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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간제3차(미완성 완료)/백두대간 제3차 산행후기

3450온누리산악회 제5기 백두대간 제2차 지리산 천왕봉(중산리)에서 벽소령(음정마을)까지 산행후기

by 칠갑산 사랑 2014.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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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경상북도 함양군과 경상남도 산천군 그리고 하동군의 백두대간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 2014년 05월 23일과 24일 (금요 무박 토요일 산행)

산행날씨 : 맑고 화창했지만 여름처럼 무더워 산행에 고생을 했던 날씨

산행온도 : 영상 16도에서 영상 28도

산행인원 : 3450온누리산악회 제5기 백두대간 종주대 37명과 함께

산행코스 : 중산리탐방지원센터-법계교-중산리야영장 빗돌-허만수추모비-중산리야영장 이정표(해발 637미터, 천왕봉 5.4 Km)-통천길 아치-이정표(중산리 0.7 Km, 로타리대피소 2.6 Km와 장터목대피소 4.6 Km)-칼바위-장터목대피소 갈림 삼거리 이정표(중산리 1.3 Km, 장터목대피소 4.0 Km, 천왕벙 4.1 Km)-망바위 이정표(해발 1177미터, 중산리 2.4 Km, 천왕봉 3.0 Km)-문창대 우량국-헬기장-로타리대피소 이정표(중산리 3.4 Km, 천왕봉 2.0 Km)-로타리 약수터-법계사 이정표(중산리 3.4 Km, 천왕봉 2.0 Km, 법계사)-전망바위-개선문 이정표(중산리 4.6 Km, 천왕봉 0.8 Km)-이정표(중산리 4.8 Km, 천왕봉 0.6 Km)-천왕샘 이정표(중산리 5.1 Km, 천왕봉 0.3 Km)-철계단과 바위계단-이정표(중산리 5.4 Km, 장터목대피소 1.7 Km)-지리산 천왕봉(1915봉)-자갈공터 아침식사-칠선계곡 갈림 삼거리-통천문-이정표(천왕봉 0.5 Km, 장터목대피소 1.2 Km)-이정표(천왕봉 1.1 Km, 장터목대피소 0.6 Km)-제석봉 전망데크-제석봉(1806봉) 고사목-장터목대피소(천왕봉 1.7 Km, 백무동 5.8 Km, 중산리 5.3 Km, 세석대피소 3.4 Km)-장터목-이정표(천왕봉 2.1 Km, 세석대피소 3.0 Km)-연하봉(1730봉) 이정표(장터목대피소 0.8 Km, 세석대피소 2.6 Km)-헬기장-해발 1678미터 이정표(장터목대피소 1.4 Km, 세석대피소 2.0 Km)-삼신봉-이정표(장터목대피소 2.0 Km, 세석대피소 1.4 Km)-촛대봉(1703봉) 이정표(장터목대피소 2.7 Km, 세석대피소 0.7 Km)-세석평전 습지대 관찰로-세석갈림길1557미터) 이정표(장터목대피소 3.4 Km, 거림 6.0 Km, 백무동 6.5 Km)-세석천-세석대피소-세석이정표(장터목대피소 3.4 Km, 벽소령대피소 6.3 Km)-헬기장-영신봉(1651봉) 이정표(세석대피소 0.6 Km, 벽소령대피소 5.7 Km)-계단지대-이정표(세석대피소 1.4 Km, 벽소령대피소 4.9 Km)-칠선봉(1576봉) 이정표(세석대피소 2.1 Km, 벽소령대피소 4.2 Km)-전망바위-이정표(세석대피소 2.7 Km, 벽소령대피소 3.6 Km)-이정표(세석대피소 3.2 Km, 벽소령대피소 3.1 Km)-선비샘(선비샘의유래) 이정표(세석대피소 3.9 Km, 벽소령대피소 2.4 Km)-덕평봉(1522봉)-이정표(세석대피소 4.6 Km, 벽소령대피소 1.7 Km)-고사목 공터-비포장 임도 이정표(세석대피소 5.2 Km, 벽소령대피소 1.1 Km)-이정표(세석대피소 5.7 Km, 벽소령대피소 0.6 Km)-벽소령대피소 이정표(세석대피소 6.3 Km, 연하천대피소 3.6 Km, 의신마을 6.8 Km, 음정함양 6.7 Km)-비포장임도 이정표(벽소령대피소 0.3 Km, 음정 6.4 Km)-이정표(벽소령대피소 1.6 Km, 음정 5.1 Km)-이정표(벽소령대피소 2.1 Km, 음정 4.6 Km)-연하천대피소 갈림 이정표(벽소령대피소 2.6 Km, 연하천대피소 3.2 Km, 음정 4.1 Km)-이정표(벽소령대피소 4.4 Km, 음정 2.3 Km)-이정표(벽소령대피소 4.9 Km, 음정 1.8 Km)-차량차단 바리게이트-능선 등로-정수장-음정마을 이정표(벽소령대피소 6.7 Km, 음정)-산행종료-남원시 인월산채식당에서 뒷풀이 후 귀경

산행거리 : 약 23.00 Km

산행시간많은 사진 찍고 여유롭게 꾸준한 속도로 11시간 50분 (03시 25분부터 15:15분까지)

교통편백두대간 제5기 40인승 전용버스 이용

 

백두대간이란 ???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동쪽 해안선을 끼고 남으로 맥을 뻗어 내리다가 태백산을 거쳐 남서쪽의 지리산에 이르는 국토의 큰 줄기를 이루는 산맥을 백두대간이라 부르는데 이 산줄기를 이루는 주요 산은 백두산(2750봉)을 기점으로 포태산(2289봉), 두류산(2309봉) 등 해발고도 2000미터 내외의 고봉으로 이어져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을 양분한다. 

산줄기는 다시 남쪽으로 차일봉(1742봉), 철옹산(1085봉), 두류산(1324봉), 추가령(752미터)으로 이어지며 또한 동해안을 끼고 금강산(1638봉), 진부령(529미터), 설악산(1707.9봉), 오대산(1563.4봉), 대관령(832미터), 두타산(1352.7미터)을 거쳐 태백산(1566.7봉)에 닿는다.

여기서 방향을 남서쪽으로 돌려 소백산(1439.5봉), 죽령(689미터), 이화령(548미터), 속리산(1058.5봉)으로 뻗어내리고 이로부터 추풍령(221미터), 황악산(1111.4봉), 삼도봉(1177봉), 덕유산(1614봉), 지리산(1915봉)으로 이어지면서 산줄기는 끝이 난다.

신경준의 산경표에 따르면 한국의 산맥은 1개 대간과 1개 정간 및 13개 정맥 체계로 되어 있고 이러한 산줄기(산경)의 개념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잘 나타나 있다.

즉 제일 굵은 선으로 표시한 것은 대간이고 두번째 굵은 선으로 표시한 것은 정맥이며 세번째 굵은 선으로 표시한 것은 지맥 그리고 기타는 골짜기를 이루는 작은 산줄기 등으로 나타냈다. 

이렇듯 대간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 산줄기들은 지역을 구분짓는 경계선이 되었으며 삼국의 국경과 조선시대의 행정경계를 이루었다.

따라서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자연적 상징이며 동시에 한민족의 인문적 기반이 되는 산줄기라고 할 수 있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다시 시작한 백두대간 산행의 의미를 생각하며 옛 추억을 찾았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후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단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이 야심한 밤에 어둠을 뚫고 베낭 하나 등에 멘 후 산행을 위해 떠나는 산객의 마음은 무엇이고 또 그 산객의 마음을 빼앗은 산길은 무엇인지 많은 생각을 하면서도 그 산길이 지리산이기에 더욱 특별한 밤이 되는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이제 새로 시작한 백두대간 산행을 위해 나서는 두번째 산행후기를 정리하는 이 시간까지도 그리운 지리산에 안겨 행복했던 어제의 시간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는 것은 산객에 있어 어떤 의미를 잦는지 알다가도 모를 시간이다.

 

그렇게 많이도 올랐고 오르면서 많이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지리산이지만 오르면 오를수록 더욱 모르게 되는 산이 바로 지리산이기에 오늘 밤 이렇게 밤을 지새며 달려가는 이 산객의 마음이 조금은 위안이 되는 시간이길 바래보기도 한다.

 

산행하기 전 일주일 동안 예기치 않은 사업 때문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지리산을 찾기 하루 전부터 몸이 좋지 못해 참여 포기까지 생각했지만 그토록 그리웠했던 지리산이기에 병원까지 다녀오며 몸 관리에 최선을 다해 오르는 천왕봉 정상에서의 시간은 그래서 더욱 특별한 시간이 되였다.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고 해서 붙여진 지리산에서 우리 백두대간 종주대들도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백두대간이 중단된 진부령까지 무탈하게 걸어 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사진 한장 남겨 본다.

또 백두대간의 맥에서 흘려왔다고 하여 두류산이라고도 불렸던 지리산은 보이는 것처럼 모두 아름다운 것만 있었던 산은 아니였다.

대한민국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지리산은 예로부터 영산으로 추앙 받아 왔고 이에 따라 고찰이 많으며 근대와 현대의 문화재도 많이 남아 있는 중요한 산이다.

지리산은 또한 쫓겨온 자들의 땅이었는데 항일의병과 동학혁명군 및 항일빨치산 그리고 한국전쟁의 빨치산도 이곳에 몸을 숨겨 역사적으로 잊혀짖 않을 아주 중요한 산으로도 알려져 있다.

한발 두발 걸으며 많은 이야기 나누다 보면 어느새 친형제보다도 더 친한 산우가 되어 산행 뿐만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좋은 친구로서 함께 하는 사람들로 기억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몸도 좋지 않은데 흔들리며 들려오는 차량 소음으로 인해 제대로 된 잠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 보니 어느새 우리 대간 종주대를 태운 버스는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의 20번 도로를 지나 법계교가 있는 중산리야영장까지 올라가고 어둠을 밝히는 등불 몇개가 흔들리는 중산리탐방지원센터 앞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려 날씨를 살피니 생각보다 춥지 않은 기온에 일단 안도를 해 본다.

산행 준비 후 새벽 3시 25분 드디어 줄을 맞춘 종주대가 지리산 천왕봉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도로 좌측에 지리산 국립공원안내도를 지나 곧바로 법계교가 나타난다.

그 법계다리를 건너니 도로 우측에 중산리 야영장 빗돌이 서 있고 좌측에는 허남수추모비도 보인다.

그 바로 앞에는 중산리야영장 이정표가 서 있고 살펴보니 지리산 천왕봉까지 5.4 Km란 거리 표시가 이 산객의 두다리의 힘을 빼앗는다.

이제 종주대들은 모두 그 이정표 좌측으로 나 있는 도로를 따라 천왕봉 방향으로 출발을 하고 이 산객과 두어명의 후미만 남아 사진 몇장 남기고 종주대를 따라 출발을 해 보는 시간이다.

 

 

천천히 걸어 오르니 전에는 보지 못했던 하늘로 통하는 길이란 뜻을 가진 통천길이란 아치를 통과하고 잘 정비된 등로 양쪽으로 자라고 있는 키 작은 산죽 등로를 타고 아직은 여유롭게 걸어 보는 시간이다.

잠시 더 오르니 벌써 중산리에서 0.7 Km 지나왔고 로타리대피소까지 2.6 Km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가 되어 있는 이정표를 지나 현위치 칼바위란 탐방로 안내판이 서 있는 칼바위에 도착해 어둠속에 보이지 않는 칼바위의 전설을 생각해 본다.

칼바위의 형상이 어둠속에 보이지 않아 오래 전 담았던 사진으로 대체해 본다. 

칼바위는 앞쪽에서 보면 그저 평범한 바위처럼 보이지만 반대편으로 돌아가면 바위의 모습이 칼날을 세운 것처럼 날카롭게 보여 왜 칼바위라고 부르는지 고개가 끄덕여지는데 이 칼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등극한 후 자신을 노리는 사람이 지리산 중턱 큰 바위 밑에서 은신 중이라는 소문을 듣고  한 장수에게 그를 찾아 목을 베어오라고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장수가 지리산을 헤매다 이곳에서 2km 떨어진 곳에 이르러 큰 바위 밑에서 공부하는 사람을 발견하여 칼로 치니 바위는 갈라져 홈바위가 되고 칼날은 부러지며 이곳까지 날아와 꽂히면서 하늘을 찌를 듯한 형상의 바위로 변하였다고 하여 칼바위라 부른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진실이던 아니던 간에 이렇게 바위 하나에도 멋진 전설을 만들어 놨으니 지리산이 우리 민초들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지 미뤄 짐작이 가는 바위의 전설이기도 하다. 

 

 

칼바위를 지나 걸어 오르니 다시 속이 매스껍고 좋지 안하 준비한 약을 먹고 조금 더 쉬었다 천천히 걸어 본다.

견딜만 하지만 과연 오늘 완주나 가능할련지 걱정이 앞서는 시간이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상 조심하며 오르면 충분할 것 같다는 희망도 가져 본다.

그렇게 다시 제일 후미로 쳐져 천천히 오르니 금새 장터목대피소 갈림 삼거리 이정표가 나타나는데 늘 백두대간 시작을 하면서 이제 3번째 그리고 오래 전 딱 한번 이곳 중산리를 통해 장터목대피소로 올랐다 천왕봉에서 다시 중산리로 내려왔던 추억을 떠 올려 보며 산친구에게 부탁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늘 지리산 서부능선만 고집을 하였는데 앞으로는 지리산 동부 능선이 그리워 그곳에서 한동안 시간을 보낼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곳 갈림 삼거리 한쪽에 어둠을 밝히는 이원규시인의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이란 싯구가 있어 옮겨 본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 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 노을을 품으려거든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시려 거든

불일 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세석 평전의 철죽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 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 만 오시라

 

진실로 진실로 지리산에 오시려 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 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 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 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약을 먹고 잠시 쉬었다 오르니 견딜만 하고 급하지 않게 천천히 오르니 산행 출발 후 1시간 20여분이 지난 세벽 4시 45분에 망바위에 도착해 사진 한장 남겨 보지만 주위는 여전히 어둠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사진에 망바위 모습을 담기 어려움을 느낀다.

이곳 중산리를 통해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다 보면 수많은 멋진 바위들이 많은데 유독 이곳 망바위에 이름이 붙어 있어 자료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되어 있다.

망바위는 마치 경계병처럼 망을 보고 있는 듯한 모습 때문에 이름이 지어졌다 하는데 조망이 그만큼 좋다는 의미라고도 하며 망바위에 오르면 영신봉에서 시작된 낙남정맥 산줄기가 등로 좌측 저 멀리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오늘은 어둠과 박무로 인해 보이는 것이 없으니 사진 한장 남기는 것으로 만족하고 다시 출발한다.

 

 

망바위를 지나니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고 진행하는 등로 앞으로 이름은 없지만 멋진 모습을 하고 있는 많은 바위들을 지난다.

조금 더 진행하니 등로 좌측 나뭇가지 사이로 연하봉에서 중산리 방향으로 내려가는 이름없는 산줄기 하나가 보이고 그 넘어 희미하게 영신봉에서 시작하는 낙남정맥 마루금이 옛 추억을 건네며 잠시 이야기 하자며 발걸음을 붙잡는다.

나무계단을 올라 길게 이어진 나무데크를 따라 걸어 진행하니 등로 좌측에 문창대우량국이란 인공구조물이 보이는데 등로 우측 바로 위에 문창대가 있음을 알려주는 구조물이다.

법계사 앞 헬기장을 지나 암봉에 최치원이 법계사에 머물 때 책을 읽고 시를 짓고 명상에 잠겼던 문창대가 있는데 

문창대의 넓은 반석 앞에는 고운 최치원선생이 지팡이와 짚신을 놓았던 곳이라는 의미의 고운최선생임리지소란 글귀가 새겨져 있으며 문창은 최치원 선생의 시호이다.

참 많이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지리산인데 이렇듯 많은 부분을 아직도 알지 못하고 있으니 앞으로 또 얼마나 더 올라야 그 지리산을 알 수 있을지 그리움만 커지는 시간이다.

그 문창대우량국을 통과해 돌계단을 타고 바위지대를 넘어 본다.

 

 

 

계속 이어지는 돌 계단을 따라 바위지대를 지나니 중산리에서 3.0 Km 지났다는 이정목을 통과하고 잠시 평이한 등로를 따르니 금새 헬기장에 도착해 위로 올려다 보이는 지리산 천왕봉을 조망해 본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아직 피어 있는 붉은 철쭉꽃 넘어 천왕봉이 아직도 올라야 할 고도가 많이 남아있다며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여유있게 오르라 말하는듯 하다.

등로 좌측으로는 백두대간 마루금인 지리산 주능선이 아련하게 보이고 우측으로는 써리봉에서 갈라지는 구곡능선이 톱날봉을 이루며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헬기장을 니나 출발하려니 헬기장 우측의 동쪽 하늘이 붉게 변해지지만 두꺼운 구름으로 인해 일출을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같은 시간 법계사 지나 전망바위에 오른 선두에서 아쉽지만 또 하루의 붉게 떠오르는 일출을 담았기에 한장 빌려와 본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만날 수 있다는 지리산 일출을 오늘은 만나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더 자주 만날 수 있을 기회가 있을 것이라 믿어 보는 아침이다.

이제 조금씩 몸이 좋아지며 처음 산행을 시작할 때 보다는 편안하지만 내장의 뒤틀림은 여전해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아무 것도 먹지 못함이 안타까운 시간이다.

 

 

헬기장을 지나 능선으로 접어드니 금새 등로 옆에 멋진 바위가 보이고 이름을 붙여보려 애쓰지만 당장 떠오르는 이름이 없어 다음 기회로 미뤄본다.

또 다른 바위가 석문을 만들어 놓고 이 산객을 기다리고 그렇게 주위 바위와 막 피었다 떨어지기 시작한 산철쭉을 친구삼아 전진하니 로타리대피소에 도착을 해 잠시 숨고르기를 해 본다.

참으로 많은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이기에 잊을 수 없는 대피소 중 한곳이 된 로타리대피소, 처음 인연은 2007년 2월 몸시도 춥고 많은 눈이 쌓여있던 시기에 얼었던 손을 호호불며 취사장에서 먹히지 않는 라면을 끓여 허기를 달랬던 시간이였는데 벌써 4번의 인연을 더 만들었고 앞으로도 또 얼마나 많은 인연을 더 만들어야 할지 모르기에 한참을 둘러 본 후 배낭메고 출발한다.

 

 

이곳 로타리대피소는 순구류를 통해 중산리로 하산하는 등로와 오늘 이 산객이 타고 올라 온 칼바위 능선을 타고 중산리로 하산 할 수 있는 등로가 있으며 어느 등로를 타고 내려가도 한두시간이면 중산리에 도착 할 수 있는 거리와 등로이다.

이제 천왕봉까지의 거리는 2.0 Km 이지만 오르막 경사가 급하고 계단과 바위가 많아 시간은 생각보다 꽤 많이 걸릴 것이다.

잠시 오르니 등로 옆에 약수물이 흐르고 물 한모금 마신 후 다시 걸어 전진하니 늘 반겨주던 법계사 일주문이 사라지고 안내판만 세워졌는데 읽어 보니 2013년 3월 10일 태풍으로 인해 일주문이 쓰러져 그 남아있는 재료들은 비를 맞지 않토록 포장으로 덮어둔 채로 현재 불사를 중비 중이라는 글이 쓰여있다.

지리산 법계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해발 1450미터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기 544년(신라 진흥왕5년)에 인도에서 건너오신 연기조사께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면서 창건하였다.  법계사가 흥하면 일본의 기운이 쇠퇴한다는 전설 때문에 고려 말 왜적 아지발도에 의해 소실되었던 것을 1405년(조선 태종 5년) 을유년에 벽계정심선사께서 중창하였으나 그 후 임진왜란과 1910년 한일합방 때 또 다시 왜인에 의해 불타고 1938년에 청신녀 신덕순씨에 의해 중건되었으나 6.25동란 때 다시 화재를 당하여 그간 초라한 초옥으로 3층 석탑을 지켜오다가 1981년 조재련, 조재화, 조재영 불자와 신도들의 발원으로 현재의 대웅전과 산신각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 12교구 본사의 해인사의 말사이다.

유물로는 부처님 진신사리탑인 법계사삼층석탑만이 보물 제 473호로 지정되어 남아 있다.

종교를 떠나 소중한 문화재의 일부분이 태풍으로 쓰러졌다는 사실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다시 법계사를 출발한다.

 

 

 

법계사를 지나 다시 오르막 등롤르 타고 오르니 지금까지 보다는 속이 편안해지면서 발걸음도 빨라지지만 너무 급하게 무리해서 진행할 필요가 없기에 조금은 여유있게 페이스를 조절해 본다.

잠시 더 오르니 자주 일출을 만났던 전망바위에 올라 오늘은 일출 대신 방금 전 우회하며 지나 온 문창대와 이어진 등로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등로 우측으로는 오늘 새벽 우리 종주대가 처음 출발한 산청의 중산리 계곡이 깊은 골짜기를 이루며 이어져 있고 그 뒤 저 멀리에는 희미한 박무속에 낙남정맥 마루금인 삼신봉 마루금이 아련히 다가와 있다.

 

 

 

등로 좌측으로 낙남정맥 마루금도 다시 한번 바라보고 전망바위를 지나 오르니 철쭉꽃이 화사하게 피어 힘들어하는 산객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있다.

그렇게 조금 더 힘겹게 오르니 등로 우측에 거대한 전망바위가 나타나고 이제는 많은 후미 산우님들과 잠시 추억 한장 남기고 다시 천왕봉을 향해 바쁜 발걸음을 옮겨 본다.

이제부터 바위와 철쭉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철쭉꽃 터널을 따라 가파르게 오르는 구간으로 철계단을 지나 오르니 지금까지 보다 더 아름다운 조망이 펼쳐져 있다.

한동안 철쭉과 철쭉꽃 터널을 따라 오르다 힘들면 잠시 뒤돌아 지나온 등로를 조망하다 보니 금새 개선문에 도착해 함께 진행하는 산우님들 추억 한장 담아 드린다.

천왕봉 남서쪽의 통천문과 함께 천왕봉을 오르는 관문으로 여겨지는데 통천문처럼 신비스럽고 위용을 갖춘 모습은 아니지만 마치 개선하는 기분이 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과거에는 오른쪽은 물론 왼쪽에도 비슷한 높이의 바위기둥이 서 있었지만 지금은 왼쪽의 기둥은 붕괴되어 없어지고 오른쪽에만 높이 10미터의 문설주가 있다.

하늘과 이어주는 의미이든 통하는 길이라는 뜻의 통천문과 닮아 있으면서도 다른 형태의 개선문은 통과하는 산객들에게 곧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는 희망의 문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제 지리산 천왕봉까지의 거리는 단지 800미터이지만 오늘 산행 중 최고의 난코스이기에 다음 단단히 먹고 천천히 출발한다.

조금 오르니 지리산 천왕봉 정상이 빤히 올려다 보이는데 금새 오를 것 같지만 아직도 제법 남아 있음에 온 몸의 힘이 빠지는 느낌이지만 등로 옆에 피어난 고운 철쭉이 용기를 주고 있다.

조금 더 오르니 이제 고도가 많이 높아졌는지 철쭉이 피지도 못하고 봉우리가 져 만개되려만 시간이 더 필요한듯 하다.

이제 천왕봉까지 600미터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통과한 후 우측에 거대 석문 모양의 돌기둥을 지나니  이제 가간히 붉게 피어난 진달래도 보이기 시작하며 고도 차이에 따른 식물 식생의 변화를 실감하게 만든다.

돌 계단을 따라 더 오르니 등 뒤로 아름다운 산하가 펼쳐져 있고 금새 천왕샘에 도착을 하는데 그 샘 좌측 옆에 아침 햇살을 받으러 나와 여유롭게 아침 식사를 즐기는 다람쥐 한마리와 잠시 짧은 만남을 가져 본다.

 

 

 

천왕샘에서도 조금씩 흘러 내리는 물줄기를 따라 물 한모금 마시기 위해 받아 보지만 오를때마다 조금씩 그 흐르는 물의 양이 줄어들고 있음에 안타까운 시간이기도 하다.

어렵게 바위 사이를 통해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나뭇가지 하나를 덧대 어렵게 물 맛을 보는데 그 물 맛도 모를 정도로 몸이 안좋은지 아니면 천왕샘의 물 맛이 변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해발고도 1800미터에 있는 남강의 발원지인 천왕샘, 여기에서 솟구친 물은 덕천강을 따라 흘러 남덕유산 참샘을 발원지로 하는 경호강과 남강댐에서 합류하여 남강을 이루어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6미터 정도의 바위 밑에서 방울방울 흘러 모인 샘물로 1977년 덕산 두류산악회에서 석공을 동원해 물이 고일 수 있도록 홈을 파놓았지만 가물 때는 쉽게 말라버리기 일쑤이고 그나마 바위에 졸졸 흐르는 정도의 적은 양이지만 남강의 첫물로서 강이 되고 바다가 될 그 시초이기에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실제로 남강의 발원지라 적은 안내판이 옆에 보이지만 흐르는 양을 보면 충분한 설명이 되지는 못하는 실정인 듯 보인다.

 

 

이제 지리산 천왕봉까지의 거리는 300미터로 줄어 들었지만 코가 등로에 닿을만큼 급경사 오르막이기에 긴장을 놓기엔 이른 시간이다.

자갈 등로를 타고 올라 길게 이어진 새로 세워진 나무계단을 따르니 다시 돌계단으로 등로가 바뀌는데 등로 주위엔 철쭉보다는 붉은 색을 띠고 있는 진달래가 이제서 반겨주기 시작한다.

거대한 바위 사이로 나 있는 계단을 지나 오르니 드디어 이정표가 있는 지리산 정상의 천왕봉에 도착을 하고 어렵게 증명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지리산 천왕봉은 남한 내륙의 최고봉으로 3대가 덕을 쌓아야 천왕 일출을 볼 수 있다는 속설과 더불어 반드시 관문을 거쳐 들어오도록 하고 있는데 동쪽으로 개천문과 남서쪽으로는 통천문을 두어 이들 관문을 경건한 마음으로 거쳐 들어오게 하고 있다

거대한 암괴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으니 서쪽 암벽에는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라는 의미의 천주라는 음각 글자가 새겨져 있다.

천왕봉에 지금의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시작되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기 전에는 경남인의 기상이 있었고 그전에는 남명 조식 선생의 하늘이 울어도 산은 울리지 않는다는 뜻의 만고천왕봉 천명유불명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서산대사는 금강산과 구월산 및 묘향산과 더불어 지리산을 평하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장엄한 산이라 했다. 
최고봉의 이름이 천왕봉인 것도 범상함을 더 하는데 천왕은 제정일치시대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군장을 달리 부르던 말로서 천왕봉은 군장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신령스러운 곳이었던 셈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천왕봉의 서쪽 암벽에는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란 뜻의 천주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천왕봉을 오르는 서쪽 방향의 입구에는 통천문, 동쪽 방향에는 개천문도 있다.

이곳 지리산 천왕봉은 많이도 올랐었던 곳인데도 오르면 오를수록 더욱 새롭게 가슴에 남겨지니 이것 또한 병이 아닐까 생각해 보는 시간으로 앞으로도 그리우면 훌쩍 다녀 갈 수 있는 곳으로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래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곳 지리산 천왕봉은 또한 중봉과 하봉을 지나 웅석봉과 백운산을 통과한 후 진주의 진양호에서 그 맥을 다하는 웅석지맥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잠시 사진 몇장 남기고 주위 조망을 즐겨보는 시간이다.

제일 먼저 방금 전 이 산객과 종주대들이 어렵게 올라 온 칼바위 능선을 따라 중산리를 살펴 본다.

부드러운 능선이 법계사 있는 곳에서 잠시 안부를 이루고 곧이어 봉우리로 올라 부드럽게 이어지더니 능선 우측 아래로 산의 중턱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중산리 펼쳐 놓았다.

그 넘어 저 멀리에는 영신봉에서 시작해 낙동강에서 그 맥을 다하는 낙남정맥의 삼신봉 줄기가 희미한 박무속에서도 그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며 당당하게 서 있다.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에 한동안 서서 많은 사진을 남겨 본다.

 

 

서쪽으로는 이제부터 종주대가 걸어야 할 백두대간 지리산 구간 주능선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지만 박무로 인해 시야가 제한을 받고 있음이 아쉬운 시간이다.

바로 앞 제석봉과 연하봉을 지나 좌측으로 촛대봉이 우뚝하고 그곳을 지나면 우측으로 방향을 바꿔 서쪽 저 멀리 반야봉을 만들고 있다.

반야봉을 지나니 그 좌측에 노고단이 보이지만 그 뒷쪽에 보여야 할 마녹대 능선은 박무속에 숨어 산객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다.

그리우면 직접 올라 그 속살을 만져보면 될 것이기에 오늘 아쉬움이 다음에 더 큰 희망으로 변해 있기를 바래도 보는 시간이다.

바로 발 아래에는 아침상을 펴고 있는 온누리산악회 산친구님들의 분주한 풍경도 눈에 들어 온다.

 

 

북쪽으로는 중봉과 하봉을 지나 촛대봉능선이 아련하고 그 뒷쪽으로 두류능선이 아름답게 펼쳐져 이 산객을 부르고 있다.

앞으로 자주 내려 와 그 속살과 대면을 자주 해 보고 싶은 동부능선의 일부분이기에 저 능선들을 타고 바라보는 지리산 천왕봉의 모습도 자주 올리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저 멀리 희미하게 함양의 법화산과 삼봉산 줄기도 이 산객을 부르며 다시 한번의 조우를 조르고 있다.

오도재 도로가 보고 싶어 무작정 내려가 하룻밤 지새던 추억에 피식 웃어 보지만 저 삼정산을 오르지 못하고 서울로 복귀했던 시간에 쓴 웃음도 지어보며 아쉬움을 달래 보는 시간이다.

 

 

지리산 천왕봉 정상에서 조망을 즐기면서 많은 풍경 사진을 담고 그 아래 자갈 공터로 내려가니 종주대들이 아침상을 펴 놓고 함께 식사를 즐긴다.

식사 후 다시 주위 풍경을 사진에 담고 서쪽 방향으로 주능선을 타고 걸어가 본다.

걱정을 하면서 아침 식사 후 다시 약을 먹은 후 출발하기에 몸이 좋아지기만 기대할 뿐 특별히 할 것이 없으니 그저 안정되길 바랄 뿐이다.

큰 바위를 넘어 곧바로 등로 우측으로 막아 놓은 칠석계곡 하산 등로를 아쉬운 눈길로 바라보고 진달래꽃을 감상하며 가파른 내리막 등로로 내려가니 구상나무와 고사목이 다시 산객의 발길을 붙잡고 늘어진다.

가파른 계단을 타고 내려가며 지리산 주능선이자 백두대간 마루금을 조망하니 환상일 뿐이다.

다시 바위지대를 넘어 진행하니 금새 통천문을 만나 사진 몇장 남기며 그 의미를 생각해 본다.

통천문은 천왕봉을 지키며 하늘과 통한다는 마지막 관문으로 동굴 입구에 옛날 필적으로 통천문이란 한자의 대각자가 보이는데 예로부터 부정한 자는 출입을 못 한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문이다.

 

 

통천문을 지나 뒤돌아 보니 그 석문 앞쪽에 통천문이라는 큰 한자의 암각이 붉은 페인트로 표기를 해 놨기에 사진으로 남겨 본다.

이제 천왕봉에서 500미터 진행했고 장터목대피소까지는 1.2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지나 걸어가니 다른 산에서는 이미 져버려 보지 못했던 엘레지꽃이 아름답게 피어 이 산객의 발길을 붙잡는다.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이제 천왕봉에서 1.0 Km 지났다는 이정표를 만나 통과하고 무명봉으로 오르니 거대한 암봉 하나가 등로를 가로막고 서 있다.

그곳 앞에서 다시 산우님들 추억 한장 남겨 드리고 진행하니 연이어 괴암들이 등장하고 곧이어 철계단을 타고 오르며 전진한다.

 

 

좌측으로 설치되어 있는 안전철책을 따라 조망을 즐기며 조금 더 걸어가니  이제 천왕봉에서 1.1 Km 지나왔고 장터목대피소까지 600미터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지나 세석봉 나무전망데크에 올라 잠시 망중한을 즐겨 본다.

지나 온 천왕봉 능선 뒤로 중봉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가야 할 서쪽 방향으로는 연하봉과 삼신봉 넘어 촛대봉이 머리에 민둥의 바위를 이고 봄으로도 당당한 풍경이 눈에 들어 온다.

우측 저 멀리 이어지는 반야봉과 노고단이 어서오라 부르지만 오늘은 만날 수 없으니 아쉬운 눈빛만 보낸다.

 

 

전망데크에서 잠시 망중한을 즐긴 후 나와 제석봉 등로를 따라 장터목대피소로 향한다.

조금 걸어 내려가니 등로 옆에 제석봉과 고사목이란 안내판이 서 있는데 읽어 보니 내용은 제석봉엔 한국전쟁 이후에도 아름들이 구상나무가 울창하게 자라고 있었으나 50여년 전 전란 후 사회기강이 어지러운 틈을 타  도벌꾼들이 구상나무를 도벌하고 도벌 흔적을 지우기 위해 불을 질러 지금처럼 나무들의 공동묘지가 되였다는 내용이다.

구상나무는 목기를 제작하는데 쓰였고 칠선계곡 아랫동네에서 목기제작을 해서 판매했다는데 제석봉 구상나무 도벌과 연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듯 한데 정확하지는 않으니 이곳에서는 여기까지만 언급을 해 본다.

제석천을 불교 입장에서 보면 불법과 불교에 귀의하는 불자를 보호하며 아수라의 군대를 정벌하는 하늘의 임금이라고 한다.

수미산 꼭대기의 도리천 선견성에서 거주하며 사천왕과 십대천자가 양옆에서 모시고 있는데 석가모니가 성불한 후 제석천은 석가모니의 시중을 들었다고 한다.

제석봉은 법계사와 천왕봉 그리고 제석봉으로 이어지는 천왕봉주변의 지명이 불교와 연관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불교의 제석천에서 유래하지 않았나 하는 설들이 전해지는데 확실하게 정립된 이야기는 아닌듯하여 그저 제석봉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정리를 해 본다.

늦은감은 있지만 공단에서 이곳 제석봉을 살리기 위해 엄격하게 출입통제를 하면서 어린 구상나무를 식재해 이제 제법 자라고 있는 모습에서 우리들 인간의 추악한 모습도 조금씩 엷어지는 것 같아 다행이란 생각으로 걸어 본다.

함께 산행을 즐기는 산행총대장과 갑장친구와 함께 담소 나누며 걸어 내려가니 뒤따라 오던 산친구 한명이 예쁘게 담아 줘 고마움을 전한다. 

 

 

다시 산친구들과 산 이야기를 나누며 혹시나 있을지 모를 야생화를 찾으며 내려가 보지만 역시 야생화는 보이지 않는다.

여유있게 발걸음을 옮기니 금새 장터목대피소가 빤히 내려다 보이는 곳에 도착을 해 붐비는 장터목대피소 풍경을 사진에 담고 그들과 합류하기 위해 내려 가 본다.

백무동과 중산리로 하산 할 수 있는 하산 등로가 있으며 산회샘이란 용수대도 있지만 아직 식수는 충분하기에 산회샘은 그대로 통과한다.

이제 천왕봉에서 1.7 Km 진행했고 세석대피소까지는 3.4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의 거리가 새롭게 다가오는 시간이다.

다만 이곳 장터목대피소엔 발간 우체통이 인상적이였는데 좌측 건물을 새로 증축하면서 그 우체통이 사라져 찾아 보지만 찾지 못해 아쉬운 시간이였다.천왕봉의 자매봉인 제석봉의 남쪽능선 고개마루를 장터목이라 부르는데 장터목은 옛날에 천왕봉 남쪽 기슭의 시천주민과 북쪽 기슭의 마천주민들이 매년 봄가을 이곳에 모여서 장을 세우고 서로의 생산품을 물물교환한데서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장터목대피소는 1971년 4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지리산 산장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여 1986년 80명 1997년 1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확대 되었으며 현재 자연자원의 보호와 탐방객의 편의 및 안전을 제공하기 위하여 운영되고 있다.

 

 

아침식사도 했고 식수도 충분하기에 잠시 장터목대피소를 둘러본 후 곧바로 넓은 공터를 통해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등로 우측 백무동 방향 저 앞쪽으로 반야봉이 뚜렷하고 그 우측 불쪽으로는 삼정능선의 삼정산이 빤히 내려다 보인다.

이제 막 푸릇한 새잎들이 피어나고 산철쭉이 활짝 피어있는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현호색 군락지가 나타나고 조금 더 오르니 장터목대피소에서 미터 진행했고 세석대피소까지는 이제 3.0 Km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가 반가운 시간이다.

그곳 이정표가 있는 공터에서 뒤돌아 보니 철쭉꽃 넘어 저 멀리 제석봉과 천왕봉 줄기가 아름답게 하늘 아래 누워 있다.

 

 

 

 

 

좁은 공터에서 지나온 천왕봉 줄기를 조망한 후 다시 발걸음을 옮기니 등로 앞에 멋진 마루금이 펼쳐져 있다.

바로 앞에 바위봉이 우뚝하고 좌측으로 삼신봉 지나 저 멀리 촛대봉이 우뚝하다.

바위봉인 연하봉으로 이어지는 등로 위를 걸어가는 종주대의 뒷모습이 아름답고 그 종주대들 뒤를 따라 걸어가니 등로 위에 내려 쬐는 햇살이 벌써 따갑게 느껴지고 생각보다 무더운 기온에 식수를 마시는 횟수와 양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시간이다.

 

 

많은 땀방울 흘리며 천천히 바위봉우리로 오르니 장터목대피소에서 800미터 지나왔고 세석대피소까지는 이제 2.6 Km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가 있는 이정표가 서 있으며 등로 좌측으로는 멋진 바위들이 산재해 있다.

해발고도 1730미터의 연하봉은 천왕봉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봉우리로서 구름이 노는 아름다운 봉우리라는 뜻으로 지리 8경 중의 한 봉우리이다.

이곳 연하봉 바위 옆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오는 곳에서 잠시 배낭 내려 놓고 쉬어가기로 한다.

 

 

등로 좌측으로는 낙남정맥 마루금인 삼신봉 줄기가 희미하게 다가오고 조망을 즐기며 걸어가니 연두빛 산하 가운데로 나 있는 횡톳빛 등로가 아름답게 뚫려있다.

그 등로를 타고 천천히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 우측 안전목책 넘어 헬기장이 보이는데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 이용하는 횟수가 없기를 바라며 걸어 본다.

헬기장이 있는 안부를 지나 능선으로 오르다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지나온 연하봉과 저 멀리 제석봉 그리고 천왕봉 줄기가 강렬한 햇볕을 받아 벌써 희미하지만 아름답게 다가온다.

다시 바위봉에 올라 산친구들과 추억놀이를 즐긴 후 걸어가니 해발 1678미터의 이정표가 서 있는데 장터목대피소에서 1.4 m 지나왔고 세석대피소까지 2.0 Km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도 눈에 들어 온다.

 

 

제법 잡목이 우거진 등로를 따라 잠시 걸어 전진하니 소나무 한그루 아래 고사목이 벤취를 대신하는 곳에서 앞서 진행하던 산친구들이 쉬었다 일어난다.

다시 안부를 지나 조금 더 오르니 삼신봉에 도착을 하고 지나온 천왕봉까지 이어진 마루금을 조망해 보니 환상의 길이 열려 있다.

다시 주위 조망을 즐기며 전진하니 돌무덤이 있는 삼신봉에 도착을 하고 앞으로 올라야 할 촛대봉 암봉을 올려다 본다.

다시 천천히 그러나 꾸준한 속도로 걸어가니 장터목대피소에서 2.0 Km 지나왔고 세석대피소까지 1.4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통과하고 곧이어 철쭉 터널을 넘어 안부를 지난다.

바위지대를 지나 오르니 금새 촛대봉 이정표에 도착을 하는데 장터목대피소에서 2.7 Km  진행해 왔고 세석대피소까지는 700미터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가 힘을 준다.

  

 

등로 옆 안전목책에 배낭 내려 걸쳐 놓고 등로 좌측 암봉으로 오르니 일망무제 사방팔방으로 시원한 조망이 펼쳐지지만 박무로 인해 시야가 상당히 제한적이라 아쉽기만 하다.

그래도 같이 산행하는 산친구들이 멋진 사진 몇장 담아 줬기에 하나를 골라 보니 제법 멋진 포즈를 담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 바위를 내려 와 잠시 암릉을 타고 촛대봉 정상을 다녀오고 싶어 살펴보니 안전 목책을 세워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도록 출입제한을 해 놓은 것 같아 아쉬운 발길을 돌려 다시 정상 등로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이곳 봉우리의 유래를 찾아보니 한 여인이 산신령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촛대를 켜고 천왕봉을 향해 빌다가 돌로 굳어버린 모습이 촛대처럼 생겨 촛대봉이라고 한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촛대봉 정상은 아니지만 바위 위에서 바라보는 지리산 주능선의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이 황홇기까지 하다.

몇번의 화대종주와 세번의 백두대간 종주 그리고 개인적으로 몇번 더 올랐던 천왕봉이고 지리산 주능선이지만 보면 볼수록 늘 새롭게 가슴속에 남겨지는 지리산이기에 아직도 몇번 더 올라야 하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등로가 되어 버렸다.

이 산객이 걸어 내려 온 장쾌한 산줄기를 바라보며 두발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더 절실하게 실감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아쉬운 발길을 돌려 다시 배낭 메고 세석평전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간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세석평전이고 이 계절에 가장 화려하면서도 은은한 천상화원이 펼쳐지는 곳이기에 많은 기대를 하고 올랐는데 올해는 이곳에도 냉해 피해를 입었는지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아 아쉬운 시간이다.

잠시 세석평전의 습지대 관찰로로 들어가 양지꽃과 기타 여러가지 야생화를 담은 후 다시 세석대피소로 내려가니 뒤따르던 종주대 한명이 멋진 사진 한장 추억으로 남겨 줘 이 지면을 빌어 감사한 마음 다시 전해 본다.

아직 꽃망울을 확짝 피우지도 못한 철쭉나무 뒷편으로 세석대피소가 그림처럼 놓여 있으며 그 뒤를 병풍처럼 둘러친 영신봉이 지난날 1+9 맥 잇기 산행의 마지막 산행지로 올랐던 낙남정맥 구간에서의 고운 추억을 이야기하며 잠시 쉬어가라 잡는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세석평전과 세석대피소 구간을 걸어 내려가는 시간이기에 몸이 피곤하고 속이 좋지 않다는 사실은 벌써 잊어버리고 눈 앞에 펼쳐진 황홀한 풍경에 온 신경을 빼앗기고 걷고 있다.

세석평전은 남부군 사령관이었던 이현상이 이 평원에서 빨치산 투쟁대회를 열었다고 하는데 잔돌이 많은 평야 같다고 한 데서 유래했으며 한국 3대 고원평원 가운데 가장 넓은 세석평전이다.
그 주위가 12 Km나 되고 면적이 무려 30여 만 평에 달해 남녘의 개마고원이라고도 불리는 세석평전에 한국 특산식물인 구상나무가 자생하고 있으며 그 평원 아래에 세석대피소도 있다.

이곳 세석대피소에서는 한신계곡코스와 남부능선 그리고 거림골코스가 갈리는 분기점이기도 하다.

세석갈림길에서 좌측 세석대피소 방향으로 내려가 먼저 세석천을 들려 본다.

시원한 식수가 제법 많이 흘러 내려 식수통에 남아 있던 물을 버리고 새롭게 물을 받은 후 많은 물을 마음껏 마셔 본 후 다시 세석대피소로 올라 와 잠시 휴식을 취해 본다.

 

 

간식도 먹으며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다시 배낭 메고 출발하기 앞서 방금 전 지나온 세석평전을 담아 본다.

붉은색 진달래와 철쭉이 만개한 세석평전을 기대했었는데 이번에는 막 피어 오르기 시작한 연분홍빛 철쭉 몇송이만이 이 산객의 아쉬운 마음을 달래주는 풍경이기에 안타까움이 더 강하게 드는 시간이다.

다음에 다시 오라는 지리산의 명령이라 생각하고 다시 천천히 영신봉을 향해 출발해 본다.

 

 

개인적으로 이곳 세석대피소와는 많은 인연을 만들지 못했지만 종주산행이나 백두대간 산행을 하면서 늘 들려 라면이라도 한그릇 끓여 먹었던 추억이 있는 곳이기에 오늘도 어김없이 구석구석 둘러 보고 출발하는 시간이다.

잠시 오르막 등로를 타고 철쭉꽃을 감상하며 전진하니 넓은 헬기장이 나타나고7년 전 처음 백두대간 산행에 들어 좋은 산친구들과 눈보라 몰아치던 시간에 추억 한장 남기던 시절로 뒤돌아가 상념에 빠져 보는 시간이지만 산친구들은 많이도 변해 만날 수 없으니 궁금하기도 하다.

다시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다 전망바위에서 뒤돌아 보니 조금씩 피어있는 철쭉꽃 지나 세석대피소가 아름답게 자리하고 그 넘어 이제사 봄빛으로 갈아입고 있는 세석평전이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그 세석평전 끝자락에 자리한 촛대봉이 또 하나의 추억을 간직하고 저 멀리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이 다음주에 다시 만나자며 부르지만 이 무더운 날씨에 다시 내려 올 수 있을지 걱정도 되는 시간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세석대피소와 세석평전이기에 한동안 더 조망을 즐기며 이제 등로 좌측으로 멀어지는 낙남정맥 마루금에 눈길을 멈춘다.

 

 

그렇게 아쉬운 발걸음을 옮기며 천천히 진행을 해 드디어 영신봉 이정표에 도착을 하지만 등로 우측의 영신봉 정상에는 들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5년하고도 7개월 간 무던히도 올라 1+9 마루금 잇기 산행을 마무리 했던 구간이 바로 이곳 영신봉이기에 천왕봉 못지 않게 이 산객에게는 새롭게 다가오는 곳이기도 하다.

지리산에서 시작을 했으니 지리산에서 마무리를 하고자 했던 그 바램이 이뤄졌지만 무탈하게 마무리 한 후 서울로 복귀하면서 희열만큼이나 얼마나 허무하고 싱겁던지 지금도 그때의 마음을 잊을 수가 없다.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무탈하게 진행하다 부모님 두분을 모두 잃고 크나큰 상심속에 축하해주는 사람 하나 없이 쓸쓸히 탁배기 한잔 앞에 놓고 잠시 산행에 대한 깊은 고민을 남겼던 시절도 이미 많은 시간이 흐르며 평상으로 돌아 왔지만 아직도 그 산행의 의미에 대한 잘문은 완전히 해소를 못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 영신봉은 또한 1백두대간 9정맥중 낙남정맥의 분기점이 되는 봉우리로서 최근에는 백두대간 산행의 마지막 산줄기를 물과 만나는 곳으로 해 백두대간 우듬지를 만들어 진행하는 종주대들에게는 또 다른 의미로 받아 들여지는 곳이기도 하다.

영신봉하면 떠오르는 지명이름이 영신사라는 사찰인데 영신봉에서 남사면의 한참 아래쪽에 있는 큰 세개골 상단에 옛 영신사터가 있으며 지금도 좌고대와 창불대 및 가섭상이라 불리는 암석 봉우리가 남아 있다.

신 동국여지승람은 영신사 좌고대에 올라 네 번 절하는 사람은 성불을 이룬다는 이야기가 민간에서 전래되고 있다고 전하며 영신봉이란 이름은 바로 이곳 영신사에서 유래되였다고 전해진다.

산행 자체도 좋지만 이렇게 지난 추억을 떠 올리며 조금 더 지리산에 가깝게 다가 설 수 있음에 감사하는 시간으로 남기는 영신봉이 되였다.

 

 

 

바위 암봉과 철쭉터널을 타고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긴 나무데크 등로가 나타나고 곧이어 세석대피소에서 1.4 Km 지나왔고 벽소령대피소까지 4.9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도 만난다.

이제부터 참으로 지루한 능선을 따라 조망도 없이 그저 등로 옆 야생화만 기대를 하면서 걸어 보는 시간이다.

한동안 좁지만 뚜렷한 등로를 따라 걷다보니 등로 옆에 오란 양지꽃이 작은 군락이 이루며 산객의 발목을 잡고 잠시 엎드려 사진에 남겨 보지만 렌즈의 한계와 이 산객의 사진 기술의 한계 때문에 기대했던 멋진 사진은 아니지만 추억 한장 남기기엔 충분한 사진을 남겨 본다.

  

 

이제 간간히 나타나는 바위와 철쭉꽃들 그리고 키 작은 산죽을 따라 산친구들과 어깨를 나란히하며 걸어 보는 시간이다.

급할 것도 없이 그저 중간 그룹에 속해 꾸준한 발걸음을 옮기니 드디어 1576미터의 칠선봉에 도착을 하지만 그곳 이정표에 붙어 있던 칠선봉 이정판은 사라진지 오래된 듯 보이지 않아 잠시 헷깔린다.

산우님들과 사진 한장 남기고 출발하다 보니 칠선봉에 대한 사진 한장 남기지 못해 산우님을 대신해 담았던 사진 한장 사용해 본다.

일곱 개의 바위가 오밀조밀 모여서 정상을 이룬 모습이 마치 일곱 선녀가 한자리에 모여 노는 형상과 같다고 해서 칠선봉이라 불린다는데 이 산객의 눈에는 지금까지 제대로 된 일곱개의 바위를 세어보지 못했으니 앞으로 얼마나 더 올라야 그 일곱개의 바위들이 다 눈에 들어 올 수 있을지 궁금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칠선봉을 지나면서 오랫만에 홀로 트랙을 다운 받아 사용하는 스마트 폰 GPS에는 이곳이 칠선봉이 아니라 조금 더 진행 해 지리산 제일봉 천왕봉을 찾아보세요라는 안내판이 있는 바위와 공터가 칠선봉이라 알려주고 있으니 이것 또한 앞으로 바로 잡아야 할 봉우리 이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지루하게 돌길을 따라 철쭉꽃을 감상하며 완만하게 오르니 전망바위가 있고 천왕봉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는 작은 공터에 도착해 지나온 대간 마루금을 조망해 본다.

그 남쪽 방향으로 낙남정맥 마루금을 찾아 보지만 이미 중천으로 떠 오른 강렬한 햇살로 인해 박무가 드리워진 남쪽 시야는 완전히 사라졌기에 마음속으롬ㄴ 지난 추억을 되새겨 보는 아쉬운 시간이 되였다.

이곳에서도 함께 진행하는 종주대의 도움으로 멋진 사진 한장 남겨 본다.

 

 

그 전망바위를 지나 철쭉 터널을 타고 계단을 내려가니 키 작은 관목들이 자라는 뜨거운 등로가 잠시 열리고 금새 세석대피소에서 2.7 Km 진행해 왔고 벽소령대피소까지는 이제 3.6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도 만난다.

늘 하룻밤 벽소령대피소에서 머물던 시절엔 이곳쯤에서 하루의 무탈한 산행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으로 선비샘으로 진행을 하였는데 오늘은 음정마을까지 다시 내려가야 하기에 또 다른 감흥으로 진행하는 시간이 되였다.

다시 세석대피소에서 3.2 Km 진행해 왔고 벽소령대피소까지 3.1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지나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오르니 벽소령에서 하룻밤 묵고 다음날 천왕봉으로 오르는 종주시에 자주 일출을 만났던 절벽 위 바위를 만나 그 때 함께 지리산을 누볐던 산친구들을 생각해 보지만 이제 그 친구들도 모두 떠나고 외롭게 이 산객 홀로 오늘 이곳을 대하는 시간이 아쉽기만 하다.

 

 

절벽 위 바위를 지나니 이제부터 지루함을 달래주려는지 더욱 화사하고 아름다운 철쭉꽃이 멋진 터널을 만들어 산객을 반겨주고 잠시 마루금 잇기 산행이 아닌 철쭉꽃을 즐기는 산행이란 착각속에 즐겨보는 시간도 가져 본다.

하얀 눈이 소복히 쌓여 새로운 발자국을 남기며 산행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정립하던 시절에 걸었던 추억이 새롭게 이 산객을 성장시켰던 마루금이기에 오늘의 지루함까지도 새롭게 다가오는 순간이다.

그렇게 걸어 진행하니 금새 선비샘에 도착해 함께 걸었던 산친구들과 시원한 식수로 갈증을 달래며 선비샘에 대한 유래를 읽어 보는 시간이다.

등산객들이 고개를 숙이고 받아 마신다는 이곳 선비샘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전설이 깃들어 있는데 먼 옛날 이 샘터 아래의 상덕평에 사는 어느 할아버지가 화전민으로 살았던 자신의 일생을 후회하며 단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양반 대접을 받길 원했다.

그것이 한이 되었던 할아버지는 죽기 전 덕평봉 밑에 지금의 샘터 위에다 자신의 묘를 만들어 달라고 유언을 남기는데 훗날 이곳을 지나던 양반네들이 물을 먹기 위해 고개를 숙여야  했기에 그 결과 샘터 위에 할아버지의 묘에 절을 하는 꼴이 되어 할아버지의 소원이 이루어 졌다는 전설이다.

그 뒤부터 동네 사람들은 덕평봉에 있는 샘터의 이름을 선비샘이라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리산에는 샘이 참으로 많은데 그중에서도 선비샘의 물 맛이 최고로 생각하며 어떤 가뭄에도 그 물줄기가 끊기는 일이 없으니 지금까지도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많은 식수를 보충하는 샘으로서 고마움을 전하게 될 선비샘이다.

이제 세석대피소에서 3.9 Km 진행해 왔고 벽소령대피소까지 2.4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지나 더욱 멋지게 피어 있는 철쭉터널을 타고 걸어가니 바위 등로가 이어지고 있다.

이제 등로 우측 봉우리에는 덕평봉이 있겠지만 그곳 정상에는 오르지 못하고 좌측 사면으로 나 있는 등로를 따르니 금새 덕평봉에 도착을 하지만 이곳 역시 정상적인 봉우리가 아닌 사면 등로의 덕평봉까지 최단 거리일 뿐이다.

덕평봉은 1680년경 남원 월평리의 덕평마을에서 유래된 듯 한데 산세가 완만하고 토질이 비옥해 화전민들이 살았던 곳으로 악천후 폭우에도 인근 주민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는 산세로 선비샘 일대 상덕평봉은 옛부터 청학동 후보지로 거론된 곳이기도 하다.
덕평봉은 덕이 많은 땅을 품은 봉우리로 알려진 곳으로 그 무엇이든 마다 않고 품어안는 산세와 걸맞는 이름인 듯 하다.

월평리는 본래 남원군 사동면 덕평리 지역으로 모사정 또는 덕평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때 덕평리, 수월리, 손율리, 인화리 각 일부가 병합되어 수월과 덕평의 이름을 따서 월평리

라 하고 월평리에 편입되었다.
조선 숙종 때인 1680년경 남양 홍씨가 구례군 토지면에서 서울로 올라가던 중 덕평마을에 이르러 경치가 좋아 정착하게 되었으며 그후에 김해 김씨, 경주 김씨, 남원 양씨 등이 마을로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
월평리는 자연마을로 수월, 덕평, 손율 3개 마을을 합한 것이고 수월의 월자와 덕평의 평자에서 유래 되었는데 마을 뒷산의 형상이 마치 모사

와 같다고 한다.

마을 어귀는 사두선

이라 하여 뱀 머리 모양이고 그 옆에는 큰 바위가 있는데 뱀이 개구리를 잡아 먹으려는 형용이라하여 이곳을 모사정이라 했다가 덕평으로 바뀌었는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고 전해진다.

 

 

다시 철쭉꽃 터널을 타고 걸어가니 금새 좁은 공터에 이정표 하나가 서 있고 그 옆에는 등산객 몇명이 앉아 쉬고 있어 살펴보니 이제 벽소령대피소까지의 거리는 1.7 Km로 줄어 들어 있다.

어느 산객은 이곳을 덕평봉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 근방 어디를 덕평봉이라 불러도 틀린 뜻은 아닐 것이기 때문에 사진 한장 남ㄱ고 통과한다.

이제 내리막 산죽 등로를 따라 한동안 완만하게 내려가니 갑자기 하늘이 열리면서 저 멀리 벽소령대피소와 그 넘어 우람한 형제봉 능선이 보이지만 오늘은 만날 수 없는 봉우리이기에 손 한번 흔들어 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오래 전 죽었던 고사목의 뿌리 몇개가 세월의 흐름을 대변해 주고 있는 좁은 공터를 지나 다시 능선으로 들어 완만하게 내려가니 입산통제와 현위치 안내판이 서 있고 벽소령대피소까지 1.1 Km의 거리 표시가 되어 있는 이정표가 보이는 비포장 임도에 도착을 한다.

눈이 하얗게 내렸던 크리스마스 연휴에 친한 산친구들과 처음 지리산 종주를 하면서 벽소령에서 하룻밤 묵고 이곳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멋진 추억을 남겼던 장소이기에 다시 한번 그때의 짜릿한 순간을 떠 올려 본다.

이제 오늘 산행도 막바지에 접어 들고 이 비포장 임도를 따라 벽소령으로 내려갔다 음정마을로 하산하면 마무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무더운 기온과 바람 한점 없는 날씨 때문에 무척 고생하며 걸었던 시간이 아니였나 생각도 해 보는 순간이다.

 

 

최근 들어 자주 산행을 함께 즐기는 갑장 친구와 이런저런 산이야기를 나누며 내려가니 등로 우측의 절개지에서 떨어지는 바위조각들이 위험천만하게 보이고 등로 좌측으로는 깊은 골짜기를 이루고 있는 하동쪽 덕평골과 의신마을 방향이 박무에 덮혀 아쉽기만 하다.

겨울 찬바람이 불 때 내려다 본 안개 낀 덕평골의 아름다움에 취해 한동안 걸음을 멈추고 무심으로 바라 봤던 추억에 다시 한번 발걸음을 멈추지만 세월이 흐른만큼 이곳 풍경도 변해 있음을 절감하는 시간이다.

많은 등산객들이 찾는 지리산이기에 공단에서는 조금 더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안전 사고 없이 즐기는 산행이 되지 않을까 걱정도 해 보는 시간이 되였다.

 

 

그렇게 산 이야기를 나누며 급하지 않게 걸어 내려가니 저 멀리 등로 좌측으로 멋진 벽소령대피소가 내려다 보이고 그 뒷쪽으로는 형제봉 오르는 등로가 열려 있다.

달밤이면 푸른 숲 위로 떠오르는 달빛이 너무나 희고 맑아서 오히려 푸르게 보인다 하여 옛 부터 이곳을 벽소령이라 부르게 되었고 따라서 벽소령의 달은 지리산 10경중의 하나가 되었다.

참으로 많은 사연을 남겼고 많은 인연을 만들었던 벽소령대피소를 다시 만나는 감흥은 남다르지 않을 수 없다.

눈보라가 휘몰아 치던 한겨울 추운 밤에 많은 등산객들과 어울려 잠을 청하다 보니 대피소는 덥고 옆 등산객은 코를 심하게 골아 잠도 자지 못하고 어렵게 종주를 이어갔던 추억부터 어렵게 침낭 들고 올라 밤하늘의 초롱한 별빛을 친구삼아 이슬이 한잔 마시며 시인이라도 된 듯 짧은 시 한수 읋으며 밤을 지새웠던 장소이기에 다시 만나는 오늘이 반갑기만 하다.

이곳 벽소령대피소에서 남아 있는 간식과 과일로 허기를 달랜 후 이제 마지막 점속구간을 타고 음정마을로 하산하기 시작해 본다.

 

 

벽소령대피소 건물 뒷편으로 나 있는 등로를 타고 형제봉 방향으로 진행을 하면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직진의 좌측 능선을 타면 형제봉을 지나 성삼재로 진행하게 되지만 오늘 이 산객의 목표지점은 우측 음정마을로 하산하는 등로이기에 사진 한장에 아쉬움을 묻어 두고 우측 음정마을 하산 등로를 따른다.

이곳 음정마을 6.7 Km 거리의 하산은 이 산객에게도 처음이기에 기대와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어짜피 내려가야 오늘 산행이 마무리될 것이기에 무심으로 걸어 보는 시간이다.

다음 구간에는 개인적인 일 때문에 다시 이곳 접속구간을 통해 올라 올 기회는 없을 것 같으나 조만간 중산리에서 성삼재까지 멋진 종주로 다음구간까지 마무리를 하였으면 하는 개인 바램이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가파른 내리막 돌 계단을 타고 천천히 내려가니 거리 표시가 되어 있는 이정목을 통과하여 금새 비포장 임도를 만난다.

그 비포장 임도를 따라 좌측으로 걸어 내려가니 벽소령대피소에서 300미터 내려왔고 음정마을까지 6.4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지나 등로 우측의 함양쪽 산그리메를 조망해 본다.

삼정능선을 타고 내려가는 지점에 삼정산이 우뚝하고 도로 건너 저 멀리 함양땅에는 함양 백운산이 아련한 추억을 이야기하며 손짓을 내밀고 있다.

함께 내려가는 산친구들과 이런 저런 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임도 양쪽으로는 붉은 병꽃이 군락을 이루며 마지막 내려가는 산객들에게 용기를 주는듯 하다.

 

 

이제 음정마을까지 5.1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지나 야생화와 성하의 계절로 달려가는 임도 주변의 풍경을 즐기며 걸어 내려가니 금새 음정까지 4.6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만난다.

다시 꾸준한 발걸음을 옮기니 연하천대피소 갈림 삼거리 이정표를 만나고 잠시 지도를 펴 놓고 살펴보니 삼정능선을 타고 올라 삼각고지 옆 주능선에 올라 연하천으로 쉽게 오를 수 있는 등로가 표기되어 있다.

이제 음정마을까지는 4.1 Km가 남아 있으니 느긋하게 걸어 내려가도 한시간이면 충분 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다 임도에 앉아 남아 있는 간식과 과일로 허기를 달래며 이야기 꽃을 피우고 진행하니 이제 음정까지 2.3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반가운 시간이다.

조금 더 내려가니 임도 좌측으로 맑은 물이 솟아지는 작은 폭포가 나타나고 몇명의 산객들은 그곳으로 들어가 시원하게 샤워를 즐기는 모습도 눈에 들어 오지만 어짜피 다시 땀에 젖을 것이기에 참고 음정마을로 내려가기로 한다.

이제 음정까지 1.8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도 지나고 계속 완만하게 굴곡진 임도를 따르니 이제 저 아래 차량통제용 바리게이트가 보이고 그곳에서 좌측으로 흐르는 임도를 버리고 직진의 가파른 능선 내리막 등로를 따라 음정으로 향한다.

 

 

능선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갑자기 등로 주변에는 멋진 적송들이 아름답게 군락을 이루며 마지막 투혼을 보이는 종주대들을 반겨 준다.

멋진 야생화도 담고 붓꽃도 바라보며 그렇게 내려가니 적송이 사라지고 활엽수 지대가 나타나더니 등로는 점차 온순하게 변해가고 있다.

등로 좌측으로는 녹색 철망이 따라오고 살펴보니 농장인듯 사방을 녹색 철펜스로 가로막고 있고 그 바로 아랫쪽에는 음정마을이 평화롭고 한가롭게 펼쳐져 있다.

 

 

 

조금 더 완만한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음정마을에서 사용하는 상수도 물탱크가 보이고 곧이어 포장도로가 나타난낟.

그 포장도로를 타고 한동안 퇴약볕을 걸어 내려가니 마을이 보이고 곧이어 마지막 이정표가 삼거리 한모퉁이에 서 있다.

음지말이라고 부르는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음정마을은 음지정쟁이라고도 부르는데 음지에 위치한 집단촌으로 취락을 이루고 살아간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음지말 서편 골짜기을 비린내골이라고 하며 아랫마을의 선유정 전설과 연관이 있는 이야기다.
선녀가 지상에 내려와 살다가 날개옷을 찾은 뒤 남편과 자식들을 두고 날개옷을 입고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 남편과 아들이 하도 원통하여 바라보고 있다가 화석으로 변하였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오는데 벽소령 정상에 부자바위가 서 있는데 원통하게 떠나 보내버린 유모엄마의 골이라고 하여 비리내골이라고 했다 한다.

그곳 한쪽에 우리 백두대간 종주대의 버스가 보이고 수송대장이 따라주는 시원한 맥주 한잔을 마신 후 바로 옆 좁은 골짜기로 들어가 땀방울과 흙먼지를 닦아내니 이제서야 사람 몰골이 되살아 나고 살맛 나는 세상이 되였다.

 

이렇게 또 한구간 무더위에 어렵게 완주 후 남원 인월의 산채식당에 들려 두루치기로 탁배기 한잔 나누니 온 세상이 다시 우리 종주대의 세상이 되었다.

 

어렵게 백두대간 산행을 이끌고 있는 상황봉대장님과 살림살이 맡아 바쁜 정이총무님 그리고 선두에서 길찾느라 바쁜 선등대장과 후미를 챙긴 후미대장 및 함께한 모든 대원들에게 지리산을 오르며 새로운 산행에 신비감을 가졌을 시간을 함께 했음에 감사하며 산행후기를 마친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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