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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맥산행(완료)/원진지맥(금북·완)

원진지맥 마지막 제2구간 역치에서 금강까지 산행후기

by 칠갑산 사랑 2019.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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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충청남도 서천군과 부여군 원진지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2019년 02월 24일 (일요일 당일 산행)

산행날씨 : 미세먼지로 인해 조망은 없었지만 날씨가 풀리면서 봄 같이 조금은 무더웠던 산행날씨

산행온도 영하 03도에서 영상 06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역치(충절로 2차선 포장도로)-벌목지-준.희님 응원판-벌목지-비포장임도 안부-묘지와 밤나무밭-168.8봉-일출-배나무쟁이고개-벌목지-

                 171.6봉-140.1봉-학산(168.3봉, 정상판과 삼각점)-2차선 포장도로(복고로)-101.1봉-이동통신탑-밤나무밭-잣티고개(611번 2차선 포장도로,

                 위덕로)-밤나무밭-99.7봉-밭 경작지-51번 송전탑-불난흔적-106.1봉-지독한 가시와 잡목구간-보리초지밭-지독한 잡목구간-91.5

                 무명봉(카메라 아웃)-벌목지-지독한 잡목지대-비포장임도-부여군위생매립장 철조망-91.6봉-염소목장과 철망-밭경작지-1차선 포장도로-

                 인삼포밭-시멘트 포장도로-폐쇄된 단무지공장-73.5봉(시멘트 건물)-대나무밭-인삼포밭-밤나무밭-시멘트포장도로 갈림사거리-44.4봉-

                 논두렁-비포장임도-조경수-625번 2차선 포장도로-밤나무밭-밭경작지-비포장임도-1차선 포장도로-세도로 2차선 포장도로-굴터고개-

                 53.3봉-벌목지-72.5 무명봉 갈림삼거리-89.6 삼각점봉-함박산(90.2봉, 정상판)-비포장임도 갈림사거리-65.8봉-비포장임도-철조망 등로-

                 봉황산(59.5봉)-대나무밭-장산리마을-성산교회-대나무밭-46.5 무명묘지봉-비포장임도-시멘트 포장도로-부흥로(2차선 포장도로)-

                 세도자원-밤나무밭-40 삼각점봉-청포마을-청포교회-망개로 1차선 포장도로-망개남로 1차선 포장도로-대나무밭-망개로 1차선 포장도로-

                 금강변-산행종료-세도농협버스정류장까지 도보로 복귀

산행거리 : 약 20.39 Km (스마트 폰의 GPX 기준, 접속구간 총 1.06 Km=금강에서 세도농협앞 버스정류장까지 1.06 Km 포함)

산행트랙 : 20190224 원진지맥 제2구간 역치-금강.gpx

산행시간 : 때로는 고속도로처럼 또 때로는 지독한 잡목구간으로 온 몸에 생채기를 내며 07간 25분 (06시 48부터 14시 13분까)

교통편 및 숙박 : 갈때 - 04:30 그린피아 찜질방에서 기상 후 샤워

                                   05:40 24시전주콩나물국밥집에서 아침식사 (4,500.-)

                                   06:20 승용차로 역치까지 이동하여 휴식 후 산행 시작

                         올때 - 13:58 금강에서 원진지맥 산행종료


                                   14:13 세도농협 앞 버스정류장까지 도보로 이동

                                   14:16 서천에 사시는 연세드신 부부의 승용차에 합승해 만사버스정류장까지 이동

                                   14:30 부여시내버스로 역치까지 이동

                                   14:55 승용차로 귀가

원진지맥이란 ???
원진지맥은 금북정맥 백월산(579봉)에서 남쪽으로 38.5 Km 떨어진 신산경표 호서정맥의 부시치 고개와 놋점이고개 사이의 표고 276미터봉에서 동쪽으로 가지를 쳐 원진산(270봉), 마가산고개, 덕림고개, 안장고개, 학산(168.5봉), 잣티고개, 함박산(90봉)을 지나 부여군 세도면 가회리에서 금강에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38.1 Km의 산줄기를 말한다.
표고 276미터의 분기점이 최고봉일 정도로 1에서 200미터대의 낮은  구릉지대로 수시로 도로와 임도를 건너며 찾는이가 적어 등산로도 제대로 없는 잡목지대로 독도에 특히 신경을 써야하는 지맥으로 대표적인 산인 원진산의  이름을 따 원진지맥이라 칭한다.





나즈막한 산줄기를 이어가며 봄이 오는 소리를 느겼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현존하는 맥 잇기 산행에 대한 수많은 이론과 산행 트랙이 존재하지만 이 산객은 신산경표를 보고 맥 잇기 산행을 처음 진행하였기에 가능하면 신산경표의 산행 이론에 따라 산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산줄기의 마지막 끝부분이 물과 만나는 지점인 합수점으로 가야한다는 이론 역시 그 어느곳에서도 올바른 정의를 내리지 못하였기에 이 산객은 옛 문헌에 나타난 이론인 관아를 기준으로 설정된 산줄기를 그 끝으로 하고 문헌에 나타나지 않은 관아 이후의 산줄기는 산행을 하는 산객 각자의 기준에 맞춰 진행하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선답자인 육덕 선배님의 산행기를 참고하여 어제 계획하고 예상했던 원진지맥 제1구간을 무탈하게 마치고 부여로 나와 편안하게 하룻밤 보내고 다음날 새벽 일찍 일어나 또 다른 하루를 시작해 본다.

생각보다 몸의 컨디션이 좋아 남아 있는 오늘 산행에 대한 기대감도 높은 새벽에 조금 일찍 일어나 24시간 운영되는 콩나물국밥집에서 아침식사까지 마치고 근처 편의점에 들려 음료수와 물 그리고 빵을 구입해 점심까지 준비하니 이제 아침 6시도 안된 시간이다.

그래도 조금 일찍 산행 들머리인 역치로 가 기다렸다 여명이 밝아 오는 시간에 산행을 시작하기로 하고 역치로 출발하니 생각보다 춥지 않아 오늘은 또 어떤 하루가 펼쳐질지 벌써 궁금해지는 시간이다.


생각보다 빠른 시간에 원진지맥 마지막 날머리인 청포리 금강 뚝방에 도착을 해 마지막 추억을 남기고 기다렸다 동네 주민인 할아버지에게 사진 한장 부탁 드리니 카메라를 사용하실 줄 모른다며 자전거를 타시고 그냥 지나가신다.

오늘 산행 중 그동안 오랫동안 애용했던 캐논 파워샷 G16 카메라가 결국 문제를 일으켜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고 모바일폰으로 사진을 담다보니 셀카 놀이도 어려워 마지막 금강에서 인증 사진 한장 남기지 못하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는데 뚝방을 내려와 마을을 통과하는 시간에 아저씨 한분이 보여 부탁 드리니 멋진 마지막 사진 몇장 남겨 줘 고마운 인사를 드리고 세도농협 앞 버스정류장으로 가벼운 발걸음을 돌린다.

이마에 잡목가지가 박혀있는 줄도 모르고 그저 즐거운 표정으로 마지막 인증을 하고 있으니 만났던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눈길로 바라봤던 것도 이제서야 이해가 되는 시간이었다.


약간 덥기는 하였지만 머무는 사람이 많지 않고 특히 술을 마시고 코를 고는 사람이 없어 편안하게 잠을 자고 그린피아 찜질방을 조금 이른 시간에 나와 보니 새벽인데도 그리 춥지 않아 다행이지만 벌써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것은 아닌지 무더위에 또 다른 걱정을 해야 하는 시간이다.

육덕님이 착한 식당이라 칭찬을 했던 군청과 버스터미널 사이의 24시 전주콩나물국밥집으로 가니 여전히 문이 열려있고 보기에 깨끗한 식당이라 들어가니 내부 역시 청결하고 맛도 먹을만 한데 가격까지 착하니 선답자들의 칭찬은 당연한 듯 보였다.

맛난 식사 후 편의점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한 후 어제 저녁에 내려왔던 역치를 향해 새벽을 달리는 마음이 왠지 모를 부자의 마음으로 조금은 여유가 생기기 시작한다.


어둠속에 지나다니는 차량도 많지 않은 지방도로를 달려 오늘 산행 들머리이자 어제 산행 날머리였던 역치에 도착하니 아직 새벽 6시 20여분 밖에 되지 않아 여전히 어둠속 세상이기에 자가용 내에서 쉬면서 산행 준비를 해 본다.

왜 역치일까 궁금해 자료를 찾아 보지만 부여군 장암면 합곡리와 임천면 점리 경계에 위치한 고갯마루인 역치에 관한 자료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아 여전히 궁금하기만 하다.

그렇게 산행 준비를 하면서 차내에서 20여분 이상 기다리니 드디어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하고 아침 6시 50여분이 지나자 헤드렌턴 불빛 없이도 산행이 가능할 것 같아 고갯마루 주변을 사진에 담으며 원진지맥 마지막 산행을 시작해 본다.


전봇대 사이로 나 있는 산행 들머리로 들어서니 곧바로 드넓은 벌목지대가 펼쳐지고 좌측을 살펴보니 이제부터 걸어 진행을 해야 할 원진지맥 마루금이 미세먼지인지 박무속에 길게 이어지고 있는 풍경도 눈에 들어 오기 시작한다.

등로 우측으로는 점리 마을이 전형적인 농촌의 풍경으로 다가오고 그 새벽 풍경을 즐기며 벌목지를 잠시 따르니 마루금은 금새 넓은 수렛길 같은 소나무 등로로 변하면서 걱정했던 나즈막한 산줄기에 자라고 있을 잡목과 가시나무에 대한 걱정이 사라지는 시간이다.

하지만 오늘 산행 중 결국 온 몸이 난자당하고 수많은 생채기를 내면서 산행을 마무리하였으니 낮은 구릉지로 이뤄진 지맥 마루금이 그리 호락하지 않음을 다시 한번 절감했던 하루의 시작이다. 


벌목지를 지나 소나무 등로로 들어가니 금새 나뭇가지에 준희님의 응원판이 반겨주고 고마운 인사를 드린 후 다시 이어지는 넓은 임도같은 등로를 타고 조금은 빠르게 걸어 본다.

잠시 후 묘지가 나타나고 그 묘지지대를 지나니 또 다른 벌목지대가 나타나는데 자세히 보니 벌목 후 나무를 식재한 모습이다.

한동안 그 벌목지를 타고 걸어가다 하늘을 보니 아직 사라지지 못하고 있는 반달이 ㅗ 아침이 밝아오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잠시 후 무명 비포장 임도가 지나는 안부를 건너 오르니 많은 묘지들을 보이고 그곳을 넘으니 묘지 뒤로 168.8봉에 도착을 하는데 여영님은 이곳을 171봉이란 산패를 걸어 놨다.

 

그 168.8봉에서 잠시 우유 하나 마시고 다시 출발하니 등로 우측 앞 저 멀리 원진지맥 마루금 위로 붉은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하고 오랫만에 다시 그 용트림에 발걸음을 멈추고 고운 추억을 남겨 보는 시간이다.

오늘 처음 만나는 태양은 더욱 붉게 빛나고 오랫만에 새벽을 열며 느껴보는 살아있는 자신에 감사하며 오늘 하루도 무탈하게 운동 후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잘 귀가할 수 있기를 태양에 빌어 보는 시간이다.


일출을 만나 잠시 발걸음 멈추고 새로운 아침을 맞은 후 다시 진행을 이어가니 몇기의 묘지들이 보이고 등로는 다시 활엽수 낙엽이 깊게 빠지는 넓은 수레길 같은 좋은 등로로 이어지고 있어 아침부터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시간이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 진행하니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 안부를 통과하는데 그 안부 한쪽에는 준희님이 이곳은 배나무쟁이고개라는 산패가 걸려있어 지도를 보니 배나무골이라는 고개이다.

이곳 배나무쟁이고개 또는 배나무골은 부여군 장암면 원문리에 있는 고개로서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북변면의 지역으로서 원문이라고 하였는데 고종 32(19895)년 에 북박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산동리와 석우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원문리라해서 부여군 장암면에 편입되었다.
옛날에 마을을 들어서는 산 양쪽을 깎아서 길을 내어 사람들을 드나들게 한 마을이라 그 문이 있는 마을이라 해서 타지방 사람들이 원문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원문이라고 부르게 된 마을이라 한다.

대부분 배나무골이라 함은 배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 대부분이고 계곡이나 고개가 있는 골짜기를 의미하는데 이곳 지명에서는 배나무와 관련된 이름을 전혀 찾을 수 없는데 왜 배나무쟁이고개나 배나무골이 되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배나무쟁이고개를 지나 능선으로 오르니 다시 소나무와 활엽수가 적당히 섞여 있는 뚜렷한 등로가 나타나고 푹신한 낙엽을 밟으며 진행하니 이제부터 생각지도 못한 잡목지대와 가시나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오랫만에 온 몸에 긴장감을 불어 넣고 산행을 이어가는 시간이다.

약간의 생채기를 만들고 어렵게 그 잡목지대를 벗어나니 다시 드넓은 벌목지대가 펼쳐지고 그 벌목지대 가운데로 나 있는 비포장 임도를 따르니 등로 좌측 뒤 저 멀리 어제부터 걸어 온 원진지맥 마루금이 박무속에 춤을 추듯 다가오고 있다.

그 아래 거대한 건물들과 채석장이라 생각되는 곳도 보일듯 말듯 다가오는데 미세먼지인지 박무로 인해 조금은 아쉬운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한동안 벌목지 가운데로 나 있는 비포장 임도를 따르니 등로는 다시 그물망이 쳐져 있는 능선으로 이어지고 잠시 넓은 활엽수 낙엽을 밟으며 무심으로 걸어가니 커다란 참나무 한그루와 키 작은 잡목들 그리고 관목들이 어우러져 있는 171.6봉에 도착을 해 잠시 쉬어간다.

표면은 이슬로 약간 젖어 있지만 그 아래에 숨어 있는 낙엽들은 바짝 말라있어 이 산객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음악처럼 들려 와 기분 좋게 걸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어제 24 Km 이상 걷고도 몸이 가뿐함을 느끼니 다시 예전 몸 상태로 되돌아 간 느낌이라 기분 좋은 아침이다.


다시 잠시 후 짧은 벌목지대를 지나 능선으로 들어가니 조선 소나무 등로가 열리고 가끔 보이는 빛바랜 억새들이 이 산객의 발걸음에 춤을 추며 서걱거리는 울음소리를 내고 있어 반갑기만 하다.

잠시 후 봉우리 같지 않은 잡목과 억새들 그리고 망개가시나무들이 섞여 있는 140.1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길을 재촉한다.


약간의 잡목지대를 벗어나니 등로는 다시 고속도로처럼 시원하게 열려있어 편안하게 걸어보고 곧이어 이름없는 누명안부를 통과하여 완만하게 올라 본다.

무심한 듯 걸어 오르니 금새 판독이 어려운 삼각점이 박혀 있는 168.3미터의 학산 정상에 도착을 해 어렵게 셀카를 작동시켜 추억 한장 남겨 본다.

워낙 낮은 산이고 별 관심도 받지 못하는지 학산에 대한 자료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지만 지도에는 표기가 되어 있는 산이었다.


학산에서 추억 한장 남기고 주위를 둘러보니 남쪽 저 멀리 지토리 지나 성흥산이 우뚝하고 다른 방향은 잡목들에 가려 보이는 것이 없으니 다시 출발한다.

약간의 잡목 구간을 지나 부드러운 활엽수 등로를 따르니 등로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어 잠시 예술가도 한번 되어 본다.

그렇게 혼자 놀이를 하면서 걸어 진행하니 갑자기 눈 앞에 절개지가 나타나고 새로 신설된 듯한 2차선 포장도로가 내려다 보이는데 지도를 보니 옛날 지도에는 이곳을 여전히 1차선 포장도로로 명기를 해 놓고 있다.

이곳은 부여군 장암면 상황리에 있는 도로로서 상황리는 조선중엽에 풍양조씨가 하곡에서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전하며 그후 임천군 남산면의 지성으로서 누루다리 또는 상황교를 줄여 상황리라 하였는데 고종32년(1895)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하황리 일부를 통합하여 부여군 장암면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또한 상황은 왕림이라고도 하는데 북쪽 오암산 아래 세 개의 큰 묘가 왕릉이라는 연유에서 불리어 지고 있다.

처음에는 이곳을 잣티고개라 잘못 착각을 했었는데 조금 더 진행하다 보니 실제 잣티고개는 나즈막한 능선 하나를 넘어야 나오는 복고로 2차선 포장도로이다.


잣티고개라 불리는 복고로 2차선 포장도로를 건너 다시 능선으로 오르니 등로는 여전히 뚜렷한 활엽수 낙엽 등로로 이어지고 있어 진행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잠시 후 솔갈비가 깔려있는 소나무 등로로 바뀌고 완만하게 걸어 진행을 이어가니 고사목들이 널부러져 있는 101.1봉에 도착을 하고 이곳도 특별할 것이 없기에 사진 한장 남기고 곧바로 산행을 이어간다.


다시 이어지는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이동통신탑이 나타나고 그 아래 절개지로 내려갈 수 없어 우측으로 길게 돌아 내려가니 복고로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잣티고개에 도착을 한다.

짓티고개 우측으로도 거대한 밤나무밭이 펼쳐져 있고 그 아래에는 상황리 마을의 울긋 불긋한 지붕을 한 마을이 아름답게 내려다 보인다.

이곳 잣티고개도 역시 차량 통행은 거의 없는 듯 이 산객이 머무는 동안에 단 한대의 차량도 지나가지 않아 소외되는 농촌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추억 한장 남기고 다시 잣티고개 도로를 건너 능선으로 오르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능선으로 오르니 그곳도 역시 거대한 밤나무밭이 이어지고 지난 가을 수확을 끝낸 밤나무밭 아래에 떨어져 있는 밤가시를 조심하며 걸어 오르니 커다란 고사목들이 널부러져 있는 곳을 지나 다시 짧은 능선으로 이어진다.

능선을 지나니 등로만 벌목된 것처럼 벌거벗은 등로로 이어지고 그렇게 잠시 더 걸어 전진하니 소나무가 우측으로 빙 돌아가며 식재된 등로를 타고 진행 해 죽천님과 금곡님의 띠지가 걸려있는 99.7봉에 도착을 해 선배님들에게 안부를 묻고 물 한모금 마셔 본다.

 

별 특징이 없는 봉우리를 지나 약간의 잡목들을 헤치며 전진하니 갑자기 눈 앞에 거대한 밭 경작지가 펼쳐지고 그 아래에는 거대한 축사가 내려다 보이는데 예전에 이 산객이 시골에 살던 때 키우던 한두마리의 소가 아닌 기업형 축사로 변하면서 예전의 아련했던 추억들은 모두 사라지는 느낌이다.

잡목이 무성한 좌측의 마루금을 버리고 밭 경작지 가장자리를 따라 축사를 우측에 두고 한동안 걸어 진행하다 보니 밭에도 축사 분뇨를 뿌려 토질은 건강하게 지킬 것 같다는 생각이다.


잠시 후 등로는 다시 밭 경작지를 우측으로 보내고 좌측 능선으로 이어지며 참나무 아래 쌓여있는 활엽수 낙엽을 밟으며 진행된다.

잠시 후 51번 송전탑을 만나 통과하고 조금 더 전진하니 갑자기 커다란 소나무 밑둥이 모두 불에 그을린 검정 흔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주위를 살펴보니 나무마다 모두 그을린 흔적들이 보인다.

그래도 큰 불은 아니였는지 불에 그을린 검정 흔적만 남기고 나무들은 잘 자라고 있는 듯 보여 다행이란 생강으로 갈어가니 다시 약간의 잡목지대를 지나 106.1봉에 도착을 해 사진 몇장 더 남긴다.


약간의 잡목들이 보이긴 했지만 진행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는데 이곳 106.1봉을 넘으면서 갑자기 등로는 지독한 잡목과 가시 등로로 변하면서 참으로 어려운 산행을 예고한다.

이리 저리 잡목과 가시나무들을 피해 왔다리 갔다리 하다보니 등로를 좌측으로 약간 벗어나 내려가게 되고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거대한 초지지대를 만나 몇장의 추억을 남겨 본다.

시간이 있다면 이 초지지대에서 조금 쉬었다 가고 싶은 굴뚝 같아지만 갈길이 머니 아쉬움을 남기고 다시 무성하게 자라난 잡목을 헤치고 정상 마루금을 찾아 사투를 벌이게 되었다.


우측 잡목지대로 들어가니 묵은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고 그곳에도 역시나 크게 자라난 잡목들이 길을 막고 통행세를 받고 있다.

여전히 앞을 가로막는 가시나무와 잡목들을 헤치며 조심해 오르막 등로를 오르니 91.5미터의 무명봉에 힘들게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펼쳐진 주위 풍경과 조망을 사진에 담으려고 셔터를 누르니 갑자기 카메라가 먹통이 되면서 그동안 문제가 되었던 렌즈 부분이 떨어져 나가 버린다.

결국 몇 년 동안 잘 사용했던 카메라를 접어 배낭에 넣고 이제부터는 모바일 폰을 이용해 기록을 남기다 보니 많이 불편하고 시간도 걸리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사진과 기록을 남길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다.

등로 우측 아래로 거대한 축사 단지들이 보이고 그 뒤 저 멀리 산 중턱에도 더 큰 축사 단지들이 늘어서 있어 온통 축사들만 보인다.

 

그곳 무명봉에서 카메라의 고장으로 심적인 어려움을 겪으며 허기까지 느껴 잠시 앉아 준비한 빵으로 허기를 달랜 후 출발한다.

짧은 잡목 구간을 지나니 다시 등로 우측으로 벌목된 등로가 나타나고 그 벌목된 경계선을 타고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이제부터 걸어 진행하며 어렵게 올라야 할 잡목 마루금이 우측으로 빙 돌아가며 펼쳐져 있다.

얼마나 많은 잡목들과 싸워야 저 능선 위로 오를 수 있을지 조금은 걱정도 앞섰던 시간이다.


잠시 지독한 잡목들과 씨름하며 힘들게 걸어 진행하니 금새 등로는 다시 넓은 수레길 같은 등로로 바뀌고 이제 비포장 임도를 타고 편안하게 걸어 본다.

좋은 등로를 따르니 금새 등로 우측으로 철망이 나타나고 그 안으로는 거대한 비닐하우스 같은 것들이 펼쳐져 있어 처음에는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부여군위생매립장이었다.

철망 안쪽으로 드넓은 매립장을 살피며 걸어 오르니 등로는 다시 평이한 능선 등로로 바뀌고 있다.


우측에 부여군위생매립지를 두고 철망을 따라 한동안 진행하며 살펴보니 군 단위의 쓰레기 매립지의 크기에 놀라는 시간이다.

한동안 그 철망을 따르니 철망이 우측 아래로 사라지고 다시 활엽수가 곧게 뻗어 있는 등로를 따라 진행되고 곧이어 무명안부도 통과한다.

잠시 후 거대한 소나무와 잡목들이 혼재되어 있는 봉우리로 오르니 소나무 빝둥에는 흰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는 91.6봉에 도착을 한다.


사진 한장 남기고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다시 지독한 잡목과 가시들이 기다렸다는 듯 심하게 공격하고 약간의 생채기를 만든 후 통과하니 등로는 다시 온순해지며 뚜렷해 지는데 금새 염소 목장이 있는 철망과 만난다.

철망을 우측에 두고 좌측 가장자리를 타고 걸어 내려가니 염소 두마리가 이방인의 출현에 멀리 도망가면서도 힐끗 힐끗 이 산객을 주시하고 있어 사진 한장 더 남겨 본다.


그 염소농장을 지나니 다시 밭 경작지가 펼쳐지고 그 밭 우측 아래로는 민가들도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 풍경을 바라보며 진행하니 금새 1차선 포장도로에 도착을 한다.

도로 우측 위에는 버스정류장이 보이는데 가서 확인을 해 보니 글자가 모두 지워져 보이지 않지만 지도를 확인해 보니 고추골 버스정류장이다.

이곳은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에 있는 수고리로서 마을이 구릉지대 밑에 자리잡고 있으며 서쪽으로 사동천이 흐른다.
백제시대에는 가림군()에 신라시대에는 가림군()에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임천군에 속하였다가 조선시대에는 임천군 초신면의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고추리, 기층리, 수다해리를 병합하여 수다해와 고추의 이름을 따서 수고리라 하고 부여군 세도면에 편입하였다.
자연마을로는 고추골, 기층골, 쇠바리, 수랑골, 오양골, 약정재 등이 있는데 기층골은 수고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고 전에 부잣집이 많아서 집을 몇 층의 층대로 잘 지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쇠바리는 마을 근처에 소 발처럼 생긴 산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오양골은 마을에서 전에 기와를 구웠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약정재는 약정현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약초가 많고 약초를 캐는 사람들이 밤마다 정자에서 잠을 자며 쑥으로 불을 놓아 정자에 쑥 냄새가 배어 약 냄새나는 정자가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도로 좌측 아래에는 화수2리라는 이정석도 서 있어 이곳이 바로 화수리와 수고리의 경계쯤 되는 곳으로 판단이 된다.


1차선 포장도로를 건너 민가 옆으로 진행하니 금새 인삼포가 나타나고 인삼포 가장자리를 따라 진행하니 또 다른 인삼포가 나타난다.

인삼의 고장인 금산과 가까운 곳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인삼은 자주 먹었던 기억이 떠 오르고 그나마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에 통닭에 통마늘과 인삼을 달여 그 국물을 약으로 마셨기에 이렇게 건강한 몸을 유지한 것은 아닌지 감사한 시간이다.

잠시 후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타나고 그 도로를 타고 걸어 오르니 단무지를 만들던 공장이 폐쇄된 듯한 공장 건물과 작업장을 지나 능선으로 오르니 금새 시멘트 건물의 뼈대만 남아 있는 73.5봉에 도착을 해 잠시 주위 구경을 하고 망중한을 즐겨 본다.


짓다 중단된 시멘트 뼈대만 남아 있는 73.5봉을 지나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대나무 밭이 짧게 나타나고 곧이어 넓은 인삼포가 눈 앞에 펼쳐져 있다.

그 인삼포 가장자리를 따라 조심스럽게 진행하니 그 주위에는 버섯을 재배하는지 두꺼운 비닐하우스도 제법 큰 규모로 보이기 시작한다.

잠시 더 주위 풍경을 살펴보며 걸어가니 밤나무밭이 펼쳐져 있고 그 사이로 시멘트 포장도로가 보여 그 도로를 타고 오르니 44.4봉에 도착 해 잠시 주위 조망을 살펴보는 여유도 가져 본다.


묘지 위에 있는 나즈막한 44.4봉을 지나 완만하게 내려가니 수확이 끝난 논둑을 이용해 지맥 산행이 진행되고 우측으로는 청송리와 화수리로 이어지는 풍경이 펼쳐져 있다.

눈 앞 우측으로는 다시 세도면 청송리 마을의 민가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나타나는 비포장 임도를 따라 조경수도 지나고 마을 뒷길로 이어지는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봄이 온듯한 날씨에 벌써 무더위를 느끼는 계절이다.

다시 화수리 마을의 민가 사이로 나 있는 도로를 따르니 금새 1차선 포장도로에 도착을 한다.

화수리는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에 있는 리로서 마을이 구릉지대 밑에 자리잡고 있으며 화수저수지가 있는데 백제시대에는 가림군(), 신라시대에는 가림군(), 고려시대에는 임천군에 속하였다가 조선시대에는 임천군 성백면의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화수리라고 하고 부여군 세도면에 편입하였다. 

자연마을로는 가장골, 불무골, 윤치, 장성배기 등이 있는데 불무골은 마을에 부처가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윤치는 마을 뒷산이 꿩이 숨은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장성배기는 전에 마을에 장승이 서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적으로는 백제시대의 토성인 화수산성이 있고 고려시대의 폐사지가 있으며 또한 소형 동종이 출토되기도 했다.

도로를 건너며 살펴보니 도로 우측으로 세도면화수보건진료소 입간판이 보인다.


버스정류장에는 이곳을 청소4리라 적어 놓고 있어 이곳 역시 청소리와 화수리의 경계쯤으로 생각되는 곳이다.

마을 도로를 타고 오르니 대나무 밭을 지나 과수원 우측 능선으로 이어지고 그 과수원 가장자리를 따라 진행하니 등로 우측으로 청소리와 화수리의 풍경들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다시 논과 밭 경작지의 경계를 타고 진행하면 잠시 후 묵은 비포장 임도로 연결되고 지난 가을 말라죽은 빛바랜 잡초들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고 있다.

좌측에 민가가 있고 그 민가로 이어주는 비포장 임도를 만나 우측으로 걸어가니 1차선 포장도로와 이어지고 곧이어 지나온 방향으로 애국지사 조종구 묘까지 100 m라는 이정표를 지나자마자 2차선 포장도로인 세도로에 도착을 하는데 한쪽에는 글자가 모두 지워진 반조원리 버스정류장 입간판이 서 있다.


이제부터 그 세도로 2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동쪽 방향으로 계속 걸어가니 도로 우측으로 청송리 마을과 들판이 드넓게 펼쳐져 있어 구경하며 걸어 본다.

청송이란 단어는 이 산객에게 평생 잊지 못할 단어인데 바로 청송국민학교를 다녔기 때문일 것이다.

청송리는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에 있는 리로서 마을이 구릉지대 밑에 자리잡고 있으며 저수지가 많다.

백제시대에는 가림군(), 신라시대에는 가림군(), 고려시대에는 임천군, 조선시대에는 임천군 초신면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상송리, 하송리, 청룡리, 하대리 일부를 병합하여 청룡과 하대의 이름을 따서 청송리라 하고 부여군 세도면에 편입하였다. 

자연마을로는 노개골, 무데미, 범굴, 새터, 솔매, 청룡골, 기왓말 등이 있는데 노개골은 마을에 노가가 살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무데미는 마을 앞에 물이 한번 차면 잘 빠지지 않고 늘 남아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범굴은 전에 마을에 호랑이가 살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청룡골은 마을 지형이 산의 청룡쪽(왼쪽)으로 되어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기왓말은 전에 기와집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렇게 한동안 발바닥에 불이 나게 포장도로를 따르니 드디어 좌측 앞으로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서 있고 우측으로 넓은 비포장 임도가 보이는 굴터고개에 도착을 해 우측 비포장 임도를 따라 능선으로 진입한다.


이곳 굴터고개 주변에도 거대한 축사들이 여럿 보이고 축사 특유의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도로 좌측으로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있고 우측으로 넓은 비포장 임도가 열려있는 굴티고개에서 우측 비포장 임도를 따르니 잠시 그 넓은 임도가 이어지는 싶더니 금새 잡목들이 우거진 능선으로 연결된다.

진행하다 보니 이곳도 역시 멧돼지들이 있는지 소나무가 멧돼지들이 목욕 후 문지른 흔적이 이곳 저곳에서 보이고 그렇게 계속 이어지는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금새 준희님의 빛바랜 띠지가 걸려있는 53.3봉에 도착을 한다.

 

진행하며 이곳을 살펴보니 아카시아 군락지가 보이고 가시를 조심하며 조금 더 걸어 진행하니 등로는 다시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가 열린다.

편안한 등로를 따라 여유롭게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벌목 후 소나무를 식재한 구간이 보이고 그 벌목지 우측 능선을 따라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등로 좌측 저 멀리 세도면 반조원리 마을들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반조원리는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에 있는 리로서 동쪽에는 금강이 흐르고 대부분 낮은 구릉지와 평지이며 상송소류지가 있다.

백제시대에는 가림군(), 신라시대에는 가림군(), 고려시대에는 임천군에 속하였다가 조선시대에는 고다진원 또는 반조원이라고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석성군 현내면의 포사리 일부를 병합하여 반조원리라 하고 부여군 세도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로는 가음말(가음촌, 갯말),  반조원리(곶지, 고다지, 고다지소, 고다진원, 반조원), 옥삼박골(옥삼외곡)이 있는데 가음말은 반조원 북쪽 강가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반조원리는 지형이 곶으로 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옥삼복골은 고려시대에 고다지소의 옥이 있었는데 그 바깥쪽이 된다 하여 붙여졌다.

그 벌목지 정상부로 오르니 잡목과 활엽수 낙엽이 깔려 있는 등로가 열려있고 그 등로를 따르니 갈림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우측으로 크게 꺽어 걸어본다.

갈림삼거리를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진행 방향으로 지맥 마루금이 펼쳐져 있어 사진에 담고 걸어가니 금새 89.6 삼각점봉에 도착을 해 흐르는 땀방울을 닦으며 잠시 쉬어 간다.


그 89.6 삼각점 봉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출발하니 등로는 활엽수 낙엽이 푹신하게 깔려있는 평이한 등로로 이어진다.

조금 더 걸어가니 등로에 고사목이 깔려있고 주위를 살펴보니 이곳에서 등로는 좌측으로 꺽여 진행해야 할 길주의 구간이자 갈림삼거리이다.

이곳에서 배낭내려 준비한 빵과 과일로 허기를 달랜 후 다시 진행을 이어가니 키가 큰 잡목 사이로 뚜렷한 등로가 열려있다.

등로를 타고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무명 안부가 나타나고 그 안부를 통과해 오르니 금새 90.2미터인 함박산에 도착을 하는데 그 어디에도 이곳 부여군의 함박산에 대한 자료를 찾을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함박산을 지나 다시 산행을 이어가니 등로는 고속도로처럼 반질거리고 그렇게 잠시 더 걸어가니 등로 좌측 잡목가지 사이로 드디어 그토록 만나고 싶어했던 금강이 유유히 흐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잠시 후 묘지를 지나 비포장 임도로 이어지는 편안한 등로를 타고 조금은 빠르게 걸어 진행하니 갈림사거리가 나타나는데 직진 방향의 등로를 따라 그 사거리 안부를 통과한다.


갈림사거리를 지나 약간의 잡목들이 보이는 등로를 찾아 전진하니 봉우리 같지 않은 봉우리에 도착을 하고 지도를 살펴보니 이곳이 65.8봉이다.

이곳은 지도를 보니 장산리로서 장산리는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에 있는 리로서 마을이 구릉지대 밑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으로 금강이 흐른다.

백제시대에는 가림군(), 신라시대에는 가림군(), 고려시대에는 임천군에 속하였다가 조선시대에는 임천군 인세면의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장토리와 중산리를 병합하여 장산리라 하고 부여군 세도면에 편입하였다. 

자연마을로는 죽촌과 신암 등이 있는데 죽촌은 마을에 대나무가 많았다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신암은 신암골 및 신앙골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마을에서 위하는 신암이란 귀한 바위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잡목이 우거진 65.8봉에서도 사진 한장 남기고 곧방 출발한다.


잡목이 우거진 봉우리를 지나 평이한 등로를 따르니 등로 좌측으로 소나무 한그루가 보이는 무명봉에 도착을 하는데 지금까지 잘 보이지 않던 바위들도 가끔 보이기 시작한다.

그곳을 지나니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고 강아지를 기르는 개집을 지나 금새 지도 상 여우고개라는 곳에 도착을 하는데 등로 옆으로는 대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여우와 관련된 지명은 전혀 찾지를 못하였는데 이곳 장산리 마을의 신암골은 신암이란 귀한 바위가 있어서 그 바위를 위했다 하는데 그 바위 있는 마을이라 하여 신암, 신암골 또는 신앙골이라 부른다.


여우고개를 지나 오르니 묘지가 나타나고 다시 능선으로 오르니 최근에 설치된 듯한 철조망이 보이는데 살펴보니 염소농장 용 철조망이다.

그 철조망 옆으로 이어진 등로를 타고 어렵게 잡목을 헤치며 오르니 시멘트 인공 구조물이 정상에 박혀 있고 잡목들이 자라고 있는 59.5미터의 봉황산에 도착을 하는데 정상을 알리는 아무 표식도 없어 아쉽다.

선답자들의 띠지 몇장만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이곳이 지맥 상 중요한 지점임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봉황산을 지나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다시 대나무 밭이 나타나는데 그곳 주변에는 지독한 잡목들이 이 산객의 앞길을 막고 있다.

조심스럽게 그 잡목을 헤치고 대나무 밭을 통과하니 장산리 마을로 통하는 도로가 나타나고 그 도로를 타고 걸어 내려가니 성산교회 앞 도로를 지난다.

그 교회 앞 도로를 타고 내려가니 1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인세로와 만나 우측으로 조금 걸어 내려가니 도로 좌측으로 성산교회 신관건물이 나타나고 그 신관을 지나자마자 좌측으로 돌아 다시 눈 앞에 보이는 능선으로 향한다.

능선으로 오르니 이곳 역시 또 다른 대나무 밭이 펼쳐져 있고 그 대나무 밭을 지나 어렵게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간다.


어렵게 대나무 밭을 통과해 걸어 진행하니 묘지지대가 펼쳐지고 그 묘지를 타고 오르다 정상부에서 배낭 내려 다시 간식과 과일로 허기를 달래고 진행하기로 한다.

그렇게 묘지 정상부로 오르니 46.5 무명봉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등로 좌측을 살펴보니 거대한 비닐하우스 단지 넘어 햇살에 반짝이는 금강이 바로 지척으로 다가와 있다.

이제 오늘 산행도 그 끝자락이 가까워졌음을 직감하는 시간이다.


그 묘지 위 무명봉에서 조망을 즐긴 후 내려가니 드넓은 비포장 임도가 열려있고 그 임도를 따라 걸어 진행하니 가회리 마을의 민가들이 보이고 그 민가 앞마당에서 동네 청소년 두명이 공놀이를 하고 있는데 참으로 평화스러운 풍경이다.

가회리는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에 있는 리로서 마을이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며 마을 동쪽으로 금강이 흐른다.
백제시대에는 가림군(), 신라시대에는 가림군(), 고려시대에는 임천군에 속하였다가 조선시대에는 임천군 인세면의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회화정리, 언고개리, 홍가동 일부를 병합하여 홍가동과 회화정의 이름을 따서 가회리라하고 부여군 세도면에 편입하였다.
조선시대 말기부터 1988년 황산대교가 가설되기 전까지 세도나루가 이 지역의 유일한 교통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다방골, 백가골, 언고개, 장짓말, 해쟁이, 홍가골이 있는데 백가골은 마을에 백씨가 집단적으로 거주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언고개는 언고개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주막이 있어 주막골이라고도 한다.

장짓말은 전에 마을에 장이 섰다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해쟁이는 마을에 회화나무 정자가 있다하여 회정리라고도 하며 홍가골은 가회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서 홍가가 많이 산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해쟁이와 언고개 중간에 있다고 하여 중뜸이라고도 부른다.
특산물로는 방울토마토가 있는데 산행 후 돌아 오는 도중 동네 오르신에게 물어 보니 수많은 비닐하우스가 거의 모두 방울토마토를 키우는 곳이라는 전국적으로도 가장 많이 생산되는 부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가회리 마을의 민가 옆 시멘트 도로를 따르니 다시 등로 좌측 저 멀리 수없이 많은 비닐하우스가 드넓게 펼쳐져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등로 좌측 앞 비닐하우스 지나 희미하게 보이는 회색빛 아파트들이 보이는데 살펴보니 몇 주 전 산친구들과 노성지맥 산행을 마무리하고 들려 좋은 추억을 만들었던 강경의 아파트 들이다.

그렇게 구경하며 천천히 진행하니 금새 68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부흥로 도로에 도착을 한다.

이곳에서 좌측의 황산대교로 가서 강경에 들려 맛있는 것 먹고 갈까 고민하다 우측 청포리 방향으로 진행하기로 한다.


68번 2차선 포장도로 건너 진행하니 세도자원이라는 고물상이 보이고 그 고물상으로 들어가 좌측으로 이어지는 능선으로 오르니 과수원이 보인다.

그 과수원 옆으로 이어지는 등로를 따르니 가회리의 비닐하우스 단지가 펼쳐져 있고 금강과 그 넘어 강경의 건물들도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등로 우측으로 그물망이 쳐진 곳을 넘으니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인 40미터의 삼각점봉에 도착을 하고 마지막 추억 한장 남기고 진행 방향과 좌우측으로 펼쳐진 원진지맥의 마지막 풍경과 조망을 즐겨 본다.


마지막 40미터인 삼각점봉을 내려가니 철조망으로 인해 무척 어렵게 내려가고 다시 등로 좌측 앞으로 펼쳐진 드넓은 비닐하우스 단지를 내려다 보며 걸어 내려가니 1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망개로에 도착을 한다.

망개로에 도착을 해 그 망개로를 타고 좌측 고갯마루로 오르니 등로는 다시 우측으로 꺽여 오르고 곧이어 갈림삼거리를 만나 우측으로 걸어 진행한다.

청포교회를 지나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는 둔덕으로 오르니 망개남로로 이어지고 그 망개남로를 타고 우측으로 잠시 내려갔다 미용실이 있는 곳에서 좌측으로 꺽어 들어가니 마을 한가운데로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타난다.

그 도로를 따라 오르니 느티나무가 다시 나타나고 그곳에서 좌측의 대나무 밭을 지나 마지막 금강 둑으로 향한다.



마지막 1차로 포장도로로 이어지는 망개로를 타고 좌측에 거대한 비닐하우스를 두고 앞으로 걸어가니 저 멀리 금강둑방이 보이고 그 앞에 정수장 건물도 보인다.

그곳으로 걸어가다 우측 벼 농사가 끝나고 수확이 된 논을 통해 우측으로 걸어 가니 금새 금강 둑방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좌측의 금강쪽을 살펴보니 그 금강변까지는 도저히 갈 수가 없어 이곳 둑방길에서 원진지맥 산행을 마무리하기로 한다.


드디어 금강 둑방에 도착을 해 마지막 추억 몇장 남겨 보지만 셀카 놀이를 할 수 있는 카메라가 고장 나 사진 한장 남길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마침 동네 어르신 한분이 자전거를 타고 오시길래 사진 한장 부탁 드렸더니 찍지 못하신다면서 야속하게 그냥 가신다.

금강은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에서 발원하여 서해의 군산만으로 유입하는 한국 6대 하천의 하나로서 유로연장 401 Km이며 남한에서는 한강과 낙동강 다음으로 큰 강이다.

본류는 구리향천과 정자천 등의 지류들과 합류하여 북쪽으로 흐르다가 전라북도 북동부에서 남대천 및 봉황천과 합류하고 충청북도에서 송천 및 보청천과 합류한 뒤 다시 충청남도 부강에 이르러 미호천과 합류하고 공주와 부여 등 백제의 고도를 지나 강경에 이르러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도계를 이루며 서해로 흘러들어간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금강은 공주에 이르러서는 웅진강, 부여에서는 백마강, 하류에서는 고성진강 등으로 불린다고 기록되어 있다.

시작하면서는 빨리 마무리하고 싶어 안달을 하다가도 막상 마무리하면서 그 산줄기가 물에 빠지는 장면을 보면 왜 그리 마음이 편치 않고 개운하지 못한지 모르겠다.

금강 넘어 보이는 익사을 살펴보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 지나 온 세도농협 쪽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금강둑방을 지나 다시 세도농협으로 되돌아 가니 동네에서 중년 어르신 한분이 나오고 어렵게 부탁해 마지막으로 증명 사진 한장 남겨 본다.

비닐하우스가 널려있는 들판을 지나 한동안 걸어가니 드디어 세도농협 앞 버스정류장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버스 시간표와 버스를 알아보니 서천에 사지는 연세드신 중년 부부가 부여와 서천 갈림삼거리까지 태워준다며 호의를 베풀어 줘 편안하게 임천과 야화 사이의 만사 버스정류장에 도착을 한다.

잠시 배낭 정리하고 기다리니 임천행 버스가 오고 버스 기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 버스가 임천을 지나 역치까지 가는데 역치 고갯마루에서 내려주신다기에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무탈하게 역치에서 내려 자가용을 끌고 손쉽게 귀가를 할 수 있었다.






이틀 간 무탈하게 원진지맥 산행을 마무리하고 올라오는데 이마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어 거울을 보니 잡목 하나가 이마에 박혀 있어 조심스럽게 빼내고 온 몸을 살펴보니 생각보다 심한 생채기로 따갑기 시작한다.

그래도 오랫만에 다시 살아 있음을 느끼며 예전의 정신력과 몸으로 되돌아 가는 것 같아 기분 좋게 완주한 원진지맥으로 남겨 본다.

하지만 벌써 무더운 날씨로 고생이 시작되는 것 같아 앞으로의 산행이 걱정되고 또 얼마나 많은 땀방울을 흘려야 올 여름을 보낼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다음주에는 서산쪽에 남아 있는 고산지맥과 석문지맥 산행을 위해 준비를 해 볼 계획이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20190224 원진지맥 제2구간 역치-금강.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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