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지 : 경상북도 봉화군의 각화지맥 마루금 일대
산행일자 : 2019년 11월 23일 (토요일 당일산행)
산행날씨 : 하루 종일 맑았고 약간은 무더위를 느겼던 산행날씨
산행온도 : 영상2도에서 영상 15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소로리 흑석 버스정류장-흑석경로당과 팔각정자-마지막 민가와 축사-억새와 잡목지대-살피재-능선진입-좌 잣나무 군락지-지독한 잡목지대-759.3봉(아홉사리상봉)-742.6 삼각점봉(춘양421 삼각점)-759.3봉 복귀-739.9 무명봉-춘양목 지대-높은터 비포장 임도(이정목과 설명판, 외씨버선길, 벤취쉼터들)-녹슨 철조망과 과수원-670.8 묘지봉-무명안부-간벌지대-704.8 묘지봉-간벌 춘양목지대-화장산(861.8봉, 춘양308 삼각점, 묘지, 860.7 삼각점)-화장암 갈림삼거리-무명안부-644.3 무명봉-노루재터널(678.9)-노루재(630m, 실측정 572.5m, 소천로 2차선 포장도로)-전사자 유해발굴 현장-677.2 콘크리트 초소봉-풍산유씨 묘-무명안부-비포장임도-684 삼각점봉(묘지)-간벌목지대-비포장임도 갈림삼거리(낙엽송 지대)-667 무명봉-우측 벌목지대-661.7 무명봉-벌목지 경계능선-길주의 갈림삼거리(우측)-시멘트 포장도로-갈림삼거리(좌측)-비포장임도-시멘트 포장도로-능선진입-498 무명봉-31번 갈산로 2차선 포장도로-485.3 무명봉-489.4 무명봉(입산금지)-494.9 잡목무명봉-무명안부-임기터널(영동선 철도)-510.8 무명Y자 소나무봉-512.5봉-묘지와 밭 경작지-시멘트 포장도로-방고개(눌산2리 방현동 갈림사거리, 이정석, 쉼터정자, 느티나무 쉼터)-능선진입(밭 경작지와 스테인레스 물통)-지독한 간벌목지대-574.1봉-무명안부-비포장임도 그물망-능선진입-579.8 무명봉-비포장 임도-110번 송전탑-월암산(608.4봉, 삼각점과 정상판, 묘지)-111번 송전탑-613.8 무명콘크리트 말뚝봉-572.6 무명봉-길주의 갈림 삼거리(우측)-무명안부-535.8 무명봉-문고개(1차선 포장도로)-568.9 무명봉-562.1봉-길주의(좌측)-무명묘지들-눌산길(1차선 시멘트포장도로)-586 무명봉-581.7 무명봉-594 무명잡목봉-595.3 무명봉 조망-입산금지 경고판-524.2 잡목묘지-503.9 무명공터봉-멧돼지 체육단련장-개노리재(버스정류장, 낙동강트래킹과 아람옛길, 35번 청량로 2차선 포장도로와 눌산길 1차선 포장도로)-35번 청량로 2차선 포장도로 진행-개놀재-법화사 갈림삼거리-삼동2리(이정석, 446.3미터 수준점, 착골 버스정류장)-황새마을 느티나무(삼동2리 새마을회관)-능선진입-잡목지대-502.1봉-안동권공 묘지들-추동길 1차선 포장도로-523.3 무명봉-잡목지대-안동권공 묘역-516.5 삼각점봉(춘양431)-송전탑-558.2 무명 웅덩이봉-간벌지대-152 송전탑-153 송전탑-송이채취구역-556.9 무명봉-560.4 무명봉(길주의-우측)-523.3봉-운곡천 조망-35번 청량로 2차선 포장도로(명호면 삼동리)-범바위 전망대(낙동강과 합수점 조망)-운해정 사각정자-능선진입-도로 옆 절개지 상단-비포장 임도-안부 사거리-능선진입-우측 벌목지-396 무명봉-341.7 무명봉-조형분수-낙동강시발점테마공원-운곡천과 낙동강 합수점-산행종료-명호(도천) 버스정류장
산행거리 : 부드러운 등로를 타고 때로는 지독한 잡목들을 헤치며 긴 접속구간 없이 25.61 Km (스마트폰의 Oruxmaps와 트랭글 기준)
산행트랙 :
산행시간 : 초반 접속구간 지나 대부분 편안한 등로였으나 가끔 지독한 잡목지대와 간벌지대를 통과하며 조금은 여유있게 진행하여
09시간 22분 (07시 35분부터 16시 57분까지)
교통 및 숙박편 : 갈때 - 05:30 여관에서 기상 후 어젯밤 준비한 컵라면과 햇반으로 아침 해결
07:05 춘양면사무소 주차장에 애마 주차 후 춘양버스터미널로 이동
07:20 소로리행 버스를 혼자 전세내고 탑승 해 소로리 흑석마을 버스정류장에서 하차 (1,300.-)
07:35 소로리 흑석 버스 정류장에서 산행 준비 후 산행 시작
올때 - 16시 57 운곡천이 낙동강과 만나는 합수점인 낙동강시발점테마공원에서 산행 종료
17시 10분 도천교를 건너 봉화군 명호면을 지나 매호교와 명호삼거리 옆 명호(도천) 버스정류장 도착
18시 05분 춘양에서 출발한 버스가 회차하여 다시 춘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탑승해 춘양버스터미널로 복귀 (1,300.-)
18시 20분 서울목욕탕으로 이동 해 샤워 후 환복(5,000.-)
19시 10분 목욕탕 앞 순대국 식당에서 돼지국밥으로 저녁 해결 후 귀경(7,000.-)
22시 40분 생각보다 막히지 않는 도로를 타고 무사히 귀가 후 소맥으로 산행 종료
각화지맥이란 ???
각화지맥은 백두대간 태백산 남서쪽 7.3 Km지점인 신선봉(1295미터봉)과 깃대배기봉(1032미터봉) 사이의 차돌배기에서 동쪽으로 약 150여미터 떨어진 고도 약 1207미터봉에서 남쪽으로 가지를 쳐 각화산(1202봉), 왕두산(1046봉), 화장산(862봉), 월암산(608봉)을 일구고 경북 봉화군 명호면 명호나루 도천교에서 낙동강에 발을 담그는 도상거리 36.2 Km의 산줄기로 운곡천의 우측 분수령이 된다.
약간의 감기 기운을 극복하고 굴곡진 인생처럼 때로는 편안하게 또 때로는 지독한 잡목과 가시나무속에 갇혀 힘들게 진행하여 운곡천과 낙동강이 만나는 합수점에서 또 하나의 지맥 산행을 완성했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후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단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현존하는 맥 잇기 산행에 대한 수많은 이론과 산행 트랙이 존재하지만 이 산객은 산경표와 신산경표를 보고 맥 잇기 산행을 처음 진행하였기에 가능하면 신산경표의 산행 이론에 따라 산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산줄기의 마지막 끝부분이 물과 만나는 지점인 합수점으로 가야한다는 이론 역시 그 어느곳에서도 올바른 정의를 내리지 못하였기에 이 산객은 옛 문헌에 나타난 이론인 관아를 기준으로 설정된 산줄기를 그 끝으로 하고 문헌에 나타나지 않은 관아 이후의 산줄기는 산행을 하는 산객 각자의 기준에 맞춰 진행하면 될 것으로 생각한다.또한 각화지맥 산행을 한 후 이 산행후기를 기술하면서 경상북도 봉화군과 주변 지자체에 수록된 지명유래 및 네이버의 지식백과와 다음의 백과사전 그리고 산림청과 한국관광공사의 자료들을 참고하여 정리된 부분들이 있으며 이런 부분들이 혹시라도 지적재산권에 저촉이 되어 삭제나 변경이 필요한 경우 연락주시면 언제라도 즉시 삭제 및 수정해 드릴 수 있음도 알린다.
어제 저녁에 어둠이 깔리는 도로에서 생각지도 못한 트럭 아저씨의 도움으로 편안하게 춘양으로 복귀하여 애마를 회수한 후 근처의 여관으로 들어 가 시원하게 샤워하고 터미널 근처의 국밥집에서 맥주 한병과 특돼지국밥 한그릇으로 저녁까지 해결한 후 편의점으로 들어 가 내일 아침으로 먹을 햇반과 컵라면 그리고 산행 중 마시고 먹을 먹거리들을 준비한 후 여관으로 들어 가 잠시 일 처리를 하고 산행 사진들을 정리하다 보니 눈꺼풀이 내려 앉고 밤 10시를 넘기고 있기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역시 찜질방보다 조용하고 혼자 마음 놓고 잠자리에 들어서인지 새벽 2시에 일어났는데 생각보다 몸은 좋은데 지난 주 산행을 하지 못한 탓인지 약간의 감기기운이 느껴진다.뜨거운 물을 끓여 목축임을 하고 수건을 적셔 방에 걸어 놓은 후 다시 눕지만 쉽게 잠을 들지 못하다가 새벽 3시 30여분이 지나 다시 잠들었다 일어나니 아침 6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다.몸 상태부터 확인하니 생각보다 좋아 산행에는 큰 무리가 없을 듯 하지만 두 다리에 전해지는 묵직함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느낌으로 썩 좋지 않았고 온 몸에 난 생채기들로 인해 약간의 고통을 느끼는 시간이다.
아침부터 간단하게 해결하고 산행 배낭을 챙긴 후 샤워하고 뉴스를 시청하다 여관을 나오는 시간이 아침 7시를 막 넘기는 시간으로 오늘은 애마를 춘양면사무소 앞 넓은 주차장에 잘 주차시키고 바로 근처의 버스터미널로 가 소로리 행 버스표를 1,300.-원에 구매한 후 시간에 맞춰 들어오는 버스에 탑승하니 승객이라고는 이 산객 달랑 혼자이다.버스 기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가다 보니 흑석마을이 어디인지 모르겠다며 소로리가 넓어 승객이 내릴 장소를 확인해 줘야 한다기에 바짝 긴장을 하고 앞자라로 옮겼는데 달리는 버스 차창으로 살펴보니 이 산객이 내릴 흑석마을에서 이 버스는 회차해 시간 맞춰 나와야 하기에 걱정없이 잘 하차해 산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거리도 가까우니 편안하게 택시를 이용해도 되겠지만 경제적인 부분을 떠나 운동 겸 이곳까지 내려 왔으니 가능하면 몸을 조금이라도 더 움직여 내려 온 의미를 갖자고 시작하다 보니 자꾸만 대중교통을 이용하게 되고 또 도보로 걸어 목적지로 가려다 보니 가끔은 몸이 고생을 하는 듯 싶기도 하다.
지난 주 쉬어서 그런지 아니면 어제 산행의 난이도가 생각보다 어려웠는지 대부분 하룻밤 자고 나면 뭉쳤던 두 다리가 완전히 풀려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했는데 오늘은 종아리가 단단하게 뭉쳐있어 조금은 걱정과 고민으로 시작하는 산행이다.
걱정했던 초반부 접속구간을 무리없이 오르고 약간의 잡목들로 어려움도 있었지만 어제 산불이 났던 지역에 비하면 웃으면서 진행이 가능한 등로이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걷다보니 높은터와 화장산을 통과하고 노루재 도로를 건너 오르니 어제 만나지 못했던 춘양목들과의 소중한 만남도 이어지고 곧이어 묘지 앞에 박혀있는 684삼각점봉을 넘어 룰루랄라 순조로운 진행이다.
잠시 후 등로 우측으로 벌목지대가 나타나고 그곳을 따라 진행하다 벌목지대가 끝나는 지점에서 우측 벌목지대 경계를 따라 내려가기 직전 우측을 살펴보니 이제부터 걸어 진행해야 할 각화지맥 나머지 구간 전부가 한눈에 들어 오고 그 뒤 저 멀리 좌측 끝자락으로는 청량산이 그리고 우측 끝자락 쪽으로는 홀로 고운 추억을 남겼던 문수지맥 마루금이 높았던 산세를 누그러트리며 이어지고 있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 온다.
명호면에서 춘양으로 나가는 버스가 오후 5시 30분쯤 있다고 알고 왔기에 그 시간에 맞춰 진행하다 보니 생각보다 빠른 시간에 범바위 전망대에 도착을 하고 잠시 그곳에서 좌측 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내려다 보며 또 하나의 산줄기 산행을 무탈하게 마무리하는 시간을 즐겨본다.
U자로 크게 휘돌아 가는 낙동강 줄기따라 우측 끝자락에 각화지맥 마지막 지점인 운곡천과 낙동강이 만나는 합수점이 내려다 보이고 그 낙동강 건너편으로는 황우산과 그 뒤로 문명산이 빠꼼히 얼굴을 내밀지만 우측 저 멀리 보여야 할 문수지맥 산줄기는 나무들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이제 오후 4시 20여분을 지나고 있어 저 합수점까지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 이곳에서 조금 더 풍경을 즐기고 남아있는 산줄기를 따라 오늘 하루도 안전한 하루가 될 수 있기를 바래 본 황홀한 순간이기도 하였다.
어제 각화지맥 첫구간을 무탈하게 완주 후 다시 춘양으로 돌아 와 잠을 푹 잘 잤더니 몸은 많이 좋아졌지만 두 다리에 전해지는 무게감이 무거워 약간은 걱정으로 시작하는 하루이다.
새벽 일찍 일어나 어젯밤 준비한 햇반과 컵라면으로 배를 채우고 시간에 맞춰 애마를 춘양면사무소 앞 넓은 주차장에 잘 주차시킨 후 나오면서 이곳 춘양에 대한 자료를 찾아 읽다 보니 몇가지 중요한 단어들과 관용구가 떠 오른다.
첫번째가 춘양목이고 두번째가 억지춘향인데 실제로 억지춘향으로 알고 있었지만 자료를 찾아 읽다보니 억지춘양이 더 맞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 본다.
억지춘향이란 원치 않는 일을 어쩔 수 없이 한다는 뜻으로 쓰이는 관용어로서 대부분 춘향전에서 변학도가 성춘향에게 억지로 수청을 요구했다는 의미의 억지춘향으로 알려져 있고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용례가 그와 같이 실려 있으나 실생활에서는 억지춘양이 더욱 많이 쓰인다는 글이 보인다.
억지춘양(또는 억지춘향)의 어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설이 전하는데 첫번째가 이곳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일대에 전해지고 있는 억지춘양이라는 속요이다.
왔네 왔네 나 여기 왔네 / 억지 춘양 나 여기 왔네 / 햇밥 고기 배부르게 먹고 / 떠나려니 생각나네 / 햇밥 고기 생각나네 / 울고 왔던 억지 춘양 / 떠나려 하니 생각나네…
그렇게 어려운 여건 속에서 춘양에 들어와 살면서 미운 정과 고운 정 다 들고 춘양이 비교적 경제적으로 여유(금정광산과 춘양목 등) 있는 고장이어서 춘양을 떠나려니 되레 섭섭하다는 의미가 담긴 노래이다.
두번째는 옛부터 백목(百木, 흰나무)의 왕이라고까지 불리며 춘양을 대표하던 소나무인 춘양목이 너무도 유명하여 춘양과 장동(춘양 소로리) 및 내성(봉화)장날 상인들이 너도 나도 내다 팔려 가져온 자기 나무가 춘양목이라고 우긴다는 말에서 억지춘양이라는 말이 유래하였다는 것이다.
마지막 세번째는 1944년 일제가 영주와 춘양을 연결하는 영춘선(지금의 영동선)철도 공사를 시작하여 해방 직전인 1945년 8월 내성역(현 봉화역)까지 철도를 개통하였으나 일제의 패망으로 철도 공사는 중단되었고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23일 경상북도 북부 일대의 홍수로 그나마 개통되어 있던 구간도 운행조차 해보지 못한 상태로 유실되고 말았다.
1949년 이미 개통된 영주와 봉화 구간을 복구하여 열차 운행을 재개하고 다시 철암까지 연결하는 철도 공사가 재개되었으나 얼마 안가서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건설은 중단되었고 휴전 이후인 1954년이 되어서야 간신히 공사가 재개될 수 있었다.
그러나 철도 공사가 90% 이상 진전된 상황에서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출신으로 당시 국회의원이자 자유당 원내 총무였던 정문흠(1892 ~ 1976)이 갑자기 영암선 철도가 춘양면을 지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결국 교통부 철도국에 압력을 넣어 법전과 녹동 구간을 직선으로 연결하도록 계획되어 있던 철도를 춘양면 소재지로 돌아서 가게 만들고 춘양면 의양리 면소재지 외곽에 역사를 설치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영암선은 직선으로 갈 수 있는 짧은 구간을 춘양면소재지를 거쳐 2 Km 이상 돌아서 나가는 Ω자 형태의 노선으로 변경되어 건설되었고 이 과정에서 험준한 산악지형을 극복하기 위해 약 300미터의 터널 1개와 길아천철교에 버금가는 높이 30.7미터에 길이 60미터의 철골 철교 등 교량 4개를 건설하는 난공사를 거쳐야 했고 결국 개통 시기도 그만큼 늦춰지게 되었다.
이러한 뒷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철도를 억지로 춘양으로 돌렸다는 뜻에서 억지 춘양이라는 말이 쓰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억지춘양과 억지춘향이라는 말 중 어느 것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꾸준히 논란이 있으나 일제 강점기에 실린 신문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있다.
格에맛지안는 地方部社會部, 經濟部椅子에 턱턱걸어안저서 억지春香의 붓대勞働을 머리골치가띙하게 終日하고잇다.-1927년 동아일보
이러케 억지春香을 꾸며노타싶이한 K君이 機械的으로움즉여야할 拘束된 店員生活에 調和되지안흘것은 定한 理致다. -1938년 동아일보
머리채를느러트리든옛시절로 거슬러올나가도못쓰겟지만 노란머리아닌털을 억지춘향으로구비치게한들 어쩔거시여. - 1949년 동아일보
위와 같이 억지春香이라는 표기가 등장하고 있으나 앞서도 소개하였듯이 봉화군 춘양면에도 일제 강점기 이전부터 억지춘양이라는 속요가 현재까지 전래되고 있으며 춘양이라는 지명은 일제 강점기 이전인 조선 시대부터 춘양현(春陽縣)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져 온 유서 깊은 지명이다.
두 표현 모두 나름대로의 근거를 가지고 있어 어느 쪽이 맞다고 쉽게 단정지을 수는 없으나 현재로서는 각각 별개로 생겨난 두 말이 비슷한 의미로 쓰이게 되었거나 혹은 두 말의 발음이 비슷하다 보니 어느 한 쪽으로 와전된 것으로 보는 것이 중론으로 여겨지고 있다.
춘양면사무소에 애마를 잘 주차시키고 바로 옆 버스터미널로 이동하니 터미널 옆에 어제 저녁을 맛있게 먹었던 우리식당 간판이 보이는데 시골 특유의 정감있는 풍경이기에 사진에 담아 본다.
서울 대도시에서 만나는 식당의 입간판과는 격이 다를지 모르지만 음식 맛만큼은 어릴적 시골에서 없는 살림에 어렵게 어머니가 만들어 준 음식처럼 정갈하고 옛 추억이 생각나는 그런 음식이었기에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다는 생각이다.
터미널 주변의 풍경들을 사진에 담고 7시 17분 쯤 들어 온 버스에 탑승하니 달랑 이 산객 홀로 전세내어 운행하게 되고 기사 아저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10여분만에 종착지인 소로리 흑석마을 버스 정류장에 도착을 해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하차하니 이곳 주민 한분이 탑승하여 버스가 기다리는데 아마도 출발시간이 정해져 있는 듯 보였다.
어젯밤 어둠속에 배낭을 정리하고 생각지도 못한 호인을 만나 편안하게 춘의로 이동했던 소로리 흑석마을에 도착을 해 저 버스정류장에서 다시 한번 더 배낭을 정리하고 산행을 시작하려는데 등산 의자가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 빼놓고 왔나 곰곰히 생각해 보니 이번 주 김장을 하면서 아들이 등산의자를 사용한 후 제자리에 놓지 않아 집에서부터 아예 챙겨오지 못하였음을 인지한다.
어제도 한 두번 생각을 하였었는데 까마귀 고기를 먹었는지 자꾸만 기억력이 감퇴되고 있음을 느끼는 시간이다.
시간을 기다리는 듯 보이는 버스와 흑석 버스정류장을 마지막으로 사진에 담은 후 살피재를 향한 접속구간을 걸어 들어가 본다.
이 아침도 늘 하던대로 오늘 하루도 안전하고 무탈하게 목적하는 지점까지 완주할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빌며 또 하루를 시작해 본다.
도로 따라 걸어 오르니 갈림삼거리가 나타나고 우측의 관석10교를 건너면 도로 좌측으로 팔각정자와 흑석경로당 건물이 자리한다.
사진에 담으며 살펴보니 흑석경로당 건물 뒤 저 멀리 방금 전 떠 오른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능선이 아름다워 지도를 찾아 보니 바로 어제 걸었던 좌측의 형제봉과 우측의 형제봉 갈림봉 및 938.7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기에 다시 한번 더 확인하고 걸어가는 순간이다.
계속 도로를 타고 걸어 들어가니 몇 시간 차이인데도 어젯밤 어둠이 깔리는 시간에 내려 온 도로라서 그런지 다른 도로처럼 느껴지고 그렇게 한동안 걸어 오르니 또 다른 갈림삼거리에서 우측 도로를 따라 올라 금새 강아지 네마리의 격한 환영을 받으며 마지막 축사를 무탈하게 통과한다.
어제보다는 온도가 높아졌는지 밤새 풀섶에 내렸던 성애가 햇살에 녹으면서 물방울들을 비산시키고 등산바지와 등산화가 축축하게 젖어 올 쯤 지독한 가시나무와 잡목들을 지나 드디어 어제 헤어졌던 각화지맥 상 살피재 인도에 무탈하게 도착을 해 거리와 시간을 보니 약 1.2 Km 거리에 약 30여분이 걸린 듯 싶다.
살피재(우측이 춘양면 소로리 샘골과 흑석경로당 방향)는 봉화군 소천면과 춘양면의 경계가 되는 재이고 살펴서 조심해 가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또 다른 설로는 임진왜란 때 봉화의 의병대장이었던 류종개가 김인상, 윤흠신, 윤흠도와 더불어 의병을 거느리고 이 고개에서 역전하다가 모두 흉봉에 죽었다는 고개로서 부근에 살피터, 높은터, 절골이 있다.
살피재 임도에서 다시 한번 더 등산복장과 배낭을 정리하고 임도 따라 짧은 거리를 올라 우측 간벌지대로 이어지는 능선으로 오르며 각화지맥 마지막 산행을 이어가 본다.
언제 다시 이곳 살피재에 올 수 있는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이 나라 이 땅에 이어진 산줄기를 따라 걸어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저 즐겁고 행복한 산객과 시간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 본다.
간벌된 능선으로 오르니 금새 정상 마루금인 주능선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등로 우측을 보니 방금 전 이 산객이 올라 온 소로리 방향의 골짜기 넘어 저 멀리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어제 걸었던 각화지맥 첫번째 구간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어 잠시 발걸음 멈추고 사진에 담으며 그 이름들을 불러 본다.
좌측 제일 뒤로 독립된 형태로 서 있는 각화산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오고 사진 중안 좌측 뒤로 왕두산이 솟아 있으며 그 왕두산에서 시작된 산줄기를 타고 우측으로 내려오며 중간에 형제봉과 형제봉 분기점 그리고 지독한 잡목과 고사목들이 시작되고 소나무들을 식재해 놓았던 938.7봉이 이어지고 그 우측으로는 이곳 살피재로 이어지는 마지막 산줄기가 올려다 보인다.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기에 조금 더 머물며 몇장의 사진을 남기고 이제는 갈길이 머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본다.
등로 우측으로 소로리와 어제 걸어 온 마루금을 조망하고 능선을 타고 오르니 생각보다 심한 잡목들이 태클을 걸기 시작하지만 그래도 키 큰 춘양목들이 등로를 인도하듯 줄지어 늘어서 있으니 어제보다는 삭막함이 덜한 기분이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 잡목들을 헤치며 완만하게 오르니 갑자기 등로 좌측으로 무명묘지 한기가 나타나고 그 아래 저 멀리 생각지도 못했던 운해가 골짜기를 가득 채우고 그 위로는 오늘 새롭게 떠 오른 태양이 밝게 웃으며 온 세상을 밝혀주고 있다.
지도를 보니 현동리로서 현동리는 경상북도 봉화군 소천면에 있는 리이며 자연마을로는 싸라리골, 살피재, 자작정, 연남, 암돌, 창마을 등이 있다.
지금 내려다 보는 곳은 바로 싸라리골로서 싸라리골은 골이 깊고 숲이 무성하여 전쟁시에는 피난처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여기 저기에 억새가 많아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억새풀에 베어 쓰라림을 맛 봐야 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세월이 지나면서 씨라리골로도 불리게 되었다.
창마을은 옛날에 군량미를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약초와 잡곡 재배에 적합하다.
산이 높고 골이 깊으며 낙동강이 근처를 흐르고 있기 때문에 운해가 자주 발생하는 지역이 아닐까 생각도 해 본다.
아름다운 운해를 감상하고 소천면과 낙동강 넘어 저 멀리 제비산과 죽미산까지 확인한 다음 걸어 오르니 잡목에 간벌된 나무들이 제멋대로 등로에 나뒹굴고 있어 정상적인 산행이 불가능하기에 좌측 약간 아래로 나 있는 사면 등로를 이용해 올라 본다.
잠시 후 좌측으로 환상적인 잣나무 군락지 아래 민가 건물이 내려다 보이고 음악소리가 들리는 지점을 지나 오르니 다시 지독한 잡목들이 등로를 가득 채우고 이 산객의 상쾌한 아침 기분을 사라지게 만든다.
아침부터 손등에 생채기를 만들며 어렵게 오르니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이 많이 걸려 있고 봉 따먹기의 대가이신 서래야님이 이곳을 759.3미터의 아홉사리봉상봉이라는 종이 코팅지를 걸어 놨다.
지도를 보니 이곳에서 우측으로 그리 멀지 않은 지점에 삼각점이 있어 잠시 다녀 오기로 한다.
이곳 삼각점으로 가는 등로 역시 지독한 잡목들로 인해 진행이 어렵고 특히나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이 아닌 내려갔다 올라 와야 되는 봉우리이다 보니 조금은 어색한 만남이기도 하다.
지독한 잡목들을 헤치며 내려가니 고사목과 삼각점 이외에는 보이는 것이 전혀 없기에 사진 한장 남기고 삼각점을 살펴보니
742.6미터의 춘양421이란 삼각점이 박혀 있다.사진 몇 장 더 남기고 곧바로 그 742.6 삼각점봉을 지나 갈림삼거리로 복귀한다.
삼각점봉을 다녀 와 지독한 잡목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759.3미터의 갈림삼거리에서 진행 방향 우측으로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갑자기 등로가 좌측으로 크게 꺽여 진행하고 곧이어 또 다시 우측으로 꺽여 잠시 후 원래 직선으로 진행하는 방향으로 이어지고 이어 살펴보니 직선으로 내려오는 등로를 따라 진행해도 아무 문제는 없지만 지독한 잡목들이 등로를 막고 있으니 선답자 중 누군가 이 우회 등로를 만들었고 그 이후부터 편안한 우회 등로를 타고 진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명 묘지 한기를 지나 내려가니 춘양목들이 등로를 가득 메우고 등로를 가득 채운듯한 치톤피드를 생각하며 힐링도 하고 건강도 챙기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걸어 보는 시간이다.
그렇게 편안하게 걸어 내려가니 등로 우측 나뭇가지 사이로 환상의 운해가 펼쳐지고 그 운해 위로 몇가닥의 산줄기들이 보이는데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잠시 발걸음 멈추고 지도를 꺼내 지약을 확인해 본다.
어젯밤 하루 묵었던 춘양면이 우측 저 멀리 운해속에 잠겨 있고 사진 중앙부쪽으로 오늘 산행을 마무리 해야 할 명호면 쪽 나즈막한 산줄기들이 보이고 좌측 진행 방향인 화장산 방향으로는 춘양목들이 가려 보이지 않는다.
생각보다 멋진 운해를 우측 아래로 내려다 보며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춘양목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약간의 잡풀 등로를 따르고 제법 속도를 내며 걸어 보는 시간이다.
잡목들이 사라지고 하늘 높은줄 모르게 곧게 뻗어 자라고 있는 춘양목을 만나니 무심으로 걷게되고 그렇게 진행하니 이제 등로 좌측으로 넓은 밭 경작지와 작은 저수지 2개가 내려다 보이고 그 풍경들을 사진에 담으며 전진하니 눈 앞에 환상의 춘양목 군락지가 펼쳐져 있다.
백두대간을 두고 북쪽으로 모레기재를 넘어간 춘양면 우구치를 흐르는 물길은 남한강이 되고 춘양천은 남한에서 제일 긴 강인 낙동강의 상류가 되는 봉화군 춘양면은 예로부터 이곳에서 나거나 모여드는 소나무 재목인 춘양목으로 이름이 높다.
춘양목은 한옥을 짓는 데에 으뜸가는 목재로 쳤으므로 봉화읍의 청암정과 석천정 같은 조선 중기의 건물과 흔히 ㅁ자로 이루어진 안동의 세도가나 서울의 반듯한 양반집들은 대부분 춘양목으로 지어졌다.
춘양목은 겉껍질이 붉은빛이 돌아 적송이라고도 부르는 육송인데 춘양목이라는 이름은 집산지인 춘양의 지명을 딴 것으로 춘양목은 다른 지역의 육송과는 달리 곧게 자라는 데다가 껍질이 얇고 결이 곱고 부드럽다.
또한 켠 뒤에도 크게 굽거나 트지 않으며 켜면 그냥 하얗게 보이기 쉬운 다른 지역의 육송과는 달리 붉은빛 또는 보랏빛을 띠고 벌레가 먹거나 썩지 않으며 대패질을 해놓으면 윤기가 자르르 돈다.
춘양목은 춘양면의 북쪽인 소천면과 강원도 지역에까지 분포되어 있어 육로로 수송할 수 없었으므로 일제 때만 해도 뗏목을 만들어 낙동강에 띄우면 소천면의 석포리, 현동리, 임기리와 명호면을 지나 안동에서 건져 매매가 이루어졌으나 사는 사람이나 파는 사람은 거의가 춘양면에 모여서 서로 계약을 맺었다.
안동이나 영주에서 춘양면으로 가려면 봉화읍을 거쳐야 했는데 봉화읍에 상권이 형성되는 데 춘양목의 구실이 컸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춘양목이 목재로 쓰이려면 적어도 반백 즉 수령이 백 년의 절반인 오십 년쯤은 된 것이라야 했는데 옛날에는 산에 나무들이 울창했기 때문에 해마다 베어내어도 그 양을 충분히 댈 수가 있었고 게다가 고갯길이 험하여 달구지로 옮겨갈 수가 없어서 베어내는 양이 한정될 수밖에 없어 숲이 보존될 수 있었지만 일제 말기부터 춘양에 수십 개에 이르는 제재소가 들어서더니 마구잡이로 베어내기 시작했고 한국전쟁 뒤의 혼란기에는 군용 화물차가 줄을 지어 춘양목을 마구 잘라 실어냈다.
그 결과 지금까지 남은 적송 군락지는 소천면에서도 외진 마을인 남희룡리와 분천리의 사유지 3제곱킬로미터에 있는 반백이들뿐으로 1950년대 말에만 해도 춘양면 소재지에 백 개가 넘는 술집들이 흥청거렸는데 하며 말끝을 흐리는 주민들의 기억 속에서만 춘양목이 남아 있다.
한편 봉화군 소천면 석포리에서 명호면에 이르는 낙동강 유역은 사람들의 손길이 타지 않은 전인미답의 절경을 지닌 곳이 많은데 승부터널과 풍애터널 등의 긴 터널뿐만 아니라 길이 없다 보니 낯선 곳에서 길을 물을 사람조차 없다.
강을 건너는 수고와 혼자 걷는 외로움 없이는 갈 수 없는 낙동강 물길은 촉으로 난 길은 푸른 하늘로 오르는 길보다 험하구나 하는 이태백의 시 험난한 촉나라 길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서거정의 시가 지금도 어울리는 오지를 뚫고 합강나루와 명호 소수력발전소를 거친 물길은 명호를 지나 봉화의 명산 청량산 기슭에 닿는다.
낙동정맥 너머인 동해 지방에서 생산되는 생선과 소금이 이 두메산골로 들어와 서로 통하는 이익이 있었고 병란이 나 세상이 어지러운 때에 피해서 살 만한 곳이 있다고 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던 봉화 동쪽에 영양군이 있다.
신라 초에 이곳 영양 일대는 고은현(영양읍)과 청기현(청기면)이 되었다가 경덕왕 때 유린현의 속현이 되었고 고려 초에 영양군으로 개명되어 예주의 속읍이 되었다가 조선 초기에는 영해부에 소속되었다.
경상도지리지에 따르면 당시 영양현이 40호에 1026명이었고 청기현은 29호에 462명이었다.
현종 5년(1664)과 숙종 1년(1675)에 영해부에서 독립해줄 것을 요구하는 상소에 힘입어 1682년에 영양현으로 독립하였지만 석보면은 영해도호부에 속하였다가 1895년 영양군으로 승격하여 안동부에 속하였고 1914년 군면 통폐합 때 행정구역이 조정되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오늘 하루 이 춘양목들과 친구가 되어 힐링도 하고 도심에서 잊고 살았던 어릴적 추억을 꺼내 또 다른 추억을 쌓는 시간이길 바래 본다.
계속 이어지는 춘양목 지대를 따라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또 다른 드넓은 밭 경작지와 과수원이 보이고 그 뒷쪽으로 창고 같은 건물도 한채 보이는데 농막으로 사용될 것 같은 모습이다.
그렇게 잠시 더 편안하게 걸어 내려가니 갑자기 비포장 임도와 만나고 그 임도 한쪽에는 이정목과 나무벤취들 그리고 높은터에 관한 설명판이 서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 온다.
살펴보니 이곳 역시 외씨버선길로서 외씨버선길(옛 보부상길)은 경관이 수려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대표 청정지역인 영월, 봉화, 영양, 청송을 연결하는 총 연장길이 240 Km의 산책로를 말하며 봉화 구간은 52 Km로서 지역주민과 전국의 길벗들에게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다.
4개 군을 연결하는 4색 길이 합쳐지면 조지훈 시인의 승무에 나오는 외씨버선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4개 지역 13개 테마별 길로 연결되어 있다.
우측으로 가면 춘양역으로 가는 비포장임도이고 좌측으로 가면 분천역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방향 표시도 보인다.
그 비포장임도를 따라 좌측으며 몇발자국 걸어가니 임도 옆에 높은터에 대한 설명판이 서 있는데 읽어 보니 높은터(아홉사리고개)는 옛날 현동에서 춘양장을 보러 가는 또 다른 길목이다.
보부상이 주로 다닌 씨라리골 살피재와 함께 씨라리골에서 높은터를 지나 가마골을 거쳐 춘양장으로 향했다고 하는 높은터는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하여 높은터라 불리워졌으며 옛날에는 사람들이 거주하였으나 현재 사람은 살지 않고 농사만 짓고 있다.
높은터를 지나 굽이굽이 고개를 넘어서며 바라보는 춘양의 풍경은 마치 한폭의 산수화를 감상하는 것과 같으며 이곳에서 산길을 타고 내려가면 가마골을 만난다.
지형이 마치 새색시가 가마를 타고 시집가는 형상으로 되어 있다고 가마골이라고 전한하는데 가마골을 거쳐 모래재로 이어진다.
예전에는 한양으로 향하는 중요한 길목이었겠지만 이제는 주위에 도로도 많이 뚫리고 대부분 차량을 이용하기에 이곳처럼 도로가 개설되지 않은 고갯마루는 점차 그 흔적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사라질 위기에 봉착해 있다어 보인다.
외씨버선길(보부상길)과 높은터에 관한 설명과 자료를 읽어 보고 그 비포장임도를 건너 능선으로 접어드니 다시 약간의 잡목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등로 좌측으로 최근에 식재된 듯한 과수원이 보이면서 그곳으로 통하는 등로 옆에는 녹슨 철조망이 보인다.
잠시 후 솔갈비를 덮고 있는 묘지를 지나 진행하니 등로가 좌측으로 빙 돌아 진행되는데 왜 직진으로 진행하지 못하는지 확인해 보니 직진 등로에는 묘지 몇기가 설치되어 잇고 그 묘지 방향으로 접근할 수 없도록 벌목된 나무 더미들로 쌓 놔 진행이 불가능하기에 우회하고 있는 듯 보였다.
잠시 후 나즈막한 안부로 내려가니 멋진 잣나무 군락지가 펼쳐지는데 그곳부터 간벌된 잣나무 가지들이 등로에 제멋대로 나뒹굴고 있어 이리저리 피하며 진행하다 보니 상당히 힘든 오르막 산행이 되었다.
안부를 지나니 간벌된 오르막 등로가 이어지고 등로 좌측으로 잣나무 군락지가 펼쳐져 있지만 화장산으로 이어지는 각화지맥 마루금에는 춘양목들이 자리하고 있다.
조금 더 걸어 오르니 최근에 간벌한 듯한 나뭇가지들이 더미로 쌓여 있고 중간 중간에 잘려진 나무조각들이 흩어져 있어 진행에 어려움을 겪는다.
잠시 후 다시 잣나무 군락지를 만나 오르다 힘들어 잠시 발걸음 멈추고 뒤돌아 보니 나뭇가지 사이 저 멀리 어제 걸었던 각화산과 왕두산 지나 형제봉 줄기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어 사진에 담고 다시 오르막 등로를 타고 굵은 땀방울을 흘려 본다.
한바탕 굵은 땀방울로 세수를 하듯 가파르게 오르니 주능선에 도착을 하고 부드러운 능선 등로를 따라 좌측으로 걸어 오르니 묘지 한기가 보이는 704.8봉에 도착을 하는데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는 물론이고 그 어떤 표식도 보이지 않는다.
무명 묘지가 정상을 지키고 있는 704.8봉을 지나 부드럽게 이어지는 춘양목 등로를 따르니 등로에는 점점 더 잡목들이 사라지며 급경사 오르막 등로로 이어지는데 이곳 등로에도 간벌한 후 잘려진 간벌목들을 정리하지 않아 등로에 널부러져 있어 오르막 등로를 오르면서 애를 먹는다.
힘들게 그 간벌목 지대를 지나 오르니 커다란 춘양목들이 반기는 평이한 능선 등로에 도착을 하고 약간의 잡목들이 보이는 춘양목 등로를 따라 잠시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진행하니 급경사 오르막 등로가 순해지며 화장산이 멀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계속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등로는 직진의 급경사 등로를 피해 좌측 사면 등로로 이어지고 사면 등로를 타고 주능선에 도착을 하니 등로 좌측 앞 나뭇가지 사이로 다시 환상의 운해가 펼쳐져 있지만 조망처가 없어 나뭇가지 사이로만 내려다 보는 아쉬운 시간이다.
이제 좌측으로 운해를 살펴보며 우측 주능선을 타고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금새 춘양306이란 삼등삼각점이 박혀 있고 무명 묘지가 보이는 861.8미터의 화장산 정상에 도착을 한다.
화장산(861.8미터와 860.7미터, 춘양306 삼각점)은 경북 봉화군 소천면 현동리에 있는 해발고도 860.7미터의 산으로 봉화군 소천면, 법전면, 춘양면 등 3개 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험준한 지형 여건과 함께 임진왜란 때 왜군과의 최대 격전지로 이름 나 있는 곳인데 의병장 유종개(1558~1592)가 의병 100여 명과 함께 적장 모리 요시나리(森吉成)의 군대를 만나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한 곳이다.
인근의 목비골은 화장산 서남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유종개 장수가 왜군들의 목을 수없이 베어낸 골짜기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화장산에서의 조망은 전혀 없는데 나뭇가지 사이로 살펴보니 이 산객이 방금 전 걸어 올라 온 북서쪽 방향을 제외한 모든 방향이 아름다운 운해로 뒤덮혀 있는데 시원한 조망은 볼 수 없어 안타까운 정상에서의 시간이었다.
보이는 것이 없기에 정상부의 모습만 사진에 담고 곧바로 화장산을 출발하니 가파른 내리막 등로에 활엽수 낙엽이 발목까지 쌓여 있어 여간 미끄럽지 않기에 조심하며 미끄럼을 타듯 내려 가 본다.
내려가다 보니 등로 좌우측으로는 여전히 운해가 내려다 보이고 잠시 후 무명 묘지가 보이는 곳에서 좌측으로 휘어져 내려가니 이곳은 춘양목과 커다란 참나무들 그리고 그 아래 적당히 자라고 있는 잡목들이 혼재되어 있는 평이한 등로로 바뀌고 있다.
잠시 후 고사목이 쓰러져 있는 838.9 무명봉을 지나 내려가니 진행방향 정면과 좌측으로 아름다운 운해 띠가 펼쳐지는데 좌측을 보니 살피재에서 올라 묘지 위에서 잠시 만났던 소천면 현동리 쪽 운해가 아름답다.
싸라리골과 시동은 경상북도 봉화군 소천면 현동리에 있으며 골이 깊고 숲이 무성하여 전쟁시에는 피난처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여기 저기에 억새가 많아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억새풀에 베어 쓰라림을 맛 봐야 한다는 데서 씨라리골이란 말이 생겨나고 세월이 지나면서 씨라리골로 변혔다.
약간의 조망처라도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을 남기고 계속 이어지는 낙엽으로 미끄러운 내리막 등로를 따라 조심하며 산행을 이어가 본다.
한동안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따라 운해를 감상하며 내려가니 많은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이 한 지점에 걸려 있고 잘 살펴보니 길주의 지점으로 우측으로 나 있는 등로를 버리고 좌측 등로를 따라 내려가야 하는 갈림삼거리였다.
계속 이어지는 춘양목과 잡목들이 혼재되어 있는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등로 우측 아래에서 사람들 목소리와 강아지 울음 소리가 들려 살펴보니 지도 상 화장암이란 절이 나뭇가지 사이로 내려다 보이고 그곳에서 나는 소리들로 보인다.
잠시 후 강아지 한마리가 이 산속까지 올라 와 산객을 보고 달려드는데 그틱으로 한번 겁을 주니 곧바로 꼬리를 내리고 줄행랑을 쳐 버리고 그렇게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잡목들이 우거져 우회하는 지점에 도착을 하는데 그곳에도 역시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이 걸려 있어 확인해 보니 우측으로 화장암 갈림 삼거리 지점이다.
이곳 화장산과 화장암 일대는 임진왜란 당시 봉화군 의병장이었던 유종개 선생이 활약한 곳으로 봉화신문에 게재된 내용이 있어 정리해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보인다.
유종개 선생은 지난 1558년(조선 명종 13)에 경상북도 안동의 예안현(당시 행정구역)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에는 봉화군 상운면 문촌리에서 글을 읽었으며 열심히 학업에 증진하여 조선 선조 12년 21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고 선조 18년인 1585년 식년문과의 병과에 합격해 사간원의 정언이라는 관직에 등용됐다.
이어 전적이라는 자리로 옮겨 일을 하다 지난 1592년(선조 25년) 부모가 별세해 향리인 봉화군 상운면 문촌리에서 상중에 있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선생은 장례가 끝나자마자 봉화에서 의병 600명을 모집해 스스로 창의대장에 추대돼 임홀, 윤흠신, 금의, 김인상 등과 함께 죽기로 왜적과 대항해 싸우기로 결심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군은 소서행장을 중심세력으로 그해 4월 14일 부산에 상륙하여 파죽지세로 북상하면서 20일 밤에 서울을 함락하고 개전 40일 만인 6월 13일에 평양을 함락했다.
이에 선조 임금은 평안북도 의주군으로 피난가고 조정에서는 한음 이덕형을 중국으로 파견해 지원병을 요청하게 되고 명나라에서는 이덕형의 요청에 우리나라를 돕도록 결정하고 이여송이 북진하는 10만 대군의 일본군을 남쪽으로 격퇴하고 있었다.
이듬해인 1593년 연초 일본의 모리 요시나리가 인솔하는 약 3,000명의 왜병이 함경도에서 동쪽으로 밀리다가 강원도 삼척을 경유해 안동방면으로 향하고 있었다.
유종개 선생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남하하는 일군의 길목인 봉화군 소천면 현동리 소재 화장 산 살피재에서 의병을 매복시키고 적을 지켰다.
당시 일군은 본국에서 전투경력이 많은 무사들로 신종 무기라 할 수 있는 조총을 가지고 있는 반면 우리의 의병들은 전투에 전혀 경험이 없이 일시에 봉화군내 곳곳에서 모였고 무기도 변변히 갖추지 못한 장정들이었다.
선생을 포함한 600여 명의 의병들은 적을 섬멸하겠다는 굳센 정신력 하나로 선생의 지시에 따라 화장산 깊은 계곡의 숲 속에 숨어있다 이곳을 지나는 왜적들에게 집중적인 공격을 가해 적들을 섬멸하고 기치도 빼앗은 전과를 거뒀다.
이어 놀라 도망가는 적을 쫓다가 복병을 만나 죽기로 항전하다 선생을 위시한 의병들이 전사하고 말았는데 3,000여 명의 왜병들은 깊은 산골을 안심하고 지나다 갑자기 의병들의 습격을 받은 후 의병들의 강한 저항력을 느끼고 감히 안동 방면으로 진출을 못하고 인원이 적은 영양과 울진방면으로 흩어져 철수했다.
또 전사한 유종개 선생의 시신을 거두지 못해 선생의 외가가 있던 봉화군 상운면 문촌리의 주민들이 그곳의 마장산 자락에 의관장으로 장례를 치렀지만 선생에게는 후손이 없는 관계로 선생의 묘소가 허물어져 가므로 후일 봉화 현감 박태적이 자신의 봉급으로 묘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 후 임진왜란이 평정되고 10여 년이 지난 뒤 조정에서는 서애 유성룡 선생의 추천으로 선생에게 예조참판의 벼슬을 추증하고 선생이 살던 봉화군 상운면 문촌리에 충신각을 세우고 선생의 영혼을 영원토록 위로 하도록 했다.
유 선생과 의사들이 장엄하게 전사한 화장산 주위 30리 안에는 나라에서 영혼을 위로하고 묘소 주변을 보호하기 위해 감관 1명과 산지기 12명을 배치해 왔으며 고종 36년인 지난 1899년까지 이 곳에 성을 쌓고 지켰다.
이 지방의 사림에서는 선생의 넋을 문계사에 모시고 향사해 왔으며 충신각도 현재까지 전해 온다.
봉화군에서는 지난 1983년 선생의 충의정신과 업적을 널리 기리고자 봉화군 소천면 화장산 일대를 정화하고 군민의 정성을 모아 7개의 돌탑과 비석을 북두칠성 모양으로 건립 보존 전승해 오늘에 이르고 있고 그 후 봉화군은 이곳에 정부의 유교문화권 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2006년부터 4년간에 걸쳐 임란의병전적지 공사를 추진했으며 1만4,471㎡의 부지에 국비 17억 9,000만 원, 도비 4억 8,300만원, 군비 11억 7,200만원 등 총 34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사당, 전시관 등 총 7동 259.02㎡의 건물과 석축, 토석담장, 마사토 포장, 의총, 사적비 등 부대시설로 구성돼 있다. 관계 후손과 봉화군에서는 매년 7월 28일(음력) 추모행사를 열고 있다는 내용이다.
그 화장암 갈림삼거리를 지나 계속 이어지는 춘양목과 그 아래 자라고 있는 잡목들이 혼재되어 있는 등로를 따르니 점점 잡목들이 사라지며 환상의 춘양목 등로가 길게 열려 있다.
어제의 피로를 풀듯 무심으로 그 환상적인 춘양목 등로를 따르니 몸도 마음도 정화되면서 새로운 활력을 찾듯 기운이 돋는 기분으로 날아갈 듯 걷는다.
한동안 그저 바라보이는 등로만을 따라 걸어가니 나즈막한 무명안부를 통과하고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노루재터널 직전의 644.3 무명봉에 도착을 하고 여전히 주종을 이루고 있는 춘양목을 친구 삼아 여유를 부려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잠시 후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가 걸려 있는 노루재터널 위를 통과하고 차량들이 빠르게 달리는 굉음을 들으며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무명 묘지 한기를 지나 금새 노루재 2차선 포장도로에 도착을 하는데 이제 바로 옆에 노루재터널이 뚫리면서 옛 노루재 도로는 유령 도로가 되어 버린 듯 차량 통행 하나 없는 곳이 되었다.
노루재는 경상북도 봉화군의 법전면 어지리와 소천면 현동리 사이에 위치한 고개로서 백두대간에서 뻗은 산줄기가 각화산과 왕두산 및 화장산으로 이어져 낙동강까지 이르는데 이 고개는 이 화장산 동남쪽에 있다.
조선지지자료에 장현(獐峴)은 언문으로 노르목이라고 하며 동면의 명호 남쪽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지명은 노루의 목처럼 생긴 지형에서 유래하였으며 고개 아래 있는 녹동(鹿洞)도 이와 관련된 지명이다.
마을 지명은 멀리 18세기 중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즉 현재의 노루골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줄곧 안동부의 춘양현 장현촌(獐峴村)에 속해 있던 마을이다.
그런데 1723년 이제겸(1683~1742)이 마을을 개척하면서 화장동(華獐洞)에 대신해서 주자의 백록동천(白鹿洞天)이라는 문장을 빌어 녹동(鹿洞)으로 개칭하였다고 하는데 이곳에는 지금도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
국도가 개설되기 전에는 마을 전방의 2 Km쯤 되는 암벽에 백록동천(白鹿洞天)이라는 암각이 있었다고 한다.
잠시 머물면서도 차량 한대 구경하지 못하고 고갯마루 건너 반대쪽 비포장 임도가 보이는 곳으로 오르며 산행을 이어간다.
가파른 절개지 좌측 능선을 타고 쓰러진 고사목들을 피해 어렵게 걸어 오르니 정상적인 마루금에 접속을 하고 좌측으로 평이한 등로를 타고 오르니 교통호가 보이고 그 교통호 건너에는 무명 묘지 한기도 올려다 보인다.
그 무명묘지 옆으로 나 있는 등로를 따르니 6.25 유해발굴 현장이라 생각되는 웅덩이들이 자주 눈에 보이고 살펴보니 임진왜란 뿐 만 아니라 6.25 전쟁시에도 많은 사연이 있는 지역처럼 보인다.
잠시 후 또 다른 무명 묘지 한기를 지나 참나무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금새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초소같은 곳이 보이는데 오르면서 만났던 교통호와도 관련이 있는 듯 보이는 건물이 있는 677.2봉에 도착을 한다.
주위 조망이라도 좋으면 한번 올라가 보고 싶었겠지만 보이는 것이 없으니 진행하면서 사진으로 남기고 곧바로 통과하여 완만하게 걸어 내려간다.
잠시 내려가니 등로는 여전히 춘양목들이 차지하는 좋은 등로로 이어져 빠르게 진행되고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풍산유씨 묘지 한기가 보인다.
그 무명묘지를 지나서도 멋진 춘양목들이 계속 친구로 따라오고 한동안 내려가니 비포장 임도같은 안부가 나타나는데 그 안부 우측 가까이에는 넓은 비포장 임도가 지나가고 있다.
우측으로 그 비포장 임도를 보내고 직진의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타고 산행을 이어가 본다.
임도로 가려는 유혹을 뿌리치고 능선으로 치고 오르니 눈 앞에 삼각점이 나타나고 그 삼각점 바로 뒤에는 무명 묘지 한기가 보이는데 지도를 보니 684미터의 삼각점봉인데 이곳 역시 아무 표식도 없이 묘지와 삼각점이 전부이다.
묘지는 오랫동안 관리가 되지 않아 잡풀들과 잡목들이 자랐다 말라 죽은 풍경들이 눈에 들어 오는데 오늘은 유난히도 정상에 모두 묘지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특이한 마루금을 걷는 기분이다.
어제 각화지맥 분기점을 지나자마자부터 관리도 되지 않고 잡목들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묘지들을 바라보며 후손들이 찾지도 않는 묘지를 이 높은 곳에 만들 이유를 찾지 못하기에 앞으로는 장례 문화도 많은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
잡목들이 묘지 위에 자라기 시작하는 684 삼각점봉을 지나니 여전히 등로에는 멋진 춘양목들이 즐비하고 그 춘양목 사이를 타고 흐르는 순하디 순한 바람소리와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이름모를 산새소리를 귓전에 담으며 걸어가니 등로 위에는 또 다시 간벌 후 나뒹굴고 있는 고사목들이 주의를 요하며 발목을 잡기 시작한다.
그래도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춘양목들이 더욱 빛나기에 힐링하듯 걸어가니 등로는 금새 비포장 임도같은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직진 방향의 짧은 비포장 임도 같은 등로를 타고 진행해야 하는 길주의 지점이다.
등로 좌측으로는 가느다란 노끈들이 설치가 되어 있는데 아마도 가을철 송이버섯 채취를 위해 출입금지를 알리는 표식처럼 보여 송이철에는 진행에 상당한 어려움도 예견되는 곳이기도 하다.
직진으로 나 있는 비포장임도를 타고 짧게 걸어가니 등로는 다시 잡목들이 보이는 소로로 변하고 바닥에는 여전히 간벌된 나뭇가지들이 나뒹굴고 있어 진행에 어려움이 크다.
잠시 더 소나무 등로 아래 고사목들이 나뒹굴고 있는 마루금을 따르니 등로 우측 소나무 가지 사이로 약간의 조망들이 터지기 시작하고 그 풍경들을 살펴보며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무명묘지 앞으로 벌목지가 펼쳐지고 그 뒤 저 멀리 아름다운 조망들이 펼쳐져 있어 잠시 발걸음 멈추고 살펴보는 시간도 가져 본다.
그 묘지를 나와 다시 등로를 타고 조금 더 걸어가니 벌목지 경계선이 나타나고 그곳에서 진행 방향을 살펴보고 그 벌목지 경계를 따라 우측으로 크게 꺽어 내려가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좌측 벌목지 등로를 따라 중앙까지 내려가고 우측으로 흐르는 각화지맥을 살펴본 후 그 뒤 저 멀리 마지막 산줄기를 보니 청량산과 그 우측으로 문수지맥 마루금이 환상의 모습으로 펼쳐져 있다.
이제 각화지맥 마지막 합수점 방향을 살펴보니 사진 좌측 중간에 합수점이 보일듯 말듯 다가와 있고 그 뒤로 문수지맥의 풍악산과 만리산 방향이 보이고 그 우측으로 백두대간 마루금이 흐릿하게 보이는데 사진 중앙 앞쪽으로 문수지맥의 갈방산 그리고 그 뒤 저 멀리에는 소백산의 도솔봉이 좌측에 그리고 죽령으로 내려 앉았던 산줄기가 우측의 연화봉과 소백산 비로봉을 일으키며 솟아 있는 그림이 한눈에 들어 온다.
그 갈방산 우측 끝자락에 솟아 있는 산은 여전히 문수산이라 생각되는 산이 올려다보이는데 기대하지 못했던 너무나 황홀한 풍경과 조망에 다시 발걸음이 멈추고 한동안 많은 사진에 남기며 그 이름들을 불러 보는 시간이다.
그렇게 한동안 그 벌목지 상단에서 좌측의 낙동정맥과 청량산 그리고 각화지맥과 문수지맥 지나 저 멀리 하늘금과 맞닿아 있는 소백산 능선이 환상이다.
계절별로 오르며 많은 추억을 남겼지만 마지막으로 올랐던 기회가 벌써 4년이 지나고 있으니 또 그리운 시기가 온 듯 하다.
다만 오늘 이후 걸어 진행해야 할 각화지맥 산줄기는 산세가 낮아지며 그 실제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아 조금은 아쉬움을 남기고 다시 몇걸음 더 걸어 오르니 작은 참나무가 정상에 보이는 661.7 무명봉에 도착을 하고 사진 한장 남기고 그곳에서 우측 벌목지 경계에 쌓여 있는 나뭇가지 사이로 나 있는 등로를 타고 우측으로 크게 꺽어 진행을 이어간다.
작은 관목의 참나무 한그루가 정상을 지키고 있는 661.7 무명봉을 올랐다 다시 몇발자국 뒤돌아 내려 와 이제는 좌측의 벌목지 경계를 타고 내려가다 앞을 보니 청량산 우측의 문수지맥 상 풍악산과 만리산 줄기가 보이고 그 앞쪽으로 오늘 산행을 마무리해야 할 운곡천의 합수점이 있는 낙동강이 보일듯 말듯 마음만 설레이게 만든다.
잠시 우측의 벌목지를 타고 내려가니 생각보다 걷기 불편하여 나무더미를 넘어 좌측 능선으로 들어가니 뚜렷한 마루금이 나타나고 그 등로를 따라 편안하게 진행을 이어가 본다.
벌목지 정상에서 한동안 환상적인 조망과 풍경을 즐기고 그 벌목지 좌측 뒷편으로 나 있는 내리막 등로를 따라 빠르게 걸어 내려가니 등로 우측 뒤 저 멀리 문수산이 여전히 군계일학의 모습으로 우뚝 솟아 있다.
잠시 더 걸어 내려가니 깊게 패인 뚜렷한 등로가 길게 이어지고 그 등로를 타고 빠른 걸음으로 진행하니 무명 묘지 한기를 지나 아름다운 소나무들이 힐링을 시켜 주듯 반겨 준다.
그렇게 무심으로 한동안 걸어 내려가니 갑자기 전봇대가 보이기 시작하고 금새 시멘트 포장도로 위에 도착을 하는데 이제부터는 한동안 이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 진행을 해야 하기에 속도를 내 시간을 단축해 본다.
특별할 것 없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빠르게 걸어 완만하게 내려가니 갈림삼거리가 나타나고 그곳에서는 우측 도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휘어져 내려가는 도로를 따라 산행을 이어간다.
좌측으로 내려가니 도로 우측으로는 전봇대가 계속 따라오고 그 전봇대 사이에는 멋진 조선소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 차 있어 치톤피드가 많이도 뿜어져 나올 것 같은 풍경으로 내려간다.
그렇게 한동안 내려가니 도로 좌측으로 나즈막한 산줄기들이 보이는데 지도를 살펴보니 무명 산줄기처럼 보인다.
그곳을 지나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시멘트 포장도로가 좌측으로 크게 휘어져 내려가는 곳 우측 직진 방향의 능선으로 선답자들의 띠지가 걸여 있어 그 방향으로 들어가며 산행을 이어간다.
능선으로 들어가니 다시 전봇대가 보이고 그 옆에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도 걸려 있다.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약간의 저ㅏㅂ목들이 보이지만 진행에 큰 어려움은 없는 등로이기에 빠른 속보로 진해되고 곧이어 커다란 소나무 한그루가 보이는 495.5 무명봉을 통과한다.
그 무명봉을 지나니 잡목들이 다시 발목을 잡아 끌고 어렵게 진행하니 등로 우측 아래로 움막처럼 생긴 작은 건물이 보이는데 아마도 송이 채취를 위한 움막이 아닐까 생각도 해 본다.
그곳을 지나 계속 잡목들을 헤치며 어렵게 진행하니 잘려진 소나무 밑둥들이 보이는 498 무명봉에 도착을 해 잠시 숨고르기를 한 후 다시 출발한다.
그 무명봉을 지나니 등로 좌측으로 제법 멋진 산이 하나 보이기 시작하고 잠시 발거걸음 멈춰 지도를 확인하니 제비산이라 생각되는 봉우리인데 아무리 찾아 봐도 이곳 봉화군에 있는 제비산에 대한 자료를 찾을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다음에 기회되면 꼭 한번 저 제비산과 죽미산 지나 황악산까지 종주 산행으로 올라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 보면서 진행하니 고도가 점점 낮아지며 묘지 한기가 나타나는데 앞에 서 있는 비석을 보니 충의위 완산이공 묘지인데 지금까지 충의위 묘지는 처음인 듯 싶다.
자료를 찾아 보니 역시나 충의위는 조선시대 중앙군으로서 오위의 충좌위에 소속되었던 양반 특수 병종으로 1418년(세종 즉위년) 개국과 정사 ·및 좌명의 3공신 자손들이 주로 소속되도록 만들어진 특수층에 대한 일종의 우대 기관이었다.
나중에는 공신 자손의 적자나 적손만이 아니라 중자나 중손도 들 수 있게 되었다가 시간이 경과하면서 뒤에 범위가 더욱 넓어져 공신 자손으로 적자손이 없을 경우에는 첩자손이라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게 하였다.
충의위는 위의 공신 자손들이 18세가 되면 아무 시취의 관문도 거치지 않고 입속되어 군사적 실력과는 거의 관련 없이 입직근무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자원하면 60세까지는 계속 입번하면서 왕의 측근을 호위할 수 있었으나 실제로는 일정 기간 복무한 다음 다른 관직으로 거관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따라서 명목은 근위이나 무예의 실력이 없어서 도리어 실제 수가 등에는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였고 왕이 수렵할 때에는 몰이꾼 노릇을 하는 데 불과하고 왕도 친히 산 위에 올라가는데 충의위는 산기슭에 머물러 있을 정도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충의위의 정액은 규정되어 있지 않고 장번복무를 하는데 이들을 위해 종4품 이하의 체아직 53과가 마련되어 있었고 거관은 종4품으로 되어 있으나 계속 복무하고자 하는 자는 정3품에서 그치도록 되어 있고 보는 없었다.
이들은 군대 복무를 한다기보다는 관료 체제 안에서 관리로서의 진출을 위한 이전 단계에 머물러 있는 셈이었고 공신 자손이라는 특권 때문에 군역에 복무하는 것이 사실상 관료로의 진출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결국 문제는 관직이나 경제적 강자들이 자기만을 위한 제도에 더 집중하는세태가 아닐까 생각을 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충의위 완산이공 묘지를 지나 내려가니 절개지 상단부에 도착을 하고 그곳으로 내려갈 수 없으니 우측 수로를 타고 내려가 금새 좌측의 소천면 임기리와 우측의 법전면 눌산리를 이어주는 31번 갈산로 2차선 포장도로에 도착을 한다.
혹시 이름이라도 있을까 궁금해 지도를 살펴보지만 이름도 없는 무명 고개로서 차량 통행도 별로 없는 듯 잠시 머무는 동안 지나가는 차량 한대 만나지 못하였다.
그 도로를 건너 좌측으로 보이는 철조망이 끝나는 우측 가장자리로 오르며 산행을 이어간다.
능선으로 오르니 가파른 오르막 낙엽 등로가 이어지고 미끄러지며 어렵게 진행하니 커다란 소나무 두그루와 잡목들이 보이는 485.3 무명봉에 도착을 하고 그곳을 지나 평이한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등로 옆 나뭇가지에 입산금지라는 녹슨 이정판이 보이는 곳에서 잠시 자리펴고 준비한 빵과 과일로 허기를 달래고 시원한 물로 갈증까지 면하고 나니 다시 체력적으로 힘이 난다.
등로 옆 낙엽송 잎들이 노랑색으로 변하며 아름다운 풍경들을 선사하고 그 모습을 사진에 담고 다시 천천히 출발하니 등로는 다시 환상적인 춘양목으로 바뀌고 있다.
잡목이 사라지고 환상적인 춘양목이 가득한 능선 등로를 따라 치톤피드를 가득 폐부속으로 들이 마시며 천천히 걸어 전진하니 등로 역시 솔갈비가 푹신하게 깔려 있어 마치 양탄자를 걸어가는 느낌으로 편안하게 걸어 본다.
잠시 후 소나무들로 둘러 쌓인 작은 잡목들이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483.3 잡목봉에 도착을 해 잠시 숨고르기를 한 후 내려가니 이곳 역시 솔갈비가 멋지게 깔려 있는 무명안부를 통과하고 잠시 평이한 등로를 타고 여유럽게 걸어가니 철도터널이 보이는 임기터널 위를 통과한다.
그곳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커다란 소나무에 입산금지 경고판이 붙어 있는 안부를 지나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아름다운 소나무 사이로 나 있는 등로를 따른다.
아마도 이곳 역시 가을철 송이버섯이 나는 지역으로 송이 채취 기간에는 산 주인과 마찰도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등로이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솔갈비가 깔려 있는 오르막 등로를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오래 전 설치되어 이제는 그 기능을 상실해 보이는 녹슨 철조망이 보이기 시작하고 조심하며 진행하니 등로는 완전한 소나무 등로로 가득하다.
어느 소나무는 춘양목처럼 보이고 또 어떤 소나무를 보면 조선소나무처럼 보이는 등로를 따라 천천히 힐링하듯 걸어가니 등로는 주능선이 아닌 우측 사면 등로로 이어지고 무심으로 그 편안한 등로를 따르니 생각지도 못한 무명 묘지 한기도 다시 통과한다.
그 묘지를 지나 오르니 관목처럼 굵지 않은 소나무들이 빼곡하게 등로를 채우는 곳을 지나 능선 상 봉우리인 512.5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출발한다.
소나무가 빼곡한 능선 상 봉우리인 512.5봉을 지나니 등로는 더욱 아름다운 소나무 등로가 길게 이어지고 빼곡하게 들어 찬 소나무 사이로 곧게 뻗어 있는 마루금이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되는 기분으로 걸어 본다.
그렇게 한동안 그 멋진 소나무 등로를 타고 무심으로 힐링하듯 걸어가니 갑자기 눈 앞이 터지며 묘지와 밭 경작지들이 나타나고 등로 좌측으로는 나즈막한 능선이 또 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다.
처음에는 저 소나무 능선으로 등로가 이어지는 줄 알았는데 실제 진행하다 보니 그 능선 입구에서 우측 시멘트 도로를 타고 방고개로 이어지고 있다.
능선에서 내려가니 무명묘지가 나타나고 그 묘지를 지나 밭 가장자리를 타고 진행하니 등로 좌측으로 계속 보이던 봉우리 하나가 조금 더 선명하게 보이는데 자세히 보니 제비산이 확실한 듯 한데 그 뒤 우측으로 보이는 칼날 능선은 청량산처럼 보여 헷갈리게 만들고 있다.
청량산은 우측 뒤로 있어야 하고 저곳은 장군봉이나 일월산이어야 하는데 일월산 능선은 아니니 장군봉 능선이 맞을 듯 싶다.
잠시 더 주위 풍경들을 살펴보며 밭 가장자리를 타고 걸어 내려가니 들깨를 수확한 밭에 황량하기만 하다.
계속 이어지는 밭 경작지 가장자리를 따라 완만하게 내려가니 등로 좌측 밭 가장자리에는 동물들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한 그물망이 쳐져 있고 그 그물망 옆 등로를 따르니 금새 시멘트 포장도로 위에 도착을 하는데 직진 방향의 능선이 아닌 우측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눌산리 방고개 방향으로 진행을 해야 한다.
이곳으로 내려 오기 전 생각했던 직진의 능선이 아닌 우측으로 돌아 도로를 타고 눌산2리 방현동 마을의 방고개 방향이 정상 등로 방향이다.
느티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 방고개를 지나 능선 앞에 보이는 스테인레스 물탱크 옆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을 살펴보고 천천히 도로를 따르니 도로 우측 아래 콩 밭에서는 연세 드신 노부부가 이제서 콩 수확을 하면서 힘겨워 하시기에 인사 드리니 나이 들어 농촌생활의 어려움을 토로 하신다.
이제 고인이 되신 부모님이 생각 나 잠시 더 머물며 이야기를 나누고 건강하시라는 인사를 드린 후 계속 도로를 타고 빠르게 걸어가니 도로 좌측으로는 눌산리 민가들이 보이고 우측 아래로는 전원주택처럼 잘 지어진 민가 한채가 눈길을 잡는다.
진행 방향으로는 지금부터 걸어가야 할 마루금이 길게 이어져 있는 모습도 가깝게 다가오고 그렇게 잠시 더 걸어가니 파란 그물망을 지나 사각정자와 느티나무 그리고 커다란 이정석이 서 있는 갈림사거리인 눌산2리 방형동 방고개에 도착을 한다.
방고개(방현, 봉화군 법전면 눌산리)는 경북 봉화군 법전면 눌산리에 있는 자연마을로서 부곡시대에 방고개촌이였으며 남양홍씨가 살았던 마을이다.
고려시대 방고개촌이 있었으나 1782년 경주최씨 전성기에 최진사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고개마루에서 백일장을 개최하였으며, 여기에 뽑힌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고 돌아올 때 알리는 소리가 고개마루까지 들렸다하여 芳峴(방현)이라 한다.
방고개를 지나 도로를 따라 잠시 걸어 오르다 등로 우측을 보니 수확이 끝난 들판 옆으로 민가 한채와 농기계가 내려다 보이고 그 좌측 아래로는 그림같은 민가 한채가 또 보이는데 그 넘어 저 멀리에는 어제부터 걸었던 각회지맥의 각화산과 왕두산 그리고 형제봉 지나 우측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이 선명하다.
저런 민가에서 한번쯤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곳 눌산리에 대한 자료를 찾아 보니 눌산리는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에 있는 리로서 눌미에서 남동쪽으로 산을 넘어 4 km 정도 떨어진 낙동강 상류 강변에 있다.
자연마을로는 눌산, 새터(신기), 갈골, 정삼, 멀곡 등이 있는데 정삼은 옛날에 정수암(靜水庵)이라는 암자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눌산은 감보개 사람에게 지배를 당하고 눌렸다 하여 이름 붙여졌으며 머루와 딸기 등이 유명하다.
가을이 무르익고 조만간 찬바람이 불어 오는 겨울이 찾아 오면 또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등로 우측의 지나 온 각화지맥 마루금을 살펴보고 시멘트 포장도로가 갈리는 갈림삼거리에서 좌측 도로를 타고 조금 더 걸어 오르니 우측 위로 밭 경작지가 보이고 그 끝자락에 커다란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물통이 볼=이는 곳으로 오르며 등로 좌측을 보니 눌산2리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그 뒤 저 멀리 좌측으로 정상에 인공 구조물을 이고 있는 일월산이 보이고 그 우측으로 흐르는 일월지맥이 잠시 보이다가 앞쪽의 덕산지맥에게 공간을 내주고 그 뒤로 숨어 버린다.
생각지도 못한 멋진 조망에 바쁜 발걸음이 자꾸만 속도를 잃고 사진에 담는 풍경만 늘어나고 있다.
그렇게 한동안 주위 풍경과 조망을 즐긴 후 밭 경작지 위로 올라 능선으로 들어가니 간벌되어 잘 정리된 소나무 등로가 열리는데 그 간벌된 나무들을 정리하지 않아 잡목 등로보다도 더 힘들게 걸어 오르는 시간이다.
오르다 잘려진 간벌목의 뾰족한 부분에 이리 찔리고 저리 맞으며 너무나 힘들게 오르니 간벌목들이 조금씩 줄어들며 진행에 속도를 붙이는데 제멋대로 자라는 듯 보이면서도 질서를 가진 소나무 등로에 다시 눈과 마음을 빼앗기는 시간이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간벌목들이 널부러져 있고 잘려진 소나무 밑둥 하나가 보이는 574.1봉에 도착을 해 시원한 물 한모금으로 갈증을 풀고 다시 출발한다.
그 소나무봉을 지나 넘어가니 또 다시 간벌목들이 등로에 나뒹굴고 그 벌목가지들을 피해 어렵게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과수원과 밭 경작지 그리고 민가 한채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견공들의 격한 환영을 받으며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좌측 민가 쪽으로 내려갈 수 있는 갈림사거리 안부에 도착을 하고 그곳부터는 한동안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가 열리는데 등로 좌측의 민가 방향으로는 높은 그물망이 쳐져 있어 진입 자체를 금지하고 있다.
다시 이어지는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타고 좌측의 민가를 내려다 보며 걸어 오르니 다시 소나무와 낙엽송들이 혼재되어 있는 등로가 나타나고 잠시 후 등로 좌측으로 방금 전 내려다 봤던 민가와 그 민가 아래로 펼쳐진 밭 경작지 그리고 그 뒤 저 멀리에는 오늘 산행 내내 보였던 제비산 지나 이제 그 뒤로 낙동정맥의 칠보산 자락이 보이기 시작한다.
오래 전 저 칠보산을 지나며 조금은 아쉬운 추억을 남겼던 곳인데 이렇게 이곳에서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잠시 더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를 따르니 그 정상부에서 그물망과 임도같은 등로는 끝이 나고 마루금은 다시 낙엽이 푹신하게 깔려 있는 능선 방향으로 이어진다.
능선으로 오르니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가 걸려 있는 579.8 무명봉에 도착을 하고 그 봉우리를 지나 멋지게 열려 있는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잠시 후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와 다시 만난다.
그 임도를 따라 조금 더 걸어가니 직진 방향으로 송전탑이 올려다 보이는데 이 임도 역시 송전탑을 세울 땐 만든 임도처럼 보인다.
그 송전탑 밑으로 오르니 110번이란 번호가 보이고 사진에 담은 후 빼곡하게 자라고 있는 키작은 소나무를 헤치고 송전탑 뒤로 오르니 묘지가 보이고 삼각점이 박혀 있는 608.4미터의 월암산 정상에 도착을 한다.
월암산(607.7m)은 경상북도 봉화군의 석포면 대현리에 위치한 산으로 해발고도는 608미터이며 태백산의 문수봉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에 있다.
이 산은 문수봉에서 바라보면 바다 위의 고립된 독도처럼 산 속에 솟아 있는 고립 봉우리이고 향토지에 조선시대에 백성들이 태백산에 입산한 단종의 영혼을 천도하고 국태민안을 기원하기 위해 태백산 망경대에서 제를 올리던 중 음력 8월 동쪽의 푸른 산 위에 기묘한 암석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어 달바위봉이라고 명하였다 라는 기사가 있다.
지명이 바위의 생김새에서 유래하였음을 엿볼 수 있고 조선지형도에는 월암봉(月巖峰)이라 적혀 있으며 일본어로 달바오라고 발음이 병기되어 있다.
관련 지명으로 배지미 남쪽의 달바우골과 월암마을이 있다.
제대로 된 대우도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조금은 미안하기도 하고 아쉬움도 남긴 채 다시 그 월암산을 출발한다.
월암산 정상을 지나 완만하게 내려가는 등로를 따르니 등로 좌우측으로 커다란 춘양목들이 보이는데 대부분의 춘양목들은 어릴적 송진 채취를 위해 상처가 난 흔적들이 깊게 패여 있는 모습들이 보인다.
가슴 아픈 역사를 생각하며 표현을 못하는 이 나무들도 장구한 세월 이렇게 고통속에 살아가고 있는데 표현이 가능한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올지 가늠조차 하기 힘든 세월이었을 것이다.
잠시 후 우측으로 무명봉이 올려다 보이지만 좌측 사면 등로가 발달되어 있어 사면등로를 타고 빠르게 잣나무 군락지를 통과하니 등로 좌측으로 이제부터 걸어 진행을 해야 할 각화지맥 산줄기와 그 넘어 청량산 능선이 아름답게 퍌쳐져 있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몇장의 사진에 남겨 본다.
등로 좌측을 조망하며 빠르게 진행하니 등로에는 다시 춘양목들이 보이고 송전탑을 지나니 조금 더 적송에 가까운 춘양목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쭉쭉빵빵 뻗어 있는 모습이 환상적이다.
잠시 더 아름다운 춘양목들을 구경하며 사진에 담고 진행을 이어가니 완만하게 올라 고사목들과 작은 콘크리트 말뚝이 보이고 한쪽에는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이 걸려 있는 613.8 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그 무명봉을 지나니 능선 등로는 여전히 멋진 춘양목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데 그 아래 등로에는 빛바랜 잡풀들과 억새들이 색다른 풍경으로 다가온다.
큰 고도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춘양목이 빼곡한 평이한 등로를 따르니 등로는 다시 완만하게 오르고 그 정상에는 커다란 춘양목 두그루와 잡목들이 산객의 발목을 잡는다.
이곳에서 등로는 우측으로 크게 휘어져 진행되고 잠시 뒤 노란 띠지가 춘양목에 감겨 있는 무명봉을 지나 커다란 소나무 한그루가 눈길을 잡는 572.6 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그 무명봉을 지나 내려가니 강릉김씨 묘지를 통과하고 완만하게 내려가니 무명안부도 보인다.
안부를 지나니 등로 우측 나뭇가지 사이로 밭 경작지들이 보이더니 잠시 후 진행 방향으로도 희미한 도로가 내려다 보이는데 직감적으로 절개지임이 느껴져 좌측 사면 등로를 타고 어렵게 내려가니 1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눌산길 1차선 포장도로가 있는 문고개(1차선 포장도로)에 도착을 한다.
마너무(매산)은 1796년 진(陳)이라는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마을산이 말등같이 생겼다하여 마너무라하고 입구 좌측에 당이 위치한다.
옛날에는 명호 삼동 사람들이 소천 현동을 가자면 3고개를 지나야 하는데 첫번째 고개가 장고개고 두번째 고개가 마너무 왼쪽의 문고개가 있고 세번째 고개가 마너무 오른쪽의 수리고개를 넘나들었다.
문고개 1차선 포장도로를 건너 좌측으로 가니 빞 ㅗ장 임도가 보이고 그 바로 뒤에는 콘테이너 박스가 서 있는데 사람이 살지는 않고 농사철 농기구 보관을 위해 사용되는 창고처럼 보인다.
비포장 임도로 들어가자 마자 등로는 다시 우측 능선으로 오르는데 오르기 전 콘테이너 박스 앞에 배낭 내리고 잠시 휴식 취하며 물 한모금 마시고 말라있는 고추밭 넘어 저 멀리 살펴보니 오늘 아침에 넘었던 화장산이라 생각되는 산과 산줄기가 보이기 시작해 지도를 꺼내 확인하고 다시 출발한다.
우측 능선으로 곧바로 올랐으면 좋았는데 좌측 사면 등로로 걸어가니 우측 주능선 방향이 아닌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 같아 우측 잡목을 헤치며 오르니 다시 정상 마루금에 도착을 한다.
잠시 후 무명봉을 지나 춘양목과 잡목이 혼재되어 있는 등로를 타고 조금은 빠르게 걸어가니 가지가 세개나 있는 참나무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562.1봉에 도착을 해 잠시 사진 한장 남기고 출발한다.
참나무가 보이는 562.1봉을 지나 완만하게 이어지는 춘양목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이곳 역시 간벌된 나뭇가지들이 등로에 제멋대로 나뒹굴고 있어 진행에 어려움을 겪는데 등로 좌측 아래에서 강아지들이 이방인의 출현에 울부짓기 시작한다.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갑자기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이 많이 보이는 곳에 도착을 해 살펴보니 직진의 발달된 등로를 버리고 좌측의 잡목들이 우거진 등로를 따라 진행해야 할 길주의 지점이다.
그곳을 지나 조심스럽게 내려가니 무명묘지들을 만나 통과하고 곧이어 등로 좌측 앞으로 민가 한채가 내려다 보이고 그 앞마당에는 집주인 아주머니라 생각되는 분이 일을 하고 있어 아주 조심스럽게 내려가 1차선 시멘트 포장도로를 건너 민가 뒷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으로 오르며 산행을 이어간다.
시멘트 포장도로 우측으로는 사과과수원들이 보이는 1차선 시멘트 포장도로를 건너 능선으로 오르니 여전히 강아지들이 울부짓는데 집 주인은 이 산객을 보지 못하고 강아지들만 책망하고 있어 괜시리 미안하기만 하다.
능선으로 오르니 이곳 역시 춘양목 등로가 펼쳐지는데 그 춘양목 아래에는 잡목들도 보이기 시작한다.
잠시 평이한 등로를 따르니 갑자기 등로 옆 커다란 소나무에 많은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가 걸려있고 살펴보니 등로 우측 아래로 비포장 임도가 따라오며 이제부터 등로는 좌측으로 한바퀴 돌아 진행되는 특이한 지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잠시 후 무명안부를 지나 큰 고도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걸어가고 조금 더 진행하니 우측으로 벌목 능선을 가지고 있는 멋진 봉우리가 보이고 궁금해 지도를 살펴보니 역시나 생각했던 오늘 아침에 넘었던 화장산과 각화지맥 마루금이 펼쳐진 풍경이었다.
사진 몇장 남기고 조금 더 걸어 오르니 커다란 소나무 사이로 잡목들이 우거진 등로가 나타나고 이곳부터 등로는 좌측으로 원형을 그리며 진행되는데 등로 좌측을 내려다 보니 돌리네처럼 깊게 패인 골짜기이기에 어쩔 수 없이 원형을 그리며 진행하게 되는 등로였다.
선답자의 산행 띠지를 확인하고 좌측으로 크게 휘어지는 잡목 등로를 따라 진행하니 등로 좌측 나뭇가지 사이로 소천리마을과 운곡천이 내려다 보이고 그 뒤 저 멀리 어젯밤 하루 묵었던 춘양마을과 그 뒤로 문수지맥의 갈방산과 문수산이 아름다운 풍경으로 다가온다.
오래 전 저 문수지맥을 걸으면서 이곳을 바라 보면서도 이 산줄기가 각화지맥이란 사실을 관심없이 진행을 하였었는데 그 이후 신산경표상의 162지맥 산행을 완주한다는 목표가 생기니 산줄기 하나를 올라도 사전에 주위 산줄기를 확인하는 습관이 들어 조금은 더 자세한 이름을 불러 줈줄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 본다.
계속 이어지는 멋진 춘양목 등로를 따르니 같은 춘양목인데도 이곳의 껍질은 조금 더 거북등 모양으로 자라고 있어 사진 몇장 더 담아 본다.
아름드리 춘양목 등로를 타고 조금은 빠르게 걸어 내려가니 잠시 나무들이 사라진 무명 안부를 통과하고 가파르게 오르니 한동안 보이지 않던 출입금지 경고판이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살펴보니 이곳 역시 송이버섯과 관련된 경고판처럼 보인다.
잠시 더 걸어 오르니 갑자기 잡목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무명묘지가 자리한 524.2 무명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좌측으로 크게 휘어져 진행되는 등로를 찾아 어렵게 진행을 이어간다.
솔갈비가 푹신한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등로에 잡목들이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무명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둔덕을 넘어 다시 내려간다.
잠시 후 좁은 공터로 보이는 503.9 무명공터봉에 도착을 하고 사진 한장 남기고 완만하게 내려가니 이곳도 역시 멧돼지들이 많은지 몸을 문질러 죽어가는 소나무 두그루가 눈길을 잡는다.
그 멧돼지 체력단련장을 지나 뚜렷하게 나 있는 등로를 따르니 아래에서 강력한 기계음 소음들이 들리기 시작하고 곧이어 무안박공 묘지를 만나는데 그 묘지 앞에서 우측으로 이제부터 타고 걸어가야 할 개노리재 버스 정류장이 있는 청량로 35번 2차선 포장도로가 내려다 보이는데 그 도로에서 무슨 공사를 하는지 계속 기계 소음이 강력하게 들려 온다.
그 묘지 앞마당에서 잠시 배낭 내려 간식을 먹으며 허기를 달래고 충분한 휴식 시간을 가진 다음 진행을 이어가기로 한다.
10여분 간식을 먹고 휴식을 취한다음 묘지를 출발해 내려가니 금새 개노리재 버스 정류장에 도착을 하고 이제부터 그 앞으로 보이는 35번 청량로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황새마을까지 이동을 한다.
다만 이곳 개노리재에 대한 자료를 찾아 보지만 그 어디에서도 자료를 찾지 못하였고 마을 이름도 없어 아쉽기만 하다.
개노리재 버스 정류장에는 진행 방향으로 삼동 표시가 되어 있고 우측 내리막 도로 방향으로는 옥천터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삼동으로 가는 청량로 35번 2차선 포장도로 좌측 옆으로는 낙동강트레킹 아람옛길이라는 입간판이 눈길을 끌고 눌산길이란 도로 입간판도 눈에 들어 온다.
진행 방향 도로 우측 아래 옥천터 방향으로는 도로 공사를 하는 차량들이 정차되어 있어 가까운 곳에서 도로 공사가 진행중이기에 기계 소음이 들렸던 것 같다.
이제 본격적으로 35번 청량로를 타고 삼동 방향으로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고갯마루 가기 전 이곳에서 새로운 도로 공사 현장이 나타나고 그곳에서 사용되는 설비들이 내뿜는 기계음이 들리기 시작한다.
우측으로 새롭게 나 있는 도로를 따라 공사 현장을 통과하니 도로 우측 저 멀리 아름다운 풍경들이 펼쳐져 사진에 담고 살펴보니 소천리 옥천교차로 지나 저 멀리 어제부터 걸었던 각화지맥의 각화산부터 왕두산과 형제봉 등 거의 전 구간이 펼쳐 보이고 그 좌측으로 백두대간 상 구룡산과 문수지맥의 주산인 문수산이 보이는데 우측 각화산 뒤로 보여야 할 태백산은 앞의 능선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계속 이어지는 35번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드디어 공사 현장을 지나 뒤돌아 보게되고 방금 전 내려 온 좌측으로 이어지는 각화지맥 마루금 보이는데 우측 뒤로 있어야 할 월암산은 능선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저 굴착기에서 내뿜는 매연과 기계 소음이 귓전을 때리고 산행을 하면서 들렸던 기계음도 바로 저 굴착기로부터 들었던 소음이 아닐까 생각을 해 본다.
별 특징이 없는 2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오르니 생각보다 차량들의 통행이 거의 없어 진행에는 큰 어려움 없이 걸어 오른다.
잠시 후 고갯마루 방향으로 올라가니 도로 우측으로 시멘트 포장도로 1차선이 갈리고 그 앞에는 생활의학센터인 마라뉴스타트란 입간판이 서 있는데 혹시 요양원인지모르겠다.
계속 이어지는 도로를 따르니 지도에 개놀재라는 지명도 보이지만 그 어느곳에서도 이 지명에 관한 자료를 찾지 못해 통과하고 드디어 도로 좌측으로 법화사와 명호면이란 도로 입간판을 만나면서 오늘 산행 날머리도 명호면이기에 그리 멀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도로 좌측으로 월암산과 그 주변으로 이 산객이 걸어 통과한 각화지맥 마루금이 가깝게 보이고 그 뒤 저 멀리 아직 미답자로 남아 있는 죽미산과 제비산 줄기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도로를 타고 걸어가지만 도로 좌우측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조망과 풍경들을 살펴보며 진행하니 드디어 고갯마루 정상부에 도착을 하는데 도로 우측으로 사과농장을 하고 있는 민가가 보이고 그곳 앞에는 사과즙을 판매한다는 플랭카드도 보인다.
작은 원두막 같은 쉼터를 지나 평이하게 이어지는 도로를 따르니 이곳 역시 도로 공사가 진행되려는지 붉은 플라스틱 통들이 도롯가에 세워져 있다.
그 민가를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다 도로 좌측을 보니 방금 전 봤던 풍경과는 달라진 또 다른 조망이 펼쳐져 있어 자세히 살펴보니 이제 좌측 끝자락으로 제비산이 보이고 우측 능선을 타고 덕산지맥 산줄기가 가깝게 다가와 있다.
생각보다 긴 덕산지맥 산줄기이고 또한 대중교통이 쉽지 않아 오래전부터 계획하고 있었지만 실행을 하지 못하였는데 올 겨울이 지나면 실행에 옮겨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래야 그곳에서 분기한 다른 2개의 지맥 산ㄹ행도 가능하니 말이다.'
다시 주위 풍경들을 둘러보고 고갯마루를 넘어 걸어가니 도로 우측으로는 말라있는 고추대가 보이는 밭이 나타나고 곧이어 도로 우측 에 좌측 방향으로 삼동2리 표기가 되어 있는 도로 표지판이 보이고 도로 좌측에는 삼동2리 마을 표지석과 표고 446.3미터의 수준점 그리고 착골이라는 버스 정류장이 보인다.
착골마을을 찾아 보니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삼동리에 있는 자연마을 중 한 곳으로 약 400여년 전 강릉김씨가 개척하여 마을 형국이 귀주머니같이 생겼다하여 패골로 부르다가 마을 지명으로 패(佩)자가 좋지 않고 부르는 데도 거부감이 있다 하여 지금은 착골로 부르고 있다.
여러가지 이유로 옛 마을 이름이 바뀌고 있지만 아무리 보고 들어 봐도 정감있는 옛 마을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착골 버스 정류장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다 도로 좌측을 보니 삼동마을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어 잠시 살펴보고 사진에 담은 후 진행을 이어간다.
삼동리는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에 있는 리로서 자연마을로는 골말, 환동, 가래골, 갓뒤 등이 있는데 삼동이란 환동, 학동, 추동을 합하여 일컫는 지명이다. 골말은 마을의 형태가 문고리 모양처럼 동그랗게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환동은 마을 모양이 떡고리처럼 둥글게 생겼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가래골은 추동이라고도 불리며 옛날에 가래나무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고추와 벼 등을 주산물로 하는 마을이다.
그 삼동리 마을 뒷편으로는 오늘 넘어 온 각화지맥의 월암산이 능선 같은 모습으로 펼쳐지며 아쉬운 이별 노래도 불러 준다.
그렇게 주위 풍경을 감상하며 걸어가니 도로 우측으로 쉼터 산마루라는 입간판이 보이고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도로가 좌측으로 휘어져 내려가는 우측으로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 있는 능선 분기점에 도착을 하는데 도로 좌측 건너에는 삼동리 황새마을이 내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황새마을(상학동, 폐교된 삼동초교입구)은 경북 봉화군 명호면 삼동리에 있는 마을로서 한양조씨가 살았다,
마을 뒷산의 형상이 암수의 학과 같이 생겼다 하여 황새마을 또는 학동으로 부르고 아래황새마을에는 풍산유씨 제실이 있고 퇴계학통을 이은 서애 유성룡공의 손자인 졸제공 유원지의 묘가 있다.
황새마을을 좌측에 두고 우측의 농업회사법인(주)정다움이라는 입간판이 있는 곳 우측으로 올려다 보이는 커다란 느티나무와 묘지들이 있는 곳으로 오르며 산행을 이어간다.
이제 35번 청량로 2차선 포장도로와 헤어져 느티나무와 묘지가 있는 황새마을 건너편 능선으로 오르니 등로는 뚜렷하게 나 있지만 잡목들이 자라면서 진행에 방해를 주고 그렇게 조금 더 걸어 오르니 주능선으로는 잡목들로 인해 진행이 불가능하기에 좌측 옆으로 보이는 묵은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를 따르지만 그곳 역시 잡풀들이 우거졌다 말라 있어 진행이 쉽지 않은데 더군다나 잠시 후 등로는 우측 주능선 방향으로 올라야 하니 초반부터 쉽지 않은 산행이다.
그래도 한들거리는 억새꽃들을 살피며 조금 더 걸어 오르다 등로 좌측을 보니 삼동리 마을 뒤로 제비산과 덕산지맥 마루금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어 잠시 위안을 삼으며 사진에 담고 지독한 잡목들의 환영을 받으며 주능선으로 오른다.
주능선으로 오르니 이곳 역시 뚜렷한 등로는 보이지만 지독하게 자라고 있는 잡목들이 등로까지 점령하여 진행이 편치 않다.
이리저리 생채기를 만들며 어렵게 걸어 오르니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정상부 커다란 소나무 위에는 독도님이 걸어 놓은 502.1봉 표시가 되어 있는 종이코팅지도 보인다.
얼마 전 162 전지맥까지 완주했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만나 뵙지는 못하였지만 축하 인사 드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어렵게 그 502.1봉을 찍고 좌측으로 90도 이상 꺽어 희미한 등로를 찾아 힘들게 내려가니 솔갈비로 덮혀 따뜻함을 주는 무명 묘지를 지나 또 다른 묘지들을 만나는데 그 묘지 위에서 등로 좌측 앞 을 살펴보니 삼동리 마을과 그 뒤 저 멀리 제비산과 덕산지맥 산줄기가 여전히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길게 펼쳐져 있다.
내려가다 묘지 주인을 보니 안동권공으로 예전에 상당한 세도 가문이었음을 알기에 다시 한번 더 살펴보고 키 작은 솔밭 등로를 타고 내려가 고갯마루에 도착을 하는데 이 고갯마루는 1차선 좁은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고 추동길이라는 삼동리에 있는 도로이다.
그 추동길 1차선 시멘트 포장도로를 건너 보이는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오르니 임도는 금새 끝이 나고 둔덕을 넘어가니 등로 좌측 위에 돌로 아래부분을 쌓아 만든 처음 보는 묘지가 보이고 그 묘지를 지나 잠시 더 평이하게 진행하니 갑자기 지독한 잡목 등로가 펼쳐지며 오르막 등로로 이어진다.
이리 치이고 저리 찔리며 힘들게 오르니 커다란 소나무 군락지가 펼쳐지고 그 정상부에는 여영님의 띠지가 걸려있는 523.3 무명봉이 보인다.
그곳을 지나니 커다란 소나무 아래 다시 지독한 잡목들이 혼재되어 있는 등로가 시작되고 참으로 힘든 산행을 어렵게 이어가는 시간의 연속이다.
그래도 뚜렷하게 나 있는 등로를 타고 급하지 않게 진행하니 주등로 좌측으로 묘지지대가 나타나고 잠시 그 묘지지대로 내려가 진행하니 등로 좌측으로 삼동리 마을과 덕산지맥 마루금이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길게 펼쳐져 있어 위안을 삼아 본다.
그 좌측으로 숨어 있는 월암산을 찾아 보지만 바로 좌측 앞으로 솟아 있는 무명봉에 가려 보이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
안동권공 묘지지대 끝자락에서 우측으로 보이는 잡목들을 헤치며 다시 주능선으로 복귀를 하고 조금 더 걸어 진행을 하니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이 걸려 있는 516.5 삼각점봉에 도착을 하고 삼각점을 덮고 있는 낙엽들을 치우니 춘양431이라는 4등 삼각점이 박혀 있다.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빵으로 허기를 달래고 과일로 후식까지 챙겨 먹은 후 지도를 확인하니 합수점이 그리 멀지 않았기에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진행을 하기로 하지만 명호면에서 춘양으로 가는 버스 시간 때문에 마음만 급한 순간이기도 하였다.
삼각점봉을 지나니 잡목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등로에는 푹신한 솔갈비가 마치 양탄자를 깔아 놓은 듯 펼쳐진다.
잠시 편안한 등로를 타고 빠르게 걸어 진행하니 번호가 없는 송전탑을 통과하고 이어지는 춘양목 지대를 관통하며 잠시 힐링하듯 걸어가니 우측으로 보이는 무명봉을 좌측 사면 등로로 지나면서 간벌된 나무들이 등로에 나뒹굴고 있어 어렵게 진행하는 시간이다.
잠시 후 간벌된 나뭇가지들이 널부러져 있는 558.2 무명봉에 오르니 한쪽에는 웅덩이도 보이는데 이곳 역시 6.25 유해발굴 현장이 아니였나 생각도 해 본다.
그 무명봉에서 등로는 좌측으로 꺽여 진행되고 지독한 간벌나무들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는 등로를 피해 좌측 사면등로를 타고 잠시 후 만나는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를 따라 내려가 정상 마루금으로 복귀하니 152 송전탑이 나타난다.
그 송전탑을 지나 편안한 등로를 타고 무명안부와 둔덕을 넘으니 또 다시 153번 송전탑이 나타나고 송전탑 지나 언덕을 넘으니 그림같은 소나무 등로가 길게 펼쳐져 있어 잠시 숨고르기를 하면서 편안하게 진행한다.
잠시 후 이곳 역시 송이버섯 채취구역이었는지 얇은 노끈들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고 그곳을 지나 완만하게 오르니 웅덩이가 보이는 556.9 잡목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무명봉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잡목이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또 다른 560.4 무명봉을 넘고 그곳에서는 우측으로 크게 꺽어 내려가니 봉우리 같지 않은 능선 상 523.3봉을 지나는데 별 특징이 없는 봉우리이다.
그곳을 지나니 다시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이 보이고 잠시 무명봉을 지나 내려가다 등로 우측을 보니 드디어 저 아래쪽으로 운곡천이 내려다 보이기 시작하여 오늘 산ㄹ행에 대한 안도감을 전해주고 있다.
마음의 위안을 삼으며 잠시 더 그 운곡천을 내려다 보고 사진에 담은 후 내려가니 푹 파인 안부를 통과하고 조금 더 걸어가니 눈 앞으로 도로가 보이는 듯 한데 내려가는 등로가 사라졌기에 우측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드디어 황새마을 앞에서 헤어졌던 35번 청량로 2차선 포장도로와 다시 만나 그 도로를 타고 우측으로 진행을 이어가 본다.
시간을 보니 이제 오후 4시 10여분을 지나고 있어 시간적으로는 충분하다는 계산이기에 여유를 찾아 보는 시간이지만 결국 버스 시간이 오후 6시 5분이었기에 더 즐기며 충분한 휴식을 취했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다.
도로를 타고 우측으로 걸어 내려가니 신비의도로 표지판이 보이고 곧이어 삼동재, 호랑이상 및 경관쉼터라는 도로 표지판들도 보인다.
잠시 후 직선으로 뻗어 있는 도로에서 천천히 걸어 내려가니 도로 좌측으로 호랑이 조형물들이 보이는 범바위와 저 멀리 운해정 정자도 보이기 시작하고 그냥 지나칠 수 없기에 잠시 도로 좌측의 범바위 전망대로 들어 가 본다.
범바위(사암)는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도천리에 있는 바위로서 야성송씨가 살았고 마을 뒷산이 뱀모양으로 뻗어 내려왔으며 학암서당 뒤에 있는 돌무지가 개구리 모양 같다 하여 뱀바우로 부른다.
범바위라는데 자료에는 뱀바위로 나와 있으니 어느 것이 맞는지 헷깔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범바위전망대에서 남쪽 방향을 살펴보니 바로 발 아래 도도히 흐르는 낙동강이 한반도 지형처럼 생긴 곡류를 만들며 휘돌아 흐르고 그 뒤로 황우산과 미림산 줄기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그 황우산 뒤 저 멀리에는 고개만 삐쭉 내밀고 있는 문명산이 존재감을 알려 오지만 아직 만나보지 못한 산들이기에 인사 하기도 왠지 모르게 쑥스럽기만 하다.
그 횡우산 우측 아래로는 낙동간과 운곡천이 만나는 합수점 위로 이름없는 다리 아치가 보이고 그 우측으로 도천교를 찾아 보지만 산줄기에 막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마지막 합수점을 확인하고 도로 따라 운해정 방향으로 걸어 내려가니 눈 앞 저 멀리 서산으로 기울어져 가는 짧은 햇살 좌측으로 퐁락산과 응봉산 그리고 만리산으로 이어지는 제법 웅장한 산줄기가 눈길을 잡는데 또 저곳은 언제 한번 오를 수 있는 기회나 있을련지 기약도 할 수 없음이 안타깝기만 하다.
한동안 아름다운 풍경들을 감상하고 아쉬움에 자꾸만 합수점도 내려다 보며 천천히 걸어 내려가니 운해정이라는 사각정자가 보이고 그곳에 배낭 내려 잠시 휴식을 취하며 남아 있는 간식과 과일로 체력 보충하고 시원한 물로 갈증까지 해솔=한 다음 다시 마지막 산행을 진행한다.
운해정을 떠나 조금 더 걸어가니 도로는 우측으로 크게 휘돌아 내려가고 등로는 좌측 콘테이너 박스가 보이는 공터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다.
공터로 내려가 화장실에서 비우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다시 콘테이너 박스 옆으로 나 있는 내리막 능선 등로를 타고 조심스럽게 내려가니 무명 묘지 한기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진행 방향 좌측을 살펴보니 범바위에서 봤던 풍경이 다시 펼쳐져 있어 잠시 발걸음 멈추고 사진에 담아 본다.
낙동강과 황우산 그리고 문명산이순차적으로 보이고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기에 가슴 속 깊은 곳에도 저장을 하는 시간이다.
묘지를 지나 우측 사면으로 이어지는 등로를 타고 조심스럽게 진행하니 등로는 다시 우거졌다 계절에 순응하며 죽어가는 칡넝쿨 위로 이어지고 어렵게 그 위로 오르니 등로 바로 우측 아래로는 절개지 아래 방금 전 헤어진 35번 청량로 2차선 포장도로가 뺌을 닮아 있는 형상으로 구불구불 이어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 온다.
조심하며 그 도로 옆 절개지 능선을 타고 천천히 내려가니 도로 건너 도전리쪽 무명 산줄기가 아름답게 뒤따르고 있다.
이제 진행 방향으로는 저 멀리 퐁락산이 우뚝 솟아 있어 그 모습을 사진에 담고 서산으로 기울어져 가는 햇살을 아쉬워하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조심하며 절개지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이제 35번 도로와 멀어지며 곧바로 비포장 임도와 만나 편안하게 걸어 본다.
한동안 편안하게 넓은 비포장 임도를 따르다 등로 좌측을 보니 여전히 아름다운 노란 낙엽송 지나 낙동강과 합수점이 보이고 그 뒤로 황우산과 미림산 그리고 파란 하늘에 흰구름이 한폭의 풍경화를 그리며 마지막 날머리로 향하는 산객의 마음에 작은 풍파를 일으키고 있다.
너무나 힘들게 진행해 온 산행이기에 그 희열 역시 비례하여 커지고 이제부터는 눈에 들어 오는 풍경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한 추억이 되고 있다.
계속 이어지는 넓은 비포장 임도를 따르니 임도 우측으로 나즈막한 무명봉이 하나 올려다 보이는데 특별할 것이 없기에 통과하고 좌측으로 이어지는 비포장 임도를 따르니 드디어 갈림사거리에 도착을 해 비포장 임도를 직진으로 보내고 좌측으로 이어지는 오르막 능선으로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벌목지대 지나 명호면쪽 마을들이 조심씩 내려다 보이기 시작하고 갑자기 커다란 라디오 음악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데 아마도 추운 겨울에 수확해야 하는 사과 과수원에서 틀어 놓은 라디오처럼 보인다.
잠시 후 커다란 참나무가 서 있는 396 무명봉을 넘어 마지막 날머리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벌목지대를 지나 능선으로 들어가니 커다란 소나무들과 잡목들이 혼재되어 있는 뚜렷한 등로가 이어지고 잠시 걸어 내려가니 자주 보였던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도 보인다.
하지만 소나무가 끝나고 참나무가 보이면서 등로가 사라지고 미끄러운 참나무 낙엽들이 수북하게 쌓여 어렵게 내려가니 드디어 가시나무와 잡목들 그리고 잡풀들이 우거졌다 말라 죽은 마지막 가시덤불 지대를 빠져 나가 낙동강 변 테마공원에 도착을 해 긴 한숨을 내쉰다.
도로를 타고 합수점으로 이동을 해 우측의 운곡천이 좌측의 낙동강에 합쳐져 낙동강이란 이름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확인하고 몇장의 사진에 담은 후 운곡천 방향으로 몇 발자국 걸어가니 낙동강시발점테미공원이라는 커다란 입간판이 보인다.
2018년 매일경제 신문에 났던 소식을 정리하면 봉화군이 낙동강 시발점인 테마공원 내에 찬밥신세를 비유한 오리알과 청둥오리 조형물을 설치해 주민들은 물론 지역을 찾는 관광객들로부터 관심을 끌고 있다.
봉화군은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1천634곳의 발원지 중 태백 황지연못에서 발원된 지류가 운곡천과 만나 낙동강 본류가 시작되는 것을 기념해 태마공원을 조성했다는 것으로 특히 오리알과 청둥오리의 조형물이 낙동강의 시발점인 테마공원내에 설치되면서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에 대한 이야기들을 담게 돼 보다 눈길을 끌 전망이다.
1980년대 두 자릿수 고도 경제성장을 기록하던 때, 경북 북부지방의 봉화는 영락없이 낙동강 오리알을 떠올릴 만큼 경제적 발전이 어느 지역보다 낙후됐던 곳이나 이제는 그 낙동강 오리알이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청정자연의 산림휴양도시로 부화돼 지역민들에게는 삶과 쉼터를 관광객들에게는 힐링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산림휴양도시로 탈바꿈한 이야기를 낙동강 오리알에 담고 경북을 대표한 관광지로 비상하는 청둥오리에 담아 낙동강의 시작 지점에 설치된 조형물이다.
낙동강 시발점 테마공원 내 설치된 오리알과 청둥오리 조형물이 자연과 역사 및 문화를 품고 희망찬 미래를 향해 힘찬 날갯짓을 했으면 좋겠다.
낙동강시발점테마공원을 빠져 나와 도찬교를 지나면서 운곡천이 저 멀리 이름없는 다리 아래 도도히 흐르는 낙동강에 합류되는 합수점을 배경으로 셀카를 이용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운곡천은 경상북도 봉화군의 춘양면과 법전면 및 명호면을 흐르는 하천으로 춘양면 북서쪽의 문수산과 옥석산을 잇는 줄기의 골짜기에서 발원한 물이 곧장 남동쪽으로 흘러 춘양면 소재지를 흐르고 법전면을 지나 명호면에 접어들어 구불구불 흘러 도천리에서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도심리 계곡의 경사가 완만한 북사면 연안에는 경지가 넓게 나타나며 작은 계류에 소규모의 두내저수지와 둔지저수지가 위치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봉화)에 도미천(道美川)은 현 북쪽 18리에 있고 근원은 태백산에서 나오며 매토천(買吐川)으로 들어간다 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내용을 통해 위치를 비정해 보면 도미천은 운곡천에 해당한다.
그리고 매토천은 신증동국여지승람(봉화)에 매토부곡에 있는데 근원이 태백산의 황지에서 나오고 바로 예안현의 나화석(羅火石) 상류이다 라는 기록을 통해서 봉화군에서 예안현에 이르는 낙동강의 본류임을 이해할 수 있다.
하천의 명칭이 매토부곡에서 유래하였으므로 대략 매토부곡에 해당하는 구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강의 이름은 19세기 중엽에 제작된 대동여지도에도 나타나나 20세기 초엽에 제작된 조선지형도에는 졸천(拙川)이라고 적혀 있고 옆에는 일본어로 발음이 표기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은 운곡천이 19세기 후반의 어느 시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음을 시사하는 한편 조선지지자료(봉화)에는 와단면 운곡리(雲谷里), 그 아래 언문으로 구니골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구한국행정구역일람(순흥) 와단면에도 운곡리가 나와 있으나 호구총수에는 기록이 없고 또한 1914년 춘양면 남산리와 상촌리 및 와단면 소로리와 운곡리, 한수리가 합쳐져 의양리가 만들어지면서 법정리로서의 운곡리는 없어졌다.
따라서 운곡천이라는 지명이 불리기 시작한 시점은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1914년 이전의 어느 시기인 것으로 여겨진지나 지도에 표기되기 시작한 것은 현대 지형도이다.
이로서 일단 각화지맥 산행을 모두 마무리하고 천천히 걸어 명호면 마을을 지나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도천교를 건너니 다시 헤어졌던 35번 청량로 2차선 포장도로와 만나고 그 도로를 타고 우측으로 걸어가니 산고수려 월명강호라는 커다란 이정석이 눈길을 잡고 잠시 후 매호교 앞 조형물에는 명호재래장터라는 커다란 입간판이 보인다.
경상북도 봉화군의 중남부에 위치한 면으로 면의 가운데를 낙동강이 남쪽으로 흐르고 강과 나란히 동쪽에는 축융봉과 청량산, 문명산, 황우산이 연이어 있고 서쪽은 만리산과 풍악산이 있다.
완만한 지형이 계류변에 산재하는 것을 제외하면 평야의 발달이 미약하고 남동쪽의 청량산 일대는 수려한 자연경관으로 인해 청량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공원 관내에는 청량사·청량산성이 소재한다.
호구총수(봉화)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봉화현 남면에 해당하는 지역이었고 뒤에 상남면과 하남면으로 분리되었다가 1914년에 동면(6개 리), 중춘양면 일부(내을리), 예안군 의동면 일부(광석동)를 합하여 명호면이 되었다.
도청 소재지인 도천리에는 명호라는 자연마을이 있는데 지명은 이 마을의 이름을 빌어다가 사용하였으며 명호마을은 갈천과 낙동강이 만나 휘도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마치 안동의 하회마을을 연상케 한다.
속설에 의하면 500여 년 전 사온이라는 안동 권씨가 이곳의 화려한 산수 형국을 매화낙지라고 한 데서 매호라는 명칭이 생겨났다고 하고 이것이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명호가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신구대조에서 처음으로 이 지명을 볼 수 있다.
현재 면 소재지인 도천리를 포함하여 8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으며 동리 지명은 1914년의 군면 폐합에 기초하고 있는데 새로운 동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대개 조선시대의 한 마을 이름을 대표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상남면 관할이었던 고감리는 풍락산 밑에 자리하므로 북치고 노래하고 춤춘다는 뜻으로 고가무 또는 고감이라고 부르던 마을이고 고계리는 안동과 봉화의 경계에 있어서 고계 또는 고세라고 부르던 마을이며 풍호리는 풍락산과 낙동강의 의미를 취해서 새롭게 명명된 지명이다.
하남면 관할이었던 관창리는 마을 뒤 바위에서 낙동강 물이 불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는 뜻에 따라 명명된 지명이고 신라리는 신라시대에 어느 태자가 이곳에 피난 왔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동면 관할이었던 양곡리는 양지바른 곳에 입지하여 배태 또는 별태라고 부르던 마을이고 안동군 재산현 관할이었던 북곡리는 청량산 뒤쪽이라고 해서 뒤실이라고 부르던 마을이다.
매호교를 지나자마자 명호(도천) 버스 정류장이 나타나고 그곳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명호와 춘양을 운행하는 버스는 하루 3편으로 오후 6시 5분 버스가 마지막 버스이다.
시간을 보니 이제 오후 5시 15분을 지나고 있어 히치 하이킹을 시도하려다 포기하고 택시도 부를까 고민해 보지만 오늘 산행도 마무리 되었으니 깨끗하게 샤워 후 저녁 식사하고 귀가하면 되기에 끝까지 버스를 기다렸다 정시에 회차하는 버스를 타고 무탈하게 춘양으로 복귀한다.
애마를 회수 해 시장통 앞에 있는 목욕탕으로 이동하고 깨끗하게 샤워 후 환복하고 나오니 도로 건너 순대국집이 보여 들어 가 따뜻한 돼지국밥 한그룻으로 춘양과 각화지맥에서의 시간을 마무리하고 생각보다 막히지 않는 도로를 타고 밤 10시 30여분에 무사히 귀가해 아이들과 소맥 한잔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어제 초반부의 긴 접속구간과 잡목들 그리고 나무들에 막혀 보이지 않았던 조망으로 답답한 산행이었고 오루부터 불이 났던 지역에서 최악의 잡목들과 사투를 벌였으나 오늘 멋진 조망과 마지막 운곡천 합수점에서 그 보상을 받았던 시간으로 기억해 본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많은 도움으로 안전하고 무탈하게 각화지맥 산행의 완주를 자축하고 다음 주에는 가족 모임이 있어 모임 장소에서 멀지 않은 팔봉지맥에 올라 세구간으로 나눠 진행을 계획해 본다.
춘양에서 만났던 소중한 인연들이 차후 삶에서 조금 더 정신적인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산행후기를 정리한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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