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지맥 산행자료
대중교통편
제1구간 : 갈때-서울 센트럴시티 호남선 터미널에서 01:00 고속버스로 광주 유스퀘어 터미널 행 버스 탑승
-광주 유스퀘어 터미널 앞 광주종합터미널 앞 버스정류장(도로 건너지 않고)에서 첨단 09번이나 좌석02번
버스로 증심사 버스 정류장에서 하차 후 산행 시작
올때-도동고개(광주 북구 장등동 877-13)에서 산행 종료 후 근처 여관에서 숙박
제2구간 : 갈때-여관에서 숙박과 아침식사 후 도동고개(광주 북구 장등동 877-13)까지 이동해 산행 시작
올때-광주천과 영산강이 만나는 상무대교 앞 합수점(광주 서구 치평동 911-4)에서 산행 종료 후
보훈회관(518민주화운동교) 버스정류장에서 일곡 38번 버스로 광주 유스퀘어 터미널까지 이동
광주시 광천동 광주종합버스터미널
증심사는 광주 동구 무등산 서쪽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서 1986년 11월 1일 광주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며 철감선사 도윤이 개창하고 1094년(고려 선종 11)에 혜조국사가 중수했다.
1443년(조선 세종 25)에 김방이 다시 중수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609년(광해군 1)에 석경과 수장 및 도광의 3대 선사가 4창했다고 하며 그 후 신도들의 정성으로 몇 차례 보수가 이루어졌으나 6 ·25전쟁 때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다가 1970년에야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들이 복구되었다.
경내에는 오백전과 3층석탑, 5층석탑, 7층석탑, 오백나한 및 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131)과 석조보살입상 등이 보존되어 있으며 2008년에 템플스테이 사찰로 지정되어 운영되고 있다.
당산나무(송풍정과 새인봉)
중머리재(617m, 장불재, 중봉, 새인봉, 분적지맥의 만연산 조망)는 광주광역시의 동구 학운동 관할 운림동과 지원동 관할인 용연동 사이의 고개이며 무등산봉에서 서석대를 거쳐 중봉으로 내려선 능선이 삼광대 아래로 이어지면서 잿등을 이룬다.
남서쪽으로는 서인봉으로 향하는 등산길이고 유서석록에 중령(中嶺)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고갯마루가 넓은 초원지로 마치 스님의 머리 닮아 중머리(중두봉)이라 한다.
장불재는 광주광역시의 동구 지원동 관할 용연동과 화순군 이서면 영평리 사이의 고개로서 무등산 정상인 천왕봉에서 남서쪽으로 서석대와 입석대를 거쳐 내려선 고개마루가 있고 억새 군락이 장관이며 고개 서편 샘골에서 광주천이 발원한다.
대동지지에 장불치(獐佛峙)로 기록되어 있고 긴골 또는 장골을 한자로 장불치(長佛峙)로 표기했으며 말 잔등 같은 능선이라 백마능선이라고도 칭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장불동에서 철이 생산되었고 유서석록에 장불천은 그 상류에서 쇠를 씻기 때문에 언제나 탁한 물이 흐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입석대(973m)는 광주광역시 북구 무등산에 있는 자연 형성된 5에서 8면체 각석형태의 선돌로서 무등산의 정상 1017미터 지점에 있는 돌기둥의 무리이다.
무등산의 대표적인 절경의 하나로 장불재(長佛峙)에서 동쪽으로 약 200미터 올라가면 정상의 서쪽에 있다.
높이 10에서 15미터의 돌기둥이 반달모양으로 둘러서 있는 석경은 다른 산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운 경관이다.
돌기둥은 5-8면체의 각석이고 하나의 암주(巖柱)나 3-4단의 석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쪽 바위에 立石(입석)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축단을 통해서 이곳이 가뭄이나 질병의 전염이 심할 때 지방관리들이 하늘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 제를 지내던 제천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중기까지만 하여도 이곳에 입석암을 비롯하여 주변에 많은 암자와 절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승천암은 천연기념물 제465호중 이무기가 승천하는 모습을 상징하는 바위 승천암 바로 이곳이다.
옛날 이 부근의 암자에 무엇엔 가 쫓기던 산양을 스님이 숨겨준 일이 있었는데 어느 날 스님의 꿈에 이무기가 나타나 산양을 잡아 먹고 승천해야 하는데 네가 훼방을 놓았다며 만약 종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너라도 잡아 먹었야겠다 고 했다.
그런데 얼마 후 난데없이 우렁찬 종소리가 들였고 이무기는 곧장 스님을 풀어 주고 승천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얽힌 바위다.
서석대(1110m)는 무등산의 최고봉인 천왕봉(1,187m)의 남서쪽에 위치한 서석대(1,050m)는 임석대(950m)와 함께 천연기념물 제465호인 무등산주상절리대에 속하며, 높이 약 30m, 너비 1~2m의 다각형 돌기둥 200여 개가 마치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무등산의 대표적인 명소이다. 주상절리대를 구성하는 암석은 무등산응회암이라고 명명된 화산암으로서 중생대 백악기 후기(약 8,700~8,500만년 전)에 분출된 화성쇄설물로 형성된 용결응회암이다. 이 응회암이 천천히 식는 동안 부피가 줄어들며 수축될 때 인장력이 작용하여 주상절리가 만들어졌다. 이곳에서는 무등산이 광주를 품 듯 시가지의 전경과 멀리 월출산을 조망할 수 있고 해질녘 서석대에 비치는 노을이 장관을 이룬다.
목교임도(958m, 초소)
무등산 중봉(915m)
무등산은 무등산은 무돌뫼(무진악), 무당산, 무덤산, 무정산, 서석산 등의 별칭을 갖고 있다. 무진악이란 무돌의 이두음으로 신라 때부터 쓰인 명칭이다. 무돌의 뜻은 무지개를 뿜는 돌이란 뜻이다. 무등산이란 명칭은 서석산과 함께 고려 때부터 불려진 이름으로, 비할 데 없이 높은 산 또는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산이란 뜻이다. 무등산에는 수많은 볼거리가 많이 있는데, 어떤 것은 멀리서도 바라볼 수 있도록 우뚝 솟아있는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가까이 가서야 볼 수 있는 것도 있다. 무등산은 오르기에 가파르지 않다. 그래서 휴일이면 무등산의 경승을 즐기려는 인파가 끊이지 않으며 남녀노소 누구나 간편한 옷차림으로 산을 찾는다. 볼만한 풍경이 있는 구경거리는 서석대, 입석대, 세인봉, 규봉, 원효계곡, 용추계곡, 지공너덜, 덕산너덜 등이 있다. 전망을 즐기려면 중머리재, 장불재, 동화사터, 장원봉 등이 있다. 이 중 화순쪽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입석대, 규봉, 지공너덜, 장불재, 백마능선, 규봉암에서의 동복호 조망 등이 있다.
천제단(911.1m)은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을 천제당 또는 천제단이라고 하는데 본래 제단은 입석대에 있었으나 점차 인가에 가까운 곳으로 내려와 현 위치를 배천(拜天)의 제단으로 정한 듯하다.
현 위치는 조선총독부 소유였으나 광주청년회가 기금을 모아 매수했으며 의재 허백련은 천제단을 민족의 제단으로 신성시하고 단군신전을 건립하기 위해 기금을 마련하여 무등산개천국건립위원회를 발족하고 기공식까지 가졌으나 이루지는 못했다.
현재 매년 개천절날 연진회에 이어 광주민학회가 중심이 되어 의식을 갖고 있다.
동화사터
바람재(485m)는 대부분 두 봉우리 사이 고도가 낮은 안부에 있는 고개로서 편서풍이나 북서 계절풍이 통과하면서 풍속이 매우 빨라지는 곳이며 이 같은 지형 조건으로 풍속이 빠른 바람이 부는 곳을 바람재 또는 풍령이라 부르고 있는데 백두대간의 황학산과 월출산의 바람재가 대표적인 안부이다.
낙타봉분기점
낙타봉은 멀리에서 봤을 때 마치 낙타의 등처럼 생겨서 불리게 되는데 이곳 역시 같은 이유로 이름이 붙은 듯 보인다.
매봉(445.9m)
향로봉(365.9m)
빛고을 산들길(안부)은 빛고을 광주를 중심으로 연이어진 산과 들을 산들산들 걷는다는 의미로 광주 북구 용산교에서 삼각산, 군왕봉, 동구 잣고개, 남구 분적산, 서구 금당산, 광산구 어등산, 백우산, 진곡, 비아를 거쳐 다시 북구 용산교로 이어지는 총연장 81.5 Km에 이르는 둘레길로 주요 노선 6개 구간과 딸린 부노선 3개 구간으로 되어 있다.
장원봉은 광주광역시의 동구 지산동과 북구 석곡동 관할인 청풍동 경계에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389미터이며 무등산 북서쪽 능선은 동구와 북구를 나누면서 내려서다가 장원봉에 다시 오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장원봉(壯元峯)은 무등산 지봉으로 속설에 향교가 옛날 봉우리 아래 있었고 고을 사람 중 장원하는 자가 많아 이름이 생겼다고 기록되어 있고 1872년지방지도(광주)에 장원봉이 그려져 있다.
무등의 작은 뫼인 꼬막뫼가 꼬두뫼>꼬두매>호두(虎頭)가 된 것으로 추정되고 향교는 현재 광주공원 성구산 동쪽 기슭에 있으며 본래 풍향동 또는 산수동에 있다가 호환(虎患)으로 광주읍성 안 즉 성내면 고향교평(古鄕校坪)으로 이전했다가 1488년에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잣고개(2차선 포장도로)는 광주광역시의 북구 두암동과 석곡동 관할 청풍동 사이의 고개로서 무등산 아래 장원봉에서 북쪽으로 내려선 곳으로 동구 산수동과 북구 두암동에서 무등산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고갯마루에 무등산도립공원 표지석과 함께 복원된 성터가 있으며 대동지지에 무등산 고성이라는 백제 때 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옛날 성터가 있는 곳에 잣(잿)과 작이 쓰였으므로 성치(城峙) 또는 척현(尺峴)이고 최근의 발굴 기록에 의하면 무진고성은 장원동을 중심으로 잣고개의 장대봉과 제4수원지 안쪽 산 능선을 따라 남북 1 Km에 동서 0.5 Km 및 둘레 3.5 Km의 타원형으로 축조되었다.
성안은 도둑골로 관과 국성 같은 명문이 새겨진 유물이 나왔으며 이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시대 중기 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무진고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포곡식 산성으로 무등산의 지맥인 장원봉(해발 386m)을 중심으로 잣고개의 상태봉(해발 350m)과 제4수원지 안쪽에 축조된 장타원형상의 산성이다.
이 성의 동문지에서 초축과 수축 성벽이 확인되었는데 초축은 자연과 계곡 및 암반층 위에 장방형으로 잘 다듬어진 석재를 정연한 수평면을 유지하면서 쌓았고 건물지와 동문지에서 출토된 기와편과 막새기와 및 순청자와 상감청자 등의 자기류가 발견되었는데 이 유물들로 보아 수축은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에 축조되었다가 9세기 중반에 폐성이 되었고 다시 9세기 후반경에 수축되어 고려 초(12세기)까지 사용된 성으로 추정된다.
잣고개 정상에 있는 서문은 광주시내에서 무등산으로 가는 도로의 통과로 심하게 훼손되어 있으며 잣고개와 석곡수원지 중간쯤에 위치한 동문도 일부 훼손되었다.
남문과 서문지 주변에는 건물지가 있는데 건물지는 성을 따라 능선상에 배치되어 모두 17개소에서 확인되었다.
성벽의 축성은 능선의 진행방향을 따라 편축하는 방법으로 능선의 7~9부 지점을 L자 형태로 다듬고 기점부에 5단 정도의 석축을 1미터 내외 높이로 쌓은 후 석축과 능선경사면 사이의 공간에는 잡석을 채워 다진 것이며 이러한 축성법은 백제의 축성법과 동일하지만 한편 성벽 상부를 잡석 채움식으로 쌓아 흙을 판축한 백제와는 다른 방법이다.
성벽 전체를 정연하게 쌓은 고구려나 신라와는 기본적으로 차이가 있어 백제축성법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새로운 유형의 백제식 축성법을 보여준다.
군왕봉(359.8m)는 무등산에서 서북능선을 따라 뻗은 산줄기로서 정상에 서면 광주시가지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데 군왕봉에 대한 공식기록은 없고 다만 광주 일곡동에 소재한 모룡대의 모룡대기 시문과 광주지도에 군왕봉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모룡대기 시문에 이 동의 지형을 살펴보면 이른바 군왕봉이라는 높은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고 그 아래에 이를 에워싼 여러 산록이 줄지어 있어 그 모습이 흡사 임금을 중심으로 여러 신하가 줄지어 모시면서 조석으로 임금을 첨모하는 듯한 형국으로 되어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태봉(바탈봉, 301.3m)
노고지리산(257m)
동창이 밝았으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란 시는 조선 후기의 문신 남구만의 시조로서 약천 남구만이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전원생활의 풍류를 즐기며 쓴 작품이다.
주제는 농가의 부지런한 생활로 밝아오는 아침과 하늘 높이 날며 지저귀는 종달새를 통해 보이는 평화로운 시골 풍경이며 농촌의 아침 정경을 여유있게 표현해 운치와 멋을 살린 대표적인 권농가 중의 하나로서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가르침과 부지런히 일하는 건강한 모습이 작품 전반에 잘 나타나 있다.
도동고개(도선사 또는 장등동에서 승하차)는 광주광역시의 북구 문흥동과 석곡동 관할인 장등동 사이의 고개이고 무등산에서 북서쪽으로 향한 능선이 대봉과 노고지리산에서 내려서 이 고개를 거쳐 삼각산으로 이어지며 광주와 담양을 잇는 중요한 재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해동지도에 저원(猪院)과 저원현(猪院峴)으로 기록되어 있고 대동여지도에도 저치(猪峙)로 표기되어 있다.
광복 이후 산적이 많아 도둑고개라 불렀는데 가파르고 솟은 곳은 돋보인다 하여 돋>돛으로 되어 한자로 옮길 때 저(猪)를 취하는 사례가 많다.
1922년 광주와 담양을 잇는 광담철로가 부설되었다.
중소기업진흥공단 호남연수원 버스정류장(29번 4차선 포장도로)
금마농장문(빛고을산들길)
삼각산(월각산, 276m, 전망데크위에 광주22 삼각점)은 광주광역시의 북구 삼각동과 석곡동 관할인 장운동 경계에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276미터이며 무등산에서 북서쪽 대봉으로 내려선 능선이 도동고개를 거쳐 솟아 있다.
북구의 진산으로 여겨지며 현대지형도(1:50,000)에는 월각산(月角山)으로 나오나 1:10,000 지형도에는 삼각산(318m)으로 되어 두 지명이 함께 사용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현 북쪽 5리에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해동지도에도 삼각산이 표기되어 있다. 본래 바위가 많은 산의 의미로 돌부리>달부리>월각 또는 석각(石角)이 되어 석이 삼(三)이 되어 삼각산(三角山)이 된 듯하다.
옛 절터에 뿔이 3개 달린 소가 있다거나 지맥이 세 군데로 뻗어 칭했다는 설이 있으며 도읍지에 있는 뫼를 서울산이라 하므로 주변이 광주의 고읍이라는 주장도 있다.
대동여지도에 광주 고읍(古邑)이 표기되어 있고 삼각산 아래에 큰안골과 역골이 전하며 한국지명총람에 이곳에 옛날 광주 고을이 있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송 이응상(1883~1937)의 삼각산에 내리는 노을로 시작되는 시가 전하고 정상에 깃대가 세워져 깃대봉이라고 하며 북구 일대가 조망된다.
남서사면 아래 오치동 관할에 1953년부터 향토사단이 있고 남사면 능안동에는 광주 노씨 시조설단 등이 있다.
죽취봉분기봉(정삼품묘, 우측으로 영산강 건너 병풍지맥 조망)
죽취봉(대포리봉)은 광주광역시의 북구 건국동 관할의 생룡동과 효룡동 및 석곡동 관할인 장등동 경계에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244미터이며 무등산에서 북쪽으로 내려선 능선이 도동고개를 거쳐 삼각산에 오르고 다시 북쪽으로 이어져 솟아 있다.
북서쪽 기슭에 생룡 마을이 있으며 서쪽은 모산이 북동쪽은 학동 그리고 남동쪽은 장등 마을이 위치한다. 큰 봉이라는 의미로 대봉우리>대볼봉>대폴봉>대포리봉>죽취봉(竹翠峰)으로 변한 듯하며 대나무가 많아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대동지지에 견훤대가 기록되어 있고 후백제 견훤이 주둔한 견훤대 터로 짐작된 곳이며 아래에는 말을 먹인 방목평도 있었다.
생룡 마을에서 금성 범씨 여환의 묘와 더불어 꼭대기까지 토성 흔적이 보이고 주변 마을 논밭에서도 백제 토기와 기와조각들이 발견된다.
1894년 범경준 일행이 피난처로 택하고 주위 5리에 걸쳐 우치산성(牛峙山城)을 쌓았다는 얘기도 전한다.
모산마을
생용동은 광주광역시 북구에 있는 동으로 원래 광주군 우치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내동리, 지내리, 용전리, 서작리 일부를 합하여 생용리가 되었다가 1957년 광주시에 편입되면서 생용동이 되었으며 1986년 광주직할시 북구 생용동으로 다시 1995년 광주광역시 북구 생용동이 되었다.
생용동은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건국동 관할하에 있으며 동 이름은 후백제의 견훤 생가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못안, 지내, 생용, 모산마을 등의 옛마을과 고개인 순산재가 있으며 휴식공간으로는 우치공원이 있다.
유적으로는 용호재, 복룡사유허비, 생용동 성지 등이 있는데 용호재는 금성범씨의 재실로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복룡사 자리에 1914년 후손들이 세웠다.
생용동 성지는 길이 약 2.5 Km에 너비 2~3미터이다.
잘산봉(172.9m, 현지명은 잘봉산)
광주패밀리 우치공원
우치공원은 광주광역시 북구 생용동에 위치한 위락시설 및 공원이며 남구 사직동의 사직공원에 있었던 동물원이 공간 협소 문제 및 주변 민가의 소음과 악취, 안전 문제로 이전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1991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고 동시에 어린이 및 가족단위의 피크닉 공간 조성을 위해 놀이공원을 조성하여 지금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이 공원에는 크게 놀이공원 시설인 광주패밀리랜드와 동물원으로 구분해서 이용 가능하다.
2018년 3월 높이 75미터의 대관람차 빅아이가 문을 열었고 일반룸, 뮤직룸, 시스루룸으로 구분되며 어떤 경우에서든 이용권을 구매하여야 한다.
부용산(153.9m, 부용정)
생용동은 요약광주광역시 북구에 있는 동으로 원래 광주군(光州郡) 우치면(牛峙面)에 속한 지역이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내동리(內洞里)와 지내리(池內里), 용전리(龍田里), 서작리(西作里) 일부를 합하여 생용리가 되었다. 1957년 광주시에 편입되면서 생용동이 되었으며 1986년 광주직할시 북구 생용동, 1995년 광주광역시 북구 생용동이 되었는데 생용동은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건국동(建國洞) 관할하에 있고 동 이름은 후백제의 견훤 생가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자연마을로는 못안, 지내, 생용,모산마을 등의 옛마을과 고개인 순산재가 있으며 휴식공간으로는 우치공원이 있다. 유적으로는 용호재(龍湖齋), 복룡사유허비(伏龍祠遺墟碑), 생용동 성지(生龍洞 城址) 등이 있는데 용호재는 금성범씨의 재실로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복룡사 자리에 1914년 후손들이 세웠다
본촌동은 광주광역시 북구에 있는 동으로서 원래 광주군(光州郡) 갑마보면(甲馬保面)에 속한 지역이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본촌면 본촌리가 되었다가 1931년 우치면(牛峙面)과 본촌면이 통합하여 지산면이 되면서 지산면 관할이 되었다. 1957년 광주시에 편입되었으며 1985년 일곡마을 일부가 서산동(瑞山洞)에 편입되었다가 1986년 광주시가 직할시로 승격하면서 광주직할시 북구 본촌동이 되었으며 1995년 광주광역시 북구 본촌동이 되었는데 본촌동은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건국동(建國洞) 관할하에 있다. 범안굴·산적골 등의 골짜기, 사망당재와 서당재 등의 고개, 방애들과 산적굴들 및 여싯모랭이 등의 들판, 거상과 지산 및 일곡 등의 옛마을이 있는데 여싯모랭이는 여우가 종종 출몰하였다는 데서 방애들은 물레방아가 있었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한다. 2000년 광주민속박물관의 발굴 작업으로 회청색경질토기와 초기 및 후기 분청사기 조각이 구릉지대에서 출토되었고 유적으로는 효자 김광언(金光彦) 정려비각과 천졸재 김치락유허비가 있다
한새봉(148.3m, 삼각점)
일곡동은 광주광역시 북구의 중앙 북부에 위치한 행정동으로 한실몰랭이 아래 양지바른 곳으로 동쪽은 삼각동과 석곡동의 장등동, 서쪽은 건국동의 본촌 · 양산동, 남쪽은 삼각동, 북쪽은 건국동의 생룡동과 접해 있으며 원래 농촌이었다가 1990년대 택지로 개발된 동으로 일곡 지명은 한실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조선 시대 광주목 석제면에 속했고 호구총수에 일곡촌(一谷村)이 기록되어 있어 지명의 유래가 오래되었음을 보여 준다. 1914년 광주군 석제면 일곡리가 되었다가 1935년 광주부 승격 때 광산군 지산면 일곡리가 되었으며 1955년 광주시 지산출장소 관할 일곡동이 되었다. 1957년 서산동 관할이 되었다가 2003년 일곡동이 분동되었다.
일곡배수장
시깃재
여물봉
매곡산(146.9m)
매곡동은 광주광역시 북구에 속한 동으로서 동쪽은 오치동과 접하고 서쪽은 건국동, 남쪽은 운암동과 용봉동, 북쪽은 서산동과 경계를 이룬다. 조선 후기에는 광주군 와지면에 속하였고 1935년 광주군이 광산군으로 바뀌면서 서방면 관할의 법정동인 매곡리와 오치리 및 삼각리가 되었다가 1955년 서방면이 광주시에 편입되어 풍향출장소 관할이 되었으며 1957년 동(洞)제가 실시되어 리(里)를 동으로 바꾸고 매곡과 오치 및 삼각동을 합하여 서산동이라 하였다. 1973년 구(區)제 실시에 따라 동구 관할이 되었고 1980년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되었으며 1986년에는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되어 광주직할시 북구 서산동이 되었다. 1994년 서산동에서 오치동이 분동되고 1995년 직할시가 광역시로 바뀌면서 광주광역시 북구 서산동이 되었다가 1997년 다시 서산동과 매곡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른다. 법정동명과 행정동명이 같은 매곡동은 옛 지명인 어매마을 어매(於梅)와 봉곡마을 봉곡(鳳谷)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인데 어매마을 뒷동산은 매화가 땅에 떨어지는 형국과 같다고 하여 풍수지리로 볼 때 매화낙지등 명당이라고 한다. 광주비엔날레가 개최되는 중외공원과 국립광주박물관으로 이어지는 문화 벨트 지역으로서 1978년 개관한 국립광주박물관은 신안 해저유물을 비롯하여 전라남도에서 발굴하고 조사 및 수집된 선사시대의 유물, 백제와 통일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는 3만 4,00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문화재로는 중흥산성 쌍사자석등(국보 103), 김용학가옥(광주민속자료 3)이 있다.
학고개
큰봉(132m, 운동기구와 벤치)
국립박물관 뒤편
마당고개
운암동은 광주광역시 북구에 속한 동으로 동쪽은용봉동과 접하고 서쪽은 동림동, 광산구 신창동, 남쪽은 서구 광천동, 북쪽은 건국동 및 매곡동과 접한다.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황계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대내리와 용산리, 대자리의 일부와 함께 운암리라는 이름으로 극락면에 편입되었고 1955년 광주시 유촌출장소가 설치되어 이곳에 편입되었다가 1957년 동(同)제 실시에따라 동림동(東林洞)과 함께 동운동으로 개편되었다. 1980년 북구청이 설치되어 1982년에 북구청 관할의 동운1·2동으로 분동되었으며 1993년 동운1동이 동운1·3동으로 분동되었다가 1997년 동운3동이 운암3동과동림동으로 분동되고 동운1·2동은 운암1·2동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운암동이라는원래의 명칭을 찾게 되었다. 법정동인 운암동은 행정동인 운암1·2·3동으로 이루어져 있고 북구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동이며 운암산(雲岩山)에서 지명이 비롯되었다. 주변의 지세가 닭이알을 품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어 풍수지리로 볼 때 황계구란형(黃鷄拘卵形) 명당이라고 하는데 마을이름인 대자실을 황계라고도 하여 황계면이라는 행정지명이생겨났으며 대내(안짝)마을 뒷동산에는 명당등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산기슭의 경사진 땅을 일구고 극락강과 광주천의 토사로 형성된 한강논을 개척한농촌지역이었는데 1970년대 말 대규모 택지조성 사업으로 아파트 단지가들어서면서 개발되었다.
호남고속도로 지하통로
1번 4차선 포장도로
운암산(133.9m, 광주414 삼각점)은 광주광역시의 북구 운암동과 동림동 경계에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131m이고 무등산에서 북서쪽으로 내려선 산줄기는 삼각산, 한새봉, 큰까끔으로 이어지다가 마당고개와 불골재를 거쳐 솟아있다. 빙 돌아선 능선의 아늑함으로 회룡고조(回龍顧祖)와 황계포란(黃鷄抱卵)형 명당으로 보며 해광(海狂) 송제민(宋齊民, 1549~1602)의 문집(1708년 간)에 운암사 창건 봉안제문에 처음 운암이 기록되었다. 영산강의 극락강변이라 안개가 많이 끼어 구름처럼 보이므로 구름 위에 솟은 바위산을 한자로 운암(雲岩)이라 표기했고 운모(雲母) 채굴 광산과 관련된다는 설도 있으며 남동사면에 경주 이씨 집성촌인 대내와 대자 마을이 있다. 황계포란 명당으로 묘에 무거운 기운이 있으면 계란이 깨지므로 비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현 벽산아파트 일대를 계란들로 부른다. 운암산에 올라 여러 벗들과 소요하며 읊는다(雲岩山與諸益逍遙吟) 라는 이응상(李應相, 1883~1937)의 시가 전한다.
삼익아파트
대마산(92.4m)은 광주광역시의 북구 동림동 죽림 마을 서남쪽에 위치한 산으로 해발고도는 92m로서 운암산에서 남서쪽으로 이어져 광주천 가 들판으로 이어져 있다. 여지도서에 왕조대(王祖臺)가 관아 서쪽 30리로 견훤대(甄萱臺)와 서로 마주보고 있고 고려 태조가 견훤을 징벌할 때 군진(軍陣)을 친 곳이며 백성들이 무지하여 왕건'라 불렀으나 태조의 성씨를 피해 지금은 다른 이름으로 고쳤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견훤대를 건국동 관할 생룡동 뒷산 죽취(대포리)봉으로 보는 설과 함께 대마산(大馬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여지도서에 방목평(放牧坪)은 견훤대 아래로 견훤이 진을 치고 말을 기르던 곳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를 통해 견훤대와 군마에서 대마산이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산은 채석을 하여 석산(石山)이라고도 부르고 바로 남쪽으로 경전선 철도가 지나고 있으며 서강고등학교 남쪽에 운암(북광주)역이 있었고 1940년대 운모 채굴과 그 운반을 위해 건설된 것이다.
봉운사
동천마을
동천동은 광주광역시 서구에 위치해 있는 행정동이자 법정동이다.
유촌마을
유촌동은 광주광역시 서구에 속한 동으로서 원래 광주군(光州郡) 내정면에 속한 지역으로 400여 년 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촌리(新村里), 군분면(軍盆面) 쌍촌리(雙村里), 황계면(黃溪面) 죽림리(竹林里)·동배리, 덕산면(德山面) 서작리의 일부를 합하여 극락면(極樂里) 유촌리가 되었다. 1955년 광주시에 편입되면서 유촌동이 되었으며 1986년 광주직할시 서구 유촌동, 1995년 광주광역시 서구 유촌동이 되었다가 1998년 3월 유촌동 일부가 치평동(治評洞)에 치평동 일부가 유촌동에 편입되었다. 유촌동은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유덕동(柳德洞) 관할하에 있으며 동 이름은 버드나무가 많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계수(桂樹)와 산우밭, 솔대배기, 아랫질, 웃질, 유촌, 칠성(七星) 등의 옛마을, 고보와 동녕보, 새보,외보 등의 보(洑), 고붓들과 대놋골, 사쟁이, 석디기 등의 들판이 있다. 쌍촌동(雙村洞)과 치평동(治平洞) 및 마륵동(馬勒洞)을 포함하는 상무신도시(상무3지구 주택개발사업)를 2002년까지 개발했으며 주요 시설로는 위생처리장과 유덕동청소년수련실이 있다. 유적으로는 낙유정(樂柳亭)과 모정(茅亭) 3채가 있고 문화재로는 유촌동 석조여래좌상(광주문화재자료 21)이 있다.
광주천은 광주광역시의 무등산 남서쪽 사면인 동구 용원동 용두골 일대에서 발원하여 시의 중심부를 흘러 치평동 일대에서 영산강과 합류하는 하천이다. 증심사천이 합류하는 동구 학동에서 국가 하천이 되며 시가지를 가로질러 북서류하다가 시가지 서쪽에서 극락천(極樂川)과 합류하며 영산강과 합류지점에서 넓은 평야를 이루고 상류와 극락천 중류는 상수도 수원지(水源池)와 관개에 이용되며 예전에는 백일홍나무가 많은 개울이라고 하여 자미탄(紫薇灘)이라고 불렀다. 해동여지도에서는 무등산 남쪽 사면의 석보면(石保面)에서 발원하여 광주 읍치를 감싸고 돌아 흐르면서 당부면(當夫面) 일대에서 영산강과 합류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고 대동여지도에서는 광주 읍치 남쪽에 건천(巾川) 지명이 기재되어 있어 이 하천의 부분칭을 보여 준다.
영산강
유덕치안센터 버스 정류장에서 318번 버스로 광천동 버스 터미널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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