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지 : 경상북도 군위군과 구미시 그리고 의성군의 팔공기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 2015년 12월 04일과 05일(금요 무박 토요일 산행)
산행날씨 : 하루 종일 흐리고 강한 바람이 불었던 날씨
산행온도 : 영하 00도에서 영상 07도
산행인원 : 총 7명 (칠갑산과 3450온누리산악회 팔공기맥 종주대 6명)
산행코스 : 땅재(68번 2차선 포장도로)-청화산 등산로 안내판과 이정표(청화산 정상 4.2 Km)-계단과 벤취 쉼터-550.6봉 헬기장 이정표(정상 2.9 Km, 땅재 1.3 Km)-다곡2리입구 갈림 이정표(정상 2.6 Km, 땅재입구 1.7 Km, 다곡2리입구 1.1 Km)-609.3봉-이정표(정상 1.4 Km, 땅재 2.8 Km, 보현리)-헬기장 이정표(정상 1.0 Km, 땅재 3.2 Km)-장군정 갈림 삼거리 묘지와 이정표(정상 0.85 Km, 청산리, 장군정)-전망바위-청화산(용솟음봉과 박곡봉) 삼각점과 육각정 및 헬기장 그리고 이정표(다항마을 4.3 Km와 주륵폭포 3.0 Km 및 의성군 청산마을 7.2 Km, 땅재 4.2 Km)-옹달샘 안내판-643봉 헬기장 이정표(다항마을 3.5 Km, 정상 0.8 Km)-637.2봉-갈림 삼거리 이정표(다항마을 2.6 Km와 주륵폭포 1.3 Km, 정상 1.7 Km와 땅재 5.9 Km)(청산마을 5.5 Km와 임도삼거리 팔각정 1.7 Km와 청화산 1.7 Km)-안전목책과 로프 계단구간-삼형제송과 청화산 등산로(정상 2.0 Km)-안전목책과 로프구간-안전목책과 로프 계단구간-나무계단-이정표(임도삼거리 팔각정 0.6 Km, 청화산 2.6 Km)-키 작은 소나무 구간-잡목구간-비포장 임도-소나무 등로-간벌 구간-291.3봉-묘지지대-갈현(12번 2차선 포장도로)-간벌된 소나무 등로-바위 암릉구간-343.1(342.7)봉 삼각점-소나무 등로-일출-바위 암릉구간-287봉-바위 안부-작은돌탑 안부-306 바위암봉-367봉-바위 암릉지대-간벌된 소나무 등로-바위 암릉구간-바위지대-338봉 아침식사-바위 암릉구간-381봉 전망바위-421 바위봉-장자봉(421.5봉)-간벌된 소나무 등로-십령(심령) 묘지-바위 암릉지대-소나무 등로-435 용암동열재 갈림이정표-이정표(용암동, 용암동열재와 철탑)-이정표(새터마을)-육각정-소원성취타임캡슐-만경산(499봉) 정상석과 전망나무데크 및 이정표(시치골 2.3 Km, 열재 1.8 Km, 관수루 낙단보 5.3 Km)-안전로프와 계단-연안이공묘지-전망지대-이정표(경산 정상 1 Km)-이정표(만경산정상 0.3 Km)-안전로프와 나무계단-이정표(만경산 정상 3 Km)-안전목책과 로프구간-벤취 쉼터-안전목책과 로프구간-운동시설-시멘트 포장도로-이정표(천은사 3 Km)-비포장 임도-묘지지대-171봉 헬기장-소나무 등로-주선고개(912번 2차선 포장도로) 육각정-시멘트 포장도로-방지고개-비포장 임도와 밭 경작지-182봉 산불감시초소-소나무 등로-간벌지대-굿고개(시멘트 포장도로)소나무 등로-197.1봉 갈림 삼거리-낙엽등로-비포장임도-안부-189봉-소나무 등로-벌목지대-231봉-간벌된 소나무등로-192봉-솔티고개(시멘트 포장도로, 성황당)-간벌된 아카시아 지대-토봉(284.9봉) 정상석과 삼각점-나무계단-192봉 벤취 쉼터와 이정표(의성경계 0.6 Km, 수암종택 3.7 Km)-나무계단-새띠고개 이정표(의성경계 2.0 Km, 수암종택 2.9 Km)-시멘트 포장도로-합수점(위천과 낙동강 합류지점)-산행종료
산행거리 : 수북한 낙엽과 흩날린 눈길을 걸으며 흐린 날씨에 꾸준히 진행해 23.86 Km (스마트 폰의 GPX 기준)
산행시간 : 강한 바람과 깊은 낙엽속에 열심히 진행하여 10시간 31분 (03시 50분에서 14시 21분까지)
교통편 : 애마 1대 이용
팔공기맥(위천북 기맥) 또는 팔공지맥이란 ???
백두대간의 매봉산(태백)에서 시작한 낙동정맥은 주왕산과 통점재를 지나 가사령에 내려서기전 1.1 Km 지점에서 서쪽으로 큰 산줄기 하나를 가지치고 가사령으로 내려서 침곡산으로 간다.
서쪽으로 가지친 큰 산줄기는 베틀봉(934미터), 면봉산(1121미터), 보현산(1126미터)을 지나 석심산(750.6미터)에 이르러 다시 두갈래로 갈라진다(분기점에서 39.4 Km).
한줄기는 남서진하며 방가산(755.8미터)과 화산(828.1미터) 및 팔공산(1,192.8미터)을 지나고 가산(901.6미터)에서 북진하여 좌베틀산(369.2미터)와 청화산(700.7미터)을 지나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 새띠마을에 이르는 길이120.7 Km되는 산줄기다.
석심산(750.6미터)에서 또한줄기는 북서진하며 어봉산(634.2미터), 갈비봉(672미터), 산두봉(719미터), 구무산(676.3미터), 푯대산천제봉(359미터), 삼표당(443.7미터), 해망산(400미터), 삿갓봉(290.7미터), 골두봉(314.8미터), 곤지산(330미터) 및 비봉산(579.3미터) 등을 지나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에서 팔공산쪽으로 온 산줄기를 마주보며 끝을내는 길이 127.4 Km나 되는 산줄기다.
두 산줄기는 위천을 남과 북으로 애워싸고 서로 마주보고 달리다가 다시 위천이 낙동강과 만나는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에서 위천을 가운데 두고 마주보며 만나게 되는데 위천의 북쪽 울타리가 보현지맥이고 위천의 남쪽 울타리가 팔공기맥 또는 팔공지맥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가사령에서 석심산과 팔공산줄기를 팔공기맥(지) 또는 낙동내륙기맥과 금호북기맥등으로 부르고 있는 모양인데 박성태님의 신산경표에는 이를 각각 가사령에서 석심산과 서북쪽 산줄기 전체를 보현지맥으로 석심산에서 남서쪽 팔공산 줄기를 팔공지맥으로 이름을 붙였는데 나도 그렇게 부르는게 좋겠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인 산세로야 팔공산쪽이 더 크고 유명세도 있지만 우선은 길이가 단 6.7 Km이긴 하지만 긴쪽을 장자로 봐야 할 것 같고 석심산에서 북서쪽 산줄기만 따로 떼어내서 이름을 붙이자면 그쪽에서 제일 높은산인 산두봉(719미터)이름을 따야 할 텐데 이름없는 산이라 좀 어색하고 잘 알려진 보현산(1124.4미터)의 위상도 감안하여 가사령에서 석심산과 산두봉 줄기를 보현지맥으로 부르고 석심산에서 남서쪽 팔공산 줄기를 팔공지맥으로 부르는게 좋을 듯 싶다.
보현지맥 북쪽의 물은 용전천, 길안천, 미천이 되어 낙동강으로 흘러들고 보현지맥 남쪽의 물은 위천이 되어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위천의 남쪽 울타리인 팔공지맥의 북쪽물은 위천으로 흘러들어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에서 낙동강에 합류하고 팔공지맥의 남쪽물은 금호강으로 흘러들다 가산을 지나고부터는 낙동강에 직접 흘러든다.
또 하나의 맥 잇기 산행을 마무리하며 위천과 낙동강의 합수점에서 아쉬움과 희열을 함께 맛 봤던 아름다웠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후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단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한구간 두구간 걷다보니 팔공기맥 산행도 이제 마지막 구간이다.
늘 함께하던 종주대들과 어떻게 내려가 산행을 마친 후 귀경하면 좋을지 고민을 하고 있는데 마침 그곳 의성이 고향인 산친구 한명이 동참하며 SUV 9인승 차량을 제공해 주고 손수 운전까지 해 주겠다고 전해오니 그저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 뿐이다.
오래 전부터 종주 산행을 함께 즐긴 산친구이지만 본인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산행에 그저 고향 땅이란 이유로 이런 큰 결정을 해 주니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이야 말로 표현이 불가능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미안하고 또 미안한 마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산행일을 기다리는데 서해안에 대설 주의보가 내릴 정도로 큰 눈이 내려 조바심이 나고 산행일이 다가 올수록 날이 추워지며 도로가 얼어 붙고 있으니 그 또한 걱정이 되는 시간이지만 다행하게도 산행지에는 큰 눈이 내리지 않았고 날씨마저 좋아진다니 큰 부담을 덜고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려 보는 시간이다.
그렇게 산행 출발일에 서울에서 모여 산친구가 손수 운전을 해 주는 SUV 차량에 몸을 싣고 조금은 막히는 도로를 타고 달려 내려가 선산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춟잘을 하니 새벽 3시 30여분에 산행 들머리이자 지난 구간 산행 날머리였던 땅재에 도착을 하니 생각보다 기온은 내려가지 않았는데 강한 바람이 불어 체감 온도는 벌써 한겨울 혹독한 추위를 느끼게 만들고 있다.
그렇게 팔공기맥 마지막 구간 산행은 많은 도움과 좋은 산행 조건으로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하며 무탈하게 대미를 장식할 수 있어 개인적으로도 큰 희열을 맛본 시간으로 남겨본다.
생각보다 눈도 많이 내리지 않아 체인젠 없이도 산행에 큰 지장이 없어 순조롭게 진행을 하지만 단지 날씨가 흐리고 강한 바람이 불어 체감 온도를 떨어 트리고 있어 잠시 휴식을 취하기도 어려운 산행 조건이다.
그래도 어둠을 뚫고 빠르게 진행을 해 생각지도 못한 환상적인 일출을 만나고 강한 바람에 어렵게 허기를 달래 줄 아침식사를 즐기고 장자봉을 지나 십령을 통과하고 만경산 오름길에 잠시 뒤돌아 보며 조만간 만나야 할 낙동강과 그 뒤로 내년쯤 올라야 할 금오산이 드높게 올려다 보이는 조망을 즐기는 시간은 참으로 황홀한 시간으로 남겨진다.
어랴운 산행을 즐기면서도 이런 황홀한 풍경을 가슴속에 남기는 시간이 있기에 그 어려움과 고통을 참아가며 또 다시 다른 산줄기를 걷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기도 하다.
산친구의 봉사와 도움으로 조금은 편안하게 내려가는 시간이지만 송수 운전까지 해 주는 산친구 때문에 더욱 잠못드는 시간이 되었다.
밤 12시를 넘긴 시간인데도 약간 막히는 도로를 타고 내려가니 천안을 지나면서 차량 통행이 줄어들고 이제부터 조금은 빠르게 달려 마지막 휴게소인 선산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달려 찬바람이 강하게 불어대는 땅재에 도착을 하니 새벽 3시 30여분을 지나고 있다.
산행 준비를 하고 단체 사진 한장 남긴 후 차량을 운전해 준 산친구는 가까운 곳에 있는 처갓집으로 내려가고 남아 있는 팔공기맥 종주대 6명만 남아 뜻깊은 팔공기맥 마지막 제7구간 산행을 시작해 보는 시간이다.
어둠속에 헤드렌턴 불빛의 도움으로 지난번 내려왔던 소보 빗돌과 땅재라는 이정판을 사진에 담고 68번 2차선 포장도로 북쪽으로 나 있는 비포장 임도를 따라 오르니 임도 옆으로 청화산 안내도와 청화산정상까지 4.2 Km라는 이정표를 지나 가파르게 이어지는 오르막 된비알을 타고 마지막 산행을 시작해 보는 시간이다.
땅재는 경북 군위군 소보면 달산리와 구미시 도개면 다곡리를 이어주는 고개로서 조선시대 성종때 큰 고목, 서낭(돌무더기)과 당집(성황당)이 있어 당고개 또는 당현 및 당재라고 불렀으며 현재는 68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곳으로 냉산과 청화산의 안부에 해당하는 고개로 이 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이름을 당현이라고 불렀다.
우리말로는 당재인데 세월이 흘러 당재라는 말이 변하여 땅재라고 불리워지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땅재라 부르니 국립지리원에서 발간하는 지도에도 이 고개를 두고서 땅재라 하고 마을 이름을 당재라고 표기하고 있다.
또 다른 내용은 구미시에 있는 다곡리의 마을중 당재가 있는데 이 당재의 이름이 변해 현재의 땅재고개가 유래된 것은 아닐까 생각도 해 보는 시간이다.
통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놓은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등로는 넓은 비포장 임도로 이뤄져 있어 진행에는 큰 어려움이 없어 보이고 잠시 더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벤취 쉼터 하나가 보이고 잠시 활엽수 낙엽이 임도가 떨어져 덮혀있는 평이한 등로가 나타난다.
그렇게 잠시 종주대들과 함께 오르니 잣나무 식재 구간이 나타나고 그곳에서부터 선두는 불빛마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앞으로 도망가 버리고 이제 후미 종주대 한분만 남아 함께 그 가파른 오르막 된비알을 타고 등줄기에 땀방울을 흘려보는 시간이다.
잠시 더 올라 이미에도 땀방울이 맺힐쯤 현위치번호라는 이정목이 보이고 곧이어 떨어진 낙엽이 발목까지 덮히는 등로를 따르니 바위 하나를 지나 떨어진 낙엽 위로 하얀 눈이 보이기 시작을 해 차량에 두고 올라 온 체인젠에 대한 아쉬움이 커지는 시간이다.
이제 하얀 눈과 그 눈 아래 깔려있는 낙엽 등로를 따르니 땅재에서 1.3 Km 올라왔다는 이정표가 보이는 첫번째 헬기장에 도착을 하는데 지도상에는 헬기장 표시는 없고 550.6봉이란 고도 표기만 보이는 곳이다.
그 550.6봉 헬기장을 지나 출발을 하니 낙엽 위에 덮혀있는 누이 조금 더 두껍게 다가오고 갑자기 차에 두고 온 체인젠이 그리워지는 시간이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큰 어려움이 없으니 천천히 걸어 진행을 해 본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 좌측으로 다곡2리입구라는 이정표가 서 있고 그 아래에 현위치 이정목이 함께하는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한다.
다곡리는 경상북도 구미시 도개면에 있는 청화산 끝자락에 자리한 마을로 작은 하천이 흘러 논농사가 주로 이루어지는데 다항리, 신화리, 우곡리 등을 병합하면서 다항과 우곡의 이름을 따 다곡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다곡, 도리골, 당재, 불당골, 탑골, 점골마을 등이 있으며 다곡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이고 도리골마을은 해평면 송곡동 도리사로 넘어가는 곳에 자리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당재마을은 서낭당이 있는 고개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고 불당골마을은 불당이 있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다.
탑골마을은 탑이 서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점골마을은 무쇠점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다곡리 갈림 이정표를 지나 오르다 잠시 뒤돌아 보니 어둠속에 지난 구간 아쉬움을 남기고 어렵게 내려온 냉산과 냉산갈림길이 희미하게 보인다.
언젠가 다시 한번 내려와 저 냉산과 연계한 산행을 하면서 가보고 싶었던 냉산과 도리사를 둘러 볼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기대해 보며 다시 오르니 609.3봉에 도착을 하는데 등로 우측으로도 희미한 등로가 보이는데 이곳에서는 좌측 뚜렷한 등로를 따라 진행을 해야 하는 곳이다.
그곳을 지나 진행을 하니 다시 보현리 갈림 이정표와 땅재에서 2.8 Km 올라왔다는 이정표가 함께 보이는 곳에 도착을 한다.
보현리는 경상북도 군위군 소보면에 있는 산으로 둘러싸인 구릉성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작은 하천이 흐르는데 보촌리와 백현리를 병합하면서 보현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보현, 골매깃골, 보광, 점목, 웃마을 등이 있으며 보현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이고 골매깃골마을은 정월 14일 밤마다 제를 올리던 소나무인 골매미나무가 있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보광마을은 보현 동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에 철광이 있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고 점목마을은 전에 옹기점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웃마을은 점복의 위쪽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 한다.
보현리 갈림 이정표를 지나 다시 낙엽 깔리 등로를 따르니 앙상한 겨울 나뭇가지와 그 아래 수북히 쌓여 있는 낙엽들과 하얀 눈 그리고 그 위에 어둠을 헤치며 묵묵히 걸어가는 종주대의 뒷모습이 또 다른 풍경으로 다가와 가슴속 깊이 쌓이는 시간이다.
다시 무명봉을 지나 잠깐 바위 자갈들이 등로에 박혀있는 곳을 지나니 청화산 정상까지 이제 1.0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서 있는 두번째 헬기장에 도착을 해 잠시 쉬어 간다.
그곳을 지나 잠시 더 걸어가니 청산리와 장군봉 갈림 이정표가 보이는데 아직도 장군봉이 어디인지 헷깔리기만 하다.
청산리와 장군봉 갈림 이정표가 있는 곳 우측 위로는 묘지 한기가 보이고 사진에 담고 다시 출발을 하니 어둠속에서도 황량함이 밀려오는 등로가 나타나고 잠시 후 묘지 한기를 지나 평이한 등로 능선을 따라 청화산으로 향한다.
그렇게 잠시 더 오르락 내리락 하니 등로 좌측으로 구미시 도개면쪽 야경이 빛나고 등로 좌측 뒤로는 지난 구간 어렵게 지나온 냉산과 그 산줄기가 아름답게 투영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다시 그 전방바위를 뒤돌아 나와 능선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눈 앞에 6각정이 보이고 곧이어 드넓은 헬기장으로 이뤄진 청화산 정상에 도착을 하는데 정상석과 삼각점은 오르자 마자 바로 옆에 서 있다.
청화산(700.7봉)은 경상북도 의성군 구천면 청산리와 구미시 도개면 다곡리의 경계부에 위치하고 있어 의성군과 구미시를 구분하는 행정 경계 역할을 하며 또한 동쪽 기슭은 군위군 소보면 보현리에 속하여 총 3개의 시와 군에 걸쳐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청화산은 원래 화할 화자가 아닌 불 화자를 써서 청화산이라 표기했다고 하는데 산이 푸르고 사철 꽃이 불타듯 만발하여 이러한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이름 때문인지 유난히 산불이 자주 발생하였기 때문에 어느 선비가 청화산의 불 화자를 화할 화로 바꾸자고 제안하여 지금과 같은 지명이 되었다고 한다.
청화산의 높이는 700.7미터로 주봉은 박봉(일명 용두봉)이고 청화산 북서쪽은 장자봉과 만경산 등의 산지와 이어지며 동쪽은 흰치고개와 막골재 등과 이어져 있다.
청화산을 제외한 산지 대부분이 300에서 450미터 내외의 구릉성 산지이기 때문에 높이 솟은 청화산은 멀리서도 단연 눈에 띄는데 높은 산지를 이루는 청화산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곳곳에 대규모의 애추가 발달해 있다.
청화산의 북쪽 자락에는 불당지나 청산지와 같은 소규모 저수지가 있는데 이 부근에서 발원한 비산천이 청화산의 북쪽 사면을 따라 북쪽으로 흘러 위천으로 흘러들어간다.
비산천의 지류에 해당되는 냉수천의 중하류부이자 청화산의 북쪽 산기슭에 해당되는 지점에는 조성지라는 대규모 인공 저수지가 축조되어 있어 구천면 일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청화산 일대는 소나무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등산로 양쪽으로 소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어 등산을 할 때 소나무 향기를 맡으며 산을 오를 수 있다.
청화산의 남쪽 사면에는 화강암이 분포하고 있는데 이 암석은 건설용 재료로 활용되는데 청화산의 남쪽 사면에 위치한 구미시 도개면 다곡리에는 이 화강암을 채취하는 채석장이 있다.
청화산은 고도가 높고 사면 경사가 급하며 애추와 같은 너덜바위가 발달하여 산세가 매우 험하기 때문에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등산지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고 팔공지맥(낙동정맥 가사령 부근 742미터 봉에서 서쪽으로 분기하여 면봉산과 보현산, 팔공산, 베틀산, 청화산, 장자봉과 만경산을 거쳐 낙동강 강변의 새띠 마을에 이르는 도상 거리 160 Km 정도의 산줄기)을 종주하는 등산객들이 종종 방문한다.
청화산 정상에는 생각보다 큰 정상석이 서 있는데 의성군에서는 용솟음봉으로 구미시에서는 박곡봉으로 다르게 표기해 두었다.
정상에서 주위 풍경과 육각정 그리고 이정표를 사진에 담고 정상 좌측인 남서쪽을 내려다 보니 저 멀리 구미시 도개면의 화려하지는 않지만 환상의 모습으로 야경이 흔들리고 있다.
도개면은 경상북도 구미시의 북동부에 위치한 면으로 면의 남쪽을 경유하는 25번 국도를 통해 해평면과 의성군으로 연결되고 면의 동쪽으로 청화산, 냉산, 장자봉 등 산지가 있으며 서쪽으로는 낙동강과 지류들이 형성한 넓은 충적평야가 분포한다.
현재 가산리, 동산리, 월림리, 신곡리, 궁기리 등 9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는데 고려시대에 선산군에 속한 도개부곡이 있던 곳으로 조선시대 선산도호부 도개면과 신곡면 지역으로 1914년 신곡면을 편입해 도개면을 신설한 사실을 신구대조의 선산과 한국지명총람를 통해 알 수 있다.
지명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선산에 도개부곡은 부의 동쪽 20리에 있다라는 기록으로 처음 등장하며 유사한 기록이 여지도서의 선산에 실려 있다.
조선 후기 표기자의 변화없이 존속되던 도개 지명은 1914년 당시 도에 대한 표기자를 길도 대신 다른 한자인 현재의 도로 음차 표기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면은 조선시대 도개면과 신곡면 지역으로 여지도서의 선산과 호구총수의 선산을 통해 해당 면 지명들과 관할 동리를 확인할 수 있다.
밝은 날에 올라 바라보는 풍경도 멋지지만 이렇게 어둠속에 빛나는 야경으로 만나는 구미시의 풍경도 나쁘지 않은 시간이다.
산행을 시작할 때만 해도 하늘에 떠 있는 반달이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구름의 양이 많아지는지 그 보였던 반달도 구름속으로 숨어 버렸다.
기온은 그리 낮지 않아 산행에는 큰 도움을 주고 있지만 간간히 불어오는 강한 찬바람이 체감온도를 떨어트리며 잠시 쉬고 있으면 한기를 느끼기에 그 넓은 청화산 정상을 출발해 완만하게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는데 이곳은 지금까지 보다 더 많은 눈이 쌓여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잠시 내려가니 등로 옆으로 옹달샘이란 안내판이 앙증맞게 서 있는데 무슨 의미인지 모르게 지나고 계속 이어지는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정상에서 800미터 내려왔다는 이정표가 있는 636봉 헬기장을 지나 등로 좌측으로 구미시의 야경을 내려다 보며 걸어 진행하니 637.2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그 637.2봉을 지나 좌측으로 진행을 하니 이제 넓은 비포장 임도를 좌측 직진 방향으로 버리고 우측 임도삼거리 팔각정 방향으로 진행해야 할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해 사진 몇장 남기고 출발을 한다.
등로 양쪽으로 2개의 이정표가 열병하듯 세워져 있고 좌측 이정표 아래에는 현위치 표기를 한 이정목도 보인다.
비포장 임도를 타고 진행을 하면 주륵폭포 지나 다항마을로 내려갈 수 있다는 이정표를 버리고 우측 능선으로 들어가니 무명봉을 지나 묵은 묘지같은 봉우리를 통과한 후 멋진 소나무 한그루를 좌측으로 돌아 내려가며 쌓인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멋진 그림도 그려 본다.
소나무를 지나니 가파른 내리막 등로에는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된 나무계단이 나타나고 그 계단을 타고 미끄럽지 않토록 조심하며 진행을 하는 시간이다.
그렇게 잠시 더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정상에서 2.0 Km 진행했다는 청화산 등산로 안내판 우측으로 삼형제송이란 안내판이 서 있다.
그 안내판 좌측 안전목책과 로프 뒤로는 안내판에서 설명한 삼형제송이라 생각되는 세그루의 소나무가 보이는데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는 일반 소나무처럼 보인다.
안내판을 읽어 보니 비바람에 흔들리는 가지를 지탱하는 것이 뿌리입니다. 가족간의 정이 메말라가는 현대인에게 다시금 돌이켜 볼 수 있는 장소입니다라는 글귀가 보이는데 왜 이런 평이한 소나무에 이런 이름을 붙였는지 의문스러운 장소이다.
삼형제송을 지나 내려가니 이제 안전목책과 로프만 있는 일반 등로가 나타나고 곧이어 또 다시 나무계단도 보인다.
잠시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된 계단을 타고 가파르게 내려가니 많은 낙엽이 깔려있는 일반등로가 열려있고 그곳을 통해 내려가니 또 다시 설치된 안전목책과 로프가 끝나는 지점에 등로 우측으로 임도 삼거리 팔각정까지 600미터 남아있다는 표기가 되어 있는 이정표가 서 있다.
이곳에서 등로에 깔려있는 수북히 쌓여있는 낙엽을 사진에 담고 임도 삼거리 팔각정 방향이 가리키는 우측 방향으로 걸어 진행을 이어가 본다.
우측으로 방향을 바꿔 완만하게 내려가며 걸어가니 갑자기 등로에는 키 작은 소나무들이 우거져 자라고 있고 조심하며 그 소나무 지대를 지나 오늘 처음 만나는 잡목지대로 걸어가 본다.
하지만 가시나무가 없어 그런대로 진행 할만한 그 잡목지대를 지나 진행을 하니 등로는 이제 잡풀이 자랐다 말라죽어간 비포장 임도를 만나 좌측으로 그 임도를 타고 진행을 하니 다른 구간에 비해서는 고속도로 같은 등로가 이어지고 있다.
청화산(701.2봉)의 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의성군 구천면 청산리에는 백운동과 청운동이 있어 예부터 청산은 아름답고 흰 구름이 드높은 선경이라 했다.
무한청산 행욕진(끝없는 청산 산길 끊겨진 곳)과 백운심처 유인가(흰 구름에 감춰진 곳 인가가 있더라)라는 옛 글을 취하여 청산1리를 백운동으로 조성지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있는 청산2리를 대칭의 개념으로 청운동이라 한다.
또 서편의 구미시 도개면 다곡리 아래 도개리에는 최근에 지은 신라불교 초전기념관과 함께 도문화재 자료 제296호인 전모례가정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신라 최초의 불교 신자인 모례의 집에서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우물은 직사각형의 석재를 사용하여 큰 독 모양으로 돌을 쌓아 만들었으며 밑바닥을 두꺼운 나무판자로 깔아 만든 것이 특징으로 나무판자는 아직도 썩지 않고 그대로 있다.
이 우물과 이웃마을의 도리사는 신라 시대 사찰이 유명하다.
그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를 타고 좌측으로 진행을 하고 잠시 둔덕을 오르는데 그곳에는 고운 솔갈비가 등로 가득 쌓여 또 다른 등로로 나겨진다.
그렇게 한동안 소나무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간벌된 오르막 등로로 이어지고 그 봉우리 정상으로 오르니 아무 표식도 없는 291.3봉에 도착을 해 후미를 기다려 본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흘렀던 땀이 강하게 불어 오는 바람에 식으며 한기를 느끼고 다시 방풍의를 꺼내 입고 있으니 후미가 도착을 하고 함께 완만하게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따라 갈현 방향으로 내려가 본다.
후미 한분과 함께 그 291.3봉을 지나 진행을 하니 몇기의 묘지들이 일렬로 보이는 묘지지대를 지나 다시 간벌된 등로를 따르니 가끔 나타나는 가시나무가 산행의 조심성을 일깨우고 있다.
그 희미한 등로를 타고 조심하며 내려가니 말라가는 칡넝쿨 지나 높은 콘크리트 옹벽을 넘어 드디어 12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갈현에 도착을 해 잠시 사진 몇장 남기며 쉬어간다.
갈현은 경북 구미시 도개면 다곡리에서 의성군 구천면 장국리로 넘어가는 12번 2차선 지방도로가 지나는 곳으로 차량 통행은 많아 보이지 않는 고개로서
험한 고개의 좌우로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칡이 많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도 도로 주위에 칡넝쿨이 많이 뒤엉켜 있다.
지명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선산에 갈현은 선산도호부의 동쪽 25리에 있다로 처음 등장하며 여지도서의 선산에도 갈현은 백마산에서 뻗어 나온다라는 기록이 있어 산줄기의 근원을 알 수 있다.
이후 표기자의 변화 없이 대동여지도에 갈현이 기록되어 있으며 한편 조선지지자료의 선산의 몽대면에는 갈현과 한글로 갈고가 병기되어 있으며 문수동에 있다는 기록이 있어 표기자가 변화된 갈현과 함께 갈고개라는 고유지명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조선지지자료의 선산의 도개면에는 갈현곡과 한글로 갈틔골이 병기되었으며 갈현동에 있다는 내용이 있으며 또한 동일 문헌의 계명에 갈현계, 암치현명에는 갈현과 한글로 갈테가 병기되어 있어 갈현을 전부지명소로 하는 골짜기 이름인 갈현곡(갈티골)과 촌락 지명인 갈현동 그리고 하천 지명인 갈현계와 또 다른 이칭인 갈테를 확인할 수 있다.
한국지명총람에는 갈티(갈티고개 밑에 있는 마을)와 갈티고개(갈현, 도개에서 의성군 구천면 장국동과 단밀면 용곡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라는 기록이 있어 갈티고개를 확인할 수 있다.
갈현에서 잠시 쉬는 동안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하고 이제 주위 사물들이 눈에 들어올 쯤 다시 그 12번 2차선 도로를 건너 철조망이 끝나는 좌측 옹벽을 넘어 진행을 하니 가파른 절개지 위로 오르기가 만만치 않다.
조심하며 올라 정상 등로를 만나 좌측으로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묘지 몇기가 보이고 바람이 잦아 드는 그곳으로 들어가 준비한 과일로 허기를 달래고 다시 출발을 한다.
이제 완전히 날이 밝아 헤드렌턴을 배낭에 넣고 출발을 하지만 구름이 끼어 일출은 불가능해 보이기에 마음을 비우고 출발을 하는 시간이다.
또 다시 나타나는 이장된 듯한 묘지를 지나 오르니 간벌된 소나무 등로가 보이고 이제부터 등로는 더욱 가파라지며 땅이 코에 닿을듯 숨도 쉬기 어려운 된비알이다.
그렇게 무심으로 한동안 오르니 등로에는 커다란 바위와 암릉들이 이어지고 어렵게 그 바위지대를 넘어 선답자들의 띠지가 걸려있는 소나무 등로에 도착을 한다.
약간의 부드러지는 소나무 등로를 타고 걸어 오르니 등로에는 또 다른 묘비와 묘지 한기가 보이고 그곳을 지나 잠시 더 오르니 343.1(342.7)봉 삼각점에 도착을 해 긴 한숨을 내쉬며 후 후미를 기다려 보는 시간이다.
후미를 기다리며 등로 우측인 북쪽을 살펴보니 소나무 숲 위 저 멀리 오늘 새벽 어둠속에 통과한 청화산 줄기가 길게 이어지며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하고 있다.
정상 주변으로도 온통 간벌된 나무들이 소나무 아래 널부러져 있어 누군가 간벌을 하면서 등로도 정리를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곳이다.
한동안 기다려 후미를 만나고 사진 한장으로 고운 추억을 남긴 후 이제 좌측으로 크게 휘어져 내려가는 등로를 타고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잠시 내려가니 등로 우측으로는 여전히 간벌된 풍경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 저쪽 멀리에는 제법 하얀 눈들이 쌓여있는 풍경도 눈에 들어 온다.
그렇게 잠시 더 내려가니 안부 같지 않은 안부에 도착을 하는데 등로 양쪽으로 빼곡히 자라고 있는 소나무 숲이 인상적이다.
그 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기 시작한다.
잠시 더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붉은 하늘이 아름답게 다가오고 잠시 후 생각지도 못한 붉은 해가 두꺼운 구름을 뚫고 찬란하게 떠 오른다.
진행하다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소나무 사이로 들어가 그 아름다운 일출을 바라보며 많은 사진들을 남겨 보는 시간은 그저 꿈결같은 시간이다.
저 멀리 금성산이나 앞으로 올라야 할 보현지맥 마루금 위로 떠 오르는 찬란한 아침해가 더욱 붉고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아마도 생각지도 못한 그 두꺼운 구름을 뚫고 올라온 기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사진을 남기고 다시 둥그런 해가 구름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모습에 다시 정상 등로로 복귀해 진행하던 산행을 이어가 본다.
다시 평이한 주등로로 올라 우측으로 간벌된 지대를 두고 걸어가니 다시 등로 우측 뒤로 찬란했던 아침해가 이제 구름속으로 완전히 숨어 그 주위의 구름 색깔만 붉게 물들이고 있다.
다시 앞으로 전진하며 걸어가 잠시 하늘이 열리는 곳에서 뒤돌아 보니 방금전 올랐다 내려온 343.1 삼각점 봉과 그 좌측 저 멀리 청화산과 그 이어진 산줄기들이 아름다운 풍경으로 이 산객의 가슴속으로 쌓여 추억이 되고 있다.
이제 등로 우측으로는 저 멀리 보현지맥 마루금 위로 숨어 버린 아침 햇살이 붉게 구름을 물들이고 그렇게 환상의 조망을 즐기며 걸어가니 눈 앞으로는 커다란 바위들이 산재해 있는 바위 암릉 등로로 변하고 있다.
그렇게 잠시 더 오르다 등로 좌측 전망바위에 올라 내려다 보니 경상북도 구미시 도개면에 있는 신곡리 마을이 아름답게 내려다 보인다.
신곡리 마을은 낙동강 지류가 흘러 논농사가 주로 이루어지는 곳으로 장자봉 밑에 큰 골짜기가 되므로 신곡리라 하였으며 자연마을로는 신곡, 검바웃골, 못안, 절골, 뿔근박골, 상리, 쑤가마골, 점골마을 등이 있다.
신곡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 유래 또한 신곡리의 그것과 같으며 검바웃골마을은 빛이 검은 큰 바위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못안마을은 앞에 못이 있었다 하여 부르게 된 이름이고 절골마을은 문수사라는 절이 자리한 곳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며 뿔근박골마을은 빛이 붉은 바위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상리마을은 신곡의 북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부르게 된 이름이다.
쑤가마골마을은 숯가마가 있었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며 점골마을은 사기점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한가롭게 내려다 보이는 마을의 평화가 그리워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등로 좌측으로 신곡리를 내려다 본 후 잠시 뒤돌아 보니 오늘 새벽부터 걸어 온 팔공기맥 마루금의 청화산에서 이곳 387봉으로 이어지는 등로가 아름답게 다가온다.
조망을 즐기며 다시 완만하게 진행을 하니 웅덩이 하나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무명봉에서 우측 등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소나무 등로를 따른다.
소나무가 빼곡하게 자라고 있는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큰 바위들이 보이고 그 바위지대를 지나 내려가니 안부를 지나 작은 돌탑이 서 있는 나즈막한 안부에 도착을 한다.
그 돌탑안부를 지나 솔갈비가 푹신하게 깔려있는 등로를 타고 평이하게 걸어가니 잠시 후 솔갈비가 넓은 활엽수 낙엽으로 바뀌고 곧이어 다시 멋진 소나무 등로가 열려있다.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거대한 바위들이 앞을 가로막고 그 바위를 지나 소나무 등로가 다시 열려있다.
잠시 더 걸어가니 등로 우측으로 장곡리와 이 팔공기맥 산줄기를 가르는 위천이 저 멀리 내려다 보인다.
장곡리는 경상북도 의성군 구천면에 있는 마을로서 만경산에서 남동쪽으로 뻗어나온 산줄기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전형적인 산촌 마을인데 비교적 고도가 낮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서쪽에는 장국지가 있다.
자연마을로 국수골, 백고개, 진실 마을이 있는데 국수골 마을은 중국동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백고개 마을은 백고개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진실 마을은 지형이 길다 하여 이름 붙여졌으며 중국 마을은 상국동과 하국동의 중간이 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제 오늘 산행이 마무리되는 시간이 되면 이 팔공기맥 산줄기를 가르는 저 위천을 만나 그 물에 손을 담그며 대단원의 산행도 마무리가 될 것이다.
그 위천 넘어 저 멀리에는 언젠가는 또 올라야 할 보현지맥 마루금이 박무속에 보일듯 말듯 아름답게 줄지어 늘어서 있다.
다시 평이한 소나무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이번에는 등로 좌측으로 고사목이 서 있고 그 고사목 넘어 저 멀리 문암산과 낙동강이 아름답게 보인다.
문암산은
경상북도 구미시 도개면 신곡리 동쪽에 위치한 산으로 해발고도는 366.1미터이다.
문암산과 관련하여 두 가지 전설이 전해오고 있는데 하나는 1592년 임진왜란 때 당진 현감 정방준이 의병을 모아 출전한 후 왜병이 쳐들어오니 정방준의 처 변씨가 문암산으로 피신하였으나 왜적이 숨은 곳을 알고 뒤쫓아와 변씨는 치마폭에 혈서를 써서 던지고 절벽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정절을 지켰다.
이에 나라에서는 변씨를 숙부와 정부라 하고 혈서를 쓴 치마폭이 떨어진 자리에 정려각을 세워 모든 사람의 귀감이 되게 하였다.
또 하나의 전설은 마을에 사는 무남독녀가 옆집 총각을 남몰래 짝사랑하여 매일 문암산 꼭대기에 올라가 그 남자와 만나게 해달라고 정성을 드렸으나 허사로 돌아가자 산꼭대기에서 투신자살을 했다고 하며 그 후 그곳에는 깎아낸 듯한 절벽이 생겼는데 그 절벽은 그녀가 떨어지면서 생긴 것이라 전해진다.
문암산 주변으로는 청화산으로부터 장자봉과 만경산으로 이어지는 연봉에 의해 의성군과 경계를 형성한다.
장자봉 북쪽으로는 의성군으로 가는 산길이 험하고 도적떼가 많아서 열 사람씩 모여서 넘었다는 열재가 있고 동네 안쪽에는 들판이 펼쳐져 있으며 신곡지를 비롯한 저수지가 있다.
그 문암산 넘어로는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그 넘어 저 멀리에는 기양지맥 마루금이 보일듯 말듯 다가와 있다.
그렇게 등로 좌측으로 낙동강과 기양지맥을 등로 우측으로는 위천과 보현지맥 마루금을 살펴보며 진행하는 즐거움도 제법 있는 시간이다.
다시 큰 바위가 산재해 있는 소나무 등로를 타고 바위봉을 넘어 걸어가니 370봉과 367봉을 차례로 통과한다.
간벌된 소나무 등로를 타고 걸어 내려가니 이제 등로 앞 좌측으로 이제부터 걸어 넘어야 할 338 무명봉과 장자봉 그리고 철탑과 그 우측으로 만경산이 시원하게 조망된다.
오랫만에 만나는 멋진 마루금에 잠시 더 머물며 많은 사진을 남기고 다시 천천히 출발을 하는데 이제 아침 8시를 넘기며 허기가 밀려오기 시작한다.
거대한 바위 암봉을 우회하며 조심해 내려가고 등로 우측으로 벌목된 소나무 등로를 타고 걸어 내려가니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로 걸어 오른다.
그렇게 오르니 다시 거대한 바위 몇개가 앞을 가로막고 그 바위를 넘어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위천과 보현지맥이 조금 더 뚜렷하게 다가와 있다.
다시 완만하게 내려가듯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 우측으로 벌목된 나뭇가지들이 널부러져 있는 평이한 등로가 나타나 그곳을 통해 전진을 해 본다.
다시 진행하니 등로 우측으로 위천과 그 넘어 드높은 보현지맥의 해망산과 국사봉이 올려다 보여 한동안 멋진 추억을 남겨본다.
방금 전 지나온 뾰족한 봉우리들을 뒤돌아 보고 앞으로 전진하니 계속 이어지는 거대한 바위들이 산재되어 있는 마루금이 이어지고 그 바위를 타고 걸어가니 저 멀리 바람이 불어 오는 능선 위에 앞서 진행하던 선두가 잠시 배낭 내리고 아침식사 준비를 하고 있다.
약간의 바람이 불어오며 한기를 느끼지만 어쩔 수 없으니 배낭 내려 허기를 달래보는 시간인데 고도를 살펴보니 이곳이 338봉이다.
아침식사 후 주능선을 타고 먼저 진행을 하니 등로 좌측으로 멋진 고사목 한그루가 반겨주고 그 고사목 뒤로는 사곡지와 낙동강이 아름답게 내려다 보인다.
그 사곡지를 두고 펼쳐진 신곡리 들판이 또한 아름다워 잠시 조망을 즐기고 전진하니 바위 등로가 나타나는데 그 바위 위에는 커다란 소나무들이 또한 자라고 있어 새로운 등로처럼 다가온다.
바위 무명봉을 넘어 내려가니 다시 소나무 등로가 열리고 잠시 후 안부를 통과하니 오르막 등로로 올라 바위지대를 통과한다.
그 바위를 올라 뒤돌아 보니 지난 구간 내려 온 냉산에서 이곳 장자봉 가까이까지 이어져 온 팔공기맥 마루금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또한 구름 사이로 숨어 있는 햇살에서 바추는 햇살 내림이 아름다운 풍경이기도 하다.
다시 간벌된 소나무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바위 절벽들이 나타나고 등로에도 역시 바위 암릉길이 이어지고 있다.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다시 바위 암릉구간을 오르니 421봉 바위봉에 도착을 한다.
그 바위봉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421.5봉의 장자봉에 도착을 해 삼각점을 찾아 보지만 찾을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장자봉(421.5봉)의 동쪽 사면은 의성군 단밀면 용곡리에 해당되며 서쪽 사면은 구미시 도개면 신곡리에 속하는데 장자봉을 포함하여 만경산 등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의성군과 구미시를 구분짓는 행정 경계를 이루고 있고 이 능선부를 따라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어 많은 등산객들이 방문하고 있다.
구미시와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 가운데 하나로 북쪽 사면은 위천의 분수계를 이루며 서쪽 사면과 남쪽 사면은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소지류 하천의 발원지에 해당된다.
장자봉은 높이가 421.5미터이며 높이에 비해 산세가 다소 험준한 편인데 이는 산지를 이루는 기반암의 특성에 따른 것으로 장자봉을 구성하고 있는 기반암은 대부분이 중생대 백악기 경상계 낙동층군 낙동층에 해당하는 만경산층원이며 산지의 서쪽이 선캠브리아기의 반상변정 편마암이다.
만경산층원은 흑색 셰일, 탄질 셰일, 담황색 역암, 역질사암, 암회색 또는 녹회색 조립질 사암, 회색 셰일 등으로 구성된 암석으로 퇴적암이다.
퇴적암으로 이루어진 곳은 기복이 완만한 데 비해 편마암으로 이루어진 사면은 기복이 심하고 산세가 험준하며 산지 정상부에는 기반암이 노출되어 있고 절벽 단애가 형성되어 있는 모습도 관찰할 수 있다.
장자봉 일대에는 참나무과에 속하는 졸참나무, 굴참나무 군락과 소나무, 상수리나무 군락 등이 분포하고 있다.
장자봉은 단밀면에서 가장 높은 산인 만경산과 연계하여 등반을 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등산로는 낙정 나루에 있는 관수루 부근 만경산 등산로 입구에서 만경산과 장자봉 및 갈현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개설되어 있다. 만경산 부근에는 나무 데크가 설치되어 있으며 장자봉 정상에는 삼각점이 있다.
장자봉을 오르는 길목에 있는 관수루는 낙단교와 낙정 양수장 사이에 있는 누각으로 고려 시대에 건립되었고 1734년(영조 10)에 상주 목사 김태연이 다시 세워 현판을 달았다.
1843년에 수리하였다가 1874년(고종 11)에 유실되었는데 1889년에 복원되었다.
권상일(1679~1760), 유주목(1813~1872) 등의 중수 기문과 이규보(1168~1241), 김종직(1431~1492), 이황(1501~1571) 등이 지은 15편의 시가가 있었던 누각으로 안동의 영호루 및 밀양의 영남루와 함께 낙동강 3대 누각으로 손꼽힌다.
장자봉에서 추억 한장씩 남기고 다시 떨어진 낙엽 위에 살포시 내려 앉아 있는 하얀 눈을 밟으며 완만하게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타고 걸어가 본다.
잠시 걸어 내려가니 그 등로에는 간벌된 나뭇가지들이 널부러져 오래되었는지 조금씩 썩어가며 흙으로 변하고 있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 좌측 앞으로 이제부터 걸어 진행해야 할 팔공기맥 마루금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데 용암동갈재와 철탑 그리고 우측 뒤로 만경산이 우뚝 솟아 보인다.
계속 이어지는 간벌된 소나무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등로 우측으로 용국리의 무명 저수지가 내려다 보인다.
그렇게 소나무 등로를 타고 부드럽게 솔갈비를 밟으며 걸어가니 묘지 2기가 있는 안부가 나타나는데 그 안부 건너자 마자 나뭇가지에는 준.희님이 붙여 놓은 심령이라는 안내판이 눈길을 끄는데 이곳은 원래 십령 또는 열재라는 고갯마루이다.
심령(십령, 열재, 심령)은 경북 구미시 도개면 동산리와 의성군 구천면 용곡리를 잇는 옛고개로 준.희님의 심령 표시판이 있고 묘지 2기가 자리잡고 있는데 팔공기맥 마루금은 보이는데 좌우측으로 내려가는 길은 거의 보이지 않아 고개의 기능을 잊어 버린지가 꽤나 오래된 것으로 생각되는 곳이다.
이 고개를 심령이라 부르지만 원래 이름은 십령이다.
십령의 유래를 보면 조선말기 동학란 때 사회가 한창 불안하여 도처에서 민란이 일어나니 관군은 이를 토벌하러 나섰고 그 틈을 타서 도적떼들이 우글거렸고 외진 산길을 들어와서 넘어가기에는 상당히 어려웠다.
이곳 열재(십령)도 산적들이 자주 출몰하여 한 두사람이 재를 넘기는 위험하고 열사람이 이상이 모여서 넘었다고 해서 열재(십령)이라고 불렀는데 이게 변음이 되어 심령이라고 부른다는데 원래 고개 이름은 십령이 맞는 듯 하다.
조선말기 3월말 보리고개에 60이 넘은 노인이 9살의 손자를 데리고 도개에서 의성쪽을 넘고 있는데 산속에서 바람소린지 사람소린지 알 수없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와 자세히 들으니 분명 사람소리였다.
살펴보니 젊은 부인이 아기를 등에 업고 있는데 상투를 튼 남자가 아기를 잡아 먹으려고 발버둥치고 있어 자초지종을 들으니 남편이 몇날 며칠을 굶어 눈이 뒤집혀 아기를 고기인 줄 알고 잡아 먹으려고 한다고 하여 손자가 우리가 싸가지고 가는 떡을 주자고 하였다.
그래서 일부를 나누어 주고 가는데 손자의 말이 너무 기특하고 배고픈 사람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떡을 전부 다 주었다가 자기들은 너무 굶주려 이 고개 넘어 의성땅에 사는 친지들에게 구원을 청하러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그 얘기를 듣고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우리가 소판돈을 주고 가자고 하여 소판돈을 주고가는 조손에게 젊은 남녀는 어디사는 누구냐고 알려달라고 애원을 했으나 그 조손은 그냥 길을 떠났다.
이 노인은 성이 조씨로 이 고장에서 꽤나 잘 살았으며 널리 보시공덕을 많이 베풀었던 사람이었는데 세월이 흘러 노인은 세상을 떠나고 손자는 어느덧 30이란 나이를 먹었고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하였거늘 조씨 집안도 살림이 기울어 생계가 어려웠다.
열재에서 도움을 받아 집으로 돌아간 부부는 열심히 농사를 지어 상당한 부를 축적하여 이 지역에서 노부자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는데 이제서야 지난날 열재에서 도움을 받았던 그 은인을 찾으려고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은인을 찾기위해 지난날 구원을 받았던 십령(열재) 아래에 주막을 내고 술을 파는게 아니라 이 고개를 넘는 과객들에게 쉬어가게 하고 술을 무료로 제공하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그 은인을 찾게 해달라고 도움을 청한다.
달이가고 해가가고 몇해가 지나도 그 은인은 나타나지 않았는데 그러던 어느날 봄철도 지나고 초여름의 긴긴해가 뉘엇뉘엇 넘어갈 때 덥수룩한 나그네가 지나가 그 지나가는 나그네이 차림은 궁색하였으나 기품은 있어 보였다.
들어와서 좀 쉬어가라 청하는 부인의 말에 말씀은 고마우나 해는 지는데 갈길이 바쁘다하면서 그냥 가려고 하여 부인이 재삼 간청에 돈이 없으니 술 먹을 형편이 못된다고 하였다.
다시 간청하는 부인의 말에 나그네는 발길을 돌려서 주막집에 들려서 쉬기로 하였는데 후히 대접을 하고 어느 손님에게나 마찬가지로 지난날의 얘기를 하면서 은인을 찾게 해달라고 하였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나그네는 눈을 지그시 감고 한참을 있다가 20년전의 9살때의 기억을 더듬어 얘기를 하니 초로의 부인은 젊은이를 와락 껴안으며 그리도 목메이던 은인을 찾았다.
지난날 죽음의 경지에서 구츨해 준 은인을 잊지 못하여 이곳에 주막을 차리게 된 동기까지 이야기 한다.
조씨도 지난날 화려했던 가세가 기울고 어렵게 살아가는 지금의 실정을 이야기하니 주막집 내외는 의논하여 조씨를 크게 도와서 보답의 기회를 찾기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선산의 노씨와 의성의 조씨는 그 후손들도 친형제 이상으로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지금도 십령 중턱에는 조그만 집한채가 문짝이 떨어 나간채로 있다고 한다.
심령 일명 십령 또는 열고개를 지나 완만하게 오르니 소나무 등로와 그 등로를 뒤덮고 있는 솔갈비가 아름다운 마루금으로 이어지고 있다.
다시 이장된 듯한 묘지 한기를 지나 소나무 등로를 타고 오르니 또 다른 묘지 한기가 나타나고 그 묘지를 지나 더욱 가파라지는 오르막 된비알을 타고 오르니 거대한 암벽이 눈 앞을 가로막고 우회 등로를 열어 놓고 있어 어렵게 그 암릉을 오르니 다시 평이한 소나무 오르막 등로가 이어지고 있다.
잠시 더 오르니 등로가 다시 뚜렷해지고 조금 더 전진하니 식재된 듯한 키 작은 소나무 등로가 보인다.
잡목과 키 작은 소나무가 혼재되어 있는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오르니 등로에는 작은 바위들이 산재되어 있는 장소를 지나 용암동열재라 적어 놓은 이정표가 서 있는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한다.
살펴보니 이곳이 좌측으로 470봉의 송전탑으로 갈 수 있는 갈림 삼거리로서 용암동은 주선리의 마을 이름으로 열재는 옛날에 도작떼들이 많아 열명 이상이 넘어야만 넘을 수 있다는 의미가 있으니 주선리의 고개로서 험준하여 10명 이상이 모여 넘었다는 유래가 되는 곳인데 어느곳인지는 알 수가 없어 아쉽기만 하다.
그 용암동열재 갈림 이정표를 좌측으로 보내고 우측의 직진 방향으로 걸어 진행을 하니 갑자기 눈 앛에 잡목지대가 나타나고 그 지독한 잡목지대를 짧게 통과해 전진하니 제법 넓고 뚜렷한 오르막 등로가 이어지고 있다.
잠시 그 넓은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오르다 뒤돌아 보니 용암동열재 이정표가 서 있는 곳에서 보이는 우측 방향으로 송전탑이 서 있는 470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다시 뚜렷한 등로를 타고 오르니 멋진 조망처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잠시 뒤돌아 보니 지나온 등로 우측으로 휘돌아 가는 낙동강이 뿌옇게 내려다 보이고 그 뒤 저 멀리 희미하게 조만간 올라야 할 금오지맥의 금오산이 우뚝 솟아 있다.
그렇게 그 조망처에서 낙동강과 지나온 팔공기맥 마루금을 조망한 후 다시 오르니 이번에는 등로 우측으로 용암동 하산 갈림 이정표가 서 있다.
용암동은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주선리에 속하는 마을의 하나로서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경상북도 비안군 단서면의 지내동, 선상동, 선하동과 주하동, 속상동, 속하동, 도암동, 용암동의 일부와 도호동 일부를 병합하면서 주하와 선상의 이름을 따서 주선동이라 하였다.
자연 마을 관동(관골)은 신라 시대에 단밀현의 현청 소재지로서 관아가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또한 고려 말과 조선 초 명망이 높은 관리이며 효자인 퇴재 신우가 살았던 곳이라서 효자리라고 불렀으며 그 표석이 비각과 함께 남아 있다.
신당은 마을 중앙에 봉성 서당이 있어서 마을 이름을 서당이라고 부르다가 변음된 것이라 하고 선학(서낙골)은 마을 안 골짜기에 선학사가 있어 절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고 하며 창마래이(창마)는 창고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경상북도 비안군 단서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지내동, 선상동, 선하동과 주하동, 속상동, 속하동, 도암동, 용암동의 일부와 도호동 일부를 병합하여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주선동이 되었다가 1988년 5월 1일 군 조례 제1225호에 따라 주선동을 주선리로 개칭하였다.
남쪽으로는 만경산이 있고 동쪽으로는 큰 하천인 위천이 북쪽으로 흐르는데 비교적 평야 지대로 넓은 논이 이어져 있고 동쪽으로 안계 평야가 멀리 건너다보이는 곳에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주선리는 단밀면 중앙 부분에 자리 잡고 있는데 동남쪽은 단밀면 위중리와 경계를 하고 서쪽으로는 단밀면 생송리, 북쪽은 단밀면 서제리와 단북면 성암리와 이웃하고 있으며 자연 마을로는 관골, 서낙골, 신당, 창마, 새터, 못안 등이 있다.
단밀면사무소에서 지방도 912번을 따라 남서쪽으로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그 뒤쪽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우재 손중돈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봉성 서당이 있으며 교육 기관으로 단밀 중학교가 있다.
그 용암동 갈림삼거리 이정표를 지나 오르니 등로에는 활엽수 낙엽이 푹신하게 깔려있어 진행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그렇게 다시 한동안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새터마을 하산 갈림 이정표가 보이고 곧이어 만경산 바로 아래 넓은 공터에 육각정이 보인다.
그 육각정을 지나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소원성취타임캡슐이 묻혀있는데 개봉일이 1000년 이후이다.
그 타임캡슐을 지나 오르니 금새 넓은 헬기장이 있는 만경산 정상에 도착을 해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본다.
경상북도 의성군의 단밀면 생송리에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499미터이다.
지명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상주에 만악산은 단밀현 남쪽에 있으며 주 북쪽 47리에 있다라는 기록으로 처음 등장한다.
이후 해동지도의 선산에 만경산, 해동지도의 상주에 만경산으로 표기되고 있어 표기자가 악에서 경, 경으로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동여지도에는 만경사가 기록되어 있어 만경산에 있던 사찰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지지자료의 선산의 신곡면에 만경산이 동정동에 있다는 기록이 있고 같은 문헌의 비안군 단서면 산곡명에 만경산과 한글로 만경산이 병기되어 있으며 용암동에 위치한다는 기록을 통해 만경산이라는 산 지명이 표기자의 변화 없이 존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한국지명총람에는 만경산(선산군 도개면 동산동, 신곡동과 의성군 단밀면 생송동, 위중동에 걸쳐 있는 산)과 같은 문헌의 단밀면 생송리 기록에 만경광산(만경산 상봉에 있는 금광) 만경약수(만경광산 밑에 있는 약수)라는 내용을 산의 구체적인 위치와 함께 만경을 전부지명소로 하는 파생 지명들을 확인할 수 있다.
만경산은 경상북도 의성군의 단밀면 생송리에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499미터이다.
지명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상주에 만악산은 단밀현 남쪽에 있으며 주 북쪽 47리에 있다라는 기록으로 처음 등장한다.
이후 해동지도의 선산에 만경산, 해동지도의 상주에 만경산으로 표기되고 있어 표기자가 악에서 경, 경으로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동여지도에는 만경사가 기록되어 있어 만경산에 있던 사찰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지지자료의 선산의 신곡면에 만경산이 동정동에 있다는 기록이 있고 같은 문헌의 비안군 단서면 산곡명에 만경산과 한글로 만경산이 병기되어 있으며 용암동에 위치한다는 기록을 통해 만경산이라는 산 지명이 표기자의 변화 없이 존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한국지명총람에는 만경산(선산군 도개면 동산동, 신곡동과 의성군 단밀면 생송동, 위중동에 걸쳐 있는 산)과 같은 문헌의 단밀면 생송리 기록에 만경광산(만경산 상봉에 있는 금광) 만경약수(만경광산 밑에 있는 약수)라는 내용을 산의 구체적인 위치와 함께 만경을 전부지명소로 하는 파생 지명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곳 만경산 정상에서 사진 몇장 남기고 직진해 나무데크로 가 주위 풍경을 둘러보며 조망을 즐겨 본다.
제일 먼저 위중리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고 그 우측으로 위천이 휘돌아 가는 모습도 눈에 들어오며 그 뒤 저 멀리 박무속에 희미하게 보현지맥 마루금이 가물거린다.
위중리는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에 있는 마을로서 위천이 흐르고 평야갸 넓은 편이고 또한 감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으며 마을 이름인 위중이란 이름은 위천의 중류라는 의미에서 생겨났다.
자연마을로는 저곡, 주미, 용암, 대나무골, 불당골이 있는데 저곡은 마을 바로 앞에 위천이 깊게 흘러서 붙여진 이름이며 주미는 위천강 넓은 들의 아름다움과 단주렁에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이름 붙여졌고 용암은 마을 앞에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대나무골은 대나무가 많다는 뜻의 지명이고 불당골은 마을 안 산기슭에 용암사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보현지맥 좌측 끝자락에는 이곳에서는 유명한 비봉산이 제법 드높게 우뚝 솟아 있는 풍경도 눈에 들어 온다.
앞으로 진행 방향인 북서쪽으로는 낙동강이 유유하게 흐르고 그 한가운데에 낙단보가 내려다 보이는데 그 낙단보 좌측 끝자락으로 돌고 돌아 그 산줄기를 마감하는 팔공기맥 마지막 산줄기가 낙동강에 빠지는 잊지 못할 모습도 눈에 들어 온다.
저 관수루 낙단보까지 곧바로 내려가면 5.3 Km거리이지만 지금부터 이 산객은 우측에서 좌측으로 단밀면을 가운데 두고 빙 돌아 내려가야 하기에 아직도 10여 Km 이상 남아 있는 실제 거리가 되었다.
그렇게 많은 시간 머물며 후미를 기다렸단 단체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우측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마지막 합수점을 향해 출발을 해 보는 시간이다.
다만 이곳에서 잠시 쉬고 있으니 차량을 운전해주고 있는 산친구가 전화를 하고 상황을 설명해 주니 912번 2차선 지방도로가 지나는 주선고개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소식을 전해 줘 조금은 가벼운 발걸음을 해 보는 시간이다.
많은 시간 만경산 정상에서 즐기며 과일로 목마름을 달랜 후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등로를 타고 출발을 하니 초반부터 가파른 내리막 등로에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그 계단마다 하얀 눈이 쌓여 있어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한동안 길게 이어지는 그 미끄러운 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이제는 깊게 깔려있는 낙엽 등로 위에 하얀 눈이 쌓여 있고 그 눈을 밟으며 뱀의 형상으로 나 있는 등로가 또 다른 아름다운 풍경으로 가슴속에 남겨지는 시간이다.
잠시 더 그 눈길을 따라 조심하며 내려가니 갑자기 눈이 사라지고 연안이공 묘지를 지나 멋진 조망처에 도착을 한다.
약간의 잡목으로 깨끗하지 못했던 낙단보의 풍경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며 이제부터 이 산객이 걸어 내려가야 할 마루금도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그 낙단보 앞으로는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에 있는 생송리가 가깝게 펼쳐져 있고 그 생송리와 낙단보 사이에는 팔공기맥 마지막 산줄기가 낙동강에 빠지는 합수점 근처의 풍경이 상세하고 자세히 내려다 보인다.
하지만 그곳으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우측에서 좌측으로 이어지는 나즈막한 산줄기를 타고 한동안 걸어가야 하기에 생각보다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등로 좌측 앞으로 펼쳐진 생송리와 낙동강 그리고 낙단보를 살펴보며 여유있게 내려가니 이제 등로 우측으로 위중리와 주선리 방향의 들판이 펼쳐져 있고 그 우측 옆으로 위천이 흐르는 풍경도 눈에 들어 온다.
그 좁은 들판과 위천을 지나 저 멀리 희미하지만 길게 이어진 보현지맥 마루금이 어서 오라 손짓하며 이 산객을 부르고 있는 듯 하다.
그 아름다운 풍경들을 조망하며 조금은 여유있게 걸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보현지맥 좌측 끝자락으로는 높게 솟아 있는 비봉산이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솟아 있는 풍경도 눈에 들어 온다.
그렇게 잠시 더 내려가니 등로 좌측 옆으로 만경산 정상까지 1.0 Km라는 이정표가 서 있고 그곳에서 등로 우측으로 펼쳐진 위중리 들판을 구경하며 내려가니 그고세는 또 다른 이정표가 서 있는데 만경산정상까지 0.3 Km라는 거리 표시가 생소하다.
다시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계단을 내려가니 잡목과 안전로프가 나타나고 잠시 후 평이한 등로에 멋진 소나무 등로가 열려있다.
솔갈비가 멋진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등로는 좌측 무명봉을 우회하여 우측 사면 등로로 이어지고 잠시 후 만경산정상까지 3.0 Km라는 이정표를 만난다.
다시 나타나는 바위지대를 지나 멋진 소나무가 보이는 넓은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따라 본다.
평이한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안전목책과 로프구간이 나타나고 그 목책을 타고 내려가니 등로 우측 뒤로 방금 전 올랐다 내려 온 만경산이 드높아 보이며 벌써 저 멀리 멀어지고 있다.
오르고 내려올 땐 무척 어렵게 오르고 내려왔는데 지나와서 올려다 보이 그토록 아름답고 나즈막하게 보일 수 없어 아이러니를 느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진행해야 할 방향으로는 나즈막한 산들도 어렵게 보이지만 지나고 나면 그 높던 산세들도 모두 낮게 올려다 보이는 말이다.
그렇게 지나온 만경산을 조망하고 걸어 진행을 하니 키 작은 소나무 등로가 나타나고 그곳을 지나니 등로 좌측 앞으로 주선고개와 방지고개를 지나 토봉으로 이어지는 나즈막한 팔공기맥 마루금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그 마루금 풍경을 조망하며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벤취2개가 놓여 있는 쉼터를 지나 길게 이어지는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멋진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 본다.
그렇게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도로가 보이고 운동시설도 보이는데 그 운동시설에는 연세가 지긋하게 든 어르신 한분이 운동을 하고 있다.
등로 좌측의 운동시설 옆 도롯가에 서 있는 이정표를 줌으로 당겨 살펴보니 우측으로는 생송리 방향이 좌측으로는 천은사 2.0 Km라는 방향 표시가 되어 있다.
그곳 안전목책과 로프를 지나 계속 걸어 내려가니 약간의 잡목이 있는 소나무 등로를 지나 묘지 한기를 통과한 후 다시 나타나는 묘지 몇기를 지나니 시멘트 포장도로가 지나는 고갯마루에 도착을 하는데 그 고갯마루 우측으로 비포장 임도가 보인다.
등로는 그 우측으로 나 있는 비포장 임도를 타고 오르며 진행을 하면 되는데 그 고갯마루 넘어 도롯가에 천은사까지 3 Km거리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시멘트 포장도로가 있는 고갯마루에서 우측 비포장 임도를 타고 오르니 등로는 아주 잘 정비되어 있어 진행에 큰 어려움이 없다.
잠시 그 비포장 임도를 타고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많은 묘지들이 보이고 그렇게 천천히 걸어 완만하게 오르니 이제는 등로 양쪽으로 묘지들이 많이도 자리를 하고 있다.
잠시 더 오르다 뒤돌아 보니 저 멀리 멀어지는 만경산에서 부터 이곳 시멘트 임도까지 이어지는 팔공기맥 마루금이 한눈에 들어 와 몇장의 사진을 남기고 다시 출발을 해 본다.
넓은 비포장 임도 양쪽으로 많은 묘지들을 두고 완만하게 오르니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지금까지 타고 올라온 비포장 임도를 우측으로 보내고 이제부터 임도 좌측의 묘지있는 곳으로 올라 성산이공과 파평윤씨 묘지를 타고 오르게 된다.
다시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양쪽으로 멋진 소나무 사이를 따라 솔갈비를 밟으며 오르니 보도블럭으로 정상을 헬기장으로 만들어 놓은 171봉에 도착을 해 후미를 기다리며 잠시 사진 몇장 남겨 본다.
헬기장처럼 보이는데 왜 일반 보도블럭이 아닌 작은 보도블럭으로 헬기장을 만들어 놨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171봉 헬기장 정상에서 좌측 계단을 타고 묘지 옆으로 내려가니 넓은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고 그 비포장 임도를 타고 우측으로 걸어 진행을 한다.
그 비포장 임도 좌우측으로는 멋진 소나무들이 자라고 그 소나무에서 떨어진 솔갈비가 푹신하여 걷기에 아주 좋은 등로로 변해 있다.
그렇게 멋진 솔갈비를 밟으며 걸어 전진을 하니 나즈막한 둔덕을 넘어 등로가 이어지고 있다.
잠시 등로 우측으로 몇기의 묘지들을 지나 다시 소나무 등로로 들어가니 등로 우측으로 몇개의 바위들이 보이고 여전히 등로에는 멋진 솔갈비가 떨어져 걷기에 아주 편안한 등로가 이어지고 있다.
솔갈비가 너무나 아름다워 몇장의 사진을 더 남겨 놓고 여유있게 걸어가니 또 다시 등로 양쪽으로 묘지들이 보이기 시작을 한다.
그러고 보니 이곳 등로에는 수많은 묘지들이 계속 연이어 나타나는데 그만큼 좋은 길지라는 의미로 받아 들이며 걸어 보는 시간이다.
그 묘지지대를 지나 넘으니 이제 등로 우측으로 밭 경작지가 나타나고 912번 2차선 포장도로도 내려다 보인다.
계속 이어지는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걸어 내려가니 저 멀리 주선고개가 내려다 보이고 산친구의 차량과 육각정 그리고 그 앞에 비닐로 만든 임시 식당도 모처럼 보이기 시작을 한다.
그렇게 그 912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주선리에 있는 주선고개 옆에 서 있는 만경산 등산로 입구라는 안내판을 사진에 담고 도로를 건너 종주대와 산친구가 잠시 머물고 있는 비닐하우스의 임시 식당으로 들어가 산친구가 정성드려 끓이고 있는 어묵탕에 탁배기 몇잔으로 피로를 풀며 추워진 몸을 녹여 본다.
너무나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괜시리 산친구의 얼굴 보기조차 어려운 시간이 되었다.
주선리는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에 있는 마을로서 남쪽으로는 만경산이 있고 동쪽으로는 큰 하천인 위천이 흐르는 비교적 평야지대가 많아 논농사가 많이 이루어진다.
자연마을로는 신당, 창마, 창마래이, 관골, 서낙골이 있는데 신당은 마을 뒷산에 신당이 있었다 하여 신당으로 부르게 된 것이고 창마는 과거에 창고가 있었다 하여 이름 붙여졌으며 관골은 관청이 있었던 곳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낙골은 마을 위 골짜기에 선학사라는 절이 있어 그 절의 이름을 따서 부른 지명이고 하늘에서 선녀와 학이 내려와 샘물을 먹고 올라갔다는 옥샘과 뚜껑이 둘이고 과거 관가에서만 먹었다는 샘물인 두이샘이 있다.
그렇게 그곳 주선리 주선고개에서 맛있는 어묵탕으로 허기를 달래고 추위를 녹인 후 다시 산친구에게 뒷처리를 부탁하고 배낭을 가볍게 한 후 출발하는 두다리가 가볍기만 하다.
주선리에 있는 912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주선고개에서 시간을 보내고 가벼운 배낭과 차림으로 다시 시멘트 포장도로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천천히 올라가 본다.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그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오르니 도로 좌측으로는 과수원이 보이고 잠시 후 갈림 사거리가 있는 방지고개에 도착을 한다.
살펴보니 직진 방향으로는 거대한 축사 건물이 보이는 이곳 방지고개에서 이제는 좌측 밭 경작지와 묘지들이 보이는 좌측 능선방향으로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완만하게 걸어 오르며 진행을 한다.
방지고개에서 좌측 밭 경작지 옆 넓은 임도를 타고 올라가니 묘지를 지나 다시 넓은 비포장 소나무 등로가 이어지고 있다.
그 비포장 소나무 등로를 타고 오르다 보니 등로는 우측 능선으로 이어져 있어 어렵게 그잡목지대를 뚫고 오르니 2층으로 되어 있는 산불감시초소가 드높게 설치되어 있는데 아직은 감시원은 없는 듯 보인다.
지도상에는 182미터봉으로 되어 있는 산불감시초소에도 조망이 없기에 사진 한장 남기고 곧바로 내려가 비포장 임도를 타고 우측으로 걸어가며 진행을 한다.
너무나 아름다운 멋진 소나무 등로가 열려있고 그 등로 위에는 폭신한 솔갈비가 두껍게 깔려 장거리 산행에 지쳐가는 산객의 마음과 발바닥에 포근함을 전해 준다.
배낭도 가볍게 만들어 진행을 하다 보니 생각보다 속도가 빠르게 진행이 되고 그렇게 조금 더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새롭게 단장한 묘지들이 보이고 그곳으로 내려가는 길이 잘 닦여 있다.
하지만 그 등로를 버리고 직진의 넓은 등로를 타고 계속 여유있게 걸어 보는 시간이다.
다시 약간의 잡목이 있는 소나무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등로 우측으로 절개지들이 보이는데 얼핏보면 굴처럼 보이기도 한 그곳에는 눈이 내린 계절인데도 파란 이끼가 한여름 자라듯 잘 자라고 있어 혹시 그 굴 안에서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기만 하다.
다시 멋진 리끼다 소나무가 하늘을 향해 쭉쭉빵빵 곧게 뻗어 자라고 있는 등로를 따르니 사라져 가는 묘지를 지나 묘지 위로 이어진 등로를 타고 걸어 본다.
그렇게 조금더 걸어 진행을 하니 눈 앞에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타나는데 그 도로 건너 우측에는 거대한 채석장 건물이 내려다 보인다.
시멘트 포장도로에서 좌측으로 그 도로를 타고 고갯마루로 오르니 도로 우측에 전봇대가 서 있고 그 앞으로 우측 능선 방향으로 비포장 임도가 열려있는데 그 비포장 임도 좌측 나뭇가지에 굿고개라는 이정판이 걸려 있다.
굿고개는 경북 의성군 단밀면 생송리와 세제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지나는데 왜 굿고개일까 아무리 자료를 찾아 봐도 찾을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다시 나타나는 묘지 좌측 위 소나무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잠시 뒤 바위 등로가 나타나고 이제부터 진행해야 할 마루금이 등로 좌측 앞으로 빼꼼히 얼굴을 내민다.
등로 좌측으로는 이제 저 멀리 멀어지는 만경산이 박무속에 드높게 올려다 보이고 갈림 삼거리에서 좌측 사면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솔갈비가 사라지고 커다란 활엽수 낙엽이 반겨 준다.
바스락 거리는 활엽 낙엽들을 밟으며 걸어가니 다시 등줄기와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흘러 내리기 시작하여 방풍의를 벗어 배낭에 넣고 걸어 본다.
잠시 잡목을 헤치고 걸어가니 등로는 다시 좌측 비포장 임도로 내려가고 이제부터 그 비포장 임도를 타고 우측으로 진행을 하는 시간이다.
비포장 임도를 따라 잠시 걸어가니 등로는 다시 능선으로 이어지고 소나무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189봉을 넘는다.
다시 빼곡하게 자라고 있는 소나무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등로는 완만하게 내려가며 이어지고 있다.
여전히 아름다운 소나무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갑자기 등로 우측으로 벌목된 등로가 나타나고 이제부터는 그 벌목된 경계를 타고 좌측 위로 솟아 보이는 231봉을 향해 걸어 올라가 본다.
오르며 살펴보니 나무들을 식재한 장소인듯 보이는데 그 나무들은 산죽처럼 보이기도 하고 대나무의 어린 순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어떤 식물인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우측으로 벌목된 산 경계를 타고 다시 굵은 땀방울을 흘려보는 시간이다.
한동안 후미를 살피며 그 벌목된 산의 경계를 타고 오르니 오를수록 경계 안쪽으로 들어가 약간의 잡목이 발목을 잡는 등로를 따라 오른다.
오르다 뒤돌아 보니 후미로 올라오는 종주대가 힘겹게 한발 두발 걸어 오르는 모습이 보이고 그 뒤 저 멀리 단밀쪽 마을들이 아름답게 내려다 보인다.
단밀면은 경상북도 의성군의 남서부에 위치한 면으로 면의 중앙으로 경유하는 912번 지방도를 통해 단북면과 구미시로 연결되는데 대부분 구릉성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면의 남쪽에는 만경산 등 산지가 분포한다.
면의 서쪽으로 낙동강이 흘러 상주시 낙동면과 경계를 이루며 북동쪽에는 위천이 형성한 넓은 충적평야가 분포하며 현재 속암리, 용곡리, 위중리 등 8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삼국시대 신라의 무동미지현 혹은 갈동미지 지역으로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단밀현으로 개칭하여 문소군(현재 의성군)의 영현으로 삼았다가 이후 1895년 비안군 단서면으로 개편되었고 1914년 단서면과 단남면을 통합해 의성군 단밀면으로 개편되었음을 신구대조의 의성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지명은 삼국사기지리지에 단밀현은 본래 무동미지현인데(한편 갈동미지라고도 이른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으며 지금까지 그대로 따른다라는 기록으로 처음 등장한다.
고려사지리지에는 단밀현의 단(單)은 단(丹)으로도 쓴다라는 기록이 있어 단(單)과 단(丹)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유사한 기록이 세종실록지리지의 단밀과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상주에 나타나는데 조선 후기에도 표기자의 변화 없이 해동지도의 상주와 대동여지도에 단밀창이 표기되어 있으며 단밀에서 유래된 단북면, 단서면, 단동면 등의 파생 지명들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현재의 면은 조선시대 단서면, 단남면 지역으로 호구총수의 상주에 단남면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해당 면 지명과 관할 동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다시 이마에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오르니 선답자들의 띠지가 나뭇가지에 달려있는 231봉에 도착을 하는데 등로 좌측 소나무 가지 사이로 이제 마지막으로 올라야 할 토봉이 너무나 높게 올려다 보인다.
다시 그 231봉에서 우측으로 이어진 잡목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등로 좌측 소나무 가지 사이로 올라야 할 마지막 봉우리인 토봉이 너무나 높게 다가와 걱정이 태산같다.
하지만 산행을 하면서 늘 느끼는 것은 보이지 않는 산줄기가 무섭지 보이는 산줄기와 봉우리는 또 쉽게 오르고 넘게 될 것이다 라는 사실이다.
다시 이어지는 소나무 등로를 지나니 등로 좌측으로 잠시 벌목된 지역이 나타나고 그곳에서 올라야 할 토봉이 자세히 올려다 본다.
채 300미터가 되지 않는 고도이니 어려울 것은 없겠지만 마지막 봉우리에 체력적으로 힘든 시간이기에 그것이 문제로 다가올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평이한 등로를 따라 좌측에 토봉을 두고 우측으로 길게 걸어 진행을 하니 키 작은 소나무 등로가 열리는데 이곳도 역시 약간의 간벌된 모습이 눈에 들어 온다.
다시 벌목된 소나무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그 간벌지대가 지나고 이제 등로가 좌측으로 크게 꺽여 마지막 봉우리인 토봉으로 향하는 등로가 열리는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한다.
해발고도 192봉에서 좌측으로 급격하게 꺽여 내리막 등로를 타고 걸어 내려가니 제법 급경사 내리막 등로가 이어지고 있다.
그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금새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지나는 솔티고개에 도착을 하고 주위를 살펴보니 도로 우측으로 작은 자갈들이 쌓여 있는 성황당 흔적이 남아 있는데 다만 커다란 나무가 보이지 않아 의문의 여지가 남아 있다.
솔티고개는 경북 의성군 단밀면 생송리와 팔등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최근에 만들어진 고개인 듯 예전 지도에는 포기도 없는 무명 고개이다.
솔티는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생송리의 마을로서 송중이란 골짜기 솔티골(솔나무)의 양지바른 작은 골의 이름에서 연유한 것이고 송하는 뒷산에 소나무가 많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에서 유래된 듯 보인다.
솔티고개를 건너 좌측 묘지들이 보이는 곳으로 올라 능선으로 오르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능선으로 오르니 커다란 활엽수 낙엽이 등로에 가득 떨어져 쌓여있고 잠시 완만하게 그 등로를 따라 오르니 커다란 고목들이 잘려져 나뒹굴고 있는 등로로 이어지는데 살펴보니 아카시아 나무들처럼 보이는 곳이다.
가시나무가 자라고 있는 완만한 등로를 타고 오르니 등로는 생각보다 잘 나 있어 진행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잠시 그렇게 더 오르니 등로에는 낮은 돌담이 보이고 그 돌담을 지나 오르니 등로는 더욱 가파른 오르막 된비알로 이어지고 있다.
다시 이마와 등줄기에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가파르게 걸어 오르니 팔공기맥의 마지막 봉우리인 토봉에 도착을 해 배낭 내리고 잠시 간식을 먹으며 쉬어 간다.
토봉(284.9봉)의 이름은 토끼 모양을 하고 있어 붙여진 것으로 보이며 쉰등이라고도 하는데 주변에 낙동강과 위천이 흐른다.
산행은 위천을 건너 우물 2리에서 시작하며 마을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길을 따라 주능선에 오른 뒤 230미터봉을 지나 능선을 타고 가면 삼각점이 있는 정상에 오르는데 우거진 잡목 때문에 전망은 좋지 않은데 하산은 낙동강 방향으로 이어진 등산로를 따라 묘를 지나 계곡으로 이어진 길을 만나면서 낙동강 백사장으로 내려온다.
낙동강변 옆으로 이어진 길로 재실 뒤의 농로를 따라 고개를 넘어 우물 2리 마을로 하산한다.
낙동강과 위강의 이수가 합류하고 속리산, 일월산, 팔공산 등 삼산의 지맥이 한곳에 모인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 일대를 일컬어서 이수삼산이라고 한다.
이곳에 있는 봉황성을 중심으로 낙동강과 위강이 좌와 우로 흘러내려 동, 서, 남 삼면이 강이고 북쪽은 영양의 일월산이 내려와 비봉산이 되었고 서쪽의 강건너 나각산은 속리산이 동남으로 이백리를 뻗어 강에 다달아 멈춰서면서 솟아 올랐고 동쪽의 토봉 일명 쉰등은 팔공산이 군위에서 위강과 같이 북으로 역류를 해서 끝을 맺은 지역으로 한마디로 강은 대강이고 산은 모두 명산이다.
봉황성은 봉황대 북편에서 동으로 위강 절벽까지 건너막은 토성으로 성은 언제, 누가, 무엇 때문에 쌓은지는 알수가 없으나 봉황성 절벽에는 임진왜란때 피난을 했다는 전설이 담긴 양처사굴이 북쪽의 낙동강 동면에는 층암절벽 천인대가 솟아있고 연하여 토진벼루, 물양절벽이 있으며 하류에는 쉰등골벼루, 뒤뛰미절벽, 관수루절벽 등이 저마다 높고 낮고 길고 짭게 일품을 자랑하고 있다.
위강 유역에는 재궁절벽, 타맥대절벽, 솟골절벽 등이 20리 장강 좌, 우에 그림같이 펼쳐져 있어 누구나 산행 후 한번쯤 가보고 싶은 충동이 생기는 곳이며 낙동강과 위강이 합류하는 모래톱에는 사시사철 철새들이 노니는 철새들의 낙원이다.
후미가 도착할 때까지 허기를 달래며 그곳 토봉 정상에서 고운 추억을 만들고 다시 가벼워진 배낭을 둘러메고 마지막 새띠고개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기만 하다.
한동안 그 토봉에서 간식으로 허기를 면하며 쉬었다 출발을 하니 등로 옆으로 바위들이 나타나고 그 바위 위에 올라 진행 방향을 내려다 보니 이제 오늘 산행 날머리이자 팔공기맥 마지막 합수점이 아름답게 내려다 보인다.
팔공기맥 마지막 잔줄기가 위천을 사이에 두고 보현지맥과 마주하고 그 좌측으로는 위천을 받아 주는 낙동강이 드넓게 펼쳐져 보인다.
그 합수점 북쪽으로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낙단보가 지척으로 다가와 있어 이제 팔공기맥 산행도 막바지에 도달을 했음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멋진 위천과 낙동강을 내려다 보며 보현지맥 산줄기도 가슴속에 담으며 걸어 내려가니 다시 멋진 소나무 등로가 열리고 곧이어 활엽수와 소나무가 혼재되어 있는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잠시 더 걸어 내려가니 나무계단이 길게 이어지고 한동안 그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다시 평이한 소나무 등로가 열리는가 싶더니 안부를 지나 이제는 오르막 나무 계단이 이어지고 있다.
짧은 그 사각나무 계단을 타고 오르니 벤취2개의 쉼터와 이정목 그리고 수암종택 표기나 보이는 이정표가 서 있는 192봉에 도착을 한다.
그 192봉을 지나 길게 이어지는 나무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다시 평이한 등로가 열리고 등로 좌측으로는 낙동강이 아주 가깝게 다가와 있다.
다시 길게 이어지는 나무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이정목을 지나 시멘트 포장도로가 지나는 새띠고개에 도착을 해 추억을 남겨 본다.
새띠고개는 경북 상주군 중동면 우물리의 새티고개에서 유래된 듯 한데 우물리에 대한 자료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자료가 보인다.
우물리는 경상북도 상주시 중동면에 있는 경지가 넓은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하천이 흐르며 논농사가 주로 이루어진다. 위천변에 자리한 마을이므로 우물리라 하였으며 자연마을로는 우무실, 가사리, 말골, 벙갈미, 유정마을 등이 있다.
우무실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유래 또한 우물리의 그것과 같으며 가사리마을은 낙동강 가가 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말골마을은 조선시대에 말을 길렀던 곳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다.
벙갈미마을은 범이 숨어있던 곳이라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며 유정마을은 버드나무 샘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곳 새띠고개는 찾아보니 의성군이 아닌 상주군으로서 낙동강 변이 모두 상주군에 포함되어 있어 처음에는 자료를 찾는데 애를 먹었다.
그 새띠고개에서 잠시 쉬면서 추억을 만들고 이제부터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좌측으로 갈어 내려가니 저 아래 산친구의 차량이 보이고 그곳에서 배낭 정리 후 차량을 이용해 위천과 낙동강이 만나고 위천 건너서는 보현지맥의 마지막 산줄기가 사라지는 강가로 이동을 해 길고도 멀었던 팔공기맥 또는 위천북기맥이라 불려지는 산줄기 이어가는 산행에 대한 대단원의 막을 내려 본다.
낙동강은 유로연장 521.5 Km이고 유역면적은 23817 Km2으로 압록강 다음가는 한국 제2의 강으로 강원 태백 함백산(1573미터)에서 발원하여 상류부에서는 안동을 중심으로 반변천을 비롯한 여러 지류를 합치면서 서쪽으로 곡류하다가 함창 부근에서 다시 내성천 영강 등 여러 지류를 구심상으로 받아들이고 유로를 남쪽으로 돌려 상주 남쪽에서 위천을 그리고 선산 부근에서 감천을 대구 부근에서 금호강을 그리고 남지 부근에서 남강을 합친 뒤 동쪽으로 유로를 바꾸어 삼랑진 부근에서 밀양강을 합치고 나서 다시 남쪽으로 흘러 남해로 들어간다.
낙동강은 가락국(또는 가야)의 동쪽을 흐르는 강을 의미하는데 옛날 가야의 터전이었던 경북의 고령과 상주, 선산, 경남의 합천, 의령, 함안, 고성 지방은 모두 낙동강의 서쪽 지역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들 지역에서 보면 낙동강은 동쪽 편에 위치한다.
고려시대 때 편찬된 삼국유사에는 낙동강을 황산진 또는 가야진으로 표기했으나 조선 초기의 역사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에는 낙동강을 낙수 혹은 낙동강이라고 썼는데 이 책에는 낙동강은 상주의 동쪽 36리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18세기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에도 낙동강은 상주의 동쪽을 말함이다라고 적고 있고 이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낙동강이란 이름이 표시되고 있어서 오늘날과 같은 낙동강의 이름은 조선 초기부터 사용됐다고 볼 수 있다.
위천 강변에 서서 그 물로 세수를 하고 낙동강과 합류되는 합수점을 배경으로 사진 한장 남기는 시간은 가슴이 뭉클함을 느낀다.
이제 남아있는 진양기맥 두구간만 마무리를 하면 신산경표에서 언급된 9기맥 산행도 마무리가 되기에 조만간 내려가 완주를 해야 되겠다는 다짐도 해 본다.
위천은 경상북도 군위군의 고로면, 의흥면, 군위읍에 있는 하천으로 고로면 학암리와 낙전리에 있는 화산에서 발원하여 고로면, 산성면, 의흥면을 경유한 후 효령면 병수리에서 남천을 합하여 병천이 되고 북쪽으로 꺾여 군위읍과 의성군 단밀면 부근을 지나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에서 낙동강으로 합류한다.
구체적인 유로를 한국지명총람의 위천, 위수, 금천, 병천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이칭인 위수, 금천, 병천도 기록되어 있다.
위천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에 상류 유역을 남천으로 중상류를 병천으로 기록하고 통용하였으며 병천의 하류 부근에 한해 위천으로 불렀으며 이후 위천이라는 하류의 유역명이 상류로 확대되어 통칭되어 왔다.
우선 병천이라는 지명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군위에 병천은 현 남쪽 11리에 있는데 의흥현의 남천 및 부계현의 남천이 합쳐서 하나의 개울이 된 것이므로 붙은 이름으로 현 서쪽을 지나 북쪽으로 가서 비안현의 남천이 된다라는 기록으로 병천이 처음 등장한다.
유사한 기록이 여지도서의 군위에 나타나며 같은 문헌의 교량조에는 병천교라는 다리 이름도 확인되며 이후 표기자의 변화 없이 해동지도의 군위와 대동여지도에 병천이 기록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의 상주목 단밀현 부근에 위수가 표기되어 있어 병천의 하류 부근 명칭으로 위수와 위천이 등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872년지방지도의 군위의 군위 읍내 남쪽 부근의 하천에 병천교가 표기되어 있어 다리 명칭과 함께 한자의 병이 다른 의미의 병으로 표기자가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지지자료의 군위에도 병천이 중리면 관동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같은 문헌의 의흥군 하리면 천계명에 금과 한글로 금기가 병기되어 있는 것을 통해 병천의 이칭인 금계와 그 고유지명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선지지자료의 의성의 기록을 통해 의성군을 흐르는 병천 하류의 유역명으로 위수와 위천, 위수강, 위수천 등 다양한 이칭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위천의 중류 유역에는 한국지명총람에 병수동(위천과 남천이 마을 앞에 흐르므로 병수동이라 하며)이라는 기록이 있어 병천에서 파생된 촌락 지명으로서의 병수동을 확인할 수 있다.
팔공기맥 산행을 마무리하고 산친구의 차량으로 안계면으로 들어가 오래된 낡은 목욕탕에서 어렵게 샤워를 하고 나와 근처의 돼지고개 갈비집에서 오랫만에 소맥으로 자축을 하면서 팔공기맥 산행에 대한 마무리를 해 본다.
생각보다 저렴하고 맛있는 저멱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잠시 낙단보에 들려 마지막 추억을 남겨 본다.
낙단보는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낙정리에 있는 낙동강 유역의 저수 시설로 낙단보는 총 사업비 13조 9000억 원을 투입해 2009년부터 시작된 4대강 살리기 사업의 일환으로 낙동강에 조성된 8개 보(수리 시설의 하나로 둑을 쌓아 흐르는 냇물을 막고 그 물을 담아 두는 곳) 중 상류 2번째에 위치한 보이다.
낙동강 살리기 사업 제32공구(구미와 상주 및 의성) 사업의 하나로 2009년 11월 23일 국토 해양부 고시 제2009-1117호에 따라 건립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낙단보의 경관은 자연은 이롭게 사람들은 즐거운 생명이 유익한 생태 환경 조성이라는 주제의 이락지천을 콘셉트로 설계되었다.
외형은 낙동강 3대 정자 중 하나인 관수루의 처마를 모방하여 경상북도 의성군, 경상북도 상주시, 경상북도 구미시 세 지역의 자연과 역사 및 문화가 융합되고 사람이 어우러지는 전통적인 이미지를 연출하도록 했다.
한편 2010년 10월 14일 발파 공사 중 의성군 단밀면 생송리 낙단보 전망대 건립 예정지 자리에서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애 보살 좌상이 발견됨으로써 공사가 일시 중단되었다가 마애보살 좌상을 보존하기 위해 설계가 변경되었다.
2011년 2월 16일 전력 제어실과 문화관을 준공했으며 2011년 11월 12일 오후 1시 개방 축제 행사를 개최함으로써 일반에 공개되었다.
낙단보 바로 옆에 있는 의성 생송리 마애보살좌상을 만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모두 마무리 하고 산친구가 운전을 하는 SUV 차량에 탑승을 해 잠을 자다 일어나 보니 벌써 여주를 지나 영동고속도로를 지니고 있다.
경상북도 의성 생송리 마애보살좌상은 낙동강을 마주하고 조성된 고려 전기에 제작된 상으로 머리에는 삼산형의 연화보관을 쓰고 두 손으로 연꽃을 잡고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마애보살좌상이다.
이 마애보살좌상은 부산지방국토관리청이 시행하고 있는 낙동강 살리기 제32공구 낙단보를 관리하기 위한 시설인 통합관리센터 부지를 조성하던 중 발견되었는데 이 상은 가로 폭이 다소 넓은 편평한 바위 면(550×400)에 얕은 부조로 새긴 보살좌상으로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으며 오른 손으로 꽃을 잡고 활짝 핀 연꽃 대좌 위에 앉은 모습이다.
보관은 3개의 꽃잎이 피어나듯 표현한 삼산형의 연화보관 형태이며 보관의 표면에는 아무런 표식과 장식이 없고 보관 아래로는 동글동글한 보발이 어깨 위로는 길게 드리워진 보발자락을 표현되었다.
이러한 보발표현은 936년경의 논산 개태사지 석조보살입상에서도 확인되고 한편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갖추었으며 곳곳에 쪼아 내다 그만 둔 흔적이 보이며 두광 좌측 편에도 새기다 만 화염이 확인된다.
2겹의 원으로 두·신광을 의도하고 그 주변을 화염으로 처리하려고 한 것은 하남 교산리 마애여래입상이나 고령 개포동 석조보살좌상의 광배와도 비교된다.
턱선을 네모나게 굴린 방형의 얼굴에는 이목구비를 도드라지게 표현하였으며 특히 돌출된 이마와 눈꼬리 쪽으로 축 처진 눈썹, 버들잎 모양의 긴 눈, 방형의 낮은 코, 도톰하게 처리한 입술 등에서 인간미가 넘쳐난다.
목에는 2겹 반원형의 독특한 삼도가 표현되었으며 수인은 오른손으로 연꽃줄기를 잡고 있는데 연 줄기는 위로 올라가면서 연잎 부근에서 다시 두 가닥으로 갈라져 아래쪽에는 연봉이 위쪽에는 만개한 연꽃이 표현되었다.
불신에는 옷 주름을 표현하지 않았고 신체에 비해 팔은 왜소하게 처리하였으며 지물을 잡은 오른손은 사실적이고 섬려하게 표현한 반면 왼손은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으로 표현하였다.
어깨 폭에 비해 무릎 폭은 다소 좁은 편이며 왼발 위를 오른 발이 포갠 길상좌를 보여주고 연화좌는 중앙의 보주형의 연꽃잎을 중심으로 좌우로 펼쳤으나 생동감이 떨어져 도식적이다.
이 마애보살좌상에 보이는 삼산형의 보관, 도드라지게 표현한 눈과 코 및 입 등에서 살펴지는 개성 있는 상호, 뼈대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연약하게 처리한 팔의 곡선, 의도된 듯 과감하게 생략한 착의형식 그리고 평면적이면서도 도식적인 연화대좌, 원형의 두, 신광의 표현, 쪼아낸 조각 수법 등은 977년(고려, 경종 2) 중수의 경기도 하남 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보물 제981호) 이나 985년(고려, 성종 4)의 고령 개포동 마애보살좌상(경북 유형문화재 제118호), 동화사 염불암 마애보살유희좌상(대구시 유형문화재 제14호) 등과 양식적으로 상통한다.
이 마애보살상은 비록 세부의 표현에서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지물을 잡은 손의 형태라든가 얼굴의 네모난 윤곽 등에서 981년(고려, 경종 6)에 조성된 이천 장암리 마애보살좌상(보물 제982)이나 평양 영명사 미륵보살좌상, 대구 동화사 염불암 마애보살상과 모든 면에서 유사해서 이 보살상도 장암리 마애보살상과 비슷한 시기인 10세기 후반이나 늦어도 11세기 초반에는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생송리 마애불상군과 같이 강을 바라보는 절벽에 새겨진 마애불로는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충주 봉황리 마애불상군, 산청 도전리 마애불상군, 여주 계신리 마애여래입상, 충주 창동리 마애여래입상 등이 있다.
이러한 불상들이 조성된 곳은 오랜 시간 동안 주요 교통로로 이용되어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곳이며 삶의 터전인 강을 따라 펼쳐진 나지막한 구릉의 절벽은 당시 불교문화와 예로부터 전해지는 산악숭배신앙이 융합된 장소로서 그 지역민들의 공덕신앙을 표출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즉 예로부터 신성시되던 이곳에 불상을 새겨 마을의 수호와 강을 건너 왕래하던 그들의 안전과 수명장수를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이 마애보살상은 오랜 세월 땅속에 매몰되어 있어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이나 이천 장암리 마애보살반가상 및 대구 염불암 마애보살좌상 등 고려 전기에 새롭게 등장하는 양식과 도상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될 뿐만 아니라 낙동강변에 위치하여 고려 전기의 수운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불상이다.
경부고속도로 달래네고개에서부터 막히는 도로를 따라 신양재터널로 나가 선바위역에서 지하철을 이용해 안전하게집으로 복귀를 하니 채 9시도 넘기지 않은 이른 시간이다.
이제 9기맥도 마무리를 하였으니 남아있는 지맥 산행을 즐기며 조금은 여유있는 산행이 되기를 바래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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