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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맥산행(완료)/호남정맥(완료)

호남정맥 제19차 오도재에서 석거리재까지 산행 후기

by 칠갑산 사랑 2011.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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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전라남도 보성군과 순천시의 호남정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 2010년 07월 16일과 17일 (토요 무박 산행)

산행날씨 : 새벽 안개 후 하루 종일 강한 햇살과 찌는듯한 삼복 더위의 날씨

산행온도 : 영상 23도에서 영상 34도

산행인원B산악회 38명 따라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오도재(오도치, 겸백고개, 845번 지방도로)-국사봉(335.5봉)-파청재(파청치)-

               시멘트 임도-314봉-약수터 사거리 이정표-방장산(535.9봉)-이드리재-배거리재-

               주월산(557봉)-활공휴게소 이정표-페러글라이딩 이정표-무남이재-광대코재-

               암릉-철쭉군락지-광대코봉-571봉 삼각점-고흥지맥 분기봉-모암재(전치고개)-

               군견묘지-철조망-폐공군막사-존제산(712봉)-폐 공군 기지 정문-임도-능선-임도-

               주랫재(895번 지방도로, 조정래대하소설 태백산맥문학비)-철계단 포장도로-

               485.5봉 삼각점-임도 삼거리 민가-415봉-석거리재(27번 지방도로)-산행종료

산행거리 : 약 22.40 Km 

산행시간 안개와 고온다습한 무더위로 사진 찍으며 천천히 09시간 55

               (04시 10분에서 14시 05분까지)  

              

호남정맥이란 ???

우리나라 서남부 문화권을 나누는 의미 있는 경계선으로 산경표를 보면 백두대간에서 금남호남정맥이 분기하고 그 산줄기가 다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으로 나뉘며 호남정맥은 그 시작점이 웅치(현재 지명으로 곰치재)라 적혀 있는 총 산행거리 398.7 Km의 산줄기이지만 어느 산꾼들은 백두대간 영취산이 호남정맥의 시작점이라 하여 총 산행거리 462 Km의 산줄기라 하기도 한다.

호남정맥은 동쪽으로 섬진강을 서쪽으로는 만경강, 동진강, 영산강, 탐진강을 가르고 있으며 주요한 산들을 살펴보면 3정맥 분기점인 주줄산(주화산)에서 남서쪽으로 분기한 산줄기가 완주 만덕산(762m)을 지난 후 내장산(763m), 추월산(729m), 무등산(1,187m), 제암산(779m), 조계산(884m) 등 남도의 큰산을 지나 광양 백운산(1,218m)을 끝으로 섬진강과 남해바다가 만나는 곳 망덕산(197봉) 앞 바다로 흘러드는 산줄기를 말한다.

 

 

장마가 끝난 후 강렬한 햇살과 삼복 더위로 무척 고생하며 완주한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 후기를 참고한 후 난해하고 어려운 정맥 산행을 진행하여 무탈하게 맥 잇기 산행을 다녀왔기에 단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정맥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이제 호남정맥 산행도 막바지 구간으로 접어 들어 남해바다를 바라보며 걸어가는 멋진 시간이지만 새벽 안개로 인해 아쉬움이 많이 남는 산행이다.

또한 장마철이기에 장도를 떠나는 날까지 하루 종일 세찬 비바람이 불며 하늘이 구멍난 것 처럼 폭우가 솟아지고 있다.

무더위를 생각하면 가랑비를 기대하지만 역시 불편하고 볼 것이 없기에 청명한 날씨를 기대하며 출발하는 시간이다.

생각보다 많은 식수를 넣고 떠나는 시간이다 보니 두 어깨에 전해오는 무게가 묵직하고 또한 좋은 카메라까지 챙겨가다 보니 무더위에 약간의 무리가 느껴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새벽 4시가 조금 못된 시간, 지난 구간 비를 맞으며 내려왔던 845번 지방도로의 오도재에 도착해 잠시 산행 준비를 하면서 산행 들머리 이정표를 담아 본다.

득량과 겸백을 이어주는 고갯마루인 이곳 오도재도 도로 공사에 필요한 돌을 캐기 위해 산 하나를 잘라내는 채석장이 있어 흉물스럽게 변해가고 있는 가슴 아픈 현장의 하나가 되어 가고 있다.

그 채석장에서 발파시 위험해 정상 등로를 폐쇄하고 득량면쪽으로 조금 내려간 지점에 새롭게 등산로를 개설해 놨지만 공사도 진행되지 않는 밤이기에 그냥 채석장 옆 편백나무 숲을 타고 정식 정맥 등로로 진행하는 시간이 새벽 4시 10여분이다.

 

참으로 멋진 편백나무 숲이 반겨주지만 어둠속에 오르는 산행이다 보니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 시간이다.

가파른 오르막 된비알을 타고 10여분 그렇게 오르니 무명봉이 나타나고 다시 완만한 내리막 등로로 이어져 지던 마루금이 오르락 내리락 두어번 더 진행한 후 무명봉 우측 사면 등로를 타고 오르니 그곳에 국사봉이란 이정표가 서 있고 옆에는 335.5봉이란 팻말도 보인다.

많은 자료를 찾아 보지만 그 어디에도 이곳 보성의 국사봉에 관한 자료를 찾을 수 없어 아쉬움이 남으면서도 확실한 고증에 의한 이름 부여가 되어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안개가 살짝 드리워진 등로 옆에는 촉촉히 젖어 있는 잡풀들이 산객들의 발자국이 스쳐지날 때마다 물방울을 뿌리고 있다.

그렇게 조금 더 진행하니 등로 좌측에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묘지를 지나 간벌된 편백나무 숲을 따라 등로가 이어져 있다.

말라가는 편백나무 숲에서 뿜어내는 치톤피드 냄새가 참으로 좋은 느낌으로 종주대의 몸을 자극하는 멋진 시간이지만 제한된 시야속 어둠이기에 보지 못하는 안타까운 시간이기도 하다.

 

다시 그 멋진 편백나무 숲을 지나 진행하니 이천서씨 묘지가 보이고 나즈막한 봉우리를 지나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넓은 임도가 나타나며 파청재란 이정표가 서 있는 곳에 도착한다.

보성군청에 들어가 자료를 찾아 보니 파청마을은 약 250년전경에 김해김씨가 입촌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마을지명은 마을 뒷산에 보살들이 절을 건립하였는데 절에 빈대가 많아 타지역으로 옮기면서 마을이 폐할 것이라 하여 파청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 파청마을과 관련하여 파청재란 지명이름이 붙었다는데 사실인지는 의문이다.

이곳에서 후미 기다리며 잠시 휴식 취하는 사이 서서히 여명이 밝아 오지만 안개로 인해 시야는 많이 제한적이다.

 

다시 파청재를 떠나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진행하니 어느새 비포장 임도는 시멘트 포장길을 타고 오르도록 되어 있다.

KBS 통신탑이 설치되어 있는 방장산 정상에 오르고 내리기 위해 도로가 포장되어 있지만 현재는 사용한 흔적이 없는 폐 도로가 되어 가고 있는 느낌이다.

그렇게 오르니 314봉이라 생각되는 나즈막한 봉우리에 도착해 살펴보니 보잘것 없는 봉우리이지만 등로가 동쪽에서 북동쪽으로 크게 꺽이는 의미가 있는 분기 봉우리이다.

 

다시 가파른 시멘트 임도를 타고 진행하니 온몸에선 비오듯 땀방울이 흘러 내리고 있다.

이제 어둠이 사라지고 여명이 밝아 와 헤드렌턴이 필요 없지만 안개로 인해 우측으로 보이는 득량만 앞바다가 희미하게 들어 와 아쉬운 시간이다.

그 바다로 향하는 중간엔 제법 넓은 평야도 보이고 그 사이마다 불을 밝히는 민가들이 조용한 농촌의 아침을 밝히고 있다.

참으로 멋지지만 희미한 조망을 아쉬워 하며 오르니 약수터사거리 이정표가 서 있고 등로 좌측으로 편백나무 숲을 지나 수남마을 가는 등로가 넓게 보이지만 등로 우측으로 호동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부터 조금 더 밝아 오고 등로 우측으로 내려다 보이는 예당리 마을과 푸른 평야가 희미한 안개속에 눈에 들어 온다.

득량만 바다와 접해 있는 평야에선 하얀 안개인지 구름이 떠 돌며 평온한 농촌에서 살아가는 민초들의 마음을 대변하듯 아름답게 떠 돌고 있다.

참지 못하고 배낭 깊숙히 넣어 두웠던 DSRL 카메라를 꺼내 몇장의 사진을 찍는 사이 또 후미로 쳐져 천천히 방장산으로 향한다.

개인적으로 몇번 들렸던 득량만의 자료를 백과사전에서 찾아 본다.

 

득량만의 입구는 남서쪽으로 열려져 보성만과 연결되며 고흥군과 보성군 그리고 장흥군 등의 일부지역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남양면 동쪽 연안에는 유인도인 우도와 무인도인 각도섬 및 구룡도 등이 있다.

주변해안에는 넓은 간석지가 펼쳐지며 특히 득량면 해평리와 대서면 남정리 연안에 득량만방조제를 쌓아 그 일대에 넓은 간척평야가 조성되었으며 만의 연안에서는 낙지와 장어 등이 많이 잡히고 김, 미역, 굴, 피조개, 키조개 및 바지락 등의 양식업이 활발하다.

또한 만의 남동쪽 용당해안은 물이 맑고 수심이 얕아서 예로부터 낚시터로 유명하다.

 

그렇게 몇장의 사진을 담으며 오르니 직진의 임도 우측 능선으로 등로가 열려 있고 그곳으로 오르니 KBS 방장산 중계탑이 우뚝 솟아 있고 한쪽에 방장산 정상 이정표가 서 있다.

그곳을 지나 진행하니 금새 방장산 정상석이 앙증맞은 자세로 그 정상을 지키고 있다.

처음에는 고창과 장성쪽에 있는 방장산을 생각했는데 이곳 보성에도 또 다른 방장산이 있음을 호남정맥을 통해 알게 된 곳이다.

우두머리란 뜻의 방장이란 이름이 붙어 있는 것으로 봐 이곳 보성이나 득량에서는 우두머리격의 산이 아닐까 추측을 해 보지만 그 어디에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으니 아쉬운 곳이기도 하다.

 

이제 방장산을 떠나 우측으로 떨어졌다 너무나 호젓한 등로를 타고 무심으로 걸어 보는 시간이다.

육산으로 지자체에서 등로도 잘 관리해 줘 큰 어려움 없이 조금은 속도를 내 보는 시간이다.

언뜻 저 앞쪽으로 안개속에 숨어 있는 주월산이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사이 서서히 안개의 두꺼움도 얇아지고 있다.

참으로 산행하기 좋은 등로에 새벽 시간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무더위는 종주대의 발목을 잡고 늘어질 것이기에 마음을 놓기는 이른 시간이기도 하다.

 

큰 오르막도 없으니 큰 내리막도 없는 평이한 등로를 타고 한동안 진행한다.

그렇게 평이한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나즈막한 안부인 이드리재를 지나 다시 완만한 오르막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이드리재는 보성군 겸백면 수남리와 조성면 덕산리를 잇는 고개로서 옛날 어느 무당이 이 고개가 내가 되어 흐를 것이다고 예언을 하여 이냇고개라 불렀는데 한자로 쓰니 이천치가 되었고 다시 세월이 흘러 이드리재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지는 고갯마루이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에는 민초들에게 중요한 고갯마루로서 그 역활을 했을 이 이드리재도 이제 그 명성만을 유지시키고 있는 그 이드리재를 지나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이곳이 고향이신 종주대 중 한분이 등로 우측 소로길을 타고 사라진다.

살펴보니 묘지들이 몇기 있는 곳이기에 따라 들어가 보니 묘지 앞으로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는데 지도를 보니 조성면 덕산리 민가들과 평야 그리고 그 멀리 득량만이 한폭의 풍경화로 살아나고 있는 시간이다.

몇장의 사진을 담으며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희미한 안개속에서도 그마나 조금씩 보여주는 풍경이 있어 그 나름 의미가 있는 산행 시간이다.

진행하는 동안 조금 더 선명하게 주월산 정상부가 안개속에 묻혔다 나타나기를 반복하고 그 풍경을 즐기며 진행하니 평이한 등로 옆에 배거리재 이정표가 서 있다.

배거리재는 배가 걸렸다는 뜻으로 자료를 찾아보니 옛 전설에 이 고개 밑까지 바닷물이 밀려와 이 곳에 배를 대어서 그런 이름을 얻었다 한다.

그러고 보니 이곳 보성의 지명중에는 물과 관련된 많은 지명 이름들을 찾아 볼 수 있어 이채롭게 다가오는 고장이기도 하다.

 

다시 완만한 오르막 등로가 시작되고 등로 주위에 자라고 있는 철쭉 군락지를 따라 걸어 올라가니 저 멀리 주월산 정상부에 종주대들 모습이 보이고 이제부터 제법 넓은 평지로 이어져 있다.

그곳에서 주월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목에 등로 우측으로 하늘에 떠 있어야 할 햇살이 발 밑 저 아래에서 반짝이고 있다.

지도를 살펴보니 대곡제에 얼비친 아침 햇살이 반짝이며 마치 안개속에 일출이 시작되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일출 대신 대곡제에 떠 있는 햇살로 또 하루를 열어 주는 시간이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주위 풍경을 가슴에 묻으며 천천히 걸어 오르니 넓은 공터와 쉼터로 이뤄진 주월산 활공장이 나타나고 잠시 물 한모금 마신 후 돌계단을 타고 오르니 주월산 정상석과 태극기가 보인다.

보성군 겸백면과 조성면 경계에 있는 주월산은 옛날 큰 물이 들어 배가 넘나들었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지만 그 어디에도 그런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아직도 고도를 높힐수록 짙은 안개가 종주대를 따라 오며 시야를 방해하니 다음에 다시 오라는 계시인듯 체념할 수 밖에 없는 안타까운 시간이다.

아직 후미가 도착하지 않았지만 갈길이 멀기에 다시 계속 이어 내려간다.

 

다시 등로 우측의 대곡제에서 빛나던 햇살이 짙어지는 안개속에 점점 그 빛을 잃고 이제 하나의 작은 별빛처럼 빛나고 있다.

잠시 능선을 따라 진행되던 등로가 금새 넓은 비포장 임도와 만나 우측으로 진행되고 그곳에는 페러글라이딩을 즐기는 사람들이 물건을 보관 할 수 있는 비닐 천막이 쳐져 있다.

이곳에서 등로는 비닐 천막 뒷쪽의 능선으로 이어져 있는데 한동안 진행 한 후 다시 넓은 임도와 만나는 것을 봐서는 직진의 임도를 따라도 될듯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비닐 천막 뒷편으로 가면 활공휴게소란 이정표가 서 있고 무남이재까지 아직도 2.3 Km 남았다는 거리표시가 되어 있다.

두명의 종주대가 넓은 임도를 타고 진행하다 등로를 잘못 들었음을 느끼고 다시 돌아 올라오는 모습도 보인다.

지도를 보니 이어진 임도가 무남이재 바로 직전에서 다시 호남정맥 마루금과 만나도록 되어 있어 아마도 임도를 타고 진행해도 될 듯하다.

 

활공휴게소 이정표를 지나 나즈막한 봉우리를 넘자 짙은 안개가 조금씩 벗겨지며 앞으로 진행해야 할 마루금쪽 모습을 살짝 보여주지만 만족할만큼의 모습은 아니기에 아쉬움이 남는 시간이다.

봉우리 지나 움푹 파인 안부의 무남이재 지나 서서히 고도를 올리며 있을 광대코재의 모습은 아직도 안개속 오리무중이다.

그래도 방금 전 주월산에서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조망이 보이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할 그런 시간으로 남겨 본다.

 

이제 무남이재로 내려가는 등로는 제법 가파른 내리막 등로로 이어져 있다.

조심하며 내려가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 더 사라져 가는 안개속에 앞으로 올라야 할 광대코재의 모습이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생각보다 높지 않은 모습에 일단은 안도해 보지만 식사 후 올라야 할 마루금은 또 어떤 복병을 만들어 종주대를 기다리고 있을까 조금은 걱정도 되는 시간이다.

 

다시 조금 더 내려가니 잡목과 소나무 가지 사이로 광대코재 좌측으로 봄철 철쭉으로 유명한 초암산 능선이 아주 가깝게 다가와 있다.

우측의 철쭉봉 지나 좌측 저 멀리 서 있는 초암산, 얼마 전 지났던 제암산과 일림산 못지 않게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철쭉 군락지 초암산, 개인적으로 한번 다녀 온 기억이 있지만 오래전 일이기에 조만간 다시 한번 여유롭게 오를 수 있기를 기대해 보는 산이기도 하다.

 

그렇게 조심하며 앞에 보이는 아름다운 산들을 구경하며 내려가니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는 무남이재에 도착해 도로 좌측 그늘진 곳에 아침상을 펴고 맛난 식사를 즐겨 본다.

이곳은 윤제림이라 하여 개인 사유지인데 45년간 가꾼 산림지역이라 하니 잘 가꾸는 노력이 필요한 곳이란 생각이다.

이곳 무넘이재는 겸백면과 헤어지고 새로운 조성면으로 이어지는 고갯마루로서 옛날 득량바다에 큰 해일이 일어 물넘은고개라 부르던 것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발음이 변해 지금의 무넘이재가 되었다는 설이 전해지는 고갯마루이기도 하다.

이곳 무넘이재 옆에는 지난 장마철에 내린 비가 개울을 타고 흘러 더위도 식히고 부족한 식수도 보충 할 수 있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고갯마루이기도 하다.

 

식사 후 늦게 도착한 후미를 기다리며 단체 사진 한장 남기려 하지만 여의치 않아 다시 출발한다.

조금은 더위에 몸이 지쳐가는 느낌이기에 캐논 DSLR 카메라는 다시 배낭에 넣고 얼마 전 구입한 방수 똑딱이를 꺼내 시험삼아 사진을 담아 보기 시작한다.

늘 느끼는 어려움이지만 오늘은 특히 아침 식사 후 광대코재로 오르는 가파른 오르막 된비알이 장난이 아니다.

지난 주 일 때문에 바빠 제대로 된 운동 한번 못하고 마신 이슬이가 말을 하고 있는 시간이기에 몇번의 휴식을 한 후 어렵게 오른다.

 

어렵게 오른 광대코재, 멀리에서 보면 광대의 얼굴을 하고 있기에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그것까지 확인하려면 또 어느 산에 올라 이곳을 바라 봐야 하는지...

이곳에서 등로 좌측으로 진행하면 철쭉봉 지나 철쭉 군락지로 그 유명한 초암산으로 이어지는 등로이고 호남정맥 마루금은 우측 능선으로 진행해야 하는 삼거리 갈림길이다.

철쭉이 화사하게 피는 시기에 다시 한번 초암산에 오르며 이곳을 지나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보는 곳이기도 하다.

 

광대코재 갈림 삼거리를 지나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오르니 큰 잡목도 없이 시원한 조망이 펼쳐지지만 역시 남아 있는 안개가 시야를 제한하고 있다.

그래도 지금까지 느끼고 봤던 풍경과 조망보다는 훨씬 멀리 그리고 깨끗하게 보이기에 몇장의 사진으로 남겨 본다.

등로 우측으로 얼마전 개장한 보성컨트리 클럽 골프장이 시원스레 내려다 보이지만 골프를 즐기는 골퍼는 찾아 볼 수 없고 그 우측 산능선을 따라 올라가니 방금 전 내려 온 주월산은 안개속에 숨어 버렸다.

 

뜨거운 햇살이 전신에 내려 앉으며 이제부터 더위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듯 하다.

광대코재부터는 지금까지 걸어 왔던 등로와는 완전히 다른 등로가 시작되고 우거진 잡목과 잡풀들로 인해 바로 코 앞에 있는 등로도 분간하기 힘이 든다.

같은 보성군에서도 면이 달라지며 변해 버린 등로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시간이다.

다만 지나온 등로를 바라보니 저 멀리 철쭉봉과 초암산 능선이 아름답게 조망된다.

 

이제 시원한 조망을 즐기며 진행하지만 역시 정리되지 않은 등로로 인해 진행이 무척 더디다.

그래도 등로 우측으로 조성면과 등로 좌측으로 율어면 조망을 보며 걸을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다.

율어면 선암리의 조용한 산촌 넘어 이름모를 산줄기가 이어져 있고 우측 존제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어 아쉽더라도 올라 만나자고 앙탈을 부리는 듯 하다.

 

다시 짧은 암봉도 지나고 등로 우측의 보성 컨트리 클럽 골프장과 천치저수지를 내려다 보며 우거진 잡목지대를 지나니 잡목 가지에 광대코봉이란 이정표가 붙어 있고 고도가 613미터라 표기 되어 있다.

가지고 있는 지도 몇개를 꺼내 살펴보지만 이곳 고도는 모두 500미터대인데 왜 갑자기 613미터란 고도가 생겼는지 의아해 돌아 와 찾아보니 광대코봉에 대한 자료는 찾을 수 없다.

다시 많은 생각을 하면서 확실한 고증에 의한 봉 이름을 붙여 놨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잡목과 잡풀을 헤치며 어렵게 등로를 찾아 진행하는 산행이 결코 만만치 않다.

조금씩 강해지는 여름 햇살이 그늘 하나 없는 능선에서 종주대의 발걸음을 더디게 만들고 온몸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은 왜 이런 맥 잇기 산행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한발 두발 앞으로 전진하며 이어가는 산행에서 자기 자신과 한 약속을 스스로 지키려는 노력에 박수를 보내는 시간이기도 하다.

앞으로 진행해야 할 571봉이 우뚝 솟아 있고 그 넘어 전치고개로 이어지는 나즈막한 산줄기 넘어 아직도 짙은 안개속에 묻고 종주대의 어려운 발걸음을 기다리는 존제산은 그 옛날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민초들의 무덤이였던 이념 갈등을 조금이라도 더 감추고 싶은지 얼굴을 내밀지 않고 있다.

 

진행하는 등로 좌측 뒤 저 멀리에는 율어면 선암리가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다.

선암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선리, 하선리, 모암리를 병합하여 상선과 모암리의 이름을 따서 선암리라 부르게 되였는데 모암마을은 약500년전에 인동장씨가 터를 잡아 6대째 살아오다 흩어지고 그후 하동정씨가 6대, 청풍김씨가 4대째 살고 있는 곳으로 율어면에서는 제일 높은 곳에 촌락을 형성하고 있다.
이 마을의 이름은 앞산에는 신부바위가 있고 뒷산에는 신랑바위가 있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하여 모암이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에 멋진 전설이 깃든 마을이 아닐 수 없다.
 

잠시 더 진행하니 앞서 진행하던 종주대 일부가 바위 옆 바람이 살랑거리는 곳에서 쉬고 있지만 이 산객은 그냥 지나쳐 몇장의 사진을 더 담기로 한다.

이제 571봉이 바로 코 앞으로 다가와 있고 모암재 넘어 존제산도 조금씩 안개를 벗겨내며 제 모습을 보여 주기 시작한다.

이 아름다운 산하에 어찌 그리 역사에 남을 이념 대결이 펼쳐졌었는지...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존재하는 정치가 그 반대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파오는 현실과 대비되며 그 옛날 아무것도 모른채 좌악과 우익을 왔다갔다하며 생명을 이어 갔을 민초들의 힘겨운 삶을 생각해 본다.

 

그러다 문득 뒤돌아 보니 힘겹게 지나 온 광대코봉 지나 저 멀리 초암산 능선이 멀어져 간다.

그저 철쭉 산행을 즐기기 위해 찾았을 땐 이곳이 이토록 중요한 호남정맥의 산줄기이였음을 알지 못했기에 그저 평범했던 곳이였는데 오늘은 같은 산줄기를 걸으면서 또 다른 감정으로 걷고 있으니 알고 진행하는 것과 모른채 지나는 산행이 얼마나 다른지 실감하는 시간이다.

산에 오르며 한번 더 공부한 지역에 대한 이해도 역시 산행에서 얻는 기쁨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이제 571봉 삼각점이 가까워져 있는 능선에서 다시 등로 우측의 보성 컨트리 클럽과 천치저수지를 담아 본다.

하트 모양을 닮은듯도 하고 좋아하는 야구장을 닮아 있는듯도 한 천치저수지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골퍼를 찾아 보지만 일요일인데도 개미 한마리 찾지 못할 정도로 정적만 흐르는 골프장을 내려다 보며 유지나 가능한지 왜 골퍼들도 찾지 않는 이곳에 저런 멋진 골프장을 만들었는지 많은 의문과 생각들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그렇게 천천히 그러나 꾸준한 발걸음으로 진행하니 어느새 5721봉 정상에 올라 조금씩 불어 오는 산바람을 맞으며 정상에 박혀 있는 삼각점을 담아 본다.

이제 천치고개로 내려갔다 마의 구간인 존제산으로 오를 일이 까마득히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닌 현실이 되고 있다.

그래도 이렇게 하나 둘 역사를 기억하며 주위 풍경을 대비하며 걸어가는 종주대야 말로 진정 복 받은 사람들은 아닐까 생각도 해 보는 시간이다.

이곳을 적지봉이라 신산경표에는 나와 있는듯 하여 바로 잡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삼각점을 찍고 잠시 진행하니 다시 삼거리 갈림길이 나타나고 등로 우측으로 잡목이 우거진 곳에 고흥지맥이란 이정표 하나가 달려 있다.

언젠가는 올라보고 싶은 맥이기에 박종률님이 정리한 고흥지맥에 관한 자료를 찾아 본다.

 

고흥지맥이란?
고흥지맥은 호남정맥의 존재산(712봉) 남쪽 2 km에 있는 적지봉(571봉)에서 
 분기하여 남동진하며 태봉(325.2봉), 가마봉(258봉), 장군봉(412.7봉), 삼봉(107.3봉), 혼백산(183봉), 천봉산(193.1봉), 소대방산(165봉), 운암산(484.2봉), 반월산(291봉), 수덕산(301봉), 오무산(356.3봉), 벼락산(431봉), 천등산(553.5봉), 우마장산(342.8봉), 유주산(416.6봉) 등을 일구고 지죽대교 앞 고흥반도 남단 남해바다에서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 90.9km의 산줄기를 말한다.
고흥반도를 남북으로 온전하게 종단하는 특수성을 고려하여 산이름이 아닌 지역이름을 따 고흥지맥이라 칭한다.

 

이제 571봉 지나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바로 밑에 절개지를 이룬 모암재 일명 천치고개가 내려다 보이고 이제 제법 그 위풍당당한 제 모습을 드러 낸 존제산이 까마득히 더 멀리 느껴지기 시작한다.

강렬한 태양이 벌써 머리 위에 서서 종주대의 발길을 붙잡고 있다.

오늘 하루가 걱정스런 시간으로 남는 순간이기도 하다.

 

천치고개로 내려가며 바라 본 등로 우측의 벌교읍쪽 풍경이다.

우측으로는 고흥지맥의 태봉과 가마봉이 있는 조성면이고 좌측으로는 벌교읍을 가르는 골짜기인 콧정골이 있는 곳이다.

해가 중천으로 떠 오르며 안개와 구름이 뒤섞여 제대로 된 풍경은 나오지 않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풍경만으로도 즐거운 시간이다.

 

이제 천치고개 즉 모암재로 가까이 내려 갈수록 깊어지는 절개지의 모습에 다시 한번 가슴이 아파옴을 느낀다.

개발의 논리로 파헤쳐지고 잘려지는 산줄기가 하나 둘이 아니지만 이렇게 붉은 속살을 드러내고 신음하는 모습을 보면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의 한명으로서 왠지 모를 미안함과 죄짓는 기분으로 울쩍해지는 것은 나만의 느낌인지...

도로를 낸 후 제대로 복구해 최소화된 자연 파괴가 되였으면 하는 바램 간절한 시간이다.

먼저 내려간 선두조는 절개지 건너 바람부는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어렵게 파헤쳐진 절개지를 우측으로 돌아 내려간 후 다시 배수로 옆 절개지를 타고 오르는데 그 수로속으로 청아한 물줄기가 흘러 내린다.

아마도 장마가 끝난지 얼마되지 않아 생각보다 많은 수량이 흐르는 것 같다.

절개지 정상에 올라 다시 그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한 후 몇바가지나 되는 물을 마시고 나니 조금은 살 것 같다는 생각이다.

정신 차려 뒤돌아 보니 방금 전 내려온 반대편 절개지와 571봉으로 이어진 마루금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잠시 그늘에서 휴식을 취한 후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늘 산행의 백미인 존제산으로 향한다.

하지만 너무나 많이 마신 계곡물과 무더위로 인해 자꾸만 몸이 쳐지기 시작하고 등로에 주저 앉아 쉬는 시간이 길어 진다.

앞으로는 무거운 카메라도 버리고 최소화된 배낭을 메고 무더위에 대비한 산행 준비가 필수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은 시간이다.

그래도 가끔 뒤돌아 보면 이제까지 숨겨놨던 보물을 하나 둘 꺼내 보여주듯 방금 전 지나온 천치고개 지나 571봉과 고흥지맥 분기점에서 우측으로 돌아 광대코봉과 초암산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이 환상을 노래하고 있다.

 

그렇게 쉬다 걷다를 반복하니 어느새 옛날 군부대 철조망을 만나 그 옆에 서 있는 소나무 그늘에서 불어오는 산바람을 친구삼아 잠시 쉬어 간다.

이 철조망을 통과해 뙤약볕에 존제산 정상으로 오르는 종주대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리고 있다.

누가 걸어주지도 않는 등로, 이제 서서히 힘을 내 다시 그들 종주대의 뒤를 따라 그늘 하나 없는 존제산으로 향한다.

 

잠시 오르며 올라야 할 존제산 정상부를 담아 본다.

관목들이 자라고 있어 초원처럼 보이는 존제산 정상부, 몇년전까지만 해도 공군부대가 자리하고 있어 호남정맥 종주대들에게는 잡목을 헤치고 등로도 없는 곳을 지나야 하는 마의 구간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곳인데 이제는 그 부대도 떠나 잔재만 남겨진 황량한 산이 되어 버린 곳이기도 하다.

그 옛날에는 이념 논쟁의 중심지로서 역사에 오랫동안 남겨질 곳으로 기록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제 존제산 정상부 근처에 올라 뒤돌아 보니 비오듯 흘러 내리는 땀방울 사이로 아름다운 호남정맥 마루금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방금 지나온 송전탑 아래로 천치고개의 붉은 절개지가 속살을 드러내고 앉아 있고 그 뒤 능선을 타고 고흥지맥 분기봉인 571봉을 정점으로 우측으로 꺽어 이어진 마루금이 우측 끝자락인 초암산까지 이어져 있다.

걸어 진행하면서 고통속에 몸부림쳤던 시간이 찰나의 시간이 지난 지금은 벌써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겨지는 시간이다.

 

군부대 막사쪽으로 들어가기 직전 지뢰 경고문들이 종주대를 긴장시키고 조금 더 오르니 선답자들의 산행 후기에서 자주 봤던 군견묘지의 비목이 외롭게 서 있다.

국가를 위해 민중을 위해 고생하다 생을 마감한 군견이지만 이렇게 그 숭고한 생명에 대한 예를 갖췄으니 이곳 군견들은 그나마 삶다운 삶을 살은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념이 무엇인지, 그저 먹고 살기 바쁜 민초들이 그 이념의 늪에 빠져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서야 지금의 세상을 열었으니 그 고통이야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 것인지...

 

군견묘지를 지나 앞을 바라보니 이제 폐건물이 되어 버린 옛 군부대 막사가 흉물스럽게 남아 있고 주위엔 온통 철조망 밭이다.

여기에서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주무대로 널리 알려진 보성의 벌교와 율어면에서의 빨치산 역사를 보성군지를 통해 알아보는 것이 산행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소개를 해 본다.

 

보성의 모스크바로 불렸던 율어는 당시 보성군 내에서 좌익세가 강했던 지역으로 꼽히는데 그것은 빨치산들의 주둔지가 되었던 존제산을 끼고 있고 조계산에 이어져 있는 지형 탓으로 반란사건 이전에도 빨치산들의 활동이 활발했었던 때문이다.

율어는 소작인이 많아 계급적 갈등이 심했을 뿐 아니라 6·25때 전남의용군 부사령관을 지낸 김○○과 같은 열성적인 좌익들의 고향이었던 때문이기도 하였기에 1946년 8월 15일 광복 1주년 기념식 때에도 2천에 가까운 농민들이 경찰관 1명과 우익인사 1명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율어를 비롯한 산간지역은 당시 기관의 추적을 피해 숨어 들어온 사람들의 은신처가 되었고 산으로 둘러싸인 율어의 상도지역은 자연히 많은 좌익들의 활동지가 되었다.

그들은 반란사건 전부터 칼과 같은 무기로 무장하였으며 면소재지를 제외한 마을단위를 모두 장악하고 있는 상태여서 경찰관들도 자기 보신 이외에 아무런 치안활동도 펼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율어는 이처럼 좌익세가 강했던 만큼 반란이 진압된 후에도 40여 일 간이나 그들의 지배하에 있을 수밖에 없었고 12월이 되어서야 경찰 38명과 군병력 50여명으로 토벌작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밤에는 소위 밤손님으로 불리는 좌익들이 밥과 가축, 젊은 청년들을 잡아가고 낮에는 토벌대가 좌익에 협조한 자를 통비분자로 잡아가 이 지역의 희생은 컸다.

사상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생존을 위해 죽이고 죽는 살상극이 연속되었던 것이다.

역사를 통해 무엇을 배우고 또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조금 더 진행하니 지뢰지대란 경고문이 붙어 있는 철조망이 가로막고 어렵게 그 철조망을 통과하니 다시 2중 원형 철조망이 종주대의 발걸음을 잡는다.

그 2중으로 가로막는 원형 철조망을 넘자 이번에는 일반 철조망 하나가 더 종주대를 잡아 챈다.

참으로 어렵게 통과하는 철조망 지대이다.

 

철조망을 통과해 진행하니 군부대 후문쪽 쓰레기장을 위한 작은 건물을 지나 연병장이 딸린 공군부대 막사였던 건물 앞에 섰다.

존재산 정상은 아마도 이 막사 위쪽에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지뢰에 대한 경고문으로 인해 정상으로 오르는 것은 포기하고 존재산에 관한 보성군지를 찾아 본다.

 

존제산은 성벽처럼 웅장하게 솟구쳐 있는 벌교의 진산이다.

해발 300m 이상의 고지가 무려 65㎢ 넓이로 퍼져 있는 보성군 남서부 산지를 대표하는 이 산은 북동에서 남서쪽으로 비스듬히 보성읍쪽으로 뻗어내리고 있다.

존제산은 고려 충렬왕이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충렬왕이 남부지방을 순시하는 길에 광주에 이르러 시종관원에게 전남의 명산을 물었더니 첫째는 광주 무등산, 둘째는 나주 금성산, 셋째는 고흥 팔영산, 그리고 네 번째가 보성의 존자산이라 알리자 왕은 존자산보다는 존제산이라 부르는 것이 낫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일설에는 이 고장 산수의 조종인 제암산을 잊지 못해 돌아보고 높이 받든다는 뜻에서 그렇게 불려 왔다고도 한다.

존제산은 불교와 연관된 지명이 많은 산이다.

특히 일월사의 철마와 관련된 전설이 여럿 전한다.

예전 이 산 기슭에 있던 일월사에 철로 만든 말이 있었는데 이 철마의 머리 방향에 위치한 촌락은 운세가 좋지 않아 흉년이 들거나 질병이 발생한다 하여 각 마을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철마의 머리 방향을 돌려세우는 등의 미신에서 비롯된 행동을 일삼아오다가 끝내는 그 철마를 산속 깊이 묻어 버렸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막사와 연병장을 빠져 나오자 등로는 다시 좌측 존제산 정상으로 향하는 갈림 삼거리에 도착한다.

잠시 갈등하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막기 위해 아쉽지만 존제산 정상이라 생각되는 등로 좌측을 아쉬운 눈으로 살펴보고 우측 도로를 타고 진행한다.

이제부터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주랫재까지 걸어 내려가야 하니 이 땡볕에 보통 고생이 아니다.

잠시 더 진행하니 나무 그늘 아래 중간 그룹이 잠시 쉬면서 간식을 먹고 있어 함께 합류한 후 지나온 구 공군부대 막사쪽을 뒤돌아 본다.

 

잠시 쉬면서 등로 우측으로 벌교읍쪽과 고흥지맥의 태봉과 가마봉을 담아 본다.

그 옛날 벌교에서 주먹자랑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전국의 주먹들이 많이 배출된 고장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꼬막으로 더 유명해진 고장이기도 하다.

언젠가는 올라 보고 싶은 고흥지맥이 부른다.

 

다시 휴식을 끝내고 배낭을 둘러 멘 후 넓은 임도를 타고 퇴약볕을 걸어가는 시간이 참으로 고통스럽다.

그 와중에 등로 우측 저 멀리 꼭 장흥의 천관산 또는 제암산이라 생각되는 산군이 보여 확인해 보니 저곳은 팔영산이 있는 고흥지역으로 고흥지맥상 존재하는 산군들이다.

저곳에 올라 이곳을 바라보며 오늘을 추억하는 시간이 있기를 간절히 바래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한동안 뜨거운 태양이 작렬하는 임도를 타고 진행하니 몇년전까지만 해도 공군부대 정문으로 사용되였던 철조망과 차량 통제 바리게이트가 나타난다.

오래전 이 산객이 보냈던 군 생활에 대한 추억을 되살려 보는 시간이였다.

이제는 막아 놨던 정상도 모두 민초들에게 개방되였으니 이 존제산도 깨끗하게 치워 옛날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루 빨리 되돌려 놓기를 기대해 본다.

 

다시 뜨거운 태양열을 머리에 받고 지열은 발바닥으로 견디며 한동안 진행하니 임도 우측으로 높은 송전탑 하나가 보이고 그곳을 지나 계속 걸어 내려가니 임도 좌측으로 방금 전 지나 내려 온 존재산 정상부가 빼꼼히 내려다 보고 있다.

그 정상부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그 근처의 군 막사까지 들렸다 내려온 시간만으로도 감사한 시간으로 남겨 본다.

그 존제산 위에 떠 있는 하얀 구름이 또 다른 세상의 모습으로 이 작은 산객의 가슴속에 깊이 남겨지는 순간이다.

 

다시 한동안 내려오니 임도 우측 저 멀리 방금 전 그 아래 임도를 타고 내려오며 바라만 봤던 거대한 통신탑이 올려다 보인다.

군부대가 사라진 자리 옆에 통신탑과 통신대가 자리하고 이미 만들어진 이 임도를 사용하고 있는듯 보였다.

언제 다시 이곳에 올라 저 통신탑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을련지 몰라 한동안 마음속 깊이 남겨보는 풍경이다.

 

그렇게 주위 풍경을 돌아보며 임도를 타고 내려오니 온 몸에 비오듯 흘러 내리는 땀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참으로 무더운 날씨에 무더운 임도를 타고 걸어가는 종주대의 모습에서 고통과 함께 삶의 활력소를 찾아 본다.

다시 한동안 진행하다 임도 좌측을 보니 역사속에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율어의 이동리 벌판이 가깝게 내려다 보이고 그 평야 저 멀리 동소산과 국기봉쪽 산줄기가 병풍을 치듯 마을을 감싸고 있다.

 

상당한 거리를 단지 뜨거운 임도를 타고 내려가니 발바닥이 불이 난듯 뜨거워지고 있다.

그래도 그 임도 우측 고랑으로 시원한 물줄기가 흐르는 소리가 들려 잠시 손을 담그니 살 맛 나는 시간이 되기도 하였다.

급하지 않은 내리막 임도를 타고 그렇게 전진하다 임도 좌측 능선으로 진입하기 직전 좌측 위를 살펴 보니 존제산 정상부의 통신탑과 군막사가 벌써 까마득히 멀어져 있다.

그 정상 위를 떠도는 흰 구름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종주대의 현실과는 다르게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으로 남겨지기에 아이러니를 느낀다.

 

임도에서 좌측 능선으로 들어 진행하니 급경사 내리막 등로가 계속 이어지고 작은 안부를 지나 호젓한 등로도 만난다.

많은 산객들이 지나 다니지 않았는지 자연의 모습이 물씬 풍겨오는 등로이기도 하다.

그저 뜨거운 태양을 피하고 땅에서 올라오는 지열을 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즐거운 산행 시간이다.

 

하지만 그 능선 숲길도 잠시 다시 전에 타고 내려온 임도를 만나 좌측으로 계속 따라 내려간다.

선답자들의 산행 후기를 읽어 보면 1시간 30여분 임도를 타고 걸어가야 한다고 되어 있는데 좌측 능선 등로가 개발되면서 30여분 짧아진 느낌이다.

잠시 더 임도를 타고 내려가니 895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주랫재에 도착해 잠시 한숨을 돌린다.

벌교와 율어면을 이어주는 895번 지방도로인 주릿재는 백림농장 입간판이 크고 많이도 붙어 있는 그런 모습이다.

 

이곳에는 정자도 하나 있고 그 옆에는 소공원도 조성되어 있으며 그속에 조정래의 대하소설인 태백산맥 문학비가 서 있다.

이곳에서 조정래의 태백산맥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진행해야 할 것 같다.

1943년 전남 승주군 선암사에서 태어난 조정래는 광주 서중학교와 서울 보성고등학교를 거쳐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한 작가이다

많은 작품들중에 특히 태백산맥이란 대하소설로 이념 대립이 심한 우리나라에서 고통가 유명세를 동시에 얻은 조정래의 태백산맥 중에 특히 이 산객이 감명 깊었던 대목은 각각 좌익과 우익을 대표하는 염상진과 염상구 형제 즉 그 당시 우리나라 현실에서 북한과 남한을 상징하는 인물들에 대한 묘사이다.

 

그들은 피를 나눈 형제이면서도 사상 때문에 대립한 후 마지막에 염상구는 죽은 형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애정을 표현하게 되는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대목이다.

반공이란 한쪽의 사상을 전수 받으며 살아 온 이 산객에게 큰 불신과 함께 경외로움을 동반했던 우익과 좌익의 이년 대결이 결국 같은 동족을 학살하는 자가당착을 저지른 대목에서는 피가 거꾸로 돌고 있는 착각을 느낀 것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기 위해 있는 이념과 정치가 인간을 살리기는 커녕 죽이는 도구로 전락할 때 힘 없는 민초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해 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결국 원초적인 인간의 형제와 동료 그리고 삶에 대한 희망보다 크지는 못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곳 주릿재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종주대가 더위에 지쳐 중도 포기하고 편안한 자세로 쉬고 있다.

조금 늦게 도착한 이 산객을 보고도 말은 안했지만 중도 포기하고 일찍 산행을 끝냈으면 하는 눈치이지만 어짜피 종주 산행이 주 목적이고 그것이 스스로와의 약속이기에 다시 배낭속 무거운 짐을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내려 놓고 895번 지방도로를 건너 추동리쪽으로 조금 내려가 좌측 능선으로 나 있는 등로를 타고 이제부터 조금은 빠르게 진행한다.

나즈막한 봉우리로 오르며 등로 좌측을 바라보니 작은 저수지 넘어 이동리쪽 푸른 평야가 펼쳐져 있다.

 

힘겹게 첫 봉우리를 올라 뒤돌아 보니 율어면쪽으로 이어진 895번 지방도로가 내려다 보이고 그 끝자락엔 우리 종주대를 태우고 온 대형버스와 팔각정 그리고 화장실 건물들이 빤히 내려다 보인다.

그 주릿재 지나 가파른 능선을 타고 오르면 고통속에 어렵게 내려온 존제산 정상부로 향하는 등로와 정상부가 한눈에 보인다.

방금 전 오르며 고통에 신음하던 시간은 어느새 사라지고 새로운 힘이 솟아나는 시간이다.

 

다시 정상부를 지나 진행하니 이곳 역시 편백나무 숲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고 즐거운 마음으로 전진해 본다.

그러고 보니 우리 종주대가 제일 마지막으로 잘 짜여진 5인의 건각이다.

이제부터 조금은 빠르게 그리고 빡쎄게 전진하니 금새 가파른 철계단이 기다리는 작은 포장도로에 도착한다.

다시 포장도로에서 가파른 절개지를 타고 능선으로 붙는다.

 

능선으로 오르니 간벌된 편백나무 숲이 기다리고 그곳을 타고 오르다 넓은 임도에서 잠시 쉬면서 물 한모금 마셔 본다.

지나온 등로와 철계단이 있는 포장도로가 빤히 내려다 보이지만 그 모습조차 사진에 담기 힘들 정도로 힘이 부친다.

다시 힘을 내 가파른 경사면을 어렵게 오르니 485.5봉 전위봉에 올라 남은 간식을 먹으며 기력을 회복 시킨다.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런 시간이지만 스스로를 채칙하며 완주에 대한 열망을 붙사른다.

그렇게 완만한 등로를 타고 진행해 485.5봉에 도착하니 앞으로 진행해야 할 마루금과 숨어있는 석거리재 그리고 그 뒤로 다음 구간 올라야 할 백이산이 시원하게 조망된다.

 

전위봉에서 약간 쉬면서 남은 간식을 먹어서 그런지 금새 기력이 회복되고 다시 완만한 등로를 타고 오르니 금새 485.5봉 정상에 도착한다.

하지만 정산 삼각점은 등로 우측 5미터 거리에 박혀 있고 485.5봉이란 이정표는 등로 좌측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

삼각점을 담은 후 뒤돌아 내려와 정상 등로에서 앞으로 진행해야 할 마루금을 담은 후 다시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빠르게 진행한다.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 안부를 지나니 다시 완만한 오르막 등로가 이어져 있고 그 등로를 타고 오르다 너무나 지쳐 잠시 쉬어간다.

다시 배낭 둘러메고 오르니 등로는 우측으로 크게 꺽어 진행되고 곧이어 넓은 임도와 이어져 있다.

조금 더 지나면 민가가 있는 곳으로 임도 타고 진행하다 저 하얀 포장이 있는 직전에서 우측으로 크게 꺽여 나 있는 임도를 타고 진행한다.

이곳이 알바하기 쉬운 곳이지만 쉽게 정상 등로를 타고 이제부터 심하지 않은 올망졸망한 마루금을 타고 진행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보이는 석거리재까지의 거리가 왜 그리 먼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정맥 등로이다.

역시 맥 잇기 산행은 그 끝자락에 내 발자국을 찍어야만 끝이 난다는 사실을 오늘도 실감시키고 있다.

하지만 그 무더운 열기속에서도 앞으로 진행해야 할 아름다운 마루금을 바라보는 것은 늘 즐거운 시간이다.

 

이제 석거리재가 눈 앞에 다가오고 다음 구간 올라야 할 백이산이 가깝게 자리한 곳에서 백이산 우측으로 내려다 본다.

27번 지방도로가 보이고 교각들도 보이며 그곳에 흩어져 존재하는 민초들의 터전들도 눈에 들어 온다.

그 뒤로 다시 올망졸망한 산들이 둘러 싸 여느 농촌과 다를 바 없지만 역사적으로 많은 고토오가 어려움이 있었던 곳이라니 믿겨지지 않는 모습이다.

 

이제 작은 봉우리 두개를 남겨 놓고 계속 평이한 등로를 타고 전진하니 등로 좌측으로 완전 벌목지대가 나타난다.

목초지를 조성하는지 아니면 편백나무를 심기 위한 작업인지 몰라도 이 무더운 퇴양볕에 전기톱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시간이 지나 오르는 후답자들의 산행 후기에는 또 어떤 모습으로 묘사가 될지 궁금하면서도 이렇게 민둥의 산자락으로 만들어 가는 현장이 아쉽기만 하다.

 

이제 마지막 봉우리를 넘으니 27번 지방도로가 원형을 그리며 지나가는 모습이 보이고 그 위로 다음 구간 올라야 할 백이산이 하늘 높은줄 모르게 높아 보인다.

낙성리쪽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벌겋게 잘려진 절개지의 모습이 또 다시 이 작은 산객의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무엇이 개발이고 또 무엇이 진짜 민초들을 위함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저렇게 망가진 자연은 몇십년 아니 몇백년이 지나도 복구가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생각하고 또 생각한 후 실행에 옮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제 오늘 산행 날머리인 석거리재가 손에 잡힐듯 다가와 있다.

좌측 민둥의 벌거숭이 능선을 타고 내려가면 그곳에 석거리재가 있을 것이다.

참으로 힘들고 어렵게 진행해 온 날머리이기에 더욱 그 감동이 큰지도 모르겠다.

함께 어려운 산행에 동참한 5인의 건각들 모두 지친 기색이 역력하지만 얼굴에는 완주에 대한 희열이 더 커 보이는 시간이다.

 

드디어 보성 땅에서 순천으로 넘어가는 27번 지방도로 위 석거리재에 도착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벌교에서 순천 외서를 이어주는 석거리재, 많은 통행량은 아니지만 그래도 간간히 사람들과 물자를 실고 이 고갯마루를 넘나드는 차량들의 행렬에 사람 사는 냄새를 맡아 본다.

이곳 휴게소 화장실에서 간단히 소금끼를 씻어 내고 종주대중 한분이 보시한 토종닭을 먹으며 하루를 마감해 보는 시간이다.

 

석거리재, 석거리재 휴게소 앞 주유소 옆 공간에 서 있는 빗돌 하나가 눈길을 잡는다.

섶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그 섶나무를 찾아 보지만 찾을 수 없다.

그래도 이렇게 이곳까지 내려 와 빗돌 하나 정성드려 담을 수 있는 시간이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다.

맥 잇기 산행이 아니라면 이곳에 들릴 수 있는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에서 본 석거리재는 다음과 같다.

석거리재는 옛 승주군 즉 지금의 순천시 외서면과 보성군 벌교읍의 경계를 짓는 곳으로 그 고갯마루에 이르는 산길의 경사가 아주 심하고 구불거림 또한 몹시 심해 차가 빨리 달리면 멀미가 날 지경이다.

소설에서 외서댁은 이 가파르고 험한 고개를 넘어 벌교 회정리 3구로 시집을 갔다.

그러고는 남편 때문에 염상구의 아이를 임신한 몸으로 먼길을 걷고걸어 이 고개를 넘어 친정을 찾아간다.

이 고개의 지형지세는 어쩔 수 없이 군경과 빨치산의 접전을 부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벌교 출신인 양효석이 계엄사령관으로 부임하자마자 벌교를 지키기 위해 이 고개를 따라 진지를 구축한 것은 썩 현명한 일이었다.

빨치산이 된 외서댁이 이 고개에서 싸우다가 문득 밤하늘을 보며 친정과 자식을 생각하며 목이 메이는 장면이 그려지는 것은 이 산객만의 마음일지...

 

석거리재 휴게소 맞은편 한쪽에 서 있는 휴게소란 이정표를 담는 것으로 오늘 산행을 마무리 한다.

백이산을 지나 선암사와 송광사로 유명한 조계산을 넘으면 이제 호남정맥 끝자락도 눈에 보일듯 다가올 것이다.

이렇게 또 하나의 조각을 맞춰 나가는 시간이 웬지모를 행복감으로 밀려오는 시간이다.

무더위와 강렬한 태양에 어려움이 있겠지만 무탈하게 완주하는 그날까지 스스로에게 화이팅을 외쳐 본다.

 

식사 후 순천에 있는 낙안읍성을 들리지만 가을에 몇번 들렸던 곳이기에 포기하고 벤취에서 모자라는 잠을 청한다.

날씨가 뜨거워 제대로 된 구경 하기도 힘이 들겠다는 생각 때문이였는데 다른 종주대들도 역시 같은 생각을 하였는가 보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