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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맥산행(완료)/영월지맥(한강·완)

영월지맥 제3구간 전재에서 곧은치까지 산행후기

by 칠갑산 사랑 2017.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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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강원도 횡성군과 원주시 영월지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2017년 04월 23일 (일요일 당일 산행)

산행날씨 : 맑고 화창하였지만 약간의 박무와 미세먼지로 시야가 제한 받았고 무더위를 느꼈던 날씨

산행온도 영상 08도에서 영상 23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전재터널-전재(540미터)-낙엽송 등로-구진농장 철조망-백덕지맥 조망-헬기장(881봉)-매화산(1085봉, 정상석과 삼각점)-암봉 우회등로-

                 급경사 내리막 등로-폐헬기장-수래너미재-966.8 무명봉-1002 무명봉-어렴재-천지봉(1086.5봉, 삼각점과 정상판)-세렴재-1053 암봉-

                 전망바위-쓰러진 고사목 안부-1109 무명봉-1114 바위봉-바위봉 우회-1131봉 휴식-산죽 밭-폐헬기장-1064 바위봉 낙석지대-배넘이재-

                 노루귀 군락지-치악산 전위봉(1220봉)-출입금지 안내판-부곡탐방지원센타(4.5 Km) 이정표와 나무계단-치악산(비로봉 1288봉, 돌탑들과

                 정상석 및 삼각점)-이정표(상원사 10.5 Km와 계곡길 0.3 Km, 사다리병창길 0.1 Km)-계단 하산길-산불감시초소 갈림 삼거리

                 이정표(상원사 10.2 Km와 입석사 2.2 Km, 비로봉 0.3 Km, 구룡사 4.7 Km와 세렴폭포 2.5 Km)-계단 오르막 등로-통나무계단-헬기장-

                 쥐너미재와 쥐넘이재 전망대-이정표(상원사 9.6 Km와 입석사 1.6 Km)-황골삼거리(입석사 갈림삼거리) 이정표(성남공원지킴터 14.4 Km와

                 남대봉 8.5 Km, 비로봉 1.3 Km, 입석사 1.2 Km)-산죽 등로-이정표(상원사 8.4 Km, 비로봉 2.1 Km)-공터 이정목(곧은재 2.1 Km,

                 비로봉 2.7 Km)-원통재-이정표(상원사 7.4 Km, 비로봉 3.1 Km)-이정표(상원사 7.1 Km과 향로봉 2.5 Km, 비로봉 3.4 Km)-

                 이정표(상원사 6.8 Km, 비로봉 3.7 Km)-971.2 삼각점봉-이정표(상원사 6.2 Km과 향로봉 1.6 Km, 비로봉 4.3 Km)-헬기장-통나무 하산 등로-

                 곧은치(곧은재, 해발 860미터, 부곡공원지킴터와 곧은재공원지킴터 갈림 사거리)-영월지맥 산행종료-이정목(곧은재 0.1 Km, 곧은재탐방

                 지원센타 2.1 Km)-이정목(곧은재 0.6 Km, 곧은재탐방지원센타 1.6 Km)-주막거리쉼터-이정표(곧은재 1.1 Km, 곧은재공원지킴터 1.1  Km)-

                 이정표(곧은재 1.5 Km, 곧은재공원지킴터 0.7 Km)-곧은재탐방지원센타-이정표(곧은재 2.2 Km)-이정표(관음사와 곧은재탐방로)-산행종료-

                  신월랑버스정류장까지 도보-산행종료

산행거리 : 약 19.68 Km (영월지맥 산행 약 16.20 Km와 접속구간으로 전재터널에서 전재까지 0.50 Km 및 곧은재에서 곧은재탐방지원센타까지 2.2 Km,

                 스마트 폰의 GPX 기준)

산행시간 : 초여름같은 무더위와 어제 장거리 산행의 여파로 무척 힘들게 진행하여 09간 08분 (07시 33부터 16시 42분까)

교통편 : 07:03 횡성 구 축협 앞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2-2 안흥 수동행 시내버스로 전재터널까지 이동

             17:10 산행 후 신월랑버스정류소에서 8번 원주 시내버스로 원주시외버스터미널까지 이동

             17:50 원주에서 횡성거쳐 춘천가는 시외버스로 횡성 시외버스터미널까지 이동

             18:25 횡성공용주차장에서 애마 회수해 목욕탕에서 샤워

             20:50 애마로 무탈하게 귀가

영월지맥이란 ???
영월지맥이란 한강기맥 상에 있는 삼계봉(1065봉)에서 남동쪽으로 분기한 산줄기가 태기산(1261봉), 덕고산(705봉), 봉화산(670봉), 풍취산(699봉), 매화산(1085봉), 치악산 비로봉(1288봉), 향로봉(1043봉), 남대봉(1182봉), 감악산(954봉), 감악봉(886봉), 석기암(906봉), 용두산(871봉), 왕박산(598봉), 가창산(820봉), 삼태산(876봉), 국지산(626봉), 영월의 태화산(1027봉)을 거쳐 남한강에서 가라 앉는 산줄기를 말하며 삼계봉(1065봉)은 홍천군, 평창군, 횡성군 등 3개 군이 만나고 홍천강, 평창강, 섬강 등 세 강이 갈리는 곳이나 이름이 없어 신산경표 저자 박성태님이 종주한 후 셋의 경계가 되는 봉우리란 뜻으로 삼계봉으로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는 설명이 보인다.

신산경표 저자 박성태님이 영월지맥과 춘천지맥을 종주한 후 지맥이 갈리는 한강기맥의 청량봉에서 장곡현, 구목령, 삼계봉 구간 11 Km를 합하여 약 272여 Km를 영춘지맥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산객은 분기점에서 시작하여 강이나 바다로 그 맥이 다하는 방향으로 진행을 했기에 이 영춘지맥 산행도 춘천지맥과 영월지맥으로 분리하여 별도로 진행하도록 한다.
이 영춘지맥은 지맥중에서 가장 긴 지맥이다.





오랫만에 살아 숨쉬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거친 호흡을 느꼈던 치악산에서의 멋진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어제 31 Km가 넘는 거리를 조금은 빠르게 진행을 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애마를 회수하다 보니 산행보다 애마 회수하는데 더 많은 신경을 쓰고 또한 포장된 도로를 많이 걷다보니 두 다리에 느껴지는 무게감이 다르지만 오늘 아침 일어나 보니 생각보다 몸 상태가 좋아 즐거운 산행을 기대해 본다.

새벽 일찍 잠에서 깨어 김밥집에서 순두부로 아침을 먹고 밥 한줄 사서 어제 새벽에 출발하기 전 옆지기가 준비해준 빵과 과일 그리고 음료수와 함께 배낭속에 넣은 후 애마를 횡성공용주차장 한쪽에 잘 주차를 시킨다.

애마를 주차시킨 후 어제 확인해 둔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횡성 구 축협 시내버스터미널로 가니 아침 6시 40여분이 지나는데 아침 햇살은 벌써 머리 위로 떠올라 온 세상을 밝히고 있다.

잠시 기다리니 2-2번 수동행 안흥버스가 도착을 하고 기사분에게 전재터널 지나자 마자 내려줄 것을 요청하니 자주 있는 일처럼 알았다며 쉽게 승낙을 한다.

생각보다 빠른 아침 7시 30여분에 전재터널을 지나자 마자 작은 공터가 있는 곳에 정확하게 하차를 하고 좌측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500여미터 걸어 오르니 금새 어제 힘들게 내려온 마루금인 전재정상에 도착을 해 산행 준비 후 사진 한장 남기고 곧바로 출발하는 시간이다.

오늘 하루도 무덥겠지만 무탈하게 기획하고 있는 곧은치까지 완주할 수 있도록 마음으로 빌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수레너미재를 지나 계속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따라 진행하는 시간은 참으로 어렵고 고된 시간이었다.

어제 30여 Km가 넘는 산행 후 이틀 연속 산행한다는 것이 예전엔 몰랐는데 오늘 느낌은 몸을 조금 더 잘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과 너무 무리하지 않고 진행해야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몇개의 1000미터가 넘는 봉우리를 넘고 넘어 드디어 치악산 비로봉 정상에 도착을 했는데 부곡탐방지원센타 방향으로는 경방기간이라 출입을 금지한다는 플랭카드를 설치하여 출입을 원천 봉쇄하고 있다.

특히나 공단 직원 2명이 올라 와 오늘 이 플랭카드를 새로 설치를 하였다고 하니 난감해 하는데 빨리 넘어오라고 하여 조심스럽게 그곳 치악산 정상 비로봉에서의 출입금지 구간 산행은 일단락되었다.

잠시 후 북동쪽으로 서 있는 돌탑으로 내려가 제일 먼저 오늘 이 산객이 걸어 온 매화산과 천지봉 방향을 살펴보니 저 멀리 봄으로도 당당하게 서 있는 지나 온 영월지맥 마루금이 참으로 고생하였다며 반겨주고 언제 다시 만날 수 있느냐며 아쉬운 헤어짐의 작별을 고한다.

이제 연 이틀 산행의 종착지도 얼마 남지 않았기에 조금 더 힘을 내며 무탈한 산행을 빌어 보지만 역시나 생각지도 못했던 경방기간 출입금지라는 시기적인 문제로 조금은 머리가 아파오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횡성에서 하룻밤 잘 묵고 새벽같이 일어나 일찍 문을 연 김밥집에서 아침식사와 점심대용인 김밥 한줄을 사서 횡성 공용주차장에 애마를 주차시킨 후 천천히 걸어 횡성 구 축협 앞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전재터널을 통과하는 버스 시간표와 버스 번호를 확인하니 가장 먼저 출발하는 시내버스는 안흥(2-3)방향의 아침 7시 3분에 출발하는 수동행 버스였다.

약간은 쌀쌀한 바람에 방풍 자켓을 꺼내 입고 버스를 기다리니 6시 55분쯤 버스가 들어오고 다시 한번 기사님에게 확인한 후 오르니 이 산객을 포함해 달랑 3명의 승객이 전부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렇게 시내버스인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산행 들머리와 산행 후 날머리에서 대중교통인 버스를 이용하여 산행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일요일 아침 일찍이라 그런지 특별히 막히는 도로도 없고 타고 내리는 승객도 많지 않으니 각 정류장마다 서지도 않으며 조금은 빠르게 달리고 달려 전재터널 바로 직전 근처에서 꼬불꼬불 구도로를 달리던 버스가 가로막은 전재 정상으로 가지 못하고 새로 뚫린 전재터널로 진입을 해 터널을 통과하자 마자 우측에 있는 좁은 공간 앞에서 이 산객을 내려주고 곧바로 출발한다.

사간을 보니 정확히 30여분이 걸려 7시 33분에 하차를 하고 좌측으로 보이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전재 정상방향으로 오르니 어제 오후에 내려갔던 거리보다 훨씬 단축되어 즐거운 마음으로 산행을 시작하는 시간이다.


잠시 터널 위쪽으로 오르니 안흥리로 이어지는 2차선 구 도로와 만나고 그 옆으로는 민가들이 보이는데 강아지 몇마리가 이방인의 출현에 새벽을 깨우고 있다.

2 차선 구 도로를 따라 좌측 전재 정상방향으로 오르니 도로 우측으로 삼마농원을 지나 곧바로 전재정상이 눈앞인데 도로 좌측 저 멀리 오늘 올라야 할 매화산 정상부가 갈라진 바위를 좌측에 두고 드높게 솟아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 온다.

전재(해발540미터)는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안흥리와 우천면 오원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1917년 발행된 지형도에는 증치라 기재되어 있다고 하는데 42번 구 국도가 있지만 고개마루 정상에서 출입통제하여 바리게이트를 설치해 차량통행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전재에서 우측방향으로는 안흥면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는데 아래로 안흥찐빵으로 유명해진 안흥면 소재지가 있고 도로 좌측편에는 교통 표지판과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으며 옛날에는 그 고개가 워낙 높고 험하여 지나가는 소장수를 노리는 산적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는 전재정상입니다라는 입간판 뒷쪽 능선 방향이 오늘 산행 들머리이다.


전재정상에서 횡성한우축협 입간판 뒤로 오르니 초반부터 로프가 설치되어 출입을 막고 있으며 오르자마자 비법정탐방로 출입제한 안내판이 계속 눈에 들어 와 산행하기 참으로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래도 그 안내판들을 뚫고 오르니 철조망이 보이지만 옆으로 우회하여 통과할 수 있고 주능선에 도착하니 50여미터 간격으로 경고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으나 진행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낙엽송 구간을 만나 부드럽게 진행되고 잠시 후 좌측 구진종합농산 축사가 보이는 곳 안부를 지나 조금 더 걸어 진행을 하니 우측으로 600봉이 보여 잠시 다녀 온다.

600봉은 소나무와 진달래 나무가 뒤엉켜 무질서하여 어렵게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낙엽송 방향으로 뒤돌아 내려온다.


잠시 낙엽송 구간으로 뒤돌아 내려 와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를 따르니 내리막 등로에 막 피어나는 고사리가 많이 눈에 띄어 오늘 처음으로 한주먹의 고사리를 뜯어 배낭에 넣고 출발한다.

계속 이어지는 낙엽송 아래 부드러운 솔갈비를 걸으며 진행하니 생각보다 두 다리에 전해오는 느낌이 좋아 오늘 산행 역시 좋은 예감으로 시작하는 아침이다.

하지만 지독한 멧돼지들의 식흔으로 인해 등줄기에서 벌써 땀이 흐르기 시작하고 멋진 소나무와 좌측에 농장지대를 바라보며 걸어가니 금새 구진종합농산이 내려다 보이는 초지 경계 등로에 도착을 해 아래쪽으로 펼쳐진 구진종합농산을 살펴본다.

이 산객이 꿈꾸는 노후의 삶이기에 부러움과 동경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풍경이다.


이제부터는 한동안 등로 좌측에 구진종합농산 철조망을 두고 걸어 올라야 하는 등로이다.

잠시 더 올라 구진종합농산 건물과 초지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뒤돌아 보니 어제 오후에 참으로 어렵게 내려 온 풍취산과 마지막 647봉이 바로 코 앞에 우뚝 솟아 있는 풍경이 참으로 아름답게 다가온다.

다시 한동안 진달래와 소나무 등로를 번갈아 타며 이마에 땀방울이 흐를쯤 제법 고도를 높인 지점에서 등로 좌측을 살펴보니 저 멀리 백덕지맥의 사자산과 백덕산이 보이고 그 앞으로 삿갓봉 그리고 우측 남쪽으로는 옆지기와 고운 추억을 남겼던 구봉대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조만간 오르고 싶은 산줄기이기에 저곳에 올라 오늘을 추억하는 시간은 또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는 시간이다.


약간의 박무는 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좋은 조망에 힘든 산행을 이겨내며 오르니 등로 좌측에서는 여전히 삿갓봉과 백덕지맥 마루금이 부르고 그렇게 많은 땀방울들을 솟아내다 보니 어느덧 좌측의 구진종합농산 철조망과 헤어져 진달래 꽃길로 접어 든다.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이제 한겨울 앙상한 활엽수 나뭇가지들만 보이는 삭막한 등로를 따라 계속 오름짓을 하니 이제 이곳은 봄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아직도 한겨울 동면에 빠진 철쭉 군락지를 통과한다.

그렇게 조금 더 오르니 분홍빛 진달래는 막 피어나기 시작하고 그 진달래꽃의 환영을 받으며 조금 더 오르니 드디어 881미터의 헬기장에 도착을 해 이제 빤히 올려다 보이는 매화산 정상부를 살펴본다.


이곳 헬기장에서는 매화산 방향 이외에는 잡목으로 가려 조망이 없기에 조금은 아쉬움이 남지만 그래도 그 잡목 위로 저 멀리 동쪽으로 백덕지맥 산줄기가 머리를 내밀고 있어 사진에 어렵게 담아 본다.

다시 한겨울 동면을 하듯 변화가 없는 낙엽진 활엽수 등로를 따라 나즈막하게 내려가 안주를 지나고 다시 완만하게 오르니 이곳은 이제서야 생강나무에서 노란 생강꽃을 피우기 시작하고 등로 좌측 앞으로는 잡목 사이로 매화산 정상부의 바위 2개가 빤히 올려다 보인다.

다시 월동중인 철쭉 군락지를 지나 오르니 등로 좌측 앞으로 다음 구간 진행해야 할 영월지맥의 치악산 남대봉 줄기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그 남대봉 우측 저 멀리에는 조만간 올라야 할 백운지맥의 백운산이 희미한 박무속에 뚜렷하게 솟아 있다.


그렇게 잡목 사이로 주위 조망을 즐기며 진행을 하니 허기가 지기 시작하고 양지바른 작은 공터에 앉아 준비한 김밥으로 허기를 달래본다.

다시 아침식사 후 오르니 이제는 등로에 노란 제비꽃과 양지꽃이 지천으로 널려있어 발걸음을 옮기기가 미안할 정도이다.

약간의 바위지대를 지나 오르니 금새 매화산 정상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정상석과 삼각점을 사진에 담는데 주위를 살펴보니 매화산 정상부에는 가족 나들이를 나온 할미꽃 가족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매화산(1085봉)는 강원도 횡성군 우천면과 안흥면 및 원주시 소초면의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해발고도는 1085미터로서 차령산맥에 딸린 산으로 치악산(비로봉 1228봉), 남대봉(1182봉), 배향산(808봉), 삿갓봉(1030봉) 등이 있다.

북쪽 기슭에는 오원저수지가 있으며 남쪽 비탈면은 주천강의 발원지이고 서쪽 기슭에는 구룡사와 구룡폭포 등이 있다.

옛날에 이 산에는 가난한 농부가 늙은 부모를 모시고 나무장사를 하며 살았다고 하며 하루는 나무하러 갔다가 이상한 새를 만나서 쫓아다니다 날이 어두워져 산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자다가 목이 말라서 물을 먹었다고 하니 이상한 새가 필경 봉황일 것이라는 뜻에서 물을 마신 곳을 봉담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다음날 이 새가 또 나타나 자꾸 쫓아가다 한곳에 이르니 꽃이 활짝 핀 매화나무 밭에 이르렀는데 이에 이곳을 매화산이라고 했다고 하며 그래도 새가 계속 따라오라고 하는 것 같아서 계속 따라가니 새는 안보이고 신선들이 앉아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신선들이 바둑을 두던 자리를 신선봉이라 하며 바둑 두는 것을 보고 있던 농부가 신선들이 없어지자 자신도 집에 가려고 하자 손에 들고 있던 도끼자루가 썩었다고 하고 집에 와 보니 자신이 죽은 줄 알고 가족들은 삼 년째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고 한다.

식구들을 이해시키고 곰곰이 생각하니 새덕이라는 벌판을 지나서 매화산을 거쳐서 신선봉을 갔다 온 것이었다.

새덕은 새의 덕으로 신선을 만나 삼 년을 굶었어도 죽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조선지지자료에는 우천면 오원리에 있는 것으로 소개하고 매지산이라는 한글 표기를 하고 있다.

잠시 매화산 정상에서 주위를 살펴보지만 앞으로 진행해야 할 방향으로 치악산 비로봉과 남대봉 방향 그리고 북쪽 잡목 사이로 영동고속도로가 내려다 보일 뿐이다.

잡목으로 조망을 즐길 수 없어 조금은 아쉬운 순간이었다.


앞으로 진행해야 할 서쪽의 치악산 비로봉을 살펴보니 이제 제법 가깝게 자리를 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저곳을 가기 위해서는 좌측으로 빙 돌아 1000미터 이상의 봉우리를 수없이 넘어 가야 하기 때문에 체력적으로도 힘이 들고 또한 약간의 지루하게 느껴지는 구간이기도 하다.

그래도 늘 느끼는 것은 보이면 쉽지 보이지 않는 봉우리가 무섭다는 생각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본다.

 

매화산을 내려가니 곧바로 거대한 암봉이 앞을 가로막고 그 암봉을 우회하여 내려가니 계속 이어지는 바위 암봉들이 줄지어 등로를 막고 있다.

그 바위들을 우회하며 조심해 내려가니 이제는 낭떨어지처럼 느껴지는 가파른 내리막 급경사가 이어지고 아주 조심하며 한발 두발 내려가 보지만 약간의 짧은 알바도 경험을 한다.

참으로 힘들게 내려가는 급경사 하산 등로이다 보니 한겨울 눈이 많이 쌓여 있거나 여름철 비가 내리는 계절에는 무척 위험할 것 같다는 느낌으로 조심하며 내려가 보는 시간이다.


그렇게 한동안 조심하며 급경사 내리막 등로를 내려가니 이제부터는 다시 분홍빛 진달래가 막 피어나기 시작하며 이 산객을 반겨 준다.

진달래 꽃길을 내려가니 평이한 활엽수 지대가 보이는가 싶더니 금새 연두빛 봄빛으로 갈아 입는 낙엽송 지대를 만나 여유를 가져 본다.

평이한 등로를 타고 조금은 빠르게 걸어가니 깨진 보도블럭들이 보이더니 금새 754미터의 폐헬기장에 도착을 하는데 빛바랜 억새들만이 정상을 지키고 있다.


헬기장을 지나 완만하게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거대한 거목 한그루가 서 있는 수레너미재에 도착을 해 조선시대의 이방원을 생각해 본다.

수레너미고개(해발706미터)횡성군 강림면 강림리 수레너미 마을에서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를 잇는 고개로 횡성쪽 아래에는 수레너미 마을이 있고 거대한 노거수가 있으며 양쪽 등로는 뚜렸하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다닌 흔적이 없을 정도로 사라지는 고갯마루처럼 보인

원래 고개이름은 수리재인데 강림과 통하는 옛길로 조선시대 태종 이방원이 스승인 운곡 원천석이 있던 각림사라는 절을 찿아 강림으로 갈 때 수레를 타고 넘었다고 하여 유래 하였다.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와 통하며 각림사는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강림면의 지명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각림사에 대ㅔ한 자료를 백과사전에서 찾아 보면 창건연대는 미상으로 조선시대 태종이 어린 시절에 글을 읽었던 사찰로서 당시에는 띳집 두어 칸이 숲속에 황폐하게 있었으며 승려 석휴가 태종을 보살폈다고 한다.

태종이 즉위한 뒤 석휴는 가끔 궁중에 드나들었고 태종은 이 절을 각별히 돌보았다.

1410년(태종 10) 12월에는 석초를 주지로 임명하고 향을 하사하였으며 1412년 10월에는 원주목사 및 승정원에 이 절의 승려들이 전세를 많이 거두어들인 일을 문책하지 말 것과 이 절의 중수를 도울 것을 명하였다고 하고 다시 승정원에 명하여 중관을 보내어서 현훈폐(검은 것과 붉은 것의 두가지 폐백) 1필을 불전에 바치고 승려들에게는 면포와 주포 10필, 마포 50필, 저화 200장을 내려주게 하였다.

그 뒤 1416년 4월부터 중창하였는데 이 때에도 태종은 철 1000근과 중수에 필요한 재목 1000주를 내렸으며 충청도 제천 창고의 쌀과 콩 100석을 하사하였다.

1417년 3월에는 태종이 행행하였으며 그 해 9월에는 낙성법회를 열자 태종은 옥천부원군 유창에게 향과 소를 주어서 대신 참석하도록 하고 화엄경을 보내어 봉안하도록 하였는데 이 경은 태종이 황고와 황비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절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중건을 보지 못하였는데 각림사 곁에 태종대가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변계량이 지은 각림사에 대한 시가 수록되어 있다.

옛 조선시대의 임금이 수레를 타고 넘어갔던 고개라고 하니 새삼 다르게 보이는 수레너미재이다.


수레너미재를 지나 완만하게 오르니 다시 분홍빛 진달래가 반겨주고 두어개의 나즈막한 봉우리와 안부를 지나 바위와 진달래 군락지 그리고 철쭉 군락지를 차례로 만난다.

그렇게 오르니 다시 바위 등로가 짧게 이어지고 힘들게 오르면 966.8봉을 지나 눈 앞으로 천지봉이 우뚝 솟아 있는 풍경이 가깝게 다가온다.

다시 큰 고도차이가 없는 등로를 따르니 바위 위에 고사목이 있는 곳을 지나 바위가 보이는 1002봉에 도착을 해 올해 들어 처음 만나는 처녀치마에 눈을 빼앗기고 만다.


잠시 야생화들과 눈을 맞춘 후 1002봉을 완만하게 내려가니 안부같지 않은 안부를 지나는데 지도를 보니 이곳이 바로 어령재이다.

어령재는 횡성군 강림면 부곡리 어령골에서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 구룡사로 연결되는 고개로 고개 좌우로 희미한 등로가 보이지만 오래전 인적이 끊긴 듯 이제는 사라지고 흔적도 없어지기 시작하는 고갯마루이다.

옛날 이 험산 산를 타고 넘어 이동을 했으니 얼마나 힘들고 고단했을까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특히나 산짐승들과 도적들을 피해 다녀야 했으니 고달팠던 민초들의 삶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 하여 쓴 웃음이 나오는 시간이다.


어령재를 넘어 진행하니 다시 바위가 나타나고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오르니 금새 천지봉 정상에 도착을 해 정상 이정판과 삼각점을 사진에 담는다.

천지봉(해발1086.5봉)원주시 소초면 학곡리와 횡성군 강림면 강림리에 걸쳐있는 봉우리로 정상에는 스텐레스로 만든 정상 이정판과 삼각점이 있는데 지명의 유래는 아무래도 이 아래에 있는 구룡사와 관련이 있는듯 싶은데 그것도 확실하지는 않은 듯 보인

천지봉의 유래는 구룡사의 현 대웅전 터에 원래 커다란 연못으로 아홉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는데 의상대사가 절을 짓기 위해 도술로 용을 쫓아낸 뒤  연못을 메워 구룡사를 창건하였는데 이때 여덟마리의 용은 천지봉쪽으로 도망을 쳤는데 도망을 친 앞산이 바로 천지봉이란다

천지봉에서 구룡사로 뻐어내린 여덟개의 크고 작은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는데 이는 용들이 도망가면서 만들어 낸 골짜기이고 그중 나머지 한마리는 미쳐 도망치지 못하고 숨어든 곳이 구룡사앞 계곡에 있는 구룡소라고 전해지며 이 용은 눈이 멀어 같이 가지 못하고 구룡폭포 밑의 용소로 도망을 갔다가 1936년대 병자년 대홍수 때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던 아니던 산이 높고 골이 깊으면 많은 전설과 설화가 존재하니 그렇게 믿고 지나가면 좋을 듯 싶다.


천지봉 역시 잡목들로 둘러쌓여 조망이 없기에 어렵게 잡목 사이로 진행방향의 봉우리들만 사진에 담고 곧바로 출발한다.

잠시 내려가니 노란 양지꽃들이 지천에 깔려 있고 조심하며 내려가니 안부같지 않은 안부에 세렴재란 이름이 붙어 있는 고갯마루이다.

우측으로 희미한 등로가 보이는데 이곳으로 내려가면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 세렴골에 있는 세렴폭포로 내려서는 등로인데 비법정탐방로라 길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다닌 흔적이 없어 이제는 사라지는 고갯마루 중 하나인 듯 싶다.

다시 발 밑에 보이는 노란 양지꽃들을 살피며 여유있게 걸어 보지만 얼마 가지 않아 지루하고 고된 산행이 이어진다는 사실을 아직은 모르고 콧노래를 불러 본다.


세렴재를 지나 바위로 된 1053봉을 우회하고 평이한 등로를 따르니 갑자기 등로 우측으로 잡목이 사라지며 절벽 바위가 나타나는데 그곳에서 바라보는 치악산 비로봉이 아주 멋지다.

오랫만에 만나는 멋진 조망에 잠시 발걸음 멈추고 그 아름다운 치악산의 비로봉과 그 주위 산줄기들을 사진과 마음으로 담아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깝게 보이는 치악산 비로봉이지만 좌측으로 길게 쭉 이어지는 1000미터 이상의 고봉들을 넘고 또 넘어야 어렵게 도착할 수 있는 비로봉이기에 체념하고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걸어 본다.

잠시 보이지 않던 산죽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나즈막한 안부를 몇개 지나니 1109봉 가기 전 제법 이름이 있을 법한 안부에 고사목 하나가 보이지만 지도를 살펴보니 이름없는 무명 안부이다.


안부를 지나 미끄러운 낙엽을 밟으며 조심해 오르니 잠시 멈췄던 등줄기와 이마에선 굵은 땀방울이 다시 등산복을 적시고 있다.

무명봉에 올랐단 내려가 산죽 안부를 통과하고 눈 앞으로 다가온 거대한 암봉을 우회하여 어렵게 오르니 이곳이 바로 1109봉인 듯 하다.

잡목이 사라진 사이로 지나온 방향을 살펴보니 저 멀리 천지봉에서 이어져 오는 산줄기가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데 제법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며 산객들을 지치게 만들고 있다.


이제 진행 방향으로는 아직도 넘어야 할 수많은 봉우리들이 보이고 좌측으로 돌고 돌아 정중앙의 치악산 비로봉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릴 듯 보인다.

그래도 오랫만에 선사하는 멋진 조망에 잠시 더 이곳에서 쉬면서 많은 사진들을 남겨 본다.

얼마나 많은 땀방울들을 흘려야 도착할 수 있을련지...


다시 내려 와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고 거대한 바위봉을 우회하니 연속으로 이어지는 작은 봉우리들이 조금씩 이 산객의 발걸음을 지치게 만들고 있다.

참으로 어렵게 걸어 다시 봉우리로 오르니 웅덩이가 보이고 정상에는 거대한 활엽수 두그루가 서 이는데 그곳 정상에서 바람을 맞으며 준비한 간식과 과일로 다시 허기를 달래며 보이는 사람이 없기에 풍욕도 즐겨 본다.

지도를 살펴보니 이곳이 1131봉 쯤 되어 보이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1131봉에서 한동안 쉬며 허기를 달래고 흐르는 땀방울들도 말린 후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내려가니 안부 같지 않은 안부를 지나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는 철쭉 군락지를 지난다.

높지 않은 나즈막한 봉우리와 안부들을 지나 계속 걸어가니 다시 허리쯤 자란 산죽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곧이어 폐헬기장인지 아니면 공터 같은 장소가 보이는데 그곳에도 역시 산죽들이 자라며 일반 등산로처럼 되어 가고 있다.


다시 키 큰 철쭉나무들이 보이는 1105봉을 넘고 1064봉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등로 우측으로 거대한 암봉이 보이는데 좌측으로 우회하는 등로에 많은 낙석들이 솟아져 있어 진행하면서 공포감을 느낀다.

조심하며 그 바위봉을 지나니 잠시 후 안부에 도착을 하는데 지도상으로 배넘이재에 해당하는 안부처럼 보인다.

배넘이재(해발1004미터)는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 세렴골에서 횡성군 강림면 부곡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좌 우측의 고개길은 인적이 끊긴지 오래됐는지 길의 형태는 전혀 보이질 않는데 주위에는 예쁜 하얀 노루귀가 지천에 피어 있어 지쳐가는 산객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있다.


배가 넘었다는 배너미재는 구룡산과 천지봉에 관한 전설과 연관이 있다.

치악산에 큰절을 세우고자 한 스님이 찾아 와 지금의 구룡골에 접어들었는데 동편에는 시루봉을 쳐다보며 아늑한 협곡으로 되어있는 이곳 풍치의 아름다움은 가히 절경이었다. 

그러나 명당을 골라 절을 세우려고 주변을 살펴본 즉 대웅전을 앉혀야 할 자리가 꼭 연못이 있는 곳이 있어서 스님은 그 연못을 메우려고 하였는데 이때 이 연못속 살고 있는 아홉 마리의 용들로서는 큰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살곳을 메우다니 그런 무자비한 일을 스님이 어떻게 할수 있소하고 항의 했으나 스님은 존엄하신 부처님을 모시려면 너희들이 사는 연못이어야 하는데 어떻하겠나하고 양보하려 들지 않았다.

스님과 용들은 메우겠다 못 메운다 한참 실갱이를 벌이다 용쪽에서의 제의로 내기를 하여 이긴쪽의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

용들은 먹구름을 불러 일으키며 하늘로 치솟으니 갑자기 뇌성벽력과 함께 장대같은 소나기가 억수로 쏟아지는데 삽시간에 계곡이 넘쳐 스님이 서 있는데까지 잠겨버렸고 이와 같은 용의 재주를 미리 짐작하고 시루봉과 천지봉 사이에 배를 건너 매어 놓고 태연히 기다리고 있던 스님은 배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용쪽에서 볼때는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럼 이번에는 내가 한수 부려볼까하고 스님은 부적을 한장 그려서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는 연못속에 집어 넣자 연못에서 김이 무럭 무럭 오르더니 연못물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용들은 견딜수 없어 하늘로 달아났는데 그중 눈먼 용 한마리가 달아나지 못하고 근처 연못으로 옮겨 앉았고 스님은 예정대로 그 연못을 메우고 대웅전을 지음으로써 오늘의 구룡사가 들어 앉게 되었다.

구룡사에서 보면 동해를 향한 여덟 개의 골이된 산봉우리를 볼수 있는데 이것은 그때 여덟마리의 용이 급히 도망치느라 골이 생긴 것이라 하며 그래서 이 절을 아홉 마리의 용이 살던곳이라 하여 구룡사라 했다 한다.


지금은 아홉구대신 거북구자를 쓰는데 이 글자를 바꾸게 된 연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본래 구룡사는 스님들의 수양도장으로 세워졌으나 오랜 세월을 두고 흥망성쇠에 따른 곡절이 많았는데 이조에 들어서면서 치악산에서 나는 산나물은 대부분 궁중에서 쓰게 되어 구룡사 주지스님이 공납의 책임자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좋거나 나쁘거나 구룡사 스님의 검사 하나로 통과되는지라 인근 사람들은 나물값을 제대로 받기 위해 별도로 뇌물을 받치기도 했으며 견물생심이라 아무리 부처님 같은 스님이라 할지라도 여기엔 욕심이 나지 않을수 없었다.

이리하여 구룡사는 물질적으로 풍성하기는 하였으나 정신도장으로서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럴즈음 한 스님 이 찾아와 몰락한 이절을 보고 개탄하면서 이 절이 흥하지 못하는 것은 절에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 때문이니 그 거북바위를 쪼개 없애면 좋을것이라고 하여 절에서는 그 스님의 말을 믿어 거북바위를 쪼개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후부터 찾아오는 신도도 더욱 적어지고 거찰로서의 명성은 점차 줄어들었고 급기야는 절문을 닫아야 할 처지에 이르렀는데 이럴때 어느 날 도승 한분이 찾아왔다.

이 절이 왜 이렇게 몰락하는가 하면 그 이름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하고 말한 주지스님은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요하고 물었다.

본시 이 절은 절 입구를 지키고 있던 거북바위가 절운을 지켜왔는데 누가 그 바위를 두동강으로 잘라 혈맥을 끊어버렸으니 운이 막힌 것이오하니 주지 스님이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재차 물었다.

그랬더니 그 도승은 거북을 다시 살린다는 뜻에서 절의 이름을 아홉구에서 거북구자를 쓴 구룡사로 쓰기로 했다 하며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에 있는 구룡사는 지금부터 약 1300여년전에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됐다.


올해 들어 처음보는 귀한 노루귀를 사진에 담아보며 잠시 더 쉬어 가는 시간이다.

노루귀는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데 꽃은 이른봄 나무들에 잎이 달리기 전인 3월에서 4월에 자주색으로 피나 때때로 하얀색 또는 분홍색을 띠기도 한다.

꽃에 꽃잎은 없고 6장의 꽃받침잎이 꽃잎처럼 보이고 3갈래로 나누어진 잎은 토끼풀의 잎과 비슷하며 꽃이 진 다음에 뿌리에서 나오는데 털이 돋은 잎이 나오는 모습이 노루귀 같다고 해서 식물이름을 노루귀라고 부른다.

민간에서는 식물 전체를 8월에서 9월에 채취하여 큰 종기를 치료하는 데 쓰며 봄에 어린잎을 따서 나물로 먹기도 한다.

참으로 아름답고 귀한 노루귀가 아닐 수 없는데 다른 남부 지방은 이미 폈다가 사라진 봄 야생화인데 고도가 높은 이곳은 이제서야 그 고운 빛을 활짝 펼치고 있어 계절이 늦음을 다시 한번 실감하는 시간이다.


노루귀를 구경하고 다시 산죽밭을 타고 진행하니 산죽의 키가 점점 커지며 산객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기 시작한다.

잠시 더 진행하니 잡목 사이로 치악산 전위봉이 올려다 보이는데 아직도 멀리 있는 것처럼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바위 암봉을 좌측으로 우회하다 잠시 돈도 안되는 알바도 하고 정상 등로로 올라 와 걸어가니 잡목 사이로 저 멀리 치악산 비로봉의 돌탑들이 제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치악산 정상부가 지척으로 다가 온 시간이다.


잠시 후 깊은 안부로 뚝 떨어졌다 평이한 산죽등로로 이어지고 잠시 후 좌측의 부곡공원지킴터에서 올라오는 정상 등로를 만나 긴 한숨부터 내쉬어 본다.

공식적으로 범법자를 벗어나 정상 등로로 복귀하며 진행되는 시간이다.

작은 출입금지 플랭카드를 뒤로 하고 우측 치악산 정상부로 향하니 길게 이어지는 나무계단이 또한 힘들게 올라온 산객의 다리를 잡고 늘어진다.

참으로 어렵고 힘든 시간이다.


부곡탐방지원센타까지 4.5 Km 거리라는 이정표를 지나 정상으로 오르니 이곳으로 오르는 계단 끝에서 출입금지 플랭카드로 다시 등로를 막아 놨다.

공단 직원 2명이 있어 질문을 하니 오늘 다시 출입금지 플랭카드를 설치하였으며 5월 15일까지 경방기간에는 엄격하게 출입을 통제한다는 내용이다.

눈치만 살피며 정상으로 오르지 못하고 있으니 안전 목책을 넘어 올라오라고 승낙을 해 어렵게 치악산 비로봉 정상에 도착을 한다.

하지만 세개의 돌탑중에 제일 서쪽에 있는 돌탑 하나가 자연 현상으로 무너져 몇명의 인부들이 새로 그 돌탑을 쌓아 올리느라 분주하기만 하다.


치악산 비로봉의 높이 1288미터로서 태백산맥의 오대산에서 남서쪽으로 갈라진 차령산맥의 줄기로 영서 지방의 명산이며 원주의 진산으로 남북으로 웅장한 치악산맥과 산군을 형성하고 있다.

주봉인 비로봉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향로봉(1043봉), 남대봉(1182봉)과 북쪽으로 매화산(1084봉), 삼봉(1073봉) 등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며 그 사이에 깊은 계곡들을 끼고 있으며 남북으로 뻗은 주능선을 경계로 하여 대체로 서쪽이 급경사를 이루며 동쪽이 완경사를 이룬다.

특히 비로봉에서 구룡사를 향하여 뻗은 북쪽의 능선과 계곡은 매우 가파른 것으로 유명하며 한편 고둔치 동쪽인 부곡리의 신막골 일대는 비교적 넓은 평탄지대를 이루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서쪽으로 흐르는 계류들은 섬강으로 흐르고 동쪽으로 흐르는 계류들은 주천천으로 흘러든다.

조선 시대에는 오악신앙의 하나로 동악단을 쌓고 원주, 횡성, 영월, 평창, 정선 등 인근 5개 고을 수령들이 매년 봄 가을에 제를 올렸고 또 많은 승려와 선비들의 수련장으로 사찰과 사적이 많다.

공원 면적은 약 182.1 Km2이고 산세가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많은 문화유적이 있어 1973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가 1984년 국립공원으로 승격되었다.

큰골, 영원골, 입석골, 범골, 사다리골, 상원골, 신막골, 산성골 등 기암괴석과 층암절벽의 아름다운 골짜기가 있으며 비로봉, 남대봉, 매화산, 안봉, 천지봉, 투구봉, 토끼봉, 향로봉 등의 산봉과 입석대, 세존대, 신선대, 아들바위, 구룡폭포, 세렴폭포, 영원폭포 등의 명소가 산재하여 있다.

치악산에는 한때 76개에 달하는 크고 작은 사찰들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구룡사, 상원사, 석경사, 국향사, 보문사, 입석사가 남아 찬란했던 불교 문화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구룡사는 신라 문무왕 때 의상이 창건한 고찰로 거북바위와 구룡소 등의 경승지가 있으며 대웅전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었다.

남대봉 아래의 상원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은 절이며 용마바위와 계수나무 고목이 위엄을 자랑하고 있는데 이곳은 꿩의 보은설화로 더욱 유명하다.

또한 고려 말의 충신 원천석의 은거지였기에 그의 묘소, 사적을 기록한 묘갈, 재실이 있는 석경사, 태종이 찾아와 스승을 기다리던 태종대, 할미소, 수레너미재, 대왕재 등 태종과 원천석에 얽힌 지명과 명소가 많이 널려 있다.

남대봉 서쪽 기슭에는 험준한 산세와 지리적 여건을 이용하여 축조한 세 곳의 옛 산성 터가 남아 있으며 합단의 침입과 임진왜란의 격전지였던 영원산성, 해미산성지, 금두산성이 그것이며 이것은 예로부터 군사적 요충인 원주를 지키는 천연의 요새로서 치악산의 몫을 입증하는 사적들이다.

남대봉 동남쪽인 상원골 입구 성남리의 성황림은 천연기념물 제93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등산로는 종주코스와 횡단코스 등 다양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으며 특산물은 송이, 산채, 닥종이 등이며 매년 9월에는 예총 원주 지부에서 주관하는 치악예술제가 열린다.

작업하시는 분에게 양해를 구해 어렵게 치악산 비로봉 정상석 옆에서 셀카로 추억 한장 남겨 본다.


치악산 비로봉 정상에서 동쪽으로 떨어져 있는 돌탑으로 가 제일 먼저 지나온 등로를 확인해 본다.

바로 앞에 치악산 비로봉 전위봉이 보이고 그 뒤로 쭉 이어진 1000미터 이상의 봉우리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이어지더니 좌측으로 돌아 천지봉이 우뚝하고 그 뒤 저 멀리 매화산이 고개만 내밀고 이별을 아쉬워하고 있다.

이제 기온이 올라가며 박무가 조금 더 심해졌는지 저 멀리 보여야 할 백덕지맥 마루금은 모습을 감추고 애간장만 태우고 있다.


이제 남쪽으로는 다음 구간 진행해야 할 향로봉과 남대봉 그리고 그 좌측으로 1000.6봉으로 이어지는 영월지맥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그 가운데로 펼쳐진 수많은 골짜기들을 감싸고 있는 부곡리가 또한 아름다운 시간이다.

부곡리는 강원도 횡성군 강림면에 있는 리로서 남쪽으로 강림천이 흐르고 있고 치악산 자락에 위치한 중산간마을이다.

자연마을에는 가래골, 가마골, 갈골, 양지말 등이 있는데 가래골은 이 마을에 가래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고 추동이라고도 하며 가마골은 마을이 가마솥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는 이 마을에 가마소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유래도 있으며 부곡리는 옛날 이 지역에 그릇 가마가 있었으므로 가마골, 가메골 또는 부곡이라 하였다고 한다.

치악산은 몇번인가 올랐었는데 늘 오를때마다 비가 내리거나 안개로 인해 조망 한번 즐기지 못해 이 산객과는 맞지 않는 산이라는 고정 관념이 있었는데 2년 전 홀로 종주 산행을 하면서 환상의 조망을 즐겼기에 그런 고정관념도 사라지게 만든 치악산이다.


참으로 안타깝고 아쉬운 돌탑 공사이다.

왜 이 돌탑이 쓰러졌는지 그 원인을 정확히 모르지만 아마도 습기가 있는 상황에서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다 보니 돌 사이에 틈이 벌어지고 그 간격이 넓어져 무너진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예상하는 수준이었다.

치악산 비로봉 미륵불탑은 치악산에서도 가장 높은 비로봉(1288봉)에 세워진 3기의 돌탑을 말하는데 3기의 돌탑은 원주시 봉산동에서 조그만 제과점을 운영하며 모나까라는 과자를 팔던 용창중(일명 용진수)이라는 사람이 어느 날 꿈을 꾸었다고 하며 이때 신으로부터 삼도가 보이는 비로봉 정상에 앞으로 3년 안에 3기의 돌탑을 쌓아라고 하는 계시를 받았다.

그래서 탑을 쌓기 위해 자르고 메고 각지를 돌아다니며 돌을 모아 혼자만의 힘으로 1962 9월 처음 탑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만에 5층으로 된 3기의 돌탑이 모두 완성 되었으나 1967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모두 무너져 내렸다.

그는 할 수 없이 다시 탑을 쌓기 시작하여 그 해에 복원을 완료하였으나 1972 다시 무너져 내려 즉시 복원을 완료하였다.

용창중씨는 1974년에 작고하였으며 1994년 벼락을 맞아 일부 무너진 것을 국립공원관리 공단이 복구하였으나 1999년에 또 한번의 벼락을 맞아 3기가 모두 무너져 내렸던 것을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2004년에 마지막으로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중앙의 탑은 산신탑, 남쪽의 탑은 용왕탑 그리고 복쪽의 탑을 칠성탑이라고 한다.

이 내용으로 보면 제일 남쪽의 용왕탑이 이번에 무너진 탑으로 생각된다.


한동안 그 치악산 비로봉 정상에서 쉬면서 조망을 충분히 즐긴 후 게단을 타고 곧은재 방향으로 빠르게 내려가 본다.

늘 거꾸로 진행을 하였던 치악산 종주 산행이었기에 오늘 내려가는 기분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시간이다.

그리고 늘 사다리병창으로 내려갔던 등로가 오늘은 남대봉 방향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안전철봉이 설치된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금새 등로 좌측에 산불감시초소와 화장실이 있는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해 이정표를 살펴 본다.

우측으로 구룡사와 세렴폭포 하산 등로가 있는 갈림 삼거리이다.


빼어난 경관의 폭포인 세렴폭포는 아홉마리 용의 전설이 얽혀있는 치악산 구룡사 계곡에 위치한 2단으로 휘어져 떨어지는 환상적인 물줄기가 일품으로 인근의 구룡폭포와 함께 치악산을 대표하는 곳으로 강원 내륙에 산재한 여러 폭포 가운데서도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치악산의 으뜸 봉우리인 비로봉에서 학곡리 쪽으로 6 Km 떨어져 있는 구룡사는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에 의하여 창건되었는데 신라 문무왕 6(666)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대웅전 자리에 9마리의 용이 살고 있는 연못을 메우고 사찰을 창건하여 아홉마리 용의 구룡사라 하였으나 조선 중기에 거북바위 설화와 관련하여 현재의 명칭인 거북이 구룡사로 개칭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치악산구룡사사적에 따르면 신라말의 고승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현재는 강희45년 글자가 새겨진 와당이 출토되어 숙종 32(1706)에 구룡사가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웅전 앞 좌우에는 서상원과 보광루, 적묵당, 심검당의 승사가 있으며 이밖에도 원통문, 국사단, 사천왕문, 범종각, 응진전 등이 있다.

이 구룡사와 세렴폭포는 좋은 계절에 다시 한번 들려 천천히 둘러 보기로 하고 영월지맥 마루금을 따라 빠르게 진행을 해 본다.


다시 이어지는 오르막 짧은 계단을 타고 오르니 바위를 우측에 두고 길게 이어지는 오르막 계단이 연이어 연결되어 있다.

그 계단을 지나니 다시 산죽이 자라고 있는 등로에는 통나무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잠시 뒤 헬기장에 도착을 해 지나 온 치악산 비로봉을 뒤돌아 보니 돌탑 하나가 사라진 정상부가 저 멀리 멀어지고 있다.

머리 위로 솟아지는 뜨거운 햇살을 피해 빠르게 그 헬기장을 출발한다.


내려가며 등로 좌측을 살펴보니 다음 구간에 올라야 할 남대봉 줄기가 아름답게 동서로 펼쳐져 있다.

사각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등로 옆으로는 노란 제비꽃과 양지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어 고단한 몸과 마음을 달래 본다.

등로 우측으로 솟아 있는 1223봉은 좌측으로 우회하며 다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가니 금새 쥐너미재전망대에 도착을 해 조망을 즐기고 잠시 쥐너미재에 대한 설명판을 읽어 본다.

실제 쥐너미재는 바로 이 전망대 바로 위인 우측 삼봉으로 이어지는 등로에 있는데 그 등로에는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판을 세워 이곳에 쥐너미재와 전망대를 설치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상황이다.

삼봉과 투구봉 그리고 토끼봉으로 이어지는 등로는 언제 한번 들어가 볼 기회가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쥐넘이재는 옛날 범골에 범사가 있었는데 쥐의 등쌀에 못 이겨 스님이 떠나고 후에 쥐들도 이 고개를 넘어가고 절은 폐사 되었다는 가슴 아픈 전설이 있으며 전망대 쥐너미재 안내판의 모습이 고개는 옛날 쥐떼가 넘어간 고개라 하여 쥐너미재라고 한다.

옛날 범골에 범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쥐가 너무 많아 스님들이 쥐들의 등쌀에 견디지 못하고 절을 떠났다고 한다.

하루는 그 많은 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줄을 지어 범사를 떠났는데 그 후로는 이 범사를 찾는 사람이 없어졌고 절은 폐사 되었다고 한다.

잠시 우측으로 흐르는 삼봉과 투구봉 그리고 토끼봉 능선을 아쉽게 바라보고 갈길이 남아 있기에 곧바로 출발한다.


쥐너미재 전망대 우측으로 펼쳐진 흥양리를 살펴보며 잠시 마을을 생각해 본다.

흥양리는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에 있는 리로서 대부분의 지역이 평지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농촌인데 동쪽은 치악산 줄기인 삼봉과 투구봉으로 막혀 있고 남쪽은 장양천이 흐른다.

근처에 사래울소류지, 하초구소류지, 황골소류지가 있으며 자연마을로 돌모루, 뜀바우, 사래울, 살여울, 새두둑 등이 있다.

돌모루는 큰 바위 모퉁이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고 뜀바우는 사래울 서쪽에 붙어있는 마을이며 사래울은 논밭의 골을 뜻하는 사래를 따와서 밭골처럼 긴 마을이란 뜻에서 이름 붙였다.

살여울은 개울물이 살처럼 급히 흐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새두둑은 억새가 많은 둔덕이라 해서 새두둑이라 하며 문화재로 마애불좌상이 있다.

앞으로 진행해야 할 마루금을 살펴본 후 내려가니 안부를 지나 다시 사각계단이 나타나고 무명봉을 넘어 내려가 입석사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한다.

입석사는 치악산 입석대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사찰로서 신라시대에 원효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데 정확한 것은 아니며 그 후 연혁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 없지만 고려시대에 조성된 석탑과 역시 같은 시대에 조각된 입석대 근처 암벽의 마애불좌상으로 인해 오랜 연혁을 지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경사진 지형에 들어선 사찰은 1992년 건립된 대웅전과 1957년 지은 요사 그리고 삼성각으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대웅전은 정면 3칸·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으로 내부에 아미타여래좌상과 관음보살좌상, 세지보살좌상을 모시고 있다.

대웅전에서 약간 위쪽으로 올라간 자리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집인 삼성각이 있다.
입석사 앞에 있는 석탑(입석사 석탑, 강원도문화재자료 제19호)은 무너져 있던 것을 다시 세운 것으로 2기의 석탑 부재가 섞여 있는 것으로 보이며 연꽃받침에 탑신을 세웠는데 조각양식과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입석사 큰 길로부터 서북 방향으로 약 30미터쯤 올라가면 나타나는 입석대 옆의 암벽에는 마애불좌상(원주 흥양리 마애불좌상, 강원도유형문화재 제117호)이 새겨져 있으며 연화대좌와 광배를 포함한 높이 1.17미터, 불상 높이 0.62미터로 역시 고려시대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잠시 고민에 빠져든다.

우측의 입석사는 열려 있는데 진행방향인 곧은치 방향은 출입금지 플랭카드가 걸려있어 엄격하게 출입을 제한한다는 내용이다

그래도 오늘 이곳에서 중단 할 수가 없어 조심하며 재빨리 곧은치 방향으로 내려가 본다.


이제 내려가니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산죽밭이 펼쳐져 있고 그 산죽밭을 따라 내려가 안부를 지나 바위 앞에서는 우측으로 우회하며 진행을 서두른다.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걸어 내려가니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고 이제 잠시 산죽이 사라진 등로에는 키 작은 잡목과 키 큰 활엽수가 공존하는 마루금으로 변하고 있다.

고도가 낮아지면서 등로 옆으로는 이제 푸른 봄빛이 돋아나고 있어 계절의 변화를 실감해 본다.


계속 이어지는 평이한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등로가 우측으로 크게 휘어지는 곳 가운데에 상원사까지 8.4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서 있다.

계속 이어지는 평이한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큰 고도 차이 없이 한동안 빨리 진행한다.

잠시 후 넓은 공터에 이정목 하나가 서 있는데 살펴보니 비로봉에서 벌써 2.7 Km 걸어 왔다는 거리 표시가 반가운 이정목이다.


그 이정목을 지나 빠르게 걸어가니 방금 전 파헤쳐진 멧돼지 식흔이 보이고 사진에 담은 후 통과한다.

그곳을 통과해 진행하니 금새 비로봉에서 3.1 Km 진행해 왔다는 이정표가 서 있는 원통재에 도착을 한다.

원통재(883미터)는 횡성군 강림면 부곡리 원통골에서 원주시 행구동 황골로 이어지는 고개에 있으며 원통골 방향으로 희미하게 등로가 보이고 마루금은 직진으로 진행한다

치악산은 크게 외치악과 내치악으로 나눠 지는데 산세가 가파르고 험난한 원주지역을 외치악이라면 산세가 완만하고 부드러운 횡성군 강림면 지역을 내치악이라 부른다.

원통재로 내려서는 부곡리는 가마솥부와 골곡을 쓰며 가마솥 형태의 지형을 이루고 있는 마을로 다리골, 원통골, 고둔치골이 있는데 치악산의 주봉인 비로봉에서 향로봉, 망경대가 감싸고 있는 부곡리는 조선 초기 태종과 그의 스승 원천석과 관련된 태종대가 있는 곳으로 강림면 소재지까지 이어지는 정도의 긴 계곡이 있다.

이곳 원통재는 이 이정표가 없다면 안부 같은 느낌이 없어 그냥 지나치기 쉬운 안부이다.


원통재를 사진에 담고 빠르게 진행하니 또 다른 이정목이 서 있는데 살펴보니 이제 곧은재까지는 1.5 Km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가 보인다.

오늘 산행을 하면서 처음 만나는 곧은재라는 단어와 그곳까지의 거리표시이기에 여간 반갑지 않다.

이정목 옆에 서 있는 이정표를 살펴보고 다시 완만하게 오르니 잡목 사이로 저 멀리 올라야 할 971.2 삼각봉이 빤히 올려다 보인다.

다시 평이한 안부를 지나 진행하니 산죽밭이 시작되고 곧이어 비로봉에서 3.8 Km 진행해 왔고 곧은치까지 1.0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와 이정목이 서 있는 우측 공터로 가 잠시 쉬면서 남아 있는 빵과 과일 그리고 식수로 허기를 달래고 출발한다.

 

잠시 간식으로 먹고 나니 조금 더 힘이 생기고 이정표를 지나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조금 빠르게 치고 오른다.

언덕을 올라 잠시 더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삼각점이 박혀있는데 지도를 살펴보니 971.2 삼각봉이다.

이제 힘든 구간은 거의 다 넘은 듯 하여 조금은 안심이 되는 시간으로 곧은치까지는 얼마 남지 않은 거리이다.


삼각점봉을 지나 부드러운 등로를 따라 빠르게 걸어가니 비로봉에서 이곳까지 내려오면서 처음으로 진달래꽃을 본 듯 하다.

완만한 등로를 따르다 오르막 등로를 오르고 다음 구간에 걸어야 할 향로봉과 남대봉을 잡목 사이로 살피며 걸어가니 금새 넓은 헬기장에 도착을 하고 등로 우측으로 펼쳐진 원주시 행구동 방향을 살펴보지만 박무로 인해 아쉬움이 남는 조망이다.

행구동은 원래 원주군 부흥사면의 지역으로 살구나무 행이 많이 나므로 살구둑 또는 한자로 행구라 하였으며 행구동은 원주 시청에서 동쪽으로 5 Km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치악산을 경계로 횡성군 강림면, 서쪽으로는 봉산동, 남쪽으로는 반곡동, 북쪽으로는 소초면에 접해 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사리 일부와 오리를 병합하여 행구리라 칭하고 판부면에 편입되었다가 1955년 원주시 승격과 구역 확장에 의하여 원주시에 편입되어 행구동이 되었다.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 시간이다.


그곳 헬기장에서 아쉬운 조망을 남기고 다시 빠르게 출발하니 완만하게 이어지는 통나무 계단이 나타나고 그곳을 지나자마자 분홍빛 진달래가 만개하여 지치고 힘든 이 산객의 몸과 마음을 달래 주고 있다.

잠시 더 걸어 내려가니 저 멀리 오늘 지맥 산행의 마지막 안부인 곧은재가 내려다 보이고 저 멀리 다음 구간에 올라야 할 향로봉이 옛날 추억을 뒤살리며 다음을 기약하고 있다.


그렇게 다음 구간을 살핀 후 내려가니 사거리 안부인 곧은치 즉 곧은재에 도착을 해 길고도 멀었던 영월지맥 제2와 3구간을 이틀에 걸쳐 마무리를 하는 시간이다.

곧은치(860미터)는 강원도 원주시 행구동과 횡성군 강림면 부곡리를 잇는 고개로 부곡리쪽은 완만한 등로이지만 행구쪽은 상당히 급경사이다.

지명의 유래는 옛날 강림면 부곡리 사람들이 치악산을 넘어 원주로 장보러 다닐 때 무거운 짐을 지고 험한길을 돌아가지 않고 편한길을 다녔는데 그 중 가장 편한길이 이곳이라 사람이 다니기 쉬운길이라 하여 그렇게 지명을 붙인 모양이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내려가면 강림면 부곡리에 태종대가 있는데 흔히 태종대하면 부산 태종대를 떠올리지만 이곳 부곡리에서 역사의 얼이 깃든 태종대가 있는데 태종대는 조선 태종과 운곡 원천석과 관계되는 유적으로 문화재자료 제16호로 지정되었다.

원천석은 고려 때 좌명공신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평장사를 역임한 원경의 19대 손이며 충숙왕 17년에 종부사령을 지낸 윤적의 둘째 아들로 원주 원씨의 중시조이다

고려의 멸망과 조선조 태조의 왕가 형제간의 살육을 통탄하며 분노를 느낀 나머지 관직을 거부하고 개성을 떠나 이곳 강림리에 은거하였고 려왕정 복고를 위하여 반기를 든 두문동 72인의 한 사람이며 이양소, 남을진, 서견과 더불어 고려 사처사중 한사람으로 유명한데 원주시 행구동 석경촌에 그의 묘소가 있고 칠봉서원에 배향되었다.

이방원이 조선조 3대 태종으로 등극하여 왕위에 오르기 전에 스승으로 섬겼던 운곡 원천석을 찾아 다시 관직에 앉히고 정사를 의논하고자 이곳을 찾았으나 원천석은 태종이 이곳에 오는 것을 미리 알고 태종과의 만남을 꺼려 피신하여 치악산으로 들어가면서 개울에서 빨래하는 노파에게 자신의 행선지를 거짓으로 알리고 골짜기로 들어갔고  태종이 이곳에 도착하여 빨래하는 노파에게 운곡이 간 곳을 물었으나 노파는 원천석이 일러 준대로 거짓으로 가르쳐 주었다.
태종은 그곳으로 가서 스승을 찾았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이 바위에서 기다리다 스승이 자신을 만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후 태종이 운곡을 기다리며 머물렀다 하여 뒤에 이곳을 태종대라 하였으며 주필대라는 비석을 세워 누각안에 보호하고 있다.

많은 이야기가 전하고 있는 치악산임을 알 수 있는 내용들이다.


아쉬움을 남기고 이제 남쪽의 직진 방향을 버리고 우측의 곧은치담방지원센타 방향으로 발길을 돌려 천천히 내려가 본다.

생각보다 가파르고 바위 자갈들이 깔려 있어 연이틀 동안 50여 Km를 걸은 발바닥에선 불이 날 듯 화끈거리기 시작한다.

그래도 조심하며 안전로프와 돌탑을 지나니 첫번째 다리가 보이는데 그 우측으로 주막거리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계속 이어지는 계곡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하부로 내려갈수록 수량이 더욱 풍부해지며 몸은 더워도 물소리는 시원한 느낌으로 진행을 한다.

혹시 기회가 되면 알탕이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내려가지만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인해 알탕은 그만두더라도 다음 구간 산행에 부담을 느끼는 시간이기도 하다.

내려갈수록 더욱 짙어지는 초록빛이 눈을 즐겁게 만들지만 여전히 두 다리에 느껴지는 무게감은 더욱 무거워지고 있다.

그렇게 내려가니 저 멀리 곧은재공원지킴터가 나타나는데 아무 생각없이 통과하려는데 지킴터 안에서 근무를 하던 공단 직원이 제지를 하고 신원을 확인한 후 다음에 다시 걸리면 20만원의 벌금을 물린다는 약속을 하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다음 구간은 5월 15일을 지난 기회에 다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다음에는 춘천지맥으로 들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어지는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가니 좌측으로 관음사 가는 이정표가 서 있고 그곳에서 잠시 개울로 내려가 손과 얼굴이라도 닦으려고 했지만 부담이 되어 그냥 걸어 내려간다.

계속 걸어 내려가니 휴일이라 그런지 이곳에도 많은 가족 단위 여행객들이 머물며 쉬고 있어 한편으로는 부럽기만 하다.

고둔치라는 펜션을 지나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드디어 버스 정류장에 도착을 하고 그 옆에 위치한 편의점에서 시원한 물 한병을 사서 한입에 마셔 본다.

잠시 더 기다렸다 신월랑 버스정류소에서 8번 버스를 타고 원주 시외버스 터미널로 이동을 한 다음 춘천행 시외버스를 타고 무탈하게 횡성에 도착을 해 샤워 후 무탈하게 집으로 귀가를 하였다.


이틀 동안 참으로 먼 거리를 걸어 치악산을 넘었으니 조만간 영월지맥도 마무리가 될 것이다.

다만 무리하지 말고 몸이 시키는대로 순리대로 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