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지 :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과 충청북도 제천시 백운면 및 충주시 엄정면의 천등지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 2017년 04월 11일 (화요일 당일 산행)
산행날씨 : 오전에는 폭우가 내린 후 점심 때부터 약간의 박무가 있었지만 바람이 불며 약간 흐렸던 산행하기 좋았던 날씨
산행온도 : 영상 05도에서 영상 14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천은사 주차장-천은사-계곡등로-백운지맥 안부이정표(십자봉 2.0 Km, 천은사 2.5 Km, 산촌마을 3.6 Km)-안전로프-천등지맥 분기봉(967.5봉,
돌탑과 이정표 십자봉 1.5 Km, 산촌마을 3.8 Km, 양안치와 백운산)-원덕동 하산 갈림이정표(십자봉 0.5 Km, 원덕동 1.3 Km)-십자봉(983.3봉,
정상석 2개와 대삼각점 그리고 이정표 양아치 3.0 Km, 산촌마을(계곡코스) 2.4 Km, 덕동리 4.1 Km)-헬기장-966.6봉 삼봉산 갈림
이정표(삼봉산 3.7 Km, 십자봉 0.7 Km, 화당리 배재)-은사시나무 군락지-뒷산(746.1봉, 벤취 쉼터2개)-고로쇠나무 안내판-이정표(뒷산 500 m,
배재 900 m, 용마사 1.8 Km)-벤취2개 쉼터-나무계단-벤취 쉼터 2개와 이정표(뒷산 1.2 Km, 배재 140 m)-배재(2차선 포장도로, 충북 제천시
백운면과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의 경계)-시멘트 임도와 차량 통행금지 바리게이트-나무계단-이정표(배재, 귀래면 5.4 Km, 백운면 12.0 Km)-
벤취 쉼터2개-당단풍나무 안내판-역주벌 갈림 이정표(배재 400 m, 역주벌 1.3 Km, 옥녀봉 1.5 Km)-철봉봉-632.4봉 삼각점-82번 송전탑-
옥녀봉 전위봉-옥녀봉(714.4봉, 정상석)-옥녀봉 정상석(702봉)-안부-시루봉 정상석(740봉)-은사시나무 군락지-시루봉(695.4봉, 정상판)-
689 소나무봉-비지재(655미터 안부)-702.7 무명봉-안부-안전로프-675 바위봉-급경사 하산 바위등로)-671.7 무명봉-강승갱이재 안부-
화당리와 가춘리 갈림 안부-화당리로 탈출-화당리 작은개마을-꽃댕이 버스정류장-산행종료
산행거리 : 약 18.65 Km (천등지맥 산행 약 12.00 Km와 천은사-분기봉과 강승갱이재-화당리까지 접속구간 약 06.65 Km, 스마트 폰의 GPX 기준)
산행시간 : 초반은 빠르게 후반부로 가면서 속도 조절하며 진행하여 06시간 56분 (11시 41분부터 18시 38분까지)
교통편 : 애마와 택시를 이용해 무탈하게 마무리하고 귀경하였음
천등지맥이란 ???
한강기맥의 삼계봉에서 분기한 영월지맥이 치악산 남대봉에서 갈라지면서 백운지맥을 만들고 백운지맥은 치악재(가리파재)를 지나며 벼락바위봉에 올라섰다가 서진을 계속하며 백운지맥의 주봉인 해발 1086미터인 백운산을 지나 오두재를 거쳐 934봉에서 세갈래로 갈린다.
한줄기는 북으로 뻗어면서 큰양안치를 지나 덕고산과 명봉산으로 이어지며 또 한줄기는 남쪽으로 500미터를 더 뻗어나가다 가십자봉(967미터)에서 서쪽으로 동막봉과 작은양안치를 지나 미륵산으로 맥을 형성하는 백운지맥이다.
하지만 가십자봉에서 백운지맥과 갈라져 남진하는 능선이 또 하나 있는데 이 맥이 이른 바 천등지맥으로서 천등지맥은 십자봉(983.3미터)을 지나 966봉에서 남동쪽으로 삼봉산(909미터)을 분가시키고 뒷산을 거쳐 배재에서 숨을 고른 후 옥녀봉(714.4미터)을 들어 올린 후 동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시루봉(695.4미터)과 오청산(656.9미터)을 만나고 다시 남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다릿재를 지나 천등산(806.6미터), 인등산(665.1미터), 지등산(534.9미터), 관모봉(628.4미터), 부대산(626.9미터), 주봉산을 지나 도상 42.5 Km(실제로는 약 52 Km)의 맥을 형성하며 충주호로 그 여맥을 가라 앉히는 산줄기를 말한다.
다시 맥 잇기 산행을 시작하며 자연과 하나가 되려고 노력했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후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단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오늘도 새벽 같이 일어나 간단히 얼굴만 닦은 후 하루 출장을 위해 집을 나서는 시간이 새벽 6시를 막 넘기고 있다.
요즈음 제천쪽에 일이 자주 생겨 다녀오는데 오늘도 역시 제천쪽에 다녀와야 하기에 아침밥도 먹지 못하고 집을 나서 제2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여유있게 내려가니 아침 8시를 조금 넘겨 약속한 회사 사무실에 도착을 한다.
내려가는 도중 원주를 지나니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제천 IC를 지나니 장대비가 솟아져 준비한 오늘 산행은 접어야된다는 생각 뿐이다.
그렇게 손님을 만나 일을 시작하는데 오늘따라 시간이 제법 걸려 회의를 마치니 10시 30여분을 지나고 밖으로 나오니 도착할 때 장대비가 솟아지던 날씨는 완전히 변해 봄 햇살이 따스하게 비추고 있다.
잠시 미인봉이나 북바위봉이나 다녀올까 고민하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천은사로 가 예전에 십자봉과 백운산을 오르며 만났던 천등지맥 한구간을 다녀오기로 한다.
잘 하면 다릿재 터널까지도 갈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가져 보지만 역시 그곳까지는 무리이기에 강승갱이재에서 좌측 제천시 백운면 화당리 작은개 마을로 탈출을 하는데 초반에 가시 덤불로 잘못 내려와 개고생을 하며 많은 생채기를 남기고 무탈하게 하산하여 귀가를 하였다.
남아 있는 구간은 조만간 내려가 걸어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보지만 또 기회가 닿지 않으면 언제 오를 수 있을지 기약도 없이 남겨질 가능성도 있는 천등지맥 산행이 되었다.
벌써 7년 전 무더운 여름 날, 이곳이 이렇게 중요한 백운지맥과 천등지맥의 중요한 봉우리란 사실도 모른채 그저 출장 왔다가 올라보지 못한 백운산과 십자봉이 그리워 무작정 올랐다 여름비에 온몸을 적시고 떠다니는 안개와 구름으로 인해 조망다운 조망도 구경하지 못하고 내려왔던 추억이 잇는 곳을 오늘은 천등지맥이란 거대한 제목을 달고 다시 올라 이렇게 사진 한장 남기는 시간이 참으로 소중하기만 하다.
7년 전에 봤던 돌탑은 여전히 그대로 인데 그때 보이지 않던 천등지맥 분기봉이란 이정판은 지맥 산꾼들이 늘었음을 알려주듯 나뭇가지 한쪽에 새롭게 달려있다.
새로 시작한 천등지맥도 무탈하게 완주할 수 있기를 빌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일을 마치고 천은사 주차장에 도착을 하니 토지 측량을 하는지 몇명의 사람들이 측량을 하면서 평일 대낮에 들어오는 차량에 따가운 시선을 보낸다.
주차장 한쪽에 잘 주차시키고 옷을 가라 입은 후 산행 준비를 하는데 생각보다 바람이 심하게 불며 약간은 한기를 느끼는 시간이다.
아침에 장대비가 내리던 시간과는 달리 햇살이 비추며 산행하기에는 딱 좋은 계절이지만 늦게 시작하는 산행이니 무리하지 말고 안전하게 하산할 수 있기를 바래 본다.
십자봉 등산안내도와 천은사계곡 안내판을 읽어 본 후 천은사 입구를 지나며 도로 양쪽에 서 있는 천하대장군과 여장군이란 돌장군이 이채로운 시간이다.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빠르게 걸어 오르니 도로 우측으로 흐르는 천은사계곡의 물소리가 참으로 청아하게 들려온다.
오랫만에 들어보는 청아한 물소리에 귓가와 마음까지 깨끗하게 정화되는 느낌이기도 하다.
이제 해우소를 지나 백운산 천은사 유래를 읽은 후 좌측의 천은사 가는 길을 버리고 우측의 계곡 등로를 타고 본격적인 천등지맥 산행을 위해 출발을 한다.
게곡으로 진행하다 좌측 저 멀리 보이는 천은사 대웅전을 사진에 담아 보는데 천은사는 생각보다 크지 않은 절처럼 보인다.
이곳은 천은사보다 천은사계곡이 더 유명한지 백과사전에도 천은사는 보이지 않는데 계곡에 대한 자료는 아래와 같이 적혀있다.
원주에서 충주방면으로 20 Km지점의 양안치고개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충주로 향하는 원주의 관문인 양아치고개를 굽이 돌아 오르면 백운산 남쪽에 위치한 귀래면 이곳 정상에서 약 5백여 미터 가량 19호선 국도를 타고 내려 가면 오른쪽에 조그만 천은사계곡에 다다르는데 지금은 천은사계곡으로 불리지만 30년 전만 해도 이곳은 명주굴로 불리었다.
이 계곡 아래쪽에 20여 가구 마을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살면서 비가 안오면 제사를 지냈던 곳이 바로 이 명주굴인데 명주굴은 명주실 한 타래를 풀어 연못에 넣으면 모두 들어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은 천은계곡이 개발되고 난 후 모습을 감췄다고 하며 입구를 지나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소나무 등 잡목이 계곡과 함께 빽빽히 어우러져 산림욕을 즐기기에도 안성맞춤 이다.
입구부터 천은사까지 약 5백여 미터 가량 구간에는 대부분 넓은 바위에 맑고 청아한 물이 흘러 가족단위의 휴식공간으로도 매우 적합한 곳으로 또 천은사까지의 산길은 대체로 잘 다듬어져 있다.
계곡내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암반위에 흐르는 깨끗한 물과 울창한 숲은 피서와 더불어 삼림욕을 하기에 안성맞춤이며 백운산 정상까지 가는 등산로가 있다.
이제 천은사 계곡을 우측에 두고 좌측의 오솔길을 따라 오르니 생각보다 천은사 계곡의 계곡물이 많고 깨끗해 잠시 손도 담가보고 얼굴도 다ㅣㄲ아보며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시간들을 벌충해 본다.
조금 더 오르니 계곡에 굴러 다니는 작은 바위에는 생각지도 못한 파란 이끼들이 보여 이곳이 정말 청정계곡의 깨끗한 수량을 지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하다.
이제 계곡을 두어번 가로 질러 건너며 진행을 하니 등로 옆으로 현호색 군락지들이 나타나고 잠시 사진 한장 남기며 쉬어 간다.
현호색을 사진에 담고 다시 오르니 등로는 잘 정비된 듯 뚜렷하고 낙엽 깔린 부드러운 등로가 나타난다.
빠르게 진행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계곡으로 오르는 산행이다 보니 깨끗한 계곡물과 파란 이끼 그리고 가끔 보이는 야생화와 낙엽진 나무들이 전부이다.
노란 생강나무 꽃들이 이제 피어나기 시작해 이곳이 정말 강원도의 산골오지임을 느끼며 오르니 마지막 샘물을 지나 백운지맥 상의 주능선에 도착을 하는데 천은사에서 2.5 Km 라는 거리 표시가 보인다.
안부를 뒤로 하고 좌측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무명 묘지 2기가 보이는데 그 묘지 위에는 노란 제비꽃이 군락을 이루며 피어 있다.
흐르는 땀방울을 닦으며 노란 제비꽃을 사진으로 남기며 잠시 쉬었다 다시 오르니 조금은 가파라지기 시작하는 등로 우측으로 굵은 밧줄이 로프처럼 설치되어 있어 조심하며 오른다.
잠시 더 오르다 등로 주위를 살펴보니 이곳은 이제 노란 제비꽃 대신 하얀 제비꽃이 산객을 반갑게 맞아 줘 사진 한장 더 남기며 발걸음을 멈춘다.
다시 나타나는 노란 제비꽃 군락지에서 또 다시 발걸음을 멈추고 사진에 담고 진행하다 보니 빠르게 진행하는데도 시간은 제법 흐르는 것 같아 이제는 눈으로만 야생화를 관찰하고 빠르게 진행하기로 한다.
다시 한구비 올라 평이한 잡목 지대를 걸어 오르니 등로 옆 마른 숲풀 사이로 수줍게 얼굴을 내밀고 있는 개별꽃이 너무나 예뻐 그냉 지나치지 못하고 다시 한번 사진기를 들이대 본다.
개별꽃을 사진에 담고 제법 성가신 잡목을 헤치며 오르니 바위 등로가 나타나고 곧이어 오늘 산행을 하는 목적인 천등지맥 산행 분기봉에 도착을 해 잠시 쉬면서 주위 풍경을 살펴본다.
7년 전 덕동마을에서 올라 십자봉을 거쳐 백운산으로 걸었던 추억에 잠시 옛 생각에 젖어 보는 시간이다.
셀카놀이를 하면서 사진 몇 장 남기고 예전과 변함이 없는 돌탑 그리고 이정표와 새로 생긴 천등지맥 분기점 967.5 미터봉이란 이정판이 눈길을 잡는다.
마음으로 천등지맥 산행도 무탈하게 완주할 수 있도록 산신령에게 빌며 천천히 그 천등지맥 분기봉을 출발한다.
천등지맥 분기봉을 막 출발하려는데 나뭇가지 옆으로 낯익은 띠지 한장이 눈에 들어 오고 살펴보니 남양주에 사시는 금곡님 띠지이다.
아마도 천등지맥 산행보다 백운지맥 산행을 하면서 걸어 놨던 띠지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여전히 잘 지내시고 계신지 궁금하다.
늘 열정적으로 산행을 즐기시는 준족의 금곡님이기에 존경의 대상이다.
지난 해 어려운 일이 생겨 잠시 산행에 뜸하셨던 것은 아닌지 궁금하며 이제 다시 맥 잇기 산행에 열중하고 계신지도 궁금하다.
언제 다시 스치는 인연으로라도 만나 인사 드리고 탁배기 한잔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참고로 천등지맥 분기봉에서 백운산 방향의 이정표에 양안치라는 단어가 생각 나 찾아 보니 양아치고개는 귀래리 동쪽에 있는 고개로서 운계리에서 흥업면으로 넘어가는데 흥업쪽의 큰 고개를 큰양아치, 귀래쪽의 작은 고개를 작은 양아치라고 부르며 양안치 또는 양어치라고도 한다.
이 양안치고개의 유래는
고개가 마치 말안장 모양이라고 해서 양안치라고 부른다고 하고 또 다른 유래는 원래는 양어치라는 주장도 있는데 고구려왕의
어거가 매지리에 머물고 신라왕의 어거가 운계리에 머물러서 그 경계인 이곳의 지명이 양어치였다고 한다.
양아치는 양쪽이란 의미의 양와 어 그리고 고개의 의미인 치가 합쳐 생긴 이름인데 풀이를 하면 두 개의 높은 고개란 뜻이다.
낙엽 등로를 타고 내려가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고 다시 올라 평이한 잡목 등로를 따르니 등로 옆 낙엽속에서 노란 복수초가 이제 봄이 오고 있음을 알리려는 듯 수줍게 피어 오르고 있다.
올 들어 처음 만나는 복수초이고 특히나 이곳 강원도 오지의 산속에서 늦게 피어나는 봄 야생화 이기에 다시 잠시 짬을 내 사진에 담는다.
생각보다 뚜렷하고 걷기 편안한 등로를 타고 빠르게 진행하다 보니 등로 좌측의 잡목 가지 사이로 드높은 봉우리 하나가 계속 따라오고 살펴보니 7년 전 안개속에 정상석만 만나고 내려왔던 백운산이 우람한 능선늘 좌우로 거느리고 봄으로도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다.
백운산은 충청북도 제천시 백운면 운학리와 강원도 원주시 판부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산이 높아 구름이 산정을 항상 덮고 있으므로 백자와 구름 운자를 써서 백운산이라 하였다.
백운산은 높이 1087미터이며 바위가 많은 월악산(1094미터)과 달리 장중한 육산으로 골짜기가 깊고 품이 넓은 산으로 원주시 동쪽을 성곽처럼 에워싸고 있는 치악산맥이 남대봉 아래 치악재에 잠시 맥을 낮추었다가 서쪽으로 서서히 고도를 높여 가장 높게 솟구친 봉우리이다.
백운산 정상에서 서남쪽으로 계속 뻗어 내린 능선이 조두치를 지난 분기점에서 서북과 남으로 갈라져 서북으로는 양아치고개에서 잠시 맥을 가라 앉혔다가 서남쪽 미륵산과 봉림산을 서북쪽 명봉산으로 이어지며 남으로는 십자봉(984.8미터)을 거쳐 오청산을 지나 천등산, 지등산, 주봉산으로 이어진다.
정상에서 동남으로 길게 가지를 친 능선은 구학산, 주론산, 박달재, 시랑산으로 이어진다.
백운산 정상부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계곡인 용수골은 용의 전설이 서린 대용소와 소용소가 있는데 울창한 숲과 맑은 물,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비경을 이룬다.
제천 쪽 백운산 자락의 물이 남쪽 덕동교를 중심으로 부채꼴로 모여들어 남한강 줄기인 원서천으로 흘러들고 백운산과 십자봉에서 발원한 덕동계곡 물은 청풍호로 흘러든다.
오늘같이 맑은 날 다시 한번 올라 주위 풍경을 살펴보며 보이는 산 이름을 하나씩 불러봤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해 본다.
아직 푸르른 잎이 돋아나질 못하고 있는 잡목 가지들이 약간의 산행을 방해하고 있지만 다른 지맥 산행에 비해서는 굉장히 좋은 산행 조건이다.
잠시 더 진행하니 눈 앞 잡목 사이로 드높은 봉우리 하나가 솟아 있고 살펴보니 바로 십자봉이다.
생각보다 뾰족하게 솟아 있는 모습이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걸어가니 실제 산행시에는 생각보다 편안하게 올랐다는 느낌이다.
잠시 편안한 등로를 타고 걸어가다 바위 지대도 통과를 하는데 앞을 살펴보니 십자봉 가는 길에 전위봉 같은 조금 낮은 봉우리가 앞에 솟아 있는 모습도 잡목 사이로 올려다 보인다.
그렇게 진행하니 금새 등로 좌측으로 원덕동 하산 갈림 이정표를 만나 원덕동에 대해 알아 본다.
원덕동은 충북 제천시 백운면 덕동리의 마을로서 옛날 마을이 생기기도 전에 어떤 도인이 덕을 쌓으려고 수양하던 곳에 마을이 터를 잡아 덕골이라 하였다가 한자로 표기하면서 덕동리가 되었다.
마을 대부분이 높은 산지로 백운산(1087m), 오두재(869m), 십자봉(984.8m), 삼봉산(909m)으로 둘러싸여 있고 작은 하천이 북서쪽에서 계곡을 따라 흐르다가 운학천을 만나 원서천으로 흘러든다.
원덕동은이란 마을이름은 덕동리의 자연 마을 가운데 맨 처음 생기고 중심이 되는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7년 전 어렵게 환종주를 한 후 덕동계곡에서 몸을 닦은 후 귀가했던 추억에 잠시 웃어 본다.
여전히 아름다운 산행하기 좋은 등로를 타고 조금은 빠르게 걸어가니 금새 십자봉 정상(983.3봉)에 도착을 해 셀카놀이를 하면서 추억을 남겨 본다.
원주시와 제천시에서 세운 각기 다른 정상석 2개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그 옆으로는 이정표와 십자봉 정상 표지판이 나뭇가지에 달려있다.
그 중앙에는 생각지도 못한 대삼각점이 눈길을 잡는다.
십자봉은 일명 촉새봉(983.3 m)으로 강원도와 충청북도의 경계를 이루는데 십자봉은 일제강점기에 붙은 이름이다.
원주시 남쪽을 에워싸고 있는 백운산(1087m)에서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솟아 있으며, 원주시에서 남쪽으로 15 Km 떨어져 있다.
정상에 서면 조망이 좋은데 북동쪽으로는 웅장한 백운산 주능선이 보이고 그 너머로 치악산 줄기가 시야에 들어오며 동남쪽으로는 삼봉산이 삿갓을 엎어놓은 듯이 보이고 남으로는 가야 할 시루봉과 옥녀봉 능선이 서쪽으로는 미륵산이 보인다.
백운산과의 사이에서 덕동계곡이 발원하여 원덕동까지 5 Km에 걸쳐 흐르고 백운산에서 시작하여 오늘 산행 기점인 천은사를 가로질러 흐르는 천은사계곡은 길이가 짧은 편이지만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널찍한 암반지대가 곳곳에 널려 있어 가족 단위의 휴식공간으로 적합하다.
이곳 십자봉 정상에서 옛추억에 잠겨 준비한 간단한 빵과 과일로 허기를 달랜 후 출발한다.
십자봉 정상을 출발하자마자 바로 눈앞에 묵어가는 헬기장이 나타나고 그 넘어 오늘 걸어가야 할 천등지맥 마루금 좌측 저 멀리 삼봉산이 우뚝 솟아 있다.
삼봉산은 충청북도 제천시 백운면 화당리와 덕동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세 개의 봉우리가 솟아오른 산이므로 삼봉산이라 하였다는데 지금 바라보는 풍경은 전혀 3개의 봉우리로 이뤄진 산처럼 보이지 않지만 진행하다 시루봉 넘어 바라보는 모습은 3개의 봉우리가 제모습을 드러냈다.
삼봉산은 십자봉 지능선의 최고봉으로 십자봉은 치악산 남대봉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진 백운산(1087m)을 모산으로 하고 삼봉산은 북쪽 백운산부터 시곗바늘 방향으로 구학산, 주론산, 시랑산, 천등산, 오청산, 옥녀봉, 십자봉의 능선이 마치 성곽처럼 둘러싼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정상에서 동남쪽 아래 화당지 방면으로 부챗살처럼 뻗어 내린 작은 능선들이 동쪽의 백운천과 서쪽의 화당천으로 잦아들고 약수동 서북쪽 약수동계곡을 따라 정상에 올라서면 십자봉을 거점으로 산봉우리들이 드넓은 초록빛 띠를 두른 듯 시야에 들어온다.
동남쪽 화당리 방면으로 백운면의 유일한 곡창 지대인 평동리 들판이 내려다 보이고 들판 너머로 제천 시내로 넘어가는 박달재가 실낱처럼 보인다.
삼봉산은 오지에 위치하는 까닭에 8·15 광복 직전까지만 해도 산속에 호랑이가 떼를 지어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을 때는 거의가 머리 부분만 남겨 두는데 마을 사람들이 발견하면 화장을 한 뒤 돌무덤을 쌓아 호식장을 지내고 돌무덤 위에 시루를 씌운 다음 시루 구멍에 칼을 꽂아 망자의 넋이 나오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며 대호지 매점에서 1.5 Km 떨어진 곳에 이른바 호식총이 있다.
산세가 험준하여 6·25 전쟁 때 북한군 유격대가 숨어들었다 할 정도로서 평동리 출신 소설가 오탁번은 6·25 전쟁을 다룬 달맞이 꽃에서 백운면 일원을 배경 무대로 그렸다.
삼봉산 아래에는 덕동계곡과 약수동계곡이 있어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피서를 즐기러 온다.
언젠가 저 삼봉산에도 올라 이곳을 바라보며 오늘을 추억할 수 있는 시간도 있을 것이다.
남동쪽으로 솟아 있는 삼봉산을 조망한 후 잠시 걸어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잡목이 사라진 틈으로 이제 북동쪽으로 거대한 백운산이 살짝 올려다 보인다.
그렇게 구경하며 부드러운 등로를 따라 조금 더 빠르게 진행하니 나즈막한 무명봉 지나 등로 좌측 아래로 덕동리 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덕동리와 덕동계곡을 내려다 보며 걸어가니 이제 배재(화당리)라는 이름이 보이는 이정표를 만나 반가움을 표한다.
살펴보니 이곳이 966.6미터의 삼봉산 갈림 삼거리로서 좌측으로 가면 삼봉산으로 가게되고 오늘 이 산객은 우측의 배재 방향으로 내려가 천등지맥을 걸어야 한다.
여전히 부드러운 등로를 타고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 좌측으로 조금 더 선명한 삼봉산이 가깝게 다가와 잇지만 여전히 봉우리 3개의 형상은 찾을 수 없다.
잠시 뒤 은사시나무 군락지를 지나 무명봉에 도착을 하고 잡목으로 가려진 진행 방향의 올망졸망한 봉우리들을 살펴 본 후 걸어가니 큰 바위 하나와 낙엽송 지대를 지나 벤취 2개가 설치되어 있는 뒷산(746.1봉)에 도착을 해 잠시 더 쉬어 간다.
생각보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 땀은 덜 흘리면서 산행하기 좋은 오후 시간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곳 746.1봉이 뒷산이라는 사실은 사전에 확인하지 못하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이기도 하다.
다시 낙엽진 활엽수가 등로를 가득 메우고 있는 편안한 마루금을 따르니 등로 옆 생강나무에선 이제서 노란 생강꽃을 피우기 시작하여 삭막한 등로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고 있다.
잠시 더 낙엽 등로를 따르니 산림조합중앙회에서 세운 고로쇠나무에 대한 설명판이 보이는데 왜 이곳에 이런 설명판을 세웠는지 이해가 안된다.
주위를 둘러보니 고로쇠나무가 많은 것도 아닌듯 싶은데 말이다.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과 내리막 등로를 따라 낙엽에 미끄러지다 보니 용마산 갈림 삼거리 이정표를 만나는데 뒷산에서부터 벌써 500미터를 걸었다는 거리 표시가 반가운 시간이다.
용마산은 충북 제천시 한수면에 있는 높이 687미터의 산으로서 북쪽에는 검단산과 능선으로 이어져 있다.
이제 배재까지는 900미터 남아 있다는 이정표에 힘을 내 빠르게 걸어 본다.
여전히 등로는 커다란 낙엽진 활엽수와 그 아래 막 자라고 있는 키 작은 잡목들이 혼재되어 있는 걷기 편안한 등로가 이어지고 있다.
등로 좌측으로 약간의 벌목된 지대에 도착을 하니 벌목된 장소 저 멀리 제법 빨래판 같은 능선이 나타나고 처음에는 천등지맥과 관계없는 능선이라 생각했는데 지도를 살펴보니 그곳이 바로 옥녀봉과 시루봉으로 이어지는 오늘 걸어야 할 지맥 마루금이다.
다시 나즈막한 능선을 넘어 진행하니 등로 좌측으로 방향을 바꿔 삼봉산 능선이 조금 더 가깝게 다가와 선명하게 그 자테를 드러내고 있다.
잠시 후 벤취 2개가 설치되어 있는 쉼터를 지나고 한동안 큰 고도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평이한 등로를 따르니 나무계단이 설치된 내리막 등로가 보이고 그곳에서 앞을 살펴보니 배재 지나 올라야 할 옥녀봉 가는 마루금이 결코 호락하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다.
잠시 나무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또 다시 벤취 쉼터 2개가 설치되어 있고 그 옆에는 이제 배재까지 140미터 남아 있다는 이정판이 서 있다.
이제 배재가 코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차량이 통행하는 소음 하나 들리지 않으니 이곳 역시 차량 통행이 거의 없는 오지의 도로가 아닐까 생각되는 곳이다.
큰 바위 지대를 지나 내려가니 바위 옆에 막 피어난 제비꽃이 아름다워 다시 한번 눈을 맞춘다.
고도가 낮은 아래쪽에는 벌써 제비꽃이 만개한 후 지고 있는데 이곳 강원에는 이제 봄이 오면서 봄 야생화가 늦게 꽃을 피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계속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고도가 낮아질수록 등로 옆으로 연두빛 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고 그렇게 눈 앞에 솟아 있는 봉우리가 봉이지 않을 만큼 내려가니 저 멀리 2차선 포장도로가 보이는 곳에서 귀한 황금빛 붓꽃을 만난다.
참으로 진귀한 야생화이기에 정성드려 담아 보지만 똑딱이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배재고개에 도착을 하니 도로는 잘 닦아 놨지만 지나다니는 차량들이 없어 여유롭게 건너 진행을 한다.
저 앞 충청북도라는 도로 표지판 뒤로 나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10여미터 들어가면 우측 능선 방향으로 가파른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잇고 그 계단을 타고 오르면 된다.
이곳 배재고개에 관한 자료를 찾다가 진주문화원에서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찾을 수 있어 올려 본다.
배재는 원주시 귀래면과 제천시 백운면 사이에 있는 높은 고개로서 위치상으로는 강원도와 충청북도의 경계이며 치악산의 남쪽줄기인 백운산(1087봉)의 십자봉과 옥녀봉 사이의 해발 500 미터 정도되는 산줄기에 있다.
배재라는 이 고개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과 그의 귀여운 딸인 덕주공주에 얽힌 역사의 전설이 있다.
경순왕은 1000년사직 신라를 왕건에게 넘긴 후 천추의 한을 품고 백운면의 이궁에 머무르게 되고 지금의 강원도 땅을 가끔 방문하는데 백운면 산너머 지금의 강원도가 바로 귀래면으로서 귀래란 한자로 귀할귀에 올래의 귀래면으로 귀인인 왕(경순왕)이 방문한 곳이란 의미로 귀래면이 되었다.
귀래에 있는 미륵산의 황산사에 머무르면서 왕은 미륵산 정상밑의 바위에 불상을 조각하도록 하였고 황산사의 불종이 울리면 배재에 올라가 저멀리 남쪽 경주를 바라보며 큰절을 했는데 천년사직을 지키지 못한 죄인의 마음으로 조상과 백성들에 대한 회한에 찬 큰절이었다.
그리고 황산사에 머무를 때 이따금 월악산 덕주사에 있던 덕주공주가 올 때면 그냥 기다리지 못하고 백운면과의 경계인 높은 언덕까지 마중 나갔으며 그때 덕주공주를 만나던 언덕 배재에서 부녀의 정을 어떻게 나누었을까 처절한 부녀상봉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린다.
정말 마의태자가 삼배옷을 입고 개골산으로 가셨을까 또는 사랑하는 동생이 있는 깊은 산사에 공주 혼자 두고 떠날수 있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지금의 우리들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더군다나 월악산 하 덕주사를 가보면 더 그런 생각이 드는데 왕건의 고려에 굴복한 견현왕은 자식에 배신당한 울분을 견디지 못하고 그 앙갚음으로 나라고 후손이고 다 넘겨 버렸지만 신라경순왕은 아름다운 나라를 뭉게 버릴수가 없어 고스란히 보존하기 위해 받쳤다면 조금의 위로는 되였을진 몰라도 그
마음을 어찌 달랠수 있었겠나 생각해 본다.
사랑하는 덕주공주가 월악산 깊은곳에 있는걸 알면서도 어쩔수 없었다면 얼마나 애절했을까하는 생각과 가만히 앉아 기다릴수가 없어 마중가신 배재언덕이 지금도 경순왕과 덕주공주의 상봉을 보는듯 마음을 저리게 하는 배재언덕, 이곳에 서서 그때 모습을 떠 올려본다.
아무리 왕건의 첫째 딸인 낙랑공주를 아내로 맞이 한들 잊을수 있었겠나하는 생각은 몇번을 들어도 마음 아픈일이 아닐수 없다.
새로운 아내를 맞이 하고 새로운 자식이 태어난들 신라왕 경순은 고려가 아닌 신라 인 덕주공주 보고픈 마음을 달랠수는 없었을것 지금의 민통선 안에 있는 도라산에 올라 남쪽을 향해 사모친 그리움에 말라져 가는 노구를 달래시던 경순왕을 위해 낙랑공주는 절을 지어 세상을 떠나실때 까지 마음껏 신라를 그리워하게 했다고 한다.
도라산의 경순왕과 개골산의 마의태자 및 월악산의 덕주공주, 그들의 사모친 한은 저 세상에서도 풀지 못했을것 같다.
이곳 배재고개에 도착을 하니 이제 오후 2시가 막 넘어가는 시간이라 오늘 산행을 마무리 하기엔 아쉬워 가능하면 다릿재터널까지 진행하는 것을 목표로 조금 더 진행하기로 한다.
배재고개에서 나무계단을 타고 가파른 경사를 오르니 계속 이어지는 통나무 계단이 나타나는데 설치된지 오래되었는지 이제 그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풍경도 눈에 들어 온다.
가파르게 첫번째 봉우리를 오르니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분홍빛 진달래가 보이기 시작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다른 산에서 봤던 진달래와는 달리 조금 더 작고 붉은 빛을 보이고 있다.
잠시 후 강원도 원주시의 귀래면과 충청북도 제천시의 백운면으로 갈 수 있는 방향과 거리표시가 되어 있는 이정판도 보인다.
무명봉을 지나 다시 완만하게 내려가니 또 다른 벤취 쉼터 2개가 보이고 그곳에서 잠시 물 한모금 마시며 쉬어 간다.
오랫만에 드는 맥 잇기 산행이라 그런지 몸이 무겁다가도 가볍게 느껴지고 액간은 두려움도 생겼다가 자연의 정기를 받아 생동감 넘치는 시간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래도 무척 빠르게 진행을 하였는데 아직까지 몸에 큰 무리가 없어 다행인 시간이다.
벤취 쉼터 2개를 지나니 산림청에서 이번에는 당단풍나무에 대한 설명판을 다시 세워 놨다.
간단히 읽어 본 후 완만하게 오르니 이곳에도 역시 통나무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곧이어 역주벌 갈림 삼거리 이정표가 보인다.
옥녀봉까지는 1.5 Km 거리이기에 별 특이한 걱정 없이 진행을 하였지만 그 옥녀를 만나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올라야 하는지 몸소 실천을 해야 하였다.
역주벌이란 충청북도 제천시 백운면 화당리에 속하는 마을로서 본디 화당리의 이름인 꽃당이 또는 꽃댕이를 한자로 표기하여 화당이라 하였지만 옛 땅이름 죽관리로 보아 화는 꽃이 아니라 고지, 곶에서 나온 말이다.
곧 지형이 곶과 같이 튀어나와 있어 붙여진 이름이고 이외에도 옛날 고을 원이 살아서 붙인 이름이라는 이야기도 전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향교터, 옥터, 화장터, 장터 등의 지명이 남아 있으며 물이 좋고 꽃이 많아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조선 말 제천군 원서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죽관리, 소포리를 통합하여 제천군 백운면 화당리가 되었고 1980년 제천읍이 분리되어 제천시로 승격됨에 따라 제원군 백운면 화당리가 되었다가 1991년 1월 1일 제원군의 명칭이 제천군으로 환원되면서 제천군 백운면 화당리가 되었고 1995년 시·군 통합으로 제천시 백운면 화당리가 되었다.
자연 마을로 약수동·강승갱이, 너럭골, 대꼬지, 뱃재, 호두나무배재, 역주벌, 비디재, 주막거리, 송골, 새터말, 양지말, 꽃댕이 등이 있다.
오늘 산행도 결국 다릿재터널까지 가지 못하고 이곳 화당리 작은개 마을로 하산하여 마무리하게 되었다.
역주벌 갈림 이정표를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무명봉에 봉 말뚝 2개가 박혀 있어 살펴보지만 아무 표식도 없다.
흔적만 남기고 다시 출발하여 얼마 가지 않은 곳 능선상에 632.4봉의 삼각점이 나타나고 살펴보니 엄정이다.
사진 두어장 남기고 잡목으로 막혀 보이는 것이 없기에 곧바로 출발을 한다.
632.4봉 삼각점을 지나 고운 분홍빛 진달래의 환영을 받으며 걸어가니 82번 녹색 송전탑이 나타나고 그 밑을 통과하여 쓰러진 고사목을 지난다.
이제 마지막 봉우리라 생각하고 오르지만 옥녀봉 만나러 가는 길이 결코 호락하지 않는다.
나즈막한 전위봉에 도착을 해 앞에 솟아 있는 봉우리를 잡목 사이로 올려다 보며 저 봉우리가 제발 옥녀봉이길 바래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무명봉을 넘어 다시 깊게 빠지는 낙엽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깊은 안부 사거리가 나타나는데 좌우측으로 에전에는 제법 길이 났을 법한 그런 안부이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지나다닌 흔적조차 가물해져 사라져 가는 안부처럼 보인다.
등로 좌측인 동쪽의 제천시 백운면 화당리와 우측인 서쪽의 원주시 귀래면 운남리를 이어주던 안부였다는 생각이다.
다시 약간의 바위들이 산재되어 있는 등로를 타고 긴 한숨을 토해내며 어렵게 오르니 이곳 역시 옥녀를 만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전위봉 중 하나이다.
다만 이제 진짜 옥녀봉이 바로 코 앞으로 다가와 있다는 느낌이다.
전위봉을 지나 부드러운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큰 오르막 된비알도 없이 능선처럼 생긴 곳에 옥녀봉 정상석이 보인다.
지나온 방향으로 다리골과 좌측의 천등지맥 마루금이 아닌 우측 등로를 따르면 갈미봉이란 이정판이 먼저 눈길을 잡는다.
이곳 옥녀봉(714.7봉)에 관한 자료를 찾다 보니 다음과 같은 풍류바위와 옥녀라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어 옮겨 본다.
충북 충주시 엄정면 유봉리의 옥녀봉 밑에는 노송과 기암으로 된 풍류바위를 비롯해서 풍류굴등 경승 좋은 놀이터가 있는데 옛날 이곳 싸리재마을에 옥녀라고 하는 외동딸과 그 어머니가 살고 있었다.
날이 밝으면 질삼과 나물 뜯는 것이 유일한 생업으로 그 모녀는 서로 애지중지하며 살아었는데 어느날 옥녀가 고개 너머에서 나물을 뜯고 있으니 어디선가 구성진 피리소리가 들려와 둘러보니 풍류바위에 앉아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풍류바위에 앉아 있는 사람은 너무도 멋있어 보였고 이 세상에서는 보기 드문 미남이었기에 옥녀의 가슴은 설레였으나 부끄러움 때문에 발을 옮길 수도 없었다.
시간이 흐르자 두 사람의 눈은 마주쳤고 그렇게 한참 동안 침묵만이 흐르다가 어렵게 대화가 시작되었는데 그 청년은 하늘나라에서 온 옥황상제의 왕자였으며 하늘나라에서 죄를 범하고 100일간을 지상의 인간세계로 유배를 왔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이 왕자와 옥녀는 별유천지에서 별개의 사람끼리 꿈과 같은 나날을 보내게 되어 세월 가는 줄도 몰랐다.
그러던 어느날 왕자의 유배 기간이 끝나 하늘나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별을 고해왔고 옥녀는 평생을 같이 하자고 애원을 해봤으나 하늘나라의 법도는 인간사회와는 허용될 수 없다며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옥녀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싶어 눈물에 젖어 있는데 어디선가 오색구름이 모여 들더니 구성진 피리소리만을 남기고 왕자는 구름과 함께 승천을 하였고 지상에 홀로 남은 옥녀는 제일 높은 상봉에 올라 매일 하늘만 바라보고 왕자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자신을 비관하고 영영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 후 옥녀의 어머니도 딸의 비운을 슬퍼하며 산중을 헤메더니 어느 석굴 속으로 들어가 질삼으로 소일을 하다가 역시 비명의 여생을 마치고 말았다.
그 후 옥녀가 올라가 왕자를 부르짖던 상봉을 옥녀봉이라고 부르고 있고 옥녀의 어머니가 들어갔던 굴은 풍류바위 옆에 있어서 풍류굴이라고 하는데 비오는 날이면 굴에서 베 짜는 소리와 함께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풍류바위라고 부르는 것은 이 기람절벽한 곳에 흔들리는 바윗 덩어리가 있어서 이 바위를 강한 바람이나 사람들이 밀면 그 암벽에 부딪쳐서 신비스러운 풍악소리가 난다고 해서 풍류바위라고 부르는데 촌로들 말에 의하면 그 소리가 은은하면서도 커서 충주시내까지도 들렸다고 하는데 그 바위를 어떤 사람이 약 15년전에 철장대를 가지고 와서 내려 굴렸으므로 지금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하는데 다시 제자리에 올려 놓으면 여전할 것이라고 말들 한다.
늘 생각하는 것은 이러한 전설이 사실이던 아니던 간에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산이 주위 민초들에게 주웠던 영향이 컸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측의 갈미봉 가는 등로를 버리고 좌측의 시루봉 가는 등로를 타고 다시 조금은 빠르게 낙엽을 헤치며 걸어가니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타고 넘어 또 다른 옥녀봉이란 정상석이 서 있는 곳에 도착을 한다.
앞에서 만났던 실질적인 옥녀봉 정상에 세워졌던 정상석은 원주시에서 세운 것이고 이곳 정상석은 살펴보니 충주시에서 세운 것으로 지자체마다 쓸데없는 경쟁심으로 돈만 낭비하고 제대로된 명칭과 높이는 방치된 상태 그대로가 아쉽기만 하다.
사진 한장 남기고 곧바로 출발한다.
잠시 내려가다 잡목이 사라진 곳에서 진행 방향을 살펴보니 앞에 나즈막한 전위봉을 지나 우뚝 솟아 있는 시루봉이 빤히 올려다 보인다.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낙엽 내리막 등로를 내려가 안부를 통과하고 조금 더 걸어가다 뒤돌아 보니 저 멀리 방금 전 올라갔다 내려 온 가짜 옥녀봉 정상이 올려다 보이고 그 사면 능선에는 꽃병을 닮았는지 아니면 무엇인가를 닮은 듯한 미묘한 바위를 보고 사진에 담아 본다.
이제 시루봉 전위봉에 오르고 앞을 살펴보니 바로 앞에 잡목 사이로 시루봉이 그리 큰 경사 없이 완만하게 오를 수 있을 것 같은 풍경으로 다가 온다.
다시 뚝 떨어지는 안부를 통과하는데 이곳 역시 좌우측으로 희미한 등로가 보이는데 최근에는 지나다닌 흔적이 없어진지 오래된 그런 안부처럼 보인다.
등로 좌측으로 낙엽송 지대가 보이고 그 안부를 넘어 다시 오르니 충주시에서 세운 가짜 시루봉 정상석이 서 잇는데 지도상 높이 695.4미터 보다도 훨씬 높은 740미터로 표기되어 있어 정확한 고증이 필요할 듯 하다.
가짜 시루봉 정상석에서 셀카놀이로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큰 고도 차이 없이 완만하게 진행하니 등로 좌측 저 멀리 봉우리 세개가 솟아 잇는 삼봉산이 다가 와 있다.
이제서야 왜 삼봉산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는 시간이다.
낙엽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은사시나무 군락지가 다시 펼쳐져 있고 바위들이 산재되어 있는 무명봉을 넘어 다시 한번 치고 오르니 드디어 진짜 시루봉(695.4봉)에 도착을 하는데 방금 전 가짜 시루봉과는 달리 정상석 하나 없이 산악회에서 달아 놓은 정상 이정판 하나가 전부이다.
이곳 시루봉에도 옥녀봉과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내려와 정리해 보면 엄정면에 시루봉이라고 부르는 높은 산이 있었고 옛날 이 산 밑에는 많은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여러 해 동안 흉년이 들어서 인심이 각박해지고 도둑질을 일삼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이곳에 사는 이시조라는 사람만은 정직하고 마음씨 좋게 열심히 일을 해서 부유하게 살고 있었지만 도둑놈들 등살에 불안하게 살아야 했다.
그래도 늙은 어머니와 어린 남매를 위해서 자신은 먹을 것과 입을 것도 아껴 초근목피로 끼니를 이어 갔는데 그나마 먹고 사는게 고맙다는 생각에 뒷산에서 지성을 드리며 살아갔다.
이시조가 어느날 잠자리에 들었는데 난데없이 백발노인이 나타나더니 나는 하늘의 사자로서 너와 같이 진실한 사람을 구하려고 내려온 것이라며 내가 시키는 것을 꼭 지키라고 당부하고 그대는 모년 모월 모일에 네 가족을 데리고 네가 지성을 올리는 그 산 꼭대기로 올라가 있으면 그 이유는 그때 가서야 알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하도 기이한 꿈인지라 이시조는 눈을 번쩍 뜨며 노인 앞에 부복을 하려고 보니 이미 노인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고 그 후 이시조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그 산에 대한 지성을 더해가며 살고 있었는데 드디어 그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이시조는 자기 혼자 같으면 그 산꼭대기 가는 것이 그렇게 문제될 것은 없을 터이나 노인과 어린것들 때문에 여간 힘든 일이 아니어서 그 날 밤은 한숨도 못자고 뜬눈으로 새운 다음 날이 밝자 다섯 식구가 집을 나서서 산정으로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산길로 들어서니 노모와 어린것들은 걸을 수가 없게 되고 이시조가 업고 산을 오르자니 힘에 겨운 일이었기에 산 허리쯤 가서는 이시조와 그 아내도 기진맥진 쓰러지고 말았는데 그때 갑자기 천지가 어두워지며 비가 쏟아지기 시작을 하더니 들판이며 산 밑의 동리가 모두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천지개벽이 있는 줄을 눈치 챈 이시조는 산 꼭대기를 향해서 있는 힘을 다해 올랐고 산마루에 오르자마자 온 식구는 실신을 하고 말았으며 다만 어린것들은 쏟아지는 비속에서 달달 떨고 있을 때 온 천하가 물바다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때 이 시루봉 꼭대기 20여만평만 남아 있었고 어린 것들이 무섭다고 소리치는 바람에 겨우 정신을 차린 이시조가 눈을 떠보니 천지개벽으로 모든 것을 다 없애고 자기 가족만 살아 남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서 모든 식구가 정신을 차리게 됐고 비도 그치고 물은 차차 빠지게 되니 다섯식구는 서로 부둥켜 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으며 이 후 이곳 정상을 멀리서 보면 시루를 엎어 놓은 것 같다고 해서 시루봉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정상 이정판 아래에서 사진 한장으로 추억을 남기고 갈길이 머니 다시 곧바로 출발한다.
시루봉을 떠나 완만하게 내려가다 앞을 보니 이제부터 진행해야 할 마루금이 마치 빨래판을 갔다 놓은 듯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해서 보여주고 잇어 오르기도 전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다.
등로 좌측 저 멀리에는 제법 그럴듯한 세개의 봉우리를 가진 삼봉산이 여전히 지켜보고 있다.
안부로 내려갔다 다시 오르니 분홍빛 예쁜 진달래와 멋진 소나무가 조화를 이루는 702.7 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다시 노란 생강나무 꽃이 피어나는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지도 상 비지재를 넘는데 특별히 안부같지 않은 능선이기에 통과한다.
이곳 비지재를 찾아 보니 비지재 좌측 아래 마을이름이 제천시 백운면 화당리 비디재로서 그 마을 이름을 곧 고갯마루 이름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되는 이름이다.
비디재를 넘어 다시 오르니 멋진 소나무가 서 있는 무명봉을 넘고 곧이어 안부를 지나는데 눈 앞으로 거대한 암봉이 나타난다.
처음에는 그 암봉을 두고 좌측 우회 등로를 타고 진행하려고 하였으나 자세히 살펴보니 가느다란 로프가 암봉쪽으로 이어져 있어 봉우리 정상부로 향한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정상부로 오르니 아무 표식도 없는 정상에는 역시 잡목들로 인해 조망조차 좋지 않아 왜 고생하며 올랏을까 후회도 되는 시간이다.
그래도 잠시 소나무 가지 사이로 뒤돌아 보니 저 멀리 옥녀봉과 시루봉 등 지금까지 어렵게 통과하며 지나온 마루금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정상 주위에 막 피어나기 시작하는 분홍빛 진달래를 배경으로 가야 할 방향을 살펴보니 저 멀리 678.5봉과 우측 저 멀리 오청산이 올려다 보이는데 시간을 보니 다릿재까지 진행하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을 것 같아 진행하다 적당한 곳에서 탈출을 하기로 한다.
이제 시간은 오후 5시가 가까워지는 시간으로 산행 시간도 약 5시간을 넘기며 거리는 약 14 Km를 넘기고 있다.
중간에 탈출한다고 마음을 먹으니 다시 두 다리에 힘이 풀리고 진행 속도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조금 더 그곳 정상에서 시간을 보낸 후 암벽을 타고 내려가니 다시 평이한 등로가 열려 있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갑자기 깨진 거울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 671.7봉에 도착을 해 물 한모금 마신 후 이제는 좌측 등로를 버리고 우측 내리막 등로를 따라 여유있게 걸어 본다.
깨진 거울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 671.7봉을 내려 와 진행하니 갑자기 등로가 넓어지며 고속도로처럼 나 있다.
그 편안한 등로를 짧게 지난 후 바위들이 산재되어 있는 오르막 등로를 따라 오르니 진행 방향으로 걸어가야 할 마루금이 제법 남성미를 뽐내며 홀로 걸어가는 산객의 의지를 꺽어 놓고 있다.
그래도 어떻게 될지 몰라 다시 힘을 내 걸어가니 나즈막하게 내려가는 끝자락에 안부가 나타나고 등로 좌측으로 두어개의 산악회 띠지가 달려있는데 살펴보니 이곳이 바로 강승갱이재로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화당리의 강승갱이마을로 하산할 수 있는 안부이다.
이곳에서 잠시 고민하다 조금만 더 진행하기로 하고 진행하지만 앞으로 탈출로도 없는 것 같아 이곳에서 강승갱이 마을로 하산하기로 한다.
강승갱이재에서 오늘 천등지맥 산행은 마무리하고 좌측 화당리 마을 쪽으로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벌목지대가 나타나는데 유독 이 산객이 하산하는 등로에만 가시나무가 군락을 이루며 내려가는 마지막 산행에 어려움을 가중 시키고 있다.
많은 가시나무에 찔리고 굵혀 붉은 피를 본 후에야 어렵게 그 가시나무 지대를 통과하여 비포장 임도와 만나 조금은 편안하게 내려가 보지만 산판도로가 이리저리 구불어져 있어 제법 시간이 걸릴 듯 하다.
내려가며 화당리 마을 뒷쪽을 살펴보니 오늘 산행 내내 보였던 삼봉산이 바로 코 앞으로 다가와 있어 스스로 놀랐던 시간이다.
이리 돌고 저리 돌아 어렵게 산판도로를 따라 한참을 내려오니 드디어 화당리 마을에 도착을 하고 백운면 택시에 전화를 하니 한분은 제천으로 나가 있어 안되고 또 한분은 휴일이라 안된다면 2개의 전화번호 모두가 사용 불가능하다.
어렵게 다른 택시 기사분을 호출하여 부탁하니 화당리가 너무 커 정확한 마을 이름이 필요하다며 콜를 거부해 어쩔 수 없이 마을 아래 도로까지 내려가 택시를 부를 수 있었다.
천등지맥 마루금에서 이곳 화당리 작은개 마을과 꽃댕이 마을 중간의 화당로로 나와 어렵게 마을 주민을 만나 마을 이름을 물어보니 작은개 마을이란다.
택시에 전화를 하여 알려주고 배낭 정리하며 기다리니 약 10여분 후에 택시가 도착을 해 배재를 통해 천은사로 복귀를 한다.
이곳 화당리 작은개와 꽃댕이는 충청북도 제천시 백운면 화당리에 속하는 마을로서 본디 이름인 꽃당이 또는 꽃댕이를 한자로 표기하여 화당이라 하였다.
하지만 옛 땅이름 죽관리로 보아 화는 꽃이 아니라 고지, 곶에서 나온 말로서 곧 지형이 곶과 같이 튀어나와 있어 붙여진 이름인듯 하며 이외에도 옛날 고을 원이 살아서 붙인 이름이라는 이야기도 전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향교터, 옥터, 화장터, 장터 등의 지명이 남아 있으며 물이 좋고 꽃이 많아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조선 말 제천군 원서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죽관리와 소포리를 통합하여 제천군 백운면 화당리가 되었고 1980년 제천읍이 분리되어 제천시로 승격됨에 따라 제원군 백운면 화당리가 되었다가 1991년 1월 1일 제원군의 명칭이 제천군으로 환원되면서 제천군 백운면 화당리가 되었고 1995년 시와 군 통합으로 제천시 백운면 화당리가 되었다.
서와 남 그리고 북 삼면이 높이 600에서 900m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화당천이 백운면에서 가장 큰 하천인 원서천으로 흘러들며 하천 주변에 제법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화당리는 백운면 중서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자연 마을로 약수동, 강승갱이, 너럭골, 대꼬지, 뱃재, 호두나무배재, 역주벌, 비디재, 주막거리, 송골, 새터말, 양지말, 꽃댕이 등이 있는데 약수동은 좋은 약수가 나서 붙인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약수를 마시고 병을 고쳐 걷게 되었다고 하며 너럭골은 마을이 자리한 땅이 넓어서 붙인 이름이고 물안이는 인근 마을에 비해 유독 물이 맑고 수량이 풍부하여 붙인 이름이다.
화당천 상류에서는 밭농사 이뤄지고 하류에 자리 잡은 논에서는 벼농사가 이루어지며 교육 기관으로 화당초등학교가 있고 경순왕이 원주 미륵산 마애불을 향해 배례한 곳이라는 전설이 전하는 배치(배재, 뱃재)가 있다.
천은사로 가면서 좋은 이야기로 분위기는 좋았으나 천은사 주차장에 도착을 하니 콜 비용 7000원을 요구해 와 약간의 다툼이 잇었고 결국 20000원 나온 택시비에 5000원을 더해 25000원을 주고 내리는데 괜시리 화가 나고 백운면에 대한 기억이 좋음에서 나쁨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수없이 많은 전국의 택시를 타고 다녔지만 이제는 모두 메타기를 켜 운행하기에 콜 비를 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이곳만은 사전에 이야기도 없이 목적지에 내릴 때 그것도 잔돈이 없어 큰 돈을 내니 콜 비용을 내라는 식의 강압은 옳지 못하다는 생각이다.
그래도 무탈하게 한구간 잘 마무리하고 서울로 복귀 할 수 있어 약간의 불미스러웠던 일은 금새 잊기로 한다.
다음 구간은 또 언제나 내려가 걸어 볼 수 있을지 기대와 걱정이 상존하는 시간이 되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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