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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후기/서울의 산

북한산 북한산성 14성문 종주 산행후기

by 칠갑산 사랑 2023.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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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와 강북구 및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의 북한산 내 북한산성 등산로 일대

산행일자 : 2023년 01월 07일 (토요일 당일 산행)

산행날씨 : 새벽에 눈이 내리고 오전까지 흐렸으며 짙은 안개로 시야가 제한되었으나 오후부터 맑고 햇살이 비췄던 산행날씨

산행온도 : 영하 00도에서 영상 04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북한산성입구 버스정류장(북한산로 4차선 포장도로)-북한산성입구교차로-북한산성 제1주차장-북한산성 제2주차장-북한산성입구 탐방지원센터-산성분소(갈림삼거리, 좌측)-산성계곡 무장애탐방로 갈림삼거리-서암문과 원효봉 갈림삼거리-수문(수문지)-산성계곡 무장애탐방로 갈림삼거리 복귀-의상봉 갈림삼거리-용암사 갈림삼거리-대서문-무량사-아미타사 갈림삼거리-북한동역사관-원효봉 갈림삼거리-선봉사-거북암-법용사(국녕사) 갈림삼거리-중성문-법용사(국녕사) 갈림삼거리 복귀-법용사 갈림삼거리-국녕사-능선진입-용출봉 갈림삼거리(우측 의상봉)-가사당암문-의상능선-성랑지 이정목-바위암릉-의상봉(502봉, 정상목) 이정표(대남문 3.0 Km, 산성탐방지원센터 1.5 Km와 백화사 1.7 Km)-의상능선-가사당암문 복귀-바위암릉-용출봉(571봉, 정상목) 이정표(대남문 2.3 Km, 의상봉 0.7 Km와 산성탐방지원센터 2.2 Km)-바위암릉-용혈봉(581봉, 정상목)-바위암릉-산불감시초소 이정표(대남문 2.0 Km, 의상봉 1.0 Km와 산성탐방지원센터 2.5 Km)-증취봉(593봉, 정상목)-부왕동여장 설명판-바위암릉-여장 설명판-부왕동암문 이정표(대남문 1.5 Km, 의상봉 1.5 Km, 삼천탐방지원센터 2.8 Km, 부왕사지 0.5 Km)-눈꽃등로-나월봉 바위암릉 우회등로-상고대 등로-나한봉 갈림삼거리-나한봉(681봉, 정상목, 나한봉 치성 설명판)-갈림삼거리 복귀-바위암릉-상고대 등로-청수동암문(694미터) 이정표(대남문 0.3 Km, 의상봉 2.7 Km, 비봉 2.2 Km와 삼천탐방지원센터 4.2 Km)-바위암릉-문수봉(727봉, 정상목)-종로구 경계점(710미터, 표지석)-대남문 이정표(대성문 0.3 Km, 비봉 2.2 Km, 구기분소 2.5 Km)-출입금지판(보현봉과 형제봉 일원)-대성문 이정표(보국문 0.6 Km와 대동문 1.2 Km, 대남문 0.3 Km와 비봉 2.5 Km, 형제봉 1.9 Km와 정릉탐방지원센터 3.0 Km,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 5.0 Km)-보국문(공사중)-대동문(공사중) 이정표(북한산대피소 1.3 Km와 용암문 1.5 Km 및 백운대 3.0 Km, 보국문 0.6 Km와 대성문 1.2 Km 및 대남문 1.6 Km,  진달래능선 아카데미탐방지원센터 1.9 Km, 화장실 0.04 Km와 산성탐방지원센터 4.5 Km)-동장대(510미터, 이정목) 이정표(북한산대피소 0.8 Km와 백운대 2.5 Km, 대동문 0.5 Km)-상고개 등로-용암문 이정표(백운대 1.5 Km, 북한산대피소 0.2 Km와 대동문 1.5 Km, 용암문공원지킴터 1.1 Km)-노적봉입구 이정표(백운대 0.9 Km, 북한산대피소 0.8 Km와 대동문 2.1 Km)-계단과 바위너덜등로-백운대 조망-백운대 갈림삼거리 이정표(백운대 0.4 Km,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 3.7 Km, 북한산대피소 1.3 Km와 대동문 2.6 Km)-백운봉암문(위문)-바위암릉-삼각산 설명판-북한산 백운대(836봉, 태극기봉, 3.1운동암각문)-갈림삼거리 복귀-내리막 바위너덜등로-약수암 공터쉼터-내리막 바위너덜등로-약수암하단 공터쉼터-바위너덜과 돌계단-대동사 갈림삼거리 이정표(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 2.5 Km, 백운대 1.6 Km)-대동사-상운사-원효봉 갈림삼거리 이정표(원효봉 0.4 Km, 화장실 0.85 Km와 백운대 2.2 Km 및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 2.3 Km, 상운사와 탐방로 없음)-바위너덜등로-북문 이정표(원효봉 0.2 Km, 효자비 2.0 Km, 백운대 2.4 Km와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 2.5 Km)-마당바위-전망바위(원효봉에서 바라 본 조망전경, 원효봉 설명판)-원효봉(505봉, 정상목) 이정표(효자리 1.6 Km, 백운대 2.6 Km)-바위암봉-공터 이정표(효자비입구 1.1 Km, 원효봉 0.5 Km)-원효암-성랑지 설명판-공터 조망처-이정표(효자리 0.8 Km, 원효봉 0.8 Km)-여장 설명판-서암문(시구문)-내시묘역길구간 갈림삼거리공터 이정표(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 0.8 Km와 북한산둘레길 진관동, 원효봉 1.6 Km, 밤골공원지킴터 2.7 Km와 북한산둘레길 교현리)-전주이씨 서흥군과 위성군 묘역-백운대 계곡길 갈림삼거리 이정표(원효봉 시구문 2.2 Km와 북한산둘레길 교현리, 계곡길 백운대 4.0 Km)-상가지대-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북한산성입구 버스정류장-산행종료

산행거리 : 약 18.50 Km (북한산성입구에서 북한산성 14성문과 백운대 지나 북한산성입구까지 환종주 코스 모두 포함)

산행시간 : 09시간 42본 (07시 02분부터 16시 44분까지, 눈덮힌 바위암릉을 따라 힘들게 진행하여)

산행트랙

20230107 북한산성 14성문.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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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편 : 갈때 -05시 40분 집에서 지하철 2호선 봉천역으로 출발

                  05시 47분 봉천역에서 지하철 2호선 첫 열차 탑승

                  06시 00분 교대역에서 지하철 3호선으로 환승

                  06시 45분 구파발역에서 지하철 3호선 하차 후 2번과 3번 출구 사이 버스정류장에서 704 광역버스 탑승

                  07시 02분 북한산성입구 버스정류장에서 하차 후 곧바로 산행 시작

          올때 - 16시 44분 북한산성입구에서 14성문 종주 산행종료

                  17시 05분 북한산성입구에서 배낭 정리 후 버스정류장에서 704번 광역버스 탑승

                  17시 27분 불광역에서 704번 버스 하차 후 6호선 지하철 탑승

                  18시 10분 합정역에서 지하철 2호선으로 환승

                  18시 40분 지하철 2호선 봉천역에서 하차 후 도보로 귀가

북한산

북한산(835.6미터)은 서울특별시 도봉구와 강북구, 종로구, 은평구 및 경기도 고양시, 양주시, 의정부시에 걸쳐 있는 산으로 명칭 유래를 보면 북한산은 예로부터 명산으로 일명 한산과 삼각산(三角山) 또는 화산이라 불렀으며 신라 때에는 부아악이라고도 하였다. 옛날 개성의 송도에서 한양으로 오다가 이 산을 바라보면 백운대(白雲臺)와 만경대(萬景臺) 및 인수봉(仁壽峰)의 세 봉우리가 삼각형 모양으로 나란히 우뚝 솟아 있어 삼각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이곳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땅을 찾았다고 하고 또한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이성계를 위해 도읍지를 정할 때 백운대에서 맥을 찾아 만경대에 올랐다가 서남쪽으로 가서 비봉에 이르렀다고 하여 만경대를 일명 국망봉(國望峰)이라고도 하며 비봉은 진흥왕순수비가 꼭대기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북한산의 자연환경은 주봉인 백운대를 중심으로 남쪽의 만경대와 보현봉 및 북악산으로 연결되는 주능선과 북쪽으로 인수봉에서 우이암, 주봉, 자운봉 및 사패산으로 연결되는 주능선을 축으로 동서로 대별된다. 북한산의 각 봉우리 사이를 흐르는 계곡으로는 정릉계곡과 구천계곡, 소귀천계곡, 육모정계곡, 효자리계곡, 삼천사계곡, 세검정계곡, 진관사계곡, 구기계곡, 평창계곡, 산성계곡 등이 있으며 이들 북한산에서 발원한 계류는 중량천과 창룡천, 불광천, 모래내 등을 이루어 한강으로 유입된다. 북한산은 서울에 근접해 있으면서 자연 경관이 뛰어나 1983년 4월 경관의 보존과 합리적 이용을 도모하기 위하여 도봉산(道峯山)일대와 함께 북한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나한봉에서 원효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1711년(숙종 37)에 축조된 연장 8 Km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이 있으며 지금도 14개의 성문 중 대서문(大西門)과 대남문(大南門), 대성문(大成門), 보국문(輔國門), 대동문(大東門), 용암문(龍巖門) 등이 남아 있다. 비봉은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국보, 1962년 지정)가 꼭대기에 세워져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진흥왕 순수비를 보존하기 위해 1972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겼고 현재 있는 것은 모조 비석이다.

북한산성

북한산성은 사적 제162호로서 북한산의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축조한 포곡식 석축산성으로 백제가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한 뒤 도성을 지키기 위해 쌓은 북방의 성으로 132년(개루왕 5)에 축조했는데 고구려의 남진을 막는 구실을 했으며 근초고왕의 북진정책하에서는 북정군(北征軍)의 중심요새지가 되기도 했다. 삼국이 모두 군사요지로 여겨 치열한 쟁탈지가 되었는데 475년(개로왕 21) 고구려의 장수왕이 이 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전사시킴으로써 백제는 웅진성(熊津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뒤 553년(진흥왕 14) 신라가 한강 하류까지 진출하여 북한산성을 차지하고서 진흥왕순수비를 여기에 세웠으며 그 후 고구려군이 신라의 북한산성을 여러번 포위했으나 쉽게 함락하지 못하고 격퇴당했다. 고려시대에는 현종이 거란의 침입을 피해 고려 태조의 재궁(梓宮 : 임금의 棺)을 옮긴 일이 있는데 이때 성을 증축했고 1232년(고종 19) 이곳에서 몽골군과 격전을 벌였으며 1387년(우왕 13) 개축했다. 조선시대에는 양 난을 겪은 뒤 도성 외곽성을 강화하자는 축성론(築城論)이 일어나 1711년(숙종 37) 대규모의 축성 공사를 실시해서 둘레 7,620보(3,716m)의 석성을 완성시켰다. 건축물로는 대서문(大西門)과 동북문 및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동장대와 남장대 및 북장대 등의 장대(將臺), 130칸의 행궁, 140칸의 군창, 중흥사(重興寺)를 비롯한 12개의 사찰, 26개소의 저수지, 99개소의 우물이 있었으나 현재 삼국시대 토성은 약간 남아 있을 뿐이고 대개는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이 남아 있다.

 

 

오랫만에 깊은 눈이 쌓여있는 북한산 14성문을 어렵게 완주하며 옛 추억을 더듬었던 시간들 

 

 

먼저 북한산성 14성문 종주 산행후기를 기술하면서 서울특별시와 고양시 및 주변 지자체에 수록된 지명유래 및 네이버의 지식백과, 다음의 백과사전, 산림청, 한국관광공사의 자료들을 참고하여 정리된 부분들이 있으며 이런 부분들이 혹시라도 지적재산권에 저촉이 되어 삭제나 변경이 필요한 경우 연락주시면 언제라도 즉시 삭제 및 수정해 드릴 수 있음도 알린다.

 

무척지맥을 마지막으로 지난해 연말 16년 간 진행한 전지맥까지 완주 후 잠시 허탈감과 무기력증에 빠져 이슬이를 친구 삼아 지내다 보니 몸만 불어나고 삶의 활력도 떨어지는 것 같아 다시 계획된 산행은 아니지만 지맥 산행으로 소홀했던 서울 근교의 산행을 다시 시작해 보려고 준비를 해 본다.

처음에는 경기도 가평의 어비산에서 유명산과 소구니산 지나 중미산을 거쳐 삼태산과 통방산까지의 종주 산행이나 가까운 관악산과 삼성산의 11국기봉을 다시 한번 돌아 볼 생각을 하다가 금요일 밤부터 토요일 새벽까지 눈 소식에 북한산의 북한산성 14성문 종주 산행으로 산행지를 급하게 변경하게 되었는데 이유는 오랫만에 북한산의 설경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또한 집에서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해 손쉽게 접근이 가능하고 진행하다 어려움을 느끼면 아무곳에서나 탈출해 쉽게 귀가할 수 있으니 마음 편히 산행지를 선정했는데 10여년 전 산친구들과 두번쯤 올랐던 북한산성 14성문을 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 결정하게 되었다.

산행에 막 입문을 하면서 산친구들과 산행 후 즐겨던 뒷풀이가 좋아 주위 조망이나 산행에 대한 깊은 고민없이 그저 속도전을 벌였더 시절에 그 의미도 잘 모르면서 두번이나 돌았던 북한산성 14성문을 오늘은 여유를 가지고 사전 공부한 내용을 확인하면서 주위 풍경과 조망까지 즐겼으면 좋겠지만 일기예보에는 황사와 미세먼지로 시야는 상당히 제한될 것이라는 예보에 북한산성 자체를 돌아 보는 것에 의미를 가지고 진행을 해 보는 시간이었다.

 

종주 산행에 빠지기 전까지 많이도 올랐던 북한산이지만 이곳 북한산 정상인 백운대는 생각보다 자주 오르지 못해 정상에서 담은 사진도 별로 없기에 아쉬움이 크게 남아 있어 오늘은 많은 눈과 얼어붙은 바위로 미끄럽지만 그렇기에 오르는 등산객이 많지 않아 잠시 다녀 오기로 하고 진행하다 동장대를 넘으니 그동안 짙게 남아 있던 안개와 미세먼지가 약간 사라지며 몽환적인 북한산 정상인 백운대의 바위암봉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용암문과 노적봉입구를 지나 눈길을 타고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드디어 눈 앞으로 환상의 백운대가 눈보라 속에 그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다른 계절에 만났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남성미 물씬 풍기는 매력적인 모습에 반해 한동안 자리잡고 많은 사진을 담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오르는 등로를 살펴보니 우측 사면 암릉을 따라 오르고 내려오는 등산객들의 모습이 살짝 보이는데 역시 예상과 마찬가지로 평소에 비해 등산객은 많지 않아 다녀오는데 큰 어려움을 없을 듯 하다.

 

관악산 11국기봉을 돌아볼까 아니면 북한산 14성문 종주를 걸어볼까 고민을 하다 몇년 동안 들리지 못했던 북한산으로 발길을 돌린 것은 오늘 새벽까지 눈이 내린다는 예보 때문에 겨울철 상고대가 그리웠기 때문이며 또한 산줄기 이어타기 산행에 빠져 만나지 못했던 북한산이 그리워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새벽 일찍 일어나 간단하게 아침밥을 챙겨 먹고 과일 몇개와 겨울 산행 준비를 해 집을 나서는 시간이 새벽 5시 30여분이고 지하철 2호선 봉천역에서 첫 지하철로 교대역에서 3호선으로 다시 구파발역 근처의 편의점에서 간단한 식수와 빵을 구매해 704번 버스로 환승해 산행 들머리인 북한산성입구에 도착을 하니 늘 만원이었던 버스도 오늘은 여유있게 자리에 앉아 이동을 했다.

아직은 어둠이 사라지지 않은 북한산성 입구에서 간단히 산행 준비 후 우측 북한산성 입구 방향으로 걸어 들어가니 이곳에도 몇개의 편의점들이 눈에 들어 와 옛날 생각을 하며 급할 것 없으니 천천히 출발하는 시간이 새벽 7시를 막 넘기는 시간이다.

 

집에서 나올때만 해도 비가 내렸는지 축축하게 젖어 있던 도로가 이곳 북한산성입구에 도착하니 눈이 보이고 도로는 얼어붙어 빙판길로 변해 있어 같은 서울이라도 지역에 따라 다른 기온과 날씨 변화를 몸으로 확인하며 걸어가는 시간이다.

불이 커져 있는 주차장을 지나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를 지나 상가골목을 통과하니 산성계곡무장애탐방로 갈림삼거리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완전히 빙판길로 변해 있는 좌측 도로를 타고 잠시 수문을 찾아보고 올라가기로 하는데 오래 전 산친구들과 걸었던 추억을 떠 올려 보지만 워낙 시간이 오래되었는지 조각난 기억들만 단편적으로 기억속에 남아 있어 그동안 얼마나 무심했었는지 스스로 반성도 해 보는 시간이다.

 

산성계곡 무장애탐방로 갈림삼거리에서 좌측 도로르 타고 조심하며 걸어가니 이곳 역시 상가지역이지만 나무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불이 모두 꺼져 있어 어둠속에 희미한 등로를 찾아 조심하며 걸어가는 순간이다.

잠시 후 다시 만나는 갈림삼거리에서 직진 방향으로 북한천을 건너면 오늘 오후에 다시 이곳으로 뒤돌아 내려와야 하는 날머리가 보이고 우측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가니 좌측으로 청아하게 흐르는 북한천의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등로는 완전한 빙판길로 변해 있다.

다만 이곳에서 바라보는 북한산 풍경이 아름다워다는 생각이지만 오늘은 아직도 남아 있는 어둠과 짙은 안개 그리고 황사와 미세먼지로 보이는 것 하나 없으니 갈림삼거리 공터만 사진에 담고 수문을 찾아 진행하는 마음이 아쉽기만 하다.

 

이제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며 주위 사물들이 눈에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하고 빙판길로 변한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다양한 안내판들을 지나 나무데크와 나무계단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예전에 보지 못했던 성벽이 등로 우측 앞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수문은 원래 좌측 북한천변에 있던 문으로 알고 있었는데 새로 단장된 듯 보여 나무계단과 성벽을 사진에 담고 좌측 북한천을 살펴보니 아직도 어둠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정상적인 수문을 확인하기는 어려워 보여 성벽만 사진에 담고 뒤돌아 내려간다.

이곳 수문(水門)은 대서문과 서암문 사이 계곡에 있는 북한산성의 문으로 조선 시대 단위로 높이 16척에 너비 50척이다.

북한산성 안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여 북한산의 모든 물이 이곳으로 흘러나오는데 현재는 그 흔적을 찾기 어려우며 계곡 옆 능선 위로 무너진 성벽이 남아있을 뿐이지만 수문 주변 바위에는 축성 당시로 추정되는 구멍들이 여러군데 남아 있다.

모든 성곽에는 배수를 위한 시설이 있는데 규모가 크고 문형식을 갖춘 것을 수문(水門)이라고 하고 배수구만 뚫어 놓은 것을 수구(水口)라고 하는데 이곳 북한산성의 것은 수문이다.

이곳 수문이 오늘 만나야 할 북한산성 14성문 중 처음으로 만나는 첫번째 목표지점이다.

 

다시 빙판길을 조심하며 오후에 내려 와야 할 서암문(시구문)과 원효봉 갈림삼거리에서 아쉬워 사진 한장 더 남기고 상가 건물들을 끼고 산성계곡 무장애탐방로 갈림삼거리로 나가니 우측으로 호장실이 보여 잠시 버림의 즐거움을 느낀 후 좌측 도로를 타고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잠시 후 우측으로 자주 올랐던 의상봉 갈림삼거리를 지나 계속 이어지는 보도블럭 도로를 따라 완만하게 오르니 오를수록 하얀 눈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등로는 이제 완전한 빙판길로 변해 체인젠 없이 오르는 발길이 조심스럽기만 한데 잠시 후 우측으로 용암사 갈림삼거리도 통과한다.

용암사(龍岩寺)는 서울시 은평구 진관내동 북한산 자락에 자리한 대한불교 조계종 선학원 사찰로서 북한산 지역은 고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민족의 역사와 숨결을 함께 해 온 민족의 대표적 명산이자 서울의 진산이다.

수많은 유적과 유물들이 북한산 골짜기마다 산재해 있고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기도처와 유물들이 천여년의 세월 속에 묻혀 있다.

그 옛날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접전지였기도 하고 고승 원효와 의상의 기도처로서 수많은 전설과 설화를 간직한 곳으로 고려 때 북한산 불교 신앙의 중심지인 승가굴이 있었으며 고려 왕들의 비호를 받은 진관사의 전신 신혈사가 자리한 곳이다.

또 조선시대 동악 금강산, 남악 지리산, 서악 묘향산, 북악 백두산과 함께 중악으로서 국가적으로 가장 중요시되었으며 수륙재 도량으로서 임진왜란 이후 산성의 승군치영 사찰로서 항상 역사의 중심에 서 있지만 용암사는 그런 북한산 명찰과 기도처로서 알려진 곳은 아니며 근래의 한 스님이 자신의 기도처를 찾던 중 부처님의 선몽을 받아 세운 아담한 기도처이다.

용암사의 진면목은 대웅전 뒤편 용암에서 가람이 앉혀진 모습을 감상하는 것인데 뒤로 북한산의 백운대와 의상봉, 원효봉이 자리하며 그 중앙 용암에서 우측으로 일산이 좌측으로 서울 구파발이 비호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는 것이다.

 

용암사 갈림삼거리를 지나니 빙판길 위에 얇은 눈이 쌓여 더욱 진행에 주의가 필요해 보이고 조심하며 천천히 걸어 오르니 뒤따라오는 등산객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고 인사 나누며 급할 것 없는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금새 제대로 된 모습으로 남아 있는 대서문에 도착을 해 그 앞에 세워져 이는 설명판을 읽어 보니 다음과 같은 자세한 설명이 되어 있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읽어 본다.

예전에 14성문 종주 산행시에는 보지 못했던 설명판인데 그 사이 많은 자료 발굴과 보수로 제대로 된 북한산성을 복원하려는 시도에 박수가 절로 나는 시간이기도 하다.

대서문은 북한산성의 정문으로 성문 16곳 중에서 가장 낮은 지점에 위치하며 1712년(숙종 38년) 숙종이 북한산성에 행차했을 때 이 대서문을 통해 성내로 들어갔다.

과거 성내에 마을이 있었을 당시엔 주민들이 대대로 이용했던 성문이기도 한데 지금의 문루는 1958년에 복원한 것으로 북한산성 문루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문루의 형식은 우진각지붕으로 문루의 일반적인 지붕 형태를 따르고 있다.

관영 건물이므로 지붕의 용마루와 추녀마루를 강회로 마감하였고 누각에 북한산성 대서문 중수기가 결려 있어 중수 내역을 전해 준다.

문루의 배수시설로 용머리 모양의 누혈(漏穴:물이 흘러내리도록 구멍을 뚫은 돌)을 성문 앞뒤로 두었고 성 밖을 바라보는 용은 입을 벌려 누혈의 구실을 제대로 하게 하였으나 성문 안쪽에 있는 용은 입을 다물고 있어 장식용으로 설치했음을 알 수 있다.

문루 정면에는 여장을 설치하였는데 한 장의 화강암으로 만든 점이 특징적으로 북한산성의 대문 6곳 모두에는 이런 독특한 형식의 여장이 올려져 있다.

이 대서문을 통과하여 중성문을 거쳐 대남문에 이르는 길은 북한산성의 주요 간선도로였는데 이 대문 3 곳을 맡아서 수비·관리하였던 군부대는 이영청 유영이었다.

 

대서문을 사진에 담고 설명판까지 읽어 본 후 주위를 둘러보고 통과해 오르니 우측으로 작은 매점같은 건물이 보이는데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조용하기만 하고 벌써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는 연세든 어른들을 만나 인사 나누고 계속 오르니 오를수록 눈의 깊이가 깊어져 스패츠와 체인젠을 착용할 장소를 살펴보며 진행하는 시간이다.

잠시 후 얼어붙은 도로를 타고 가파르게 오르니 반사경과 적사함이 보이는 고갯마루 지나 다시 완만하게 내려가고 잠시 후 절내 눈을 치우는 스님의 빗자루 소리가 들리는 무량사에 도착을 해 스님과 인사를 나누고 전경을 사진에 담으며 통과한다.

무량사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의 북한산성 내에 자리한 대한불교법화종 사찰로서 택리지(擇里志)를 쓴 이중환은 땅의 기운이 가장 승한 곳으로 나라 안에서 네 곳을 꼽았는데 개성의 오관산, 한양의 삼각산(북한산), 진잠(대전)의 계룡산, 문화의 구월산을 정기가 빼어난 명산으로 보았으며 그 가운데서도 삼각산을 으뜸으로 꼽았다.

북한산은 수도 서울의 주산이요 진산인데 삼국시대 이래 한국사의 중심이 되어 온 이 지역은 한민족의 문화와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온 불교와도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조선시대까지 이어 왔다.

무량사는 경내에 약수가 있어서 처음에는 약수암(藥水庵)이라고도 불렀다가 1980년에 무량(無量)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뒤에 절 이름을 무량암이라 하였다가 다시 무량사로 바꿨다.

그동안 수없이 만났던 북한산인데 늘 종주 산행에 속도전만 재미를 붙였기에 오늘처럼 자세히 살펴보며 진행한 경험이 없어 잘 몰랐는데 오늘 보니 이처럼 많은 암자와 절이 산재해 있음에 놀라는 시간이기도 하다.

 

무량사를 지나 잠시 더 하얀 눈을 밟으며 전진하니 도로 좌측으로 아미타사 갈림삼거리가 나타나고 사진에 담은 후 찾아 보니 아미타사는 구 덕암사로서 자료에는 모두 아미타사가 아닌 덕암사로 표기되어 있어 자료 찾기에 어려움도 있던 암자이다.

원효봉 아래에 자리한 아미타사(구 덕암사)는 자연 그대로 형성된 바위 굴 속에 법당이 마련되어 있는데 정식 등산로가 아닌 데다 주변에 안내판도 없어 신도가 아니면 이 절의 석굴암을 접하기는 쉽지 않다.

덕암사에는 2개의 굴법당이 있는데 대웅전과 약사전이 바로 그것으로 이중 특히 대웅전은 큰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는 널찍한 바위 아래에 출입문을 설치하지 않았다면 그저 커다란 바위쯤으로 보일 듯한데 이 곳 덕암사의 석굴은 인접한 원효봉이 말해주듯 신라 때 원효대사가 기거했었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삼국 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원효대사가 이곳에 머물며 수도를 하면서 통일을 기원했다고 한다.

아미타사는 좌측으로 흐르는 북한천 건너 원효암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암자인데 입구는 이곳으로 되어 있어 원효암 방향에서 접근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는 듯 보인다.

 

아미타사 갈림삼거리를 지나니 등로에는 제법 등산객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곧이어 나무데크와 벤취쉼터들 및 화장실 그리고 북한동역사관이 보이는 공터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 벤취쉼터에도 몇명의 등산객들이 보여 체인젠을 착용하며 쉬고 있는 모습이 보여 이 산객도 잠시 발걸음 멈추고 벤취쉼터에 배낭 내려 입었던 방풍의를 벗어 배낭에 넣고 스패츠와 체인젠을 착용하며 겨울 산행 준비를 해 본다.

응달이라 그런지 손끝에 전해지는 한기가 온 몸을 얼어붙게 만들어 잠시 손을 녹이며 주위를 둘러보니 북한동역사관이란 건물이 눈에 들어 온다.

북한동역사관은 북한산성을 축조하던 때부터 300년 이상 삶의 터전이었으나 계곡상류에서 주거와 영업에 따른 환경오염 문제로 철거되어 공원입구 상가로 이주한 북한동마을의 발자취가 전시되고 있는 곳으로 근처에는 너른 쉼터와 화장실이 있어 본격적인 산행을 앞두고 전열을 정비하기 좋은 쉼터이다.

 

북한동역사관이 있는 쉼터에서 완벽한 겨울 산행준비를 마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려놓은 배낭을 둘러메고 출발하니 새마을교가 나타나고 그 다리를 건너자마자 다시 갈림삼거리가 보이는데 무심토 좌측 도로를 타고 원효봉과 백운대 방향으로 잠시 오르다 뒤돌아 내려 와 우측인 북한산대피소와 대남문 방향으로 오르며 산행을 이어간다.

잠시 오르니 좌측으로 서 있는 불상 하나가 보이고 곧이어 도로위에 쌓여 있는 눈을 치우는 비구니 한분이 보여 인사 드리고 우측 나무데크를 따라 오르니 앞서 세분의 여성분들이 재잘거리며 고요한 새벽 정적을 깨트리며 걸어 오르는 모습이 보인다.

 

한동안 나무데크와 계단을 타고 가파르게 오르니 도로 좌측으로 선봉사란 표지석이 보이고 그 뒤로 건물들이 보이는데 대한불교 조계종에 속한 작은 암자처럼 보인다.

사진에 담고 잠시 옛 생각을 해 보니 이곳에 선봉사란 암자가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오랫만에 들렸고 그때는 이런 암자에 관심도 없었기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선봉사를 지나 계속 이어지는 나무데크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거북암이란 작은 암자 건물이 보이는데 이곳은 사찰이라기보다는 매점같은 분위기에 홀로 웃어보는 시간이다.

거북암을 지나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북한동역사관 지나자마자 건넜던 북한천을 다시 통과하고 우측으로 보이는 밥용사를 확인하며 들머리도 다시 살펴보는데 그 이유는 중성문을 다녀 와 이곳 법용사에서 우측으로 들어가 능선을 타고 국녕사로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법용사 역시 자료를 찾아보니 자료에도 보이지 않는 작은 암자이지만 북한산성 14성문 종주를 위해서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암자이니 오늘은 세심하게 살펴보며 진행하는 시간인데 오래 전 산친구들과 진행할 땐 선등자가 있어 등로를 확인할 생각조차 못하고 무관심하게 산친구의 발자국만 따라 올랐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 오른다.

 

법용사를 지나 조금 더 걸어 오르니 우측으로 나무데크가 설치되어 있는데 앞서 진행하던 세명의 여성 등산객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좌측 시멘트 도로로 진행을 하기에 우측 나무데크와 계단을 통해 재빨리 통과해 오르니 우측에 커다란 바위 위에 음각이 새겨져 있는데 글씨는 보이지도 않아 사진에만 담고 조금 더 걸어 오르니 금새 중성문에 도착을 한다.

중성문은 북한산의 노적봉과 증취봉 사이의 협곡에 쌓은 중성(重城)에 설치된 성문으로 대서문에서 이곳에 이르는 지역은 지형이 비교적 평탄해 적의 공격에 취약한 구역이었기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이곳에 적의 공격을 이중으로 방어할 수 있는 차단 성인 중성을 두었다.

중성 안쪽은 북한산성의 내성에 해당되는데 이 내성에 행궁, 중흥사, 상창 등의 주요 시설이 집중되어 있었다.

또한 북한산성 중성문 옆에는 수문 터가 남아있는데 수문은 성벽 하단에 문을 내어 성 안의 물을 성 밖으로 흘려보내는 배수 시설로 적의 침투에 대비한 철책 시설도 갖추어 놓았다.

규모는 대서문보다 조금 작은 편으로 문루는 1998년 복원했는데 1958년에 복원한 대서문의 문루보다 40년이 늦어 복원기술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중성문 옆의 암반에 폭 2.2m, 높이 1.8m 규모의 작은 암문(暗門)이 숨겨져 있으며 이 암문은 원래 이름이 없었으나 성 안에서 생긴 시신(屍身)이 중성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이 문을 통해 나간다고 해 시구문(屍軀門)이라 불렸다.

한편 중성문 바로 옆을 흐르는 계곡에는 수문이 설치돼 있었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이곳 중성문 옆 계곡에 있던 시구문과 수문을 합쳐 16성문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기 쉽지 않아 편히 암문과 수문을 제외한 14성문으로 통용되고 있는 듯 보인다.

 

중성문을 살펴보고 사진에 담은 후 다시 뒤돌아 내려가 법용사 갈림삼거리에서 좌측 법용사 방향으로 들어가니 끝자락 우측으로 돌계단이 보이고 그곳을 통해 이제 국녕사 방향으로 오르며 종주 산행을 이어간다.

법용사 입구에 설치된 국녕사까지 0.6 Km와 의상봉까지 1.1 Km란 이정표를 확인하고 법용사 법당가는길이란 작은 이정판이 걸려있는 안전철봉이 설치된 돌계단을 타고 오르니 능선 등로에는 제법 많은 눈이 쌓여있고 지나간 발자국 하나만이 길라잡이 노릇을 하면서 이 산객을 유도하고 있어 편안하게 발자국을 따라 오르며 주위를 살펴보니 황사와 미세먼지 그리고 안개가 자욱해 시야가 제한되었기에 보이는 것 하나없이 등로에만 집중하며 오르는 시간이다.

잠시 후 돌탑 지나 지게꾼과 여인 두명이 앞서 진행하는 모습이 보이고 드디어 국녕사 사찰 옆에 건설된 동양 최대 좌불인 국녕대불 합장환희여래불이 보이기 시작한다.

북한산성 안에 자리했던 주요 사찰들은 대부분 1712년 성능(聖能) 스님이 북한산성 도총섭이 된 이후에 승병이 머무르는 군영(軍營)으로서 창건되거나 중창이 되었는데 북한산성 가사당 암문 아래에 자리한 국녕사도 1713년 승병(僧兵)의 군영이라는 목적으로 창건된 사찰이다.

당시 승군들은 북한산성 수비와 관리를 책임지는 막중한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승군이 머무를 수 있는 도량은 필수적이었는데 창건 이후 국녕사는 갑오경장으로 의승군(義僧軍)이 폐지 될 때까지 존속하였으나 이후 노역에 지친 많은 스님들이 떠나게 되어 한국전쟁 이후까지 폐허로 남게 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국녕사가 편안하면 나라가 편안하다고 했는데 이는 도성의 외곽에서 수비를 책임지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던 국녕사의 역할을 잘 표현한 말인 듯하다.

한국전쟁 이후 보경(寶鏡) 스님에 의해 법등을 다시 밝히게 된 국녕사는 1991년 화재로 소실이 되는 불운을 겪기도 하였으며 지금의 국녕사는 1998년 폐허를 딛고 가람을 중창한 것이어서 예전의 모습은 찾을 길 없으나 사찰의 역사 속에 면면히 흐르는 호국의 의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앞서 진행하던 여인 한분과 만나 인사를 나누는데 하산길에도 이곳으로 내려오냐고 묻길래 다른 곳으로 내려간다고 하니 이곳으로 내려오면 잠시 들려 따뜻한 차 한잔 마시고 내려가라고 해 감사한 마음만 전하고 국녕대불 합장환희여래불 바로 우측 옆으로 나 있는 탐방로 안내판이 가리키는 능선 방향으로 오르며 산행을 이어간다.

 

국녕사 건물들도 잠시 둘러보고 사진에 담은 후 능선으로 오르니 길게 이어지는 나무계단이 보이고 그 계단을 타고 오르니 계단 우측 아래로 국녕사 건물이 살짝 보이는데 가까운 거리이지만 짙은 안개와 황사로 인해 가시거리가 짧아 아쉬움도 남긴다.

다시 이어지는 긴 나무계단을 타고 오르니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능선 앞으로 좌측의 용출봉과 우측의 의상봉 가는 갈림길임을 알리는 작은 이정판이 보여 고민없이 우측의 의상봉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곳 역시 길게 이어지는 나무계단을 타고 숨가쁘게 오르며 생각해 보니 오래 전 14성문 종주시에는 보지 못했던 계단들이기에 시간이 지나 서울시에서 많은 노력을 들여 등로를 정비하고 북한산성도 많이 복원을 했다는 느낌이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 오르니 드디어 이정표와 서ㅏㄹ명판이 서 있는 가사당암문에 도착을 해 사진을 남기고 잠시 둘러보는 사이 우측 의상봉에서 내려오는 몇명의 등산객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다.

가사당암문은 북한산의 의상봉과 용출봉 사이의 고갯마루에 위치해 있는데 1711년(숙종 37년)에 북한산성 성곽을 축조하면서 만든 8개의 암문(暗門) 중 하나로 현재 백화사가 위치한 의상봉길에서 북한산성으로 오르는 길목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했다.

암문은 비상시에 병기나 식량을 반입하는 통로이자 때로는 구원병의 출입로로 활용된 일종의 비상출입구로서 산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적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고갯마루나 능선에 설치했다.

가사당암문은 여느 암문과 마찬가지로 성문 상부에 문루(門樓)는 마련하지 않았고 성문 양쪽은 장대석으로 쌓아올렸으며 그 위 천장 부분은 장대석 여러 매를 걸쳐 만들었다.

이런 양식의 성문을 아치 모양의 홍예식과 구분하여 평거식(平据式)이라 부르는데 원래 문짝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문짝을 달았던 원형의 지도릿돌과 일반문의 빗장에 해당되는 장군목을 걸었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가사당암문 아래에는 국녕사(國寧寺)가 자리잡고 있는데 국녕사는 북한산성의 축조, 수비, 관리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던 승병이 주둔한 승영사찰 (僧營寺刹)이었으며 가사당암문의 수축과 방어를 담당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 까닭에 가사당암문은 국녕문(國寧門)으로도 불린다.

그곳 가사당암문에서 우측 의상봉을 포기하고 좌측 용출봉으로 진행을 할까 잠시 고민하다 그래도 후회될 것 같아 우측 의상봉으로 향하는데 이곳부터는 쌓여있는 눈이 발목까지 빠지며 본격적인 눈 산행의 진수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가사당암문에서 뚜렷하게 나 있는 우측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며 의상봉에서 거꾸로 내려오는 몇명의 등산객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며 진행하니 등로 옆으로 성랑지라는 이정목이 서 있고 하부에는 설명이 되어 있어 읽어보니 성랑지는 성을 지키는 초소가 있었던 곳을 말하는데 북한산성에는 총 143개의 성랑이 있었다고 되어 있다.

오늘 북한산성 14성문 종주 산행을 하면서 가장 많이 만났던 성랑지 이정목이기에 이곳에서 그 내용을 상세히 읽어보고 확인한 후 다음부터는 사진에 담는 것으로 대신하는데 143개의 초소가 있었다고 하니 촘촘한 경계를 섰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성랑지 이정목 지나 조금 더 전진하니 드디어 북한산 특유의 바위암릉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평소같으면 주위 풍경과 조망들을 즐기며 진행했을 암릉이 얼어붙어 있고 눈까지 쌓여 이어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거꾸로 내려오는 등산객들을 만나면 기다렸다 교행하다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려 오늘 하루동안 14성문 종주나 가능할지 걱정이 생기기 시작하고 조심하며 바위암릉을 타고 오르니 짙은 안개와 미세먼지로 시야는 제한되어 있지만 능선 위에는 아름다운 눈꽃과 상고대가 피어있어 별천지를 만들고 있어 잠시 전 오르며 힘들었던 시간은 금새 잊혀지고 있다.

잠시 더 그 바위암릉을 타고 진행하니 드디어 502미터의 의상봉 정상에 도착을 하는데 벌써 12년 전인 2011년 3월에 대전 산친구들과 함께 올라 만났던 이후 처음이니 참으로 무심했던 세월이 지난 후이다.

그때와는 달리 많은 정상목들과 벤취쉼터 및 이정표가 세워져 있어 조금은 낯설게 느끼며 사진 몇장 남기고 곧바로 올라왔던 등로를 타고 뒤돌아 가는데 오를 때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설경이 자꾸만 발목을 잡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의상봉은 북한산의 의상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높이는 502m이며 명칭은 신라의 고승 의상(義湘)이 머물렀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하였다.

양쪽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가까운 지형이지만 정상은 평탄한 편으로 북쪽으로 원효봉(元曉峰)과 마주하고 있으며 이 봉우리에서 남쪽의 용출봉에서 용혈봉, 증취봉, 나월봉, 나한봉, 715봉, 문수봉으로 의상능선이 이어진다.

 

의상봉에서 고운 추억을 남기고 다시 바위암릉 위로 내려가니 바위틈에서 자라고 있는 키 작은 소나무가 겨울 찬바람에 하얀 상고대를 만들어 산객의 발목을 잡는데 바로 이런 풍경이 그리워 찾았던 북한산인데 제대로 된 모습이기에 만족하며 사진에 담아 본다.

다만 뿌연 안개와 미세먼지로 인해 주위 풍경과 조망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니 안전하게 바위암릉을 타고 내려가 원래 계획했던 14성문 종주에 집중하며 진행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바위암릉 위에 뿌리를 내리고 어렵게 살아가는 키 작은 소나무에 펴 있는 아름다운 상고대를 사진에 담고 주위 큰 소나무 솔잎에 매달려 있는 빙화를 확인한 후 다시 바위암벽을 조심해 내려가니 금새 가사당암문 위 성벽 등로에 도착을 하고 이제 그 암문 위로 나 있는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안전철봉과 쇠줄이 설치된 등로를 지나 또 다른 바위암릉이 시작된다.

어렵게 그 바위암릉을 타고 오르니 안전철봉이 끝이나고 암릉 능선 위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 역시 소나무 가지에 열려있는 환상의 눈꽃과 상고대가 산객의 발걸음을 붙잡고 늘어져 잠시 찬바람이 불어오는 능선에서 주위를 살펴보고 아름다운 소나무를 사진에 담은 후 출발한다.

 

그 바위암릉을 통과하니 눈과 바람과 습기가 만들어 놓은 황홀한 겨울 풍경이 다시 펼쳐지고 무심으로 그 겨울의 찬바람을 맞으며 잠시 즐기겨 걸어가니 바위 위에 설치된 안전철봉과 쇠줄이 이어지고 그 철봉을 따라 진행하니 점점 더 눈의 높이가 높아지고 있어 주의가 필요해 보인다.

해발 552미터라는 이정목을 지나 우뭇가사리보다 더 선명하고 아름다운 나뭇가지에 피어난 상고대를 친구삼아 천천히 전진하니 또 다시 안전철봉과 쇠즐을 지나 금새 571미터의 정상목과 이정표가 서 있는 용출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는데 가까운 거리의 사물조차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시야는 많이 좁아져 있어 오늘은 풍경과 조망은 포기하고 등로 주변에 피어있는 하얀 눈꽃과 상고대에 집중하는 시간이다.

용출봉은 북한산의 의상봉능선에 있는 의상봉과 용혈봉 사이에 있는 봉우리로 높이는 해발 571m이고 용이 나오는 봉우리라는 뜻에서 용출봉(龍出峰)이란 이름이 붙여졌으며 뾰족한 삼각형을 이룬 듯한 모습이 특징이다.

의상봉에서 용출봉과 용혈봉, 증취봉, 나월봉, 나한봉, 715봉을 거쳐 문수봉으로 의상봉능선이 이어진다.

 

용출봉을 지나 바위 사이로 설치된 철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눈과 바람과 습기가 만들어 놓은 환상의 설경이 펼쳐지고 잠시 감상하며 급할 것 없는 발걸음을 옮기니 다시 안전철봉과 쇠줄이 나타나고 얼어있는 바위 위에 쌓여 있는 눈으로 조심하며 바위암릉 능선을 통과하며 뒤돌아 보니 방금 전 내려 온 철계단 좌우측으로 보이는 바위들이 생각보다 위압적으로 느껴진다.

다시 바위암릉 사면에 자라고 있는 키 작은 소나무 위 솔잎에 수북이 쌓여있는 아름다운 하얀 눈꽃을 감상하며 사진에 담고 진행하니 눈 앞으로 멋진 바위 하나가 솟아 있는데 근사한 이름을 붙여 주려고 해도 너무 다양한 모습들이 연출되어 그저 탄성으로 대신하고 통과한다.

 

바위를 지나 조금 더 전진하니 가느다란 잡목 가지에 습기와 바람이 만든 하얀 빙화와 상고대가 나뭇가지보다 더 넓게 펼쳐져 있어 잠시 눈 맞춤을 하고 사진에 담으며 진행하니 뒤따르던 등산객 한분도 이런 설경에 감탄했는지 탄성만 지르고 있다.

늘 지맥 산행에 빠져 눈이 없는 지역으로 산행을 이어가다 보니 오랫만에 만나는 아름다운 설국에 나도 모르게 빠져 드는데 오늘은 설경과 함께 북한산성 14성문을 이어 걷는 종주 산행임도 잠시 잊고 있는 시간이다.

이어지는 계단과 안전철봉 지나 바위암릉을 통과하니 바위 위에 아담한 정상목이 박혀있는 581미터의 용혈봉에 도착을 하는데 정상부는 완전한 설국에 바람이 불어 춥기는 하지만 몽환적인 모습까지 선물로 주고 있다.

용혈봉은 북한산 의상능선의 용출봉과 증취봉 사이에 있는 봉우리로 높이는 해발 581m이고 의상봉에서 용출봉을 거쳐 이 봉우리까지의 구간은 낙뢰가 자주 발생하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이 봉우리를 지나 증취봉으로 넘어가는 도중에 강아지 얼굴 모양을 한 강아지바위가 있다.

몇 년 전 여름철 벼락이 치는 계절에 등산객들이 사망을 한 낙뢰위험지역이지만 오늘은 그런 위험성이 없기에 조금 더 머물며 설화와 상고대 그리고 설국을 마음껏 즐겨보는 시간이다.

 

약간의 바람이 불지만 생각보다 심하지 않아 흐르는 땀방울을 식혀줄 정도로 기온도 올라 산행하기에는 좋은 조건이지만 짙은 안개와 미세먼지로 인해 보이는 풍경과 조망이 없으니 그것이 옥의 티로 남아 있다.

용혈봉 주위에 피어있는 환상의 상고대와 눈꽃을 사진에 담고 바위암릉을 내려가니 등로는 갑자기 좌측으로 급하게 꺽어 내려가고 눈 덮힌 바위와 소나무들의 아름다운 조화를 살펴보며 걸어가니 대남문까지 2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 좌측 아래로 산불감시초소가 보이는 안부도 통과한다.

 

안부 지나 우측에 커다란 바위암릉을 두고 좌측 사면 등로에 설치된 안전철봉과 쇠줄을 따라 전진하니 다시 길게 이어지는 계단이 보이고 커다란 바위들이 키 자랑을 하고 있는 봉우리에 도착을 하는데 좌측 바위 옆에서 중년의 아저씨 두분이 아름다운 설경을 배경으로 추억 남기기 바뿐 모습도 이색적으로 다가온다.

이곳에서 증취봉은 좌측 바위 뒤로 돌아 올라야 만나기 때문에 조심하며 오르니 중년의 남성 두명이 인사를 건네고 목례를 하고 바위 위로 오르니 바위 위에 아담한 정상목이 서 있는 593미터의 증취봉 정상에 도착을 해 추억 한장 남긴다.

증취봉은 북한산의 의상능선에 있는 봉우리로서 해발 593m이며 멀리서 보면 시루가 불타는 모양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바위들에 둘러쌓여 있는 증취봉 정상 주변의 커다란 소나무 앞에도 환상의 눈꽃과 상고대가 펼쳐져 있어 잠시 머물며 중년의 아저씨 두명과 함께 탄성을 지르고 사진에 담은 후 천천히 출발하니 등로 주변으로는 온통 하얀 솔잎과 설경이 불어오는 바람에 흩뿌려지는 눈가루와 함께 몽환적인 분위기도 만들기 시작한다.

많은 사진을 남기고 출발하니 여전히 바위암릉이 이어지고 곧이어 등로 옆으로 부왕동여장이라는 설명판이 서 있어 잠시 발걸음 멈추고 읽어본다.

여장(女墻)은 성벽 위에서 적의 공격으로부터 은신할 수 있는 방패의 역할을 하면서 활이나 총을 쏘기 위해 구멍이나 사이를 띄어서 쌓은 작은 성벽으로 삼국시대부터 만들어져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여장의 형태는 삼각형, 사각형, 반원형, 사다리형 등 다양하며 여장의 중간에 총안까지 갖추어 방어력을 높였다.

이곳 부암동암문 가까이에 있는 여장은 부암동여장으로 불리는데 대략 8.4 Km에 달하는 북한선성의 여장중에서 그 원형이 가장 잘 남아있다.

북한산성의 여장은 진돌로 만든 남한산성의 여장이나 잘 다듬은 돌을 이용하여 만든 화성의 여장과 차이를 보이는데 적당히 다듬은 활석(깬돌)으로 쌓았다.

현재 동장대 주변에 복원된 여장은 세부 자료와 축조된 방식에서 부왕동여장과 차이를 보여 원형이 잘 반영돤 복원이라 할 수 없으며 앞으로 여장 복원은 이곳 부왕동여장을 참고하여 이루어져야 하겠다라는 내용이다.

 

부암동여장 설명판을 읽어보고 성벽을 따라 눈 쌓인 등로를 따르니 바위암릉 사이로 안전철봉과 쇠줄이 설치되어 있고 그 바위암릉 지대를 통과하니 또 다른 여장 설명판이 설치되어 있어 잠시 발걸음 멈추고 읽어 본다.

한양도성이나 수원화성과 같은 성곽을 보면 들쭉날쭉 요철(凹凸)로 된 나지막한 담이 눈에 들어 와 우리는 이것을 여장(女墻)이라 하는데 장(墻)은 담을 뜻하는 것이므로 이해되는데 왜 여(女)를 붙여 여장이라고 했을까 궁금하기만 하다.

중국 명나라 때 백과사전인 삼재도회(三才圖會)와 중국 후한(後漢, 서기 25~220년) 말기에 만들어진 사전인 석명(釋名)에 그 답이 있어 확인해 보니 이 책에 의하면 성 위에 있는 담을 비예(睥睨)라 하며 가운데 빈 공간이 있어 비상(非常)한 것을 살펴보게 하는데 아래의 높은 성에 비하여 높이가 작아 마치 키가 큰 남자와 키가 작은 여자와 같아서 이를 여장이라고도 일컫는다(若女子之於丈夫也)고 되어 있다.

여장은 성곽에서 매우 중요한데 성 자체가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는 역할을 한다면 여장은 방어와 공격 두 가지를 담당한다.

임진왜란 이후 영의정을 지낸 서애 유성룡은 서애집(西厓集)에서 이 여장(女墻)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였다.

그는 원래 여장은 높이가 있어야 밖에서 날아오는 화살과 돌을 피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 여장은 몇 자 되지 않아 성을 지키는 사람이 몸을 숙이고 허리를 굽혀 쥐처럼 지나감에도 적의 탄환에 맞을 수 있으니 옳지 못하다고 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 오랜 기간 평화가 지속되어 적의 침입에 대한 대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으로 그래서인지 전란 이후 지어진 수원 화성은 다른 성곽에 비하여 여장의 높이가 높다.

 

부암동여장과 일반 여장에 대한 설명판을 통해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성벽에 대한 이해도를 높히고 이어지는 설경을 감상하며 걸어가니 등로 옆으로는 여전히 성랑지에 대한 설명판들도 자주 눈에 들어 온다.

그렇게 잠시 더 성벽을 따라 눈을 헤치며 전진하니 금새 부왕동암문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 역시 암문 옆으로 설명판이 설치되어 이고 그 설명판 옆으로는 대남문까지 1.5 Km 거리라는 이정표도 보인다.

부왕동암문은 북한산의 나월봉과 증취봉 사이의 고갯마루에 위치해 있는데 1711년 숙종 37년 북한산성 성곽을 축조하면서 설치한 8개의 암문(暗門)중 하나로 성 밖의 삼천사 쪽에서 성 안쪽의 중흥사에 이르는 길목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했다.

암문은 비상시에 병기나 식량을 반입하는 통로이자 때로는 구원병의 출입로로 활용된 일종의 비상출입구로서 산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적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고갯마루나 능선에 설치했다.

부왕동암문도 여느 암문과 마찬가지로 성문 상부에 문루(門樓)를 마련하지 않았고 출입구의 모양은 암문의 일반적인 형태인 사각 형태가 아니라 외관상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 형태를 띠고 있다.

원래 문짝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문짝을 달았던 원형의 지도릿돌과 일반문의 빗장에 해당되는 장군목을 걸었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부왕동암문 아래에는 원각사(圓覺寺)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 원각사는 북한산성의 축조와 수비 및 관리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던 승병이 주둔하였던 승영사찰(僧營寺刹)이었으며 부왕동암문의 실질적인 방어와 수축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까닭에 부왕동암문은 원각문(圓覺門)으로도 불린다.

 

부암동암문을 통과하자 세상은 온통 하얀 눈의 세상으로 바뀌고 잠시 걸어 오르니 구급함과 이정목 그리고 벤취쉼터들이 설치된 공터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부터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눈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나뭇가지에 내려 앉아 있는 하얀 눈들이 송이송이 커다란 눈꽃으로 다시 피어나고 주위 어디를 봐도 그저 탄성이 나오는 환상의 풍경화가 펼쳐져 있다.

여전히 짙은 안개와 미세먼지로 시야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생각없이 등로 주위에 피어난 설화를 배경으로 많은 사진과 추억들을 남기다 보니 오늘 산행이 종주산행인지 눈꽃 구경을 위한 테마기획 산행인지 분간하기도 어려운 시간이 흐르고 있지만 급하 것 없는 발걸음이 여유로운 근교 산행의 절정임을 알려주고 있기도 하다.

 

잠시 후 약간의 바위너덜등로를 지나 잡다한 잡목들로 이뤄진 등로를 따르니 그 잡목 등로마저 오늘은 이 산객을 위한 설경을 만들 듯 아름답게 포장되어 있어 사진기의 셔터 누르기에 바쁜 시간이다.

지나다 눈꽃이 만발한 나뭇가지를 살짝 건드리기라도 하면 쌓여있던 눈꽃들이 사라지며 산객의 온 몸을 향해 눈가루를 뿌려주고 있어 그 또한 그동안 즐기지 못했던 산행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시간이다.

잠시 더 온통 순백의 설경으로 치장된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대남문까지 1.2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나타나고 그 우측으로 나월봉 오르는 등로가 보이는데 안전로프가 설치되어 있어 살펴보니 아무도 오르지 않은 순백의 눈이 그대로 쌓여 있어 위험을 무릅쓰고 오를 필요까지는 느끼지 못하기에 아쉬움만 남기고 나월봉은 좌측 사면 등로를 통해 편안하게 통과하기로 한다.

 

사면 등로 우측으로 거대한 바위암릉으로 이뤄진 나월봉 능선을 아쉬움속에 살펴보며 걸어가니 바람이 머물다 가는 곳이라서 그런지 나뭇가지에 쌓여있는 눈꽃송이들이 더욱 크게 펼쳐지고 어느 소나무 가지에는 솔잎에 쌓여있는 눈들이 마치 하얀 밀가루 반죽을 해 놓은 듯 앙켜 붙어 있어 산객의 눈과 발걸음 모두를 잡고 늘어진다.

사진에 담으며 조금 더 전진하니 등로 우측으로 거대한 바위암릉이 나타나고 그 사이마다 키 작은 소나무 가지에는 하얀 눈꽃이 함박꽃을 연상시키게 달려이어 잠시 감상도 해 본다.

곧이어 우측 나월봉 정상부 방향으로 거대한 바위암벽이 나타나고 하얀 순백의 풍경을 사진에 담으며 오르지 못한 아쉬움도 잠시 그저 오늘 이 시간을 즐겨보는 산행이 즐겁기만 하다.

오르지 못한 나월봉은 북한산 의상능선의 증취봉과 나한봉 사이에 있는 봉우리로 높이는 해발 651m인데 이 봉우리의 정상은 의상능선에서 조망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추락위험지역으로 안전장구를 갖추지 않으면 출입이 제한된다.

북한동 방면의 산성탐방지원센터에서 의상능선을 거쳐 보국문과 대동문, 용암문, 백운대, 우이탐방지원센터에 이르는 종주코스는 약 8시간이 소요된다.

 

우츩 암벽 위로 오르지 못한 나월봉을 살펴보고 계속 이어지는 사면 등로를 따르니 더욱 커진 눈꽃송이들이 소나무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 평소 알고 있던 푸른 소나무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기분이다.

급할 것 없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설국의 설경을 즐기다 보니 대남문까지 0.8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다시 만나고 성랑지 이정목 지나 이어지는 나무계단을 타고 오르니 이제부터 나한봉으로 오르는 능선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 등로 역시 황홀한 설경이 끝도 없이 펼쳐져 전진하기 어려운 시간이다.

앞서 진행하던 중년의 여성 두분이 탄성을 지나 신음소리를 내면서 설경을 즐기고 뒤따르던 젊은 등산객 한분도 급할 것 없다는 발걸음으로 이 산객과 보조를 맞춰 환상의 설국을 즐기는 모습이 역력하다.

나뭇가지마다 매달려있는 설화와 우측 성벽 방향으로 펼쳐진 드넓은 상고대와 살화가 뒤엉킨 황홀한 모습이 산객의 발걸음을 붙잡아 이곳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내며 그저 즐겨보는 시간이다.

 

소나무 가지에 달려있는 눈꽃송이들이 마치 하얀 장미송이로 물들인 듯 펼쳐지고 강한 바람에 녹았던 물기가 얼으며 부드러운 눈꽃들을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로 만들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비경을 만들어 놨다.

누구 하나 급하게 서두름 없이 모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많은 사진에 담고 남을 의식하지 않고 내지르는 탄성이 등로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시간이다.

우측 키 작은 잡목 가지에는 강한 바람에 넓게 펼쳐진 눈꽃과 상고대가 뒤엉켜 또 다른 탄성을 부르고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머물다 내려간다고 해도 아쉬울 것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완벽한 설국의 설경을 만들어 놨다.

 

환상의 설국에 펼쳐진 황홀한 설경에 취해 누구 하나 서두르지 않고 신세계를 즐기며 진행하다 보니 한발자국 옮기는 것도 어려울 정도로 심취한 시간이었다.

이렇게 담아보고 저렇게 담아봐도 비슷한 모습처럼 보이지만 모두 다른 환상의 풍경에 넋이 나간 사람들처럼 즐기며 사진에 담다 보니 자꾸만 발걸음은 좌측 사면 등로를 벗어나 우측 성벽 방향으로 올랐다 내려오기를 반복하고 잠시 후 등로 우측으로 안전철봉과 쇠줄이 보이는 곳에서 지나 온 방향을 보니 소나무 가지 위에 쌓여 얼어 있는 눈꽃송이들이 마치 하나의 거대한 조각품을 만들어 놓은 듯 보여 눈길을 뗄 수가 없다.

앞서 진행하던 중년의 여성 두명은 이런 모습을 마치 하얀 장미송이들이 뭉펴 거대한 장미다발을 만들어 놨다고 좋아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거대한 눈 터널을 통해 황홀경에 빠지다 보니 산행인지 그림 전시장인지 모를 환상에 빠지고 그렇게 즐기며 조금씩 걸어 오르니 이제는 등로 우측의 키 작은 잡목 가지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상고대가 드넓게 펼쳐져 있어 또 다시 탄성속으로 빠져 든다.

얇은 나뭇가지의 몇배나 되는 드넓은 상고대가 미풍에 흔들리는 모습이 아른거리고 많은 사진에 담아 보지만 눈으로 직접 보며 느꼈던 감흥만큼은 되살아 나지 않지만 오랫만에 즐겼던 설국의 설경속 눈꽃과 상고대는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은 환상의 모습으로 간직될 것이다.

 

그렇게 짧지만 길게 즐겼던 환상의 설국속 설경을 즐기며 감상하고 천천히 오르니 어느 순간 그 황홀경에서 어렵게 빠져 나오고 하얀 눈 세상속으로 걸어 오르니 갑자기 눈 앞으로 나한봉 치성이라는 설명판이 서 있어 잠시 읽어 본다.

치성(雉城)은 성곽 일부분을 네모나게 돌출시켜 밖으로 내어 쌓은 구조물로 적군의 접근을 초기에 관측하고 전투할 때 접근하는 적을 정면이나 측면에서 격퇴하기 위해 설치한 방어 시설물이다.

치성의 치는 꿩이라는 뜻인데 성곽 구조물의 생김새가 꿩의 머리처럼 돌출되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하며 성곽의 역활이 몸을 숨기고 주변을 살피는 꿩의 습성과 비슷하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해발 688m에 조성된 나한봉 치성은 성곽의 남서쪽을 관측하기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한양을 비롯해 한강유역을 한눈에 관측할 수 있고 서쪽의 한강 하구와 멀리 강화도까지 조망할 수 있다.

나한봉 치성의 구조는 3-4단의 성벽이 있고 삼면이 전부 깍아지른 자연 절벽으로 이뤄지며 북서쪽은 30cm 내외로 흙을 사용해 평편하게 했고 외성벽 아랫쪽은 계단식으로 만들어 성벽을 보강했다.

치성의 길이는 10cm에 너비 4.4m이며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1m 내외이고 내부에서는 건물지로 추정되는 초석 1기의 초석을 받친 적심 유구2기가 발견되었는데 130cm 내외로 간격이 일정하며 지붕을 만든 재료로 보이는 기와도 발견되었다.

 

나한봉 치성 설명판을 읽고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넓은 공터 주변으로 성곽을 복원한 정상부에 도착을 하는데 정상 한쪽에는 681미터의 나한봉이라는 정상목이 서 있어 사진과 추억 한장 남기고 올라갔던 등로를 뒤돌아 짧게 내려간 후 우측의 정상등로를 만나 산행을 이어간다.

나한봉은 북한산 의상능선의 나월봉과 715봉 사이에 있는 봉우리로 높이는 해발 688m이며 이 봉우리 정상은 위험지역으로 출입이 제한되므로 일반 등산객은 우회하는 것이 좋다.

북한동 방면의 산성탐방지원센터에서 의상능선을 거쳐 보국문과 대동문, 용암문, 백운대, 우이탐방지원센터에 이르는 종주코스는 약 8시간이 소요된다.

 

나한봉 정상에서 사진과 추억을 남기고 뒤돌아 내려가 우측으로 이어지는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이곳 역시 우측에 성벽을 두고 양쪽으로 안전목책이 설치되어 있어 길찾기엔 걱정이 없어 편안하게 진행하니 앞서 진행하던 중년의 여성 두명이 여전히 가벼운 대화를 하면서 앞서 진행하고 있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여성들을 추월해 안전철봉이 설치된 바위암릉을 타고 오르니 성랑지 이정목이 보이는 무명봉 넘어 다시 환상의 눈꽃 터널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평소같으면 잡목들로 성가시게 느꼈을 등로가 하얀 눈꽃 터널을 만들어 환상의 세계로 인도하듯 펼쳐져 무아의 세계로 빠져드는 시간이다.

 

진행할수록 눈의 깊이도 깊어지고 눈가루가 날리면서 시야는 더욱 좁아졌지만 그렇기에 더욱 몽환적인 풍경에 빠져 걷다 보니 또 다른 모습의 우뭇가사리 등로가 길게 이어진다.

가끔 만나는 등산객 모두 환희에 찬 모습으로 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즐기는 모습에서 오늘의 산행이 얼마나 행복감을 선물해주고 이;ㅆ는지 실감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 산객 역시 오랫만에 시간과 거리에 구애됨 없이 그저 즐기다 진행이 늦어지면 쉽게 탈출하리란 생각으로 진행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14성문 완주란 단어가 꿈틀거려 가끔은 빠른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남장대지와 행군지 갈림삼거리 이정판이 나타나는데 망설임 없이 통과하고 나니 후회도 되는 시간이다.

남장대(南將臺)는 북한산성에 설치된 3개소의 장대 중 하나로서 조선 시대에는 어영청의 장수가 주둔했으며 행궁을 비롯한 성내 시설물을 관리하기 위한 지휘·관측소로 쓰였다.

북한산 상원봉의 줄기인 나한봉(羅漢峯:현 715봉) 동북쪽에 위치하며 현재는 기단석만 남아 있다.

하지만 아쉬움도 잠시 다시 설국의 설경을 즐기며 조금 더 진행하니 694미터의 청수동암문에 도착을 해 사진과 추억을 남기며 잠시 쉬어간다.

청수동암문(淸水洞暗門)은 북한산의 나월봉과 문수봉 사이의 고갯마루에 위치해 있으며 1711년 숙종 37 북한산성 성곽을 축조하면서 설치한 8개의 암문(暗門) 중 하나로 탕춘대성과 비봉에서 성 안쪽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했다.

암문은 비상시에 병기나 식량을 반입하는 통로이자 때로는 구원병의 출입로로 활용된 일종의 비상출입구로서 산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적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고갯마루나 능선에 설치했다.

청수동암문은 여느 암문과 마찬가지로 성문 상부에 문루(門樓)는 마련하지 않았는데 성문 양쪽은 장대석으로 쌓아올리고 그 위 천장 부분은 장대석 여러 매를 걸쳐 만들었다.

이런 양식의 성문을 아치 모양의 홍예식과 구분하여 평거식(平据式)이라 부르는데 원래 문짝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문짝을 달았던 원형의 지도릿돌과 일반문의 빗장에 해당되는 장군목을 걸었던 방형 구멍이 남아 있다.

 

청수동암문을 지나자마자 구급함과 이정목 그리고 벤취들이 설치된 쉼터가 나타나는데 고양이 한마리가 눈길을 잡아 잠시 쓰다듬어 주고 눈 앞으로 보이는 거대한 바위암봉으로 조심하며 오르니 눈꽃이 만발한 소나무 지나 정상목이 설치된 727미터의 문수봉 정상에 도착을 하는데 이 문수봉 역시 몇 년전 친구들과 올라 즐겼던 것이 마지막이었으니 족히 5년은 된 듯 싶다.

하지만 풍경과 조망이 좋은 문수봉이지만 오늘은 보이는 것 하나 없으니 그저 정상부에 피어 난 설화와 상고대로 만족하는 시간이지만 아쉬움은 별로 없는 순간이기도 하다.

문수봉은북한산의  의상봉에서 시작되는 의상능선의 마지막 봉우리로 높이는 해발 727m이고 명칭은 봉우리 아래에 있는 고려 때 창건된 문수사(文殊寺)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봉우리 북쪽 자락의 청수동암문에서 의상능선과 산성주능선 및 비봉능선이 만나는 곳으로 봉우리 위에 있는 두꺼비 모양의 바위 등에 걸터앉아 아들을 갖기를 축원하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오늘은 눈이 덮혀있어 바위에 앉기도 힘든 시간이다.

 

문수봉부터는 제법 많은 등산객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조용하던 등로도 시끌벅쩍 소음이 들리면서 이곳저곳에서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들이 귓전을 때리기 시작한다.

보이는 풍경과 조망이 없으니 문수봉 주위에 피어 난 아름다운 소나무 위 설화와 상고대를 사진에 담으며 내려가니 바로 눈 앞으로 커다란 소나무가 나타나는데 이곳 역시 아름다운 누놏과 약간의 상고대가 산객의 눈길과 발목을 잡아 잠시 더 살펴보고 사진에 담은 후 출발한다.

 

카메라 앵글을 어느곳에 두고 사진을 담더라도 모두 작품이 되는 풍경에 취해 잠시 더 머물다 조심하며 그 문수봉 정상의 바위암봉을 내려가니 우측으로 종로구 경계점이라는 작은 표지석이 박혀있고 약간의 잡목 위에 피어있는 눈꽃들을 살펴보며 내려가니 다시 북한산성 성벽을 따라 등로가 이어진다.

성벽을 따라 잠시 내려가니 넓은 공터에 많은 안내판들과 이정표가 서 있고 바로 뒷편으로 복원이 완성된 대남문 상부에 도착을 하는데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내려 가 전체 모습을 사진에 담고 다시 올라 가 본다.

대남문(大南門)은 북한산성의 가장 남쪽에 있는 성문으로, 산성이 축성된 1711년(숙종 37)에 지어졌다. 소남문으로도 불린 대남문은 비봉 능선을 통해 도성의 탕춘대성과 연결되는 전략상 중요한 성문이다.

성문 하부는 홍예 모양으로 통로를 내고 성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도록 했으며 상부에는 군사를 지휘하고 성문을 지키기 위한 단층의 문루가 있었는데 이 문루는 소실되었던 것을 1991년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

 

몇명의 등산객들이 보이고 일부는 새끼를 대동한 강아지를 보며 먹이를 나누는 모습들도 보여 대남문 정면을 사진에 담고 출발하니 성벽을 따라 가파른 오르막 등로가 이어진다.

하지만 모두 하얀색으로 변한 설국의 설경에 취해 어려운 줄도 모르고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바위능선이 보이는데 출입금지 안내판 뒤로 통천문을 닮은 바위와 구멍이 보여 사진에 담고 살펴보니 보현봉과 형제봉 일원은 훼손지 확산 방지와 식생복원지로 지정되어 2026년 마라지 출입이 금지된다는 내용이다.

 

출입금지 안내판을 지나 이어지는 평이한 능선 등로를 따르니 눈은 이제 발목을 덮고 여전히 나뭇가지에 쌓여있는 눈꽃들은 세상을 온통 설국으로 변화시켜 놨기에 힘들 줄 모르게 풍경을 즐기며 걸어가는 시간이다.

잠시 후 다시 만나는 성벽을 따라 가파르게 내려가니 안전목책과 로프 등로를 지나 바람이 잦아 든 등로에 도착을 하는데 더욱 풍겅한 눈꽃이 다시 산객의 발걸음을 붙잡기 시작한다.

온통 하얀 설경에 취해 많은 사진을 담고 조금 더 내려가니 잠시 후 진행해야 할 대성문 지나 펼쳐진 등로가 살짝 보이기 시작하고 흥분된 마음으로 사진에 담으며 진행하니 대성문에 도착을 해 복원이 끝난 모습을 사진에 담아 본다.

대성문(大城門)은 북한산성의 동남쪽에 있는 성문으로 산성이 축성된 1711년(숙종 37)에 지어졌으며 문의 형식과 규모는 대남문과 같다.

대성문은 형제봉 능선을 타고 서울의 북쪽 평창동과 정릉동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관문으로서 성문 하부는 홍예 모양으로 통로를 내고 성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도록 했다.

상부 단층 문루는 우진각 지붕 형태인데 이는 지붕 네 면 모두에서 불화살 공격을 막기 위한 것이며 이 문루는 소실되었던 것을 1992년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

 

대성문 앞 벤취쉼터에서 준비한 빵과 과일로 허기를 달래고 다시 성벽을 따라 걸어 오르니 이곳 역시 제법 등산객들이 보이지만 평소에 비해 적은 인원이기에 등산객으로 인한 어려움은 전혀 없다.

잠시 그렇게 등산객들 뒤를 따라 천천히 걸어 올라 무명봉에서 지나 온 방향을 뒤돌아 보니 방금 전 넘어 온 무명봉 뒤로 대성문이 숨어 있고 그 뒤로 대남문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봉우리들이 살짝 얼굴을 내밀기 시작해 오늘 처음으로 제한된 풍경과 조망을 사진에 담아 본다.

 

대성문 지나 성벽을 타고 오르며 오늘 처음으로 지나 온 등로를 살펴보며 많은 사진으로 남기고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등로 주위에 서 있는 소나무에 환상의 눈꽃이 활짝 펴 다시 산객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지나가는 등산객들을 피해 몇장의 사진을 더 담은 후 천천히 진행하니 바람이 약한 부분의 소나무엔 눈이 도로에 쌓여 있듯 소복하게 앉아 있어 색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고 잠시 더 그 풍경들을 즐기며 오르니 무명봉 넘어 다시 성곽을 따라 완만하게 내려가는데 내려가는 길목에 서 있는 소나무 두 그루가 다시 환상을 노래하고 있다.

평소 같으면 보고 지나쳤을 풍경이 오늘은 한폭의 산수화로 남아 사진에 담다 보니 속도는 현저히 떨어지지만 급할 것 없으니 가슴속 깊이 고운 추억들도 담아 보는 시간이다.

 

사진을 담는 동안 몇명의 등산객들이 앞서 지나가고 그 뒤를 따라 완만하게 내려가니 이제 진행 방향으로도 약간의 조망이 열리기 시작하는데 바로 밑으로 보이지 않는 보국문 넘어 올라야 할 다음지도에 표기된 복덕봉과 그 좌측으로 이어지는 대동문 방향의 산줄기와 성곽이 엷어지는 안개속에 몽환적인 모습으로 산객의 마음을 흔들기 시작한다.

복덕봉 우측으로는 다음지도에 석기봉으로 표기된 봉우리도 아름답게 쌍봉의 모습으로 보여 다시 몇장의 사진에 담다 보니 이것이 바로 설국의 설경이 아닐까 하는 착각속에 빠져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기대하지 못했던 지나 온 등로와 진행 방향으로 조금씩 열리기 시작하는 풍경과 조망들을 사진에 담으며 천천히 내려가니 등로 우측의 성곽에도 하얀 눈이 소복히 쌓여 있어 또 다른 추억을 만들어 준다.

성곽 위에 쌓여있는 하얀 눈에 글씨도 써 가며 내려가니 가파른 내리막 등로에는 안전철봉과 로프가 설치되어 있어 안전하게 진행되고 그렇게 여유롭게 걸어 진행하니 바로 눈 앞으로 보국문이 보이는데 이 보국문은 복원 공사중이라 제 모습을 보기 어려워 높은 이곳에서 사진으로 남겨 본다.

보국문(輔國門)은 북한산성의 동남쪽에 있는 암문으로 산성이 축성된 1711년(숙종 37년)에 지어졌으며 소동문 또는 동암문이라고도 한다.

암문은 평상시에는 백성들의 출입문으로 이용되었으며 전쟁 때에는 비밀통로로 사용되었는데 암문은 돌로 만들었지만 홍예 형태가 아닌 방형의 평문 형식이며 상부에 문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1993년에 보국문 상부이 여장을 복원하였고 부분적으로 수리하였다가 현재도 여전히 복원공사가 진행중이라 철판으로 가림막을 설치해 직접 만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공사중이라 내부를 볼 수 없는 철판 가림막이 설치된 보국문 앞을 지나 우측으로 돌아 오르니 철판에 작은 이정판들이 걸려있어 방향을 확인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 놔 진행에는 어려움이 없다.

공사중인 보국문을 통과해 다시 이어지는 성곽을 타고 오르다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지나 온 다음지도에 성덕봉으로 표기된 봉우리가 하얀 설경의 모습으로 아름답게 펼쳐져 있어 다시 사진에 담으며 천천히 올라간다.

오르니 소나무 가지마다 하얀 눈꽃이 활짝 펴 산객을 반겨주고 곧이어 복덕봉 정상으로 오르니 우측으로 칼바위능선 갈림삼거리 이정표도 서 있는데 진행 방향으로는 대동문까지 0.4 Km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가 보인다.

그 복덕봉 정상 지나 우측에 성곽을 따라 조금 더 평이한 능선 등로를 걸어가니 좌측으로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곳 역시 나뭇가지마다 하얀 눈꽃이 활짝 펴 있는 환상의 설경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탐스런 눈꽃들이 피어있는 터널을 지나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우뭇가사리가 줄지어 펼쳐지고 그 모습을 가슴속에 남기며 천천히 내려가니 잠시 깊은 눈이 발목까지 빠지는 넓은 비포장임도 같은 등로가 길게 이어지고 있다.

한동안 더 길게 이어지는 평이한 눈꽃 터널을 따라 걸어가니 저 멀리 굵은 나무들이 보이는 공터가 보이기 시작하고 그곳에는 많은 등산객들이 서성이며 쉬고 있는 풍경도 눈에 들어 온다.

그 풍경들을 바라보며 조금 더 걸어가니 많은 설명판과 안내판들이 설치되어 있고 우측으로는 공사중인 대동문 앞에 도착을 하는데 복원이 완료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인다.

대동문(大東門)은 북한산성의 동쪽에 있는 성문으로 산성이 축성된 1711년(숙종 37)에 지어졌으며 서울의 동북쪽 수유동과 우이동을 연결하는 관문이다.

문의 형식이나 모습은 대남문이나 대성문과 같지만 홍예는 이 문이 가장 크고 하부의 홍예문은 통로로 사용되었으며 상부의 단층 문루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문루는 소실되었던 것을 1993년에 새로 복원되었는데 이때 홍예문 상부의 여장도 함께 복원하였다가 현재는 전체적인 모습을 복원중에 있다.

 

등산객들로 붐비고 복원 공사중이라 볼 수 없는 대동문이기에 사진만 남기고 곧바로 출발하니 우측의 성곽과 좌측의 굵은 소나무 사이로 환상의 설국이 길게 이어진다.

잠시 그 소나무 등로를 따라 아름다운 설경을 즐기며 진행하니 설명판과 이정목 그리고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는 2층의 동장대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지도를 살펴보니 다음지도에는 시단봉으로 표기된 곳으로 산성은 우측으로 이어진다.

동장대(東將臺)는 북한산성의 동쪽에 있는 장대로 1712년(숙종 38)에 지어졌으며 장군의 지휘소로 북한산성에는 동장대 외에 남장대와 북장대가 있었으나 현재는 동장대만 남아있다.

동장대는 최고 지휘관이 사용하던 곳으로 장대 중에서도 가장 중요시 되었는데 장대의 평면은 정방형이고 중층 구조로 아래층은 벽이 없이 트여 있어서 지휘하기 편리하도록 했으며 위층은 창으로 막아 방을 만들어 사용했다.

장대의 구성이나 모습은 수원 화성의 서장대와 거의 같으나 소실되었던 장대를 1996년에 복원한 것이다.

 

동장대에서 사진 한장 남기고 우측으로 이어지는 성곽을 따라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이곳 역시 설국속으로 들어가 아름답게 펼쳐진 설경속으로 빠져 드는 느낌으로 걸어보는 시간이다.

잠시 성벽과 헤어졌다 다시 만나 그 성벽을 따라 걸어가니 온 세상이 전부 하얀 눈 세상으로 변해있어 오늘 제대로 된 눈 산행을 즐기는데 바로 앞서 걸어가는 등산객 한분의 옷이 주황색이라 하얀 설원에서 더욱 빛을 내고 있어 한동안 이색적인 풍경속에 무심으로 걸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한동안 더 앞서 걸어가는 주황색 방풍의를 입고 진행하는 등산객 뒤를 따라 걷다 보니 등로는 우측의 성벽과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하고 곧이어 몇명의 등산객들을 더 만나는데 입은 등산복의 색깔이 전부 달라 하얀 설경속에 특이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한동안 더 평이하지만 하얀 눈에 덮힌 세상을 순백의 어린마음으로 살펴보며 진행하니 갑자기 잡목 가지에 열려있는 하얀 상고대가 산객의 발길을 붙잡아 잠시 발걸음 멈춰 다시 많은 사진을 남기고 출발하니 이제는 커다란 소나무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 솔잎 위에도 소복하게 쌓여 있는 눈꽃이 마치 함박꽃이 만개한 느낌으로 다가 와 종주 산행이라는 사실도 잊고 한동안 즐기는 시간도 가져본다.

 

평소같으면 조금 빠르게 통과했을 평이한 잡목 구간이 더욱 황홀한 상고대를 만들어 자주 발걸음을 멈추다 보니 시간 개념이 사라지듯 진행하는데 가끔 불어오는 찬바람에 누놏이 휘날리며 몽환적인 모습도 만들어 더욱 발걸음을 느리게 만들고 있다.

아름다운 눈꽃이 활짝 펴 풍성해진 소나무를 살펴보며 많은 사진을 담고 다시 출발하지만 얼마 진행하지 못해 이번에는 잡목 가지에 얼어 있는 상고대가 다시 눈 앞에서 춤을 추기 시작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뒤따르던 등산객들도 같이 발걸음을 멈추고 누구랄 것도 없이 함께 설국의 설경을 즐기며 탄성을 지르는 시간도 가져본다.

환상의 상고대를 구경하며 사진에 담고 다시 설경이 아름다운 성벽 옆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갑자기 눈 앞으로 눈보라 속에 거대한 암봉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용암문 지나 우회하게 될 용암봉으로 그 좌측 뒤로는 노적봉도 살짝 머리를 내밀기 시작해 더욱 산행의 묘미를 느끼며 걸어가는 시간이 되었다.

 

눈 앞으로 펼쳐진 몽환적인 용암봉과 노적봉을 살펴보며 많은 사진에 담고 계속 급하지 않은 발걸음을 옮기니 커다란 소나무 위에 소복하게 쌓인 눈들이 얼어 황홀한 눈꽃으로 다시 태어나 있어 사진에 담고 동심으로 돌아가다 보니 어느새 용암문에 도착을 해 추억 한장 남기는데 이곳에도 많은 등산객들이 모여 있어 곧바로 출발한다.

용암문(龍岩門)은 북한산성의 대동문 북쪽에 있는 암문으로 산성이 축성된 1711년(숙종 37)에 지어졌고 용암봉 아래에 있어서 용암봉암문이라고도 부르며 우이동으로 통하는 관문이다.

암문은 그 모양이 홍예가 아닌 방형이라는 것이 특징이며 상부에 문루도 만들지 않았으나 용암문은 성 내부 쪽을 홍예형으로 만들었다.

용암문 상부이 여장은 무너졌던 것을 1996년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

 

용암문을 통과하니 크고 화려한 우뭇가사리를 닮아 있는 상고대가 눈길을 붙잡고 뾰족한 암봉으로 이뤄진 용암봉은 좌측 안전철봉이 유도하는 우회 등로를 타고 오르니 갑자기 많은 등산객들이 쉬고 있는 안부에 도착을 하는데 좌측 옆으로는 노적봉이라는 이정표가 서 있어 잠시 방풍의를 벗어 배낭에 넣고 물 한모금 마시는 사이 등산객들이 다가 와 사진 한장 부탁을 해 사진도 찍어 드리며 쉬었다 출발한다.

노적봉은 만경대 서쪽 아래에 있는 봉우리로 높이는 해발 716m이며 북한산에서 두 번째로 큰 암장(巖嶂)이며 명칭은 봉우리 모양이 노적가리를 쌓아놓은 것처럼 보인다 하여 붙여졌다.

행정구역상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에 속하며 임진왜란 때 백제관전투에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위기에 처하였는데 밥할머니가 꾀를 내어 이 봉우리에 볏짚을 쌓고 창릉천에 쌀 씻은 물처럼 보이도록 석회를 뿌리게 함으로써 왜적으로 하여금 버틸 만한 군량이 충분한 것으로 판단하게 하여 물러가도록 하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노적봉이란 이정표 좌측 바위벽 위로 솟아 있는 봉우리가 노적봉인데 오늘은 등산코스도 아니고 눈까지 많이 쌓여 있어 진행이 불가능하기에 눈으로만 살펴보고 우측 오르막 등로를 타고 만경대를 우회하는 우회 등로로 진입하며 진행을 이어간다.

 

이제 고도를 높혀 700미터를 넘어가니 지금까지 봤던 눈꽃과 상고대와는 달리 눈꽃 크기와 상고대의 넓이 및 두께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있어 또 다른 설경을 선물하고 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등산객이 뜸한 사이 많은 사진으로 남기며 천천히 걸어 오르니 등로 우측 위 바위틈에 피어난 누놏과 상고대가 다시 산객의 발걸음을 붙잡아 시간가는 줄 모르게 즐기며 많은 사진과 추억을 남기는데 제법 늘어난 등산객 모두 급할 것 없이 이 산객처럼 눈 세상을 즐기는 모습이 여유롭게 보인다.

 

한동안 완만하게 이어지는 우회 등로를 타고 불어난 등산객들과 교행하며 천천히 오르니 다시 등로 좌측으로 노적봉과 백운대 사이에 솟아 있는 봉우리들이 보이기 시작해 지도로 확인해 보니 염초봉과 장군봉으로서 이 산객이 서 있는 곳과 해발고도가 비슷한지 발 아래로 내려다 보이듯 서 있는 모습들이 처음으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멋진 풍경들을 사진에 담으며 계속 천천히 걸어 오르다 어느 순간 뒤돌아 보니 드디어 방금 전 입구에서 헤어진 노적봉 정상부가 하얀 눈을 뒤집어 쓴 채 황홀한 모습으로 아쉬움을 달래주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자꾸만 뒤돌아 보게 만들고 있다.

이제 길게 이어지는 계단을 지나 바위너덜길을 타고 급하게 오르니 우측 위로 만경대 방향의 암벽이 올려다 보이는데 그 사이마다 크리스마스 트리같은 소나무 가지 위에 수북히 쌓여있는 눈들이 얼어 환상의 눈꽃으로 다시 피어나 있고 그 아래로는 굵고 두꺼운 상고대가 잡목 가지마다 자랑하듯 열려있어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등로로 변해 있다.

만경대는 서울특별기 은평구와 도봉구에 있는 삼각산의 한 봉우리로서 국망봉이라고도 하며 백운대 남쪽에 있는데 고려 우왕 원년 (1375) 6월에 큰 비가 와서 이 봉우리가 무너지고 선조 30년에 이 산이 우레와 같이 소리를 내어 울었다고 한다.

그 후 이곳에서 기우제와 기설제를 가끔 지냈다고 하며 이곳에 오르면 삼라만상의 온갖 경치를 구경할 수 있으므로 만경대라고 하였다.

조선 초에 무학대사가 태조의 명을 받고 이 봉에 올라서서 나라를 다스릴 도읍터를 바라다 보았으므로 국망봉이라고 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아쉬운 마음에 다시 만경대 정상부와 지나 온 노적봉 그리고 염초봉과 장군붕을 차례로 살펴보며 사진에 담다 보니 진행 방향 눈 앞으로 커다란 소나무가 마치 달력에서나 볼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화로 태어나 앞길을 막고 있어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한동안 넋이 나간 사람처럼 살펴보는 시간도 가져본다.

 

해발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눈꽃과 상고대의 아름다움도 극치로 치닫고 한장면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카메라 셔터를 누르다 보니 많은 등산객들도 같은 마음인지 등로를 왔다리 갔다리하면서 추억을 남기기 바쁜 모습들도 보이기 시작한다.

이어지는 소나무 가지마다 탐스럽게 피어있는 환상의 누놏들을 즐기며 언덕으로 올라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지나친 노적봉이 엷은 눈보라 속에 몽환적인 모습으로 조금씩 멀어지는데 살펴보는 장소와 각도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도 조금씩 다르게 다가오며 많은 사진으로 남기기 바쁜 시간이다.

 

많은 등산객들로 붐비지만 서두르는 사람 하나 없이 자연이 선물해 준 설경을 담기에 여념이 없고 그렇게 함께 어울리며 만경대 우회 등로를 통과하니 진행 방향 눈 앞 저 멀리 드디어 북한산 최고봉인 백운대의 거대한 암봉이 눈 앞으로 부룩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측으로는 거대한 바위벽 위로 솟아 있는 만경대를 살펴보고 진행 방향 앞으로는 최고봉인 백운대의 거대한 암봉을 사진에 담으며 진행하며 살펴보니 암봉 우측으로 등산객들이 백운봉으로 오르고 내려오는 모습들도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지나 온 남쪽 방향으로는 노적봉이 우회하는 우측 암벽 위로는 만경대가 진행 방향인 북쪽으로는 거대한 암봉으로 이뤄진 북한산 최고봉인 백운대를 살펴보며 많은 사진에 담고 천천히 진행하니 다시 눈 앞으로 커다란 소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는데 그 가지마다 피어있는 탐스런 눈꽃들이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푸르름을 간직하던 한여름의 소나무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흔적도 보이지 않고 하얀 눈을 이고 눈꽃으로 다시 태어난 모습에 다시 탄성이 절로 흘러 나오는 시간인데 이곳에 모여 있는 모든 등산객들은 한마음처럼 다 함께 다양한 소리로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노력하지만 탄성 이외에는 별다른 단어들이 떠 오르지 않는 시간이기도 하다.

 

여전히 엷은 안개와 눈보라 그리고 미세먼지로 인해 시야는 상당히 제한되어 있지만 그렇기에 주위에 펼쳐진 풍경에 집중하다 보니 조금 더 내밀한 북한산의 속살을 살펴보며 암봉들과 소나무 위에 탐스럽게 피어난 하얀 눈꽃들 그리고 잡목 가지를 크고 두껍게 만드는 상고대를 친구 삼아 여유롭게 걸어 오르니 이제 조금 더 넓고 가깝게 북한산 정상인 백운대와 그 백운대로 오르는 등로 우측 아래 위문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험준한 바위 등로를 타고 정상을 향해 오르고 내려오는 등산객들의 모습도 조금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해 등로의 흐름을 확인하며 몇장의 사진으로 담아 본다.

 

북한산 최고봉인 백운대를 살펴보고 그 정상으로 오르고 내려오는 등산객들도 확인하면서 몇장의 사진에 담고 계단과 데크를 타고 진행하니 그 백운대 좌측으로 장군봉과 염초봉으로 이어지는 바위암봉들도 조금 더 가깝게 다가 와 있다.

잠시 후 백운대 갈림삼거리 이정표가 서 있는 지점에 도착을 해 14성문 종주 산행이 목적이지만 왕복 800미터 거리의 백운대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우측 계단을 타고 오르니 계단이 끝나면서 오르막 바위너덜길이 한동안 이어진다.

이제 많은 등산객들로 붐비는 백운봉암문 일명 위문 앞에 도착을 하니 머리 위 나뭇가지에 매달려있는 상고대가 황홀하게 빛나고 있어 백운대를 배경으로 몇장 남겨 보지만 실제 눈으로 보았던 황홀감은 많이 떨어져 있어도 아름답기만 하다.

 

아름다운 상고대를 몇장의 사진에 담으며 위문에 머물던 등산객들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어렵게 사진 몇장 남기고 백운봉암문 일명 위문을 통과 해 본격적인 백운대 오르막 암벽을 타고 조심스럽게 산행을 이어간다.

백운봉암문(白雲峰暗門, 위문)은 북한산의 주봉인 백운대와 만경대 사이에 설치한 성문으로 북한산성의 성문 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1711년(숙종 37)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설치한 8개의 암문 중 하나인데 일제강점기부터 위문(衛門)으로 불려왔다.

백운봉암문은 여느 암문과 마찬가지로 성문 상부에 문루는 설치하지 않았고 성문 양쪽은 장대석으로 쌓았으며 그 위 천장 부분은 장대석 여러 매를 걸쳐 만들었다.

이런 양식의 성문을 아치 모양의 홍예식과 구분하여 평거식(平据式)이라 부르는데 원래 문짝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문짝을 달았던 원형의 지도릿돌과 일반문이 빗장에 해당되는 장군목을 걸었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백운봉암문(위문)을 지나 오르다 뒤돌아 보니 만경대로 이어지는 초입의 거대한 암봉이 눈길을 잡는데 눈과 바람이 만들어 놓은 환상의 자연미에 한동안 진행하지 못하고 많은 사진으로 남기며 무념으로 즐겨보는 시간이다.

바위암봉 주위로 자라고 있는 키 작은 잡목 가지마다 자랑하듯 피워 낸 환상의 상고대가 다시 눈길을 붙잡고 위대한 자연의 힘 앞에 초라한 인간의 욕심을 버리려 노력하지만 그게 쉽지 않으니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도 잠시 해 본 시간이다.

바람이 불기 시작하며 땀으로 젖었던 등산복이 식어 한기가 돌기에 더 이상 지체하지 못하고 바위암벽에 설치된 안전철봉과 쇠줄에 의지해 조심스럽게 북한산 정상을 향한 힘찬 발걸음을 옮겨 본다.

 

오늘 산행 중 가장 많은 등산객들로 붐비는 백운대 오르막 암벽에서 교행하다 보니 기다리는 시간도 있어 자꾸만 지체되는데 평소에 비해서는 그래도 기다리는 시간이 짧으니 견딜만 하다.

다만 진행하다 보니 아이젠도 없어 일반 운동화를 착용하고 오르는 등산객들도 보여 위험해 보이는데 끝까지 무탈하게 하산할 수 있기를 바래보며 조금 더 걸어 오르니 이제 정상부인 백운대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 와 있어 기다리며 몇장의 사진으로 남긴다.

 

한동안 얼어붙어 있는 바위암벽에 설치된 안전철봉을 위지해 오르다 멈추기를 반복하며 천천히 진행하니 등로 우측으로 인수봉의 미ㅡㄴ한 바위암봉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아직은 앞 바위벽에 막혀 전체 모습은 보기 어렵다.

잠시 후 등로 좌측으로 바위암릉 위에 자라고 있는 소나무 한그루에 하얀 누놏과 상고대가 황홀하게 피어 있어 사진에 담으려고 본 몇명의 등산객들이 추억을 남기기에 바쁜 모습이나 하산 시 담기로 하고 계속 바위암벽을 타고 교행하며 어렵게 올라 약간의 공터가 있는 평탄한 지점에 도착을 해 뒤돌아 보니 백운봉암문 일명 위문 뒤로 솟아 있는 우회한 만경대가 약간의 눈보라 속에 몽환적인 모습으로 위풍당당히 서 있어 한동안 살펴보며 많은 사진으로 남겨 본다.

 

만경대를 살펴보고 이어지는 바위암릉을 타고 조금 더 걸어 오르니 삼각산 설명판이 설치된 안전지대에 도착을 하고 사진에 담고 마지막 힘을 내 오르니 백운대 직전 바위봉에 도착을 하고 잠시 기다렸다 하산하는 등산객들이 뜸한 시간을 이용해 오르니 드디어 바위 사이로 안전철봉이 설치되어 있고 태극기가 휘날리는 북한산 최고봉인 836미터의 백운대에 도착을 해 기다리는 등산객과 교대로 추억 몇장 남겨 보는데 백운대는 실로 10여년이 넘어 다시 찾게 되니 감개가 무량하다.

백운대는 서울특별시 도봉구와 경기도 고양시에 걸쳐 있는 북한산(北漢山)의 최고봉으로 높이는 836m이고 인수봉(仁壽峰, 810.5m) 및 노적봉(露積峰, 716m) 등과 함께 북한산의 고봉을 이룬다.

등산을 돕기 위한 철사다리가 놓여 있으며 기암괴석과 맑은 계류 및 푸른 수림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백운대에서의 조망은 일품이고 백운사지(白雲寺址)를 비롯해 최근에 신축된 절과 암자가 많으며 산 아래쪽에는 백운수(白雲水, 일명 萬水)라 불리는 약수가 솟는다.

백운대에 오르는 길목은 여럿이 있는데 우이동에서 도선사를 지나는 약 8Km 코스와 창의문(彰義門)과 세검정에서 오르는 약 12Km 코스, 정릉에서 오르는 약 10Km 코스 등이 있으며 그밖에도 계곡과 능선을 따라 여러 방면으로 오를 수 있다.

안개와 눈보라 그리고 미세먼지로 시야가 제한되어 아쉬움도 남기지만 이런 멋진 설국의 설경을 만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잠시 주위를 둘러본다.

 

잠시 서 있는 동안 바람이 강하게 불어 위험하기에 정상부 옆 3.1운동 암각문이 설치된 바위틈에서 잠시 더 주위 풍경을 살펴보고 내려가기 전 바위에 새겨진 백운대 836미터란 글씨를 사진에 담는데 눈으로 인해 글씨도 선명하지 못하다.

다만 평소 같으면 정상에서 사진 한장 남기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등산객들로 붐비는 백운대이지만 오늘은 눈이 많이 내렸고 황사와 미세먼지 예보가 있어 그런지 생각보다 등산객들이 많지 않아 많은 추억과 사진을 남기고 백운대 정상을 내려 와 바위암릉에 도착을 해 아쉬움을 달래 본다.

 

백운대 바로 아래에 있는 평탄한 바위암봉 위에서 북동쪽을 살펴보니 드디어 삼각산 설명판 뒤로 거대한 암봉인 인수봉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그 풍경에 빠져 잠시 더 머물며 많은 사진으로 남겨 본다.

인수봉(仁壽峰)은 서울 강북구 북한산(北漢山)에 있는 산봉우리의 하나로서 높이 810.5m이고 백운대(白雲臺) 및 만경대(萬景臺)와 함께 예로부터 삼각산(三角山) 또는 삼봉산(三峰山)으로 불려왔다.

화강암의 암벽이 노출된 경승으로 동쪽 산기슭에는 우이동(牛耳洞)이 있고 남동쪽 기슭에는 도선사(道詵寺) 등이 있어 많은 등산객이 찾는 암봉으로서 한국의 대표적인 암벽등반 대상이지만 가끔 산악사고도 발생하는 곳이다.

암벽등반은 자신이 없기에 아직 한번도 오르지 못한 인수봉인데 언젠가 한번쯤 올라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보는 시간이다.

 

백운대 바로 아래 평탄한 암봉에서 인수봉을 살펴보고 올라 왔던 암벽을 타고 교행하며 내려가니 다시 만경대가 빤히 보이는 바위 위에 자라고 있는 소나무 앞에 도착을 하고 오를 때 등산객들로 인해 담지 못한 사진을 어렵게 남기는데 찬바람에 눈이 녹았다 얼으면서 환상의 상고대가 화려하게 피어 있어 잠시 피곤함을 달래 본다.

오래 전 저 만경대도 올랐던 기억이 있는데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대를 하면서 만경대를 다시 한번 더 눈에 담고 여전히 복잡한 바위암릉을 따라 조심스럽게 위문 방향으로 하산한다.

 

이제 내려가며 살짝 비추기 시작하는 햇살에 빛나는 인수봉을 측면에서 제한된 모습으로 사진에 담으며 백운봉암문 일명 위문을 지나 내려가니 계단 옆에서 움직임이 포착되고 살펴보니 참새 한마리가 날아가지도 못하고 껑충껑충 뛰어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어 사진에 담는데 도망가지도 않고 모델을 자처하고 있어 몇장의 사진에 담아 본다.

참새는 참새과에 속하는 전장 14㎝의 소형 조류로서 유라시아대륙에 널리 번식하며 우리 나라에서는 전역에서 번식하는 가장 흔한 텃새다.

머리는 자색을 띤 갈색이고 등은 갈색바탕에 흑색 가로무늬가 있으며 날개에는 가는 두 가닥의 흰 띠가 있다.

얼굴은 희고 귀깃과 턱 밑은 흰색이며 암수 같은 빛깔인데 지붕처마 밑, 건물 틈새, 콘크리트 전주 꼭대기 등 인공건축물이나 가공물 뿐만 아니라 인공새집과 다른 새가 버린 둥지 예를 들면 까치집과 같은 것도 곧잘 이용하여 번식한다.

살펴보니 아프거나 부상을 당한 참새는 아닌 듯 한데 왜 날아가지도 못하고 뛰어 다니고 산객이 가까이 접근해 사진을 담아도 움직이지 못하는지 의아하기만 하다.

 

홀로 모델을 자처한 참새와 잠시 시간을 보내고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금새 백운대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하고 이제는 우측인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까지 3.7 Km 란 방향으로 진행하니 눈 쌓인 가파른 내리막 바위너덜길이 이어지고 몇명의 등산객들이 앞서 내려가는 모습들도 보인다.

등로 좌측으로 만경대를 살펴보며 계속 이어지는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조심스럽게 진행하니 백운대에서 0.6 Km 내려 왔다는 이정목을 만나고 조금 더 내려가니 오후 시간에 백운대를 향해 오르는 등산객들도 생각보다 많이 보인다.

잠시 후 벤취쉼터와 구급함이 보이고 바위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공터에 도착을 하는데 바로 약수암터이다.

 

약수암터에서 좌측 등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이곳 역시 바위너덜길이 길게 이어지고 주위 풍경이 보이지 않으니 등로 주변으로 펼쳐진 설경만 사진으로 담으며 진행하는 시간이다.

잠시 후 등산객들이 쉬고 있는 약수암 하단 쉼터에 도착을 해 벤취쉼터에 쌓여있는 눈을 치우고 배낭 내려 준비한 빵과 과일로 허기를 달랜 후 물 한모금 마시고 다시 남아 있는 성문 종주 산행을 이어가는데 생각보다 많은 등산객들이 백운대로 향하는 발걸음이 보여 추워지는 날씨에 약간 걱정이 앞서는 시간이기도 하다.

 

허기와 갈증을 달래고 내려가니 눈이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하고 바위너덜길이 녹으면서 진행하는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있음을 느끼는데 체인젠을 벗고 진행을 해야 하는지 잠시 고민도 해 보지만 조금 더 진행해 보기로 한다.

한동안 더 바위너덜길을 따라 완만하게 내려가니 이곳 등로에는 눈이 거의 사라지고 지난 가을에 떨어지지 못하고 나뭇가지에 매달려 말라있는 낙엽들이 많이 보이면서 지그마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펼쳐져 있다.

잠시 후 백운대에서 1.6 Km 내려왔다는 이정표가 보이는 지점 우측으로 대동사 진입 갈림삼거리가 나타나고 잠시 고민하가 대동사 방향으로 올라가니 대동사 좌측 옆으로 등로가 나 있어 편안하게 진행한다.

 

잠시 돌계단을 타고 올라 문이 잠겨있는 대동사를 우측에 두고 조금 더 진행하니 커다란 바위에 대동사란 글씨가 새겨져 있고 그곳에서 대동사 건물 뒤를 올려다 보니 드디어 좌측의 백운대에서 중앙부 멀리 만경대 그리고 우측 가까운 곳으로 노적봉이 한눈에 보이기 시작해 몇장의 사진에 담으며 잠시 쉬어간다.

가끔 햇살이 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원경은 아니지만 이렇게나마 백운대와 만경대 그리고 노적봉을 보여주기 시작하니 답답했던 가슴이 열리면서 또 다른 북한산의 장엄함을 느껴보는 시간이다.

 

대동사를 지나 마른 계곡을 건너 좁은 능선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금새 상운사에 도착을 하고 상운사 앞에 세워진 설명판을 읽어 본 후 상운사 방향으로 몇발자국 걸어 오르니 상운사 건물 뒤로 염초봉이 올려다 보이는데 염초봉 정상부에는 눈도 없이 약간의 박무만 끼어 있는 평이한 암봉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상운사는 서울특별시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의 경계인 북한동북한산 원효봉(元曉峰)에 있는 절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1722년(경종 2) 승병장 회수(懷秀)가 옛 절터에 130여 칸의 절을 중창하고 노적사(露積寺)라 하였으며 1813년 승병장 지청(智聽)이 중건하였다.

1864년 긍홍(亘弘)이 극락전을 중건하였고 1898년한암(漢庵)이 큰 방을 중건하였으며 1942년 주지 법연(法延)과 화주 덕산(德山)이 법당을 중수하였다.

사세가 미약하여 퇴락하였다가 최근 법당을 중건하고 요사채를 다시 세워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제 상운사를 우측에 두고 좌측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이어지는 바위너덜길을 따라 산행을 이어간다.

 

잠시 내려가니 대동사와 상운사를 우회하여 원효봉으로 오르는 넓고 뚜렷한 등로와 만나는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 역시 등산객들이 보여 사진 한장 남기고 우측 오르막 돌계단으로 이어지는 원효봉 방향으로 오르며 힘을 내 본다.

예전에는 대동사와 상운사가 아닌 화장실이 있는 갈림삼거리에서 우측 원효봉 방향으로 올라왔다는 기억인데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서 가물거리지만 오르막 돌계단과 바위너덜길을 따라 오르다 보니 오래된 추억이 단편적으로 생각나면서 함께 걸었던 산친구들이 그리워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한동안 가파르게 이어지는 돌계단과 바위너덜길을 따라 오르니 생각보다 많은 등산객들이 하산히고 있어 인사를 나누며 진행하고 잠시 안전철봉과 쇠줄이 설치된 등로를 지나 오르니 금새 북문에 도착을 해 사진과 추억을 남겨 본다.

북문(北門)은 북한산성에 있는 문으로 원효봉과 영취봉 사이의 해발 430m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산의 능선이 말안장 모양으로 움푹 들어간 형태를 보이는 안부(鞍部) 지점에 자리한다.

주변에 상운사와 훈련도감 유영지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훈련도감 유영과 상운사에서 북문 지역의 수비와 관리를 맡은 것으로 파악된다.

북한산성에는 대서문과 대남문, 대동문, 대성문, 중성문, 북문 등의 6개의 대문이 있으며 큰길은 대서문에서 중성문 지나 대남문과 대성문을 연결하는 간선도로였다.

대문 중 북문과 대동문은 간선도로에서 벗어나 있는데 이는 한양 도성과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진 지점에 위치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대문으로서 북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낮았던 것은 북문만이 대(大)자를 붙이지 않은 사실로도 알 수 있는데 실제로 북한지(北漢誌, 1745년 간행)를 보면 북문에만 도로망이 연결돼 있지 않다.

성문은 석축기단 부분이 육축부(陸築部), 그 위에 올린 문루(門樓), 출입을 위한 개구부(開口部), 출입을 통제하기 위한 문짝 등으로 이루어진다.

현재 북문에는 문루와 문짝이 없는 상태로 육축부와 개구부만이 남아있고 문루 자리에는 초석만이 있으며 개구부에는 문짝을 달았던 원형의 지도릿돌과 장군목을 건너질렀던 방형의 구멍이 남아있다.

북한산성의 대문이 완성된 때가 1711년(숙종 37)인데 30년 후에 간행된 북한지에는 북문의 문루가 표현되어 있지 않아 이를 근거로 18세기 전기에 이미 문루가 없어졌으며 그 상태가 지금까지 이어져왔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북문을 사진에 담고 주위를 둘러보며 북문에 관한 설명판도 읽어 본 후 좌측 성벽을 따라 원효봉 0.2 Km 방향으로 오르니 금새 넓은 마당바위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지나 온 방향인 동쪽을 살펴보니 여전히 박무인지 눈보라로 인해 흐릿하긴 하지만 북한산의 주봉들이 올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좌측 앞으로 염초봉이 근육질 몸매를 자랑하며 솟아 있고 그 바로 우측 뒤로 희미하게 북한산정상인 백운대가 얼굴을 내밀고 우회했던 만경대와 노적봉이 우측으로 높은 병풍을 두른 듯 아름답게 펼쳐져 있어 몇장의 사진에 담으며 여유를 부려본다.

 

노적봉 우측 아래로도 몇개의 나즈막한 암봉들이 솟아 있어 실펴보니 기린봉 우측 아래 뒷쪽으로 오늘 오전에 걸어 넘었던 의상능선 상 연봉들이 펼쳐져 있는데 우측 능선에 막혀 제대로 보이지는 않는다.

몇장의 사진을 더 남기고 그 마당바위 지나 안전목책과 로프 등로를 타고 오르니 잠시 헤어졌던 성벽을 다시 만나고 곧이어 원효봉 전위봉에 도착을 하는데 젊은 친구 3명이 이야기를 나누며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그곳 원효봉 전위봉에서 다시 염초봉과 백운대 우측으로 만경대와 노적봉을 살펴보고 눈을 남쪽과 남동 방향으로 돌리니 오늘 아침 짙은 안개속에 걸어 넘었던 우측 가장 가까운 곳에 독립적으로 솟아 있는 의상봉부터 의상능선을 따라 용출봉과 용혈봉 및 증취봉이 또 다른 산군으로 펼쳐져 있고 좌측 뒤 희미하게 나한봉과 문수봉 지나 남장대로 이어지는 봉우리들이 성벽과 함께 펼쳐진 모습이 아름답게 보인다.

이곳 원효봉 전위봉에서 드디어 오늘 하루종일 걸었던 모든 산줄기와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 와 한동안 많은 사진들을 남기며 귀어가는데 바람이 불어 한기가 느껴지기에 다시 바로 위 원효봉으로 향한다.

 

원효봉으로 오르니 이곳에도 젋은 연인 두명이 추억 남기기 바쁘고 방해되지 않토록 옆으로 돌아 오르니 바위 위에 505미터의 정성목이 서 있는 원효봉에 도착을 해 추억 한장 남기는데 이곳 역시 바로 전 머물렀던 전위봉 못지 않게 조망이 뛰어나지만 박무로 인해 아쉬움도 남긴다.

원효봉(元曉峰)은 북한산의 원효봉능선에 있는 봉우리로서 높이는 해발 505m이며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에 속하는데 명칭은 봉우리 아래에 있는 원효암에서 유래한 것으로 원효암은 신라시대 원효(元曉) 대사가 수도하였던 토굴이다.

원효봉능선은 북문에서 염초봉으로 이어져 백운대로 향한다.

이곳 원효봉은 북한산 산행을 하면서 자주 들리지 못하는 봉우리로서 12년 전인 2010년에 산친구들과 14성문 종주 시 들린 후 처음이기에 기억이 가물거린다.

 

그냥 떠나기 아쉬워 주위 풍경과 조망들을 다시 살펴보는데 젊은 등산객 5명이 전위봉에서 쉬고 있는 모습 뒤로 조금 더 희미해진 좌측의 염초봉과 백운대 그리고 우측 중앙부로 만경대 지나 노적봉이 한눈에 들어 와 사진에 담아 본다.

이런 좋은 북한산을 두고 오랫동안 종주 산행에 빠져 들리지 못했으니 무심했던 시간을 반성하게 만들고 앞으로는 자주 들려 더 좋은 풍경과 조망을 즐길 수 있기를 약속도 해 본다.

 

원효봉에서 오늘 이 산객이 걸었던 모든 봉우리들과 성문들을 살펴보고 희미하지만 처음으로 아름다운 풍경과 조망까지 즐기고 다시 출발하니 우측 옆으로 성벽이 함께 따라 온다.

하지만 그 성벽은 금새 멀어지고 평이한 등로로 이어지더니 눈 앞으로 거대한 바위암봉이 나타나는데 바로 원효대로서 이 원효대는 원효봉과 원효암 사이에 있는 바위암봉으로 옛날 원효가 좌선하였다고 전해지는 봉우리이다.

눈도 많이 녹아있고 안전철봉이 박혀있어 안전하게 오르니 햇살이 나면서 박무가 심해져 주위 풍경과 조망은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안전철봉을 따라 쉽게 원효대 정상인 암봉으로 올라 주위를 살펴보니 방금 전 지나 온 원효봉에서 봤던 풍경과는 또 다르게 박무가 심해져 모든 방향이 희미하기만 하다.

그래도 방금 전 지나 온 원효봉 방향인 남동에서 동쪽을 살펴보니 우측 소나무들이 푸르게 보이는 원효봉 좌측 뒤 저 멀리 염초봉과 백운대가 나란히 올려다 보이는데 염초봉 뒤 백운대는 이미 박무가 심해 잘 분간하기도 어려워 보이고 그 우측으로 만경대는 봉우리 모습도 잘 구분하기 어렵다.

 

진행 방향인 서쪽을 살펴보니 바로 앞 안전철봉과 바위 뒤로 이어지는 등로 넘어로 보여야 할 효자동과 진관동 방향은 완전히 오리무중으로 변해 어디가 어딘지 확인하기도 쉽지 않다.

아쉬움을 남기고 잠시 더 머무는 동안 하산 방향인 원효암 방향에서 거ㅜ로 올라 온 등산객 한명을 만나 반갑게 인사하고 등로를 확인해 보니 눈과 얼음이 녹아 체인젠 없이도 진행이 가능할 것 같다는 소식을 듣고 이 산객도 지나 온 방향의 등로 사정을 알려 준 후 헤어져 원효대를 내려가는데 내려가는 바위암릉에는 잔설과 약간의 얼음이 남아 있어 주의가 필요해 보인다.

 

원효대 암봉을 조심스럽게 내려 가 평이한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아직 눈이 녹지 않은 공터에 도착을 하고 바위 앞에 서 있는 이정표를 보니 효자비입구까지 1.1 Km란 거리 표시가 반가운데 이 산객이 진행을 해야 할 북한산성 입구까지는 조금 더 길게 남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공터와 이정표가 서 있는 곳을 지나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등로 좌측 옆으로 작은 원효암이 나타나는데 보이는 것과는 달리 원효대사와 관련이 있는 유명한 암자이다.

원효암은 경기도 고양시 북한동 북한산에 있는 절로서 한국불교 태고종에 속하는데 신라 때 원효(元曉)가 좌선하면서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조선 숙종 때 승병장 성능(聖能)이 원효를 기리기 위하여 창건하고 원효암이라고 하였다는 것을 정설로 보고 있다.

그 뒤 북한산성을 지키는 승병이 머무르는 사찰로 전승되었으며 1734년(영조 10) 2월에 실화(失火)로 불타버린 뒤 곧바로 중건에 착수하였고 1938년에 주지 영운(泳雲)과 그의 제자들이 법당을 중건하였다. 6·25 때 다시 불탄 뒤 비구니 월해(月海)가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스피커를 통해 불경소리가 청아하게 들리는 원효암을 살펴보고 방해되지 않토록 조용히 빠져 나와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이곳부터는 눈이 완전히 녹아있고 얼어있는 곳도 없어 보여 하루종일 착용했던 체인젠을 벗어 가볍게 내려간다.

 

원효암을 지나 내려가니 다시 성랑지 이정목이 보이고 오늘 하루종일 많이도 봤기에 사진에마ㅣㄴ 담고 계속 이어지는 내리막 돌계단을 타고 진행하니 다시 전망좋은 좁은 공터에 도착을 해 효자동과 진관동 방향을 살펴보지만 보이는 것이 없기에 곧바로 출발한다.

한동안 이어지는 돌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효자리까지 0.8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보이고 곧이어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된 정비된 돌 등로가 길게 이어지고 있는데 등로 우측으로는 정비되지 않은 무너진 성벽이 다시 나타나고 여장 설명판이 다시 보여 잠시 한번 더 읽어 본다.

여장(女墻)은 성벽의 몸체 부분 위에 설치한 낮은 담장으로 성가퀴 또는 살받이터라고도 하는데 성을 지키는 병사를 보호하고 적을 관측하거나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었다.
여장은 대개 총안(銃眼, 적에게 활이나 총을 쏠 수 있도록 성벽 여장에 나있는 구멍)을 뚫었는데 비스듬하게 뚫어 성벽 가까이 접근한 적을 공격할 수 있게 한 총안을 근총안이라 하고 수평으로 뚫어 멀리있는 적을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게 한 총안을 원총안이라고 한다.
북한산성의 여장은 적당히 다듬은 할석(割石, 깬돌)으로 쌓았는데 이 점은 전돌로 쌓은 남한산성의 여장이나 잘 다듬은 돌을 사용한 화성의 여장과 차이를 보이는 축성법이다.

오전에 만났던 여장의 설명판과 같은 내용으로 네이버 지식백과를 찾아보니 약간은 다른 내용이 있어 정리해 본다.

 

여장 설명판을 읽어 보고 이어지는 내리막 돌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출입제한 안내판과 이정판이 보이고 곧이어 오늘 마지막 성문인 서암문 일명 시구문에 도착을 해 사진과 추억을 남겨본다.

서암문(西暗門)은 북한산성에 있는 문으로 조선 시대 단위로 높이는 7척이고 너비는 7척인데 외부와 내부를 모두 홍예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성 안의 시체가 모두 여기를 통해 밖으로 나갔다 해서 시구문(屍軀門)이라고 불렸다.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 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이 암문은 성벽의 흐름방향과 달리 입구가 북서쪽을 향하고 있어 외부에서 쉽게 관찰되지 않도록 하였으며 또한 북동쪽의 성벽을 돌출하여 암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원성에 설치된 12개 암문의 외측 개구부(開口部)는 대부분 홍예식(虹霓式)이지만 제2암문과 더불어 이 암문의 개구부는 평거식(平据式)으로 선조 15년 1월 23일 한밤중에 습격해온 청병을 크게 물리친 곳이라 하여 이 암문 부근을 서암문 파적지라 부른다.

 

오늘 만나야 할 북한산성 14성문 중 마지막으로 만난 서암문 일명 시구문을 통과하니 안개와 미세먼지로 풍경과 조망이 없어 답답했고 눈이 많이 쌓여있고 빙판길이 많아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완주했다는 사실에 만족감이 느껴진다.

이제 잘 정비된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내려가니 발걸음도 덩달아 빨라지고 잠시 멋진 소나무 등로를 통과한 후 효자리 0.1 Km가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만나 우측으로 크게 꺽어 잠시 더 진행하니 건물이 보이기 시작하고 곧이어 이정표와 안내판이 서 있는 공터에 도착을 하는데 우측으로 범골공원지킴터로 내려갈 수 있는 갈림삼거리로서 이정표에는 내시묘역길 구간이란 글씨가 이색적으로 보인다.

효자동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의 동쪽 끝에 위치하는 동으로 서울특별시 은평구와 강북구 및 양주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본래 경성부 은평면에 속하였던 지역으로 1914년 고양군에 편입되어 신도면 효자리로 되었다.

신구대조에 따르면 효자리는 경성부 은평면의 신둔(新芚)과 효자동(孝子洞) 및 사기동(沙器洞) 등의 자연마을을 포함하고 있으며 고양시 승격과 함께 법정동인 효자동과 북한동 및 지축동의 일부를 관할하는 행정동 효자동이 설치되었다.

효자동은 효자 박태성의 전설에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는데 조선 후기 한양에 살던 박태성이 북한산 기슭에 있는 부친의 묘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한양에서 무악재와 박석고개를 넘어 찾았다 하여 효자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광여도 등에 따르면 박석고개의 북사면에서 동서로 흐르는 창릉천(昌陵川)이 한양과 고양의 경계선이 되었다.

이곳 갈림삼거리 공터에서 좌측인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 방향으로 질척이는 등로를 타고 마지막 산행을 이어간다.

 

이제 이곳은 눈과 얼음이 완전히 녹아 질척이는 등로로 변해있어 주의하며 걸어가니 우측으로 농원이 나타나고 북한산 둘레길 중 내시묘역길 통행에 효자농원에서 도움을 줬다는 안내판도 보인다.

잠시 더 둘레길을 따라 편안하게 걸어가니 산책을 즐기는 부부의 모습도 보이고 작은 다리를 건너 진행하니 등로 좌측으로 철망이 설치된 몇기의 커다란 묘지들이 보이는데 안내판을 살펴보니 전주이씨 서흥군과 위성군 묘역으로서 조선시대 중종의 손자와 증손자의 묘지였다.

이곳에서 내시묘역길구간이란 단어가 신기해 찾아보니 이사문공파 내시묘역은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내동(津寬內洞) 북한산 자락에 있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 되고 규모도 크며 보존상태가 양호한 조선시대 내시(內侍)의 집단묘역이다.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내동(津寬內洞) 중골마을과 북한산 의상봉(義湘峰) 등산의 기점이 되는 백화사(白華寺) 가까이에 있는데 2003년 11월 발견되었다.

조선시대 내시파 가운데 이사문(李似文)을 파조(派祖)로 하는 이사문공파의 내시 무덤 45기가 모여 있으며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621년(광해군 13)에 처음 묘비가 세워진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 김충영(金忠英)의 묘로서 김충영은 왕과 왕비의 명령을 출납하는 승전관(承傳官)을 지냈다.

지금까지 발견된 내시 묘역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사대부에서 서민에 이르는 다양한 계층의 무덤이 조성되어 있어 조선시대 내시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으나 2012년 일대의 개발로 무덤들이 모두 훼손되면서 현재 내시묘역은 남아 있지 않다.

 

조선시대 중종의 제2 아들인 해안군의 둘째아들이 서흥군이고 그 서흥군의 아들이 위성군이니 왕족으로 태어났지만 왕은 되지 못한 왕자들의 무덤이었던 것이다.

그 묘역을 지나니 나무데크가 잘 설치되어 이어 편안하게 걸어 진행하니 북한천을 통과할 수 있는 다리 건너 드디어 오늘 새벽 어둠속에 수문을 만나기 위해 잠시 들렸던 갈림삼거리 공터에 도착을 해 이정표 뒤를 살펴보니 저 멀리 방금 전 만나고 내려 온 원효봉과 그 우측으로 만경대 및 노적봉이 희미하게 보이는데 백운대는 원효봉에 막혀 보이지 않는다.

 

이제 넓고 편안한 등로를 타고 상가지대를 지나 다시 만나는 산성계곡 무장애탐방로 갈림삼거리에서 우측 도로를 따라 완만하게 내려가니 우측으로 상가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곧이어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 지나 좌측으로 북한산국립공원이라는 커다란 안내판이 눈길을 잡는다.

오늘 새벽 어둠속에 지났던 곳이기에 사진 한장 남기고 우측으로 이어지는 2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북한산겅입구 방향으로 천천히 거어 내려가며 주위 풍경들을 살펴보는 시간은 늘 그렇듯 가장 뿌듯하고 희열이 뿜어져 나오는 시간이다.

 

도로 주위로 주차장이 보이고 그 주자장 뒷편으로도 이어지는 상가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데 대부분 등산용품들을 판매하는 상가들이다.

그렇게 한동안 도로를 따라 걸어 내려가며 집에 전화를 하니 옆지기는 대전 처갓집으로 내려가 없고 아들은 알바를 한다고 아침에 나가 딸만 남아 있기에 탁배기 한잔 마시고 저녁까지 먹고 싶은 마음 달래며 일찍 귀가를 서두른다.

잠시 후 북한산국립공원이라는 커다란 표지석 뒤를 살펴보니 저 멀리 생각보다 뾰족하게 솟아 있는 바위암봉의 의상봉과 그 뒤로 이어지는 의상능선 상 봉우리들이 헤어지는 아쉬움을 위로해 주고 있다.

 

도로 주위로 펼쳐진 식당에는 함께 산행 후 뒷풀이를 즐기는 등산객들의 흥겨운 모습들이 보이는데 그 모습을 보니 더욱 허기가 지기 시작해 남아 있는 식수로 배고품을 달래고 북한산성입구 교차로 직전 좌측의 벤취쉼터에서 착용했던 스패츠와 배낭을 정리하고 젖어 있는 등산복 상의를 갈아 입은 후 마지막으로 진행한 성문 방향을 뒤돌아 보니 상가 건물들 뒤로 여전히 아름다운 의상봉과 의상능선에 솟아 있는 봉우리들이 생각보다 뾰족하고 드높게 올려다 보인다.

 

이제 북한산성입구 교차로로 빠져 나와 횡단보도를 통해 북한산로 6차선 포장도로를 건너 버스정류장으로 이동하며 북한산겅입구 방향을 살펴보니 그 뒤 저 멀리 오늘 마지막으로 올라 만났던 원효봉이 박무속에 우뚝 솟아 이어 사진에 담아 본다.

드디어 오늘 산행을 마무리하는 북한산성입구 버스정류장에 도착을 해 뒷편을 보니 박효자와 인왕산 호랑이에 대한 설명판이 있어 잠시 읽어보는 사이 704번 버스가 도착을 하고 그 버스를 이용해 불광역에서 하차 후 지하철을 이용해 귀가를 하였다.

 

산행예상 시간을 약 8시간 정도로 예상을 했는데 들리고 싶었던 보현봉과 문필봉은 들리지도 못했는데 9시간 40여분이나 걸려 오늘 산행이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느끼게 되었다.

깊게 쌓인 눈과 빙판길로 변한 바위암릉 그리고 너무나 황홀하게 펼쳐진 설국의 설경에 빠져 진행하다 보니 시간 개념없이 즐겼던 하루로 남기고 다음에는 날씨 좋은 날 오랫만에 불광에서 솔고개로 이어지는 북한산 최장코스로 한번 다녀오고 싶다는 생각도 해 본다.

내일 몸이 괜찮으면 관악산 11국기봉 종주를 계획하고 있는데 몸이 피곤하면 하루 쯤 쉬어가도 좋겠다는 생각으로 귀가해 딸과 함께 자축하는 소맥 몇잔으로 오랫만에 즐긴 북한산성 14성문 종주를 마무리 한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