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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맥산행(완료)/성주지맥(금북·완)

성주지맥 제1구간 성태산에서 이어니재까지 산행후기

by 칠갑산 사랑 2014.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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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충청남도 청양군과 부여군 그리고 보령시의 성주지간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 2014년 05월 31 (토요일 당일 산행)

산행날씨 : 무척 무더운 폭염과 짙은 박무로 인해 조망이 없었던 날씨

산행온도 : 영상 23도에서 영상 31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청양군 남양면 백금2리 노인회관 금곡마을(백월산종합안내도)-성태산입구 0.8 Km 이정표-상수도 물 탱크-이정표(금곡마을 0.4 Km, 성태산입구 0.3 Km)-가야사-성태산입구 이정표(금곡마을 0.7 Km, 성태산 1.0 Km) 및 백월산과 성태산 안내도-능선진입-비포장임도-이정표(금곡마을 0.9 Km, 성태산 0.8 Km)-이정표(금곡저수지, 성태산 631미터)-비포장 임도-능선 계단진입-벤취 쉼터-이정표(금곡마을 1.4 Km와 2.2 Km, 성태산 0.2 Km)-안전목책과 로프-성태산 천세봉(626봉)-성주지맥 분기점 이정판-성태산 만세봉(631봉) 이정표(천세봉 0.1 Km, 문봉산 2.5 Km, 옥가실 1.8 Km)-580봉-청라방향 갈림 임도 이정표(수신리 3.6 Km, 문봉산 1.1 Km, 청라방향)-문봉산(632봉)-헬기장1 이정표(성태산 2.3 Km, 장군봉, 상수리재 1.3 Km)-벌목지대-헬기장2-해발 560미터 이정목-암릉구간-심연동 갈림 삼거리(문봉산정상 0.9 Km, 장군봉 0.9 Km, 심연동 2.7 Km)-벤취쉼터-암릉구간-성주산 역암 설명판-성주산 장군봉(677봉) 이정표(문봉산정상 1.8 Km, 왕자봉 5.9 Km, 심연동 1.8 Km)-은선동냉풍욕장 갈림 삼거리 이정표(장군봉 0.5 Km, 청라면사무소 3.1 Km와 옥마정 6.9 Km 및 왕자봉 5.4 Km, 은선동냉풍욕장 1.4 Km)-청라면사무소 갈림 이정표(장군봉 0.8 Km와 문봉산 2.6 Km, 왕자봉 5.1 Km, 청라면사무소 2.8 Km) 헬기장-보령냉풍욕장 갈림 이정표(장군봉 0.9 Km, 왕자봉 5.0 Km, 보령냉풍욕장 1.4 Km)-521봉 이정표(장군봉 2.1 Km, 왕자봉 3.8 Km)-장군봉 설명판(527봉)과 이정표(장군봉 2.4 Km, 왕자봉 3.5 Km)-향천봉(519봉) 이정표(장군봉 3.1 Km, 왕자봉 2.8 Km)-이정표(장군봉 3.5 Km, 왕자봉 2.4 Km)-벤취쉼터-이정표(장군봉 4.2 Km, 왕자봉 1.7 Km)-벤취 쉼터-암릉구간-묘지2기-이정표(장군봉 5.3 Km, 왕자봉 0.6 Km)-해발 463미터 헬기장-헬기장2-성주쉼터 갈림 이정표(장군봉 5.8 Km, 왕자봉 0.1 Km, 성주쉼터 2.1 Km)-왕자봉(513봉, 돌탑) 이정표(장군봉 5.9 Km, 옥마정 1.7 Km)-한내여중 갈림 이정표(왕자봉 0.5 Km, 옥마정 1.2 Km, 한내여중 1.7 Km)-운동시설 쉼터-이정표(왕자봉 1.0 Km, 옥마정 0.7 Km, 성주쉼터 0.4 Km)-벤취쉼터-이정표(왕자봉 1.5 Km와 편백나무숲 2.1 Km)-바래기재(성주터널과 옥마정) 쉼터 사각정자-옥마산 입구 안내판과 이정표-이정표(왕자봉 1.6 Km, 옥마산 2.7 Km)-콘크리트 포장도로-능선진입-포장도로 복귀-이정표(옥마정 1.5 Km와 성주산일출전망대 1.3 Km, 성주암 0.6 Km)-이정표(대영사 1.3 Km, 옥마봉 0.5 Km)-이정표(대영사 1.2 Km와 명천폭포 1.3 Km, 옥마봉 0.3 Km)-옥마산 활공장-옥마산 정상석(601봉)-옥마산 중계소 이정표(말재 3.3 Km)-중계소 철조망-해발580봉 헬기장-이정표(옥마봉 0.8 Km, 말재 2.6 Km)-벤취쉼터-이정표(옥마봉 1.8 Km, 말재 1.6 Km)-이정표(옥마봉 2.7 Km, 말재 0.7 Km)-전망바위-묘지1기-말재 이정표(옥마정 3.4 Km, 사현마을 2.2 Km, 남포읍내리 1.2 Km, 개화리 2.0 Km)-삼각점봉(317봉)-송전탑 58번-이정표(말재 0.4 Km, 잔미산 3.3 Km)-이정표(말재 0.9 Km, 잔미산 2.8 Km)-이정표(말재 1.3 Km, 잔미산 2.4 Km)-이정표(말재 1.8 Km, 잔미산 1.9 Km)-봉화산(329봉) 이정표(말재 1.9 Km, 잔미산 1.8 Km)-벤취쉼터-수부리 갈림 이정표(말재 2.6 Km, 잔미산 1.1 Km, 수부리 1.7 Km)-이정표(말재 3.1 Km, 잔미산 0.6 Km)-잔미산 갈림 이정표(말재 3.4 Km, 잔미산 0.3 Km, 이어니재 0.9 Km)-무인산불감시카메라-잔미산(417봉 정상석과 삼각점 및 봉수대) 이정표(말재 3.7 Km, 대천리 3.6 Km)-잔미산 갈림 삼거리 복귀-안전철봉과 로프구간-비포장 임도-이어니재(2차선 21번과 77번 포장도로)-경찰충혼탑-산행종료

산행거리 : 스마트 폰의 GPS 기준으로 24.70 Km

산행시간무더위에 지쳐 많이 쉬며 사진 찍고 꾸준하게 10시 15분 (04시 45분부터 15:00분까지)

교통편옆지기의 도움으로 애마 이용

성주지맥이란 ???

성주지맥은 금북정맥의 백월산(560미터)에서 남쪽으로 약 3 Km 떨어진  금북기맥의 성태산(633미터)에서 남서쪽으로 가지를 쳐 보령시 웅천 앞바다 부사방조제 앞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로 웅천천의 좌측 분수령이 되는 도상거리 약33.4 Km되는 산줄기를 성주지맥이라 칭한다.

이 산줄기를 따라가면 성태산(633미터), 문봉산(633미터), 성주산(677미터. 장군봉), 또 다른 성주산(515미터. 왕자봉), 옥마산(596.9미터), 봉화산(323미터), 잔미산(416.8미터), 통달산(184미터)을 만날 수 있다.

   

폭염과 박무로 인해 사라진 조망속에 어렵게 이어가는 성주지맥 첫구간에서의 고통스러웠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후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단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남아있는 진양기맥 2구간을 마무리하려고 준비하는데 갑자기 옆지기와 큰 딸 아이가 시골 고향집에 다녀오면 어떻하겠냐며 의견을 물어오고 산행 계획을 바꿔 고향의 산줄기를 타고 진행하는 2번째 이야기인 성주지맥으로 향한다.

전날인 금요일 조금 일찍 일을 마치고 알바를 하느라 정신없는 둘째 아들을 제외하고 가족 3명 모두 사전 투표까지 마친 후 약간씩 막히는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시골 고향집으로 내려가니 벌써 어둠이 내려 앉고 있다.

지난 번 내려 가 정리한 정원에는 다시 많은 풀들이 자라고 있고 부모님 산소로 올라가 잔디며 심어 놓은 나무들을 확인해 보니 생각보다 잘 자리를 잡아가고 있어 아들 가족이 찾아 왔다며 인사 드리고 내려 와 늦은 저녁을 먹으며 하루를 마감한다.

다음날 새벽 3시 30분에 일어 나 간단히 누룽지 아침을 먹고 옆지기가 준비한 도시락과 과일 그리고 빵을 배낭에 넣은 후 시골집을 나서 산행 들머리인 백금2리 노인회관 앞에 도착을 하니 새벽 4시 30여분을 가리키고 아직도 어둠속 세상은 짙은 안개까지 머금어 더욱 깊은 어둠을 만들고 있지만 잠시 기다리며 산행 준비를 하는 사이 그 어둠도 많이 엷어져 옆지기를 보내고 홀로 길을 나서는 시간이 새벽 4시 45분이다.

 

 

생각보다 무더운 한여름 폭염을 방불케하는 기온과 강렬한 햇살로 인해 발걸음이 느려지고 준비한 식수를 마시는 횟수가 많아졌지만 그래도 계획보다 많이 늦지 않게 보령 시민들에게 가장 사랑을 받고 있는 성주산 왕자봉에 올라 옆에서 쉬고 있는 등산객에게 부탁해 어렵게 사진 한장 남겨보지만 얼굴은 이미 익어 붉게 변해가고 있다.

오랫만에 다시 온 몸에 남아 있는 모든 노폐물을 제거하듯 입고 있는 등산복을 땀에 흠뻑 적시며 걸어가는 시간은 앞으로 한여름 산행에 어떻게 해야하며 또 구간 나누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답을 가지고 내려 왔으니 그것만으로도 족한 산행이 되였지만 이 글을 정리하는 이 시간까지도 어제의 무더위에 숨이 가빠지는 느낌을 받고 있으니 여름이 일찍 찾아 온 것 역시 맞는 말인듯 하다.

 

 

희미한 헤드렌턴 불빛을 의지해 노인회관 앞 우측에 세워진 백월산 종합안내도를 사진에 남기고 어둠이 엷어지는 포장도로를 따라 좌측 성태산 방향으로 출발을 해 본다.

출발을 하면서 요즈음 새롭게 배워 사용하는 스마트 폰 GPS도 갈림길에서의 도움을 위해 시작 보튼을 누르고 걸어가니 도로 좌측에 성태산입구까지 0.8 kM 거리란 이정표 하나가 반겨주고 사진 한장 남기고 멀고도 긴 산행을 시작하는 시간이다.

이제 이곳을 세번째 왔으니 다시 올 기회는 많지 않을 것이란 예감으로 출발를 하는데 혹시 다시 들리게 되면 그때는 이런 장거리 산행이 아닌 즐기며 쉬고 먹는 그런 산행으로 주위 산군들의 속살을 만져 보는 시간이였으면 좋겠다는 바램도 가져 보는 시간이다. 

이곳 백금리는 본래 청양군 남하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반곡리, 백토리, 금곡리, 추목동 일부와 홍주군 상전면의 마다리 일부를 병합하여 백토와 금곡의 이름을 따서 백금리라 하여 사양면에 편입되였다가 1987년 1월 1일 면의 이름 개칭으로 남양면 백금리가 된 마을이다.

백금리중 금곡마을은 백월산과 성태산 종주 기점과 종점으로 이용되는 마을은 거문고 골짜기라는 뜻으로 마을 지형이 거문고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백금리 또한 하얀 거문고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거문고 형상인지는 아직 보지 못하고 진행함이 아쉽기만 하다.

 

 

 

계속되는 마을 포장도로를 따라 완만하게 오르니 도로 좌측으로 커다란 스테인레스 스틸로 만든 상수도시설이 눈에 들어 오고 잠시 더 오르니 금곡마을에서 0.4 Km 지나왔고 성태산입구까지 0.3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서 있다. 

조금 더 오르니 도로 우측으로 공사중인 가야사가 어둠속에 희미하고 조금 더 오르니 갈림 삼거리에 금곡마을에서 0.7 Km 올라왔고 성태산까지 1.0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와 백월산 성태산 안내도가 서 있다.

가야사에 대한 자료를 찾아 보지만 찾지 못하고 이곳 갈림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흐르는 비포장 임도를 보내고 이 산객은 이정표와 안내도가 서 있는 좌측 임도를 타고 오르기 시작하는데 벌써 여명이 밝아오며 주위 사물이 눈에 들어 오기 시작한다.

 

 

좌측 비포장 임도를 따라 끝까지 오르니 임도 우측 우거진 나뭇잎 사이로 능선으로 진입하는 등로가 열려있고 짧게 그 등로를 오르니 다시 비포장 임도와 만나는데 살펴보니 가야사 위에서 헤어졌던 그 임도와 결국 다시 만나는듯 보인다.

우측으로 비포장 임도를 따라 조금 오르니 임도 좌측으로 금곡마을에서 0.9 Km 올라왔고 성태산까지 0.8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서 있고 그 좌측으로 오르막 계단이 보인다.

그 계단을 타고 오르니 등로 좌우측으로는 검정 그늘막이 등로를 따라 쳐져 있고 잠시 그 검정 그늘막과 걸음을 같이하며 오르는데 새벽부터 찜통 더위에 바람 한점 없어 땀이 비오듯 흐르고 있다.

 

 

검정 그늘막과 함께 한동안 오르니 좁은 공터가 나타나는데 그 공터 옆에는 색다른 이정표 하나가 서 있다.

이제 지나온 방향으로 금곡저수지가 방향암 표기되어 있고 올라야 할 방향으로는 성태산정상까지 631미터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가 보인다.

그 이정표 옆에는 다시 계단이 보이고 그 계단을 따라 많은 땀방울을 등로에 뿌려보는 시간이다.

잠시 그렇게 하늘도 보이지 않는 나무숲속을 따라 오르니 갑자기 하늘이 열리면서 최근에 만들어진 듯한 비초장 임도가 넓게 나타나며 그 위에 도착을 한다.

이곳에서 임도 따라 우측으로 잠시 가며 알바를 하고 다시 뒤돌아 와 좌측으로 10미터 진행하니 임도 우측 능선으로 계단이 보이고 성태산 오름 들머리가 보인다.

 

 

비포장 임도가 좌측으로 크게 걲였다가 다시 우측으로 꺾이는 우측으로 계단을 타고 능선으로 오르니 등 뒤로 잠시 조망이 나타나지만 방금 전 이 삼객이 출발한 백금리의 초입부 저 멀리만 보일뿐 금곡마을은 나뭇가지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조금 더 오르니 벤취2개가 보이고 우측에는 커다란 사각탁자도 보이는 좁은 공터를 지나 오르니 또 다른 벤취 2개가 자라는 잡풀속에 방치되어 있다.

다시 사각탁자를 지나 오르니 등로가 좌측 사면로로 이어지고 잠시 더 진행하니 성태산까지 0.2 Km 남아 있다는 주능선 갈림길에 도착해 물 한모금 마시며 잠시 쉬어 간다.

이곳은 우측의 성태산과 좌측의 행여봉을 이어주는 금북기맥 능선으로 2년 전 지나간 등로로서 백월산과 연계해 산행하는 등산객들이 자주 이용하는 등로처럼 보였다.

 

 

그 이정표 갈림 삼거리를 지나 성태산 방향으로 오르니 그곳에는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되어 있고 그렇게 오르다 보니 박무와 두꺼운 구름으로 보지 못할 것 같았던 하루 일출이 나뭇가지 사이로 시작되어 잠시 발걸음 멈추고 그 아름다운 일출을 감상해 본다.

늘 산에 들어 만나는 일출이지만 오늘은 무더운 날씨에 박무 없이 멋진 조망을 선사해 줄 것을 간절히 소원해 보지만 결국 그 소원은 그저 소원으로 끝났기에 아쉬움이 큰 산행이였다.

너무나 아름답고 장쾌한 산줄기들이 이어지는 성주지맥 첫구간이였는데 초반부 약간의 흐릿한 조망 이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으니 그 아쉬움은 더욱 큰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일출까지 구경한 후 빠르게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금새 성태산 천세봉에 도착을 하는데 2년 전 금북기맥 산행을 하면서 들렸던 때와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 정상이지만 그 오른 의미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다가오고 있다.

해발고도 626미터인 이곳 성태산 천세봉은 자료를 찾아 보지만 자세한 자료도 없고 정상석에서도 그 어떤 내용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어 아쉬움만 남긴다.

다만 성태산 만세봉 정상석 뒷편에 씌여있는 이야기를 읽어 보면 이곳 성태산 천세봉은 그저 만세봉을 이름 붙여 놓다 보니 미안한 마음에 정상석 하나를 세워 놓기 위해 부여군에서 붙여 준 이름이 아닐까 생각해 보는 정상이라 어딘지 모르게 조금은 찜찜한 시간이기도 하다.

 

 

정상에서 방금 전 올라 온 방향 우측을 내려다 보니 부여의 수신리 마을이 내려다 보이고 그 옆으로 금북기맥 마루금이 비산비야를 이루며 지난날의 추억을 이야기 해 보다 한다.

2년 전 어머님을 잃고 아버님을 모시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홀로 이곳으로 올라 금북기맥을 시작했던 시간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년이란 세월이 흐르며 살아 계셨던 아버님마저 잃고 이제 어제처럼 산소에 들려서나마 인사를 드릴 수 있으니 사는 세월이 아쉬울 뿐이다.

외산면의 최북단에 위치해서 북쪽으로 해발 620미터의 성태산을 경계로 보령시 청라면과 청양군 남양면과 접하고 있는 부여의 수신리는 산과 들과 계곡이 잘 조화를 이룬다 해서 유인

들이 신성지로 손꼽기도 하고 풍류객이라기보다 조용한 지역에서 안주를 바라는 사람들이 한번 정착하고는 떠나지 않았던 특이한 조건이 있는 지역이다.

조선시대 홍산현 외산면이었으나 후에 외산내면에 속하였는데 전주이씨들의 정착과 함께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상신리와 상수리 일부를 병합하여 상수와 상신의 이름을 따서 수신리라 하고 부여군 외산면에 편입하였다.
사람들이 정착하여 뿌리를 내린다는 뜻에서 신근

마을이 있고 파평윤씨가 많이 사는 마을로 뒷산의 형국이 마치 신선이 춤추는 형상이라 무수 또는 무술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70년대부터 95년까지 탄을 캐는 동명탄광이 성황을 이루었고 1944년 설립된 무술초등학교가 1999년 폐교되는 아쉬움도 남아 있다. 또한 이정표에서 자주 보게 될 옥가실에는 수령 4~5백년된 희귀한 소나무가 있다.

 

 

이곳에서 금북기맥과 금북정맥 그리고 오늘 걸어야 할 성주지맥 마루금을 조망하고 싶었는데 박무로 인해 조망은 영 엉망이 되어 안타까운 시간만 흐르고 있다.

물 한모금 마신 후 다시 보이지 않는 주위 조망을 바라 본 후 정서쪽 방향의 준.희님이 붙여 놓은 성주지맥 이정판 방향으로 새로운 산줄기를 찾아 길고도 먼 하루의 발걸음을 시작해 본다.

잠시 걸어 진행하는 금새 성태산 만세봉에 오르는데 이곳 역시 2년 전 다녀간 기억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는데 다만 정상석 뒷편에 적어 놓은 만세봉 유래가 더욱 뚜렷히 눈에 들어 오는 시간이다.

성태산 만세봉은 부여군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서 전하는 말에 의하면 1919년 독립만세운동 당시 이곳에서 부여, 보령, 청양 3개시군 주민들이 모여 봉화를 올리고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운동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정상을 만세봉이라 하고 다음 봉을 천세봉이라 명명하였다.

잠시 더 주위 풍경을 조망해 보지만 박무로 인해 아쉬움만 짙게 남아 있는 시간만 흐르고 있다.

 

 

만세봉 정상에서 출발에 앞서 가야 할 성주지맥 좌측으로 약간의 조망이 나타나고 그 조망을 바라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 본다.

발 바로 아래에 지선리와 저 멀리 성주리가 내려다 보이고 좌측으로 오래 전 짙은 안개속에 헤맸던 만수산 자락이 박무속에 추억이 이야기 해 준다.

부여 외산면 지선리는 조선시대 참나무가 많은 지역이라 숯이 유명하였고 백자(가 생산되었던 마을로서 교하노씨와 여산송씨 그리고 전주이씨가 입촌하여 촌락을 이루었고 본래 홍산군 외산내면의 지역인데 1914년 군폐합에 따라 상비리, 장선리, 지단리, 저동 일부를 병합하여 지단과 장선의 이름을 따서 지선리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70년대 초반부터 우량광산이 성황을 이루어 95년까지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장수하는 사람이 많아 장선마을, 모시를 많이 재배하여 모시울, 모새골, 저동, 마을 주변에 지초가 많은 안쪽 마을이라 하여 지단내 마을이 있다

또한 그 지선리 넘어 저 멀리에는 보령의 성주리가 보이는데 조선시대 말기에는 남포면 북외면의 지역이었다가 원래 성주산 아래가 되므로 성주골 또는 성주동이라 부르던 지역이다.

서쪽으로 장쾌하게 이어지는 성주지맥을 바라보지 못하고 진행함이 못내 서운하지만 그것도 오늘 이 산객의 운이니 어쩔 수 없는 시간이기도 하다.

 

 

성태산 만세봉을 출발해 완만하게 내려가니 잠시 멋진 소나무 군락지가 나타나더니 푸른 잡풀들이 등로를 메우고 키 큰 활엽수가 그늘을 만드는 아름다운 등로로 이어진다.

지루하지 않게 바위 암릉도 나타나고 다시 푸른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나즈막한 안부지나 성황당에 서 있을 법한 거대한 활엽수도 다시 만난다.

잠시 통나무 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금새 드넓은 공터가 있고 우측으로는 청라면 방향으로 하산할 수 있는 비포장 임도가 갈리는 하산로도 보인다.

그 공터 한가운데에는 둥그런 원형속에 활엽수 한그루가 자라고 있어 색다른 풍경을 선사하고 있다.

  

 

공터를 가로질러 짧은 절개지를 타고 능선으로 오르니 다시 등로는 멋진 푸른 초원으로 변하고 우거진 활엽수 그늘을 따라 급하지 않게 오르고 있다.

점점 더 우거지는 등로를 찾아 조심스레 오르니 갑자기 봉우리 하나가 나타나는데 혹시나 하고 주위를 살펴보지만 아무 표식도 없는 무명봉이다.

지도를 꺼내 살펴보니 아무 표식도 없어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출발을 해 본다.

 

 

무명봉 지나 좁은 공터같은 곳을 통과하니 다시 등로 주위엔 역암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잠시 순한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봉우리 같지 않은 능선에 준.희님이 달아 놓은 문봉산 정상 이정표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

조망도 없고 문봉산에 대한 자료도 찾지 못해 안타까운 시간에 아쉬움과 사진 한장만 남기고 다시 성주산 장군봉 방향으로 출발을 해 본다.

해발고도 632미터의 문봉산은 이곳 지방에서는 꽤 높은 산이지만 단독 산행을 하는 산객들은 없을 것 같지만 성태산과 성주산 연계 산행이나 부여쪽 만수산에서 성주산 연계 산행 시에는 잠시 들렸다 지나는 산쯤으로 생각되는 곳이다.

아니면 오늘 이 산객처럼 성주지맥 산행을 하는 산객들에게나 그 이름을 알리는 산이 아닐까 생각도 해 보고 출발을 한다.

 

 

문봉산을 출발하자 마자 등로에는 잘 만들어진 원통형의 단단한 돌들이 무더기로 흩어져 있는데 자연 발생한 돌들은 아닌듯 한데 무슨 용도로 만들어졌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혹시 이곳이 옛날 광산촌이다 보니 토질의 확인하며 석탄을 채취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추측만 해 보는 시간이다.

그 돌을 지나 등로 좌측으로 커다란 삼각점이 보이는데 아무 표식도 없어 사진에 담고 출발하니 금새 상수리재 갈림 이정표가 서 있는 헬기장에 도착을 한다.

오래 전 만수산으로 올라 성주산으로 진행하려다 짙은 안개에 발목이 잡혀 만수산 비로봉에서 아쉽게 하산한 아픈 추억이 있는 곳이기에 한참을 머물며 상수리재 방향의 등로를 바라보고 출발한다.

언제 다시 이곳으로 내려 와 화장골을 가운데 두고 만수산과 성주산을 연계해 화장골 환종주를 해 봤으면 하는 바램이지만 그럴 기회가 올련지 모르겠다.

 

 

상수리재 갈림 헬기장을 지나니 제법 잘 세워진 이정목이 해발고도와 함께 보이기 시작하고 또 한쪽면에는 보령시의 특산물을 적어 놔 홍보를 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등로 우측으로는 청라면이 내려다 보이지만 박무로 인해 흐릿하고 그 넘어 오서산과 그 곳으로 이어지는 금북정맥은 박무속에 모습조차 찾기가 어려워 아쉽기만 하다.

다시 조금 더 걸어 진행하니 갑자기 간벌된 지대가 나타나고 멋진 소나무들이 군락을 이루며 지루해지는 등로에 생기를 불어 넣고 있다.

등로 좌측으로는 보량 시민들에게 인기가 있는 성주산 자연휴양림과 화장골이 내려다 보이는데 몇 년 전 아쉽게 잠시 들렸다 내려간 아픈 추억을 생각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잠시 간벌지역의 등로를 따라 즐기며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아름다운 소나무 군락 넘어 화장골이 깊게 드러나고 그곳에서의 아픈 추억을 생각하며 그 뒤로 병풍처럼 둘러친 부여의 만수산 줄기를 올려다 본다.

성주산자연휴양림내 계곡을 화장골이라 하는데 화장골이란 이름은 성주산 일대에 모란형 명당이 8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곳 화장골에 감추어져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라 한다.

화장골계곡은 충남도내 11개소의 명수 중의 하나로 충청남도에서는 97년 각 시와 군으로부터 수질과 인근 자연환경이 뛰어난 계곡, 폭포, 하천등 31개소의 후보지를 추천받아 대전산업대 환경공학과 유병로교수팀과 현지조사를 벌여 99년 4월 25일 최종적으로 11개소를 확정발표 하였다.

이중 화장골계곡이 충남 명수 11개소 중의 하나로 선정된 것은 화장골계곡이 자연환경이 잘 보전된 청정지역임을 입증하며 또한 그 후 성주산휴양림은 도로를 닦고 위락시설도 갖추고 있어 관광명소로 자리잡아 가고 있으며 우거진 숲과 맑은 물이 감도는 구곡계곡은 선경을 연상케하고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는 가을단풍은 대자연의 신비를 만끽케 한다.

저곳에서 만수산과 성주산 연계 종주 산행을 위해 왔다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에 발목이 잡혀 만수산 비로봉만 어렵게 다녀왔던 아픈 추억을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옛 추억을 생각하며 조만간 다시 내려 와 멋진 화장골 환종주를 그려 보는 시간은 참으로 즐겁고 환상적이지만 언제 다시 그 기회가 올련지는 미지수이기에 아쉬운 시간이기도 하다.

잠시 더 간벌지대를 따라 걸어가니 저 앞쪽으로 성주산 장군봉이 우뚝 솟아 있고 그 좌측으로 583봉쯤 되어 보이는 봉우리도 결코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는 듯 하다.

그렇게 한동안 진행하니 첫번째 헬기장이 잡풀에 그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고 다시 평이한 벌목 등로를 따르니 두번째 헬기장을 지난다.

계속 이어지는 등로 좌측의 화장골을 내려다 보며 진행하니 무명봉의 분재형 소나무 한그루가 질긴 생명력을 이어가며 자라고 곧이어 가파른 암릉을 지나 좌측으로 심연동 하산 갈림 삼거리 이정표를 만난다.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의 한마을로서 성주골 동쪽으로 깊은 골짜기에 있는 마을을 심연동이라고 부르는데 깊은 골짜기에 마을이 조성되었으므로 붙은 마을이름이다.

 

 

심연동 갈림 이정표를 지나 완만하게 오르니 벤취쉼터가 나타나고 그 쉼터 공터를 지나 멋진 등로를 타고 전진하니 바위 암릉구간이 앞을 막는다.

어려운 구간이 아니기에 조심하며 통과하니 등로 우측으로 무명봉이 보이는데 좌측 사면 등로가 나 있어 무명봉으로 오르니 아무 표식도 없는 그저 그런 무명봉이다.

멋진 소나무 한그루를 지나 다시 나타나는 암릉 구간을 넘으니 등로 좌측으로 만수산 방향의 조망이 터지더니 곧이어 등뒤쪽으로 지나온 성주지맥 마루금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오랫만에 만나는 아름다운 마루금이기에 한참을 머물며 많은 사진으로 남기고 그 봉우리 하나 하나에 이름을 맞춰보는 시간은 참으로 황홀하기만 하다.

577봉 넘어 문봉산이 보이고 그곳을 지나면 성태산의 만세봉과 천세봉이 아련하게 멀어져 있다.

 

 

등 뒤로 펼쳐진 아름다운 마루금을 조망하며 조금 더 진행을 하니 안전로프가 달려있는 암벽이 나타나고 조심하며 오르니 다시 등로 우측으로 멋진 조망바위가 보여 그곳으로 올라 조망을 즐겨 본다.

방금 전 바라 봤던 성주지맥을 가운데 두고 우측으로는 부여의 만수산 줄기가 시원하고 좌측으로는 금북정맥의 제일 남쪽 봉우리인 백월산이 박무속에서도 그 존재감을 알려 온다.

그 백월산 청라면과 나운리 그리고 월티 저수지가 내려다 보이는데 박무로 인해 아쉬움이 짙게 남아 있는 시간이다.

이곳 나원리는 백제때는 신촌현에 속했었는데 신라때는 신읍현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보령현에 속했었다.

조선때에도 보령군에 속했으며 조선말엽에 보령군 청라면의 구역으로서 청라원이 있었으므로 청라원 또는 청라동이라 하였는데 1914年 행정구역 개혁때 원우리, 은선동, 상중리, 지천리, 월치리, 주평리, 정산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라원리라 하였다고 전해지는 마을이다.

 

 

멋진 조망을 바라본 후 다시 오르니 무명봉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잠시 배낭 내려 놓고 물한모금 마신 후 출발을 해 본다.

오늘 아침부터 제법 무더위를 느끼기 시작하고 벌써 준비한 물 1리터를 거의 마셨을 정도로 산행에 어려움을 느끼는 시간이기도 하다.

바위 암릉을 지나 계속 진행을 하니 갑자기 눈 앞에 안내판 2개와 역암의 커다란 바위가 앞을 가로 막는데 역암을 읽어 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되어 있다.

성주산 역암은 퇴적암의 일종으로 크기가 큰 자갈과 그 사이를 채우는 작은 모래알갱이 등으로 이루워진 암석이다.

성주암 역암은 고생대초(약5억8천만년전)부터 바닷속에 퇴적한 퇴적층이 한반도에서 지질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인 중생대(약2억2천5백만년전)에 조산운동으로 융기하여 형성되였으며 현재 성주산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적혀 있고 그 옆에는 산의형성을 안내한 안내판도 보인다.

바다였던 곳이 오랜 세월 변해 이렇게 높은 산이 되였다니 자연은 참으로 신비하기도 하고 그 형성과정이 조산운동을 거쳤다고 하니 장구한 세월 얼마나 많은 변화들이 있었는지 가늠하기 조차 어려운 자연 현상들이다.

 

 

역암지대를 지나 오르니 다시 좁은 공터에 도착을 하고 그곳부터는 성주산 장군봉으로 오르기 위한 안전로프의 암벽과 잠시 씨름을 해야 한다.

암벽을 타고 조심하며 오르니 드디어 오늘 가장 높은 봉우리이며 이곳 성주지맥이란 이름을 붙이게 한 성주산 장군봉에 도착을 해 잠시 배낭 내려 놓고 셀카 놀이와 주위 조망을 살피는 시간을 가져 본다.

해발고도 677미터인 성주산은 오서산과 함께 보령을 상징하는 명산으로 예로부터 성인과 선인이 많이 살았다 하여 성주산이라 부르고 있다.

성주산에는 질 좋은 소나무를 비롯하여 느티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때죽나무, 고로쇠나무 등이 자생하고 있는데 한낮에도 컴컴할 정도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성주산 계곡의 맑은 물이 흐르고 있어 더할 나위 없는 휴양지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특히 이 일대의 계곡은 예로부터 화장골이라 하여 그 수려함이 잘 알려진 곳으로 성주산 일대에 모란형의 명당8개소(성주8묘)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이곳에 감추어져 있다하여 화장골이란 이름이 붙여졌으며 지금도 명당을 찾으려는 이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기도 하다.
4킬로미터 이르는 우거진 숲과 맑은 물이 감도는 비경은 가히 선경을 연상케 하면서 자연미의 극치를 이룬다.

또한 이곳 장군봉은 고려 마지막 공민왕 시절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 말 충신중의 한명인 감성우 장군과 관련되어 붙여진 이름으로 이 산객에게는 직속 선조이기에 더욱 뜻깊은 곳이기도 하다.

 

 

잠시 배낭 내려 놓고 주위 조망을 살펴보지만 박무로 인해 바로 앞도 보이지 않으니 아쉬운 시간이다.

방금 전 지나 온 마루금 방향으로 이정표를 담아 사진에 담아 보니 바로 앞 봉우리 이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정상석 옆으로 올라 주위를 둘러 봐도 전혀 보이는 것이 없어 지도를 펴 놓고 방향 따라 보이지 않는 산 이름만 불러 보는 시간이다.

마지막으로 삼각점을 사진에 담고 다시 아쉬운 마음 돌리며 배낭 메고 내리막 등로를 따라 지맥 산행을 이어가 본다.

 

 

내리막 등로가 한동안 이어지지만 크게 어려운 구간은 아니기에 여유롭게 내려가 본다.

잠시 내려가다 등로 우측을 보니 낭떨어지 절벽이 펼쳐져 있고 나뭇가지 사이로 청라면과 그 뒤로 희미하게 금북정맥 마루금과 오서산이 보이지만 박무로 인해 선명하지 않아 카메라를 다시 조작해 어렵게 한장 건져 본다.

사진 정중앙 저 멀리 희미하게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오서산이 오늘 담았던 유일한 오서산의 사진 정도 될듯 싶다.

 

 

다시 부드러운 내리막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등로 우측으로 깊은 골짜기 앞에 바위 암릉이 보이고 사진에 한장 남기고 진행해 이제 박달나무 군락지를 통해 걸어 본다.

아름다운 아침 햇살이 박달나무 군락지로 들어오고 그 아름다운 등로를 따라 전진하니 등로 우측으로 은선동냉풍욕장 갈림 삼거리 이정표가 서 있다.

이곳 은선동냉풍욕장은 자료가 많지 않는데 이 역시 석탄광산을 개조해 만든 냉풍욕장으로 의평리냉풍욕장과는 가까이 근접해 있는 곳이지만 다른 냉풍욕장으로 의평리쪽 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냉풍욕장이다.

 

 

         

 

은선동냉풍욕장은 부모님 살아 계실 때 고향집에 내려 와 몇번 들렸던 곳이기에 그 추억에 잠겨 보는 시간이다.

그곳 지나 잠시 더 전진하니 작은 바위 몇개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무명봉을 넘는다.

잠시 멋진 초록 등로를 따라 안부로 내려갔다 오르니 금새 등로 우측으로 청라면사무소 하산 갈림 이정표가 서 있는 헬기장에 도착을 한다.

헬기장에는 성주산등산로종합안내도와 산을 보호하자는 안내판이 서 있다.

보령시의 동북방향에 위치한 청라면은 총면적의 75 %가 산지로 이뤄진 마을로 보령의 대표적인 청정지역으로 충남의 명산 오서산과 성주산에 둘러 쌓여 주민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 이다.

 

 

그 헬기장을 지나 내려가니 헬기장은 돌들로 석축을 쌓은듯 보이는데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으니 아쉽기만 하다.

그곳을 지나자 마자 등로 우측으로 보령냉풍욕장 하산 갈림 삼거리 이정표가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의평리냉풍욕장이다.

보령시의 청라면 자료를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되어 있다. 

산중턱에 자리잡은 냉풍욕장의 입구에 들어서면 외부 기온이 섭씨30도를 넘어서도 실 내에는 섭씨12도의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냉풍체험장’이라고 적힌 안내판을 따라가다 보면 어디선가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느껴지기 시작하는데 한 발짝 더 나아가 냉풍이 시작되는 갱도 입구로 들어서면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바람이 서늘하다.

냉풍욕장의 바람은 더운 공기가 위로 올라가고 차가운 공기는 아래로 내려가는 대류현상 때문. 이 때문에 바깥 기온이 높을수록 냉풍욕장의 바람은 더욱 세차진다. 자연이 만들어낸 천연에어컨인 셈이다.

냉풍욕장 내 광장 옆 물길도 놓칠 수 없는 피서 명소인데 탁족을 체험하고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이곳은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는 것만으로도 무더위가 잊혀진다.

충남 보령시 농업기술센터에서 관리하는 보령냉풍욕장은 1989년 석탄합리화조치에 의해 폐광된 후 여름철 냉풍을 이용해 양송이를 재배했던 양송이 재배단지였으며 이후 일반인에 개방된 것은 1995년부터다.

이곳에선 냉풍욕장으로 개방하는 갱도를 포함해 총 17개의 갱도에서 양송이를 재배하는데 그 덕에 양송이 회 무침과 부침개 등 다양한 양송이요리를 별미로 즐길 수 있고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도 있다.

보령냉풍욕장은 7~8월까지만 일반인에 개방하는데 이용 시간은 오전 9~저녁 6시까지이며 입장료는 무료다.

한동안 부드러운 등로를 따라 진행하니 그늘진 활엽수 등로를 만나고 곧이어 등로 우측으로 희미한 오서산을 다시 한번 조망해 본다.

 

 

다시 칼날 등로를 따라 암릉을 지나니 부드러운 등로가 열리더니 좁은 공터봉이 나타난다.

앞으로 올라야 할 521봉이 나뭇가지 사이로 올려다 보이는 등로를 따르니 등로는 다시 내리막으로 이어지더니 금새 안부 지나 완만하게 오르막 등로로 변한다.

해발고도 463미터란 이정목을 지나 그늘진 부드러운 등로를 타고 오르니 좁은 공터 위에 이정표가 서 있는데 살펴보니 해발고도 521미터에 성주산 왕자봉까지는 이제 3.8 Km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가 반가운 이정표이다.

 

 

해발고도 521봉 이정표를 지나 조금 더 진행하니 바위틈으로 자라고 있는 소나무 한그루가 발걸음을 붙잡아 사진 한장 남겨 본다.

다시 바위 암릉구간을 지나 멋진 소나무를 통과하니 등로 우측에 스테인레스 스틸로 만들어진 8361부대장의 장군봉 안내판이 서 있다.

이곳에서 잠시 고려말 김성우 장군에 대한 자료를 찾아 보기로 한다.

고려말 보령지역은 왜구들이 자주 출몰하여 노략질과 방화 그리고 납치 등 백성들을 괴롭혀 조정에서 김성우 장군을 도만호 겸 초토사로 임명하여 왜구를 퇴치토록 하고 백성을 위로하도록 하여 큰 공적을 세웠으나 왕권이 바뀌면서 불사이군의 정신으로 이곳에 남아 보령지역의 광산김씨 입향조가 되었다.
김성우 장군에 대한 기록은 동국여지지와 신안읍지 및 여지도서 그리고 충청도읍지 등 여러 곳에 행적이 실려 있다.
특히 여지도서와 충청도읍지에는 장군의 업적과 지명유래 등이 기록돼 있다.
여기에는 장군의 본관은 광산이고 시중 김주성의 증손이며 판도판서 김윤장의 아들로서 고려말에 도만호 초토사로 임금의 명을 받들어 왜적을 토벌했다.
이 지역 지명도 군대가 바닷가에 들어왔다는 군입포라는 지명과 적의 시체가 개미떼 같이 쌓였다는 까닭에 의평리라고 하는 등 현재 사용하는 여러 곳의 지명이 이때부터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한 김성우 장군 전적관련 기념비가 대천해수욕장 시민탑광장에 도만호 김성우 장군 관암사적비를 비롯하여 대천항에 김성우 장군 전첩사적비와 이외에도 김성우 장군 진수유허비 및 김성우 장군 왜구소탕비 등 보령의 여러 곳에 산재해 있다.

이곳에서 허기를 느껴 잠시 준비한 아침식사를 하고 출발하기로 하는데 시간을 보니 아침 8시 30여분을 지나고 있다.

 

 

장군봉 안내판 앞에는 왕자봉까지 3.5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도 서 있다.

식사 후 다시 배낭 메고 출발하니 등로 옆 거목의 소나무엔 옛날 송진을 채취했던 아픈 역사의 흔적이 산객의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다시 부드러운 등로를 따라 안부로 내려갔다 오른 후 소나무 군락지를 따르니 이곳에도 바위틈에 뿌리를 박고 어렵게 살아가는 소나무 한그루가 눈길을 잡는다.

큰 어려움 없이 소나무와 잡목이 어우러진 등로를 따르니 저 멀리 오늘 처음으로 만나는 산객 한분이 다가오는데 인사를 건네니 두서없이 매일 10 Km씩 이곳 성주산에 올라 체력단련을 하고 계시다며 잠시 자랑을 늘어 놓으신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보령의 산꾼으로서 초이라는 민박집을 운영하면서 백두대간 산행이 꿈인데 보령에는 그런 산행을 하는 팀이 없어 아쉽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신다.

6월말까지 200 여 Km를 더 걸은 후 여름철 해수욕장 성수기이기에 돈 벌기 위해 산행을 중단하고 9월이 되어야 다시 산행을 할 수 있다며 진한 아쉬움도 나타내기에 사진 한장 남겨 본다.

부디 평생의 염원인 백두대간 산행을 꼭 이루시길 바라며 보령에 내려가게 되면 초이민박집에 꼭 한번 들려 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다짐해 본다.

 

 

 

보령 산꾼인 초이민박집 아저씨와 많은 이야기 나눈 후 다시 천천히 오르막 등로를 오르니 등로엔 바위 암릉들이 산재해 있다.

조금 더 오르니 해발고도 495미터란 이정목을 만나고 곧이어 해발고도 519미터의 향천봉에 도착을 하는데 이정표 옆에는 벤취 쉼터 2개가 눈에 띈다.

이제 왕자봉까지는 2.8 Km로 거리가 많이 줄어 든 모습이다.

이곳 향천봉은 산 아래에 있는 향천리에서 붙여진 이름은 아닐까 생각해 보며 향천리를 소개해 본다.

백제때는 신촌현에 속했었고 신라때는 신읍현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보령현에 속했었다. 조선때에도 보령현에 속했으며 조선말엽에는 보령군 청라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에 따라 임천동, 분향리, 창대리, 증성리, 만천리, 평정리 일부를 병합하여 분향과 임천의 이름을 따서 향천리라 하였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을 통합하여 보령시 청라면 향천리로 되었다.사진 몇장 남기고 다시 향천봉을 출발해 본다.

 

 

 

향천봉을 지나니 키 작은 관목의 푸르름과 키 큰 적송이 멋진 조화를 이루는 등로가 나타나고 그 등로를 타고 무심으로 걸어 보는 시간이다.

그렇게 멋진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이제 왕자봉까지 2.4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지나고 한국인의 삶을 닮아 있는 끈기의 상징인 소나무 군락지가 보이고 그 군락지를 따라 걸어 본다.

벤취쉼터를 지나 이어지는 소나무 군락지를 따르니 이제 왕자봉까지 1.7 Km 가 남아 있다는 이정표도 지난다.

돌벤취 4개와 나무 벤취 1개가 혼재한 쉼터를 지나니 다시 완만한 오르막 등로가 이어지고 그 오르막 등로를 오르니 등로 옆에 이상하게 생긴 바위가 나타나 사진에 담아 본다.

이제 제법 등산객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지도를 살펴보니 보령시 대천읍이 멀지 않기에 왕자봉을 오르는 등산객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나타나는 바위 암릉구간을 지나 평이한 등로를 따르니 멋진 소나무 군락지가 다시 펼쳐진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등로 좌측으로 낮은 분봉을 가진 두기의 묘지를 통과하고 바위 너덜지대를 통과하니 금새 왕자봉까지 0.6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만난다.

다시 멋진 소나무 등로를 따라 걸어 오르니 헬기장이 보이고 두번째 헬기장을 지나 성주쉼터 갈림 이정표를 지난다

이제 성주산 왕자봉까지는 0.1 Km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가 반가운 시간이다.

조금 더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금새 작은 정상석과 큰 돌탑 그리고 벤취 쉼터들이 있는 왕자봉에 도착을 하는데 제법 많은 등산객들이 올라 와 쉬고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 온다.

 

 

배낭 벗어 벤취 한쪽에 놔 두고 등로 우측을 살펴보니 저 아래 보령시의 대천시내가 시원하게 내려다 ㅗ이지만 박무로 인해 시야가 제한적이다.

성주산 산이름은  바로 이 성주사에서 유래됐는데 성주사지에서 북동쪽(왼쪽) 먹방골과 오른쪽 심원골 사이로 마주보이는 피라밋처럼 솟은 능선이 성주산 남서릉이다.
성주사지에서 오른쪽 심원계곡 안으로 약 1 Km 들어서면 백운교가 나타나고 백운교를 건너 왼쪽 외딴 민가 앞으로 갈라지는 좁은 도로 입구에 백운사 안내판이 있다.

안내판에서 왼쪽으로 굽돌아 이어지는 다소 가파른 오솔길을 따라 5분 올라가면 염소막이 나오고 염소막 이후로는 소나무와 잡목들이 숲터널을 이루며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아대고 있는 숲속 오솔길로 10분 오르면 해발 360 미터 지점에 위치한 백운사 경내로 들어선다.
백운사는 통일신라시대 무주무염(801-888) 스님이 창건했다 전해지는데 창건 당시에는 성주산의 옛 이름인 숭암산 이름을 따서 숭암사로 했다가 이후 사찰이 높은 곳에 위치해 흰 구름 속의 사찰과 같다고 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부르게 됐다.
당시 성주산문의 일개 수행도량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성주사와 함께 전소됐다가 조선조 순조 25년(1925년) 중건됐는데 건물로는 대웅전과 요사채 한 채가 전부이고, 고려 때 정연당스님의 부도가 남아 있다.

또한 몇번인가 들렸던 성주사터에 대한 자료를 찾아 보니 성주산 아래 골짜기 들머리에 넓은 성주사터가 있다.

신라 말 고려 초 9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문의 중심 사찰인 성주사가 있던 자리로 불교 역사상 중요한 곳으로 백제 법왕 때 오합사라 부르던 절터에 신라 문무왕 때 낭혜화상(무염선사)이 크게 중창하면서 성주사라 했다.
넓이 약 8800여 평에 동서 200여미터 남북 142미터인 이 터에는 국보 제 8호이자 고운 최치원의 사산비의 하나인 낭헤화상백월보광지탑비를 비롯하여 보물, 석등, 석탑, 금당지, 강당지 등 유물 유적 등이 남아 있다.

 

 

한동안 성주산 왕자봉에 머물며 주위 조망도 즐기고 흐르는 땀방울도 식히며 물 한모금 마시고 천천히 넓은 등로를 타고 내리막 등로를 따라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이제 옥마정까지는 1.7 Km이기에 큰 어려움 없이 내려가 바래기재의 옥마정으로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내려가니 왕자봉에서 0.5 Km 지나왔고 우측으로 한내여중 갈림 삼거리 이정표가 서 있고 그 옆에는 옥마산등산로종합안내도가 서 있다.

이제 옥마산 정상의 인공 구조물들이 소나무 사이로 언듯 보이기에 어렵게 사진 한장 남겨 본다.

대천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니 처음에는 물이 좋은 큰샘이 있어 큰샘계라고 하였으나 이 후 더많은 물이 넘쳐 흐르라는 뜻에서 더너물이라 부르다 8.15해방 이후 대천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 이정표를 지나니 제법 오르는 등산객들의 모습이 보이고 등로는 아름다운 소나무 군락지로 변해 있어 편안하게 내려가 본다.

 

 

한동안 내려가니 운동시설이 설치된 장소에 소나무 상처에 대한 설명판이 보이는데 일제강점기 말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군사용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소나무에서 송진을 채취하기 위해 낸 상처가 이리도 오랫동안 흔적을 남기며 아품을 대변하고 있다는 설명이 가슴을 아프게 만든다.

다시 좌측으로 성주쉼터 갈림 이정표를 지나 부드러운 소나무 숲길을 걸으니 벤취쉼터가 보이고 곧이어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바래기재의 쉼터인 사각정자에 도착해 물 한모금 마시며 그곳에서 쉬고 있는 어르신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다.

그곳 우측으로 도로 따라 200여 미터 내려가면 옥마정이 있는데 오늘은 보이는 조망이 없기에 다녀오는 것을 포기하고 무더위를 피해 잠시 더 쉬어 가기로 한다.

보령 시가지를 동남쪽으로 둘러서 있는 산이 성주산과 옥마산이다. 
봉우리가 옥마봉인데 이곳에 서면 보령시가지와 관광 특구인 대천, 무창포해수욕장, 죽도관광지등 멀리 서해까지 아기자기하게 바다를 수놓은 섬들이 눈에 들어온다

성주터널이 생기기 전 성주와 부여쪽으로 가려면 옥마산을 통과하는 구절양장 고갯길을 넘어야 했는데 비포장 도로인 옛길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오르다 보면 보령시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정자가 옥마정이다. 
옥마정에서 성주로 향하는 내리막 길에서 다시 산을타고 오르면 보령 행글라이딩과 패러글라이딩 활공장과 만나는데 이곳은 항공 스포츠를 즐기는 이들에게 새로운 메카 구실을 하는곳이다.

 

 

많은 선답자들이 이곳 바래기재의 옥마정 있는 곳에서 한구간을 마무리하였기에 이 산객도 마무리를 하려고 시간을 보니 이제 아침 10시 40여분을 지나고 있기에 쉬었다 조금 더 걸어 이어니재까지 가기로 한다.

옆지기에게 이어니재에 대해 설명을 해주고 오후 3시 전후로 만나기로 하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지고 이어가는 산행에 큰 부담이 없지만 결국 잔미산 부근에서 탈진이 될 정도의 극심한 고통에 빠지고 만다.

사각정자인 바래기재 쉼터에서 한동안 쉬며 흐르던 땀방울을 식힌 후 도로를 따라 좌측으로 오르니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고 그 옆에는 옥마산등산로종합안내도와 바래기재 설명판과 명천폭포에 대한 설명판이 서 있다.

이곳에서 2차선 포장도로 우측으로 나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옥마산 방향으로 들어 진행한다.

옥마산과 성주산이 이어지는 정상능선에 바래기재라는 고개가 있다.

이 고개는 아주 먼 옛날부터 성주면과 보령시내(대천)를 연결해주는 통로 역할을 하다가 성주터널이 생기자 순수관광도로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옥마산과 성주산으로 오르는 등산로롤 이용되고 있다.

 

 

삼거리 갈림길에 서 있는 이정표를 보니 옥마산 정상까지는 이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2.7 Km를 걸어 올라야 하니 한여름 찜통 더위에 여간 곤혹이 아니다.

중간 중간 한겨울 눈이 내리면 살포하라는 모래주머니를 저장한 작은 창고가 설치되어 잇고 그렇게 잠시 더 오르니 등로는 좌측 시멘트 도로를 버리고 우측 능선으로 나 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능선으로 들어가니 얼마가지 않아 등로는 다시 시멘트 도로를 만나는데 살펴보니 돌아 오르는 시멘트 도로를 가로 질러 나 있는 짧은 능선 등로였다.

한동안 뜨거운 태양열을 받으며 오르니 넓은 공터가 나타나고 좌측 아랫쪽으로 비포장 임도가 나 있는데 차량 통제용 바리게이트가 설치되어 있고 그 옆에는 임산물 반출금지란 안내판이 붙어 있다.

성주암 갈림 이정표도 지나고 계속 뜨거워진 시멘트 도로를 따라 옥마산 정상으로 향한다.

 

 

다시 한동안 오르니 등로 옆에 대영사 갈림 이정표가 나타나고 옥마봉까지 이제 0.5 Km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가 반가운 시간이다.

잠시 더 오르니 차량 통제용 바리게이트가 설치되였던 지점을 지나고 이제 옥마봉까지 0.3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통과하니 시멘트 도로 위 저 멀리 옥마산 정상부를 차지하고 있는 이동 통신탑들이 여러개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옥마산 정상부에 가까이 올라왔음을 느끼는 시간이지만 온 몸은 이미 뜨거운 열기로 인해 익을듯 뜨거워져 있다.

 

 

앞에 보이는 인공 송전탑을 보면서 조금 더 오르니 등로 우측에 옥마산이란 커다란 이정석이 서 있고 그쪽 방향으로 계단이 나타나고 그 옆에는 또 다른 안현구추모비와 행.파라그라이딩 이륙장으로 가는 화살표 표시가 보인다.

많은 행.글라이딩을 즐기는 사람들로 붐비기에 그곳 활공장은 들리지 않고 옥마산 정상부로 오른다.

보령시내로 들어서면 병풍처럼 동남방으로 길게 뻗어 내린 해발 600에서 700미터 규모의 커다란 산줄기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이 산줄기는 차령산군의 끝 부분으로 성태산, 문봉산, 성주산, 옥마산, 잔미산으로 연결되어 보령시 웅천읍 대천리까지 이어지다가 화락산을 한 점으로 남기고 서해바다로 사라진다.

이중 해발 601미터의 옥마봉을 주봉으로 하는 옥마산은 보령시 명천동과 남포면을 호위하는 모습으로 우뚝 솟아있는데 이 곳에 통신 중계탑이 설치되어 있어 누구든지 쉽게 찾을 수 있다.

옥마산(봉)이라는 이름은 신라 비운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과 화살 맞은 옥빛 말의 전설과 관련하여 전해지고 있으며 옥마봉에는 행글라이더와 패러글라이더 이륙장이 있어 새처럼 날며 산과 바다의 조화된 아름다움을 즐기려는 항공스포츠 동호인들이 전국에서 찾아오는 이름난 곳이기도 하며 활공장 옆 솔숲에는 휴식공간이 마련돼 있다.

보령시에서는 매년 전국 규모의 활공 대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대천항공클럽에 문의하면 자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표지석에는 옥마산의 유래를 자세하게 적고 있다.
후삼국 시대 견훤의 세력하에 있던 이 지역에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성주사의 주지와 신라의 국운을 상의하기 위하여 찾아 만난 후 옥마산 부근에 있을 때 부지불식간 한 필의 옥마가 나타나 경순왕의 앞길을 가로막으며 울부짖고 방해하므로 견디다 못하여 경순왕을 따르던 신라의 한 장수가 화살을 쏘아 옥마를 죽게 하였는데 옥마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지않고 하늘 높이 치솟다 북쪽방향으로 사라졌다.

그 후 경순왕은 밤마다 옥마의 악몽에 시달려 결국 고려에 항복하였다 하여 경순왕의 갈림길을 시험한 옥마가 죽은 지역이라 하여 옥마산이라 부른다고 한다고 적혀 있다.

 

 

옥마산 이정석을 지나 계속 시멘트 도로를 따라 오르니 도로 좌측에 반사경이 보이고 잠시 그 앞으로 가 사진 한장 남겨 본다.

그 반사경을 지나니 도로 좌측에 옥마산 중계소란 빗돌이 서 있고 그 바로 윗쪽에 옥마산등산로종합안내도가 서 있다.

그 안내도 위에는 좌측으로 말재까지 3.3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서 있고 그 뒤에는 녹슨 철대문과 철조망이 앞을 가로막는다.

옥마봉은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성주사 주지와 신라의 국운을 상의하고 귀향하던 중 옥마산 부근에 머무르고 있을 때 한필의 옥마가 나타나 왕의 앞길을 막고 방해하여 장수가 화살을 쏘았는데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지않고 하늘 높이 치솟다가 북쪽방향으로 사라졌다. 그 후 경순왕은 옥마의 악몽에 시달려 항복하였다하여 경순왕의 갈림길을 시험한 옥마가 죽은 지역이라 하여 옥마봉이라 부른다.

 

 

옥마봉 정상에서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도로 좌측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조망을 바라본다.

오랫만에 보는 조망에 절로 흥이 나는 시간이지만 너무나 뜨거워진 기온에 온 몸이 땀범벅이 되어 버린다.

부여와 경계를 이루는 만수산과 아미산 그리고 그 줄기와 이어진 능선이 참으로 아름답게 펼쳐지며 오랫만에 눈의 호강을 시켜주고 있다.

봉화산 좌측으로 이어지는 우각산도 저 멀리 가물거리는 풍경에 더운줄도 모르고 즐기고 있다.

 

 

한동안 옥마봉 정상의 말재 이정표에서 조망을 즐긴 후 녹슨 철대문 좌측 등로를 타고 내려가 우측 철조망을 옆에 두고 잡풀을 헤치며 진행을 하니 등로 우측으로 녹슨 철보망이 따라 온다.

한동안 녹슨 철조망을 우측에 두고 진행하니 어느 순간  녹슨 철조망을 우측으로 보내고 등로는 좌측 능선 방향으로 벗어나고 곧이어 해발 고도 580미터란 이정목이 서 있는 헬기장을 만난다.

 

 

 

헬기장을 지나 소나무와 자작나무 군락지를 지나니 해발고도 470미터란 이정목을 지나고 한동안 부드러운 등로를 따라 걸어 본다.

가끔 나타나는 바위들은 눈요기감으로 생각하며 통과하니 해발고도 473미터란 이정목이 서 있는 벤취쉼터에 도착을 하는데 한쪽에는 말재까지 이제 2.6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도 보인다.

그 가운데엔 거대한 소나무 한그루가 두가지를 하늘로 향하게 뻗어 오르며 또 다른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그 이정표를 지나면서 부터는 큰 고도차도 없이 초록 빛 등로가 지루하게 이어진다.

해발고도 477미터란 이정목을 지나 암릉을 넘으니 해발고도 484미터란 이정목이 다시 나타난다.

그렇게 지루하게 걸을쯤 등로 우측 조금 높은 곳에 벤취 하나가 놓여있고 무심코 지나치다 살펴보니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아닐 수 없어 잠시 올라가 앉아 본다.

산행을 접고 시원하게 샤워한 후 이곳 벤취에 앉아 책이나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한 후 다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본다.

 

 

벤취 쉼터를 지나 다시 지루한 등로를 따라 무작정 걸어 본다.

교통호 같은 지역도 지나고 초원의 목장지대와 같은 등로도 통과하며 약간의 바위 너덜지대도 지난다.

그렇게 다시 한동안 걸어가니 말재까지 1.6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지나 석탄처럼 보이는 등로도 통과한다.

이제서야 이곳 보령이 옛날에는 석탄으로 유명했던 사실을 기억하며 다시 한번 더 유심히 석탄 빛깔의 등로를 살펴본다.

약간의 바위 너덜 구간을 지나 멋진 소나무와 홀엽수가 교대로 등로를 채워주는 구간을 넘으니 그림같은 초원의 등로가 앞을 밝혀주고 있다.

 

 

현위치 388미터란 이정목을 지나 무명봉을 우측 사면 등로로 우회하니 이제 말재까지 0.7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만나고 곧이어 등로 좌측으로 멋진 전망바위를 만나 잠시 쉬어 가기로 한다.

남아 있던 빵과 방울토마토로 호기도 달래며 목마름도 달래보는 시간이기에 오랫만에 등산화 벗어 놓고 풍욕까지 즐겨 본다.

바위 앞으로 우각산과 아미산 그리고 좌측 저 멀리 만수산이 지난날의 추억을 꺼내며 다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지만 오늘은 할 이야기가 많지 않다.

한동안 쉬면서 허기를 달래고 나니 몸이 훨씬 좋아지고 이제부터 다시 룰루랄라 콧노래를 불러보는 시간이다.

 

 

한동안 쉬어서 그런지 전망바위를 지나면서 부터는 몸이 좋아져 산행속도가 제법 붙는듯한 느낌이다.

잠시 더 내려가니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묘지 한기를 지나 내려가니 금새 당산나무 한그루와 이정표 그리고 안내판이 서 있는 말재에 도착을 한다. 

말재가 있는 보령 남포면 옥동리는 마한때는 만로국에 속한 지역이었다가 백제 때는 사포현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남포현에 속했었다.

조선때에도 남포현에 속했으며 조선말엽엔 남포군 군내면의 지역인데 1914年 행정구역 개혁에 따라 교촌 동도리와 동리 서리의 각 일부와 북내면의 옹암리 일부를 병합하여 뒤에 있는 옥마산과 동도의 이름을 따서 옥동리라하여 보령군 남포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되어 보령시 남포면이 되었다.

말재고개는 읍내에서 미산면으로 넘어가는 큰고개를 말재 또는 마티라고 부르는데 옥마산의 줄기에 고개가 있다해서 마티 또는 말재라고 부른다고 전해진다.

잠시 몇장의 사진을 담은 후 다시 말재를 지나 오르막 등로를 타고 계속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말재에서 우측으로는 남포면 읍내리로 하산 할 수 있으며 좌측으로는 보령공설묘지가 있는 개화리 방향으로 하산할 수 있는 갈림 사거리이다.

말재를 지나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따라 오르니 금새 삼각점이 나타나는데 살펴보니 해발고도 317미터봉으로 보령 456이란 삼각점이 박혀 있다.

사진 한장 남기고 조망도 없기에 다시 곧바로 317봉을 떠나 그늘속으로 몸을 숨긴다.

 

 

317봉 삼각점을 지나 진행하니 해발고도 321미터란 이정목을 만나고 한동안 부드러운 초록 등로를 따르니 등로 좌측으로 송전탑 58번이 서 있다.

그 송전탑 밑을 통과해 오르니 소나무와 푸른 잡풀이 등로를 채우는 아름다운 마루금이 펼쳐지고 조금 더 오르니 앞으로 올라야 할 봉화산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다.

이제 말재에서 0.4 Km 지나왔고 잔미산까지 3.3 Km 남아 잇다는 이정표를 지나 한동안 부드러운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오르니 금새 말재에서 0.9 Km 지나왔고 잔미산까지 2.8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다시 만난다.

그곳을 지나 바위지대를 지나니 해발고도 312미터란 이정목을 통과하고 말안장을 닮아있는 나무를 만나니 금새 잔미산까지 2.4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다시 만난다.

다시 한동안 지루한 등로가 이어지고 그렇게 무심으로 걷다보니 말재에서 1.8 m 지나왔고 잔미산까지 1.9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만나는데 그곳에 봉화산이란 정상 이정판이 붙어 있다.

하지만 그 어느곳에서도 이곳 보령의 봉화산에 대한 자료를 찾을 수 없어 아쉽기만 한데 외연도의 봉화산에 대한 자료만 몇개 찾아 볼 수 있었다.

  

 

특별한 조망도 없고 자료도 없기에 봉화산은 사진 한장 남기고 곧바로 출발을 해 본다.

다시 지루하게 이어지는 초록의 잡목구간을 걸어가니 벤취2개가 놓여있는 쉼터를 통과하고 멋진 소나무들이 도열해 있는 등로도 만난다.

잠시 안부같은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수부리 갈림 삼거리 이정표를 만난다.

수부리는 백제때는 사포현에 속했었다가 신라때는 소포현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남포현에 속했었다.

조선때에도 남포현에 속해서 조선말엽엔 남포군 고읍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상부리, 하부리, 수안리 일부를 병합하여 수안과 부당의 이름을 따서 수부리라 하여 보령군 웅천면에 편입되었다

좌측 아래에응 수부리 새터마을이 내려다 보이는데 불근댕이 뒤쪽으로 새로된 마을을 새터라고 부른다.

불근댕이 뒤쪽으로 자리해서 새로 마을이 생겼다하여 새터라고 부르는데 이 마을을 상부리 또는 신기라고도 부른다.

 

 

수부리 갈림 삼거리 이정표를 통과해 완만하게 이어주는 오르막 등로를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는 간벌을 했는지 빼곡하던 소나무가 조금은 줄어들었다는 느낌이다.

잠시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등로 좌측의 조망을 즐기며 오르니 잔미산까지 0.6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도 지나 부드러운 등로가 열려있다.

나뭇가지 사이로 언뜻 올려다 보이는 잔미산 정상부를 올려다 보며 오르니 드디어 잔미산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잠시 마음의 갈등을 일으킨다.

몸은 가지 말자고 조르는데 마음은 벌써 잔미산으로 향하고 배낭을 나뭇가지 뒤에 숨기고 빈몸으로 오르는 시간도 몸은 천근만근이 되였다.

옆지기와 딸 아이가 3시 전후로 도착을 한다고 하였기에 잔미산을 들리지 않고 내려가면 너무 일찍 하산할 것 같다는 생각에 오르기는 하지만 오늘은 몸이 말이 아니다.

 

 

잔미산 갈림 삼거리에서 잔미산 정상까지는 고작 300미터인데 지친 몸에 더위를 먹었는지 한발 두발 옮기는 것조차 너무나 힘들고 고통으로 다가오는 시간이다.

그래도 한발 두발 천천히 오르니 정상부 직전에 무인산불감시 카메라가 서 있고 곧이어 잔미산 정상이다.

잔미산 정상에는 작은 정상석과 봉수대 그리고 옥마봉 봉수대 설명판과 삼각점이 보인다.

잔미산은 차령산군의 끝 부분으로 웅천읍 두룡리, 대천리, 성동리, 수부리로 둘러싸인 산으로 웅천읍의 중심이 솟아 있는 높은 산이라 예부터 주민들의 연료 공급지로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지질은 중생대 퇴적암으로 되어 있어 역암과 사암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남포 오석의 산출지이기도 하며 또한 석탄층이 있어 오랫동안 무연탄을 채취하기도 하였다.
꼭대기에는 산성이 있는데 잔미산이라는 이름도 성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성의 고어인 잣에 뫼가 붙어 만들어진 이름이 세월이 흐르면서 변한 것이다.

옥미봉 봉수대는 보령시 남포면 옥서리와 웅천읍 수부리 경계인 잔미산 417m 정상에 위치한다. 조선 전기 남포현은 덕산과 여도점(현재로는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음)에 두 개의 봉수대가 있었는데 조선 후기에 이르러 이 곳 옥미봉 봉수대 하나만으로 설치 운영 되었다. 옥미봉 봉수대는 순천 돌산도 방답진에서 시작되어 한성 목멱산 경봉수로 군사 정보 등을 전달하는 제5로 중 서해안으로 통하는 간봉 중 하나였다. 또한 서해에 나타나거나 침투하는 외적을 관측하여 그 사실을 중앙에 알리는 연변 봉수 구실을 하기도 한 곳이다. 남쪽으로는 10여 Km 떨어진 비인 칠지산 봉수대에 응하고 북으로는 거의 같은 거리의 보령 조침산(보령시 주교면) 봉수대에 응한다. 5개의 연조(아궁이)로 추정되는 흔적이 보이고 1개의 봉돈과 봉수 관련 시설물을 보관하는 20여 미터 둘레의 연대를 쌓아던 터가 남아 있고 그 바깥으로는 이 연대를 보호하기 위한 참호를 설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 잔미산에서의 조망도 좋다고 했는데 오늘은 박무와 뜨거운 열기로 인해 조망은 엉망진창이 되였다.

그래도 봉수대 중간에서 어렵게 서쪽을 바라보니 나뭇가지 뒤 저 멀리 서해바다가 내려다 보이는데 주위 풍경은 전햐 알아 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우측 저 멀리 대천해수욕장이 보여야 하지만 오늘은 전혀 보이질 않고 그저 남포방조제도 보이지 않는다.

강렬한 햇살이 서해 바다에 비춰 붉게 물들어가는 풍경만이 그곳이 바다임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다시 잔미산 정상을 둘러 보고 삼각점을 사진에 담은 후 무인 산불감시 카메라를 통과후 내려가 잔미산 갈림 삼거리에서 숨겨 놨던 배낭을 찾아 이어니재 방향으로 걸어 내려간다.

이어니재까지는 0.9 Km 거리이니 금새 도착할 것이지만 이곳 삼거리에서 내려가는 등로부터가 힘에 겹게 다가온다.

가파른 내리막 등로엔 안전로프가 설치되어 있는데 그 로프를 잡고 내려가는데도 조심스럽게 발걸음이 느려진다.

한동안 내려가니 등로 우측으로 옥서리쪽 비닐하우스 단지가 눈에 들어 오는데 어릴적 이 산객이 살던 고향의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기에 더욱 정겹게 다가오는지도 모를 일이다.

 

 

계속 이어지는 안전로프를 타고 내려가니 점차 경사도가 약해지며 마지막엔 로프가 사라지고 완만한 내리막 등로로 변해 간다.

그 내리막 등로를 따라 조금 더 내려가니 만든지 얼마되지 않은듯한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고 그 비포장 임도를 따라 우측으로 한동안 내려가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비포장 임도 뒷쪽 저 멀리 잔미산 봉우리가 보일듯 말듯 다가온다.

 

 

넓은 수레길 같은 비포장 임도를 따라 내려가니 임도 좌우측으로는 멋진 소나무들이 도열해 산객을 반겨 준다.

한동안 그 비포장 임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내려가니 임도가 좌측으로 내려가는 곳에 성주지맥 등로는 우측 능선으로 나 있고 잠시 그 능선 등로를 따르니 등로는 다시 좌측 등로로 바뀌어 내려간다.

조금 더 내려가니 이어니재 도로 건너 다음 구간 올라야 할 224봉 줄기가 가깝게 올려다 보이지만 크게 걱정할 정도의 높이는 아닌듯 하다.

 

계속 내려가니 등로 옆에 높은 안테나 같은 철봉 하나가 높게 서 있고 그곳을 지나니 절개지 우측으로 21번과 77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4차선 포장도로가 내려다 보이고 우측 저 멀리에는 참전경찰공적비와 만세보령지킴터 빗돌이 보이는데 옆지기가 방금 애마를 몰고 와 주차시키는 풍경이 눈에 들어 온다. 옥서리는 마한때는 만로국에 속한 지역이였다가 백제때는 사포현에 속했으며 신라때는 소포현에 속했었다. 고려때는 남포현에 속했으며 조선때에도 남포현에 속했었다가 조선말엽엔 남포군 군내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발산 사현리, 남리, 동리, 서리의 각일부를 병합하여 옥마산과 서리의 이름을 따서 옥서리라 하여 보령군 남포면에 편입되었다.

이어니재는 남포면과 웅천면을 이어지는 경계고개를 말한다.

이 고개에는 경찰충혼비와 합장묘가 있는데 6.25당시 철도경찰과 괴뢰군이 조우하여 격전을 벌이다 산화한 영혼들을 모시고 있다.

 

 

절개지를 우측으로 돌아 내려가니 드디어 이어니재 4차선 포장도로에 도착을 해 배낭 챙겨 애마에 넣고 등산화 벗어 그곳 화장실 옆 수도에서 세수를 하니 이제사 살 것 같다는 생각이다.

다음 구간 올라야 할 긴 철계단을 사진에 담고 주위 풍경을 살펴보니 이곳 역시 아픈 역사의 숨결을 간직한 곳임을 발견했기에 고개가 숙여지며 숙연한 시간이 되였다.

이년이 무엇이고 전쟁은 또 왜 누구를 위해 해야하는지 ...

앞으로는 그런 전쟁과 이데오르기에 매몰되는 시대가 없기를 간절히 바래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어니재 옆 한쪽에 조성된 참전경찰 충혼탑을 둘러보고 어렵게 성주지맥 첫구간을 무탈하게 마무리 한다.

생각보다 무덥고 높은 기온에 온 몸과 얼굴이 붉게 익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많이 느리지 않게 마무리 할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다.

마지막 구간은 거리도 짧고 고도차도 거의 없기에 오전이면 마무리가 될 것이기에 6월 14일 죽마고우들과의 모임 때 내려 와 마무리를 할 수 있기를 바래 본다.

다시 옆지기와 큰 딸을 태우고 애마를 몰아 시골 고향집으로 돌아 가 정리하고 서울로 복귀할 준비를 하는 동안 샤워 후 누우니 금새 잠이 들고 2시간 가까이 잘 잔 후 저녁 늦게 서울로 복귀하며 간단히 저녁 식사까지 마치니 하루가 참으로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다.

 

옆지기와 딸 아이도 만족하고 이 산객은 2백배 만족한 시골 여행과 산행을 마치고 복귀하니 서울 집은 벌써 무더위로 열대야의 잠못 이루는 밤이 되였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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