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지 : 경상북도 봉화군과 안동시 그리고 영주시의 문수지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 2015년 10월 09일 금요일(한글날 휴일) 당일 산행
산행날씨 : 새벽부터 오전까지 짙은 안개와 강한 바람으로 약간 한기를 느꼈다가 오후부터 맑고 화찾했던 전형적인 가을날씨
산행온도 : 영상 10도에서 영상 22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미륵재(918번 2차선 지방도로, 경찰관순직비)-391봉-성도의성김씨묘지-시멘트 1차선 포장도로(낡은 원두막)-비포장임도-391.5봉-밭가장자리-410.1봉-시멘트 포장도로(상수도 저수통)-1차선 포장도로-대백임도안내판-시멘트 포장도로-비포장임도-긴재(갈림삼거리)-능선진입-응봉산(617봉)-시멘트 포장도로 복귀-능선진입-551봉 소나무 군락지-567봉 송이채취용 입산금지 경고판-안부-582봉(599.5봉 갈림삼거리)-비포장임도-541봉-안부-잣나무 군락지-간벌된 나무지대-독도님의 문수지맥 응원판-바위지대-657 무명봉-만리산(791.6봉, 정상판과 삼각점)-시멘트 포장도로-만리산 늘못 안내판-늘못 나무데크와 전망대-능선진입-불난 흔적-시멘트 포장도로-메밀밭-간벌된 소나무등로-726 무명봉-바위 우회등로-송이버섯지대-교통호-의성이씨묘지-월오현(2차선 포장도로)-능선진입-안부-512.4봉갈림 묘지봉-자작나무 조림지-간벌지대-541봉-비포장임도-시멘트 포장도로-시멘트포장도로 사거리-김해김씨 합동제단-간벌지대-비포장 임도-636.4봉 무명묘지-용두산(정상석과 칡넝쿨)-629바위봉-안부-625.6봉-593.9봉 삼각점(용수산?)-용수재(임도 삼거리)-505.1봉 우회-능선진입-묘지지대-굴티고개(928번 2차선 포장도로)-시멘트 포장도로-사과과수원-복두산(502.4봉, 헬기장과 삼각점)-509.1봉(복두산?)-490봉 헬기장-김해김공과 유인성산유씨묘지-시멘트 포장도로-신평안흥길 도로표지판-능선진입-안부-403.4봉-490.1봉 삼각점(요성산서봉)-방아재(935번 2차선 포장도로)-로프 오르막 등로-산불감시초소봉(조망)-안부-523.1봉(시멘트 블록)-518봉-비포장임도-성황당 거목-교통호-박달산(580봉, 헬기장과 정상이정판)-안부-비포장임도-송이버섯구간-녹슨 철조망지대-사과과수원-비포장임도-헬기장-교통호-용암지맥 분기점-봉수산(봉화산, 569.6봉, 삼각점과 정상이정판)-묘지봉-입산금지 경고판-비포장 임도-송이채취용 움막-함창김씨묘지-사과과수원-인동장공과 예안이씨묘지-옛고개(예고개, 버스정류장, 915번 2차선 포장도로, 휴게소와 식당 및 주유소, 옛고개삼거리 도로표지판)-비포장임도-사과과수원-오운터널-안부-356무명봉-391무명봉-413.2봉-532.7봉(산불감시 초소와 묘지, 월봉산)-비포장임도-405.1봉 삼각점 우회-능선진입-금계 시멘트 포장임도-산행종료
산행거리 : 추위와 무더위가 교차하는 날씨에 송이버섯 채취지역과 사과과수원을 피해 어렵게 진행하여 34.64 Km (스마트 폰의 GPX 기준)
산행시간 : 추위와 무더위가 남아있던 계절에 꾸준히 진행하여 13시간 40분 (05시 04분에서 18시 44분까지)
교통편 : -옆지기의 애마와 택시를 이용 다녀 옴
- 옹천택시 010-8830-5031, 054-859-5657
문수지맥이란?
백두대간 옥돌봉(1244미터)서남쪽 280미터 지점에서 분기하여 서남진하며 낙동강 본류와 내성천을 가르며 문수산(1207.6미터), 갈방산(712미터), 만리산(791.6미터), 용두산(665미터), 복두산(509미터), 요성산(490미터), 박달산(580미터), 봉수산(569.6미터), 천등산(575.4미터), 조운산(635미터), 학가산(874미터), 보문산(641.7미터), 대봉산(210미터), 검무산(331.6미터), 나부산(330미터)을 일구고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낙동강 본류에 합수되는 삼강나루앞에서 그 맥을 대하는 도상거리 약114.5km 정도되는 산줄기이다.
깊어가는 가을빛을 따라 마루금을 걸으며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생각했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후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단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한글날이 낀 3일 연휴를 맞아 고민할 것도 없이 진행하던 문수지맥을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토요일인 10일에는 약간의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지만 늦은 밤에 그것도 적은 양이 내린다고 하니 가능하면 9일과 10일 이틀간 문수지맥에 올라 마지막 한 구간만 남겨 놓고 올라 올 수 있기를 바래보지만 그것이 힘들다면 진행하다 중단하고 그냥 집으로 복귀해도 좋겠다는 생각으로 출발해 본다.
목요일 저녁에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 와 배낭 챙기고 출발 준비를 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갑자기 왜 그리 출발하기에 겁도 나고 가기가 싫어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어둠이 깊게 내려 앉은 새벽 1시에 집을 나서 뻥 뚫린 도로를 타고 내려가다 간이 휴게소에서 한시간 이상 단잠을 자고 영주에서 간단히 먹거리를 준비한 후 산행 목적지인 경찰관순직비가 있는 미륵재에 도착을 하니 새벽 4시 50여분이 지나고 있다.
산행 준비를 하는데 지난주와는 또 다르게 강한 바람이 불며 약간은 한기를 느끼는 온도로 인해 계절의 흐름을 온 몸으로 느껴본다.
약간의 이슬이 끼어 있는 날씨에 강한 바람까지 불고 있어 방풍 자켓을 걸치고 산행을 출발하니 생각보다 강한 추위가 엄습해 오며 오늘 하루 산행이나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하다.
그래도 진행하다 몸이 견디지 못하거나 비가 내려 진행이 어렵다고 판단되면 곧바로 산행을 접고 가까운 곳의 청량산에 올라도 좋겠다는 생각으로 어둠을 뚫고 출발하는 시간은 왠지 모를 불안감과 공포감이 섞여 있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풀섶에 내려 앉아있는 이슬과 두껍게 끼어 있는 구름으로 인해 하늘에 떠 있는 반달이 흐미하게 내려다 보는 시간에 약간의 두꺼운 방풍 자켓을 입고 출발을 하는데 여전히 온 몸에 전해지는 느낌은 벌써 이렇게 추위가 가까이 와 있었나 하는 느낌이다.
그렇게 생각보다 적은 땀을 흘리며 진행해 바람이 잦아든 양지쪽에 앉아 준비한 아침을 먹고 다시 힘들게 진행을 하니 오늘 산행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나는 용두산 정상석을 만나는데 그 정상석 주위로는 무성하게 자란 칡넝쿨이 사람의 발길을 막는 방어벽을 치듯 우거져 있어 어렵게 그 방어막을 뚫고 올라 어렵게 사진 한장 남겨 본다.
몇 일 사이에 이렇게 변해버린 날씨와 기온으로 인해 역시 산에 들 땐 완실한 준비와 철저한 대비가 필수적이란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애마를 경찰관순직비 앞 넓은 주차장에 주차시킨 후 산행 준비하여 밖으로 나오니 옷깃을 파고 든 ㄴ 한기가 장난이 아니기에 다시 방풍 자켓을 준비해 입고 출발을 해 보는 시간이다.
이곳 경찰관순직비에는 봉화 총경이었던 지용호경찰서장 순직비도 있는데 살펴보면 봉화 총경 지용호경찰서장 순직비는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봉양리 산 50번지에 있으며 비의 높이는 3.1이고 둘레는 1.4미터에 1.4미터의 크기이다.
1949년 6월 17일 당시 봉화경찰서장 지용호 경감은 봉화군 재산면에 공산당원들이 출현하여 살인과 방화를 저지른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전투경찰과 청년단원들과 봉화군청 직원 등 46명을 인솔하고 재산으로 출동했으나 미륵재 능선에 잠복한 무장공산당원들의 기관총 난사와 포위망에 걸려 전원이 몰살될 위기에 처하였다.
지용호 서장은 적 앞에 나아가 자기 신분을 밝힌 후 자기를 죽이고 딴 사람은 살려 보내라고 하여 생존자 30여 명은 살아 돌아가고 지용호 서장은 현장에서 전사하였다.
부하를 구출하고 장렬하게 전사한 지용호 서장의 충용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70년 10월 15일 이 비를 세웠다.
그 경찰관순직비를 출발해 918번 2차선 비장도로를 타고 좌측 명호면 방향으로 걸어 오르며 오늘 산행을 출발해야 할 들머리가 보이고 그 앞 반사경에서 몇장의 사진을 담아 보는데 똑딱이 카메라라는 한계만 절감한 채 우측 능선을 오르며 멀고도 긴 산행을 시작해 본다.
이곳은 사실 이름도 없는 918번 2차선 포장도로인데 경찰관순직비를 살펴보면 그곳에 이곳이 미륵재임을 밝히고 있어 이 산객도 그 미륵재라는 이름을 차용해 보기로 한다.
이곳 미륵재는 해발고도 351미터로서 질고개라고도 불려자는 곳으로 봉화군 봉성면에서 명호면으로 넘어가는 918번 도로 위 고개이다.
경찰관순직비가 있고 그 비문에는 이곳 미륵재에서라는 문구가 있어 이곳을 미륵재로 하는데 지형도상 미륵고개는 지난 제1구간에 지나온 1차선 시멘트 포장도로이다.
918번 지방도로에서 능선으로 오르자 마자 작은 고추밭이 보이고 그 고추밭 가장자리에는 목책이 설치되어 있어 출입을 막고있다.
그 고추밭으로 잠시 들어가 등로를 찾아 보지만 찾지 못하고 고추밭 우측 잡목 숲을 헤치며 어렵게 정상 등로를 찾아 올라본다.
잠시 능선으로 오르니 키 큰 소나무와 활엽수가 서 있는 등로 아래에는 키 작은 잡목들이 자라고는 있지만 산행에는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 뚜렷하고 좋은 등로가 열려있다.
그렇게 잠시 더 오르니 391봉에 도착을 하고 등줄기에 흐르는 땀방울로 인해 입었던 자켓을 벗어 배낭에 넣고 있는데 등로 좌측 저 멀리 아래에 있던 강아들이 울부짓으니 주인아 나와 서치라이트를 비추기에 잠시 헤드렌턴 불빛을 끄고 송이버섯 채취철이라 주민들과의 마찰을 최소화 시키려 노력을 해 본다.
잠시 불빛을 감추고 배낭을 정리하다 보니 민가쪽에서 비추던 써치라이트도 사라져 재빨리 배낭 둘러메고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잔시 더 능선을 따라 진행을 하니 등로는 완만하게 내려가 몇기의 묘지들이 있는 좌측 등로로 이어지고 내려가다 비석 하나를 살펴보니 성도의성김씨 묘지와 묘비가 보인다.
그 묘지를 내려가니 시멘트 포장임도와 만나고 그 임도를 따라 좌측으로 내려가니 도로 좌측에 앙상한 뼈대만 남아있는 듯한 작은 원두막이 보인다.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좌측으로 잠시 걸어가니 포장도로 우측으로 다시 갈리는 삼거리가 나타나고 문수지맥 마루금은 그 우측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쪽으로 이어지는데 그 도로를 따라 잠시 걸어 들어가면 완만하게 올라 금새 비포장 임도로 변한다.
잠시 비포장 임도를 타고 오르니 다시 잡목이 우거진 능선 등로가 나타나고 391.5봉을 지나 그 등로를 따르니 묵은 비포장 임도와 이어지는데 세월이 흘렀는지 그 비포장 임도 위에도 우거진 잡목으로 인해 진행에 어려움을 겪는다.
조금 더 걸어 진행하니 우거진 잡목으로 진행을 못하고 등로 좌측으로 잘 갈아 놓은 밭이 보여 그 밭 가장자리를 타고 잠시 더 걸어 올라 우측 능선으로 접어들어 완만하게 걸어 올라 본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 오르니 칡넝쿨이 우거진 410.1봉에 도착을 해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 본다.
칡이 우거진 410.1봉에서 등로를 찾느라 약간 고생을 하고 완만하게 내려가니 한동안 잡목이 우거진 등로가 이어지는가 싶을쯤 시멘트 포장도로와 만난다.
그 바로 앞에는 갈림 삼거리인데 직진 방향으로는 출입을 금지시킨 상수도 물통이 보인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나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콘테이너 박스가 보이는데 주위에는 과수원이라 생각되는 과실수들이 보인다.
그곳을 지나니 다시 1차선 포장도로와 만나 우측으로 조금 걸어가니 등로는 도로 좌측의 시멘트 포장도로와 이어진다.
그 시멘트 포장도로 옆으로 임도안내도가 보이고 우측으로는 사과과수원도 보이는데 이곳 봉화 역시 사과의 고장이라 생각될 정도로 많은 과수원을 만나게 된다.
살펴보니 이곳이 바로 대백재 임도로서 대백재는 고감리의 한마을에서 유래된 듯 하며 백재 뿐만 아니라 고감리의 많은 마을들을 만나며 진행을 하게 되는데 이곳 백재 임도는 해발고도 355미터로서 장고개라고 불려진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장고개에 대한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
고감리는 풍악산 자락에 위치하여 고도가 높은 전형적인 산촌 마을이며 자연마을로는 고가무(고감), 가골, 고리안(고리내, 괴촌, 조만), 골마, 대백, 매태(매대), 새마(신기, 신기리), 성뚜들(성구), 양지마 등이 있다.
고가무는 풍락산 아래가 되므로 북치고 노래하고 춤춘다는 뜻으로 고가무이고 이를 줄여서 고감이라 하였는데 후에 고감리가 되었다.
고리안은 지형이 고래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괴목이 많아 괴촌이라고도 부른다.
매태는 매봉산 밑에 위치하여 붙여진 마을이고 성뚜들은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하여 성을 쌓았던 곳이라고 한다.
이곳 대백재에서부터는 이어지는 비포장 임도와 시멘트 포장도로를 번갈아 갈아타며 긴재까지 걸어가는데 처음에는 임도 좌측의 마루금을 타보려고 살펴보지만 잡목이 우거져 도저히 진행이 불가능해 잠시 짧은 구간 걷다가 임도로 뒤돌아 내려 와 편안하게 임도를 타고 걸어가기로 한다.
임도를 따라 한동안 걸어가니 이제 여명이 밝아오며 주위 사물들이 인식이 될쯤 임도 좌측 저 멀리 아름다운 산그리메가 눈에 들어 와 잠시 발걸음 멈추고 사진에 담아 보지만 아직도 빛이 부족한지 충분히 좋은 사진은 아니다.
앞으로 진행해야 할 송전탑이 바로 우측에 있고 저 멀리 풍락산이 올려다 보이는데 아쉽게도 오늘은 오르지 못하는 산이 되었다.
풍락산은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고감리에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762.1미터인데 옛날부터 선약이 난다고 전해온다.
조선 제16대 임금인 인조 때 명호면 관창리 비진동에 임석돌이라는 이상한 장수가 살았다고 하는데 그는 소년시절 신라 때 쌓았다는 풍락산 속 산성에서 전쟁놀이를 즐겼다.
어느 날 용마 한 마리가 마을에 나타났는데 마을 사람들 누구의 말에도 움직일 줄 모르고 서 있었고 이 소식을 들은 임석돌 장군이 급히 용마에게 달려가서 달래자 훈련된 말처럼 임 장군을 따랐으며 임 장군은 그후 매일 말을 탄 채 가래로 비진동에서 풍락산성까지 길을 닦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산이기도 하다.
풍락산을 바라본 후 앞으로 진행해야 할 임도 방향도 살펴보니 저 멀리 올라야 할 응봉산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다.
그렇게 걸어 진행하다 보니 임도를 걷고 있는 동안 완전히 날이 밝아 오는데 두껍게 드리워진 구름으로 인해 일출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동안 임도를 따라 걸어가면 비포장 임도가 시멘트 포장도로로 바뀌는가 싶더니 다시 비포장 임도로 바뀌기를 두어번 한 후 드디어 긴재에 도착을 한다.긴재는 갈림삼거리로서 좌측으로는 문수지맥 마루금이 이어지고 임도 우측으로는 송이버섯을 채취하는 시기에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움막들이 보이는 곳인데 아쉽게도 해발고도 500미터인 이곳 긴재에 관한 자료는 찾을 수 없다.
다시 긴재를 출발해 좌측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 오르니 이곳 역시 시멘트 포장도로와 비포장 임도가 교차하며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한동안 임도를 따라 걸어가니 임도 옆으로 계속해 송이 채취 지역으로 출입금지 경고판이 붙어 있어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다시 만나는 삼거리에서 문수지맥은 우측으로 진행을 해야 하지만 가까운 곳에 응봉산이 있어 풍락산까지는 아니라도 응봉산을 다녀오기 위해 좌측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좌측으로 빙 둘러 걸어가니 안부로 내려가 등로는 이제 시멘트 포장도로를 좌측으로 보내고 우측 능선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 입구에도 입산금지 플랭카드가 붙어있어 주위를 살핀 후 조심스럽게 들어가 본다.
능선으로 들어가 이제부터 코가 땅에 닿을듯한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타고 희미한 족적을 찾아 오르니 생각보다 경사도가 심하다.
한동안 올라 등줄기와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멪힐쯤 주능선에 도착을 하고 금새 좌측으로 돌아 올라 응봉산 정상에 도착을 한다.
늘 봉화와 삼척 경계에 있던 덕구 온천으로 유명한 응봉산은 몇번 올랐던 기억이 있는데 이곳 순수한 봉화쪽 응봉산은 처음이다.
응봉산 정상에는 정상석도 삼각점도 없이 정상 이정판 세개가 각기 다른 등산객 이름으로 붙어 있는 것이 전부인데 이곳 응봉산에 대한 자료를 찾아 보지만 이곳 역시 찾을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이곳 응봉산 정상 근처에서는 가까운 청량산이 참으로 아름답게 보인다고 선답자의 산행후기에서 봤던 기억이 생각 나 열심히 찾아 보지만 찾을 수가 없는데 갑자기 불어 와 시야를 가리는 안개 때문인지 아니면 청량산은 원래 보이지 않는지 알 수가 없으니 아쉽기만 하다.
동쪽으로는 풍락산이 올려다 보이는데 그 정상에는 갑자기 불어 온 하얀 안개가 뒤덮고 있어 가까운 산봉우리인데도 그 정상을 보여 주지 않고 그 풍락산 우측 아래 남동쪽으로 보여야 할 청량산은 그 모습조차 보여주질 않고 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그래도 응봉산에 올랐다는 사실을 위안 삼으며 다시 올랐던 등로를 타고 뒤돌아 내려 와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원점으로 복귀를 한다.
내려오며 시멘트 포장도로를 벗어 나 잠시 능선을 타고 내려오니 그곳에 묘지 한기를 지나 다시 시멘트 포장도로와 이어진다.
다시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잠시 걸어 진행을 하니 드디어 길고도 멀었던 시멘트 포장도로와 비포장 임도를 벗어나 우측 능선으로 들어가는 능선진입 등로를 만나는데 이곳에도 역시 송이버섯 채취구간에 입산을 금지한다는 커다란 경고 플랭카드가 달려있다.
갑자기 오늘 산행이나 무사히 마칠 수 있을지 괜시리 걱정도 되는 시간이기에 송이가 보이지도 않겠지만 보인다 해도 손하나 대지 말고 진행하자 다짐을 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제 시멘트 포장도로를 버리고 우측 능선으로 올라가며 잠시 뒤돌아 보니 저 멀리 지나온 마루금이 하얀 안개속에 파묻혀 멀어지고 있다.
주능선으로 오르니 제멋대로 자라난듯 하면서도 그들만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소나무 군락지가 나타나는데 이곳 역시 송이버섯 채취와 관련된 경고 플랭카드가 달려있어 조심스럽기는 매마찬가지이다.
무명봉인 551봉을 지나 계속 이어지는 소나무 등로를 따라 치톤피드를 들이 마시는 시간은 왜 이른 새벽부터 이런 산행을 하는지에 대한 답을 알려주고 있다.
이제 완전히 날이 밝아 어둠속에 두려웠던 마음도 사라지고 즐기며 걸어가니 무명봉 몇개와 안부를 지나 간벌된 나무들이 널부러져 있는 곳을 통과하고 곧이어 등로 우측으로 599.5봉 가는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해 긴 한숨을 내뿜어 본다.
벌목된 나뭇가지들이 널부러져 있는 599.5봉 갈림봉을 내려오니 등로에는 여전히 멋진 소나무 등로가 열려있고 힐링하듯 무심으로 걸어가는 이 시간이 참으로 행복하다는 생각을 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한동안 소나무 등로를 따라 거어가니 다시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고 그 비포장 임도를 가로질러 반대쪽 능선으로 오른다.
이곳은 신라재 임도로서 해발고도는 507미터인데 경상북도 봉화군의 상운면 신라리에 위치한 고개로서 상운면 문촌리와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를 잇는 길목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봉화와 여지도서의 봉화에 신라의 왕 태자가 내령군에서 놀다가 고을 아전의 딸을 사랑하게 되어 오랫동안 머물렀다가 고을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들어서 살며시 돌아와 여기에 머문 적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이 내용을 통해서 신라시대의 태자 설화에서 유래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해동지도의 봉화 등 대부분의 군현지도에 태자산 북쪽에 신라현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 지도를 통해서 신라현이 조선시대에는 안동이나 예안을 연결하는 간선 도로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현재는 일반 차도가 이 고개를 지나고 있으며 신라리 및 신라폭포는 관련 지명이다.
신라재는 원래 등로 우측에 있는 고개인데 언제부터인지 이곳 비포장 임도를 신라재로 불리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보인다.
다시 반대쪽 능선으로 오르니 빼곡하게 자라는 소나무 등로가 이어지고 잠시 후 나무 등걸이 모여있는 541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그 봉우리를 지나 완만하게 내려가니 깊은 골짜기가 있는 안부에 도착을 하는데 지도를 살펴봐도 아무 이름도 없는 무명안부인데 생각보다 제법 큰 안부이기에 스스로 놀라 본다.
그 안부로 내려가니 작은 돌무덤이 나타나고 안부를 지나 오르자 마자 등로 우측으로 완전히 녹슨 철판 하나가 서 있는데 너무 녹이 슬어 아무 글자도 보이지 않는다.
그 안부를 지나 완만하게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생각지도 못했던 잣나무 숲이 잠시 나타난다.
그 잣나무 숲을 지나 오르니 등로에는 간벌된 나뭇가지들이 널부러져 있고 이리저리 피하며 올라 다시 일반 소나무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다시 나타나는 널부러져 있는 나뭇토막을 피하며 오르니 또 다시 잣나무가 나타나고 곧이어 좁은 비포장 임도를 건너 올라 독도님이 붙여 놓은 응원판을 만나 힘을 내 본다.
그 응원판을 지나 낙엽 등로를 따르니 등로 우측으로 생각지도 못한 바위 암릉이 짧게 나타나 좌측으로 우회하며 걸어 통과해 본다.
바위를 지나 657봉을 넘으니 상수리와 도토리나무 낙엽이 등로에 깔려 있어 오늘 산행이 낙엽 산행은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이다.
그렇게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등로는 이제 가을빛이 깊어지며 이 산객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고 있다.
커다란 낙엽송 거목 아래 말라가는 잡풀을 바라보며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잠시 등로 우측으로 신라리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데 박무로 인해 희미해 아쉽기만 하다.
그곳 조망처를 지나 완만하게 이어지는 등로를 따르니 금새 만리산 정상에 도착을 하고 추억 사진 한장 어렵게 남겨 본다.
만리산(791.6봉)은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관창리에 자리잡고 있는 산으로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청량산(870봉)과 문명산(894봉)을 마주하고 있다.
경상북도 봉화군의 명호면 관창리와 상운면 신라리 사이에 위치한 산으로 해발고도는 792미터이고 문수지맥의 대백고개에서 응봉산, 만리산, 월오현, 용두산(안동시)으로 이어지는 줄기에 있다.
조선지지자료에 하남면 관창리 북쪽에 있는 산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매우 높아서 봉우리에 오르면 만리가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는 지명이 뜻하는 것과 달리 정상은 터가 다져져 있지 않아 숲이 울창하고 사람이 쉴 만한 공간도 없으며 그곳이 정상임을 알려주는 작은 현판만이 나무에 걸려 있을 뿐이다.
그곳 만리산 정상에는 생각지도 못한 대삼각점이 있어 다시 한번 확인하고 그 정상을 출발하니 큰 바위 하나가 반겨주며 다음을 기약하고 있다.
다시 활엽수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내려가니 등로에 깔려있는 낙엽들로 인해 미끄러워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그렇게 한동안 내려갔다 올라가기를 반복하니 781봉을 지나 다시 시멘트 포장도로에 도착을 한다.
등로 한쪽은 메밀밭이 보이고 다른 한쪽은 잡풀이 무성한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가니 둔덕을 넘어 갑자기 등로 옆에 만리산 늘못 생태탐방길이란 안내판이 서 있고 잠시 그 내용을 읽어 본다.
늘 못에는 나무데크와 사각정이 조성되어 있어 생태탐방길을 둘러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잠시 그곳으로 가 보지만 억새가 무성한 늘 못에는 가뭄이 얼마나 심한지 물 한망울 보이지 않는다.
늘못(705미터)이 있는 만리산 일대는 원래 화전민 이주지역으로 개간하였으나 지금은 고랭지 채소단지로 더 유명한 곳이 되었는데 평평한 분지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못에서 고랭지 채소밭에 쓸 물 공급이 쉬워 그랬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만리산 늘 못을 찾아 보지만 찾을 수 없는데 이 늘 못이 있는 관창리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어 정리를 해 본다.
관창리는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에 있는 마을로서 낙동강과 인접하고 있으며 멀리 내려다 보이는 청량산과 낙동강 줄기의 전경 등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할 만큼 장관을 이룬다.
자연마을로는 원관창, 갈골, 초방사, 구우전 등이 있으며 본래 마을 뒤 바위에서 낙동강 물이 불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여 관청이라 불렸으나 후에 내자대수시에 많은 강물을 보고 관창이라 부르게 되었다.
갈골은 옛날 만리산에 못이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비가 많이 와 못 둑이 터지고 이무기가 떠나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또 못 둑까지 칡이 늘어져 있어서 갈골이란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대부분 산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있으며 고추를 많이 재배한다.
그곳 늘 못 생태탐방로에 똑딱이를 올려 놓고 추억 한장 남겨보고 곧바로 다시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출발을 해 본다.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한동안 걸어 진행을 하니 그 시멘트 포장도로가 좌측으로 크게 휘어 내려가는 곳 우측 능선방향으로 마루금이 이어지고 있다.
지도를 찾아 보니 계속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진행을 해도 되지만 우측 능선을 타고 진행을 하면 단지 거리가 짧아질 뿐이다.
그래도 우측 잡목을 뚫고 들어가니 금새 가파른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고 잣나무 군락지가 나타나는데 왠일인지 잣나무 밑둥에는 하나같이 산불이 나 그을린 흔적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잣나무 군락지를 지나 내려가니 방금 전 헤어졌던 시멘트 포장도로를 다시 만나 우측으로 그 도로를 타고 걸어 본다.
그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가니 도로 좌측으로 또 하나의 도로가 분기하는 갈림 삼거리를 지나 조금 더 전진하니 시멘트 포장도로를 보내고 우측 능선쪽으로 간벌지대가 나타나는데 그 간벌된 지대 좌측으로는 묵밭도 보이는 그 사이로 오르며 맥 잇기 산행은 이어진다.
잠시 오르니 등로 좌측은 메밀밭이 펼쳐져 있고 뒤돌아 보니 남동쪽으로 관창리 마을 지나 저 멀리 너무나 아름다운 청량산의 암봉들이 조만간의 만남을 약속이라도 하라는듯 위압적으로 다가와 있다.
올 가을이 지나기 전 한번 올라 가을 단풍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도 있기를 바래 보는 시간이다.
멋진 청량산을 조망하고 다시 능선 방향으로 오르니 간벌된 지역을 타고 오르게 되고 726봉을 넘어 등로 남쪽으로 가지를 친 738.5봉을 올려다 본다.
다시 능선을 타고 여유있게 걸어가니 등로 우측으로 신라리가 아름답게 내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신라리는 경상북도 봉화군 상운리에 있는 마을로서 자연마을로는 신라, 새터, 절골, 모찌골, 용수골 등이 있는데 안동군 태자동으로 통하는 다리재가 있으며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터라는 이름이 붙었다.
산재는 봉화 금씨 후손인 산재공이 터를 잡고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모찌골은 모산이란 돌산의 모양이 메추라기가 알을 품고 있는 듯 하다 하여 생긴 이름인데 담배농사를 주로 하며 특산물로 고추와 사과가 있다.
약간의 바위지대를 지나 진행하니 다시 등로 옆으로 보여지는 조망에 취해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살펴보는 시간은 참으로 행복한 시간으로 남아있다.
등로 우측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산그리메와 작은 마을들을 살펴보고 진행을 하니 무명봉을 지나 멋진 소나무 등로도 만난다.
송이버섯이 자라고 있을 법한 등로를 따라 걸어가며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주위를 살펴 보지만 송이버섯은 그만두고라도 그 어떤 버섯 종류도 보기 힘이 드는 등로이다.
무명봉 몇개를 넘고 비포장 임도같은 안부를 지나 묘지 한기를 통과하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월오현 도로에 도착을 한다.
월오현 도로에 도착을 해 북쪽을 살펴보니 방금 전 이 산객이 걸었던 문수지맥 마루금이 빤히 올려다 보이는데 599.5봉에서 우측의 만리산 방향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이다.
월오현 북쪽으로는 논농사와 사과과수원을 하는지 황금들녘 사이로 붉게 익어가는 사과가 탐스럽기만 해 혹시 주인이 있으면 하나 사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살펴 보지만 아무도 만날 수 없어 아쉬운 마음 접고 도로 건너 우측 고추밭 옆으로 나 있는 능선으로 올라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월오현(463미터)은 경상북도 안동시의 도산면 태자리에 있는 고개로서 고개 북쪽은 봉화군 상운면 신라리이며 예전에 예안에서 봉화로 갈 때 이용하였던 고개였다.
해동지도의 봉화를 비롯한 여러 봉화의 옛 지도들에서 월현으로 표기되어 있고 또 월현 바로 위에 신라현(지금의 봉화군 상운면 신라리 신라재)도 함께 표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지금의 월오현은 조선지지자료에서 나오는데 즉 봉화군 하남면 태자산리 월오현과 그 한글 명칭 달애재로 기록되어 있다.
원래 높은 재란 뜻으로 우리말 달애재 혹은 다랫재라고 부르다가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월현 또는 월오현으로 바뀐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도 월오현 대신에 다랫재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잠시 머물고 있는 동안 트럭 한대만 지나갔을 정도로 차량의 통행은 많지 않은 시골 도로처럼 보이는 월오현이었다.
능선으로 진입을 하니 가파른 오르막 등로가 이어지고 잠시 더 오르니 등로는 좌측으로 크로스 오버하듯 진행하여 깊은 안부를 통과한다.
안부를 지나 오르니 묘지2개를 지나 등로 우측으로 512.4봉을 두고 좌측으로 우회하는 등로를 따르니 등로 우측으로 자작나무 조림지가 나타난다.
잠시 잡풀이 우거진 등로를 지나 간벌된 나뭇가지들이 널부러진 등로를 따르니 541봉에 도착을 해 식수 한모금 마시고 출발을 해 보는 시간이다.
이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람도 약해지고 기온도 오르면서 마시지 않던 식수를 마시는 횟수도 따라서 늘어나고 있다.
그 541봉을 지나 잠시 더 전진하니 갑자기 눈 앞에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는데 한동안 그 비포장 임도를 타고 진행을 하게 된다.
그 비포장 임도를 타고 한동안 진행을 하니 다시 다른 비포장 임도가 갈리는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한다.
등로 우측으로 많은 실핏줄 같은 임도가 널려있는 신라리를 두고 우측으로 임도를 타고 걸어가 본다.
임도를 따라 진행하다 잠시 등로 좌측을 살펴보니 남동쪽으로 좌측 저 멀리 청량산 자락이 살짝 보이고 그 우측으로 돌아가며 낙동강 넘어 안동의 아기자기한 산그리메들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이제 바람도 잦아들고 하늘도 열리면서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남아 색다른 풍경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주위 조망을 즐기며 걷다 보니 아직까지는 큰 어려움 없이 잘 진행되고 있는 문수지맥 산행의 제 2구간이다.
다시 비포장 임도를 타고 걸어가다 등로 좌측을 살펴보니 더욱 선명한 풍경과 조망이 펼쳐져 있어 조금 더 살펴보며 걷다보니 속도가 느려지고 있다.
이제 시멘트 포장도로로 바뀐 등로를 타고 걸어가다 앞으로 진행 방향도 올려다 보니 636.4봉 가기 전 무명봉들도 올려다 보이는듯 가까워져 있다.
그렇게 한동안 걸어 진행을 하니 둔덕을 넘어 도로 우측에 붉게 익어가는 사과과수원이 있는 갈림 삼거리에서 이제 등로는 좌측 비포장 임도로 이어지는 등로를 타고 걸어 오르며 이어지고 있다.
잠시 그 비포장 임도를 따라 걸어 오르니 김해김씨 합동제단이 잘 정리된 채로 보이고 그 합동제단 뒷쪽으로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칡넝쿨 지대를 지나 어렵게 능선으로 오르니 이곳도 역시 잡목의 저항이 심해 진행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 합동제단 위로 올라 잡목을 헤치고 잠시 뒤돌아 보니 저 멀리 방금 전 어렵게 올랐다 내려온 만리산과 그 주변 산줄기들이 그림처럼 다가온다.
날씨가 풀리면서 조망 역시 아름답게 다가오니 산행 속도는 조금 더 느려지고 있지만 일찍 내려간다 해도 특별히 할 일이 없으니 주위 조망을 즐기며 진행을 하는 시간이다.
조망을 즐기고 잡목을 헤치며 오르니 멋진 소나무 등로가 이어지는데 얼마 전 간벌을 했는지 잘려진 나뭇가지가 등로에 널부러져 있어 진행에 약간의 방해를 받고 있다.
다시 한동안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이제 이곳 마루금에도 가을 빛이 깊어가고 있음을 몸으로 느껴보는 시간이다.
비포장 임도를 지나 노란 가을빛을 느끼며 뚜렷한 활엽수 등로를 따르니 잘린 나뭇가지들이 널부러져 있는 645봉을 지나고 다시 뚜렷한 등로를 타고 평이하게 걸어가니 다시 안부를 지난다.
그 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오르고 뚜렷한 활엽수가 지키는 등로를 따르니 무명묘지 한기가 보이는 636.4봉에 도착을 한다.
그 636.4봉을 지나 다시 완만하게 내려가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오르니 또 다른 무명묘지 2기를 차례로 통과한다.
너무나 아름다운 활엽수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가을빛이 무르익고 635봉이 있는 무명봉을 지나 조금 더 오르니 드디어 용두산 정상에 도착을 해 등로 좌측을 살펴보니 건지산 지나 저 멀리 안동의 산줄기들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용두산 정상은 넓은 공터같은 곳이지만 지금은 잡목과 칡넝쿨이 우거져 정상석이 서 있는 가운데로 들어가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어렵게 그 정상석 옆으로 올라 추억 몇장 남기고 앙증맞은 정상석을 사진에 담는데 산행을 종료하고 보니 이곳 용두산 정상석이 오늘 산행 중 만난 유일한 정상석이었다.
용두산(665봉)은 경상북도 안동시의 녹전면 매정리에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665미터인데 이 산을 경계로 녹전면과 도산면이 나누어지며 고려 때 창건된 용수사가 남쪽 자락에 있다.
정상에 옛날 기우제를 지내던 기우단이 있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예안에 현 북쪽 22리에 있으며 최선의 용수사기에 태백산 남쪽으로 300여 리를 높았다 낮았다 하여 우뚝하게 빠져 나온 것이 있으니 이것이 용두산인데 실로 영가군(지금의 안동)이 이 산을 짊어지고 도시가 된 것이라고 나온다라는 기록이 있다.
용두산은 여러 옛 지도에 자주 등장하며 여지도의 예안에도 용두산이 표시되어 있는데 주변에 용수사, 도마현(지금의 녹전면 매정리 도마치재), 원당촌(지금의 녹전면 원천리 원당마을), 신암 등도 함께 표현되어 있다.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용두산에서의 시간을 뒤로 하고 어렵게 그 칡넝쿨을 뚫고 내리막 등로로 들어가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용두산에서 칡넝쿨을 헤치고 어렵게 내려 와 내려가는 등로를 찾지 못해 잠시 헷깔려하며 시간을 보내고 우측 내리막 등로를 찾아 내려가 본다.
잠시 더 내려가니 바위가 나타나고 지도를 살펴보니 629봉이다.
그 바위봉을 지나 완만하게 내려가니 동네 주민이 올라왔는지 안부에 지게가 보이고 그 옆으로 갈퀴와 쓰레받이도 보이는데 정작 사람은 보이지 않아 인사도 못하고 다시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올라 본다.
한동안 관목의 활엽수 등로를 타고 오르니 625.6봉을 지나 금새 삼각점이 박혀있는 593.9봉에 도착을 하는데 서래야 박건석님이 용수산이란 종이 코팅지를 걸어 놨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용수산에 관한 자료를 찾아 보지만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어 안타까운 시간이다.
이제 그 593.9봉을 지나 소나무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내려가니 금새 비포장 임도가 지나는 용수재에 도착을 하는데 이제 그 비포장 임도를 가로건너 반대쪽 골짜기 같은 곳으로 오르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용수재(506미터)에 관한 자료 역시 찾을 수 없어 용수재가 있는 매정리에 관한 자료를 찾아 정리를 해 본다.
매정리는 경상북도 안동시 녹전면의 용두산 자락에 위치하며 마을 뒤로 산이 감싸고 있고 앞으로는 구봉천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의 농촌 마을인데 자연마을로는 고장실(고정), 골매(골매리), 담말, 도가몰, 똑까맛골(독가맛골), 산도리, 새미(신정), 쥐심골, 평짓마 등이 있는데 골매는 매정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용두산 밑 골짜기가 되는데 매화낙지형의 명당이 있다 한다.
담말은 2백여년 전에 박씨가 살면서 담을 크게 둘러 쌓았다고 하고 도가몰은 술도가 있었다고 하며 똑까맛골은 독을 만드는 가마가 있었다고 한다.
쥐심골은 쥐가 숨은 형국이라 붙여진 이름이고 골매와 신정의 이름을 따서 매정리라 하였으며 신암폭포가 유명하다.
이곳 매정리에도 용수재와 관련된 마을은 찾을 수 없어 그 유래를 전혀 알 수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용수재를 지나 다시 능선으로 진행을 하니 등로에는 잡목이 우거져 제대로 진행을 하기가 힘이 들고 등로 우측 아래로 비포장 임도가 따라오고 있어 능선 마루금을 포기하고 우측 비포장 임도로 내려가 임도를 타고 진행하기로 한다.
다시 임도를 따라 걸어가니 비포장 임도 주위 풍경은 이제 완연한 가을빛으로 변하고 있다.
임도 우측으로는 녹전면 산그리메가 눈에 들어오고 조금 더 걸어가니 임도 옆에 가을을 대표하는 구절초가 아름답게 피어 있다.
구절초는 다년생 초본으로 근경이나 종자로 번식하는데 전국적으로 분포하며 산지에서 자라며 옆으로 벋는 땅속줄기에서 나온 줄기는 높이 40~60cm 정도이고 가지가 갈라진다.
어긋나는 잎의 잎몸은 넓은 난형이며 1회 우상으로 갈라지고 가장자리가 다소 갈라지거나 톱니가 있고 9~10월에 피는 두상화는 지름 8cm 정도로 백색이거나 붉은빛이 돈다.
수과는 긴 타원형이며 밑으로 약간 굽는데 산구절초에 비해 키가 크고 잎은 크고 덜 갈라지거나 얕게 갈라지며 두상화의 지름이 8cm 정도에 달한다.
바위구절초와 달리 잎의 측열편이 흔히 4개로 갈라지고 열편 가장자리는 톱니같이 갈라지며 관상용으로 심으며 두상화서를 말려 차로 음용한다.
계속 이어지는 비포장 임도를 따라 걸어가니 이곳 등로도 역시 비포장 임도와 시멘트 포장도로가 교차로 이어지고 있다.
신평기점 2.5 Km란 표지석도 지나고 그 비포장 임도 좌측 끝자락에 505.1봉이 올려다 보이는데 너무나 가파른 오르막 등로가 이어져 있어 오르지 못하고 우측 잡목이 우거진 등로로 이어지는 마루금을 타고 이제 비포장 임도와 이별을 고한다.
우측 우거진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작고 좁은 물길 같은 등로가 열리고 한동안 그 등로를 타고 진행을 하게 된다.
그렇게 평이한 등로를 타고 넘으니 묘지2기가 보이고 그 우측 넘어 굴티고개를 지나 이제부터 오늘 산행 중 가장 가파른 오르막 된비알을 타고 올라야 할 복두산이 올려다 보인다.
잠시 잡목을 헤치고 내려가니 잣나무 군락지가 나타나고 곧이어 928번의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굴티고개에 도착을 해 주변 풍경을 사진에 담아 본다.
도로 좌측의 고갯마루로 올라가니 도로 우측으로 붉게 익어가는 사과과수원이 보이고 고갯마루 정상에는 민가가 보여 식수가 부족할 때 식수 보충을 하기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굴티고개(350미터)는 갈현리에 있는 고개로서 갈현리는 경상북도 안동시 녹전면에 있는 법정리로서 1914년 갈골, 굴현(일명 굴티), 상등골을 병합하면서 갈골의 갈자와 굴현의 현자를 따서 갈현이라 하였다.
조선 말기에 예안군 북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굴현·갈골·상등골을 병합하여 갈곡과 굴현의 이름을 따서 갈현동(리)이라 하고 안동군 녹전면에 편입하였다가 1995년 안동군이 안동시와 통합되면서 안동시 녹전면 갈현리가 되었다.
복두산 자락에 있어 고도가 높고 골짜기가 많은 산촌 마을이며 마을 아래로 용강천이 흐르고 옛날에는 봉화현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자연마을인 굴현은 마을 남쪽에 구부러진 고개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옛날에는 단양우씨들이 모여 살다가 현재는 순흥안씨와 안동권씨들이 살고 있다.
그곳 갈현리의 굴현 즉 굴티마을에서 붙여진 고개 이름이 아닐까 생각을 해 본다.
그 굴티고개에서 우측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사과과수원 방향으로 올라 나타나는 갈림 삼거리에서 그 가운데 절개지 방향을 타고 사과과수원 옆 등로를 타고 걸어 올라야 하니 이곳도 아주 조심스럽게 올라보는 시간이다.
등로 좌측으로 붉게 익어가는 사과과수원을 두고 오르는 시간이 참으로 아름답기만 하고 우측으로는 묵은 밭이 나타난다.
잠시 더 오르니 등로가 사라져 묘지 있는 곳으로 오르다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지나온 505.1봉 있는 마루금도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묘지 뒤로 올라 좌측으로 조금 이동을 하니 희미한 마루금이 나타나고 그 희미한 마루금을 타고 오르니 오늘 산행중 가장 가파른 오르막 된비알이 나타나 두어번 쉬고 오르며 많은 땀방울을 흘려보는 시간이다.
많은 땀방울을 등로에 뿌리며 너무나 힘들게 오르니 갑자기 하늘이 열리며 헬기장이 나타나고 그 헬기장 한쪽에 삼각점이 박혀있다.
지도상에는 502.4봉의 삼각점이라 이름 붙여진 봉우리이다.
그 헬기장 삼각점봉을 지나 능선으로 들어가니 등로 옆에 시멘트 블록이 한무더기 쌓여있어 혹시 헬기장 작업을 위해 옮겨 놓은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해 본다.
그 보도 블록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복두산이란 종이코팅지가 나타나고 그 옆으로 무명묘지 한기가 보이는데 그 종이코팅지 이외에는 이곳이 복두산 정상이란 표식이 없어 아쉽기만 하다.
지도상에는 509.1봉인 복두산 정상이 맞는 것 같은데 너무 홀대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쉬운 시간이다.
복두산(509.1봉)은 경상북도 안동시의 녹전면 갈현리에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509.1미터인데 일부 고지도에만 표시되어 있는데 해동지도의 예안에는 복두산이 안동도회좌통지도의 예안에는 폭두산 그리고 대동여지도에는 복두산으로 각각 표기되어 있다.
해동지도를 보면 남쪽에 요성산이 동쪽에 굴현(지금의 갈현리 굴티) 그리고 서쪽에 방하현(지금의 신평리 방아재)이 각각 표현되어 있다.
복두산 정상을 출발해 완만하게 내려가니 이곳에도 소나무 곳곳에 입산금지 경고판이 붙어 있어 지역 주민들이 얼마나 송이버섯에 신경을 쓰고 있는지 실감을 해 보는 시간이다.
소나무 군락지를 타고 걸어가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시 주위를 살피며 걸어가지만 버섯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만날 수 없다.
그렇게 한동안 소나무 등로를 따라 평이하게 진행을 해 보는 시간이다.
소나무 군락지를 따르니 갑자기 넓은 공터가 나타나는데 지도에는 표기가 되어 있지 않은 헬기장처럼 보이는 공터이다.
GPX고도상 490미터로 표기되는 헬기장을 지나 썩어가는 작은 나무 구조물을 통과하니 김해김공과 배우자의 묘지를 지나고 다시 시멘트 포장도로 위에 도착을 한다.
이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한동안 진행을 해야 하기에 좌측으로 도로를 따르니 우측으로 사기막 마을 지나 안동쪽 산그리메가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한동안 그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 내려가니 지나온 방향으로 갈골가는 화살표 표시가 되어 있는 표지석을 지나 신평안흥길이란 도로 표지판도 만난다.
이곳이 사기막고개라는 곳으로 등로는 다시 능선으로 진입하며 진행하게 되는데 사기막고개는 사천리에 있는 고개이다.
사천리는 경상북도 안동시 녹전면에 있는 법정리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사기막, 간천리, 방신동, 원천동의 각 일부와 영주군 천상면 면천동 일부를 병합하고 사기막의 사자와 간천리의 천자를 따서 사천리라 하였다.
조선 말기에 예안군 북면에 속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사기막, 간천리, 방신동, 원천동의 각 일부와 영주군 천상면 면천동 일부가 병합되어 사천리가 되고 안동군 녹전면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안동군이 안동시와 통합되면서 안동시 녹전면 사천리가 되었다.
마을 뒤쪽으로 삿갓봉(448봉)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으며 앞으로는 용각천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 임수형의 농촌 마을로서 삿갓봉은 고려 때 이곳을 지나던 승려가 산의 모양을 보고 삿갓처럼 생겼으므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자연마을인 가르내(일명 간천)는 사천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로 냇물이 이 마을 입구에서 갈라져 흐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사기막(일명 사그막)은 가르내 동북쪽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로 고려 때 사기점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명소로 느티나무 군락지가 있으며 이곳에서 남쪽으로 100미터쯤 언덕에 한천정이 있다.
사기막고개라는 시멘트 포장도로 갈림삼거리를 지나 능선으로 오르니 여전히 소나무 등로가 반겨주는데 금새 안부를 통과하고 403.4봉을 넘는다.
봉우리같지 않은 403.4봉을 지나 약간의 잡목을 헤치고 계속 완만하게 오르니 금새 삼각점이 박혀있는 490.1봉에 도착을 하는데 선답자들 중 몇명의 이정판에는 이곳을 요성산서봉이라 표기를 해 놨는데 역시 자료는 찾을 수 없다.
다만 이곳 요성산서봉 좌측인 동쪽에 요성산이 있는데 그 요성산과 연계되어 이곳을 요성산 서쪽에 있는 봉이란 의미로 서봉이란 이름을 붙였다면 이해가 되는 이름이기도 하다.
요성산은 경상북도 안동시의 녹전면 신평리에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481미터이고 북쪽에 복두산이 동쪽에 국망봉이 있다.
고려 말 충신 김을방을 입향조로 하는 의성 김씨 삼대종택이 요성산 남쪽에 있으며 여지도서의 예안에 요성산은 현 북쪽 18리에 있고 용두산 서쪽 줄기에서 이어진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옛 문헌과 고지도에는 대부분 요성산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요성을 풀이하면 성인을 맞이한다는 뜻으로 다분히 유교식 명칭이고 원래의 산 이름은 따로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요성산은 여러 옛 지도에도 자주 등장하며 해동지도의 예안에도 요성산이 표시되어 있다.
주변에 폭두산(지금의 복두산), 굴현(지금의 신평리 굴티), 방하현(지금의 신평리 방아재) 그리고 사찰 성천사도 함께 표현되어 있다.
요성산서봉이라 이름 붙여진 490.1봉을 출발해 완만하게 내려가니 이곳 등로도 여전히 소나무 등로가 이어지고 있다.
잠시 진행을 하다 보니 송이버섯을 채취하던 사람들이 걸어 놓은 듯한 큰 플라스틱 소주병들이 소나무 가지에 거꾸로 꽂혀있는데 보기에 좋지 않다.
계속 이어지는 완만한 소나무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무명묘지 한기를 통과한 후 곧바로 쌍묘도 지난다.
그 쌍묘를 지나 조금 더 내려가니 또 다른 묘지 한기를 지나 935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방아재에 도착을 한다.
방아재(364미터)는 935번 2차선 지방도로가 지나는 곳으로 경상북도 안동시의 녹전면 사천리에 있는 고개인데 해동지도의 예안에 방하현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를 보면 예안에서 영주로 가는 길은 방하현을 넘어 영주시 평은면으로 가는 길과 녹전면 신평리 굴티와 매정리 도마치재를 거쳐 가는 길의 2개의 길이 있었던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옛 예안현 지도들 대부분이 방하현을 표시하고 있는데 그만큼 중요한 고개였다.
조선지지자료에도 한자로 방하현과 우리말로 방하재로 기록되어 있으며 지금의 이름은 방하재에서 변음된 것이다.
방아재 도로 좌측에는 커다란 스테인레스 통 2개가 보이는데 혹시 상수도를 보관하고 공급하기 위한 시설은 아닐까 생각되며 그 앞으로는 붉게 익어가는 사과과수원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방아재 도로를 가로질러 건너 반대편 능선으로 오르니 위험하지 않은 곳에 긴 로프가 설치되어 있어 그 로프를 따라 완만하게 오르게 된다.
계속 이어지는 로프를 따라 오르니 약간의 잡풀지대와 무명봉을 넘어 억새가 하얗게 피어 있는 산불감시초소봉에 도착을 하는데 약 480여미터의 나즈막한 봉우리이지만 그 산불감시초소로 올라 보니 사방팔방이 시원하게 조망되는 조망처로서 아주 훌륭하여 잠시 황홀한 조망을 즐겨본다.
제일 먼저 산불감시초소로 올라 남동쪽을 살펴보니 바로 코 앞에 목전면 마을이 아름답게 내려다 보이고 그 넘어 안동호 방향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산그리메들이 너울을 만들며 펼쳐져 있다.
산그리메 그 끝자락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줄기는 아마도 안동호를 지나 펼쳐진 덕산지맥 산줄기라 생각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하지만 언젠가 저곳에 오르게 되면 이곳 문수지맥 마루금을 살펴보며 오늘을 추억할 수 있는 시간도 있을 것이다.
이제 눈을 동쪽 지나 북동쪽으로 돌리니 여전히 덕산지맥 산줄기들을 타고 올라 그 앞쪽으로 축융봉부터 청량산 지나 문명산 방향으로 이어지는 멋진 암봉과 첨봉들이 어서 오라 재촉하듯 다가와 있다.
문수지맥 산행이 마무리 되기 전에 한번 더 내려 와 저 청량산에 올라 이곳을 바라보며 추억할 수 있기를 바래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제 눈을 돌려 지나온 문수지맥 방향을 바라보니 나즈막한 산줄기가 끊길듯 이어지며 저 멀리 문수산으로 연결되는 풍경도 어렴풋히 눈에 들어 온다.
다만 잡목들로 가려 나즈막한 각 봉우리들은 자세히 분간하기 힘이 들고 그저 큰 산줄기를 가늠하며 문수산으로 방향을 잡아 추측을 해 보는 시간이다.
그 좌측인 북쪽으로는 문수산과 선달산 지나 남쪽으로 흐르는 소백산 줄기가 박무속에서도 거대한 산군을 이루며 이 산객의 가슴을 애타게 만들고 있다.
수없이 많은 사연과 추억을 만들었던 소백산이지만 이렇게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다시 가슴 설레이고 다시 가 보고 싶은 곳으로 남겨진 산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눈을 돌려 이제부터 가야 할 문수지맥 산줄기를 살펴보니 바로 코 앞에 523.1봉 지나 박달산이 아름답게 이어지고 있다.
이제 하루 해가 문수지맥 산줄기 위에 걸려 가야 할 마루금 위를 강렬하게 비추고 있기에 박달산으로 이어지는 마루금 위에는 더욱 아름다운 빛내림이 산객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그렇게 한동안 비어있는 그 산불감시초소에서의 환상적인 조망을 마치고 계단을 내려 와 남서쪽 방향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 길을 재촉해 본다.
억새가 우거진 산불감시초소봉을 지나 숲으로 들어가 활엽수 등로를 따르니 안부가 나타나고 무명의 깊은 안부를 건너 봉분이 거의 사라진 무명묘지 한기도 통과한다.
잠시 후 더 걸어가니 보도 블럭들이 등로에 널부러져 있는 폐헬기장처럼 보이는 523.1봉에 도착을 해 잠시 식수 한모금 마셔 본다.
오래전 사라진 폐헬기장인지 보도 블럭 사이에는 제법 굵은 소나무들이 자라나고 있다.
그 폐헬기장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잘 관리되고 있는 묘지 한기를 만나고 무명봉을 지나 또 다른 무명묘지 한기를 통과한다.
다시 평이한 일반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내려가니 저 아래 비포장 임도가 다시 나타나고 잠시 후 그 임도에 도착을 하는데 지도를 살펴봐도 특별한 이름이 없는 무명 비포장 임도이다.
이곳에서는 비포장 임도를 가로건너 반대쪽 능선으로 오르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이제 활엽수와 소나무가 섞여 있는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타고 계속 오르니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콘크리트 초소가 나타나 깜짝 놀라는 시간이다.
전방과 해안쪽으로는 경비를 위해 이런 교통호와 초소가 보였지만 내륙 깊숙한 곳에 이런 초소가 보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초소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내려가니 이제 등로는 완전히 낙엽 등로로 바뀌고 다시 완만하게 올라 금새 넓은 폐헬기장 같은 높이 580미터의 박달산에 도착을 하는데 정상 한구석엔 많은 쓰레기들이 버려져 있어 눈살이 가는 풍경이기도 하다.
박달산(580봉)은 경상북도 안동시의 녹전면 녹래리에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580미터로서 봉수산의 북쪽에 위치한다.
현대 지형도에서는 사천리에 있는 산을 박달산으로 표시하고 있는데 이는 또 다른 박달산이다.
해동지도의 예안과 조선지도 등에 박달산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 지도들은 박달산과 함께 녹전산 및 봉수산도 나란히 표시하고 있다.
이 세 개의 산에 대한 정확한 위치 비정에 대해서는 좀 더 검토가 필요한데 박달산이란 명칭은 산에 박달나무가 많았던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박달산 정상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준비한 간식과 식수로 허기를 달랜 후 다시 뒤돌아 내려와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 본다.
잠시 박달산 정상에서 내려오는 등로가 희미해 정상 등로를 찾아 헤맸지만 금새 찾아 내려가고 한동안 잡목과 씨름하며 내려가니 등로 한가운데에 거대한 소나무 한그루가 반겨준다.
다시 만나는 비포장 임도를 타고 걸어 내려가니 멋진 소나무 등로와 이어지고 등로 좌측으로 녹슨 철조망이 따라온다.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붉게 익어가는 사과과수원이 철조망 건너 바로 보이기 시작하고 살펴보니 우측은 영주시 평은면 오은리이고 좌측은 안동시 녹전면 녹래리이다.
사과과수원의 울타리 역활도 하고 있는 우거진 잡목지대를 뚫고 어렵게 진행을 하니 사과과수원이 끝나면서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고 그 임도 좌측으로는 여전히 철조망이 따라오는데 그곳에는 나무를 식수한 지대가 보인다.
비포장 임도를 타고 완만하게 오르니 등로는 그 철조망 위 끝쪽에서 다시 능선으로 이어지고 능선으로 올라 잠시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올랐다 내려온 박달산이 저 멀리 멀어지고 있다.
능선으로 들어가 잠시 걸어 오르니 금새 헬기장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헬기장을 지나 우측으로 꺽이는 등로에서 등로를 찾지 못하고 직진으로 진행을 해 교통호 초소를 만나 다시 뒤돌아 나오며 짧은 알바도 경험을 한다.
정상 등로를 찾아 진행을 하니 방금전 알바를 하면서 만났던 것과 동일한 콘크리트 초소를 다시 만나 통과를 하고 그곳에서 잠시 잡목이 사라지며 펼쳐진 환상의 조망을 즐겨보는 시간도 가져 본다.
북서쪽으로 가까운 곳에 안동의 영지산이 보이고 그 뒤 저 멀리 문수지맥을 시작할 때 봤던 자개지맥의 나즈막한 산줄기를 지나 영주쪽 고층 아파트들도 보이기 시작을 한다.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멋진 조망을 즐기고 다시 잠시 걸어가니 금새 봉수산 정상부에 붙어 있는 용암지맥분기점 이정판을 만난다.
언제 다시 이곳으로 올라 저 용암지맥 산줄기를 타고 걸어 볼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오를 수 있을 것이란 희망으로 사진에 남겨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용암지맥이란 백두대간의 문수지맥이 봉수산에서 가지를 쳐 용암산(475봉), 오로산(343.6봉), 목성산(240봉)을 거쳐 안동시 운흥동 낙동강과 반변천이 합치는 곳에서 그 맥을 다하는 거리 33.6 Km의 비교적 짧은 지맥으로 안동호 서쪽 분수령을 용암지맥이라 부른다.
그리 길지 않은 산줄기이기에 가능하면 한번쯤 내려와 하루에 걸어 볼 수 있기를 바래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용암지맥분기점 이정판을 지나자마자 삼각점이 박혀있는 봉수산(봉화산) 정상의 569.6봉에 도착을 해 추억 한장 남겨 본다.
봉수산(569.6봉, 봉화산, 용암지맥 분기점)은 경상북도 안동시의 녹전면 녹래리에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570미터로서 녹전면 녹래리와 영주시 평은면 오운리의 경계가 되는 산이다.
산 남쪽에 신라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일출사가 있으며 강원도 강릉시의 정동진보다 더 빨리 일출을 볼 수 있어서 해마다 1월 1일에는 다채로운 해맞이 행사가 열린다.
봉수산 명칭은 조선시대 때 봉수대가 있었던 것에서 비롯되었는데 세종실록지리지의 예안에 봉화가 1곳이니 녹전산으로 현 서쪽에 있으며 서쪽으로 영천(지금의 영주) 소산에 응한다라는 기사가 있어 이를 통해 원래의 명칭은 녹전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역에서는 또 일출봉이란 명칭도 자주 사용하고 있는데 일출사가 있다고 해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해맞이 장소로 유명하기 때문에 유래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한편 지역에서는 이곳을 박달산이라고도 부른다고 하는데 예전에 박달나무가 많았다고 하며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10여 분 내려오면 수령 200년의 박달산 신목이 남아 있다.
이로 인해 박달산이란 명칭이 붙게 되었다고 하나 해동지도의 예안을 비롯한 여러 옛 지도를 보면 이 일대에는 위쪽부터 녹전산, 박달산, 봉수산 세 개의 산이 나란히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어 여기에 대해서는 좀 더 상세한 고증이 필요하다.
봉수산 지나 조금 진행을 하니 등로 좌측으로 멋진 풍경이 눈에 들어 오고 살펴보니 용암지맥 산줄기의 주봉인 용암산이 내려다 보이고 그 뒤 저 멀리 아름다운 산그리메들이 펼쳐져 있다.
이곳 용암산 자락에는 일출사가 있는데 일출사는 경상북도 안동시 녹전면 일출길 207 (녹래리 741)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로서 기록은 없으나 신라 법흥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불사를 활발히 진행하여 조선시대까지도 문화재와 성보가 남아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소실되고 절도 폐사되었다.
6·25전쟁 때 승려 최학수가 임시로 대웅전을 중건하고 민가에 보관되어 있던 석가모니불을 옮겨 봉안하였으며 1950년에 대웅전과 범종루를 중건하고 2002년에 삼성각을 중건하였다.
창건 당시 의상대사가 신통력을 발휘하여 물을 끌어 올렸다는 우물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주지가 잘못을 행하면 우물의 수위가 내려간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남쪽의 풍경을 즐긴 후 다시 출발하니 입산금지 경고판이 계속 나타나고 곧이어 남서쪽으로 가야 할 문수지맥 마루금이 보이는 조망처가 약간 열려있다.
이제 해가 중천을 지나 서쪽으로 기울어가며 가야할 문수지맥 마루금도 박무속에 희미하게 그 존재감을 알려온다.
알 것 같기도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중첩되어 있는 산그리메를 살펴보며 해가 지기 전 계획했던 큰두무재까지 가려면 조금은 서둘러야 할 것 같아 곧바로 다시 출발을 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조망을 즐기고 출발을 하니 무명묘지 한기를 지나 잡목이 있는 등로로 이어지고 곧이어 또 다른 묘지 한기가 나타난다
그 묘지를 지나 걸어가니 숑이버섯 채취기간에 출입을 금지하는 경고 플랭카드가 걸려있고 곧이어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 좌측으로 흰색 테이프로 줄을 쳐 놓았다.
다시 무명 묘지 한기를 통과하고 계속 그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를 따르니 송이버섯 채취 시 사용되었을 듯한 움막이 나타나는데 다행히 사람이 없어 사진 한장 남기고 곧바로 통과를 한다.
그 움막을 지나 소나무 등로를 타고 조금은 빠르게 진행을 하니 함창김씨 묘지를 지나 사과과수원 앞에 도착을 하는데 주위에 잡목과 가시덤불 그리고 잡풀이 우거져 어쩔 수 없이 그 사과과수원 내를 통해 진행하게 되어 있다.
다행이 아주머니 두분이 사과과수원에 계시기에 양해를 구하고 과수원으로 들어서니 약간의 상처가 나 있지만 먹기에는 전혀 지장이 없는 사과 하나를 주는데 얼마나 고맙고 미안하던지 몇번이나 감사한 인사를 드리고 재빨리 그 사과과수원을 빠져 나온다.
방금 받은 약간의 상처가 나 있는 사과를 먹으며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얼마나 맛이 있던지 목마름과 허기가 한방에 날아가는 느낌이다.
나즈막한 둔덕을 넘어 인동장씨 묘지를 지나니 곧이어 915번 2차선 지방도로가 지나는 갈림 삼거리의 옛고개 일명 예고개에 도착을 한다.
이곳 옛고개에는 주유소와 매점 그리고 식당들이 있어 한구간 들머리와 날머리로 이용을 해도 좋을 것 같은 그런 고갯마루였다.
옛고개(300미터, 예고개) 즉 예고개는 915번 2차선 지방도로가 지나는 안동과 영주을 이어주는 고개인데 닭발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이곳 지역의 예고개 또는 옛고개에 닭발 요리가 유명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더고 하니 의아하기만 하다.
옛고개가 있는 오운리는 경상북도 영주시 평은면에 있는 리로서 산지를 끼고 있으며 박달산이 위치해 있다.
자연마을로는 금곡동, 고사동, 평지동, 연당골, 새터, 예고개, 갈분, 외뚜들, 멀래, 서부럼 등이 있는데 금곡동은 골짜기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평지동은 평지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새터는 새로 개척하여 생겨진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시간을 보니 벌써 오후 5시 15분을 지나고 있기에 과연 큰두무재까지 정상적인 산행이 가능할지 고민이 되지만 지금 마무리를 한다해도 특별히 할 일이 없기에 갈수 있는 곳까지 가 보기로 한다.
배낭속에는 아직 식수와 약간의 간식 그리고 과일이 남아 있기에 안동방향으로 도로를 타고 걸어가 예고개 버스정류장을 지나자마자 우측으로 나 있는 비포장 임도를 타고 오르니 배추밭과 비닐밭이 나타나는데 바로 밑으로는 붉게 익어가는 사과과수원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어렵게 잡풀과 가시덩쿨을 넘어 사과과수원으로 내려가 그 과수원 가장자리를 통해 어렵게 걸어보는 시간이다.
어렵게 그 사과과수원을 지나 비포장 임도에 도착을 해 잠시 지나온 옛고개 방향을 뒤돌아 보니 괜시리 출발을 했다는 후회가 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갈 수 있는 곳까지 가 보자는 생각이다.
비포장 임도를 따라 좌측의 사과과수원과 민가가 있는 방향으로 오르니 등로 옆으로는 계속 붉게 익어가는 먹음직스런 사과들이 줄지어 열려있다.
어렵게 또 한번의 사과과수원을 지나 조심스럽게 오르니 민가를 지나 또 다른 비포장 임도와 만나고 그 임도를 따라 사과과수원 끝까지 걸어 올라 본다.
그 사과과수원이 끝나는 곳 우측으로 많은 사과가 열려있고 그 아래에는 빛을 반사해 붉은 사과를 만들기 위한 바짝이도 보인다.
이제 그 사과과수원과 헤어져 조금은 빠른 발걸음으로 산행을 이어가 보는 시간이지만 이곳 사과과수원을 통과하며 너무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기에 고민과 걱정이 조금 더 늘어나는 시간이기도 하다.
사과과수원을 지나 본격적으로 다시 능선으로 접어 드니 평이한 등로가 열리면서 완만한 오르막으로 이어진다.
조금은 빠르게 걸어 진행을 하니 나즈막한 봉우리와 안부를 교대로 건너 오운터널을 지나 무명묘지 한기를 통과하는데 이제 하루해가 우측 서산으로 기울며 나뭇가지에 걸려 길게 눕기 시작한다.
다시 소나무 등로를 타고 조금은 빠르게 걸어가니 391봉에 도착을 해 철사줄을 조심하며 우측으로 꺽어 내려가며 진행을 한다.
잠시 더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 옆으로는 철사줄이 함께하기에 조심스럽게 걸어 본다.
그렇게 특이할 것 없는 평범한 등로를 타고 간벌지대도 지나고 413.2봉을 지나 사진도 담지 못하고 빠르게 걸어 보지만 하루해가 벌써 서산으로 떨어져 어둠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하루 해가 떨어지기 전 산행을 마무리하려고 하였는데 어쩔 수 없이 아침에 사용했던 헤드렌턴을 꺼내 다시 이마에 차고 산행을 이어가는 시간이다.
드디어 532.7봉 직전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하고 조금 더 힘을 내 오르니 무명묘지 한기와 산불감시초소가 서 있는 532.7봉의 월봉산에 도착을 한다.
이제 하루해가 완전히 서산으로 넘어가 서쪽 하늘엔 붉은 석양빛만 가득하다.
아무리 바빠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해가 진 서쪽 하늘을 살펴보니 저 멀리 끝없이 펼쳐진 산그리메 뒤로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이 예쁜데 그 좌측으로 다음 구간에 올라야 할 학가산쪽 마루금도 보일듯 말듯 다가오고 있다.
언제 만나고 바라봐도 아름답고 환상적인 석양빛이다.
그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532.7봉에서 멋진 석양빛을 구경하고 곧바로 출발을 하는데 처음에는 내리막 등로를 찾지 못해 잠시 헷깔리다 어렵게 등로를 찾아 완만하게 내려가 본다.
그렇게 잠시 걸어 내려가니 갑자기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고 정상 등로는 직진 방향으로 이어지는 것 같아 직진 방향으로 걸어가니 잡목들로 인해 등로가 보이지 않아 포기하고 좌측 비포장 임도로 내려와 임도를 따르기로 한다.
이곳에서 옹천택시기사에게 전화를 해 큰두무재에서 만나기로 하는데 웅천택시에서 큰두무재까지는 5분여 걸린다기에 큰두무재 근처에 가서 전화를 한다고 하니 할일도 없으니 지금 출발해 큰두무재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전해온다.
지도를 살펴보며 옹천택시기사와 전화 통화를 할 때 지형을 잘못 이해해 선황재를 큰두무재로 착가을 일으킨 것이 화근이 되어 결국 작은 헤ㅠㅡ닝이 발생을 하지만 큰 일은 아니었다.
비포장 임도를 타고 빠르게 걸어 내려가다 중간쯤 내려간 지점에서 앞을 살펴보니 석양빛이 붉게 물들어 가는 산마루 저 멀리 불노봉이라 생각되는 봉우리 위에 인공구조물들이 보이고 그 뒤로 붉게 물들어 가는 하늘이 참으로 예쁘게 다가온다.
그저 이렇게 바라만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둠속에 행복해지는 시간들이다.
그렇게 한동안 비포장 임도를 따라 걸어 진행을 하니 지곡기점 2.0 Km라는 이정석도 만나고 그 좌측으로 있을 405.1봉 삼각점은 확인도 못한 채 우회하며 임도로 진행을 한다.
다시 그렇게 한동안 비포장 임도로 내려가니 임도가 좌측으로 휘어지는 부분에서 주등로는 다시 우측 능선으로 이어져 그 능선을 타고 가파르게 올랐다 내려가 본다.
어둠이 깊어지며 바로 발 앞을 비추는 헤드렌턴 불빛에 의존해 내려가니 금새 시멘트 옹벽이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에 도착을 해 이제서야 무엇인가 잘못 알고 진행하였음을 깨닭고 살펴보니 큰두무재까지는 아직도 멀었고 이곳은 우측으로 금계골이 있는 금계임도 또는 선황재라 불려지는 고갯마루이다.
이곳 금계임도 즉 선황재라 불려지는 곳에 도착을 해서야 뒤늦게 큰두무재에서 기다리고 있는 택시기사에게 전화를 해 현위치를 설명하고 금계임도에서 만나기로 하고 잠시 배낭 정리하며 산행을 정리해 본다.
금계동은 경상북도 영주시 평은면 강동리에 있는 마을인데 강동리는 구릉성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들이 넓게 펼쳐져 있어 논농사가 주로 이루어지며 작은 하천이 마을을 감싸 흐른다.
강성동, 동막동, 금계동 등을 병합하면서 강성과 동막의 이름을 따 강동리라 하였는데 자연마을로는 강성, 점촌, 신촌, 성안, 왕머리마을 등이 있다.
강성마을은 내성천 가가 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점촌마을은 강동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옹기점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신촌마을은 점촌 서북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고 성안마을은 전에 이곳에 성이 있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다.
지곡리는 경상북도 영주시 평은면에 있는 마을로서 왕머리마을은 고려 제 31대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안동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서 머물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용암산이 위치하며 하천이 마을을 끼고 남북으로 흐르며 자연마을로는 지신동, 삼밭골, 새장골, 새마을 등이 있다.
삼밭골은 마을 앞에 있는 넓은 밭에 농사를 지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새마을은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렇게 금계임도라고도 불려지고 선황재라고도 불려지는 지곡리와 강동리 금계마을을 이어주는 시멘트 포장도로 고갯마루에서 오늘 산행을 마무리하고 택시를 기다려 경찰관순직비까지 가 애마를 회수하며 하루를 마무리 한다.
내일 하루 더 산행을 하고 올라가려던 계획은 택시를 기다리며 추웠는지 한기가 돌며 갑자기 너무나 피곤한데 내일 날씨예보에 약간의 비까지 내린다고 하기에 이번 산행은 여기에서 마치고 서울로 복귀해 일요일 잠시 관악산에 오르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한다.
나오는 길에 영주의 찜질방에서 샤워를 하면서 한시간 이상 잠을 자고 나니 몸도 마음도 좋아졌지만 내일 산행은 무리라는 판단에 포기하고 서울로 복귀해 달콤한 연휴를 보내며 산행후기를 정리해 본다.
남아 있는 구간은 옆지기와 함께 내려가 안동시내도 구경하며 여유있게 즐기다 올라오는 시간이 되길 바래본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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