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지 : 경기도 남양주시와 구리시 및 서울특별시의 수락지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 2017년 12월 25일 (월요일 성탄절 휴일 당일산행)
산행날씨 : 맑았지만 바람불어 추웠고 약간의 박무가 있었던 산행날씨
산행온도 : 영하 07도에서 영상 04도
산행인원 : 총 2명 (칠갑산과 산친구 공작산)
산행코스 : 덕릉고개(덕릉교장, 2차선 포장도로)-나무계단-덕릉고개 위 이정표(불암산정상, 수락산정상, 남양주시 별내)-안전목책-나무계단-불암산 둘레길(하루길) 안내목-410.5 암봉 우회-절고개-일출-이정표(불암산정상 0.74 Km, 덕릉고개 0.98 Km, 식송마을 2.04 Km)-안전목책과 나무계단-전망바위-폭포약수터 갈림삼거리-사각탁자 쉼터-석장봉(다람쥐광장)-계단-쥐바위-불암산(509.7 미터, 정상석과 삼각점, 태극기봉)-계단-이정표(깔딱고개 0.15 Km, 정상 0.3 Km)-깔딱고개 이정표(헬기장과 공릉동, 불암산정상, 공원관리소, 남양주와 불암동)-불암산성 설명판-헬기장(421.6미터) 이정표(화랑대역 5.46 Km, 불암산정상 0.94 Km)-이정표(천병약수터, 불암산정상, 공릉동방향 3.5 Km)-천보사 하산길 이정표(중계동, 불암산정상, 천보사 하산길 0.34 Km)-안전철봉과 로프 바위구간-학도암 갈림 이정표(화랑대역 4.6 Km, 불암산정상 1.8 Km, 학도암 0.4 Km)-육각정자와 운동시설-중계본동 갈림 이정표(화랑대역 4.3 Km, 불암산정상 2.1 Km, 중계본동 1.4 Km)-별내동원훈련장 갈림 이정표(효성아파트 3.0 Km, 불암산정상 2.2 Km, 별내동원훈련장 1.0 Km, 중계본동 1.4 Km)-노원고개 이정표(태릉백세길)-녹색철망-삼육대 갈림 이정표(삼육대 제명호, 불암산정상)-삼육대 우회등로-비포장 임도-이정표(불암산맨발길 삼육대갈림길 800 m)-삼육대 제명호-삼육대교정-삼육대 신학관-한국삼육중고등학교-삼육대학교 정문-화랑로 6차선 포장도로-삼육대학교 버스 정류장-담터고개 버스정류장-담터고개(담터사거리)-담터고개추어탕-천성교회-담터길32번길-대흥수출포장과 한양기업-비포장 임도-절개지 능선-갈매교회-CJ 대한통운-푸드앤숍-신영지웰-KCC창호와 육대장 갈매점-경춘선 갈매역-갈매길 포장도로-상신문구센터-구리농협-가고파식당(아점식사)-미셀가방-아시아전선-화로정숯불갈비-서울특별시 중랑구 도로표지판-새우개고개(47번 4차선 포장도로)-SK 주유소-배과수원-능선진입-군부대 삼각점(?)-135.4 삼각점봉-구리 둘레길 이정표(갈매마을길과 구리둘레길2코스 갈매천입구, 구리둘레길1코스 망우산입구)-동물이동통로(세종포천간고속도로, 구리포천간 구간)-안전철망과 시멘트 포장도로-구리 둘레길 이정표(갈매마을길과 구리둘레길2코스 갈매천입구 480 m, 구리둘레길1코스 망우산입구 2.73 Km)-능선진입-사각정자와 우물-능선치기-171.4 삼각점봉-구리둘레길 이정표(딸기원입구 2.4 Km, 갈매동 1.5 Km)-동구릉 철조망-구능산(177.9미터, 군부대통신탑과 초소, 빗돌)-통나무 벤취쉼터-군부대 철조망-안전목책과 나무계단-구리둘레길 이정표(1코스 망우산입구 1.25 Km, 2코스 구릉산 등산로 삼거리 1.25 Km)-충군육교(북부간선도로 위 육교)-국군구리병원-군부대 철조망-소나무 군락지-군부대 망루-151.3봉 구리둘레길 이정표(딸기원입구 0.62 Km, 갈매동 3.3 Km, 구리시국민체육센터 1.5 Km)-131.7봉 벤취쉼터와 이정표(교문사거리 1.6 Km, 구리둘레길2코스 구릉산 등산로 삼거리 2.2 Km, 구리둘레길1코스 관룡탑 3.75 Km)-전주김공과 밀양박씨 합장묘-이정표(구리둘레길2코스 구릉산 등산로 삼거리 2.3 Km, 구리둘레길1코스 관룡탑 3.45 Km)-묘지지대-삼각점(식별불가)-2차선 포장도로-망우리고개 이정표(구리둘레길2코스 구릉산 등산로 삼거리 2.5 Km, 구리둘레길1코스 관룡탑 3.25 Km)-육교(6번 6차선 포장도로 통과)-중랑둘레길 이정표(망우산 삼거리 북카페 2 Km, 망우저류조공원 0.2 Km, 중랑캠핑숲 1.8 Km)-중랑둘레길와 등산로 안내도-서울시립공원묘지-박인환묘소 갈림 이정표(사잇길입구 130 m, 박인환 묘소 180 m)-망우리공원 인문학길 사잇길-1차선 포장도로-이정표(사잇길 분기점1 1.3 Km, 관리사무소 220 m, 이태원합장비 40 m)-공동묘지 능선진입-조망처-산불감시초소(258 무명봉)-254.2봉-전망데크-안창호묘터 안내판-이인성묘터 안내판-안부 이정표(망우전망대 290 m, 구리 한강 전망대 85 m, 아카시아와 타쿠미묘소 120 m, 사잇길 생명의 숲 85 m)-망우 전망대 300 m 안내판-망우산 3보루-망우산(282봉, 스피커 깃대와 돌탑)-구리둘레길 안부 이정표(망우산2보루 0.15 Km, 망우산 3보루 0.08 Km)-망우산2보루입구-무명묘지1-망우리의 유래 설명판과 구리둘레길 이정표(사각정 0.6 Km, 망우산3보루 0.2 Km)-281.3 삼각점과 전망데크-망우산 2보루-구리둘레길 망우산묘역(1차선 포장도로와 육각정자)-구리둘레길 아차산생태문화길-아차산일대보루군 설명판-동화천 약수터 이정표(순환로, 한다리길 한다리마을 2.7 Km, 보루길 망우산 2보루 0.6 Km, 보루길 관룡탑 0.8 Km, 동화천약수터 0.7 Km)-망우산1보루 화살표-이정표(동화천약수터 520 m, 관룡탑 1.03 Km, 동락정 170 m)-산불감시초소(257미터)-265.3봉(소나무와 관목들)-264 무명봉(인식불가 삼각점)-망우산1보루입구-279.5 삼각점봉 공터(삼각점 망실)-산악기상관측장비-안부 이정표-중랑 사가정시장 이정판-사적 455호 보루 연결로(아차산산성)-이정표(망우리 순환로 850 m, 용마산5보루 395 m, 시를 닮은 약수터 230 m)-깔딱고개(570계단)-경관조망장소안내판-안전목책-아차산일대 보루군 분포도-용마산 5보루-316 헬기장 구리둘레길 이정표(용마산 헬기장 0.3 Km, 깔딱고개 0.12 Km)-319 무명봉 벤취쉼터1-서울시 잠실 조망-용마산 갈림 헬기장(318.5 미터)-이정표(용마산정상 400 m와 아차산4보루 570 m, 용마산 5보루 67 m와 망우공원묘지 관리사무소 3200 m)-안부-320 납작묘지-용마산제3헬기장과 사적455호 용마산 4보루(고구려)-돌담-전망바위-용마산체력장-용마산(348.6미터, 정상석과 1등삼각점, 측량기준점)-용마산갈림 삼거리 복귀(H.3지점 안내판)-나무계단-서울둘레길 안내판과 이정표(아차산 4보루 0.24 Km와 서울둘레길 광나루역 3.58 Km, 구리 둘레길 용마산 5보루 0.58 Km와 서울둘레길 양원역 5.69 Km, 긴고랑 중곡사거리 1.31 Km)-27번 송전탑-안전목책과 나무계단-서울둘레길 이정표(광나루역 3.51 Km, 양원역 5.76 Km)-아차산 4보루 건물지 공터-아차산(295.7 미터, 아차산 고구려 역사길 안내판)-아차산 3보루-명품소나무 조망처-266.4 봉(아차산 5보루 돌탑)-서울둘레길 이정표(광나루역 2.33 Km, 양원역 6.94 Km, 대성암 범굴사 0.42 Km, 아차산해맞이광장 0.16 Km, 전망이 좋은 숲길 아차산능선)-벤취쉼터와 간이매점-아차산 1보루-해맞이광장-이정표-나무계단-안부 이정표(아차산성 328 m, 해맞이광장 415 m)-아차산성(202.8 미터)-이정표(생태공원 485 m, 아차산성길, 아차산정상 1650 m와 용마산 정상 3000 m)-관리사무소 갈림삼거리(좌)-안전목책과 로프구간-벤취쉼터와 소나무등로-아차산종합안내도-아차산 이정석-아차산공원입구-아차산생태공원 자생식물원-서울광장초등학교-광장중학교-광나루역(43번 8차선 포장도로)-산행종료
산행거리 : 약 22.81 Km (스마트 폰의 GPX 기준)
산행시간 : 산친구와 오손도손 이야기 나누며 꾸준하게 진행하여 07시간 22분 (07시 22분부터 14시 44분까지) :
산행트랙 :
교통편 : 갈때 - 지하철 2호선 봉천역에서 탑승 후 사당역에서 4호선으로 환승하여 당고개역까지 이동
당고개역에서 산친구 공작산을 만나 10-5번 버스편으로 덕릉고개까지 이동
올때 - 광나루역에서 9호선 지하철 탑승 후 군자에서 7호선 건대입구에서 2호선으로 환승 후 봉천역까지 이동
한북수락지맥이란 ???
한북수락지맥이란 한북정맥이 운악산과 죽엽산을 거쳐 무림리고개로 내려와 잠시 남진하다가 무명봉에서 한북정맥은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축석령으로 이어지고 또 한줄기는 동남쪽으로 뻗어 용암산(477봉), 깃대봉(288봉), 수락산(641봉), 불암산(510봉), 망우산, 아차산을 거쳐 한강에서 그 맥을 다하는 산줄기를 말하며 도상거리는 약 38 Km이고 실제 거리로는 약 42 Km의 마루금을 말한다.
첫 구간을 함께한 산친구와 오랫만에 발 맞춰 도심속 사라진 마루금을 걸으며 우정을 나눴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후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단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지난 2015년 2월 중순에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던 등로를 타고 어렵게 용암산 정상을 들렸다 내려 와 개활지의 동북아산 소나무유전자 보전원이란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 감시원에게 발각되어 일장 훈시를 들으며 참으로 어렵게 진행을 하여 수락산을 넘고 불암산 오르기 직전 덕릉고개에서 산행을 마친 후 기약없이 세월만 보내다 이번 성탄절 날 첫 구간을 함께 걸었던 산친구와 연락해 다시 한번 더 발을 맞춰 걸어 보자는데 합의를 해 본다.
이 산객은 산줄기 종주에 빠져 있고 그 산친구는 조금 일찍 산줄기 종주에 발을 들였다 이제는 거의 뺀 상태이다 보니 함께 발 맞추기가 쉽지 않았는데 서울이고 산행의 난이도도 그리 높지 않기에 즐기면서 걸어 본 시간들이었다.
앞으로 마음이 변해 함께 산에 들 기회가 자주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진행을 해 보지만 역시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보니 출입제한과 개발로 인해 바뀐 산줄기가 많아 원 마루금을 따라 진행하는 것은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산행 초반의 불암산을 넘어선 이후부터는 제대로 된 마루금 찾아 진행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많이 달라져 있고 워낙 많은 등산객들이 찾다 보니 등로는 반질거려 빛이 나는 지경이었다.
그래도 그 사라진 마루금을 찾아 이렇게나마 글로 남길 수 있어 다음에 다시 한번 찾게 될 때 조금이나마 참고가 될 수 있기를 바래보며 오늘 하루도 무탈한 산행을 빌어 보는 시간이다.
당고개역에서 택시 기사로 인해 약간의 황당한 시간을 보냈지만 금새 잊어 버리고 대중교통인 10-5번 버스를 이용해 무사히 오늘 산행 들머리인 덕릉교정 앞에서 하차 후 간단히 산행 준비를 하여 출발하는 시간이 아침 7시 20여분을 지나고 있다.
산행을 시작하자 마자 길게 이어지는 나무계단을 탄 후 다시 가파른 오르막 된비알을 따라 오르니 지도상 410.5 암봉이 나타나고 그곳에도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어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좌측 정상 등로를 따라 조금 더 걸어 진행하니 등로 좌측 저 멀리 천마지맥의 백봉산과 고래산 부근의 동쪽 하늘에서 붉은 태양이 솟아 오르기 시작하고 그 황홀한 풍경에 잠시 발걸음 멈추고 많은 사진을 담아 본다.
그 좌측 위로는 천마산 줄기가 확연하고 그 우측 아래쪽으로는 예봉과 예빈산을 지나 검단지맥의 끝자락을 이루고 있는 검단 용마산도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한다.
모두 걸어 봤던 산줄기들이기에 가슴속 깊이 숨겨 놨던 옛날 추억을 꺼내 다시 한번 그 시절을 되돌아 보는 시간도 가져 보는데 벌써 오래된 기억처럼 저 멀리 멀어져 가 버렸다.
아침 7시에 4호선 지하철의 마지막 역인 당고개 역에서 친구를 만나 덕릉고개로 이동하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데 버스 배차 시간이 긴지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아 버스정류장 옆에 대기하고 있는 택시로 가 탑승을 시도하니 덕릉고개는 가지 않는다며 거절을 당한다.
아직도 이런 서비스를 하면서 매년 택시비를 올려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는 택시기사와 회사들을 보며 그 누가 이들 택시 회사와 기사들에게 동조를 해 줄 수 있을지 참으로 한심한 택시 기사들이다.
추위에 떨며 조금 더 기다리니 드디어 10-5번 버스가 회차하여 들어 오고 어렵게 버스를 이용해 덕릉교정 앞에 내리니 찬바람이 불며 몸과 마음을 움츠리게 만들고 있다.
이곳 덕릉고개는 노원구 상계동에서 남양주시 별내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의 묘소인 덕릉이 고개 동쪽에 있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며 덕릉현이라고도 한다.
덕릉으로 부르게 된 설화를 보면 선조는 생부인 덕흥대원군이 세상을 떠나자 묘소를 능으로 승격시키고 싶어서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모두 불가하다고 대답하였다.
선조는 정식으로 능 승격은 단념하고 한 가지 방법을 꾀하였는데 어느 날 동대문 밖 시탄상인(장작과 숯을 파는 장삿꾼)을 불러서 너는 가게에 있다가 지나가는 시탄상인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면 덕흥대원군의 능을 지나왔다고 하면 후히 대접하고 나무와 숯을 고가로 사들여라 하였다.
명을 받은 시탄상인이 그대로 이행하니 이 소문이 퍼져 5강의 시탄상인들까지 일부러 동대문 쪽으로 찾아와 덕릉을 지나왔다고 하였고 이 뒤부터 저절로 덕릉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해방 전후까지 도당집이 있어서 나라와 마을의 무사태평을 산신에게 빌었던 곳이어서 당고개라고도 불리는데 현재의 당고개는 덕릉고개 아래쪽인 노원구 지하철 4호선 종점이 있는 곳을 당고개라 부르고 있다.
신구대조에 따르면 상계동이 노원면 간촌리를 중심으로 수락산 동쪽에 위치한 별비면 덕동리를 합한 것으로 보아 덕동리라는 지명도 덕릉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오래 전 산행을 시작하면서 아무것도 모르고 속도전을 펼치며 강북 5산 종주라는 이름으로 많이도 지나다녔고 그 이후에도 불암산과 수락산 산행을 위해 수시로 들렸던 곳인데 이제는 이렇게 산줄기 종주 산행을 위해서만 들리는 고개가 되었으니 언제 다시 마음 편히 들릴 수 있을지 아쉽기만 하다.
길게 이어지는 나무계단을 타고 절개지 능선으로 오르니 덕릉고개라는 이정표가 반갑고 이제부터는 얼어 있는 오르막 등로를 따라 가파르게 올라 본다.
함께하는 산친구인 공작산이 워낙 준족이다 보니 열심히 따라가도 힘에 부치고 조금은 발걸음이 무거워질 쯤 등로 우측 잡목 사이로 도봉구쪽 거대한 아파트 단지를 지나 북한산이 정상부에 하얀 눈이불을 뒤집어 쓴채 너무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북한산을 삼각산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삼각점을 이루고 있는 백운대와 인수봉 그리고 만경대(국망봉)의 모습이 제대로 잡히고 있어 잠시 발걸음 멈추고 사진에 담아 본다.
참으로 많이도 올랐던 북한산이였는데 요즈음은 그곳으로 발길 한번 주기가 이렇게 힘이 드니 언제나 다시 마음 편히 들릴 수 있을지 아쉽기만 하다.
북한산은 서울 특별시와 경기도 고양시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837미터이고 주봉인 백운대를 중심으로 동북 쪽의 인수봉(해발 803미터)과 동남쪽의 만경대(해발 800미터)가 삼각을 이루고 있어 삼각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세 봉우리를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상장봉, 남쪽으로는 석가봉과 보현봉 및 문수봉 등이 있고 봉우리들은 한결같이 경사도가 가파른 험한 암벽으로 되어 있으며 대체로 서쪽의 경사도가 더 심하다.
북한산은 산 모양이 웅장하고 아름다워 예로부터 서울의 진산으로 귀중하게 여겨져 왔으며 특히 조선 시대에는 금강산과 묘향산 및 지리산 그리고 백두산과 함께 우리 나라 5대 명산으로 지정되어 나라에서 큰 제사를 지내던 산이기도 하다.
전설에 의하면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둘째 아들인 비류와 셋째 아들인 온조가 이 산에 올라 장차 터를 잡고 살 곳을 둘러보았다고 하고 또 무학 대사가 조선 태조 이성계를 위하여 도읍지를 정할 때 백운대에서 만경대를 거쳐 비봉까지 갔었다고 전해진다.
비봉은 이 산의 남서쪽에 있는 해발 560미터의 산봉우리이며 국보 제3호로 지정된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이 봉우리에서 발견되어 이름을 비봉이라고 한다.
북한산에는 1711년에 쌓은 길이 8 Km의 북한 산성이 있는데 이 성에는 원래 14곳에 성문이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대서문을 비롯한 대남문, 대성문, 보국문, 대동문, 용암문 등이 남아 있고 그 밖에도 북한산 구기라 마애 석가 여래 좌상, 태고사 원증 국사 탑비, 태고사 원증 국사 탑, 동장대지 등 많은 유물과 유적이 있으며 상운사를 비롯하여 진관사, 승가사, 문수암, 태고사, 화계사, 도선사, 원효암 등 30여 곳의 절이 있다.
백운대와 인수봉 등은 암벽 등반 훈련장으로도 이용되며 서울에 가까이 있으면서 경치가 아름다워 1983년에 근처의 도봉산 일대와 함께 북한산 국립 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그 북한산 우측으로는 또 다른 암봉으로 이워진 도봉산이 정상에 역시 하얀 이불을 쓴채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하고 있어 또 다시 몇장의 사진에 담아 본다.
다시 이어지는 안전목책 등로를 타고 가파르게 오르니 하루길이라는 불암산 둘레길 안내목이 보이고 곧이어 좌측으로 410.5 암봉이 올려다 보이는데 눈이 없으며 그곳으로 올라 주위 조망과 풍경을 즐기고 일출까지 보고 싶지만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어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조금 더 진행하여 절고개 주위에서 등로 좌측을 살펴보니 저 멀리 남양주의 퇴계원과 진전읍을 지나 길게 펼쳐진 천마지맥 마루금 위로 멋진 일출이 시작되어 잠시 발걸음 멈추고 일출을 만난 후 출발하기로 한다.
좌측으로는 천마산이 우뚝하고 우측으로는 예봉산과 한강 지나 검단지맥의 끝자락을 알리는 검단산과 용마산이 우뚝하다.
천마지맥 산줄기 위로 환하게 떠오른 하루 해를 만나고 다시 조금 더 진행을 하니 암벽이 앞을 가로막아 되돌아 가 진행 방향 우측으로 나 있는 계단을 타고 암봉을 좌측으로 우회하며 진행을 해 본다.
잠시 후 절고개 안부를 지나 오르니 조망처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진행 방향으로 불암산 정상부를 살펴보니 하얀 눈에 쌓여 있는 석장봉과 불암산 정상부가 소나무 가지 사이로 아름답게 올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그곳에서 잠시 등로 우측인 서쪽을 살펴보니 북한산은 소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고 그 우측으로 도봉산의 암봉이 막 떠오른 햇살을 받아 더욱 신비롭게 빛나고 지나온 방향인 북쪽으로는 지난 구간 얼어 있는 등로를 타고 어렵게 내려 온 수락산이 또한 예사롭지 않은 암봉을 드러내며 봄으로도 당당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주위 조망과 풍경을 살핀 후 잠시 더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지난 밤 내린 눈이 그대로 나뭇가지에 얼어 붙어 환상의 눈꽃 세상을 만들고 있어 연신 감탄사를 남발하며 몇장의 사진에 담아 본다.
고도가 낮은 곳의 눈은 이미 녹아 그 흔적도 남지 않았지만 조금만 고도를 높여도 이처럼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으니 산에 오르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빠른 발걸음을 하면서도 주위 풍경과 조망을 즐기며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폭포약수터 갈림 이정표가 서 있는데 마루금 방향으로는 내려 붙어 있던 눈이 얼어 글씨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곳 폭포약수터 갈림 이정표를 지나 나무가 사리진 곳에서 잠시 뒤돌아 보니 노원구와 남양주를 이어주는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의 수락산터널이 보이고 그 뒤로 수락산이 너무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당당히 자리하고 있다.
서울 주위에 좋은 산들이 많지만 수락산(높이 638미터)은 계절에 상관없이 언제 찾아가도 나름대로의 특색을 보여주는 산으로 아기자기한 암봉들은 저 멀리 설악산이나 월출산을 찾아간 듯한 느낌도 안겨준다.
서울시와 경기도 의정부시, 남양주시 별내면의 경계에 솟은 수락산에는 금류, 은류, 옥류 폭포와 신라 때 지은 흥국사, 조선조 때 지어진 내원사, 석림사, 궤산정 등 명소가 산재해 있고 남쪽에는 불암산이 솟아 있으며 서쪽으로 마주 보이는 곳에는 도봉산이 의젓하게 자리잡고 있다.
많이도 올랐던 수락산이지만 이제는 발길 한번 주기가 지방의 이름없는 산보다 더 어려운 기회이니 산줄기 종주가 끝나는 시점까지는 이런 아쉬움의 연속일 것이다.
그 수락산 우측으로는 천마지맥의 산줄기들을 살펴보고 다시 그 수락산 좌측인 북서쪽으로 눈을 돌리니 거대한 노원구쪽 아파트 단지들 위를 병풍처럼 둘러쳐진 북한산과 도봉산 라인이 너무나 신비스런 자태로 이 산객을 매혹시키고 있다.
바쁜 발걸음이지만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조차 할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과 조망이기에 다시 발걸음 멈추고 많은 사진을 담은 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본다.
도봉산(717미터)은 도봉구 도봉동에 있는 산으로 조선왕조를 여는 길을 닦았다는 뜻과 뜻있는 지사들이 그 뜻을 키우고자 학문을 연마하고 민생을 구제하고자 도을 닦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데 조선왕조의 흥업이 이 도봉산의 정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있다.
도봉산 정상인 자운봉(717미터)과 만장봉, 도봉, 우이암, 선인봉 등 닭 볏 모양의 기이한 봉우리가 하늘 높이 솟아 있어서 팔팔한 정기가 어려 있고 천축사, 망월사의 고찰이 있으며 도봉서원 터 부근 골짜기의 수석이 기이하여 선경 같은 놀이터가 되었다.
가까이 있기에 그 멋스럽고 아름다운 자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뿐이지 지방 어느 자리에 솟아 있었다면 명산의 반열에 올라 전국의 산꾼들을 끌어 모았을 산들임에 분명한 도봉산이다.
그렇게 한동안 주위 풍경과 조망에 취해 많은 사진을 남기고 발걸음을 옮기니 이제는 소나무 가지에 쌓여 있는 눈들이 눈꽃 송이를 만들어 이 산객을 유혹하고 있어 다시 카메라 꺼내 몇장의 사진에 더 담아 본다.
잠시 후 사각탁자가 있는 소나무 등로에 도착을 하고 진행 방향으로 불암산 정상으로 이어진 긴 철계단과 불암산 정상부를 확인한 다음 우회하며 통과한 다람쥐광장으로 올라 옛 추억을 더듬어 본다.
석장봉(470미터 바위봉우리)은 불암산 북쪽 150미터 지점에 있는 바위봉으로 석장봉에 관한 자료는 찾을 수 없지만 다음과 같은 추측은 가능할 것 같다.
불암산을 송락(스님들이 쓰는 밀짚모자)을 쓴 부처님 같다고 하고 스님들이 짚고 다니는 지팡이를 석장이라고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불암산 정상은 송락으로 이곳을 석장으로 표기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 보는 시간이다.
오래 전 산친구들과 탁배기를 나눠 마시며 인생을 논하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모두 할아버지가 되어 산행에서 조차 잘 만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으니 안타까운 세월만 탓해 보는 시간이다.
이 산객도 그리 늦은 발걸음이 아닌데 오늘은 앞에서 이끌고 있는 공작산 산친구의 발걸음이 너무나 가벼워 뒤따라 가기 버거운 시간이기도 하였다.
그 다람쥐광장에서 잠시 주위 풍경을 살피며 산친구와 이야기를 나눈 후 진행 방향으로 돌아 내려가니 그곳에도 역시 눈을 뗄 수 없는 환상의 눈꽃들이 소나무 가득 피어있고 그 눈꽃 뒤 저 멀리 이제부터 올라야 할 불암산 정상부의 태극기가 빤히 올려다 보인다.
잠시 사진에 담고 손으로 만져보니 이미 얼어 있어 눈꽃들이 흩어지지 않고 눈꽃 그대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솜사탕보다 더 달콤하고 하얀 눈꽃들을 살펴보며 이런 풍경에 취해 있는 이 시간이 진정 행복한 시간은 아닐까 잠시 스쳐가는 상념도 해 보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그곳 다람쥐광장과 그 주변에서 많은 시간 보내고 불암산 정상부로 진행을 하니 바위 위에 내려 앉아 있는 눈들로 인해 조시스럽게 진행이 되고 잠시 후 등로 우측 뒤로 방금 전 올랐던 방향을 살펴보니 거대한 바위 위에 독야청청 자라고 있는 소나무 한그루 위에도 하얀 눈이 소복하게 덮혀 있어 환상의 풍경화를 만들고 있다.
바위 옆 계단을 타고 가파르게 오르다 뒤돌아 보니 쥐바위 역시 눈과 추위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모습으로 다가오고 그렇게 계단을 올라 불암산 정상에 서서 지나 온 방향인 북쪽을 살펴보니 수락산이 아주 가깝게 다가와 있고 그 뒤로 파란 하늘과 대비되는 풍경이 환상을 노래하고 있다.
이제 눈을 서쪽으로 돌리니 커도 너무나 크고 넓은 서울 북쪽의 한쪽을 이루고 있는 노원구쪽 아파트 단지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고 그 뒤로 도봉지맥 또는 한북정맥을 이루고 있는 북한산이 너무나 아름답게 솟아 있다.
북한산 주봉인 백운대에서 좌측으로 흐르며 이루고 있는 문수봉과 보현봉이 뚜렷하고 그 좌측 끝자락쪽으로 비봉능선을 이루며 이어진 비봉과 향로봉쪽 봉우리들도 선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 백운대 우측으로는 도봉산과 이어주는 영봉 줄기가 아름다운 자태를 마음 놓고 드러내며 뽐내는 듯 줄지어 서 있다.
남서쪽으로는 드넓은 서울 도심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기 시작하고 저 멀리 서울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남산과 그 정상에 우뚝 솟아 있는 남산타워도 보이기 시작한다.
그 남산 좌측 저 멀리에는 광명의 구름산과 가학산이라 생각되는 산도 보이고 그 좌측 끝자락으로는 삼성산 지나 관악산 줄기도 너무나 아름답게 펼쳐져 있어 그 풍경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기 전에 몇장의 사진으로 더 남겨 본다.
정남쪽 방향으로는 삼성산과 관악산 그리고 청계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부르고 있고 그 좌측 끝자락에는 우리나라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되어 있는 잠실의 롯데타워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솟아 있는 모습도 한눈에 들어 온다.
그렇게 한동안 그 불암산 정상에서 주위 풍경과 조망을 즐기고 삼각점을 사진에 담은 후 조심해 내려오니 불암산 정상석은 정상 남쪽 바위 위에 오석으로 세워져 있어 추억 한장 남겨 본다.
사진 한장 남길 수 있도록 정상석을 세워놨으면 좋았겠지만 이렇게나마 추억거리 하나 만들고 내려갈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으로 남겨 보는 시간이다.
함께하는 공작산 산친구도 인물 사진은 많이 남기지 않고 주로 셀카 놀이로 사진을 남기다 보니 늘 이 산객의 인물 사진만 남기는 산행이 되고 있다.불암산(508미터)은 서울 노원구와 경기 남양주시 별내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산 정상부에 있는 큰 바위가 마치 부처님의 모습을 닮았다고 하여 불암산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해발고도는 509.7미터로서 필암산, 천보산이라고도 한다.
산의 능선은 남북으로 이어진 방향인데 서울시 노원구 중계동과 경기도 남양주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불암산은 서울 상계동에서 경기도 남양주 별내면으로 넘어가는 덕릉고개 남쪽에 높이 420 미터의 또 하나의 봉우리를 거느린 산으로 산 자체는 단조로우나 거대한 암벽과 절벽 그리고 울창한 수목이 어울려 아름다운 풍치를 자랑하며 석장봉과 거북바위가 유명하다.
산 남쪽 사면에는 불암산 폭포가 장관을 이루며 또한 산에는 신라 지증국사가 세운 불암사와 그 부속 암자인 석천암이 있고 조선시대에 무공대사가 세운 학도암 등도 있다.
그 밖에 산중에는 조선 중종의 비인 문정왕후의 능인 태릉이 있고 명종의 능인 강릉이 있고 조선말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여주로 달아나던 명성황후가 하루를 머물면서 치성을 올렸다는 수령 650년의 은행나무가 있다.
산정에는 옛 성터인 불암산성과 봉화대 터가 남아 있으며 부근 일대에는 육군사관학교, 서울여자대학교, 삼육대학교 및 태릉선수촌 등이 있었며 서울 근교의 등산 코스로 개발되어 많은 관광객이 찾아 든다.
불암산 정상 아래 바위에 세워진 정상석에서 인증 사진 남기고 길게 이어진 계단을 따라 걸어 내려가니 이제부터 진행해야 할 수락지맥 마루금이 높은 고층 빌딩 사이로 이어지다 마지막 용마산과 아차산에서 롯데타워를 머리에 이고 있는 형상으로 길게 펼쳐져 있다.
아쉬움에 다시 한번 불암산 정상부를 올려다 보고 계속 계단을 타고 걸어 내려가니 계단 좌측으로 거대한 바위 벽 앞에 소나무들이 보이고 그 소나무 가지 위에 소복하게 내려 앉은 눈들이 솜사탕을 만들어 환상의 풍경을 선물하고 있다.
그 뒤로 천마지맥의 산줄기들이 막 떠 오른 강렬한 아침 햇살에 얼굴을 감추고 온 몸을 데우고 있는 듯 다가온다.
천마산에서 우측으로 백봉산과 고래산으로 이어지는 천마지맥이 예봉산과 예빈산을 거치며 한강으로 스며들고 그 한강 남쪽으로는 검단지맥의 검단산과 용마산도 올려다 보이고 있다.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들이기에 자꾸만 발걸음이 느려지고 있지만 걱정하지 않고 즐기며 내려가니 계단이 끝이나고 곧이어 깔딱고개 이정표가 나타난다.
이곳 깔딱고개는 불암산 정상으로 이르는 고개로 다른 등산로와 달리 산세가 비교적 험하고 가파른 등산로로 사람들이 숨이 깔딱깔딱 넘어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깔딱고개 이정표를 지나자마자 등로 옆으로 불암산성에 대한 설명판이 서 있어 잠시 살펴보고 가기로 한다.
불암산성은 서울특별시 노원구와 경기도 남양주시에 걸쳐 있는 불암산 남쪽에 있는 산성으로 오각형 형태이며 둘레 길이는 236미터이고 삼국시대의 성으로 추정된다.
성이 위치한 곳은 불암산 주봉(507미터)에서 남쪽으로 뻗은 능선상의 제2봉(420.3미터)이며 정상부에서는 중랑구 일대가 잘 조망되지만 북쪽방향은 불암산으로 인하여 시야가 가려져 있다.
성은 평탄한 정상부를 돌아가면서 자연지형을 따라 쌓았는데 평면 형태는 부등변의 5각형이나 원형에 가까우며 성의 전체 둘레는 약 236미터에 성 내부 면적은 약 5321.8 m2이다.
성벽은 군데군데 허물어졌지만 서벽과 동벽 일부 구간에서는 10단 이상이 잔존하여 비교적 양호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인근에 위치한 아차산 보루군과는 축성기법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벽석은 세로가 긴 편이고 면석은 장방형으로 다듬은 후 줄을 맞추어 수직에 가깝게 쌓아 올렸으며 뒷채움 돌은 길쭉한 돌을 길이 방향으로 놓아 면석이 쉽게 붕괴되지 않도록 하였다.
문 터로 추정되는 곳은 현재 등산로가 형성된 부분으로 생각되고 정상부 북동쪽 아랫단에는 우물로 추정되는 원형의 석축 구조물이 있다.
성내에는 헬기장이 조성되어 있으며 헬기장의 북동쪽에는 집수시설로 추정되는 직경 8미터 정도의 원형 함몰부가 있다.
유물은 정상부의 평탄한 곳과 경사면 일대에서 주로 발견되는데 청동기 시대의 무문토기류와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 시기의 경질토기편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불암산성은 아직 정식 시굴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유적의 성격이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은 상태이나 입지나 축성기법 및 성 안에서 발견되는 유물 등을 고려할 때 이 산성은 서울 지역으로 진출한 신라가 한강 유역 방어를 위해 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도 일시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산성 축성 이전에도 청동기시대부터 주거유적이나 간단한 방어시설이 조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암산성은 비록 규모는 작고 성벽 중 이미 훼손된 범위가 적지 않으나 삼국시대 석축 산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고대 교통로와 삼국의 영역 확장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므로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한다.
불암산성 설명판을 지나 평이하게 걸어 내려가니 금새 421.6미터봉인 헬기장에 도착을 하는데 한쪽에는 벤취쉼터들과 화랑대역까지 방향과 거리 표시가 되어 있는 이정표가 보인다.
불암산성을 문화재로 지정했다는 설명판이 보이는 헬기장 정상에는 제법 많은 눈이 내린 그대로 쌓여 있어 고도가 낮은 도로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어 있다.
잠시 더 평이하게 걸어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천보사 하산길 이정표가 보이고 곧이어 거대 바위 좌측으로 안전철봉과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등로도 보이기 시작한다.
반질거리는 넓은 소나무 등로를 타고 빠르게 걸어 내려가니 금새 등로 우측으로 학도암 하산 갈림 이정표도 만나 통과를 해 본다.
이름이 범상치 않아 학도암을 찾아 보니 네이버 맥과사전에 다음과 같은 설명들이 보인다.
서울 근교에 자리한 사찰 가운데 학이 날아와 놀았다는 사찰은 아마도 학도암 뿐일 것인데 그만큼 주변의 경치가 학이 와서 놀만큼 빼어나게 아름다웠다는 의미이다.
지금도 학도암 주변은 이름에 걸맞게 경치가 좋은데 한여름에는 푸른 숲과 어울려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그 속에서 천진한 어린이들이 뛰어 놀며 겨울이면 나뭇가지 위로 눈이 덮여 설국이 연출되기도 한다. 산중에 자리한 사찰치고 그러한 풍경을 가지지 않은 곳이 어디있겠냐 싶지만 학도암은 불암산의 감추어진 비경이 아닐 수 없는데 학도암의 상징은 암자 뒤쪽 커다란 바위 면에 새겨진 높이 13.4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마애관음보살좌상이다.
이 마애관음보살좌상은 1870년(고종 7) 명성황후가 발원하여 조성했다고 하는 것으로 자비로운 미소로 중생을 굽어 살피고 있어 학도암 뿐만 아니라 노원구의 명물이기도 하다.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은 전국적으로 많이 남아있지만 관음보살을 새긴 것은 많지가 않아 손에 꼽을 정도이며 그중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은 가장 크고 선명하게 남아있어 중요한 문화재로 여기고 있다. 이처럼 학도암은 학이 날아와 놀만큼 아름다운 경치를 주변에 두고 전국에서 가장 큰 마애관음보살상 아래에서 향화를 올리고 있는 소중한 도량이다.
학도암은 1624년(인조 2) 무공화상이 불암산에 있던 옛 암자를 지금의 자리로 옮겨 창건하였다고 하나 이 시기의 사정을 적은 기록이 없어 옛 암자라고 한 것이 어디에 있었으며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1927년 편찬된 봉선본말사지의 학도암 조에 의하면 창건이후 250여년의 역사는 공백으로 남아있고 1878년(고종 15)에 가서야 벽운화상이 재창하였다고 하나 현재 학도암 주차장 아래 자연암벽에 선각으로 조성되어 있는 2기의 부도가 있어 1878년 벽운화상이 재창한 이전의 역사를 말해준다.
이 부도는 왼쪽부터 청신녀월영영주지탑, 환구당선사취근지탑이며 이 가운데 청신녀월영영주지탑은 가경이십사년기묘십월이라는 명문이 함께 기록되어 있어 1819년(순조 19)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환구당선사취근지탑도 19세기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이 되고 또한 사찰의 뒤쪽 암벽에 선각된 마애관음보살좌상을 1870년(고종 7) 명성황후가 발원하여 조성했다고 한다.
이로 볼 때 1819년 무렵과 1870년 무렵에도 사찰은 법등을 이어오고 있었으며 1875년에 이르러 벽운화상이 중창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에는 1878년 한씨 일가의 시주로 마애관음좌상을 보수하였고 다시 1885년(고종 22) 벽운화상이 화승 경선화상을 불러와 불상 1구를 개금하고 불화 6점을 그려 봉안하였다.
이 시기 불사에 관한 내용은 천보산학도암개금탱화시주록기로 기록되어 봉선본말사지에 전하고 있다. 1922년에는 성담화상이 주지로 머물며 개인소유로 넘어간 사찰 소유의 산림 10여 정보를 매입하여 사찰의 경계를 확장하였고 그 후 1966년에 이르러 김명호 주지가 퇴락한 법당을 중건하였으며 1970년에 영산회상도를 봉안한 후 1972년에는 삼성각에 칠성탱과 산신탱을 봉안하였다.
2000년에는 한사람이 겨우 출입할 수 있을 정도였던 자연 동굴을 넓혀 안에 석조약사여래좌상과 일광보살좌상, 월광보살좌상을 봉안하고 약사전이라 부르고 있고 2005년에는 무이 주지스님이 법당 오른쪽 공터에 4.3 미터 높이의 석조지장보살좌상을 봉안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학도암 갈림 이정표를 지나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육각정 앞에 운동기구가 보이는데 그곳에서 아주머니 한분이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다.
육각정자를 지나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중계본동과 화랑대역으로 갈리는 갈림삼거리 이정표가 나타나고 그곳에서는 좌측의 화랑대역 방향으로 걸어 진행을 한다.
잠시 후 별내동원훈련장과 중계본동으로 갈리는 갈림사거리 이정표를 통과하고 태릉백세길이라는 이정표를 지나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 우측으로 녹색 철망이 설치되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지도를 살펴보니 이곳이 바로 노원고개로서 노원고개는 서울특별시의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고개로서 태릉과 강릉에서 불암산으로 가는 길에 있으며 해동지도와 광여도에는 태릉과 강릉이 불암산에 위치하고 있으나 양주지도에는 수락산 남쪽에 태릉과 강릉이 자리하고 있다.
노원이라는 지명은 고려 시대부터 사용하였으며 노원고개가 위치한 노원 일대는 교통의 요충지였는데 고려사의 지리지에 참역 중의 하나가 남경(현재의 서울)에 있는 노원이라고 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양주도호부에 역이 6이니 청파, 노원, 영서, 평구, 구곡, 쌍수요 라고 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노원역이 흥인문 밖 4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하였다.
그 녹색 철망을 타고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드디어 원 마루금으로 진행할 수 없는 삼육대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좌측 마루금 방향의 삼육대 방향으로는 2중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어 월담하기도 쉽지 않아 편안하게 우측의 삼육대학교 제명호 방향으로 나 있는 넓은 비포장 임도를 따라 진행하기로 한다.
개인적으로 조금 아쉬움이 남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에 삼육대와 큰 마찰을 일으키면서 까지 원 마루금을 고집할 필요까지는 없을 듯 하여 우측의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빠르게 걸어 내려가니 그곳은 내린 눈이 녹았다 얼었다를 반복하며 얼음판이 되어 있어 조심스럽게 걸어 진행을 한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 내려가니 드디어 삼육대 제명호에 도착을 하고 그 호수를 우측에 두고 좌측 비포장 임도를 타고 반 원형을 그리듯 걸어 진행을 해 반대쪽으로 걸어가니 그곳에 제명호라는 커다란 빗돌 하나가 서 있어 사진에 담아 본다.
제명호라고 불리는 이 호수은 삼육대 안에 있으며 둘레가 100미터에 달한다고 하며 나무로 삥 둘러 싸여 있는 호수에는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고 나무 그늘 밑 의자에서 호수를 보고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멀리 떠나온 듯한 느낌이 든다.
현재 노원구에서 제명호 주변을 정리하고 주민들이 산책하고 쉴 수 있도록 쉼터를 조성했으며 목재데크, 파고라, 조형가벽, 테이블, 인공섬, 수목식재 등을 통해 삼육대 제명호 호수 주변이 작은 공원으로 재탄생했다.
캠퍼스 안의 작은 호수인 제명호는 주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이곳은 삼육대 교정 안인데도 불암산둘레길이라는 이정표와 안내도가 계속 나타나고 그 제명호와 헤어져 삼육대학교 정문 방향으로 나 있는 넓은 비포장 임도를 따르니 이곳 역시 응달이라 그런지 임도는 온통 얼음판이 되어 있어 방금 전 제명호에서 체인젠을 벗은 아쉬움을 톡톡히 치르고 있다.
그렇게 한동안 넓은 비포장 임도를 따르니 비포장 임도는 포장도로로 바뀌고 학생들이 등교하는 시기엔 우측 우회 등로를 이용하라는 안내판도 보인다.
계속 넓은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가니 멋진 소나무들이 보이고 그 좌측으로는 신학관 건물도 예쁘게 올려다 보인다.
그 신학관 건물을 지나 우측으로 휘어지는 포장도로를 따라 계속 걸어가니 이 추운 날씨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불암산둘레길과 불암산 등산을 위해 이곳을 찾고 있음을 실감하는 시간이다.
계속 이어지는 멋진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도로 좌측으로 한국삼육 중고등학교 빗돌이 보이고 곧이어 삼육대학교 정문을 통해 삼육대학교를 빠져 나온다.
서울시 노원구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인 삼육대학교의 모태는 1906년 10월 평안남도 순안에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의 교육이념에 기초하여 창설된 의명학교로서 1942년 5월 일제의 탄압을 받고 폐교된 뒤 1947년 9월 조선합회 신학교로 다시 개교하였다.
1950년 6월 6·25로 인해 임시 휴교하고 1951년 11월 삼육신학원으로 교명을 바꾸었다가 1961년 6월 정규4년제 대학으로 인가를 받아 삼육신학대학으로 개칭하고 1992년 3월 지금의 교명인 삼육대학교로 변경하였다.
1962년 3월 삼육실업초급대학을 병설하고 1968년 3월 영어영문학과를 신설하였으며 1993년 2월 유즈노사할린에 분교 러시아삼육대학을 설치하였다.
2005년 교육인적자원부로부터 보건복지교육분야 특성화 우수대학으로 선정되었고 2006년 2월 교육인적자원부 주관 장애학생지원평가 최우수대’으로 선정되었다.
2007년 9월 약학대학과 2008년 3월 신학대학을 각각 신설하였고 2010년 3월 복수전공 활성화를 위한 교육과정을 개편하고 학과(부) 자율경영제도를 실시하였으며 2012년 8월 안면도에 인성교육수련원을 준공했다.
삼육대학교는 여성에게 교육의 권리가 없던 시절에 최초로 남녀공학을 실시했고 일인일기의 기술교육을 가장 먼저 시작했으며 농촌계몽과 계절학기를 맨 처음 시행했다.
또 전일 영어교육 프로그램도 국내 대학 중 처음으로 실시했다.
삼육대학교 정문을 나오자마자 화랑로라는 6차선 포장도로와 만나는데 그 도로는 현재 공사중이라 어지럽기만 하다.
그 화랑로를 타고 좌측으로 걸어 진행을 하니 금새 삼육대앞 버스 정류장이 보이고 그 버스정류장을 지나 계속 걸어 오르니 이제 담터고개 버스정류장이 보인다.
그 담터고개 버스정류장 앞 횡단보도에서 6차선 화랑로를 건너 우측의 천성교회 방향으로 진행을 해야 되는데 좌측으로 돌아가며 짧은 알바를 경험한다.
담터고개는 경기도 구리시 갈매동에 있는 자연마을 중 한곳인 담터마을에서 그 이름이 유래된 듯 보이며 담터마을에 관한 자료를 찾아 보니 구리시 갈매동에 있는 자연 마을로서 담터 마을은 국도 47호선을 타고 남양주 방향으로 올라가다 갈매동 삼육 대학교로 들어가는 길로 좌회전하면 나타나는 마을이다.
산이 마을을 담처럼 싸고 있고 삼태기처럼 생겼다고 하는 담터 마을은 산치성 굿인 할머니 도당굿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며 약 500평 정도의 도당굿 굿터에는 당집과 석수간 그리고 창고 건물들이 있다.
명칭 유래는 담터 마을은 북쪽과 서쪽으로 둘러싼 작은 야산들이 담을 쌓은 듯 마을을 감싸고 있어 삼태기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담터 마을은 옛날에는 담터 마을로 불리우다가 일제 강점기 양주군 노원면 장기리라고 불리워 졌고 해방 이후 다시 담터라 하였다.
장기마을은 담터의 한문 표기이다.
담터 마을이 속한 구리시 갈매동은 조선 시대부터 1914년 일제 강점기 행정 구역 개편 전까지는 양주군 노원면에 속했는데 1914년 일제 강점기 행정 구역 개편 때 노원면의 담터와 구리면의 사노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갈매리라고 하여 구리면의 한 리가 되었다.
1979년에 갈매 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80년에 남양주군에 편입되었다가 1986년 구리읍이 시로 승격되어 갈매동이 되었으며 마을 주위의 산의 모양이 칡(갈)과 매화(매)와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약 500에서 600년이 된 담터 마을은 해방 전에는 60호 정도가 살았는데 1997년대에는 700호가 조금 안되었다고 하며 20%가 정도가 본토박이이고 나머지는 서울특별시로 출퇴근하는 외지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논이 거의 80%을 차지하여 당시는 구리 지역에서 가장 부촌이었다고 한다.
담터 마을은 오래된 옛날 주택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 마을이며 마을 입구인 구리 농협 앞에 1997년 12월에 구리시가 세운 담터 마을 유래비가 있다.
담터사거리라는 도로 표지판이 보이는 사거리를 건너 우측으로 보이는 담터고개추어탕이란 식당 쪽으로 걸어가면 되는데 그 반대 방향인 좌측으로 가니 잠시 후 담터사거리 버스정류장이 보이고 곧이어 잘못 되었음을 깨닭고 되돌아 와 담터고개추어탕이란 식당 입간판을 지나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도로 좌측으로 천성교회로 들어가는 포장도로가 보인다.
그 천성교회 방향으로 오르니 천성교회는 도로 좌측에 있고 등로는 우측으로 걸어 가 좁은 비포장 소로가 열려있는 곳을 통해 이어가야 한다.
좁은 소로의 비포장 임도를 따라 걸어 내려가니 도로 양쪽으로 민가와 작은 공장 건물들이 나타나고 곧이어 갈림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정면 쪽으로는 담터길 32번길이라는 도로 표지판이 보인다.
그곳에서 우측 도로를 타고 걸어 내려가니 도로 좌측으로 대흥수출포장과 한양기업이라는 낡은 공장이 나타나고 우측으로도 오래되어 낡은 모양의 공장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 내려가니 비포장 임도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그곳에서 좌측으로 돌아 진행을 하였으면 좋았는데 우측으로 비포장 임도를 타고 조금 걸어 올라 다시 좌측의 잡목과 잡풀이 우거진 짧은 콘크리트 절개지를 타고 오르며 진행을 하니 잠시 후 커다란 검정 천으로 지붕을 한 공장 건물들이 나타나는데 내부는 대부분 비어 있는 창고같은 건물들이다.
그곳을 지나 좁은 골목 같은 등로를 따르니 전선을 생산하는 공장인지 전선을 감을 때 사용하는 기구들이 많이 쌓여 있고 우측으로는 갈매교회 입간판이 보인다.
이곳 갈매동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법정 동으로서 갈매동은 불암산 줄기의 동남쪽에 있는 구릉지대로 산지와 농경지가 많다.
한양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산림이 우거져 범이 많았으나 차츰 없어지고 산의 모습이 칡(갈)과 매화(매)와 같다고 하여 갈매리라고 불리게 되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목마른 말이 화접리에 있는 샘말의 물을 먹는 형국인 갈마음수형이라고 하며 그래서 갈마가 갈매로 바뀐 것이라는 설도 있다.
본래 양주군 노원면 지역이었다가 1914년 양주군 노원면 담터 전부와 구지면의 사노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갈매리라 하고 구리면에 소속시켰으며 1973년 갈매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80년 구리면이 구리읍으로 승격되자 양주군에서 분리되어 남양주군 구리읍에 속하게 되었다가 1986년 구리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갈매동으로 바뀌었다.
행정동명과 법정동명이 같으며 자연마을로는 담터, 범데미, 도촌말, 웃말, 양지말, 장사나골, 정촌말, 협동마을 등이 있다.
서울 주변의 대표적인 근교농업 지역의 하나로 주요 농산물은 원예작물이고 서울과 동일 생활권이며 도시·농촌 행정을 병행하고 있다.
경춘선 철도와 47번 국도가 북부를 가로지르며 문화재로는 구리 갈매동 도당굿(경기무형문화재 15)이 있다.
계속 이어지는 공장 건물들 사이로 나 있는 도로를 타고 걸어가니 형제무역과 한식뷔페 김밥이라는 안내판들이 보이고 곧이어 CJ 대한통운을 필두로 많은 택배 회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도로 좌측의 푸드앤숍과 우측의 택배 자동 분류 장치들을 구경하며 걸어가니 달인과 KGB 택배 회사 차량들과 공장 건물들도 보이기 시작한다.
잠시 후 신영지웰이라는 입간판이 보이는 갈림삼거리에서 좌측으로 꺽어 진행을 하면 도로 우측으로 KCC창호와 육대감 갈매점 식당들이 나타난다.
잠시 후 다시 갈림사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바로 눈 앞 도로 위로는 철로가 보이고 좌측 멀지 않은 곳으로 경춘선 갈매역이 보인다.
젊은 시절 꿈과 낭만의 대명사였던 경춘선은 서울시 노원구에 있는 성북역과 강원도 춘천시에 있는 춘천역을 잇는 철도 노선으로 총 길이는 87.3 Km로서 1939년 7월 25일 경춘철도주식회사에 의해 성동역에서 춘천 사이의 구간이 개통되었으나 서울의 시가지 확장에 따라 성동역에서 성북역 구간은 철거되고 성북역을 기점으로 하는 단선철도가 되었다.
경춘선을 달리는 모든 열차는 경원선의 청량리역에서 출발하고 모든 열차가 정차하는 역은 청량리역, 성북역, 대성리역, 청평역, 가평역, 강촌역, 남춘천역이고 나머지 역은 열차마다 정차여부가 다르다.
원래 종착역이었던 춘천역은 복선 전철화 공사 관계로 영업이 중지되었고 이에 따라 성북역에서 옆에 보이는 갈매역 구간은 폐선되며 신상봉역에서 갈매역 구간이 신설된다.
경원선 성북역은 2013년 2월 25일자로 광운대역으로 역명이 변경되었으며 경춘선은 북한강을 끼고 달리므로 경관이 좋고 청평역과 가평역 및 강촌역 부근에는 관광 및 휴양지가 많다.
잠시 젊었던 시절 저 경춘선을 타고 엠티를 가 밤 새워 마시고 놀았던 시절을 떠 올리면서 피식 웃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갈매역 우측의 갈림사거리에서 고가철도를 건너지 않고 갈매역 반대 방향인 우측으로 90도 꺽어 보이는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 진행을 하니 도로 우측으로 나즈막하게 이어지는 원마루금이 올려다 보이는데 잡목과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며 진행에 어려움이 예상되기에 새우개고개까지는 그냥 편안하게 이 도로를 타고 진행하기로 한다.
잠시 후 도로 좌측으로 구리농협 갈매지점이 보이고 우측에는 서원종합건설회사에서 짓고 있는 건물 공사장도 보이기 시작한다.
조금 더 걸어 진행을 하니 도로 좌측으로 가고파라는 허름한 식당 간판이 보이는데 이른 아침을 먹었기에 조금 일찍 식사를 위해 들어가 보니 내부 역시 허름하기는 마찬가지인데 반찬이며 김치찌개 그리고 밥 맛이 일품이라 밥 한그릇을 더 비우고 허기를 달랜 후 나와 계속 이어 진행을 해 본다.
잠시 후 갈매 자동차공업사와 갈매동추어탕 입간판을 지나고 미셀가방이라는 입간판도 통과하니 도로 좌측으로 아시아전선이라는 공장 건물과 회사도 보인다.
도로 좌우측으로 무질서하게 주차되어 있는 차량들 사이로 조심스럽게 걸어 진행을 하니 다시 화로정숯불갈비 식당이 보이고 곧이어 서울특별시 중랑구라는 도로 표지판을 지나 47번 6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새우개고개에 도착을 한다.
새우고개(새우개, 새고개, 새우개고개, 47번 4차선 포장도로)는 서울시 중랑구 신내동 자연마을 중 한곳인 새우개마을과 경기도 구리시 갈매동을 이어주는 47번 4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고개이다.
서울특별시의 중랑구 신내동에서 경기도 구리시 갈매동으로 가는 길에 위치한 고개로서 마치 새우등과 같이 구부러진 모양이라고 하여 새우고개, 새우개, 새고개라고 하였다고 전하며 새고개를 한자로 바꾸어 신현이라고도 하였다.
영조실록에는 서울에서 광릉에 이르는 길에 신현이란 곳이 있는데 바로 육릉에서 내려온 맥이다 라고 쓰여 있고 또 해동지도와 광여도에는 불암산 아래 신현을 표기해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있으며 새우고개가 있는 일대는 신현리라 하였다.
신구대조에 따르면 신현리와 봉화산 근처에 있던 내동리가 합쳐지면서 이 지역을 신내동이라고 하였으며 신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등에서 지명을 엿볼 수 있다.
이곳에서 황단보도를 통해 47번 6차선 포장도로를 건너 SK 주유소 우측으로 나 있는 낡은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오르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서울 중랑구와 경기도 구리시의 경계선을 이루고 있는 새우개고개를 건너 낡은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오르니 잠시 후 도로는 녹색 철망으로 막혀 있어 더 이상 진행이 곤란한데 지도를 살펴보니 이곳에서 마루금은 좌측의 철조망으로 가로 막혀 있는 배 과수원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어 조심스럽게 그 배 과수원 방향으로 올라 가 본다.
이곳이 그 유명한 먹골배로서 단종과 관련이 깊은 과일이기도 하다
먹골배는 1930년대 봉화산 기슭에서 재배되기 시작하였으며 지금의 묵동에서 신내동 그리고 남쪽으로는 중화동과 상봉동 일대 전체가 먹골배 밭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한편 먹골배가 달고 유달리 수분이 많으며 맛있는 이유는 이곳의 토질이 모래가 많이 섞인 사질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먹골배라는 명칭은 배의 품종명이 아니라 이곳 먹골(묵동)이라는 지역에서 생산된 배를 의미한다.
먹골배의 달고 맛있는 배맛에 이끌린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현재는 택지개발로 점차 재배면적이 축소되고 사라져 인근 태릉주변과 구리시로 재배가 옮겨가고 있다.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대항하여 단종복위 운동을 꾀한 사육신은 처형당하고 단종은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가게 되었으며 또한 세조는 정순왕후의 친정 식구들을 모두 역모로 몰아 학살을 하였다.
금부도사 왕방연이 책임지고 호송하는 단종의 영월 귀양행차는 10일을 가고 한 번 쉬었는데 귀양행차는 온갖 시름을 없애 준다는 망우리고개를 넘어갈 때도 쉬어 가지 못했다.
왕방연은 주위의 눈이 무서워 온정을 베풀지 못하고 쩔쩔매기만 했으며 가문의 영광인 금부도사 직책이 원망스러웠다.
단종은 영월 청령포에 자리를 잡았고 소임을 마친 앙방연은 단종의 옥체 만강하기를 마음속으로 빌면서 영월을 떠나게 되었는데 어린 임금을 유배지에 홀로 두고 가는 마음은 괴롭고 울적했다.
단종은 청령포로 떠난 지 1년 후 사약을 먹고 비극적인 생애를 마감했고 이 소식을 들은 왕방연은 분노와 설움의 눈물을 흘리며 서둘러 한양으로 돌아 와 이내 관직을 사임했다.
관직에서 물러난 왕방연은 선산이 있는 지금의 봉화산 아래 중랑천변 먹골(묵동의 옛이름)로 거주지를 옮기고 날마다 필묵과 벗을 하며 키우기 시작한 나무가 있었는데 바로 배나무였다.
왕방연은 배꽃에 단종의 눈물 어린 넋이 깃들어 있다고 여겨 배나무를 정성껏 보살폈으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
유배지를 떠나는 단종이 갈증으로 인해 물을 마시고 싶어 했으나 물 한 그릇도 국법에 어긋난다 해서 올리지 못하였고 그래서 그는 매년 단종이 승하한 날이 되면 자신이 가꾼 배를 바구니에 가득 담아 영월을 향해 절을 했다고 한다.
왕방연은 단종에게 속죄하는 길은 배나무를 잘 키워서 달고 맛있는 열매를 익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배나무를 심고 가꾸었으며 이것이 단종에 대한 죄책감으로 평생을 시달렸던 왕방연이 죽음의 문턱에서도 속죄를 하면서 변함없는 절개를 지키는 일이었다.
후손들은 왕방언의 유언을 따라 신내동과 묵동의 접경지대에 그의 무덤을 만들었고 이런 이유로 그가 살고 묻힌 곳을 왕방골이라고 불렀다.
왕방연이 손수 심었던 배나무는 사방으로 퍼져 나갔으며 그의 눈물과 정성으로 가꿔진 배는 오늘날에도 먹골배라는 이름으로 유명하지만 이제는 그곳 배밭들이 새로운 거대한 도시로 바뀌면서 주변 도시로 흩어지게 되어 그 명맥마저 사라지고 있다.
한동안 그 먹골배 과수원을 통해 가파르게 오르니 그 배 과수원이 끝나는 지점 뒷쪽 능선 방향으로 좁은 통로가 보이고 그곳을 통해 배 과수원을 벗어나 정상 능선으로 오르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보는데 과수원을 경작하는 계절에는 진행에 상당한 어려움도 예상되는 지점이다.
그 먹골배 과수원을 지나 능선으로 오르니 쓰러진 거목들이 등로를 완전히 가로막아 진행에 상당한 어려움을 느낀다.
장애물 넘기처럼 쓰러진 나무들을 넘기도 하고 밑으로 기어 가기도 하면서 힘들게 걸어 오르니 용도를 알 수 없는 삼각점 하나가 보이는데 정상 삼각점이 아닌 군용 삼각점은 아닐까 생각되는 곳이다.
사진 한장 남기고 잠시 더 걸어 진행을 하니 또 다른 삼각점 하나가 보이고 지도를 보니 135.4 삼각점봉인데 삼각점은 오래되어 판독이 불가능한 수준이다.
그 135.4 삼각점봉을 지나자마자 등로는 우측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고 조심하며 낙엽을 헤치고 걸어 진행을 하니 세종포천간고속도로 위에 드넓은 동물이동통로가 나타난다.
이쪽으로는 자주 오지 않다 보니 새로 뚫린 도로들이 많아 낯설게 느껴지고 잠시 후 안부쪽으로 내려가니 구리둘레길1코스와 2코스를 표시하는 이정표가 서 있다.
이제 구리둘레길1코스인 망우산입구 2.9 Km 라는 방향과 거리 표시가 되어 있는 방향으로 걸어 진행을 해 보는 시간이다.
드넓은 동물이동통로를 통해 세종포천고속도로의 구리포천간 구간을 건너가니 직진 방향으로 철계단이 보이고 그 위에는 다시 목책이 설치되어 있어 진행이 불가능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좌측으로 나 있는 우회 등로를 타고 크게 우회하며 진행을 해 본다.
좌측으로 돌아 목책이 끝나는 지점 우측 능선 방향으로 뚜렷한 구리둘레길이 나있고 그 둘레길을 타고 걸어 오르니 사각정자와 음수대가 나타나는데 둘레길은 그곳에서 좌측으로 더 멀게 돌아가고 이 산객이 진행해야 할 수락지맥 마루금은 우측 능선 방향을 가리키고 있어 어쩔 수 없이 깊게 쌓여 있는 낙엽을 헤치며 사면치기로 주능선 방향으로 오른다.
한동안 낙엽을 헤치며 능선 방향으로 오르니 거대한 고사목들이 쓰러져 등로를 가로막고 있는 주능선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등로를 따라 좌측으로 걸어 진행을 하니 군 삼각점이라 생각되는 삼각점 하나가 박혀 있다.
그 삼각점을 지나 조금 더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 우측 옆으로 171.4 삼각점봉이 나타나 그곳으로 올라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삼각점은 성동 441번이며 해발고도는 171.4미터라는 삼각점 안내판이 서 있어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삼각점을 다녀 와 다시 내려오니 이제 딸기원입구까지 2.4 Km 거리라는 구리둘레길 이정표가 반겨주고 잠시 후 등로 좌측으로 철조망이 쳐져 있는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그 철조망에는 동구릉이라는 플랭카드가 붙어 있다.
동구릉(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에서 인용)은 구리시 인창동에 위치한 동구릉은 조선시대의 임금 일곱명과 10위의 왕비와 후비 등을 안장한 왕릉인데 1408년 태조의 건원릉을 시작으로 조선시대 왕족이 하나의 군락을 이루고 있다.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태조는 살아생전에 고려 왕릉의 대부분이 개성 부근의 산악지대에 있어서 참배하기 불편할 뿐 아니라 왕릉을 관리하기도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그런 연유로 자신과 자손들의 유택을 한양 가까운 곳에 정하고자 하였다.
태조가 죽은 뒤 태종의 명을 받아 서울 가까운 곳에서 길지를 물색하다가 검교참찬의정부사를 지낸 김인귀의 추천을 받고 하륜이 양주 검엄에 나아가 보고 능지로 정하였다고 하며 항간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태조가 생전에 무학대사를 시켜 자기와 후손이 함께 묻힐 족분의 적지를 선정하게 하여 얻은 것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만들어진 전설에 불과하다.
아홉 개의 능 하나하나가 조성된 사정을 보면 길한 능지 여러 곳을 물색하다가 이곳에 귀착한 것이다.
이곳을 동구릉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익종을 모신 수릉이 아홉 번째로 들어서던 1855년(철종 6)때이며 그 이전에는 동오릉, 동칠릉이라고 불렀던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하고 있다.
동구릉의 지세가 풍수지리이론에 합당한 유수한 지세임은 감여가들이 이곳에 아홉 개의 능 터를 찾아낸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태종 때 명나라 사신들이 건원릉을 둘러보고 그 산세의 묘함에 감탄하여 어떻게 이와 같이 하늘이 만든 땅덩이(천작지구)가 있단 말인가 하며 필시 인간이 만든 조산일 것이다 라고 감탄하였다 한다.
현재 59만 평을 헤아리는 광대한 숲에 조성된 동구릉에 들어서서 직선거리의 맨 끝에 있는 능이 태조의 건원릉이며 이 건원릉은 고려 왕릉 중 가장 잘 조성된 현정릉(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능제를 기본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후 건원릉은 조선왕조 오백 년 왕릉의 기준이 되었고 그 뒤 조성된 왕릉은 저마다 조금씩 규모와 형태가 다르지만 석물의 배치와 능제는 대부분 국조오례의와 국조상례보편에 따라 비슷하게 조성되었다.
건원릉의 정면 멀리 떨어진 곳에 홍살문을 세웠는데 이곳에서 부터는 성스러운 장소이니 악구가 범접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왕의 능으로 오르는 길인 참도를 따라가면 정자각이 있고 정자각 왼쪽으로 다른 능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작은 석물이 있다.
정자각 남쪽으로는 제사를 준비하는 3칸짜리 수복청이 있고 그 옆에 용무늬 비 머리가 얹어진 태조의 신도비가 비각 안에 세워져 있으며 신도비는 중국 진송 때부터 비롯된 것으로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묘에선 자주 볼 수 있지만 왕릉 중에는 태조와 태종의 능에 신도비가 있을 뿐이다.
건원릉의 좌우로 8능 16위가 15유택을 이루고 펼쳐져 있다.
건원릉 동쪽 언덕에 자리 잡은 능은 제14대 선조와 그 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능인 목릉이며 선조의 능은 다른 능과 달리 조형미와 세련미가 떨어지는데 이는 선조가 죽은 해인 1608년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고 난 직후라 왕릉의 조성에 심혈을 기울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원래 선조릉은 건원릉 서쪽 줄기에 있었으나 심명세가 목릉에 물이 차서 불길하다고 주장하여 인조 8년인 1680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그 아래쪽에 제5대 문종과 그 비 현덕왕후의 능인 현릉이 있으며 이 현릉은 병풍석의 방울과 방패무늬가 사라지고 고석이 네 개로 줄어들었는데 이는 망료위 대신 제향 후에 축문 등을 태우는 예감을 마련한 최초의 능이라고 하며 이것 역시 능제의 검소함을 주창한 국조오례의의 양식을 적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릉 아래에 자리 잡은 수릉은 제23대 순조의 원자인 문조와 그 비 신정익왕후의 능이다.
건원릉 서쪽 아래에 있는 능은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인 휘릉인데 15세 어린 나이에 계비가 되었으며 26세에 남편 인조를 잃고 대비가 되어 효종과 현종 그리고 숙종에 이르기까지 왕실의 어른 조대비로 지냈지만 소생이 없었다.
인조의 정비인 인열왕후가 파주시 탄현면에 있는 장릉에 있는데 1688년 12월에 장렬왕후만 이곳으로 옮겨왔다.
제21대 영조와 그 계비 정순왕후의 능인 원릉은 휘릉 아래에 있으며 정자각 오른쪽으로 3칸짜리 비각 안에 3기의 비가 서 있다.
영조는 살아생전에 정비 정성왕후 곁에 묻히기 위해 서오릉의 홍릉에 터를 잡아 두었지만 그 터에 이상이 생겨 이곳 계비 정순왕후와 함께 쌍릉에 잠들어 있다.
제24대 헌종과 그 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능인 경릉은 동구릉의 아홉 번째 능이며 이곳은 풍수가들이 용세와 혈증이 확실하고 열이면 열이 다 좋다 라고 평하는 명당 중의 명당이다.
국상을 입고서 열세 군데의 길지를 찾아 나선 끝에 이곳에 자리 잡았다고 하며 그래서 그런지 경릉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동구릉 중에서 으뜸이다.
경릉 아래쪽에 제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능인 혜릉이 있으며 단의왕후는 11세에 세자빈에 책봉되어 33세의 나이로 창덕궁 장춘원에서 세상을 떠나 이곳에 홀로 묻혔고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는 성북구 석관동의 의릉에 있다.
혜릉에서 조금 들어가면 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가 쌍릉에 묻힌 숭릉이 있으며 병풍석 없이 난간을 둘렀는데, 경릉처럼 두 봉분을 이어서 둘렀다.
한동안 그 동구릉 철조망을 좌측에 두고 그 철조망을 따라 산행을 이어가게 된다.
한동안 그 철조망을 타고 걸어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고 다시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철조망 좌측 안쪽으로 군통신탑과 초소가 보이고 그 우측 앞 가장 높은 곳으로 아무 표식도 없는 커다란 빗돌 하나가 서 있는데 지도를 보니 이곳이 바로 해발고도 177.9미터의 구능산 정상이었다.
이곳 구능산(171.5미터)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과 서울시 중랑구 망우동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이 산 아래에 동구릉이 있다고 해서 구능산이라고 부른다는 설이 있는 산이다.
다만 정상부의 빗돌이 철조망 안에 위치하고 있어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어 아쉬웠던 시간이었다.
구능산 정상부를 지나 평이하게 걸어 전진하니 등로 우측으로 통나무 쉼터들이 설치되어 있는 공터봉이 보이고 곧이어 동구릉과 헤어져 이번에는 군부대 철조망이 등로 좌측으로 설치되어 있는 등로를 타고 걸어 진행을 해 본다.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그 철조망 안으로 군부대 단장이 경고판을 붙여 놨는데 무단침입과 사진촬영 금지라는 경고판이다.
계속 이어지는 철조망을 따라 걸어가니 드디어 눈 앞으로 상전벽해로 변해버린 난해한 도심의 도로망들이 펼쳐져 있어 내려다 보는 눈이 다 휘둥그레 해질 정도이다.
산행지도에도 잘 표기가 되지 않는 도로들이기에 다음지도로 확인을 해 보니 바로 발 아래로 지나가는 6차선의 북부간선도로가 내려다 보이고 그 우측 저멀리 중랑IC가 있는 세종포천고속도로 진입 로타리가 보인다.
북부간선도로는 이 길이 서울의 북동부 지역을 잇는 간선도로인 데서 유래되었는데 북부간선도로는 성북구 하월곡동삼거리에서 중랑구 신내동(신내동 시계)에 이르는 폭 약 25미터에 길이 8300미터의 4차선 도로이다.
이 길은 1993년 7월 23일 처음 북부간선도로로 이름 붙여졌는데 이때는 23000미터 구간이었으나 그후 1998년 12월 18일 내부순환로로 일부 편입되었고 나머지 구간은 하월곡삼거리에서 고가로 구리시 서울외곽순환도로까지 이어졌다.
다행스럽게도 북부간선도로 위로는 지나갈 수 있는 육교가 설치되어 있고 그 육교 방향으로 나무계단이 잘 설치되어 있어 통과하는데엔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나무 계단을 타고 걸어 내려가니 구리둘레길 종합안내도가 서 있고 좌측으로는 방금전까지 계속 만났던 철조망을 쳐 놓은 군부대 정문이 나타나고 우측으로 충군육교가 보이는데 그 충군육교를 통해 북부간선도로를 통과한다.
충군육교를 통과하니 도로 좌측으로 새로 지은듯한 국군구리병원이 보이고 등로는 우측 군부대 철조망 옆으로 이어지고 있다.
아마도 국군구리병원을 보호하고 있는 철조망을 좌측에 두고 우측 등로로 이어지는 듯 보이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등로 우측으로 멋진 소나무 군락지도 지나며 잠시 무심으로 걷다 보니 등로 좌측의 철조망 안으로 군부대 초소가 올려다 보이고 다시 등로는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오르막 등로로 이어진다.
잠시 후 딸기원입구까지 0.62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서 있는 151.3봉을 지나고 계속 이어지는 평이한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벤취쉼터들과 묘지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교문사거리 갈림 이정표가 서 있는 131.7봉에 도착을 해 입었던 방풍의를 벗어 배낭에 넣고 출발을 한다.
아직도 바람이 불면 차갑지만 기온이 오르면서 양지에는 진흙 등로가 이어지고 있어 방풍의를 벗고 진행을 하니 견딜만 한 날씨이다.
교문사거리까지 1.6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지나 조금 내려가니 목사전주김공과 권사밀양박씨 합장묘지가 나타나고 곧이어 몇기의 묘지들이 나타나는데 그 넘어로는 진행해야 할 망우산도 올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몇기의 묘지들을 좌측에 두고 능선을 타고 걸어 내려가니 능선에 인식을 할 수 없는 삼각점 하나가 박혀있고 잠시 후 민가들이 보이는 2차선 포장도로로 내려가 그 도로를 따라 좌측으로 걸어 내려가 본다.
여전히 구리둘레길 1,2코스를 알려주는 이정표가 서 있고 잠시 후 세종포천고속도로를 건널 수 있는 2차선 포장도로를 통해 그 고속도로를 통과하는데 지도를 보니 이곳을 망우리고개라 하였다.
망우리 고개(6번 6차선 포장도로)는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과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사이에 있는 고개로서 망우산(281미터) 북쪽 능선에 있는 고개이며 옛날부터 서울로 들어오는 동부 관문이었고 이 고개를 통해 경춘국도와 강원도로 통하는 국도와 중앙선이 지나간다.
이 지명은 조선 초기부터 불리었는데 그 유래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이성계가 조선 개국 후 묘자리를 정하기 위해 고심하다가 동구릉의 건원릉 터를 유택지로 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 고개 위에 이르러 잠시 쉬면서 주위의 산천기세를 둘러보고 오랜 동안의 근심을 잊게 되었다 하여 망우리고개라 하였다고 전한다.
망우동은 경기도와 강원도 방면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으로서 망우리고개와 공동묘지가 있는 험준한 지형 때문에 예부터 수도방어의 요충지였다.
공동묘지와 고개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도로확장 및 구회정리사업 후 교통이 편리해졌을 뿐만 아니라 신흥주택가와 교육지구로 변모하였다.
망우동의 동쪽으로는 망우산(281미터)의 능선을 경계로 경기도 구리시와 인접되어 있고 남쪽으로는 면목동을 맞닿아 있으며 서쪽으로는 상봉동과 경계를 짓고 북서쪽으로는 신내동과 접해 있다.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과 서울시 중랑구 망우동을 이어주는 6번 6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고개로서 서울시립 망우리공동묘지가 있는 곳이다.
그 망우리고개의 육교를 통해 아래 세종포촌고속도로를 통과한 후 망우리공동묘지 방향의 나 있는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 올라가 본다.
잠시 걸어 오르니 서울시 둘레길인 중랑둘레길이 우측 아래에서 올라 와 구리둘레길과 합류하고 잠시 후 박인환묘소 180 미터라는 이정표를 만나는데 이 산객은 직진의 사잇길입구1이라는 화살표 방향으로 진행을 한다.
잠시 후 도로 우측으로 망우리공원 인문학길 사잇길이라는 안내도가 보이고 그곳으로 가니 이곳 망우리공원묘지에 묻혀 있는 유명하신 분들의 설명과 함께 사잇길에 관한 해설도 곁들여 져 있다.
잠시 읽어 보고 좌측 도로를 타고 계속 오르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한동안 더 그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 오르니 좌측으로 이태원합장비 갈림 이정표를 지나 우측 망우리공동묘지들이 보이는 곳 능선 방향으로 등로가 이어져 하얀 눈을 밟으며 우측 묘지가 있는 능선으로 올라가 보니 중앙부 묘지 사이로 등로가 나 있다.
망우리 공동묘지는 망우산 일대 넓은 공간에 조성된 묘지공원으로 1933년 5월 27일부터 공동묘지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1973년 3월에 2만 8500여 기의 분묘가 가득 찼으며 이장과 납골을 장려한 결과 2005년 9월 기준으로 1만 7041기의 묘가 남아 있다.
한용운과 오세창 및 서동일 등 독립운동가들과 방정환과 이중섭 및 박인환 등 17인의 유명인사가 잠들어 있으며 안창호 선생의 묘도 이장되기 전에는 이곳에 있었다.
산책과 조깅을 즐길 수 있는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5.2 Km의 산책로 곳곳에 15인의 연보비가 놓여 있다.
묘지 사이로 나 있는 주 능선을 타고 조심하며 걸어 오르니 묘지 사이에 쌓여 있는 눈들이 녹았다 얼었다를 반복하며 얼음 등로로 변해 있어 여간 미끄럽지 않다.
그렇게 한동안 걸어 올라 묘지 위에 서서 등로 좌측인 북동쪽을 살펴보니 경기도 구리시와 남양주시의 거대한 아파트 단지 뒤로 천마지맥의 산줄기가 정상부에 하얀 솜이불을 쓴채 너무나 아름답게 펼쳐져 있어 감탄사를 연발하며 많은 사진을 남겨 본다.
처음에는 천마산이 아닌 듯 살펴 봤지만 지도를 정치해 놓고 살펴보니 확실한 천마지맥의 철마산에서 천마산을 지나 고래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맞다.
눈을 북쪽으로 돌리니 서울 중랑구쪽 아파트 단지 뒤로 불암산과 그 불암산에 가려 보이지 않던 수락산이 얼굴을 내밀며 인사를 건네고 있다.
다시 눈을 북서쪽으로 돌리니 이번에는 도봉산에서 북한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정상부에 하얀 눈을 한가득 이고 강렬한 햇살을 받아 너무나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이제 삼각형의 모양은 사라지고 미끈한 인수봉이 전면으로 나와 그 우람한 남성미를 자랑하는 풍경을 줌으로 당겨 보니 또 다른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시간이다.
생각보다 빨리 잘 진행되고 있어 이제부터는 너무 서두르지 않고 여유를 가지고 걸어 보는 시간이 되었다.
그렇게 너무나 아름다운 조망과 풍경들을 사진에 담고 다시 묘지 사이로 나 있는 미끄러운 등로를 따라 걸어 오르니 금새 259미터의 산불감시초소에 도착을 해 주위를 살펴 본다.
그 산불감시초소 앞으로 이정석이 세워져 있었던 주춧돌이 보이지만 그 위에 얹혔을 이정석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아 아쉬운 시간이다.
그곳에서 등로는 우측으로 이어지고 잠시 등로 좌측을 살펴보니 드디어 한강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고 그 한강을 사이에 두고 북쪽인 좌측은 천마지맥의 예봉산과 예빈산이 남쪽인 우측으로는 검단지맥의 끝자락인 검단산과 용마산 줄기가 서로 마주보고 달려 온다.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기에 옛 추억을 떠 올리며 잠시 더 쉬어가는 산불감시초소 봉이다.
이제 질척이는 등로를 타고 봉우리 같지 않은 254.2봉을 지나 조금 더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 좌측으로 나무데크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고 그곳에는 몇명의 등산객들이 쉬면서 식사도 하고 간식을 먹고 있다.
잠시 그곳으로 들어가 등로 좌측인 남동쪽을 살펴보니 구리시쪽 아파트 촌 뒤로 한강이 도도히 흐르고 그 뒤로 천마지맥의 마지막 봉우리인 예빈산과 검단지맥의 마지막 봉우리인 검단산이 서로 마주보며 한강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풍경이 그대로 펼쳐져 있다.
그곳을 올라 걸을 땐 느끼지 못했던 황홀함이 다시 영혼을 깨우며 그 아련한 추억을 들추는 시간이기도 하다.
남쪽으로는 이제 강동구와 송파구쪽 아파트 촌들도 보이기 시작하고 그 우측 끝자락에 서울의 랜드마크로 자리잡은 롯데타워도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솟아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 오기 시작한다.
한동안 풍경과 조망을 즐기고 다시 그 전망데크를 나와 등로를 타고 빠르게 걸어 진행을 하니 안창호묘터와 이인성묘소 가는 안내판이 보이고 곧이어 사거리 안부를 통과하는데 특이하게도 아사카와 다쿠미묘소라는 일본인 묘소를 안내하고 있어 확인해 보니 총독부 산림과 과장이었다는데 왜 그런 사람이 이곳에 묻혀 있는지 의아한 시간이다.
안부를 지나 오르니 등로 옆으로 망우산3보루에 대한 설명판이 서 있어 자료를 찾아 보니 망우산3보루는 망우산 2보루에서 북쪽으로 액 160미터 떨어진 봉우리에 있다.
망우묘역을 만드는 과정에서 많이 훼손되어 원래의 형태와 규모를 파악하기 어려우며 정상부 남쪽 비탈면에 무너진 석축 일부가 노출되어 있고 돌 다듬은 기법으로 보아 고구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주변에서 고구려 토기 조각과 민무늬토기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만시지탄은 있지만 늦게나마 이런 발굴 작업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은 소중한 작업이 될 것이다.
망우산3보루 설명판을 지나 빠르게 걸어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이곳은 망우산3보루 유적지입니다 라는 설명판이 또 보이고 그곳을 지나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녹슨 깃대에 스피커가 달려있고 그 아래에는 작은 돌탑이 보이는 282미터의 망우산 정상에 도착을 해 추억 한장 남겨 본다.
망우산(281.7미터)은 망우동과 면목동, 경기도 구리시에 걸쳐 있는 망우산은 해발고도 281.7미터이며 망우산 일대에는 서울시립장묘사업소 망우묘지가 있는데 이 묘지는 1933년에 공동묘지로 지정되었으며 아동문학가인 소파 방정환과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인 독립운동가인 오세창과 한용운 그리고 천연두 보급의 건구자로 의학자이며 국어학자인 지석영 등이 안장되어 있다.
이 후 시인 박인환, 문일평, 서병호, 서옹일, 오재영, 서광조, 유상규, 교육가 오긍선 등 여덟 분의 연보비가 추가로 설치되어 역사의 교육장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문화재로는 거북비로 불려오던 조선중기의 문신인 신경진의 신도비(서울 유형문화재 제 95호)가 있다. 또한 망우리공원 내의 순환도로 5.2 Km를 아스콘 포장하여 산책로를 만들었으며 산책로의 이름을 공모하여 98년 5월 사색의 길로 정하여 불리고 있다.
도시환경과 자연관찰로, 나무정자, 약수터 등의 시설이 있으며 수목 관리가 잘 되어있고 공기가 맑아 휴식 및 자연공원으로 많은 시민들이 찾고 있다.
망우산 정상을 통과한 후 다시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안부에는 여전히 구리둘레길 이정표가 보이는데 이제 망우산3보루에서 2보루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음을 알리는 이정표이다.
망우산2보루 입구라는 이정목을 지나 계속 오르니 망우리의 유래판과 무명묘지 한기 그리고 삼각점과 전망데크가 보이는 281.3미터의 망우산2보루에 도착을 한다.
망우산2보루는 해발 281.7미터의 봉우리에 만들어졌으며 망우리묘역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심하게 훼손되어 원래의 형태와 규모를 찾기 어렵다.
묘지 조성 시 재사용된 돌이나 주변에서 발견된 고구려 토기 조각들을 통해 보루로 추정하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고 그 전망데크로 올라 주위 풍경과 조망을 살펴보니 그곳에도 환상의 그림들이 펼쳐져 있다.
북쪽과 북서쪽으로 서울 북부 지역의 거대한 아파트 촌들이 군락을 이루고 그 뒤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불암산과 수락산이 한몸인듯 붙어 있고 그 좌측으로 도봉산 줄기가 북한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에 이곳에서도 잠시 더 머물며 쉬어가 보는 시간이다.
북한산과 한강 그리고 천마지맥과 검단지맥까지 두루 살펴보고 망우전망대의 사진을 대조하며 그 이름들을 찾아 본다.
한동안 즐긴 후 그 전망데크를 내려 와 질척이는 등로를 따르니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다시 측백나무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무명봉을 지난다.
무명봉을 지나 완만하게 내려가니 육각정자가 보이는 포장도로로 내려서고 그곳에서 설치되어 있는 안내판들과 이정표를 살펴본 후 아차산일대보루군에 관한 설명판도 읽어 본다.
그곳 육각정자가 있는 갈림길에서 도로 좌측으로 나 있는 소로를 타고 다시 오르니 망우산1보루로 오르는 등로이고 잠시 후 등로 좌측으로 산불감시초소가 보이는 255 무명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예전에 학교를 다닐때만 해도 이곳은 망우리공동묘지가 있는 곳이라 해서 올 기회 자체가 없었는데 산행을 즐기다 보니 가끔 오르게 되었고 이제는 묘지를 만나면 인사 드리고 앉아 편히 쉬었다 갈 수 있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으니 많은 인식 변화가 있었다.
망우리의 유래를 찾아 보니 중랑구 망우동 서울특별시와 구리시와의 경계가 되는 곳에 있는 고개로서 태조 이성계가 검암산 밑 동구릉의 건원릉 터를 유택으로 정한 후 망우산 고개 위에서 쉬면서 신하들에게 아아 이제야 근심을 잊게 되었구나(어사 오우망의) 라고 하였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나 일설은 태조가 남재를 대동하고 명당을 찾던 중 동구릉 부근에서 삼혈을 얻었는데 이곳은 이미 남재가 묘 터를 잡아놓은 곳이었다.
태조가 남재에게 다른 곳과 바꿀 것을 제의하였으나 남재는 왕릉 예정지에 제가 묻히는 것은 불경이며 후손에게도 중죄가 돌아가게 될 것이므로 불가하다고 대답하자 태조는 불망기를 써 줄 터이니 증빙을 삼으라 하고 불망기를 써 준 뒤 근심을 덜게 되었다는 뜻으로 망우리라고 했다 한다.
태조의 능터에 얽힌 또 다른 이야기로는 무학대사가 양주 회암사로 가기 전에 검암산 아래에 절터를 정하려고 했으나 그날 밤 꿈에 신령이 나타나서 이곳은 아홉 왕릉을 모실 자리라는 계시를 받고 그 자리에 태조를 모시기로 하고 절터를 단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현재 망우리고개는 옛 고개 보다 남쪽에 새로 낸 고갯길이며 옛 고개의 위치는 중앙선의 망우역과 도농역 사이의 기차 터널 윗길이다.
그 산불감시초소를 지나 계속 평이한 등로를 따르니 꼬부랑 소나무와 박달나무라 생각되는 활엽수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256.3봉에 도착을 하는데 특별히 정상을 알리는 표식 하나 없는 무명봉이다.
지나 온 등로를 살펴보니 걸어 온 등로 좌측의 원 등로에는 잡목과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그 무명봉을 지나 몇발자국 걸어가니 또 다시 표식을 확인 할 수 없는 삼각점이 박혀있는데 일반 정상적인 삼각점은 아닌 듯 보인다.
그곳을 지나 빠르게 걸어가니 등로 좌측 나무에 서구동고개라는 글씨가 보여 살펴보니 그저 서울과 구리 및 동화리의 첫글자를 타 붙여 놓은 의미없는 이름이었다.
그곳을 지나 조금 더 걸어 진행을 하니 망우산1보루 설명판이 서 있고 그곳을 지나 망우산1보루 정상으로 오르니 있어야 할 삼각점은 망실되어 보이지 않고 279.5미터의 삼각점 안내판만 덩그런히 그곳에 서 있다.
넓은 정상 공터에는 누군가 세워 둔 작은 돌 두개만이 찬바람을 맞으며 그곳을 지키고 있다.
망우산1보루는 망우산의 보루 중 훼손이 심한 2. 3루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망우산 남쪽 끝 봉우리(해발 280.3미터)에 자리하고 있으며 용마산 보루와 시루봉 보루 일대가 잘 조망된다.
1994년 지표조사에서 고구려 토기편 여러 개가 발견되어 고구려 보루로 추정된다.
헬기장과 군용참호 묘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유적이 많이 파괴되었으나 지금은 헬기장과 참호를 없애고 유적을 돌아 가도록 하는 등산로를 새로 만들어 보루를 보존하고 있다.
279.5미터의 삼각점이 있다는 망우산1보루를 지나 다시 평이한 등로를 타고 빠르게 걸어가니 등로에는 억새로 만든 마대포가 깔려 있어 걷기에 참으로 편안하다.
잠시 후 등로 좌측에 산악기상관측장비를 지나고 조금 더 걸어 진행을 하니 벤취쉼터들이 설치되어 있고 많은 이정표가 붙어 있는 무명안부 갈림사거리에 도착을 한다.
중랑 사거정시장 설명판이 서 있어 잠시 읽어 보고 출발한다.
이정표와 여러가지 설명판들이 설치되어 있는 안부를 지나 계속 걸어가니 눈 앞에 길게 이어지는 계단이 보이는데 등로 좌측으로는 깔딱고개에 570 계단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힘들게 그 계단을 타고 오르다 전망데크가 있는 곳에서 잠시 쉬며 등로 좌측을 살펴보니 구리암사대교가 바로 한강 위로 보이고 그 좌측 위로는 강동대교도 보인다.
그 구리암사대교를 건너면 하남의 거대한 아파트 촌들이 보이고 그 뒤로 천마자맥의 예봉산과 에빈산 그리고 그 우측으로 검단지맥의 검단산과 용마산 줄기가 아름답게 마주보며 한강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풍경이 눈에 선하게 보인다.
그 예봉산과 예빈산 좌측 저 멀리 머리에 하얀 솜이불을 쓰고 있는 천마산도 살펴보고 다시 남아 있는 계단을 타고 걸어 오르니 북쪽으로는 오늘 새벽에 넘어 온 불암산과 그 뒤로 수락산이 아름다운 암봉의 모습으로 멀어지고 있다.
잠시 후 깔딱고개의 570개 계단을 모두 올라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평이한 등로를 따르니 용마산5보루 설명판이 나타나고 곧이어 넓은 헬기장에 도착을 한다.
용마산5보루는 서쪽의 중랑천 일대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용마산 능선에는 7개의 보루가 있다. 이곳 용마산 5보루는 해발 316미터에 위치해 있고 둘레 약 132미터에 내부면적 936평방미터 정도의 크기로 추정된다.
보루 북동쪽 비탈면에서 성벽으로 추정되는 석축 일부가 땅 표면 위로 드러나 있고 보루 내 북쪽에서 고구려의 전형적인 토기 양식인 몸통긴항아리가 깨어진 채 발견되기도 하였다.
용마산 5보루의 헬기장을 출발 해 잠시 걸어 내려가니 좌측에 벤취쉼터 하나가 설치되어 있는 용마산 갈림 삼거리인 318.5봉에 도착을 한다.
그곳에서 잠시 직진으로 아차산 방향을 살펴보니 아차산 넘어 저 멀리 한강과 롯데타워가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하고 그 뒤 저 멀리 청계산으로 이어지는 강남 산군들도 보이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좌측 아차산 가는 등로를 버리고 우측의 용마산 정상을 잠시 다녀 오기로 하고 용마산 방향으로 걸어 내려간다.
헬기장을 지나 우측 등로를 따르니 사적 455호 용마산과 아차산 보루들을 이어주는 보루 연결로 설명판이 서 있고 그 옆으로는 용마산 제2헬기장이라는 이정목도 서 있다.
용마산정상까지 400미터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지나 간이 매점이 있는 안부를 지나 완만하게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봉분이 거의 없는 납작한 묘지 한기가 보이는 319 무명봉을 통과한다.
그 납작 묘지를 지나니 용마산 제3헬기장이라는 이정목을 지나 사적 455호 용마산 4보루(고구려)라는 안내판도 보인다.
그 안내판을 지나자 마자 드넓은 헬기장이 나타나는데 오래 전 산친구들과 시산제를 지냈던 곳이기에 잠시 추억에 젖어 보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아차산일대보루군은 출토유물이나 축성방법 등으로 보아 삼국시대의 유적으로 보이며 고구려가 5세기 후반에 한강 유역을 진압한 후 551년에 신라와 백제에 의해 한강유역을 상실하기까지의 역사를 밝혀줄 수 있는 유적이다.
아차산일대보루군은 아차산보루, 용마산보루, 시루봉보루, 수락산보루, 망우산보루 등 17여개의 보루로 이루어진 유적으로 그 중 일부를 제외한 10여개의 보루가 고구려의 보루로 추청된다.
아차산일대보루군은 중랑천과 아차산, 용마산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데 여기에 존재하는 10여개의 보루는 현재 남한 내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고구려 관련유적으로서 발굴 등을 통해 고구려 군사시설의 면모가 규명되고 있으며 백제나 신라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자료가 부족하여 그동안 연구활동이 부진했던 고구려 관련 고고학적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삼국시대 특히 고구려 국경지대 요새의 구조와 성격, 국경방위체계, 군 편제 등을 밝혀주는 귀중한 역사 자료로서 고구려의 남하과정, 한강유역에서의 대치와 관리방식, 한강을 둘러싼 삼국의 각축과 발전과정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유적이다.
아차 용마산 등산 안내도를 살펴보고 돌담을 지나 빠르게 걸어 내려가니 잠시 후 나무들이 사라진 조망처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등로 좌측 앞을 살펴보니 광진구쪽 도심을 지나 한강이 내려다 보이고 그 바로 뒤에 마천루를 이루고 있는 롯데타워가 군계일확의 높이를 자랑하며 드높게 솟아 있다.
그 우측으로 우면산 지나 관악산으로 이어지는 산군들도 보여 사진 몇장 더 남기고 다시 롯데타우ㅏ 좌측을 살펴보니 용마산을 다녀 와 걸어 진행해야 할 아차산 능선이 하늘금을 만들며 아름답게 펼쳐져 있어 추억 몇장 더 남기고 곧바로 용마산 정상부를 행해 빠르게 출발해 본다.
잠시 가파르게 오르니 운동시설들이 있는 용마산체력장을 지나 금새 용마산 정상에 도착을 하는데 커다란 정상석과 1등 삼각점 그리고 측량기준점이 보인다.
용마봉(348미터)은 서울특별시 광진구 구의동과 중곡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348미터이고 장군봉이라고도 하는데 아차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이며 아차산과 함께 백두대간에서 갈라나온 광주산맥의 끝을 이뤄 예전에는 아차산을 포함해 남행산이라고도 불렀다.
광진구의 동북 경계를 이루며 산지를 형성하고 예로부터 중랑천 지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고구려가 전쟁에 대비해 만든 소규모 요새지인 보루 유적이 있다.
1970년대 들어 서울특별시가 아차산과 용마봉 일대에 아차산공원과 용마공원 및 용마돌산공원 등 도시자연공원을 조성하였다.
산에는 아기장수 전설이 전해지는데 삼국시대에는 장사가 태어나면 가족을 모두 역적으로 몰아 죽이는 때가 있었다고 하는데 백제와 고구려의 경계였던 이곳에서 장사가 될 재목의 아기가 태어났고 이를 걱정하던 부모가 아기를 죽여버렸으며 그 뒤 용마봉에서 용마가 나와 다른 곳으로 날아간 데서 용마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는 조선시대 산 아래에 말 목장이 많아 용마가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용마산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도 한다.
정상에는 해발 높이를 측정하는 기준점과 큰 철탑과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고 주택가와 밀접하므로 인근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된다.
예전에 산중턱에 동양 최대의 석조 채취장이 있던 탓에 미관상 보기가 싫었는데 최근 인공폭포 등을 조성하여 공원화하면서 보완하였다.
산행은 아차산과 연계한 코스가 많은데 구의동에 있는 영화사를 기점으로 팔각정을 거쳐 아차산 정상에 오른 뒤 용마봉을 거쳐 대원외국어고등학교로 내려오는 2시간 30분 코스와 광장동 동의초등학교 옆 주차장을 기점으로 능선을 타고 팔각정과 아차산 정상을 거쳐 용마산 긴고랑체육공원으로 내려오는 코스 그리고 용마산길의 아성빌라와 선진연립을 기점으로 하는 코스가 있다.
잠시 더 주위을 둘러보고 다시 용마산 갈림길로 빠르게 걸어 복귀를 서두른다.
용마산으로 올랐던 등로를 따라 재빨리 갈림삼거리까지 되돌아 나오는데 오를때보다 조금 더 등산객들이 늘어난 모습이다.제법 많은 등산객들과 교행하다 보니 어딘지 모르게 어색함이 묻어 나는데 이것 또한 금새 익숙해지는 시간이었다.그렇게 빠른 발걸음으로 갈림삼거리로 복귀하니 갈림삼거리에는 H-3지점 안내판이 보이고 그곳에서 좌측 등로를 버리고 우측 사면 등로를 타고 아차산 방향으로 진행을 해 본다.
이제부터 지나야 할 아차산의 보루는 고구려에서는 삼국시대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한강유역에 20여 개의 보루를 만들어 남진 정책의 전초기지로 활용하였으며 아차산 일대의 보루는 475년 고구려 장수왕 63년에 한강 유역에 진출한 후 551년 신라와 백제에 의해 물러날 때까지 사용되었다
아차산 4보루도 토기 형태와 목탄의 연대측정 결과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중반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아차산 4보루는 크게 성벽과 건물터로 구성되어 있다
둘레 249미터의 성벽은 지형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바깥 면을 돌로 쌓음과 동시에 안쪽 경사면을 뒷체몸돌과 흙으로 다져 메우는 식으로 만들었고 외부 감시와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유리한 곳에 치를 설치하였다
독특한 구조의 남쪽 이중치는 출입구로 추정되며 고구려 성 쌓기의 전형인 퇴물림 들여쌓기 형식이 잘 나타나고 있으며 성벽 안쪽의 건물 터는 병사들의 생활에 필요한 온돌과 배수로, 저수조 등이 배치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항아리와 명문접시 및 시루 등의 그릇과 투구 찰갑과 창 및 도끼 그리고 화살촉 등의 무기, 낫과 쇠고랑 등의 농기구 및 재갈 등지와 같은 말 갖춤이 발견되었다.
사면 등로를 타고 빠르게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 우측으로 아차산 줄기가 가깝게 다가와 있고 그 뒤로 한강과 롯데타워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잠시 더 걸어 진행을 하니 바위암릉이 나타나고 그곳부터는 길게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그 계단을 타고 걸어 내려간다.
잠시 후 등로 좌측으로는 한강 넘어 천마지맥과 검단지맥 산줄기가 아름답게 조망되고 그 풍경을 구경하며 내려가니 바로 눈 앞 직선 방향으로는 아차산4보루 정상부가 빤히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그 아차산 4보루 우측으로 살펴보니 아차산성쪽 산줄기 넘어 롯데타워가 여전히 자리를 지키며 하늘을 향해 드높게 솟구쳐 오르고 있다.
길게 이어지는 나무계단을 따라 한동안 내려가니 박목월 시인의 청노루라는 시가 적혀있는 안내판을 지나고 서울둘레길 안내판도 살펴본 후 광나루역까지 3.58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서 있는 안부를 통과한다.
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27번 송전탑을 지나고 조금 더 걸어 오르다 등로 우측을 살펴보니 방금 전 다녀 온 용마산 줄기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다시 이어지는 나무계단을 타고 가파르게 오르니 이정표를 지나 아차산4보루 정상의 드넓은 공터에 도착을 한다.
아차산 4보루는 아차산 정상(아차산 3보루)에서 북쪽 진행하는 능선의 최북단 봉우리에 위치하는데 아차산 일대 보루군 유적지 중에서 가장 먼저 발굴조사가 진행된 유적으로 1997~1998년에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고 2007년에서 성벽 복원정비를 위하여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성벽과 주변 지역에 대한 추가 조사를 진행하였다.
성벽의 둘레는 238미터에 내부 면적은 1518입방미터로 아차산 3보루 다음으로 규모가 크며 발굴조사 결과 이중 구조로 된 치를 비롯하여 효율적인 방어를 위한 치 구조물과 석축 성벽 및 내부에 대형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또한 각종 토기류와 무기류, 농공구류, 마구 등 많은 유물들이 수습되어 고구려 군사시설의 구조와 군사들의 생활상을 확인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아차산생태공원에서 등산로를 따라서 약 1시간 정도 산행을 하면 도착 할 수 있으며 경기도 구리시 방향으로는 명빈묘 입구에서 등산로를 따라서 30분 정도 산행을 하면 아차산 4보루에 도착 할 수 있다.
2010년에 아차산 보루 유적 중에서 처음으로 복원 정비가 완료되어 생생한 고구려 보루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 할 수 있다.
보루에 올라서면 서편으로는 용마산, 망우산 자락의 다른 보루군들을 모두 확인 할 수 있고 동쪽으로는 한강과 왕숙천도 한 눈에 내려 다 볼 수 있다.
아차산 4보루 정상부를 지나 걸어 내려가다 등로 우측을 살펴보니 방금 전 올랐다 내려 온 용마산 줄기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어 사진 몇장 더 남겨 본다.
사실 저 용마산은 수락지맥 산줄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 다녀오지 않는 산님들도 있는 듯 보이지만 시간도 충분하고 높이도 아차산보다 높아 다녀오길 잘했다는 생각이다.
특히나 전국적으로 1등 삼각점이 많지 않은데 낮은 높이의 용마산에 측량 기준점과 함께 1등 산각점이 있어 더욱 다녀 오길 잘 했다고 스스로에게 칭찬을 하면서 바라보는 마음이 기쁘기만 하다.
그 아차산 4보루의 공터를 지나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드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가 열리면서 벌거숭이 민둥의 능선이 이어지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아차산 정상부이지만 그 어디에도 아차산 정상부임을 알리는 표식이 없어 아쉽기만 하다.
아차산(287미터)은 서울특별시 광진구와 경기도 구리시에 걸쳐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287미터로서 예전에는 남쪽을 향해 불뚝 솟아오른 산이라 하여 남행산이라고도 하였고 마을사람들은 아끼산, 아키산, 에께산, 엑끼산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경기지 양주조에 보면 화양사(지금의 영화사)가 악계산에 있다고 되어 있으며 현재 아차산의 한자 표기는 阿嵯山, 峨嵯山, 阿且山 등으로 혼용되는데 옛 기록을 보면 삼국사기에는 아차(阿且)와 아단(阿旦) 2가지가 나타나며 조선시대에 쓰여진 고려역사책인 고려사에는 아차(峨嵯)가 처음으로 나타난다.
조선시대에는 봉화산을 포함하여 망우리 공동묘지지역과 용마봉 등 광범위한 지역을 모두 아차산으로 불렀던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이성계의 휘가 단(旦)이기 때문에 이 글자를 신성하게 여겨서 단(旦)이 들어간 이름은 다른 글자로 고치면서 단(旦) 대신 이와 모양이 비슷한 차(且)자로 고쳤는데 이때 아차산도 음은 그대로 두고 글씨를 고쳐 썼다고 한다.
그밖에 산이름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는데 조선 명종 때 점을 잘 치는 것으로 유명한 홍계관이라는 사람이 있었고 명종이 이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 쥐가 들어 있는 궤짝으로 능력을 시험하였는데 그가 숫자를 맞히지 못하자 사형을 명하였다.
그런데 조금 후에 암쥐의 배를 갈라보니 새끼가 들어 있어서 아차하고 사형 중지를 명하였으나 이미 때가 늦어 홍계관이 죽어버렸고 이후 사형집행 장소의 위쪽 산을 아차산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백두대간에서 갈라나온 광주산맥의 끝을 이루며 온달에 대한 전설이 많이 전해져오는데 온달이 가지고 놀았다는 지름 3미터짜리 공기돌바위와 온달샘 등이 있고 아차산성(사적 234)에서 온달이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예로부터 삼국시대의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고려 때는 광나루와 함께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찾았으며 은석사, 범굴사, 영화사 등 여러 사찰이 있었다.
조선 중기까지 일대가 목장으로만 개발되어 인가가 드물고 수풀이 무성하였으며 호랑이와 늑대 같은 많은 야생동물이 살고 있어 임금의 사냥터로 이용되었다.
근대 이후 산기슭 중턱까지 주택이 들어서게 되었고 뛰어난 조망으로 인해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세워졌으며 1970년대 들어 서울특별시가 일대에 아차산공원과 용마공원 및 용마돌산공원 등 도시자연공원을 조성하였고 산자락에 주택가와 쉐라톤워커힐호텔이 들어서 있다.
문화재는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하여 250여 년 동안 각축을 벌였던 아차산성(사적 234), 아차산 봉수대지(서울기념물 15), 신라 문무왕 12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영화사 등이 있으며 그밖에 고구려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보루 유적이 있고 대성암 뒤에는 의상대사가 수련을 했던 곳으로 알려진 천연 암굴 외에 석곽분, 다비터, 강신샘 등 유적이 많다.
구리시 아치울에서는 해마다 온달장군 추모제가 열린다.
산행은 용마봉과 연계한 코스가 많은데 구의동에 있는 영화사를 기점으로 팔각정을 거쳐 아차산 정상에 오른 후 용마봉을 거쳐 대원외국어고등학교로 내려오는 2시간 30분 코스와 광장동 동의초등학교 옆 주차장을 기점으로 능선을 타고 팔각정과 아차산 정상을 거쳐 용마산 긴고랑체육공원으로 내려오는 1시간 50분 코스 및 용마산길의 아성빌라와 선진연립을 기점으로 하는 코스 그리고 워커힐호텔에서 구리시로 넘어가는 검문소 주변 우미내마을의 무료주차장을 기점으로 하는 2시간 코스 등이 있다.
벌거숭이 민둥의 능선 넘어로는 롯데타워가 드높게 솟아 있는 풍경이 바로 눈 앞으로 펼쳐져 있다.
아차산 정상부로 걸어 내려가다 등로 좌측 뒤를 살펴보니 그곳에도 아름다운 한강이 S라인을 그리며 도도하게 흐르고 그 넘어 하남시와 천마지맥 그리고 검단지맥 산줄기가 아련하기만 하다.
약간의 박무가 있지만 생각보다 좋은 조망과 풍경으로 산행의 즐거움을 제대로 느껴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오래 전 매주 이곳에 올라 환상의 야등을 즐기며 야경을 담았던 추억이 있기에 더욱 그립게 다가오는 아차산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아차산 3보루라는 설명판을 지나며 잠시 읽어 본다.아차산3보루는 아차산 줄기의 6개 보루 중 가장 가운데(해발 296미터)에 자리하고 있다.
동남쪽의 아차산 2보루와 한강 이남은 물론 서쪽의 용마산 보루들을 바라볼 수 있는 요충지이다.
성벽 둘레 약 450미터에 내부면적 약 6500 평방미터로 추정되어 아차산 일대의 보루 중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5년 일부 이뤄진 발굴 조사에서 배수로와 여러 개의 건물 기단과 성벽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다른 보루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디딜방아의 볼씨로 추정되는 것이 발견되어 아차산 3보루가 아차산 일원 병사들의 식량지원 기능을 하였으리라 추측되기도 한다.
나머지 구역이 마저 조사된다면 아차산의 다른 보루들과 관련하여 이곳이 어떤 기능을 하였는지 좀 더 분명하게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아차산 3보루를 지나니 우측으로 명품 소나무가 보이고 그 소나무 가지 아래 저 멀리 서울 한폭판과 그 한가운데 보이는 남산이 우뚝하다.
그 남산 한가운데 솟아 있는 남산 타워가 이제는 롯데타워에 치여 낮게만 다가오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제 광나루역까지 2.7 Km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지나 걸어가니 또 다른 명품 소나무가 보이고 그 앞으로 저 멀리 관악산이 박무속에 환하게 웃고 있다.
그 명품 소나무 위로 남산과 그 주변 서울 도심을 살펴보고 조금 더 내려가 등로 우측을 살펴보니 방금 전 다녀 온 용마산을 우측 끝자락에 두고 그 좌측으로 돌아가며 북한산 백운대와 보현봉 능선 그리고 좌측의 비봉능선까지 옛 친구들을 추억하며 다시 한번 사진에 담아 본다.
다시 계속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아차산 5보루 설명판이 보이고 좌측 끝자락에 커다란 돌탑이 보여 그 돌탑으로 향해 본다.아차산5보루는 아차산 6보루에서 남쪽으로 약 250미터 떨어진 작은 봉우리(해발 267.2미터)에 있다.
둘레 약 158미터에 내부면적은 약 1818 평방미터로 추정된다.
이곳에서는 한강 남쪽의 암사동에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등 잠실까지 한 눈에 내려 다 볼 수 있다.
정상부와 연결된 북쪽 비탈면에 석축 일부가 노출되어 훼손되고 있던 것을 흙을 덮어 보존하고 있다.
이곳 정상의 돌무더기는 비교적 최근에 쌓은 것으로서 무너진 성돌을 주워 사용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통일신라시대의 토기조각들이 여러 점 발견되어 삼국시대 보루를 파괴하고 통일신라시대 고분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곳 아차산 5보루에서도 등로 좌측 뒤로 보이는 환상의 S라인으로 이뤄진 한강과 하남시 그리고 그 뒤로 펼쳐져 있는 천마지맥과 검단지맥 산줄기들을 찾아 본다.
모두 올라 이름들을 불러 준 산들이기에 이제서야 조금씩 그 산줄기의 이름과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을 정도 되었으니 언제나 완벽한 조망을 그려볼 수 있을지 가능도 할 수 없는 시간이다.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고 아름다운 우리강산 우리 나라 대한민국이다.
눈을 돌려 남서쪽을 살펴보니 많은 한강 다리들이 보이고 아파트 단지들 넘어 군계일학의 롯데타워가 솟아 있다.
그 우측으로는 이 산객이 살고 있는 우면산과 관악산 줄기가 박무속에 존재감을 확실히 알리고 있기도 하다.
그렇게 한동안 그 아차산 5보루에서 주위 조망과 풍경을 즐긴 후 되돌아 내려오는데 서쪽으로 또 다른 그림들이 펼쳐져 있어 자꾸만 발목을 잡고 늘어진다.
우측 끝자락에 남산과 남산타워가 보이고 그 좌측으로 서울시내가 환하게 보이는데 다만 한낮의 기온이 오르면서 박무가 껴 조금은 아쉬운 풍경을 보이고 있다.
그 좌측 저 멀리에는 한강 넘어 관악산 줄기가 아름답고 늘 오르며 걸었던 그 속살을 생각하며 피식 웃어 보는 시간도 가져 본다.
이제 이런 풍경과 조망도 오늘 산행에서는 마지막 이라는 생각을 하니 아쉬움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그 아쉬움을 떨치고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 정상 마루금으로 복귀해 광나루 방향으로 빠르게 걸어 진행을 해 본다.
광나루역까지 2.33 kM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지나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비닐 천막을 치고 영업을 하고 있는 간이 매점이 보이고 그곳에 들어 탁배기를 들고 있는 등산객들이 보인다.
그 간이 매점을 지나니 아차산 1보루 설명판이 나타나고 잠시 발걸음 멈추고 읽어보고 출발한다.
아차산1보루는 아차산 5보루에서 남쪽으로 200미터 떨어진 봉우리(해발 250미터)에 만들어진 것이다.
1994년 지표조사에서 고구려 토기 조각이 여러 개 발견되었고 보루 동쪽과 남쪽 일부에서 성벽이 확인된다.
유적의 존재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남쪽 성벽 일부를 파괴하고 봉우리 정상을 지나는 등산로가 만들어지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보루 바깥을 지나도록 새로운 길을 만들어 유적을 보존하고 있다.
이곳 아차산 1보루에서는 남쪽과 남동쪽으로 아차산성과 풍납토성 및 몽촌토성 자리를 한 눈에 볼 수 있고 북동쪽으로는 아차산 5보루를 볼 수 있다.
그곳 등로 우측으로 가 방금 전 내려 온 아차산 5보루를 살펴보고 그 우측 뒤로 한강과 천마지맥 그리고 검단지맥 산줄기를 조망하고 내려가니 아차산1보루 설명판이 다시 보인다.
그 아차산 1보루를 지나 잠시 더 걸어 진행을 하니 아차산 해맞이 광장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도 역시 많은 등산객들로 붐비고 있다.
아차산에 대한 유래는 옛날에 홍계관이라는 점쟁이가 점을 잘 본다는 소문이 있어서 명종이 불러서 시험을 해 보려고 할 때 여기 상자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아 맞히라는 문제를 냈고 홍계관은 잠시 생각하더니 쥐 다섯 마리가 들어있다고 얘기하자 왕이 상자를 열어보니 여기에는 쥐가 한 마리 들어있었다.
그걸 본 왕은 사람을 속인 죄로 홍계관을 산(아차산)에서 처형하라고 명령한 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쥐를 갈라보았더니 뱃속에는 새끼 4마리가 들어있자 왕은 후회를 하고 아차 내가 잘못 알았구나하고 후회했다고 해서 하인을 시켜서 처형하지 말라고 했으며 하인이 산으로 가서 처형하지 말라는 뜻으로 손을 흔들었지만 그걸 본 처형수는 빨리 처형하라는 소리인 줄 알고는 처형해 버려 아차 했다는 이야기에서 아차산이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아차산의 이름이 이미 있은 후에 홍계관의 이야기를 삽입한 경우이기 때문에 신빙성은 많이 떨어진다.
그외에도 온달의 이야기나 이성계가 이단으로 개명한 덕에 피휘의 일환으로 아단산에서 아차산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아직까지 정확한 유래는 나오지 않고 있다.
사진 몇장 남기고 아차산에서 바라본 서울 풍경을 살펴 본 후 빠르게 걸어 내려가니 광나루 역까지 이제 1.94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도 통과한다.
사각 나무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등로는 다시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로 변하고 곧이어 아차산성까지 328미터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보이는 안부를 통과한다.
안부를 지나니 등로 좌측으로 아차산성을 알리는 설명판들이 계속 나타나는데 아직도 발굴중인지 그곳 아차산성 방향으로는 출입금지 표시가 되어 있다.
아차산성은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과 구의동에 걸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1973년 5월 25일 사적 제234호로 지정되었으며 지정면적 10만 3375입방미터이며 아단성, 장한성, 광장성이라고도 한다.
해발고도 200미터 산정에서 시작해 동남쪽으로 한강을 향하여 완만하게 경사진 산 중턱 위쪽을 둘러서 둘레 약 1000미터 이상의 성벽이 구축되어 있으며 동쪽과 서쪽, 남쪽에 성문지가 남아 있다.
산성의 형식은 테뫼식에 속하나 규모가 매우 크고 성안에 작은 계곡도 있어 포곡식으로도 보이는데 성벽 구조는 삭토법으로 대체의 형태를 축조한 뒤 그 윗부분을 따라 돌아가면서 낮은 석루를 쌓은 듯한데 지금은 성벽들이 무너져 토석혼축과 같은 모습이다.
성벽 높이는 외부에서 보면 평균 10미터 정도 되며 내부에서는 1에서 2미터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475년 백제의 개로왕(재위 455∼475)이 백제의 수도 한성을 포위한 3만여 명의 고구려군과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자 아들 문주를 남쪽으로 피신시킨 뒤 자신은 이 산성 밑에서 고구려군에게 잡혀 살해되었다.
이로써 백제는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하게 되었고 또 고구려 평원왕(재위 559∼590)의 사위 온달장군이 죽령 이북의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려고 신라군과 싸우다가 아차산성 아래에서 죽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백제 초기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 산성은 고구려가 잠시 차지했다가 신라 수중에 들어가 신라와 고구려의 한강유역 쟁탈전 때 싸움터가 된 삼국시대의 중요한 요새였다.
좌측에 아차산성을 두고 계속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를 타고 빠르게 걸어 내려가니 등산객들과 산책객들이 점점 더 늘어 나 있다.
잠시 후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등로 우측으로는 만남의 광장과 관리사무소로 내려가는 방향이고 좌측은 계속 능선을 따르는 등로인데 어짜피 잠시 후 다시 만나게 되니 어느 곳을 선택해도 무방하다.
오랫만에 들리다 보니 유적지 발굴로 인해 역사 복원은 되었지만 너무나 많은 곳을 파헤쳐 아쉬움도 남는다.수많은 벤취쉼터들이 거대한 소나무 사이에 설치되어 있는 등로를 따르니 이제 아차산 입구도 그리 멀지 않았음을 직감해 본다.
예전에 야등을 한다고 참으로 많이도 들렸던 아차산인데 지리적으로 너무 멀고 아차산 야등을 좋아하던 산친구들도 떠나고 나니 이곳을 다시 들리기 어려웠는데 수락지맥이란 이름으로 찾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그렇게 걸어 조금 더 내려가니 드디어 아차산 들머리에 도착을 하고 우측 가장자리 위에 설치되어 있는 이정석에 올라 추억 한장씩 남겨 본다.
실질적인 수락지맥 산행을 마무리 하는 시간으로 두물머리인 중랑천과 한강이 합쳐지는 합수점까지 가려면 아직도 먼 거리이지만 그 등로는 완전히 개발되어 마루금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을만큼 변했을 뿐만 아니라 합수점까지 갈 수도 없기에 대부분 광나루역에서 마무리 하기에 이 산객도 광나루역에서 실질적인 수락지맥 산행을 마무리 하기로 한다.
아차산 들머리 앞에 보이는 도로를 타고 조금 걸어 내려가 아차산생태공원 옆 소로를 따른다.아차산 생태공원은 서울시 광진구 영화사로 일대에 조성된 생태공원으로 서울특별시에서 공원녹지확충 5개년 계획에 따라 조성된 아차산생태공원은 시민과 학생들에게 자연을 접할 수 있는 기회와 자연생태계 학습장 및 체험공간을제공하고 있다.
또한 도시생태계의 생물다양성을 증진시키고 시민들에게 건강하고 건전한녹지공간의 쉼터를 제공함으로써 도시환경의 질적 향상에 기여하고 있다.
10여년 전에 조성된 생태공원은 한겨울이라 그런지 설렁한 분위기만 보이고 있다.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도로 좌측으로 식당들이 보이고 곧이어 서울광장초등학교 앞을 지나는데 벽면에 그려진 눈썰매를 타고 신나게 달리는 아이들을 그린 그림이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시간이다.
이곳 광진구 아차산 자락에는 또한 영화사란 절이 있는데 영화사는 서울시 광진구 구의동 아차산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사암으로 무릇 일반인들이 보아도 명당자리인 듯싶은 곳을 찾아가보면 거의 어김없이 사찰이 자리하고 있어 굳이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산세와 지세 등을 따지지 않더라도 이 점은 틀리지 않을만큼 옛 스님들이 선견지명이 있었지 않았나 싶다.
서울의 동쪽 끝 아차산 자락에도 이러한 예상은 틀리지 않는데 바로 영화사가 그러한 곳으로 소나무향 그윽하고 강내음 바람타고 올라오는 아차산 남단 중턱에 자리한 영화사는 672년(신라 문무왕 12)에 화엄종을 개창한 의상대사가 화양사란 이름으로 처음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절은 역사적으로 볼 때 몇 차례 옮겨졌었다.
조선 태조 4년(1395년)에는 이 절의 등불이 궁성에까지 비친다고 하여 산 아래 용마산 기슭 군자봉에 옮겨 짓게 하였다가 1907년에 이르러서야 지금 자리로 다시 옮겨오면서 비로소 영화사라 한 것이다.
영화사에는 거대한 미륵석불입상이 미륵전에 모셔져 있는데 이 미륵부처님은 세조가 이곳에서 기도하여 지병을 치유하였다는 영험있는 부처님으로 그래서인지 요즈음도 이 영험한 미륵불에게 기도하기 위해 대학입시 때나 공무원 시험 등이 있을 때면 백일기도를 정성스럽게 올려 합격을 기원하는 불자들이 많이 찾아온다.
영화사에 들어서면 4OO년이나 된 느티나무가 먼저 멀리서 반기며 또한 사찰 주위는 아름드리나무와 무성한 숲으로 둘러싸여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잘 갖추고 있어 영화사는 인근 주민들의 마음의 평정을 찾는 안식처로도 많은 공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 중학교를 지나 걸어가니 금새 오늘 산행 날머리인 광나루역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며 3년 가까이 걸려 수락지맥 산행을 깨끗하게 마무리 해 본다.
광나루역 1번 출구에서 사진 한장 남기고 주위 음식점을 찾아 간단히 마무리 의식을 한 후 공작산 친구와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아쉬운 작별을 한다.
예전에 야등을 위해 들리면서 자주 이용을 했던 광나루역이 있는 광나루는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에 있었던 나루터로서 양진, 광장, 광진, 광진도 등의 명칭으로도 불리었으며 진취락을 형성하였던 곳이며 한강의 중하류에 위치한 광나루는 교통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서울에서 부산까지 연결되는 영남로의 주된 간선로는 아니었으나 부산으로 향하는 도로의 길목에 위치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파발로가 지나서 광나루의 교통상 기능은 지속적으로 중요시되었다.
광진원이 광나루 북쪽 언덕에 위치하였으며 도승이 있어 사람들의 내왕을 조사하기도 하였고 당시 좌도수참전운판관이 겸직으로 이 지역의 조운을 관장하였을 정도로 광나루는 서울 주변의 중요한 나루터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북쪽에는 백제 초기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등과 연결되는 아차산성이 있으며 삼국시대의 서울에서 부산간 교통로도 이 지역을 지나고 있어 광나루는 고대부터 교통로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는 광진교와 천호대교가 건설되어 강북과 강남을 연결해주므로 나루터의 기능은 상실하였으나 3번국도와 강변도로가 지나고 있어 여전히 교통이 좋은 지역이다.
조선시대에는 양주목에 속하였으나 1895년 행정단위의 개혁에 의하여 한성부 양주군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고양군 독도면에 속하였다가 1949년 면 전체가 서울로 편입됨에 따라 성동구에 1995년에는 분구에 따라 광진구에 속하게 되었다.
간단히 불둑배기 하나 시켜 놓고 소주 한잔씩 나누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조만간 다시 만날 약속을 하고 아쉬운 작별을 하고 지하철을 이용해 조금 이른 시간에 집으로 돌아 온다.한강까지 가지 못한 아쉬움은 남지만 늘 보고 만나는 한강이기에 이것만으로도 만족한 시간이다.
한강은 아리수와 한수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남한에서 가장 많은 수량을 갖는 강으로 유역면적은 2만 6018 킬로평방미터로 한반도에서 압록강과 두만강 다음으로 넓고 압록강과 두만강, 낙동강 다음으로 긴데 한강의 본류는 경기도 양평군의 양수리에서 비슷한 크기의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서 이루어진다.
남한강은 태백시의 금대봉 계곡에서 발원해 골지천과 오대천을 거쳐 본류를 이루는데 강원도와 경기도의 경계에서 섬강 등의 주요지류와 합류한다.
북한강은 강원도 옥밭봉에서 발원해 금강천과 사동천 등과 합류하여 본류를 이루며 춘천에서 소양강이 가평 남쪽에서 홍천강 등의 주요지류와 합류한다.
양수리에서 시작되는 한강 본류는 왕숙천, 탄천, 중랑천, 안양천, 굴포천 등의 지류를 합치며 하구에서 임진강과 만나 경기만에 흘러 든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한번 찾아 가능하면 중랑천이 한강과 합류되는 곳으로 방향을 잡아 천천히 걸어 볼 기회가 잇기를 기대도 해 본다.
이제 이틀 정도 잡무를 정리하고 이번주 후반에는 순천으로 내려가 계획했던 여수지맥 두구간을 무탈하게 올라 올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올 한해도 무탈하게 지나감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산님들 모두에게도 의미있는 한해가 되길 바라면서 산행후기를 정리해 본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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