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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맥산행(완료)/계명지맥(대간·완)

계명지맥 마지막제2구간 신매고개에서 탄금대 달천 합수점까지 산행후기

by 칠갑산 사랑 2019.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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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충청북도 충주시의 계명지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2019년 11월 03일 일요일 당일 산행

산행날씨 : 하루종일 흐리고 저녁에는 약간의 비가 내렸으며 바람이 강하게 불었으나 미세먼지로 조망이 없었던 산행 날씨

산행온도 영상 07도에서 영상 18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신매고개(이정석, 531번 매남이길 2차선 포장도로)-전주이공 묘지-282.8봉-339.8 무명봉-바위등로 우회-378.4 삼각점봉-송전탑안부-387

                무명봉-415.7봉-바위등로-483.8 무명봉-발치-돌담계단-434 무명봉-465.3봉-김해김공묘-밀양박공묘-460.2 삼각점봉-채석장-절개지-

                448.3봉-430 무명봉-성황당 안부-시멘트 포장도로-비포장임도1-비포장임도2-비포장임도3-바위등로-로프구간-사유지출입금지판(604.8미터)-

                613.4봉-남산성 복원공사지역-헬기장-돌탑3개-남산(636.1봉, 정상석, 충주11 삼각점)-충주산성 안내판과 이정표(마즈막재 2.2 Km,

                재오개 0.8 Km, 샘골약수터 0.83 Km와 깔딱고개 1.28 Km)-성벽등로-나무계단-안전목책과 나무계단-비포장임도-484.3 무명봉-로프구간-

                비포장임도(충민공 임경업장군 일대기 설명판)-대전교통방송과 국익방송 및 남산임도(배수진을 치고 분전하는 신립장군과 8천용사 설명판) 

                이정판(마즈막재 2.0 Km, 재오개 3.0 Km와 석종사 5.5 Km)-방송국 철망-벤취1봉-409.9 무명봉-비포장임도(물류유통의 중심이 되었던 가흥창)-

                전봇대안부-비포장임도(6.25전쟁과 동락전투)-시멘트포장도로-송전탑-시멘트포장도로 이정표(등산로입구 1.51 Km, 충주산성 0.49 Km)-

                동구밖 과수원길 식당-충주무공수훈자공적비-마즈막재(531번 충주호수길 2차선포장도로와 안림로 2차선 포장도로 갈림삼거리, 충주호

                종댕이길 제1주차장)-대몽항쟁전승기념관-안전목책과 로프구간-바위너덜구간-나무계단-로프구간-530.6 무명봉-구급함과 계명산 119신고

                안내 제1지점-안전목책과 로프구간-전망대 이정표(계명산정상 1.4 Km, 마즈막재 0.9 Km, 계명산휴양림 1.4 Km)-로프구간-안전목책과

                로프구간-벤취쉼터와 계명산 119신고안내 제2지점-707.9봉 이정표(정상 0.8 Km,제1전망대 0.5 Km)-로프구간-바위지대-안전목책과 로프구간-

                무명안부-바위와 안전목책 및 로프구간-바위로프구간-이정표(정상 0.5 Km와 텃골 1.1 Km, 제2전망대 0.5 Km)-안전목책과 로프구간-헬기장-

                계명산(775봉, 정상석2개, 삼각점)-헬기장 위 이정표(막은대미재 4.3 Km, 마즈막재 2.6 Km, 범골과 범동 2.0 Km)-계명산 119신고안내 제4지점-

                돌탑안부 이정표(막은대미재 3.9 Km, 정상 0.4 Km, 주공7단지 3.2 Km)-이정표(막은대미재 3.6 Km, 정상 0.7 Km, 작은민재 1.8 Km)-안전목책과

                로프구간-안동권공묘지-485.6봉-이정표(웃돌고개 0.5 Km와 작은민재 1.2 Km, 정상 1.8 Km)-419.6봉(벤취쉼터들, 돌탑, 국가지점번호, 조망)-

                안전목책과 로프구간-무명묘지-낙엽송구간-이정표(연수동 0.5 Km와 작은민재 0.7 Km, 정상 2.4 Km)-300.7 무명봉-낙엽송구간-비포장임도-

                사유지 원형철조망-작은민재 안부-290.5봉-15번과 43번의 송전탑-무명안부-292.5 삼각점봉(충주421 삼각점, 벤취쉼터들, 조망)-안전철봉과

                로프구간-전망좋은곳-안전철봉과 로프구간-통나무계단-비포장임도 갈림사거리 이정표(막은대미재 0.5 Km, 사래실 4.4 Km, 약수터 1.2 Km와

                정상 3.8 Km, 연수정 1.0 Km와 연수주공 1.2 Km)-238.8 벤취쉼터1봉-풍경길 이정표-갈림삼거리 이정표(작은대미재 0.3 Km, 사래실 4.56 Km)-

                운동기구봉-막은대미재 설명판과 2개의 이정표(연수정 0.5 Km, 약수터 1.7 Km와 정상 4.3 Km, 공원묘지 0.3 Km, 연수주공 0.7 Km)-안전철봉과

                로프 및 계단등로-현위치번호 뒷골목산 01번 이정목-244.9 삼각점봉-인식불가 삼각점봉-금릉배수지-국민대로 6차선 포장도로-

                응골1길(개발로 우회도로)-능선진입(마루금 접속)-팽고리산길 2차선포장도로-능선진입-101.4 무명봉-144.1 무명봉-148.6 삼각점봉-

                아카시아 잡목구간-지독한 잡목구간-충원대로 4차선 포장도로-파라다이스 웨딩홀-충주세무서-E1주유소-철도 통과-시멘트 포장농로-

                칠금동마을-칠지마을회관 및 경로당-충주임마누엘교회-세계무술공원-칠금국민관광단지-능선진입-교장안동김공묘지-대문산(106.9봉, 감자꽃

                노래비, 동천권태응 설명판)-팔천고혼위령탑-충혼탑-충주 탄금대입구-충주문화원-95.3 마지막봉-탄금장례식장-달천과 남한강 합수점-

                산행종료

산행거리 : 신매고개에서 탄금대 달천 합수점까지 가끔 가시덤불을 헤치며 어렵게 진행하여 약 25.50 Km (스마트 폰의 Oruxmaps와 트랭글 기준)

산행트랙 : 20191103 계명지맥 제2구간 신매고개-달천 합수점.gpx (스마트 폰을 바꾼 이후로 자주 튀는 현상으로 실거리 측정에 어려움)

산행시간 : 대체적으로 등로는 뚜렸하고 좋았으나 고도 차이로 인해 어렵게 진행하여 10시간 59분 (07시 03분에서 18시 03분까지)

교통편 및 숙박 : 갈때 - 05:00 죠이랜드 찜질방에서 기상하여 샤워 후 출발

                                   05:30 죠이랜드 찜질방에서 나와 충주에서 가장 싼 콩나물국밥집에서 아침식사(4,000.-)

                                   05:50 애마를 몰아 탄금대장례식장 도착해 카카오 택시 호출

                                   06:25 카카오 택시로 신매고개까지 이동 후 산행 준비 (23,000.-)

                                   06:31 날이 밝기를 기다리며 주위 풍경을 사진에 담은 후 산행 시작

                         올때 - 17:25 탄금대 달천과 남한강이 만나는 합수점에서 산행 종료

                                   17:50 탄금대장례식장에서 애마 회수하여 가까운 충주스파렉스 찜질방에서 샤워 후 환복 (7,000.-)

                                   18:30 찜질방 근처 짬뽕생각에서 곱빼기 짬봉으로 저녁식사 (9,000.-)

                                   23:10 막히는 영동고속도로 덕평휴게소에서 약 1시간 30분 동안 꿀잠 후 무탈하게 귀가

계명지맥이란 ???

계명지맥은 백두대간 마패봉과 부봉 사이에 있는 745봉에서 가지를 쳐 북바위산(772.1봉), 석문봉(727봉), 망대봉(731.8봉), 대미산(681봉), 남산(636봉), 계명산(775봉), 광명산(148.5봉), 대문산(110봉)을 거쳐 충주시 칠금동의 탄금교에서 맥을 다 하는 약36.7 Km의 산줄기를 말한다.

   

 


이틀 연속 산행으로 약간의 체력적인 어려움을 느끼고 미세먼지로 조망도 없이 아쉬움을 남겼으며 산행 막바지에 가시나무 군락지에 갇혀 사투를 벌이며 힘들게 마무리했던 계명에서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현존하는 맥 잇기 산행에 대한 수많은 이론과 산행 트랙이 존재하지만 이 산객은 산경표와 신산경표를 보고 맥 잇기 산행을 처음 진행하였기에 가능하면 신산경표의 산행 이론에 따라 산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산줄기의 마지막 끝부분이 물과 만나는 지점인 합수점으로 가야한다는 이론 역시 그 어느곳에서도 올바른 정의를 내리지 못하였기에 이 산객은 옛 문헌에 나타난 이론인 관아를 기준으로 설정된 산줄기를 그 끝으로 하고 문헌에 나타나지 않은 관아 이후의 산줄기는 산행을 하는 산객 각자의 기준에 맞춰 진행하면 될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계명지맥 산행을 한 후 이 산행후기를 기술하면서 충청북도 충주시와 주변 지자체에 수록된 지명유래 및 네이버의 지식백과와 다음의 백과사전 그리고 산림청과 한국관광공사의 자료들을 참고하여 정리된 부분들이 있으며 이런 부분들이 혹시라도 지적재산권에 저촉이 되어 삭제나 변경이 필요한 경우 연락주시면 언제라도 즉시 삭제 및 수정해 드릴 수 있음도 알린다.


대중교통으로 어렵게 진행했던 어제의 기억으로 오늘 새벽 탑승하려던 버스도 확인해 보니 첫차 운행이 어려울 것 같아 마음 편히 택시를 이용해 계명지맥 산행을 마무리하기로 하니 차라리 마음은 편안하다.

산행 때문에 자주 내려오는 충주이기에 찜질방을 알아 보니 중심부에 충주 스파렉스 찜질방이 있지만 조금 더 사람들도 많고 잠자리가 불편해 늘 죠이랜드를 이용했는데 오늘은 왠일인지 이곳에 묵는 동안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았는지 누울 자리 찾기도 힘들 뿐만 아니라 스마트폰과 충전기의 충전을 하기 위한 전원 찾기도 쉽지 않다.

그래도 술을 마시거나 크게 코를 고는 사람없이 편안하게 잠을 자고 새벽 일찍 일어나니 몸은 조금 풀린듯 한데 어제 산행이 생각보다 어려웠는지 몸은 조금 무겁다는 느낌으로 시작하는 시간이다.

선답자들의 산행 후기를 확인하니 산행시간에 워낙 큰 차이가 있어 등로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단해 오늘은 조금 이른 시간에 시작해 가능하면 해가 지기전에 변수를 제거하고 어둠이 찾아들기 전 산행을 마무리하였으면 하는 바램으로 또 새로운 하루를 시작한다.


산행거리는 그리 긴 거리는 아니었는데 고도 차이가 났었는지 예전과 달리 오늘은 새벽부터 몸이 조금은 무겁다는 느낌으로 하루를 시작하니 역시나 산행 내내 어려움의 연속이다.

낮은 고도에서 시작하여 점점 고도를 높혀 충주 남산을 오르고 다시 마즈막재까지 최대한 고도를 낮췄다가 가장 높은 계명산으로 오르는 등로는 마지막 체력 시험장이 되어 버렸다.

다만 미세먼지라도 사라져 조망이라도 좋았으면 조금 더 좋은 조건으로 산행을 진행했겠지만 산행 내내 보이는 것 없이 올라치려니 힘만 들고 속도는 나질 않는다.

그래도 한발 두발 꾸준하게 걸어 많은 땀을 흘리며 오르니 계명산 정상부 헬기장에 도착을 하고 동쪽을 살펴보니 흐릿하게 내려다 보이는 충주호 넘어 얼마전 걸었던 천등지맥의 부대산과 주봉산이 보이고 그 뒤로 희미하게 조만간 올라야 할 갑산지맥의 부산도 겹쳐 보이는데 미세먼지가 아쉬운 시간이다.

그 우측인 남동쪽으로는 보여야 할 등곡산과 월악산 그리고 어제 걸었던 계명지맥의 대미산이 미세먼지의 박무속에 모습을 감추고 보여주질 않으니 기다리는 산객의 가슴만 타들어간 시간이기도 하였다.


계명산 정상에서 아쉬운 조망과 풍경을 둘러보고 서울에서 내려 왔다는 부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인사 드리고 이제부터 빠르게 걸어 내려가니 등로 옆으로 곱게 피어 난 단풍들이 다시 발목을 잡고 늘어진다.

자주 발걸음 멈춰 멋진 단풍을 사진에 담고 계속 내려가니 드디어 벤취쉼터 2개와 작은 돌탑 그리고 바위들이 보이는 419.6봉에 도착을 해 좌측과 앞으로 진행 방향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조망과 풍경들을 다시 살펴보지만 역시나 미세먼지로 인한 제한된 시야로 아쉬움만 남긴다.

서쪽인 진행방향으로 이제부터 걸어 진행을 해야 할 계명지맥 마루금이 좌측 충주 시내 방향으로 길게 이어지고 곧게 뻗어 있는 도로 끝자락에 오늘 산행을 마무리해야 할 탄금대 달천 합수점도 내려다 보이지만 짙은 미세먼지로 인해 뚜렷한 모습은 아쉽기만 하다.

그 넘어 남한강을 지나면 오랴ㅐ 전 걸었던 부용지맥과 가섭지맥도 희미하게 눈에 들어 오지만 사진으로는 앞의 부용지맥 산줄기만 보일듯 말듯 다가와 있다.

그래도 이틀동안 무탈하게 이곳까지 걸어 진행하여 그 마지막 산줄기가 강물에 빠지는 지점까지 확인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시야가 제한되어 아쉽지만 그래도 진행하는 산줄기의 끝자락과 오래 전 걸었던 산줄기를 살펴보며 잊었던 추억을 꺼내 보는 시간은 늘 설레이면서도 즐거운 시간임에는 틀림없다.

다시 올망졸망한 산책로 같은 등로를 타고 울긋불긋 곱게 물들어 떨어지는 단풍과 낙엽을 친구 삼아 조금은 빠르게 진행하니 드디어 벤취쉼터들이 설치되어 있고 인식이 불가능한 삼각점이 박혀 있는 292.5봉에 도착을 하니 진행 방향으로 마지막 계명지맥 마루금이 눈 앞으로 길게 펼쳐져 있고 그 끝자락 좌측으로는 달천이 남한강과 합쳐지는 합수점도 빤히 내려다 보인다.

그 합수점 넘어 저 멀리에는 흐릿하기만 했던 부용지맥의 산줄기가 조금 더 선명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그 뒤 가섭지맥 산줄기는 여전히 오리무중으로 공중에 떠 있는 상황이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그동안 걸었던 산줄기의 이름을 불러 줄 수 있음에 감사하며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내고 시원한 음료수로 갈증을 풀어 낸 후 다시 바쁜 발걸음을 옮겨 본다.


출발하려고 배낭 둘러메고 출발하려다 남쪽을 보니 충주시내 지나 오전에 올랐던 충주 남산이 우뚝 솟아 있고 그 우측 뒤로 송전탑들이 세워져 있는 대림산도 보이는데 역시나 미세먼지로 인해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고 보니 충주시를 좌측에 두고 우측으로 빙돌아 걸어 온 계명지맥 산줄기의 흐름을 이제서야 제대로 느끼고 살펴보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방금 전 올랐다 내려 온 계명산은 좌측 산줄기에 막혀 보이지 않는다.

이제 오늘 산행도 그 끝자락이 멀지 않음을 느끼며 이제부터는 비산비야를 타고 도심의 도로를 따르면 금새 탄금대에 도착하리란 예상은 아카시아 가시나무 군락지에 갇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이 되어 당황하기도 했던 시간이었다.


어제 계명지맥 제1구간을 무탈하게 마무리한 후 충주시내의 변두리에 있는 죠이랜드 찜질방에 들려 하룻밤 잘 머물고 새벽같이 일어나 충주시내에서 가장 싼 전주종가콩나물국밥집에서 따뜻한 국밥으로 아침식사를 하니 피곤한 몸이 조금은 풀리는 느낌이다.

원래 계획은 충주교통시내버스차고지에서 신매고개로 가는 6시 40분 버스를 이용해 가려고 했지만 학생들이 등교를 하지 않는 날에는 운행을 하지 않는다기에 어쩔 수 없이 애마를 몰아 이곳에서 가까운 탄금장례식장 주차장에 주차시킨 후 카카오택시를 이용해 산행 들머리인 신매고개로 이동하기로 한다.

다만 새벽 6시도 되지 않은 시간에 많은 젊은 청춘들이 술에 취해 이런 국밥집을 찾는 것을 보면 세상살기가 그리 녹록치 않음을 실감하는 시간이기도 하였고 이 산객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시간이었기에 많은 반성과 씁쓸함을 느껴 본다.


새벽 6시 쯤 탄금장례식장에 애마를 잘 주차시키고 배낭 둘러메며 카카오택시를 부르니 채 5분도 되지 않아 택시가 도착하고 그 택시로 어제 산행을 마무리한 신매고개에 도착을 하니 6시 25분을 넘어가고 있는데 도로 위엔 아직도 어둠이 남아 있어 잠시 주위 풍경과 조망을 살펴보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곧바로 산행을 시작하는 시간이 6시 31분을 넘어가고 있다.

신매고개는 충청북도 충주시 살미면 신매리에 있는 고개로서 신매리는 충주호와 가까운 곳에 자리잡은 농촌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매내미, 뭉골, 선돌배기가 있는데 매내미는 신매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옛날에 매화나무가 많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뭉골은 마을에 진씨들이 많이 살아서 묵은골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뭉골이라 불리며 선돌배기는 마을에 선돌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특산물로는 대학찰옥수수, 고추, 사과, 담배 등이 있다.

오늘 하루도 무탈하게 계획했던 탄금대까지 산행 완주 후 귀가할 수 있도록 마음속으로 빌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신매고개는 좌우측으로 도로를 내면서 절개지로 변하였고 그 절개지에는 철망을 설치해 놔 진행이 불가능하기에 서쪽 설운리 방향으로 내려가 철망이 끝나는 지점 우측으로 나 있는 비포장 임도를 타고 본격적인 계명지맥 마지막 제2구간을 출발한다.

약간 가파른 오르막 비포장 임도를 타고 숨가쁘게 오르니 오늘도 안개가 있는지 금새 온 몸이 더워지며 이마에선 굵은 땀방울이 흐르는데 기온은 어제보다도 더 올라간 느낌으로 진행한다.

잠시 후 전주이공 묘지들이 보이는데 비포장임도 같은 등로는 바로 이 묘지들을 설치하며 개설된 임도처럼 보인다.

그 묘지 최상단 능선으로 들어가니 평이한 등로가 열리는데 잠시 후 등로는 우측으로 휘어져 진행되고 좌측 가까운 곳에 지도상 286.8봉이 보여 잠시 올라가 보지만 잡목과 잡풀들만 보이는 평범한 붕우리이다.


그 봉우리에서 사진 한장 남기고 올랐던 등로를 타고 다시 내려 와 갈림삼거리에서 좌측 등로를 따르니 이곳도 역시 멧돼지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는지 소나무 몇 그루의 밑둥이 완전히 망가져 죽어가고 있다.

잠시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둔덕을 넘고 다시 길게 이어지는 낙엽 안부를 통과하니 바위 위에 뿌리를 내리며 힘겹게 살아가는 참나무 한그루가 눈길을 잡는다.

그곳을 지나 조금 더 전진하니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가 걸려있는 339.8 무명봉에 도착을 해 지점 확인을 하고 곧바로 출발한다.


그 무명봉을 넘으니 잘 보이지 않던 단풍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하고 잠시 눈맞춤을 하고 전진하니 잘려진 나뭇가지들이 등로를 가로막고 쌓여 있는 344.6 무명봉에 도착을 해 좌측으로 우회하며 통과한다.

그 무명봉을 넘어 안부를 지나니 바위암릉 능선이 길게 이어지고 그 위에 떨어져 쌓여 있는 낙엽으로 인해 진행에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렇게 그 바위암릉 지대를 조심하며 끝까지 올라가니 이끼가 끼어 있어 인식이 불가능한 삼각점이 박혀있는 378.4 삼각점봉에 도착을 해 잠시 추억 한장 남겨 본다.


그 삼각점봉을 지나 완만하게 내려가니 여전히 바위암릉이 이어지는데 그 사이마다 커다란 참나무들이 자라면서 색다른 등로를 만들고 있다.

떨어진 낙엽이 바위 위에 쌓여 조심스럽게 진행하고 그렇게 한동안 걸어 전진하니 소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 무명봉을 지나 잡목들이 우거져 있는 송전탑 안부에 도착을 하는데 송전탑 번호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그 송전탑 안부를 지나 둔덕으로 올랐다 내려가니 관목 같은 참나무가 보이고 낙엽이 수북히 쌓여 있는 무명 안부를 지나 산행을 이어가 본다.


안부를 지나 완만하게 오르니 등로 좌우측으로는 커다란 소나무와 참나무가 혼재되어 있는 걷기 좋은 등로로 변하고 무심으로 걷다 보니 등로는 다시 오르막 등로로 올라 참나무들이 주종을 이루는 387.1 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그 무명봉에서 등로는 좌측으로 크게 휘어 내려가고 약간의 잡목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등로에는 아직 지지 못한 나뭇잎들이 남아 온 세상을 울긋불긋 색동옷으로 갈아 입혔다.

잠시 후 커다란 소나무들이 보이는 무명봉을 지나고 곧이어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가 보이는 도상 415.7봉에 도착을 해 잠시 심호흡 한번 하고 진행한다.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가 있던 415.7봉을 지나 다시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넉엽송이 보이는 안부로 내려갔다 다시 오르고 등로에는 이제 참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약간의 고사목들이 널부러져 있는 무명봉을 지나니 등로 위에는 다시 바위들이 깔려 있고 ㄴ조심해 그 바위 등로를 따르니 금새 바위들이 사라지며 온순한 낙엽 등로로 바뀌고 있다.

평이한 등로를 타고 한동안 무심으로 걷다보니 등로가 우측으로 크게 꺽여 진행되는 봉우리(483.8봉) 한쪽에 오랫만에 만나는 자하 신경수님의 띠지를 만나 잠시 확인하고 우측으로 꺽어 내려가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무명봉에서 우측으로 크게 꺽여 진행되는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우측으로 우회하던 등로와 만나 다시 ㅊ푹신한 낙엽을 밟으며 산행을 이어간다.

일반 야산에서 만날 수 있는 아기자기한 참나무들이 보이는 평이한 낙엽 등로를 타고 조금은 빠르게 진행하니 나즈막한 무명안부를 지나 계속 완만하게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로 이어진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 내려가니 나뭇가지 사이로 진행 방향의 봉우리들이 보이지만 제한적이라 잘 구분은 되지 않는다.

잠시 후 등로는 급격히 낮아지는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고 곧이어 비포장 임도가 지나는 안부에 도착을 하는데 선답자가 이곳을 발치란 이름으로 종이코팅지로 걸어 놔 지도를 보니 발치라는 안부이다.  

발치(발치고개)는 충청북도 충주시의 직동과 살미면 재오개리 사이에 있는 고개이며 재오개리 발티 마을 뒤에 있는 고개로서 옛날 삼남대로로 통하는 대로의 첫 고개였다고 하는데 지명 유래는 확실하지 않다.

예전에는 제법 통행량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제는 주위에 도로들이 많이 뚫려 이곳을 통해 통행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 보인다.


발치 안부를 통과하여 다시 평이한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커다란 참나무 아래 키작은 관목들이 혼재되어 있는 노란색 등로로 바뀌고 조금 더 진행하니 등로는 점점 더 가파라지기 시작하며 코가 땅에 닿을 듯 직벽처럼 느껴진다.

조금 더 오르다 보니 낙엽이 쌓여 있고 돌담 같은 것들이 보이는 곳을 피해 어렵게 돌아 오르니 온 몸에선 벌써 굵은 땀방울이 흘러 등로를 흥건히 적시듯 떨어지고 있다.

너무나 힘들게 천천히 걸어 오르니 드디어 주능선에 도착을 해 선답자들의 띠지를 살펴보고 조금은 완만해진 등로를 따라 우측으로 오르니 잡목들이 우거져 있는 465.3봉에 도착을 해 선답자들이 걸어 놓은 띠지에 매직 펜으로 해발고도를 적어 놓은 높이를 확인한다.


오늘 산행 중 가장 힘들게 올라 와 잠시 물 한모금 마시고 가쁜 숨을 내쉰 후 다시 평이한 등로를 따르니 김해김씨 묘지를 지나 밀양박공 묘지들이 줄지어 나타나는 등로도 통과를 한다.

그 묘지지대를 지나니 커다란 소나무가 보이는 무명봉에 오르고 곧이어 나타나는 차돌바위를 우회하며 통과하니 인식하기 어려운 삼각점이 박혀 있는 460.2 삼각점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며 주위를 살펴보고 곧바로 출발한다.


그 삼각점봉을 지나니 부드러운 낙엽 등로가 길게 이어지고 잠시 후 등로는 내리막 하산 등로로 변하면서 잡목들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나뭇잎에 내려 앉은 먼지들이 비산하며 기침을 유발하고 있어 지도를 보니 바로 앞이 채석장처럼 보인다.

잠시 후 산이 통째로 날아갈 것 같은 거대한 채석장이 등로 좌측으로 보이고 곧이어 비포장 임도로 내려서는데 지도를 보니 이곳이 바로 재오개고개이다.

재오개재는 충청북도 충주시 살미면 재오개리에서 재오개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어 확인해 보니 재고개는 충주시 살미면 면소재지인 세성리와 재오개리를 지나 충주시 목벌동로 향하는 약 4 Km 지점에 있는 고개로서 이 고개로 인해 재오개리라는 마을이 생겼으며 재오개는 상재오개와 하재오개 두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982년 충청북도에서 간행한 전설지에 실려 있는데 이는 당시 살미면 세성리에 살고 있는 주민 강문식으로부터 채록한 것으로 1981년 중원군에서 간행한 내고장 전통가꾸기와 2002년 충주시에서 간행한 충주의 구비문학에 각각 수록되어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조선 태종 때 노선비가 재고개 밑 외딴집을 찾아 들어 그 집 부인이 건네주는 냉수를 받아 들며 부인이 잉태하고 있는 것을 보고서 산월을 물었다.

잠시 후 노선비가 그 집을 떠나면서 재고개 정기와 금봉산 영기를 타고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이니 잘 길러서 나라의 기둥이 되도록 하라고 한 후 노선비가 고개를 넘으면서 지세를 살피고는 애석한지고 요절기가 있으니 라며 탄식하였다.

그런 후 얼마 안가 부인이 해산을 했는데 재고개에서 무지개가 그 산실로 이어졌고 태어난 아기는 생후 석 달 만에 말을 했고 3살 되던 해 쌀 한가마니를 들 수 있는 장사가 되었으며 5살이 되면서 재주가 비상해 글을 지을 수가 있고 병법을 논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문무에 신기를 가진 어린애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관가에서 조정에 알리자 조정에서 풍수에 능한 술자를 보내 그 주변을 살피게 하였다.

술자가 이곳 지세를 보고 충주 땅에 왕기가 있고 어린애가 왕위를 찬탈할 인물이 될 것이라 하므로 조정에서 방액법을 물으니 재고개의 정기를 타고 태어났으니 산혈을 끊어야 한다고 했다.

군사를 보내어 재고개 혈에다 철장을 박고 맥을 끊으니 산이 진동을 하고 초목이 떨며 잎이 마르고 아이가 별안간 죽고 말았다.

그 후 재주 있는 아기 장사가 다섯 살이 되던 해 고개 혈을 끊겨 요절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재오개로 불러 오늘에 이른다.

이 설화의 모티브는 신분이 엄격히 구분되던 조선 사회에서 평민 집안에서 장수로 태어나는 것 자체가 큰 불행이었고 민중들은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지만 현실의 장벽에 부딪혀 좌절하고 마는 것이 아기장수전설의 전형이다.

아기장수는 부모에 의해 죽는 것이 일반적인 화재인데 재오개 전설에는 나라에서 혈을 잘라 장수의 출현을 막고 있는 것이 다르며 풍수신앙과 관련된 아기장수전설이다.

이제 이 개오개재는 채석장으로 인해 완전히 단절된 고개가 되었으며 이곳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 이외에는 들릴 일도 없어 보이기에 앞으로는 또 어떤 이름과 모습으로 변하게 될지 자못 궁금해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유명무실해진 재오개재에서 몇발자국 걸어 드디어 채석장 안으로 들어가니 일요일은 쉬는지 기계들은 가동을 멈추고 조용하며 출근하고 상근하는 사람도 없는지 사람 목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그곳에서 잠시 등로 우측을 살펴보니 재오개리 방향이 짙은 미세먼지 속에 살짝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지만 잘 분간조차 할 수 없음이 아쉽기만 하다.

재오개리는 충청북도 충주시 살미면에 있는 리로서 산지 아래자락에 자리잡은 농촌마을로 충주호와 가깝다.

자연마을로는 동막골, 아랫재오개, 웃재오개, 흑석이 있는데 동막골은 구한국 때 이곳에서 동을 캤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아랫재오개는 재오개의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웃재오개는 재오개의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흑석은 마을 근처에 검은 돌이 많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며 특산물로는 대학찰옥수수, 고추, 사과, 담배 등이 있다.


이제 이 채석장을 지나 어떻게 절개지를 넘어 이어지는 마루금 능선으로 오를 수 있는지가 고민거리로서 많은 선답자들이 좌측 채석장 가장 자리를 타고 길게 빙 돌아 진행한 후기글이 자주 보여 그리로 진행하려다 진행 방향의 절개지를 살펴보니 공사장 경계 지점의 남아 있는 잡풀들과 잡목들을 이용해 오르면 생각보다 쉽개 ㄱ직등도 가능 할 것 같아 정상 마루금 방향으로 시도를 해 본다.

시멘트 분말 같은 흙들이 덮혀 있어 절개지 방향으로 접근하니 등산화가 뾰얀 먼지를 한가득 뒤짚어 쓰고 완전히 다른 신발로 변해 있고 발이 진흙에 빠지듯 들어 가 쉽지 않지만 그럭저럭 잡풀들과 잡목가시나무들을 잡으며 오르니 오를만 하다.

어렵게 먼지를 뒤집어 쓰며 그 절개지를 타고 올라 상단부에 도착하여 뒤돌아 보니 방금 전 통과 해 올라 온 채석장이 우측으로 내려다 보이고 중앙부 저 위로 오늘 이 산객이 걸어 내려 온 계명지맥 마루금이 아름답게 올려다 보인다.

드디어 고민하던 채석장을 무탈하게 잘 통과하여 정상 마루금을 타고 가파르게 걸어 오르니 저절로 긴 한숨이 새어나오면서 안도의 마음이 든다.

 

코가 땅에 닿을 듯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올라 평이한 능선에 도착을 하고 선답자들이 걸어 놓은 산행 띠지를 살펴보며 정상적인 마루금을 찾아 진행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 감사하기만 하다.

하지만 이곳 정상 마루금을 타고 진행한 선답자들이 많지 않은 듯 답목들이 자라고 고사목들이 제멋대로 나뒹굴고 있어 진행에는 상당한 어려움을 느끼며 그 정상부로 오르니 거대한 참나무 한그루 주위로 잡목들이 보이고 그 위 산행 띠지에 이곳이 448.3봉이라는 표식을 해 둔 선답자들의 띠지를 담아 사진 한장 남겨 본다.

난제중의 난제라 생각했던 채석장을 너무나 쉽게 잘 통과하여 기분 좋은 상태로 산행을 이어가 본다.


잡목들이 보였던 448.3봉을 지나 완만하게 걸어 낙엽 등로를 따르니 등로가 희미해지고 아예 사라져 버리는데 낙엽이 쌓이면서 등로를 완전히 숨기고 있는 듯 보인다.

방향만 잡고 가파르게 걸어 내려가니 안부 지나 다시 올라 Y자 소나무를 만나고 사진에 담고 다시 내려가니 전형적인 성황당 아니 서낭당의 모습을 하고 있는 고갯마루에 도착을 해 옛 추억에 잠시 잠겨 보는 시간도 가져 본다.

성황당은 서낭당의 다른 말로서 서낭신을 모신 당집이나 제단을 말하며 지방에 따라 할미당과 천황당 및 국사당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서낭신은 토지와 마을을 수호하는 신으로 최근까지 전국에 널리 퍼져 있었고 보통 신수(신의 기가 있는 나무)에 잡석을 쌓은 돌무더기나 신수에 당집이 복합되어 있는 형태로 고개 마루나 길옆, 부락입구, 사찰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서낭당은 서낭신의 봉안처인 동시에 거소가 되는데 이 신은 천신과 산신의 복합체로 보여지며 서낭신의 신앙에는 내세관이나 인간 정신세계의 이상 같은 것이 없고 현실적인 일상생활의 문제가 중심을 이룬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액과 질병, 재해, 호환 등을 막아주는 부락수호와 인간의 현실적인 생계문제 해결에 목적이 있고 신수에는 아이들의 장수를 위해 걸어놓는 헝겊조각이나 상인의 장사를 잘되게 해달라고 걸어놓는 짚신짝 또는 신랑신부가 새살림을 차릴 때 부모계의 가신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신부가 자기 옷을 찢어서 걸어놓는 색헝겊조각 등이 있다.

또 통행인이 길을 안전하게 가기 위해 돌을 주워서 돌무더기 위에 던지거나 침을 뱉는데 이는 길가에 배회하는 악령의 피해를 막기 위함이다.

이처럼 서낭당은 현실적인 문제를 기원하는 곳으로 정초에는 부인들이 간단한 제물을 차려놓고 가정의 평안을 빌기도 하며 동해안 별신굿이나 강릉단오제는 규모가 큰 서낭제의 일종이다.

어렵게 살면서도 가족 건강과 아이들 잘 되게 해달라고 일년에 한번 이상은 진행하였던 굿이었는데 이제 그리워해도 만날 수 없는 부모님이 되셨으니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운 현실이다.


아직도 사람들이 찾고 있는 듯한 성황당을 지나자마자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타나고 그 도로를 건너 능선으로 오르니 간의 잡목들이 보이지만 그럭저럭 진행이 가능 할 것 같아 오르니 점점 더 잡목들의 저항이 심해지고 가시나무까지 합세해 참으로 고통을 주는데 그에 더해 쓰러진 거대한 낙엽송들이 산객의 발길을 붙잡고 놔 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너무나 힘들게 그 잡목과 가시나무 지대를 빠져 나가니 금새 다시 비포장임도와 만나는데 그곳에는 산수유나무가 빨간 열마를 매달고 가을을 수놓고 있어 몇 알 따 먹으니 약간 시큼하면서 입맛을 돌게 만든다.

산수유는 붉은 과실로 눈을 즐겁게 하고 봄이면 산에서 꽃으로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팔방미인으로 간과 신장을 보호해주고 회춘 효과가 뛰어난 열매이다.

술과 차로 마실 수 있으며 삼계탕을 요리할 때 함께 사용할 수 있다.


비포장임도를 건너 다시 능선으로 오르니 얼마 진행하지 못해 또 다시 돌아 올라 오는 비포장임도와 만나 임도 옆에 보이는 붉은 산수유 열매를 따 입에 물고 가파른 능선으로 오른다.

약간의 잡목들이 있고 가파른 오르막 등로이다 보니 낙엽에 어려움이 있지만 짧게 오르면 또 다른 비포장 임도와 만나기 때문에 가쁜 숨을 헐떡이며 전진한다.


다시 마지막 비포장임도를 건너 가파른 오르막 능선으로 오르니 생각보다 경사도가 심해 코가 땅에 닿을 듯 오르게 된다.

잠시 더 걸어 오르니 바위암릉이 나타나고 그 위에 떨어진 낙엽이 미끄럽기에 주의하며 천천히 걸어 전진하니 커다란 참나무에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지점도 만나 그 로프를 의지해 올라 본다.

힘들게 걸어 오르니 바위 사이에 피어난 화려한 단풍이 잠시 휴식 시간을 주고 사진에 담은 후 다시 오르니 거대한 바위암릉이 앞을 가로막고 옆으로 우회하라 손짓을 하고 있어 어렵게 그 바위암봉을 돌아 올라간다.

선답자들의 산행 트랙을 살펴보니 이 등로는 직등을 하지 않고 좌우측으로 크게 우회하며 진행한 트랙도 보이는데 그곳도 경사도는 유사하기에 직등으로 진행한 것이 잘됐다고 자위하며 올라가는 시간이다.

 

여전히 보이는 바위 사이에 쌓여 있는 낙엽을 헤치며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드디어 경사도가 조금은 완화되며 진행에 도움을 받는데 이곳 역시도 여전히 참나무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잠시 후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도 만나 여유롭게 걸어 오르니 사유지 출입금지를 알리는 경고판이 서 있는 604.8 무명봉에 도착을 해 잠시 숨고르기를 하고 시원한 물 한모금으로 갈증을 달래고 출발한다.

 

우측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는 마루금을 타고 천천히 걸어 내려가니 이곳 역시 활엽수 낙엽이 발목까지 쌓여 있어 바스락거리기 시작하고 힐링하듯 여유롭게 걸어 가니 커다란 참나무들이 보이는 무명안부를 통과하고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등로 옆으로 피어난 고운 단풍들을 사진에 담으며 전진하니 커다란 참나무를 가운데에 두고 양쪽으로 커다란 소나무들이 서 있는 613.4봉에 도착을 하는데 독도님이 종이코팅지에 이곳이 계명지맥 상 613.4봉임을 알리는 이정표를 걸어 놨다.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와 이정판이 보이는 613.4봉을 지나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벌목된 참나무 토막들이 등로에 널부러져 있는 모습들이 보이고 다시 올라 조금 더 전진하니 공사중인 충주산성 성벽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옆으로 임시 설치되어 있는 철계단을 타고 산성 내부로 올라 본다.

충주산성은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테뫼식으로 축조된 석축 성곽으로 충청북도 기념물 제31호이며 지정면적은 1165m2에 둘레 1120m이며 성벽 높이는 6.5m에 너비는 5∼6.5m이다.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마고성이라고도 하는데 전설에 의하면 삼한시대에 마고선녀가 7일 만에 축성하였다고도 하고 또는 백제 개로왕 21년(475) 성 아래 북쪽의 안림동에 이궁을 짓고 남산에 성을 쌓았다고 한다.

해발 636미터의 남산 또는 금봉산이라 부르는 산의 정상부에서 동쪽으로 두 개의 작은 계곡 8부능선을 에워싼 석축산성이다.

안쪽 벽은 계곡 부분만 2미터쯤 협축(중간에 흙이나 돌을 넣고 안팎에서 돌 등을 쌓음)하였고 성벽 위에 여장(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너비 1.2미터에 높이는 0.6미터쯤 남은 곳이 있는데 바깥 성벽에서 곧바로 쌓아올리고 미석(여장 맨 아래에 성벽 바깥으로 내밀게 얇은 돌로 깐 것)을 사용하지 않은 평여장이다.

문터가 사방에 모두 있으며 바깥쪽에서의 입면이 요(凹)꼴로 된 것으로 보아 모두 현문(평상시 닫았다가 사용할 때는 문을 바깥으로 드리워 사다리처럼 걸쳐놓고 통행하는 문모양)이 시설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성안 동쪽 계곡 쪽으로 세 군데의 집수처가 확인되었고 동문터의 남쪽에는 수구가 원형대로 남아 있다.

수구는 물이 성벽의 중간을 통과하도록 되어 있고 출수구는 성벽 바깥바닥에서 약 0.6미터쯤 올라온 벽의 중간에 미석이 있으며 높이 0.65미터에 아랫너비 0.6미터 그리고 윗너비 0.26미터여서 마치 궁륭모양 돌방무덤의 단면처럼 생긴 특이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성 북쪽의 마스막재에는 관애가 시설되어 있어서 삼국시대의 국원성 혹은 중원경의 외곽을 형성한 것으로 보이며 일종의 나성 구실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오르니 한참 공사중이라 어지러운데 오늘이 일요일이라 휴식을 취하는지 사람들은 보이지 않아 이곳저곳 구경하며 충주 남산 정상부로 향한다.

 

능선 등로 우측으로는 그물망이 설치되어 있고 좌측으로는 현장사무실 가건물이 나타나는데 일반 등산객들은 그물망 우측 넘어로 걸어가는 모습도 보인다.

잠시 참나무 등로를 따라 평이하게 걸어가니 등로 우측에 설치되어 있던 그물망이 사라지고 일반 등로와 만나 진행이 된다.

잠시 후 둔덕을 넘어 헬기장이 나타나고 그 헬기장을 넘어 보이는 능선으로 오르며 산행을 이어간다.


능선으로 올라 조금 더 걸어 들어가니 등로 우측으로 벤취쉼터들과 돌탑 3개가 보이고 사진에 담고 앞으로 전진하니 금새 충주11이란 1등 삼각점이 박혀 있고 그 옆으로 정상석이 서 있는 충주 남산 정상에 도착을 해 주위를 둘러보고 있으니 등산객이 올라 와 부탁해 사진 몇장 남겨 본다.

남산(636.1, 금봉산)은 충북 충주시 동남 편인 직동과 살미면에 있는 높이는 636.1의 산으로 마즈막재를 사이에 두고 북쪽에 위치한 계명산과 마치 형제처럼 마주보고 있는 산이며 일명 금봉산이라고도 한다.

산 남쪽 기슭에는 신라시대에 창건한 창룡사를 비롯하여 시내 기슭에는 각종 체육시설 및 약수터가 있으며 충주 사과의 주 생산지가 넓게 퍼져 있기도 하다.

산행기점이나 하산로가 모두 시내에 인접해 있어 교통이 매우 편리한 산이며 높이도 별로 높지 않아 찾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호젓한 산행을 하려는 사람들은 이 점을 감안해야 한다.

이 산의 정상 부근에는 남북을 잇는 능선 상에 남산성이 있는데 충주산성이라고도 불리며 이 산성은 삼한시대 마고선녀가 축성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어 마고성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금단산 수정봉에 은거하고 있던 마고할미(늙은 신선할미)가 하늘의 법도를 어기고 마구 살생하자 대노한 옥황상제가 하천산 노둑봉으로 쫓아 냈는데 500년이 지난 후 마고할미가 잘못을 뉘우치고 금단산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빌자 옥황상제는 금봉산에 들어가 성채를 쌓고 처소로 삼도록 하되 성은 반드시 북두칠성을 따라 한 별 씩 7일 동안 쌓게 하였다.

마고할미가 명을 받고 이 산에 이르러 보니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전망이 좋아 흡족하게 생각하고 명령대로 7일 만에 성을 완성했으나 옥황상제가 살고 있는 서쪽을 향해 수구가 뚫려 있는 것을 보고 괘씸하게 생각한 옥황상제는 마고할미를 성주가 아닌 성지기로 삼았다.

그 뒤 이 산성이 마고성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며 축성의 법칙에 의하면 수구문은 서쪽으로 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데 산성 중 유일하게 서쪽으로 수구문이 난 성이기도 하다.

창룡사 우측 계곡길을 통해 능선에 오르면 정상까지 군데군데 휴게소가 있는 깨끗한 산책로로서 시내에서 멀지 않아 충주시민들은 물론 서울에서도 나들이하기에 좋은 곳이며 정상에 서면 충주호와 월악산이 보인다.

얼마 전 동쪽의 천등지맥 산행을 진행하면서 이곳을 바라보며 환상의 조망과 풍경을 만났던 기억이 나 살펴 보지만 오늘은 미세먼지로 인해 상상만으로 그 산줄기들을 그려본다.


남산에서 추억을 남기고 내려가니 갈림사거리인데 좌측으로는 재오개가는 등로이고 직진은 깔딱고개 방향이며 계명지맥 마루금은 우측의 마즈막재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다.

등로 좌측 옆으로는 충주산성에 대한 설명판이 서 있어 잠시 읽어 본 후 진행 방향 우측으로 돌아 계단을 내려가니 남한산성의 모습을 닮아 있는 성벽 위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이 충주산성은 충주 동쪽의 계명산 영맥과 서쪽의 대림산성 및 북쪽의 탄금대 토성지와 함께 충주를 사방에서 방어하기 위하여 험한 산세를 이용하여 돌로 쌓은 산성이다.

구조는 외축 내착형이며 산 정상을 이어 쌓은 퇴뫼식 산성이라고 할 수 있으며 축성 재료는 석재를 고루 쌓아 전형적인 고식을 보인다.

성벽 좌우측으로는 알록달록 곱게 물들어 가고 있는 단풍이 환상적으로 펼쳐져 있어 잠시 여유를 가지고 힐링하듯 걸어 보는 시간이다.


충주산성 성벽 위를 따라 걸어가니 미세먼지로 인해 시야가 제한되면서 조망이 전혀 없는데 다만 등로 좌측 가까이에 남산에서 분기하는 또 다른 이름없는 산줄기가 흐르고 그 우측 끝자락으로 태봉이라 생각되는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 가니 등로 우측 앞으로 분재형 멋진 소나무가 보이고 그 주위로는 접근을 막는 울타리가 쳐져 있는 곳 좌측으로 성 밖으로 빠져 나갈 수 있는 문과 계단이 보여 그곳을 통해 걸어 왔던 충주산성을 빠져 나간다.


충주산성과 헤어져 활엽수 낙엽이 아름답게 깔려 있는 참나무 등로를 따르니 등로는 다시 완만하게 내려가고 곧이어 나무계단이 보인다.

그 나무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비포장 임도에 도착을 하는데 그 임도를 가로질러 다시 능선으로 들어가니 낙엽 등로가 예쁘게 열려 있다.

잠시 후 소나무와 바위가 보이는 무명봉을 지나 단풍이 보이는 로프 구간을 타고 내려가니 또 다른 비포장임도와 만나는데 그 한쪽에 충민공 임경업장군 일대기라는 설명판이 보여 자료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보인다. 

임경업(1594-1646)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친명배청파 무장으로 본관은 평택이고 자는 영백이며 호는 고송이었으며 충청도 충주 달천촌 출생이다.

충청도 충주 출생이며 한때 1595에서 1602까지 평안도 개천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602년 충청도 충주 향리에 귀향하여 그 후 충청도 충주에서 줄곧 자랐고 1612년(19세 시절) 진사시에 합격 후 1618년(25세 시절) 2살 아래의 친아우 임사업과 함께 때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624년(인조 1)이괄의 난 때에는 반란군을 토벌하여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1633년 청북 방어사 겸 영변부사에 등용되어 북방 경비를 튼튼히 하기 위해 의주에 있는 백마 산성을 다시 쌓았으며 당시 누르하치가 만주 대륙을 통일하여 나라 이름을 후금이라 칭하고 명나라와 조선에 싸움을 자주 걸어왔다.

후금의 소규모 부대가 국경을 넘어오자 이를 여러 번 격퇴하여 되돌려보낸 임경업의 시호가 충민이다.

조선 조정 내 친명 인사의 한 사람으로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 주었으며 임경업은 명나라를 위하여 오랑캐를 무찌르는 것으로 보답하여, 명나라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임경업 장군에 대한 자료를 찾아 보고 다시 능선으로 오르니 나무벤취쉼터를 지나 평이한 등로가 이어지고 곧바로 또 다시 비포장임도와 만나는데 도로 건너편에는 대전교통방송과 대전국악방송의 드높은 송신소가 올려다 보이고 임도 옆으로는 신립장군과 8천용사라는 설명판이 보여 다시 읽어 보고 출발한다.

신립은 조선 중기의 무장으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도순변사가 되어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싸우다 순국하였다.

신립설화의 핵심인 신립 장군 이야기는 그의 이적과 충주 전투를 내용으로 한다.

신립에 관한 인물전설은 문헌·구전을 통해 전승되어 왔으며 문헌설화는 어우야담, 대동야승, 연려실기술, 대동기문 등에 실려 있고 구비설화는 각 시·군지와 한국구비문학대계 등에 실려 있다.

임진왜란 중 충주는 가장 희생이 많았던 싸움터였고 초기에 신립 장군은 탄금대 앞에서 달천과 남한강을 뒤로 하여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는 8첨여 명의 조선군 중 두서너 명만이 살아남았다고 할 만큼 희생이 큰 전투였고 또한 충주읍성에 있던 많은 사람들 즉 사민과 관속들이 당대의 명장인 신립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음을 믿고 피난을 가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희생이 더욱 컸다고 할 수 있다.

일부에서는 조령의 골짜기를 이용하여 전투를 벌여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신립은 조령을 포기하고 탄금대 앞의 들을 택하였는데 탄금대는 천연의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다.

신립은 천연의 해자를 최대한 이용하여 왜군을 탄금대 앞의 넓은 들로 유인하여 철기로 일격을 가하고자 하였고 급하게 편성한 훈련받지 못한 병력으로는 왜군을 당할 수 없음을 알고 옥쇄를 각오한 배수진으로 최후의 일전을 결행하고자 한 것이었다.


주위를 구경하고 설명판을 읽어 신립장군에 대한 공부를 하고 방송국 철망을 따라 능선으로 오르니 벤취쉼터와 단풍들이 반겨주고 곧이어 바위와 박달나무가 공존하는 무명봉도 통과한다.

그곳을 지나 내려가니 또 다시 비포장임도를 만나 우측으로 걸어가니 가흥장에 대한 설명판이 나타나고 그 설명판 우측 도로 건너 전봇대가 서 있는 곳에서 다시 등로는 능선으로 이어지고 있다. 

가흥창은 충북 중원군 가금면 가흥리 남한강변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조창으로 원주의 흥원창 및 춘천의 소양강창과 더불어 수참선으로 세곡을 운반하는 참운의 좌수참에 속하여 좌수참창이라고도 하였으며 1465년(세조 11)에 설치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덕흥창이라 하다가 조선 건국 초 경원창으로 개칭하였고 세종 때 다시 덕흥창이라 하다가 세조 때 조창 자리를 가흥역 근처로 옮기고 가흥창이라 하였다.

또 각지에서 수집한 세곡을 야적하였던 것을 1521년(중종 16)에야 70칸 규모의 창고를 지었다.

가흥창의 세곡수납 관할구역은 경상도의 각 읍과 충청도의 충주와 음성, 괴산, 보은, 단양, 영춘, 제천, 진천, 황간, 영동, 청풍, 청산 등이었으며 이들 지역에서 수납된 세곡은 남한강 수로를 통해 260리에 이르는 서울의 용산창으로 운송되었다.

원주의 흥원창 및 춘천의 소양강창과 더불어 수참선으로 세곡을 운반하는 참운의 좌수참에 속하여 좌수참창이라고도 하였으며 1465년(세조 11)에 설치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덕흥창이라 하다가 조선 건국 초 경원창으로 개칭하였고 세종 때 다시 덕흥창이라 하다가 세조 때 조창 자리를 가흥역 근처로 옮기고 가흥창이라 하였다.

또 각지에서 수집한 세곡을 야적하였던 것을 1521년(중종 16)에야 70칸 규모의 창고를 지었고 가흥창의 세곡수납 관할구역은 경상도의 각 읍과 충청도의 충주와 음성, 괴산, 보은, 단양, 영춘, 제천, 진천, 황간, 영동, 청풍, 청산 등이었으며 이들 지역에서 수납된 세곡은 남한강 수로를 통해 260리에 이르는 서울의 용산창으로 운송되었다.


가흥창에 대한 설명판을 읽어 본 후 마음 같아서는 그 비포장임도를 따라 진행하고 싶었지만 산행 후 후회가 될 것 같아 임도를 건너 다시 능선으로 오르니 나즈막한 둔덕을 넘어 다시 내려가 전봇대가 서 있는 안부에 도착을 한다.

그 무명안부에서 우측으로 올라가는 등로가 보이지만 그곳으로 이어지지 않고 좌측으로 나 있는 우회 등로를 따라 산행이 진행되기에 여유롭게 걸어가니 참나무와 낙엽송이 등로를 채우고 있다.


나즈막한 둔덕을 넘어 진행하니 다시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고 짧은 절개지를 타고 비포장 임도에 도착을 한다.

그 임도 옆에는 6.25전쟁과 동락전투라는 설명판이 보이고 읽어 보니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이곳 충주와 관련된 내용들을 새로 공부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동락리전투는 한국전쟁 발발 초기인 1950년 7월 7일 충청북도 동락리에서 벌어진 전투로서 1950년 7월 7일 충청북도 음성군 신니면 동락리(지금의 충주시 신니면 문락리)에서 국군 제6사단과 북한군 제15사단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뒤에 계속 물러나기만 하던 육군이 북한군에 처음으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전투로 무극리전투와 우재전투 등과 함께 음성지구전투로 통칭되기도 하며 현재 충주시 신니면 문락리에 전승비가 세워져 있다.

능선으로 오르기 전 진행 방향을 살펴보니 (마즈막재)마지막재 넘어 잠시 후 올라야 할 계명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미세먼지속에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이어지는 능선으로 들어 나즈막한 둔덕을 넘어 내려가니 참나무 낙엽이 깔려 있고 조금은 초록빛이 남아 있는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잠시 더 진행하다 등로 좌측을 보니 미세먼지로 희미한 가운데 안림동쪽 마을 풍경이 내려다 보인다.

안림동은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는 법정동이며 행정동인 교현과 안림동 관할으로 충주시 도시지역의 동남부에 있으며 주위에 종민동과 연수동, 성내동, 용산동, 직동 및 목벌동과 접한다.

원래 충주군 북변면 지역이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북변면의 안심리, 범의동, 어림리, 교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충주군 읍내면 안림리가 되었다.

1917년 읍내면이 충주면으로 개칭되었고 1931년 충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충주읍 안림리가 되었다가 1956년 충주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안림동으로 개칭되어 충주시의 행정동인 안림동 관할의 법정동이 되었으며 1998년 교현·안림동 관할로 바뀌었다.

충주호변의 도농복합지역으로 사과와 복숭아의 주산지이고 남한강과 충주호변에 531번 지방도가 있다.

남쪽 직동 및 살미면 재오개리에 걸쳐 남산(일명 금봉산, 636m)이 있고 남산의 정상 부근에는 백제시대에 축성되어 고려시대에 개축된 충주성(충북기념물 31호)이 있으며 역내에 충주기상대, 충주소년원, 계명정보통신학교, 충일중학교, 대원고등학교가 있으며 안심리, 안림리, 어림리, 범의 등의 자연 마을이 있다.


등로 좌측으로 흐릿한 조망을 살피고 내려가니 시멘트 포장도로에 도착을 하고 우측으로 보이는 이정표를 보니 지나온 방향으로 충주산성이 0.49 Km 거리라는 방향과 거리 표시가 보인다.

그 좌측 옆으로 송전탑이 보이고 그 송전탑을 지나 능선으로 들어가니 우측으로 철망과 앞쪽으로 낙엽송이 보이더니 금새 운동장과 식당 건물 그리고 마즈막재 넘어 계명산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데 박무로 인해 아쉽기만 하다.


눈 앞에 펼쳐진 풍경들을 살펴보며 내려가니 동구밖 과수원길이라는 식당 건물 옆으로 진행되는데 배추가 자라고 있는 배추밭 옆으로 강아지 두마리가 지키고 있어 걱정을 하지만 순둥이 이기에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걸어간다.

잠시 후 식당 앞 포장도로로 내려가니 마즈막재삼거리 좌측 옆으로 자전거 동호회에서 행사를 하는지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

그곳을 지나 내려가니 드디어 531 충주호수로 2차선 포장도로와 안림로 2차선 포장도로가 만나는 마즈막재 삼거리에 도착을 해 주위를 둘러 보고 곧바로 능선을 치고 오르며 산행을 이어가는데 올라 가 보니 나즈막재 좌측 안림로 방향으로 조금만 걸어 가 우측으로 오르면 잘 설치되어 있는 계단 등로가 이어져 있다.

한국지명유래집에 마지막재(아리랑고개)는 충청북도 충주시의 안림동과 목벌동 및 종민동을 연결하는 고개로서 신라 시대에 나무벌(목벌)과 같은 뜻인 깊은 나무고개(심목치)였다고 전한다.

계명산 옛 이름인 심항산에서 따와 심항현이라 하였고 심항현의 한자 뜻을 풀어 마수막재라고도 하였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마즈막재로 발음이 바뀌었다는 주장이 있다.

한편 청풍과 단양의 죄수들이 사형 집행을 받기 위해 충주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이 고개를 넘어야 했는데 이 고개만 넘으면 다시는 살아 돌아갈 수 없어 마지막재가 되었다는 애처로운 전설이 있으며 예전 남산 아래 마즈막재 부근에 실제로 사형장이 있었다.


나즈막재 지나 올라 간 대몽항쟁전승기념탑 앞에서 지나 온 방향으로 뒤돌아 보니 방금 전 건너 온 나즈막재 넘어 이어진 계명지맥 마루금이 미세먼지로 희미한 가운데서도 환상적인 모습으로 다가 온다.

몇장의 사진에 남기고 뒤돌아 보니 대몽항쟁전승기념탑이 드높게 설치되어 있어 그곳 옆 그늘 공터에서 준비한 빵과 과일로 허기를 달래고 시원한 음료수로 갈증까지 달래고 있으니 부부인 등산객이 계명산으로 향하는 모습도 눈에 들어 온다.


간단한 식사 후 대몽항쟁전승기념탑을 둘러보고 몇장의 사진으로 남겨 본다.

고려의 대몽항쟁은 1231년(고종 18)부터 1273년(원종 14) 삼별초군의 패망에 이르는 40여 년이란 장구한 기간 동안 전개되었다.

1225년(고종 12) 몽고 사신 저고여의 피살 사건을 계기로 국교가 단절된 뒤 몽고는 1231년(고종 18) 조공 거절 및 저고여 피살에 대한 보복으로 고려에 대한 제1차 침입을 필두로 1254년까지 8차에 걸쳐 한반도 전역을 유린하였다.

이 시기 고려 백성의 생활은 비참해질 대로 비참해졌고 고려왕조는 지배 체제가 무너짐으로써 한때나마 시련기를 맞게 되었다.

충주민은 1231년(고종 18) 12월 몽고군 침략으로부터 1258년(고종 45) 10월 박달현 전투까지 약 27년 동안 9차례의 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끌어 충주를 대몽항쟁의 최대 승전지로 만들었다.

특히 충주에서는 백정과 천민 및 노비들이 주체가 되어 몽고군과 용감하게 싸웠는데 그 원인은 충주 지역이 삼국시대 이래 그 어느 지역보다 시련이 많았던 지역임을 감안하면 충주민의 자생적 지역 보위의 정신이 승화된 주인의식과 애국심의 발로일 것이다.

고려시대 충주민의 대몽항쟁의 전승을 기념하고 그 호국정신을 이어받기 위하여 2003년 9월 24일 대몽항쟁전승기념탑이 충주시 안림동 마즈막재에 세워졌다.


그렇게 대몽항쟁전승기념탑에서 허기를 달래고 갈증도 풀은 후 주위 풍경과 조망들을 살펴 본 후 배낭 둘러메고 이제 마지막 계명산을 향해 발길을 돌린다.

잘 정리된 등로를 타고 능선 방향으로 걸어 올라가니 등로 우측으로 밭 경작지가 보이고 금새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낙엽송과 잡목들이 혼재되어 있는 단풍이 화려한 마루금으로 이어지고 있다.


생각보다 뚜렷한 등로를 타고 계속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등로가 나타나고 방금 전 간식을 먹을 때 만났던 부부 등산객을 추월해 온 몸에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숨가쁘게 걸어 올라 본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 오르니 등로 좌우측으로 바위너덜길이 펼펴지고 그 풍경을 살펴보며 오르니 등로 자체에도 짧은 바위너덜길이 펼쳐져 있다.

그 바위너덜길 등로 좌우측으로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마음을 정화시켜 줄 수 있는 가을 정취가 깊이 묻어나는 단풍들이 물들고 있어 홀로 오르는 산객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있다.


너덜길을 오르니 커다란 참나무들이 등로에 보이는 평이한 오르막 등로가 여전히 이어지고 힘들게 그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드디어 완만하게 이어지는 능선 등로에 도착을 해 조금은 편안하게 걸어 진행을 해 본다.

잠시 후 길게 이어지는 나무계단이 나타나고 그 계단을 타고 다시 굵은 땀방울을 흘리다 보니 계단 등로가 끝이나고 이제는 굵은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등로를 따른다.

그 로프 구간을 지나 오르니 바위들과 참나무들이 보이는 530.6 무명봉에 도착을 해 가쁜 숨을 깊게 들이 마시며 잠시 쉬어 간다.

  

무명봉에서 가쁜 숨을 내쉬고 잠시 쉰 후 다시 내려가니 몇 발자국 되지 않아 구급함과 계명산119신고안내 제1지점 안내판이 서 있어 사진에 담고 진행을 이어간다.

다시 이어지는 가파른 오르막 참나무 등로를 타고 미끄러운 낙엽을 조심하며 오르니 나뭇가지 사이로 올라야 할 계명산 정상부의 모습이 살짝 보일듯 말듯 다가오고 이어지는 안전목책과 로프를 따라 굵은 땀방울을 등로에 뿌리다 보니 잠시 하늘이 열리면서 방금 전 어렵게 올랐다 내려 온 충주 남산이 미세먼지 속에서도 빛나고 이제 그 거리감이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생각지도 못한 남산을 살펴보고 힘을 내 다시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관목들의 키가 조금씩 작아지며 드디어 공터의 전망대란 봉우리에 도착을 하지만 이름이 무색하게 전망은 전혀 없는 620 무명봉이다.

공터 한쪽에는 전망대란 이정판이 걸려 있고 반대쪽에 정상까지는 아직 1.4 Km를 더 가야 한다는 이정표가 서 있는데 정상 반대 방향인 우측으로는 계명산휴양림 방향으로 하산할 수 있는 이정표도 보인다.

물 한모금 마시고 보이는 것이 없으니 다시 배낭 둘러메고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지만 그 무게감이 더욱 무겁게만 느껴지는 시간이다.


지금까지의 경험 상 결국 거리와 시간이 예상된 것만큼 지나야 마무리가 될 수 있음을 알기에 조바심을 버리고 해 지기 전까지 마무리를 하면 좋겠다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니 다시 두 다리에 힘이 들어 가고 특히나 애마까지 날머리에 잘 주차를 해 놨기에 조금 더 늦어도 상관없다는 마음을 가지니 조바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도 조만간 걸어야 할 갑산지맥 산줄기와 올라야 할 계명산 정상부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노랑게 물들어 가는 가을 정취를 담아 함께 사진에 남기다 보니 힘든 산행 속에 또 계절이 가고 있음을 가슴으로 느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보일듯 보이지 않는 조망과 풍경을 아쉬워하며 주위 풍경만이라도 마음에 저장하다 보니 어느 지점에서는 아직 지지 못한 고운 단풍이 산객의 발걸음을 붙잡아 잠시 발걸음 멈추고 가을을 음미해 보는 시간도 가져 본다.

곱게 물들어 가는 단풍 옆으로는 이제 그 삶을 다하고 말라가는 단풍잎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최후의 화려함을 뽐 내는 것은 아닐까 생각도 해 보는 시간이다.

다시 이어지는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굵은 로프가 나무에 설치되어 있어 그 로프를 타고 올라 가니 다시 안전목책과 로프가 함께 보이기 시작한다.

힘겹게 그 오르막 등로를 오르니 벤취쉼터와 계명산119신고안내 제2지점 안내판이 보이는 공터에 도착을 해 심호흡 한번 하고 다시 출발하니 금새 정상까지 0.8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서 있는 도상 707.9봉에 도착을 해 과일 한쪽으로 갈증과 허기를 채우고 진행한다.


이정표가 서 있는 707.9봉을 지나 오르니 나즈막한 무명안부를 지나 바위암릉 구간이 나타나지만 경사도는 급격하게 완화되면서 체력적인 부담에서는 어느 정도 벗어나는 느낌으로 조심해 걸어 올라 본다.

잠시 후 무명봉을 넘어 나즈막한 안부를 통과하니 다시 바위암릉 등로에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오르막 등로가 나타나고 이제 정상까지 그리 멀지 않았음을 느끼며 그 로프를 따라 안전하게 걸어 올라간다.


그렇게 로프를 타고 오르니 커다란 바위 사이로 자라난 거대한 소나무가 존경스럽게 자라고 있는 무명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내려가니 수북히 쌓여 있는 낙엽이 인상적인 무명안부를 지나 다시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바위암릉으로 이어지고 있다.

조심하며 그 바위암릉을 올라가니 등로는 이제 푹신한 낙엽 등로로 바뀌면서 정상까지 0.5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와 국가지점번호판이 서 있는 727 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아직 남아 있는 화려한 단풍과 그 삶을 다하고 말라가는 나뭇잎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는 풍경들을 사진에 담고 그 무명봉을 지나 정상부로 향하는 발걸음에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단풍 지대를 지나니 눈 앞에 거대한 바위벽이 나타나고 그 앞으로 무명안부가 보이는데 조심스럽게 내려가 바위벽을 타고 오르니 오르막 등로에는 다시 안전목책과 로프가 길게 이어지고 있다.

마지막 화려함을 만천하에 선보이려 노력하듯 피어난 단풍들을 구경하며 천천히 걸어 오르니 약간의 바위암릉 지대를 지나 다시 안전목책과 로프를 만나고 곧이어 진디가 깔려 있는 헬기장에 도착을 하니 부부 등산객 두분이 잠시 휴식을 취하며 인사를 건네 준다.

잠시 이야기 나누고 등로 우측으로 충주호를 내려다 보니 미세먼지로 인해 그 윤곽조차 잘 구분이 되지 않고 그 뒤로 보여야 할 갑산지맥의 산줄기들도 시야에서 사라져 많은 아쉬움을 남기는 시간이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부부 등산객과 인사 나눈 후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드디어 이 산줄기의 이름을 붙이게 된 계명산 정상에 도착을 해 멋진 추억들을 남겨 본다.

계명산은 충청북도 충주시 용탄동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774미터이며 서쪽으로 목행동과 동쪽으로 동량면에 접한다.

충주시 북동쪽과 충주호 사이에 초승달처럼 능선이 뻗어 있고 충주호 건너편 북쪽에 지등산(535미터)과 마주하며 마즈막재로 고개가 연결되어 남산(636미터)에 이른다.

마즈막재는 옛날 죄수들이 사형장으로 갈 때 마지막으로 넘는 고개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충주시에서 충주호관광 유람선 선착장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정상에 오르면 서쪽 아래로 충주시와 북쪽으로는 인등산, 천등산, 시랑산 줄기가 보이고 동쪽으로는 충주호 너머로 부대산(627미터) 산줄기가 보인다.

산 이름의 유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백제시대에 이 산의 남쪽 마고성에 왕족이 성주로 있었으며 당시 산에는 지네가 많이 살아 성주의 딸이 산기슭에서 지네에 물려 죽게 되어 성주는 산신령에게 치성을 드렸다.

그러자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길 지네는 닭과 상극이니 산에 닭을 풀어놓으라 하였고 성주가 그 말에 따라 닭을 방목하자 지네가 사라졌으나 다시 지네가 들끓을 것을 염려하여 계속 닭을 풀어놓아 길러 곳곳에 닭의 발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원래 오동산 또는 심항산이라 부르던 산의 이름을 이때부터 계족산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1958년 충주시에서 여명을 알리는 뜻의 계명산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산행은 마즈막재에서 능선을 따라 정상에 올라 하종마을로 내려오는 코스가 있는데 약 4.8 Km 3시간 정도 소요되며 또 853고지에 올라 갈평리로 내려오는 코스가 있는데 6.2 Km로 약 2시간 30분이 소요된다.

주변의 충주호 관광지도 빼놓을 수 없는 명소이며 숙박 시설과 식당이 많으며 토질이 좋고 일조량이 알맞아 산기슭에서 생산되는 사과는 품질이 우수하여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이제 계명지맥 산행도 그 막바지에 도착했음을 알기에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 지지만 그 합수점까지는 또 어떤 변수들이 도사리고 있을지 짐작도 되지 않기에 마음의 긴장감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계명산 정상에서 고운 추억들을 남기고 사진을 담으며 잠시 망중한을 즐긴 후 다시 헬기장 뒷쪽의 능선 등로를 따라 내려 오니 나즈막재 부근에서 만났던 부부 등산객들이 올라오고 인사 나누며 잠시 이야기를 하고 진행해야 할 막은대미재 4.3 Km이라는 이정표가 서 있는 곳 앞에 자리 펴고 남아 있던 빵과 과일로 허기를 달래고 있으니 부부 등산객이 정상을 다녀 와 넓은 헬기장에 자리 펴고 늦은 점심식사를 즐긴다.

이 부부 등산객들도 어제 서울에서 내려 와 봉화의 청량산을 둘러보고 오전에 다른 곳 한곳을 더 다녀 온 후 서울로 복귀하기 전 이곳 계명산에 올라 온 산행 마니아 부부인듯 보였다.

방금 전 올라올 때 보다는 좋아졌지만 아직도 뿌연 충주호와 갑산지맥 산줄기를 배경으로 부부 등산객을 사진에 담고 갈길이 멀기에 인사 드리고 먼저 출발해 막은대미재로 빠르게 하산을 시작한다.

 

잠시 내리막 등로를 타고 빠르게 걸어 내려가니 아직 지지 못한 화려한 단풍들이 등로를 가득 메우고 있어 마음과는 달리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단풍들을 사진에 담으며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계명산119신고안내 제4지점 안내판이 서 있는데 제1,2 안내판은 만났는데 제3안내판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한 시간이다.

사진 한장 남기고 곧바로 출발하니 생각보다 등로가 좋아 무척 빠르게 내려가는 시간이다.


잠시 화려한 단풍들이 눈길을 잡는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바위들과 커다란 소나무들이 보이는 713.2 무명봉도 넘고 이어지는 평이한 단풍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저 멀리 돌탑 하나와 이정표 서 있는 안부가 내려다 보이고 다가가 살펴보니 정상에서 0.4 Km 진행되어 내려 온 지점 확인 이정표이다.

주위 조망도 없고 특이할 것도 없기에 다시 사진 몇장 남기고 곧바로 출발해 그 돌탑 안부를 통과한다.


그 돌탑과 이정표를 지나니 다시 등로 옆으로 피어난 아름다운 단풍들이 산객의 발걸음을 붙잡고 그 유혹을 벗어나지 못하고 한동안 천천히 걸으며 많은 사진을 담아 본다.

양지 바른 곳은 이미 단풍이 져 앙상한 나뭇가지들만 남아 겨울 준비가 한창이지만 음달은 아직도 고운 단풍이 남아 대조를 이루는 등로를 따라 깊어가는 가을을 제대로 느껴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여유를 부리며 걸어 내려가니 작은대미재까지 3.6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보이고 사진에 담은 후 곧바로 진행을 이어간다.


그 이정표를 지나니 다시 너무나 아름다운 단풍이 유혹을 하고 잠시 발걸음 멈추고 사진에 담은 후 출발하니 길게 이어지는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되어 있어 조심하며 미끄러지지 않토록 내려가 본다.

가을이 무르익는 풍경들을 사진과 가슴으로 담으며 내려가니 목책구간이 끝이 나고 진디가 죽어 가는 안동권씨 묘지가 나타나는데 이 산중에 어느 후손이 올라 와 관리를 할지 걱정도 앞서는 풍경이다.

다시 화려함을 자랑하는 단풍들을 살펴보며 조금은 완만해진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잡목들이 정상을 차지하고 있고 좌측 바로 아랴로 우회 등로가 나 있는 485.6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출발한다.


이제 고도가 많이 낮아졌는지 급경사 내리막 등로는 보이지 않고 평이하고 완만한 내리막 등로가 이어지고 있어 마음 편히 거어 본다.

커다란 참나무들 사이로 키 작은 관목들이 혼재되어 있는 낙엽 등로를 따라 잠시 사색하는 시간도 갖다 보니 정상에서 1.8 Km 내려 왔다는 이정표를 지나 금새 벤취쉼터들이 보이고 조망이 좋은 419.6봉에 도착을 해 배낭 내리고 등로 좌측으로 펼쳐진 조망과 풍경들을 감상하며 시원한 물 한모금으로 목마름을 달래 본다.


제일 먼저 바로 발 아래 펼쳐진 연수동 지나 충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 오고 그 우측 뒤 저 멀리 오늘 산행을 마무리해야 할 달천과 남한강이 만나는 탄금대 합수점도 희미하게 내려다 보이지만 미세먼지인지 안개로 인한 박무 현상 때문에 분간조차 하기 힘든 상황이 아쉽기만 하다.

그 탄금대 넘어 부용지맥 산줄기가 보일듯 말듯 시야에 들어 오는데 사진으로는 보이지도 않고 그 부용지맥 뒤로도 너무나 흐리지만 가섭지맥이라 생각되는 산줄기가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산객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다.

 

충주 시내 우측으로는 이제부터 이 산객이 걸어 내려가야 할 나즈막한 계명지맥 바지막 산줄기가 내려다 보이고 그 좌측 끝자락에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고 달천과 남한강이 만나는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는 풍경도 살포시 알려주고 있다.

그 우측 뒤로는 오갑지맥 옆으로 이어지는 보련산과 국망봉 줄기가 보일듯 말듯 펼쳐져 있어 사진에 담아 보지만 아쉽게도 사진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모두 걸었던 산줄기들이라고 이렇게 보일듯 보이지 않는 방향만이라도 확인하고 옛 추억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시간으로 남겨 본다.


정중앙에 탄금대 합수점을 두고 아쉬운 마음에 다시 한번 더 연수동과 충주 시내를 사진을 남겨 본다.

일은 많지 않아도 산행 때문에 자주 들렸던 충주이기에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충주 연수동을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보인다.

연수동은 충청북도 충주시의 중앙 북쪽에 위치한 동으로 1914년 연원과 동수동에서 한 자씩을 따서 연수리라고 하였는데 연원은 찰방이 있던 곳이고 동수는 연원의 동쪽을 지키던 망대가 있었던 곳이다.

여지도서에 이곳은 북변면 연원리 지역으로 충주관아로부터 북쪽으로 5리 거리에 위치한다는 기사내용이 있고 조선지형도에서도 지명을 확인할 수 있다.

연수동은 1914년에 충주군 읍내면에 편입되었고 1956년에는 충주시에 속하였으며 연수초등학교가 있다.

앞으로 몇번을 더 들려야 산줄기 잇기 산행을 위해 찾지 않아도 될 충주가 될련지 아련한 추억들만 떠 오르는 시간이다.


미세먼지로 인한 아쉬움은 남지만 산상에 올라 늘 한결같이 좋은 조망과 풍경을 만날수 있다면 그 또한 지루하고 흥미없는 산행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조망처인 419.6봉을 지나 우측으로 보이는 바위와 돌탑들을 지나 완만하게 걸어 내려간다.

안전목책과 로프 구간이 나타나고 가파르게 내려가니 등로는 다시 완만한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며 묘지도 만난다.

묘지들을 지나니 굵은 낙엽송이 등로를 가득 채우고 그 사이로 나 있는 꼬부랑 등로를 따르니 이정표가 서 있는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에서는 우측 내리막 등로를 버리고 좌측의 작은민재 방향인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따라 진행을 해야 하는 지점이다.


좌측으로 나 있는 뚜렷한 등로를 따르니 무명묘지들이 나타나고 곧이어 커다란 아카시아 나무들과 작은 바위들이 보이는 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그 무명봉을 지나니 등로는 다시 낙엽송 구간으로 변하면서 완만하게 내려가고 그렇게 한동안 진행하니 갑자기 등로가 어지러워지며 왔다리 갔다리 하는데 결국 우측의 비포장임도를 만나 진행하게 되고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좌측으로 사유지 출입금지라는 경고 종이코팅지가 원형철조망에 걸려 있는 지점에 도착을 한다.

이곳에서 잠시 헷깔려 짧은 알바를 하고 진행하니 중년 부부 등산객이 빈몸으로 지나가고 살펴보니 충주 시민들에게 사랑 받는 산책로쯤으로 생각되는 등로이다.

잠시 후 안부인듯 아닌 듯한 곳을 지나는데 살펴보니 이곳이 작은민재로서 충주시 연수동 금곡에서 용탄동 절골로 넘어가는 고개가 작은민재이고개라는데 어떠한 자료도 보이지 않아 아쉽기만 하다.


넓은 비포장임도 같은 산책로를 타고 작은민재 안부를 지나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등로 양쪽으로는 절정으로 달려가는 단풍들이 산객의 마음을 흔들고 많은 사진을 담다 보니 시간 개념이 사라지고 있음을 한참을 지난 후에야 느끼게 되었다.

계속 이어지는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등로 양쪽에 거대한 참나무 한그루씩 보초를 서듯 서 있는 290.5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타고 산행을 이어가 본다.


잠시 걸어 내려가니 15번과 43번 두대의 번호가 나란히 걸려 있는 송전탑을 지나고 등로 좌우측으로 칡넝쿨이 우거진 사이로 나 있는 등로를 타고 걸어가며 등로 좌측으로 펼쳐진 희미한 충주 시내를 살펴보는 시간은 여전히 아쉬움으로 가득한 시간이다.

다시 나즈막한 무명안부를 지나 다시 오르니 벤취쉼터들이 설치되어 있고 커다란 느티나무가 보이는 공터로 이뤄진 충주421이라는 삼각점이 박혀 있는 292.5봉에 도착을 하니 동네 주민 한분이 벤취에 앉아 쉬고 있어 방해되지 않게 조심하며 주위 풍경을 사진에 담은 후 다시 진행 방향과 충주 시내를 살펴보는 시간도 가져 본다.


제일 먼저 서쪽을 살펴보니 이제부터 걸어가야 할 계명지맥 마지막 산줄기가 길게 이어진 풍경이 눈에 들어 오고 멀게만 보였던 충주시의 고층 빌딩 3개도 마루금 좌측으로 가깝게 다가와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 온다.

그 마루금과 고츨빌딩 3개 사이로 오늘 산행을 마무리해야 할 탄금대의 달천 합수점이 희미하지만 확실하게 내려다 보이고 그 뒤 저 멀리 부용지맥의 산줄기들이 나즈막하지만 병풍처럼 둘러쳐진 모습도 눈에 들어 오기 시작한다.

그 산줄기 좌측으로는 충주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데 나뭇가지들의 방해로 선명하지 못하기에 벤취수미터에 앉아 남아 있는 음료수로 갈증을 풀고 다시 천천히 주위 풍경을 둘러 보기로 한다.


갈증을 풀고 등로 좌측 뒤를 살펴보니 아직은 푸르름이 남아 있지만 노랑게 물들어 가는 활엽수 단풍 넘어 저 멀리 방금 전 올랐다 내려 온 계명산 정상부가 빼꼼하게 올려다 보여 사진에 담아 본다.

조금 더 시야가 좋았으면 좋은 장소를 찾아 멋진 사진을 담아 보려고 노력도 했겠지만 미세먼지와 박무로 인해 보이는 것이 없으니 이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아쉬운 시간을 마무리하고 다시 가벼워진 배낭을 둘러메고 산행을 이어가 본다.


멸발자국 더 걸어 내려가니 서쪽 진행 방향으로 계명지맥 마지막 산줄기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고 그 좌측인 남서쪽으로 달천의 합수점이 있는 탄금대와 고층빌딩이 내려다 보이는 충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 오기 시작한다.

산행을 하기 위해 많이도 찾았고 많이도 묵었던 충주이지만 탄금대 이외에는 별 기억이 없고 머릿속에 남아 있는 추억이라고는 모두 산과 관련된 것들 뿐이니 맥 잇기 산행이 끝나면 여유를 가지고 한번쯤 즐겼다 가는 충주시가 되기를 바래보는 ㅎ시간이기도 하다.

이곳 근처에서 다시 오룩스맵의 트랙이 이상을 일으켜 몇 Km가 갑자기 튀어 버려 진행된 거리보다 10여 Km 가 늘어나고 트랙도 보기 싫게 작성되어 그 이유가 궁금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왜 이런 현상들이 자주 일어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충주 시내를 살펴보고 이제는 계명지맥 마루금 우측을 살펴보니 거대한 충주일반산업단지 지나 남한강이 보이고 그 뒤로 이어지는 비산비야를 넘어 희미하게 백운지맥의 산줄기들도 보이는데 사진으로 확인하니 그곳이 하늘인지 산줄기인지 구분조차 하기 힘든 상황이다.

그래도 방향을 잡아 얼마 전 올랐던 산줄기들을 희미한 실루엣으로나마 살펴보고 진행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벌써 고운 추억으로 남겨진 백운지맥에서의 시간들을 생각도 잠시 해 보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조금은 아쉽고 조금은 감사한 마음으로 조망과 풍경들을 살펴보며 내려가니 벤취쉼터 하나가 보이고 안전철봉과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가파른 내리막 등로가 이어지는데 그 좌측편으로 전망좋은곳이란 안내판이 보여 들어가 보니 멋진 조망처가 보인다.

주민 한분이 망중한을 즐기고 있어 방해가 되지 않토록 옆에서 감탄하며 조망을 즐기니 이곳 저곳 설명을 해 주시기에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제일 먼저 남쪽으로 충주시내를 지나 우뚝 솟아 있는 오전에 들렸던 남산이 조금은 깨끗한 모습으로 올려다 보이고 그 우측 뒤로 정상에 많은 인공구조물들이 보이는 489미터의 대림산이 보이는데 저 대림산은 전혀 몰랐었는데 주민이 설명해 줘 그제서야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정면인 남남서 방향으로 충주시내가 한눈에 들어 오고 군계일학처럼 솟아 있는 고층빌딩 3개 우측으로는 달천과 남한강이 만나는 합수점인 탄금대도 조금 더 상세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땅 이름 점의 미학에 의하면 충주시는 주례소에 쓰기를 중심왈충이라고 했으미 중심지가 곧 충으로 표현된다는 말이다.

충주는 고구려 때에 나라의 벌판이란 뜻으로 국원성이라 했고 신라 때에 가운데의 벌판이란 뜻으로 중원이라 했으므로 벌판이란 의미를 안고 발전해온 고을이다.

벌판의 위치가 나라의 가운데에 해당하므로 중원이 되었고 그것이 다시 유학을 숭상한 고려 태조에 이르러 주례의 의미를 살려 충주로 다시 고침으로써 오늘에 이른 것이다.

정인지는 충주는 남방의 목구멍을 찔러 막은 곳에 자리하고 지역이 넓고 호구가 많으며 이 때문에 공문서가 구름처럼 쌓이고 빈객들이 모여들어서 밝고 지혜로움이 없으면 다스릴 수 없는 곳이라 했다. 홍귀달은 중원은 남북의 요충지로서 서울로부터 남방으로 가는 사람이 물에 뜨고 육지로 달리어 중원에 모였다가 다시 갈라지며 남방에서 북쪽으로 오는 자도 또한 두 고개를 지나 중원에 모이고 여기에서 물과 육지를 경유하여 서울에 도달하게 된다고 했다.

이것은 충주가 단순한 중앙의 벌판에 그치지 않고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빈번한 수륙 교통의 요지임을 설명하는 글귀이다.

또한 임진왜란 때에 남한강에 배수진을 치고 왜적과 싸웠던 신립 장군의 장렬한 죽음을 추모하고 임경업 장군을 추모하기 위한 충렬사를 세우면서 충주는 충렬의 고장으로 변모해 갔다.

이는 국지 장소의 지명에 반영되어 충주시 내의 번화가로 알려진 중심지에 충의동이 출현함으로써 구체화되었다.

충주는 남한강과 달천이 합류하는 충적평원에 자리하며 국원과 중원으로 통용할 만한 광활한 평원이 전개되어 비옥하고 함지못 등 수많은 소택지가 분포한다.

우륵이 가야금을 탔다는 데서 유래한 탄금대는 신립 장군의 격전장과 어우러진 역사 현장이 되고 신라시대 5개의 작은 서울 중의 하나이며 고려시대 12개 지방 통치 거점의 하나이다.

13도의 분할 당시에도 충청도의 이름(충주와 청주)이 나오고 충북의 관찰사가 주재할 정도로 충주는 확고한 위치에 있었으나 1908년에 도청소재지의 기능을 청주에 빼앗기면서부터 쇠퇴의 길을 걸어오다가 1956년에 시 승격되면서 회춘을 맞이하고 있다.

이후 충주 비료 공장과 충주댐의 건설 및 건국대학교 제2캠퍼스의 설립 등은 회춘의 불길을 타오르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렇게 한동안 그 조망좋은곳에서 주민 한분의 도음을 받아 멋진 조망과 풍경을 감상하고 다시 뒤돌아 나와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 본다.


이어지는 안전철봉과 로프를 따라 급경사 내리막 등로를 조심하며 내려가니 통나무 계단이 보이고 그 통나무 계단을 지나 이정표가 2개나 서 있는 비포장임도 갈림4거리 안부에 도착을 해 이정표를 살펴본다.

막은대미재가 아직 0.5 Km 남아 있고 우측으로는 사래실까지 4.4 Km 거리라는 이정표와 함께 연수정과 연수주공아파트로 내려갈 수 있다는 방향과 거리 표시가 되어 있는 또 다른 이정표도 보인다.

사진에 남기고 그 무명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걸어 올라 본다.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등로 좌측 위로 벤취쉼터1개가 보이고 곧이어 국가지점버호판이 붙어 있는 이정표가 서 있는데 양쪽 모두 풍경길이란 글자만 보여 이곳을 풍경길이라 부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

계속 올라가니 무명묘지를 지나 갈림삼거리 이정표와 만나는데 우측으로 작은대미재까지 0.3 Km라는 표시가 보이지만 우측 등로를 버리고 좌측의 직진 등로를 타고 걸어 간다.운동기구들이 보이는 정상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이정표가 서 있는 안부인 작은대미재에 도착을 하는데 그 안부를 넘어거자마자 막은대미재에 대한 설명판이 보인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 의하면 막은대미재는 충청북도 충주시 연수동과 목행동 사이에 있는 고개이며 해발 고도는 약 210미터로서 충주의 진산 중 하나인 계명산(775미터)에서 서쪽으로 남한강까지 뻗은 산줄기 상에 위치한다.

동서 방향의 산줄기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구조선을 따라 풍화가 진전되면서 능선이 약간 낮아진 결과라 할 수 있으며 막은대미재의 경우 고도 자체는 그리 높지는 않으나 주변 지역이 남한강 본류 변과 충주분지여서 오르는 길은 상대적으로 짧은 급경사를 지니고 있다.

또한 암상도 계명산과 동일한 계명산층(흑운모석영편마암)에 속하여 수풀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다.

충주의 주산인 계명산 등산은 대체로 외지인들에게 남쪽에 위치한 마즈막재에서 오르고 내리는 코스가 가장 많이 이용되는 것으로만 알려져 있으며 또한 충주호반을 이루는 종민동 계명산 자연휴양림과 하종 그리고 충주댐 휴게소에서 북쪽으로 오르내리는 코스가 잘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막은대미재에서 시작하는 정상 북서쪽의 코스가 가장 붐빈다.

외부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이 코스는 시내 중심가 인구 밀집 지역인 연수동 두진아파트와 아이파크아파트 단지 주민들이 평일에도 아침과 저녁으로 찾는 코스이다.

이 코스는 마즈막재를 비롯한 기존의 코스들보다 길이가 두 배 가량 길다는 것이 장점이기도 하다. 연수동의 두진아파트를 출발하여 막은대미재에서 작은민재 지나 425미터 봉과 485미터 봉을 경유하는 북서쪽을 타고 계명산 정상에 오르는 코스로서 산행 거리는 약 5.5 Km이고 3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막은대미재 안부를 지나 다시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동네 산책로 수준의 소나무 등로가 이어지고 우측 위로 올려다 보이는 248 무명봉은 좌측 우회 사면 등로를 통해 통과하게 되어 있어 미련없이 좌측 사면 등로를 따른다.

잠시 후 우측 248 무명봉에서 내려오는 등로와 만나는 갈림삼거리를 지나 나즈막한 무명안부를 지나고 안전철봉과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통나무 계단을 오르니 현위치번호에 뒷골목산이란 이름이 보여 찾아보니 자료가 없어 조금은 아쉬움이 남지만 충주 주민들은 알고 있는 산인 듯 보였다.

계속 이어지는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드디어 등로 한가운데에 인식을 할 수 없는 삼각점이 박혀 있는 244.9 삼각점 정상이다.

이곳에서 직진의 잘 발달된 계단이 놓여 있는 등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잡풀들이 자라난 방향으로 꺽어 진행해야 할 길주의 지점이기도 하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푸른 빛이 주를 이루고 있고 잡풀들이 많이 보이는 등로를 따르니 무명묘지 한기를 지나고 조금 더 걸어 가 또 한기의 무명묘지를 통과한다.

잠시 후 커다란 참나무가 보이는 등로를 지나 여름과 가을이 공존하는 등로를 따르니 또 다른 묘지 한기를 지나 갑자기 등로에 삼각점이 보이는데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고도 상 209.1 무명 삼각점봉이다.

사진 한장 남기고 곧바로 출발한다.


삼각점봉을 지나니 커다란 바위암릉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사이마다 크게 자라난 벗나무들이 눈길을 사로 잡는다.

바위암릉 지대를 지나니 아카시아 나무 지대를 통과하고 작은 의자가 놓여 있는 무명안부를 지나 교통호처럼 보이는 수로가 있는 무명봉에 도착을 하는데 가까운 곳에서 차량들이 빠르게 통행하며 내는 소음이 크게 들리기 시작한다.

그 무명봉을 지나 내려가니 드디어 금릉배수지 앞 넓은 시멘트 공터에 도착을 하고 이제부터는 우측으로 나 있는 도로를 타고 국원대로 6차선 포장도로 방향으로 진행을 이어가 본다.

금릉동은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는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칠금동 관할이고 충주시 도시지역의 서북부에 있으며 주위에 연수동, 목행동, 칠금동과 접하고 서쪽은 남한강에 면하며 남한강 너머로 금가면 유송리와 마주한다.

원래 충주군 북변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북변면의 금제와 능암, 호암, 칠지 및 연원동의 일부 지역을 병합하였다.

금제와 능암의 이름을 따서 충주군 읍내면 금능리가 되었다가1917년 읍내면이 충주면으로 개칭되었고 1931년 충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충주읍 금능동이 되었다.

1956년 충주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금능동으로 개칭되어 충주시 칠금동 관할의 법정동이 되었고 2007년에 금능동이라고 표기하고 호칭해온 동명을 한글맞춤법에 따라서 금릉동으로 바꾸기로 하였다.

달천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남한강변 마을로서 대규모 친환경 시설채소단지와 아파트가 밀집된 도농복합지역으로 마을 주위에 충북선과 19번국도가 있다.

충주시청, 충주세무서, 충주시보건소, 충주상공회의소, 충주산림조합, 국민건강보험공단 충주지사, 한국감정원 충주지점, 교통안전공단 충주검사소, 금릉우체국, 금릉초등학교 등이 있고 또한 유엔기념관, 국제문화예술센터, 평화박물관, 무술박물관이 포함되는 유엔평화공원과 충주여성회관이 있으며 능암과 섬들 등의 자연 마을이 있다.


금릉배수지로 이어지는 1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가니 국원대로 6차선 포장도로 건너 원 계명지맥 마루금이 올려다 보이는데 지금은 국원대로 방향에서 절개지와 지독한 잡목과 잡풀들로 인해 도저히 올라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잠시 도로를 따라 걸어 보는 시간이다.

국원대로 6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좌측으로 걸어가며 첫번째로 만나는 횡단보도에서 도로를 건넌 후 우측 마루금 방향으로 올라가 보려고 시도를 해 보지만 높은 콘크리트 옹벽과 그 뒤로 우거진 가시나무들과 칡넝쿨들로 인해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잠시 도로를 타고 진행을 이어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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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로 인해 이제는 원 지맥 등로로 오르기도 쉽지 않은 우측의 지맥 마루금을 올려다 보며 국원대로 6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도로 우측으로 콘크리트 옹벽이 사라지고 이제는 밭 경작지 가장자리로 그물망을 설치해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게 만들었다.

그 밭 경작지를 지나자마자 우측으로 내려가는 소로가 보이고 그곳을 통해 내려가니 1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응골1길이다.

잠시 그 응골1기를 따라 우측으로 걸어가니 푸드 시스템이란 회사 건물 좌측 위로 올라가는 포장도로가 보이고 그곳으로 들어가 도로를 따르니 포크레인을 수리하는 넓은 마당으로 이어지는데 그곳에는 맡겨진 포크레인을 수리하는 사람과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출발한다.


그 포크레인 수리센터 앞마당에서 능선으로 오르지만 역시나 등로도 없고 잡목들과 잡풀들이 우거져 진행이 도저히 불가능 할 것 같아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능선 경계를 타고 묘지 사이를 지나 리끼다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능선으로 어렵게 올라 본다.

잠시 오르니 등로가 다시 사라지고 좌측으로 이어지는 사면 등로를 따르니 넓은 비포장임도와 만나 우측으로 걸어 올라간다.

잠시 후 고갯마루 안부에 도착을 하는데 그 고갯마루가 바로 계명지맥이 지나는 산줄기로서 그 고개 넘어에는 사과과수원이 보이는데 붉게 익어가는 사과들이 탐스럽게 열려 있다.

그 고갯마루에서 좌측 능선으로 올라 릮;다 소나무 군락지를 타고 걸어 전진하니 특별할 것 없는 리끼다 소나무들이 보이는 136.5 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그 무명봉에서 등로는 좌측으로 크게 휘어져 내려가고 등로에는 여전히 리끼다 소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잠시 후 차량 소음들이 크게 들리기 시작하고 약간의 잡목들이 보이는 등로를 타고 걸어 내려가니 저 멀리 쓰러질 것 같은 비어 있는 창고 건물이 나타나고 곧이어 충주여성문화회관과 가까운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팽고리산길에 도착을 한다.

그 팽고리산 2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좌측으로 걸어가니 도로 건너 우측으로 국원자동차매매센터 건물들과 많은 차량들이 보이는데 원 지맥 마루금은 그 건물 뒷편으로 올려다 보이는 팽고리산(광명산)으로 이어지지만 오를 수 없는지 대부분의 선답자들 산행 트랙에는 그냥 이어지는 도로를 타고 진행하다 중간쯤에서 우측 팽고리산 방향으로 치고 올라 온 내용이 대부분이라 고민하다 일단 자동차매매센터 방향으로 들어 가 보기로 한다.

 

자동차 매매센터 우측 뒤로 돌아 가니 커다란 개 두마리가 울부짓고 그 뒤로 돌아 살펴보니 나즈막한 개울을 건너 직등으로 치고 오르면 원 마루금과 가장 가깝게 진행이 가능할 것 같아 말라있는 개울을 건너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치고 오르니 온 몸에선 다시 굵은 땀방울이 흘러 내리기 시작한다.

잠시 후 소나무 가지들이 잘려 말라 있는 고사목이 보이는 곳을 지나 조금 더 걸어 오르니 소나무들과 밤나무들이 보이는 101.4 무명봉에 도착을 하는데 선답자들도 많이 지나가지 않았는지 흔적 하나 남아 있지 않다.


그 무명봉을 지나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비닐들이 소나무 주위로 흩어져 덮혀 있는 안부를 지나 다시 오르고 솔갈비가 푹신한 부드러운 등로를 따르니 또 다시 밤나무와 고사목들이 널려있는 무명봉을 지나 삼각점이 박혀 있는 148.6봉 정상에 도착을 하니 백두사랑 산악회에서 걸어 놓은 광명산 정상판과 많은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이 걸려 있는 팽고리산 일명 광명산 정상에 도착을 한다.

광명산(148.6봉, 팽고리산)은 충청북도 충주시 금릉동에 있는 산으로 명칭유래를 보면 산 모양이 팽이처럼 생겼다고 하여 팽고리산이라 한다.

팽이를 치다 보면 아주 잘 칠 때 팽이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는데 바로 이 순간처럼 산이 생겼다고 여긴 것으로 한자로는 광명산()으로 표기한다.

충주의 주산인 계명산에서 서쪽으로 뻗은 산줄기 끝 부분에 자리 잡은 구릉성 산이고 주변에 남한강 본류가 흐르며 충주 탄금대가 있는 대문산이 부근에 있다.

안동권씨 문중 산으로 안동권씨 충주 입향조 권천과 후손의 묘가 많이 있는 팽고리산은 특히 충주가 고향인 권태응(1918~1951) 시인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더 알려져 있다.

권태응은 일제강점기에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1년간 옥살이를 한 뒤 폐결핵에 걸려 고향에서 요양했는데 요양할 당시 시골 체험이 알알이 배인 동시와 동요를 많이 내놓았다.

대문산에 오르면 1968년 충주 탄금대에 권태응의 감자꽃을 새긴 노래비가 세워졌고 이곳 팽고리산 남서쪽 비탈면에 있는 충주세무서 자리에서 백제 초기의 무덤 200여 기를 비롯한 금릉동 유적이 발굴되었다.

이제 이곳 계명지맥 산행도 무탈하게 잘 마무리가 되어간다고 자만하며 그 광명산을 내려가며 예기치 못한 수렁에 빠져 너무나 힘들게 진행하는 시간이 되었다.


마지막 광명산이란 생각에 편안한 마음으로 정상 마루금을 타고 내려가니 우거진 잡풀들과 잡목들이 계절의 변화에 순응하며 말라 죽어가는 풍경이 눈에 들어 오고 그 뒤 저 멀리 논 경작지로 이뤄진 마지막 탄금대로 이어지는 마루금이 좌측의 고층 아파트촌과 묘한 대조를 이루며 눈길을 잡는다.

그 들판 넘어로는 달천 지나 좌측의 신선지맥 산줄기와 우측의 부용지맥 산줄기가 구름속에 갇혀 있는 햇살의 빛내림이 아름다운 아래로 길게 펼쳐진 모습이 눈에 들어 온다.


그 진행 방향 우측으로는 드넓은 논 경작지 뒤로 금릉동 마을이 내려다 보이고 그 마을 넘어 저 멀리 부용지맥의 산줄기들이 아름답게 병풍처럼 다가와 있다.

그 금릉동 우측 가장자리에는 내려오며 봤던 목행용탄동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렇게 아무 생각없이 말라 죽어가는 잡풀지대를 헤치며 여유를 부려 보는 시간이다.

목행동은 충청북도 충주시에 속하는 법정동으로 1914년 충주군 북변면에서 충주군 읍내면으로 편입되어 목수동과 행정리, 미력리, 지탄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고 목수동과 행정리의 머리자를 따서 목행리라 하였다.

목수는 옛날 충주목의 북쪽 물가라는 뜻이며 행정은 목수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큰 은행나무가 있어 은행정이라고도 하였는데 이 은행나무는 6·25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고 전해 온다.

1760년 여지도서에 충원현의 북변면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1895년 충주군 설치로 충주군 북변면으로 개칭되었다가 1912년 구한국 지방행정구역 명칭 일람에 충주군 북변면으로 32개 리를 관할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목행리라 해서 충주군 읍내면에 편입되었다.

1917년 읍내면 목행리에서 충주면 목행리가 되었고 1931년 충주면이 충주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충주읍 목행리로 1956년에는 충주읍이 충주시로 승격되면서 충주시 목행동으로 각각 개칭되었다.

1962년 용탄동과 합쳐져 목행용탄동의 연합동으로 개칭되었고 현재 행정동인 목행용탄동은 법정동인 목행동과 용탄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목행동은 충주시의 북쪽 남한강 변에 위치해 있으며 북으로는 금가면 및 동량면과 접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연수동 및 칠금동과 접하고 있다.

그곳에서 지도를 정독하고 선답자들의 산행 트랙을 잘 확인했어야 하는데 지금까지의 경험과 오늘 산행도 막바지에 다 왔다는 자만심에 빠져 눈 앞에 다가온 거대한 아카시아 군락지와 그 아래 충원대로로 내려가는 등로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내려가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잠시 우거졌다 말라죽어가는 잡풀지대를 헤치며 잠시 더 평이하게 내려가니 갑자기 눈 앞에 아카시아 잔나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금새 완전한 아카시아 밭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진행할 수 있는 공간들이 보여 이리저리 헤치며 그 아카시아 군락지를 통해 계속 전진하니 어떻게 그 아카시아 군락지는 너무나 힘들게 빠져 나갔지만 그곳에서 바로 몇비터 앞에 보이고 많은 차량들이 통행하는 소음이 크게 들리는 충원대로 4차선 포장도로로 내려갈 방법이 없어 완전히 가시나무들과 잡목에 갇힌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 아카시아 군락지와 충원대로 변 지독한 잡목 사이에 갇혀 오가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잠시 정신 차리고 도로로 내려갈 수 있는 길이 없는지 왔다리 갔다리 하며 한참을 해매다 보니 잠시 커다란 아카시아 나무들이 잘려진 공간이 보이고 그곳으로 가 지독한 잡목들을 헤치며 조금 충원대로 방향으로 내려가니 그 간벌된 커다란 나무들은 사다리차를 이용해 전선을 보호하기 위해 나무들만 베어내고 등로는 만들지 않은 듯 보였다.

그곳에서 다시 잡목과 가시와 사투를 벌이며 너무나 힘들게 막무가내로 충원대로 방향으로 길을 뚫고 내려가니 드디어 충원데로 4차선에 도착을 해 몰골을 보니 말이 아니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아무 사고없이 충원대로에 내려서서 도로를 타고 좌측으로 걸어가니 좌측으로 파라다이스란 예식홀과 충주세무서를 지나 보이는 횡단보도를 통해 충원대로 4차선을 통과한다.


세무서 건너편이란 버스정류장을 지나고 주유소를 지나 다시 우측 논 경작지 방향으로 나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가니 인삼포와 철도가 보이고 그 넘어 드넓게 펼쳐진 칠금동의 논 경작지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칠금동은 충청북도 충주시에 속하는 법정동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금대리, 신촌리, 칠지리, 능암리, 봉계동의 일부를 병합하고 칠지리와 금대리의 이름을 따서 칠금리라 하였다.

칠지는 옻나무 가지라는 뜻인데 옛날에 마을 근처에 옻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고 금대는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이라는 뜻으로 충주 탄금대의 준말이다.

칠금동은 원래 충주군 북변면에 속하였다가 1914 4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금대리, 신촌리, 칠지리, 능암리, 봉계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칠금리라 하고 충주군 읍내면에 편입하였다.

1917년 읍내면을 충주면으로 개칭하였고 1931 4 1일 충주면이 충주읍으로 승격하였다가 1956 7 8일 충주읍이 충주시로 승격하면서 충주시 칠금동이 되었으며 1962년 연합동제 실시로 금릉동과 합쳐져 칠금금릉동이 되었다.

동서로 흐르는 충주천 하류의 북쪽 지역에 있는 마을로 남한강과 달천을 끼고 있다.

잠시 그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오른손이 아프기 시작하고 살펴보니 손등과 바닥이 가시나무에 긁혀 완전히 상처 투성이이고 새끼 손가락에는 몇개의 가시들이 박혀 있는지 검은 반점 같은 것들이 보이는데 누르면 고통이 심해지기 시작한다.


지상으로 지나는 철도를 지나고 드넓게 펼쳐진 금릉동 논 경작지 한가운데를 통해 마지막 대문산을 향하며 도로 우측을 살펴보니 지나온 마루금 좌측 능선 아래 논 경작지와 아파트 단지들이 보이고 그 넘어 저 멀리 얼마 전 걸었던 천등지맥의 마루금들이 아파트 단지 머리 위로 보이기 시작한다.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에 줌으로 당겨 보지만 스마트 폰으로 담다 보니 제한적이고 다시 산행 트랙이 이유없이 튀어 자세히 살펴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그래도 이렇게 비산비야를 걸으며 천등지맥 산줄기임을 알 수 있음에 감사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걸어가는데 자세히 보니 지독했던 미세먼지와 박무들이 거의 사라지며 제법 먼 거리까지 조망이 되기에 가능했던 천등지맥 산줄기들과의 조우였다.

 

뒤돌아 보니 논 경작지 뒤로 철도가 보이고 그 좌측으로 충주세무서와 파라다이스 웨딩홀 그리고 지독한 가시나무에 갇혀 너무나 고생을 한 지역을 지나 광명산에서 우측 계명산으로 이어지는 계명지맥 마루금이 환상으로 다가온다.

걸어 진행하면서는 힘들고 어렵게 통과하였지만 통과한 이후 살펴보면 이렇게 뿌듯할 수가 없어 또 그 고통을 알면서도 겁없이 새로운 산길을 찾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등로 좌측으로는 충주 시내를 관통하는 아파트 단지들 뒤로 남산에서 우측의 대림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또한 서산으로 기울어져 가는 햇살을 기다리며 너무나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남산은 오늘 올랐으니 앞으로 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 대림산은 꼭 한번 올라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갈어 보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주위 조망과 풍경들을 살펴보며 논 경작지를 통과하니 칠금동 마을 진입도로에 도착을 하고 이리저리 마을길을 돌아 어렵게 마지막 퍼즐을 맞혀 본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 이상한 눈초리로 살펴보고 어느 산을 다녀오내고 질문들을 하기에 간단하게 남산과 계명산을 돌아 내려왔다고 답해 드리고 방향만 잡고 진행하니 칠지마을 다기능회관과 경로당을 지나 마을 한가운데 길을 따라 대문산 방향으로 걸어 간다.

 

잠시 후 충주임마누엘교회를 지나고 도로 공사중인 곳에 도착을 하는데 살펴보니 공사장 바로 건너편이 세계무술공원이고 그 뒤로 올려다 보이는 산이 바로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인 대문산처럼 보인다.

세계무술공원이라는 말도 처음이고 이런 공원이 있다는 소식도 처음이기에 자료도 찾아 보니 택견 때문에 생겼다는 내용은 알겠는데 왜 충주시에 이런 공원이 생겼는지는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많은 관광객들을 태우고 와는지 관광버스들도 보이고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세계무술공원을 가로질러 정문을 통해 빠져 나가고 바로 나타나는 도로를 건너 절개지를 타고 마지막 대문산을 향해 급경사 등로를 올라 잠시 뒤돌아 보니 오늘 이 산객이 걸어 온 마루금이 시원하게 펼ㅊ펴져 있고 바로 발 아애로는 세계무술공원도 내려다 보인다.

충주세계무술공원은 충청북도 충주시 금릉동에 위치하는 무술을 테마로 조성된 공원으로 충청북도 충주시 남한강로 24 (금릉동 700)에 있는 무술을 테마로 만들어진 공원이다.

남한강 일대의 관광지 조성과 충주시가 택견의 본고장임을 알리기 위해 조성되었는데 총 부지면적 617,000㎡ 규모의 공원으로 주요시설로는 인조잔디 축구장, 어린이놀이시설 라바랜드, 야외공연장, 세계무술박물관 등이 있다.

유네스코(UNESCO)가 공식 후원하며 전세계 39개국 47개 세계무술연맹 단체들이 참여하는 충주세계무술축제가 1998년부터 매년 이곳에서 개최되고 있다.

알지 못했던 많은 새로운 사실들을 확인하고 다시 능선으로 오르니 커다란 참나무들과 잡목들이 적당히 혼재되어 있는 드올가 나타난다.


잠시 후 교장안동김공 묘지를 지나니 뚜렷한 등로가 열리고 편안하게 그 등로를 타고 올라가니 넓은 리끼다 소나무 밭 건너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그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니 감자꽃 노래비가 세워져 있는 대문산 정상에 도착을 하는데 그 어디에도 이곳이 대문산임을 알리는 표식이 없어 아쉽기만 하다. 

대문산은 충청북도 충주시의 칠금동에 위치하고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107미터이며 남한강과 달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산으로 기암절벽에 송림이 우거져 경치가 좋고 탄금대가 있다.

탄금대는 신라 진흥왕 때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이라 전하고 임진왜란 때 신립이 왜군과 맞서 싸운 전적지이기도 하다.

탄금정, 충혼탑, 신립장군 순절비, 악성 우륵선생 추모비 등이 있으며 탄금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여지도서(충원)에 관아의 서쪽 8리에 있고 그 아래에는 금휴포가 있으며 그 위에는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탄금대가 있으나 뻗어 나오는 줄기는 명확하지 않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본래 견문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왜 이곳에 감자꽃 노래비가 세워져 있을까 궁금해 찾아보니 감자꽃은 1948년 간행된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시인 권태응의 동요집으로서 이 감자꽃은 1948년 글벗집에 의해 처녀 출간된 권태응 시인의 동요를 묶은 동요집이자 그 안에 수록된 시의 제목이기도 하다.

1968년 충주시 탄금대공원에 감자꽃노래비가 세워졌으며 이 때 등사판으로 동요집 감자꽃이 간행되었고 1995년에 창작과비평사에서 다시 동요집으로 재간행되었다는 자료가 보인다.


그 대문산 정상부를 지나 도로를 타고 마지막 탄금대 방향으로 걸어가니 생각보다 많은 충주 시민들이 이 대문산 정상부를 찾아 산책을 즐기는 모습이 눈에 들어 오고 잠시 후 충장공신립장군과 팔천고혼 위령탑이 보이는데 남산과 계명산 사이 임도를 걸을 때 봐던 내용이기에 통과한다.

잠시 후 도로 좌측으로 충혼탑을 살펴보고 계속 이어지는 도로를 타고 조각 예술품을 관찰하며 걸어가니 드디어 탄금대 입구 주차장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은 온통 탄금대에 관한 설명이 이곳저곳에 얼려 있다.

탄금대는 충청북도 충주시 칠금동에 있는 명승지로서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7월 9일 명승 제42호로 변경되었다.

탄금대는 본래 대문산이라 부르던 야산인데 기암절벽을 휘감아돌며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과 울창한 송림으로 경치가 매우 좋은 곳으로 신라 진흥왕 때 우리나라 3대 악성 중 하나인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삼국사기에 보면 우륵은 가야국 가실왕 때의 사람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에 귀화하였고 진흥왕이 기뻐하여 우륵을 충주에 살게 하고는 신라 청년 중에서 법지, 계고, 만덕을 뽑아 보내 악을 배우게 하였다.

우륵은 이들의 능력을 헤아려 각기 춤과 노래와 가야금을 가르쳤다고 하고 그가 이곳에 터를 잡아 풍치를 즐기며 커다란 바위에 앉아 가야금을 타니 그 미묘한 소리에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이곳을 탄금대라 불렀으며 칠곡리(지금의 칠금동), 금뇌리(지금의 금능리), 청금리(지금의 청금정) 등의 마을 명칭은 지금까지 전한다.

탄금대는 또 임진왜란 때 무장 신립이 8,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를 맞아 격전을 치른 전적지이기도 하다.

탄금대 북쪽 남한강 언덕의 열두대라고 하는 절벽은 신립이 전시에 12번이나 오르내리며 활줄을 물에 적시어 쏘면서 병사들을 독려하였다고 하는 곳인데 전세가 불리하여 패하게 되자 신립은 강에 투신자살하였다.

이곳에는 신립의 충의심을 기리는 탄금대비를 비롯하여 신립장군순절비, 조웅장군기적비, 악성우륵선생추모비, 충주문화원, 야외음악당, 충혼탑, 감자꽃노래비, 탄금정, 궁도장, 대흥사 등과 조각공원 및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충주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곳 탄금대는 4년 전 무더운 여름날 부용지맥 산행을 마무리하고 잠시 들려 봤던 곳이기에 약간의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이다.

탄금대 입구 매점에서 시원한 음료수 한병 사 마시며 갈증을 해결하고 악성우륵선생추모비를 지나 다시 낡은 충주문화원 좌측으로 나 있는 도로를 따르니 조각 예술품들이 보이고 잠시 후 안부 지나 우측으로 화장실도 보인다.

그 안부를 지나 오르니 잠시 부드러운 낙엽 등로가 이어지고 그렇게 무심으로 걷다 보니 실질적인 마지막 95.3 봉우리에 도착을 하는데 등로 우측 아래 나뭇가지 사이로 새벽에 잠시 들렸던 탄금장례식장 건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마지막 봉우리에서 물 한모금으로 마시고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따라 조심하며 내려가니 바로 눈 앞에 탄금장례식장 건물이 나타나고 그 마당으로 들어 가 주차된 애마에 배낭을 정리해 넣어 놓고 방풍의를 입고 빈몸으로 달천과 남한강이 만나는 합수점으로 향한다.

슬품에 젖어 있는 문상객들과 상주들이 모여 이야기도 나누고 담배도 피우다가 낮선 이방인이 등산복 차림으로 돌아 다니니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기에 재빨리 시야에서 벗어나 합수점으로 가면서 뒤돌아 탄금장례식장 건물 사진을 남겨본다.


드디어 합수점에 도착을 해 우측의 남한강 한가운데에 보이는 용섬과 도도하게 흐르는 남한강을 살펴본다.

용섬은 충청북도 충주시의 칠금동을 흐르는 남한강과 달천의 합류점에 있는 하중도이다.

남한강과 달천이 만나는 합류점은 유속이 감소되는 구간으로 하천 공급 물질들이 퇴적될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특히 하류에 충주 조정지댐이 생긴 이후 습지 성격을 띤 하중도가 형성되었다.

장방형으로 길게 늘어진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상부는 포플러 등을 비롯한 여러 초본류들이 서식하는데 이는 하중도가 안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최근 충주댐에 의해 토사 공급이 줄어들고 충주 조정지댐 건설로 탄금호가 만들어지면서 수위 변동이나 물질 공급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용섬을 기준으로 남한강 양쪽 기슭의 암벽과 구릉이 심한 비탈면을 이루며 마주 보고 있고 남쪽은 충주 탄금대가 있는 대문산 암벽이 북쪽은 금가면 일대에 펼쳐진 화강암 구릉대가 발달하였다.

남한강에 대한 자료는 너무나 많은 지맥 산행기에 정리를 하였기에 오늘은 생략하고 용섬으로 대신한다.


좌측 탄금대교 아래로는 충주천을 합류시킨 후 남한강에 합수되는 달천이 도도하게 흘러 내려오는 모습도 눈에 들어 온다.

보은과 괴산의 지명유래에 따르면 달천은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에서 발원하여 괴산군을 거쳐 충주시로 흘러드는 하천이며 달래강 또는 감천이라고도 부른다.

옛날에는 수달이 많이 살아서 달강이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 때문인지 인근에 수달피 고개가 있으며 달천리 서쪽 물가를 물개달래로 부른다.

한편 달천은 물맛이 좋아 단냇물이라 하였던 것이 달냇물로 다시 달천으로 변했다는 지명 유래도 전하는데 달천동 주변에는 달다는 뜻의 단월동과 단호사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달천 혹은 덕천이라고 하고 고을 서쪽 8리에 있으며 근원이 보은현 속리산 꼭대기에서 나와서 물이 세 갈래로 나뉘었는데 그 하나가 서쪽으로 흘러 달천이 되었으며 배를 띄우고 겨울에는 다리를 놓아 이행이 능히 물맛을 변별하였는데 달천 물을 제일이라 하여 마시기를 좋아하였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달천은 해동지도(충주)에서 은성천과 합류하여 충주를 동서로 가로지르며 흐르고 나루터인 달천진도 확인할 수 있다.

대동여지도에는 달천강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고 조선팔도고금총람도(1640)에는 음성천과 만나 충주 방면으로 흐르며 동국지도첩에는 달천의 유로와 함께 지명이 표기되어 있다.

여지고람도보에는 달천의 유로만 표기되어 있고 공충도(19세기 전기)와 여지도에는 달천유로와 지명이 함께 표기되어 있으며 구한말지형도에서도 지명을 확인할 수 있다.

달천의 또 다른 이름인 덕천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설이 전해 오는데 병이 있는 한 중년 남자가 중생을 위해서는 적선을 하고 육신을 위해서는 고행을 해야 한다는 도승의 주문에 1년간 고생하여 돌로 달천에 다리를 놓았는데 급한 환자가 이 다리를 건너 생명을 구하였다.

이때 생명이 위급한 환자가 참으로 덕을 입은 강이로다 하였다 하여 덕천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한편 달천은 달래강이라고도 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해 온다.

오누이가 함께 강을 건너면서 강물에 젖어 누나의 적나라하게 드러난 몸매를 보고 성욕이 발동한 동생이 죄책감에 못 이겨 성기를 돌로 찧어 죽었다.

이 사실을 안 누이가 회한의 말로 달래나 보지 하였다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이제 언제 다시 저 달천을 찾아 의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 기약도 할 수 없는 시간이기에 조금 더 머물며 그 풍경을 가슴에 담아 본다.


마지막으로 좌측의 달천과 우측의 남한강이 만나 합수되는 합수점을 배경으로 셀카 놀이를 한 후 탄금대에 대한 자료를 찾아 본다.

두산백과에 따르면 충주탄금대는 충청북도 충주시 칠금동에 있는 명승지로서 1976 12 21일 충청북도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 7 9일 명승 제42호로 변경되었다.

탄금대는 본래 대문산이라 부르던 야산인데 기암절벽을 휘감아 돌며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과 울창한 송림으로 경치가 매우 좋은 곳으로 신라 진흥왕 때 우리나라 3대 악성 중 하나인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삼국사기에 보면 우륵은 가야국 가실왕 때의 사람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에 귀화하였고 진흥왕이 기뻐하여 우륵을 충주에 살게 하고는 신라 청년 중에서 법지, 계고, 만덕을 뽑아 보내 악을 배우게 하였다.

우륵은 이들의 능력을 헤아려 각기 춤과 노래와 가야금을 가르쳤다 하고 그가 이곳에 터를 잡아 풍치를 즐기며 커다란 바위에 앉아 가야금을 타니 그 미묘한 소리에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이곳을 탄금대라 불렀으며 칠곡리(지금의 칠금동), 금뇌리(지금의 금능리), 청금리(지금의 청금정) 등의 마을 명칭은 지금까지 전한다.

탄금대는 또 임진왜란 때 무장 신립이 8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를 맞아 격전을 치른 전적지이기도 하다.

탄금대 북쪽 남한강 언덕의 열두대라고 하는 절벽은 신립이 전시에 12번이나 오르내리며 활줄을 물에 적시어 쏘면서 병사들을 독려하였다고 하는 곳으로 전세가 불리하여 패하게 되자 신립은 강에 투신자살하였다.

이곳에는 신립의 충의심을 기리는 탄금대비를 비롯하여 신립장군순절비, 조웅장군기적비, 악성우륵선생추모비, 충주문화원, 야외음악당, 충혼탑, 감자꽃노래비, 탄금정, 궁도장, 대흥사 등과 조각공원 및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충주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오래 전 다른 지맥 산행을 마무리하면서 남한강 건너편에서 바라보고 잠시 들렸던 추억을 꺼집어 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달천과 남한강이 만나는 합수점에서 계명지맥 산행을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다시 탄금장례식장 주차장으로 되돌아 와 배낭 정리하고 신발을 갈아 신은 후 애마를 몰아 가까운 충주스포렉스 찜질방으로 이동해 샤워하고 무릎도 달랜 후 환복을 하고 나니 조금은 살 것 같다는 느낌이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허기가 지기 시작하고 시간은 흘러 벌써 저녁 7시가 가까워진 시간이기에 집까지 돌아 가 식사를 하기엔 너무 늦어 찜질방 가까운 곳의 식당들을 찾아 보니 유명하다는 짬뽕생각이라는 식당이 보여 들어가 곱빼기를 시키니 양도 푸짐하고 낙지 한마리도 통째로 넣어 줘 배불리 먹고 늦은 시간에 충주를 출발하니 영동고속도로에서 막히기 시작해 잠시 덕평 휴게소에 들려 2시간 가까이 잠을 청한 후 귀가하게 되었다.





거리는 길지 않았지만 고도 차이가 많았고 둘째 날에는 두번의 큰 고도 차이를 극복하느라 체력적으로 어려움을 느끼면서도 아무 사고 없이 안전하고 무탈하게 계명지맥 산행을 마무리 할 수 있음에 감사한 이틀이었다.

지맥 산행을 위해 몇번인가 들렸던 충주이지만 아직도 두어번 더 머물러야 근처 지맥 산행이 끝이 나기에 오늘 지냈던 시간들을 잘 추억했다 다음에 다시 내려 가 또 다른 추억을 쌓길 바래 본다.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충주에 과한 많은 자료를 찾고 공부하다 보니 조금은 더 친숙한 도시로 다가온 충주이기에 다음에는 낮설지 않게 친구처럼 편안한 도시이길 바래도 본다.

아마도 갑산지맥과 등곡지맥을 진행하면서도 다시 들려야 할 충주가 아닐까 기대하면서 계명지맥 산행에서의 고운 추억들을 접는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20191103 계명지맥 제2구간 신매고개-달천 합수점.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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