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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맥산행(완료)/감악지맥(한북·완)

감악지맥 제1구간 말머리고개에서 설머치고개까지 산행후기

by 칠갑산 사랑 2014.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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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경기도 양주시와 파주시의 감악지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 2014년 02월 15일 (토요일 당일 산행)

산행날씨 : 맑은 날씨에 기온이 올라 박무가 약간 있었고 눈이 녹아 질척이는 등로였지만 대체로 산행하기 좋았던 날씨

산행온도 : 영하 03도에서 영상 06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말머리고개(39번 지방도로)-신한북지맥 또는 오두지맥 분기점-한강봉(감악지맥 분기봉, 460봉)-나무문-벤취 쉼터봉(436봉)-이정표(한강봉 0.6 Km, 은봉산정산 1.8 Km, 은봉초등학교 1.3 Km)-벤취 갈림 삼거리-안부 사거리 이정표(한강봉 1.0 Km, 은봉산정산 1.4 Km, 동화아파트 1.7 Km)-느르미고개 이정표(한강봉 1.8 Km, 은봉산정산 0.6 Km, 기산저수지 0.6 Km, 기업1리마을회관 1.3 Km)-송전탑 43번-묘지지대-은봉산 입구 이정표(한강봉 2.4 Km, 냉골아파트 0.7 Km, 소사고개 0.9 Km)-은봉산(389봉)-은봉산입구 복귀-임도-소사고개(39번과 98번 지방도로 위 기산 배수지)-산불감시탑봉(군용 삼각점)-팔일봉 갈림 삼거리-팔일봉 헬기장-팔일봉(463봉)-팔일봉 갈림삼거리 복귀-은사시나무 조림지-폐헬기장-임도-하우고개-굴뚝봉-임도-전봇대 임도-헬기장-노아산 갈림 헬기장(삼각점)-노아산(337봉)-헬기장 복귀-노아산 훈련장 경고 안내판-군벙커와 교통호-임도-안부사거리-길주의 지점-폐헬기장-잣나무 군락지-낙엽송 군락지-잣나무 군락지-가족묘지-개네미고개(368번 지방도로)-시멘트임도-노인요양원장애인복지원-벌목지대-묘지지대-벌목지대-안동권씨가족묘지-폐헬기장-교통호-송전탑 번호 92번과 29번-임도-임도 갈림 삼거리-개네미고개 동물이동통로(315번 지방도로)-잣나무 군락지-운동시설-노고산 갈림 임도-비포장임도-콘크리트 임도(군부대 정문)-시멘트 임도-미화레미콘-갈곡리 56번 지방도로-탱크방호벽 2차선 지방도로-신4차선 도로 통과-오현리 삼거리(전곡과 의정부 갈림 삼거리, 군부대와 파주휴게소)-스르레미농장-우축사-스르레미고개(해태상, 양주와 파주시 경계)-임도-교통호 능선-묘지지대-군벙커 및 종봉-시멘트 임도-군벙커-임도-헬기장-능선봉(266봉)-임도-전망암봉(305봉)-잣나무 군락지-벙커봉-수레네미고개(시멘트 포장도로)-비포장 임도-교통호-비포장 임도-철탑-327 군 삼각점봉-굴뚝봉-교통호-임도-깃대봉-깃대봉 2-송전탑 번호 71번과 8번-임도-사격구역경고판-넓은공터-군 벙커건물-임도-임도 삼거리-능선진입-군초소와 경고 안내판-잣나무 군락지-임도-안테나봉-벙커봉-잣나무 군락지-임도-무건리고개(시멘트 포장도로)-묘지지대-폐헬기장-암봉-368.7봉(삼각점과 군삼각점)-폐헬기장-군부대 철조망-차랭통제 바리게이트와 임도-군벙커-삼각점봉-적포획/포로취급 설명판-상산김씨 가족묘비-교통호-묘지지대-수로-설머치고개(323번 지방도로)-산행종료

산행거리 : 약 31.00 Km (지맥 25.00 Km와 접속구간 및 3개산 왕복 약 06.00 Km)

산행시간 : 질척이는 임도와 봄같이 따스했던 기온으로 인해 여유있게 사진 찍으며 10시간 45분 (07시 15분부터 17:55분까지)

교통편 : 애마와 버스 그리고 택시 이용

 

감악지맥이란

감악지맥이란 한북정맥 상에 있는 한강봉(474봉)에서 북서쪽으로 분기하여 느르미고개, 은봉산(379.8봉), 소사고개, 팔일봉 갈림길, 노아산 갈림길, 개내미고개, 세우게고개, 수르네미고개, 무건리고개, 설머치고개, 감악산(675봉), 간패고개 및 마차산(588봉)을 거쳐 431봉 직전의 분기점에서 우측능선으로 이어지며 구정산을 지나 3번 지방도로를 건너 372번 지방도로를 따라 가다가 한탄교(한탄강과 신천의 두물머리)에서 맥을 다하는 약 42 Km의 산줄기를 말한다.하지만 431미터봉 직전의 분기점에서 또 하나의 산줄기가 분기하여 동북쪽으로 진행하다가 계속 북쪽 방향으로 37번 지방도로의 아마니고개를 넘어 계속 북쪽으로 진행하다가 한탄강이 임진강에 합류되는 도감포 앞에서 맥을 다하는 약 39 Km의 마루금이 있는데 이곳은 한탄강과 임진강의 두물머리에서 맥을 다하는 산줄기로서 이 감악지맥 역시 어느 산줄기가 진짜 감악지맥이냐를 놓고 약간의 논란이 있는듯하여 이곳 역시 두 산줄기 모두를 걸어 볼 예정으로 준비를 해 본다.자료를 준비하다 보니 대부분의 종주자들이 한탄대교로 종주했는지 한탄대교 방향은 길이 무척 좋고 표지기도 많이 부착되어 있는데 비해 도감포 방향으로는 길은 대체로 양호하지만 독도 주의지점이 몇 군데 있고 표지기도 적게 보이기에 산행하기에는 주의가 필요 할 듯 하다.다만 

강의 격을 놓고 보면 한탄대교 방향은 신천이 한탄강에 합류되는 것이고 도감포 앞 방향은 한탄강이 임진강에 합류되는 것이기 때문에 도감포 방향의 격이 조금 더 높다고 말할 수 있으며 박성태님의 신산경표에서는 도감포 방향으로 감악지맥이 이어진다고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종주자들은 한탄대교 방향으로 종주를 한 듯 하다.

 

 

숨겨 놨던 감악지맥에서 질척이는 임도를 따라 지루하게 걸으며 옛 추억을 생각했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 후기를 참고한 후 난해하고 어려운 정맥 산행을 진행해 무탈하게 맥 잇기 산행을 다녀왔기에 단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정맥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나쁘지 않은 결과를 가지고 따뜻한 2013년을 보내고 다시 새로운 2014년을 맞으며 지난해 벌여 놨던 일들을 마무리하기 위해 눈코뜰새 없이 바쁜 일정의 연속이다.

두군데 사업장에 각기 다른 유럽 기술자가 들어 와 납품된 기계를 설치하고 시운전을 하는 동안 또 다른 전문가가 방문해 함께 일을 하다 보니 금요일 밤 늦게 서울로 복귀하고 집으로 돌아 오니 벌써 자정이 가까워져 가고 있다.

장거리 산행을 못하고 있기에 이번주에는 어느 산이라도 올라 장거리 산행을 하면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고 나면 좋아질 것 같다는 생각으로 이곳 저곳을 살펴보지만 피곤한 몸 때문에 정하기가 쉽지 않다.

일단 감악지맥과 영산기맥 그리고 진양기맥을 생각하고 배낭 준비 후 잠자리에 들면서 늦게 일어나면 주위 산이라도 올랐다 내려오기로 한다.

하지만 어쩐일인지 새벽 3시에 눈이 떠지고 더 이상 잠을 이루지 못하고 소치 올림픽 경기를 재방으로 보다가 새벽 5시에 간단하게 준비한 배낭을 메고 애마를 몰아 양주시 백석읍 위 고갯마루에 위치한 말머리고개로 달려간다.

진양기맥에 들고 싶었지만 지난 주 바쁜 일정으로 몸도 좋지 않기에 감악지맥에 들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 내려왔다 다음에 다시 오르자 마음 먹으니 견딜만한 시간이 되였다.

 

 

말머리고개 또는 마두령이라 불려지는 신한북정맥 마루금이 지나는 39번 2차선 포장도로 고갯마루에서 어둠이 서서히 물러가기 시작하는 시간에 올라 한북정맥 분기봉을 거쳐 감악지맥 분기봉인 한강봉에서 오랫동안 잊지 못할 환상의 조망을 즐긴 후 팔일봉 분기점에 도착해 좌측으로 높게 솟아 있는 팔일봉을 다녀오다 그 등로상에 있는 헬기장에서 북쪽을 바라보니 이곳에서의 조망 역시 가히 환상적이라 할만하다.

바로 아래에 나즈막한 노아산이 내려다 보이고 그곳 지나 상처 투성이인 노고산이 안타까운 풍경으로 이곳이 전방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 노고산 뒤로 올망졸망한 감악지맥 마루금이 이어지다 저 멀리 한가운데 높게 치솟아 있는 감악산과 그 우측으로 마차산이 산아래 하얀 안개를 드리우고 이 산객을 부르고 있다.

오늘 저곳을 넘지는 못하지만 아주 지근거리에서 만나 이야기 나눈 후 내일 다시 올라 오늘의 그리움을 풀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새벽 일찍 간단히 준비한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 뻥 뚫린 도로를 따라 이곳 양주시 백석읍 말머리고개 넘어 주차장에 도착을 하니 아침 7시 10여분을 지나고 있지만 아직도 세상은 어둠속에서 완전히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등산화를 신고 산행 준비 후 39번 2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좌측 고갯마루로 오르며 도로 좌측을 바라보니 양주시 백석읍 기산리가 펼쳐져 있고 그 우측으로는 은봉산이 그리고 좌측으로는 팔일봉이 높게 올려다 보인다.

 

백석읍은 양주시 11개 읍면동 가운데 하나로 동쪽으로 양주동, 서쪽으로 파주시 광탄면, 남쪽으 로 장흥면, 북쪽으로 광적면과 접해 있는 법정 면으로서 면적은 군내에서 장흥면 다음으로 크다.

백석읍은 남쪽의 앵무봉(621.8봉)으로부터 시작하여 북쪽의 노아봉(336봉)에 이르기까지 한강봉(436봉)과 은봉산(379봉) 등의 연봉을 이루어서 동서의 지형구분이 뚜렷해져서 북쪽의 오산리에서부터 광적면 가납리와 광석리에 걸친 드넓은 분지가 발달되어 있고 기타의 지역은 거의 산악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소재지는 오산리에 있으며 방성리, 홍죽리, 연곡리, 기산리, 가업리, 복지리 등 7개의 법정리와 26개의 행정리로 이루어져 있다.

면소재지인 오산리에는 면사무소를 비롯하여 경찰지서, 농협, 양주소방서,초, 중, 고등학교 등이 있고 최근 복지리와 가업리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인구가 급증하였으며 그 결과 2001년 10월 1일 읍으로 승격되는 경사를 맞이하였다.

 

기산리는 백석읍의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동쪽으로 복지리, 서쪽으로 파주시 광탄면 기산리, 남쪽으로 장흥면 부곡리, 북쪽으로 홍죽리와 접해있다.

기산리라는 땅이름이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이후인데 대한제국기까지 만해도 이곳은 대부분 기곡리, 내고령리, 중산리에 속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백석면의 기곡리, 내고령리, 중산리 일부를 병합하여 기곡과 중산의 이름을 따서 기산리라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이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과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1917)에 나와 있으며 그 후 1983년 2월 15일 대통령령 제11027호에 따라 기산리와 영장리 등 2개리가 파주시로 이속되어 영장출장소의 관할을 받다가 이중 기산리의 일부가 1987년 1월 1일에 다시 환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기곡리란 땅이름은 사람들이 산속 골짜기에 들어와 터를 잡았다는 뜻의 터골에서 유래하였고 중산리는 산속의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높은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어 자연환경이 빼어난 기산리에는 현재 기산저수지를 중심으로 대규모 위락시설과 음식점 그리고 카페촌들이 들어서 수도권 주민들의 편안한 안식처로서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그 두개의 산 사이로 아침 물안개가 피어 올라 새로운 신천지를 보여주듯 그렇게 아름다운 자태를 선사하고 있다.

 

 

그렇게 여명이 밝아 오는 39번 지방도로를 타고 고갯마루로 오르며 도로 좌측의 백석읍 기산리와 제한된 감악지맥 마루금을 바라보며 오르는 시간이 겨울 날씨 치고는 춥지 않아 상쾌함을 더해 준다.

그렇게 오르니 금새 마두령이라고도 하는 말머리고개에 도착을 하는데 이번이 벌써 4번째 방문이 되는 셈으로 다시는 이곳에 들리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예전 한북정맥과 신한북정맥을 타면서 수집한 말머리고개 이름유래에 대한 자료를 다시 한번 기억해 본다.

송추 고비골과 백석읍 기산리를 이어주는 39번 도로가 지나는 이곳 마두령 및 백석고개 또는 말머리고개는 조선시대 중국 사신이 이 고개를 넘어오다가 타고오던 말이 험한 길을 이기지 못하고 굴렀던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지는 고갯마루이다.

지금은 많은 차량들이 큰 무리 없이 넘나들고 있지만 도로가 포장되기 전에는 고갯마루가 하도 험하여 마차나 사람들이 넘나들기 힘든 고갯마루였다고 한다.

말머리고개라는 이름은 원래 말굴이를 잘못 발음해서 말구리로 그 말구리를 말두리로 또 말두리를 말머리로 부르기 시작하며 정착된 이름이라 전해지는 고갯마루이다.

또한 이곳은 고비골에서 오른다하여 고비골고개라 불리기도 하였는데 여기에도 세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첫째가 고비나물 즉 고사리가 많이 난다하여 붙여진 이름과 장흥에서 제일 높은 고개라는 의미와 마지막으로 이 고개를 넘는 길이 구불구불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어 구불이 고비로 변했다는 설인데 지금은 백석읍으로 넘어가는 고개라하여 백석고개로도 불리우는 고갯마루가 되었다. 

 

 

 

 

아침 7시 15분 드디어 말머리고개에서 감악지맥 산행을 시작해 보는 시간이다.

이곳 감악지맥 산행 들너리 반대편 도로 건너에는 몇년전까지만 해도 송추유스호스텔이 있었지만 지금은 세월이 변해 그 옛 이름은 사라지고 제과로 유명한 CROWN과 해태 연수원이란 큰 입간판이 바꿔 달려 있다.

잠시 가파른 절개지를 올라 푹신한 낙엽을 밟으며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오늘 새벽 이 산객이 애마를 몰아 올라온 양주시 장흥면 일대가 펼쳐져 있다.

오래 전 복잡한 서울 도심을 벗어나 지인들과 자연을 벗삼아 커피와 차를 마시며 낭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던 곳들인데 이제는 시내보다 더 복잡하게 변해 버린듯 아름답던 자연도 많이 손상된 느낌이다.

그 석현리와 부곡리 지나 저 멀리 한북정맥 또는 도봉지맥이라 불려지는 서울의 도봉산과 북한산이 멋진 암봉을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날을 세우며 밝아오는 아침 풍경에 최고의 선물을 선사하고 있다.

 

 

 

잔설이 남아 있는 등로에 두껍게 깔려 있는 낙엽을 밟으며 오르니 얼어있던 낙엽이 부서지며 사각거리고 있다.

그 리듬을 귓전에 들으며 오르니 벌써 등줄기와 이마에선 굵은 땀방울이 흘러 내리고 잠시 배낭 벗어 자켓과 귀마개를 벗어 배낭에 넣은 후 연신 땀방울을 닦으며 오르니 드디어 신한북정맥이라고도 불리고 있는 오두지맥 분기점에 도착해 잡목 사이로 막 떠오르고 있는 일출을 담아 본다.

늘 하루에 한번씩 만나는 일출이건만 왜 도심에 살면서는 제대로 된 일출 기억이 없고 또 그 아름다움도 모르며 지내고 있는지 의아하기만 하다.

 

 

 

오두지맥 또는 신한북정맥 분기봉으로서 사진에 보이는 방향은 한북정맥의 우측으로 남쪽인 첼봉으로 가는 등로 방향이다.

북사면이다 보니 이곳 오르막 등로에는 아직도 약간의 잔설이 남아 있어 산행에 여간 조심스럽지 않는 구간이기도 하다.

오늘 이 산객은 이 반대편 등로를 타고 진행해 감악지맥이 분기하는 한강봉 방향으로 진행하게 될 것이다.

예전엔 이곳에 분기 안내판과 지도가 서 있었는데 이제는 모두 사라지고 등로 한귀퉁이에 대구 선산님이 붙여 놓은 종이 코팅지에 한자로 신한북정맥-오두지맥 분기점이란 안내판만 달랑 달려 있다.

 

 

 

이제 오두지맥 또는 신한북정맥 분기점을 출발해 북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오래전 지났던 추억을 떠 올리며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타고 걸어 본다.

부드러운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방금 전 봤던 아침해가 온누리에 퍼지며 따쓰한 빛을 나눠주고 있다.

그렇게 진행하니 금새 감악지맥 분기점인 한강봉 8각 정자가 나타나는데 몇년전 한북정맥 산행시에는 그저 넓은 헬기장 공터 한구석에 노란색 바탕의 정상안내판과 이정표가 있었음을 떠 올리고 많이도 변해 버린 모습에 잠시 어리둥절한다.

이곳 한강봉은 양주시 백석읍의 가업리, 기산리, 복지리에 걸쳐있는 봉우리로서 양주시 문서에는 높이가 436미터로 표기되어 있지만 다른 ㅈ도상에는 460미터로 표기가 되어 있는 산이다.

산정상에 오르면 한강이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옛날 이곳에서 봉화를 올렸다 하여 봉화등이라고도 한다.

이곳 한강봉 정상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너무나 아름답고 멋진 조망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한동안 머물며 많은 사진으로 남기며 바빴던 심신을 힐링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먼저 한강봉 북쪽의 감악지맥을 살펴 본다.

우측으로 백석읍이 안개에 묻혀 있고 그 시내 좌측 울타리를 따라 감악지맥 마루금이 이어지고 있다.

노고산 좌측으로 자웅산과 광평산 그리고 파주의 파평산이 가물거리고 우측 저 멀리 이 감악지맥이란 산줄기 이름을 붙게한 감악산과 마차산이 우뚝 솟아 있다.

너무나 아름다운 감악지맥 마루금에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눈과 가슴으로 그 멋진 풍경을 담아 본다.

 

 

 

북동 방향으로는 아주 가깝게 자리한 백석읍을 지나 암봉이 아름다운 불곡산과 도락산이 아주 가깝게 다가와 있다.

한북정맥과 왕방지맥을 타면서 모두 올랐던 산들이지만 오래전 올랐던 곳들이다 보니 이제 이 산객의 기억속에서 조금씩 가물거리는 산들이 되어 버렸다.

이제 산줄기가 아닌 아름다운 힐링 산행으로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주위 조망을 즐기는 시간을 다시 한번 가져 볼 기회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불곡산과 도락산 넘어로는 왕방지맥과 소요지맥의 산들이 지난날의 추억을 되살리며 밝아 오는 햇살에 환한 미소를 전해 준다.

 

 

 

남쪽으로 눈을 돌리니 우측 첼봉 지나 저 멀리 좌측에서 우측으로 뻗어가며 아름다운 도봉산과 삼각산의 암봉들이 톱날처럼 각을 세우고 있다.

개별산행과 종주산행 그리고 마루금 잇기 산행을 통해 참으로 많이도 올랐던 곳들인데 이제는 저 도봉과 북한산 라인보다도 집과 가까운 삼성산과 관악산을 더 자주 오르다 보니 약간은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오랫만에 참으로 멋진 풍경에 마음과 혼을 빼앗겨 버리는 기분이다.

그렇게 조망을 즐기고 있으니 백석읍 쪽에서 등산객 한분이 올라 오는데 강아지를 세마리나 데리고 올라 와 한강봉 정상을 소음으로 만들고 있다.

 

 

 

오랫동안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을 멋진 조망을 즐긴 후 다시 한강봉을 출발해 미지의 등로를 따라 발길을 옮겨 본다.

북서쪽으로 나 있는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생각지도 못한 싸립문 같은 통로가 만들어져 있고 좁은 문을 통해 조심하며 통과해 잔설과 낙엽이 뒤섞여 있는 평이한 등로를 따라 상쾌한 아침 공기를 들어 마시며 걸어 본다.

아직도 한겨울이지만 오늘은 봄 날씨처럼 포근함까지 느낄 정도이니 영동지방에서 약 2미터 가까운 눈과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마음까지 들 정도이다.

잠시 더 진행하니 소나무 사이에 통나무로 만들어 놓은 의자봉을 지나 동화아파트와 은봉초등학교 갈림 이정표가 서 있는 삼거리에 도착을 해 직진 등로를 버리고 좌측 은봉산 약수터와 은봉산 정상 표시가 되어 있는 내리막 등로를 타고 진행을 해 본다.

이 이정표 뒷편 저 멀리 직진 코스에는 벤취 의자 하나가 넓은 공터에 자리잡고 있는 풍경도 눈에 들어 온다.

 

 

 

나무계단을 타고 급하게 내려가니 다시 부드러운 등로가 열리는데 살펴보니 북사면에는 잔설이 그대로 남아 남사면은 따스한 햇살로 인해 얼었던 등로가 녹으면서 진흙창이로 변하고 있다.

잠시 잔설이 남아 있는 평이한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저 멀리 소나무 군락지 사이로 벤취 쉼터가 보이고 그 앞에서 선답자들의 발자욱이 모두 좌측으로 휘어 내려간 모습이 눈에 들어 온다.

선답자들의 발길을 따라 내려가며 감악지맥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보는데 오늘은 남아 있는 잔설로 인해 길찾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 같은 좋은 예감으로 시작하는 시간이다.

 

 

 

좌측으로 휘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타고 선답자들과 일반 등산객들이 남겨 놓은 발자국을 따라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묘지가 보이고 그 주위에는 멋진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는데 그 아래로 등로 좌측 저 멀리 한북정맥 마루금의 산들이 너무나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 놓고 자랑하고 있다.

말머리고개에서 올라 만나는 좌측 나즈막한 봉우리가 441봉이고 가운데가 530봉인 수리봉 그리고 우측 저 멀리 높게 치솟은 봉우리가 622봉인 고령산으로 생각되는 풍경이다.

오래 전 맥 잇기 산행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고령산에 간다고 하니 따라 나섰다가 가을날에 저 고령산 오름길에 낙엽으로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지금도 고개가 절로 좌우로 흔들어 지는 그런 기억으로 남겨진 산이지만 그 후 정식으로 오두지맥을 걸을 땐 즐거운 마음으로 아무 기억조차 없이 오른 추억이 있는 곳들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마루금을 좌측으로 올려다 보며 걸어가는 아침이 그저 즐거울 따름이다.

다시 평이한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등로는 잔설이 제법 쌓여있는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고 아니젠을 차야 하는지 그냥 참고 견딜만 한지 고민과 고민을 하면서 걸어 보지만 아직은 참을만 하고 귀찮다는 생각에 그냥 족심하며 내려간다.

잠시 내려가니 저 멀리 사거리 안부가 나타나고 그 옆에 이정표 하나가 서 있는데 살펴보니 은봉아파트와 은봉산약수터 갈림 표시이다.

이ㅗㅅ에서는 느르미고개와 은봉산 정상거리 표시가 되어 있는 직진의 오르막 등로를 타고 진행한다.

 

 

 

잠시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묘지가 보이고 그 좌측 능선을 타고 올라 민둥의 넓은 공터가 있는 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등로 좌측 묘지 뒷편으로 저 멀리 신한북정맥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오두지맥이라 불려야 하는지 모를 고령산 줄기가 북사면에 하얀 눈을 품은채 너무나도 황홀하게 그 자태를 드러내 놓고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에 다시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한동안 많은 사진을 남긴 후 다시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진행하니 운치있는 소나무 숲이 나타나고 잠시 후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 느르미고개 안부에 도착을 한다.

이곳 느르미고개는 일명 장현고개로도 불리는데 가업리 남서쪽은 봉산자락에서 기산리 턱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노루목처럼 좁은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한자로는 장현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는 상구너미 또는 턱굴고개라고도 하는데 턱굴고개라는 땅이름은 광적면 덕도리에서도 확인된다.

 

 

             

 

느르미고개에도 역시 이정표가 서 있는데 좌측으로는 기산저수지 방향이 우측으로는 가업1리마을회관 방향이 표기되어 있다.

이곳에서 직진의 은봉산 정상 방향으로 오르니 우측에 다시 묘지들이 보이고 그 능선으로 올라 우측의 임도를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오르니 정상부근에 송전탑 43번이 서 있다.

그 송전탑을 지나 진행하니 우측으로 약간 휘어지며 방금 전 헤어졌던 임도와 다시 만나 그 임도를 타고 진행한다.

평이한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저 앞으로 많은 묘지들이 보이는 작은 공동묘지를 좌측에 두고 진행하며 곧이어 은봉산 입구에 서 있는 서광아파트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한다.

감악지맥은 직진 임도를 타고 소사고개로 진행하여야 하지만 가까운 거리에 있는 우측의 은봉산 군부대가 모두 철수를 하여 비어 있기에 잠시 은봉산 정상을 다녀 오기로 한다.

 

 

 

많은 군부대 시설물들과 벙커들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지대를 지나 걸어 들어가니 나즈막한 오르막 지대를 지나 조망이 트이는 은봉산 정상에 도착을 하지만 이곳이 은봉산 정상임을 알리는 어떠한 표식도 없어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은봉산은 가업리와 홍죽리 그리고 기산리에 걸쳐있는 산으로 높이는 380미터이다.

은이 나는 산 혹은 부엉이가 숨어있던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이곳에서 은을 채굴했다고 하며 지금도 은봉산 중턱에는 당시에 채굴했던 은굴이 있다고 하지만 알 수는 없다.

은봉산은 19세기 중반의 문헌인 양주목읍지(1842)에서부터 확인되어 한자로는 은봉산(숨어있는 봉황이 있는산)이라고 하였는데 양주목읍지(1871), 양주군읍지(1899), 양주읍지(1899)도 마찬가지이다.

땅이름 유래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얘기도 전해지는데 남씨 일가에서 사람이 죽어 장사를 치르는데 지관이 말하기를 이곳을 파고 바위돌이 나오면 시신을 그 위에 올려놓고 묻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자손들은 시신을 돌 위에 올려놓고 묻을 수 없어 바위돌을 들어내었더니 마침 부엉이 3마리가 이곳에서 날아갔고 그 후 우환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혹은 봉황이 숨었다가 날아갔다고 하여 은봉산이라고도 한다는 것인데 정상 부근에 부엉이묘가 남아 있다.

하지만 부엉이 묘지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으니 답답한 시간이였다.

 

 

 

은봉산 정상에서 다시 운해속에 그 얼굴만 내밀고 있는 감악지맥 산줄기들을 살펴본다.

바로 앞 많은 부분이 파헤쳐져 붉은 속내를 드러내 놓고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아침 햇살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노고산 뒤로 끊어질듯 이어지는 감악지맥 산줄기들과 그 좌측으로 이어지듯 보이는 자웅산과 파평산 지나 우측으로 이 산줄기의 이름을 탄생시킨 감악산이 우뚝하다.

아까 한강봉에서 봤을 때 보다는 많이 가까워진 느낌으로 그 아름다움에 취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낮은 지역은 모두 안개가 덮고 있기에 감악지맥 하나하나를 모두 확인 할 수는 없지만 감악산 우측으로 마차산이 뾰족하게 튀어 올라 와 있기에 그 두개의 산은 확실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그렇게나 멀리 보이는 저 산들도 쉼없이 꾸준히 걸어가는 이 산객의 작은 두다리로 내일이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며 무엇이든 이 세상에서 열심히 하면 안되는 것은 없을 것 같다는 자신감과 용기를 얻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은봉산 정상에서 많은 시간 머물며 조망을 구경한 후 다시 군부대 시설물을 타고 정문쪽으로 내려오다 앞을 보니  고령산과 수리봉으로 이어지는 오두지맥 마루금이 하얀 속살을 내밀며 속삭이고 그 넘어 보이는 산들은 모두 숨겨 놓고 있다.

저곳을 통해 오두지맥을 걸을 땐 몸랐는데 이제 참으로 많이도 오르고 또한 맥 잇기 산행을 즐기면서 하나 둘 산세만 보고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되였으니 그 열정이 놀랍기만 하다.

하지만 아직도 올랐던 산보다 오르지 못한 산이 훨씬 더 많으니 아마도 죽을 때까지 평생을 올라도 다 못 오를 곳들일 것이다.

 

 

 

은봉산 정상에서 다시 철망이 있는 정문쪽으로 걸어 나오며 앞을 보니 오두지맥의 고령산과 그 좌우 능선이 참으로 예쁜 모습으로 다가 온다.

북사면으로 보이는 그 산줄기 속살이 너무나 선명하게 뇌리에 와 박히고 있기에 한동안 이 멋스러움에 취해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도 해 보는 시간이다.

다시 정문으로 나와 이제는 우측의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소사고개 방향으로 진행을 하는데 도로에는 제법 많은 눈들이 쌓여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한동안 그 도로를 따라 내려오니 이제 등로 앞쪽으로는 지금부터 진행해야 할 감악지맥이 올려다 보이고 그중에서도 하늘 높이 솟아 있는 팔일봉이 작은 산객을 압도하고 있다.

계속 임도를 따라 내려가니 제법 차량들이 지나다니는 소음이 들리고 금새 2차선 포장도로가 내려다 보이는 39번과 98번이 지나는 소나고개에 도착을 해 등로 좌측의 기산배수지를 담아 본다.

이 소사고개의 도로 옆 등산로 입구에는 은봉산정상에서 0.9 Km 지나 왔고 한강봉에서는 3.3 Km를 걸어 왔다는 거리표시가 되어 있는 이정표가 서 있다.

소사고개는 양주시 백석읍 홍죽리 안골에서 기산리로 넘어오는 고개로서 안골을 지나 높은 고갯길을 오르면 기산저수지가 펼쳐진다.

저수지 옆에 있는 집 뒤로 가느다란 산줄기가 마치 뱀의 모양을 이루고 있으며 예로부터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이 근방에 묘지를 쓰면 소새라는 새가 뱀을 찍는 모양이 되므로 가세가 기운다고 하였고 실제로 허씨 집안이 묘소를 쓰고 망했다고 한다.

소사고개라는 이름은 18세기 중반의 문헌에서부터 확인되는데 여지도서(1757-1765)에서는 이곳을 소사현으로 소개하면서 읍치에서 서쪽으로 30리 거리에 있으며 소령원으로 가는 통로라고 하였다.

이밖에도 대동여지도(1861), 대동지지(1864), 증보문헌비고(1908)에서도 확인되며 소사현이라 한 것은 고문헌에 따르면 잘못된 표현으로 추측된다.

생각보다 제법 많은 차량들이 통행하는 소사고개 도로를 건너 기산배수지 건물과 절개지 옹벽 사이의 철조망을 타고 능선으로 오르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약간은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또 다시 등줄기와 이마에선 굵은 땀방울이 흘러 내리고 진행하다 보니 날씨는 봄날처럼 따스하고 햇살은 강하게만 느껴진다.

그렇게 땀방울을 닦으며 오르니 바로 눈 앞에 높은 산불감시초소가 보이는데 올라가 보니 많이 녹이 슨 오래된 초소처럼 보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위를 둘러 보지만 조망도 없고 삼각점도 없기에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직진의 마루금을 따라 산행을 이어 간다.

 

 

 

잠시 굴곡이 없는 평이한 등로를 따라 진행하니 등로 옆에 알 수 없는 표식이 되어 있는 군용 삼각점이 박혀 있다.

그곳을 지나 넓은 공터처럼 보이는 무명봉을 넘으니 다시 완만한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고 안부를 지나지만 아무 특징도 없어 통과해 오른다.

무명봉으로 오르니 벌목된 나무들이 너부러져 있는 곳을 지나  낙엽이 깊게 깔린 평이한 등로를 따른다.

그곳을 지나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은사시나무가 식재된 곳이 나타나고 등로엔 소나무 한그루가 막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 온다.

잠시 더 오르다 등로 좌측을 보니 햇살을 받아 반짝이면서도 저 멀리 북한산과 도봉산 자락이 아름답게 다가 오고 우측 가까이에는 계명산과 앵무봉 자락이 아주 가깝게 자리하며 힘내라 응원을 해 주고 있다.

 

 

 

그렇게 주위 풍경을 조망하며 완만하지만 꾸준하게 오르니 드디어 좌측 팔일봉 오르는 등로에 나무로 막아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한다.

몸 상태를 확인해 보니 견딜만 하고 또 다시 팔일봉만을 위해 오를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무조건 좌측 팔일봉으로 방향을 잡는다.

좌측 잡목가지 사이로 보이는 팔일봉 정상부가 가깝게 느껴지고 경사도도 심하지 않을 것 같아 오르지만 오르면서 얼었던 땅이 녹아 질척였기에 얼마나 고생을 하였던지 진절미가 다 날 정도이다.

 

 

 

다시 한동안 질척이는 흙투성이 등로를 타고 오르다 미끄러지기를 몇번인가 하고선 어렵게 헬기장에 도착을 한다.

생각지도 못한 헬기장에 도착을 해 주위를 살펴보니 일망무제 거침없이 펼쳐진 멋진 조망에 팔일봉 정상으로 향하는 것도 잠시 잊고 즐겨 본다.

먼저 오르면서 앞에 보이는 팔일봉 정상부를 올려다 보니 그리 높지 않아 마음이 놓이지만 오를 땐 또 얼마나 힘이 들던지 지금 생각해도 식은 땀이 흐를 정도이다.

 

 

 

남쪽으로는 우측에 마장저수지가 좌측에는 기산저수지가 있어 안개가 자욱하고 그 넘어 저 멀리 좌측에 감악지맥 분기점인 한강봉에서 첼봉 지나 오두지맥의 수리봉과 고령산이 보이고 그곳 지난 저 멀리 중앙에 도봉산과 북한산 자락이 멀어져 가고 있다.

생각보다 너무나 멋진 조망에 다시 이곳 헬기장에서 머물며 시간을 보내본다.

북쪽으로는 가야 할 감악지맥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어 그 이름 하나하나를 불러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다시 헬기장을 지나 오르니 진달래 나무들이 등로를 막고 있지만 심하지 않아 천천히 올라 본다.

다시 잔설이 자욱한 등로를 따라 오르니 팔일봉 전위봉이 나타나는데 교통호가 이리저리 어지럽게 널려있고 그곳을 지나 오르니 드디어 팔일봉 정상이다.

정상에는 정상표지판이 서 있지만 잡목들로 인해 조망이 없어 조금은 아쉬운 시간이기도 하다.

팔일봉은 석골 북쪽에 있는 산으로 여덟 개의 봉우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산을 통해 해를 맞이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기산리와 광적면 비암리에 걸쳐있는 산으로 높이는 463미터인데 이곳에서 봉화를 올렸다고 한다.

다른 말로는 거룻봉이라고도 하는데 산등성이의 생김새가 마치 거룻배와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그 모양은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팔일봉 정상에서 셀카로 사진 몇장 남기고 다시 올랐던 등로를 따라 뒤돌아 내려오니 헬기장이 나타난다.

그곳에서 이제 북쪽으로 가야 할 감악지맥 마루금을 천천히 살펴본다.

바로 아래에 정상이 벗겨진 노아산이 내려다 보이고 개내미고개를 지나는 368번 지방도로가 보이며 그 위로 오르지 못하고 우회해야 할 노고산 정상이 안타깝게 다가온다.

그 뒤로 선명하게 드러난 감악산이 우뚝하고 그 감악산 우측 저 멀리 뾰족한 마차산이 이 산객을 부르고 있다.

오늘 가 만나고 싶지만 저 두개의 산은 내일 만남을 약속해야 하는 거리이기에 아쉬움을 남긴다.

 

 

 

다시 헬기장으로 내려 와 많은 시간 주위 조망을 살펴본 후 갈림 삼거리로 내려 온다.

오를 때보다 더욱 질척이는 등로가 발목을 잡고 늘어지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좋은 풍경과 조망으로 인해 까먹은 약 40여분이 아깝지 않은 시간이였다.

팔일봉 갈림 삼거리로 뒤돌아 내려 와 이제는 좌측 감악지맥 마루금을 따라 걸어가니 등로 우측으로는 키 큰 자작나무의 하얀 껍질이 어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제 까먹은 시간을 보충하기 위해 조금은 빠르게 발걸음을 옮겨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하우고개 임도로 진행하다 등로 우측을 바라보니 저 멀리 양주시의 아파트 단지들이 내려다 보이고 그 뒤 저 멀리 희미하게 암봉이 우뚝 솟아 있는 불곡산이 반갑게 인사를 전하고 있다.

그 좌측으로는 도락산이 다시 이 산객을 부르고 두 산을 한번에 올려다 보고 있으니 다시 그 산줄기에 들고 싶다는 생각에 불현듯 사로 잡혀 버린다.

약간의 잡목을 헤치고 내려가니 넓은 임도인듯 한데 사람들 통행이 없어 잡목들이 산행을 방해하는데 어렵게 그곳을 빠져 나가니 넓은 비포장 임도가 나타난다.

그 비포장 임도를 타고 내려가면 사거리 갈림길이 나타나고 그곳 사거리에서 직진의 시멘트 임도를 타고 오르며 지맥 산행을 이어가면 된다.

 

 

 

그곳 사거리는 이미 얼었던 얼음이 녹아 질척이고 등산화에 많은 진흙을 묻혀가며 내려가니 직진의 시멘트 도로 우측 능선에 하우고개란 콘크리트 이정석이 반긴다.

이곳을 자세히 살펴보니 군사지역으로 군인들에 의해 개설된 임도처럼 보이며 민간인들의 출입은 이 산객처럼 감악지맥을 타는 사람을 제외하면 거의 없는듯 보인다.

하우고개에 대한 자료를 찾아 보지만 찾을 수 없고 다만 양주시 자료를 찾아보니 와우고개 또는 와우개 또는 와우현만 찾을 수 있어 정리해 본다.

와우고개는 안골에서 광적면 비암리 괴미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소가 누운 모양의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하우고개란 이정석을 사진에 담고 전차포사선방향(노야로)이란 안내판이 서 있는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타고 오르막 등로로 오른다.

 

 

 

오르며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어렵게 다녀 왔던 팔일봉이 드높게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풍경이 보인다.

그곳 콘크리트 임도를 타고 중앙으로 향하니 정중앙쪽 능선으로 선답자들의 많은 띠지가 미풍에도 흔들리며 산객을 인도하고 있다.

그곳 능선으로 오르니 교통호와 소나무 군락지가 나타나고 곧이어 웅덩이 하나가 보이는 곳에서 좌측 능선을 타고 진행한다.

잘 나 있는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넓은 벙커 정상의 굴뚝봉이 나타나고 그곳에서 등로 찾으며 긴 한숨을 내쉰 후 좌측으로 잠시 걷다가 우측으로 크게 돌아 내려가며 맥 잇기 산행을 진해해 본다.

 

 

 

잠시 잡풀들이 가득한 등로를 헤치고 우측으로 내려가니 얼었던 얼음이 녹으며 진흙창이로 변해가는 넓은 비포장 임도가 눈 앞에 펼쳐진다.

그 비포장 임도로 내려가 잠시 더 걸어가다 띠지도 보이지 않고 방향도 이상한듯 해 다시 능선으로 올라 살펴보지만 그 비포장 임도를 제외하면 감악지맥 등로가 보이지 않는다.

다시 비포장 임도를 타고 좌측으로 돌아 살펴보니 방금 전 하우고개에서 올라 와 정중앙의 능선으로 오르지 말고 좌측으로 임도를 타고 걸어 와도 이 비포장 임도와 만날 것으로 생각되는 임도이다.

 

 

 

이제부터 지루한 임도를 타고 한없이 걸어가는 시간이다.

오프로드를 즐기는 사람들이 자동차로 달렸던 바퀴 자국이 선명하고 오토바이크를 타고 지난 흔적도 보인다.

진행하다 앞을 보니 저 멀리 노아산 정상부의 군사시설도 보이고 임도는 중간에 흙탕물웅덩이와 잡풀 그리고 잔설이 번갈아 나타나며 등산화를 더럽히고 있다.

그렇게 한동안 임도를 타고 완만하게 올라 임도 좌측을 보니 이제 팔일봉이 제법 드높은 높이로 굽어보고 있으며 조금씩 거리가 멀어져 가고 있다.

 

 

 

한동안 진행하다 보니 이곳 비포장 임도는 진흙창이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전봇대가 이 산객의 여행길에 동행을 해 주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다가온다.

너무나 녹아 버린 임도로 인해 등산화는 이미 걸래처럼 지저분해져 있고 등산화 밑창에 달라 붙는 진흙으로 인해 산행속도는 자꾸만 느려지고 있다.

그래도 계속 등로 좌측 뒷로 올려다 보이는 팔일봉을 바라보는 재미는 제법 쏠쏠하다.

그렇게 20여분 이상 임도를 따라 걸어가니 드넓은 공터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서쪽의 노아산 정상부를 바라본다.

 

 

 

잠시 고민하다 이곳 노아산 역시 오늘이 아니면 다시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없기에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그곳 노아산을 향해 걸어 간다.

제법 거리가 있는듯 보였는데 걸어 오르니 생각보다 빨리 도착하고 그 정상부 부근의 군사시설물과 정상의 깃대봉과 굴뚝을 담아 본다.

노아산은 냅대뒤 서쪽에 있는 산으로 홍죽리와 연곡리 그리고 광적면 비암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는 336.6미터이다.

산에 바위가 많아 밤에 뜨는 달빛이 바위에 반사되어 아름다운 빛을 발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으로 마을사람들이 매년 10월 1일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다.

이 산등성이에 묘자리가 있는데 이곳에 묘를 쓰면 그 후손들만 번창하고 다른 사람들은 질병과 가난에 시달린다고 하여 사람들이 그곳의 묘를 모두 없애버렸다고 한다.

진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지역의 전설을 만들어 사랑한다는 사실은 좋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노아산 정상에서 잠시 주위 조망과 정상을 살펴 본 후 올랐던 등로를 타고 다시 넓은 공터로 뒤돌아 나온다.

공터로 내려 와 진행해야 할 방향 우측에 박혀있는 삼각점 옆에 배낭을 내려 놓고 사과 하나와 따뜻한 커피 한잔으로 허기를 달래며 휴식을 취해 본다.

지루한 임도가 끝나는가 싶었지만 오늘 뿐만 아니라 내일까지 이어지는 이 감악지맥 산행은 임도와의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란 생각이다.

다시 배낭 메고 노아산 갈림 공터를 출발하기 전 아쉬움에 뒤돌아 서서 팔일봉과 서쪽의 노아산을 카메라에 담고 둔덕을 넘어 맥 잇기 산행을 이어 간다.

 

 

 

공터를 지나 진행하니 내려가자 마자 좌측에 전차포와 박격포 같은 군사 훈련 경고판이 서 있고 약간은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계속 벙커와 교통호가 뒤따른다.

교통호가 끝나는가 싶더니 이제는 넓은 임도가 나타나고 그 임도를 따라 걸어 간다.

다시 교통호를 따라 올랐다 내려가 넓은 안부를 통과한 후 멋진 소나무 지대를 지나니 등로는 뚜렷한 직진을 버리고 좌측의 잡목 사이로 나 있다.

길주의 구간으로 잘못 진행하면 직진의 뚜렷한 방향으로 진행하기 쉬운 장소처럼 보인다.

길주의 구간에서 정상 등로를 찾아 무탈하게 진행하니 다시 벙커와 교통호가 나타나더니 폐헬기장인지 아니면 넓은 공터가 나타난다.

 

 

 

공터를 지나 내려가니 멋진 잣나무 군락지가 나타나고 나즈막한 내리막 등로를 타고 진행하여 안부로 내려가니 등로는 직진이 아닌 우측의 잣나무 군락지를 타고 크게 걲여 내려간다.

이곳 역시 길찾기 주의 구간이다.

한동안 부드러운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낙엽송 군락지가 나타나고 그곳을 지나니 다시 멋진 잣나무 군락지가 보인다.

그 잣나무 군락지를 지나자 마자 우측으로 연곡리 마을이 예쁘게 펼쳐져 있다.

연곡리는 양주시 백석읍의 서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동쪽으로는 오산리 및 광적면 광석리가 서쪽으로 광적면 비암리 그리고 남쪽으로 홍죽리와 북쪽으로 광적면 우고리와 접해있다.

연곡리라는 땅이름이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이후로서 대한제국기까지 만해도 이곳은 대부분 해유리, 연평리, 난곡리에 속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백석면의 해유리, 연평리, 난곡리 일부를 병합하여 연평과 난곡의 이름에서 한자씩을 따서 연곡리라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이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과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1917)에 나와 있다.

연평리란 땅이름은 연못이 있는 들판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유래하였고 난곡리란 땅이름은 임진왜란 당시에 있었던 피난말에서 변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였는데 현재 연곡리에는 임진왜란 당시 육지전투 최초의 승전지인 해유령을 비롯하여 조선왕조 창건의 일등공신인 조영무의 별묘 등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조용하고 정감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의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다.

 

 

 

이제부터 넓은 임도같은 등로를 타고 우측으로 연곡리를 바라보며 내려가니 가족묘지라 생각되는 묘지지대가 보이고 그곳을 지나니 잣나무 군락지가 보인다.

군 시설물을 지나 조심하며 내려가니 드디어 2차선 368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게너미고개에 도착을 한다.

게너미고개 또는 해유령은 피난말 북쪽에 있는 고개로서 게가 넘어간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는데 옛날 인근 노고산에 노고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노고할머니가 오줌(소변)이 마려워 다리 한쪽은 노고산에 걸치고 다른 한쪽은 반대편 도락산에 걸친 후 광적면 우고리와 광석리 경계지점 부근 황새등고개에 있는 요강바위에 오줌을 쌌다고 한다.

그런데 요강바위의 오줌이 넘치면서 인근 개울에 뜨거운 오줌이 흐르게 되었고 개울에 살던 민물게들은 뜨거움을 이기지 못하고, 바로 이 고개를 넘기 시작하여 이웃한 광적면 비암리와 파주시 발랑리 쪽으로 갔다고 한다.

실제로 연곡리에는 민물게가 보이지 않지만 비암리와 발랑리에는 민물게가 있다하며 혹은 400여 년 전 소나기 빗줄기를 따라 양주게가 파주로 넘어갔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서는 적성현의 토산물 가운데 하나가 게(해)라고 하였고 고개의 이름은 대개 게너미고개라고 부른다.

한자로는 해유령(蟹踰嶺), 해현(蟹峴), 해유현(蟹踰峴)이라고 하나 우리나라 땅이름의 대부분이 우리말을 그대로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와전되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게너미고개 또한 고개가 높고 험하여 기어 넘어가는 고개라는 순우리말이 이렇게 변한 것이 아닌가 한다.

게너미고개는 16세기 중반의 사실을 전하는 선조실록에서 처음 등장하며 선조수정실록25년(1592) 5월 1일조에는 해령이란 지역이 등장하는데 이는 게너미고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임진왜란 종료 후 논공행상의 자리에서 해유령대첩 관련기사가 나오고 있으며 한편 여지도서(1757-1765)는 해유령이 치소에서 서쪽으로 30리 되는 거리에 있고 파주로 통하는 길이라고 소개하였다.

대동지지(1864)에서는 해유현은 선조 25년 4월 부원수 신각이 처음에 김명원을 따라 한강을 방어하였는데 김명원의 군사가 궤멸되자 신각은 한강으로부터 따라 달려온 이양원과 함께 양주에서 흩어진 군대를 수습하였다.

때마침 함경남도 병사 이혼의 장병들이 와서 원조하니 드디어 군대를 합하여 진을 치게 되었는데 드디어 해유현에서 왜병을 만나 요격하여 격퇴하니 70여 명을 목베었다고 하였다.

한편 해현이란 이름으로 팔도군현지도(1767-1776), 동국여도(1801-1822), 청구도(1834), 대동여지도(1861)에 해유령이라는 이름으로 해동지도(1760), 증보문헌비고(1908)에서도 확인된다.

이와 같이 해유령 즉 게너미고개는 우리역사에서 치욕을 남겼던 임진왜란 당시 육지전투 최초의 승전지로서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이다.

이처럼 알지 못했던 이곳 지역의 전설을 배우고 나니 지금과는 다른 풍경으로 이 산객의 눈에 들어 오는 시간이다.

 

            

 

이곳 게너미고개에서 정상 등로를 찾아 오르는 것이 쉽지 않아 잠시 이리저리 헤매였지만 금새 정상 등로를 찾아 무탈하게 진행을 한다.

게너미고개 우측 300미터 앞에는 직진의 360번 도로를 타고 포천과 우측으로 송추 및 장흥으로 가는 도로 이정표가 보인다.

도로 건너에는 해유마을과 보성사 그리고 진미간장게장과 노인요양원 장애인복지원 출입 간판들이 줄지어 서 있고 그 옆으로 시멘트 포장 도로가 보인다.

그 시멘트 도로를 타고 올라 노인요양원 바로 직전 좌측 능선으로 오르면 될 것을 굳이 도로를 타고 좌측 게너미고개 중앙으로 올라 능선으로 들었다가 고생한 후 어렵게 다시 이 정상 등로를 찾아 진행하는 시간이다.

노인요양원 앞 능선을 타고 오르니 잣나무를 벌목한 곳이 나타나고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무명봉에서 이제부터 올라야 할 묘지지대가 올려다 보인다.

 

 

 

묘지지대를 올라 능선에 도착한 후 준비한 양갱이와 음료수로 허기를 달랜 후 다시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게너미 마을의 비닐하우스와 마을이 내려다 보이고 저 멀리 연곡리 마을들도 보인다.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지나온 노아산과 팔일봉이 강한 햇살을 받아 희미하게 빛나고 이제 안녕을 고하며 작별 인사를 하는듯 하다.

인간의 위대한 두 다리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으로 남겨 본다.

 

 

 

등로 좌측으로는 잣나무가 우측으로는 벌목된 잡목지대가 나타나고 그 우측 잡목지대 아래로는 민가들이 보인다.

저 멀리 연곡리 뒷쪽으로는 도락산과 불곡산이 보이고 그 ㅜ측으로 한북정맥 마루금이 희미하게 다가온다.

등로 좌측으로 멋진 안동권씨 가족묘지가 나타나고 잡목지대를 지나 무명봉으로 완만하게 오르도록 되어 있다.

조금 더 오르니 사승지 소나무가 멋지게 서 있고 웅덩이 초소가 보이는가 싶더니 금새 평이한 아름다운 등로가 열려 있다.

 

 

 

그곳 무명봉으로 오르니 넓은 공터가 보이고 잡목을 지나 교통호를 통과하니 다시 활엽수 잡목지대가 나타난다.

다시 진행하니 송전탑 92번과 29번이 적혀 있는 곳을 지나 넓은 임도같은 등로를 따라 진행한다.

그 임도를 타고 걸어가니 삼거리 갈림길이 나타나고 우측 오르막 임도를 따라 오르니 무명봉에 도착해 앞으로 노고산 정상부와 좌측으로 군시설들이 올려다 본다.

계속 진행하니 갑자기 넓은 공터가 나타나는데 그 바로 아래가 세우게고개가 지나는 315번 지방도로이다.

 

 

 

한동안 오르지 못하는 노고산과 그 주변의 군사 시설을 올려다 보고 좌측 임도를 따라 내려가니 315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위로 나 있는 동물이동통로 아래로 터널이 보인다.

잠시 더 내려가니 동물이동통로는 우측으로 이어지고 잣나무 군락지를 통해 정상 등로로 복귀해 진행토록 되어 있다.

동물이동통로 좌측으로는 민가와 고급 가옥같은 것이 내려다 보이는데 그 용도는 알지 못하고 다시 정상 등로를 찾아 진행한다.

새우개고개 즉 삼현터널의 마을이름을 안새우개라 부르는데 이 마을에서 밖으로 나가려면 세고개 즉 우골고개(점말고개), 언굴고개(갈곡령), 자작고개(화암령)를  넘어야 한다는데서 유래한다는데 이름을 보면 아마도 세고개에서 음운이 변해 세우개 또는 새우개로 불려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되는 고개이기도 하다.

 

 

한동안 잣나무 군락지를 따라 가파른 경사지를 오르니 낙엽 깔린 정상 등로가 열리고 그 등로를 따라 좌측으로 걸어가니 부드러운 등로가 연속으로 이어지고 있다.

조금 더 걸어가니 감골성당에서 적어 놓은 산책길이란 종이 코팅지가 많이 걸려 있다.

다시 평이한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등로에 운동시설들이 놓여 있고 그 옆에는 벤취 쉼터도 보인다.

 

 

그 운동시설을 지나 잠시 더 걸어가니 드디어 노고산 우회 비포장 임도가 나타다.

노고산 등산로는 앞에 보이는 임도를 가로질러 능선으로 올라야 되지만 그곳은 군사지역이라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부득이 좌측 임도를 따라 한시간 이상 걸어 돌아가야 한다.

많이 아쉬운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좌측으로 나 있는 넓은 임도를 따라 걷다 보니 임도 우측으로는 절개지가 그리고 좌측으로는 가파른 내리막 절개지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임도 중간 중간에 지뢰매설 경고판이 세워져 있어 지나가는 산객의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끼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한동안 걷다 임도 좌측을 내려다 보니 광적면 비암리 마을이 내려다 보이고 그 좌측으로는 저 멀리 팔일봉에서 노아산을 거쳐 이어진 감악지맥 마루금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비암리는 광적면 서남쪽 끝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서 동쪽으로 백석읍 연곡리와 홍죽리, 서쪽으로 파주시 광탄면, 남쪽으로 백석읍 기산리, 북쪽으로 우고리 및 파주시 법원읍과 접해 있다.

비암리라는 땅이름이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이후인데 이곳은 대한제국기까지만 해도 광석면 사패리 및 파주군 천현외패면 삼현리와 광탄면 발랑리에 속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비암리로 통합 명명되었고 이러한 사실이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과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에 나와 있다.

비암리란 땅이름은 이지역에 있는 견준바위 즉 비암에서 유래하였다.

지금은 도로 확장 과정에서 거의 파손되었지만 옛사람들은 이 바위를 막대기로 견주면서 자신의 소원을 빌었다고 전한다.

게너미고개를 넘어 파주시 발랑리로 이어지는 양주군과 파주시의 경계지점에 위치한 비암리는 현재 송추컨트리클럽 골프장이 들어서 과거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예전의 농촌 풍경을 아직까지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양주군의 몇 안되는 지역이다. 

 

 

이제 임도 우측으로는 군사시설물들이 사면 능선 위로 아스라히 올려다 보이지만 오를 수 없으니 안타까움이 더욱 커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다시 임도를 따라 진행하다 좌측을 보면 비암리 마을과 좌측의 감악지맥 마루금이 계속 뒤따라 오며 다시 한번 봐달라 애원하고 있다.

그렇게 한동안 지나 뒤돌아 보니 이제 머리 위로 숨었던 노고산 정상부가 불쑥 나타나 그리움을 더하고 그 아래 우측 저 멀리에는 오늘 이 산객이 걸어 온 감악지맥 전부가 시원스레 조망된다.

첼봉과 한강봉이 보이고 그 우측으로 오두지맥의 고봉들이 즐비하게 줄지어 들어서 있으며 가까운쪽으로 팔일보와 노아산 그리고 나즈막한 산줄기가 이곳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노고산은 노고할매와 연관되어진 이름이나 노고산 또는 노고봉은 대부분 늙은 어미산이란 뜻을 지니고 있으며 대동여지도에는 돌성을 쌓은산이란 뜻의 석적산이라 표시하였다. 

지금도 이곳 마을 주민들은  노고산을 서석적산으로 부른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렇게 임도 좌측으로 파주시 광적면과 저 멀리 오늘 이 산객이 걸어 온 감악지맥을 조망하며 진행하니 드디어 노고산 군부대로 통하는 정문이 있는 콘크리트 임도에 도착을 해 아쉬움을 달랜다.

이곳에서 잠시 직진의 능선을 타고 진행할까 아니면 그냥 시멘트 임도를 따라 진행할까 고민하다 큰 의미가 없기에 콘크리트 포장 임도를 타고 진행하기로 한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 레이더봉까지만이라도 다녀올까 생각하고 능선방향의 시멘트 임도를 따라 오르다 뒤돌아 보니 그곳에 오르지 못하는 노고산 군부대 시설물들이 아쉬움을 더욱 진하게 전해 준다.

하지만 더 진행해도 큰 특징도 없고 조망도 없어 보이기에 다시 군부대 정문으로 내려 와 좌측 내리막 콘크리트 임도를 타고 내려가며 크게 노고산 정상부를 우회하기 시작한다.

 

 

이제 콘크리트 임도를 따라 오현리 도로쪽으로 내려가며 아쉬움에 자꾸만 임도 우측 저 위에 자리하고 있는 노고산 군부대를 담아 본다.

그렇게 내려가다 보니 임도 우측 앞으로 갈곡리와 오현리 마을이 내려다 보이고 우측으로 뾰족한 금병산이 우뚝한데 좌측 멀리에는 머리에 인공시설물을 이고 있는 오두산 통일전망대가 눈에 들어 온다.

잠시 옛날 생각에 잠겨 오두지맥 산줄기의 이름을 기억해 보지만 오래된 흑백 필름처럼 가물거리기만 하다.

그래도 기대하지 않았던 멋진 조망에 콘크리트 임도를 타고 내려가는 따분함을 잠시 잊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곳 오두산 통일전망대도 산행으로만 두번을 올랐고 여행겸으로는 몇번인가 올랐기에 그 영상이 뚜렷히 남아 있다.

이제 많이도 내려 온 지점에서 뒤돌아 보니 노고산 서쪽의 시설물들이 보이고 제법 멀리 내려왔다는 느낌이다.

그렇게 조금 더 내려오니 갑자기 임도 우측으로 기계음이 들리기 시작하고 살펴보니 노고산 서쪽 한자락에 미화레미콘공장이 들어서 산자락을 잘라내고 있고 그 거대한 건물 앞에는 수십대의 레미콘 차량들이 토요일이라 쉬는지 정차되어 있다.

어쩔 수 없다 해도 사용 후 원상 복귀를 시키든지 아니면 너무 깊은 상처가 아니길 간절히 소망해 보지만 가능한 일이 아니기에 안타까움만 더하는 시간이다.

 

 

그 미화레미콘 공장을 내려오니 임도 우측으로 높게 쌓아 올린 채석더미가 산을 이루고 수많은 레미콘 차량들이 통행하기에 콘크리트 임도도 성한 곳이 없을 지경이다.

다시 내려가니 저 앞으로 신설도로가 건설중이고 살펴보니 화합로 548번길이란 도로 표지판이 보인다.

지도상으로는 56번 지방도로로서 오현리사거리까지 다시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가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56번 2차선 포장도로 위 점멸등을 만나 도로를 타고 우측으로 걸어진행을 하니 갈곡리(부대앞)버스정류장이 보이고 곧이어 탱크방호벽이 나타나는데 그곳을 지나자마자 높은 교각 위로 새로운 4차선 도로가 건설중인 풍경이 눈에 들어 온다.

 

 

파주시 법원읍 자료를 찾아 보니 갈곡리는 조선시대 천현외패면 지역인데 이 지역은 노고산 내령으로 자운산을 거쳐 삼봉산에 이르러 수레너미고개 좌우편 산야에 칡넝쿨로 뒤덮여 있어 붙은 이름이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갈동리와 은곡리에 천현내패면의 오리동 일부 지역을 편입하여 갈동리의 갈자와 은곡리의 곡자를 따서 갈곡리라 하였으며 칡울 또는 갈동이라고도 한다고 전해진다.

56번 2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계속 완만한 오르막길로 오르니 좌측으로 367번 지방도로를 타고 적성과 전곡으로 갈 수 있는 갈림 삼거리가 나타난다.

이곳 삼거리에는 좌측에 군부대가 있고 가운데 건물에 파주휴게소가 있어 음료수 한병 사 마시고 다시 우측 도로인 56번 지방도로를 타고 양주와 의정부 방향으로 걸어 본다.

 

파주휴게소 앞 도로 건너편에는 오현리라는 버스정류장이 보이고 그 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도로 좌측에 스르레미농장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노고산을 통할 경우 걸어 진행해야 할 원지맥 능선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우측 노고산에는 정상과 그 주변에 군사시설물들이 조금 더 뚜렷하게 다가온다.

그렇게 걸어 진행하니 드디어 양주시와 파주시를 나누는 해태상이 있는 스르레미고개에 도착을 해 사진 몇장 남겨 본다.

오현리는 조선시대 천현 내패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오리동과 부작동의 각 일부 지역인 황발리, 샘골, 동두라 지, 차현동 등을 병합하여 오리동의 오자와 차현동의 현자를 따서 만든 이름이다.

또한 이곳 고개 이름이 스르레미 또는 수레네미고개로 불려지는데 그 유래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되어 있다.

수레네미고개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거미울

에서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오현리 넘어가는 고개로서 옛날 중국으로 가는 길목이라 수레가 끊임없이 넘나들던 고개라 하여 수레네미고개라 하였다.

또 지세가 험하고 도적이 많아 쉰 명이 모여야 넘을 수 있었으므로 쉰고개

또는 쉰넘이고개라고도 하였으며 혹은 고개가 험해 몇 번을 쉬어야 넘을 수 있다고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한다.

차유령 또는 수레네미고개 또는 스르레미고개라고도 한다.

연산군일기에 차유령이 처음 보이기 시작하여 대동여지도(1861), 증보문헌비고(1908) 등에도 차유령이 나온다.
현재 수레네미고개는 이용되지 않고 그 옆에 새로 놓인 2차선 포장도로를 통해 차량들이 통행하고 있다.
이 고개 이름이 아랫마을 이름인 거미울과 관련이 깊은듯 보인다.

거미울

이라는 마을의 원래 이름은 수레 거에 말마자를 써서 거마울이었다.

거마울, 거마울하던

발음이 거미울로 변형되어 거미울마을이 되었다는데 여기에는 마차길이 지나는 곳이라 주막이 있었고 장사꾼들은 고개를 넘기 전에 그 주막에 모여 잠을 자고 가기도 하였다. 그리고 꼭 쉰 명이 모인 다음에야 그 고개를 넘어갔는데 그 이유는 한두 명씩 고개를 건너가면 강도들이 나타나 물건을 모두 빼앗아 가기 때문에 강도를 당하지 않기 위해 쉰 명씩 모여서 고개를 건넜던 것이다. 쉰 명이 모여 넘어 간다고 하여 처음에는 그 고개를 쉰넘이 고개라고 하였는데 쉬르네미, 쉬르네미하다가 수레네미고개로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 수레네미고개에서 몇장의 사진을 남기고 좌측 비포장 임도로 들어가니 다시 삼거리 갈림길이 나타나고 좌측 민가쪽으로 나 있는 임도를 버리고 우측 임도를 따라 계속 진행한다.

다시 군데 군데 군시설물들이 차지하고 있는 임도를 통해 오르니 넓은 공터와 교통호들이 보인다.

곧이어 나타나는 묘지 위 능선을 통해 진행하면 등로 우측 저 멀리 오늘 이 산객이 걸어 온 감악지맥이 시원하게 조망되고 금새 군 시설물들이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벙커봉에 도착을 한다.

  

 

잠시 주위 풍경과 정상부 모습을 사진에 담고 우측 좁은 계단을 타고 내려오니 시멘트 포장 임도와 만난다.

그 포장 임도를 타고 좌측으로 돌아 나오니 우측으로 또 다른 시멘트 임도가 나즈막한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고 있는데 잠시 헷깔려 그곳으로 몇발자국 옮기다 다시 뒤돌아 올라 와 정면으로 바라 보이는 군부대 시설물 앞으로 걸어가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간다.

군 시설물 사이 저 멀리에는 사방산과 광평산쯤 되어 보이는 산이 우뚝 하늘 높은줄 모르게 솟아 있다.

 

 

그 군 시설물을 지나 계속 걸어가니 시멘트 포장 임도는 비포장 임도로 바뀌고 잠시 후 군전용훈련장 경고판이 반긴다.

다시 질척이는 등로를 타고 어렵게 걸어가니 송전탑 하나가 보이는데 번호는 알길이 없다.

그 송전탑을 지나 진행하니 묘지지대가 다시 나타나고 그 아래 광적면 마을들과 저 멀리 도락산 및 불곡산이 꽤 멀어진 풍경으로 반긴다.

걱정했던 것보다 몸 상태는 좋아 아직까지 큰 무리 없이 진행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다시 질척이는 임도를 따라 걷다보니 등산화는 이미 색깔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더럽혀져 있다.

삼거리 감ㄹ림길에서 좌측 오르는 임도를 버리고 우측 평이한 임도를 따라 걸어가니 갑자기 드넓은 헬기장이 나타나지만 질척이는 등로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한다.

다시 계속되는 임도를 따라 오르고 입을 벌리고 있는 군시설물을 지나 걸어가니 임도 좌측으로 봉우리가 나타나는데 주위에 온통 철조망이 쳐져 오를 수가 ㅇ벗어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진 한장 남긴다.

진행하다 보니 주능선과 가깝게 군사 임도가 나 있는데 그렇다 보니 임도와 주능선이 교대하면서 작은 무명봉은 그냥 지나치게 되어 있는 형국이다.

다시 나타나는 갈림 삼거리 임도에서 이번에는 좌측 임도를 버리고 우측 임도를 따라 오르고 낙엽 깔린 멋진 임도를 걷다보니 사거리 갈림길이 나타나고 이곳에서는 모든 임도를 버리고 정중앙의 능선으로 오르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능선으로 올라 진행하니 큰 구덩이 하나가 있는 무명봉에 오르고 다시 부드러운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또 다시 바위들이 박혀 있는 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그곳을 지나니 등로는 우측 급경사 내리막으로 90도 꺾여 내려가지만 바로 앞으로 5미터 전방에 멋진 암봉이 보여 그곳에 올라 늦은 점심식사를 즐기며 아름다운 조망을 담아 본다.

무건리고개 지나 368.7봉이 보이고 송전탑을 따라 저 멀리 감악산과 마차산이 시원하게 조망되는 곳에 서서 셀카를 이용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좌측 앞으로는 파주시 직천리와 무건리 들판이 내려다 보이는데 그 주위로는 나즈막한 산줄기들이 둘러쳐져 있다.

저쪽으로 파주의 파평산도 보이는듯 한데 어느곳이 파평산인지는 알 수가 없어 아쉽기만 하다.

파주시 법원읍 직천리는 조선시대 천현내패면 지역이었는데 이 지역 오현리 수레너미 고개에서 내려가는 산골짜기 냇물이 곧바로 이곳을 통과하여 늘노천으로 흐르는 냇물이라 하여 이름 지어졌다.

1914년 설원동, 한터, 먼내, 벌말, 삼박골, 상산굴, 부작동 지역을 직천리라 하였다.

이 산객이 살았던 시골과 별반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에 잠시 고향을 생각해 본 시간이기도 하였다.

 

 

등로 좌측 뒷쪽으로는 이 산객이 걸어 온 감악지맥 마루금이 살짝 살짝 보이는 풍경이 그리움으로 남겨진다.

박무가 짙어지며 이제 저 멀리 보여야 할 팔일봉은 숨어 있어 숨바꼭질을 하자고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지나온 오현리 마을이 선명하게 다가오고 그렇게 한동안 조망을 즐긴 후 점심식사를 하면서 따뜻한 커피 한잔으로 허기를 달래 본다.

 

 

 

 

 북쪽을 바라보니 이제 오늘과 내일 걸어가야 할 감악지맥 마루금이 시원하게 조망되고 있다.

바로 앞 좌측으로 368.7봉이 올려다 보이고 설머치고개를 지나 감악산이 우뚝하며 그 우측 저 멀리에는 마차산이 아직도 뾰족봉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그 아래 옆에는 양주시 남면 신암리 마을이 아름답게 내려다 보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암저수지를 찾아 보지만 산줄깅[ 가려 저수지까지는 보이지 않는다.

 

 

 다시 배낭 메고 떠나기 아쉬워 많은 사진을 남기고 왔던 등로를 뒤돌아 가 좌측 급경사 내리막 등로를 타고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진행하다 보니 방금 전 올랐다 조망을 즐기고 점심식사를 했던 그 암봉을 좌측에 두고 우회하는 등산로로 진행하는 시간이다.

깊이 깔린 낙엽지대를 어렵게 통과해 내려가니 이제 등로는 잣나무 군락지로 이어지고 있다.

멋진 등로를 타고 걸어가다 보니 오늘 하루 종일 많은 도움을 준 J3 CLUB의 박창연님과 노성임님 띠지가 반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오래전 잠시 인연을 맺었던 고양의 알프스님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감사한 마음 전하며 스치는 인연이라도 볼 수 있기를 바래 보는 시간이다.

 

 

 이제 잠시 부드러운 등로를 따라 걸어가고 소나무 숲을 지나 진행하니 등로 앞 저 멀리 절개지가 나타난다.

가파른 내리막 경사면을 따라 내려가니 벙커가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곧이어 시멘트 포장 임도가 나타나는데 임도 좌측으로는 off load를 즐기려는 자동차와 모터 사이클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온다.

지도를 살펴보니 아무 표시가 없는데 어느 지도에는 이곳이 진짜 수레네미고개로 표기를 해 놓고 있다.

신암리는 남면에서 북서쪽 끝에 위치한 마을로서 동쪽으로 황방리와 한산리, 북서쪽으로 파주시 적성면, 남쪽으로 매곡리와 신산리와 접해 있다.
신산리는 남면 중앙에 위치한 마을로서 동쪽으로 한산리 와 입암리, 서쪽으로 매곡리, 남쪽으로 구암리, 북쪽으로 신암리와 접해 있다.
신암리라는 땅이름이 문헌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은 18세기 후반으로 호구총수(1789)에서는 이곳을 적성군 남면에 속한 신암리로 소개하였다.

그러나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적성군 남면 전체가 연천군 남면으로 변화되면서 신암리 일부지역이 신산리에 편입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과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에 나와 있으며 이후 1945년 9월 미군정 포고령 제22호에 따라 파주군에 속하였다가 1946년 2월 남면 주민들의 요청으로 양주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신암리라는 땅이름은 이 마을이 산신에 제사지내는 감악산 바로 밑에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자세한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첫번째로 조선시대에 신을 모신 바위가 있었다는 설과 두번째로 이곳에 남선굴로 불리는 신선바위가 있으므로 여기에서 신선바윗골과 신암골 및 신앙골 그리고 신암동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설이다.

그러나 일설에는 이곳에 감나무가 많아 감나무골 즉 시낭골로 불렸는데 남을진이 감악산으로 들어오면서 귀신바위를 붙들고 울었다 하여 귀신 신자와 바위 암자를 따서 신암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현재 신암리는 감악산 남쪽 자락에 위치한 관계로 양주군 안에서 가장 공기가 맑고 깨끗하며 파주시 적성을 넘나드는 설마치고개를 중심으로 파주와 양주를 연결하는 통로 구실을 하고 있다.

한편 감악산이 만들어 놓은 천혜의 자연 환경을 따라 사시사철 수많은 등산객과 낚시꾼들이 신암리를 찾아오고 있다.

참으로 멋진 전설들이 아닐 수 없다.

 

 

그 시멘트 임도를 건너 능선으로 오르니 교통호를 따라 활엽수가 자라고 잠시 더 오르니 또 다른 시멘트 임도가 나타나 지도를 정치시키고 확인을 해 본다.

진행상 큰 잘못도 없었고 옆으로 빠질 등로도 없었기에 다시 그 나타난 시멘트 임도를 건너 능선으로 오른다.

번호가 없는 송전탑을 만나 오늘과 내일 올라야 할 감악지맥을 살펴보고 우측으로 아름답게 펼쳐진 신암리 마을을 조망해 본다.

신암리를 조망한 후 다시 출발하니 등로에 표식이 엇는 삼각점 하나가 낙엽속에 숨어 있다.

 

 

그 알수 없는 삼각점을 지나 번호가 없는 송전탑을 다시 지나니 다시 부드러운 등로가 눈 앞에 펼쳐져 있다.

즐겁게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가니 등로 위에 키가 커 잘 보이지 않는 굴뚝이 서 있고 살펴보니 굴뚝봉이다.

하지만 호사다마라 했던가...

큰 어려움 없이 진행하던 맥 잇기 산행이 이곳에서 직진의 뚜렷한 등로를 타고 내려가 잠시 알바를 한다.

우측으로 내려가는 등로를 찾아 보지만 찾지 못하고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잠시 시간을 까먹고 결국 직진으로 내려가 교통호가 있는 곳에서 좌측 정 지맥 방향으로 걸어가니 그곳에 전혀 다름 산줄기가 펼쳐져 있고 이곳이 감악지맥임을 직감한다.

 

 

다시 교통호가 어지럽게 난무하는 등로를 따라 내려가다 살펴보니 바로 우측에 번호가 없는 송전탑이 자리하고 이 산객이 왔다리 갔다리 했던 능선이 좌측 직진으로 나 있다.

다시 만나는 시멘트 포장 임도를 만나 좌측으로 진행하고 다시 잠시 비포장 임도를 따르다 능선으로 오르며 암릉 구간을 지난다.

그 암릉구간을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붉은 깃발이 보이고 다가가 사진 한장 남기고 조망도 없기에 진행방향으로 출발한다.

 

 

다시 깃대가 있는 무명봉을 지나 걷다보니 소나무들이 등로를 채우고 곧이어 낙엽이 깊게 깔린 평이한 등로로 이어진다.

그곳을 지나 나즈막한 봉우리로 오르니 그곳 우측에 다시 붉은 깃발이 꽂혀있는 깃대가 보인다.

그 깃대 넘어로는 남면 신암리쪽 마을이 아름답게 내려다 보인다.

조금 더 주위 풍경을 조망한 후 다시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그 붉은 깃발이 있는 깃대봉을 내려오며 앞을 보니 이어지는 송전탑을 따라 저 멀리 감악산이 우뚝 솟아 있다.

내일 아침이면 저곳에 올라 이곳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사를 연발할지도 모를 일이기에 천천히 음미하며 자연을 바라본다.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지만 사실은 송전탑을 세우기 위해 만들어진 도로처럼 보이는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송전탑 71번과 8번이 공존하는 밑을 지난다.

다시 드넓은 임도를 따라 걸어가니 좌측에서 우측으로 휘어지며 올라오는 임도를 만나 우측 직진 방향으로 진행한다.

이제 군부대에서 걸어 놓은 사격지역경고판을 지나 드넓은 공터를 통과하니 지하벙커처럼 보이는 군시설물 뒤편으로 송전탑이 보인다.

 

 

군 지하벙커를 지나 계속 이어지는 넓은 임도를 따라 걸어가니 임도 주위에는 멋진 소나무 군락지가 형성되어 있다.

그렇게 계속 진행하니 다시 묘지지대가 나타나고 군 적사함등이 눈에 들어 온다.

이제 임도 위 저 멀리에는 감악산 임꺽정봉의 절벽이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그 뒷쪽으로 드높은 통신탑도 보인다.

이제 임도가 갈리는 삼거리에서 다시 좌측 임도를 타고 진행하니 금새 무건리고개 앞 군초소와 사격장 경고판이 서 있다.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무건리에 있는 고개로 옛날 설인귀가 이곳 골짜기에서 무술을 연마했다고 해서 무건리라 부른다고 하며 무건이, 무건동이라고 한다.

 

자연마을로는 감굴, 모른말, 빈배이, 솥점 등이 있는데 감굴은 감악산 밑이 된다 하여 붙은 이름이고 모른말은 모퉁이에 있던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며 빈배이는 거르메 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고 솔점은 솥점이 있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2002년 이곳 무건리 훈련장에서 훈련을 마치고 이동 중이던 미군 궤도차량에 여중생 2명이 깔려죽는 일이 발생하여 촛불집회가 들불처럼 일어나 사회적 이슈가 된 곳이도 한 가슴아픈 사연이 숨어 있는 고개가 바로 이곳이다.

   

 

무건리고개 부대 앞을 지나 진행하니 임도 우측으로는 밭이 보이는데 지금은 겨울철이라 모든 밭이 비어 있는 모습이다.

계속 임도를 타고 진행해도 될것 같지만 가운데 능선의 잣나무 밭이 너무나 운치가 있어 그 능선으로 올라 넘으니 다시 임도를 만나 좌측으로 임도를 타고 걸어 본다.

임도에서 다시 능선으로 올라 교통호와 벙커를 만나고 넓은 공터와 타이어 벙커를 지나 녹슨 레이더 시설이 있는 무명봉을 넘는다.

  

 

레이더 봉을 넘어 다시 벙커를 지나고 멋진 잣나무 숲을 통해 진행하니 쓰레기무단투기단속경고판이 서 있는 임도와 다시 만난다.

그 임도를 만나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좌측으로 임도따라 걸어가니 시멘트 공터 좌측으로 짚차 하나가 올라와 있다.

우측으로 묵밭과 좁은 밭이 보이고 시멘트 포장 임도는 우측으로 휘어지며 이어지는데 반대편에는 잣나무 군락지가 보인다.

좌측에 잣나무 군락지를 두고 시멘트 임도를 따라 우측에 묘지지대를 두고 오르막 임도를 타고 오르면 되는데 잠시 오르기전 우측 저 멀리 바라보니 감악산이 시원스레 조망되고 있다.

 

 

시멘트 임도를 타고 완만하게 오르니 다시 드넓은 공터가 나타나고 공터를 지나자마자 임도 좌측으로는 많은 묘지들이 산재한 장소가 보인다.

묘지 위로 올라 지나온 마루금을 살펴보지만 강렬한 햇살로 인해 시야가 제한되며 보이는 것이 없다.

주위에 식재된 잣나무 군락지를 바라보며 계속 걸어가니 멋진 소나무들이 반기고 폐헬기장이라 생각되는 장소도 통과한다.

부드러운 등로를 타고 오르니 생각지도 못한 암봉이 나타나고 그 암봉 위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소나무 한그루가 눈길을 잡는다.

다시 등로에 군 시설물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제 잡목지대를 통해 오르니 다시 바위가 산재한 무명봉에 오른다.

군부대용 삼각점이 보이고 문산 305란 3등 삼각점이 박혀있는 368.7봉에 도착해 긴 한숨을 내쉬어 보는 시간이다.

 

 

별 조망이 없어 삼각점만 사진에 담은 후 다시 배낭 메고 진행하니 큰 웅덩이가 정상을 차지하고 그곳을 지나 잔설이 남아 있는 내리막 낙엽 등로를 타고 조심하며 진행해 본다.

이제 종주 산행이 아닌 낙엽산행을 하고 있는 기획산행처럼 여유를 가져보니 이제 하루해가 저 멀리 서쪽으로 멀어지고 있다.

다시 부드러운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녹슨 군부대 철조망이 가로막고 그 철조망을 타고 우측으로 내려가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간다.

잠시 더 내려가니 가파른 절개지가 나타나고 차량 통제용 바리게이트가 있는 넓은 공터에 도착해 잠시 휴식을 가져 본다.

 

 

넓은 공터를 가로 질러 비포장 임도를 타고 진행하니 차량보관용 엄폐시설 같은 군시설물이 4개가 보이는 곳에서 시설물 우측 임도를 타고 오른다.

계속 이어지는 임도같은 등로를 타고 오르다 잠시 뒤돌아 보니 방금 전 내려온 368.7봉과 철조망 하산 등로가 시원하게 조망되고 있다.

다시는 오지 못할 풍경이기에 잠시 더 머물며 몇장의 사진에 담고 가던 길을 재촉한다.

 

 

다시 그곳을 지나 진행하니 진흙으로 이뤄진 작은 계곡이 나타나고 그 넘어로 커다란 활엽수 한그루가 서 있는데 그 진흙 봉우리에 표식이 사라져 가는 삼각점 하나가 서 있는데 바닥까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곳에서 앞을 보니 저 멀리 잡목 사이로 감악산이 더욱 가깝게 다가와 있다.

참으로 거대한 암봉이 위압적으로 이 작은 산객을 억누르듯 다가온 느낌이다.

 

 

멋지게 다가오는 감악산 조망을 즐긴 후 다시 배낭 둘러메고 진행하니 적포획/포로취급이란 군사 작전 표지판이 보인다.

이곳 역시 유격훈련장으로 사용하다 폐쇄된 군사지역임을 금방 알수 있는 표식들이다.

그곳에서도 머리 위로 올려다 보이는 감악산의 모습에 몇장의 사진을 더 담은 후에야 능선으로 들어가며 마지막 힘을 내 본다.

 

 

잡목과 잣나무가 적당히 뒤섞인 등로를 따라 진행하니 다시 깊은 낙엽이 깔린 융단같은 등로가 열리고 바삭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즐겁게 걸어 보는 시간이다.

잠시 더 걸어 가니 임도 삼거리를 만나는데 임도 오측으로 상산김씨12대손 가족묘지 안내석이 서 있고 지나온 등로를 뒤돌아 본다.

가족묘지 안내석이 가리키는 우측 방향으로 오르니 다시 임도는 좌측으로 걲여 진행되고 잡목이 널려있는 등로를 타고 오르니 눈 앞으로는 감악산이 늘 함께하는 풍경이다.

다시 임도를 따라 걸어가니 약간의 바위지대를 지나 등로 좌측으로 신도로를 만들며 뚫고있는 터널 입구 2개가 보인다.

그곳 조망처를 지나 진행하니 등로 우측으로 많은 가족묘지들이 보이고 그곳에서 허기를 달래기 위해 남아 있는 사과 하나를 꺼내 먹으며 핸폰을 보니 모르는 전화번호가 3번이나 떴는데 문자 하나에 전화가 안돼 차량을 견인 조치했다는 문자가 남아 있다. 

 

 

무슨 일일까 걱정과 궁금증을 유발하며 전화를 해 보니 마두령 고갯마루의 가게 주인인데 차량 주차를 가게쪽에 너무 가깝게 주차를 했다며 겨울에는 괜찮은데 여름에는 영업에 지장이 많으니 이곳에 주차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한다.

일단 차량은 견인 조치를 했는지 확인하니 견인조치는 하지 않았으니 빨리 와 차량을 빼라는 이야기이다.

다행이란 생각에 미안하다고 전하고 다시 가벼워진 마음으로 배낭 메고 그 묘지지대를 지나 평이한 등로를 타고 걸어가다 좌측으로 내려 떨어지는 등로를 따라 내려가며 2번의 수로를 지나니 드디어 4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설머치고개에 안착을 한다.

 

설마리는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칠중성에서 태어나 이 곳에서 말을 달려 훈련했으므로 설마지나 마지 또는 설인귀가 추운 겨울에 눈에 쌓인 상봉을 거쳐 감악산 봉으로 말을 달려 무예를 쌓았다하여 설마리라고도 하고 설마동 설마치라고도 한다.

 

이 설마리에 있는 고개라서 설마지고개 또는 설머치고개라 불리는 이곳은 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리에서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양주에서 적성(현 파주시)으로 통하는 관문으로 중요시됐던 고개로 이 지역 사람들은 사기막 고개라고 부르는데 4차선인 371번 지방도가 지나고 있다.

마치고개는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신라의 삼국 통일을 지원하기 위해 말을 타고 달리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혹은 근처에 제단이 있어 설마고개라 했다고도 한다.

어룡고개 혹은 어영고개라고도 불리었는데 임금님이 넘어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설마치고개는 증동국여지승람(1530)에 처음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설마현 혹은 설마령으로 나오며 이 고개로 수십 리를 가면 적성현이 나온다고 하였다.

해동지도(1760), 팔도군현지도(1767-1776) 등에는 설마치로 나온다.
설마치고개가 시작되는 신암리 동쪽에 신암저수지가 있고 고개가 끝나는 파주시 적성면의 설마리도 설인귀와 관련된 마을이다

이 지역에서 내려오는 설인귀 장군의 유래를 보면 설인귀는(613-682) 용문출신으로 서기 645(고구려 보장왕 4)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입할 때 군졸을 응모

안시성 공방전에서 공을 세워 유격장군으로 발탁된 후 655년 영주도독 정명진 좌우위중랑장 소정방과 고구려 적봉진을 침략 658(보장왕 17) 우령군중랑장으로 승진되어 주장 이세적과 육군을 이끌고 봉천을 함락시켰으며 이어 제성을 공략하였다.  

666년(보장왕 25) 고구려장수 막리지와 연개소문이 죽은 후 그의 장남 남생이 아우 남건, 남산에게 쫓겨 그를 입당시킨 사실과 신라에서 구원병을 청하자 좌무위장으로 요동안무대사를 도와 내침 남건의 군사를 격파하고 남소, 목저, 창함성을 협공 드디어 남산은 중신 등과 당영에 나가 항복함에 따라 고구려 보장왕 27(668) 9 21일 역사적인 최종의 치욕일로서 705년간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에 따라 당나라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 설인귀는 검교 안동도호부 총독이 되었다.

648년 이때 신라무왕(제30대왕)의 의도를 책망하는 장문을 보내자 진덕여왕(38대)은 내가 양국을 평정하면 평양이남 백제 토지를 모두 그대에게 주어 편안하게 하려한다는 내용에 변명서를 보내 왔으며 신라의 정당한 요구에 대변을 삼았다.  

이리하여 신라는 백제땅을 대부분 점령한 후 설인귀는 671(신라문무왕 11) 계림도 행군 총관으로서 신라에 내침하였으며 이어 675년(문무왕 15) 신라 숙위학생 풍훈을 향도로 삼아 풍성강을 침공하였다.

연이어 나장문훈에게 대패 이듬해 문무왕 16 11월 금강하류 소벌포에서 거듭 패전 후 678(문무왕 17)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무순(봉천)으로 이치함으로 나당간 무력 충돌이 종식되었으며 설인귀는 그 후 본위대 장군이 되어 평양군공에 봉해졌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설인귀장군은 적성면 주월리 백옥봉하 오환면적오제갈지에서 가난한 집에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위에서 명기한 용문은 바로 이곳인지도 모를 일이다.

 

설인귀는 구척 장신으로 어려서부터 기골이 수려하고 힘이 센 장사로서 당시 세도가인 상산김씨묘를 쓸 당시 술을 세동이나 마시고 난 후 아름드리 나무들을 캐내는데 무밭에서 무 뽑듯이 하였다 한다.

그 후 율포리 임진강변 벼랑에 갔을 때 석벽에 있는 바위가 갈라지면서 용마가 뛰어나와 말을 타고 감악산 천왕봉하 백운동을 가니 밭을 갈던 농부가 쟁기에 걸려 캐낸 큰 궤짝속에서 갑옷과 투구를 얻었으며 백운대 삼태봉(4체봉) 칼바위에서 보검을 얻은 후 무건리 골짜기에서 감악산을 오르내리며 군마훈련을

익혀 무훈을 세웠다하여 무건리로 호칭하였다.

 

이곳에 이런 엄청난 역사적 사실이 숨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에 또 다른 고갯마루로 기억되는 시간이다.

 

 

그렇게 설마치고개에서 잠시 역사적인 사실을 떠올리며 새롭게 바라본 후 어떻게 말머리고개로 복귀할지 고민하는 중에 군내버스가 오고 무조건 손 흔들어 탄 후 버스기사에게 물어 보니 상수리까지 가 그곳에서 택시로 가는 방법이 가장 좋을 것 같다고 추천을 해 준다.

그 버스 기사님 추천대로 상수리에 내려 도로를 건넌 후 택시 승강장에서 이곳 택시를 잡아 말머리고개로 가 얌전히 남아 있는 애마를 회수해 집으로 복귀하니 저녁 8시를 넘기고 있다.

어렵게 첫구간을 무탈하게 완주했으니 내일 하루 남아 있는 구간도 멋지게 완주 후 돌아 올 수 있기를 바래 본다. 

삼겹살에 소주 두잔 마시고 소치 올림픽 게임을 구경한 후 일찍 잠자리에 들어 내일을 기다려 본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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