비포장 임도)-능선진입-송전탑-열왕지맥과 화왕지맥 분기점-천왕산(618봉)-열왕지맥과 화왕지맥 갈림 삼거리 복귀-

                배바위-배바위산(607.1봉)-송전탑 전망대-362봉-비포장 임도-514봉-건티재 시멘트 포장도로 이정표(청도군 각남면 옥산리, 청도면

                각산면 함박리, 밀양시 청도면 소태리)-산행종료-봉고차로 대산저수지까지 이동-청도택시로 청도읍 필모텔 투숙

산행거리 : 5월 04일(월) 약 30.88 Km (스마트 폰의 GPX 기준), 5월 05일(화) 약 29.52 Km (스마트 폰의 GPX 기준)

산행시간 : 5월 04일(월) 아침까지 짙은 안개 후 맑고 화창했던 봄 날씨에 12시간 20분 (04시 42분에서 17시 03분까지)

                 5월 05일(화) 하루종일 맑고 화창한 초여름 같은 조금은 무더웠던 날씨에 11시간 24분(04시 45분부터 16시 09분까지)

교통편 : 심야우등버스(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동대구터미널까지)

            택시 이용 (장상근청도개인택시 010-8290-5806) 

비슬지맥이란???

낙동정맥 사룡산(683봉) 북쪽 400미터 지점에서 분기하여 서진하며 사룡산(683봉), 구룡산(674.8봉), 발백산(674.5봉), 대왕산(607봉), 선의산(756.4봉), 용각산(692.5봉), 상원산(674.1봉), 삼성산(668.4봉)등 600에서 700미터 대의 산들을 들어 올린 후 비슬산(1083.6봉)에 이르러 북쪽으로 청룡지맥을 분기한후 방향을 남쪽으로 틀어 조화봉(1057.7봉), 수봉산(592.5봉), 묘봉산(514봉)을 지나 천왕산(619.2봉)에 이르러 남쪽으로 열왕지맥을 분기한후 동남진하며 호암산(611.2봉), 화악산(930봉), 형제봉(556.7봉), 종남산(663.5봉), 팔봉산(391.4봉), 붕어등(278.8봉)을 지나서 밀양시 상남면 외산리에서 낙동강에 발을 담그며 그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146.5 Km가 되는 산줄기로 최고봉인 비슬산의 이름을 빌려와 비슬지맥이라 칭한다.
비슬지맥은 낙동정맥 및 청룡지맥과 함께 금호강의 남쪽울타리를 분담하고 밀양강의 서쪽 울타리역활을 처음부터 끝까지 맡아와 밀양강을 낙동강에 합수시키고 동쪽 밀양강 건너로는 낙동정맥에서 온 영축지맥의 끝을 바라보고 남쪽 낙동강 건너로는 낙남정맥에서 온 무척지맥의끝을 바라보며 그 끝을 맺는다.
지나가는 산들은 사룡산(683봉), 구룡산(674.8봉), 발백산(674.5봉), 대왕산(607봉), 선의산(756.4봉), 용각산(692.5봉), 상원산(674.1봉), 봉화산(473.5봉), 삼성산(668.4봉), 우미산(-0.7 Km, 747.3봉), 비슬산(1083.6봉), 조화봉(1057.7봉), 수봉산(592.5봉), 묘봉산(514봉), 천왕산(619.2봉), 배바위산(607.1봉), 호암산(-0.7 Km, 611.2봉), 화악산(930봉), 형제봉(556.7봉), 종남산(663.5봉), 팔봉산(391.4봉), 붕어등(278.8봉)을 지난다. 

지나는 행정구역은 사룡산에서 건천읍, 영천시, 청도군경계에서 시작하여 구룡산에 와선 건천읍과 영천시와는 작별하고 경산시와 청도군경계를 한동안 따르다가 상원산 근방에 와서 대구광역시와 경북도경계를 만나서부터는 도경계를  따라 비슬산, 조화봉, 수봉산, 천왕봉, 화악산까지 간다.

화악산을 지나서야 그동안 처음부터 계속돼온 청도군경계를 벗어나 밀양땅으로 들어선다.
비슬지맥 전체 146.5 Km중 청도군경계를 109미터쯤 지난다.
 

비슬지맥에서 분기하는 지맥은 비슬산에서 북진하는 청룡지맥(약 37 Km)과 천왕산에서 남진하는 열왕지맥(약30.4 Km)이 있다.

 

 

비바람에 기대했던 비슬산 참꽃은 만나지 못했지만 환상적인 마루금을 걸으며 힐링을 했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5월 1일 근로자의 날과 5일 어린이날 휴일로 인해 4일 하루를 더 연차를 내 남아 있는 비슬지맥 산행을 마무리 하고자 했지만 5월 3일 일요일 산행지인 비슬산에 내리는 비로 인해 산행을 포기하고 3일 밤 자정 무렵 고속버스를 이용해 동대구로 내려가 택시로 헐티재까지 이동하여 산행을 시작해 본다.

오늘과 어린이날 휴일인 내일 이틀동안 산행을 해야 하기에 구간 나누기도 애매하고 또 내일 일요일 저녁에 서울로 복귀하는 시간이 정해지지 않아 많은 변수를 가지고 내려 온 시간이지만 잘 준비를 하였으니 가능하면 외산교에 가깝게 진행하고 올라 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다만 전날 이곳 산행지에 내린 비와 강풍으로 인해 기대했던 비슬산의 참꽃이 대부분 떨어져 아쉬움이 컸으나 예상도 못했던 천왕봉과 대견사를 만나 그 참꽃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 보는 시간이었다.

 

비슬산 참꽃이 보고 싶어 급하게 진행하기 시작한 비슬지맥인데 막상 비슬산 정상에 도착을 하는 날은 전날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바람이 강하게 불어 만개한 참꽃이 모두 떨어져 보고 싶은 참꽃은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말았다.

더욱이 안개가 자욱한 등로를 따라 걷다 보니 보고 싶었던 풍경과 조망도 없이 걷다 보니 더욱 아쉬움이 컸는데 다행히도 비슬산 정상을 지나니 서서히 안개가 걷히며 환상적인 조망을 즐길 수 있어 다행이었다.

특히 4년 전 비슬산에 올라 환상적인 참꽃을 구경하였을 땐 비슬산 정상석이 대견봉이었는데 지금은 천왕봉으로 바뀌어 있어 그 내역을 상세히 알아 볼 기회를 가져 보도록 한다.

 

원래 5월 2일 이곳 헐티재로 내려 와 4일까지 비슬지맥 산행을 마무리하고 올라가고 싶었는데 5월 1일 대동금강기맥 첫구간 산행과 3일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는 예보로 인해 포기하고 비가 그친 3일 밤 11시 50분 고속버스를 타고 동대구로 내려 와 택시를 타고 어렵게 헐티재에 다시 서게 되었다.

택시 기사의 어이없는 운전으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아무튼 무탈하게 헐티재에 도착해 어둠속에 사진 한장 남기고 철조망으로 막혀 있는 도로를 타고 어렵게 산행 들머리를 찾아 비에 젖은 등로로 들어가며 내일까지 만 2일동안 멀고도 긴 산행을 시작해 본다.

이곳 헐티재에 대한 자료는 제3구간 말미에서 설명을 했기에 생략하고 다만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와·금천리에서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로 넘어가는 고개라는 사실만 간단히 언급을 해 본다.

 

헐티재 이정석과 청도소싸움경기장 그리고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도로 표지판이 서 있는 능선 방향의 마루금을 타고 산행을 시작하려 해 보지만 비에 젖어 있는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로 인해 포기하고 다른 선답자들과 마찬가지로 청도 방향으로 잠시 도로를 타고 걸어 넘어가 도로 우측에 서 있는 반사경과 철조망 사이에 나 있는 좁은 등로를 타고 어렵게 산행을 시작해 본다.

바람이 불지 않은 낮은 지대의 나뭇가지에는 많은 빗방울이 맺혀 이 산객이 움직일수록 온몸에 비산하며 마치 비를 맞는듯한 그런 모습으로 산행을 시작한다.

 

비에 젖어 미끄러운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타고 이리저리 등로도 없는 능선을 따라 무작정 오르니 벌써 등줄기와 이마에선 굵은 땀방울이 흘러 등로로 뚝뚝 떨어지고 있다.

참으로 어렵게 10여분 많은 땀을 흘리며 등로도 없는 등로를 따라 오르니 드디어 정상 등로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잠시 배낭 내려 물 한모금 마시며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 본다.

그곳 정상 마루금에서 다시 배낭 둘러메고 좌측 등로를 타고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따라 걸어가 본다.

 

정상 등로를 타고 진행을 하니 등로는 완전히 젖어 잇어 깔린 낙엽이 촉촉하기만 하고 가끔 바람이 멈춘 등로 위에는 짙은 안개가 머물며 등로조차 보여주질 않는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 오르니 677봉이라 생각되는 봉우리에 올라 불어오는 바람에 흐르는 땀방울을 식히고 다시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산책로란 화살표 이정판이 보이고 곧이어 등로 우측으로 바위 전망대가 보여 잠시 들어가 보니 지난 구간 내려온 비슬지맥 마루금과 오늘 새벽 어둠속에 어렵게 올라 온 헐티재의 도로와 불빛이 벌써 저 아래 멀어져 가고 있다.

또한 헐티재와 오늘 걸어 올라야 할 비슬지맥 사이에는 880봉이 우뚝 솟아 있는데 그곳 정상에도 역시 짙은 안개가 춤을 추고 있고 그 880봉 좌측으로는 이제부터 올라야 할 비슬산 방향의 마루금이 여명의 빛을 받아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데 아쉽게도 저 멀리 비슬산 정상은 안개속에 숨어 보여주질 않는다.

 

그곳 바위 전망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흐르는 땀방울도 식히고 멋진 조망도 감상 한 후 다시 등로로 뒤돌아 나와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등로는 금새 평이하게 이어지고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등로인데 아직도 완전히 어둠이 물러가지 않아 조금은 어둑한 등로를 따르니 등로 우측으로 또 다른 바위 전망대가 나타나고 그곳으로 오르니 이제 지난 구간 내려 온 비슬지맥 마루금과 헐티재 그리고 오늘 걸어 올라 온 마루금이 우측 저 멀리 아련히 펼쳐져 있다.

구비 구비 돌아 내려간 골짜기가 마치 강원도 오지를 방불케 하는 풍경에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다 다시 갈길이 멀기에 내려 와 등로를 걸어 본다.

 

그곳을 내려 와 다시 등로를 따르니 이제 등로 주위에 피어난 개꽃인 철쭉이 아름답지만 아쉽게도 참꽃인 진달래는 벌써 모두 져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그래도 주위 풍경을 즐기며 비가 내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하고 걸어가니 이번에는 등로 좌측으로 너럭바위 같은 큰 바위 전망대가 나타나고 그곳으로 올라 발 아래 펼쳐진 그림같은 풍경을 감상해 본다.

오산리는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에 속하는 법정리로서 청도군의 가장 서북쪽에 위치한 오산리는 용천사가 있고 대구와 인접한 전원주택 단지로 알려져 있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당시 오이와 고산의 이름을 따서 오산동이라 하였는데 오산리는 고산(귀미)와 삼천, 오리가 합해져서 만들어진 동네로서 덕산과 오리 사이에 있는 고산은 대구읍지에는 고며리라고 적혀 있고 마을 사람들은 귀미라고 부르고 있으며 그 유래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오리는 오산을 말하는데 대구읍지에는 동네 이름이 오이원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 달성군 화원이나 가창으로 갈 때 산기슭에 당도해 해가 저물면 오이원에서 자고 떠났다고 하는데 오이원은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와 오이리를 잇는 길목이며 대구읍지는 지금의 가창면을 상수서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청 또는 삼천 마을은 마을의 세 곳에 우물이 있다고 하여 삼천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1896년 이전은 대구부 풍각현 각북면으로 청도읍지에는 기록이 없었다가 1906년에 청도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당시 고산동, 오이동, 금곡동의 비지를 병합하여 오이와 고산의 이름을 따서 오산동이라 하고 각북면에 편입하였다.

1988년 오산동에서 오산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비슬산 동쪽 첫 동네인 오산리는 청도군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동네로 청도에서는 오지 중의 오지로서 비슬산 중턱에 자리 잡은 마을은 넓은 경작지가 없는 편인데 계단식 밭과 다랑논으로 되어 있다.

고산 마을 북쪽에 있는 들은 경지 정리가 말끔히 되어 있고 오리 서쪽에는 대동골이라는 계곡이 있으며 이곳에서 발원한 청도천의 원류인 오산천은 동쪽으로 흐른다.

대동골은 여름이면 피서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그 오산리 지나 저 멀리 하얀 안개가 덮혀 있는 풍경이 참으로 황홀하기만 하다.

 

 

그 바위 전망대에서 한동안 아름다운 풍경과 조망을 즐긴 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망대 우측 위를 올려다 보니 저 멀리 비슬산 정상부의 마루금이 힐끗 올려다 보이지만 아직도 하얀 안개가 춤을 추고 있어 정상부의 깨끗한 조망은 볼 수 없다.

그렇게 조망을 즐긴 후 내려 와 다시 등로를 따르니 등로 우측에 거대한 바위가 나타나고 그 바위 좌측으로 우회해 내려가니 더 큰 바위로 다가온다.

다시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타고 걸어 오르니 778.1봉 삼각점이 나타나고 준.희님이 나뭇가지에 걸어 놓은 이정판도 보인다.

그런데 서래야님이 또 한쪽에 이곳을 용천봉이라 적어 놓아 정확한 이름이 필요할 듯 하다.

 

그 778.1봉 삼각점을 지나 완만한 관목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안개인지 비에 젖어 더욱 깨끗하게 다가오는 연두빛 마루금이 환상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꿈길 같은 등로를 타고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자연에 동화되는 기분으로 걸어가니 다시 완만하게 올라 바위봉을 지나고 안개 낀 몽환적인 등로를 만나 잠시 환상속을 걸어 본다.

다시 큰 소나무 등로가 나타나고 좌측 사면 등로를 따르니 바위가 산재한 등로를 지나 참꽃이 지고 파란 새잎이 피어나는 진달래 터널도 걸어 본다.

 

그 진달래 군락지를 지나니 소나무 군락지가 나타나고 안개 낀 몽환적인 마루금을 따라 조금 더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용천사 가는 하산 갈림길이 있는 삼봉재에 도착을 한다.

용천사는 비슬산 동쪽 기슭에 자리 잡은 절로 670년에 의상 대사가 옥천사로 창건한 해동 화엄 전교의 10대 사찰 중 한 곳으로 1267년(고려 원종 8) 일연이 중창하여 불일사라 칭하였다가 다시 용천사로 고치고 임진왜란 후 1631년(인조 9) 조영 대사가 3중창하였으며 1805년(순조 5) 의열이 크게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용천사라는 이름은 맑고 풍부한 석간수가 끊임없이 용솟음쳐 흘러내리고 있어 용천이라 붙인 것이라고 전하며 이 용천의 샘물은 가물 때나 장마가 질 때도 늘 일정한 양의 맑은 물이 흐르고 사철 마르지 않으며 한겨울에도 어는 법이 없다고 한다.

유물로는 경내의 대웅전과 삼존불, 후불탱화, 나한 십육존불, 진영, 석조물 등이 있으며 불을 밝히는데 사용하였던 정료대가 남아 있고 절 오른쪽 골짜기에는 고승들의 부도 6기가 이 절의 역사를 대변해 주고 있다.

 

삼봉재를 지나 이제부터 조금씩 더 가파라지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등로는 더욱 짙은 안개가 덮고 있어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계속 더 오르니 진달래 군락지가 나타나고 등로는 더욱 미끄러지며 오르기가 쉽지 않다.

그렇게 조금 더 진달래 군락지를 따라 오르니 이제 군달래 나무가 사라지고 등로 좌우측으로는 빛바랜 억새군락지가 나타나기 시작을 한다.

그 억새 군락지를 타고 조금 더 걸어 오르니 이정표가 나타나고 그곳에는 몇개의 키 작은 돌탑들이 서 있다.

이곳이 소위 청룡지맥 분기봉으로서 청룡지맥은 비슬지맥 비슬산 대견봉 아래에서 분기되어 청룡산(793.1봉)과 산성산(653.4봉), 두류산(124.8봉), 와룡산(295봉), 궁산(250.9봉)을 거쳐 금호강으로 이어지는 약 37 Km의 산줄기를 청룡지맥이라 한다.

언제 다시 이곳에 올라 이 청룡지맥 마루금을 타고 걸어 볼 기회가 있을지 기약은 없지만 그런 기회가 있기를 기대해 보는 시간이기도하다.

 

 

그곳 청룡지맥 분기봉에서 청룡지맥 마루금을 타고 북서쪽으로 나 있는 등로를 따라 400미터 떨어져 있는 바슬지맥이란 이름을 낳게 한 비슬산 정상부로 향한다.

잠시 걸어 오르니 바위 등로가 나타나고 비슬산 0.34 Km 남아 있다는 이정목을 지나니 또 다시 비슬산까지 0.14 Km 남아 있다는 이정목을 만난다.

그곳 지나 오르니 금새 헬기장을 지나 철 구조물만 있는 풍향계를 통과하니 금새 넓은 공터가 있는 한쪽에 비슬산 천왕봉 1084 미터란 커다란 정상석이 보인다.

짙은 안개속에 사진 몇장 남기고 살펴보니 몇 년 전까지 올랐을 땐 모두 대견봉이란 정상석이었는데 이번에는 대견봉이 아닌 천왕봉이라 이상한 생각을 해본다.

신증동국여지승람달성군지에는 비슬산을 일명 포산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포산은 수목에 덮여 있는 산이란 뜻이다.

내고장 전통 가꾸기(1981년 간행)에 보면 비슬산은 소슬산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인도의 범어로 부를 때 일컫는 말이며 중국말로는 포산이란 뜻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더불어 신라시대에 인도의 스님이 우리나라에 놀러 왔다가 인도식 발음으로 비슬이라고 해서 이름을 붙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가사사적에는 산의 모습이 거문고와 같아서 비슬산이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일설에 비슬산은 산꼭대기에 있는 바위의 모습이 마치 신선이 거문고를 타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비슬산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비슬산의 해발고도는 1084미터이며 최고봉은 대견봉이였다가 최근에 천왕봉으로 고쳤고 비슬산괴는 대구분지 남부산지의 주체이며 비슬산은 이 산괴의 주봉으로 여기서 북북서 방향으로 청룡산(794봉), 산성산(653봉)이 있고 앞산(660봉)에 이르러 분지상에 임한다.

산지는 전체적으로 급준한 사면을 가지고 분지에 임하고 있으나 그 산정에는 평탄면을 형성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면 산성산은 480미터 부근 이상에서는 갑자기 경사가 완만해지고 곡폭도 넓어져 높이 600미터의 고산현까지 계속되고 있고 청룡산은 500미터 부근부터 완경사지가 보이고 산정부에 평탄면이 나타나고 최정산에 있어서도 약 700미터 이상에서는 완사면을 이루고 있다.

비슬산은 800미터 이상에서 평탄면이 나타나는데 평탄면의 성인을 살펴보면 과거에는 이 지방이 현재보다 낮고 완만한 구릉지 즉 노년기 산지였는데 일대가 융기함에 따라 신천과 남천 등 하천의 침식이 부활해 산지를 개석하였다.

그 결과 평탄명 양사면에 급사면이 발달되었고 이러한 지형의 영향을 받은 하천은 비슬산을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흐르고 있다.

이 중 신천의 본류가 제일 큰 하천이고 기세곡천은 직선상의 유로를 취하고 있으며 그 상류에 용연사가 있으며 이들 하천은 산지내에서는 V자곡을 형성하고 산기슭에서는 대선상지군을 이루고 있다.

산체의 대부분은 백악기의 유문암, 안산암질각력암으로 되어 있고 그 남서부는 각섬석흑운모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비슬산에는 유가사, 소재사, 용연사, 용문사, 임휴사, 용천사 등의 많은 사찰이 산재해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 용연사는 경내에 보물 제539호인 석조계단이 있으며 가까이에 유명한 약수터도 있고 1986년 2월 22일에는 달성군 군립공원으로 1993년 1월 18일에는 자연휴양림으로 지정되어 관광지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앞산의 북쪽 중턱에는 장군수라는 약수터와 안일암이 있다.

2003년 12월 13일달성비슬산암괴류가 천연기념물 제435호로 지정되었는데 암괴류는 주로 각진 거력으로 이루어진 다량의 암괴가 사면의 최대경사방향 또는 골짜기를 따라 흘러내리는 듯한 상태로 샇여 형성된 지형을 말한다.

비슬산 암괴류는 중생대 백악기 화강암의 거석들로 이루어져 특이한 경관을 보이고 있는데 길이 2 Km, 폭 80 m, 두께 5 m에 달하고 암괴들의 직경이 약 1에서2 m, 사면경사 15도로 국내에 분포하는 암괴류 중 규모가 가장 커서 학술적, 자연학습적 가치가 크다.

참으로 많은 이야기와 전설 그리고 설명이 존재하는 비슬산이다.

 

비슬산 정상에서 잠시 더 기다려 보지만 짙은 안개가 벗겨질 기미가 없어 정상 주위 사진 몇장 더 남기고 다시 올랐던 등로를 되돌아 나와 청룡지맥 분기봉으로 나온다.

이정표와 돌탑이 있는 청룡지맥 분기봉을 살펴보고 이제 남쪽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등로를 따라 비슬지맥 산행이 이어가 본다.

소나무와 억새가 조화를 이룬 등로를 지나니 이정목이 서 있는 안개 낀 몽환적인 등로가 이어진다.

그곳 지나 소나무 군락지를 통과하니 벤취 2개가 반겨주고 이제 등로는 완만한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완만하게 잠시 내려가니 등로 우측에 전망바위가 있어 들려보니 참꽃 군락지 지나 비슬산자연휴양림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에 걸려있는 안개가 인상적이다.

그 비슬산 자연휴양림을 지나 대구의 달성군 유가면쪽 고층 아파트가 희미하게 눈에 들어오기도 하지만 안개가 짙어 선명하지는 못하다.

그 바위를 내려와 좌측으로 우회해 통과한 후 소나무 군락지를 타고 바위 등로를 내려가니 금새 마령재에 도착을 한다.

마령재는 경상남도 창녕군의 성산면 연당리 웃당마에서 청도군 풍각면 금곡리를 오가던 고개인데 연당리 동쪽에 소재한 고개로 신라 때 낙동강 서부의 진주와 합천 등지에서 경주로 가는 대로로써 인마의 왕래가 많았다고 한다.

지명은 말의 형세를 한 이 산의 모양에서 말안장을 얹는 말의 등 부분에 해당한 데에서 유래하며 말재 혹은 마령으로도 부른다.

지리지에서는 마현으로 수록하고 있는데 현의 북쪽 30리에 있으며 비슬산에서 이어진다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지도에서는 해동지도 이후부터 대동여지도에 이르기까지 마현으로 기재하고 있으며 지도에서 비슬산 아래 성산리에서 청도로 넘어가는 길이 그려져 있고 마현이라 기재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산행을 하는 등산객들 일부만 지나다니는 보잘 것 없는 고갯마루로 변해가고 있다.

 

마령재에서는 좌측으로 용천사를 그리고 우측으로는 유가사를 갈 수 있는 사거리 안부 이정표가 서 있다.

그 마령재를 지나 바위가 깔려있는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오르니 바위 전망대가 나타나고 그 위에 올라 지나온 등로를 살펴보니 방금 전 내려온 봉우리가 우뚝하고 앞으로 올라야 할 월광봉 지나 우측으로 참꽃 군락지 위로 대견사 가는 능선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이제 부드럽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따라 사라진 참꽃을 그리워하며 아쉬운 마음으로 참꽃 군락지를 통과한다.

 

월광봉 지나 진행해야 할 대견사 방향의 등로를 올려다 보고 잠시 더 걸어가니 등로 옆에 벤취2개가 놓여 있고 등로는 아주 부드럽게 이어지고 있다.

비슬산에서 1.34 Km 지나 왔다는 이정목을 지나 나타나는 등로 우측의 전망바위에 오르니 다시 등로 우측 저 멀리 대구시 달성군 유가면의 고층 아파트들이 박무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대구시 달성군 유가면의 면소재지는 금리이고 서부의 봉리와 금리 일대에 펼쳐진 평야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높고 험준한 산지를 이루고 있으며 동쪽에는 비슬산(1084봉)을 비롯한 1000미터 내외의 산들이 솟아 있다.

서남쪽에는 성산면과의 경계에 달창저수지가 축조되어 있으며 곳곳에 소규모의 저수지가 많고 주요농산물은 쌀, 양파, 고추, 수박 등이며 최근에는 방울토마토와 같은 원예작물재배가 활발해지고 있으며 또한 면내에 제지와 화학 등의 제조업체가 있다.

저곳에는 또한 동화사의 말사인 유가사가 있어 비슬산 산행 들머리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다시 등로 우측의 비어 있는 참꽃 군락지를 아쉬운 마음으로 바라보며 월광봉 방향으로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마음이 허전하기만 하다.

곱게 만개한 시기의 참꽃 군락지를 경험했기에 그 아픈 마음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오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천천히 오르다 문득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올랐다 내려온 비슬산 정상의 천왕봉이 안개속에 춤을 추며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이 산객의 애간장을 태우고 발걸음을 붙잡는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월광봉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리니 등로 좌측으로는 청도의 아기자기한 산들이 펼쳐져 있고 그 아래에는 하얀 안개가 드리워져 또 다른 풍경으로 다가온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일 올라야 할 청도의 화악산을 찾아 보지만 안개속에 묻혀 보이지 않고 안타까운 시간만 흐르고 있다.

그렇게 다시 진행을 하다 아쉬운 마음에 드넓게 펼쳐진 비어 있는 참꽃 군락지를 바라보니 그래도 아직 남아 있는 붉은 빛의 평원이 옛 추억을 더듬게 만든다.

 

그렇게 잠시 더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따라 진행을 하니 등로 우측으로 뚜렷한 우회 등로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월광봉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직진의 잡목이 우거진 가파른 등로를 타고 올라 본다.

잠시 등줄기에 땀방울이 맺힐쯤 소나무 두어그루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1003미터의 월광봉에 도착을 하니 등로 좌측 앞인 남쪽으로 조화봉의 인공 구조물이 바로 가깝게 다가와 있고 그 조화봉으로 오르는 다리도 지네다리를 연상시키며 옛날 그대로 놓여 있다.

 

월광봉에서 잠시 머물며 주위 풍경을 살핀 후 다시 그 1003봉을 내려오니 이곳은 아직 참꽃이 남아 산객의 마음을 달래주고 곧이어 잘 정비된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가 본다.

한참 내려가니 나무계단이 끝이나고 금새 참꽃이 지고 새잎이 피어나는 키 작은 진달래 능선이 나타나 그 등로를 따르니 등로 우측 저 앞으로 대견사 가는 방향으로 참꽃이 사라진 참꽃 군락지가 드넓게 펼쳐지고 있다.

등로 좌측의 조화봉과 우측의 참꽃 군락지를 교대로 조망하며 진행을 하니 벤취2개가 있고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는 전망대 갈림 삼거리 안부에 도착을 해 잠시 옛날 생각을 하면서 쉬어 간다.

 

이제 조화봉까지 900미터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지나 진달래 군락지를 따라 완만하게 오르니 등로에는 고무판이 깔려 있어 진행에 큰 어려움이 없다.

조금 더 오르니 참꽃을 대신하는 개꽃이 반겨주고 다시 벤취 하나를 지나 조화봉을 구경하며 오르니 등로는 나무데크로 변하고 있다.

잠시 그 나무데크를 타고 오르니 등로 우측 옆으로 예쁜 참꽃 한그루에 멋진 참꽃이 탐스럽게 피어 있어 잠시 사진에 담으며 아쉬움을 달래 본다.

 

그 참꽃을 사진에 담고 다시 나무데크 등로로 복귀해 진행하니 서서히 안개가 걷히면서 좌측의 조화봉과 우측의 참꽃 군락지가 조금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계속 이어지는 나무데크와 계단을 타고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대견사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하고 좌측 조화봉으로 곧바로 진행하지 못하고 우측 대견사를 잠시 들려 보기로 한다.

그곳 삼거리 갈림길에서 뒤돌아 보니 나무데크와 참꽃 군락지를 지나 저 멀리 우뚝 솟아 있는 월광봉과 비슬산 천왕봉은 벌써 안개속에 묻혀 안타까운 마음만 내려 놓고 출발한다.

 

우측 등로인 참꽃 군락지 제일 상단부 능선을 타고 걸어가니 바위 등로가 나타나고 그 바위 위에 올라 등로 좌측을 내려다 보니 예전에 보이지 않았던 대견사 건물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끝자락에 외롭게 서 있는 삼층석탑이 아름답게 내려다 보인다.

사진에 대견사 전경을 담고 다시 능선을 따라 대견사 방향으로 걸어가니 기바위와 참선바위를 지나 다시 나무데크를 타고 내려가 우측으로 전망대 갈림 삼거리를 지나 진행을 해 본다.

 

나무데크를 타고 걸어가니 대견봉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좌측의 대견사 방향으로 90도 꺽어 오르니 이곳 비슬산에 산재되어 있는 수많은 바위들에 붙어 있는 이름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서 있다.

그곳을 지나 다시 능선으로 올랐다 대견사 방향으로 내려가다 앞을 보니 저 멀리 삼층석탑이 외롭게 서 있다.

다시 돌 계단을 타고 대견사로 내려가니 비슬산 암괴류 안내판이 보이고 대견사 삼층석탑, 대견보궁, 대견사, 층층바위, 대견사조감도, 작은거북바위, 큰거북바위, 코끼리바위를 둘러본 후 그곳에서 지나온 방향으로 서 있는 삼층석탑을 다시 한번 사진에 담아 본다.

몇 년 전 올랐을 땐 분명 이곳 대견사가 없었는데 새로운 건물들이 생기면서 대견사의 모습이 조금씩 나타나는 것 같아 자료를 찾아 본다.

대견사의 창건자는 미상이나 신라 흥덕왕 때 창건된 사찰로서 당나라 문종이 절을 지을 곳을 찾고 있었는데 하루는 낯을 씻으려고 떠놓은 대야의 물에 아주 아름다운 경관이 나타났다.

이곳이 절을 지을 곳이라 생각한 문종은 사신을 파견하여 찾게 하였는데 결국 중국에서는 찾을 수 없게 되자 신라로 사람을 보내어 찾아낸 곳이 이 절터인데 이 터가 대국에서 보였던 절터라 하여 절을 창건한 뒤 대견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창건 이후의 역사는 거의 전래되지 않고 있지만 1416년(태종 16) 2월 29일과 1423년(세종 5) 11월 29일 이 절에 있던 장륙관음석상이 땀을 흘려 조정에까지 보고되었고 종파는 교종에 속하였다고 한다.

절의 폐사에는 빈대와 관련된 일반적인 설화가 전래되고 있으며 그 시기는 임진왜란 전후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 뒤 1900년 영친왕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하여 이재인이 중창하였으나 1908년 허물어지기 시작하여 1917년 다시 폐허화되었다.

2011년 11월 대견사 재건 공사가 착공되어 2014년 3월 적멸보궁, 요사채, 산신각, 목조와가 등 건물 4동이 완공되었는데 이로써 대견사가 폐지된 지 100여년 만에 다시 복원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신라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길이 30미터와 높이 6미터의 축대가 남아 있고 무너진 구층석탑과 거대한 석조선각불상 및 1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동굴대좌 등이 있다.

이 중 축대는 현재까지 온전히 보존되어 있으며 동굴은 참선 또는 염불도량으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도굴꾼에 의해서 무너진 구층석탑은 원래 높이 4.5미터와 기단 너비 1.2미터이었던 우수한 작품이다.

전성기에 이 절은 비슬산의 중심사찰이었다고 하는데 산 밑에 있는 소재사는 옛날 이 절의 식량이나 각종 생활용품과 의식용품 등을 공급하던 곳이었다고 하며 소재사 앞터에는 방앗간을 비롯하여 두부공장 및 기왓골 등도 있었다 한다. 현

재 이 절의 축대 밑에는 맑은 물이 솟아나는 샘터가 있으며 가뭄 때면 달성군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기우제를 지내고 있다.

이제서야 왜 이곳에 대견사가 새로 생겼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대견사를 둘러보고 나오면서 대견사 마애불도 읽은 후 다시 뒤돌아 나와 대견사 갈림 삼거리로 복귀를 한다.

이제 등로 좌측의 비슬산 천왕봉 등로를 버리고 직진의 우측 등로를 따라 조화봉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간다.

등로에는 가마니를 잘라 만든 것과 같은 볏단이 깔려있고 그 부드러운 등로를 따라 진행을 하니 이곳 등로 옆에는 아직 완전히 떨어지지 않은 참꽃이 남아 산객의 아쉬움을 달래주고 있어 저 멀리 조화봉과 함께 사진에 담아 보지만 그곳 조화봉 역시 다시 안개속에 숨어 보여주질 않는다.

 

나무계단을 타고 내려가 조금 더 걸어가니 톱날바위 200미터란 이정표를 만나고 조금 더 걸어 진행을 하니 시멘트 포장도로와 만나 그 옆에 서 있는 비슬산강우레이더관측소라는 커다란 이정석과과 만난다.

그러고 보니 저 앞에 보이는 커다란 인공구조물이 강우레이더관측소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다.

차량 차단막이 설치된 곳을 지나 조금 더 시멘트 포장도로를 오르니 비슬교라는 다리가 나타나고 그 다리 위를 걸어 완만하게 오르며 강우관측소를 다시 사진에 담아 본다.

 

그 비슬교를 따라 완만하게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는 멋진 암괴류가 보이는데 살펴보니 불꽃같기도 한데 방금 전 지나오며 만났던 이정표에 톱날바위란 단어가 생각나 살펴보니 이곳이 혹시 톱날바위는 아닐까 생각되는 바위들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이곳 바위들이 톱(칼)바위로서 자세한 설명도 함께 되어 있는데 톱(칼)바위는 너덜이 되기 직전의 모습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으며 돌 사이 틈이 벌어져 일부 바위는 낙하하고 일부 바위는 비스듬하거나 쭈뼛하게 서 있는 형상이다.

또한 톱(칼)바위가 있는 우측 반대편인 좌측을 살펴보면 지나온 등로와 그 능선에 바위 너덜구간이 군데군데 펼쳐져 있는 풍경도 눈에 들어 온다.

 

 

그렇게 비슬교를 따라 잠시 더 오르니 강우레이더관측소 정문 10여미 전방 우측으로 돌계단이 보이고 그 옆에 조화봉까지 100미터란 이정판도 서 있다.

그곳 돌 계단을 타고 올라 좌측으로 걸어 오르니 강우레이더관측소를 좌측 아래에 두고 비슬산해맞이제단이 설치되어 있고 그 넘어에 해발고도 1058미터인 조화봉 정상석이 서 있다.

정상석에서 셀카 놀이를 하면서 어렵게 사진 한장 남겨 본다.

 

그곳 비슬산 조화봉에서 잠시 망중한을 즐기며 북쪽을 살펴보니 이 산객이 새벽부터 걸어 온 비슬지맥 마루금이 한눈에 들어 오기 시작한다.

우측 저 멀리 헐티재에서 올라오는 등로를 타고 아직도 안개가 춤을 추고 있는 비슬산 정상인 천왕봉을 다녀 와 우측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유ㅓㄹ광봉을 지나면 우측으로 광활한 참꽃 군락지가 펼쳐지고 좌측 보이지 않는 대견사를 들렸다 이곳 조화봉에 올라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시간이다.

참꽃이 없는 아쉬움을 아름다운 조망이 대신해 주는 시간이기도 하다.

 

북서쪽으로는 방근 전 지나온 대견봉과 숨어 있는 대견사가 보이고 그 우측 저 멀리에 비슬산 정상인 천왕봉이 서 있는데 대견봉과 천왕봉 정상에는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는지 하얀 안개가 머물며 시시각가가 다른 풍경으로 이 산객의 마음과 발길을 붙잡고 있다.

그렇게 조화봉 정상에서 잠시 더 조망을 즐긴 후 조화봉 뒷쪽 능선으로 들어가니 전망바위가 보이고 그곳에서 이제부터 걸어가야 할 비슬지맥 마루금을 살펴본다.

989.7 암봉을 지나 우측으로 대구시와 경남도계를 이루는 933봉이 아름답고 그 좌측으로는 기차바위 능선을 따라 완만하게 이어지는 비슬지맥 ㅏ루금이 황홀하게 들어 온다.

 

다시 조화봉으로 나와 이제 등로 좌측으로 989.7 암봉으로 가는 등로를 찾아 내려가 보지만 찾지 못해 시멘트 포장도로까지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기를 두어번 한 후 어렵게 좁게 나 있는 능선진입 등로를 발견하고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능선으로 들어가 진행하니 등로 우측으로 비포장 산판도로가 내려다 보이고 저 멀리 대견봉 아래에는 아담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대견사가 빤히 건너다 보인다.

안전목책과 로프 구간을 따라 내려가며 좌측의 암봉을 우회해 더 걸어가다 뒤돌아 보니 강우레이더관측소와 조화봉 정상이 벌써 암봉 뒤 저 멀리 사라지고 있다.

 

이제 등로 우측으로 대견봉과 대견사 그리고 그 좌측 아래 유가면의 빌딩들을 살펴보며 조금은 지루한 등로를 타고 진행을 해 본다.

진달래 군락지를 지나 걸어가다 잠시 하늘이 열려 뒤돌아 보면 강우레이더 관측소와 이어진 등로가 아름답게 멀어지고 다시 잡목속으로 들어가 걷기를 반복하는 시간의 연속이다.

로프 암벽 구간도 지나고 안전목책과 로프를 지나니 등로 우측으로 따라오는 비포장 산판도로가 바로 옆으로 다가왔다가 멀어지고 있다.

짧은 암릉구간을 지나 조금 더 진행을 하니 969 암봉이 바로 눈앞으로 다가와 있다.

 

개꽃인 철쭉꽃이 바위틈에 피어 있는 969암봉을 타고 조심스럽게 오르니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고 잠시 뒤돌아 보니 등로 좌측으로 마루금을 따라오던 비포장 산판도로와 주능선 그리고 저 멀리 지나온 강우레이더 관측소와 조화봉 정상이 환상의 모습으로 이 산객의 가슴에 남겨진다.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을 멋진 풍경이기에 잠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쉬어간다.

 

969암봉을 지나 다시 능선으로 들어가니 눈 앞에 다시 큰 바위들이 길을 막고 그 바위들을 우회해 진행하니 조화봉과 군불로 이정표를 지나 등로 우측으로 따라오던 비포장 임도로 진행 후 능선으로 올라오는 좁은 등로가 보인다.

다시 연두빛 산하가 시작되는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따라 오르니 또 다시 조화봉과 군불로 이정표를 지나 멋진 989.7봉 직전 암봉에 올라 잠시 망중한을 즐기며 뒤돌아 보니 이제 조화봉에서 지나온 부드러운 마루금과 조화봉 그리고 좌측으로 대견봉으로 이어지는 비슬지맥 마루금이 너무나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 989.7봉 암봉을 넘어 진행하려고 올라보지만 너무나 위험하고 힘이 들것 같아 포기하고 우회 등로를 찾아 보니 암봉 우측 아래에 희미하게 우회 등로가 보이고 그 등로를 따라 989.7봉 암봉을 좌측에 두고 우회해 본다.

잠시 우회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짧은 바위 너덜길도 만나고 다시 잡목이 우거진 희미한 등로를 따라 어렵게 그 989.7봉 암봉을 통과해 본다.

 

989.7봉을 우측으로 우회하며 바라보니 등로 우측 아래에는 유가면 용리쪽 비슬산자연휴양림이 내려다 보이고 그 주위에 산재한 올망졸망한 산들이 산재해 있다.

그렇게 989.7봉을 완전히 우회해 정상 등로를 찾아 내려가니 바위들이 보이고 그 바위 아로 아래에 기차바위란 이정판이 보인다.

그 바위 암릉을 타고 내려가 잠시 휴식을 취하며 셀카놀이를 하면서 사진 한장 남겨 본다.

기차바위 정상부에 989.7봉이 우뚝하고 그 우측으로 조화봉으로 이어지는 비슬지맥 마루금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그렇게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청도의 나즈막한 산줄기들이 내려다 보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청도의 화악산을 찾아 보지만 박무로 인해 아직은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잠시 더 내려가니 추락주의 경고판이 보이고 잠시 후 바위 옆에 곱게 피어난 철쭉꽃 넘어 조화봉에서 989.7봉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이 너무나 아름다워 개꽃과 함께 추억 한장 더 남겨 본다.

 

그 기차바위를 지나 내려가니 다시 소나무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고 잠시 활엽수 구간을 지나 또 다른 바위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바위를 타고 천천히 걸어가니 비슬산 등산로 안내판이 보이고 큰 바위들을 타고 내려가니 오페라바위라는 이정판이 소나무 가지에 걸려 있다.

살펴보니 바위가 마치 호주의 오페라하우스를 닮은듯 서 있어 참으로 자연의 오묘한 맛을 느끼며 사진에 담아 보는데 지금 다시 봐도 여전히 오페라 하우스를 닮은듯 다가와 신기하기까지 하다.

 

오페라바위를 지나 등로 좌측을 바라보니 다시 조화봉에서 989.7봉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비슬지맥 마루금이 올려다 보이고 그 능선 위에는 제법 넓고 긴 바위 너덜지대가 보이기도 하다.

또 다른 비슬산 등산로 이정판을 지나 바위를 통과하고 소나무 군락지를 내려가니 보림사와 상수월마을 정상가는 이정표가 서 있고 그곳에서 물 한모금 마신 후 출발을 해 본다.

 

보림사 갈림길을 지나 진행을 하니 등로는 아주 부드럽게 이어지고 잠시 후 상수월마을 정상 이정판을 지나 또 다른 보림사 갈림 삼거리 이정표를 만난다.

멋진 소나무 군락지를 지나 활엽수 사이에 홀로 서 있는 소나무 봉을 넘으니 상수월마을 정상과 보림사 갈림 이정표가 다시 나타나고 상수월마을을 소개합니다란 이정판도 보인다.

그 이정표와 이정판을 지나 내려가니 녹음이 우거지는 등로를 통과하고 곧이어 고운 철쭉꽃들이 만발한 개꽃 등로가 열려 있다.

 

잠시 철쭉꽃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등로에는 밭을 일구듯 갈아 놓은 멧돼지들의 식흔이 어지럽게 널려있고 곧이어 바위와 평이한 등로가 이어진다.

소나무와 관목들이 어우러진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묘지 하나를 지나 시멘트 포장 임도로 내려선다.

그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좌측으로 걸어 내려가니 다시 삼거리 갈림 삼거리가 보인다.

그 갈림삼거리에서 우측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가니 잠시 후 마루금은 직진의 임도를 버리고 좌측의 능선으로 이어지고 있다.

 

비포장 임도같은 소나무 등로를 타고 능선으로 들어가니 다시 키 큰 소나무 군락지 밑에 자라고 있는 키 작은 활엽수가 조화를 이루는 등로를 따라 조금은 여유를 찾아 본다.

다시 나타나는 소나무 군락지를 지나니 또 다른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타나는데 살펴보니 이 도로는 방금 전 지나온 시멘트 포장도로의 연장선인듯 보인다.

그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좌측으로 진행을 하니 마루금은 고갯마루에서 좌측 능선으로 이어지는데 그 고갯마루에서 조금 더 걸어가니 넓은 공터 옆에 원명마을 이정석과 소나무에 원명고개 427미터란 준.희님의 이정판이 걸려있다.

이곳 원명고개 또는 원명재는 바로 아래에 있는 호산리의 원명마을에서 얻은 고개이름이 아닐까 생각되는 고갯마루 이름이다.

화산리는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에 속하는 법정리로서 비슬산 아래 첫 동네인 원명과 동원 맟 서원을 합하여 만들어진 동네이다.

화산리의 명칭 유래는 마을 앞산의 이름이 꽃밭등이라서 화산이라고 하는데 밀주지에는 동원과 서원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고 원시만 보이는데 서원은 청도군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서원이라 불리고 원명은 우멍이 또는 움미라 불리는데  세월의 흐름에 따라 원명으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원산리 마을의 형성 및 변천은 본래 풍각현의 지역으로 고려 때에는 밀양 도호부에 속해 있었고 조선 시대에는 대구부에 속했으며 1895(고종 32)에 청도군 이동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동원동, 서원동, 원명동을 병합하여 화산동이라 하고 풍각면에 편입되었고 1988년 화산동에서 화산리로 이름을 바뀌었다.

마을의 자연 환경은 청도군에서 서쪽으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며 비슬산 조화봉에서 금곡으로 내려오는 등성이 첫머리에 있는 마을로 계곡 2개를 끼고 위치하는 화산리는 위쪽이 동쪽이고 아래쪽이 서쪽이어서 마을 이름도 동원과 서원으로 불리고 있다

용각산계에서 비슬산으로 이어지는 태산준령들 사이로 송서에서 부터 서쪽으로 이르는 골 안으로 형성된 마지막 골짜기이며 계곡을 따라 금곡리와 안산리 쪽만 열려 있고 경작지는 거의 없으며 밭 경작과 함께 산채 나물과 약초 및 자연산 송이 등을 채취한다.

 

그 원명마을 이정석이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에서 진행방향으로 좌측 비포장 임도를 따르니 금새 좌측 능선으로 마루금이 이어지고 있다.

다시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따라 잡목을 헤치고 오르니 둥글레가 자라고 있는 묘지 1기를 지나 바위에 둘러 쌓인 나무가 자라는 장소를 통과해 오르니 금새 535.8봉의 삼각점이 나타난다.

사진 한장 남기고 주위 조망이 없기에 다시 곧바로 그 535.8봉을 출발한다.

 

535.8봉 삼각점을 지나 진행을 하니 다시 잡목 구간이 나타나고 별 특징 없는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해 걸어 본다.

다시 소나무 군락지를 지나 활엽수 군락지를 통과하니 바위 무명봉도 지난다.

그 봉우리를 지나 소나무와 잡목이 어우러진 등로를 따르니 또 다른 바위 무명봉을 지나 최근에 설치된 듯한 송전탑도 지난다.

그 송전탑을 지나 잡목이 우거지는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금새 611.3봉인 마령산 정상석과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에 도착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봉우리 같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마령산이란 정상석을 지나 소나무 군락지를 따라 완만하게 내려가니 금새 가파른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더니 등로는 소나무에서 키 작은 활엽수 등로로 바뀌고 있다.

잠시 더 내려가니 등로 옆에 커다란 암봉이 나타나고 그 암봉을 우회해 통과하니 진행 방향으로 두개의 송전탑이 서 있고 그 송전탑 위를 연결하는 수많은 전선들이 부자유스럽게 능선을 따라 비슬지맥 마루금과 함께한다.

묘지들을 지나 다시 새롭게 설치되고 있는 송전탑을 통과하고 잠시 더 내려가니 비포장 갈림 사거리인 마령치에 도착을 한다.

마령치는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금곡리에서 경상남도 창녕군 성산면 연당리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명칭 유래는 청도군에서 창녕군으로 가는 다섯 개의 주요 고개인 버티재, 마령치, 배고개, 통짐이 고개, 매봉재 중 하나이다.

명칭에 대한 정확한 유래는 전해지지 않지만 마치, 말치, 마령, 마령치, 마랑재 등의 이름으로 불렸는데 주변 마령재에서 금곡리로 이어지는 골짜기 이름이 말치골로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말과 관련이 있는 지명으로 추정된다.

오산지(1673)에서는 비판산(비슬산)의 지맥이 남쪽으로 가서 마치협을 지난 뒤 굽이쳐 갑을령이 됐다가는 동쪽으로 굽는다라고 기록했는데 여기서 마치협은 마령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마령치의 자연 환경은 불똥갓산(611.6봉)과 남쪽의 수봉산(592.6봉) 사이에 있는 고도 400미터의 고개로서 소나무 군락이 압도하고 있으며 봄이면 진달래와 철쭉 등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주변에 미티재와 방골재, 퉁점이재, 배고개 등이 위치하며 서쪽은 창녕군 대합면과 성산면 및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유가면과 구지면 및 현풍면 등 달성 남부권이 분포하고 동쪽으로는 풍각을 시작으로 청도의 넓은 땅이 위치한다.
송서리에서 청도천의 지류인 풍각천을 거슬러 올라 봉기리를 지나 금곡리 입구에 이르면 마령치를 넘게 되는데 청도와 창녕을 잇는 다섯 개의 고개가 있었지만 마령치는 그 중 가장 많은 통행량을 자랑하였다고 한다.

마령치의 동쪽에 위치한 청도의 풍각면은 일찍이 고추와 땅콩이 유명하고 송서리는 큰 규모의 우시장으로 알려져 있어 풍각 시장에서 구입한 소와 작물들은 금곡리를 지나 마령치를 넘었다고 한다.

이를 반영하듯 금곡리에는 과거 주막이 성행했다고 전해지며 주막을 이용한 소장수들은 여러 개 박아둔 말뚝에 소를 매어 놓고는 주막에서 숙식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일제 강점기 이전까지 오가는 사람들로 번잡했던 마령치가 인적이 드문 곳으로 바뀐 것은 아래 비티재를 따라서 신작로가 생기하면서부터이다.

비티재는 청도군 풍각면과 창녕군 성산리를 연결하는 국도 20호선이 지나는 고개로서 이 길을 따라 일제 강점기 때 자동차가 오갈 수 있는 신작로가 생기고 버스가 다니기 시작하면서 마령치에는 인적이 드물게 되고 비티재의 통행량이 높아졌다.

6·25 전쟁 기간에 남북 방향의 낙동강 물길을 지키던 미군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1950년 9월 창녕과 달성 쪽의 수많은 피란민들이 마령치를 넘어서 청도 풍각천과 청도천 등에 움막을 치고 전쟁 기간 동안 버텼다.

당시 패배했던 미군 부대가 자동차로 비티재를 넘어 온 후 마령치 초입과 금곡리 입구 마을 숲에 진을 치고 전선을 지켰다고 전해지는데 당시를 기억하던 마을 주민들은 줄줄이 비티재를 넘어 오던 미군의 자동차 행렬과 마령치를 넘어 오는 피난민들의 행렬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2013년 현재 마령치는 더 이상 행인들이 오가는 도로로 남아 있지 않으며 산을 찾는 등산객들이 이용하는 등산로 역할을 한다.

과거 마령치가 담당했던 역할을 비치재가 대신하고 있으며 통행량의 증가로 인하여 비치재 또한 도로 확장을 위한 공사가 시행되고 있다.

 

 

비포장 임도인 마령치를 건너 다시 반대편 능선으로 오르며 뜨거워지는 지열을 느끼기 시작한다.

잠시 그늘진 활엽수 등로를 따르니 또 다른 새로 세워진 듯한 송전탑이 등로 우측에 보여 어딘지 이상하게 생각이 들기 시작하고 잠시 고민하며 생각해 보니 이곳이 밀양과 가까운 곳으로 밀양은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으로 한동안 작은 대한민국을 사회 이슈화 했던 곳임을 상기시켜 본다.

그 밀양의 송전탑과 이어지는 송전탑들이 밀양과 가까운 청도와 창녕땅에도 건설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며 모두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길을 함께 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보는 시간이다.

등로가 사라지는 송전탑 건설 현장을 지나 또 다시 나타나는 송전탑을 통과하니 금새 556.2봉 이정판이 보인다.

그 556.2봉 우측에는 바위 전망대가 있어 잠시 올라 주위 풍경과 조망을 즐긴 후 진행하기로 한다.

 

556.2봉 이정판 우측의 전망바위로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연당리 넘어 지맥 산행을 하면서 한동안 보였던 435.8봉인 연화봉이 우뚝하고 그 우측으로 방금 전 이 산객이 어렵게 진행해 온 비슬지맥의 611.3봉이 머리 위에 송전탑의 전선을 이고 아련히 서 있다.

그 611.3봉 넘어 저 멀리에는 비슬산 조화봉이 하늘 높이 올려다 보이고 그 우측 능선으로 오늘 산행 들머리인 헐티재로 이어지는 마루금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다시 비슬지맥 마루금의 611.3봉과 좌측의 연화봉 사이에 있는 연당리를 살펴 본다.

창년군 성산면 연당리의 연당은 연꽃이 핀 연못이니 연내골이라 속칭되는 연당리 일대가 불교와 인연 깊은 곳임을 확연하게 보여준다 할 것인데 연당은 부처님이 계신 곳인 연좌와 불좌를 가르킴이니 연화대가 있는 곳은 곧 불교의 성지라 하는 뜻과 같다 하겠다.

이 근처에 있었던 사찰의 이름은 연화사로 연꽃이 있는 곳은 바로 연못이므로 연당이라는 지명이 불리게 되었다고 할것으로 이 지역 넓게 연꽃과 연관을 맺어 앞 봉우리는 연화봉이라 부르고 산 아래의 들판과 마을은 연평이라 부른다.

연화봉의 봉우리는 연꽃 모양이라 하여 부처님께서 계셨던 곳처럼 산을 바라보는 것이라 할 수 있고 연당을 조선 초기에는 연화라고 불리었으며 연화가 그 후 연당으로 바뀌었는데 연당의 본동은 연화사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연화라 불리었는데 지금은 산아래 평지의 연화와 구분키 위해 이 옛마을을 구연화라 부른다.

창녕군 리 명칭 및 구역획정에 관한 조례를 보면 연당1구와 연화리로 지번이 나왔는데 합하여 졌으며 행정리는 2개리로 연당, 연화가 있다.

연당은 연당리의 북부에 있는 행정리의 마을 이름으로 마령치 서쪽 아래에 있는데 성곡국민학교가 있는 한정지의 동쪽 대산천의 가에 있는데 이 일대가 부처님이 계신 곳은 연화이고 그 아래이니 이곳은 대좌인 연화대라 하고 연화대는 낮은 골짜기 일대이라고 한다.

 따라서 바로 그 연못이란 뜻으로 연당이라 하였으나 사실은 이 마을에 신을 모시는 당집이 많이 있었으며 무당이 많았던 동네였으므로 당집이 있는 마을이라 연당이라 한 것이 변한 듯 하다고 한다.

 연당 마을 안에 여러 뜸이 있는데 아랫당, 윗당, 뒷당, 굽마 등이 있으며 경주 이씨가 많이 살고 있는데 과거에는 80여호가 되었으나 지금은 43호이며 파평 윤씨와 경주 이씨 등이 살고 있다.

마을 뒤에는 연화봉이란 산이 있는데 산이 연꽃 형국이라 하여 연화봉이라 하였는데 연당리의 서쪽에 높이 430미터의 산으로 봉우리가 동서로 두개가 있다.

남쪽 산자락에 연밥에 해당되는 곳이 명당이라 소문나 여러 문중에서 묘를 들이었으나 아직 그 명당은 찾지 못했다고 전하며 산의 서남쪽 줄기는 제비가 나는 형국이라 하여 연봉 또는 연비산이라 하고 서쪽 봉우리는 웃줄기 또는 매방산, 방응산, 응방산이라 하며 남쪽 300미터의 봉우리는 남방을 가린다하여 가림산, 가남산이라 부른다.

또 북쪽 줄기는 홰학골산이라 부르는데 이렇게 산 하나를 놓고 여러 이름이 산줄기마다 생긴 것은 마을과 문중에서 묘를 들이고 그곳의 지형에 따라 작명하여 불렀기 때문이다.

 

그렇게 556.2봉 옆 전망바위에서 주위 풍경과 조망을 즐긴 후 내려 와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잡목 오르막 구간을 오르니 금새 해발고도 593미터인 수복산 일명 수봉산 정상석에 도착을 해 다시 주위 풍경을 즐겨 본다.

수복산 일명 수봉산은 마령재 남쪽으로 경남과 경북의 경계지점에 솟아 있는 해발고도 592.5미터의 산으로 서쪽 산아래에 연내각씨묘, 연화사, 구연화등이 있는데 수봉이란 뜻은 으뜸되는 봉우리란 뜻이니 마령이 마리재로 머리란 뜻과 서로 같은 이름이라 하겠다.

홀로 셀카놀이를 하면서 배낭 위에 카메라를 올려 놓고 사진을 찍다 보니 배낭 커버도 담겨있다.

 

수복산 일명 수봉산을 지나 진행하니 의자바위가 보이고 평이한 등로를 따라 걸어가면 가끔 바위가 나타나더니 완만한 내리막 등로에서 제법 큰 소나무 군락지를 만난다.

한동안 그 소나무 군락지를 따라 내려가니 바로 눈 앞에 비티재 20번 지방도로가 내려다 보이고 그 도로 건너 저편에는 비슬지맥 마루금 좌측의 아름다운 능선이 펼쳐져 있다.

조심해 내려가니 도로 건너에는 2개의 휴게소가 있고 그중 한곳으로 들어가 가락국수 한그릇 먹으며 잠시 쉬어간다.

시간을 보니 이제 오후 1시 20여분을 지나고 있어 오늘 어디까지 진행을 하는 것이 좋을지 구간 나누기가 고민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곳 비티재는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에서 경상남도 창녕군 성산면으로 넘어가는 20번 2차선 지방도로가 지나는 고개로서 청도군의 서쪽 경계선이다.

주변 마령치와 방골재에 비해 이용 빈도가 낮았지만 일제 강점기 때 신작로 개설과 더불어 청도군과 창녕군을 잇는 주요 도로가 되었고 국도 20호선이 지난다.

명칭유래로 비티재는 비치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비슬산맥에 연결되는 수봉산 자락의 고개라는 의미로서 정확한 명칭 유래는 알 수 없으며 다만 한자로 비슬산의 비파 비를 사용하여 비티재 또는 비치재로 불린다.

이곳 비티재의 자연환경은 수봉산(507봉)과 묘봉산(512.6봉) 사이 수봉산의 동남쪽 줄기를 지나는 해발 고도 278미터의 고개로서 남쪽으로 덕시골이 위치하며 주변에는 참나무와 소나무가 군락을 이룬다.

북동쪽으로 풍각면 금곡리를 지나며 남서쪽으로 경상남도 창녕군 운봉천 골 안과 연결되는데 청도군 쪽은 풍각천을 건너 풍각면으로 연결되지만 창녕군 쪽은 운봉천 골 안 동네 방리에서 둘로 갈려 우측은 마령재와 좌측은 방골재가 지난다.

수봉산 동남쪽 끝자락을 휘감아 돌며 넘어가는 고개로서 직선로인 북쪽 마령치와 남쪽 방골재에 비해서 그 거리가 멀다.
도보로 고개를 오가던 시절 금곡리 사람들은 마령치를 방골 사람들은 방골재를 통해서 창녕읍과 풍각면을 오갔지만 일제 강점기 때 신작로가 개설되고 6·25 전쟁 당시 탱크와 군용 차량이 지나기 위한 신작로 확장이 이루어지면서 청도군과 창녕군을 잇는 주요 고개가 되었다.

2012년 현재는 청도와 창녕을 연결하는 국도 20호선 왕복 2차선 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비티재 정상 창녕군 방면 왼쪽에는 비티재 쉼터가 조성되어 있고 비티재 쉼터 내에는 청도군 풍각면을 상징하는 석조 조형물과 함께 벤치가 조성되어 있다.

석조 조형물은 1998년 2월 조성되었으며 크기는 높이 4.3미터이고 너비 6.4미터의 석조물로 전면에는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이라 각석되어 있다.

우측으로 간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휴게소도 운영되고 있고 창녕군에서 청도군 풍각면으로 오가는 유일한 길이지만 고개가 험하고 길이 구불구불하여 적은 눈에도 교통이 통제되는 구간이기도 하다.

 

 

배부르게 맛난 잔치국수 한그릇을 먹고 다시 지열이 올라오는 20번 도로를 타고 좌측 고갯마루로 올라 도로 옆 시멘트 포장 임도를 따른다.

휴게소 안주인이 준 잔치국수 한그릇의 양이 많아 놀랍기만 했는데 많은 산객이 찾아 쉬었다 가는지 산객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듯 하였으며 국수를 먹는 동안 휴대폰도 충전까지 마치니 일석이조를 얻고 출발하는 시간이다.

시멘트 포장임도를 따라 벌써 이마에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오르니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비포장 임도로 변하고 잠시 부드럽게 천천히 걸어 본다.

잠시 걸어 오르니 비포장 임도 좌측 아래에도 또 다른 비포장 임도가 지나는데 살펴보니 최근에 설치된 송전탑 건설을 위해 개설된 임도처럼 보인다.

이제 비포장 임도를 우측으로 보내고 직진의 좌측 능선으로 들어가니 등로는 간벌된 나무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어 진행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 진행하니 봉우리 같지 않은 평이한 등로에 삼각점 하나가 박혀있어 사진에 담고 지도를 살펴보니 277.8봉으로 보이는 삼각점이다.

 

그 삼각점을 지나 계솟 이어지는 간벌된 등로를 따르니 등로 우측에 송전탑이 보이고 다시 간벌된 등로를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본다.

오후 1시를 넘겨 2시가 되어가니 한여름 날씨처럼 무더위로 인해 산행에 어려움을 느끼는 시간인데 더욱이 잔치국수 한그릇 먹고 진행하는 시간은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이다.

그 간벌 지역을 타고 한동안 진행하니 드디어 파란 등로가 나타나고 또 다른 2번 송전탑을 지나 소나무 군락지를 통해 잠시 걸어가니 등로 우측 저 멀리 거대한 변전소가 있는 거대한 장소가 나타난다.

그 변전소를 지나 조금 더 좌측을 살펴보니 청도 풍각면 안산리의 안태지가 아름답게 내려다 보이는데 그 안태지 지나 저 멀리에는 왕령지맥 마루금도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다시 잘 발달된 소나무 등로를 타고 무심으로 걸어가니 무더운 날씨에 온 몸에선 굵은 땀방울이 흘러 등로를 적시고 있다.

그렇게 평이하게 잠시 더 걸어가니 봉우리 같지 않은 등로 좌측에 342.4봉의 삼각점이 보이는데 삼각점 안내판에는 이곳이 해발고도 341미터라 되어 있다.

또한 서래야 박건석님은 이곳을 안산봉이라 이름을 붙여 놨는데 그 어디에서도 안산봉이란 이름을 찾지 못해 맞기만 바랄 뿐이다.

 

안산봉이라 적혀있는 342.4봉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등로 우측으로 민둥의 352봉이 보이고 송전탑 하나가 보여 잠시 들려보니 송전탑 지나 저 멀리 이제부터 진행해야 할 비슬지맥의 멋진 마루금이 빼꼼히 보인다.

그 민둥의 352봉을 나와 다시 흐릿한 소나무 군락지의 등로를 찾아 어렵게 진행을 하니 다시 소나무와 키 작은 활엽수가 공존하는 마루금이 나타나고 힘들게 굵은 땀방울 흘리다 보니 금새 해발고도 514미터인 묘봉산 정상에 도착을 한다.

묘봉산(514봉)은 모분재 또는 묘봉재라고도 하는데 덕곡의 북쪽에 있는 산으로 후면(뷱)이 경북 청도군 풍각면 월봉리인데 이 산 이름을 딴 묘봉이라는 동리가 밀양쪽 산자락에 있다.

퉁점이에서 경북 청도군 풍각면 월봉리 묘봉으로 가는 고개이므로 묘봉재라 하는데 모분재로 와전되었고 고개길은 묘봉산의 정상 동편에 있다.

 

묘봉산을 지나 완만하게 내려가니 다시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오르고 금새 500.3봉 정상에 도착을 한다.

정상에는 역시 준.희님이 붙여 놓은 500.3봉 이정판이 반겨주는데 산을 좋아하는 산객으로서 감사한 마음과 함께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분이시다.

봉우리로 오르면 잠시 불어오는 산바람에 흐르던 땀방울을 말릴 수 있어 조금은 살 맛 나는 시간을 만끽도 해 본다.

그 이정판 밑에 박혀 있는 삼각점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모가 되어 있다.

 

500.3봉을 지나 완만하게 내려갔다 다시 오르니 큰 거목을 지나 나즈막한 안부를 통과하고 다시 그림같은 활엽수 능선 등로를 따른다.

그렇게 잠시 그림같은 등로를 따르니 몇개의 바위들이 등로를 가로막고 등로 우측으로는 간벌된 소나무들이 나뒹굴고 있다.

다시 잠시 간벌된 등로를 지나 소나무 군락지를 따르고 거목 한그루가 서 있는 안부를 지나 오르니 활엽수 등로가 펼쳐진다.

그 활엽수 등로를 따라 커다란 활엽수가 서 있는 아무 표식도 없는 398.9봉을 지나니 다시 소나무 군락지를 통과하면 청도 453이란 삼각점이 있는 364.4봉에 도착을 한다.

 

다시 나타나는 그림같은 소나무 등로를 타고 한동안 무심으로 걸어 보는 시간은 참으로 힐링되는 시간이다.

그저 세상사 모두 잊고 이 시간처럼 몸은 피곤해도 정신적으로 너무나 맑게 다가오는 시간이 그리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가끔씩 등로 우측으로 왕령지맥 마루금도 웅장하게 올려다 보이는 등로를 따르니 등로는 여전히 멋진 소나무 등로가 이어진다.

한동안 그렇게 진행하다 보니 갑자기 소나무가 사라지고 저 멀리 민둥의 등로를 지나 비포장 임도가 보이고 곧이어 등로 우측 앞으로 거대한 송전탑이 서 있다.

등로 우측으로는 창녕군 성산면 가복리로 알고 있는데 가복리에는 광산마을이 없는데 현지에는 광산마을이 있어 헷깔리게 만든다.

아무튼 이곳 광산재 또는 광산고개는 등로 우측의 가복리에 있는 광산마을이 있어 붙여진 고개 이름처럼 보인다.

 

광산재 임도를 지나 능선으로 오르니 처음에는 완만하게 이어지던 오르막 등로가 서서히 가파라지기 시작하고 다시 많은 땀방울을 흘리고 긴 한숨을 몰아쉬니 등로가 부드러워지면서 큰 활엽수 나무에 열왕지맥과 화왕지맥분기점이란 안내판이 반겨 준다.

열왕지맥은 낙동정맥에서 분기한 비슬지맥이 천왕산에 이르러 남으로 열왕지맥과 왕령지맥을 분기하고 계속 동쪽으로 나아간다.

열왕지맥은 화왕산이 있는 화왕지맥을 분기하고 창녕과 밀양의 경계를 이루며 남으로 내려가서 창녕군 부곡면 학포리 학포양수장에서 낙동강을 만나 사라지는 32 Km의 산줄기이며 열왕산, 영취산, 종암산, 덕암산, 처녀봉과 비룡산을 지난다.  

열왕지맥은 동쪽에 흐르는 청도천 그리고 서쪽에 흐르는 토평천과 계성천의 분수령이 된다.

비슬지맥 천왕산에서 분기하여 669.2봉에서 남쪽으로 열왕지맥이 흐르고 서쪽으로 화왕지맥이 이어지는데 서쪽에서 시작한 화왕지맥은 화왕산에서 남쪽으로 꺾어 내려가다 구현산을 넘어 남서쪽으로 뻗는다.

큰갓길산에서 다시 남쪽으로 뻗어 함안군 대산면과 의령군 지정면 그리고 창녕군 남지읍의 경계인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합수점에서 끝을 맺는 산줄기다.
이 합수점에서 화왕지맥 건너편에는 낙남지맥의 광려산에서 뻗어 내려오는 화개지맥이 마주하고 있고 우측으로는 남덕유산에서 시작하여 진양호에서 막을 내리는 진양기맥의 한우산에서 분기되어 나오는 우봉지맥이 합수점의 기강 나루터에서 끝난다.
화왕지맥과 화개지맥 그리고 우봉지맥이 함안군과 의령군 그리고 창령군의 경계에서 서로 마주하면서 끝을 맺고 있다.

지나는 주요산은 천왕산. 열왕산. 관룡산. 화왕산. 구현산 그리고 큰갓길산을 지나며 도상거리 42.7 km산줄기다왕령지맥은 낙동정맥에서 분기한 비슬지맥이 비슬산을 넘어 내려오다가 천왕산에서 남쪽으로 열왕지맥을 나누고 열왕지맥은 남진하면서 서쪽으로 낙동강을 향해 두 가닥의 산줄기를 다시 나누는데 토평천을 사이에 두고 위쪽은 왕령지맥이고 남쪽이 화왕지맥이다.  

왕령지맥은 아래로 토평천이 위로는 차천을 낙동강으로 흘려보내며 서진하다가 창녕군 대합면의 태백산(284봉)에서 아래 위로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위로 가는 산줄기는 대니산을 지나 달성군 구지면 도동마을로 내려가고 아래로 가는 산줄기는 코장산을 지나 창녕군 이방면 성산리 소바위로 떨어진다. 

태백산 이후 북서쪽 차천의 하구인 도동마을은 16 Km 남서쪽 토평천의 하구인 소바위는 22 Km로 남쪽 산줄기가 6 Km 더 길다.

신산경표에서는 위쪽 도동마을로 가는 산줄기를 주맥으로 보았는데 강도 아닌 천의 하구를 논하기도 그렇고 여느 지맥 처럼 낙동강 건너편에 마주보는 지맥의 끝도 없어 어느 쪽을 우선하기가 애매하다.

그래봐야 어디로 가든 40 Km도 안되는 산줄기이니 둘 다 밟아보고 나름대로 택할 일이다.

이곳에서 분기되는 3지맥 모두를 밟아 볼 수 있는 기회가 올지 모르겠지만 그런 시간이 되어 오늘 이시간을 다시 한번 추억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열왕지맥과 화앙지맥 그리고 왕령지맥의 3지맥이 분기하는 분기봉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천왕산이 비슬지맥 좌측으로 약간 떨어져 있기에 그곳을 잠시 들려 확인하고 출발하기로 한다.

제법 넓은 공터같은 곳에 잡목과 잡풀이 무성한 한가운데에 커다란 정상석이 서 있고 남서쪽으로 약간의 조망이 열려있는 정상부이다.

해발고도 619.2봉의 천왕산은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 옥산리와 풍각면 월봉리 및 경상남도 밀양시 청도읍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낙동 정맥 사룡산에서 비슬산을 지나 밀양 종남산 오우진 나루까지 146 Km에 이르는 비슬 지맥의 봉우리이다.

서쪽의 묘봉산과 동쪽의 배바위산으로 이어지는 비슬 지맥에서 약간 벗어나 있지만 경상남도 창녕군의 화왕산과 관룡산 조망이 일품인 산이다.

동쪽으로 배바위산, 화악산(932봉), 철마산(634봉)으로 연결되며 서쪽으로 능선을 따라 묘봉산, 수봉산, 비슬산(1083봉)으로 연결되며 북쪽으로는 족금당(551봉)을 지나 청도천 방향으로 산지가 낮아지며 남쪽으로는 창녕군의 산지로 연결된다.

천왕산 일대의 지질은 중생대 백악기에 관입과 암상 접촉으로 인해 주산 안산암질암이 이루어진 후 정상부에 함각력 안산암이 관입하였고 천왕산과 동쪽 능선에 있는 배바위산, 북쪽 능선의 족금당은 주산 안산암질암이 분포하고 600미터 내외의 산지를 이룬다.

천왕산의 북쪽에는 천왕산 동쪽 사면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부곡천으로 유입되며 서쪽 사면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풍각천으로 유입된다.

부곡천이 청도천으로 유입되는 지점에는 제4기에 충적층이 퇴적되어 넓은 범람원을 형성하였으며 대표적인 송서들이 나타난다.
천왕산의 북동쪽을 흐르는 부곡천 유로를 따라 각남면 사리와 청도읍 상리를 연결하는 지방도 902호선이 밤티재를 넘어 지나며 북서쪽에는 풍각천의 유로를 따라 풍각면 안산리와 창녕군 성산면 방리를 연결하는 국도 20호선이 비티재를 넘어 지나간다.

천왕산 북쪽 산록에 신라 때 창건된 대산사가 있으며 산행 코스는 북동쪽의 풍각면 덕양리(가양)에서 임도를 따라 대산사까지 가거나 각남면 상옥산에서 대산사에 오른 후 족금당에서 천왕산을 거쳐 배바위산으로 산행을 이어갈 수도 있다.

그 천왕산 정상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셀카 놀이를 마치고 다시 3지맥 분기봉으로 뒤돌아 내려온다.

 

삼지맥 분기봉에서 우측의 지맥 등로를 바라보고 다음을 기약한 후 이제 좌측의 비슬지맥 마루금을 따라 평이하게 걸어 본다.

활엽수가 자리하고 있는 평이한 등로를 타고 무심으로 진행하니 큰 고도차이도 없이 룰루랄라 걸어가는 시간이다.

그렇게 한동안 진행하니 등로 우측으로 큰 바위가 보이는데 살펴보니 정상부에 오묘하게 생간 형상이기에 무슨 바위일까 궁금했는데 바로 앞에 해발고도 607미터의 배바위산이란 이정판이 붙어 있어 이제서야 배를 맬 수 있는 형태의 바위였던가 생각을 해 본다.

 

봉우리같지도 않은 평이한 등로 위에 있던 배바위산을 지나 다시 평이한 등로를 따르니 등로 자체는 참으로 아름답다.

큰 거목들이 등로 주위에 듬성듬성 서 있고 그 바닥에는 키 작은 갈비풀들이 막 새로운 잎을 피우며 푸르게 채색하고 있다.

거칠것 없이 뚜렷한 등로를 따라 조금은 빠르게 전진하니 등로 우측에 송전탑 하나가 보이고 그곳으로 가 보니 남쪽으로 밀양시 청도면 마을이 바로 앞에 펼쳐져 있고 송전탑 지나 우측 저 멀리 열왕지맥 마루금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그 송전탑 조망처를 지나 진행하니 여전히 마루금은 부드럽게 이어지고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다시 철쭉꽃이 피어있고 그곳에서 등로는 완만한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는데 곧이어 다시 평이한 등로로 이어진다.

그 평이한 등로를 따르니 잠시 잡목과 잡풀이 등로를 막고 저항하지만 견딜만 하고 그곳을 빠져 나가니 작은 공터를 지나 이제부터 넓은 비포장 임도로 이어져 산행에는 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산행 막바지에 참으로 부드럽고 좋은 비포장 등로를 만나 아주 편안하게 진행하는 마루금 잇기 산행이 되었다.

 

이제부터 비포장 임도를 따라 걸어가니 임도 좌우측으로 562봉과 514봉이 있다고 지도에 표기가 되어 있지만 큰 의미가 없기에 그냥 이어지고 있는 비포장 임도를 타고 조금은 빠르게 걸어 본다.

그렇게 한동안 걸어가니 고도차이도 크게 느끼지 못할만큼 진행되고 아주 빠르게 전진하니 비포장 임도가 좌측으로 꺽여 내려가고 그곳을 통과하니 시멘트 포장도로가 갈리는 삼거리 갈림도로에 임도 표석과 이정표가 보인다.

내려가 보니 우측인 남쪽으로 밀영시 청도면 소태리가는 방향이 그리고 북쪽의 북서쪽으로는 청도군 각남면 옥산리 가는 방향이 그리고 북동쪽으로는 청도군 각남면 함박리 가는 방향 표시가 되어 있다.

이곳이 지도를 살펴보니 건티재로서 잠시 오늘 산행을 더 진행을 할 것인지 이곳에서 마무리를 할 것인지 고민을 하다가 더 진행을 하면 산행 남러리가 불분명하기에 오늘은 이곳에서 산행을 마무리 하기로 하고 풍각에서 하룻밤 묵기로 하여 풍각택시를 부른다.

하지만 잠시 기다리는 동안 대구에서 왔다는 나물 채취를 위해 올랐던 부부의 봉고차를 만나 잠시 옥산리 방향으로 내려가며 택시에 전화를 하지만 연락이 되지 않아 잠시 더 내려가다 대산저수지에서 택시를 기다려 본다.

 

이곳 건티재는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 옥산리에서 경상남도 밀양시 청도면 소태리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두 고개 중 하나인데 건티재는 호암산 서편의 고개이고 요진재는 호암산 동편으로 오른다.

건티재의 명칭 유래는 인근의 건티산(429.5봉)과 같은 이름을 쓰고 있으며 긴티재 또는 큰태재라고도 한다.

경상북도와 경상남도의 경계는 청도군 각남면과 밀양시 청도면에서 높은 산지를 형성하는데 화악산(931.5봉)에서 호암산(611.6봉)을 거쳐 천왕산(618.2봉)에 이르는 산지가 그것이다.

요진재가 화악산과 호암산 사이의 고개인데 반해 건티재는 호암산과 천왕산 사이의 고개이다.

건티재 일대는 소나무 군락이 압도하고 있으며 봄이면 진달래와 철쭉 등으로 아름답고 건티재에서 임도를 지나 각남면 함박리 방면으로 약 20여 분 거리의 구간은 백양목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장관이다.

 

 

부부의 도움을 받아 시멘트 도로를 따라 한동안 내려오니 동국사와 대산사 가는 큰 이정판이 서 있는 대산 저수지 앞에서 부부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건넨 후 택시와 연락해 잠시 택시를 기다린다.

마음 같아서는 부부의 봉고차를 타고 큰 도로까지 내려가고 싶었지만 시골 택시는 한번 불렀다 타지 않으면 많은 손해가 되고 외지인에 대한 불신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곳에서 택시를 기다려 보는 시간이다.

그곳 대산저수지 앞에서 북쪽을 살펴보니 청도군 각남면 옥산리 마을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옥산리는 밀주지에 따르면 풍각현 현남면 우척동과 대산동으로 표기 되어 있고 또 1768년의 대구 읍지에는 옥척동과 대산동으로 표기 되어 있다.

우척은 뒷날 옥척으로 바뀌고 옆에 작은 부락은 오리밭으로 불리워 지고 있고 우척동에는 마을의 산세 형상이 소가 누운 것과 유사하다고 하여 우척이라고 불리며 자연 마을인 옥척과 오리밭이 있는데 대산동에는 자연 마을인 웃대산과 아랫대산 및 신기가 있다.
옥산리는 밀양과 대구를 거쳐 청도로 옮겨온 풍각현에 속해 있던 곳으로 풍각현 현남면 우척동과 대산동을 합해서 만들어진 마을로서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당시 초동면에 있었던 우척과 대산을 병합하여 옥산동이 되었으며 각남면에 편입되었고 1988년 옥산동에서 옥산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옥산리 앞에는 천왕산이 높이 솟아 있고 남과 서 그리고 북이 막혀 있어 동쪽으로만 열려 있는 골을 따라 내려온 산줄기 따라 희나무골과 개명골과 통서골 등에서 발원한 물이 상옥산을 거쳐 신당으로 흘러 내려간다.

산이 높고 골이 깊어 경작지는 많지 않은 편이고 산과 물을 따라 만들어진 경작지는 마을 앞으로 전개되어 있다.

옥산 2리 위에 축조된 대산지는 각남면 옥산리와 신당리와 녹명리까지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으며 논 작물보다 과수 작물이 경제적 이익이 더 많아 논을 밭으로 변화시켜 과수 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어렵게 택시를 만나 그 택시를 타고 풍각에서 하룻밤 묵고 싶다며 잘 수 있는 곳과 새벽 밥집을 확인하니 모텔과 식당이 멀리 떨어져 있고 새벽 일찍 문을 여는 식당도 없다기에 청도읍으로 향해 청도역 근처의 필모텔에서 하룻밤 묵기로 한다.

모텔에서 잠시 샤워로 몸 치장을 하고 역근처의 추어탕을 먹기 위해 길을 나서며 청도읍 번화가의 거리를 사진에 담아 본다.

청도군은 경상북도 최남단에 있는 마을로서 지세는 동서가 가늘고 길며 남북으로 짧고 협소한 형태이며 청도군의 중앙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용각산맥을 경계로 산동과 산서로 구분하여 불린다.

산동 지역은 운문면과 금천면 및 매전면 3개면으로 높은 산이 밀집하고 평야가 협조하며, 동창천을 중심으로 마을들이 형성되어 있는 반면 산서 지역은 화양읍과 청도읍 등 청도군의 중심 마을이 위치한다.

주변에는 비슬산, 묘봉산, 수봉산, 남산, 화악산 등 작은 산이 옹립하고 있으며 청도군의 중앙을 관통하는 청도천의 평탄한 분지가 주로 형성되어 있어 청도군의 곡창 지대를 이루는 곳이다.

청도군은 동쪽으로는 경상북도 경주시와 서쪽은 경상남도 창녕군과 인접하였으며 남쪽으로는 경상남도 밀양시와 북쪽으로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및 경상북도 경산시와 접하고 있다.

이곳 청도지역은 삼한 시대 우유국으로 존재하다가 이서국으로 호칭하였으며 신라와 힘겨루기를 하다가 유례왕 때부터 신라에 합병되었다.

신라에 복속된 후 신라와 가야와의대치상태에서 주요 전략기지로 있었는데 원광국사가 중국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 가슬삽사에 머물 때 화랑인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를 전수해 줌으로해서 화랑들의 수련 장이 설치되었다.

신라 경덕왕 때 구도성 경내에 있던 솔이산, 경산, 오도산의 3성을 합하여 대성군을 설치하였다가 그 후 3성을 분할하여 경산현과 소산현, 형산현으로 개칭하여 밀양군에 편입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1018년 지방 제도 개칭에 따라 신라 때의 3현을 통합하여 청도군으로 되었다가 1010(현종 1)에 도주로 개칭되었다가 이후 여러 차례 행정 구역 개편으로 다시 현으로 격하되었으며 1366년 군으로 승격되었다.

조선 시대 초기에는 현이었지만 1404년 군으로 승격되어 밀양부 등에 속했다가 1519년 경상좌도에 속하게 되었고 1894년 도제 당시 경상도 청도군이었으며 189613도제 실시에 따라 경상북도 청도군이 되었다.

1906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대구군 각북면, 각현내면, 각초동면(현 각남면), 각이동면(현 풍각면, 각북면)과 밀양면 고미면이 편입되었다.

1912년 외서면 및 하남면 운수동이 경상남도 밀양군으로 이속되고 밀양군 소속이었던 상동면과 사지동(현 청도읍 사촌리)이 청도군 하남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9개읍 면 212동이 되었다.

1949년 청도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79년 화양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청도읍을 지나 청도역을 우측에 두고 조금 더 걸어가니 큰 도로 옆에 추어탕 전문 식당들이 많이 보이고 그들 중 할머니가 운영하는 작은 추어탕 집에 들어가 맥주 한병 시키니 이곳 청도는 식당에서 주류를 판매하지 않으니 매점에서 마시고 싶은 주류를 구매해 마시라고 한다.

바로 앞에 있는 마트에 들려 시원한 캔 맥주 하나 사 시원하게 마시며 준비된 추어탕을 먹어보니 일반 알고 있는 전라도의 추어탕과는 완전히 다른 씨래기국과 닮아 있는 추어탕이라 약간은 실망도 해 본다.

하지만 너무나 허기가 진 시간이라 그런대로 배를 채우고 곧바로 방으로 돌아 가 내일 새벽 2시 50분에 알람을 맞춰 놓고 조금은 일찍 잠자리에 들어간다.

 

지역마다 그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이 있는데 물 맑고 인심좋은 청도에 가면 꼭 먹어봐야 할 것으로 청도의 3미라 불리는 한재미나리와 추어탕 그리고 감말랭이가 꼽힌다.
그 중에서도 청도군 대표음식으로 불리면서 지난 2011년 추어탕 특화거리로 육성된 청도역 주변 9개 추어탕 전문 업소는 이미 관광상품화가 돼 있을 만큼 전국적인 명소로 이름을 톡톡히 알리고 있으며 예전에는 의성추어탕과 향미추어탕 두 집이 있었지만 추어탕 손님들이 밀려들면서 지금은 9곳이 성업중이다.
청도추어탕은 청도의 맑고 깨끗한 청도천과 동창천에서 잡아올린 쏘가리, 황동어, 꺽지, 메기 등 잡어와 미꾸라지를 적절히 섞어 사용하는 웰빙 향토 음식으로 원래는 미꾸라지만 사용해서 국을 끓였지만 미꾸라지만으로 수요를 충족할 수 없어 민물잡어를 추어탕 재료로 사용한지 오래다.
하지만 민물잡어는 단백질과 칼슘 등 각종 영양소가 풍부한데다 함께 어우러지는 배추와 부추, 풋고추, 파 등의 야채도 풍성해 그 맛도 일품이다.
추어탕은 각종 잡어를 삶아 으깬 후 채로 걸러내면 고기 살만 남게 된다.

여기에 준비한 야채를 넣고 푹 끓인 청도추어탕은 맑고 시원하고 담백해 청도의 대표 음식으로 자림매김 한 지 오래다.

힘들고 어렵게 진행을 하였지만 아무 사고 없이 무탈하게 또 한구간 마무리하였음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깊은 꿈나라로 향한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