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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맥산행(완료)/낙동정맥(완료)

낙동정맥 제15차 OK그린연수원에서 와항재까지 산행 후기

by 칠갑산 사랑 2011.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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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경북 경주시의 낙동정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 2011년 12월 09일과 10일 (무박 2일 토요 산행)

산행날씨 : 하루종일 춥고 바람이 강해 추웠으나 조망이 좋았던 날씨

산행온도 : 영하 06도에서 영상 04도

산행인원 : 3450온누리산악회 낙동정맥 종주대 10명과 함께

산행코스 : OK그린연수원-512봉 통신탑-535봉-메아리농장-비포장 임도 삼거리-초지지대-605봉-아랫상목(장승)-임도-민가-우측 능선진입(물통2개)-녹슨 철조망-535.1봉 전망바위-윗상목 임도-680봉 헬기장-684.8봉 헬기장-700봉-700.1봉 삼각점-아침식사-소호고개(태종고개)-30번 송전탑-쩍바위-638.5봉-전망대 바위-호미지맥 분기봉-삼강봉(845봉)-855.9봉-암릉로프지대-870봉-백운산(901봉)-692.7봉 삼각점-시멘트 임도 삼거리-소호령 삼거리-대성사-돌탑(920봉)-나무계단-고헌산동봉(1032.8봉, 산불감시초소 및 돌탑)-고헌산(1033봉)-나무계단-고헌산서봉(1035봉, 정상석과 돌탑)-돌탑지대-잣나무 숲-와항재(921번 지방도로)-산행종료,  경주시 산내면 와항마을에서 한우로 식사하고 귀경해 사당에서 사당지맥 진행

산행거리 : 약 19.90 Km (접속구간 00.00 Km)

산행시간 : 사진 찍고 휴식 취하며 꾸준한 속도로 09시간 00분 (04시 32분부터 13시 32분까지)

 

낙동정맥이란 ???

낙동강의 동쪽을 따르는 산줄기로 동해바다를 가르는 한반도 동해안 지방의 담장이다.

백두산에서 남으로 힘차게 뻗어내려 금강산과 설악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내려가는 백두대간 마루금이 천의봉(매봉산,1303봉)으로 솟아 오르기 전 1145봉 직전에서 남동쪽으로 분기하여 태백 백병산(1259봉), 통고산(1067봉), 울진 백암산(1004봉), 청송 주왕산(720봉), 경주 덕석산(829봉), 울산 가지산(1240봉), 신불산(1209봉), 부산 금정산(802봉)을 지나 백양산(642봉)을 넘어 낙동간 하구인 다대포 몰운대에서 끝나는 약 397 Km의 산줄기를 낙동정맥이라 한다.

낙동정맥 중에서 최고봉은 태백의 백병산으로 그 높이는 1259미터이다.

 

 

한겨울 강풍속에 너무나 아름다운 조망과 풍경을 즐긴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 후기를 참고한 후 난해하고 어려운 정맥 산행을 진행해 무탈하게 맥 잇기 산행을 다녀왔기에 단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정맥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전국적으로 불어닥친 한파와 폭설 소식에 멀리 떠나 올라야 할 낙동정맥 제15차 구간 산행이 걱정스러운 시간, 늘 기상청 싸이트에 들락거리며 산행지 날씨를 확인하니 다행히 낙동정맥 종주대의 산행지에는 영하의 기온에 바람이 강하게 불어 산행이 쉽지는 않겠지만 다행이 폭설 소식이 없어 새벽에 꼬부랑 도로를 타고 OK 그린연수원까지 버스로 오르는 것도 큰 문제가 없을 듯 하다.

하늘에 떠 있는 둥근 보름달과 많은 별들을 올려다 보며 도착한 황량한 초원 위 평원에 몰아치는 한겨울 찬바람이 종주대의 발걸음을 자꾸만 버스에 묶어 두는 시간이지만 그래도 걸어야 할 마루금이기에 완전 무장을 한 후 임도로 내려 산행을 시작하는 시간이 새벽 4시 13분이다.

10시간 이상 걸어야 도착 할 와항재이기에 급하지 않게 여유를 생각하며 어둠속에 강렬한 한겨울 삭풍을 가슴에 묻은 후 막바지 낙동정맥 마루금 위에 오른다. 

 

 

강렬하게 불어오던 한겨울 삭풍도 고헌산 서봉을 지나 12시를 넘기자 온화한 기온의 날씨로 변하면서 갈색으로 변해버린 억새 저 멀리 앞으로 내려 가야 할 와항재로 통하는 마루금 아래로 조용한 소호리 마을을 지나 그 우측 능선을 타고 오늘 낙동정맥 종주대가 걸어 온 등로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소호리 마을 지난 사진 정중앙의 단석산 아래 OK 그린연수원의 갈색 평원이 보이고 그 앞으로 700봉을 지나 소호고개로 잠시 산세를 낮췄던 등로가 전망대바위와 삼강봉 그리고 백운산을 밀어 올리고 이곳 고헌산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이 너무나 아름답게 펼쳐져 있고 그 위에 떠 있는 뭉게구름과 파란 하늘이 종주대의 발길을 붙잡고 잠시 더 여유를 가져보라 말하고 있다.

바로 이런 느낌을 가슴으로 느끼과 눈으로 조망을 볼 수 있기에 모든 고통을 극복하고 또 오늘 이곳에 서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난 구간 어렵게 도착해 잠시 여유를 가졌던 OK 그린연수원 비포장 임도에 도착을 하니 새벽 3시 40여분을 넘기고 차창 밖으로 전해오는 강렬한 한겨울 강풍이 종주대의 몸을 자꾸만 얼어 붙게 만들고 있다.

수의지 주위에 낙엽을 떨구고 서 있는 벗나무의 작은 나뭇가지 사이를 흐르는 새벽 한풍이 종주대의 귓전을 가르며 강렬히 요동치고 있다.

모두가 머뭇거리며 나서기를 주저하지만 그 누가 대신 할 수 없는 산행임을 잘 알기에 완전 무장 후 몸을 가누기도 힘든 임도에 내려 멀고도 힘든 장도를 출발하는 시간이다.

신라의 화랑들이 심신을 연마하던 이곳 수의지와 해발 600미터 정상이 이제는 호연지기를 키울 수 있는 청소년 수련원으로 개발돼 드넓게 펼쳐진 관광농원을 가로질러 능선으로 오르니 더욱 강렬한 겨울 찬바람이 얼굴을 얼리고 재빨리 진행 해 낙동정맥 마루금 초입인 계단 앞에 서서 인원 확인 후 나부끼는 띠지 하나를 등불 삼아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조금은 가파른 계단을 타고 오르는 종주대의 얼굴에 인정사정 없이 흔들리는 잡목 나뭇가지들이 휘갈리고 그 따가운 느낌을 느끼지도 못한 채 오르니 바위가 서 있는 무명봉에 오르고 등로는 우측으로 크게 꺽어 낙엽속으로 이어지지만 흐릿한 등로로 인해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농원과 산의 경계로 올라 정상 등로로 진행하니 금새 다시 등로는 넓은 비포장 임도로 변해 버린다. 

추위에 빨라지는 발걸음으로 오르는 그 비포장 임도는 얼어 얼음기둥이 세워져 있고 발걸음이 지날 때마다 그 얼음기둥이 무너지며 눈을 밟고 지날 때 나는 소리같은 뽀드득 뽀드득 소리를 내고 있다.

그렇게 잠시 더 오르니 선답자들의 산행 후기에서 자주 만났던 이동 통신탑이 서 있는 512봉 정상에 도착해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산행을 이어 간다.

 

 

등로 좌측은 경주시 내남면인데 옛날부터 경주부의 남쪽에 있다는 뜻으로 경주군 부남면으로 부르다가 일제가 제멋대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경주부의 남쪽안에 있다 하여 경주 내남면이라 한 마을인데 남산 서쪽비탈과 함께 형상강의 상류가 관통하고 그야말로 물좋고 산좋은 청정지역을 이루는 곳이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 하기 전까지만 해도 언양과 양산을 거쳐 부산에 이르는 교통의 중추지였는데 이로 인해 신라시대부터 도읍 경주의 젖줄이었고 각종 유적이 산재해있는 유서깊은 고장이기도 하다.

이런 이곳 역사를 생각하며 참으로 부드러운 소나무와 잡목 사이로 곧게 뻗어 있는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10여분 만에 다시 작은 돌탑이 서 있는 535봉 정상에 도착해 찬바람을 가르며 사진 한장 남긴 후 다시 빠르게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 본다.

 

 

잠시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며 이곳 주위의 마을 지명을 생각해 본다.

등로 좌측은 경주시 내남면 비지리 마을로서 마을 앞에 학산이란 산이 있는데 이 학산의 모습이 학이 날아가는 형상이라 해서 날비자와 다만지자를 따서 비지라고 불렸다는 마을이 있지만 어둠속이기에 확인 할 수 없어 안타까운 시간이다.

등로 우측으로는 한우 불고기로 유명한 경주시 산내면이 있는데 산과 하늘만 보인다는 오지중의 오지의 고장이 있다.

등로 바로 밑에는 경주시 산내면 내일2리 수의동이 있는데 신라때 화랑의 수련장이었던 수의지 아래 생긴 마을이라 하여 수의라고 부르고 있다고 전해지는 마을이다.

이 마을 역시 어둠속에 보이는 것이 없이 부드러운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억새가 바람결에 흔들리는 수의동 안부 삼거리를 지나 조금씩 종주대의 몸에도 열이 오르기 시작한다.

 

 

수의동 안부 삼거리를 지나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바위가 있는 무명봉에 도착하고 마루금은 다시 완만한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낙엽이 깔린 등로 밑에는 악마의 이빨처럼 드러난 어름기둥이 솟아 있어 여간 미끄럽지 않아 주의가 필요한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내려가니 묘지 두기가 보이는 장소에 도착하고 그 묘지 아래에는 멋진 소나무들이 서 있다.

그곳에서 넓어진 비포장 임도를 타고 조금 내려가니 밭이 보이고 그 밭 가장자리를 타고 전진하니 어둠속에 황량함이 밀려드는 메아리 농장의 폐건물들이 나타난다. 그 폐건물들을 통과하니 임도 좌측에서 한우 울음소리가 어둠의 정적을 깨고 비어있는 농장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다.

그 축사를 지나니 시멘트 임도를 만나 좌측으로 타고 오르며 계속 낙동정맥 산행을 이어가 본다.

 

 

시멘트 임도를 타고 오르다 임도 우측 앞을 올려다 보니 둥그런 보름달이 종주대의 앞길을 비춰주며 쓸쓸함이 묻어나는 시간을 만들어 준다.

이곳에서 잠시 등로 좌측에 있는 박달리를 생각해 보니 이 마을은 박달 뒷산의 생긴 모양이 흰 닭과 같다 하여 옛날에는 백 계동이라 했었는데 흰 닭 즉 밝은 닭이 박달로 굳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마을이란 설이다.

또한 시멘트 임도를 타고 우측으로 내려가면 경주시 산내면 내일리 참나무정 또는 진목이란 마을이 있는데 이곳은 마을 개척 당시 참나무 숲이 많이 있었다 하여 진목정 또는 참나무정이라 칭하였다는 설이 있는 마을이다.

하지만 오늘은 어둠이 모든 것을 숨겨 놨기에 그저 아름다운 상상만으로 걸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목장의 초지지대가 펼쳐진 가운데에 나 있는 시멘트 임도를 타고 오르니 임도가 비포장으로 변하며 우측으로 꺽여 이어져 오른다.

잠시 더 오르니 등로는 비포장 임도에서 능선으로 진입하고 조금 더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오르니 철쭉나무 군락지를 만난다.

약간의 바위지대도 지나 깊게 깔린 낙엽 등로를 따라 오르니 605봉에 도착하지만 별 특징은 없다.

그래도 무척 걱정되고 등로 찾기에 난해한 곳을 모두 무사히 통과하고 나니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605봉에서 좌측으로 꺽어 내려가며 등로를 이어간다고 되어 있는데 어둠속에 진행하다 보니 좌측으로 크게 꺽어 진행해야 되는지 잘 모를 정도로 평이하게 진행된다.

공터도 지나고 묘지들도 통과하며 진행하니 금새 콘테이너 박스 하나가 서 있고 그 옆에는 많은 장승들이 줄지어 서 있는 아랫상목 임도에 도착을 한다.

경주시 산내면 내일리 상목 마을 (윗상목골과 아랫상목골)은 임진왜란시 유규화선생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며 마을 뒷산이 누에같이 생겼다 하여 잠두산이라 하였고 누에는 뽕을 먹어야 잘 산다는 뜻에서 상목이라 하였다는 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마을이다.

장승 옆에는 경상북도 녹색마을 시범조성지 안내도가 서 있고 그 좌측 능선으로 띠지들이 나풀거리고 있지만 얼마 진행하지 못하고 다시 우측으로 내려 와 등로 우측으로 따라가는 시멘트와 만나기에 처음 시작점부터 우측 시멘트 임도를 타고 진행하기로 한다.

하지만 그 출입구에 출입금지 팻말이 붙어 있어 조금은 마음에 걸리지만 차가운 한겨울 야밤이기에 그냥 진행한다.

 

 

시멘트 임도를 타고 조금 더 진행하니 시멘트 임도는 비포장 임도로 바뀌고 허허벌판 같은 등로에 휘몰아 치는 한겨울 찬바람이 종주대의 몸을 날려버릴 기세로 강하게 불어 온다.

뼈속까지 차가워져 옴을 느끼며 조금은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니 등로 좌측 저 위에 크리스마스 트리에 점등이 되어 있고 점멸하며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산중에 무슨일일까 의심하며 올려다 보니 민가들이 둥근 보름달에 비춰 흐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그 민가에서 만들어 놓은 크리스마스 트리였던 것이다.

계속 임도를 타고 진행하니 등로는 좌측으로 이어지고 바로 앞에는 보온 덮개가 씌여져 있는 큰물통 2개가 서 있다.

이곳에서 비포장 임도는 등로 우측으로 흘러 이어지고 있다.

  

 

임도를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오르니 갑자기 가파른 오르막 등로로 이어지며 등로 우측으로는 녹슨 철조망이 따라 온다.

그 녹슨 철조망에는 바람결에 흩날리던 낙엽이 통과하지 못하고 쌓여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 온다.

그렇게 가파른 등로를 타고 낙엽속에 숨어 있는 얼음기둥을 조심하며 오르니 가끔 바위지대도 나타나는데 능선으로 오를수록 기세등등한 한겨울 찬바람이 귓전과 볼을 때리며 한겨울 산행에 익숙지 않은 종주대의 온몸을 얼어 붙게 만들고 있다.

  

 

그렇게 한동안 오르막 등로를 녹슨철조망과 함께 타고 오르니 바위지대에 도착하고 조금 더 전진하니 535.1봉 전망바위에 도착하지만 어둠속이기에 등로 좌측으로 반짝이는 박달저수지와 박달리쪽 불빛만이 아쉬움을 달래주고 있다.

다시 바위를 타고 넘으니 이제 짧은 암벽지대가 나타나고 안전로프가 달려있지만 조금은 위험 구간으로 생각되는 구간이다.

모두 조심하며 그 안전로프를 타고 내려가니 당분간은 바위지대가 연속으로 나타나는 첫번째 위험구간을 천천히 통과한다.

 

 

그 바위지대를 타고 조심하며 내려가니 넓은 공터가 나타나고 임도와 연결되어 있다.

임도를 타고 조금 내려가니 등로의 물엉덩이는 모두 얼어 얼음빙판을 이루고 있다.

그렇게 임도를 타고 짧게 진행하니 임도 사거리가 나타나고 살펴보니 경주 산내 내일과 내남 박달간 임도 안내도가 서 있고 마루금은 직진의 출입금지 안내판이 서 있는 임도로 이어져 있다.

내일리의 상목골이라는 이름은 뒷산이 누에를 닮았다며 잠두산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하는데 누에는 뽕나무가 제격이라는 의미에서 상목골이라고 부르게 됐다는 유래가 전해지는 마을이다.

 

 

윗상목 임도에서 몇장의 사진을 남긴 후 임도를 가로질러 넓은 비포장 임도를 따르니 임도 좌측에 벤취가 보이고 조금 더 오르니 등로 좌측에 다시 콘테이너 박스 하나가 보인다.

그 콘테이너 박스를 지나 전진하니 등로는 이제 임도를 우측 직진으로 보내고 좌측 낙엽 깔린 능선으로 꺽어 오르막으로 이어진다.

한동안 거친 숨소리를 내뿜으며 전진하니 둥근 보름달이 우측 산마루에 걸려 넘어가지 못하고 있고 등로 좌측으로는 하루해가 세상에 나오려는 듯 세상을 붉게 물들이며 점점 밝은 빛을 비추고 있다.

그렇게 가파른 오르막 된비알을 치고 오르니 680봉 헬기장의 공터가 나타나고 조금 더 전진하니 684.8봉의 두번째 헬기장을 지나 마루금이 이어져 있다.

 

 

두번째 헬기장 오르는 등로에는 많은 잡목과 가시나무들이 등로를 뒤덮어 여름날 산행에 어려움이 예상되는 곳이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색이 변해 버린 억새들이 그 잡목 아래 자라며 또 다른 풍경을 만들었을 것 같았다는 느낌이다.

그렇게 진행하며 다시 나즈막한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평이한 등로가 열려있지만 바람 한 점 막아 줄 방패막이가 없어 너무나 차가운 기운이 몸을 파고 든다.

황량함과 쓸쓸함이 묻어나는 등로에 어둠속 차가움이 더욱 가슴을 때리지만 그렇기에 더욱 완주에 대한 강렬한 소망이 드는 시간이기도 하다.

 

 

낙엽이 깊이 깔린 등로를 타고 찬바람이 강하게 불어 오는 능선을 따라 걸어가는 시간은 온 몸이 얼어 붙는듯 차가워져 온다.

두꺼운 장갑과 방풍의 그리고 겨울 자켓까지 입었지만 빠르게 변해가는 계절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몸이 굳어가며 더욱 추위가 엄습해 오는 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와 달리 등로 좌측의 동쪽 하늘에서 꿈틀거리는 붉은 기운이 온 세상을 뒤덮고 이 산객이 가장 좋아하는 빛의 향연이 시작되고 있어 강렬한 추위마저 잘 느끼지 못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경주시 남쪽에 고요히 잠들어 있는 토암산과 삼태봉 능선 위를 붉게 물들이는 하늘의 빛에 더 진행하지 못하고 추위에 손을 비비면서도 한동안 무심의 마음으로 바라만 보고 있다.

   

 

등로 좌측에 떠 오르는 붉은 기운을 온 몸으로 받으며 능선을 걷다보니 가끔 큰바위들이 등로 옆에 서 있는 모습도 들어 온다.

그렇게 진행하며 어느 순간 밑을 바라보니 두껍게 깔린 낙엽이 눈에 들어 오고 잠시 모두 떠난 텅빈 등로 위에 홀로 서서 지도를 살펴보니 이곳이 700봉쯤 되는 장소이다.

홀로 후미에 남아 바쁜 발걸음 속에서도 몸과 눈길은 자꾸만 등로 좌측의 붉은 하늘과 그 아래 조용히 잠에서 막 깨어나려는 세상을 응시하게 된다.

하루 중 그 무엇보다도 이 산객에게 가장 아름답게 다가오는 이 시간, 가슴속에 남아 있는 그 무엇을 꺼내듯이 붉게 불타오르는 세상이 이 산객의 발목을 잡고 놔 주질 않는다.

 

 

등로 좌측의 동쪽 하늘에선 더욱 더 검붉은 빛이 솟아 오르기 시작하는데 700봉에서 내려가는 등로는 왜 그리 길고도 먼 길인지.

마음이 급해 무거운 카메라를 메고 낙엽 깔린 폭신한 등로를 타고 달려간다.

혹시나 이 아름다운 일출 모습을 잡목에 가려 보지나 못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안타까움에 어려움과 고통도 잊은 채 소나무 군락지를 지나 나즈막한 안부를 통과한 후에도 계속 오르막 등로를 타고 달려간다.

 

 

드디어 붉고 둥근 해가 저 멀리 동해 바다를 박차고 온 세상을 밝혀주는 시간이다.

울산 앞바다라 생각되는 동해 바다에 얼비친 아침 햇살도 그리움을 남기고 또 그 위로 떠 오른 둥근 해는 더욱 강렬한 삶의 모습으로 종주대의 가슴에 남겨지는 순간이다.

이 산객뿐만이 아니라 이곳 700.1봉 오르막 등로 한켠에 서서 찬란히 떠 오르는 아침 일출을 바라보고 있는 모든 종주대의 마음도 같은 느낌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같은 태양이며 같은 해이지만 이토록 고생 한 후 맞이하는 깨끗한 붉은 빛은 또 고요히 잠들었던 세상을 힘차게 살아가도록 격려하고 용기를 주는 세상으로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10명의 종주대가 모두 모여 그 찬란하게 떠 오르는 태양을 바라 본 후 가슴속에 큰 희망 하나씩을 품고 다시 이어지는 700.1봉 오르막 등로를 타고 마루금 잇기 산행을 진행한다.

오르다 잠시 뒤돌아 보면 이제 막 태어난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는 등로 좌측의 내남면 박달리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고 그 좌측 저 멀리 박달 저수지도 보이기 시작한다.

그 저 멀리 천년고도인 경주가 잠에서 깨어나고 그 우측 아래로는 아침 햇살을 받아 강렬하게 포효하는 금오산 넘어 세상이 열리고 있다.

 

 

그렇게 뒤돌아 보다 한숨 한번 크게 쉬고 다시 오르막 등로를 타고 소나무 군락지를 오르니 언양 303, 1982 재설이란 삼각점이 박혀 있는 700.1봉에 도착을 한다.

그 옆에는 삼각점 설명판 옆에 해발고도 701미터란 고도 표시가 되어 있다.

무엇이 맞는 높이인지 헷깔리지만 일단 지도를 기준으로 남겨 본다.

이곳 정상은 잡목들로 둘러 쌓여 주위 조망은 전혀 없다.

홀로 남겨졌기에 종주대를 따라 조금은 빠르게 뒤를 따라 진행한다.

 

 

700.1봉에서 평이한 등로를 타고 진행하다 다시 완만한 내리막 등로로 바뀌는 마루금을 타고 내려가 본다.

몇장의 사진을 찍으며 내려가다 앞을 보니 좌측으로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전망대바위에서 삼강봉 지나 백운산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이 부드러우면서도 제법 땀을 요구하듯 당당히 서 있는 모습이 이 작은 산객을 압도하고 있다.

저 능선을 오르기 위해선 바로 앞에 보이지 않는 소호고개를 지나 오르게 될 것이다. 

 

 

내리막 등로를 타고 잠시 내려가니 등로 좌측 바람이 잦아 든 작은 공터에 종주대들이 모여 있고 다가가 보니 이곳에서 아침상을 펴자는 의견이다.

약간의 바람이 불어 들긴 하지만 그런대로 참을만 하기에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근사한 아침상을 차리니 이 또한 아름다운 추억의 한 장면으로 저장되고 있다.

조금은 따뜻한 국물로 배를 데우니 추위가 가시기 시작하고 생각보다 참을만 하다는 생각이다.

한시간 여 주린 배를 채우고 이슬이 한잔으로 추위를 달랜 후 활엽수 지대를 지나 소나무 군락지를 통과하니 임도가 지나는 소호고개에 도착을 한다.

임도 우측 10여미터 아래에는 임도 삼거리가 보이고 그곳에 두서내와와 상북소호와 두서차리 및 상북태종 마을로 내려가는 이정표가 서 있다.

이곳 소호고개는 또한 태종고개로도 불려지는데 그 유래가 궁금해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되어 있다.

태종은 당리에서 북쪽으로 약3km쯤 떨어진 소호리의 맨 북쪽 경북 경주시 산내면과 내남면의 경계에있는 즉 동쪽의 산을 경계로 두서면 내와리 경주시 내남면 박달리와 경계를 이루고 북쪽의 하천을 경계로 경북 경주시 산내면 대현리와 태종마을과 경계를 둔다.

태종마을은 중앙의 하천을 경계로 북쪽의 경북 경주시 산내와 남쪽의 울산 울주 상북과 경계를 이루며 갈라지는데 원래 1914년 4월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북쪽을 경주 산내면 대현리와 태종도 소호리에 속했다.

이 물줄기는 산내면 소재 부근을지나 다시서류하여 청도의 대천댐을거쳐 말양으로 들어가 낙동강으로 흐르는데 태종이란 매우높은 산지의 마을이란 뜻이다.

태종은 원래 1910년 전후에는 소호와 분리되었다가 1914년 다시 소호리에 합해져 지금까지 이어져 온다.

 

 

그렇게 마을 이름을 딴 소호고개 즉 태종고개를 건너 반대편 능선으로 오르니 제법 가파른 등로가 이어지고 잠시 더 오르니 등로 중간에 돌을 둘러친 벽이 나타나고 곧이어 저 멀리 송전탑이 올려다 보인다.

잠시 더 오르다 뒤돌아 보니 방금 전 내려온 700.1봉과 아침 식사를 즐긴 소나무 군락지도 건너다 보인다.

정상부로 오르니 독립된 큰 바위 하나가 등로 좌측에 서 있는데 잡목으로 인해 사진 한장 남기기 어렵다.

그 바위가 쩍 바위인지 아니면 30번 송전탑과 이 독립된 바위를 지나 능선을 넘으면 나타나는 바위군 두군데 중 한곳이 쩍바위인지 알 수는 없지만 몇개의 바위중 하나를 올려 본다.

왜 쩍바위일까 찾아 보니 그 모습이 쩍 갈려진 모습이라 쩍바위란 이름이 붙었다니 웃음만 흘러 나온다.

 

 

30번 송전탑과 쩍바위를 지나 전진하니 평이한 등로가 열려있고 등로 주위엔 하얀 꽃을 한들거리며 피운 갈대가 무성히 피어 나 있다.

그 아름다운 자태를 구경하며 천천히 진행하니 다시 완만한 오르막 등로로 이어지고 등로 좌측으로는 계속해서 경주의 박달리와 저 멀리 경주 시내쪽 산그리메가 펼쳐져 있다.

계속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정상부가 가까워질수록 잡목과 잡풀들이 무성하게 자란 후 말라 죽어 있고 잠시 더 오르다 뒤돌아 보니 저 멀리 오늘 새벽 어둠속에 산행을 진행한 OK그린연수원과 그 뒤 단석산에서 부터 방금 전 내려온 700.1봉까지 이어져 온 낙동정맥 마루금이 아주 가깝게 다가 와 있다.

다시 잡목과 잡풀들이 죽어 갈색으로 변해 부는 바람에 한들거리는 등로를 타고 오르니 다시 활엽수 지대 밑에 흔들리는 억새를 만나 편안하게 진행을 해 본다.

 

 

이제 능선으로 오르니 완전히 날이 밝아오며 주위 조망이 너무나 황홀하다.

지나 온 정맥 마루금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고 그 마루금을 타고 존재하는 봉우리 하나와 송전탑까지도 깨끗하게 눈에 들어 온다.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과 조망을 즐기며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나즈막한 산그리메가 끝없이 펼쳐져 있고 좌측의 마루금 아래 우측으로 경주남석광산이 보이고 그 멀리 직진의 방향으로 천년고도인 경주시의 빌딩들이 눈에 들어 온다.

그 우측 아래의 남쪽으로는 경주의 금오산과 그 아래 우뚝 솟아 있는 토암산이 방향타 구실을 하고 있다.

 

 

전망대 바위에 오르니 드디어 일망무제, 탁 트인 조망이 환상을 노래하고 있다.

지나 온 방향으로 부드러운 능선을 타고 30번 송전탑이 내려다 보이고 그 아래 소호고개로 잠시 내려 앉았던 등로가 700.1봉으로 치솟아 올랐다가 다시 나즈막한 마루금으로 이어져 저 멀리 단석산으로 연결된 풍경이 그림처럼 보인다.

이렇게 서서 그 이름 하나 둘 종주대와 불러 보는 시간이 산행을 하면서 가장 흥미롭고 그 산행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은 아닐까 생각해 보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다 조금 더 올라 등로 우측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문복산과 옹강산이 멋진 고봉의 산줄기를 거느리고 조만간 한번 만나자며 유혹하고 있다.

문복산은 경주시 산내면과 청도군 운문면의 경계에 자리한 해발 1014미터의 산으로서 일명 영남알프스라고 불리는 경상남도와 경상북도의 경계 부근에는 해발 천 미터가 넘는 산이 무려 아홉이나 되는데 그 중의 막내가 바로 문복산이며 그곳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 역시 황홀하다.

고헌산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백운산을 이어 단석산으로 연결되는 낙동정맥의 주능선이 눈 앞에 전개되고 그 너머의 울산이며 북녘의 경주 영천 포항의 여러 산들이 아스라이 보인며 남녘으로는 이 산의 형님이 되는 운문산 가지산이며 재약산 간월산 신불산 등이 첩첩 청산의 파노라마를 연출한다.

그 문복산 우측으로 솟아 있는 옹강산은 만복산과 연계해 오르면 좋을 것 같이 보이는 산으로서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한번 올라 이곳 낙동정맥 마루금을 바라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보는 산이다.

 

 

전망바위에서 주위 풍경을 둘러보고 알고 있는 산 이름을 불러주니 산행의 묘미를 만끽하는 시간이다.

종주대 중 일부는 종주 산행이 아닌 기획테마 산행이라면서 느끼는 감정 그대로를 솟아내고 있다.

아마도 근래 들어 가장 조망과 풍경이 좋은 날이기에 새벽에 그토록 추위에 떨었으면서도 즐거울 수 있는가 보다.

잠시 오르며 좌측 앞을 올려다 보니 삼강봉과 백운산 동쪽 자락에 낙엽진 나뭇가지가 햇살을 받아 마치 하얀 상고대가 피어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이제부터 능선을 타고 오르며 좌우측으로 시원하게 펼쳐진 조망을 즐기며 여유를 가져 보는 시간이다.

잠시 바위에 올라 지나온 등로와 등로 우측으로 펼쳐진 내남면 박달리와 저수지 그리고 저 멀리 천년고도인 경주시를 둘러 본다.

사진 좌측 위의 단석산과 그린연수원 그리고 내려 와 700봉과 소호고개 및 송전탑이 제법 걸어 왔음을 알리고 있다.

등로 우측으로는 좁은 골짜기를 타고 박달저수지가 파란 물을 가두고 조용히 내려다 보이고 우측으로 돌아가며 경주시와 금오산 그리고 경주에서 가장 높은 토암산이 우뚝 솟아 있는 풍경까지 일망무제로 들어 온다.

  

 

등로 동쪽인 좌측으로는 호미지맥이 또 다른 산줄기를 이루며 끝없는 산그리메를 만들어 내고 있고 저 멀리 동해바다쪽으로 멀어지면 경주의 진산인 금오산과 토암산이 제법 높은 산줄기를 이루며 동해의 방파제 역활을 하고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 온다.

그 사이에 올록볼록 자연스런 경관을 선보이는 마을과 산하에 그저 경외로움만 가득 내려 앉는 시간이기도 하다.

말이 필요 없이 그저 가슴으로 보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 할 것 같은 환상의 산그리메이다.

 

 

계속되는 암봉과 주위 풍경을 조망하며 진행하다 보니 지루할 틈도 없이 그저 불어오는 찬바람을 맞으며 탄성만 지르는 시간이다.

잠시 더 오르니 전망바위가 나타나는데 고래바위는 아닐까 생각되는 곳이다.

그곳에서 가야 할 남쪽을 바라보니 평화로운 소호리마을과 우측으로 옹강산과 문복산이 자리하고 저 멀리 남쪽으로는 하얀 억새가 춤을 추던 시절 올랐던 영남알프스의 최고봉인 가지산 능선이 웅장하게 서 있다.

 

 

북쪽으로는 좌측에 소호리 마을을 두고 우측으로 낙동정맥 마루금이 시원하게 뻗어 단석산으로 이어지고 좌측으로 돌아가며 사룡산과 구룡산 그리고 발백산 능선이 이어져 있다.

좌측 저 멀리에는 대두의 팔공산과 가산이 가물거리는 듯 보이는데 정확하지는 못하다.

발 아래 보이는 소호리는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의 마을로서 본래 경북 경주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풀이 많고 수원이 좋아서 학자들이 소호리라 하였는데 고종 광무 l0년(1906)에 울산군 두서면에 편입되고  l9l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종동을 병합하여 소호리라 하였는데 l973년 7월 l일 대통령령제 6542호에 의하여 상북면에 편입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소호리 마을 중 보이는 마을 몇군데를 소개하면 먼저 당리와 당수말인데 마을 한복판에 당수 나무가 많다하여  당수말 또는 당리로 부르며 소호에서도 마을가장 중심부에 자리잡은 큰마을인데 옛날에 이곳에 느티나무(당수나무) 숲이 우거져 마을의 당재를 모시던 곳이고 지금도 그 숲자리에 소호초등학교 운동장 가운데 느티나무(당수나무) 노거수가 있어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날 저녁에 당제를 지내고있다.

또한 대곡과 큰골은 골짜기가 크다 하여 큰골이라 부르는데 당리의 남쪽 약 1km쯤 떨어진 곳으로 고현산의 골짜기 도장골에 위치하여 자연마을을 형성하고 있고 대리와 큰말은 옛날에 이마을이 소호리에서 제일 큰 마을이라 하여 부르게된 이름인데 당리의 서남쪽 약400m쯤 떨어진 곳 즉 큰골의 서쪽에 있는 마을인데 구전에 의하면 이전에는 제일 큰 마을이였으나 큰 불로 인해 집들이 모두 전소 되였다 하여 지금은 소호리에서 제일작은 자연마을이 곳이다.

이렇게 살아보지 못한 마루금 주위의 마을을 공부하는 시간 역시 산행이 주는 재미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다시 남성미 물씬 풍기는 등로를 타고 진행하다 고래등바위라 생각되는 곳에 도착해 다시 주위 조망을 즐기니 이보다 더 행복 할 순 없을 듯 하다.

지나 온 낙동 마루금은 물론이고 그 우측으로 돌아 동해쪽 산그리메 그리고 그 가운데 자리한 경주시가 참으로 그림처럼 다가온다.

그러다 우측 앞을 보니 앞으로 올라야 할 삼강봉과 백운산이 톱날처럼 뾰족하게 솟아 있고 소호령으로 잠시 가라 앉더니 마지막 영남알프스 한자락을 차지하고 있는 고헌산을 향해 숨가쁘게 치고 오르는 풍경이 빤히 올려다 보인다.

벌써 입안에선 단내가 날 정도로 아드해 보이지만 지나온 등로보다는 훨씬 짧기에 한걸음 두걸음 걷다 보면 또 저 정상에 서 있을 것이다.

 

 

다시 천천히 사진을 담으며 진행하니 이제 눈 앞에 거대한 바위군이 나타나고 그곳에 오르니 주위 조망 역시 환상이다

잠시 더 풍경을 가슴에 담은 후 안전로프를 타고 조심해 내려가니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평이한 등로를 따르다가 금새 호미지맥 분기봉인 삼강봉에 도착을 한다.

호미지맥은 아직 미답의 산줄기로서 9정맥이 끝나면 가장 먼저 오르고 싶은 산줄기 중 한곳이기에 자료를 찾아 본다.

백두대간 매봉산 천의봉 직전에서 출발해 남진하는 낙동정맥이 경북 동쪽 산줄기를 타고 내려가다 신라의 김유신 장군과 관련이 있는 단석산을 지나 백운산과 고헌산 그리고 가지산으로 이어지는 영남알프스를 통과한 후 부산 다대포의 몰운대에서 그 길고도 먼 마루금이 바닷속에 사라진다.

단석산 지나 백운산 직전봉인 845봉에서 좌측인 동쪽으로 

가지를 쳐 천마산(620.5봉)과 경부고속도로를 지나 치술령(766.9미터)에서 부터는 북동진하며 포항의 호미곶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를 호미지맥이라 부른다.

이 산줄기는 도상거리 약 98km가 되는 산줄기로 형산강의 남쪽 울타리 역할을 하여 일부에선 형남기맥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통상은 땅끝기맥과 같이 지역의 특수성을 살려 호미지맥이라 부른다.

이 산줄기 북쪽으로 흐르는 물은 형산강으로 들고 남쪽으로 흐르는물은 태화강으로 흘러 들며 일부는 장기천과 대화천으로 들어 동해바다로 흘러간다.

그저 바라보는 산줄기만으로도 가슴이 울렁거리는 아름다운 곳이다.

호미지맥에 올라 바라보는 이곳 낙동정맥은 무슨 모습이고 치술령에서의 발걸음은 또 어떨지 궁금해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호미지맥 분기봉에서 좌측으로 5미터쯤 올라가면 그곳에 동쪽으로 절벽을 이루는 삼강봉이란 정상석이 서 있다.

지도 상에는 없는 봉우리인데 이렇듯 정상석까지 세워둔 것을 보면 그만한 의미가 있을 듯 해 자료를 찾아보니 역시 멋진 의미를 가진 삼강봉이였다.

형산강과 태화강 그리고 밀양강을 가르는 봉우리로서의 의미가 있다 하니 그 얼마나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봉우리인가 말이다.

다만 이 삼강봉이란 이름은 제대로 된 고증을 거쳐 이 이름을 얻었는지가 의문인 봉우리이다.

이곳에서 플랭카드 꺼내 오랫만에 단체 사진 한장 남기고 떠나 본다.

 

 

그곳 삼강봉 정상에서 잠시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오렵게 올라 온 바위 전망대가 뾰족하게 솟아있고 그 아래로 급격하게 떨어진 마루금이 송전탑과 소호고개를 거치며 내려섰다 700봉 지나 저 멀리 올망졸망 이어지다 단석산에 도착해 그 높이를 하늘 높이 밀어 올리고 있다.

그 좌측으로 흐르며 그 전에 다녀 온 사룡산 줄기가 또한 시원하게 이어지고 있다.

그 우측으로 펼쳐진 박달리 마을이 또한 고요하고 평화롭게 산객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있다.

  

 

이제 경주시내가 한눈에 들어 온다.

좌측 저 멀리 끝자락에 단석산이 보이고 그 아래 갈색의 OK그린연수원도 보이고 우측 아래로는 박달저수지와 박달리가 평화롭다.

그 우측으로 다시 경주시내가 자리하고 우측 산줄기를 만들어 금오산과 토함산을 빗어 놓았다.

가는 곳마다 발길 닿는곳마다 역사 유적지로 뒤덮혀 있는 경주시, 저곳 역시 9정맥 완주 후 여유를 가지고 발길을 옮길 수 있는 시간이 있기를 간절히 바래보는 마음이다.

 

 

이제 삼강봉을 내려 와 정상 등로를 타고 진행을 하니 잠시 더 전진한 곳에 855.9봉의 암봉이 가로막는다.

잠시 안전에 유의하며 그 바위에 오르니 이곳 역시 일망무제, 거침없는 조망이 일품이다.

종주대들과 많은 사진을 남기고 우측 앞을 바라보니 소호리 넘어 고헌산 주능선이 높게 드러나 있고 와항재 지나 와항마을이 약간 드러나 있으며 그 넘어 10월에 넘었던 영남알프스의 주봉인 가지산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그 우측 능선을 타고 만복산과 옹간산이 또한 그 존재감을 알리고 있다.

 

 

다시 855.9봉 지나 나타난 암릉을 안전 로프를 타고 오르니 그곳에 고래등바위가 있고 그곳에서 바라보는 풍경 역시 황홀하다.

지나 온 삼강봉과 전망대바위 그리고 단석산으로 이어진 마루금이 시원하고 그 우측으로 박달리 마을도 평화롭게 다가 온다.

한동안 머물다 앞서가는 종주대의 뒤를 따라 다시 천천히 발길을 돌리는 마음이 아쉽기만 하다.

 

 

암릉 전망대에서 많은 사진을 남기고 다시 여유로운 발길을 돌리니 저 멀리 종주대들이 도착해 환호성을 지르며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 온다.

다시 등로는 좁은 암릉에서 벗어나 넓은 비포장 임도로 바뀌고 지도를 살펴보니 방화선이 시작되는 지점인 것이다.

완만한 오르막 비포장 임도를 타고 오르니 정상석 3개가 나란히 박혀 있는 백운산 정상이다.

경주시 두서면 내와리와 상북면 소호리 사이에는 백운산이 높이 솟아 있는데 신라시대 이래 열박산이라고도 하여 무척 신령스럽게 여겨왔던 산이다.

이 백운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가 감투봉인데 여기에 신라 때 김유신과 연관된 한 설화가 전해온다.
삼국통일의 영웅 김유신은 원래 김해 금관가야의 왕손이었는데 그의 증조부 구형왕이 신라의 법흥왕에게 귀부함으로써 금관가야는 이제 신라에 병합되었고 가야왕족은 신라의 진골에 편입되였다.

이와 같이 김유신은 가야계 세력을 대표하는 신라의 귀족자제로서 성장하는 중 나이 15세에 화랑이 되었는데 그때 사람들이 흡연히 그에게 복종하여 용화향도라 불렀다.
신라 진평왕 28년(서기 611년)에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는데 북으로는 고구려와 말갈이 그리고 서쪽에서는 백제가 국토를 침략함을 보고 강개하여 외적을 평정할 뜻을 깊이 품었고 그래서 그는 홀로 중악의 석굴에 들어가서 제계하고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기를 적국이 무도하여 이리나 범과 같이 우리 강역을 소란케 함에 거의 평안한 해가 없습니다.

나는 한낱 미약한 신하로서 재주와 힘을 헤아리지 않고 화란을 소청하는데 뜻을 두고 있사오니 하늘은 굽어살펴 나에게 능력을 빌려주십시오 하였다.
그러기를 나흘만에 문득 한 노인이 허름한 옷을 입고 와서 말하기를 이곳에는 독충과 맹수가 많아 무서운 곳인데 귀 소년이 여기에 와서 혼자 거처하니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이에 유신이 대답하기를 어른께서는 어디서 오셨습니까?

존명을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니 노인이 나는 일정한 거처가 없이 인연을 따라 행동하는데 이름은 난승이라 한다고 하였다.
유신은 이 말을 듣자 그 노인이 비상한 사람임을 알고 재배하고 나아가 나는 신라 사람입니다. 나라의 원수를 보니 마음이 아프고 근심이 되어 여기 와서 고명한 분을 만나게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어른께서는 저의 정성을 어여삐 여기시어 방술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하였다.
노인이 다만 잠잠하여 말이 없자 그는 눈물을 흘리며 간청하기를 예 닐 곱 번이나 거듭하니 그제야 노인은 그대는 아직 어린데 삼국을 병합할 마음을 가졌으니 장한 일이 아닌가? 하고 이에 간직하였던 비법을 전하면서 조심해서 함부로 전하지 말라. 만일 불의한 일에 쓴다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이다 하였다.

말이 끝난 다음 작별하고 2리쯤 가자 유신이 쫓아 가 찾아 보았으나 노인은 보이지 않고 오직 산 위에 5색과 같이 찬란한 빛이 나타나 있을 뿐이었다.
이듬해인 진평왕 건복 29년(612년)에 이웃 적병이 박도 하니 유신은 더욱 비장한 마음을 격동시키며 혼자서 보금을 들고 열박산(백운산, 901봉) 깊은 골짜기 속으로 들어가 향을 피우면서 마치 앞의 중악에서와 같이 기도하며 빌기를 천관신께서는 보검에 신령을 내리소서 하였더니 사흘째 되는 밤에 허숙과 각숙 두 별의 빛이 환하게 내려 뻗히자 유신의 칼이 움직이는 듯 하였다.
이상이 이곳 고장의 열박산 즉 백운산과 김유신이 얽힌 전설의 대강이다.

물론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영웅이고 그의 충성과 통일의 의지는 바로 이곳 열박산 즉 백운산에서 다듬어진 것이다.

 

 

이제 이곳 백운산에 도착을 하니 경주는 점점 북쪽으로 멀어지고 이제 울주와 울산직할시쪽 산그리메와 도시들이 눈에 들어 오기 시작한다.

그에 비례해 강렬한 햇살이 비추며 사진의 한계를 절감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울산 서쪽으로 봉긋 솟아 있는 산인 치술령과 국수봉 그리고 옥녀봉이 울산시를 숨기고 있다.

그 산줄기 넘어 동해 바다에 붉은 빛이 발산하는 모습에서 낙동정맥도 그 마지막을 향해 달려 가고 있음을 실감하는 시간이다.

  

 

작은 자갈과 큰 바위들이 뒤섞여 있는 넓은 방화선을 타고 급경사 내리막을 타고 내려가 본다.

한동안 내려가니 등로 우측에 넓은 공터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잠시 쉬며 남아 있는 간식과 빵 과일 등으로 허기를 달래며 잠시 쉬어 간다.

하지만 쉬는 시간에 잠시 머금던 땀방울이 마르며 한기가 밀려 와 오래 머물지 못하고 배낭 메고 다시 방화선으로 뒤돌아 나온다.

잠시 더 진행하니 소호령 안부를 지나 방화선 중간 중간에 물웅덩이가 나타나는데 그 물들이 모두 얼어 두꺼운 얼음이 얼어있다.

잠시 장난을 치며 얼어 있는 웅덩이로 올라가니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모두 깨져 버린다.

지나 다시 가파른 오르막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소호리 마을이 내려다 보이고 그 뒤 저 멀리 문복산과 옹강산이 올려다 보인다.

 

 

넓은 방화선을 타고 소호령 지나 다시 나타나는 가파른 오르막 된비알을 타고 오르니 갑자기 시야가 넓어지며 앞으로 고헌산 능선이 시원하게 열리고 그곳으로 통하는 마루금도 가깝게 열려 있다.

지도를 살펴보니 이곳이 692.7봉이다.

하지만 고도표에 나와 있는 지명과 산행지도에 나와 있는 지명이 달라 잠시 헷깔려 한다.

 

 

계속 방화선을 타고 진행하니 이제 큰 굴곡없이 평이한 방화선이 이어지고 있다.

어릴적 학교 다닐 때 걸었던 비포장 신작로를 걷던 기억이 되살아 나며 추억 한자리를 더듬어 본다.

그렇게 한동안 진행하니 시멘트 임도를 만나 우측 오르막으로 전진한다.

마침 그 때 아주머니가 운전하는 포터 트럭 한대가 내려오며 웃음으로 인사를 한다.

이 산객도 목례와 웃음으로 인사를 건네니 알지 못하는 아주머니 이지만 그저 친했던 친구처럼 다가온다.

 

 

계속되는 넓은 방화선을 타고 전진하니 눈 앞에 파란 그물망이 쳐진 밭이 나타나고 그 중간에 건물 한채가 눈에 들어 오는데 바로 대성사란 절인 듯 하다.

그 넘어 저 멀리에는 이제부터 땀방울 흘리며 올라야 할 영남알프스의 막내인 고헌산이 부드러운 능선을 자랑하며 서 있다.

종주대들이 우측 방화선을 타고 느긋하게 진행하는 모습도 눈에 들어 온다.

이제부터 한발 두발 마지막 고헌산으로 향한다.

하지만 지명이 다시 발목을 잡는다. 고도표에는 이미 소호룡을 지났는데 산행지도에는 이곳이 소호령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녹색 그물망이 쳐진 밭을 지나 오르니 등로 우측에 소호리 3.0 Km, 고헌산 2.0 Km 및 와항재까지 5.0 Km 남았다는 이정표 하나가 서 있다.

사진 한장 남기고 그곳을 지나 오르니 등로 좌측에 작은 연못이 있고 선답자들이 뜨거운 여름날 오르며 흘렸던 땀방울을 씻었던 수돗가가 있는 대성사에 도착해 잠시 들려 보지만 주인은 출타 중인지 인기적이 없다.

사진 몇장 남기고 나와 이제부터 본격적인 고헌산 산행을 시작해 본다.

 

 

대성사를 지나 오르니 목책으로 방화선을 막아 놓고 그 앞에는 고헌산 방화선 복원공사란 안내판이 서 있다.

우측으로 돌아 다시 방화선으로 들어 조금씩 가파라지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땀방울을 흘려 본다.

아직도 남아 있는 찬바람이 얼굴을 강타하지만 배낭으로 보온된 등줄기에서는 조금씩 땀방울이 배어 나오고 있다.

잠시 가쁜 숨 헐떡이며 뒤돌아 보니 가파른 넓은 방화선을 타고 힘들게 올라 오는 후미조의 사투도 눈에 들어 와 마음이 짠하다.

 

 

다시 올라가야 할 고헌산 오르막 등로엔 앞서 진행하는 종주대의 힘겨워하는 모습이 들어 온다.

선두나 후미를 가리지 않고 힘든 것은 역시 마찬가지인듯 하다.

하지만 아직 방화선 공사가 끝나지 않은 듯 방화선 중간에는 짚이 깔려 있고 그 위에 그물 덮개를 덮어 비나 눈으로 인한 토사 유실을 방비하고 있는 모습이 들어 온다.

오르면서 보이는 좌측과 뒤돌아 본 조망 역시 환상이다.

 

 

방화선을 타고 오르다 등로 좌측을 내려다 보니 남동쪽으로 울주군 언양읍의 차리 마을이 내려다 보이고 저 멀리 울산시도 가물거린다.

나즈막한 산줄기를 타고 평야지대를 지나 동해바다엔 이제 조금씩 박무가 드리워져 바다인지 육지인지 분간하기도 힘이 들 정도이다.

좌측 발 아래 내려다 보이는 차리마을은 경주의 남면이었을 지금의 상, 중, 하 차리를 합하여 차동이라 하였고 이 차동은 남중리(지금의 중리) 다음가는 동이라고 차동 마을이라 칭해졌는데 그 후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지금의 다개 갈밭마을은 언양에 이속 되었다.
지세로는 동으로 구량리, 남으로 언양 다개와 연접하고, 또 북으로는 선필, 서편으로는 고헌산을 중심하여 상북 소호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한편 중차리를 덕산동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중차리 뒷산이 우덕산인데서 연유하였다고 본다.
성씨로는 경주 이씨가 제일 먼저 차리에 정착하였다고 전해지며 경주 김씨 또한 오래 전부터 입향하여 경주 이씨와 더불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특히 상차리에는 경주 김씨 일족이 32호나 대를 이어 살고 있는데 이들은 확충하고 있다.

하단부 계곡에서는 한때 유명한 자수정을 채굴한 바 있었으나 지금은 농업용 저수지 축조 공사로 폐광되었다.

울산시 울주군 두서면과 언양읍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들판이 아름다운 모두가 12촌 이내의 가까운 친척들이다.
직업 분포는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나 1980년대 이래 축산업(양계와 양돈)도 성행하고 있다.

한편 해발 1033미터의 고헌산에는 예로부터 머루와 다래 뿐 아니라 희귀한 산채와 약초들이 자생하고 있어 이들의 채취가 주민소득 증대에 크게 기여해 온 마을이다.

 

 

그렇게 힘들게 오르고는 있지만 주위 조망이 워낙 좋아 생각보다 힘들지 않게 올라가 본다.

오르다 보니 방화선 좌측에 작은 돌탑 하나가 보이고 지도를 살펴보니 약 920미터의 해발고도를 가리키는 장소이다.

그곳에서 잠시 쉬며 뒤돌아 보니 이제 오늘 산행 들머리인 OK그린연수원 뒤로 단석산에서 이곳으로 이어져 온 낙동정맥 마루금이 아주 시원하게 그리고 깨끗하게 조망되고 있다.

 

 

돌탑봉에서 단석산을 줌으로 당겨보니 그 중간에 서 있는 방주교회 건물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그 아래로 펼쳐진 드넓은 정원도 보인다.

다시 천천히 발길 돌려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돌들이 보이는 지점에 올라 올라야 할 앞을 바라보니 이제 급경사는 거의 다 오른 듯 평이한 등로가 열려 있고 그 방화선을 타고 오르는 종주대의 뒷모습도 들어 온다.

 

 

등로 좌측 동쪽을 바라보니 파란 하늘에 떠 있는 뭉게 구름 아래 끝없는 산그리메가 펼쳐져 있고 경주의 토함산이 보인다.

그 넘어 약간의 동해바다도 넘실거리는 모습에서 오늘 산행의 백미를 느끼는 순간이다.

참으로 많이도 봤고 느꼈던 풍경이고 조망인데 아직도 이처럼 설레이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자연의 무한성을 느끼기도 한다.

 

 

주위 조망을 즐긴 후 마지막 짧은 된비알 치고 오르니 드디어 고헌산 동봉 정상 직전 소호령 1.7 Km 및 고헌산 정상 300미터 이정표를 만난다.

나무계단이 짧게 설치되어 있고 바로 앞 우측에는 전망대 구실을 하고 있는 나무데크도 준비되어 있다.

이정표를 담으며 살펴보니 이정표 뒤 저 멀리 소호리가 빤히 내려다 보이고 그 우측으로 저 멀리 단석산에서 삼강봉 지나 백운산 줄기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다시 한번 그 풍경을 넣어 담아보니 환상이다.

 

 

꼭 영남알프스의 신불평원을 걷는 그런 기분과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고헌산 정상부의 풍경이다.

등로 좌우로 억새는 아니지만 키작은 관목들과 뒤섞여 있는 억새들이 인공적이지 않고 자연적인 모습으로 다가오기에 더욱 정감있게 보이는 시간이기도 하다.

앞서 진행하는 종주대의 뒷모습이 이제사 제대로 보이면서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제 저 동봉에 오르면 산불감시초소 옆에는 또 어떤 멋진 조망을 숨겨 놓고 이 산객을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드디어 고헌산 동봉에 도착해 동쪽과 남동쪽의 풍경을 감상해 본다.

뾰족하게 올라온 문수산 뒤로 울산시가 숨어 있고 바로 발 아래로는 산줄기 하나가 언양을 향해 줄달음을 치고 있으며 그 아래 사람들이 아웅다웅 살아가는 마을과 민가들이 모여 있다.

그 민가 저 멀리 뒤에는 2개월 전 올랐던 통도골프장과 정족산이 올려다 보이고 올 마지막 낙동정맥 산행으로 올라야 할 천성산 자락도 보이면서 천성산과 영축산 줄기 사이로 희미하게 부산의 진산인 금정산도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다.

이렇게 낙동정맥 전 구간의 20 % 이상을 오늘 이곳에서 볼 수 있음에 그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서 있다.  

 

 

많은 시간 멋진 조망에 취해 한동안 머물다 고헌산 동봉을 떠나려니 다시 서쪽으로 지난 시간 올랐던 영암알프스의 최고봉인 가지산에서 석남터널을 지나 간월산과 신불산 그리고 영축산 줄기가 거대한 산군을 이루며 옛 추억을 되살려 주고 있다.

참으로 많이 올랐던 곳이지만 요즈음 이렇게 맥 잇기 산행에 빠지다 보니 자주 만날 수 없어 그리움만 쌓였던 곳, 오늘 이렇게 가슴에 그 모습을 담아 가니 한동안 영알에 대한 아쉬움은 덜 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평이한 등로처럼 보이는 고헌산 정상부의 능선을 타고 높은 돌탑이 서 있는 고헌산 정상을 향해 출발한다.

하지만 주위 조망과 보이는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고 황홀하기에 빤히 보이는 정상까지의 산행 시간이 자꾸만 늦어진다.

따스한 겨울 햇살이 이제 차가운 겨울 바람을 몰아 내고 봄 나들이 나온 산객을 맞이하듯 세상도 배꿔 놓았다.

관목으로 이뤄진 정상 능선 넘어 저 멀리 가지산 줄기가 여전히 웅장하면서도 위압적으로 다가오지만 역시 다녀 온 곳이기에 앞으로 올라야 할 심적부담보다는 그저 즐거움이 훨씬 큰 시간이 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드디어 고헌상정상에 도착해 큰 돌탑 하나와 별도로 세워진 4개의 정상석 그리고 주위에 서서 황홀한 조망과 풍경을 바라보는 종주대를 담아 본다.

고헌산에 관한 자료는 많았지만 그 중 가장 가슴에 남아 있는 글로서 소개를 해 보고자 한다.

고헌산의 북쪽에 있는 경주시 산내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상북쪽에 있는 고헌산을 속칭 고함산이라고도 한다.

또한 산내면 대현리 중마을에는 문복산이라 하는 높다란 산이 있는데 이 산에는 디린바우라는 이름난 큰 바위가 마치 한 산봉우리 처럼 높이 솟아 있어 이 바위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전해온다.
높고 큰 층암으로 이룩된 이 바위는 위에서 아래로 드리워져 있다 하여 디린바우라 불렸는데
이 디린바우는 드려지듯 험한 곳이므로 좀처럼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였으므로 이 곳에는 돌버섯이 돌 틈에 붙어 자라는 석이버섯이 많이 있어 마을사람들은 이것을 따서 맛있게 먹었으며 이런 이유로 그 디린바우에는 예부터 지내와 거미들도 많이 살고 있었다.

그 지네는 어찌나 큰지 채이짝만 하였고 거미 또한 서말지 소댕(솥뚜껑)만 하였다.
옛날 어느 때 한 용감한 머슴(청년)이 있었는데 이 디린바우의 석이가 몹시 먹고 싶어 어느날 길고 튼튼한 줄을 매어 바위의 아래쪽으로 내려가 석이를 찾아 따기 시작하였다.

인적이 닿지 않는 곳이니 석이가 많아 버섯을 따는데만 그저 온 정신이 팔려 바깥 세상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 만복산의 디린바우의 남쪽에는 멀리 고현산이 자리잡아 그 위용을 자랑하듯 웅장하게 서 있는데 어떤 사람이 고헌산에 올라 나무를 한짐 가득 지고 내려오다가 짐이 하도 무거워서 어깨를 파고드는 듯 하니 전망이 좋은 자리를 골라 짐을 받쳐놓고는 곰방대를 끄내어 담배 한 대를 부벼넣고 불을 당겨 한모금 빨아 내뿜고 나니 금시 어깨가 가벼워지는 듯하였다.

이때 북쪽을 바라보니 디린바우에 한 사람이 석이를 따고 있는데 서말지 소댕만한 큰 거미가 사람을 매달려있는 줄을 물어 뜯고 있어 금시 소름이 오싹 끼치었다.

줄이 끊어지면 그 사람은 높은 벼랑에서 떨어져 영락없이 죽기 때문이었다.
나무꾼이 벌떡 일어서며 보소보소 버섯 따는 사람아라고 고함을 질렀으나 그는 버섯 따는데만 열중하다 보니 고함소리가 안들리는 듯 하여 다시 목이 터질 듯 큰소리로 보소보소 버섯따는 사람아, 보소보소 버섯따는 사람아 하며 손나팔을 하여 고래고함을 지르기를 여러번 되풀이하니 겨우 그 사나이는 무슨말이 들리는 듯 이곳을 바로보며 손으로 응대하는 것이었다.
나무꾼은 손짓 몸짓을 하며 거미가 줄을 끊는다 거무봐라 거무를 하니 그제야 그는 말을 알아 듣고 위를 쳐다보니 디린바우의 지킴(지꿈)인 왕거미가 나와 줄을 물어 뜯고 있음을 알고 놀란 사나이는 급히 몸을 피하여 큰 위기에 탈출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로부터 이곳 사람들은 고헌산을 고함을 친 산이라 하여 고함산이라 하였다는 설이 전해져 내려오며 나무꾼이 석이버섯을 따는 사나이를 위해 고함을 지른산이라 하여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고헌산에 올라 이렇듯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공부하고 나니 조금은 산상에서 보낸 시간이 위안이 되는 듯 하다.

 

 

사방팔방 시원하게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즐겨보는 사이 어느덧 후미까지 도착해 단체 사진 한장 근사하게 남겨 본다.

다시 정상 돌탑 아래에 준비된 나무데크 전망대로 내려가 개별 사진을 남기고 서쪽을 바라보니 언양쪽 마을 한가운데로 울산 밀양간 4차선 지방도로가 시원하게 뚫려있고 우측의 가지산에서 좌측의 능동산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석남터널도 보인다.

좌측의 능동산 지나 배내봉과 간월산 그리고 신불산이 거대한 산군을 이루며 당당히 서 있고 그 신불산 자락 한쪽에 단애의 영축산 정상부가 고개만 내밀고 있다.

그저 바라만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그렇게 한동안 잊혀지지 않을 멋진 추억을 만들고 이제 고헌산 정상과는 아쉬운 작별을 고하는 시간이다.

서쪽으로 나 있는 나무 계단을 타고 갈색으로 변해 버린 풍경속을 걸어가는 모습과 기분은 꼭 영남알프스 신불평원과 닮아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저 멀리 암봉으로 이뤄진 고헌산 서봉에 오르면 오늘 산행도 마무리가 되면서 이제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면 될 것이다.

저 정상에 오르면 또 어떤 조망이 이 산객을 붙잡고 놔 주지 않을련지 궁금하다.

 

 

이제 종주대들과 이야기 나누며 여유있게 걷다보니 어느덧 서봉 위에 올라서고 그곳에서 바라 본 지나온 고헌산 정상부와 좌측으로 돌아가 만나는 고헌산 동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너무나 황홀하게 뻗어 있다.

어느 영화에 나오는 풍경이 부럽지 않은 그런 모습이기에 이곳 고헌산 서봉에서도 제법 시간을 지체해 본다.

시간을 보니 생각보다 빨리 진행 해 놀며 천천히 내려간다 해도 9시간 정도면 산행이 완료가 될 것 같은 그런 시간이다.

 

 

고헌산 서봉에서도 많은 추억을 만들고 다시 뻥 터진 시야속에 들어 오는 산들을 바라보며 그 이름 하나 하나를 불러 본다.

울산시 울주군에 위치한 고헌산(1034봉) 정상보다 약간 더 높은 고헌산 서봉(1035봉)의 전망 역시 황홀하면서도 환상이다.

정면 돌탑 뒤 저 멀리 낙동정맥인 경주 단석산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구미산 옥녀봉 벽도산 경주시내 소금강산 동대봉산 토함산 삼태봉 동대산 무룡산이 병풍처럼 둘러쳐 보이고 그 앞 능선의 맨 오른쪽 국수봉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치술령 마석산 남산이 펼쳐진다.

정면 눈 앞의 산허리에 길이 나 있는 산이 고헌산에 앞선 낙동정맥인 백운산이고 고개돌려 오른쪽으로 고헌산 정상이고 오른쪽으로 연화산 무학산 울산 문수산 남암산 꼬장산 대운산이 그 앞 능선으로 정족산 천성산2봉 천성산 금정산이 보인다.

그 오른쪽 앞 일자능선이 신불산이고 그 앞 능선 오른쪽으로 간월산 배내봉 오두산 송곳봉이 그리고 24번 국도 끝 배내고개를 중심으로 오른쪽 능동산, 그 뒤 오른쪽 천황산을 기점으로 왼쪽 재약산 향로산이, 오른쪽 가지산 중봉 가지산, 그 우측 앞으로 쌀바위 상운산 쌍두봉 지룡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이름을 열거하기도 힘이 들 정도의 일망무제 끝없이 이어진 산줄기에 그저 감탄하기 바쁜 시간들이다.

 

 

이제 고헌산 서봉에서의 조망과 전망 그리고 풍경까지 즐겼으니 이제 마지막 하산만 남겨 두고 있다.

진달래 관목 사이로 난 등로를 타고 북쪽으로 내려가니 바로 앞에 수없이 많은 돌탑들이 쌓아져 있고 그곳으로 내려가 돌 하나를 올려 본다.

그 돌탑 저 멀리에는 소호리 우측 능선을 타고 저 끝자락의 단석산에서부터 이곳 고헌산 서봉까지의 낙동정맥 마루금이 너무나 아름답게 뻗어 내려오고 있다.

그 능선을 타고 이곳까지 걸어 온 종주대의 발걸음에 찬사를 보내는 시간이다.

  

 

그 돌탑들을 지나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2개월 전 어둠속에 올랐던 와항재와 와황마을 그리고 목장과 문복산 갈림길로 이어지는 환상의 마루금이 한눈에 들어 온다.

생각보다 크고 멋진 와항마을이다.

이렇게 밝은 낮에 한번 보고 올랐으면 조금은 수월했을 것을 그저 어둠속에 띠지만 보고 올랐다 내려와 다시 마을을 지나 목장 따라 어렵게 올랐던 추억의 한자락을 잡고 미소를 띠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오늘 산행 후 내려 가 점십식사를 즐길 곳도 바로 저기 보이는 마을의 입구쪽 와항마을일 것이다.

 

 

이제 몸이 고통보다는 아쉬움을 이야기 하는 시간이다.

가파른 내리막 경사를 타고 내려가는 등로 양쪽에는 색이 바래 갈색으로 된 억새들이 부는 겨울 바람에 한들거리며 흔들리고 있다.

무엇인가 종주대들에게 이야기를 나누려는 듯 속삭이는 흔들리는 그곳에 귀를 대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도 본다.

참으로 아름다운 마루금이며 우리의 자연이다.

 

 

이제 관목과 억새 지대를 내려오니 가파른 경사면도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이제는 멋진 소나무들이 등로를 채우고 산객들을 맞이해 주고 있다.

하지만 잠시 내려가니 이곳 소나무 군락지도 역시 가파른 내리막 등로로 이뤄져 있어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내려가며 함께 하는 산객을 붙잡아 몇장의 사진을 남겨 드리다 보니 저 멀리 차량 통행 소음이 들리는 와항재에 도착을 한다.

 

 

드디어 와항재에 도착을 한다.

경주와 울산을 이어주는 2차선 포장도로인 이곳 와항마을은 조선시대 태종 이방원이 고개마다 진지 번호로 일항(외항)과 재항(소호)으로 정한 이름이 그대로 불린다고 하고 마을 형태가 기와처럼 생겼다 하여 와항 또는 외항만디 및 기와목이라고도 불려지며 그 마을에서 와항재가 왔다는 설이 있는 고개이다.

정확히 3개월 전 억새가 한들거리는 영남알프스 산행을 위해 먼저 안개가 자욱한 밤에 찾았던 곳이기에 낮설지는 않은 느낌이다.

이렇게 또 9시간의 긴 산행을 마치고 여유를 가지고 배낭을 챙겨 본다.

 

 

생각보다 일찍 하산 해 짐 챙겨 산내면 대현3리 와항마을로 내려가 푸른가든이란 한우 불고기 식당에서 제대로 된 점심식사를 즐겨 본다.

경주시 산내면에 속한 마을이지만 이곳 역시 언양 한우 불고기 마을로 통하며 많은 식당들이 한우 전문 식당으로 성업중인 곳이다.

마침 오늘이 이 산객의 생일이고 또 요즈음 바쁜 일 때문에 정신없던 시간도 한시름 놓게 돼 생각지도 못한 거한 생일상을 받게 된 것이다.

그렇게 즐긴 후 마음이 통해 또 사당에 도착해 시원한 생맥주 몇잔으로 우정을 나누니 이것이 인생이 아닐까 생각해 본 시간이다.

단촐한 인원이기에 아쉬움도 남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애틋하게 하나된 낙동정맥 종주대 여러분들과 황홀하면서도 환상의 산행을 할 수 있어 더없이 좋은 추억으로 남겨 봅니다.

이제 낙동정맥 산행도 3구간만 남겨 놓고 있는 시간, 많은 생각들이 떠오르지만 마지막 몰운대에 서는 그날까지 모두 무탈하게 완주 할 수 있기를 바래 보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모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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