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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상류의 금산 천내리 어죽과 도리뱅뱅을 맛본 시간들

칠갑산 사랑 2011. 8. 3.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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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의 먹거리인 어죽과 도리뱅뱅

여름 휴가기간이지만 일이 바빠 제대로 된 휴가도 즐기지 못하고 잠시 짬을 내 대전의 처갓집에 내려가 금강 상류에 자리잡은 금산군 제원면 천내리의 인공폭포를 둘러보고 그곳에서 유명한 원골식당에 들려 어죽과 도리뱅뱅을 먹고 온다.

그곳에서는 꽤 유명한 어죽과 도리뱅뱅으로 원골식당 역시 유명세를 타고 있어 제법 멀리에서도 찾고 있는 식당이였다.

내부 인테리어나 식당 자체는 깨끗하거나 청결한 이미지는 아니였지만 음식맛은 제법 좋은 듯 보였다.

다만 매년 들리지만 올해에는 작년보다 값이 꽤 올랐다는 생각이다.

 

가는길

대전에서 대진고속도로를 타고 금산IC로 빠져 지방국도를 타고 제원면 천내리로 가다보면 보인다.

 

식당은

원골식당이고 전화번호는 041-752-2638번이고 주소는 충남 금산국 제원면 천내리 254-1번지이다

 

어죽과 도리뱅뱅 가격은

어죽은 1인분에 5000원이지만 도리뱅뱅은 후라이 한판에 7000원으로 기존 5000원보다 2000원 오른 가격이였다

 

맛은 ???

도리뱅뱅은 원래 빙어를 잡아 만들어 먹었다는데 요즈음엔 빙어가 없어 송사리나 피라미를 잡아 만드는 것으로 보였다.

맛은 매콤하니 먹을만 했으며 큰 멸치를 고추장에 볶아 먹을 수 있는 맛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어죽은 원래 국수를 이용하지만 이곳은 밥에 수제비를 넣어 만들고 있었으며 보기에는 꿀꿀이죽처럼 보였지만 맛은 일품이였다.

 

이곳 천내리는 ???

금강 상류지역으로 물이 맑고 깨끗했으며 그 금강 반대편 암봉에는 100여미터 높이의 인공폭포가 만들어져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제원면과 천내리를 금산군청에서 자료를 찾아 본다.

금산군 제원면은 ???

금산군내에서 곡창지대로 불리우는 제원면은 금산군에서 가장 넓은 들이 있으나 들보다는 산악지대가 많은 지역이다.
북쪽에는 산 높이 667m의 국사봉을 비롯하여 많은 산이 즐비하게 서 있는가 하면 동쪽으로는 산 높이 714m가 되는 산을 비롯하여 많은 산이 산맥을 이루고 서쪽으로는 발군산이 그리고 중앙에는 천앙봉이 우뚝 서서 어떻게 보면 온통 산악지대 같다.

남쪽에는 금강과 이에 합류하는 봉황천이 또한 북쪽에서 흘러오는 조정천이 합류하는 그 지역에 넓은 들을 조성하여 비교적 높은 지역에 위치한 금산군에선 들이 많은 편에 속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제원면의 총면적으로는 많은 들이 있는 편은 아니다.

남쪽 전라남도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 뜬봉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와서는 서쪽으로 방향을 돌린 금강의 강줄기가 제원면에 이르러서는 다시 북쪽으로 그 물줄기를 바꾸다가 마치 뱀처럼 꾸불꾸불 선을 그으며 동쪽으로 물줄기가 바뀌는 그 아기자기한 금강변이 제원면의 남쪽이 된다.

그러므로 산과 들과 강이 조화를 이루는 절경지가 많은 지역이 또한 제원면이다.

동쪽으로는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학산면과 접하고 남쪽은 부리면과 접하며 서쪽과 북쪽은 군북면과 경계를 나눈다.

인류의 정착은 신석기시대로 본다.

선사시대에 이미 제원면 금강변에는 인류가 정착하여 수렵으로 생활을 하였다는 증거로 제원면 천내리 부근에서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백제 때에는 두시아현에 속했으며 백제 멸망 후에는 백제 부흥군이 옹성하여 저항하였다는 토성도 있다.

신라 때는 이성현에 속했으며 신라 때 창건하였다는 신안사가 이 지역에 있으며 신라말기 경순왕의 발길이 잦았던 지역이기도 하다.

고려 때에는 처음에 부리현에 속했었다.

고려전기 성종 때에 관물의 수송, 도로의 정비전령기관으로 역관이 있었던 제원역이 들어서면서 제원면은 활발하게 개간되기 시작한다.

조선시대 초기 태종 13년(1413년)부터는 금산군에 속했었다.

백제 때에 이미 많은 사람이 드나들고 그 이전부터 취락이 형성된 지역이었으나 고려말기까지 정착한 씨족으로서 대를 잇는 가문은 없다.

현재 제원면에 거주하는 씨족들은 대개가 고려후기부터 조선시대를 전후하여 정착한 씨족들이다.

현재 제원면에 거주하는 집성 성씨인 상산김씨, 김해김씨, 진주강씨, 영산신씨, 옥천육씨도 이에 속하는 정착과정을 밟은 씨족들이다.

특히 금성골의 김해김씨는 처음에는 연산군조의 사화를 피하여 이 지역에 은둔한 것으로 전해온다.

고려시대 공민왕 때 홍건족의 침입을 피하여 남쪽으로 피난갔을 때 이 지역을 찾고는 능묘지로 지적하였다.

천내리 앞산 앞 금강가에 용호석이 서 있어서 명당자리가 많은 지역으로도 손꼽힌다.

용호석이 있는 부근에 흐르는 금강에는 철따라 고기가 잡히는 기현상이 일어나는데 3월에는 창사리가 잡히고 4월에는 꽃물고기가 5월에는 쏘가리가 여름철에는 자가가 가을철에는 모래무지가 잡혀서 깨끗한 물고기의 수확으로 식도락가의 입맛을 돋구는 지역이 또한 제원면이다.

조선시대 중기 임진왜란 때는 금강을 건너서 침범해 오는 왜군을 무찌르기 위해서 권종 군수와 오금산의 군사들이 피를 흘렸던 닥실의 저곡산성이 있으며 또한 칠백의사의 의병대장이 건넌 닥실나루도 여기에 있다.

조선시대 말기 영조 4년(1728년)에 일어난 정희량의 민란 때는 의병대장 나후명이 의병을 모아 난을 진압할 때 그 의병을 모았던 발군산도 여기에 있다.

또한 제원역의 명 찰방 허목이 어풍대를 만들고 민심을 수습하였다는 그 지역이 제원면이고, 조선시대 숙종 때 건립한 용강서원은 노론의 거목이 출입하는 서원으로서 그 명성이 있었으며, 삼정의 민란 때는 금산 고을까지 진격하여 농민의 권리를 주장한 그 민란의 발생지 또한 제원이다.

조선시대에는 금산과 진산에 대조해서 권력보다는 대중적인 생활영역을 보존하였으며 그러므로써 산간벽지에서 농민을 대변하는 여러 선비들이 정착한 지역이기도 했다.

국운을 어지럽히려 조정에 반기를 들고 여러 곳에서 동학이 일어났을 때 금산일원의 동학들이 운집하여 금산을 습격하고 나아가서는 정사의 시정을 요구했던 횃불 같은 동학란의 금산 중심지는 제원이었다.

 

금산군 제원면 천내리는 ???

제원면 용화리에서 강의 흐름을 서북쪽으로 그 방향을 바꿔 금강이 봉황천과 합류하면서 다시 동남쪽으로 그 방향을 꺾고는 여러 궁형을 이루면서 동북쪽으로 흘러가며 그 안쪽과 북쪽으로는 첩첩산중을 이루는 산악지대를 북벽처럼 막고 천내리는 자랑한다.

북쪽으로는 신안리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대산리와 남쪽으로는 용화리와 접하고, 동쪽으로는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과 경계를 나눈다.

금강변에 위치해 있으나 대체로 산악지대가 많은 지역이며 서쪽에 위치한 금산읍에서 영동에 이으는 국도가 있어서 금강변은 교통이 편리한 지역이나 북쪽과 남쪽은 교통이 아직도 불편한 상황의 지역이다.

인류의 정착은 선사시대로 본다.

백제 때는 부시이현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이성현의 지역이었다.

고려 때는 초기에 부리현에 속했다가 19대 명종 5년(1175)에는 감무가 관할하는 지역에 속했으며 25대 충렬왕 31년(1305)부터는 승격한 금주에 속했었다.

조선시대 초기 태종 13년(1413)부터는 금산군에 속했었다.

엣날에는 천내리에서 저곡리 개티로 건너다니는 나루가 있어서 이 나루를 천내나루라 하였으며 금산에서 금강변으로 이어지는 큰 길이 있어서 사람들의 왕래도 많았으며 금강변의 큰 나루였다.

지형이 웅장해서 명당자리가 많으며 한때 공민왕이 그의 묘터로 지목된 곳도 천내리에 있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강을 건너서 금산을 침략한 그 강기슭도 천내리에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부북면의 지역으로서 금강 안쪽에 위치해 있으므로 내안 또는 천내라 부르던 지역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