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지 : 전라남도 여수시의 여수지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 2018년 01월 07일 (일요일 당일 산행)
산행날씨 : 하루종일 구름이 드리워졌고 흐렸으며 약간의 바람이 불었지만 많이 춥지 않았던 산행날씨
산행온도 : 영하 03도에서 영상 7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창무리 창무버스정류장(22번 2차선 포장도로)-시멘트 포장도로-밭 경작지-창무1길(케이티 텔레캅)-창무옻닭식당-잡목능선-지독한 잡목등로-전망바위-비봉산 갈림삼거리 이정표(안양산 6.0 Km, 비봉산정상 0.2 Km, 창무 0.8 Km)-벤취쉼터1-306 헬기장-비봉산(310.4미터)-비봉산 갈림삼거리 복귀-무명안부-233.3봉 벤취쉼터2와 이정표(안양산 5.8 Km, 용문사 0.4 Km, 비봉산정상 0.4 Km)-무명안부-192 무명봉-무명묘지1-등산로1구간 제3지점 이정표(안양산 5.1 Km, 웅동마을 0.9 Km, 비봉산 1.1 Km)-등산로제1구간 4지점 이정표(안양산 4.8 Km, 상전 0.7 Km, 비봉산 1.4 Km)-상촌고개(17번 2차선 포장도로)-지독한 잡목등로-등산로제1구간 제6지점 이정표(안양산 3.7 Km, 나진 0.7 Km, 비봉산 2.5 Km)-전망암릉구간-198.9봉(벤취쉼터1)-등산로제1구간제7지점 이정표(안양산 3.6 Km, 옥적 1.8 Km, 비봉산 2.6 Km)-179 바위 무명봉-199 바위무명봉(벤취쉼터1)-벤취쉼터1과 등산로제1구간제8지점 이정표(안양산 3.0 Km, 석교 0.6 Km, 비봉산 3.2 Km)-219.2봉-등산로제1구간제8지점 복귀-전망바위-무명안부-곡화목장 둘레길 안내판(2차선 포장도로, 제일타조농장 입간판)-128 무명봉(제선충 방지포)-미니공동묘지-등산로제1구간제9지점 이정표(안양산 2.2 Km, 나진 논골 0.7 Km, 비봉산 4.0 Km)-비포장 임도-시멘트 포장도로 사거리, 등산로제1구간제10지점 이정표(안양산정상 2.0 Km, 나진 논골 0.8 Km, 석교 3.1 Km, 비봉산 4.2 Km)-미니공동묘지-전주이씨 효령대군파 묘지들-능선진입-단석(잘려진 바위) 전망대-288.2봉(바위봉)-편백나무 군락지-돌담(묘지 보호용?)-안양산(327.5봉) 무인산불감시 카메라와 이정표(서촌과 서이산 1.4 Km, 화동 화양고 1.3 Km, 비봉산 6.2 Km)-무명안부 이정표(화동 화양고 0.9 Km, 청량마을 0.8 Km, 안골 0.8 Km, 안양산정상 0.4 Km)-잡풀묘지-파란 그물망-231.5 삼각점봉(여수 405)-김령김공묘지2(간식시간)-무명묘지지대-시멘트 포장도로-갈림삼거리-다래밭 경작지-화동리 화동 고인돌-여수화동고등학교 정문-화동고개(화동로 2차선 포장도로)-화양고 버스정류장-관파이창보선생공덕비(화양고등 공민학교 교가작사가)-묘지지대-밭 경작지-시멘트 포장도로-2차선 포장도로-이동통신탑-억새잡초등로-능선진입-103 무명봉-바위등로-미니공동묘지-억새안부-지독한 칡넝쿨등로-시묘살이 가건물-시멘트 포장도로-갈림삼거리-능선진입-지독한 잡목등로-226.7봉(벤취쉼터들)-227 무명봉-249 무명봉-279.6봉-녹슨 철조망 등로-비포장 임도-독도 이경일님 응원판-229 무명봉-2차선 포장도로(육각정과 조망 안내도)-봉화산 등산로입구와 고봉산 전망대 안내판-시멘트 포장도로-능선진입-233 무명봉-억새등로-306.5봉-무명안부-시멘트 포장도로-능선진입-시멘트 포장도로-고봉산 전망대 안내판-나무계단-고봉산(362미터, 삼각점과 전망대 팔각정)-내리막 등로-시멘트 포장도로-비포장 임도-능선진입-이정표(봉화산 0.9 Km, 장등 1.3 Km, 고봉산 전망대)-활공장-능선진입-337 무명봉-바위전망대-바위우회-이정표(봉화산정상 0.2 Km, 장등 0.8 Km, 고봉산 0.9 Km)-통나무계단-운동기구들-봉화산(372.4미터, 백야곶봉수대, 산불감시초소)-능선진입-시멘트 포장도로 경계등로-시멘트 포장도로-비포장 임도-198.5봉-소나무와 억새능선-바위무명봉-디오션컨트리클럽 카트도로-바위너덜등로-이동통신탑-디오션컨트리클럽 골프장 West 3번홀-능선진입-묵은 비포장 임도-미니공동묘지-신설도로 공사장 절개지-22번 2차선 포장도로-공사중인 신설도로-밭 경작지-시멘트 포장도로-한우목장-세포교회 버스정류장(22번 2차선 포장도로, 세포교회)-밭 경작지-파란 그물망(밭 경작지)-억새능선-79.3 삼각점봉(준희님 80봉)-밤나무 과수원-비포장 임도-묘지들-억새등로-밭 경작지-2차선 포장도로(돌산개마을 버스정류장)-77번 2차선 포장도로(도로 공사중)-한우목장-이동통신탑-남경수산 진입입간판-시멘트 포장도로-이동통신탑-진주강공 묘지들-비포장 임도-묘지들-염소농장-시멘트 포장도로-77번 2차선 포장도로-힛도 버스정류장-백야대교-산행종료
산행거리 : 창모리 창모버스정류장에서 힛도마을과 백야대교까지 약 19.80 Km (스마트 폰의 GPX 기준)
산행시간 : 양호한 등로에서는 빠르게 지독한 잡목구간에서는 사투를 벌이며 너무나 힘들게 진행하여 09시간 31분 (06시 08분부터 15시 40분까지)
산행트랙 :
교통편 : 갈때-05:25 여수종합버스터미널 건너편의 버스터미널 정류장에서 23번 여수시내버스 탑승
06:05 여수시내를 투어하듯 돌아 나와 창모리 창모버스정류장까지 이동
올때-16:05 힛도 버스정류장에서 여수시내버스 28번 탑승
16:30 백야도 전지역을 돌아 나온 후 28번 종점에서 정차하였다가 정확히 16:30분에 백야도 출발
17:10 여수시청 지나 국민은행 앞에서 하차하여 도보로 진흥장까지 이동
18:50 진흥장에서 여천역까지 도보로 이동을 하였지만 식당이 없어 저녁식사를 위해 시내버스 666번으로 시내까지 이동
20:25 택시로 여천역까지 이동(7,000.-)
20:37 여천역에서 출발하는 KTX 용산행 탑승 (44,000.-)
23:35 용산역 도착 후 1호선 탑승하여 신도림역에서 지하철2호선이 끊겨 택시 탑승
24:10 집으로 무사 귀가
여수지맥이란 ?
호남정맥의 미사치에서 동쪽 백운산쪽으로 2.2 Km 떨어진 3면 경계봉 (약 820미터, 순천시 서면과 황전면 그리고 광양시 봉강면)에서 호남정맥은 북으로 올라가고 남으로 한줄기 가지를 쳐 서쪽으로는 순천동천으로 동쪽으로는 광양서천으로 물길을 가르면서 여수반도의 끝단인 여수시 화양면 안포리 힛도마을까지 이어지는 도상거리 약 81 Km의 산줄기를 말한다.
땅끝기맥, 호미지맥, 고흥지맥, 변산지맥등과 같이 산이름이 아닌 지형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지맥의 명칭을 붙였다.
지맥의 길이로는 인근의 고흥지맥이 더 기나 한반도에서 가장 길게 이어지는 산줄기라는데 큰 의미가 있겠다.
즉 함경도끝 연두봉에서 남쪽끝 여수의 힛도까지는 도상거리 2394 Km로 한반도에서 가장 긴 산줄기다
(연두봉- 온성기맥 131.8 Km-조두봉분기점-관북정맥 264.8Km- 설령봉분기점-백두대간 1434.2Km-영취봉분기점-호남정맥 482.2Km-미사봉 분기점-여수지맥 81Km-힛도, 2394Km).
실질적으로 갈수있는 남한땅 향로봉에서 힛도까지는 도상거리 1176.3 Km가 된다(향로봉-백두대간 613.1Km-영취봉분기점-호남정맥 482.2 Km-미사봉 분기점-여수지맥 81 Km-힛도, 1176.3Km)
환상의 조망과 풍경에 취해 잡목과 가시나무로 인한 고통은 잊은채 살고 싶었던 여수를 생각하며 마무리한 여수지맥에서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후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단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드디어 올 들어 첫 지맥 산행인 여수지맥을 마무리하는 산행이기에 기대도 크고 걱정도 되는 새벽이지만 더욱 신경 쓰이는 것은 지난 밤 제대로 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어제 오후부터 좋아진 왼쪽 엄지 발가락 통증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다.
그래도 늘 느끼는 것은 산줄기 이어가기 산행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그 끝자락을 볼 수 있다는 설레임과 기대가 있는 이 시간이 참으로 좋다는 것이다.
오늘은 약간 흐리고 남부지방부터 밤에 비 또는 눈 예보가 있기에 조금 이른 시간에 마무리를 하였으면 하는 바램이지만 지맥 등로가 어느 한곳이라도 기대만큼 좋았던 곳이 많지 않음을 알기에 그저 무탈하게 안전한 마무리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어제 먹었던 식당도 알고 있고 대중교통 편도 크게 불편하지 않기에 조금 일찍 일어나 샤워하고 배낭 챙겨 여관방을 나서는 시간이 새벽 4시 50여분을 지나고 곧바로 24시 편의점에 들려 음료수와 식수를 보충한 다음 식당으로 가 든든하게 허기를 달랜 후 조금 이른 시간인 새벽 5시 20여분에 여수종합버스터미널 건너 버스정류장에서 23번 버스에 탑승을 하는데 알고 보니 이 버스가 여수 시내를 한바퀴 돌아 결국 새벽 5시 47분 쯤 다시 여수종합버스터미널 앞 버스 정류장으로 뒤돌아 온다.
그리고는 곧바로 출발해 오늘 산행 들머리인 창무리 창무버스정류장에 도착을 하는 시간이 새벽 6시 5분 쯤으로 창무버스정류장도 두군데가 있어 반드시 문을 닫은 SK주유소 앞이라고 이야기를 하고서야 제대로 된 버스 정류장에서 내릴 수 있었다.
산행 들머리인 창무리 창무버스정류장에 내리니 찬바람이 불지만 어제보다도 춥지 않은 기온에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산행 준비를 해 보는 시간이다.
이제 여수지맥 산행도 막바지인 고봉산 팔각정 전망대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배낭 내려 잠시 쉬면서 주위를 살펴보니 일망무제로 펼쳐진 조망과 풍경이 너무나 황홀해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시간이다.
지난 4일간 진행을 하면서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기억은 잠시 사라지고 그저 눈 앞에 펼쳐진 환상의 신세계에 빠져 들며 왜 그토록 힘들고 어렵게 지맥 산행을 이어가고 있는지에 대한 답을 얻는 듯 하다.
방금 전 지나 온 육각정이 있었던 신설도로가 내려다 보이고 그 넘어로 279.6봉이 봉긋하게 솟아 있으며 그 좌측으로 화동저수지가 좁은 여수들판의 젖줄로서 남아 있다.
그 화동저수지 지나 저 멀리 오늘 아침에 넘어 온 안양산이 우뚝하고 그 우측 중앙부에 솟아 있는 비봉산이 헤어지는 아쉬움을 달래며 우측 뒤로 어제 올라 환상의 조망과 풍경을 즐겼던 안심산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는지 물어오지만 기약없는 답변에 아쉬움이 한가득 묻어 나는 시간이다.
등로 우측인 남서쪽으로는 거대한 장수리 해변이 드넓게 펼쳐져 있고 그 해안선을 따라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풍경이 한눈에 들어 오기 시작한다.
그 장수리 좌측 끝자락으로는 그 넘어 조발도와 연결하는 연륙교가 건설중인 모습도 눈에 들어 오고 그 뒤로 둔병도와 낭도 그리고 적금도를 지나 고흥의 팔영산이 톱날 능선을 자랑하며 봄으로도 당당하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풍경이 그림처럼 다가온다.
지난 해 겨울 잠시 스치며 만났던 곳들이기에 그 그리움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이 산객의 가슴속 깊이 고운 추억으로 다시 한번 쌓이는 모습이기도 하다.
바다를 접한 반도나 섬 산행에서만 느끼고 볼 수 있는 황홀한 풍경에 잠시 넋을 잃고 종주 산행임도 잊은 채 그저 이 순간을 즐기는 시간이 참으로 행복하다.
고봉산 전망대에서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멋진 조망과 풍경을 즐기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여수지맥에서 마지막으로 솟아 있는 이름있는 봉우리인 봉화산 백야곶봉수대에 올라 진행 방향인 남동쪽을 살펴보니 그곳에도 환상의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고 그 아름다움에 빠져 한동안 말 없이 그저 그 풍경을 가슴속에 담아 보는 시간이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산줄기가 백야도 앞 백야대교에서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하고 남해바다에 그 산줄기가 잠기는 모습에 잠시 울컥하는 마음도 들고 그 뒤로 펼쳐진 무수히 많은 섬들이 가슴석 깊이 알알히 박히며 언제 다시 저곳으로 내려가 또 다른 추억을 만들 수 있을지 계획도 세워보는 시간이다.
그 뒤 저 멀리 한번쯤 내려가 머물고 싶은 개도와 금오도도 보이고 그 좌측으로 오래 전 고운 추억을 남겼던 돌산도의 끝자락도 마지막 인사를 나누려고 마중 나온 듯 다가와 있다.
너무나 아름답고 환상적인 모습이기에 무슨말로 표현을 해도 충분하지 못함이 아쉬웠던 시간이었다.
이제 눈을 동쪽으로 돌리니 오래 전 하얀 벗꽃과 진홍빛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시절에 홀로 내려가 걸으며 황홀경에 빠졌던 돌산지맥 산줄기가 여전히 멋스런 모습으로 이 산객을 반갑게 맞이해 주고 있다.
좌측 돌산대교에서 시작되는 산줄기를 타고 우측 남쪽으로 내려가면 소미산 지나 무슬목이 대미산과의 연결고리로서 그 역활에 충실하고 그 우측으로 봉화산과 봉황산 지나 그 끝자락에 금오산이 그 모습 그대로 옛 추억을 들려주고 있다.
그렇게 한동안 돌산도 산줄기에 빠져 있다 깨어나니 바로 발 아래에도 아름다운 풍경들이 펼쳐져 있어 살펴보니 잠시 후 내려가 우측 한쪽을 걸어야 할 디오션 골프장이 드넓게 펼쳐져 있고 그 끝자락에 안포리와 목도가 또 다른 엄마의 따스한 품을 만들어 민초들이 살아가는데 큰 파도를 막아주고 있는 형상이다.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고 또 보고 싶은 풍경이고 조망들이기에 한동안 그곳에 머물며 시간 가는 줄모르게 즐겨봤던 봉화산 정상이었다.
어제 저녁에 제3구간 산행을 마치고 여수종합버스터미널로 뒤돌아 가는 시간은 상당히 멀고 길었다는 생각인데 새벽이라 그런지 채 20여분도 지나지 않은 새벽 6시 5분 쯤 드디어 여수지맥 마지막 구간의 산행 들머리인 22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창무버스정류장에 내리니 바로 앞에 보이는 SK주유소도 폐업을 해 어둠속에 이 산객 홀로 불어 오는 겨울 찬바람을 맞고 서 있는 모습이 처량해 보이기까지 한다.
20번대 버스 대부분이 여수종합버스터미널 앞 버스정류장에 정차를 하니 이곳에서의 대중교통은 생각보다 편리해 구간 나누기에 적정하다는 생각이다.
창무리(22번 2차선 포장도로, 명신 SK 주유소)는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에 있는 리로서 바다로 길게 뻗은 육지에 위치하여 양쪽 옆이 바다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부분의 지역은 낮은 산지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마을로는 창무, 성줏골, 배낭골, 백초 등이 있는데 창무는 문꾸지라 불렸는데 이는 창무 마을의 순 우리말 이름으로 곡화목의 마성 성문이 있던 곳이란 뜻으로 지어졌다.
성줏골은 창무마을과 용창초등학교 사이의 마을로 곡화목장의 성주가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고 배낭골은 마을 북동쪽에 있는 작은 마을로 배나무골이 변한 말이다.
백초는 마을 주변이 갈대와 같이 하얀색을 띤 풀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마을이 하얗게 보인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신추라고도 하였다.
산행 준비를 하는데 어제보다는 춥지 않아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창무버스정류장 우측으로 도로 확장 공사중인 곳을 지나 여수지맥 마지막 구간 산행을 시작하는 시간이 채 새벽 6시 10여분도 되지 않은 시간이다.
도로 확장 공사중인 곳을 지나니 시멘트 포장도로가 보이고 그 도로를 타고 조금 걸어 들어가니 갈림삼거리가 나타난다.
금호건설 현장사무소 가는 방향의 이정판이 서 있는 그곳 갈림삼거리에서는 좌측의 금호건설 현장사무소 가는 방향으로 걸어 진행을 하고 잠시 시멘트 포장도로 좌우측으로 밭 경작지를 두고 걸어가니 등로는 밭 경작지 가장자리로 이어지고 있다.
밭 경작지 가장자리를 타고 걸어 전진하니 금새 또 다시 시멘트 포장도로와 만나 그 도로를 타고 좌측으로 걸어가니 콘테이너 박스와 케이티 텔레캅 첨단경비구격이라는 간판이 보이는 금호건설에서 공사중인 나진소라간 지방도로공사 현장 사무소가 보인다.
그 현장 사무소를 지나 계속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마을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그렇게 한동안 걸어 전진하니 갈림삼거리가 나타나는데 그곳에는 콘크리트 뼈대 위에 커다란 식수통 같은 것이 올려져 있고 그 앞에는 좌측으로 창무옻닭집을 선전하는 LED 전광판이 반짝이며 길을 안내하고 있다.
계속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창무옻닭을 알려주는 이정판이 서 있고 그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또 계속 걸어 진행을 하니 드디어 그 창무옻닭 집 앞에 도착을 하는데 생각보다 큰 식당으로서 옻닭 뿐만 아니고 다양한 음식과 보양식을 제공하는 식당처럼 보인다.
그곳에서 등로는 창무옻닭 들어가기 직전 건물 우측으로 나 있는 소로를 통해 이어지고 잠시 걸어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창무옻닭집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인다.
그 창무옻닭집을 니자 이어지는 넓은 비포장 임도를 따라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비포장 임도는 좌측으로 약간 휘어져 이어지고 여수지맥 트랙은 우측 능선으로 연결되는데 아무리 찾아 봐도 오를 수 있는 등로가 보이지 않아 잠시 허둥대다 우측 사면으로 돌아 잡목이 덜한 곳으로 무조건 치고 오르며 어둠속에 잡목과 붙어 한바탕 극심한 전쟁을 치른다.
몇개의 선답자들 트랙을 준비하였는데 모두 약간씩 차이가 나고 그 여러개의 등로를 조합하며 어렵게 오르니 오르면 오를수록 더욱 거세지는 잡목들과 멍개나무 가시들로 인해 초장부터 온 몸의 진을 모두 빼내는 기분이다.
몇 번인가 긴 한숨을 내쉬며 너무나 어렵게 지독한 잡목지대를 뚫고 조금씩 전진해 오르니 드디어 커다란 바위암릉에 도착을 하고 잠시 배낭 내려 나뭇가지와 낙엽을 제거하고 불어 오는 찬바람에 흐르는 새벽 땀방울을 식혀보는 시간이다.
바위암릉을 따라 조금 더 오르니 잡목이 사라지고 지나온 등로 방향으로 뒤돌아 보니 어제 넘어 온 사방산과 안심산이 어둠속에서도 존재감을 뽐내고 그 좌측 저 멀리 여수시내의 화령한 불빛이 여명의 빛을 받아 조금씩 그 위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 여수시가지의 불빛 좌측으로는 오르지 못한 무선산과 비봉산 줄기가 좌측으로 흐르며 잡목속에 고생한 산객에게 소중한 선물을 선사하고 있는 듯 다가온다.
몇장의 사진을 더 담은 후 동쪽 하늘을 살펴보니 두꺼운 구름이 드리워져 오늘 일출은 불가능해 보이기에 일출에 대한 기대감을 버리고 다시 그 바위암릉을 넘어 오르니 약간의 잡목들이 보이지만 금새 넓은 제도권 등로와 만나 조금은 편안하게 걸어 보는 시간이다.
뚜렷한 등로가 좌측에서 올라오고 있어 살펴보지만 어디에서 올라오는지는 알 수가 없으니 추천하기도 어려운 등로이지만 아무튼 제도권 등로를 만나 조금은 안심을 해 본다.
잠시 편안하게 걸어 완만하게 오르니 갑자기 눈 앞에 이정표가 서 있고 살펴보니 우측으로 비봉산 정상까지 200미터 거리라는 방향과 거리표시가 되어 있는 비봉산 갈림삼거리이다.
어둠속에 보이는 것은 없지만 그냥 지나치면 어제 무선산처럼 후회될 것 같아 잠시 우측 오르막 등로를 타고 비봉산으로 향한다.
비봉산 갈림삼거리를 지나 우측으로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따라 조금 걸어 오르니 좌측으로 벤취쉼터 하나가 보이고 그 좌측으로 여명이 밝아오는 남해바다가 너무나 아름답게 펼쳐져 있어 잠시 발걸음 멈추고 몇장의 추억을 담아 본다.
흡사 많은 악어떼들이 여자만으로 들어가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의 멋진 풍경에 홀로 감탄사만 연발하고 다시 아쉬운 발걸음을 옮기며 잠시 후 내려오며 다시 한번 더 살펴보기로 한다.
멋진 조망을 즐기고 오르니 넓은 헬기장이 나타나고 그 헬기장을 가로질러 오르니 커다란 바위를 우회하며 통과하고 곧이어 작은 돌탑 위에 고사목 하나가 서 있는 곳을 지나 희준님이 걸어 놓은 정상판이 보이는 비봉산 정상에 도착을 해 추억 한장 남겨 본다.
비봉산(311미터)은 전라남도 여수시의 화양면 창무리와 용주리 일대에 위치한 산으로 해발고도는 311미터이고 화양면 가장 북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소라면과 경계를 이룬다.
옥적천 등 하천이 발원하면서 사방으로 흘러 저수지가 발달해 있고 692년(통일신라 효소왕 1) 건립된 것으로 알려진 용문사가 남사면에 위치한다.
여수군읍지와 여수읍지에 용문암이 서쪽 30리 마거산 아래에 있다고 하여 비봉산이 마거산으로 불린 것으로 보이며 그 후 조선지지자료의 순천에 화양면 창무리에 비봉산이 있다고 하여 일제강점기에 비봉산 지명이 비로소 등장한다.
1872년지방지도의 순천고 돌산진에 산 지명은 나오지 않으나 창무에 용문암이 나오고 그 뒤로 암석 산이 묘사되어 있어 비봉산을 짐작하게 하며 조선지형도에는 창무리 남쪽으로 지명이 표기되어 있다.
정상을 둘러보고 우측 작은 돌들이 보이는 곳으로 올라 살펴보니 어제 걸어 온 안심산과 여수시내 그리고 가막만이 여명의 빛을 받아 제대로 보이기 시작하지만 그 위로 떠 올라야 할 일출은 두꺼운 구름속에 갇혀 만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다.
잠시 더 비봉산 정상에 머물며 주위 풍경과 조망을 살펴 본 후 북쪽 돌담 위로 올라 내려가기 전 다시 한번 지나온 방향을 살펴보니 사방산과 안심산 그리고 여수시내를 지나 좌측으로 이어지는 여수지맥 마루금이 아름답고 그 여수시내 우측 저 멀리로는 봄철 진달래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진례산과 영취산 자락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오래 전 참으로 고운 추억을 남겼던 영취산 종주길이었기에 지금도 붉게 불타는 듯한 진달래 능선을 잊을 수가 없다.
혼자 보기 너무나 아쉬워 가족과 함께 살방살방 다녀오리라 생각을 했었는데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산객 홀로 즐기고 있으니 많이 아쉬운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비봉산 정상에서 잠시 즐긴 후 올랐던 등로를 타고 빠르게 내려가며 헬기장과 벤취쉼터를 지나니 이제 어느정도 여명이 밝아 오며 오를때와는 또 다른 그림같은 풍경들이 산객의 발길을 사로 잡는다.
잠시 몇장의 사진을 더 남기고 빠르게 걸어 내려가니 방금 전 헤어졌던 비봉산 갈림삼거리 이정표를 만나 사진으로 남기고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빠르게 걸어 내려가 본다.
다만 어제 점심때부터 갑자기 통증이 사라진 왼쪽 엄지 발가락이 여전히 신경이 쓰이는데 지난주보다는 훨씬 통증이 완화되어 어찌된 영문인지 어리둥절하다.
잠시 후 낙엽이 수북하게 깔려있고 제선충 방지포가 보이는 무명안부를 지나 완만하게 오르니 벤취쉼터 2개와 좌측으로 용문사 하산 방향이 표기된 이정표가 서 있는 233.3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양평의 은행나무가 유명한 용문사만 알고 있었는데 이곳 여수에도 용문사가 있어 찾아보니 비봉산 아래 위치한 용문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산하의 화엄사 말사로 등록되어 있다.
통일 신라 692년(효소왕 1) 주사승 문덕과 혜원 헌장 또는 당나라 고승 도증법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정확한 것은 확인할 수 없으며 그 후 수차에 걸쳐 중수하였고 가람 배치 형태는 무탑식 산지 가람으로 일주문이 없다.
내세울 것 없고 보여줄 것 없는 아담한 사찰이지만 피로에 지친 이들에게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여유를 줄 수 있는 곳이다.
특별한 종교가 없는 무교이지만 어릴적 부모님이 불교를 믿고 계셨기에 절과 암자를 자주 들려 이제는 어른이 되어서도 절과 암자에 들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푸근해짐을 느끼는 것은 아마도 어릴적 받은 영행이 큰 듯 보인다.
그 용문사 갈림삼거리 이정표가 서 있는 233.3봉을 지나 빠르게 걸어 진행을 하니 생각보다 등로가 좋아 콧노래를 부르지만 이 콧노래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기대가 되면서도 걱정이 앞서는 시간이기도 하다.
잠시 진행 방향으로 올라야 할 산줄기들을 가늠해 보고 진행하니 등로 좌측으로 원형의 작은 섬이 하나 내려다 보이는데 지도를 살펴보니 오도라 생각되지만 확실하지는 않고 그 뒤로 아름다운 돌산도 산줄기가 길게 펼쳐져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돌산도는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에 있는 섬으로 여수반도에서 남쪽으로 약 450미터 떨어져 있다.
백제 때는 돌산현에 통일신라 때는 여산현에 속했다가 고려초에 다시 돌산현이 되었고 1914년 여수군에 병합되어 두남면이 되었으며 그 뒤 1917년 두남면이 돌산면으로 개칭되었고 1980년에 돌산읍으로 승격되어 지금에 이른다.
섬의 이름은 8개의 큰 산이 있다는 뜻에서 산과 팔 및 대자를 합하여 돌산도라 했다고 전한다
최고봉인 봉황산(460미터)과 천왕산(385미터), 대미산(359미터), 금오산(323미터), 천마산(271미터) 등이 사방에 우뚝 솟아 있고 동쪽의 둔전리와 죽포리 일대에는 논밭으로 이용되는 평지가 펼쳐져 있다.
해안은 소규모의 만과 갑이 이어져 드나듦이 비교적 심하며 남동쪽해안은 대부분 암석해안이고 서쪽해안은 약간의 갯벌이 펼쳐져 있다.
기후는 대체로 온난하며 비가 많으며 곰솔나무와 동백나무, 후박나무, 팽나무 등이 자라고 취락은 해안 곳곳의 만입부와 만 안쪽에 집중되어 있으며 북동쪽 우두리에는 돌산등대가 있다.
주민은 농업과 어업을 겸하나 농업에 더 많이 종사하는데 농작물로는 쌀과 보리, 고구마, 감자, 고들빼기, 마늘, 목화, 돌산갓 등이 생산되며 최근에는 양잠업도 행해진다.
연근해 일대에서는 문어, 조기, 삼치, 멸치, 갈치, 쥐치 등이 잡히고 김과 굴, 홍합 등이 양식되며 특히 바람이 적은 서쪽해안에서는 풍랑이 적어 굴양식이 이루어지고 바람이 많은 동쪽해안에서는 홍합양식이 행해진다.
유물과 유적으로 남서쪽 군내리에 돌산향교, 신복리에 온적암지, 북쪽 우두리와 평사리 사이의 무슬목에 충무공전적비 등이 있다.
여수에서 출발하는 정기여객선이 수시로 운항되고 있지만 1984년과 2012년에 각각 개통된 돌산대교와 제2돌산대교로 인해서 교통이 매우 편리해졌다. 여수 앞바다에 있는 돌산도의 아름다운 자연경치, 문화재로 지정된 마을, 월암산성, 방죽포·무슬포 해수욕장 등은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으며 돌산대교와 오동도 인근을 일주하는 유람선과 금오도 및 마족항과 연결되는 정기여객선이 운항되고 있다.
조만간 다시 한번 들려 힐링하는 시간이라도 가진 후 올라 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진행방향인 남쪽과 좌측인 남동쪽으로 돌산도를 조망하며 빠르게 걸어 진행을 하니 돌산대교 쪽 하늘에선 일출이 시작되는듯 보이는데 두꺼운 구름을 뚫지 못하고 하늘만 붉게 물들이고 있다.
다시 뚜렷한 평이한 등로를 타고 전진하니 등로 좌측 용주리쪽의 아름다운 들판과 민가들이 그림처럼 내려다 보이고 그 넘어 저 멀리 돌산도 쪽 하늘은 금새 붉은 빛으로 변하고 있다.
잠시 후 무명안부를 지나 완만하게 오르니 붉은 띠지가 걸려있는 192 무명봉에 도착을 하고 잘 관리되지 않는 무명묘지 한기를 통과한 후 등로 좌측으로 웅동마을 하산 이정표를 만난다.
웅동마을은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나진리의 자연마을 중 한곳으로 나진마을 북동쪽 약 1.2 Km 지점에 있으며 고무골이라는 땅이름을 곰(웅)골이라는 뜻으로 해석하여 곰 웅자를 써서 웅동이라 하였다.
예전에 곰이 많이 살아서 또는 이 마을 주변의 땅의 모양이 곰의 형상을 하여서 고무골이라고 이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나 고무골은 움푹 들어간 곳을 뜻하는 구무와 골이 합쳐 이루어진 말로서 지형이 구멍처럼 들어간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등로는 우측으로 꺽여 진행이 되는 곳으로 이정표가 세워져 있어 길 잃을 염려는 없어 보인다.
웅동마을 갈림삼거리 이정표를 지나 여전히 뚜렷하게 나 있는 평이한 등로를 타고 빠르게 걸어 진행을 하니 저 멀리 나즈막한 안부가 보이고 그 안부 옆으로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데 이제 등로 우측으로 상전마을 가는 갈림삼거리 이정표이다.
상전마을에 관한 자료는 찾지 못하였는데 그 상전마을은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옥적리에 있는 자연마을 중 한곳으로 옥적리는 대부분 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작은 천이 흐르고 옥적저수지가 위치해 있다.
자연마을로는 산전, 논골 등이 있는데 산전은 18 세기말의 순천 고돌산진 지도를 보면 곡화목에 있었던 4 군데의 송전을 지금은 모두 산전으로 부르고 있는데 그 중에 화양면의 송전이 있던 곳이고 논골은 논이 많은 골짜기에 위치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상전 갈림삼거리 안부를 지나 약간의 잡목이 보이는 등로를 따르니 등로는 다시 완만하게 내려가다 넓은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상촌고개에 도착을 한다.
상촌고개는 도로 우측의 옥적리에 상촌마을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보이지만 그 상촌에 관한 자료를 찾지 못해 아쉽기만 하다.좌측의 나진리와 우측의 옥적리를 이어주는 17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지만 차량 통행은 거의 없는 듯 보이는 고개이다.
상촌마을이 있는 옥적리를 찾아 보니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에 속하는 법정리이자 행정리로서
옥적리는 마상과 신기, 대옥, 소옥, 산전마을을 병합한 법정리 이름이자 신기와 소옥마을만을 칭하는 행정마을 이름이기도 하다. 곡화목장이 있던 조선시대에 여러 마을의 목동들이 모여들어 말거리산이라 불렀으며 산자락이 남서쪽으로 길게 뻗쳐 큰 골과 작은골을 이루고 이 산의 모양이 옥피리를 닮았다 하여 마을 이름을 옥적이라 하였다 전해 온다.
비슷한 형상의 지형이었던 율촌면의 취적마을도 뒷산의 이름이 대통산으로 대나무통 모양으로 생긴 산의 모양에서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
옥적마을의 유래와 함께 옥피리형 지세에 대한 풍수의 설명도 전해오는데 옥피리형 지세는 자손들이 널리 이름을 떨치게 된다고 하며 이런 신비한 힘을 가진 옥피리산의 동쪽 큰 골짜기 마을은 대옥이라 하고 서쪽의 작은골 마을을 소옥이라고 한다.
신기마을은 우리말 땅이름으로 새터로 불리는 마을로서 임진왜란 이후에 인동장씨가 이주해 왔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이 마을 출신인 학자 장태지는 1858년에 태어나 돈녕부 동지사에까지 올랐다가 낙향하여 향리의 후학들을 가르쳤으며 마을 한가운데 자리 잡은 옛 초등학교는 1948년 개교하여 50여 년 동안 주변 마을 기초 교육을 담당하다 1999년 폐교되었다.
마상마을은 본래 몰산개라는 우리말 이름을 한자로 고쳐 부르게 된 이름으로 몰은 말(마)의 고어이고 곡화목장 시절 방목한 말을 몰이하여 잡았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가까운 돌산읍 마상포마을의 본래 이름도 몰산개였다고 전해 온다.
마상마을 남쪽 해안에는 기밀개라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기밀개는 해안가 마을이라는 뜻으로 한자로는 구미포라고 표기하였으며 석양과 어우러진 조용하고 한적한 어촌의 모습이 아름다운 곳이다.
산전마을은 곡화목장에 있었던 네 군데의 송전 중 한 곳으로 송전은 널(관)이나 집을 짓기 위한 목재나 배를 만들기 위한 선재 등 좋은 목재를 생산하기 위해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지정하여 함부로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고 가꾸었던 곳으로 송전의 나무를 함부로 벤 사람을 엄하게 다스렸던 기록이 난중일기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나타난다.
그 17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상촌고개를 지나 콘크리트 계단이 보이는 곳을 통해 능선으로 오르니 지독한 잡목구간이 펼쳐져 있고 한쪽에는 제선충 방지용포가 설치되어 있는데 그 방지포가 있는 곳만 조금 진행이 가능하다 그곳을 지나면 완전히 잡목으로 뒤덮혀 진행 자체가 불가능해 보인다.
너무나 힘들게 그 잡목구간을 헤치고 어렵게 오르니 잠시 후 뚜렷한 소나무 등로가 열리고 조금은 편안하게 걸어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나진가는 갈림삼거리 이정표가 보인다.
나진리는 전남 여수시 화양면의 리로서 동쪽으로 바다와 접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지역이 낮은 산지와 평지로 되어 있는데 앞 바다에는 죽도가 위치한다.
자연마을로는 나지개, 소장, 응동 등이 있는데 나지개는 나진리의 본 마을로 지명은 바다의 깊이가 낮아서 물이 빠지면 배가 다닐 수 없는 개에 위치한다고 하여 낮은 개를 소리나는데로 쓰면서 나진개로 굳어졌다.
소장은 처음 이 마을에서 살았던 사람이 하씨 성을 가진 사람이어서 하가당이라고 하였고 그 후에 소장기미라 부르다가 행정구역 개편시 소장이라 개칭하였으며 응동은 고무골이라고도 불리는데 고무골이란 예전에 곰이 많이 살아서 곰골이라 하다가 변형되었다는 설과 곰의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곰골이라 하다가 변형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 이정표를 지나니 바위암릉이 나타나고 그곳에서 진행 방향을 살펴보니 이제부터 걸어 넘어야 할 안양산과 그 뒤로 펼쳐진 여수지맥 마루금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한다.
한동안 그 바위암릉에서 진행 방향과 좌측의 가막만 방향을 살펴본 후 조금 더 올라 뒤를 돌아 보니 가막만 넘어 저 멀리 돌산도 넘어 두꺼운 구름속에 붉게 불타는 듯 변해 오는 하늘이 아름답지만 그만큼 오늘 날씨가 흐리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렇게 조망과 풍경을 즐긴 후 오르니 예쁜 벤취쉼터 하나가 설치되어 있는 198.9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그러고 보니 방금 전 지났던 나진 갈림삼거리에서 등로는 우측으로 크게 꺽어 이곳 198.9봉으로 올라 왔는데 아마도 잡목으로 인해 직선으로 진행하지 못하고 뚜렷한 등로가 생기면서 이곳 등로를 타고 갈지자 행보를 한 것처럼 보이는 트랙이자 등로이다.
그 벤취쉼터 하나가 설치되어 있는 198.9봉을 지나 빠르게 걸어 진행을 하니 이번에는 등로 우측으로 옥적 하산 갈림삼거리 이정표가 보이는데 옥적리 역시 화양면의 법정리 중 한곳이다.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에 속하는 법정리이자 행정리인
옥적리는 마상, 신기, 대옥, 소옥, 산전마을을 병합한 법정리 이름이자 신기와 소옥마을만을 칭하는 행정마을 이름이기도 한데 곡화목장이 있던 조선시대에 여러 마을의 목동들이 모여들어 말거리산이라 불렀다.
산자락이 남서쪽으로 길게 뻗쳐 큰 골과 작은골을 이루고 이 산의 모양이 옥피리를 닮았다 하여 마을 이름을 옥적이라 하였다 전해 온다.
비슷한 형상의 지형이었던 율촌면의 취적마을도 뒷산의 이름이 대통산으로 대나무통 모양으로 생긴 산의 모양에서 마을 이름이 생겨났으며 옥적마을의 유래와 함께 옥피리형 지세에 대한 풍수의 설명도 전해오는데 옥피리형 지세는 자손들이 널리 이름을 떨치게 된다고 한다.
이런 신비한 힘을 가진 옥피리산의 동쪽 큰 골짜기 마을은 대옥이라 하고 서쪽의 작은골 마을을 소옥이라고 한다.
옥적리는 밀양박씨와 인동장씨 및 전주이씨 등이 처음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하고 조선시대에 간행된 호구총수에 옥적동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대옥, 소옥, 신기, 논골, 마상 기밀개를 병합하여 법정리인 옥적리가 되었다.
옥적리는 창무리와 사이에 있는 비봉산 자락에 형성된 마을이며 일제강점기에 신기마을 남쪽에 간척지가 조성되었으며 마상마을 서쪽으로는 포구가 있다.
여수시청에서 승용차로 20분 거리에 있으며 북쪽으로 전어로 유명한 감도마을과 접하고 남쪽은 화동리와 동쪽은 비봉산과 벌곡재를 경계로 면 소재지인 나진리와 접하고 있다.
주민 대부분이 농업을 주업으로 하지만 소득 작물이 적기 때문에 젊은 사람이 없으며 화양면의 경우에 바다를 끼고 있는 마을은 어촌계가 형성되어 주민 생활에 큰 도움을 주지만 옥적리는 포구가 있는 마상마을을 제외하고는 바다와 인접하지 않아 농업과 축산업을 하는 농가가 많은 편이다.
그 옥적 갈림삼거리 이정표를 지나니 다시 진행 방향으로 올라야 할 여수지맥 마루금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고 그렇게 평이하게 빠른 발걸음으로 걸어 전진하니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다시 바위 암릉이 나타나는데 그 바위암릉 위에 엉뚱하게도 벤취쉼터 하나가 설치되어 있어 운치를 더해 준다.
다시 바위들이 등로를 채우고 있는 199 무명봉을 지나 잡목들이 보이는 뚜렷한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등로는 다시 완만하게 오르며 이어지고 있다.
잠시 오르니 등로 위에는 많은 낙엽들이 깔려 있고 잠시 후 벤취쉼터 하나가 다시 보이는데 그 벤취쉼터 우측으로는 석교로 내려갈 수 있는 갈림삼거리 이정표가 서 있고 그 방향으로는 219.2봉이 바로 위에 올려다 보여 잠시 들렸다 오기로 한다.
석교 역시 옥적리의 자연마을 중 한곳인데 많은 자연마을에 대한 자료들이 있는데 유독 석교와 상전 및 상촌마을에 대한 자료만 찾을 수 없어 아쉽다.
잠시 소나무들이 정상을 지키고 있는 219.2봉으로 가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석교 갈림삼거리 이정표가 서 있는 곳으로 뒤돌아 나와 이제는 진행 방향의 우측 방향으로 걸어 내려가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석교 갈림삼거리 이정표를 지나 가파르게 걸어 내려가니 그곳 등로에는 잎이 넓은 활엽수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 있어 진행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
조심하며 어렵게 걸어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화양면의 마을이 아름답게 내려다 보이고 그 앞으로 가막만과 오도 지나 저 멀리 돌산도의 산줄기가 아름답게 눈에 들어 오기 시작한다.
그 위로 두꺼운 구름속에 강렬한 태양이 숨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모습이 환상적이다.
등로 좌측 바로 아래에는 화양중학교 건물과 드넓은 운동장도 내려다 보인다.
멋진 조망을 즐기고 출발하려는데 등로 좌측 저 멀리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 돌산도가 계속 마음속에 남아 제대로 걸어 진행이 불가능 하기에 다시 발걸음 멈추고 조금 더 머물다 출발한다.
잠시 내려가다 앞을 보니 이제부터 걸어 진행을 해야 할 나즈막한 마루금이 보이고 그 우측 앞으로 높은 안양산이 보이는데 사진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 산줄기 넘어 저 멀리에는 오후에 넘어야 할 고봉산과 봉화산이 보이고 그 뒷쪽으로 백야도쪽 풍경도 살짝 보이기 시작한다.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과 조망에 다시 발걸음이 자꾸만 느려지는 시간이다.
그 등로 우측으로는 직진으로 내려가다 우측으로 휘돌아 올라야 할 안양산이 지척으로 다가와 있는데 그 안양산 앞으로는 288.2봉이 솟아 있어 안양산의 본모습을 살짝 감추고 있기도 하다.
이제 활엽수 낙엽이 수북히 쌓여 있는 완만하게 내려가는 등로를 타고 빠르게 걸어 전진하니 소나무와 동백나무가 보이는 무명안부를 통과하고 다시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등로는 아주 뚜렷하게 잘 정비되어 있어 진행에 아무런 제한이 없다.
그렇게 한동안 걸어 내려가니 등로는 다시 우측으로 크게 휘돌아 내려가 곧바로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고갯마루에 도착을 하는데 도로 건너 낙석방지용 철조망에는 곡화목장 둘레길이라는 안내판이 보이고 도로 우측으로 돌아 잠시 걸어가니 도로 좌측으로는 시멘트 포장도로 하나가 분기하여 내려가는데 그 앞에는 제일타조농장이라는 입간판이 서 있다.
곡화목장은 말을 놓아 길렀던 조선시대의 목장으로 원래 백야곶목장이라고 하였으나 조선 중기에 이르러 곡화목장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1451년(세종 16)의 기록에 전라도 백야곶목장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전라도 지역에 목장이 집중적으로 세워졌던 1445년(세종 10)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여수시 소호동 해안으로부터 화양면 이천리 오천마을까지 이어진 곡화목장의 경계를 구분 짓고 말이 달아나지 못하게 돌로 쌓은 분계성의 흔적이 화양면 곳곳에 남아 있다.
성을 쌓았던 사람들이 성벽에 새겼다는 흥양(현재의 고흥)과 보성 등의 글자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전라도 여러 고을의 사람들이 동원되어 쌓은 성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중기 한때 곡화목장에는 1027필의 말이 수용되어 있었고 목자는 446명이었다고 하는데 철 따라 목장을 이동하여 봄에는 통구미산, 여름에는 이영산, 가을에는 천마산, 겨울에는 서이산에서 군마를 길렀으며 밤에는 말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산등성이 1 Km에 걸쳐 등불을 켰다고 전해진다.
그 제일타조농장으로 들어가는 시멘트 포장도로쪽으로 들어가자마자 등로는 좌측 능선 방향으로 뚜렷하게 나 있어 들머리 찾기에는 전혀 문제없이 진행이 되고 있다.
잠시 능선으로 오르다 뒤돌아 보니 방금 전 걸어 내려 온 능선 좌측으로 거대한 태양광 발전판들이 설치되어 있어 이곳에도 친환경 발전설비에 관심이 많은 듯 보이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친환경 발전을 위해 거대한 자연이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현장이기도 하다.
계속 뚜렷한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커다란 소나무 옆에 제선충 방지포가 보이는 128 무명봉을 넘고 잠시 뒤 등로 우측으로 많은 묘지지대를 지나 등로 좌측으로 나진(논골)으로 하산할 수 있는 갈림삼거리 이정표를 만난다.
이곳에서 보이는 나진마을은 전남 여수시 화양면 면사무소 소재지로서 바다의 깊이가 낮아 물이 빠지면 배가 다닐 수 없는 낮은 개란 뜻의 나지개가 본래의 마을 이름이었고 호구총수에도 나지포라고 하였으며 1990년대 초에 발행된 마을유래지에서는 나진이라 하여 비단 같이 아름다운 포구여서 이름 지어졌다고 전하고 있다.
나진마을 남쪽의 큰나지개마을은 나진마을에서 처음 사람이 살았다고 하여 10가구도 안 되는 작은 마을이지만 큰나지개라고 부르고 있으며 항로표지기지창 건물의 뒤편 언덕의 이름은 당머리로서 지형이 닭의 머리처럼 생겨서 당머리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하는데 한자로는 계두라고도 하며 여수의 어항단지 율촌면의 여흥리마을과 화양면의 세포마을 등에서도 같은 모양의 지형에서 계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진마을은 바닷가에 있어서 나루가 있던 곳이 많은데 현재는 나루꼬지와 조금나루 등의 마을 이름이 불리고 있다.
나진마을 안 골짜기는 골짜기마다 재미있는 이름이 불렸는데 골짜기가 가늘게 이어진 가는골, 밭이 많은 전골, 논이 많아서 논골, 복숭아밭이 있던 복성밭골, 살쾡이가 살았던 바위 씰가지박골, 피가 많이 자라던 피밭골, 입구가 넓어서 아귀 같이 생겼다는 아구창골 등 저마다 지형의 특징을 잡아서 특색 있는 이름으로 불려왔다.
나진리 논골 하산 갈림삼거리 이정표를 지나니 등로는 고속도로 같은 넓은 비포장 임도로 이어지고 잠시 후 시멘트 포장도로가 지나는 갈림사거리에 도착을 한다.
이제 안양산정상까지는 2 Km 거리가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가 보이고 좌측으로는 나진 논골마을로 그리고 우측으로는 옥적리 석교마을로 내려갈 수 있는 갈림사거리이다.
그 시멘트 포장도로를 건너 계속 이어지는 고속도로 같은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조금은 빠르게 진행을 해 본다.
완만한 오르막 등로로 이뤄진 넓은 고속도로 같은 비포장 임도를 따라 빠르게 걸어 오르니 등로 양쪽으로 잘 관리되고 있는 많은 묘지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렇게 조금 더 걸어 오르니 앞으로 한동안도 더 그 길게 이어지는 묘지지대를 따라 진행이 이어지고 있다.
살펴보니 나진공동묘지 지대이다.
그렇게 한동안 그 묘지지대를 타고 걸어 올라 그 묘지지대 상부에서 잠시 뒤돌아 보니 가막만과 방금 전 걸어 넘어 온 219.2봉이 빤히 올려다 보인다.
다시 잡목 능선으로 오르니 등로는 다시 뚜렷하게 나 있어 편안하게 걸어 오르고 또 다른 묘지 2기를 지나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바위암릉지대가 나타나는데 그곳에는 칼로 무우를 지르듯 세조각으로 정교하게 잘려진 바위들이 보여 사진에 담다 보니 오래 전 낙동정맥 산행을 하면서 단석산에서 만났던 김유신장군이 칼로 베었다는 바위가 생각나는 시간이었다.
그 바위암릉 지대를 지나 우측 바위쪽으로 올라가 보니 방금 전 걸어 진행해 온 여수지맥 마지막 마루금이 너무나 아름답게 펼쳐져 있어 그 이름들을 불러본다.
숨어 있는 나진공동묘지 지대를 지나 2차선 포장도로 부분이 움푹 들어가 있고 그곳을 지나 128 무명봉을 넘으니 2차선 포장도로를 지나 태양광 발전기와 그 뒤로 219.2봉 그리고 그 우측 뒤로 비봉산도 빤히 올려다 보인다.
이제 그 산줄기도 이 두발로 직접 걸어 넘어 왔기에 어렵지 않게 그 이름을 불러 줄 수 있어 다행인 시간이다.
그 219.2봉 좌측인 서쪽으로는 옥적리 마을이 첩첩산중으로 다가오고 우측인 동쪽으로는 가막만과 돌산대교쪽 희미한 풍경들 그리고 그 좌측으로 돌산대교와 가까운 곳의 구봉산과 장군산 및 고락산 줄기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그 산줄기 사이로 숨어 있는 여수 시가지 뒷편으로는 봄 진달래 터널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호랑산과 영취산 자락들이 그 옛날 추억을 들추며 마음은 벌써 그곳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언제나 다시 한번 여유를 부리며 힐링하듯 다녀갈 수 있을지 아쉽기만 하다.
그 바위암릉 위 단석과 전망바위를 지나 진행을 하니 등로는 소나무와 잡목이 혼재된 뚜렷한 등로로 이어지고 등로 옆 곳곳에 제선충 방지용포가 보이기 시작한다.
별 특징 없는 평이한 등로를 타고 빠르게 전진하니 앙증맞은 비봉산과 안양산 가는 방향만 표기된 이정판이 보이고 곧이어 바위들이 보이면서 박달나무 등로도 나타난다.
바위 위에는 많은 활엽수 낙엽들이 쌓여 미끄럽기에 조심스럽게 진행을 하니 선답자들의 띠지가 걸려 있는 288.2봉에 도착을 해 목례를 드리고 사진 한장 남겨 본다.
다시 솔갈비가 수북히 쌓여 있는 완만하게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멋드러진 편백나무 군락지를 통과하고 잠시 힐링하듯 안부를 지나 완만하게 오르니 나즈막한 돌담들이 보이는데 대부분 묘지를 보호하기 위한 돌담들인데 이곳 돌담은 그 높이가 너무 낮아 용도를 모르겠다.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관목으로 이뤄진 오르막 등로를 따라 꾸준하게 걸어 진행을 하니 잠시 후 바위와 잡목들이 보이는 사이로 안양산 정상을 알리는 이정표 하나가 보이기 시작한다.
안양산(327미터)은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화동리와 나진리 및 서촌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327미터이며 옛 기록에는 화산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호남정맥 상의 순천 계족산에서 분기한 여수기맥이 앵무산과 무선산 및 안심산을 지나 이곳 안양산을 통과하고 비봉산을 거쳐 백야곶까지 이어진다.
정상에 서면 동쪽으로 가막만과 서쪽으로 여자만(여수 지역에서는 순천만을 여자만이라 부른다)이 보인다. 조선시대에 말을 기르던 곡화목장(백야곶목장)이 설치되었던 곳이며 서쪽 기슭에 지금은 폐사된 대청사라는 절의 암자였던 안양암 터가 있다.
지질은 중생대 백악기 화성암인 중성화산암류로 이루어져 있다.
여수군읍지에 안양산이 서쪽 40리에 있으며 산 아래 감목관의 아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고 하였는데 여기서의 목장은 곡화목장이다.
조선지지자료의 순천에는 안양리에 있는 산으로 기재되어 있고 1872년지방지도의 순천 고돌산진 등 옛 지도에 목장은 있으나 산 지명은 찾을 수 없는 대신 목장 뒷산이 묘사되어 있어 안양산으로 추정된다. 조선지형도에는 화동리 북쪽의 산으로 표기되어 있고 여수여천향토지에는 화동리의 진산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곳 안양산 정상에는 이정표 하나가 전부이고 그곳을 넘어 조금 더 걸어가니 억새공터 한쪽에 무인산불감시 카메라와 좌측 등로 앞 잡목에 준희님이 붙여 놓은 안양산 정상판이 전부이다.
그곳 안양산 정상부를 둘러보고 몇장의 사진을 남긴 후 등로 좌측을 살펴보니 바로 아래에 소장제라는 저수지가 내려다 보이고 그 넘어 가막만 지나 돌산도가 다시 아름답게 펼쳐진 모습도 눈에 들어 온다.
가막만은 북쪽의 여수반도(소호동과 시전동, 웅천동, 국동, 경호동 등)와 서쪽의 고돌산반도(화양면), 동쪽의 돌산도(돌산읍), 남쪽의 개도(화정면 개도리) 등으로 둘러싸인 만으로 길이는 약 15 Km에 폭은 9 Km이며 가막만에는 소경도와 대경도, 금죽도 등의 유인도와 가덕도, 가막도,가장도, 삼도, 두력도 등의 무인도가 있다.
만의 중앙에서 남쪽으로 갈수록 깊어져 남쪽의 만 입구에서는 최대 수심 40미터에 달하고 수온은 온대 해역의 전형적인 계절 변동 특성을 보이며 가막만의 밑바닥은 모래나 자갈이 거의 없는 갯벌로 이루어져 있어 다양한 생물들이 서식한다.
수산자원 보호지역 및 청정해역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소호동 앞바다에서는 진주담치 양식, 돌산읍과 화양면 앞바다에서는 굴 양식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또 대경도와 소경도 근해에서는 새조개, 소호동 근해에서는 전어, 개도와 화태도 근해에서는 멸치와 갈치 및 조기 등이 잡힌다.
여수항을 기점으로 백야도와 사도, 둔병도, 낭도 등을 운항하는 연안선이 가막만을 통과한다.
생각보다 초라한 안양산 정상부에서 잠시 머물며 몇장의 사진을 남기고 좌측으로 꺽어 잡목을 헤치고 내려가니 등로는 뚜렷하게 이어지는데 그 등로 위에 많은 낙엽들이 쌓여 잇어 미끄럽기에 조심하며 걸어 내려가 본다.
잠시 내려가니 여전히 등로는 뚜렷하게 나 있는데 그 등로 주위에는 키가 크지 않은 관목들과 잡목들이 우거지고 등로쪽에는 빛바랜 억새가 자라고 있어 조금은 특이한 등로로 기억되는 곳이다.
잠시 더 걸어 내려가다 등로 좌측을 보니 그곳에는 여전히 가막만과 골산도 산줄기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그렇게 한동안 걸어 내려가니 그동안 잘 보이지 않던 파란 잎이 인상적인 동백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곧이어 높은 돌담으로 보호되고 있는 묘지지대를 지나 등로 좌측으로는 안골로 그리고 우측으로는 청량마을로 갈 수 있는 갈림사거리 안부에 이정표가 서 있다.
이곳은 전남 여수시 화양면 화동리로서 화동리는 남쪽으로는 산지가 있으며 동쪽으로는 바다가 펼쳐져 있고 대부분의 지역이 낮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마을로는 안양동, 대청몰, 산전 등이 있는데 안양동은 노승 한 분이 심씨 집 앞을 지나다 마을 이름을 안양이라 지어 부르면 자식들이 고이 자라며 부모에게 효를 다해 받들어 모시며 마음이 편하게 되리라 라고 하였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대청몰은 마을을 이루기전 이 마을에 대청사라는 큰 절이 있었다 하여 대청몰이라 불린다고 전해지나 책이나 기타의 기록 등에서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며 산전은 대청마을 남쪽 산골에 있는 마을로 조선조에는 송전이 있던 곳이다.
그 갈림사거리 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이곳에도 몇개의 나즈막한 돌담들이 흩어져 보이고 곧이어 잡풀이 무성하게 자란 관리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무명묘지 한기를 통과한다.
다시 소나무와 동백나무가 혼재되어 있는 오르막 등로를 오르니 문인석이 서 있는 묘지들을 지나고 잠시 더 걸어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파란 그물망이 나타나는데 무슨 용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산약초나 임산물을 재배하는 곳은 아닐까 예상을 해 본다.
그렇게 계속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보이지 않던 바위들이 보이고 그 바위들 틈으로 잡목들이 자라고 있는 231.5 삼각점봉에 도착을 하는데 준희님은 이곳을 229.4봉이란 정상판을 걸어 놨다.
그 삼각점봉을 지나 몇 발자국 걸어 내려가니 묘지2기가 나타나고 그 묘지 앞마당에 자리 깔고 쉬면서 준비한 빵과 과일로 허기를 달래며 주위 조망과 풍경을 살펴 본다.
등로 앞 좌측으로 생각보다 큰 화양농공단지가 내려다 보이고 그 뒤로 가막만과 ㄱ=돌산도가 여전히 자리를 지키며 아름답게 다가온다.
이제서야 조금씩 주위 조망을 살펴보며 그 이름을 불러줄 수 있을 정도가 되니 더 알고 싶고 가고 싶은 곳들은 왜그리 많아지는지 모를 일이다.
한동안 그 묘지에서 쉬면서 허기를 달래고 시간을 보낸 후 묘지 우측 소나무 사이로 나 있는 내리막 등로를 타고 천천히 걸어 진행을 해 본다.
잠시 내려가다 등로 좌측을 보니 여전히 같은 풍경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고 이제는 화양농공단지가 조금 더 자세히 드넓은 지역으로 내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내려가니 낙엽 등로를 지나 잎이 파란 동백나무 등로로 이어지고 또 다른 무명묘지 지대를 통과하니 제법 많은 묘지들이 내려다 보이는데 그곳에서 진행 방향을 살펴보니 우측 소나무 사이로 화양고등학교는 숨어 있고 그 좌측으로 화동고개와 시멘트 포장도로 지나 밭 경작지 위 이동통신탑 그리고 103 무명봉과 226.7봉이 빤히 올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그 좌측 저 멀리 여수지맥 마지막 봉우리들인 고봉산과 봉화산도 보이기 시작하여 이제 여수지맥 산행도 그리 멀지 않았음을 느끼는 시강이기도 하다.
묘지가 있는 곳에서 진행 방향을 조망한 후 내려가니 등로 우측으로 화양고등학교 건물이 소나무 사이로 보이기 시작하고 등로는 여전히 계속 묘지들 사이로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한동안 묘지지대를 따라 내려가니 등로 좌측 앞으로 화양농공단지가 생각보다 크고 넓게 다가오는데 오늘은 일요일이라 그런지 조용하기만 하다.
잠시 후 시멘트 포장도로에 도착을 해 그 도로를 타고 우측으로 걸어 내려가니 갈림삼거리를 만나 그곳에서도 우측으로 걸어 내려가 본다.
잠시 후 드넓은 마늘과 양파밭을 지나 붑가 밭 경작지에서 무엇인가를 캐고 있어 여쭤보니 다래를 캔다면서 겨울에는 검정 천막을 덮어두면 이렇게 싱싱한 다래를 겨울에도 수확이 가능하다며 혼자 왜 산에 다니냐며 걱정을 해 주신다.
인사를 드리고 걸어 내려가니 도로 우측으로 여수화양고등학교 정문이 나타나고 그 좌측으로 화동리 화동고인돌이 나타나는데 사진 한장 남기는 사이 여수로 나가는 시내버스가 지나가 그 버스를 타고 여수시내로 나가고 싶다는 유혹을 잠시 받아 본다.
몇장의 사진을 남기고 진행하니 곧바로 화동로 2차선 포장도로인 화동고개 일명 화양고개에 도착을 하고 좌측으로 몇발자국 걸어가니 도로 좌측으로 방금전 지나온 화동 고인돌에 대한 설명판이 보인다.
화동고개나 화양고개는 이곳 지명을 따 붙인 이름으로 화동은 화동리를 화양은 화양면을 의미하는데 고개 이름으로서는 큰 의미가 없는 듯 보인다.
이곳 고인돌은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화동리에 있는 청동기시대 무덤군으로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돌무덤이다.
고인돌 상석은 대부분 무덤의 봉분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으나 어떤 집단의 공동 무덤을 상징하는 묘표석 또는 종족이나 집단의 모임 장소나 의식을 행하는 제단 또는 기념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는데 여수 지역의 고인돌은 남방식 고인돌이 변화된 것으로 넓고 판판한 1매의 상석을 지석이 받치고 있는 형태를 띠고 있다.
화동리 화동 고인돌군은 5개 군락에 60기 이상의 고인돌 상석이 분포하는데 이곳 여수화양고등학교 앞에 있는 고인돌은 화동리 화동 고인돌 나군에 속한 고인돌로서 화동리 화양고등학교 정문 앞에 고인돌 26기가 위치한다.
고인돌은 좁은 공간에 모여 있으며 현재 마을 주민과 학생들의 휴식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상석 중 2기는 상면에 선정비가 음각되어 있고 상석 1기에는 선정비 2기가 새겨져 있으며 다른 상석 1기에는 선정비 3기가 음각되어 있다.
이 상석들 앞쪽에는 3기의 감목관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화동리 화동 고인돌군과 인접한 안골마을 고인돌군에서는 발굴 조사를 통해 좁은 공간에 원형집석유구를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연접되어 있는 다수의 매장 주체부가 확인되었으며 10점의 마제 석검과 18점의 석촉이 발견되었다.
화동리 화동 고인돌군도 많은 수의 상석이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주변 지역과의 비교를 통한 청동기시대 묘제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화동리 화동고인돌에 대한 설명판을 읽어 본 뒤 계속 그 화동로 2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 진행을 하니 화양고라는 버스정류장이 보이고 곧이어 관파이창보선생공덕비가 서 있는데 그 옆을 보니 이창보님은 화양고등공민학교 교가작사가였다.
그 공덕비를 지나자마자 도로 우측의 억새능선을 따라 오르니 또 다른 묘지2기가 보이고 그곳에서 등로 우측을 살펴보니 화양면 화동리 마을이 생각보다 크게 펼쳐져 있어 놀라는 시간이다.
화양면은 대한민국 전라남도 여수시 서부에 있는 면으로 여천군에서 1998년 4월 1일 여수시로 통합되었으며 면 전체가 남쪽으로 돌출하여 북쪽을 제외한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대부분의 지역이 200미터 내외의 구릉성 산지를 이루며 곳곳에 안양산(324미터), 이영산(336미터), 봉화산(371미터) 등이 솟아 있고 경지는 면 중앙부와 바다로 흘러드는 하천연안 곳곳에 분포하며 주요 농산물은 쌀과 보리, 고구마, 딸기, 수박 등이며 한약재로 이용되는 황금 등의 약초를 밭에서 재배한다.
용주리에는 돌산포 만호진 터와 용문사가 있으며 대섬(죽도)은 봄철에 백로와 각종 희귀 철새들의 도래지로 알려져 있다.
면 남단의 국도와 백야대교를 통해 화정면과 육로로 연결되고 행정구역은 서나진리와 용주리, 창무리, 이천리, 옥적리, 화동리, 서촌리, 이목리, 장수리, 안포리 등 10개리가 있으며 행정리 기준으로는 31개 리가 있는 면이다.
묘지를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다시 2차선 포장도로와 만나 그 도로를 건너고 앞에 보이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오르니 비어있는 드넓은 밭 경작지로 올라서는데 밭 경작지 좌측으로는 민가와 드높은 이동통신탑이 보인다.
밭 경작지를 가로질러 걸어 오르니 지독한 억새등로가 나타나고 어렵게 그 억새 등로를 지나 오르다 잠시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지나온 231.5 삼각점봉과 화양고등학교 그리고 이동통신탑이 줄지어 늘어선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렇게 지나온 마루금을 확인하고 다시 오르다 등로 좌측을 보니 화동삼거리 도로표지판 지나 화양농공단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고 등로 우측으로는 화양면 화동리 마을이 아름답게 내려다 보인다.
그 억새 등로를 지나니 다시 지독한 잡목 능선이 기다리고 어렵게 그 잡목을 헤치며 걸어 오르니 커다란 바위들이 등로에 보이고 그 바위틈마다 제법 굵게 자란 관목들이 들어 차 진행에 상당한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그렇게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커다란 바위 옆으로 돌담을 쌓은 103 무명봉에 도착을 하는데 이 돌담은 무슨 용도인지 모르겠다.
돌담을 지나니 오랫동안 묵은 묘지 위에는 제법 굵은 관목이 자라는 곳을 통과하고 다시 바위 등로를 따라 걸어 내려가니 또 다시 많은 묘지들이 보이고 그 묘지 사이로 나 있는 등로를 따르니 빛바랜 억새 능선이 가을 정취를 물씬 풍기고 있다.
잠시 가을을 느끼며 그 억새 능선을 타고 여유를 부리며 걸어가니 여름철 지독하게 자랐다 말라 죽은 칡넝쿨 지대를 만나 그 위를 걸어가다 앞을 보니 이제부터 진행해야 할 시멘트 포장도로와 그 넘어 지독한 잡목 능선 지나 226.7봉이 빤히 올려다 보인다.
여름철이었다면 진행이 불가능해 보이는 지독한 칡넝쿨을 밟으며 쉽게 통과하고 여유롭게 걸어 내려가니 잔디가 깔린 억새 등로가 다시 나타나 그 등로를 따라 손쉽게 내려가 본다.
등로 좌측으로는 띄엄띄엄 보이는 민가들 사이로 한가로운 시골 풍경이 펼쳐져 있고 그렇게 잠시 더 걸어 내려가니 시멘트 포장도로를 만나 우측으로 걸어 가 만나는 갈림삼거리에서는 또 다시 우측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 전진을 해 본다.
그 포장도로를 따라 잠시 걸어가다 방금 전 걸어 내려온 도로 우측 방향을 살펴보니 이 산객이 내려 온 바로 우측 방향으로 말로만 듣던 시묘살이를 하고 있는 나이드신 할아버지 한분이 묘지 앞 허름한 거푸집에서 나와 로프를 들고 무엇인가 하려는지 밭 가장자리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다.
이 시대에 아직도 시묘살이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 몇번이나 돌아보고 또 처다보지만 이 산객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이기도 하다.
계속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도로 좌측 비닐하우스들과 붉은색 사각 석유통이 보이는 곳 좌측으로 시멘트 포장도로가 분기되고 그 분기된 도로를 따라 오르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도로 우측으로 비닐하우스를 두고 걸어 오르니 비어있는 듯한 축사가 나타나고 그 축사 뒤로 돌아 능선으로 진입하는 들머리를 찾아 보니 이미 잡목과 잡풀들이 무성하게 자라 잘 보이지 않는다.
잠시 지나온 방향을 조망하고 사진 한장 남긴 후 우측으로 빙 돌아 생활 쓰레기들이 보이는 곳을 지나 올라가니 묵은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고 그 임도를 타고 걸어 오르니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는지 잡목과 잡풀들이 우거져 진행에 상당한 어려움을 느낀다.
잠시 커다란 편백나무와 소나무 등로를 타고 오르니 갑자기 등로가 사라지며 지독한 잡목이 앞을 가로막아 이곳에서 한동안 온 몸에 생채기를 만들며 너무나 힘들게 기어 오르니 갑자기 몇개의 벤취쉼터들이 전혀 관리되지 않은 상태로 흩어져 있는 226.7봉에 도착을 해 긴 한숨을 토해내며 밀려오는 고통을 참아 본다.
오랫동안 사람들 발길이 닿지 않았음을 한눈에도 알 수 있는 그 226.7봉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그곳에도 몇개의 벤취쉼터들이 보이는데 역시나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 있어 황량함만 더하고 있다.
사진 몇장 남기고 우측으로 크게 휘어지는 등로를 타고 조심스럽게 진행을 하니 잠시 완만하게 내려가던 등로가 평이하게 이어지고 곧이어 동백나무와 자작나무들이 자라면서 조금은 이국적인 풍경도 선물을 해 준다.
어렵게 그 잡목과 관목 등로를 지나니 다시 나즈막한 돌담들이 보이고 평이한 안부를 지나 다시 지독한 잡목지대로 들어 선다.
이리 찔리고 저리 채이면서 어렵게 걸어가니 무한도전 띠지가 반겨주고 그곳을 지나 머리를 땅에 박고 엎드려 줄기덩쿨 지대를 어렵게 빠져 나가며 트랙을 확인하니 해발고도 227미터의 무명봉이다.
유격 훈련도 이런 유격 훈련이 없을 정도로 엎드리고 뛰어 넘으며 온 몸에 생채기를 만들다 보니 약간의 바위들이 보이는 공간으로 빠져 나오고 그곳에서 나뭇가지와 낙엽을 털어 낸 후 다시 희미한 활엽수 관목 사이로 나 있는 희미한 등로를 찾아 출발하니 제법 뚜렷한 등로와 만나는 249 무명봉에 도착을 해 지점을 확인해 본다.
계속 이어지는 돌담을 지나면서 살펴보니 그 돌담 안에는 묘지가 보이는데 그 묘지들도 오랫동안 관리가 되지 않은 듯 잡목들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다시 희미해지는 등로를 찾아 어렵게 진행을 하니 여수지맥 산행 내내 도움을 준 보만식계의 산길따라 라는 노란 띠지가 길라잡이를 해 주고 있어 목례를 올리고 전진한다.
다시 오르는 듯 마는 듯 그렇게 완만하게 오르며 진행을 하니 이제는 비실이부부의 띠지가 걸려 있는 279.6봉에 도착을 해 긴 한숨을 내쉬며 그동안 고생하며 진행해 온 시간을 정리해 본다.
그 279.6봉을 지나니 또 다시 관리가 전혀 되지 않고 있는 무명묘지 위에는 보기에도 험악한 잡목들이 제세상 만난 듯 무성하게 자라는 모습이 보기에도 좋지 않고 재빨리 그 묘지를 지나 완만하게 내려가니 약간의 잡목들이 보이지만 방금 전 오르막 등로보다는 좋은 등로 상태이기에 발걸음을 빨리 옮겨 본다.
잠시 후 등로 좌측으로 녹슨 철조망 두가닥이 보이고 한동안 그 녹슨 철조망을 타고 걸어 진행을 하니 약간의 잡목들이 방해를 하지만 견딜만한 수준이기에 빠르게 걸어 내려가 비포장 임도와 만나 이제부터 룰루랄라 콧노래를 불러보는 시간이다.
잠시 그 비포장 임도를 따라 내려가니 커다란 편백나무 지대를 지나 회색빛 억새가 한들거리는 가을 정취를 느끼는 안부도 지나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잡목 등로를 타고 걸어 전진을 해 본다.
잠시 더 걸어 오르니 등로 옆 커다란 소나무에 독도 이경일님이 종이코팅지에 응원판을 매달아 놔 목례를 하고 힘을 받아 빠르게 거어 진행을 한다.
계속 이어지는 낙엽 깔린 넓은 비포장 임도를 따르니 임도 좌우측으로는 가는 나뭇가지를 가진 잡목들이 우거지기 시작하지만 등로까지는 아직 큰 영행을 미치지 못하기에 편안하게 걸어 오르고 그렇게 잠시 더 걸어 오르니 웅덩이가 보이는 229 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그 무명봉을 지나 다시 낙엽 깔린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등로는 더욱 뚜렷해 지고 잠시 후 잡목 사이로 넓은 포장도로가 내려다 보이는데 지도를 보니 도로 표시가 있는 곳이다.
빠르게 걸어 내려가니 최근에 새로 보수를 하면서 포장을 한 듯한 넓은 2차선 포장도로가 내려다 보이고 좌측으로는 육각정과 등로 좌측의 가막만과 돌산도쪽 조망도도 보인다.
잠시 그 2차선 포장도로로 내려가 육각정 옆 조망안내도를 보면서 가막만과 돌산도쪽 풍경을 살펴보며 그 이름을 맞춰 본다.
제일 먼저 저 멀리 돌산도 좌측 끝자락에 소미산과 우측의 대미산을 이어주는 무슬목이 있고 그 앞쪽 가막만에 희미하게 까막섬과 소죽도 및 금죽도가 보일듯 말듯 떠 있다.
그 대미산 우측 능선을 따라 천황산과 봉황산이 보이고 그 우측 끝자락에 보여야 할 금오산은 산줄기 건너편으로 있기에 보이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
그 앞 가막만에는 작은 섬들이 몇개 떠 있고 가까운 원포마을 해변가 지나서는 목도가 가깝게 내려다 보인다.
그렇게 그곳 육각정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고 그 새로 포장된 듯한 2차선 포장도로를 건너 봉화산등산로입구와 고봉산전망대 가는 표시를 해 둔 이정판이 서 있는 1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천천히 걸어 오르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도로를 타고 잠시 오르니 등로는 다시 좌측으로 보이는 넓은 비포장 임도로 이어지는데 어느 선답자의 트랙에는 그냥 이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 올라가도 빙 돌아가기는 하지만 고봉산전망대와 이어지는 듯 보인다.
하지만 정확하지 않기에 도로를 버리고 좌측 비포장 임도를 따라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방금 전 통과한 2차선 포장도로와 육각정이 바로 발 아래로 내려다 보인다.
다시 그 비포장 임도를 지나 바위가 깔려 있는 능선으로 오르니 관목들이 보이고 등로는 희미하게 사라지는데 그냥 방향만 보고 완만하게 걸어 올라 평이한 소나무 한그루가 보이는 233 무명봉 능선에 도착을 한다.
이제부터 등로도 뚜렷하고 큰 고도 차이도 느끼지 못하면서 멋진 억새 등로도 나타나기에 빠르게 걸어 전진하니 선답자들의 띠지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곧이어 많은 가지들이 함께하는 단단한 활엽수 한그루가 서 있는 306.5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출발한다.
그 306.5봉을 지나 관목들이 자라고 있는 넓은 공터 안부를 통과하고 걸어 진행을 하니 최근에 만들어진 듯한 시멘트 포장도로 위에 도착을 한다.
그 시멘트 포장도로를 건너 다시 약간의 잡목들이 보이는 능선으로 들어가니 등로는 그럭저럭 견딜만 하고 잠시 후 곧바로 짧은 절개지가 올려다 보이는 곳에 커다란 바위들이 앞을 가로막는 곳을 조심해 통과하니 방금 전 헤어졌던 시멘트 포장도로와 다시 만나는데 그 포장도로 건너편 능선 방향으로 선답자들의 띠지가 달려 있다.
도로 좌측을 살펴보니 잠시 후 고봉산을 다녀 와 다시 만나야 할 이곳 시멘트 포장도로가 길게 이어져 있고 그 끝자락 저 멀리에는 남해바다와 백야도 그리고 그 백야도 뒤에 숨어 있던 금오도가 빤히 내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부터는 포장도로 건너 능선으로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그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잠시 더 우측으로 걸어 오르니 몇대의 차량들이 주차되어 있고 그 주차장 좌측으로 고봉산 오름 나무계단이 길게 설치되어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 온다.
그 길게 설치된 나무계단을 타고 힘들게 걸어 오르니 방근 전 주차장에 주차를 시킨 차주분들과 일행들이라 생각되는 한무리의 사람들이 여행을 왔다가 잠시 들렸는지 고봉산전망대에 머물다 내려오기 시작하고 인사를 나눈 후 빠르게 오르니 드디어 팔각정이 보이고 그 우측으로 정상판과 삼각점이 보이는 고봉산 정상에 도착을 해 추억 한장 남겨 본다.
고봉산(363.7미터)은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장수리에 있는 산으로 자세한 명칭유래는 알 수 없으나 지명에서 나타나 있듯이 인근 주변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지질은 중생대 백악기 화성암인 중성화산암류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산 전체의 경사가 가파른 해발 363.7미터의 육산이고 기후는 온화하며 평균의 연강수량을 보인다.
산정부에는 기반암이 노출되어 토양층이 얇게 형성되어 있으나 산록 일대는 기반암이 풍화된 두터운 토양층이 잘 발달되어 있는데 이런 토양은 식생발달을 유도하여 식생이 울창한 편이다.
따라서 거기에서 발원하는 화양천은 이 지역의 중요한 물줄기를 이루고 있으며 이 물줄기는 화양면에서 가장 큰 수원지인 화동제를 이루어 화양면 서촌들의 수원이 되고 있다.
고봉산은 장수리 중앙에 솟아 있으며 여수화양고등학교에서 남쪽으로 2 Km 지점에 있는 산전마을 뒷산으로 화동리와 장수리 사이에 있다.
여수시에서는 남서쪽으로 직선거리 10 Km 지점에 있으면서 지방도 22호선 변에 있으며 원포에서 화동으로 넘어가는 동안 산이 높기 때문에 하천과 지류가 발달하여 화동제, 원포제, 안정제 등 저수지가 발달하였으며 이들 상수원은 원포마을, 안정마을, 화동마을의 농업용수로 이용된다.
고봉산 정상 이정판 앞에서 추억 한장 남기고 곧바로 2층 전망대로 오르니 일망무제로 펼쳐진 조망과 풍경이 그동안 힘들게 걸어 내려 온 고통은 모두 날려버리고 그저 환상의 탄성만 지르게 만들고 있다.
제일 먼저 진행 방향인 남동쪽을 살펴보니 바로 아래 시멘트 포장도로와 활공장이 내려다 보이고 그곳 안부를 지나 오르면 저 멀리 봉수대와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봉화산이 빤히 보이고 그 우측 저 멀리 남해바다 지나 오늘 산행 남머리인 힛도마을 앞으로 백야대교와 백야도가 아름답게 내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그 뒤로 올망졸망 펼쳐져 있는 많은 섬들이 다시 이 산객의 가슴속에서 잠자던 섬 이야기를 꺼내 주는데 맥 잇기 산행이 어느정도 마무리될 때까지는 그 큰 그리움을 참아야 하기에 아쉬움도 남는 시간이다.
전망대 우측인 서쪽으로는 장수리와 공정리 해변이 너무나 아름답게 펼쳐져 있고 그 해변을 따라 77번 포장도로와 민가들이 올망졸망 이어져 있는 풍경이 산객의 넋을 빼앗아 버린다.
그 공정리에는 바다 위 섬인 조발도 사이에 다리 공사를 하는지 거대한 건설 공사장이 내려다 보이고 그 뒤로 둔병도와 낭도 및 적금도 지나 고흥땅으로 이어지는 환상의 조망도 길게 펼쳐져 있다.
그렇게 아름다운 조망을 즐기다 보니 저 멀리 고흥 땅 우측으로 하늘을 향해 톱날 능선을 자랑하고 있는 팔영산이 눈에 들어 오고 그 우측으로 지난해 가을에 너무나 힘들게 걸었던 고흥지맥 산줄기도 찾아 보지만 너무 멀어서 그런지 흐릿한 실루엣만 보여주고 있다.
이제 눈을 돌려 지나온 방향인 북쪽을 살펴보니 방금 전 통과해 넘어 온 팔각정이 있는 2차선 포장도로 안부가 빤히 내려다 보이고 그 뒤로 279.6봉과 좌측의 하동재 넘어 안양산과 비봉산 그리고 우측 저 멀리 안심산 자락까지 시원하게 조망되기 시작한다.
그 뒤로 지난 해 겨울에 걸었던 여수지맥 초반부와 호남정맥 산줄기를 찾아 보지만 하늘금과 맞닿아 있는 흐릿한 등로는 보이지만 분간은 어려워 보이는 그런 풍경이다.
너무나 힘들게 진행을 했기에 모두 통과한 후 살펴보는 황홀한 이 풍경은 그래서 더욱 진하게 가슴속 깊이 간직될 수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눈을 돌려 동쪽을 살펴보니 안포리 마을이 아름답게 내려다 보이고 그 앞으로 가막만이 드넓게 펼쳐져 있으며 그 가막만 넘어에는 환상의 섬인 돌산도가 길게 뻗어 있는 모습도 한눈에 들어 온다.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고 또 새롭게 다가오는 풍경과 조망에 다시 발걸음 멈추고 조금 더 시간을 보내는 순간이다.
안포리는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에 속하는 법정리이자 행정리로서 안포리라는 명칭유래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안정과 원포 및 세포마을을 합병하여 지어진 법정리 이름이지만 안정리만을 이르기도 한다.
안정리의 순 우리말 이름은 안징이인데 안은 사물의 안쪽이고 징이는 지역을 뜻하는 접미사로 안징이는 산으로 둘러싸인 안쪽 지역의 마을이란 뜻이다. 여천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집에 의하면 안정을 한자로 풀이하여 편안하고 고요한 마을이어서 이름이 지어졌다고 하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산행 내내 등로 좌측으로 돌산도를 바라보며 걸어 온 것 같은 느낌으로 살펴보는 시간이다.
많은 시간 그곳 고봉산 정상과 전망대에서 머물며 고운 추억을 남기고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남동쪽 관목 사이로 나 있는 등로를 따라 내려가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잠시 내려가며 살펴보니 이곳 나무들은 대부분 단단한 질감을 가지고 있는 관목들로서 진행에는 큰 어려움이 없어 빠르게 내려가니 고봉산 전망대 오르기 전 만났던 시멘트 포장도로를 다시 만나고 이제 편안하게 그 도로를 타고 우측으로 걸어 내려가 본다.
잠시 내려가며 앞을 보니 여전히 백야도가 저 멀리 도로 끝자락에 걸려 있듯 다가와 있다.
그렇게 한동안 그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 내려가니 그 시멘트 포장도로가 좌측으로 180도 꺽어 내려가는 곳 우측 직진 방향으로 비포장 임도가 분기하는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하고 당연히 시멘트 포장도로를 좌측으로 버리고 직진의 비포장 임도를 따라 걸어간다.
잠시 후 등로는 우측 능선 방향으로 이어지는데 지도를 살펴보니 비포장 임도와 우측 능선 등로 어느곳을 선택해도 잠시 후 활공장 근처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 있다.
우측 능선으로 들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시루봉(원포)가는 갈림삼거리 이정표가 보이고 그곳을 지나 계속 부드러운 등로를 따라 빠르게 진행을 한다.
원포마을도 안포리의 자연마을 중 한곳인데 세포마을과 달리 별도의 참고 자료는 없는 듯 하다.
이곳 역시 나즈막한 돌담들이 보이는데 그 돌담안으로는 보여야 할 무덤들이 사라져 또 다른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부드러궁 능선 등로를 타고 빠르게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는 다시 넓은 잔디공터로 이어지는데 그 공터 좌측으로는 방금 전 헤어졌던 시멘트 포장도로가 다시 이어지고 있다.
이곳 공터는 지도를 보니 활공장으로 나와 있는데 활공을 즐기기에는 조금 좁고 아래가 바다쪽 절벽이라 어떨지 모르겠다.
그 우측 앞으로 가 우측 장수리 해변과 고흥쪽 바닷가를 살펴보고 저 멀리 남쪽으로 남해바다에 떠 있는 많은 섬들을 살펴보니 상화도와 하와도를 지나 나루도도 보이기 시작해 잠시 오래 전 옆지기와 좋은 추억을 남겼던 내외나루도 이기에 그 추억을 떠 올려 보는 시간도 가져보며 피식 웃어 보는 시간이다.
다시 그 활공장을 지나 좌측으로 시멘트 포장도로를 보내고 우측 능선으로 들어가니 이곳 역시 관목들이 빼곡하게 보이지만 그 관목 사이로 등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완만하게 오르는데엔 전혀 문제가 없다.
잠시 더 걸어 오르니 등로 위에 제법 큰 바위들이 박혀있고 그 바위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누군가 소원을 빌며 쌓은 작은 돌탑을 지나 337 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그 무명봉을 지나니 제법 큰 바위들이 등로 옆에 보이기 시작하고 곧이어 커다란 바위 하나를 우회한 후 341 미터인 바위암릉으로 올라 진행 방향을 살펴보니 봉화산이 이제 지척으로 다가와 있다
.
봉화산 정상부를 살펴본 후 그 정상부 우측을 살펴보니 바다관광타운과 장등해수욕장이 빤히 내려다 보이고 그 앞으로 77번 2차선 포장도로도 나란히 달리는 모습이 보인다.
그 도로를 따라 앞으로 가보면 저 멀리 오늘 걸어야 할 여수지맥 마지막 비산비야가 눈에 들어 오고 그 우측으로 백야대교 건너 여수시내버스인 28번 버스로 투어를 즐기게 될 백야도가 가깝게 다가와 있다.
그 뒤로 저 멀리 금오도도 이제 제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하는데 오래전 고운 추억을 되살려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바위암릉에서 조금 더 머물며 시간을 보내고 주위 풍경을 사진에 담은 후 진행을 이어가니 커다란 바위가 앞을 가로막아 좌측으로 우회하며 통과한다.
바위지대를 지나면서 잠시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올랐다 환상의 조망과 풍경을 즐겼던 고봉산이 벌써 저 멀리 멀어지며 작별 인사를 건네고 있다.
다시 나타나는 바위들을 지나 조심하며 걸어가니 눈 앞에 인공 구조물들이 보이고 다가 가 살펴보니 등로 우측으로 장등과 장등해수욕장 방향으로 내려갈 수 있다는 이정표와 함께 구급함과 안전수칙에 대한 안내판이 서 있다.
장등마을은 장수리의 자연마을 중 한곳으로 장수리는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에 속하는 법정리로서 명칭유래를 살펴보면 장수리는 장척과 수문마을의 앞 글자를 따서 장수리라 하였다.
장수리는 공정, 자매, 수문, 장척, 장등마을이 통합된 법정리로서 각 마을의 이름 또한 유래가 있는데 장수리의 자매마을은 마을 뒷산에 자생하는 매화나무가 많아서 지어졌다고 전해지며 자매라는 이름의 한자를 풀이하여 나온 이름으로 자매마을의 우리말 땅이름은 잘미라고 하였다.
장척마을 동쪽의 장등마을의 옛 이름은 마을이 봉화산 자락과 함께 긴 산등성이를 이루고 있어 진등이라고 불렀으며 진등은 한자로 쓰면서 장등으로 바뀌었다가 불빛이 멀리 비추라는 뜻의 등자로 바뀌었다.
마을 뒷산에 백야곶 봉수대가 있어 봉수대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마을에 전해오고 있으며 마을의 풍수가 좋아 인물이 난다는 믿음과 멀리 떠날수록 마을 이름의 뜻 때문에 큰 인물이 된다고 전해오기 때문이다.
사진 한장 남기고 그 안부를 지나 빠르게 걸어 오르니 통나무 계단이 길게 설치되어 있고 힘들게 그 통나무 계단을 오르니 운동기구들과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는 봉화산 정상에 도착을 하는데 그 봉수대 앞에는 화양곡화목장길 안내도와 백야곶봉수대에 대한 설명판이 서 있다.
백야곶봉수대는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장수리와 안포리 사이 봉화산에 있는 조선시대 봉수대로서 봉수는 변방 국경의 긴급한 상황을 중앙 또는 변경의 기지에 알리는 군사상 목적으로 설치된 통신 수단이다.
적이 침입했을 때 현지에서 직접 전투를 담당한 군사적 고지이기도 한데 백야곶 봉수대는 화양반도에서 백야도를 왕래하는 관문으로 기능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백야곶 봉수대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자세한 축조 연대나 기능을 알 수 없지만 위치상으로 볼 때 동쪽 돌산 방답진 봉수대와 연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야곶 봉수대의 위치는 화양면 장수리와 안포리 사이에 있는 해발 371미터의 봉화산 정상에 위치한다.
국방의 최전선에 설치되었던 연변 봉수의 연대는 1447년(세종 29)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높이 7.5미터에 둘레 21미터로 쌓고 연대 밑의 각 면은 9미터가 되도록 하였으며 그 주위에 외침을 막기 위해 폭 3미터에 깊이 3미터의 참호를 판 후 그 위에 약 1미터의 날카롭게 깎은 말목을 박았다.
이 연대 위에 집을 지어 무기와 생활용품을 보관하도록 하였는데 내지 봉수는 높이 3미터의 봉화를 올리는 아궁이만 설치하였고 백야곶 봉수대에는 승평지와 동국여지승람 등에 봉군 6명과 오장 2명이 배치된 것으로 전한다.
백야곶 봉수대는 현재 잘 복원되어 체험학습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백야곶봉수대 설명판 앞에서 셀타놀이를 하면서 추억 한장 남기고 뒤로 돌아 산불감시초소 앞으로 나 있는 돌계단을 타고 봉수대 위로 오르니 이곳 역시 일망무제로 펼쳐진 아름다운 조망과 풍경으로 인해 추위도 잊은채 한동안 그 봉수대를 돌아가며 많은 사진과 추억을 남겨 본다.
제일 먼저 이제부터 걸어 내려가 마무리를 해야 할 여수지맥 마지막 날머리 방향을 살펴보니 급하게 내려가던 마루금이 디오션 골프클럽을 만나 잠시 평이하게 진행되고 그 뒤로 비산비야를 이루며 백야대교까지 이어지는 산줄기가 그 질긴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백야대교 넘어로는 백야도가 당당하게 서 있고 그 뒤로 개도와 금오도가 주위에 작은 수많은 섬들을 거느리며 봄으로도 당당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동쪽으로는 안포리쪽 마을과 해변 그리고 가막만이 아름답게 내려다 보이고 그 넘어 저 멀리 좌측의 우두리쪽 나즈막한 능선을 타고 소미도와 무슬목 그리고 대미산을 지나 천황산과 봉황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이 산객을 목놓아 부르고 있는 듯 하다.
그 우측 끝자락에 보여야 할 금오산과 향일암쪽을 살펴보지만 이쪽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모습이기에 그저 상상만으로 그 향일암을 살펴 본다.
사진 우측 끝자락에 보이는 삼섬은 밀물과 썰물에 따라 섬이 되기도 하고 육지가 되기도 한다는데 이 시간은 밀물과 썰물의 경계에 있는 시간은 아닐까 생각도 해 본다.
눈을 북서쪽으로 돌리면 방금 전 즐기며 많은 추억을 남겼던 고봉산이 좌측으로 봉긋하게 솟아 잇고 그 우측 줄기를 따라 저 멀리 안양산이 올려다 보인다.
그 우측 저 멀리 어제부터 이 산객이 거어 온 산줄기가 길게 이어지지만 지금까지 많이도 불러주고 불러 봤던 이름들이기에 이 시간은 그저 바라보고 감탄사만 연발하는 시간이 되었다.
다시 이곳으로 내려 와 이런 풍경을 만나기는 힘들겠지만 저 백야도와 근처의 섬들을 찾으면서 기회가 되고 마음이 변하면 한번쯤 더 올라 올 기회는 있지 않을까 예상도 해보는 시간이다.
눈을 북서쪽으로 돌리니 고봉산 좌측으로 장수리 해변과 마을들이 여수지맥 산줄기에 가려 반토막만 보이고 그 좌측으로 조발도와 둔병도 및 낭도가 아름다운데 그 넘어 저 멀리 고흥의 팔영산이 다시 그 존재감을 드러내며 멀리에서도 확실하게 그 모습을 분간할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참으로 많은 추억과 기억을 남겼던 고흥과 팔영산이기에 오래토록 잊혀지지 않고 이렇게 기억속에 남아 되살려 주곤 할 것이다.
저 고흥은 조만간 다시 내려갈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기에 팔영산에 올라 옛 추억을 더듬어 볼 기회가 있기를 기대도 해 본다.
팔영산까지 돌아 본 후 눈을 서쪽으로 돌리니 드넓은 남해바다가 펼쳐지고 그 바다 위에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이 너무나 아름다운 환상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상계도와 하계도가 보이고 그 좌측으로 상화도와 하화도 그리고 그 중간에 장구도도 내려다 보이고 그 뒤 저 멀리 고흥반도에서 뻗어 내려 온 내나루도와 외나루도가 남해바다쪽으로 삐죽히 빠져 나와 독립된 산군을 일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언제나 저 나루도에서 우주를 향한 미지의 꿈을 펼칠 기회가 있을지 안타까우면서도 희망을 가벼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잊혀지지 않을 멋진 풍경과 조망을 즐기고 다시 그 봉수대를 내려 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남쪽의 잡목 사이로 나 있는 등로를 타고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약간의 잡목들이 보이는 낙엽 등로를 따르니 생각보다 등로 상태는 좋아 발걸음이 빨라지고 잠시 후 돌담속에 안전하게 잘 관리되고 있는 무명묘지 한기를 지나 등로 좌측으로 시멘트 포장도로를 만나지만 사진으로 한장 남기고 계속 그 포장도로 우측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진행을 이어가 본다.
잠시 후 낙엽이 푹신하게 깔려 있는 곳에서 배낭 내려 남아 있는 간식과 과일로 허기를 달랜 후 출발하니 금새 시멘트 포장도로 위에 도착을 하고 그 포장도로를 건너 능선으로 오르며 맥 잇기 산행은 이어진다.
둔덕을 넘어 나타나는 비포장 임도를 건너 다시 능선으로 올라가니 약간의 잡목들이 저항해 보지만 견딜만 하고 그렇게 잠시 더 걸어 오르니 이제부터 생각지도 못한 지독한 잡목과 멍개가시나무 그리고 사람 티보다 조금 더 자라고 있는 빼곡한 소나무 군락지로 인해 진퇴양난에 빠진다.
전진도 힘들고 그렇다고 후퇴도 쉽지 않은 등로를 타고 잡목을 다리 삼아 멍개가시나무 위에 얹은 채 한발 두발 참으로 어렵게 걸어 전진하니 그래도 시간은 많이 걸렸고 온 몸에 극심한 고통을 수반했지만 그 198.5 봉우리 정상에 도착을 하니 멍개가시나무만 이 산객을 반겨준다.
이렇게 극심한 잡목과 가시나무 지대였음을 알았다면 차라리 이곳 봉우리를 오르지 않고 우회했으면 좋았을 것을 봉우리 하나 확인을 하면서 이토록 극심한 고통과 어려움을 겪었던 기억도 많지 않은 듯 싶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 없었다.
멍개가시나무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그 198.5봉을 지나 진행을 이어가니 이곳 등로 역시 지독하게 빼곡하게 자라고 있는 소나무와 솔잎이 등산복을 파고들며 피부를 극심하게 자극하고 그 고통에 홀로 육두문자를 꺼내며 후회해 보지만 자기가 좋아 올라 이런 상황을 만들었기에 그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다시 이리저리 내려 갈 수 있는 작은 공간을 찾아 한발 두발 어렵게 전진한다.
너무나 힘들게 그 지독한 소나무와 가시나무 등로를 헤치고 내려가다 멍개가시나무 줄기 하나에 목덜미부터 얼굴까지 긴 영광의 상처를 만들었는데 다행이 피는 흐르지 않지만 퉁퉁 부어 있어 마치 옆지기의 손톱에 긁힌 것처럼 보기 흉한 상처를 만들었다.
그래도 힘들게 좁은 공간을 찾아 내려가니 오래된 묵은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고 빛바랜 억새가 자라고 있는 그 임도를 따르니 임도 우측에 커다란 바위가 나타나고 그 바위 아래에서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지옥에서 빠져 나온듯한 198.5봉이 부드러운 미소로 약을 올리고 그 좌측 뒤로 봉화산이 올려다 보인다.
그 커다란 바위를 지나면서도 등로에는 키 작은 소나무들이 빼곡하게 자라는데 시간이 흘러 몇년이 지나면 이곳 198.5봉은 오를 생각도 못하고 전부 우회해야 되는 마루금은 아닐까 걱정도 되는 시간이다.
그래도 묵은 비포장 임도라 걸어 진행하는데 도움을 받고 그렇게 잠시 더 걸어 내려가니 등로는 절개지 상단부로 이어지는데 내려다 보니 좌측 앞으로 드넓은 디오션 골프장이 펼쳐져 있고 절개지 바로 아래에는 골프장 카트 포장도로가 지나는데 그 카드도로까지 내려가는 등로가 또한 만만치 않다.
지독하게 자라난 사람 키보다 훨씬 크게 자랐던 잡풀들이 말라 죽으며 등로를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어 등로 찾기를 포기하고 방햐만 잡아 잡풀이 조금 덜한 곳을 찾아 내려가니 온 몸은 완전히 낙엽과 잡풀 조각들로 뒤덮혀 버려 사람 몰골이 아니다.
그런 와중에도 진행 방향으로 마지막 여수지맥 날머리와 백야도를 확인하며 어렵게 내려가니 드디어 골프장 카트도로에 도착을 하고 간단히 쓰레기와 낙엽들을 제거하고 다시 둔덕을 넘으니 그 둔덕 위에도 지독한 잡풀들이 우거져 있어 낙엽들이 다시 온 몸으로 파고 든다.
그 둔덕을 넘으니 위에서 내려봤을 때 바위너덜길 위에 도착을 하고 그 바위너덜길을 통해 진행을 하니 짧은 절개지를 내려가 비포장 임도에 무사히 도착을 해 자리 펴고 배낭 내려 낙엽과 나뭇가지 그리고 쓰레기들을 제거한 후 물 한모금 마시고 출발한다.
잠시 더 그 비포장 임도를 따르니 이동통신탑이 보이고 그곳을 지나 골프장 티박스로 내려가니 디오션컨트리클럽 West 3번 홀이다.
그곳을 지나 능선으로 들기 직전 잠시 뒤돌아 보니 지나올 때 극심했던 고통은 모두 사라지고 고운 추억으로 남겨지는 풍경이다.
골프장을 지나 능선으로 들어가니 커다란 참나무 한그루 밑에 제법 큰 바위들이 등로에 깔려 있고 조심해 내려가니 등로는 다시 낙엽이 수북하게 깔려 있는 잡목 능선으로 바뀌고 있다.
이장된 듯한 묘지 위에서 백야도와 그 우측 남해바다를 살펴보고 걸어 내려가니 등로는 다시 묵은 비포장 임도를 만나 족ㅁ은 여유를 가지고 편안하게 걸어 보는 시간이다.
그렇게 한동안 편안하고 빠르게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는 갑자기 높은 절개지 위에 도착을 하는데 아래를 살펴보니 22번과 77번이 교차하는 교차로 부근의 도로를 모두 새로 넓히고 직선화 하는 공사를 하고 있는 듯 보인다.
조심해 조금 더 내려가 시멘트 도로 위에서 배낭 내려 낙엽과 나뭇가지 그리고 쓰레기들을 배낭과 등산복에서 모두 제거하고 잠시 더 쉬면서 진행 방향을 살펴보니 좌측 앞으로 안일초고가 있는 세포마을이 생각보다 넓게 내려다 보인다.
그렇게 배낭 정리하고 그 시멘트 포장도로를 지나 절개지 사면을 타고 내려가니 77번 도로가 지나는 공사장을 지나 직선화 공사중인 새로운 77번 도로를 타고 세포마을 방향으로 걸어 내려가 본다.
공사 자재들이 쌓여 있는 직선화 된 공사중인 77번 도로를 따라 내려가니 등로는 다시 도로 좌측의 한우축사가 있는 방향으로 이어지고 빹 경작지를 지나 만나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우측으로 걸어 나가니 도로 우측으로는 방금 전 봤던 한우축사가 보이고 진행 방향으로는 세포교회버스정류장이 보이는 22번 2차선 포장도로를 만난다.
그곳에서 22번 2차선 포장도로를 건너 좌측에 세포교회를 두고 우측 밭 가장자리를 타고 능선으로 올라 본다.
지도와 트랙을 보니 22번과 77번 도로가 만나는 갈림삼거리에서 도로를 타고 백야대교까지 걸어가도 될 것 같은데 괜시리 마지막까지 잘 진행 한후 이구간을 도로따라 진행하면 나중에 분명 후회를 할 것 같아 고집스럽게 능선을 따른다.
저가 내려다 보이는 세포마을은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안포리에 있는 마을 중 하나로서 가장 남쪽 마을인 세포마을은 산과 산 사이의 길고 가늘게 갈라진 포구의 모양 때문에 가는개라고 한 것을 한자로 표기한 이름이다.
지금은 간척 공사로 가는개가 있던 곳이 논으로 변하였지만 안일초등학교 앞으로 보이는 들을 바라보면 길고 가는 포구가 한눈에 들어와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세포마을은 여수시의 농촌 마을 중 가장 큰 마을 답게 마을 안 곳곳을 부르는 작은 마을의 이름이 다양하게 전하는데 무려 10여 개에 달한다.
능선으로 오르니 다시 묘지들이 보이고 그 묘지 뒤로 올라 지나온 방향을 살펴보니 안포리 세포마을 좌측으로 도로공사중인 곳을 따라 저 멀리 봉화산이 올려다 보인다.
이제 저 봉화산도 제법 먼 거리로 멀어지고 있어 여수지맥 날머리도 그리 멀지 않았음을 느끼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밭 경작지와 억새 능선을 지나 능선으로 들어가니 날머리가 가까워지면서 바닷바람이 강하게 불어 춘추 방풍의를 입고 진행을 한다.
소나무 등로 아래 빛바랜 억새가 우거져 자라는 등로를 따라 오르니 오르면 오를수록 소나무 키는 작아지고 그것에 반비례해 빛바랜 억새는 더욱 지독하게 우거져 있는 등로로 변하고 있다.
이 산객의 키보다 더 크게 자랐던 억새를 헤치며 진행을 하다보니 손 등은 다시 날카로운 억새 잎에 베여 쓰라리고 액간의 핏기가 베어 나오기 시작한다.
그래도 힘들게 그 억새풀들을 헤치며 진행하니 등로 우측으로 파란 그물망이 쳐진 밭 가장자리를 따라 걸어가는데 그 그물망에 비둘기 한마리가 걸려 빠져 나오지 못하고 죽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 온다.
작년 문수지맥 산행을 하면서도 그물망에 갇혀 빠져 나오지 못하던 까투리 한마리를 구해줬던 기억에 안타까운 시간이다.
그 밭 가장자리를 지나 오르니 억새는 이제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만큼 앞을 완전히 가로막아 한걸음 옮기기도 쉽지 않는 등로로 변하고 있어 어렵게 통과하니 좌측으로 밤나무 과수원이 보이더니 금새 79.3봉에 도착을 하는데 준희님은 이곳을 80미터 봉이라는 이정판을 걸어 놨다.
그 80봉을 지나 좌측 밤나무 과수원 우측 가장자리를 타고 조심스럽게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는 다시 넓은 비포장 임도와 만나 진행이 되고 잠시 그 임도를 따르니 등로는 다시 우측의 드넓은 억새군락지 한가운데로 이어지고 있어 가을 정취를 느끼며 그 억새 군락지를 따라 걸어 내려가 본다.
잠시 더 걸어 내려가니 진행 방향을 살펴보니 이제부터 걸어 진행해야 할 비산비야의 여수지맥 마지막 등로가 나즈막하게 펼쳐져 있고 그 중간에 높은 이동통신탑들도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조망을 즐기며 내려가니 금새 그 빛바랜 억새 군락지를 넘어 밭 경작지 가장자리로 내려서게 된다.
이곳 역시 동물들의 출입을 막기 위한 그물망이 쳐진 밭 가장자리를 타고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민가들이 보이고 곧이어 도로 공사중인 22번 도로 위에 도착을 해 그 도로를 타고 좌측으로 걸어 가 본다.
잠시 후 도로 좌측으로 돌산개마을 버스정류장을 지나 우측 77번 포장도로와 만나는 갈림삼거리에서 그 도로를 타고 좌측의 백야도 방향으로 맥 잇기 산행을 계속 이어가 본다.
돌산개마을 입구는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안포리 7반을 돌산개마을이라고 하는데 산을 돌아간 곳에 있는 개란 뜻으로 마을 남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도로 우측 앞으로 높게 솟아 있는 이동통신탑을 기준으로 삼아 빠르게 걸어 가면서 대중교통에 관한 자료를 찾아 보지만 28번 버스 운행 시간표가 정확하지 않아 조금은 걱정도 되는 시간이다.
한동안 지루하게 그 77번 2차선 공사중인 도로를 타고 빠르게 걸어 진행을 하니 도로 우측으로 남해바다 건너 저 멀리 백야대교와 백야도가 눈에 들어 오기 시작하고 그 모습이 아름다워 몇 장 더 남기며 걸어 내려간다.
계속 걸어 진행을 하니 도로 우측 앞으로 높은 이동통신탑이 이제 아주 가깝게 다가와 있고 도로 좌측으로는 제법 커다란 축사 건물과 잘 보관중인 볏짚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축사가 보이는 좌측 도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휘어지는 2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 내려가니 뒤돌아 200미터 전방에 마루펜션이 있다는 입간판을 지나 거대한 이동통신탑도 통과를 한다.
잠시 후 도로 좌측으로 삼섬임시승강장 안내판을 지나 도로 좌측으로 1차선 포장도로가 분기되고 이제는 77번 2차선 포장도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분기하는 포장도로를 따른 후 곧바로 우측 능선 방향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마지막 능선으로 오른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진행을 이어가니 이동통신탑 앞에서 시멘트 포장도로는 멈추고 등로는 바로 앞 우측 능선 방향으로 나 있는 비포장 임도로 이어지고 있다.
넓은 비포장 임도를 따르니 다시 잎이 푸른 동백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잠시 후 잘 관리되고 있는 많은 묘지들이 보이는 곳에서 마루금 찾아 잠시 헤맨 후 지독한 억새 능선을 헤치고 진행을 해 밤나무 과수언과 함께하는 지역을 지나니 다시 등로는 넓은 비포장 임도로 이어지고 있다.
둔덕을 넘어 등로 양쪽으로 키 작은 소나무와 키 큰 억새들이 혼재된 지역을 지나니 등로 앞으로 키 작은 억새 들판 넘어 백야도가 바로 코 앞으로 다가와 있다.
등로 좌측의 가막만 끝자락과 백야도를 바라보며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는 억새 능선을 지나 그물망이 쳐진 밭 가장자리로 내려서고 잠시 후 갈림삼거리에서 우측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르니 곧바로 도로 우측으로 염소농장이 보인다.
염소 농장을 지나 비포장 임도를 따르니 임도는 다시 시멘트 포장도로로 바뀌고 길게 이어지는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드디어 힛도버스정류장이 보이는 77번 2차선 포장도로 위에 도착을 한다.
이곳 힛도마을은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안포리 8반을 말하며 화양반도의 최남단 마을로서 여수반도의 땅끝마을이기도 하는데 힛도는 백야도의 우리말 이름인 희섬(흰섬)에 작은 해협을 뜻하는 도가 합쳐진 이름으로 희섬 앞의 도가 있는 곳에 마을이 있기에 불려진 마을 이름이다.
실질적인 여수지맥 산행은 이곳에서 종료되고 잠시 멀지 않은 백야대교를 찾아 보기로 한다.
힛도 버스정류장을 지나 77번 도로를 타고 우측으로 걸어 가니 도로 양쪽으로 작은 건물들이 보이는데 교회와 커피점들 이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는 듯 보인다.
펜션도 지나 조금 더 걸어 오르니 금새 좌측으로 백야도와 연결된 백야대교가 보이고 잠시 후 그 백야대교 앞에서 배낭 내려 여수지맥 마지막 완주를 자축해 보는 시간이다.
이곳 백야대교 앞에서 히치 하이킹을 시도해 보지만 20여분간 태워주는 차량이 없어 고민하고 있는데 저 멀리 버스 한대가 빠르게 들어 오는 모습이 보여 재빨리 힛도버스정류장으로 이동을 해 그 버스를 기다린다.
버스는 힛도마을 끝까지 내려갔다 회차하여 올라오고 그 28번 버스에 탑승하니 버스는 백야대교를 건너 백야도를 한바퀴 빙 돌듯 돌아다니며 손님들을 태우고 있는데 이곳 백야도에서는 다른 시골처럼 시간 적용을 받아 운행되고 있는 듯 보인다.
버스를 타고 백야도 투어를 하면서 여수의 장수리 바닷가와 조발도를 이어주는 다리공사 현장을 사진에 담아 보지만 날씨가 흐려서 그런지 눈으로 버ㅗㄹ 때보다 많이 흐리게 나왔다.
다시 돌고 돌아 백야도여객선대기실 앞에서 버스는 정차하고 잠시 화장실로 가 얼굴과 손을 닦아내니 이제서야 정신이 좀 들기 시작한다.
백야도는 전라남도 여수시 화정면에 위치한 섬으로 여수에서 남서쪽으로 18.5 Km 떨어져 있다.
백야산(백호산, 286미터) 정상이 모두 백석으로 둘러 있고 멀리서 보면 투구처럼 둥실둥실한데 산 정상에 석문이 있는 석보가 있어 백야도라는 지명을 얻었다.
마을 뒷산에 범 모양의 돌들이 모두 흰(백)색을 띠고 있어 범이 새끼를 품고 있는 것 같다 하여 백호도로도 불린다.
원래는 호랑이같이 사나운 사람이 산다 하여 백호도라 불렀으나 1897년 돌산군 설립 당시 백야도로 개칭되었고 약 400년 전 장흥고씨가 들어와 정착하였다고 한다.
최고점은 백호산(286미터)으로 산의 정상 부분은 산세가 험하지만 산록부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농경지와 취락이 형성되어 있으며 남쪽 해안에는 해식애가 발달하였다.
기후가 온난하여 동백나무가 무성하고 남국적 경관을 이루며 주민들은 농업과 어업을 겸하고 있다. 주요농산물은 보리와 고구마 및 쌀이고 수산물은 멸치와 붕장어 등이 잡힌다.
조선시대에는 백호산에 봉수대와 백야산성이 있었고 말을 사육하던 백야목장이 있었으며 짐막골 해수욕장과 화백해송림 등 아름다운 경관으로 해마다 여름에 많은 피서객들이 찾고 있다.
특산물로는 향기 좋은 유자가 유명하고 1929년에 세워진 백야도 등대는 여수와 목포간
항로의 주요표지이다.
이럴줄 알았으면 여수지맥 산행을 마치자마자 백야도에 솟아 있는 능선을 따라 백야도를 둘러 봤어도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곳 백야도 정차장에서 정확히 오후 4시 30분에 출발하여 백야대교를 건너 여수종합버스터미널로 이동을 하며 여천역에서 용산가는 기차표를 알아보니 저녁 8시 37분 발 표가 보이고 그 표를 구매해 버스가 아닌 기차를 타고 용산으로 이동하기로 한다.
이번 여수지맥 산행을 하면서 이용했던 백야도와 여수종합버스터미널을 운행하는 28번 버스이다.
버스를 타고 여천역에서 가장 가까운 진흥탕이라는 목욕탕을 발견하고 여수시정 지나 국민은행 앞에서 하차하여 도보로 진흥탕까지 이동을 하니 저녁 5시 20여분을 넘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른 시간인데도 찬물을 빼내고 있어 아쉬움을 남기고 그곳에서 샤워하고 옷을 갈아 입은 후 빠져 나오니 채 저녁 7시도 되지 않았기에 여천역까지 그리 멀지 않아 걸어 이동을 한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여천역에 도착을 하니 저녁 7시가 막 넘어가는 시간인데 역 주변에는 식당이나 간식을 먹을만한 아무 시설들도 보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처음으로 도착하는 666번 버스를 타고 여수 외곽을 돌고 돌아 7시 40여분에 결국 여수종합버스턴미널 앞 버스정류장에서 하차해 삼겹살집에서 목살과 삼겹살 합 2인분을 시켜 소맥으로 허기를 달래니 이제서야 제대로 된 몰골이 나오는 듯 하다.
시간을 보니 저녁 8시를 넘어가고 있어 언제 버스가 올지 몰라 택시를 이용해 여천역으로 이동을 하고 정확하게 도착하는 KTX 열차를 이용해 편안하게 서울 용산역으로 뒤돌아 올라 왔다.
서울 용산역에 도착하니 정확히 밤 11시 30분을 넘어가고 뛰다시피 달려 지하철 승차장으로 가니 인천가는 마지막 열차가 기다리고 있어 어렵게 올라 탔지만 결국 신도림역에서 2호산 열차가 끊기는 바람에 뛴 보람도 없이 택시를 이용해 귀가할 수 있었다.
직년 1,2 구간 산행 후 귀가할 땐 평일이라 조금 늦은 시간까지 열차가 있었는데 오늘은 일요일이라 조금 일찍 열차 운행 시간이 끊기는 것을 몰라 벌어진 작은 헤프닝이었다.
그래도 이틀간 아무 사고 없이 무탈하게 여수지맥을 완주할 수 있어 자축하며 올라 온 시간으로 이제는 화원지맥으로 눈을 돌리는데 그곳은 이곳 여수지맥보다 더 교통편이 어려워 조금은 고민도 되는 시간이다.
특히나 이번주 그곳 서해안 지방에 큰 눈이 내리고 날씨까지 추워진다고 하니 기상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남겨 놓는다.
새해 첫 산행지로 다녀온 여수지맥에서 가장 아름답고 살고 싶은 고장으로만 기억되는 시간이길 바라며 산행후기를 정리해 본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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