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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후기/서울의 산

집 근처 근린공원과 서울둘레길 산행후기

by 칠갑산 사랑 2019.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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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와 동작구의 국사봉, 까치산, 서울둘레길, 청룡산 및 장군봉 정상과 둘레길 일대

산행일자 : 2019년 06월 26일 (수요일 퇴근 후 운동)

산행날씨 : 하루 종일 흐리고 무더웠으며 몇방울 비가 떨어졌던 산행날씨

산행온도 : 영상 19도에서 영상 31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집-봉천역-남부순환로-봉천로 현대시장입구교차로-양녕로 현대시장교차로-국사봉터널입구-국사봉 등산로입구-동작충효길-

                 국사봉(180.9봉)-국사봉 등산로입구 복귀-125.3 바위봉-상도근린공원둘레길안내판-구암고등학교-158.2 관목봉-성현드림숲안내판-성현동

                 관악드림타운아파트단지-까치산공원-까치산(122.3봉)-솔밭로 이동통로-119.3 벤취쉼터봉-까치생태터널 위(남부순환로통과)-인헌공

                 강감찬길-98.2 무명봉-무당골-천지정과 K2 천지약수-서울대 연구공원-관악사삼거리-능선진입(사색의길)-179.7 삼각점봉 우회-135.5

                 무명봉-134.6 삼각점봉(헬기장)-SK 주유소 및 문영여자고등학교-관악로-관악서울대치과병원 버스정류장-능선진입-청룡산(138.8봉)-

                 청능산(157.7봉)-용천사-e편한세상서울대입구아파트공사장-쑥고개(쑥고개로)-장군봉(112봉)-집-산행종료

산행거리 : 약 14.59 Km (스마트폰의 GPX 트랙 기준)

산행트랙 20190626 국사봉_까치산_서울둘레길)청룡산_장군봉.gpx

산행시간 : 아주 빠르게 걸어 진행하여 03시간 37분 (16시 55분에서 20시 32분까지)

 

 

집 근처에 산재되어 있는 근린공원을 찾아 또 새로운 길을 만들고 역사기행을 함께하며 걸었던 시간들 

 

 

퇴근하니 먹구름이 밀려오며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기세인데 하늘만 바라보고 집에 있자니 답답한 마음에 간단히 물과 과일 그리고 우산을 챙겨 오늘은 집 근처에서 봤던 새로운 근린공원들을 찾아 한바퀴 크게 돌아 오려고 생각을 해 본다.

제일 먼저 자주 그 앞 도로를 지나쳤던 국사봉을 둘러보고 까치산도 들린 후 서울둘레길은 상황에 따라 진행 여부를 결정한 후 청룡산과 건우봉을 거쳐 장군봉에 올랐다 내려오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결국 건우봉은 오르지도 못하고 길게 서울둘레길과 인헌공 강감찬길을 길게 걸은 후 귀가하니 생각보다 긴 거리를 제법 많은 시간을 걸려 제대로 운동을 하고 어둠이 내려 앉은 거리를 걸어 늦게 귀가하게 되었다.

걸으며 살펴보니 그동안 무심하게 지나쳤던 양녕대군과 인헌공 강감찬장군에 대한 많은 생각과 의미를 알게 되었고 그 길을 따라 조금은 여유있는 발걸음도 필요해 보였다.


걸으며 만났던 동작충효길이란 글이 생각 나 찾아 보니 동작충효길은 충효의 고장 동작에서 만나는 일곱색깔 동작이야기 주제를 바탕으로 동작구의 역사와 문화자원에서 나타나는 충과 효의 정신을 포함하고 있다.

전체 코스는 본동 배수지공원을 시점으로 해서 노들역, 고구동산, 현충근린공원, 한강수변길, 노량진수산시장, 노량진 근린공원, 보라매공원, 국사봉, 까치산을 거치며 모두 7개 코스에 총연장 25 km에 이른다.

각각의 코스마다 이름과 테마를 달리하고 있으며 1코스 테마는 생(生)으로서 삼림욕을 즐길 수 있는 서달산 잣나무길, 피톤치드(산림욕) 체험장, 살아있는 자연생태를 체험할 수 있는 숲속 유치원, 자연학습장으로 구성돼 있고, 2코스 현충원길의 테마는 충(忠)으로서 국립서울현충원 내부 및 외부를 지나면서 호국영령의 넋을 기리자는 취지다.


국사봉은 양녕대군 이제 묘역이 위치한 남쪽 산을 말하며 해발 184미터의 산으로 관악구 봉천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국사봉이란 이름은 태종의 맏아들이었었던 양녕대군이 이 산에 올라 멀리 경복궁을 바라보며 나라와세종을 걱정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국사봉 부근에는 양녕대군의 사당과 묘소도 자리하고 있으며 국사봉 정상에 서면 한강의 시원한 물줄기와 서울의 아름다운 전경이 눈을 시원하게 해준다.

국사봉 밑에 자리 잡은 사자암은 조계종 소속으로 조선 태조 5(1396) 무학대사가 한양천도과정에서 풍수 상의 이유로 창건했다고 하는데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서울의 풍수를 살펴보니 만리현(현재 만리동)이 밖으로 달아나려는 백호의 형상이었다.

이에 무학대사는 백호의 움직임을 막아낼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만리현의 맞은편인 관악산에 호압사를 짓고 사자형상인 국사봉에 사자암을 조성했다.


국사봉 오름길에 제일 먼저 눈길을 잡은 것은 능고개와 아차고개 설화에 대한 설명이었다.

이곳 국사봉이 있는 상도동의 동명은 이곳에 상여꾼이 집단으로 거주하여 상투굴이라고 칭하던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 성도화리로 불리다가 상도리와 상도정이란 이름을 거쳐 1955년 서울특별시 동설치조례에 의하여 상도동으로 개칭되었다.능고개는 상도4동 국사봉중학교에서 봉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으로 이 지역에 얽힌 이야기를 보면 지금의 지덕사가 처음에는 중구 도동에 세워져 문중도 같이 살고 있었으나 워낙 살림이 빈궁하여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였다.

근근히 지내던 어느 추운 겨울날 한 노승이 이 집 앞을 지나다가 밤이 깊어 하룻밤 묵고 가기를 청하는지라 불러들여 불을 지피고 밥 대신 죽을 끓여 집주인은 먹지 않고 중에게만 주었다.

이튿날 이 사실을 안노승은너무 고마워서 은혜에 보답하겠다며 그 주인을 데리고 능고개 자리에 와서 장차 죽거든 이곳에 묘를쓰라고 일러 주었고 그로부터 몇 년 후에 그 주인이 죽자 중이 가르쳐준 고개에다 묘를 썼더니 그때부터 자손이 번창하고 가세가 일어났다고 하여 능고개라 한다.


노량진(노들나루)이란 이름은 백로가 노닐던 나루터라는 뜻으로 조선시대에 지금의 용산에서 수원 방면으로 가려면 노들나루를 이용하였는데 이곳에 도성을 지키기 위하여 노량진이 설치되어 마을 이름을 노량진이라 부르게 되었다.

아차고개는 사육신묘 마루터기에 있는 고개이름으로 이 고개는 조선 세조 때 영등포 이남에 살던 어떤 선비가 사육신을 처형함이 부당함을 간하기 위하여 도성을 향하여 말을 달려 오다가 이 고개에 이르렀을 때 육신이 이미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차! 늦었구나 하고 한탄하던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또 다른 유래는 조선 명종 때 이름난 점술가인 홍계관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자기의 명을 점쳐 보니 모년 모월 모일에 횡사하는 점괘가 나와 살아날 길을 찾아보니 딱 한 방법으로 용상 아래 숨어 있으면 횡사를 면한다고 하는지라 홍계관은 왕에게 아뢰어 승낙을 받고 날짜에 맞춰 용상아래 숨어있었다.

그때 때마침 쥐 한 마리가 마당을 질러가고 있어 이를 본 왕이 홍계관에게 지금 마당에 쥐가 지나가는데 몇 마리인지 점을 쳐 보아라 하고 명하였고 그가 곧 점을 쳐보고 말하기를 세 마리라 하였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노하여 형관을 시켜 홍계관의 목을 베라고 하였고 형장에 당도하여 다시 점을 쳐보니 만일 한 식경만 기다리면 살 길이 있겠다 하는 점괘가 나왔다.

홍계관이 형관에게 조금만 형 집행을 늦추어 달라고 간청하므로 형관이 허락하여 잠시 기다리고 있었다.

계관을 형장으로 보낸 후 왕은 측근을 시켜 그 쥐를 잡아 배를 갈라 보니 뱃속에 새끼 두 마리가 있었고 홍계관의 신묘한 점에 놀란 왕은 곧바로 신하를 형장으로 보내어 계관의 참형을 중지하라고 하였다.

이에 신하가 급히 달려가 보니 막 형을 집행하는 순간이었고 크게 소리질러 중지 하라고 하였으나 형관의 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할 수 없이 손을 흔들어 중지하라고 하였지만 형관은 사형 집행을 빨리하라는 줄로 알고 홍계관을 참하고 말 았다.

신하가 되돌아와 왕에게 자초지종을 말하니 왕은 아차하고 매우 슬퍼하였다고 하며 이때부터 그 형장 이 있던 이 고개를 아차고개라 불렀다는 것이다.


상도근린공원은 서울시 동작구 성대로6사길 27-6에 있는 공원으로서 상도공원의 주봉인 국사봉은 글자 그대로 양녕대군이 이 산에 올라 나라를 생각하고 임금을 걱정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양녕대군은 왕세자로서 스스로 실적을 저질러 폐세자가 되어 왕의 자리를 동생에게 물려준 뒤 대궐에서 쫓겨났지만 그는 형제 간에 우애가 지극하여 이 산에서 멀리 경복궁을 바라보며 나라와 세종의 일을 걱정했다고 한다.

둘레길이 잘 조성되어 있고 곳곳에 운동기구들이 잘 설치 관리되고 있어 인근 주민들의 생활공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구암고등학교를 지나 오르면 만나는 관목들이 보이는 158.2봉에 오르면 이제 살피재는 좌측으로 내려가고 이 산객은 우측 등로를 따르는데 잠시 살피재를 다녀올까 하다가 시간이 많지 않아 다음 기회에 가 보기로 하고 자료만 찾아 본다.

살피재는 상도1동 숭실대학교 아래 교차로에서 봉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옛날 이곳은 수목이 울창하여 도둑이 많이 출몰하였던 터라 이 재를 넘기 전에 사람들이 살펴서 가라고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살피재 갈림길을 지나 내려가니 장승배기 설화설명판이 서 있어 잠시 읽어 보고 간다.

장승배기는 동작구 상도2동 영도시장 맞은편 삼거리의 노량진 파출소와 한빛은행 상도지점 앞을 장승배기라고 부르는데 행정구역상 현재 장승이 서있는 위치는 노량진2동에 속한다.
이곳은 노량진동과 상도동 및 대방동이 접한 지역으로 조선시대에는 노량진 선창으로 가는 길목이었으며 서울 시민들 중에는 상도동의 위치는 잘 몰라도 장승배기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 명칭이 널리 알려졌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 유명한 대방 장승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사라져가는 민속신앙 중의 하나이지만 예전에는 동네 어귀나 사찰 입구에서 어김없이 찾아볼 수 있었던 것이 장승으로 장승은 경계의 표시이기도 했지만 이(리)수를 적어 10리나 15리마다 세워둠으로써 이정표역할을 했으며 특히 악귀를 막는 수호신이기도 했다.

흔히 장승이 서 있는 곳을 장승배기라 하는데 우리나라 각지에 이런 이름이 남아있으며 장승배기에서는 마을의 공동문제 즉 부락제나 기타 여러가지 일을 의논했던 것이 마을 이름으로 되어 전해온 것으로 이곳에 장승을 세우게 된 내력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조선 중기 사도세자가 부왕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비통하게 죽은 뒤 그의 아들 정조가 1777년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 사도세자를 한시도 잊지 못하여서 정조는 화산(지금의 수원)에 있는 아버지 묘소 곧 현륭원에 참배 다니는 것을 잊지 않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우나 더우나 찾아가 아버지 무덤 앞에 무릎꿇고 그 애통한 한을 달래며 명복을 빌었다.

금은 현대식 건물과 주택들이 들어서 있지만 당시 장승배기 일대는 낮에도 맹수가 나타날 것만 같은 울창한 나무숲이었으며 현륭원으로 가는 정조의 어가는 이곳에서 한번쯤 쉬어가야 했으나 아름드리 나무숲이 우거진 이 지점에서 쉬기란 적적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라도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면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인가가 없고 통행인마저 시오리 가야 한두 사람 만날까 말까 할 정도로 한적한 곳이었기에 정조는 이곳에 장승을 만들어 세우는데 하나는 장사 모양을 한 남상 장승을 세워 천하대장군이라 이름을 붙이고 또 하나는 여상을 한 지하여장군으로 하여라 하고 명하였다.

명으로 장승배기에는 곧 두 개의 높다란 장승이 세워지게 되었고 이는 왕이 안심하고 행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는데 이때부터 이곳은 장승배기라는 지명이 붙게 되었고 정조는 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하러 가는 길 오는 길에 이 장승 앞에서 어가를 멈추고 쉬었다는 것이다.

편 장승을 소재로 한 판소리와 서도창에 보면 이곳 장승의 이름이 팔도장승의 최고 우두머리인 대방 장승이었고 또 이와 관련된 내용이 나타나고 있다. 가루지기전은 변강쇠가 엄동설한에 땔것이 없어 나무를 하러 길가에 세워 놓은 장승을 패가지고 오는 것을 풍자적으로 엮은 것으로 변강쇠한테 도끼로 찍혀 부서진 장승이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 것이 멋스럽다.

래 장승이란 마을로 들어오는 동구 밖에서 병액의 귀신을 물리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촌락공동체의 수호신이요 경계표지였다.

제 장승의 신앙적 의미는 미약해졌으나 다만 한국을 상징하는 대표적 풍물로 부활되어 명맥을 잇고 있다.


잠시 더 내려 가 우측으로 전망대가 있는 곳으로 가니 눈 앞에 거대한 아파트 단지들이 보이고 그 사이 저 멀리 가장 많이도 올랐던 관악산 정상부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어 어렵게 사진 한장 남겨 본다.


관악산을 조망하고 진행하니 갑자기 등로 옆으로 성현드림숲이란 안내판이 서 있어 잠시 읽어 본다.

2014년 관악구가 상도근린공원 내 불법시설물을 철거하고 주민을 위한 공원으로 새롭게 꾸몄는데 관악구는 수년간 민원이 끊이지 않던 상도근린공원 내 불법시설인 법륜사를 철거하고 누구나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공원으로 만들어 주민들에게 개방한 것이다.

1979년 상도근린공원 내에 2개 동의 불법건축물을 지은 법륜사는 2000년 화재로 소실된 기존무허가건물에 무단으로 건물을 신축 및 증축하고 담장과 철조망을 설치하여 공원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등 공원의 미관을 훼손하고 지역주민들에게 불편을 끼쳐왔다.

관악구는 그동안 공원재정비를 위한 임시 전담반을 구성해 법륜사의 자진 정비를 유도하였으나 법륜사가 불법 점유한 토지에 대한 소유권 인정소송을 내는 등 무단점유를 지속하자 고발과 강제이행금 부과하고 재산압류 등 행정제재를 가했으며 법원으로부터 토지인도 판결을 받고 토지소유자인 산림청과 협의를 거쳐 2013년 12월 강제철거를 시행했다.

또한 철거 후 홈페이지와 주민설명회 등을 통해 접수한 주민의견을 반영해 상도근린공원을 생태숲으로 복원하고 주민여가 및 휴게를 위한 공간으로 조성했다.

철거지 경사면에 조경석을 쌓고 조경석 사이에는 관목 식재를 심어 경관을 개선했으며 산림과 인접지역은 인근 수목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나무를 배치했고 주민들의 요청에 따라 인위적인 시설물을 최소화해 주민들이 자연 그대로의 경관 속에서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으로 꾸몄다.

특히 불법시설 정비를 바라던 성현동 주민들이 숲이 주는 혜택을 마음껏 누리며 꿈을 꿀 수 있도록 상도근린공원 내 이곳을 성현드림숲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었다.


한동안 나즈막한 근린공원 내 뚜렷한 등로를 따라 편안하게 걸어가니 드디어 아파트 촌이 보이고 상가들도 나타나는 도로를 타고 한동안 걷게 되었다.

이곳은 봉천동으로서 예전에는 판자촌으로 유명하였지만 이제는 상전벽해가 되어 완전히 새로운 동네로 탈바꿈한 봉천동으로서 봉천동이란 동명은 이 마을이 관악산 북쪽 기슭에 있어서 관악산이 험하고 높아 마치 하늘을 받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 데서 한자명으로 奉天이라 한 데서 유래되었다.

봉천동은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시흥군 동면과 과천군 하북면에 속하였으며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와 동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한 경기도 구역획정 때 시흥군 동면 봉천리와 과천군 하북면 본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경기도 시흥군 동면 봉천리로 칭하였다.

광복 후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에 의한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시흥군 동면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될 때 봉천동이 되어 영등포구 관악출장소에 속하였다.

1968년 1월 1일 서울특별시조례 제491호로 관악출장소가 폐지되어 영등포구의 직할이 되었고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8호로 관악구가 신설됨에 따라 봉천동은 관악구에 속하여 오늘에 이른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봉천동은 14개동까지 있었으나 이제는 각 동마다 새로운 이름을 부여 받아 사용하면서 14동까지 사용하던 봉천동도 많이 달라진 모습이다.


까치산과 까치산공원은 수목이 우거지고 까치가 많아 까치고개라 불렸던 곳으로부터 이름이 유래했다.

2005년 6월 아치형 생태육교가 세워지면서 관악산까지 이어지는 등반이 가능해졌으며 이 생태로 주변에는 자생수종 및 먹이식물인 소나무 등 12종 4,200여 그루의 나무를 비롯해 생태시설물 8종이 있다.


벤취 쉼터들이 조성되어 있는 119.3봉도 넘고


드디어 남부순환로를 관통하는 까치고개(작현, 가추개)에 도착을 해 옛 생각에 젖어보는 시간도 가져 본다.

이곳에 수목이 우거지고 까치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사당동 281-291번지 일대이며 현재 은행나무가 두어 그루 있다고 하여 은행나무골이라 불려지고 있다.

저 도로를 타고 이 산객의 반평생을 보낸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까치고개 생태터널을 통과해 진행하니 자주 올랐던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가 나타나고 조금 더 걸어가니 등로 옆으로 인헌공 강감찬길이라는 안내판들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정표에는 서울둘레길과 관악산 둘레길이 함께 표기되어 있어 같은 임도와 등로를 두고 세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듯 보인다.

우리 역사에서 3대 대첩을 꼽는다면 두말 할 것도 없이 을지문덕의 살수대첩과 이순신의 한산대첩 그리고 강감찬의 귀주대첩을 들수 있는데 그중 고려 시대 거란의 수십만 대군을 맞아 귀주에서 섬멸한 귀주대첩을 이끈 장군이 바로 강감찬이다.

강감찬은 948년(정종 3)에 태어났으며 그의 탄생과 관련해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는데 한 사신이 밤중에 시흥군으로 들어오는데 큰 별이 어떤 집으로 떨어지는 것이 보여 그가 사람을 보내 찾아보니 마침 그집 부인이 사내를 낳았고 그가 바로 강감찬이었다고 한다.

강감찬의 어릴 때 이름은 은천으로 강감찬의 아버지는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할 때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이 된 강궁진이다.

고려사에는 강감찬이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신통한 지략이 많았다고 전한다.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사실 때문에 강감찬을 무인으로 알기 쉽지만 사실 강감찬은 문관이었는데 983년(성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복시에서 갑과에 장원한 뒤 관직에 오른 후 예부시랑과 국자제주, 한림학사, 승지, 중추원사와 이부상서를 역임했다.

1010년(현종 1) 거란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두 번째로 고려를 침략했는데 우여곡절 끝에 등극한 현종은 전쟁에 미처 대비할 틈이 없었고 그래서 고려군은 속수무책으로 패전을 거듭했다.

이때 강감찬은 장수로 나서지는 않았으나 왕에게 끝까지 항복하지 말 것을 주장해 관철시켰다.

왕이 피신한 사이 다행히 양규가 무공을 크게 세워 거란을 물리쳤으나 거란은 1018년(현종 9)에 또다시 고려를 침략했는데 이때 강감찬이 나섰다.

강감찬은 흥화진과 귀주에서 뛰어난 전략과 기지로 거란군을 대파하고 승리했고 고려는 안정을 되찾아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 인헌공 강감찬길은 바로 아레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에 있는 강감찬과 그의 사당인 낙성대와 관련이 있다.

낙성대는 정면 5칸에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호이며 강감찬의 출생지로서 그가 출생할 때 별이 떨어졌다고 하여 낙성대라는 이름으로 전하여오고 있다.

강감찬의 애국충정을 기리고자 서울시에서는 1973년에서 1974년까지 2년간에 걸쳐서 이곳을 정화하면서 사괴석으로 409미터의 담장을 쌓고 사당 안국사를 지었는데 이것이 곧 낙성대이다.

안국사는 외삼문인 맞배지붕의 안국문을 거쳐 내삼문 안에 건축되었는데 사당 안에는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한편 1974년 6월 10일 안국사가 완공되자 서울시에서는 그 날짜로 공원으로 지정하여 유료공원으로 관리하고 있는데 공원의 총면적은 3만 1350 ㎡이나 성역화된 곳은 1만 1550㎡이며 안국사의 면적은 237.6㎡이다.

공원 경내에 5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고 공원 입구에 큰 연못을 파서 구름다리를 놓았으며 성역화 경내에도 낙성교가 있다.

이곳에는 고려시대에 건립된 삼층석탑이 있으며 탑에는 강감찬낙성대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 탑은 원래 강감찬이 태어난 봉천동 218번지 집터에 있던 것을 1973∼1974년 정화사업에 따라 현위치로 옮겨왔으며 그 터에는 따로 유허비를 세워 사적지임을 표시하였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석탑의 대석을 비틀어 어기고 탑의 위층을 빼어 한 층을 낮추어 정기를 줄이고 탑 안에 있던 보물을 훔쳐갔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들은 탑만이 아니라 탑 주위에 있던 병풍바위와 선돌바위도 모두 부수고 탑의 동쪽 구릉을 파내어 땅의 혈맥을 끊기도 하였다고 전하여온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몇번인가 들려 쉬었던 기억 빼고는 특별한 기억이 없이 그저 산행을 하면서 또는 둘레길을 걷다가 한두번 들려 자료를 읽었던 기억이 전부이다. 



이제부터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여 조금 빠르게 걸어가니 생각보다 산책하는 사람들이 가끔 보이고 잠시 후 전망대 지나 무당골에 도착을 한다.

무속인들이 기도를 하던 작은 동굴이 있는데 그 바위 안을 보니 얼마나 많은 무속인들이 찾아 초를 피우고 기도를 하였는지 내부가 온통 불에 그을린 것처럼 검게 그을렸다.

그 무당골 바위 옆에 서 있는 안내판을 읽어 보니 무당들의 기도터인 무당골은 무속신앙에서는 우주만물과 그 운행에는 각각 그 존재와 운행질서에 상응하는 기운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어찌되었던 이곳 무당골에서 우리나라 무속신앙에 대한 생각을 해 본다.


무당골을 지나 빠르게 걸어 진행하니 우측으로 낙성대와 좌측으로 서울대 가는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좌측 서울대 방향으로 꺽어 내려가니 예전에 옆지기와 관악산 둘레길 산책길에 내려갔던 바로 그 등로이다.

잠시 후 서울대학교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은 우리나라 유수의 기업들이 건물을 지어주고 회사 이름을 따 연구할 수 있는 연구공원으로 조성된 곳이다.


그곳에서 좌측으로 돌아 서울대학교 정문 방향으로 걸어가다 학부생과 대학원생관악사와 교수회관을 지나 우측으로 이어지는 예전의 황우석 박사 이름을 따 황우석 사샛의 길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능선으로 오르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잠시 후 179.7 삼각점봉을 지나 등로 우측으로 보이는 버섯바위를 살펴보니 그 바위는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이 산객을 맞이해 준다.


한동안 정신업시 걷다보이 등로 좌측으로 서울대 건물이 다시 공사중이고 얼마나 더 많은 관악산이 파헤쳐져야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지 않게될련지 걱정스런 시간이기도 하다.

잠시 후 135.5봉을 지나 드넓은 헬기장에 잔디가 곱게 깔려 있는 134.6 삼각점에 도착을 해 오랫만에 삼각점도 찾아 보고 다시 출발한다.


잔시 후 등로 자측으로 갈라지는 갈림삼거리에서 좌측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금새 SK주유소가 보이는 관악로에 도착을 하는데 도로 건너편에는 서울문영여고와 관악경찰서가 보인다.


관악로를 건너 좌측 서울대 방향으로 걸어 내려가니 도로 좌측으로 서울대치과병원 건물이 보이는 곳 우측으로 등로가 열려있어 그 등로를 타고 능선으로 진입하니 어둠이 짙어지며 나무가 우거진 곳에서는 등로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한동안 오르니 엊그제 청룡산 산책로를 걸으며 지나다닌 등로에 도착을 해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오르니 운동기구들이 보이는 138.8봉의 청룡산 정상부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긴다.


다시 철조망을 두고 진행해 사거리 안부를 통과하고 뚜렷한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금새 청능산 정상부에 도착을 하는데 평소와 다르게 사람 한명 만날수 없다.

아마도 어둠이 짙게 내리면서 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모두 귀가를 한 듯 보인다.


청능산을 지나 용천사를 통과하고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 있는 대단위 아파트 공사장을 지나니 금새 쑥고개에 도착을 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타고 자주 오르고 있는 장군봉에 서니 정상부에는 몇명이 걷기 운동을 하는 불켜진 장군봉 운동장에 도착을 한다.





장군봉 정상에서 나무계단을 타고 길게 걸어 내려가니 금새 아파트 입구에 도착을 해 산행을 종료하고 하루를 마감해 본다.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하여 먼 거리를 걷다보니 두 다리에 전해지는 묵직함이 평소와는 다르게 전해진다.

내일 모레는 지리산에 들어야 하기에 내일은 간단한 근육 운동을 중심으로 진행하고 무리한 도보나 걷기는 자제를 해야 할 듯 싶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20190626 국사봉_까치산_서울둘레길)청룡산_장군봉.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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