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맥산행(완료)/낙동정맥(완료)

낙동정맥 제9구간 피나무재에서 황장재까지 산행후기

칠갑산 사랑 2014. 5. 19.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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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경상북도 청송군과 영덕군의 낙동정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 2014년 05월 17일과 18일 (토요 무박 일요일 산행)

산행날씨 : 맑고 화창했지만 한낮엔 무더위를 느꼈던 날씨

산행온도 : 영상 13도에서 영상 25도

산행인원 : 3450온누리산악회 제2기 낙동정맥 종주대 16명과 함께

산행코스 : 피나무재(914번 2차선 지방도로)-폐헬기장-통천문-별바위(745.4봉)-전망바위-주산재-신술리 갈림 삼거리-움막터-문인석-돌탑안부-

                   경주이씨묘-초원등로-헬기장(798봉)-바위너덜구간-갓바위 전망대-제단바위-대관령-3층바위-안전목책구간-왕거암 갈림삼거리-

                   왕거암(907.4봉)-왕거암 갈림 삼거리 복귀-느즈매기(느지미재)-폐헬기장-명동재(헬기장, 875봉)-먹구등(벅구등, 폐헬기장, 846.4봉)-두고개-

                   암릉지대-통천문-732.6봉 삼각점-849봉-너덜구간-799.7봉-대둔산 갈림 삼거리-대둔산(905봉)-대둔산 갈림 삼거리 복귀-낙엽송지대-

                   출입금지 안내판-묘지-송이채취구역출입금지 플랭카드-바위지대-이정표(먹구등 5.2 Km, 황장재 3.7 Km)-고사목-이정표(먹구등 5.8 Km,

                   황장재 3.1 Km)-이장묘지-갈평재 이정표(먹구등 6.8 Km, 황장재 2.1 Km, 갈평동 2.4 Km, 안하곡 1.8 Km)-묘지2기-묘지1기-묘지1기-

                   소나무 군락지-묘지1기-콘크리트 교통호-황장재(34번 2차선 지방도로)-산행종료-명궁약수가든(청송군 진보면 달기약수 식당)

산행거리 : 약 26.70 Km (스마트 폰 GPS 산행 거리 기준)

산행시간많은 사진 찍고 여유롭게 그러나 꾸준한 속도로 11시간 35분 (03시 25분부터 15:00분까지)

교통편 : 낙동정맥 제2기 30인승 전용버스 이용 

낙동정맥이란 ???

낙동강의 동쪽을 따르는 산줄기로 동해바다를 가르는 한반도 동해안 지방의 담장이다.

백두산에서 남으로 힘차게 뻗어내려 금강산과 설악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내려가는 백두대간 마루금이 천의봉(매봉산,1303봉)으로 솟아 오르기 전 1145봉 직전에서 남동쪽으로 분기하여 태백 백병산(1259봉), 통고산(1067봉), 울진 백암산(1004봉), 청송 주왕산(720봉), 경주 덕석산(829봉), 울산 가지산(1240봉), 신불산(1209봉), 부산 금정산(802봉)을 지나 백양산(642봉)을 넘어 낙동간 하구인 다대포 몰운대에서 끝나는 약 397 Km의 산줄기를 낙동정맥이라 한다.

낙동정맥 중에서 최고봉은 태백의 백병산으로 그 높이는 1259미터이다.

 

 

오지의 아름다운 마루금을 걸으며 주왕의 전설이 깃든 주왕산을 생각했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후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단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올라 걷고 싶은 마루금은 많고 시간과 몸은 한정되어 있으니 어디로 가야할지 괜시리 행복한 고민에 빠져 버리는 시간이지만 그래도 몇년 전 하루종일 장대비를 맞으며 아름다운 주왕산을 보지 못했던 낙동정맥 주왕산 구간을 온누리 낙동정맥 종주대와 함께 다시 한번 걸어 보기로 결정을 한다.

온누리산악회가 안정되면서 홀로하는 산행보다는 오랫동안 산친구들과 함께 전국을 걸었던 옛 시절로 되돌아가 즐기는 시간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지만 진행하던 마루금 잇기 산행은 또 언제 오를 수 있을지 약간 걱정도 되는 시간이다.

느긋하게 토요일 하루를 집에서 마음 편히 쉰 후 밤 늦게 배낭 메고 사당역으로 나가니 벌써 출발지에 도착한 많은 종주대가 반갑게 맞이해 주고 잠시 산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새 출발시간이다. 

한동안 무박산행을 중단하고 당일 산행이나 홀로하는 산행을 즐기다 보니 조금은 낯설고 불편해 깊은 잠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쪽잠으로 하룻밤을 보내고 어렵게 새벽 일찍 산행 들머리인 피나무재에 도착해 비에 흠뻑 젖어 생쥐꼴이 되였던 옛 추억을 떠올려 보는 시간이다.

 

원래 낙동정맥 종주대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진행하고 있지만 이곳 황장재에서 피나무재까지는 2017년까지 출입금지로 막혀있어 단속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부득이 남에서 북으로 꺼꾸로 산행을 계획하고 준비를 하는 시간이다.

범법자라면 범법자 신세이지만 왜 이런 구간이 출입금지 구역으로 묶여야 하는지 아쉬움을 뒤로하고 부드러운 등로를 따라 어둠속에 진행해 어렵게 가파른 오르막 된비알을 타고 별바위봉에 오르니 생각지도 못했던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하면서 너무나 아름다운 일출이 두꺼운 구름을 뚫고 올라온다.

이제부터 걸어야 할 주산재 방향의 마루금 넘어 저 멀리 동쪽의 내연산 북쪽 줄기를 이루고 있는 동대산과 바대산 줄기 위로 떠오르는 아침 둥근해가 이 산객의 가슴속으로 들어 와 자리하며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고귀한 선물을 선사하는 이 광경이 보고 싶어 그 고생을 하면서도 무박산행을 고집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떠오르는 저 태양처럼 오늘 우리 종주대의 앞길에도 밝은 희망과 무탈한 산행이 이뤄지길 마음속으로 빌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3년 전 7월 초순에 온누리 낙동정맥 종주대와 함께 황장재에 도착해 어둠속에 산행을 시작하니 채 한시간도 지나기 전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하루종일 장대비를 맞으며 아름다운 주위 조망 한번 구경하지 못한 채 그저 낙동정맥 한구간 무탈하게 걸었다는데 만족을 했던 구간이기에 오늘은 낙동정맥 종주대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옛 추억을 꺼내보는 시간으로 만들어 볼 계획이다.

저 출입금지 플랭카드는 옛날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크게 새로 걸어 놨지만 그렇다고 산을 훼손하며 걸어 갈 종주대는 없기에 단체사진 한장 남기고 범법자의 신세가 되어 어둠을 뚫고 조심스레 첫발걸음을 옮겨 보는 시간이다.

피나무재는 주왕산(721)을 비롯하여 무포산(718)과 무장산(641)이 속해 있는 경북 청송군 동부의 부동면에서 이어지던 914 2차선 지방도로가 내룡리와 봉산리를 거쳐 영덕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인데 이름과는 달리 피나무 자체는 보이지 않는 2차선 지방도로의 고개이다.

 

능선으로 들어 마루금을 따르니 등로엔 깊은 낙엽이 깔려있고 그 낙엽 위로 파란 활엽수 잎새가 자라면서 봄을 지나 성하의 계절로 달리고 있음을 몸으로 알려주지만 종주대가 지나는 발걸음마다 낙엽속에 숨어있던 먼지가 비산하며 산행에 약간의 지장을 주고 있다.

그래도 어둠속에 말라있는 낙염이 사각거리며 고요함을 깨우는 마루금은 깨어있는 자의 전유물이 되어 또 다른 세상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한동안 부드러운 등로를 타고 올랐다 내리기를 몇번하고 나니 갑자기 등로 우측에 거대한 암릉이 나타나고 어둠속에서도 그 바위가 보고 싶어 사진으로 남겨 보지만 아쉬움만 가득한 시간이다.

 

그 바위 구간을 좌측 사면 등로를 따라 우회하며 넘으니 무명봉에 도착하고 잠시 흐르는 땀방울 닦으며 자켓을 정리하는 시간도 가져 본다.

다시 약간의 바위들이 산재한 등로를 타고 오르막 등로를 오르니 산행 시작 후 한시간을 넘겨 첫번째 넓은 헬기장에 도착을 하지만 이곳 역시 관리가 안되어 폐헬기장으로 변해가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위를 둘러 보지만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고 하늘에 떠 있는 상현달만이 종주대의 앞길에 희미한 빛을 선사하고 있다.

3년 전 진행했던 사진을 찾아 보니 강한 빗줄기 사이로 이곳 사진 한장이 보이지만 빗방울 때문에 분간조차 하기 힘든 일반 등로처럼 보이긴 오늘과 마찬가지이다.

 

                             

헬기장을 지나면서 부터는 일부러 제일 후미로 빠져 혹시나 벌바위봉에서 일출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천천히 걸으며 자연을 음미해 보는 시간으로 채워본다.

어둠속에서도 등로엔 파란 목초지를 연상시키는 풀들이 자라 편안한 등로를 만들고 하늘 높이 떠 있는 상현달이 그림자처럼 따라오지만 어둠을 완전히 밝혀주기엔 너무 이른시간이다.

다시 바위봉 ㅎ나를 넘어 등로 좌측의 청송군 부동면 이전리 방향에 유령처럼 떠 있는 불빛을 담아 보지만 역시 똑딱이 카메라로는 제한적으로 보이질 않는다.

다시 두번째 폐헬기장으로 변해가는 공터를 지나 잠시 나무숲을 통과하니 등로 우측으로 거대한 암릉군이 나타나고 그 좌측 미끄러운 오르막 된비알을 타고 비지땀을 흘리니 드디어 통천문에 도착해 배낭 내려 놓고 추억 하나씩 만들어 보는 시간이다.

하늘로 통하는 문이라는 뜻의 통천문은 유명세를 타고 있는 전국 대부분의 산에는 하나씩 존재하는 바위문이지만 이곳을 직접 통과하는 문이 아니기에 조금은 아쉬움이 남아 있는 통천문이다.

 

통천문을 지나 다시 가파른 된비알 치고 오르니 우측으로 거대한 바위 하나가 올려다 보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선두대장과 그 방향으로 올라보니 도저히 오를 수 없는 바위봉우리이고 벌바위봉은 좌측 등로 위에 절벽을 이루며 봄으로도 당당히 서 있다.

그 벌바위봉으로 어렵게 올라 내려다 보는 주산지와 그 아래로 펼쳐진 부동면 이전리마을 그리고 끝없이 이어진 산그리메가 또 한장의 추억을 만들며 종주대의 가슴속에 남겨지는 시간이다.

서쪽으로는 오래 전 한번 들려 그 아름다움에 빠졌던 주왕산 한 편에 있는 약 300여년의 세월이 전해지는 저수지 주산지가 있는데 깊은 주왕산 자락을 따라 물을 모아 만든 주산지 한가운데는 머리카락을 바람에 살랑이고 있는 굵은 왕버드 나무들도 있다.

주산지는 조선 경종 원년1720 8월에 착공하여 이듬해에 완공한 농업용 저수지로서 길이 100 m, 너비 50 m, 평균 수심 7.8 m의 조그만 산중 호수라고 말할 수도 있으며 이 아름다운 호수는 오랜 역사 동안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바닥을 한 번도 드러낸 적이 없는 농민들이 믿고 의지하던 저수지 이었다.

주산지는 이전리 마을에서 약3㎞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주왕산 영봉에서 뻗어 나온 울창한 수림에 둘러싸여 한적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가을 단풍이 물들면 용이 승천한다는 주왕산 별바위가 왼편에서 지켜보고 있고 파란 하늘과 울창한 숲의 주산지 경치는 그야말로 자연만이 만들 수 있는 세상의 유일한 창조물이 아닐까 하며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붕어의 퍼드덕거림과 산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버들나무를 쓸어내리는 소리는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어 평화로움을 가져다 줘 주산지에 있노라면 세상살이는 잠시 잊고 신선이 된 듯한 느낌이 드는가 보다.

주산지의 가장 아름다운 배경은 바로 30여 그루의 왕버들 고목이 물에 잠긴 채 자생하고 있는 모습으로 국내 30여종의 버드나무 중 가장 으뜸으로 꼽히는 왕버들은 숲 속에서 다른 나무와 경쟁치 않고 아예 호숫가를 비롯한 물 많은 곳을 택해 자란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다른 나무의 자생 속도 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성장한 뒤 수백 년간을 자연에 의지하는 듯 유유한 모습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왕버들을 보면서 인생을 바라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 본다.

주산지는 내안쪽과 바깥쪽이 공존하는 듯한 공간이라는 느낌을 가져다 주어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촬영지 이기도 하다. 

 

북서쪽으로는 선두 그룹이 약간 알바를 경험한 이전리 방향의 산줄기가 저 멀리 주왕산 주능선과 오버랩되며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부일리와 하의리 사이를 나누는 큰 산줄기 하나가 앞으로 흐르고 그 뒷쪽 저 멀리 뾰족하게 주왕산 주봉이 보이면서 우측으로 가메봉과 오늘 이 종주대가 올라야 할 왕거암이 우측 끝자라게 펼쳐져 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주왕산의 산그리메에 다시 한번 옛추억을 떠올리며 아직도 가슴속 깊이 남아 있는 절경의 주왕산 단풍과 주왕에 대한 전설을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우뚝 솟아오른 기암괴석과 깎아지른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일대 장관인 주왕산(720.6)은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도 인문지리서 택리지에서 주왕산을 일러 모두 돌로써 골짜기 동네를 이뤄 마음과 눈을 놀라게 하는 산이라고 평했다.
거대 암릉군이 지상으로 노출되면서 오랫동안 절리와 차별침식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춘 주왕산의 원래 이름은 석병산이었는데 이는 수 백미터의 돌덩이가 병풍처럼 도열해 있다는 의미이다.
주왕산으로 바뀐 건 신라 때부터 구전돼 온 주왕의 전설 때문으로 마치 단풍이 아름다운 적악산이 꿩의 보은 설화로 인해 꿩 치자로 대체된 치악산으로 변했듯이 같은 연유 때문이다.
주왕의 전설은 당나라 때 후주천왕을 자처하며 군사를 일으킨 주왕이 실패하자 멀리 이곳 석병산으로 피신하였고 이에 당이 신라에 주왕을 잡아달라고 요청하자 신라는 마장군의 형제들을 필두로 진압군을 이곳 석병산으로 보내 주왕과 그의 군사들을 격퇴시켰는데 요즘으로 치자면 실패한 혁명가의 한이 서린 산이다.
전설의 산답게 기암괴석 동굴 사찰 할 것 없이 곳곳에는 주왕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대표적으로 대전사 주왕암 주왕굴 무장굴 등이 있다..
또 다른 명소들은 주방천을 따라 펼쳐지는 3개의 폭포인데 하나같이 모양이 특이한데다 주변 경관이 빼어날 뿐만 아니라 울긋불긋 단풍까지 더해지면 가히 천하절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남동쪽으로는 주산재에서 탈출할 수 있는 양설령 지나 저 멀리 내연산 줄기를 이루고 있는 산군들이 춤을 추며 옛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지만 귓전에는 그저 오늘 이곳에서 만나는 환상의 조망에 모두 묻혀버리는 느낌이다.

좋은 산친구들과 내연산 전체를 한바퀴 돌아 나온 후 바닷가에서 맛난 회한접사 앞에 두고 끝없이 이어졌던 산이야기는 이미 오래전 과거로 되돌아가 그 친구들의 얼굴조차 희미해져 가는 아쉬움이 남아 있기에 더욱 아련하게 다가오는 산줄기들이다.

내연산(710봉)은 바위 하나 볼 수 없는 육산으로 정상은 삼지봉인데 주능선은 완만하고 참나무 숲이며 12폭포골 또는 보경사계곡이라고도 불려지는 청하골은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계곡미가 빼어난데다 12개의 폭포가 이어져 절경을 뽐낸다.

십리가 넘는 청하골은 관음폭포, 연산폭포, 쌍생폭포와 은폭포 등 크고 작은 수많은 소와 협암, 기와대, 선일대, 비하대와 학소대 등의 기암절벽이 어울려 절경을 이루고 있다.

1폭포 쌍생폭(상생폭), 제2폭포 보현폭, 제3폭포 삼보폭, 제4폭포 잠룡폭, 제5폭포 무풍폭을 거쳐 제6폭인 관음폭과 제7폭포 연산폭 일대가 경관이 수려하다. 쌍폭인 관음폭은 쌍굴인 관음굴, 폭포 위로 걸린 연산구름다리, 층암절벽과 어우러져 환상적이며 연산적교를 건너면 높이 20미터의 연산폭이 학소대 암벽을 타고 힘찬 물줄기를 쏟아 내린다.

내연산은 여름산행지로 적격인데 산과 계곡 그리고 바다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여름등산의 3박자를 고루 갖춘 산행지다.

단풍이 들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을 울렁이게 한다는 내연산, 10월 하순에 절정을 이루고 활엽수가 많아 11월 초순에는 낙엽산행으로 적기인데 그때가면 능선에는 낙엽이 계곡에는 단풍이 남아 있다.

 

남서쪽으로는 외롭게 서 있는 소나무 한그루 뒤로 방금 전 종주대가 힘들게 올라온 바위암릉이 보이고 그 바위 지나 걸어 온 마루금이 펼쳐져 있지만 그 마루금은 소나무 뒤에 숨어 잘 보이지 않는다.

마루금 우측으로 이름도 갖지 못한 산줄기이지만 너무나 아름답게 이어지며 우측 주산지 방향을 감싸며 내려가는 풍경이 황홀하기만 하다.

그 뒤 저 멀리 조만간 올라야 할 보현지맥의 산줄기들이 어서오라 손짓하며 이 산객의 가슴에 또 다른 의욕을 돋구고 있다.

그 산줄기 좌측으로 보여야 할 낙동정맥 마루금을 찾아 보지만 생각보다 박무가 있어 잘 보이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미 종주대들은 모두 벌바위봉을 출발해 마루금으로 복귀하며 짧은 알바를 하고 뒤돌아 와 동쪽으로 나 있는 정상 등로를 타고 진행해 간다.

잠시 두명의 종주대와 제일 후미에 남아 아쉬운 일출을 더 감상한 후 마지막으로 이제부터 걸어 가야 할 정북쪽의 낙동정맥 마루금을 살펴 본다.

798봉과 갓바위봉 갈림길 그리고 저 멀리 왕거암에서 좌측으로 흐르는 가메봉과 주왕산 주봉이 아름다운 산줄기를 만들며 다시 해우하는 산객을 반갑게 맞이해 주는 듯 다가와 있다.

청송군과 영덕군을 가르며 봄으로도 당당하게 펼쳐진 낙동의 마루금을 바라보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는 시간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이제 벌바위봉 정상에서 잠시 내려 와 정상 이정판을 사진에 담고 다시 한번 삼각점도 사진에 남긴 후 발걸음을 옮기니 조금 더 세상을 향해 올라온 아침 해가 다시 한번 산객의 발길을 붙잡고 놔 주질 않는다.

몇 년 전 고운 추억을 남겼던 내연산과 동대산 산줄기 위로 솟아 올라온 태양이 더욱 넓게 세상을 밝히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이 산객의 가슴에도 또 다른 태양 하나가 남겨지는 시간이다.

이 시간 어떤 사람은 벌써 잠에서 깨어 치열하게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겠지만 또 누군가는 느긋하게 일요일 아침을 창가에서 맞이하고 있을 것이다.

이 산객은 어디에서 무엇을 맞이하기 위해 달려왔으며 또 어떤 삶을 살아 가야하는지에 대한 짧은 생각을 정리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제 별바위봉을 출발해 정동 방향으로 걸어가니 급경사 내리막 등로에 깊은 낙엽이 깔려 여간 조심스럽지 않고 천천히 그 내리막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잠시 평이한 등로가 열리더니 등로 우측으로 바위 하나가 눈에 들어 온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바위 위로 오르니 방금 전 별천지의 또 다른 세상을 만끽했던 별바위봉의 절벽과 오늘 새벽 어둠을 뚫고 어렵게 걸어 올라 온 낙동 마루금이 좌측으로 아침 햇살을 받으며 너무나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몇장의 사진으로 그 헤어지는 아쉬움을 달래고 다시 종주대 후미를 따라 열심히 걸어 보는 아침 시간이다.

 

그 전망바위를 내려 와 잠시 더 평이한 등로를 따라 진행하니 금새 좁은 공터가 나타나는데 이곳에서 등로는 좌측으로 크게 꺽여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고 있어 살펴보니 처음에는 이곳이 주산재가 아닐까 생각을 하였는데 우측 우설령으로 하산하는 등로가 보이지 않아 주산재 가기 직전의 무명 공터였다.

우측 아래로는 영덕 달산면의 봉산리가 자리하고 있는 전형적인 살골 마을이 있다.

봉산리의 유래는 봉동의 봉자와 주산동의 산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 마을은 16세기초에 울진임씨가 마을을 개척했다 하며 그 뒤 함안조씨가 입주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서면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일제가 자의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 할 때 봉전동과 주산동 산성, 굴암을 병합하여 달산면에 편입하였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봉산리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봉산리의 위치는 동쪽은 주응리와 서쪽는 청송군 부동면 주왕산 국립공원 그리고 남쪽은 부동면 항리와 군계를 이루고 북쪽은 지품면과 면경계를 이루고 있다.

마을로는 주산 서쪽에 있는 마을로 굴이 뚫린 바위가 있다는 굴암과 봉산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일명 봉전동이라고도 하는 봉동 그리고 봉동 남서쪽에 있는 마을인 주산이가 존재하는 마을이다.

 

그 공터를 지나 꽃이 지고 파란 잎새만 무성한 철쭉 터널을 타고 걸어가니 금새 사거리 안부에 도착을 하는데 살펴보니 우측의 우설령 하산 등로 뿐만 아니라 좌측의 하산 등로에도 많은 띠지들이 붙어 있어 잠시 헷깔리는 안부였다.

처음에는 앞에서 만났던 공터가 주산재라 생각을 했는데 이곳에 와 보니 이곳이 바로 주산재가 아닐까 생각되는 사거리 안부이다.

가끔 종주대들이 출입금지 구역을 진행하다 피나무재에서 단속이 심하면 우측 봉산리 방향의 양설령 방향으로 탈출하는 탈출로로 이용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 주산재 일명 별바위재는 영덕과 청송을 연결하는 유일한 재로 당시 영덕의 수산물과 청송의 농산물을 지게에 담아지고 많은 사람들이 넘나들었던 고개로서 또한 이 재로 향하는 골이름이 설티골인데 이를 보아 양설령에 대한 지명유래는 잘 나타나 있지는 않자만 눈과 고개의 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우측으로 내려가면 만나는 도로가 바로 우설령인데 양설령이라고 불려지고 그 유래는 양설령의 한자 양자가 우자로 오기되어 비우자를 따 우설령으로 표기된 것이라는 설이 있는 고개이다.

이곳은 달산면 봉산리와 청송군 부동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역이고 원래 주산리 라고 불렸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봉산동이라 편입된 곳이라 전해진다.

 

주산재를 지나 계속 이어지는 철쭉 터널을 타고 걸어가니 돌무덤으로 이뤄진 무명봉을 두어개 넘어 자연 성벽을 이루고 있는 커다란 바위담을 지나간다.

좌측에 성벽같은 바위를 두고 우측 등로로 내려가니 다시 짧은 바위 너덜구간을 통과하고 이제 아침 햇살이 나뭇가지를 뚫고 등로까지 들어 오는 상쾌한 아침을 맞이한다.

계속 이어지는 멋진 철쭉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등로 좌측 나뭇잎 사이로 올라야 할 798봉이 머리를 내밀고 그 좌측으로 622봉이 삐쭉 고개를 내밀며 따스한 아침 햇살을 맞이하고 있다.

너무나 싱그러운 5월 햇살과 그 햇살을 받아 더욱 신선하게 다가오는 자연을 마음껏 즐기는 종주대의 발걸음이 함께하는 시간이다.

 

이제 가끔씩 나타나는 소나무와 철쭉 터널이 혼재된 등로를 따라 부드럽게 전진하니 거의 모든 소나무엔 송진을 채취하기 위해 상처를 냈던 흔적들이 산객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렇게 또 생채기가 난 몸을 자연 치유해 건강한 숲을 만들어 가는 자연에서 작은 인간의 삶을 뒤돌아 보는 시간도 가져 본다.

잠시 더 진행하니 봉분도 보이지 않는 넓은 공터에 이씨를 기리는 비석 하나가 덩그런히 서 있고 그 묘지 위로 돌아 진행하니 우측에 무명봉을 두고 좌측 사면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잠시 오르막 등로를 따라 오르니 바위지대를 지나 드넓은 초원의 목초지처럼 아름답게 펼쳐진 초원 등로가 나타나고 푸른 비단을 따라 무념으로 걷다보니 그 ㅊ원 우측 넓은 자리에 선두가 아침상을 차리고 있다.

하지만 그 아침상 때문에 등로 좌측에 있는 종정대부의 묘지 앞 비석과 문인석을 담지 못하였는데 뒤에 오는 산우님이 잘 담아 줬기에 하나 빌려 온다.

하지만 종정대부 비석과 문인석 2기가 있는 곳을 아무리 살펴봐도 묘지같은 느낌이 없는데 이장을 한 것인지 아니면 묘는 쓰지 않고 비석과 문인석만 세워 둔 것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맛난 아침 식사를 하고 난 이후부터는 자유 산행이라는데 이 산객에게는 큰 의미가 없기에 함께하면서도 약간 거리를 두고 홀로 산행하듯 걸어 보는 시간이다.

너무나 아름다운 초원 등로를 따라 걸어가는 시간은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는듯 아니면 꿈을 꾸고 있는듯 그저 황홀경에 빠졌던 시간으로 기억된다.

약간의 미풍이 있어 저 가냘픈 풀들이 춤이라도 추웠으면 더욱 환상이였겠지만 날씨가 좋아 따뜻한 햇살이 들어 와 푸른 초원을 비추는 풍경만으로도 충분한 힐링 뿐만 아니고 잠도 못자고 피곤이 밀려오는 종주대의 신체에 건강을 채워주기에 필요 충분한 조건을 전해주는 등로이다.

 

계속 이어지는 초원 등로 위에 드문드문 서 있는 갈참나무가 더욱 멋진 풍경과 추억으로 남겨지고 잠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따라 오르는 시간에도 여전히 발끝에는 푸르름이 절정을 이루는 초원지대가 펼쳐져 있다.

그저 치열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잠시 비워두고 나무와 풀과 돌 그리고 햇살이 비춰주는 이곳에 남아 한동안 지낼 수 있다면 어떨까 생각도 해 봤던 시간이지만 너무나 많은 제약이 따르기에 아쉬울 따름이다.

고개 하나를 넘어 다시 내려가니 초원이 사라지고 안부에는 작은 돌탑 하나가 서 있다.

낙동정맥 산행을 하던 선답자들이 하나 둘 돌을 올려 놓으며 가정과 오늘의 무사 산행을 빌었던 돌탑이 아닐까 생각하며 사진 한장 담으며 이 산객도 안전 산행을 빌어 보는 시간이다.

 

돌탑을 지나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따라 오르니 등로 옆에 다시 묘지 한기가 보이고 금새 더워지기 시작하는 날씨와 기온으로 인해 재빨리 철쭉 터널속 그늘로 들어가 본다.

키 큰 활엽수가 주종을 이루고 땅 위에는 이제 막 싹을 틔워 자라기 시작한 어린 묘목들이 층을 이루며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는 등로를 따라 여유있게 진행하니 약간의 바위너덜길을 지나 등로는 편안하게 이어지고 있다.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갑자기 짧은 콘크리트 포장이 된 798미터의 헬기장에 도착을 하지만 관리가 되지 않아 조만간 폐헬기장으로 변할 것 같은 풍경이다.

 

이곳 798봉의 헬기장도 어김없이 준.희님이 붙여 놓은 정상 이정판이 현위치를 알리고 고마움에 고개 숙여 감사한 마음 전하고 출발한다.

다시 낙엽진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조심하며 내려가니 등로 옆에는 벌깨덩굴과 노란 현호색이 군락을 이루며 산객의 발걸음을 붙잡지만 오랫동안 눈맞춤을 할 수 없기에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출발이다.

다시 큰 어려움 없이 편안한 초록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약간의 바위너덜구간이 나타나더니 금새 안전로프가 달려있는 급경사 내리막 등로로 이어진다.

그 내리막 등로를 내려가니 평이한 등로로 다시 바뀌면서 초원의 드넓은 풀밭이 연상되는 풍경이 나타난다.

잠시 좌측으로 갈리는 삼거리가 나타나지만 직진의 초원 등로를 따르면 큰 어려움 없이 진행을 할 수 있는 마루금이다.

 

초원 등로를 타고 너무나 멋진 힐링 산행을 하다 보니 다시 한번 좌측으로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지만 이번에도 직진의 등로를 따르면 큰 무리없이 진행이 가능하다.

우측 선답자들의 띠지를 보고 걸어가니 금새 이정표 하나가 서 있고 그 넘어에는 사각탁자와 전망대도 보이는 갓바위전망대에 도착을 해 잠시 조망을 즐기며 쉬어간다.

우측 전망대 방향으로 갓바위까지 400미터 남아 있고 좌측 주등로 방향으로는 왕거암까지 2.6 Km 남아 있다는 거리표시가 함께있는 이정표이다.

전망대로 내려가니 바로 앞에 아름다운 갓바위가 우뚝 서 있고 그 뒤로 영덕의 올망졸망한 마고산과 시루봉 그리고 삿갓봉이 멋진 산그리메를 그리며 넘실거리고 있다.

잠시 갓바위산에 다녀오고 싶은 마음 간절했지만 종주대에게 피해를 줄 것 같아 참는 시간이 왜 그리 야속하고 아쉬웠던지 모르겠다.

 

이제 갓바위를 줌으로 당겨 한번 더 담아 본다.

그 갓바위 앞에 영덕군에서 설치한 안내판을 읽어 보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되어 있다.

태고때부터 있었다는 이 바위는 세 개로 나란히 위치해 있고 맨 앞의 바위가 멀리에서 보면 갓을 쓰고 있는 것 같아 갓바위라 불러왔다.

일명 관암이라 불려지기도 하였으며 이 바위에 공을 드리면 액운을 떨치고 소원이 성취된다고 하여 옛부터 지역 주민들이 자주 찾는 바위였으며 근래에는 외지인들이 찾아 와 소원을 비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예전의 갓바위골이란 마을이 바위 아래 실제로 있었지만 저수지가 생기면서 수몰되였고 현재 갓바위 아래 마을 이름인 용정리는 옛날엔 입암마을로 갓바위 마을이었던 셈이고 또한 마을에 정자를 지어 모암정이라 이름을 붙였으니 옛부터 이 바위를 신성시 여겨왔음을 알 수 있다.

 

한동안 갓바위 전망대에서 조망을 즐긴 후 뒤돌아 나와 이정표에서 이제는 우측의 왕거암 방향으로 진행을 하니 다시 등로는 파란 초원의 등로로 변해 있다.

앞서 걸어가는 갑장 친구를 불러세워 초원 위에서 사진도 담아주며 여유롭게 전진하니 고갯마루처럼 생긴 바위를 넘어 금새 등로 우측으로 제단바위가 보이는데 그곳에 먼저 와 있던 산우님 한분과 함께 추억의 사진 한장 남겨 본다.

그저 만나면 즐겁고 함께 산행하다 보면 우정을 나물 수 있는 시간이기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금새 이렇게 또 산친구가 되어가는가 보다.

그 웃음이 백만불짜리 웃음이 되어 치열하게 살아가는 세상에서도 웃을 수 있는 그런 시간이 많기를 바래 보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제단바위를 지나 내려가며 아쉬운 마음에 다시 한번 바위만 사진에 담고 내려가니 금새 대관령 안부에 도착을 하는데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예전에 그 유명했던 고갯마루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안부였다.

정상부가 대궐만큼 넓은 평지에 부드러운 낙엽이 융단처럼 깔려있는 평지의 모습이다.

임금이 계신 곳을 둘러 이어진 산봉우리를 가리키는 의미로서 일반적인 고개의 뜻보다는 산줄기의 높은 곳을 가리키는 듯 하다.

옛날 중국 당나라 때 주왕인 주도가 진나라의 회복을 도모코자 스스로 후주천왕을 자처하고 군사를 일으켰다가 패한 후 이곳으로 피신하여 성을 쌓은 후 대궐을 짓고 머물다 청송 주왕산으로 넘어 갔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이곳에 숨어 지낼 때 영덕지방 사람들과 물물교환을 하였던 곳을 시루장맥이라 하였는데 아직도 그대로 내려온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이 희미하게 사라지는 안부 고갯마루에도 이런 멋진 이야기가 전해진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 시간이기도 하다.

 

대관령 지나 완만한 오르막 등로로 오르니 멋진 바위가 등로 우측에 서 있어 사진에 담고 지나치는데 뒤돌아 가며 살펴보니 삼층석탑을 닮은 바위 모양을 하고 있다.

다른 산에 있었으면 근사한 이름 하나쯤 얻었을 바위인데 워낙 멋진 바위들이 많은 주왕산이다 보니 제대로 된 이름 하나 얻지 못하고 무명바위로 남아 있는듯 하다.

이제 이곳부터는 계속되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왕거암 삼거리까지 제법 굵은 땀방울을 흘려야 하는 구간으로 기억된다.

 

잠시 삼층바위를 지나 진행하니 등로 옆 소나무 두그루에 커다란 송진 채취용 칼자국이 남아 이 산객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고 곧이어 멋진 금강송이 잠시 나타나더니 금새 철쭉 터널로 바뀌고 있다.

조금씩 더 굵은 땀방울이 흘러 내릴쯤 등로 우측으로 안전목책이 보이고 그곳에서 잠시 조망이 트이면서 멋진 풍경을 선사하고 있다.

영덕의 오십천이 보일듯 말듯 애간장을 태우고 그 넘어 보여야 할 푸른 동해바다는 박무속에 가려 아쉬움만 토해내는 시간이다.

바로 아래로 보이는 용덕리 마을유래는 구룡기의 용자와 대덕동의 덕자를 따서 붙인 이름으로 용덕1리는 16세기경 김씨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용덕2리는 시대는 알 수 없으나 문씨 터전에 김씨가 정착했다고 하는데 지형이 흡사 사자가 머리를 내미는 것 같다 하여 사자골이라고도 불렀다 하며 일명 대덕리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북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전국의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대덕동과 구룡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용덕동이라 하고 지품면에 편입하였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용덕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행정구역상 용덕1리와 2리로 분동되어 있다.

용덕리의 위치는 동쪽은 달산면 대지리와 눌곡리와 신양리와 서쪽는 청송군과 남쪽은 달산면 인곡리 그리고 북쪽은 송천리가 있는데 용덕리에서 가장 큰 구룡터 일명 구룡마을과 구룡터 서쪽에 있는 대덕동마을 그리고 대덕동 서쪽 골짜기에 있는 사자동마을과 절이 있었던 웃절골 및 아랫절골마을이 있다.

이렇게 또 들려보지 못했던 산골마을의 유래와 그 풍경을 가슴속에 남겨 보는 시간이 참으로 유용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그렇게 영덕의 용덕리와 나즈막한 산줄기들 그리고 오십천을 그려본 후 본격적인 오르막 된비알 산행을 시작해 본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푸른 철쭉 터널을 타고 무심으로 걸어 오르니 이곳 등로에도 이정목을 세우려는지 빈 이정목이 등로 군데군데에 세워져 있고 일부 구간에는 나뭇가지에 임시 종이코팅지로 현위치 표시를 해 걸어 놨다.

한동안 굵은 땀방울을 등로에 뿌리며 천천히 걸어 오르니 드디어 평이한 등로로 바뀌면서 이정표 하나가 서 있는 왕거암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왕거암까지의 거리는 300미터이다.

 

3년 전 오르며 장대비로 인해 들리지 못했기에 오늘은 배낭 내려 놓고 무조건 주왕산의 최고봉인 왕거암으로 향한다.

왕거암 가는 등로도 완전히 철쭉터널이 만들어져 있고 군데군데 멋진 암릉과 바위들이 존재하지만 진행하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는 등로이다.

바위를 지나니 초원 등로가 다시 열리고 조금 더 오르니 드디어 조망은 없지만 이정표가 서 있는 넓은 공터의 왕거암 정상에 도착해 증명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이곳에서 뒤돌아 내려오지 않고 직진을 하면 가메봉을 지나 칼등고개 넘어 주왕산 정상으로 갈 수 있지만 오늘은 그곳이 목적지가 아니기에 그리운 마음으로 등로만 바라보고 왕거암 갈림 삼거리로 뒤돌아 나온다.

왕거암(907.4)은 주왕산 산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데 주왕산에 얽힌 전설속의 주왕이 거처한 바위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 전해지지만 관리가 안되였는지 아니면 자연 그대로 남아서인지 생각보다 조망은 전혀 없는 그거 평범한 봉우리로 남아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 

 

왕거암에서 가메봉까지가 1.8 Km이고 대전사까지가 8.6 Km이니 언젠가 한번쯤 돌아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던 시간이다.

왕거암에서 내려와 이제 등로 좌측의 느즈미재 방향으로 철쭉터널을 타고 여유롭게 내려가 본다.

너무나 아름다운 철쭉 등로를 타고 내려가기에 함께 진행하던 산우님들 세우고 몇장의 사진을 남겨 드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온라인상에서 만나 이야기를 주고 받았던 산우님도 오늘 이곳에 함께 산행을 진행하고 있음을 알고 잠시 놀라는 시간이기도 하다.

참으로 넓고도 좁은 세상임을 다시 한번 실감한 시간이기도 하다.

 

철쭉터널을 타고 진행하며 나즈막한 무명봉을 넘으니 등로 좌측으로 멋진 금강송이 보이고 사진에 담은 후 소나무 등로를 기대해 보지만 역시나 등로 옆에는 철쭉만이 번성하고 있다.

다시 활엽수가 그늘을 만들어 주는 평온한 등로를 타고 걸어가며 산우님들 사진을 담다 보니 느즈매기 일명 느지미재 안부에 도착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방금 전 지나온 왕거암과 가야 할 명동재 사이에 있는 느지미재는 주왕산 큰골의 내원동과 부동면에서 영덕의 송천마을과 지품마을로 영덕 장을 보기 위해 넘나들던 고개로서 지름길인 이 고개를 넘어 다녔다 하는데 내원동에서 아침 일찍 출발 하여 장을 보고 이 재를 다시 넘을 때는 저녁 늦게 느즈막이 도착한다 하여 느지미재라고 불렸다고 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우리 한글 이름이기에 더욱 애정이 가는 곳이다.

 

느즈매기 지나서도 등로는 여전히 파란 철쭉터널이 이어지고 잠시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거목의 활엽수와 그 아래 초원의 등로가 묘한 조화를 이루며 산객의 피로를 풀어 주고 있다.

너무나 아름다운 등로이기에 조금은 쉬면서 많은 사진을 남겨 보지만 역시나 그 등로를 걸으며 느끼고 가슴에 담았던 그런 풍경은 아니기에 아쉬움도 진하게 남는 시간이다.

자연만이 만들 수 있는 그 아름다운 마루금을 따라 잠시 더 오르니 흔적만 남아 있는 헬기장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에도 이정표를 만들기 위한 목책 하나가 서 있다.

이곳 헬기장에서 배낭 내려 잠시 쉬어 간다.

 

헬기장에서 잠시 쉰 후 다시 배낭 메고 출발하니 후미에서 뒤따라 올 것이라 예상했던 산우님들이 먼저 명동재 헬기장에 도착해 쉬고 있어 놀라면서 함께 한 그룹이 된다.

이곳 에서도 미니 단체 사진 한장 남기고 출발하기에 앞서 잠시 명동재를 생각해 본다.

지형도상 명동재는 아무리 살펴봐도 875미터의 헬기장 봉우리인데 왜 고개의 의미가 있는 재란 이름이 붙었을까 궁금하기만 한데 선답자들과 자료를 찾아 보니 조금은 이해가 간다.

명동재는 원래 고개 모양이 두리뭉실하고 밋밋하여 민둥재로 불리다가 명동재로 바뀌게 되였다는 글이 있어 가져 와 본다.

이곳 명동재는 또한 주왕산 오지마을인 큰골의 내원마을에서 이곳 고개를 넘어 영덕의 지품마을로 숯을 팔러 다녔다는데 이제 이곳을 찾는 사람은 이렇게 낙동정맥 산행을 위해 오르는 사람들 뿐이니 세월과 함께 명동재도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먼 훗날 후답자들이 이곳에 올라 오늘 이 산객이 느꼈던 명동재를 알아보고 이해할 수 있을지 고민도 되는 시간이다.

 

명동재를 지나 다시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이곳 역시 파란 잎새가 무성한 철쭉터널 등로가 열려 있다.

내려가며 몇명의 종주대를 세우고 철쭉 터널에서 사진을 담으며 진행하다 보니 다시 거목과 관목이 어우러진 등로로 바뀌고 나즈막한 낙엽 안부를 지나 오르니 붉은 병꽃나무가 활짝 웃으며 지쳐가는 종주대를 반갑게 맞이해 준다.

한동안 다시 부드러운 오르막 등로를 타고 그늘 산행을 이어가니 먹구등 직전 헬기장에 도착해 물 한모금 마시며 갈증을 해소하는 시간이다.

 

헬기장을 출발해 다시 지루한 철쭉터널과 활엽수 그늘 마루금을 따라 걸어가니 드디어 먹구등 일명 벅구등 폐헬기장에 도착해 이곳에서도 미니 단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먹구등 일명 벅구등도 그 유래를 알고 읽어 보니 참으로 그럴싸해 보인다.

먹구등(846.4)의 원래 지명은 벅구등이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먹구등으로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설이 있지만 맞는지는 모르겠다.

벅구등 정상에 평편하고 넓은 돌이 있어 이 돌 위에서 발을 구르면 소리가 울린다고 해서 벅구등이라 불리게 되였다는 설과 농악기구인 소고(벗구)처럼 생겼다 하여 먹구등이라고 한다는 설이 있는데 어느 바위를 말하는지 아무리 찾아 봐도 알 수가 없으니 아쉬울 따름이다.

다만 있어야 할 바위를 찾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다. 

 

다시 먹구등을 출발해 내려가니 등로가 점점 희미해지는데 사라지지는 않아 그냥 선두를 따라가다 보니 오랫만에 다시 사용하고 있는 스마트폰의 GPS가 마루금을 벗어났다면 큰 소리로 알려 준다.

확인해 보니 정상 등로를 약 40여미터 벗어나 있고 등로 우측 저 멀리에는 이정표를 세우기 위한 빈 목책 하나가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다시 먹구등 방향으로 뒤돌아 올라 정상 등로를 타고 비어 있는 목책방향으로 걸어가니 두고개가 나타난다.

두고개는 영덕군 지품면 기사리에서 청송군 청송읍 주왕산 골짜기의 내원동을 이어주던 고갯마루로서 두번의 고갯길을 넘어야 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설이 있다.

이곳에서 북진을 하는 오늘 우리 종주대와 같은 산행은 우측이 낙동정맥 마루금으로서 대둔산으로 진행하는 등로이고 좌측으로 가면 내원동이나 능선을 타고 두수람과 금은광이를 거처 장군봉이나 큰골로 가는 등로이니 길주의가 필요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 두고개는 살펴보니 예전에 헬기장이 있었는지 콘크리트 블록이 바닥에 박혀있다.

사용하지 않던 스마트폰의 GPS 기능에 제대로 효과를 본 시간이였다. 

 

이제 정상 등로를 찾아 다시 진행하니 이곳 역시 파란 철쭉터널이 마루금을 가득 채우고 한동안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그 파란 터널을 걸어 본다.

큰 고도차도 없이 한동안 철쭉터널을 걷다보니 등로엔 조금씩 바위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금새 암릉 등로로 변하면서 제법 바위 건너는 재미가 있다.

지루함이 사라지고 주의하며 바위지대를 지나니 이제 책바위처럼 생긴 바위도 보이고 여러 형태의 아름다운 바위들이 등로 옆에 서서 지나가는 종주대를 응원하듯 매려다 보는 것 같다.

 

다양한 모양을 하고 있는 바위들과 암릉지대를 지나니 다시 활엽수 그늘 등로가 나타나고 그렇게 무심하게 걸어가니 또 다른 바위지대가 눈앞에 나타난다.

바위고개도 지나고 멋진 바위도 구경하며 조금 더 전진하니 드디어 그곳에 있는 통천문을 만나 그곳을 통해 어렵게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바위로 둘러쌓인 등로 한쪽에 통과 할 수 있을 정도의 바위 구멍이 보이는데 통상 이런 바위들은 정상 부근에 위치해 이 문을 통과하면 하늘로 오를 수 있다 하여 통천문이라 부르지만 이곳은 정상과도 거리가 있고 또한 하늘도 보이지 않으니 통천문이란 이름을 붙이기는 힘이 들 듯 하다.

하늘과 통하는 문의 역활은 못하고 있지만 그 모양이나 형태는 유사하게 생겼기에 그냥 편하게 통천문이라고 부르는가 보다.

 

통천문을 지나 계속 진행을 하니 이제 등로는 수렛길처럼 넓어지고 그 넓어진 등로에는 파란 잔디가 깔린듯 파란빛을 띠고 있다.

몸은 조금씩 지쳐가고 있지만 주위 풍경과 자연의 빛은 더욱 정신을 맑게 만들어 피로를 풀어주는 듯 다가온다.

약간은 오르막 등로를 따라 오르니 묘지 한기지나 다시 평온해지고 잡목이 우거진 지점을 통과하니 그곳에 삼각점 하나와 준.희님이 달아 놓은 732.6봉 이정판이 보인다.

사진 한장 남기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터를 찾아 보지만 그 흔적도 많이 사라져 이 산객처럼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그런 곳이였다.

732.6봉 삼각점을 가기 직전 쓰러진 거목 옆으로 오래전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이 아주 쬐끔 남아 있는듯 보였다.

 

732.6봉을 지나 진행하니 등로 우측으로 잠시 약간의 조망이 터지지만 잘 보이지 않기에 사진 한장만 남기고 이제부터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따라 849봉으로 오른다.

이곳 등로 역시 거목들과 바닥에 붙어 있는 초원의 풀들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어 등줄기와 이마에선 연신 굵은 땀방울이 흘러 내리지만 마음만은 힐링하는 기분으로 걸어보는 시간이다.

조금 더 힘내 오르니 등로 옆에 또 한기의 묘지가 보이고 그 묘지를 지나니 금새 쓰러진 거목이 등로를 막고 있는 능선에 도착해 부드럽게 걸어 본다.

걷다가 849봉이라 생각되는 지점 바로 지난 곳에서 잠시 물 한모금 마시며 종주대를 기다리는데 오지 않아 출발하려는데 늦게 도착한 종주대는 직전에서 쉬면서 간실 털이를 하고 있다.

다시 그곳으로 합류한 조금 더 쉰 다음 함께 대둔산으로 오르기로 한다.

 

다 함께 휴식도 취하고 간식도 나눠 먹은 후 다시 배낭 메고 출발하니 야생화 꽃밭이 나타나고 사진에 담은 후 다시 진행해 나즈막한 안부를 건너니 등로가 넓2어지며 푹신한 낙엽이 깔려있다.

그 넓은 등로를 따라 여유작작 걷다 보니 다시 완만하게 오르막 등로로 이어지고 곧이어 짧은 바위너덜 등로를 지나 식물 덩쿨들이 우거진 799.7봉을 지난다.

799.7봉을 넘으니 다시 넓은 등로가 나타나는데 이곳에는 잡목이 자라면서 진행에 약간의 방해를 주고 있다.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철쭉나무와 활엽수 그늘 마루금을 타고 오르니 등로는 점점 더 가파르게 변하면서 입에서는 단내가 날 정도로 힘들어진다.

더운 날씨에 산행 거리가 길어지며 약간의 피로가 누적되고 더욱이 하루 중 최고로 더운 시간이 다가왔기에 더욱 체력적인 부담이 가중되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올라 대덕산 삼거리에 도착을 하면 이제부터는 편안하게 내려가는 등로이기에 참고 올라본다.

그렇게 큰 신음소리를 내며 어렵게 오르니 큰 경주 최씨 묘지 한기가 보이고 그 좌측 넘어로 대둔산 가는 등로에 선답자들의 띠지가 보인다.

이곳 정등재에 배낭 내려 놓고 다시 대둔산으로 올라 본다.

 

경주 최씨 묘지 위 능선에 배낭 내려 놓고 절등재를 지나 대둔산으로 오르니 이곳 등로 역시 지금까지의 마루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생각보다 짧은 거리를 올라 걸어가니 금새 대둔산 정상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잠시 쉬면서 사진 몇장 남겨 본다.

전국에 같은 이름을 갖고 있는 대둔산은 세 곳이 있는데 그중에서 이곳 주왕산에 속해 있는 낙동정맥의 대둔산이 가장 높지만 관리가 되지 않아 정상석 하나 없는 정상의 모습은 가장 초라하기 그지없다.

대둔산(905)은 옛날에 우거진 이 산의 소나무에서 나오는 솔괭이로 먹을 만들어 상품성이 있는 것은 나라에 바치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은 민가에서 민초들이 사용하였다.

현재에도 먹을 만들던 곳이라 하여 먹방 또는 묵방이라 부르고 있다고 전해진다.

산줄기에는 높은 촛대바위와 커다란 동굴이 있어 임진왜란 때 수많은 민초들이 피난하여 목숨을 구하였다고 하는데 이곳 대둔산에서 이어진 능선을 타고 태행산(927.7)까지 종주 산행을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쉽지만 이렇게 다시 만나 사진 하낭 남길 수 있음에 그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시 내려가 본다.

 

다시 경주 최씨 묘지가 있는 절등재로 뒤돌아 내려 와 묘지 위에서 단체 사진 몇장 남기고 남아 있는 간식으로 허기를 달랜 후 다시 정상 등로를 타고 내려가 본다.

큰 소나무와 낙엽송이 나타나고 조금씩 더 가파라지는 내리막 등로를 따라 걸어 내려가니 금새 출입금지를 알리는 안내판을 만난다.

드디어 피나무재에서 부터 이어져 온 주왕산 국립공원 내 출입금지 구역이 풀리는 지점으로 지금부터는 조금 더 마음 편히 걸어 내려 갈 수 있는 구간이다.

종주대에게는 등로를 열어 줘도 큰 무리는 없을 텐데 아쉬운 마음만 이 출입금지 안내판에 함께 걸어 놓고 떠나는 시간이다.

 

출입금지 안내판을 지나 계속 완만하게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잘 정돈된 느낌의 깔끔한 등로가 나타나고 키 큰 관목들이 이제 막 새로운 파란 잎을 키우며 산뜻하게 열려있다.

다시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묘지를 좌측에 두고 오르니 갑자기 등로 좌측 능선 위에 무인 CCTV까지 설치되어 있다는 송이채취 출입금지 플랭카드가 걸려있다.

서로가 조금씩 양보하고 믿어 줄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출발한다.

 

송이채취 금지 풀랭카드를 지나 내려가니 등로는 더욱 가파르게 내려가고 가끔 바위 암릉이 나타나 더욱 조심하며 내려가 본다.

줄지어 내려가는 종주대의 뒷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몇장의 사진으로 남겨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내려가니 다시 먹구등에서 5.2 Km 지나왔고 황장재까지 3.7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지난다.

이제 좌측 낙엽 깔린 사면 등로를 타고 우측 무명봉을 지나니 몇그루의 큰 소나무들이 반기고 곧이어 고사목을 지나 먹구등 5.8 Km 지나왔고 황장재까지 3.1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만난다.

 

고사목과 이정표를 지나 낙엽 깔린 부드러운 등로를 타고 활엽수 그늘을 따르니 다시 뚜렷한 깨끗한 등로가 반겨 준다.

키 큰 활엽수와 바닥에 깔린 초원 등로를 따르니 이장된 듯한 묘지 한기를 지나 키 큰 활엽수와 소나무 군락지를 통과한다.

그렇게 잠시 더 내려가니 갈평재 안부에 도착해 쉬고 있는 종주대와 만나 남아 있는 마지막 과일과 간식으로 허기를 달래며 쉬어 간다.

등로 좌측으로는 청송 진보면의 갈평동이 등로 우측으로는 영덕 지품면 안하곡으로 하산할 수 있는 갈림 사거리 안부이다.

등로 좌측의 영덕군 지품면 학곡마을과 우측의 청송군 진보면 괴정리 갈평동을 고갯마루로서 옛날에는 제법 민초들의 왕래가 있었겠지만 현대화된 도로가 뚫리고 또 새로운 길이 생기면서 이제는 이곳이 고갯마루였는지조차 그 흔적을 찾기 힘들만큼 낙엽속에 파묻혀 있다.

우측 청송의 갈평동에는 1970년 준공된 제장 132미터와 제고 28미터인 갈평저수지가 있는데 산간계곡 저수지의 하나로서 저수지 규모는 작으나 수심이 깊고 물 또한 차갑고 맑은 저수지이다.

이제 마지막 고갯마루까지 지났으니 조만간 날머리인 황장재도 보일 것이다. 

 

갈평재에서 한참을 쉰 후 다시 배낭 메고 출발해 오르막 등로를 지나 묘지 2기가 등로 우측에 보이고 그 묘지들을 지나니 멋진 소나무와 키 큰 활엽수가 줄지어 등로를 채우고 있다.

아주 부드러운 등로를 타고 걸어거니 좌측의 무명봉을 우측 사면 등로로 지나고 다시 무명봉 정상부 우측에 묘지 한기를 두고 좌측 등로로 진행을 하니 다시 부드러운 내리막 등로가 이어진다.

한동안 그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 등로 우측에 묘지 한기가 있는 무명봉을 넘고 오르막 등로를 지나 무명봉 하나를 지나니 멋진 소나무 등로가 나타난다

그 좌측의 무명봉을 지나온 곳에 잡풀이 무성한 묘지 한기가 다시 보이고 그곳을 지나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등로 우측으로 지품리 마을이 아스라히 내려다 보인다.

지품리의 유래는 조선시대 이전부터 지품부곡이 있었으며 조선시대 이 마을에 지품원이 있었던데서 붙여진 이름인데 이 마을은 15세기 후기에 (1470년경) 마을이 개척되었다고 하며 그 뒤 4개 성의 으로운 사람인 지사가 공론하였다 하여 지품이라 하기도 하고 학곡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본래 옛 영해부에 딸린 지품부곡이 있었고 조선시대 지품원이 있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동동을 병합하여 지품동이라 하고 지품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지품리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지품마을을 내려다 보며 잠시 더 걸어 내려가니 차량들이 통행하는 소음이 들리기 시작하더니 금새 등로 옆에 콘크리트로 된 교통호도 보인다.

그곳을 지나 뚜렷한 등로를 따라 조금 더 내려가니 드디어 34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황장재에 도착해 오늘 산행을 마무리하는 시간이다.

경상북도 영덕군의 지품면 황장리와 진보면 신촌리를 연결하는 고개로서 영덕읍에서 출발하는 34번 국도가 이곳을 지나가는데 예전에도 영덕에서 진보로 가는 큰 길이 이 고개를 통과하였다.

과거에는 임물현으로 불렸던 이곳은 여지도서 영덕편에 임물현은 현 북쪽 57리에 있고 영해 읍령(지금의 울치재)에서 산줄기가 이어진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대부분의 옛 지도에 황장재가 표현되어 있는데 임물현 또는 임울현으로 표기하였다.

황장재 너머 진보면 초입에 있는 이무곡 마을 명칭은 황장재의 옛 명칭 임율현의 흔적을 보여 주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즉 임울골이 변음되어 이무곡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황장재라는 명칭은 이 일대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황장봉산이 실시되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광여도 영덕의 주기에 임물현에 황장봉산이 실시되었다는 기록이 나오나 황장재라는 명칭은 해방 이후에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지지자료에 황장동 임울령으로 기록되어 있다.

 

 

황장재로 내려 와 좌측의 청송쪽 방향을 사진에 담다 보니 도로 좌측으로 황장재 휴게소가 보이고 우측 영덕 방향으로는 도로 우측에 거대한 지품면황장재란 이정석이 서 있다.

그 이정석 앞에서 마지막 인증 사진을 남기고 그 넘어 벤취로 이동해 배낭을 정리하며 땀에 젖어 있는 옷을 갈아 입으니 살것 같다.

미리 준비한 시원한 맥주 한잔으로 하루의 산행을 갈무리 하고 후미를 기다렸다 청송군 진보면 방향으로 이동해 늦은 점심 겸 탁배기 한잔 마시기로 한다.

3년 전에는 보지 못했던 이정석이기에 그 앞에서 사진 한장 남겨 본다.

 

 

후미까지 모두 생각보다 일찍 내려 와 버스를 타고 청송군 진보면 방향으로 내려 가 명궁약수가든에서 닭불고기와 백숙으로 식사를 한다.

처음에는 어떤 종류의 전이라 생각을 했는데 이것이 바로 닭뼈를 발라 낸 닭불고기로 식사가 나오기 전 탁배기와 함께 먹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하였다.

생각보다 먹을만 했고 반찬도 깔끔해 가격대비 참으로 잘 선택한 식사가 아니였나 생각해 본다.

 

 

탁배기 한잔과 닭불고기를 먹으며 약간의 허기를 달래고 있으니 진짜 식사인 닭 백숙이 나오는데 닭죽처럼 생긴 음식에 닭다리 하나씩을 넣어 주었으며 위에는 인삼뿌리를 올려 놔 건강에도 좋을 듯 하게 나왔다.

맛도 좋아 한그릇 다 먹고 나니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아 나와 식당 앞에 흐르는 약수 한모금 마셔보니 너무 철분 냄새가 강해 마시기 어려웠지만 몸에 좋다하니 몇모금 더 마셔 본다.

이곳은 달기약수터와 가까운 곳이기에 그 달기약수물을 이용해 닭요리를 많이 해 먹어 이런 닭 불고기와 백숙이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전해 준다.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부곡리에 있는 약수터를 속칭 달기약물이라 하는데 이 약수의 특성은 빛과 냄새가 없고 아무리 많이 마셔도 배탈이 나지 않으며 마신 즉시 트림이 자주 나는 점이다.

 

이렇게 멋진 산행을 마치고 저녁 5시 30여분 청송의 식당을 출발한 전용버스가 저녁 9시 조금 넘긴 시간에 사당역에 무사히 도착을 하고 아쉬움에 종주대들과 두어잔의 맥주잔을 기울이며 이야기 나눈 후 집으로 복귀하니 벌써 또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다.

함께한 종주대들과 좋은 산행으로 마무리 할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며 남아 있는 구간도 무탈하게 완주 하길 빌어 보는 시간이다

다음에 다시 기회가 된다면 아마도 영알 구간에서 다시 한번 합류를 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예상을 해 보면서 산행 후기를 마무리 한단.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