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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맥산행(완료)/성주지맥(금북·완)

성주지맥 마지막 제2구간 이어니재에서 부사방조제까지 산행후기

by 칠갑산 사랑 2015.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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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충청남도 보령시의 성주지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2015년 03월 28일(토) 당일 산행

산행날씨 : 약간의 박무가 있었으며 따뜻한 봄처럼 기온이 올라 약간은 더위를 느꼈던 날씨

산행온도 영상 06도에서 영상 18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홀로

산행코스 : 이어니재(21번 2차선 지방도로, 참전경찰공적비와 경찰 충혼탑)-철계단(만세보령 지킴터 안내도와 보령 국민보도연맹 사건 희생지 안내판)-철조망-무명묘지3기-무명묘지1기-무명묘지1기-소나무 오르막 군락지-223봉-묘지지대-묘지2기-벌목지대-잡목지대-바위등로-지지대-시멘트 포장임도-급경사 절개지-소나무와 잡목지대-묘지지대-비포장 임도-소나무 군락지-여산송공묘비-소나무와 잡목지대-낡은 교통호-274봉 삼각점-무명묘지1기-바위 잡목지대-공터와 벌목지대-낙엽등로-소나무 군락지-162봉(은사시나무 식재지)-비포장 임도 안부-소나무 군락지-간벌지대-소나무 군락지-간벌지대-낙엽 안부-바위지대-248봉-잡목지대-무명묘지3기-잡목지대-안부-198봉 잡목봉-바위 등로-조망처-바위등로-173봉 삼각점-잣나무 군락지-길주의 구간-묘지2기-묘지3기-묘지지대-비포장 임도-606번 2차선 지방도로-진등석재-진등삼거리 도로 표지판-서해안고속도로 통과-백제농산영농조합법인-관당초등학교-기현삼거리 도로 표지판-607번 2차선 지방도로로 약간 알바-죽청 버스정류장-천용선사와 보령예석 이정판-능선진입-무송윤공묘지-묘지3기-74봉-묘지지대-비포장 임도-1차선 포장도로-이정표(무창포 해수욕장과 태봉산 등산로 방향표시)-시멘트 포장임도-비포장 임도-이정표(간드리큰길 0.3 Km, 태봉정등산로 0.4 Km)-이정표(간드리큰길 0.7 Km, 무창포해수욕장 1.7 Km)-태봉정 팔각정자(100봉)와 운동시설-소나무 군락지-묘지지대-비포장 임도-묘지지대-녹색 철조망-느티나무 식재지와 간벌지대-묘지지대-독산사거리 도로 표지판-607번 춘장대해수욕장 방향으로 진행-송양윤세명자택 입구 이정석-소황1길과 독산로 갈림 도로판-소황1길-소황2길-시멘트 포장임도-폐허된 민가지대-비포장 임도-공군제20전투비행단 철조망-갈림삼거리-갈림삼거리-광주안공묘지-능선진입-산죽과 대나무 밭-원형 철조망-잡목과 잡풀지대-잡목지대-대나무지대-폐허된 군용차지대-소나무 군락지-불난지역-폐허된 전투기-잡목지대-폐허된 통신탑-지독한 잡목지대-녹슨 철조망지대-바위지대-엄나무지대-통달산(183봉)-조망처-불난지역 벌목지대-불난 벌목지대-강릉최공묘지-묘지3기-묘지지대-비포장 임도-607번 2차선 포장도로-소황리 장안마을 이정석-장안마을 버스정류장-장안해수욕장 도로표지판-바닷가집 매점-소황사구 생태학습장 입구-부사방조제 표지석-산행종료

산행거리 : 약 14.60 Km (스마트 폰의 GPX 기준)

산행시간 : 많은 사진 찍으며 여유있게 그러나 꾸준한 속도로 04시간 33 (11시 24부터 15시 58분까지)

교통편 : 애마와 택시 이용

            부사방조제에서 이어니재까지 웅천택시 (041-931-3801, 011-458-3800)로 18,500.-원

성주지맥이란 ???

성주지맥은 금북정맥의 백월산(560미터)에서 남쪽으로 약 3 Km 떨어진  금북기맥의 성태산(633미터)에서 남서쪽으로 가지를 쳐 보령시 웅천 앞바다 부사방조제 앞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로 웅천천의 좌측 분수령이 되는 도상거리 약33.4 Km되는 산줄기를 성주지맥이라 칭한다.

이 산줄기를 따라가면 성태산(633미터), 문봉산(633미터), 성주산(677미터. 장군봉), 또 다른 성주산(515미터. 왕자봉), 옥마산(596.9미터), 봉화산(323미터), 잔미산(416.8미터), 통달산(184미터)을 만날 수 있다.

 

 

 

고향에서 죽마고우들과의 만남에 앞서 남아 있던 성주지맥을 마무리하며 서해바다에서 또 하나의 맥 산행에 대한 고운 추억을 남겼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오늘 밤 고향땅에서 오랫만에 초등학교 동창들과의 만남이 계획되어 있기에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다 조금 일찍 보령으로 내려가 작년 5월에 진행하다 중단된 성주지맥 산행을 마무리하고 고향으로 가기로 한다.

오늘 이곳 성주지맥 산행을 마무리한 후 저녁에는 죽마고우들과의 모임이 있기에 이슬이와의 한판 김 승부가 진행되겠지만 그것 역시 일삶의 중요한 일정 중 하나이기에 오늘밤 만큼은 그저 즐겨보는 시간이길 바래 본다.

토요일 저녁은 특히 시골 고향땅에서 시인으로 활약하고 있는 친구집에서 옻닭으로 저녁이 예정되어 있어 더욱 기대가 되는 시간이고 내일 일요일엔 다시 몇몇 친구들과 칠갑산 등산이 예정되어 있기에 바쁜 주말과 휴일이 될 것이다.

다만 토요일 밤과 일요일 오전에 약간의 비 예보가 있어 그것이 변수가 되지 않을까 걱정도 해 보는 시간이다. 

그래도 몇 십년 만에 만나는 친구를 포함해 20여명의 죽마고우들과 다시 조우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즐겁게 출발해 경찰충혼탑이 있고 근래들어 도로 포장공사가 한창 진행중인 이어니재에 도착해 산행 준비 후 주위 풍경을 담아보는 시간은 어딘지 모르게 낯설어 보이기만 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고향땅에 내려오기도 쉽지 않다 보니 이 성주지맥 산행을 마무리하기까지도 근 1년여가 걸려 다시 찾게되는 힘든 시간이 되었다.

 

 

봄도 없이 초여름 날씨처럼 기온이 오르며 벌써 산행에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으니 앞으로의 산행이 조금은 걱정이 되는 시간이다.

생각보다 긴 거리에 잡목 구간도 있어 제법 걸릴 것이라 예상되었던 산행시간이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어 성주지맥 마지막 장소인 부사방조제 앞에 서니 채 오후 4시도 되지 않았다.

보령과 서천을 이어주는 부사방조제에서 또 하나의 산줄기를 걸으며 완주의 기쁨을 맛 보지만 시원함보다는 남아있는 지맥 마루금에서 잡목과의 사투를 생각하면 웃을수만은 없는 시간이 되기도 하였다.

그래도 이렇게 하나의 산행을 무탈하게 마무리하고 정리하는 시간은 몸과 마음 모두 새털처럼 가볍게 또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 갈 수 있는 희망의 시간이다.

 

 

지난 해 5월에 내려 와 첫구간을 걸었으니 정확히 11개월이 다 되어 다시 찾는 보령시 남포면 옥서리 이어니재에서 산행 준비를 하는 시간이 낯설게 다가 와 새로운 곳처럼 다가온다.

찾지 못했던 지난 시간동안 이곳에도 많은 변화의 바람이 불어 도로를 확장하기 위한 공사가 한창이고 공사가 끝나고 나면 이곳 모습이 또 어떻게 변해 있을지 궁금한 시간이기도 하다.

남포면 옥서리는 마한때는 만로국에 속한 지역이였다가 백제때는 사포현에 속했으며 신라때는 소포현에 속했었고 고려때는 남포현에 속했으며 조선때에도 남포현에 속했었다.

조선말엽엔 남포군 군내면의 지역인데 1914年 행정구역 개혁때 발산 사현리, 남리, 동리, 서리의 각일부를 병합하여 옥마산과 서리의 이름을 따서 옥서리와 서리의 이름을 따서 옥서리라 하여 보령군 남포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이 통합되어 보령시 남포면이 되었다.

이곳 이어니재는 보령시 남포면과 웅천면을 이어주는 21번 2차선 지방도로가 지나는 경계고개를 말하며 이 고개에는 경찰충혼비와 합장묘가 있는데 6.25당시 철도경찰과 괴뢰군이 조우하여 격전을 벌이다 산화한 영혼들을 모시고 있어 지나다니는 객손들이 잠시 쉬어가는 곳인듯 보인다.

 

 

 

산행 준비랄 것도 없지만 그래도 간단히 먹을 간식과 음료수 그리고 사진기를 챙겨 배낭에 넣고 주위 풍경을 사진에 담은 후 출발하려는데 21번 도로 건너 북동쪽으로 지난해 5월의 무더위 속에 홀로 어렵게 올랐던 성주지맥 첫 구간의 옥마산과 봉화산 그리고 잔미산 줄기가 너무나 아름답게 다가 와 잠시 옛날 생객에 잠겨보는 시간이기도하다.

늘 새롭게 올라야 할 산줄기는 멀고도 험해 보이지만 아무리 높고 험했던 산줄기라도 지난 구간을 뒤돌아 보는 마음은 그저 고운 추억 하나로 웃으며 바라볼 수 있으니 그것이 인생이고 삶은 아닐까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

 

 

이제 만반의 준비를 하였으니 경찰충혼탑이 있는 장소를 우측에 두고 21번 지방도로 우측에 놓여있는 긴 철계단을 타고 성주지맥 마지막 완주를 위해 출발을 해 보는 시간이다.

이곳 경찰합동묘역 만세보령지킴터는 광복 이후 6·25동란 등 반공 전선에서 희생한 호국 영령들을 추모하고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자유수호 희생자 위령장소로서 보령시 남포면 옥서리 이어니재 도로변에 있는 경찰 합동 묘역이다.

계단을 오르다 계단 좌측에 보이는 안내판을 읽어 보니 보령 국민보도연맹 사건 희생자들이 희생된 장소로서 함부로 훼손하지 말라는 안내문인데 이념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고 죽여야 했는지 안타깝고 고통스런 시간으로 남아 있는 역사이다.

 

 

그 긴 철계단을 타고 오르니 갑자기 등로 앞에 튼튼한 철조망이 가로막는데 살펴보니 좌측 등로를 버리고 철조망을 좌측에 두고 웇ㄱ 등로를 따른다.

철조망 내부에는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 살펴보지만 특별히 보이는 것이 없기에 더욱 궁금증만 자아내는 철조망으로서 그 철조망을 따라 짧게 진행하니 철조망은 다시 좌측으로 사라지고 무명 묘지 3기가 등로 위에 있어 그 묘지 사이를 타고 완만하게 오르며 소나무 군락지로 들어간다.

 

 

다시 두어기의 묘지를 지나 오르니 간벌된 멋진 소나무 군락지가 나타나는데 간간히 간벌이 되어 있어 이제 그 소나무 밑에서는 키 작은 관목들이 새롭게 자라고 있는 풍경도 눈에 들어 온다.

잠시 더 오르니 등로는 점점 더 된비알 오르막 등로로 이어지고 벌써 등줄기와 이마에선 굵은 땀방울이 흘러 내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한동안 힘들게 걸어 오르니 정상 직전 좌측으로 준.희님이 걸어 놓은 223봉 이정판이 반겨주고 그곳에서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심호흡 한번 크게 하고 좌측으로 꺽어 완만하게 내려가 본다.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등로에는 벌목된 소나무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어 진행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다.

이리저리 피해가며 조심스럽게 내려가니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다시 평이한 오르막 등로로 이어지더니 등로 좌측에 몇기의 묘지들이 보이는 곳에 도착해 소나무 가지 위로 화락산 줄기를 올려다 본다.

다시 멋진소나무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내려가니 무명 묘지 2기 사이를 지나 오르막으로 이어지고 무명봉에 도착을 하니 생각지도 못한 분홍빛 진달래가 반겨주고 있어 완연한 봄임을 다시 한번 느껴보는 시간이다.

 

 

진달래꽃을 사진에 담고 조금 더 진행하니 등로 좌측 앞으로 시멘트 임도를 지나 솟아있는 274봉이 가깝게 다가와 있는데 생각보다 고도감이 제법 있어 보인다.

잠시 낙엽진 활엽수와 관목지대를 지나 평이한 능선 등로를 따르니 등로 주위에는 노란 생각꽃들이 만개하기 시작하며 산객의 발목을 잡고 있어 다가가 눈을 맞추며 사진 몇장 남겨 본다.

운이 좋다면 산행을 하면서 예쁜 야생화라도 몇송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예상을 해 보는 시간이다.

 

 

평이한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햇살이 따갑게 다가오고 땀방울 닦으며 전진해 잡목이 사라진 등로 옆 조망처에서 잠시 발걸음 멈추고 등로 좌측의 274봉을 살펴 본다.

그 274봉 우측으로는 저 멀리 보령요트경기장쪽 서해바다가 빤히 내려다 보이고 274봉 좌측 저 멀리에는 웅천천 지나 운봉산과 동달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들이 보이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금북기맥 또는 호서정맥이라 불려지는 산줄기도 찾아 보지만 벌써 기온이 오르며 박무현상으로 인해 정확한 산줄기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렇게 잠시 더 진행하다 다시 등로 좌측을 살펴보니 274봉 좌측 산자락 아래에 산을 파먹기 시작하는 채석장이 조그만하게 내려다 보이는데 현재의 크기보다 더 커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래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곳을 지나니 등로에 제법 큰 바위들이 산재해 있고 그 바위 등로를 지나자마자 많은 묘지들이 줄지어 있는 작은 공동묘지지대를 따라 내려가 본다.

잠시 평이한 등로를 따르니 잡목 구간이 나타나고 작은 골짜기처럼 보이는 고랑을 따라 내려가니 1차선 시멘트 포장도로가 눈에 들어 온다.

이 시멘트 임도는 우측의 신흥리와 좌측의 두룡리를 이어주는 고갯마루인데 고갯마루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신흥리는 백제때에 사포현에 속했었다가 신라때는 소포현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남포진 남포현에 속했었다.

조선때에도 남포현에 속했으며 조선말엽엔 남포군 신안면의 지역인데 1914年 행정구역 개혁때 매천리, 봉촌, 상신리, 하신리, 대달리 일부를 병합하여 신흥리라 해서 보령군 남포면에 편입되었다.

새로 이룩된 마을이 많은 지역임으로 새말, 신흥, 신촌이라고 부르던 지역이다.

시멘트 임도 좌측에는 웅천읍 두룡리가 있는데 백때는 사포현에 속했었다가 신라때는 소포현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남포현에 속했었다.

조선 때에도 남포현에 속했으며 조선말엽남포군 신안면구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두명리용와리를 병합하여 두룡리라 해서 보령군 웅천면편입되었다.

두룡리쪽으로는 두룡저수지가 있다는데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고 우측으로는 서해안고속도로가 뚫렸지만 고속도로 역시 보이지 않는다.

 

 

시멘트 임도로 나가니 도로 주위에는 소나무를 간벌해 목재로 쌓아 둔 나무더미가 보이고 잠시 후 큰 트럭 한대가 올라 오는데 이 산객이 등로를 사진에 담으니 이상하고 신기한 듯 무엇을 찍느냐며 물어 와 그냥 산행을 하면서 풍경을 찍는다고 하니 이상한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지나간다.

시멘트 임도를 가로질러 짧은 급경사를 치고 오르니 잠시 소나무와 잡목 구간이 나타나더니 등로 우측으로 묘지지대를 지나 금새 넓은 비포장 임도로 이어지고 한동안 편안하게 그 비포장 임도를 타고 걸어 진행한다.

 

 

멋진 소나무들이 도열해 있는 넓은 비포장 임도를 따라 걸어 가니 두어번의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고 그곳 삼거리에서는 직진의 오르막 등로 방향으로 진행을 한다.

그렇게 한동안 완만하게 오르니 비포장 임도가 끝나는 지점 좌측으로 몇기의 묘지들이 보이고 그 묘지 우측 능선 위로 오르다 뒤돌아 보니 저 멀리 북동쪽 방향으로 지난해 걸어 진행했던 성주지맥 첫구간의 옥마산과 봉화산 그리고 잔미산 줄기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물한모금 마시며 그 아름다운 조망과 풍경을 음미해 보는 시간이다.

 

 

그렇게 조망을 즐긴 후 능선 위로 오르니 소나무와 잡목이 우거진 희미한 등로가 나타나고 어렵게 뚫고 오르니 갑자기 군사용 교통호 같은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그곳을 지나 오르니 지도상에는 275.1봉이고 이곳 삼각점에는 274미터라 적혀있는 봉우리에 도착해 사진 몇장 남겨 본다.

삼각점 번호는 보령 452번 이라는데 낡아 전혀 보이지 않아 확인은 불가능 하다.

잡목이 우거져 주위 조망도 없기에 삼각점만 사진에 남기고 잡목이 잔재해 있는 내리막 등로를 따라 진행을 이어 가 본다.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소나무들이 반기고 금새 묘지 한기를 지나는데 그 묘지 앞에는 멋진 소나무가 한그루가 넘어져 어려운 삶을 이어가는 풍경도 눈에 들어 온다.

그 묘지를 지나니 낙엽진 활엽수 등로가 나타나더니 곧이어 바위가 박혀있는 능선 등로로 바뀌고 있다.

그 등로를 따라 걸어 진행하니 등로 좌측으로 넓은 공터가 나타나는데 최근에 벌목 후 만들어진 공터같은데 왜 이런 공터를 만들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그 공터에서 등로 좌측을 보니 웅천읍 두룡리의 두루니 마을이 보인다.

두루니 마을은 쪽으로 산이 있는데 이 산을 백산 또는 잔비산이라고 부르고 잣나무가 많은 산이라 백산, 잔비산이라고 부르는 산이다.그 두루니 마을 지나 저 멀리에는 운봉산과 동달산 지나 호서정맥 또는 금북기맥 산줄기가 보이는듯 다가와 있다.

 

 

그 공터에서 등로 좌측을 조망한 후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지나온 274봉이 빼꼼히 올려다 보여 살펴보고 그 공터를 출발해 본다.

공터를 출발하자마자 지맥 등로는 좌측으로 흘러 내려가는 비포장 임도를 버리고 우측 잡목사이로 나 있는 희미한 등로를 따라 진행해야 하는 길주의 구간이다.

잠시 내려가니 낙엽진 등로로 변하고 안부를 지나 또 다시 멋진 소나무와 관목지대를 지나니 사시나무 조림지라 생각되는 곳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162봉이라 생각되는 봉우리에 도착을 하지만 잡목이 우거져 있고 간벌된 나뭇가지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어 조망 하나 없는 아쉬움이 있다.

 

 

162봉을 지나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진행하니 앞으로 올라야 할 246봉의 봉우리 두개가 잡목사이로 올려다 보인다.

이제 등로 우측으로는 월전초등학교와 마을들 그리고 제민저수지인 제민제가 내려다 보인다.

그렇게 조망이 없음을 아쉬워하며 걸어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는 여전히 은사시나무 군락지가 이어져 있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 내려가니 등로가 우측으로 길게 꺽여 내려가더니 비포장 임도와 만나 내려서게 된다.

양기리와 두룡리를 이어주는 고갯마루인데 이름이 없는 무명 고갯마루처럼 보이는 고개이다.

 

 

비포장 임도를 통과해 반대쪽 능선으로 오르니 다시 멋진 소나무 군락지가 보이고 약간의 잡목을 헤치고 진행을 해 본다.

그렇게 한동안 잡목을 헤치고 작은 생채기를 내며 완만하게 오르니 간벌된 구간이 나타나는데 간벌된 나무들이 등로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어 진행에 큰 방해를 받는다.

다시 멋진 소나무 군락지를 지나 큰 활엽수 한그루가 서 있는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오르니 큰 바위들이 등로에 흩어져 있는 풍경도 눈에 들어 온다.

 

 

그 바위 구간을 지나니 다시 소나무와 잡목이 혼재된 등로가 나타나고 오래된 죽은 고사목들이 등로를 가로막아 진행에 어려움을 겪는다.

다시 평이한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또 다른 바위들이 산재해 있고 잡목들이 우거진 등로와 만나 오르니 지도상 246봉이고 실제 정상에는 준.희님이 달아 놓은 248봉 이정판이 보이는 봉우리에 도착을 하지만 조망이 없어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생각보다 잡목의 저항이 있어 진행에 어려움이 있는 구간으로 기억되는 등로이다.

 

 

248봉을 지나서도 약간의 잡목들의 저항이 이어지지만 진행에 큰 어려움은 없다.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를 버리고 우측의 희미한 등로로 들어가 진행을 하니 이제 등로 우측으로 보령요트경기장과 그 우측 위쪽으로 죽도섬과 관광단지도 내려다 보인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두어번 모시고 와 들려 고운 추억을 남겼던 죽도섬이기에 많은 그리움이 떠 오르는 시간이기도 하다.

 

 

잡목사이로 죽도와 서해바다를 바라보며 걸어 진행을 하니 무명봉을 좌측에 두고 우측 사면 등로로 우회하며 낙엽 등로를 따라 내려가 보는데 이곳에도 역시 잡목으로 조망이 없다.

다시 잡목이 우거진 등로를 따라 올랐다 내렸다를 반복하니 무명묘지 3기를 통과해 한동안 다시 잡목 구간을 지난다.

그렇게 진행하니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따라 오르니 바위 등로로 이어지더니 이제 등로 우측으로 서해안고속도로와 서해바다가 한눈에 들어 오는 조망이 터지기 시작해 산행의 즐거움을 배가 시켜 주고 있다.

 

 

남쪽 저 멀리 무창포해수욕장의 건물들과 바닷가 그리고 남포방조제와 죽도가 내려다 보이는 풍경이 한폭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그렇게 조망을 즐기며 진행을 하니 여전히 등로 위에는 많은 큰 바위들이 차지하고 있는 198봉을 넘어 조심하며 걸어 진행해 본다.

그렇게 바위들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이제 등로 좌측으로 두룡리와 구룡리 및 대천리의 웅천농공단지와 그 뒤 저 멀리 운봉산과 동달산이 박무속에 멋지게 조망된다.

 

 

다시 등로 우측으로도 서해바다가 내려다 보이니 약간의 잡목과 바위들이 산재해 있다해도 지금보다는 헐씬 더 산행하는 즐거움이 느껴지는 시간이다.

다시 나타나는 바위들을 우회하며 걸어가니 다시 약간의 잡목과 낙엽들이 혼재한 등로를 지나 간간히 바위들이 보이는 평이한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진행나니 아주 부드러운 낙엽진 활엽수 등로가 나타나는데 그 활엽수 저 멀리에는 앞으로 올라야 할 나즈막한 성주지맥 봉우리들이 올려다 보인다.

 

 

다시 간벌된 낙엽진 활엽수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내려가지만 간벌된 나뭇가지들이 등로를 막아 진행에 약간의 어려움을 느낀다.

등로 좌측으로는 여전히 아름다운 풍경들이 조망되고 그렇게 걸어가니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따르는데 여전히 간벌된 나뭇가지들이 등로를 막고 있어 걷기가 쉽지 않다.

그곳을 지나 오르니 뚜렷한 등로가 이어지더니 정상부로 갈수록 잡목들이 우거져 있는데 오르자 마자 해발고도 173미터의 서천 404란 삼각점이 박혀있다.

그 삼각점 옆 나뭇가지에는 여영님이 달아 놓은 해발고도 173.6미터란 이정판이 달려있다.

 

 

173봉에서도 역시 조망이 없기에 곧바로 좌측 내리막 등로를 따라 내려가 본다.

이곳 173미터의 삼각봉에서는 길주의 지점인데 우측 직진 방향으로 등로가 나 있어 그쪽으로 갈 수도 있지만 지맥 등로는 좌측 내리막 등로로를 타고 진행해야 한다.

잠시 멋진 잣나무 군락지를 지나 평이한 뚜렷한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갑자기 등로 우측 희미한 길 위에 선답자들의 많은 띠지들이 달려있고 살펴보니 이제 뚜렷한 내리막 등로를 좌측으로 흘려보내고 우측 희미한 잡목 등로를 따라 걸어가야 하는 지점에 도착을 한다.

 

 

잡목의 저항이 있지만 진행하기에 큰 어려움이 없는 희미한 등로를 따라 진행을 하니 다시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 2기의 묘지를 지난다.

그 묘지들을 지나니 다시 비석이 서 있는 묘지 한기를 통과한다.

다시 간벌된 지역의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잘 조성된 묘지 한기를 통과하고 짧은 뚜렷한 등로를 따라 내려가면 많은 묘지들이 잠들어 있는 길게 이어진 묘지지대를 통과하게 된다.

 

 

그 묘지지대를 따라 잠시 걸어 내려가니 뚜렷한 임도를 만나 잠시 후 민가 건물들이 보이고 차량들이 통행하는 소음이 들리기 시작한다.

도로 좌측으로는 진등식당이 내려다 보이고 바로 눈 앞에는 민가 건물 한채가 보이더니 금새 606번 2차선 지방도로를 만나 그 도로를 따라 우측으로 걸어가 본다.

잠시 걸어가니 도로 우측에 진등석재 이정석이 보이고 바로 눈 앞에는 진등삼거리 도로 표지판이 서 있고 그 표지판 바로 뒤에는 서해안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이곳 진등삼거리는 관당리에 속한 지명으로 백제때는 사포현에 속했었다가 신라때는 소포현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남포현에 속했었다.

조선 때에도 남포현에 속했으며 선말엽남포군 웅천면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관동, 당 현리, 간입리를 병합하여 관동당현의 이름을 따서 관당리라 하여 보령군 웅천편입되었다.

1995년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해 보령시가 된후 1995년3월 2일 보령시 조례 제138호로 웅천면에서 웅천읍으로 승격되었다.

이제 이 도로를 따라 잠시 더 걸어가야 한다.

 

 

서해안고속도로를 건너 계속 606번 2차선 지방도로를 따라 걸어 가니 실질적인 진등삼거리가 나타나고 우측으로 607번 2차선 지방도로를 타고 대천해수욕장과 남포방조제 가는 방향 푯가 되어 있다.

그 진등삼거리를 지나 계속 도로 따라 걸어가니 우측으로 백제농산영농조합법인에서 운영하는 잡곡종합유통처리센터 건물이 보이고 계속 더 걸어가니 도로 좌측으로 관당초등학교 건물과 입간판도 보인다.

다시 나즈막한 둔덕을 넘어 계속 606번 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도로 좌측으로 607번 지방도로를 따라 서면과 춘장대해수욕장으로 갈 수 있는 기현삼거리 도로표지판이 보인다.

 

 

그 기현삼거리 도로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직진의 무창포해수욕장 방향으로 걸어가 언덕에서 좌측 능선으로 올라가며 지맥 산행을 이어가야 하는데 이곳에서 잘못 판단해 좌측 춘장대해수욕장 방향의 607번 2차선 지방도로를 따라 걸어 본다.

죽청1리 이정석이 보이고 죽청 버스정류장도 서 있는 기현삼거리에서 좌측 춘장대해수욕장 방향으로 607번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 내려가니 도로 좌측으로 논들이 보이고 그 뒤 저 멀리 천용선사와 보령예석 그리고 서해안고속도로와 방금 전 지나온 173봉이 올려다 보인다.

그곳에서 잠시 더 내려가다 지도를 살펴보니 이 도로를 따라 걸어가도 정상 등로를 만날 수 있겠지만 원지맥 등로는 우측 능선 방향으로 이어져 있어 그 능선 방향인 우측으로 넓은 비포장 임도를 따라 걸어 올라가 본다.

 

 

능선으로 올라 우측 능선을 타고 완만하게 걸어 올라가니 무송윤공 묘지를 지나 무명묘지 3기를 통과한다.

그곳에서 잠시 능선 등로 우측을 살펴보니 밭을 지나 저 멀리 서해안고속도로와 173봉이 올려다 보인다.

그곳을 지나 조금 더 오르니 잡목이 자라고 있던 70봉에 도착을 하고 그 앞에서 진행방향을 살펴보니 묘지지대를 지나 저 앞으로 100봉이 올려다 보인다.

잠시 그 공동묘지 같은 70봉 정상에서 진행방향을 살펴본 후 묘지 좌측의 비포장 임도를 따라 천천히 내려가며 진행을 해 본다.

 

 

이제 등로 우측으로는 무창포해수욕장과 그곳의 캠핑장 건물들이 내려다 보이기 시작하고 그 앞으로 펼쳐진 파란 서해바다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등로 좌측으로 멋진 소나무들을 구경하며 넓은 비포장 임도를 따라 내려가니 1차선 포장도로와 만나고 살펴보니 이곳 역시 갈림 사거리인데 지도상에도 아무 표식이 없는 무명 고갯마루이다.

이 고개는 우측의 웅천읍 관당리와 좌측의 죽청리를 이어주는 고갯마루로서 도로를 건너자 마자 좌측에 이정표가 보이는데 진행 방향의 직진으로는 태정봉 등산로 표시가 그리고 우측 포장도로 방향으로는 무창포해수욕장 방향 표시가 되어 있다.

 

 

그곳 1차선 포장도로를 건너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오르니 금새 넓은 비포장임도로 바뀌고 그 비포장 임도를 따라 걸어 들어가니 이제 완연한 봄이 오는 풍경을 볼 수 있다.

잠시 더 걸어 오르니 지나온 방향으로 간드리큰길에서 300미터 왔고 가야 할 방향으로 등산로 태봉정까지 400미터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보인다.

간드리큰길은 보령시 웅천읍 관당리에 있는 간드리마을에서 온 지명으로 갓굴 서남쪽에 자리한 마을을 간드리, 간입리라고 부른다.

옛날 몸에 병이 있거나 벼슬길에서 그만둔 사람들이 이 마을에 들어오면 모두 편안하게 사는 마을이라 간드리 및 간입리라 부른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그 마을이름에서 도로 이름도 가져온 듯 하다.

 

 

다시 넓은 비포장 임도를 따라 태봉정으로 걸어 오르니 임도 좌우측으로는 초록잎이 피어나기 시작하고 봄이 오고 있음을 느끼는 시간이다.

다시 멋진 소나무와 새로 식재된 나무가 보이는 임도를 따라 걸어 진행하니 저 멀리 작은 봉우리가 올려다 보이고 그 뒷편으로 팔각정자가 보인다.

그곳으로 조금은 빠르게 올라가니 그 팔각정자 직전에 또 다른 이정표가 보이는데 간드리큰길에서 700미터 왔고 무창포해수욕장까지 1.7 Km 거리라는 이정표이다.

해발고도 100미터인 태봉정 주위는 넓은 공터이고 그 공터 가장자리에는 운동시설이 보이고 벤취들도 보인다.

잠시 그 태봉정 정상으로 오르니 서쪽으로 무창포해수욕장과 서해바다가 내려다 보인다.

 

 

잠시 그 태봉정 정상에서 주위를 둘러보다 올라온 마루금에서 직진 방향인 남서쪽이 정상 등로라 생각했는데 살펴보니 정상 등로는 올라 온 등로에서 좌측 방향으로 크게 꺽어 내려가는 등로로 이어지고 있어 재빨리 기 태정봉을 내려와 진행 방향의 등로를 따라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잠시 내려가니 소나무 군락지가 나타나고 더욱 뚜렷한 임도 같은 등로와 이어진다.

그 등로를 따라 조금 더 내려가니 또 다른 작은 공동묘지 같은 묘지지대가 나타나고 그 묘지를 지나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묘지지대를 지나 계속 이어지는 넓은 임도를 따라 걸어가니 소나무 군락지가 계속 이어지고 등로 우측으로 묘지지대가 다시 보인다.

한동안 그 넓은 임도를 따라 소나무 군락지 사이로 걸어가니 또 다시 비포장 임도 좌측으로 거대한 묘지지대가 나타나고 그 묘지지대 건너 논을 지나 드문드문 보이는 민가를 지나 웅천쪽 나즈막한 비산비야가 성주지맥을 따라 함께 달려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 온다.

저 들판에 펼쳐진 민가들이 내려다 보이는 죽청리는 백제때는 사포현에 속했었고 신라때는 소포현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남포현에 속했었다.

조선때는 남포현에 속해서 조선말엽남포군 웅천면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대청리, 소청리, 장기리, 봉오리주교리, 화망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죽청리라 해서 보령군 천면편입되었다.

95년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해 보령시가 된후 95년3월 2일 보령시 조례 제138호로 웅천면에서 웅천읍으로 승격되었다.

옛날엔 청동이라고 부르던 지역으로 오열사의 한분인 옥제 백관형 선생출생지이기도 하다.

 

 

그렇게 비포장 임도 좌우측을 조망하며 여유있게 걸어가니 다시 임도 우측으로 새로 조성중인 묘지지대가 나타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많은 묘지 주인들로 이곳 역시 가득찰 것이다.

잠시 더 걸어가니 임도 좌측에 잘 관리되고 있는 4기의 묘지를 지나 나무가 식재된 밭이 끝나는 지점에 두개의 콘테이너 박스가 눈에 들어 오는데 살펴보니 아마도 묘지지대를 조성하며 사용하였던 가건물이 아니었을까 생각되는 콘테이너 박스이다.

 

 

그 두개의 콘테이너 박스를 지나니 임도 좌측으로 녹색 철조망이 쳐져 있고 그 안쪽에는 식재된 느티나무밭이 나타난다.

녹색 철조밍을 지나니 그곳에는 다시 원형 철조망으로 바뀌어 있고 또 다시 수많은 묘지들이 펼쳐져 있다.

607번 지방도로 건너 저 멀리 산자락에 거대한 건물들과 공장 건물같은 원통형 건물들도 보이는데 무슨 용도인지는 확인이 안된다.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임도 좌측으로 멋진 조망이 펼쳐져 있고 그곳 묘지 위로 가 살펴보니 평화로운 죽청리 마을이 바로 가깝게 내려다 보인다.

 

 

그 묘지지대를 지나 걸어가니 다시 임도 좌측으로는 밭이 펼쳐지고 그 아래로 죽청리 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나즈막한 언덕을 넘으니 임도 우측으로 또 다시 묘지지대가 보이고 그곳 묘지를 지나니 독산2리 이정석이 서 있고 독산(홀뫼)해수욕장과 무창포해수욕장을 갈 수 있는 도로 표지판 그리고 독산 버스정류장이 있는 독산사거리에 도착을 한다.

아마 기현삼거리에서 607번 2차선 지방도로를 따라 걸어 내려왔으면 이곳 독산사거리에서 다시 정상 마루금과 만나 진행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도로 좌측 607번 지방도로 쪽으로는 보령 대천해수욕장과 남포방파제 도로 표지판이 보인다.

 

 

그 독산사거리에서 남쪽인 서면 춘장대해수욕장 방향으로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 가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살펴보니 원 지맥 등로는 도로 우측의 나즈막한 능선으로 이어질 것 같은데 그곳에는 등로가 없어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 내려가니 도로 우측으로 또 다시 묘지지대가 보인다.

다시 보이는 독산사거리 도로표지판을 지나 도로 좌측을 살펴보니 저 뒤편으로 웅천읍 죽청리 소황교회와 마을들이 보인다.

그 소황마을 뒤 저편으로 오늘 걸어 온 성주지맥 마루금이 끊어질듯 이어지는 모습도 눈에 들어 온다.

 

 

등로 좌측으로는 논 들판이 보이고 그 뒷편으로 나즈막한 산줄기가 보이고 이름을 찾아 보지만 이름조차 갖지 못하는 무명의 산줄기와 봉우리들이다.

도로 따라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도로 우측으로 송양윤세명자택입구라는 이정석이 보이는데 윤세명이란 이름이 궁금해 찾아보니 자세한 설명은 없이 공군사격장과 관련해 민원인이라는 것만 찾을 수 있다.

그 윤세명자택 이정석을 지나니 도로 우측으로 소황리 마을이 보이기 시작하고 살펴보니 같은 모양을 한 민가들의 풍경이 줄지어 보인다.

잠시 더 걸어 내려가니 지나온 방향으로 소황1길 그리고 진행 방향으로 독산로란 도로 표지판이 보이고 도로를 좌측으로 보내고 우측 시멘트 포장도로를 통해 마을로 들어가니 그 입구에는 웅천파견대란 안내판이 서 있다.

 

 

마을로 들어가니 파란 창고형 건물들이 보이고 조금 더 걸어 들어가니 우측으로 소황2길이란 도로 표지판도 보인다.

웅천읍 소황리는 백제때는 사포현에 속했었고 신라때는 소포현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남포현에 속했었다.

조선때에도 남포현에 속했으며 조선 말엽남포군 웅천면지역으로서 쪽에 있는 작은 마을로서(작은황골) 또는 황동이라고 부르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대황리 일부를 병합하여 소황리라 해서 보령군편입되었다.

1995년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돼 보령시가 된후 95년3월 2일 보령시 조례 제138호로 웅천면에서 웅천읍으로 승격되었다.

2차선 포장도로를 좌측으로 보내고 우측 소황리 마을로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마을 도로로 들어간다.

 

 

마을 시멘트 임도를 따라 걸어 들어가니 다시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우측 민가쪽 시멘트 포장도로를 버리고 좌측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시멘트 임도 좌측으로는 거대한 축사같은 건물이 보이고 그 건물 우측으로는 방금 헤어진 607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모습도 눈에 들어 온다.

 

 

잠시 그렇게 시멘트 임도를 따라 걸어 들어가니 이곳에 있는 건물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비어있고 허물어지고 있어 마치 전쟁 폐허로 만들어진 유령의 마을같은 그런 느낌으로 걸어 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지만 마을 전체가 텅 비어있고 폐허가 된듯 지저분하게 허물어지고 있어 대낮인데도 왠지 모르게 등줄기에선 시원한 바람이 불어 오는 느낌만큼 좋지 않다.

 

 

그렇게 폐허가 되어가는 민가를 지나 걸어가니 비포장 임도로 변하고 그 임도를 따라 조금 더 걸어가니 임도 우측으로 철조망이 쳐져 있는데 살펴보니 공군제20전투비행장이란 경고판이 달려있다.

그 안쪽을 살펴보지만 어느곳에서도 비행단 같은 건물이나 장소는 발견하지 못하고 그 안 논둑에서 짚불을 태우는 농부들만이 주의를 기울이여 불을 태우고 있다.

아마도 이 공군부대도 지금은 다른 장소로 이전해 이제 이곳에는 어떤 부대도 존재하지 않는듯 하다.

 

 

그렇게 또 한동안 우측에 녹슨 철조망을 두고 그 비포장 임도를 따라 따라 걸어가니 철조망 근처에는 산죽들이 보인다.

조금 더 걸어 들어가니 녹슨 철조망과 헤어져 산 능선으로 들어가고 작은 둔덕을 넘으니 그 비포장 임도가 좌측으로 휘어지고 우측에 광주안공 묘비가 있는 곳에서 지맥 등로는 이제 직진의 희미한 능선으로 들어가 한동안 키큰 산죽나무와 대나무 밭을 따라 걸어가게 된다.

 

 

잡목이 우거진 낙엽 등로를 따라 들어가니 등로 좌측으로는 키 큰 산죽밭이 보이는데 너무 빼곡히 자라고 있어 그 산죽밭으로 진행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 산죽밭을 좌측에 두고 우측의 잡목 구간 사이로 걸어가니 갑자기 눈 앞에 원형 철조망이 나타나고 그 철조망을 건너 커다란 대나무 밭으로 들어가 보지만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다시 잡목 구간으로 ㄴ온다.

우측에 잡목 구간과 좌측에 대나무 밭을 두고 걸어가다 잡목 구간을 살펴보니 한겨울이 아닌 여름철에는 진행이 불가능해 보이기에 반드시 이 잡목들이 말라있는 계절에 진행할 것을 추천해 본다.

 

 

한동안 그렇게 잡목과 잡풀 그리고 대나무 밭 사이를 통해 걸어가니 등로 우측으로 넓게 정리된 밭이 나타나고 다시 잡풀 구간을 통과해 진행하니 잠시 대나무 밭이 사라지고 거대한 나무들과 관목이 혼재한 구간을 지난다.

그렇게 진행하니 등로는 좌측의 묵은 임도를 따라가다 우측의 능선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고 능선으로 오르니 다시 대나무 밭이 보이는데 그 앞에는 무너진 벽돌 더미들이 보이는데 살펴보니 예전에 사람이 살던 집터가 아니였을까 생각되는 곳이다.

그곳을 지나 다시 잡풀과 관목 그리고 대나무 밭을 지나니 잠시 평이한 등로로 이어지다가 갑자기 등로 옆에 녹슬어 쓰러진 찝차들이 몇대 줄지어 늘어서 있다.

아마도 이곳이 예전에 군부대이었음을 알려주는 풍경 같은데 이제는 그 자체도 추억속으로 사라지는 풍경으로 남아 있는 듯 하다.

 

 

녹슨 군용 찝차 구간을 지나니 갑자기 허기가 지기 시작하고 그곳 소나무 밭에서 배낭 벗어 준비한 떡과 과일로 허기를 달래며 주위를 살펴보니 소나무 밑둥이 모두 검게 그을린 산불이 났던 흔적으로 보인다.

이곳에서부터 부사방조제까지 진행하다 보니 광범위하게 산불이 났었고 그 산불이 사회문제가 되어 매스컴까지 탔다고 하니 제법 큰 산불이 났었던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물 한모금 마시고 다시 사진 한장 남기고 배낭 둘러멘 후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허기를 달랜 후 소나무 군락지를 따라 걸어 내려가니 다시 잡목과 관목이 혼재된 등로로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대나무 밭과 헤어져 평이한 등로로 진행을 한다.

진행하다 보니 묵은 비퐂ㅇ 임도가 나타나는데 오랫동안 사용하지 안해 많은 관목들이 자라고 있는 풍경이 나타나고 그 묵은 임도를 따라 좌측으로 걸어가니 등로는 우측 능선 위로 이어지고 있다.

우측 능선으로 올라가 조금 더 걸어 진행을 하니 선답자들의 산행후기에서 자주 봤던 군용기가 녹슨채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혹시나 하고 그 비행기 위로 올라가 보려고 했지만 이제 이 비행기도 너무 녹슬어 올라가기도 힘들 것 같아 포기하고 사진 몇장 남기고 갈길로 발길을 돌린다.

 

 

군용 헬기 옆에는 대전의 산꾼인 산보님 띠지가 빛바랜 모습으로 펄럭이고 있어 안부를 묻고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의 소나무 지역을 따르니 이곳도 역시 큰나무 밑둥은 모두 검게 그을린 모습이다.

잠시 잡목을 헤치며 천천히 걸어 오르니 갑자기 녹슨 이동통신탑 같은 안테나가 나타나는데 그 좌측으로는 넓은 공터에 바위들이 산재되어 있는 풍경도 눈에 들어 온다.

 

 

그 녹슨 이동통신탑 같은 안테나를 지나 진행하니 잡목이 우거져 진행에 어려움을 겪는다.

온몸에 생채기를 내며 조심하며 걸어 오르니 많은 동물들의 배설물들이 보이고 주능선에 도착을 하니 바로 눈 앞에 녹슨 철조망이 나타나는데 그 철조망을 좌측에 두고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계속 걸어 올라 본다.

잡목과 소나무가 혼재되어 진행에 무척 애를 먹는 구간을 주의하며 걸어 오르니 이제 등로에는 큰 바위들이 산재되어 있어 걸어 진행하기에 더욱 어려움이 가중된다.

 

 

그래도 주의하며 녹슨 철조망을 이리저리 건너가며 완만하게 오르니 이제 바위 너덜길 같은 등로가 나타나는데 그곳에서 잠시 잡목이 사라지며 좁은 조망과 풍경을 볼 수 있는 장소를 내 준다.

등로 좌측을 살펴보니 웅천천 지나 서천의 땅과 비산비야의 산줄기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성주지맥의 끝자락이 멀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여전히 불난 흔적이 남아 있는 거대한 소나무들을 따라 진행하니 통달산 직전에 가시가 달려있는 엄마무 밭이 나타나는데 불난 자리에 새로 자라고 있어 진행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다.

 

 

그 불난 지역의 엄나무 지대를 어렵게 통과해 오르니 정상에 거대한 측백나무 한그루가 서 있고 그 나뭇가지 속으로 해발고도 183미터의 통달산 정상 이정표가 달려 있다.

대동여지도에 표기된 산 이름은 통달산인데 25000분의 1 지형도에는 용달산으로 잘못 표기가 되어 있어 참으로 한심스런 공무원들의 일 처리를 엿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아마도 통달산의 한자를 옮겨 쓰면서 책받침변을 잘못 표기해 삼수변으로 바뀌어 통달산이 용달산으로 둔갑을 하고 말았으니 자기 이름을 바꾸면 어땠을까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 처리이다. 

보령의 웅천에 있는 이 통달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에 수록되어 있으며 그 의미는 서해안에 우뚝 솟아 산 정상에 올라가면 사면이 잘 보이며 사통오달된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통달산 정상에서 바라보니 산불이 얼마나 심하게 났었는지 온통 산 전체가 사라져 벌목된 모습으로 다가와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드는 시간이다.

그 통달산 정상에서 잠시 주위 조망과 풍경을 살펴보지만 잡목과 소나무들로 인해 조망이 제한되어 그 바로 아래에 있는 넓은 공터로 내려가 다시 살펴 보니 등로 좌측 남동쪽으로 웅천천 지나 서천의 주렴산 그리고 춘장대쪽 마을이 환히 보이기 시작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년 전 걸었던 호서정맥 또는 금북기맥이라 불려지는 산줄기를 찾아 보지만 그 마루금을 저 멀리 희미하게 보여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바로 남쪽으로는 웅천천이 바로 발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데 그 한가운데에 이름 모를 작은 다리 하나가 놓여 보령과 서천을 이어주는 풍경도 눈에 들어 온다.

그 웅천천 넘어 저 멀리에는 서천의 올망졸망한 산줄기가 펼쳐져 있고 그 산줄기 저 멀리에는 희미하게 호서정맥 또는 금북기맥 산줄기가 옛날 추억을 들추며 이야기하자 조르고 이다.

웅천천은 성주산과 아미산의 골짜기 물이 이룬 냇물로서 양각산 아래에서 웅천천을 막아 넓은 보령호가 만들어졌고 서해바다로 흘러 마지막으로 부사 방조제로 들어 왔다 서해바다로 나가는 내이다.

근래에 보령에서 탐사를 벌여 웅천천의 발원지를 찾아 물탕샘이라 명명하였다고 하니 다음에 시간이 되면 꼭 한번 들려 그 모습이라도 담아보고 싶은 마음 굴뚝같다.

 

  

 

이제 남서쪽으로는 오늘 산행 날머리 좌측에 위치한 부사방조제가 보이고 그 앞으로 보령과 서천을 연결하는 도로와 서해바다가 바로 코 앞으로 다가와 있다.

그 부사방조제 주위에는 드넓은 평야지대를 이루고 그 풍경을 내려다 보는 시간이 참으로 아름답고 황홀하기만 하다.

시간이 된다면 이곳에서 낙조까지 보고 내려가고 싶지만 저녁에 고향에서 죽마고우들과 약속이 되어 있기에 낙조는 다음으로 미루고 조망과 풍경을 사진에 담기 바쁜 시간이다.

 

 

부사방조제 북쪽인 서쪽으로는 이제부터 걸어 내려가야 할 성주지맥 마지막 마루금이 산불 흔적으로 벌거벗은 채 속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한두 그루씩 남아 있는 거목들도 그 밑둥에는 모두 산불 흔적으로 검게 그을려 있어 언제까지 살아 갈 수 있을지 안타까운 시간이기도 하다.

그 마루금 끝자락에는 화마에서 벗어나 푸르름을 유지하고 있는 마지막 낮은 봉우리가 보이지만 그 봉우리는 철조망으로 인해 오르지 못하고 우회해야 하니 이제 성주지맥도 이곳이 마지막 봉우리이다.

 

 

이제 마루금 우측 앞인 북서쪽으로는 황죽도와 몇개의 무인도가 내려다 보이고 그 안쪽으로는 이제 걸어 내려가야 할 소황리와 그 위쪽으로 독산리 그리고 위쪽으로 무창포가 보인다.

독산리는 백제때는 사포현에 속했었고 신라때는 소포현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남포현에 속했었다.

조선때에도 남포현에 속했으며 조선 말엽엔 남포군 웅천면지역으로서 홀로 된 산이 있으므로 홀미, 홀뫼 또는 독산이라 하였는 1914년 행정구역 개혁에 따라 독산라 하여 보령군 웅천면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시 보령시가 된 후 95년 3월 2일 보령시 조례 제138호로 웅천면에서 웅천읍으로 승격되었다.

보면 볼수록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에 내려 갈 생각도 못하고 한동안 더 머물며 가슴속 깊이 간직해 본다.

 

 

 

그 독산리 위쪽 저 멀리에는 무창포 지나 남포방조제와 보령의 대천해수욕장 해변도 아스라히 보이기 시작한다.

보령시는 마한때부터 서서히 부락형성이 있었던 내포의 들인데 백제때는 사포현에 속해서 농경지정착하는 백제유민들로 크게 마을이 이룩되어 갔었다.
신라때는 소포에 속해서 서림군영현에 속했으며 어민들의 마을형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었고 고려때는 현종 9년(1018)에 가림현에 속했다 가 한때 왜구의 침입으로 차츰 황폐화되어 갔었다.
잦 은 왜구의 침입초토화되었던 마을이 34공양왕때부터 남포이 생기면서부터 군사를 주둔시켜 왜구를 철저하게 몰아내고 흩 어졌던 류망인들을 소집함으로 다시 재건을 보게된 지역이였었다.

조선 태조 6년(1397)에 병마사를 두어 현사를 겸하게 하였 으며 세조 12년(1446)에 남포현에 속하여 이 때부터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던 지역이었다.
도침선사의 말에 따르면 풀이해서 우국인물이 많이 배출되며 또한 도학이 묻힐 곳이라 하는데 곰내주위에 번지는 산과 들이 선비의 내음을 훈훈하게 하는 내포의 외곽인 것이다.
세조 후에 충청수사영검사영황교리 구진에 있어서 수군군선이 드나들었던 곳이기도 하고 고종 32년(1895)에 남포군에 속해서 웅천의 이름을 따서 웅천면이라 하여 관동 외에 18개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고읍면외성 외 8개 동리와 신안면두명리, 습의면벽동심전면동막리를 병합하여 웅천면이라하고 관당, 독산, 소황, 황교, 죽청, 구룡, 노천, 두룡, 대천, 대창, 성동, 수부, 평의 13개리로 개편하여 관할하여 보령군에 속하게 되었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시 보령시가 된후 95년3월 2일 보령시 조례 제138호로 웅천면에서 웅천읍으로 승격되었다.

 

  

 

그렇게 통달산 정상부에서 많은 시간 머물며 주위 조망과 풍경을 하나 둘 가슴속 깊이 담은 후 성주지맥 마지막 날머리를 향해 천천히 걸어 내려가 본다.

내려가다 보니 불난지역에 벌목된 나뭇가지를 잘라 쌓아 놓고 있고 그 한쪽으로는 민둥의 풍경으로 남아 있어 천천히 주위 풍경을 살피며 내려가 본다.

그렇게 한동안 내려가니 이제 눈 앞에 서 있던 거대한 소나무들도 모두 사라지고 내려가야 할 마지막 봉우리의 파란 소나무 숲과 그 좌측으로 부사방조제 지나 서해바다가 멋지게 내려다 보인다.

이곳에서도 잠시 더 머물며 많은 사진을 남기고 천천히 내려가 본다.

 

 

그렇게 한동안 주위 풍경을 담으며 걸어 내려가다 뒤돌아 보니 민둥의 가슴 아픈 상처를 안고 우뚝 솟아 있는 통달산이 저 멀리 멀어지고 있다.

민둥의 산불난 통달산 능선에는 힘없이 서 있는 몇그루의 소나무들이 파란 하늘에 떠 있는 하얀 뭉게 구름과 멋진 조화를 이루며 이 산객의 발걸음을 붙잡고 있다.

아쉬워도 다시 발길 돌려 내려가야 하기에 아쉬운 마음 달래며 발걸음을 돌려 본다.

 

 

늘 맥 잇기 산행을 하면서 느끼는 감정이지만 하나의 산줄기를 마무리하면 즐겁고 웃음이 나야 하는데 왜 이리 가슴이 아리고 또 더 이상 걸어가지 못하는 마루금이 왜 이리 서운하던지 가슴 한쪽이 멍하기만 하다.

마지막 파란 소나무 봉우리와 그 좌측으로 부사방조제와 서해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을 다시 가슴에 남기며 천천히 내리막 등로를 따라 걸어 본다.

언제 다시 이곳에 올라 오늘을 회상할 수 있을지 기약도 없고 약속도 할 수 없지만 이 그리운 마음은 평생의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다시 그렇게 한발 두발 발걸음 옮겨 내려가니 임도와 만나고 그 임도를 따라 걸어 내려가다 아쉬워 다시 뒤돌아 통달산을 올려다 본다.

민둥의 통달산 줄기 위에 드문 드문 자라고 있는 소나무들 그리고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너무나 황홀한 풍경을 그리고 있다.

다시 천천히 임도를 따라 걸어 내려가며 성주지맥에 대한 추억도 하나 둘 더 가슴속에 쌓이고 있다.

 

 

그렇게 그 불난 지역의 민둥산인 통달산을 내려 와 만나는 비포장 임도를 따라 걸어 내려가니 비포장 임도 우측으로 작은 공동묘지 같은 지대가 펼쳐져 있고 잠시 사진에 담은 후 진행하니 임도 좌측으로는 작은 다랑이 논이 보인다.

그 논 뒤 저 멀리 이제 통달산이 멀어지며 이 산객의 가슴에도 마지막이자 새로움을 선사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임도 좌우측으로 키 큰 산죽들이 반겨주고 잠시 더 내려가니 간간히 차량들이 달리는 소음이 귓전에 들리기 시작한다.

 

 

다시 비포장 임도를 타고 내려가니 금새 607번 2차선 지방도로와 만나고 그 도로를 따라 우측 부사방조제 방향으로 걸어 간다.

잠시 걸어 진행하니 도로 우측에 소황리 장안마을이란 이정석이 서 있어 소황리에 대한 자료를 찾아 본다.

이곳 소황리는 백제때는 사포현에 속했었고 신라때는 소포현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남포현에 속했었다.

조선때에도 남포현에 속했으며 조선 말엽엔 남포군 웅천면의 지역으로서 황골 남쪽에 있는 작은 마을로서(작은황골) 또는 소황동이라고 부르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대황리 일부를 병합하여 소황리라 해서 보령군에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했고 보령시가 된후 95년3월 2일 보령시 조례 제138호로 웅천면에서 웅천읍으로 승격되었다.

이곳 소황리에는 가슴 아픈 사격장이 자리하고 있어 수많은 민원이 발생했던 곳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그 소황리 장안마을 이정석을 지나 계속 도로를 타고 걸어 들어가니 금새 부사방조제 주차장이 보이고 도로 좌측에는 장안마을 버스 정류장이 보이는데 우측 부사방조제를 지나 춘장대란 단어가 눈길을 사로 잡는다.

도로 우측으로는 장안해수욕장 가는 방향의 도로 표지판이 걸려있고 그 끝자락에는 우측으로 바닷가집이란 식당과 매점이 보이고 그 앞에는 바람에 실려 와 쌓여 있는 수많은 모래를 파내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그 부사방조제로 오르니 그 임도길에도 수많은 모래가 쌓여 그 구실을 잃은지 오래된 듯 보이고 그 우측 바닷가로는 소황사구 생태학습장 가는 길이 열려 있지만 그 기능은 많이 사라진듯 보인다.

인간의 삶을 위해 만들어진 인공 방조제로 인해 자연 피해가 커지고 모래가 날아 와 쌓이면서 해마다 많은 경비를 들여 새로 쌓이는 모래를 퍼내야 하니 자연보호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소황사구 방향을 다시 한번 돌아 본다.

소황사구는 충남 보령시 웅천읍 소황리 및 독산리에 위치하며 남북으로 길이 2 Km 정도이고 폭은 50미터 정도 되는 띠의 형태로 사구가 형성되어 있으며 북쪽으로 무창포 해수욕장과 남쪽으로 춘장대 해수욕장을 사이에 두고 해빈과 사구가 잘 발달하였다.
사구식생의 면적은 좁지만 전형적인 식생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으며 귀화종의 수가 적고 인위적인 교란이 적어 보존가치가 크다.

해안사구는 해류나 하류에 의해 모래가 만조선 근처인 사빈으로 운반되고 다시 해풍에 의해 육지로 이동하고 퇴적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형성된 곳으로 이렇게 형성된 해안사구는 육지와 해양 사이의 퇴적물량을 조절해 해안을 보호하고 해안 고유생물의 서식지와 해안 식수원 저장지 및 아름다운 경관 등 다양한 기능을 갖고 있다.

환경부는 국내 해안사구 중 유일하게 전체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소황사구를 체계적으로 보전하고 소황사구에 서식하는 노랑부리백로, 매, 삵 등 멸종위기종을 비롯한 야생 동식물을 보호하기 위해 2005년 10월27일 이곳을 생태계보전지역에 지정했다.

한번 둘러보고 가고 싶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오늘은 여기까지 이다.

 

 

 

부사방조제 위로 올라 소황사구와 서해바다 그리고 서천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살펴 본 후 다시 부사방조제 이정석이 서 있는 곳으로 가 사진 몇장 남기고 나오니 통달산에서 내려오며 불렀던 웅천택시가 와 기다리고 있다.

그 택시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 택시 기사님에게 부탁해 보령 여행 관광 안내도 옆에서 증명 사진 한장 남기고 성주지맥 산행도 모두 마무리를 해 본다.

부모님이 안 계시니 고향을 내려 올 기회도 많지 않지만 그래도 산행을 위해서는 몇번인가 이곳 주위를 더 내려와야 할 곳이기에 그때 더 고운 추억을 남길 수 있기를 바래 본다.

그렇게 택시를 타고 이어니재에 도착을 하고 간단히 샤워를 마친 후 고향인 청양으로 넘어가 죽마고우가 살고 있는 시골집으로 가 준비중인 옻닭으로 몸보신 겸 여흥의 시간을 보내며 오랫만에 다시 개구쟁이 시절로 되돌아 가 본다.

앞으로는 더 자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있기를 바라며 밤새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일요일 아침에 계획되었던 칠갑산은 오르지도 못하고 새벽같이 서울 집으로 돌아 와 시체 놀이를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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