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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맥산행(완료)/용암지맥(문수.완)

용암지맥 제1구간 옛고개에서 봉수산 분기점 넘어 이상리고개까지 산행후기

by 칠갑산 사랑 2022.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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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경상북도 영주시와 안동시의 용암지맥 마루금 일대

산행일자 : 2022년 01월 13일 (목요일 당일 산행)

산행날씨 : 하루종일 흐리고 바람이 강하게 불었으며 기온이 내려가 무척 추웠던 산행날씨

산행온도 : 영하 12도에서 영하03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옛고개(915번 평은로와 예봉로 2차선 포장도로 갈림삼거리, 오은2리 예고개 표지석과 예고개 버스정류장, 예고개 기사식당, 옛고개 주유소)-능선진입-무명묘지-사과과수원-능선진입-무명안부-함창김씨 묘지-송이움막-이정표(해맞이길일출암과 봉수대, 예고개주유소)-안동권씨 묘지-무명묘지-봉수산(봉화산, 570봉, 24재설 건설부 삼각점, 묘지1기의 공터, 콘크리트 초소)-이정표(해맞이길일출암, 봉수대, 먹골저수지)-용암지맥 분기점(이정판)-사각탁자와 벤취쉼터2-소나무 등로-일출-사각나무계단-일출암 확인-일출암 안부 이정표(옛고개, 봉수산 11분 0.5 Km)-이정표(일출정 70m)-일출봉 설명석과 일출정 팔각정자-529.6봉(준희 이정판)-무명묘지와 동판비 진주강공묘지-무명잡풀묘지-진주강공 묘지-무명묘지-용암산(478m, 이정판)-무명묘지와 바위봉 안동시경계 이정판(지신동 7 Km, 봉수산 1.3 Km와 예고개 2.5 Km)-바위암릉-바위들-442.2봉(무명묘지들)-파이프 등로-성황당 무명안부(돌무덤)-잡목등로-소나무등로-이장묘지 공터-408.3봉(준희 이정판, 묘지1)-378.8 삼각점봉(준희 이정판, 422건설부 삼각점)-지독한 가시잡목-진성이공 부부묘지-물탱크(삼밭골 갈림삼거리)-삼밭골재(928번 녹지로 2차선 포장도로, 영주시 평은면과 안동시 녹전면 도로표지판)-시멘트 포장도로-이동통신탑-유실수조림 밭경작지-능선진입-잡목등로-고경사 조망-치성송씨 가족평장묘지들-시멘트 포장도로 갈림삼거리-시멘트 포장도로-능선진입-시멘트 포장도로 갈림삼거리-밭경작지 비포장임도(교수님네 들깨농장)-그물망 등로-무명묘지-공사장 절개지 등로-서삼리고개(서삼길 2차선 포장도로)-소나무(파란 페인트) 무명봉-묵은 밭경작지-무명묘지-비포장임도 무명안부-잡풀등로-가시잡목등로-320.8봉(무한띠지)-비포장임도 갈림삼거리 안부-341.3 무명봉-364.1 공터무명봉-이정표(금학봉, 감찰사 김연과 김부필의 묘, 수청산)-금학봉(364.5봉, 용알바위)-삼각점(305 건설부 삼각점) 이정표(거인 0.5 Km)-금학봉 복귀-소나무 등로-346.5봉(준희 이정판)-산나물 채취금지 경고판-이정표(금학봉 1.35 Km)-325.6봉(비실이 띠지)-비포장임도-이정표(금학봉정상)-시멘트 포장도로 갈림삼거리(반딧불이농장 표지판)-비포장임도-낙엽송등로(우측 벌목지)-354.3봉 갈림삼거리(무한띠지)-354.3봉(와룡산 띠지, 안동김공 부부묘지)-가시잡목-무명묘지-무명안부-길주의 지점(뚜렷한 직진 버리고 우측 소나무등로, 무명객띠지)-비포장임도-묵은밭 경작지-308.2 무명봉(잘린 고사목)-고사목 무명봉-무명안부-준희님 응원판(길주의 우측)-311.5봉 갈림삼거리-사라진 311.5봉(태양광 발전설비)-무명묘지2-시멘트 포장도로-새마고개(와북로 2차선 포장도로)-밭경작지-무명안부-고사목 무명봉-318.6 삼각점봉(준희님 이정판, 424 건설부 삼각점)-제선충 나무더미2(길주의 우측)-금령김씨 묘지-예천임공 묘지들-시멘트 포장도로(동막골길)-인삼포 조성지-갈림삼거리(우측)-밭경작지-능선진입-밭경작지-가시잡목 등로-야성정씨 묘지-인공수로등로-공사 절개지-시멘트 포장도로(고누골길)-민가와 와북로 2차선 포장도로-시멘트 포장도로(와북로)-비포장임도-능선진입-아카시아가시나무 그물망 등로-지독한 가시잡목등로-비포장임도-무명잡목안부(버려진 농기계)-286.2봉(준희님 이정판)-무명안부-단양우공 부부묘지-그물망 묘지-밭경작지-비포장임도(물탱크)-능선진입(절개지)-오노봉 갈림삼거리-오노봉(342.9봉, 준희님 이정판, 예안301 삼각점, 공터)-갈림삼거리 복귀-무명묘지-갈림사거리 안부-무명묘지2-안동권공 묘지-안동김공 묘지2-비포장임도-시멘트 포장도로(웃골1길)-감애고개(와북로 2차선 포장도로, 계유농장과 감애웃골 버스정류장, 웃골1길 도로표지판)-시멘트 포장도로-비포장임도-물탱크-강릉최공 묘지들-282.4봉(준희님 이정판)-비포장임도 갈림삼거리-명잣고개(감애주하길 2차선 포장도로)-철문통과-양계농장건물 통과-절개지-291.6봉(준희님 이정판)-콘크리트 인공수로(수로로 진행, 뒨저골 비포장임도 갈림삼거리 통과)-270.2봉(준희님 이정판)-제선충 나무더미들-낙엽송 등로-비포장임도-오리원재(비포장임도 갈림삼거리 안부)-300.8봉(준희님 이정판)-시멘트 포장도로(퇴계로)-가시잡목 등로-철망 등로-안동소주공장(철망통과)-폐쇄된 안동소주공장 건물통과-안동소주일품홍보관(태리금산로)-안동소주고개(35번 퇴계로 2차선 포장도로, 안동와룡기사식당, 안동소주 직판장, 안동 간고등어 직판장)-비포장임도-밭 경작지-진주강씨 묘지-철망등로-무명묘지들과 축사-밭경작지-시멘트 포장도로(메구네길)-시멘트 포장도로 갈림삼거리(와룡면 태리)-개집-소나무등로-276.3봉(준희님 이정판)-시멘트 포장도로(메구네길)-비포장임도-지리산(334.8 삼각점봉) 갈림삼거리-무명안부-방화선 등로-시멘트 포장도로-우거진잡풀 비포장임도-무명묘지들-서주길 2차선 포장도로-그물망 밭경작지-능선진입-비포장임도-낙엽송 등로-고공수로(수로타고 진행)-방화선 등로-잡목등로(주하굴 철로통과)-고공수로9수로타고 진행)-경주김씨 가족묘지-249.2봉(준희님 이정판)-무명안부-지독한 가시잡목등로-아카시아나무 등로-제선충 나무더미와 묘지-인식불가 삼각점-269.7 삼각점봉(준희님 이정판, 422건설부 삼각점, 안동권씨 묘지)-경주김공 묘지-비포장임도-이상리고개(924번 이하오산로 2차선 포장도로)-산행종료

산행거리 : 29.86 Km (옛고개에서 봉수산 비로봉 분기점 찍고 924번 이하오산로 2차선 포장도로 상 이상리고개까지)

             지맥산행 : 28.37 Km (용암지맥 분기점인 봉수산에서 924번 이하오산로 2차선 포장도로 상 이상리고개까지)

             접속구간 : 01.49 Km (옛고개에서 봉수산 용암지맥 분기점까지)

산행트랙

20220113 용암지맥 제1구간 옛고개-분기점-이상리고개.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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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3-1 용암지맥 제1구간 안동소주명품홍보관-이상리고개.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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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시간 : 10시간 13분 (06시 51분부터 17시 04분까지)

교통 및 숙박편 : 갈때 - 04시 00분 용암지맥 제1구간 들머리인 옛고개를 향해 집에서 옆지기와 함께 애마로 출발

                            06시 35분 924번 이하오산로 2차선 포장도로 상 옛고개에 도착 해 준비한 빵과 커피로 아침식사

                            06시 51분 애마에서 잠시 휴식 후 옆지기를 안동시로 보내고 곧바로 산행 시작

                    올때 - 17시 04분 924번 이하오산로 2차선 포장도로 상 이상리고개에 도착해 용암지맥 제1구간 산행 종료

                            17시 40분 옆지기의 도움으로 안동시 꿈의궁전 모텔에 예약 후 투숙(40,000.-)

                            18시 50분 모텔 근처 안동시 구시장의 찜닭거리에서 옆지기와 찜닭으로 저녁식사 후 모텔로 복귀 (41,000.-)

유봉지맥이란 ???

백두대간의 옥석산(1242m)에서 남쪽으로 가지를 친 문수지맥을 따라 내려 온 봉수산(570m)에서 또 하나의 가지를 쳐 용암산(475봉)과 오로산(343.6봉) 및 목성산(240봉)을 거쳐 안동시 운흥동 반변천과 낙동강이 합치는 곳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33.6 Km의 비교적 짧은 지맥으로 안동호 서쪽 분수령이 되는 산줄기이다.

 

 

오랫만에 옆지기의 도움으로 교통편을 해결한 후 올들어 최고 추웠던 날씨에 예상보다 좋은 등로를 따라 빠르게 마무리한 후 안동에서 좋은 추억을 쌓았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후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단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현존하는 맥 잇기 산행에 대한 수많은 이론과 산행 트랙이 존재하지만 이 산객은 산경표와 신산경표를 보고 맥 잇기 산행을 처음 진행하였기에 가능하면 이 산행 이론에 따라 산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산줄기의 마지막 끝부분이 물과 만나는 지점인 합수점으로 가야한다는 이론 역시 그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아직 정확하게 내려진 올바른 해답이 없기 때문에 이 산객은 옛 문헌에 나타난 이론인 관아를 기준으로 설정된 산줄기를 그 끝으로 하고 문헌에 나타나지 않은 관아 이후의 산줄기는 산행을 하는 산객 각자의 기준에 맞춰 진행하면 될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용암지맥 산행을 한 후 이 산행후기를 기술하면서 경상북도 영주시와 안동시 및 그 주변 지자체에 수록된 지명유래 그리고 네이버의 지식백과, 다음의 백과사전, 산림청, 한국관광공사의 자료들을 참고하여 정리된 부분들이 있으며 이런 부분들이 혹시라도 지적재산권에 저촉이 되어 삭제나 변경이 필요한 경우 연락주시면 언제라도 즉시 삭제 및 수정해 드릴 수 있음도 알린다.

 

이번주에는 어느 산줄기로 갈까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옆지기가 마침 목요일과 금요일 이틀간 시간이 난다고 해 처음에는 교통편이 불편한 덕산지맥을 생각해 보지만 코로나19 펜데믹으로 인해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었던 시간이 없었기에 옆지기가 좋아하는 볼링을 손쉽게 즐기고 산행 들머리와 날머리도 도심에서 멀지 않으며 특히 산행 후 저녁에 먹을 중요한 먹거리가 있는 안동시에서 가까이 지나는 지맥 산줄기를 생각하다 보니 용암지맥으로 결정되고 바쁘게 준비하다 보니 산행 들머리인 옛고개까지도 집에서 2시간 40여분이면 도착이 가능해 충분한 숙면을 취하고 새벽 일찍 내려가기로 하니 왠지 모르게 용암지맥은 거져 먹는 기분이다.

다만 첫날 산행 날머리를 어디로 정할지 고민이기에 옆지기와 함께 안동소주명품홍보관이나 이상리고개 두군데의 주소를 공유하고 산행 후 안동의 유명한 찜닭을 먹기 편한 구시장 가까운 모텔까지 예약하고 나니 마음 편히 산행에만 전념하면 될 듯 싶은데 갑자기 기온이 급강하하며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씨가 될듯 싶으며 서해안에는 대설 주의보까지 내린다고 하니 날씨로 인한 변수가 고민거리인 산행이 되었다.

그래도 오랫만에 옆지기와 함께하는 시간이니 가능하면 옆지기가 만족할 수 있는 계획으로 다녀올 수 있기를 희망하며 출발하는 마음이 가볍기만 하다.

 

출발하기 전 산행지 기온이 영하 10도 전후로 알고 내려왔는데 차량온도계에 나타난 온도는 영하 13도를 가리키고 찬바람까지 강하게 불어 체감온도는 영하 20도가 넘을 듯 싶다.

조금 더 기다렸다 해가 뜨면 출발하라는 옆지기의 걱정스런 응원을 뒤로하고 새벽 7시가 조금 안 된 시간에 새로 장만한 밝은 페츨 헤드렌턴을 밝히고 출발하는데 평소와 달리 조끼와 두꺼운 방풍의까지 착용하고 오르막 등로를 따라 진행하는데도 땀은 커녕 무릎을 파고 드는 찬바람이 온몸을 얼어 붙게 만들고 있어 오늘 하루 참으로 추운 시간임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래도 용암지맥 분기점인 봉수산으로 오르는 도중 여명이 밝아오고 옛추억을 더듬으며 봉수산 정상과 분기점에서 사진 한장 남기고 남쪽으로 이어지는 용암지맥 산줄기를 따라 본격적으로 걸어 내려가니 등로 좌측인 동쪽의 일출암 뒤 저 멀리 덕산지맥 산줄기 위로 일출이 시작되고 그곳에서 방ㄹ걸음 멈추고 살펴보니 환상의 풍경과 조망들이 펼쳐져 있어 그 이름들을 불러 본다.

제일 좌측으로 문명산 지나 바위암릉이 특이한 청량산 지나 축융봉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고 그 뒤로 보여야 할 일월산을 찾아보니 청량산 줄기에 막혀 아직은 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으며 그 우측인 남쪽으로는 조만간 다시 만나야 할 덕산지맥 마루금이 마치 하나의 높낮이 없이 평이한 산줄기로 이어지듯 방금 전 떠오른 아침해가 보이는 앞까지 길게 이어지고 있어 가슴을 들뜨게 만들고 있다.

그렇게 산줄기들을 살펴보고 이름들을 불러준 후 바로 발 아래 내려다 보이는 일출암을 찾아보니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어 그 내용을 읽어 보니 일출암(일출사)은 경상북도 안동시 녹전면 일출길 207 에 있는 암자로서 고즈넉하고 조그마한 산에 태백산맥이 일자로 남쪽을 향해 달리고 있는 그림 같은 풍경 위로 해가 떠오르는 광경에 숨을 멎게하는 곳이 있으며 안동과 영주의 경계에 자리한 봉수산(烽燧山)의 8부 능선에 있는 일출사(日出寺)가 바로 그곳이다.

경북지역에서도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이며 강원도 정동진 보다 일찍 해가 뜨는 일출사는 의상대사가 태백산에서 수행정진하다 발견하여 창건했다고 전해지는데 일출이 장관을 이루어 일출암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놀라운 일출을 간직한 절이 있다는 자체가 놀랍고 신비로운 천혜의 명소라 할 만하고 우리의 적막과 고요 그리고 세속의 번뇌를 다 씻어 내어 안식처로서 손색이 없는 일출사는 일출 뿐 아니라 소백산을 배경으로 떨어지는 장엄하고 어지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일몰의 광경도 선사한다.

낙조대에서 보면 동남으로 누워 있는 소백산 너머로 긴 그림자를 조금씩 감추며 일몰이 황홀하게 펼쳐지는데 세상 모든 번뇌와 시름이 지는 해와 함께 모두 사라져 버린다.

참으로 봉수산 일출사는 의상 대사가 창건한 절답게 아침과 저녁으로 태양이 선사하는 황홀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해 내는 비경을 간직하고 있다.

산사에 서서 맞이하는 장엄한 일출은 부처님의 진리의 빛과 같이 우리의 마음으로 비치며 서역 땅으로 지는 일몰은 우리의 모든 고통과 번뇌를 담아가니 극락정토가 따로 없다.

더구나 부처님의 자비와 기도 수행이 이루어지는 일출사는 찾는 이의 가슴을 한없이 너그럽고 평화롭게 만들어 준다. 일출사는 신라 법흥왕(514∼540)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암자로 전해지나 기록이 없어 확인은 어려우며 의상대사가 일출사를 창건할 때에는 5명의 스님들이 있었다고 하나 그 이후 점차 불사가 늘어 사세가 커지면서 스님들도 100여 명이 되는 도량이 되었다고 한다.

스님들이 많이 모이자 생활하기 불편하고 물도 부족해 의상대사가 신통력을 발휘하여 물을 끌어 올려 우물을 만들었다고 하고 이 우물은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고 하며 이 사찰의 주지가 잘못하면 우물의 수위가 내려간다고 하는 전설도 전하여 지고 있다.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중창불사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이름난 사찰이 되었고 귀중한 문화재와 성보가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많이 소실되어 사찰도 없어지게 되었다고 하며 그 이후 최학수 스님이 6.25 전쟁 때 임시로 대웅전을 중건하여 거처하게 되었고 이어 본원스님이 주지로 7년간 있으면서 사찰명을 일출암에서 일출사로 바꾸었다.

대웅전과 범종루는 1950년경에 중건되었으며 삼성각은 2002년에 중건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잠시 더 일출을 바라보고 있으니 일출암에서 한분이 밖으로 나와 우측의 전망대로 이동을 해 방금 전 떠 오른 햇살을 온 몸으로 받으며 기를 충전하듯 하루를 시작하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남겨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일출을 감상하고 청량산과 덕산지맥 마루금도 확인한 후 약간의 잡목 등로를 타고 일출정 지나 이 산줄기의 이름을 부여받게 만든 용암산을 지나는데 국토지리원 지도와 최근의 다른 지도에 표기된 용암산 위치가 다르게 표기되어 있어 헷깔리기만 하는데 하루 빨리 정확한 위치를 고증해 정확한 위치 표기와 함께 정상석이라도 하나 세워 두면 이런 논란이 사라질 듯 보여 아쉬움도 남긴다.

최신의 지도와 용암산에 대한 설명된 자료에 표기된 529.6봉에 도착을 하니 준희 선생님이 걸어 둔 이정판 하나가 반겨주고 옛 국토지리원 지도에 표기된 용암산 정상부인 478봉에 도착을 하니 대전 산꾼들이 부착한 용암산이란 종이 코팅지 한장이 전부인데 산행 후 돌아 와 많은 지료들을 찾아 봐도 어느 지점이 정확히 용암산 정상임을 주장하기가 어려워 보여 더욱 난감하기만 하다.

그 용암산을 지나 다시 나타나는 바위암릉을 통과하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나는 지독한 가시잡목 구간을 관통한 후 삼밭골재 넘어 큰 고도차이 없이 생가보다 좋은 등로를 타고 빠르게 걸어가니 용알바위라 불려지고 있는 바위암봉으로 이뤄진 364.5미터의 금학봉 정상에 오르니 이곳 역시 사방팔방 막힘없이 시원한 조망이 펼쳐진 일망무제의 전망대로서 그곳에서 서쪽을 살펴보니 좌측 가장자리 앞으로 상산과 천등산 뒤로 문수지맥의 학가산이 정상부에 많은 인공구조물들을 이고 봄으로도 당당히 서 있고 그 바로 우측으로 뾰족하게 솟아 있는 조운산 우측으로 갈미봉으로 이어지는 문수지맥 산줄기가 흐르고 우측 앞으로는 복후면의 무명봉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며 이어지고 있어 한동안 많은 사진과 추억을 남기며 머물다 출발하는 시간이 되었다.

 

오랫만에 옆지기와 동행하는 산행이다 보니 함께하는 산행은 아닐지라도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산줄기를 선택하게 되었고 그곳이 바로 길이도 짧고 대도시인 안동시를 지나며 먹거리도 풍부해 좋은 결정이기를 희망해 보는 산행이다.

하지만 갑자기 추워진 날씨로 인해 구간 나누기가 쉽지 않았고 산세가 높지 않아 가시잡목에 대한 걱정이 있었지만 생각보다 너무 좋은 등로를 따라 먼 거리인데도 예상보다 일찍 산행을 마무리하고 옆지기와 안동에서의 좋은 추억을 남길 수 있어 다행이었다.

옆지기와 출발하기 전 숙면을 취하고 새벽 4시가 다 된 시간에 여유롭게 출발해 중간에 한번의 짧은 휴식 후 산행 들머리인 옛고개에 도착을 하니 새벽 6시 40여분이 가까워진 시간으로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출발하려던 계획은 급강하된 기온과 강한 찬바람으로 출발을 주저하다 보니 10여분간 더 따뜻한 차량에서 머물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시간이 되어서야 걱정스렁 응원을 보내는 옆지기의 배웅을 받으며 오래된 추억을 떠올리며 또 하나의 새로운 산줄기를 찾아 출발하는 시간이 참으로 힘들고 어렵기만 하지만 그것조차도 즐기려 마음 먹으니 참을만 하다.

이곳 예고개(옛고개, 경북 영주시 평은면 오운리 915번 도로, 주유소와 기사식당이 있는 휴게소, 예고개 표지석과 버스정류장)는 경상북도 영주시 평은면 오운리와 안동시 녹전면 녹래리를 연결하는 고개로서 두 지역 사이에 남북 방향으로 뻗어있는 박달산(579.5m)과 봉수산(570m) 및 용암산(635.5m) 산줄기를 넘는 고개이다.

명칭 유래를 보면 예고개는 과거 영주와 안동 및 봉화 방면으로 갈라지는 고갯길이라 하여 옛 고(古) 자에 고개 현(峴) 자를 써서 옛고개(고현)라 불려왔으며 시간이 지나 예고개로 변형되어 불리고 있다.

예고개는 평은면 소재지까지 15리, 안동시 북후면 옹천리까지 15리, 안동시 녹전면 원천리까지 15리로 이 고개를 넘어 다니던 소금장수와 등짐장사꾼들이 쉬어가는 길목이었다고 전해진다.

예고개의 동쪽으로는 박달산에서 봉수산 지나 용암산의 산줄기가 이어지며 서쪽에도 남북 방향으로 길게 뻗은 산줄기가 이어지고 두 산줄기 사이에는 길게 구조곡이 나타난다.

예고개를 기준으로 북쪽의 골짜기에서 발원한 소하천은 북쪽으로 흘러 토일천에 유입하며 남쪽 골짜기에서 발원한 송야천은 안동시 풍산읍 막곡리 부근에서 낙동강에 유입한다.

예고개를 따라 지방도제915호선이 남북 방향으로 지나가며 예고개 남쪽 약 1.5㎞ 지점에서 국도제5호선과 만나 서쪽의 영주시 시가지로 이어진다.

 

예고개에 도착을 해 밖으로 나와보니 생각보다 찬바람이 강하게 불어 체감온도를 급격히 떨어 뜨리고 사진 몇장 남기는 사이 온 몸이 얼어 붙는듯한 느낌에 다시 견디지 못하고 따뜻한 차량으로 들어가니 출발하기가 더욱 어려운 시간이다.

더욱이 밖으로 나와 급강하된 기온에 강한 찬바람을 맛본 옆지기가 자꾸만 일출 후 따뜻해지면 출발하라는 장난기 어린 꼬드김이 이어져 마음이 약해지지만 산행 날머리에 대한 부담으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걱정하는 옆지기의 응원을 뒤로 하고 산행 후 반갑게 만나기로 하고 도로 건너 주유소 방향에서 산행 들머리로 가며 S-OIL 이란 입간판이 서 있는 방향을 사진에 담으니 보는 것만으로도 찬바람이 온 몸으로 파고들며 몸을 움추리게 만들고 있다.

오래 전인 6년하고도 3개월 전에 홀로 문수지맥 산행을 하면서 지난 기억을 떠 올려보니 희미한 기억이 나기는 한데 특별한 일이 없어서 그런지 상세한 풍경은 기억속에서 사라지고 없는 옛고개 모습이다.

 

주유소 가장자리에 있는 입간판 뒤 능선으로 오르니 초반에 약간의 잡목지대를 지나 무명묘지를 통과하니 언덕 넘어 다시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 사과과수원에 도착을 하는데 식재된지 얼마되지 않았는지 나무들은 크지 않아 진행에는 어려움이 없다.

평소같으면 벌써 껴 입은 조끼와 방풍의를 벗어 배낭에 넣고 진행을 했을 시간인데 오늘은 워낙 기온이 낮고 찬바람이 강하게 불어 땀이 흐를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짧은 사과과수원 지나 능선으로 올랐다 나즈막한 무명안부를 지나 다시 가파르게 오르는데도 이마에 땀방울 하나 보이지 않으니 근래들어 처음으로 땀방울 없이 초반 진행되는 산행이 되었다.

 

무명안부 지나 키작은 잡목속에 함창김씨 묘지를 지나 오르니 이곳 역시 활엽수 낙엽 등로가 이어지고 곧이어 하늘색 띠지가 바람에 펄럭이는 무명봉 넘어 비닐로 만들어진 송이움막이 길목을 지키고 있지만 송이채위와 관계없는 계절이다 보니 조용하기만 하다.

송이움막 지나 조금 더 전진하니 갑자기 이정표가 나타나고 살펴보니 거리 표시없이 방향 표시만 되어 있는 이정표로서 진행방향으로 봉수대와 해맞이길일출암이란 글씨들이 보이고 좌측으로는 방금 전 산행을 출발한 예고개주유소로 내려갈 수 있는 등로 표시가 되어 있는 갈림삼거리 안부이다.

 

이정표 지나 안동권씨 묘지를 통과하니 활엽수 낙엽들이 깔려있는 부드러운 비포장임도 같은 등로가 펼쳐지고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며 헤드렌턴 불빛없이도 진행이 가능해 보여 헤드렌턴을 벗어 주머니에 넣고 좌측 잡목 능선으로 오르니 희미한 등로가 보인다.

굵은 소나무 사이로 키 작은 잡목들이 혼재되어 있는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무명묘지 지나 커다란 소나무 두그루가 보이는 무명봉에 도착을 하고 사진에 담고 조금 더 전진하니 강한 바람이 이제 태풍같이 불어 와 온몸의 열기를 빼앗아가며 얼리고 있다.

그곳에서 진행 방향 좌측 앞을 보니 잠시 후 만나야 할 봉수산 지나 북쪽으로 이어지는 문수지맥 마루금이 길게 이어지고 저 앞으로 봉긋 솟아 있는 579.5미터의 박달산이 보이는데 오래전 기억을 떠올려 보지만 저 박달산에 대한 추억은 기억속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북쪽으로 이어지는 문수지맥 마루금과 박달산을 살펴보고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다시 무명묘지 한기 지나 넓은 공터 한가운데에 무명묘지와 가장자리로 초소들 그리고 많은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 사이로 삼돌이님이 걸어 둔 569.6미터의 이정판이 걸려있는 봉수산(봉화산) 정상에 도착을 하고 그 아래 24재설 건설부란 삼각점이 박혀있는 것을 확인한 후 몇장의 사진과 추억들을 남기는 사이 태풍같은 차가운 강풍이 불어 더 이상 지체하지 못하고 통과하며 마지막으로 사진 한장 남기고 곧바로 봉수산 정상을 출발한다.

봉수산(烽燧山, 570m, 24재설 건설부 삼각점, 무명묘지와 공터 및 초소)은 경상북도 안동시의 녹전면 녹래리에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570m이고 산 남쪽에 신라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일출사(日出寺)가 있으며 강원도 강릉시의 정동진보다 더 빨리 일출을 볼 수 있어서 해마다 1월 1일에는 다채로운 해맞이 행사가 열린다.

봉수산이란 명칭은 조선시대 때 봉수대가 있었던 것에서 비롯되었는데 세종실록지리지(예안)에 봉화가 1곳이니 녹전산(祿轉山)으로 현 서쪽에 있고 서쪽으로 영천(榮川, 지금의 영주) 소산(所山)에 응한다 라는 기사가 있으며 이를 통해 원래의 명칭은 녹전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역에서는 또 일출봉(日出峰)이란 명칭도 자주 사용하고 있는데 일출사가 있다고 해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해맞이 장소로 유명하기 때문에 유래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한편 지역에서는 박달산(朴達山)이라고도 부른다고 하는데 예전에 박달나무가 많았다고 하고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10여 분 내려오면 수령 200년의 박달산 신목이 남아 있으며 이로 인해 박달산이란 명칭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해동지도(예안)을 비롯한 여러 옛 지도를 보면 이 일대에는 위쪽부터 녹전산, 박달산, 봉수산 세 개의 산이 나란히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어 여기에 대해서는 좀 더 상세한 고증이 필요하다.

 

너무 추운 태풍급 찬바람에 조끼와 두꺼운 방풍의까지 입었는데도 온몸이 오들오들 떨려 더 이상 머물지 못하고 북쪽으로 이어지는 문수지맥과 박달산 그리고 그 좌측인 북서 방향으로 안동시와 영주시의 경계를 따라 흐르는 915번 도로 좌측으로 솟아 있는 507미터의 영지산을 살펴보고 남동방향으로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봉수길이란 종이코팅지 지나 많은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이 보이고 그 앞에 이정표가 보여 살펴보니 좌측으로 먹골저수지로 갈 수 있는 갈림삼거리 이정표이다.

먹골저수지는 경상북도 영주시 평은면에 있는 리로서 산지를 끼고 있으며 박달산이 위치해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금곡동, 고사동, 평지동, 연당골, 새터, 예고개, 갈분, 외뚜들, 멀래, 서부럼 등이 있다.

금곡동은 골짜기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평지동은 평지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새터는 새로 개척하여 생겨진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먹골저수지 갈림삼거리 이정표 지나 해맞이길일출암 방향으로 몇발자국 더 걸어 내려가니 많은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이 걸려있는 중간에 준희님이 걸어 둔 용암지맥 분기점이란 이정판이 보여 그 앞에서 사진과 추억 몇장 남기며 이틀간 걸어야 할 용암지맥을 생각해 본다.

6년 3개월 전 홀로 문수지맥 제2구간을 산행하면서 거꾸로 오르며 만났던 이정판으로서 그때는 다시 용암지맥 산행을 위해 이곳에 들릴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 그렇게 적어 놨었는데 6년이 지나고서야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이곳에 서 있으니 스스로에게 대견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출발한다.

 

용암지맥 분기점이란 이정판을 지나 조금 더 걸어 평이하게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사각탁자와 벤취쉼터 2개가 나타나고 그곳을 지나니 멋진 소나무 등로가 길게 이어진다.

한동안 그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등로 좌측 나뭇가지 사이로 일출이 시작되는데 나뭇가지에 걸려 아쉬움을 남기기에 재빨리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길게 이어지는 사각나무 계단이 열리고 그 계단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일출암 지나 안동시 녹전면 마을 넘어 저 멀리 나즈막하게 이어지는 조만간 만나야 할 덕산지맥 마루금 넘어 오늘 하루 세상을 밝혀 줄 찬란한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일출과 일출암 그리고 그 덕산지맥 마루금 좌측으로 청량산과 축융봉 방향을 살펴보고 계속 이어지는 사각나무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이정표 2개가 보이는 안부에 도착을 하는데 좌측으로 옛고개로 가는 방향과 진행 방향으로는 일출정 70m라는 별도의 이정표와 지나온 방향으로 봉수산까지 0.5 Km 거리라는 방향과 거리 표시가 보인다.

좌측의 안동시 녹전면 녹래리와 우측의 영주시 평은면 오운리를 이어주는 안부로서 좌측의 안동시 방향으로 보이는 일출암은 용암지맥 분기점으로 오르는 최단거리로서 많은 선답자들이 이용하는 듯 보이는데 오늘 이 산객은 옛 추억을 더듬으며 옛고개를 이용하였기에 일출암을 둘러 볼 기회는 얻지 못하였다.

 

안동시와 영주시의 경계를 이루는 좌측으로 일출암 가는 무명안부 지나 일출정 방향으로 이어지는 짧은 사각나무 계단을 따라 오르니 비포장임도는 우측으로 우회하듯 지나고 있어 좌측 잡목 등로로 올라 조금 더 조심해 걸어 오르니 팔각정의 일출정이란 정자가 나타나고 그 좌측 옆으로는 일출봉이란 표지석에 글씨들이 보여 읽어보니 우리지역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 정동진보다 앞서 해를 볼 수 있는 곳, 지역에서 일출일몰이 가장 아름다운 곳, 명산을 가장 많이 조망할 수 있는 곳이란 설명이 보이는데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니 믿고 사진에 담은 후 곧바로 출발한다.

 

이제 일출봉과 일출정 정자를 지나 잡목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방금 전 헤어진 비포장임도 같은 우회 등로와 다시 만나 좌측으로 이어가고 평이한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등로 위에는 활엽수 낟엽들도 자주 나타난다.

한동안 더 걸어 평이하게 내려가니 굵은 소나무에 준희님이 걸어 둔 529.6미터란 이정판이 보이는데 옛날 국토지리원 지도에는 평범한 529.6봉이라 되어 있지만 최근의 다음이나 네이버 지도에는 이곳을 529.6미터의 용암산이라 되어 있어 헷깔리기만 하다.

신산경표를 따라 새로운 산줄기를 찾아 걷고 있는 이 산객같은 사람들에게는 산줄기의 주산이자 그 이름을 부여 받게 한 봉우리만이라도 제대로 된 명칭과 위치 그리고 지명유래가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지만 이 또한 공식적으로 명명된 이름이 아니니 안타까운 현실일 뿐이다.

 

현대의 지도에 용암산이라 명기된 529.6봉에 설치된 준희님의 이정판을 사진에 담고 잠시 평이하게 걸어가니 솔갈비가 뒤덮고 있는 무명묘지 한기가 나타나고 그 묘지를 지나자마자 교인의 묘지들이 나타나는데 그 가운데엔 십자가도 보인다.

사진에 담으며 그 묘지 앞으로 통과하는데 처음 나타나는 묘지에는 지금까지 살면서 처음보는 동판의 비가 설치되어 있어 살펴보니 진주강공 부부묘지인데 초대대한예수교인이란 글자가 보인다.

 

진주강공 부부묘지를 지나 십자가도 통과하니 전도사와 권사 부부의 묘지가 다시 나타나고 잡풀이 우거졌던 무명묘지를 넘으니 평이한 소나무 등로 지나 또 다시 진주강공 묘지가 보인다.

그 묘지지나 또 다시 무명묘지를 통과하니 소나무 등로가 열리고 약간의 잡목들이 혼재되어 있는 등로를 따라 빠르게 진행하니 등로 좌측 잡목가지에 대전의 산꾼들이 종이코팅지에 478미터의 용암산이란 글씨가 보이는 정상에 도착을 해 사진과 추억 한장 남기며 잠시 용암산에 대한 생각을 해 본다.

이곳 용암지맥의 주산이자 33.6 Km의 산줄기의 이름을 부여 받게 한 이곳 안동시 녹전면 녹래리에 있는 용암산에 대한 자료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는데 다만 녹전면 마을에 용암산이란 이름들이 가끔 보이는 것이 전부이다.

녹래리는 경상북도 안동시 녹전면에 있는 리로서 봉수산 자락에 위치하여 마을 뒤로 산이 감싸고 있고 앞으로는 개천이 흐르며 밭농사를 주로 하는 농촌 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구용골(구룡곡), 녹전(놋점,녹전리), 올골(내동), 장밭(장전,장전리), 중들(중평) 등이 있는데 구용골은 지형이 구렁이처럼 생겼다고 하고 녹전은 녹래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녹전산 밑이 되는데 예전에 놋점(유기점)이 있었다고 한다.

장밭은 예전에 장이 섰었다고 하고 중들은 녹전 남쪽 들 한가운데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며 녹전과 내동의 이름을 따서 녹래리라 하였는데 문화유적으로 의상대사가 창건한 일출암이 있다.

 

국토지리원 상 478미터의 용암산 정상에서 사진과 추억을 남기고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리니 굵은 소나무 등로에 진달래 나무들이 혼재되어 있는 등로가 이어지고 곧이어 찢겨진 플랭카드가 갈려있는 무명봉도 통과한다.

그 플랭카드를 지나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완만하게 걸어가니 키 작은 잡목들과 잡풀들이 보이고 그 한쪽에 바위들이 보이는 무명봉에 도착을 하니 등로 좌측인 동쪽으로 환상의 조망들이 펼쳐져 있어 잠시 발걸음 멈추고 많은 사진과 추억을 남겨 본다.

제일 먼저 북동쪽을 살펴보니 여전히 좌측 끝자락의 나뭇가지 뒤로 893미터의 문명산이 보이고 그 우측으로 뾰족하게 보이는 청량산 그리고 그 우측으로 축융봉 줄기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고 그 뒷쪽으로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일월산을 찾아 보지만 모바일폰의 한계인지 여전히 보이지 않고 그 우측 아래로는 아직 만나지 못한 덕산지맥의 마루금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북동쪽에서 동쪽 방향으로 청량산과 덕산지맥 산줄기를 확인하고 이제 그 우측인 남쪽으로 동쪽에서 남동 방향을 살펴보니 방금 전 떠 오른 붉은 태양 아래 나즈막하게 이어지는 덕산지맥 마루금을 따라 우측으로 빙 돌아 이어지고 그 앞쪽으로 하얗게 보이는 곳이 낙동강의 안동호가 있는 부분으로 생각되며 남동 방향 저 멀리 나즈막한 덕산지맥 산줄기 뒷쪽으로는 덕산지맥 산행 후 곧바로 다시 만나야 할 영등지맥의 영등산과 아가산 방향으로 이어지는 봉우리들이 솟아 있는 모습들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저 덕산지맥과 영등지맥을 걸으며 오늘 걷게 될 용암지맥과 오래 전 걸었던 문수지맥 산줄기를 살펴보며 또 어떤 생각이 들지 궁금한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잠시 더 그 바위무명봉에서 많은 사진과 추억을 남기고 머물다 보니 약간의 땀방울이 식으면서 한기가 밀려오지만 새벽보다는 훨씬 견디기 편한데 아마도 따스하게 비추는 아침 태양열 때문은 아닐까 생각도 해 본다.

무명봉을 출발하자마자 굵은 소나무에 안동시경계란 이정판에는 이곳을 477미터의 용암산으로 표기를 해 놓고 진행 방향으로 지신동까지 7 Km에 지나온 방향으로 봉수산까지 1.3 Km와 그 봉수산에서 예고개까지가 1.2 Km란 방향과 거리 표시가 보이는데 결국 용암산은 지도에 따라 또 지자체에 따라 세군데의 봉우리를 다르게 표시를 하고 있고 그 위치 뿐만 아니라 고도표시도 모두 다르니 하루 빨리 통일된 위치와 정확한 이름이 필요해 보인다.

무명봉을 지나니 바위암릉이 연달아 나타나 우회하며 통과하고 잠시 멋진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다시 커다란 바위 몇개가 나타난다.

그 바위지대를 지나 한동안 편안하게 능선 등로를 타고 소나무 등로를 걸어가니 무명묘지들이 보이는 뒤쪽 나뭇가지에 법광님이 442.2봉이란 산행 띠지를 걸어 놔 국토지리원 지도를 확인해 보니 아무 표식도 없는 무명봉이라 사진에 담고 곧바로 출발한다.

 

무명묘지 뒷쪽의 소나무 무명봉인 442.2봉 지나 다시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갑자기 잡목 등로에 굵고 검은 파이프가 깔려있고 그 파이프를 따라 다시 보이는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등로는 굵은 소나무 등로에 키 작은 잡목들이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지만 걸어 진행하기엔 큰 어려움이 없어 속도를 내 본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 내려가니 작은 돌들이 깔려있는 성황당 모습을 하고 있는 안부를 통과하는데 좌측은 여전히 안동시 녹전면 사신리이고 우측은 영주시 평은면 오운리의 경계지역으로 예전에는 민초들의 발걸음이 있었는지 제법 뚜렷한 등로들이 보인다.

어릴적 토속신앙으로 신수와 돌무덤이 있는 이런 안부에서 자주 굿을 했고 음식물들이 보였기에 어릴적 이런곳을 지날때면 늘 두려움의 대상이었는데 어른이 되어 산행을 하면서 극복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성황당 안부와 묘지를 지나면서도 그 어떤 두려움이나 공포를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 성황당 또는 서낭당 흔적이 남아 있는 영주시와 안동시의 경계지점에 위치한 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굵은 소나무 등로가 뚜렷하게 나 있고 그렇게 잠시 언덕을 넘어가니 등로 좌우측으로 오래된 길의 흔적이 거의 사라져 가는 무명안부를 다시 통과한다.

그 무명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굵은 소나무 사이로 제법 키작은 잡목들이 우거져 있어 그 잡목들을 헤치며 오르다 보니 지금과는 달리 속도가 나질 않는다.

그 잡목지대를 지나니 갑자기 잡목들이 사라진 멋진 소나무 등로가 길게 이어지고 그렇게 걸어 전진하니 이장된 듯한 묘지 공터를 지나 자연으로 뒤돌아 가고 있는 잡풀이 무성한 무명묘지 옆 벗나무 가지에 준희님의 이정판이 걸려있는 408.3봉에 도착을 해 사진과 추억 한장 남긴다.

 

이정판이 걸려있는 408.3봉을 지나 큰 고도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굵은 소나무들이 보이는 무명봉 지나 간벌된 나뭇가지들이 등로를 가로막고 있는 곳 좌측 아래에서 강렬한 개들의 울부짖음이 들려 살펴보니 나뭇가지 사이로 개 사육장처럼 보이는 녹색 철망과 개집들이 보이는데 민가는 보이지 않고 그 앞에 보이는 밭경작지와 인삼포를 지키기 위해 사육하고 있는 개들이 아닐까 생각되는 모습이다.

다시 이어지는 자연으로 되돌아 가고 있는 무명묘지들을 살펴보며 조금은 빠르게 걸어 전진하니 422건설부란 오래돤 삼각점이 박혀있고 준희님의 이정판이 걸려있는 378.8미터의 삼각점봉에 도착을 해 주위를 살펴보니 나무들에 막혀 보이는 것이 없기에 정상부 사진과 추억 한장 남기고 곧바로 출발한다.

 

오래된 건설부 삼각점이 박혀있고 준희님의 이정판이 걸려있는 378.8봉 지나 동쪽 방향으로 조금 더 걸어 전진하니 갑자기 눈 앞에 지독한 가시잡목들이 나타나고 그곳을 뚫고 진행이 불가능해 보여 우측으로 우회하며 어렵게 내려가니 정상 마루금과 자꾸만 멀어지는 듯 보여 좌측 사면 등로를 개척하듯 진행한다.

한동안 우측으로 우회하는 등로를 따라 조금은 적은 가시잡목들을 헤치며 완만하게 내려가니 갑자기 등로 좌측인 동쪽 방향으로 약간의 가시잡목들이 사라지며 희미한 등로가 열리고 그곳으로 들어가 보니 지독한 가시잡목 사이로 제법 뚜렷한 등로가 열리기 시작한다.

 

너무나 힘들게 그 가시잡목을들 서쪽에서 동쪽 방향으로 가로지르며 진행하다 등로 우측인 남동쪽 방향을 살펴보니 중앙부에 잠시 후 우측에 두고 걸어 진행을 해야 할 영주시 평은면 지곡리 삼밭골 마을이 내려다 보이고 그 좌측으로 용암지맥 마루금이 펼쳐져 있으며 그 뒤 저 멀리 나즈막한 덕산지맥 산줄기 지나 영등지맥과 구암지맥 마루금이 덕산지맥과 중첩된 모습으로 눈에 들어오고 그 뒤 끝자락으로 제법 높게 솟아있는 봉우리들이 보여 지도로 확인해 보니 바로 낙동정맥과 그 앞으로 주왕산 줄기처럼 보이는 산군들이 눈길을 사로 잡는다.

 

계속 이어지는 가시잡목 사이로 나 있는 뚜렷한 등로를 타고 그 가시잡목 지대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로질러 진행하듯 걸어가다 이번에도 역시 등로 우측인 남동에서 남쪽 방향을 살펴보니 영주시 평은면 지곡리의 삼밭골 마을이 조금 더 선명하게 내려다 보이고 그 뒤로 안동호 주변의 나즈막한 산들과 저 멀리 갈라지맥과 구암지맥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와 그 사이로 높게 솟아 있는 연점산 줄기가 보이는 듯 한데 나뭇가지에 막혀 선명하지는 못하다.

그래도 걸어 지난지 얼마되지 않았다고 그 산줄기들과 봉우리들이 눈에 들어오니 잠시 더 살펴보며 이제 옛 추억이 되어가는 기억들을 붙잡아 보지만 그 위에 쌓이는 다른 추억들로 인해 꺼내 보기도 힘이 드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남동쪽에서 남쪽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들과 조망을 즐기며 멀리 낙동정맥 마루금까지 살펴본 후 조금 더 걸어 전진하니 드디어 지독했던 가시잡목 등로가 끝이나고 등로는 다시 남동 방향으로 잘 정비된 비포장임도 같이 이어지고 있어 편안하게 내려가니 진성이공 부부묘지가 나타난다.

그 묘지를 지나니 등로 좌우측으로는 키 작은 상수리나무에 잎이 붙어 있는 가을 풍경이 풍기고 잠시 후 등로 우측의 가시잡목 속에 커다란 스테인레스 스틸의 물탱크 지나 우측으로 삼밭골 마을로 내려갈 수 이는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그곳에서 마을을 내려다 보니 전형적인 농촌마을 한가운데에 삼전교회란 입간판이 눈길을 잡는다.

삼밭골은 경상북도 영주시 평은면 지곡리에 있는 자연마을 중 한곳으로 지곡리는 용암산이 위치하며 하천이 마을을 끼고 남북으로 흐른다.

지곡리의 자연마을로는 지신동, 삼밭골, 새장골, 새마을 등이 있는데 삼밭골은 마을 앞에 있는 넓은 밭에 농사를 지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새마을은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삼밭골 마을 갈림삼거리를 지나니 원 마루금은 직진으로 진행을 해야 하지만 우거진 잡풀들로 인해 진행이 어려워 보이고 특히 잠시 후 만나게 될 928번 녹지로 2차선 포장도로로 내려설 수 없을 것 같아 좌측으로 우회하는 넓은 비포장임도를 따라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금새 928번 녹지로 2차선 포장도로에 도착을 하는데 삼밭골재라 불리는 고갯마루이다.

삼밭골재(928번 녹지로 2차선 포장도로, 안동시 녹전면 서삼리와 영주시 평은면 지곡리의 경계를 짓는 고개)는 경상북도 영주시 평은면 지곡리의 자연마을 중 한곳인 삼밭골마을에서 차용된 고개이름으로 마을 앞에 있는 넓은 밭에 농사를 지었다 하여 붙여진 삼마골마을에 있는 고개라서 붙여진 이름인 듯 보인다.

도로 우측으로 영주시 평은면이란 커다란 도로표지판이 보이고 그 뒷쪽으로 우측 삼밭골마을의 삼전교회로 이어지는 좁은 시멘트 포장도로도 보이는 곳에서 뒤돌아 보니 안동시 녹전면이란 커다란 도로표지판이 보이고 그 앞 우측으로 보이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오르며 산행은 이어진다.

 

삼밭골재란 928번 녹지로 2차선 포장도로를 건너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 오르니 금새 비포장임도로 바뀌고 등로 좌측 아래로는 거대한 축사 건물도 내려다 보인다.

묘지 한기를 지나 우측으로 좁고 긴 밭경작지에 과실수가 식재된 풍경이 눈에 들어오고 그렇게 잠시 더 걸어가다 등로 우측을 보니 방금 전 통과한 928번 녹지로 포장도로 뒷쪽으로 흐르는 나즈막한 산줄기 뒤 저 멀리 봉긋 솟아 있는 봉우리가 눈길을 잡아 확인해 보니 문수지맥 상 군부대가 있던 학가산으로 그 좌우측으로 날개를 펼치듯 보여야 할 천등산고 조운산 및 갈미봉 줄기는 아직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생각지도 못한 조망에 자꾸만 우측을 관찰하며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갈림삼거리 한쪽 잡목속에 이동통신탑이 보이고 그곳에서 우측의 등로를 따라 걸어가다 등로 우측인 북서 방향을 살펴보니 방금 전 지독한 가시잡목 등로를 힘들게 내려 온 378.8삼각점봉이 벌써 저 멀리 멀어지며 아쉬운 이별의 손을 흔들고 있는 듯 보이고 바로 눈 앞으로는 과실수들이 식재돤 밭경작지들이 펼쳐져 있다.

 

아름답게 펼쳐진 지나 온 용암지맥 마루금을 확인하고 사진에 담으며 다시 남쪽 방향으로 전진하니 등로 좌측인 남동 방향으로 서삼리 텃골마을이 빤히 내려다 보여 사진에 담고 계속 평이하게 걸어 전진하니 등로 우측으로도 좁고 긴 밭경작지에 유실수들이 식재된 풍경이 눈에 들어 온다.

그곳들을 살펴보고 조금 더 걸어 전진하니 등로 좌측으로 그물망이 설치된 밭경작지들이 나타나고 그 끝자락으로 소나무들이 보이는 능선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인다.

능선으로 들어 평이하게 이어지는 솔갈비 등로를 따르니 소나무 사이로 잡목들이 우거진 오르막 등로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뒤돌아 보니 우측 뒤로 고경사의 높은 석탑이 빤히 내려다 보이고 곧이어 능선을 지나 치성송씨 평장들이 나타난다.

그 평장 지나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다 등로 우측인 남서 방향을 살펴보니 안동시 북후면마을 넘어 저 멀리 조운산 뒤로 다시 문수지맥의 학가산이 뾰족한 모습으로 드러나 있다.

 

학가산을 살펴보고 조금 더 내려가니 묘지 지나 시멘트 포장도로의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하고 지도를 살펴보니 지도에는 갈림삼거리가 아닌 동서 방향으로 지나는 시멘트 포장도로만 표기된 지점이다.

그 갈림삼거리에서 직진 방향인 남쪽 방향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로 이어지고 곧이어 도로가 우측으로 휘어지는 지점 좌측 잡목능선 방향으로 선답자의 산행 띠지가 걸려있어 지도를 확인해 보니 그냥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진행해도 될 듯 싶지만 능선에 무엇인가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잡목들이 보이는 능선으로 들며 뒤돌아 보니 저 멀리 지독한 가시잡목들을 힘겹게 통과한 378.8 삼각점봉에서 이곳으로 이어지는 용암지맥 마루금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지나온 방향의 마루금을 살펴보고 사진에 담은 후 잡목들을 헤치며 능선으로 오르니 굵은 소나무 사이로 약간의 잡목들이 보이는 둔덕봉으로 오르고 특별할 것 없는 봉우리 넘어 완만하게 내려가니 절개지 아래 시멘트 포장도로가 지나는데 지도를 확인해 보니 마루금은 우측으로 보이는 밭경작지 옆으로 이어지고 있어 다시 잡목들을 헤치며 능선을 내려가니 갈림삼거리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타난다.

그곳에서 등로는 우측 도로를 따라 진행되고 좌측으로 내려가는 시멘트 포장도로는 북후면 대현리의 널바우마을 방향으로 이어지는 도로이다.

 

갈림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나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르니 등로 우측인 북쪽 방향으로 용암지맥 마루금이 살짝 보이기 시작하고 시멘트 포장도로는 그물망이 설치된 비포장임도로 변하는데 그 그물망에는 교수님네 들깨농장이란 종이코팅지가 걸려있어 실소를 하게 되는데 울타리를 훼손하지 말라는 경고문이었다.

그물망과 울타리가 설치된 밭경작지를 지나니 등로 좌측 녹전면 서삼리 방향으로 밭경작지와 거대한 축사가 내려다 보이고 사진에 담으며 키가 크고 굵은 줄기로 이뤄진 잡풀등로를 따르니 무명묘지 지나 그물망을 넘어 능선으로 오르는데 넓은 비포장임도의 등로이다.

둔덕봉을 넘어 다시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등로 우측인 남서 방향으로 개간지로 변한 풍경이 나타나고 이곳에서도 그 개간지 뒤 저 멀리 학가산을 중심으로 좌측으로는 천등산이 솟아 있고 조운산은 이제 학가산과 중첩되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구분할 수 없는 위치로 솟아 있다.

 

개간지 옆 등로를 따르니 다시 소나무들이 보이는 능선으로 이어지고 둔덕을 넘으니 다시 신설된 듯한 2차선 포장도로가 나타나는데 도로명은 서삼길로서 좌측은 안동시 녹전면 서삼리 이전마을(돌머리, 돌모들)이고 우측은 영주시 평은면 지곡리 사장골마을을 이어주는 고갯마루인데 특별한 이름은 없는 듯 보이는데 도로명이 서삼길로서 아마도 좌측의 서삼로에서 차용된 아름이 아닐까 생각해 보는 도로이다.

어느 선답자는 당고개라고도 불렀지만 이전고개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듯 보이는데 이전마을(돌머리 또는 돌모들)은 안동시 녹전면 서삼리 모란 북서쪽에 있는 동네로 마을 앞에 외딴 산이 우뚝 솟은 것이 특이하다.

이 마을은 약 400년 전 배나무 밭을 개간하여 이룬 마을이라 해서 이전이라 칭하며 또 지형이 배가 돌아드는 형상과 흡사해서 돌머들이나 돌모들 또는 돌미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전 마을을 세분하여 상이전(上梨田)과 하이전(下梨田)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상이전은 마을의 서쪽에 있는 마을로 웃돌머들이라고도 하며 하이전은 상이전의 동쪽에 위치하며 아랫돌머들이라고 한다.

현재 이전 마을은 서삼리에서 가장 큰 동리로 하이전 마을을 합해 30여 호가 살고 있다.

 

서삼길 2차선 포장도로를 건너 콘크리트 옹벽 넘어 밭경작지로 오르니 그 뒤로 등로가 보이고 약간의 잡목들이 보이는 소나무 등로로 오르니 언덕봉에 도착을 하고 살펴보니 굵은 소나무에 파란 페인트들이 칠해져 있다.

그 언덕봉을 넘어 내려가니 무성했던 잡풀들이 말라 줄기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묵은 밭경작지들이 펼쳐져 있고 그 묵은 밭경작지를 통과하니 잘 관리되고 있는 묘지 한기가 보인다.

그 묘지를 지나 조금 더 걸어 전진하니 갑자기 움푹 패인 비포장임도 같은 뚜렷한 안부가 나타나는데 마차도 지나다닐 정도의 안부이다.

영주시 평은면 지곡리에 있는 무명안부로서 지곡리 마을들을 이어주는 고갯마루처럼 보이는데 주위에 마을과 민가가 멀리 떨어져 있어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고 농사나 임산물을 수송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사용될 듯 보이는 모습이다.

 

그 무명안부를 지나 조금 더 전진하니 우거졌던 잡풀들이 말라있는 등로 지나 묘지들이 보이고 곧이어 잡목들이 발목을 잡는 능선으로 이어지는데 오를수록 잡목의 저항이 심해 속도가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하고 생채기가 나지 않토록 조심하며 걸어 오르니 잡목속에 굵은 소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 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삼밭골재로 내려오는 등로에서 만났던 지독한 가시잡목 이후로 다시 만나는 우거진 잡목 등로를 타고 오르는데 이곳은 그나마 가시나무들이 없어 잡목들을 헤치며 오르기 어렵지 않다.

 

무명봉 지나 계속 이어지는 잡목 등로를 따르니 점차 잡목들이 사라지고 굵은 소나무 등로가 열리는데 그 등로를 지나자마자 넓은 비포장임도처럼 잡목들이 완전히 사라진 굵은 소나무와 참나무들이 혼재되어 있는 멋진 능선 등로가 열린다.

잠시 더 걸어 오르니 활엽수 등로가 이어지고 곧이어 파란 포장으로 감싸 놓은 제선충 처리용 훈증 나무더미들이 보이기 시작하며 사진에 담고 조금 더 걸어 오르니 고사목 지나 둔덕봉에 올라 선답자들이 걸어 둔 빛바랜 띠지들을 확인하고 주위를 살펴보니 무한도전 띠지에 이곳을 320.8미터봉이라 적어 놨는데 시간이 지나 글씨가 지워지고 있다.

 

이정판 하나 없이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만 걸려있는 320.8봉 지나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영양군 방향으로 펼쳐진 나즈막한 덕산지맥과 영등지맥이 보이고 그 뒤로도 몇번이나 중첩된 듯한 산너울이 파도를 치듯 넘실거리는데 그 끝자락에 있을 낙동정맥 마루금을 찾아 보지만 워낙 거리감이 멀어 그곳까지는 확인하기가 어렵다.

등로 우측인 서쪽으로는 나뭇가지 사이로 학가산과 그 좌우측으로 천등산과 조운산이 마치 학가산을 호위하듯 펼쳐진 모습이 아름답기만 하다.

그렇게 등로 좌우측으로 펼쳐진 조망을 즐기며 내려가니 키 작은 잡목 등로 지나 다시 갈림삼거리의 반질거리는 등로가 지나는 무명안부를 다시 통과한다.

 

그 무명안부를 지나 다시 이어지는 조선 소나무 오르막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그동안 보였던 잡목들이 사라져 진행에 어려움은 전혀 없다.

그렇게 걸어 오르니 보이지 않던 바위가 보이기 시작하고 곧이어 관목의 참나무와 굵은 참나무가 보이는 무명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출발하니 평이한 능선 등로가 길게 이어지고 있다.

그 끝자락에서 등로는 좌측인 동쪽으로 이어지고 선답자의 산행 띠지 한장 지나 바위 뒤로 우측의 수청산으로 갈리는 갈림삼거리의 이정표가 서 있는데 좌측의 진행 방향으로는 거리 표시없이 금학봉이란 방향 표시만 보인다.

다만 지나 온 방향으로는 관찰사 김연과 김부필의 묘가 표기되어 있는데 오면서 이런 묘지들을 확인 할 수 없어 궁금하기만 하다.

 

갈림삼거리 이정표에서 좌측의 금학봉 방향으로 급하게 오르니 눈 앞으로 커다란 바위암봉이 나타나고 그 앞에서 잠시 살펴본 후 좌측으로 우회하며 진행하니 바위 앞으로 해발 364미터의 금학봉이란 하얀 정상석이 서 있어 자료를 찾아 보니 그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 금학봉이다.

안동시의 자료를 확인해 보니 금학산(금학봉)은 거인 마을 뒤에 있는 산으로 운암(雲巖) 김연(金緣)의 묘소가 있다라고 되어 있는데 김연은 김부필의 아버지로서 광산김씨인 김연과 김부필과 연관이 있는 듯 보여 김부필을 찾아본다.

김부필은 조선중기의 학자(중종 11년인 1516 - 선조 10년인 1577)로서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자는 언우(彦遇)이며 호는 후조당(後彫堂)에 안동 예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대사헌 김연(金緣)이며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로 조치당(曺致唐)의 딸이다.

1537년(중종 32)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유학하면서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였고 1556년(명종 11) 41세의 나이로 이황의 문하에 나아가 제자로서의 예를 올렸으며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지만 사양하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에 이황이 후조주인(後彫主人)은 깨끗한 절개를 굳게 지켜 임명장이 문전에 이르러도 기뻐하지 않는구나 라는 시를 지어 그의 지조와 절개를 높이 평가하였다.

평소 효제를 학문의 근본으로 삼았으며 일생 심경(心經)을 애독하였다고 하며 1571년(선조 4) 스승 이황이 사망하자 소의(素衣)와 소대(素帶) 및 소식(素食)하며 심상(心喪) 1년을 행하였다.

아우 김부의(金富儀), 4촌형 김부인(金富仁), 4촌아우 김부신(金富信)과 김부륜(金富倫), 고종 금응훈(琴應壎) 및 금읍협(琴應夾)과 한 동네에 살면서 학문을 토론하고 덕업을 권장하여 향리에서는 오천칠군자(烏川七君子)라 칭송되었다.

1570년 이황이 역동서원(易東書院)을 건립할 때 적극적으로 협조하였으며 1574년에는 조목(趙穆)과 함께 도산서원 건립을 주도하였다.

구봉령과 권호문 및 조목 등 동문들과 두루 교유하였고 학문과 행실로서 사림들 사이에 신망이 높았으며 1822년(순조 22)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문순(文純)의 시호를 내렸다.

예안의 낙천사(洛川祠)에 위패가 봉안되었으며 저서로는 후조당문집(後彫堂文集)이 있다.

 

지도를 확인해 보니 모든 지도에는 이름없이 단지 364.5미터의 삼각점 봉우리로만 표기가 되어 있어 더욱 금학봉이 금궁해하며 그 바위 위로 오르니 일망무제로 펼쳐진 풍경과 조망이 아름다워 많은 사진들을 담으며 보이는 산줄기와 봉우리들의 이름들도 확인을 해 본다.

제일 먼저 남서 방향을 살펴보니 사진 우측 가장자리 방향으로 안동의 명산인 문수지맥 상 학가산이 우뚝하고 그 바로 앞 우측으로 뾰족하게 솟아 있는 조운산이 보이고 그 좌측 앞으로는 별도의 산줄기로서 천등산도 보인다.

그 천등산 좌측으로는 안동시 방향으로 낮아지는 산줄기가 길게 이어지는데 그 산줄기 앞으로는 내일 낙동강과 만나는 송야천의 물줄기가 살짝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학가산 우측인 서쪽 방향으로는 중앙선이 지나는 곳 옆으로 무명봉이 솟아 있고 그 무명봉 좌측 뒤 저 멀리로는 조운산에서 이어져 온 산줄기 상 갈미봉이 머리만 내밀고 있다.

우측으로는 북후면 마을 뒤로 무명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우측 뒤로 길게 펼쳐지는데 처음에는 어느 이름있는 산줄기라 생각했는데 지도를 확인해 보니 500미터대의 무명 산줄기이다.

안동시 북후면은 고려말과 조선초에는 안동부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부북(府北)이라 하였으나 숙종 때 북선면(北先面)과 갈라지면서 북후면이라 하였으며 그 후 일제강점기인 1913년 10월 30일 부제(府制)가 공포되고 1914년 3월과 4월에는 부, 군, 면의 통폐합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일제가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지방행정 제도였던 면리(面里)의 구성을 파괴함으로써 지방민의 결속을 약화시키고 식민통치를 쉽게 하려는 목적에서 시행되었으며 이때 안동의 행정구역은 총 24개 면에서 20개 면으로 축소되어 면소재지를 중심으로 인접한 지역은 통폐합되었다.

북후면의 경우 1914년 4월 1일에 시행된 행정구역 개편시에는 마사(麻仕), 소부(小夫), 동음(東音) 등 3개 동이 폐지되었고 상마사(上麻仕)는 연곡(蓮谷) 2동에 하마사(下麻仕)는 도진동(道津洞)에 소부(小夫)는 서후면(西後面) 자품동(者品洞)에 석탑동(石塔洞) 추곡부락(秋谷部落)은 예천군(醴泉郡) 보문면(普門面) 우래동(友來洞)에 편입되었으며 황학(黃鶴), 벽사(碧寺), 장기(場基) 등의 3개 마을은 장기동(場基洞)으로 하였다.

또 영주군(榮州郡) 문수면(文殊面) 조제리(助梯里)의 일부를 석탑동(石塔洞)에 편입하여 11개 동을 관할하게 되었다.

면사무소는 장기동(場基洞)에 있었으나 1942년 중앙선(中央線) 철도의 개통과 함께 면사무소, 경찰지서, 시장 등이 역이 세워진 옹천동(瓮泉洞)으로 옮겨졌다.

현재 면소재지인 옹천(瓮泉)은 예부터 역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지금도 중앙선이 통과하고 안동 영주를 잇는 국도 변에 위치하여 교통이 매우 편리한 곳이다.

역은 공문서의 전달, 관리나 외국 사신의 숙박, 말을 공급하여 관물(官物)의 수송 등을 돕기 위한 기관으로 조선 세조 3년(1457)에는 전국에 538개의 역을 설치하여 이를 40개 구역으로 나누어 각각 찰방을 두었으며 찰방이 주재하는 역을 찰방역이라 하였는데 찰방이 관내의 소속 역을 통할했다.

안동 지역의 역을 살펴보면 예안과 연결되는 길목에 위치하면서 찰방이 주재한 안기도의 중심역인 안기역, 청송과 연결되는 길에는 금소역과 송제역, 의성을 잇는 길에는 운산역, 예천을 잇는 길에 안교역, 영천(현재 영주)을 잇는 길에 옹천역이 설치되었고 안동에서 예천을 거쳐 영천군과 연결되는 길에 감천현의 유동역이 자리잡고 있었다.

옹천역은 부의 북쪽으로 35리에 있었고 북으로 영천의 평은역과 30리 거리이며 동북으로는 봉화의 도심역과 50리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면의 지형은 북쪽은 고산지이며 남쪽은 중간 산지로 분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토질이 마르고 건조한 편이다. 생산되는 농산물은 품질 좋은 산약과 고추가 주로 생산된다.

 

이제 눈을 북쪽으로 돌리니 우측으로 돌아 내려 온 마루금 타고 저 멀리 용암산과 봉수산이 빤히 올려다 보이고 그 우측 뒤로 박달산 지나 길게 이어지는 문수지맥 마루금이 또 다시 옛 기억을 떠 올리며 홀로 힘들게 남겼던 족적들을 추억시키고 있다.

그 봉수산 좌측 뒤로 뾰족하게 올라 온 봉우리 하나가 자꾸만 눈에 들어 와 지도로 확인해 보니 507미터의 영지산이고 우측 소나무에 가려있는 곳은 용두산 방향이다.

 

남동 방향과 남쪽 방향으로 안동호 지나 급격하게 산세를 낮춘 덕산지맥을 살펴보고 삼각점을 찾아 보지만 바위암봉에는 그 어디에서도 찾지 못해 내려 와 그 금학봉이라는 바위암봉을 한바퀴 돌아 보지만 그 어디에도 삼각점이 보이지 않아 포기하려는 순간 금학봉 정상석 좌측 옆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이정표가 보여 살펴보니 그 이정표 옆으로 삼각점이 보여 다가가 보니 좌측으로 거인 하산 이정표이고 305건설부란 오래된 삼각점이 박혀있다.

이정표에 표기된 거인(居人)은 경상북도 안동시 복후면 태현리에 있는 자연마을 중 한곳으로 광산 김씨 후조당 김부필이 이곳으로 옮겨와 마을 뒷산 국사봉에 올라 임금이 계신 조정을 향하여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충의를 다졌다고 해서 큰 선비가 산 마을이란 뜻에서 거인이라 불렀으며 관찰사를 지낸 운암 김연의 신도비가 마을 뒤에 있다.

 

금학봉이란 바위암봉과 좌측의 이정표와 삼각점을 확인하고 다시 바위암봉으로 되돌아 올라 와 남쪽 방향으로 걸어 진행하니 아름다운 소나무 능선 등로가 길게 이어지고 큰 고도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조금 더 걸어가니 굵은 소나무가 보이는 언덕같은 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사진 한장 남기고 계속 이어지는 소나무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내려 가니 나즈막한 무명안부 지나 다시 둔덕봉으로 오르니 굵은 소나무에 준희님의 이정판이 걸려있는 346.5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긴다.

 

언덕같은 346.5봉 지나 여전히 멋진 소나무 등로를 타고 계속 편안하게 걸어 전진하니 갑자기 눈 앞으로 종이코팅지가 노끈에 매달려 있고 글씨가 보여 살펴보니 임산물이나 산나물을 채취하지 말라는 경고판이다.

그 경고판을 지나니 등로 우측으로 굵은 노끈이 길게 이어지고 그 노끈을 따라 이어지는 등로 역시 소나무 사이로 뚜렷하게 나 있어 진행에는 전혀 어려움이 없다.

잠시 후 지나 온 방향으로 금학봉에서 1.35 Km 지나왔다는 이정표 지나 부드러운 활엽수 낙엽 등로를 타고 평이하게 걸어가니 제법 굵은 아카시아나무 등로가 보이고 곧이어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이 걸려있는 325.6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긴다.

 

단지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만 걸려있는 325.6봉 지나 굵은 아카시아나무들을 따라 완만하게 내려가니 조금 더 넓고 뚜렷한 능선 등로가 길게 이어지고 그렇게 한동안 편안한 등로를 따르다 등로 좌측인 북동 방향을 보니 저 멀리 오늘 산행 중 계속 보였던 청량산이 나뭇가지 사이로 살짝 보이기 시작한다.그곳을 지나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지도에도 표기되지 않은 시멘트 포장도로 갈림삼거리가 내려다 보이는데 그 입구에는 이정표도 설치된 모습이 눈에 들어 온다.

사진에 담고 내려가니 지나 온 방향으로 금학봉 정상으로 진행할 수 있다는 방향만 표기된 단순한 이정표이다.

 

이정표를 보고 시멘트 포장도로 갈림삼거리로 내려가 뒤돌아 보니 우측에서 올라오는 시멘트 포장도로 옆으로 커다란 반딧불이농장이라는 이정판이 서 있어 농장으로 이어지는 도로처럼 보인다.

다시 이어지는 직진의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르니 도로가 우측으로 휘어지기 직전 좌측으로 비포장임도가 보이고 그 임도를 타고 오르니 등로는 다시 주능선에 도착을 해 우측으로 이어간다.

굵은 낙엽송 지대를 타고 빠르게 걸어가니 등로 우측으로 갑자기 벌목지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저 멀리 아름다운 풍경들을 살펴보니 정 가운데에 문수지맥 상 학가산을 중심으로 그 우측으로 뾰족한 조운산이 보이고 바로 앞 좌측으로는 천등산 지나 안동 방향으로 흐르는 나즈막한 무명 산줄기가 보이고 학가산 우측으로는 앞으로 흐르는 무명 산줄기 뒤로 문수지맥 마루금이 얼굴만 보이고 있다.

 

계속 이어지는 우측의 벌목지와 좌측의 낙엽송 등로를 따라 걸어가 문수지맥과 학가산의 변해가는 풍경을 살펴보며 전진하니 다시 벌목지가 끝이나고 그곳에서 뒤돌아 보니 좌측으로 무명 산줄기 따라 문수지맥이자 용암지맥 분기점인 봉수산이 낙엽송 가지 뒤로 살짝 보이지만 깨끗하지 못해 아쉬움도 남긴다.

다시 능선으로 올라 조금 더 걸어가니 관목의 소나무들이 보이는 봉우리에 도착을 하는데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이 걸려있어 확인해 보니 이곳을 354.3봉이라 적어 놨는데 우측으로 실제 354.3봉이 올려다 보여 잠시 다녀오기로 한다.

 

우측으로 빼곡하게 서 있는 소나무 등로를 타고 평이하게 걸어가니 오래되어 제단의 글씨가 많이 마모된 안동김공 묘지가 보이는 실제 354.3봉 정상에 도착을 하는데 묘지 뒤 소나무 가지에 와룡산님의 띠지 한장만 걸려있어 조금은 아쉬움을 남긴다.

나무에 막혀 풍경과 조망이 전혀 없기에 정상부와 묘지에 대한 사진 몇장을 남기고 다시 소나무 등로를 따라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이 걸려있는 갈림삼거리로 복귀해 우측인 동쪽 방향으로 이어지는 소나무 등로를 타고 산행을 이어간다.

 

묘지 한기와 선답자의 산행 띠지 한장 걸려있던 354.3봉을 다녀 와 동쪽으로 이어지는 등로를 따르니 갑자기 지독한 가시잡목이 앞을 가로막고 좌측 아래에서는 전기톱을 이용해 나무들을 벌목하고 있어 신경이 쓰인다.

잠시 머뭇거리며 진행이 가능한지 확인해 보니 우거졌던 가시잡목 사이로 희미한 등로가 보이고 그 등로를 따라 왔다리 갔다리 전진하니 등로 우측의 안동호와 안동시 방향으로 나즈막한 산그리메들이 펼쳐져 있는 풍경들이 보이는데 추운 날씨에도 기온이 올랐는지 원경은 박무들로 인해 시야가 상당히 제한되고 있다.

어렵게 그 가시잡목 지대를 통과해 내려가니 무명묘지 한기가 다시 나타나고 나즈막한 무명안부 지나 벌목된 소나무 밑둥의 무명봉을 넘으니 굵은 소나무에 무영객님 띠지가 걸려있는 곳에서 등로는 다시 북동에서 남동 방향으로 크게 휘어져 내려가며 이어진다.

뚜렷한 넓은 비포장임도 같은 잡풀 등로를 따르니 등로 좌측으로 다시 개사육장이 있는지 개들이 울부짖음이 들리고 곧이어 밭경작지 지나 드넓은 인삼포가 나뭇가지 사이로 내려다 보인다.

다시 나타나는 갈림삼거리에서 우측의 남쪽 방향으로 진행하니 다시 묵은 밭경작지에 줄기가 굵은 잡풀들이 무성하게 자랐다 말라있는 곳으로 내려가 어렵게 산행을 이어간다.

 

한동안 우측으로 이어지는 묵은 밭경작지를 따라 완만하게 내려가니 등로는 다시 좌측의 잡목 능선으로 이어지고 관목의 참나무 오르막 능선을 지나 조금 더 걸어 오르니 굵은 소나무 한그루가 잡목 사이에 서 있는 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그 무명봉을 지나니 간벌된 나뭇가지들이 등로를 가로막고 그 옆으로는 산객의 허리 높이에서 잘린 소나무 고사목들이 보인다.

조심하며 그곳을 빠져 나가니 제법 굵은 밤나무들이 보이고 다시 이어지는 부드러운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다시 고사목들이 널부러져 있는 무명봉도 통과한다.

잠시 후 나즈막한 무명안부 지나 비포장임도 같은 등로를 따르니 굵은 소나무에 준희님이 걸어 둔 응원판이 보이는데 이곳에서 등로는 우측으로 크게 꺽어 잡목 등로를 따라 진행을 해야 하는데 뚜렷한 직진 등로를 타고 잠시 알바 후 뒤돌아 올라 오는 헤프닝도 벌어진다.

 

짧은 알바 후 응원판이 걸려있는 곳으로 되돌아 올라 와 이제 좌측 방향을 살펴보니 많은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이 보이는데 그곳을 확인하지 못하고 직진하며 헛걸음만 하고 올라 왔다.

짧은 아카시아 가시나무 등로를 통과하고 아름다운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좌측으로 뚜렷한 등로가 열리지만 지도를 보니 우측 직진 방향으로 도상 311.5봉이 보여 우측 직진의 등로를 따르니 선답자들이 많이 다니지 않았는지 우거진 잡목들이 태클을 걸고 좌측으로는 넓은 태양광발전시설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렵게 조금 더 걸어 태양광발전시설 옆 능선으로 걸어가니 드디어 도상 311.5봉에 도착을 하는데 좌측으로 넓은 태양광발전시설을 만들며 실질적인 311.5봉은 사라져 그 옆으로 소나무 능선을 사진에 담고 뒤돌아 나온다.

 

태양광발전시설들을 조성하며 사라진 도상 311.5봉을 살펴보고 되돌아 나와 잡목들을 헤치며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잘 관리되고 있는 무명묘지 2기를 지나 시멘트 포장도로와 만나는데 살펴보니 방금 전 만났던 태양광발전시설 방향으로 오르는 도로이다.

그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와북로 2차선 포장도로에 도착을 하는데 어느 선답자는 이곳을 세마고개라 하였는데 공식 이름은 아니고 지명 이름을 차ㅣ용해 편리하게 붙여진 이름처럼 보인다.

새마고개(와북로 2차선 포장도로)는 좌측으로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서현리 새마마을과 우측으로 안동시 북후면 연곡리 신그네마을을 이어주는 와북로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고개로서 서현리의 가장 큰 마을인 새마마을에 있어 붙여진 고개이름이다.

새마(우두산 牛頭山 또는 새마을)이란 마을은 서현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약 150년 전에 봉화에서 입향한 봉화정씨(奉化鄭氏)가 개척하였다고 전하며 새마와 새마을 또는 우두산이라고 하는데 우두산은 소의 머리처럼 생긴 산으로 이 산 아래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므로 마을 이름도 따라서 우두산이 되었다.

 

와북로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새마고개로 내려 와 도로를 따라 우측으로 조금 걸어 내려 가 좌측의 밭경작지가 끝나는 지점에서 잡목 능선으로 오르니 활엽수 낙엽 등로 지나 갑자기 움푹 패인 무명안부 지나 다시 잡목 능선으로 이어지고 있다.

안부 지나 조금 더 걸어 오르니 제선충 훈증 더미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무명봉 지나 잡목 사이로 뚜렷하게 나 있는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고사목들이 널부러져 있는 무명봉에 도착을 하는데 예전에 뚜렷한 탁자같은 곡이 있던 지점인데 이제는 모두 무너져 탁자의 흔적은 사라진 봉우리이다.

그 무명봉 지나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다시 관목의 참나무 등로로 바뀌고 곧이어 424건설부란 삼각점이 박혀있고 아카시아 나뭇가지에 준희님의 이정판이 설치되어 있는 318.6 삼각점봉에 도착을 해 사진과 추억 몇장 남기고 출발한다.

 

삼각점봉을 지나 북동 방향으로 방향을 바꿔 진행하니 제선충 훈증더미 2개가 보이는 곳에서 등로는 다시 남동 방향으로 변해 이어지고 있다.

활엽수 낙엽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내려가니 잡목 등로가 나타나고 어렵게 그 잡목 등로를 피해 어렵게 통과하니 가시잡목 사이로 제선충 훈증더미가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그곳을 지나니 뚜렷한 관목 등로를 따르니 금령김씨 묘지가 나타나고 다시 무명묘지와 풍천임공 부부묘지를 지나니 바로 앞으로도 묘지들 지나 시멘트 포장도로와 설치중인 인삼포가 내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그곳 따뜻한 묘지 마당에서 배낭 내려 준비한 빵과 과일로 허기를 달래고 물 한모금 마신 후 다시 묘지를 따라 내려가니 동막골길이라는 기멘트 포장도로에 도착을 하는데 진행 방향인 좌측으로 새로 설치중인 인삼포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그 동막골길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좌측으로 걸어 오르니 도로 우측으로는 드넓은 인삼포를 만들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곧이어 이동통신탑 지나 다시 갈림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직진의 시멘트 포장도로를 버리고 우측 능선 방향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르니 넓은 비닐밭 경작지가 진행 방향으로 길게 이어지고 있다.

그 비닐이 덮혀있는 밭경작지를 따라 능선으로 오르니 관목의 참나무 등로가 열리고 곧이어 둔덕봉으로 오르니 선답자의 산행 띠지가 걸려있다.

그곳부터 지독한 축사 분뇨냄새가 코를 자극하기 시작하고 살펴보니 등로 좌측으로 거대한 축사단지들이 내려다 보이기 시작하고 낙엽송과 잡목들이 사라진 작은 활엽수 등로를 따르니 다시 눈 앞으로 넓은 밭경작지 지나 묘지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밭경작지를 지나 묘지지대 뒷쪽으로 걸어 오르니 지독한 가시잡풀지대가 앞을 가로막고 힘들게 그 가시잡풀 등로를 통과하니 처음 보는 야성정씨 묘지가 나타난다.

그 묘지를 지나니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인공수로가 나타나고 그 수로를 따라 조금 더 진행하니 다시 공사하다 중단된 황토흙 절개지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진행 방향을 살펴보니 드넓은 밭과 논경작지 사이로 고누골길 시멘트 포장도로와 민가 그리고 우측으로 이어지는 와북로 2차선 포장도로 따라 올라 언덕에서 좌측 능선 방향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이 한눈에 들어 와 사진에 담고 조심하며 그 황토흙 절개지를 따라 내려간다.

 

황토흙 절개지를 타고 내려가니 고누골길 시멘트 포장도로에 도착을 하고 그 도로를 따라 좌측으로 걸어가니 좌측으로는 밭경작지가 우측으로는 논경작지가 펼쳐져 있다.

잠시 더 그 고누골길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르니 민가가 나타나고 그 민가를 우측으로 끼고 오르니 와북로 2차선 포장도로와 만나는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해 이제 와북로 도로를 따라 우측으로 걸어 오른다.

이제 안동시 와룡면 감애리 지역으로 그 와북로를 타고 걸어 오르다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지나 온 민가와 갈림삼거리 지점이 빤히 내려다 보인다.

 

계속 이어지는 와북로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완만하게 걸어 올라 언덕에 도착을 하니 도로 좌측으로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타나고 여전히 와북로라는 이름의 도로를 타고 좌측 시멘트 포장도로로 오르니 도로 우측 아래로 감애리 마을이 드넓게 펼쳐진 모습이 눈에 들어 온다.

감애리는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에 있는 리로서 하천이 마을을 가로질러 남북으로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우무실, 미우리, 오리원, 부곡, 도래마 등이 있는데 우무실은 근심이 없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미우리는 서북쪽에 있는 웃골앞산이 와우형(臥牛形)으로 소의 머리 부분에 해당되며 마을은 소의꼬리 부분에 해당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오리원은 부근에 조선시대 행인에게 편리를 제공하던 숙박편의 시설인 원(院)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부곡은 앞산이 우마형(牛馬形)이며 골짜기는 죽통처럼 생겨 소가누워서 죽을 먹는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도래마는 한 굽이를 돌아가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와북로라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언덕으로 오르니 도로는 다시 비포장임도로 바뀌고 다시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등로는 좌측 묘지지대로 오르며 진행된다.

잘 관리되고 있는 묘지지대를 지나니 관목의 소나무 등로가 이어지고 한동안 편안한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등로 좌측 앞인 서쪽으로 천등산과 학가산이 이제 거의 일직선처럼 보이기 시작해 어렵게 사진에 담고 우측인 북동 방향으로 방향을 바꿔 전진하니 좌측 능선 우측 아래 사면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가시잡목으로 능선 등로를 포기하고 우측 사면 등로를 따르니 다시 묘지지대 지나 능선 방향으로 오르는데 이곳 역시 파란 그물망이 설치되어 있어 멧돼지와 고라니의 피해가 심각한 듯 보인다.

 

그물망이 설치된 묘지지대를 통과하니 여전히 가시잡목 사이로 사람 한면 지날 수 있는 좁은 등로가 드러나 있고 그 등로를 타고 걸어가며 지독한 축사 분뇨 냄새가 나 주위를 살펴보니 좌측으로 거대한 축사 단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다시 나타나는 묘지지대를 지나 걸어가며 좌측으로 내려다 보이는 거대한 서현리 축산단지를 내려다 보며 진행하니 등로는 이제 조금 더 넓은 비포장임도처럼 나 있는데 등로 좌우측으로는 여전히 지독한 가시잡목들이 우거져 있다.

한동안 더 걸어가니 다시 좌측으로 내려갈 수 있는 갈림삼거리 안부에 도착을 하는데 살펴보니 좌측으로 서현리 계림농장과 서현양돈단지 방향으로 내려갈 수 있는 갈림삼거리인데 그 안부 건너 우측 가시잡목 사이로는 버려진듯한 경운기도 보인다.

 

서현리 갈림삼거리 안부 지나 우측으로 버려진 경운기를 사진에 담은 후 계속 이어지는 넓은 비포장임도 같은 등로를 타고 빠르게 걸어 오르니 등로는 다시 북쪽에서 남동 방향으로 크게 꺽여 이어지고 곧이어 굵은 소나무에 준희님의 이정판이 걸려있는 286.2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이제 시간은 오후 1시가 가까워진 시간인데도 강하게 불어오는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만들고 평소같으면 벌써 벗었을 귀마개와 버프는 목과 귀에 아직도 걸치며 찬바람을 막고 있어 오늘이 가장 추운 날씨 중 하루임을 입증하고 있다.

 

이정판이 걸려있는 286.2봉 지나 남동 방향으로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잘록한 무명안부를 통과하는데 좌측의 와룡면 서현리와 우측의 감애리를 이어주는 안부이다.

그 무명안부 지나 다시 활엽수 낙엽이 수북히 쌓여 있는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용도를 알 수 없는 이상하게 생긴 그물망이 나타나고 그 그물망 지나 우측으로 휘어져 전진하니 많은 묘지지대 지나 농막과 논경작지 넘어 좌측 능선으로 이어지는 진행 방향의 마루금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단양우공 묘지들을 지나 내려가니 그물망이 설치되어 있고 조심해 통과하니 다시 농막인지 아니면 묘지들을 관리하기 위한 농기구들을 보관하는 창고인지가 나타나고 그곳을 지나자마자 갈아 엎어 놓은 밭경작지가 펼쳐진다.

그 경작지를 지나니 파란 물탱크가 나타나고 곧이어 비포장임도로 이어지는데 그 임도를 따라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등로는 이제 임도를 우측으로 버리고 좌측의 능선 방향으로 절개지를 따라 오른다.

벌목지와 소나무의 경계 사이로 이어지는 등로를 타고 능선으로 오르며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지나 온 경작지와 등로가 내려다 보이는데 서현리와 감애리의 경계를 따라 등로가 이어지고 있다.

 

능선으로 오르니 소나무 등로에 약간의 잡목들이 나타나고 곧이어 언덕봉으로 오르니 중간에 잘려진 소나무 고사목들이 보이는 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고사목 무명봉 지나 계속 이어지는 부드러운 아카시아나무 등로를 따라 큰 고도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전진하니 쓰러진 고사목들이 등로를 막고 있는 지점도 나타난다.

다시 조금 더 걸어 오르니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하고 살펴보니 마루금은 동쪽에서 남쪽으로 크게 꺽어 진행되지만 북동 방향으로 342.9미터의 삼각점이 박혀있는 오노봉이 가깝게 있어 잠시 다녀오기로 한다.

 

오로봉 갈림삼거리에 잠시 배낭 벗어 놓고 편안하게 직진의 능선 등로를 타고 빠르게 전진하니 무명봉 넘어 부드러운 아카시아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넓은 공터에 예안301이란 삼각점이 박혀있고 준희님의 이정판이 걸려있는 342.9미터의 오로봉에 도착을 해 사진과 추억을 남기고 곧바로 뒤돌아 갈림삼거리로 복귀한다.

오로봉(五老峰, 342.9m, 예안301 삼각점)은 경상북도 안동시의 와룡면 서현리에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342.9m이고 호계서원에 대한 기록에서 1575년(선조 8) 지방사림들이 안동부(安東府) 동북쪽 여산촌(廬山村) 오로봉(五老峯) 아래에 있는 백련사(白蓮寺) 절터에 여강서원(廬江書院)을 세웠다가 대홍수로 유실되자 지금의 와룡면 도곡리로 옮겨 새로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오로봉이란 명칭은 오래전부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조선지지자료의 북선면(北先面) 외감애동(外甘厓洞)에 오로봉산(五老峰山)으로 나오고 조선지도(안동)에 지금의 오로봉 위치에 해당하는 산 이름을 여산(廬山)으로 표기하였다.

 

오로봉 갈림삼거리로 복귀해 벗어 놓은 배낭을 찾아 두 어깨에 둘러메고 남쪽 방향으로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무명묘지가 나타나고 낙엽송 군락지 앞의 무명안부도 통과한다.

안부 지나 연속으로 나타나는 2기의 무명묘지를 통과하니 다시 부드러운 등로 지나 안동권공 묘지도 통과한다.

이어지는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안동김공 평지 묘지가 나타나고 곧이어 우측으로 거대한 축사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하며 좌측 능선 등로로 이어지는데 그 능선 등로를 지나자마자 넓은 비포장임도로 이어진다.

다시 우측으로 내려다 보이는 거대한 축사 건물들을 내려다 보며 조금 더 전진하니 비포장임도가 웃골1길이라는 시멘트 포장도로로 바뀌고 곧이어 웃골1길이라는 도로 표지판이 보이는 와북로 2차선 포장도로에 도착을 하는데 웃골고개라는 곳으로 우측으로는 계유농장이라는 이정판과 감애 웃골이라는 버스정류장도 보이는 고갯마루이다.

웃골(통골 또는 부곡-釜谷)은 우무실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웃골 혹은 통골이라 하며 오로봉 준령이 마을 뒤에 있는 남동향인 마을로서 마을 앞산이 우마형(牛馬形)이며 골짜기는 죽통처럼 생겨 소가 누워서 죽을 먹는 형국이라 하여 부곡이라고 한다.

현재 마을 호수는 20호로 약 200여년 전에 권두기 공이 입향한 이후로 안동권씨 별장공파가 모여 사는 마을이다.

 

웃골1길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 와 웃골고개인 와북로 2차선 포장도로를 건너 다시 나타나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이동통신탑과 전봇대 지나 비포장임도로 이어지고 있는데 원 마루금은 우측의 나즈막한 능선 등로이지만 금방 다시 비포장임도와 만나기에 그냥 편안하게 비포장임도를 따라 진행한다.

우측에 스테인레스 스틸 물탱크를 지나 우측의 원 마루금과 만나는 갈림삼거리를 통과하니 잘 관리되고 있는 강릉최공 묘지들이 나타나고 그곳을 통과해 진행하니 선답자의 산행 띠지가 걸려있는 곳에서 등로는 남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바뀌어 소나무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다시 관목의 활엽수 등로가 나타나고 잠시 편안하게 전진하니 소나무들이 빼곡하게 자라고 있는 정상에 준희님의 이정판이 걸려있는 282.4봉에 도착을 해 사진과 추억 한장 남긴다.

 

이정판이 걸려있는 봉우리 지나 안부를 지나 잡풀들이 말라있는 부드러운 소나무 등로가 길게 이어지고 곧이어 비포장임도가 만나는 갈림삼거리를 통과하는데 약간의 생활 쓰레기들이 보여 지나온 우측 아래를 살펴보니 축사와 민가가 보인다.

잠시 비포장임도를 따라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시멘트 포장도로가 보이고 곧이어 도로 건너 거대한 일성가축인공수정소가 보이는 감애주하길 2차선 포장도로에 도착을 하는데 좌측으로 와룡면 감애리 명잣골 마을이 있는 고갯마루인데 어느 선답자는 이곳을 명잣고개라 하였다.

명잣(명계-明溪)마을은 웃골 아래쪽에 위치한 마을로 오로봉을 줄기로 한 야산들이 마을 주위를 둘러싸고 있으며 안동 도산 간의 국도가 마을 앞에 나있다.

조선 선조 때 선성이씨와 청주정씨가 입향하였다고 하며 마을 앞으로 감애 2리에서 발원하여 주하 1, 2리를 거쳐 북후면의 도나리로 흐르는 명계천(明溪川)이 흐르므로 마을 이름도 명계 혹은 명잣으로 부른다.

이 마을은 현재 행정구역상 일부는 주하 2리에 속하고 나머지 일부는 감애 1리에 속하는데 주하리에는 10여호가 살며 감애리에는 30여호가 산다.

그곳에서 감애주하길 2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좌측으로 조금 걸어가면 우측으로 거대한 일성가축인공수정소 입구가 나타나고 그 입구를 통해 들어가며 산행을 이어간다.

 

그 일성가축인공수정소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니 소독조 지나 수정소의 거대한 건물들이 보이고 걱정을 하며 진행하지만 사람 한면 만나지 못하고 제지도 받지 않으니 괜시리 미안한 마음에 재빨리 건물 좌측 뒤로 들어 눈 앞으로 보이는 제법 높은 절개지를 타고 능선 방향으로 오른다.

말라있는 잡풀들을 두손으로 잡으며 힘들게 능선으로 올라 뒤돌아 보니 거대한 일성가축인공수정소 건물과 감애주하길 넘어 내려 온 나즈막한 용암지맥 마루금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어 사진에 담고 참나무 능선으로 들며 산행을 이어간다.

 

부드러운 참나무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다시 제선충 훈증더미가 나타나고 갑자기 보이는 지독한 가시잡목 등로를 피해 이리저리 힘들게 통과하니 다시 그 가시잡목 등로를 지나 부드러운 참나무 등로에 제선충 훈증더미가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그 훈증더미 지나 오르며 등로 좌측 뒤인 북동 방향을 보니 오늘 하루 종일 바라봤던 청량산과 축융봉 능선이 여전히 아름답게 눈에 들어오고 사진에 담고 조금 더 걸어 오르니 굵은 아카시아 나무에 준희님의 이정판이 걸려있는 291.6봉에 도착을 해 잠시 심호흡 한번 하고 사진에 담는다.

 

이정판이 걸려있는 봉우리 지나 활엽수 낙엽이 깔려있는 부드러운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눈 앞으로 콘크리트로 이뤄진 인공수로가 나타나고 그 주위를 살펴보니 수로 아래로 비포장임도와 시멘트 포장도로가 지나는 갈림사거리가 내려다 보이고 우측으로는 커다란 축사 건물도 보인다.

그 위로 설치된 수로를 살펴보니 중간에 얼어있지만 물기가 없어 조심하며 그 콘크리트 수로를 타고 진행하니 내려갔다 올라 와야 할 체력과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그 시멘트 수로를 타고 끝자락으로 걸어 가 수로를 벗어나기 직전 지나 온 방향을 뒤돌아 보니 부드럽게 이어지는 등로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콘크리트 인공수로를 통해 손쉽게 갈림사거리 안부를 통과한 후 수로 우측으로 오르니 제법 굵은 낙엽송 등로가 이어지고 잠시 후 말라있는 잡풀 등로가 나타난다.

우거졌다 말라있는 잡풀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굵은 밤나무 가지에 준희님의 이정판이 걸려있는 270.2봉에 도착을 해 사진과 추억 한장 남기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 역시 나뭇가지들로 인해 풍경이나 조망은 전혀 보이지 않고 진행 방향으로 제선충 훈증더미들만 수북히 보이기 시작한다.

 

이정판이 걸려있는 270.2봉을 지나 내려가니 다시 강한 찬바람이 불어 오후 시간인데도 얼굴이 얼어있고 손이 시려워 장갑을 벗을 엄두가 나질 않는데 등로 위에는 제법 굵은 아카시아 등로 주위로 많은 제선충 훈증더미들이 즐비하게 널려있다.

그곳을 지나 이제는 낙엽송 군락지가 나타나고 한동안 편안하게 전진하니 소나무와 잡목등로가 이어지더니 무명묘지 한기가 다시 나타나고 그곳을 지나 평이한 능선 등로를 따르니 비포장임도로 바뀌고 있다.

그 비포장임도 좌측으로는 밭경작지가 펼쳐져 있는데 그곳에는 그물망이 설치되어 있고 그렇게 한동안 더 그 비포장임도를 타고 빠르게 걸어 전진하니 갈림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지금까지 타고 온 비포장임도는 좌측으로 보내고 우측 능선 방향으로 오르니 도상 오리원재라 표기된 안부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긴다.

오리원(五里院, 오리원촌-五里院村)은 안동시 와룡면 감애리의 자연마을 중 한곳으로 지내리와 감애리에 걸쳐있는 자연마을로 마을 부근에 조선시대 행인에게 편리를 제공하던 숙박 편의시설인 원(院)이 있었으므로 마을이름이 되었다.

이 마을은 언덕을 중심으로 북쪽 5리와 남쪽 5리의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오리원 혹은 오리원촌이라 불렀으며 주로 남양홍씨(南陽洪氏)와 안동권씨(安東權氏)들이 세거하고 있고 현재 감애리에 속한 오리원에는 10집이 살고 있다.

그 오리원 마을에 있는 고개라서 오리원재로 불리게 된 듯 보이는데 실제 오리원재는 이 안부에서 좌측으로 조금 빗겨난 곳인 듯 한데 편의상 이곳을 오리원재라 한다.

 

나즈막한 안부인 오리원재를 지나 우측으로 잠시 걸어 오르니 다시 굵은 아카시아나무 위에 준희님이 이정판을 걸어 둔 300.8봉에 도착을 해 몇장의 사진과 추억을 남겨본다.

이곳 감애리는 경북 안동시 와룡면에 있는 리로서 영가지에는 전민(田民)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하였으며 감메촌(甘 村)이라 표기하였다.

구한말 북선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가마형국이므로 가마골, 가마촌(加麻村), 부곡(釜谷), 감이촌(甘爾村), 감애(甘厓)라 하였는데 1914년에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내감애동, 외감애동, 마암동과 동선면의 가야리와 지상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감애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와룡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에는 안동시군 통폐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감애리는 1, 2리로 구분되는데 가구수는 약 180호로 감애 1리에는 우무실과 미우리, 명잣, 한골, 오리원 등의 작은 마을이 있으며 감애 2리에는 웃골과 도래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이정판이 걸려있는 300.8봉 지나 다시 평이한 활엽수 낙엽이 깔려있는 등로를 따르니 멧돼지들이 몸을 문질러 죽어가는 낙엽송이 나타나고 약간의 잡목들을 헤치고 전진하니 퇴계로 시멘트 포장도로에 도착을 하는데 지도를 보니 여전히 감애리 마을이다.

시멘트 포장도로 건너 앞에 보이는 잡목 능선으로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드넓은 사과과수원이 내려다 보이고 그 뒤로 감애리 마을의 민가들이 내려다 보이는데 자연마을로는 어떤 이름인지 알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잠시 후 잘 관리되고 있는 묘지를 지나 밭경작지를 따라 진행하는데 우측 밭경작지 경계에는 그물망이 설치되어 있어 몇번인가 그 그물망에 걸려 넘어지며 통과하니 다시 동네 산책로 같은 소나무와 활엽수들이 혼재되어 있는 비포장임도 같은 등로가 열린다.

잠시 후 굵은 소나무 한그루와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이 걸려있는 무명봉 넘어 다시 나타나는 무명묘지 한기를 통과하니 고도차이가 전혀 없고 활엽수 낙엽이 수북히 깔려있는 넓은 비포장임도 같은 등로를 타고 다시 선답자의 산행 띠지가 걸려있는 곳에서 등로는 남동에서 남서로 휘어져 이어지고 있다.

잠시 더 관목의 활엽수 등로를 따르니 좌측으로 이사를 간 안동소주 공장 건물이 보이기 시작하고 곧이어 좌측의 공장 방향으로 철조망이 설치된 능선 등로가 나타난다.

 

안동소주 공장 방향으로 녹슨 철조망이 설치된 우측으로 능선 등로가 길게 이어지고 잠시 더 걸어가니 이제 등로 좌측으로는 거대한 편백나무가 철조망과 함께 공장 건물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잠시 더 걸어 전진하니 좌측으로 안동소주 건물 지나 어떻게 공장 내부로 진입을 해야하는지 걱정을 하며 걸어가니 짧은 구간 철조망이 사라지고 선답자들이 내려간 희미한 흔적이 보여 그곳을 통해 안동소주 공장 내로 진입하니 시멘트 포장도로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좌측 뒤로 보이는 이제는 사용되지 않는 안동소주 공장 건물을 사진에 담아 본다.

안동소주는 안동지방의 이름난 집에서 전수되어 오던 증류식 소주로 일반 백성들은 안동소주를 상처, 배앓이, 식욕부진, 소화불량 등에 구급처방으로 활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만드는 방법은 쌀, 보리, 조, 수수, 콩 등 다섯가지 곡물을 물에 불린 후 시루에 쪄서 여기에다 누룩을 섞어 10일 가량 발효시켜 진술을 만든다.

이 진술을 솥에 담고 그 위에 소주고리를 얹어 불을 지피면 진술이 증류되어 소주가 만들어지는데 목성산의 맑은 물이 좋아 이곳에서 생산되는 안동소주는 그 맛과 향이 뛰어나다.

안동소주는 가양주로 전승되어 오다 1920년 안동시에 공장을 세워 제비원소주라는 상표로 상품화 되었다가 1962년 주세법 개정으로 순곡소주 생산이 금지되어 생산이 중단되었다.

그뒤 1987년에 와서 안동소주 제조비법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 조옥화씨가 기능보유자로 인정되면서 1990년 민속주로 생산과 판매가 다시 이루어졌다.

 

이제 다른 장소로 이사를 한 안동소주 공장 건물을 뒤로 하고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 내려가니 정문 위병소가 나타나고 곧이어 자부라 정문이 나타나는데 문을 막아 놔 어렵게 넘어 통과하니 도로 좌측으로 안동소주일품홍보관 건물이 나타난다.

안동소주는 고려시대 이후 명문가의 가양주로 계승되었으며 접빈용이나 제수용으로 사용된 순수곡주로서 안동의 맑고 깨끗한 물과 옥토에서 수확된 양질의 쌀을 이용하여 전승되어 온 전통비법으로 빚어 낸 증류식 소주이며 45도의 높은 도수이지만 마신 뒤 담백하고 은은한 향취에다 감칠맛이 입안 가득히 퍼져 매우 개운한 뒷맛을 가진다.

증류식 소주로서 장기간 보관이 가능하며 오래 지날수록 풍미가 더욱 좋아지는 장점을 가진 민속주이다.

이 안동소주일품홍보관 앞으로는 35번 퇴계로 4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데 그 도로까지는 가지 않고 테리금산로라는 도로에서 우측의 식당 건물들 우측 뒤로 이어지는 비포장임도로 산행을 이어간다.

 

테리금산로 포장도로 좌측은 안동소주일품홍보관이 있고 우측으로는 안동와룡기사식당과 안동소주 및 안동간고등어 직판장이 있는 커다란 건물들이 보이는데 식사를 해도 충분할 것 같은 분위기이다.

사진 몇장 남기고 시간을 보니 이제 오후 2시 48분을 넘어가고 있어 안동시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옆지기에게 전화를 해 이상리고개에서 오후 5시 전후로 만나기로 약속하고 기사식당 건물 우측 뒤로 나 있는 비포장임도를 따라 산행을 더 이어가기로 한다.

 

기사식당과 간고등어와 안동소주 직판장이 있는 건물 우측 뒤로 보이는 비포장임도를 타고 산행을 이어가니 건물 뒷편에서 기르는 강아지 두마리가 울부짖고 달래며 파란 물탱크를 지나니 좌측으로 식당건물을 건설하면서 생긴 절개지가 보이는데 원래 그곳이 등로이지만 위험하기에 그 마루금 우측 아래로 보이는 밭경작지를 따라 능선으로 올라 원 마루금과 접속하여 우측으로 진행을 이어간다.

진주강씨 묘지를 지나 선답자의 빛바랜 산행 띠지가 걸려있는 갈림삼거리에서 좌측으로 꺽어 전진하니 갑자기 등로 우측으로 최근에 설치된 듯한 신상의 철망이 길게 설치되어 있는 비포장임도가 열린다.

이곳 태리는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에 있는 리로서 중앙선이 통과하며 여러 개의 못이 위치해 있다.

자연마을로는 서동골, 합강, 아방곡, 밤나무골, 금학곡 등이 있는데 서동골은 지형이 불을 밝히는 초롱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합강은 동쪽의 가구리와 북쪽의 오리원재에서 내려오는 냇물이 이곳에서 합류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아방곡은 예로부터 아름답고 경치가 아주 좋아서 붙은 이름으로 아방현이라고도 부르고 있고 밤나무골은 뒷산과 밭둑에 크고 작은 밤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며 금학곡은 조선 중기 때의 문신인 지헌 정사성 선생이 입향하여 망산(望山)에 올라 금(琴)을 켰더니 난데없이 한 쌍의 학(鶴)이 나타나 춤을 추었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철조망 등로를 타고 한동안 편안하게 걸어가니 등로 우측 아래로 많은 묘지들이 내려다 보이고 그 뒤 저 멀리 학가산이 보이고 천등산도 보이는데 이제 위치가 바뀌어 학가산이 좌측에 천등산이 앞 우측으로 위치가 바뀌어 보이고 그 우측으로 나지막하게 이어지는 문수지맥 산불기도 보이기 시작한다.

사진에 담고 조금 더 평이한 철망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이제 등로 좌측 바로 아래로 거대한 축사 건물들이 내려다 보이고 곧이어 몇기의 무명묘지들을 지나 축사 우측 옆 시멘트 포장도로로 내려서는데 메구네길로서 태리 메구네골마을이다.

매그내(매구내)는 경북 안동시 와룡면 태리의 자연마을 중 한곳으로 보티 안마에서 북서쪽에 있는 말바우 마을로 가는 길에 있는 고개이며 안동부의 주산 가운데 하나인 영남산의 맥(脈)이 이곳에 와서 맺었다고 하여 안동 명지(名地)는 논 둑 명산(名山)이다 라는 말이 구전된다.

또 임진왜란 때 조선에 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큰 인물이 날 것을 두려워하여 이곳의 혈(穴)을 끊었다는 이야기도 전하는 곳이기도 하다.

 

좌측에 축사 건물을 두고 매구네길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 내려가니 우측의 강아지 한마리가 이방인의 출현에 울부짖다가 가ㅏ이 가니 공포에 자기집으로 숨어 버리고 잠시 후 갈림삼거리에서 우측 능선으로 오르는 입구에 새끼를 낳아 기르고 있는 백구 한마리가 무섭게 달라 들지만 즈ㅜㄹ이 매달려있어 편안하게 걸어 오른다.

우거진 잡풀들이 말라있는 비포장임도를 지나 굵은 아카시아나무들이 보이는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다시 잡목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선답자의 산행 띠지가 걸려있는 곳에서 등로는 남서에서 북서 방향으로 바뀌어 이어진다.

다시 이어지는 소나무 등로를 타고 여유롭게 걸어가니 제선충 훈증더미가 있는 곳에서 등로는 다시 북서에서 남쪽으로 크게 꺽어 내려가고 잠시 더 빼곡하게 자라고 있는 소나무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관목의 소나무에 준희님의 이정판이 걸려있는 276.3봉에 도착을 한다.

 

봉우리 같지 않은 276.3봉 지나 계속 이어지는 소나무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갈림사거리 안부를 지나고 등로는 다시 좌측인 남동쪽으로 이어지는 소나무 등로를 따르는데 동네 주민이 홀로 추위를 이겨가며 산책을 즐기는 모습이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한동안 뚜렷한 등로를 따라 고도차이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빠르게 진행하니 지도에도 표기가 없는 시멘트 포장도로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살펴보니 갈림삼거리이다.

 

그 시멘트 포장도로를 통과하자마자 비포장임도가 이어지고 등로는 이제 남동에서 남쪽과 남서 방향으로 틀어 이어지는데 이 근처의 등로는 방향이 수시로 바뀌고 있어 주의가 필요해 보인다.

다시 넓은 비포장임도에 활엽수 낙엽이 수북히 깔려있는 직진의 등로를 타고 빠르게 걸어가니 등로 우측으로 많은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이 걸려있고 좌측으로도 뚜렷한 등로가 보여 지도를 확인해 보니 지리산 갈림삼거리인데 시간을 보니 오후 3시 21분을 지나고 있어 잠시 고민에 빠진다.

지리산까지 왕복 약 2.5 Km에 배낭 두고 빠르게 다녀온다고 해도 최소 40여분이 소요될 듯 싶은데 아직 남아 있는 거리가 부담이 돼 아쉽지만 지리산은 포기하고 옆지기와 약속한 오후 5시 전후로 이상리고개까지 진행하는데 목표를 가지고 걸어보지만 역시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지리산(枝里山, 334.8m)에 관한 자료는 보이지 않는데 다만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태리에 잠시 그 이름이 등장 할 뿐이다.

태리는 마을 주변으로 낮은 구릉지가 형성되어 있고 마을 앞으로는 부드럽고 습기가 풍부한 모래흙으로 이루어진 논밭이 있으며 서쪽에 지리산(枝里山)이 솟아 있다는 내용으로 아마 홀로 내려왔으면 조금 늦더라도 잠시 들려 사진 한장 남기고 진행했을 것이지만 오늘은 옆지기와 안동에서 즐거운 저녁시간이 약속되어 있어 아쉬움을 달래본다.

 

지리산 갈림삼거리에서 등로는 다시 남서 방향에서 북서 방향으로 크게 틀어 진행되고 잠시 후 약간의 잡목들이 보이는 무명안부 지나 다시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많은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가 나뭇가지에 걸려있다.

잠시 후 잘 관리되고 있는 묘지를 지나 능선 등로를 타고 잠시 더 전진하니 폭이 약 5미터쯤 되는 긴 방화선이 나타나고 사진에 담고 통과하니 등로는 다시 서쪽으로 바뀌었다가 잠시 후 북쪽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어 진행하는 산객에게도 어지러울 지경이다.

한동안 참나무 사이로 나 있는 뚜렷한 등로를 따르니 다시 약간의 잡목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조금 더 전진하니 비실이부부님 산행 띠지가 걸려있는 무명안부에 도착을 하는데 좌측의 와룡면 이상리와 우측의 태리를 이어주는 경계 안부이다.

 

그 안부 지나 다시 이어지는 아카시아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잘 관리되고 있는 무명묘지 한기를 만나고 그곳을 지나 조금 더 전진하니 또 다시 넓은 방화선이 나타나는데 그곳에서 좌측을 보니 저 멀리 2중으로 펼쳐진 멋진 산줄기가 보이는데 지도를 확인해 보니 위치가 바뀌어 처음에 잘 몰랐던 학가산이 정중앙부로 솟아 있고 그 좌측으로 상산과 앞으로 천등산 그리고 우측으로 조운산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데 지금까지 봐 왔던 모습과 위치가 달라져 처음에는 학가산이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다른 지명과 이름을 찾아 보니 찾을 수 없다.

역시 풍경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달리 보임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방화선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다 이제는 등로 우측을 보니 좁은 들판 사이로 다시 축사 건물이 내려다 보이고 사진에 담고 다시 출발하니 잡풀들이 말라있는 등로 지나 좌측으로 내려가고 곧이어 시멘트 포장도로와 만나는데 지도를 확인해 보니 지도에도 표기가 없는 이상리의 고갯마루이다.

도로 좌측으로 이상리의 좁은 들판과 저 멀리 나즈막하게 이어지는 무명 산줄기를 사진에 담고 도로 건너 비포장임도로 오르니 우거졌다 말라있는 잡풀등로가 잠시 이어지고 있다.

 

조심하며 우거졌다 말라있는 오르막 잡풀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오르니 갈림삼거리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묵은 비포장임도 같은 등로를 우측으로 보내고 좌측의 잡목들과 제선충 훈증더미가 보이는 좌측 방향으로 오르니 언덕 넘어 무명봉이 나타난다.

계속 이어지는 묘지지대를 따라 조금은 빠르게 걸어가니 잠시 넓은 비포장임도가 열리고 곧이어 또 다시 묘지들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잠시 후 등로는 좌측으로 우회하며 내려가고 곧이어 비포장임도를 따라 우측으로 내려가니 서주길 2차선 포장도로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진행 방향을 살펴보니 시멘트 포장도로가 보인다.

 

서주길 2차선 포장도로 건너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짧게 오르니 작은 밭경작지가 나타나고 그 끝자락에 설치된 그물망 넘어 능선으로 오르니 리끼다 소나무 사이로 뚜렷한 비포장임도 같은 등로가 완만하게 오르고 있다.

잠시 후 시멘트 수로를 건너 계속 걸어 오르니 간벌된 고사목 가지에 금곡님 산행 띠지 한장이 걸려있고 다시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굵은 낙엽송 군락지가 펼쳐져 있다.

잠시 후 우거졌다 말라있는 사초 등로를 타고 조금 더 걸어가니 우측으로 낙엽송 군락지 지나 주하리 방향의 축사 건물이 내려다 보이고 진행 방향으로는 인공수로가 보여 그 수로를 따라 산행을 이어간다.

 

첫번째 인공수로를 따라 통과한 후 나타나는 말라있는 잡풀 절개지를 따라 오르니 넓은 방화선 같은 등로가 나타나고 그 등로 좌우측으로 굵은 낙엽송 군락지가 길게 이어지고 있다.

잠시 후 굵은 참나무에 빛바랜 선답자의 산행 띠지가 걸려있는 지점에서 등로는 다시 우측인 북서 방향으로 이어지고 그곳을 지나자마자 보이지 않던 잡목들이 발목을 잡기 시작한다.

다시 나타나는 관목의 참나무 등로를 타고 조금 더 전진하니 중앙선 철도가 지나는 지하 주하굴이 나타나고 다시 두번째 인공수로가 보이는데 그 수로를 타고 수로 아래 무명안부를 통과한다.

 

두번째 인공수로를 통과하며 좌측을 보니 드넓은 밭경작지와 논경작지 지나 민가가 내려다 보이고 사진에 담고 인공수로를 넘어가니 우측으로 묘지를 조성하려는 평장들이 보인다.

그 묘지지대를 지나니 경주김공 묘지 지나 짧게 펼쳐진 빛바랜 억새 능선을 지나니 등로는 다시 활엽수 낙엽 능선이 이어지고 잠시 더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굵은 참나무 위에 준희님의 이정판이 걸려있는 249.2봉에 도착을 한다.

 

그 봉우리 지나 우측인 북서 방향으로 진행하니 관목의 소나무와 활엽수가 혼재되어 있는 등로가 이어지고 관목의 참나무 두그루가 서 있는 무명봉을 넘는다.

잠시 후 무명안부 지나 말라있는 잡풀 등로를 따르니 다시 관목의 아카시아나무 등로가 이어지고 다시 나타나는 무명안부를 통과한 후 조금 더 걸어 오르니 잡풀이 무성했다 말라있는 무명묘지 2기가 보이는 곳에서 등로는 다시 좌측인 남서 방향으로 크게 꺽어 내려가며 이어지고 있다.

방향을 바꿔 남서 방향으로 내려가니 지독한 아카시아 가시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어 조심스럽게 통과하고 그렇게 잠시 더 걸어 진행하다 등로 우측 앞 가시잡목 위를 살펴보니 서쪽으로 좌측 앞으로 상산 지나 우측 중앙 뒤로 학가산 그리고 우측으로 천등산과 조운산 줄기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어 잠시 몇장의 사진에 담아 본다.

 

지독한 가시잡목 사이로 나 있는 좁은 등로를 타고 내려가며 우측으로 문수지맥의 학가산과 조운산 그리고 천등산과 상산을 확인하고 사진에 담은 후 계속 아카시아나무를 헤치며 조금 더 내려가니 어느 순간 가시잡목이 사라지고 굵은 아카시아 나무 등로가 깨끗하게 이어지고 있다.

빼곡하게 등로를 채우고 있는 관목의 아카시아 등로를 따르니 오랫만에 만나는 부뜰이님 산행 띠지가 반갑고 다시 활엽수 낙엽이 깔려있는 평이한 등로를 따르니 다시 제선충 훈증더미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잠시 후 잡풀들과 말라있는 사초 등로를 지나 조금 더 전진하니 의미를 알 수 없는 삼각점 지나 발목까지 빠지는 활엽수 낙엽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오랫만에 만나는 하얀색 신경수님 산행 띠지가 걸려있는 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무명봉 넘어 무명묘지를 통과하고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관목의 아카시아와 참나무 등로에 활엽수 낙엽들이 깔려있고 그 주위로는 제선충 훈증더미들도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무명안부로 내려갔다 올라 낙엽 깔린 무명봉도 지나고 약간의 잡목 등로를 통과하니 또 다른 무명봉이 기다리는데 이곳 등로 역시 굵은 아카시아 능선 등로가 길게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 전진하니 422건설부라는 오래된 삼각점이 박혀있고 준희님의 이정판이 걸려있는 269.7 삼각점봉에 도착을 해 사진과 추억 한장 남기고 옆지기에게 전화를 해 이상리고개에서 약속 시간에 만나자고 연락하고 곧바로 출발한다.

 

마지막 삼각점봉을 지나 안동권공과 경주이공 부부묘지를 차례로 통과하니 뚜렷한 내리막 등로가 길게 이어지고 다시 제선충 훈증더미가 있는 곳에서 약간의 잡목들이 보이는 희미한 등로를 타고 어렵게 전진하니 금새 산행 날머리인 924번 이하오산로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이상리에 있는 고개에 도착을 해 용암지맥 첫날 산행을 마무리하고 시간 맞춰 도착한 옆지기와 함께 배낭 정리하고 곧바로 안동의 구시장 근처의 예약한 꿈의궁전이란 모텔로 향하는데 정확히 저녁 5시 4분을 지나고 있어 너무 늦지 않게 잘 도착을 한다.

이상리는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에 있는 리로서 중앙선이 마을을 관통하며 여러 개의 못이 위치한다.

자연마을로는 중리, 농막앞들, 도가못, 샘골, 황새골 등이 있는데 중리는 중앙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고 농막앞들은 처음에는광산 김(金)씨가 입주하여 살았으며 이 후 진성 이(李)씨가 입주하여 세거하다가 농막(農幕)으로 주었다 하여 생겨난 지명이다.

도가못은 도가(都家)에서 수리용으로쓰기 위해 조성한 못이 있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고 샘골은 좋은 샘이있어 붙은 이름으로 한샘골이라고도 하였으며 황새골은 옛날 송림(松林)이 울창하고 산세가 아름다워 황새가 많이 깃들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옆지기와 안동으로 내려오며 오늘은 안동에서 가장 유명한 찜닭을 먹기로 했기에 찜닭거리로 유명한 구시장 근처의 모텔을 예약하다 보니 오래되어 약간의 냄새가 나지만 소맥 한잔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모텔에 도착해 샤워 후 가까운 안동의 구시장 내 찜닭거리로 들어가 장금이식당에서 찜닭 하나에 소맥 몇잔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나니 오랫만에 산행과 여행의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시간이 되었다.

낙동강 상류에 위치한 이곳 안동은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이미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는데 삼한시대에는 진한에 속하였으며 삼국사(三國史)에 의하면 B.C 57년 염상도사(念尙道士)가 길지(吉地)를 찾아 이곳에 와 처음으로 창녕국(昌寧國)이라는 부족국가를 세웠다고 전한다.

신라때는 고타야군(古陀耶郡)으로 되었다가 고구려에 인접한 관계로 한때는 고구려에 속하여 굴화현(屈火縣)으로 불리었으며 진흥왕때 부터는 계속 신라에 속하게 되었다.경덕왕(757년)때 군현제도(郡縣制度)의 개혁으로 고창군(古昌郡)으로 개칭되었다가 그 후 일계군(一界郡), 지평군(地平郡), 화산군(花山郡), 고령군(古寧郡), 고장군(古藏郡), 석릉군(石陵郡) 등으로 그 명칭이 변경되기도 했다.

고려 건국초 태조 왕건(王建)과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군내(郡內) 병산(甁山)에서 싸울 때 고을 성주인 김선평(金宣平) 장길(張吉) 권행(權幸)이 고을민을 이끌고 태조를 도와 그 공이 컸으므로 부(府)로 승격하고 안동으로 고쳤다(태조 13년:930년).

그 후 영가군(永嘉郡)으로 고쳤다가 성종 14년(995년)에 길주(吉州)로 하였다가 현종 3년(1012년) 안무사를 두었다가 동 21년(1030년)에 다시 안동부(安東府)로 하였다.

명종 27년(1197년)에 남적(南賊) 김삼(金三) 효심(孝心) 등이 주군(州郡)을 겁탈 노략하니 차사(差使)를 보내어 평정하였는데 부(府)가 공이 있다하여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고 신종 7년(1204년) 동경(東京:경주)의 야별초 (夜別抄) 패좌(悖佐) 등의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자 이번에도 이를 진압 하는데 공이 있었음으로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하였다.

충렬왕 34년(1308년) 다시 복주목(福州牧)으로 고쳤다가 공민왕 10년(1361년)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피하여 왕이 남쪽으로 행차하여 이 고장에 머무를 때 고을백성이 충성을 다해 왕을 봉공하였으므로 다시 대도호부로 승격하고 인근 17개 군현(郡縣)을 관할하게 했다. 우왕 9년(1383년)에는 안동도(安東道)로 개칭하고 원수(元帥)겸 부사(府使)를 두었다가 동 14년(1388년)부사제(府使制)로 환원하였다.

914년 예안군(禮安郡)을 병합 19개 면으로 편성하고,1931년에는 안동면을 안동읍으로 승격시킴과 동시 일부 면을 통합과 폐합함으로써 1읍 15면 218동으로 개편되었다.

1962년에 안동읍을 그대로 시(市)로 승격하여 명칭을 신안동시(新安東市)라고 하였으나 시명(市名)에 대한 시민들의 의사에 따라 개칭하여 1963년 1월 1일을 기하여 안동시(安東市)가 되었다.

1973년에 풍산면(豊山面)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74년에 안동댐으로 월곡면(月谷面)이 폐지되었다.

1995년에 안동시(安東市)와 안동군(安東郡)이 통합하여 통합안동시(統合安東市)가 되어 1읍 13면 18동으로 되었고 행정구역통·폐합에 따라 1997년 7월 1일에 5개 동이 폐지되어 1읍 13면 13동으로 되었고 1998. 12. 1에 2차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3개 동이 폐지되어 1읍 13면 10동으로 되어 현재에 이른다.

 

 

추천 받은 장금이 식당에서 주문한 중자 찜닭인데 옆지기와 둘이 공기밥 하나와 함께 먹다 남기고 나온 찜닭으로 서울에서 먹었던 맛보다는 좋았다는 생각이다.

안동 구시장에는 1970년대부터 생닭이나 튀김 통닭을 팔던 통닭골목이 있었으나 양념치킨이 유행하면서 닭 골목 상인들은 자구책을 찾아야했고 그때 생긴 퓨전요리가 바로 안동찜닭이다.

갈비찜 양념에 당면과 각종 채소를 넣어 물기가 약간 있게 조리한 양념찜닭이 매콤달콤한 맛과 저렴한 가격 및 푸짐한 양으로 전국에 입소문이 나면서 통닭골목은 찜닭골목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현재 이곳은 30여 개 점포가 밀집해 주말이면 약 2만 명의 관광객이 찾고 있다.

안동찜닭이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음식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조리서인 수운잡방과 음식디미방을 보면 안동지역에서 오래전부터 안동찜닭과 비슷한 조리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동찜닭은 풍부한 단백질과 다양한 채소에 함유된 비타민 등 각종 영양소가 어우러져 영양학적으로도 좋은 음식이다.

안동찜닭은 경상북도 안동에서 유래한 음식으로 삶은 닭에 소스 온갖 채소와 양념을 섞어 졸인 요리로서 안동찜닭의 유래에 관한 설은 다양하다.

조선시대 안동의 부촌인 안(內)동네에서 특별한 날 해먹던 닭찜을 바깥 동네 사람들이 보고 안동네찜닭이라 부르기 시작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고 1980년대 중반 안동 구시장 닭 골목에서 단골손님들이 닭볶음탕에 이런저런 재료를 넣어 달라고 요청하면서 재료가 더해져 지금의 안동찜닭으로 변모했다는 설이 있다.

가장 설득력 있는 설은 서양식 프라이드 치킨점의 확장에 위기를 느낀 안동 구시장 닭 골목의 상인들이 그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운 맛을 찾던 중 생긴 퓨전요리가 안동찜닭이라는 것이다.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은데 ① 닭은 한입 크기로 손질하여 데쳐낸 후 물기를 뺀다. ② 감자와 당근은 4~5등분 하여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주고 양파도 비슷한 크기로 썬다. ③ 마른 홍고추(또는 청양고추), 통마늘, 양파, 생강을 끓여 육수를 만들고 당면은 미리 물에 담가 불려둔다. ④ 데친 닭과 육수, 소스(간장, 물엿, 설탕, 후추 등)를 넣고 졸이다가 표고, 당근, 감자, 고추 등의 채소를 넣고 센 불에서 10분 정도 더 졸인다. ⑤ 당근과 감자가 거의 익으면 밀가루를 약간 넣고 시금치나 오이, 파 등을 얹어 휘저어준다. ⑥ 불려두었던 당면을 넣고 뚜껑을 닫고 뜸을 들이고, 접시에 담을 때 깨를 뿌린다.

안동찜닭은 고온에서 조리하므로 기름기가 적고 담백하며 닭고기의 맛과 매콤한 양념의 조화를 혀끝에서 즐길 수 있는 음식으로 갖가지 재료를 넣어 다양한 맛을 내기 때문에 누구든지 즐길 수 있는 음식이다.

또한 닭에 풍부한 단백질과 다양한 채소에 함유된 비타민 등 각종 영양소가 어우러져 영양학적으로도 좋은 음식이다.

 

식당에서 옆지기와 함께 기분 좋게 안동찜닭과 소맥 몇잔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조금 더 마시고 싶었지만 내일을 위해 모텔로 뒤돌아 오는데 바람이 얼마나 강하게 불고 기온이 급강하 했는지 짧은 시간동안 한기가 돌며 내일 산행이 걱정되는 시간이었다.

그래도 추운 날씨에 이상리고개까지 너무 늦지 않게 일찍 도착을 하고 옆지기는 안동시에서 좋아하는 볼링을 치고 시내 구경을 한 후 카페에서 커피까지 즐기며 만족한 시간이었기에 그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며 내일을 기대해 본 시간이었다.

오랫만에 옆지기와 함께한 안동에서의 시간은 코로나19 사태로 함께하기 쉽지 않은 산행과 여행이었기에 더욱 값진 시간으로 추억되고 내일 시간되면 조금 더 안동을 알고 귀경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모든 것은 순전히 옆지기의 의견에 따라 결정될 것이기에 여행의 마지막은 내일 결정하기로 한다.

내일 하루는 오늘보다 더 추워 올 들어 가장 낮은 온도라는데 조금은 걱정이지만 거리가 짧으니 여유롭게 진행하면 늦지 않게 마무리하고 여유를 찾을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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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갑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