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지 : 경상남도 산청군과 진주시의 진양기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 2015년 12월 13일 (일요일 당일 산행)
산행날씨 : 하루종일 흐렸다 맑았다를 반복했던 조금은 무더위를 느꼈던 날씨
산행온도 : 영상 02도에서 영상 09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경상남도 축산진흥연구소 축산시험장 정문-비포장 임도-청현소류지-민가-축산시험장 후문-청현재-진양기맥 마지막 구간 산행시작-324.1 삼각점봉(보현봉)-낙석방지 도로 표지판-280봉 6각정자-비포장 임도-능선진입-비포장 임도-진한국부인철성이씨묘입구 말뚝-갈림 삼거리 시멘트 포장도로-광제산등산로안내도-능선진입-116번 송전탑-이정판(광제봉수대 2 Km, 집현산 4 Km, 동전마을 2 Km)-송전탑-묘지1기-313봉-이정판(광제산봉수대 1 Km, 집현산 정상 5 Km)-광제봉(347봉)-113번 송전탑-무명묘지1기-이정판(광제봉수대 0.3 Km, 집현산 5.7 Km, 홍지소류지 2 Km)-약샘삼거리 이정판(봉수대 0.1 Km, 외율임도 1.9 Km와 집현산 5.9 Km, 약샘 0.2 Km와 홍지주차장 2.0 Km)-광제산 봉수대(420봉, 봉수대 3기와 조망 안내도)-비포장 임도(면사무소 이정판)-대나무 등로-광제제 비포장 임도-무명묘지1기-광제산 등산로 안내판-덕곡고개 시멘트 포장도로 이정판(명석면사무소 9 Km, 광제산봉수대 1 Km)-비포장 임도-310봉-297봉 사각정자-이정판(명석면사무소 8 Km, 광제봉수대 2 Km, 덕곡마을 2 Km)-291봉-웰빙광제산등산로 스파랜드 갈림길-299.5 삼각점봉(소원봉)-소나무 등로-107번 송전탑-송전탑-비포장 임도-206 바위봉-소나무 등로-함안조공 묘지1기-소나무 등로-일출-콘크리트 말뚝-220봉-묘지지대-242봉-놋종기먼당(265봉, 정상석과 돌탑)-262.7봉-돌담 묘지-잡목지대-무명묘지1기-대나무 등로-용산치(3번 6차선 포장도로)-칡즙매점-밤나무 과수원-150봉-안부-196 삼각점봉-203 잡목봉-복천사 갈림 안부-228봉-벌목지대 출입금지 안내판-222.2봉-잡목가시지대-탱자나무 등로-소나무 등로-갈림삼거리 95번 송전탑-장아산(200봉)-212.2봉-219.2봉-218 잡목봉-지독한 잡목등로-180 돌탑봉-진주강공가족제단-비포장 임도-176봉-불난지역-진주강공묘지-2차선 포장도로-시멘트 포장도로-민가-통영대전고속도로 지하통로(서진주IC)-감나무 과수원-밤나무 과수원-철계단-묘지지대-164봉 갈림 삼거리-181봉-소나무 등로-이장된 묘지지대-146봉-안부-진양호상수도보호구역 말뚝-밤나무 과수원-172.3봉-잡목가시지대-이정표(팔각정자 300m, 호수변 1100m, 상락원입구방면과 판문예술촌방면)-벤취 쉼터 2-내리막 계단-사각탁자와 벤취 쉼터-안부 이정표(팔각정자 100m, 파크골프장 250m, 순환산책로)-사각 계단-명상의 숲 안내판-양마산 팔각정(146봉) 이정표(진양호공원전망대, 상락원입구, 산림욕장과 등산로)-안전목책과 로프-낭떨어지 경고판-121.4봉 벤취 쉼터-보도블럭 도로-편백나무 등로-콘크리트 계단-호반전망대(진양호 공원안내도)-아시아레이크사이드호텔-이재호 노래비-6각정자-진주랜드-진양호 휴게소(진양호공원안내도)-남인수동상-우약정-이정표(가족쉼터 272m)-편백나무와 벤취쉼터들-이정표(가족쉼터 80m, 우약정 120m, 남인수동상 790m)-진양호-망향비-쉼터-진주시 충혼탑-진양호공원-산행종료
산행거리 : 진양기맥 마지막 구간을 즐기고 많은 사진을 찍으며 여유있게 진행하여 약 22.36 Km
산행시간 : 9기맥 산행을 마무리하는 아쉬움을 달래며 홀로 꾸준히 걸어 09시간 06분 (04시 45분부터 13:31분까지)
교통편 : 애마와 택시 이용
- 명석 콜택시(055-744-4747) : 23000.-원 진양호공원 충혼탑에서 경상남도 축산진흥연구소 축산시험장까지
진양기맥이란 ??? 아직 공식명칭은 아니지만 신 산경표의 저자인 박성태님이 그 이름을 붙여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독립된 기맥으로 부르고 있는 가칭 진양기맥은 백두대간의 남덕유산에서 남동쪽으로 가지를 쳐 월봉산, 금원산, 기백산, 망설봉, 갈전산, 바랑산, 소룡산, 황매산, 철마산, 금곡산,성현산, 산성산, 한우산, 자굴산, 망룡산, 천황산, 집현산, 광제봉을 일으키고 남강 유역인 진양호의 남강댐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 159.1km의 산줄기를 말한다.
진양기맥 산줄기는 주로 남강과 황강을 가르는 분수령으로 진양기맥의 서쪽 내지 남쪽의 물은 남강으로 흐르고 산줄기 동쪽의 물은 황강 내지 낙동강 본류로 흐른다.
남강과 황강을 가르는 산줄기로만 따진다면 한우산에서 좌굴산,집현산,광제봉,남강댐으로 가지 말고 한우산에서 응봉산,우봉산,돌문재쪽으로 가야 할 것이나 남강댐쪽이 거리도 25km쯤 더 길고 산세도 더 수려하며 진양호에서 맥을 다한다는 이유로 대부분 종주자들이 남강댐쪽으로 이어가고있다.
진양기맥은 하동을 제외한 서부 경남의 전지역인 함양,거창, 합천, 산청, 의령, 진주등 6개시군을 지난다.
진양기맥을 마지막으로 9기맥 산행까지 깔끔하게 마무리를 하고 개운한 마음으로 다음 지맥산행을 생각했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후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단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어제 내려 와 제7구간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원지로 들어가 이슬이 한병에 곰탕으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1시 30분에 일어나 간단히 준비 후 애마를 타고 통영대전 고속도로를 타고 서진주 TG를 통해 진양호로 들어가다 돼지국밥 한그릇으로 새벽 식사를 마치니 새벽 3시 30여분을 지나고 있다.
다시 24시 편의점에 들려 필요한 음료수와 햇반 하나 그리고 김치를 구매하여 배낭에 넣고 진양호공원 내 충혼탑 앞 주차장에 주차를 시키고 명석 콜택시에 전화를 하니 채 10분도 되지 안하 도착을 하고 그 택시로 갈아 타 어제 저녁에 내려 왔던 산청의 경상남도 축산진흥연구원으로 가니 새벽 4시 40여분을 지나고 있다.
간단히 산행 준비 후 배낭을 둘러메고 축산진흥연구원 주위를 사진에 담고 출발하는 시간이 4시 45분으로 오늘 이곳 진양기맥 마지막 제8구간을 마무리하게 되면 9기맥 산행도 마무리가 되기에 의미가 있는 시간이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어떻게 빨리 완주 후 도로 정체 없이 서울 집으로 복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다.
때로는 조금 빠르게 또 때로는 여유롭게 많은 시간 쉬면서 진행을 하다 보니 예상했던 시간에 진양호공원 내에 있는 충혼탑 앞 쉼터에 도착을 하고 배낭을 정리하여 출발하려는데 마침 가족들과 함께 구경 나온 여행객이 있어 어렵게 부탁해 진양호를 배경으로 마지막 사진 한장 남겨 본다.
그렇게 갈무리를 하고 뒤돌아 서니 그제서야 오늘 산행 뿐만 아니라 1대간 9정맥 9기맥을 무탈하게 완주했음을 느끼고 스스로 자축해 보지만 큰 감흥은 없다.
아마도 수없이 많은 산줄기를 타고 걸으며 그 산줄기가 물로 빠지는 풍경을 만났기에 이렇게 큰 산행을 마무리하면서도 희열이 크지 않으니 역시나 경험이 쌓이면 희열과 즐거움도 줄어드는가 보다.
그래도 스스로에게 수고했다면 위로를 건네고 집으로 전화를 해 축하를 받으며 일찍 올라가 이슬이 한잔으로 가족과 함께 자축한다 생각하니 오늘만큼은 이 세상의 주인공이 된듯한 착각속에 즐거움만 가지고 정리를 하는 시간이 되었다.
언제 다시 이곳 경상남도 축산진흥연구소에 올 수 있을지 생각해 보지만 오늘이 지나면 기약조차 할 수 없는 시간이기에 어둠속에서도 조금 더 주위를 둘러 보는 시간이다.
택시에서 내리니 생각보다 춥지 않아 진행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듯 한데 다만 예상보다 높은 기온으로 인해 추위가 아닌 무더위에 고생이나 하지 않을까 걱정도 되는 시간이다.
배낭을 둘러메고 축산진흥연구소 정문 우측으로 나 있는 비포장 임도를 타고 출발하니 좌측 저 멀리 집현산 쪽으로 부터 멧돼지 울음소리가 크게 들리고 등골이 오싹하는 기분으로 걸어 오르니 20여분만에 드디어 진양기맥 마지막 구간의 산행 들머리인 청형재에 도착을 해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 본다.
어제 오후에 서 있었던 청현재인데도 전혀 새로운 장소에 새롭게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어둠이 온 세상을 삼키는 시간에 홀로 멧돼지 울음소리를 들으며 산행을 이어가기 위해 올라 온 스스로에게 대견한 위로를 건네며 9기맥 완주를 위한 발걸음을 옮겨 본다.
이 산객은 청현재의 북쪽을 통해 산행 날머리와 들머리를 잡았지만 어떤 선답자들을 보니 남쪽인 신기리의 보현사를 통해 오르고 내려간 산행기도 있는 듯 하여 그곳 신기리에 대한 자료를 찾아 본다.
신기리는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에 있는 마을로서 집현산의 서남쪽 자락에 위치하여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골짜기에 신기저수지가 있다.
자연마을로는 신기, 솔기, 동전 등이 있는데 신기는 임진왜란 때에 정선 전씨가 처음 들어와서 살았는데 대단한 부자였다고 하며 그 뒤를 이어서 진양 강씨와 능성 구씨들이 들어와 살면서 새마을이라는 촌명이 생겼다고 한다.
솔기는 집현산 발치에 있는 산촌이니 명석면에서 제일 북쪽에 위치한 마을이고 동전은 옛날에 서쪽에 있는 광제사의 중들이 재를 넘나들며 동쪽 밭에 농사를 지었다는 것에서 유래된 지명이며 또한 세 갈래 길이 있다 하여 삼거리라고도 부른다.
문화재로는 명석자웅암(명석각:경남민속자료 12)이 있다.
청현재에서 입었던 방풍 자켓을 벗어 배낭에 넣고 우측 잡목이 자라고 있는 능선을 타고 마지막 구간 산행을 시작한다.
광제봉수대까지 4 Km 거리라는 이정판을 지나 희.준님의 응원판을 바라보며 오르막 등로를 타고 잡목을 헤치며 오르니 등로는 생각보다 뚜렷하고 잠시 후 멋진 소나무 등로가 이어진다.
어둠속에서도 멋진 소나무 등로를 타고 잠시 더 오르니 벌써 등줄기와 이마에선 굵은 땀방울이 흐르기 시작하고 그렇게 조금 더 오르니 갑자기 눈 앞에 324.1봉의 삼각점이 나타나는데 선답자의 한명이 이곳을 보현봉이라 적어 놨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정확한 고증이 없다면 노력한 만큼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헷깔리기까지 하니 조금 더 신중한 이정표와 이정판을 설치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 324.1 삼각점봉을 지나 계속 이어지는 소나무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갑자기 등로 좌측으로 낙석방지 도로 표지판이 반짝이고 있어 깜짝 놀란다.
이 산중에 왠 낙석방지 도로 표지판이 있을까 궁금해 살펴보니 그 낙석방지 도로 표지판은 최근에 개설된 듯한 비포장 도로 옆에 서 있던 것이었다.
무슨 용도로 왜 이런 산중에 도로 표지판이 서 있는지 어둠속에 알수는 없지만 사진 한장 남기고 계속 이어지는 뚜렷한 등로를 따라 걸어 본다.
잠시 등로 좌측으로 보이는 신기저수지 방향의 야경을 살피며 걸어가니 갑자기 눈 앞에 육각정자가 나타나고 사진 한장 남기고 출발을 한다.
그 육각정자를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소나무로 된 능선 등로가 끝이나고 이어지는 등로는 방금 전 낙석방지 도로 표지판에서 헤어졌던 비포장 도로와 만나 한동안 그 도로를 타고 우측으로 걸어가며 진행이 되고 있다.
어둠속에 보이는 것이 없기에 그저 이 비포장 도로를 따라 걸어가다 보니 도로 우측으로 진한국부인철성이씨묘지입구라는 콘크리트 말뚝이 보이는데 등로를 자세히 살펴보니 우측은 마루금의 나즈막한 능선이고 좌측으로는 불빛이 저 멀리 내려다 보이기에 민가들과 제법 멀리 떨어진 도로가 아닐까 생각되는 도로이다.
잠시 더 진행하다 궁금해 지도를 펴 놓고 살펴보니 이 비포장 도로는 오늘 산행 들머리로 이용했던 청현재에서 이어지는 도로로서 잠시 더 진행하다 비포장 임도를 우측으로 보내고 등로는 좌측으로 헤어지게 되어 있어 이제서야 이해가 될듯 하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가니 저 앞으로 시멘트 포장도로가 지나는데 반원형을 그리며 통과되고 그곳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흐르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보내고 우측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 간다.
지도를 보니 이곳은 외율리로서 외율리는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에 있는 마을로서 집현산 동쪽 자락에 위치하여 대부분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작은 천이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내율, 팔미 등이 있는데 내율은 광제산 서북쪽에 자리한 산간벽촌으로 주위 산에 밤나무와 대추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옛날부터 밤실이라 불렸다.
내율이란 촌명은 점차 인가가 늘어 마을이 커지면서 바깥밤실, 안밤실로 구별하여 부른 것에서 유래된 것이니 지금도 인근에서는 내율보다는 밤실로 많이 불러지고 있다.
팔미는 주위의 높고 낮은 산세 속에 여덟 군데의 명지가 있다 하여 팔미란 지명이 붙었는데 이러한 지명에 걸맞게 멀리서 두줄기 산맥이 갈라지며 깊숙한 골을 이루었으니 양편 산록을 따라 밖에 있는 마을을 외팔미라 하고 안쪽에 있는 마을을 내팔미라고 한다.
이제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조금 더 걸어가니 넓은 비포장 공터가 나타나고 그 우측 한쪽에는 광제산등산로안내도와 광제산등산로 산림정화 안내문이란 안내판이 보이고 직진 앞으로는 벤취 쉼터 2개가 놓여 있는 내율고개 모습도 보인다.
내율고개는 내율마을에 있는데 내율마을은 광제산 서북쪽에 자리한 산간벽촌으로 주위 산에 밤나무와 대추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옛날부터 밤실이라 불렸다.
내율이란 촌명은 점차 인가가 늘어 마을이 커지면서 바깥밤실, 안밤실로 구별하여 부른 것에서 유래된 것이니 지금도 인근에서는 내율보다는 밤실로 많이 불러지고 있다.
사진 몇장 남기고 이제부터 도로를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올라 걸어가니 그곳도 넓은 소나무 등로가 열려있어 진행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잠시 더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 옆에 116번 송전탑이 보이고 그 송전탑을 지나니 등로는 더욱 넓어지며 고속도로 처럼 뚜렷하다.
소나무로 이뤄진 넓은 등로를 따라 전진하니 이제 이정판 하나가 보이는데 살펴보니 등로 좌측으로 동전마을 하산 표시가 있는 갈림 삼거리인데 이제 광제봉수대까지는 2 Km남아 있다는 거리표시가 반가운 시간이다.
동전마을은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명 신기리에 있는 마을로서 옛날에 서쪽에 있는 광제사의 중들이 재를 넘나들며 동쪽 밭에 농사를 지었다는 것에서 유래된 지명이며 또한 세 갈래 길이 있다 하여 삼거리라고도 부른다.
동전마을 갈림 삼거리를 지나 소나무 등로를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는 다시 오르막 등로로 이어지고 번호를 확인 할 수 없는 송전탑 옆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도를 살펴보니 비로 이 송전탑을 지나자 마자 나타나는 묘지 부근이 광제봉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실제 등로에는 아무 표식도 없어 어둠속에 식별이 되지 않으니 아쉽기만 하다.
광제봉(347봉)은 경상남도 진주시의 명석면 외율리에 위치한 산으로 해발고도 347미터이다.
광제산은 명석면 외율리, 덕곡리, 계원리, 신기리에 걸쳐 있는데 동쪽으로 집현산이 있고 남쪽으로 숙호산이 있다.
광제산 줄기가 남쪽으로 뻗어 내리면서 진주 서부지역 판문동, 평거동, 신안동, 이현동 일대를 감싸고 있으며 광제봉 남쪽으로는 명석면 덕곡리 토장동에서 외율리로 넘나드는 광제재가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진주에 광제산 봉수는 주로부터 북쪽 31리에 있으며 남쪽으로 망진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단성 입암산에 응한다라고 수록되어 있다.
현재 광제산 봉수대(경상남도 기념물 제158호)의 화구와 석축의 일부 흔적이 남아 있으며 덕곡리 성지는 광제봉에 있는데 덕곡리와 신기리의 경계를 이룬다.
성은 둘레가 약 150미터의 석축성이지만 대부분 무너져 그 흔적만 확인할 수 있으며 봉화대 밑에는 일제강점기 금을 캤던 굴이 10여 개 정도 있다고 한다.그 송전탑 옆에서 등로 좌측 뒤를 살펴보니 신기리 마을의 야경이 반짝이고 있다.
다시 능선으로 들어가 걸어가니 묘지 한기를 지나고 무명봉을 넘으니 평이한 등로를 타고 291봉에 도착을 한다.
다시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소나무 등로를 타고 전진하니 등로 옆에 이정판이 서 있는데 이제 광제산봉수대까지 1 Km 거리라는 표시가 되어 있는 313봉이다.
다시 무명봉을 넘어 나즈막한 안부로 내려갔다 진행을 하니 113번 송전탑을 통과하고 평이한 등로를 따르다가 완만한 오르막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약간의 바위들이 산재되어 있는 등로를 지나 뚜렷한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무명묘지봉우리에 도착을 하는데 지도를 살펴보니 13번 송전탑 지나기 전에 347봉의 광제봉이 있다는데 그 어디에도 그런 표식을 찾지 못해 아쉽기만 하다.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계속 더 진행을 하니 금새 등로 좌측으로 계원리에 있는 홍지소류지 하산 갈림 삼거리 이정판이 보인다.
계원리는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에 있는 마을로서 집현산의 산맥인 광제봉이 동쪽에 위치하여 높이 100에서 300m 내외의 산이 대부분이며 산지 사이를 작은 하천이 흐르는데 하천 연안을 따라 평야가 분포하며 고추, 딸기 등의 비닐하우스 재배가 활발하다.
자연마을로는 갈전, 보촌골, 새터 등이 있는데 갈전은 보촌골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에 갈정승의 묘가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보촌골은 갈전의 북쪽에 있는 마을이며 봉청동이라고도 불리고 새터는 보촌골 북쪽에 새로 된 마을이라서 새터라 불리고 전에 홍씨가 터를 잡아 이루었다 하여 홍지골이라고도 한다.
홍지소류지 갈림 삼거리를 지나 걸어가니 등로는 여전히 아름다운 소나무 등로가 이어지고 있는데 어둠속에 걷다보니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게 평이하게 걸어가니 등로는 다시 나즈막하게 내려가는데 내려간 그 안부에 약샘삼거리 이정판이 서 있는데 봉수대까지 100미터 거리에 좌측으로는 약샘까지 200미터 거리라는 표시가 눈에 들어 온다.
물이 부족하면 가까운 곳에 있는 샘이기에 다녀올법도 하지만 오늘은 산행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물 한모금 마시지 않았기에 그냥 출발을 한다.
약샘삼거리를 지나 가파르게 오르니 금새 봉수 3개가 있고 몇개의 조망안내도와 이정판들이 보이는 광제산 봉수대에 도착을 한다.
광제산(420봉)은 높이 420미터로서 진주시내에서 차로 15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백두대간인 덕유산에 뿌리를 두고 금원산과 황매산을 거쳐 집현산을 일구었고 서쪽으로 부드럽게 뻗어나가 봉우리를 이룬 산이다.
산세는 진주 시내에 있는 숙호산으로 이어져 이현, 신안, 평거, 판문동 일대를 감싸고 있는 전형적인 흙산이어서 경사가 완만하며 토종 소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어 가족 단위의 등반객이 많다.
현재 11개의 등산로가 30여 개의 안내판과 함께 설치되어 있는데 4 Km에서 20 Km까지 길이가 다양하여 체력과 시간에 맞추어 선택할 수 있으며 집현산을 횡단하는 왕복 30 Km의 산악마라톤코스도 유명하다.
그다지 높지 않으나 남쪽의 남해바다와 북쪽의 덕유산 자락이 보일 만큼 주변 시야가 넓어 조선시대 통신수단이었던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다.
이곳의 봉수대는 전국의 5개 직봉 중 동래 다대포진에서 서울에 이르는 제2간봉으로 남쪽으로는 남해 금산에서 창선 대방산, 사천 각산, 사천 안점, 진주 망진산, 북쪽으로는 산청 신안 벽계봉수대에서 합천 금성산, 충주 망이산으로 이어진다.
봉수대는 윗부분이 무너진 것을 제외하고는 원형을 잘 보전하고 있어 1997년 경상남도기념물 제158호로 지정되었으며 2004년에는 무너진 돌더미를 사용하여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광제산 정상에 있는 봉수대와 조망안내판 그리고 주위 풍경을 사진에 담고 내려와 이제는 등로 좌측 야경을 살펴보니 저 멀리 진주의 불빛이 아른거린다.
오늘 점심을 지나 도착을 해야 할 진주이기에 보이지는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벌써 저 멀리 있을 진양호가 가 있다.
광제산 봉수대는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덕무리에 있는 봉수대로서 경상남도기념물 제158호이며 광제산 봉수대는 진주를 통과하는 남해안의 위급한 상황을 서울로 전달하는 내륙의 중요한 통신수단 역할을 한 조선 세종 때에 축조된 것이다.
이 봉수대는 남으로 망보산 봉수와 북으로 단성의 입암산봉수와 상응한 남산에서 동래선을 보조하는 간봉으로서 현재 화구, 봉수대의 석축, 봉수군 숙소터가 잔존하고 있으며 일부는 훼손되었으나 복원이 가능하다.
봉수제도는 고려 의종 3년에 서북병마사 조진약의 주청에 의하여 처음 시작되었고 세종 원년(1419)에는 봉수령을 제정 군사제도로 정착되었다.
봉화방법은 밤에는 불로, 낮에는 연기로 하였으며 신호체계는 아무일이 없을 때에는 1거, 적이 바다에 나타나면 2거, 해안에 가까이 오면 3거, 우리 병선과 접전하면 4거, 육지에 상륙하면 5거로 하였다.
이러한 신호는 즉각 오장이 각 지방 수령에게 보고하였고 서울에서는 병조에서 관장하여 승정원에 보고하여 임금께 상주되었다.
그곳 광제산 봉수대에서 많은 사진을 남기고 시간을 보낸 뒤 다시 올라온 방향으로 가니 이제는 올라온 방향 좌측으로 면사무소라는 화살표 표시가 되어 잇는 안내판이 서 있고 그 방향으로 가파르게 내려가 본다.
낙엽 깔린 넓은 등로를 따르니 등로 좌우쪽으로 대나무들이 보이고 작은 바람에서 서걱거리며 우는 소리가 이색적이다.
다시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바위가 산재되어 있는 등로를 지나고 곧이어 좌측의 비포장 임도와 만나 내려가게 되는데 지도를 보니 이곳이 광제재이다.
광제재에 대한 자료는 찾지를 못해 아쉬움만 남긴채 가파르게 내려가 본다.
잠시 더 그 비포장 임도같은 넓은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무명묘지를 지나 소나무 등로로 변하고 더욱 넓어진 등로로 이어진다.
그렇게 한동안 내려가니 광제산등산로 안내판이 보이고 그 아래에는 현위치 덕곡고개라는 안내판도 보인다.
곧이어 시멘트 포장도로와 만나 그 도로를 건너니 다시 시멘트 포장도로는 좌측으로 오르고 그 우측 능선 방향으로 비포장 임도가 보이는데 그 비포장 임도를 타고 산행을 이어가야 한다.
덕곡고개 즉 덕재는 진주시 명석면 덕곡리에서 외율리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덕곡리를 찾아보니 덕곡리는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에 있는 마을로서 집현산의 서남쪽 자락에 위치하여 대부분 낮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덕곡소류지, 엄목소류지가 있다.
자연마을로는 토담, 엄목정, 소태골, 홍지동 등이 있는데 토담은 광제산 바로 아래 위치해 있으며 가마실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엄목정은 예전에 동리어구에 몇 아름되는 장엄한 기목나무가 서 있어 멀리서 보면 나무에 가리어 마을이 보이지 않았다 하여 이런 촌명이 생겼다고 하고 소태골에는 인동 장씨와 동래 정씨가 약 300여년 전부터 살아왔으며 정씨들의 재실이 있다.
홍지동은 마을에서 등 하나를 넘아가면 홍지곡이라는 골짜기가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며 인근에서는 홍재 또는 홍묘라고도 부른다.
시멘트 포장도로가 지나는 덕곡고개에서 가운데 능선으로 나 있는 명석면사무소(등산로) 방향의 비포장 임도를 타고 오르니 이곳 역시 넓은 등로 위에 솔갈비가 깔려 있어 진행하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등로 양쪽으로 약간의 잡목과 관목들이 자라고 있지만 등로가 워낙 넓은 비포장 임도처럼 나 있어 큰 무리없이 걸어 오르니 약간의 바위들이 산재되어 있는 곳을 지나 큰 활엽수와 작은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310봉에 도착을 해 처음으로 물 한모금 마신 후 배낭을 정리하고 다시 출발을 한다.
그 310봉을 지나 깊은 낙엽이 떨어져 쌓여있는 완만하게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타고 걸어 내려가니 다시 소나무 등로가 나타나고 곧이어 등로는 우측으로 크게 휘어져 내려 진행되는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등로 좌측으로는 여명이 밝아오며 방금 전 올랐다 내려 온 광제산 봉수대가 아름답게 조망되기 시작한다.
어둠이 사라지고 처음으로 바라보는 조망이기에 조금 더 살펴보고 몇장의 추억을 남겨 본다.
그 갈림 삼거리 우측으로 사각정자가 서 있고 그 옆에는 광제봉수대에서 2 Km진행해 왔고 좌측으로 덕곡마을 하산 갈림 이정판도 서 있다.
그 사각정자의 덕곡마을 갈림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크게 꺽어 이어지는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걸어 전진하니 이곳 역시 활엽수 낙엽이 등로가 떨어져 깊게 깔려 있어 마치 양탄자를 걷듯 편안하게 걸어 본다.
등로 좌측으로는 아침 일출이 시작되려는지 하늘이 붉게 물들어 오기 시작을 하는데 살펴보니 구름이 두껍게 끼어 있어 멋진 일출은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렇게 다시 활엽 낙엽 등로와 소나무 등로를 번갈아 타며 걸어가니 등로는 넓고 뚜렷하게 나 있다.
다시 한동안 뚜렷한 등로를 타고 평이하게 진행하니 등로는 다시 완만하게 오르게 되고 잠시 후 바닥에 바위들이 산재되어 있고 거목의 참나무 한그루가 정상을 지키고 있는 291봉에 도착을 한다.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그 291봉을 넘어 걸어가니 등로에는 솔갈비가 아름답게 깔려 있다.
잠시 더 걸어가니 최고의소나무길 웰빙 광제산 등산로(10 Km)라는 안내판에 등로 좌측으로 스파랜드 갈림 이정판이 서 있고 곧이어 299.5 삼각점봉에 도착을 한다.
이곳 역시 선답자 한분이 소원봉이란 이정판을 걸어 놨는데 고생만 한듯하여 아쉽기만 하다.
사진 한장 남기고 살펴보니 지도상에는 299.5봉이 맞는데 실제 삼각점 표지판에는 286.5봉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각점봉을 지나 내려가니 이곳 역시 너무나 아름다운 소나무 등로가 열려있고 힐링하듯 걸어가니 갑자기 등로는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로 변하고 있다.
너무나 편안하게 빠른 속도로 걸어가니 등로 옆에 107번 송전탑이 서 있고 그곳에서 잠시 등로 좌측을 살펴보니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산그리메가 덕곡리 마을을 가운데 두고 펼쳐져 있다.
다시 이어지는 소나무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번호를 볼 수 없는 송전탑을 지나 등로 좌측으로 덕곡고개에서 헤어졌던 비포장 임도가 등로 좌측 아래로 따라 오고 있는 풍경도 내려다 보인다.
다시 한동안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고 그 임도를 건너 능선으로 들며 산행을 이어간다.
이곳 지명을 찾아보니 낙현치라는 이름이 나타나는데 그 이름에 관한 자료는 전혀 찾을 수 없어 아쉽기만 하며 아마도 최근에 개설된 도로처럼 보인다.
최근에 개설된 듯한 비포장 임도가 있는 낙현치를 건너 능선으로 들어가니 바위가 정상에 누워있는 듯한 204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출발한다.
그 봉우리를 지나 멋진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봉분이 있는 함안조공묘지를 지나 계속 이어지는 소나무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내려가 본다.
그렇게 잠시 더 소나무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갑자기 등로 좌측의 소나무 가지 사이로 힘들게 올라오고 있는 일출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가며 어렵게 그 일출 사진을 몇장 남기고 나니 떠 오르던 아침 햇살은 금새 다시 두께운 구름속으로 숨어 들어간다.
늘 같은 일출이지만 9기맥을 마무리하는 오늘의 일출은 구름속에서 만나지만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온다.
일출을 보면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정상 등로로 복귀해 조금은 빠르게 걸어 본다.
잠시 더 걸어가니 등로 좌측 앞으로 잠시 후 올라야 할 나즈막한 진양기맥 마루금들이 올려다 보인다.
다시 조금은 빠르게 걸어 진행을 하니 바위로 만들어진 몇기의 묘지들이 보이는데 관리가 되지 않아 모두 무명묘지로서 조만간 사라질 것 같은 모습들이다.
다시 나타나는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잘려진 콘크리트 말뚝을 지나고 잠시 완만하게 오르니 진행 방향 저 멀리 잡목 사이로 놋종기먼당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이 넘실거린다.
잠시 후 오지승 소나무 한그루가 정상에 서 있는 228봉에 도착을 한다.
그 오지승 소나무가 서 있는 봉우리를 지나 걸어가니 잡목과 소나무가 섞여 있는 뚜렷한 등로가 이어지고 곧이어 몇기의 나즈막한 봉분을 가진 묘지지대를 통과한다.
묘지를 지나니 다시 소나무 등로가 이어지고 이제 진행방향 앞으로 잠시 잡목이 사라진 곳에서 아름다운 진양기맥 마지막 구간의 마루금을 살펴 본다.
계속 이어지는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멧돼지 목욕탕이 함께하는 낮은 봉분을 하고 있는 무명묘지를 지나 등로 좌측으로 끝없이 펼쳐진 진주방향의 산그리메를 살펴보며 잠시 쉬어 간다.
남동쪽 저 멀리 진주시 동쪽에 말 안장처럼 생긴 월아산이 참으로 아름다운 산그리메이다.
멋진 진주시 방향의 산그리메를 살펴본 후 다시 출발하니 멋진 소나무 등로가 이어지고 곧이어 참나무와 잡목이 섞여 있는 등로로 변하고 있다.
그렇게 진행하다 등로 좌측 앞으로 보이는 뾰족봉이 있어 살펴본 후 지도를 보니 놋종기먼당 지난 260봉인 듯 보인다.
처음에는 지도에 놋종기먼당이란 표식이 없어 그저 돌탑봉이라 생각했는데 그곳 260봉의 놋종기먼당에 도착을 해서야 정상석과 돌탑 그리고 그 유래를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다시 그 260봉 뒤로 이어지는 진양기맥 마루금을 조망하며 산행을 이어간다.
다시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돌담처럼 보이는 안에 상수리 나무 하나가 자라고 있는 무명봉을 지나 놋종기먼당(265미터) 등산로 안내판과 돌탑 그리고 정상석이 서 있는 놋종기먼당에 도착을 한다.
놋종기먼당은 오미리의 동북쪽에 있는 산봉우리로서 천지개벽 시에 놋종기 만큼 남았다고 하여 붙여진 봉우리 이름이다.
놋종기먼당이란 뜻이 이상해 자료를 찾아 보지만 잘 찾을 수 없어 진주시에 문의를 하니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해 준다.
놋종기란 놋그릇으로 만든 조그만 그릇 종류로 종재기라고 부르기도 하며 먼당은 봉우리란 뜻으로 두 단어를 합하면 놋그릇 술잔만한 작은 봉우리란 의미란다.
그 정상석 앞에서 셀카 놀이를 하면서 추억 한장 남기고 일망무제로 펼쳐진 주위 조망과 풍경을 즐겨 본다.
제알 먼저 남쪽으로 지금부터 걸어 진행해야 할 방향의 산그리메를 살펴 본다.
바로 앞에 또 다른 260봉이 우뚝 솟아 보이고 그 뒤로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이어져 있는 산그리메가 진양호를 지나 낙남정맥을 이루고 있는 나즈막한 산줄기로 이어지는 풍경이 눈에 들어 온다.
저 붉게 빛나는 하늘 아래 이어져 있는 나즈막한 낙남정맥 마루금을 타고 걸었던 추억이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속에서도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산줄기들이다.
등로 우측인 서쪽 방향으로는 오미리의 시목마을이 내려다 보이고 그 앞으로는 거대한 진양호가 시원하게 흘러가는 풍경도 보이며 그 진양호 위를 가로지르는 통영대전간 고속도로 위로는 많은 차량들이 빠른 속도로 달리며 가까워지고 멀어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 뒤 저 멀리 보여야 할 성제봉과 지리산 천왕봉을 찾아 보지만 희미한 박무로 인해 눈에 들어 오지 않아 아쉬움으로 인해 발만 동동 굴러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남동쪽으로는 진주시내쪽의 월아산과 의령쪽 벽화산 줄기도 보이기에 언젠가 다시 한번 내려가 올라보기로 하고 아쉬운 조망을 마치고 다시 놋종기먼당 정상을 출발해 본다.
억새가 피어있는 소나무 등로를 타고 걸어 내려가니 등로 우측으로는 통영대전간 고속도로와 진양호가 계속 내려다 보이고 그렇게 조금 더 진행하니 철모르고 피어난 잔덜래꽃이 화사하게 웃어주지만 한겨울 추위에 또 어떤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도 되는 시간이다.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바위가 있는 등로를 지나 등로 좌측 뒤로 지금까지 걸어 온 진양기맥의 한우산과 자굴산으로 부터 이곳으로 이어져 온 마루금이 환상속에 빛나고 있다.
지나 온 마루금을 뒤돌아 보고 다시 출발하니 이제는 앞봉우리가 바싹 다가와 있고 그 좌측 뒤로 진주에 있는 월아산의 말 안장이 박무속에 아른거린다.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잡목의 저항을 뿌리치며 다시 완만하게 오르니 등로 좌우측으로 펼쳐진 산그리메가 자꾸만 이 산객의 발길을 붙잡고 산행속도를 늦추고 있다.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바위와 참나무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262.7봉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다시 가야할 진양기맥 마지막 산줄기를 원없이 살펴보는 시간도 가져 본다.
너무나 아름다운 마루금으로 인해 쉽게 출발하지 못하고 조금 더 가슴속 깊이 그 환상의 진양기맥 마루금을 간직한 후 잡목을 헤치고 출발하니 이제부터 등로에는 여러종류의 식생들이 혼재되어 나타나고 있다.
억새와 잡목들 그리고 키 작은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섞여 등로를 감추고 그 사라진 등로를 찾아 어렵게 전진하니 돌담이 쳐져 있는 진주강씨 묘지들을 지나 또 다시 펼쳐진 산그리메에 발걸음을 멈춘다.
등로 좌측으로는 진주시 명석면의 산그리메가 또한 가슴속 깊이 남겨지며 또 다른 추억을 만들고 있다.
명석면은 경상남도 진주시의 서북부에 위치한 면으로 북쪽의 집현산(578미터)과 광제봉(347미터) 줄기가 남향하면서 만든 크고 작은 곡간을 흐르는 물줄기가 모여 나불천을 이루었으며 명석면은 산지 곡간에 형성된 농경지를 바탕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조선 전기에 진주목 북면 명석리, 성태동리로 불렀는데 명석리는 임진왜란으로 인구가 크게 줄어 성태동리에 합해졌다가 조선 후기 명석리가 복구되었다 성태동리와 함께 면으로 바뀌었다.
1914년 진주군 명석면·성태면, 단성군 오도면 토현동, 오산면·신풍면 중동 일부, 대평면 일부 등을 명석면으로 통폐합하였으며 1938년 평거면 우수리, 용산리를 편입하였고 명석면은 우수리와 관지리 등 11개 법정리를 관할한다.
진양지에 성태동리는 주의 북쪽 20리에 명석리는 주의 북쪽 30리에 있으며 임진왜란 전에는 사족이 몇 집 살았으나 왜란 이후에 없어졌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기리에는 명석 지명이 유래한 명석자웅석(도 민속문화재 제12호)이 보전되고 있는데 명석자웅석 전설은 고려 공민왕 때 여진의 침입(일설에는 1231년 몽골의 침입)에 대비한 진주성 수축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부역에 동원되었던 승려가 급히 걸어오는 자웅석과 만나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더니 돌은 진주성 부역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스스로 성돌이 되고자 간다고 하였다.
승려가 이미 성을 다 쌓았다고 말해주자 돌이 크게 울며 전신에 눈물을 흘리고 그 자리에 서버렸는데 그래서 운돌 혹은 울돌이라고 이름을 짓게 되었던 것에서 명석 지명이 유래하였다.
다시 나타나는 잡목지대를 타고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이제 3번 6차선 도로가 지나는 용산치가 바로 눈 앞에 나타나고 그 넘어 저 멀리 196봉 지나 240봉으로 이어지는 진양기맥 마루금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 풍경도 눈에 들어 온다.
계속 내려가니 잡목지대를 지나 밤나무 과수원이 이어지고 곧이어 물이 흐르는 묘지를 지나 절개지 상단에서 좌측 등로를 타고 대나무 밭을 지나니 3번 6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용산치에 도착을 한다.
용산치는 용산리 북쪽에 있는 고개로 명석면 용산리와 오미리를 이어주는 고개라는 뜻과 산청군에서 진주시로 이어지는 3번 6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고개라는 설명도 보인다.
생각보다 차량 통행량이 많아 기다렸다 조심하여 3번 도로를 건너 산행을 이어가 본다.
3번 6차선 도로를 건너 도로를 타고 우측으로 걸어가니 선답자들의 산행후기에 자주 나타났던 칡즙매점이 보이는데 주인장은 어디를 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그 옆에 흐르는 수돗물에 얼굴을 닦고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들어가자 마자 좌측 밤나무 과수원이 보이는 절개지를 타고 능선 방향으로 어렵게 올라 본다.
오르다 보니 밤이 등로에 많이도 떨어져 있는데 모두 벌레를 먹었는지 아니면 추위에 얼었다 녹아서 그런지 먹을만한 밤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그 밤나무 과수원을 통해 가파르게 오르니 밤나무 밭이 끝이나면서 잡목이 앞을 가려 무척 어렵게 진행을 한다.
온 몸에 생채기를 내며 어렵게 오르니 잡목과 소나무가 섞여 있는 150봉에 올라 한숨을 돌리고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약간의 바위들이 산재되어 있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무명봉을 지나 곧바로 196 삼각점봉에 도착을 해 물 한모금 마셔 본다.
해발고도는 높지 않은데 참으로 어렵게 올라 온 196봉이다.
그 196봉을 지나 다시 평이하게 걸어가니 다시 잡목의 저항이 심해지고 어렵게 잡목을 헤치고 전진하니 억새 지대가 짧게 나타난다.
그 억새지대를 지나니 등로 좌측에 잘 익은 감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감나무가 서 있어 이곳에서도 감 몇개를 따 먹으니 허기가 사라지고 목마름도 달랠 수 있었다.
그렇게 감을 따 먹고 잠시 더 걸어 진행을 하니 억새가 자랐다 사라진 공터의 203봉에 도착을 하는데 앞으로 진행해야 할 240봉이 저 앞으로 우뚝 솟아 있다.
잡풀이 있는 203봉을 넘어 내려가니 이장된 묘지가 있었는지 넓은 공터가 이어지고 그 공터를 지나 내려가니 소나무 등로가 이어지는데 어린 소나무들이 등로를 막아 등로를 찾아가며 내려가는 시간이 어렵기만 하다.
그 소나무 등로를 지나니 다시 활엽수 낙엽이 깊게 쌓여 있는 안부를 지나는데 지도를 보니 이곳 안부 좌측으로 북천사가 있다는 표시가 눈에 들어 온다.
그 안부를 지나 완만하게 오르다 잡목이 사라진 곳에서 잠시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지나온 203봉과 저 멀리 자굴산으로 이어진 오늘 이 산객이 걸어 온 진양기맥 마지막 마루금이 한눈에 들어 와 다시 발걸음 멈추고 잠시 쉬어 간다.
그렇게 오르니 등로는 잡풀만 약간 자랐다 말라죽은 걷기 좋은 등로로 이어지고 잠시 후 검은 바위들이 산재되어 있는 228봉에 도착을 해 다시 조망을 즐겨 본다.
약간의 잡목이 자라고 있는 등로를 타고 앞에 보이는 240봉을 바라보며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진주의 나즈막한 산줄기가 끝없는 산그리메를 이루며 산객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다시 간벌된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오르니 등뒤로 조금 더 선명하게 저 멀리 한우산과 자굴산으로 이어지는 진양기맥 마루금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그렇게 조망을 즐기다 보니 참나무들이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240봉에 도착을 하고 다시 간벌된 나뭇가지들이 널부러져 진행에 어려움을 겪는 등로를 따르니 금새 등로는 낙엽깔린 고속도로로 변하고 있다.
잠시 더 걸어가다 보니 찟겨진 플랭카드들이 눈에 들어 오는데 살펴보니 개인사유지의 약초재배지이기에 출입을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억새가 자라는 간벌된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다시 등로에는 가느다란 철사줄이 설치되어 있고 그 철사줄을 타고 오르니 출입금지 경고판을 지나 참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 227봉에 도착을 해 잠시 더 쉬어 간다.
또 다른 지도에는 222.2봉이라 되어 있는 참나무 한그루가 정상을 지키고 있는 227봉을 지나 다시 평이하게 걸어가니 그곳에는 낙엽 산행을 즐기듯 올해 떨어진 커다란 활엽수 낙엽들이 깊게 깔려 바스락 거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멋진 낙엽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소나무 등로가 짧게 이어지더니 지독한 잡목지대와 만난다.
너무나 힘들게 그 잡목지대를 넘으니 등로 앞 우측으로 진양호가 아름답게 내려다 보이고 곧이어 탱자나무 등로를 어렵게 지나 참으로 아름다운 소나무 등로를 타고 걸어 본다.
그 멋진 소나무 등로를 타고 통과하니 등로 우측 아래에 95번 송전탑이 서 있는데 등로는 이곳에서 우측 직진의 넓은 등로를 버리고 좌측의 소나무와 잡목이 섞여 있는 나즈막한 봉우리 방향으로 크게 꺽어 진행을 한다.
큰 소나무 한그루와 잡목들이 있는 봉우리를 지나 진행을 하니 다시 탱자나무 가시들이 보이고 등로 우측 아래로 4개의 파란 물통이 보이는데 무슨 용도인지는 모르겠다.
그 물통을 지나 좌측 오르막 등로를 타고 잠시 오르니 소나무에 장아산(200미터)이라는 이정판이 붙어 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장아산에 대한 자료를 찾지 못해 아쉽기만 하다.
장아산을 지나 넓은 등로 양옆으로 소나무가 자라는 뚜렷한 등로를 따르니 다시 잡목 등로가 이어지더니 지독한 잡목봉에 도착해 어렵게 그 봉우리를 타고 넘는다.
지도를 보니 지독한 잡목이 있는 봉우리는 212봉이고 다시 완만하게 내려가니 짧은 구간 편백나무도 보인다.
묘지를 지나 완만하게 내려가니 멋진 등로가 다시 이어지고 등로 우측으로는 통영대전간 고속도로가 내려다 보이고 앞으로는 진행해야 할 마루금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으며 좌측으로는 명석면의 산그리메가 발길을 붙잡는다.
하지만 그 명석면에는 보이는 아름다움 솏에 숨겨 둔 아픈 과거가 있었으니 다음과 같은 사연들이다.
명석면에는 6.25때 민간인 학살사건이 일어났던 곳으로 이는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일대에서 일어났던 민간인 학살사건으로 1950년 7월을 전후하여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일대에서는 육군 특무대 부대원들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이루어졌다.
민간인 학살의 발단 경위와 경과 등에 대해서는 정확한 조사가 미흡하여 당시 상황을 기억하고 있는 몇몇 증언들에 의해 사건의 참상이 드러났다.
이를 통해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소재 지역별 보도연맹원들을 중심으로 인근지역의 민간인까지 포함하여 최소 수백 명이 학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보도연맹은 1949년 정부가 좌익세력에 대한 통제와 회유를 목적으로 전향자들을 모아 조직한 반공단체였으나 이듬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와 국군 그리고 경찰은 이들이 무조건 북한 측에 동조할 것이라는 일방적이고 자의적인 판단을 내리고 보도연맹원들을 무차별적으로 검속해 즉결처분했다.
이 학살사건의 목적은 진주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 발단은 진주지역의 보도연맹원 학살도 이 같은 배경 하에 일어났다.
1950년 여름 진주가 북한군에 의해 점령될 것이 명확해지자 경찰들과 국군 그리고 우익인사들은 과거에 좌익활동을 했다가 전향한 진주지역 보도연맹원들을 미리부터 학살하기 시작했고 학살은 진주의 외곽지역 곳곳에서 벌어졌는데 특히 산간지역이 많은 명석면 일대는 대학살의 진원지였다.
1950년 7월 29일에 경상남도 진주지역으로 파견된 CIC대원(육군 특무대 소속)들에 의하여 진주시 명석면 일대 우수리 갓골, 밀밭골, 솔밭골 등에서 100여 명의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되었다.
당시 증언에 의하면 정치사상범들을 마치 북어짐짝을 싣듯 세 겹으로 트럭에 얹어 싣고 그 위에 놈들이 타고 앉아 와서 늘어세운 다음 기관총으로 소사했다고 한다.
또한 학살자들은 군복을 입지 않은 채 한복을 입었으나 모두 기관총을 어깨에 메고 실탄이 가득 찬 탄통을 들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진주시 명석면 소재 지역별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된 장소와 인원수를 추정해보면 우수리 송고 콩밭골 1백여 명, 우수리 갓골 내 밀밭골 43명, 관지리 삭평 건너 닭족골 50여 명, 관지리 신촌 앞 화령골 1백여 명, 용산리와 오미리 고개 수백 명 등이었다.
이 중에서 학살된 희생자의 신분과 숫자가 밝혀진 곳은 2곳으로 형무소 수감자들이 집단학살 당한 용산리의 용산치와 정확히 43명의 민간인이 보도연맹원이란 이유로 학살당한 우수리의 갓골이다.
용산리에서 대량살육된 희생자들이 죄수복장으로 머리를 모두 빡빡 깎은 것으로 볼 때 진주형무소에 수감 중이었던 미결수나 복역수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학살 이후 시체를 매장하기 위하여 주민들을 동원하였는데 이 때 그들이 미군의 지휘를 받는 한국군 정보요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적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뿐만 아니라 미군과 한국군에 의한 학살의 진상들이 하나 둘 밝혀지고 있다.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에서 일어난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은 이 같은 부끄러운 역사의 하나로 확실한 조사와 함께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이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등로 좌측의 명석면에 펼쳐진 아름다운 산그리메를 살펴본 후 평이하게 걸어가니 금새 활엽수 두그루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219.2봉에 도착을 해 잠시 쉬어 간다.
이제 등로 우측으로는 조금 더 귓전을 때리는 차량 통행 소음이 가깝게 들려오고 우측을 보니 통영대전간 고속도로가 가까워 져 있다.
그 통영대전간 고속도로 앞으로는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진양호가 도도히 흐르는 풍경도 아름답게 펼쳐져 있어 이제 산행하는 재미가 제법 느껴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곳 219.2봉에서 잠시 주위 풍경과 조망을 즐긴 후 다시 출발을 하니 검은 바위 두개가 소나무와 함께 등로에 보이고 그곳을 지나니 잡목지대가 다시 나타난다.
앞으로 진행해야 할 진양기맥 마루금이 앞으로 멋지게 펼쳐져 있고 그렇게 조망하며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잡목지대를 지나 가파르게 내려가고 내려가는 중간의 큰 바위에는 호돌바위라는 글씨가 각인된 모습도 눈에 들어 온다.
다시 등로 우측 아래로는 통영대전간 고속도로가 내려다 보이고 잠시 낙엽 깔린 평이한 등로를 따르니 지독한 잡목지대가 다시 앞을 가로막는다.
그 지독한 잡목이 있는 216.3봉을 넘어 진행을 하니 억새와 잡목이 혼재된 등로가 이어지고 완만하게 내려가니 무명묘지를 지나 또 다시 지독한 잡목과 잡풀지대가 눈앞에 나타난다.
그 잡목지대 넘어를 살펴보니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다시 오르면 180봉이 저 멀리 올려다 보인다.
어렵게 그 지독한 잡목지대를 지나니 다시 안부를 만나고 그 안부를 지나 오르기 시작을 한다.
그렇게 다시 오르니 좋은 등로가 나타나고 금새 소나무에 기대어 쌓여 있는 나즈막한 돌탑이 서 있는 180봉에 도착을 한다.
이곳에서 약간의 허기를 느껴 준비한 간식과 과일을 먹으며 쉬었다 출발을 하기로 한다.
이제 시간은 낮 11시를 넘기고 구름속에 숨어 있던 햇살도 맑은 하늘에 떠 올라 따갑게 내려 쬐고 있다.
돌탑이 있는 180봉을 지나 등로 우측 앞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을 살펴보며 벌목지대를 따라 걸어가니 등로 우측 아래에는 통영대전간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인다.
그 고속도로 넘어로는 진양호가 보이고 그렇게 멋진 풍경을 살피며 걸어가니 약간의 잡목 구간을 지나 진주강공가족제단과 묘지들이 있는 넓은 임도에 도착을 한다.
살펴보니 이곳에 가족묘지를 만들면서 넓혀 놓은 넓은 비포장 임도처럼 보이는 그곳을 지나니 다시 등로 좌측으로 넓은 비포장 임도가 갈리는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해 좌측 임도를 버리고 우측 임도를 타고 위로 오른다.
그 가족 묘지지대를 지나 좌측으로 흐르는 갈림 삼거리를 통고한 후 우측 비포장 임도를 따라 오르니 선답자들의 산행후기에 꼭 등장하는 두그루의 형제 소나무가 X자를 만들며 멋지게 서 있다.
그 소나무를 지나며 살펴보니 소나무 두그루는 진짜 X자로 붙어 잇는 것이 아니고 떨어져 있는데 멀리에서 보면 마치 붙어서 X자를 만들고 있는 ㄳ처럼 보이고 있다.
그 X자 소나무를 지나 오르니 잡목이 우거진 나즈막한 봉우리에 도착을 하고 살펴보니 174.5봉이다.
사진 한장 남기고 그 174.5봉을 출발해 차량 통해 소음이 들리는 판문동 방향으로 내려가 본다.
잠시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걸어 내려가니 밤나무와 활엽수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등로가 열리고 잠시 더 내려가니 밑둥이 큰 소나무들이 보이는데 그곳에는 예전에 물이 나 탔던 검정 흔적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소나무 등로를 지나 내려가니 진주강공 묘지가 보이고 곧이어 파란 물통 2개가 서 있는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판문고개에 도착을 한다.
판문고개는 진주시 명석면 가화리와 판문동을 잇는 20번 2차선 지방도로가 대전통영간 고속도로와 나란히 달리고 있는 곳으로 지역 주민들은 진주시 판문동인 이곳을 판문고개라고 부른다.
그 판문고개로 내려 와 살펴보니 원 마루금은 도로 건너편에 있는 작은 민가 우측으로 나 있는 비포장 임도를 타고 진행을 해야 될 것 같은데 지금은 그곳으로 가면 통영대전간 고속도로에 막혀 더 이상 진행이 불가능 하기에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좌측으로 갈어 내려가 본다.
잠시 내려가니 도로 우측으로 시멘트 포장도로가 갈리는 삼거리가 보이고 그곳에서 우측으로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가니 저 앞으로 통영대전간 고속도로가 보이는데 그곳에는 서진주 IC가 2 Km 남아 있다는 도로 표지판도 올려다 보인다.
지도를 살펴보니 이곳이 판문동인데 판문고개도 이곳 지명인 판문동에서 유래된 듯 보인다.
판문동은 경상남도 진주시의 서남부에 소재한 마을로서 서쪽으로 진양호가 이어져 있고 북쪽은 산지 곡간에 농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구릉지에 형성된 자연마을을 바탕으로 도시화되었다.
남강댐으로 조성된 진양호 부근에는 관광명소로서 전망대, 동물원, 유람시설, 소싸움경기장 등 각 종의 위락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조선 전기에 진주목 서면 어배곡리 속방으로 상판문, 중판문, 하판문이 있는데 어배곡리는 임진왜란으로 인구가 크게 줄어 평거리에 합해졌다.
판문동은 조선 후기 평거리에 속방이고 구한말 평거면 판문동, 오동동 지역이다.
귀곡동은 구한말 가귀곡면 상촌, 중촌, 하촌 지역이었는데 1914년 평거면 판문동, 오동동 지역을 평거면 판문리로 통폐합하였으며 가귀곡면 대동, 유곡면 산지동 일부 지역을 평거면 귀곡리로 통폐합하였다.
1938년 평거면의 판문리, 신안리, 이현리, 유곡리, 상봉리가 진주읍으로 편입될 때 평거면 귀곡리는 내동면에 편입되고 평거면 우수리와 용산리는 명석면에 편입되었다가 1949년 판문남, 북동으로 바뀌었다.
1973년 내동면 귀곡리를 진주시로 편입하여 귀곡동으로 개칭하였다가 1990년 판문남, 북동을 통합하였다가 1997년 평거동 일부를 편입하였는데 판문동은 법정동인 판문동과 귀곡동을 관할한다.
판문마을은 삼국시대 석씨들이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동리밖에 판자로 울타리를 치고 동쪽으로 문을 내었다고 하여 판문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그 지명 유래가 전한다.
진양지에는 진주목 서면 어배곡리의 속방으로 상판문, 중판문, 하판문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로부터 판문동 지명이 유래하였다.
귀곡동은 진양지에 의하면 진주목 서면 가귀곡리인데 속방으로 대동촌, 광연원이 있었는데 광연원은 덕천강과 경호강이 만나는 광탄의 광탄진에 둔 역원에서 비롯된 마을이었다.
1970년 광탄 바로 아래 지역에 남강댐이 건설되었다.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통영대전간 고속도로가 지나는 우측 방향으로 걸어 들어가니 도로 좌측으로 민가 한채가 보이는데 그 우측으로 통영대전간 고속도로를 통과할 수 있는 지하통로가 보인다.
그 지하통로를 통해 고속도로를 통과하니 바로 눈 앞에는 또 다사 많은 감이 달려있는 감나무 과수원이 보여 감 몇개 따 먹고 이제는 우측으로 고속도로 옆 시멘트 수로를 통해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잠시 그 콘크리트 수로를 따라 오르니 등로는 다시 길게 이어진 철계단으로 이어져 절개지 중간까지 오르도록 되어 있다.
그 철계단 우측으로는 통영대전간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뻗어 있어 잠시 내려다 보며 즐겨보기도 한다.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는 총 길이는 209.8 Km이며 왕복 4차선으로 함양군에서 진주시 간 58 Km 구간은 1992년 3월 착공하여 1998년 10월 22일 완공되었으며 대전광역시에서 무주군 간 43.6 Km는 1995년 착공하여 2000년 12월에 무주군에서 함양군 간 59.4 Km 구간은 1995년 착공하여 2001년 12월 말에 개통되었다.
진주분기점에서 통영시 간 48.8 Km 구간은 2005년 12월에 완전 개통되었고 2002년 5월 고속도로 변경에 따라 중부고속도로에 편입되면서 노선번호가 17호선에서 35호선으로 바뀌고 경기도 하남시까지 연결된다.
대전광역시에서 진주시 간에는 경상남도 산청군에 1998년 건설된 산청1, 2, 3 터널 및 산청휴게소가 있고 서진주에서 진주 간에는 경상남도 진주시에 1996년 건설된 독산터널과 신율터널이 있다.
산내분기점에서 남부순환고속국도(노선번호 300)와 연결되고 추부, 금산, 무주 인터체인지, 함양분기점, 생초, 산청, 단성, 서진주 인터체인지가 있다.
함양분기점에서 88올림픽고속도로(노선번호 12)와 연결되고 진주분기점에서 남해고속도로(노선번호 10)와 연결된다.
경상남도 서부 전라북도 북동부의 낙후된 지역의 개발을 촉진하고 지역을 연결하는 고속도로로 광양제철소, 광양컨테이너 부두의 산업물동량을 원활히 수송하고 지리산국립공원, 덕유산국립공원, 한려해상국립공원과 대둔산도립공원 등의 관광자원 개발을 촉진하기 위한 기반시설 확충사업으로 건설되었다.
도로 주변에는 적상산과 황석산 등의 산이 많아 자연경관이 아름답다.
고성군의 연화산도립공원, 산청군의 웅석봉군립공원, 문익점목화시배지, 운곡관광농원, 단서향교, 배산서원, 문익점묘, 금산군의 칠백의총, 만인산자연휴양림, 진주시의 촉석루, 진양호 등의 문화유적지와 관광지, 법송사, 법계사, 율곡사, 운석사 등의 사찰이 있다.
그렇게 철계단을 타고 절개지 위로 오르니 등로는 다시 좌측 능선으로 이어지고 그곳으로 오르기 전 뒤돌아 보니 통영대전간 고속도로 건너 방금 전 내려 온 176봉쪽으로 이어진 마루금도 조망하고 능선으로 들어간다.
잠시 능선으로 들어가니 성주배씨 묘지들이 줄지어 보이고 그 묘지를 따라 다시 능선으로 들어가니 소나무 등로를 지나 164봉에서 좌측으로 크게 꺽어 진행을 한다.
다시 소나무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181.3봉에 도착을 하고 계속 이어지는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이장된 듯한 묘지지대를 지나 멧돼지 목욕탕도 보인다.
잠시 다시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등로는 이제 활엽수 낙엽 등로로 바뀌고 완만하게 내려갔다 올라 나즈막한 146봉에 도착을 한다.
그 146봉을 지나 이어지는 소나무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활엽수 낙엽이 깔려 있는 등로를 따라 나즈막하게 내려가 안부를 통과한다.
계속 이어지는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낙엽을 밟으며 걸어 내려가니 172봉으로 오르기 직전에 제법 그럴듯한 안부가 나타나는데 지도를 살펴보니 이곳 역시 이름조차 없는 무명 안부이다.
그 안부를 지나 완만하게 오르기 시작하니 등로 옆으로는 진양호상수원보호구역이란 사각 말뚝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제 곧 진양호에 도착 할 수 있으리란 기대를 가지고 걸어 보는 시간이다.
그 안부를 지나 깊은 낙엽이 깔려 있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오르니 등로에는 다시 작은 자갈들이 보인다.
잠시 멋진 활엽수 등로를 따르니 등로에 바위들이 박혀있는 무명묘지봉에 도착을 하는데 지도에는 172봉이라 되어 있지만 GPX에는 162봉으로 표기가 나타난다.
그곳을 지나 밤나무 과수원을 타고 걸어가니 커다란 박달나무 위에 172.3미터봉이란 이정판이 걸려 있다.
그 172.3봉을 지나 다시 조금 더 걸어가니 눈 앞에 가시나무와 잡목지대가 나타나고 어렵게 그 잡목지대를 지나니 처음으로 이정표가 나타나는데 이제 팔각정자까지 300미터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가 반가운 시간이다.
우측으로는 호수변 즉 진양호 가는 방향이 좌측으로는 이 산객이 걸어 온 상락원 입구 방면과 판문예술촌 방향이란 글귀도 보인다.
잠시 긴 한숨을 쉬고 다시 출발하니 등로는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고 그 우측으로는 벤취쉼터2개가 놓여 있다.
다시 나무 계단을 타고 걸어가니 등로는 뚜렷하고 등로 옆으로는 벤취 쉼터 뿐만 아니라 간이 침대도 놓여 있다.
등로 옆으로는 계속해 간이 탁자와 벤취들이 보이고 그렇게 한동안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파크골프장 갈림 삼거리 이정표가 보인다.
우측으로는 순환산책로 가는 방향이 보이고 이제 팔각정자까지는 100미터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가 있는 이정표 옆에는 나무탁자와 벤취 쉼터가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그곳을 지나 나무계단을 타고 오르니 명상의 숲 안내판이 서 있고 곧이어 팔각정이 서 있는 양마산 정상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에는 한가족이 올라 와 잠시 쉬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워 보인다.
진양호 옆 양마산은 언제 가도 좋은 곳으로 진양호를 옆구리에 끼고 부드러운 흙길로 이어진 이곳은 진양호의 진정한 매력이 숨겨진 보석이기 때문이다.
호반의 도시 진주를 방문해 진양호의 매력을 느껴보기 위해서는 양마산 길만 한 곳도 없는데 호반도시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한 진양호는 호수로서는 드물게 물도 맑다.
절벽과 조화된 산으로 둘러싸인 경치 또한 그만인데 진양호 양마산 가는 길은 간간히 들리는 맑 은 산새소리로 귀가 즐겁게 한다.
얼마쯤 걸어 가면 흙길이 나오고 편백나무 숲 산림욕을 겸한 본격적인 산책을 즐기다 보면 어느덧 정적인 진양호가 주는 그윽한 신비감과 낭만적인 운치가 배가 된다.
일가족이 올라 와 쉬고 있는 팔각정이 있는 양마산을 출발 해 다시 완만하게 내려가니 등로 우측으로 푸르른 진양호가 도도하게 흐르는데 그 앞으로는 안전 목책과 로프가 설치되어 있다.
드디어 진양기맥 마루금 잇기 산행도 마무리가 다가오고 있는 느낌이다.
2013년 1월 26일 찬바람이 강하게 불어오는 눈 덮힌 남덕유산에 올라 무사 완주를 빌고난 후 3년 가까이 지나서야 졸업을 하면서 바라보는 진양호이기에 가슴속에 뭉클함이 느껴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오늘 진양기맥 졸업을 마지막으로 9기맥 산행도 마무리가 되니 더욱 뜻깊은 산행이 아닐 수 없다.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진양호를 배경으로 사진 한장 남기고 싶었지만 셀카를 이용해 남기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계속 겋ㄹ어 진행을 한다.
다시 뚜렷한 멋진 등로를 따라 우측에 진양호를 두고 걸어가니 위험 경고판이 서 있고 113봉에 도착을 하는데 그곳에는 사각형의 헬기장인지 모를 보도블럭이 깔려있고 주위에는 운동시설과 벤취 쉼터들도 보이는데 중년 남녀가 앉아 애정 행각을 하고 있어 사진 한장 남기고 곧바로 출발을 한다.
이 추운 날씨에 이곳까지 올라 와 애정 행각을 하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기만 하다.
그 113봉을 지나 완만하게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이곳 등로에도 보도블럭이 깔려있고 등로 좌측으로는 편백나무가 우측으로는 진양호가 내려다 보인다.
잔시 내려가니 안부에 도착을 하는데 등로 우측으로는 철조망 안에 초소처럼 생각되는 비어 있는 건물들이 보이고 그 건물을 우측에 두고 다시 완만하게 오르니 이곳은 등로 좌우측에 편백나무 숲을 두고 시멘트 계단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그 계단을 타고 오르니 등로 우측 진양호 방향으로 호반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그 정상으로 올라 여행 온 여행객에게 부탁해 진양호를 배경으로 사진 한장 남겨 본다.
호반전망대에서 북쪽에서 서쪽을 돌아 남쪽 방향을 살펴보니 남쪽의 남강댐 방향으로 사천의 와룡산부터 남해의 금산, 금오산 그리고 북서쪽으로 지리산이 조망된다는데 오늘은 박무로 인해 시야가 제한되어 지리산을 만나지 못함이 아쉽기만 하다.
이제 진행 방향의 마지막 남강댐과 그 남강댐으로 이어지는 비산비야의 마루금을 살펴본 후 우측으로 발길을 돌려 지나온 양마산과 나즈막한 진양기맥 마지막 마루금을 살펴 본 후 그 호반 전망대를 내려 와 출발하기 직전 전망대 전경을 담아 본다.
호반전망대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며 멋진 조망을 즐기고 추억을 남긴 후 출발하니 도로 우측으로 아시아레이크사이드 호텔이 보이고 그 호텔을 지나 내려가니 갈림 삼거리 도로가 보이는데 그 삼거리 도로 좌측에 남강의 추억이란 노래를 작사 작곡한 이재호 노래비가 보인다.
이재호 노래비는 경상남도 진주시 출신의 대중가요 작곡가로서 1914년에 진주에서 출생하여 어릴 적에 형에게서 트럼펫을 배운 뒤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고등음악학교 본과 2년을 수료하였다.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어 고향인 진주에서 휴양 중 레코드사에 관계하는 친구의 소개로 대중가요 작곡을 하게 되었다.
1956년에 지병이 재발하여 경상남도 마산시에서 요양하던 중 4·19혁명 직후 미발표곡들을 남긴 채 1960년에 죽었으며 본명은 이삼동이다.
일본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한 후 귀국하여 처음에는 당시 OK레코드사에서 무적인이라는 필명으로 작사 및 작곡을 해오다가 태평레코드로 옮겨 이재호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8년에는 나그네 설움으로 가수 백년설을 출세시켰고 같은 해에 불효자는 웁니다와 꽃마차를 신인가수 진방남이 취입하여 인기가수가 되었다.
또한 1940년에는 복지만리와 대지의 항구를 백년설에게 주어 당시 최고 인기가수로 각광받게 하였다.
1942년에는 황하다방과 갈매기 쌍쌍으로 백난아를 출세시켰고 1943년 이후 물자결핍으로 인해 레코드 제작이 부진해지자 태평레코드사의 전국 순회공연 무대에서 연주단을 지휘하였다.
1945년 전후에 고향인 진주에서 중학교 음악교사로 봉직하였으며 6·25전쟁 중에는 부산방송국 전속 악단장으로 취임하였다.
1952년에는 홍콩 아가씨를 1953년에는 경상도 아가씨 등을 발표하였고 환도 직후 무영탑 사랑, 물레방아 도는 내력 그리고 단장의 미아리고개 등을 발표하여 작품들의 완숙기에 도달하였다.
1957년에는 공보처 제정 국민가요 고향에 찾아와도를 발표하였고 인기가수 남인수에게 무정열차와 산유화 등을 취입 곡으로 주었다.
대표작으로는 불효자는 웁니다, 단장의 미아리고개, 산장의 여인, 고향에 찾아와도가 있으며 그 외에 다수가 있다.
한국가요의 서정성과 서양음악(반주음악)을 접목하여 당시 한국적 대중가요를 재치 있게 만들어냈고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유행가요를 많이 작곡하였다.
현재 경상남도 진주시 평거동에 있는 진양호공원 내에 이재호를 기리기 위해 1972년에 건립된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이재호 노래비에서 우측 도로를 타고 동물원과 서진주 IC 방향으로 걸어 진행을 하니 도로 우측 숲속에는 사각탁자와 벤취 쉼터들이 잘 준비되어 있어 시민들이 쉬어 갈 수 있도록 해 놨다.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도로 좌측으로 벗길조상비가 보이고 좌측 넘어로는 놀이동산도 보이고 있다.
계속 도로를 타고 내려가니 도로 좌측으로진주랜드 놀이동산으로 갈 수 있는 도로가 갈리고 곧이어 동물원 앞 광장에 도착을 하는데 휴일이라 그런지 수많은 차량들이 무질서하게 주차되어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 온다.
광장으로 내려가니 도로 우측으로는 남인수생가 가는 표시가 되어 있는데 그곳은 포기하고 직진의 우약정 방향으로 걸어 진행을 이어가 본다.
남인수 생가는 경상남도 진주 출생으로 원래 이름은 최창수였으나 개가한 어머니를 따라 진주 강씨 문중에 들어가면서 강문수로 바뀌었다가 남인수라는 이름은 가수로 데뷔하면서 작사가 강사랑이 지어준 예명이다.
학력 사항에 대한 내용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가수 데뷔 전 경력 역시 일본에서 노동자로 일했다는 설과 중국어를 배우다가 경성부로 올라왔다는 설 등 여러 설이 분분한데 다만 다소 불우한 유년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는 정도로 알려져 있다.
1936년 김상화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눈물의 해협으로 가요계에 데뷔하였고 1938년 데뷔곡을 이부풍이 개사한 애수의 소야곡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후 약 20여 년간 타고난 미성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물방아 사랑, 꼬집힌 풋사랑, 감격시대, 항구의 청춘시, 울며 헤진 부산항, 서귀포 칠십리, 청노새 탄식, 낙화유수, 남아일생, 일가 친척, 가거라 삼팔선, 달도 하나 해도 하나, 청춘 무성, 고향의 그림자, 고향은 내 사랑, 이별의 부산정거장, 청춘 고백, 추억의 소야곡, 산유화, 울리는 경부선, 무너진 사랑탑등 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약 1천곡 가까운 노래를 불렀고 가요 황제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는데 대개 청춘의 애틋한 사랑과 인생의 애달픔 그리고 유랑의 슬픔 등을 그린 노래였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이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대표곡 애수의 소야곡은 시에론레코드에서 취입한 데뷔곡으로 큰 반응을 얻지 못했던 눈물의 해협의 가사를 바꿔 다시 부른 노래였다.
남인수는 시에라레코드의 박영호와 박시춘을 통해 가수로 데뷔했다가 오케레코드에서 스타가 되었는데 이 당시 남인수의 등장은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미성의 가수 탄생으로 크게 선전되었다.
남인수는 음역이 넓고 감정 표현도 풍부하여 가수로서의 천부적인 재질을 갖고 있었는데 목소리가 옹골찬 미성인데다 음높이와 발음이 정확하여 고음 처리에 강점을 보였다.
남인수의 등장으로 채규엽, 고복수, 강홍식 등 이전 세대 인기 가수의 시대가 저물고 가요계의 새로운 판도를 열었다고 평가될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백년설, 박향림과 함께 부른 혈서지원을 비롯하여 그대와 나 등 태평양 전쟁을 지원하는 강제 동원 가요를 군국 일제의 폭압에 의해 취입함으로써 노무현 정권 때인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는 뒤늦게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포함시켰으나 과연 친일 조선인 앞잡이 등도 확실하게 규명하지 못하는 현실과 전후 발표곡을 감안해 볼 때 친일로 단정할 수 있을는지가 논란거리요 숙제다.
동료 가수 이난영과의 로맨스가 유명한데 이난영은 원래 작곡가 김해송의 부인이었으나 한국 전쟁 때 남편이 실종되면서 남인수의 도움으로 김해송이 운영하던 악단을 운영했다가 1962년 남인수가 폐결핵으로 사망할 때까지도 이난영이 간호해 주었다.
사망 전 한국연예인협회 부이사장, 대한가수협회 회장 등을 지냈고 장례식은 연예협회장으로 치러졌다.
진주의 생가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동상과 노래비도 세워져 있다.
진주시가 주최하는 예술제에 포함된 남인수가요제 개최를 시민단체가 남인수의 친일 경력을 들어 반대하는 등 여러 차례 논란이 있었다.
그 동물원 앞 광장을 지나니 광장 우측으로는 진양호 휴게소도 보이는데 오늘도 역시 준비한 과일과 물 그리고 음료수를 거의 마시지 않았기에 지나쳐 곧바로 보이는 우약정으로 오른다.
우약정은 우리교유의 건축양식을 본따 지은 우약정은 진주시 대곡면 출신 재일교포 하경완 선생이 1974년 건립하여 진주시에 기증한 것으로 고국을 그리는 애절한 망향의 심정으로 여기 푸른 물이 넘실거리는 진양호에 선친의 자를 따서 우약정으로 이름을 짓게 되었다.
우약정을 사진에 담고 좌측에 서 있는 설명을 읽어본 후 다시 그 우약정을 통과해 좁은 통로를 타고 넘어가니 드널븡ㄴ 소나무 광장 같은 장소로 나가게 된다.
우약정을 지나니 벤취 쉼터들이 설치되어 있는 소나무와 편백나무 숲이 나타나고 잠시 내려가니 등로에는 많은 묘지들이 보인다.
그 묘지지대를 지나 내려가니 우측으로 남인수동상까지 790미터란 이정표를 지나 진양호 위에 설치된 다리를 건너 마지막 남강댐 방향으로 걸어가 본다.
진양호는 경상남도 진주시 판문동, 귀곡동, 대평면과 내동면 및 사천시 곤명면에 걸쳐 있는 인공호수로 면적 29.4 Km2이고 유역면적 2285 Km2이며 저수량은 3억 1000만톤이다.
1970년 남강을 막아서 만든 남강댐에 의해서 생긴 인공호수로 경호강과 덕천강이 만나는 곳에 있으며 홍수 조절과 주변 일대의 상수도, 관개용수, 공업용수 등으로 이용되며 물이 맑고 주변 경관이 좋아 진주시의 관광명소가 되었다.
주변에 선착장과 물홍보전시관, 동물원, 어린이동산, 호텔, 여관, 식당 등의 위락시설이 있으며 400대를 수용하는 주차장과 동물원, 어린이동산은 유료이고 물홍보전시관은 무료 입장할 수 있다.
찾아 가려면 진주 시외버스터미널과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진양호행 시내버스를 타거나 사천공항에서 승용차로 20분 고속도로에서 서진주 인터체인지로 빠져나와 2분 정도 달리면 나온다.
이제 저 멀리 충혼탑과 남강댐이 보이는 도로를 타고 걸어가니 도로 좌측으로 대나무 숲이 보이고 쉼터를 지나 돌계단을 타고 올라 망향비에 도착을 한다.
그곳에서 뒤돌아 보니 진양호와 이 산객이 걸어 온 도로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진양호 망향비는 남강댐 공사로 수몰되면서 고향을 떠난 진주시 귀곡동 귀곡마을 실향민과 당시 귀곡초등학교 학생 및 교사 등 500여 명은 2년 전 진양호 선착장 앞 망향비 광장에서 반세기 만에 한자리에 모였는데 이번 만남은 지난 1969년 진주 남강댐 건립공사로 마을이 수몰되면서 고향을 떠난 지 꼭 44년 만이다.
이들은 고향을 수장시키고 뿔뿔이 흩어져 객지에서 저마다 생업에 종사하며 바쁘게 살아 왔지만 가슴속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마을 사람들의 안부가 궁금하였고 당시 주민의 절반 정도만 진주에 정착하고 나머지는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그러다가 지난 2001년 실향민회를 구성해 흩어진 고향 사람을 찾는 데 노력했고 귀곡동(일명 까꼬실) 사람을 소재로 한 소설과 시집 등의 책자를 발간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2003년에는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진양호 인근에 고향을 그리워하는 망향비를 세웠다.
그 망향비를 지나니 오늘 새벽 이 산객이 들려 애마를 주차시켜 놨던 쉼터 광장이 나타나고 그곳을 지나 우측으로 오르니 오늘 산행 날머리인 진주시 충혼탑에 도착을 한다.
진주시(진양호) 충혼탑은 원래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는데 처음 모셔진 건 1968년 현충일에 장소도 임진왜란때 진주를 지키고 장렬히 전사한 김시민 장군과 진주시민들의 혼이 깃든 진수성지 안이었다.
그러다 십년 뒤 진주시 상평동으로 옮겼다가 진주시와 진양군이 통합되면서 2002년 6월 6일 이 자리에 모신 것이었다.
진주 시민들이 여가를 즐길 때면 찾곤 하는 호반에 충혼탑이 자리를 잡은 건 9년째로 조국을 지키다 산화한 조국 영령들에게 늘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 같다.
그 충혼탑에서 사진 한장 남기고 무사 완주를 지켜준 고마운 마음으로 잠시 묵념을 한 후 다시 쉼터로 내려오며 우측 도로 위에 세워진 진양호공원이란 아치를 사진에 담아 본다.
진양호공원은 지리산에서 흘러내린 경호강과 덕천강이 만나 형성된 서부경남의 유일한 인공호수로 각종 위락시설을 고루 갖춘 관광객의 쉼터인 이곳은 경남 유일의 동물원을 두고 있어 호랑이, 사자, 곰, 독수리, 기린 등 야생동물을 직접 관람할 수 있어 어린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곳이다.
3층 규모의 현대식 휴게전망대로 시원하게 트인 넓은 호반과 주변 시가지, 지리산에서 와룡산, 자굴산, 금오산 등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진주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이곳은 영화 하늘정원(안재욱, 이은주 주연)의 촬영지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1년 계단과 연결되어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상락원 가족쉼터와 연결된 가족들의 휴식코스로, 동물원·진주랜드와 연결되어 오락과 즐거움을 동시에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다양한 볼거리를 갖춘 진주의 명소이다.
이렇게 오랜시간이 걸려 완주한 진양기맥을 끝으로 또 다른 목표였던 9기맥까지 무탈하게 완주를 하고 나니 이제부터 약간은 고민이 시작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과연 진행하다 남아 있는 130여개의 지맥 마루금도 걸어볼 것인가 말것인가 하는 행복한 고민인데 현재 30여개를 진행했기에 이제부터는 하고싶고 올라보고 싶었던 산을 중심으로 하나의 봉우리가 아닌 지맥산행을 병행하는 방법으로 절충된 산행을 해 보기로 한다.
하지만 이 마음도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게 되면 또 한동안 산에 미쳐 그렇게 산사람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오늘만은 그저 9기맥 완주를 자축하는 시간이길 바래 본다.
생각보다 덜 막히는 도로를 타고 귀가해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이슬이 한잔으로 자축을 하니 온 세상이 이 산객의 세상이 된 듯한 시간이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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