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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맥산행(완료)/낙남정맥(완료)

낙남정맥 제5구간 계리재에서 추계재까지 산행 후기

by 칠갑산 사랑 2011.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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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경상남도 사천시와 진주시 그리고 고성군의 낙남정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 2011년 12월 17일과 18일 (무박 2일 일요 산행)

산행날씨 : 하루 종일 맑고 화창하였으나 새벽엔 약간 추웠던 날씨

산행온도 : 영하 01도에서 영상 10도

산행인원 : B 산악회 32명 따라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계리재(3번 지방도로)-무명봉-진주축협생축사업장(3번 지방도로)-단감단지 그물망-밤나무 단지(전기위험 경고판)-170.1봉-24번 송전탑-봉전고개(6번 지방도로)-무선산 갈림 이정표(무선산 0.10 Km)-무선산(277.5봉)-무선산 갈림 삼거리 복귀-274봉-200봉-돌장고개(1002번 지방도로)-지하통로(대진고속도로 통과)-채석장 입구-이정표(부련이재 10.37 Km)-191봉-밤나무 단지-임도삼거리-밤나무 단지-능선 소나무 군락지-단감나무 단지-임도-소나무 군락지-단감나무 단지-일출 감상-능선 소나무 군락-임도-소나무와 잡목지대 통과-임도삼거리-아침식사-임도 타고 진행-능선 진입-삼거리 이정표(부련이재 6.87 Km)-357봉-310봉 헬기장-벌목지대 통과-삼베마을 주차장 갈림 이정표(봉대산 정상 3.0 Km)-바위 및 벌목지대-261봉-안부-소나무 군락지-객숙치-이정표(부련이재 2.67 Km)-안부 성황당 나무-나무계단-헬기장-봉대산(409봉)-헬기장-이정표(삼베마을 주차장 3.5 Km)-51번 송전탑-낙남정맥등산안내도(사천시)-52번 송전탑-경주김씨묘지-양전산(311봉)-경산전씨묘지-부련이재(5번 지방도로)-밀양박씨묘지-문고개(시멘트 임도)-농장 그물망지대-백운산(391봉)-426봉-46번 송전탑-395봉-불난지역-380봉-야베스 농장 울타리-야베스 농장 입구 시멘트 임도-비포장 임도-백곡고개(포장도로와 시멘트 임도 도로)-천황산(342.5봉)-370봉-추계재(1016번 지방도로)-산행종료

산행거리 : 약 24.00 Km (접속구간 00.00 Km)

산행시간 : 사진 찍으며 조금은 빡빡하게 10시간 40분 (04시 00분부터 14시 40분까지)

 

낙남정맥이란?

지리산 세석평전을 품고 있는 영신봉에서 남쪽으로 갈라져 내려온 마루금이 삼신봉에서 외삼신봉을 지나 묵계치와 고운재를 거쳐 옥산까지의 산줄기는 서쪽 섬진강으로  그 물줄기를 가르고 있으나 이후 산줄기는 인위적으로 잘라 만든 진양호 물이 사천만으로 흘러들게 만든 거대한 가화강을 지나 백운산 대곡산 무량산 여항산 서북산 광려산 대산 무학산 천주산 봉림산 대암산 용제봉 김해의 신어산을 거쳐 낙동강하구인 김해시 매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그 긴 줄기를 낙동강에 묻는 약 224 Km의 산줄기를 낙남정맥이라 한다.

이 산줄기에는 특이하게도 인공 호수와 강줄기가 마루금을 가르고 있기에 피치 못하게 가화강을 건너야 하는 산자분수령과는 다른 산행이 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림같은 마루금을 타고 동네 뒷산 오르듯 즐겼던 낙남에서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 후기를 참고한 후 난해하고 어려운 정맥 산행을 진행해 무탈하게 맥 잇기 산행을 다녀왔기에 단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정맥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이 지나고 있다.

일생 일대의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약 4개월을 눈코 뜰새 없이 보내고 드디어 이번 주 그 결론이 나는 기간이다.

토요일까지 독일 친구 및 네덜란드 친구들과 장문의 Mail을 보내고 장시간의 전화로 확인하며 일을 마치고 돌아 오니 긴장이 풀리며 몸이 아파오고 있다.

일요일 집에서 쉬면 더욱 몸이 아파 올 것도 걱정되고 내일 이 산객이 만든 산악회의 남한산성 송년 산행에서의 떠들며 웃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기에 몸을 혹사 할 수 있는 낙남정맥에 올라 모든 일과 사업을 잠시 잊고 자연의 품에 안기기로 한다.

갑작스런 결정에 밤 늦게 옆지기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이것 저것 준비해 주며 건강하게 잘 다녀 오라 당부하는 모습에 힘들지만 용기를 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오늘도 어둠속에 돌장고개를 지나 대진고속도로를 건너 가슴 아픈 채석장을 내려다 보며 무한의 책임을 느끼는 시간이다.

여명의 빛을 받아 어렵게 잘려 나간 산줄기를 내려다 보는 가슴이 내려 앉고 다시 밤나무 단지를 지나 감나무 과수원으로 들어서니 등로 좌측 저 멀리 하루의 해가 동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이 산객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하지만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함을 알기에 능선 속 소나무 군락지를 지나니 다시 단감나무 과수원이 나타나고 그곳에서 동쪽 산줄기 저 멀리 연화산과 학남산 산봉우리를 타고 둥그런 아침 햇살이 반갑게 떠 오른다.

너무나 찬란한 빛이기에 가슴속에 남아 있던 작은 일상에서의 고민과 걱정까지 날려 버리고 이 시간 그저 자연과 동화되어 그속에 몰입되는 자신을 바라본다.

감동이 아닐 수 없으며 일상에서의 찌들었던 심신을 정화시키는 시간이기도 하다.

 

 

피곤하였던지 차에 올라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 모든 종주대들이 자리를 잡자마자 꿈나라로 향하고 산청 휴게소에서 음료수 한변 사 배낭에 넣은 후 다시 자다깨다를 반복하니 새벽 3시 40여분에 오늘 산행 들머리인 계리재에 도착을 해 산행 준비를 하는데 생각보다 춥지 않아  이곳이 남쪽 지방임을 다시 한번 느끼는 시간이기도 하다.

3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계리재는 정촌면 소곡리와 문산읍 두산리를 이어주는 고갯마루로서 옛날부터 풍수설에 의하여 전해진 말에 의하면 닭과 삵쾡이가 이쪽 저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계리재가 속한 두산리는 이 지방의 방언으로 두메실이라 부르는데 두메실이란 산으로 둘러 싸여 있다고 불리워진 이름으로 본시 동물곡동에 연유하여 동물이라 하다가 1995년에 두산리로 개칭하였으며 그 동물리 동쪽에 있는 마을을 계리 또는 제리재라고도 부렀다.

크고 둥근 바위가 있어 나무꾼의 놀이터를 이루며 소음마을과 소통되는 길이 있고 옛날에 무슨 소리가 나는 골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마을로서 1914년 이래로 소음이라 하다가 1995년 계리로 개칭되었다고 전해지는 마을이다.

어둠이 세상을 삼켜버린 조용한 시간인 새벽 4시에 산행 준비 후 드디어 나무계단을 타고 먼 여행을 떠나는 순간이다.

 

 

나무계단을 타고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오르니 아무 표식도 없는 무명봉에 도착하는데 어둠속에서도 등로에는 2년전 강력한 태풍인 곤파스의 영향으로 뿌리채 뽑혀 쓰러진 많은 나무들이 눈에 들어 오며 자연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무언으로 알려주고 있다.

무명봉을 지나 다시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오니 등로 좌측으로 녹슨 철조망이 쳐져 있지만 그 철조망 위로 잡풀들이 무성하게 자랐다 말라 죽은 앙상한 모습들이 눈에 들어 온다.

잠시 더 내려가니 평이한 등로와 이어지더니 곧이어 방금 전 산행을 시작한 3번 지방도로로 내려 서서 그 도로를 타고 우측으로 내려가니 도로 우측에 진주축협생축사업장 입간판이 서 있고 그안에 잠들어 있던 강아지 한마리가 종주대를 향해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울부짖고 있다.

곤하게 잠들어 있을 농촌의 민초들에게 괜시리 미안한 마음에 발걸음이 빨라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3번 지방도로를 타고 진주축협생축사업장 입간판을 지나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도로가 좌측으로 크게 휘어지는 지점 우측에 전봇대 하나가 서 있고 그곳에서 등로는 우측 도랑을 건너 능선으로 이어지고 있다.

잠시 가파른 절개지를 타고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그물망이 쳐져 있고 한동안 그 그물망과 나란히 걸어 오르게 된다. 

그렇게 오르니 어느새 그물망은 등로 우측 저 멀리 달아나고 곧이어 밤나무 과수원이 나타나더니 등로 좌측으로 녹슨 철사줄이 줄지어 있고 그곳에 전기위험이란 녹슨 경고판이 서 있는데 너무나 오래된 경고문이라 누가 믿어 줄까 의심이 가는 그런 경고문이였다.

등로 우측 멀리에는

사천시 정촌면 관봉리의 고미마을의 불빛이 반짝이는데 이 마을의 옛 이름은 산꼬리가 아홉등으로 이루어져 구미골이라 부르다가 정자나무가 여러나무 있어서 길손들의 휴식처로 더없는 곳이기에 계미골이라고 고쳐서 불려진 뒤 아름다운 골이라 하여 고미라고 부르고 있다는 마을이다.

 

 

잠시 더 밤나무 과수원을 타고 오르니 아무 표시도 없는 170.1봉을 지나 평이한 등로와 이어지고 간간히 보이는 나즈막한 봉분을 가지고 있는 묘지들을 지나며 166봉을 넘는다.

다시 별 특이한 것이 없는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등로 우측으로는 관봉리의 불빛이 흔들리고 등로 좌측으로는 인담리의 민가 불빛들이 찬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등로 우측의 사천시 정촌면 관봉리의 봉동마을은 앞산이 봉황새를 닮았다하여 새밭골이란 안동네와 앞산너머 봉새가 지나왔다 하여 묵은 새밭골이 있다.

새밭골에는 봉새를 닮은 암 수의 형상석이 있고 숫봉새는 암봉새를 따라가는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경운기 길이 뚫린 후에 숫봉새와 암봉새의 머리가 없어져 버렸다는 마을이며 등로 좌측의 인담리(여물동) 마을은 좋은 못이 있어 인담이라 하는데 이 곳에는 저수지와 소류지가 많은 특징이 있는 마을이다.

그렇게 흔들리는 희미한 불빛을 친구 삼아 몸을 혹사시키며 사진을 찍다보니 빛이 적은 어둠으로 인해 이 산객 바로 앞서 진행하는 산우의 뒷태만 사진으로 남겨져 있다.

그렇게 낙엽 깔린 등로도 지나고 억새풀이 말라 흔들리는 마루금도 따라 걷다 보니 225봉을 넘어 24번 송전탑이 나타나고 곧이어 나무계단으로 된 내리막 등로로 연결되어 있다.

 .

 

나무 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정촌면과 금곡면을 이어주는 6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봉전고개에 내려 선다.

어둠속이기에 그저 도로 표지판과 낙남정맥 이정표를 담으며 이곳이 단지 봉전고개임을 느끼고 후미를 기다려 본다.

이 고개 우측 관봉리에는 봉전마을이 있는데 그 봉전마을에서 이 봉전고개가 생겼다는 설이 유력해 보인다.

봉전마을은 무선산 북쪽 기슭에 자리잡은 마을로서 뒷산은 학이 밭에 내려앉는 형태이기 때문에 봉전이라 부르는데 우백호 등은 학등이고 좌청룡은 무선산이다.
우백호 등밑에 용청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석탑만 남아있고 없어졌고 좌청룡인 무선산 중턱은 진터라고 전해왔는데 지금은 성터만 남아 있는 곳이다.

무선산 밑 중턱에 용바위가 있는데 용이 등천했다고 하는 굴이 있기도 하다.

이곳 봉전고개 도로 위에서 후미를 기다리며 한동안 흘렸던 땀이 식으니 추위가 밀려들고 한기를 느낄쯤 다시 나무 계단을 타고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봉전고개에서 다시 배낭메고 나무계단을 타고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한기가 사라지며 조금씩 몸이 더워지기 시작한다.

몇기의 묘지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을 지나 무명봉으로 올랐다 우측으로 꺽어 진행하니 다시 평이한 마루금으로 이어져 있다.

그렇게 어둠속 등로를 찾아 걷다보니 어느새 무선산 갈림 삼거리에 도착해 서 있는 이정표를 살펴보니 낙남정맥 마루금은 등로 좌측으로 꺽여져 진행되지만 우측으로 100미터 전방에 무선산 정상이 있다고 하니 다녀 오기로 한다.

이곳 무선산에 관한 자료를 찾아 보지만 찾지를 못하고 대신 여수쪽 무선산을 찾아 보니 그곳은 신선이 춤을 추던 산이라 무선산이라는데 이곳도 같은 의미의 산인지 아쉬운 시간이다.

표고는 277.5미터에 불과하지만 이곳 구간에서는 꽤나 높은 산에 속하며 정상에 서면 멀리 지리산 천왕봉이 한 눈에 다가오고 두량 저수지가 발 아래로 보여 가히 신선이 춤추고 놀 만한 풍광이 펼쳐진다라고 알았는데 오늘 이 산객에게는 그저 어둠속 스테인레스 스틸로 된 정상 안내판 하나가 전부이다.

어둠속에 어렵게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무선산 갈림 삼거리로 뒤돌아 내려 와 이제는 등로 우측으로 진행하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간다.

 

 

이제 지루하다 할 정도로 큰 오르내림도 없고 별다른 특징도 없는 그저 그런 평이한 등로를 타고 한동안 진행을 해 본다.

나즈막한 봉분들이 눈에 띄는 묘지들을 따라 274봉을 넘어 좌측으로 꺽여지는 등로를 돌아 185봉도 넘고 우측으로 꺽어 계속 진행하니 등로 우측으로 커다란 차량 괴음이 들리며 대진고속도로가 가깝게 자리하고 있음을 직감한다.

조금 더 진행 해 200봉을 넘어 좌측으로 꺽여 진행하다 다시 우측으로 꺽어 내려가니 김해김씨 묘역을 지나 1002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돌장고개에 도착해 도로를 타고 우측으로 진행하며 도로 좌측으로 내려다 보이는 대진고속도로를 따라 조금 내려가 본다.

 

도로 우측에는 민가가 한채 어둠속에 희미하게 보이는데 그 안에 있던 강아지 한마리가 또 다시 고요한 밤을 깨우며 짖어댄다.

 

그곳을 지나 진행하니 1002번 지방도로는 우측의 직진으로 달아나고 종주대가 건너야 할 지하통로는 도로 좌측으로 시멘트 임도로 이어져 있다.

돌장고개는 진주와 사천에서 고성과 통영을 가장 단거리로 이어주는 나름 큰 고개인데 이곳 출신의 산꾼 한분이 이곳의 옛 지명이 돌장빼이 이며  예전에 돌장승이 있었다고 한 글을 본적이 있다. 

사실 이 고개는 확실한 지명 유래비를 갖고 있는 고개이기도 하다.

이번에 내려온 돌장고개에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79호로 지정된 두문리 경계비석이 있는데 이는 진주시(옛 진양군)와 사천시(옛 사천군)의 경계석으로 추정된다는데 어둠속에 그 경계석을 찾아 봤지만 찾지 못해 사진 한장 남기지 못한 아쉬움이 있는 고개이다.

그 비문에는 천태산의 마구할미(마고할미)가 물레질을 하려고 바위3개를 갖고 사천군 큰골(지금의 두량 즉 서쪽) 방향에서 다가 하나는 사천군 구암숲에 또 하나는 고성군 영오에 놓고 남은 하나는 지금의 자리에 꽂았다는 전설이 적혀 있다고 하는데 직접 확인을 못해 안타까운 순간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마고할매가 바위를 지고 가다 놓고 갔는데 그곳이 고개이고 그래서 옛날에는 돌장빼이라고 했다는 고개 유래가 남아 있는 곳이다.

 

 

지하통로를 통해 대전진주 또는 대전 통영간 고속도로를 건넌 후 다시 고속도로를 좌측에 두고 좌측의 시멘트 임도를 타고 진행한다.

조금 더 진행하니 산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린 채석장 입구가 나타나고 그 입구를 지나자마자 콘테이너 박스 하나가 서 있다.

이제 완만한 오르막 시멘트 임도를 타고 오르니 고속도로 반대쪽 등로와 일직선이 되는 지점인 고갯마루에 우측 능선쪽으로 이정표 하나가 서 있다.

이제 부련이고개까지의 거리가 10.37 Km 가 남았다는 이정표가 있는 그곳을 통해 우측 능선으로 오르며 계속 맥 잇기 산행은 이어지고 있다.

  

 

잠시 능선으로 오르니 가파른 오르막 된비알이 이어지고 등로 주위에는 제법 굵은 편백나무들이 보인다.

잠시 더 땀방울을 흘리며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오르니 갑자기 묘지가 나타나고 그 좌측 나뭇가지에 장태규증조모묘란 코팅지에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데 이런 안내판보다 묘지 관리에 좀 더 신경을 썼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곳을 지나 계속 오르니 활엽수 낙엽이 폭신한 등로가 이어지다가 편백나무 옆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다 폐허처럼 보이는 임도를 만나 191봉 정상에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꽤 높은 절개지가 나타나고 그 아래 산 하나가 사라진 흉물스런 채석장이 나타나고 등로 좌측 동녘 하늘에선 이제 조금씩 하루의 여명이 밝아오며 어둠을 몰아내려는 처절한 용트림이 일어 나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채석장이라 해도 사 후 처리나 잘 해 줬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잠시 내려다 보고 출발한다.

 

 

잠시 더 진행하며 내려가니 밤나무 과수원이 나타나고 그곳 나뭇가지가 없는 곳에서 등로 좌측의 산줄기를 바라보니 붉게 타오르듯 밝아오는 하늘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저 멀리 연화산과 학남산 줄기라 생각되는 산봉우리 사이로 아름답게 하늘을 물들이며 일출의 산고를 겪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인 새벽이다.

요즈음 자주 만나는 일출을 보며 그 일출의 황홀경도 좋지만 그 황홀한 일출을 기다리며 바라보는 불타는 듯이 변하는 하늘의 빛이 더 환상의 풍경임을 가끔 느끼는 시간들이다.

그저 이렇게 바라만 봐도 가슴 두근거리는 황홀한 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멋진 새벽을 느끼며 천천히 밤나무 밭을 걸어 내려 가니 등로 우측으로 임도가 나란히 하고 그 임도로 내려섰다 다시 밤나무 단지 우측 가장자리를 타고 봉우리 꼭대기로 향한다.

잠시 오르다 등로 좌측을 내려다 보니 여명의 빛을 받아 제 모습을 드러 낸 두문리 마을이 아름답게 보이고 저 멀리 연화봉과 어산 그리고 금태산등의 산줄기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바로 발 아래 보이는 두문리 마을의 두문이란 이름은 드물, 드리무, 입물, 더문, 도무리, 두무리라는 말로 책에서 전하여 오는 점으로 보아 두문리라는 이름이 만들어 진데는 사연이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영현면에서 흘러드는 도산천과 영오면에서 흘러드는 군산천이 합하여 지는 지점인 것으로 보아 도산천의 도와 군산천의 무리를 합하여 도무리가 두문리의 유래인 듯도 하고 현재 더문골이란 곳이 옛날 두문리 마을이었는데 세월이 흘러 물이 잘 들어오지 않자 차차 낮은 곳으로 옮겨왔다는 것으로 보아서 드무리라는 말도 일리가 있는 듯하다.

책에 들입자와 말물자로 하여 입물이란 이름도 있는 것으로 보아 물이 들지 말라는 뜻이 있는 듯도 하다.

또 더문이란 말은 드물다는 경상도의 벙언인 것으로 보아 물이 잘 들어오는 일이 드물어서 사람 살기가 좋다는 뜻도 되므로 결국 도무리 또는 두무리로 되었다가 훗날 글을 잘하는 사람이 들어와 살면서 음이 비슷한 두문리로 바꾸어 한자의 두의 뜻은 많다 좋다 대단하다는 뜻이 있으므로 글이 좋다 또는 글을 잘한다는 의미로 두문리로 바뀌어 온 것으로 추측된다.

또 두문리는 삼면이 강으로 막히어 있어 막을 두와 면할면을 써서 두면으로 부르게 되고 두면은 마을을 보호한다와 액을 면하게 한다는 등의 뜻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대문이 없는 마을로서 약 백년 전에 학문의 열기가 높으면 선비와 벼슬 할 사람이 많이 난다고 하여 두문리라 하여 오늘에 이른다.

약 오백년 전부터 김해김씨가 정착하였다는 설이 있으며 현재는 김해김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으며 이곳 주변의 마루금에 많은 김해김씨 묘지를 만날 수 있다.

 

 

밤나무 과수원을 지나 능선으로 들어가니 소나무 군락지가 잠시 나타나더니 금새 단감나무 과수원으로 들어 선다.

등로 좌측으로는 더욱 강렬해 진 동녘 하늘이 금새 불이라도 낼 듯 타오르고 있다.

고민하며 잠시 기다려 두문리 마을과 불타 오르는 동녘 하늘을 바라보다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듯 하여 빠르게 단감나무 과수원을 통과 해 능선으로 들어 간다.

그곳도 역시 멋진 소나무 군락지가 이어지더니 다시 한번 단감나무 과수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두번째 만난 단감나무 과수원에서 잠시 배낭 내려 놓고 불게 타오르는 동녘 하늘에 초점을 맞추고 기다려 본다.

동녘 하늘의 선유산과 연화봉 그리고 연화산과 어산 봉우리 사이를 뚫고 또 하루의 찬란한 일출이 시작되고 있는 현장이다. 

365일 중 하루라고 생각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렇게 고되게 산상에 올라 누구보다 먼저 맞이하는 아침해는 분명 가슴속에 많은 상념을 남기곤 한다.

그것이 설령 365일 중 평범한 하루라 해도 말이다.

 

 

그렇게 한자리에 고정되어 시린 손끝을 호호 불며 수없이 많은 사진들을 남겨 본다.

손톱처럼 초승달의 모양이 점점 커지며 반달을 넘어 이제 둥그런 쟁반달처럼 아니 보름달처럼 산줄기를 뚫고 불쑥 솟아 오른 아침해를 바라보며 잠시 많은 상념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다.

그저 하루 하루 지나는 계절은 변함없이 시간에 맞춰 흘러가고 있는데 왜 그리 조바심을 내며 욕심을 털쳐버리지 못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죽을 듯 바빴던 시간들도 잠시 멀리 떨어져 바라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그렇게 두문리 마을 위 단감나무 과수원에서 너무나 황홀했던 일출을 맞이한 후 천천히 발길 돌려 능선으로 들어가니 이리저리 제멋대로 자란듯하면서도 질서있게 커가는 소나무 군락지가 반기는가 싶더니 등로 우측으로 비포장 임도가 따라 온다.

그곳을 지나 계속 진행하니 등로 우측으로 너무나 아름다운 사천시 금곡리 마을이 펼쳐져 있고 자료를 찾아 보니 본래 북면지역으로 거무실 또는 금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금곡이라 해서 읍내면에 편입되었으며 일설로는 금송아지가 태어났다고 하여 지어진 지명이라고 전해지는 마을이다.

이 산객이 살았던 고향도 이곳 마을과 비슷하기에 한동안 진행하지 못하고 옛 추억에 젖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다시 비포장 임도를 등로 우측에 두고 진행하니 260봉 정상으로 향하는 완만한 등로가 이어지고 계속되는 소나무 군락지를 따라 편안한 산행을 즐겨 본다.

봉분이 넓은 묘지가 있는 정상을 넘어 내려가니 다시 더 빽빽한 소나무 군락지가 펼쳐져 있고 술래잡기 하듯 그 소나무 숲을 지나 내려가니 저 멀리 임도 안부에 종주대들이 모여 아침 식사를 즐기는 모습이 들어 온다.

그곳에 내려 가 임도 삼거리에서 따뜻한 국물과 이슬이 한잔 나누니 몸이 따뜻해 지며 사람 사는 정을 느끼는 시간이다.

어찌보면 왜 이런 청승을 떨며 어렵게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지 자신도 모르는 시간이지만 지나고 나면 모두 고운 추억으로 남겨지는 인생의 한 장면이니 참고 견뎌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임도 삼거리에서 한동안 시간 보내며 아침 식사를 즐긴 후 후미를 기다려 보지만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못하고 비포장 임도를 타고 좌측 오르막으로 올라 본다.

한동안 넓은 임도를 타고 오르는 사이 아침 햇살이 제법 올라 소나무 사이로 따스하게 바추고 그 온기를 타고 오르니 마루금은 고갯마루에서 비포장 임도를 좌측 직진의 방향으로 보내고 우측으로 90도 꺽어 능선으로 이어지고 있다.

맛난 아침 식사 후 오르는 등로는 늘 왜이리 힘들고 고통을 수반하는지 ...

 

 

능선으로 들어서부터 제일 후미로 쳐져 천천히 자연을 음미하며 걸어 본다.

소나무 군락지를 통해 동쪽으로 이어가던 등로가 이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연결되다가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바꿔 180도 다른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곳에 우측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버리고 좌측 사면으로 난 정맥 마루금을 타고 진행하니 길목에 부련이재까지 6.87 Km 남았다는 이정표가 반긴다.

이제부터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 357봉으로 향하는 길목에 도착을 한 것이다.

 

 

다시 계속 등로를 이어가니 완만한 오르막 등로가 이어지더니 돌들로 담을 쌓듯 성터인지 아니면 집터였을 법한 장소들이 나타난다.

무슨 사연이 있을 법 한데 자료를 찾아 보니 그 옛날 .6.25 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이란 자료만 잠깐 찾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낙동전선으로 6.25 전쟁이 최고조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중 한곳이란 사실을 알게 되였다.

어렵게 드디어 357봉에 올라 특이한 것이 없기에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진행해 본다.

 

 

큰 숨 한번 들이 쉬고 다시 진행하던 등로를 타고 계속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간다.

그림같은 소나무 숲이 이어지고 간간히 벌목된 등로를 타고 진행하는 산객의 마음은 일상에서 찌들었던 심신이 치유되는 그런 기분으로 걸어가는 발길은 날아 갈듯 가뿐하다. 

낙엽이 두껍게 깔려있어 더욱 포근한 등로를 타고 전진하니 금새 310봉 헬기장에 도착해 잠시 쉬고 있던 종주대와 함께 단체 사진 한장 남기고 출발한다.

날씨가 춥기에 오늘 처음으로 음료수로 목 축임을 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다시 너무나 평이한 등로를 타고 여유롭게 걸어가지만 역시나 큰 프로젝트가 늘 마음에 걸려 편안하지 못하다.

다시 그림같이 펼쳐진 아름다운 소나무 숲속을 산보하듯 걸어가니 간간히 잘 벌목된 소나무 군락지가 나타나며 환상의 등로를 열어 주고 있다.

다시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다 보니 등로 중간에 상베마을 주차장 하산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고 그곳에 이정표 하나가 서 있다.

1914년 진주군 성을산면 장지동과 죽곡동 및 성산동 일부로서 죽곡리라 하였는데 죽곡리는 본래 성을산면의 지역으로서 대나무가 많으므로 죽고 또는 대시이라 하였다 한다.

이곳 진주시 금곡면 죽곡리는 삼베길쌈으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고 있는 마을이 있다.

바로 경상남도 진주의 한 마을인 죽곡마을은 10여 가구가 길쌈전통을 여전히 이어가고 있다.

400년 삼베길쌈을 지켜온 아낙네의 손길을 남아 있는 삼베마을 옆으로 이어진 마루금을 타고 또 다른 역사를 배우고 있는 중이다.

단년생 식물인 삼은 봄에 씨를 뿌린다.

7월에서 9월에 2에서 2.5미터 정도 자라면 대나무로 만든 칼인 삼칼로 삼잎과 줄기를 쳐서 털어낸다.

단으로 묶은 삼대는 찌어낸 뒤 햇볕에 말렸다가 다시 쪼개진 삼의 머리와 꼬리를 잇는 작업을 한다.

전기다리라는 기구 2개를 이용해 삼줄기를 길게 이어내는데 이빨로 줄기 한쪽을 둘로 갈라 다른 줄기 끝을 허벅지에 대고 새끼 꼬듯 비벼 연결시킨다.

다시 숯불을 피워 노란 치자 물로 베를 멘 뒤 도투마리에 감아 베틀에서 삼베를 짜내야 노랗고 고운 삼베가 완성된다.

죽곡리 삼베길쌈은 1590년대부터 약 400여 년 동안을 이어왔다.

마을은 대나무가 많은 지역이어서 죽곡이라 불렸는데 진주의 동남쪽에 위치한 금곡면은 동으로 고성군, 남서쪽은 사천시와 접하고 있는 마을이다.

이 산객도 어렸을 적 어머님이 바깥 마당에서 길쌈을 메던 추억이 떠 올라 잠시 머물다 진행한다. 

 

 

그 삼베마을 갈림길에 서 있던 이정표에서 종주대원의 사진 한장 남겨 드리고 계속 이어가니 너무나 아름다운 등로가 이어지며 완만한 오르막으로 연결되어 있다.

저 앞에 무거운 배낭을 메고 오르막 등로를 힘들게 오르는 종주대의 모습에서 오늘 산행의 전부를 보는 듯 하다.

힘들게 오르기는 하지만 그림같은 마루금이 펼쳐져 있기에 또 금새 고통은 잊혀지고 아름답고 고운 추억만 한가득 남아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모든 세상사가 지나고 나면 그저 고운 추억으로 채색되어 저장된다는 말이 실감나는 시간이기도 하다.

 

 

다시 등로 우측으로 감곡리 마을들이 그림쳐럼 펼쳐져 있고 잡목 사이로 언듯 드러나는 칼라풀한 지붕들이 산객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

진주시 정동면 자료를 찾아 보니 강원도 양양의 감곡리 마을 유래를 적어 놓았다.

이는 또 무슨 뜻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같은 의미로 옮겨 놓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정리해 본다.

조선 7대 세조가 병을 고치려 강원도 양양 낙산사에 거동했을 때 근처 동천의 물을 마시고 달다고 칭찬해서 이 샘이 있는 마을을 감동골이라 불려왔다고 한다.

그 곳이 지금의 양양읍 감곡리인데 감골, 감실의 감은 보통 달다나 적실과의 감과 관계지어 이름 유래를 말하고들 있지만 대개는 큰마을, 중심마을의 뜻에서 나온 것이다. 감곡은 이곳과 강원도 양양 외에도 충북 음성, 충남 논산, 경북 여주와 영일 등에 깔려 있고 감리는 창녕군 고암면에 있다.
골은 더러 평지 마을에 붙기도 하나 실은 대개 골짜기 마을에 붙는다.

따라서 감실이라고 하면 그 자체가 큰 골짜기를 뜻하지만 그런 곳에 위치한 마을 역시 같은 이름을 얻는다.
이런 과정에서 볼 때 감골, 감실은 감곡, 시동 등의 한자로도 옮겨 갔슴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곳 지명의 유래를 말할 때 가난한 사람들이 이곳 깊은 산골에 들어와 비옥한 토지와 산지를 개간하여 감나무를 많이 심어 생계를 도모하였기 때문에 감실이라 했다는 것은 엉뚱한 지명 유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마을을 생각하며 진행하니 등로 좌측 저 멀리 잡목 사이로 이제부터 올라야 할 봉대산이 우뚝 솟아 제법 고통을 요구하며 땀방울을 흘릴것도 요구하고 있다.


                          

 

다시 예쁘게 벌목된 소나무 군락지를 타고 진행하니 잠시 무아지경에 빠지고 그렇게 걷다보니 등로 우측으로 감곡리 마을이 고요하게 앉아 있다.

참으로 아름답고 멋진 풍경이며 조망이 아닐 수 없다.

이 산객이 어릴적 살았던 시골 고향 같은 풍경이기에 언제 어디에서 만나고 본다해도 질리지 않을 영원한 어머니같은 품이기 때문이다.

감곡리 감곡마을은 복상에서 동쪽으로 들어가면 두갈래 개천이 나오고 북쪽으로 다시 조금 가면 깊은 골짜기가 나오는데 여기가 바로 감곡리 중심마을인 감곡마을이다.

봉대산 주봉에서 비롯된 여러 등성이가 내려오면서 생긴 노싯골, 대아골 등을 이루었고 산골에는 3개의 소류지가 있다.

감곡마을도 약 350여 년 전(1645년경) 연안 차씨와 장흥 마씨 일가가 살다가 떠나고 진주 강씨 청풍공파 일가가 의령에서 들어와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박씨, 정씨, 주씨, 천씨, 손씨, 진씨, 최씨가 입주하여 살고 있는 마을이 되였다.

잠시 서서 그 아름다움을 음미한 후 다시 출발한다.

 

 

잠시 안부를 지나 제법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타고 땀방울 흘리며 올라 본다.

한동안 오르니 잡목이 우거진 등로를 타고 올라 바위들이 산재한 무명봉 정상 부근에 도착해 잠시 숨 돌리고 뒤돌아 보니 그곳에 한폭의 풍경화가 놓여 있다.

저 멀리 돌장고개에서 올라와 357봉의 뾰족봉을 지나 310봉 헬기장이 보이고 그곳에서 이곳 객숙치 근방까지 이어진 올망졸망한 마루금이 참으로 포근하게 다가온다.

그 등로 우측에는 객숙저수지가 파란 물을 가득 가두고 갈수기의 생명줄 역활을 하고 있다.

그저 그림같은 이 조망만으로도 찌들고 고통스러웠던 일상 생활을 잠시 벗어 날 수 있었던 시간이였다.

  

 

그렇게 잠시 바위가 산재한 정상으로 오르니 그곳이 바로 객숙치였다  

객숙치는 일명 객숙재라고도 하는데 대실 남쪽에서 사천군 정동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옛날에 골이 하도 깊고 멀어서 손님이 고개를 넘으려면 자고 넘었다는 데서 생겨난 말이고 이 골을 객숙골이라고도 한다.

이 자료만 보면 방금 전 지나 온 안부가 객숙치라 여겨지는데 지도를 보면 삼각점 표시가 되어 있는 봉우리에 표시가 되어 있어 햇깔리는 지명이며 장소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바라 본 북쪽으로 301봉과 299봉 그리고 시리봉 넘어 저 멀리 고성군의 장군산까지 멋진 산그리메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혹시나 하고 가곡저수지를 찾아 보지만 301봉 산줄기에 막혀 낮은 지역은 전혀 보이지 않는 객숙치 정상이다.

 

 

객숙치 정상을 벗어나 다시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 보니 생각보다 많이 내려가지는 않는다.

이제 소나무 군락지가 끝나고 활엽수가 즐비하게 줄지어 선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말라 버린 활엽수 낙엽이 바스락 거리며 경쾌한 발걸음에 흥을 더해 준다.

그렇게 잠시 내려가니 등로에 부련이재까지 2.67 Km 남았다는 이정표가 서 있고 이제 완만한 내리막 등로로 이어져 있다.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성황당 나무 한그루를 통과하니 이제부터 본격적인 봉대산 오르막 등로로 마루금이 이어지고 있다.

제법 땀방울을 흘리며 오르니 나무 계단이 이어지고 그 계단을 타고 땀방울을 등로에 뿌리니 갑자기 앞에 넓은 헬기장이 나타나고 등로 좌측에서 종주대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헬기장 직전에서 좌측으로 3미터쯤 들어가니 그곳에 아담한 봉대산 정상석이 서 있고 몇명의 종주대들이 주위 조망을 즐기며 쉬고 있다. 

해발 고도 409미터의 봉대산은 진양과 사천 및 고성의 3개 군을 포옹하여 웅장하게 솟은 명산이다.

죽곡에 위치하였으나 이 산은 금곡면의 주봉이며 전설도 많다.

죽곡에는 옛날에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으면 그 대밭에는 봉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하는데 그 후 천지개벽이 있자 봉은 봉대산 꼭대기로 날아가 앉았다.

그 후 물이 빠진 자리에는 대나무도 없어지고 깊은 골짜기가 이루어져서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리하여 봉이 앉아있는 밑이라는 뜻에서 여기를 봉하죽임이라 불렀다 한다.

그 이후 대나무가 있는 골이라는 뜻에서 죽곡으로 불리어 오늘에 이른다는 전설이 있으며 지금도 마을 어귀에는 대나무가 있다는 사실이 전해지고 있다.

이것이 그저 전설이라도 좋고 사실이라도 좋을 것이다.

고향의 명산을 지키고 보존하려는 후손들의 애틋한 마음으로 받아 들이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봉대산 정상에서 정상석을 담고 잠시 북쪽을 바라보니 그곳에 302.7봉 넘어 진주시 금곡면이 자리하고 그 우측으로는 이름도 우스운 만취산과 당뫼산이 보인다.

그 뒤로 이어진 나즈막한 산줄기가 서서히 올라가는 기온으로 인해 박무가 생기면서 아스라히 멀어져 간다.

그 금곡면 우측으로 고개를 돌리니 이제 사찬과 진주 땅을 벗어나 고성땅인 영현면 봉림리쪽 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봉림리의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사람이 살게 된 것은 임진왜란 전후로 추정하고 있으며 지금은 파평윤씨의 집성촌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봉림 마을은 봉대산을 뒤로하여 마을 앞을 흐르는 영천강을 경계로 면소재지 마을(침점 1구)과 인접하고 있으며 마을 앞의 농경지는 경지정리가 된 비옥한 토질로 수원도 양호한 지대로 이뤄진 마을이다.

 

 

몇장의 사진을 더 남긴 후 다시 봉대산을 내려 와 이제 좌측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금새 넓은 헬기장이 앞에 펼쳐져 있다.

사진 한장 남기고 능선으로 진입해 들어가니 금새 삼베마을 갈림 이정표가 보인다.

이제 고성군이란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표 방향으로 방향을 잡아 진행하면 되는 곳이다.

어릴적 바깥 마당에서 봤던 삼베짜는 모습이 어린거리며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 올려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완만한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한 오르막 등로로 이어지고 있는데 등로 좌측으로 종주대 한명이 들어 가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들어 가 보니 꽈배기처럼 돌돌 말린 나무 두 가지가 꼬여 요상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계속 전진하니 등로 옆에 51번 송전탑이 보이고 그 번호를 담아 사진 한장 남겨 본다.

다시 평이한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소나무 군락지 한가운데에 낙남정맥등산안내도(사천시)란 안내판 하나가 크게 서 있다.

안내도를 살펴보니 지금까지 한동안 사천시와 진주시의 경계를 타고 두 도시를 왔다 갔다 하면서 진행해 왔고 이제부터는 고성군으로 진입하는 그런 장소였던 곳이다.

 

 

 

다시 낙남정맥등산안내도를 지나 진행하니 52번 송전탑이 등로 우측에 자리하고 저 멀리 가 그 번호를 확인하고 사진 한장 남겨 본다.

다시 평이한 등로를 타고 소나무 군락지를 걷다보니 높지 않은 봉분을 가지고 있는 많은 묘지들을 지나게 된다.

그렇게 무심으로 전진하니 경주전씨 묘지 앞에 앞서 진행하던 종주대 몇분이 쉬고 있어 함께 쉬면서 시원한 식수 한모금으로 목마름을 달래 본다.

이제 몇분의 종주대가 한 그룹이 되어 급하지 않게 진행하니 소나무 숲을 지나 종주대는 손살같이 사라지고 곧이어 양전산 정상 이정표가 보인다.

정상 이정목이 없었다면 정상인지도 모르게 지나쳤을 양전산, 하지만 아무리 자료를 찾아 봐도 찾을 수 없는 양전산이니 많은 아쉬움이 남는 정상이기도 하다.

 

 

양전산을 지나 평이한 등로를 타고 진행하다 이제 내리막 등로를 타고 맥 산행을 이어가 본다.

잠시 진행하다 등로 좌측을 보니 영현면 범호산이라 생각되는 제법 높은 산이 잡목 사이로 박무속에 나타나고 사진 한장 담은 후 전진을 계속해 본다.

그곳을 지나 내려가니 경산전씨 묘지들이 나타나고 그 위에서 앞을 바라보니 부련이재 지나 앞으로 올라야 할 마루금이 시원하게 올려다 보인다.

그렇게 다시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부련이재가 얼마 멀지 않은 곳 등로 우측으로 고성군 상리면 고봉리 마을이 5번 지방도로와 함께 아름답게 다가온다.

고성군 상리면 고봉리 마을은 구전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윗마을을 고곡이라 하고 아랫마을을 봉곡이라 이름하여 1600년 경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으며 1895년 행정구역 개편때 고곡과 봉곡의 앞자를 따서 고봉이라 명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마을이다.

옛날 활을 쏘았다는 사정거리가 있고 건너편 산에 과녁판을 세웠던 것과 앞산에 재자가 붙은 건물이 있었기에 잿간이라는 이름이 유래되기도 하다.

고봉 마을은 인근 사천시 정동면과 경계하고 있으며 북쪽은 영현면과 접하고 있고 동서북이 산으로 에워싸인 산골 마을로서 토질은 비옥하나 수원이 넉넉하지 못한 마을이기도 하다.

 

 

그렇게 주위 풍경을 구경하며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곧바로 5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부련이재에 도착을 한다.

이곳 부련이재는 동쪽으로 영현면 영부리와 서쪽으로 상리면 고봉리를 이어주는 5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고갯마루로서 도로 좌측의 영부마을을 찾아 본다.

영부는 본래 부연촌이라 이름하여 왔는데 1984년 8월 22일자로 군의 행정리를 조정할 때 영부리를 분동하여 영부마을로 명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현재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각 성씨의 문중기록에 의하면 수원백씨가 임란때 이곳에 입촌하여 거주하게 되었다고 하며 밀양박씨가 조선조 인조때 입촌하였고 김해김씨가 효종때 부연 마을에 입촌하고 진양정씨가 약 200여 년 전에 입촌하여 살게 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영부마을은 면 소재지와 인접한 영동마을의 윗쪽에 위치하여 서쪽으로 부련이 재를 경계로 상리면 고봉리에 접하고 있으며 동, 서, 남쪽이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로 농경지는 비옥하며 마을 위에 영부저수지가 있어 수원도 양호한 지대의 마을이기도 하다.

 

 

철조망이 사라진 산행 들머리를 타고 다시 짧은 절개지를 오르니 금새 능선으로 이어지고 완만한 오르막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잠시 더 오르다 등로 우측을 보니 잡목사이로 고봉리의 울긋불긋한 민가 지붕들이 화려하게 펼쳐져 있다.

한동안 그 지붕들을 구경하며 급하지 않게 오르니 무명봉을 넘어 밀양 박씨 묘지가 있는 곳에서 종주대들이 잠시 쉬며 간식을 들고 있다.

함께 쉰 후 다시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금새 시멘트 임도가 나타나고 지도를 살펴보니 문고개이다.

문고개는 등로 좌측의 임란전부터 사람이 거주하게 되면서 마을명을 지동이라 불러오다가 그후에 마을 서쪽 산밑에 사찰이 들어서게 되면서 발리또는 발촌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1914년 8월 22일자 고성군 조례 제858호로 이동명칭 및 행정구역 확정시 분동하여 봉발1구로 오늘에 이르고 있는 동쪽의 봉발리와 서쪽의 고봉리를 이어주는 고갯마루이다.

 

 

등로 좌측 봉발리쪽으로는 농장과 과수원이 있는지 그물망이 쳐져 있고 절개지를 타고 조금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봉발리 마을과 나즈막한 산줄기가 시원하게 펼쳐 보인다.

지도를 살펴보니 동산과 범호산 그리고 그 산들과 이어진 산그리메들이다.

높지는 않지만 주위 산군들 역시 높은 산들이 없기에 제법 멋진 모습으로 남아 있는 풍경들이다.

 

 

한동안 좌측에 파란 그물망을 두고 제법 가파른 오르막 된비알을 타고 땀방울을 등로에 뿌려 본다.

잠시 오르니 소나무 숲이 펼쳐지며 평이한 등로로 이어지더니 다시 고도를 높혀 가파른 오르막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조금씩 체력적인 부담을 가지고 꾸준히 오르니 작은 잡목들이 사정없이 얼굴을 때리며 맥 잇기 산행의 고통을 온 몸으로 전해주고 있다.

그렇게 한동안 오르니 오르막 등로가 끝이나고 다시 완만하게 평이한 등로로 이어지는데 그 한가운데에 삶의 투쟁을 벌여 공생하고 있는 특이한 나무 두 그루를 만나 사진 한장에 담으며 우리들 인생의 삶을 조명해 보는 시간을 가져 본다.

 

 

치열한 삶을 이어가는 두 다른 나무의 공생을 바라보고 다시 전진하니 바위들이 박혀있는 완만한 등로가 열려있고 그곳을 통해 전진하며 맥 산행을 이어가 본다.

그렇게 전지해 진행하니 등로 우측 잡목 사이로 간간히 내려다 보이는 고봉리쪽 마을들과 민가가 아름답게 다가온다.

그러다 잠시 잡목이 적어진 등로에서 고봉리를 내려다 보며 멋진 사진 한장 남겨보며 마을에 대한 생각을 해 본다.

고봉리 비곡 마을의 형상은 골이 깊고 산이 높으며 경지면적이 좁아 처음에는 까마귀 오자와 날 비자로 비오동으로 불리다가 1938년 행정구역 재조정시 고봉리 2구로 변경되었다가 1984년 8월 22일자 고성군 조레 제858호로 고성군의 이동 명칭 및 행정구역 확정시 비곡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마을인데 산세가 험하고 골이 깊으며 작은 골짝이 많은 마을로서 양지쪽에는 정지골, 소상골, 다리골, 선논둑, 불매골, 심복골, 삼밭골, 진발등, 대밭골, 토골, 가능골, 토토랑골, 뿔당골, 갈골, 홈태골, 안골이 있고, 음지쪽에는 감나무골, 진정골, 깨밭골, 마당골, 큰골, 솔담골, 흠골, 계자골, 절골, 산태등, 크밭골, 물방앗골, 수리골, 계방등 등 많은 골짝이 있는 마을로서 북쪽은 영현면과 접하고 동서북쪽이 산으로 에워싸인 골짝 마을로서 산세가 험하고 경지면적은 적으나 수원은 비교적 양호한 편의 마을이다.

 

 

다시 꾸준히 이어지는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타고 끝없는 인내를 시험하고 있다.

해발고도가 높지는 않지만 빨래판을 연상시키는 굴곡이 심한 등로를 따라 걷다 보니 이제 제법 체력적인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다시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등로 우측 저 멀리 고성의 오두산이 우뚝 솟아 있고 그 위용을 자랑이나 하듯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그 뒤로 이어진 아름다운 산그리메를 구경하며 계속 이어가니 저 멀리 백운산도 멀지 않은 듯 가벼워지는 발걸음을 느낀다.

 

 

참으로 힘들게 오르고 또 올라 드디어 백운산 정상에 도착한다.

하지만 기대했던 정상석 하나 없이 정상목도 진행하는 반대방향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기에 주위하지 않고 지나면 그냥 지나 칠 수 있는 그런 정상이다.

더욱이 이 정상에서 앞을 바라 보면 앞에 백운산보다 더 높은 426봉이 잡목 사이에 보이기에 더욱 알지 못하고 지나기 쉬운 백운산 정상으로서 박혀 있는 삼각점 역시 오래되어 그 역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어느 지도에는 이곳을 대곡산이라 적어 놓은 자료도 봤는데 아무리 고성군 자료를 찾아도 이곳 백운산과 대곡산에 관한 자료를 찾을 수 없어 아쉬운 시간이다.

 

 

잡목으로 인해 주위 조망도 없고 특이하게 오랫동안 쉴 수 있는 백운산 정상도 아니기에 사진 몇장 남기고 다시 가던 길을 떠나 본다.

완만한 오르막 등로가 계속 이어지고 그 등로를 타고 오르다 보니 등로 중앙에 이번에는 세 가지로 자라고 있는 같은 나무에서 다시 형제들끼리 치열한 삶의 투쟁을 벌여 세 가지 모두 함께 비비꼬며 자라고 있는 나무 한그루를 만나 끊질긴 삶과 생명의 소중함을 느낀다.

다시 부드러운 등로를 타고 오르니 정상이 평편한 426봉 정상에 올라 잠시 낙엽 위에 누워 본다.

 

 

426봉을 지나니 다시 완만한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지만 큰 오르내림은 아니다.

그저 평이한 등로를 타고 전진하니 다시 멋진 소나무 등로가 열리고 호젓한 기분으로 즐겨 본다.

나즈막한 안부로 내려섰다 다시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송전탑 하나가 서 있는데 번호는 반대편에 붙어 있어 어렵게 다가가 보니 46번 송전탑이다.

그곳을 지나 계속 전진하니 395봉 정상에 도착을 하고 잠시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지나 온 42번 송전탑과 426봉이 저 멀리 보인다.

 

 

395봉을 지나 이제부터 굴곡이 거의 없는 호젓한 소나무 숲을 따라 걸어 본다.

몸은 피곤하지만 이렇게 몸을 혹사하며 자연속에 있다보면 이 산객도 자연의 일부가 되어 치열하게 살아 온 일상에서의 삶은 이미 다른 삶의 일부인양 잊어 버리고 만다.

참으로 멋진 시간에 멋진 등로를 타고 그렇게 즐기며 진행하니 갑자기 나무들 밑둥이 물에 그을린 불난 지역이 나타나고 지도를 보니 아마도 380봉쯤 되는 지역인 듯 보인다.

 

 

그 불난 지역을 걷다보니 제법 넓은 지역에 불이 났었던듯 계속 큰 나무 밑둥은 검게 그을려 있다.

왜 불이 났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름다운 자연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늘 불조심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제일 덕목일 것이다.

고사목들이 등로에 쓰러져 자연의 이치에 따라 형성되고 사라지는 사물을 바라보며 이 산객의 인생을 잠시 그려보는 시간도 가져 본다.

그렇게 진행하니 다시 완만한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고 갑자기 등로 우측으로 폐 임도 같은 임도 하나가 지나는데 그곳으로 통하는 길목엔 철사줄이 쳐져 있다.

이곳에서 거꾸로 산행을 하며 오르는 이곳 주민 한분을 만나 인사 나누고 전진하니 등로 우측 저 멀리 야베스농장 건물들이 건너다 보인다.

 

 

등로 우측에 있는 야베스 농장 건물을 바라보며 잠시 더 내려가니 금새 콘크리트 임도가 나타나고 임도 우측 방향으로 화살표가 표시되어 있고 야베스농장이란 안내판이 서 있는데 외부인 출입금지란 글귀도 보인다.

시멘트 임도로 내려서서 우측으로는 야베스 농장 들어가는 입구이고 그 반대편인 좌측으로 5미터쯤 가면 도로 우측 능선으로 마루금이 열려 있는 많은 선답자들의 띠지들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다.

 

 

시멘트 임도를 건너 능선으로 올라 나즈막한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무명봉 하나를 넘어 비석이 모두 지워진 묘지 하나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종주대 몇분이 다시 잠시 쉬면서 막걸리 한잔을 건네 주신다.

달게 마신 후 이제부터 다시 종주대 세분과 함께 마지막 추계재를 향해 출발한다.

너부러진 고사목들을 지나 진행하니 등로 좌측으로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고 그 임도 주변으로는 편백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잠시 그 비포장 임도를 좌측에 두고 진행하니 잠시 후 그 임도로 내려서 건너게 된다.

 

 

그 비포장 임도를 건너 다시 반대쪽 능선으로 올라 소나무 숲을 타고 편안한 산행을 해 본다.

하지만 아직도 백곡고개를 넘지 못하였고 앞에 보이는 제법 높아 보이는 천황산과 370봉을 넘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자꾸만 발걸음을 무겁게 만드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잠시 더 진행하니 등로 앞이 터지며 등로 좌측에 대법리가 보인다.

대법리는 본래 진주군 영선면의 지역으로서 광무 10년(서기 1906년)에 고성군에 편입되었으며 1914년 3월 1일에 경상남도령 제2호로 고성군의 면을 통, 폐합 할 때 대촌리, 법이리, 산하리, 영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대촌과 법이의 윗자를 따서 대법리로 하여 영현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행정리로 대촌과 법촌의 2개 마을이 있다.

등로 우측에 있는 망림마을은 망림리 본동마을로 1500년 경에 전주최씨, 밀양박씨, 창원황씨가 거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앞 산세가 뛰어나고 문수암 밑의 팔송정 숲이 아름다워 숲을 바라보면서 항상 희망을 갖고 살기를 바란다는 뜻에서 바랄망과 수풀림자를 따서 망림이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이 생긴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서기 1500년경부터 전주최씨, 밀양박씨, 창원황씨가 입촌하여 살았으며 지금은 10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여 거주하고 있다.

망림 마을은 국도를 따라 고성에서 진주방향 12km 지점에, 면소재지에서 2km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마을 뒤에는 산으로 영현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마을 앞들은 경지 정리가 되어 토질은 비옥하고 수원도 좋은 편이다.

그리고 예로부터 효의 마을로 명석한 인재들이 많이 나온 마을로 이름나 있다.

그곳을 내려서니 등로 좌측으로는 2차선 포장도로가 있고 우측으로는 시멘트 임도가 연결되어 있는 백곡고개이다.

 

 

이제부터 마지막 남은 천황산 오르는 된비알 타고 숨가쁜 발걸음을 옮겨 본다.

숨은 가빠오고 가슴은 터질듯한 고통에 몸부림 쳐 보지만 역시 그 누가 걸어 주지 않는 발걸음이기에 한발 두발 인내하며 그 고통을 참아 본다.

그러다 15분 여를 빡쎄게 올라 시원한 바람이 불어주는 천황산 직전 바위 전망대에서 둘러보는 주위 풍경과 조망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이 산객의 막혔던 가슴에 시원한 물줄기를 퍼부워 주고 있다.

남동쪽으로 다음 구간 올라야 할 404봉에서 대곡산과 철마산 줄기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고 그 넘어 저 멀리 무량산도 얼굴을 내밀고 있다.

 

 

천황산 남쪽으로는 상리면 부포리가 예쁘게 자리하고 그 넘어 저 멀리 나즈막한 산줄기가 분지를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부포리 부포마을의 지명은 옛날부터 감티, 부개, 부포로 불리어져 왔는데 감티는 통영에서 70리, 진주에서 70리 되는 지점이 이곳으로서 옛날 사천, 진주, 지리산 지역의 산적과 통영, 마산, 부산등지의 산적이 서로 만나 감투싸움을 한 고개로서 감티(재)라 부르게 되어으며 부개는 천황산 줄기가 지아비 부, 클개(날개) 포자 모양을 하고 있다 하여 이곳을 지나던 원님이 지어준 지명을로 부개라 하였다 한다.

그리고 부포는 일제시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포리로 하였다가 광복후 분동이 되면서 부포와 내부포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이 생긴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구전에 의하면 지금부터 약 500여년전에 수원백씨가 이곳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하면서 수원백씨가 임란때 입촌하였고 그후에 밀양박씨, 전주최씨, 평택임씨등 지금은 10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다.

부포마을은 고성에서 사천과 진주방면 국도의 갑문에 위치한 감티고개 마을로 뒤에는 천황산, 앞은 선당산 자락에 자리잡은 마을로 군내에서 높은 지대로 겨울에 춥기로 전라도 운봉 다음가는 마을로 알려져 있으며 농토가 비옥하지 못하고 수원도 좋지 못한 지대의 마을로 알려져 있다.

알고 보면 더 가슴에 와 묻히는 아름다운 우리의 산하이다.

 

 

그렇게 전망바위에서 조망을 즐긴 후 다시 뒤돌아 조금 더 오르니 드디어 오늘 마지막 이름있는 봉우리인 천황산 정상에 도착해 남아 있는 간식과 곡주를 꺼내 만찬을 즐겨 본다.

뒤 따르던 종주대원들이 도착하며 남아 있던 간식을 꺼내니 금새 푸짐한 상이 차려지고 그 상 앞에 앉아 모두 하나가 되는 시간이다.

한동안 쉰 후 일어 나 천황산 정상 코팅지를 사진에 담다보니 이 산객이 잘 알고 있는 고산마루(다올)님이 붙여 놓은 정상 표시이기에 더욱 반가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다만 이곳 역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어 전국적으로 많은 이름을 남긴 천황산 또는 천왕산의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기를 바래 본다.

 

 

이제 천황산을 출발해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금새 안부에 도착하고 다시 등로는 오르막 마루금으로 이어진다.

짧은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금새 다시 아무 표식도 없는 오늘 마지막 봉우리인 370봉에 도착해 남쪽과 동쪽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조망을 다시 한번 즐겨 본다.

등로 앞 동쪽으로 다음 구간 올라야 할 대곡산과 무량산이 지척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370봉에서도 잠시 주위 조망을 즐긴 후 다시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추계리가 내려다 보이고 이름 모를 작은 저수지의 파란 물도 내려다 보인다.

그렇게 내려가니 금새 추계리 마을의 민가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잠시 추계리를 생각해 본다.

추계리는 단일 법정리로 형성된 마을로 본래 진주군 영선면의 지역으로서 가리재 고개 밑에 마을이 있다하여 가리재 또는 추현이라 하였는데 광무 10년(서기 1906년)에 고성군에 편입되어 1914년에 고성군의 행정구역 통·폐합시 영현면의 추계리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추계리는 서기 1650년경에 달성서씨와 진양정씨가 맨먼저 입촌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지금은 김해김씨, 진양강씨, 장흥마씨등 여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다.

추계마을은 면 소재지로부터 5㎞ 동남쪽에 위치한 큰땀, 새땀, 반장땀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동, 서, 남쪽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골마을로 선바위산 골짜기에서 원류하는 냇물이 마을 앞을 지나 영천강으로 흐르고 있고, 농경지는 계단식 천수답이 많으나 수원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그렇게 내려가니 저 멀리 추계재가 보이고 그 한쪽에 정차해 있는 우리들의 애마도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내려가니 추계재 바로 직전에 대나무 몇그루가 보이고 곧이어 남쪽의 부포리와 북쪽의 추계리를 이어주는 1016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추계재 일명 가리고개에 도착을 해 또 한구간을 마무리 해 본다.

이 고개가 가리고개이기에 아래에 있는 마을을 가리마을 또는 추개리로 불렸다는 설이 있으니 어느것을 써도 좋겠지만 우리나라 글과 더 가깝게 느껴지는 가리고개가 왠지 더 정답게 느껴진다.

제법 긴 구간이고 또한 빨래판처럼 굴곡이 심해 쉽지 않은 산행이였지만 이렇게 또 무탈하게 마무리하고 시원한 맥주 한잔 마시는 시간이야 말로 이 세상 최고의 시간일 것이다.

 

시간이 늦어 계획된 샤워는 못하고 김치찌개 식당에 들려 따뜻한 찌개와 이슬이 몇잔으로 몸을 녹이니 몸이 노곤하며 버스에 오르자마자 꿈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다음 구간은 이 산객이 진행하는 낙동정맥 제19구간 양산의 도롱룡으로 유명한 천성산 구간과 겹치기에 참여하지 못하고 홀로 또는 몇명의 대원들과 다녀와야 할 구간으로 남겨지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다시 일상에 복귀해 몇개월 간 열심히 진행해 왔던 큰 프로젝트를 잘 마무리하고 가족들과 해외 여행이라도 다녀 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시간이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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