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지 : 충청남도 부여군과 서천군의 금북기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 2012년 09월 22일 (토요일 당일 산행)
산행날씨 : 맑고 화창하였으나 무척 무더웠던 날씨
산행온도 : 영상 15도에서 영상 26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부시치고개(4번 지방도로, 대덕1리 버스정류장)-시멘트 포장 임도-162.5봉-준.희님 응원 이정판-무명봉-68번송전탑-69번송전탑-장고개(경주최공 묘지)-279봉-월명산(276봉, 원진산갈림봉)-벌목지대-비포장 임도-장뇌삼 제배 검정막-풍양조공 묘지-경주최공묘지-콘크리트 수로-나주정공 가족묘-콘크리트 계단-놋점이고개-콘크리트 포장 임도-밤나무 밭-통신탑-벌목과 잡목지대-비포장 임도-249봉 무인산불감시탑-천방산영농조합의 고압 전기목책 경고판-비포장 임도-야생동물퇴치씨스템-노루치고개(비포장 임도 삼거리)-벌목지대-잡목지대-천방산 임도 사거리(작은재줄무덤 안내판과 이정표)-잡목지대-봉림산(346봉)-조망처-잡목지대-비포장 임도-잣나무 조림지-잡목지대-풍양조공묘지들-북산리 1차선 포장도로-잡목지대-벌목지대-점심식사-잡목지대-콘크리트 말뚝 표시기-잡목지대-김해김공묘지들-대나무 밭-민가(식수 보충 및 세수)-통정대부함평이공묘지들-비포장 임도-석촌리 1차선 포장도로-함평이공 묘지들-비포장 임도-비석없는 묘지들-표고버섯재배지-한상준과 배 평산신씨 묘지-잡목과 벌목지대-139봉 삼각점(서천 430)-비포장 임도-알바-소나무 군락지-밤나무 밭-전주이씨와 배 교하노씨 묘지들-은골고개(4번 2차선 포장도로, 민가에서 식수 보충)-비포장 임도-밭 통과-알바-태봉산(76.1봉, 용궁전공과 배 광산김씨 묘지와 비석)-벌목지대-안부-무명봉-알바-김해김공 묘지들-비포장 임도-능선진입-용궁전공 묘지들-밭 통과-콘크리트 포장도로-서해안고속도로 지하통로-시멘트 임도에서 좌측 능선-수원백공 묘지들-태봉산(90봉)-대형알바-사각정자-구 장항선 철도-벌목지대-오석산 등산로-이정표(서천여자정보고등학교 800미터 방향)-클래시움 아파트-사곡리 도로-통신탑이 보이는 쉼터-서천읍성-산행종료
산행거리 : 약 26.00 Km (알바로 약 05.00 Km)
산행시간 : 잡목과 무더위로 힘들게 진행하여 11시간 35분 (06시 35분부터 18시 10분까지)
교통편 : - 애마 이용해 부시치고개에 주차 후 산행 시작
- 서천개인택시 011 450 8075로 서천에서 부시치고개 복귀(17,000.- 택시기사가 대덕1리버스정류장을 몰라 잠시 헤매였지만 너무나 친절해 다음에 기회되면 다시 이용하고 싶은 기사님이였음)
금북기맥이란 ???
박성태님의 산경표에 의하면 백두대간 천왕봉(1508봉)에서 시작하여 말티고개, 선도산(547봉), 상당산성, 좌구산(657봉), 보현산(481봉)을 지나 칠장산(516봉)에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과 갈라지면서 한남금북정맥은 끝이 나며 이어서 금북정맥은 칠현산(516봉), 안성 서운산, 천안 흑성산(519봉), 아산 광덕산(699봉), 청양 백월산(560봉), 예산 수덕산(495봉)을 지난다.
산줄기는 예산 가야산(678봉)에서 잠시 주춤거리다 성왕산(252봉), 백화산(284봉)를 거쳐 태안반도로 들어 반도의 끝 안흥진에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산경표에 금북정맥은 금강과 별로 관계가 없는 오서산과 가야산을 경유한다는 논란이 있으며 따라서 금북정맥 백월산에서 내려서다 오서산으로 향하지 않고 직진하여 성태산(624봉), 조공산(399봉), 월하산(423봉), 월명산(544봉), 옥녀봉(380봉), 봉림산(346봉), 오석산(127봉), 남산(147봉), 서대산(104봉), 중대산(102봉)을 지나 장항 앞 바다 금강 하구에서 끝을 맺는 또 하나의 산줄기를 금북기맥이라고 부르는데 이 명칭은 공식명칭이 아니고 그냥 편의상 붙인 이름이다. 다만 박성태님의 신산경표상에는 속리산 천왕봉에서 분기하여 장항 앞바다에 이르는 산줄기를 호서정맥이라 명칭하고 백월산에서 안흥진에 이르는 산줄기를 금북기맥이라 칭하고 있어 원 산경표와는 다른 주장을 하고 있음도 알아야 할 것이다.금북기맥은 청양의 백월산에서 시작해 장항 앞바다인 금강 하구까지 이어지는 69.4 Km의 산줄기를 말한다.
잡목과 벌목지대 그리고 늦더위로 무척 고생하며 어렵게 올랐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 후기를 참고한 후 난해하고 어려운 정맥 산행을 진행해 무탈하게 맥 잇기 산행을 다녀왔기에 단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정맥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추석을 일주일 남겨두고 시골로 내려가 사촌 형님들과 벌초가 예정되어 있어 금요일까지 일을 마무리하고 저녁 늦게 또는 토요일 새벼같이 내려갈 준비를 마치고 전화를 하니 벌써 벌초를 마쳤다는 소식이다.
괜시리 미안하면서도 내일 하루 벌었다는 생각에 또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 새벽 일찍 서천으로 내려가 남아 있는 금북(호서)기맥 두 구간을 마치고 올라 오기로 한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잡목과 올해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의 영향으로 잘리고 쓰러진 나무들로 인해 산행의 불편함은 말할 것도 없이 등로 찾기가 너무나 어려워 많이 지체되여 버렸다.
특히나 서해안고속도로 지하통로를 무탈하게 건넌 후 태봉산으로 잘 올랐지만 그곳에서 사각정자쪽 들머리를 찾지 못하고 근 한시간 20여분 헤매였던 것이 부담으로 남아 결국 하루 더 진행하지 못하고 서울로 복귀하게 되였다.
추석 때 어머님 산소에 인사를 드리기 위해 내려가야 하기에 하루쯤 시간 빼 남아 있는 금북(호서)기맥 산행을 마무리하고 오늘 그토록 어렵게 올랐던 고속도로 지나 태봉산과 그 이후로 서천읍성까지도 새롭게 밝고 올라올 예정으로 남겨 둔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봉림산 정상에 오르니 일망무제 탁 트인 조망이 펼쳐져 있고 뜨거운 태양열 아래 시간 가는줄도 모르게 오랫동안 주위 풍경을 즐겨 보는 시간이다.
특히나 이제부터 걸어 내려가며 진행해야 할 마루금이 멋지게 펼쳐져 있지만 북산리 포장도로까지는 난해한 등로 찾기를 하며 미로속을 헤매야 함을 알기에 조금 더 상세히 내려가야 할 방향을 살펴 본다.
그래도 끊어질듯 이어져 금강까지 줄기차게 내려가는 마루금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우리 인생도 이 마루금을 닮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새벽 일찍 일어나 이틀동안 머물며 산행 할 준비를 하고 배낭 매고 출발해 부시치고개로 달려가니 맑던 날씨가 충남으로 들어가자 마자 짙은 안개가 피어 오르며 주행에 어려움을 줄 정도이다.
생각보다 일찍 부시치고개에 도착을 하니 산행 들머리 좌측으로 영업이 안돼 문을 닫은 옥산주유소와 산장가든이 더욱 을씨년스럽게 다가오고 그곳에서 산행 준비 후 몇장의 사진을 담은 후 짙은 안개속을 걸어 올며 멀고도 긴 하루의 산행을 시작한다.
이곳 고개는 부시치고개로 알려져 있는데 그 어느곳에서도 지명에 대한 유래나 전설을 찾지 못했기에 아쉬움만 남기지만 그래도 버스정류장으로 표기된 대덕리에 관한 자료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되어 있다.
부여군 옥산면의 남서쪽에 위치한 대덕리는 서천군 판교면과 보령시 미산면과 접하고 있는 마을로서 조선시대 중기 전주이씨가 정착하면서 남원윤씨, 밀양박씨, 진주강씨가 들어 와 마을을 이룬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하서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일유리, 대마동, 부덕리를 병합하여 대마와 부덕의 이름을 따서 대덕리라 하여 부여군 옥산면에 편입되었다.
일유마을과 마을 지형이 큰말과 같이 생겼다 하여 대마동, 처음에는 우만리라고 부르던 마을인데 마을이 빈곤하여 부를 쌓고 덕을 베푸는 동네가 되라고 부덕이라고 고쳐부른 자연마을이 있다.
부시치에 대한 자료를 찾지 못해 못내 아쉬운 시간이다.
대덕1리버스정류장을 우측에 두고 좌측으로 나 있는 콘크리트 포장임도를 타고 절개지 정상부로 걸어 올라가니 임도 좌측으로는 민가들이 보인다.
그 콘크리트 포장도로 정상부에 도착을 하니 사람들의 왕래가 없어 그런지 잡풀과 칡넝쿨이 우거져 있고 그 위에 내려 앉아 있던 물방울들이 이 산객이 지나면서 흔들어 비산하며 등산복과 등산화를 적시고 있다.
그 정상부에서 좌측 우거진 잡목을 헤치고 들어가니 뚜렷한 등로가 나타나지만 최근에 지나간 태풍의 영향으로 많은 나뭇가지가 떨어져 혼란스럽고 큰나무들도 부러져 등로를 막고 있다.
안개가 더욱 짙어지는 등로를 타고 오르니 162.5이라 생각되는 곳에 오르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삼각점은 보이지 않고 그곳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준.희님의 응원 이정판이 나뭇가지에 붙어 있다.
등로는 제법 뚜렷하게 나 있지만 안개가 짙어지니 바로 앞만 보일 정도로 시야가 좁아져 있다.
계속 짙은 안개속에 뚜렷한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눈앞에 68번 송전탑이 나타나고 번호를 사진에 담은 후 다시 진행하니 눈 앞에 거대한 벌목지대가 펼쳐져 있고 나즈막한 골짜기엔 하얀 안개가 드리워져 있어 꿈결같은 풍경에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본다.
이제 그 벌목지대를 우측에 두고 좌측 능선을 타고 걸어가니 우측 벌목지대 저 멀리 걸어가야 할 마루금과 그 끝자락에 봉림산이 얼굴만 내밀고 있는 풍경이 들어 온다.
조금 더 걸어 올라가니 등로 앞 능선 위에서 갑자기 하얀 안개가 벗어지며 붉고 둥근 해가 불쑥 솟아 오른다.
하얀 안개가 바로 앞 능선을 타고 좌측에서 우측 판교리 방향으로 넘어가는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워 다시 잠시 발걸음 멈추고 바라본 후 출발한다.
잠시 더 걸어 잡목을 헤치고 오르니 등로 좌측에 69번 송전탑이 보이고 번호를 카메라에 담은 후 우측으로 꺾어 진행하니 금새 안개가 사라지기 시작하고 밝은 아침 태양빛이 잡목 사이로 파고 들며 아름다운 세상을 열어주고 있다.
다시 뚜렷한 등로를 타고 내려가다 잡목을 넘으니 경주최공 묘지들이 자리하고 그 아래에는 비포장 임도가 지나는 장고개에 도착해 저 멀리 서천의 진산인 희리산과 문수산을 조망해보는데 그 아래 깔려 있는 안개속의 모습이 너무나 황홀하다.
하지만 호사다마라 했던가
잘 사용하던 DSRL 카메라에 이상이 생겼는지 화면이 이상하게 나타나고 아쉽지만 무거운 카메라를 배낭에 넣고 똑딱이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잠시 뚜렷한 등로를 타고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잡목이 우거져 서서히 등로가 보이지 않고 그렇게 등줄기와 이마에 땀방울을 흘리며 오르니 정상부에 준.희님이 달아 놓은 279봉 이정표가 나타난다.
아침 햇살이 잡목을 뚫고 들어 와 사람들이 사는 세상과는 너무나 다른 풍경으로 가슴에 남아 있는 시간이다.
다시 계속 뚜렷한 등로를 타고 진행을 하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많지 않다보니 점점 더 등로가 희미해지고 잡목이 등로를 덮고 있는 형상이다.
그렇게 처음 걱정과는 달리 무사히 등로를 찾아 진행한다는 안도감이 밀려오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제 등로는 소나무들이 줄지어 들어 선 군락지를 이루고 아주 편안하게 잠시 오르락 내리락하니 금새 원진산 갈림봉인 월영산에 도착을 하지만 아무 표식도 없어 무심코 진행하면 잘 모르고 지나갈 것 같은 그런 봉우리이다.
지도를 보면 봉우리 좌측으로는 원진산 가는 등로임을 잘 알고 있기에 우측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는 띠지들이 나부끼는 등로를 확인한 후 식수 한모금으로 목마름을 달랜 후 다시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며 출발한다.
월영산에서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벌목된 나무들이 너부러져 있고 어렵게 내려가니 뚜렷한 내리막 등로가 직진으로 나 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정상 등로가 아닌듯 하다.
혹시나 하고 띠지를 찾아 보지만 찾기도 어렵고 느낌상 아닌듯 하여 다시 올라 와 주의 깊게 살펴보니 정상 등로는 희미하게 내려오다 금새 우측 잡목 사이로 나 있다.
소나무 군락지로 이뤄진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금새 비포장 임도와 만나는데 그 임도 건너 평이한 능선 진입로에 산행 들머리를 표시하는 띠지가 붙어 있다.
다시 잡목과 소나무가 어우러져 있는 등로를 타고 평이하게 전진하니 선답자들의 산행 후기에서 봤던 검정 타양막이 쳐져 있는 장소에 도착해 그 차양막을 우측에 두고 따라 내려가며 진행하도록 되어 있다.
내려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차양막 내부를 살펴보니 아마도 장뇌삼을 심어 놓은 장소인듯 하며 그 삼을 보호하기 위해 CCTV까지 설치된 모습이 눈에 들어 와 삭막해지는 세상사를 엿보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못하다.
이 산객의 고향이 청양이다 보니 어릴적부터 많은 인삼 재배지를 봤고 그 인삼 덕분에 건강하게 잘 컸기에 더욱 가슴에 담아 보는 풍경이다.
그 검정 차양막을 따라 계속 내려가니 어느 순간 그 검정 차양막이 끝나고 안부가 나타나고 잠시 두리번 거리며 등로를 찾아 보지만 우측 하산 등로는 아닌듯 하여 다시 안부를 올라 직진으로 진행하니 검정 차양막이 파란색으로 변해 있다.
그 파란 차양막을 타고 계속 진행하니 파란 차양막이 우측 방향의 직각으로 멀어지는 곳에서 능선 또한 우측으로 나 있어 따라 가 보지만 얼마 가지 못해 등로가 사라져 버린다.
다시 뒤돌아 올라 와 파란 차양막 있는 곳에서 살펴보니 직진 방향으로 희미한 등로가 나 있고 그 등로를 찾아 가니 다시 벌초가 잘 되어 있는 경주최공 묘지가 나타난다.
처음에는 산소의 벌초를 위해 나 있는 길이라 생각해 다시 차양막으로 뒤돌아 와 아무리 등로를 찾아 보지만 찾을 수 없어 다시 그 경주최공 묘지있는 곳으로 가 살펴보니 묘지 좌측으로 다시 희미한 등로가 보이고 그곳으로 빠져 나가며 산행을 이어가 본다.
그 희미한 등로를 타고 내려가는데 콘크리트 수로가 보이는가 싶더니 바로 등로 우측으로 차량 소음이 들려 온다.
확실한 등로임을 직감하고 콘크리트 수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는데 등로는 점점 더 희미하더니 금새 막혀 버리고 등로 좌측으로 넓은 공터같은 모습이 눈에 들어 오는데 살펴보니 넓은 가족묘 같은 곳에 많은 묘지들과 비석이 보인다.
무조건 그곳 좌측으로 내려가 살펴보니 나주정공과 배 김해김씨 묘지들이 들어 선 가족 묘지 같은 곳이였다.
그 묘지 끝자락쪽으로 내려오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놋점이고개이다.
놋점이고개에 도착해 등로를 찾아 보지만 보이지 않아 도로를 타고 우측으로 올라 고갯마루를 넘으니 도로 우측에 놋점이란 버스 정류장이 보이는데 보는 방향에서 우측인 동쪽은 금북리이고 좌측인 서쪽은 판교리이다.
그 버스정류장에서 도로를 건너 다시 놋점이 고갯마루 쪽을 올려다 보니 도로 우측으로 시멘트 포장도로가 보이고 그 끝자락에 차량 두대와 가족들이 앉아 담소를 나누는지 이야기 소리가 들려 온다.
잠시 판교리에 대한 자료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판교의 중심지는 판교리이다.
모든 고개마루의 길은 판교리로 통한다.
그러하기에 판교리에는 장시가 발달하였다.
사방으로 뚫인 고개를 넘어 판교장 즉 너다리장을 찾았다.
판교는 널 판자에 다리 교자로 널다리가 있던 마을이다.
즉 널다리는 지금의 판교리 노인회관 앞에 나무로 제작한 다리가 있어 유래된 지명이다.
지금도 그 노인 회관의 이름이 너다리 노인회관이다.
사방으로 통하는 길을 중심으로 발달한 판교장에는 서천, 비인, 문산, 주산, 미산, 옥산 사람들이 다녔다.
이 지역의 경제 활동이 판교장을 중심으로 이루어 졌다.
특히 판교장은 우시장으로 유명하다.
광천 우시장, 공주 우시장, 마산 새장 등으로 유명한 우시장의 중심지가 판교였던 것이다.
그 시장의 흔적이 옛 판교초등학교 주변에 남아 있다.
판교장은 상거래의 중심지로써 상무사 조직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보부상단이 구성되어 상거래의 질서를 유지하고 물동량을 조절하였던 기능을 갖고 있었다.
그랬던 판교가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에서 이름마저 잊혀져 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운 시간이기도 하다.
그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오르니 가족들이 앉아 식사를 하고 있고 잠시 잡목지대를 넘어 오르니 밤나무 밭이 나타난다.
그 밤나무 밭을 따라 오르니 두어명이 밤을 줍고 있는데 방금 전 만났던 가족들과 함께 온듯 하여 인사 나누고 다시 오른다.
오르니 밤나무 밭 좌측 가장자리에 통신탑이 서 있고 그 앞을 통과해 밤나무 밭을 빠져 나가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간다.
밤나무 밭을 통과해 오르니 소나무 군락지가 펼쳐져 있고 그 한가운데를 통해 편안하게 산행을 이어가 본다.
잠시 더 멋진 소나무 군락지를 따라 오르니 다시 잡목지대가 나타나고 그곳에 있을 삼각점을 찾아 보지만 도저히 찾을 방법이 없다.
그 잡목 지대를 어렵게 뚫고 오르니 빨간 노끈이 올바른 등로임을 알려주고 태풍에 쓰러진 거목들이 등로를 가로막고 어려운 잡목지대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계속 이어지는 잡목지대를 어렵게 뚫고 진행하다 보니 등산복이 만신창이가 되어 가고 생각보다 더운 날씨에 온몸은 다시 비에 젖은듯 축축해져 온다.
생각보다 많은 식수가 필요할 듯 하여 음료수 포함해 모두 3리터 이상 준비한 식수가 걱정이 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진행하니 이장된 듯한 공터를 지나 넓은 비포장 임도를 만나는데 그 임도 옆에는 철사줄이 쳐져 있고 그 의미를 알 수가 없다.
그 비포장 임도를 타고 좌측으로 걸어 오르니 임도 우측은 잘 간벌되어 있어 잡목도 사라져 있는데 이 산객이 걸아 나온 좌측은 소나무와 그 아래 키가 큰 잡목이 등로를 가득 채워 비교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게 비포장 임도를 타고 오르니 커다란 무인산불감시탑이 서 있는 249봉에 올라 잠시 심호흡하며 식수 한모금 마셔본다.
잠시 그 무인산불감시탑 주위를 다녀 나오니 다시 이슬에 등산화가 젖어 있고 조심해 내려 와 비포장 임도를 타고 좌측으로 계속 걸어 내려가 본다.
한동안 내려가니 등로 우측에 천방농산영농조합에서 붙여 놓은 고압전기목책 경고문이 서 있는데 실제 고압 전기는 흘리지 않는듯 이 산객이 몇번인가 접촉을 했는데도 무사하다.
아마도 산림자원을 보호하기 위한 경고문이란 생각이다.
그곳 경고판을 지나 조금 더 진행하니 등로는 좌측 능선으로 이어지고 잡목이 우거져 진행에 많은 어려움을 느낀다.
어렵게 그 잡목구간을 지나니 다시 멋진 소나무 군락지가 나타나고 그곳을 지나 진행하니 다시 키작은 잡목과 관목이 등로를 막고 산객을 잡아채고 있다.
그렇게 어렵게 잡목을 뚫고 전진하니 다시 철사줄이 쳐진 비포장 임도를 만나 그 임도를 타고 좌측으로 오르니 갑자기 넓은 공터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잠시 임도 우측으로 멋진 조망을 감상한다.
노루치고개 지나 221봉 능선 넘어 저 멀리 봉림산이 얼굴만 내밀고 어서 오라 손짓하는듯 하다.
등로 우측 남서쪽으로는 금덕리 마을의 좁은 농지가 멋지게 펼쳐져 있고 그 주위를 나즈막한 산들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사진 좌측 저 멀리에는 서천의 희리산과 문수산이 까마득히 멀리 보이지만 오늘 걸어야할 마루금을 타고 진행하면 저 산들도 가깝게 자리할 것이다.
금덕리는 서천군 문장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금단과 만덕의 이름을 따서 금덕리라고 하였다.
안동권씨 50여호의 집성부락이 있다. 이 금덕리에는 4개의 부락마을이 있는데 만덕 마을에 망덕사라는 절이 있었으므로 이에 연유하여 만덕이라고 부르고 산막골은 산막곡이라고도 부르는데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인 곳에 마을이 있으므로 산막골 또는 산막곡이라고 부른다. 원닷골은 원다곡이라고도 부르는데 골짜기 안쪽으로 마을이 있으므로 그리 부르며 금단은 금단리라고도 부른다. 또한 변해서 검단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시대에 권좌에 올랐던 안동권씨가 사방에 씨족의 권세를 위하여 금단의 서약을 많이 하였었다. 명문으로서 자리를 지키는 인물들이 사는 마을이라 금단이라 부르고 변하여 검단이라고도 부른다.
참으로 많은 인문사를 배워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조망을 즐긴 후 뒤돌아 서 보니 그곳에 야생동물퇴치시스템이란 장치가 보인다.
다가가 살펴보니 태양광을 이용한 전자 센스로 이동하는 동물들에게 특수 빛이나 소리를 줘 지나지 못하게 하는 장치는 아닐까 생각해 보는 장치이지만 처음보는 것이기에 신기할 뿐 특별한 애착은 없다.
이 산객이 그 앞에서 몇번 왔다리 갔다리 해 보지만 특별한 변화는 없는 듯 하다.
이제 계속 그 비포장 임도를 타고 진행하니 완만한 내리막 임도가 이어지는데 그 임도 양쪽으로는 멋진 소나무들이 도열해 이 산객을 맞이하듯 서 있다.
그렇게 한동안 내려가니 비포장 임도가 만나는 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지도를 살펴보니 노루치고개이다.
잠시 주위 풍경을 사진에 담고 있는데 차량 두대가 이 임도를 타고 지나가며 이상한 눈으로 이 산객을 살펴보며 지나간다.
이 산객의 눈에는 차량을 타고 이런 비포장 임도를 지나는 사람들이 더 이상하게 보이는데 말이다.
이 고개는 서천군 판교면의 금덕리와 문산면의 수암리를 이어주는 고갯마루로서 2011년에 개설되였다는 표지석이 보이지만 왜 노루치고개인지 알 수 없으니 아쉬운 시간이기도 하다.
비포장 임도를 가로질러 능선으로 오르며 다시 편안한 등로를 타고 오른다.
그러더니 다시 등로는 잡목이 우거지기 시작하고 가끔 나타나는 벌목된 나무들이 등로를 가로막아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다시 소나무 군락지와 잡목이 우거진 등로가 교대로 나타나더니 어느 순간 앞이 트이며 저 멀리 올라야 할 능선과 그 끝자락에 고개만 내밀고 있는 봉림산 정상이 빤히 올려다 보인다.
선답자들의 후기에 어렵게 올랐던 봉림산 등로가 생각나기에 그저 무덤덤하게 아무 생각 없이 올라 보리라 마음 먹고 오르는 길이다.
잠시 더 오르니 이장된 묘지가 있었던 곳인 듯 공터가 나타나고 그곳을 오르니 등로 좌측이 벌목된 벌목지대가 나타난다.
이제 좌측에 벌목지대를 두고 문산면 수암리를 내려다 보며 진행하게 되는데 등로 우측으로는 소나무와 잡목이 자라는 일반 야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번 태풍이 얼마나 강했는지 홀로 서 있던 소나무들은 대부분 부러져 꺾여 있는 모습이 가슴을 아프게 만들고 있다.
이제 천천히 그 벌목지대와 야산의 경계인 등로를 타고 오르며 등로 좌측을 바라보니 그곳에 수암리 마을과 들녘 그리고 그 뒤 저 멀리 문산저수지가 내려다 보인다.
그 들판엔 벌써 가을이 성큼 다가온듯 황금빛으로 변하기 시작하는 모습도 눈에 들어 온다.
이 산객이 태어나 자란곳도 유사한 풍경이기에 가슴속 깊이 남겨지는 아름다운 농촌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주위 조망을 즐기며 오르다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올라 온 노루치고개는 잡목들에 가려 보이지 않고 그 넘어 이 산객이 지나 온 마루금만이 평이하지만 길게 드러나 있다.
우측의 제법 높은 봉우리를 타고 좌측으로 흐르다 바로 발 아래 보였던 노루치 고개로 떨어졌다 이곳 벌목지대로 이어지는 마루금이 한눈에 들어 온다.
인간의 두발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다시 한번 깨닭고는 다시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다시 소나무 군락지 아래에 자라난 키큰 잡목을 헤치고 완만하게 오르는 등로를 타고 올라보는 시간이다.
간간히 나타나는 선답자들의 띠지가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그저 고마운 마음으로 함께 걸어 올라본다.
다시 묵묘처럼 보이는 공터를 지나 오르니 바위들이 산재한 221봉을 넘어 이제는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타고 소나무 군락지를 걸어 내려간다.
그곳을 타고 잠시 더 내려가니 공터 부분만 시멘트로 포장된 천방산오름 사거리에 도착을 한다.
천방산 임도시설 현황 표지석과 천주교백색순교자 작은재줄무덤 빗돌 그리고 각 마을로 통하는 이정표가 몇개 서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 온다.
서천군 판교면 금덕리에 있는 백색순교자 작은재줄무덤 기념비의 자료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박해시대 서천 지역 신앙 선조들의 삶의 터전이자 순교자들의 유해가 묻힌 무덤 터가 2010년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 같은 사실은 호남교회사연구소 서종태 박사가 발간한 박해기 서천지역 천주교회사에 대한 연구 자료집을 통해 밝혀졌다.
자료집에 따르면 천방산 산막골(현 충청남도 서천군 판교면 금덕리)은 신앙 선조들이 1839년 기해박해 이후 군란을 피해 인적 없는 산간벽지에 숨어 신앙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곳이자 다블뤼 주교와 페롱 신부의 사목 중심지로 밝혀졌다.
또한 이곳은 순교자들이 심한 형벌을 받고 피를 흘렸던 점으로 보아 성지로서의 의미도 갖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이곳은 황석두 루카 성인 일가가 충청북도 연풍에서 이주해 와 1866년 병인박해가 있기 전 10여 년 동안 머물면서 참회와 보속의 삶을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서천군 문산면 수암리 산 78번지의 천방산 기슭은 수암리의 독뫼 공소 터와 판교면 금덕리의 작은재 공소 터를 이어주는 고갯마루로 이름 없이 살다간 숱한 신앙 선조들의 줄무덤이 있던 자리였다.
하지만 1994년 산림도로 개설과 함께 줄무덤 터는 콘크리트에 묻히고 말았으며 당시 공사현장에서 숱한 유골과 함께 발굴된 십자가와 묵주 등 성물도 연고자가 없어 인근에 다시 묻혔으나 그 위치를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대전교구 서천 본당 주임으로 정성용 신부가 부임하면서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박해시대 서천 지역 신앙 선조들의 숭고한 터전들이 하나씩 밝혀지게 되었다.
서천 본당은 2010년 11월 천방산 고갯마루에서 유흥식 주교 주례로 산막골 작은재 줄무덤 터 현양미사를 봉헌하고 수암리의 독뫼 공소 터에 세워진 성모동산과 공소 터에서 작은재를 오르는 산길에 세워진 십자가의 길 14처에 대한 축복식도 가졌다.
또한 독뫼 공소와 작은재 공소 터에 기념비를 세워 교우촌 순례길을 돕고 있으며 작은재 줄무덤 터에도 기념비를 세워 천주교 백색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있다.
종교가 무엇이길래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서까지 전파하고 그 전파를 막으려고 했는지...
천방산 임도 사거리에서 직진의 잡목이 우거진 능선을 넘어 오르니 계속 잡목이 붙잡아 진행을 더디게 만들지만 한발 두발 천천히 오르다 보니 봉림산 주능선에 도착을 하고 등로 우측으로는 만덕교와 홍림저수지 그리고 홍림교가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다시 계속되는 잡목지대를 뚫고 전진하니 갑자기 아담한 정상석이 앉아 있는 봉림산 정상에 도착해 셀카를 작동시켜 사진 한장 남기고 주위 풍경을 조망해 본다.
봉림산은 충청남도 서천군의 문산면과 판교면 경계에 위치하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346미터이며 남동쪽으로 천방산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또한 대수산이라고도 하는데 관아의 북쪽 20리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고 여지도서에 산은 아득하고 바다는 너르다.
북쪽으로 봉림산이 쭈삣하고 서쪽으로 응암이 우뚝하다라 노래한 이승소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해동지도에는 봉림산이라는 지명과 함께 그 산줄기에 대수산이라는 지명도 표기되어 있다.
오늘도 이곳 금북기맥에 올라 멋진 산 이름 하나를 더 얻어 내려가니 그것만으로도 오르는 기쁨은 충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배낭 내려 놓고 시원한 식수로 목을 축인 후 준비해 간 사과 하나를 입에 물고 천천히 주위 풍경을 감상해 보는 시간이다.
남서쪽으로 이제부터 타고 내려가야 할 금북기맥 마루금이 끊어질듯 이어지며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다만 이곳 봉림산에서 북산리도로까지는 잡목이 우거지고 등로가 희미하게 사라져 가고 있어 마루금 찾기가 쉽지 않다고 알고 있기에 조금 더 세심하게 마루금이 지나는 방향과 모습을 지도를 살피며 꼼꼼히 확인해 둔다.
저 멀리 혹시나 하고 서천읍과 금강이 보일지 몰라 찾아 보지만 박무로 인해 그곳까지는 너무 멀은듯 하다.
그 금북기맥 마루금 좌측으로는 서천군 시초면의 나즈막한 야산들과 들판이 펼쳐져 있고 그 끝자락에 금강도 보이는듯 하다.
그 들판 좌측 가까운 곳에는 천방사란 절이 크게 보이는데 그 절에 대한 자료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이 김유신과 관계가 있었던 절로 나온다.
김유신은 백제를 치려고 당나라에 병력을 청하였는데 당나라에서는 소정방으로 하여금 배로 군사 12만 명을 거느리고 청방산 아래에 정박하게 하였다.
그런데 연기와 안개가 자욱하게 덮여 천지가 캄캄하였다.
김유신은 산신령에게 기도하기를 만일 안개를 활짝 개게 해주면 절 1000채를 세워 부처님을 받들겠다고 하자 곧 안개가 걷혔다.
그런데 산에 올라가서 두루 살펴보니 지세가 너무 좁아 절 1000채를 도저히 세울 수 없었으므로 돌 1000개를 배치하여 절의 형태만 만들고 법당 1동을 세워 천방사라 불렀다고 한다.
후에 이 절은 선림사라 고쳐 불렀으며 고려 숙종의 명으로 중수하고 불상을 안치한 뒤 다시 천방사라 고쳐 불렀다.
그 뒤 조선 중기까지 존립하다가 폐사가 되었는데 빈대로 인한 것이라고 전한다.
이렇듯 사라진 절을 다시 근래에 새로 세운듯 크게 넓게 느껴지기에 충분한 터인듯 보인다.
천방산 임도 사거리에서 부터 의문점을 가지고 올랐던 남동쪽을 바라보니 그곳에 천방산이 우뚝 솟아 있다.
왜 봉림산 임도가 아닌 천방산 임도일까 궁금해 자료를 찾아 보니 천방산에 대한 자료를 다음과 같이 찾을 수 있었다.
천방산은 충청남도 서천군의 판교면 등고리와 금덕리 그리고 문산면 북산리와 수암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324미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군 동쪽 21리에 있다라 하였고 여지도서에 천방산은 관아의 동쪽 21리에 있다.
봉림산 곧 대수산으로부터 뻗어 나온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해동지도 (서천)를 보면 문장면에 산의 형세와 함께 천방산이라는 지명이 나와 있다.
주위에 금단산과 봉림산이 있다.
특이한 사항은 없는듯 한데 이곳 봉림산보다는 천방산이 이곳 주민들에게는 더 잘 알려진 산처럼 보이는 까닭이 궁금해 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등로 우측으로는 동고리 마을과 들판 그리고 그 넘어 만덕교와 흥림교가 흥림저수지 위에 놓여 있는 풍경도 눈에 들어 온다.
그 뒤로 서천의 진산으로까지 대접받고 있는 희리산과 문수산 줄기가 흥림저수지를 병풍처럼 둘러쳐 있듯 보이는 모습이 아름답다.
오래전 한번 올랐던 곳인데 그 이후 산을 알게 되면서 오르지 못했기에 조만간 시간 되면 꼭 한번 올라 이곳 봉림산과 천방산을 바라보며 오늘을 추억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아름다운 풍경 좌측으로는 이 산객이 타고 내려가야 할 금북기맥 마루금이 너무나 환상의 풍경으로 이 산객의 가슴속으로 파고 들고 있다.
잠시 봉림산 정상에서 마루금을 타고 내려가니 민둥산처럼 잡목이 사라진 좋은 등로가 이어지는가 싶더니 금새 등로는 사라지고 잡목이 붙잡아 도저히 내려 갈 수가 없을 지경이다.
어렵게 조금 더 내려가 잡목 사이로 내려다 보이는 마을과 등로를 확인하니 아무래도 이곳 등로가 아닌듯 싶어 다시 민둥의 능선으로 올라 내려다 보니 방금 이 산객이 들어가 허우적 거리던 좌측 능선이 아닌 우측 능선을 타고 내려가야 될 것 같다.
등로 우측으로는 등고리 가옥들과 비닐하우스가 빤히 내려다 보이는데 민가들은 최근에 새로 지은 집인듯 멋지게 들어서 있다.
등고리는 서천군 문장면의 지역으로서 높고 험한 고개가 있으므로 등고개 또는 등고라 불렀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등고리라 하여 문산면에 편입되었다가 뒤에 판교면에 편입되었다. 이 등고리에는 소현골이란 마을이 있는데 윗말이라고도 부른다. 등고개 위쪽 작은 산줄기 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그리 부르게 되였으며 등고개란 마을은 등고라고도 부르는데 험한 고개 아래 있으므로 그리 부르게 되였다고 전해지는 마을이다.
약간은 남서쪽으로 내려가는 희미한 등로를 따라 내려가다 보니 어느새 다시 등로가 사라지기를 몇번 그래도 감각적인 본능을 따라 내려가니 끊어졌던 등로가 다시 나타나고 그렇게 한동안 내려가다 잠시 뒤돌아 보니 잡목이 산 전체를 뒤덮어 어디가 어딘지 분간조차 하기 힘든 풍경이다.
그 봉림산 정상부로 이어지는 잡목지대를 올려다 보며 스스로에게 대견함을 느끼며 다시 이어지는 잡목과 소나무 사이를 뚫고 어렵게 이어가는 맥 산행이 되였다.
다시 키가 큰 소나무와 잡목이 우거진 내려가야 할 등로를 바라보며 지도를 정치해 독도를 해 보니 정상적인 등로를 타고 내려가는 기분이라 그대로 진행을 해 본다.
설령 잘못 내려간다 해도 다시 만나야 할 산판도로인 비포장 임도를 만나 정상적인 루트를 타고 진행하면 큰 무리가 아닐듯 싶어 조심하며 다시 출발한다.
내려가다 앞을 보니 뚜렷한 마루금이 펼쳐져 있고 그 마루금을 따라 내려가면 좋을듯 한데 잡목과 싸우다 보면 정상적으로 내려 갈 수 있을지 사실 걱정도 되는 시간이였다.
그렇게 앞을 조망하며 잡목 사이를 헤치고 내려가니 생각보다 잡목의 키가 크지 않아 제대로 된 마루금을 따라 희미하게 내려 갈 수 있었다.
많은 산객들이 다니지 않고 또한 옛날처럼 나무를 해다 때는 집안들도 없기에 한번 우거지기 시작한 등로는 다시 만들어지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알기에 앞으로 진행 할 후답자들이 더욱 걱정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조심하며 내려가니 갑자기 절개지가 나타나고 그 아랴로는 가느다란 로프가 달려 있는데 그 로프를 타고 냐려가며 비포장 임도를 만난다.
그 비포장 임도를 만나 다시 길처럼 전혀 보이지 않는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잡목을 헤치며 내려가니 다시 가야 할 마루금이 시원하게 조망되고 꼼꼼히 확인하며 그 등로를 머릿속에 담아 둔다.
하지만 이제부터 지독한 잡목과 소나무들이 빼곡히 등로를 차지해 산객의 진행을 방해하고 참으로 어렵게 전진하며 걸어가다 보니 온 몸이 상처 투성이로 변해 버린다.
고통을 수반하며 그 힘든 미로같은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이제 다시 싸리나무가 이 산객의 키보다 훨씬 웃자라며 다시 발목을 잡고 늘어지기 시작한다.
태양열은 뜨겁게 내려 쬐는데 많이 준비한다고 한 식수는 간당거리는 상황에서 참으로 어렵게 진행하는 금북기맥 산행이 되어 가고 있다.
참으로 어렵게 온 몸에 생채기를 만들며 지독한 잡목지대를 빠져 나오니 풍양조공 묘지가 나타나고 엊그제 후손들이 찾아 깨끗하게 벌초한 모습이 아름답게 비춰지는 시간이다.
그 묘지들을 지나 다시 짧은 잡목지대를 지나니 또 다른 풍양조공의 묘지들이 나타나고 그곳을 빠져 나가니 북산리와 등고리를 이어주는 북산리 1차선 포장도로 위에 도착을 한다.
그 도로를 건너 반대편 능선으로 오르니 이름 없는 잘 정리된 묘지 한기를 지나 잡목 사이로 등로가 열려 있고 그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오르며 진행을 한다.
잘려진 나뭇가지들이 등로를 막아 돌아가고 밑으로 기어가며 어렵게 오르니 무명봉이 나타나고 다시 완만하게 짧게 내려갔다 오르기를 두어번 더 경험한다.
그리고는 만나는 무명 묘지를 지나 진행을 하는데 이곳까지 오면서 만났던 모든 묘지들을 후손들이 벌초로 깔끔하게 정리한 모습을 보니 이고장 사람들의 조상 섬기는 자세가 어떤 것이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무명 묘지를 지나 계속 전진하니 이제 잡목이 많이 사라지고 잘 생긴 활엽수 군락지를 타고 조금은 편안하게 진행하는 시간이 되였다.
그렇게 진행하다 잡목이 사라진 곳에서 등로 우측으로 시원하게 조망되는 지나 온 금북기맥 마루금을 살펴보고 다시 소나무 숲을 지나 전진하다 뒤돌아 보니 소나무 가지 사이로 방금 전 어렵게 올랐다 내려온 봉림산 정상부와 그 우측으로 천방산 산줄기가 어렴풋이 드러나 있다.
제법 고도를 자랑하듯 하늘 높이 솟아 있는 풍경이 조금은 이색적으로 다가오는 시간이기도 하다.
계속 뒤돌아 보며 조금씩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봉림산과 천방산을 조망하며 앞으로 전진하니 소나무 군락지가 나타나다가 금새 잡목지대로 변하는 등로가 되어 버린다.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이 산객이 진행할 만큼의 공간은 비워둔 것 같아 요리조리 나뭇가지 사이를 빠져 나가며 진행을 한다.
그렇게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어느 순간 앞이 훤히 열리며 시원한 벌목지대가 나타난다.
시간을 보니 벌써 12시 25분을 가리키고 허기가 밀려 오기에 시원한 소나무 그늘 아래 보잘것 없지만 풍성한 점심상을 펴고 바지 속옷만 남긴 채 모두 벗어 물기를 짜낸 후 뜨거운 햇살에 말리며 즐거운 식사 시간을 가져 본다.
아침 저녁으로는 차가운 바람이 불어 오지만 한낮 산행하기에는 아직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시기이기에 생각보다 어렵게 진행하는 맥 잇기 산행이 되였다.
그렇게 30여분가 꿀맛같은 점심시간을 보낸 후 다시 벗었던 옷가지를 챙겨 입고 출발해 본다.
식사를 끝내고 좌측으로는 벌목지대가 우측으로는 평이한 산의 경계를 타고 진행하니 등로 좌측으로 멋진 풍경이 조망되고 몇장의 사진을 남겨 본다.
북산리 마을로 보이는데 이제 푸른 들판이 조금씩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며 풍요로운 가을 준비하는 모습도 눈에 들어 온다.
풍양조씨가 많이 살며 그 집성부락도 있다.
아마도 그래서 지금까지 산행을 하면서 그렇게나 많은 풍양조씨 묘지들을 만났었나 보다.
생각보다 뜨거운 한낮의 태양열을 받으며 벌목지대를 걸어가는 시간이 결코 달갑지 않은 시간이다.
그래도 한발 두발 걸어가니 그 벌목지대가 끝이 나며 잡목과 잡풀이 우거진 등로로 들어가게 된다.
그곳으로 들기 직전 잠시 뒤돌아 보니 지나온 벌목지대 능선 저 멀리 좌측으로 봉림산이 우뚝하고 우측으로는 천방산이 마치 지리산의 반야봉을 연상시키듯 아름답게 보인다.
다시 잡풀지대를 넘어 오르니 지독한 잡목이 길을 막고 열어주질 않고 참으로 어렵게 뚫고 진행하니 등로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한동안 길찾아 이리저리 돌아 다니다 보니 하얀색이 칠해져 있는 콘크리트 봉을 만나 전진하고 가시나무와 잡목이 길을 막는 곳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갇혀 버리는 상황이 계속 되고 있다.
이제 온 몸에 나 있는 생채기가 땀방울을 만나 쓰라리기 시작하고 그래도 길 찾아 진행해야 한다는 사명간이 더욱 크기에 참으로 어렵게 전진하는 시간이다.
무명봉에서는 무조건 남남동쪽 능선을 타고 진행한다는 기분으로 진행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다.
우거진 가시나무 지대를 지나니 낙엽 떨어진 잡목지대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반가운 붉은 노끈을 만나 긴 한숨을 내쉬어 본다.
다시 태풍에 쓰러진 나뭇가지를 우회하고 올라타며 어렵게 전진하니 김해김씨와 배 추계추씨 묘지가 나타나고 그 앞으로는 대나무 밭이 보인다.
그 대나무 밭쪽으로 내려가니 벌초가 되지 않은 몇기의 묘지들이 더 보이는데 살펴보니 같은 김해김씨 묘지들이다.
묘지를 지나 대나무 밭을 통과하니 등로 앞으로작은 건물이 나타나는데 살펴보니 화장실이다.
그 화장실을 앞에 놓고 우측으로는 민가 한채가 서 있는데 얼마나 반갑던지 무조건 그 민가로 가 주인을 찾아 보지만 아무도 없다.
그 비닐천막이 쳐진 외부에 보이는 수도가 있어 머리를 감고 수건을 빤 후 비어 있는 물통 2개에 가득 식수를 담으니 갑자기 부자된 기분으로 즐겁게 진행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감사한 마음을 남겨 놓고 아무 표식도 남기지 않은채 배낭을 메고 나오려는데 마당가에 예쁘게 피어난 붉은 상사화가 눈길과 발길을 붙잡으며 잠시 더 쉬어 가라 붙잡는다.
몇년 전만 해도 이 계절이 되면 영광의 불갑산 산행 겸 불갑사 꽃무릇(석산)을 보기 위해 먼길을 떠났었고 고창의 선운사에 들려 잎도 없이 대만 불쑥 올라 붉은 꽃을 피우는 모습에 반해 내려가곤 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맥 산행에 빠지고 보니 그 아름다운 꽃 구경 한번 못하고 지나는 한해가 되어 버렸다.
상사화로 착각을 하곤했는데 꽃무릇과 상사화는 물로 다른 식물로 알고 있다.
상사화는 이른봄에 잎이 올라와서 지고난후 8월중숨이후에 분홍색의 꽃을 피우며 석산(꽃무릇)은 가을에 잎이 올라와서 월동을 한후 봄에 잎이 지고난 후 추석을 전후하여 붉은색의 꽃을 피운다. (더러는 노란색을 피우기도 함)
잎과 꽃이 만날 수 없다고 해서 상사화라고 하는데 두종류 모두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하는건 같지만 꽃 모양이나 잎모양 피는 시기가 서로 다르며 상사화의 잎은 좀 넓고 크지만 석산의 잎은 좁다.
생각지도 못한 식수 보충에 예쁜 꽃무릇까지 봤으니 보너스를 받은 기분으로 그 민가를 출발한다.
다시 그 민가를 빠져 나와 우측에 화장실 건물을 지나 고갯마루에서 우측 능선을 타고 오르며 금북기맥 산행을 이어가 본다.
잠시 잡목을 치고 오르니 드넓은 묘지지대가 나타나는데 살펴보니 통정대부함평이공묘지와 그 가족묘지들처럼 보이는데 제법 벼슬이 있었던듯 좋은 비석위에 많은 글들이 쓰여 있다.
얼마전 후손들이 다녀갔는지 단정하게 벌초된 모습이 좋아 보이는 풍경이다.
그 넓은 묘지구간을 빠져 나와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등로 좌측으로 다시 문제함평이공 묘지들이 나타나고 그 묘지 앞으로는 비포장 임도가 보인다.
그 비포장 임도를 가로 질러 붉은 노끈이 달려 있는 희미한 등로를 타고 들어가니 석촌리 1차선 포장도로 위에 올라 선다.
좌측으로 도로 건너에 반사경이 서 있어 잠시 그곳으로 가 사진 놀이를 해 보는 시간이다.
반사경에 비춘 모습을 사진에 담은 후 올라갈 수 있는 들머리를 찾아 보지만 이미 우거진 잡풀들이 등로를 막아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반사경 뒤 잡풀을 헤치고 오르니 제법 뚜렷한 등로가 나타나고 다시 함평이씨 묘지를 만난다.
잠시 호젓한 등로를 타고 오르니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를 만나 좌측으로 룰루랄라 걸어 보는 시간이다.
묘비가 없는 많은 무명 묘지들이 잠들어 있는 넓은 묘지지대를 지나니 넓은 비포장 임도 같은 등로 좌측에 표고버섯 재배 단지가 나타난다.
이 산객이 어릴적 많이도 키웠던 표고버섯이기에 예전 추억을 떠올려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표고버섯 재배지대를 지나 계속 넓은 임도를 타고 오르니 한상준과 배 평산신씨 묘지가 나타난다.
다시 평이한 등로를 타고 오르니 잡목지대 지나 소나무 군락지를 통과한다.
그렇게 오르다 보니 차돌이 등로에 박혀 있어 한동안 바라본 후 전진하니 태풍에 쓰러진 소나무가 갈길 바쁜 산객의 발목을 잡고 늘어진다.
그곳을 지나 조금 더 오르니 139미터봉이 나타나고 삼각점이 보이는데 서천 430이란 글귀가 보인다.
조망이 막혀 있기에 삼각점과 지적표지판을 사진으로 담은 후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는데 길주의 구간이기에 아주 조심스럽게 진행한다.
잠시 내려가니 확실한 등로는 직진의 방향으로 나 있지만 기맥 마루금은 우측의 희미한 등로를 타고 진행해야 한다.
소나무 군락지를 지나 제법 넓은 등로를 만나 진행하니 쓰러진 나무를 넘어 다시 등로 양쪽에 아름다운 소나무가 도열해 있는 등로를 걸어 지난다.
잠시 더 걸어가니 비포장 임도를 만나 좌측으로 진행하다 곧바로 직진의 뚜렷한 등로를 버리고 우측 희미한 마루금을 타고 진행해야 하는데 그 진입 들머리를 놓쳐 직진하며 한동안 알바를 경험한다.
한동안 직진의 뚜렷한 넓은 임도를 타고 내려가니 임도 우측에 잘 가꿔진 묘지 한기가 보이고 그 묘지 앞 우측으로 등로 하나가 더 나 있다.
그곳이 혹시 기맥 마루금일까 하고 아무리 찾아봐도 띠지도 보이지 않고 등로가 아닌듯 하다.
다시 직진의 임도를 타고 조금 더 내려가니 광산김공 묘지가 나타나고 더 내려가니 밤나무 단지가 보인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아무리 정상 등로를 찾아 보지만 보이지 않아 다시 뒤돌아 오르며 정상 등로를 찾으며 오르니 저 앞에 좌측으로 띠지 하나가 보이고 그곳으로 기맥 마루금 진입로가 보인다.
약 30여분 알바를 한 후 정상 마루금을 찾은 것이다.
그 진입로 입구에는 산보님 띠지 하나가 붙어 있어 조심하며 진행하면 금새 찾을 수 있지만 조금만 부주의하면 놓치기 쉬운 길주의 장소이다.
정상 기맥 마루금으로 들어가니 많은 선답자들의 띠지가 나풀거리는데 좀 잘 보이는 곳에 붙여 놨다면 조금 더 효과적일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 시간이다.
잠시 멋진 소나무 군락지를 타고 전진하니 다시 태풍으로 쓰러진 나무들이 발목을 붙잡고 어렵게 그곳을 통과해 진행하니 등로 좌측으로 묘지 위에서 태월리 마을을 내려다 본다.
그곳을 지나니 기다리던 밤나무 단지가 나타나고 그곳을 내려가니 전주이공 묘지가 보인다.
그 묘지를 지나니 등로 우측으로 거대한 가족묘지군이 보이고 계속 완만한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과수원이 나타난다.
그 과수원을 지나 진행하니 다시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4번 지방도로가 있는 은골고개에 도착을 한다.
이곳 은골고개는 태월리와 석촌리를 이어주는 고갯마루로서 좌측으로 조금 더 도로타고 내려가니 민가가 나타나고 그 민가 수돗가로 가 세수를 하고 식수를 받아 채우니 다시 부자된 기분이다.
그곳 집 주인과 많은 이야기 나누고 금북기맥에 대해 설명하며 시간을 보낸 후 고맙다는 인사를 남긴 채 다시 4번 지방도로로 나오니 도로 바로 직전 우측에 장승 3개가 서 있고 첫번째 장승에는 현대건강원이란 간판이 붙어 있다.
그곳에서 도로를 건너 민가를 좌측에 두고 오르면 민가 우측으로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고 그 임도를 타고 오르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좌측에 민가가 있는 비포장 임도를 타고 오르니 소나무 등로를 지나 밭이 나타난다.
그 밭 가장자리를 타고 진행하니 다시 묘지 하나가 나타나고 그 묘지를 지나 능선쪽으로 붙으니 선답자의 띠지 하나가 반겨 준다.
하지만 그곳에서부터 벌목된 나무들이 이리저리 뒹굴며 산행에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어렵게 주능선 방향으로 오른다.
하지만 잡목이 다시 발목을 붙잡고 참으로 어려운 산행의 연속이 이어지고 있다.
잡목을 헤치고 주능선으로 오르니 조금은 넓은 등로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태봉산이란 76.1봉의 이정표를 찾아 보지만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는다.
이곳에서 그 76.1봉이란 이정표를 찾아 근 30여분 헤매였지만 결국은 찾지 못하고 불길한 산행의 징조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왔다리 갔다리 하다보니 만나지 말아야 될 묘지들도 만나고 철도길도 조망하며 참으로 어려운 산행을 이어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럴땐 정말 GPS나 스마트 폰을 이용한 문명의 기기를 사용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그것에 의존하다 보면 자세한 산행기를 남기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에 조금만 더 참아 보기로 한다.
76.1봉이란 이정표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정상 등로를 타고 어렵게 진행하니 용궁전공과 배 광산김씨 묘지와 묘비가 보인다.
잘 가꾸지 않아 봉분 위에도 굵은 나무가 자라는 모습에서 세월의 무상함과 산속에 묘지를 쓴다는 것이 과연 올바른 방법인지 잠시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누군가에게 알리기 위한 조상 모시기가 아닌 진심으로 후손들이 자주 찾아 즐길 수 있는 장례 문화가 절실한 시점은 아닌가 생각해 보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 묘지 지나자 마자 등로는 뚜렷한 직진길을 버리고 좌측으로 크게 꺾여 내리막 마루금으로 이어진다.
좌측으로 크게 꺾여 내려가니 나즈막한 골짜기 형태의 안부를 지나고 다시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잡목들이 이리저리 나뒹구는 구간으로 접어 든다.
그곳에서 바라보니 소나무 위에 붉은 페인트 칠이 되어 있는 몇개의 나무들을 만나고 무명봉에 올라 등로를 찾아 보지만 아무리 찾아 봐도 정상 등로를 찾을 수가 없다.
그 무명봉 오르기 직전에 선답자들의 띠지가 있어 정상 등로임을 확인했지만 무명봉에서 길이 끊겨 등로 찾기에 애를 먹고 다시 이곳에서 30여분간 왔다리 갔다리 헤매고 있다.
그렇게 그곳에서 많이도 헤맨 끝에 우측에서 벌초하는 소리가 들리고 혹시나 하고 그곳으로 넘어 오르니 두분이 많은 묘지 위에서 벌초에 여념이 없다.
아저씨에게 다가가 길을 물으니 잘 알지 못하고 다시 고속도로 지하통로가 있느냐고 물으니 앞 마을쪽에 있다는 소식에 확신을 가지고 그 묘지를 지나 출발한다.
그 묘지 위에서 살펴보니 진행해야 할 마루금이 확연히 보이는데 저곳 고속도로 지난 곳에서 다시 많은 시간 헤매며 돌아 다녔으니 맥 잇기 산행이 얼마나 어려운 산행인지를 가슴으로 느껴 본 시간이였다.
아저씨들과 인사를 나누고 그 묘지를 내려오니 넓은 임도같은 등로가 나타나고 그 등로 위 나뭇가지에 선답자들의 띠지가 나풀거리고 있다.
이제야 긴 한숨이 나오며 정상 등로를 찾았다는 안도감이 밀려 온다.
그 비포장 임도를 타고 계속 전진하니 그 임도가 우측으로 꺾여 내려가는데 이제부터는 콘크리트 포장도로로 바뀌어 있다.
그 콘크리트 포장임도를 타고 내려가 마을 앞에서 지하통로를 통해 서해안고속도로를 건넜으면 조금 더 수얼하게 진행 할 수 있었을 것을 그 시멘트 포장 임도를 타고 조금 내려가다 상세 산행 안내를 읽어 보니 임도를 벗어나 좌측 능선을 넘어 다시 나타나는 지하통로를 타고 서해안고속도로를 건너도록 되어 있다.
그것이 길고도 먼 대형 알바의 시작점이 될 것이라고는 아직까지는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다.
콘크리트 포장 임도를 타고 우측으로 내려가다 중간쯤에서 다시 뒤돌아 올라 와 우측 골짜기 같은 능선으로 타고 올라 절개지 위로 오르니 좌측 잡목 사이로 희미한 등로가 나타나고 그 앞에는 토지지신이란 표지석이 보인다.
그 좌측으로 내려가니 넓은 공터같은 묘지들이 나타나고 살펴보니 드디어 찾고 있는 용궁전공의 가족묘인듯 한 많은 묘지지대가 나타난다.
그 묘지지대를 타고 내려가니 내리막 등로 좌측에 대나무 밭이 나타나고 곧이어 밭이 나타나 그 밭을 타고 전진한다.
시원하게 서해안고속도로를 조망한 후 밭을 타고 내려가 장항선 철도 위 시멘트 도로를 타고 우측으로 걸어가니 잠시 후 우측으로 서해안고속도로를 건널 수 있는 1998년 준공된 지하통로가 나타난다.
그 지하통로를 타고 진행해 무탈하게 서해안고속도로를 건너 다시 나타나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른다.
하지만 이곳은 방금 전 비포장 임도를 타고 시멘트 임도를 따라 오석리 마을로 내려가 지나는 지하통로와는 다른 지하통로인데 상세 산행안내를 정리하면서 몇명의 선답자들의 산행 후기를 정리하다 보니 잘못된 정보가 입력되어 있어 대형 알바의 단초가 되였다.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잠시 더 오르니 임도 우측으로 철조망이 쳐져 있는 농장인지 아니면 과수원이 보이고 그 철조망 오르기 직전 좌측으로 등로 하나가 보인다.
계속 진행해 경고문 앞에서 좌측 등로를 타고 진행하라고 상세 산행 안내서에는 적혀 있지만 그 설명은 오석리 마을의 지하통로를 타고 서해안고속도로를 건널때 해당되는 마루금 설명이지만 그것을 잘못 이해해 잘 오르면서도 엉뚱하게 생각해 대형 알바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시멘트 포장 ㅇ미도에서 좌측 등로를 타고 오르니 금새 수원백공 묘지들이 나타나고 조금 더 오르니 또 다른 묘지들이 줄지어 서 있다.
그곳을 지나 다시 잡목이 우거진 등로를 타고 오르면 금새 90봉인 태봉산인데 처음에는 태봉산이라 잘 이해하고 진행하는듯 하였지만 그곳 정상에서 내려 와 주등로를 만나 우측으로 타고 진행을 한다.
잠시 더 진행하니 등로 우측으로 서해안고속도로쪽에서 올라 오는 등로가 보이고 그곳이 경고판에서 좌측 등로를 타고 오르면 만나는 등로라 미리 짐작하여 헷깔리기 시작한다.
조금 더 내려가 확인해 봐도 정상 등로가 아닌듯 하여 계속 정상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무명봉이 나타나고 조금 넓은 공터가 보인다.
다시 뒤로 돌아 방금 전 올랐던 90봉 태봉산으로 뒤돌아 와 서해안고속도로와 방금 전 이 산객이 올라 온 철조망 그리고 저 멀리 용궁전공 묘지와 그 우측으로 장항선 철로가 보인다.
태봉산 지나 다시 좌측인 남동쪽으로 한동안 진행하며 몇개의 무명봉을 지나지만 이곳 역시 띠지도 보이지 않고 정상 등로가 아니라는 확신으로 다시 뒤로 돌아 태봉산 지나 평편한 공터봉까지 넘은 후 묘지 한기가 있는 묘지봉까지 진행한다.
그곳에서도 정상 등로를 찾지 못하고 계속 더 진행하니 드디어 띠지 몇개가 보이고 아직까지도 어느곳이 정상 등로인지 더 확인이 필요하기에 진행하니 용궁전공 묘지까지 진행했다 다시 태봉산으로 돌아가지만 그곳에서 내려가야 할 우측 등로를 찾지 못해 다시 우측으로 등로를 타고 용궁전공 묘지까지 뒤돌아 온 후 그곳 아래 계곡쪽을 타고 탈출해 오늘 산행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내려와 마을 시멘트 포장도로에서 드넓은 멋진 민가 하나가 철조망으로 둘러쌓여 있는 정문 앞에서 아쉬워 위를 올려다 보니 그곳에 파란색 사각 정자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환장할 모릇이다.
저 정자 있는 곳 등로를 찾아 태봉산을 몇번이나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그토록 정독을 하였건만 찾지 못하고 오늘 산행을 포기하려 내려 왔는데 저 사각정자를 보는 순간 다시 산행에 대한 의욕이 불타오르고 그 민가를 둘러싼 철조망을 타고 참으로 길도 없는 잡목 숲을 헤쳐 어렵고 고통스럽게 올라 드디어 사각정자를 만난다.
에구 나무나 힘들고 지쳐 기운조차 없는 시간이기에 남아 있는 빵 한조각과 사과 하나를 먹고 나니 조금은 살 것 같다.
사진 한장 남기고 우측에 철조망을 두고 내려가며 두다리가 뻐근해 옴을 느끼는 시간이다.
철조망이 우측으로 크게 휘여져 가는 끝자락에서 계속 직진의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골짜기 같은 안부를 지나 옛 장항선 철로가 보이는데 콘크리트 옹벽이 길을 막아 도저히 내려 갈 방법이 없다.
다시 위로 올라 이제 우측의 등로를 타고 내려가 우측으로 크게 틀어 가니 밭을 지나 드디어 철로가 사라진 정상적인 옛 장항선 철로에 내려서 사진 한장 남겨 본다.
그곳 주위 논에서 일을 하는 부부를 만나 인사 나누고 조심히 산행을 하라는 응원을 받고는 사라진 등로를 무시하고 급경사 오르막 등로에 벌목된 나무들이 나뒹구는 능선으로 오르니 여전히 어지러운 산상이다.
산상의 등로를 만나 진행하니 고속도로 같은 뚜렷한 등로를 만나고 그 임도를 타고 이제 콧노래를 불러보는 시간이다.
포기하려다 다시 올라 만나 진행하는 등로이다 보니 감회가 더욱 깊은 시간이기도 하다.
무엇이 이토록 가슴시린 산행을 강요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몸이 피곤한 만큼 정신은 말똥해져 오는 인간사를 다시 한번 느껴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쉼터 의자를 지나 오석산 오름등로를 타고 진행하다 직진의 오석산 등로를 버리고 우측의 등로를 타고 맥 산행에만 전념을 해본다.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이제 등로 좌측으로 서천과 장항선이 조망되고 예전에 일 때문에 자주 들렸던 풍경과 추억을 떠 올리며 즐겨 보는 시간이다.
계속 진행해 묘지가 있는 삼거리에서 우측 등로를 버리고 좌측 등로를 타고 내려간다.
소나무 군락지를 타고 진행하다 만나는 삼거리에서 이제 기맥 등로는 우측길을 따라야 한다.
잠시 더 진행하니 이정표가 나타나는데 이곳 이정표에서는 서천여자정보고등학교 800미터 방향으로 틀어 진행한다.
잠시 완만하게 내려가니 황톳빛 찜질방 건물이 앞으로 나타나고 그 건물을 지나니 클래시움 아파트가 나타난다.
그 아파트 옆으로 진행해 가다 뒤돌아 보며 지나 온 등로쪽을 담아 보니 찜질방 건물 한쪽 모퉁이와 클래시움 아파트 그리고 파란 지붕을 한 민가가 훤히 보인다.
그 클래시움 아파트 옆으로 진행해 나타나는 사곡리 도로를 건너 좌측으로 돌아 절개지를 올라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지나온 풍경이 그대로 내려다 보인다.
능선으로 다시 재진입해 좌측으로 진행하니 뚜렷한 등로를 만나고 통신탑이 보이는 쉼터 앞 공터에서 등로는 우측 방향으로 꺾여 진행 된다.
잠시 더 진행하니 드디어 오늘 산행 날머리인 서천읍성 안내판과 표지석을 만나 길고도 멀었던 그리고 고통스러웠던 하루의 산행을 마감하는 시간이다.
파란 사각정자를 만나지 못하고 탈출하려고 내려간 그곳에서 저 산등성이에 봄으로도 당당히 서 있는 정자를 바라보는 순간 피가 거꾸로 치솟고 자기 자신에 대한 강렬한 불신감으로 치를 떨며 다시 오를 때를 생각하면 지금까지도 온몸에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느낌이다.
어렵게 서천읍성길을 타고 걸으며 성터에 대한 생각에 잠시 잠겨 보는 시간도 가져 본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과 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을 말한다.
흙으로 쌓아 만든 서천읍성은 한 도읍 전체를 둘러싸고 군데군데 문을 만들어 바깥과 통하게 만든 성이다.
전설에 의하면 여자 100명이 성을 쌓고 장사 1명이 홍여다리를 짓는 내기를 하였는데 여자들이 성을 다 쌓고 즐거운 함성을 지를 때 장사가 급히 마지막 돌을 끼워서 똑같이 끝나 무승부가 되었다고 한다.
성벽의 길이는 1068미터이고 높이는 3미터로 현재는 동문터의 성벽 일부만 남아 있고 현재의 성은 조선 영조 27년(1751)에 쌓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을 쌓은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서해안으로 침입해 오는 왜구들로부터 양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조선 초기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도 마지막 산행길에서는 역사의 한편느오 사라져 가는 서천읍성을 공부 할 수 있어 좋은 마무리가 되어 다행인 시간이 되였다.
오늘 밤 이곳 서천에서 하룻밤 더 묵고 내일 일요일 남아 있는 구간을 마무리하고 올라가려 했지만 등로가 사라진 기맥 마루금에서 너무나 힘들게 진행했기에 의욕 저하와 추석 때 고향으로 내려 와 하루 시간이 되기에 그 때 오르기로 하고 집으로 복귀하기로 한다.
오래 전 일 때문에 알았던 지인과 연락이 되어 택시를 소개 받아 생각보다 저렴하게 친절한 기사님과 부시치고개로 향하지만 잠시 길을 헷깔려 알바를 경험하지만 그리 오랜 시간이 아니기에 참을만한 수준이다.
너무 이기적으로 상술이 지나치지 않았기에 다음에 다시 서천에 내려 갈 일이 있으면 꼭 이 기사님을 부를 예정이다.
그렇게 너무나 힘들었던 하루를 마감하고 약간은 막히는 도로를 타고 집으로 복귀해 옆지기가 준비해 준 삼겹살에 이슬이 한잔 마시고 나니 온 세상이 내것이 되면서 깊은 꿈나라로 떠나 버렸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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