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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승지 자료/정감록과 십승지

미래의 땅 십승지를 가다

by 칠갑산 사랑 2014.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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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1998년 중앙일보에 연재되였던 십승지 자료를 정리한 것이다.

 

 

 

1. 지리산 운봉

미래의 땅 - 십승지를 가다/중앙일보/1998.3.19


아직도 우리에겐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땅이 남아 있다. 이른바 '정감록' 에서 말하는 십승지 (十勝地) 이다.

'난리를 피할 수 있고 가난과 질병이 미치지 않는 땅' 으로 알려진 십승지는 '새로운 시대' 를 열망하는 민초들의 가슴에 ' 꿈에도 그리는 고향' 으로 전승돼 오고 있다. IMF시대를 맞아 우리 선조들이 남겨놓은 미래의 땅, 십승지의 지리적 특성과 주변의 볼거리 등을 소개한다.

 

 

 

사진

구름에 가려진 세걸산과 운봉. 전북 남원시 운봉읍은 백두대간이 지리산을 만들기 위해 마지막 힘을 모으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사진 중앙의 작은 도로가 지맥이 가는 길이다.

 

 

 

지리산 주변에는 구례나 남원, 경남의 함양.하동 등 크고 작은 도시들이 있다. 모두가 한폭의 그림같은 마을이고 살기 좋은 곳이다.
그러나 '정감록' 에 따르면 이 도시들보다 지리산으로 오르는 중간지대인 운봉 (雲峰) 을 십승지의 하나로 꼽고 있다.
운봉은 오늘날 전북 남원시 운봉읍과 그 주변을 가리킨다.
이곳은 "어진 정승과 훌륭한 장수가 연달아 나며 가히 오래 몸을 보전할 수 있는 곳" 이라고 했다.

운봉은 동으로 팔랑치, 서쪽에 여원치라는 큰 재를 두고 있다. 북에는 덕유산에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막고 있고
남에는 지리산이 자연경계를 이룬다. 경상도나 전라도에서 운봉으로 가려면 각각 팔랑치와 여원치를 넘어야 한다.

가령 외부의 침략을 방어하려면 이 두 재만 단단히 지키면 된다. 해발 평균 450m,
서울 남산의 두배 높이에 자리한 운봉은 그런 점에서 '하늘의 요새' 라고 하겠다.
 
고려말 남해안을 날뛰던 왜구들도 이곳을 범하지 못했고 근세의 동학농민전쟁은 물론 해방후 빨치산전투에서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문병태 (51.운봉읍진흥계장) 씨는 자랑한다.

지리산 등반을 하는 경우 대개는 88고속도로 지리산IC에서 인월로 빠져나와 곧장 뱀사골로 들어가게 마련이다.

그 결과 운봉은 등반객에게도 낯선 곳이다. 인월에서 운봉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황산과 덕두산 자락이 수문장처럼 버티고 있다.
이곳을 지나면 자신의 눈을 의심할 만큼 광대한 평야가 전개된다.

 

 

사진
황산대첩비각. 고려말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물리친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파괴한 것을 복원했다.

 

 80년대 들어 목축업과 고랭지 작물이 일부 시작됐지만 여전히 이곳의 주산물은 쌀이다.

 

지리산 자락의 풍부한 물과 맑은 공기가 가을이면 들녘을 황금벌판으로 물들인다.

외부의 간섭이 없고 먹을 식량이 풍족하면 인심은 절로 좋게 마련. 여기에다 지리산으로 연결되는

주변의 산들이 하나같이 살기 (殺氣) 를 벗고 있어 인물 역시 보장한다. 발복의 시기는 북으로 흐르는 하천 (광천) 이

운을 받는 지금부터다. 그래서 십승지는 제때에 들어가야 복을 누린다고 했다.

운봉읍의 행정을 관할하는 남원시는 이곳을 지리산관광지구로 개발할 계획이다. 장차 운봉에는 경비행장과 스키장.골프장

그리고 아트빌리지가 들어서게 된다.

 

 

 

 

 

 

 

 

 

 

2. 봉화군 춘양

미래의 땅 - 십승지를 가다/중앙일보/1998.3.26


"왔네 왔네 나 여기 왔네/ 억지춘향 나 여기 왔네/ 햇밥 배부르게 먹고/ 떠나려니 생각나네/ 햇밥 고기 생각나네/ 울고 왔던 엊지 춘향/떠나려니 생각나네"


경북 봉화군 춘양면에 전래하는 '억지 춘양' 이라는 속요이다. 예나 지금이나 배부르고 등 따시면 서민은 살기 좋은 곳이다.

그런 줄 모르고 산간오지라고 하여 오기를 두려워 한다면 그건 순전히 주는 복을 차버리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사진

옛 소라국 구리왕의 전설을 전해주는 위패. 새마을사업으로 파괴된 성황당 자리에 마을 촌로들이 다시 세웠다.

 

 

 조선조가 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태백산 아래 이곳 각화사에 사고 (史庫) 를 지은 것만 보아도 춘양이 지닌 지리적 여건을 짐작할 수 있다.

 

춘양은 태백산이 소백산으로 건너가는 과협처 (기를 모으는 곳)에 도래기재를 만들면서 남향받이로 생긴 마을이다.
지금은 영동선 기차가 면소재지를 지나고 한 여름 피서객이 몰려드는 불영계곡으로 이어지는 36번 국도를 끼고 있어 벽지라는

인상은 많이 가셨다. 그런데도 여전히 춘양은 새색시처럼 얼굴을 숨기고 있다. 특히 마을 어구이자 면을 관통하는 운곡천의

수구 (물 빠져나가는 곳)에 삼척봉이란 둥근 산이 마을을 가리고 있어 주의하지 않으면 지나치게 돼 있다.

'정감록' 은 물론 여타 비결서도 난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춘양을 반드시 꼽고 있다. 춘양을 두고 '소라고기 (召羅古基)' 라 했고

이는 옛 부족국가시절에 이미 이곳에 소라국이라는 독립된 나라가 있었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 춘양면 일대가 외부의 도움없이

자생할 수 있는 지역임을 말해준다. 또 전란을 피하기 좋다는 것은 임진왜란 때 서울의 사대부들과 서애 유성룡의 형 유운룡이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한 점에서도 확인된다.

 

 

 

사진
태백산 남쪽의 첫 도회지인 춘양면. 풍부한 물산과 좋은 인심은 한번 오면 떠나기가 좀체 어렵다고 한다. 지금은 사과재배지로 명성을 얻고 있다.

 

 

 

 춘양면은 3개 지구로 나눌 수 있다. 도래기재 밑의 서벽리 일대와 중간 마을격인 도심리 그리고 현재 면사무소가 있는 의양리가 그것이다.

 

 

이들 3개 지역은 모두 외부와 차단된 듯한 지리적 조건을 지니고 있다. 각 지역마다 쌀과 밭작물이 주업이었으나

지금은 집집마다 사과나무를 심어 '경북 능금' 의 주산지로 바뀌었다.


최재국 (50.부면장) 씨는 "IMF사태로 사과의 소비가 줄어 주민의 소득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없지 않다" 며

"다시 밭작물과 쌀농사로 전환하는 문제를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 고 했다.

춘양은 한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소나무로 불리는 춘양목 (春陽木) 의 집산지로, 또 우구치리의 금정광산에서 캐내는 금으로 각광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흘러간 추억으로만 남아 있다.


흔히 봄 춘 (春) 자를 파자 (破字) 하면 삼인일 (三人日) 이라고 한다. 이를 두고 보면 춘양은 적어도 세번은 좋은 시절을 맞게 돼 있다.

단순히 피난처라는 통념에서 벗어나 또 한번의 영화가 남아 있는 셈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오는 99년 하반기가 되면 춘양에서

강원도 영월로 이어지는 지방도가 완공된다. 서울가는 길이 훨씬 단축된다. 춘양은 영남 북부의 교통요지로 바뀐다.

 

 

 

3. 공주시 유구. 마곡 

미래의 땅 - 십승지를 가다/중앙일보/1998.4.2


충남공주시유구읍과 사곡면 경계에 상원계곡이 있다. 공주 일대의 사람들이 즐겨 찾는 유원지다.

이곳에서 50년을 살아온 閔씨 할머니 (67.푸른상회 주인) 의 말.

"6.25가 나기 전 강원도삼척군가곡면에서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 왔다.정감록에 난리를 피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해서

아버지가 가솔을 이끌고 오셨다.그런데 정작 이곳에 와서 6.25를 겪었다. 공비들 등쌀에 죽을 고생을 했다."

사진
비결파의 요람이었던 유구와 마곡은 곳곳에 명당을 간직하고 있다. 사곡면해월리 또한 해복형(蟹腹形) 명당마을로 유명하다.

 

 


한국전쟁 후 할머니는 서울에서 피난온 집안과 결혼, 이곳에 정착했고 그의 부모들은 고향인 강원도로 돌아가 지금은 모두 타계했다고 한다.

閔 할머니의 경우만이 아니라 현재 공주시유구읍 인구의 70%가 외지인이다.이들 대부분은 대한제국 말에서 일제하 그리고 한국동란 전후에 십승지로 소문난 이 지역에 정착한 비결파 (정감록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 의 후손들이다.

당시 외지인으로 이곳에 정착한 비결파들은 집집마다 직조기를 들여놓고 명주와 비단을 생산, 생계를 유지했다. 60, 70년대 공주군 일대의 유일한 제조업이었던 직조공장도 80년대 이후 중국산 직물에 밀려 이제는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세태 변화를 눈치챈 사람들은 대부분 목축업이나 고랭지 채소.약초재배로 전업했다.

 

 

사진
충효사. 단종 때 우의정을 지낸 충장공 정분과 그의 아들 정지산을 모신 사당. 사곡면 호계리 소재.
정분은 세조의 왕위찬탈 후 광양으로 유배됐다가 그곳에서 사약을 받았다.


유구.마곡은 공주에서 천안으로 올라가는 대로변에서 비껴나 있다. 이 지역은 금강 이북의 이른바 차령산맥 (금북정맥) 이 시작되는 곳이어서 충남의 여느 지역과는 달리 산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이 지역의 진산 (鎭山) 이라고 할 수 있는 무성산은 일찍이 홍길동이 웅거하던 산이다.

또 마곡은 마 (麻) 씨라는 큰 도적의 산채가 있었던 곳이라는 데서 이름을 얻었고 이곳 마곡사는 김구선생이 인천감옥을 탈옥해 숨어있던 곳이다. 이처럼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곳이지만 칠갑산에서 북으로 흐르는 대룡천과 유구천이 만나 평야를 이루니 곧 유구읍에서 신풍면에 이르는 벌판이다. 이 평야는 최소한 이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다. 특히 유구천의 수구가 꽉 막혀 있어 풍수적으로도 길지에 해당한다.

유구천이 금강에 이르기 전에 다시 마곡사에서 흘러오는 마곡천과 합하는 곳이 사곡면 입구의 호계리다.이곳은 유구에 비해 평야가 넓지 않지만 배후에 철승산과 무성산을 두고 있어 유사시에 피란하기에는 적합한 곳이다.

사진
유규천과 마곡천이 만나는 호계리 느티나무.

 


호계리를 벗어난 유구천은 우성면과 경계인 통천포에 이르러 또 한번 수구를 자물쇠로 채우듯 닫았다. 그런 탓인지 주위에는 이른바 명당이라고 하는 동네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대표적으로 화월리의 명당골을 들 수 있다.

금강변 곰나루의 취미산과 채죽산에 가려져 피란처로 알려진 유구와 마곡은 아산시와 예산.서산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로 바뀌었다.피란지라는 명성은 잃었지만 전원도시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아직도 그 꿈을 키워주기에 적합한 곳으로 남아있다.

 

 


 

 

4.예천 용문면 금당실

미래의 땅 - 십승지를 가다/중앙일보/1998.4.9

 


 

 

'정감록' 자체에서 내린 십승지의 정의는 "세상에서 피신하기 가장 좋은 땅" 이라고 했다. 여기서 '피신' 이란 말의 의미는 매우 다양하다.


내우외환 (內憂外患) , 즉 외적의 침입은 물론 국내의 쿠데타 등 정변으로부터 생명을 보전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십승지라고 하여 모두 이런 조건을 충족하는 것은 아니다. 때론 단서조항이 붙기도 한다. 예컨대 예천 (醴泉) 금당실 (金塘室) 의 경우, '임금의 수레가 닥치면 그렇지 않다' 고 했다.


사진
'물위에 떠 있는 연꽃'모양의 예천 금당실. 사진 뒤편 왼쪽 산이 오미봉이다.
금당과 이웃한 맛질 동리를 합하면 서울의 반(半)은 된다고 전해 온다.

 

 

 

예천 금당실은 오늘날 경북 예천군 용문면 (龍門面) 상금곡리 (上金谷里) 를 가리킨다. 먼저 예천군을 살펴보면 이곳은 소백산 줄기가 북쪽을 막고 낙동강이 남쪽을 경계하는 천연의 요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낙동강 주변의 구릉을 따라 점촌에서 안동을 잇는 4차선의 34번 국도가 예천군을 동서로 횡단하고 영주와 군위를 잇는 28번 국도가 남북으로 관통하게 됐다.

여기에다 공항이 생기고 충북 단양을 잇는 저수령이 개통되면서 군청 소재지인 예천은 교통의 요지로 바뀌었다. 비결서가 말하는 '임금의 수레' 란 이같은 교통의 변화를 뜻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예천읍의 배후에 자리한 용문면 금당실은 결코 피란지가 아니다. 예천읍에서 용문면은 승용차로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곳이다. 그럼에도 이곳의 지형을 보면 분명 옛 사람들이 무엇을 중시했는가를 알 수 있다.

먼저 금당실을 처음 찾아가는 사람은 예천읍에서 두어 고개 넘자마자 눈앞에 전개되는 광활한 대지에 깜작 놀라게 마련이다.


 

사진
초간정. 주변 소나무와 기암·계곡이 어우러져 한폭의 그림을 이룬다.

 

 

"예천군은 물론 경북 전체에서도 면 단위로 우리 동네만큼 넓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상수원 보호구역이 되다 보니 공기도 맑아 사람살기는 최적의 상태 "라고 이곳 토박이인 이승희 (39) 씨는 자랑한다. 이곳 금당과 이웃한 맛질 (대저.하학.능천리) 이란 동네를 합하면 서울의 반은 된다는 것이 이 지방에 전해오는 말. 다만 서울과 비교해 부족한 것이 한강 같은 큰 물이 가까이 없다는 점이다.

용문면 인구는 2천여명. 이 중 반 가까운 인구 (5백戶)가 금당실에 모여산다. 소백산이 저수령을 넘어 월악산으로 가는 중에 한가지가 남으로 내려와 매봉이 되고 여기서 다시 네개의 봉우리를 만들고 다섯번째 봉이 금당실의 주산이 됐다.
오미봉 (五美峰) 이 그것이다. 오미봉은 마치 연꽃처럼 생겼다. 금당 (金塘) 은 바로 이 연꽃이 피는 연못 자리다. 그래서 이곳 지형을 연화부수형 (蓮花浮水形 : 물 위에 뜬 연꽃) 이라고 한다.

"임진왜란때 이여송장군이 이곳 지세를 보고 인물이 난다고 하여 오미봉에 쇠말뚝을 박았다고 합니다. 그 이후 인물이 별로 안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판.검사는 다른 면에 비해 많이 배출한다" 고 장봉규 (73) 씨는 귀띔한다.

용문은 쌀이 남아 돈다. 또 '예천마늘' 의 주산지다. 이처럼 '가난' 을 모르는데다 인물까지 배출하는 곳이다. 뜻있는 사람은 후손을 위해 아직도 둥지를 틀 만한 곳이다.

 

 

 

 

 

5. 충북 영춘면 의풍리

미래의 땅 - 십승지를 가다/중앙일보/1998.4.16


사진
남한강과 소백산이 가로막고 있는 영춘면. 이곳 사람들의 고적한 삶을 달래주듯 오늘도 강물은 북벽을 따라 유유히 흐른다.

 


비결서의 내용은 본래 '비결' 이란 말이 상징하듯 그 해석을 둘러싸고 상당한 의문을 남기고 있다. 예컨대 '정감록' 에서 이심은 십승지의 다섯번째로 '단춘 (丹春)' 을 꼽았다.이어 같은 책에서 이연은 '단춘' 이란 말 대신 '영월 정동쪽 상류가 난을 피할 만하다' 고 했다.

앞의 '단춘' 에 대해서는 오늘날 대개 충북 단양 (丹陽) 읍과 영춘 (永春) 면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연이 말한 '영월 정동쪽' 이 어디냐를 두고는 해석이 엇갈린다. 혹자는 강원도 영월의 정동쪽인 상동읍 직동리라고 해석하는가 하면 혹자는 충북 영춘면 의풍리 (儀豊里)가 그곳이라고 한다. 상동읍 직동리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우선 영춘면 의풍리를 살펴보자.

영춘면 의풍리는 충북 단양군 소속이다. 단양이란 말은 선가 (仙家)에서 말하는 연단조양 (煉丹調陽)에서 비롯됐다. 백두대간이 낳은 오대산 줄기와 소백산 줄기가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만나는 곳이 단양이다. 기암괴석이 주종을 이루는 단양팔경이 말해주듯 이곳은 태고의 신비가 그대로 숨쉬고 있다. 오늘날 보아도 그러한데 옛 사람은 이곳에서 영생을 꿈꾸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단양군에서 영춘면은 '육지 속의 섬' 과 같은 곳이었다. 삼면이 남한강에 둘러싸였고 남동쪽은 소백산이 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남·북에 각각 다리가 건설돼 단양읍과 영월로 곧바로 통한다.

 

 

 

사진

영춘향교 전경. 북벽 언덕에 우뚝서 영춘면을 지켜보고 있다.

 


영춘면 소재지에서 남한강의 북벽을 타고 동쪽으로 가면 동대리가 나온다. 이곳 역시 북벽이란 절벽을 앞에 두고 있어 비결파들이 일찍부터 십승지로 알고 삶의 둥지를 튼 곳이다.

동대리에서 이른바 99굽이의 대관령보다 더 험하다는 157굽이의 베틀재를 넘으면 의풍리가 나온다. 경북·강원·충북의 3도 경계지대다. 면적은 지리산 운봉에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태백산이 소백산으로 넘어가면서 만든 평지라는 점에서는 지리적 성격이 같다.

금년에 일흔이라고 나이를 밝힌 박문찬씨는 깜짝 놀랄 만큼 젊어 보였다.해맑은 얼굴이 누가 보아도 50대 후반이라고 할 만하다. "해방 전 형님을 따라 이곳에 왔다" 는 그의 고향은 평북 창성군 청산면이다.


1남 5녀를 둔 박씨는 서슴없이 "물좋고 산 좋아 제 한몸 살기는 매우 좋은 곳" 이라고 자랑한다. 다만 아이들 교육 때문에 걱정이었다고. 한때 200호가 넘던 마을이 지금은 90호 정도만 남았다. 주산물은 고추와 대추다.쌀농사도 자급이 될 만큼 하고 있다.

리 밖에 김삿갓묘소가 있어 영월군에서 관광지로 개발하자, 의풍도 그 바람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여느 동리와는 달리 이곳 주민들은 그들의 고장이 십승지임을 드러내 놓고 자랑한다. 96년 10월 마을 한가운데 '마을자랑비' 를 세웠다. '깨끗한 물, 맑은 공기를 보존하자' 는 결의가 대단하다

 

 

 

 

 

6. 경북 상주 우복동

미래의 땅 - 십승지를 가다/중앙일보/1998.4.23


 

사진

속리산 아래 상주시 화북면은 한때 한국인의 전설적 유토피아인 '우복동'의 현장이라고 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용유리 병천에서 본 우복동 입구. 멀리 속리산 천황봉이 보인다.

 

 

<"허어, 요즘 우복동 찾는 사람 없는데 보통 사람 아니구먼. 예전엔 우리 집이 우복동 찾는 사람으로 가득했지."

경북 상주 (尙州) 시 화북 (化北) 면 상오리, 속칭 '높은다리' 라는 동네에 사는 김중만 (65) 씨의 말이다.그는 이어 뒷산을 가리키며 "저게 장각 (長角) 이고 동네 이름도 장각동이니 쇠뿔인 셈이지. 그러니 우리 동네가 당연히 소의 배에 해당하고 화북시장 터는 소의 엉덩이" 라고 했다. 그의 설명에 옆에 있던 김태진 (65) 씨는 "화북면 7개 동리가 저마다 우복동이라고 한다" 며 말을 거들었다.

우복동 (牛腹洞) 이란 예부터 영남 일대에서 전해오는 피란지의 이름으로 상주에 있다고 했다. 동네가 마치 소의 배 안처럼 생겨 사람살기에 더없이 좋다는 곳이다.그 우복동이 상주에서도 속리산에 둘러싸여 있는 화북면이라고 이곳 사람들은 믿고 있다.

화북면은 대부분 속리산 국립공원에 속해 있다.서울에서 이곳으로 가자면 괴산에서 선유동 계곡을 지나 늘티를 넘거나, 아니면 충북 청천면에서 용화동을 거쳐 밤재를 넘는 방법이 있다. 남쪽 상주시에서 들어가는 길은 갈령재를 넘어야 한다.동편 문경쪽에서는 가은을 지나 농암의 쌍룡계곡을 타고 들어가야 한다. 어느 쪽이든 지금은 전부 도로가 포장돼 있어 접근이 매우 쉽지만 예전엔 깊고 깊은 산골이 분명하다.

화북면은 크게 3개 지역으로 구분된다.


 

사진

우복동의 쇠뿔에 해당한다는 장각동에 있는 7층석탑. 고려시대 작품.


용유리와 장암 (壯岩) 지구. 이곳은 후백제의 견훤이 쌓은 견훤산성에서 현재 '우복동 유적비' 가 있는 병천의 입구까지가 해당한다. 청화산 (靑華山) 이 진산 (鎭山) 이고 서쪽에 속리산, 동편에는 속리산에서 갈라져 나온 도장산 (道藏山) , 또 청화산이 남쪽으로 뻗어와 이곳의 앞산이 된 승무산 (僧舞山) 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그 모양은 마치 속세를 떠난 유 (儒).불 (佛).선 (仙) 의 대가들이 모여 앉아 담론하는 형세다.

화산 (華山) 마을 지구. 이곳은 청화산과 시루봉 사이에 펼쳐진 협곡이다. 지세가 매우 핍착하지만 역시 복지 (福地) 로 불린다.지금도 비결파의 후손들이 서너집 남아 있다.

용화 (龍華) 지구. 지도상에 문장대온천이라고 표시된 곳이다. 4대째 이곳에 산다는 장병균 (57) 씨는 "용유동보다는 용화가 우복동" 이라고 침이 마르게 자랑한다. "용유동은 골이 좁아 사람 살 곳이 못된다" 고 했다. 이곳은 온천개발을 두고 경북과 충북이 법정싸움을 벌이는 곳이다. 미륵불의 도량인 법주사 뒤편에 자리한 용화는 어쩌면 미륵불이 불법을 설하는 용화세계, 그곳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일찍이 전국 각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집팔고 땅팔아 우복동을 찾아왔다.

사진

상주시 화북면 토박이들이 세운 우복동 기념비.


그러나 그들이 기다리던 '큰 난리' 는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가산만 탕진했다.그래서 이곳 '장바우 (壯岩里)' 를 두고 '망 (亡) 바우' 라는 말까지 생겼다. 땅은 예나 이제나 그대로인데 사람들이 들고 까불고 있으니 어디가 '무릉도원' 일까.

 

 

 

 

 7. 영주시 풍기 금계동

 

미래의 땅 - 십승지를 가다/중앙일보/1998.4.30


 

소백산 천문대 남쪽, 경북 영주 (榮州) 시풍기 (豊基) 읍 삼가리 한 언덕에서 사과나무를 손질하는 金유홍 (47) 씨 - .그는 서슴없이 집안 내력을 털어놨다.

"원래 선대는 황해도 해주가 고향이셨다. 1백30년전에 비결을 보고 이곳으로 오셨다. 현재 4대째 이곳에 산다. 아버님께서 이사 나가면 굶어 죽는다고 하셨다.

 

 

사진

십승지 첫째로 꼽히는 경북영주시풍기읍. 소백산의 우람한 산들이 사진에서 보듯 풍기를 품에 안고 있다.
사진 왼쪽 위가 천문대가 있는 연화봉, 오른쪽 끝봉이 금계동으로 내려가는 갈미봉이다. 오른쪽 아래 사진은 암수 두마리의 닭이 사랑을 나누는 모습인 금계바위.

 

 

金씨는 비결의 진의는 잘 모르지만 "굳이 아버님의 말씀을 어기기 싫어 지금껏 이곳에서 산다" 고 했다. 또 금계동의 황영욱 (61) 씨는 조부의 고향이 평양이라고 했다. 달밭골에 사는 김만정 (50) 씨 역시 해방되던 해에 조부가 황해도 곡산에서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풍기 사람들은 풍기를 두고 '작은 서울' 이라고 한다. 이곳 토박이보다 전국 각처에서 비결의 가르침을 좇아 모여든 사람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풍기의 토산품인 인삼과 직조물은 이렇게 모여든 외지인들에 의해 지금까지 명성을 얻고 있다.

과연 비결서는 풍기를 두고 뭐라 했는가.정감록의 감결은 풍기 차암 (車岩) 금계촌 (金鷄村) 이 십승지의 첫번째라고 꼽았다. 남사고의 십승지론에도 피란지로서는 소백산이 으뜸이라고 했다. 이후 여러 비결서들은 이 두 이론을 확대.재생산해 내는데 불과했다. 풍기에 모여든 비결파들은 금계동의 위치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지만 대체로 다음의 원칙에는 수긍한다.

첫째는 돌이 없어야 한다. 둘째는 바람이 없어야 한다. 셋째는 죽령이 보이지 않아야 한다. 이 세가지는 모두 죽령과 관계있는 조건들이다. 서울과 통하는 영남대로의 높은 죽령을 옆에 끼고 있는 풍기는 자연히 바람이 세고 개천 (남원천)에는 돌이 많게 마련이다. 그리고 죽령이 보인다면 곧 큰길과 인접해 있다는 뜻이다.

이 세가지 조건을 피할 수 있는 곳이 바로 현재 금계동으로 불리는 임실 (任實) 지역이라고 한다. 여기서 금계라는 지명은 풍수에서 '닭이 알을 품고 있다' 는 금계포란형에서 비롯됐다.

임실은 임신 (妊娠) 과 통한다. 그런 점에서 더욱 임실이 유력한 십승지로 꼽힌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지역에는 닭의 벼슬처럼 생긴 산봉우리가 2개 있다. 암수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세다. 이 봉우리는 욱금동과 금계동의 경계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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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비로봉 아래 비로사의 석조 아미타불 좌상. 통일신라 말기 작품. 습기 방지를 위해 금칠을 했다.

 

 

 

 그래서 서로 자신의 동네가 금계촌이라고 다툰다. 일반적으로 십승지라면 전란과 질병,가뭄이나 홍수, 굶주림의 피해가 없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 비로사의 성공스님은 "의상대사가 창건한 비로사가 임진왜란과 동학농민전쟁, 한국전쟁을 통해 완전히 불타버렸다" 고 했다.

비로사는 임실이나 욱금동보다 산속에 위치한다. 그런데도 전란의 참화를 겪었다. 앞서 김유홍씨도 "부친이 6.25때 고생했다" 고 말했다.

지난 60, 70년대 풍기는 영풍군 (현재 영주시)에서 가장 부유한 읍면이었다. 인삼과 직조업의 번성으로 군의 재정을 풍기가 맡았다. 그러나 이젠 영주시가 더 커졌다.

풍기는 영주시의 배후에 있는 전원도시로 변했다. 중앙고속국도가 개통되는 2000년대 초에는 죽령마저 힘을 쓸 수 없게 된다. 풍기는 세상에 자신을 고스란히 드러내 놓아야 한다. 아마 십승지 제1의 영예는 이때쯤 전설 속으로 묻히게 될 것이다.

 

 

 

 

 

 

8. 무주군 무풍면

 

미래의 땅 - 십승지를 가다/중앙일보/1998.5.7


북한의 삼수.갑산과 남한의 무주 (茂朱) 구천동은 오지 (奧地) 의 대명사다. 세상 일에 어두운 사람을 두고 "무주 구천동에서 왔나" 라고 할 정도로 무주라는 지명은 속세와 동떨어진 곳으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는 곳이 무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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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 구천동에 인접한 무풍면은 봉황(중앙의 산)이 날개를 펴고 마을에 내려오는 형국이다. 들이 넓고 산세가 좋아 걸출한 인물도 기약한다.


97년 동계유니버사드 대회가 열려 세계에 그 이름이 알려졌다. 그보다 앞서 지난 75년 덕유산 일대가 국립공원이 되면서 무주 또한 이름난 휴양지로 바뀌었다.

정감록 등 비결서는 무주군에서 가장 오지로 통하는 구천동을 제쳐두고 무풍면 (茂豊面) 을 십승지로 꼽았다.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구천동의 빠른 변화를 예감한 것이 아닌가 싶다.

무풍면으로 가려면 무주읍에서 구천동으로 들어가는 중간쯤에서 만나는 나제통문 (羅濟通門) 을 통과해야 한다. 나제통문은 이름 그대로 옛 신라와 백제의 경계지대에 설치된 관문을 뜻한다.

무주읍에서 경북 성주로 이어지는 30번 국도가 개설될 때, 이 작은 터널도 뚫렸다. 자칫 그 이름으로 인해 고대에 개설된 것이 아닌가 착각할 수 있지만, 통문의 역사는 70여 년밖에 안된다.

나제통문을 지나면 완만한 곡선으로 이어지는 10리 계곡을 만나고 그 끝에 광활한 대지가 펼쳐진다.대덕산 (大德山) 을 가운데 두고 남쪽에서 흘러오는 남대천과 동쪽에서 오는 무풍천이 만나는 사이가 들판이다.

"쌀독에서 인심난다" 고 너른 들판은 한눈에 이곳의 인심을 대변해 준다. "살기 좋으니 인심이 온후할 수밖에 없지요. 여기에다 예부터 학문을 숭상해 예절 또한 군내에서는 으뜸이지요. " 유한철 (58) 부면장의 자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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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풍면으로 들어가는 30번 국도의 나제통문. 터널 위의 산이 신라와 백제의 경계선이었다.

 

 

 

그러나 한때 만명에 육박하던 인구가 지금은 3천명이 채 안된다고 하니, 이곳 역시 이농현상의 바람을 피하지는 못한 셈이다. 들이 넓어 쌀은 자급자족이 가능하지만 지금은 주로 담배와 고랭지 채소로 수입을 올리고 있다.

무풍면의 중심은 옛 무풍현의 관청이 있던 현리다.

이곳은 삼도봉에서 뻗어온 삿갓봉이 마을의 주산이다. 티없이 맑은 산이 학문을 숭상하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앞산인 무봉산 (舞鳳山) 은 무풍 (茂豊 혹은 舞豊) 이란 현 이름을 만들어준 산이다.

현리 새터에서 무봉산을 바라보면 지리를 모르는 사람도 한 마리 큰 새가 날개를 펴고 훨훨 나는 형세를 볼 수 있다. 정말 아름다운 산이다.

무봉산을 낳은 산이 대덕산이다. 대덕산의 청룡 줄기가 무봉산을 낳고 백호 줄기가 시루봉을 만들었다. 그 사이가 증산리 석항동네다.

이곳에서 황인성 전총리와 김광수 자민련부총재가 태어났다. 한 마을에서 비슷한 때에 두 인물을 배출하니 동넷사람들은 지기 (地氣) 의 덕이라고 돌린다.

무풍은 단순한 피란지로서 십승지가 아니다.

'삼풍에서 인재를 구하라' 고 했듯이 인물의 고장이다. 또 이곳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서부 경남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이다.

그런 까닭에 여느 곳과 달리 비결파들이 즐겨 찾아 들지는 않았다.

 

 

 

 

 

 

 

  • 무주는 북한의 삼수갑산(三水甲山)과 함께 남한 오지(奧地)의 대명사다.

     

    무주라는 지명은 속세와 동떨어진 곳으로 인식돼 왔기에 세상 돌아가는 일에 어두운 사람을 두고 "무주 구천동에서 왔나?"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 무주의 무풍은 그야말로 심심산골. 백두대간의 한 자락이 덕유산과 삼도봉 사이에서 활 모양으로 휘어 돌며 싸안은 면(面) 단위의 산골이지만, 그래도 옛날에는 당당히 사또(현감)가 다스렸던 하나의 행정 지역이었다.

     

    삼국시대에 무산현으로 불렸던 이곳은 삼국 통일 후인 신라 경덕왕 때에 이르러선 무풍현으로 바뀐다. 두 지명에서 '무'는 같은 글자이므로 더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문제는 '산'과 '풍'인데 이 두 글자가 어떻게 대역이 될까?

     

    '무풍(茂豊)'에서의 '풍'을 '풍성함'의 뜻으로 보면 '무산(茂山)'과의 대역이 어려워지고 만다. 학자들은 여기서의 '산'과 '풍'을 똑같은 뜻으로 풀고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의 연구'(신태현 저)라는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무산(茂山). 무(茂)의 훈은 '성 '. 산(山)의 훈은 '뫼'. 무산(茂山)을 '무풍(茂豊)'으로 개명한 것은 '풍(豊)'이 '풍(酉豊)'의 약자로 그 훈이 '술'이므로 '풍(豊)'으로써 '수리(봉우리)'에 훈차한 것이다. 따라서 '무산'이나 '무풍'은 '성한뫼'가 그 원이름이다."

     

    즉, '풍'을 '풍성함'의 뜻으로 보지 말고, '산(봉우리)'이란 뜻의 '수리'로 보라는 뜻이다. '성한뫼'에서 '성한'은 '성하다(많다)'의 뜻임은 말할 것도 없다. 즉, '높고 많은'의 의미일 것인데, 지금의 무풍 지역으로 보면 그 지형상 딱 어울리는 땅이름이 아닐 수 없다.

     

     

    9. 변산 호암 (병바위) 

    미래의 땅 - 십승지를 가다/중앙일보/1998.5.20


    변산 (邊山) 으로 가는 길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산악의 나라 한반도에 이렇게 넒은 평야가 있었는가 하는 것이 그 첫째다. 이어 송기숙의 대하소설 '녹두장군' 의 첫 무대가 이곳 백산에서 펼쳐지는 이유를 반추하게 된다.

    곡창지대와 혁명의 요람 - .우리 역사는 이 역설의 현장을 이곳에 펼쳐놓고 있다. 김제.만경평야의 서쪽 끝이 변산이다. 이중환의 '택리지' 를 읽어보자. "노령산맥의 한 줄기가 북쪽으로 부안에 와서 서해 가운데 쑥 들어갔다. 서쪽.남쪽.북쪽은 모두 바다이고 산 안에는 많은 봉우리와 수많은 구렁이 있는데 이것이 변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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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굴바위로 불리는 변산 호암. 굴 입구의 모습이 호리병을 닮았다.

     

    " 자칫 배수진을 처야 할 외통수의 땅이지만 비결은 이런 "변산의 호암 (壺岩 = 병바위) 아래" 가 십승지라 했다. '남사고비결' 은 여기에다 단서조항을 넣고 있다. "탐라 (제주)가 다른 나라 땅이 되면 그렇지 않다." 변산에서 호암을 찾기란 매우 힘들다. 발음만 듣고 사람들이 가리키는 곳은 보안 (保安) 면 호암 (虎岩) 리다. 호랑이와 호리병은 거리가 너무 멀다.

    그래서 우선 바위부터 찾는다. 우금산성에 우금바위가 있다. 우금바위 동남편이 개암사 계곡이다. 이곳은 너무 좁고 동쪽 김제평야와 얼굴을 맞대고 있다. 군부대의 초소로 제격이다. 우금산성 북쪽, 상서면 통정리에서 우슬재를 넘으면 쇠뿔바위을 만나게 된다.

    변산에서 가장 높다는 의상봉을 왼쪽에 끼고 있는 쇠뿔바위, 청림리의 주산 (主山) 이다. 심상치 않다. 당연히 우공 (牛公) 이 먹을 식량 (잡초더미) 이 있어야 한다. 남쪽에 자그마한 노적봉이 있고 동리 이름도 노적이다.

    고광충 (57) 씨는 "부안 고을에서 첫 손꼽는 마을이 노적" 이라고 한다. 진사 급제자가 가장 많았고 유명 부자는 이곳에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의 뒷말은 이곳이 십승지가 아님을 전한다. "6.25때 수복이 가장 늦었고 궁궐같은 기와집들은 모두 불타버렸다" 고 한다. 이제 남은 것은 '굴바위' 를 끼고 있는 보안면 우동 (牛洞) 리다.

    이곳은 이성계가 젊은 시절 무예를 닦았다고 전해지는 성계골과 실학의 문을 연 반계 유형원이 경국 (經國) 의 꿈을 펼치던 곳. 이 마을 북쪽에 옥녀봉이 있고 그 줄기 끝이 굴바위다. 우동제방에서 바라보면 굴바위 입구의 모양이 영낙없는 호리병 모양이다. 우동리는 전형적인 삼태기형 지형이다. 앞이 터진 것 같으나 천마산이 막고 있다. 가히 욕심없이 살 수 있는 전원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단서조항, 변산과 탐라는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제주도가 '남의 땅이 된다' 는 것은 또 무슨 뜻인가. 땅을 두고 시간과 역사의 골짜기를 더듬는 것은 그래서 늘 흥분을 안겨준다.

     

     

     

    10. 보령시 남포

    미래의 땅 - 십승지를 가다/중앙일보/1998.5.27


    지난 79년 충남 대천 출신 작가 이문구는 '관촌수필' 을 통해 고향의 변화를 리얼하게 그려낸 바 있다. 그로부터 20년이 흘렸다. 서해안 최대의 해수욕장인 대천은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의 한 해안을 연상케 할 만큼 변모했다. 해안으로 통하는 도로가 시원하게 뚫리고 해변에는 모텔과 각종 유흥시설이 즐비하게 들어섰다. 계절의 구분 없이, IMF라는 경제적 위기에도 이곳은 젊은 인파로 바다가 넘실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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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포읍성은 서해안 요충지였다. 사진은 관아 정문인 진서문.


    대천의 변모는 그 이름에서도 드러난다. 보령군 (保寧郡) 대천읍에서 86년 대천시로, 다시 95년에는 보령군과 통합하여 보령시로 이름까지 바꿨다. 보령시 산하에는 웅천읍과 남포면 (藍浦面) 등 1읍 10개 면이 있다. 비결서는 보령시의 남포를 십승지로 꼽고 있다.

    보령시에서 서천으로 이어지는 21번 국도변에 있는 남포면은 여간 주의하지 않으면 그냥 스쳐 지나가게 된다. 보령시와 뚜렷한 경계가 없고 다만 남쪽으로 웅천읍과 고개 하나를 두고 있을 뿐이다. 서쪽은 바다다. 옛 남포현 시절에는 이곳에 성을 쌓아 서해안 방어진지로 이용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남포면을 피란지라고 판단하기는 매우 어렵다.

    사진이곳 토박이 박창선 (72) 씨는 "예부터 십승지라는 말은 들었지만, 외지인이 일부러 찾아온 경우는 없었다" 고 잘라 말한다. 대천문화원 윤원석 (83) 원장은 남포라는 특정지역보다는 보령시 전체가 십승지의 하나라고 밝힌다. "고려조 이래 보령은 '만세보령 (萬世保寧)' 이라 하여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졌다" 고 한다. 그러나 그 까닭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성주산에서 옥마산 (보령시와 남포면 동쪽에 있는 산)에 이르는 보령시의 산들이 모두 부여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고 덧붙였다. 그의 말은 이중환의 '택리지' 에서 남포를 언급한 글과 끈이 닿는다.

    이중환은 "남포 성주산은 남쪽과 북쪽 두 산이 합해져서 큰 골이 됐다. 산중이 평탄하여 시내와 산이 맑고 깨끗하다. 산 밖에는 검은 옥이 나는데 벼루를 만들면 기이한 물건이 된다. 옛날 매월당 김시습이 홍산 무량사에서 죽었다고 하는데 곧 이 산이다. 시내와 계곡 사이에 또한 살 만한 곳이 많다" 고 했다.

    그렇다. 십승지 남포는 오늘날 면소재지 쪽보다는 성주면 일대를 가리킨다고 하겠다. 성주사가 자리한 이곳은 비록 임진왜란이란 병화를 입었지만, 지금은 대천해수욕장과 함께 보령시의 관광.휴양지로 탈바꿈하고 있다. 이름에 집착하면 본령을 보기 어렵다는 옛말을 남포는 일깨워 준 셈이다.


     

     

    11. 서천군 비인면

    미래의 땅 - 십승지를 가다/중앙일보/1998.6.3


    충남 서천군 비인면 (庇仁面) 을 보러 가는 날, 하늘은 짓궂게도 비를 내렸다. "바람은 구름을 몰고/구름은 생각을 몰고/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라는 서천 출신 나태주 시인의 마음이 떠오른다.

    그는 이어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쓰고/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자고 나니 눈두덩이엔 메마른 눈물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안개. …" ( '대숲 아래서' 의 일부) 라며 축축한 날 만나고픈 님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안개비에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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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비의 고장 비인을 지켜온 성북리 5층 석탑 (고려시대). 갓쓴 선비의 모습이다.

     


    산골과 갯마을이 함께 있는 비인의 첫 인상은 이렇게 다가왔다. 비인을 십승지로 꼽은 비결은 '남격암 산수십승보길지지' 다. 이 책은 "평평 울울이 가장 길하고 내포의 비인.남포가 다소 낫다" 고 했다.

    여기서 '평평 울울' 은 동해안의 평해와 울진으로 대개 비정한다. 이에 비교되는 서해안의 십승지가 비인과 남포라는 뜻이다. 그런데 비인이 십승지의 하나라고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다행히 비갠 다음날 비인향교 옆에서 한 농부를 만났다.

    전홍석 (73) 옹은 "타향살이를 오래 하다 3년 전에 고향에 돌아왔다" 고 한다. "비인이 십승지라는 걸 아는 사람은 100세 넘은 노인뿐일 걸. " 저승에나 가서 물어보라는 뜻이다. 어린 시절 그런 얘기를 들었지만 "믿지 않는다" 고 했다.

    향교 뒷산 월명산 주위를 공군비행기들이 쉴새없이 나른다. 노인은 더 이상 목청을 높여 대꾸하기가 힘들다는 듯이 밭이랑에 눈길을 떨어뜨렸다. 비인의 원 이름은 비중 (比衆) 이다.

    사진신라 경덕왕이 비인으로 고친 이후 지금껏 사용하고 있다. 1천여년의 역사를 지닌 이름이다. 굳이 지명의 의미를 캔다면 '어진 것을 감싼다' 는 뜻이다. 조선조에 들어 서울의 사대부들이 이곳에 모여 들었다.

    고려중엽 이후 서해안은 왜구의 노략질이 심했고 조선조 세종 때 (1418) 는 비인 앞바다 마량진에 왜선 50척이 나타나 우리 병선을 불사르고 비인성까지 공격했다. 이 싸움 이후 평지에 있던 비인성은 현재의 위치인 산 위로 올라왔다.

    그 뒤에도 비인은 전란이 비껴가지 않았다. 그런데도 서울 사대부들이 즐겨 낙향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택리지의 지적은 이렇다.
    "여러 읍과 이웃해 있고 뱃길이 편리하여 서울과 가깝기 때문" 이라는 것.

    그런 점을 중시한다면 비인은 과거보다 미래를 위해 남겨진 땅이다. 한때 이곳에 공단을 유치하려던 정부의 발상도 지역민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선비의 상징 인 (仁) 을 숭상하는 비인 사람들의 '양반기질' 이 이웃 한산면 (韓山面)에 뒤질 리 있겠는가.


     

     

    12. 경기 가평 설악면

    미래의 땅 - 십승지를 가다/중앙일보/1998.6.10


    서울 근교에도 십승지가 있다. 주말이면 사람과 자동차가 북적거리는 청평댐에서부터 유명산 휴양림에 이르는 경기도 가평군 (加平郡) 설악면 (雪岳面) 이 그곳이다. 강원도 설악산과 같은 이름의 설악면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처음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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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악면 소재지의 신성봉(左)은 서울의 북악을 쏙 빼닮았다.

     

    본래 이곳은 고려말 미원현 (迷原縣) 으로 양평군에 속했었지만, 1942년 가평군으로 넘어왔다. 옛 미원현의 역사적 흔적은 이곳 미원초등학교 이름에 남아 있다. '정감록' 은 설악면에서도 소설촌 (小雪村) 을 승지로 꼽는다.

    양평 북쪽 40리에 있는 소설촌은 미원으로부터 들어갈 수 있으며 그곳은 '가장 깊은 심심계곡' 이라 했다. 소설촌은 설곡리 (雪谷里) 라는 행정구역 안에 마을 이름으로 남아 있다. 설악면 일대가 휴양지로 일반에게 널리 알려졌지만 설곡리는 여전히 숨은 마을이다.

    이곳으로 가려면 면소재지를 지나는 37번 국도를 타고 유명산쪽 (양평 방향) 으로 가다가 엄소리라는 동네를 거쳐야 한다. 엄소리는 말하자면 설곡리의 초소와 같은 곳이다. 이곳에서 다시 양의 창자와 같은 굽이굽이를 지나야 설곡리를 만나게 된다.

    북으로 북한강이 가로 막고 동.서.남에는 용문산의 큰 줄기가 에워싸고 있어 이곳은 그야말로 천혜의 피난처라고 할 수 있다.
    황해도 신계에서 조부때 이곳으로 왔다는 김종섭 (60) 씨는 "이곳은 퇴로 (退路)가 없어 군부대가 주둔할 수 없는 곳" 이라며 "6.25때 용문산 전투가 매우 심했지만 이 마을에는 피해가 전혀 없었다" 고 덧붙였다.

    설곡리는 여느 피란지와 달리 골의 폭이 매우 좁다. 또 소설이란 말이 상징하듯 겨울이면 설악산에 비견할 만큼 많은 눈이 내린다. 용문산 뒷쪽인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이곳은 집단적 거주지는 결코 아니다. 고려말 보우국사가 소설암을 짓고 몸소 경작을 했듯이 그런 장소로 적합한 곳이다.

    오늘날 눈으로 보면, 소설보다는 이웃 묵안리 (墨安里)가 더 승지에 가깝다. 소설가 조세희씨의 고향인 묵안리는 동리 입구에 검은 바위가 빗장을 지르듯 가로막고 있다. 바위에는 '묵암동천삼청일월 (墨巖洞天三淸日月)' 이란 글귀가 선명하다. 바로 속리산 우복동이 자랑하는 '동천' 이 바위 뒤에 숨어 있다.

    나라 안에서 제일 좋다는 국수 (國水)가 또한 이곳에 있다. 묵안리에서 산 하나를 넘으면 방일리 (訪逸里).가일리 (可逸里) 다. 지금은 유명산 휴양림으로 더 소문난 이곳은 이미 오래 전에 오늘의 변화를 예고해 왔다. 두 동리 모두 '크게 숨는 곳' 이란 대일 (大逸)에서 이름을 얻었기 때문이다. 지명에 숨어있는 선조들의 예지를 다시금 일깨워 주는 곳이 설악면이다.

     

     

    13. 단양군 단성면·적성면

    미래의 땅 - 십승지를 가다/중앙일보/1998.6.17


    '동국여지승람' 은 충북 단양 (丹陽) 을 두고 '산과 물이 기이하고 아름답다' 고 한마디로 평했다. 산과 물, 계곡의 아름다움을 단양처럼 한곳에서 집중적으로 볼 수 있는 곳도 우리나라에서는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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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단을 펼쳐놓은 듯한 금수산의 품에 안겨 있는 적성면 품달촌

     

    그래서 예부터 문인들이 즐겨 유람을 왔고 선비들의 휴식처가 됐다. 오늘날 역시 이곳은 월악산.소백산국립공원과 충주호로 연계되는 관광의 중심지다.

    '정감록' 역시 단양을 십승지에서 빠뜨리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단양 가차촌 (駕次村)' 을 피장처로 꼽았다. 문제는 가차촌이 어디인가다. 다른 십승지와는 달리 같은 이름이나 비슷한 지명이 지금까지 전해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 지역 향토연구가들은 대개 적성면 성곡리에 있는 가은산성 (可隱山城) 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이번 취재를 하기 위해 기자가 자료를 조사하던 중 '여지도서' 와 '호서읍지' 에서 '가차읍리' 의 기록을 찾게 됐다.

    두 문헌은 단양 (현재의 단성면 소재지) 관문으로부터 20리 서쪽에 '가차읍리 (加次邑里 또는 佳次邑里)' 가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또 같은 지역에 장회천 제방이 있다고 했다. 이로 미뤄 오늘날 단성면 장회리 일대가 바로 가차촌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단양팔경의 하나인 구담봉과 옥순봉 그리고 가은산성이 둘러싸고 있는 이곳은 피란처라기보다는 명승지다.이곳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산천을 즐기고 환란시에는 가은산성으로 피란하지 않았나 싶다. 이를 입증하듯 '여지승람' 에는 고려말 왜구의 침입때 단양인은 물론 청풍과 제천 사람들까지 이 성에 피란했다고 전한다.

    가차촌이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데 반해 여전히 옛날의 지세와 이름을 유지하는 곳이 있다. 장회리에서 멀지 않은 적성면 품달촌 (品達村 : 상리와 현곡리 일대) 이 그곳이다. 해동 성리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우탁 (禹倬 ; 1262~1342) 선생의 탄생지이기도 한 품달촌은 금수산 (錦繡山) 이 진산이다. 금수산 정상은 마치 한자 품 (品) 자처럼 생겼다. 이는 관작의 품계 (品階) 를 뜻하며 품달이란 말의 어원이 됐다. 우탁선생 이후 조선조 영조때 영의정을 역임한 유척기 역시 이곳 사람이다. 아직도 한 명의 큰 인물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이곳 출신 여인들은 친정에 와서 몸을 푸는 관습이 생겼다. '요즘도 친정 와서 아기 낳는가' 라는 질문에 박옥자 (63) 씨는 웃음으로 대신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할머니들이 "아, 첫날밤이 어디 따로 있유. 만나면 즉석에서 끝내지. " 스스럼 없는 농담이 삶의 여유처럼 다가왔다. 또 물 한바가지 퍼주면서 150살까지 살라고 축원한다. 자신들은 "미수 (米壽 : 88세)가 보통" 이라며.

     

     

     

    14. 강원도 정선군 북면

    미래의 땅 - 십승지를 가다/중앙일보/1998.6.24


    서해안에서 낙조를 바라보면 대개 황홀감에 젖는다. 이에 비해 강원도 어느 산마루에서 넘어가는 해를 보면 왠지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이때 누군가 부르는 "세월아 네월아 나달 봄철아 오고 가지 말아라/알뜰한 이팔 청춘이 다 늙어를 간다" 는 정선아라리가 바람을 타고 날아와 귓볼을 건드리면 애간장이 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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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세성도(萬歲聖都)’로 불리는 강원도 정선 땅은 승지 아닌 곳이 없다. 구절리로 자연학습 온 학생들이 돌아갈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과연 산다는 게 뭔가. 숨가쁘게 달려온 지난 날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강원도 땅은 이렇게 인생의 깊이를 되새기게 한다. 굳이 '정감록' 을 들먹이지 않아도 강원도는 영동이나 영서 어디든 십승지가 아닌 곳이 없다. 강원도의 여러 산골 중에서 특히 정선은 '무릉도원' 으로 불렸다.

     

    하늘이 만들어 놓은 험준한 산들이 고을마다 둘러싸고 있어 웬만한 장정 한 사람이 고개만 지키면 외적의 침입이 불가능하다. 이를 자랑하듯 정선에서 북평면으로 넘어가는 반점고개에는 '만세성도 (萬歲聖都)' 라는 기념비가 우뚝 서 있다.

     

    정선에서도 정감록이 꼽는 십승지는 상원산 (上元山) 동남쪽 일대다. 행정명으로 정선군 북면 여량리와 유천리, 구절리 (九切里) , 봉정리 (鳳亭里) 등이 이에 해당한다. 여량은 아우라지와 함께 널리 소개된 곳이다.

     

    사진유천리는 구절리 입구 마을로 이곳에선 '흥터' 라고 부른다. 패가가 없는 부유한 동네다. 봉정리는 임계면으로 넘어가는 중간지대로 역 (驛) 이 있던 마을이다. 반륜산 (半輪山 : 지지 않는 해) 이 지키고 있어 아직 속세의 때가 묻지 않았다.

     

    구절리는 노추산 (魯鄒山) 이 진산이다. 또 상원산이 안산으로 가마솥처럼 버티고 서서 구절리의 지기가 누설되는 것을 막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예부터 노추산 아래 만인활거지지 (萬人活居之地)가 있다고 했는데 구절리가 그곳이다. 60년대부터 지난 92년까지 8개 석탄광업소에 근무하는 5천여명의 근로자들이 이곳에 모여 살았다.

     

    앞에 있는 상원산은 그 정상에 오르면 운동장 크기의 몇 배나 되는 평지가 있다. 거기서 나는 산나물은 기근을 막아준다. 가히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춘 승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증조부 때 평안도에서 이곳으로 와 토박이가 됐다는 송창석 (63) 씨의 자랑이다. 92년 산업합리화조치로 탄광이 폐쇄된 후 이곳은 한낮에도 적막감이 감돈다. 그러나 송씨를 비롯한 이곳 사람들은 오히려 새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기대에 차 있다. 이곳 사람들은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노추산과 아우라지 그리고 정선선을 잇는 관광자원이 처녀림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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