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전라남도 완도군 일대
날자 : 2015년 03월 14일(토요일)과 15일(일요일)
날씨 : 맑고 화창한 겨울과 봄의 경계에 있었던 계절의 날씨
여행인원 : 총 6명 (장인어른, 장모님, 칠갑산, 옆지기, 딸, 군인인 아들)
일정 : 03월 14일 08:00 대전 처갓집에서 출발
11:20 완도대교 도착
11:40 전라남도 완도군 군부대 도착 후 아들 면외 및 외박
12:20 완도읍 음식특화거리 내 일억조 식당에서 전복 물회로 점심 식사
13:30 빙그레 모텔에 숙박 예약
14:20 완도읍 대신리 해신청해포구세트장 방문
16:15 장도 청해진유적지 방문
18:20 완도읍 학림 회센타에서 저녁식사
23:00 칠갑산 가족 4명만 치맥으로 하루 마감
03월 15일 05: 기상
06:10 빙그레 모텔 출발
06:30 완도 5개봉 종주 들머리인 대구리 도착 후 산행 준비
06:39 대구리 대구미마을에서 산행 시작
11:13 완도 군외면 불목리 불목교 청해진북로에서 완도 5개봉 종주 마무리
12:25 완도타워 방문
13:10 다도해 일출공원
14:00 완도읍 한우애 한돈애 식당에서 점심식사
16:00 군인인 아들을 완도버스터미널에서 작별인사 (선임과 만나 복귀 약속)
19:40 대전 처갓집 도착 후 식당에서 된장국으로 저녁식사
21:00 대전 출발
23:00 서울 집 도착 후 아들 외박과 가족여행 마감
완도읍 청해진로에 있는 해상왕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고 중국과 신라 및 일본을 잇는 삼각무역을 펼쳤던 우리나라 최초의 무역전진기지이자 군사요충지를 둘러보며 역사를 배웠던 시간들
완도읍 대신리의 해신청해포구세트장을 둘러보고 해상왕 장보고 대사가 828년 청해진을 설치하고 무역과 군사 요충지로 이용했던 장도를 둘러보기 위해 잠시 들려 본다.
장좌리 앞 바다에 전복을 엎어놓은 듯 둥글넓적한 섬 장도(일명 장군섬)가 있는데 마을에서 장도까지의 거리는 약 180미터 쯤 되고 하루 두 차례씩 썰물 때는 바닥이 드러나 걸어갈 수 있다.
이곳은 통일신라시대의 유명한 무장 장보고 장군과 그가 이룩한 청해진의 유적지인데 장보고 장군은 이곳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여 삼해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신라와 일본 및 당나라 3국의 해상교역에서 신라가 주도권을 장악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당시의 유적으로 장도에 외성과 내성이 있었다고 전하며 현재 유적 성역화사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당시 화려했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기와와 토기 등 여러 유적과 유물이 장도를 중심으로 완도의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물이 빠졌을 때는 장도 남쪽 갯벌에서 원래 청해진을 방비하기 위해 굵은 통나무를 섬 둘레에 박아놓았던 목책의 흔적이 드러난다.
유적으로는 청해진성, 와당편 다수, 토기편, 사당, 법화사지터 등이 있으며 장도의 남쪽과 북서쪽 해안에는 약 1000여개의 직경 40에서 80센티미터의 목책이 남아있다.
섬 중앙에 직경 1미터와 두께 30센티미터의 맷돌이 하나 남아 있는데 그 모양이 중국에서 발견된 것과 비슷하며 장좌리 뒤쪽 상황봉 기슭에 다섯 계단으로 여러 채의 큰 건물이 있었던 흔적인 법화사지가 있다.
청해진
청해진은 신라 흥덕왕 3년(828년) 장보고의 청에 따라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군 장도에 설치하였던 진으로 초기에는 해적을 방비하기 위한 군사거점으로서 설치되었으며 이후 해상무역의 주요 거점으로서 경제적으로도 번영을 누렸다.
장보고는 원래 신라의 해안 지역 출신으로 일찍이 친구 정년과 함께 당으로 건너가 서주의 무령군중소장을 지냈으며 신라로 돌아와서는 당의 해적들이 신라 주민을 잡아다 노비로 팔고 있는 실상을 보고하면서 해적을 소탕하기 위한 군사거점으로서 청해진을 설치하도록 허락해줄 것을 왕에게 청했다.
왕은 이를 수락하여 흥덕왕 3년(828년) 4월 장보고를 청해진대사로 임명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장보고가 세운 청해진이 신라 바닷길의 요충지로 다른 이름은 조음도이며 삼국사기가 편찬될 당시에 이미 지금의 이름과 같은 완도라 불리던 섬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완도는 조선시대에는 전라도 해남현과 강진현에 나누어 속했다.
청해진을 거점으로 장보고는 1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해안에 출몰하던 해적을 소탕하는 한편 중국과 일본 간의 해상무역에도 개입해 부를 쌓았으며 이로써 청해진은 해상무역의 거점 항구로서 성장하여 바닷길의 요충이 되었고 재력에 겸해 무력까지 갖추고 신라 정계의 왕위 다툼에도 개입해 무력으로 민애왕을 죽이고 산무왕을 옹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딸을 문성왕의 차비로 들이려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보고는 조정에서 보낸 자객 염장에게 살해되었고 문성왕 13년(851년) 청해진은 폐지되고 그곳에 살던 주민들은 벽골군으로 옮겼다.
삼국사기 권제32 잡지 제1 제사조에는 신라에서 중사로서 제사지내던 곳의 하나로서 청해진이 언급되어 있다.
한국의 해양사를 연구한 동국대학교 윤명철 교수는 고대 신라와 당을 오가는 항로로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루트를 지적하였는데 첫번째가 황해중부 횡단항로로서 산동반도의 등주와 적산 및 밀주 등지에서 출발하여 150여 Km를 횡단해 한반도의 백령도와 덕적도 등 경기도 연안에 도착해 여기서 다시 남쪽으로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영산강 하구권의 고이도나 무주 같은 항구나 주변 해역 등을 거치는 루트이고 두번째 루트는 황해남부 사단항로로서 지금의 전라남도 등지의 해안에서 출발해 사선으로 비껴서 항해하여 양쯔강 하구의 장쑤성과 ) 저장성 및 항저우 그리고 밍저우(닝보)와 그 외곽의 저우산 군도 등의 중국 강남 지역 항구로 도달하는 루트(역루트도 가능하다)이며 마지막 루트는 동중국해 사단항로로서 절강 이남 지역을 출발하여 지금의 동중국해와 제주도 해역, 흑산도, 황해 남부를 거쳐 신라로 도달하는 루트 등이 있다.
이들 항로에서 중국측 선착지인 산동 반도의 등주와 밀주 및 양자강 하구의 쑤저우나 양저우 및 항저우와 밍저우 등지에는 당에 체류하는 신라인들이 모여사는 신라방(일종의 신라인 자치주)이 존재했으며 당시의 항해 기술의 한계 때문에서라도 가능한 육지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연근해 항로를 이용해야 했던 실정상 당으로 신라뿐 아니라 당과 일본의 항로 또한 한반도 남부 해안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과정에서 서해에서 남해로 돌아가는 지점에 청해진이 있었다.
청해진이 위치한 완도 일대는 남북 연근해항로가 통과하는 곳으로 한반도에서는 남해와 서해가 만나는 지점이자 중국 강남 지역에서 한반도로 북상하는 항로가 만나는 곳이기도 했다.
한반도 서남해의 리아스식 해안과 밀접한 섬임에도 불구하고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지 않은 데다 일단 섬 내부로 들어오면 파도도 일지 않고 부두에 가까운 곳에 산이 이어져 있어 방어거점으로서도 유리했으며 강진과 해남 등의 배후도시가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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