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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맥산행(완료)/수도지맥(대간·완)

수도지맥 제2구간 수도암에서 고불암까지 산행후기

by 칠갑산 사랑 2015.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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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경상북도 김천시와 경상남도 합천군의 수도지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2015년 06월 28일 일요일 당일 산행

산행날씨 : 새벽부터 아침까지는 이슬비와 짙은 안개로 조망이 전혀 없었고 아침부터 점심때까지는 흐리고 간간히 햇볕 후 점심부터 강렬한 햇살과

                 무더위로 고생했던 산행 날씨

산행온도 영상 12도에서 영상 28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수도암-한산교-청암사 갈림 삼거리 이정표(수도산 정상 2240 m, 청암사 4400 m, 수도암 250 m)-산죽지대-청암사 갈림 삼거리

                 이정표2(수도산 정상 1790 m, 청암사 4350 m, 수도암 700 m)-이정표(정상 1000 m)-암봉 전망대-안전목책과 로프구간-나무계단-

                 바위전망대-나무계단-돌탑-수도암 갈림 삼거리 이정표(수도산 70 m, 단지봉 4.5 Km, 수도암 2.43 Km)-안전목책과 로프구간-

                 수도산(1317봉)-수도암 갈림 삼거리 이정표 복귀-동봉 전망대-암릉지대-위치번호(수도산 10번지점)-산죽지대-구곡령

                 이정표(양각산 3 Km, 수도산 1.3 Km, 단지봉 3.3 Km, 심방하산 3.9 Km)-준.희님의 응원판-바위 무명봉-지독한 잡목지대-중촌마을 갈림

                 삼거리 이정표(수도산 2.9 Km, 단지봉 1.7 Km, 송중마을 4.9 Km)-지독한 잡목지대-송곡령(고비재) 이정표(수도산 3.8 Km,

                 단지봉 0.8 Km, 송곡령 하산)-헬기장(산으로의 비행) 이정표(수도산 4.5 Km, 두리봉 9.3 Km, 내촌입구 4.0 Km)-잡목구간-

                 단지봉(1335봉, 정상석과 삼각점) 이정표(수도산 4.6 Km, 두리봉 9.2 Km)-지독한 잡목구간-홍감 갈림 삼거리 이정표(단지봉 1.3 Km,

                 두리봉 7.9 Km, 홍감 3.4 Km)-산죽지대-바위 암릉구간-좌일곡령(봉, 1258봉)-조릿대 구간-바위 암릉구간-조릿대 구간-바위 암릉

                 우회구간-바위 전망대-바위 암릉구간-조릿대 구간-이정표(단지봉 2.2 Km, 목통령 2.8 Km와 두리봉 7.0 Km)-바위 우회구간-1118.3

                 암봉-암봉 우회구간-용두봉(1124.9봉) 삼각점-산죽지대-개금 갈림 삼거리 이정표(단지봉 5.0 Km, 두리봉 4.2 Km, 개금 2.1 Km)-목통령-

                 지독한 잡목구간-보리수나무 구간-간벌지대-1040 헬기장 갈림 철조망-자작나무 지대-황점마을 하산 안부-바위 우회등로-석항령

                 분기점-잔망바위-산죽지대-1157 민둥봉-잣나무 지대-자작나무 지대-소나무 지대-분계령(불기령)-지독한 잡목지대-산성 흔적-두리봉

                 분기점-두리봉 헬기장-두리봉(1134.2봉) 삼각점-두리봉 헬기장 복귀-산성 흔적-초원 등로-이정표(목통령 3.7 Km와 단지봉 8.7 Km)-

                 무명봉-초원 능선-진달래 군락지-살푸지재 평전-남산 깃대봉(1112.9봉) 헬기장과 삼각점-낙엽송 지대-간벌지대-산죽지대-출입금지

                 안내판-장자동고개-벌목지대-잡목지대-918봉 헬기장-안부-소나무 지대-고불종루 공사장-고불암 도로-고불암-산행종료

산행거리 : 두리봉 삼각점 왕복 포함해 22.47 Km (스마트 폰의 GPX 기준)

산행시간 : 이슬비와 짙은 안개 그리고 지독한 잡목 구간들로 인해 참으로 어렵게 진행 해 10시간 46분 (02시 59분에서 13시 45분까지)

교통편 : -갈때 22시 50분 서울역에서 김천역 도착하는 열차 이용후 김천역에서 택시로 수도암

             -올때 고불암에서 해인사 택시로 성주시외버스터미널 도착 후 시외버스로 서울남부터미널 도착

수도지맥이란?
백두대간이 전북 무주군과 경북 김천군과 경남 거창군등 삼도가 만나는 대덕산(1290.9봉) 남쪽의  삼도봉(일명 초점산, 1250봉)에서 남쪽으로  300여 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시작하여 남동쪽으로 가지를 쳐 내려가며 경상남도와 북도계를 따라 봉산(902봉), 수도산(1317봉), 단지봉(1326.7봉), 좌일곡령(1257.6봉)을 지나  가야산을 목전에 두고 두리봉(1133봉)에서 도계를 벗어나 남쪽으로 거창군과 합천군경계를 따라 남산(1113봉), 마령(1006.5봉), 우두산(의상봉, 1046.2봉), 비계산(1130봉), 88고속도로, 두무산(1038.4봉), 오도산(1120봉) 등 1000미터 이상의 장쾌한 능선이 60여Km 이어진다.
오도산에서 거창군과는 작별을하고 온전한 합천땅으로 들어서며 고도를 낮춰 토곡산(644봉)를 지나면 다시 경상남도와 북도계를 만나 고령군과 합천군계를 따라 만대산(688봉), 시리봉(408봉)을 지나 솜등산(271봉)에 올라선 도계능선과는 작별을하고 마지막 여력으로 필봉(330봉), 부수봉(317봉), 성산(205.7봉)을 내려서며 맥을 다한다. 

수도지맥 동북쪽으로 흐르는 감천은 길이 69 Km 유역면적 10만 Km2로 수도산 북쪽에서 발원하여 김천시의 지명을 낳게하고 김천시일대를 지나 구미시 선산읍 원리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들고 수도지맥 동쪽내지 동남쪽으로 흐르는 회천은 길이 78 Km,유역면적 78000 Km2로  수도산 동쪽기슭에서 발원하여 대가천을 이루어 성주호에 들었다가 다시 동으로 흘러 고령읍에서 소가천 및 안림천과 합류하고 고령군 덕곡면 율지나루에서 낙동강에 흘러든다.  

수도지맥 서쪽으로 흐르는 황강은 길이 111 Km,유역면적 13만 Km2로  남덕유산(1507봉)동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합천호에 들었다가 합천군 청덕면 적포리 일대에서 낙동강에 흘러들며 맥을 다한다. 
수도지맥중 제일 높은산은 단지봉(1326.7봉)이지만 지맥의 이름을 수도지맥으로 한것은 아마도 수도산(1317.1봉)의 유명세일 듯 싶고
좌일곡령(1257.6봉)은 일부지도가 좌대곡령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壹(한일)자와 臺(돈대대)가 비슷하여 생긴 일은 듯하며 국토지리정보원의 25000지도는 좌일곡령으로  표기되고 있다.

 

 

 

짙은 안개와 이슬비로 인해 기대했던 조망 하나 없이 지독한 잡목을 어렵게 헤치며 구간 완주에 만족을 했던 안타까웠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나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메르스로 인해 산행과 여행 한번 가기도 눈치 보이는 정국에 지독한 가뭄까지 겹쳐 배낭 메고 밖으로 나가기가 쉽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렇다고 방콕으로 시간을 보낼 수 없어 이번주에는 어디로 갈까 잠시 고민해 본다.

진행하다 남아 있는 진양기맥 2구간과 부용지맥 및 관암지맥 그리고 수도지맥 중 한곳을 생각하다 잡목이 더 자라면 진행이 가장 어려울 것 같은 수도지맥으로 내려가기로 한다.

금요일 저녁에 내려가고 싶었지만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생겨 토요일 산행이 어려워지고 하루 일을 보고 저녁에 간단히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 열차를 타고 김천으로 향한다.

 

일 때문에 자주 내려 왔고 수도가야 종주와 무흘9경 때문에 또 한번 올랐던 수도암이기에 낯설지 않게 편안한 마음으로 김천으로 내려가 간단히 새벽 참을 먹고 택시를 이용해 수도암으로 가니 점점 안개가 짙게 밀려오고 기대와는 달리 진행에 어려움이 예상되는 새벽이다.

새벽 2시 40여분에 수도암 주차장에 내려 잠시 산행 준비를 하고 있으니 수도암 넘어 저 깊은 수도산 계곡에서 크기도 우람한 멧돼지 울음소리가 들리면서 수도암에서 잠을 깨우는 은은한 종소리마저 삼켜 버리고 있다.

오늘은 멋진 일출과 아름다운 조망을 기대했는데 그 기대는 모두 무너지고 그저 무탈하게 고불암까지 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보는 소박한 소망으로 바뀌는 시간이기도 하다.

 

수도암에서 시원한 물 한모금 마시고 수도산으로 오르니 오르면 오를수록 미세한 가랑비가 내리듯 하얀 안개가 온몸을 휘감고 나뭇가지에 매달려있던 안개가 산객의 발걸음에 비산하며 등산복을 흥건히 적시니 산행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은 완전히 젖어 버렸다.

더욱이 잡목이 자라면서 등로조차 보이지 않고 그 잡목을 헤치며 진행하다 보니 시간은 기약없이 지체되고 온몸에 생채기가 생겨 아품이 밀려들지만 중간에 포기하기도 어려워 이를 악물고 악전고투가 이어지고 있다.

그래도 아침식사를 마치고 10시가 지나 햇살이 바추면서 이슬이 사라지니 등로의 물방울은 사라지고 있지만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고 비로 인해 젖었던 등산복이 마를쯤 다시 땀방울이 그 등산복을 젖시는 시간에 어렵게 남산 깃대봉에 올라 힘든 얼굴을 감추고 셀카로 사진 한장 남겨 보지만 어려움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하고 있다.

 

열차를 이용해 내려가다 보니 몸은 편안하지만 지나는 역마다 방송을 하고 객차 내에는 환하게 불까지 밝혀 놔 잠도 잘 수 없으니 장단점이 공존하는 시간이다.

어렵게 김천역에 도착해 간단히 밤참을 먹고 택시에 올라 무흘구곡을 거쳐 수도암에 도착을 하니 새벽 2시 40여분을 지나고 홀로 남겨진 시간에 산행 준비 후 주차장을 출발해 계단 옆에 서 있는 수도암에 관한 안내판을 읽은 후 올라 시원한 물한모금 마시고 대적광전 앞에 서 있는 삼층석탑에서 어렵게 사진 한장 남기며 수도암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본다.

수도암은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수도길 1438(수도리 512)에 있는 절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의 말사인 청암사의 부속 암자로 수도산 (일명 불령산) 정상 부근에 있다.

859(헌안왕 3) 도선국사가 수도 도량으로 이 절을 창건하고 매우 기쁜 나머지 7일 동안 춤을 추었다고 하는 수도암은 조선시대 1649(인조 27)에 벽암각성이 중창했으며 동학농민운동 당시 암자의 일부가 소실된 것을 1649(광무 3) 포응이 다시 이룩했다.

6·25전쟁 때 빨치 소탕 작전으로 일부 건물을 제외하고 불타버렸1960년에는 대적광전, 약사전, 정각암, 요사채 등 4동의 건물에서 서너 명의 승려가 수도하고 있었는데 조계종 제11대 종정인 법전이 와서 크게 중수하여 20여 동이 넘는 큰 가람으로 변모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적광전, 약광전, 수도선원, 관음전, 나한전, 노전, 정각, 서전, 낙가전 등이 있으며 유물로는 약광전의 석불좌상(보물 296), 삼층석탑(보물 297) 2,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307) 등과 함께 창건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기단과 초석이 있다.
이 가운데 석불좌상은 도선이 조성한 것으로 전하며 금오산 약사사, 직지사 삼성암에 있는 약사여래좌상과 함께 방광했다고 하여 삼 형제 불상으로 부르는데 머리 부분에 보관을 장식했던 흔적이 있는데 이는 약왕보살의 머리에 금속관을 설치했던 것으로서 흔치 않은 예이다.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경주시의 것굴암 불상보다 80 Cm 작으며 9세기에 거창군 가북면 북석리에서 제작되었다고 하며 당시 이 불상의 운반에 고심하고 있을 때 한 노승이 나타나 불상을 등에 업고 이 절까지 운반했는데 절에 다 와서 칡덩굴에 걸려 넘어지자 산신령을 불러 크게 꾸짖고 칡덩굴을 모두 없애게 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이 절 근처에는 칡덩굴이 없다는 설화가 전한다.
또 삼층석탑은 이 절터가 마치 옥녀가 베를 짜는 모습의 명당터라 하여 베틀의 기둥을 상징하는 뜻으로 두 탑을 세웠다고 한다.

 

대적광전 앞에 서 있는 삼층석탑을 둘러보고 나와 수도암 우측에 있는 수도산 등산로 안내지도가 보이는 곳으로 내려가니 그곳에 오늘 산행 들머리인 한산교가 보인다.

이제 세번째 들리는 이 한산교이기에 조금은 친근감까지 드는 곳이지만 앞으로도 두번 정도는 더 올라 지나야 하는 다리이기에 그때는 또 어떤 느낌으로 통과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마음속으로 무탈하게 오늘 하루도 멋진 산행이 될 수 있기를 바래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한산교를 지나자마자 등로 좌측 산죽지대 방향으로 수도산 오르는 마루금이 열려있고 그 바닥에는 등산로입구 정상가는 길이란 안내판이 보인다.

그곳을 지나 오르니 산죽이 반겨주고 곧이어 청암사와 출입금지 안내판이 보인다.

그곳에서 좌측 청암사 방향으로 돌려 진행을 하니 넓은 등로가 나타나고 잠시 더 걸어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청암사 갈림 삼거리 이정표가 서 있다.

이곳에서 직진의 좌측인 수도산 방향으로 계속 등로를 따르니 멋진 산죽지대가 보이는데 생각보다 안개가 짙고 등로 옆 잡목에 물방울이 맺혀있어 이 산객이 지나면 그 물방울이 비산하며 등산복을 적시고 있어 오늘 하루 산행이 쉽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다.

 

산죽지대를 지나자 마자 안개는 더욱 짙게 드리워져 있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욱하다.

다시 나타나는 청암사 갈림 이정표를 지나 바위봉우리를 넘으니 이제 정상까지 1000미터 남아 있다는 스텐레스 스틸 이정판이 서 있다.

그 이정판을 지나니 바위봉우리에 올라 주위를 둘러 보지만 어둠과 짙은 안개로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기에 조심하며 그 바위봉우리를 내려 와 안전목책과 로프 구간으로 걸어 진행을 한다.

다시 나타나는 나무계단을 타고 오르니 그곳에도 멋진 조망바위가 나타나는데 이곳에서의 조망 역시 어둠과 안개로 인해 보이는 것이 없어 곧바로 출발을 해 본다.

 

바위 봉우리를 지나 다시 나타나는 나무 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그곳에 돌탑들이 보이는데 살펴보니 키 작은 돌탑 몇개와 제법 높게 쌓아 올린 돌탑 하나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풍경이다.

지난 제1구간 때에도 이곳을 지났는데 기억속에는 제법 높은 돌탑 하나만 서 있었다는 기억만 남아 있기에 그 때 얼마나 힘들게 이곳을 내려 왔는지 알 수 있는 기억일 뿐이다.

오르막 등로에서 굵은 땀방울이 흐르기는 하지만 안개로 인해 산행에는 도움을 받지만 역시 보이는 것이 없으니 아쉬운 시간이기도 하다.

 

그 돌탑을 지나 다시 평이하게 진행을 하니 드디어 수도암 갈림 삼거리 이정표를 만나고 살펴보니 단지봉까지 4.5 Km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가 눈에 들어 온다.

오래 전 산친구들과 하얀 눈이 쌓여 있던 시절에 멋진 상고대를 즐기며 수도가야 종주 산행을 하면서 걸었던 구간이기에 감회가 새로운 수도지맥 산행이기도 하다.

짙은 안개를 뚫고 오르니 마지막 안전목책과 로프구간을 지나 드디어 지난 구간 멋진 조망을 즐겼던 수도산 정상에 올라 몇장의 추억을 남겨 본다.

수도산은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수도리와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중촌리 사이에 걸쳐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 1317미터이다.

수도산은 백두대간의 대덕산 남쪽 부근에서 가야산을 향해 남동 쪽으로 이어진 산줄기인 수도지맥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봉우리로 동쪽에는 송곡령과 단지봉이 위치하고 서쪽에는 우두령이 위치한다.

수도산은 산지와 주변 계곡의 지형 경관이 아름답고 유명한 사찰인 수도암이 산록에 위치하고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산이다

수도산은 참선 수도장으로 유명한 신라 말의 수도암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신선들의 유락지였던 산이라 하여 신선대 또는 수락산이라 하였다.

오늘도 역시 수도산 정상에 머물며 삼각점을 찾아 보지만 안내판만 보일 뿐 삼각점을 찾지 못해 아쉬운 시간이다.

 

아직도 짙은 안개와 어둠속에 서 있는 수도산 정상이기에 주위 조망은 물론 정상 주위의 풍경조차 보이지 않는 시간이기에 안타까움만 남긴채 상상으로 주위 조망을 즐겨 본다.

다시 수도산 정상을 출발해 수도암 갈림 삼거리 이정표 방향으로 내려가니 저 멀리 골짜기에서는 괴성을 지르고 있는 멧돼지의 울음소리가 등줄기에 식은 땀방울을 흘리게 만들고 있어 진행하면서 괜시리 큰소리도 내보고 스틱을 흔들어 소리를 내면서 멧돼지의 접근을 막아 보려 수고를 해 보기도 한다.

드디어 수도암 갈림 삼거리 이정표에 도착해 좌측으로 흐르는 수도암 등로를 버리고 우측의 단지봉 방향으로 오르니 오래 전 겨울에 올랐던 추억이 생각나며 그때 같이 걸었던 산친구들이 불현듯 그리운 시간이기도 하다.

 

수도암 갈림 삼거리를 지나 오르니 바위 봉우리가 나타나고 동봉 전망대라 생각되는 봉우리이지만 보이는 것이 없으니 안타까운 시간이다.

더욱이 짙은 안개가 껴 있어 이 산객이 지날때마다 등로 옆 잡목이 흔들리며 잡목 잎에 남아 있는 물방울이 비산하며 산객의 등산복을 적시고 있다.

그 동봉 바위를 지나 잡목을 헤치고 잠시 더 걸어가니 가파른 암릉 내리막 등로가 이어지고 조심하며 그 암릉을 내려가 보는데 오래전 하얀 눈이 내려 소복히 쌓여있던 이 등로를 타고 걸으며 환상의 상고대를 만났던 시절을 추억하는 시간이다.

 

암릉을 내려 와 걸어가니 수도산 10번 지점이란 현위치 안내판이 보이고 다시 바위를 넘어 걸어가니 이슬비가 내리듯 안개가 내려 앉으며 몸을 움추리게 만들고 있다.

그렇게 무명봉을 지나 진행을 하니 지도상 불석재를 지나는데 이제 이곳은 고개인지 아닌지도 분간하기 어려운 사라져 가는 고갯마루로 변하고 있다.

불석재는 남쪽 아래 거창군 가북면 중촌리에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불석동이란 마을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불석동은 가북면 작은골의 가장 북쪽 끝 동리였는데 지금은 마을이 없어졌다.

폭시기라고 하였는데 수도사 부처를 다듬은 돌이 이 골짜기에서 나왔으므로 불석동이라 하였다고 전해지는 마을과 고개 이름이다.

다시 나타나는 산죽지대를 지나 걸어가니 금새 심방하산로가 있는 구곡령에 도착해 그곳에 서 있는 이정표를 살펴 본다.

구곡령(아홉사리고개)은 경남 거창군 웅양면과 김천시 증산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아홉사리 고개라고도 부르며 우측으로는 웅양면 심방마을 가는 길이고 좌측으로는 무흘구곡으로 이어지는 고개이다.

 

구곡령을 지나 다시 잡풀과 잡목속으로 들어가니 온몸이 비에 젖은듯 젖어들기 시작한다.

다시 완만하게 오르니 멋진 진달래 군락지가 나타나더니 나뭇가지 옆에 준.희님이 걸어 놓은 응원 안내판이 힘을 주고 있다.

이곳 등로 좌측으로는 심방마을이 있는데 자료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되어 있다.

심방마을은 거창군 가북면 중촌리의 마을로서 그 유래는 산 아래 수재라는 이름은 천재가 살았다는 전설에 따라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하며 심방소는 고려 말 신방이란 사람이 은거한 곳이라는 뜻과 또는 땔나무가 많다는 뜻에서 신방으로 하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의 심방으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마을이다.

지금까지는 등산화를 젖지 않토록 조심하며 진행을 하였는데 큰 잡목이 나타나면서 온몸이 젖어오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을 것 같다.

 

준.희님의 응원판을 지나 오르니 멋진 등로가 이어지지만 짙은 안개로 인해 아쉽기만 하다.

완만하게 오르니 등로에 바위들이 나타나고 그 바위를 타고 오르니 무명봉에 도착을 하는데 그 무명봉 정상에도 역시 멋진 바위 하나가 보인다.

혹시나 하고 그 바위 주위를 서성이며 주위 조망을 살펴보지만 여명은 밝아 왔지만 안개로 인해 보이는 것이 없으니 아쉬운 마음이 가득한데 더욱이 안개에 젖어 오는 몸이 추위를 느끼며 잠시 쉬어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고 있다.

 

그 바위가 서 있는 무명봉을 지나 진행을 하니 진달래 군락지가 나타나고 이제 등산화는 완전히 젖어 물이 들어 오려는지 눅눅하기만 하다.

스틱으로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물방울을 털어가며 걸어가지만 완전히 물기를 털어 내는 것이 불가능해 등산복 바지까지 흥건히 젖어 온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가니 등로를 뒤덮는 잡목으로 인해 진행에 어려움이 가중되고 조금 더 걸어가니 오늘 산행 중 처음으로 지독한 잡목짇에 봉착해 어렵게 그 잡목지대를 통과하니 온몸이 완전히 젖어 비맞은 생쥐꼴이 되어 버렸다.

오늘 하루 어떻게 진행을 해야 하는지 걱정이 앞서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지독한 잡목지대를 어렵게 통과해 걸어가니 다시 무명봉을 만나고 그 무명봉을 넘으니 잠시 편안한 등로가 이어지고 있다.

바지와 등산화에 묻어 있는 빗물을 털어내며 걸어가니 다시 등로를 덮고 있는 잡목들이 보이고 살펴보니 자줏빛 꽃이 피어 있는 싸리나무 지대이다.

그 싸리나무 지대를 지나니 다시 온몸이 완전히 젖어 들며 등산복 바지를 타고 등산화로 흘러 내리는 빗방울로 인해 등산화가 서서히 젖어 들기 시작한다.

다시 잡목이 사라진 좋은 등로를 따르니 곧바로 지독한 잡목지대를 통과하고 곧이어 중촌마을로 내려갈 수 있는 갈림 삼거리 이정표를 만난다.

이곳 이정표가 서 있는 곳을 송곡령이라 하는 산객들도 있는듯 한데 이곳은 그냥 중촌마을 하산 삼거리가 맞는듯 하다.

중촌리는 거창군 가북면에 있는 법정 이름 중 한 마을로서 불석동, 수재동, 심방소, 다전, 동촌, 산수동, 고비등 7마을이 있다.

잠시 이정표를 사진에 담고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등로를 타고 산행을 이어가 본다.

 

중촌마을 하산 갈림 이정표를 지나 완만하게 오르니 금새 다시 지독한 잡목지대가 앞을 가로막는데 어떻게 진행을 해야하는지 나해하기만 하다.

조심하며 그 잡목을 헤치니 그래도 다행인 것이 등로 좌우측으로 자라난 잡목들이 서로 뒤엉켜 등로를 열어 주지 않는 상황은 아니기에 조심하며 걸어 본다.

잡목에 남아 있던 빗방울들이 온몸으로 비산하며 완전히 젖어 버려 이 삼복더위에 한기를 느낄 정도로 추위가 엄습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몸에서 한기를 느끼기에 쉬지도 못하고 다시 조금은 빠르게 진행을 하니 완만하게 올라 무명봉을 넘고 잠시 평이하게 진행을 해 본다.

그렇게 걸어가니 등로 옆 잡풀에 남아 있던 빗방울들이 튀어 바지와 등산화를 적시고 이제 등산화에서는 난데없이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조금 더 걸어가니 드디어 송곡령 이정표를 만나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송곡령은 고비재라고도 부르는데 거창군 가북면 송촌리 고비마을에서 김천시 증산면 수도리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단지봉 오르기 전에 있는 해발 700미터의 높은 곳에 위치한다.

학이 높이 날면서 놀았다 하여 이름이 되었다 하고 고사리와 같은 고비 나물이 많이 나 고비라 한다는 말도 있다.

이곳에서 한구간을 끊어 진행하는 산객들도 많은 듯 한데 오늘 이 산객은 고불암까지 이기에 다시 독한 마음으로 잡목을 헤치며 걸어 본다.

 

이제 단지봉까지 800미터 이기에 마음 비우고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걸어 올라 본다.

예전에 한겨울 수도가야 종주를 할 땐 추위에도 땀방울이 흘러 몇번인가 그 땀방울을 닦으며 올랐는데 오늘은 이슬비와 안개로 인해 추위를 느끼며 흐르는 땀방울도 많지 않게 오르는 시간이다.

생각보다 급하지 않게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약간의 잡목지대를 지나 드디어 단지봉 직전의 드넓은 헬기장에 도착해 우측의 이정표를 살펴 보니 그 방향으로 내촌마을 하산 이정표가 서 있다.

내촌마을은 거창군 가북면 몽석리의 마을로서 그 이름의 어원은 소학 내칙편의 예의범절을 배우는 것이 사람되는 근본이라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다라는 설이 있는 곳이다.

사진 한장 남기고 한기를 느끼기에 지체없이 지독한 잡목을 헤치고 단지봉 정상으로 이동을 한다.

 

헬기장을 지나 지독하게 자라고 있는 잡목 지대를 지나니 다시 고개를 숙여 어렵게 소로를 따라 단지봉 정상에 도착을 한다.

멋진 조망이 그리운 시간이지만 오늘은 안개로 인해 보이는 것이 없으니 포기하고 가까운 풍경에 집중하는 시간이 되었다.

단지봉(1326)은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수도리와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몽석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김천시 증산면 수도리 내원마을에서 남쪽으로 약 2.2 Km, 거창군 가북면 몽석리 덕동마을에서 북북동 쪽으로 약 2.0 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정상부 높이 1326미터의 봉우리이다.

단지봉은 백두대간의 대덕산 남쪽 부근에서 가야산을 향해 동남동 쪽으로 이어진 산줄기인 가야수도지맥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봉우리로서 단지봉의 동쪽에는 좌대곡령이 서쪽에는 송곡령이라 불리는 고개가 있으며 이들 고개 역시 높이 1000미터 이상의 준령이다.

단지봉은 산 정상이 항아리(단지)를 엎어 놓은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단지봉 일대의 지질은 중생대 백악기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화강암은 석영, 사장석, 흑운모 등을 주성분으로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백악기 화강암은 쥐라기 대보화강암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풍화 및 침식 작용에 강하여 산지를 이루는 경우가 많은데 단지봉 일대는 백악기 화강암이 남쪽에 넓게 분포하는 선캄브리아기 편마암에 접하는 화강암 지질의 가장자리에 해당하며 이러한 경암 지질과의 경계부라는 점이 상대적으로 더 높은 산지를 형성하는 데에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단지봉 일대는 화강암 지질이지만, 바로 남쪽에 위치한 편마암 지질의 영향이 강하여, 기반암이 지표에 노출된 석산이 아닌 토양층이 지표를 덮고 있는 토산을 이루고 있다.

단지봉의 정상부 일대는 참나무를 중심으로 한 활엽수가 우점하고 있으며, 소나무와 같은 침엽수림은 산록의 중·하단부에 분포하고 있다. 단지봉 일대는 수도산에서 가야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동서 방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북사면과 남사면에서 하천이 발원하는데, 북사면에서 발원한 하천은 옥동천이 되어 증산면의 한복판을 지나 감천에 유입되고, 남사면에서 발원한 하천은 석가천이 되어 황강에 유입된다.

단지봉은 경상북도와 경상남도의 경계에 위치한, 고도가 높고 규모가 큰 봉우리이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 가야산과 백두대간을 연결하고 있어 가야산과 연계하여 등산을 즐기는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단지봉 정상부는 나무들이 모두 제거된 나지를 이루고 있어 북쪽의 김천시와 남쪽의 거창군을 향하여 전망이 좋은 편으로 현재 정상에는 작은 헬기 이착륙장과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정상석 옆에는 삼각점이 보이고 그 삼각점 뒤로 진행방향에는 이정표도 서 있다.

이곳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싶었지만 약간의 바람이 불고 추위가 엄습해 와 다시 젖어 있는 배낭을 둘러메고 조금 더 진행을 하기로 한다.

 

단지봉 정상을 출발해 두리봉 9.2 Km란 거리표시가 되어 있는 방향으로 다시 지독한 잡목을 헤치고 완만하게 내려가니 키 큰 진달래 군락지가 나타나고 그 나무숲을 고개숙여 걸어본다.

다시 완만하게 내려가니 지독한 잡목지대가 짧게 이어지고 그곳을 지나니 파란 풀들이 자라는 멋진 등로가 나타난다.

잡목이 아닌 거목과 그 아래 파란 풀들이 깔려있는 멋진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금새 홍감하산 갈림 이정표가 보인다.

홍감마을은 거창군 가북면 용암리에 있는 마을로서 이름유래는 홍감마을 앞에 가마솥 같이 생긴 큰 바위가 있어서 홍가마라고 부르던 것이 홍감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안개로 인해 보이지 않는 마을을 상상하며 자료로 찾은 마을 유래만 생각해 보는 아쉬운 시간이기도 하다.

 

홍감 하산 이정표를 지나 평이한 등로를 따르니 등로 옆에는 보라빛 엉겅퀴가 반겨주고 웃자란 풀들이 빗방울을 비산시키며 젖어 있는 산객의 등산복을 더욱 흥건히 적시고 있다.

카메라에도 물기가 들어 와 사진 한장 남기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젖은 손수건으로 카메라 렌즈를 닦으며 조심해 보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진행하니 등로 옆에 바위들도 보이기 시작하고 자작나무라 생각되는 나무들도 지나 평이하게 걸어 본다.

그렇게 한동안 걸어 산죽지대를 넘으니 드디어 좌일곡령으로 오르는 바위 암릉지대가 나타나고 그 바위 앞에서 잠시 물 한모금 마시며 쉬어 간다.

 

바위 암봉을 조심스럽게 올라 바위 봉우리에 오르지만 역시나 짙은 안개로 인해 조망은 전혀 없고 그저 봉우리 주위의 풍경만 보일 뿐이다.

바위 봉우리 주위를 살펴보니 바위 옆 나뭇가지에 좌일곡령 이정판이 보인다.

좌일곡령은 경남 거창에 있는 산으로 고개 령자로 끝나 고갯마루로 간혹 오해를 받곤 하지만 명색이 높은 산으로 해발 1258미터나 되는 꽤 높은 암봉이다.

거창 가북면과 경북 김천 증산면을 가로 지르는 총 길이 24 Km나 되는 수도가야 종주능선 상에 위치해 있는데 이 등로는 평균 1000미터 이상의 고봉준령의 마루금으로 백두대간이나 영남알프스에 견줄 만큼 산꾼들에게 인기가 높은 산이다.

좌대곡령은 고개가 아닌 암릉으로 된 봉우리로서 지도에는 삼각점 표기가 있으나 바위 정상에서는 찾을 수 없다.

지형도에는 한자로 표기가 되어있고 여타 지도에는 좌일곡령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돈대대한일자의 한자가 혼동된 듯하다.

한자 뜻을 보면 자리좌 돈대대(물건얹는 평평한곳) 골곡 재령이니 뜻으로 연결하면 좌대곡령이 맞는 것 같으나 봉우리에 재령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데 어쨌든 국토지리원의 고시지명은 좌대곡령이고 지명종류는 고개로 되어 있어 상당히 혼란스럽다.

산행을 하다보면 이곳 좌일곡령처럼 봉우리를 고개의 의미인 령이나 재로 쓰이는 지명이 있는데 그 정확한 유래를 알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좌일곡령 정상에서 주위를 살펴보며 짙은 안개속에 몇장의 사진을 남기고 이어지는 암릉을 따라 조심하며 내려가 본다.

이슬이 내려 앉아 미끄럽기에 조심하며 걸어 내려가니 거대한 활엽수 나무에 분홍빛 버섯이 멋지게 자라고 있어 사진 한장 남기고 살펴 본다.

산행을 하면서 많은 버섯 종류들을 만났지만 오늘 만난 이 버섯은 새롭게 각인되는 버섯이라 돌아 와 인터넷에서 찾아 보지만 빛깔도 그렇고 모양도 처음 보는 버섯이라 정확한 이름을 찾지는 못했다.

 

좌일곡령 바위를 내려 와 정상적인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이제 등로에는 빛 바랜 산죽들이 펼쳐져 있는데 키 작은 조릿대에서는 뻣뻣한 열매가 올라 와 이색적인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꽃인지 아니면 열매인지 모를 특이한 조릿대를 살펴보며 걸어가니 다시 등로는 키 큰 나무와 그 아래 바위들로 이뤄진 특이한 등로로 이어지고 한동안 그 바위 등로를 타고 걸어 본다.

잡목과 바위 그리고 조릿대가 섞여 있는 등로를 따르니 이곳은 지금까지의 등로와는 완전히 다른 밀림같은 분위기의 등로로 느껴진다.

 

다시 잠시 평이한 잡목 등로를 따라 짙은 안개를 헤치며 걸어가니 등로 주위에 다시 거대한 바위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고 그 바위들을 우회하며 걸어 보는 시간이다.

선돌같은 바위도 지나고 특이한 바위군들도 지나 걸어가니 등로 우측으로 전망바위가 나타나는데 오늘은 짙은 안개로 인해 보이는 조망이 없어 잠시 들렸다 나온다.

그래도 진행 방향으로 안개속에 희미한 봉우리가 보여 어렵게 사진에 담아 본다.

 

그 전망바위를 나와 다시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내려가니 잡목으로 인해 산행속도가 늦어지고 잠시 더 진행하니 등로는 좌측 능선을 버리고 우측 사면 등로를 따라 산죽길로 이어진다.

잠시 더 그 산죽 등로를 따르니 다시 등로에는 많은 바위들이 산재되어 있고 그 바위지대를 넘어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거대한 바위 암릉이 올려다 보인다.

 

바위를 좌측에 두고 우측 사면 등로를 타고 우회하니 다시 산죽 등로로 이어진다.

잠시 산죽 등로를 따르니 바위가 보이고 그 바위를 넘으니 다시 평이한 등로로 이어지고 있어 편안하게 걸어 보는 시간이다.

부드러운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이제 태양이 짙은 안개를 뚫고 나오려는 듯 바람의 느낌이 더워지면서 젖어있던 등산복이 조금씩 말라가고 있다.

그렇게 부드러운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단지봉에서 2.2 Km 지나왔고 두리봉까지 7.0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반겨 준다.

 

이정표를 지나서 한참을 부드러운 등로를 따르니 다시 등로 옆으로 큰 바위가 나타나고 책바위처럼 보이는 그 바위를 지나 진행을 하니 등로 옆으로 제법 큰 바위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주능선 옆으로 나 있는 사면 등로를 따라 진행을 하니 다시 바위 구간이 나타나는데 살펴보니 안개속에 거대한 암릉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 등로도 좌우로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힘들게 이어지고 있다.

거대한 바위를 우측에 두고 좌측 사면 등로를 타고 우회하다 우측 주능선 방향으로 어렵게 오르니 눈 앞으로 거대한 암릉이 다시 가로막는다.

 

눈 앞을 가로 막고 있는 거대한 암릉으로 올랐다 길이 없는듯 하여 다시 내려갔다 정상 등로를 찾아 보지만 찾을 수 없어 다시 내려왔던 그 암릉 등로를 타고 오르니 바위 위를 따라 희미하게 등로가 나 있다.

그 바위를 타고 오르니 큰 바위들이 연이어 나타나는데 처음에는 그냥 지나치다가 나뭇가지에 무엇인가 보여 살펴보니 이곳이 바로 지도상에 있는 1118.3봉 정상이다.

어렵게 젖어 있는 지도를 꺼내 살펴보니 이제 용두암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 1118.3봉 암봉을 지나 내려가니 연이어 거대한 암봉들이 줄지어 있고 주의하며 그 바위를 넘어간다.

바위를 통과하며 진행하니 등로 좌측으로 거대한 암릉이 올려다 보이고 등로는 그 바위 틈사이로 좁게 나 있다.

바위를 지나 다시 우측으로 급경사 미끄러운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등로 주위에 많은 거대 바위들이 산재되어 있는 풍경도 눈에 들어 온다.

 

주능선으로 올라 다시 평이하게 걸어가니 사면 등로에는 꽃인지 열매가 달려있는 산죽지대가 나타나고 그 산죽지대를 지나니 가대한 암봉이 앞을 가로 막는다.

다시 그 암봉을 오르락 내리락 왔다리 갔다리 하다 어렵게 거대한 암릉을 타고 오르니 정상에 가야 451이란 삼각점이 박혀있고 바위 옆 큰 나뭇가지에 용두암이란 준.희님의 이정판이 걸려 있다.

용두암봉(1125)은 김천시 증산면과 거창군 가북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멀리서 보면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라고 하는데 산아래 용암리에서 유래한듯 하며 용암바위라고도 불려진다.

이곳에서의 조망 역시 환상적이라 기억하고 있지만 오늘은 볼이는 것 없이 안개솟 세상이라 정상 이정판만 사진에 담고 그 바위 암봉을 내려가 본다.

 

용두암에서 사진을 담고 바위를 타고 조심하며 내려가는데 그 용두암 바로 아래 등로에서 거대한 멧도ㅑ지 울음소리가 들리고 등줄기에서 굵은 식은 땀을 흘리며 큰소리로 소리치니 몇마리의 멧돼지들이 숲속으로 재빠르게 달아나는 소리와 함께 흔들림이 포착된다.

그 용두암 암봉을 타고 조심하며 내려가니 짧은 바위 절벽이 나타나고 얇은 로프를 타고 어렵게 그 바위를 내려 와 살펴보니 바위 옆으로 우회 등로가 보이는데 많은 종주대가 이 용두암 정상을 오르지 않고 우회 등로를 따라 진행을 한듯 하다.

 

용두암 바위를 내려 와 평이하게 걸어가니 다시 등로 좌측으로 거대한 바위가 서 있고 잠시 잡목이 얼굴을 때리는 등로를 따른다.

잠시 잡목이 사라지고 안개가 내려 앉아 있는 운치있는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키 작은 관목들이 나타나기 시작을 하지만 아직 진행에는 큰 어려움이 없는 좋은 등로가 이어진다.

그렇게 한동안 걸어가니 다시 산죽지대가 나타나고 그곳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개금마을 갈림 삼거리 이정표가 보인다.

개금마을은 거창군 가북면 용암리의 마을로서 두개의 개금마을이 있는데 상개금은 큰골의 가장 북쪽 끝에 있는 마을로서 북동 2 Km에 경상북도 성주군과 맞닿아 있다.

옛날에는 앞뒤 산과 골짜기에서 금이 많이 나왔고 지금도 금광 흔적이 남아 있는 마을로서 금동 불상이 나왔으므로 개금불이라고 하였다는 말도 있다.

하개금 마을은 개금골의 아래에 자리함으로 아래 개금불이라 한다고 전해지는 마을이다.

하지만 많은 산객들이 이곳을 개금마을 하산 갈림길이라 생각하지 않고 목통령이라 부르고 있는듯 보이는 장소이지만 실질적인 목통령은 조금 더 지난 안부가 목통령이라 보인다.

 

개금마을 하산 삼거리를 지나 다시 잡목사이로 들어가니 바위들이 보인다.

바위를 지나 평이하게 펼쳐지는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지독한 잡목이 우거진 안부가 나타나고 그 잡목을 뚫고 걸어가다 보니 이곳이 지도상에 있는 실질적인 목통령이다.

목통령 사거리(985)은 경북 김천시 증산면과 경남 거창군 가북면의 경계능선에 있는 고개로 국립지리원에서 발간한 지도책에는 이곳을 목통령으로 기재되어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 영조때 암행어사 박문수가 이곳을 넘어 거창으로 향하다 허기에 지쳐 탈진한 상태에서 쓰러졌다가  아낙의 젖을 먹고 살아난 곳이라고 한다.

목통령은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황점리와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용암리를 연결하는 고개로서 한자에서 알 수 있듯이 나무통과 관련된 이름이다.

한편 으름덩굴이 많이 서식하는 곳에서는 으름덩굴의 한자 표기인 목통이라는 지명이 쓰이기도 하므로 목통령의 목통은 으름덩굴을 의미하는 목통에서 한자가 변형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목통령에서 발원하여 황점리를 흐르는 하천을 목통천이라 하며 목통령이 있는 원황점은 원래 황을 구운 황점이 있던 곳이어서 붙인 이름이다.

김해 김씨 중시조가 유황을 구워 상납한 것이 마을 조성의 단초로서 원래 마을은 골짜기 상류에 있었는데 1936년 수해 때 유실되어 아래쪽으로 옮겼다.

목통령은 경상북도 김천시와 성주군 및 경상남도 거창군과 합천군 경계를 이루는 단지봉(1326)과 가야산(1430)의 중간 지점에 있는 고개로 백두대간 대덕산 부근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가 동남동쪽 가야산으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수도산(1317)과 단지봉 등 높고 경사가 가파른 봉우리와 산지를 이룬다.

목통령은 높이 약 1010미터로 김천시에서 가장 높은 고개이자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높은 편에 속하며 목통령 부근에는 석항령, 분계령, 좌대곡령 등 높이 1000미터 내외의 준령이 있다.

목통령 북쪽 비탈면에서 성주군과 고령군을 흐르는 대가천 최상류인 목통천이 발원하여 김천시 증산면을 지나 성주군으로 흘러들고 목통령 남쪽 비탈면에서 거창군과 합천군을 지나는 황강의 지류 하천인 석가천이 발원하여 흐른다.

목통령 일대의 지질은 선캄브리아기 흑운모 편마암으로서 김천시 남부와 합천군 북부에서 대체로 높고 경사가 급한 산지를 이루는 암석이다.

목통령은 김천시 증산면과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을 잇는 여러 고개 가운데 마을에서의 접근성이 가장 좋고 고개 이름이 주변 지역의 일화 및 설화에 소개되는 점으로 미루어 과거에 사람들의 왕래가 가장 빈번한 고개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고개가 높고 경사가 가파르며 교통로 기능의 필요성이 적어서 김천시에 있는 대부분의 고개와는 달리 도로가 개설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자연 환경이 매우 잘 보존되어 있으나 고개로 오르기 위해서는 험한 등산로를 거쳐야 하므로 현재 사람들이 왕래하는 고개의 기능은 거의 하지 못하고 있다.

사연도 많고 추억도 남아 있는 목통령을 지나 진행하는 시간이 아쉬움으로 가득한 시간이 되었다.

 

그 지독한 잡목이 우거져 있는 목통령을 어렵게 빠져 나가니 목통령 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잡목과 잡풀이 우거져 진행에 어려움을 느끼는 등로가 이어지고 있다.

묵묘가 있는듯한 잡풀지대를 지나니 방화선 같은 등로에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초원같은 등로가 나타나고 그 초원 같은 등로를 따르니 이곳 역시 지독한 잡목들이 자라나 진행에 큰 어려움을 느낀다.

잡목을 헤치며 어렵게 통과하니 등산복이 찟기고 구멍이 나면서 여름철에 지맥 산행이 얼마나 어려운지 몸으로 직접 실천하고 있다.

 

그 지독한 잡목지대를 어렵게 뚫고 통과하니 이제는 잡풀과 잡목이 우거진 등로가 나타나고 그곳 역시 어렵게 헤쳐 진행한다.

잡목 지대를 지나니 보리수 나무 군락지가 나타나는데 아직 보리수는 보이지 않는다.

보리수 나무 군락지를 지나니 간벌지대가 나타나고 급경사 오르막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철조망이 앞을 가로막아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그 철조망을 타고 좌측으로 진행을 하는데 그 철조망 안에 있는 1040봉 헬기장을 보지 못하고 진행하게 되어 아쉽기만 하다.

 

이제부터 한동안 그 철조망을 우측에 두고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걸어가는 시간이다.

걸어가다 보니 잡목이 사라져 조금은 수월한 등로가 보이는가 하면 또 때로는 잡목이 우거져 바로 눈앞의 등로도 보이지 않아 어렵게 그 잡목을 헤치며 걸어가야 하는 등로도 나타난다.

그렇게 한동안 걸어가니 키 큰 잡목이 자라고 있는 곳에서 철조망을 우측 사면으로 보내고 이제부터는 잡목과 가끔 보이는 자작나무를 친구삼아 걸어 본다.

다시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올랐다 완만하게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깊은 골짜기가 나타나는데 살펴보니 그쪽 방향으로 황점리 하산 등로가 나 있는 안부이다.

황점리에서도 원황점 마을로 내려가는 안부이기에 원황점 마을을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보인다. 

원황점 마을은 원래 황을 구운 황점이 있었던 마을이라고 하여 원황점이라 하는데 김해김씨 중간시조가 유황을 구워 상납한 것이 마을 조성의 단초였으며 원래 마을은 골짜기에 있었는데 병자년 수해 때 유실되어 아랫쪽으로 옮겨졌다.

원황점 마을로 자락을 늘어뜨린 목통령은 마을에 몇 뙈기의 밭과 다랑논을 줬을 뿐 넉넉함을 허락하지는 않았지만 유황을 줌으로써 유황을 정제해 나라에 공납하고 식량 따위를 받아 근근이 연명하게 했다.
취토, 취회, 교합, 사수, 오수, 재련, 삼련, 합제의 여덟 단계 순으로 까다로운 공정을 거쳐야 정제되는 유황은 당시의 주요 군수품으로, 유황을 만드는 이들에 대한 나라의 관리는 대단히 엄격했을 터이다.

이들은 대를 이어가며 유황을 생산해야 하는 국법에 묶여 있었다. 속박된데다,

구차하기가 그지없는 생활에서 벗어나는 게 자연 이들의 소원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 해인가 마을 뒷산으로 산나물을 찾아 나선 아낙이 탈진해 쓰러진 낯선 남정네를 발견하곤 젖먹이에게 줄 불어난 젖을 짜 먹여 기운을 차리게 했다.
이 남정네가 바로 거창을 향해 목통령을 넘으려던 암행어사 박문수다.

그는 아낙으로부터 마을의 딱한 처지를 듣고는 임금(영조)에게 청원해 이들이 황을 캐는 일에서 헤어나게 했다.

한 아낙의 젖보시로 천형같은 고통에서 벗어난 마을의 지명 원황점은 원래 황을 캐던 곳이라는 뜻이다.

 

원황점 마을로 내려 갈 수 있는 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오르니 등로에는 잡목 아래 파란 초원이 펼쳐지기 시작하며 산객의 눈길을 사로 잡는다.

무명봉을 넘어 다시 완만하게 내려가고 가끔씩 나타나는 선답자들의 띠지를 확인하다 보니 잠시 활엽수가 아름다운 안개 자욱한 등로를 따라 걸어본다.

등로 좌측으로 큰 바위들도 바라보며 계속 전진하니 다시 내리막 등로가 이어지는데 그 등로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파란 초원 등로가 열려 있어 산객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잡목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초원 등로를 타고 무념무상으로 걸어가니 등로는 다시 키 작은 산죽 등로로 변하고 있다.

산죽지대를 지나 잠시 잡목을 헤치고 걸어가니 다시 작은 자작나무 지대를 지나 소나무 한그루가 정상을 지키고 있는 무명봉도 지난다.

다시 아름다운 등로를 타고 잠시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석항령이 분기되는 분기봉에 올라 잠시 주위를 살펴보고 조심해 석항령 방향인 좌측 등로를 버리고 우측 지맥 등로를 찾아 출발해 보는 시간이다.

석항령 분기봉(1115)은 경북 김천시 증산면과 성주군  가천면 그리고 경남 거창군 가북면이 면을 맞대고 있는 삼군 경계봉으로 왼편 북쪽으로 내려앉은 산줄기가 김천에서 성주군으로 바뀌고 김천 시계이면서 이곳을 넘어 형제봉, 독용산으로 이어진다

이곳 석항령에서 두리봉까지는 성주군 가천면과 거창군 가북면의 경계를 따라 산줄기가 이어지고, 두리봉에서 장자봉까지는 가북면과 합천군 가야면의 경계가 이어진다.

이곳 그 어디에도 석항령이라는 표식은 없고 무심코 지나가기 좋은 곳으로 이 지역 사람들은 석항령이라 부르지 않고 돌곡래라 부른다고 한다.

 

석항령 분기점을 지나 정상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이곳 역시 잡목으로 진행이 더디기만 하다.

한동안 그 잡목을 헤치고 어렵게 진행을 하니 자작나무 지대를 지나 잠시 멋진 등로가 열려있는데 살펴보니 진달래 군락지라 생각되는 곳이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무명봉을 지나 평이한 등로가 나타나는데 그 등로 우측으로 전망바위가 있어 올라가 보지만 역시 안개로 인해 잠시 등로 우측의 성주군 가천면의 신계리 마을이 아름답게 내려다 보이고 그 좌측 능선으로는 안개가 춤을 추며 흐르고 있다.

신계리는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에 있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로서 고개와 골짜기가 발달하였으며 하천이 마을을 가로질러 흐른다.

신촌리, 적계리, 정리 등을 병합하면서 신촌과 적계의 이름을 따 석계리라 하였는데 자연마을로는 교동, 돌목제, 새점, 늦으미기, 정자마을 등이 있으며 교동마을은 신계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학교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돌목제마을은 돌이 많은 고개 밑이 된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고 새점마을은 무쇠점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늦으미기마을은 경사가 완만한 곳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며 정자마을은 만귀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안개로 인해 조망과 풍경이 없어 아쉽기는 하지만 이렇게나마 약간의 조망을 내려다 볼 수 있어 조금은 위안을 삼았던 시간이다.

 

전망바위에서 아쉬운 마음에 조금 더 머물며 안개가 사라지길 기다려 보지만 더 이상 멋진 조망을 보여주지 않을 것 같아 다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본다.

다시 정상 등로로 뒤돌아 나와 걸어가니 다시 키 작은 산죽지대가 나타나고 잡목에서 비산하는 물방울로 인해 카메라 렌즈에도 이제 습기가 차기 시작해 사진을 담기에 어려움은 느낀다.

계속 이어지는 산죽지대를 타고 걸어가니 다시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따라 1157 민둥봉우리에 도착을 한다.

이곳 역시 조망과 아무 표식도 없어 아쉽기는 하지만 지도를 살펴보니 도 경계인듯 보이는 봉우리이다.

 

그 1157봉을 지나 사면 등로를 따르니 멋진 잣나무 지대와 자작나무 군락지가 차례로 보이고 곧이어 완만한 내리막 등로에는 거대한 소나무들이 간간히 보이기 시작한다.

거목의 소나무와 키 작은 잡목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내리막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잠깐 잡목지대를 지나 드디어 분계령 또는 불기령이라 불려지는 안부에 도착을 한다.

불기령(997)은 거창군 가북면 개금마을에서 성주군 가천면 월남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로 국립지리원에서 발간한 25000 지형도에는 분계령(불기령)함께 표기되어 있는데 고시지명(표기지명) 불기령이다.

금부치가 나온다는 개금마을 뒷산에 있는 고개라 하여 불기령라 부른다고 하며 우측으로 상개금 마을로 통하는 길이 뚜렷하게 보인다

이곳에 있는 세 고개의 이름도 재미가 있는데 코배이재는 고개를 오르려면 코를 땅에다 박을 정도로 가파르다고 해서 코배이재란 이름이 붙었고 불기재는 아랫 마을인 불기마을에서 유래됐으며 이곳에는 철기시대의 꽃을 피운 풀뭇간이 있어 연장의 생산과 정비작업이 활발했다.

일부에서는 이 고개를 넘어가면 하루 만에 돌아오지 못한다고 해서 불귀재라고 부르기도 한다.

돌목재 경우엔 굳이 한자를 써서 석항령이라고 하나 돌목재에는 돌이 없으며 길이 가파르고 급해서 갈지자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돌목재란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오래 전 수도가야 종주시에도 이곳 불기령에 앉아 남아 있는 간식으로 허기를 달랜 후 진행했던 기억이 나 홀로 피식 웃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오늘은 분계령에 잡목이 자라면서 앉아 있을 공간조차 없어 보이기에 사진 한장 남기고 곧바로 출발해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따른다.

잠시 오르니 이곳도 역시 지독한 잡목이 앞을 가로막으며 많은 ㅅ간을 소비하게 만드는데 다행인 것은 이제 안개가 사라지며 잡목에 남아 있던 물방울이 많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잡목을 지나 오르니 이제 뚜렷한 등로가 나타나고 조금은 편안하게 오르니 갑자기 많은 돌 성벽 같은 것이 보이고 곧이어 잡목이 무성한 두리봉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한다.

분기점 한쪽에는 내용을 알 수 없는 삼각점 하나가 박혀있는데 지도를 살펴봐도 보이지 않는 삼각점이기에 사진에 한장 남기고 잠시 물 한모금 마셔 본다.

 

두리봉 분기점에서 잠시 고민을 해 보지만 고민도 짧게 곧바로 우측의 수도지맥 등로를 버리고 좌측의 두리봉 정상을 향해 내려가고 있다.

몇 년전 수도가야 종주 시 걸었던 추억이 생각나고 이곳에서 바라 본 가야산의 조망이 환상적이었음을 알기에 살펴 보지만 아쉽기만 하다.

잠시 내려갔다 안부를 지나 다시 오르니 갑자기 넓은 헬기장이 나타나고 그곳에서 잠시 안개가 물러나는 시간에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올랐다 내려온 두리봉 분기점의 하얀 안개가 인상적인 풍경으로 다가온다.

 

헬기장을 지나 다시 잡목을 헤치고 오르니 등로 자측으로 희미한 등로가 나타나고 그곳으로 오르니 오늘 목표로 한 두리봉 정상의 삼각점을 만난다.

예전 수도가야 종주시에는 방금 전 만났던 헬기장에서 휴식을 취하며 조망을 즐기고 가야산으로 걸어 진행하며 이곳 두리봉 정상은 둘리지도 못하고 우측 사면 등로를통해 그냥 지나친 기억이 뚜렷한 두리봉 정상이다. 

두리봉(1134.4)은 경남 거창군 가북면과 합천군 가야면 그리고 경북 성주군 가천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수도지맥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곳으로 펑퍼짐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두리봉의 이름에 대한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다.

다만 봉우리에서 사방을 둘러볼 수 있다고 해서 두리봉 또 그 형상이 두리뭉실해서 두리봉이란 얘기가 있으며 두리봉 아래인 개금마을 주민들은 사방을 두루 볼 수 있다고 해서 두루봉이라 한다고 했다.

이곳은 진짜 두리봉이 아닌 수도지맥과 가야산 종주코스가 갈라지는 곳으로 삼각점이 있는 두리봉(1133.4)은 북서쪽으로 5분 정도 시간이 걸리는 곳에 벗어나 있어 잠시 다녀 오기로 한다.

이곳은 경북과 경남의 도계를 이루는 곳으로 좌측으로는 성주군과 이별을 하고 합천군 가야면으로 접어들며 이젠 경남땅으로 수도지맥의 발을 들여 놓는다.

 

두리봉 정상에서 몇장의 사진을 남기고 다시 올랐던 등로를 따라 헬기장으로 뒤돌아 내려오니 여전히 두리봉 분기점에는 안개가 춤을 추며 모습을 보였다 감추기를 이어가고 있다.

다시 두리봉 분기점 부근으로 오르니 돌로 쌓은듯한 계곡이 보이고 그곳에서 초원 등로를 따라 분기점이 아닌 좌측으로 걸어 내려가니 우측 두리봉 분기점 방향으로 돌 무덤들이 보이는데 살펴보니 이곳에도 예전에 무슨 산성이 있었던 듯 보인다.

자료를 찾아 보니 이곳은 가야산성 또는 용기성이라 불리는 산성의 일부인 듯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석축 주위 1만 5935척에 높이 5척이라 기록되어 있을 뿐 언제 어떤 구실로 성을 쌓았는지에 대하여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가야산 정상에서 계곡을 끼고 구축되었으며 현재 남아 있는 석축은 백운동에서 용기사 터로 올라가는 계곡을 따라 1 Km 정도 되는 지점에 계곡을 가로질러 합천군과 경계를 이루는 정상의 서쪽 능선을 따라 남아 있으며 수구 및 성문으로 되어 있는 통로가 있는데 너비 4 m에 통로 동쪽의 높이는 2.2 m로 석축된 도로의 길이는 11 m에 이른다.
성벽은 19 m까지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나 통로 서쪽의 계곡 너머로 이어지는 성벽은 모두 붕괴되어 흔적만 남아 있으며 조선 숙종 때 근처에 독용산성이 수축됨에 따라 이 산성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퇴락하였다.

 

이곳에서부터 등로는 완전한 초원 등로로 변하면서 지친 심신을 달래주고 있는 듯 보인다.

그렇게 한동안 완만하게 내려가니 이제 수도지맥 등로는 좌측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고 그곳으로 내려가 정상적인 등로를 타고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너무나 아름다운 초원 등로가 이어지고 잠시 더 걸어가다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그 초원 등로에 누워 잠시 휴식도 취하면서 여유를 부려 본다.

초원 등로를 지나 진행을 하니 다시 진달래 군락지가 보이고 무명봉을 넘는다.

 

그렇게 멋진 초원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다시 약간의 잡목 구간이 이어지더니 단지봉에서 8.7 Km 지나 왔다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제 김천시와 합천군을 지나 거창까지 내려왔으니 꽤 멀리 걸어 왔음을 알 수 있는 이정표 이기도 하다.

안개가 걷히면서 햇살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제 한기는 완전히 사라졌지만 지열이 올라오면서 무더위가 시작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이정표를 지나 진행을 하니 이곳에도 역시 제법 성가신 잡목들이 자라며 진행에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나즈막한 무명봉을 지나 다시 내려가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니 제법 큰 활엽수와 초원의 글라스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등로로 이어진다.

다시 키 작은 관목과 잡목이 우거진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약간의 자작나무들이 보이고 금새 평이한 등로같은 마루금이 펼쳐져 있다.

지도를 살펴보니 이곳이 살푸지재 평전사거리라 생각되는 곳이기에 살펴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들이 보인다.

살푸지재 평전사거리(947)은 거창군 가북면 용암리 하개금 마을에서 해인사로 넘어가는 희미한 길이 있는 고개로 예전에 봇짐장수같은 민초들이 넘었던 고개였던 모양이다.

고개 아래에는 성황당터처럼 보이는 나무 한그루가 서있고 돌무덤이 보인다.

키 큰 활엽수와 초원같은 등로가 어우러진 살푸지재 평전을 지나 계속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는 시간이다.

 

 

그곳을 지나 다시 나타나는 진달래를 통과하고 그곳을 지나 오르락 내리락 하는 평이한 등로를 따르니 거대한 소나무 한그루가 정상을 지키는 무명봉도 넘는다.

다시 관목지대를 지나 완만히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함몰지대를 지나고 멋진 소나무 군락지를 따라 한동안 무심으로 걸어가니 드디어 헬기장으로 이뤄진 남산 깃대봉에 도착을 해 주위를 살펴보지만 조망 하나 없어 아쉽기만 하다.

남산 깃대봉(1112.9)은 경남 거창군 가북면 용암리와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경게에 있는 산으로 남산과 깃대봉을 함께 표기하고 있지만 국립지리원 고시지명은 남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정상에는 3등 삼각점(가야 313)이 설치되어 있고 헬기장이 있다.

조망도 없기에 사진 한장 남기고 곧바로 그 남산 깃대봉을 떠나 남아 있는 구간을 향해 출발해 본다.

 

 

남산 깃대봉을 지나 완만하게 내려가니 다시 잡목 구간이 나타나고 짧은 잡목구간을 지나니 초원 등로가 펼쳐져 있는데 지도상에는 난석산 깃대봉이라 표기된 장소인데 진행하면서 살펴보니 전혀 인식을 할 수 없는 장소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료를 찾아 보니 이곳 남산과 깃대봉 그리고 난석산은 같은 산의 같은 장소로 표기가 되어 있어 통일된 지명 이름이 필요한 곳으로 되어 있는 곳이었다.

그 초원 등로를 따르니 금새 등로는 잡목구간으로 바뀌고 멋진 낙엽송 구간을 지나 간벌된 소나무 군락지가 나타난다.

 

간벌된 나무들이 나뒹굴고 있는 소나무 군락지를 지나 진행하니 잡목과 낙엽송 그리고 소나무가 어우러진 등로가 나타나고 잠시 후 산죽지대로 변한다.

산죽지대를 지나니 다시 멋진 거목의 소나무들이 보이고 곧이어 가야산국립공원사무소장이 세워둔 출입금지 경고판이 나타난다.

두리봉 분계령에서 이곳 장자동고개까지도 가야산 군에 속해 있으면서 출입금지로 묶여 있는 곳으로서 이제서야 자유의 몸으로 진행하게 되는 수도지맥 산행이 되었다.

등로 우측으로는 장자동고개의 포장도로가 내려다 보이고 그 넘어 저 멀리 양각지맥의 산군들이 어서오라 부르고 있는듯 다가온다.

 

장자동 고개에 있는 안부를 지나 진행을 하니 이곳은 우측으로 벌목이 되어 있어 오늘 산행 중 처음으로 멋진 조망을 즐기며 걸어가는 시간이지만 랫살이 비추며 지열이 올라 와 무더위와의 싸움이 시작되는 구간이 되었다.

장자동 고개(890)은 거창군 가북면 용암리 하개금에서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장자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거창군쪽은 포장도로이지만 합천쪽은 해인사의 반대로 인하여 개발이 중단되어 절름발이 도로가 되어 버렸다.

조금 아쉬운 점은 중생을 위해 존재하는 종교가 자신의 불편함 때문에 중생의 불편함을 외면한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장소로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장자동 고개 지나 저 멀리 용암리와 중촌리 넘어 양각지맥의 양각산과 흰대미산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조만간 하얀 눈이 내리는 계절에 저 산줄기를 타고 걸어 볼 기회가 있기를 바래본다.

 

 

오랫만에 나타나는 조망을 즐기며 벌목 구간을 오르다 뒤돌아 보니 남산 깃대봉쪽 봉우리가 아름답게 올려다 보이고 곧이어 소나무 군락지 사이로 널부러져 있는 간벌된 나무들이 나뒹굴며 진행에 상당한 어려움을 주고 있다.

그곳을 지나 계속 걸어가니 다시 잡목과 잡풀지대가 나타나고 금새 잡풀이 무성한 넓은 공터가 나타나는데 918 헬기장이라 생각되는 장소이다.

이제 고불암도 바로 코 앞으로 다가온 느낌이기에 마지막 힘을 내며 물 한모금 마셔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헬기장이라 생각되는 공터를 지나 완만하게 내려가니 잡목과 잡풀이 나타나고 짧은 구간 내려가니 안부를 만난다.

지도를 살펴보지만 아무 표식도 없는 안부로서 우측으로는 장자동고개와 고불암을 이어주는 고갯마루가 아닐까 생각되는 안부처럼 보인다.

안부 좌측으로는 치인리가 있는데 비봉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산간 마을로서 높은 고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지대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마을로는 치인 말찡이와 삼정 마을 등이 있는데 치인 마을은 해인사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말찡이 마을은 마장이라고도 불리며 신라 제 40대 애장왕이 해인사를 세우려고 머물 때 마장이었다 하여 이름 붙여지게 되었다.

삼정 마을은 애장왕이 3년간 머물때 삼정승이 함께 따라와 머물었다는 의미에서 불리워진 이름이다.

 

안부를 지나 소나무 군락지를 타고 완만하게 오르니 나즈막한 무명봉을 넘어 곧바로 고불암 도로와 만난다.

내려가 그곳 고불암 도로에는 고불종루라는 건축물을 세우는 공사가 한창인데 처음에는 해인사의 말사인 고불암에서 장자동고개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들고 있지는 않을까 기대를 했었는데 그것은 아니고 고불암의 고불종루를 만들고 있는 공사중이었다.

그 고불암 도로로 내려가 오늘 수도지맥 산행을 마무리하고 고불암으로 내려가 주위를 둘러보고 하루의 산행을 마무리 한다.

조만간 이곳 수도지맥 산행을 하는 후답자들은 새로운 모습의 고불암 도로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예상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고불암 도로에서 좌측 아래에 위치한 고불암 방향으로 내려가니 공사중인 건물이 고불종루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다.

고불암으로 내려가 제일 먼저 눈에 보이는 약수터로 가 시원한 약수를 두어바가지 퍼 마시니 이제서야 살 것 같다는 느낌이다.

육화당과 벽안당, 고불루, 용선당, 반야당 및 종무소를 둘러보고 나오니 고불산방이 보이는데 오늘은 문을 닫았는지 조용하기만 하다.

주차장으로 나와 택시를 기다리며 배낭을 정리하고 잠시 후 도착한 택시를 타고 성주로 나가 시원한 음료수 하나 입에 물고 서울로 가는 버스에 올라 길고도 멀었던 하루를 마감해 본다.

고불암 도로에 도착을 해 고불암을 살펴보니 해인사 고불암은 가야산 자락의 해인사 부지내에 있으며 해인사의 말사중에 가장 높은 해발 900고지에 위치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납골당이라고 한다.

고운 최치원 선생은 가야산은 명산 가운데서도 천하의 명당이라고 찬탄했다고 하는데 이곳은 산자의 수행처이자 사자의 안식처로  최고의 장소라고 한다.

그 가운데서도 예시적으로 지목된 가야산 마장동에 납골성전인  무량수전을 창건하여 삼계중생구제를 한다는데 그 의미를 둔 고불암은 10만평의 넓은 부지에 750 7개동의 대웅전및 부속건물과 무량수전 1200평의 건물 실내공간에 2만기의 위패를 모시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고 하는데 이곳은 요즘 납골당 업자의 농간에 휘말려 각종 송사에 시달리고 있는 모양이다.

남아 있는 구간은 또 어떻게 진행을 해야 할지 조금은 걱정도 되지만 유명한 산들이니 등로가 잘 나 있어 큰 걱정은 안하지만 역시나 무더위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건이 될 듯 하다.

 

남아 있는 구간도 무탈하게 즐기는 산행이 될 수 있기를 바래 본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