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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맥산행(완료)/봉수지맥(금북·완)

봉수지맥 제2구간 숫고개에서 비티고개까지 산행후기

by 칠갑산 사랑 2017.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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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충청남도 홍성군과 예산군의 봉수지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2017년 04월 29일 (토요일 당일 산행)

산행날씨 : 새벽에 짙은 안개 후 오전부터 맑고 화창하였지만 약간의 박무와 함께 무척 무더웠던 산행날씨

산행온도 영상 07도에서 영상 23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숫고개(96번 2차선 포장도로)-대골고개 안부-190봉-벌목지대-비포장 임도-시멘트 포장도로-신평이씨 묘지들-241봉-

                 250 바위봉-29번 송전탑-276.9봉-암자와 사거리안부-이동통신탑-비포장임도-검은들 안부-밭 경작지-비포장임도-

                 벌목지와 식재지-은사시나무 군락지-서낭당재(1차선 시멘트 포장도로)-밭과 이동통신탑-대구서공묘지들-오봉이마루

                 안내판-194.5 바위봉-밭 경작지-200 삼각점봉-벌목지대-85번 송전탑-대영고개(29번 4차선 포장도로) 동물이동통로-

                 밭과 무명묘지2기-묘지들-밭 경작지-비포장 임도-185봉 갈림삼거리-경주김씨 묘지들-비포장임도-200봉(88번 송전탑)-

                 벌목지대-236봉(홍성둘레길 237봉) 전망대-236봉(묘지와 소나무)-안부-벌목지대-느티나무 식재지-초롱산(339봉,

                 정상석과 삼각점)-공터-음미고개(1차선 시멘트 포장도로)-비포장임도-납골묘와 담양전공 묘지-260봉(홍성둘레길 226봉

                 안내판)-226.5봉-270봉 산신제단-벌목지대-비포장임도 안부-온양정공 묘지들-240 무명봉-개간 절개지-구름고개(1차선

                 포장도로, 광시면 마사리 버스정류소와 홍성군 금마면 도로표지판)-밭 경작지-대나무군락지-밭 경작지-월암리 홍주마

                 새마을 도로-해주오공 묘지들-시멘트 포장도로-바위너덜 등로-대슬랩 우회등로-전망바위-임존성-헬기장-467봉(극동점,

                 홍성둘레길 477봉 안내판)-이정표(봉수산 정상 0.3 Km, 휴양림관리소 1.2 Km, 마사리대련사 1.6 Km)와 내포문화숲길-

                 안전철봉과 로프-이정표(봉수산정상 0.16 Km, 임존성 0.29 Km, 임도 0.92 Km)-봉수산(483.9봉, 정상석과 삼각점, 밴취

                 쉼터와 이정표)-이정표(약수터 기도원 1.1 Km, 봉수산정상 0.4 Km, 봉수산자연 휴양림)와 봉수산등산로안내판, 벤취

                 쉼터2개-소나무 등로-410 벤취 쉼터봉(홍성둘레길 416봉 안내판)-조망처-벤취 쉼터 1-계단과 안전로프-큰비티고개(벤취

                 쉼터2와 갈림삼거리 시멘트 포장도로, 이정표)-비포장임도-240봉-비포장임도-편백나무 군락지-녹슨 철조망-

                 비티고개(616번 2차선 포장도로)-산행종료

산행거리 : 약 19.94 Km (스마트 폰의 GPX 기준)

산행트랙 :

20170429 봉수지맥2 숫고개-비티고개.gpx
0.11MB

산행시간 :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고사리를 뜯으며 여유롭게 진행하여 08간 50분 (06시 11부터 15시 02분까)

교통편 : 옆지기의 도움으로 애마를 이용해 편안하게 진행하였음

봉수지맥이란 ???

안성 칠장산(492.4봉) 남쪽 300미터지점에서 분기한 금북정맥이 남서진하며 서운산(547봉), 성거산(579봉), 봉수산(525봉)등을 일구며 150여 Km를 달려와 백월산(560봉)에서 한줄기는 남진하며 성태산(624봉), 월명산(544봉), 오석산(127봉)등을 일구며 70 Km를 달려가 용당정에 이르며 신산경표의 호서정맥을 만들고 또 한줄기는 북서진하여 다시 130 Km를 가면서 오서산(791봉), 가야산(678봉), 지령산(220봉)등을 일구고 안흥해안에 몸을 담그는 금북정맥을 낳는다.

 

봉수지맥은 이 분기점인 백월산(560봉)에서 북쪽으로 10.9 Km 떨어진 오서산(791봉)에서 동북으로 약 3.2 Km 떨어진 공덕고개 남쪽의 370미터봉에서 금북정맥은 서북으로 가고 봉수지맥은 동북으로 갈라진다.동북으로 올라가며 초롱산(339봉), 봉수산(483봉), 팔봉산(207.4봉)등을 지나서 예산군 신암면 하평리에서 삽교천에 몸을 담그며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로 약 47.5 Km되고 지맥 서쪽으로 떨어진물은 삽교천 본류에 동쪽으로 떨어진 물은 무한천에 몸을 담갔다가 삽교천에 합류하여 아산만으로 들어간다.지나는 산들중 제일 높은산인 봉수산(483봉)의 이름을 따서 봉수지맥이라 부르며 무한천의 오른쪽 물막이가 된다.지맥 서쪽의 삽교천은 길이63.9 Km에 유역면적 1649.87 Km2에 아산시 인주면이 종점이고 지맥 우측의 무한천은 길이 53.9 Km에 유역면적 467.54 Km2에 예산군 신암면이 종점이다.
발원지의 길이로 치자면 무한천이 더 긴데 유역면적이 삽교천이 더 커서 무한천이 삽교천의 지류가 되는 모양이다.
오서산은 까마귀와 까치가 많아서 오서산이라 부르며 까마귀 오자에 살서자를 쓰는데 일부지도는 오루산(다락루산) 혹은 조루산, 조서산으로 표기한것도 있는데 이는 까마귀오자를 새조자로 살서자를 다락루자로 잘못 표기한 것이다.

 

 

 

 

고향에서의 가족모임과 죽마고우들과의 모임을 핑계로 진행하다 중단했던 봉수지맥 제2구간을 편안하고 즐겁게 올랐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이번주에는 시골에서 두 건의 모임이 중복되어 참으로 난감한 상황인데 모두 토요일 저녁에 예정된 모임들이다.

모임에만 참석하려니 토요일 하루가 아까워 주위 지맥을 살피다 작년에 잠시 짧게 한구간만 진행하고 중단했던 봉수지맥을 생각하곤 토요일 새벽 일찍 옆지기와 함께 출발해 이 산객은 산행을 하고 옆지기는 비어 있는 시골집으로 내려 가 집 정리 후 옻순과 쑥 그리고 모시를 뜯는 것으로 하고 출발하는 시간이 새벽 3시이다.

여유있게 내려가니 당진영덕고속도로부터 짙은 안개가 드리워져 있어 속도를 줄이며 조심하여 어렵게 홍성역 앞에 도착을 해 콩나무국밥으로 허기를 채운 후 산행 들머리인 대현리 숫고개에 도착을 하니 이곳도 역시 짙은 안개로 인해 주위 사물 파악이 불가능할 정도로 시야가 좁아져 있다.

산행 준비 후 잠시 더 기다렸다 새벽 6시를 넘겨 여명이 밝아오며 주위가 분별되는 시간에 걱정되는 마음으로 옆지기를 보내고 들머리로 오르니 풀섶에 내려 앉은 이슬이 산객의 접근에 비산하며 금새 등산화와 바지를 적시고 있다.

 

그래도 능선으로 오르니 금새 안개가 사라지고 한여름 같은 무더위에 고생은 하였지만 무탈하게 비티고개에 도착을 해 마중 나온 옆지기와 잠시 옻순을 채취하고 시골집으로 돌아 가 부모님 산소를 다녀 와 비어있던 시골집 주위에 자라고 있는 엄나무와 옻순을 채취하고 쑥과 모시대를 뜯은 후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참석에 옻닭과 이슬이 몇잔으로 추억을 이야기하며 새로운 집행부도 구성을 한다.

그렇게 저녁 시간을 보낸 후 죽마고우들의 눈을 피해 운곡면의 송조농원에서 열리고 있는 또 다른 가족 모임에 참석을 해 늦은 밤까이 이슬이를 안주 삼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잠자리에 드니 오늘 하루가 참으로 길고도 보람있는 하루로 남겨진다.

이제 남아 있는 봉수지맥 마지막 구간은 언제 다시 오를지 기약이 없지만 아마도 한여름 무더위를 피해 진행되지 않을까 예상을 해 본다.

 

 오늘 산행 준 가장 힘들고 고통스런 봉수산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생각지도 못한 바위 너덜 등로를 지나 거대한 대슬랩을 우회하며 오르는 시간은 마치 한여름 무더위속 산행을 연상시키는 산행으로 온 몸에 남아 있는 한방울의 진국까지 완전히 등로에 뿌리는 시간이었다.

그래도 그 힘든 오르막 된비알을 오르니 등로 우측 대슬랩 위에 흩어져 있는 바위들이 보이고 그 위에 올라 지나온 마루금 방향을 살펴보니 그곳에 환상의 풍경이 한폭의 풍경화를 그리며 지난 시간의 추억을 들려주고 있다.

저 멀리 오서산이 가을 억새의 울음소리를 들려주며 또 다른 만남을 이야기하고 오늘 지나온 초롱산을 중심으로 앞뒤로 이어지는 봉수지맥 마루금이 또한 초록의 바다교향곡을 연상시키듯 봄 빛으로 물들며 오늘도 수고했노라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고 있다.

지나 온 어려웠던 시간이 봄 눈 녹듯 사라지고 이마에 흐르는 굵은 땀방울을 닦으며 환희에 들떠 어린아이처럼 자연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되었다.

 

지맥 산행을 하다보면 늘 고민거리가 어떻게 산행 들머리와 날머리를 들고 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지만 오늘처럼 옆지기를 대동하고 가는 날은 이런 걱정이 필요없는 말그대로 대박인 날이기에 이 산객은 즐거운 마음으로 내려가지만 옆지기에게는 마른날에 날벼락 같은 날이 될지도 모르겟다는 생각이다.

그래도 큰 불평불만 없이 이 산객의 산행을 도와주는 옆지기에게 미안함에 새벽 콩나무국밥 한그릇을 사 주지만 산행 들머리에서 산행 준비 후 비어있는 시골집으로 홀로 보내는 시간은 괜시리 마음이 찡한 시간이 되어 버렸다.

일찍 도착을 하였지만 짙은 안개로 인해 잠시 더 애마에서 기다렸다 새벽 6시를 넘겨 주위 사물이 분별되는 시간에 옆지기를 보내고 다시 숫고개 주위를 돌아다니며 몇 장의 사진을 더 남겨 본다.

숫고개(숯고개)는 홍성군 장곡면 상송리와 대현리를 이어주는 96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고개로서 숯고개는 과거에 고개 양쪽으로 참나무가 많아 그 참나무로 숯을 구워 팔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숯고개 또는 탄현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홍성군 장곡면에서 청양군 화성면으로 이어지는 96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지도상 숫고개는 숯고개의 오기로 보인다.

 

작년 이곳 숫고개로 내려올 땐 도로 건너편에 민가 한채가 있었다고 생각되었는데 오늘 이곳에 다시 와 찾아 보니 그 기억속에 남아 있던 민가는 보이지 않는다.

상송리에서 대현리 방향으로 걸어 내려가다 콘크리트 옹벽이 사라지는 지점에서 짧은 절개지 능선으로 오르니 풀섶에 내려 앉아 있던 이슬들이 이 산객의 접근에 놀라 비산하며 금새 등산화와 등산ㅁ바지를 흥건히 적시고 있다.

잠시 비포장 임도같은 넓은 등로를 따라 오르다 능선 중앙에서 우측 잡목 사이로 들어가니 안개가 조금씩 사라지고 생각보다 산행하기 좋은 시간이다.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키 작은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190봉에 오르니 등로 좌측 뒤 저 멀리 봉수지맥을 분기하고 가을 억새로 유명한 오서산이 우뚝 솟아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오서산 우측으로 이어지는 금북정맥을 살펴보고 잠시 더 걸어 진행을 하니 짧은 벌목지대를 지나 완만하게 진행되는 내리막 등로로 이어진다.

그렇게 잠시 더 조심하며 걸어 내려가니 넓은 비포장 임도에 도착을 하는데 지정리 임도처럼 보이는 곳이다.

지정리 임도는 지정리에 있는 임도로서 지정리는 충청남도 홍성군 장곡면에 있는 리로서 본면의 북부에 위치하며 보금산 자락에 자리한 농촌마을인데 자연마을로는 계산리, 동살미, 검은들, 마정, 지명 등이 있다.

계산리는 지정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계수나무가 많아 붙은 이름이고 검은들은 뒷산에 검은 바위가 많다 하여 붙은 이름이며 마정은 큰 우물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지명은 지명동 또는 김녕동이라고도 부르며 김씨들이 마을을 이뤘다 하여 붙은 이름이 고 지명과 마정의 이름을 따서 지정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이제 그 지정리 임도를 가로질러 건너편 능선으로 오르며 빠르게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능선으로 오르니 신평이공 묘지들이 나타나고 그 끝자락으로 올라 능선으로 들어가니 큰 어려움 없이 잠시 후 241봉에 도착을 하는데 특별한 곳은 아니다.

소나무와 잡목이 어우러진 평이한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250봉이라 생각되는 봉우리에 도착을 하지만 이곳 역시 지도에 나와 있는 높이로만 확인이 가ㅣ능할 정도로 특이한 사항은 없어 보인다.

 

다시 평이하게 이어지는 마루금을 타고 완만하게 오르니 바위가 있는 260봉에 도착을 하고 사진 한장 남기고 출발하여 29번 송전탑을 지난다.

그곳 29번 송전탑을 지나 벌목지쪽을 살펴보니 저 멀리 평화로운 마을이 보이고 좁지만 민초들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들판도 보이고 그 끝자락에 희미안 안개인지 이슬 속에 솟아 있는 봉우리들도 보인다.
잘 살펴보니 지정리 마을 지나 나즈막한 금북정맥 마루금이 지나고 그 뒤로 솟아 있는 봉우리들은 아마도 지기산과 보개산이 아닐까 생각되는 봉우리들이다.

 

그곳 송전탑에서 잠시 더 조망을 즐긴 후 걸어가니 벌목지대에 새로운 나무들을 식재한 식재지를 지나 우측의 벌목된 나뭇가지들이 산행을 방해하는 방향으로 어렵게 들어 다시 능선으로 이어간다.

잠시 후 나무 뿌리가 드러나 있는 275봉을 지나 소나무와 박달나무가 정상을 지키고 있는 276.9봉도 지나는데 특별한 장소는 아니다.

낙엽송 지대를 지나 나즈막한 안부를 통과하고 완만하게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갑자기 등로 좌측으로 짧은 벌목지대가 나타나는데 바로 발 아래에는 최근에 생긴 듯한 묘지 3기가 보이고 그 옆으로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은 암자 건물도 눈에 들어 온다.

그 아래 저 멀리에는 여전히 지정리의 마을이 아름답고 그 뒤로 흐르는 금북정맥 마루금 역시 지난날의 추억을 이야기 하며 당당하게 서 있다.

그 절개지 아래로 내려가 걸어가니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며 사거리 지난 저 멀리에 이동통신안테나도 보이기 시작한다.

 

비포장 임도를 따라 내려가니 트럭 한대가 주차되어 있고 그 옆으로 시멘트 포장도로가 지나는 사거리 갈림길이 보이는데 그곳에서는 직진의 이동통신탑 쪽으로 진행을 해 안내판을 읽어 본 후 그 아래로 나 있는 비포장 임도를 타고 계속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넓은 임도를 따라 걸어가니 이곳은 이제 완전한 초록의 세상이 펼쳐지며 성하의 계절로 달려가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가니 임도 옆으로 주인장이 약초재배중이니 절대 출입금지라는 경고판을 세워뒀다.

그래도 가야하니 약초에는 무관심하게 걸어가 나즈막한 둔덕을 넘어 내려가니 잘 관리되는 부안임공 묘지 2기 옆에는 빨간 연산홍이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곧이어 오래전 식재된 듯한 느티나무 그늘 아래를 산책하듯 여유있게 걸어보는 시간이다.

 

그 느티나무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지나니 무명봉이 나타나는데 등로 옆으로는 커다란 노란 물통이 버려져 있다.

그곳 무명 봉우리를 넘어 다시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저 아래 깊은 안부가 나타나는데 혹시나 하고 지도를 살펴보지만 이름없는 안부였다.

등로 좌측으로는 검은들이란 마을이 있는데 홍성군 장곡면 지정리에 있는 마을로서 뒷산에 검은 바위가 많다고 하여 붙은 마을 이름이다.

안부에 도착해 좌우를 살펴보니 예전에는 제법 사람들의 왕래가 있었을 듯 싶은 안부이지만 지금은 잡풀과 잡목이 자라면서 민초들의 왕래도 끊긴 듯 보였다.

 

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지나니 등로 우측으로 밭 경작지가 나타나는데 얼마전 농부가 밭을 갈았는지 붉은 황톳빛 흙이 잘 정돈되어 있다.

그 밭 아래로는 작지만 아담한 농촌마을이 자리잡고 그 뒤로는 병풍처럼 나즈막한 산줄기가 마을을 감싸고 있다.

그 밭 좌측 가장자리를 타고 밭을 반바퀴 돌듯 진행하니 밭 한가운데에 사용하던 농기구 한대가 널부러져 있고 곧이어 밤나무가 식재된 곳을 지나 비포장 임도를 따른다.

잠시 뒤 임도 좌측으로 잘 가꿔진 듯한 소나무 군락지를 만나는데 너무나 아름답고 멋진 풍경에 발걸음이 저절로 느려지며 자연을 만끽해 보는 시간이다.

 

등로 우측으로는 소나무만 남기고 벌목된 것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걸어가니 잠시 뒤 그 벌목된 장소에는 키 작은 소나무들이 식재되어 있다.

잠시 후 잡목을 지나 은사시나무 군락지를 통과하여 내려가니 곧바로 1차선 시멘트 포장도로가 지나는 서낭당재에 도착을 한다.

도로 양쪽으로 높은 바위벽이 쌓여져 있어 고개 우측으로 돌아 내려가 서낭당재 주위 사진을 몇장 남겨 본다.

 

맥 잇기 산행을 하면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 맨발님의 산패를 다시 이곳에서 만나 고개를 숙여 본다.

이곳 서낭당재는 홍성군 장곡면 월계리와 홍동면 문당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자료를 찾아 보지만 이곳 서낭당재에 관한 자료는 찾지 못하였지만 다른 지명의 서낭당재를 찾아보면 예전에 서낭당이 있어 불려진 이름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곳 홍성은 또한 역사적으로 주류성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주류성은 일명 두율성 또는 주모성 이라고도 하며 백제부흥운동의 근거지였는데 백제부흥군이 이곳에서 신라와 당나라의 2차연합군을 맞아 최후 결전을 전개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당서에는 주류성으로 되어 있으나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두량이로 그리고일본서기에는 쓰누로 되어 있다.

660년에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백제의 수도 사비성(지금의 부여)이 함락됨으로써 백제는 멸망하였으며 백제의 저항운동은 그 초기에는 임존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복신과 승려 도침 등은 주류성을 근거지로 삼고 백제부흥운동을 펼쳐 나갔다.

661년에 복신과 도침 등이 사비성을 공격하자 백제부흥군의 본군도 주류성으로 옮겨와 사비성의 당군을 계속 압박하였고 이 때 신라군이 구원 차 왔으나 부흥군의 반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같은 해 6월신라의 문무왕이 즉위했을 때는 나당연합군이 고구려 공격에 전념하게 됨에 따라 백제부흥군은 세력을 확대와 정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에 지금의 대전과 금산 방면을 수복하고 그 여세를 몰아 662 5월에는 일본에 머무르고 있던 왕자 풍을 데려와 백제 왕위를 회복하여 더욱 기세가 높아졌다.

그러나 지휘자 사이의 불화로 말미암아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여 부흥군은 내부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이때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여러 성들을 빼앗기고 사비성의 포위도 깨어지고 말았다.

나당연합군의 계속된 공격으로 수세에 몰린 백제부흥군은 662 12월에 왕성을 주류성에서 피성으로 일시 옮겼으나 주변의 성들이 함락되자 같은 달에 다시 주류성으로 본진을 옮겼다.

잇따른 패전 속에서 다시 663 6월에 풍왕이 복신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부흥군은 더욱 세력을 잃고 말았으나 이와는 달리 당군은 응원군인 손인사의 군사 7,000명이 증원되었다.

나당연합군은 수륙 양면으로 나뉘어 웅진을 출발하여 백강에서 만나 수륙군이 함께 주류성으로 진격하여 663 8 13일에 주류성에 도달하여 8 17일에 주류성을 에워싸게 되었다.

나당연합군이 주류성을 본격적으로 공격하여 8 28일에는 백강구전투가 치뤄졌고 이 전투에서 일본의 수군 2만이 패배하고 풍왕은 고구려로 망명하였으며 급기야 9 7일에는 주류성이 함락되었다.

주류성이 포위되어 공격을 당하자 풍왕의 숙부인 왕자 충승과 충지 등이 사녀 및 왜의 무리를 거느리고 탐라국의 사자와 함께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고 그 뒤 주류성에서 일부 백제부흥군이 저항하였으나 곧 평정되어 4년간에 걸친 백제의 부흥운동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러한 역사를 지닌 주류성의 위치가 어디인가는 아직도 정설이 없지만 신라군과 당군이 논공행상을 했던 설리정을 주류성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그 설리정은 현재의 서천군이다.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 6에서 신라군은 임존성을 2주일 동안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설리정으로 군사를 돌이켰으며 이때 신라군이 군사를 돌이킨 이유는 설리정에서 논공행상을 하면서 신라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함으로 설리정 진영에 머물러 있었던 당군에게도 의복을 지어 나누어 주었다.

임존성과 가까운 웅진부성으로 가지 않고 사기를 진작시키러 멀리 떨어진 설리정으로 간 것은 이곳이 백제부흥군의 왕성인 주류성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신라는 주류성을 함락시킨 뒤 설리정을 설치하여 당군을 머물게 했고 백제부흥군의 왕성에서 논공행상을 하며 저하된 사기를 진작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주류성이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이라는 주장이 현재 통설로 인정되고 있다.

이러한 통설 이외에도 주류성이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이라는 주장과,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의 위금산성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또한 잠시 후 올라야 할 봉수산 가는 길에 만나는 임존성도 바로 이곳 홍성의 성이니 이곳 홍성은 옛부터 지켜야 할 중요한 마을 중 한곳이 아니였을까 생각해 보는 마을이기도 하다.

 

그렇게 서낭당재에서 잠시의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우측 짧은 절개지를 타고 오르니 잘 정리된 밭경작지와 그 끝자락에 이동통신탑이 보인다.

그 통신탑 쪽으로 걸어가니 좌측 밭 경작지 아래로는 잘 가꿔지고 있는 묘지가 나타나고 그넘어 저 멀리 오늘 산행 중 늘 이정표가 되어 주는 오서산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아직도 그곳에 있느냐며 물어 보는듯 다가온다.

다시 짧은 비포장 임도를 지나 나즈막한 둔덕을 오르니 다시 잘 가꿔진 묘지들과 그 주위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연산홍이 이 산객을 맞이해 준다.

 

묘지를 둘러보니 대구서공 묘지들로서 후손들이 아주 잘 관리하고 있는 듯 보인다.

다시 이어지는 멋진 소나무 지대를 지나 평이한 등로로 이어지고 무명 안부를 통과하니 금새 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옥녀꽃대를 만나 사진에 담아 보는데 옥녀꽃대는 일명 조선꽃대 또는 과부꽃대로 불려지는 식물로서 꽃보다 꽃대로 더 유명한 봄 야생화 중 하나이다.

옥녀꽃대라는 이름은 이 야생화가 처음 발견된 장소가 거제도 옥녀봉이라서 붙여진 것으로 얼마 전까지 남부 지방에서는 홀아비꽃대라고도 하고 꽃이 작고 잎이 크다고 해서 과부꽃대라고도 했다.

하지만 홀아비꽃대는 별도로 구분이 되므로 현재는 옥녀꽃대라고만 하는데 종자가 익는 시기가 6월경으로 종자가 결실되면 홀아비꽃대는 위로 솟구치지만 옥녀꽃대는 약 50도 정도 비스듬히 누워 있어 구분이 되고 또 홀아비꽃대는 잎 끝에 자줏빛이 있지만 옥녀꽃대는 전부 녹색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꽃대라는 이름으로 꽃이 아니라 꽃대라고 부르는 것은 꽃이 보잘 것 없어서 그렇게 부른다.

오죽하면 꽃대라고 했을까 할 정도인데 실제로 꽃을 보면 아주 작은 털 같은 것들이 달려 있을 뿐 꽃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하다.

옥녀꽃대는 제주도와 남부 지방 숲에 사는 여러해살이풀로 우리나라 특산종으로 반그늘이나 양지에서 자라며 토양 비옥도가 좋은 곳에서 잘 자라고 키는 약 35 Cm 전후이다.

잎은 줄기 끝에 타원형으로 4장이 뭉쳐나고 잎의 색은 녹색이며 끝이 날카롭지 않으며 꽃은 4~5월에 흰색으로 핀다.

4장의 잎 사이에서 꽃대가 올라오는데 꽃대의 길이는 20 Cm 전후이며 전체에 털이 없고 가지는 갈라지지 않고 열매는 6~7월경에 노란색이 도는 녹색으로 둥글게 달린다.

홀아비꽃대과에 속하며 과부꽃대라고도 부르고 우리나라와 일본 그리고 중국에 분포한다.

요즈음 산행을 하면서 가장 관심이 있는 부분이 야생화 이름과 식물 이름 그리고 약초에 관한 것들이다 보니 이렇게 오늘도 옥녀꽃대 하나를 덤으로 얻어가는 시간이다.

 

이름이 범상치 않은 옥녀꽃대를 사진에 담고 다시 출발하니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그 앞에는 좌측으로 평화의길 오봉이마루라는 이정판이 서 있는데 이 산객은 우측 등로를 타고 걸어가야 한다.

오봉이마을은 충청남도 홍성군 홍동면에 있는 문당리의 마을로서 본면의 중심에 위치한 농촌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갓굴, 광지울, 문산, 원당 등이 있는데 갓굴은 원당 동쪽 가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문산은 원당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전에 정자가 있었다 하여 문산정이라고도 부른다. 원당은 문당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이문산과 원당의 이름을 따서 문당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생각보다 뚜렷한 등로를 타고 잡목이 자라는 지대를 지나니 금새 무명봉에 도착을 해 물 한모금 마셔 본다.

초록이 물결치는 마루금을 따라 마음도 정화시키는 시간으로 금새 바위가 정상을 지키는 무명봉에 다시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긴다.

지도를 살펴보니 이곳이 194.5봉으로 봉우리인지도 모를 정도로 평퍼짐한 능선처럼 보이기도 하다.

다시 잡목이 자라는 불편한 등로를 지나 묘지와 쓰러진 고목지대 그리고 밭 경작지를 차례로 통과하니 작은 그물망이 눈에 보인다.

잠시 후 등로 좌측으로 잡목이 사라지먀 시야가 트이는데 살펴보니

대영리마을이다.

대영리는 충청남도 홍성군 홍동면에 있는 리로서 본면의 동부에 위치한 농촌마을인데 자연마을로는 대조, 영촌, 수골 등이 있다.

대조는 황새울, 한새울 또는 한사라고도 부르며 전에 황새가 많이 살았다 하여 붙은 이름이고 영촌은 대영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천호 가까이 사는 마을이었으며 안씨라는 장자가 천석을 했다고 하여 천봉터 또는 천분터라고 부르며 수골은 물이 많이 나는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인데 대조와 영촌의 이름을 따서 대영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약간의 박무가 있는지 마을 뒷쪽 저 멀리로는 뿌옇게 보여 아쉬움이 남는다.

다시 평이한 무명봉을 넘어 진행을 하니 소나무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이정표가 붙어 있는데 우측으로는 명동정상로란 글씨가 보인다.

지도를 보니 명동은 월계리의 마을인데 월계리는 충청남도 홍성군 장곡면에 있는 리로서 본면의 북부에 위치하며 광천읍 가정리로 가는 고개가 있는 농촌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월촌, 명천, 화양 등이 있으며 월촌은 지형이 달처럼 생겼다 하여 붙은 이름이 명천은 냇물이 급하여 소리를 내면서 흐른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화양은 행섭이라고도 부르며 월계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화양나무가 많았다 하여 붙은 이름이월촌과 명천의 뜻을 따서 월계라는 명칭이 생겼다.약간의 밤나무 지대를 지나 푹신한 낙엽등로를 타고 룰루랄라 콧노래를 불러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다시 이어지는 밤나무 단지를 타고 여유있게 걸어가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발 밑을 살펴보지만 이곳은 고사리가 보이지 않는다.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다시 이어지는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타니 안부를 지나 금새 홍성 473이란 글자가 선명한 삼각점이 박혀있는 200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오늘 산행 중 처음으로 만나는 삼각점이기에 셀카 놀이를 하면서 추억도 한장 남겨 보는 시간이다.

 

사진 한장 남기고 출발하려는데 등로 우측 뒤 저 멀리 오늘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이 펼쳐져 잠시 풍경 구경을 하고 출발한다.

방금 전 지나온 초록의 마루금 뒤 저 멀리 여전히 오서산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데 이제는 제법 멀어져 있는지 그 얼굴 모습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 오는 시간이다.

그래도 이정표 역활을 하면서 지쳐가는 산객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오서산이기에 앞으로도 한동안 저 오서산이 봉서지맥을 걷고 있을 산객들의 등불이 되어 줄 것이다.

 

다시 멋진 소나무 등로를 타고 200봉을 빠르게 내려가니 갑자기 벌목지대가 펼쳐지고 살펴보니 벌목 후 새로운 수종을 식재한 장소이다.

그 벌목지대를 따라 조금 더 걸어가니 등로 옆에 85번 송전탑이 서 있고 등로 아래로는 박무로 인해 선명하지 못한 농촌마을이 고요히 앉아 있는 모습이 강렬한 아침 햇살 아래 실루엣으로 다가온다.

지나 온 송전탑을 바라보며 잠시 짧은 상념에 잠겨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다시 능선으로 들어 빠르게 걸어 진행을 하니 갈림 삼거리 임도가 나타나는데 넓은 좌측으로 흐르는 임도를 버리고 우측 잡목 사이로 들어가니 예쁜 각시붓꽃이 반겨 준다.

다시 가시덤불이 등로를 가로막는 장소에 도착을 해 어디로 가야할지 잠시 고민하다 그 잡목을 우회해 통과하니 콘크리트 수로가 보이고 그 수로를 타고 내려가려는데 눈 아래로 낭떨어지 같은 절벽 아래 넓은 4차선 포장도로가 보이고 그 좌측 앞으로 에코 브리지인 동물이동통로가 보여 긴 한숨을 내쉬며 그 에코 브리지를 통해 대영고개를 건너 본다.

대영고개는 홍성군 홍등면 대영리와 장곡면 월계리 그리고 예산군 광시면 노전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서 294차선 포장도로가 지나고 도로 위에는 최근에 설치된 듯한 동물이동 통로가 보이는 곳이다.

이곳 대영고개 우측에 있는 월계리는 또한 최치원 선생과 인연이 있는 마을로 유명한데 그 자료를 찾아 보니

마을 가운데로는 동쪽과 서쪽의 두 물줄기가 한쌍으로 흘러내리다가 합쳐지며 큰못을 이루고 있는데 이 계곡을 최치원 선생이 쌍계라고 이름 지었다 한다.

최치원 선생은 이 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찬양하기 위해 쌍계의 서쪽 암벽에 13개의 마애 금석문을 남겨놓았는데 그 중에 쌍계와 최고운서라고 새겨진 글은 이곳의 유래와 함께 마애금석문의 주인공이 최치원 선생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 마애금석문은 천년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쌍계의 아름다웠던 옛모습을 말없이 전해주고 있다.

신라 최고의 문장가요 동방십팔현의 한 분이신 최치원 선생은 12세에 당나라에 건너가 빈공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고 그 후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토황소격문을 지었는데 황소가 이 글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침상에서 내려앉았다는 일화가 전할 만큼 명문이었다고 한다.

그 후로도 저 유명한 계원필경 20권을 지어 문명을 중원에 떨쳤던 그가 조국 신라로 돌아온 것은 신라 헌강왕10(884) 그의 나이 28세 되던 해 10월이었다.

당시 신라는 말기증상을 보이면서 국정이 극도로 문란하던 시기여서 인재를 알아보지 못했고 지방의 태수자리로 전전하던 선생은 40대 중반에 돌연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를 두고 후세에서는 말이 많았는데 기울어지는 조국과 운명을 같이하지 않았다는 비판의 소리도 있었고 숨어서 고려의 건국을 도왔다는 소위 밀찬조국설도 있었지만 44세를 일기로 경상도 가야산에서 신선이 되었다는 우화등선설이 퍼지면서 선생의 생애 후반은 미스터리에 빠지고 말았었다.

그런데 이곳 홍성이 선생이 말년을 보내다가 95세로 천수를 다하고 뼈를 묻은 곳이라는 것이다.

묘역까지는 아직 공인이 안 되었지만 계곡에 흩어져 있는 선생의 석각필적들은 감정을 거쳐 공인된 유적이라고 했다.

월계리 장방형의 큰 자연석이 놓여 있는데 전면에는 용은별서라는 네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고, 옆에는 작은 글씨로 사행시가 새겨져 있다.

사행시의 내용은 이 곳이 선생의 별서(별장)가 있던 곳이고 글씨는 선생의 친필각자인데 좋은 경치에 술이나 즐기며 머물겠다 라고 읊은 시의 내용으로 보아 이 곳에서 생을 마치신 것이 틀림 없다고 했다.

 

시멘트 관리 도로와 에코 브리지를 통해 넓게 새로 단장한 29번 4차선 포장도로를 안전하게 통과하니 도로 우측으로 이 산객의 고향인 청양으로 갈 수 있는 도로표지판이 내려다 보이는데 오늘 산행 후 들려야 할 곳이지만 괜시리 벌써 마음은 그곳 고향으로 향하고 있다.

다시 나타나는 시멘트 관리도로를 건너 오르니 넓은 밭 경작지와 민가들이 보이는데 민가 옆 밭경작지에는 초지인지 보리인지 모를 푸른 초원이 조성되어 있다.

잠시 후 능선으로 들어 묘지2기를 지나고 또 다시 나타나는 밭경작지와 묘지 몇기를 통과해 계속 완만하게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묘지들이 잘 관리되고 있는 무명봉에 올라 등로 좌측으로 펼쳐진 지나 온 봉수지맥 마루금을 살펴 본다.

송전탑 사이 저 멀리 희미하게 사라지려고 하는 오서산이 눈에 선명하게 박히는 시간이다.

 

다시 그 묘지지대를 지나 큰 고도차이가 없는 평이한 등로를 따르니 등로 우측 아래로 묘지와 비닐밭 경작지들이 넓게 펼쳐져 있다.

지도를 살펴보니 월천마을처럼 보이는 장소이다.

다시 나타나는 묘지를 지나 오르니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무명봉 정상에 도착을 해 주위를 살펴보지만 나무들로 막혀 조망은 전혀 없다.

 

다시 나타나는 전깃줄로 출입을 통제하는 비닐 밭을 우측에 두고 좌측 가장자리를 따라 걸어가니 다시 밭 경작지가 끝나고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가 이어지고 있다.

완만하게 오르니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지도를 살펴보니 이곳이 185봉으로 이곳에서 마루금은 직진의 넓은 임도를 버리고 좌측으로 떨어지는 임도를 타고 방향을 바꿔 진행을 해야하는 길주의 구간이다.

 

185봉에서 우측으로 흘러 내려가는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잠시 짧은 알바 후 좌측 정상 등로 방향으로 오르니 또 다른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고 그 위로 많은 묘지들이 보인다.

그 묘지 방향으로 잠시 오르다 진행 방향을 살펴보니 200봉의 88번 송전탑 우측 저 멀리 뾰족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초롱산이 올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가깝게 보이지만 좌측으로 돌아 올랐다 다시 우측으로 휘돌아 가야 하기에 제법 거리감과 시간이 필요한 초롱산과의 만남이다.

 

경주김공 묘지들을 지나 잘 나 있는 비포장 임도 같은 등로를 따르니 이제 등로 우측으로 예산군 광시면 운산리와 광시리 마을들이 내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한우마을이 조성되면서 더욱 잘 알려지기 시작한 광시면이기에 잠시 살펴본다.

광시면은 대한민국 충청남도 예산군 남부에 있는 면으로 면의 동부에는 차령산맥이 뻗어내려 법산(459봉), 백월산(400봉) 등이 솟아 있으며 서부에는 봉수산(484봉), 초롱산(340봉) 등이 있다.

무한천과 양지천이 합류하여 예당저수지로 흘러들며 하천 연안의 충적지는 농경지로 이용되는데 쌀 재배와 한우 축산업이 활발하였으며 한때 대영광산에서 금과 은, 구리와 납 등이 생산되었으나 지금은 폐광되었다.

동산리에 백제 의자왕 때 도침이 창건한 대연사가 있으며 경내에 삼층석탑(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78호)과 원통보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77호) 등의 유물과 유적이 있다.

예산과 홍성 방면의 도로가 하천을 따라 통과하며 행정구역은 광시리, 하장대리, 운산리, 노전리, 은사리, 신대리, 구례리, 마사리, 관음리, 동산리, 장전리, 월송리, 서초정리, 용두리, 장신리, 신흥리, 미곡리, 대리, 시목리, 가덕리 등 20개리가 (법정리 기준, 행정리 기준 26개리) 있고 면사무소 소재지는 광시면 광시소길 16이다.

다시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느긋하게 걸어가니 소나무 등로가 열리고 곧이어 88번 송전탑에 도착을 한다.

 

88번 송전탑을 지나니 등로는 다시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하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어렵게 통과하니 묘지 한기를 지나 등로 좌측으로 벌목 후 관목들이 자라는 등로와 만난다.

여유있게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 좌측 소나무 사이로 대영리 마을이 아름답게 눈에 들어 오고 대영리를 찾아보니 대영리는 충청남도 홍성군 홍동면에 있는 리로서 본면의 동부에 위치한 농촌마을인데 자연마을로는 대조, 영촌, 수골 등이 있다.

대조는 황새울, 한새울, 또는 한사라고도 부르며 전에 황새가 많이 살았다 하여 붙은 이름이고 영촌은 대영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천호 가까이 사는 마을이었으며 안씨라는 장자가 천석을 했다고 하여 천봉터 또는 천분터라고 부르며 수골은 물이 많이 나는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인데 대조와 영촌의 이름을 따서 대영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그렇게 여유있게 진행을 하니 갑자기 등로에는 작은 바위 자갈들이 혼재된 너덜 구간이 짧게 나타나며 급경사 오르막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잠시 올라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지나 온 88번 송전탑 뒤 우측으로 오늘 이 산객이 걸어 온 봉수지맥 산줄기가 푸른 물결을 이루며 길게 이어지고 그 끝자락에 오서산이 길게 누워있듯 하늘을 받치고 서 있는 풍경도 희미하게 눈에 들어 온다.

 

아름다운 풍경에 한동안 그곳 조망처에서 많은 사진을 남기고 가슴에 그 풍경을 담은 후 다시 오르니 큰 바위 너덜길이 열리고 그 바위 주위로 자라고 있는 소나무들과 묘한 조화를 이루는 오르막 등로와 만난다.

그 바위 너덜길을 타고 오르니 갑자기 하늘이 열리면서 활엽수 한쪽에 홍성둘레길 237미터라는 이정판이 붙어 있는 237.1봉에 도착을 한다.

이곳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 역시 일품인데 제일 먼저 등로 좌측으로 펼쳐진 홍성군 홍동면 일대가 아름답다.

홍동면의 면소재지는 운월리이고 동부의 초롱산(340봉) 일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낮고 평탄한 산지와 평지를 이룬다.

금마천의 소지류들이 면내를 흐르며 경지는 주로 이들 소하천 연안에 분포하고 서산과 청양을 잇는 도로가 면내를 지난다.

운월과 월현 등 14개 동리가 있는데 이는 법정리 기준으로 행정리 기준은 33개이다.

 

237.1봉을 지나 바위와 소나무가 혼재된 등로를 따라 조금 더 이동을 하니 뾰족한 바위들이 보이는 좁은 공터가 나타나고 그곳 바위 위에 올라 주위를 살펴보니 환상의 풍경들이 펼쳐져 있다.

등로 좌측으로 홍성군 홍동면이 펼쳐져 있고 우측으로는 예산군 광시면이 보이고 지나온 방향으로는 봉수지맥 마루금과 오서산이 이제 제법 멀어진 느낌으로 하늘 거린다.

진행 방향으로는 무명묘지 한기와 그 위에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서 있고 그 소나무 밑으로 이동해 진행 방향을 살펴보니 초롱산이 지척으로 다가 와 있고 그 초롱산 좌측 저 멀리 희미하게 봉수산도 보일듯 말듯 이 산객으로 다가오고 있다.

 

아름다운 풍경을 한동안 감상한 후 이제 다시 내리막 등로를 타고 조금은 빠르게 내려가니 제멋대로 자라고 있는 소나무 등로가 인상적이다.

그렇게 한동안 내려가니 갑자기 눈 앞에 벌목지가 넓게 펼쳐져 있고 발 바로 아래에는 깊은 안부가 나타나는데 아마도 벌목하면서 생긴 안부가 아닐까 생각되는 곳이다.

이곳 비포장 임도는 홍성군 홍등면 금당리 등골마을과 예산군 광시면 운산리 동달마을을 이어주는 임도이다.

비포장 임도 안부를 지나 벌목지대로 오르니 벌목 후 새로운 나무를 식재한 곳을 따라 완만하게 오르고 잠시 후 지나온 방향으로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올랐다 내려 온 237.1봉이 제법 봉우리 형상으로 다가 오지만 이제는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다.

 

벌목 후 새로운 수종을 식재한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오르니 벌써 머리 위로 쏫아지는 햇살은 한여름 더위처럼 이 산객의 온몸을 짓누르고 있다.

많은 땀방울을 흘리며 진행하다 보니 준비한 식수가 모자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스치지만 민가와 가깝게 진행하는 등로이다 보니 식수 걱정은 하지 않기로 하고 오른다.

등로 좌측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홍성군 홍등면을 살펴보며 한동안 그렇게 오르니 다시 능선으로 접어들고 잘 관리되고 있는 장흥고공 묘지2기를 지나 진행방향의 초롱산을 올려다 본다.

잠시 평이한 잡목과 소나무가 혼재된 등로를 따르니 다시 나타나는 많은 묘지들을 지나 오래 전 식재된 듯한 느티나무 조림지의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다시 완만하게 오르기 시작한다.

 

느티나무 식재지를 지나 능선으로 접어드니 잡목과 산초나무가 잠시 산행을 방해하고 어렵게 정상 등로를 찾아 오르니 지나 온 봉수지맥 마루금이 한눈에 보이는 조망처를 지나 몇개의 나즈막한 봉우리와 안부를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계속 오르막 등로가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한동안 땀방울을 흘리며 오르니 바위들이 보이더니 금새 초롱산 직전의 삼각점에 도착을 하는데 예산 315란 삼각점으로서 해발고도는 339미터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사진 한장 남기고 몇 발자국 더 걸어 오르니 아담한 정상석이 서 있는 초롱산 정상에 도착을 해 배낭 내리고 잠시 쉬어 가기로 한다.

초롱산(340.1봉)은 홍성군 홍동면 금당리와 예산군 광시면 은사리의 경계에 솟아 있는 산으로 금룡산이라 불려지기도 하는데 초롱불을 밝히던 산이라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으며 고려의 충신 이성과 깊은 관련이 있는 산이기도 하다.

초롱산과 왕지마을의 유래라는 전설로 남아 있어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홍성군 홍동면 금당리에는 초롱산이 있는데 홍성읍에서 청양 방면으로 향하다 보면  홍동 사거리를 지나서 왼편 길옆으로 금당초등학교가 있고 그 금당초등학교를 지나치면서 뒤쪽으로 야트막하게 서있는 산이 초롱산이다.
초롱산이라는 이름은 초롱불을 밝히던 산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는데 초롱산 아래 살았던 고려의 충신 이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성은 고려 시대의 충신으로서 제주의 벼슬로 시작하여 높은 지위에 오른 인물이지만 고려말엽에 국정이 어지러워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홍주에 내려와 있었으며 사서오경에 통달하여 오경사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으며 그의 학식과 인품이 출중하여 많은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와 제자가 되기를 청할 정도였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자신을 도와줄 인물들이 필요하여 이미 이성의 인물 됨됨이를 잘 알고 있던 이성계는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청하였지만 이성은 고려의 신하로서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지조를 굽히지 않고 이성계의 부름에 따르지 않았다.

이에 다급해진 이성계는 직접 이성을 찾아와서 만나기를 청하였고 이성계가 이성을 찾아왔을 당시의 일화들이 1923년에 발간된 여조충열록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으며 그 원문의 일부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태조가 말하기를 비욕청신 원위빈사 즉 신하가 되기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이에 이성이 말하기를 옥출곤강 산기진출옥호 금생여수 수기진생금호 여필종부 인기진부이종호 즉 옥이 산에서 난다 한들 어찌 산마다 옥이 나겠으며 또한 금이 고운 물에서 난다 한들 어찌 모두 금이 나올 수 있겠으며 아내는 남편을 따른다 하나 어찌 모든 아내가 남편을 따를 수 있겠느냐고 답하였다
.
이성의 대답을 들은 이성계는 그 뜻을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달았고 이성의 집을 떠나면서 손에 쥐고 있던 금단장으로 주변 사방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근처의 산과 전답을 이성 자손들의 녹으로 내어주어라고 명하였다
.
후에 이곳은 왕이 준 땅이라고 하여 금동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으며 옛날에는 이곳의 이름이 홍주군 금동면이었는데 1914년에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홍성군 홍동면으로 바뀌게 되었다
.
또한 초롱산이라는 이름도 이성계가 이성을 찾아와서 하룻밤 묵을 때 초롱불을 밝히던 산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초롱산 바로 아래에 백동마을이 있는데 옛이름은 등골이라고 한다.

이성계가 왔을 때 등불을 밝혔던 마을이라는 데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지금도 마을사람들은 옛날부터 사용하던 등골이라는 이름을 즐겨 부른다.
한편 홍동면 수란리에 왕지, 왕지동, 왕지울이라고 부르는 마을이 있으며 모두 초롱산 아래 등골마을 옆쪽에 있는 마을로서 왕지라는 마을이름은 이성을 찾아온 이성계가 머물렀던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
왕지에는 이성계가 찾아왔을 당시의 얘기가 전설로 전해지고 있는데 이성계가 왕지마을에 머물면서 여러 번 만나기를 청했지만 이성은 꿈쩍도 하지 않아 나중에는 이성계가 이성의 집 앞까지 직접 찾아 가니 이성은 개구멍으로 얼굴을 내밀고 개 짖는 소리만 내고 방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
이성의 곧은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전설이면서 홍성지역 선조들의 절개 굳은 선비 정신을 대변하는 전설의 하나로서 초롱산과 주변 마을에 전해지는 이야기들이 묵직한 교훈을 담아서 후손들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초롱산에서 옛 생각을 하면서 준비한 과일 하나를 먹으며 주위 풍경을 살펴보니 제일 먼저 진행 방향으로 좌측에 산신제단이 있는 270봉이 보이고 구름고개 지나 저 멀리 우측으로 봉수지맥이란 이름을 탄생시킨 봉수산이 제법 우람한 남성미를 자랑하며 서 있다.

가깝게 보이고 높아 보이지 않지만 저 봉수산 오르막 너덜길과 대슬랩 우회 등로는 오늘 산행의 백미로 온 몸에 있는 한방울의 진국까지 빼내고야 어렵게 오른 산상이었다.

 

다시 평이한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묘지2기를 지나는데 그 묘지를 지나며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올랐다 내려 온 초롱산이 저 멀리 우뚝 솟아 있다.

다시 잡목들이 자라고 있는 등로를 타고 진행을 하니 갑자기 넓은 공터가 나타나는데 지난 여름 자랐다 죽어버린 잡풀들이 등로를 지독하게 막고 있다.

그곳을 조심해 내려가니 드넓은 공터에 파란 잡풀들이 자라며 발목을 덮고 그곳에서 진행 방향을 살펴보니 270봉 우측 저 멀리 이제부터 올라야 할 봉수산이 어서오라 손짓을 하고 있다.

 

이제 그 넓은 공터를 지나 능선으로 들어가니 다시 활엽수와 잡목이 섞여있는 등로를 지나 금새 1차선 시멘트 포장도로가 지나는 음미고개에 도착을 한다.

음미고개는 홍성군 홍동면 금당리와 예산군 광시면 은사리를 지나 광시읍으로 넘나들던 고갯마루로서 시멘트 포장도로의 임도이다.

사진 한장 남기고 시멘트 포장도로 지나 이어지는 비포장 임도를 타고 완만하게 오르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이제 햇살이 길어지며 시간이 지날수록 뜨거워지는 햇살을 피해 그늘이 그리워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비포장 임도를 따라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납골묘와 일반 묘지들이 보이고 곧이어 억새들이 자랐다 말라죽은 잡풀지대가 보인다.

그곳에서 잠시 흐르는 땀방울을 닦으며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어렵게 올랐다 내려 온 초롱산이 반대쪽에서 봤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뾰족봉으로 다가온다.

마치 용문산 백운봉처럼 마테호른을 연상시킬 정도로 뾰족한 송고ㅗㅅ을 연상시키는 모습에서 역시 산은 여러 각도에서 봤을 때 그 진실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말에 완전히 공감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담양전공의 묘지와 또 다른 묘지지대를 지나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측백나무가 보이고 다시 잡목이 우거진 일반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오를수록 잡목이 우거져 진행에 어려움이 있지만 그래도 봉우리는 찍고 내려가야 될 것 같아 악착같이 오르니 그곳 정상에 홍성둘레길 226봉이라는 이정판이 붙어 있는 260봉에 도착을 해 어렵게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이곳은 많은 산님들이 우회하며 지나치는지 생각보다 띠지들이 적다는 느낌이다.

 

그곳 260봉에서 올라갔던 방향으로 잠시 내려오다 우측으로 크게 꺽어 잡목을 헤치며 내려가니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맥 잇기 산행을 하면서 늘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 논산의 바랑산님 띠지가 반갑게 맞이해 준다.

이제 제법 웃자라고 있는 잡목들을 헤치고 진행하다 보니 온몸에 생채기가 나기 시작하고 그렇게 잡목이 우거진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오르니 이제 막 연두빛 봄이 오고 있는 226.5봉에 올라 잘려진 나무등걸 하나를 사진에 담아 본다.

 

계속 이어지는 잡목지대를 뚫고 걸어 진행을 하니 다시 나즈막한 안부가 나타나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며 어렵게 그 안부를 통과하니 말라죽은 활엽수 나뭇가지가 발목을 붙잡고 진행을 방해하고 있다.

다시 성하의 계절로 달려가는 푸른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바위 무명봉이 나타나고 곧이어 안부를 통과한 후 산신제단이 흙어 묻혀있는 270봉에 도착을 해 벌써 등줄기와 이미를 흥건하게 적시고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 본다.

 

산신제단이 있는 270봉에서 사진 몇장 남기고 우측으로 뚝 떨어지는 등로를 어렵게 찾아 내려가니 파란 나뭇잎이 더욱 짙어가고 낙엽 깔린 등로는 더욱 푹신하게 산객의 온몸을 흔들고 있다.

이제 제법 뚜렷한 등로를 타고 한동안 걸어가니 벌목지대에 키 작은 소나무들이 자라는 등로와 만나고 잠시 후 산수골 갈림길이 있는 곳에서 진행 방향의 봉수산을 올려다 본다.

이 산객이 살던 시골마을에도 산수골이란 마을이 있어 더욱 정겹게 다가오는 마사리 산수골마을을 찾아보니 마사리

산수굴마을은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에 있는 리로서 대체로 낮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마을 앞에 마사천이 흐르고 마사소류지가 축조되어 있다.

조선 때 말을 먹이던 곳이므로 마사라 하였는데 자연마을로는 내상산, 마새, 절골, 산숫굴마을 등이 있으며 내상산마을은 봉수산 밑이 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고 마새마을은 마사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 유래는 마사리의 그것과 같다.

절골마을은 절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절골 서쪽에 있는 산숫굴마을은 산소가 있었다 하여 칭하게 된 이름이다.

잠시 더 그 벌목지대에 자라고 있는 키 작은 소나무 군락지를 타고 진행을 하는 시간이다.

 

계속 이어지는 벌목지대를 따라 걸어가니 등로는 다시 잘린 나뭇가지들이 널부러져 있는 능선으로 이어지고 잠시 더 능선을 걷는가 싶더니 벌목지대와 다시 만난다.

그곳을 지나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비포장 임도와 만나고 그 임도 위에는 또 다시 몇기의 묘지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그 묘지 뒤로는 올라야 할 124봉이 자라고 있는 소나무 등로로 막혀있고 그 우측 저 멀리에는 여전히 올라야 할 봉수산이 그리 높지는 않지만 대슬랩의 가파른 오르막 등로가 제법 땀을 흘려야 됨을 짐작하게 만들고 있다.

 

온양정공 묘지들을 지나 지독한 키 작은 소나무 군락지를 오르고 잡목지대를 헤치며 어렵게 진행을 하니 참으로 어렵게 124봉에 도착을 하는데 아무런 표식도 없어 피식 웃어보고 곧바로 우측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내려가며 걸어 본다.

잠시 걸어 내려가니 다시 키 작은 소나무 군락지를 지나 등로 좌측으로 벌거벗은 벌목 후 식재된 장소를 지나는데 능선으로 진행하기 어려워 그 절개지 제일 위쪽 등로를 따라 조심스럽게 걸어 본다.

진행 방향으로는 아름다운 월암리 마을 위로 올라야 할 봉수산이 연두빛 봄을 머금은 채 어서오라 손짓하고 있다.

 

절개지 위 경작지를 조심하며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 우측으로 복숭아 과수원이 보이고 그 아래에는 새로 지은듯한 민가 두어채가 내려다 보이는데 주말을 맞이해 가족들이 방문을 하였는지 차량 몇대가 보여 방해되지 않토록 조심하며 밭 가장자리를 따라 내려가 구름고개에 도착을 한다.

구름고개는 1차선 시멘트 포장도로가 지나는 고개로서 광시면 마사리 버스정류장과 홍성군 금마면 도로표지판 그리고 봉수산로라는 도로 표지판이 보인다.

 

이곳 구름고개 정상 한쪽에도 어김없이 준.희님의 이정판이 붙어 있어 감사한 마음으로 고개 숙여 인사 드리고 사진 한장 남겨 본다.

구릉고개(구름고개)는 예산군 광시면 마사리와 홍성군 금마면 월암리를 이어주는 19 1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고개로서 마사리에 있어 마사고개로도 불린다.

마사리는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에 있는 리로서 대체로 낮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마을 앞에 마사천이 흐르고 마사소류지가 축조되어 있다.

조선 때 말을 먹이던 곳이므로 마사라 하였는데 자연마을로는 내상산, 마새, 절골, 산숫굴마을 등이 있으며 내상산마을은 봉수산 밑이 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고 마새마을은 마사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 유래는 마사리의 그것과 같다.

절골마을은 절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절골 서쪽에 있는 산숫굴마을은 산소가 있었다 하여 칭하게 된 이름이다.

구름고개에서 우측 짧은 절개지를 타고 오르며 다시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절개지로 오르니 밭 경작지가 나타나고 그 좌측 가장자리를 타고 완만하게 오르며 진행을 하니 지독한 대나무 밭으로 이어져 한동안 고생하며 통과하여 다시 나타나는 밭 가장자리를 따라 조금은 편안하게 걸어 본다.

잠시 후 이동통신탑을 지나 진행하니 마사리 마을로 진입하고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마을 사람들에게 폐가 없도록 조용하고 빠르게 그 마을 등로를 통과한다.

 

잠시 더 걸어 사거리 갈림길에서 민가로 들어가 식수 좀 얻으려고 하지만 빈집이 많아 포기하고 남아 있는 1리터의 식수로 견뎌 보기로 한다.

원 등로는 직진의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민가 바로 곁으로 걸어 올라야 하지만 이방인의 출현으로 인해 불편해 할 것 같아 우측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마을을 약간 우회해 돌아 진행하기로 한다.

 

우측으로 나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잠시 걸어 오르니 도로 좌측으로 비포장 임도가 이어지고 그 비포장 임도를 타고 완만하게 오르니 해주오공 묘지들이 길게 이어지며 등로를 안내하고 있다.

그곳 묘지지대를 지나 잠시 더 오른 후 나무 그늘에 앉아 쉬면서 남아 있는 빵과 과일로 허기를 면한 후 다시 등로를 타고 오르니 저 멀리 올라야 할 봉수산 자락에 하얀 이빨처럼 드러난 대슬랩이 어렵게 오르는 산객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고 있다.

 

허기를 면한 후 묘지 옆으로 나 있는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소나무 등로가 보이더니 금새 또 다시 비포장 임도와 만나 잠시 더 쉬어 가기로 한다.

비포장 임도를 가로질러 능선으로 오르니 이제까지 불어주던 바람도 멈추고 지면에서 올라오는 열기는 초여름 열기를 지나 한여름 불볕 더위를 연상시키고 있다.

 

능선으로 오르니 생각지도 못한 바위 너덜길이 펼쳐져 있고 생각보다 가파른 오르막 된비알 등로로 인해 산행 속도가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

온 몸에선 굵은 땀방울 쉴새없이 솟아져 내리고 바위 너덜길을 타고 오르는 두 다리엔 힘이 실리며 더욱 오르는 등로가 힘들게 느껴진다.

그래도 한발 두발 미끄러지며 돌아 오르니 눈 앞에 대슬랩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대슬랩을 우측에 두고 좌측 가장자리로 돌아 오르니 이제 바위 너덜길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낙엽 등로가 이어지고 있어 진행에 여간 어렵지 않다.

 

두발 걸어 오르면 한발 미끄러지기를 반복하는 어려운 바위 너덜길과 낙엽 등로를 번갈아 타며 힘들게 오르니 그래도 대슬랩을 우측에 두고 그 위쪽으로 진행이 되고 이제부터 대슬랩 위에서 우측을 살펴보면 지나온 봉수지맥 마루금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벌목된 소나무 가지를 헤치며 조금 더 오르니 등로 우측 대슬랩 위로 많은 바위들이 쌓여 있고 그 위로 조심스럽게 올라 지나온 봉수지맥 마루금을 살펴보니 그곳에 그림같은 풍경이 고스란히 펼쳐져 있다.

방금 전 지나온 마사리와 월암리 마을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고 그 뒤로 270봉과 초롱산이 이어지고 그 초롱산 뒤 저 멀리 희미하지만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오서산이 좌우측으로 금북정맥 줄기를 거느리며 봄으로도 당당하게 솟아 있다.

 

너무나 아름다운 봉수지맥 마루금이기에 한동안 더 그 바위 위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머물며 고운 추억을 만들고 내려 와 다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힘겹게 올라 본다.

꽃 잎이 시들어 떨어지는 진달래와 소나무가 혼재된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어느새 등로는 약간 유순해지고 곧이어 생각지도 못한 독사 새끼를 만나 올 한해도 뱀과 좋은 인연을 만들어 달라고 기원해 본다.

다시 나타나는 바위 등로를 지나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내상산이 가깝게 보이고 그 뒤로 예당저수지와 이어지는 무한천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상산은 충청남도 예산군의 남부 광시면의 북서부 마사리에 위치한 산으로 해발고도는 384미터이다.

임존성으로 유명한 봉수산의 남쪽 연봉으로 내상산은 봉수산에 둘러싸인 듯한 산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하며 조선지형도의 대흥에서 내상산이 확인된다.

조선지지자료의 대흥의 일남면 동리촌명에서 내상산리만 기록되어 있다.

 

이제부터 오솔길 같은 등로를 타고 오르니 금새 임존성에 도착을 해 잠시 그 임존성곽을 타고 좌측으로 걸어 본다.

임존성은 대흥면 상중리(: 광시면 마사리)에 있는 봉수산 거의 정상부까지 난 가파른 산길을 아홉 굽이 돌아 숨차게 올라가다 보면 어느덧 장대한 성벽이 시야를 가로막는데 이곳이 대흥 임존성으로 임존성은 백제 시대에는 수도 경비의 외곽 기지였으나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백제부흥운동의 근거지로서 그마저 쓰러져 버린 뒤 후삼국 때에는 다시 견훤과 왕건이 겨루었던 곳으로 깊은 시름을 담아온 곳이다.

이곳과 함께 부흥운동의 주요한 근거지였던 주류성은 서천의 건지산성으로 추정한다.

높이 484미터인 봉수산과 그 동쪽 900미터쯤에 떨어져 있는 봉우리를 에워싼 테뫼형 산성이어서 한편으로는 봉수산성이라고도 하며 산 아래로 예당 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데 옛날에는 그 아래로 흐르는 무한천을 통해 바닷물도 들어왔다고 한다.
돌을 다듬어 차곡차곡 쌓은 석축산성으로 안으로는 흙을 파내서 다지고 밖으로는 축대를 쌓는 방식으로 성을 쌓은 내탁외축형으로 주변에 돌이 많아 돌 구하기가 어렵지는 않았을 듯하다.

온전히 남아 있는 동북쪽 성벽높이가 최대 4.2미터에 이르러 성벽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 또한 까마득하다. 백제 시대 최대의 테뫼형 산성으로 산등성이를 둘러 성벽이 이어졌으니 그 구불거리는 곡선이 햇빛 받아 빛나는 모습은 퍽 아름답다.

둘레가 2450미터나 되어서 산을 오르내리는 것까지 해서 가벼운 등산로로도 괜찮으며 성 안쪽으로도 약 8미터에 이르는 호를 둘러 견고하기가 이를 데 없어 백제 때의 성이 이만큼 견실하게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면 신기한 일로서 사적 제90호이다.
세계에 하나뿐인 수정식 성인데 이는 가장 높은 곳에 우물을 파서 성 안에 모았다가 적이 공격할 때에 물꼬를 터뜨려 1차로 곤경에 빠뜨리고 나서 공격을 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다.

남쪽 성벽에는 수구도 있어 물이 흘러나간 자리를 보여 주고 수구 쪽으로는 물이 잘 흐르도록 폭 60㎝ 깊이 90㎝의 도랑을 팠고 그 위를 판석으로 덮었다.
남쪽 성문 자리에 거대한 석축이 있어서 그 흔적이 가장 잘 남아 있는데 성 안은 경사를 약간 이루면서도 평평한 넓은 분지인데 넓이가 28 8,000평에 이르고 계단식으로 된 건물터도 곳곳에 있고, 우물자리도 있다
.
그만큼 높은 산 위까지 오르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그토록 깎아지른 성벽을 공격하기는 더더욱 어려운 일 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방어에는 유리한 고지였으나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지키는 자의 의지가 굳지 못하면 소용없는 노릇이다.

이 대흥성은 성 안 사람들이 내분으로 인해 죽고 죽이고 항복하는 통에 당군에게 내주고 말았으니 그로서 백제부흥운동도 막을 내리고 유민들의 피 어린 한숨만 남게 되었다.

 

임존성곽을 따라 좌측으로 걸어 오르니 봉수산 가는 등로는 우측 잡목 사이로 이어지고 성곽을 넘어 우측 능선으로 들어가니 바위 틈에 자라고 있는 소나무 한그루가 멋진 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출발하니 금새 잘 관리되고 있는 듯한 헬기장에 도착을 해 잠시 주위 풍경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 본다.

이곳 임존성에는 또한 흑치상지라는 걸출한 장군과도 인연이 있는데 흑치상지는 백제 말기의 장군으로 서부 출신으로 2품관인 달솔에 올라 풍달군장을 겸하였던 7척이 넘는 키에 용감하고 지략이 뛰어난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660(의자왕 20)에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어 백제가 망하자 부중과 더불어 항복하였으나 그 뒤 소정방이 의자왕과 태자 효를 비롯해 여러 왕자를 사로잡고 당나라 군사를 풀어서 제멋대로 약탈하자 이에 분개하여 가까운 족장 10여 명과 반기를 들어 임존성(지금의 충청남도 대흥)을 근거지로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부흥군은 곧 3만명으로 늘어나 한때 소정방의 군사를 물리치고 200여 성을 되찾아 기세를 떨쳤다.

소정방이 당나라로 돌아간 뒤 나당연합군은 백제유민들이 전개한 부흥운동을 막기 어려워 새로이 원병을 청해 수륙의 두 길로 공격을 강화하여 백제 부흥운동의 유력한 한 축을 형성하다가 부흥운동의 본거지였던 주류성이 함락된 663 9월을 전후하여 더 버티기가 어려워 수로로 공격해온 당나라의 장수 유인궤에게 항복하였다.

이후 그는 오히려 당군의 선봉에 서서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 보루였던 임존성을 함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부흥운동이 종식된 뒤 흑치상지는 부여융과 함께 당으로 들어가 장안의 만연현에 편적되었으나 다음 해인 664년에 부여융이 웅진도독에 임명되어 백제땅으로 귀환할 때 흑치상지도 다른 백제 인사들과 함께 백제땅으로 돌아와 절충도위, 진웅진성대 즉 부여융을 수반으로 하는 웅진도독부의 군장이 되었다.

웅진도독부가 신라군의 공격으로 한반도에서 소멸되면서 흑치상지는 당시 당으로 들어간 후 여러 차례 승진을 거듭하여 좌령군원외장군 양주자사가 되어 토번(티베트)과 돌궐을 치는데 공을 세웠다.

그 관직과 신임이 중국사람보다 두터워 벼슬이 연연도대총관 연국공에까지 이르렀고 국공이란 당나라에서 9등급으로 분류되어 있던 귀족의 직위 중 세 번째로 3000호의 토지를 소유하게 되어 있었다.

, 측천무후의 통치 때 응양장군 조회절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주흥 등의 무고로 옥에 갇혔다가 689 10월 자결하였다.

흑치상지의 억울한 죽음은 9년 후인 698년 장남인 흑치준의 노력으로 신원되었고 측천무후는 제서를 내려 흑치상지를 좌옥검위대장군에 추증하고 훈과 봉을 회복시켜 주었다.

생전에 그가 받았던 훈은 확인되지 않지만 봉은 연국공이었다.

가족상황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의 중녀로 적혀 있는 낙랑군부인 흑치씨는 중국의 불교미술사에 그 이름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흑치씨는 백제 또는 고구려계의 유장으로 흑치상지의 경우와 같이 당나라에 들어가 군공을 세워 천병중군부사 우오위장군 상주국 준화군 개국공에까지 관위가 올라간 순의 부인이다.

흑치씨는 706년에 남편 및 그의 가족들과 힘을 합쳐 8세기 전반기의 중국불교조각을 대표하는 산서성 천룡산의 당대 석굴에 삼세불상과 제현성을 조각하였으며 이 불상조각은 707년에 완성되었다.

이 해 10월에 불상이 조각된 사연을 적은 공덕비가 세워져 불교미술 분야 뿐만 아니라 당제국에 있어서 한반도 출신의 유민활동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헬기장 좌측인 서쪽방향으로 가 살펴보니 발 아래 월암리 마을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고 그 뒤로 홍성의 진산인 용봉산과 수암산 줄기가 보이면서 그 뒤로 오래 전 힘들게 걸었던 금북정맥 줄기가 아름답다.

남산과 일월산 우측으로 용봉산과 수암산이 보이고 그 뒤 저 멀리 수덕산과 그 우측으로 조만간 걸어야 할 석문지맥까지 시원하게 펼쳐져 있지만 오늘은 약간의 박무로 인해 조금은 아쉬움을 남긴다.

 

그렇게 한동안 그 헬기장에서 주위 풍경을 즐긴 후 다시 출발하니 이곳은 완전히 한여름 등로처럼 푸른 숲으로 변해 버렸다.

잠시 더 걸어 오르니 둔덕에 도착을 하고 그 한쪽에 걸려있는 이정판을 살펴보니 홍성둘레길 극동점 477봉이라 적혀 있어 지도를 살펴보니 이곳의 고도를 467미터로 표기되어 있다.

이제 봉수산 정상도 아주 가까워졌음을 느끼는 시간이다.

 

다시 내려갔다 올라 성곽을 만나는 지점에 봉수산정상까지 300미터 남아 있다는 이정표와 내포문화숲길이란 안내판을 만난다.

내포문화숲길은 내포신도시에 있는 산책로로서 내포신도시는 대한민국 충청남도 홍성군 흥북면 신경리와 예산군 삽교읍 목리를 중심으로 조성 중인 신도시이다. 2006 2 12일 충청남도청은 대전광역시 중구에 있던 충청남도청사를 충청남도 홍성군 흥북면과 예산군 삽교읍 일원으로 이전하기로 최종 확정하였다. 2009 6 16일 도청신도시 개발구역 내 행정타운 예정지에서 신도시 기반공사와 충청남도청 신청사 기공식을 가졌는데 원래는 5 26일에 기공식을 가질 예정이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 기간이어서 장례식 이후로 연기되었다. 2010 8 2일 신도시 명칭이 내포로 확정되었으며 충청남도청은 내포라는 명칭이 내포 문화권(충청남도 북서부 지역)의 중심이라는 역사적이고 지리적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 황해권 시대의 선도 역할을 한다는 미래 지향적 의미를 담았다는 점에서 선정되었다고 밝혔다.

도청 이전 신도시의 새이름은 도청 이전지가 결정된 2006 2월 이후부터 그해 6 9일부터 6 30일까지 21일 동안 공모해 전국에서 총 75명이 153건을 응모했고 잠시 명칭 선정이 유보됐다가 2010 7월 충남도 지명위원회를 열어 내포시로 최종 결정됐다. 

다시 안전 철봉과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내려갔다 올라 평이하게 걸어가니 다시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는데 등로 좌측으로 임도 가는 갈림 삼거리로서 봉수산정상까지는 이제 160미터 남아 있다는 거리 이정표도 보인다.

그곳을 지나 조금 더 힘을 내니 금새 정상석과 삼각점 그리고 벤취와 이정표가 서 있는 봉수산 정상에 도착을 한다.

봉수산은 충청남도 홍성군의 동쪽 금마면에 위치하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483미터이며 예산군 대흥면과 경계를 형성한다.

봉수산은 홍성군의 안산에 해당하며 일명 대흥산이라고 불리는 산정상부에는 백제 시대의 임존산성이 있는데 이 산의 산세는 매우 험준하며 북쪽 산록에는 비티라는 험준한 고개가 있는데 과거에 홍성지방과 대흥을 잇는 길목으로 현재에도 비티고개와 큰비티고개가 산정상부에 존재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봉수산은 홍주 동쪽 21리에 위치하며 대흥현과 경계를 형성한다고 기록하였고 여지도서에는 오서산에서 북으로 뻗은 산줄기로 대흥의 주산이라고 기록하였다.

봉수산이라는 이름은 산이 봉황새의 머리를 닮았다는 데에서 유래한 것으로 대흥면에 있는 산이라 하여 대흥산이라고도 불린다.

봉수산의 지명표기는 조선 시대에 제작된 지도에 따라 매우 다양한데 즉 조선지도, 대동여지도, 1872년지방지도(대흥)에서는 현재의 이름과 동일하게 표기되어 있지만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 등에서는 봉수산으로 표기하였고 1872년지방지도(홍주)에서는 봉수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해동지도에 산성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고 조선지형도에서는 현재의 지명과 동일하게 표기되어 있다.

정상 동남쪽에는 백제의 전략적 요충지인 임존성(사적 제90)이 남아 있으며 임존성이 바로 백제의 복신, 지수신, 흑치상지 등이 당나라 장수 유인궤에게 항거하던 곳이다.

지금의 본읍 관아 서쪽 13리 지점에 옛 돌성이 있는데 그 주위가 5,194척이며 안에 3개의 우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의심하건대 이 성이 아닌가 한다라고 적혀 있다.

      

잠시 쉬고 있으니 붑 두명이 올라오고 인사 나눈 후 부탁해 추억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주위 풍경을 사진에 담은 후 지나 온 등로 방향인 남서쪽을 살펴보니 나뭇가지 사이로 지난해 4월 걸었던 등로와 오늘 지나온 마루금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고 그 끝자락엔 여전히 오서산이 굽어 보듯 당당히 서 있다.

그 좌우측으로 펼쳐진 금북정맥 역시 지난 추억을 이야기하며 다시 한번 더 조우를 약속하고 있다.

 

등로 우측으로는 예당저수지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고 그 좌측 끝자락에는 예산의 산들인 금오산과 안락산 자락이 보이고 그 우측 저 멀리에는 또 다른 금북정맥의 봉수산 자락이 살포시 고개를 내밀고 있다.

자주 들렸고 앞으로도 몇번인가 더 들려야 할 예당저수지는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과 응봉면 사이에 있는 저수지로서 1928년 4월에 착공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말기와 광복 후 중단되었다가 1952년 12월에 다시 착공되어 1964년 12월에 준공되었다.

유역면적은 3만7360 ha이고 저수지의 규모는 둘레가 40 Km로서 동서 2 Km에 남북 8 Km이며 만수면적이 약 1100 ㏊나 되는 광활한 국내굴지의 인공호수이다.

총저수량은 약 4700만톤으로 1만240 ㏊의 몽리면적을 가지고 있으며 예당평야를 관개하고 있는 예당저수지의 제방구조는 흙댐이며 규모는 길이 814.5이고 높이는 13.3미터이고 물넘이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설치한 테인터 게이트가 특징적이다.

길이 약 25미터 되는 콘크리트 물넘이에 설치된 26연의 자동식 개폐문은 평상시에 만수위를 유지하고 호우시에는 홍수조절의 기능을 가진다.

각 수문의 크기는 너비 6.0미터에 높이 3.6미터로 배제수량은 초당 63.2톤이고 총배제수량은 초당 1645톤에 달하며 수문조작은 관리사무실에서 원격조정으로 하게 된다.

개보수실적은 준공 뒤 20년이 된 1984년에 물넘이·수문 및 통관의 보수가 있었고 1985년에 제방의 보수공사가 있었으며 현재 모든 기능이 양호한 상태에 있다.

이 밖에 담수어의 양식장과 낚시터로 유명하여 잉어·뱀장어가 양식되고 낚시인구도 연간 10만여명에 달하고 있다.

또한, 뱃놀이와 조종경기 연습장으로도 활용되며 1979년 전국체전 때에는 조정경기장으로 사용한 실적이 있다.

 

그렇게 한동안 봉수산 정상에서 머물며 물 한모금 마시고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다 이제 오늘 처음으로 만나는 비티고개라는 이름과 그곳 비티고개까지 1.13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보고 시골집에서 머물고 있는 옆지기에게 전화를 하니 시간 맞춰 비티고개로 와 대기하겠다는 답변을 듣고는 다시 천천히 그 봉수산 정상부를 출발하는데 아무래도 비티고개까지의 거리 표시가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이다.

아마도 큰비티고개까지가 1.13 Km이고 비티고개까지는 그 두배 이상 걸리지 않을까 생각되는 거리였다.

잠시 뚜렷한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내려가니 저 멀리 이정표와 벤취 2개 그리고 봉수산등산로안내판이 서 있는데 살펴보니 이곳이 5코스 갈림삼거리이다.

 

그 5코스 갈림삼거리에 설치된 인공구조물들을 사진에 담고 다시 완만하지만 뚜렷하게 나 있는 등로를 타고 걸어 내려가니 멋진 소나무 등로가 반겨준다.

약간의 바위와 소나무가 서 있는 무명봉을 지나 계속 이어지는 바위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벤취 하나가 설치되어 있는 봉우리에 도착을 하는데 살펴보니 그 벤취 위에 홍성둘레길 416봉이란 이정판이 붙어 있고 한쪽에는 긴급구고119 이정목도 서 있는 415.7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곧바로 출발한다.

 

그 415.7봉을 지나 고속도로 같은 뚜렷한 내리막 등로를 따라 잠시 더 걸어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약간의 바위들이 박혀있는 조망처에 도착을 해 앞으로 진행해야 될 등로 좌측의 북쪽 방향을 살펴보니 연두빛으로 변해가는 산하가 싱그러움을 더하며 저 멀리 비티고개 지나 끊어질듯 이어지고 있는 봉수지맥 산줄기가 한눈에 들어 온다.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에 잠시 더 머물며 많은 사진을 남긴 후 이제 옆지기가 일찍 와 기다리고 있을 비티고개를 향해 빠르게 내려가 본다.

 

다시 더 가파라지는 내리막 등로를 타고 조심하며 내려가니 등로 우측 옆으로 벤취 하나가 보이고 그곳 등로 우측으로 열려있는 풍경을 살펴보니 예당저수지가 조금 더 가깝게 다가와 있고 그 좌측 저 멀리 예산과 아산의 산줄기들이 손짓하며 부르고 우측으로 빙돌아 살펴보니 몇 년 전 어렵게 홀로 오르며 이제는 하늘나라에 계신 부모님과 많은 시간을 보냈던 금북정맥 산줄기들도 어렴풋이 눈에 들어 온다.

이곳에서도 몇장의 추억을 더 남기고 이제부터는 조금은 빠르게 진행을 해 보는 시간이다.

 

다시 출발하니 이제 등로에는 계단이 보이고 잠시 후 안전로프가 설치된 장소가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진행하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

그 계단 구간을 내려가니 등로는 다시 편안해지고 연두빛 자연이 풀파에 시달린 이 산객의 몸과 마음을 힐링시켜 주고 있다.

그렇게 잠시 더 내려가니 저 멀리 시멘트 포장도로가 보이더니 금새 벤취 2개가 설치된 장소를 통과한다.

곧이어 시멘트 포장도로와 비포장 임도가 만나는 갈림사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살펴보니 봉수산정상에서 1.2 Km 내려왔다는 이정표와 홍성산꾼들이 붙여놓은 홍성둘레길 큰비티고개라는 이정판도 보인다.

큰비티고개는 홍성군 금마면 봉서리에서 예산군 대흥면 동서리를 이어주는 시멘트 포장도로가 지나는 고개이다.

남쪽의 봉수산에서 뻗어 북쪽으로 올라온 산줄기를 가로지르면서 형성된 이 고개는 군의 금마면과 예산군 대흥면의 경계를 형성하기도 하는데 한국지명총람에서는 큰비티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다른 이름으로는 한자화하여 대비치라고 기록하였다.

큰비티고개 북쪽의 해발고도가 낮은 곳에는 비티고개가 자리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큰비티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고개의 규모를 의미하기보다는 높이가 높은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 직진 방향의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계속 진행을 하니 시멘트 포장도로는 금새 비포장 임도로 변하고 임도 좌측으로는 벌목 후 잘 관리되고 있는 커다란 멋진 소나무 아래 어린 편백나무들이 새롭게 식재되어 있다.

임도 우측으로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 잠깐 들어가 보면 드넓은 예당저수지가 한눈에 들어 오는 조망의 명당들이 나타난다.

잠시 뒤 옆지기로부터 전화가 오고 벌써 도착을 했다는 소식에 그늘에서 기다리게 하고 조금은 빠르게 발걸음을 움직여 본다.

이제 소나무 군락지도 지나 그 비포장 임도가 좌측으로 우회하며 지나가는 우측 봉우리를 지나칠 수 없어 잠시 오르니 잡목의 저항이 심하고 어렵게 올라 잡목들이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242.2봉을 확인하고 다시 잡목을 헤치며 좌측 사면 등로를 타고 비포장 임도로 복귀한다.

 

드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는 다시 편백나무들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일반 활엽수와 관목들이 자라는 풍경이 눈에 들어 온다.

약간의 바위들이 보이는 나즈막한 무명봉도 지나 우측 교촌리쪽 대흥목장으로 내려갈 수 있는 삼거리 갈림길을 지나니 정상 등로 방향으로는 비포장 임도가 끝이나면서 일반 능선으로 이어지는데 금새 다시 커다란 편백나무 군락지로 변하고 있다.

교촌리는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에 있는 리로서 평지에 위치한 농촌마을이며 마을 뒤로 봉수산이 자리하고 있고 향교가 있으므로 향교말 또는 교촌이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구두물, 병목안, 우정, 원댕이, 향교마을 등이 있는데 구두물마을은 큰 우물이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고 병목안마을은 마을 모양이 병목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우정마을은 마을에 큰 우물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댕이마을은 전에 원당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향교마을은 향교가 자리하였다 하여 유래된 이름으로 대흥향교는 시도기념물 제136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곳 편백나무 군락지에서 등로는 우측방향을 버리고 녹슨 철조망이 있는 좌측 방향으로 크게 꺽어 완만하게 내려가며 진행을 해야 된다.

선답자들의 띠지 몇개가 방향을 정확하게 알려주고 그 띠지들을 따라 내려가니 갑자기 편백나무들이 잘려진 장소에 도착을 해 방향을 잃고 잠시 헤매였지만 금새 녹슨 철조망을 찾아 정상적으로 내려가 본다.

비석이 있는 묘지 한기를 지나 내려가니 잡목 사이로 좁은 등로가 열려있고 이제 녹슨철조망을 넘어 밤나무 단지를 지나 616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비티고개에 무사히 도착을 해 오늘 산행을 마무리 해 본다.

비티고개 : 홍성군 금마면과 예산군 대흥면 그리고 응봉면의 3개 면이 만나는 고갯마루로서 금마에서 예당저수지로 이어지는 616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곳으로 예전에는 아주 헌한 고개였다는데 지금은 그저 평범하게 보이는 고갯마루가 되었다.

 

충청남도 홍성군의 금마면

봉서리와 예산군 응봉면 건지화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홍성군과 예산군의 경계를 형성하는 봉수산 줄기가 북쪽으로 뻗어 나가는데 이 산줄기를 넘어 홍성지방과 예산지방으로 이동하던 사람들에 의해 비티고개가 형성되었다.

한국지명총람에 따르면 비티고개는 비치라고도 불리는데 비티고개 남쪽의 예산군 대흥면에는 큰비티고개(대비치)

도 존재한다.

현재는 616번 지방도가 비티고개를 지나며 이 도로를 따라 가면 예산의 예당저수지와 연결된다.

 

이곳 비티고개에 일찍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옆지기에게 부탁해 사진 한장 남기고 준비한 시원한 식수로 갈증을 달래니 오늘 하루도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 가고 있다.

잠시 배낭을 정리하고 산행을 마무리하는데 차량 통행이 뜸한 비티고개 도로 옆 능선에 이제 막 새순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옻순들이 보여 한주먹 따서 애마에 실고 시골집으로 향한다.

남아 있는 구간은 언제 다시 올지 기약이 없지만 아마도 날씨가 시원해지는 가을이나 겨울에 다시 들려 마무리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을 해 본다.

 

시골집으로 돌아 와 세차하고 부모님 산소를 다녀 와 돌아가시기 전 자식들이 시골로 내려오면 좋아하는 엄나무와 옻순을 마음껏 따 먹으라며 부모님이 시골집 주위에 심어 놓은 옻나무와 엄나무에서 옆지기와 함께 연한 새순들을 따 정리하고 쑥과 모싯잎을 따다 보니 매형과 사촌 형님들이 도착을 해 남아 있는 옻순과 엄나무 순들을 정리한다.

그렇게 많은 새순을 따고 시골집을 정리한 다음 모든 가족들이 모여있는 운곡면 송조농원에 옆지기를 내려 놓고 초등학교 동창들이 모여 있는 송방리로 들어가 이슬이 한잔 나누며 추억을 만들고 새로운 집행부를 구성해 노래방으로 향한다. 

어렵게 동창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늦게 송조농원으로 돌아가니 사촌형님들이 아직도 술잔을 기울이고 있어 동참하고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에 일어나 그곳 송조농원 뒷편으로 올라 아름다운 농촌 풍경을 사진에 담아 본다.

이 산객도 고향에 내려가 이번에 처음 들려 본 송조농원인데 송조농원은 충남의 명산 칠갑산을 따라 형성된 산지를 비집고 들어 앉은 마을 운곡면 위라리에서 흑염소 사육을 해오고 있으며 주위의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오염되지 않은 자연 속에서 자라나는 염소를 소비자 여러분들께 제공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농촌형 휴식 공간이다.

하루 세끼를 차려주고 숙박까지 포함하여 한사람당 6만원에 제공을 하는데 최소인원은 12명으로 그 이상 한명씩 추가될 때 마다 4만원의 추가 요금이 책정되는 시스템이다.

식사 때에만 정확하게 필요한 식사와 염소고기가 제공되지만 식사 시간이 지나면 늦게 도착을 하더라도 특별히 선 주문을 해 놓지 않으면 먹기가 어려워 여자분들은 대만족하였지만 이슬이를 좋아하는 남자들은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안주가 없어 조금은 아쉬움을 남겼던 송조농원이었다. 

이렇게 하루에 세가지 일을 모두 무탈하게 마치고 일요일 오전 일찍 서울로 귀가를 해 점심 때부터는 또 다른 고등학교 친구들 모임에 참석한 후 귀가하니 이틀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훌쩍 지나가 버렸다.

 

내일은 다시 산친구들과 수원에서 간단히 칠보산 산행 후 홍어를 먹기로 하였으니 기대를 하면서 하루를 마감해 본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20170429 봉수지맥2 숫고개-비티고개.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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