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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맥산행(완료)/비슬지맥(낙동·완)

비슬지맥 제1구간 분기봉에서 비오재까지 산행후기

by 칠갑산 사랑 2015.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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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경상북도 경주시와 영천시 및 청도군의 비슬지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2015년 04월 24일, 25일, 26일 (금요일에서 일요일까지 3일 연속 산행)

                 2015년 4월 24일(금요일 당일 산행)

산행날씨 : 맑고 조망도 좋았지만 갑자기 기온이 오르며 초여름 같이 무더웠던 산행 날씨

산행온도 영상 10도에서 영상 26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숲재(숙재, 오봉로 2차선 지방도로)-생식촌로-우라생식마을-식물분석장-능선진입-비슬지맥 분기봉(밀양지맥, 656봉)-녹슨안테나-

                 산불감시초소-생식마을 갈림삼거리-헬기장-사룡산(685봉)-541봉 이정판-바위봉-처사김녕김공묘지-안전목책과 로프구간-사루봉

                 갈림삼거리-안전로프구간-나무계단과 안전목책구간-오재쉼터(921번 2차선 지방도로, 이형표 애국지사 추모비)-구룡산등산로(수암)

                 이정표(사룡산정상 1.9 Km, 구룡산정상 3.1 Km, 상리 2.3 Km)-안전목책과 로프구간-이정표(사룡산정상 2.3 Km, 구룡산정상 2.7 Km,

                 마일리 0.9 Km)-517봉-수암 시멘트 포장임도 이정표(사룡산정상 4.2 Km, 구룡산정상 0.9 Km, 상리 2.8 Km)-능선진입 이정표(사룡산

                 정상 4.3 Km, 구룡산정상 0.8 Km, 수암사 1 Km)-바위봉-부처바위-이정표(사룡산정상 4.9 Km, 구룡산정상 0.15 Km, 무지터 0.2 Km)-

                 구룡산(675봉, 정상석과 삼각점 및 전망데크)-이정표(사룡산 5.2 Km, 발백산 4.7 Km, 외촌고개 11.5 Km)-구룡고개 시멘트 포장 임도

                 이정표(발백산 4.2 Km, 운문 정상리)-이정표(구룡산 0.5 Km, 발백산 4.1 Km, 매남리 0.3 Km)-페안테나-로프구간-경산구룡산(675봉)-

                 이정표(구룡산 1.1 Km, 발백산 3.5 Km, 매남리 0.5 Km)-예수상과 전망대-천주교구룡공소 파정의집-612봉-바위봉-로프구간-

                 이정표(구룡산 2.4 Km, 발백산 2.3 Km, 용성 매남리 2.5 Km)-시멘트 포장 임도-정상재(8번 2차선 포장도로와 쉼터)-능선진입

                 이정표(구룡산 2.6 Km, 발백산 2.0 Km, 운문면, 용성면)-안전목책과 로프구간-538봉-로프구간-588.4봉 삼각점-내리막 로프구간-오르막

                 로프구간-발백산(674.5봉, 정상석과 전망대)-이정표(구룡산 4.7 Km, 반룡산 3.9 Km)-부일 산촌생태마을 등산로 이정표(영천방향,

                 다음이정표까지 1.3 Km)-비포장 임도-시멘트 포장 임도-비포장 임도-송림기점 0.5 Km 이정목-비포장 임도-능선진입-부일 산촌생태마을

                 등산로 이정표(수변관찰로 0.5 Km, 다음이정표까지 0.6 Km)-494.6봉 삼각점 부일 산촌생태마을 등산로 이정표(다음이정표까지 1.2 Km)-

                 영천최씨묘지-87번 송전탑-철조망-임도 끝 부일 산촌생태마을 등산로 이정표(다음이정표까지 1.5 Km)와 벤취 2개-송전탑-508.4봉

                 삼각점-477봉-묘지지대-비포장임도-차량통제막-시멘트 포장임도-비포장 임도-시멘트 포장임도-연못-가척리 용림마을민가-비포장

                 임도-묘지지대-비포장 임도-351.4봉 삼각점(산불감시초소와 이동통신탑)-비포장 임도-43번 송전탑-44번 송전탑-일몰-육동배수지탱크-

                 비포장 임도-철대문-비닐하우스촌-들풀애농원-비오재(4번 2차선 포장도로) 

산행거리 : 4월 24일(금) 약 22.29 Km (스마트 폰의 GPX 기준)

                 4월 25일(토) 약 38.48 Km (스마트 폰의 GPX 기준)

                 4월 26일(일) 약 19.73 Km (스마트 폰의 GPX 기준)

산행시간 : 4월 24일(금) 맑고 무척 무더웠던 초여름 같은 날씨에 08시간 00분 (10시 42분부터 18시 42분까지)

                 4월 25일(토) 맑고 무척 무더웠던 초여름 같은 날씨에 13시간 41분 (05시 14분에서 18시 56분까지)

                 4월 26일(일) 맑고 무척 무더웠던 초여름 같은 날씨에 07시간 00분 (05시 02분에서 12시 02분까지)

교통편 : 애마와 택시 이용 (서정수 동곡택시 010-8006-6997와 장상근청도개인택시 010-8290-5806) 

비슬지맥이란???

낙동정맥 사룡산(683봉) 북쪽 400미터 지점에서 분기하여 서진하며 사룡산(683봉), 구룡산(674.8봉), 발백산(674.5봉), 대왕산(607봉), 선의산(756.4봉), 용각산(692.5봉), 상원산(674.1봉), 삼성산(668.4봉)등 600에서 700미터 대의 산들을 들어 올린 후 비슬산(1083.6봉)에 이르러 북쪽으로 청룡지맥을 분기한후 방향을 남쪽으로 틀어 조화봉(1057.7봉), 수봉산(592.5봉), 묘봉산(514봉)을 지나 천왕산(619.2봉)에 이르러 남쪽으로 열왕지맥을 분기한후 동남진하며 호암산(611.2봉), 화악산(930봉), 형제봉(556.7봉), 종남산(663.5봉), 팔봉산(391.4봉), 붕어등(278.8봉)을 지나서 밀양시 상남면 외산리에서 낙동강에 발을 담그며 그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146.5 Km가 되는 산줄기로 최고봉인 비슬산의 이름을 빌려와 비슬지맥이라 칭한다.
비슬지맥은 낙동정맥 및 청룡지맥과 함께 금호강의 남쪽울타리를 분담하고 밀양강의 서쪽 울타리역활을 처음부터 끝까지 맡아와 밀양강을 낙동강에 합수시키고 동쪽 밀양강 건너로는 낙동정맥에서 온 영축지맥의 끝을 바라보고 남쪽 낙동강 건너로는 낙남정맥에서 온 무척지맥의끝을 바라보며 그 끝을 맺는다.
지나가는 산들은 사룡산(683봉), 구룡산(674.8봉), 발백산(674.5봉), 대왕산(607봉), 선의산(756.4봉), 용각산(692.5봉), 상원산(674.1봉), 봉화산(473.5봉), 삼성산(668.4봉), 우미산(-0.7 Km, 747.3봉), 비슬산(1083.6봉), 조화봉(1057.7봉), 수봉산(592.5봉), 묘봉산(514봉), 천왕산(619.2봉), 배바위산(607.1봉), 호암산(-0.7 Km, 611.2봉), 화악산(930봉), 형제봉(556.7봉), 종남산(663.5봉), 팔봉산(391.4봉), 붕어등(278.8봉)을 지난다. 

지나는 행정구역은 사룡산에서 건천읍, 영천시, 청도군경계에서 시작하여 구룡산에 와선 건천읍과 영천시와는 작별하고 경산시와 청도군경계를 한동안 따르다가 상원산 근방에 와서 대구광역시와 경북도경계를 만나서부터는 도경계를  따라 비슬산, 조화봉, 수봉산, 천왕봉, 화악산까지 간다.

화악산을 지나서야 그동안 처음부터 계속돼온 청도군경계를 벗어나 밀양땅으로 들어선다.
비슬지맥 전체 146.5 Km중 청도군경계를 109미터쯤 지난다.
 

비슬지맥에서 분기하는 지맥은 비슬산에서 북진하는 청룡지맥(약 37 Km)과 천왕산에서 남진하는 열왕지맥(약30.4 Km)이 있다.

 

 

새로운 마루금 산행을 시작하며 첫 구간부터 보너스를 받은 느낌으로 즐겁게 자연을 만끽했던 아름다운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지난 6개월 동안 많은 산친구들과 땅끝기맥과 호미기맥 산행을 이어오다 보니 가끔은 홀로 마음대로 하는 산행이 그리워지고 때마침 몇 년 전 다녀왔던 비슬산 참꽃이 생각 나 갑자기 비슬지맥 산행을 준비해 본다.

하지만 산행 들머리와 날머리에서의 대중교통이 불편하고 또한 서울에서 접근하기도 쉽지 않아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4월 24일인 금요일 아침 일찍 경산에 일이 생겨 자연스럽게 애마를 이용하게 되었는데 금요일 오후 시간을 더 산행 할 수 있어 보너스 같은 기분으로 걸어 보지만 역시나 애마를 이용하다 보니 택시비는 생각보다 많이 들어 결국 편안한 식사와 잠자리에 비해 비싼 값을 치루고 진행한 산행이 되었다.

더욱이 4월 23일인 목요일 저녁에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던 죽마고우가 한국에 들어 와 새벽까지 몇잔의 이슬이를 기울이다 집으로 돌아 와 채 3시간도 자지 못하고 24일 새벽 일찍 출발하려니 몸도 마음도 무거워 경산에서의 약속만 없으면 산행을 포기하고픈 마음 간절했지만 이미 약속된 일정이기에 조심하며 머나먼 경산으로 출발한다.

또한 4월 25일인 토요일은 오랫만에 마음 놓고 장거리 산행을 진행하였는데도 몸에 이상이 없어 감사한 마음으로 좋은 시간을 보냈지만 27일인 월요일에 독일에서 온 사업 파트너와 아침 일찍부터 고객들을 방문하는 일정이 잡혀 26일인 일요일은 조금 일찍인 점심 때 산행을 마치고 서울로 복귀해야 되는 일정으로 조금은 아쉬움이 묻어 난 하루였다.

그래도 2일과 반나절 동안 총 80.50 Km 산행에 약 28시간 40여분이 걸렸는데도 몸에 이상이 없으니 그저 부모님께 감사한 시간으로 남겨 본다.

 

경산으로 내려가 고객을 방문한 시간이 아침 8시 40여분이고 이야기를 나눈 후 회사에서 나오니 아침 10가 가까워진 시간이다.

그곳에서 산행 들머리까지 길찾기를 해 보니 40여분 운전하면 될 것 같아 조심하며 애마를 몰아 가니 드디어 몇 년 전 새벽에 추위에 몸을 떨며 어렵게 진행했던 경주 산내면의 우라리 우라생식마을 앞 도로에 도착을 하고 산행 준비를 한 후 시멘트 포장임도를 따라 멀고도 먼 비슬지맥 산행을 시작하는데 오늘은 온 산에 울긋불긋 피어난 봄꽃 향연에 기분이 좋다.

그렇게 분기봉과 사룡산 지나 오재쉼터를 넘어 가뿐 숨을 헐떡이며 흐르는 땀방울을 닦다 보니 드디어 구룡산에 도착해 셀카 놀이를 하며 사진 몇장 남겨 본다.

사룡산도 그렇고 구룡산도 그렇고 이곳의 산들은 용과 관련된 산들이 많이 보이는데 자료를 찾아 정리를 하면서 정리를 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다.

 

산행 들머리인 경주시 산내면 우라리의 우라생식마을 앞에 도착을 하니 아침 10시 35분을 지나고 이곳에서 간단히 산행 준비후 주위 풍경을 사진에 담다 보니 몇 년 전 낙동정맥 산행을 하면서 거꾸로 내려왔던 기억을 떠올리며 잠시 추억에 잠겨 보는 시간이다.

우라2리 이정석과 오봉로 및 생식촌로 도로 표지판 그리고 석두암 표지판이 눈길을 잡는다.

생각보다 무더운 기온으로인 해 산행 출발 전부터 굵은 땀방울이 이마와 등줄기를 적시는 시간에 우라생식마을 이정석에 표기된 화살표 방향으로 시멘트 포장 임도를 따라 우라리란 지명유래를 생각하며 길고 힘든 산행을 시작하는 시간이다.

우라리는 우라1리와 2리가 있는데 우라1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산 지형이 우형(소의 형태)을 이루고 있다하여 우라로 칭하였고 여기에는 마을 개척 당시 피나무 숲이 있었다 하여 수피라 부르는 마을이 있다.

또한 우라2리에는 4개 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들을 살펴보면 중리마을로 개척 당시 동쪽 산정에 산성이 있어 성촌이라 하였고 산에서 우렁이 소리가 들린다하여 명라동이라 칭하다 자연부락의 중간에 위치한다 하여 중리로 바꿔 불렸다는 마을이다.

또한 상리마을은 우라 윗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부르는 마을이고 지경마을은 수피와 중리의 경계되는 곳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지경이라 불려졌으며 시루미기(생식촌)마을은 골짜기의 지형이 시루와 같이 생겼다하여 불려지는 마을이라 전해진다.

이곳은 또한 숙재라는 고갯마루인데 지도상엔 숲재로도 되어 있지만 이곳 주민들은 모두 숙재로 부르고 있는 고갯마루이다.

숙재란 이름의 유래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높은 지대인 우라리에서 낮은 아화리 쪽으로 숙진다고 해서 숙재라고 하며 한자로는 숙령이라 쓴다.

천촌리 쪽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지나는 골 이름도 숙골이고 거기에 있는 저수지는 숙곡지라 하므로 숲재보다는 이곳 주민들이 부르는 이름인 숙재가 맞을 듯 싶다.

 

한동안 시멘트 포장도로와 비포장 임도가 번갈아 나타나는 등로를 따라 우라생식마을로 올라가다 등로 좌측 사룡산 자락을 살펴보니 높은 기온과는 달리 산하는 연두빛과 고운 봄꽃 빛깔이 산객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고 잠시 옛날 낙동정맥 산행을 함께하며 고생했던 산친구들을 떠 올려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잠시 더 오르니 도로 좌측으로 민가로 들어가는 비포장 임도 갈림길을 지나 생식마을이란 이정석이 보이는데 그곳에서 임도 좌측 아래를 살펴보니 우라리 마을을 관통하는 방금 전 이 산객이 경산에서 타고 온 오봉로 도로가 발 아래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꾸불꾸불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 임도 양쪽으로 피어나는 연두빛 봄 빛깔을 즐기며 오르니 드디어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우측으로는 주차장 가는 길이 좌측으로는 식물분석장이란 철문을 지나 우라생식마을로 통하는 도로가 있는 갈림 삼거리로서 이곳에서 좌측 우라생식마을 방향으로 진행을 한다.

 

식불분석이란 글귀가 있는 철문을 통과해 조금 더 진행하니 종교와 관계된 글귀들이 많이 보이고 방문자들에게 생식마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안내판도 보인다.

그곳을 지나 조금 더 오르다 도로 좌측을 살펴보니 저 멀리 우측으로 낙동정맥에서 분기하는 비슬지맥 분기봉인 656봉과 그 좌측으로 해발고도 685미터인 사룡산이 옛 추억을 이야기하며 멋지게 올려다 보인다.

다시 언젠가 이곳에 올 기회가 있을지 기약이 없는 시간이기에 조금 더 발걸음 멈춰 이 아름다운 풍경과 조망을 가슴속에 새겨 보는 시간이 되었다.

 

비슬지맥 분기봉과 사룡산을 조망한 후 다시 걸어 진행을 하니 또 다른 철대문이 활짝 열려 있고 그 문을 통해 걸어 들어가 본다.

잠시 더 시멘트 포장 도로를 따라 걸어 들어가니 도로 좌측으로 또 다른 철문이 보이는데 잠시 둘러보지만 별다른 특이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곳 우라생식마을은 말 그대로 음식물로서 생식을 섭취하며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이 수행하는 곳이므로 특별히 생각하지 말고 수행에 지장이 없도록 많은 방문을 자제해 달라는 당부도 있는 마을이다.

그저 세상을 살아가는데 여러가지 방법 중 다른 한 방법을 채택해 살아가고 있다고 인정하며 차별없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길 바래 본다.

 

계속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오르니 건물 하나를 지나 소나무 능선으로 이어지고 진달래가 피어있는 등로를 따라 걸어 오르니 또 다른 민가 한채가 앞에 보인다.

잠시 걸어 오르니 건축된지 얼마 되지 않은듯 깨끗한 모습에 사람이 살고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을만큼 조용한 적막감만 맴돌고 있다.

사진 한장 남기고 그 마지막 민구 우측의 능선으로 이어지는 진달래 등로를 따라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타고 분기봉으로 오르기 시작한다.

 

기온이 무척 올라갔는지 산행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온몸엔 벌써 굵은 땀방울로 흥건히 젖어 온다.

아름답게 피었다 떨어지고 있는 진달래 일명 참꽃을 바라보며 조금 더 경사도가 가파른 등로를 타고 오르니 저 위쪽으로 두개의 이정표와 그 이정표 가운데에 낙동정맥이라 적혀있는 이정석이 서 있다.

하지만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하나의 이정표에는 비슬지맥이 아닌 밀양지맥으로 펴기되어 있어 정확한 명칭으로 바로 잡아야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통상적으로 산줄기 중 가장 높은 산이나 가장 유명한 산 이름으로 지맥이란 이름을 만들고 있기에 밀양보다는 비슬지맥이 맞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마음속으로 간단히 예를 올리고 안전한 비슬지맥 산행을 기원하는 시간을 가져 본 후 사진 몇장 남기고 곧바로 등로 좌측으로 이어지는 본격적인 비슬지맥 산행을 시작해 보는데 그곳 등로에는 사룡산까지 600미터 거리라는 이정표가 보 있다.

 

분기봉을 지나자 마자 녹슨 안테나가 보이는데 아마도 옛날에 아라생식마을에서 사용하던 TV용 안테나는 아니였나 생각되는 인공 구조물이다.

그 녹슨 안테나를 지나 완만하게 내려가니 등로 우측으로 산불감시초소가 있고 그 안에는 이곳 주민이 머무르며 전화를 하고 있는지 무척 시끄럽다.

그 산불감시초소 북측으로 살펴보니 바로 앞에 진분홍빛 진달래꽃이 피어있고 그 넘어 저 멀리 경부고속도로가 시원하며 그 우측으로 서면과 고경면 마을과 주위 산들이 평화롭게 다가온다.

이 산객이 살았던 고향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이지만 좁은 들판 사이로 이어져 뻗어 있는 산줄기들이 마치 악에떼가 마을로 내려가는 느낌으로 다가 온다.

 

조금 더 경산의 고경면과 경주시의 서면 방향을 조망한 후 다시 그 산불감시초소를 나와 등로를 타고 우측 사룡산 방향으로 진행을 한다.

등로에는 이제 막 푸른 잡풀들이 잎사귀를 내밀기 시작하고 있지만 낙엽진 거목의 활엽수에는 아직 봄 소식이 늦은지 봄빛깔을 찾을 수 없다.

그렇게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거목 아래에 잡목들이 보이고 그 작은 잡목들은 먼 여행을 시작하는지 이제 막 연두빛 봄빛깔로 치장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렇게 봄을 느끼며 걸어가니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살펴보니 등로 좌측으로는 우라생식마을로 내려가는 하산 등로이고 비슬지맥 사룡산은 등로 우측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그 삼거리에는 사룡산 방향으로 오제소공원과 구룡산무지터란 안내판이 보인다.

 

그 갈림 삼거리를 지나 우측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등로 좌우측으로는 분홍빛 참꽃이 반겨주고 그 아래에는 황금빛 제비꽃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바쁜 시간이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쪼그려 앉아 몇장의 사진을 담고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그곳에도 여전히 황금빛 제비꽃이 마치 가을 들녘을 연상시키듯 그렇게 홀로 진행하는 산객의 멋진 친구가 되어 준다.

그곳을 지나 천천히 오르니 등로 좌측 억새밭 사이로 낡은 헬기장이 보여 잠시 들려 보지만 특이할 것이 없어 다시 등로롤 복귀해 맥 산행을 이어가 본다.

 

다시 넓은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오르니 화사하게 피어있는 참꽃이 다시 눈길을 잡고 금새 정상석이 세개나 서 있는 사룡산 정상에 도착을 한다.

몇 년 전 낙동정맥 산행을 하면서 아침 추위에 벌벌 떨면서 이곳을 오르다 황홀한 일출을 만나 손이 얼도록 사진에 담았던 추억을 생각하며 피식 웃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사룡산(685)은 경북 경주 산내면 우라리와 영천 북안면 당리 그리고 청도군 운문면 마일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일명 전방산이라고도 하는 사룡산(685)은 이름 그대로 네 마리 용이 승천한 산이라고 하는데 삼국시대부터 신라 경주를 지키던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리고 은자의 정서가 물씬 풍기는 산으로 터를 닦은 지 무려 13백년 된 불국사의 말사인 금정사가 있는데 이 금정사는 원효대사가 창건했으며 사룡산 품에 안겨 고요함과 단아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사룡산 정상 평원지대에는 한때 유명했던 생식마을이 있는데 이 곳은 곡물 야채를 비롯한 음식을 날로 먹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서쪽으로 구룡산과 동쪽으로 오봉산이 이어지며 삼국시대의 부산성(사적 제25)이 있다 

부산성은 신라 문무왕 3(663)에 쌓은 신라 산성으로 주사산성이라고도 하는데 주사산, 오봉산, 오로봉산, 닭벼슬산이라고도 불리는 부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세 줄기의 골짜기를 따라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석축성이다.

산성이 있는 곳은 대구에서 경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선덕여왕 때 백제군이 이 산을 넘어 옥문곡(일명 여근곡)까지 침입한 일이 있었다.

그 이후에 경주의 서쪽에서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외곽산성으로 조선시대 전기까지 왜구의 침입에 대비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성밖은 4면이 경사가 심하고 험준하여 방어에 적합하다.

성안에는 넓고 평탄한 지형이 많으며 물이 풍부하여 신라의 중요한 군사기지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효소왕 때 화랑 득오가 죽지랑과의 우정을 그리워하며 모죽지랑가를 지은 곳으로도 유명한 곳으로 현재는 남문터와 군의 창고터 그리고 군사훈련을 시켰던 연병장터, 우물터, 못터 및 비밀통로인 암문터 등이 남아 있다.

이곳 사룡산 정상에서 어렵게 셀카 놀이를 하면서 몇장의 추억 사진을 남긴 후 다시 서쪽으로 나 있는 완만한 등로를 타고 오재방향으로 출발을 한다.

 

생각보다 아주 잘 정비된 등로를 타고 조금은 빠르게 진행을 하니 등로 주위엔 이제 주황빛과 남빛이 감도는 예쁜 붓꽃이 산객의 발걸음을 붙잡고 늘어지기 시작한다.

잠시 가던 길 멈추고 몇장의 사진으로 남겨 보지만 진행하면 할수록 더욱 예쁜 붓꽃들이 산객의 산행 속도를 자꾸만 늦추고 있다.

갈림 삼거리에서 우측 등로를 타고 주능선으로 걸어가니 십이지승보다 더한 가지를 자랑하는 소나무 한그루를 지나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 군락지를 따른다.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진행하니 등로 우측으로는 낭떨어지 지나 저 멀리 경주시 서면의 마을들이 평화롭게 내려다 보인다.

다시 내려갔다 오르기를 반복하는데 이제 등로에는 몇송이의 구슬봉이가 떼지어 피어있는 등로로 바뀌고 곧이어 둔덕에 보이는 541봉에 도착을 한다.

이곳에도 여전히 준.희님이 달아 놓은 비슬지맥 541 m 란 이정판이 산객의 등불이 되어 주고 있다.

 

541봉을 지나 완만하게 내려가니 등로는 고속도로처럼 잘 나 있고 길 잃을 염려도 없을만큼 환상적이다.

막 피어나기 시작하는 연두빛 새순들이 산객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그렇게 평온하게 내려가니 해발고도가 낮으면 낮을수록 더욱 짙푸른 자연이 빛이 반겨주고 있다.

잠시 더 오르막 내리막 하다보니 등로 좌측으로 바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잠시 더 진행한 후 바위 위로 올라 산벗들이 피어있는 나무가지 저 멀리 가야할 방향을 살펴보니 구룡산 정상이 멀은듯 가깝게 올려다 보이는데 저곳을 오르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많은 땀방울을 흘려야 할지 가늠도 되지 않는 시간이다.

 

가야 할 구룡산 우측으로는 영천시 복안면의 마을들인 상리와 당리 및 복리가 내려다 보이고 그 마을 한가운데로 지나는 지방도로가 사람들이 살아가는 마을을 형성하며 내려다 보인다.

상리는 옛날에는 영천군 원곡면이었던 지역인데 1914년에 인근 마을을 병합하여 사리라 하였다가 사란 글자가 불길하다고 하여 상리로 고치고 북안면에 편입시켰다.

못마을 또는 감동은 예부터 수자원이 풍부한 곳이기도 하며 신촌은 김녕 김씨 칠대조께서 감동에서 분가하여 이 곳에 정착했다 하고 양지촌은 가장 일찍 부터 인류가 정착한 듯한 곳이기도 하며 여러 성씨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다.

김녕 김씨가 가장 많이 사는 집성촌은신촌이고 굽말 또는 굼말은 마을 깊은 곳에 위치한다하여 지은 이름이다.

당리는 원래 영천군 원곡면이었으며 면소재지였는데 사룡산 밑에 신당이 있었으므로 당리라 했다.

또는 금부동이라고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변경시 북안면에 편입시켰으며 마을 개척은 서기 1590년대라 전해오며 중리는 들 중앙에 있으며 예부터 취락이 형성된 곳이기도 한 곳으로 다른 자연부락에 비하면 가장 큰 마을이다.

북리는 본래 원곡면의 지역으로 나경과 합하여 1914년 개편된 마을이며 세골은 구룡산 밑에서 큰 마을까지 길고도 좁은 계곡이 약 500미터나 되며 대리는 가장 큰 마을로 옛날에 큰 집이 있었다고 전한다.

북리는 북골이라고도 하는데 마을 모양이 베짜는 북처럼 생겼다하여 지은 이름이기도 하며 상마을 또는 대리는 북동의 안쪽에 있다하여 상마을이라고 하며 현재 월성 김씨가 가장 많고 전체 50여 가구가 살고 있다.

그렇게 주위 풍경을 조망하며 출발하니 암릉을 우회하며 처사김녕김공 묘지를 지나 또 다시 나타나는 거대 암봉은 우측 우회 등로를 따라 안전목책과 로프를 따라 통과한다.

그곳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시루봉 가는 안내 표지판이 화살표 표시와 함께 서 있다.

 

그 시루봉 가는 이정판을 지나 로프가 설치된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작은 선돌처럼 생긴 바위를 지나 등로 옆에 많이도 보이는 개복숭아 꽃을 사진에 담아 보는 시간도 가져 본다.

그곳을 지나 가파르게 내려가니 나무계단 등로가 나타나고 곧이어 영천시 북안면 상리와 청도군 운문면 마일리를 이어주는 2차선 921번 포장도로가 지나는 오재에 도착을 한다.

운북로란 도로 표지판이 보이고 도로 우측으로는 사룡산에서 구룡산까지의 등산안내도도 보이며 우측 영천시 방향으로 조금 더 걸어 가 보니 애국지사 이형표 추모비도 보인다.

애국지사 이형표 추모비를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오재쉼터란 큰 이정석과 나무 쉼터가 보인다.

생각해 보니 비슬지맥 분기봉에서 사룡산 가는 갈림 삼거리에서 봤던 오재소공원이 바로 이곳을 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닐까 생각을 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영천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많은 애국지사들이 태어난 곳이기도 한데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분연히 일어나 이 나라 강토를 죽음으로 지켜온 호국의 고장이었다.

한말 일제 침략기에는 산남의진 대장 정환직, 정용기 부자를 비롯하여 강봉학, 권규섭, 김수곡, 박광, 박한종, 손진구, 이규식, 이형표, 전응팔, 조상환, 최치환, 황보근 등이 산남의진에 가담하여 활동하였으며 이외에도 구봉서, 이학로 등이 의병에 가담하여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활발한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처럼 우리 영천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호국의 성지로서 조국 수호의 중심지로서 우뚝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알려지지 않은 많은 애국지사들이 전국 곳곳에 산재되어 있는데 조금이나마 그 활동 내역을 발굴하고 후손들을 보살피는 나라가 되길 바래도 보는 시간이다.

 

오재쉼터 이정석과 애국지사 이형표 추모비를 둘러보고 다시 청도군 운문면 방향으로 오재고갯마루를 넘어 도로 따라 조금 걸어가니 도로 우측으로 구룡산등산로 수암이란 작은 안내판과 구룡산정상까지 3.1 Km 거리라는 이정표가 서 있는 곳에 비포장 임도가 보이고 그 임도를 따라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임도 좌우측으로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등로를 따라 오르니 임도 좌측으로 낙동정맥의 마루금들이 올려다 보이고 옛날 만들었던 추억을 생각해 보는 시간도 가져 본다.

그렇게 한동안 비포장 임도 같은 등로를 따라 오르니 이제 등로 우측 아래로 오재고개에서 영천시 북안면으로 이어지는 921번 지방도로가 구절양장을 이루며 꾸불꾸불 이어져 가는 풍경이 그림처럼 다가온다.

상리와 당리마을 넘어 저 멀리 경부고속도로와 영천의 산들이 눈에 들어 오기 시작한다.

 

조망을 즐기고 다시 잘 나 있는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걸어 진행을 하니 멋진 소나무 군락지에 자라고 있는 관목에서 막 피어나기 시작하는 연두빛 새순이 산객의 마음을 부드럽고 예쁘게 보듬어 주는듯 하다.

그렇게 잠시 아무 생각없이 진행하니 등로 좌측으로 마일리 하산 갈림 등로가 있는 이정표가 서 있는데 이제 구룡산까지 2.7 Km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가 반가운 시간이다.

마일리의 마이란 지명은 오래전부터 산골에 마을이 있어서 청도 말로 마을인 마알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마일로 변했다고 전하고 있는 마을로서 이곳에는 아랫마을, 평지마, 구 마실, 안 마실, 외두리, 음지마, 새집마, 신당, 괴기(괴틀), 수암(아래 수암, 윗수암) 등이 있다.

경주와 영천 및 경산의 접경 지역으로 청도와 경주의 행정 구역으로 번갈아 편입되었고 조선 중엽까지는 경주에 속해 있었다.

청도군 고미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당시 마상동과 마하동을 합하여 마일동이라 하고 운문면에 편입되었다가 1988년 마일동에서 마일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마일에는 1970년대에 세워진 마일 분교가 있었으나 대도시로 사람들이 떠나고 지금은 폐교가 되고 그 잔존의 건물이 흉물스럽게 남아 있다.

청도의 제일 동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지도상에는 마치 누에의 뿔모양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영천시 북안면 상리와 맞닿은 곳에 있는 마을로서 구룡산 높은 봉우리가 북쪽을 막고 그 주봉들인 우라봉과 마일봉이 마을의 앞과 뒤를 막으면서 마을은 가운데 계곡에 주로 형성되어 있다.

경작지는 마일천 양안으로 논이 있고 산비탈에는 계단식 밭을 일구어 대부분 고추와 콩 등을 경작하고 있다.

 

이정표를 지나 진행을 하는데 여전히 등로는 넓은 수렛길처럼 나 있고 생각보다 잘 발달된 등로에 스스로 놀라기도 하는 시간이다.

잠시 더 걸어가니 등로에 거목의 소나무 한그루가 보이고 다시 평이한 등로를 따라 마음 편안하게 걸어가는데 정오가 되면서 기온이 오르는지 온 몸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흐르고 생각보다 무덥다는 느낌으로 조금은 힘들게 걸어가는 시간이다.

그렇게 잠시 더 진행을 하니 등로 주위에는 예쁜 산철쭉이 피어나기 시작하고 그 철쭉꽃 지나 등로에는 푸르른 봄 빛이 빛나고 있어 산행에는 큰 어려움이 없지만 기온이 오르면서 무더위가 발목을 잡지 않을까 고민도 시작되는 시간이다.

 

약간의 고도차이는 있지만 큰 어려움 없이 그 고도차이를 극복하며 여유있게 걸어가니 여전히 등로에는 푸르른 봄 빛과 아름다운 철쭉꽃이 반겨주는 등로로 이어지고 마음 편안하게 발걸음 가볍게 걸어가는 시간이 되었다.

전날 죽마고우와 새벽까지 즐겼던 즐거움으로 인해 몸이 조금은 무겁지만 별 어려움 없이 걸어가니 등로는 소나무와 잡목이 교대로 나타나고 무명봉을 두어개 넘어 새싹이 돋아나는 활엽수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저 멀리 시멘트 포장도로가 보이는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살펴보니 바로 수암고개이다.

이곳 수암고개는 시멘트 포장도로가 보이고 갈림 삼거리로 되어 있는데 마루금은 우측의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오르며 진행하게 된다.

 

등로 좌측은 여전히 청도군 운문면의 마일리마을로서 바로 아래에는 수암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수암은 청도에서는 가장 높은 지대에 형성된 마을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수암에는 신라 때 다섯 개의 암자를 거느린 큰 사찰인 수암사라는 절이 있었으나 점차 절이 쇠락함에 따라 민가가 들어서면서 절은 폐사되었다고 하며 또한 수암에는 윗수암과 아랫수암이 있다고 한다.

그곳 갈림 삼거리 안부에서 직진의 시멘트 포장 임도를 따라 완만하게 오르니 도로 좌측 전봇대에 수암사 가는 방향 표지판이 보이고 수암사를 찾아보니 조선 인조대오아 때 큰 사찰이었다가 소실된 이곳에 13년전 혜국스님(석종사)께서 토굴을 짓고 1여년을 수행하셨으며 상좌인 성천스님과 병천스님(월하스님상좌)께서 조선시대 수암사를 복원 불사를 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 시멘트 포장도로를 조금 더 따라 오르니 도로 우측 능선 방향으로 구룡산까지 800미터 남아 있다는 이정표 뒤로 등로가 보인다.

 

구룡산 가는 방향으로는 또한 무지터가는 길이란 안내판도 함께 보이는데 무지터 갈림길에서 무지터를 살펴 보기로 한다.

다시 잘 발달된 등로를 따라 조금은 가파르게 오르니 등로는 다시 멋진 소나무 군락지로 변하고 등로에는 간간히 바위들도 보이기 시작한다.

많은 바위지대를 지나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멋진 바위 하나가 보여 사진에 담고 하늘이 보이는 봉우리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 올라가 본다.

봉우리는 무명봉으로 그곳에서 낙동정맥 방향을 살펴보니 낙동정맥 마루금은 보이지 않고 경산쪽으로 뻗어 있는 산줄기들만 살짝 얼굴이 다가온다.

 

흐르는 땀방울을 닦으며 다시 바위 등로를 지나니 멋진 소나무 등로가 반겨주고 지나온 방향으로 오제소공원과 사룡산과 생식촌 방향 표시가 되어 있는 큰 안내판을 지나니 다시 아름다운 소나무 등로가 열려 있다.

다시 간간히 보이는 바위를 지나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등로 앞에 큰 바위 하나가 보이고 그 뒷편으로 부처바위란 안내판과 함께 그 바로 뒷편에 부처바위가 당당하게 서 있다.

부처바위 안내판에는 3m정도의 기암으로 기도하는 부처형상을 하고 있으며 소나무와 바위가 어울어져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옛부터 영험있는 미륵골 돌부처라 하여 소원을 비는 이가 많았으며 지금도 부처바위를 찾아 소원을 비는 이가 많이 있다라고 적혀 있다.

 

부처바위를 지나 조금 더 오르니 전망바위가 나타나는데 오늘 처음으로 지나 온 비슬지맥 분기봉과 사룡산 그리고 좌측으로 낙동정맥 및 부산성이 있는 오봉산까지 시원하게 조망을 해 보는 시간이다.

그렇게 조망을 즐긴 후 다시 잠시 더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무지터 갈림 삼거리 이정표가 보이는데 지금까지 진행하면서 궁금했던 무지터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보인다.

무지터는 구룡산 용의 눈에 해당하는 명당으로 8부 능선쯤에 위치하고 있으며 습지 식물이 군락을 이뤄 자생을 하고 잇다.

구룡산 용 9마리가 승천하였다는 이곳은 옛부터 가뭄이 신할 때 영천, 경산과 청도 3개 부락에서 합동 기우제를 지낸 신성한 곳으로 이 샘에서 물을 길러 음식을 만들어 제상을 올렸다.

무지터 옆 약 200평방미터 정도의 평평한 바위 위 제단에 제상을 마련하고 제관과 마을 사람들이 모여 비를 내려 주길 빌었다고 전하며 이곳에서 내려다 보면 북안면 전체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어 경관상으로 매우 수령하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관리가 되지 않아 무지터는 지저분하고 물은 음용은 물론 손을 닦기도 어려울 정도로 오염이 심하게 되어 있는듯 보인다.

 

무지터 갈림 삼거리를 지나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이곳 역시 황금빛 제비꽃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제비꽃밭을 지나 오르니 진달래꽃이 보이고 저 멀리 벤취 한개와 나무데크 전망대가 눈에 들어 오기 시작한다.

전망데크를 바라보며 오르니 구룡산 정상 직전 삼거리에 등로 좌측으로 발백산 가는 등로 방향 표시가 서 잇고 곧이어 정상석 2개와 삼각점이 있는 구룡산 정상에 도착을 한다.

구룡산은 예부터 신령스러운 산으로 알려져 있는데 전해 내려오는 전설 또한 그럴싸하다.

구룡산(675봉)은 경산시 용성면 매남 4동(구룡동)에 있는 산으로 옛날 동해의 용왕님에게는 막내딸이 있었는데 용궁에서 학대받음을 안타까이 여긴 용왕님은 그 딸을 육지에서 살도록 하였다.

해동 조선의 정기를 지닌 금강산에는 이미 용왕님의 동생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태백산 줄기를 따라 살기 좋은 남으로 남으로 내려와 보니 수목이 울창하고 꼭대기가 넓고 편편한 이상스러운 산이 있음을 발견하고 이곳에 영주의 터전을 잡게 하였다.

이 용은 때때로 구름을 낳고 비를 내리게 하여 육지의 억조창생을 도왔다.
비를 내리게 하는 용은 열 마리의 귀여운 새끼를 낳았고 날이 갈수록 탐스럽게 자랐는데 다른 새끼들은 모두 어미 용의 말을 잘 듣고 효성이 지극한데 유독 막내 새끼만은 항상 말썽을 부리고 불효막심하였다.

어미 용은 항상 막내를 타일렀지만 끝끝내 듣지 않으므로 하는 수 없이 동해의 용왕님에게 벌을 주도록 청하였다.
용왕님은 고생한 어미용을 용궁으로 부르고 9마리의 용은 넓은 하늘나라에 올라가게 하여 이 세상의 비와 구름을 관장케 하고 말성꾸러기의 용은 그곳에서 쫓아내었다.

쫓겨난 용은 지금의 용산에서 살다가 본래의 살던 곳이 그리워 찾아가다가 용왕님의 노여움을 사서 병을 얻어 죽고 말았는데 이곳이 지금의 반룡산이라고 한다.

이 구룡산은 9마리의 용이 하늘에 올라간 뒤부터 그렇게 부르게 되었으며 그곳에 생긴 동리를 구룡동이라고 부르고 있다라는 전설이 있다.

 

구룡산 정상에서 사진 몇장 남긴 후 우측 나무데크로 올라 주위 조망을 즐겨 본다.

먼저 지나 온 동쪽 방향의 비슬지맥 분기봉을 살펴보니 우측 바로 옆으로 517봉이 솟아 있고 오재로 가라 앉았던 산줄기가 다시 솟구쳐 사룡산과 분기봉을 일으키고 그 좌측으로 낙동정맥이 보이고 우측 뒷편으로는 부산성이 있는 오봉산도 올려다 보인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분기봉 우측 아래를 살펴보지만 산줄기에 가려 보고 싶은 단석산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구룡산에서의 멋진 시간을 보내고 다시 올랐던 갈림 삼거리로 뒤돌아 내려 와 이제는 우측 등로인 발백산 4.7 Km 방향으로 완만하게 내려간다.

잠시 평이한 등로를 따라 진행하니 소나무와 진달래꽃이 만발한 진달래 나무가 잘 조화를 이루며 산객의 눈길과 발길을 잡고 있다.

한동안 그렇게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등로 좌측에 바위가 쌓여 있는 바위 무명봉을 통과한다.

기온이 올라 식수를 마시는 시간이 많아지지만 아직은 큰 어려움이 없이 걸어가지만 오늘 새벽까지 무리한 몸이 조금은 힘이 든다며 아우성을 치고 있기도 하다.

 

그 바위봉을 지나니 등로는 이제 연두빛 새싹이 막 올라오기 시작하는 활엽수 등로로 바뀌고 마루금도 조금 더 가파르게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한동안 가파르게 내려가니 다시 소나무 군락지를 지나 잘 가꿔진 묘지를 통과한다.

그 묘지를 지나 조금 더 내려가니 밭이 보이고 그 밭 가장자리를 따라 내려가니 발백산까지 4.2 Km가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서 있는 구룡고개에 도착을 한다.

이 고갯마루에는 시멘트 포장도로가 지나는 곳으로 마루금은 이 시멘트 포장 도로를 건너 진행하게 된다.

이 구룡고개란 이름은 아마도 방금 전 지나온 구룡산에서 유래된 내용이 아닐까 유추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구룡고개의 좌측으로는 청도의 운문면 정상리 하산 갈림길이 있는 곳으로 경상북도 경산시와의 경계선에 위치한다.

정상리에구룡 마을, 비석 마을, 질(길)머리 마을, 삼당 마을, 심곡 마을, 새말 등의 자연 마을이 있는 곳으로 역사의 기록이 남은 것은 밀양군 고며면이 시초이다.

1906년에 청도군 동이위면으로 다시 동일위면으로 바뀌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정상동이라 하여 운문면으로 통합되었으며 1988년 정상동에서 정상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구룡산과 바리박산(발백산) 및 룡산 사이에 있으며 경작지가 적으나 골은 비교적 좁은 편이 아니며 비탈진 곳의 논은 대부분 다랑논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밭작물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묘지2기를 지나 소나무 군락지를 따라 올라 무명봉을 넘으니 발백산까지 4.1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다시 그 소나무 군락지를 지나 푸르름이 짙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다시 묘지들과 시멘트 포장임도가 있는 안부에 도착을 한다.

 

묘지를 지나 시멘트 포장 임도를 건너 다시 능선으로 들어가니 키 작은 억새지대를 지나 소나무와 잡목이 어우러진 등로를 따른다.

잠시 더 오르니 등로 옆에 녹슨 안테나가 방치되어 있고 파란 나뭇잎이 나오는 등로를 따르니 다시 가파른 오르막 등로가 열리는데 그 등로에는 로프가 달려 있다.

잠시 더 가파른 등로를 따라 오르니 그곳에도 검은색 정상석 하나가 보이는데 해발고도 675미터인 구룡산이라 적혀있어 의아해 하는데 살펴보니 이곳은 경산에서 세운 소위 경산 구룡산이라 불려지는 봉우리이다.

우측으로 매남리 하산 갈림길이 있고 직진 방향으로는 발백산까지 3.5 Km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가 있는 이정표가 서 있는 곳이다.

 

정상석 위에 카메라를 세워 놓고 이정표에서 오랫만에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평이한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멋진 나무들이 등로를 가득 채운 아름다운 등로가 나타난다.

잠시 내려가니 등로 옆에는 십자가 형태를 한 제14처란 글귀가 보이고 그 등로 좌측으로는 높은 십자가에 예수가 매달려 있는 조형물이 보여 잠시 들려 본다.

그 십자가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니 바로 앞으로 조망이 열리고 저 멀리 구룡산이 보이는데 그 구룡산 아래에는 용성성당구룡공소와 천주교구룡공소 피정의 집이 내려다 보인다.

결국 이 십자가와 십자가 표식이 되어 있는 등로 옆 표식은 이곳 용성성당구룡공소에서 설치된 종교시설이 아닌가 생각되는 시간이다.

 

그 십자가가 있는 곳에서 다시 주등로로 올라 와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소나무 등로 옆에도 연이어 십자가 형태의 표석이 연이어 나타난다.

길게 이어지는 완만한 등로를 따라 소나무 사이를 걸어가는 시간이 참으로 즐겁고 기분 좋은 시간이다.

세상의 힘들고 어려웠던 순간들을 모두 잊고 그저 눈 앞에 펼쳐진 황홀한 자연만 생각하는 시간이기에 더욱 소중하게 다가오는 시간이 되지 않을 까 생각도 해 본다.

참으로 좋은 삶의 활력소를 얻어 보는 순간이기도 하다.

 

계속 이어지는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고도가 낮아질수록 등로는 더욱 푸르른 봄빛으로 변하고 화살표 하나가 방향을 알려주는 공터에서 우측으로 틀어 내려가니 다시 일반 등로와 같은 능선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그곳을 지나니 다시 푸르름이 적어지면서 일반 등로가 나타나고 조금 더 진행을 하니 봉우리 같지 않은 일반 등로 옆 나뭇가지에 612봉이란 이정판이 붙어 있어 사진 한장 남기고 물 한모금 마셔 본다.

 

그곳을 지나 다시 푸른 산하가 펼쳐진 등로를 따르니 바위 암릉이 짧게 나타나고 잡목 사이로 희미한 조망이 나타나는데 어디인지는 분간이 잘 안되고 있다.

다시 그 바위 암릉을 지나 진행하니 산벗과 철쭉이 피어 있는 등로로 바뀌고 조금 더 오르락 내리막 하다보니 벌목된 나뭇가지가 나뒹굴고 큰 나무에는 하얀 띠가 둘러쳐져 있는 장소에서 잠시 쉬며 준비한 김밥 한줄로 허기를 달래 본다.

 

김밥 한줄이지만 맛있는 식사를 하고 로프가 달려있는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한동안 고도를 낮추고 그렇게 어렵게 진행하니 발백산까지 2.3 Km 남아 있고 좌측으로 용성 매남리 하산 갈림 이정표가 서 있다.

경산시 용성면 매산리를 찾아 보니 매산리에 자료는 없고 용성에 대한 자료만 찾을 수 있었는데 미루어 보건대 용성이란 고장의 이름은 십중팔구 용산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용성면의 주산이 바로 용산이며 용산을 달리 용산성 혹은 용성이라고 부르기에 그러한데 용산은 남산면의 갈지리와 용성면의 곡신과 용산리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고도 400여 미터지만 이산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날이 오래도록 가물면 주위의 사람들은 이 곳 용산에 기우제를 올리는데 매년 때가 이르면 용산지 부근에 있는 당나무 아래에서 이웃하여 있는 용강사의 스님을 모셔다가 당나무 아래에서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 드린다.

이르자면 마을의 제사를 지내는데 용산지라 하는 곳은 용산 동북쪽에 있는 연못을 이르는 곳이다.

한편 마을 뒤쪽에 있는 용거랑은 용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꼬리로 후려친 곳인데 일백여 미터나 파여 있으며 용거랑을 용구렁이라고도 이르는데 이는 구렁이나 거랑이나 갈라져 후미지게 파여 있는 곳을 말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용성에는 용과 걸림을 보이는 마을 이름이 여럿 있는데 용산은 물론이고 용전, 용천이 이들 보기에 값하는 곳으로 용전 동쪽에 자리한 반룡사도 같은 경우라고 할 것이다.

고려 충렬왕 29년(1303)에 절을 지었는데 조선조 인조 무렵 계운과 명언이 다시 지었다고 전해오며 한 때 저 유명한 원응국사 같은 고승대덕이 거처하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정표를 지나자 마자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타나고 그 포장도로를 따라 우측으로 걸어 내려가니 저 아래쪽에 정상재와 그 정상재 지나 올라야 할 588.1봉과 발백산 마루금이 드높게 올려다 보인다.

그렇게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2차선 8번 도로가 지나는 정상재가 가깝게 내려다 보이고 그 도로 옆에는 청도와 봉화 방향 및 좌측으로 구룡마을 갈림 도로 표지판이 보인다.

정상리 구룡마을로 내려가는 표시가 되어 있는 빗돌도 보이는데 그 도로 건너편에는 벤취 쉼터가 있어 아주머니 몇분이 담소를 나누며 쉬고 있다.

 

이제 주위 풍경을 사진에 담으며 내려가 도로를 건너 벤취 쉼터 옆에 보이는 표지석으로 가 보니 경산에서 배출한 삼성현에 대한 설명을 적어 놓고 있는데 삼성형은 원효성사와 설총 그리고 일연선사로 되어 있다.

참으로 위대하신 성현들인데 모두 이곳 경산에서 배출하였다니 자랑스러워 해도 충분할 만한 인물들인 듯 하다.

주위 풍경을 사진에 담고 곧바로 도로 따라 잠시 더 걸어가니 등로는 좌측 능선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곳 정상재는 등로 좌측의 청도군 운문면 장성리란 마을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생각되는 고갯마루로서 포장도로가 좌측으로 꺽이는 곳에서 직진의 비포장 임도를 따라 조금 더 걸어가 좌측 능선으로 오르니 그곳에도 이정표 하나가 서 있다.

그 이정표 옆에는 경산시 경계숲길 종합안내도가 보이는데 살펴보니 경산시계 등산로가 아닐까 생각되는 곳이다.

우측으로는 경산시의 용성면이 좌측으로는 청도의 운문면이 자리하고 있다는 표시가 보이고 직진 방향으로는 발백산까지 2 Km 남아 있다는 표시가 반가운 시간이다.

 

정상재 이정표를 지나 완만한 등로를 따라 오르니 등로위에는 깊은 낙엽이 쌓여 있고 오를수록 더욱 가파라져 자꾸만 미끄러진다.

어렵게 한고비 올라 둔덕에 도착하니 다시 등로는 평이하게 이어지고 연두빛 자연속에 저 멀리 올라야 할 538봉과 588.1봉이 잡목 사이로 올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오르다 힘들어 잠시 발걸음 멈추고 뒤돌아 보니 612봉과 구룡산이 아스라히 멀어지고 있다.

다시 조금 더 오르니 안전목책과 로프가 나타나고 어렵게 538 봉우리로 오르니 아무 표식도 없어 정상부를 사진에 담고 저 앞으로 보이는 588.1봉으로 다시 오르기 시작한다.

로프가 달려있는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따라 오르니 드디어 588.1봉 삼각점이 박혀 있는 봉우리에 올라 물 한모금 마시며 목마름을 달래 본다.

 

다시 깊은 낙엽이 깔려 있는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완만하게 내려가고 안부 지나 한동안 무심으로 진행하다 보니 등로 옆에 금빛 붓꽃이 예쁘게 피어 있어 잠시 쉬면서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지금까지 진행하면서 많은 붓꽃을 만났지만 금붓꽃은 처음이기에 느낌이 남다르다.

금붓꽃은 전세계 중 우리나라에만 자라고 있는 야생화로서 땅속줄기가 옆으로 뻗으면서 새순이 나오며 새순이 나온 자리에는 수염뿌리가 생긴다.

잎은 뿌리에서 모여 나오고 줄기 밑은 오래되어 말라 붙은 잎으로 둘러 싸이며 위에 달리는 잎은 위로 곧추서며 길이는 15에서 20 Cm 정도이고 너비는 3에서 8 mm 정도이다.

꽃은 4에서 5월에 노란색으로 피는데 지름이 2 Cm이며 줄기 끝에 1송이만 달린다.

우리나라 중부지방 특히 경기도의 산과 들의 해가 잘 비치고 물이 잘 빠지는 곳에서 많이 자라며 이와 비슷한 식물인 노란붓꽃은 꽃이 줄기 끝에 2송이씩 달린다.

 

금붓꽃을 사진에 담고 조금 더 진행하니 또 다른 야생화인 제비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는데 너무 많이 피어 있어 그 고귀함이 사라져 버렸다.

다시 가파르게 이어지는 로프 등로를 타고 땀방울 흘리며 평이한 등로를 따르니 한동안 콧노래가 나올 정도의 마루금을 따른다.

그렇게 걷다 보니 다시 로프가 달려 있는 가파른 오르막 등로가 나타나고 암릉 바위 구간을 로프를 타고 오르니 지나온 마루금 방향으로 시원한 조망이 펼쳐져 있다.

살펴보니 바로 눈 앞에는 진달래가 활짝 피어 있고 방금 전 지나온 마루금과 정상재 지나 구룡산과 저 멀리 사룡산이 아스라히 펼쳐져 있고 그 사룡산 좌우측으로는 낙동정맥 마루금이 춤을 추듯 펼쳐져 있다.

잠시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아름다운 조망을 즐겨 보는 시간이다.

 

조망을 즐기고 뒤돌아 가니 바로 그 옆에 해발고도 675미터인 발백산 정상에 도착해 셀카 놀이를 하면서 사진 몇장 남겨 본다.

발백산이란 산 이름도 새롭고 한자로 되어 있는 산 의미도 새로워 인터넷에서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이는데 이 자료는 2010년 07월 17일자 발백산과 관련한 매일신문에 연재된 내용이었다

국가기본도가 머리카락발과 자를 써 발백산이라 적어 뒀으나 그게 뭣을 뜻하는지 도저히 알아먹기 힘들었는데 어르신들도 연유를 몰라 하긴 마찬가지였다.

인근 마을서는 대신 그걸 바리배기(바리박이) 또는 바리박산이라 불렀는데 산 북쪽 경산구룡 어르신이나 동편 봉하리 어르신이나 마찬가지였다.

저 멀리 서쪽 송림리서도 한 치 거리낌 없이 이 이름으로 통했는데 그 소리를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서 저런 희한한 명칭이 돌출한 것 아닌가 싶다.

그러고 보면 우리 땅이름은 참으로 많은 곡절을 겪어 왔고 지금도 그러는 중이기에 자꾸 그냥 넘겨 둬 될 일이 아니다.

몇몇 연구들을 참고해 짐작건대 우리 산이나 재는 대개 순수 우리말 이름으로 불렸는데 예를들면 시루를 닮았으면 시루봉, 매가 모여들면 매봉, 능선이 칼 같으면 칼등, 종지 같으면 종지봉, 갈모 형이면 갈모봉, 상여를 닮았으면 생이산, 위가 평평하면 마당재, 도마 같으면 도마재, 질매 닮았으면 질매재, 큰 고개면 한티 또는 큰티였다.

그 이름은 왜곡되거나 변질될 위험성도 극히 낮았는데 토박이들에 의해 대대손손 전승되기 때문이다.

외지인이 틀리게 기록해 유통시킬 위험성은 거의 없었고 가끔 고지도가 극소수 산이나 재 이름을 한자로 기록하는 경우가 있긴 해도 그럴 때 역시 한자의 뜻이 아니라 음이 활용됐다.

그러나 1918년 일제가 처음으로 전국 1대 50000 지형도를 완성한 걸 계기로 상황이 달라졌는데 세세한 땅이름까지 지도라는 문서에 실리게 된 것까지는 좋았으나 전문성 없는 사람들이 작업을 맡은 건 태생적 위협이었다.

우리말 소리를 제대로 반영할 수 없는 한자를 사용하다 보니 개똥산이 계룡산으로 바뀌기 십상이었다.

소리를 반영한 것인지 뜻을 번역한 것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려운 것도 있어 곳곳서 이해 안 되는 한자 이름들이 돌출하고 숱하게 현지 호칭과 상충하는 것은 그 결과일 터이다.

이렇게 됐을지라도 광복 후에나마 우리 발로 열심히 걷고 재조사해 우리말 이름을 회복시켰으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나 놀랍게도 90년 전 그때 기록된 산 이름 재 이름이 지금 지도에도 대부분 그대로 실려 있다가 20여 년 전부터 불어 닥친 등산 붐을 타고 급속히 확산돼 지도가 새롭고 강력한 지명 전승자로 부상한 것이다.

그런데도 현지인들은 이질적인 명칭을 거부하거나 바로잡으려 하지 못하여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을 새긴 정상석이 마을 뒷산에 세워져도 체념하여 스스로의 전승 능력에 자신감을 잃고 활자의 위력에 짓눌린 탓이다.

오히려 틀린 대로 따라하기 바빠할 지경으로 바람 풍해야 할 사람들까지 바담 풍하게 된 꼴이다.

이 모든 잘못의 책임은 일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는데 진정한 광복은 거창한 구호를 통해서가 아니라 전래명칭의 회복 같은 작으나마 실질적인 노력들을 통해서야 이룰 수 있는 것임을 망각한 것이다.

지금이라도 우리말 전래명칭을 되찾으려 애쓰는 게 옳을 터이나 국가는 여전히 관심이 없고 이제 한 달여 뒤면 광복절이고 다시 2주 후면 국치 100주년 되는 날이라고 많이들 목청을 높일 것이지만 그래봐야 효과라곤 일본을 속웃음 짓게 만드는 이상이기 어려울 것이다.

바리박산 정상은 뛰어난 전망대로서 지나온 사룡산에서 구룡산 지나 정상재 능선은 물론 사룡산에서 부산을 거쳐 흐르는 낙동정맥 능선까지 훤하다.

2007년에 정상석을 세운 청도산악회서 일대 잡목을 베어낸 공이 크다고 했으며 우리 땅 사랑을 북돋우기 위해서는 이런 노력이 다른 산 다른 능선 곳곳에도 필요할 것이다.

 

발백산 정상에서 조망을 즐기고 셀카놀이도 한 후 다시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니 멋진 등로가 나타난다.

잠시 평이하게 걸어가니 등로는 가파른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고 잠시 평이하게 이어지던 등로가 또 다시 가파른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나즈막한 안부로 내려갔다 다시 오르니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고 그곳에는 반룡산 갈림 삼거리 이정표가 보인다.

이곳에서 잠시 헷깔려 반룡산 방향으로 몇발자국 진행하다 뒤돌아 나와 정상적인 비슬기맥 산행을 이어가 본다.

 

반룡산 갈림 삼거리 이정표를 지나 다시 맥 잇기 산행을 진행하니 내리막 등로가 이어지고 곧바로 넓은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는데 살펴보니 최근에 개설된 듯 보인다.

비포장 임도로 내려가 좌우측으로 사진 한장 남기고 그 비포장 임도를 가로질러 능선을 타고 내려가니 방금 전 헤어졌던 비포장 임도가 다시 나타난다.

이제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타나고 다시 그 시멘트 포장도로를 가로질러 능선을 타고 내려가니 방금 전 헤어졌던 그 시멘트 임도가 다시 나타나며 이제부터 그 포장도로를 타고 우측으로 한동안 내려가 본다.

 

그 포장도로를 따라 한동안 우측으로 내려가니 포장도로 좌측으로 송림기점 0.5 Km란 키 작은 이정석이 서 있다.

그 표지석을 지나 진행하니 비포장 임도가 우측으로 크게 휘어지는 곳에서 마루금은 좌측 능선으로 이어지고 그 능선으로 올라 가 지나온 비포장 임도를 살펴보니 그 비포장 임도가 270도 돌아 나가고 있다.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 푸르른 능선으로 들어가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나즈막한 무명봉을 넘어 평이하게 진행하니 다시 큰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완만한 내리막 등로가 이어지고 곧이어 아름다운 소나무 군락지가 펼쳐진다.

등로 좌측으로 귀재와 부일리쪽 마을이 아름답게 내려다 보이고 조금 더 내려가니 잡목이 우거진 등로를 따르게 된다.

다시 평이하게 이어지는 소나무 군락지를 따르니 등로 좌측으로 수변관찰로 가는 방향의 이정표가 보이는데 그 이정표 위쪽에는 부일산촌생태마을 등산로가 보인다.

부일리쪽에 생태마을이 있는 듯 보이는 안내판과 등산로이다.

 

다시 이어지는 소나무 군락지와 푸르게 변해가는 관목을 따라 걸어가니 등로 옆에는 철쭉이 다시 예쁘게 피기 시작했다.

한동안 소나무 군락지를 지나니 또 다시 푸르게 변해가는 활엽수 등로가 나타나고 완만하게 내리막 등로로 내려간다.

내려가니 안부에 이정표가 서 있고 그곳을 지나 오르니 494.6봉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에 도착해 사진 몇장 남겨 본다.

 

그 494.6봉을 지나 다시 내려가니 더욱 푸르게 변해가는 산하에 하얀 철쭉이 피어 아름다운 자연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다.

마음 편안하게 걸어 진행하니 비석은 있지만 본봉은 보이지 않는 2개의 묘지를 지나 또 다시 소나무 군락지를 통해 걸어 본다.

이제 등로 좌측으로는 소나무 군락지가 우측으로는 잡목이 자라는 좋은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금새 새로 식재된 듯한 소나무 식재 구간도 지난다.

그곳을 지나 조금 더 걸어 진행하니 87번 송전탑이 나타나고 그 아래로 가 등로 좌측을 살펴보니 부일리쪽 좁은 논과 마을이 아름답게 내려다 보인다.

 

그 87번 송전탑에서 둥글레도 담은 후 다시 출발하니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반겨주고 곧이어 또 다른 송전탑이 나타나는데 번호는 확인하지 못한다.

그 송전탑을 지나자마자 등로 우측으로는 철조망이 쳐져 있어 살펴보니 임산물을 재배하는 장소인듯 보인다.

그 철조망을 따라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넓은 공터같은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는데 우측을 살펴보니 얼마 전 헤어졌던 시멘트 포장도로와 만나는 듯 보인다.

살펴보니 이곳이 도삼고개인듯 한데 도삼고개 오른쪽은 경산시 용성면이고 오른쪽은 청도군 운문면이다.

이곳에 서 있는 이정표에는 이제 등산로 종점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도삼고개의 드넓은 진디 공터를 가로질러 반대편 능선으로 오르니 사유지이니 출입을 금지한다는 경고판이 보이지만 임산물 채취에는 관심이 없기에 그냥 진행을 한다.

멋진 소나무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오르니 등로 옆에 바위를 지나 금새 송전탑에 도착을 해 등로 좌측의 산줄기를 살펴 본다.

발백산 지나 청도 운문 방향으로 이어지는 600미터급 산줄기에 위치한 무명의 산줄기라 생각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게 송전탑에서 잠시 조망을 즐기고 다시 출발하니 부드러운 등로 위에 하얀 철쭉이 피어나 산행의 피로를 달래주는데 잠시 후 게 등껍질을 닮은 바위 하나가 눈길을 잡는다.

다시 부드러운 등로를 타고 무심으로 걸어가니 완만하게 올라 508.4봉에 도착을 한다.

삼각점이 박혀있는 508.4봉에서 잠시 떨어져 가는 물 한모금 마시며 걱정을 해 보지만 용림 임도안부까지는 참아야 하기에 더욱 갈증이 심해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508.4봉을 지나 다시 완만하게 내려가니 작은 무명봉을 넘고 또 다시 등로는 완만한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한동안 이어지던 내리막 등로가 다시 짧게 올라 477봉을 넘는데 아무 표식도 없는 무명봉이다.

그 무명봉을 지나 내려갔다 또 다른 무명봉 하나를 넘으니 다시 멋진 소나무 내리막 등로를 따라 아름다운 비슬 마루금을 음미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한동안 그렇게 걸어가니 등로 앞에는 갑자기 잘 조성된 묘지 몇기가 보이는 장소에 도착을 해 묘지 위에서 진행 방향의 가척리 용림마을과 그 뒤로 펼쳐진 비슬지맥 마루금을 살펴 본다.

 

그 묘지지대를 내려와 걸어가니 이제 등로는 이 묘지들을 만들며 조성된 듯한 넓은 비포장 임도와 연결되는데 등로 우측에도 목책이 보여 잠시 다녀오니 그곳 역시 묘지를 보호하기 위한 목책이 잘 설치된 곳이다.

잠시 비포장 이도를 따라 완만하게 내려가니 또 다른 비포장 임도와 만나 새로운 비포장 임도를 따라 우측으로 내려간다.

한동안 내려가니 열려있는 차량 통제 차단막을 지나니 임도 우측으로는 대추나무인 듯한 과수원이 보인다.

 

그 과수원을 지나 내려가니 비포장 임도가 시멘트 포장 임도로 바뀌고 다시 비포장 임도와 시멘트 포장 임도로 번갈아 바뀌더니 시멘트 임도를 타고 저 앞으로 보이는 작은 연못과 폐가가 되어 가는 작은 마을 방향으로 완만하게 내려가 본다.

아마도 경산시 용성면 가척리라 생각되는 용림마을인데 자료가 없어 용성면 자료를 찾아 올려 본다.

미루어 보건대 용성이란 고장의 이름은 십중팔구 용산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이는데 용성면의 주산이 바로 용산이며 용산을 달리 용산성 혹은 용성이라고 부르기에 그러하다.

용산은 남산면의 갈지리와 용성면의 곡신과 용산리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높이는 400여 미터지만 이산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날이 오래도록 가물면 주위의 사람들은 이 곳 용산에 기우제를 올렸는데 매년 때가 이르면 용산지 부근에 있는 당나무 아래에서 이웃하여 있는 용강사의 스님을 모셔다가 당나무 아래에서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 드린다.

이르자면 마을의 제사를 지내며 용산지라 하는 곳은 용산 동북쪽에 있는 연못을 이른다.

한편 마을 뒤쪽에 있는 용거랑은 용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꼬리로 후려친 곳인데 일백여 미터나 파여 있고 용거랑을 용구렁이라고도 이르는데 이는 구렁이나 거랑이나 갈라져 후미지게 파여 있는 곳을 말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시멘트 포장도로 사거리에 위치한 용림마을의 폐가처럼 변해가는 민가를 살펴보니 사람은 살지 않지만 사람들의 옷가지들이 보여 들어가 확인하니 바로 옆에 수도가 보여 비어있는 물통을 채우고 몇모금은 물로 목마름을 달래 본다.

그렇게 비족한 식수를 채우고 나니 갑자기 부자된 기분으로 그 펴가된 민가 사이로 나 있는 비포장 임도를 타고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많은 묘지들이 잘 가꿔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 오고 그곳에서 잠시 뒤돌아 보며 방금 전 어렵게 내려 온 등로와 민가들을 조망해 본다.

이제 시간적으로 오후 6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기에 아마도 비오재에서 산행을 마쳐야 할 것 같다는 느낌으로 진행하는 시간이다.

 

잠시 그 묘지지대를 지나 오르니 등로는 여전히 비포장 임도로 이어지는데 그 비포장 임도가 젖어있고 많은 물구덩이들이 보여 이아하게 생각되는 시간이다.

그 비포장 임도 우측 앞 언덕에는 폐가가 된 작은 집이 보이고 등로 좌측 저 멀리에는 포도과수원과 복숭아 과수원이 보이는데 마침 도화가 예쁘게 피어 있어 어려움속에서도 발걸음을 멈춰 잠시 아름다운 복숭아 밭을 예쁘게 수놓고 있는 도화를 조망해 본다.

 

다시 비포장 임도를 따라 한동안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는 소나무와 잡목이 어우러져 있는 능선방향으로 이어지고 완만하게 이어지는 그 비포장 임도를 타고 한동안 걸어간다.

그렇게 오르니 저 멀리 무인산불감시 카메라와 산불감시초소가 올려다 보이고 곧이어 그 정상에 올라 주위 조망을 즐겨 본다.

지도를 살펴보니 저 멀리 북동 방향으로 방금 전 식수 부족으로 어렵게 내려 온 508.4봉과 477봉이 이제 아련한 추억의 저편으로 멀어지고 있다.

 

지나 온 방향을 살펴 본 후 산불감시초소를 살펴보니 이곳 역시 산불감시원이 상주하는 듯 보이는데 전화를 하는지 밑에 사람이 올라오던 말던 신경을 전혀 쓰지 않는 눈치이다.

그 옆 무인산불감시 카메라를 보호하는 철조망 옆에 351.4봉이란 준.희님 이정판이 붙어 있고 감사한 인사를 드려 본다.

지도를 살펴보니 이제 오늘 산행 날머리인 비오재도 얼마 남지 않음을 알 수 있는 거리이다.

 

351.4봉에서 잠시 더 머물며 주위 조망을 살펴보니 등로 우측 저 멀리 용성면 시간지 좌측으로 봉우리 하나가 솟아 있고 그 뒤로 경산시 방향의 작은 산줄기와 산군들이 펼쳐져 있지만 해가 서산으로 지면서 박무를 만들어 눈으로는 보이지만 사진으로는 보이지 않는 안타까운 시간이기도 하다.

이제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져 가는 시간에 351.4봉을 지나 다시 여름이면 잡목과 잡풀들로 인해 진행에 무척 어려움을 겪을 것 같은 난해한 등로를 타고 다시 능선으로 접어 들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잠시 능선으로 들어가니 다시 제멋대로 자란듯한 아름다운 소나무 군락지가 나타나고 그 소나무 군락지의 가운데로 나 있는 등로를 따라 무심으로 걸어 본다.

다시 계속 이어지는 소나무 군락지를 따라 완만하게 내려가니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가 다시 나타나고 그 임도를 따라 산행을 진행한다.

많은 선답자들이 띠지들이 길라잡이를 해 주는 등로를 따라 이제 조금은 빠르게 발걸음을 옮겨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조금은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며 진행을 하니 43번 송전탑을 지나고 평이한 등로를 따라 조금 더 진행을 하니 또 다른 송전탑인 44번 송전탑이 나타난다.

그 44번 송전탑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등로 우측의 용성면 좌측 능선 위로 하루를 밝혔던 둥근 해가 이제 서산으로 지기 시작한다.

예상도 못한 일출까지 만나면서 산행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으로 또 이렇게 하루를 마음껏 즐겼던 하루로 기억될 것이다.

 

그렇게 진행을 하니 둔덕을 지나 내일 올라야 할 마루금을 살펴보고 잡목과 잡풀이 우거진 등로를 내려가니 이곳 역시 묘지를 만들며 조성된 듯한 비포장 임도와 다시 만난다.

잠시 그 비포장 임도를 따라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육동배수지란 커다란 스테인레스 스틸 원형 물통이 보인다.

더욱 넓어진 비포장 임도를 따라 내려가니 바로 눈 앞에 밭이 보이는데 그 밭이 보이는 바로 앞에 철조망이 쳐져 있고 그 철조망 좌측 끝자락의 비어 있는 공간을 통해 그 비포장 임도를 벗어 난다.

 

그 철조망을 벗어나니 바로 앞에는 잘 갈아 놓은 밭이 보이고 이제 등로는 다시 만난 비포장 임도를 따라 좌측 내리막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간다.

그 밭이 끝나는 지점부터는 수많은 비닐하우스들이 보이고 그 비닐하우스 지나 내일 새벽에 올라야 할 비슬지맥 마루금이 빼꼼히 올려다 보인다.

잠시 더 내려가니 등로는 우측에 비닐하우스를 두고 비포장 임도를 따르고 저 아래쪽에는 흰색의 콘테이너 박스도 보이기 시작한다.

 

그 비닐하우스들을 지내 내려가 흰색 콘테이너 박스가 있는 갈림 삼거리에서 우측 비포장 임도를 따라 계속 걸어가니 등뒤쪽의 지나온 비슬지맥 마루금은 벌써 비닐하우스 저 멀리 멀어지고 있다.

계속 비포장 임도를 따라 내려가니 등로 우측으로 친환경(무농약) 농원인 들풀애농원 입간판이 보이고 바로 앞으로 2차선 지방도로가 지나는 비오재에 도착해 비슬지맥 첫 구간 산행을 무탈하게 마무리한고 배낭 정리를 해 본다.

 

배낭 정리를 하면서 산행 중 전화로 콜한 택시를 기다려 보는데 생각보다 늦어 이곳 비오재 도로 표지판을 사진에 담아 본다.

지나 온 비포장 임도도 뒤돌아 보고 내일 새벽 올라야 할 마루금도 살펴보며 택시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다시 한번 가척리와 비오재 또는 비리재를 인터넷에서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있어 정리를 해 본다.

가척리는 용성면 소재지에서 남동쪽으로 3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로서 세 면이 산으로 둘러싸였으며 남쪽만 트여 대종리와 연결되고 마을의 북쪽에는 용림지란 못이 있고 골자기 가운데 넓은 들판이 이루어져 있다.

1650년 무렵 연안 차씨가 처음으로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경주 이씨들이 많이 살고 있는 마을에는 비리재 혹은 비오재라고도 부르는 고개가 있으며 전해 오는 이야기인즉 옛날 한 부인이 고개를 넘어 간 남편을 기다리다가 죽어 까마귀가 되어 날아갔다고 한다.

가척리 도요지는 이른바 비리재에 자리하고 있는 옹기점의 점을 따다가 지었다는 점못에서 가척리 쪽으로 약 150미터 쯤 농로변의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는데 주로 옹기를 구운 요 즉 가마가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산기슭 단면을 통해서 볼 때 이곳 도요지는 옹기 편들이 4개의 지층을 이루고 있으며 지층의 규모는 폭이 20여 미터와 높이가 3미터 정도로 경사를 이용하여 만든 오름 식의 가마라고 하겠는데 흙은 대부분 적갈색의 끈끈한 점토질이며 이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약 250년에서 300년 전쯤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는데 높이 30센티 폭 20센티 크기의 완전한 옹기 1점이 영남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마을에 있는 당수나무는 신성시되고 있으며 정월 대보름만 되면 동제를 모신다.

자연 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는 다음과 같은데 가재와 가현리 및 가척동은 본래 자인군 하동면의 지역으로 가재 밑이 되므로 가재 또는 가현리와 가척동이라 하였다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통합에 따라 비리재를 병합하여 용성면에 편입이 되었다.

못안과 지내마을은 비리재 골을 타고 안쪽고을로 가면 큰 못이 있고 못안에 마을이 있는데 못안에 마을이 있다하여 못안과 지내로 부르게 되었으며 최근에 못안에는 젖소를 기르는 목장이 있으며 복숭아 산지로 개발되어 소득이 높은 마을이다.

문디밭골과 문동전곡 마을은 가재 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문둥이가 살았다는 데서 문디밭골이라 하였으나 언제 문둥이가 살았는지 알 수 없으며 다만 구전되어 올 뿐이다.

비리재와 비오재 및 비리현 그리고 비오현이란 마을은 용성면에서 육리로 넘어 오는 고개를 비오재라고 불렀다.

전설에 의하면 어느 부인이 이 고개를 넘어간 남편을 기다리다가 죽고 말았는데 그녀의 한이 까마귀가 되어 날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며 이 비리재 근처에 있는 마을 이름 역시 비리재라 부른다.

윗비리재과 생골 마을은 비리재 근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비리재라 하며 비리재 고개 밑에는 이 마을의 위쪽 부분을 윗비리재라 부르며 현재 10가구 가량의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다.

아랫비리재 마을은 비리재 근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비리재라 하며 비리재 고개 밑에 있는 마을 중 아랫부분을 아랫비리재라 하고 중간비리재 마을은 비리재 근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비리재라 하며 비리재 고개 밑에 있는 마을 중 중간 부분을 비리재라고 부르고 있다.

 

기다리는 동안 택시가 도착을 하고 다시 경주의 우라리까지 꼬불꼬불한 구절양장 도로를 달려 어둠이 내려 앉은 시간에 어렵게 애마를 회수한 후 금호읍으로 가 하루의 피로를 풀며 일찍 잠에 취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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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갑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