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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맥산행(완료)/두승지맥(변산·완)

두승지맥 제2구간 덧고개에서 고부천 합수점까지 산행후기

by 칠갑산 사랑 2020.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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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전라북도 정읍시와 부안군의 두승지맥 마루금 일대

산행일자 : 2020년 2월 2일 (일요일 당일 산행)

산행날씨 : 하루종일 흐리고 미세먼지와 박무로 인해 시야가 제한되었으며 가끔 햇살이 비췄던 조금은 더위를 느꼈던 산행날씨

산행온도 : 영하2도에서 영상 9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덧고개(29번 영원로 4차선 포장도로, 서당촌 버스정류장, 서당마을 표지석)-2차선 포장도로(구도로)-시멘트 포장도로-오리농장-태양판 발전단지-

               군부대 2중 철조망-능선진입-흑암동 갈림삼거리 이정표(끝봉정자 0.72 Km와 말봉 1.14 Km, 흑암동 0.39 Km)-통나무 계단-안전목책과 로프구간-

               바위너덜구간-안전목책과 로프구간-갈림사거리 이정표(말봉 0.59 Km, 끝봉 0.16 Km, 흑암동 0.94 Km, 만수동 1.07 Km)-끝봉 팔각정자(339.1봉)

               이정표(말봉 0.75 Km, 두승사 0.87 Km)-갈림사거리 안부 복귀-안전목책과 로프구간-바위암릉-소나무 등로-442.7 무명봉-바위암릉과 안전목책 및

               로프구간-두승산(445.1봉, 바위암봉, 삼각점 소실) 이정표(상봉 0.19 Km, 치재 1.51 Km, 끝봉 0.75 Km)-보문사 갈림삼거리 이정표(유선사 0.94 Km,

               말봉 0.07 Km, 보문사 1.42 Km)와 이정표(두승산정상 0.03 Km, 보문사 1.4 Km와 두승산성서분지 2.5 Km)-정읍 두승산 정상철판(444미터)

               이정표(유선사 1.1 Km, 상학리 1.7 Km, 보문사 0.9 Km)-상학리 갈림삼거리 이정표(유선사 0.65 Km, 말봉 0.36 Km, 상학리 1.39 Km)-

               441봉(무인산불감시카메라)-길주의 지점(우측 산죽지대)-이끼바위너덜구간-산죽지대-고사목과 잡목지대-녹슨 철조망-시누대와 묘지지대-비포장

               임도-돌짐재(음지길 2차선 포장도로)-시멘트 포장도로(묵은 동물이동통로)-태양광 발전시설-가시잡목지대-204.6봉(무명묘지와 바위)-송전탑과

               잡목지대-천치(태고로 2차선 포장도로)-능선진입-잡풀지대-묘지-146.3봉 갈림삼거리-146.3 삼각점봉(정읍445 삼각점)-갈림삼거리 복귀-바위

               암릉-천치 갈림삼거리-천치(183.9봉)-천치갈림삼거리 복귀-가시잡목지대-밀양박씨묘4-밀양박씨 묘지들-길주의 무명묘지(우)-자라고개(다음지도,

               구파로 2차선 포장도로)-능선진입-85.4 고사목봉-성황당 안부(성황당 설명판)-묘지 위 조망-시누대 터널-돌계단-은선리 고분석실묘-

               이정표(깃대봉 0.45 Km, 자라고개 0.3 Km, 은선리고분군 0.1 Km)-작은돌탑과 바위-163.3 띠지봉-이정표(무제봉 0.38 Km, 태산사 0.66 Km,

               은선리고분군 0.45 Km)-로프와 통나무 계단-잡초묘지들-자라고개(국토지리원)-천태산(197.2봉, 삼각점, 운동기구, 벤취쉼터)-포토존 나무데크-

               171.3봉(운동기구, 벤취쉼터, 금성오씨묘) 이정표(창동길 0.75 Km, 치마바위 0.25 Km, 천태산정상 0.32 Km)-비포장임도-안전철봉과 로프-가시

               잡목지대-92.1 무명묘지봉-묘지지대-밭 경작지-소나무 식재지-비포장임도-운학고개(736번 말목장터로 2차선 포장도로, 운학 버스정류장, 한길

               타조농장, 녹색환경)-시멘트 포장도로-묘지들과 한길타조농장-갈림삼거리 민가-여산송씨 가족묘-비포장임도-민가-능선진입-48 띠지봉-묘지와

               밭경작지-태평길 시멘트 포장도로-애마회수-양계축사-청량양수장(한국농어촌공사)-갈림삼거리(우 창동주산길)-태양광 발전시설-갈림삼거리(좌)-

               양계축사-거대 양계축사-궁동길 2차선 포장도로(장내리)-청량리 안내판(좌측)-갈림삼거리(좌측 2차선 포장도로)-한우축사(좌)-하청로 2차선

               포장도로-백산농장(양계장)-갈림사거리(정애교회, 정애 버스정류장)-갈림삼거리(좌측)-정애 장애노인복지원-성화농장-희망농장-궁동길 시멘트

               포장도로-갈림사거리(하청리, 백산서로 2차선 포장도로, 우측)-705번 지운로 2차선 포장도로 갈림삼거리(직진 비포장임도)-갈림삼거리 복귀-705번

               지운로 2차선 포장도로(좌측)-갈림삼거리-동학로 1차선 포장도로(좌측)-거룡마을 갈림삼거리(좌측, 거룡2마을 버스정류장)-거룡마을 갈림

               사거리(거룡마을 버스정류장)-거령교회-산전마을 표지석-용출마을 표지석-용출마을 갈림삼거리(용출마을 표지석과 용출 버스정류장)-

               지하도로(29번 부령로 4차선 포장도로 통과)-용계리 버스정류장(동학로)-지하도로(30번 하원로 4차선 포장도로 통과)-봉석 갈림삼거리(봉석 버스

               정류장, 백산로 2차선 포장도로)-백령정미소-마지막 민가-밭 경작지-백산(49봉, 동학정 팔각정자, 백산성, 정읍302 삼각점, 백산성과 동학혁명

               설명판)-마지막 민가 복귀-봉석 버스정류장복귀-백산로 2차선 포장도로-백산교차로(백산 삼거리, 부령로 2차선 포장도로)-백산성지 입구-백산

               삼거리(백산 버스정류장, 우측 부안농협)-회포마을 표지석-용계마을 버스정류장-금판마을 이정판-신금마을 버스정류장-신성 버스정류장-중금 버스

               정류장-현호마을 표지석-판금2교(서해안고속도로 통과)-강변로 시멘트 포장도로-고부천과 동진강 합수점-산행종료

산행거리 : 26.82 Km (덧고개에서 고부천과 동진강이 만나는 합수점까지)

산행트랙 : 20200202 두승지맥제2구간 덧고개-고부천 합수점.gpx

산행시간 : 06시간 45분 (07시 25분부터 14시 11분까지)

교통 및 숙박편 : 갈때 - 04시 00분 태평양스파 찜질방에서 기상

                                 05시 00분 명물육계장 식당에서 육계장으로 아침식사

                                 05시 55분 태평길(정읍시 이평면 창동리 산 54-1) 1차선 시멘트 포장도로 도착 해 산행 준비

                                 06시 40분 태평길에 애마 주차 후 산행 준비하여 배낭 메고 영원면 금곡 버스정류장까지 도보로 이동

                                 07시 01분 215번 버스 탑승하여 고부삼거리 장문 버스정류장까지 이동 후 또 다른 215번 버스로 환승

                                 07시 24분 29번 영원로 4차선 포장도로의 서당촌 버스정류장(덧고개)에서 하차하여 산행 시작

                       올때 - 14시 11분 고부천과 동진강이 만나는 합수점 앞 강변로에서 산행 종료

                                 14시 15분 배낭 정리하고 곧바로 귀경

                                 16시 40분 서울 집 도착해 산행 마무리 및 정리 후 휴식 

두승지맥이란 ???

두승지맥이란 호남정맥 내장산에서 분기하는 영산기맥을 따라오다 방장산 분기봉에서 변산지맥을 만나고 다시 이곳 삼면 경계봉에서 변산지맥과 갈라져 매봉산, 비룡산, 국사봉, 태봉산, 두승산, 천태산을 거쳐 평야지대를 가로질러 벽산에 이르는 32,9 Km의 산줄기를 말한다.

다만 백산 이후에는 농경지로 변경되어 고부천이 동진강과 합류되는 합수점까지는 대부분의 선답자들이 다녀오지 않았기에 고민인데 시간도 충분하니 가능하면 차량을 이용해서라고 합수점까지 다녀 오리라 계획해 본다.

 

 

제대로 된 정상석 하나 만나지 못하고 마지막 부분은 논 경작지로 변해 마루금이 사라졌기에 백산에서 마무리한 선답자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애마를 몰고 고부천 합수점까지 찾아 가 또 하나의 지맥 산행을 마무리했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현존하는 맥 잇기 산행에 대한 수많은 이론과 산행 트랙이 존재하지만 이 산객은 산경표와 신산경표를 보고 맥 잇기 산행을 처음 진행하였기에 가능하면 신산경표의 산행 이론에 따라 산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산줄기의 마지막 끝부분이 물과 만나는 지점인 합수점으로 가야한다는 이론 역시 그 어느곳에서도 올바른 정의를 내리지 못하였기에 이 산객은 옛 문헌에 나타난 이론인 관아를 기준으로 설정된 산줄기를 그 끝으로 하고 문헌에 나타나지 않은 관아 이후의 산줄기는 산행을 하는 산객 각자의 기준에 맞춰 진행하면 될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두승지맥 산행을 한 후 이 산행후기를 기술하면서 전라북도 정읍시와 부안군 및 그 주변 지자체에 수록된 지명유래와 네이버의 지식백과 및 다음의 백과사전 그리고 산림청과 한국관광공사의 자료들을 참고하여 정리된 부분들이 있으며 이런 부분들이 혹시라도 지적재산권에 저촉이 되어 삭제나 변경이 필요한 경우 연락주시면 언제라도 즉시 삭제 및 수정해 드릴 수 있음도 알린다.

 

어제 두승지맥 제1구간 산행을 이른 시간에 잘 마무리하고 덧고개에서 제시간에 도착한 버스를 이용해 정읍시로 나와 찜질방에서 편안하게 하룻밤 잘 자고 일어나 정읍역 버스 정류장 옆에 있는 명물육계장 식당에서 밥 한그릇을 모두 말아 든든하게 아침 배를 채우고 필요한 물품은 24시 편의점에서 구매한 후 실질적인 산행 날머리인 전라북도 정읍시 영원면 운학리 산 8-2 번지 근처의 묘지 옆에 애마를 주차시키고 도보로 영원면사무소 근처의 금곡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니 새벽 6시 40여분에 도착을 해 바람은 불지 않지만 그래도 한겨울 추위에 개떨듯 떨며 20여분 기다리니 드디어 기다리는 215번 버스가 도착을 하는데 만수리 덧고개까지 가는지 확인을 하니 그곳까지는 가지 않지만 무조건 탑승을 하라는 기사님의 요청에 버스에 올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 버스는 장문리 장문 버스정류장에서 또 다른 215번 버스가 올 때까지 대기하다 승객을 환승시킨 후 백산으로 돌아가야 하니 버스값은 하나의 버스에만 내면 된다고 알려준다.

7시 8분쯤 장문리 장문 버스정류장에 도착을 해 2분여 기다리니 또 다른 215번 버스가 도착을 하는데 이 버스가 덧고개를 경유하여 정읍시내로 들어가는 버스로서 그 버스로 환승한 후 산행 들머리인 덧고개의 서당촌 버스정류장에 도착을 하니 7시 23분을 넘어가고 있어 곧바로 산행 준비 후 두승지맥 제2구간 산행을 시작하니 고민하고 걱정했던 대중교통 편이 잘 해결되어 나도 모르게 깊고 긴 한숨이 새어 나와 피식 홀로 웃어 보는 시간이다.

오늘 하루도 무탈하게 산행 완주 후 합수점에서 추억 한장 남기고 귀가하여 시원한 소맥으로 마무리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새벽부터 대중교통을 이용한다고 고생은 했지만 무탈하게 산행 들머리까지 와 두승지맥의 주산인 두승산으로 오르는 시간은 그저 즐거운 마음으로 힐링하듯 걸어 본 시간이었다.

오늘도 역시 날씨가 흐려 기대했던 일출은 보지 못하였고 미세먼지와 박무로 인해 시야가 제한되었지만 그래도 두승산 끝봉에서 바라보는 어제 걸어온 두승지맥 제1구간 전체 산줄기와 변산지맥 일부 구간을 살펴보는 시간은 그저 꿈길에서 홀로 우주를 야영하듯 환상을 노래하던 시간이었다.

중앙 가장 먼 곳으로 쌍봉처럼 솟아 있는 방장산의 좌측 봉우리에서 변산지맥이 시작되어 좌측으로 흐르며 두승지맥을 분기하고 비룡산과 국사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생각보다 제법 멋진 풍경으로 다가오고 이제 좌측으로 흐르던 등로가 우측으로 방향을 바꿔 비산비야의 끊어질 듯 이어지는 모습에서 인생을 배우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오늘 아침 산행을 시작한 덧고개로 내려오는 만수농장에서의 아쉬움이 그대로 산줄기에 묻어 있고 태양광 발전시설과 군부대 철조망이 아쉬움을 남겼지만 이 정상에서 내려다 보는 이 사진 한장으로 그 아쉬움과 불편함은 모두 털어 버리고 새로운 마음과 기분으로 또 새로운 시간을 맞이할 수 있음에 감사한 시간이기도 하였다.

 

백산과 백산성 이후는 농경지 개발로 인해 마루금이 완전히 사라져 진행해야 할 의미가 없다고 말하지만 그래도 산줄기를 가르며 두개의 물줄기가 하나가 되는 합수점은 보고 싶어 애마를 이용해 고부천과 동진강이 만나는 합수점으로 가 보니 드넓은 갈대지대가 펼쳐지고 그 갈대밭 저 멀리 좁은 수로처럼 좌측의 고부천에서 흘러 내린 물줄기가 우측에서 흘러내린 동진강의 물줄기와 만나는 물결이 살짝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잠시 저 갈대밭을 뚫고 들어가 두 물줄기가 만나는 합수점에서 손이라도 담그고 싶었지만 도저히 갈대밭을 뚫고 들어갈 엄두가 나질 않아 이곳 뚝방길에서 사진 몇장 남기는 것으로 이틀에 걸친 두승지맥 산행을 마무리하고 배낭 정리해 서울 집으로 귀가를 하기로 한다.

몇 군데 난해한 등로와 잡목 구간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가장 고속도로 같은 등로에 고도 차이도 없어 생각보다 편안하게 일찍 마무리 한 마루금으로 기억될 듯 싶다.

 

어제 산행이 일찍 끝났고 식사도 묵고 있던 찜질방에서 해결하고 나니 산행 사진을 정리하는 것 이외에는 할일이 없어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두어번 깨어난 후 새벽 3시에 일어나 더 이상 잠들지 못하고 이른 시간에 샤워 후 찜질방을 빠져 나오니 새벽 5시를 막 넘기고 있다.

생각할 것도 없이 어제 봐뒀던 찜질방 근처의 명물육계장 식당에 들려 육계장 한그릇을 다 비우고 천천히 애마를 몰아 마을 시멘트 도로가 시작되는 운학리로 이동해 묘지 옆에 잘 주차시키고 시간을 보니 이제 아침 6시를 넘기고 있어 한동안 애마에서 오늘 산행후기와 코스를 다시 한번 더 확인한 후 배낭 메고 어둠속에 천천히 가까운 영원면사무소 근처의 금곡 버스정류장으로 이동을 하게 되었다.

논 경작지 한가운데로 나 있는 듯한 시멘트 도로를 따라 걷다보니 거대한 축사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렇게 영원면사무소와 파출소 근처의 금곡 버스정류장에 도착을 하니 아침 6시 40여분을 넘기고 있는데 기온이 차갑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아 다행이지만 그래도 한겨울 차가운 공기가 홀로 있는 산객의 마음을 얼리는지 20여분간 떨다 보니 애타게 기다리던 버스가 도착을 해 안심을 하던 시간이었다.

 

아침 7시 정각에 기다리던 215번 버스가 도착을 해 기사님에게 문의하니 이 산객이 원하는 만수리 덧고개까지는 가지 않지만 장문이라는 버스정류장에서 또 다른 215번 버스로 무료 환승이 가능하니 일단 탑승한 후 장문까지 가면 된다는 답변이 들린다.

인사하고 버스에 올라 얼었던 몸을 녹이면서 이야기를 들어 보니 정읍시내 버스는 맞는데 지금 타고 있는 버스는 정읍시내까지 들어가지 않고 장문 버스정류장에서 다시 백산쪽으로 돌아가 이곳 지역만 순회하며 승객을 태우는 버스이고 이 산객이 장문에서 환승해야 할 또 다른 215번 버스가 정읍시내까지 운행되는 버스라는 소식에 이제서야 조금 이해가 된다.

그렇게 버스 기사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장문 버스정류장에 도착을 하니 이제 아침 7시 8분여를 지나는데 버스에서 조금 더 기다리니 아침 7시 10여분에 또 다른 215번 버스가 도착을 해 환승한 후 이곳 저곳을 들려 만수리 덧고개에 도착을 하니 아침 7시 23분을 넘어가고 있다.

무사히 산행 들머리까지 왔다는 안도감에 긴 한숨을 내쉬고 다시 한번 배낭을 정리한 후 진행방향을 살펴보니 29번 영원로 4차선 포장도로 건너 두승산이 높게 솟아 있고 어제 오후에 내려오며 젊은 주인장으로부터 싫은 소리를 들은 만수농장이 등 뒤에서 잘 가라며 손을 흔들어 주고 있는 듯 하다.

 

신호를 기다렸다 횡단보도를 통해 29번 영원로 4차선 포장도로를 건너니 곧바로 옛날 구도로인 2차선 포장도로가 짤게 이어지고 곧이어 우측으로 만수리 마을로 진입하는 시멘트 포장도로가 보인다.

만수리는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에 있는 리로서  평지에 자리잡은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두승저수지 가까이에 있다.

자연마을로는 상만, 하만, 서당촌이 있는데 상만은 만수리의 윗마을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고 하만은 만수리의 아랫마을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며 서당촌은 마을에 서당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특산물로는 내장산 복분자, 단풍미인쌀, 새송이버섯등이 있다.

도로 좌측으로 거대한 오리농장을 두고 우측으로 빙 돌아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르니 갑자기 눈 앞에 거대한 태양열 발전 시설들이 나타나고 그 좌측 저 멀리 이제부터 올라야 할 두승산이 어서오라 손짓을 하고 있는 듯 다가온다.

 

오리농장을 지나 오르니 태양열 발전시설 앞에 철망문이 닫혀있고 좌우측으로 돌아 들어갈 수 있기에 좌측으로 돌아 들어가니 고압전류가 흐르는 시설물에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판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가운데로 나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조심스럽게 정상부로 걸어 올라간다.

태양열 발전시설 끝자락까지 올라가니 눈 앞에 절개지가 나타나고 그 절개지 위로는 군부대 2중 철조망이 쳐져 있어 잠시 고민을 하는데 처음에는 그 군부대 철조망이 이곳 태양열 발전시설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로 착각을 해 넘어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절개지를 타고 올라 군부대 철조망에 붙어 고속도로 같은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초반부터 등로 주위에 시누대 군락지들이 자주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한동안 군철조망을 우측에 두고 따라 오르니 군부대장 경고판이 붙어 있는 좌측 능선으로 등로가 이어지며 함께 걸어 왔던 군부대 철조망과는 이별을 하는 지점에서 잠시 배낭 내려 방풍의를 벗어 배낭에 넣고 가벼운 차림으로 산행을 이어간다.

 

이제 군부대 2중 철조망을 우측으로 보내고 좌측 능선 방향으로 오르니 초반부터 고속도로 같은 넓은 수렛길이 나타나고 등로 주위를 살펴보니 소나무와 시누대 그리고 일반 활엽수가 차례로 나타나며 별 특이한 모습은 아닌데 왜 이런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가 개설이 되어 있는지 궁금하기는 하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 오르니 나뭇가지 사이로 올라야 할 끝봉과 두승산 정상부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올려다 보이기 시작하고 곧이어 이정표가 나타나는데 살펴보니 등로 우측으로 흑암동 하산 갈림삼거리이다.

흑암동은 전라북도 정읍시에 있는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농소동 관할이고 정읍시 동지역의 서북부에 위치하며 주위에 농소동, 망제동, 용계동, 덕천면 및 고부면과 접한다.

원래 고부군 소정면 지역이었으나 1915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정읍군 소성면 흑암리가 되었고 1983년 정주시에 편입되면서 흑암동으로 개칭되어 정일동관할의 법정동이 되었다가 1995년 정주시와 정읍군이 통합됨에 따라 정읍시 흑암동이 되었으며 1998년 관할 행정동이 농소동으로 바뀌었다.

정읍시 도심 외곽의 농촌지역으로 마을 동쪽에 정읍천이 흐르고 북쪽 덕천면과의 경계에 동죽산(223 m)이 있고 서쪽 덕천면 및 고부면과의 경계에 두승산(443.5m)이 있다.

배영중고등학교, 정충사지(전북기념물 74호)와 상흑, 하흑, 신흥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가 볼 기회가 없을 것 같지만 자료를 찾아 정리하다 보면 언젠가는 오늘 찾은 이 자료들이 유용하게 사용 될 수 있기를 바래본다.

 

흑암동 갈림삼거리 이정표에서 진행 방향으로 끝봉(정자)과 말봉이라는 봉우리 이름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끝봉까지는 0.72 Km라는 거리 표시가 반가운 시간이었다.

그 흑암동 갈림삼거리 이정표를 지나 계속 이어지는 완만한 오르막 임도를 타고 전진하니 등로 우측 나뭇가지 사이로 두꺼운 구름을 뚫고 하루해가 솟아 오르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구름에 막혀 더 이상 떠 오르지 못하고 주저 앉는다.

사진에 아쉬운 장면만 담고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묘지들이 나타나고 그 우측 위로 이제부터 걸어 올라야 할 끝봉의 정자와 우측 말봉으로 이어지는 지맥 능선이 아름답게 올려다 보여 사진 한장 더 남기고 걸어가니 눈 앞으로 통나무 계단이 시작되고 그 계단 위로는 사면으로 보였던 끝봉이 계단 정상 위로 올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이어지는 통나무 계단을 타고 오르니 계단이 사라지며 안전목책과 로프 구간이 펼쳐지고 곧이어 사면으로 길게 이어지는 바위 너덜길이 나타난다.

처음에는 끝봉을 오르기 위해 직등으로 오르는 등로만 생각을 했는데 오르면서 아무리 찾아 봐도 끝봉으로 오르는 직등 코스가 보이지 않아 우측 사면으로 이어지듯 연결되는 등로를 따르다 보니 이곳 너덜구간도 통과하게 되었는데 결국 다 올라 확인해 보니 직등하는 코스는 잡목들이 자라면서 사라지고 끝봉과 말봉 사이의 안부로 올라 좌측의 끝봉은 올랐다 다시 내려와야 되는 등로로 바뀐 듯 보였다.

이곳 바위 너덜구간에도 어김없이 작은 돌탑들이 보이는데 이곳을 지나는 길손들이 자신과 가족들의 건강과 행복을 빌기 위해 쌓은 돌탑들이 아닐까 생각하며 통과하는 시간이다.

 

그 바위 너덜구간을 우측 사면으로 통과하니 등로 우측으로 약간의 조망이 터지고 살펴보니 방금 전 이정표로 확인한 흑암동 넘어 동죽산과 망제봉이라 생각되는 봉우리들이 200여미터의 해발고도 치고는 제법 드높게 올려다 보이고 있다.

다시 이어지는 안전목책과 로프를 따라 조금 더 가파르게 걸어 오르니 만수동과 흑암동 그리고 끝봉과 말봉이 갈리는 사거리 안부에 도착을 해 등로 한쪽에 배낭을 벗어 놓고 좌측의 끝봉 정자를 다녀 오기로 한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여유롭게 걸어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시원한 조망과 풍경들이 펼쳐지기 시작하여 발걸음의 속도를 늦춰 천천히 걸으며 살펴보니 방금 저 오르며 봤던 흑암동 넘어 동죽산과 망제봉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고 그 우측으로 두꺼운 구름을 뚫지 못한 아침 햇살이 하늘만 붉게 물들이며 밝은 세상으로 나오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 온다.

망제봉은 전라북도 정읍시의 망제동 중앙에 위치하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257미터이고 여지도서(고부)에 망제산은 군 동쪽 10리에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여도(18첩 5면), 1872년지방지도 등에 망제산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특히 대동여지도(17첩 5면)에는 고부읍치 남동쪽인 저천이 모천에 합류하는 서편에 망제산이 기재되어 있다.

한국지명총람에는 병자호란 때 송인이 출병하다가 (청과의) 화의 소식을 듣고 명나라를 바라보며 통곡하였다 라고 소개하고 있어 제왕을 바라보던 봉우리란 의미의 망제봉이라는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예로부터 약수로 유명했던 서쪽 기슭의 천곡 골짜기에는 천곡사지칠층석탑이 있고 동쪽의 망월사터로 추정되는 곳에는 망제동석불입상이 있다.

아직 오르지 못한 미답봉이기에 기회가 되면 주위 산줄기를 연계해 한번 올라 볼 기회가 오기를 기대도 해 보는 산줄기이다.

 

그렇게 등로 좌측으로 펼쳐지는 시원한 조망과 풍경들을 살펴보며 여유롭게 걸어 오르니 드디어 두승산 끝봉 팔각정자에 도착을 하는데 바로 앞에는 커다란 바위와 우측으로 이정표가 서 있어 확인해 보니 올라 온 방향으로 두승사와 진행 방향으로 말봉 표시가 되어 있는 이정표이지만 끝봉이나 339.1봉에 대한 이정판을 찾지 못해 아쉬움을 남긴다.

이곳 끝봉 팔각정자에서 살펴보는 풍경과 조망이 좋아 잠시 발걸음 멈추고 많은 사진을 담았던 시간도 보낸다.

 

제일 먼저 이 끝봉으로 오르면서 나뭇가지에 막혀 잘 보이지 않았던 남동쪽을 살펴보니 바로 앞에 정일제라는 작은 저수지가 내려다 보이는데 그 저수지 위로 떠 올라야 할 오늘 태양이 두꺼운 구름에 막혀 세상으로 나오지 못하고 강렬한 태양빛만 그 저수지에 뿌리고 있어 물빛이 붉게 변해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 뒤 저 멀리 보여야 할 어제 하룻밤 묵었던 정읍시내는 미세먼지와 박무 그리고 그 위에서 강렬하ㅣ게 내려 쬐는 햇살로 인해 보이지 않아 상상으로만 그 정읍시내를 확인하는 안타까운 시간이기도 하다.

 

남동쪽을 살펴보고 이제 눈을 남쪽 방향으로 돌리니 덧고개에서 오늘 아침에 이곳으로 올라 온 두승지맥 마루금이 펼쳐져 있고 그 우측 아래로는 두승산을 파 먹고 있는 거대한 채석장이 흉물스럽게 거대한 입을 벌리고 악마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그 덧고개 지나 젊은 주인장과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던 만수농장 뒤로 주동저수지가 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만들고 그 뒤로 끊어질 듯 이어지는 두승지맥 마루금이 펼쳐져 있으며 중앙부에 국사봉과 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해발고도 보다는 훨씬 높게 이어지고 우측 끝자락 저 멀리에는 변산지맥과 두승지맥 분기점을 형성하고 있는 방장산이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며 어른 노릇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눈을 이제 남남서쪽으로 돌리니 바로 앞에 29번 영원로 4차선 포장도로가 좌우측으로 길게 뻗어 있고 그 바로 뒷쪽으로 거대한 만수저수지가 민초들 삶의 영양분이 되어 주고 있다.

그 만수저수지 우측으로는 생각보다 큰 만수마을이 아기자기한 모습으로 펼쳐져 있고 그 뒤 저 멀리에는 희미하지만 역시나 2개월 전 애마로 통과한 변산지맥의 비산비야로 이뤄진 마루금이 보일듯 말듯 펼쳐져 있지만 미세먼지로 인해 분간하기는 어렵다.

그 뒤로 보여야 할 선운산의 경수지맥은 완전히 미세먼지 속에 숨은 듯 이 산객의 애간장만 태우고 있어 한동안 두 눈 부릅뜨고 살펴보다 상상만으로 그 산줄기를 그려 본다.

 

그렇게 한동안 그 끝봉 팔각정자에 올라 사방 팔방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과 조망들을 사진에 담고 그 이름들을 불러 준 후 내려가니 바로 앞 이정표와 바위 넘어 저 멀리 이제부터 이 산객이 걸어 넘어야 할 두승산 줄기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두승지맥이 아니였다면 결코 쉽게 오를 수 없었던 산이고 산줄기이기에 더욱 애착을 가지고 그 풍경 하나 하나를 가슴속 깊이 간직하는 시간이 되었다.

 

미세먼지와 박무로 인해 많은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래도 보고 싶고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던 풍경들을 살펴보고 끝봉에서 내려가니 등로 우측으로는 여전히 아름다운 풍경들과 조망들이 펼쳐져 있지만 추억으로 남겼기에 곧바로 배낭이 있는 갈림사거리까지 내려 간다.

내려 가 배낭을 찾아 어깨에 둘러메고 갈림사거리를 지나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등로에는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되어 있고 곧이어 바위지대를 넘어 또 다시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구간으로 진입한다.

 

길게 이어지는 안전목책과 로프 구간을 타고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커다란 바위와 소나무들이 보이고 그 바위지대를 넘자 등로에는 다시 굵은 로프가 설치되어 있다.

그 로프 지대를 지나니 조선 소나무로 이뤄진 명품 등로가 짧게 펼쳐지고 힐링하듯 여유롭게 천천히 그 명품 소나무 등로를 통과하니 중간 크기의 바위들과 잡목들이 보이고 한쪽 잡목 가지에는 선답자의 산행 띠지가 걸려 있는 442.7 무명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출발한다.

 

그 무명봉을 지나니 거대한 바위암릉이 나타나는데 그 바위들에는 모두 부드러운 솔갈비가 깔려 있어 처음에는 바위가 아닌 듯 착각을 일으키게 만들고 있다.

바위암릉지대를 우측으로 우회하며 멋진 소나무들을 살펴보니 강원도에서 봤던 금강송과는 전혀 다른 우리나라 토종의 조선 소나무 같은 느낌으로 살펴보고 그곳을 통과하니 이제는 바위암릉 위에 안전철봉과 로프가 설치되어 있어 그 로프를 따라 편안하게 걸어 본다.

잠시 후 등로 좌측으로 미세먼지속에 조망이 펼쳐져 살펴보니 입석리쪽 두승산성과 그 두승산성에서 두승산으로 이어지는 무명 산줄기가 아름답게 내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두승산성은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입석리에 있는 산성으로 1981 4 1일 전라북도기념물 제54호로 지정되었는데 이 산성은 언제 축조되었는지 확실한 기록이 없다.

삼한시대에 쌓았다고도 하고 고려시대에 쌓았다고도 전해지는데 성안에서 출토된 토기편은 백제시대의 것도 있으나 대부분 고려시대의 것이어서 백제시대에 축조되어 고려시대에도 계속 사용되었던 것이라고 짐작된다.

한편 동국여지승람에 영주시구성(瀛州時舊城)이라고 나와 있어 매우 오래된 산성으로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산성은 서성과 남성으로 나누어진 복합적인 형세이다.

두승산(444m)은 도순산 또는 영주산이라고도 불렀으며 두승산성은 승고산성 또는 영주산성이라고도 불렀고 둘레는 1만미터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는 아홉 개의 봉우리를 이룬 절벽을 이용하여 5 Km가 넘게 둘레를 쌓았다.

두승산 남쪽에 솟은 산봉우리가 선인봉인데 이 선인봉의 남쪽 기슭이 고려시대 영주관찰부가 있었던 고부면 입석리이다.

선인봉의 남쪽 정상에는 석성지가 있으며 대부분 무너졌으나 약간의 원형이 남아 있는 곳도 있다.

 

두승산성을 직접 찾아 보기 어렵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줌으로 당겨 산성의 흔적이라도 찾아보려 했지만 미세먼지와 거리감으로 인해 정확하게 확인 할 수 없음이 아쉽기만 하다.

그렇게 주위 풍경과 두승산성 쪽 조망들을 확인하며 조금 더 걸어 전진하니 커다란 바위봉이 운 앞을 가로막아 조심스럽게 그 바위를 타고 오르니 바위에는 잘 인식하기 어려운 많은 한자들이 새겨져 있어 사진에 담고 그 바위 위로 오른다.

바위 위로 오르니 바위에 망선대(望仙坮)와 수두태정(水斗太井)이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고 우측 한쪽으로는 준희 선생님이 걸어 놓은 두승산 정상 이정판이 눈길을 잡는다.

그 두승산 정상에서 방금 전 지나 온 남쪽 방향으로 망선대란 음각을 넣어 끝봉을 담아 보니 보는 사진 만으로도 환상이다.

 

그렇게 잠시 더 두승산 정상에서 주위 풍경들과 조망을 즐긴 후 준희 선생님이 걸어 놓은 정상 이정판에서 추억 한장 남겨 본다.

두승산(441m)은 전라북도 정읍시의 흑암동과 고부면 남복리 및 덕천면 상학리 그리고 소성면 만수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444미터이고 부안군의 봉래산, 고창군의 방장산과 함께 삼신산의 하나로 모셔졌던 산이다.

현재 보문사, 유선사, 전충사 등의 절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고부)에도 만일사, 망월사, 등계사는 모두 도순산에 있다 라고 하는 기록을 보아 과거에도 여러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지도서(고부)에 두승산은 군 남쪽 5리에 있는데 예전에 도순산으로 불렀고 또 영주산(瀛州山)으로도 부르고 산에 9개 봉우리가 있는데 그 최고봉에 돌말(석두)과 돌되(석정)가 있어 그 이름을 두승산이라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부군의 진산으로 세종실록지리지(고부)에 진산은 도순(都順)이고 군의 동쪽 5리에 있다 라고 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고부)에 두승산은 군의 동쪽 5리에 있는데 일명 도순산이라 부르며 옛 석성이 있는데 둘레가 1 8 12자이고 길은 골짜기를 넘어가는데 영주(瀛州) 때의 옛 성이 아닌가 한다 라고 하는 기록이 있다.

대동여지도(17 5)에 고부읍치 남쪽에 두승산이 기재되어 있고 저천(猪川)이 발원해 동류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그 밖에도 해동지도, 광여도 등에 두승산이 표기되어 있다.

 

두승산 정상에서도 많은 시간 즐기고 휴식 취한 후 다시 천천히 내리막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등로 우측으로 치재에서 올라오는 갈림삼거리 이정표가 서 있고 그곳에서 상봉까지는 0.19 Km 라는 방향과 거리 표시가 반가운 시간이다.

이정표와 장상 풍경을 마지막으로 사진에 남기고 내려가니 이제 걸어 넘어야 할 상봉이 바로 코 앞으로 우뚝 솟아 있고 그 우측 뒤 저 멀리 만나야 할 천치와 천태산 봉우리들도 존재감을 알려오기 시작한다.

잠시 후 무명묘지 1기와 이정표 2개가 서 있는 안부로 내려가 이정표를 살펴보니 좌측으로 보문사 하산 갈림삼거리 이정표이다.

 

보문사 갈림삼거리 안부에서 사진을 남기고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산행을 이어가니 활엽수 등로에 키 작은 산죽들이 보이고 곧이어 바위들과 어우러진 소나무 등로로 바뀌고 있다.

바위가 보이는 소나무 등로를 따라 오르니 정상에 바위가 보이는 봉우리에 도착을 하는데 그 바위 지난 공터에는 이곳이 두승산이란 이름과 함께 철 안내판이 서 있고 이곳이 정읍시의 두승산으로서 해발고도는 444미터라는 고도 표시가 눈에 들어 온다.

 

그 이정판을 지나 진행하니 키 작은 산죽들이 등로 옆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나즈막한 안부로 내려갔던 등로가 다시 급해지며 바위 자갈들이 깔려 있는 오르막 등로로 변하고 있다.

잠시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상학리 하산 갈림삼거리 이정표가 서 있고 그곳을 지나니 무인산불감시 카메라를 보호하기 위한 철망에 준희님이  걸어 놓은 441.0미터라는 이정판을 걸어 놔 추억 한장 남겨 본다.

 

무인산불감시 카메라와 그를 보호하기 위한 철망에 붙어 있는 441미터라는 이정판을 사진에 담고 바위가 깔려 있는 정상을 지나쳐 걸어가다 등로 좌측 뒤를 보니 두승산성과 끝봉 사이로 덕안리와 만수리 마을 및 만수저수지가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하고 그 좌측으로는 끝봉에서 두승산 정상까지 이어지는 굴곡진 마루금이 뿌연 미세먼지 속에서도 빛나고 있어 잠시 발걸음 멈추고 그 이름들을 불러보며 몇장의 사진으로 담아 본다.

조금 더 선명하고 깨끗한 조망과 사진을 남길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이렇게나마 그 모습을 즐길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이 되었다.

 

지나 온 두승산 줄기를 사진에 담고 다시 산행을 이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여전히 두승산성과 끝봉 사이로 만수리와 덕안리 풍경이 눈에 밟혀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발걸음 멈춰 몇장의 사진을 더 남기고서야 제대로 진행을 할 수 있었다.

만수리는 출발하면서 자료를 찾아 봤기에 덕안리 자료를 찾아 보니 덕안리는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에 있는 리로서 마을이 잘 정리된 논밭에 자리잡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새터, 안영, 육선, 진장, 회동, 덕안이 있는데 새터는 마을이 새로 이루어졌다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선인이 자리를 까는 형국이라 하여 강선동이라고도 부르며 덕안은 마을이 둔덕 안쪽에 자리잡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특산물로는 내장산 복분자, 단풍미인쌀, 새송이버섯등이 있다.

그렇게 한동안 더 그 441봉에서 주위 풍경을 살펴보고 다시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등로 주위로는 키 작은 산죽들이 자라면서 푸르름을 선물하고 있어 눈도 호사를 해 보는 시간이다.

 

그렇게 한동안 키 작은 산죽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내려가니 등로는 나즈막한 무명안부를 지나 둔덕 같은 곳으로 오르고 조금 더 걸어가니 갑자기 많은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이 걸려 있어 자세히 살펴보니 이곳이 바로 길주의 지점으로 직진의 뚜렷한 유선사 가는 등로를 버리고 우측의 희미한 산죽 등로를 따라 개척 산행을 하면서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따라 어렵게 돌짐재로 하산해야 하는 지점이었다.

이곳에서부터 유선사에서 키우는 강아지 두마리가 정적을 깨며 두승산을 시끄럽게 만들기 시작하고 그 강아지들의 울부짖는 소리는 이 산객이 키 큰 산죽지대를 완전히 빠져 나갈 때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유선사 가는 좋은 등로를 버리고 우측의 키 큰 산죽지대로 들어가니 초반부터 등로가 사라지고 지저분하게 자라고 있는 산죽들이 발목을 잡고 늘어지며 등로에 쌓여 있는 바위 너덜에는 파란 이끼들이 껴 있어 여간 미끄럽지 않아 2중 3중 고역이다.

그래도 희미하게 남아 있는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을 찾아 어렵게 내려가니 등로 좌측 유선사에서 들려오는 강아지 두마리의 울부짖음이 귀를 성가시게 만들고 소리도 질러 보지만 강아지들의 목소리만 더 커지니 그냥 감수하고 내려가는데만 신경을 써 본다.

그렇게 더 조심하며 내려가니 제법 긴 바위너덜길이 다시 나타나고 그 위에는 이끼 긴 바위들이 악마의 유혹을 펼치듯 이 산객을 유혹하고 있어 시간이 지체되더라도 안전하게 천천히 내려가 본다.

 

지독하게 자라 난 산죽과 이끼 낀 바위너덜길을 타고 조심스럽게 내려가니 생각보다 시간 지체가 극심하고 조금은 조바심이 날때 쯤 가파른 내리막 등로가 조금은 완화되면서 진행에 도움을 받지만 그것도 잠시 이 산객보다 훨씬 크게 자란 산죽이 완전히 등로를 뒤덮어 어디가 어딘지 분간조차 하기 힘든 등로를 찾아 진행한다는 것이 기적같은 느낌이다.

힘들게 그 짧은 키 큰 산죽 지대를 빠져 나오니 이제부터는 지독한 잡목들이 앞을 가로막으며 진행을 방해하고 조심하며 잡목을 헤치며 내려가니 등로 바닥에는 쓰러져 나뒹굴고 있는 커다란 고사목들이 또한 발목을 잡고 늘어 진다.

 

그래도 그 잡목지대를 빠져 나오니 활엽수 낙엽이 깔려 있는 평이한 등로가 열리고 가끔 보이는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를 길라잡이 삼아 내려가니 갑자기 등로 좌측으로 녹슨 철조망이 나타나 조심한다.

그 녹슨 철조망을 지나니 등로는 우측으로 빙 돌아 시누대 터널을 통과하고 묘지지대를 지나 비포장 임도를 타고 드디어 음지길 2차선 포장도로에 도착을 하는데 지도를 보니 이곳을 돌짐재라 칭하였지만 그 어디에서도 이 지명에 대한 자료를 찾지 못해 아쉬운 시간이다. 

돌짐재(동물이동통로)는 음지길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좌측의 장문리와 우측의 하학리를 이어주는 고갯마루로서 이름유래나 지형에 관한 자료는 찾지 못하였기에 이곳 돌짐재가 속한 장문리를 확인해 보니 장문리는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에 있는 리로서 마을이 산 밑에 자리잡고 있으며 북쪽으로 큰 저수지를 끼고있다.

자연마을로는 내건너, 등전, 양지, 음지가 있는데 내건너는 마을이 음지 북쪽 내 건너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등전은 마을 지대가 높고 밭이 많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구슬 등잔을 벽에 거는 모습이라 하여 등지리라고도 부른다.

양지는 마을이 양지쪽에 음지는 마을이 음달에 자리잡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문화재로는 장문리 5층석탑이 있으며 특산물로는 내장산 복분자, 단풍미인쌀, 새송이버섯등이 있다.

돌짐재에서 음지길 도로를 타고 좌측 고갯마루 방향으로 오르니 도로 건너 우측으로 진행해야 할 시멘트 포장도로가 보이고 그 위로는 동물이동통로도 보이는데 왜 저 동물이동통로로 진행하지 못하고 이곳 음지길 도로까지 내려왔는지 궁금했지만 그 궁금증은 금새 해소되었다.

 

돌짐재에서 도로 건너 보이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음지길 2차선 포장도로인 돌짐재를 통과할 수 있는 동물이동통로가 설치되어 있는데 살펴보니 설치된지 오래되었는지 그 통로 위에는 퇴적물들과 잡목 그리고 잡풀들이 우거져 도저히 동물들도 건너 다닐 수 있는 통로가 아니기에 사람은 더욱 더 진행이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선답자들이 동물이동통로가 아닌 우측으로 빙 돌아 음지길 2차선 포장도로로 내려가 돌짐재를 통과한 후 다시 능선 방향으로 오르고 있는 듯 보인다.

동물이동통로를 좌측으로 살펴보고 다시 우측으로 돌아 오르니 눈 앞에 작은 하얀 건물 하나가 보이고 그 주위로는 드넓은 철망이 쳐져 있어 무슨 용도인지 궁금해 다가가 보지만 아무 표식도 없다.

철망 좌측으로 돌아 곧바로 능선으로 오르니 지독한 가시잡목들이 등로를 가득 메워 진행에 고통이 심하고 그렇게 잠시 더 진행하다 뒤돌아 보니 돌짐재를 가로지르는 사용 불가능한 동물이동통로 위 저 멀리 두승산에서 내려온 어려웠던 급경사 내리막 등로와 우측으로 강아지 두마리가 울부짖었던 유선사가 빤히 올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너무나 힘들게 가시잡목들을 헤치며 전진하니 잠시 후 등로 바로 우측 아래로 하얀 철망이 올라 와 있고 그곳에서 철망은 우측으로 꺽어 내려가고 마루금은 직진 방향의 잡목 등로로 이어지고 있는데 가능하면 하얀 철망을 타고 그 철망을 우측에 두고 진행을 하면 조금 더 수월하게 진행이 도지 않을까 예상도 해 본다.

철망과 헤어지니 여전히 잡목들이 보이지만 방금 전 지나온 등로보다는 양반이고 그렇게 조금 더 전진해 오르니 뚜렷한 소나무 등로가 열리면서 잡목으로부터의 고생도 해방이 되었다.

약간의 널부러진 고사목들과 잡목들을 조심하며 오르니 한동안 평이한 등로가 이어지고 곧이어 무명 묘지 한기와 커다란 바위들이 보이는 204.6봉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 역시 준희 선생님이 커다란 소나무 가지에 이정판을 걸어 놔 추억 한장 남겨 본다.

 

그 204.6봉에서 사진 몇장 남기고 이제 우측으로 크게 꺽여 진행되는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등로는 다시 활엽수 낙엽이 깔려 있는 완만한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잠시 후 등로는 다시 밤나무가 보이는 등로로 변하고 잠시 평이하게 걸어 둔덕을 넘으니 이제 등로에는 관목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거대한 활엽수가 쓰러져 있는 곳 우측으로 번호를 알 수 없는 송전탑이 보인다.

그곳을 지나니 지독한 잡목과 잡풀지대가 나타나지만 누군가 잘 정리를 해 놔 진행에는 정혀 지장이 없는 곳을 통과하는데 선답자의 띠지가 반겨 준다.

 

잡목과 잡풀들이 우거졌다가 정리된 번호를 알 수 없는 송전탑을 지나니 등로는 다시 뚜렷한 소나무와 관목 등로로 변하고 곧이어 활엽수 낙엽이 푹신하게 깔려 있는 곳에서 약간은 가파르게 내려가며 나뭇가지 사이로 잠시 후 올라 야 할 마루금이 살짝 올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잠시 더 평이하게 걸어 내려가니 바로 발 아래 태고로 2차선 포장도로가 내려다 보이는데 그 도롯가에는 높은 철망이 설치되어 있어 직진으로는 내려갈 수가 없어 좌측으로 돌아 어렵게 태고로 2차선 포장도로에 도착을 한다.

다음지도에는 아무 표식도 없는 도로이지만 오래된 국토지리원 지도에는 이곳을 천치라 표기를 해 놨기에 편의상 천치 2차선 포장도로로 표기를 한다.

이곳 천치 역시 좌측의 장문리와 우측의 하학리를 이어주는 고갯마루인데 왜 천치라 했는지 궁금하지만 그 이름유래를 정리한 자료가 없어 답답하기만 하다.

 

천치로 내려가 태고로 2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우측 고개 넘어로 올라가니 도로 좌측으로는 낙석 방지용 울타리 넘어 거대한 바위들이 금방이라도 떨어져 내릴 듯 아슬하게 걸쳐있어 위험스럽게 보인다.

덕천면과 고부면의 경계임을 알리는 도로 표지판을 지나니 도로 좌측으로 낙석 방지용 철망이 끝이 나고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이 걸려있는 비ㅗ장 임도가 보여 그곳을 통해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잠시 비포장 임도를 타고 오르니 등로는 금새 지독하게 무성했다 말라 있는 칡넝쿨과 덩굴식물들이 보이고 그곳을 통해 오르니 잘 관리되고 있는 묘지가 나타나는데 허기도 져 그곳 묘지 마당에 자리깔고 앉아 간식과 과일로 허기를 달래며 쉬었다 출발한다.

잠시 쉬면서 지나 온 방향을 살펴보니 천치 지나 잡목들이 우거져 있고 송전탑이 보였던 162.1봉이 빤히 올려다 보인다.

 

묘지 마당에서 간식으로 허기를 달래고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이어지는 짧은 가시잡목을 뚫고 오르니 뚜렷한 주능선 등로에 도착을 해 우측으로 오르며 정상적인 산행을 이어간다.

잠시 더 걸어 오르니 갈림삼거리가 나타나고 우측 가까운 곳에 146.3 삼각점봉이 있기에 무조건 우측 잡목 사이로 나 있는 희미한 등로를 타고 오르니 금새 정읍445라는 삼각점이 박혀 있는 146.3봉에 도착을 하는데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 몇장이 전부이다.

 

사진에 담고 그 146.3 삼각점봉을 되돌아 나와 주능선 방향으로 진행하니 커다란 박달나무가 보이는 갈림삼거리에 다시 도착을 하고 좌측 등로를 버리고 우측등로를 따르니 솔갈비가 수북히 쌓여 있는 바위암릉들이 나타나고 우회해 통과하니 다시 무명묘지 한기와 거대한 바위암릉이 연달아 나타난다.

우측 위로 거대한 바위암릉을 두고 좌측 우회 등로를 따라 사면치기 하듯 걸어 오르니 금새 잡목들이 우거진 주능선에 올라 진행하게 된다.

 

약간의 잡목들과 커다란 소나무들이 혼재되어 있는 등로를 따르니 다시 갈림삼거리가 나타나고 지도를 보니 등로 좌측 가까운 곳에 183.9미터의 천치라는 봉우리가 보여 잠시 다녀 오기로 한다.

조금 더 걸어 진행하니 커다란 참나무 가지에 준희 선생님 이름으로 걸어 놓은 천치 183.9미터봉이란 이정판이 보여 사진 한장 남기고 뒤돌아 나오면서 자료를 찾아 보지만 역시나 아무 자료도 찾을 수 없는데 한자를 보면 하늘의 고개 또는 하늘 아래 높은 고개라는 뜻처럼 보이는데 이곳이 속해 있는 고부면 장문리에는 천치라는 지명 이름이 보이지 않으나 우측의 덕천면 하학리에는 천치제처럼 천치와 관련된 지명들이 보이는 것으로 봐 이곳 하학리의 지명 이름과 관련이 있을 듯 싶지만 확실하지 않아 아쉽기만 하다.

다만 다음지도를 찾아 보면 이곳 천치 또는 천치 직전의 갈림삼거리를 뛰둥산이라 표기를 하고 있는데 지역은 고부면 장문리 지역이지만 뛰둥산과 관련된 자료는 찾을 수 없어 역시 아쉽기는 마찬가지이다.

 

이정판이 걸려 있는 183.9미터의 천치라는 고개가 아닌 봉우리를 잠시 오른 후 사진 한장 남기고 뒤돌아 나와 갈림삼거리에서 우측 등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휘어지는 등로를 따라 산행을 이어가니 선답자들의 많은 띠지들이 정상적인 마루금을 알려주고 있어 감사한 마음을 표하고 전진한다.

약간의 잡목들과 잘려 쌓인 고사목들이 보이는 갈림삼거리를 지나니 희미한 소나무 등로가 이어지고 조금은 편안하게 산행을 이어간다.

 

잠시 후 솔갈비가 푹신하게 깔려 있는 무명묘지 한기를 지나고 갑자기 사라지는 등로를 찾아 잡목들을 헤치며 수북하게 쌓여 있는 활엽수 낙엽들을 헤치니 생각보다 길찾기가 쉽지 않다.

주능선 우측으로는 오래 전 벌목이 되었는지 키 작은 잡목들과 관목들이 우거져 있고 등로에는 오래 전 잘려진 나뭇가지들이 쌓여 썩어가는 고사목들이 널부러져 있어 진행이 거의 불가능하기에 좌측 사면으로 내려가 여전히 발목을 잡고 있지만 그래도 뚫고 진행이 가능한 가시잡목들을 헤치며 어렵게 진행을 이어간다.

 

한동안 그렇게 가시잡목들과 씨름을 하면서 어렵게 통과하니 잡목들이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하고 금새 밀양박공 묘지 4기가 모여 있는 묘지 마당으로 내려가며 한고비 넘겨 본다.

그 밀양박공 묘지 4기를 지나니 뚜렷한 참나무 능선 등로가 열리고 그 등로를 타고 빠르게 진행하니 다시 등로 좌측으로 많은 묘지들이 보이는 능선으로 올라 좌측을 살펴보니 송전탑이 보이는 봉우리들이 올려다 보이는데 저곳은 천치 좌측인 서쪽으로 있는 230.3봉으로 금사동토성이 있는 봉우리이기에 금사동토성을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자료들이 보인다.

금사성토성은 전라북도 정읍시 영원면에 있는 삼국시대 외성과 내성의 구조로 축조된 성곽의 산성 및 토성으로서 시도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내용은 전라북도 기념물 제55호로서 지정면적 355,396㎡, 둘레 4,759m. 현재 문지와 수구문 및 건물지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동서로 뻗은 산릉의 북사면을 감은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되는데 외성은 북쪽 골짜기를 감은 포곡식(계곡과 산정을 함께 두른 산성)이며 내성은 테뫼식(산 정상을 둘러 쌓은 성)이며 외성의 규모는 동서 710m, 남북 620m의 평면으로 성곽 둘레는 2,365m에 이른다.

남변은 석축인데 중앙수구에 북문지가 있고 수구 서편 성내는 너비 120m 정도의 평탄한 대지가 있는데 건물지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내성은 산릉선을 두른 외성 남변을 외곽으로 하고 동남우각에서 북으로 300m쯤 내려오다가 북사면 중턱을 감았다.

이 곳은 토루()를 쌓고 안에 회랑도를 설치한 이른바 말달지기라는 것이며 내성의 전체 둘레는 2,394m인데 외성보다 더 긴 것은 북변 굴곡이 심하기 때문이다.

내성은 동쪽에 해발 200m, 서쪽에 170m의 양 봉우리를 감고 있으며 그 중간에 길이 427m, 너비 21∼36m의 평탄한 대지가 있는데 이 곳이 건물지로 생각되며 그 남변 중앙에 남문지가 있다.

내성 동쪽 봉우리도 대지를 이루어 상성() 구실을 하는데 석축으로 견고하게 쌓았으며 1980년의 조사결과 기와편과 백제계 토기편 등이 발견되었다.

이 산성은 백제시대의 중방고사부리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천치에서 그리 멀지 않기에 잠시 다녀왔으면 좋았는데 통과한 이후에 알게 되어 아쉬움이 남는다.

 

묘지지대 위에서 등로 좌측으로 올려다 보이는 무명봉들을 살펴보고 다시 진행하니 금새 무명묘지 한기를 더 만나는데 그곳에서 등로는 우측으로 크게 꺽여 내려가며 진행을 해야 하는 길주의 지점이다.

선답자의 산행 띠지가 길라잡이를 해 주는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또 다시 무명묘지 한기를 지나 커다란 아카시아 나무들이 쓰러져 고사목으로 변해 있는 등로를 통과하여 우측으로 이어지는 활엽수 낙엽 등로를 따르니 금새 구파로 2차선 포장도로에 도착을 한다.

지도를 보면 이곳 좌측 은선리에 있는 고개가 자라고개라는 표기를 해 놨는데 또 어느 지도에는 잠시 후 만나는 성황당 안내판이 서 있는 안부를 자라고개라 표기를 한 곳도 있어 헷깔린다.

 

그 구파로 2차선 포장도로를 건너 우측에 농장과 좌측으로 낙석방지용 철망을 두고 능선으로 오르니 여름철 지독하게 우거졌던 덩굴식물들과 칡넝쿨들이 말라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 오고 그곳을 통해 주능선으로 오르니 활엽수 낙엽을 이불처럼 뒤집어 쓰고 있는 무명묘지 한기를 통과한다.

다시 이어지는 잡목과 쓰러진 거대한 아카시아 나무 고사목들을 어렵게 통과하며 진행하니 금곡님의 띠지가 걸려있는 85.4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며 잠시 주위를 둘러본다.

 

그곳을 지나 평이한 등로를 타고 나뭇가지 사이로 내려다 보이는 우측의 거대한 농장지대를 살펴보며 걸어 오르니 금새 성황당 안내판과 낮은 돌무덤들이 널려 있는 안부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을 자라고개라 부르는 지도도 있는데 어느 것이 사실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이곳 안부에 서 있는 성황당 안내판을 읽어 보니 이곳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서해에서 자라가 육지로 올라오는 형국인 자라혈이라 하며 이 고개를 자라고개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이곳에는 성황당(서낭당)이 있고 1894년 갑오 동학 혁명 당시 동학 농민군들이 이 고개를 지나 진군하면서 진을 치고 군기를 꽂았던 군기봉이 있다.

성황당은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슬기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대개 지형이 높은 길가에 성황당을 만들고 길을 가는 나그네들은 이곳에 돌이나 동전 등 쇠붙이와 그 위에 솔가지를 던지고 가면 다리가 아프지 않고 소원성취한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는 우리 선조들이 만약의 전시를 대비하기 위하여 산 기슭에 있는 돌을 일정한 곳에 한데 모아 전쟁 시 용이하게 사용하고자 함이요 쇠붙이는 화살촉 등 병기를 만들기 위한 것이며 솔가지를 던진 것은 돌더미를 은폐하고자 하는 지혜와 슬기에 연유한 것이라 한다.

지금은 새로 뚫린 길을 이용하기 때문에 고개를 넘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옛날에는 영원 지역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 정읍 시내까지 시장도 다니고 학교도 다녔다고 한다.

이곳 성황당 안내판을 통해 성황당에 관한 더 많은 사실들을 알게 되어 좋은 추억으로 남겨 본다.

 

성황당 안내판과 돌무덤들이 있는 자라고개 안부를 지나 다시 오르니 무명 묘지 2기가 나타나고 그 묘지를 통과하니 등로 우측으로 또 다른 많은 묘지들이 보이면서 그 아래 도계리쪽으로 거대한 농장들과 목장들이 펼쳐져 있어 살펴본다.

도계리는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에 있는 리로서 평지에 자리잡은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작은 하천이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금계리, 다내골, 도마다리, 새장터가 있는데 금계리는 도계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금계포란혈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다내골은 마을 뒷산이 다락같이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도마다리는 마을 앞 시내에 도마같이 생긴 돌다리가 놓여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새장터는 마을에 전에 장이 섰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도계리 뒤 저 멀리에는 우측으로 두승산 자락이 살짝 보이기 시작하고 중앙으로 동죽산과 바작산 지나 망제봉이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그 묘지 위에서 그렇게 한동안 도계리 마을과 산줄기들을 살펴보고 걸어 진행하니 잠시 후 눈 앞으로 나무들과 약간의 잡목들이 보이는 능선 진입로가 나타나고 그 입구에서 능선으로 들기 전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지나 온 뛰둥산과 천치 우측으로 금사동토성이 있는 230.3봉과 우측으로 190.6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벌써 저 멀리 멀어지며 이별 인사를 하고 있다.

 

이제 능선으로 들어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수렛길 같은 뚜렷한 등로가 나타나더니 금새 시누대 터널로 바뀌고 있다.

한동안 이어지는 시누대 터널을 통과하니 돌계단이 나타나고 처음에는 이 산중에 왠 이런 돌계단을 만들어 놨을까 궁금했는데 잠시 더 걸어 오르니 또 다시 나타나는 시누대 지대를 지나 저 멀리 커다란 입을 벌리고 서 있는 듯 보이는 고분군들이 올려다 보이기 시작하고 자료를 보니 이곳이 바로 은선리 고분군으로서 발굴하여 정비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듯 보인다.

은선리 고분군은 전라북도 정읍시 영원면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구덩식돌방무덤과 굴식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을 말하며 시도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은선리 고분군은 1981년 4월 1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57호로 지정되었고 지정면적은 110,768㎡이며 이 고분군은 고부면에서 북방으로 4 Km 떨어져 있는데 현재 고부지역에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본래는 고부군의 관할이었고 역사상 고부와 관계가 깊다.

탑동마을의 동쪽에는 천태산이 있어 남방의 두승산에 연결되며 천태산은 다시 서남방으로 지맥이 뻗어내리는데 이 산줄기가 형성된 구릉의 남쪽에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남으로 뻗은 능선과 서남의 지맥 사이로 이루어진 대지 안에 수십 기의 고분이 산재해 있으며 이 고분군은 백제계 굴식돌방무덤(墓)으로 모두 파괴되고 10기만이 1973년 전주시립박물관에 의해 조사되었다.

이후 2005년 지표조사를 통해 이 고분군이 3개 지점(A, B, C고분군)에 43기가 분포하고 있음이 추가로 확인되었으며 2008과 2009년에 걸쳐서 1기의 고분이 발굴조사되었다.

은선리고분군에서 가장 먼저 조사되어 그 유형이 파악된 것은 A고분군에 해당하는 10기의 무덤으로 돌방은 깬돌(石)을 이용하였으며 벽면 위쪽을 안으로 기울여 천장 폭을 좁혔고 동쪽에 널길(道)이 달려 있다.

판석()을 사용한 돌방은 위쪽 천장면석 사이에 안기울임시킨 장대석()을 끼워 단면 6각형을 만들고 앞면 중앙에 짧은 널길을 설치해 부여 능산리고분과 같은 형식을 나타냈다.

또한 그 중간의 과도적 형태인 아래쪽 벽면은 면석()을 세우고 윗면은 깬돌이나 장대석을 안기울임시킨 것이 있어 백제시대 돌방무덤의 변천을 엿볼 수 있다.

이를 형식별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은데 ① 제1유형으로 안쪽에 다듬은 판석을 맞추어 세워 장방형 돌방을 짜고 양측벽면 위쪽에는 안기울임시킨 장대석을 끼워 천장 폭을 좁힌 뒤 천장돌을 얹어 단면 6각형으로 널방(室)을 축조하였다.

뒷벽은 1장의 판석을 단면에 맞추어 수직으로 세웠으며 앞면 양귀에는 귓기둥을 세워 널방 폭을 좁혔으며 널방 입구에는 판석으로 된 막음돌을 세우고 널길은 중앙에 짧게 설치해 뚜껑돌(石)을 얹었다(A·B·C·D·P호분).

② 제2유형에는 깬돌로 네 벽면을 쌓고 동편한 널길을 설치하였으며 널방 벽면 위쪽은 차차 안기울임시켜 천장 너비를 좁히고 뚜껑돌을 얹었고 바닥에는 얇게 깬돌을 깔았다.

널방 천장 높이는 다른 돌방에 비해 가장 높고 동편한 널길은 역시 깬돌이나 냇돌을 쌓고 뚜껑돌을 덮었으며 입구는 냇돌로 막았는데 이러한 유형은 E호분 단 1기뿐이다.

③ 제3유형으로는 제2유형에서 제1유형으로 바뀌어가는 과도적인 형식으로 장방형 돌방에 동편 입구와 널길이 있는 것은 제2유형과 다를 바 없으나 아래쪽 벽면은 넓은 판석을 수직으로 세우고 그 위에도 안쪽을 다듬은 장대석을 쌓아올렸으며 위로 가면서 차차 작아지고 혹은 꺾든가 둥글게 안기울임시켜 그 위에 천장돌을 얹었다.

다만 앞뒷벽을 수직으로 세웠거나 안기울임시킨 차이가 있을 뿐인데 이 역시 과도적인 형식이다(G·H·L·N호분).

제1유형의 대표적인 것은 A호분으로서 가장 남쪽에 자리하는데 돌방은 장축이 서남방향이고 널방의 바닥은 길이 2.24m, 너비 1m이고, 천장 높이는 1.19m로서 석재는 화강암이다.

널길은 길이 38㎝, 높이 80㎝, 두께 22㎝의 판석을 양편에 세우고 뚜껑돌을 덮었다.

유일한 제2유형인 E호분은 장축이 남서방향으로 잡석으로 벽면을 쌓고 3장의 넓은 뚜껑돌을 가로 맞추어 덮었고 널방 바닥은 길이 2.44m, 너비 1.7m이며, 천장 높이는 1.66m로서 길이에 비해 너비와 높이가 넓고 높은 편이다.

널길은 동쪽벽이 널방벽과 일직선인 동편 널길이고 바닥 너비는 0.75m이나 동벽도 안기울임해 윗면은 0.65m로 줄었으며 길이 1.24m, 높이 0.85m이고 그 위에 2장의 뚜껑돌을 덮고 바깥 입구는 냇돌로 막았다.

제3유형은 판석과 잡석을 혼용한 돌방으로서 대표적인 것은 N호분뿐으로 서남방향에 동편한 널길이 있는 돌방이며 널방은 길이 2.73m, 너비 1.90m, 천장 높이 1.63m이다.

네 벽은 0.95m 높이부터 안으로 꺾여 천장 길이 1.92m, 너비 1.10m로 줄었고 앞면은 너비 1m, 높이 0.8m의 판석으로 서쪽을 막고 동쪽에 0.9m 너비의 입구를 남겼으며 널길은 길이 1.35m, 높이 0.8m이다.

제3유형은 공주지방의 제2유형이나 남원 초촌리 제1유형과 구조, 석재, 수법 등이 비슷해 축조연대가 6세기 전반기에 해당하고 제1유형은 부여 능산리 중상총()과 서하총(西) 등과 같은 백제 말기형식이므로 연대가 7세기 전반기에 해당한다.

은선리고분군이 위치한 지역은 백제시대의 고사부리군()으로 사비시대의 지방제도였던 5방() 중의 하나인 중방()의 고사부리성()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 고분군은 공주시대에서 부여시대 말기에 걸친 약 1백년 동안의 묘역이었다.

이에 선행하는 백제고분으로는 은선리 북방의 운학리나 은선리 지사()마을에 있는 구덩식돌방무덤(墳)이 있어 이곳이 공주시대 이전부터 백제의 중요한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자료를 찾아 읽어 본 후 도굴되어 소장품들은 모두 사라졌다는 소식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으니 남아 있는 고분들만이라도 오랫동안 잘 관리하고 보관되어 후손들에게 역사적인 자료로 남아 있기를 바래 본다.

 

그 고분군 두개를 지나니 여전히 돌계단이 이어지고 곧이어 깃대봉과 자라고개 및 은선리고분군으로 갈 수 있는 갈림삼거리 이정표를 만나는데 그 이정표 우측으로도 완전하게 정비되지 않은 고분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곳 은선리고분군과 이정표를 지나 깃대봉 방향으로 진행을 이어가니 소나무 등로가 열리고 곧이어 작은 돌탑 하나와 커다란 바위를 지나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만 걸려있는 163.3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사진 한장 남기고 그 봉우리를 좌측으로 걸어 내려가니 솔갈비가 푹신하게 깔려 있는 멋진 소나무 등로가 나타나고 한동안 무심으로 걸어가니 많은 가지가 함께하는 참나무 지나 이정표가 서 있는데 태산사와 무제봉으로 갈 수 있는 갈림삼거리이다.

그 이정표를 지나자마자 봉우리 정상부에 작은 돌로 원형을 만들어 놓은 모습이 눈에 들어 오는데 고도를 보니 186.6 무명봉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15년 전 오마이뉴스에 연재된 기사 하나가 눈에 들어 오는데 살펴보니 무제봉으로 오르는 길은 이평면과 영원면의 경계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밭고랑 몇 개를 지나 오솔길이 나있다.

또 자라고개에서 능선을 타고 가는 길도 좋은 편인데 등산이라기보다는 가벼운 산책길에 가까운 아기자기한 산책로 그러나 이 작은 산 어느 능선이나 1500여 년 전의 백제 돌방무덤들이 숨겨져 있었고 석곽묘도 자주 눈에 띤다.

무제봉에 오르니 우선 가슴이 탁 트이고 천지가 발아래 펼쳐져 있는데 두승산에서 뻗어내려 온 산 줄기가 들판 가운데로 깊숙하게 들어와 불쑥 솟아 있기 때문이다.

입암산과 내장산 등 멀리 노령산맥의 힘찬 내리 뻗음을 볼 수 있고 모악산과 원평, 신태인, 만석보, 말목장터, 녹두장군 전봉준의 고택지가 발 아래 가까운 거리다.

 

돌들이 원형으로 널부러져 있는 무명봉을 지나 내려가니 통나무 계단이 길게 설치되어 있고 그 통나무 계단 옆으로는 굵은 로프도 보인다.

그렇게 한동안 걸어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잡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났다 말라 죽어 있는 많은 묘지들이 보이고 진행 방향으로는 잠시 후 올라야 할 천태산이 빼꼼하게 올려다 보이는데 사진 한장 남기고 조금 더 내려가니 지도 상 자라고개 안부에 도착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전혀 길이 없는 고갯마루처럼 보이지 않는 평이한 안부로서 성황당 안내판이 서 있던 곳이 실제 자라고개가 아닐까 생각이 드는 시간이다.

 

자라고개라는 안부를 지나 평이한 소나무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등로 옆 소나무에 하트 모양으로 천태산정상까지 0.23 Km 거리이고 지나온 방향으로 백운사까지 0.85 Km 라 적어 놓은 이정판이 앙증스럽다.

잠시 후 많은 운동기구들이 보이고 그 운동기구 한쪽에 정상 이정판이 붙어 있으며 그 앞에 삼각점이 박혀 있는 천태산 정상에 도착을 한다.

천태산(197.2m, 삼각점, 운동시설)은 전라북도 정읍시의 영원면 은선리와 이평면 도계리 및 산매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196미터이고 이 일대는 백제 오방성중 하나인 중방 고사부리성의 옛터라고 전해진다.

서쪽 기슭에 은선리고분군이라고 하는 백제의 횡혈식석실분 10여 기 가량이 군집해 있으며 동쪽사면의 백운암에 석불입상(문화재자료 제139)이 있다.

여지도서(고부)에 천태산은 군의 동쪽 10리에 있다 라는 기록이 있고 대동지지에도 천태산(天台山)이 군의 남쪽 5리에 있으며 위에 9개의 봉우리가 있고 그 하나를 일컬어 국사봉(國師峯)이라고 하며 산세가 높아 그러하다 라고 하는 등 이후 많은 지리지에 천태산이 수록되어 있다.

동여도(18 5)에 고부읍치 북동쪽과 달천 서편에 천태산이 묘사되어 있으며 대동여지도(17 5), 1872년지방지도 등에도 산이 표기되어 있다.

백제 근초고왕이 마한을 정복한 뒤 왜의 장수와 회맹을 맺었던 장소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한국지명총람에는 두승산의 유선사 바로 뒤에 있는 바위에서 왜장 천웅장배와 만남을 가졌다고 하고 천마산으로도 소개되어 있다.

오마이 뉴스에 연재된 기사 중 천태산과 관련된 부분을 발췌해 보면 이곳 천태산 주변에는 마한 구소국의 역사와 백제의 지방 5대 거점 중의 하나인 중방성의 역사와 유적 유물이 발길마다 채이는데 백제시대의 은선리 석탑을 비롯하여 엄청난 백제의 역사적인 흔적들이 흩어져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곳 천태산 밑의 영원면은 백제의 중방성 지역으로 충청도의 공주, 논산, 예산 지역에 설치된 방성을 포함하여 5방성 중의 하나이고 그 5방성 중 하나인 남방성이 바로 이곳 영원면이라는 주장도 여러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다.

그 규모를 대충 살펴보면 5방성은 달솔계급의 방령 1인이 은솔계급의 방좌 두 명과 함께 관장했으며 군사가 1200여명이었고 민가 500호가 주어졌었다고 하고 또 10개의 군과 현 및 성을 거느렸다고 했으니 정읍, 부안, 고창, 김제 지역이 이에 속한다고 하는데 즉 동진강 남쪽과 노령산맥 서쪽 변산반도 일대가 이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방성이 설치된 이유는 이곳이 백제 남방 경영의 요충지이며 한반도에서도 비교적 빨리 벼농사 문화가 시작된 눌제천이 있으며 내륙 깊이 조수가 들어와 물류 유통이 수월했기 때문일 것이다.

 

천태산 정상부를 사진에 담고 주위 풍경들을 살펴보지만 정상부 주위에 자라 난 나무들로 인해 시야가 상당히 제한되어 있고 미세먼지인지 박무가 심해 멀리 조망도 되지 않기에 아쉬움을 뒤로 하고 운동기구들이 있는 천태산 정상부를 출발한다.

우측으로 짧게 내려가니 나무데크가 나타나고 한쪽에 이곳이 포토존이란 이정판이 붙어 있어 그곳으로 올라 제일 먼저 좌측을 살펴보니 오늘 새벽에 잠시 들렸던 영원면 들판과 비산비야 지역이 미세먼지 속에서도 빤히 내려다 보인다.

영원면은 전라북도 정읍시의 서북부에 위치한 면으로 동남부에는 해발고도 200m 내외의 산지가 서북부에는 고부천을 따라 평야가 전개되고 있다.

현재 은선리, 후지리, 앵성리 등 7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는데 후지리에 있던 면 소재지는 현재 은선리에 있고 본래 조선 시대 고부군 북부면 지역이며 고부 읍내 북쪽이었으므로 북부면이라 하였다고 한다.

1914년 북부면과 동부면을 중심으로 거마면, 덕림면, 궁동면, 서부면, 남부면 등의 일부 동리를 합쳐 정읍군 영원면으로 하여 8개 동리를 관할하게 하였고 이후 장문리가 고부면에 분리되고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영원이란 지명은 조선 시대 영원역()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한 지명이며 자획이 간단한 영원()으로 쓴 것이라고 한다.

조선 시대 대부분의 지리지에 북부면과 영원역이 수록되어 있는데 세종실록지리지(고부)에 역이 하나이니 영원()이다 라고 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고부)에 영원역은 군의 북쪽 10리에 있다 라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한자 표기는 다르다.

호구총수(고부)와 1872년지방지도에도 역리라는 동리명이 등장하는데 운학리의 태동 마을 동북쪽에 있는 역터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고 청구도에 읍치 북쪽에 북부면이 표기된 것을 비롯해 해동지도와 여지도 등에 북부면이 기재되어 있으나 영원역은 찾아볼 수 없지만 해동여지도(정읍, 고부)에는 북부면과 함께 영원역()이 한자를 달리해 수록되어 있다.

 

등로 좌측의 영원면을 살펴보고 이제 눈을 우측인 이평면 방향을 살펴보니 바로 아래 산매제란 저수지 지나 황토현전적지와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있는 곳과 그 우측 뒤로 망제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에 있는 기념관으로서 1894년 반부패,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들고 봉기한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 수만의 무명동학농민군이 전주감영에서 파견한 관군을 크게 이긴 최초의 전승지로 향후 고부민란이 동학농민혁명으로 나아가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성지로 이를 추모 및 기념하기 위한 공간으로 조성하였다.

역사상 최초의 농민봉기탑인 갑오동학혁명기념탑과 동학농민혁명 관련 각종 교육 및 행사를 담당하는 교육관이 있다.

또한 황토현은 해발고도 35.5미터의 야트막한 고개로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에 있는데 진등이라고도 부르며 황토현 서남쪽으로는 두승산(444m), 서쪽으로는 천태산(195m)이 솟아 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이 관군을 크게 물리친 전적지로 황토현전투에서의 승리는 동학농민운동을 크게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황토현 일대의 면적 16만 3,224㎡는 황토현전적지라는 명칭으로 사적 제295호로 지정되었고 황토현 고갯마루 아래쪽(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산8번지)에 2004년 5월 개관한 동학농민혁명기념관, 1963년 10월 건립한 갑오동학혁명기념탑, 전봉준과 손화중 및 김개남 장군과 농민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구민사와 전봉준동상 등이 있다.

잠시 후 만나게 될 백산과 백산성 역시 전봉준 장군과 동학농민혁명의 중요한 사적지로 보존되고 있어 이곳 정읍은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이자 근거지로서 지금까지도 이곳에서 살아가는 많은 민초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듯 보인다.

 

한동안 그 포토존이란 나무데크에서 등로 좌우측을 조망하고 사진에 담은 후 다시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조금 더 선명하게 영원면 일대가 내려다 보이고 잠시 발걸음 멈추고 살펴 본 후 진행을 이어가니 평이하지만 뚜렷한 소나무 등로가 열려있다.

조금은 빠르게 걸어 진행하니 무명묘지 한기가 나타나고 그곳을 지나니 좌측에서 등산객 두분이 올라오며 인사를 나누는데 그리 반가울 수가 없다.

동네 주민이라 소개를 하고 헤어져 다시 눈에 보이는 이정표와 운동기구들을 지나 오르니 금성오공 묘지 한기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171.3봉으로 사진 한장 남기고 뒤돌아 나와 이정표를 보니 이제부터 좌측의 창동길로 내려가며 진행을 이어가야 한다.

 

묘지가 있는 171.3봉에서 좌측 등로로 내려가니 활엽수 낙엽이 수북히 쌓여 있는 수렛길 같은 넓은 등로가 이어지고 편안하게 그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내려가니 갑자기 급경사 내리막 등로가 나타나며 안전철봉과 로프가 설치되어 있다.

그 철봉과 로프지대를 지나 내려가니 다시 소나무 등로가 열리는데 잠시 후 스렛길 임도는 우측으로 휘어져 내려가고 등로는 직진의 가시잡목 능선으로 이어져 조금 더 걸어가니 관리가 전혀 되지 않아 민둥의 아카시아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무명 묘지가 있는 92.1 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무명묘지를 지나 약간의 잡목들이 보이는 평이한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묘지들이 나타나고 그 묘지 지나 밭 경작지와 민가가 보이는데 밭 경작지 가장자리에는 전기줄이 설치되어 있어 우측의 소나무 조림지를 통해 조심스럽게 내려간다.

조금 더 내려가니 소나무 조림지 우측의 비포장임도를 만나 그 임도를 따르니 736번 말목장터로 2차선 포장도로에 도착을 하고 그 도로를 따라 좌측으로 걸어가니 운학 버스정류장과 한길타조농장 이정판이 서 있는 운학고개에 도착을 한다.

운학리는 전라북도 정읍시 영원면에 있는 리로서 영원면의 중심지에 가까이 자리잡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서당정과 태동이 있는데 서당정은 마을에 서당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태동은 마을이 천태산 아래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특산물로는 참외와 고추가 있다.

 

그 736번 말목장터로 2차선이 지나는 운학고개에서 우측의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 들어가니 도로 좌측으로 묘지들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밭 경작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는데 그곳을 지나자마자 우측으로 한길타조농장이 나타나고 그곳에서 키우고 있는 타조들이 이방인의 출현에 신기한 듯 다가 와 바라본다.

그 타조농장을 지나 도로 좌우측으로 펼쳐진 밭 경작지를 살펴보며 걸어 들어가니 갈림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좌측 도로는 민가로 들어가는 도로처럼 보여 우측의 도로를 타고 산행을 이어간다.

이곳은 창동리는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에 있는 리로서 이평면 중심지에 가까이 자리잡은 농촌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창골, 광터, 뒷머리, 새터, 송산, 소송, 양간다리가 있는데 창골은 마을에 창고가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고 소송은 마을 둘레에 소나무가 울창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양간다리는 전에 바다이어서 배가 달았다하며 두 다릿이에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문화재로는 창동서원이 있다.

 

갈림삼거리에서 우측 도로를 타고 계속 걸어가니 느티나무 조림지가 나타나고 이름모를 산새들이 노래를 부르며 자연을 알려 줘 잠시 발걸음을 멈춰 본다.

조금 더 걸어가니 도로 우측으로 푸릇하게 자란 마늘밭이 넓게 나타나고 잠시 후 도로 좌측 위 능선 방향으로는 여산송씨 가족납골묘지들이 보인다.

그 묘지들을 살펴보고 우측의 민가가 보이는 방향으로 진행하다 잠시 뒤돌아 보니 이 산객이 걸어 온 시멘트 포장도로가 길게 보이고 그 뒤 저 멀리 넘어 온 171.3봉부터 197.2미터의 천태산과 186.6 무명봉이 보이고 그 우측 저 멀리에는 183.9미터의 천치봉도 보인다.

 

진행하며 걸어 올 땐 고통스럽고 힘들었지만 지난 마루금을 뒤돌아 보면 작은 인간의 두다리가 얼마나 위대하고 대단한지 실감이 나면서 그 어떤 등로라도 모두 아름답고 멋지게 올려다 보이는 것은 그 고통과 어려움을 참고 극복하며 넘어 왔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도 해 본다.

조금 더 걸어가니 이제 시멘트 포장도로가 끝이나고 비포장 임도로 이어지는데 그곳에서 임도 좌측으로는 푸른 드넓은 초지지대가 펼쳐지고 그 초지지대 넘어 저 멀리에는 아침에 잠시 들려 애마를 주차시키고 버스를 탑승했던 영원면 마을들이 미세먼지 속에서도 아름답게 보인다.

 

그렇게 등로 좌측으로 펼쳐진 푸른 초원지대와 영원면 마을들을 살펴보고 계속 걸어 전진하니 아름답게 지어진 민가 한채가 서 있는데 집을 지키고 있는 강아지 한마리가 이방인의 출현에 경기를 하고 짖어 대 재빨리 그 민가 뒤로 나 있는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그 민가를 통과한다.

민가를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이제 등로 우측으로 갈색의 드넓은 밭 경작지가 펼쳐져 있는 이평면 마을들을 살펴본다.

이평면은 전라북도 정읍시의 북서쪽에 위치한 면으로 남서부 구릉지대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이 평야지대이고 동학농민운동의 기화가 되었던 고부군수 조병갑(1844~1911)의 만석보와 전봉준(1855~1895)이 당시 거주했던 고택지가 있다.

현재 두지리와 하송리 및 산매리 등 11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고 하송리에 있던 면 소재지는 현재 두지리에 있다.

이평이란 지명은 면의 북동부 동진강 연안에 펼쳐져 있는 평야를 일컫는 배들에서 온 한자 표기로서 본래 조선 시대 고부군 답내면과 궁동면 지역이고 답내면은 배들 안쪽이 되므로 유래한 지명이라고 한다.

호구총수(고부)에 답내면과 궁동면이 기재되어 있으며 조선 시대 이곳에 있었던 산매리와 평령리 및 청량리 등의 동리명이 확인되고 이후 여지도서(고부)에 궁동면은 북쪽으로 30리이고 (중략) 답내면은 동쪽으로 15리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호남읍지와 전라북도각군읍지 등에도 두 면이 수록되어 있다.

광여도에 읍치 북동쪽에 답내면궁동면이 표기되어 있는 것을 비롯해 해동지도와 지승 등에도 두 면이 묘사되어 있고 한편 동여도(18첩5면)와 대동여지도(17첩5면) 및 청구도(21첩14면) 등에 고부군과 경계하는 태인의 서쪽 경계부에 하천이 묘사되어 있으며 그 일대에 이평()이 기재되어 있다.

1914년 답내면과 궁동면을 중심으로 오금면과 거마면 등의 일부 동리를 합쳐 정읍군 이평면을 신설하였다가 1973년 정우면 오금리를 편입하였고 이후 1987년 도계리가 덕천면으로 분리 ·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잠시 더 그곳에 머물며 아름다운 이평면과 창동리 마을을 내려다 보고 조금 더 걸어 진행하니 벗나무 한그루가 서 있고 선답자의 산행 띠지가 걸려있는 민가 뒷쪽 48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그 나즈막한 48봉을 지나니 묘지들과 드넓은 밭 경작지인지 초원지대가 펼쳐지는데 기온이 오르면서 등산화 밑바닥에 진흙이 묻어 자꾸만 무게감이 더해진다.

그곳에서 진행 방향을 잘못 이해해 밭 가장자리 좌측을 통해 진행해야 되는데 우측 가장자리 방향으로 진행하다 뒤돌아 온다.

 

어렵게 초원지대를 가로질러 정상 마루금으로 복귀해 내려가니 드릅 가시나무가 식재되어 있는 곳을 지나 지독한 잡목과 잡풀속에 사람이 지날 수 있는 등로만 열려있는 마루금을 찾아 내려가니 드디어 묘지지대를 지나 밭 경작지가 나타나고 우측으로 거대한 농장 건물과 함께 좌측으로 새벽에 주차시킨 이 산객의 애마가 보인다.

태평길 시멘트 포장도로에 내려 서서 좌측의 애마를 회수해 백산 직전의 마지막 민가까지 천천히 진행하며 도로 옆에 세워진 표지석과 버스정류장을 사진에 담으며 진행을 이어간다.

 

드디어 애마를 회수 해 편안하게 운전을 하면서 태평로를 따라 우측으로 달리니 거대한 양계장 축사 건물들이 나타나고 강아지들의 격한 환영인사를 받으며 통과하니 도로 우측으로 한국농어촌공사의 청량양수장이 보인다.

그곳을 지나니 다시 갈림삼거리가 나타나고 좌측 도로를 버리고 우측의 창동주산길을 타고 전진하니 도로 우측으로 태양광 발전시설을 지나 다시 만나는 갈림삼거리에서는 우측으로 휘어져 내려가는 도로를 버리고 직진의 좌측 도로를 따라 산행을 이어간다.

 

직진의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르니 도로 좌측으로 논 경작지도 보이고 잠시 후 도로 우측으로 녹색 철망이 설치된 풍경이 나타나면서 거대한 축사를 통과하니 바로 앞에 인공수로가 지난다.

그 인공수로를 건너 계속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르니 도로 좌측으로 마늘 밭과 드넓은 밭 경작지를 지나 저 멀리 오늘 이 산객이 걸어 온 171.3봉과 천태산 그리고 우측 뒤로 천치봉이 차례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 아름다운 풍경과 조망에 다시 잠시 그곳에 멈춰 많은 사진으로 남기고 다시 출발하니 도로 바로 좌측으로는 말라있는 인공 콘크리트 수로가 계속 따라 온다.

그렇게 계속 전진하니 도로 우측 앞으로 이제부터 도로를 타고 진행해야 할 마루금이 빼꼼히 보이기 시작하고 곧이어 궁동길 2차선 포장도로와 만나 그 궁동길을 따라 좌측으로 진행을 이어간다.

이곳 장내리는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에 있는 리로서 평지에 자리잡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며 자연마을로는 돌개명당, 돌못, 송곡, 월산, 조소가 있는데 돌개명당은 마을앞에 네 갈랫길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돌못은 마을 앞에 큰 못이 있었는데 일곱개의 돌로 다리를 놓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송곡은 마을에 옛날 소나무가 많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월산은 달모양의 능선이 둘러싸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문화재로는 전봉준 선생 고택지가 있다.

 

장내리에 속한 궁동길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조금 더 전진하니 도로 좌측으로 브리덕 종오리라는 입간판과 그 옆으로 청량리로 갈 수 있다는 도로 이정판이 서 있다.

청량리는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에 있는 리로서 언덕에 자리잡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궁골과 연지가 있으며 궁골은 마을 뒷산이 활모양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연지는 마을 앞 못에 연꽃이 많이 피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갈림삼거리를 지나 계속 이어지는 궁동길 2차선 포장도로를 따르니 다시 갈림삼거리가 나타나고 그곳에서는 우측의 시멘트 포장도로를 버리고 좌측의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산행을 이어간다.

 

계속 이어지는 2차선 포장도로를 따르니 도로 좌측으로 거대한 한우목장이 나타나고 곧이어 우측으로 부안군 백산면 하청리의 거대한 양계장 축사 건물들이 줄지어 보이기 시작하고 그 축사 건물들이 끝날 쯤 가축방역을 위한 소독 지점도 통과한다.

이제 등로는 좌측에 정읍시를 두고 우측으로는 부안군을 둔 그 경계지역을 타고 진행하게 되는데 도로명도 구궁동길에서 하청로로 바꾸어 있다.

 

소독 지점을 통과하니 다시 갈림삼거리가 나타나는데 도로 좌측으로는 정애교회와 정애 버스정류장도 보이는 이곳은 여전히 정읍시 이평면 청량리이고 도로 우측으로는 부안군 백산면 하청리로 갈리는 지점이다.

그 갈림삼거리에서 하청로 2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우측으로 진행하니 금새 다시 갈림삼거리가 나타나고 그곳에서는 우측의 직진 시멘트 포장도로를 버리고 좌측의 하청로 1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장애노인복지원과 성화농장을 지나 도로 좌측으로 6각 정자가 서 있는 곳도 통과한다.

 

정자를 지나 좌측으로 약간 휘어지는 도로를 타고 진행하니 도로 좌측으로 희망농장 입간판이 보이고 다시 도로 양쪽으로는 밭과 논 경작지들이 펼쳐져 있다.

그곳을 지나니 이제 도로 좌우측 모두 정읍시와 작별하고 순전히 부안군 백산면 지역으로 들어가 진행하게 되는데 백산면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니 백산면은 전라북도 부안군의 동쪽에 위치한 면으로 동진강 하류의 서편에 위치해 중부에 백산(47m)을 비롯한 낮은 구릉지대 외에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해 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동학군이 첫 지휘소인 호남창의대장소를 설치하고 전열을 정비했던 백산성이 있으며 본래 조선 시대 고부군 지역으로 1895년 전주부의 고부군으로 그리고 1896년 전라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1914년 백산면, 거마면, 덕림면을 중심으로 궁동면과 부안군 상동면, 하동면, 소산면, 김제군 공산면과 부량면, 태인군 용산면 등의 일부 동리를 합쳐 부안군 백산면으로 하였으며 현재 덕신리와 용계리 및 죽림리 등 12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고 평교리에 있던 면 소재지는 현재 덕신리에 있다.

백산 지명은 조선 시대 백산면 용계리에 있는 백산의 역사성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산 정상에는 삼국 시대 산성으로 추정되는 백산성이 있고 산에 흰색의 화강암 바위가 많아서 하얗게 보이기 때문에 백산이란 설도 있다.

여지도서(고부)에 백산은 군북 30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고 호구총수(고부)에는 신평리와 하청리 및 대수탕리 등의 동리명이 확인된다.

이제 이 백산면으로 들어 백산과 백산성까지 계속 도로를 따라 이동하게 된다.

 

 

잠시 후 만나는 갈림삼거리에서는 백산서로 2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우측으로 이어가는데 도로 주변으로는 논과 밭 경작지들이 펼쳐져 있고 낡은 민가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농촌의 풍경을 하고 있다.

잠시 후 만나는 갈림삼거리에서는 좌측 도로를 버리고 우측 도로를 따라 이동하고 그렇게 한동안 진행하니 705번 지운로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원 지맥 등로는 도로 건너 대각선으로 이어지는 비포장 임도를 타고 진행하도록 되어 있어 비포장 임도로 들어간다.

 

비포장 임도를 타고 들어가니 임도 우측으로 밭 경작지 지나 커다란 축사 건물이 올려다 보이고 전방 저 앞으로도 거대한 축사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잠시 더 들어가 그 축사 앞에 도착을 하니 거대한 콤바인이 도로를 완전히 차단하고 그 앞에는 질병 예방을 위해 방역을 하고 있으니 그 누구도 충립금지 한다는 커다란 입간판을 세워 놓고 목장주 두명이 마당에서 을을 하고 있어 다툼을 피해 다시 뒤돌아 나와 방금 전 헤어졌던 705번 지운로 2차선 포장도로 방향으로 뒤돌아 나간다.

 

다시 만난 705 지운로 2차선 포장도로를 만나 그 도로를 타고 좌측으로 진행하니 금새 도로 좌측으로 1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해 우측으로 약간 휘어져 가는 705번 지운로 2차선을 버리고 좌측 동학로 1차선 그 포장도로를 따라 들어가며 산행을 이어간다.

도로 좌측으로 방금 전 비포장 임도에서 올려다 봤던 거대한 축사 건물들이 나타나고 조금 더 진행하니 거룡2마을 버스정류장이 보이는 곳 갈림삼거리에서 우측으로 가는 거룡아랫길을 버리고 좌측에 파란 지붕을 한 거대 축사 건물을 끼고 좌측 도로를 따라 산행을 어렵게 이어간다.

 

계속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들어가니 작은 갈림사거리가 나타나는데 그 사거리 위에는 좌측으로 오곡리 우측으로 거룡안길이라는 도로 표지판이 걸려 있다.

거룡1미을 표지석과 거룡마을 버스정류장이 서 있는 이곳 사거리는 좌측의 오곡리와 우측의 거룡리의 경계지점이다.

거룡리는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에 있는 리로서 섬진강의 지류가 흐르는 구릉성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경지가 넓게 분포하여 논농사가 주로 이루어지는 곳이다.

자연마을로는 거룡, 새터, 새암, 산전, 가운데뜸마을 등이 있는데 거룡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이고 새터마을은 거룡 남서쪽에 새로 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새암마을은 샘이 있었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고 산전마을은 거룡 서쪽 산등성이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며 가운데뜸마을은 거룡리 복판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거룡리와 오곡리의 경계인 갈림사거리를 지나니 여전히 동학로가 이어지고 잠시 후 우측으로 산전길 갈림삼거리가 나타난다.

그 갈림삼거리 앞에 서 있는 산전마을 표지석을 사진에 담고 계속 전진하니 도로 우측으로 용출마을 표지석과 용출길이라는 도로 표지판이 걸려 있고 다사 도로 좌측으로 계동길 갈림삼거리 도로 표지판을 지나 좌측 앞으로 29번 부령로 4차선 포장도로 위 도로 표지판도 확인해 본다.

잠시 후 도로 우측으로 용출마을이란 표지석과 버스정류장이 있는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해 거룡리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그 용출마을 표지석과 버스정류장을 지나니 방금 전 좌측 앞으로 봤던 29번 부령로 4차선 포장도로를 통과할 수 있는 지하차도가 보이고 그 지하차도를 통해 도로를 건너니 용계리 버스정류장이 다시 나타난다.

잠시 후 도로 우측으로 드넓게 펼쳐진 논 경작지를 바라보며 계속 전진하니 저 멀리 진행 방향으로 30번 하원로 4차선 포장도로를 통과할 수 있는 지하차도가 다시 나타난다.

그 지하도로를 따라 30번 하원로를 통과하니 다시 낡은 민가들이 나타나고 금새 봉석이라는 버스정류장이 있는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좌우측으로 달리는 도로는 백산로 2차선 포장도로이다.

 

그 백산로 2차선 포장도로로 올라 우측으로 살짝 진행 후 다시 백룡정미소가 좌측으로 보이는 앞 좌측으로 나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들어가 잠시 전진하니 다시 만나는 갈림삼거리에서는 좌측의 곧게 뻗어 있는 도로를 버리고 우측의 좁은 시;ㅔㅁ트 포장도로를 따라 완만하게 오른다.

잠시 더 오르니 마지막 민가에 도착을 하고 그 앞마당에 애마를 주차 시킨 후 스마트 폰만 들고 좌측으로 돌아 북동쪽으로 보이는 백산과 백산성이 있는 팔각정자가 보이는 방향으로 걸어 올라가 본다.

논 경작지를 지나 콩 수확을 하지 않은 밭 경작지를 타고 걸어가니 비포장 임도와 만나 우측으로 걸어 오르니 동네 어르신 한분이 힘겹게 백산으로 오르고 있어 잠시 인사 드리고 빠르게 먼저 오른다.

 

그렇게 한동안 비포장 임도를 타고 오르다 백산이 바로 코 앞으로 올려다 보이는 곳에서 잠시 뒤돌아 보니 이 산객이 애마를 주차시키고 오르기 시작한 민가와 동네가 빤히 내려다 보이고 그 뒤 저 멀리 비산비야로 이뤄진 백산면 마을이 펼쳐져 있지만 바로 앞 능선에 가려있고 미세먼지로 인해 선명하지 못해 아쉬움으로 남는다.

방금 전 이 산객이 애마를 주차시키고 올라 온 마을은 오곡리로서 오곡리는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에 있는 리이며 고부천이 마을을 따라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난산리, 새텃뜸, 오신, 원머우실 등이 있는데 난산리는 황사포란형의 명당이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고 새텃뜸은 머우실 남쪽에 새로 된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며 오신은 머우실 동쪽에 새로 된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고 원머우실은 오곡리의 원마을을 말한다.

 

조금 더 걸어 오르니 가선대부를 지낸 최공 묘지가 나타나고 그 마당을 통해 오르다 등로 우측 뒤를 보니 29번 부령로와 30번 하원로가 교차하는 백산교차로 지나 저 멀리 29번 부령로가 길게 뻗어 있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다가 온다.

그 도로 끝자락 저 멀리에는 오늘 이 산객이 두발로 걸어 넘었던 천태산과 천치로 이어지는 두승지맥 마루금이 희미하게 보이고 이제 그 산줄기와도 이별을 고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그렇게 주위 풍경과 조망을 즐기고 이름들을 불러주며 여유롭게 오르니 드디어 백산 정상의 팔각정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과 추억을 남기고 그 팔각정 옆에 박혀 있는 정읍302리는 3등 삼각점을 사진에 담아 본다.

사진을 남기고 동학정이란 현판이 걸려있는 팔각정자로 올라 잠시 주위 풍경과 조망을 즐겨 보기로 한다.

백산은 전라북도 부안군의 백산면 용계리 동진강 연안에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47미터이며 백산면에서 고도가 가장 높은 산으로 전체가 흰 바위로 되어 있어 유래한 지명이라고 한다.

산 정상에는 삼국 시대 산성으로 추정되는 백산성이 있는데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에 동학군이 첫 지휘소인 호남창의대장소를 설치하고 전열을 정비했던 곳이기도 하다.

여지도서(고부)에 백산은 군북 30리에 있다 라는 기록이 있고 조선지형도(김제)에는 백산 동쪽 동진강 하도가 뱀의 꿈틀거림처럼 직강공사 이전의 심한 곡류하천 모습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

 

동학정이라는 팔각정에서 잠시 주위 풍경들을 살펴보지만 나뭇가지에 가려 시야가 제한되고 미세먼지로 인해 제대로 된 풍경과 조망을 즐기기 어렵기에 내려 와 우측의 조형물과 벤취쉼터가 보이는 곳으로 내려가니 백산성과 동학농민운동, 부안 백산성 설명판, 백산성과 백제 부흥운동 등에 관한 설명 자료들이 보여 잠시 모두 읽어 본다.

백산성은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에 있는 산성으로 축성연대는 660663년 사이로 추정(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후 왕자 풍을 옹립하고 항전했던 주류성과 연관되는 유적으로 보기도 함)하며 1894년 동학농민혁명시 동학군의 기포지로 사용되었다.

1976 4 2일에 전라북도 기념물 제31호로 지정(지정 면적 6,203)되었고 1995년 지표조사를 실시(부안군,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하였다.

백산성지는 표고 47.4미터인 백산을 중심으로 축성된 퇴뫼식 토축성으로 외성을 포함 4단으로 이루어졌으며 토단 외곽에 목책을 둘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1성은 산 정상을 평탄하게 다듬은 산상대지로서 최대 폭 25m, 길이 80m, 둘레 181.5m이고 제2성은 제1성의 3m 아래에 테머리식으로 타원형으로 감았으며 장축 길이 120m, 최대폭 60m(너비 812m의 회랑도를 두름)이다.

3(중성)은 둘레가 506m이고 제4(외성)은 둘레 1,064m, 장축 길이 358m, 최대폭 230m로 중성의 기저부로부터 약 320m 뻗고 있으며 폭은 70m 내외이다.

개간과 분묘설치 등으로 일부 훼손된 곳도 있으나 토단(높이 34m)은 잘 남아 있고 잔존 유구와 출토 유물 등은 북문지, 남문지, 건물지, 옛우물터, 삼국시대 토기편 등이 있다.

정상부 남서측에 묘1기가 있으며 묘비에는 효자 증가선대부이조참판행통훈대부호조좌랑최공지묘라고 각자되어 있으며 묘 전면에는 혼유석 1기가, 봉분 전면 좌우에는 특이한 얼굴 모습의 문인석 각 1기씩 서 있다.

동 백산성의 동측 기슭과 서측에는 채석장 개발로 인해 일부 훼손되어 있으며 부안군에서는 북측 채석장 부지를 주차장으로 활용하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아울러 동 성지 남측에는 마을이 집중 형성되어 있으며 부안 시내 방향으로 나 있는 도로 좌측에도 일부 건물이 들어서 있고 1998 2 24일 문화재위원회 제3분과 제2차 회의 검토 결과 현지 조사를 실시한 후 재검토하기로 하였다.

1998 4 89일 관계 전문가가 현지 조사를 실시하였고 1998 4 24일 문화재위원회 제3분과 제4차 회의 검토 결과 사적(백산성)으로 지정 예고하되 성벽과 목책 및 주거지 등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시굴조사를 선행 조건으로 하였다.

1998 5 8일에 문화재(사적)로 지정 예고하였으며 1998 6 26일 문화재위원회 제3분과 제6차 회의 심의 결과 사적(백산성)으로 지정하기로 하였다.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고 정치인의 SNS에 올린 글로도 유명해진 전봉준의 죽창가도 생각나는 시간이다.

 

애마가 없었다면 백산과 백산성에서 올라 온 남서쪽 방향이 아닌 남동쪽으로 내려가 고부천 합수점까지 진행해야 하지만 애마를 회수해야 하기에 다시 올라 왔던 남서쪽 오곡리 마을 방향으로 내려가니 최공 묘지 비석 앞에 방금 전 만났던 동네 오르신이 쉬었다 오르고 마지막으로 인사 드리고 빠르게 내려가 애마를 회수한 후 백룡정미소가 있는 백산로 2차선 포장도로로 나와 그 도로를 타고 좌측으로 진행하니 백산삼거리(백산교차로) 지나 부령로를 타고 백산성지 입구 앞에 도착을 한다.

이곳으로 올랐다 내려오면 더 쉽고 빠르게 진행이 가능하지만 조금이나마 마루금에 충실하고자 반대쪽으로 올랐는데 어짜피 큰 의미는 없다.

 

그 백산성지 입구를 지나 조금 더 전진하니 도로 우측으로 백산 버스정류장이 보이고 2차선 포장도로가 갈리는데 바로 백산농협과 우체국으로 갈 수 있는 도로로서 백룡초교도 있는 곳이다.

그곳을 지나 계속 부령로 2차선 포장도로를 따르니 도로 우측으로 회포마을 표지석이 서 있고 회포마을을 찾아보니 용계리에 있는 자연마을이다.

용계리는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에 있는 리로서 고부천이 마을을 따라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나무다리, 매안, 배가뜸, 장터 등이 있는데 나무다리는 나무로 놓은 다리가 있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고 매안은 용계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백산 안쪽이 된다 하여 붙은 이름이며 배가뜸은 배씨들이 많이 산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터는 백산 장터가 열렸다 하여 붙은 이름이라는데 정작 필요한 회포마을에 대한 자료는 찾질 못해 아쉬운 시간이다.

 

 

회포마을 표지석을 지나 계속 부령로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전진하니 회포마을 버스정류장을 통과하고 도로 우측으로는 드넓은 초원지대 같은 논 경작지가 펼쳐져 있어 이국적인 풍경을 선물하고 있다.

잠시 후 도로 우측으로 금판마을 표지석이 나타나고 그곳으로 꺽어 들어가니 도로 좌측으로 금판마을이라는 커다란 안내판도 서 있다.

이곳 금판마을은 이곳 용계리 지나 금판리에 있는 자연마을인데 정작 자료에는 나타나 있지 않아 아쉬움만 남는다.

 

금판로라는 1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도로 양쪽으로 드넓은 초원같은 논 경작지를 두고 달려가니 눈 앞으로 판금마을이 펼쳐져 있고 마을 가운데로 나 있는 도로를 타고 통과하니 금리 신성 버스정류장이 있는 곳에서 좌측의 교회건물이 보이는 방향으로 90도 꺽어 진행한다.

이제 합수점까지 온전한 금판리 마을을 통과하기에 찾아보니 금판리는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에 있는 리로서 고부천이 마을을 따라 흐르며 곳곳에 공동묘지가 위치한다.

자연마을로는 거문구지, 고부뜸, 고신, 동강촌, 뒷뜸, 앞뜸등이 있는데 거문구지는 지형이 곶이로 되어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고 고부뜸은 옛날 고부군에 딸렸던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며 고신은 고부뜸 동쪽에 새로 된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동강촌은 현호 북동쪽 동진강가에 있는 마을을 말하고 뒷뜸은 현호 뒤쪽이 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앞뜸은 현호 앞쪽이 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금마을에서 좌측으로 90도 꺽어 도로를 타고 진행하니 눈 앞으로 금판교회 건물이 보이고 그 건물을 목표로 진행하니 교회건물 직전에서 도로는 우측으로 다시 90도 꺽여 진행된다.

신금마을을 우측에 두고 금판로 포장도로를 따르니 신금 버스정류장을 통과하고 신성마을 앞 신성 버스정류장이 서 있는 곳에서 좌측으로 다시 90도 꺽어 진행된다.

 

직선으로 뻗어 있는 금판로 포장도로를 따르니 중금 버스정류장 지나 중금마을 표지석이 서 있는 갈림삼거리도 지난다.

중금마을 역시 금판리의 자연마을중 한곳인데 이름이 바뀌었는지 금판리 자료에는 중금마을에 관한 자료 역시 찾을 수 없어 안타깝고 아쉬운 시간이다.

중금마을 표지석을 지나 계속 직진으로 진행하니 다시 갈림사거리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우측으로 90도 꺽어 현호마을 표지석이 서 있는 방향으로 진행을 이어간다.

 

잠시 후 만나는 갈림사거리를 넘자마자 우측으로 현호마을 이라는 표지석이 보이고 찾아 보니 이곳 현호마을 역시 금판리의 자연마을인데 자료는 보이지 않고 다른 이름의 자연마을 이름들만 보인다.

아마도 옛날 사용하던 이름과 달리 박혀 있는 표지석들은 바뀐 이름의 자연마을을 사용한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해 본다.

그 현호마을 표지석을 지나니 저 멀리 서해안고속도로를 총과할 수 있는 금판2교가 보이고 그 아래 현호길을 타고 서해안고속도로를 통과하니 현호마을이 바로 눈 앞으로 다가온다.

 

그 현호마을로 들어가기 직전 좌측으로 90도 꺽어 진행하고 다시 첫번째 만나는 갈림사거리에서 우측으로 90도 꺽어 전진하니 드디어 고부천과 동진강이 만나는 합수점 근처의 뚝방길로 올라서게 되고 그곳에서 동진강과 고부천 그리고 합수점 방향을 살펴보니 거대한 갈대숲이 조성되어 있어 흐르는 물줄기는 저 멀리 좁게 보이는 것이 전부이다. 

고부천은 전라북도의 고창군 신림면 도림리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흐르다 송룡리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바꾼 후 고창군 성내면과 흥덕면의 여러 동리를 지나 동림저수지를 만드는 하천이며 계속 북쪽으로 흘러 시의 고부면 백운리 용수 마을 앞에서 소성천을 합류한다.

이어 용흥리의 신용(용흥) 마을 앞에서 운흥천을 합한 후 북동쪽으로 약간 방향을 바꾸어 영원면 풍월리와 앵성리 및 장재리를 지나 북류하며 도의 부안군 백산면 대죽리와 평교리, 덕신리, 금판리의 평야지대를 지나 부안군 동진면 장등리 앞에서 동진강에 유입되는 하천이다.

고부라는 명칭은 삼국사기지리지에 등장하는데 눌제천(訥堤川) 또는 눌천(訥川)으로도 불렸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고부)에 눌제천은 근원이 흥덕현의 반등산에서 나와 군의 서쪽 10리에 와서 눌제천이 되고 북쪽으로 흘러 부안의 동쪽에 와서 모천과 합하여 동진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라는 기록이 있다.

눌제천은 백제 시대 제방으로 전해지는 눌제(늘제, 율못)라는 방죽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보이고 동일 문헌에 눌지(訥池)는 군의 서쪽에 있는데 지금은 없애고 논을 만들었다 라고 하였고 동국여지지(고부)에 눌제호는 군 서쪽 8리에 있는데 일명 율호(律湖)라고도 불리고 방죽 길이가 1,200보요 호 주위가 40리이다 라고 하는 관련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정읍시사(2003)에 의하면 발원지로부터 소성천과 합류하기까지의 구간은 흥덕천(興德川)으로도 불린다.

그래도 좌측에서 흘러 내려 온 고부천과 우측에서 흘러 내려 온 동진강이 만나 하나가 되어 북쪽으로 흐르다 서쪽으로 방향을 바꿔 서해의 가력도항으로 흘러가는 모습을 만나는 것으로 이틀에 걸친 두승지맥 산행도 무탈하게 마무리를 하고 배낭 정리해 귀가길에 오른다.

 

동진강은 전라북도의 정읍시에서 서북쪽으로 흘러 새만금 사업지구로 유입하는 하천이며 유로는 정읍시 상두산 남쪽 묵방산 북쪽 시의 산외면 상두리와 화죽리에서 발원한 여러 물들이 정량리에서 합류하여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칠보면의 시산리 인근에서 북서쪽으로 방향을 바꾸며 칠보천을 합하고 옹동면 매정리의 매정교 아래에서 축현천을 합류한다.

태인면을 지나 호남선의 동진강 철교 바로 위에서 용호천을 합류하고 이평면 하송리의 만석동 앞에서 정읍천, 두전리의 둑전 마을 아래에서 덕천천을 합한 후 부안군 백산면을 경계지으며 흐르다가 부안군 동진면 장등리 앞에서 고부천을 합류하고 이어 김제시 죽산면 서포리의 불당 마을 앞에서 원평천을 합류한 후 황해로 들어가는 국가 하천이다.

동진 지명은 동진나루와 관련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부안)에 동진은 통진(通津)이라고도 하고 벽골제와 눌제의 물이 합해져 북쪽으로 흘러 이 나루가 되며 현의 동쪽 16리에 있다 라고 하는 관련 기록이 확인된다.

현재의 동진강은 구간별로 다른 이름으로 불렀는데 우선 동진강 상류에 해당하는 상두산과 묵방산 자락에서 나온 물이 칠보천과 축현천을 합해 용호천을 만나기까지의 구간은 도원천(桃源川), 평사천(平沙川) 또는 남천(南川)이라 하였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태인)에 남천은 현의 남쪽 5리에 있는데 상두산 남쪽에서 나와 이평에 이르러 정읍의 물과 합쳐서 서쪽으로 흘러 김제군 동진으로 들어간다 라고 하는 기록이 있다.

정읍시사에 의하면 도원천이 상두산 북쪽에서 발원한 용호천(견천)과 합류하여 정읍천을 만나기까지의 구간은 대각천(大角川) 또는 태인천(泰仁川)이라고 하였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고부)에 태인수(泰仁水), 대동지지(태인)에 대각천이라는 명칭이 확인된다.

현재 태인면 거산리의 거산교 바로 아래에 있는 대각교는 해동지도(태인)에도 표시되어 있고 또 신증동국여지승람(고부)에 모천(茅川, 현 정읍천)은 근원이 정읍현의 내장산에서 나오고 북쪽으로 흘러 군의 동쪽 15리에 와서 서쪽으로 꺾여 태인수(泰仁水, 현 동진강 중상류)와 합하여 부안현의 동진으로 들어간다 라고 하여 결국 정읍천과 태인의 태인천 또는 남천이 합쳐진 이후의 구간을 동진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만경강은 자주 들어 봤지만 동진강은 친숙하지 않은 이름으로서 이번에 두승지맥 산행을 하면서 제대로 알게 된 강이 되었다.

이렇게 그리웠던 변산지맥과 두승지맥도 무탈하게 마무리하고 다음주부터는 조금 더 남쪽 지방에 위치한 가시잡목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철성지맥과 태청지맥을 진행하려고 준비중인데 태청지맥은 두구간으로 나눠 완주가 가능하려면 첫 구간 태청산을 먼저 짧게 다녀 와야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난제를 남겨 놓게 되었다.

 

생각보다 막히지 않는 고속도로를 타고 이른 시간에 귀가해 식구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서 소맥 한잔으로 자축하고 산행 사진 정리하며 뜻깊은 휴 일 저녁을 보낸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20200202 두승지맥제2구간 덧고개-고부천 합수점.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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