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지 : 경상북도 포항시의 호미기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 2015년 03월 07일(토)과 8일(일)-토요 무박 일요일 산행
산행날씨 : 갑자기 기온이 오르며 봄 같이 따뜻한 햇살에 많은 땀을 흘렸던 날씨
산행온도 : 영하 01도에서 영상 11도
산행인원 : 총 19명-3450 온누리산악회 호미기맥 종주대 9명과 구룡포 여행을 위한 기획테마팀 10명과 함께
산행코스 : 성황재(14번 2차선 지방도로)-비포장 임도-무명묘 1기-390봉-무명 바위봉-무명묘 1기-성황당 고개-320봉-산사태지역-403.5봉-57번 송전탑-성황재(성황재와 연동리 이정표)-갈림삼거리(비포장 임도 탈출)-산사태지역-무명묘 1기-갈림 삼거리(좌측)-갈림삼거리(우측)-산사태지역-낙엽 안부-갈림삼거리(우측 연등 버리고 좌측)-이정표(제1기동사격장 10.8 Km, 월산마을삼거리 3.6 Km, 진전저수지 2.4 Km)-시 경계구간 화살표-해병대제1사단 문무대왕로 이정판-경주김공 묘지-가선대부김공묘지2기-만리성재-만리성(427봉)-안부-무명묘 1기-314 전망봉-암벽 전망처-260 암봉-안전 철봉과 로프구간-무명봉-해병대제1사단 문무대왕로 이정판-소나무봉-이정표(제1기동사격장 7.5 Km, 월산마을삼거리 6.9 Km, 산서사격장 0.5 Km)-안부 사거리-일출-묘봉산 갈림삼거리-석남사 갈림삼거리-묘봉산(361.5봉)-무명묘 1기-바위 너덜지대-330 무명묘지봉-이정표(제1기동사격장 3.5 Km, 월산마을삼거리 10.9 Km, 방산저수지 0.6 Km)와 해병제1사당 퇴출로 방산지 12분 이정판-소나무 등로-월미산 용봉 갈림 이정표(제1기동사격장 3.4 Km, 월산마을 삼거리 11.0 Km, 월미산 용봉 0.9 Km)-뒤뜸재-삼봉산(290.3봉)-군부대 표적통-벌목지-10번 송전탑-솔밭재-도암사 갈림 이정표(제1기동 사격장 1.0 Km, 월산마을 삼거리 13.4 Km, 도암사 0.4 Km)-해병대 훈련장-탱크-해병대 훈련장 시설공사 현장-이정표(월산마을 감포방면 삼거리 14.4 Km, 오천읍 사무소 3.0 Km, 사격장)-문무대왕로 포항시구간 안내판-포장도로-세계원재(929번 2차선 포장도로)-정천 버스 정류장-장기로 마을-시멘트 포장임도-능선 진입-묘지 5기-소나무 숲길-2번 2차선 포장도로-나눔텃밭 이정표 방향-산불전문예방진화대 콘테이너 박스-비포장 임도-납골당-나눔텃밭-통점마을-미해병대 훈련장-비포장 군사 훈련임도-능선진입-소나무 능선-170 소나무봉-소나무 등로-유인김해김씨묘지-석곡선생 묘소 가는길 250 m-소나무 비포장 임도-석곡선생 묘소 가는길 350 m-묘지지대-석곡선생 묘소 가는길 800 m-석곡 이규준 선생 설명판-금강석산조망-안전목책과 로프지대-군사 훈련용 비포장임도-채석장 조망-조항산 중계소-이정판(조항산, 장기, 금광)-조항산(426봉)-한국항공공사포항항공무선표지소 건물-좌측 철조망-잡목 등로-조항산 조망처-묘지2기-잡목과 잡풀지대-한국항공안전탑-잡목구간-민가 한채-동양산업공장-흰날재 육교(31번 4차선 지방도로 위 육교)-(재)동산공원묘원 2.3 Km 이정판-흰날재-산행종료
산행거리 : 약 22.08 Km (스마트 폰의 GPX 기준)
산행시간 : 잘 훈련된 호미기맥 종주대와 발 맞춰 봄 기운을 맞으며 여유롭게 06시간 55분 (04시 07분부터 11시 02분까지)
교통편 : 3450온누리산악회 호미기맥 전용 넓은 25인승 버스 이용
호미기맥이란???
부산 몰운대에서 북진하는 낙동정맥이 영축산,가지산,고헌산,백운산을 지나 경주의 단석산으로 이어지며 북진해 올라간다.
단석산에 이르기전의 백운산은 붕우리가 4개 있는데 맨 아랫쪽의 892m봉이 주봉이고 그 북쪽으로 860m봉, 845m봉, 855m이 연이어 있는데
호미기맥은 그중 아래에서 세번째 봉인 845m봉에서 동쪽으로 가지를 쳐 천마산(620.5미터 봉)과 경부고속도로를 지나 치술령(766.9미터 봉)에서부터는 북동진하여 포항의 호미곶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를 호미기맥이라 부른다.
이 산줄기는 도상거리 약 98 Km나 되는 산줄기로 형산강의 남쪽 울타리 역할을 하여 일부에선 형남기맥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통상은 땅끝기맥과 같이 지역의 특수성을 살려 호미기맥이라 부른다.
이산줄기 북으로 흐르는 물은 형산강으로 들고 남쪽으로 흐르는물은 태화강으로 들며 일부는 장기천, 대화천으로 들어 동해바다로 들어간다.
봄 기운을 맞으며 즐겁게 걸었던 호미기맥 산행팀과 구룡포와 호미곶 여행을 겸한 기획.테마팀과의 멋진 추억을 만들었던 아름다웠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후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단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그동안 회사 통합과 개인적으로 독감 몸살로 인해 제대로 된 산행 한번 못해보고 몸도 좋지 못한 상황이기에 조금은 걱정도 되는 시간이지만 마루금이 큰 고도차이가 없고 군사용 비포장 임도가 대부분이기에 그저 즐기려는 마음으로 출발을 해 본다.
특히 그 동안 참여 인원이 적어 늘 노심초사 하였는데 이번 구간에는 기획.테마 산행으로 구룡포의 응암산 산행 후 구룡포읍 여행과 그곳의 유명한 먹거리인 과메기와 대게를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주워지며 많은 산우님들이 동참을 해 줘 더욱 뜻깊은 산행을 예감하며 출발을 해 본 시간이다.
홀로가면 마음 편히 마음 가는대로 발길 닿는대로 걸어가면 되는 것을 왜 이리 마음 고생하며 진행을 해야하는지 가끔 불만족스러운 질문을 해 보지만 이것 역시 산에 드는 이유만큼이나 인간을 성숙하게 만들어 주니 그것만으로도 좋은 인생 공부가 되지 않을까 좋게 생각을 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석곡 이규준 선생의 묘지가 멀지 않은 소나무 등로를 올라 유인 김해김씨 묘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넓은 비포장 같은 임도를 타고 조금 더 진행을 하니 나즈막한 언덕을 넘어 바로 눈 앞으로 조항산과 중계소가 조망되고 그곳으로 통하는 넓은 비포장 같은 임도를 타고 내려가니 앞서 걸어가는 호미기맥 종주대의 여유있는 발걸음과 그 위로 솟아 있는 중계소가 너무나 아름답게 다가온다.
이제 오늘 산행의 날머리도 멀지 않았음을 알고 있기에 두 다리에 전해오는 무게감도 많이 줄어 들어 조금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지난 2월 초 무척이나 춥고 강한 바람이 불어 콧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기를 닦으며 어렵게 내려 온 성황재 휴게소 앞에 도착을 하는 시간이 새벽 4시를 넘기고 있다.
늘 성원이 안되어 노심초사했던 지난 구간과는 달리 이번 구간에는 구룡포 여행을 위한 기획.테마팀에 10명의 산우님들이 더 동참을 해 줬기에 그 10명은 버스에서 기다리고 호미기맥 종주대 9명이 폐쇄된 성황재 휴게소의 드넓은 공간에서 산행 준비를 마치고 출발에 앞서 간단히 단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이곳 폐쇄된 성황재 휴게소는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동리와 포항시 오천읍 진전리의 경계에 있는 고갯마루로서 2차선 포장도로인 14번 국도가 지나가는 곳으로 폐쇄된 성황재 휴게소는 진전리에 있다.
포항 오천읍 진전리 마을에는 옛날에 묵은(오래된)밭이 많다고 하여 진전(베풀진 또는 묵을진 또는 오래된진)이라 하였다고 하며 또는 진전산(만리봉)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진전이라 불렀다고도 전해진다.
오천읍의 최남단에 위치하며, 남쪽으로는 경주시 양북면이 서쪽으로는 경주시와 경계를 이루면서 냉천의 발원지가 되는 만리봉(428봉)과 못재(538봉) 및 갈미봉(331봉)등 준봉으로 둘러 싸여 있으며 양지마을과 음지마을의 자연부락이 있다.
양지마을은 음지마을 서쪽에 있는 마을로 해가 돋을 때 햇빛이 비치는 양지에 위치하고 서북쪽이 산으로 막혀 겨울에도 항상 따뜻하다고 하여 불려진 이름이다.
음지마을은 마을 동쪽에 있는 수리등이라는 산등성이가 아침 해를 가려 음지가 된다고 하여 음지마을 또는 음지촌이라고 불렸는데 이마을 남쪽에는 경주 지림사로 통하는 옛고개인 서낭재(성황현)가 있다.
이마을 북쪽 갈평리와 경계지점에는 노루목이라는 작은 부락이 있었는데 1988년오천읍 상수도 수원지건설당시 수몰지역이 되었다.
폐쇄된 성황재 휴게소에서 14번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우측 경주시 양북면 고갯마루 쪽으로 걸어 올라가니 경주시와 포항시 경계 표지판이 서 있고 금새 S자형 급커브 구간 도로 표지판이 보이고 그 옆으로 철조망이 끝이 나는 곳에 짧은 절개지가 보인다.
하지만 오늘은 이 절개지를 타고 오르는 대신 우측으로 돌아 나 있는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주능선으로 오르기로 한다.
한동안 그 비포장 임도를 타고 진행을 하니 나즈막한 무명봉을 넘어 안부를 지나 또 다른 큰 소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 봉우리에 도착을 하는데 처음 시작부터 진행하는 등로가 드넓은 고속도로 수준이라 산행 속도도 무척 빠른 느낌이다.
무명봉을 넘어 전진하니 다시 등로는 좌측에 나즈막한 봉우리를 두고 우측 사면 등로로 나 있는데 여전히 대로 같은 비포장 임도로 이어지고 있어 발걸음이 무척 빠르다.
잠시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무명묘지 한기가 나타나고 다시 완만히 올라가니 잠시 잡목 지대를 지나 등로 좌측으로 환하게 빛나는 포항시내를 조망해 보지만 역시나 삼각대 없이 담아보는 야경은 흔들림이 심하다.
다시 한동안 걸어가니 390봉이라 생각되는 봉우리에 도착해 어둠속에서도 앞으로 진행해야 할 마루금을 살펴 본다.
지난 구간 지나온 마루금과 진행해야 할 마루금이 시원하게 조망될 것으로 생각되는 봉우리이지만 오늘은 어둠으로 인해 모든 것이 그저 상상으로만 보이는 봉우리에서의 아쉬운 시간이 되었다.
어둠속에 주위 조망을 즐긴 후 다시 걸어가니 넓은 비포장 임도를 우측으로 보내고 좌측의 잡목이 옷가지를 잡아 당기는 희미한 낙엽 등로를 따라 걸어가게 된다.
잠시 더 진행하니 바위 몇개가 박혀 있는 무명봉을 지나고 곧이어 무명묘지 한기를 다시 통과한다.
그 묘지를 지나자 마자 나무가 서 있고 작은 돌맹이들이 보이는 안부에 도착을 하는데 살펴보니 지도상 성황당 고개이다.
경주시 양북면 권이리 세바시골에서 오천읍 진전리 음지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에 성황당 돌무덤이 하나 나타나는데 이곳이 성황당으로서 민초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장소로서 이 산객이 어릴 적 이런 성황당 고개를 지날 때면 등줄기에 땀방울이 맺힐 정도로 무서워 했던 기억이 있는 곳이다.
성황당 고개를 지나 다시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무명봉에 도착을 하고 다시 안부로 내려가는데 그 안부를 지나자마자 제법 넓은 산사태 지역이 나타나 조심하며 진행을 한다.
그 산사태 지역을 지나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낙엽이 발목 위까지 빠지며 산행에 약간의 지장을 주고 있지만 그 어려움 보다는 깊은 낙엽속을 걸어가는 기분이 더욱 멋진 시간이다.
깊은 낙엽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오르니 선답자들의 띠지들이 나부끼는 봉우리에 도착을 하는데 살펴보니 좌측 봉우리를 두고 우측 사면 등로로 이어지는 갈림 삼거리 봉우리이다.
직진의 봉우리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잠시 낙엽을 밟으며 조금 더 오르니 나뭇가지 사이에 시 경계구간 403.5미터라는 봉우리 정상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오늘 등로는 포항시 경계 등로와 이곳에 주둔하고 있는 해병대의 훈련로로 유명한 문무대왕로가 잘 닦여 있어 산행에 큰 어려움이 없는 구간이기도 하다.
그 403.5봉에서 사진 몇장 남기고 다시 우측 등로로 내려 와 진행을 하니 금새 57번 송전탑이 나타나고 그 밑을 통과하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간다.
그곳을 지나니 수봉학원 개교 70주년 기념 이정판이 보이는데 깨져 있어 정확하지는 않지만 경주시 경계산행 등로로서 제12구간 성황재에서 연동리까지의 구간이라 되어 있다.
이곳 연동리는 경주시 감포읍 오류리에 속한 마을로서 감포읍과 오류리에 대한 그 유래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되어 있다.
감포읍은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에는 신라6촌중 금산가리촌에 속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현종때 장기현에 포함되어 경주속현이 되었다가 조선시대에는 경주군 동해면이 되었다가 장기군에 편입되었고 일제시대에 장기군의 폐지에 따라 경주군 양북면에 편입되었다가 양북면에서 분리되어 1937년 감포읍으로 승격되었으며 이후 경주시제의 실시로 군명칭이 월성군으로 개정됨에 따라 월성군에 소속되었다가 경주군으로 명칭이 바뀜에 따라 경주군에 속했다가 경주시군 통합으로 경주시에 속하게 되었다.
감포라는 명칭은 지형이 한자의 감자 모양으로 생겼고 또 감은사가 있는 포구라 하여 감은포라 부르다가 음이 축약되어 감포라고 칭하게 되었으며 동해남부의 어업전진 기지로 9개 법정리, 20개 행정리, 22개반으로 구성되어있고 52개 자연부락이 있다.
31번 국도 남쪽 32 Km 지점에 울산광역시가 있으며 북으로는 32 Km 지점에 포항시가 4번국도의 서쪽으로는 경주시 보문관광 단지가 있으며 전촌과 나정 및 오류 해수욕장과 횟집으로 유명하다.
연동리가 있는 오류리는 본래 장기군 내남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하여 오류와 연동 및 척사리를 병합하여 오류리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다시 높지 않은 무명봉을 넘어 나타나는 첫번째 삼거리에서는 좌측으로 진행을 하고 잠시 후 다시 나타나는 두번째 갈림 삼거리에서는 우측 골짜기 같은 등로를 따라 낙엽을 밟으며 걸어 본다.
그렇게 잠시 더 진행을 하니 등로는 우측 능선을 두고 좌측으로 반 원형을 그리며 이어지는데 처음에는 왜 이렇게 등로가 나 있을까 궁금했는데 통과 후 살펴보니 등로 좌측으로 거대한 산사태 지역이 큰 입을 벌리고 컨길 낭떨어지처럼 내려다 보인다.
어둠속에서도 왜 등로가 곧바로 진행하지 못하고 우측으로 크게 반 원형을 그리며 진행을 해야 되는지를 명확히 알려주는 산사태 지역이다.
그 거대한 산사태 지역을 지나니 또 다시 무명묘지 한기가 나타나고 조금 더 진행을 하니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우측 등로를 버리고 좌측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올라 본다.
잠시 더 오르니 또 다른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고 이곳에서는 좌측 오르막 등로를 버리고 우측 사면 등로를 타고 낙엽속을 걸어 본다.
잠시 사면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안부같은 장소도 보이고 조금 더 진행을 하니 큰 나무에는 붉은색 페인트로 등로 표시를 해 뒀다.
또 다시 보이는 산사태 지역을 지나 낙엽이 깊게 깔린 안부를 넘으니 갈림 삼거리가 다시 나타나는데 우측 등로에는 연등이 달려 있고 호미기맥 ㅁ루금은 좌측 희미한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올라야 한다.
우측으로는 지도에는 표기되지 않은 작은 암자가 있는듯 보인다.
그렇게 조금 더 오르니 진전저수지 갈림 이정표가 나타나는데 이제부터는 제1기동사격장 방향을 보고 진행하면 된다.
시 경계등산로를 바라보고 다시 그 이정표를 지나 걸어가니 j 안부를 통과한다.
그 안부를 지나 오르니 등로 옆 큰 나무에는 해병대 제1사단에서 종이로 붙여 놓은 문무대왕로란 이정판이 보인다.
문무대왕로는 경상북도 포항시 오천읍 세계원재에서 경주시 감포읍 문무대왕 수중릉간의 해병대 행군로를 개설하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해병대에서 장병들의 호연지기를 키우고 죽어서도 동해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려는 문무대왕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고자 해병1사단에서 문무대왕 수중 릉까지 50키로의 행군로를 개설하고 이길을 문무대왕로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지는 넓은 비포장 임도 같은 등산로이다.
이제 이 넓은 문무대왕로 등로를 타고 세게원재까지 평이하게 진행된다.
문무대왕로라는 종이 이정판을 지나 진행을 하다 지도를 살펴보니 만리성재는 이곳 종이 이정판이 붙어 있기 바로 직전의 안부인 고갯마루가 바로 찾던 만리성재이다.
그 만리성재를 지나 평이한 등로를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처사경주김공묘지가 나타난다.
그 묘지를 지나 나즈막한 둔덕을 지나 내려가니 다시 평이한 안부가 나타나고 그 안부를 지나 완만하게 걸어 올라가니 갈림 삼거리가 나타난다.
살펴보니 등로 좌측의 만리성을 두고 우측 사면 등로로 우회하는 갈림길이 있는 갈림 삼거리이기에 좌측 등로를 타고 오르니 묘지 바로 앞에 서 있지 않고 비스듬히 서 있는 묘비가 있는 가선대부김공 묘지2기가 있고 바로 위에 해발고도 427미터인 만리성 정상석과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에 도착을 한다.
경북 포항시 오천읍 진전리와 갈평리 그리고 장기면 산서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오늘 산행 구간 중에 가장 높은 산이다.
흔히들 독립된 봉우리는 산이라 부르고 연결되어 있는 곳은 봉이라 부르는데 이곳 정상은 산도 아니고 봉우리도 아닌 성이라 부른 것이 특이하여 자료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보인다.
경주시 외동읍 문산리의 성만리는 관문성(만리성) 위에 마을이 있었으므로 성만리라 불렀다고 한다.
2007년 6월 현재 8가구가 거주하고 있는 마을인데 신라 초기 때 가락국과 경계지역인 이곳에 외침을 막기 위해 성을 쌓았는데 그 성 이름이 만리성이다.
약 500년 전에 황씨가 처음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만리성 옆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성만리라 불렀다.
김해김씨와 경주이씨 및 황씨 등이 살고 있다.
만리성 정상에서 몇 장의 사진을 남긴 후 좌측인 북쪽을 살펴보니 박무속에 야경이 빛나는 포항시가 환히 내려다 보인다.
1995년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포항시와 영일군이 통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도농통합시를 이룬 현재의 포항시는 농업과 수산업이 함께 행해지던 지역으로 수산업의 중심지였으나 1970년대에 포항종합제철(주, 포스코)이 들어서고 시설확장이 계속되는 한편 관련 산업이 발달하여 세계적인 제철도시로 성장했다.
관광자원도 풍부한 지역으로 남구와 북구 및 구룡포읍, 연일읍, 오천읍, 흥해읍, 대송면, 동해면, 장기면, 대보면, 신광면, 청하면, 송라면, 기계면, 죽장면, 기북면, 상대1동, 상대2동, 해도1동, 해도2동, 송도동, 청림동, 제철동, 효곡동, 대이동, 중앙동, 학산동, 양학동, 죽도1동, 죽도2동, 용흥동, 우창동, 두호동, 장량동, 환여동 등 2개구 4개읍 10개면 19개동이 있으며 시청소재지는 남구 대잠동이다.
이곳 만리성 주변은 또한 만리산성 터가 있는데 이 마을 동쪽 장기면 산서리와의 경계지점에 있는 만리봉(427봉) 정상의 성터로 신라말기에 쌓은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북쪽 능선을 따라 토성흔적이 수Km에 남아 있다.
이 토성의 특징은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축성된 것으로 동쪽은 급경사를 이용하여 자연적인 성벽이 이루어졌으며 성벽 주변에는 많은 슬라그(쇠똥)가 발견되어 옛날 쇠를 다루어 철기를 제작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산성터 곳곳에 초소병사터와 같은 주초가 있고 일정한 거리를 두어 평지가 있어 방어 수비병들의 집합장소가 아닌가 추측된다.
전해오는 이야기에는 이 성이 울산까지 연장되었다고 하며 오천 상수도 수원지 정상부분에 지름 약20에서 30 미터의 못이 있었는데 만리산성의 병사들의 수원지로 사용되었으리라 추측된다.
지금은 오천읍의 상수원지로 자연환경보호구역이며 폐교된 진전국민학교(오천초등학교 진전분교)의 흔적(건물)이 남아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약수를 받아오기도 한다.
이렇게 한동안 그 만리성 정상에서 어둠속에 주위 풍경을 사진에 담으며 역사를 추억한 후 우측 잡목과 벌목된 남 사이로 어렵게 내려 가 우회하는 정상 등로로 내려 서서 다시 여유롭게 진행을 해 본다.
만리성을 낼 와 정상 등로를 타고 거어가니 등로는 우측으로 이어지고 좌우측으로 왔다리 갔다리 하다가 좌측 작은 골짜기 같은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내려간다.
다시 평이한 등로가 이어지더니 등로 좌우측으로는 어둠속에서도 낭떨어지 같은 풍경으로 다가오기에 주 등로를 타고 조심하며 걸어 본다.
다시 나타나는 무명묘지 1기를 지나 짧은 거리를 가파르게 올라가니 넓은 공터에 멋진 조망처가 나타나는데 아직도 온 세상은 어둠속에 숨어 있기에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 시간이다.
등로 좌측 뒤로는 포항 좌측으로 시루봉과 운제산이 보이고 그 위로 둥그런 보름달이 휘영청 밝게 빛나고 있다.
북쪽으로는 올망졸망한 산줄기 사이 저 멀리 포항의 불빛이 빛나고 그 포항 불빛 우측으로는 앞으로 올라야 할 묘봉산과 삼봉산 방향의 호미기맥이 어둠속에서도 아름답게 이 산객의 가슴속에 고운 추억으로 남는다.
그 조망처에서 내려오려는데 이제 등로 우측의 잡목 사이 저 멀리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고 조만간 아름다운 일출이 시작될 것 같다는 예감이 밀려 오기 시작한다.
모두 떠난 그 조망처에서 제일 후미로 내려오니 주능선을 좌측에 두고 우측 사면으로 등로가 나 있는데 조금 더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있는 조망처가 나타나는데 조금은 위험해 보이기도 하다.
그래도 그곳으로 가 진행 방향을 보니 260 암봉의 북쪽 방향이 조망되는데 거대한 바위 절벽이 보여 이 산객도 깜짝 놀라는 시간이었다.
사진 한장 남기고 그 위험한 조망처를 나와 주 등로를 타고 조금 더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바위 몇개가 산재되어 있는 소나무 봉우리가 나타나고 지도를 살펴보니 해발고도도 표기가 되지 않은 무명 바위봉 쯤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해 보는 시간이다.
그 바위봉을 지나자마자 등로 좌측으로는 방금 전 봤던 바위 절벽 방향으로 안전철봉과 로프 구간이 나타나는데 그저 형식적으로 설치되어 있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잠시 더 걸어가니 여전히 등로는 넓은 고속도로처럼 나 있고 등로의 고도차이도 별로 없기에 진행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다시 멋진 낙엽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저 앞으로 260봉이라 생각되는 봉우리가 나타나는데 등로는 매우 넓게 정리된 문무대왕로임을 알리고 있다.
그 봉우리로 오르니 이제 앞으로 올라야 할 묘봉산이 바로 눈 앞으로 다가오고 좌측 저 멀리에는 오천읍 문충리도 내려다 보이는데 그 문충리는 고려의 마지막 충신인 정몽주가 태어난 곳으로 유명한 지역이기도 하다.
포항시 오천읍 문충리는 갈평리 북쪽에 있는 마을로 서남쪽의 반월산과 신광봉 및 매봉 그리고 까치재 등의 산들이 항사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 냉천이 흐르고 있다.
사거리와 백산 및 위래점 등 3개의 자연부락이 있는데 봄이면 진달래가 만발하여 온 산이 불타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문충공 정몽주가 태어난 곳이라 하여 그의 시호를 따서 문충골 또는 문충이라 하였다 하는데 선생의 발자취가 마을 곳곳에 남아 있다.
사거리는 옛 기록에는 색거리라는 명칭도 나오나 고려말에 이 곳에 선비들이 공부한 곳이라하여 사거리라 부르다가 한 선비가 태사 벼슬을 한 뒤부터 사거리라 불러 왔다 한다.
포은 선생은 고려 충숙왕 복위6년 이 마을에서 태어나 구정리에 기거하다가 청년시절에는 외가인 영천에 이거하였다 한다.
현재 문충리 182번지에는 선생이 살았다는 포은터가 있는데 지금 이 포은터는 밭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토기 및 자기 파편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1942년 설립된 문충초등학교 앞에는 이 학교 전신인 문충간이학교를 세우고 마을 동쪽 삼봉산 아래 하천부지를 개간하여 옥탑으로 가꾼 이 마을 자도자 윤두현의 추모비가 있다.
이제 서서히 어둠이 사라지며 여명이 밝아 와 머리에 두른 헤드렌턴도 필요 없기에 배낭에 넣고 이제부터 눈으로 보이는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에 조금은 더 여유를 부려 본다.
종주대 9명 중 한명이 먼저 출발해 40여 Km가 넘는 거리를 오늘 완주 목표로 먼저 출발했기에 나머지 종주대들은 조금 더 여유롭게 걸어보는 시간이다.
260봉을 넘어 넓은 임도 같은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다시 큰 나무에 문무대왕로라는 종이 이정판이 보이고 곧이어 소나무 한그루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봉우리에 도착을 해 앞을 바라보니 길에 뻗어 있는 그 등로 끝자락에 드높이 솟아 있는 묘봉산이 올려다 보이고 그 등로를 타고 묘봉산으로 걸어가는 종주대의 뒷모습이 그저 환상을 노래하고 있다.
소나무 봉우리를 지나 완만하게 내려가니 직선으로 곧게 뻗어 있는 등로가 아름답게 눈에 들어 오고 앞으로 올라야 할 묘봉산과 그 좌측으로 336봉과 284봉이 좌측으로 길게 능선을 이루며 어서오라 손짓을 하고 있다.
그렇게 아름다운 등로와 풍경을 즐기며 걸어가니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곧바로 등로 우측으로 산서사격장 갈림 이정표가 서 있다.
산서사격장이라 적혀 있는 방향의 지명 이름인 포항시 장기면 산서리는 묘봉산 동남과 만리성산 동쪽으로 흐르는 계곡을 따라 새터와 서화마을이 있고 감재산 북동쪽으로 월산마을이 있는데 이들 하천들은 동악산 서남족 망매에서 만나 장기천으로 흐르고 있으며 이 세 마을을 산서리라 한다.
새터는 최국원이라는 사람이 영덕으로부터 이 곳에 새로 터전을 마련하였다 하여 새터라 하는데 경주 장포 최국원을 기리는 구산재와 최학진의 효자각이 있다.
서화와 서화실은 산서리 중앙에 있는 마을로서 매화나무에 얽힌 전설에서 상서로운 꽃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서화 또는 서화실이라 한다.
유독 매화나무와 얽히는 이름이 많이 남아 있는 마을로서 고려 예조판서를 지낸 경주 수은 김충한과 그의 7대손 서계 김응장을 추모하는 서산서원과 김시상의 효자각이 있는데 1996년 폐교된 산서초등학교 터가 남아있다.
월산마을은 초승달이 산을 지나 다시 출현한다고 하여 함월산이라 하고 그 골짜기를 음월곡이라 하는데 이에 연유하여 마을을 월산이라 한다.
인눌산에는 1905년에 창건된 범인사가 있다.
산서사격장 갈림 이정표를 지나 계속 평이한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그곳 안부 옆에서 함께하던 산우님들이 잠시 쉬어가고 이 산객 홀로 멋진 일출을 기ㅐ하며 조금은 빠르게 묘봉산 정상부로 향한다.
빠르게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소나무봉이 나타나고 다시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걸어 무명봉에 올랐다 완만하게 잠시 내려가니 다시 막바지 오르막 등로가 열려 있다.
한동안 숨가쁘게 치고 오르니 넓은 등로는 좌측으로 이어지는데 살펴보니 이곳이 바로 우측으로 묘봉산 가는 갈림 삼거리이다.
그곳 묘봉산 갈림 삼거리에서 등로 우측 잡목 사이로 붉게 떠오르는 하루 일출을 경건한 마음으로 사진에 담아 본다.
늘 보는 하루의 시작이지만 밤을 새워 등로를 걸으며 땀방울을 흘린 후 만나는 일출은 또 다른 의미로 가슴에 새겨지고 있다.
잡목 사이로 어렵게 구름 사이로 막 떠 오르는 일출을 본 후 묘봉산 갈림 삼거리에서 등로 좌측 뒤 저 멀리 살펴보니 지난 구간 넘었던 호미기맥 마루금이 살며시 보이고 목장부도 희미하게 보인다.
그 우측으로 금오산과 남산도 희미하게 보이고 시루봉과 운제산은 가깝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곳 삼거리에 배낭을 벗어 놓고 우측 묘봉산 방향으로 조금 진행하니 땅바닥에 우측으로 석남사 방향 표시가 되어 있는 이정판이 나뒹굴고 있다.
석남사는 기울어진 대웅전 한채만 있는 작은 암자로서 오래 전 여스님께서 이곳으로 와 암자를 가꿨다는 곳으로 일반 암자와는 차이가 있는 아주 작은 암자로 알려진 곳이다.
그 석남사 갈림 삼거리를 지나 직진으로 완만하게 오르니 금새 바위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묘봉산 정상에 도착해 정상석 옆에서 사진 몇장 남겨 본다.
해발고도 361.5봉인 묘봉산은 경상북도 포항시 오천읍 갈평리와 장기면 방산리의 경계능선에 위치한 산으로서 해발고도가 높지는 않지만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과 조망은 일품이다.
묘봉산은 호미기맥의 만리성재에서 삼봉산 사이에 있는 산으로 기맥 마루금에서 약 120미터 가량 우측으로 벗어나 있지만 형남기맥에 속해있는 산이라 할 수 있기에 반드시 다녀 가야 할 산이기도 하다.
정상부에서는 포항항을 비롯하여 영일만 일대를 훤히 굽어볼 수 있을 만큼 시야가 트이는 곳이라고 알고 올랐지만 잡목이 심해 일출도 제대로 보지 못할 만큼 조망은 사라진 산이기도 하다.
정상석에서 추억을 남기고 정상 좌측 한쪽에 박혀 있는 삼각점을 살펴보지만 워낙 닳아 글씨를 알아 볼 수도 없을 지경이다.
묘봉산에서 내려 와 벗어 놨던 배낭을 메고 이제 우측 넓은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편안한 소나무 등로가 열려 있고 치톤피드를 가슴속 깊이 들어 마시며 여유롭게 걸어 본다.
잠시 더 걸어가니 골짜기 같은 등로를 타고 다시 소나무가 빼곡히 자라고 있는 멋진 등로를 따른다.
그곳을 지나 평이한 등로를 따르니 저 앞에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낙엽진 활엽수가 서 있는 등로를 향해 걸어 본다.
잠시 더 걸어가니 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한 오르막 등로가 이어지고 금새 등로 좌측으로 묘지 한기가 보인다.
그 묘지 우측 옆 등로를 타고 걸어 오르니 좌측 정상으로 향할 것 같던 등로가 우측 사면 등로를 타고 조금은 편안하게 진행되고 있다.
잠시 더 우회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등로에 많은 자갈들이 박혀 있고 등로 우측 아래에는 누군가 쌓아 올린 작은 돌탑들이 몇개 보이는데 저렇게나마 돌을 쌓으며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 작은 돌탑 구간을 지나니 등로 우측 잡목 사이로 방금 전 지나 온 묘봉산 줄기가 멋지게 올려다 보인다.
다시 평이한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완만한 오르막 등로가 이어지고 묘봉산 자락에 가려 보이지 않던 아침 햇살이 밝게 빛나고 있다.
336봉이라 생각되는 봉우리로 올라 오늘은 산행 거리에 비해 산행 시간이 짧기에 조금은 일찍 아침 식사를 하고 출발하기로 한다.
하지만 새벽에 휴게소에서 먹은 우동 한그릇이 잘못되었는지 아침 식사를 하지 못할 정도로 속이 좋지 못해 반만 먹고 따뜻한 물로 한기를 달랜 후 다시 천천히 배낭을 둘러메고 출발을 해 본다.
식사 후 다시 평이한 등로를 타고 조금은 빠르게 걸어가며 몸의 한기를 털어 본다.
입고 가던 자켓을 벗어 다시 배낭에 넣고 진행하다 등로 좌측을 바라보니 올라야 할 280봉 넘어 월미산 용봉이 보이고 그 넘어 저 멀리 포항의 고층 아파트들과 포스코에서 뿜어 내는 하얀 연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대로같은 문무대왕로를 따라 한동안 걸어가니 등로는 더욱 넓고 곧게 뻗어 있고 잠시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오르니 무명묘지인지 아니면 흙무덤이 있는 정상을 지나 너무나 아름다운 마루금으로 진행을 한다.
다시 평이한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월미산 용봉이 올려다 보이는데 그 조망을 즐기며 가파르게 짧은 오르막 구간을 오르니 등로는 갑자기 좌측으로 크게 꺽여 진행 되는데 그 등로 앞 저 멀리에는 방산저수지와 망해산이 보이고 그곳 저 멀리 구룡포쪽 동해바다가 햇빛을 받아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망해산을 찾아보니 여러 자료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삼봉산 한 지맥이 남동으로 내려오다 묘봉산에 이르고 묘봉산 마주보는 동쪽에 망해산(250봉)이 있다.
묘봉산 아래에 괴정이 있고 망해산 아래에 평동이 있는데 두 마을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이 만나는 곳에 육송정이 있고 육송정 동남에 팔어실이 있으며 팔어실에서 방일천 건너편 동악산 아래에 거산이 있다.
거산과 팔어실 및 육송정을 방산 1리라 하고 평동과 괴정을 방산 2리라 한다.
괴정마을은 큰 괴목(느티나무)이 있었으므로 괴정 또는 괴동이라 하는데 서쪽 골짜기에 석남사지에는 남파대 사비가 있다.
등로 우측 잡목 사이로 방산저수지와 망해산 그리고 동해바다를 조망하며 걸어가니 방산저수지 갈림 삼거리 이정표가 나타나고 한쪽에는 방산지 방향으로 해병대제1사단 퇴출로라는 종이 이정판이 보인다.
방산리와 망해산 방향에 있는 지명을 살펴보니 삼봉산 한 지맥이 남동으로 내려오다 묘봉산에 이르고 묘봉산 마주보는 동쪽에 망해산(250m)이 있다.
묘봉산 아래에 괴정이 있고 망해산 아래에 평동이 있으며 두 마을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이 만나는 곳에 육송정이 있고 육송정 동남에 팔어실이 있고 팔어실에서 방일천 건너편 동악산 아래에 거산이 있다.
거산과 팔어실 및 육송정을 방산 1리라 하고 평동과 괴정을 방산 2리라 한다.
거산은 동악산(252m) 서쪽 산 기슭에 있는 마을로 큰 산(동악산)을 등지고 있다 하여 거산이라 하는데 고려조 기구현과 장평부의 현기지라 전해지고 달성서씨의 동산재가 있다.
팔어실과 방일은 여덟 마리의 고기가 노니는 형국이라 하여 팔어실이라 하며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팔어곡부곡에서 연유하여 팔어실이라고도 한다.
광서 년간(1875-1908)에는 방일이라고도 하였는데 방일과 거산을 합쳐 방산이라 한다.
방산 팔경이 팔어실을 중심으로 동악조양, 증봉석조, 율오청풍, 송정명월, 응봉숙무, 관등장송, 석암시종, 망산초가이며 경주김씨의 안산서원과밀양박씨의 봉덕서원 있다.
육송정은 팔어실 북쪽 고석사 입구에 있는 마을로 경치가 좋고 소나무 정자가 좋다 하여 육송정이라 한다.
평동은 옛날 고씨와 남씨가 사이좋게 살았다 하여 평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하며 동국여지승람에 평장사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모아 동명과 절이름이 연관이 있을 것이라 추측되는데 신라때 창건하였다는 고석사가 있다.
괴정은 큰 괴목(느티나무)이 있었으므로 괴정 또는 괴동이라 하며 서쪽 골짜기에 석남사지에는 남파대 사비가 있다.
방산저수지 갈림 이정표의 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걸어 오르는데 앞서 진행하던 산우님들이 직진의 호미기맥 마루금이 아닌 좌측의 월미산 용봉 방향으로 진행하다 뒤돌아 오는 해프닝이 있었다.
잠시 더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멋진 소나무 등로가 이어지고 그 갈림 삼거리에서 좌측이 아닌 우측 직진의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등로 좌측으로 월미산 용봉 0.9 Km 란 방향 표시가 되어 있는 이정표가 서 있다.
살펴보니 지금까지 진행하면서 등로 좌측으로 보였던 정자는 월미산 용봉으로서 그곳을 거쳐 갈 것이라 생각이 되었는데 실제 마루금은 그곳을 들리지 않고 우측으로 꺽여 진행이 되고 있다.
다시 등로 우측으로는 묘봉산이 보이는 넓은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이제 등로 좌측으로는 방금 지나 온 월미산 용봉 정상의 팔각정이 올려다 보인다.
이곳 월미산 용봉에 대한 자료는 찾지 못해 그 산이 위치한 오천읍 용산리의 자료를 찾아 본다.
오천읍 소재지에서 오어사로 가는 길과 경주군 양북면으로 통하는 929번 지방도가 갈라지는 삼거리에 동쪽의 삼봉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용산과 국들(이상 1리) 및 달애골(2리)등 3개의 자연부락이 형성돼 있으며 마을의 동남쪽에 용의 형국을한 야산인 용머리산이 있으므로 이 마을을 용산이라 하였다.
용산은 약250년 전 수원김씨가 들어와 처음 개척한 마을로 지금도 이 성씨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이 마을과 동북쪽의 달애골 사이에는 50에서 60년 된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숲을 이룬 용산숲이 있다.
이 숲 속에는 초대 오천면장을 지낸 진성현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후손이 1982년에 세운 정자가 있어 남녀노소의 놀이터가 되고 있고 용머리 위에는 1978년에 4만평의 넓은 부지 위에 지은 한국전력공사 신포항전력소가 있다.
달애골이란 월곡은 마을 뒷산이 마치 반달같이 둘러싸고 있으며 달이 뜨면 가장 먼저 비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동쪽의 상박골에는 10여 년 전에 생긴 대흥사가 있다.
국들마을은 마을 주변에 들국화가 많이 있어 부르게 되었다 하며 방치되어 오던 하천부지에 한때 양송이 재배 단지가 들어섰으나 얼마 가지 못해 폐쇄되었고 주민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등로 우측으로는 방금 전 일출을 만났던 묘봉산 줄기가 잡목 사이로 시원하게 올려다 보인다.
묘봉산 우측으로는 나즈막한 안부인 묘ㅗㅇ산 갈림 삼거리와 오늘 아침 식사를 했던 봉우리도 올려다 보인다.
진행하면서는 잘 느끼지 못했던 마루금이 지나서 보면 이렇게 아름답고 멋진 산줄기로 살아 나 산객의 가슴속으로 파고 드니 또 이렇게 밤새워 달려 내려오는지도 모를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산줄기이며 묘봉산 정상이다.
등로 좌측으로는 월미산 용봉을 그리고 우측으로는 지나 온 멋진 묘봉산 산줄기를 조망하며 진행하니 다시 소나무 두그루가 정상을 지키는 273봉이라 생각되는 봉우리를 넘어 걸어 본다.
그곳 273봉 정상 좌측으로 가 살펴보니 저 멀리희미하게 하얀 연기를 뿜어내는 포스코가 위치한 포항 시내가 내려다 보이고 그 풍경을 가슴에 담고 다시 진행하니 넓은 문무대왕로 등로가 반갑게 반겨 준다.
잠시 평이한 등로를 따르니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살펴보니 이곳이 바로 뒤뜸재라는 고갯마루가 아닐까 생각되는 곳이다.
뒤뜸재는 길등재라고도 하는데 삼봉산으로 가는 문무대왕로와 희미한 마루금이 갈리는 안부에 있는 고갯마루로서 뒤뜸의 뜻이 뒷동네이니 뒤뜸재는 뒷동네에 있는 고개로서 이곳 주민들은 길등재라부른다고 전해지는 고갯마루이다.
그 뒤뜸재라 생각되는 곳에서 좌측 넓은 문무대왕로를 버리고 우측 희미한 능선을 타고 오르니 삼봉산까지는 희미한 족적만 남아 있는 잡목 구간이다.
잠시 그렇게 진행하니 금새 삼봉산 정상에 도착을 해 사진 몇장 남기고 정상 이정판과 삼각점을 사진에 담아 본다.
삼봉산(290.3봉)은 경북 포항시 오천읍 용산리와 장기면 방산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봉우리 3개가 붙어 있어서 삼봉산이라고 부려진다고 전해지는 산으로 멋진 조망을 기대했는데 정상은 잡목들로 인해 조망이 없고 준.희님의 정상 표지판과 또 다른 포항 삼봉산 표지판 및 삼각점이 있는데 삼각점은 너무 낡아 알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이곳 정상에서 잠시 물 한모금 마신 후 다시 여유롭게 진행을해 본다
삼봉산을 지나 다시 넓은 문무대왕로를 타고 큰 어려움 없이 룰루랄라 걸어 보는 시간이다.
다시 더 진행하니 등로는 우측 능선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 같은데 좌측으로 문무대왕로가 개설되어 그 임도 같은 등로를 따른다.
그렇게 나즈막한 고갯마루로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표지판 같은 표식을 한 녹슨 철통이 보이는데 해병댁 붙여 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의미는 모르겠다.
그곳을 지나 완만하게 내려가니 갑자기 개활지가 나타나는데 등로 좌측으로는 드넓은 공사 현장이 나타나고 그 뒤 저 멀리에는 이제 포항 시내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고 그 우측으로 동해바다도 내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너문 드넓은 공사장이 나타나 또 어떤 공사가 진행되는지 궁금했는데 진행하다 보니 해변대 훈련장 공사장 현장임을 알게 되었다.
한동안 ㄱ 공사장과 포항시내를 구경한 후 진행하니 다시 우측 능선과 좌측 문무대왕로가 갈리는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어느곳으로 진행해도 마찬가지이지만 우측 능선 방향으로 송전탑이 보여 그곳으로 진행을해 본다.
잠시 능선 방향으로 가니 10번 송전탑을 지나 가시나무와 잡목이 자라기 시작하는 어려운 등로를 타고 힘들게 내려가니 등로 좌측 바로 앞쪽으로 대구 포항간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고 간간히 빠르게 달려가는 차량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어렵게 가시 덤불이 있는 등로를 헤치며 내려가니 다시 방금 전 좌측으로 헤어졌던 문무대왕로와 만나 편안하게 그 등로를 따라 걸어 내려간다.
이제 앞쪽으로는 비산비야로 이뤄진 호미기맥 마루금이 잡목 사이로 보이기 시작하고 한동안 평이한 임도 같은 등로를 타고 여유롭게 무심으로 걸어 보는 시간이다.
묘지를 이장하라는 안내판을 지나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도암사 갈림 삼거리에 이정표 하나가 서 있는데 지도를 살펴보니 이곳이 바로 솔밭재라는 곳인데 지금은 해병대의 행군로로 길이 넓혀져 솔밭이란 느낌은 전혀 없는 곳이 되고 말았다.
찾아보니 도암사는 길등재를 넘어 정천1리쪽으로 내려서면 도암사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 도암사는 법화종으로 1978년 세워져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도암사 갈림 삼거리 이정표를 지나 계속 넓은 임도 같은 문무대왕로를 따라 걸어가니 지금까지 이정표를 통해 만났던 제1기동사격장도 거의 도착이 되는듯한 느낌이다.
등로 우측 저 멀리 진행해야 할 호미기맥 마루금을 살펴보고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선답자들의 산행후기에서 봤던 낡은 전차 한대가 넓은 공터에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오늘 진행하면서 이정표를 통해 봤던 제1기동사격장으로서 그곳에 들려 잠시 추억을 만들어 본다.
해병대의 훈련 장소와 행군로로 이용되는 장소이기에 생각지도 못했던 이런 탱크까지도 볼 수 있는가 보다.
몇몇 종주대가 그 전차에 올라 포즈를 취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다시 문무대왕로로 뒤돌아 나와 맥 잇기 산행을 이어 가 본다.
그곳 제1기동사격장에 있는 전차에서 추억을 만들고 나와 더욱 넓어진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등로 우측에 공사장의 컨테이너 박스 건물들이 보인다.
그 건물을 지나 살펴보니 해병대 훈련장 시설공사란 글이 보여 이제서야 그 넓은 공사장과 이곳 공사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곳을 지나 조금 더 진행하니 등로 우측에 또 다른 거대한 철골 건물이 보이는데 그 용도는 알 수가 없다.
선답자들의 산행후기를 살펴보면 이곳 근처에 석장승 2개가 있는 장승백이가 있다고 알고 왔는데 오늘은 전혀 찾을 수 조차 없다.
장승백이는 오천과 장기의 경계 지역으로 옛날 장승이 서 있던 곳이라 하여 장승백이 또는 장승백이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은 바로 이 고개마루에 장기 청년회의소가 세워놓은 석장승 한쌍이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의 옛 이름을 지키며 그 자리에 서 있다.
장승백이의 바른 표현은 장승박이라고 하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음운변화에 의해 장승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짐시 더 걸어 내려가니 갈림 삼거리 우측에 몇개의 이정표와 문무대왕로 표지판들이 보이는데 그 앞에는 공사현황을 설명하는 설명판들이 가로 막아 조금은 아쉬움이 남아 있는 시간이다.
문무대왕로 이정판을 어렵게 사진에 담고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도로 우측에 제1기동사격훈련장과 해병대 경고판이 보인다.
그곳을 지나니 드디어 929번 2차선 지방도로가 지나는 세계원재에 도착을 하는데 도로 좌측을 보니 자동차전용도로 고가도로가 보이고 그 아래에는 세계교차로 도로 이정표가 보이는데 직진 방향으로는 오찬읍 가는 표시가 보인다.
세계원재는 경북 포항시 오천읍 금광리와 장기면 정천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929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고 정상에는 석장승 2기와 오일뱅크 주유소 그리고 정천 버스 정류장이 있으며 교통량이 꽤나 많은 곳이다.
세계리는 안마실 안마을 당앞 내촌 가뭇골로 넘어 가는 골짜기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안마을이라 부른다 하는데 실제로 동쪽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안마실이 있다.
세계 세계원 혜제 혜제원은 신라 때 세오녀가 짠 비단으로 일월지에 제사를 지냈더니 그 빛이 고지대인 이 곳에 제일 먼저 비쳐 온 세계가 환하게 되었다고 하여 지명이 유래 되었다고 한다.
원세계는 현재 읍사무소의 남쪽에 있는 마을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신흥과 중흥 세계를 병합하여 세계리라 하였으므로 그 이전의 세계리를 원세계라 이름 지었다 한다.
이곳 세계리에는 장승배기가 있는데 옛날에 이 마을 어귀에 장승이 서 있어서 장성배기라 부르게 되었다 하며 현재 20가구 정도의 민가가 있으며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지금은 장기면 정천 2리에 속해 있다.
그 세계원제에서 마을 좌측의 밭 가장자리로 들어가니 금새 대나무 밭으로 등로가 막혀 있어 동네 민가 사이로 나 있는 좁은 도로를 타고 우측으로 돌아가 원 기맥 등로를 만난다.
그곳에서 도로 우측의 929번 2차선 지방도로 옆에 보이는 정천 버스 정류장과 현대오일뱅크 주유소도 사진에 담아 본다.
그 주유소에서 들어 오는 포장도로를 만나 이제 장기면 정천리 통점마을을 통해 어렵게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장기면 정천리는 정족산의 북동쪽으로 펼쳐진 참샘이와 장승배기 및 퉁점을 정천1리라 하고 냉천마을을 지나는 하천과 죽정에서 흐르는 하천과 만나는 곳에 정천2리에 속하는 하정이 있다.
서로는 오천읍과 북은 동해면과 경계를 이루는데 정천리에는 운천 김윤찬의 효자비와 백운 김광화의 충절유허비 및 만취 이헌칠을 기리는 이요정이 있다.
참샘마을은 약물이 솟아나는 참샘이 있어 가뭄에 변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질병도 고친다고 하여 불리어진 이름이다.
오늘 우리 종주대가 지나는 퉁점마을은 옛날 이곳에 구리쇠가 생산되었다 하여 생긴 이름으로 포항시 남구 동해면으로 되어 있다가 1995년 6월 21일 장기면 정천1리로 편입되였다.
장승배기는 장기면과 오천읍의 경계인 세계원재 고갯마루에 위치한 마을로 옛날 장승이 세워졌던 곳이라 한다.
또한 하정마을은 원래 이곳은 가마솥 형국이라 하여 정방이라 불렀으나 근년에 들어와 죽정리에 속하는 자연부락인 상정과 중정 아랫쪽에 위치하므로 하정이라 부른다. 옛 모이현원이 있었던 곳이어서 원대와 원들 등 이와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장기로라 이름 붙은 장천리 마을을 통해 시멘트 포장도로를 걸어가니 다시 민가가 사라지고 능선 같은 풍경이 펼쳐지는데 도로는 아직도 시멘트 포장도로로 이어진다.
잠시 더 그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가니 고갯마루에서 도로 우측으로 전봇대 옆으로 능선 진입 등로가 나타나고 호미기맥 마루금은 이제 좌측의 시멘트 포장도로를 버리고 우측의 능선 등롤 이어진다.
능선으로 들어가 잠시 더 걸어가니 등로 우측으로 몇기의 묘지들이 잘 정리된 장소가 나타나고 그 좌측 등로를 타고 진행을 계속한다.
그 묘지지대를 지나 걸어가니 너무나 멋진 소나무 숲으로 이뤄진 등로가 이어지는데 등로라기 보다는 소나무 숲이란 말이 더 잘 어울릴듯한 그런 장소에 도착을 한다.
하지만 그 소나무 등로는 금새 끝이나고 또 다른 2차선 포장도로로 내려서는데 살펴보니 2번의 2차선 포장도로이다.
이곳 2차선 포장도로는 동해면 세계리와 장기면 정천리를 이어주는 2번 2차선 지방도로로서 이제 이 도로를 타고 좌측으로 100 미터 정도 따라 가다가 도로 우측에 보이는 나눔텃밭 안내판이 서 있는 곳에서 좌측의 2번 포장도로를 버리고 우측의 콘테이너 박스있는 방향으로 들어가며 진행을 해 본다.
콘테이너 박스에는 포항시남구청의 산불전문예방진화대란 안내판이 적혀 있다.
콘테이너 박스를 지나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초록의 밭이 보이는데 살펴보니 시금치를 재배하다 수확한 푸른 밭이었다.
다시 최근에 공사를 한듯한 넓은 비포장 임도를 따라 걸어가니 등로가 우측으로 크게 휘어지는 곳 우측으로는 키 큰 조릿대가 자라고 등로 좌측 저 멀리에는 잘 정리된 납골 가족묘가 보인다.
그곳을 지나 계속 이어지는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걸어 본다.
그렇게 한동안 그 넓은 비포장 임도를 따라 걸어가니 2번 2차선 포장도로에서 봤던 나눔텃밭 가든 및 주말농장 건물을 우측에 두고 진행을 한다.
그곳을 지나 걸어가니 다시 장천리 퉁점마을 도로를 통해 민가 사이로 진행을 하게 된다.
통점마을은 포항시 남구 장기면 정천리에 있는 마을로서 정천리는 정족산의 북동쪽으로 펼쳐진 참샘이와 장승배기 및 통점을 정천1리라 하고 냉천마을을 지나는 하천과 죽정에서 흐르는 하천과 만나는 곳에 정천2리에 속하는 하정이 있다.
서로는 오천읍과 북은 동해면과 경계를 이루는데 정천리에는 운천 김윤찬의 효자비와 백운 김광화의 충절유허비및 만취 이헌칠을 기리는 이요정이 있다.
이 정천리의 통점마을은 옛날 이곳에 구리쇠가 생산되었다 하여 생긴 이름으로 포항시 남구 동해면으로 되어 있다가 1995년 6월 21일 장기면 정천1리로 편입 되였다.
그 통점마을을 지나니 마지막 민가 좌측으로 이동통신탑이 보이고 그곳을 지나 다시 능선으로 이어지는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간다.
잠시 더 걸어가니 등로는 산속 능선으로 이어지는데 산세를 보니 통점마을이 생기기 전에는 통점마을 한가운데를 통해 이곳 고갯마루로 내려올 것 같다는 느낌이다.
이곳에서 등로는 직진의 넓은 임도를 버리고 우측 소나무 등로를 타고 진행을 하게 된다.
우측 소나무 등로를 타고 진행을 하는데 앞서 진행하던 종주대가 소스라치며 놀라고 살펴보니 처음에는 마네킹이라 생각을 했는데 살펴보니 미해병대인 듯 많은 미국 병사들이 훈련을 하면서 조용히 하라며 통과하라는 수신호를 보낸다.
보니 모두 젋은 병사들로서 미국대사의 테러도 있는데 먼 타국 알지도 못하는 시골까지 내려와 훈련을 하는 모습에 왠지 모르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조심하며 그 훈련장소를 빠져 나오지만 여전히 산속에는 많은 미 병사들이 진지하게 훈련을 받고 있는 모습에서 많은 생각을 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그곳을 지나 다시 최근에 개설된 듯한 넓은 군사용 도로인지 산판도로를 타고 걸어 오르니 산자락 중간에서 등로는 좌측 능선으로 이어지고 있다.
좌측 능선으로 들어가 진행을 하니 생각보다 가파른 오르막 등로가 이어지고 등줄기와 이마에 굵은 땀방울을 흘린 다음에야 어렵게 멋진 소나무 숲을 이루고 있는 완만해진 등로에 도착을 해 한숨을 크게 내쉬어 본다.
이제 다시 한동안 멋진 소나무들이 빼곡히 들어 차 있는 등로 사이를 타고 즐겁게 걸어가니 등로가 좌측으로 휘어지는 우측에 전망대가 보이고 그곳으로 가 잠시 주위를 살펴 본다.
지도를 보니 170봉 전망처로서 바로 발 밑으로는 방금 전 헤어진 군 작전도로가 끊기는 마지막 도로가 내려다 보이고 그 넘어 저 멀리에는 성적산과 뇌성산 방향이 시원스럽게 조망된다.
그 170봉 조망처에서 즐긴 후 다시 뒤돌아 나와 이제 우측 등로를 타고 소나무 숲을 타고 진행을 해 본다.
제 멋대로 자란듯 하면서도 조화를 이루고 있는 소나무 등로를 따라 진행을 하니 그 등로는 생각보다 길게 이어지는데 완만한 오르막 등로이기에 제법 지루하게 여겨지는 시간이다.
그렇게 한동안 걸어 오르니 앞서 진행하던 산우님들이 유인김해김씨 묘지 앞에서 배낭을 내려 놓고 잠시 쉬어간다.
준비한 과일과 떡으로 잠시 쉰 후 다시 배낭 둘러메고 그 김씨 묘지를 떠나 오르니 우측으로 석곡선생 묮 가는 길이란 안내판이 서 있고 궁금해 석곡 선생을 찾아 보니 잠시 후 설명판이 나타나 그곳에서 다시 설명을 하는 것으로 한다.
등로 우측으로는 228.8봉 삼각점이 있다는데 잠시 들리고 싶었지만 조망도 없고 정상석도 없다기에 포기하고 좌측 넓은 임도 같은 등로를 타고 진행을 하니 다시 멋진 소나무 등로가 반겨 준다.
소나무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고 다시 석곡선생 묘지가는 이정판이 보인다.
살펴보니 호미기맥 마루금은 우측이고 좌측은 많은 묘지들을 만들면서 인위적으로 만드러진 산길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진행하니 이제 저 멀리 앞으로 조항산 인공 구조물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오늘 산행도 벌써 종착지가 가까워졌음을 느끼는 시간이다.
언덕을 올라 넘으니 완만한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고 이제 조항산이 코 앞으로 다가온 느낌인데 그곳 등로 우측에 석곡 이규준선생에 대한 설명판이 서 있다.
석곡 이규준 선생은 1855년 태어나 1923년 생을 마감한 포항 출신의 유명한 한학자이면서 한의학자였으며 석곡 선생은 허준과 이제마와 더불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한의학자로 근대 한의학의 서곡을 울린 한의학자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
석곡 선생은 고향인 포항시 남구 동해면 임곡리에서 기존 성리학을 비판하며 특히 의학 연구에 힘써온 실학자였으며 선생은 당시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던 주자의 학설을 비판해서 유교경전 13경에 독자적인 주석을 달아 조선 유림을 들끓게 만들었기도 하였고 또한 의학경전인 황제내경에 주석을 달아 중국의학을 숭상하던 조선의 학계를 놀라게 했다.
그의 대표적인 의학서로는 황제내경의 핵심적인 내용을 추려 편찬한 황제내경 소문대요와 직접 저술한 의감중마가 있는데 이중 의감중마는 평소 선생이 주창하던 부양론과 기혈론에 상통하는 부분을 동의보감 중에서 발췌하여 간행한 것으로 현재 우리나라 한의학계에서 아주 소중히 여기는 의서로 중요시 되고 있다.
또한 선생은 병에 대한 탁월한 식견으로 난치병을 치료했고 서병오(석재), 이원세(무위당), 배을제, 조규철 등의 제자를 배출했으며 석곡은 가난한 백성들에게 무료로 처방해 주었으며 움막을 만들어 나병환자를 모아 두고 치료해 주었다.
이처럼 석곡 선생의 뛰어난 학문 성과와 사상은 오늘날 전국의 한의사들이 학회를 만들어 이어오고 있을 정도로서 해마다 선생의 기일이 되면 한의사들이 그의 고향인 포항을 찾아와 한자리에 모여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하지만 석곡 선생의 소중한 유산인 목판본 6백여 개는 그냥 창고에 쌓여 있어 천덕꾸러기 취급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으로 이처럼 보관 상태가 열악하다 보니 훼손 상태도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데 선생의 유족들이 몇 년 전 포항문화원에 맡겼다 소홀이 대하자 후손들이 다시 집으로 가져왔지만 역시 관리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향토사학자 황인(포항 동성고 교사)씨는 석곡 선생은 이 지역 출신의 대 학자로서 많은 저서를 남기고 특히 한의학 부분에서는 탁월한 식견을 보여 명의에 반열에 올랐다.
현재 석동에는 선생의 목판 366장이 보존되어 있으나 그 보관 상태는 아주 불량한 편이다.
이 지역에 아주 크신 학자가 있으나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형편이고 이 분의 목판이나 서적이 잘 보존될 수 있도록 당국에서 관심을 가져야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석곡 선생에 대해 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이 소중한 시간으로 남겨진다.
그 석곡선생 설명판을 읽어 보고 등로 우측 앞을 바라보니 조항산 우측 남쪽으로도 멋진 봉우리 2개가 하늘 높이 솟아 있어 궁금하기만 한데 돌아 와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산들이다.
조항산을 좌측 북쪽에 두고 운장산(200m)이 솟아 있는데 이 운장산 남쪽에 위치하여 남쪽으로 공당리와 북쪽으로 상정리의 경계를 접하며 마을 중앙으로 흐르는 구석보를 경계로 하여 형성된 모산과 중앙 2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진 마을이 있는데 바로 중산리 마을이다.
남쪽 들판에 3개의 고인돌이 마을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앞으로 들릴 수 있는 기회가 있을지 기약은 할 수 없지만 포항으로 내려 올 기회가 있다면 꼭 한번 들려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계속 넓은 임도를 타고 걸어가 안부를 지나 완만하게 오르니 저 눈 앞에 좌측으로 안전목책과 로프가 보이고 소나무 몇 그루도 보인다.
그곳으로 오르니 무인산불감시카메라를 설치하려는지 많은 인공 설치물들이 너부러져 있고 그 좌측으로는 소나무 밑에 조망처가 보인다.
잠시 그 조망처로 가 살펴보니 등로 좌측으로 대구 포항간 고속도로가 보이고 그 넘어 저 멀리 드넓은 포항시내와 해병대 건물들 그리고 포스코에서 뿜어내는 하얀 연기가 훤히 내려다 보인다.
그 포항시 우측으로는 영일만 바다가 푸르게 펼쳐져 있고 그 바다 바로 앞 뭍으로는 포스코도 내려다 보인다.
한동안 그렇게 그 조망처에서 풍경과 조망을 즐긴 후 다시 넓은 임도를 따라 조항산 정상부로 걸어가니 임도 우측으로 잘 가꿔진 소나무와 바위들이 보이고 곧이어 여러 방송국 주탑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잠시 팔각정도 보이고 우측에는 장기와 금광 갈림 이정표도 보이는데 그곳을 지나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계속 올라가니 MBC와 KBS 방송국 주탑들도 보인다.
몇 방송국들의 주탑을 지나 계속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거어 올라가니 조항산정상 이정판이 서 있는데 해발고도는 벌써 지워져 알아 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곳 정상 이정판 앞에서 사진 몇장 남기고 조항산에 대한 자료를 생각해 본다.
해발고도 245미터인 조항산은 경북 포항시 동해면과 구룡포읍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정상은 여러 방송국의 송신소가 자리를 잡고 있어서 포항 동해 산악회에서 설치한 스텐레스 표지판이 도로가에 외롭게 자리를 잡고있다.
산의 모습이 멀리서 보면 새의 목덜미처럼 생겼다고 해서 새조자와 목덜미항을 써서 조항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국토지리원의 지도에는 조항산이 이곳이 아닌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약간 떨어져 있는 212미터의 봉우리를 조항산으로 적고 있어 진짜 조항산이 어떤 곳인지 헷깔리는 곳이기도 하다.
조항산 정상을 지나 계속 이어지는 포장도를 타고 진행하니 다시 포항항공무선표지소건물과 철조망이 막고 있어 진행하지 못하고 그 건물 좌측으로 나 있는 철조망을 타고 어렵게 진행을 해 보는 시간이다.
제법 많은 잡목들의 저항을 뿌리치고 한동안 진행하니 철조망이 우측으로 약간 휘어지는 부근에서 등로는 철조망과 헤어져 좌측 잡목 사이로 나 있다.
오랫만에 잡목이 우거진 희미한 등로를 타고 낙엽진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며 마지막 봉우리를 향해 즐겁게 걸어 보는 시간이다.
잠시 잡목을 뚫고 내려가니 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한 오르막 등로로 이어지고 그 등로를 따라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잡목이 사라지며 잠시 조망이 터지기 시작한다.
실질적인 조항산 우측으로 석통채석장이 보이고 그 넘어 저 멀리 잠시 후 만나야 할 31번 4차선 지방도로와 그 접속도로가 보이더니 석리의 민가들도 보이기 시작한다.
포항시 남구 동해면 석리마을은 조항산(247m) 북쪽과 돼지산 남쪽의 포항과 구룡포 간 국도를 끼고 있는 마을로 안독골과 바깥독골 등 2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돌산(돼지산) 밑에 있으므로 돝골이라 하였는데 나중에 음이 변하여 독골 또는 돌골이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석동이라 하였으며 예로부터 감싸고 있는 돼지산 때문에 돼지 사육을 금기사하여 왔다 한다.
바깥독골은 서쪽 도로변에 위치해 있고 김씨가 처음 개척한 마을이고 안독골은 동쪽 골짜기 안쪽에 위치해 있고 방씨가 처음 개척한 마을이다 .
이 마을 동쪽 흰날재 부근에는 흔히 백토라 불리는 벤토나이트가 무진장 매장되어 있어 몇몇 광산업체가 들어와 채광 작업을 하고 입암리와 경계를 이루는 사화랑산(150m)에는 옛 사회랑봉수대의 유적이 있으며 조항산 산정에는 1971년설치 된 방송국 중계소가 있다.
그렇게 조망을 즐기며 걸어가니 등로 옆에 큰 바위 하나가 보이고 ㄱ곳으로 올라 등로 좌측의 지도상에 보이는 또 다른 조항산을 살펴 본다.
해발고도 212미터로서 그리 높지 않은 높이에 가파르지 않아 육산처럼 보이는 산으로 한번쯤 올라보고 싶어지는 산이기도 하다.
산자락에는 모두 낙엽진 앙상한 활엽수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정상부근은 파란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의아한 생각도 드는 시간이다.
그렇게 평이한 능선 등로를 타고 여유있게 주위 풍경과 조망을 즐기며 걷다 보니 다시 등로는 잡목과 큰 소나무가 어우러진 숲으로 이어지고 그곳을 지나니 소나무가 조금 더 많은 걷기에 큰 불편이 없는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다시 잡목지대를 타고 가파르게 오르며 땀방울을 흘리니 주능선에 도착을 하는데 그곳에도 무명 묘지 2기가 보이고 그곳을 지나 오르니 한여름에 잡풀이 무성하게 자랐다가 말라 죽은 듯한 정상부가 나타난다.
여름에 진행하는 산우님들이 얼마나 고생하며 진행하였을까 걱정도 되었던 시간이다.
그곳 200봉 정상을 지나 조금 더 진행을 하니 거대한 항공항행 안전시설인 높은 철탑이 서 있다.
그 철탑을 지나 다시 가파르게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다 버스 기사님과 전화 통화를 해 흰날재로 오도록 연락을 취하는 사이 다시 제일 후미로 쳐져 천천히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내려간다.
잡목과 낙엽으로 어렵게 내려가니 낙엽송 등로가 이어지며 등로는 온순해지고 다시 평이한 등로를 타고 한동안 진행을 하니 저 앞으로 민가 한채가 눈에 들어 온다.
사람이 살고 있는 않는지 지저분하고 인기척도 없는 그 민가를 지나 계속 넓어진 임도를 타고 걸어 본다.
민가를 지나 나즈막한 둔덕을 넘어 지나니 임도 우측 저 앞으로 거대한 비료 생산 업체인 동양산업 건물이 눈에 들어 온다.
이제 오늘 산행의 날머리도 바로 코 앞으로 다가왔음을 느끼며 그 넓은 임도를 타고 한동안 걸어가니 이제 동양산업 건물이 등 뒤로 멀어지고 있다.
그렇게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동양산업으로 들어가는 포장도로와 만나 좌측으로 가니 반사경이 있고 바로 앞에는 31번 4차선 지방도로가 내려다 보인다.
그 31번 4차선 지방도로 앞에서 우측으로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가니 낡은 육교 하나가 보이고 그 육교를 통해 31번 4차선 지방도로를 건넌다.
이곳이 바로 오늘 산행 날머리인 흰날재로서 육교 건너 좌측으로 걸어 올라가니 다음 호미기맥 마지막 구간 들머리인 (재)동산공원묘원 2.3 Km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에서 산행을 마무리 한다.
한명의 종주대가 홀로 호미곶까지 진행한다며 일찍 출발을 했기에 궁금해지고 기획테마팀은 지금 구룡포읍에 있으니 함께 만나 점식식사를 나누며 잠시 구룡포나 호미곶을 여행 후 서울로 복귀하면 알맞은 시간일 것 같다는 느낌이다.
잠시 버스를 기다리며 다음 구간 산행 들머리 부근을 살펴보고 사진 몇장 남긴 후 배낭을 정리해 본다.
오늘 산행 날머리인 흰날재는 포항시 동해면 약전리와 상정리 사이에 흰날재라는 작은 고개로 31번 4차선 국도가 지나고 있다.
신라 어느 왕이 이곳을 돌아보다가 봉산현(장기현의 옛이름)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태양이 빛을 잃고 밤과 같이 캄캄해졌기에 놀란 왕이 일관을 불러 그 이유를 물어 보았다.
일관이 왕에게 말하기를 왕의 몸으로 경솔하게 나다니면서 오랫동안 궁을 비워두었기 때문에 하늘이 크게 노하여 빛을 거두어 간 것라고 했기에 왕은 크게 뉘우치고 환궁을 서둘게 되었다.
어둠속으로 막 고개를 넘자 태양이 다시 빛을 얻게 되어서 밝은 날이 되었다는 뜻의 흰날재와 희날재 및 히나리재 등으로 불러졌다고 한다.
히날재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에는 흔히 백토라고 불리는 벤토나이트가 무진장 매장되어 있어 몇몇 광산업체가 채광작업을 하고 있다.
잠시 이곳 흰날재에서 쉬며 배낭을 정리하고 있으니 버스가 도착을 하고 그 버스를 이용해 가까운 구룡포읍으로 이동을 한다.
구룡포읍에 들어가 금강모텔 목욕탕에 들려 잠시 흘린 땀방울을 닦아 내고 몸치장을 한 다음 기획테마팀이 섭외한 구룡포근대문화역사거리 앞 수평회대게식당에서 박달대게는 아니지만 대게로 푸짐한 점심식사를 한다.
많은 산행을 해 봤지만 산행 후 이렇게 대게를 앞에 놓고 탁배기 한잔 마셔 본 기억도 처음이기에 기분이 참으로 좋은 시간이다.
식사 후 잠시 일본인들이 옛 구룡포읍에 살았던 가옥들을 보존한 구룡포근대문호역사거리를 간단히 둘러보고 주상절리를 보기 위해 출발을 했지만 주상절리는 보지도 못하고 호미곶으로 가 생각지도 못한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해 본다.
점심 식사를 하면서 먼저 출발한 종주대에게 전화를 하니 예상보다 일찍 호미곶에 도착을 해 대중교통을 이용해 서울로 복귀한다기에 식사를 하면서 기다리라고 전해 놓고 호미곶으로 가 잠시 망중한을 즐겨 본다.
호미곶 하면 바로 상생의 손이 생각 날 정도로 유명해졌는데 바다에 오른손이 그리고 육지에 왼손이 있다.
호랑이 꼬리를 닮은 경북 포항시 남구 대보면 대보리의 해맞이 명소 호미곶은 상생의 손으로 유명한데 해맞이 광장이 들어서서 한민족 해맞이 축전이 열리는 등 전국적인 명소가 됐으나 지도에 기록된 정식 명칭은 장기곶이어서 혼란을 빚어왔다.
호미곶은 원래 말갈기처럼 생겼다해서 조선시대에는 장기곶으로 불렸으나 1918년 일제가 곶을 일본식 표현인 갑으로 고쳐 장기갑으로 했던 것을 1995년 5월 일제 잔재 청산 차원에서 정부가 장기곶으로 이름을 바꿨다.
조선 중기 풍수지리학자인 남사고는 동해산수비록에서 한반도는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모양으로 백두산은 코이고 이 곳은 꼬리에 해당한다고 호미곶의 모양을 묘사했다.
그러나 일부 시민이 호미곶을 토끼 꼬리등으로 부르는 등 명칭을 놓고 혼란을 겪자 포항시가 경북도에 명칭변경 신청을 했었고 국립지리원이 중앙지명위원회를 열어 호미곶을 새이름으로 결정하였다.
시민들은 한반도가 민족의 웅혼한 기상을 상징하는 호랑이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셈이라며 반겼다고 전해진다.
다음 홈니기맥 마지막 구간에 들려 다시 한번 상세히 만나야 할 호미곶 호랑이 상도 담아본다.
호미곶은 토끼꼬리가 아닌 호랑이 꼬리라 불려져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배우고 온 시간이기도 하다.
영일만 동해바다 속에 있는 오른손 상생의 손과 그 좌측으로 전망데크가 인상적이다.
수많은 여행객들로 붐비는 이곳 호미곶에서 많은 사진 남기고 싱싱한 회로 탁배기 한잔 나누니 마지막으로 호미기맥을 홀로 완주한 종주대를 만나 기쁨도 나눠 본다.
2주 후를 기약하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 본다.
마지막으로 돌아 나오며 새천년기념관과 육지에 있는 상생의 손 및 금술 좋은 부부상인 연오랑 세오녀 상 그리고 풍력발전기를 바라보며 2주 후의 완벽한 호미기맥 완주 후 더욱 즐거운 마음으로 즐겨 볼 수 있기를 바래 본다.
늘 인원이 부족해 노심초사 고생을 했던 지난 구간에 비해 종주대 모두도 무탈하게 완주하고 기획테마팀과 함께 멋진 추억을 남기고 돌아 오는 시간은 행복하고 풍족한 마음만으로 돌아 오는 시간이 되었다.
함께했던 종주대와 산우님들 모두에게 감사한 마음 전해 드리며 다음에도 더 좋은 산행에서 함께 즐겨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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