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지 : 경상남도 하동군의 백두대간 우듬지 마루금 일대
산행일자 : 2022년 11월 19일 (토요일 당일 산행)
산행날씨 : 약간의 구름이 껴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맑고 약간의 바람이 불었던 산행날씨
산행온도 : 영상 05도에서 영상 18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남해대교(구 노량대교) 북단 노량리 주차장-남해대교 교차로 횡단보도-섬진강대로 4차선 포장도로-노량교차로(남해와 노량대교 갈림삼거리)-19번 섬진강대로 4차선 포장도로-연대봉(해발 447미터) 들머리와 설명판-미법마을 도로표지판-금남교차로(금남과 신노량 갈림삼거리)-수문과 미법 버스정류장-소송마을 갈림삼거리(우측 섬진강대로 1차선 포장도로)-이정판(하동석산 채석장까지 1.7 Km)-섬진강대로 시멘트 포장도로-제8962부대 경고판-제8962부대 개인화기와 자동화사격장 안내판-하동석산(채석장)-능선진입(지독한 칡넝굴등로)-우거진 잡목등로-아침재(이정판, 우듬지 마루금접속)-잡목등로-능선진입(좌측)-산죽지대-바위너덜등로-잡목등로-준희 선생님의 응원판-제도권 등로접속-432.3봉(이정판)-무명묘지-국립공원 이정목-연대봉(446.8미터, 정상석, 돌탑, 조망안내판) 이정표(신노량 1.4 Km, 미법마을 1.6 Km)-남해대교 갈림삼거리(무명묘지, 정상까지 200미터 표지석)-신노량 갈림삼거리 이정표(구노량 0.7 Km, 신노량 1.0 Km, 연대봉정상 0.4 Km)-돌담지역-조망(바위암반)-무명묘지-갈림삼거리(우측)-밭경작지-섬진강대로 시멘트포장도로-구노량마을-1002번 구노량길 4차선 포장도로-구노량 버스정류장-남해대교(구노량대교)-산행종료
산행거리 : 07.47 Km (남해대교에서 아침재와 연대봉 찍고 다시 남해대교까지)
우듬지 산행 : 03.00 Km (아침재에서 연대봉 지나 남해대교이자 구노량대교 북단까지)
접속구간 : 04.47 Km (남해대교이자 구 노량대교에서 하동석산 지나 아침재까지)
산행트랙 :
산행시간 : 02시간 48분 (07시 00분부터 09시 48분까지)
교통 및 숙박편 : 갈때 - 05시 30분 광양시 알프스 모텔에서 기상 후 샤워하고 출발
06시 20분 광양시 김밥집에서 김밥과 라면으로 아침 해결(6,500.-원)
07시 00분 남해대교이자 구노량대교 북단의 GS25시 앞 주차장에서 애마를 주차시키고 산행 준비 후 곧바로 출발
올때 - 09시 48분 백두대간 우듬지 산행을 깨끗하게 마무리하고 홀대모 모임이 예정된 모악산 자락 금산사로 출발
15시 30분 중간 휴게소에서 점심식사 및 휴식 후 모악산 유스호스텔 도착 해 홀대모 모임에 참석 (8,000.-원)
백두대간 우듬지란 ???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에 의해 백두대간이 우리나라의 모든 물줄기를 동서로 양분한다고 전제할 때 산경표의 시작점인 백두산에서는 압록강과 두만강이 동과 서로 갈라지나 그 끝점인 지리산에 와서는 동서로 가르는 물줄가 없이 엉거주춤하게 되어 버렸다.
나라 전체의 윤곽에 대한체계적인 지식도 없이 두 발로 걸어 올라 나라 전체의 물줄기와 산줄기를 도표로 만듦에 있어서 세세한 부분까지 언급하며 기록 할 수는 없었겠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나라 등뼈에 해당하는 백두대간의 마지막 지점이 어디냐를 놓고 많은 이견들이 나타나기 시작을 하였다.
산경표에서 마감한 지리산 이후의 산길에서 물을 만나 산과 산줄기로써의 기능을 잃고 산과 물이 만나 하나되는 지점까지의 산줄기에 관한 의견들인 것이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시작하거나 또는 마무리하던 백두대간 산행을 언제부턴가 웅석봉에서 백운산으로 또는 진양호까지 연장을 하며 진행하기도 하였지만 그 경우에도 물길을 가르는 기능이 없어 지금은 그 의미가 많이 축소된 듯 보인다.
지리산 천왕봉을 지나 가장 길게 연장하여 진양호까지 이어간다 하더라도 마루금 양쪽의 물은 모두 남강물로서 원래 산줄기를 정했던 물길이 동서로 가르는 기능은 없기 때문이기에 산줄기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는 지점까지 가거나 왔다는 의미는 있으나 물길을 가르는 분수의 역할은 영신봉을 넘으면서 이미 끝이 났기 때문이다.
신산경표에서는 백두대간을 영신봉에서 계속 남으로 이어 노량 앞바다에서 마감을 했는데 이럴 경우 낙동강과 섬진강을 가르면서 나라의 물줄기를 온전히 동과 서로 양분하는 산줄기가 가능하지만 이럴 경우 산경표의 낙남정맥과 일부 겹치게 되어 산경표의 일부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는데 우듬지와 낙남정맥이 분기하는 옥산을 낙남정맥의 시작점으로 내려야 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다른 맥들처럼 이름 짓기가 용이하지 않는데 먼저 백두대간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별도의 지맥으로 볼 것인가 부터 쉽지 않다 보니 신산경표의 백두대간이나 백두대간 꼬리 또는 신백두대간이라 불려지기도 하는데 그 중에서 순수 우리말인 우듬지를 택해 백두대간 유듬지로 정하면 어떨까 하는 의견이다.
우듬지란 순수 우리말로서 나무 꼭대기의 가지 윗부분 줄기를 뜻한다.
오래 전 활성화 되기 전 폭염속에 올랐다 지독하게 우거진 가시잡목으로 인해 아침재에서 중간 탈출한 후 신산경표 상 전지맥 완주 이전에 마무리하기 위해 잠시 들려 깨끗하게 완주했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후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단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현존하는 맥 잇기 산행에 대한 수많은 이론과 산행 트랙이 존재하지만 이 산객은 산경표와 신산경표를 보고 맥 잇기 산행을 처음 진행하였기에 가능하면 이 산행 이론에 따라 산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산줄기의 마지막 끝부분이 물과 만나는 지점인 합수점으로 가야한다는 이론 역시 그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아직 정확하게 내려진 올바른 해답이 없기 때문에 이 산객은 옛 문헌에 나타난 이론인 관아를 기준으로 설정된 산줄기를 그 끝으로 하고 문헌에 나타나지 않은 관아 이후의 산줄기는 산행을 하는 산객 각자의 기준에 맞춰 진행하면 될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백두대간 우듬지 산행을 한 후 이 산행후기를 기술하면서 경상남도 하동군과 그 주변 지자체에 수록된 지명유래 및 네이버의 지식백과, 다음의 백과사전, 산림청, 한국관광공사의 자료들을 참고하여 정리된 부분들이 있으며 이런 부분들이 혹시라도 지적재산권에 저촉이 되어 삭제나 변경이 필요한 경우 연락주시면 언제라도 즉시 삭제 및 수정해 드릴 수 있음도 알린다.
가장 무더웠던 정확히 10년 전인 2012년 8월 중순에 같이 산행을 하던 산악회에서 백두대간 우듬지 산행공지가 떠 고민할 필요도 없이 신청을 했는데 산행대장은 일부 회원들과 함께 산행을 포기하고 남해안 해수욕장에서 피서를 즐기기로 했다는 소식에 난감해 하면서 지도 한장 들고 다섯명이 산행을 시작했는데 결국 수많은 대형 알바를 하다가 구노량대교까지 가지 못하고 아침재에서 좌측으로 탈출한 이후 기회가 없어 내려오지 못하다 오늘에서야 다시 들리게 된 사연 많은 백두대간 우듬지 산행이 되었다.
지금이야 산행 트랙도 많고 등로도 많이 좋아져 진행에 큰 어려움이 없지만 10년 전 진행을 할때만 해도 우거진 가시잡목들로 온 몸에 큰 상처들을 남기면서도 두 구간으로 이틀간 완주를 못할 정도로 너무나 힘들고 어렵게 진행한 산행으로 기억된다.
다만 남아 있는 산행 거리가 짧기는 하지만 날머리와 들머리 접근이 좋지 않아 여러가지 고민을 하다 산행 날머리인 남해대교 일명 구노량대교 진입로 근처의 GS 편의점 앞 주차장에 애마를 주차시키고 걸어서 아침재로 이동 후 백두대간 우듬지 산행을 마무리하고 오후에 홀대모 모임이 있는 김제의 모악산 유스호스텔로 이동을 하기로 결정하고 전날 옥룡지맥 산행을 마무리하자마자 광양시로 이동해 하룻밤 묵고 산행 날머리에 도착을 해 오랜 세월 지나 다시 백두대간 우듬지 산행을 완주하기 위해 서 있는 감정이 복잡하기만 하다.
백두대간 우듬지 산행의 날머리이자 들머리인 남해대교(구노량대교) 앞 주차장에 애마를 주차시키고 19번 섬진강대로 4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하동석산 진입로가 분기하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하동석산 지나 백두대간 우듬지인 하침재로 어렵게 접속을 한다.
10년 전 우거졌던 가시잡목들이 많이 사라진 아침재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등로를 따르니 좋은 등로는 아니지만 진행에 큰 어려움을 느끼는 등로도 아니기에 편안하게 오르니 제법 긴 바위너덜 등로가 나타나고 그 상단부로 올라 뒤돌아 보니 바로 발 아래 아침재 지나 깃대가 세워져 있던 503.8미터의 깃대봉이 보이고 그 뒤로 잘록한 대치 넘어 인공구조물들이 가득한 875.1미터의 하동 금오산이 솟아 있고 그 좌측 뒤로 762.5 삼각점봉이 차례로 보이는데 저 능선을 따라 진행하면서 너무나 많은 알바와 식수 부족으로 힘들게 진행했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바위너덜지대를 타고 올라 우거진 잡목 등로를 헤치며 어렵게 진행하니 갑자기 우측에서 올라오는 뚜렷한 등로와 접속을 하고 편안하게 걸어 진행하니 도상 432.3봉을 통과한다.
도상 432.3봉 지나 평이한 능선 등로를 타고 사방팔방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과 조망들을 살펴보며 전진하니 드디어 백두대간 우듬지의 마지막 봉우리인 446.8미터의 연대봉에 도착을 하고 중앙에 설치된 거대한 돌탑 앞에서 추억 한장 남기며 백두대간 우듬지 산행도 갈무리를 하기 직전이다.
그토록 이곳을 들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오르지 못하다가 결국 신산경표 상 162 전지맥 완주가 코 앞으로 다가 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찾게 된 것이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나 버렸지만 무탈하게 마무리를 할 수 있어 큰 희열을 느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높지 않은 연대봉 정상이지만 주위에 높은 산이나 봉우리가 없어 일망무제로 펼쳐진 풍경과 조망이 압권으로 펼쳐져 있어 거대한 돌탑 앞에서 추억 한장 남기고 제일 먼저 남쪽과 남남동쪽을 살펴보니 오늘 산행을 시작한 남해대교 일명 구노량대교와 우측으로 새로 건설된 신노량대교가 내려다 보이고 그 뒤로 남해지맥 전구간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는데 좌측 앞으로 377.9미터의 구두산을 필두로 그 뒤로 480.9미터의 금음산 그리고 그 좌측 가장자리 방향으로 보리암이 있는 704.9미터의 금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남해대교와 노량대교 뒷쪽으로는 뾰족하게 솟아 있는 450.4미터의 녹두산이 보이고 그 우측 뒤로 784.9미터의 망운산이 보이는데 2009년 4월 말에 홀로 내려 와 이틀간 힘들게 완주한 남해지맥에 대한 추억이 하나 둘 껍질을 벗으며 잠시 상념에 잠기게 만든다.
어제 신산경표 상 159번째 지맥이자 호남지방에 남아 있던 마지막 지맥인 옥룡지맥 산행을 나주에 살고 계신 동밖에님의 도움으로 잘 마무리하고 밤 늦게 광양시로 들어가 하룻밤 묵고 아침식사까지 든든하게 먹고 산행 들머리이자 날머리인 남해대교 앞으로 이동을 하니 GS 편의점 앞에 넓은 주차장이 보여 그곳에 애마를 주차시키고 간단히 산행 준비 후 곧바로 19번 섬진강대로를 타고 산행을 시작하는데 도로로 나가자마자 남해대교 일명 구노량대교와 매점들을 배경으로 사진 한장 남긴다.
남해대교 북단에서 섬진강대로 4차선 포장도로를 건너 좌측인 서쪽으로 걸어가니 도로 우측으로 시멘트 포장도로와 민가들이 보이고 곧이어 청학동과 삼성궁 및 최참판댁 가는 도로표지판 뒤로 좌측의 남해와 신노량으로 분기하는 도로 표지판이 올려다 보인다.
계속 이어지는 섬진강대로를 따르니 노량교차로 도로표지판이 보이고 그곳을 지나자마자 좌측으로 신노량과 남해로 들어갈 수 있는 노량대교 북단 풍경과 함께 노량대교 홍보관 건물도 보이기 시작한다.
노량대교는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과 하동군 금남면을 잇는 교량으로 국내 기술로 만든 세계 최초의 경사 주탑 현수교이고 2018년 9월 13일 개통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노량해전이 일어났던 장소로 다리의 디자인은 이순신 장군의 전술인 학익진을 모티브로 하고 있으며 주탑에 8도의 경사각을 주는 경사(기울어진) 주탑 방식으로 시공되어 V자 모양의 주탑으로 완성되었다.
신노량과 남해로 들어갈 수 있는 노량대교 분기점을 지나 조금 더 도로 따라 걸어가니 도로 우측 옆으로 연대봉(해발447미터) 안내판이 보이는데 연대봉에 대한 설명과 함께 정상까지 1.2 Km임을 알리는 거리표시도 보이고 그 설명판 뒤로는 연대봉으로 오를 수 있는 계단과 함께 좌측 옆으로는 계단식 밭경작지들도 보이는데 내려올 때 갈림삼거리에서 우측인 신노량 방향으로 내려오면 만나는 들머리처럼 보인다.
계단으로 이뤄진 연대봉 들머리와 설명판을 확인하고 사진에 담은 후 계속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좌측으로 금남과 노량으로 갈 수 있는 갈림삼거리 도로표지판이 보이고 곧이어 도로 우측 옆으로 미법마을로 갈 수 있는 도로표지판이 보여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미법마을은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송문리에 있는 자연마을 중 하나로서 송문리 중심 마을로 금남면사무소와 금남면 보건소 및 노량초등학교 등이 들어서 있다.
미법마을이 속해 있는 송문리는 곤양군 서면 소송동(小松洞)의 송자와 수문동(水門洞)의 문자를 따서 송문리(松門里)라 하였다.
호구총수(戶口總數)에 곤양군 서면의 소송포촌(小松浦村)와 수문포촌(水門浦村),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옹기점(일명 수문동)이라는 한글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 말 곤양군 서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소송동과 수문동 및 미법동(彌法洞)이 통합되어 하동군 남면 송문리가 되었고 1933년 남면과 금양면이 통합되어 금남면이 됨에 따라 금남면 송문리가 되었다.
금오산(金鰲山, 849m)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높이 300~400m 산지들이 마을 동쪽을 감싸고 산기슭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송문천(松門川)을 이루는데 송문천 연변을 따라 형성된 평지에 마을이 들어서 있다.
미법마을로 갈 수 있는 도로표지판을 확인하고 조금 더 걸어가니 금남교차로 도로표지판이 보이는데 좌측으로 신노량과 금남으로 갈 수 있는 갈림삼거리이다.
금남면은 경상남도 하동군의 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면으로 동쪽으로는 남해 바다와 접해있고 서쪽으로 금성면과 이웃하며 남쪽으로 바다 건너 남해도와 마주한다.
북쪽으로 금오산을 경계로 진교면과 접하고 서북쪽으로는 고전면과도 연접하는데 금오산에서 발원한 하삼천과 진정리의 용산에서 발원한 진정천이 북쪽으로 흘러 주교천에 합류한다.
면의 동쪽은 금오산으로부터 큰설산과 연대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형성되어 있고 구릉성 산지들이 분포하며 남해 바다와 접해 있는 해안 일대는 간척된 넓은 평야지대가 있다.
금남교차로를 지나 우측으로 금남과 금정사 가는 갈림삼거리를 지나니 도로 우측으로 연대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울긋불긋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어 있고 지나 온 방향을 바라보니 우측 뒤 저 멀리 남해의 산줄기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계속 이어지는 도로를 타고 조금 더 걸어가니 도로 우측으로 수문과 미법이란 버스정류장이 나타나는데 미법은 방금 전 미법마을이란 도로표지판을 봤을 땐 확인했고 수문을 확인해 보니
수문마을은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송문리의 자연마을 중 한곳으로 마을 앞으로는 남해의 드넓은 갯벌이 펼쳐져 있고 마을을 지나는 국도 19호선의 소송교차로와 금남교차로가 있다.
미법마을과 마찬가지로 수문마을이 속해 있는 송문리는 곤양군 서면 소송동(小松洞)의 송자와 수문동(水門洞)의 문자를 따서 송문리(松門里)라 하였다.
호구총수(戶口總數)에 곤양군 서면의 소송포촌(小松浦村)와 수문포촌(水門浦村),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옹기점(일명 수문동)이라는 한글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 말 곤양군 서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소송동과 수문동 및 미법동(彌法洞)이 통합되어 하동군 남면 송문리가 되었고 1933년 남면과 금양면이 통합되어 금남면이 됨에 따라 금남면 송문리가 되었다.
금오산(金鰲山, 849m)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높이 300~400m 산지들이 마을 동쪽을 감싸고 산기슭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송문천(松門川)을 이루는데 송문천 연변을 따라 형성된 평지에 마을이 들어서 있다.
수문과 미법마을 버스정류장을 지나 조금 더 도로를 타고 걸어가니 좌측으로 소송마을 입구 도로표지판이 보이고 곧이어 도로 우측으로 소송마을과 하동석산으로 갈 수 있는 갈림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이곳에서 지금까지 걸어 온 19번 섬진강대로 4차선과는 헤어져 우측 분기하는 도로 방향으로 진입한다.
소송마을은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송문리에 있는 자연마을 중 한곳으로 송문리의 으뜸가는 마을이고 소나무 숲이 무성하였다고 한다
소송마을이 속해 있는 송문리는 곤양군 서면 소송동(小松洞)의 송자와 수문동(水門洞)의 문자를 따서 송문리(松門里)라 하였다.
호구총수(戶口總數)에 곤양군 서면의 소송포촌(小松浦村)와 수문포촌(水門浦村),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옹기점(일명 수문동)이라는 한글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 말 곤양군 서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소송동과 수문동 및 미법동(彌法洞)이 통합되어 하동군 남면 송문리가 되었고 1933년 남면과 금양면이 통합되어 금남면이 됨에 따라 금남면 송문리가 되었다.
금오산(金鰲山, 849m)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높이 300~400m 산지들이 마을 동쪽을 감싸고 산기슭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송문천(松門川)을 이루는데 송문천 연변을 따라 형성된 평지에 마을이 들어서 있다.
남해대교부터 타고 걸어 온 19번 섬진강대로 4차선 포장도로와는 이곳에서 헤어져 우측 분기하는 소로의 1차선 포장도로로 빠져 나가니 소송마을로 갈 수 있는 좌측으로 갈리는 갈림삼거리가 나타나고 그 도로 우측 능선 방향에는 하동석산이란 입간판이 보이는데 아마도 아침재 좌우측으로 보이는 거대한 채석장이 바로 이 하동석산 회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제 하동석산 즉 채석장으로 들어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계속 북동 방향으로 걸어 오르니 도로 양쪽으로 이곳은 아직 약간의 단풍들이 남아 있어 구경을 하면서 많은 사진에 담아 본다.
그렇게 한동안 걸어 오르며 살펴보니 우측의 깃대봉과 좌측 뒤로 보이는 금오산이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조금 더 걸어 올라 칡넝굴들이 보이는 곳에서 올려다 보니 우측의 깃대봉과 전봇대 좌측 뒤로 인공구조물들을 이고 있는 하동의 금오산 정상부가 빤히 올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사진에 담으며 아침재를 향해 걸어 오르니 깃대봉과 금오산 줄기에 남아 있는 울긋불긋한 단풍이 최절정을 막 지나는 듯 이 산객의 눈과 마음을 훔치기 시작하고 올해 잘 느껴보지 못했던 가을 정취를 마음껏 느끼며 진행하다 보니 도로 좌측으로 군부대 경고판이 보이기 시작하고 곧이어 우측으로 묘지들이 보이는 넓은 공터에 도착을 해 진행 방향을 살펴보니 우측의 깃대봉과 좌측의 금오산 사이로 움푹 패인 아침재가 드디어 모습을 조그믹 드러내기 시작한다.
공터를 지나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눈 앞으로 깃대봉이 조금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하고 곧이어 도로 좌측으로 군부대 개인화기 자동화사격장 안내판이 보이면서 좌측 앞으로 군부대 사격장이 보이기 시작한다.
군부대 사격장 진입로 갈림삼거리를 지나 계속 오르다 보니 도로 한쪽으로 아직 지지 못한 구절초가 하얀 잎을 흔들며 배웅을 하고 있어 잠시 눈맞춤을 하고 출발하니 금새 하동석산 채석장 입구에 도착을 하는데 10여년 전 기계 소음으로 내려오지 못했던 하동석산 채석장도 이제는 폐쇄되었는지 정적만 감돌고 있다.
채석장 입구를 지나 조금 더 걸어 오르니 좌측으로는 채석한 작은 돌더미가 산처럼 쌓여있고 우측으로는 임시 사무실로 사용했던 콘테이너 박스들이 보이는데 강아지 한마리가 이방인의 출현에 울부짖더니 금새 조용해지고 잠시 주위를 둘러 보지만 누군가 관리만 할 뿐 작업을 하거나 이곳에 상주하는 사람은 없는 듯 보인다.
관리 사무실을 지나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도로 우측으로 드디어 흉물스럽게 드러나는 하동석산의 거대한 채석장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생각보다 높고 깊게 채석한 흔적이 아픈 상처로 남아 있다.
그렇게 조금 더 하동석산 채석장 한가운데로 나 있는 도로를 따라 상단부로 올라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이 산객이 걸어 오른 도로와 콘테이너박스 및 채석된 돌 더미들이 보이고 그 뒤 저 멀리 제법 높고 긴 산줄기가 보여 지도로 확인해 보니 북서 방향으로 하동읍 지나 호남정맥의 백운산과 쫒비산불암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였다.
지나 온 도로와 호남정맥 상 백운산과 끝자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확인하고 우측의 높고 깊은 흉물처럼 남겨진 하동석산의 채석장을 다시 한번 더 살펴보고 사진에 담은 후 채석장 상단부로 오르니 도로는 좌측으로 휘어지며 끝이나고 그 끝자락부터 거친 바위 위로 지독하게 우거진 칡넝굴들이 보이는데 지도로 확인해 보니 저 칡넝굴 위를 타고 올라야 아침재로 갈 수 있어 아침부터 난관에 봉착한 느낌이다.
10여 년 전 이곳 아침재에서 탈출할 때만 해도 서쪽의 채석장이 공사중이라 사람들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해 좌측인 동쪽 방향으로 탈출했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채석장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는지 이제는 이곳도 사람 그림자 하나 보기 어려운 상황이 된 듯 싶다.
지독하게 우거진 칡넝굴 지대를 타고 오르니 다시 드넓게 펼쳐진 칡넝굴지대가 보이는데 올라오는 등로보다는 수월하게 나 있는 등로를 타고 능선으로 오르니 우거진 가시잡목들이 산객의 옷깃을 붙잡으며 진행을 어렵게 만든다.
그래도 천천히 가시잡목들을 헤치며 쓰러진 거대한 고사목들을 조심해 통과하며 오르니 금새 준희 선생님이 걸어 둔 백두대간 우듬지의 아침재라는 이정판이 반겨 주는데 10여 년 전 여름에 어렵게 탈출했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으로 오늘은 제법 진행이 가능해 보이는 아침재이다.
좌측으로 노량리와 우측으로 송문리를 이어주는 경계지점의 고갯마루인 아침재에 관한 자료는 보이지 않는데 해남에 있는 같은 이름의 아침재는 지역 세도가에게 부임하는 현감들이 아침 문안을 드린 이후에 정사가 시작되었다는 설에서 아침마다 문안을 드리러 갔던 길의 고갯마루란 의미라는데 이곳의 지명 유래도 비슷한지 궁금하기만 하다.
10여년 전 무더운 여름날 자료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한 상황에서 주관한 산행대장은 해수욕장에 가서 피서를 즐기고 산행에 미쳐있던 5명의 종주대만 이곳 백두대간 우듬지 산행을 진행하면서 등로도 없었고 트랙을 볼 수 있는 공유기도 없이 나침판과 지도를 들고 수없이 많은 대형 알바와 지독하게 우거진 가시잡목들을 헤치며 개척 산행을 하면서 결국 남해대교까지 가지 못하고 이곳 아침재에서 좌측 채석장 방향으로 눈물을 머금고 탈출했던 곳을 이제와 다시 만나게 되니 감회가 새롭고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하게 나 있는 등로에 조금은 안심을 해 보는 시간이다.
아침재에서 사진과 추억을 남기고 우측인 남쪽 방향으로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제법 우거진 잡목들이 옷가지를 잡고 늘어지지만 다른 지맥 마루금과 비교해 특별히 더 어려운 등로는 아니기에 평이하게 진행해 오르니 묵은 비포장임도에 조금 더 우거진 키 작은 잡목 군락지가 나타나더니 금새 그 묵은 비포장임도의 잡목들을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오르며 진행을 이어간다.
좌측 능선으로 오르니 잡목들은 많이 사라지지만 관목의 나무들이 질서 없이 자라면서 등로를 사라지게 만들고 점점 더 경사도가 급해지면서 두발 오르면 한발 미끄러지기 쉬운 등로로 변하고 있다.
그래도 조금 더 걸어 오르다 가뿐 숨 몰아쉬며 뒤돌아 보면 10여 년 전 너무나 힘들게 내려 온 깃대봉과 우거졌던 잡목등로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해 옛 추억을 더듬으며 오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힘들게 가파른 오르막 잡목 등로를 타고 어렵게 진행해 오르니 이제 가끔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곧이어 시누대 군락지와 바위너덜 초입부에 도착을 해 한숨 돌리며 주위 풍경을 사진에 담아 본다.
이곳부터는 희미한 선답자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어 넘어지지 않토록 주의하며 선답자들의 발자취를 타고 오르니 지저분한 시누대와 바위너덜 등로에 잡목까지 혼재되어 힘들게 진행되고 곧이어 커다란 바위 지나 오르니 전망바위가 나타나는데 그곳에서 뒤돌아 보니 10여 년 전 고생하며 진행해던 백두대간 우듬지 산행의 등로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고 보이는 아름다움으로 인해 그 고통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 된 듯 한 기분이다.
바로 발 아래로 아침재가 숨어 있고 그 뒤 지독하게 우거졌던 잡목 등로 뒤로 503.8미터의 깃대 하나만 꼽혀있던 깃대봉이 보이고 그 뒤로 인공구조물들을 정상에 이고 우뚝 서 있는 하동의 금오산과 좌측 뒤로 762.5 삼각점봉이 옛 추억을 들려주고 있어 잠시 더 머물러 본다.
북쪽으로 백두대간 우듬지 마루금을 살펴보고 옛 추억을 더듬은 후 우측 아래로 북동동과 동쪽 방향을 살펴보니 하동군과 사천시 사이에 떠 있는 무수히 많은 섬들이 눈길을 사로잡고 우 중앙 뒷쪽으로 생각보다 높고 긴 산줄기가 보여 지도를 확인해 보니 바로 사천의 와룡산을 지나는 와룡지맥 마루금으로서 거리감이 있고 박무 때문에 흐릿하긴 하지만 제법 웅장한 산세에 잠시 놀랐던 시간이다.
직접 걸었던 시기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와룡지맥인데 생각보다 높고 험한 산줄기에 적잖이 당황도 했었던 추억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3년이 지난 듯 하다.
전망바위에서 10여년 전 만들었던 고운 추억을 더듬고 우측으로 그림같이 떠 있는 섬들과 와룡지맥도 확인한 후 본격적인 바위너덜 등로를 타고 조심해 오르니 너덜길 좌측으로 선답자들의 산행띠지들이 걸려있어 진행에는 어려움이 전혀 없다.
종주 산행을 하다 만난 몇군데의 유명한 바위너덜길이 생각나지만 그정도 험난한 등로가 아니기에 걷기 좋은 느낌으로 오르다 보니 생각보다 편안하고 손쉽게 올랐다는 생각이다.
거리도 짧고 시간도 충분하니 급할 것 없이 바위너덜길을 타고 오르다 뒤돌아 보니 그림같은 풍경들이 계속 펼쳐져 있어 많은 사진에 담아 보는데 이제 바로 발 아래 오늘 백두대간 우듬지 산행을 시작한 아침재부터 그 뒤로 지독하게 고생하며 내려 온 깃대봉 하산 등로 뒤로 깃대봉이 솟아 있고 그 깃대봉 뒤로는 금오산이 우뚝한데 저 금오산을 내려오면서는 대형 알바를 두어번이나 하면서 시간을 까먹어 결국 아침재에서 이곳으로 오르지 못하고 탈출하는 아쉬움을 남겼던 추억이 엊그제처럼 살아나는 시간이다.
바위너덜길을 타고 오르며 뒤돌아 보고 많은 사진들을 담고 남기다 보니 이제 등로 우측인 금오산 서쪽 방향으로 금남면 마을이 아름답게 내려다 보이고 그 뒤로 지리산이 보여야 하지만 오늘은 박무로 인해 시야가 제한을 받아 지리산까지는 보여주질 못하고 있어 아쉬움도 남긴다.
바위너덜길을 오르며 아쉬움에 자꾸만 뒤돌아 보며 많은 사진들을 남기고 다시 잡목 오르막 등로를 타고 힘겹게 진행을 이어가니 가파른 오르막 낙엽 등로 옆에 준희 선생님이 걸어 둔 응원판이 보여 사진에 담고 힘을 내 본다.
준희 선생님의 응원판이 있다는 사실은 늘 가파른 오르막 등로가 시작되거나 그 중간쯤 걸려 있으니 이곳 연대봉 오르막 등로도 오늘 산행 중 가장 힘들고 어려운 등로일 것이라 생각해 보며 무심으로 다시 산행길을 재촉해 본다.
준희 선생님이 걸어 둔 응원판을 뒤로 하고 다시 힘을 내 조금 더 잡목등로를 헤치며 어렵게 오르니 갑자기 우측에서 올라오는 좋은 등로와 만나 좌측으로 진행하는데 지그마지 올라 온 등로와는 비교가 안될만큼 고속도로 수준이라 이제 안도의 한숨이 길게 나온다.
편안하게 이어지는 넓고 뚜렷한 능선 등로를 타고 남쪽 방향으로 걸어 진행하니 금새 굵은 소나무와 잡목들이 혼재되어 있는 사이로 준희 선생님이 걸어 둔 이정판이 보이는 도상 432.3봉에 도착을 해 사진과 추억 한장 남기고 곧바로 출발한다.
이정판이 걸려 있는 도상 432.3봉 지나 뚜렷하나 나 있는 능선 등로 양쪽으로 굵은 소나무와 고사목들을 확인하면서 평이하게 걸어가니 무명묘지 한기가 보이는데 후손들이 이곳까지 올라 와 관리나 할 수 있을지 궁금해하며 출발하니 이제 제법 굵은 소나무 아래 무성하게 자랐다 말라 있는 잡풀들과 잡목들이 묘하게 어울리는 능선 등로로 이어진다.
잠시 후 약간의 바위지대와 국립공원 콘크리트 말뚝을 지나 오르니 금새 백두대간 우듬지의 마지막 봉우리인 446.8미터의 연대봉에 도착을 하는데 정상에는 커다란 돌탑과 아담안 오석의 정상석 그리고 정상 주위로 둘러 친 안전목책과 조망도가 보이고 이정표도 서 있다.
남쪽 방향으로 내려 가 커다란 돌탑과 정상석을 베경으로 사진 한장 남기고 자료를 찾아 보니 연대봉은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에 있는 산봉우리서 노량해협을 바라보며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 북쪽과 송문리 동남쪽에 우뚝 솟아 있으며 연대봉에는 석성인 연봉산성이 있고 그 안에 연대 봉수대가 있다.
연대봉수대는 조선 시대의 봉수대로서 왜구를 방어하는 중요한 요새지로 봉수대의 잔존 형태나 주위 여건을 감안해 볼 때 조선 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연대 봉수대는 적군의 침입 시 가장 먼저 봉화를 올리는 곳으로 하동 금오산 봉수대(河東金鰲山烽燧臺)와 정안봉 봉수를 거쳐 지리산(1,915m)에 있는 봉수대로 연락하게 된다.
2011년 현재 연대 봉수대는 하동군이 소유 및 관리하고 있으며 봉화를 올린 흔적은 남아 있지만 석렬이 와해되고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 원래의 규모를 추정하기는 어렵다.
연대봉 정상부를 사진에 담고 제일 먼저 서쪽을 살펴보니 사진 좌측 가장자리 중앙부로 하얀 하동화력발전소가 보이고 그 우측 뒤로는 호남정맥의 마지막 산줄기가 펼쳐져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사진 우측 위로 솟아 있는 산줄기는 바로 억불봉과 백운산 줄기로서 박무속에서도 확실한 존재감을 알리고 있다.
이제 하동화력발전소를 사진 우측에 두고 남서 방향을 살펴보니 남해바다 뒤로 하동화력발전소가 내려다 보이고 그 뒤로 광양제철소가 거대한 모습으로 펼쳐져 있는데 그 우측 뒤로는 광양의 구봉산에서 국사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보이고 중앙 좌측으로는 남해바다에 떠 있는 주지섬과 대도 등 수많은 작은 섬들이 존재감을 알리고 그 섬들 뒤로는 나즈막하게 흐르는 여수지맥 산줄기가 펼쳐져 있는데 분간하기는 쉽지 않은 모습이다.
이제 눈을 남해바다에 떠 이는 섬들에 초점을 맞춰보니 연대봉 조망목책과 조망도 뒤로 무수히 많은 섬들이 남해와 하동 및 광양 그리고 여수시 사이에 떠 있어 그 이름들을 불러 본다.
좌측 앞으로 개구리섬이 보이고 우측 뒤로 넓은섬과 대도 및 주지섬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으며 그 뒤로 난초섬도 보이는데 이 섬들은 모두 우측의 광양과 좌측의 남해 그리고 저 먼곳으로 여수시 사이에 떠 있는 섬들이다.
이제 눈을 남쪽으로 돌리니 바로 눈 앞으로 남해대교(구노량대교)와 노량대교가 펼쳐져 있고 그 뒤로 남해지맥 거의 전구간이 환상의 모습으로 펼쳐져 있다.
남해대교 남단부터 좌측으로 구두산과 왕지산 지나 금음산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뾰족하게 솟아 있는 녹두산 뒤 우측으로 삼봉산과 망운산이 솟아 있으며 송등산과 호구산 자락도 보이는데 좌측 가장자리 가장 먼곳으로는 보리암이 있는 금산도 둥그런 모습으로 옛 추억을 들려주고 있다.
거의 모두 올랐던 산과 산줄기이지만 너무 오래된 추억이기에 차후 시간되면 유람하듯 몇일동안 그 속살을 다시 한번 더 만나보고 싶다는 열망이 생기는 남해이다.
이제 눈을 남동동 방향으로 돌리니 사진 우측으로 남해와 창선도의 산줄기가 살짝 눈에 들어 오고 우측 뒤 창선도의 최고봉인 대방산이 우뚝 솟아 있는 모습으로 펼쳐져 있고 좌측으로는 사천의 와룡산과 와룡지맥 산줄기가 환상을 노래부르며 잠시 잊고 지냈던 와룡지맥에서의 고운 추억을 다시 들려주고 있다.
저 와룡산과 와룡지맥은 생각보다 어렵게 진행을 했지만 워낙 주위 풍경과 조망이 좋아 어려운 줄 모르게 걸었던 시간으로 남아 있다.
이제 눈을 북도옥으로 돌리니 남해바다 건너 우측 뒤 저 멀리 사천시의 와룡산과 와룡지맥이 제법 높고 길게 펼쳐져 있고 바로 발 아래로는 채도와 소청도 같은 작은 섬들이 점점히 떠 있으며 좌측 가장자리 방향으로는 사천시 서포면 방향의 나즈막한 산줄기와 그 주위로 펼쳐진 남해바다가 또한 환상의 풍경화로 남아 있다.
이제 연대봉으로 올랐던 신노량까지 1.4 Km 거리란 이정표가 서 있는 북쪽을 살펴보니 방금 전 바위너덜길을 타고 오르며 뒤돌아 본 풍경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방금 전 지나 온 도상 432.3봉이 중앙 좌측 앞으로 솟아 있고 그 뒤 정중앙 방향으로 깃대봉과 금오산 그리고 좌측 뒤로 762.5삼각점봉이 일렬로 줄을 서듯 쭉 늘어서 있는 모습이 또한 그림같다.
그렇게 연대봉 정상에서 많은 사진을 담으며 사방팔방 둘러보고 좌측의 남해와 우측의 광양시 및 하동군 사이의 남해바다에 떠 있는 많은 사진들을 다시 한번 더 담아보는 시간은 그저 꿈결같다는 생각도 해 본다.
남해 전지맥과 남해를 이루고 있는 봉우리들을 다시 한번 더 사진에 담아보고 출발하는데 여전히 남해대교와 노량대교 건너 좌측 뒤 금산까지 이어지는 구불구불 이어지는 남해지맥이 또 다시 그리워지는 시간이다.
저 남해지맥 산행을 진행할때만 해도 전지맥 산행은 꿈도 꾸지 못하고 그저 우리나라 섬 산줄기가 좋아 거제와 강화도 및 완도 산줄기들을 찾아 걸을 때였으니 등로도 희미하고 나침판 하나 들고 다니던 시절이니 알바는 밥먹듯 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렇게 고생하며 긴 산줄기 산행 하나를 마무리하면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아 있었던 시절이기 때문에 10여년이 지났어도 저 남해지맥 산줄기 산행을 했던 기억이 엊그제 걸은 듯 생생하기만 하다.
그렇게 한동안 연대봉 정상에 머물며 많은 시간과 추억 남기고 환상의 풍경과 조망까지 즐긴 후 남동 방향으로 가파르게 내려가니 내려가는 곳도 역시 전망대 역활을 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속도는 줄고 사진의 숫자만 늘리고 있다.
내려가면서도 많은 사진을 남기고 조금 더 내려가니 약간의 자갈너덜길이 나타나면서 참나무 등로가 열리고 곧이어 비포장임도 같은 뚜렷한 등로를 만나 편안하게 내려가니 정상까지 200미터라는 이정석과 무명묘지가 보이는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원 마루금은 좌측인 남동 방향으로 진행해야 하지만 우거진 잡목과 사라진 등로로 인해 원 마루금으로 진행하지 못하고 우측 신노량 가는 방향으로 잠시 돌아 내려가기로 한다.
표지석과 무명묘지 한기가 보이는 갈림삼거리에서 원 마루금을 포기하고 우측 신노량 방향으로 나 있는 뚜렷한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내려가니 소나무 사이로 걷기 좋은 등로가 계속 이어진다.
그렇게 한동안 더 무심으로 걸어 내려가니 갑자기 이정표가 서 있는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해 살펴보니 직진은 신노량 방향으로 오늘 19번 섬진강대로 4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걸으며 만나던 연대봉에 대한 설명판과 계단이 있었던 방향으로 내려가고 좌측은 우듬지 산행을 약간 우회하는 구노량가는 등로 표기가 되어 있어 좌측 구노량 방향으로 사면치기 하듯 진행을 이어간다.
좌측인 동쪽 방향으로 사면치기 하듯 걸어가니 이곳 역시 굵은 소나무와 활엽수들 그리고 가끔 봉는 편백나무 아래 활엽수 낙엽들이 깔려있는 뚜렷한 등로가 열리고 가끔 봉는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를 확인하다 보니 옛날 집터였는지 나즈막한 돌담들도 보인다.
그 돌담들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등로 우측으로 노량대교가 내려다 보이고 좌측으로 남해의 삼봉산과 망운산 자락이 펼쳐져 있고 중앙부 가장 먼곳으로는 진달래로 유명한 여수의 영취산 자락도 보이기 시작한다.
등로 우측인 남쪽으로 저 멀리 여수시의 진달래꽃 산행지로 유명한 영취산까지 확인한 후 계속 이어지는 평이한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잠시 후 제법 넓은 바위암반늘 만나는데 이곳 역시 등로 우측으로 지금까지 봐 왔던 풍경과 비슷한 모습들을 살펴볼 수 있는 조망처이다.
몇장의 풍경과 암반을 사진에 담고 곧바로 출발이다.
이제 방향이 남동에서 남남동 방향으로 바뀌고 넓은 비포장임도 같은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잡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났다 말라있는 무명묘지를 지나는데 연세 많이 드신 할아버지 한분이 농기계를 들고 어렵게 산으로 올라가고 계셔 물어 봤더니 조상들 묘지 손질을 하기 위해 올라간다는 답변이 돌아 와 고생하신다는 인사만 드리고 내려가는 마음이 개운치 못하다.
이제 등로 주위로는 잎이 파란 키가 작은 동백나무들로 인해 다시 봄이 오는 기분으로 걸어 내려가니 드디어 좌측의 비포장임도 같은 등로가 보이는 암반에 도착을 해 원 마루금과 접속해 우측으로 내려가며 산행을 이어간다.
원 마루금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니 뚜렷한 등로가 길게 이어지고 잠시 후 편백나무들도 보이면서 약간의 밀림같은 분위기의 마루금을 통과하자마자 노란 은행잎이 아름다운 은행나무 한그루도 만난다.
그 은행나무의 노란 은행잎을 사진에 담고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밭경작지들이 보이고 곧이어 예쁜 단풍들을 지나 쉼터 넘어 남해대교 교각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어지는 밭경작지를 살펴보니 제법 자란 양파처럼 보이는 농작물이 파란 잎새귀들을 내밀고 자라고 있어 사진에 담고 내려가니 금새 구노량마을 위 시멘트 포장도로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진행 방향을 살펴보니 민가들 뒤 가ㅏㅂ게 남해대교 일명 구노량대교가 지척으로 다가 와 있다.
원 마루금인 직진 방향으로는 민가들로 인해 진행이 불가능하기에 시멘트 포장도로 따라 구불구불 내려가다 보니 등로 우측 아래로 구노량마을이 내려다 보이고 우측으로 남해대교와 남해바다 건너로는 남해군의 산줄기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노량리는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에 위치한 리(里)로서 산촌마을이고 덕천천이 흐르며 샘골 소류지와 뒤터 소류지가 자리한다.
자연마을로는 구노량, 신노량, 백도마을 등이 있는데 구노량(舊露梁)마을은 노량리의 본 마을이자 오래된 마을이란 의미에서 지어진 지명이다.
신노량(新露梁)마을의 지명은 새로 된 마을이란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백도마을은 백토(흰색 토양)이 났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구노량마을 한가운데로 나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내려가다 보니 어느 민가 뒷뜰에 노란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있어 처음에는 무엇인지 궁금해했었는데 자세히 보니 유자로서 대부분 전라남도에서 많이 생산된다고 알고 있는데 이곳에서 보니 반갑기만 하다.
유자는 유자나무(Citrus ichangensis × C. reticulata)의 열매로서 한쪽으로 치우친 노란색의 공 모양으로 지름은 5.5~7.5센티미터이다.
껍질은 울퉁불퉁하고 향기가 좋으며 과육은 부드러우나 신맛이 강해 비타민 시(C)가 레몬보다 세 배 많다.
얇게 저며 차를 만들거나 설탕에 절여 먹는데 술을 담기도 하며 기관지 천식과 기침 및 가래를 없애는 데 효과가 있다.
한국과 중국 및 일본 등지에서 생산되는데 한국산이 가장 향이 강하고 껍질이 두껍고 한국의 주요 산지로는 전라남도 고흥, 완도, 장흥, 진도와 경상남도 거제, 남해, 통영 등지이다.
노란 유자를 사진에 담고 계속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도로 우측 앞으로 남해대교와 남해 산줄기가 아름답게 내려다 보이고 살펴보며 걸어가니 남해대교 좌측 옆 부둣가에서는 포크레인이 작업을 하면서 소음을 내고 있어 확인해 보니 부둣가를 보수하고 있는 듯 보인다.
잠시 후 드디어 1002번 구노량길 2차선 포장도로에 내려서고 좌측을 보니 터널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남해대뵤 북단이 눈에 들어 와 사진에 담고 횡단보도를 통해 남해대교 북단 방향으로 진행한다.
횡단보도를 건너자마자 구노량 버스정류장이 보이고 그 우측 옆으로 드디어 백두대간 우듬지 날머리인 남해대교 최북단에 도착을 해 남겨진 숙제를 해결한 기분으로 백두대간 우듬지 산행을 10년만에 깨끗하게 마무리하며 기분 좋게 하동에서의 시간을 마무리 한다.
남해대교 뒷쪽으로는 오래 전 홀로 고운 추억을 남겼던 남해 산줄기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데 그 위 파란 하늘에 떠 있는 하얀 뭉게구름이 오랫만에 여유를 가져다 준다.
그렇게 접속구간과 우듬지 산행이 비슷하게 짧은 시간 동안 백두대간 우듬지 산행을 마무리하고 도로를 건너 애마를 주차시킨 주차장으로 이동을 해 GS 편의점에서 음료수 한병 사 마시고 곧바로 애마를 이용해 홀대모 모임이 있는 김제 금산사 유스호스텔로 향하는데 오늘과 내일은 금산사와 모악산에서 홀대모 20주년 모임이 있어 참석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무한도전에서 최단시간 내 162 전지맥까지 완주한 다류님을 축하하고 오랫만에 만나게 되는 산줄기 영웅들과 선배님들을 뵙고 인사 드리고 하룻밤 이야기를 나누고 내일은 간단히 모악산을 왕복하며 또 다른 추억을 만들 예정이기에 느긋하게 금산사로 향하는데 어제 옥룡지맥 마지막 구간에서 고생하며 잠도 충분히 자지 못해 두어번 휴게소에 들려 차박을 하며 가다 보니 모임시간인 오후 3시 30분 쯤 드디어 금산사 유스호스텔에 도착을 해 알고 지내던 많은 선배님들과 인사 나누고 즐거운 홀대모 모임이 되었다.
이제 이 산객도 3개의 지맥 산행을 마무리하면 신산경표 상 162지맥까지 완주하게 되는데 그 사이 신낙남정맥과 진행하다 중단된 성골지맥 한구간을 짧게 마무리하면 완벽한 완주가 될 것이기에 조금 더 열정을 불태우기로 한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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