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지 : 경상북도 김천시와 경상남도 거창군군의 수도지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 2015년 05월 23일 토요일 당일 산행
산행날씨 : 약간의 구름이 있었고 바람도 불었지만 무더워 많은 땀을 흘렸던 산행 날씨
산행온도 : 영상 16도에서 영상 28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소사고개(지경재, 소사마을 표지석과 탑선슈퍼, 1089번 2차선 지방도로)-능선진입-비포장임도-소나무식재 구간-과수원 농장-고랭지 채소밭-시멘트 포장도로-마지막 민가-능선진입-시멘트 포장도로-능선진입-시멘트 포장도로-비닐하우스와 파란물통-사과 과수원-능선진입(대덕산 삼봉산 등산로 안내판)-벌목지대-통나무 계단-로프구간-무명묘지-수도지맥 분기봉 이정표-대덕삼도봉(초점산, 1249봉, 정상석과 벤취) 이정표(대덕산, 수리봉 0.6 Km, 덕산2리마을 2.8 Km)-수도지맥 분기점 이정판과 이정표(국사봉 7.2 Km, 초점산 삼도봉 0.4 Km, 소사 2.8 Km)-묘지1기-억새지대-고랭지 채소밭-시멘트 포장도로-파란물통2개-사과 과수원-고랭지 채소밭-과수원과 농장 관리 움막-능선진입-벌목지대-진달래 군락지-조망처-877봉의 구름재 갈림 이정표(초점산 삼도봉 4.2 Km, 국사봉 3.4 Km, 구름재 1.2 Km)-철조망-861.6봉-무명묘지-비포장 임도-소나무 군락지-무명묘지-감주재 이정표(초점산 삼도봉 6.6 Km, 국사봉 1.0 Km, 한기마을 2.4 Km)-벌목지대-국사봉 갈림 이정표(초점산 삼도봉 7.2 Km, 국사봉 0.4 Km, 백학동 3.4 Km)-국사봉(875.1봉) 삼각점-아침식사-국사봉 갈림 삼거리 복귀-잡목지대-무명묘지-벌목 잡목지대-무명묘지-시멘트 포장도로-문의리 입구 이정표(국사봉 1.9 Km, 백학동 1.0 Km)-하성 안내판과 이정표(국사봉 3.1 Km, 백학동 0.7 Km)-시멘트 포장도로-배티고개(오산 백학동 표지석, 3번 2차선 지방도로, 거말산 국사봉 초점산 등산로 안내판)-시멘트 포장도로-이정표(거말산정상 3.0 Km, 국사봉)-축사건물-비포장 임도-능선진입-낙엽송지대-간벌지대-소나무 군락지-간벌지대-무명묘지-소나무 군락지-목림이고개 이정표(배티고개 2.0 Km, 거말산정상 1.0 Km)-전망바위-이정표(배티고개 2.6 Km)-거말산정상 갈림 이정표(배티고개 2.9 Km, 거말산정상 70m, 우두령 1.3 Km)-거말산(901.6봉) 삼각점-거말산 갈림 삼거리 복귀-로프구간-무명묘지들-안부 이정표(우두령 660 m, 거말산정상 740 m)-소나무 군락지-잣나무 등로-우두령(1099번 2차선 포장도로) 이정표(거말산 1.3 Km, 수도산 5.8 Km)-시멘트 포장도로-간벌된 잣나무 군락지-비포장 임도-능선진입-헬기장-낙엽송 등로-철조망-861봉-벌목지대-안부-소나무 군락지-바위등로-1008봉-바위 전망대-시코봉(1237봉 정상석, 양각지맥 분기점) 이정표(우두령 4.1 Km, 수도산 1.7 Km, 양각산 1.7 Km)-1200봉 바위전망대-심방 갈림 이정표(수도산 1.4 Km, 양각산 2.0 Km, 심방 3.8 Km)-바위 전망대-점심식사-산죽과 철쭉지대-바위 너덜구간-수도산 서봉(1313 신선봉, 금오지맥 분기점)-이정표(양각산 3.2 Km, 수도산 0.2 Km)-바위 전망대-수도산(1317봉, 정상석과 돌탑)-안전목책과 로프-수도암 갈림 이정표(단지봉 4.5 Km, 수도산 70 m, 수도암 2.43 Km)-돌탑-나무계단-바위 전망대-나무계단-안전목책과 로프-바위 전망대-헬기장-이정표(정상 1000 m 지점)-119 구조요청 수도산 7번 지점-벤취와 소나무 봉-119 구조요청 수도산 6번 지점-청암사 갈림 이정표(수도산정상 1790 m, 청암사 4350 m, 수도암 700 m)-산죽지대-119 구조요청 수도산 3번 지점-청암사 갈림 이정표(수도산 정상 2240 m, 청암사 4400 m, 수도암 250 m)-이정판(청암사, 수도암, 출입금지 등산로 아님)-통나무 계단-이정판(수도산 해발 1317 m, 정상 1827 m 지점)-한산교와 수도산 등산로 안내지도-수도암-산행종료
산행거리 : 꾸준하게 그러나 우두령에서 수도산 오름길에 체력적인 부담을 느끼며 어렵게 26.11 Km (스마트 폰의 GPX 기준)
산행시간 : 새벽부터 아침까지는 조금 빠르게 그러나 우두령에서 수도산까지는 무더위와 체력적인 부담감속에 아주 느리게 진행 해 13시간 12분 (03시 25분에서 16시 37분까지)
교통편 : 애마와 택시 이용 (웅양 콜 택시 011-9574-0044와 055-942-3801)
수도지맥이란?
백두대간이 전북 무주군과 경북 김천군과 경남 거창군등 삼도가 만나는 대덕산(1290.9봉) 남쪽의 삼도봉(일명 초점산, 1250봉)에서 남쪽으로 300여 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시작하여 남동쪽으로 가지를 쳐 내려가며 경상남도와 북도계를 따라 봉산(902봉), 수도산(1317봉), 단지봉(1326.7봉), 좌일곡령(1257.6봉)을 지나 가야산을 목전에 두고 두리봉(1133봉)에서 도계를 벗어나 남쪽으로 거창군과 합천군경계를 따라 남산(1113봉), 마령(1006.5봉), 우두산(의상봉, 1046.2봉), 비계산(1130봉), 88고속도로, 두무산(1038.4봉), 오도산(1120봉) 등 1000미터 이상의 장쾌한 능선이 60여Km 이어진다.
오도산에서 거창군과는 작별을하고 온전한 합천땅으로 들어서며 고도를 낮춰 토곡산(644봉)를 지나면 다시 경상남도와 북도계를 만나 고령군과 합천군계를 따라 만대산(688봉), 시리봉(408봉)을 지나 솜등산(271봉)에 올라선 도계능선과는 작별을하고 마지막 여력으로 필봉(330봉), 부수봉(317봉), 성산(205.7봉)을 내려서며 맥을 다한다.
수도지맥 동북쪽으로 흐르는 감천은 길이 69 Km 유역면적 10만 Km2로 수도산 북쪽에서 발원하여 김천시의 지명을 낳게하고 김천시일대를 지나 구미시 선산읍 원리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들고
수도지맥 동쪽내지 동남쪽으로 흐르는 회천은 길이 78 Km,유역면적 78000 Km2로 수도산 동쪽기슭에서 발원하여 대가천을 이루어 성주호에 들었다가 다시 동으로 흘러 고령읍에서 소가천 및 안림천과 합류하고 고령군 덕곡면 율지나루에서 낙동강에 흘러든다.
수도지맥 서쪽으로 흐르는 황강은 길이 111 Km,유역면적 13만 Km2로 남덕유산(1507봉)동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합천호에 들었다가 합천군 청덕면 적포리 일대에서 낙동강에 흘러들며 맥을 다한다.
수도지맥중 제일 높은산은 단지봉(1326.7봉)이지만 지맥의 이름을 수도지맥으로 한것은 아마도 수도산(1317.1봉)의 유명세일 듯 싶고
좌일곡령(1257.6봉)은 일부지도가 좌대곡령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壹(한일)자와 臺(돈대대)가 비슷하여 생긴 일은 듯하며 국토지리정보원의 25000지도는 좌일곡령으로 표기되고 있다.
또 다른 마루금에서 자만의 대가를 치르며 인생을 배웠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후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단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무엇이 그리도 이 산객의 발길을 그 험한 산지로 이끌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산에 들어 마음이 편안하고 살아 온 자신의 삶을 뒤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이라 생각하니 또 이렇게 새로운 마루금으로 출발을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진양기맥 산행도 2번만 내려가 오르면 마무리가 되고 대동금강기맥 산행도 3번만 더 내려가면 되니 이제 9기맥 산행도 가을에 진행 예정인 팔공기맥 산행이 마무리되면 이 산객의 인생에서 큰 굴곡점이 되는 시점도 올 것이다.
홀로 비슬지맥을 마무리 하고 곧이어 수도지맥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원래 2일간 산행 후 올라 올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아들의 군 휴가와 옆지기와의 다음 주 산행 때문에 하루만 산행 후 서울로 복귀하는 발길이 가볍기만 하다.
수도지맥의 상당부분 역시 개인적으로 걸었던 마루금이기에 옛 추억을 떠올리며 즐기는 시간이길 바라며 무엇보다 무탈하게 건강한 모습으로 완주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던 시간이었다.
새벽 일찍부터 산행을 시작해 우두령까지는 생각만큼 예정된 시간에 잘 마무리하였지만 우두령부터는 가파른 오르막 등로에 가온이 오르기 시작하고 밤새워 내려와 잠을 자지 못하고 산행을 해서 그런지 갑자기 체력이 저하되고 산행 속도도 급격하게 느려져 고불암까지 가려던 예정을 수정해 수도암에서 여유있게 산행을 마치게 되었다.
마음으로 한번 꺽이고 나니 산행 속도는 더욱 느려지고 쉬는 시간이 늘어나며 우두령에서 수도암까지 약 7.5 Km를 걷는데 6시간 가까이 걸려 도착을 한다.
다만 느려진 산행 속도로 인해 수도지맥에서 주위 산군들을 속살까지 살펴 볼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시간으로 남길 수 있는 산행이었다.
참으로 어렵게 수도산 정상에 도착해 셀카 놀이를 하면서 사진 한장 남기고 보니 이제 세번째 도착한 수도산 정상에서 제대로 된 사진 한장 남길 수 있어 고운 추억으로 남겨지길 바래 본다.
새로운 마루금 산행을 위해 떠나는 시간은 그 길이나 중요성을 떠나 늘 가슴 설레이는 시간이며 긴장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어둠을 뚫고 어렵게 도착한 소사고개 즉 지경재에서 잠시 산행 준비 후 무주 거창쪽으로 200여미터 내려가 탑선슈퍼와 소사마을 이정석을 사진에 담고 다시 소사고개 즉 지경재로 올라 와 마음속으로 멀고도 긴 수도지맥 산행도 무탈하게 이끌어 줄 것을 빌어 보는 시간이다.
소사고개 즉 지경재는 경남 거창군 고제면과 전북 무주군 무풍면을 잇는 덕유산 고갯길로서 옛 지명은 도마치로 경상도와 전라도 및 충청도를 아우르는 삼남대로에서 도마치는 문헌이나 지도에서 중요한 고갯길로 등장하는데 옛 지명은 대동지지 거창편에 등장하며 정상기의 팔도지도에도 표기된 요충 고개였다.
덕유산줄기 삼봉산(1245봉)과 삼도봉(1177봉) 사이에 있으며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인 삼도봉이 지리산 삼도봉과 같은 이름인 이유는 충북 영동과 경북 김천 및 전북 무주의 경계에 산이 위치해 있기 때문이나 옛 문헌과 이 지역 사람들은 삼도봉을 초점산으로 부르고 지금 이 고개는 소사고개로 불리고 있는데 고갯마루에 있는 마을이름인 소사를 따 온 것이며 고개 마루가 항상 바람에 씻기어 모래가 희고 깨끗했으므로 생긴 이름이라 마을 사람들은 증언한다.
전라도 쪽은 무풍의 덕지리이고 경상도 쪽은 고제의 봉계리를 가르고 있으며 덕유산을 넘는 경상도 고개 중 소사고개는 해발 530미터로 비산비야를 이루고 있다.
고개마루에도 고랭지 채소밭이 개간되어 있는 이 고개는 1089번 지방도로가 통과하는 길목이고 소사고개의 지리적인 특징은 일반적 산의 마루금으로 도계를 표시하는 관행을 벗어나 북사면인 무풍 쪽으로 약간 벗어나 있다.
1728년(영조 4년)때 일어난 이인좌의 난 중 안음의 정희량이 지휘하는 반군이 기병했는데 거창과 합천 일원을 장악한 반군의 주력은 거창에 집결하여 북상 준비를 하였다.
성초역에 주둔한 정희량은 소사 고개를 넘어 무주를 거쳐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에서 기병한 반군 세력과 합류하려 하였으나 관군의 동원과 진군은 반군이 예상보다 신속하여 무주 방면의 도로도 전라도의 군사들이 먼저 장악하여 정희량이 지휘하는 반군이 진군할 수 없었다.
소사고개 아래인 지금의 고제면 생초마을의 성초역 부근에서 발이 묶여 있던 정희량은 내부 반란으로 소사 고개를 넘지 못하고 체포되어 참수되었는데 김천도찰방에 속한 거창의 성초역은 지금 고제면 용초 마을에 소재했다.
1610년(광해군 2년) 9월 내암 정인홍이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을 훼척했는데 회퇴변척소 즉 회개 이언적과 퇴계 이황의 문묘종사가 부당하다고 논핵한 글이다.
여기에 반대하는 당시 영남에서 가장 유명한 73명의 유림들이 연명 상소를 작성하여 소사고개를 넘어 서울에 올라가 대궐 앞에서 항소한 일이 있다.
뜻을 관철한 영남유생들은 돌아오면서 다시 소사고개를 넘었고 거창 성초역에서 이별을 아쉬워하는 시가 지금도 전하며 소사고개를 넘지 못한 반군 정희량은 정온의 4대손으로 조선후기 최대의 모반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부흥과 도마 북수마을 앞을 지나는 골들이 모여 남대천을 이루고 이 시냇물은 한치 저수지로 유입되며 대덕산과 망덕산이 마을을 지키고 있어 덕지리라 이름 붙었다고 한다.
이곳의 지형은 비산비야를 이루고 있어 옛길은 한재 마을에서 남대천 변을 따라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포장도로가 되어 있다.
완만한 경사가 이러지는 잘록이 소사고개 마루까지 마을이 형성되어 있을 정도로 왕래가 잦은 이곳 옛길은 흔적도 없는데 그 이유에 대하여 마을 주민들은 신작로가 생기고 도로 포장이 되면서 직선화가 되고 그것이 결국 옛길을 잠식한 것이라고 말한다.
소사고개를 경계로 양쪽에서 살아온 소사동, 지경내, 부흥동 등 마을은 전라도와 경상도 개념이 없다.
소사고개 마루에서 무풍쪽으로 내려와 도경계선이 지나는 부흥동엔 거창과 무주의 시내버스가 여기서 회차한다.
산행 준비 후 잠시 소사고개 주위를 사진에 담고 거창의 백두대간 등산로 안내판 우측의 백두대간 쉬어가는 곳 안내판과 전봇대 사이로 나 있는 등산로를 찾지 못해 잠시 우왕좌왕하다가 어렵게 정상 등로를 찾아 어둠속에 첫 수도지맥 또는 수도기맥 산행을 시작해 본다.
이곳 소사고개가 위치한 봉계리는 거창군 고제면의 법정리로서 탑선, 지경, 소사, 원기, 원봉계, 내다의 여섯 마을이 있다
탑선은 옛날 죽산전씨가 마을을 열었다 하며 마을 앞에 높이 1미터의 2층 석탑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동쪽 원탑선을 탑서이라 하고 서쪽에 소사와 북쪽에 지경이 있는데 이들 세 담을 통틀어서 탑서이라고 부르며 대덕산과 삼봉산 사이에 안긴 높이 700미터의 고냉지대이다.
지경마을은 옛날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으며 지금의 영남과 호남의 경계에 있으며 경상도 땅 안에 있으므로 지경내라고 하며 장포라고도 썼고 원기마을은 옛날 성초역에 따른 원이 있었으므로 원터라 한다
원봉계는 옛날 마을 근처 골짜기마다 불당이 많아서 당골이라 하다가 한말 이곳에 살면서 동학혁명 때 치안유지에 공이 있었다는 하종호의 호 봉서에서 새봉자를 따서 봉계라 고쳤다 하고 300여 년 전 엄씨가 마을을 열었다고 전한다.
이곳 소사고개는 이제 3번째 들리는 장소인데 주로 백두대간 산행을 위해 들렸던 곳이기에 낯설지 않게 다가오는 고갯마루이지만 그 고개 정상부에는 공사를 하고 있고 등로 우측에는 과수원이 조성되어 있어 또 다른 얼굴로 오랫만에 조우하는 이 산객을 반겨준다.
탑선슈퍼 쪽 시멘트 포장임도를 타고 진행을 해도 되겠지만 오랫만에 홀로 백두대간 마루금을 밟고 싶어 가파른 밭둑을 타고 오르니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고 그 임도를 지나 좌측 능선으로 진입을 한다.
잠시 능선을 지나니 많은 무명묘지들과 좌측으로는 벌목지가 나타나는데 이곳에서 잠시 정상 등로를 찾아 헤맸다가 우측 소나무 식재구간쪽으로 진행을 하니 등로 우측에 거대한 과수원이 보이고 곧이어 드넓은 고랭지 채소밭이 잘 정리된 상태로 나타난다.
등로 좌측으로 지경내 마을의 야경이 반짝이고 조금 더 진행을 하니 시멘트 포장도로와 만나고 잠시 그 도로를 타고 올라가니 오래전 만났던 마지막 민가가 나타나며 옛 추억을 더듬어 보는 시간이다.
등로는 민가 움막이 있는 우측으로 크게 꺽여 올라갔다 다시 그 움막을 우측에 두고 좌측 비포장 임도를 타고 들어가면 금새 드넓은 고랭지 채소밭이 펼쳐지고 그 밭을 지나니 다시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타난다.
그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가니 중간에 차량통제 가림막이 있는 곳에서 우측 능선방향으로 등로가 열려있고 그 능선을 따라 올라 잡목과의 짧은 전투를 끝내니 등로는 다시 시멘트 포장도로로 내려서 좌측으로 오르면 과수원과 물통 지대를 지나 비포장 임도를 따르고 곧이어 임도 우측으로 정상 마루금이 갈리는 능선진입 갈림길이 나타난다.
그 우측 능선으로 오르니 계단이 나타나고 곧이어 벌목지대가 열리는데 예전에 백두대간 산행을 할 때에는 잡목속에 가파른 오르막 등로였다고 기억되는데 이제 이곳 마루금도 많이 변하고 있음을 직감해 본다.
잠시 더 오르니 통나무 계단이 나타나고 조금 더 오르니 로프구간도 보인다.
다시 생각보다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타고 걸어 오르니 억새지대를 지나 새벽에 만들어진 듯한 식흔을 통과해 무명묘지에 오른다.
그 무명묘지에서 잠시 뒤돌아 보니 어둠속에 봉계리 마을과 소사고개 넘어 저 멀리 백두대간 마루금상 삼봉산과 그 우측 저 멀리 덕유산이 아련하게 다가온다.
삼봉산 우측의 덕유산 정상에서는 불빛이 반짝이며 조만간 다시 한번 조우할 것을 약속하자 속삭이는 듯 하다.
또한 삼봉산 좌측으로는 거창군 고제면의 봉계리와 봉산리 마을이 1089번 지방도로를 따라 환한 불빛을 반짝이고 있다.
그렇게 잠시 어둠속에서도 주위 풍경을 살펴보며 옛 생각에 잠겼다 다시 천천히 잡목을 헤치고 오르니 금새 수도지맥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한다.
백두대간 산행을 하면서 그리고 수도가야 종주를 하면서 꼭 한번 걷고 싶다고 생각했던 미지의 마루금인 수도지맥 산행을 위해 다시 이곳 분기점에 서 있는 시간이 감격스럽고 자랑스러운 시간이 되었다.
수도지맥은 이곳 분기점에서 우측으로 크게 꺽여 완만하게 내려가며 진행이 되지만 직진 방향의 삼도봉인 초점산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잠시 다녀 오기로 한다.
잠시 더 오르니 어둠속에서도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색깔이 고운 철쭉이 만개해 있어 편안하게 초점산 즉 삼도봉 정상에 도착해 많이도 변해있는 정상을 둘러 본다.
초점산(1249봉)은 경북 김천시 대덕면, 경남 거창군 고제면, 전북 무주군 무풍면의 3개도에 걸쳐있는 봉우리로 원래 이름은 초점산이라고 부르는데 예전에 이곳 능선에 억새가 뒤덮혀서 그렇게 불렀는데 요즘은 초점산보다는 삼도봉으로 더 알려진 곳이다.
정상에는 거창군에서 새로 설치한 깨끗한 표시석이 있고 바로 아래에는 예전 작은 표시석도 있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그야말로 일망무제로서 남쪽으로는 가야산과 수도산이 멋진 모습으로 보이고 북쪽으로는 대덕산이 그리고 서쪽으로는 삼봉산과 덕유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초점산이라 불리는 이곳은 삼도봉(경남과 경북 및 전북)이었으며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또 다른 삼도봉(경북 김천, 전북 무주, 충북 영동)이 있다.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를 가르는 삼도봉은 조선시대 8도를 분할했던 조선초기에 삼남의 분기점이었으며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역할을 했던 곳이다.
삼도봉을 중심으로 음식, 문화, 말씨 등이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초점산 정상은 예전에 작은 삼도봉이란 정상석 하나가 돌무덤 속에 세워져 있었는데 이제는 커다란 초점산이란 정상석이 서 있고 예전 깨진 정상석은 새로운 초점산 정상석 앞에 서 있다.
잠시 주위 풍경을 둘러보니 등로 우측 저 멀리 금오지맥 마루금 위로 하늘이 붉게 물들어 오지만 두꺼운 구름으로 인해 일출을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조금은 아쉬움이 있는 시간이지만 자연이라는 것이 늘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음을 오늘 다시 한번 알아가는 시간이 되었다.
이곳 초점산에서의 멋진 일출을 기대해며 어둠을 뚫고 올라 왔는데 아쉬움과 함께 자연의 섭리는 다시 한번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렇게 주위 풍경을 살펴보고 일출을 기대해며 동쪽 하늘을 살펴보는 사이 어느새 여명이 밝아오고 드디어 주위 풍경과 조망이 제법 선먕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내려다 보는 등로 좌측인 동쪽으로 이제부터 진행해야 할 수도지맥의 국사봉 넘어 저 멀리 수도산과 단지봉이 보이고 그 좌측 끝자락에 우뚝 솟아 있는 합천의 가야산이 그 옛날 고운 추억을 만들었던 기억을 뒤살리며 어서 오라 손짓을 하는 듯 서 있다.
너무나 아름다운 산줄기에 그저 넋을 잃고 살펴보는 시간이다.
이제 지나온 등로인 남서쪽으로는 호사하게 피어있는 철쭉꽃 넘어 저 아래 소사고개와 그 주위에 드넓게 펼쳐진 고랭지 채소밭이 보이고 그곳을 지나 백두대간의 삼봉산과 우측 저 멀리 덕유산 향적봉에서 그 아래로 이어진 덕유능선이 참으로 아련하게 다가온다.
참으로 많이도 올랐다고 생각하는 덕유산이지만 이렇게 다시 보니 또 올라보고 싶은 곳 그곳이 바로 산이 아닐까 혼자 독백도 해 보는 시간이다.
그렇게 그곳 초점산인 대덕삼도봉에서 주위 풍경과 조망을 즐긴 후 마지막으로 정상석과 정상 주위를 사진에 담고 다시 본격적인 수도지맥 산행을 위해 수도지맥 분기점으로 내려가 본다.
잠시 내려가니 올라올 땐 어둠속에 보이지 않았던 등로 옆 둥글레가 밭을 이루고 아름답게 피어 있는 철쭉도 이번 산행이 올해의 마지막 철쭉임을 알리며 눈길을 사로 잡고 있다.
그렇게 내려가다 등로 우측의 간벌된 지역에서 다시 한번 더 삼봉산과 덕유산을 조망한 후 조금은 빠르게 내려가니 드디어 수도지맥 분기점에 도착해 이정판을 찾아보니 준.희님의 수도지맥 이정판이 땅바닥에 떨어져 나뒹굴고 있어 조심스럽게 나뭇가지 사이에 끼워 놓고 사진 한장 남겨 본다.
갈림 삼거리에서 우측 백두대간 마루금을 버리고 좌측의 잡목이 우거진 수도지맥 마루금을 따라 내려가니 등로는 예상보다 편안하고 뚜렷하게 이어지고 있다.
잠시 내려가니 무명묘지가 보이고 그곳에서 조만간 내려가 걸어야 할 우두산에서 오도산으로 이어진 수도지맥 마루금이 제법 암릉군을 형성하며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진행 방향으로 조망을 즐기고 내려가니 이제부터 내려가 걸어야 할 고랭지 채소밭 지나 국사봉과 금오지맥과 독용산 자락이 희미하게 보인다.
등로 우측 앞으로 다시 한번 삼봉산과 백두대간 마루금을 살펴 본 후 내려가니 다시 조망처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등로 좌측 앞을 살펴보니 바로 앞에 수도지맥의 국사봉 넘어 거말산이 보이고 그 좌측 저 멀리 오늘 올라야 할 수도산 넘어 가야산이 우뚝 솟아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단지봉을 찾아 보니 수도산 능선 우측 위로 머리만 내밀고 있는 단지봉이 보여 오늘 저곳을 지나 장자동고개까지 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보기도 하지만 역시나 조금은 무리한 거리와 산행 조건은 아니였나 생각을 해 본다.
그렇게 조망을 즐긴 후 내려가니 멋진 참나무 등로가 나타나더니 등로가 서서히 희미해지고 잠시 등로 찾느라 헷깔리기만 하다.
우측 사면 등로같은 마루금을 따라 어렵게 진행을 하니 등로는 다시 좌측 내리막 드올로 이어지고 곧이어 위에서 내려다 볼 때 허허들판처럼 보였던 드넓은 고랭지 채소밭 위로 내려간다.
식재된 나무들이 보이고 그 밭 사이에 파란 물통2개가 보이는 곳에서 진행 방향의 마루금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본다.
잠시 고랭지 채소밭을 지나 내려가니 파란 물통 옆으로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타나고 이제부터 그 도로를 타고 내려가는데 방금 전 내려 온 등로 좌측으로 멧돼지들의 울음소리가 우렁차고도 거대하게 온 산천을 뒤흔들고 있다.그렇게 잠시 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가 첫번째 파란 물통을 지나 두번째 파란 물통 앞에서 뒤돌아 보니 방금 전 내려온 수도지맥 마루금의 분기점과 초점산 그리고 그곳에서 이곳 고랭지 채소밭으로 이어지는 등로가 한눈에 올려다 보인다.
잠시 뒤돌아 보며 진행해 온 마루금을 살펴 보는데 내려 온 등로 좌측 골짜기에서 거대한 멧돼지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그 소리가 뒷덜미를 잡으며 잠시 두려운 시간이 되었다.
다시 그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가니 도로 우측으로 사과 과수원이 보이고 곧이어 도로 좌측의 작은 개울가에 물을 담아 경운기로 고랭지 채소밭에 물을 주고 있는 풍경이 옛날 어릴적 시골에 살던 때를 그립게 만들고 있다.
그렇게 주위 고랭지 채소밭을 바라보며 천천히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진행을 하니 생각보다 드넓은 풍경에 놀라는 시간이다.
잠시 더 걸어 내려가니 도로 우측에 고랭지 채소밭과 과수원을 관리하기 위한 움막이 보이고 좌측 드넓은 고랭지 채소밭에는 장애를 가지고 있는 농민 한분이 스프링 쿨러를 돌리며 비어 있는 고랭지 채소밭에 배추와 무우를 식재하고 있다.
여전히 산에서 울리는 거대한 멧돼지의 울음소리에 잠시 그 농민과 수화로 이야기를 나누고 인사 드린 후 다시 그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조금은 빠르게 걸어 본다.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다시 가파르게 오르니 시멘트 포장도로 옆에는 아카시아 꽃과 조팝나무가 만발해 감미로운 꽃 향기를 전해주고 그 향기를 따라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셔보는 시간이다.
잠시 더 오르니 시멘트 포장도로가 끊기고 등로는 좌측 고랭지 채소밭 가장자리를 타고 올라 우측 능선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능선으로 오르기 직전 뒤돌아 보니 저 멀리 백두대간 상 수도지맥 분기점과 초점산 그리고 그 아래 고랭지 채소밭으로 이어지는 잡목 구간과 드넓은 고랭지 채소밭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능선으로 들어가니 생각보다 등로는 뚜렷하게 잘 이어져 있고 큰 활엽수 밑 등로 옆에는 멋진 둥글레가 온천지를 초록의 물감을 펼친 듯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다.
그렇게 잠시 걸어 완만한 봉우리로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벌목지대가 나타나고 그 벌목지대 저 멀리 백두대간 상 삼봉산이 아름다운 자태로 서 있다.
다시 능선으로 들어 가 진행을 하니 꽃잎이 지고 파란 잎새가 돋아난 진달래 군락지를 지나 나즈막한 몇개의 무명봉을 오르락 내리락 해 본다.
등로 좌측으로는 저 멀리 백두대간과 다음에 올라야 할 금오지맥 산줄기가 희미하게 다가오고 그렇게 조망을 즐기며 걸어가니 등로 옆에 생각지도 못한 멋진 펜촉을 닮아 있는 바위가 반겨 준다.
바위를 지나 조금 더 진행을 하니 등로 좌측으로 조망처가 보이고 그곳에서 잠시 조망을 살펴 본다.
김천을 두고 좌측으로는 덕대산과 백두대간 마루금이 보일듯 말듯 다가오고 우측으로는 다음에 올라야 할 금오지맥 넘어 저 멀리 가을에 만나야 할 팔공기맥 마루금의 산군들도 보일듯 말듯 산객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다.
아마도 좋은 날씨에 저 팔공기맥에 올라 이곳을 바라보며 오늘을 추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등로 바로 좌측 아래에는 내감리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데 깊은 골짜기 같은 마을에 많은 비닐하우스가 보여 의아해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내려다 보이는 내감리는 김천시 대덕면에 속하는 법정리로서 조선시대에는 지례현 남면에 속했던 중감과 내감의 2개의 마을로 1895년에 남면이 삼분되면서 상남면에 귀속되었다가 1914년에 내감과 중감이 통합하여 내감리라 칭하고 김천군 대덕면에 편입되었다.
대덕산(1290봉)과 국사봉(875봉)의 사이 골짜기의 윗쪽 산간 오지에 위치한 벽촌으로 면소재지에서 6 Km 떨어져 있으며 덕산천의 지류인 감주천의 발원지로서 연화1리 앞 30번 국도에서 갈라져 나온 지방도로의 종점으로 남과 서는 준령으로 경남 거창군과 경계하고 북은 덕산 2리와 외감리와 동은 문의리와 접경하고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내감과 웃감주는 감주 골짜기의 4개의 부락(내감, 외감, 중감, 절골) 중에서 가장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웃감주 또는 내감이라고 했고 진터와 중감은 감주 골짜기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중감이라 했는데 임진왜란 때 공장군과 박장군이 이곳에서 진을 친 사실이 있다 하여 진터라고도 한다.
그렇게 잠시 주위 조망을 즐기며 걸어가니 등로 우측으로 구름재 갈림 이정표가 서 있는 877봉 삼각점을 만나는데 이 877봉은 경북 김천시 대덕면과 거창군 고제면 그리고 웅양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준.희님의 이정판 있고 정상에는 4등 삼각점(무풍 430)이 있으며 서래야 박건석님이 삼면봉이라 적어 놓은 종이 코팅지가 보인다.
877봉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몇장의 사진을 남긴 후 다시 출발을 하니 등로 좌측 잡목 사이로 진행 방향의 마루금과 저 멀리 금오지맥 산줄기가 머리를 내밀며 조만간에 만나자 약속을 하고 있다.
다시 그림같은 소나무 군락지 아래 푸르게 펼쳐진 초록의 마루금을 따라 부드럽게 걸어가니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오른다.
오르다 보니 등로 좌측으로 방금 전 올랐다 내려온 초점산이 우뚝 솟아 있고 다시 부드러운 등로를 따라 조금 더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이제 초점산에서 고랭지 채소밭을 지나 903봉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수도지맥 마루금이 아름다운 풍경으로 산객의 가슴속에 고운 추억으로 남겨진다.
다시 평이한 등로를 타고 아침을 만끽하니 등로 좌측으로는 새벽에 들렸던 초점산이 계속 따라오며 멀어지는 안타까움을 온 몸으로 알려준다.
잠시 간벌된 뚜렷한 등로를 타고 조금 더 걸어가니 눈 앞에 갑자기 최근에 설치된 듯한 깨끗한 철조망이 가로막고 등로는 그 철조망을 우측에 두고 좌측으로 이어진다.
임산물과 약초를 재배하는 곳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고 그 높이도 제법 높아 약초가 있어도 들어가기 힘든 철조망인데 이 산객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는 안내판이기에 그저 산객들이 피해를 주지 않고 서로 상생하는 시간이길 바래본다.
그 철조망 좌측 바깥으로는 벌목이 되어 있어 진행에는 전혀 어려움이 없다.
그렇게 한동안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김천쪽 산줄기가 너울거리고 그 산줄기 위에 있는 산들을 살펴보니 다음에 올라야 할 금오지맥 산들이 키재기를 하면서 줄지어 서 있다.
금오지맥 좌측으로는 다시 초점산에서 이어져 온 수도지맥 마루금이 아름답고 그 초점산 뒤쪽으로는 백두대간 마루금도 보일듯 말듯 희미하다.
그렇게 진행하며 조망을 즐기다 보니 등로는 다시 오르막 등로로 이어지고 철조망과 약간 떨어져 있는 봉우리에 861.6봉이란 이정판이 붙어 있다.
그곳 861.6봉을 지나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다 등로 좌측을 보니 이제 그곳에는 초점산이 아닌 월매산이 우뚝 솟아 있다.
월매산(1023봉)은 김천시 대덕면 화전리 광신원마을에서 남동쪽으로 약 2 Km 대리 새복마을에서 북서쪽으로 약 1 Km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산으로 월매산 줄기가 남동쪽으로 뻗어 형성된 수도산(1317봉)은 김천의 주요 하천인 감천의 발원지이며 따라서 월매산 남쪽 비탈면은 수도산과 같은 감천 최상류의 골짜기를 이루며 다른 비탈면들도 모두 감천의 상류로 흘러드는 작은 지류 하천들을 형성한다.
월매란 지명유래는 우리말 달매를 한자로 바꾼 이름으로 땅 이름에서 달이 들어가는 경우에는 높다 또는 크다의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으며 화전리에서 보면 비고 약 600미터가 넘는 매우 높은 산이기 때문에 높은 산이라는 뜻에서 붙인 달뫼가 변형되어 월매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는 설이 있는 산이다.
잠시 더 진행하니 철조망은 이제 우측으로 휘어 달아나고 조금 더 내려가니 무명묘지 지나 그 묘지로 통하는 넓은 비포장 임도를 따라 유유자적 걸어 본다.
비포장 같은 임도를 따라 걸어가니 등로에는 멋진 소나무들이 아름답게 도열하듯 서 있다.멋진 소나무 군락지를 지나 내려가니 다시 무명묘지 한기가 보이고 그곳을 지나니 우측 거창쪽으로는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지만 좌측 김천쪽으로는 비포장 임도로 남아 있는 감주재에 도착을 한다.
감주재는 경북 김천시 대덕면 내감리와 경남 거창군 웅양면 한기리를 잇는 고개로서 감주의 유래는 삼도봉 아래 외감리와 내감리의 골짜기가 깊은 계곡이어서 감계라 하였고 군진이 주둔했던 병영에서 계곡으로 쌀뜨물을 흘려보내 물맛이 달았으므로 감주라고 하였다고 한다.
등로 우측으로는 한기마을 갈림 이정표가 서 있는데 거창군 웅양면 한기리의 한기마을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 한기마을에 대한 자료를 찾아 보지만 찾을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감주재를 지나 능선으로 오르니 이제 등로 우측으로는 간벌지대가 나타나는데 간벌된지 시간이 지났는지 키 작은 관목과 잡목들이 자라나며 진행에 더 어려움을 가중 시키고 있다.
등로 좌측은 키 큰 활엽수와 잡목이 자연 그대로 방치된 그 경계선을 타고 완만하게 오르니 등로 우측 저 아래로 한기리와 신촌리 마을이 내려다 보이고 그 뒤로 이제부터 올라야 할 거말산 일명 봉산이 봉끗 높게 솟아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렇게 등로 우측에 벌목지대를 두고 오르니 벌써 머리 위에 떠 있는 강렬한 햇살이 비추며 무더위가 밀려오고 등줄기와 이마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흘러 등로를 적시고 있다.
위로 오를수록 잡목이 자라며 산객의 발목을 잡고 그렇게 한동안 오르니 능선 위에 우측으로 백학동 내려가는 국사봉 갈림 삼거리 이정표에 도착을 한다.
직진 방향의 좌측으로 400미터 거리에 국사봉 가는 표시가 되어 있어 잠시 들렸다 오기로 하고 우측 마루금인 백학동 등로를 버리고 국사봉으로 오른다.
별 특징 없는 등로를 타고 두어번의 오르고 내림을 반복하니 드디어 잡목이 조망을 방해하는 국사봉 정상에 올라 이정판과 삼각점을 사진에 담고 잠시 앉아 준비한 김밥 한줄로 아침식사를 해 본다.
국사봉(875.1봉)은 경북 김천시 대덕면 문의리와 경남 거창군 웅양면 한기리의 경계지역에 있는 봉우리인데 옛날 국사를 통신하기 위해서 봉화를 올리던 봉우리로 삼국시대에 백제가 처음 쌓았다가 임진왜란때 길이 1.5 Km에 높이 2 미터로 다시 고쳐 쌓은 석축인 국사봉여산성지가 있으며 정상에는 삼각점(무풍308)이 있다.
하지만 국사봉여산성지는 이곳에서 조금 더 내려가 나즈막한 산줄기에 남아있는 하성 산터로서 잠시 후 만나게 될 성이기에 이곳에서는 이것으로 만족해 보는 시간이다.
간단하게 아침식사 후 잡목으로 보이지 않는 주위 조망을 살펴보니 북서쪽으로 초점산이 아름답게 다가오고 그 초점산 우측인 북쪽으로 김천의 백두대간 줄기인 황악산과 그곳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덕대산 줄기가 아련히 다가온다.
그 우측으로 금오지맥이 가물거리고 그곳 지난 저 멀리 기양지맥의 산줄기들도 보일듯 말듯 그렇게 아름다운 산하를 이루고 있다.
한동안 더 그 국사봉 정상에서 조망을 즐기며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올라갔던 등로를 타고 국사봉 갈림 삼거리인 백학동 하산 이정표로 내려온다.
갈림 삼거리에서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등로는 다시 벌목지대로 이어지는데 그 벌목지대에도 잡목이 웃자라며 진행에 상당한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그곳에서 등로 우측으로는 방금 전 지나온 수도지맥 마루금이 보이고 그곳 뒤 저 멀리 백두대간의 삼봉산이 아련히 올려다 보인다.
상당히 어려운 등로를 타고 힘들게 그 잡목 구간을 내려 와 잠시 한숨 돌리며 뒤돌아 보니 잡목을 헤치며 어렵게 내려 온 국사봉 능선이 활짝 펼쳐져 있다.
시간이 더 지나 몇 년이 지나면 이곳 등로를 타고 지맥 산행이나 잘 진행될 수 있을지 걱정도 되는 상황이다.
계솟 눈 앞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한기리와 신촌리 마을의 풍경과 그 뒤로 우뚝 솟아 있는 거말산을 바라보며 내려가니 기온이 오르며 등로를 뒤덮은 잡목과 잡풀들은 더욱 거세게 등로의 흔적을 지우고 있다.
다시 무명묘지를 지나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타나고 살펴보니 등로 우측으로는 한기리 한기마을로 통하고 좌측으로는 대덕면 문의리로 통하는 시멘트 포장도로이다.
이곳에서 그 시멘트 포장도로를 가로질러 다시 능선으로 들어가며 산행을 이어가는데 여름철엔 잡목의 저항이 심해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우측 한기마을을 통해 진행해도 큰 무리가 없을 듯 하지만 하성을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곳 정상적인 마루금을 타고 진행해야 할 것 같다.
능선으로 올라 진행을 하니 다시 밭이 나타나고 그 밭 가장자리를 타고 걸어가니 다시 시멘트 포장도로를 만나는데 그 도로 옆에는 국사봉에서 1.9 Km 진행해 내려왔다는 이정표가 서 있다.이곳은 문의리 입구로서 김천시 대덕면 문의리는 조선시대에는 지례현 남면 기동 및 문의라 불리던 마을로 1895년에 남면이 삼분되면서 외남면에 귀속되었다가 1914년에 곡암과 하임기를 통합하여 문의리라 칭하고 김천군 대덕면에 편입되었다.
동에 월매산(1023봉)과 서에 국사봉(875봉) 등 높은 산이 많은 고지대로 들이 적으며 대1리와 대2리에서 발원된 화전천이 북류하고 화전천이 들판을 이루어 논밭이 되고 있다.
3번 국도가 남북으로 관통하고 면소재지와는 4.5 Km 거리이고 동으로는 화전 2리, 서쪽으로는 경남 거창군, 남쪽은 대 1리, 북쪽은 화전1리와 2리와 접경한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기릿마, 기림마, 내촌, 원문의는 문의리의 중심인 임터의 서쪽 1500 미터의 거리에 있으며 20여 가구가 거주하며 고랭지 채소와 포도를 주로 생산하고 있다.
꼭두바우와 곡암은 임기 북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앞에 굽은 바위가 있어서 마을 이름을 곡두바우 또는 곡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다시 밭 가장자리를 타고 걸어 가 민가가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진행하니 묘지지대를 만난다.
그곳에서 원지맥 등로를 버리고 밭 가장자리를 따라 걸어가다 뒤돌아 보니 지나온 국사봉과 문의마을이 아름답고 곧이어 키 큰 산죽이 등로를 가로막는 능선으로 들어가 허물어진 하성을 따라 걸어 본다.
다시 그 하성 성벽을 타고 걸어가니 하성 안내판과 이정표가 서 있고 잠시 하성에 대한 내용을 읽어 본 후 자료를 찾아 본다.
이제 백학동 배티고개까지는 700미터 거리라는 이정표가 반가운 시간이다.
하성에 관한 자료를 찾아 보니 하성은 웅양면 한기리 오산부락에서 동북쪽 약 300미터 지점에 옛날 삼국시대에 쌓은 성터로서 원래 이곳은 돌이 귀한 곳이라 성을 쌓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아녀자들이 동원되어 먼 곳에서 돌을 날라다가 성을 쌓았다고 하여 일명 여성이라고도 하며 또는 치마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 여성에는 다른 하나의 애절한 전설이 지금도 이곳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옛날 이 성의 아래 마을에 다정하고 금슬이 좋은 부부가 살고 있었고 이 부부의 행복한 생활은 끝이 없을 것 같았는데 불행히도 아내가 출산을 하다가 딸 아이 하나를 낳고 죽어 남편은 핏덩어리인 딸을 안고 통곡을 했으나 한번 염라대왕의 부름을 받은 다정한 아내는 저승 사람일 뿐 살아서 돌아오지를 못했다.
남편은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딸이 다섯 살이 지나도록 재혼을 하지 않고 아내를 닮아 예쁜 어린 딸을 기르는 것을 낙으로 삼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 동안 여러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재혼하기를 재촉했으나 그는 오직 어린 딸을 기르는 데 신경을 쓸 뿐 재혼같은 것은 하지 않고 지냈다.
그러나 딸아이가 점점 자라나자 마침내 남편은 주위의 간청을 받아들여 재혼을 하게 되었는데 이 딸아이의 계모는 아들 하나를 데리고 시집을 왔고 계모가 데리고 들어온 아들은 몹시 총명하였으나 전처의 딸에 미치지는 못했으므로 계모는 항상 전처의 딸이 총명한 것을 시샘을 했하였으나 이들은 나이가 들수록 그 총명함이 더해 갔다.
하루는 계모가 전처의 딸과 자기의 아들을 불러 놓고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너희들 모두가 분간할수 없도록 똑똑하고 총명하니 어미의 마음은 기쁘기 한량이 없어서 오늘은 너희들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총명한가를 시험해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아들에게는 한 마리의 말을 주면서 천리를 갔다 오게 하고 딸은 집 뒤의 산에 올라 성을 쌓으라고 하였는데 만약 한달안에 일을 마치지 못하면 지게 되는 것이고 이 시합에서 지는 사람은 죽게 되는 것이었다.
아들은 말을 타고 고향을 떠났고 딸은 뒷산에 올라 성을 쌓기 시작했는데 이 딸에게는 어려서부터 애지중지 길러오던 고양이가 한 마리가 있었고 이 고양이가 딸이 성을 쌓는 일을 도와 주게 되었다.
사실 이 시합은 하나마나 한 것으로 말을 타고 천리를 갔다 오는 것은 쉬운 일이었으나 돌성을 쌓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고 더구나 이곳은 돌이 귀하기 때문에 먼 곳에서 돌을 날라다가 성을 쌓아야 했기 때문에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딸은 성을 착실히 쌓아 갔으며 고양이는 재빠른 행동으로 먼 곳의 돌을 부지런히 날라다가 딸이 성을 쌓는 일을 도왔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열흘이 지나고 하여 이제 거의 한 달이 다 될 무렵에 딸은 부지런히 성을 쌓았기 때문에 얼마 안 있어 거의 완성될 것 같았는데 계모가 보니 성은 거의 완성되어 가는데 아들이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기에 안달이 난 계모는 딸이 성을 쌓는 것을 지연시키기 위하여 한가지 꾀를 내었다.
계모는 평상시에 보이지 않던 친절을 딸에게 보이기 시작했고 일부러 성을 쌓는데 나아가 딸과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며 새참도 주고 콩도 볶아서 간식으로 주고 하였기에 딸은 차마 계모의 정성을 거절할 수 없어서 자기의 일을 미루고 계모의 일까지 거들어 주면서 틈이 나는 대로 성을 쌓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이런 일 때문에 성을 쌓는 일이 늦어지게 되었다.
이제 약속된 한 달이 다 되어 마지막 날이 되었고 그동안 고양이와 딸이 열심히 성을 쌓았기에 이제 한 번만 돌을 날라다 쌓으면 성이 완성될 순간에 고양이도 이제는 지쳐서 쓰러질 지경이고 딸도 손과 발이 부르터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으나 이제 마지막 돌을 나르면 성이 완성되기에 딸은 피곤한 줄 모르고 치마에 돌을 담아 싸 가지고 오는 도중 멀리서 동생이 말을 타고 온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부지런히 성을 쌓는 곳에 도착하려고 하는데 마침 그때 멀리에서 동생도 말을 타고 가까이 오고 계모는 콩을 먹으라고 붙잡아 딸은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가 계모의 청을 못이겨 콩을 받아먹게 되고 그 순간 아들은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쳐 버렸다.
마침내 계모의 간교한 꾀에 딸은 내기 시합에서 지게 되었고 아들이 이곳을 지나치자 졌구나하는 생각으로 앞치마에 쌓던 돌을 힘없이 쏟아 버리고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은 딸은 그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끓어 버렸다.
딸의 죽음을 보자 고양이도 슬피 울고서는 그 자리에서 딸을 따라 죽어 버려서 성은 끝내 완성되지 못한채로 지금까지 남아 있고 그 성을 여자가 쌓았다고 해서 여성이라고 후세의 사람들은 불러오고 있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성이다.
이 전설이 진실이던 아니던 고향을 지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는 것은 좋은 것이라 생각해 본다.
하성을 지나 뚜렷한 등로로 진행하고 과수원 밭 가장자리를 따라 걸어가니 곧이어 1차선 포장도로와 만나 그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 본다.
그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금새 백학경로당을 지나 3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배티고개에 도착을 한다.
이곳은 오산마을이라고도 하였는데 이제는 백학동으로 더 많이 알려진 부락으로 김천시 대덕면 문의리의 원문의 마을이다.
문의리의 유래는 평산 신씨와 파평 윤씨 등 명문가의 자손들이 국사봉 아래로 깊숙이 들어와 살면서 선비의 기개와 유학을 대표하는 문자와 의자를 따서 마을 이름으로 삼았다.
조선 말 지례군 외남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문의와 임터 및 꼭두바위(일명 곡암)과 아랫임터가 통합되어 김천군 대덕면 문의리로 개편되었다가 1949년 금릉군 대덕면 문의리로 개칭되었고 1995년 김천시 대덕면 문의리가 되었다
동쪽으로 월매산이 서쪽으로 국사봉 등 높은 산이 많은 고산 지대로 대리에서 발원한 화전천이 북쪽으로 흘러 마을 앞을 돌아 나간다.
자연 마을로는 임터, 문의, 아랫임터, 꼭두바위, 원문의 등이 있는데 임터는 국도 3호선 변에 자리 잡은 마을로 문의리의 중심 마을이었고 마을 개척 당시에 나무가 울창하여 붙인 이름이다.
아랫임터는 새목골 물과 화전천이 합류되는 지점에 자리 잡은 마을로 임터 아랫마을이어서 붙인 이름이고 꼭두바위는 마을 앞에 굽은 바위가 놓여 있어 붙인 이름으로 수년 전 수해로 큰 피해를 입었고 도로 직선 공사로 마을이 두 동강이 나면서 마을 형태가 많이 훼손되었으며 마을의 지명이 유래되었다는 꼭두바위도 찾을 길이 없다.
원문의는 임터에서 오른쪽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한참 들어가 자리 잡은 마을로 김천에서 가장 골이 깊은 오지 마을 중 한 곳으로 원래의 문의마을이란 뜻에서 붙인 이름이며 국사봉으로 오르는 깊은 골짜기에 자리 잡았으므로 내촌이라고도 하는 마을로 평산 신씨와 파평 윤씨 집성촌이다.
원문의 앞산인 성재는 임진왜란 때 나라에서 주민들을 동원해 성을 쌓아 붙인 이름으로 성을 쌓을 당시 여동생이 치마로 돌을 나르고 오빠는 돌을 쌓다가 성을 다 쌓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치마에 싼 돌을 버렸더니 큰 돌무덤이 생겼다고 한다.
이후 그 성을 일컬어 여성 또는 치마성이라 하였는데 원문의 뒷산인 국사봉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마을 일대가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곳 배티고개에서 한구간 나눠 산행을 중단하는 산꾼들도 많은 듯 한데 거리가 짧고 시간이 충분하니 오늘은 마음 먹고 길게 걸어 볼 예정이다.
배티고개의 3번 2차선 포장도로를 건너 방금 전 지나온 국사봉과 앞으로 올라야 할 방향으로 거말산 3.0 Km란 이정표가 서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거대한 건물들이 보이는 쪽으로 걸어 올라가니 도로 좌측으로 한우를 비육시키는 커다란 축사 한동이 보인다.
그 축사를 지나 계속 오르니 다시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시멘트 포장도로는 좌측으로 흐르고 우측으로 비포장 임도가 나 있어 그 비포장 임도를 따라 올라 본다.
임도 좌측으로 거대한 비닐하우스인지 아니면 거대한 건물단지가 내려다 보이는 좁은 등로를 타고 능선 방향으로 진행을 하니 다시 비포장 임도를 직진 방향으로 보내고 우측 능선으로 마루금은 이어지고 있다.
잠시 더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간벌된 지대를 지나 주능선으로 오를수록 등로는 멋진 소나무 군락지로 변하며 우측의 간벌지역을 통해 방금 전 지나온 수도지맥 마루금을 살펴본다.
잠시 더 걸어 오르니 간벌된 소나무 군라지 지나 저 멀리 올라야 할 거말산 능선이 빼꼼히 올려다 보이고 그렇게 능선을 따라 조금은 여유롭게 걸어 올라 본다.
무명봉을 지나 다시 완만하게 내려가니 안부가 눈 앞에 보이고 이제 간벌지대를 지나 다시 능선으로 등로가 이어지는데 그 능선 등로에는 커다란 잣나무 몇그루와 낙엽송이 멋지게 줄지어 선 모습도 눈에 들어 온다.
그곳 능선으로 들어가기 직전 잠시 등로 우측 저 멀리 바라보니 웅양면의 한기리와 신촌리 마을이 내려다 보이고 그 마을 넘어 저 멀리 국사봉과 초첨산 그리고 좌측 끝자락으로 백두대간의 삼봉산이 벌써 저 멀리 멀어져 가고 있다.
능선으로 들어가니 무명묘지 한기를 지나 소나무가 빼곡한 등로가 나타나고 무심으로 걸어 보는 시간이다.
그렇게 한동안 멋진 소나무 군락지를 따라 걸어가니 다시 완만하게 내려가고 곧이어 비포장 임도가 지나는 안부에 도착을 하는데 살펴보니 그 임도 옆에 거말산 정상까지 1.0 Km 남아 있다는이정표가 보인다.
이곳은 목림이 고개라 불려지는 고개로서 목림이 고개는 경남 거창군 웅양면 신촌리와 경북 김천시 대덕면 대리를 잇는 고개로 이정표가 서있고 사람들이 다니는지 길은 뚜렷이 보인다.
지도를 살펴보니 이곳에서 비포장 임도를 타고 좌측으로 가면 곧바로 우두령과 만날것 같은데 바로 앞에 있는 거말산(봉우산 또는 봉산)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비포장 임도를 건너 직진의 거말산 방향으로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한다.
능선으로 오르니 다시 소나무 군락지가 펼쳐져 있는데 그 소나무 아래에는 잡목이 자라며 등로를 뒤덮고 있어 진행에 어려움이 있다.
그렇게 한동안 걸어 오르니 이제는 소나무 군락지가 끝이나고 진달래 나무 군락지가 나타나며 터널을 이루고 있어 고개를 숙이며 진행을 한다.
그렇게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드디어 바위 조망처가 있는 암릉 구간에 도착을 하고 그 바위 전망대에 올라 지나온 방향의 북쪽을 살펴보니 오늘 이 산객이 걸어 온 마루금이 한눈에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북서쪽으로 백두대간의 삼봉산이 암릉을 드러내며 아름답게 우뚝 서 있고 그 우측으로 오늘 올랐던 초점산이 올려다 보이는데 그 사이에 있는 소사고개는 능선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바로 발 아래에는 한기리와 신촌리 마을이 모내기를 준비하는 바쁜 농민들의 마음을 담고 고요하지만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그 초점산 우측인 북쪽으로는 방금 전 지나 온 국사봉이 보이고 그 국사봉에서 내려오면 지나온 하성과 나즈막한 산줄기 그리고 배티고개가 아주 가깝게 내려다 보인다.
그 배티고개 지나 어렵게 올라 온 간벌지대가 보이고 그 간벌지대에서 이곳 바위 암릉까지 이어진 마루금도 내려다 보인다.
그 수도지맥 마루금 우측으로는 월매산 지나 조만간 다시 올라야 할 금오지맥 마루금이 다시 만나자 부르고 있다.
그렇게 그곳 암릉 전망대에서 한동안 주위 풍경과 조망을 즐긴 후 오르니 또 다른 바위가 보이는데 그곳에서 진행 방향을 살펴보니 저 멀리 수도산으로 이어지는 드높은 산줄기가 이 산객의 마음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다시 등로를 따라 오르니 이제 배티고개에서 2.6 Km 지나 왔다는 이정표를 지나 뚜렷한 참나무 등로를 따라 여유롭게 걸어 본다.
편안한 등로를 따라 여유롭게 걸어 오르니 드디어 거말산 갈림 삼거리 이정표를 만나 잠시 사진 한장 남기며 쉬었다 거말산을 다녀 오기 위해 직진의 등로를 따라 걸어 올라 본다.
조금 더 가파라지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금새 곰 형상이 함께 서 있는 거말산 정상에 도착을 해 사진을 남기며 잠시 휴식을 취해 본다.
지도를 보니 이곳 거말산은 봉산이라고 되어 있고 인터넷 지도에는 봉우산이라 되어 있는 정상이기도 하다.
이곳 정상에 있는 곰 형상의 정상석은 2014년 거창군에서 등산객들을 유치하기 위한 일환으로 거창에 있는 높은 산에 그 지역 특색에 맞춘 정상석을 세웠는데 이곳 거말산의 곰 형상은 웅양의 곰을 형상화한 정상석이란 설명이 보인다.
거말산(901.6봉)은 경남 거창군 웅양면 군암리와 경북 김천시 대덕면 대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거말산의 옛 이름은 거말흘산이다.
경상남도와 북도를 경계하는 산으로 옛날 군사적 요충지였던 우두령재를 동쪽에 두고 서쪽의 거창군 웅양면 하성리에서 경북 김천시 대덕면 태리를 넘는 배티재를 두고 있다.
엣날에는 거말산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서 봉우산 또는 봉수산이라 불렀고 봉산으로도 불렀다고 한다
거말흘산 봉수대는 남쪽 금귀봉 봉수대의 신호를 받아서 북쪽 구성산 봉수대로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거말흘산 봉수대 축법은 돌과 흙으로 쌓았으며 규모는 둘레 20 미터에 높이는 4 미터 그리고 폭이 3에서 4 미터가 된다.
내지 봉수로 봉수군은 오장 2명과 군사6명이 배치되었다고 하며 19세기에 편찬된 거창읍지에 따르면 봉수군은 별장 1명에 군사5명이 있었다고 한다.
거말산 정상은 제법 넓은 공터로 이뤄져 있는데 주위 잡목들로 인해 깨끗한 조망은 없으나 그 잡목 위로 주위 산들의 머리만 빼꼼히 올려다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먼저 진행 방향인 우측 동쪽으로는 시코봉과 신선봉 지나 수도산이 우뚝하고 그 좌우측으로 금오지맥과 양각지맥 산줄기도 보일듯 말듯 다가온다.
남동쪽으로는 다음이나 그 다음 구간 올라야 할 미인봉 방향의 암봉이 우뚝하고 서쪽으로는 삼봉산 주위의 백두대간 마루금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북쪽으로 오늘 이 산객이 걸어 온 수도지맥 마루금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 뜨거워지는 거말산을 내려 와 거말산 갈림 삼거리 이정표에서 이제는 우측 우두령 방향의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 본다.
로프 구간을 지나 무명묘지 지대를 지나니 다시 비포장 임도와 이정표를 만나는데 살펴보니 목림이고개와 이어지는 비포장 임도터럼 보이는 안부이다.
그 비포장 임도를 가로 질러 건너 능선으로 진행을 하니 소나무 군락지를 지나 잣나무가 보이고 다시 잡목 구간을 통과한 후 잣나무가 식재된 곳을 지나 1099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우두령에 도착을 하는데 차량 소음이 시끄러워 살펴보니 우두령 고갯마루 위에는 거대한 차량 3대가 정차되어 있고 그 트럭들에는 각각 벌목된 나무토막이 한가득 실려있다.우두령(1580미터)은 거창군 웅양면 산포리와 김천시 대덕면 문의리를 넘나드는 반은 포장 반은 비포장인 1099번 도로가 지나가는 고개로서 고개가 마치 소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우두령이라 한다.
이 고개는 대덕산(1290봉)에서 동쪽으로 가야산(1430봉) 방면으로 뻗는 지맥 중의 국사봉(875봉)과 수도산(1317봉)과의 안부에 위치한다.
고개 서쪽으로는 남해에서 초산간의 3번국도가 지나는데 이 도로는 북쪽으로 지례를 거쳐 김천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웅양을 거쳐 거창에 이른다.
따라서 우두령은 경상북도의 남서부지역과 경상남도의 북부산간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옛날에는 남해안의 삼천포(지금의 사천)에서 진주, 산청, 함양을 거쳐 우두령을 넘고 다시 북쪽으로 김천, 상주, 점촌을 거쳐 문경새재에 이르는 남한의 중앙을 남북으로 직통하는 교통의 요지였다이 고갯마루에는 감천발원지라는 이정표가 서 있다는데 작업을 하고 있어 사진에 남기는 것을 포기하고 뜨거운 포장도로를 건너 최근에 공사를 한듯한 비포장 임도를 타고 다시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이곳 우두령 정상에 있는 감천 발원지란 이정표를 만들어 놓은 감천을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보인다.
감천은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 봉화산과 내감리 국사봉 및 덕산리 대덕산에서 발원하고 삼도봉에서 흐르기 시작한 부항천과 지례에서 합류하여 김천시를 관류하여 구미시 선산읍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과거 우리나라는 말은 있으나 글이 없어 소리 또는 의미를 한자어로 표현하던 한자차용 시기가 있었는데 이 시기에 감천의 표기는 우리말 감의 소리를 한자어에 대응시켰으며 천은 내의 뜻을 빌려온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감천은 우리말로 감내가 되는데 기원적으로 우리말 감은 신을 이르는 것으로 단군왕검에서 보듯 검은 신과 같은 존재로서 즉 검의 모음이 바뀌어 감이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검은 신뿐만 아니라 중심의 의미도 함께 있었으므로 감천은 신이란 뜻이 없어지고 중심이라는 뜻만 남아 김천 지역의 중심을 흐르는 하천인 중앙천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 밖에 김천 지역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은 감천의 물맛이 다른 지역보다 달고 맛이 있어 감천이라고 명명하였다고도 한다.
김천 지역에 속한 감천은 김천시지와 국가수자원관리종합정보시스템에서 구성면 광명리를 기점으로 크게 두 개의 구간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그 두 구간의 명칭은 각각 대덕면에서 구성면 광명리까지 이르는 상류 구간인 감천과 구성면 광명리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지점에 이르는 감천의 하류부인 감천으로 구분되고 유로 길이는 상류 감천이 33.39 Km이고 하류 감천이 40.88 Km이다.
국사봉(318봉 아포읍), 금오산(976봉), 영암산(784봉), 백마산(715.7봉), 고당산(596봉), 염속산(869.9봉), 수도산(1313봉)이 감천의 남동쪽 분수계를 이루고 대덕산(1290.9봉), 삼도봉(1177봉), 황악산(1111.4봉), 눌의산(743.3봉), 백운산(631봉), 광덕산(393.5봉)이 북서쪽 분수계를 이룬다.
이 산지들의 능선부를 연결한 분수계 내 유역 분지 총 면적은 1,005.33 Km2이고 유역 분지에 포함되는 하천은 직지천, 부항천, 아천, 무릉천, 하원천, 대방천, 감문천, 율곡천, 연봉천, 외현천, 강곡천, 백운천, 광천천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감천으로 흘러드는 감천의 지류이다.
감천 하류부에는 광명평야, 개령평야, 아포평야 등 김천의 곡창 지대를 이루는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감천은 구성면 송죽리에서 곡류 절단의 흔적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 곡류 절단은 하천의 침식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구성지방산업단지를 조성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유로를 변경하면서 생긴 것이다.
송죽리는 내륙에 분포하는 대표적인 신석기 유적지로 감천 옛 하도에서는 신석기 시대 유물과 유구가 대량으로 발견되었고 옛 하도에 조성한 구성지방산업단지는 장기간 방치되어 오다가 최근에 골프장으로 용도가 변경되어 현재 공사를 하고 있다.
지역 주민들은 골프장 때문에 하천수가 오염될 것을 염려하고 있다.
1099번 2차선 포장도로를 건너 돌로 옹벽을 만들어 놓은 옆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진행을 하니 등로 좌측으로는 최근에 간벌되고 가지키기를 한 듯한 잣나무 군락지가 보이고 우측으로는 웅양면 산포리 마을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생각보다 많은 비닐하우스가 보이고 그 끝자락에는 대양저수지도 보이는데 계획된 산행이 아니라면 저 푸른 물속에 들어가 더워진 몸을 식히고 싶다는 생각도 강하게 드는 시간이다.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조금 더 오르니 등로는 이제 좌측 잣나무 군락지의 비포장 임도와 이어지고 그 임도를 따르니 이제 등로는 잣나무 군락지 능선으로 나 있다.
능선을 타고 조금 더 가파른게 오르니 넓은 헬기장이 나타나고 그 헬기장을 가로질러 오르막 능선으로 들어가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약간의 잡목들 저항이 있는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다시 등로는 멋진 소나무 군락지와 이어진다.
나즈막한 이름없는 안부를 지나 작은 수로 같은 등로를 타고 오르니 멋진 낙엽송 지대가 보이는데 보기에는 좋지만 산림에는 큰 효과를 주지 못하는 낙엽송이 안타까운 시간이기도 하다.
다시 평이한 오르막 등로를 따라 걸어 오르니 갑자기 눈 앞에 철조망이 나타나는데 살펴보니 이곳 역시 최근에 설치된 듯한 철조망 안에는 임산물과 약초들을 재배하는 장소처럼 보이는데 그 아래에는 무슨 작업을 하는지 중장비 소음과 톱질을 하는 소음이 귓전을 때리고 있다.
그 철조망을 우측에 두고 좌측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갑자기 체력적인 문제가 노출되기 시작하고 몇십미터 진행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느껴진다.
아마도 장자동고개까지 진행하다고 조금은 서둘러 산행을 진행하고 앞으로 진행해야 할 거리가 상당하기에 정신적인 부담이 있는 상황에서 기온이 오르며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따르다 보니 예상하지 못했던 체력 저하가 발생되었던 것 같다.
약간의 바람이 불어 오는 길목 그늘에서 잠시 자리펴고 30여분 달콤한 단잠에 빠졌다 일어나니 조금은 살것 같아 다시 천천히 걸어 올라 861봉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철조망 따라 우측으로 내려가니 안부 지나 소나무 군락지와 함께 가파르게 이어지는 수도지맥 마루금이 산객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고 있다.
철조망 우측으로 살펴보니 이곳 역시 벌목지대로서 임산물과 약초들을 재배하는 장소가 아닐까 생각되는 곳이었다.
안부를 지나니 조금씩 가파라지기 시작하는 오르막 등로에는 거대한 소나무들이 빼곡히 서 있고 천천히 오르는 시간인데도 생각보다 체력적으로 회복이 되지 않아 무척 어렵게 오르는 시간이 되었다.
오랫만에 산행을 하면서 이렇게 힘들게 오른 기억이 별로 없는데 오늘은 정말 너무 어렵게 오르기에 장자동고개까지 진행하는 것을 포기하고 수도암까지만 걸어가기로 하니 마음의 부담은 많이 덜어지는 느낌이다.
그렇게 한동안 오르니 바위들이 나타나고 곧 아무 표식도 없는 1008봉의 바위를 지나 조금 더 걸어 바위 전망대에 도착을 한다.
소나무와 바위 그리고 비박바위 같은 바위들을 지나 소나무 군락지를 지나니 바위 전망대가 나타나고 그곳 정상에서 준비한 과일로 허기와 목마름을 달래며 주위 풍경을 살펴 본다.
진행 방향으로 지금부터 올라야 할 양각지맥 분기점인 시코봉이 아직도 제법 높아 보이고 그 시코봉에서 좌측으로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금오지맥 분기점인 수도산 서봉이자 신선봉이 아름답게 서 있고 그 우측으로 오늘 최종 목적지인 수도산이 아직도 멀게만 느껴진다.
오랫만에 느끼는 체력 저하에 괜시리 홀로 걱정도 해 보는 시간이지만 역시나 충분한 잠과 휴식 그리고 꾸준한 운동만이 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도 해 본 시간이다.
바위 전망대에서 쉬면서 진행 방향으로 마루금을 살펴보고 준비한 사과 하나로 허기와 목마름을 달랜 후 진행을 하니 등로는 여전히 거대한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마루금이다.
그렇게 한동안 바위와 소나무 군락지를 타고 걸어가니 등로는 조금씩 더 가파라지기 시작하고 이제는 소나무 대신 활엽수가 차지하던 마루금에 키 작은 산죽밭이 대체를 하고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등로를 타고 어렵게 오르니 고도가 넢아짐에 따라 이곳은 이제야 예쁜 철쭉꽃이 만개해 산객의 고달픈 심신을 달래주고 있다.
가다 쉬다를 반복하며 오르니 드디어 시코봉이 빤히 올려다 보이는 넓은 공터를 지나 빡쎄게 올라 붙히고 곧이어 넓은 공터에 정상석과 이정표가 서 있는 양각지맥 분기점인 시코봉 정상에 도착을 한다.
시코봉(1237봉)은 경남 거창군 웅양면과 경북 김천시 대덕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멀리서 보면 소의 코처럼 보인다고 해서 시코봉이라 부른다고 한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양각지맥으로 이어지는 분기봉이기도 하고 수도지맥은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서 능선안부를 걷는다.
조만간 다시 한번 내려가 걸어 야 할 양각지맥은 수도지맥의 시코봉(1237봉)에서 분기되어 양각산(1237봉), 흰대미산(1018봉), 보해산(911.5봉), 일산산(625.4봉)을 거쳐 가천이 황강에 합수되는 가천교 까지 이어지는 33.5 Km의 산줄기이다.
정상석에서 사진 한장 남기고 잠시 일망무제로 펼쳐진 주위 조망과 풍경을 담으며 한동안 쉬어 간다.
먼저 앞으로 올라야 할 북동쪽으로는 바우 전망대 지나 좌측으로 부드러운 능선을 타고 금오지맥 분기점인 수도산 서봉이자 신선봉이라 불려지는 봉우리가 아름답고 그 금오지맥 분기점 우측으로 오늘 산행의 최종 목적지인 수도산이 아주 가깝게 다가 와 있다.
늘 하얀 눈이 내려있던 계절에 올라 추위에 떨며 바라보고 만났던 수도산이었기에 이렇게 초록의 계절에 올라 만나는 시간이 아주 특별한 시간으로 남겨지기도 하다.
이제 이곳 수도산도 몇차례 더 올라야 할 곳이기에 좋은 추억으로 남겨지기를 바라는 시간이기도 하다.
등로 남쪽으로는 몇 번인가 내려와 오르려고 준비를 하였다가 오르지 못하였던 양각지맥의 양각산과 흰대미산 줄기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양각산(1150봉)은 경남 거창군의 웅양면과 가북면의 경계에 자리한 산으로 옛이름은 금광산으로 북쪽 수도산 신성봉을 기점으로 남진하는 줄기 4 Km지점에 있다.
정상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거창 두메가 되는 가북면 중촌리 소재 심방소가 안기고 서쪽으로 웅양댐 위에 자리한 금광마을을 품고 있다.
양각이란 두 개의 소뿔을 의미하는데 화강암 지반을 갖고 높이 솟은 두 봉우리는 동서쪽으로 벼랑을 수반하고 소뿔 형상의 암과 수 자웅 형태로 솟은 두 봉우리 중에 북봉이 정상이다.
양각산 좌봉에 서면 수십 Km에 달하는 백두대간 마루금과 주변의 산봉들이 파노라마를 이루는데 좌봉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북봉 정상에 오르면 북쪽으로는 대덕산 너머 민주지산과 황악산이 시계바늘 방향으로는 수도산이 펼쳐지고, 사야산, 두무산, 오도산, 기백산, 금원산, 남덕유산, 무룡산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산의 특징은 재나 골짜기 및 마을 이름들이 모두 소에 인연하여 빚어진 이름들이 많다는 점으로 김천시로 넘는 소머리고개인 우두령을 비롯하여 소구시를 뜻하는 구수마을, 쇠불알을 뜻하는 우랑마을 등이 있다.
산행은 거창군 웅양면을 기점으로 오르는 코스 외에도 김천시 증산면의 수도사를 기점으로 수도산과 양각산을 잇는 코스도 있지만 수도산에서 출발해 양각산을 이어 흰대미산을 지나 웅양면으로 내려오는 코스는 당일산행이 가능하다.
흰대미산(1018봉)은 경남 거창군 웅양면과 가북면의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 정상부가 흰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모양으로 인하여 흰대미산, 흰돌더미산으로 불리고 있으며 정상에는 흰덤이산(백석산)이란 이름이 적혀있다.
이곳 양각지맥은 지맥 산행도 좋지만 눈이 내린 겨울철에 심방마을을 통해 양각산과 흰대미산을 돌아 원점회귀하는 산행도 인기가 있으니 꼭 다시 한번 올라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우측의 양각지맥과 좌측의 수도지맥을 두고 그 한가운데에는 심방마을이 아름답게 내려다 보이고 그 심방마을 아래 저 멀리에는 진양기맥의 철쭉으로 유명한 합천의 황매산 줄기가 보일듯 말듯 가물거리고 좌측으로는 조만간 내려가 올라야 할 수도지맥의 우두산에서 오도산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미인봉의 암봉이 다가와 있다.
심방마을은 거창군 가북면 중촌리의 한 마을로서 심방소라 불려지는 마을인데 고려말 신방이라는 사람이 은거하던 곳이라 이름이 붙었으며 뒷산에 땔 나무가 많아 신방이라 쓰기도하고 경치가 좋아서 심방이라 쓰기도 했다.
겨울에 산님들과 함께 다시 올라 꼭 한번 이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 볼 수 있기를 바래 본다.
그렇게 한동안 시코봉 정상에서 주위 풍경과 조망을 살펴 본 후 다시 동쪽의 능선을 타고 진행을 하니 잠시 내리막 등로가 이어지고 다시 완만하게 올라 바위가 있는 전망대에 도착 해 또 다른 모습의 조망과 풍경을 살펴 본다.
남동쪽으로는 너무나 아름다운 임신한 미인이 누워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우두산에서 오도산으로 이어지는 멋진 암릉이 어서오라 손짓을 하고 있다.
저 누워있는 미인봉에 올라 바라보는 수도산의 모습은 어떤 풍경일까 궁금해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곳을 지나 조금 더 걸어 진행을 하니 다시 이정표 하나가 보이는데 살펴보니 등로 우측으로 심방 하산 갈림 삼거리이다.
다음에 꼭 한번 더 이곳을 이용해 심방으로 내려가 볼 수 있기를 바라며 좌측 수도산 방향으로 진행을 하니 산죽으로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가 펼쳐진다.
짧게 가파르게 내려가니 다시 등로는 유순해지더니 금새 오르막 등로로 이어지고 이제부터는 제법 큰 바위들을 타고 넘어야 할 암릉이 펼쳐져 있다.
그 바위 전망대로 오르니 진행 방향의 수도산 지나 단지봉과 가야산이 시원하고 그 우측인 남쪽으로는 우두산에서 오도산으로 이어지는 미인봉과 그 우측 저 멀리 진양기맥의 황매산이 가물거린다.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과 조망에 다시 한동안 쉬어가며 즐겨 보는 시간이다.
그렇게 주위 조망을 즐기며 천천히 걸어가니 이곳 등로는 여전히 암릉이 이어지고 계속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져 있다.
진행 방향인 북동쪽으로는 신선봉과 수도산 지나 우측으로 단지봉과 저 멀리 가야산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지만 오늘은 걸어 진행할 수 없기에 가슴속에 그 아름다운 풍경을 담아 보는 시간이다.
몇 년전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던 등로를 따라 수도산에서 가야산까지 환상의 상고대를 친구 삼아 걸었던 추억을 반추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다시 바위 암릉을 타고 걸어 진행을 하다 넓은 너럭바위에 걸터 앉아 준비한 김밥 한줄로 늦은 점심을 먹고 쉬어 가 본다.
한동안 쉬면서 허기를 달래니 이제서야 방전되었던 체력이 조금씩 보충이 되는듯 하고 다시 일어 나 진행 방향을 살펴보니 완만하게 이어지는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오르면 금오지맥 분기점을 지나 우측으로 수도산이 아름답게 이어지고 있다.
이제 산행 막바지라고 생각하니 그동안 지쳐있던 심신이 살아 나며 조금은 평안한 시간이 되었다.
바위 옆으로 피어 있는 아름다운 철쭉꽃을 친구 삼아 조금 더 걸어가니 이제 이곳에 펼쳐진 암릉이 끝이나며 아쉬운 마음에 다시 한번 그 암릉을 두고 주위 풍경을 바라 본다.
바위 옆 저 멀리 거창의 가조마을이 보이고 그 뒤로 숙성산과 우측으로 진양기맥 그리고 좌측으로 수도지맥 마루금이 아름답게 이어져 있어 걸어 본 추억과 앞으로 걸어야 할 등로에 대한 기대를 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출발하기 아쉬워 다시 몇 번 더 주위 풍경과 조망을 바라 본 후 능선으로 들어 가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니 등로는 다시 멋진 철쭉꽃과 산죽이 열려있고 가파르게 오르니 또 다른 바위 전망대가 나타난다.
그곳에서 우측 앞으로 수도산 장상이 빤히 올려다 보이고 조금 더 잡목 사이로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금오지맥 분기점으로 올라가는 갈림 등로가 나타난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좌측 금오지맥 분기점으로 오르니 바위 너덜구간이 보이고 그곳을 지나 오르니 쇠봉에 황강기맥과 수도산신선봉이란 글이 보인다.
금오지맥 분기봉(1313봉)은 수도산 서봉(신선봉)에서 갈라지는 마루금으로 분기봉 정상에는 부산 같이하는 산악회가 설치한 스테인리스 이정표에 금오지맥을 감천지맥으로 수도지맥을 황강기맥으로 표기를 하여 헷갈리기만 하다
늘 정확한 고증을 통해 올바른 이름을 적어 놓았기를 간절히 바래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수도지맥을 마치면 곧바로 오르고 싶은 금오지맥은 수도지맥 수도산의 1313봉(금오지맥 분기점)에서 북쪽능선으로 시작하여 삼방산과 염속산을 지나고 서쪽으로 이어지다 염속봉산을 지나 다시 북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이다.
연봉산과 벌무산 그리고 고당산을 지나면서 다시 지맥은 북동쪽으로 이어지고 백마산을 지나고 금오산성에 접어
들면서 지맥은 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백마산을 끝으로 감천으로 떨어지는 실 거리 87.93 Km의 산줄기를 말한다.
언제 다시 오를 수 있을지 기약은 없지만 마음 같아서는 수도지맥이 마무리 되면 곧바로 올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 본다.
이곳 금오지맥 분기점은 신선봉이라고도 하고 수도산 서봉이라고도 불려지는데 통일된 이름이 필요할 듯 하다.
다시 그 금오지맥 분기점을 지나 너덜길을 타고 내려가 벗어 놓은 배낭을 메고 수도산 방향으로 걸어가니 철쭉꽃 길 지나 수도산까지 200미터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만난다.
커다란 노목을 지나 조금 더 걸어 가니 등로 앞에 거대한 바위가 서 있고 그곳 바위에서 바라 본 수도산 방향이 참으로 아름답게 다가오는 시간이다.
몇개의 거대한 암봉이 있고 그 끝자락에 높게 솟아 있는 돌탑이 멋지게 보인다.
그곳을 지나 천천히 걸어가며 등로 우측을 내려다 보니 가조쪽 마을이 보이고 그 끝자락에 조금 더 선명하게 진양기맥의 황매산과 좌측의 수도지맥 상 오도산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진양기맥 역시 황매산 지나 이제 두구간만 더 진행하면 남강에 도착을 하는데 언제 내려갈 수 있을지 아쉽기만 하고 저 암봉으로 이뤄진 수도지맥의 우두산과 오도산 줄기가 산객을 부르고 있다.
저곳에 올라 이곳을 바라보며 오늘을 회상하며 추억할 수 있는 시간이 있기를 바래 본다.
조금 더 진행하다 수도산 정상부 가까이에 있는 바위에서 지나 온 금오지맥 분기점 좌측으로 흐르는 시코봉을 살펴보니 그 시코봉 넘어 저 멀리 희미한 덕유산 자락이 아름답고 그 좌측으로 진양기맥을 이루는 남덕유산과 함양의 4개산인 기백 금원 거망 황적산이 아름답게 추억을 이야기 하고 있다.
몇 년 전 한겨울 홀로 올라 4개봉을 돌고 황적산에서 다시 뒤돌아 내려 와 용추계곡으로 내려온 기억과 작년 진양기맥 산행을 하면서 올랐던 기억이 떠 오르며 잠시 그 고왔던 추억을 반추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지나온 등로를 바라보면 이토록 많은 이야기와 추억이 생기는 것을 왜 그리 다른 욕심이 많은지 조금은 사람다운 삶이길 바래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다시 천천히 걸어가니 금새 커다란 돌탑과 두개의 정상석 그리고 삼각점 안내판이 서 있는 수도산 정상에 도착을 한다.이제 세번째 도착한 수도산에서의 기억은 추위에 떨며 어둠속에 어렵게 사진 한장 남겼던 것이 전부였는데 오늘은 밝은 대낮에 홀로 올라 전세 내듯 이곳 수도산 정상을 독차지해 본다.
수도산(1317봉)은 말 뜻 그대로 수행하기 좋은 장소라서 지어진 이름인데 가야산 북서쪽 경북 김천과 경남 거창의 경계에 우뚝 솟은 수도산은 가야산을 분수령으로 한 비교적 높은 산으로 신라말기의 참선 수도장으로 유명한 수도암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일명 불령산 또는 선령산이라고도 한다.
수도암은 수도산 상부에 위치한 도량으로 옛날 도선국사가 이 도량을 보고 앞으로 무수한 수행인이 나올 것이라 하여 산과 도량 이름을 각각 수도산과 수도암이라 정했다고 한다.
백 여년 전부터는 부처님의 영험함과 이적이 많다 하여 사람들이 불영산이라고도 불렀던 이 수도산 아래 수도암은 통일신라 헌안왕 3년(859) 도선국사가 창건한 이래 여러 번의 증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경내에 있는 석불상과 석탑 그리고 지형을 상징한 석물 등도 모두 천 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매우 조용하고 한적한 곳으로서 암자까지 걸어 오르는 숲이 우거진 오솔길은 아늑한 정취를 한껏 느끼게 해준다.
수도계곡은 구비구비마다 독특한 절경이 이어지고 산기슭에는 비구니스님들이 수행정진하는 청암사 승가대학이 있어 도선국사의 선견지명이 느껴지기도 한다.
정상인 신선대에 오르면 가야산, 덕유산, 황악산, 금오산이 손에 잡힐 듯 조망이 좋으며 평균 고도 1200미터 고원에 수림과 초원 그리고 바위길이 어우러져 있다
.
이곳 수도산 정상은 다시 몇 번 더 올라야 할 곳이기에 구석 구석 그 흔적들을 가슴에 남기며 많은 시간 보낸다.
수도산 정상에서 다시 일망무제로 펼쳐진 주위 풍경과 조망을 살펴 본다.
남쪽으로는 거창의 가조마을이 내려다 보이고 그 한가운데에 숙성산이 솟아 있고 그 숙성산 우측으로는 진양기맥의 황매산 방향의 산줄기가 희미하지만 또렷하게 이 산객의 머릿속에 남겨 진다.
가조 마을 좌측으로는 조만간 올라야 할 수도지맥 마루금의 우두산과 오도산 줄기가 또한 아름다운 암봉을 드러내며 어서오라 손짓을 하고 있다.
그저 평이한 산하의 모습이라 할찌라도 오늘 이곳 수도산 정상에 서 있는 이 산객에게는 참으로 황홀하고 아름다운 산하가 되어 있다.
이제 동쪽으로는 다음 구간 올라야 할 단지봉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능선이 가슴속으로 다가온다.
구곳령과 송곡령을 지나 가파르게 오르면 단지봉이 우뚝 솟아 있고 그 단지봉 좌측으로 좌일곡령이 보인다.
몇 년 전 어둠속에 쌓여 있는 눈길을 걸어 어렵게 도착한 단지봉의 풍경을 떠 올리며 고운 추억으로 남겨지는 시간이다.
다음 구간 저곳을 오르며 또 어떤 추억을 만들 수 있을지 궁금해지기도 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등로 뒤쪽으로는 지나온 신선봉과 시코봉 지나 저 멀리 진양기맥 마루금이 아름답게 다가와 있어 다시 한번 그곳을 걸었던 후기글을 살펴 보고 싶은 시간이다.
북서쪽으로는 덕유산에서 초점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마루금이 아름답고 그곳 초점산에서 이곳 수도산으로 이어져 온 수도지맥 마루금이 또한 또 다른 추억을 만들며 당당히 이어져 있다.
북동쪽으로는 조만간 다시 걸어야 할 금오지맥의 금오산이 가물거리며 어서오라 이야기를 전한다.
이제 그곳 수도산 정상을 지나 정상 뒷쪽의 안전목책과 로프 구간을 따라 출발하니 수도암 갈림 삼거리 이정표가 서 있고 아쉽지만 오늘은 단지봉 방향의 마루금을 포기하고 좌측의 수도암 2.43 Km 방향으로 걸어 내려간다.
잠시 후 다시 작은 돌탑 하나를 만나고 암봉을 지나 계단을 타고 오르니 동쪽으로 단지봉에서 가야산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수도지맥 마루금이 펼쳐져 있다.
그곳 바위 전망대에서 다시 한동안 조망을 즐긴 후 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다시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된 등로가 보인다.
다시 바위 암릉 구간을 지나 오르니 지나 온 수도산 정상부가 벌써 저 멀리 멀어지고 다음 구간 걸어야 할 수도지맥 마루금을 가슴에 담아 본다.
암릉을 내려 와 부드러운 등로를 따르니 등로 우측으로 넓은 헬기장이 보이고 그곳을 우측에 두고 다시 정상 등로로 나와 부드러운 내리막 등로를 따른다.
예전에 어둠속에 거꾸로 오르며 걸었던 추억을 기억하며 내려가니 정상에서 1000미터 내려왔다는 이정판을 지나 부드러운 내리막 등로가 아름답게 열려 있다.
이곳에서 웅양택시에 전화를 해 수도암으로 오게하고 시간 맞춰 걸어 내려가니 현위치 표지판을 지나 벤취 2개와 거대한 소나무가 서 있는 무명봉에 도착해 물 한모금 마셔 본다.
벤취 무명봉을 지나 뚜렷한 부드러운 활엽수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다시 현위치 표지판을 지나 청암사 갈림 삼거리 이정표에 도착을 해 청암사를 생각해 본다.
청암사는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의 말사로서 원래 지금의 면사무소 자리에 있다가 6·25 때 수도산에 숨어 있던 공비들의 방화로 소실된 쌍계사의 산내 암자였는데 1914년에 강원으로 승격되고 지금은 직지사의 말사로 유서 깊은 천년 고찰이고 숙종의 비 인현왕후가 폐위된 뒤 이곳에 잠행하여 복위를 빌었던 일로 유명한데 극락전 남별당에 인현왕후가 머물렀다고 한다
청암사는 858년(헌안왕 2) 도선이 창건하였고 혜철이 머물기도 하였는데 조선 중기에 의룡율사가 중창하였고 1647년(인조 25) 화재로 소실되자 벽암이 허정을 보내 중건하였으며 1782년(정조 6) 4월 다시 불타자 환우와 대운이 20여년 후에 중건하였다.
그 뒤 1897년(고종 34)경에 폐사되어 대중이 흩어졌으나 1900년대 초에 극락전을 건립하였으며 이어서 응운이 보광전을 건립하다가 입적하자 대운이 이를 받아서 완성하고 42수의 관세음보살상을 봉안하였다.
1911년 9월에 다시 화재로 인하여 전각이 불타자 대운이 1912년 봄에 다시 당우를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20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육화전, 진영각, 정법루, 일주문, 사천왕문, 비각, 객사 등이 있고 계곡 건너 100미터 지점에는 극락전, 보광전, 요사채 등이 있는 극락암이 있다.
이 중 육화전은 과거에 강원으로 이용되었던 건물이고 정법루는 현재 종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또 대웅전 앞에 있는 높이 약 6미터의 석탑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2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층 석탑에 여래상이 양각되어 있으나 탑신이 4층이어서 균형이 맞지 않는다.
이 절 입구의 부도군에는 벽암대사의 사리탑을 비롯하여 태감과 지성 등의 공덕비가 있다.
또 일주문 안에는 사적비를 비롯하여 회당비각과 대운당의 비각이 있고 이 절의 부속 암자로는 유명한 수도도량인 수도암과 1905년에 비구니 유안이 창건한 백련암이 있다.
아직 청암사는 들려보지 못한 사찰로서 앞으로 들려 볼 기회가 있을지 아쉬운 시간이다.
청암사 갈림 삼거리에서 청암사 가는 좌측 하산 등로를 버리고 우측의 수도암 방향으로 내려가니 등로는 여전히 뚜렷하게 잘 나 있다.
조금은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따라 한동안 내려가니 이제 등로는 빛바랜 키 작은 산죽 등로로 바뀌고 한쪽에 현위치 안내판을 지나 또 다른 청암사 갈림 이정판을 만나는데 등로는 이곳에서 직진의 등로를 버리고 우측의 내리막 등로를 타고 수도암으로 진행을 한다.
좌측의 청암사 방향 등로를 버리고 우측 수도암 방향으로 내려가니 통나무 계단이 보이고 곧바로 수도암 한산교와 수도산 등산로 안내지도가 서 있는 곳에 도착을 한다.
늘 어둠속에 내려가는 등로가 아닌 오르는 등로로 통과를 했던 한산교를 보니 감회가 새롭다.
이곳에서 수도암을 살펴보니 내일 모레가 석가탄신일이라 그런지 많은 등불이 설치되어 있어 일년에 가장 큰 행사를 앞둔 수도암의 풍경을 제대로 구경을 해 본다.
그곳 한산교에서 나와 대광숙전과 그 앞에 있는 3층 석탑을 살펴 본다.
수도암은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수도리의 수도산에 있는 암자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의 말사인 청암사의 부속 암자이다.
859년(헌안왕 3)에 도선국사가 수도도량으로 창건한 사찰로서 도선은 청암사를 창건한 뒤 수도처로서 이 터를 발견하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여 7일 동안 춤을 추었다는 전설이 있는 절인데 그 뒤 이 절은 수도승들의 참선도량으로 그 이름을 떨쳤으나 6·25전쟁 때 공비 소탕작전을 펼치면서 전소된 뒤 최근 들어 크게 중창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적광전, 약광전, 선원, 관음전, 나한전, 노전 등이 있으며 근래 법전을 중건하였는데 보물 제296호로 지정된 약광전석불좌상과 보물 제297호의 3층 석탑(2기) 및 보물 제307호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등과 함께 창건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기단석과 초석이 남아 있다.
이 중 약광전의 석불좌상은 도선이 조성한 것으로 전해지며 금오산 약사암과 직지사 삼성암에 있는 약사여래와 함께 방광하였다하여 3형제 불상으로 불리는데 특히 머리 부분에 보관을 장식했던 흔적이 있어 주목되며 이는 약왕보살의 머리에 금속관을 설치했던 것으로 흔하지 않은 예이다.
석조비로자나불상은 석굴암 불상보다 80센티미터 작으며 9세기에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북석리에서 제작하였다고 하며 당시 이 불상 운반에 골몰하고 있을 때 한 노승이 나타나서 등에 업고 이 절까지 운반하였는데 절에 다 와서 칡덩굴에 걸려 넘어졌다고 한다.
당시 노승은 산신령을 불러 크게 꾸짖고 칡덩굴을 모두 없애게 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이 절 근처에는 칡덩굴이 없다고 하며 또 3층 석탑은 도선이 창건 당시에 이 절터가 마치 옥녀가 베를 짜는 모습을 갖추고 있는 지대라 하여 베틀의 기둥을 상징하는 뜻으로 두 탑을 세웠다고 한다.
산행을 위해 두번 그리고 무흘구곡을 둘러보기 위해 한번 더 올랐으니 이곳은 이제 네번째 들리는 사찰이 되었는데 앞으로 몇번을 더 올라야 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그곳 수도암을 둘러보고 내려 와 수돗가에서 시원한 식수로 목마름을 달래며 주차장으로 내려오니 생각보다 많은 차량들로 어리둥절 하는데 생각하니 2일 후면 석가탄신일이기에 많은 불자들이 들린 듯 보였다.
이곳 수도암에서 수도리로 내려가다 보면 무흘구곡이 펼쳐져 있는데 그 계곡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무흘구곡은 조선 시대 정구가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에서 부터 김천시 증산면에 이르는 계곡의 뛰어난 경관에 감흥하여 지은 시로서 몇 년전 수도가야 종주를 하면서 몇군데는 들려 구경도 하였던 곳이기에 잠시 옛추억을 더듬어 보는 시간이다.
무흘구곡은 조선 중기의 학자인 한강 정구(1543에서 1620)가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의 성주댐 아래쪽의 대가천에 자리한 제1곡 봉비암에서부터 성주댐을 거쳐 김천시 증산면 수도리의 수도암 아래쪽 계곡에 자리한 제9곡 용소폭포까지 약 35 Km 구간의 맑은 물과 기암괴석 등의 절경을 읊은 시로서 성주군에 제1곡에서 5곡이 있고 김천시 증산면에 제6곡에서 9곡이 있다.
정구가 대가천 계곡의 아름다움에 반해 중국 남송 때의 유학자인 주희의 무이구곡을 본받아 대가천을 오르내리며 경관이 뛰어난 곳을 골라 이름 짓고 7언 절구의 시를 지어 그 절경을 노래한 것으로 전해진다.
무흘구곡의 아홉 굽이는 제1곡이 봉비암, 제2곡이 한강대, 제3곡이 무학정, 제4곡이 입암, 제5곡이 사인암, 제6곡이 옥류동, 제7곡이 만월담, 제8곡이 와룡암, 제9곡이 용추이다.
조선 시대의 선비들은 산수에 은거하여 아담한 정원을 꾸미거나 산과 바위 혹은 시내의 물굽이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자신의 사상과 연결된 주위의 생활 세계를 창조하였는데 이러한 사상은 구곡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구곡은 단순한 물의 굽이침의 차원을 넘어서 주자의 도학적 이상을 배우고자 하는 상징적인 의미로 유행된 바 있는데 당시 주자는 조선 시대 선비들에게 절대적인 이상이었으며 흠모의 대상이었다.
특히 주자가 만년에 은거하며 강학하던 무이산의 절경은 아름다움을 넘어선 철학의 담론을 펼칠 수 있는 정신적인 이상향으로서의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 시대 선비들에게 산수를 경영하여 정사를 짓고 무이 산지를 탐독하며 구곡을 경영하는 것은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고 자연을 완상하는 도학적 이상향의 해법으로 이해되었다.
심지어 서실에 구곡도를 걸어 놓고 구곡시와 구곡가를 차운하여 읊는 것은 무이산에 실제 가보지 못한 한탄과 동경의 실천적 방도로써 널리 유행하였다.
또한 구곡의 경영에 있어서도 유교와 불교 및 도교 등의 종교적 교리나 사상을 반영하여 관념적 실체로 명명하였는데 각 곡을 도학적 이상을 실현시키는 수신의 과정으로 생각하였으며 얻으면 세제민하겠다는 그 당시 사대부들의 정치와 사회적인 맥락으로도 이해되었다.
이처럼 정구의 무흘구곡은 조선 시대 선비들의 구곡 경영과 그를 통한 철학적 및 종교적 사상 및 실천의 일단을 엿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적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수도암 주차장에서 배낭을 정리하며 주위 풍경을 사진에 담고 쉬고 있으니 웅양의 콜 택시가 도착을 하고 그 택시를 이용해 산행 들머리인 소사고개로 뒤돌아 와 집으로 전화를 하니 아들이 휴가를 나와 있고 옆지기가 다음 주 다시 내려가 함께 시간을 보내자는 제안에 따라 내일 다시 한구간 더 진행하기를 포기하고 집으로 복귀해 가족과 즐거운 연휴를 보낸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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