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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맥산행(완료)/낙동정맥(완료)

낙동정맥 제11구간 가사령에서 블랫재까지 산행 후기

by 칠갑산 사랑 2011.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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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경북 포항시와 영천시의 낙동정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 2011년 08월 12일과 13일 (무박 2일 산행)

산행날씨 : 새벽에 안개와 구름 후 아침부터 맑고 따가운 햇살과 약간의 살랑바람의 날씨

산행온도 : 영상 21도에서 영상 32도

산행인원 : 칠갑산 포함 3450온누리산악회 낙동정맥 종주대 15명

산행코스 : 가사령(69번 지방도로)-599.6봉-630.5봉-711봉-성법령 삼거리(709.1봉, 헬기장)-

               돌무더기(묘지터)-796.9봉-사관령(782.3봉, 헬기장)-밀양박씨 묘-여강이씨 묘-

               574.1봉-배실재(490봉, 폐임도, 낙동정맥 중간지점)-492.4봉-628.2봉-680봉-

               침곡산(725봉)-송전탑-서당골재 사거리-태화산(676.8봉, 산불감시초소 및 돌탑)-

               쌍묘-585.1봉-422봉-먹골안부-한티터널(290봉, 31번 지방도로)-한티재-400봉-

               545봉-폐헬기장-블랫재-산행종료

산행거리 : 약 23.20m (정맥구간 21.70 Km 및 접속구간 02.50 Km 블랫재에서 중도일까지)

산행시간 : 안개와 흐린 날씨로 꾸준하게 10시간 00분 

               (04시 30분부터 14시 30분까지)

 

낙동정맥이란 ???

낙동강의 동쪽을 따르는 산줄기로 동해바다를 가르는 한반도 동해안 지방의 담장이다.

백두산에서 남으로 힘차게 뻗어내려 금강산과 설악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내려가는 백두대간 마루금이 천의봉(매봉산,1303봉)으로 솟아 오르기 전 1145봉 직전에서 남동쪽으로 분기하여 태백 백병산(1259봉), 통고산(1067봉), 울진 백암산(1004봉), 청송 주왕산(720봉), 경주 덕석산(829봉), 울산 가지산(1240봉), 신불산(1209봉), 부산 금정산(802봉)을 지나 백양산(642봉)을 넘어 낙동간 하구인 다대포 몰운대에서 끝나는 약 397 Km의 산줄기를 낙동정맥이라 한다.

낙동정맥 중에서 최고봉은 태백의 백병산으로 그 높이는 1259미터이다.

 

 

말복 더위에 고생을 하였지만 종주대의 팀웍을 다졌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 후기를 참고한 후 난해하고 어려운 정맥 산행을 진행해 무탈하게 맥 잇기 산행을 다녀왔기에 단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정맥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참으로 많은 사연과 우여곡절을 겪으며 진행되는 낙동정맥, 완주 후에도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맥 잇기 산행으로 기억될 시간들이다.

참으로 어렵게 다시 시작된 낙동정맥 제11구간,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종주대의 참여로 25인승 버스를 가득 채우고 힘들게 멀고도 먼 산행 들머리인 가사령에 도착하니 어제까지 내리던 폭우의 날씨는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어둠속 하늘에선 반짝이는 별빛만이 고요한 가사령에 도착해 산행 준비를 하는 종주대를 반겨 준다.

조금씩 짙어지는 안개에 조금은 걱정이 되였지만 별 무리없이 지난 밤 내린 비로 인해 촉촉히 젖어 있는 풀잎을 털어내며 또 한 구간 길고도 먼 산행을 시작해 본다. 

 

힌티터널을 지나 꼬불꼬불 이어진 가사리 도로를 타고 어렵게 도착한 가사령, 그곳에는 보기에도 초라한 비닐 코팅지에 적혀있는 가사령이란 이정표 하나가 잡목과 잡풀이 무성한 69번 지방도로 한쪽에 성의 없이 붙어 있을 뿐이다.

죽장면 사료철을 찾아보니 병암산입암에서 상옥으로 넘어가는 가사령 골짜기에 일제시대 백탄을 공급하던 숯의 명산지였으며 어사룡이라는 나무꾼 노래를 비롯한 풀베기와 김매기의 농요와 초동들의 놀이였던 지게상여놀이가 잘 보존되고 있는 큰마을과 중마을, 이 부근에는 250년 전 능성구씨가 입향하여 당대에 유명한 가시내 솥을 만들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가시내한 지명은 이곳에서 생산되던 솥의 질이 워낙 뛰어나서 장안의 기방에서까지 소문이 자자한지라 이에 빈정댄 뜻으로 가시내골이라 부른 것에 연유한다고 하는데 산남의진에 가담했던 구한서의사와 김석하의사의 출신지인 윗각단, 아직도 큰가매골과 작은가매골과 같은 지명이 남아 있어 농기구와 무기의 주생산지였음을 짐작케 하는 갈밭, 큰마을에서 남동으로 벼슬재를 넘는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로 옛날 도요지가 있던 곳이며 마을의 모습 또한 항아리 형국이라 하여 예부터 샘을 파지 못하는 마을이란 독골로 이워진 가사리는 1914년 붙여진 이름으로 이 가사리 위에 있는 고개라서 가사령이란 이름이 사용 되였다는 이곳에서 멀고도 긴 하루의 여정을 시작한다.

 

간단히 산행 준비 후 빗물을 머금고 있는 잡풀 숲을 헤치며 잠시 능선으로 오르니 더욱 짙어지는 안개속에 등로 좌측으로 상옥리 불빛이 따라오고 그 불빛을 친구 삼아 오르니 599.6봉 삼각점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잠시 죽장면 자료를 찾아 상옥리를 공부해 본다. 

고산분지에 형성된 마을로서 신라 때부터 숨어 살게된 사람들과 전란을 피해 온 사람들 그리고 화전민들이 정착함으로써 커지게 된 상옥리, 흔히들 이곳은 오강지두 팔령지하라 할만큼 산간오지이다.

예부터 피란지처로 첫째는 고래요, 둘째는 두마라 할때 그 첫째에 해당하는 곳이 바로 이곳 상옥리이다.

옥같이 맑은 냇물이 흘러 오십천의 상류 한 지류가 되니 세칭하기를 옥계라 했으며 고래 또는 고내라고도 부르던 상옥은 높은 곳에 냇물이 흐른다는 뜻인 고천으로 풀이되기도 하고 지형이 마치 거대한 고래로 각을 떠낸 듯한 행주형국인지라 이에 연유하여 고래라 부른다 한다.

한편으로는 동편 산의 모습 또한 암수 두 마리의 고래를 닮았다는데 연유한다고도 전한다.

 

신라말기 서라벌에서 난을 피해 들어온 고관대작들의 고급주택이 즐비하였으며 한때 1000여 호가 넘게 살았다 전한다.

먹방골은 그 당시부터 먹을 만드는 고을로 소문이 났고, 무쇳골은 병기와 농기를 만드는 마을로 군사상 중요한 지역이었다 한다.

성지비결에 이재칠전중이라 했고 정감록 비결에도 구인종 칠전중이라 했다 하여 칠전의 중앙에 위치한 이 마을을 피난처로나 군사기지로 이용하였다 한다.

산남의진에 가담한 강대근 의사의 출생지라고도 한 이곳에서 또 새로운 마음과 각오로 종주대의 발걸음이 이어지는 시간이다.

 

이제 이곳 산행지도 경상북도의 최남단 끝자락인 포항에서 시작해 영천에서 끝이나고 다음구간엔 다시 천년 고도인 경주로 들어 한동안 진행하게 될 것이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평이한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게릴라 폭우와 같이 안개도 등로 곳곳에 지엽적으로 짙었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그렇게 진행하니 등로 좌측에 921번 지방도로 위에 형성된 마을의 불빛이 계속 이어지더니 등로 옆에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쓰러진 안테나 하나가 눈에 들어오며 상쾌한 새벽 기운을 깨버리고 있다.

이 산객이 어릴적 살았던 시골 마을에서도 같은 풍경속에 살았지만 산에 들면서 이제는 이런 풍경이 마냥 허용될 수 없는 시간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굵은 땀방울을 등로에 뿌리며 오르니 630.5봉을 우회한 장소에서 시원한 산바람이 불어 온다.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잠시 쉬며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내니 곧바로 후미가 도착하고 다시 등로를 타고 조금은 내리막 마루금을 따르니 등로 좌측 나뭇가지에 인공구조물이 달려 있다.

사람들이 살아가며 편리성을 위해 설치한 것이라면 그 용도가 다 한 후 자연을 자연상태 그대로 돌려 줄 수 있는 미음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어둠속에 한장 담아 본다.

 

이제 조금은 더 가파라지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711봉에 도착하고 특별한 표식도 없기에 다시 나즈막한 안부로 내렸다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콘크리트로 이뤄진 헬기장이 있는 709.1봉에 도착하고 등로 좌측으로 비학지맥과 내연지맥 갈림 이정표가 붙어 있고 성법령 삼거리란 이정표도 보인다.

포항시 북구 죽장면의 성법리에 있는 921번 지방도로 상 위치한 성법령으로 하산할 수 있는 갈림 삼거리인 곳이다.

성법령을 포항 지명 유래에서 잠시 살펴 보는데 이곳은 조선시대까지 부곡이 있었던 지역이다

부곡이란 신라시대부터 조선말까지 전국 각지의 산골짜기에 산재해 있던 일종의 집단 수용지로서 주로 천민이나 노예 그리고 반역민등을 수용하여 출입을 통제한 상태에서 그 시대 필요한 무기, 농기구, 유기, 자기 및 토기등을 생산하던 일종의 공업단지였다.

성법리는 옛날 역모죄로 몰린 사람들이 천민으로 격하, 이곳으로 수용되어 법을 반성 하라는 뜻에서 성법이라 하였다고 하며 지휘관제소는 덕동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곳은 언젠가는 한번쯤 다시 올라야 할 비학지맥과 내연지맥의 분기점이기도 하기에 이 산객에게는 또 다른 봉우리의 의미로 다가오는 시간이다.

 

비학지맥이란

호미지맥이 형산강의 남쪽 물줄기를 가두는 맥이라면 비학지맥은 형산강의 북쪽 물줄기를 가두는 맥으로 비학지맥 분기점은 낙동정맥상의 709.1봉(헬기장) 즉 성법령 서쪽 300m 정도에 위치한 봉우리다.

성법령은 기북면 성법리에서 죽장면 상옥을 연결하는 921번 지방도로상의 고갯마루로서 북으로 상옥과 하옥계곡을 거쳐 내려서는 오십천과 남으로 기계천을 일구어 형산강으로 흘러드는 수계를 가르는 주요 분기점이다.  

비학지맥은 낙동정맥상의 709.1봉에서 분기해서 성법령-괘령산 분기점(678.8봉)-비학산(762.3봉)-346봉-냉수리 윈고개-도음산(384.6봉)-지곡뒷산-연화재-소태재-감태고개-우목리에 이르는 산줄기로 도상거리 42km에 달하는 맥이다. 

포항은 연일, 흥해, 청하, 장기로 크게 사등분 되는데 이 중에서 연일과 흥해의 문화와 경제권을 가르는 맥이 바로 비학지맥인 것이다.

 

내연지맥이란

낙동정맥이 남하하면서 주왕산을 지나 가사령에서 서쪽으로 팔공기맥과 위천북기맥을 흘려보내고 남진하여 올라간 무명 709.1봉에서 동쪽으로 분기하여 포항시 북구 죽장면 상옥리에서 북구 기북면 성법리를 잇는 921번지방도로 성법령(630미터)으로 내려서 올라간-도면상 811봉에서 두줄기로 분기하여 동남방향으로 비학지맥을 흘려보내고 내연지맥은 북진한다

내연지맥은 780봉-괘령(730)-괘령산(869.1봉)-752봉-샘재에서 남쪽으로 장구재(585.5봉)을 떨구고 올라간 무명봉에서 동쪽으로 천령산(775.0봉)을 떨구고 서진한 후 매봉(833.2봉)-향로봉(930.0봉)-내연산(710봉)에서 동남방향을 문수산(622봉)을 떨구고 포항시 죽장면과 영덕군 남정면의 경계를 따라 북진하다 동대산(791.3봉)-따스내안부(370미터)- 바데산(645.5봉)에서 영덕군 달산면과 남정면의 경계를 따라간 후 매티재(290미터)-332봉에서 남쪽으로 정족산(302.2봉)을 떨구고 북진하며 395.1봉에서 올라선 무명310봉에서 정확한 오십천의 남쪽 하구로 가려면 서진을 하며 천제봉을 거쳐 신강구 오십천 남안 하구에 이르는 산줄기로 가야하나 산줄기는 그리 짧게 끝나지 않고 북진을 계속하여 이산줄기 보다 약 4.5km를 더 뻗어 나간다

280.7봉-진등재(210미터)-316.7봉-삿갓봉(319.9봉)에서 서진을 하며 무명270봉에서 남쪽으로 기수를 돌려 장고개(50미터)를 지나 강구면 소월리 오십천변에서 끝이나는 약 47.1km의 산줄기를 내연산의 유명도를 빌어 낙동정맥에서 분기하였으므로 낙동내연지맥이라고 이름을 짓고 내연지맥이라 부른다.

 

비학과 내연지맥 분기점이면서 성법령 갈림 삼거리인 헬기장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잡풀을 헤치며 능선으로 들어가니 이미 등산복 하의와 등산화는 흥건히 젖어 온다.

잠시 나즈막한 안부로 내려가는 듯 하던 등로는 다시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타고 한동안 진행하도록 되어 있다.

그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돌들이 깔려 있는 무명봉에 도착해 잠시 쉬어 간다.

이제 등 뒤의 좌측과 우측을 번갈아 타고 일출이 시작되려는지 붉은 하늘이 두꺼운 구름속을 헤치며 나오려는듯 사투를 벌이고 있다.

마음이 급해지며 앞에 보이는 제법 높아 보이는 796.9봉에서 혹시나 만날지 모르는 일출을 기대하며 발걸음도 빨라진다.

 

이미 일출은 시작된듯 한데 아직도 붉은 하늘만 보여줄 뿐 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어렵게 796.9봉 가까이 올라가니 등로 우측으로 전망바위가 나타나고 오늘 처음으로 멋진 조망이 펼쳐져 있다.

가까이에 포항의 죽계면과 그 넘어 저 멀리 포항과 청송의 경계를 이루는 산줄기들이 정상에 하얀 안개를 뒤집어 쓰고 당당히 줄지어 늘어 서 있다.

구암산과 천마산이 보이는듯 한데 어느산이 구암산인지 분간은 어려운 시간이다.

소나무 가지와 어우러진 아침의 멋진 풍경이 이 작은 산객의 마음을 뒤집어 놓는 시간이다.

 

소나무 가지를 피해 조금 더 넓게 보이는 장소에서 다른 모습으로 바라 본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일체의 세상을 묻어두고 순전히 자연만이 얼굴을 내미는 산하, 정확한 의미는 설명하기 힘들지만 왠지 모르게 이런 풍경이 가슴에 들어 와 살아가는 의미를 생생하게 만들어 주는 시간이기에 또 이곳에 어렵게 올라 이렇게 긴 한숨을 내쉬며 살아가는 의미를 찾아 보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느낀 점을 글로 옮기려는 아둔한 시간이 고통스럽지만 그 누군가를 위해 아니 내 자신의 미래를 위해 정리는 필요한 시간일 것이다.

 

잠시나마 올라 세상 시름 잊고 대자연속에 묻혀 행복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아쉬움에 올랐던 바위를 담은 후 다시 완만한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어느새 아침 햇살이 두꺼운 구름을 뚫고 나와 잡목 사이의 빈 공간으로 화사하게 들어 오고 있다.

참으로 담기 어려운 조건이지만 그래도 굴하지 않고 기다려 어렵게 하루의 아침 해를 담아 보는 시간은 늘 새로운 두려움과 설레임이 교차하는 시간이다.

이렇게 또 하루가 시작됨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한동안 다시 완만한 등로를 타고 오르니 오늘 산행 중 가장 높은 고도의 무명봉인 796.9봉을 넘는다.

이 무명봉 주위에도 특별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산이 없기에 제대로 된 이름 하나 가지고 있을 법 한데 이름이 없어 아쉬운 시간이기도 하다.

다시 잡목 사이로 투영되는 맑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급하지 않게 진행하니 그동안 지쳤던 몸도 마음도 모두 정화되는듯 가벼운 발걸음이 되어 간다.

산친구가 이야기 하였듯 무박 산행의 기쁨은 일출을 전후하여 느껴지는 자연의 바람과 이름모를 새소리 그리고 내가 그곳에 동화되어 간다는 생각 때문에 잊지 못하고 다시 오르는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 산행 중 가장 높은 796.9봉에서 다시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왔다 오르니 갑자기 급경사 오르막 된비알로 변하고 그곳을 짧게 치고 오르니 좁지만 표시가 확실한 헬기장이 나타나고 그 한쪽에 사관령이란 이정표가 붙어 있다.

자료를 찾아 보니 임진왜란 전후에 가사리에서 무기를 제조 하여 벼슬아치 즉 사관외는 좌측의 성법 지휘통제소가 있던 덕동으로 못 넘게 통제하였다 해서 부쳐진 고개 이름이라고 전해진다는 설이다 

이곳에서 준비한 막걸리 한잔 나누며 높은 습도로 인해 흘리는 땀방울을 닦아 본다.

아직까지는 강렬한 햇사로 아니고 또한 두꺼운 구름이 그 햇살마저 가리며 살랑이는 산밞까지 불어주니 산행하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지만 이런 좋은 산행 조건이 끝날때까지 이어질지 걱정이 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사관령에서의 꿀 밋같은 휴식을 끝내고 이제 다시 내리막 등로를 타고 한동안 내려가야 하는 시간이다.

잠시 내려가다 보니 내려갈 등로 앞 저 멀리 하얀 안개가 드리워지며 몸환적인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

일반 사회에서는 자주 볼 수 없는 귀한 풍경이지만 산에 들면 자주 만나는 비경중 하나인 몸환적인 안개의 몸부림, 그 풍경조차 새롭게 가슴에 파고들며 이 작은 산객의 마음에 많은 생각을 부여해 주는 시간이다. 

 

몇기의 묘지들을 지나 선답자들의 산행 후기에 자주 등장하는 밀양박씨와 여강이씨의 묘지를 차례로 지나니 아침 7시가 가까워지고 몇몇 산우님들은 벌써 허기를 호소하며 아침상을 기대하는 시간이다.

574.1봉 가기 전 평탄한 묘지 한기가 보이고 그 위에 우리들만의 식당을 차려 허기를 달래본다.

묘비도 없고 비석도 없는 묘지이지만 후손들은 기억했다 명절날이라도 찾아 오는 묘지이길 바라며 고시레 한번 한 후 맛난 식사를 즐겨 본다.

먹는 것 역시 산행의 재미 중 하나는 아닐까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40여분간 맛난 아침식사를 끝내고 이제부터 속도를 즐기는 종주대를 앞세우고 이 산객은 제일 후미로 쳐져 늘 하던 방식 그대로 후미와 함께 진행하기로 한다.

평이한 등로를 타고 내렸다 올랐다를 반복하니 잡목 사이로 살짝 올라야 할 침곡산으로 이어진 마루금이 보이고 곧이어 574.1봉에 도착해 사진 한장 남기고 계속 진행한다.

진행하며 담은 사진이다 보니 흔들림 현상이 있지만 후기를 작성하기에는 큰 부족함이 없는 사진이다.

  

다시 평이한 등로를 타고 기분좋게 진행하니 저 멀리 플랭카드가 보이고 다가가 보니 낙동정맥 중간지점이란 글자들과 함께 배실재란 이정표가 보인다.

배실재는 산 아래 좌측 즉 기북면 오덕리 마을에는 이 많이 나와 그 철로 무기를 만드는 곳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 때문에 벼슬아치 즉 사관이 아니면 이 고개를 지날 수 없도록 하였다 하여 벼슬재 즉 관령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데 사투리와 함께 고개이름이 변해 배실재가 되였다고 한다.

이 배실재가 정말 낙동정맥 중간지점인지에 대해서는 분분한 의견들이 있는듯 하며 그 위치는 조금씩 다른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측정 방법과 측정 기구 그리고 중간지점이라 알리는 이정표를 세워둔 시기와 사람들에 의해 조금씩 차이가 있는 듯 하며 이곳 배실재에서 크게 다른 지점은 아닌듯 하여 이 산객은 그냥 마루금에 있는 이곳 배실재를 낙동정맥 중간지점이라 칭하고 진행하기로 한다.

 

배실재를 지나 계속 완만한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앞으로 올라야 할 628.2봉이 소나무 가지 사이로 들어 온다.

그 풍경을 담으며 제일 후미에서 진행하니 선두는 벌써 그곳 정상을 지나는 듯 무전기 소리가 들려 온다.

정상이 아닌정상 좌측으로 우회 등로가 나 있는데 선두는 등로도 없는 정상으로 올랐는데 오르니 아무 표식도 없기에 중간과 후미에게 정상을 들리지 말고 그냥 우회 등로를 타고 진행하라는 소식이다.

 

다시 잠시 더 진행하니 등로 좌측에 봉우리도 아닌데 삼각점 하나가 박혀있어 잠시 들어 가 사진으로 담은 후 지도를 꺼내 살펴 본다.

평이한 등로를 타고 진행하였기에 느끼지는 못하였지만 약간의 오르내림이 있는 등로였고 이곳은 492.4봉 정상으로서 그곳에 삼각점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역시 높고 이름있는 봉우리가 아니라서 그런지 삼각점 관리는 다른 곳에 비해 부실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렇게 평이한 등로를 타고 진행하다 628.2봉 오름길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잠시 나뭇가지 사이로 트이는 우측 조망을 살펴보니 새벽 어둠속에 어렵게 달려 올라온 가사리와 그 주위에 존재하는 산줄기들이 희미하게 존재감을 알리는 시간이다.

조금 더 이름있고 그 존재감을 확실히 알리는 산줄기였다면 많은 사진에 담으며 그 이름이라도 한번 불러주려 노력했겠지만 그렇지 못하기에 이렇게 사진 한장 남기는 것으로 만족한다.

 

서서히 고도를 높히며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침곡산 오르막 산행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잠시 오르다 우측과 우측 뒤를 바라보니 처음에는 어디인지 분간도 못하다가 자세히 살펴보니 사관령이라 생각되는 봉우리가 등로 우측에 저 멀리 자리하며 응원해 주는 듯 하다.

지나온 등로가 시원하게 올려다 보이는 조망에 더위에 지쳐가며 올라야 할 마루금은 잠시 잊은채 그저 행복하게 바라만 보고 있다.

 

이제 서서히 지열이 올라오기 시작하고 능선을 벗어나 오르막 된비알을 타고 진행하면 폭포수처럼 솟아지는 땀방울로 인해 말복 다위에 가만히 있어도 무더운 날씨에 맥 잇기 산행을 하면서 이열치열의 참 의미를 느끼는 시간이다.

그렇게 한동안 땀방울 흘리니 능선에 오르고 그래도 시원하게 불어 주는 산바람을 맞으며 잠시 간식을 먹어 본다.

커다란 손수건을 몇개 적시고 큰 손수건을 사용해 보지만 역시 짜면 주르륵 물기가 땅바닥에 떨어지고 있다.

그곳에서 땀방울을 말리고 다시 평이한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628.2봉을 좌측으로 우회하며 방금전 선두와 나눴던 무전기 교신 내용을 더듬어 보는 시간이다.

 

다시 약간의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갔다 다시 가파라지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올라 본다.

150여미터의 고도차를 극복하며 오르는 등로는 좌절과 고통을 수반하며 종주대의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듯 그렇게 높게 이어지고 있다.

수없이 많은 땀방울을 흘리고 다시 시원한 산바람을 맞으며 걸을 수 있는 능선으로 오르니 이제 조금은 앞으로 진행해야 할 침곡산 정상부가 나뭇가지 사이로 언뜻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시간은 아침 9시 30여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지만 구름이 서서히 걷히며 드러나는 뜨거운 뙤양볕에 제대로 된 말복 더위를 온 몸으로 실감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다시 나즈막한 내리막 안부를 거쳐 다시 본격적인 오르막 된비알을 타고 침곡산 오르는 마루금은 왜 그리 힘이 드는지...

무거운 캐논 DSRL 카메라를 다시 배낭 속에 넣고 똑딱이를 꺼내 주위 풍경을 담으며 한발 두발 오르니 작은 이끼 바위 지나 능선 안부에 도착해 시원하게 불어 오는 산바람을 맞으며 잠시 쉬어 간다.

처음에는 이곳 이끼 바위가 있는 곳이 침곡산이라 생각했지만 침곡산은 다시 한번 가파른 깔딱 오르막 마루금을 지나고서야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고통속에 몸부림 치니 저 멀리 침곡산 정상에서 종주대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오르니 잡풀에 뒤덮힌 넓은 헬기장에 종주대들이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다 후미가 도착하자마자 선두는 다시 출발이다.

너무나 많이 흘린 수분을 보충하며 잠시 앉아 쉰 후 정상석과 주위 풍경을 사진에 담아 본다.

이 침곡산은 입암리 동쪽 침곡산(725봉)을 향해 뚫린 좁고 긴 바늘같은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로서 그 곡리 위에 있는 산이라 침곡산이라 불려진 것은 아닌가 하고 유추해 본다.

침곡산은 있는 산임을 포항시 죽장면과 기북면을 경계하는 낙동정맥의 산으로서 대동여지도에는 사감산으로 표시되어 알게 되였다.

침곡리에는 능성구씨가 300여년 전 들어 와 솥을 만들며 살아 구점마을이라 불리우는 점마을과 점촌이 있고 그밖에 중바느실과 중마을 그리고 밖바느실, 아래바느실 및외침곡 같은 마을이 이뤄 침곡리를 이루고 있다.

 

이제 한티재까지 2시간 남았다는 이정표가 반가운 시간, 정상 삼각점을 담은 후 제일 후미로 다시 좌측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 본다.

한 4분여 내려가니 다시 평이한 등로로 변해 있고 그 멋진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침곡산에서의 휴식이 달콤했던지 한결 좋아진 몸 상태를 느낀다.

살랑거리는 산바람이 간간히 불어 와 생각보다 땀방울도 적게 흐른다는 느낌이다.

평화로운 등로가 언제쯤 돌변할지 알 수는 없지만 그저 이렇게 무탈하게 진행되는 시간이 만족스런 순간이기도 하다.

 

아침 10시를 넘겨 다시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오랫만에 멋진 조망이 나타나고 이곳에서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잠시 서서 그 아름다운 조망과 풍경을 담으며 이름을 찾아 본다.

좌측 나뭇가지에 가려 보이지 않는 비학산과 그 아래로 펼쳐진 비학지맥이 시원하게 들어 온다.

다만 너무 밑으로 내려 왔기에 저 비학지맥과 나란히 분기하녀 북쪽으로 갈라쳐 나간 내연지맥이 벌써 시야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등로 좌측 바로 앞에는 포항시 북구 기북면의 모덕리와 용기리 들판과 민가들이 아름답게 조용히 펼쳐져 있고 그 뒤로 병풍처럼 둘러치며 흘러 내려간 비학지맥 산줄기가 이 산객의 눈을 사로 잡고 있다.

저 비학지맥 산줄기를 밟으며 이곳을 추억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좀 더 상세한 주위 산군들에 대한 자료 준비가 필요함을 느낀다.

이제 뜨거운 태양빛이 서서히 종주대의 발목을 잡으며 힘들고 고통스런 시간을 전해 주지만 아직까지는 참을만한 시간이다.

 

다시 조금은 완만해진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저 멀리 송전탑 하나가 등로를 막고 있고 그 송전탑 밑을 통과해 계속 내려가니 서당골재 사거리로 내려 선다.

그 서당골재로 내려서기 바로 직전에 침곡산에서 30분 내려 왔으며 한티재까지 1시간 40분 남았다는 이정표가 반갑기는 하지만 그 산행 시간이라는 것이 장소마다 다르게 표기되어 있어 신뢰하기 힘들게 되였다.

뜨거운 말복 태양열이 머리위에 솟아지고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무 그늘이 막아 줘 뙤양볕은 피할 수 있지만 이제 바람 한점 불지 않는 등로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지열로 산행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서당골재를 지나자 다시 오르막 등로가 눈 앞을 가로막고 제법 힘을 써야 된다는 것을 무언에 알려 주고 있다.

높은 습도와 지열 그리고 말복 더위에 오르막 등로에서는 바람 한 점 없는 최악의 산행 조건을 이겨내며 앞으로 전진하는 종주대의 투혼에 박수라도 보내고 싶은 시간이다.

누가 시켜서는 도저히 오를 수 없는 산행 그리고 자신과의 약속을 생각하지 않고는 진행할 수 없는 시간임을 잘 알고 있기에 그저 뒤따라 오르는 자신이 부끄럽지 않게 진행 할 뿐인 시간이기도 하다.

몇기의 이름 없는 묘지들을 지나 계속 이어지는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쉼없이 걸어 올라가는 시간이다.

 

그렇게 한동안 오르니 제법 고도를 높였는지 등로 우측 잡목 사이로 간간히 조망이 터지지만 시원한 모습은 아니기에 몇장의 사진에 담은 후 다시 오르니 이제 밀림 숲처럼 햇빛 하나 들어 오지 않는 검으스름한 등로를 타고 오른다.

그 밀림지대를 지나니 다시 온순한 등로가 열리는가 싶더니 저 멀리 태화산 정상이 보인다.

돌탑 위에 테화산 정상 이정표가 있었다고 알고 있는데 그 돌탑은 보이지 않고 나뭇가지 위에 매달아 놓은 정상 이정표가 반기는 새로운 모습이다.

정상 정중앙에는 무인산불감시 초소가 둥그런히 놓여 있고 그 주위에는 빠르게 자라고 있는 잡목과 잡풀들이 어지럽게 채우고 있다.

 

조심스럽게 그 산불감시초소로 올라 주위를 돌아가며 보이는 조망 전부를 많은 사진에 담아 본다.

남쪽으로 짙은 먹구름 아래 선명히 드러난 다음 구간 올라야 할 운주산이 가운데 우뚝 솟아있고 그 좌측 멀리 봉좌산과 도덕산이 어서 오라 손짓하듯 서 있다.

뭉게 구름이 하늘에 떠 있어 더욱 그 풍경이 아름다운 시간, 오랫만에 시원하게 펼쳐진 그림같은 조망에 힘든줄도 모르게 즐기는 시간이다.

 

다음 구간 올라야 할 운주산을 두고 앵글을 좌측인 서쪽으로 돌리니 오늘 내려가야 할 한티재와 마의 520봉 그리고 숨어 있는 블랫재가 보일듯 말듯 무심하게 이 산객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다.

참으로 부드럽고 아름답게 보이는 한티재 넘어 520봉을 이루는 마루금이 오늘 종주대의 발목을 잡고 늘어져 한없이 시간을 깨먹고 있던 구간이다.

그 저 멀리 산으로 둘러 쳐져 있어 보이지 않는 영천시를 그려 보는 시간이다.

 

눈을 완전히 서쪽으로 돌리니 대구의 진산인 팔공산과 비슬산이 가물거리고 우측으로 돌아가며 영천의 진산인 보현산과 면봉산이 아주 가깝게 다가 와 있다.

파란 하늘에 떠 있는 하얀 뭉게 구름과 그 아래 끝없이 펼쳐진 산그리메를 바라보며 그 이름 하나 둘을 불러 주는 이 시간이 있기에 지금까지의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걸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참으로 말로 표현하기 힘든 복받치는 감정의 표현을 자제하며 지나 온 산줄기를 바라보지만 그곳은 나즈막한 봉우리와 잡목들로 인해 숨어 버렸다.

 

이제 눈을 동쪽으로 돌리니 서쪽의 우람한 고봉들과는 달리 포항시 기북면과 기계면의 올망졸망한 들판이 자리하고 그 뒤를 둘러킨 나즈막한 산줄기가 이어지고 있다.

그 좌측 저 멀리로는 비학지맥이 이어지며 다시 이 산객을 부르고 있다.

언젠가는 꼭 한번 올라 오늘 봤던 이곳 태화산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 할 시간이 있을 것이란 기대도 숨기지 않는다.

  

조금 더 눈을 돌려 남동쪽을 바라보니 기북과 기계쪽 들판 넘어 형산강이 가물거리고 그 강줄기를 따라 늘어 서 있는 아기자기한 산줄기가 또한 눈길을 사로 잡는다.

구름과 이어진 저 산마루 끝자락엔 동해바다도 넘실 거릴 것이지만 오늘은 참으라 이야기를 전해 준다.

뜨거운 태양열이 내리쬐는 따가운 시간임도 모른채 한동안 그렇게 높은 산불감시초소에 올라 나만의 시간을 즐겨보는 순간이다.

 

산불감시초소에 올라 전망대처럼 이용한 후 내려 와 남아 있는 간식과 얼어있던 캔맥주 하나를 가지고 이 세상 최고의 맥주 맛을 맛본다.

슬러시와 얼음물의 중간 단계인 캔 맥주 하나에 감사와 고마움같은 이 세상 최고의 찬사를 보내며 남아 있던 과일로 허기와 목마름을 달랜 후 등로 우측으로 나 있는 내리막 능선을 타고 태화산을 내려 간다.

급경사 내리막 등로를 타고 한동안 내려가니 등로 앞 저 멀리 영천의 보현산과 그 우측으로 면봉산 그리고 기룡산과 안봉산등 영천의 고산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모습도 들어 온다.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한동안 내려오니 다시 평이한 등로가 열려 있고 그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585.1봉은 등로 좌측으로 우회하듯 지나고 있다.

그 봉우리를 우회해 진행하니 다시 등로는 한동안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며 발길을 편안하게 해 주지만 한티재 지나 오름길을 생각하니 은근히 걱정도 되는 시간이다.

이제 태양 빛은 점점 더 대지를 달구고 온 몸에 전해지는 더위응 가히 폭발적으로 다가온다.

 

그저 고통과 어려움만을 생각하며 이번 구간 완주에만 신경을 쓰다 등로 옆에 곱게 피어난 노란 원추리 한송이에 잠시 마음이 편안해지고 영혼의 위안을 삼아 본다.

하지만 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원추리꽃도 하루만 지나면 시든다고 하니 하룻밤 풋사랑에 눈물을 흘리지는 않을까 조심스럽기도 한 시간이다.

조금 더 많은 야생화를 공부해 말라가는 영혼에 단비를 뿌려주는 주인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불현듯 해 본다.

 

다시 한동안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타고 무심으로 걸어 본다.

이제 앞서 가던 종주대 모두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홀로 느긋하게 자연을 즐기며 걸어가는 시간이지만 말복 더위가 발목을 잡으며 쉽지 않은 산행에 어려움을 느낀다.

그래도 한발 두발 걸으며 수수하지만 때묻지 않은 자연속에 들어 와 있음을 폐부 깊숙히 느끼는 시간이다.

 

가파르지는 않았지만 꾸준하게 이어진 내리막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한티재 직전 먹골 즉 먹골안부에 도착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가안리와 감곡리를 이어주는 먹골은 한티제를 오르는 국도변 골짜기에 위치하며 뒷산에 절이 있을 때 벚나무가 많아 마을 이름도 이에 연유하는데 원래는 길 건너 산록에 있는 300여 년생 느티나무 당산목 부근에서 시작된 마을이 바로 가안리이며 먹골이다.

마을 뒷산 절골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이여송이 혈을 질렀다는 자리가 있으며 이 마을과 죽장면 정자리를 잇는 터널이 10여년 준공되어 지금은 한티터널로 불리고 있다.

감곡리는 감나무가 잘되는 마을이라 마을 이름도 그렇게 붙였는데 마을 이름이 감실 감골 등으로 불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곳이다.

 

먹재에서 다시 앞을 올려다 보니 하늘이 보이지 않을만큼 가파른 봉우리 하나가 앞을 가로 막는다.

체력적으로 어렵고 또 한낮의 말복 더위가 온 몸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시간, 290봉으로 어렵게 오르니 그곳에 삼각점 하나가 박혀 있다.

지도를 확인하니 삼각점 표시가 되어 있는 무명봉 하나가 보이지만 그 높이는 알기가 쉽지 않다.

이제 이곳을 지나면 또 한구간 끊어 산행 들머리와 날머리로 이용할 수 있는 한티터널 위 한티재가 있을 것이다.

 

다시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많은 차량 소음이 들리고 곧이어 나뭇가지 위에 달려 있는 한티재 이정표가 나타난다.

이 한티재 이정표가 있는 곳 좌측으로는 한티터널로 내려가 한 구간을 끝내는 갈림 하산길이 보인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에 가장 뜨거운 정오를 지나는 시간이기에 다시 온 몸에선 비오듯 굵은 땀방울이 솟아지고 있다.

10여년전 한티터널이 한티재 아래로 뚫리기 전에는 많은 민초들이 넘나 들었을 애환의 고갯마루도 이제는 이렇게 정맥 산꾼들이나 찾아 오는 한가한 고갯마루로 변해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는 시간이다.

 

잠시 한티재 이정표를 지나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시원하게 뻗어가는 31번 지방도로가 내려다 보이고 그 도로 양쪽으로 죽장면 정자리가 길게 펼쳐져 있다.

한티재와 핑구재 사이에 형성된 정자리 마을은 북서쪽에 봉화봉이 솟아 있는데 1914년 송림, 양지, 음지, 정자(큰마을), 점말과 같은 자연부락을 합하여 정자나무가 있는 큰마을의 이름을 따서 정자라 하였다.

죽장지역에서 처음 과수원이 형성되었던 곳이며, 과수 집단지로 탈바꿈하여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25인승 버스 기사님과 통화를 해 보니 블랫재까지 올라 올 수 있다는 아주 희망적인 소식을 접하고 무전기로 선두와 중간에 알려준다.

오후 2시면 선두가 블랫재에 도착 할 것 같아 시원한 맥주와 식수를 가지고 블랫재로 올라 와 줄 것을 부탁하니 몸이 무거운 것과 달리 마음만은 최고의 안정된 시간이다.

 

                         

 

나즈막한 무명봉을 넘자 520봉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고 임도 지나 520봉 오르는 능선 진입로까지는 온통 잡풀과 잡목들이 자라 등로가 어디인지 분간도 하기 힘든 산하가 펼쳐져 있다.

그래도 앞서 진행한 선두에서 고생을 했기에 희미한 족적이 남아 있고 그 족적을 따라 진행하니 잡풀 사이로 쭉쭉빵빵한 낙엽송이 그림처럼 자라고 있다.

그저 바라만 봐도 아름답고 멋진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잡초 지대를 지나면 임도가 나타나고 그 임도를 가로질러 건너면 우측에 묘지;가 있고 좌측 능선으로 마루금이 이어지지만 한치 앞이 보이지 않을만큼 자란 칡넝쿨과 잡목들로 인해 그 등로를 찾기조차 힘이 든다.

그래도 바로 앞서 진행하는 종주대들이 큰 어려움 없이 그 등로를 찾아 오르는 모습을 물끄럼이 바라보며 홀로 흐믓한 미소를 지어 본다.

이제 모든 종주대들이 뒷모습을 감추고 능선으로 올랐으니 빨라 따라 가야 할 것이다.

 

드디어 잡목과 낙엽송 지대를 지나 비포장 임도로 내려간다.

10여년전 한티터널이 뚫리기 전까지만 해도 제법 고개다운 모습으로 수많은 민초들의 애환을 담고 남겼을 한티재, 이제는 이곳에 농사일을 하거나 산림자원을 우한 사람들 그리고 오늘 우리 낙동정맥 종주대처럼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려는 산꾼들만 찾아 오는 한가한 고갯마루로 변해 버린 임도이다.

이제 블랫재까지 1시간 30분 거리라는데 체력 소모도 심하고 말복 더위가 발목을 잡는 시간이기에 또 어떤 변수가 기다리고 있을지 걱정도 되는 순간이다.

 

무척 뜨거운 말복 태양이 머리 위에서 강하게 내려 쬐고 한티재 풍경을 몇장 사진에 담은 후 곧바로 비포장 임도를 건너 능선으로 나 있는 임도를 타고 잠시 오른다.

그곳으로 오르니 금새 임도 우측으로 잘 가꿔진 묘지 한기가 있고 그 좌측 능선으로 등로가 열려 있어야 하지만 칡넝쿨과 잡목들이 가로막아 전혀 등로가 보이지 않는다.

잠시 이리저리 뒤져보며 찾아 보니 푸른 나뭇잎 뒤 저 멀리 띠지 하나가 보이고 조심스럽게 칡넝쿨을 헤치고 들어가니 정글속 밀림이 끝나면서 다시 정상적인 마루금 등로가 보인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다시 마지막 사투가 시작되는 520봉을 향해 오르기 시작한다.

 

참으로 고통스럽고 힘든 산행이 이어지고 있다.

참으로 많이도 준비한다고 한 식수와 간식 그리고 과일도 거의 바닥을 드러내는 시간, 그래도 이를 악물고 한걸음 두덜음 마지막 종주대의 뒤를 따라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는 사투는 계속된다.

그렇게 오르다 보니 저 멀리 푸른 하늘에 떠 있는 뭉게구름이 잡목 사이로 보이기 시작하고 처음에는 그곳이 520봉 정상이라 생각하고 마지막 힘을 내 본다.

 

그렇게 능선으로 오르니 종주대 후미들이 모여 있고 일부는 등로 옆 목초에 누워 편안히 쉬고 있고 또 일부는 나무에 기대어 마지막 체력을 보충하는 모습도 보인다.

이곳에서 남아 있는 얼음과 식수를 모두 모아 섞은 후 아주 조심하며 한모금씩 목마름을 달래며 함께하는 산행의 팀웍을 제대로 느껴본다.

제대로 된 종주대는 한명도 보이지 않고 모두 체력적인 부담을 호소하는 시간, 한동안 그곳에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천천히 마지막 520봉을 향해 오른다.

 

하지만 쉬었다 오르니 쉬었던 곳은 약 400여봉으로 아직도 100이란 고도를 더 높여야 520봉에 도착 할 수 있는 것이다.

코가 등로에 닿을듯 가파른 급경사 오르막 된비알을 타고 거친 숨소리를 헐떡이며 천천히 한발 두발 걸어 정말 고통속에 오르니 아무 표식도 없는 그저 평이한 정상이다.

그곳에 삼각점 하나가 박혀 있어 정상임을 알 수 있는 그런 곳이였다.

지도를 보니 지도에는 545봉이라 표기되어 있고 삼각점 표시는 없는데 고도표에는 약 520봉으로 표기가 되어 있어 어느것이 맞는 높이인지 헷깔린다.

 

잠시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앞서 진행하는 두팀의 무전 내용을 듣다보니 선두는 460봉에서 좌측 정맥 등로를 놓치고 우측 도일리 마을로 알바를 한듯 하고 중간팀도 어딘지 모르게 알바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지도상 나와 있는 헬기장은 이미 용도 폐기되어 그 모습조차 없다고 선답자들의 후기에서 읽었는데 자꾸만 헬기장이 나오고 그 헬기장에서 좌측으로 내려 갈 것인지 우측으로 내려갈 것인지를 확인하는 무전 내용들이다.

마지막 구간에 이렇게 대형 알바를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기에 후미는 모두 한팀이 되어 같이 진행하기로 정하고 진행한다.

 

나즈막한 안부로 내려갔다 정말 마지막 460봉 삼거리 능선으로 향하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gps를 가지고 있는 또다른 종주대로 부터 알바인듯 하다며 전화가 오기 시작하고 어렵게 선두쪽 스마트폰을 가지고 등로를 확인하는 종주대에게 전화를 해 보니 오후 2시를 막 넘긴 시간에 선두 몇명을 이끌고 블랫재에 도착해 버스를 만났다는 전언이다.

마지막 460봉 상황을 확인하니 헬기장은 그 어느곳에도 없는데 선두쪽 몇명이 아마도 그곳 460봉 삼거리 능선에서 좌측 능선이 아닌 우측 능선을 타고 헬기장을 거쳐 도일리나 지동리로 내려가며 대형 알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이고 삼거리 능선에서 보이는 확실한 우측 등로가 아닌 좌측 원시림 같은 등로를 타고 진행해야 블랫재로 내려 갈 수 있었던 것이다.

 

확인해 보니 선두 1명과 중간조 2명 그리고 또 다른 한명의 종주대가 도일리와 지동리로 내려갔고 그중 한명이 뒤로 돌아 오르며 정상 정맥 등로로 복귀하고 있는 중이였다.

전화로 모든 상황을 확인하고 조치를 취한 다음 천천히 급경사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잠시 뒤 앞으로 올라야 할 다음 구간 마루금이 살짝 눈에 들어 온다.

참으로 아름다운 마루금이지만 대형 알바로 고생하는 종주대와 원 정맥 등로로 복귀하는 종주대로 인해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모두 무탈하게 내려 와 만날 수 있기만을 기대해 보는 시간이다.

 

조금 더 내려가니 앞이 시원하게 뚫리고 다음 구간 올라야 할 마루금과 무명봉이 거대하게 들어 온다.

살펴보니 저 앞에 보이는 산은 넘지 않을 듯 하여 안심하며 정맥길로 복귀하는 산우님의 족적에 경을 써 보지만 뱃떠리가 없는지 소식도 두절된 상태이다

식수도 없고 먹을 것도 없다는 소식이기에 물이라도 들고 잠시 올라보고 싶지만 연락이 두절이니 그저 기다리고 있을 뿐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답답한 시간이다.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한동안 내려오니 다시 잡목과 잡풀이 등로를 가득 메우고 그 정글같은 숲을 헤치며 내려가니 아래에서 함성이 울려 퍼진다.

바로 앞서 진행하던 후미 종주대가 블랫재에 도착해 먼저 내려가 기다리던 종주대와 조우하며 시원한 맥주 한잔 따라주며 내는 반가운 소식이였던 것이다.

내려가 버스 기사분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시원한 맥주 두잔을 연거푸 따라 마시니 더위를 먹었는지 더 이상 들어 가지도 않는다.

다시 대형 알바를 한 종주대와 현재 원대 복귀중인 종주대 모두에게 연락을 해 무탈한 방법을 확인하고 잠시 더 쉬고 있으니 마지막 정상 정맥으로 복귀한 종주대가 무탈하게 내려오며 정말 길고도 먼 또 한구간의 산행을 마무리 한다.

 

다음 구간 산행 들머리를 확인하고 등로 좌측 묘지에 있는 사자상은 멀리에서 담은 사진 한장으로 대신하며 블랫재 이정표를 담는 것으로 오늘 산행을 마무리 한다.

블랫재는 블래재로서 불교가 이 고개를 통해 다른 마을로 전래 되였다고 해서 생긴 하나의 설과 한번 가면 다시는 돌아 오지 못하는 곳이라 하여 블래재라 불린다는 설이 있는 고개인데 어느것이 정설이라 해도 그저 그 고장 특유의 이야기를 담은 민초들의 삶의 터전이였던 곳일 것이다.

블랫을 찾아 보니 우리가 하산하는 도일리 반대 방향인 남계리에서 불랫재를 오르는 길목에 있는 작은 마을이름인데 절터골에 나대에 절이 있어 부처님이 오신다는 뜻인 블래와 재를 넘어가면 도적이나 범과 같은 야수의 피해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뜻의 불래 그리고 영천 쪽에서 불을 내면 강한 서풍을 타고 잘룩한 불랫재를 넘어 이 남계리 마을로 번져온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의 화령현 아래 있는 마을이 바로 블래마을인 것이다.

20여 년 전 이 재를 뚫어 포항 종합제철로 보내는 송수관을 설치하니 마을 샘물이 말라 모두 떠나 버리고 지금은 민가는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기도 한 곳이기도 하다.

 

조심해 버스를 타고 도일리로 내려가다 중도일 마을 계곡에서 알탕으로 땀방울을 씻어 낸 후 나머지 3명의 종주대도 무사히 만나 포항 죽도 어시장으로 자리를 옮겨 맛난 회와 이슬이로 늦은 점심을 먹어 보지만 모두 더위를 먹었는지 생각보다 많이 먹지를 못한다.

그래도 그동안 어렵게 이어져 온 낙동정맥 종주대의 화합과 끝까지 함께한다는 다짐을 했으니 그것으로 또 한 구간 어렵게 마무리한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이제 다음 구간 한구간만 더 진행하면 무더위도 지나고 추석 연휴 때문에 한주를 쉬게되면 생각했던 영남알프스의 하늘거리는 억새를 보기 힘들 것 같아 어렵게 코스를 변경해 영알의 멋진 억새를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몸 조리 잘 하고 다시 다음 구간에 멋진 모습으로 이번 구간 함께하지 못했던 종주대까지 모두 함께 웃으며 떠나는 시간이길 간절히 바라면서 지금도 고통이 전해지는 산행 후기를 마무리 한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