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맥산행(완료)/고흥지맥(호남·완)

고흥지맥 제1구간 모암재에서 골안고개까지 산행후기

by 칠갑산 사랑 2016. 1. 2.
728x90

산행지 : 전라남도 보성군과 고흥군의 고흥지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2015년 12월 29일 (화요일 당일 산행)

산행날씨 : 아침엔 약간 추웠으나 하루 종일 맑고 산행하기 좋았던 날씨

산행온도 영하 03도에서 영상 08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모암재(옥전1길 2차선 포장도로)-선암생태통로-비포장 임도(무선이동통신탑)-고흥지맥 분기점(571봉)-575봉(적지봉)-547.5봉-안부-

                 적지치(432.6, 조성1봉?)-404봉(302봉, 조성2봉?)-361.1봉-275 쌍묘-302.1봉-편백나무 조림지-소나무 등로-326.6봉-태봉(325.2봉 삼각점)-

                 일출-가마봉(258.3봉)-경주김씨 가족공원묘지-경주김씨 묘지들-여하치-지하통로(남해고속도로 통과)-2번 4차선 포장도로 통과-열가재(열가재

                 제2주유소)-경주김공묘지와 벌교1터널-전주이공묘지-무인산불감시카메라-295.8봉(무명묘지)-보성의공묘지들-비포장임도-무인산불감시

                 카메라와 무인이동통신탑-장군봉(412.7봉 삼각점)-223미터 안부-교통호-비포장 임도-285(송장봉)-송장고개-병풍산과 두방산 갈림 삼거리-

                 310봉(용흥봉)-303봉-비포장 임도-266봉(가늘고 높은 안테나)-271봉-303봉(두방산)-303봉-291봉(대강봉)-258봉 갈림 삼거리-편백나무

                 등로-여산송씨묘지들-밭 경작지-비포장 임도-시멘트 포장도로-물탱크-송전탑 30번-갈림 사거리-축내고개(20번 2차선 포장도로)-축내 버스

                 정류장과 축내마을 이정석-시멘트 포장도로-여산송씨 묘지들-88.2봉(축내봉 삼각점)-시멘트 포장도로-갈림사거리-묘지들-시멘트 포장도로 갈림

                 삼거리-송전탑-지독한 잡목과 가시나무 등로-103봉 편백나무-창원박공묘지-가드릿재(2차선 포장도로)-조릿대구간-70봉-문화유씨 묘지들-

                 비포장 임도-갈림사거리 안부-대웅아트산업 콘테이너 박스-시멘트 포장도로-감나무 과수원-2차선 포장도로(태양열 발전판)-통덕랑청주양씨묘지-

                 무인이동통신탑(고흥동강기지국)-삼봉(107.3봉)-국도환경 공사장-비포장 임도-77번 2차선 포장도로-탄포삼거리(15번과 27번 포장도로)-

                 탄포버스 정류장과 중산일몰 전망대 이정판-아평마을(마느바대) 이정석-탄포육교(우주항공로 4차선 도로 통과)-1차선 포장도로-고인돌-갈림

                 삼거리-과수원-영광정공묘지-비포장 임도-밭 경작지-녹슨 철조망-벌목지대-혼백산 갈림 삼거리-혼백산(183.3봉, 쌍묘)-무명묘지들-

                 운교고개(시멘트 포장도로)-밤나무 과수원-밭 경작지-110봉-천봉산(192.5봉, 무인산불감시카메라)-천방산임도삼거리 이정표(골안고개 1.1 Km,

                 남양산성 1.3 Km와 면사무소 1.7 Km)-비포장 임도-시멘트 포장도로-신사당고개(2차선 포장도로, 남양천방산 등산로안내도와 담양전씨

                 세장산 이정석)-골안고개(양로 갈림 삼거리, 농협창고)-산행종료

산행거리 : 약 26.26m (스마트 폰의 GPX 기준)

산행시간 : 지독한 잡목과 가시나무 등로를 따라 온 몸에 생채기를 내고 많은 사진 찍으며 10간 34 (05시 39부터 16시 13분까지)

교통편 : 애마와 택시 이용

고흥지맥이란 ???

고흥지맥은 호남정맥의 존재산(712봉) 남쪽 2 Km에 있는 적지봉(571봉)에서 분기하여 남동진하며 태봉(325.2봉), 가마봉(258봉), 장군봉(412.7봉), 삼봉(107.3봉), 혼백산(183봉), 천봉산(193.1봉), 소대방산(165봉), 운암산(484.2봉), 반월산(291.0봉), 수덕산(301봉), 오무산(356.3봉), 벼락산(431봉), 천등산(553.5봉), 우마장산(342.8봉), 유주산(416.6봉) 등을 일구고 지죽대교 앞 고흥반도 남단 남해바다에서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90.9 Km 되는 산줄기로 말한다.
고흥반도를 남북으로 온전하게 종단하는 특수성을 고려하여 산이름이 아닌 지역이름을 따 고흥지맥이라 칭한다.

 

 

 

지독한 잡목과 가시나무 그리고 사라진 마루금을 찾아 너무나 힘들게 걸었던 고흥에서 멋진 추억을 만들었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올 한해 사회 여건과 전세계적인 상황변화로 일적이나 개인적으로 너무나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마지막 시기에 생각지도 못한 멋진 프로젝트 하나를 잘 마무리 할 수 있어 마음 편히 10여일간의 연휴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처음에는 군에 입대한 아들을 제외하고 가족과 함께 여행이라도 갈 계획이었지만 아버님 제사와 본인의 생일 그리고 군에 가 있는 아들이 갑자기 연말연시에 휴가를 얻어 나올 수 있다는 소식에 모든 연휴계획이 틀어지며 이 산객 홀로 산에 들 기회만 생겼다.

연휴 첫날 가섭지맥 제2구간을 다녀온 후 이틀간 집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월요일 오후 산행 준비 후 홀로 순천으로 내려가 하룻밤 묵은 후 화요일과 수요일 이틀간 잡목과 가시나무들로 인해 선답자들에게 가장 악명이 높은 고흥지맥을 걸어 보기로 하고 계획을 세워 본다.

순천만과 낙안읍성등 순천은 몇번 내려가 둘러 본 기회가 있었기에 그곳에서 하룻밤 묵고 다음날 새벽 일찍 일어 나 고흥지맥 첫구간 산행 들머리로 가 멀고도 긴 산행을 시작해 본다.

 

다만 30일인 수요일 군에 간 아들이 휴가를 나오기에 그날 집으로 복귀해 탁배기 한잔 마시며 2015년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2016년 새해를 맞을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운 좋은 가장은 아닐까 생각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서둠속에 택시를 타고 올라 와 홀로 남겨진 새벽 시간에 산행 준비를 하니 찬바람이 불어 체감온도가 내려가지만 생각보다 많이 춥지는 않아 기분 좋게 출발하는 시간이다.

다만 새벽 어둠속에 홀로 진행을 하다 보니 예전 호남정맥 산행을 하면서 가슴속 깊이 남아 있는 멋진 존재산을 볼 수 없음에 아쉬운 시간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걸어 진행을 하니 초반인데도 선답자들이 왜 이곳 고흥지맥을 그토록 악명 높은 마루금이라 했는지 몸으로 느끼며 어렵게 걸어 일출을 보고 태봉이 가까워진 공터에서 좌측 뒤를 보니 오늘 새벽에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출발한 존재산에서 좌측 초암산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이 이제 한눈에 들어 오기 시작한다.

저 아래 옥전리의 천치저수지 위로 새벽에 택시로 올라 간 지방도로가 보이고 그 뒤 저 멀리 많은 추억을 남긴 존제산과 좌측의 고흥지맥 분기봉이 벌써 저 멀리 멀어지며 다시 언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없은 헤어짐을 아쉬워하고 있다.

 

홀로 순천에서 새벽에 일어 나 간단하게 새벽 식사를 하고 도시락을 준비해 고흥지맥 제1구간 산행 날머리인 골안고개의 오래된 농협건물 옆에 주차를 시키고 근처 택시 기사를 만나 출발하는 시간이 새벽 5시를 막 넘기고 있다.

네비게이션의 고장으로 스마트 폰의 T맵을 이용해 어렵게 도착한 모암재의 선암생태통로 앞에서 택시를 돌려 보내고 홀로 산행 준비를 하는 시간은 괜시리 큰 외로움이 밀려 오는 시간이기도 하다.

모암재(천치재)는 전남 보성군 벌교읍 옥전리에서 보성군 율어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이 지역 사람들은 모암재라기 보다는 천치재로 더 부르고 있는 고개이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천치라는 마을이름이 어감이 좋지 않다하여 1995년 8월 1일자로 옥전리라 개명하였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치리는 한때 낙안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하느재 밑이 되므로 하느재 또는 천치라 하였데 융희2년(1908)에 보성군 남상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마화리 온동리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천치리라 하여 벌교읍에 편입되었다.

전마을은 1300년경에 진주인 강원종이 이주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마을의 이름은 옛날부터 마을 뒤로 넘어가는 고개의 길이 보기에는 금방 지나 갈것처럼 보이지만 가다보면 끝이 없이 높고 멀어 마치 하늘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천치라 했다 한다.

 

    

어제까지 올 들어 가장 추웠던 날씨이기에 걱정을 많이했는데 생각보다 춥지 않아 기분좋게 출발을 하는데 생태통로 앞에서 좌측 절개지를 타고 오르니 키 큰 쑥과 잡목들이 자랐다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는 곳을 처음부터 힘들게 헤치며 오른다.

잠시 오르니 드디어 호남정맥 산행 시 걸었던 호남정맥 마루금과 만나 우측의 존제산 방향을 버리고 좌측의 초암산 방향으로 걸어 진행을 하는데 오래 전 일이다 보니 존제삼 이외에는 기억이 별로 없다.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좋은 등로를 타고 걸어 오르니 금새 비포장 임도와 만나는데 그곳에는 이동통신탑이 서 있고 등로 좌측 아래로 옥전리를 지나 저 멀리 벌교읍의 야경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그곳에서 잠시 벌교읍 야경과 지나 온 방향으로 존제산을 살펴 보지만 아직은 어둠이 짙어 존제산은 보이지 않는다.

그곳에서 비포장 임도를 건너 능선으로 오르니 초입에 초암산 등산로로 정상까지는 4.5 Km 남아 있다는 이정판이 이채롭다.

 

잠시 더 오르니 키 큰 나무들이 사라지고 관목과 키 작은 잡목들이 보이고 그 사이마다 빛바랜 억새가 눈에 들어 온다.

그곳에서 잠시 등로 좌측으로 벌교읍을 살펴보니 벌교읍도 생각보다 넓고 야경 역시 제법 빛나고 있어 벌교읍을 찾아 본다.

벌교읍은 전라남도 보성군의 동부에 있는 읍으로 동쪽에는 제석산, 북쪽에는 백이산, 서쪽에는 존재산(712미터), 남쪽에는 장군봉(414미터)과 병풍산(479미터) 및 비조암(456미터)이 솟아 있다.
읍의 동부지역에 있는 벌교리, 장양리, 장암리 등이 남해와 접하고 있으며 벌교천과 그 지류가 흐르는 지동리와 전동리 일대에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으며 읍 소재지인 벌교리를 비롯하여 21개 법정리를 관할한다.
백제 시대 분차군과 분사군 및 부사군, 신라 시대 분령군, 고려 시대 낙안군과 양악에 속하였는데 낙안군의 옛 고을이 있었으므로 고읍면이라 하여 22개 동리를 관할하다가 1908년(융희 2) 보성군에 편입되어 고상과 고하의 2면으로 분리되었다.
1914년 흥양군 일부와 순천군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포구로서 번창한 벌교리의 이름을 따서 벌교면이라 하였다가 1929년 순천군 일부를 편입하였으며 1937년 벌교읍으로 승격하고 1983년 고흥군 일부를 편입하였다.
해동지도의 낙안의 벌교 일대에 벌교 다리가 묘사되어 있고 1872년지방지도에는 벌교를 비롯하여 고읍과 대포 등이 그려져 있는데 벌교 바로 앞에는 다리가 그려져 있고 단교라 기록되어 있다.
호구총수에는 고읍면 벌교리가 나타나고 구한국행정구역일람에 고하면 벌교포로 신구대조에 벌교면 벌교리로 기록되어 있다.
나무다리가 있어서 벌교라 불렀다고 하는데 벌교리 홍교 마을에는 1734년에 놓은 길이 27미터와 높이 3미터의 홍교(무지개 돌다리)가 있는데 홍교가 있던 자리는 원래 나무다리가 있었다 한다.
원래 있던 나무다리는 1718년에 주민이 놓았는데 1728년 홍수에 유실되었다가 1729년 선암사 주지가 돌로 다시 만들어 1734년에 완공했다.

키 큰 나무들이 사라지니 찬바람이 강하게 불어 오며 견딜만하던 추위가 다시 엄습해 오는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오르니 키 작은 진달래나무들 사이로 키 큰 소나무 몇그루가 서 있는 고흥지맥 분기점에 도착을 해 고흥지맥 분기점(571미터)을 생각해 본다.

고흥지맥은 호남정맥이 전라남북도를 휘돌아 광양 백운산으로 가던중  전남 보성군 조성면 주월산과 벌교읍 존제산 사이에 있는 571봉(적지봉)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조성면과 벌교읍의 경계 능선을 타고 동남진하여 고흥반도 지죽도앞 남단 바닷가에서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 90km의 산줄기를 고흥지맥이라 한다.

 

그렇게 그곳 고흥지맥 분기점에서 우측으로 흐르는 호남정맥 마루금을 다시 한번 살펴본 후 추워지는 몸을 이끌고 좌측의 관목과 잡목이 우거진 마루금을 타고 고흥지맥 산행을 실질적으로 출발을 해 본다.

하늘엔 보름이 가까운지 둥그런 밝은 달이 고흥지맥에 드는 산객의 앞길을 밝혀주고 있어 즐거운 마음으로 걸어 본다.

잠시 더 오르니 앞으로 진행하기 어려울 정도로 관목과 잡목이 우거져 진행에 어려움을 느끼고 그렇게 잠시 관목을 헤치고 오르니 575봉의 적지봉이란 종이 코팅지가 붙어 있어 헷깔리기만 하다.

지도에는 고흥지맥 분기점인 571미터 지점을 적지봉이라 되어 있는데 선답자의 한분이 이곳을 적지봉이란 안내판을 달아 놔 어떤 것이 정답인지 잠시 생각을 해 보고 다시 출발한다.

 

등로 좌측으로는 저 멀리 벌교읍쪽으로 이어지는 불빛과 벌교읍의 야경이 아름답게 다가오지만 똑딱이 카메라로는 담을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잡목이 우거진 무명봉을 지나 쓰러진 나무가 등로를 막고 있는 곳을 통과하니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따라 내려가 중간 크기의 나무가 두어그루 자라고 있는 안부에 도착을 해 입었던 방풍자켓을 벗고 장갑과 귀마개도 벗어 배낭에 넣고 다시 출발을 한다.

 

안부에서 배낭을 정리하고 다시 출발해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오르니 다시 잡목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곧이어 봉우리에 도착을 하는데 소나무 한그루에 종이코팅지가 붙어 있어 다가가 보니 431봉인데 지도에는 이곳을 적지치라 적고 있다.

보통 치라고 하면 제법 큰 고갯마루로 알고 있는데 이곳은 안부의 고갯마루가 아닌 봉우리이기에 조금은 신기하기만 하다.

적지치는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옥전리와 조성면 대곡리 사이의 고개로서 피가 고갯길을 붉게 적시었다 해서 적지재라 이름 붙은 것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 공신 이경남이 아버지를 업고 피난하다가 이 고개에서 왜적을 만났는데 아버지를 살리려다 적의 칼에 쓰러지고 아버지도 죽어 피가 고갯길을 붉게 적시었다고 전한다.

고개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 나니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적지치이다.

 

적지치를 왜 조성1봉으로 적어 놨을까 생각을 해 보니 이곳이 조성면에 속하기에 그렇게 불린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조성1봉이란 종이 코팅지가 걸려있는 적지치를 출발해 잠시 완만하게 걸어 진행을 하니 큰 안부도 지나지 않고 곧이어 302미터의 조성2봉이란 종이 코팅지가 걸려있는 봉우리에 도착을 하는데 지도를 살펴보니 이곳은 302미터봉이 아닌 404미터의 봉우리로서 여영님이 그 옆에 404미터라는 이정판을 걸어 놨다.

종이 코팅지를 붙여가며 수고한 노력에는 감사한 마음이지만 제대로 된 고증을 거쳐 확실하게 이정판을 걸어 놨으면 하는 바램이기도 하다.

 

이제 그 404봉을 넘어 걸어가니 눈 앞으로 여명이 밝아 오기 시작하고 저 멀리 동쪽으로 일출이 시작되려는지 하늘이 붉게 물들어 오기 시작한다.

늘 만나는 일출이지만 이렇게 어둠을 헤치며 힘들게 걸어가다 만나는 일출은 특별한 하루로 다가오기에 오늘도 그 떠 오르는 일출을 살펴보며 걸어 보는 시간이다.

다시 내려가 나즈막한 안부를 통과하고 오르니 361.1봉에 도착을 하고 바로 눈 앞으로 다가 온 태봉과 장군봉 능선 넘어 붉게 물들어 오는 하늘을 살펴보며 걸어보는 시간이다.

다시 잡목을 지나 무명묘지 2기를 통과하니 완만하게 올라 잡목이 우거진 302.1봉에 도착을 하는데 일출이 시작되려면 아직도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아 다시 출발을 한다.

약간의 편백나무 숲이 있는 등로 경계를 타고 걸어가 멋진 소나무 등로를 지나 326.6봉을 넘으니 완전히 날이 밝아 오고 저 멀리 북동쪽으로 벌교지나 호남정맥 마루금이 밝아오는 여명의 빛을 받아 빛나고 있다.

 

등로 좌측 앞으로 펼쳐진 옥전리와 칠동리 지나 벌교읍이 펼쳐져 있고 그 뒤 좌측으로 호남정맥 마루금이 지난 추억을 이야기 해 주고 있다.

다시 잡목이 우거진 무명봉을 지나 넘으니 약간의 바위들이 산재되어 있는 등로를 지나 태봉 직전 공터에서 좌측으로 가 보니 그곳에도 역시나 환상의 풍경이 펼쳐져 있다.

북쪽으로 호남정맥 마루금이 펼쳐져 있고 좌측으로 존제산이 보이며 그 아래에 오늘 새벽 어둠속에 산행을 시작한 모암재와 고흥지맥 분기점이 시원하게 조망되고 있다.

조망을 즐기고 오르니 금새 325.2봉인 태봉에 도착을 해 이정판과 삼각점을 사진에 담아 본다.

태봉(325.2미터)은 전남 보성군 조성면 축내리와 벌교읍 옥전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맞은편 존제산과 가야할 두방산과 봉두산이 한 눈에 들어오는 조망처로서의 역활을 하고 있는데 다만 왜 태봉인지 자료가 없어 아쉽기만 한데 다만 가마봉에 관한 자료를 찾다보니 산 위 성터 모양이 태를 두른 듯하다고 하여 태봉이라고도 부른다는 자료를 찾을 수 있어 올려 본다.

 

태봉에서 이정판과 삼각점을 사진에 담고 다시 천천히 출발하니 등로 좌측으로 천치저수지가 내려다 보이고 그 뒤로 존제산에서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 마루금이 아름답게 눈에 들어 온다.

오래 전 걸었던 기억이 떠 오르며 함께 걸었던 산친구들이 그리워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주위 풍경을 살펴보며 조금 더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 좌측 앞 저 멀리 옥전리와 칠동리 지나 벌교읍이 보이고 그 뒤 저 멀리 낙안읍성을 감싸고 있는 주위 산들이 머리를 내밀고 언제 만날 수 있느냐며 물어 오는듯 하다.

 

그렇게 멋진 풍경과 조망을 즐기며 태봉을 내려가니 등로 우측 앞 잡목 사이로 갑자기 붉은 둥근해가 솟아 오르고 그 모습을 사진에 담으며 잠시 쉬어 간다.

멀리 남쪽 끝자락인 고흥까지 내려 와 연말에 만나는 일출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고 오늘과 내일 이틀간 걸어야 할 고흥지맥 마루금에서도 아무 사고 없이 무탈하게 완주 후 서울로 복귀 할 수 있기를 빌어 보는 시간이다.

잠시 쉬면서 일출을 사진에 담고 갈 길이 멀기에 다시 발걸음을 옮겨 본다.

 

다시 조금은 빠르게 걸어 전진하니 등로 좌측으로 벌목 후 나무들을 식재한 식재지가 나타나고 그곳에서도 등로 좌측으로 펼쳐진 벌교들판과 그 뒤로 이어지는 호남정맥 그리고 금전산을 비롯한 낙안읍성을 둘러 싼 순천의 산들이 아름답게 다가와 있다.

진행 방향으로는 억새가 보이기 시작하고 그 사이마다 식재된 키 작은 편백나무들이 아름답게 자라고 있고 그 뒤 저 멀리 올라야 할 장군봉이 드높게 올려 다 보인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 진행을 하니 봉우리같지 않은 곳에 가마봉이라는 이정판이 걸려 있다.

가마봉(258봉)은 전라남도 보성군의 조성면 신월리와 벌교읍 옥전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258미터이다.
봉우리 지형이 가매(가마)처럼 생겼다 해서 가매봉이라고 하며 산 위 성터 모양이 태를 두른 듯하다고 하여 태봉이라고도 부르는데 현지인은 가매봉이라고 부른다.

 

가마봉을 지나 다시 출발을 하니 무명묘지가 보이고 잠시 안부를 지나 무명봉에 오르니 알고 있는 선답자의 띠지가 반겨 준다.

잡목과 활엽수가 혼재되어 있는 낙엽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다시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잡목이 우거진 등로를 걸으며 온 몸에 많은 생채기를 내는 시간이 되었다.

쓰러진 고사목을 넘어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다시 벌목 후 나무가 식재된 장소가 나타나고 그 식재지 뒤 저 멀리 벌교읍과 호남정맥 그리고 순천쪽 산군들이 그림처럼 펼쳐져 갈 길 바쁜 산객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잠시 후 통과해야 할 목포 광양간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고 그 위를 빠르게 질주하며 굉음을 내고 있는 차량들의 움직임도 눈에 들어 오기 시작한다.

 

가야 할 방향으로는 다시 국사봉 위로 아침해가 걸려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 오고 계속 이어지는 등로 좌측의 벌교를 내려다 보며 걸어가니 등로는 식재지 경계를 타고 내려가게 된다.

그렇게 나무들을 식재한 식재지의 경계를 따라 완만하게 내려가니 등로 옆으로 경주김씨 가족 묘지들이 보이고 잠시 편백나무 지대를 지나니 경주김씨의 시제단과 공원묘지 건립비와 많은 묘지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그 경주김씨 묘지를 지나 조금 더 내려거니 등로 앞으로는 목포 광양간 고속도로와 벌교2터널이 바로 코 앞으로 다가와 있다.

 

다시 많은 경주김씨 묘지들이 있는 곳을 따라 내려가니 목포 광양간 고속도로가 바로 눈 앞으로 지나가고 그 우측 시멘트 수로 옆 잡풀지대를 따라 내려가니 목포 광양간 고속도로를 통과할 수 있는 지하통로가 보이고 그 지하통로를 통해 고속도로를 통과한다.

지도를 살펴보니 이곳이 바로 여하치라는 곳인데 열가재와 같은 의미의 같은 지명임을 알 수 있다.

광양과 목포간 고속도로는 영암에서 순천까지 총 연장 106.8 Km로 2조 2646억 원을 투입해 지난 2002년 12월 착공하여 2012년 4월에 완공한 고속도로이다.
이 도로가 개통되어 광양에서 목포까지 기존 2시간 10분이 소요되던 거리가 1시간 5분으로단축되며 연간 1000억원의 물류비가 절감될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여수세계박람회와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 등 국제행사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목포 광양간 고속도로를 통과하니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타나고 그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가니 2번 4차선 포장도로와 만나고 차량 통행량이 많지 않기에 조심하며 그 도로를 무단황단하여 건너니 반대편에 열가재제2주유소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여하치 또는 열가재라는 지명으로 자료를 찾아 보니 열가치(여하치)는 전라남도 보성군 조성면 신월리와 벌교읍 옥전리 경계에 있는 고개로서 해동지도의 보성의 조내면 일대에는 여하치(열갓재)로 해동지도의 낙안에는 열가치로 기록되어 있으며 위에 관행길이 있다.

그 주유소를 지나 좌측으로 2번 국도를 따르니 바로 눈 앞에 방금 전 통과한 목포 광양간 고속도로가 보이고 그 도로 직전 우측의 묘지가 보이는 방향으로 오르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목포 광양간 고속도로 직전 우측 능선으로 오르니 그곳에도 많은 경주김씨 묘지들이 보이고 조금 더 오른 곳에서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올라 온 열가재제2주유소와 2번 지방도로가 바로 발 밑에 내려다 보이고 그 뒤 저 멀리 보성군 조성면의 마을들과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줄기들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조성면은 동쪽은 벌교읍과 고흥군 동강면, 서쪽은 겸백면과 득량면, 남쪽은 고흥군 대서면, 북쪽은 벌교읍과 율어면에 접하고 남쪽은 남해에 면한다.
면의 동부는 봉두산(430미터)와 장군봉(414미터), 서부는 방장산(536미터), 북부는 존재산(704미터)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과 보리 외에 오이와 토마토 및 키위 등이고 특산물은 가내수공업으로 생산되는 용문석이 있고 경전선 철도와 목포와 순천 간 2번 국도가 통과한다.
문화재로는 보성 우천리 삼층석탑(전남유형문화재 6), 신월리성지, 구산정, 매월당, 이경남 충효문, 조양성지 및 안규태묘 등이 있다.
보성 우천리 삼층석탑은 993년(고려 성종 12)에 조성한 석탑으로 옛날 이곳에 증광사라는 고찰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석탑만 남아 있다.
중석은 1매의 큰 돌로 탱주와 우주가 있고 갑석은 2매의 판석으로 조성되어 있고 옥신에도 우주가 있으며 옥개받침은 4단이다.

 

    

그렇게 조성면의 마을과 그 뒤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줄기를 조망하고 다시 오르니 이제 전주이씨 묘지를 지나 등로 좌측 뒤로 목포 광양간 고속도로가 지척으로 지나고 있다.

이제 그 목포와 광양간 고속도로와 헤어져 능선 위로 오르니 등로가 사라지며 잡목이 태클을 걸기 시작하고 잠시 가파르게 오르니 갑자기 무인산불감시 카메라가 나타나고 그 카메라를 지나 오르니 무명묘지 한기가 있는 295.8봉에 도착을 하는데 가야 할 방향으로 고흥지맥 산줄기가 잡목 사이로 보일듯 말듯 이어지고 있다.

 

무명묘지가 있는 295.8봉을 지나 우측으로 내려가니 그곳에도 많은 묘지들이 보이는데 이제는 보성의씨 묘지들이다.

그 보성의씨 묘지들을 지나니 안부를 지나 간벌된 나뭇가지들이 등로를 막아 진행에 큰 어려움을 느낀다.

이리 저리 피하며 힘들게 그 간벌된 지역을 지나니 등로 우측에서 올라 오는 비포장 임도를 만나 조금은 편안하게 걸어 올라 본다.

잠시 그 비포장 임도를 따라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JN벌교2라는 이동통신탑과 무인산불감시 카메라가 공존하는 철탑을 만나 통과하니 등로는 여전히 넓은 비포장 임도로 이어져 잠시나마 편안하게 걸어 진행하는 시간이다.

 

그렇게 한동안 비포장 임도를 타고 편안하게 오르니 등로는 다시 비포장 임도를 우측으로 보내고 좌측 잡목이 있는 능선으로 이어지고 있어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타고 잡목을 헤치며 어렵게 올라 본다.

그렇게 어렵게 오르니 장군봉 전위봉에 도착을 하고 잠시 푹신한 낙엽 등로를 따르니 안부 넘어 바위 등로를 지나 장군봉 정상에 도착을 한다.

장군봉(412.7미터)은 전남 보성군 벌교읍 마동리와 조성면  신월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장군봉에 관한 설화는 이른바 장수 혹은 장군으로 불리는 가상의 존재에 관한 이야기도 있고 실존 인물인 특정 장군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전자의 부류 중에는 풍수설화의 성격이 강한 이야기도 있고 장수설화나 영웅설화의 성격이 강한 이야기도 있으며 또한 이런 부류의 이야기들이 전승 지형도상의 인접성 때문에 절충하여 새로운 이야기 형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후자의 부류는 다양한 유형의 역사 인물담이나 장수 및 영웅설화들과 결합한다.
그밖에 장군이 날 지세를 설명하는 풍수설화나 명당을 둘러싼 다툼을 그리는 투묘설화, 일본 사람들이 장군 날 자리를 끊었다는 단혈설화 등이 전승되기도 한다.

 

잡풀들이 무성하게 자랐다가 계절의 변화를 거스리지 못하고 말라 죽은 풍경이 인상적인 장군봉에서 정상 이정판과 삼각점을 사진에 담고 이제부터 잡목과 관목이 우거진 난해한 등로를 찾아 어렵게 진행하는 시간이다.

참으로 어렵고 힘들게 완만한 잡목 내리막 등로를 내려가니 안부를 지나고 다시 평이한 등로가 열리더니 무명묘지들과 편백나무들이 보이는 장소도 지난다.

그곳을 지나니 여전히 등로 좌측으로는 호남정맥과 벌교읍 그리고 그 뒤로 아름답게 펼쳐진 산줄기들이 잠시나마 이 산객의 발걸음을 붙잡고 잠시 쉬어가라 속삭이고 있다.

 

그렇게 주위 풍경을 살펴보며 전진을 하는데 등로 우측으로는 은림저수지 지나 저 멀리 우뚝 솟아있는 산 하나가 위압적으로 다가오는데 지도를 보니 고흥지맥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봉두산이다.

봉두산(430봉)은 전라남도 보성군의 조성면 은곡리와 고흥군 동남면 금마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426미터로서 해동지도의 흥양에 봉두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갈미봉은 봉우리가 갈미(갈모)처럼 생겼다고 해서 산성산은 옛날 산성이 있어서 부용산은 지형이 부용처럼 생겼다고 해서 봉두산은 봉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각각 붙여진 이름들이다.
봉구산은 봉두산의 음이 변한 것으로 보이며 산 동쪽 기슭에 옛 석성 터가 있다.

그렇게 잡목을 헤치고 진행을 하니 이제는 묵은 비포장 임도같은 좋은 등로를 만나 걸어가고 깊은 이름없는 안부를 건너 다시 오르니 아무 표기가 없는 경전선이 지나는 송장굴을 통과한다.

송장굴은 보성군 조성면 은곡리와 고흥군 동강면 마동마을을 이어주는 고개로 우측에는 성황당 흔적인 듯한 돌무덤이 보이고 이 굴 아래로는  경남 밀양시 삼랑진에서 광주 송정역을 있는 경전선이 지나간다.

조성에 전해져 내려 오는 전설중 송장굴이있는데 송장굴은 조성에서 벌교로 가는 기차길 터널을 파는 중이었다..
시대는 일제 강점기 때 굴을 파다가 굴속에 귀가 달린 뱀이 있었는데 그 공사장에서 공사를 하다가 그 뱀을 본 사람은 그 즉시 죽어나가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미신 같은 것을 믿지 않는 편이라서 그런 전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면서 전설을 많이 이야기 해주셨다...
처음에 송장굴 두번째로 귀산마을 당산나무 이야기를 해주셨다..
또한 귀산마을 당산나무는 예전에 사람들이 그 나무를 베려고 톱질한 사람은 모두 죽었다고 하는데 조성면에서 가장 오래된 당산나무가 이곳 마을에 있는 나무라고 하는데 그 나무는 속이 비어있으며 이유는 하도 오래돼서 나무 속이 썩었고 옆집아저씨가 나만 할 때 쥐불놀이하다가 나무에 불이 붙어서 속이 모두 타버렸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이런 많은 전설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 마을에 대한 민초들의 애정이 담겨 있다는 뜻은 아닐까 생각도 해 보는 시간이다.

 

그 송장굴을 지나 다시 오르니 비포장 임도를 건너 올라 송장봉이란 종이 코팅지가 있는 285봉에 도착을 한다.

285봉은 삼면봉(3면봉)이라고도 하는데 이 봉우리는 전남 보성군 조성면과 벌교읍 그리고 고흥군 동강면이 만나는 3면 경계봉으로 이 봉우리를 기점으로 지금까지 걸어 온 보성군 조성면 및 벌교읍과는 아쉬운 이별을 하고 이제부터는 완전히 고흥군으로 접어들어 고흥지맥이 다하는 지점까지 걸어 가는데 등로 우측으로는 고흥군 대서면이 좌측으로 동강면의 좁은 평야와 남해바다가 이 산객의 친구가 되어 줄 것이다.

이곳에서 허기를 느껴 잠시 쉬면서 준비한 빵과 과일로 허기를 달랜 후 진행하기로 한다.

 

허기를 달랜 후 배낭을 둘러메고 출발을 하려는데 등로 우측 저 멀리 봉두산 옆으로 득량만이 아스리히 보이기 시작한다.

오래 전 옆지기와 이곳 남도를 여행하면서 잠시 들려 좋은 추억을 남겼던 득량만이기에 그곳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득량만은 전라남도 고흥군의 고흥반도 북서쪽에 있는 만으로 조선지형도에 의하면 본래는 장흥반도와 고흥반도 사이에 있는 지금의 보성만 전체를 아우르는 만이었으나 보성만이라는 이름이 생겨나고 그 구획이 설정되면서 득량만은 고흥군과 보성군 및 장흥군으로 둘러싸여 있는 보성만의 후미 부분만을 일컫게 되었다.
만 깊숙한 곳에는 고흥군 남양면의 우도와 무인도인 각도섬, 하구룡도, 중구룡도, 상구룡도가 있다.
주변 해안에는 간석지가 널리 펼쳐져 있으며 고흥군 대서면 남정리와 보성군 조성면 예당리에는 득량만방조제가 건설되어 넓은 간척평야가 조성되었다.
지명은 득량도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되며 관련 지명으로 보성군 득량면, 득량천, 득량역과 득량호가 있다.

    

그렇게 등로 우측 저 멀리 득량만을 구경하고 출발하는데 등로 좌측 저 뒤로는 오늘 고흥지맥 산행을 시작한 모암재에서 이곳으로 이어진 마루금이 다시 산객의 발길을 붙잡는다.

옥전리를 통해 모암재로 오르는 꼬부랑 도로 위로 존제산이 떠 오른 햇살을 받아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그런 멋진 풍경을 살피며 완만하게 내려가니 키 큰 활엽수와 빛바랜 억새가 공존하는 등로를 타고 송장고개에 도착을 한다.

송장고개는 전남 보성군 조성면과 벌교읍 사이에 있는 고개로 임진왜란 때에 이곳에서 송모장군이 왜적을 맞아 싸웠다고하여 송장군고개 또는 송장고개라고 부르며 왜적과의 싸움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 시체가 쌓였으므로 송장치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평이한 능선 같은 송장고개를 지나 빛바랜 억새와 키 큰 활엽수가 섞여있는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갑자기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한쪽 소나무에는 등로 좌측으로 병풍산과 두방산 가는 길이란 안내판이 걸려있다.

이곳에서 고흥지맥 마루금은 좌측 병풍산과 두방산 가는 등로를 버리고 우측 마루금을 따라 진행하게 된다.

약간의 잡목들이 진행을 방해하는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따라 계속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병풍산과 두방산 갈림 삼거리를 지나 잡목 구간을 헤치며 내려가는데 언제 한번 다시 내려 와 저 병풍산과 두방산 줄기를 타고 첨산까지 올라보고 싶다는 생각이다.

한번 산줄기를 그려 다시 내려 올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래보며 걸어 내려가니 바위를 지나 금새 잡목이 우거진 310봉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에도 출처를 알 수 없는 용흥봉이란 종이 코팅지가 걸려있다.

등로 우측으로는 봉두산 성터와 은곡리가 보이는데 등로 좌측으로 있어야 할 두방산은 잡목들로 인해 보이지 않는다.

은곡리는 전라남도 보성군 조성면에 있는 마을로서 대부분 평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조성천이 흐르며 자연마을로는 사초, 은림, 대야 등이 있다.
사초마을은 마을 뒷산 준령의 형국이 뱀처럼 생겨 뻗어 내려왔고 뱀이 풀 속에서 나온다는 말에 연유하여 뱀사를 넣어 사초정이라 이름 붙여 내려오다가 떼 속에서 풀이 자란다 하여 떼사 풀초로써 사초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은림마을은 마을 형국이 맹호 출림형의 명당이라 하여 한때 호산으로 불러 왔으나 마을이 산과 숲으로 감싸 숨겨져 있다 하여 은림으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대야마을은 지형이 가장(양다리 벌린) 형태라 가장금 또는 소정지라 불렀으며 풍수리지설에 의해 봉화라고 불렸으며 대실과 봉합촌을 병합하여 대야라 하였다.

 

    

용흥봉이란 종이 코팅지가 걸려있는 310봉을 지나 다시 잡목이 우거진 마루금을 타고 내려가니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완만하게 오르고 봉우리 같지 않은 303봉을 넘는다.

그 303봉을 지나니 바위들이 산재되어 있는 등로가 나타나고 곧이어 소나무와 잡목이 섞여 있는 등로를 지나 비포장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하고 우측 비포장 임도를 타고 완만하게 올라 본다.

잠시 오르니 좁고 높은 안테가가 솟아 잇고 그 안테나를 지나자 마자 등로 좌측 저 멀리 두방산 줄기가 또 다른 아름다운 풍경으로 다가와 있다.

두방산(489봉)은 전라남도 고흥군의 동강면 매곡리에 위치한 산으로 해발고도는 486미터로서 1872년지방지도에 처음으로 지명이 등장하는데 두방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 조선지형도, 호남지에는 두방산이라고 기재되어 있으며 조선지형도에는 일본어로 둔방산이 병기되어 있고 조선지지자료에 지리산, 호남지에 지래산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이밖에도 임진왜란 때 송득운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서산이라고 하였고 산에 귀절암이 있다고 해서 귀절산이라 불렸으며 말 명당이 있다고 하여 말봉산이라고 했다고도 전해진다.

 

멋진 두방산을 조망하고 다시 진행을 하니 비포장 임도가 끝나고 다시 잡목이 우거진 능선으로 들어가는데 그 비포장 임도는 이곳 높은 안테나를 세우기 위해 개설된 임도가 아닐까 생각되는 곳이다.

다시 잡목이 우거져 진행이 어려운 등로를 헤치고 전진하니 303봉에 도착을 하는데 또 다른 선답자가 이곳을 306봉의 두방산이라 적어 놔 헷깔리기만 하다.

공신력있는 지도에 표기된 지명 이름이나 높이를 정확히 알려 주면 그것으로 고마움을 표시할 것인데 이렇게 헷깔리게 종이 코팅지를 걸어 놓으니 더욱 신뢰성이 사라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303봉을 지나 조금 더 전진하니 등로 우측 저 멀리 득량만이 조금 더 가깝게 다가오고 그 받ㅅ가에 펼쳐진 작은 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간벌된 잡목들이 널부러진 어려운 등로를 지나니 또 다시 303봉에 도착을 하는데 지도에는 표기가 되어 있지 않은 봉우리로서 이곳 역시 잡목이 우거쟈 온 몸에 다시 생채기를 만들고 있다.

참으로 어려운 잡목 등로를 지나니 나즈막한 안부를 통과하고 다시 완만하게 오르니 대강봉이란 종이 코팅지가 걸려 있는 291봉에 도착을 하는데 대강봉이란 출처도 모를 이름은 어디에서 왔는지 아쉬운 시간이다.

혹시 대강리에 있다고 해서 대강봉이란 이름을 붙여 놓은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대강리는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에 있는 마을로서 두방산 주변에 있는 농촌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사서, 사동, 두산, 평촌마을이 있는데 사서는 일제시대 때 옛 사창을 중심으로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사동은 사창의 동쪽의 마을이라 하여 이름 붙여졌다.
두산은 두방산 중앙에 있다 하여 생긴 지명이고 평촌은 일제시대 행정구역 개편 당시 평탄한 곳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이름 붙여졌다.
주요한 천연기념물로는 시도기념물 제214호인 느티나무가 있고 대강리의 느티나무는 2그루로 나이가 약 4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대강봉이란 291봉을 지나 다시 잡목을 헤치고 어렵게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여자만과 조그만 섬들이 보이고 그 넘어로는 조만간 다시 들려 올라야 할 여수지맥 마루금이 남쪽으로 길게 이어지고 있다.

이제 등로 좌측으로는 잡목 사이로 두방산과 병풍산 우측 저 멀리 뾰족하게 솟아 있는 첨산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렇게 잠시 더 걸어가 바위들이 산재되어 있는 등로를 지나니 등로가 우측으로 급하게 휘어지는 갈림 삼거리인 258봉에 도착을 한다.

우측으로 꺽어 잠시 더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여자만과 여수지맥이 조금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 오기 시작한다.

여자만은 전라남도 여수시 화정면 여자도를 중심으로 보성군과 순천시, 여수시와 고흥군으로 둘러싸여 있는 내해로서 자세한 명칭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만이 위치한 북쪽 지역이 순천 지역이어서 순천만이라고 부르며 여수 지역에서는 이 만의 중앙에 위치한 섬 명칭인 여자도에서 유래 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자만으로 부르는 해역이다.
여자만 내해는 굴곡이 심하며 대여자도, 소여자도, 대운두도, 소운두도 등을 비롯한 많은 섬들과 공진반도와 운두만이 있어 해안선이 매우 복잡하다.
고흥반도의 해창만은 우리나라 유수의 간척지로 농경지로 조성되었으며 여자만 바다에는 여자도, 장도, 달천도 등이 있으며 청정해역으로 전어, 멸치, 갈치, 문어, 조기 등의 어로와 김양식이 활발하다.
한편 해안에는 넓은 개펄이 발달해 있어 제염업을 비롯해 예로부터 꼬막, 피조개, 굴, 바지락 등이 많이 채취되었으나 현재 천일 제염업은 쇠퇴하였으며 개펄을 이용한 양식업이 발달해 있다.
특히 화양면 이천리, 옥적리, 감도리에서는 꼬막이 소여자도에서는 피조개 양식이 행해지며 감도에서는 전어가 많이 잡힌다.
2005년 해양수산부(현재 국토해양부)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여자만 해역은 우리나라에서 갯벌의 상태가 가장 좋은 2등급 판정을 받았으며 여자만 지역의 갯벌이 가진 생물종 다양성과 생태적 가치가 국가적 자연 자산으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어 2003년 12월 26일 해양수산부(현재 국토해양부)로부터 연안습지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여자만을 조망하고 계속 완만하게 내려가니 잡목들이 자라고 있는 묘지 한기를 지나 약간의 활엽수와 낙엽이 깔려 있는 등로로 내려간다.

잠시 빼곡히 자라고 있는 소나무 등로를 지나 편백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등로를 통과하니 비포장 임도를 만나 우측으로 짧게 이어가고 곧이어 좌측 잡목과 잡풀들이 자랐다 말라 죽은 난해한 등로를 찾아 걸어가니 여산송씨 묘지들이 보이는 곳을 지난다.

나무가 식재된 밭을 지나 여산송씨 합동제단을 통과하니 비포장 임도와 만나 내려가 스테인레스 물통이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마륜리의 축내마을로 내려가며 맥 산행을 이어가 본다.

 

물 탱크를 지나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마늘밭이 보이고 그 넘어 저 멀리 옥산이라 생각되는 산이 보이는데 꼭 관산처럼 보이기도 하다.

계속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 내려가니 도로 우측으로 민가가 보이고 좌측으로는 30번 송전탑이 서 있다.

갈림 삼거리를 지나 계속 진행을 하니 봉형사라는 빗돌이 서 있는 20번 2차선 포장도로를 만나 우측으로 조금 걸어가니 축내마을이란 빗돌과 축내라는 버스정류장이 보인다.

축내마을은 마륜리(원등마을)에 속한 마을로서 마륜리는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에 있는 마을로서 농촌 지역이며 마을 주변에 담곡 저수지가 있다.
이 마을은 옛날 선비들이 말을 타고 출입하는 말발굽 소리가 수레바퀴처럼 끊임이 없었다 하여 마륜이란 지명이 생겼으며 자연마을로는 마서, 덕촌, 마동, 축내, 원등이 있다.
마동마을과 마서마을은 각각 마륜리의 동쪽과 서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덕촌은 덕을 갖춘 마을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지은 지명으로 주요 문화재로는 임진왜란 때 순국한 신여량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신여량장군정려와 같은 시기 순국한 송대립과 그의 아들 송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고흥송씨쌍충정려가 있다.

 

    

그곳 축내마을 표지석과 버스정류장이 있는 곳에서 남쪽으로 나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조금 더 걸어가다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지나 온 축내버스정류장과 20번 포장도로 지나 저 뒤로 미륜리 원동마을과 송전탑 그리고 291봉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이 시원하게 올려다 보인다.

하지만 그 사이에 있는 편백나무 숲에서 희미한 등로를 찾아 헤매며 왔다리 갔다리 했던 추억과 기억에 잠시 쓴 웃음도 지어 보는 시간이다.

 

다시 계속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도로 좌측에 콘테이너 박스가 있는 곳에서 등로는 우측 시멘트 포장도로로 이어지고 그 포장도로를 따라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지나온 고흥지맥 마루금이 저 멀리 291봉으로 이어지는 풍경이 한눈에 들어 온다.

잠시 더 오르니 시멘트 포장도로가 끝나고 이제 등로는 능선으로 이어지는데 오르니 다시 여산송씨 묘지들이 모여있다.

등로 뒤 좌측으로 축내마을이 바로 내려다 보이고 등로 우측 앞으로는 마륜리 마동마을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데 그 뒤로는 지금까지 계속 등로 우측으로 보면서 진행을 했던 봉두산이 아름답게 솟아 있다.

 

다시 진행해 온 마루금을 살펴보고 그 여산송씨 묘지들을 지나 오르니 또 다른 무명 묘지 몇기가 잘 정돈된 형태로 늘어서 있고 그 주위에는 잘 가꿔진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그 가운데 묘지를 타고 걸어 오르니 나즈막한 봉우리 같지도 않은 곳에 88.2봉이 보이는데 이곳에도 어김없이 축내봉이란 종이 코팅지가 붙어 있고 그 아래에는 삼각점이 박혀 있다.

축내봉이란 의미 역시 이곳이 축내마을이기에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생각해 보지만 그 어디에도 이런 봉우리 이름을 찾을 수 없어 안타까운 시간이다.

 

그 88.2봉에서 잡목을 헤치고 좌측으로 크게 꺽어 내려가니 여산송씨 묘지2기가 있고 그 묘지 앞으로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가 열려있어 그 등로를 따르고 곧이어 무명묘지 한기를 지나 잡목 구간이 나타난다.

등로 좌측으로는 마륜리의 축내마을이 바로 발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데 너무나 조용하고 아름다운 시골마을의 풍경 그대로이다.

그 잡목 구간을 지나 걸어가니 다시 몇기의 묘지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곳을 지나 시멘트 포장도로 위에 도착을 한다.

 

그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우측으로 걸어가니 도로 주변으로 파란 마늘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고 리제 그 도로 좌측으로는 축내마을 지나 20번 도로와 방금 전 걸어 내려 온 291봉까지 이어진 마루금이 한눈에 들어 온다.

살펴보니 고흥지맥 마루금이 축내마을 버스정류장으로 내려 와 축내마을 방향으로 이어지다 좌측 능선으로 올라 88.2봉을 찍고 다시 축내마을을 좌측 중앙에 두고 반바퀴 돌아 진행되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잠시 마늘밭 사이로 걸어 진행하니 다시 잡풀들이 자랐다 말라가는 밭둑을 통해 고흥지맥 산행을 이어가 보는 시간이다.

 

그 밭둑을 타고 걸어가니 등로는 다시 시멘트 포장도로로 변하고 곧이어 갈림 사거리를 만나 직진의 등로를 타고 걸어간다.

등로 좌측으로는 여전히 드넓은 마늘 밭 지나 축내마을이 보이고 방금 전 걸어 내려왔던 고흥지맥 마루금이 아름다운 농촌 풍경 그대로 펼쳐져 있다.

이제 좌측에 밭 경작지를 두고 우측으로는 소나무 지대의 경계를 타고 걸어가니 잠시 능선으로 들어가 소나무 등로를 통과하고 많은 묘지들을 만나 그 묘지 우측 능선을 타고 진행을 한다.

 

그 묘지지대를 지나 걸어가며 등로 좌측을 살펴보니 이제 지나온 마루금 우측 넘어로 두방산과 첨산이 새로운 풍경으로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다시 계속 이어지는 묘지지대를 지나 걸어가니 시멘트 포장도로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하고 그 삼거리에서 직진 방향의 송전탑으로 진행을 해야 되지만 관목과 잡풀에 막혀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우측으로 돌아 어렵게 능선으로 올라 본다.

첨산(314봉)은 전라남도 고흥군의 동강면 대강리와 마동리 및 한천리 사이에 위치한 산으로 해발고도는 314미터로서 여지도서에 지래산 동쪽 기슭에서 뻗어 나오며 관아의 북쪽 75리에 있으며 선조 30년(1597)에 고을 사람 송대립이 왜적과 싸우다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기록이 있다.
해동지도, 대동여지도, 1872년지방지도, 조선지형도에 지명이 표기되어 있으며 병풍산에서 동쪽으로 비켜 선 산으로 정상부 쪽은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삼각형 모양으로 뾰족하다.
지명은 산의 이러한 모습에서 유래하였다.

 

어렵게 능선으로 오르니 나무 식재지를 지나 지독한 잡목과 가시나무 지대를 만나 참으로 심한 고생을 해 본다.

잠시 걸어 진행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온 몸이 긁히고 생채기가 나 쓰라리고 따갑기까지 하기 시작한다.

보이지 않는 등로를 찾아 걸어가니 무명봉 정상에서 편백나무 숲을 만나 짧은 구간 편안하게 걸어 본다.

다시 이어지는 잡목지대와 편백나무 숲을 교대로 지나 걸어가 창원박씨 묘지를 지나니 금새 21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가드릿재에 도착을 해 잠시 긴 한숨을 쉬어본다.

가드릿재는 전남 고흥군 동강면 유둔리와 대서면 상남리를 연결하는 21번 2차선 지방도로가 지나는 곳으로 우측에 커다란 목장인듯한 건물이 보인다.

 

가드릿재를 건너 보이는 비포장 임도를 타고 오르니 잠시 편백나무 등로가 잘 나 있고 그 등로를 따라 조금은 가파르게 오르니 식재된 나무 지대를 타고 조금은 편안하게 걸어 본다.

잠시 더 오르니 커다란 바위 2개가 통천문 같은 형태로 서 있고 그 바위 사이를 통해 오르니 지독한 조릿대 숲이 나타나는데 다행히도 그 가운데로 이 산객이 걸어 갈 수 있을 정도의 멋진 등로가 뚫려있어 새로운 기분으로 통과해 본다.

 

그 조릿대 구간을 지나 넓은 뚜렷한 등로를 따르니 등로는 이제 푸르른 식물들이 등로를 뒤덮고 있는 색다른 등로를 타고 걸어가게 된다.

한동안 색다른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70봉이 나타나고 다시 편안하게 낙엽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문화유씨 묘지들을 만나 통과한다.

그 묘지 앞에서 등로 좌측을 보니 지나온 마루금 우측으로 두방산과 병풍산이 보이고 그 우측 뒤로 첨산의 모습이 얼굴만 내밀고 우뚝 서 있다.

잠시 발걸음 멈추고 그 아름다운 조망을 즐기고 다시 출발을 해 본다.

 

다시 그 묘지지대를 지나니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고 그 비포장 임도를 타고 걸어가니 갈림 사거리가 나타나고 그 사거리를 건너 걸어가니 임도 좌측으로 콘테이너 박스가 보이는데 살펴보니 예전에 대웅아트산업 사무실로 이용되던 박스였지만 이제는 폐허가 된 그런 콘테이너 박스이다.

그 콘테이너 박스를 지나니 등로는 이제 시멘트 포장도로로 바뀌고 그 도로를 타고 걸어가니 등로 우측으로 앞으로 올라야 할 삼봉 방향의 마루금이 아름답게 이어져 있다.

이제 등로 좌측으로 두방산과 첨산을 조망하며 걸어가니 도로 좌측으로는 식재된 조림지와 우측으로는 감나무 과수원을 두고 걸어 진행하게 된다.

 

감나무 과수원을 지나 진행하다 등로 좌측을 보니 덕암마을이 보이고 두방산과 첨산은 연전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계속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가니 노란 물통을 지나 큰 느티나무 두그루와 쉼터가 있는 밭 가장자리를 지나 상남리의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금곡고개에 도착을 한다.

그 2차선 포장도로를 건너 마루금이 이어지지만 그곳에는 드넓은 태양열 수집판이 들어서 있어 진행하지 못하고 우측 논둑을 통해 진행해야 하는 안타까운 장소이기도 하다.

상남리(금곡마을과 금곡고개)는 전라남도 고흥군 대서면에 있는 마을로서 남해 바닷가에 위치한 해안 마을이다.
자연마을에는 남양, 동편, 금곡, 온동이 있는데 남양은 과거 이 곳을 지나던 승려가 마을의 위치나 기후가 중국의 제갈공명이 밭을 갈던 남양과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동편은 남양마을에서 분리되면서 남양마을의 동쪽이라 하여 동편이란 이름이 붙었고 금곡은 마을 앞에 가야금처럼 생긴 동산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온동은 마을 북쪽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사시사철 기후가 따뜻하므로 온동이라 하였다.

 

그 금곡고개를 지나 좌측 위에 태양열 수집판을 두고 논둑을 통해 걸어가니 논둑 우측으로는 거대한 축사 건물이 보이고 그 주위에 펼쳐진 밭 경작지를 지나 저 멀리 고흥지맥 마루금과 두방산 그리고 첨산의 모습이 한눈에 또렷하게 들어 오기 시작한다.

그렇게 조망을 즐기고 조금 더 걸어가니 이제 등로는 논둑에서 잡풀이 우거졌다 말라 죽어가는 능선으로 이어지는데 마침 선답자들이 몇명 지나갔는지 등로가 좁게 열려있다.

 

약간의 잡목들이 있는 낙엽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오르니 통덕랑 청주양씨 묘지를 지나 멋진 소나무 등로가 열려있어 오랫만에 편안하고 기분 좋게 걸어가 본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 오르니 고흥동강 기지국이란 이동통신탑이 보이고 그 좌측으로 돌아 오르니 금새 107.3봉인 삼봉에 도착을 한다.

삼봉(107.2봉)은 고흥군 동강면 유둔리와 대서면 상남리 그리고 남양면 침교리의 경계 능선에 위치한 삼면봉으로서 특별한 자료는 찾을 수가 없어 아쉽기만 하다.

 

삼봉을 지나니 다시 등로에는 잡목과 가시나무들이 우거져 진행에 어려움을 겪고 너무나 힘들게 희미한 등로를 찾아 내려가니 등로 우측으로 득량만이 보이고 곧이어 멋진 소나무 등로를 지나 드넓은 공터에 도착을 한다.

살펴보니 예전에 채석장이었다가 이제는 폐석장이 되어 형식적으로나마 나무를 심어 복원하고 있는 듯한 풍경이 눈에 들어 온다.

등로 우측으로는 공사 현장 지나 저 멀리 남해바다가 산줄기 사이로 보이기 시작하고 그 풍경을 살펴 보며 걸어가니 고압 전봇대 지나 드넓은 공터에 도착을 하는데 살펴보니 국도환경이란 공사현장으로 녹슨 공사 장비들과 비어있는 민가 한채도 보인다.

 

이제부터 이곳 국도환경으로 통하였던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탄포육교까지 걸어가게 된다.

계속 이어지는 비포장 임도를 타고 걸어가니 도로 우측으로 92봉이 올려다 보이지만 특이한 것도 없고 잡목이 우거져 도저히 올라갈 수 없기에 그냥 비포장 임도를 따라 걸어가 본다.

한동안 걸어가니 임도 옆으로 보리밭이 보이고 그 좌측 저 멀리 드넓은 태양열 수집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태양열 수집판을 조망하며 계속 이어지는 비포장 임도를 따르니 태양열 수집판 넘어 저 멀리 이제부터 걸어 진행을 해야 할 고흥지맥 마루금이 아름답게 올려다 보인다.

그렇게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77번 2차선 포장도로와 만나 좌측으로 그 도로를 타고 걸어가니 저 멀리 탄포삼거리가 보인다.

탄포 삼거리는 고흥군 동강면과 남양면 및 대서면의 경계에 있는 삼거리로 15번과 27번의 2차선 지방도로가 지나가는 곳이다.

 

탄포삼거리는 77번과 15번 그리고 27번 도로가 만나는 갈림 삼거리로서 도로 건너편에는 오늘 산행 후 잠시 들려 환상의 일몰을 구경했던 중산일몰전망대 이정판이 서 있다.

탄포 버서 정류장을 사진에 담고 아평마을(마느바대) 이정석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15번과 27번 4차선 고속화 도로를 통과할 수 있는 탄포육교를 통과한다.

탄포마을은 숯개와 관련이 있는데 숯개는 숲이 우거진 나루이며 탄포는 이것의 한자식 표기로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탄포원은 흥양현 북쪽 60리에 있다는 내용이 있고 조선지지자료에는 탄포주막이 기록되어 있다.
침교리는 전라남도 고흥군 남양면에 있는 마을로서 남해 바다에 위치한 해안 마을이다.
자연마을에는 화담마을, 침교마을, 아평마을이 있는데 화담은 과거에 이 지역의 장고담이라는 소지명을 따서 고담이라고 부르다가 마을 전체의 모습이 꽃과 같은 모습이라 하여 화담으로 부르게 되었다.
침교는 잠은다리라고 불리던 마을인데 홍수가 나면 물이 마을 앞까지 들어오므로 돌다리를 놓고 다녔는데 홍수가 날 때에는 돌다리마녀 물에 잠겼다 하여 침교가 되었다.

아평마을 표지석이 있는 아평은 풍수지리에 따라 마을 앞의 지형이 검은 갈가마귀가 사람이 죽은 시체를 보고 이를 쪼아먹기 위해 날아드는 모습이라 하여 지은 이름이다.

 

    

탄포육교를 지나 진행방향을 살펴보니 도로를 타고 걸어 능선으로 올라 만나야 할 혼백산 능선이 부르고 있다.

이어지는 포장도로를 타고 우측에 밭 경작지를 두고 좌측으로 큰 창고 건물을 두고 걸어가니 도로 우측 밭 가장자리에 몇기의 고인돌이 보이는데 그 옆에 서 있는 스케인레스 스틸로 된 설명판은 지워져 글씨가 전혀 보이지 않아 아쉽기만 하다.

전라남도 고흥군 남양면 침교리 아평마을에 있는 아평저수지에서 남서쪽으로 약 100미터 떨어진 구릉에 37기의 고인돌이 있는데 주민들은 이 고인돌들을 종종바우라고 부른다.

원래 훨씬 더 많은 수가 있었으나 저수지를 축조할 때 고인돌을 깨뜨려 사용함으로써 일부만 남았다고 전해진다.
일제강점기에 많은 고인돌이 도굴되었으며 돌검과 돌살촉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하는데 고인돌군은 낮은 구릉으로 둘러싸여 소형분지를 이루는 지대에 남과 북 방향으로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아평 고인돌 지대를 지나 마늘 밭 사이로 열려있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도로 우측으로 거대한 축사 건물이 보이고 도로 좌측으로는 아평제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조금 더 걸어가니 볏짚을 포장한 물건들이 쌓여있는 1차선 포장도로와 만나는 삼거리에서 곧바로 도로를 건너 능선으로 오르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잠시 오르니 감나무 과수원이 보이고 영광정씨 묘지를 지나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올라가 본다.

잠시 그곳 비포장 임도에서 정상적인 등로를 찾지 못해 왔다리 갔다리 해매다가 어렵게 밭을 가로질러 좌측으로 돌아 진행을 하고 잡목과 잡풀이 자랐다 말라죽은 능선을 오르며 너무나 힘들게 맥 산행을 이어가 보는 시간이다.

그렇게 어렵게 비포장 임도로 다시 올라 능선으로 오르기 직전 뒤돌아 보니 아평제 지나 마을과 저 멀리 지나온 고흥지맥 마루금 및 두방산 그리고 우측으로 첨산이 아름답지만 멀어지는 아쉬움을 전하고 있다.

 

너무나 힘들게 그 마루금을 찾아 잡목과 잡풀을 헤치고 오르니 낙엽진 완만한 오르막 능선으로 이어지고 그렇게 한동안 무심으로 오르니 갑자기 등로 앞에 녹슨 철조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제 그 녹슨 철조망을 우측에 두고 좌측으로 걸어 전진하니 등로 우측으로 중산리 지나 오늘 올라야 할 마지막 천봉산이 올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등로 옆으로 한들거리는 빛바랜 억새 능선을 타고 걸어가니 그 천봉산 우측 저 멀리 득량만의 남해 바다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다.

 

등로 좌측으로는 지나온 고흥지맥 마루금과 두방산 그리고 첨산이 여전히 아름다운 그림으로 다가오고 그렇게 조망을 즐기며 진행을 하니 바로 눈 앞으로 간벌된 오르막 등로가 나타난다.

약간의 관목과 잡목지대를 지나 안부를 넘으니 그 간벌지대로 오르고 간벌된 나뭇가지들이 남아 생각보다 힘들게 그 간벌지대를 오른다.

 

어렵게 그 간벌지대를 따라 오르다 남아 있는 몇그루의 키 큰 소나무 사이로 뒤돌아 보니 저 멀리 오늘 새벽 어둠속에 산행을 시작한 존제산 아래 모암재에서 이리저리 끊길듯 이어져 온 고흥지맥 마루금이 아름다운 산수화를 그리며 달려오고 있다.

그렇게 지나온 마루금을 살펴보고 다시 잡목이 우거진 능선으로 오르니 혼백산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좌측의 혼백산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다시 잡목을 헤치며 힘들게 오르니 그저 아무 표식도 없이 무명묘지 2기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혼백산 정상에 도착을 한다.

 

어렵게 혼백산 정상에 도착을 하지만 아무 표식도 정상석과 안내판도 없이 그저 무명묘지 2기만 정상을 차지하고 있어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다시 올랐던 잡목 등로를 타고 갈림 삼거리로 뒤돌아 온다.

이제 진행 방향의 좌측 등로를 타고 잡목을 헤치며 잠시 내려가니 잡목 사이로 이제 올라야 할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인 천봉산이 제법 높은 고도를 자랑하며 이 산객의 마음을 고달프게 만들고 있다.

 

조금은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이제까지 잘 보이지 않던 키 작은 동백나무들이 등로를 가득 채우고 그 동백나무들을 헤치며 내려가니 많은 묘지들이 펼쳐져 있는 곳도 지난다.

그 묘지를 내려가 끝자락 좌측에서 우측으로 걸어 내려가니 비포장 임도와 만나 진행을 하고 곧이어 시멘트 포장도로와 만나 그 도로를 타고 우측 고갯마루로 오른다.

살펴보니 이곳이 운교고개로서 운교마을(중산리)은 전라남도 고흥군 남양면에 있는 마을로서 남해 바다에 위치한 해안 마을이며 근처에는 우도가 있다.
자연마을에는 중산마을과 운교마을이 있는데 중산은 마을이 마치 소쿠리 안과 같아서 마을 안에 들어서면 이웃마을의 개 짖고 닭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산중이라 하여 중산이란 이름을 붙였다.
운교는 과거 이 지역의 명물이었던 구름다리의 이름을 따서 구름다리 즉 운교라고 불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시멘트 포장도로로 된 운교고개에서 도로를 건너 임도를 따라 오르니 밤나무 과수원이 보이고 그곳을 지나 밭 가장자리를 타고 잡목이 우거진 능선으로 오른다.

등로 좌측으로는 남양면 신흥리 지나 순천만(여자만)이 내려다 보이는데 순천만(여자만)은 전라남도 여수시 화정면 여자도를 중심으로 보성군과 순천시, 여수시와 고흥군으로 둘러싸여 있는 내해로서 자세한 명칭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만이 위치한 북쪽 지역이 순천 지역이어서 순천만이라고 부르며 여수 지역에서는 이 만의 중앙에 위치한 섬 명칭인 여자도에서 유래 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자만으로 부르는 해역이다.
여자만 내해는 굴곡이 심하며 대여자도, 소여자도, 대운두도, 소운두도 등을 비롯한 많은 섬들과 공진반도와 운두만이 있어 해안선이 매우 복잡하다.
고흥반도의 해창만은 우리나라 유수의 간척지로 농경지로 조성되었으며 여자만 바다에는 여자도, 장도, 달천도 등이 있으며 청정해역으로 전어, 멸치, 갈치, 문어, 조기 등의 어로와 김양식이 활발하다.
한편 해안에는 넓은 개펄이 발달해 있어 제염업을 비롯해 예로부터 꼬막, 피조개, 굴, 바지락 등이 많이 채취되었으나 현재 천일 제염업은 쇠퇴하였으며 개펄을 이용한 양식업이 발달해 있다.
특히 화양면 이천리, 옥적리, 감도리에서는 꼬막이 소여자도에서는 피조개 양식이 행해지며 감도에서는 전어가 많이 잡힌다.
2005년 해양수산부(현재 국토해양부)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여자만 해역은 우리나라에서 갯벌의 상태가 가장 좋은 2등급 판정을 받았으며 여자만 지역의 갯벌이 가진 생물종 다양성과 생태적 가치가 국가적 자연 자산으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어 2003년 12월 26일 해양수산부(현재 국토해양부)로부터 연안습지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잡목이 우거진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보이지 않던 바위들도 보이고 그렇게 무심으로 오르니 갑자기 멋진 소나무와 억새능선이 기다리는 110봉에 도착을 해 조금은 편안하게 걸어 본다.

 

    

한동안 이어지는 멋진 소나무 등로를 타고 무심으로 전진하니 옛날 방화선이었던 듯한 등로가 나타나는데 이제는 그곳에 빛바랜 억새가 자라 색다른 풍경을 선사하고 있다.

그렇게 한동안 걸어가니 갑자기 가시가 많은 엄나무 지대를 지나 철없는 진달래꽃을 바라보며 눈 내리는 겨울을 어떻게 보내려고 철없이 꽃을 피우는지 걱정스런 시간이다.

그렇게 멋진 등로를 타고 한동안 오르니 무인산불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천봉산에 도착을 하는데 아무 표식도 없어 오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셀카 놀이를 하면서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천봉산(193.1봉)은 고흥군 남양면 중산리 운교마을과 신흥리 주교마을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산 정상에는 무인산불감시 카메라가 있다.

 

    

천봉산에서 남아 있는 사과 하나로 허기와 목마름을 달래고 다시 배낭 둘러메고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봏분이 거의 사라진 묘지를 지나 멋진 소나무 등로를 따른다.

한동안 멋진 소나무 등로를 타고 무심으로 걸어 내려가니 이제 두 다리에 전해지는 묵직함이 제법 걸어 왔음을 느끼게 해 주고 있다.

한동안 그렇게 멋진 등로를 타고 걸어 내려가니 생각지도 못한 천방산삼거리 임도 이정표를 만나는데 등로 우측으로 남양산성가는 방향이 표시되어 있고 골안고개까지는 이제 1.1 Km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가 반가운 이정표이다.

2002년 11월 27일 전라남도기념물 제207호로 지정된 고흥 남양리 산성은 고흥군 남양면 남양리와 중산리 일대에 있는데 이 지역은 백제시대에 조조례현이 있었던 지역으로 남양리 산성도 조조례현과 관련된 성으로 추정된다.
위치, 축성법, 출토유물 등의 양상으로 보아 백제시대에 처음 축성되어 조선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해발고도 162미터의 산 정상부를 감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으로 산성 동서쪽으로는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데 총둘레 534미터에 너비 4미터 내외이며 돌로 축조되었다.
산성의 평면형태는 부정형으로 남북이 동서에 비해 길며 성벽의 동벽과 북벽 일부의 보존상태가 비교적 좋다.
성 안쪽은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완만하게 경사가 진 지형으로 약 12곳의 계단식 평지가 확인된다.
성의 중앙부에 돌로 쌓은 원형 우물 2곳이 나란히 설치되어 있는데 지금은 물이 나오지 않으며 성문 터는 현 출입로로 이용되는 성의 남동쪽 회절부에서 서쪽으로 약 40미터에 있는데 현재 동쪽 외측 모서리부분 약 90cm정도만 남아 있을 뿐 흔적이 거의 사라졌다.
성안에서 출토된 유물은 자기류, 기와류, 방추차, 숫돌, 석환 등이고 고흥 남양리 산성은 전라남도 동부 지역의 백제산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자료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무명묘지 2기가 있는 천방산삼거리 임도 이정표를 지나 내려가니 등로는 여전히 비포장 임도에 빛바랜 억새가 자랐다가 말라가는 그런 마루금이다.

편안하게 조금은 빨리 내려가니 많은 묘지와 억새들이 자랐던 임도에서 임도 좌측이 열려있고 내려다 보니 바로 아래 가건물 넘어 좁은 들판이 길게 누워있고 그 끝자락에 86봉 지나 순천만 일명 여자만이 다시 내려다 보인다.

저 순천만 일명 여자만에서도 옆지기와 고운 추억을 남겼던 곳이기에 다음에 다시 기회가 되면 또 다른 추억을 남기고 싶은 곳으로 남아 있다.

 

멋진 조망과 풍경을 즐기며 내려가니 잘 정리된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고 고속도로 같은 그 임도를 따라 전진하니 갈림 삼거리 좌측 아래로 방금 전 봤던 가건물이 내려다 보인다.

그곳을 지나 뒤돌아 보니 저 멀리 천봉산에서 이곳으로 이어진 고흥지맥 제1구간 마루금이 아름답게 올려다 보인다.

이제 내려가며 살펴보니 비포장 임도는 시멘트 포장도로로 변하고 앞으로 내일 올라야 할 고흥지맥 제2구간 마루금들이 올망졸망 결코 쉽지 않은 산행이 될 것임을 암시하듯 그렇게 이어져 있다.

잠시 더 내려가니 도로 우측으로 과수원이 보이고 곧이어 남양면 대곡리쪽 마을들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남양의 마을들을 구경하며 걸어 내려가니 드디어 2차선 포장도로를 만나는데 이 도로는 남양면서 동강면과 고흥읍으로 이어지는 지방도가 지나는 곳으로 천봉산 안내도와 담양전씨 선산 표시석이 있다.

이제 그 2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좌측으로 걸어 가며 오늘 산행 날머리인 골안고개 방향으로 걸어가 본다.

이곳 고갯마루를 신사당고개라고 한다는데 그 이유에 관한 자료는 찾지를 못해 아쉽기만 하다.

 

그 2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좌측인 동쪽으로 걸어가니 드디어 갈림 삼거리인 골안고개에 도착을 해 오늘 산행을 마무리 한다.

우측으로는 17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고 그 도로를 타고 잠시 내려가면 남양면사무소와 초등학교가 있는 곳이고 내일 제2구간 들머리는 17번 도로를 타고 낡은 농협 창고를 지나 도로 우측으로 보이는 상와마을 표지석으로 들어가며 진행을 하면 될 것이다.

이곳 골안고개는 고흥군 남양면 대곡리에 있는 고개로 직진을 하면 동강면으로 가고 우측으로 가면 고흥읍으로 이어지는 15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곳이다.
골안고개가 있는 대곡리는 전라남도 고흥군 남양면에 있는 마을로서 남해 바다를 향한 곳에 있는 해안 마을이다.
자연마을에는 상와마을, 골안마을, 중와마을, 하와마을, 노송마을이 있는데 상와, 중와, 하와는 이 주변의 산 모양이 여러 갈래로 뻗어 내려 마치 바닥기와가 깔려있는 것처럼 생겼다 하여 와평이라 하였다가 셋으로 나뉘어진 것이다.
골안마을은 마을이 골짜기 안에 위치하여 있으므로 붙인 이름이고 노송마을은 오래된 소나무가 있으므로 노송이라 이름 붙였다.

 

그렇게 악명 높은 고흥지맥 제1구간을 무탈하게 마무리하고 애마를 몰아 가까운 곳에 있는 중산일몰전망대로 가 환상의 일몰을 감상하고 고흥읍으로 들어가 샤워를 한 후 값싼 남도의 맛난 음식으로 포식을 하고 하룻밤 머문 후 내일 하루 더 멋진 산행을 기대하며 일찍 잠자리에 든다.

하지만 지독한 잡목과 가시나무들로 인해 온 몸에 심한 생채기가 나 쓰리고 따가워 제대로 잠이나 잘 수 있을지 걱정이 되는 밤이기도 하였지만 너무나 피곤했던지 눕자마자 골아 떨어져 고흥에서의 첫날밤을 마무리 한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