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지 : 경북 영천시와 청도군 및 경주시의 낙동정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 2011년 11월 25일과 26일 (무박 2일 토요 산행)
산행날씨 : 새벽엔 춥고 맑았으나 아침 이후로 산행하기 좋은 온도의 날씨
산행온도 : 영하 02도에서 영상 11도
산행인원 : 3450온누리산악회 낙동정맥 종주대 15명과 함께
산행코스 : 아화고개(옛날 4번 지방도로 위 애기지휴게소)-중앙선 철길-하추마을-과수원-3/71번 송전탑-4/70번 송전탑-임도삼거리-178봉(5/69번 송전탑)-복숭아 밭-시멘트 임도-경부고속도로 지하통로-임도삼거리-맥아 보리밭-909번 지방도로-14/60번 송전탑-15/59번 송전탑-형제목장고개-498봉-전망바위 및 소나무-560봉 삼각점-640봉 전망바위-비슬(밀양)기맥 분기봉(삼면봉, 655봉)-산불감시초소-오소재공원 및 사룡산 갈림 삼거리-헬기장-사룡산(685봉)-갈림 삼거리 복귀-우라생식마을-아침식사-식물분석장 문-능선진입-숲재(우라리 즉 시루미기 정류장)-2차선 포장 지방도로-시멘트 임도-능선진입-시멘트 임도-건천농장 철문-임도-부산성 서문-무우밭-억새밭-부산성 남문-헬기장-청천봉(751봉, 산불감시초소)-독고불재(어두니목장 및 영남채석장)-651.2봉 삼각점-682봉-오리재-오천정씨묘-어두지 임도-396.9봉 삼각점-김해김씨묘-땅(당)고개(20번 지방도로)-이정표 3개-662봉-이정표 단석산 1.0 Km-단석산 갈림 삼거리-단석산(827봉)-갈림 삼거리 복귀-이정표-OK그린 연수원 1.6 Km-방주교회-OK 그린 연수원 임도-산행종료, 경주시 건천읍으로 이동해 목욕과 식사 후 귀경
산행거리 : 약 22.10 Km (접속구간 01.60 Km, 단석산 갈림 삼거리에서 단석산까지 왕복)
산행시간 : 사진 찍고 휴식 취하며 꾸준한 속도로 10시간 45분 (04시 10분부터 14시 55분까지)
낙동정맥이란 ???
낙동강의 동쪽을 따르는 산줄기로 동해바다를 가르는 한반도 동해안 지방의 담장이다.
백두산에서 남으로 힘차게 뻗어내려 금강산과 설악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내려가는 백두대간 마루금이 천의봉(매봉산,1303봉)으로 솟아 오르기 전 1145봉 직전에서 남동쪽으로 분기하여 태백 백병산(1259봉), 통고산(1067봉), 울진 백암산(1004봉), 청송 주왕산(720봉), 경주 덕석산(829봉), 울산 가지산(1240봉), 신불산(1209봉), 부산 금정산(802봉)을 지나 백양산(642봉)을 넘어 낙동간 하구인 다대포 몰운대에서 끝나는 약 397 Km의 산줄기를 낙동정맥이라 한다.
낙동정맥 중에서 최고봉은 태백의 백병산으로 그 높이는 1259미터이다.
겨울 한파속에 마루금을 벗어난 고봉에 올라 속세를 잊고 조망을 즐긴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 후기를 참고한 후 난해하고 어려운 정맥 산행을 진행해 무탈하게 맥 잇기 산행을 다녀왔기에 단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정맥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아직도 일이 바빠 제대로 된 산행을 즐기기엔 마음의 부담이 적지 않지만 모든 작업 마치고 남아있는 마지막 단계는 이 산객의 몫이 아니기에 진인사대천명의 마음으로 또 먼 길을 떠나 본다.
날씨는 맑고 화창할 것으로 예보되어 있지만 갑자기 추워진 기온으로 인해 약간의 걱정이 앞서고 특히나 아화고개에서 아화리 하추마을을 지나 경부고속도로로 진입하는 지하통로를 어둠속에 잘 찾아 진행 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에 더욱 움추러드는 몸으로 출발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도 바쁘고 정신없이 보낸 일상에서의 시간이 이렇게 산행을 위해 종주대들을 만나 먼 길을 떠나는 시간은 모든 것 잊고 그동안 지낸 시간들을 정리 할 수 있어 불편한 몸과는 달리 맑아지는 정신세계이기도 하다.
손발리 얼어 붙듯 추운 새벽에 마을과 과수원 그리고 야산을 넘어 어렵게 경부고속도로를 찾아 넘으며 이제부터 부드러운 등로를 따라 걸어 본다.
한동안 진행하니 새로 생긴 909번 지방도로를 건너 조금씩 가파라지는 오르막 된비알을 타고 처음으로 등줄기에 땀방울을 흘리니 좌측에 우라생식마을을 두고 삼면봉이란 비슬기맥 분기봉에 도착해 사진 몇장 남기고 사룡산으로 향하는 마루금에서 좌측 부산성 위로 떠오르는 일출을 감상하며 잊었던 삶에 대한 열정을 되찾아 본다.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잘 살아간다는 것은 또 무엇인지 어린아이처럼 끝없는 자문자답을 하면서 세상을 밝혀주는 태양속으로 빨려 들어가 내 몸을 태우는 시간이기도 하다.
2주전 많은 땀방울을 흘리며 어렵게 찾아 내려왔던 옛 4번 2차선 지방도로 옆 아화고개 애기지휴게소에 도착해 미니버스에서 내리니 생각보다 추운 기온과 날씨에 몸이 자꾸만 움추러들고 얼어붙는 기분이다.
하얀 입김이 숨을 쉴때마다 어둠속 세상으로 흩어지고 그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는 수증기를 따라 하늘을 처다보니 근래에 볼 수 없었던 수많은 별들이 까만 밤하늘을 수놓으며 자꾸만 작아지는 낙동 종주대의 가슴을 열어주는 시간이기도 하다.
아화는 당초 마을 앞에 언덕이 있어 답답하다고 하여 아울이라 하였는데 여름철에는 수리시설이 좋지 않아 초목이 메말라 탈 정도로 심한 가뭄을 겪어야 되고 언덕에 불을 붙이면 불이 꺼질 줄 몰랐다 하여 아화라고 마을명을 불렀다 하며 그 마을에 있는 고개라 아화고개란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다.
그래도 도착을 했으니 출발을 해야 하는 시간, 중무장을 하고 산행 준비를 마친 후 미니버스를 보내고 애기지휴게소에서 서쪽의 영천방향으로 도로를 따라 걸어 올라가며 오늘의 장도를 시작하는 시간이다.
조금 더 진행하면 도로 우측으로 새로 생긴 4차선 4번 지방도로를 건널 수 있는 지하통로가 나타나고 그 앞에는 주식회사 지에스엠이란 회사 간판이 서 있고 가스충전소란 작은 간판도 보인다.
그곳을 지나 계속 진행해 약 150여미터 걸어가면 도로 좌측으로 가드레일이 잠시 사라진 곳에 오늘 산행 들머리가 보이고 그곳으로 내려가면 곧바로 중앙선 철도가 놓여 있다.
중앙선 철도는
일본이 조선을 대륙침략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경부선에 이은 조선 제2의 종관선을 건설하여 경상북도와 충청북도 그리고 강원도 및 경기도 등 4개 도에 걸친 내륙일대의 풍부한 지하자원을 수탈하고 날로 증가하는 조선과 만주 그리고 일본 간의 여객과 화물의 수송을 원활히 할 목적으로 이 노선을 건설하였는데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역에서 국토를 남북으로 종관하여 경상북도 경주시 경주역에 이르는 철도를 말한다.그 중앙선을 가로 질러 오르니 시멘트 임도가 나타나고 선답자들의 산행 후기에서 자주 봤던 저온창고임대란 커다란 건물이 나타난다.
저온창고임대란 건물 앞으로 올라 시멘트 임도를 타고 우측으로 걸어가니 잠시 후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고 그 한가운데에는 동광석재라는 회사 이정석이 서 있다.
그곳에서 시멘트 임도를 타고 좌측으로 걸어 들어가니 임도 좌우측으로는 복숭아 과수원이 줄지어 서 있다.
조금 걸어 들어가니 하추마을의 민가들이 나타나고 처음 만나는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틀어 들어갔다 잠시 알바 후 뒤돌아 나와 직진의 임도를 타고 민가 사이를 통해 계속 진행하는데 새벽을 깨우는 많은 견공들의 울부짖음에 괜시리 마을 주민들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계속 그 시멘트 임도를 타고 진행하니 비포장 임도로 바뀌며 임도 좌측으로 희미하게 송전탑이 보여 오르지만 역시 등로가 금새 끊기고 만다.
우측 임도를 계속 타고 진행하던 종주대가 그곳에서 띠지를 발견하곤 모두 다시 임도를 타고 조금 더 진행하니 등로는 좌측으로 급격하게 꺽여 오르며 등로 좌측으로 송전탑 하나가 희미하게 보이는데 아마도 3/71번 송전탑으로 보이며 정상 등로는 그곳으로 올라야 하는데 과수원이 들어 서 있어 임도를 타고 진행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드는 곳이다.
조금 더 오르니 우측에 파란색 물탱크를 만나 정상적인 마루금으로 진행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파란색 물 탱크를 지나 오르니 등로 앞에 송전탑이 나타나고 그 밑으로 통과하며 살펴보니 송전탑 4/70번으로 그 송전탑 정중앙 밑을 통해 정맥 마루금이 이어지고 있다.
계속 그 임도를 타고 오르니 우측에서 올라오는 임도와 만나 좌측으로 타고 오르니 다시 등로에 5/69번 송전탑이 나타난다.
그 송전탑을 지나 오르니 임도 삼거리에 도착하고 물통 2개가 서 있는 178봉에 도착해 잠시 후미를 기다리며 쉬어 간다.
등로는 이곳에서 우측으로 이어지는 임도를 버리고 좌측으로 뚝떨어지게 이어지고 있다.
잡풀이 말라있는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서리가 내리고 땅이 얼어 푸석거리며 무척 미끄럽다.
조심하며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많은 묘지들이 보이고 큰 소나무 한그루가 보이며 곧이어 비포장 임도와 만나는데 임도가 좌우로 갈라지는 삼거리이다.
그곳에서 임도를 타고 우측으로 조금 더 내려가 시멘트 임도를 만나면 좌측으로 꺽어 우측에 경부고속도로를 두고 진행하였으면 좋았을 것을 비포장 임도를 좣측으로 타고 진행하니 어쩐지 경부고속도로와 자꾸만 멀어지는 느낌이고 등로 우측으로 높은 송전탑 하나가 희미하게 들어 온다.
그곳에서 우측의 복숭아 과수원 중앙을 타고 나즈막한 둔덕을 오르니 경부고속도로가 보이고 곧이어 시멘트 임도 우측에 태양광 설비가 있는 장소에서 시멘트 임도를 타고 경부고속도로쪽으로 내려가니 정상적인 시멘트 임도를 삼거리를 만나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간다.
조금 더 내려가니 선답자들의 산행 후기에서 많이 봤던 민가가 나타나고 곧이어 우측으로 경부고속도로를 건널 수 있는 지하통로가 나타난다.
지하통로를 통해 경부고속도로를 건너 이제 우측으로 나 있는 시멘트 임도를 타고 오르니 금새 삼거리 갈림길이 나타나고 그곳에서 우측 비포장 임도를 타고 오르니 우측으로 경부고속도로쪽으로 콘크리트 수로와 만나는 지점에서 좌측으로 휘어지는 임도를 타고 계속 진행한다.
잠시 진행하니 등로는 나즈막한 야산으로 이어지고 그곳으로 들어가 걷다보니 계속 이어지는 임도같은 등로 옆에 김해김씨 묘지가 보인다.
그 묘지 옆을 타고 계속 정맥 산행을 이어가 본다.
잠시 더 걸어가니 잘 자란 소나무 군락지를 만나고 그곳을 통과하니 다시 앞이 탁 트이는 넓은 임도를 만나 등로가 이어진다.
그 임도를 타고 걸어가니 임도 좌측으로는 야산과 나무들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하얀 서리가 내린 파란 맥아 보리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제법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며 종주대의 얼굴과 귓등을 얼게 만들고 잠시 후미를 기다려 또 모두 함께 진행하기로 한다.
사진으로 보는 것처럼 보는 것만으로도 온 몸이 얼어 붙는 제법 추운 새벽 시간이다.
그렇게 한동안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진행하니 등로는 다시 나즈막한 능선으로 이어지지만 그곳에도 역시 넓은 비포장 임도를 걷게 된다.
임도 좌우측으로 측백나무를 식재한 듯한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등로가 다시 좌측 내리막 능선으로 급격하게 꺽이는 장소에 철늦은 단풍이 피어 나 종주대의 눈길을 사로 잡는다.
이곳에서 잠시 후미 기다려 또 기차놀이를 하면서 한 그룹이 되어 어둠을 헤치며 걸어 본다.
잡목과 잡풀들이 제법 자라난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다시 나즈막한 무명봉을 넘어 다시 내리막 등로와 이어지는데 등로에는 키큰 쑥들이 무성하게 자랐다 말라있어 진행하기에 쉽지 않은 등로이다.
등로 좌측에는 콘크리트 수로가 나 있고 우측 아래에는 절개지 밑에 철조망이 보이고 그 아래에는 최근에 만들어진 듯한 2차선 포장도로가 내려다 보인다.
서리가 내려 얼어 있기에 무척 미끄러운 등로를 조심하며 내려가니 등로는 우측 포장도로로 이어진다.
그 포장도로 옆에는 낙석주위 도로 이정표가 보이고 그 뒤로는 영천시 북안면 도로 안내판이 서 있으며 그곳에서 도로를 건너 가니 능선 진입로에 사룡산 등산 진입로 좌우측에 안전철봉과 로프가 열려있고 그 옆에는 등산 안내도가 서 있다.
잠시 잘 정비된 로프를 타고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잘 간벌된 지역으로 호젓한 등로가 열려있다.
그곳을 타고 진행하는 발의 촉감이 너무나 부드럽고 상쾌해 정맥 산행인지 아니면 동네 산보를 즐기고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여유로운 시간이다.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이 종주대의 발길을 희미하게 밝혀주는 시간, 그렇게 오손도손 이야기 나누며 진행하니 효리에서 1 Km ㅗㄹ라왔고 이제 사룡산까지는 4 Km가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처음 만난다.
이제부터 잘 세워진 이정표를 따라 진행하면 길 찾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효리마을의 유래를 보면 서기 1500년경에 개척하여 살기 좋고 재물을 저축 할 수 있다하여 장재동이라 하다가 박경립이 지극한 효자였음으로 효자가 살았던 곳이라 하여 효리라 불르게 되었으며 또 한편 이곳은 길이가 길고 지형이 소등처럼 생겼기에 소골, 소등, 우곡이라 부르며 마을중심에 위치하였다하여 중각단이며 새로운 마을을 조성됨으로 새각단이며 못안에 마을이 있다하여 못안이라 한다.
이조시대 영천군 비소면에 속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영천군 북안면 효리가 된 마을이다.
우측으로 등로가 꺽이며 오르게 되는 첫번째 이정표를 지나 진행하니 14/60번 송전탑이 나타난다.
어둠속에 어렵게 사진 한장 남기고 전진하니 다시 잡목들이 자라난 등로로 이어진다.
그곳을 지나니 다시 15/59번 송전탑이 나타나고 그 송전탑을 통과하니 지도상에는 형제목장고개란 장소를 지나는데 목장이 있는지는 어둠이기에 분간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서 있는 천촌리 갈림 이정표를 만나 사진으로 남겨 본다.
효리에서 1.6 Km 걸어 왔고 이제 사룡산 정상까지는 3.4 Km 남았다는 이정표이다.
경주시 서면에 있는 천촌리는 이 마을 개척당시 뒷산에 올라 마을 형태를 보니 마을 주위가 흡사 정호처럼 지형이 깊고 공곡에 물이 새어나온다 하여 샘촌 즉 천촌이라 불려졌다는 곳이다.
형제목장고개 좌측에는 경주전통체험학교가 있다는데 어둠속이라 그 자취를 확인하지 못하고 진행하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경주전통체험학교를 찾아 보니 참으로 좋은 취지로 문을 연 사실을 알게 되어 다음에 시간되면 꼭 한번 아이들 손잡고 다녀오고 싶은 곳이 되였다.획일적인 서구교육의 잣대에 밀려 솟대는 왜 세우는지 그리고 성황당은 왜 있는지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싶어서 문을 열었다는 동국대 이점원교수는 폐교된 경주 천촌분교 자리에 개교한 전통 놀이 문화를 알리는 학교이다.그저 그곳 경주전통체험학교로 통하는 고갯마루만 사진으로 담고 계속 진행하니 사룡산까지 3 Km 남았다는 이정표를 지나고 평이한 등로를 따라 진행하다 봉분이 낮은 묘지 두어기를 지나게 된다.사룡산 정상까지 이제 2.8 Km 남았다는 이정표를 지나 조금 더 가파라진 오르막 등로를 타고 가뿐 숨 몰아 쉬며 오르니 푹신한 활엽수 낙엽을 밟으며 첫번째 바위봉인 498봉에 올라 불어 오는 차가운 밤바람에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 본다.많은 선답자들의 띠지가 바람에 흔들리며 올바른 정맥 마루금을 타고 진행하고 있음을 확인시키고 있다.
가파르게 치고 올라온 등로가 첫번째 봉우리인 498봉을 지나면서 잠시 숨고르기를 시도하듯 평이한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등로에는 발목까지 빠지는 낙엽이 쌓여 종주대가 지나며 밟는 소리가 바스락 거리며 좋은 느낌의 소리로 다가온다.
그렇게 잠시 짧게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며 꾸준히 전진하니 사룡산까지 이제는 1.1 Km 남아 있다는 표시와 함께 우측으로 용계리 하산 이정표가 서 있는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한다.
영천시 북안면 용계리 마을은 서기 1100년에 개척되었으며 마을 뒤 계천에서 큰붕어가 용이되어 승천하였다 하여 용계라 하면 옛날 마을안에 3개의 불상이 있었다하여 세불이라 하며 옛날 부자촌으로 그 위세가 당대에 으뜸이라 해서 원당골이라 하였다.
고려 현종때시 경주군에 속하였으며 이조 태종 14년에 영천군 원곡면에 속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영천시 북안면 용계리가 되였다.
마을 남쪽 뒷산이 사룡산인데 옛날부터 4마리의 용이 도사리고 있기에 사룡산이라 칭하게 되었으며 이 산 꼭대기에 4개의 물이 나는 웅덩이가 있어 4마리의 용이 목욕을 하였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는 산이다.
용계리 갈림 이정표를 지나니 바위 구간이 나타나고 그곳을 통해 오르니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 첫번째 조망바위에 올라 여명이 밝아오는 시간에 잠시 캐논 카메라를 꺼내 영천의 용계리쪽 마을과 저 멀리 보일지도 모를 대구의 팔공산과 영천의 보현산을 찾아 보지만 역시 빛이 약한지 가까운 영천시 북안면의 용계리쪽 마을만 시야에 들어 온다.
마치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을 연상시키는 마을과 아침을 여는 여명의 빛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산객의 마음을 설레이게 만들고 있다.
첫번째 전망바위에서 몇장의 사진을 담은 후 다시 천천히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이제 등로에는 제법 많은 바위들이 박혀있어 주의를 요한다.
잠시 더 오르니 등로 좌측 오봉산과 부산성 사이에서 붉은 빛이 솟아 오르기 시작하고 조만간 일출이 있으려는 듯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이곳에서 기다리며 일출을 볼까 생각을 해 보지만 경험상 일출은 아직도 제법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다시 천천히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다시 급하게 진행 할 이유가 없기에 여유를 가지고 좌우를 조망하며 올라가니 계속되는 조망처가 연달아 이어지고 있다.
잠시 바위 등로를 타고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시원하게 뻗어 있는 경부고속도로가 눈에 들어 오고 그 주위로 펼쳐진 마을과 작은 저수지들이 조용한 아침을 열고 있다.
이곳 영천시 북안면은 고려시대까지는 경주군에 속하였다가 조선조 태종때 영천군에 속하였고 1914년 3월 1일 원곡, 비소, 원당면을 합쳐 영천군 북안면이 되였으며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합으로 현재의 영천시 북안면이 된 마을이다.
이 지역은 학문과 충절을 바탕으로 하는 예절의 고장이며 맑은 공기와 수량이 풍부하여 과일재배지로 적합하고 고속도로와 철도 및 국도가 통과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산업개발 및 농산물유통이 용이한 지역으로 알려진 곳이다.
많은 사진을 남기며 천천히 전진하니 560봉 삼각점이 나타나고 등로 우측으로는 경부고속도로와 영천의 북안면 마을들이 여전히 눈에 들어 온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저 멀리 대구쪽을 바라보니 희미하게 팔공산과 영천의 보현산이 눈에 들어 오지만 사진으로는 들어 오지 못하는 안타까운 시간이기도 하다.
다시 계속 이어지는 바위 등로를 타고 오르니 지도상 전망대바위로 표시된 제2전망대에 도착해 주위 조망을 살펴 본다.
등로 좌측으로는 부산성 위로 더욱 뚜렷히 붉게 물들어 오는 하늘이 일출이 가까워졌음을 알리고 있다.
조금 더 조망을 즐긴 후 이제 안전 철봉과 로프가 달린 등로를 타고 바위를 위회해 전진하니 큰 바위 위로 마루금이 연결되어 있다.
큰 바위를 넘어 올라가니 저 멀리 이정표가 서 있고 다가가 보니 비슬기맥 즉 밀양기맥이란 안내 이정표가 보인다.
이곳이 바로 삼면봉이라 이름이 붙은 655봉으로서 이곳에서 비슬지맥이 분기되는 분기봉이 되는 곳이다.
비슬지맥은 낙동정맥이 포항 땅을 지나 경주 땅에 접어들어 경부고속도로에 앉았다가 아화고개에서 부산성으로 일어서기 직전 분기점(656봉)에서 서진하는 산줄기이다.이 산줄기는 경산시와 청도군의 경계를 이루며 사룡산(685봉)-구룡산(674.8봉)-대왕산(607봉)-선의산(756봉)-용각산(693봉)-상원산(674봉)-삼성산(668봉)-비슬산(1083.6봉)에 이르고 다시 남진하여 청도, 경남 창녕군과 밀양군의 경계를 이루며 천왕산(619.2봉)-화악산(930봉)-종암산(664봉)-붕어등(251봉)까지 정맥에서 갈려져나온 지맥으로, 낙동강에서 끝을 맺는다.도상거리가 약 146.5km에 이르는 산줄기를 비슬지맥이라 칭한다. 하지만 분기봉에는 비슬지맥보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밀양기맥 분기봉이란 이름이 붙어 있어 지자체간 산줄기 이름을 가지고도 이렇게 다툼이 심한 것을 보며 가슴이 아파옴을 느낀다.
또한 비슬산에서 북쪽으로 분기한 줄기는 청룡산(793봉), 산성산(683봉), 궁산(251봉)으로 이어지는 청룡지맥을 이루고, 천왕산에서는 또 한줄기가 열왕산(663봉)으로 남진하며 영취산(740봉), 종암산(546봉), 덕암산(544봉)과 비룡산(252봉)으로 이어지는 열왕지맥을 이룬다.분수계는 북쪽으로는 금호강, 남쪽으로는 동창천 상류의 울타리를 이루다가 비슬산을 지나며 서쪽은 낙동강과 청도천, 동쪽은 청도천과 밀양강의 수계를 이룬다.모두 올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라며 다음을 기약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비슬기맥 분기봉에서 몇장의 사진을 남긴 후 좌측 정맥 등로인 우라생식마을 쪽이 아닌 직진의 사룡산쪽으로 진행하며 사룡산을 들려 보기로 한다.
잠시 봉우리를 내려가니 등로 우측으로 벌목지가 나타나고 그곳에는 산불감시초소와 깃발 하나가 나부끼고 있다.
그 아래로는 우측으로 영천시와 청도군의 경계 근처의 마을들과 산군들이 눈에 들어 온다.
비슬기맥 분기봉을 내려와 안부를 지나는 시간, 드디어 등로 좌측 오봉산과 부산성 사이의 봉우리에서 아침 일출이 시작되고 있다.
아침 7시 10여분이 일출시간으로 알고 있었는데 높은 산에 막혀 조금 늦은 시간에 일출이 시작되고 있다.
오랫만에 만나는 깨끗한 일출에 모두들 먻을 잃고 바라보며 감탄을 하기에 바쁘고 그 아래에는 경주시 건천읍 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이곳 마을은 경주시 건천읍쪽 마을로서 마을은 약 150년 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번창하였다.
마을옆 건천강변이 배수가 잘되어 물이 고이지 아니하고 항상 건조되여 한발이 심했으므로 건천이라고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고려태종 23년에 경주 대도독부, 조서조때는 경주부에 예속, 1895년 경주군 서면에 속해 오다가 1914년 부군통폐합시 마을 이름을 건천이라고 하였고 1973년 읍으로 승격하면서 건천읍 소재지가 되었다.
찬란하게 떠 오른 아침 햇살, 가슴이 설레이고 강렬한 그 햇살에 또한 삶에 대한 애착과 옳바른 삶에 대한 생각을 해 보는 시간이다.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는 것만큼 담아내지 못하는 카메라 앵글이 아쉽기만 한 시간이지만 그것이 큰 문제는 없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저 이렇게 가슴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마음을 다잡는 순간이기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하루의 아침일 것이다.
둥근 해가 산마루를 타고 둥실 떠오를 때까지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그 강렬한 햇살을 응시해 보는 순간이다.
그렇게 황홀한 하루의 아침해를 바라 본 후 산줄기 위로 머리를 내밀자 이제사 다시 정신을 차려 가던 길 재촉을 해 본다.
아침 7시 30여분을 지나며 뱃속에선 허기가 진다고 난리를 치고 있는 시간, 잠시 더 진행하니 종주대 몇명이 사룡산 갈림 삼거리에서 기다리며 쉬고 있다.
오제소공원과 구룡산(무지터) 가는 우측 화살표 방향이 사룡산 정상으로 가는 등로이고 원 정맥 등로는 좌측으로 90도 꺽어 우라생식마을로 들어서며 진행해야 하는 갈림 삼거리이다.
이곳에 배낭 벗어 놓고 우측 직진의 등로를 타고 사룡산 정상을 다녀 오기로 한다.
무지터는 구룡산 용의 눈에 해당하는 명당으로 8부능선쯤에 위치하고 있으며 습지 식물이 군락을 이뤄 자생을 하고 있다.
구룡산 용 9마리가 승천하였다는 이곳은 옛부터 가뭄이 심할 때 영천 경산 청도의 3개 부락에서 합동 기우제를 지낸 신성한 곳으로 이 새암에서 물을 길러 음식을 만들에 제상에 올렸다.
무지터 옆 약 200 평방 미터의 평편한 바위 위 제단에 제상을 마련하고 제관과 마을사람들이 모여 비를 내려 주길 빌었다고 전해지며 이곳에서 내려다 보면 북안면 전체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어 경관상으로 매우 수려한 곳이기도 하다.
오제소공원은 오제쉼터에 있는 공원을 말하는데 사룡산을 넘어 계속 진행하면 오제쉼터와 구룡산 무지터를 모두 만날 수 있어 이정표로 표시한 듯 하다.
낙엽이 깊게 깔려있는 융단같은 등로를 타고 곧게 뻗은 넓은 임도같은 길을 따라 완만히 오르니 사룡산 정상 가는 등로 좌측에 헬기자 하나가 보이고 주위에는 온통 하얀 억새가 피어 하늘 거리고 있다.
등로 좌측의 떠오른 햇살을 받아 역광으로 빛나는 억새꽃이 더욱 아름답게 다가오는 시간이다.
잠시 사진 몇장 더 담은 후 이제 사룡산 정상으로 향한다.
사룡산 정상 오르는 등로도 참으로 멋지고 아름답다.
편안하게 낙엽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오르니 금새 사룡산 정상에 도착하고 3개의 정상석돠 하나의 정상 이정표를 담은 후 환가운데 있는 묘지를 둘러 본다.
뒤따르는 종주대들과 사진 몇장 남기고 다시 부드러운 낙엽 등로를 타고 사룡산 갈림 삼거리로 내려가 본다.
사룡산은 경북 경주시 산내면 우라리와 영천시 북안면 당리 그리고 청도군 운문면 마일리에 걸쳐 있는 해발 685 미터의 산으로 서쪽으로 구룡산, 남쪽으로 장륙산, 정족산과 이어져 있으며 주봉과 더불어 시루봉, 문방봉(645.2봉), 조래봉(585봉)으로 연결되어 있고 옛날 용 네 마리가 승천한 산이라는 뜻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사룡산은 이웃한 경주 오봉산의 부산성과 연결되는 군사적 요충지로 신라시대 병사들이 이 산을 거점으로 삼아 적을 물리쳤다하여 영천 사람들은 사룡산을 전방산이라고도 부르고 연세 많은 어르신들은 전배이라고 부른다
북으로 신라 때 창건된 금정사가 있으며 정상 부근에는 생식마을이 있다.
헬기장으로 내려가는 등로에서 앞을 바라보니 저 멀리 방금 전 지나 온 비슬지맥 분기봉이 우뚝 솟아 있고 그 뒤 저 멀리 희미하게 주위 산군들도 보인다.
내려가는 등로에는 잡목들이 자라고 있지만 등로를 잘 정비해 놨기 때문에 오르고 내리는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이제 허기가 지기 시작하고 좋은 자리 잡아 민생고를 해결해야 하는 시간이다.
사룡산 갈림 삼거리로 복귀하여 남아 있는 배낭 둘러메고 우측 우라생식마을로 내려가며 종주대를 뒤따라 간다.
사룡산 갈림 삼거리에서 우라생식마을로 내려가니 넓은 임도가 나타나고 그 도로를 타고 진행하니 등로 우측으로 첫번째 민가가 보이더니 저 아래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그 마을 풍경을 바라보며 걸어 내려가니 다시 시멘트 임도 좌측으로 비포장 임도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고 좌측 비포장 임도를 타고 들어가는 곳에 짓다 만 집이 보이고 그곳으로 가 아침 식사를 하기로 한다.
동네 아저씨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니 절대로 불을 피워서는 안된다는 다짐을 한 후 그곳에서 식사를 즐기지만 동네 전부가 어딘지 모르게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처럼 보인다.
아침 식사 후 시멘트 임도를 타고 내려가며 정맥 잇기 산행을 계속 진행한다 .
우측 저 위 사룡산 아래 산자락에 수십채의 민가들이 들어서 있지만 익혀 먹지 않고 생식을 해서 그런지 마을 전체가 을씨년 스럽다는 느낌이다.
조금 내려가니 시멘트 임도 좌측 산자락에 기기묘묘한 탑들이 서 있고 성경 구절들이 적혀 있다.
마을 뒷편에 마리아상도 보이고 과실나무들도 보이는 것으로 봐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그것을 생식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인듯 한데 종교는 기독교를 가진듯 성경의 구절들이 많이 보인다.
이곳 마을 이름이 시루미기라 전해지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세히 살펴보니 시루같다는 느낌은 없는데 시루를 닮아 시루미기라 불린다니 믿을 수밖에 없다.
조금 더 내려가니 임도 좌측으로 영문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비슬지맥 분기봉에서 정상 정맥 등로를 타고 내려오면 만나는 문인 듯 하다.
계속 시멘트 임도를 타고 진행하니 이름도 모르고 뜻도 모를많은 문들을 통과하게 되고 많은 성경 구절도 읽게 된다.
예상하지 못한 사자상과 한우상도 보여 더욱 의아한 생각으로 조금은 빠르게 마을을 벗어나고 픈 마음이다.
성경과 약초 그리고 질병과 삶에 대한 많은 글들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면서 또한 삶에 대한 생각을 짧게 해 보는 시간으로 남겨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 곳은 곡물 야채를 비롯한 음식을 날로 먹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사룡산의 독특한 분위기는 더 진하게 배어나왔다.
그렇게 잠시 더 진행하니 마지막 커다란 문이 나타나고 그곳을 지나 뒤돌아 보니 문 위에 식물분석장이란 글귀가 보인다.
이로써 일단 우라생식마을은 완전히 통과 후 그 문 앞으로 지나는 시멘트 임도 삼거리를 만나 좌측으로 조금 올라갔다 우측 능선으로 올라가며 정맥 산행을 이어가게 되어 있다.
산 능선으로 오르기 어렵다면 시멘트 임도를 타고 우측으로 계속 내려가면 결국엔 숲재에서 다시 만나게되니 큰 걱정은 안해도 될 듯 하다.
우라생식마을을 벗어나는 식물분석장 간판이 걸려있는 문에서 우측 시멘트 도로를 타고 내려가도 숲재를 만나지만 정상 등로로 진행하고자 능선으로 오른다.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활엽수와 침엽수의 적당한 비율로 떨어진 낙엽을 밟으며 올라 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특이한 이정표도 없고 표식도 없는 무명봉에서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잠시 내려가니 묘지 한기가 보이고 그곳을 지나 내려가니 우라생식마을 정문에서 내려오는 시멘트 임도와 만나 좌측으로 조금 걸어 내려가니 숲재가 보인다.
해발고도 475미터인 숲재는 고개가 아화 방향으로 급하게 숙이고 있다고 해서 숙재라고도 부른다는데 아화쪽 아랫 마을 이름도 숙골이고 거기 있는 저수지도 숙곡지이다.
한문으로는 숙령이라고 쓰는데 버스 승장장 안에는 우라생식마을을 말하는 우라리 시루미기라고 적혀 있고 도로 표지판에는 생식촌길 그리고 2차선 도롯가엔 석두암과 우라2리 마을 표석이 서 있다.
우라리는 중리와 상리 그리고 지경 및 시루미기(생식촌)로 이뤄져 있는데 중리는 개척 당시 동쪽 산정에 산성이 있어 성촌이라 하였고 산에서 우렁이 소리가 들린다하여 명라동이라 칭하다 자연부락의 중간에 위치한다 하여 중리로 하였고 상리는 우라 윗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상리라 불렀으며 지경은 수피와 중리의 경계되는 곳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땅의 경계란 뜻인 지경이라 불렀다.
또한 시루미기(생식촌)는 골짜기의 지형이 시루와 같이 생겼다하여 시루미기 마을이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숲재에서 몇장의 사진을 남기고 후미가 도착해 다시 도로를 건너 우측으로 조금 내려간 곳에서 좌측 시멘트 임도를 타고 오르며 맥 잇기 산행을 진행한다.
시멘트 임도 들머리 우측에는 전못대 하나가 서 있고 그 앞에는 기원정사란 입간판이 서 있다.
그곳으로 조금 올라 시멘트 임도가 우측으로 꺽여 돌아가는 곳에서 잠시 숲재를 내려보고 또 몇장의 사진을 더 남겨 본다.
우라생식마을로 통하는 시멘트임도가 어딘지 모르게 자꾸만 멀어지는 기분이다.
시멘트 임도가 우측으로 휘어 돌아가는 곳에서 등로는 다시 좌측 능선으로 이어지지만 계속 임도를 타고 올라도 다시 그 임도와 만나기에 후미로 올라오는 종주대는 그냥 시멘트 임도르를 타고 오르도록 한다.
조금은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타고 한동안 오르니 다시 이마에선 굵은 땀방울이 흐리기 시작하고 소나무가 우거진 등로를 타고 정상부로 오르니 더욱 많은 소나무 군락지가 펼쳐져 있다.
아무 표식도 없는 정상부의 부드러운 솔잎 등로를 타고 넘으니 저 멀리 다시 잠시 전 헤어졌던 임도가 나타나고 그 임도를 타고 올라온 종주대들도 다시 만나게 된다.
다시 만난 임도를 타고 좌측으로 계속 진행한다.
잡목이 임도 주위에 자라고 있다가 문득 멋진 소나무가 반기는 곳도 지나 계속 올라가니 임도가 우측으로 휘어져 올라가는 곳에 옛날 건천농장 철조망 정문이 굳게 닫힌채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 철조망 앞에서 다시 등로는 좌측 능선으로 이어지고 한동안 가파른 오르막 된비알을 타고 오르는데 등로 우측으로는 건천농장 철조망이 계속 따라 올라오고 있다.
건천농장 철조망을 타고 올라 정상부에 도착하니 등로 좌측 잡목 사이로 지난 구간 어렵게 올랐다 내려온 관산과 양계장 그리고 만불산 불상이 아스라히 펼쳐져 있고 그 좌측 나즈막한 능선이 끊어질듯 이어지며 낙동정맥 마루금을 이어오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 온다.
그 아래에는 경주의 천촌리와 서오리 그리고 도계리가 펼쳐져 있고 그 가운데 군데 군데 만들어진 저수지엔 푸르디 푸른 물들이 산객의 마음을 정화시키듯 놓여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조망이며 지나온 낙동정맥 마루금이 아닐 수 없다.
잠시 능선을 타고 걸어가니 멋진 소나무와 바위들이 보이고 다시 나타나는 넓은 임도를 가로질러 반대편 능선으로 올라 계속 정맥 산행을 이어간다.
그곳에서 잠시 더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바위들이 너부러져 있는 부산성 서문에 도착해 주위 풍경을 사진에 담아 본다.
삼국통일의 정신이 깃든 부산성의 자료를 찾아 보니 이 산객이 알고 있던 중요성보다 훨씬 더 중요한 성이였음을 알게 되였다.
사적 제25호로 지정된 부산성은 백제가 멸망한 3년 후인 663년 정월에 착공하여 3년뒤에 완공하였다.
부산성지(사적 제25호)는 건천읍 오봉산에 위치하며 동경잡기에 문무왕 3년에 축성하였다고 기록되었고 화랑 죽지랑과 득오곡의 신의와 우정에 대한 사연이 전해진다.
효소왕 때 화랑 죽지랑의 낭도로서 득오곡이 있었다.
어느 날 득오곡이 안 보여 찾았더니 모량부의 익선이 득오곡을 부산성의 창직으로 임명했단다.
죽지랑은 낭도들과 함께 음식과 술을 준비하여 득오곡에게 먹이고 익선에게 보내줄 것을 요청했으나 익선은 거부하였다.
익선은 말안장을 받고서야 풀어주니 조정의 화주(화랑들을 관리 함)가 익선의 악행을 벌하려고 하였으나 익선은 도망가고 아들이 잡혀왔다.
화주는 아들을 성 안의 못에서 악행을 씻도록 하였더니 겨울이라 동사하였다.
효소왕도 익선에게 분노하여 모량리 사람은 벼슬과 승려에서 전부 내 쫒았다.
신라시대에는 탐욕과 불의를 색출하여 맑고 깨끗한 세상을 만들려고 국왕까지 나섰음을 알 수 있다.
화랑과 낭도사이도 신의와 우정으로 맺어져 화랑도의 정신이 싹텄다.
득오곡의 모죽지랑가에는 죽지랑에 대한 사모의 정이 잘 표현되어 있단다.
성의 둘레는 7.5km에 이르고 넓이는 100만평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부자산성이다.
부산성 축조당시 의상대사가 예언하기를 성 안에다 주사암을 두면 신라는 영원히 망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으나 주사암을 밖에 두고 산성을 쌓았다.
결국 대사의 예언대로 신라는 망하고 말았다.
부산성 서문을 지나 조금 더 진행하니 등로 좌측인 북동쪽으로 경주의 오봉산 또는 부산이라 불리우는 산이 고랭지 채소밭 넘어 멋진 형상으로 다가와 있다.
전국에 많은 이름의 산이 있지만 이곳 경주의 오봉산처럼 많은 전설이 남아 있는 곳도 없을 듯 하다.
오봉산의 높이는 688미터로 여근곡으로 산을 타고 정상에 올라 부산성으로 내려오는 코스는 천년고도 경주의 역사와 전설을 느낄 수 있으며 산세와 조망도 뛰어나다.
등산은 건천읍 신평 2리를 기점으로 여근곡 입구에서 마을로 들어가 유학사로 가 앞마당에서 여근곡에서 솟아나는 샘물인 옥문지 약수를 맛 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당을 건너 산속 오솔길에 들어서면 636년 선덕여왕이 매복한 백제군을 섬멸시켰다는 여근곡이 나온다.
울퉁불퉁한 고갯길을 걸어 능선에 오르면 오른쪽으로 바위전망대가 있다.
정면으로는 화랑을 느낄 수 있는 부산성의 넓은 평원이 오른쪽으로는 정상이다.
정상에는 1300여 년 전에 의상이 창건했다는 작은 사찰 주사암이 있다.
여근곡을 찾아 보니 여근곡은 선덕여왕의 지기삼사에 관한 전설 중의 하나에서 유래하는 지명이다.
636년(선덕여왕 5) 여름에 영묘사 앞 큰 연못인 옥문지에 난데없이 두꺼비들이 모여들어 싸우는 일이 생겼다.
모두 궁금히 여기는 가운데 선덕여왕이 해석하기를 두꺼비의 눈이 성난 것같이 생겼으므로 병란이 날 조짐이라 하고 알천과 필탄 두 장군을 불러 2,000명의 군사를 주어 경주 서쪽에 있는 여근곡에 가서 백제의 복병을 치게 하였다.
두 장군이 여근곡에 이르니 백제의 장군 우소가 거느린 500여명의 복병이 있어 쉽게 물리쳤다.
이것은 옥문을 여근으로 해석하여 여근은 음이므로 남근이 여근 속으로 들어가면 토사한다는 음양설을 인용하여 해석한 것이다.
여근곡의 위치는 자인에서 경주로 가는 길목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에는 마곡산 밑의 회곡치가 있었던 곳으로 지형의 생김새로 보아 여근곡이었을 것으로 본다.
또한 오봉산에 있는 주사암도 찾아 본다.
경상북도 경주시 서면 천촌리 오봉산 꼭대기에 있는 절로서 불국사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주암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조선 후기에 세워진 정면 3칸과 측면 2칸의 영산전과 관음전 그리고 삼성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쪽은 탁 트여 부산성이 한눈에 들어오며 나머지 삼면은 바위로 둘러싸여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 절에 얽힌 설화가 전해온다.
신라 때 한 노승이 밤마다 자신이 사는 동굴로 임금이 아끼는 궁녀를 데려가자 화가 난 임금이 궁녀에게 주사(짙은 붉은 빛의 광택이 있는 광물로서 정제하여 연료나 한방의 자료로 씀)로 굴 옆 바위에 표시를 해놓으라고 일렀다.
궁녀가 임금의 말대로 주사병을 던져 바위에 물을 들여놓자 다음날 임금이 군사들을 동원하여 노승이 있는 동굴을 에워쌌다.
그 순간 노승이 주문을 외우니 순식간에 신병 수만 명이 등장하여 노승을 보호하였다.
임금은 부처가 노승을 보호함을 깨닫고 노승을 국사로 모신 뒤 바위 옆에 절을 지어 주사암이라고 하였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찾은 자료를 읽는 것만으로도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오봉산에 올라 직접 몸으로 느끼고 눈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래 본다.
북동쪽으로는 오봉산이 그리고 동쪽으로는 용림산과 구미산 넘어 금오산과 토암산이 우뚝 솟아 있다.
역사의 숨결을 느끼며 모두 한번 느긋하게 올라 선조들의 삶을 조명 해 볼 수 있기를 바라는 시간이기도 하다.
앞으로는 진행해야 할 고랭지 채소밭 넘어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억새가 눈부시다.
오랫만에 다시 만나는 고랭지 채소밭이 짠한 마음으로 가슴에 박히는 순간이기도 하다.
잠시 고랭지 채소밭 사이로 드러난 서면의 들녘 넘어 관산이 우뚝하고 그 좌측으로 돌고 돌아 나즈막하게 이어지고 있는 정맥 마루금이 힘겹게 이어져 오고 있는 모습도 들어 온다.
그 넘어 저 멀리 우측으로는 운주산과 도덕산 그리고 천장산과 어래산 줄기도 희미하지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지나고 나면 모두 추억이 되고 역사가 되는 우리 산하, 그저 바라보고 가슴에 담아 갈 수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잠시 능선을 넘어 나즈막한 무명봉을 넘으니 그곳에도 역시 드넓은 고랭지 채소밭이 펼쳐져 있지만 수확하지 못하고 밭에 너부러져 있는 무우를 보니 가슴이 답답하고 멍해져 온다.
농사 일을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또 어떤 고통이 있었는지 잘 알고 있기에 그 농사일을 한 수확물을 밭에 그대로 놔 두는 농부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오는 시간이다.
모두 즐겁게 일하고 모두 공평하게 잘 살아 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이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무겁게 진행하는 산행 시간이 되였다.
그 무우 하나를 뽑아 먹어 보지만 얼어 버린 무우에서는 단맛이 아닌 쓴맛만이 입안 가득 퍼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추위에 버려진 무우밭을 긴장하며 우울하게 통과하니 다시 나즈막한 무명봉을 넘어 이제부터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멋진 억새능선이 펼쳐지고 남동쪽에서 비춰주는 강렬한 아침 햇살을 받아 더욱 고혹적인 자태를 흔들거리고 있다.
전국의 수많은 억새 산행을 다녀봤지만 어딘지 모르게 인공적인 냄새가 물씬 풍겼었는데 이곳에서 만난 억새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에서 다시 어릴적 죽마고우들과 뒷동산에 올라 억새인지도 모르고 뛰어 놀던 시절을 회상해 보는 순간이다.
서걱거리는 억새 소리를 들으며 걸어가는 발길이 상쾌한 기분으로 바뀌며 세상에서의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묻어 보는 순간이기도 하다.
잠시 더 진행하며 억새 능선에서 등로 좌측을 바라보니 동해 저 멀리 경주쪽으로 용림산과 구미산이라 생각되지만 확신은 없는 멋진 능선 하나가 지나가고 그 넘어 가물거리는 금오산과 토암산이 경외롭게 펼쳐져 있다.
다만 기온이 오르면서 박무가 드리워져 그 아름다운 금오산과 토암산을 사진에 담을 수 없음이 안타까운 시간이다.
맥 잇기 산행이 마무리되면 내려가 한번쯤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올라 이곳을 바라보며 오늘을 추억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역시 강렬하다.
여전히 아름다운 억새가 서걱거리며 바람결에 울고 있는 소리도 정겹게 다가오는 순간이다.
다시 좌측에 텅 빈 고랭지 채소밭을 두고 억새밭을 따라 네려가니 저 앞으로 나즈막한 봉우리 하나가 보이고 그 좌측 능선에도 전부 고랭지 채소밭으로 변해 버렸다.
그 능선을 타고 종주대들이 오르는 모습이 보인다.
그 능선 우측으로는 저 멀리 평범하게 보이는 720봉 헬기장과 753봉 갈림 삼거리 봉이 펑버짐하게 솟아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 온다.
급하지 않게 제일 후미로 진행하며 앞서 전진한 종주대를 따라 걸어보는 시간이다.
나즈막한 봉우리를 앞에 두고 안부에 내려섰다 바라보니 많은 띠지들이 좌측 고랭지 채소밭이 아닌 우측 능선쪽으로 달려 있고 나부끼고 있다.
하지만 그곳으로 오르나 이곳 고랭지 채소밭 가장자리를 타고 오르나 또 만날 것 같아 고랭지 채소밭 가장자리를 타고 우측에 무명봉을 타고 올라 본다.
잠시 올라 방금 전 지나 온 마루금을 뒤돌아 보니 환상의 고랭지 채소밭 좌측으로 억새밭이 열려 있다.
이제 완연한 겨울임을 알리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고랭지 채소밭 가장자리를 타고 오르니 능선에서 등로는 다시 우측 억새밭으로 이어지고 그 억새속으로 들어가 잠시 더 진행하니 무명봉으로 잠시 오른다.
그 무명봉에 오르니 정상에는 커다란 구멍이 파여진 정상으로서 사진 한장 남기고 내려가니 돌담이 쌓여 있는 부산성 남문에 도착을 한다.
몇명의 종주대들이 그 부산성 돌담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도 들어 온다.
이제 등로는 돌담을 내려서며 좌측으로 크게 꺽어 내려가도록 되어 있다.
남문에서 잠시 내려가니 다시 앞으로 올라야 할 720봉 헬기장과 그 우측 저 멀리 753봉 정상이 부드럽게 펼쳐져 있다.
멋진 조망 한번 구경한 후 내려가니 안부를 지나 이제부터 소나무를 식재해 놓은 아름다운 소나무 군락지를 타고 완만한 오르막을 오르게 되어 있다.
후미들도 한 그룹이 되어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며 그 소나무 군락지를 따라 오르니 기분마저 상쾌함을 느끼는 순간이다.
그렇게 완만하고 부드러운 등로를 타고 소나무 솔잎을 밟으며 올라가니 나즈막한 구릉을 넘어 720봉 헬기장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배낭 내려 놓고 잠시 쉬면서 지나온 사룡산과 우라생식마을을 뒤돌아 본다.
그 사룡산 좌측 아래로는 사룡산과 이어진 구룡산이 우뚝 솟아 있고 그 아래로 발백산이 시원하게 드러나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저 멀리 대구쪽 팔공산과 비슬산을 찾아 보지만 희미한 박무 현상으로 비슬산까지는 찾지를 못하였다.
한동안 쉰 다음 다시 배낭 메고 헬기장을 떠나 본다.
헬기장을 떠나 잠시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정상에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751봉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이미 산불감시요원 한분이 올라 와 계시고 종이와 연필을 꺼내 한사람이 대표로 주소와 이름을 적으라 하신다.
모두 적은 후 둘러보니 나뭇가지에 청천봉이란 안내판이 보이고 그 아래에는 나무 의자도 보인다.
그 어디에서도 청천봉을 찾을 수 없어 아쉬웠는데 그 이름이 정말 그곳 751봉의 이름에 맞기를 바랄 뿐이다.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751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참으로 멋지고 아름답다.
남동쪽 저 멀리 지금부터 타고 내려가야 할 낙동정맥 마루금이 나즈막하게 내려 앉고 그 마지막 아래에 숨어 있는 당고개가 있으며 그곳에서부터 꽤 많은 땀방울을 요구하는 단석산이 우뚝 솟아 있다.
참으로 가까운듯 하면서도 먼 단석산, 오늘은 저 단석산을 넘어야만이 마무리가 될 것이다.
그 단석산 우측으로 돌아가니 다음 구간 올라야 할 마루금이 넘실거리고 그 우측 가장자리로 2개월 전 다녀온 영남알프스 가지산 구간이 희미하게 드러나 있다.
정남쪽으로는 늘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영남알프스의 고헌산과 가지산 그리고 운문산 지나 우측으로 억산까지 깨끗하지는 않지만 분별이 될 정도로 펼쳐져 있다.
몇번인가 내려 와 걸으며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던 영남알프스 가지산과 운문산 구간, 낙동정맥 산행을 하면서도 2개월 전에 다녀온 가지산이기에 더욱 특별히 남아 있는 풍경이기도 하다.
지금은 맥 잇기 산행에 몰입하다 보니 자주 내려 갈 기회가 없었지만 앞으로 한가해지면 다시 찾아 내려 갈 기회가 많이 있을 영남알프스 구간이다.
751봉 청천봉이란 안내판이 붙어 있는 봉우리에서 잠시 주위 조망을 즐긴 후 좌측으로 크게 꺽어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 본다.
잠시 내려가니 다시 등로는 평평한 등로로 바뀌고 낙엽이 많이 떨어져 쌓여 푹신한 등로로 변해 있다.
참으로 편안한 몸과 마음으로 그 낙엽을 밟으며 전진하니 등로 좌측으로 바위군이 나타나고 그 옆을 돌아 계속 진행을 한다.
다시 등로는 완만한 내리막 길로 변하고 마루금 좌측으로는 자작나무를 식재한 거대한 산자락이 올려다 보인다.
독고불재라 불려지는 어두니목장 안부쪽으로 조금씩 더 급해지는 마루금을 타고 내려가다 보니 등로 좌측으로 민가 같은 집 한채가 보이고 그 주위엔 온통 자작나무 식재 지역이다.
꽤 넓은 지역에 식재된 나무들을 바라보며 몇년이 지난 후 다시 올라 커다란 나무로 변한 모습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까 하는 마음이다.
또한 나이 들어 저렇게 나무를 심어 놓고 필요할 때마다 현금화 시켜 편안하게 살 수 있다면 최고의 삶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는 시간이다.
다시 조금씩 더 가파라지는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오니 등로 좌측에서 공사 소음이 들려오고 살펴보니 거대한 영남채석장이 들어서 있어 산자락 하나가 통째로 사라지고 있는 현장에서 울리는 공사소음이다.
맥 잇기 산행을 하면서 봤던 몇군데의 채석장 못지 않게 거대한 영남채석장, 산자락 하나를 통째로 들어 내고도 아직 또 파내야 할 바위들이 그렇게 많은지 쉴새없이 돌아가는 공구들을 바라보니 왠지 모를 서글품이 묻어 난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 사라지는 산자락이지만 공사 완료 후 최대한 자연친화적으로 복원시켰으면 하는 바램이다.
잠시 산자락 하나가 사라지는 영남채석장 공사장을 내려오니 바로 눈 앞에는 어두니 목장의 초원과 건물들이 보이고 드넓은 초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한우들도 보인다.
구제역이라도 발생하면 진행하기 어려운 맥 산행이 되겠지만 오늘만큼은 그저 한가롭게 전원 생활을 즐기는 평화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시간이다.
목장주도 그 남름의 고충과 고민이 있겠지만 대도시에서 느끼는 삶의 팍팍함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어두니 목장을 내려다 보며 한동안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오니 다시 넓은 들에는 정원수를 가꾸는 소나무 분재들이 한가득 심어져 있다.
그 소나무 사이를 타고 임도로 내려와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가니 임도 좌측으로는 낙엽송이 일렬로 길게 심어져 또 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다.
인간이 다듬어 놓은 그 어떤 예술품보다 더 아름답고 멋진 자연 그대로의 예술품을 감상하는 기분으로 걸어 내려오니 독고불재 안부 좌측으로 어두니목장 정문이 나타나고 안내판 하나가 걸려 있다.
이제 다시 어두니 목장 입구를 지나 낙엽송 임도를 타고 진행하니 능선으로 등로가 이어지고 생각보다 가파른 오르막 된비알이 종주대의 의지를 시험하고 있다.
등로에는 녹슨 철조망이 왔다갔다 하면서 쳐져 있고 한동안 이마에 굵은 땀방울 흘린 후 뒤돌아 보니 방금 전 내려 온 751봉에서 부터 내려 온 마루금이 선명하고 그 아래 안부에는 어두니 목장이 내려다 보인다.
그림같은 풍경에 된비알 오르는 어려움을 잠시 참고 망중한을 즐겨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한동안 비지땀을 흘리며 오르니 651.2봉에 도착하고 가쁜 호흡을 진정시키며 심호흡 몇번 해 본다.
오늘 오름 등로 중 가장 어렵게 오른 된비알 이였다.
이곳에서 등로는 우측으로 90도 꺽여 진행되고 등로에는 여전히 깊은 낙엽이 쌓여 있다.
우측 잡목 사이로 조금씩 보이는 사룡산에서 751봉까지 이어진 4개의 높은 봉우리가 연봉이 되어 이어진 모습도 눈에 들어 온다.
이제 등로에는 낙엽 뿐만이 아니라 제법 큰 바위들도 자주 눈에 들어 오기 시작한다.
682봉으로 가는 등로는 낙엽과 큰 바위 그리고 잡목이 어우러진 등로이다.
낙엽속에 파묻힌 바위와 나무 뿌리가 악마의 손처럼 위험을 내포한 등로를 조심히며 진행하니 등로 우측 잡목 사이로 잠시 비슬지맥 분기봉에서 사룡산 그리고 600봉과 751봉으로 이어진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 온다.
그 아래에는 남양목장과 건물들이 내려다 보이는 참으로 평화로운 풍경이 펼쳐져 있다.
그렇게 자연을 즐기며 지나온 마루금을 조망하는 즐거움으로 진행하다 이번에는 등로 좌측을 보니 송선리 송선저수지와 민가들이 또한 조용하고 평화롭게 펼쳐져 있다.
그 줄기를 타고 단석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고도를 높히며 줄지어 늘어 선 모습도 들어 온다.
내려다 보이는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마을은 약 400여년전 임진왜란 후에 오천정씨가 이곳에 정착을 하면서 소나무밭을 개간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여 송전이라 하였다고 하는데 마을로는 옛날 복두암 선인대에 8선녀가 매일밤 내려와 중업암 용정에 목욕하며 놀다가 올라갔다라고 해서 선동이라 불려졌다는 선동마을, 신라 때 병사들이 주둔했으며 병기를 보관하고 창고를 지은 자리라 하여 창리라고 하였다 하며 혹은 창터, 말천, 달래, 달래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달천창, 약 150년 전부터 화전민들이 나무를 치고 이 마을을 개척하여 정착하였으며 1300여년 전 신라가 백제의 침공에 대비했던 산성이 이곳 에 있으므로 마을 이름을 산성이라 했다는 마을과 약 300년 전 경주이씨가 마을을 개척할 때 신라시대의 절터가 있었다 하여 절골 혹은 사곡이라고 불렀다는 마을 및 신라 때 위증이라는 당 태조의 신하가 이 마을에서 수도하였다고 하여 우중골이라고 부르다가 송산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인 고로 구름이 덮히고 어두워지면 곧잘 비가 몰려온다고 하여 우징곡 또는 우중굴이 되었다는 마을등이 있는 곳이다.
그렇게 좌우 풍경을 감상하며 낙엽 쌓인 바위 등로를 타고 넘어 682봉에 도착하니 그곳에서도 등로 우측으로 지나온 봉우리들이 연봉을 이루며 마지막 산객의 마음을 달래주는 듯 하다.
이제부터 내리막 등로를 타고 땅고개까지 내려가면 버스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몇번의 오르고 내린 등로를 타고 왔지만 651.2봉에서 682봉까지느 크게 지루하지도 않고 기분좋은 산행을 할 수 있었던 구간으로 기억된다.
682봉에서 부터는 다시 가파른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는데 등로 주위에는 벌목한지 얼마되지 않은듯 많은 벌목된 나무들이 어지럽게 너부러져 있다.
벌목된 내리막 등로를 타고 한동안 내려오니 저 앞에 넓은 공터를 지나 묘지가 보인다.
내려가 살펴보니 오천정씨 묘지이다.
오천정씨 묘지를 통과해 내려가니 오리재 안부에 도착을 하는데 별 특징은 없다.
무심결에 진행하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곳인데 산내면 감산리 마을 유래를 찾아보니 이곳은 다른 마을에 비해 산이 높지 않고 아름답게 생겼다하여 감산이라 칭한다는 이야기이다.
오천정씨와 오리재 안부를 지나 계속 내려가니 다시 등로 좌측에 영일정씨의 가족묘지처럼 보이는 많은 수의 묘지들이 나란히 줄지어 있다.
사진 한장 남기고 조금 더 임도 타고 내려가니 어두지 임도에 도착해 좌측에 전봇대 하나가 서 있는 방향으로 90도를 특ㄹ어 좌측으로 내려가 본다.
이제 당고개까지는 평이한 등로라 생각했는데 언제 맥 잇기 산행의 등로가 편안함을 주웠던가.
어짜피 398.9봉의 삼각점을 담아야만이 당고개로 내려가는 것을 허락 할 것이다.
잠시 임도를 타고 100여미터를 내려가니 마루금은 직진의 넓은 임도를 버리고 우측의 능선으로 접어들며 잘 정비된 또 다른 임도를 타고 진행하도록 되어 있다.
이곳 어두지 임도를 산내면 감산리에서 찾아보니 신라때 전란으로 왕자가 피신하고 있던 곳으로 황자동이라 하다가 이를 은폐하기 위해 지형이 물고기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어머리 또는 어두란 이름으로 붙여졌다는 설이 내려온다
100여미터의 해발고도를 올려야 하기에 쉽게 생각을 했지만 체력적인 부담으로 그곳을 오르는 등로에도 많은 땀방울을 흘려본다.
넓은 임도같이 잘 정비된 등로를 타고 오르다 갑자기 좁은 능선 등로로 바뀌어 잡목을 헤치고 오르니 나즈막한 봉우리 정상에 도착을 하고 그곳 한가운데에 박혀 있는 삼각점을 담아 본다.
지도를 살펴뵈 이곳이 바로 396.9봉 정상으로 이제 내리막 등로만 타고 진행하면 당고개에 도착할 것이다.
396.9봉에서 다시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등로에는 많은 소나무 군락지가 펼쳐져 있다.
한동안 그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차량들이 통행하는 소음이 들리기 시작하고 곧이어 20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절개지 위에 도착해 당고개 풍경을 담아 본다.
바로 발 아래에 20번 지방도로가 보이고 우리가 타고 온 미니버스도 보이며 그 넘어 당고개휴게소 건물들이 보인다.
절개지에서 우측으로 나 있는 콘크리트 수로를 타고 우회하며 내려가니 등로는 20번 지방도로로 연결되고 그 우측에는 당고개 버스 정류장 표시와 당고개 공원이 보인다.
그곳에서 도를 건너 철조망이 쳐진 앞에 세워진 산내면 이정석을 담은 후 살펴보니 산행 들머리는 이곳 옆에 나 있다.
이곳 경주시 산내면은 가도가도 산이요 봐도 봐도 하늘뿐인 말 그대로 산속의 고을로서 지리적으로는 남쪽으로 울산시 상북면과 연접하고, 동남쪽엔 내남면, 서쪽으론 청도군 운문면, 북쪽으로는 영천시 북안면과 이웃하고 낙동강 상류인 동창천이 면 중심을 관통 하고 대구시민의 식수원인 운문댐 상류에 위치한 산천어, 꺽지, 피라미, 빙어등 민물고기가 많은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고장이다.
산내면 이정석을 뒤로 하고 경주쪽으로 조금 걸어 고갯마루로 올라가니 저 멀리 당고개휴게소 건물들이 보이고 좌측으로 우리가 타고 온 미니버스도 보인다.
그 버스에 도착해 기사님이 준비한 시원한 맥주 한잔 마시고 불필요한 물건들은 차량에 두고 간단히 쌕에 필요한 물건만 담아 다시 단석산을 향해 산행 준비를 한다.
이곳 당고개는 땅고개로 많이들 불려지고 있으며 휴게소 이름도 땅고개 휴게소이지만 산내면 자료를 찾아 보면 당고개가 맞을듯 하며 당고개 버스정류장과 당고개공원으로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경주시 산내면과 건천읍을 이어주는 20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당고개는 산내쪽에 당집이 많이 있어 당고개란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다.
이 고개를 기준으로 건천천과 청도천이 갈라지는 분수령이기도 하다.
원 정맥 등로는 산내면 이정석이 있는 철조망 옆으로 들어가 시작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이곳 당고개에 도착해 살펴보니 20번 도로가 생기면서 절개지가 만들어졌고 그래서 산내면쪽으로 조금 내려간 곳으로 내려와 당고개휴게소를 들리지 않고 진행할 경우 그곳이 맞을 듯 싶지만 원 정맥 등로는 이곳 당고개 휴게소 옆 들머리가 맞을듯 싶다.
총 15명의 종주대중 7명은 이곳 당고개에서 탈출하고 나머지 8명만이 고통을 참으며 그 험난한 단석산 오름 등로를 향해 출발을 해 본다.
단석산 오름 등로는 초반부터 종주대의 의지를 시험하듯 가파르게 솟아 있다.
등로 자체는 부드러운 흙산이지만 오르막 등로는 가파른 된비알로 이뤄져 제대로 허리 한번 펴고 쉬어 가기도 힘이 들 정도이다.
총 8명의 단석산 등반 종주대 중 2명은 고통스럽다며 단석산을 포기하고 단석산 갈림길에서 정상 정맥 등로를 타고 맥 산행만 이어간다는 말에 이제 자신과의 사투를 시작해 본다.
당고개에서 단석산까지 총 3.4 Km 거리인데 첫 500미터 올라온 곳에 서 있는 이정표를 만난다.
다시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타고 계속 굵은 땀방울을 흘려 본다.
앞서 진행하는 5명의 종주대는 군대 산악 훈련을 받고 있는 젊은 장병들보다 더 빠른 속도로 그 가파른 오르막 된비알을 치고 오른다.
사진 한장 찍는 사이 10미터 아니 20여미터 이상씩 거리가 벌어지고 이제 앞서 진행하는 종주대 5명은 꼬리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한동안 오르니 당고개에서 1 Km 올랐다는 이정표를 만나 사진 한장 남기고 잠시 심호흡 한번 해 본다.
다시 계속 이어지는 가파른 오르막 된비알을 타고 오르니 중간에 경주 국립공원 안내 플랭카드가 걸려있고 동식물 주위 안내판도 걸려 있다.
이곳이 경주 국립공원이란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많은 땀방울을 흘리며 빠르게 치고 오르지만 앞서 진행하는 종주대들의 꽁무니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오르니 662봉 정상부에 도착해 부드럽게 변하는 등로를 담아 본다.
다시 이어지는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당고개에서 1.5 Km 올랐다는 이정표를 만나고 나즈막한 안부를 향해 걸어 내려갔다 오르니 당고개에서 2.0 Km 올랐다는 이정표를 다시 만난다.
그곳을 지나니 소나무 군락지가 멋지게 이어지고 그곳을 통해 전진하니 다시 등로는 철쭉나무 군락지로 접어 든다.
이제 계속 완만한 오르막으로 이뤄진 등로를 타고 낙엽소리를 들으며 전진하니 당고개에서 2.4 Km 올랐다는 이정표를 지나 봉우리를 오르니 활엽수가 멋지게 도열해 산객을 맞아 준다.
그곳을 따라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조금 따라 내려가니 그곳에 단석산 갈림 삼거리 이정표가 서 있다.
단석산까지는 800미터 좌측으로 더 가야 정상을 만날 수 있고 낙동정맥 마루금은 우측 OK 그린연수원 방향으로 2.0 Km를 더 가야 오늘 산행이 마무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단석산을 다녀오기로 했으니 조금 더 고통속에 시간이 필요 할 듯 하다.
조금은 부드러운 등로가 이어지는가 싶더니 보이는 고도와는 달리 그저 평이하다.
그렇게 룰루랄라 잠시 더 진행하니 단석산 갈림 삼거리에서 400미터 진행해 왔고 단석산 정상까지 이제 400미터 남았다는 이정표를 만나고 부터 코가 땅에 닿을 듯 가파른 오르막 된비알을 타고 마지막 고통에 몸부림 쳐 본다.
왜 그리 힘들고 어렵게만 느껴지는지...
단석산 정상에 오르며 몇명의 등산객들이 머물고 있고 앞서 올라 온 낙동정맥 종주대들은 사진을 찍으며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자리를 펴고 있다.
잠시 주위 조망과 풍경을 둘러 본 후 자리 펴고 준비한 복분자 한잔과 빵 그리고 떡을 나누며 허기를 달래니 이제사 정상적인 풍경이 들어 오는 듯 하다.
해발고도 827미터인 단석산은 삼국시대 백제를 견제하는 신라 국방의 요충지였다
단석산은 경주옆을 지나는 경부고속도로를 사이에 두고 경주와 떨어져 있으나 경주 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산이다.
단석산 지역에 국보급 신라시대 불교 문화재가 널려 있을 정도로 많이 있기 때문으로 단석산은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 장군이 화랑시절 호연지기를 길러 삼국을 통일 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운 장소가 바로 이 산으로서 그래서 김유신 장군에 관한 설화가 유난히 많이 남아있다.
바위가 많고 부근에서 빼어날 정도로 높은 산인 단석산은 토함산, 선도산, 소금강산, 경주 남산인 금오산과 함께 경주 오악으로 불리기도 했다.
경주 5악도 맥 잇기 산행이 끝나면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돌아 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커다란 단석산 정상석 뒷편에는 단석산이란 이름을 붙게 만든 단석이 놓여 있다.
즉 단석산의 단석은 김유신 장군이 검으로 내려친 바위라고 하고 김유신 장군이 물을 마셨기 때문에 이름이 남은 음마지와 물을 마신 곳이 장군지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잠시 단석산의 전설을 담아 본다.
삼국통일의 공신인 김유신은 595년(진평왕 17년) 충북 진천에서 만노군의 태수이던 서현장군의 첫아들로 태어났다.
김수로왕의 13대손인 김유신은 15세에 화랑이 되어 17세에 고구려,백제의 잦은 침략에 삼국통일의 큰 뜻을 품고 서라벌 서쪽 산에 있는 석굴에 들어가 목욕재계하고 천지신명에게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말갈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자 4일만에 한 노인이 나타나 김유신의 인내와 정성을 가상히 여겨 비법이 담긴 책과 신검을 주었다고 삼국사지와 동국여지승람 그리고 동경잡기에 소개되어 있다.
김유신은 이 신검으로 고구려와 백제와 싸울 때마다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며 당시의 화랑들이 수도하던 산에서 김유신은 이 칼로 무술연마를 하면서 바위들을 베었다고하여 이름이 단석산이 되었다.
이렇게 단석산에 올라 많은 역사 공부를 해 보는 시간으로 남겨 본다.
이제 간식까지 먹고 느긋하게 단석산 정상에서의 조망을 즐겨 본다.
북동쪽으로는 경주시 건천읍이 가깝게 다가와 있고 그 주위로 나즈막한 경주의 산줄기가 건천읍을 병풍처럼 둘러치며 동해를 막아주고 있다.
그저 이렇게 바라만 봐도 너무나 아름답고 멋진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눈을 동쪽으로 돌리니 경주 시가지가 아스라히 보이고 그 우측으로 그토록 명성이 자자한 경주의 금오산과 토암산이 높은 하늘과 맞닿아 있는 형상으로 솟아 있다.
다만 기온이 오르며 시원한 모습을 감추고 있어 아쉽다는 생각이다.
그래도 여유롭게 저곳에 올라 오늘을 회상하며 그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눈을 남쪽으로 돌리니 산불감시초소 넘어 다음 구간 올라야 할 마루금이 끝없는 산그리메를 만들며 그곳에 머물러 있다.
백운산과 고헌산을 지나 가지산과 운문산 그리고 억산이 다시 그 옛날 홀로 오르며 황홀한 추억을 담았던 영남알프스를 알려 주고 있다.
저곳에 올라 오늘 서 있는 이곳 단석산을 보고 오늘 이 시간 이생각을 꺼집어 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서쪽으로 눈을 돌리니 운문호가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그 뒤로 화악산과 화왕산 그리고 저 멀리 대구쪽 비슬산이 가물거린다.
하지만 벌써 박무가 끼어 그 아름다운 조망을 방해하고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가슴속 깊이 그 풍경을 담아 보는 시간이다.
오르고 또 오르며 많이도 올랐다고 생각을 했는데 아직도 오른 산보다 올라야 할 산이 훨씬 더 많음에 즐거움과 함께 약간의 지루함도 느끼는 것은 왠일인지...
많은 시간 단석산 정상에서 즐겼으니 이제 하산을 해야 하는 시간이다.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앞서 내려간 종주대는 벌써 꼬랑지도 보이지 않고 달아나 버린다.
단석산까지 400미터 이정표와 단석산 갈림 삼거리 이정표를 지나 이제부터 OK 그린연수원 방향으로 방향을 틀어 전진한다.
평이한 등로를 타고 OK 그린연수원까지 1.6 Km 남았다는 이정표와 다시 1.0 Km 남았다는 이정표를 차례로 통과하며 진행한다.
나즈막한 무명봉을 오르락 내리락 진행하다 뒤돌아 보니 잡목 사이로 단석산 정상부의 무리둥실한 두 봉우리가 보인다.
다시 조금 더 진행하니 OK 그린 연수원까지 500미터 남았다는 이정표를 지난다.
그렇게 진행하며 자꾸만 뒤돌아 보니 무명봉 오르막 등로에서 잠시 잡목이 사라진 틈을 통해 저 멀리 단석산 정상부가 드러 나 있다.
참으로 온화하고 평범한 정상이건만 오름 등로는 왜 그리 가파르고 고통을 수반했던지 벌써 까마득한 과거로 돌아 간 느낌이다.
이제 오늘 산행 날머리도 얼마 남지 않은 거리이다.
먼저 내려간 종주대들은 이미 건천에 도착해 샤워를 하고 음식점에 도착을 했다는 전언이 들려 온다.
그렇게 빠르게 진행하다 마지막 봉우리에서 잠시 휴식 취하며 남아 있는 맥주 한잔으로 목마름을 달래 본다.
쉬는 동안 단석산에서 남쪽으로 이어져 내려온 산줄기 위에 멋진 바위가 보이고 그 바위 위에 더 멋진 소나무 몇그루가 자라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 온다.
카메라로 당겨 그 풍경을 담아 보니 참으로 멋진 바위와 소나무의 조화이다.
오늘 마지막 봉우리인 652봉에서 휴식을 끝내고 다시 평이한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갑자기 넓은 공터같은 억새밭이 나타나더니 곧이어 거대한 A자 형태를 하고 있는 건물 한동이 등로 옆에 서 있다.
이곳이 바로 방주교회인듯 하는데 몇명의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모습도 눈에 보인다.
왜 이런 거대한 교회가 이곳에 있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알려진 바에 의하면 어느 회사의 연수원 건물이였는데 교회로 개조되였다는 설이 있는 건물이다.
건물을 정면에 보고 좌측으로 90도 꺽어 내려가니 건물 앞에는 거대하게 잘 조성된 정원이 펼쳐져 있고 그 정원에는 잘 가꿔진 소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영화라도 한편 찍어도 될 정도의 그 정원을 타고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내려가 본다.
정원 우측에는 저수지가 보이고 앞으로는 다음 구간 올라야 할 535봉 안테나가 가깝게 다가 와 서 있다.
어둠속에 올라야 할 구간이기에 잠시 정상적인 산행 루트를 점검한 후 정원우측의 저수지 있는 쪽으로 내려가며 오늘 산행을 마무리 해 본다.
정원에서 내려 가며 바라 본 다음 구간 535봉 안테나가 있는 봉우리 방향이다.
다음 구간에도 다시 어둠속에 등로를 잘 찾아 걸어 갈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의 시간이 유익했음을 만세상에 공포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제부터 미니버스를 찾아 넓은 임도를 타고 우측 연수원 건물이 있는 곳으로 이동한다.
오늘 산행의 날머리이다.
몇동의 건물들이 보이고 그 앞에는 주차장이 준비되어 있다.
이곳에서 미니버스를 만나 젖은 옷을 갈아입고 먼저 내려가 기다리는 종주대들에게 달려 간다.
건천읍에 도착해 옛날 목욕탕에 들어가 소금끼와 땀을 닦아 낸 후 정식에 이슬이 한잔 나누니 이세상 모두가 우리것이 되였다.
먼저 내려 와 후미를 기다리며 기다려 준 선두팀들에게 감사한 마음 전하며 다음 구간에도 멋지게 다시 만나 함께 걸어 볼 수 있기를 바래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종주대 모두 수고 많이 하셨고요 몸조리 잘 하신 후 다음 구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정맥산행(완료) > 낙동정맥(완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낙동정맥 제15차 OK 그린 연수원에서 와항재까지 상세 산행 안내 (0) | 2011.12.06 |
---|---|
낙동정맥 제18차 주남고개에서 지경고개까지 산행 공지 (0) | 2011.11.30 |
낙동정맥 제14구간 아화고개에서 OK 그린연수원까지 상세 산행 안내 (0) | 2011.11.22 |
낙동정맥 제13차 시티재에서 아화고개까지 산행 후기 (0) | 2011.11.12 |
낙동정맥 제13차 시티재에서 아화고개까지 상세 산행 안내 (0) | 2011.1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