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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맥산행(완료)/문수지맥(대간·완)

문수지맥 제1구간 도래기재에서 918번 지방도로까지 산행후기

by 칠갑산 사랑 2015.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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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경상북도 봉화군의 문수지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2015년 09월 25일 금요일 당일 산행

산행날씨 : 하루 종일 흐렸다 개었다를 반복했던 약간은 무더웠던 산행 날씨

산행온도 영상 15도에서 영상 26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도래기재(88번 2차선 지방도로) 이정표(옥돌봉 2.68 Km, 구룡산 5.4 Km)-나무계단-안전목책과 로프의 돌계단-안전목책과 로프구간-

                 진달래터널-고슴도치 조우-이정표(옥돌봉 1.3 Km, 도래기재 1.4 Km)-안전목책과 로프구간-550년 철쭉보호수-옥돌봉(1244봉, 정상석)-

                 헬기장-옥석산(1242봉, 정상 안내판)-전망바위-문수지맥 분기점(이정표-옥돌봉 0.28 Km, 박달령 2.8 Km, 주실령, 안내판, 벤취2개

                 쉼터)-일출-예천바위 갈림 이정표(주실령 1.6 Km, 예천바위 30 m, 옥돌봉 0.36 Km)-예천바위-예천바위 갈림 삼거리 복귀-전망대

                 이정표(주실령 1.08 Km, 옥돌봉 0.8 Km)-전망바위-전망대 이정표 출발-안전목책과 로프 내리막 돌계단-옥석산 안내판-안전로프

                 암벽 구간-이정표(주실령 1.07 Km, 옥돌봉 0.88 Km)-소나무 군락지-나무계단-낙엽송 구간-나무계단-주실령(780미터, 915번 2차선

                 지방도로)-능선진입-소나무 군락지-983.7봉 갈림길 이정표(문수산 4.8 Km, 주실령 0.8 Km)-헬기장 왕복-잡목 헬기장

                 이정표(문수산 4.7 Km, 주실령 0.9 Km)-980봉-갈림길 이정표(문수산 3.6 Km, 주실령 2.0 Km)-928.4봉-예배령(919미터)

                 이정표(문수산 2.6 Km, 주실령 3.0 Km)-925봉(예배령봉)-이정표(문수산 1.6 Km, 주실령 4.0 Km)-1047.3봉-두내입구

                 이정표(문수산 1.1 Km, 주실령 4.5 Km, 두내약수탕 2.6 Km)-축서사입구 이정표(문수산 0.7 Km, 주실령 4.9 Km, 축서사입구 1.7 Km)-

                 바위전망대(축서사 조망)-문수산 안내판-문수산정상(1205봉, 정상석과 삼각점)-태양광 발전 콘테이너-헬기장-무인산불감시카메라-

                 문수산 동봉(무명묘지)-무선 중계시설-올무 제거-바위 암릉지대-1157.8봉-아릉지대 우회구간-전망바위-암릉구간-직벽바위 로프구간-

                 1003.8봉 우회-잠시 알바-사면 낙엽 등로-바위 암릉구간 우회-암봉-벌목된 잡목지대-소나무 군락지-무명묘지-가부재(비포장 임도)-

                 887.1봉-987.1봉 헬기장(삼각점)-876.9봉 폐헬기장-경주최공묘지-795.5봉-742.4봉 갈림봉-솔당재(우터골 갈림 안부)-707.8 바위봉-

                 699봉(솔당재봉)-흙목이재 안부-소나무 군락지-674 묘지봉-669.5봉-무명안부-지독한 산초가시등로-비포장 임도-자작나무 군락지-

                 능선진입-무명 굴(씽크홀)-무명봉-696봉-무명굴-갈방산(712봉)-불났던 지역-소나무 군락지-안부 갈림길-550.7봉-무명묘지1기-

                 전주이씨묘지-무명묘지1기-소나무 군락지-구36번 2차선 지방도로-다덕육교(신36번 4차선 고속화도로)-다덕현-시멘트 포장도로-

                 능선진입-벌목된 가시나무 지대-낙엽송지대-무선이동통신탑1-무선이동통신탑2-무명묘지1기-낙엽송지대-낙엽송과 벌목지대-소나무와

                 벌목지대-의령서씨묘지-비포장 임도-능선진입-473 잡목봉-무명묘지1기-무명 안부-녹슨 철선지대-소나무 군락지-509.6봉

                 삼각점(불미산)-74번 송전탑-안동김공묘지-무명굴(영남권역 공해 실태조사)-안부-공터봉-무명묘지1기-옛고개(1차선 포장도로)-

                 간벌지역-460.4봉-무명안부-바위안부-공터봉-480.8봉 삼각점(봉성산)-450봉-무명묘지1기-410.3봉 갈림봉-403봉-407봉-낙엽송

                 구간-가파른 절개지-미륵고개(시멘트 포장도로, 봉양리석조마애입상)-소나무 군락지-무명 삼각점-경찰관 순직비-총경지용호경찰서장

                 추모비-경찰관 순직비 주차장-918번 2차선 포장도로(양곡리도로, 질고개)-산행종료

산행거리 : 흐렸다 개었다를 반복하는 약간은 무더위가 남아 있는 계절에 많은 식수를 마시며 여유있게 진행하여 28.24 Km (스마트 폰의 GPX 기준)

산행시간 : 많은 식수를 마시고 휴식을 취하며 꾸준히 진행하여 12시간 59분 (04시 38분에서 17시 37분까지)

교통편 : -옆지기의 애마와 택시를 이용 다녀 옴

             - 춘양택시 011-548-6611

문수지맥이란?

백두대간 옥돌봉(1244미터)서남쪽 280미터 지점에서 분기하여 서남진하며 낙동강 본류와 내성천을 가르며 문수산(1207.6미터), 갈방산(712미터), 만리산(791.6미터), 용두산(665미터), 복두산(509미터), 요성산(490미터), 박달산(580미터), 봉수산(569.6미터), 천등산(575.4미터), 조운산(635미터), 학가산(874미터), 보문산(641.7미터), 대봉산(210미터), 검무산(331.6미터), 나부산(330미터)을 일구고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낙동강 본류에 합수되는 삼강나루앞에서 그 맥을 대하는 도상거리 약114.5km 정도되는 산줄기이다.

 

 

새로운 산줄기를 찾아 떠나며 또 다른 미지의 세계를 꿈꿨던 멋진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이제 목표로 했던 1대간 9정맥 9기맥 산행도 올해가 가기전에 마무리가 되기 때문에 지맥 산행은 오르고 싶은 산이 있는 곳을 우선 생각하며 오르자고 다짐을 해 보지만 그전에 일단 100 Km가 넘는 길이를 가지고 있어 지맥인지 기맥인지 불분명한 산줄기 산행을 마무리하기로 하고 비슬지맥과 수도지맥을 완주하자마자 곧바로 문수지맥과 금오지맥을 두고 고민하다 문수지맥을 먼저 오르고자 시작하는 산행이다.

요즈음이 송이 채취기간이라 조금은 신경이 쓰이지만 등산이외에는 전혀 무관심하고 특히 등로 옆에 자라고 있는 버섯 하나 채취하지 않기로 스스로 다짐을 했기에 큰 마찰은 없으리라 생각하며 전날 저녁 조금 일찍 배낭 챙겨 옆지기 애마를 몰고 서울 집을 출발한다.

내려가기 전 인터냇을 통해 교통 상황을 확인하니 생각보다 도로가 좋아 잘 내려갔는데 산행 후 올라오는 도로의 정체를 다시 걱정 했지만 늦은 시간에 올라와서 그런지 생각보다 교통 체증 없이 추석 직전 휴일을 알차고 멋지게 보낸 하루가 되었다.

 

출발하기에 앞서 춘양의 택시를 확인하고 새벽 3시에 전화 통화를 해 새벽에 만나기로 하고 출발하니 생각보다 막히지 않는 도로를 타고 여유있게 달려 산행 날머리에 일찍 도착해 잠시 잠을 자고 다시 출발하기 전 택시 기사에게 전화를 해 918도로에서 새벽 3시 50여분에 만나자고 약속을 하지만 약속한 택시 기사가 이곳을 찾지 못하고 헤매다 어렵게 새벽 4시 15분쯤 도착을 해 곧바로 택시를 타고 도래기재로 향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생각보다 일찍 도래기재에 도착을 해 옛 생각에 잠시 잠겼다 멀고도 긴 산행을 시작해 본다.

이곳 문수지맥은 총 4구간으로 나눠 완주를 목표로 했기에 몸 관리와 체력 관리를 잘 하면서 무탈하게 마무리 할 수 있기를 스스로에게 다짐해 본다.

 

자주는 아니지만 매주 한번 이상은 긴 종주 산행을 하기로 약속을 하고 현재까지 잘 지키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오늘 새벽에 잠깐 잠을 자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오늘 산행은 좋은 조건으로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산행 후 막힐지 모르는 도로를 타고 집으로 복귀를 해야 내일 새벽 차례를 지내고 시골로 내려가 부모님 산소에 성묘를 해야 하기에 가능하면 너무 무리하지 않게 즐기며 안전하게 진행하자 생각하니 속도는 크게 빠르지 않다.

그래도 꾸준히 진행을 해 문수산에 도착을 하니 멋진 조망과 풍경이 맞이하고 그렇게 즐긴 후 사진 한장 담는 시간은 개인적으로 참으로 의미가 있는 시간이 되었다.

시골에서 태어나 자란 촌놈이 서울에서 치열한 삶을 경험하고 다시 이토록 자연의 품으로 돌아 와 어린 시절을 추억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돌아가신 부모님에게 감사하는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다섯번째 들리는 도래기재이기에 낯설지는 않지만 첫번째와 두번째 도착했을 땐 동물이동통로가 없었고 그 이후 세번째와 네번째 도착했을 땐 새로운 동물이동통로가 생겼기에 새로운 풍경으로 가억에 남아 있는 곳이다.

새벽에 조금 헤맸다며 택시기사가 베푼 작은 호의에 기분 좋게 사진 한장 담아 보지만 카메라 조작 방법이 서툴러 제대로 된 사진 한장 남기지 못하고 주위 풍경만 몇장 남기고 이곳 도래기재를 출발해 보는 시간이다.

도래기재는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와 서벽리를 연결하는 고개로서 국가지원지방도 제88호선이 이곳을 지난다.
본래 이 곳에 조선시대 역이 있어서 도역마을이라 불리다가 도래기재로 변음됐다고 하며 다른 이름으로는 도력현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 고개를 넘어서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으로 갈 수 있다.
이 고개 아래에는 1925년에 일본인들이 뚫은 터널인 금정수도라는 곳이 있는데 본래 이곳 근처에는 금정광업소라는 큰 금광이 있었으며 이 곳에서 캐낸 광물을 수송하기 위해 건설된 터널이었으나 1993년 이 곳을 운영하던 태백시에 위치한 함태탄광이 폐광하면서 금정광업소도 같이 문을 닫게 되자 터널도 폐쇄했다.
이 고개를 넘으면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으로 연결되고 이 고개 정상에 경상북도를 알리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기 때문에 이곳이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도계를 이룬다고 잘못 알고 있는데 실제 도계는 이곳이 아니라 도래기재에서 강원도 방향으로 자동차를 이용해 약 20여분 가면 나오는 조제2교라는 다리가 실제 행정 구역상 도계를 이룬다.
봉화군 학예연구사인 정민호씨는 조제2교가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경계를 이루게 된 이유가 조선시대 임금이 한강이 위치한 서울에 팔도의 물을 다 모으고 싶어 강원도 땅이던 우구치를 인위적으로 봉화 땅에 속하게 했다라는 설을 전했다.
잠시 도래기재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하고 옥돌봉까지 2.68 Km란 이정표 옆에 놓여 있는 터널 남쪽으로 나 있는 나무계단을 타고 산행을 출발하는 시간이 새벽 4시 38분이다.

 

나무계단을 타고 오르니 계단 좌측에 철망이 보이고 그곳에는 수많은 선답자들이 걸어 놓은 가지각색의 띠지들이 반갑게 맞이해 준다.

그 나무계단이 끝나는 우측에는 예전에도 봤던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과 백두대간외래식물제거사업현황이란 안내판이 보인다.

그 안내판을 지나 오르니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된 돌계단이 나타나고 잠시 그 돌계단을 따르니 평이한 잡목 구간이 나타나고 곧이어 능선에 오르니 생각보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 와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실감해 본다.

다시 나타나는 나무계단을 타고 오르니 또 다른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된 나무계단을 지나 진달래터널이란 안내판이 나타난다.

예전에 고운 철쭉이 피어난 등로를 타고 걸었던 추억을 생각하며 잊혀진 산친구들을 기억해 보는 시간도 가져 본다.

 

진달래터널을 걸어 지나니 그 터널이 끝나는 지점에도 또 다른 동일한 형태의 안내판이 보이고 그곳을 지나 오르니 숲안내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이제 평이한 등로를 타고 잠시 걸어가는데 갑자기 발 앞에 무엇인가 움직임이 포착되어 살펴보니 올해 태어난 새끼인듯한 고슴도치가 이 산객의 발자국 소리에 놀라 몸을 공처럼 말아 원형을 만들며 등로에 놓여 있다.

사진 한장 남기고 좌측 숲으로 돌려 보내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데 어둠속에 만난 고슴도치로 인해 등줄기가 젖을 정도로 땀이 흐르고 있다.

고슴도치는 고슴도치과에 딸린 작은 동물로 몸길이는 20에서 30cm이며 주둥이는 돼지처럼 뾰족하고 다리가 짧다.

등 전체에 갈색과 흰색의 바늘 같은 가시가 빽빽이 나 있어 적을 만나면 몸을 밤송이처럼 만들며 주로 숲에서 살고 밤에 나와 돌아다니며 곤충이나 개구리, 과일, 새알 등을 먹는다.

겨울에는 나무등걸의 틈새에 틀어박혀 겨울잠을 잔며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 유럽, 북아프리카 등지에 많이 산다.

 

고슴도치를 만나 숲으로 잘 돌려 보낸 후 다시 평이한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등로 좌측에 큰 바위를 우측으로 우회해 진행하니 금새 이정표 하나를 만나는데 살펴보니 도래기재와 옥돌봉까지의 중간쯤 되는 곳의 이정표이다.

그 이정표를 지나니 또 다시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된 구간이 나타나는데 이곳은 갈림 삼거리이다.

살펴보니 등로 우측으로는 550년된 철쭉나무 보호수라는 우리나라 최고 수령을 살고 있는 철쭉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는 등로이다.

어둠속에 잠시 들려 사진 한장 남기고 뒤돌아 나와 옥돌봉으로 향한다.

550년된 우리나라 최고령 철쭉나무가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백두대간에서 발견되었는데 철쭉 노거수를 포함한 군락지 33 ha(약 10만평)를 산림유전자원보호림 및 보호수로 지정 보호 하기로 했다.
백두대간의 도래기재에서 옥돌봉(1242미터)구간 능선(해발 1085미터)에서 발견된 이 철쭉의 나이는 국립수목원에서 분석한 결과 약 550년(오차범위 ±30년)된 것으로 판명 됐다.
시대적으로 조선 세조2년(1456년)때부터 자란 이 철쭉은 국내에서 가정 오래된 것으로 키는 약 5미터에 뿌리부분 둘레가 약 1.05미터이고 가지의 폭은 8.3미터에 이른다.
또 세 갈래의 가지는 둘레가 각각 64 Cm, 52 Cm, 45.4 Cm로 인공미가 전혀 가미되지 않아 자연 그대로의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을 자아낸다.

 

그 550년된 철쭉나무를 지나 오르니 다시 철쭉나무인지 진달래나무인지 분간이 어려운 터널을 통과하고 조금 더 올라 금새 옥돌봉 정상에 도착을 한다.

두번의 기억을 되살려 보니 이곳에서 사진을 담으며 헬기장 지난 또 다른 정상에서 오래된 산친구들과 추억을 남겼던 시간에 잠시 미소를 지어 본다.

정상석과 셀카 놀이를 하며 추억 몇장 남기고 있으니 등로 좌측인 동쪽의 나뭇가지 사이로 붉게 물들어 오는 하늘에 잠시 발길을 멈추고 살펴보는 시간도 가져 본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다시 헬기장 지나 또 다른 정상으로 향한다.

 

헬기장을 지나 보이는 또 다른 봉우리로 가니 그곳에는 보이지 않던 색다른 정상 안내판이 서 있는데 이곳에는 옥돌산이란 글이 보인다.

이곳에서도 셀카 놀이를 하면서 사진 몇장 남기고 다시 헬기장 지나 옥돌봉 정상으로 뒤돌아 와 더욱 붉게 변하는 동녘하늘을 다시 한번 살펴 본다.

옥석산 옥돌봉은 경상북도 봉화군의 춘양면 우구치리에 위치한 해발고도 1242미터의 산으로 태백산에서 소백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능선부에 있다.
서사면 계곡의 물야면 오전리에는 오전약수가 있고 산꼭대기에는 옥돌봉이라는 암각의 표석이 세워져 있는데 옥석산이란 지명은 조선지형도에서 처음 볼 수 있다.
산의 정상부에 흰 바위가 있는데 여기서 지명이 유래한 듯하며 이 바위의 빛이 예천까지 비친다고 해서 예천봉 또는 예천바위라고도 부른다.
옥석산 옥돌봉은 높이 1242미터로 전설에 의하면 단군인 환인께서 천지순회를 하다가 이른 곳은 옥이 안난곳이 없고 선경이 아닌곳이 없었다 하는데 환인이 순회한 곳이라 하여 이름을 옥돌봉이라 하였다 한다.
또 이산 정상에는 흰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 빛이 예천까지 빛났다 하여 예천 바위로 전해오고 이곳은 6.25사변시 공산게릴라와의 치열한 격전지로도 유명하다.

 

옥돌봉으로 뒤돌아 와 이제는 진행방향의 좌측인 직진 방향으로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큰 바위가 보여 그 바위위로 올라가 보니 여명이 밝아 오는 세상에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다.

잠시 그곳 전망바위에서 머물며 주위 풍경과 조망을 살펴보고 있으니 방금 전 올랐다 내려온 옥돌봉 방향인 좌측 뒷편으로 하늘이 붉게 물들어 오기 시작하며 잠시 후 일출이 시작되려는 듯 몸부림을 치고 있다.

늘 안개와 구름으로 인해 근래 만나지 못했던 일출이기에 오늘도 전혀 기대를 하지 않고 올랐는데 두껍게 구름이 껴있기는 하지만 운이 좋으면 일출을 볼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해 보는 시간이다.

남동쪽으로 이제부터 올라야 할 문수산이 보이고 그 좌측인 동쪽으로는 각화산과 그 남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언젠가는 올라야 할 각화지맥 능선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고 그 산줄기 위 저 멀리 불이 난듯 붉게 물들어 오는 하늘이 이 산객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새벽이다.

 

남동쪽으로는 이제부터 걸어 진행해야 할 문수지맥이 펼쳐져 있는데 남쪽으로 흐르던 마루금이 주실령을 지나 우측으로 오르고 다시 남쪽으로 이어져 저 멀리 우뚝 솟아 있는 문수지맥의 주봉인 문수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산줄기 뒷편 저 멀리 하늘에도 역시 일출이 시작되려는 듯 붉게 변하고 있는데 구름이 두껍게 드리워져 있어 조금은 아쉬운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도 이렇게 구름에 덮혀 또 다른 풍경으로 올려다 보이는 하늘이 있어 더욱 의미가 큰 새벽 시간이다.

 

그렇게 한동안 그 전망바위에서 너무나 아름다운 조망과 풍경을 즐긴 후 내려 와 진행하니 백두대간 마루금이라 그런지 등로는 여전히 뚜렷하게 나 있다.

잠시 완만하게 내려가 안부를 지나고 다시 완만하게 오르니 등로 주위에 피어났던 고비들이 다양한 빛깔로 변하며 이곳 1000고지가 넘는 백두대간 마루금에는 벌써 가을이 다가왔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렇게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드디어 기맥분기점 안내판과 표찰 그리고 벤취2개 쉼터가 있는 작은 공터의 문수지맥 분기점에 도착을 해 배낭을 벗어 놓고 잠시 주위 풍경을 사진에 담아 본다.

두번이나 지났는데도 이곳 문수지맥에 대한 기억이 없어 조금은 아쉬웠는데 오래 전 사진을 보니 그때는 지맥에 별로 관심이 없어 사진도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 같다는 생각이다.

문수지맥은 경북 봉화군에 위치한 백두대간의 도래기재에서 출발하여 도래기재, 옥돌봉(1242봉), 문수지맥 분기봉(1211.5봉), 문수산(1205.6봉), 바지산, 갈방산(712봉), 만리산(792봉), 용두산(665봉), 복두산(503봉), 요성산(481봉), 박달산(580봉), 봉수산(570봉), 성안봉, 조운산(635봉), 유선봉, 국사봉, 학가산(874봉), 보문산(642봉), 대봉산(218봉), 독점산, 검무산(332봉), 보지산, 봉우산, 나부산(333봉), 사림봉, 적석봉, 삼강앞봉, 비룡산, 홍룡포까지 무명봉을 제외하고도 26여개 산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을 말한다.

 

벤취 쉼터 옆에 이정표가 서 있어 살펴보니 백두대간 상의 옥돌봉과 박달령 방향과 거리표시가 보이고 그 좌측으로 이제부터 이 산객이 걸어가야 할 문수지맥 마루금이 보인다.

물 한모금 마시며 잠시 쉬고 있으니 등로 좌측 동쪽 하늘에서 붉은 햇살이 솟아 오르고 있는데 잡목들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가며 잡아보니 어렵게 나뭇가지 사이로 짧은 시간 올라 온 일출을 사진에 담는데 그 아침 햇살도 찰나의 시간 보이다가 다시 두꺼운 구름 사이로 숨어 버린다.

그렇게 또 하루의 시작을 멋지게 시작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문수지맥에서 미지의 세계를 찾아 무탈한 하루를 마감할 수 있기를 가슴속으로 빌어 보는 시간이다.

 

문수지맥 분기점 공터 한쪽에 숲안내판이 서 있는데 높이가 1205미터로서 1980년대 중반까지는 이곳이 산불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방화선이 있었던 지역이란 설명이 되어 있다.

이제 배낭을 둘러메고 본격적인 문수지맥 산행을 위해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타고 걸어 내려가니 등로에는 노란 단풍이 눈길을 붙잡고 잠시 후 등로 우측으로 예천바위 갈림 이정표가 서 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예천바위이고 또 일찍 하산해도 딱히 할 일이 없어 예천바위에 잠시 들려 보기로 한다.

 

예천바위로 오르니 서쪽으로 부드러운 백두대간 마루금이 선달산으로 이어지고 그 우측 저 멀리 오래전 올랐던 어래산과 내리계곡을 상상하며 살펴보니 그 뒤로 얼마 전 다녀 온 마대산도 가물 거리는듯 다가와 있다.

선달산 좌측으로는 오래전 고운 추억이 남아 있는 마구령 지나 자개지맥이 보이고 그 뒤 저 멀리 소백산으로 이어지는 형제봉도 가물거린다.

이 예천바위란 이름이 이해가 되지 않아 찾아 보니 자세한 자료는 전해지지 않는데 다만 옥돌봉과 옥돌산에 관한 자료속에 예천바위에 대한 자료가 보인다.

이 옥돌산 정상에는 흰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 빛이 예천까지 빛났다 하여 예천 바위로 전해오고 이곳은 6.25사변시 공산게릴라와의 치열한 격전지로도

유명하다.

 

      

선달처럼 선달선달 올라야 한다는 선달산 좌측으로는 오전약수 관광지와 물야저수지가 내려다 보이고 그 좌측으로는 물야면이 뒷쪽으로는 부석사가 있는 부석면이 보인다.

그 뒤로 보여야 할 소백산의 주봉인 비로봉과 도솔봉은 박무속에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데 이곳 사진으로는 더욱 희미해 잘 보이지 않는듯 하다.

참으로 많이도 올랐던 소백산과 부석사 그리고 그 주위로 펼쳐진 수많은 계곡들이 그 옛날 추억을 들추며 또 다른 추억을 만들고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예천바위에서 한동안 아름다운 조망과 풍경을 즐기고 다시 뒤돌아 나와 갈림 삼거리에서 우측 지맥 마루금을 타고 가을빛으로 변하는 등로를 타고 여유롭게 걸어 본다.

잠시 더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 좌측으로 전망대 이정표가 서 있는데 옥돌봉과 주실령의 중간지점쯤 되는 곳이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전망바위로 오르니 생각보다 길게 이어진 몇개의 큰 바위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어 그 끝자락까지 가 좌측 위를 살펴보니 바위 옆 곱게 물들어 가는 단풍 잎 위로 방금 전 지나온 문수지맥 분기점과 그 뒤로 옥돌봉 및 옥돌산이 올려다 보인다.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전망바위에서 지나온 문수지맥 마루금 넘어 저 멀리 예천바위에서 만났던 백두대간 마루금을 살펴보니 저 멀리 선달산과 어리산 그리고 좌측으로 소백산으로 이어지는 멋진 등로가 아름답다.

내년쯤 저 아름다운 백두대간 마루금을 타고 남진을 하면서 다시 한번 그 속살을 살피며 만져볼 시간도 있을 것이다.

그곳을 걸으며 이곳 문수지맥을 바라보면 오늘의 추억도 다시 한번 기억하며 엷은 미소로 화답할 시간도 기다려 본다.

 

이제 주실령으로 내려갔다 올라 문수산으로 이어지는 문수지맥을 살펴보고 그 좌측으로 펼쳐진 도심리 지나 춘양목으로 유명한 춘양의 마을들도 보인다.

그 뒤 저 멀리 청량산과 일월산도 그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는데 문수지맥 산행을 하면서 자주 만나야 될 산들이기에 박무로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 아쉬움은 덜 하다.

도심리는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에 있는 마을로서 배고개재에서 내려다 보면 운곡천 강 건너에 있는 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자연마을로는 새터, 삼밭골, 배나무골, 숯터골, 당재 등이 있다.

삼밭골은 화전민들이 삼(대마)을 많이 재배하여서 붙여진 이름이고 배나무골은 옛날에 큰 배나무가 있었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옛날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밑빠진 독에 물을 가득 채우라 하여 며느리가 독에 물을 채우다 쓰러져 죽자 동네사람들은 며느리의 울분을 들어주기 위하여 지금의 당재를 넘을 때마다 작은돌을 쌓아 주었다고 하며 이러한 연유로 그 고개를 당재라 부르게 되었고 사과, 복수박 등이 유명하다.

 

등로 좌측 북동쪽으로는 시루봉 지나 구룡산과 청옥산 넘어 태백산이 머리를 내밀고 내년을 기약하고 있다.

그렇게 한동안 조망과 풍경을 살피고 그 전망바위를 내려오니 등로와 전망바위 사이에 너무나 곱게 피기 시작한 올해 처음보는 붉은 단풍이 환상적이다.

생각보다 너무나 고운 첫 단풍에 마음을 빼앗겨 다시 한동안 그곳에 머물며 몇장의 단풍 사진을 담아 본다.

 

그렇게 그 전망바위에서 참으로 많은 시간 보내고 다시 내려 와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된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옥석산 이정표를 만나고 곧이어 로프가 설치된 짧은 암벽을 타고 내려가 본다.

다시 내려가니 바위 옆에 있는 주실령까지 1.07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지나고 춘양목이 아름다운 등로를 만나 내려간다.

잠시 넓은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나무계단이 나타나고 한동안 내려가니 낙엽송 구간을 지나 안전목잭이 있는 나무계단을 지나 드디어 주실령에 도착을 한다.

벤취2개 쉼터가 있고 사각정자도 보이며 백두대간등산로 안내판과 외씨버선길 안내판도 보인다.

주실령에 대한 다양한 전설이 있는데 그곳 주실령 고갯마루에 보이던 안내판의 설명은 사진으로 대신해 본다.

 

주실령에 도착을 해 주위 풍경을 구경하며 사진에 담고 915번 2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좌측으로 고갯마루를 넘으니 도로 우측으로 해발 780미터 주실령이란 도로 표지판도 보인다.

주실령 현위치 안내판도 보이고 능선 들머리 입구쪽에는 서벽리 두내 산촌마을 전방 2 Km란 이정판도 보이는데 이곳 주실령은 물야와 춘양을 이어주는 고갯마루라는 표식도 보인다.

주실령은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이곳까지 물이 차 있어 배가 다니던 고개라 하여 배 주자를 써서 주실령이라고 부른다고 하나 확실한 어원은 알 수 없다.
오전약수탕이 있는 마을은 예전에 쑥밭이란 뜻에 애전으로 불리던 곳인데 이 쑥밭이라는 이름의 유래에는 두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이 지역이 물이 합수되는 지역이라 하천이 범람하여 항상 늪지대였기에 그런 뜻으로 수전이라 하였는데 다른말로 쑤뱅이라 불리던 것이 쑥밭으로 변경되었다는 설이 있고 또 하나는 이곳 약수물이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고 하여 한센병 환자들이 약수를 먹고 몸을 씻고 이 지역에 있는 쑥으로 피부에 뜸을 뜨고 달여먹고 하여 병을 고쳤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어 쑥밭이라 불리웠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오전 약수터는 물야면 오전리 후평장과 춘양 서벽장을 드나들며 장사를 하던 봇짐장수 곽개천이라는 사람이 서벽장을 보고 주실령을 넘어 후평장으로 가던 어느날 쑥밭에서 잠이 들었는데 꿈에 산신령이 나와 이르기를 네 옆에 만병을 통치할 수 있는 약수가 있다고 하여 잠에서 깨어 옆을 보니 과연 약물이 솟고 있었고 조선 제9대 성종(1469-1494)때 발견된 이 약수는 이듬해 가장 물맛이 좋은 약수를 뽑는 대회에서 전국 최고의 약수로 뽑혔다고 한다.

이 약수는 탄산성분이 많아 톡쏘는 맛이 일품이며 주요성분은 유리탄산, 망간, 마그네슘이온, 염소, 중탄산, 칼슘이온, 철분으로 위장병과 피부병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한편 오전약수탕 주변 등산로는 백두대간 구간으로 최근에는 등산객들이 많이 찾고 있고 맥반석 찜질방이 있어 약수샤워도 즐길 수 있다.

 

주실령 고개에서 외씨버선길의 약수탕길 안내판과 전봇대가 있고 그 앞에는 서벽리 두내라는 커다란 입간판이 서 있는 곳에서 우측 능선으로 접어 들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능선으로 접어 들자마자 멋진 춘양목들이 반겨주고 잠시 후 춘양목이 낙엽송으로 변한다.

그렇게 잠시 더 완만하게 오르니 주실령에서 800미터 올라왔고 문수산까지 4.8 Km가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보이고 등로는 좌측으로 이어지는데 등로 우측으로 길이 뚜렷하게 나 있어 잠시 다가가니 그곳에 넓은 헬기장이 보이는데 사용을 하지 않았는지 잡풀과 잡목이 자라며 헬기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해 가고 있는듯 보인다.

 

다시 헬기장 갈림 삼거리에 있는 이정표로 뒤돌아 나와 참나무가 ㅇ름다운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금새 또 다른 헬기장이 나타나는데 이곳 헬기장은 방금 전 만났던 헬기장보다 더 무성하게 자라난 잡목과 잡풀들로 인해 폐헬기장화가 진행되고 있는 듯 보인다.

사진 한장 남기고 곧바로 그 헬기장을 가로질러 능선으로 들어가는데 그 능선 바로 입구에 헬기장이란 이정표에 이제 주실령에서 900미터 올라왔고 문수산까지 4.7 Km남아 있다는 거리와 방향 표시가 보인다.

 

그 헬기장을 지나 능선으로 들어가니 노란색으로 변해가기 시작하는 키 작은 싸리나무 위로 멋진 거목의 참나무들이 반겨주고 있다.

그렇게 편안하게 걸어가니 참나무에 솔잎혹파리방제지역이라는 안내판이 달려있어 자연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 일인지 실감을 시켜주고 있다.

잠시 낙엽이 푹신한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나즈막한 능선이 나타나는데 등로는 그 능선 우측 사면 등로로 우회하도록 되어 있다.

지도를 살펴보니 이곳이 980봉이란 표식이 보여 그 능선으로 올라가 보니 준.희님이 나뭇가지에 달아 놓은 문수지맥 980봉이란 안내판이 보인다.

이곳 980봉에서 배낭 내려 준비한 김밥 한줄로 아침식사를 하면서 잠시 쉬어 가기로 한다.

 

봉우리 같지도 않은 그 980봉에서 허기를 달래고 다시 배낭 둘러메고 출발을 하니 금새 땅바닥에 떨어져 나뒹굴고 있는 갈림길 이정표가 보인다.

지도를 살펴보니 어느곳으로 갈 수 있는 갈림길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다지 이곳 이정표를 통해 이제 문수산까지 3.6 Km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수준이 전부이다.

여전히 싸리나무와 참나무가 시야를 막아 조망과 풍경은 전혀 보이지 않으니 그저 등로만 내려다 보며 걷는 것에 충실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다시 직진의 멋진 싸리나무와 참나무가 섞여 있는 뚜렷한 등로를 따르니 다시 등로 옆에 거대한 춘양목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아름다운 춘양목을 친구삼아 잠시 나즈막한 봉우리를 넘으니 등로는 다시 싸리나무로 변하면서 완만하게 내려간다.

살펴보니 900미터를 기준으로 그보다 낮은 고도에는 아직도 파란 잎이 무성한 한여름 풍경이 보이지만 그보다 고도가 높아지면 자연은 노란색으로 변하면서 가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는듯 하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 내려가니 거대한 소나무 한그루에 걸쳐있는 예배령 이정표가 보인다.

예배령은 경상북도 봉화군의 물야면 개단리와 춘양면 서벽리 사이에 있는 고개로서 물야면의 오록장과 봉화읍의 봉화장을 보기 위해 춘양과 강원도의 영월 및 상동 등지의 사람들이 많이 이용했다고 한다.
이 고개는 물야면과 춘양면을 이어주는 매우 짧은 지름길이기는 하지만 산이 높고 경사가 매우 가파른 고개이기 때문에 이 재를 넘기 위해서는 하룻밤을 묵고 넘어야 했다고 하며 고개 이름이 조선지형도와 조선지지자료에 기록되어 있다.
전자와 후자에 각기 다른 한자로 예비령이라 기재되어 있고 아래에 언문으로 예비라고 병기되어 있는데 봉화군지에는 예부령으로 표기되어 있다.

자료를 보면 예전에 제법 민초들에게 중요한 고개였다고 여겨지지만 주위에 새로운 도로가 뚫리면서 이제는 잊혀져가는 곣마루로 변하고 있는 듯 하여 안타까움이 남아 있는 고개이다.

 

예배령 이정표 옆에는대전충남의 산악회중 하나인 대충산사에서 919미터의 예배령에 십승지 춘양둘레길 걷기라는 안내판이 다시 보인다.

대충산사는 대전충남에서 제법 이름이 알려진 산악회로서 특히 십승지 산행에 선두 산악회로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고 알기 때문에 차후 십승지 산행을 하면서 많은 도움을 받아야 할 산악회로 알고 있는 곳이라 반갑기만 하다.

그 예배령을 지나 조금 더 걸어 오르니 서래야 박건석님이 해발 925미터의 예배령봉이란 종이 코팅지를 붙여 놨는데 그 수고하심에는 감사 드리지만 정확한 고증을 하고 봉우리 이름을 달아 놨으면 하는 바램이다.

 

참나무가 멋진 925봉을 지나 계속 걸어 오르니 약간의 키 큰 싸리나무가 성가시게 굴지만 생각보다 등로는 아주 뚜렷하게 잘 나 있고 지금까지 다녔던 다른 기맥과 지맥 마루금과 비교하면 고속도로 수준이기에 편안하게 걸어 보는 시간이다.

한동안 진행하니 등로의 싸리나무 앞이 노란색으로 변하고 있어 고도가 제법 높아지고 있음을 실감하며 조금 더 전진하니 바위 암릉 구간을 지나 조금 더 가파른 오르막 등로로 이어진다.

잠시 더 오르니 좁은 공터의 1047.3봉을 지나고 노란 싸리나무 지대를 통과하니 두내입구라는 안내판이 서 있고 좌측으로 두내약수탕으로 내려갈 수 있는 갈림 삼거리이다.

두내약수탕 지구는 봉화와 물야 그리고 오전약수터에서 주실령 고개를 넘어 내려가면 있는데 마을 지형이 말 속같이 생겼다고 하여 두내라고 불리고 있으며 100여년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전해오는 두내약수탕은 문수산 자락의 영험한 기운을 머금고 있는 탄산약수로서 피부와 위장병에 효험이 뛰어나 각처에서 많은 환자들이 무한정으로 모여들어 마을 주민들이 이곳약수터를 묻어버렸던 것을 1982년에 재발견하였으며 주변을 정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한 두내약수탕은 경관이 수려하고 약수의 효능과 물맛이 좋아 전국에서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언제 한번 시간되면 두내약수탕에도 들려보고 싶지만 약수를 그리 좋아하지도 않고 피곤하면 들릴 수 있는 시간이나 만들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드는 시간이기도 하다.

다시 노란 빛깔로 변해가는 키 작은 싸리나무와 거목의 참나무가 혼재된 등로를 타고 잠시 더 오르니 좁은 공터가 보이고 그 좌측 옆에는 우측으로 축서사 내려가는 갈림 삼거리 이정표가 서 있다.

축서사는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개단리의 문수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로서 673년(신라 문무왕 13년) 의상이 창건하였다.
창건 설화에 의하면 당시 인근 지림사의 주지가 산 쪽에서 상서로운 빛이 나오는 것을 보고 의상에게 알렸고 의상이 그곳으로 가보니 비로자나불이 광채를 발하고 있어 그 자리에 이 절을 짓고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지림사는 오늘날 수월암이라고 하는데 867년(경문왕 7)에 부처 사리 10과를 가져와 사리탑을 조성하였으며 이후 참선 수행 도량으로 유명해졌다.
이후 1705년(조선 숙종 31)에 중건하였는데 당시 법당 등의 전각 6동과 광명루 및 승방 10여 동이 있었고 암자로 도솔암과 천수암 등이 있는 큰 절이었다고 한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선실 및 요사가 있으며 유물로 보물 제995호인 봉화축서사석불좌상부광배가 유명한데 높이 108 Cm의 비로자나불인 이 석불은 창건 당시 의상이 봉안한 것으로 통일신라 말기의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경내에 삼층석탑과 석등도 있는데 각각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57호와 제15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중 삼층석탑에서 석탑조성명기가 발견됨에 따라 이 석탑이 867년에 조성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기단부 하대와 3층 옥신과 상륜 등은 소실되었고 석등은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수지맥 자료를 찾다보니 이곳 축서사를 들머리나 날머리로 이용하여 문수산으로 오르는 등산객들이 꽤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축서사 갈림 삼거리 이정표를 지나 조금 더 가파라지는 오르막 등로를 따라 가을빛으로 변하는 자연을 음미하다 보니 거대한 바위 암릉군이 나타나고 등로 우측으로 전망바위가 있는 듯 보여 올라가 보니 일망무제 멋진 조망이 펼쳐진 조망처이다.

바위 위에 올라 바로 발 아래를 내려다 보니 방금 전 지나친 축서사 갈림길에서 내려가면 만날 수 있는 제법 큰 축서사가 펼쳐져 있고 그 앞으로 봉화군 물야면 마을들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물야면은 경상북도 봉화군 북서부에 있는 면으로서 면소재지는 오록리이다.

문수산(1206봉)이 솟은 북동부는 험준한 산지를 이루며 그밖의 지역은 500미터 내외의 낮은 산지로 되어 있는데 신흥가계천이 면의 중앙을 지나 내성천에 흘러들며 하천 양안에 소규모의 충적지가 분포한다.

개단리와 북지리를 중심으로 논농사가 행해지며 고랭지 채소를 비롯한 담배와 인삼 재배가 활발하며 문화재로는 개단리에 취서사와 북지리에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오록, 가평, 개단, 오전, 압동, 두문, 수식 및 북지 등 8개 동리가 있다.

그 물야면 저 멀리 보여야 할 소백산 능선은 박무로 인해 보일듯 말듯 이 산객의 마음만 애태우고 있다.

 

이제 그 축서사와 물야면 우측의 산줄기를 살펴보니 방금 전 어렵게 올라온 문수지맥 마루금이 저 멀리 백두대간 마루금의 옥돌봉으로 이어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 오고 그 좌측으로 선달산과 어래산도 보이는데 그 좌측으로 돌아가며 보여야 할 봉황산과 자개봉은 그 뒤로 드높게 둘러친 백두대간 마루금에 가려 분간이 어렵다.

그래도 그 좌측으로 부석사를 안고 있는 소백산은 박무속에서도 그 존재감을 알려 오는데 사진으로 보니 잘 나타나지 않아 아쉽기만 하다.

 

남서쪽으로는 산세를 확 낮춘 응봉산 넘어 자개지맥 산줄기가 보이고 그 응봉산 좌측으로는 하룻밤 묵어 가고 싶은 봉화의 나즈막한 빌딩들도 작은 숲을 이루고 있다.

그렇게 한동안 그 조망바위에서 멋진 풍경을 감사하고 뒤돌아 나와 주등로를 타고 가파르게 오르니 단풍나무 지나 좁은 공터도 지난다.

다시 나타나는 바위지대를 지나 주황색으로 변해버린 고비지대를 오르니 문수산 정상을 알리는 안내판 지나 금새 문수산 정상에 도착을 해 배낭 벗어 놓고 잠시 쉬어 간다.

 문수산은 경상북도 봉화군의 물야면 개단리와 봉성면 금봉리 및 춘양면 서벽리의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해발고도는 1206.6미터인데 세종실록지리지에 봉화의 진산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봉화편에 조선 세조 3년에 순흥 문수산의 물 동쪽 땅을 떼어서 예속시켰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여지도서의 순흥편에 백병산에서 뻗어 나와 안동 학가산의 으뜸 줄기를 이룬다라고 하였고 여지도서의 안동편에 내성현의 북쪽에 있으며 북쪽의 안동 태백산에서 뻗어 나와서 동쪽으로 봉화 갈방산으로 뻗어 나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의 순흥편에 지금은 순흥에 속한다라는 간략한 기사만 나와 있는데 이들 관찬사료의 내용은 지명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시사할 뿐 유래에 대해서는 아무런 단서를 제공하지 않는다.
조선지지자료에는 축서사라는 사찰이 기재되어 있으며 이 산중에는 673년(신라 문무왕 13)에 의상조사(625에서 702)가 창건한 축서사가 있는데 향토지에서는 문수산 아래의 축서사에서 광채가 비쳐 가보니 문수보살이 현신하였다라는 축서사 관련설이 언급되어 있다.

전국적으로 문수산이란 이름의 산이 너무나 많기에 어느 산객은 이곳 산줄기대표적인 산인 문수산을 따르지 않고 하천을 기준으로 내성기맥이라 부르기도 하고 있으니 각 산줄기에 대한 정확한 이름을 달아 줄 체계적인 확립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문수산 정상에서 주위 풍경을 살펴보기 위해 준비한 지도를 들고 제일 먼저 지금부터 걸어 진행해야 할 헬기장 지나 무인산불감시카메라가 있는 동쪽을 살펴보니 저 멀리 좌측으로 태백산이 우뚝하고 그 태백산 가기 전에서 우측인 남쪽으로 가지를 친 각화지맥의 각화산도 보이기 시작한다.

그 각화산 뒤로 청옥산이 얼굴을 내밀고 그 우측 아래 희미하게 낙동정맥 상의 먼산도 보이는듯 하는데 박무로 인해 확실한 분간은 안되고 있어 아쉽기만 하다.

눈이 소복히 내려 앉아 산죽밭을 걸으며 무척 고생을 했던 추억을 기억해 내곤 홀로 피식 웃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잡목이 우거진 남동쪽을 살펴보니 다음 구간에 걸어야 할 문수지맥 마루금이 보이고 그 좌측 저 멀리 봉화의 진산으로 대접 받고 있는 청량산의 울퉁불퉁한 남성미 물씬 풍기는 풍경이 희미하지만 눈에 들어 온다.

그 좌측 저 멀리 일월산 지나 낙동정맥 마루금도 보일듯 말듯 가물거리는데 통고산쪽 마루금인듯 다가온다.

혹시나 하고 동해 바다도 찾아 보지만 너무나 거리가 멀고 박무가 끼어 있어 동해바다를 만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청량산은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에 있는 높이 870미터의 산으로 태백산맥의 줄기인 중앙산맥의 명산으로서 산세가 수려하여 소금강이라고 하는데 최고봉인 장인봉을 비롯하여 외장인봉, 선학봉, 축융봉, 경일봉, 금탑봉, 자란봉, 자소봉, 연적봉, 연화봉, 탁필봉, 향로봉 등의 12개의 고봉이 치솟아 절경을 이룬다.

그 가운데에서도 금탑봉 오른쪽의 절벽인 어풍대는 최고 절승으로 꼽히고 있으며 그 밖에도 신선이 내려와서 바둑을 두었다는 신선대, 선녀가 가무유희를 즐겼다는 선녀봉을 비롯하여 신묘한 절승지가 많다.

낙동강이 이 산의 서쪽 기슭을 흐르며 반곡폭포, 산북폭포 등의 폭포가 이 산의 풍광을 더하여주고 있다.

이 산세를 조선 시대의 이중환택리지의 복거총론 산수도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는데 안동 청량산은 태백산맥이 들에 내렸다가 예안 강가에서 우뚝하게 맺힌 것으로 밖에서 바라보면 다만 흙묏부리 두어 송이뿐이나 강을 건너 골 안에 들어가면 사면에 석벽이 둘러 있고 모두 만길이나 높아서 험하고 기이한 것이 형용할 수가 없다.

이 산에는 27개의 절과 암자의 유지가 있고 신라 시대 이후 선현들이 수도한 유적이 다수 남아 있는데 원효가 건립하였다고 하는 내청량사와 외청량사, 의상이 창건하였다는 유리보전, 신라 시대의 명필 김생이 글씨를 공부하던 김생굴, 최치원이 수도한 고운대와 독서대,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은신한 유명한 오마대와 공민왕당 등이 있다.

여기에는신증동국여지승람돌로 쌓았고 둘레가 1350척이고 안에 우물 7개소와 시내 2개가 있으나 지금은 폐하였다라고 기록된 청량산 성지도 있다. 이황은 도산서원을 근거로 하여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을 연구하다가 수시로 청량산으로 들어가 수도하였다고 한다.

그는 청량산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이 산을 매우 사랑하여 이 산에 관한 51편의 시를 남겼고 청량산록발이는 글도 썼으며 또 청량산을 오가산이라고도 하였다.

이황이 거처하며 학문을 연구하던 자리에 후인들이 기념으로 세운 청량정사라는 건물이 지금도 남아 있다.

수려한 경관과 유서 깊은 문화유적이 곳곳에 있어 봉화군 및 안동시 일대가 1982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이곳의 특산물로는 송이버섯과 대추가 있으며 예로부터 대궐이나 사찰 건축재로 이용된 춘양목이 있다.

 

그 청량산 좌측인 약간 더 동쪽으로 오르니 저 멀리 희미하게 일월산이 하늘금 아래 희미하게 다가온다.

한번쯤 올라보고 싶은 곳이지만 아직도 미답지로 남아 있어 더욱 가슴속에 남겨지는 곳이기도 하다.

문수지맥 산행을 하면서 시간 내 청량산과 일월산은 꼭 한번 다시 올라 보리라 다짐도 해 보는 시간이다.

일월산은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에 있는 높이 1219미터의 산으로 산세가 공중에 우뚝 솟아 웅장하고 거대하며 산정은 평평하고 급하지 않으며 동쪽으로 동해가 바라보이고 해와 달이 솟는 것을 먼저 바라본다 하여 일월산이라고 부른다.

꼭대기에는 일자봉과 월자봉의 두 봉우리가 솟아 있고 천축사라는 사찰터와 산령각, 황씨부인당, 용화사, 천화사 등이 있다.
특히 일월산은 태백산의 가랭이에 위치해 음기가 강한 여산으로 알려져 그믐날만 되면 전국 각지의 무속인들이 이 산을 찾아 영험함과 신통함이 더한 내림굿을 하는데 그렇게 하면 점괘가 신통해진다 하여 무속인들로부터 성산으로 추앙받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심산유곡에 자생하는 일월산 산나물(고사리, 참나물, 금죽, 나물취 등)은 향과 맛이 좋다.

 

북쪽으로는 지나온 문수지맥 마루금의 옥돌봉이 보이고 그 좌측으로 선달산과 어래산도 보인다.

그 백두대간 마루금 좌측인 북서쪽으로는 방금 전 주실령을 건너며 지나온 915번 2차선 지방도로가 지나는 물야면 마을이 길게 펼쳐져 있다.

다른 방향과 달리 제법 낮은 산세를 가진 좁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그 우측 저 멀리 소백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이 보일듯 말듯 가물거리지만 오늘은 박무로 인해 확실하지 않으니 기회되면 다음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한다.

그렇게 많은 시간 그곳 문수산 정상에서 쉬면서 조망을 즐기고 다시 배낭 둘러메고 천천히 정상을 출발해 올라왔던 방향으로 걸어 내려간다.

 

내려가 작은 콘테이너 박스를 지나 넓은 헬기장을 통과하니 또 다른 인공구조물인 무인산불감시카메라가 보이고 그곳을 지나니 잘 관리되고 있는 묘지 한기가 나타난다.

방금 전 지나온 헬기장 지나 문수산 정상부를 올려다 보고 진행 방향으로 보이는 또 하나의 이동통신 송전탑을 사진에 담고 북쪽을 살펴보니 지나온 옥돌봉과 그 좌측으로 선달산이 이제 멀어지는 아쉬움을 남기며 이별을 이야기 하고 있다.

내년쯤 저 선달산에 올라 이곳 문수지맥 마루금을 살펴보며 오늘을 추억할 수 있기를 기대도 해 보는 시간이다.

 

그렇게 주위 풍경을 살펴보고 묘지 뒷쪽으로 가 보니 3000산 오르기의 한현우님이 이곳을 해발고도 1205미터의 문수산 동봉이란 작은 띠지를 걸어 놨다.

그렇게 이곳 묘지봉에서도 많은 시간 머물며 주위 풍경을 둘러보고 이제 또 다른 이동통신 송전기가 있는 방향으로 내려가며 아쉬운 마음에 뒤돌아 보니 지나온 헬기장과 문수산 정상이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으로 가슴속으로 남겨진다.

 

묘지봉을 지나 내려가니 산림보호용 무선 중계기 시설물을 지나 잡목이 우거진 능선으로 들어가고 조금 더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에 손목 굵기의 나무들이 가로로 막고 걸쳐있어 처음에는 무심코 지나쳤는데 잠시 후 곧이어 또 하나의 나무토먹이 걸쳐있다.

이상해 살펴보니 지약 주밍이 그랬다고 생각되는 올무들이 자주 설치되어 있어 주민에게는 미안하지만 손으로 모두 제거하며 치우고 진행을 한다.

이 산객도 어릴적 시골에 살면서 겨울이면 꿩과 토끼를 잡기 위한 올무를 자주 사용한 경험이 있지만 도심으로 나와 살기 시작하면서 모두 잊고 지냈는데 다시 올무를 보니 많은 생각들이 스치며 착찹하기만 하다.

 

계속 나타나는 올무를 제거하며 진달래 터널을 걸어 진행하니 등로 양쪽으로 거대한 암릉 지대가 나타나 그 사이로 통과하고 계속 이어지는 바위지대를 조심하며 걸어간다.

이곳 잡목지대엔 가을 빛이 완연해 조만간 겨울이 올 것 같다는 느낌으로 걸어가니 잠시 잡목이 우거진 1157.8봉 정상ㅇ에 도착을 해 잠시 쉬어 간다.

지금까지는 육산으로 편안하게 진행을 했는데 문수산을 지나자마자 바위가 나타나고 잡목의 저항도 심해져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등로가 열려있다.

 

그 1157.8봉에는 묘지 한기가 있다고 지도에 표기가 디어 있어 찾아 보니 오래전 이장을 했는지 정상에는 큰 웅덩이 같은 것이 하나 보일 뿐이다.

대구의산님이 띠지에 해발 1157.8봉이라고 친절히 안내를 해주고 있어 꾸벅 인사를 드릭 다시 출발을 한다.

잠시 낙엽 등로를 따르니 다시 바위 등로로 바뀌고 편안한 등로가 나타나더니 소나무 가지 사이로 멋진 풍경도 선사를 하는데 등로 좌측 앞으로 일월산과 청량산이 조금 더 뚜렷히 보인다.

하지만 그곳은 바위 절벽이라 직진으로 내려가질 못하고 좌측 우회 등로를 찾아 내려가려다 진행 방향을 살펴보니 지금부터 진행해야 할 문수지맥 마루금 저 멀리 청량산과 일월산이 보인다.

 

그렇게 소나무가 서 있는 전망대에서 조망과 풍경을 살펴보고 다시 내려가 바위 좌측 우회 등로를 어렵게 찾아 진행을 하니 등로 우측 앞으로 거대한 암벽이 보인다.

그 암벽을 우측에 두고 걸어가니 등로에는 제법 많은 낙엽이 쌓여 발목까지 덮고 있다.

미끄러지지 않토록 조심하며 걸어가니 그 거대한 바위 아래에는 좁고 긴 굴 같은 것이 보이는데 살펴보니 바위와 지면 사이에 열려있는 공간처럼 보인다.

 

바위 암릉 구간을 우회하며 통과하니 또 다른 암벽이 앞을 가로막아 우측으로 우회하며 그 암뱍을 지나간다.

그렇게 그 암벽 구간을 지나니 등로 우측으로 멋진 조망이 펼쳐지는데 살펴보니 저 멀리 가부재에서 이어지는 비포장 임도가 지나는 우곡리쪽 마을과 사방댐이 내려다 보인다.

일부 종주대가 당일 산행을 하면서 저곳 우곡리로 탈출했던 산행기도 봤기에 잠시 더 살펴보고 그 암벽과 암릉 구간을 계속 우회하며 진행한다.

우곡리는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에 있는 마을로 앞에 급경사로 된 좁은 이 흐르며 자연마을로는 우르실, 구만, 중대곡 등이 있다.

우르실은 예전에 이곳에 산짐승이 많아 밤이면 산짐승들이 우글거린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구만은 구망이로도 불렸는데 옛날 아홉 집중 구만석 거부가 난다는 어느 비결가 말을 따라 이름 붙여졌고 사과, 고추 등이 유명하다.

그 좌측 저 멀리에는 춘양목을 낳게 한 춘양면 마을도 있겠지만 지금은 산줄기에 막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등로 좌측에 거대 암벽을 두고 우회하며 조심해 걸어가니 다시 바위 암릉구간이 나타나고 그 바위 사이에 자라고 있는 붉은 빛의 거대한 소나무인 춘양목이 산객의 눈길을 잡는다.

바위 암릉 사이로 나 있는 좁은 등로를 타고 거대 암봉을 우회하니 사면 등로에 깊은 낙엽이 깔려 있어 미끄럽기에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그래도 급하지 않게 조심하며 걸어 진행을 하니 갑자기 직벽의 거대한 암벽이 나타나고 그곳에는 얇은 로프 한줄이 걸려있어 그 로프를 잡고 조심하며 내려가 본다.

 

다시 암벽 구간을 우회하며 조심히 걸어가니 얇은 로프가 달려있는 거대 암벽이 나타나고 조심하며 그 암벽을 내려가는데 살펴보니 이곳이 바로 좌측에 드높은 성불산이라 불리는 1003.8봉이 있는 곳으로 정상을 다녀오지 못하고 우측으로 우회하는 등로를 따르고 있다.

로프를 타고 내려가 안부를 만나 계속 뚜렷하게 나 있는 등로를 타고 진행을 하는데 조금 더 걸어 오르막 등로를 타고 거대한 소나무가 서 있는 곳에 도착을 해 살펴보니 1003.8봉을 우회하자마자 좌측으로 크게 틀어 진행을 했어야 하는데 뚜렷한 직진 등로를 타고 잠시 알바를 하고 있다.

물 한모금 마시고 다시 뒤돌아 1003.8봉 방향으로 뒤돌아 간다.

 

오늘 처음으로 제대로 된 알바를 했던 곳으로 1003.8봉 방향으로 뒤돌아 가 안부를 지나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깊은 낙엽이 깔려있고 등로는 중간에 쓰러진 나무 밑으로 잘 이어지고 있는데 직벽을 내려와 진행을 하다보면 능선으로 오르지 않고 좌측 직진의 뚜렷한 능선으로 이어지기에 알바하기 쉬운 곳으로 여겨진다.

어렵게 제대로 된 등로를 찾아 걸어가니 여전히 1003.8봉을 좌측에 두고 한동안 빙 둘러 우회하듯 걸어가는데 이곳 사면 등로에도 깊은 낙엽이 깔려있어 진행에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사면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금새 선답자들의 띠지를 만나 편안하게 낙엽 등로를 걸어보고 그렇게 잠시 더 걸어가니 눈 앞 좌측으로 또 다른 거대한 암벽이 나타나는데 그곳에 예쁜 다람쥐 한마리가 앉아 이 산객을 살펴보며 잠시 기다려 준다.

재빨리 카메라에 몇장의 사진을 담고 다람쥐에 전혀 피해를 줄 의사가 없음을 알리듯 무심히 그 바위 우측 아래 우회 등로를 타고 걸어 가 본다.

다람쥐는 다람쥐과에 딸린 동물로서 생김새는 쥐와 비슷하나 쥐보다는 크고 꼬리가 굵으며 몸 색깔도 다르며 몸길이는 15~16cm이고 꼬리 길이는 약 12cm이다.

꼬리는 털이 많고 크며 앉아 있을 때는 꼬리를 위로 올리고 몸 색깔은 등 쪽이 황갈색을 띠고 있으며 배 쪽은 희고 등에 5개의 검은 세로줄이 있나 털 색깔은 여름과 겨울에 약간의 차이가 있으며 다리는 짧고 앞니가 발달하였다.

잣, 도토리, 밤, 땅콩, 곤충 등을 먹으며 나무를 잘 타므로 새의 알도 꺼내 먹으며 또한 뺨 속의 주머니가 잘 발달하여 먹이를 입속에 넣고 운반하여 굴속에 저장도 한다.

보통 낮에 활동하며 겨울에는 나무 구멍 속에서 지내는데 추운 지방의 다람쥐는 땅속에 들어가 겨울잠을 자다가 바깥 기온이 올라가면 잠에서 깨어 가을에 저장해 두었던 먹이를 먹는다.

다람쥐는 비를 싫어하여 비가 내리기 전에 미리 알고 독특한 소리를 내기 때문에 다람쥐가 많이 사는 지방에서는 다람쥐의 울음소리로 비가 올 것을 예상한다고 한다.

다람쥐는 오스트레일리아와 태평양의 여러 섬을 제외한 세계 각지에 분포하는데 한 번에 2~6마리씩 1년에 2~3회 새끼를 낳으며 성질이 온순하여 애완용으로 많이 기르는데 우리나라 곳곳에 널리 분포한다.

 

거대 암릉을 우측으로 우회하며 통과를 하니 다시 일반 평이한 등로가 이어지고 잠시 따르니 다시 완만하게 올라 잡목속을 어렵게 통과한다.

그렇게 잠시 더 오르니 등로는 좌측으로 휘어져 진행이 되는데 우측 위로 봉우리 하나가 보여 잠시 올라가 보니 바위가 보이고 그곳에서 뒤돌아 보니 지나온 암봉과 그 뒤로 성불산이라 불리는 1003.8봉이 아름답게 올려다 보인다.

그곳에서 지나온 마루금을 살펴본 후 다시 잡목을 헤치고 내려 와 우측 잡목을 헤치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다시 일반 등로로 내려 와 진행을 하니 멋진 소나무 등로가 열리고 잠시 후 진달래 터널을 지나 사면 우회 등로를 타고 진행하게 된다.

다시 우거지는 잡목을 헤치고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도심리 마을이 좁고 길게 내려다 보인다.

그 우측 아래로는 춘양면이 존재할 것이지만 지금은 산줄기에 가려 전혀 보이질 않는다.

도심리는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에 있는 마을로서 배고개재에서 내려다 보면 운곡천 강 건너에 있는 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자연마을로는 새터, 삼밭골, 배나무골, 숯터골, 당재 등이 있다.

삼밭골은 화전민들이 삼(대마)을 많이 재배하여서 붙여진 이름이고 배나무골은 옛날에 큰 배나무가 있었다 하여 생긴 지명이며 옛날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밑빠진 독에 물을 가득 채우라 하여 며느리가 독에 물을 채우다 쓰러져 죽자 동네사람들은 며느리의 울분을 들어주기 위하여 지금의 당재를 넘을 때마다 작은돌을 쌓아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그 고개를 당재라 부르게 되었으며 사과, 복수박 등이 유명하다.

 

그곳 조망처를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눈 앞에 갑자기 벌목지대가 나타나는데 오래되었는지 벌목된 장소에는 잡목과 잡풀이 웃자라며 진행을 방해하고 있다.

일반 등로보다 더 힘들게 벌목지대를 오르는 시간이다.

오르다 잠시 등로 우측 뒤를 살펴보니 저 멀리 1157.8봉이 우뚝 솟아 있고 그곳을 지나 내려오면 성불산인 1003.8봉도 보이고 그 아래 다람쥐를 만났던 봉우리도 보인다.

생각지도 못했던 아름다운 풍경에 잠시 사진 몇장 더 남기고 출발한다.

 

어렵게 잡목을 헤치고 벌목지대를 오르니 가부재봉이란 종이코팅지가 보이는데 확실한지 궁금증만 늘어가는 시간이다.

다시 멋진 춘양목 등로를 타고 힐링하듯 걸어 내려가니 잡풀이 우거진 무명묘지 한기를 지나 곧바로 비포장 임도가 지나는 가부재에 도착을 해 물 한모금 마셔본다.

가부재는 옛날 봉성면과 춘양면을 오가며 장보러 가던 고개라고 하는데 이제는 그 고개로서의 의미는 사라지고 멋진 춘양목들만이 산객을 반겨주고 있는 비포장 임도이다.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도심리의 갑옷골(가부골)은 옛날 장수가 싸움을 하다 옷을 묻고 갔다하여 갑옥골이라 불리기도 하고 부자가 난다는 부자터에서 부자가 난다하여 가부골이라고도 하는데 현재는 갑옷골로 더 많이 불리어지고 있다.

 

이곳 가부재는 2011년 작업임도시설로 만들어진 비포장 임도가 지나는 곳으로 임도로 내려가 임도를 타고 좌측 삼거리 방향으로 걸어가 우측 임도를 따르면 거대한 소나무 한그루 지나 곧바로 능선으로 들어가는 들머리가 보인다.

그곳 NO1 이란 이정판이 박혀있는 곳에서 능선으로 오르니 활엽수가 자라는 멋진 등로가 나타나고 완만하게 그 오르막 등로를 따라 올라 본다.

잠시 더 오르니 잡목이 사라지고 진달래 나무가 터널을 이루는 곳을 지나 887.1봉에 도착을 한다.

  

평이한 등로를 타고 능선을 걸어가니 다시 갑자기 드넓은 헬기장이 나타나는데 987.1봉이란 안내판에 삼각점이 박혀있다.

방금 전 887.1봉을 지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987.1봉이 나타나니 어리둥절 하기만 하다.

이곳 역시 십승지 둘레길 중 한곳인지 고도 표지판에는 대충산사의 팻말이 보인다.

식재된 듯한 키 작은 소나무가 자라는 방향으로 걸어 다시 능선으로 들어가며 산행을 이어가 본다.

 

그 987.1봉 헬기장을 지나 능선으로 들어가니 참나무 가지 사이로 벌목된 나무가 얹혀있는 무명봉을 지난다.

잠시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등로가 좌측으로 크게 휘어져 사면 등로로 진행하듯 이어지고 있다.

다시 춘양목 지대를 지나 안부를 건너니 깊은 낙엽 등로를 만나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걸어가고 금새 폐헬기장이 되어가는 공터에 도착해 배낭 내리고 잠시 휴식을 취하며 구절초를 사진에 담아 본다.

지도를 살펴보니 876.9봉의 폐헬기장이다.

 

폐헬기장을 지나 낙엽이 깔린 약간의 잡목 구간을 타고 완만하게 내려가니 다시 멋진 능선 등로가 나타난다.

그 능선을 타고 걸어가니 처사경주최공의 묘지 한기가 나타나고 그 묘지를 지나 식흔이 어지러운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올라 다시 완만하게 내려가니 나즈막한 안부를 통과한다.

다시 완만하게 오르니 795.5봉 정상에 도착을 하고 사진 한장 남기고 조금 더 걸어 등로 우측으로 742.4봉으로 갈리는 갈림 삼거리를 지나니 곧바로 멋진 춘양목이 눈 앞에 펼쳐져 있다.

 

너무나 아름다운 춘양목을 바라보며 다시 완만하게 내려가니 등로에는 참나무와 춘양목이 섞여있는 멋진 등로가 열려 있다.

그렇게 잠시 더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깊은 안부가 나타나는데 처음에는 이곳이 솔당재가 아닐까 생각을 했는데 지도를 살펴보니 솔당재는 조금 더 진행을 해 소나무 군락지 부근이 솔당재라 생각되는 곳이다.

이곳 역시 이름없는 안부이지만 등로 주위에는 멋진 소나무들이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그 무명 안부를 지나 우측으로 휘어지며 걸어가니 좌측에 거대한 바위가 보이고 그 바위를 우측으로 우회하며 통과하니 비포장 임도같은 넓은 등로 양쪽으로 거목의 소나무 등로가 너무나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 솔당재에 도착을 한다.

솔당재는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에 있는 버제이, 버지이, 법전마을은 법전1리에 있는 마을로서 옛날 이곳에 법흥사라는 절이 있었고 그 앞에 큰 밭이 있었는데 그 밭에 마을이 생겼다고 해서 법전이라 하며 또는 법전이라고도 한다.
법전에는 진주강씨가 많이 살고있는 집성촌 마을로서 버전이라는 명칭도 있는데 법전리에서 3백 수십년간 세거하는 진주강씨네를 버전이 강씨라하여 버전이라고도 한다.
법전리에는 법전면의 중심소재지로서 봉화읍과 소천, 현동을 연결하는 국도 36번이 통과하며 폭 5,6m의 하천이 소재지의 남향쪽으로 흐르고 있다.
용동과 밀김이마을은 법전1리에 있는 마을인데 법전면 소재지에서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서 처음에는 산세가 용혈이라는 구멍이 있어서 밑구무라고 한것이 밀김이로 변천하여 불리어 오다가 해방을 지나면서 용동이란 지명으로 불리어 지고 있으며 또는 마을 앞산 지형이 용머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용동이라고도 한다.
음지말, 음지마을, 순흥법전는 법전리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 법전리 가운데 폭이 5,6m쯤 되는 조그만 개울을 두고 조선시대에 개울의 오른쪽은 순흥땅이었고 왼쪽은 안동땅으로 경계를 갈라 이 지명을 순흥법전이라고 부르기도하고 음지마을이라고 부르기도한다.

이 지역에는 잠은 강흡의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대과급제자 13명을 배출하였으며 후손 류하 강태종은 1858년 철종9년에 법천 강윤과 법천의 두 동생인 첨지 중추부사 강완과 참봉 강한 3형제분의 유덕을 기려 재실을 건립하고 추사 김정희가 쓴 경체정의 현액을 걸어 지금도 법전리에 남아있다.
서멍이, 서망이, 서망은 조선시대 임금이 미복잠행 행차 하다가 이곳의 농사 형편을 보고 매우 걱정했다고 하며 이 곳에 모내기만 하면 전국이 풍년인줄 알고 안심했다고 한다.
이곳에 백성들이 성은에 감격하여 서쪽에 있는 대궐을 바라본다고 하여 서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모랫골은 산이 헐벗고 모래가 많아서 유래된 지명이며 지금은 조림으로 모래산이 별로 없고 산에는 나무가 많은 편이다.
이 지역은 한마을이 5리 정도의 큰골을 이루고 있어 아랫모래골과 윗모래골로 부르고 있으며 모랫골 입구에 서낭당이 2개 있는데 마을 입구의 북향으로 오른편에 있는 당은 일반적인 당이고 왼편에 있는 당은 삼신당으로 매년 음력 정월 14일 밤이면 풍년 농사의 기원과 마을의 안녕을 위해 동리에서 유사(재간,축간 당주)를 정하여 당제를 올렸다 한다.
사랭이, 새랭이, 사령은 모래골의 북향 방향으로 2 Km 위쪽에 속해 있으며 마을 주위의 산이 마사토의 산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이 마을이 개의 형상을 하고있고 주위의 산 8개봉이 개(견)의 유두를 상징하고 있어 옛부터 이 마을은 8호 이상이 거주를 못한다고 하여 왔다.
붓둔, 북둔, 부둔은 마을의 양쪽에 베틀 같은 산이 있고 가운데 북처럼 생긴 산이 있어서 유래된 동명이며 마을에 둔덕이 많아 교통이 불편한 오지부락이다.
이 마을에는 수년 전부터 마을 입구에 성황당을 모셔 놓고 매년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그 주위에는 수령 약 150년 되는 노목 한 그루가 있으며 (보호수 읍면나무 11-29-4-2호 지정) 그 이후 심겨진 배나무 1그루, 소나무 1그루가 함께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솔등재에 대한 자료는 찾지 못하고 솔등재가 있는 법전리에 대한 자료만 찾아 본다.

 

솔드재를 지나 완만하게 오르니 바위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707.8봉에 도착을 한다.

멋진 소나무 두그루 사이에 바위가 서 있는 이곳 정상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한현우님이 솔당재봉이란 낡은 띠지가 나타난다.

어디에서 솔당재봉이란 이름을 찾아 붙여 놨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정확한 고증을 통해 붙여 놨으리라 생각을 해 본다.

그곳을 지나 등로 옆 소나무에 철사줄이 이어져 있는 철사줄 등로를 타고 걸어 보는 시간이다.

 

잠시 철사줄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등로에는 다시 멋진 춘양목이 줄지어 자라고 있는 멋진 마루금을 만난다.

평이한 등로를 타고 잠시 걸어가니 등로는 완만한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고 나즈막한 안부 하나를 건너 걸어가니 금새 또 하나의 안부를 통과한다.

지도를 살펴보니 흙목이재라 표기가 되어 있는 안부인데 지도를 보지 않고 진행을 하면 어디인지도 모르게 통과할 것 같은 그런 안부이다.

흙목이재는 봉양면 우곡리와 춘양면 학산리를 이어주는 고개로서 왜 흙목이재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는 문수지맥을 타는 산꾼을 제외하곤 찾는 사람 하나 없는 사라져 가고 있는 고개로 보인다.

 

흙목이재 안부를 지나 완만하게 오르니 멋진 춘양목이 다시 나타나는데 거목의 춘양목 아래에는 키 작은 잡목들이 자라고 있다.

다시 멋진 춘양목 군락지를 따라 걸어가니 갑자기 정상에 도착을 하는데 그 정상을 넘자마자 벌초가 된 듯한 무명묘지 한기가 보인다.

지도를 살펴보니 674 묘지봉이고 이곳에서 등로는 우측으로 능선을 타고 휘어지며 이어지고 있다.

 

그 묘지봉에서 잠시 더 능선을 타고 걸어가니 거목의 소나무들이 보이고 곧이어 또 다른 봉우리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의 해발고도가 669.5봉이다.

잠시 지독한 잡목이 등로를 막고 강력하게 저항을 하고 어렵게 그 등로를 지나니 다시 멋진 소나무 등로가 이어지고 있다.

소나무에는 여전히 철사줄이 박혀 등로를 따라오고 평이한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갑자기 지독한 산초가시가 등로에 가득 자라고 그 산초가시나무 지대를 지나는데 온 몸이 생채기가 나기 시작한다.

 

지독한 산초가시나무를 이리저리 피하며 어렵게 진행을 하니 나즈막한 봉우리와 안부를 오르고 내렸다를 반복한다.

그곳에서 잠시 배낭 내려 준비된 간식과 과일로 허기를 달래고 다시 출발하니 갑자기 비포장 임도로 내려서는데 이곳이 바로 붓든고개이다.

이곳 붓든고개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하는데 임도 주위에는 이곳저곳에 송이채취 때문에 출입을 금한다는 내용들이 많은데 다행히도 오늘 하루종일 송이를 채취하는 농민들을 만나지 않아 편안하게 진행을 하고 있지만 괜시리 의심을 받아 진행에 어려움이 없기를 바래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붓든고개는 붓둔, 북둔, 부둔이라는 마을의 양쪽에 베틀 같은 산이 있고 가운데 북처럼 생긴 산이 있어서 유래된 동명이며 마을에 둔덕이 많아 교통이 불편한 오지부락인데 그 부락에 있는 고개라서 붙은 이름처럼 보인다.
이 마을에는 수년 전부터 마을 입구에 성황당을 모셔 놓고 매년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그 주위에는 수령 약 150년 되는 노목 한 그루가 있으며 (보호수 읍면나무 11-29-4-2호 지정) 그 이후 심겨진 배나무 1그루, 소나무 1그루가 함께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붓든고개는 법전리와 우곡리를 이어주는 고개인데 현재는 고개로서의 기능은 많이 퇴색된 듯 보인다.

 

그 비포장 임도 우측으로는 자작나무 조림지가 짧게 나타나고 그 비포장 임도가 끝나는 지점에서 다시 능선으로 오르니 이제부터 등로에는 이름모를 많은 굴들을 만나며 진행을 하게 된다.

첫번째 무명 굴을 지나 오르니 소나무가 자라는 봉우리 같지 않은 평이한 봉우리에 도착을 해 다시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오후 2시가 넘으면서 산행 속도도 조금씩 떨어지고 집중력도 저하가 되면서 쉬어가는 시간과 기회가 자꾸만 길어지고 있다.

 

다시 소나무 군락지를 타고 걸어가니 변색이 되어가는 잡목 등로가 나타나고 거대함 거목의 소나무 한그루를 지나 평이한 능선 등로를 걸어간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가니 이름 모를 무명 굴이 다시 나타나고 그곳을 지나 오르니 좁은 공터가 있는 갈방산 정상에 도착을 한다.

해발고도 712미터라 적혀있는 많은 안내판이 어지럽게 달려있는 갈방산 정상에서 추억의 사진 한장 남기고 잠시 쉬었다 다시 배낭 둘러메고 다덕현으로 향한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갈방산에 대한 자료를 찾을 수 없어 제대로 된 공부를 할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갈방산 정상에서 증명 사진 몇장 남기고 우측 커다란 소나무 몇그루가 서 있는 방향으로 걸어 진행을 하니 완만한 내리막 등로가 이어지고 그곳에도 역시 멋진 소나무가 도열해 있다.

잠시 내려가니 등로 좌측 앞으로 청량산이 아주 가깝게 자리하고 그 좌측 저 멀리 일월산도 조금 더 다가와 있다.

조만간 다시 오르기로 약속을 하고 계속 완만하게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타고 걸어 본다.

 

조망을 즐기고 내려가니 이곳에는 예전에 불이 났었는지 거대한 소나무 밑둥에 검게 그을린 흔적들이 남아 있다.

계속 이어지는 청량산과 주변 산들을 조망하며 내려가니 멋진 춘양목 등로를 지나 잡목과 춘양목이 섞여있는 마루금을 통과한 후 무명 묘지 한기도 넘는다.

다시 잡목 구간을 지나 전주이씨 묘지를 지나니 벌초가 잘 되어 있는 무명묘지 한기가 다시 나타나고 또 다른 무명묘지 한기를 지나 춘양목 군락지를 타고 가파르게 내려가 2차선 옛날 36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다덕현에 도착을 한다.

구 36번 2차선 도로로 내려서서 도로를 타고 좌측으로 걸어 오르니 그곳에 신 4차선 36번 도로 위를 지나는 다덕육교가 보이고 그 육교를 통해 새로 신설된 36번 4차선 지방도로를 건너 진행을 한다.

 

다덕육교 가운데를 지나며 아래로 자동차들이 빠르게 달리는 신설 4차선 36번 지방도로를 내려다 보고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반사경이 있는 곳 우측으로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 있고 문수지맥 마루금은 그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진행하게 되어 있다.

다덕현은 다대기 또는 다덕은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우곡2리에 있는 우곡 약수탕이 있는 마을로 일제시대에 다덕광업소가 있었는데 이 명칭을 따서 마을 이름을 다덕이라 불렀으며 금, 은, 동, 철, 아연 등 7가지 광물이 많이 생산되었고 성할 때는 종업원이 3000여명이 넘어서 시장이 들어설 정도였다고 하며 지금은 폐광되어 매몰되었고 우곡약수탕에서 나오는 약수는 위장병과 피부병에 특효가 있다하여 외지에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 다덕현에서 우측 우곡리 방향으로 들어가며 맥 잇기 산행은 이어지고 있다.

 

구 36번 2차선 2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다덕육교를 지나 나타나는 반사경쪽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다덕마을 방향으로 들어가니 도로 좌측 능선 방향으로 가시나무를 벌목한 장소가 나타나고 그곳으로 오르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지도상으로 나타나 있는 423.4봉을 찾아 보지만 시멘트 포장도로를 내면서 사라진 듯 아무 표식도 없다.

벌목된 가시나무 능선으로 오르니 잠시 낙엽송 구간을 지나 잡목이 지독하게 우거져 있어 진행이 어렵지만 다시 시멘트 포장도로로 내려와 진행하기가 그래 그냥 그 잡목을 뚫고 정상 마루금으로 진행을 한다.

잠시 ㅇ르니 갈림 삼거리에서 우측 잡목이 우거진 방향으로 어렵게 걸어 오르니 희미한 등로가 나타나고 곧이어 이동통신분전함이 두개가 서 있다.

 

그 이동통신 분전함을 지나 잘 정비된 무명묘지 한기를 넘으니 다시 멋진 낙엽송 등로가 나타나고 그 우측으로는 우곡2리의 다덕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다대기와 다덕마을은 우곡 약수탕이 있는 마을로 일제시대에 다덕광업소가 있었는데 이 명칭을 따서 마을 이름을 다덕이라 불렀으며 금, 은, 동, 철, 아연 등 7가지 광물이 많이 생산되었고 성할 때는 종업원이 3000여명이 넘어서 시장이 들어설 정도였다고 하며 지금은 폐광되어 매몰되었고 우곡약수탕에서 나오는 약수는 위장병과 피부병에 특효가 있다하여 외지에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많은 선답자들이 주등로 우측 아래로 이어져 오는 비포장 임도를 따라 진행을 하였는지 이곳 주능선에는 잡목과 잡풀이 자라며 진행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다시 잡목이 우거진 주능선을 타고 걸어가니 등로 우측으로 방금 전 건넌 신설 36번 4차선 지방도로가 보이고 그 위로는 제법 많은 차령들이 빠르게 통과하고 있다.

그 도로 옆으로 다덕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다시 멋진 소나무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이제 등로 좌측으로 법전면 풍정1리에 있는 사택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사택이 생기기 전까지는 단지골이라고 불리어 졌으나 1935년경 일본인들이 다덕광산을 개발하면서 지금의 자리에 사택 43동과 목욕탕 1개소, 야구장 1개의 시설을 설치하였다.

그 시기의 광맥은 금, 은 등이 생산되었으며 광부 600명과 일본인 100명 정도 광산 개발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해방이 되면서 광산이 폐광되고 광부들은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그 사택마을 남쪽으로는 불미골과 명창골도 보일듯 말듯 그렇게 다가와 있다.

명창골 북쪽으로 산등하나를 사이에 둔 마을로 풀피형상으로 되어있어 풀피야를 따서 야동 또는 불미골 이라고 하며 명창골은 산세가 아래명동은 자이고 웃명동은 자의 형국같이 생겨서명동 또는 명창골이라고 하며 조선 숙종 때 이시선이라는 선비가 정자를 짓고 정자 앞에 연못과 큰 소나무가 있어 정자 이름을 송월제라 했으며 명월청풍이라는 데서 명청동이라 이름이 불려졌는데 지금은 명창골이라고 한다.

그렇게 주위 마을 풍경을 구경하며 잡풀을 헤치고 걸어가니 이제 등로 우측 저 멀리 방금 전 지나온 갈방산이 36번 도로 건너 빤히 올려다 보인다.

유령서씨 묘지를 지나 파란 천이 쳐진 나즈막한 능선을 지나 우측으로 진행을 하니 처음 다덕마을로 들어오며 헤어졌던 시멘트 포장도로와 이어진 비포장 임도와 만나 잠시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살펴보니 다덕현에서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계속 지행을 하면 이곳 비포장임도와 만나도록 되어 있다.

 

그 비포장 임도가 끝나는 지점에서 등로는 우측 능선으로 이어지고 능선으로 오르니 다시 지독한 잡목들이 기다리며 저항도 점점 더 강해져 온다.

잡목과 커다란 소나무가 함께하는 지독한 등로를 뚫고 오르니 정상에 잡ㅁㄱ과 잡풀이 자라고 있는 무명묘지처럼 보이는 분봉이 있는 473봉에 어렵게 도착을 해 큰 한숨을 내쉬어 본다.

이곳에서 우거진 잡목으로 인해 정상적인 등로를 찾기 위해 잠시 헤매고 어렵게 자측으로 정상 등로를 찾아 완만하게 내려가며 진행을 해 본다.

 

어렵게 잡목 구간을 지나니 벌초가 되어 있는 묘지 한기를 지나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 안부를 통과한다.

그 안부를 지나 오르니 이곳에도 역시 소나무에 철사줄이 이어져 있는 등로가 나타나고 그 철사줄을 따라 걸어 보는 시간이다.

이제 잡목은 조금 줄어 들었지만 그 등로에는 소나무와 가시가 달린 산초나무가 너무나 힘든 산행을 만들고 있다.

잠시 쉬면서 준비한 빵과 과일로 허기를 달랜 후 다시 걸어가니 등로는 소나무가 빼곡한 완만한 ㅇ르막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조금 더 오르니 삼각점이 박혀있는 509.6봉에 ㄷ착을 하는데 서래야 박건석님이 이곳을 불미산이란 종이 코팅지를 달아 놨다.

 

불미산이란 509.6봉을 지나 소나무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74번 ㅅㅇ전탑을 만나고 그 송전탑에서 잠시 주위 풍경을 둘러 본다.

먼저 등로 우측으로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우곡리의 진의실, 진곡, 지내실이란 마을이 보이는데 동네 뒷산의 형태가 지네를 닮았다고 하여 지네실이라 하다가 진의실이라 부르고 있고 난리때 피난을 안가도 안전한 마을이라고 전해온다.

사과 과수원을 하는지 많은 과수나무들이 보이고 그 뒤로 돌아가며 멋진 산줄기가 병풍처럼 돌아가고 있다.

 

등로 좌측으로는 억새지대를 지나 바로 아래에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갈방산 중턱 해발 600미터 지점에 있는 풍정리 마을이 내려다 보이고 좁은 그 들판에도 이제는 황금빛 물결로 변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명창골, 불미골, 시드물(풍정), 사택 등이 있는데 불미골은 야동으로도 불리는데, 마을이 풀피 형상으로 되어있다 하여 풀피야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고 시드물(풍정)은 마을 앞 냇가에 있는 맑은 우물 근처에 큰 신나무가 있다 하여 이름 붙여졌으며 사과, 머루, 감자 등이 유명하다.

그 풍정리 지나 저 멀리 나즈막한 각화지맥 지나 청량산과 덕산지맥 그리고 일월산이 가깝게 다가와 있다.

아름답게 이어져 있는 저 산줄기들을 모두 타고 걸어 볼 기회가 잇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기회가 온다면 오늘도 좋은 추억으로 남겨질 것이다.

 

그 송전탑을 지나 잠시 평이한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처사안동김공묘지가 나타나고 그 묘지를 지나 능선으로 들어가니 큰 웅덩이가 보이고 곧이어 멋진 소나무 등로가 이어지고 있다.

잠시 그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등로 옆에 무명굴이 또 나타나는데 그 굴 앞에는 한국광해관리공단의 영남권역 굉해 실태조사라는 띠지 하나가 걸려있어 귀가 후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되어 있다.

한국광해관리공단은 폐광산이나 개발이 중단되고 사업이 종료된 공산지대의 실태를 조사하여 생활에 피해가 없도록 하는 공단이라는 설명이 있어 이제서야 조금은 이해가 될 듯 하다.

이곳 지역도 예전에 많은 광산지역이 있었고 그 광산들로 인해 이런 수많은 무명굴들이 생겼기에 한국광해관리공단에서 실태조사를 했던 것이 아닐까 추측을 해 보는 시간이다.

 

몇개의 무명굴을 지나 안부를 통과하니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고 완만하게 오르니 공터가 있는 봉우리인 무명 공터봉에 도착을 한다.

이곳에서도 잠시 식수 한모금 마시고 휴식을 취한 후 좌측으로 크게 꺽어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를 타고 곧장 내려가며 진행을 해 본다.

이제 그리 멀리 남아 있지 않기에 몸이 피곤하지만 두 다리엔 힘이 붙는 시간이기도 하다.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뚜렷한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분봉이 쓰러져가는 무명묘지 한기를 지나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 평이한 등로와 만난다.

잣나무 등로를 타고 잠시 걸어 내려가니 금새 1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옛고개에 도착을 해 잠시 심호흡 한번 해 본다.

옛고개는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봉성1리에 있는 앳골, 애골, 아곡, 역전이라 불리는 마을로서 옛날에 이 골에는 집이 없었는데 행인들이 법전면 갈방으로 넘어가는데 재가 험하고 도둑이 많아서 애를 먹었다 하여 애골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영암선이 개통된 후 봉성역이 이곳에 설치되어 요즘은 역전이라 부르고 있다.

옛고개는 봉화군 법전면 풍정리와 봉성면 봉성리를 이어주는 고개로서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기능으로 사용되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봉성역이 활발하게 사용되던 시절엔 꽤 많은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개가 아니였을까 생각도 해 본다.

 

옛고개 도로를 건너 전봇대가 있는 곳을 통해 능선으로 오르니 간벌된 지역이 나타나고 완만하게 한동안 올라 주능선에 도착하고 잠시 그 주능선을 따르니 간벌된 나뭇가지들이 널부러진 장소를 지나 460.4봉에 도착을 한다.

그 460.4봉을 지나니 다시 잡목이 사라지고 소나무가 잘 자라고 있는 능선 등로가 이어져 콧노래를 불러보는 시간이다.

 

뚜렷한 멋진 등로를 타고 나즈막한 안부와 봉우리를 내려갔다 오르니 등로에 참호같은 웅덩이가 보이고 소나무 등로를 따라 내려가 바위로 된 안부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도착을 한다.

지도상에는 풍정굴이라 되어 있어 자료를 찾아 보니 정확한 자료는 찾을 수 없지만 이곳 아래 지하터널로 영동선 기차길이 지나다니기 때문에 이곳 지명 이름을 따 풍정굴이라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되는 곳이다.

다만 선답자들은 이곳을 엉고개라 부르기도 하기에 찾아 보니 엉고개는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풍정2리에 있는 고개로 아현이라 불려지는데 500여년 전 봉화금씨가 와서 살면서 엄현이라 불렀으나 어린아이들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자주 죽게되자 아현으로 고쳐 불렀다 한다.
현재 봉성면과 재를 하나 사이에 두고 경계를 이루며 아랫마을 웃마을로 나눠 불리운다.

 

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오르니 이장된 듯한 묘지터였던 넓은 공터가 나타나고 조금 더 걸어 진행하니 갑자기 480.8봉 정상에 도착을 한다.

삼각점이 박혀있는 이곳 480.8봉에는 서래야 박건석님이 봉성산이란 종이 코팅지를 달아 놓고 있다.

잠시 사진 몇장 남기고 직진 방향의 잡목 속으로 들어가 다시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다시 이어지는 잡목과 소나무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봉우리 같지 않은 450봉을 지나 벌초가 잘 되어 있는 무명 묘지 한기를 통과한다.

그곳을 지나 다시 평이하게 걸어가니 소나무와 잡목이 공존하는 410.3봉 갈림봉에 도착을 한다.

다시 멋진 소나무 등로를 타고 여유있게 걸어가니 403봉 지나 금새 잘려진 소나무 잔가지들이 말라 널부러져 있는 407봉에 도착을 해 식수 한모금 마셔본다.

이제 미륵고개가 얼마 남지 않은 장소이기에 무게감이 느껴지는 두다리에 힘을 모아 걸어 본다.

 

다시 나타나는 산초가시나무와 소나무를 타고 어렵게 걸어가니 다시 멋진 소나무 등로가 열리고 곧이어 낙엽송 군락지가 펼쳐져 있다.

그곳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눈 앞에 시멘트 포장도로가 내려다 보이는데 살펴보니 우회하는 등로가 없이 직벽의 절개지를 타고 직접 미륵고개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어쩔 수 없이 직벽의 절개지를 타고 조심하며 내려가 어렵게 1차선 시멘트 포장도로가 지나는 미륵고개에 도착을 한다.

미륵고개는 경상북도 봉화군의 봉성면 봉성리와 명호면 양곡리 사이에 있는 고개로서 이 고개는 문수지맥에 있는데 위로는 옛고개와 다덕현으로 이어지고 아래로는 긴재와 응봉산으로 이어진다.
조선지지자료에 미륵현과 함께 미럭이라는 언문이 병기되어 있으며 미륵고개 서쪽 사면을 미륵골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이 있다.
자연 암석에 조각된 미륵불의 높이는 2.5m 정도로서 암석에 새겨진 이 미륵불의 존재에서 지명이 유래하였다.

 

미륵고개 우측에는 봉화 봉성리 석조여래입상이 서 있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잠시 들려 둘러보고 사진 몇장 남겨 본다.

봉화 봉성리 석조여래입상은 봉성1리 미륵골마을에서 북동쪽으로 개설된 농로를 따라 500여 미터 가다보면 남북으로 흘러내린 산 능선의 최 말단부 돌출된 암벽에 3m의 불상이 부조로 새겨져 있는데 머리 부분은 다른 바위로 조각하여 이 위에 얹어 놓았는데 바위 자체의 테두리는 자연히 광배가 된다.
머리 높이는 1.27m나 되는 우람한 모습이지만 굵은 눈썹이 좁은 이마에 바싹 붙어 있고 눈은 웃는 모양이며 코는 너무 길어 턱 가까이까지 내려와서 입이 간신히 표현되어 있으며 뺨이 유난히 팽창되어 있는 등 토속미가 물씬 풍기고 있다.
수인은 가슴에 들어 올려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으로 아미타 중품중생인이고 통견의 법의는 선조로 U자 모양의 둥근 옷 주름을 크게 새겨 놓았다.

이곳 석조여래입상이 있어 미륵고개가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들깨 밭이 있는 도로 우측 끝자락에서 다시 능선으로 가파르게 오르니 소나무 등로가 이어지고 등로는 완만하게 오르며 진행이 된다.

잠시 더 걸어 오르니 주능선에 도착을 하고 곧이어 표식이 다 지워진 삼각점을 만난다.

그 삼각점을 지나니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가 열리고 다시 소나무 등로로 이어지는데 등로 좌측으로는 비닐하우스가 설치된 밭이 보이고 사람들이 작업을 하는지 목소리도 들린다.

 

특이한 것이 없는 평이한 등로를 타고 한동안 걸어가니 등로는 우측 사면 등로로 이어지고 곧이어 경찰관순직비가 있는 곳으로 내려선다.

그곳 경찰관순직비에는 총경지용호전봉화경찰서장 순직비가 세워져 있고 다른 7인의 서장과 단장 순직비도 보인다.

자료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되어 있다.

6·25가 일어나기 1년 전인 1949년 나라 안에서는 무장 공비들이 여러 곳에서 착한 국민들을 괴롭히고 있었고 6월 17일 조용한 봉화경찰서 상황실에 경비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재산 지서가 약 200여 명의 무장 공비들의 습격을 받고 있다는 급한 연락이었고 즉시 보고를 받은 지용호 경찰서장은 비상대기하고 있던 경찰관 20여 명을 비롯하여 대한 청년단 봉화군 단장과 청년 단원 46명 그리고 봉화군 내무과장으로 구성된 인력과 무기 및 식량 등을 3대의 작전차량에 나누어 타게 하고 급히 출동하였다.
재산으로 출동 중 명호면과 봉성면 경계 지점인 미륵재에 이르자 도로 양편 능선에 매복하고 있던 무장 공비 약 100여 명이 집중적으로 사격을 가해 오고 차에 타고 있던 사람이 전멸 당할 위기에 빠지자 지용호 서장은 자동차를 즉시 멈추게 하고 용감하게 뛰어 내려가 사격 중지, 사격 중지하자 자동차가 멈추고 금테 모자를 쓴 높은 사람이 뛰어 내려와 소리치니 무장공비들도 놀라서 사격을 멈췄다.
그 때 우렁찬 목소리로 나는 봉화경찰서장으로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과 물자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고 내 목숨을 내놓을 터이니 다른 사람들은 절대 죽이지 말아라고 소리쳤다.
그는 책임감이 투철하고 부하 직원과 동료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였으며 남을 위해 희생하는 정신에 감동된 무장공비들은 지용호 서장의 요구에 따라 그들을 돌려보내 주었다.
무장공비들은 지용호 서장을 살해하고 자동차 3대를 불태웠으며 식량, 무기, 의복 등을 빼앗아 도망쳤으나 전멸 당할 위기에서 용기 있는 지용호 서장의 행동으로 38명의 목숨을 구하고 자신은 장렬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봉화군민들은 순직한 8명의 합동 위령 군민제를 실시하는 한편 지용호 서장의 숭고한 정신을 길이 후손에 전하기 위하여 미륵재에 1970년 10월 15일 순직비를 건립하고 매년 6월17일에 학생과 군민들이 고인의 장한 충절을 되새기고 있다.

 

경찰관순직비를 돌아 보고 내려 와 918번 2차선 포장도로를 만나 오늘 산행을 마무리 한다.

918번 2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좌측으로 조금 오르면 반사경과 전봇대가 있는 도로 우측 능선으로 다음 구간 산행 들머리가 보이고 그곳으로 들며 제2구간이 시작될 것이다.

오늘도 장거리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한 후 마무리하고 가능하면 조만간 다시 내려 와 제2구간도 무탈하게 완주할 수 있기를 바래 본다.

집으로 복귀하는 도로가 생각보다 막히지 않아 일찍 복귀해 집에 모여있는 가족들과 회포를 풀고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며 아름답고 멋진 추석 연휴를 시작해 본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