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맥산행(완료)/감악지맥(한북·완)

감악지맥 마지막 제2구간 설머치고개에서 한탄강까지 산행후기

by 칠갑산 사랑 2014. 2. 17.
728x90

산행지 : 경기도 양주시와 파주시 그리고 연천군의 감악지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 2014년 02월 16일 (일요일 당일 산행)

산행날씨 : 맑은 날씨에 기온이 올라 박무가 심했고 눈이 녹아 질척이는 등로였지만 산행하기엔 좋았던 날씨

산행온도 : 영하 02도에서 영상 08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설머치고개(오룡고개, 323번 지방도로)-절개지-깃대봉-교통호-굴뚝봉(벙커와 쇠종)-이정표(범바위 1.2 Km, 감악산정상 3.0 Km)와 벤취쉼터-유격훈련장-폐헬기장(공터)-유격훈련장 경고판과 철조망-임도 이정표(범바위 2.3 Km, 감악산정상 1.9 Km)-유격훈련장 경고판과 이정표 삼거리(범바위 2.5 Km, 감악산정상 1.7 Km)-그물망 통과-유격훈련 가스실습장-공터-유격훈련장 경고판과 이정표 (범바위 2.7 Km, 감악산정상 1.5 Km)-암릉지대-암릉지대-바위지대-이정표(장군봉 0.9 Km, 감악산정상 1.3 Km)-암릉 로프지대-바위지대-암릉 로프지대-암봉 로프지대-돌로 만든 벙커-이정표(범바위 3.5 Km, 감악산정상 0.7 Km)-안전목책과 로프지대-전망바위봉(540봉)-안전목책과 로프지대-이정표(신암저수지 2.5 Km, 감악산정상 0.6 Km)-계단지대-전망바위-계단지대-현위치 4~3 장군봉데크 이정표(감악산주차장 3.7 Km, 법륜사 방향지시, 감악산정상 0.5 Km)-계단지대-전망바위봉-장군봉(현위치 4~4와 감악산등산로 안내판)-암릉지대-벤취쉼터-신암저수지 갈림 삼거리 이정표(신암저수지 2.3 Km, 장군봉 0.1 Km, 감악산정상 0.5 Km)-정상 삼거리 이정표(정상 0.4 Km, 장군봉 0.2 Km, 임꺽정봉 0.05 Km)-계단지대-임꺽정봉(매봉재) 정상(676.3봉, 정상석과 삼각점 그리고 설명판)-임꺽정굴(설인귀굴) 설명판-계단지대-안전목책과 로프지대-구름재 갈림 삼거리 이정표(정상 0.2 Km, 임꺽정봉 0.2 Km, 구름재 3.5 Km)-계단지대-법륜사 갈림 삼거리 이정표(정상 감악산비 0.1 Km, 임꺽정봉 0.3 Km, 법륜사 2.4 Km)-안전목책과 로프지대-현위치 1~7 고릴라바위 이정목-계단지대-양주감악정 4각정자-감악산 정상(675봉, 정상석, 감악산비, 등산로 안내판, 군부대 통신탑, 헬기장)-늘목리 1등산로 적동분교 이정표 방향-계단지대-안전목책과 로프-진입도로 갈림 삼거리 이정표(감악산정상 0.1 Km, 작동분교 1.74 Km, 동광정사 1.6 Km)-암봉 계단지대-성모마리아동상과 전망바위-군 훈련장-이정표(정상 0.24 Km, 늘목리 적동분교 3.24 Km)-이정표(감악산정상 0.3 Km, 적동분교제1등산로 3.54 Km)-안전목책과 로프구간-병풍바위-안전목책과 로프구간-이정표(감악산정상 0.4 Km, 동광정사 0.9 Km, 초록지기마을 4.0 Km)-암봉지대-이정표(감악산정상 0.5 Km, 적동분교제1등산로 3.34 Km)-이정표(정상 0.45 Km, 늘목리 적동분교 2.96 Km, 하늘아래첫동네 2.0 Km)-헬기장 병풍바위 안내판-이정표와 벤취 쉼터(감악산정상제1등산로 1.1 Km, 적동분교제1등산로 2.74 Km)-이정표(정상 1.21 Km, 늘목리 적동분교 2.28 Km)-이정표(정상 1.57 Km, 늘목리 적동분교 1.88 Km)-벤취2 쉼터-송전탑 54번 이정표(감악산정상제1등산로 2.36 Km, 늘목리 적동분교 1.48 Km)-이정표(감악산정상제1등산로 2.44 Km, 늘목리 적동분교 1.4 Km)-출입금지 경고판 로프지대-이정표(정상 2.43 Km, 늘목리 적동분교 1.06 Km)-이정표(정상 2.58 Km, 늘목리 적동분교 0.86 Km)-송전탑 52번-송전탑 51번-묘지지대-간패고개(황방리고개, 368번 지방도로)-벙커와 종봉-묘지지대-송전탑 50번-전곡읍 간파리 갈림삼거리 이정표(마차산정상 2.9 Km, 동두천 동광교 종주끝 6.0 Km, 전곡읍 간파리 방향표시)-늦은고개 이정표(마차산정상 2.8 Km, 동광교 6.1 Km 아홉골 0.7 Km, 웃안흥리 0.7 Km)-임도-다솜농장 갈림 삼거리 이정표(마차산정상 1.8 Km, 동광교 7.1 Km, 다솜농장 1.0 Km)-4각정자-넓은 공터와 마차산등산로 안내판-담안삼거리 갈림 삼거리 이정표(마차산정상 1.2 Km, 동광교 7.7 Km, 담안삼거리 1.3 Km)-벤취1 쉼터-벤취1 쉼터 및 송전탑-안전로프지대-헬기장-바위지대-암봉우회지대-기도원 갈림 삼거리 이정표(마차산 정상 0.1 Km, 동두천역 3.7 Km, 동광교 9.1 Km)-바위 암릉지대-바위와 소나무지대-성터-군용 삼각점-마차산(588.4봉, 정상석과 삼각점 그리고 마차산정상안내도)-현위치 1-5 헬기장 안내판-현위치1-4삼거리 이정표(초성교 7.5 Km, 마차산정상 0.1 Km, 소요산역 3.9 Km, 동두천역 4.0 Km)-암봉과 벙커-송전탑 43번-번호없는 송전탑-채석장 위-현위치 2-3 댕댕이 안내판-댕댕이고개 이정표(초성교 6.7 Km, 마차산정상 0.9 Km, 소망기도원 1.7 Km)-현위치 2-2 밤골재 이정표(초성교 6.3 Km, 마차산정상 1.3 Km, 밤골재와 갈림길 등로 폐쇄표시)-폐헬기장-도감포 갈림 삼거리 이정표(꾀꼬리봉 430봉, 초성교 6.0 Km, 마차산정상 1.5 Km, 간파리 방향표시)-소망기도원 갈림삼거리 이정표(초성교 5.05 Km, 마차산 2.55 Km, 소망기도원 1.0 Km)-댕댕이고개 이정표(초성교 4.95 Km, 마차산정상 2.65 Km, 소망기도원 방향표시)-등산로입구 갈림삼거리 이정표(초성교 4.9 Km, 마차산정상 2.7 Km, 등산로입구 1.1 Km)-현위치 2-1 양원리 이정표(초성교 4.6 Km, 마차산정상 2.9 Km, 소요산역 3.0 Km)-굴뚝봉-벤취1 쉼터와 봉암광산 갈림 이정표(봉암광산 1.2 Km)-이정표(초성교 4.1 Km, 마차산정상 3.5 Km)-굴뚝봉-교통호-벤취1 쉼터-웃양원리 갈림 삼거리 임도 이정표(초성교 3.4 Km, 마차산정상 4.2 Km, 웃양원리 방향표시)-이정표(초성교 2.6 Km, 마차산정상 5.0 Km)-승전교 갈림 삼거리 공터 이정표(초성교 2.3 Km, 마차산정상 5.3 Km, 승전교 2.5 Km)-임도합류지점 공터 이정표(초성교 1.4 Km, 마차산정상 6.2 Km)-임도 갈림 삼거리-벌목지대-구정산(412봉, 구정산산신지위 제단석)-교통호와 벙커지대-구정산제비-김치마을과 약수터 갈림 이정표-교통호와 벙커지대-군용 삼각점-헬기장-교통호와 벙커지대-헬기장봉-비포장 임도-한탄대교사거리 도로입간판-한탄대교-한탄강-산행종료

산행거리 : 약 21.00 Km

산행시간 : 눈길과 질척이는 등로와 봄같이 따스했던 기온으로 인해 여유있게 사진 찍으며 09시간 05분 (07시 15분부터 16:20분까지)

교통편 : 애마와 버스 그리고 택시 이용

 

감악지맥이란

감악지맥이란 한북정맥 상에 있는 한강봉(474봉)에서 북서쪽으로 분기하여 느르미고개, 은봉산(379.8봉), 소사고개, 팔일봉 갈림길, 노아산 갈림길, 개내미고개, 세우게고개, 수르네미고개, 무건리고개, 설머치고개, 감악산(675봉), 간패고개 및 마차산(588봉)을 거쳐 431봉 직전의 분기점에서 우측능선으로 이어지며 구정산을 지나 3번 지방도로를 건너 372번 지방도로를 따라 가다가 한탄교(한탄강과 신천의 두물머리)에서 맥을 다하는 약 42 Km의 산줄기를 말한다.하지만 431미터봉 직전의 분기점에서 또 하나의 산줄기가 분기하여 동북쪽으로 진행하다가 계속 북쪽 방향으로 37번 지방도로의 아마니고개를 넘어 계속 북쪽으로 진행하다가 한탄강이 임진강에 합류되는 도감포 앞에서 맥을 다하는 약 39 Km의 마루금이 있는데 이곳은 한탄강과 임진강의 두물머리에서 맥을 다하는 산줄기로서 이 감악지맥 역시 어느 산줄기가 진짜 감악지맥이냐를 놓고 약간의 논란이 있는듯하여 이곳 역시 두 산줄기 모두를 걸어 볼 예정으로 준비를 해 본다.자료를 준비하다 보니 대부분의 종주자들이 한탄대교로 종주했는지 한탄대교 방향은 길이 무척 좋고 표지기도 많이 부착되어 있는데 비해 도감포 방향으로는 길은 대체로 양호하지만 독도 주의지점이 몇 군데 있고 표지기도 적게 보이기에 산행하기에는 주의가 필요 할 듯 하다.다만 

강의 격을 놓고 보면 한탄대교 방향은 신천이 한탄강에 합류되는 것이고 도감포 앞 방향은 한탄강이 임진강에 합류되는 것이기 때문에 도감포 방향의 격이 조금 더 높다고 말할 수 있으며 박성태님의 신산경표에서는 도감포 방향으로 감악지맥이 이어진다고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종주자들은 한탄대교 방향으로 종주를 한 듯 하다.

 

 

박무로 인해 기대했던 멋진 조망은 없었지만 숙제를 마무리한 홀가분한 마음으로 기분 좋게 걸었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 후기를 참고한 후 난해하고 어려운 정맥 산행을 진행해 무탈하게 맥 잇기 산행을 다녀왔기에 단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정맥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어제 30여 Km가 넘는 감악지맥 제1구간을 무탈하게 완주 후 집으로 복귀해 편하게 잔 후 아침 일찍 눈을 뜨니 새벽 5시이다.

간단하지만 옆지기가 준비해 준 컵라면 하나와 밥 한조각 그리도 뜨거운 물과 사과 2개를 배낭에 넣고 아침 식사를 마치고 집을 나서는 시간이 새벽 5시 30여분이다.

어젯 밤 잠자리에 들면서 오늘 아침 일어나 몸이 불편하면 다음에 다시 오르자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몸이 가벼웠기에 그냥 계획대로 출발하는 시간이다.

어둠을 뚫고 조금은 빠르게 달려가니 설마치고개에 생각보다 이른 아침 7시에 도착을 하고 산행 준비 후 어제와 마찬가지로 아침 7시 15분에 설마치고개를 출발해 절개지를 오르며 긴 장도를 출발해 본다.

잠시 어제 그랬듯이 오늘 하루도 무탈하게 한탄강까지 갈 수 있도록 산신령에게 빌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오늘은 구름이 짙게 드리워져 아침 일출도 보지 못하고 또한 박무로 인해 조망 역시 생각보다 좋지 못하다.

그래도 꾸준하게 진행해 드디어 감악산 임꺽정봉에 도착을 해 몇 년전 옆지기와 올라 점심을 먹었던 추억을 생각해 본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등산객 한명 구경하기 힘들어 그곳 정상에서 어렵게 셀카 놀이를 하며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정상석 뒤로는 신암저수지와 원당저수지가 내려다 보이고 신암저수지 우측으로 어제 지나온 감악지맥 마루금이 선명하다.

 

 

어제 어렵게 내려 와 군내버스를 타고 출발했던 설마치고개에서 산행 준비 후 우측 절개지를 향해 천천히 오른다.

이곳 위 파주쪽 설마리와 이곳 설마치고개에 대한 상세 자료는 어제 제1구간에서 설명이 되였던 내용을 다시 한번 사용해 보기로 한다.

설마리는 당나라 장수인귀가 칠중성에서 태어나 곳에서 말을 달려 훈련했으므로 설마지나 마지 또는 설인귀가 추운 겨울에 눈에 쌓인 상봉을 거쳐 감악산 봉으로 말을 달려 무예를 쌓았다하여 설마리라고도 하고 설마동 설마치라고도 한다.

이 설마리에 있는 고개라서 설마지고개 또는 설머치고개라 불리는 이곳은 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리에서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양주에서 적성(현 파주시)으로 통하는 관문으로 중요시됐던 고개로 이 지역 사람들은 사기막 고개라고 부르는데 4차선인 371번 지방도가 지나고 있다.

마치고개는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신라의 삼국 통일을 지원하기 위해 말을 타고 달리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혹은 근처에 제단이 있어 설마고개라 했다고도 한다.

어룡고개 혹은 어영고개라고도 불리었는데 임금님이 넘어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설마치고개는 증동국여지승람(1530)에 처음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설마현 혹은 설마령으로 나오며 이 고개로 수십 리를 가면 적성현이 나온다고 하였다.

해동지도(1760), 팔도군현지도(1767-1776) 등에는 설마치로 나온다.
설마치고개가 시작되는 신암리 동쪽에 신암저수지가 있고 고개가 끝나는 파주시 적성면의 설마리도 설인귀와 관련된 마을이다.

 

 

설마치고개를 출발해 우측 절개지로 들어가니 절개지 좌측으로 대보건설이란 큰 입간판이 서 있다.

절개지를 타고 진행하니 등로는 절개지 우측 끝자락으로 이어지고 절개지를 타고 오르는 대신 우측 능선과 절개지의 경계를 타고 오르도록 되어 있다.

잠시 올라 좌측 절개지쪽을 보니 좌측 파주의 설마리쪽 도로와 마을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인다.

오늘 산행 후 이곳을 찾아 오기 위해 또 한번의 요상한 쇼를 하고 말았지만 새벽 공기를 가르고 오르는 이 시간만큼은 그저 가벼운 발걸음에 행복한 시간이다.

 

 

다시 잠시 더 오르니 등로 우측에 깃대가 서 있는데 깃발은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등로 우측으로 양주시 신암리 마을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인다.

푹신한 낙엽이 깔린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오르니 교통호가 나타나고 곧이어 벙커와 종이 세워져 있는 봉우리에 도착을 한다.

오늘의 기온은 어제보다도 더 올랐는지 벌써 굵은 땀방울로 인해 귀마개와 장갑을 벗어 던지고 자켓까지 벗어 배낭에 넣고 진행을 한다.

이곳에서 정상 마루금은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진행해야 한다.

 

 

주능선에 올라 낙엽이 푹신한 등로를 따라 큰 굴곡이 없이 진행하니 생각보다 몸의 상태는 좋은 느낌이다.

그렇게 조금 더 진행하니 등로 좌측으로 조망처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바라보니 방금 전 이 산객이 올라 온 설마치고개와 그 한쪽에 서 있는 애마가 내려다 보이고 그 고갯마루 뒷편으로는 어제 내려 온 감악지맥 마루금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벌써 일출이 시작되어야 할 시간이지만 오늘은 짙은 구름이 껴있어 등로 우측의 동쪽에서도 별 특징 없는 하늘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등로 좌측의 지나온 마루금을 조망한 후 조금 더 진행하니 드디어 주능선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 삼거리에는 좌우측 모두 띠지가 걸려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 정상 등로는 좌측으로 걲어 올라 감악산으로 가야 맞는 방향이다.

조금 더 많은 띠지가 펄럭이는 좌측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오르니 잡목 구간이 나타나고 잠시 등로 우측 뒤를 바라보니 신암2리에서 올라오는 등로와 이어진 산줄기가 아름답게 다가온다.

그곳을 지나 벤취 하나가 있는 쉼터 옆에 오늘 처음으로 이정표를 만나는데 범바위 1.2 Km와 감악산정상 3.0 Km란 거리 표시가 되어 있다.

그곳에서 등로 우측을 보니 신암리와 신암저수지가 발 바로 아래 가깝게 보인다.

 

             

 

다시 약간의 잔설이 떨어진 낙엽위에 쌓여 있는 운치있는 등로를 따라 여유롭게 걸어 보는 시간이지만 그래도 눈길은 계속 등로 우측인 동쪽으로 향한다.

약간의 바위들이 정상부를 차지하고 있는 무명봉을 지나 다시 길게 이어진 낙엽 등로를 타고 걸어간다.

그저 이렇게 보고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될 것 같은 너무나 멋진 낙엽 등로이다.

그러다 다시 활엽수들이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무명봉에 오르니 드디어 등로 우측 동쪽에서 구름속에서 꿈틀대는 붉은 불덩어리가 느껴지고 잠시 그곳을 응시하다 붉게 변해가는 구름과 하늘만 담아 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금 더 그곳 무명봉 정상에서 기다려 보지만 오늘 일출은 보기 어렵다는 판단에 다시 낙엽 등로를 타고 감악산으로 향한다.

걸어가며 앞을 바라보니 잡목가지 사이로 감악산의 장군봉과 임꺾정봉의 암벽이 너무나 드높게 올려다 ㅗ인다.

계속 이어지는 낙엽 등로 위에 소나무들이 듬성듬성 보이고 조금 더 많은 잔설이 남아 있는 나즈막한 내리막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안부를 지나 꿈결같은 낙엽 등로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다.

 

 

다시 여유롭게 낙엽을 밟으며 걸어가니 이곳 역시 군 유격장이였는지 진지강화 재편성이란 안내판이 서 있고 소나무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넓은 공터가 있는 장소를 만난다.

그곳 정상을 지나서도 계속 이어지는 낙엽 등로를 따라 너무나 맑은 하루를 열어보고 걸어가니 큰 구덩이가 있는 곳을 지나 원형 철조망과 군부대 유격훈련장 경고판이 서 있는 임도에 도착을 한다.

그곳에서 앞을 올려다 보니 지금부터 올라야 할 감악산의 장군봉과 임꺾정봉 암릉이 시원하게 올려다 보인다.

 

 

이제부터 잠시 비포장 임도를 타고 완만하게 오르니  범바위에서 2.3 Km 지나왔고 장군봉까지 1.5 Km, 감악산정상까지 1.9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서 있다.

이제부터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짧게 오르니 그 임도가 좌측으로 휘어져 올라가는 곳 우측 직진 방향으로 짧은 비포장 임도가 보이고 그 앞쪽에 범바위에서 2.5 Km 지나 왔고 장군봉까지 1.3 Km 및 감악산정상까지 1.7 Km 남아 잇다는 이정표와 그 뒷편에 군부대 유격훈련장 경고판이 서 있다.

그 우측 직진 방향의 짧은 임도를 타고 오르니 저 위로 군부대 건물이 올려다 보인다.

 

 

임도 우측 위쪽으로 보이는 군부대 건물을 바라보며 올라가니 파란 그물이 쳐져 있는데 사람 한명이 통행 할 수 있는 작은 개구멍이 열려 있다.

그곳을 통해 ㄷ안으로 들어가니 그 군부대 건물은 유격훈련 때 사용하는 가스실이였다.

그 가스실 건물쪽 앞으로 가 그 앞에서 건물 반대방향으로 오르니 드넓은 공터가 나타나고 그 공터에서  방금 전 올라 온 가스실 건물을 담아 본다.

 

 

다시 넓은 공터에서 우측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그 입구에 군부대 유격훈련장 경고판과 이정표가 서 있는데 범바위에서 2.7 Km 지나 왔고 장군봉까지는 1.1 Km와 감악산정상까지는 1.5 Km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가 보인다.

약간의 바위들이 나타나지만 여전히 낙엽이 푹신한 오르막 등로가 이어지고 조금 더 많아진 바위 암릉구간을 지나 오르니 하늘이 열리면서 지나온 마루금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다시 완만하게 오르니 바위들이 산재한 암릉구간에 나타나고 그 암릉 군데군데에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암릉구간을 지나자 마자 등로 뒷쪽으로 시원한 마루금이 펼쳐져 있다.

우측으로 지나온 마루금이 넘실거리고 그 좌측으로 돌아가니 오래전 힘들게 올랐던 소요지맥의 소요산과 저 멀리 포천의 왕방지맥을 이루는 왕방산이 반갑다고 손짓을 하고 있다.

박무로 인해 선명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희미한 흔적을 만날 수 있음에 감사한 시간이기도 하다.

 

 

조망을 즐긴 후 다시 오르니 바위들이 산재된 구간이 나타나고 곧이어 암릉구간이 이어지고 있다.

그 바위 암릉구간을 오르니 이제 장군봉까지 0.9 Km남아 있고 감악산정상까지 1.3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만난다.

이제 잡목 사이로 우측 저 멀리 임꺾정봉의 늠름한 암봉이 시야에 가깝게 들어오기 시작한다.

다시 이어지는 암릉구간에 설치된 쇠철봉과 로프를 통해 오르고 다시 나타나는 바위를 넘으니 등로 좌측으로 전망바위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잠시 지나온 마루금을 내려다 본다.

한강봉은 희미하여 그 존재감을 확실히 분간하기 힘들지만 팔일봉과 노고산 그리고 그 이후로 이어지는 마루금이 선명하게 이 산객의 뇌리에 남아 멋진 추억으로 남겨진다.

 

 

다시 이어지는 바위 암릉구간을 지나 오르니 삼형제를 이루고 있는 바위가 나타나고 그 이름을 삼형제봉이라 붙여 본다.

그 암릉 바위를 넘으니 다시 무명봉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조금 더 멀리 조망을 바라보니 또 다른 맛이 나는 시간이다.

우측으로 지나온 감악지맥 마루금이 보이고 그 좌측 능선으로 눈을 돌리면 신암리쪽 산줄기 지나 저 멀리 희미하게 불곡산과 도락산 자락이 가물거린다.

 

 

이제 지나온 감악지맥 마루금의 좌측을 바라보니 저 아래 하얀 눈을 덮어 쓰고 있는 신암저수지가 내려다 보이고 그 우측으로는 감악지맥이 그리고 좌측으로는 금이산 방향의 산줄기가 나란히 달려가고 있다.

몇년전 옆지기와 함께 법륜사에 애마를 주차시키고 이곳 임꺾정봉으로 올라 저 신암저수지를 내려다 보며 좋은 추억을 남겼던 곳이기에 오늘 다시 그 추억에 젖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제 다시 지나온 감악지맥 마루금을 살펴 본다.

바로 아래에 방금 이 산객이 타고 올라온 군부대 유격훈련장이 펼쳐져 있고 봉우리 두어개를 넘어 우측으로 설마치고개로 하산하는 등로도 보인다.

어제 힘들게 걸었던 노고산 방향은 산줄기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저 멀리 팔일봉과 한강봉은 희미하지만 존재감을 확실하게 전해 준다.

오르지 않고 바라볼 때와 직접 두 발로 올라 본 후 살펴보는 마루금이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들고 있음을 다시 한번 절감하는 시간이다.

 

 

또 다른 각도에서 지나온 감악지맥 마루금을 살펴 본다.

바로 좌측 뒷편으로 능선을 사이에 두고 좌우측이 서로 다른 수종으로뒤덮혀 있는 무명봉 넘어 저 멀리 보이지 않던 노고산과 그곳을 중심으로 이어진 감악지맥이 시원하게 들어 온다.

정상을 타고 넘었으면 금새 넘었을 노고산을 근 한시간 이상 우회하며 도로를 따라 진행하던 시간은 이미 먼 옛날 추억처럼 빛바랜 사진이 되였다.

 

 

조금 더 올라 드디어 540봉에 도착을 하고 그곳 능선에서 앞 위쪽을 올려다 보니 잡목 나뭇가지 사이로 3개의 멋진 암봉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좌측이 장군봉 전위 암봉이고 가운데가 장군봉 그리고 우측에는 임꺾정봉이 올려다 보인다.

거칠게 보이는 암봉 사이마다 푸른 솔잎을 드러내며 굿굿하게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는 소나무의 모습에서 또 다른 생명력과 살아있음을 느끼는 시간이기도 하다.

 

 

 

다시 약간은 평이한 능선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약간의 바위들이 산재한 등로가 나타나고 그 바위 사이에는 많은 낙엽들이 떨어져 쌓여 있어 여간 미끄럽지가 않다.

조심하며 걸어 진행하니 저 위로 다시 바위 암릉지대가 나타나고 그 우측 방향으로 쇠철봉과 로프가 설치되어 있다.

그곳 로프를 타고 암릉 지대를 올라 조금 더 가깝게 올려다 보이는 장군봉과 임꺾정봉을 살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장군봉 전위 암봉을 올려다 보니 아찔할 정도로 직각 절벽을 이루고 있는데 그 정상부는 암봉처럼 보인다.

그 전위봉 우측으로는 장군봉 능선과 저 멀리 임꺾정봉이 하얀 잔설을 덮고 위풍당당하게 서서 이 작은 산객에게 어서오라 손짓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임꺾정봉 우측을 살펴보니 저 멀리 희미하게 양주의 도락산과 불곡산이 보인다.

혹시나 하고 마차산 방향을 살펴보지만 임꺾정봉에 가려 마차산과 소요지맥 그리고 왕방지맥은 보이지 않는다.

다시 남쪽으로 무명봉과 그 뒤로 펼쳐진 감악지맥 마루금을 살펴보는 시간은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을 소중한 추억으로 남겨지는 시간이다.

 

 

 

이제 다시 정신을 차리고 어제 어렵게 진행해 온 감악지맥 마루금을 살펴 본다.

바로 앞에 설머치고개가 능선에 숨어 있고 어제 내려온 마루금 넘어 저 멀리 노고산이 가물거리며 노아산과 팔일봉이 나도 여기 존재하고 있다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좌측 중앙쪽으로는 오두지맥 마루금이 보이고 좌측 끝자락으로는 감악지맥 분기봉인 한강봉과 그 한강봉을 두고 앞뒤로 흐르는 한북정맥이 가물거린다.

 

 

 

한동안 그곳에서 주위 조망과 풍경을 살펴본 후 다시 오르니 거대한 암봉이 앞을 가로막아 오르지 못하고 암봉을 앞에 두고 좌측으로 우회하는 등로를 따른다.

넓은 너럭바위처럼 생긴 바위를 지나 걸어가니 그곳 바위 위에도 안전 철봉과 로프가 달려 있고 안전하게 그 로프의 도움을 받으며 암봉지대를 무탈하게 통과한다.

 

 

 

그 바위 암봉을 좌측으로 우회해 안전 철봉과 로프지대를 지나니 다시 조금은 가파라지는 급경사 오르막 등로가 이어지고 그 등로를 타고 오르니 등로 좌측 옆으로 조금은 신기하게 생긴 돌초소가 눈 앞에 나타난다.

군사지역이기에 이러한 군초소들이야 많은 것이 당연하겠지만 기초를 마치 첨성대 쌓듯 돌로 만들고 그 위에 콘크리트 초소를 만든 후 지붕까지 덮었으니 소위 말하는 호텔급 초소처럼 보인다.

너무나 오래된 군생활에 대한 추억이라서 그런지 이러한 풍경 하나하나가 이 산객에게는 모두 소중한 추억이 되고 있는 것이다.

 

 

 

멋진 돌초소를 지나 오르니 벤취와 이정표가 보이는데 살펴보니 이제 범바위에서 3.5 Km 지나 왔고 장군봉까지 0.3 Km 그리고 감악산정상까지는 0.7 Km 남았다는 거리 표시가 반갑다.

이제 오르막 등로에 설치된 안전목책과 로프를 타고 장군봉 전위봉인 암봉으로 향하는데 이 산객 바로 앞으로 두명의 등산객이 먼저 오르고 있다.

그 오르막 등로엔 아직도 많은 잔설이 남아 있고 그동안 많은 등산객들이 다니면서 얼어 붙어 빙판길이 만들어져 있어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그렇게 올라 드디어 암봉 정상에 도착을 하고 제일 먼저 장군봉 암릉과 임꺾정봉 그리고 좌측 저 멀리 감악산 정상부의 높은 철탑을 담아 본다.

 

 

 

이제 암봉 정상으로 올라 다시 한번 천천히 어제 걸어 온 감악지맥을 살펴 본다.

박무로 인해 희미하지만 그 윤곽만큼은 뚜렷하게 남아 이 신객의 머릿속에 고운 추억으로 쌓아두는 시간이기도 하다.

좌측 저 멀리 첼봉과 한강봉이 보이고 그 우측으로 오두지맥 능선이 보이며 우측 중앙부쪽에 팔일봉도 멋진 산줄기를 만들며 당당하게 서 있다.

노아산은 보일듯말듯 애간장을 태우고 오르지 못한 노고산이 아쉬운듯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 노고산에서 이곳 감악산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은 높지 않게 올망졸망 잊혀지지 않을만큼의 산줄기를 만들어 달려오고 있는듯 보인다.

바라보며 그 이름 하나 하나를 불러 보는 이 시간이 그저 행복하기만 하다.

 

 

 

마침 그곳 암봉에서 처음 만났던 등산객 두명과 인사를 나누다 보니 그 중 한명이 이곳 25사단 출신이고 이 산객도 30여년이 넘는 시간 전에 이곳 25사단에서 군복무를 한 경험이 있기에 그때의 군생활과 주위 풍경을 주제로 약간의 시간을 보내 본다.

두 등산객이 먼저 떠나고 잠시 더 머물며 주위 풍경을 사진에 담고 좌측 내리막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그곳에도 역시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되어 있어 미끄러운 등로를 타고 조심하며 진행을 한다.

그곳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안부가 나타나고 이정표 하나가 서 있는데 신암저수지를 들머리로 잡았을 때 2.5 Km 거리이고 이곳에서 장군봉까지는 0.2 Km 그리고 감악산정상까지는 0.6 Km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가 되어 있다.

 

 

 

안부에서 잘 설치된 나무계단을 타고 장군봉으로 오르니 갑자기 등 뒤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려 바라보니 젊은 친구 한명이 재빠르게 장군봉으로 올라 오고 있다.

잠시 쉬면서 등로도 비켜주고 사진을 담고 있으니 진행하지 않고 옆에 서서 인사를 건네며 초코렛 하나를 건네준다.

감사한 마음에 받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20대 초반인데 월롱에서 살고 있으며 가끔 주위 산들을 오른다고 전해 준다.

보통의 젊은이와는 다르게 멋진 인생을 살고 있다는 생각에 잠시 부러워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제 장군봉 암봉과 저 멀리 신암저수지 및 그 주변 풍경들을 사진에 담아 본다.

 

 

 

나무 계단을 타고 장군봉 능선 암봉으로 오르니 일망무제 시원하게 펼쳐진 조망이 산객의 발길을 붙잡는다.

젊은 등산객도 먼저 인사를 나누고 저 멀리 도망가듯 달아나고 다시 여유를 찾아 멋진 사하를 사진에 담으며 즐겨 보는 시간이다.

방금 전 올랐다 내려온 540봉 암봉 위에는 또 새로운 등산객들이 차지하고 추억을 남기기 바쁜 모습이고 그 암봉 저 멀리 어제 걸어 온 감악지맥 마루금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남쪽으로는 신암저수지와 능선들 그리고 감악지맥이 내려다 보이고 등로 우측 앞으로는 절벽을 이루고 있는 임꺾정봉과 그 우측 아래에 소나무 두어그루가 서 있는 작은 암봉이 산객의 눈길을 잡는다.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에 다시 많은 사진을 남기고 천천히 장군봉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 본다.

이어지는 임꺾정봉과 그 우측 아래의 소나무 암봉이 너무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자꾸만 산객의 발길을 붙잡는 시간이기도 하다.

 

 

 

다시 나타나는 안부를 만나 그 옆에 서 있는 법륜사 하산 이정표를 보니 오래전 옆지기와 진달래 피던 시절에 올라 즐겼던 추억을 생각해 내곡 따스한 미소를 지어 보는 시간이다.

이제 장군봉까지 0.1 Km 남아 있고 감악산정상까지는 0.5 Km 남았다는 거리 표시와 함께 좌측으로 법륜사 하산 방향 표시가 눈에 들어 온다.

그 이정표 옆에는 별도의 작은 현위치 4-3 장군봉데크란 이정목과 양주감악산등산안내도가 서 있다.

사진에 담고 다시 발길을 돌려 나무계단을 타고 장군봉으로 올라 보는 시간이다.

 

 

 

장군봉으로 오르는 나무계단도 설치된지 얼마되지 않았는지 깨끗하기만 하다.

그 계단 정상부로 올라 뒤돌아 보니 계단 아래 안부에 설치되어 있는 이정목과 이정표 그리고 등산안내도가 보이고 그 안부 넘어 저 아래쪽에 540봉의 암봉이 보인다.

그저 바라만 봐도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아닐 수 없다.

 

 

 

드디어 장군봉 바로 직전의 암봉에 올라 지나온 마루금을 다시 한번 뒤돌아 본다.

방금 전 올라 멋진 조망을 즐겼던 540봉 암봉이 이제 제법 멀어져 가고 그 넘어 넘실거리는 감악지맥 마루금이 언제 다시 볼 수 있느냐며 아쉬움을 전해 주는듯 하다.

다만 박무로 인해 이 산객이 어제 걸어 진행했던 감악지맥 마루금을 선명하게 바라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암릉을 타고 오르니 암릉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이렇듯 당당하게 푸른 잎을 만천하에 드러내며 살아가는 소나무 한그루가 눈길을 잡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사진에 담아 본다.

산에 올라 홀로 걷다보면 인생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가족이나 하는 일에 대한 생각도 하게 되지만 무엇보다 많은 시간 생각하는 것은 역시나 늘 접하는 자연에서의 삶과 인생일 것이다.

저 바위들과 소나무 한그루를 만나 오늘 이 산객이 배우고 느끼는 것이 또 많이 있으니 앞으로 살아가면서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시간이 되였으리란 생각이다.

 

 

 

다시 천천히 장군봉으로 걸어가다 아쉬움에 뒤돌아 서서 지나온 540봉 암봉과 저 멀리 감악지맥을 담아 본다.

희미하지만 감악지맥의 분기봉인 한강봉에서 팔일봉을 거쳐 오르지 못한 노고산을 통과해 이곳 감악산으로 이어지는 나즈막한 산줄기가 모두 보이기 시작한다.

어제 아침 저 시작했던 한강봉에서 이쪽을 바라봤을 때도 오늘처럼 감악산과 마차산까지 뚜렷했었는데 오늘은 어제만큼의 멋진 조망은 아니지만 가슴속에 남겨질 풍경들은 충분히 보는 듯 하다.

 

 

 

그렇게 주위 풍경을 즐기며 걸어가니 드디어 암릉 중간에 감악산장군봉이 보이고 그 옆에는 현위치 4-4 장군봉 정상이란 이정목과 커다란 감악산등산로가 서 있다.

그곳 정상에서 남쪽을 내려다 보니 방금 전 540봉에서 헤어졌던 등산객 2명이 작은 소나묻들이 분재처럼 자라고 있는 암봉에 올라 천하를 굽어 내려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감악산은 경기도 파주시와 양주시 그리고 연천군 사이에 있는 산으로 높이 675 미터로서 예부터 바위 사이로 검은빛과 푸른빛이 동시에 흘러나온다 하여 감악 즉 감색바위라고 하였다.
이 일대는 광활한 평야지대로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였는데 원래 감악사, 운계사, 범륜사, 운림사 등의 4개 사찰이 있었다는데 현재는 1970년 옛 운계사 터에 재창건한 범륜사만 남아 있다.

장군봉 아래는 조선 명종 때 의적 임꺽정이 관군의 추적을 피해 숨어 있었다는 임꺽정굴이 있으며 6·25전쟁 때는 격전지로 유명해서 설마리 계곡에 영국군 전적비대한의열단 전적비가 남아 있다.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으며 의정부 북쪽 회천에서 양주시 남면을 지나 설마리를 거쳐 감악산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높이 20여 미터에 달하는 운계폭포가 나오고 폭포 뒤로 범륜사가 있으며 그뒤로 전형적인 암산의 모습을 띤 감악산이 보인다.

범륜사에서 감악산으로 오르는 길은 오른쪽 능선을 타고 임꺽정봉과 장군봉을 거쳐 정상에 이르는 코스남쪽에서 계곡길을 거쳐 올라가는 코스가 있으며 임진강 하류의 넓은 평야지대를 바라보면서 북쪽 능선을 타고 오르는 길도 있다.

맑은 날에는 개성의 송악산과 북한산이 보인다.

 

 

 

장군봉에서 남쪽으로 지나온 감악지맥을 바라보는 조망 역시 환상이다.

계속 따라오는 우측의 멋진 조망을 즐기며 다시 출발하니 안전목책과 로프가 달려 있는 암릉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잠시 셀카놀이를 하면서 임꺾정봉을 배경으로 사진 한장 남겨 보지만 빛이 약해 선명하질 못하다.

이제 임꺾정봉이 지척으로 다가와 손을뻗으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이 바로 코 앞이다.

 

 

 

암릉을 타고 진행하다 계속 바뀌는 임꺾정봉의 풍경에 연속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손길이 바쁘기만 하다.

하지만 생각보다 등산객들이 적어 왜 그럴까 생각을 해 보니 이 산객처럼 먼 거리를 종주하는 지맥 산꾼이 아니라면 이곳 정상부까지 오르기엔 너무나 이른 시간이다.

붐비지 않은 호젓한 등로를 따라 제대로 된 조망과 암릉미를 동시에 즐기는 시간이다.

 

 

 

잠시 더 바위 암릉을 타고 진행하니 암릉이 끝이나며 나즈막한 안부로 내려가도록 되어 있는데 그 안부에는 2개의 벤취와 우측 사면 등로에 이정표 하나가 서 있다.

그 안부 좌측 저 멀리에는 감악산 정상부의 철탑이 방향타 구실을 하면서 조심하며 오라고 이야기를 전해 주는듯 하다.

그 안부를 바라보며 조심해 안부로 내려 선다.

 

 

 

안부로 내려가니 벤취 2개를 지나 우측 사면 등로 앞에 동굴바위 쉼터까지 0.3 Km 그리고 신암저수지까지 2.3 Km 남아 있다는 갈림 삼거리 이정표가 서 있다.

이곳에서 지맥 등로는 우측 신암저수지 방향이 아닌 임꺾정봉 0.1 Km와 감악산정상 0.5 Km란 좌측 직진 방향으로 진행을 해야 한다.

약간의 북서면을 타고 오르니 이곳은 고도도 높아져 있고 햇살이 잘 비추지 못하는 응달이다 보니 등록 얼어있어 약간은 미끄럽다.

체인젠을 꺼낼까 말까 고민하다 조금 더 조심하며 걸어 올라가 보기로 한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평이한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무명봉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조금 더 진행하니 큰 바위가 있는 앞에 좌측 방향으로 임꺾정봉까지 0.05 Km 남아 있고 지나온 방향으로 장군봉 0.2 Km 그리고 앞으로 진행해야 할 우측 방향으로 정상까지가 0.4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서 있다.

그곳에서 임꺾정봉 방향으로 짧은 계단을 오르니 넓은 공터에 임꺾정봉 정상석(676.3봉)과 임꺾정봉(매봉재)설명판 그리고 삼각점과 벤취가 보인다.

그러고 보니 이곳 경기도 북부지역의 많은 장소가 임꺽정과 설인귀와 관련된 지명이 많아 흥미롭다.

임꺽정봉 정상에 있는 임꺽정봉(매봉재) 설명판을 읽어 본다.

감악산 에 위치한 봉우리로 부도골 북쪽에 있으며 생긴 모양이 매와 비슷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현재 봉우리 밑에는 굴이 있으며 다섯 걸음을 들어가면 구덩이가 나오는데 컴컴하여 깊이와 넓이를 추측할 을 정도라고 한다.

일명 응암봉이라고도 하는데 적성현지(1842), 적성현지(1871)에 모두 등장한다.

한편 응암봉 밑에 있는 굴에 대해서는 설인귀굴 또는 임꺽정굴이라고도 부르는데 일설에서는 고려 말 충신 남을진 선생이 은거한 남선굴이 바로 이 굴이라고도 전해진다라고 적혀 있다.

 

 

 

임꺽정봉에서 떠나기 전 아쉬워 방금 전 지나온 감악지맥을 다시 한번 뒤돌아 본다.

우측 바로 앞에서 부터 장군봉과 암봉 그리고 540봉이 보이고 그 밑 저 멀리 이 산객이 어제 걸었던 감악지맥 마루금이 박무속에 희미하게 다가온다.

깨끗하지 못한 조망에 아쉬움이 남지만 그것이 산행이고 인생이며 산행인 것을 어찌 이 작은 인간이 바꿀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제 남쪽으로 신암저수지를 가운데 두고 우측의 감악지맥 마루금을 따라 어제의 시간을 추억해 본다.

설마치고개가 내려다 보이지만 어제 오르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 있는 노고산은 사진에서 빠지고 저 멀리 희미한 팔일봉만 고개를 들고 있다.

언제 다시 이곳에 올라 어제와 오늘의 시간을 다시 추억 할 수 있을지 기약이 없기에 더욱 그리움으로 남겨지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계단을 타고 그 임꺽정봉을 내려 와 갈림 삼거리 이정표에서 우측 임꺽정 굴로 내려가 보니 얼어있어 위험하다는 생각이지만 절벽 근처는 가지 않고 굴 입구에서 사진만 한장 담아 온다.

양주시 자료에 따르면 임꺽정굴(설인귀굴)은 감악산 남쪽 매봉재에 위치하여 있는 굴로서 고구려를 치러 온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이곳에 진을 쳤다는 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곳이다.

설인귀굴로 알려진 이곳은 일제초기의 문헌에서 처음 확인된다.

조선지리(1918)에서는 봉암사를 소개하면서 이 절이 바위로 이뤄진 굴속에 있는데 설인귀가 혈거한 곳으로 전해진다고 하였다.

한편 마을 노인들은 임꺽정굴이라고도 하며 감악산 정상 부근 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임꺽정굴을 사진에 담고 다시 임꺽정봉 갈림 삼거리로 뒤돌아 올라 와 이제는 나무계단을 타고 내려가며 감악산 정상 방향으로 진행을 한다.

계단이 끝나고 미끄러운 얼음판 등로가 이어지기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준비한 체인젠을 착용한 다음 편안하게 진행을 하니 등로 좌측에 벙커가 있는 갈림 삼거리에 이정표 하나가 서 있다.

살펴보니 우측으로 원당저수지와 구름재 갈림 삼거리로서 임꺽정봉에서 0.2 Km 지나 왔고 정상까지 0.2 Km 남아 있다는 기리 표시가 함께 되어 있다.

사진에 담고 다시 정상 방향으로 진행한다.

 

 

 

 

 

구름재 갈림 이정표가 서 있는 삼거리를 지나 나즈막한 봉우리를 오르니 다시 등로는 안부로 이어지고 그곳에서 올려다 본 감악산 정상부는 잡목 사이로 아주 가깝게 자리하고 있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 안부에 도착을 하니 좌측으로 법륜사에서 올라 오는 등로가 보이고 이제 정상까지는 0.1 Km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가 반가운 시간이다.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법륜사는 감악산 등산로 입구에 세워진 아담한 사찰이다.

원래 감악산에는 감악사, 운계사,  법륜사, 운림사 등 총 4개의 사찰이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소실되고 지금의 법륜사는 지난 1970년 옛 운계사터에 재창건된  것이다.   

중앙 대웅전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미타전과 동양 최초의 백옥 11면 관세음보살상이, 전면에는 9층 석탑과 자연석으로 세운 세계평화의 비가 있고 절 뒤편에 위치한 산신각 안에서 시원한 석간수가 흘러나온다.

하지만 법륜사의 가장 큰 볼거리는 바로 높이 20여 미터의 운계폭포인데 거의 수직으로 떨어지는 운계폭포는 겨울  빙벽훈련에도 이용된다.

세조의 공덕비 2억 5천만년 전 통나무가 돌이 되어버린 목화석 동양 최초 11면 관음보살상 회나무 삼층탑 운계폭포등 볼거리가 많은 절이기도 하다.

그곳 안부를 지나 오르니 현위치 1-7 고릴라바위란 이정목이 서 있는데 아무리 봐도 옆에 서 있는 바위가 고릴라를 닮지는 않아 보인다.

 

 

 

고릴라 바위를 지나 오르니 다시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된 계단이 나타나고 그 계단을 타고 오르니 양주감악정이란 사각정자가 나타난다.

그 사각정자 우측으로 가 보니 절벽으로 이뤄져 있고 약간의 조망이 펼쳐져 있어 잠시 구경도 해 본다.

동쪽으로 지금부터 열심히 걸어 올라야 할 마차산이 감악산 정상부 우측 능선 옆으로 살며시 고개를 내밀고 있다.

 

 

 

감악정에서 잠시 조망을 즐긴 후 다시 계단을 타고 오르니 드디어 넓은 헬기장으로 이뤄진 감악산 정상에 도착해 북쪽 철 울타리 안에서 초소 근무를 하고 있는 사병 2명과 인사를 나눈다.

감악산은 휴전선이 멀지 않은 경기최북단 지역인 파주시 적성면에 있는 암산으로 정남쪽 산자락에 있는 신암저수지에서 본 감악산의 모습은 정상부가 동쪽과 남쪽에 깎아지른 암벽으로 되어 있는 암봉이 그림 같다.

적성에서 의정부로 넘어가는 고개에서 바라본 감악산의 모습도 명산에 걸맞게 암봉들과 암릉이 연이어져 높은 스카이라인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제법 웅장해 보이는데 까치봉이 있는 서북쪽 능선과 임꺽정봉이 있는 서남쪽 능선은 아름다운 암릉과 암봉들이 거의 연이어져 높이 700미터가 채 안되는 산인데도 코스가 아기자기하다.

장군봉을 중심으로 한 암봉과 단애들은 부근에는 비슷한 예가 없을 정도로 감악산 일대만의 빼어난 풍광을 이루며 부근에 높은 산이 없어 감악산 조망은 아주 시원한데 남쪽은 양주벌판이고 북쪽과 서쪽은 광활한 임진강 하류 옥토지대지만 상당부분은 북한의 개풍군이다.
역사를 알고 감악산에 올라온 사람이라면 착잡한 느낌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을 것인데 감악산은 예나 지금이나 전략적 요충지라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파주군 적성면과 감악산 일대는 그 뛰어난 전략적 가치 때문에 삼국시대 때 뺏고 뺏기는 요충지였다.(신라통일이전 삼국이 쟁패하던 시절 칠중성이 바로 적성 즉 파주이다)

그 사실은 이곳에 성터가 발견되었다는 보고등으로 이미 웬만큼은 다 알려진 상태이며 서북쪽 능선에 올라서서 능선을 따라 정상으로 가다 북쪽을 바라보면 임진강과 강 건너편 벌판이 발아래 내려다 보인다.

어느편이든 감악산을 점령하고 있다면 임진강 하류 유역의 광활한 평야지대는 감악산 주둔군의 장악하에 들어갈 게 틀림없음을 느끼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한 전제는 20세기가 다 지나가는 지금에도 유효한 명제이니 착잡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6.25때 국군이 감악산을 장악함으로써 임진강 건너편 옥토가 회복된 것처럼 말이다.
정상에 돌비가 하나 서 있는데 이 비석의 주인공은 신라의 야심찬 젊은 왕 진흥왕이냐 아니면 당나라 장수 설인귀냐 하여 설왕설래가 계속되고 있는데 이름하여 비뚤대왕비라는 이 비석이 진흥왕이 세운 것으로 보는 사람들은 비석의 모양이 북한산 비봉의 진흥왕 순수비와 흡사하다는 점, 신라의 영향이 한반도 중부에 미치기 시작한 것이 진흥왕때라는 점을 들어 그의 순수비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고 있다.

반면에 당나라 장수로 이 땅에 와서 신라를 도왔던 장수 설인귀로 보는 사람들은 설인귀가 이곳 사람인데도 외국에 가서 출세를 했고 그의 제사가 정상에서 모셔졌다는 것을 들어 설인귀의 비로 본다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며 많은 사진을 남기다 보니 감악산 몰자비와 감악산비가 눈길을 잡는다.감악산 몰자비는 감악산 정상에 있는 향토유적 8호로 지정된 삼국시대 옛날 비 즉 고비나 빗돌대왕비 또는 설인귀 사적비라고도 하며 비문의 글자는 마멸되어 있는데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이고장 출신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설인귀 비라는설도 있으며 1982년 6월5일 동국대학교 학술조사단이 발견하였고 학계에서는 비의 양식이나 건립 추정연대 지형적 조건 등 으로보아 또하나의 진흥왕 순수비로 추정하며 그 구체적인 이유로는 비의 형식이 북한산비의 전체적인 외형과 흡사하고 기단의 경우 자연암반에 축을형성하여 건립한 양식이 똑같으며 크기는 감악산비가 높이 170 Cm에 두께 19 Cm 그리고 너비 78 Cm인데 비해 북한산 비는높이 155 Cm 두께 20 Cm 너비 71 Cm로 거의 비슷한 크기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며 고산자 선생은 대동지지 적성조에서 감악산단을 기술하면서 산유고비(山有古碑)라 기록하였고 조선시대에 발간된 적성군志 에도 그 소재를 밝히면서  

명문의 판독이 불가능 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감악산비의 안내문을 읽어 보니 임진강 유역 즉 한강 유역은 본래 마한 땅인데 백제가 이어 받았다가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 빼앗기고 말았다. 그 후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어 잠시 수복하였다가 신라의 배신으로 이 땅을 다시 신라에 빼앗겼는데 배신으로 빼앗은 땅에 신라는 신주(신천주 즉 북한산주)를 설치하고 삼각산 비봉에는 신라의 강역임을 선언하는 진흥왕 순수비를 세웠다.

이 때 세 나라가 빼앗고 빼앗겼던 성과 보루가 한강과 임진강 사이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 칠중성도 그 중 하나였다.

민간에서는 당나라 장수 설인귀를 감악산 신으로 여겨 왔고 유래는 분명치 않으나 고구려 멸망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수나라 당나라의 30만 대군과 100만 대군이 쳐들어 와도 고구려는 끄떡없이 이들을 물리쳤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앞장선 장수가 설인귀였으니 설인귀는 당나라의 영웅이 되고 평양에 당이 안동도호부를 두자 군정 총독이 되었다.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죽자 세 아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 장자 연남생이 당으로 도망가 고구려를 치는 전투에 당군의 앞잡이가 되었으니 나라의 운명을 인간의 욕심이 망친 것이다. 이러한 아픈 역사를 두고 단지 설인귀가 이 지방 출신이라는 것을 자랑 삼아 일부 민간에서 설인귀를 감악산 신으로 모시고 지내 왔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너무나 많은 사진을 담고 또 즐겼지만 여전히 북쪽 군부대 뒤로 보여야 할 한탄강과 북녘 땅이 박무로 보이지 않으니 아쉽기만 하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기 직전 아쉬움에 다시 한번 방금 전 지나 온 임꺽정봉을 바라 본다.

거대한 암봉 덩어리 위에 살짝 내려 앉은 하얀 눈이 더욱 운치있게 만들고 있지만 응달에는 녹지 않아 얼음으로 변한 눈으로 인해 어찌나 미끄럽던지 겨울 산행 준비를 완벽하게 하지 않으면 고생 좀 해야 할 봉우리이기도 하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임꺽정봉이란 이름에 잠시 미소를 지어보며 임꺽정을 생각해 본다.

16세기 중반 몰락농민과 백정·천인들을 규합하여 지배층의 수탈정치에 저항하고 정국을 위기로 몰아넣었던 임꺽정은 홍길동 및 장길산과 함께 조선의 3대 도적으로 일컬어지는데 일명 임거정 또는 임거질정이라 불린다.

경기도 양주에서 백정 신분으로 태어나 황해도에서 생활했던 임꺽정은 뜻을 같이하는 비슷한 처지의 농민 수십 명과 그 가족으로 집단을 이루어 황해도의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도적활동을 시작했다. 날쌔고 용맹스러우며 지혜로웠던 그는 1559년경 황해도와 경기도 그리고 평안도까지 활동영역을 넓혀 이 지역의 관청이나 양반 및 토호의 집을 습격 이들이 백성에게서 거두어들인 재물을 빼앗았다. 또한 서울과 평양 간 도로와 그밖의 주요 교통로를 장악하여 정부가 농민들로부터 거두어들인 토지세와 공물 및 진상물 등을 탈취했고 이와 함께 관군의 방비와 토벌의 허점을 교묘히 찌르며 세를 확장하면서 빼앗은 재물을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어 의적으로서의 성가를 높이고 이들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았다. 위기감을 느낀 정부 지배층이 여러 차례 관군을 동원하여 진압하려 했으나 이를 번번이 물리치고 1559년에는 개성부 포도관 이억근마저 잡아 죽였고 1560년 가을에는 봉산과 개성을 거점으로 서울까지 진출했으나 같은 해 11월 참모인 서림이 체포되면서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정부는 서림에게서 활동의 계획과 비밀을 알아내고 선전관 정수익과 봉산 및 평산의 관군으로 하여금 토벌하도록 했으나 뛰어난 전투력과 농민 및 이서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 세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당시 이서와 농민의 도움은 임꺽정의 부대가 모이면 도적이 되고 흩어지면 백성이 되어 출몰을 예측할 수 없어 잡을 수가 없다고 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1561년에 들어 황해도와 경기도 북부 그리고 평안도와 강원도 지역에 출몰하여 활동했으나 관군의 대대적인 토벌이 이어져 형인 가도치가 체포되는 등 세력이 점차 위축되었다. 토포사 남치근이 이끄는 관군의 끈질긴 추격으로부터 도망하던 중 마침내 1562년 1월 서흥에서 부상을 입고 체포당해 15일 만에 죽음을 당했다.

임꺽정의 의적활동은 연산군 이후 명종대에 이르기까지 조선 전체에서 일어났던 농민봉기의 일환이며 그 집약점이었는데 이 시기 농민의 저항은 당시의 사관이 "도적이 되는 것은 도적질하기 좋아서가 아니라 배고픔과 추위가 절박해서 부득이 그렇게 된 것이다. 백성을 도적으로 만드는 자가 누구인가"라고 기록한 바와 같이 사회경제적 모순이 격화됨에 따라서 지배층에 저항하여 전국 각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임꺽정 집단의 치열하고 오랜 활동은 정부·지배층에게는 불안과 공포의 위기의식을 심어주었으며 피지배층 일반에게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이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도 상반되어 지배층은 그를 흉악무도한 도적이라고 했고 민중들은 의적으로 영웅시했다.

그뒤 그에 관한 많은 설화가 민간에 유포되었고 그의 행적이 소설로 그려지기도 했다.

산행 뿐만 아니라 이곳 지역과 관련된 역사적인 사실까지 알게 되니 더욱 산행의 재미가 느껴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렇게 한동안 감악산 정상에 머물며 옛 추억에 젖어 보기도 하고 주위 조망을 즐겨 보기도 하지만 역시나 박무로 인해 한탄강과 이북 땅을 볼 수 없으니 아쉬운 시간이다.

그동안 올라 오는 등산객 하나 없어 다시 벗어 놨던 배낭 둘러 메고 이제 늘목리(1등산로와 적동분교) 3.84 Km와 하늘아래 첫동네(2등산로) 2.46 Km 방향으로 긴 나무계단을 타고 내려가며 감악산과 아쉬운 작별을 한다.

이제부터 한동안 저 늘목리(적동분교)란 이정표 방향을 따라 맥 잇기 산행을 이어 갈 것이다.

 

 

 

가파른 나무계단을 타고 한동안 내려가니 등로에는 잔설이 제법 남아 있고 좌측 사면으로 나 있다.

등로에는 안전목책과 로프가 달려 있어 진행하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지만 아이젠을 착용해야 되는지 착용하고 진행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시간이다.

조금 더 사면 잔설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안부가 보이고 그 안부 지나 다시 나무계단과 그 우측으로 암벽도 보이기 시작한다.

잠시 후 안부에 도착해 우측으로 동광정사와 남선굴 하산 갈림 이정표를 만난다.

이곳에서 지맥 등로는 감악산신당 3.1 Km와 초록지기마을 4.3 Km 방향의 직진 방향이다.

 

 

 

안부 삼거리를 지나 오르니 다시 계단이 나타나고 계단 우측으로는 절벽 위에 바위들이 서 있는 형국이다.

그렇게 짧은 오르막 계단을 오르니 생각지도 못한 성모마리아상이 서 있다.

그 성모마리아상 우측 뒷편으로 바위가 보이는데 혹시나 하고 가 보니 전망바위 역활을 하고 있다.

방금 전 내려 온 감악산 정상부와 좌측 저 멀리 임꺽정봉이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으로 다가온다.

 

 

 

성모마리아 상 뒷쪽 전망바위에서 바라 본 임꺽정봉이다.

우측 감악산 정상부는 잘려있지만 바라 볼 땐 모두 보이는 정말 멋진 조망이였다.

언뜻 보면 만수짓찌를 즐기고 다가 선 헬기장에서 올려다 보는 월악산의 영봉을 닮았다는 생각을 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성모마리아상을 내려와 이제 교통호를 타고 진행해야 하는데 그곳에 얼음이 얼어 아이젠 없이 진행하기에 위험이 따를 것 같아 미련 없이 아이젠을 착용하고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진행을 해 본다.

교통호를 지나 내려가니 등로 우측으로 나무 거치대가 보이는데 이곳이 군사지역 훈련장임을 감안하면 병사들이 식사나 비를 피할 수 있는 용도로 만들어진 시설물처럼 보이지만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방치된 것처럼 보인다.

 

 

 

방치된 나무 시설물을 지나니 안부로 내려서고 그곳에는 정상에서 0.24 Km 지나왔고 늘목리(적동분교)까지 3.24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서 있다.

그 이정표 옆에는 군벙커가 보인다.

안부를 지나 오르다 뒤돌아 보니 다시 암봉 넘어 저 멀리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임꺽정봉이 보인다.

다시 진행하니 이제 등로가 북사면을 통해 진행되고 등로에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제법 깊은 눈이 쌓여 있어 미끄럼을 타고 진행하듯 걸어 본다.

조금 더 진행하니 감악산정상에서 0.3 Km 진행해 왔고 적동분교(제1등산로)까지 3.54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지난다.

다시 임꺽정봉과 지나온 감악지맥 마루금을 바라 본 후 신암저수지 좌측의 산줄기를 내려다 보니 이름은 없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으로 남아 있다.

 

 

 

다시 진행하려니 방금 전 봤던 이정표 옆에 또 다른 이정표 하나가 보이는데 그곳에는 정상에서 0.3 Km 지나 왔고 초록지기마을까지 4.1 Km와 감악산신당까지 2.9 Km 남아있다는 거리 표시가 되어 있다.

그러고 보니 이곳 등로에는 필요 이상으로 너무 많은 이정표가 두군데의 지자체에서 경쟁적으로 세워 놔 없는 것보다 더 혼란스럽게 다가 온다.

불필요한 이정표의 잘못된 거리 표시 보다는 꼭 필요한 곳에 필요한 용도로 세워줬으면 하는 바램이 가득한 시간이기도 하였다.

이제 안전목책과 로프가 달려 있는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타고 눈썰매를 타듯 내려가니 등로 우측으로 바위지대가 나타나고 곧이어 절벽단애를 이루는 병풍바위 앞에 도착 해 앞으로 진행해야 할 저 멀리 동쪽으로 마차산을 담아 본다.

 

 

 

등로 우측 아래로는 낭떨어지 절벽으로 이뤄진 병풍바위가 존재하고 그 병풍바위 위 능선을 타고 좌측으로 진행하게 된다.

다시 눈이 깊이 쌓여 있는 안전목책과 로프가 달려 있는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감악산 정상에서 0.4 Km 지나왔다는 이정표가 보이고 이곳에서도 초록지기마을 4.0 Km 남아 있다는 방향으로 진행을 한다.

다시 좌우 양쪽으로 서 있는 바위 가운데를 통해 언덕을 넘으니 동광정사 갈림 이정표가 서 있는데 이정표가 각기 다른 지자체에서 세워둔 등로 양쪽에 2개가 서 있다.

정상에서 0.5 Km와 병풍바위에서 0.1 Km 지나 왔고 우측으로는 동광정사까지 1.2 Km남아 있다는 등로를 버리고 초록지기마을까지 3.9 Km 남아 있다는 방향으로 진행을 해야 한다.

 

 

 

다시 진행방향으로 걸어가니 벙커가 보이고 등로 좌측으로 하늘아래첫동네 2.0 Km하산 갈림 이정표가 서 있는 삼거리를 지난다.

이곳에서도 직진 방향의 늘목리(작동분교) 2.96 Km 방향이 지맥 마루금이다.

조금 더 가니 넓은 헬기장이 나타나고 그 헬기장 우측 한쪽에 거치대가 보이는데 글씨가 모두 사라져 어떤 안내글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곳에서 위를 바라보니 그곳에 너무나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 병풍바위가 올려다 보이고 그 뒷편으로 감악산 정상의 철탑도 보인다.

또한 병풍바위 좌측 아래로 작은 남선굴도 보인다.

여기에서 남선굴에 대한 자료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과 함께 남을진 선생에 대한 설명이 함께 되어 있다.

남선굴은 양주시 남면 황방리 감악산 중턱에 있는 인공 석굴로서 봉암사에서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약 30분 정도 걸으면 다다르는 감악산 중턱 병풍바위 옆에 위치해 있고 그 남선굴 앞에는 두 그루의 활엽수를 중심으로 돌무지가 둘러져 있다.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케 하는 기와 및 토기 조각이 주변에 흩어져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알려지지 않았고 다만 남선굴은 화강암 암벽을 뚫어 만든 인공 굴이며 높이 2.4미터, 너비 4.5미터, 길이 2미터 정도의 규모이다.

굴 안에 다시 2개의 작은 굴을 팠는데 오른쪽 굴에는 웅덩이가 있어 물이 모이도록 하였고 왼쪽 굴에는 안쪽에 3개의 굴이 있는데 오른쪽 굴에는 바닥 부분에 4매의 판석을 깔아 대석으로 사용하였던 듯하다.

굴의 상부에는 굴선남이라고 우측에서 좌측으로 글자를 새겨져 있고 지금은 복을 비는 사람들의 기도소로 이용되고 있다.

고려 말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사은으로 불린 곡은 남을진이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맹세하고 이 굴에서 은거하다가 끝내 굶어 죽었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이는 남선굴은 남을진과 관련하여 생긴 이름으로 볼 수 있다.

 

남을진 선생은 고려말 충신으로 본관은 의령으로 공양왕 때 참지문하부사가 되었던 사람으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끝까지 충절을 지킨 두문동 72현중의 한사람이다.

성질이 강직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정몽주, 길재등과 사귀었는데 고려말 정치가 문란하여 사천에 은거 1392년 조선의 개국 후 태조 이성계에 의해 사천백으로 봉해지자 감악산에 들어가 생을 마감했다.

사후 그가 거처한 자리를 남선굴이라 했다.

이렇게 또 다른 역사적인 사실을 배우고 가는 감악지맥 산행이 디고 있다.

 

 

 

 

헬기장에서 잠시 병풍바위와 남선굴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을 공부하고 진행하려다 감악산 우측 능선을 보니 그곳에도 멋진 산줄기가 지나고 그 우측 끝자락에 인공구조물이 보인다.

언뜻 봐서는 저 능선이 혹시 감악지맥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어 지도와 나침판을 들고 정독을 한 후 상세 산행 자료를 살펴보니 이 산객이 현재 진행하는 이 등로가 정상 감악지맥임을 확인하고 의심되는 산줄기를 사진 한장으로 남기는 것으로 대신한다.

 

 

 

이제 등로엔 눈 대신 깊이 쌓인 낙엽이 사각거리며 이방인을 반기고 그렇게 조금 더 진행하니 다시 안부가 나타나는데 이곳 역시 다른 두 지자체에서 각기 다른 두대의 이정표를 등로 양쪽에 세워 놓고 있다.

이런 것을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감악산정상에서 1.1 Km 지나왔고 적동분교(제1등산로)까지는 2.74 Km 남아 있다는 연천군에서 세운 이정표와 또 다른 양주군 이정표가 보인다.

그 가운데에는 벤취쉼터 하나가 놓여 있어 심신이 피곤한 산객들이 쉬어 갈 수 있도록 해 놨다.

 

 

 

안부를 지나 걸어가니 낙엽위에 잔설이 남아 있는 또 다른 모습의 등로가 열려 있고 저 멀리 또 하나의 이정표가 보인다.

감악산정상에서 1.21 Km 지나왔고 늘목리(적동분교)까지는 2.28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이지만 매번 만나는 이정표마다 거리와 목적지가 달라지니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할지 감이 서질 않는다.

그 이정표를 지나니 다시 등로엔 하얀 눈이 쌓여 있고 그곳을 지나 걸어가니 나즈막한 안부를 통과한다.

다시 감악산정상에서 1.57 Km 지나왔고 늘목리(적동분교)까지는 1.88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지나 계속 부드러운 등로를 따르니 등로 앞쪽으로 간간히 마차산이 올려다 보인다.

계속 이어지는 부드러운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소나무 군락지를 지나 벤취2개가 놓여있는 무명봉을 넘어 잣나무 군락지를 지난다.

그렇게 진행하니 감악산정상에서 2.36 Km 지나왔고 늘목리(적동분교)까지는 1.48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만나고 그 뒤에 송전탑 54번이 서 있다.

그 송전탑 앞에서 뒤돌아 보니 감악산 임꺽정봉과 정상 그리고 그곳에서 이곳까지 이어져 온 감악지맥 마루금이 한눈에 들어 오는데 너무나 아름답다.

 

 

 

송전탑 54번을 지나 더 진행하니 감악산정상(제1등산로)에서 2.44 Km 지나왔고 적동분교(제1등산로)까지는 1.4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만나고 조금 더 진행하니 등로 우측으로 주황색 로프에 노란색 코팅지가 매달려 있다.

살펴보니 임업부산물 무단 채취 금지 안내판인데 이 로프가 간패고개 직전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의미는 이 로프만 따라가면 등로를 잃을 염려는 없다는 의미이지만 그것 때문에 늘목리 갈림 삼거리에서 잠시 알바를 경험하게 된다.

 

 

 

다시 소나무 군락지에 쌓여 있는 잔설을 밟으며 진행하니 감악산정상(제1등산로)에서 2.43 Km 지나왔고 늘목리(적동분교)까지는 1.06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보인다.

다시 그 이정표를 지나 진행하니 바위들이 산재한 등로를 지나고 곧이어 이정표가 서 있는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해 살펴보니 감악산정상(제1등산로)에서 2.58 Km 지나왔고 늘목리(적동분교)까지는 0.86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이다.

살펴보니 갈림 삼거리인데 좌측으로는 완만한 내리막 등로가 이어져 있고 그 방향으로 늘목리 방향 표시가 되어 있으며 우측 방향으로는 주황색 로프와 노란색 코팅지가 이어져 있다.

이곳에서 잠시 등로 좌측 늘목리 방향으로 내려갔다 이상한 생각에 자료를 찾아보고 지도를 정치해 보니 정상 등로는 좌측 늘목리 방향이 아닌 우측 코팅지 방향이다.

다시 갈림 삼거리로 뒤돌아 올라 와 주황색 로프와 노란색 코팅지를 따라 정상 등로를 타고 진행해 본다.

 

 

 

이제 정상적인 등로를 찾아 여유롭게 콧노래를 부르며 우측 주황색 로프와 노랑색 코팅지를 따라 걸어가니 잔설이 쌓여 있는 등로 위를 걸어간다.

잠시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그곳에는 다시 교통호가 나타나는데 로프와 코팅지는 그 교통호를 따라 이어지고 있다.

등로 주위에 자라고 있는 소나무가 아름다운 등로이다.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다시 무명봉으로 오르니 약간의 잡목이 나타나고 좌측으로 휘어지는 등로를 따라 가니 등로 우측에 송전탑 52번이 서 있다.

다시 부드러운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이제 솔잎이 깔린 등로가 이어지더니 갑자기 등로 좌측으로 낙엽송 구간이 지나간다.

이제 등로 우측으로는 양주시 남면의 황방리 마을이 내려다 보이고 조금 더 걸어가니 다시 송전탑 51번을 만나고 앞으로는 지금부터 간패고개를 지나 진행해야 할 마차산 등로가 시원하게 올려다 보인다.

우측으로 휘어지는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가족 묘지들이 나타나고 그곳에서 잠시 배낭 내려 사과 하나를 먹으며 허기를 달래 본다.

묘지지대 앞으로는 봉암저수지도 내려다 보인다.

 

 

 

묘지 위에서 사과 하나 먹고 나니 다시 힘이 나고 좌측 밭을 통해 내려가니 368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간파고개이다.

간파고개는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간파리에서 양주시 남면 황방리를 잇는 고개로 368번 지방도가 지나가며 간파령 또는 황방리 고개라고도 부르는데 고개 아랫마을인 간파리에는 효자문이 있는 마을로 의령남씨 집성촌이다.간파령은 19세기 초반 문헌인 만기요람(1808)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간파현으로 소개 되었으며 17세기 금석문에 감파라는 이름이 등장하는데 지금의 간파고개 일대의 명칭이라 추정되고 있다

고개 부근 황방리에는 조소앙 선생묘소가 있으며 고개넘어 간파리에는 함석헌 선생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도로 좌측에는 세영테이프 공장이 있고 그 공장 반대편으로 도로 건너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들어가자 마자 다시 나타나는 갈림 삼거리에서 이번에는 좌측으로 흐르는 시멘트 임도를 버리고 우측 오르막으로 이어지는 비포장 임도가 지맥 등로이다.

 

등로 우측의 양주시 남면 황방리는 남면에서 북쪽 끝에 위치한 마을로서 동쪽으로 은현면 봉암리, 서쪽으로 신암리, 남쪽으로 한산리, 북쪽으로 연천군 전곡읍 늘목리와 접해 있다.

황방리라는 땅이름이 문헌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은 18세기 후반으로 호구총서에서는 이곳을 적성현 남면에 소재한 황방리로 소개하였고 이후 1842년판 및 1871년판 적성현지에서도 그대로 표기하고 있다.

한편 1914년 일제의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면의 많은 마을이 통폐합되면서 땅이름과 영역이 많이 변하였으나 황방리는 예외였으며 대한제국기의 남면 적성군 황방리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과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에 나와 있지만 황방리의 한자 표기가 황방리로 변화되었다는 점이 특색이다. 이후 1945년 9월 미군정 포고령 제22호에 따라 파주군에 속하였다가 1946년 2월 남면 주민들의 요청으로 양주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황방리라는 땅이름은 옛날에는 원래 감악산 아래 대나무가 무성하였고 그 모습이 흡사 꽃과 같아 황방과 황뱅이 또는 황방동이라 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조선후기의 기록에 적혀있는 황방리의 한자를 통해서 볼 때에는 감악산 남쪽에 위치한 이곳에 무수히 많은 골짜기가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추측되며 1914년 이전에는 적성 문녀촌이라고도 불렀는데 원당저수지 북쪽에 있는 굿당의 무녀들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현재 황방리에는 감악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가두어 만든 원당저수지(1969년 조성)와 봉암저수지가 있어 휴일만 되면 많은 강태공과 등반객들로 붐빈다.

감악산 자락에는 고려말 충신인 남을진 선생이 은거하였다는 남선굴이 있다.

 

간파리는 본래 양주군 영근면의 지역으로 간파 또는 간패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페합에 따라 연천군에 편입되었고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남쪽이 되어 파주군 적성면에 편입되었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60년 11월 18일 구역확장규칙개정에 따라 다시 연천군 전곡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현재 1개의 행정리와 3개 반 4개의 자연마을로 이뤄져 있다.

 

 

우측 임도를 따라 오르니 제법 큰 군부대 지하벙커가 나타나고 그 앞을 지나 능선으로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묘지 2기가 보인다.

그 묘지 옆에서 지나 온 감악지맥 마루금을 살펴보니 저 멀리 감악산 임꺽정봉에서 이곳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박무속에서도 확연히 드러나 있다.

이곳에서 보니 감악지맥 마루금이 송전탑을 따라 비슷하게 이어져 오고 있음에 놀라울 따름이다.

바로 아래 간패고개의 세영테이프 공장 건물과 파란색 지붕도 빤히 내려다 보인다.

 

 

 

그 묘지 위에서 조망을 즐긴 후 잡풀이 무성하게 자랐다 말라죽은 등로를 따라 걸어 오르니 송전탑 50번 밑을 지나고 다시 능선으로 들어 잠시 교통호를 따르다가 푹신한 낙엽 등로를 만나 콧노래를 불러 본다.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잔설이 깔리 미끄러운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바로 눈 앞에 다람쥐 한마리가 포즈를 취하며 이방인을 반겨 준다.

다람쥐는 전세계 각지에서 숲이나 사막·초원·툰드라 등 다양한 서식지에 살고 있으며 약 50속 260종이 있으며 이들 가운데는 땅다람쥐와 마못쥐 그리고 줄무늬다람쥐류가 있다.

많은 다람쥐가 나무에 살지만 마못쥐 같은 몇몇은 땅에 살며 날다람쥐와 같은 것들은 앞다리와 뒷다리를 연결하는 늘어지고 털이 덮인 피부를 이용해 나무 사이를 날아다닌다.

다람쥐는 어느 것이나 뒷다리가 강하고 꼬리가 잘 발달했으며 꼬리에 털이 나 있다.

다람쥐는 색깔과 무늬가 서로 다르며 모양도 가는 것(날다람쥐)부터 뚱뚱한 것(마못쥐)까지 다양하다.

몸길이도 다양해서 아프리카난쟁이다람쥐의 경우 10 Cm밖에 안 되지만 아시아에 사는 큰다람쥐류는 90 Cm에 이른다.

 

 

 

다람쥐를 만난 후 다시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타고 등줄기와 이마에 굵은 땀방울을 흘리니  등로가 나타나고 낙엽 깔린 양탄자 같은 등로를 따라 여유를 찾아 본다.

굵은 활엽수들이 등로 주위에 자라고 있는 부드러운 등로를 만나 걸어가고 잠시 교통호 같은 등로를 따라 걸어 본다.

다시 등로는 낙엽속 희미한 등로로 이어지고 조금 더 오르니 이정표 하나가 서 있다.

살펴보니 감악산에서 남동쪽으로 진행하다 제일 남쪽 봉우리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이곳에서 좌측 마차산 방향으로 틀어 북동쪽으로 오르게 된다.

전곡읍 간파리 방향에서 올라 와 좌측 마차산 정상 2.9 Km 방향으로 진행하는데 우측 방향으로는 동두천 동광교(종주끝) 6.0 Km 표시가 있는 갈림 삼거리이다.

 

 

 

동두천 갈림 삼거리 이정표를 지나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가니 다시 부드러운 낙엽 등로가 열리고 곧이어 시멘트 임도와 만난다.

임도를 만나 좌측으로 타고 조금 진행하니 코너에 늦은고개 이정표가 서 있는데 우측으로 웃안흥리 0.7 Km 갈림 이정표이다.

이제 마차산 정상까지는 2.8 Km 거리이다.

늦은고개는 경기도 양주시 남면 봉암리에서 연천군 전곡읍 간파리를 잇는 고개인데 왜 늦은고개인지 자료를 찾아도 알 수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단지 봉암리에 대한 자료만 찾아 올려 보기로 한다.

봉암리는 은현면에서 북쪽 끝에 위치한 마을로서 동쪽과 북쪽으로 동두천시, 서쪽으로 남면 황방리와 하산리 및 입암리, 남쪽으로 운암리와 하패리와 접해 있다.

원래 논밭으로 이루어진 지역이었는데 1952년 미군의 주둔(현재는 한국군이 주둔하고 있음)과 더불어 오늘날의 모습으로 변모하기 시작했고 암리라는 땅이름이 문헌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18세기 후반인데 이는 오늘날의 봉암리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즉 호구총수(1789)에 나온 이담면 봉암리와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나온 상봉암리는 오늘날의 봉암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데 이들 지역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은현면에 편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봉암리는 1914년 새롭게 형성된 행정구역으로 개편 이전의 묵은면 사패리와 현내면 하패리 및 이담면 안흥리 그리고 적성군 남면 하산리등 4개 리에서 일부지역을 떼어 내어 봉암리라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이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에 실려 있다.

봉암리라는 땅이름은 봉암 즉 봉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봉데미고개를 비롯하여 봉암리 일대에 바위가 많았기 때문이다.

봉암리 지역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곳은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항상 물이 많고 좋았으며 산에는 소나무와 밤나무가 숲을 이루어 왜가리와 황새 등이 항상 날아와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냈다고 한다.

실제 봉암약수터 주변의 산세와 약수물은 이지역 사람들의 자랑이기도 한데 현재 봉암리에는 여말선초 불사이군의 대표적인 표본인 충신 남을진의 묘와 정절사등 역사유적이 산재해 있으며 대부분의 지역에 군부대가 자리잡고 있는 관계로 예전 모습에서 많은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다.

 

 

 

오늘도 이곳 늦은고개부터 마차산 정상부근까지 어제와 마찬가지로 넓은 임도를 따라 걸어가도록 되어 있다.

나즈막한 언덕을 넘어 내리막 임도를 타고 걸어가니 임도 우측으로 묘지들이 나타나고 그 묘지 위에서 앞을 올려다 보니 송전탑을 따라 저 멀리 마차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이 선명하다.

이제 조금씩 따가워지는 햇살을 피해 모자 하나 쓰고 진행을 해 보지만 흐르는 땀방울로 인해 금새 벗어 던진 후 다시 천천히 임도를 따라 걸어 본다.

 

 

 

다시 잔설과 얼음 그리고 낙엽이 교대로 쌓여 있는 임도를 따라 걸어 오르니 감악산보다는 제법 등산객들이 보이고 인사 드리며 교차한다.

우측 위로 올려다 보이는 마차산 등로를 바라보며 조금 더 걸어 오르니 임도가 좌측으로 꺽여 오르고 그 앞에 사각정자가 서 있다.

그 사각정자로 오르기 직전 우측으로 분기하는 임도 하나가 내려가는데 그 좌측에 이정표 하나가 서 있다.

살펴보니 우측 임도로 내려가는 길은 다솜농장 방향으로 농장까지는 1.0 Km의 거리란 표시가 되어 있다.

이제 마차산 정상까지는 1.8 Km 남아 있는 거리이다.

사진 한장 남기고 사각 정자로 가 배낭 내려 준비한 간식과 음료수 한병 마신 후 다시 힘을 내 천천히 임도를 타고 마차산으로 향한다.

 

 

 

넓은 공터를 지나 가파른 오르막 등로에 마차산등산로란 이정표가 보이고 그 이정표 화살표를 따라 오르니 임도가 조금은 가파른 오르막으로 변하고 있다.

다시 활엽수가 임도 좌우로 가득찬 곳이기에 수북히 쌓여 있는 낙엽을 밟고 걸어가는 시간은 색다른 경험으로 다가온다.

뽀드득 뽀드득 거리는 낙엽 밟는 소리가 청아하게 들려온다는 느낌은 어떤 느낌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계속 이어지는 낙엽 임도를 따라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오르니 임도 우측으로 담안삼거리 1.3 Km 갈림 이정표가 서 있다.

이제 마차산 정상까지는 1.2 Km 남았다는 거리 표시가 반가운 시간이다.

그곳 이정표를 지나 오르니 벤취 하나가 보이는 헬기장 같은 공터가 나타나고 다시 잔설이 제법 쌓여 있는 부드러운 등로를 따라 오르니 등로 좌측에 벤취하나와 송전탑이 서 있는 410봉에 도착해 소나무 밑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등로 좌측의 송전탑 밑으로 가 연천군 전곡읍 간파리 마을 넘어 감악산과 임꺽정봉을 올려다 본다.

아침에 올랐던 감악산인데 이제 박무속에 그 모습이 희미하게 멀어져 가고 있다.

 

 

 

410봉에서 조망을 즐긴 후 다시 배낭 둘러메고 오르니 완만한 낙엽 등로가 이어지고 있다.

완만하게 내려갔다 오르기를 반복하고 다시 잔설이 남아 있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로프가 달려 있는 잔설의 가파른 오르막 등로가 이어지고 어렵게 로프를 다잡고 이마에 땀을 흘려 본다.

낙엽 떨어진 등로에 산재해 있는 바위지대를 지나 다시 양탄자 같은 낙엽 등로를 밟고 여유롭게 올라 본다.

 

 

 

멋진 양탄자 같은 낙엽 등로를 타고 오르니 다시 바위들이 산재한 등로로 바뀌고 등로 좌측으로 벙커들도 보인다.

또 다시 나타난 로프를 잡고 올라 산재된 바위지대를 넘으니 H자가 선명한 헬기장에 도착을 하고 그 헬기장 넘어 잡목 사이로 올려다 보이는 마차산 정상부를 조망해 본다.

그 마차산 정상부의 좌측에는 드높은 송전탑 하나가 눈에 가시처럼 아프게 다가오는 시간이기도 하다.

 

 

 

헬기장 우측으로는 동두천의 안흥동과 상봉암동 그리고 하봉암동이 내려다 보이지만 박무로 인해 잘 보이지는 않는다.

아주 오래전 저 근방에서 잠시 젊은 청춘을 받쳐 열심히 일했던 경험이 있기에 남다르게 다가오는 마을 이름들이다.

다시 잔설과 낙엽이 혼재된 등로를 타고 오르니 앞으로 큰 바위와 암릉들이 길을 막아서고 등로는 그 암릉을 우회하도록 나 있다.

 

 

 

암릉을 지나 잠시 낙엽 깔린 양탄자 같은 등로를 따르니 다시 눈 앞에 거대한 암봉들이 나타나고 그 암봉과 암릉을 좌측으로 우회해 통과한다.

다시 나타나는 거대 암봉 하나를 좌측으로 우회해 통과하고 연속으로 이어지는 암릉을 타고 오르니 등로는 우측의 암봉을 좌측 사면 등로로 우회하도록 길게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잠시 더 오르니 등로는 좌측 직진으로 이어지지만 우측 등로 아래에도 갑자기 이정표와 119 구급함이 보인다.

그곳으로 가 살펴보니 동두천역에서 올라오는 갈림 삼거리로서 동두천역까지 3.7 Km, 동광교 9.1 Km 그리고 마차산 0.1 Km란 거리 표시가 있는 기도원 삼거리이다.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원 지맥 등로로 복귀해 얼마 남지 않은 마차산으로 향한다.

 

 

 

마차산까지 100미터 남았다는 이정표를 보고 오르지만 그 마차산 정상은 쉽게 허락하질 않는다.

잠시 오르니 멋진 바위들이 줄지어 늘어선 형태로 이 산객을 반겨 준다.

마치 도봉산의 오봉을 촘촘히 붙여 줄지워 세운듯 그런 형상으로 바위들이 줄지어 있다.

다시 사진 한장 남기고 그 바위를 좌측에 두고 우측으로 우회하며 통과한다.

 

 

 

오봉같은 바위를 지나 오르니 금새 또 다른 암릉 구간이 나타나고 이번 암릉 구간에는 그 한가운데에 말라죽은 소나무 한그루가 서 있다.

어렵고 힘든 시기를 잘도 버텨 견디다 그 힘이 부쳐 더 이상 삶을 이어가지 못하고 말라 죽은 소나무 한그루가 홀로 오르는 이 산객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 짧은 시간에 삶과 죽음 그리고 조화와 부조화에 대한 생각들로 잠시 머리가 멍한 시간이기도 하였다.

 

 

 

그 바위 암릉 구간을 우회하며 무탈하게 넘어 오르니 바위들이 산재한 무명봉이 나타나고 그 정상에도 힘들게 삶을 이어가고 있는 제법 굵은 소나무 한그루가 이 산객의 마음에 풍파를 던지고 있다.

그 소나무 한그루를 지나 오르니 금새 관리되지 않아 허물어져 가고 있는 마차산성이 보인다.

관리가 전혀 되지 않는 마차산성과 함께 마차산자락에는 삼국시대의 군사시설인 산성과 봉화대 터도 남아 있는데 이는 그만큼 이 마차산이 예전부터 군사요충지였다는 의미이다.

마차산은 바로 38선과도 인접해 있고 6·25 직전에는 북한군의 남침을 눈치 챈 한국군이 구축한 방어선이 북위 38선으로 연결되는 주문진 북방에서 춘천 북방, 가평 북방, 포천 북방, 소요산, 마차산, 감악산과 임진강 일대를 연결하는 선이었다.

그래서 38선 방어선 한 축이었던 마차산도 격전지였으며 마차산 전투의 기록도 별도로 전해질 정도이다.

정상에서 사방으로 늘어진 능선 곳곳에는 6·25 때 한국군과 북한군이 구축한 참호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이곳이 얼마나 격한 격전지였는지를 말해 준다. 

마차산 계곡이 시신으로 덮일 정도였다고 전하는데 세월이 흐르며 그 심했던 상처들은 많이도 아물어 이제는 그 흔적조차 사라지고 있는 자연의 치유성을 실감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마차산성으로 오르니 넓은 공터처럼 보이는 한곳에 군사용 삼각점이 보이고 바로 우측 가까이에 마차산 정상의 정상석과 등산안내도가 건너다 보인다.

이제 질척이는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금새 마차산 정상에 도착해 주위 조망을 즐기며 사진 몇장 남겨 본다.

동두천역을 지나 소요산역으로 향하는 열차에서 왼쪽 차창을 통해 올려다 보이는 산이 있는데 이 산이 이제까지 소요산의 유명도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마차산(588.4봉)이다.

이 산 정상은 봉화대였고 6.25 이후에는 군사기지가 있었을 정도로 널찍한 공터로 이뤄져 있어서  정상에 오르면 사방으로 조망이 막힘없이 터진다.
마차산은 한북정맥과 연결되어 있는데 양주군 회천읍과 양주읍 경계를 이루는 한북정맥은 남서쪽으로 이어지다가 불곡산(470봉)을 지나 꾀꼬리봉(425봉)에 이르기 직전 무명봉에서 세 갈래로 갈라진다.

남으로 방향을 틀어 나가는 능선은 사패산(532봉)을 지나 도봉산으로 이어지고 꾀꼬리봉 직전에서 한북정맥을 이탈해 북서쪽으로 갈라지는 능선이 있다.

이 능선이 소사고개 , 노아산(336.7봉),  노고산(400.9봉)을 지난 다음 약 12 Km 북진하다가 설마치고개에서 산세를 낮춘 다음 약 3 Km 거리에 이르러 들어올린 산이 감악산(675봉)이다.
감악산에서 임진강에 막혀 방향을 동쪽으로 틀어 3 Km 거리의 황뱅이고개에서 가라앉은 다음,약 3.5 Km 더 나아간 곳에 빚어놓은 산이 마차산이다.

마차산에서 계속 북동으로 퍼져나가는 지능선들은 한탄강과 한탄강 지류인 신천(일명 강화천)에 여맥을 모두 가라앉힌다.
연천군 전곡읍과 동두천시 경계를 이루는 마차산은 3번 국도와 경원선 철로를 사이에 두고 소요산과 마주보고 있다.

마차산은 국립지리원 발행 지형도에는 마차산(馬車山)으로 되어 있지만 주민들이 세운 안내판에는 마차산(磨叉山)으로 되어 있다.
이곳 마차산에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우리의 옛날 종교에서는 그 고장의 높고 영험한 산을 골라 하늘님과 선조의 신령을 위하였으나 예가 바로 삼신께서 주재하시는 갈뫼(마구)이다.

다산과 풍요를 베푸시고 하루밤 사이에 앞쪽의 석성을 쌓으시기도 하신 삼신할머니는 세상만사를 어우르시는 여가의 수리바위에 앉으셔서 옥비녀와 구슬을 갈고 매무새를 고치셨다는 전설에서 그이름에 갈비녀차를 붙여 마차산이라 명명하여 이른다고 전해진다.

 

 

 

 

마차산 정상에 도착해 바위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 와 조망을 즐겨 보지만 짙어진 안개 때문에 보이는 것이 별로 없다.

그래도 등로 우측으로 희미하지만 소요산이 눈에 들어 와 반가운 마음에 사진으로 담아 본다.

그 뒤쪽으로 포천의 왕방산도 보여야 할 곳이지만 제한된 시야로 인해 소요산을 만난 것으로 만족하는 시간이다.

 

 

 

마차산 정상에서 잠시 남쪽과 남동쪽 조망을 즐긴 후 방금 전 지나 온 마차산성쪽을 바라보니 절벽 암벽 넘어 부드러운 봉우리가 보인다.

이제 저 마차산성도 지자체의 관심으로 조금 더 잘 보관되고 아픈 역사를 복원해 이곳에 오르는 등산객들에게 좋은 역사 공부가 될 수 있기를 바래 본다.

이제 질척이는 진흙 등로를 벗어 나 벗어 놨던 배낭을 메고 다시 우측 헬기장 쪽으로 출발한다.

 

 

 

헬기장이 펼쳐진 곳을 지나는데 이곳 헬기장엔 많은 등산객들이 올라 와 점심식사를 즐기고 있다.

시간을 보니 이제 오후 1시를 넘기고 서서히 허기가 지기 시작하는 시간이지만 너무나 복잡하기에 조금 더 진행 후 호젓하게 점심을 즐기기로 한다.

감악산에서 만나지 못했던 등산객들을 이곳 마차산의 현위치 1-5 헬기장에서 모두 만난듯한 착각에 빠져 본다.

 

 

 

헬기장을 지나 잔설이 남아 있는 등로를 타고 걸어 진행하니 다시 현위치 1-4 삼거리 안내판이 보이고 그 옆에는 마차산에서 0.1 Km 지나 왔고 초성교까지 7.5 Km 더 진행해야 하며 우측 방향으로 소요산역 3.9 Km와 동두천역 4.0 Km 갈림 이정표가 보인다.

이제부터 임도 갈림 끝자락까지 초성교 이정표와 거리를 보고 걸어가면 될 것이다.

 

 

 

갈림 삼거리를 지나 진행하니 암봉이 앞을 가로 막고 좌측으로 우회해 통과하니 벙커가 보인다.

벙커를 지나니 이제 제법 많은 등산객들이 이 산객과 반대 방향에서 마차산을 오르고 그 오른 발자국이 뱀이 꿈틀거리듯 선명하게 나 있다.

많이 남아 있는 잔설로 산행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길찾기에는 수월하니 그것은 장점으로 다가 온다.

이제 무조건 아이젠을 착용하고 안전하게 여유를 찾아 걸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 위에 쌓인 낙엽과 잔설을 밟으며 여유롭게 내려가니 저 아래 한무리의 등산객들이 능선에서 쉬고 있고 그 등산객들을 막 지나쳐 좌측에 송전탑 43번 밑으로 가 전곡읍 간파리를 지나 우뚝 솟아 있는 감악산을 바라 보며 사진 몇장 담아 본다.

박무로 인해 아쉬움은 남지만 이것도 하늘의 뜻이니 받아 들이고 즐길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감악산을 조망한 후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따라 부드럽게 내려가니 잔설이 남아 있는 등로에 많은 등산객들이 같은 곳만 밟고 진행했기에 등로만 녹아 색다른 풍경을 선사하고 있다.

북사면에는 많은 잔설이 보이지만 남사면에는 눈이 모두 녹아 바삭거리는 낙엽이 귓전을 울린다.

활엽수 나무를 타고 진행하니 번호가 없는 송전탑을 지나 곧바로 등로 좌측으로 채석장이 보인다.

벌써 상당부분 마차산 줄기를 파먹고 들어 온 풍경이 몰골 사납도록 가슴을 때리는 시간이다.

어쩔 수 없겠지만 채석 후 하루라도 빨리 복원 될 수 있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주길 바라는 마음 뿐이다.

 

 

 

채석장을 내려다 본 후 조금 더 걸어 송전탑 끝부분으로 이동하니 저 멀리 감악산이 다시 멋지게 조망되고 잠시 머물며 몇장의 사진에 나눠 담아 본다.

좌측 봉우리로 임꺽정봉이 절벽단애를 이루고 그 우측으로 감악산 정상부가 지리산 반야봉처럼 두 봉우리로 보인다.

이제 급할 것 없으니 다시 여유를 부려 보지만 허기가 심하게 지기 시작하고 이제부터 진행하면서 따뜻한 장소를 찾아 점심식사를 하고 출발하기로 한다.

 

 

 

그렇게 그곳 송전탑에서 조망을 즐긴 후 진행하니 현위치 2-3 댕댕이란 안내판이 서 있고 그 옆에 댕댕이고개란 이정표가 별도로 서 있는데 마차산정상에서 0.9 Km 내려왔고 초성교까지 6.7 Km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가 보인다.

댕댕이고개는 옛날 이 자리에 댕댕이 덩굴이 숲을 이뤘기 때문에 생긴 지명이라 하는데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활엽수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듯 보인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내려가면 소망기도원까지 1.7 Km이고 소요산역까지는 2.2 Km 거리란 표시가 눈길을 잡는다.

소요산역을 중심으로는 동두천시의 소요동이 자리하고 있는데 자료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들이 있다.

소요동은 동두천시의 최북단에 위치하며 본래 쇠둔치(소요둔치)란 이름이 상봉암동에 속한 자연마을이던 것이 시승격과 더블어 소요산이 그 관할 구역에 있으므로 소요동이라고 행정동명을 정한 것이다.이 소요동에는 다음과 같이 3개 마을로 이뤄져 있는데 쇠둔치는 소요산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로서 경원선과 3번국도가 마을 중앙을 관통하며 소요산 역이 있어 교통이 편리하게 되어 있다. 

원래 상봉암동에 속한 작은 취락이었으나 소요산이 개발되고 관광객이 몰려옴에 따라 점차 인구가 증가되었다.
소요라는 지명은 신라때의 고승 원효대사가 이 산을 개산하여 소요암을 세운 후부터 소요산이란 이름이 붙었으며 산입구에 자리잡은 마을을 쇠둔치라 하였다.
두번째는 사야위인데 이는 봉골로도 불러지며 아래사야위와 위사야위의 2개마을로 되어 있다. 

마을앞에 봉황새를 닮은 바위가 있어 이름을 봉바위라 하는데, 그로 인해 봉암이란 이름을 붙여 상봉암동 하봉암동으로 하였다. 

지금은 채석으로 인해 훼손되었다.(사야위란 들판을 말한다. 윗사야위는 윗돌, 아랫사야위는 아래돌을 뜻한다)

세번째는 동막골이란 마을이 있는데 왕방산의 힘찬 지맥이 북으로 뻗어 나가면서 서향으로 소요산을 펼쳐놓고 다시 꿈틀거리며 1 km를 달리다 동서로

아름다운 계곡을 형성, 그 입구에 옹기종기 20여 호의 마을을 이루어 수백년을 내려온 뿌리깊은 마을이다.
동두천시의 북단에 위치한 마을로 동쪽이 산으로 막혀있어 그 지형에 따라 동막골이라 한다.
마지막으로 용연동은 동두천시의 최북단 동향 계곡에 위치한 마을로서 계곡 안에 작은 폭포가 있고 그 폭포와 웅덩이를 용못이라 해서 이렇게 불려오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도적의 은거지라 해서 도독골로도 불러오고 있다.

 

 

 

 

댕댕이고개를 지나 벌목된 나무들을 쌓아 놓은 둔덕을 통고하니 다시 상수리나무 군락지가 나타나 능선에 쌓인 잔설을 밟으며 진행한다.

앞을 보니 잡목 가지 사이로 나즈막한 안부로 내려 앚던 등로는 다시 솟구쳐 431봉을 들어 올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 온다.

허기는 지는데 저 봉우리는 올라야 점심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조금 더 참아 보기로 한다.

다시 눈내린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현위치 2-2 밤골재란 안내판과 그 옆에 우측으로 밤골재에서 갈림길까지 산사태로인한 등산로 폐쇄란 이정표가 서 있다.

이제 마차산에서 1.3 Km 진행했고 초성교까지 6.3 Km 남았다는 거리 표시가 반가운 이정표 이다.

밤골재에 대한 자료는 찾지 못하고 그 밤골재가 속한 상. 하봉암동을 찾아 보니 마을 앞 쪽에 커다란 바위산이 있으며 그 바위산 중에 황새의 모양을 한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이 바위를 황새바위라 불렀으며 부엉이가 자주 날아들었다고 한다.

이 바위를 중심으로 그 남쪽을 윗사야위, 북쪽을 아랫사야위로 호칭하기도 하였는데 이 바위가 새바위 즉 봉암으로 불린 데서 마을을 상.하봉암동으로 불러왔다고 한다.

 

 

 

이제 밤골재 안부를 지나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따라 오르기 시작한다.

제선충제로 인해 벌목된 나무를 쌓아 말리는 풍경과 군 벙커가 자주 눈에 들어 오고 그렇게 길지는 않지만 제법 가파른 경사가 있는 오르막 등로를 오르니 제법 넓은 공터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늦은 점심을 해결한다.

짧은 점심 시간을 보내고 다시 내리막 등로로 내려가 안부를 지나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오르니 430봉 꾀꼬리봉이란 코팅지와 함께 등로 좌측으로 간파리 갈림 삼거리 이정표가 서 있다.

지도를 살펴보니 이곳이 바로 우측의 한탄대교와 좌측의 도감포로 빠지는 갈림 삼거리이다.

언젠가 시간이 되면 다시 마차산으로 올라 이곳에서 간파리를 통해 도감포로 내려갈 기회가 있기를 바라며 오늘은 등로 우측의 초성교 6.0 Km 방향으로 발길을 돌린다.

 

 

이제 다시 식재된 듯한 나무 등로 사이를 타고 너무나 여유롭게 걸어가고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가끔 뒤돌아 서서 지나온 마차산 능선도 올려다 본다.

다시 잔설이 쌓인 무명봉에 도착해 긴 한숨을 토해 내고 벙커를 돌아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따라 낙엽을 밟으니 다시 잔설이 제법 쌓여 있다.

이제 다시 잔설과 낙엽이 적당히 쌓여 아름다운 등로가 만들어져 있는 곳을 지나니 낙엽 등로가 우측 사면으로 나 있고 곧이어 등로 좌측으로 전곡읍 양원리 마을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본래 양주군 영근면의 지역으로 옛 양주 관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멀원리라 불리워오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기존의 윗멀원리(상원리)와 아랫멀원리(하원리)를 병합하여 상원과 하원의 두 원자를 따서 양원리하 하여 연천군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남쪽이 되어 파주군 적성면에 편입되었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었고  1960년 11월 18일 구역확장규칙 개정에 따라 다시 연천군 전곡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1개의 행정리, 6개 반, 4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멋진 등로를 따라 이 고장 마을유래도 공부하며 아름다운 조망도 즐기며 걸어가니 다시 부드러운 낙엽 등로가 반겨 준다.

운치있게 다가오는 잔설과 낙엽 등로를 타고 이제부터는 조금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니 바위 몇개가 산재한 안부가 나타나고 그 앞에 벤취와 함께 등로 우측으로 소망기도원 1.0 Km란 갈림 삼거리 이정표가 보인다.

마차산정상에서 2.55 Km 지나왔고 초성교까지 5.05 Km 남았다는 거리표시도 함께하는 이정표이다.

그러고 보니 내려오며 만났던 많은 등산객들이 저 소망기도원쪽에서 올라 마차산으로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이정표 이기도 하였다.

 

 

 

소망기도원 갈림 삼거리에 있던 이정표를 사진에 담고 다시 빠르게 낙엽 등로를 따라 진행하니 금새 또 다른 이정표 하나가 서 있는데 이곳 역시 등로 우측으로 소망기도원 하산 갈림 삼거리인듯 보인다.

마차산정상에서 2.65 Km 자나왔고 초성교까지 4.95 Km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로 봐 방금 전 만났던 이정표에서 단지 100미터 진행해 왔는데 왜 또 이렇게 이런 이정표가 붙어 있어야 하는지 이해가 불가능한 표식들이다.

그렇게 진행하니 다시 큰 소나무 한그루가 넘어져 죽어 있는 삼거리 갈림길에 또 다른 이정표 하나가 서 있고 이제 등로 우측으로는 등산로입구 1.1 Km란 표시와 함께 초성교까지 4.9 Km 남았다는 표시가 보인다.

그곳을 지나 진행하니 나뭇가지에 안내판 하나가 붙어 있는데 살펴보니 등산과는 무관한 양원리에 사는 개인 홍보 안내판이였다.

 

 

 

그 개인 홍보 안내판을 지나 조금 더 낙엽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금새 현위치 2-1 양원리 안내판과 그 옆에 양원리 고개 이정표가 서 있다.

이제 우측으로 소요산역까지 3.0 Km 거리이고 마차산에서 2.9 Km 지나 왔으며 초성교까지 4.6 Km 남아 있다는 거리표시가 있는 이정표이다.

이 양원리고개는 동두천시와 전곡읍을 이어주는 고갯마루인데 지금은 주위 도로가 발달되어 있어 이 고개를 이용해 왕복을 하는 사람들은 없는지 고갯마루로서의 역활도 없는듯 보인다.

 

 

 

양원리고개를 지나 잠시 더 진행하면 굴뚝봉이 나타나고 그 굴뚝봉 지나 내리막 등로에는 제법 많은 눈이 쌓여 있어 조심하며 내려가 본다.

한동안 등로에 쌓여 있는 많은 눈들로 인해 그동안 하지 못했던 눈산행에 대한 갈증을 풀고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낙엽 등로를 따라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봉암광산 1.2 Km란 이정표와 벤취 하나가 있는 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봉암광산 방향으로 길을 찾아 보지만 등로는 없는듯 한데 저 아래 채석장처럼 보이는 광산이 잡목 사이로 내려다 보이고 작업을 하지 않는지 조용하기만 하다.

 

 

 

이제 능선을 따라 낙엽과 작은 바위들이 산재한 등로를 따르고 그 바위지대를 지나니 마차산에서 3.5 Km 내려왔고 초성교까지 4.1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보인다.

다시 나타나는 잔설과 낙엽 등로를 따라 여유롭게 걸어가는데 어제부터 시작한 산행으로 인해 피로도가 오는지 두 다리가 약간은 무거워진 느낌으로 걸어 본다.

다시 교대로 나타나는 잔설과 낙엽을 따라 진행하니 또 다른 굴뚝봉에 도착을 해 잠시 심호흡 한번 해 본다.

 

 

 

굴뚝봉에는 굴뚝과 한쪽에 큰 구덩이가 보이는데 진지로 사용했는지 모르겠다.

이제 한동안 잔설과 낙엽을 밟으며 진행하다 잡목 사이로 보이는 높은 봉우리를 보니 아마도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인 구정산이 아닐까 생각을 해 보지만 경험상 그 구정산에 도착하려면 저 봉우리를 넘고도 한참을 더 진행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냥 무심하게 걸어 본다.

하지만 내심 마음속으로는 저 고봉은 오늘 넘어야 할 산이 아닐 것이야 하는 나약한 마음과 함께 말이다.

 

 

 

이제 지루하던 등로에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푸른 빛의 짧은 잣나무 군락지가 나타나고 그곳을 지나 교통호 같은 군 시서리 있는 무명봉으로 오른다.

어지럽게 널려 있는 교통호가 있는 안부를 지나 다시 눈길을 걸어 진행하니 등로 옆에 벤취 쉼터 하나가 눈에 들어 오고 곧이어 좌측으로 웃양원리 하산 갈림 삼거리에 이정표 하나가 서 있는 임도에 도착을 한다.

이곳에서 등로는 우측 임도쪽으로 꺾여 초성교 3.4 Km방향으로 진행한다.

 

 

 

이제 다시 시작된 임도를 만나 지루하게 그 임도를 타고 한탄강 직전까지 걸어가야 한다.

힘은 들지 않아 좋지만 지루하고 발바닥이 아프니 그것이 고역일 것이다.

이곳 임도 역시 일반 등로와 마찬가지로 낙엽과 많은 잔설이 공존하며 이어져 있고 그렇게 한동안 걷다 보니 임도 우측으로 잠시 조망이 터지고 그곳을 통해 내려다 보니 동두천의 하봉암동과 청산면의 초성리 방향이 보이고 그 뒷쪽으로는 왕방지맥의 마지막 봉우리쪽인 종헌산 자락이 보이지만 박무로 인해 희미하니 아쉽기만 하다.

 

 

 

임도는 산줄기의 나즈막한 봉우리들을 모두 우회하며 갈지자 행보를 하고 있고 어떤 곳은 절개지가 되어 자꾸만 돌들과 흙더미들이 임도로 내려 앉고 있다.

아마도 군사용 목적으로 개설된 임도이겠지만 지금은 그 용도가 다해 별로 사용한 흔적도 보이지 않고 군 장병들은 더욱 더 만나기 힘든 곳이다.

그렇게 다시 지루한 임도 산행을 이어가다 보니 저 멀리 임도 좌측에 이정표 하나가 서 있고 다가가 보니 등로는 이곳 이정표 있는 곳에서 좌측 오르막 임도를 타고 꺾여 진행하도록 되어 있다.

마차산에서 5.0 Km 진행하였고 초성교까지는 2.6 Km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도 함께한다.

 

 

 

좌측 가파른 오르막 임도를 타고 오르니 얼었던 땅이 녹아 약간 질척이지만 어제 걸었던 임도보다는 훨씬 양호한 상태이다.

곧바로 다시 낙엽 임도로 바뀌고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넓은 공터 위에 이정표 하나가 서 있다.

이제 마차산에서 5.3  진행해 왔고 초성교까지 2.3 Km 남아 있으며 임도 우측으로 승전교까지 2.5 Km 남아 있다는 승전교 갈림 삼거리 임도이다.

이곳에서도 좌측 초성교 방향이 지맥 마루금이다.

 

 

 

승전교 갈림 삼거리 임도를 지나 진행하니 임도 좌측으로 송전탑이 지나가지만 번호 확인은 불가능하다.

다시 이어지는 임도를 따라 걸어가니 누군가 비양심적인 사람이 가정용 가구와 전자제품을 이곳 산속으로 가져 와 버리고 갔는데 보는 사람의 눈이 다 민망 할 정도이다.

다시 드넓은 임도를 따라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로 오르니 등로 우측 저 멀리 희미하게 소요지맥과 왕방지맥의 산줄기들이 다가온다.

모두 올랐던 산줄기들이지만 벌써 오래전 기억들이기에 이제 추억속에서도 가물거리는 시간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멋진 산줄기를 바라보며 걸어 오르니 이제 바위들이 조각나 뾰족하게 능선에 박혀 있는 임도가 나타나고 좌측 절개지와 떨어져 우측 낭떨어지 옆을 통해 걸어 간다.

그렇게 한동안 걸어 오르니 임도 우측으로는 청산면의 나즈막한 산줄기를 지나 종헌산이 옾게 올려다 보인다.

다시 임도 좌측에 타이어 벙커를 지나 오르니 임도 좌측으로 바위 절개지를 통과하고 곧이어 넓은 공터에 임도합류지점이란 안내판과 이정표 하나가 서 있다.

이제 마차산에서 6.2 Km 지나 왔고 초성교까지 1.4 Km 남아 있는 임도삼거리로서 이곳에서 지금까지 벗하며 함께한 우측 초성교 방향을 버리고 직진 방향으로 지맥 산행은 이어진다.

 

 

 

임도 합류삼거리 공터를 지나 내려가니 그곳에는 발목까지 빠지는 눈이 덮혀 있고 미끄러워 다시 아이젠을 착용하고 조심하며 내려가 본다.

이제부터 인간의 발자국은 보이지 않고 이곳의 주인인 날짐승드의 발자국만이 그 하얀 눈 위에 몇개가 찍혀 있다.

한동안 그 눈길의 임도를 따라 걷다 보니 임도 우측 저 멀리 왕방지맥과 소요지맥의 산줄기들이 조금은 더 선명하게 다가오고 있다.

박무속에 넘실대는 산그리메가 생각보다 아름답고 멋지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멋진 소요지맥과 왕방지맥 마루금을 조망하며 다시 빨라지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눈길의 임도를 따라 지맥 산행을 이어가 본다.

다시 잡풀이 웃자랐다 말라버린 갈색의 짧은 초원도 지나고 낙엽진 호젓한 임도도 걸어 진행하다 보니 저 앞에 나풀거리는 띠지 하나가 눈길을 잡는데 살펴보니 이 산객이 주도해 만들었던 산악회 띠지가 보인다.

아마도 한돌대장님이 작년에 몇명의 산우님들을 모시고 진행하며 걸어 놓은 띠지처럼 보이는데 아직도 건강하게 후답자들에게 길라잡이를 해주고 있다.

어제 오늘 몇개의 다른 띠지들로 인해 아주 편안하게 길을 찾아 진행하였음을 이 자리를 빌어 감사한 인사를 드린다.

 

 

다시 넓은 헬기장인지 공터를 지나 진행되고 깊은 눈이 남아 있는 임도를 따라 한동안 걸어가니 갑자기 임도에 벌목된 나무들이 쓰러져 어지럽게 널려 있다.

진행에 큰 어려움을 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조심스럽게 진행해야 하기에 제법 신경이 쓰이는 구간이다.

한동안 그 벌목된 나무 사이를 조심하며 오르니 갑자기 임도 우측 저 멀리 묘지의 비석 같은 것이 보이는데 가까이 가 보니 묘지는 보이지 않고 구정산산신지위란 제단이다.

혹시나 하여 이곳 주위 산정을 모두 찾아 보지만 이곳이 구정산이란 표식은 이 제단 하나 뿐이니 몇장의 사진을 남기고 준비한 간식으로 허기를 달래 본다.구정산은 초말 서북쪽에 있는 큰 산으로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어떤 풍수가가 명당을 찾으러 각처를 다니던 중 이 곳에 와서 보니 이 산의 형상이 정승 아홉이 나올 명당자리가 되어 산에 올라 그 혈을 찾았으나 멀리서 보기와는 전혀 다른 명당터가 되지 않은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양주의 옛 지리지와 대동여지도에는 이 산이 영근산으로도 표기되어 있다.

오래전 이곳에 올랐던 선답자들은 다른 여러가지 표식들로 인해 쉽게 구정산임을 알 수 있었다고 하는데 오늘 이 산객이 만난것은 단지 제단 하나 뿐이니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구정산을 지나 계속 임도를 따라 진행하니 더욱 깊은 눈들이 쌓여 있고 잠시 평이한 등로가 이어지는가 싶더니 우측 가파른 내리막 등로로 이어진다.

잔설과 떨어져 쌓여 있는 낙엽이 뒤엉켜 무척 미끄러운 내리막 등로로 비뀌어 있어 여간 조심스럽게 진행하지 않을 수 없다.

두어번 엉덩방아를 찧고서야 그 미끄러운 잔설과 낙엽 내리막 등로를 내려오고 그 옆에 입을 벌리고 서 있는 벙커를 담아 본다.

 

 

 

이곳에서 부터는 다시 사람들이 올랐다 내려간 발자국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선명하게 나 있는 선답자들의 발자국을 따라 진행하는 길찾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잡목 사이로 보이는 눈 앞의 높은 고봉이 다시 체력적으로 한계점에 다다른 이 산객의 마음을 자꾸만 나약하게 만들고 있다.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올라 평이하게 걸어가니 등로 좌측에 구정산제비가 보인다.

 

 

 

그 구정산제비를 지나 이제부터는 어지럽게 널려 있는 교통호와 벙커를 친구 삼아 조심하며 진행을 하는 시간이다.

잠시 교통호를 지나니 부드러운 등로가 이어지고 우측 사면으로 이어진 등로를 따르니 다시 소나무들이 자라는 등로와 만나 등로 옆 삼형제 소나무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이제 한탄강이 얼마 남지 않은 듯 차량 소음들이 제법 귓전에 들리기 시작한다.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따라 오르니 등로 우측 교통호 옆에 약수터와 김치마을 하산 이정표가 보이고 사진에 한장 남기고 맥 잇기 산행을 이어 간다.

이제 등로 우측으로는 잡목사이로 청산면 초성리가 아주 가깝게 발 아래로 내려다 보인다.

다시 무명봉 하나 지나 교통호를 따라 민둥의 군사용 삼각점이 박혀 있는 봉우리에 오르니 이제 감악지맥 끝자락 봉우리와 산줄기가 내려다 보이고 그 끝에 유유히 흐르는 한탄강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인다.

청산면 초성리는 물론 한탄대교 지나 연천군도 보이지만 박무로 인해 제한된 시야가 아쉬운 시간이다.

 

 

 

이제 줌으로 당겨 한탄강을 담아 본다.

군 생활을 이곳에서 멀지 않은 감악산 근처에서 했고 첫 직장을 이곳 근처에서 시작을 했으니 제법 그럴듯한 인연을 만든 곳이지만 왠지 노르게 모두 좋은 추어그로 만든 인연이 아니기에 그 이후로 다시 찾기까지는 제법 긴 시간이 걸린 고이기도 하다.

이곳 연천군 청산면은 본래 양주군의 지역으로 청송면이라 하여 백호, 의요, 평촌, 궁촌, 탄동, 장연, 대전, 초촌, 금촌(지금의 전곡읍 신답리) 및 이패(지금의 대전리 아장동) 10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조선 광무 10(1906) 9 24일 칙령 제49호인 지방 구획 정리에 의하여 포천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포천군 산내면의 덕둔, 사정, 금동, 지동, 삼정, 간자, 갈월 및 송둔의 8개 동리를 병합하여 청송의 청자와 산내의 산자를 따서 청산면이라 하여 백의, 궁평, 장탄, 초성, 대전, 덕둔, 금동, 삼정 및 갈월의 9개 리로 개편 관할하였는데 1945  8·15 광복 직후에  3·8선 북쪽 지역인 장탄, 궁평, 백의 전지역과 초성, 대전리 일부 지역이 북한 공산 치하에 놓여 면사무소를 궁평리에서  3·8선 남쪽 지역인 삼정리로 이전하여 삼정, 갈월, 금동, 덕둔 등 4개의 법정리만을 관할하게 되었다.

 

그 후 6·25로 전지역을 잃었다가 1954 11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초성리로 면사무소를 이전하여 9개 리를 관할하여 오다  1983 2 15일 대통령령 제11027호에 의하여 덕둔, 금동, 삼정, 갈월의 4개 리(남청산 지역)는 포천군 신북면에 편입되었고 그 외 백의, 궁평, 장탄, 초성, 대전의 5개 리는 연천군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른다.

동쪽은 포천군 창수면과 남쪽은 포천군 신북면과 동두천시 그리고 서쪽과 북쪽은 전곡읍과 경계가 된다.

 

 

 

한탄강을 굽어 내려 본 후 그 민둥의 봉우리를 떠나려다 살펴 보니 그 정상마저도 벙커봉이다.

이곳이 이북과 접경지대이고 군사 요충지로서 수많은 군사 시설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시간이 되였다.

다시 많은 눈들이 쌓여 있는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이곳 역시 모든 등로가 교통호로 변해 버려 그 교통호를 타고 이리저리 묘기하듯 걸어야 한다.

우측으로 계속 보이는 초성리를 잡목사이로 내려다 보며 군벙커 옆 교통호를 타고 급경사 내리막으로 내려간다.

 

 

 

계속 이어지는 교통호를 타고 안부로 내려갔다 다시 나타나는 소나무 등로를 타고 정상부로 오르니 소나무와 바위가 산재되어 있고 교통호는 돌로 쌓여 있는 조금은 특이한 풍경도 만난다.

그렇게 오르니 넓은 교통호를 건널 수 있도록 나무토막 3개를 묶어 임시 다리를 만들어 놓은 무명봉에 오르고 다시 어지러운 교통호를 타고 내려가니 검은 천으로 교통호 주위를 덮어 보호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곳을 지나자 마자 넓은 헬기장을 만나 앞으로 보이는 나즈막한 봉우리를 올려다 본다.

 

 

 

첫번째 헬기장을 지나 다시 이어지는 교통호를 타고 걸어가니 한탄강과 초성리가 조금 더 가깝게 다가 와 있고 잡목 사이이지만 그 조망을 즐기며 진행하니 금새 두번째 헬기장에 도착을 한다.

주위에는 바위들도 보이지만 잡목들로 인해 헬기장 본연의 역활이나 잘 수행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그곳 헬기장을 지나 다시 조금 내려가니 그곳 바로 아래에도 커다란 벙커가 크게 입을 벌리고 앉아 있다.

 

 

그 헬기장을 지나자 마자 앞에 보이는 마지막 봉우리를 향해 직진하지 못하고 등로는 우측 낙엽 쌓인 사면 등로로 이어지는데 살펴보니 직진의 봉우리로 가면 절개지와 연결되어 직접 한탄강으로 내려가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측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그곳 등로에도 많은 낙엽들이 떨어져 쌓여 있어 여간 미끄럽지 않다.

조심하며 내려가니 이제 초성리 마을이 조금 더 선명하게 다가오고 그렇게 내려가니 벌목된 지역을 지나 검은 천으로 임도 둘레를 막아 놓은 비포장 임도에 안착을 한다.

연천군 청산면 초성리는 본래 양주군 청송면의 지역으로 초성리역 남쪽에 있는 산성인 초성의 밑이 되므로 초촌리라 하였는데 조선 광무 10년(1906) 칙령 제49호에 의해 양주군에서 포천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에 의하여 지금의 초성2리 지역에 있는 토성에서 성자를 따서 초촌리를 초성리로 개칭하여 청산면에 편입되었다가  1945년 8·15 광복과 더불어  3·8선에 의하여 초성리 북쪽의 일부 지역이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6·25가 끝난 후인 1954 11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 되었고 1983 2 15일 대통령령 제11027호에 의하여 포천군에서 연천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4개의 행정리, 21개 반, 4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임도를 타고 좌측의 한탄강 쪽으로 걸어가니 임도 우측으로 4차선 도로인 3번 지방도로가 보이고 그 도로 위에는 이곳을 알리는 인공구조물이 안치되어 있다.

이곳 근처에는 전곡리선사유적지가 있는 곳이기에 동물과 인간의 원시적인 형상을 조형물로 만들어 치시킨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전곡리 선사유적지는 한탄강변의 용암대지 위에 형성된 고인류의 점거지다.

1978년 주한미군 병사 그렉 보웬이 발견하고 그 다음해인 1979년부터 발굴 조사가 시작 되어 세계 학계에 알려진 구석기 유적인데 국 인디애나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그렉 보웬이 한탄강유원지를 여행차 들렀다가 우연히 유원지 주변에서 석기로 보이는 유물들을 발견하게 되었다.한눈에 이 뮤물들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한 그는 자신이 발견한 석기의 사진과 발견 경위를 소상히 적어 프랑스의 저명한 구석기 전문가인 보르드 교수에게 연락을 취하게 되고 보르드 교수는 당시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임중이던 김원용 교수를 찾아가도록 권유했다.그렉 보웬이 가져온 석기를 살펴본 김원용 교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고 하는데 곧바로 전곡리 일대에 대한 조사계획이 수립되었고 1978년 5월 14일 서울대 김원용 교수, 윤대인 조교, 권학수 조교를 중심으로 조사단이 구성되어 전곡리 일대에 대한 최초의 자료조사가 실시 되었다.

 

지표 조사를 바탕으로 김원용 교수와 정영화 교수가 진단학보에 전곡리 아슐리안 양면핵석기 문화예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전곡리선사육적지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탄대교 직전 도로 우측에는 38선이라는 표지석도 보이는데 저 표지석을 보니 이곳이 정말 남북이 대치하는 그 끝자락임을 실감하고 있다.

 

 

 

이제 그 임도 끝에 도착을 하니 좌측 한탄강을 따라 전곡으로 가는 2차선 포장도로가 보이고 우측으로는 한탄대교를 가로지르는 4차선 포장도로인 3번 지방도로가 지난다.

잠시 한탄대교 밑으로 들어 가 한탄강에 손이라도 담그고 싶어 내려가 보지만 급경사 인공 콘크리트 벽으로 인해 도저히 내려 갈 수가 없어 중간지점에서 한탄대교와 한탄강을 사진에 담으며 이틀간의 감악지맥 산행을 마무리 짓는다.

한탄강은 한강의 제2지류이자 임진강의 제1지류이며 길이는 134.5 Km로서 강원도 평강군 상송관리, 장암산(1052 m) 남쪽 계곡에서 발원해 김화군과의 경계를 따라 남쪽으로 흘러 휴전선을 지나 남대천을 합류한다.

유로를 남서쪽으로 바꾸어 영평천과 차탄천을 차례로 합치고 연천군 미산면과 전곡읍 도감포 사이에서 임진강으로 흘러드는데 흔히 6·25전쟁중 다리가 끊겨 후퇴하지 못한 사람들이 한탄하며 죽었다고 해서 불려진 것이라고 하나 이 명칭은 크다, 넓다, 높다는 뜻의 한과 여울, 강, 개의 뜻인 탄이 어울린 순수한 우리말이며 이를 한문으로 음차한 것이다.

추가령 구조곡의 열하에서 분출한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용암대지는 평강과 철원에서 임진강과의 합류점까지 뻗어 있는데 곳곳에 수직절벽과 협곡이 발달했고 휴전선에 가까워 이들 수직단애의 골짜기는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이용되고 있다.

추가령 구조곡은 서울과 관북지방을 잇는 국도와 경원선이 통과하여 교통의 요지였고 철원에서 평강까지 용암대지는 토질이 비옥해 벼, 보리, 밀, 옥수수, 콩, 감자 등이 재배된다.

옛날 후고구려의 궁예가 도읍을 정하기로 했던 한탄강 유역에는 6·25전쟁 때 평강과 철원 및 김화를 연결하는 철의 삼각지를 비롯해 백마고지, 단장의 능선, 김일성고지 등의 격전지와 제2땅굴, 38선경계비, 승일교, 만세교, 김일성별장, 필리핀군 참전기념탑 등 분단의 아픔을 실감하게 하는 전적비와 전적기념물이 많다.

또한 유역 내에는 한탄강유원지, 남대천유원지, 직탕폭포, 삼부연폭포, 재인폭포, 매월대, 철원8경, 고석정 및 순담(강원도 기념물 제8호) 등 자연경관이 빼어난 경승지가 많고 또한 한탄강 하류의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에서 전기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굴되었다.

다시 한탄강에서 올라 와 3번 도로 옆에서 설마치고개로 복귀하는 문제로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마침 빈택시가 한탄대교쪽에서 내려오고 그 택시를 잡아 무탈하게 설마치고개로 복귀해 생각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 온다. 

이렇게 또 하나의 숙제를 끝냈으니 다음부터는 벌여 놓은 영산기맥과 진양기맥에 집중하여 더워지기 전에 마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