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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맥산행(완료)/쌍령지맥(한남·완)

쌍령지맥 마지막 제2구간 성은이고개에서 진위천 합수점까지 산행후기

by 칠갑산 사랑 2017.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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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경기도 안성시와 평택시 쌍령지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2017년 12월 22일 (금요일 당일 산행)

산행날씨 : 전날보다 기온이 올라 약간의 박무가 있었지만 여전히 춥고 맑았던 산행날씨

산행온도 영하 06도에서 영상 5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성은리고개(23번 2차선 포장도로)-능선진입-절개지 상단-만세터널 위-묘지지대-무명안부-소나무 등로-안전목책과 로프구간-222.3봉(벤취 쉼터2)-209 무명봉(벤취쉼터들)-안전목책과 로프 계단등로-벤취쉼터 무명봉과 이정표(백련봉 0.9 Km, 3.1운동기념관 1.3 Km)-나무계단-성황당 안부 이정표(백련봉 0.7 Km 3.1운동기념관 1.4 Km, 칠곡리, 성은리)-193봉(벤취쉼터와 사각탁자, 최만리 설명판) 이정표(백련봉 0.5 Km, 3.1운동기념관 1.6 Km)-안전로프-돌탑안부-안부 이정표(백련봉 0.3 Km, 3.1운동기념관 1.8 Km)-안전목책과 로프 계단-백련봉(235.2 이정판, 돌탑, 벤취쉼터, 최규서 설명판)-청원사 설명판-이정표(지문리, 백련봉 0.3 Km)-189 무명봉-안전목책과 로프구간-잡풀공터-무명안부-전원마을 절개지 철조망-이정표(지문리, 백련봉 1.1 Km)-157.2봉(벤취쉼터들)-141 무명봉-137 무명봉 이정표(지문리, 백련봉 1.8 Km)-125 무명봉-이정표(지문리, 백련봉 2.0 Km)-125 무명봉-나무계단-2번 2차선 포장도로(지문로) 이정표(산하리, 백련봉 2.4 Km)-사각나무 계단-119 무명봉(타이어봉)-안전목책과 로프계단-폐 헬기장-군벙커-안전목책과 로프구간-묘지지대-안전목책과 로프구간-평안해오름길 안내판-비포장 임도-2차선 포장도로 이정표(덕암산과 정도전사당, 지문리와 백련봉)-경부고속도로 지하통로(하수구)-2차선 포장도로(우측에 안성휴게소)-능선진입-콘크리트 수로-절개지 위 잡목지대-비포장 임도-비포장임도 갈림삼거리-묘지지대-115 무명봉-무명안부-130 무명봉-부엉바위 갈림삼거리 이정표(부엉바위 0.2 Km와 은산리 3.0 Km, 팔용산 원곡초교 3.2 Km)와 현위치 이정목(부엉바위 0.2 Km, 팔용산 3.2 Km)-부엉바위(168.3미터 정상석)과 이정표(은산리 2.8 Km, 팔용산 원곡초교 3.4 Km와 부락산정상 5.0 Km)-부엉바위 갈림삼거리 복귀-나무계단-소나무 식재지-안전목책과 로프구간-무명안부-안전목책과 로프계단-현위치 덕암산 이정목(덕암산정상 0.5 Km, 부엉바위 0.5 Km)-안전목책과 로프 계단-현위치 덕암산 이정목(덕암산정상 0.4 Km, 부엉바위 0.6 Km)과 벤취쉼터2-덕암산 둘레길-무명안부-현위치 덕암산 이정목(덕암산정상 0.2 Km, 부엉바위 0.8 Km)-안전목책과 로프구간-142 무명봉-덕암산둘레길 갈림삼거리-덕암산정상(164미터 정상석과 삼각점 용인 469) 현위치 이정목(부락산정상 4.1 Km, 부엉바위 0.9 Km)-157 무명봉(사각정자와 운동기구들)-현위치 덕암산 이정목(산불감시초소 1.3 Km, 덕암산정상 0.25 Km)-137 무명봉(벤취쉼터1)-안전목책과 로프계단-성황당 안부 사거리-이정표(부락산정상 3.6 Km, 덕암산정상 0.5 Km)-현위치 덕암산 이정목(산불감시초소 0.9 Km, 덕암산정상 0.5 Km)-소나무 등로-현위치 덕암산 이정목(산불감시초소 0.5 Km, 덕암산 정상 0.9 Km)-안전목책 등로-삼남길 안부 이정목(원균장군묘 1.94 Km, 부락산쉼터 1.68 Km)-162.9봉(이정판, 사각정자, 산불감시초소) 이정표(부락산정상 3.1 Km, 덕암산정상 1.0 Km, 동막 1.2 Km, 암발 원균장군묘 800 m)-144 돌탑봉-안전목책과 로프구간-15번 송전탑-안전목책 등로-현위치 덕암산 이정목(부락산쉼터 0.9 Km, 산불감시초소 0.1 Km)-해주정씨 삼옥공 정감묘 안내판-삼남길 안부 이정목(부락산쉼터 1.17 Km, 원균장군묘 2.45 Km)-109 무명봉 사각정자(황덕산)-현위치 덕암산 이정목(부락산쉼터 0.5 Km, 산불감시초소 0.7 Km)-벤취쉼터2-백현원과 맹사성의 공당문답 안내판-안전목책과 로프구간-평택을 거쳐간 이몽룡 안내판-삼남길 이정목-317번 4차선 포장도로 위 동물이동통로-안전목책과 로프구간-벤취쉼터 봉-평택의 하얀고개(흔치고개) 설명판-흔치휴게소(평안 해오름길 안내판, 삼남길 안내판) 이정표(터골휴게소 0.5 Km, 국제대학교 0.8 Km)-안전목책과 로프계단-현위치 부락산 이정목(부락산정상 0.75 Km, 흔치휴게소 0.15 Km)-현위치 부락산 이정목(부락산정상 0.6 Km, 흔치휴게소 0.3 Km)-101 사각정-벤취쉼터2-현위치 부락산 이정목(부락산정상 0.4 Km, 흔치휴게소 0.5 Km)-127 무명봉(사각정자와 운동기구, 벤취쉼터)-현위치 부락산 이정목(부락산정상 0.2 Km, 흔치휴게소 0.7 Km)-통나무계단-현위치 부락산 이정목(팔각정 0.7 Km, 흔치휴게소 0.4 Km)-부락산정상(149.4봉, 정상석과 산불감시초소, 적암산과 부락산 설명판)-이정판(등산로입구, 부락산정상 0.1 Km와 흔치휴게소 0.8 Km, 성불사 0.5 Km, 은혜고 0.25 Km와 국제대학 0.3 Km)-사각정자와 현위치 부락산 이정목(팔각정 0.55 Km, 부락산정상 0.25 Km)-현위치 부락산 이정목(팔각정 0.4 Km, 부락산정상 0.4 Km)-은혜고와 국제대학 갈림삼거리 이정표(부락산정상 700 m, 국제대학과 은혜고 600 m)-2층 팔각정자와 삼각점(145.5봉)-운동시설-은혜고와 국제대학 갈림삼거리 복귀-2차선 포장도로-능선진입-민가-이충문화체육센타-인라인스케이트장-축구장-풋살장-2차선 포장도로-돌구이 식당-주님의교회-리더스유치원 앞 사거리-리더스유치원-능선진입-송탄충의교회-4차선 포장도로-부락산 둘레길 안내판-충의근린공원안내판-충의각-휴먼시아 추담마을 아파트-4차선 포장도로-반지초등학교-송탄고등학교 버스정류장-302번 원곡 도로표지판-갈림삼거리-장안동 표지석-2차선 포장도로-은혜와진리교회-두부마을과 정소반쭈꾸미-302번 4차선 포장도로 지하통로-돌우물(석정) 표지석-1차선 포장도로-린나이 보일러-민가-비포장 임도-민가1-벌목 후 소나무 조림지-89.5 삼각점봉(벤취쉼터2)-무명안부 사거리-녹슨 철조망과 시멘트 창고-66 무명봉과 시멘트 말뚝-비포장임도-녹색철조망-1차선 포장도로-늘사랑교회-광동제약사거리(1번 6차선 포장도로)-장당마을 표지석-장당교(1호선 지하철로)-삼성반도체 공사장(지맥등로 사라짐)-고덕국제신도시 방향으로 우회-삼성반도체 공사장으로 우회-삼성로(8차선 포장도로)-고덕국제신도시 도로표지판-여염근린공원-여염사거리(삼성 반도체 공사장과 이별)-한국전력-고덕산업단지 도로표지판-평택터널(평택제천간고속도로)-지제교차로 전 JS프라자-방축2리 마을입구(원방축)-한식뷔페-태영금속-절개지와 녹색철조망-절개지능선(우측은 평택제천간고속도로)-경주이공묘지-53.1 잡목과 잡풀봉-묘지들-퍼블릭골프장-9번 송전탑-이스트힐골프연습장-1차선 포장도로-과수원-평택중부교회 도로표지판 사거리-갈림삼거리-시멘트포장도로-능선진입-소나무 등로-38.3 삼각점봉(삼각점 망실)-서천사-시멘트포장도로-인공수로와 녹색철망 사거리-시멘트 포장도로(좌우측 논 경작지)-정자삼거리-고덕교차로-1차선 포장도로-동고리 신한파크맨숀-KTX 철로 통과-기계화경작로 안내판-시멘트포장도로 경작로-철도 통과-농업회사법인 양지 갈림삼거리-안성천 둑방-합수점(진위천이 안성천과 합류되는 지맥 마지막 지점)-쌍령지맥 산행종료-동고리 기계화경작로-동고2리 버스정류장(38번 4차선 포장도로)-산행종료

산행거리 : 약 27.64 Km (스마트 폰의 GPX 기준)

               지맥산행 : 25.83 Km (성은이고개에서 진위천 합수점까지)

               접속구간 : 01.81 Km (진위천 합수점에서 고동2리 버스정류장까지 01.81 Km)

산행시간 : 큰 고도차이 없이 비산비야와 포장도로를 따라 빠르게 진행하여 07간 43 (08시 10부터 15 53분까)

산행트랙 :

2017-12-22 쌍령지맥제2구간 성은리고개-합수점.gpx
0.14MB

교통편 : 05:41 봉천역에서 지하철 첫 열차에 탑승 후 교대역에서 환승하여 서울남부버스터미널까지 이동

            06:20 서울남부버스터미널에서 안성행 직행버스 탑승 (4,000.- 원)

            07:10 안성 공도버스정류장 도착

            07:50 평택으로 돌아가는 택시로 성은이고개까지 이동 (13,000.-,)

             - 구)공도버스터미널 앞 버스정류장에서 7번과 7-6번 버스로 만세고개까지 이동하려고 하였지만 운행 차량이 적어 택시로 이동

             - 만세고개나 성은리고개로 이동시 안성이 아닌 평택이나 오산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편이 좋을 것 같음

한남정맥 쌍령지맥이란 ???

쌍령지맥이란 한남정맥상에서 용인지역에 있는 문수봉에서 가지를 치는데 북쪽으로 앵자지맥을 분기하고 조금 더 진행하여 독조지맥을 분기한다.

문수봉에서 남서쪽으로 진행하다가 남쪽으로 쌍령지맥을 분기하는데 지나는 산군은 쌍령산(502 미터), 봉황산(259.3 미터), 천덕산(322.3 미터), 백련봉(235.2 미터), 덕암산(164 미터), 불악산(149.4 미터)들이고 도상거리로는 약 43.6km이다.

이 산줄기에서 우측으로는 진위천으로 흐르고 좌측은 한천과 안성천으로 흘러 들어 간다.

 

 

사라지는 비산비야의 산줄기를 걸으며 왜 이런 산줄기 이어가기 산행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조금이나마 얻었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전날 생각보다 산행이 잘 진행되어 예상했던 시간보다 일찍 무탈하게 쌍령지맥 제1구간을 마무리하고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해 귀가를 하니 저녁 시간보다 일찍 집에 도착을 해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반주 한잔 나누니 이세상 모두가 내 것이 된듯한 그런 기분이다.

특히나 큰 아이가 취직이 되어 첫 월급을 탔다며 이 산객과 옆지기에게 거금을 건네니 갑자기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눈시울이 불거지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평생 키워주고 뒷바라지만 했기에 이런날이 오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다 이제 아이가 장성하여 거액의 용돈까지 쥐어주니 아이들을 키우면서 가장 가슴에 와 닿았던 세번 중 한번이 아닐까 생각도 해 보는 시간이다.

사업적으로도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아이들도 장성해 자기 앞가림을 할 줄 아는 나이가 되니 이제 큰 걱정없이 즐겁고 행복한 시간만 있기를 바래보지만 인생이 그리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기에 늘 조심하며 긍정적인 삶이 되길 희망도 해 본 시간이었다.

 

 

새벽에 안성 공도로 내려 와 대중교통 편 때문에 조금은 어려움도 있었고 시간이 지체되었지만 예상보다 늦지 않은 시간에 우측의 진위천과 좌측의 안성천이 만나는 쌍령지맥 마지막 합수점에 도착을 해 셀카 놀이를 하면서 추억 한장 남기는 시간은 참으로 편안하고 행복했던 꿈결같은 시간이었다.

더 걷고 싶어도 물로 가로막혀 더 이상 갈 수 없는 산줄기의 마지막 장소에 도착을 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늘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르게 가슴속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그 산행의 난이도와 그 산줄기에 대한 애정이 다르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도 해 보는 시간이다.

오늘도 처음 생각과는 달리 조금은 이곳 분위기에 취해서 그런지 아니면 일이 잘 풀려서 그런지 가슴속으로 느껴지는 감정은 굴곡이 심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많은 아쉬움이 교차하는 그런 시간이 되었다.

그래서 뒤돌아 나가는 발걸음이 조금은 더 무겁고 힘들게 느껴졌는지도 모를일이지만 가슴속으로 느끼는 감정과는 달리 옮기는 발걸음은 가볍고 상쾌하게 또 하나의 지맥 산행을 무탈하게 마무리했다는 안도감과 성취감에 도취되어 춤을 추고 있는 듯 다가온다.

 

 

선답자들의 산행후기와 대중교통 편을 확인하니 대부분 오산과 평택 또는 안성공도로 내려 와 대중교통인 버스나 택시를 이용해 이곳 성은리고개 일명 만세고개로 이동을 하고 산행을 시작했다는 내용이 보여 이 산객도 아무 생각없이 안성공도로 내려간다.

하지만 안성 공도에 아침 7시 10여분에 도착을 해 구)공도 버스터미널 앞 버스정류장에서 사전 확인된 아침 7시 40분 발 버스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고 아침 8시가 가까워 오는 시간이다 보니 마음만 급해 공도 택시를 콜 하니 이곳 공도 택시 역시 돈이 되는 곳만 가는지 콜 택시를 부르기 힘들다며 지나가는 택시를 이용하라는 멘트만 들려 온다.

그렇게 약 5분여 택시를 잡기 위해 노력하지만 두번이나 만세고개까지는 운행을 하지 않는다며 거부하는 택시 기사들로 인해 앞으로는 절대로 안성 공도로 내려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다짐을 하면서 조금 더 기다리니 마침 안성까지 왔던 평택택시가 빈차로 돌아가고 그 택시를 불러 만세고개까지 부탁을 하니 조심스럽게 탑승을 허락한다.

지역이 달라 이곳 안성에서 다른 지역인 평택택시가 영업을 하다 발각되면 문제가 된다며 조심스러워하는 택시 기사를 안심시키며 만세고개에 도착을 하니 생각보다 늦지 않은 아침 8시 8분여를 지나고 있다.

이곳 만세고개(성은리고개)는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과 양성면을 잇는 만세고개는 지명 이름을 따 성은리 고개로도 불리며 1919년 기미년 음력 3 1일 일제 식민통치에 항거해 만세 시위가 시작된 곳으로 농민 2천여 명은 뜨거운 피를 흘리며 조국의 독립을 외쳤던 고개로 지금은 3.1운동을 기념해 만세고개로 불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어제 해가 지기전에 내려 온 성은리고개 일명 만세고개이기에 큰 어려움 없이 산행 준비 후 23번 도로를 타고 우측인 용인방향으로 조금 걸어 내려간 곳 좌측 잡풀이 우거진 능선 방향으로 들어가며 또 다른 지맥 산행을 시작해 보는 시간이 정확히 아침 8시 10여분을 넘어가고 있다.

성은리고개 일명 만세고개 정상은 진행 방향으로 높은 절개지에 콘크리트 옹벽과 철조망이 쳐져 있어 진행이 불가능하기에 어쩔 수 없이 23번 도로를 따라 우측인 용인 방향으로 20여미터 내려간 곳 안부처럼 보이는 산행 들머리를 이용해 지그재그로 주능선에 올라 진행을 해야하는 곳이기에 내려가니 어제 용인지방과는 달리 싸락눈이 약간 흩뿌린 정도가 전부인 듯 등로는 양호하게 나 있다.

 

 

도로 좌측으로 안부처럼 보이는 곳을 통해 산행을 시작하니 등로는 다시 좌측으로 크게 꺽어 깊은 활엽수 낙엽 등로를 타고 좌측 절개지 방향으로 오르게 되어 있다.

그렇게 잠시 오르니 등로는 이제 방금 전 23번 도로에서 올려다 봤던 절개지 상단부 직전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우측 절개지 최상단 부분으로 조심하며 걸어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낙엽진 활엽수 넘어 어제 아쉬움을 남기고 내려 온 천덕산 정상부와 그 정상부를 차지하고 있는 공군부대의 막사들이 올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언제나 저런 군부대의 방해 없이 전국토를 마음대로 올라가 볼 수 있을지 아쉽고 안타까운 시간이기도 하였다.

 

 

잠시 후 우측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을 타고 본격적인 쌍령지맥 제2구간 산행을 시작하니 깊은 낙엽 등로 위 관목에 선답자들의 띠지들이 보여 반갑게 인사하고 눈을 맞춰 본다.

잠시 더 걸어 진행하니 등로 좌측으로 수많은 공장 건물들이 내려다 보이고 곧이어 하얀 이불을 덮어 쓰고 있는 잘 관리되고 있는 묘지를 지나 낙엽이 수북히 쌓여 있는 비포장 임도같은 안부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이제부터 본격적인 지맥 산행을 시작해 보는 시간이다.

 

 

낙엽 깔린 안부를 지나 오르니 멋진 소나무 등로가 열리는데 등로는 생각보다 넓고 뚜렷하게 나 있어 진행에는 전혀 지장이 없는 등로이다.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무명봉에 돌랐다 내려가니 약간의 눈이 흩뿌린 듯한 안부를 통과하고 다시 아름다운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이제부터 오르막 등로에는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데 그리 위험하지도 않는 곳에 왜 이런 것들을 설치해 놨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안전목책과 로프 지대를 지나 오르니 벤취쉼터 2개가 설치되어 있는 222.3봉에 도착을 해 흐르는 땀방울을 닦으며 입었던 방풍의를 벗어 배낭에 넣고 간편하게 진행을 해 보는 시간이다.

 

 

그곳 222.3봉에서 추억 한장 남기고 비움의 만족도 느낀 후 다시 이어지는 소나무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등로는 아주 잘 정비되고 뚜렷하게 나 있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는지 반질거리기까지 한다.

큰 높낮이도 없는 소나무 등로를 타고 조금 빠르게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는 다시 완만하게 올라 나무벤취 쉼터 몇개가 놓여 있는 209 무명봉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잠시 심호흡 한번 크게 하고 다시 출발을 해 본다.

 

 

나무벤취 쉼터들이 설치되어 있는 무명봉을 지나 다시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이제는 안전목책과 로프와 함께 사각나무 계단이 길게 ㄱ설치되어 있어 그 계단을 타고 걸어 내려간다.

그렇게 내려가 무명안부를 지나고 다시 완만하게 오르니 나무벤취 쉼터들과 백련봉까지 0.9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보이는데 한쪽 벤취쉼터에서 동네 오르신이 쉬고 있어 이정표만 사진에 담고 곧바로 출발한다.

그 무명봉을 지나 계속 이어지는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등로는 다시 완만하게 내려가 좌측으로 칠곡리와 우측으로 성은리로 갈 수 있는 사거리 이정표가 서 있는 무명 안부를 통과해 본다.

작은 돌 무덤까지 보이는 것으로 봐 옛날 이곳에서 굿을 했던 서낭당은 아니었을까 생각도 해 보는 시간이다.

 

 

그 무덤 안부를 지나 빠르게 걸어 오르니 이제는 벤취쉼터와 사각나무데크까지 보이는 195 무명봉에 도착을 하는데 한쪽에는 목숨을 건 간언 최만리에 대한 설명판이 서 있다.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학자였던 최만리의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자명이며 호는 강호산인으로서 고려시대 해동공자로 불리던 최충의 12대손이며 하의 아들이다.

1419년(세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그 이듬해 집현전박사로 임명되었고 그 뒤 집현전학사를 거쳐 그 실무책임자인 부제학에까지 올랐다.

개괄적인 관력을 보면 1427년 3월 교리로서 문과중시에 급제하였고 그 해 7월에 응교에 올랐으며 1437년 직제학 1438년 부제학 1439년 강원도관찰사 1440년 집현전부제학으로 복귀하였다.

그 뒤 1444년에 훈민정음창제에 대한 반대상소문제로 즉일 친국을 받고 다음날 석방하여 복직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부정과 타협을 모르는 깨끗한 관원으로서 일관하였으며 진퇴가 뚜렷하였다.

그는 집현전의 실무책임자인 부제학으로서 14차에 걸쳐 상소를 올렸으며 그 중 불교배척 상소가 6회이고 첨사원 설치반대상소가 3회로서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밖에 일본과의 교역에서 석류황의 대가를 지나치게 후하게 지불한 것에 대한 책임추궁과 진사시에서 시의 출제법이 잘못됨을 지적한 것 그리고 이적의 사형결정이 모호하다고 감형을 주장한 것과 사직상소 및 한글반대상소가 있다.

불교배척상소의 대부분은 흥천사의 사리각 중수 및 경찬회의 혁파를 청하는 것이었고 첨사원 설치를 반대한 상소는 세종이 건강상의 이유로 세자에게 섭정시키려 하므로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한 것이었다.

그는 훈민정음이 완성될 때까지 세종의 뜻을 잘 받들어 반대한 일이 없었는데 세종은 훈민정음을 완성하고 비밀리에 궁중의 의사청에 최항 이하 집현전 소장학사와 동궁 및 진평대군 등을 참가시켜 원나라의 웅충이 엮은 고금운회거요의 자음을 한글로 달아 일대 자음의 개변운동을 하려 하였다.

세종은 당시 우리나라의 한자음이 체계 없이 사용되는 것이어서 어느 정도 중국체계에 맞도록 새 운서를 편찬하여 당시 한자음을 개혁하려고 한 것이었으며 이에 그는 집현전의 중진학자들과 함께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것이 유명한 한글반대상소문이었다.

이 상소문은 여러 학사의 합작으로 보이며 조목에 따라서는 한글창제의 불필요성과 한글의 무용론을 주장한 것으로 사대주의적 성향이 짙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으나 그 진의는 세종의 한자음 개혁에 반대한 것이 된다.

세종의 최만리에 대한 친국내용을 보면 내가 만일 이 운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누가 바로잡을 것이냐 라고 한 것을 보면 최만리 등의 상소는 고금운회거요의 번역사업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고금운회거요의 번역사업은 뒤에 동국정운의 사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중국에서 홍무정운이 실패작이었던 것과 같이 우리의 동국정운도 그 한자음이 실시될 수 없어 결국 실패로 돌아간 것이라고 한다면 그의 고금운회거요 번역사업의 반대상소 견해는 그러한 의미에서 정당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소문의 내용이 사대주의라고 비판을 받고 있는 것도 당시 지배층이 일반적으로 사대주의적 경향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에 대한 평가는 재고되어야 할 것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목숨을 건 최만리 설명판이 서 있는 195 무명봉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며 설명판을 읽어 본 후 그 옆에 서 있는 이저표를 보니 백련봉까지 이제 500미터 거리라는 표시가 반갑기만 하다.

약간의 눈이 등로에 흩뿌려진 상태의 내리막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등로 우측으로는 굵은 로프가 설치되어 있다.

그렇게 잠시 내려가 안부를 지나니 다시 작은 도랍 하나가 등로 옆에 보이고 곧이어 활엽수 낙엽이 푹신한 등로로 변하고 있다.

그 낙엽를 밟으며 빠르게 걸어 내려가니 등로 우측으로 성은리와 좌측으로는 백련사로 내려갈 수 있는 사거리 안부가 나타나는데 그곳에는 산악자전거와 오토바이 출입을 자제해 달라는 커다란 플랭카드가 두개나 걸려 있어 그 피혜를 실감해 보는 시간이다.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지문리에 있는 백련사는 한국불교태고종에 속하는 사찰이며 고려 중기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에 탄 뒤 오랫동안 폐사로 남아 있었으며 조선 후기에 복원하였으나 다시 폐사된 바 있으며 1990년대에 이르러 다시 복원되었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산신각 및 요사채 등이 있다.

 

 

이제 백련봉까지는 300미터 거리라는 이정표를 사진에 담고 그 사거리 안부를 지나 빠르게 걸어 오르니 백련봉 오르는 등로에는 안전목책과 로프 및 나무계단이 길게 이어져 있어 여간 힘들게 오르지 않는다.

한동안 이마에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오르니 나무계단은 사라지고 안전목책과 로프 등로가 나타나고 그렇게 한동안 걸어 오르니 드디어 커다란 돌탑 하나가 정상을 지키고 있는 235.2미터의 백련봉에 도착을 해 추억 한장 남겨 본다.

이곳 백련봉(235.2 미터)에 대한 자료는 찾을 수 없었는데 아마도 이 봉우리 좌측 아래에 있는 백련사와 연관이 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 보는 봉우리 이름이다.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지문리에 위치한 산으로 잘 정비된 완만한 등로를 타고 올라 나즈막한 봉우리 몇 개를 넘으면 금새 해발 백련봉 정상에 도착을 하는데 정상석 하나 없이 돌탑과 그 돌탑 위에 백련봉 235미터라는 작은 이정판이 전부인 곳이다.

또한 주위에 자라고 있는 나무들로 인해 조망까지 없어 조금은 아쉬운 정상이었다.

 

 

정상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고 몇장의 사진을 담은 후 등로 좌측으로 가니 이번에는 백성을 한가롭게 하는 정치 최규서에 대한 설명판이 서 있고 그 옆으로 원곡면 외가천리 마을과 저 멀리 오늘 걸어 넘어야 할 쌍령지맥 마루금이 펼쳐져 있는 모습이 유일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조선 후기의 문신인 최규서는 1650(효종 1)년 부터 1735(영조 11)년까지 살았으며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문숙이며 호는 간재, 소릉, 파릉이었고 광주 출신으로 삼당시인으로 꼽히는 최경창의 현손이며 최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진해이고 아버지는 현감 최석영이다.

1669년(현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0년(숙종 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출사하였으며 이 때 서인의 나문에서 뛰어난 재주로 시명을 얻어 언관이 되었다.

정언으로 있을 때 서북인을 통청하라는 왕의 하교에 맞서 인문이 황폐하고 가합자가 없다는 논지로 소를 올려 논객의 면모를 보였으며 또한 서인이 노소로 갈라졌을 때 나양좌를 옹호하는 등 소론에 가담하였다.

1685년 지평에 올랐고 이어 이조좌랑·수찬 등을 역임하였으며 이 때도 최석정의 파직을 변호하는 등 소론의 소장으로 활약하였다.

1689년 대사간에 올랐는데 이 때 남인에 맞서 희빈 장씨의 책봉을 반대하는 데에 앞장 섰다.

그 뒤 1694년 외직으로 전라도관찰사로 나갔으며 이어 강화유수를 역임하였고 주청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하면서 부제학, 형조와 예조 판서, 대제학 등 현직을 누렸다.

1711년 소론의 최석정 등이 삭탈관작되고 1716년 병신처분으로 소론이 실세를 거듭하자 지중추부사 등의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 광주로 내려가 여생을 마치려하였으며 이 때 많은 사직소를 올린 것으로 유명하다.

1721년(경종 1) 소론이 득세하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이 되었고 1723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이 무렵 노론들이 연잉군(뒤의 영조)의 대리청정 등을 추진할 때 이에 맞서는 등 소론정권의 주역을 맡았으나 강경파 김일경 등이 신임사화를 일으킬 때는 완소로 온건하게 대처하였다.

이어 치사를 빌어 봉조하를 받고 일선에서 물러나 성묘를 핑계대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그리하여 1724년(영조 즉위년) 영조가 즉위하여 노론이 집권했을 때에도 무사하였다.

1728년 무신난이 일어날 때 용인에 있으면서 이 정보를 입수하고는 80세의 노구를 이끌고 제일 먼저 조정으로 달려와 이를 알린 다음 역정포고의라는 토난책을 건의하였는데 여기에서 그는 원옥이 없을 것을 당부하고 완소계열을 보호하려고 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일사부정이라는 영조의 어필이 내려졌고 이어 공신에 녹훈하려고 하자 이를 끝까지 거절하였으며 당인의 중심 인물이었으나 온건하게 대처하였다.

또 지방관으로 나갔을 때에는 많은 선정을 베풀었다.

특히 전라감사로 있을 때 선정으로 이름나 사람들이 부서한(관청 문서가 한가함.), 공방한(아전들이 한가함.), 기악한(기생과 풍악이 한가함.)의 삼한이라 했다 한다.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정이고 시문집으로 간재집 15권이 있다.

 

 

한동안 그 백련봉 정상에서 시간을 보내며 최규서에 관한 설명판도 읽어 보고 조망이 없는 주위 풍경도 살펴 본 후 직진 방향의 낙엽 등로를 따라 빠르게 걸어 내려가니 등로는 뚜렷하게 아주 잘 정비된 듯 보인다.

그렇게 한동안 빠르게 걸어 내려가니 부처님의 가호 청원사라는 설명판이 서 있는데 지도를 보니 이 설명판 전 갈림삼거리에서 직진의 이곳이 아닌 좌측으로 꺽어 진행을 했어야 하는데 약간의 알바를 하고 있는 중이다.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성은리에 있는 청원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로서 백제 때 창건되었으며 창건 당시 산에 푸른 안개가 끼어 있어서 절 이름을 청원사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1975년 도로공사가 대웅전 내의 삼존불을 개금할 때 복장에서 사경이 발굴되었는데 여기에는 청원사라고 기록되어 있었으나 1481년(조선 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현재의 절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조선 초에 바뀐 것임을 알 수 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 1000명이 이곳에 안전하게 대피하여 산 이름을 천덕산으로 바꾸었다.
건물로 대웅전과 산령각 및 요사 등이 있는데 이중 대웅전은 조선 후기에 세워진 건물이고 유물로 대웅전 후불탱화와 청원사칠층석탑, 부도, 고려사경, 본존불 등이 남아 있다.

후불탱화는 1891년(고종 28)에 만들어진 것이며 부도는 고려 충렬왕  때의 승려 안제의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칠층석탑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6호로 지정된 유물이며 고려사경은 불상의 복장에서 나온 유물로 출처와 조성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어 불경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곳에서 내려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좌측으로 트래버스하듯 낙엽속을 헤치며 걸어 진행을 하니 얼마 가지 않아 뚜렷한 정상 마루금을 만나 정상적으로 걸어 본다.

 

 

정상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이곳 역시 활엽수 낙엽이 푹신하게 깔려 있어 진행에는 큰 어려움이 전혀 없다.

다시 나즈막한 무명 안부를 지나 완만하게 오르고 그렇게 낙엽을 밟으며 즐기다 보니 두 갈래 참나무가 서 있는 189 무명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이곳에서 등로는 좌측으로 급격하게 휘어져 진행이 되는데 살펴보니 우측으로 진행해야 될 것처럼 보이는 무명봉을 좌측 사면 등로로 우회하듯 진행이 되기 때문인 듯 보인다.

 

 

잠시 더 좌측 사면 등로를 따라 걸어가듯 진행을 하니 억새대로 엮은 마대자루 같은 등로 보호대ㅔ가 깔려있고 등로 좌측으로는 잡목 사이로 동막전원마을의 전원주택들이 내려다 보이는데 그 전원주택단지 방향으로는 철조망까지 쳐져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잠시 후 등로는 다시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고 그렇게 잠시 더 걸어 내려가니 예전에 헬기장이었는지 아니면 이장된 묘지가 있었는지 모를 공터에 잡풀들이 무성하게 자랐다 말라 죽은 곳도 통과를 해 본다.

 

 

잡풀들이 무성한 공터를 지나 다시 이어지는 낙엽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등로는 마치 아름다운 동화의 나라로 들어가는 길처럼 느껴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잠시 후 등로는 다시 무명봉을 지나 완만하게 내려가고 곧이어 갈림사거리 안부에 도착을 하는데 좌우측으로 뚜렷한 등로가 보여 지도를 살펴보니 지도상에는 아무 표식도 없는 무명안부이다.

무명 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낙엽 등로를 따라 올라 조금 더 걸어가니 눈 앞에 높은 절개지가 나타나고 그 앞에 설치되어 있던 철조망은 넘어져 나뒹굴고 있다.

 

 

그 철조망 아래 천길 낭떨어지 넘어에는 방금 전 지나 온 동막전원마을과 같은 전원주택들을 짓고 있는지 제법 넓은 지역에 새로운 건물들이 올라가고 있다.

생각보다 넓은 지역의 산을 파헤쳐 주탁단지로 개발을 하는 듯 보이고 그 아래 저 멀리에는 산장낚시터가 있는 산하리마을도 내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먼 훗날 후답자가 지나가는 시간에는 이곳을 또 어떻게 묘사하게 될지 자못 궁금해지는 곳이지만 공사 후 자연을 가능한 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시켜 놓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잠시 등로 좌측의 절개지와 주택 공사장을 내려다 보고 등로 좌측으로 철망을 두고 우측 능선으로 걸어 진행을 하니 백련봉에서 1.1 Km 진행해 왔고 앞으로는 지문리 방향으로 진행을 해야 한다는 이정표를 만나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사진을 남기고 큰 어려움 없는 낙엽 등로를 타고 걸어 진행을 하니 몇개의 벤취쉼터들이 설치되어 있는 제법 넓은 공터의 157.2봉에 도착을 해 잠시 숨 한번 고르고 출발해 본다.

 

 

그 157.2봉을 지나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낙엽 등로를 타고 걸어 내려가니 갈수록 낙엽의 두께는 더욱 두꺼워지고 잠시 나즈막한 안부를 넘어 다시 올라 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봉우리 같지 않은 능선상의 낙엽 봉우리인 141 무명봉을 지나고 조금 더 걸어가니 나무로 만든 벤취와 백련봉에서 1.8 Km 진행해 왔다는 이정표가 서 있는 137 무명봉에 도착을 해 좌측 등로를 타고 걸어 본다.

지나가며 살펴보니 우측으로도 뚜렷한 등로가 보여 길주의 구간인 듯 보이기도 한 곳이다.

 

 

그 갈림삼거리를 지나 계속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는 이제 큰 고도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평이하게 진행이 되고 제법 큰 소나무와 참나무들이 혼재되어 있는 등로는 진행에 큰 어려움이 전혀 없다.

다만 가끔 너무나 많이 떨어져 쌓여있는 활엽수 낙엽들로 인해 등로 찾기에 조심을 하면 큰 어려움은 없는 산행이다.

그렇게 한동안 평이하게 걸어 전진하니 선답자의 띠지가 소나무에 걸려 있는 125 무명봉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 역시 갈림삼거리로서 좌측 등로를 버리고 우측 등로를 따라 진행을 해야 하는 길주의 구간처럼 보이는 곳도 통과를 한다.

 

 

사진 한장 남기고 계속 이어지는 백련봉에서 2.0 Km 진행되어 왔다는 이정표를 만나고 소나무 사이로 나 있는 고속도로 같은 멋진 등로를 따라 빠르게 걸어 진행을 하니 선답자의 띠지가 걸려 있는 125 무명봉에 도착을 해 잠시 숨 한번 조절하고 출발한다.

그 무명봉을 넘으니 등로는 좌측으로 크게 휘어져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가고 잠시 후 2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곳으로 내려선다.

오늘 진행을 하면서 계속 만났던 이정표에 보였던 지문리를 살펴보니 지문리는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에 있는 리로서 낮은 산과 고개가 많아 골짜기가 많다.
지문리의 지명은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당시 병합된 여러 지역 중 상지촌과 동문의 이름을 따서 지문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지문마을과 동문마을이 있는데 지문마을은 마을 앞산의 봉우리가 세 명의 중이 고깔을 쓴 모양이라고 해서 불자를 따서 불지라고 했다고 하며 현재 이 마을은 윗불지와 아랫불지로 나누어져 있고 동문마을은 고을의 관문이라 하여 골문이라고 한다.

 

 

그 2번 2차선 포장도로 고갯마루 양쪽으로는 높은 콘크리트 옹벽 위에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어 절개지로 곧바로 내려오거나 올라가지 못하고 우회한 듯 보인다.

잠시 사진 몇장 남기고 지도를 살펴보니 이곳 역시 아무 표식도 없는 그저 2번 국도 표시만 되어 있는 무명 고갯마루이다.

도로 건너편으로 보이는 나무계단을 타고 한동안 걸어 오르니 벌써 허기가 지기 시작하고 그 나무계단 끝자락에 걸터 앉아 준비한 떡과 과일 그리고 뜨거운 물로 따뜻한 커피 한잔 마시고 다시 일어서니 이제서야 조금 살 것 같다는 느낌이다.

이제 진행 방향으로는 지문리에서 산하리로 바뀌었고 그렇게 계속 오르니 나무계단이 끝나는 지점에서 얇은 로프가 설치되어 있고 곧이어 폐타이어들이 버려지듯 쌓여 있는 119 무명봉에 도착을 해 우측 아래를 살펴보니 커다란 공장 건물들이 빼곡하게 내려다 보인다.

 

 

폐 타이어봉을 지나 평이하게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는 다시 우측으로 크게 휘어져 내려가는데 그곳에는 하얀 눈이 그대로 쌓여 있는 안번목책과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나무계단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계단 우측으로는 여전히 커다란 공장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살펴보니 그 거대한 공장지대를 우측에 두고 좌측 등로를 따라 휘돌아 가는 형국처럼 보이기도 하다.

안부로 내려갔다 다시 낙엽 등로를 타고 오르니 잡풀들이 무성하게 자랐다 말라 죽은 124 무명 헬기장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자작나무들도 보이는 그 폐헬기장을 지나 진행하니 등로는 여전히 뚜렷하고 많은 낙엽들이 쌓여 가끔은 미끄럽지만 진행에는 큰 어려움이 없기에 빠르게 걸어 본다.

잠시 걸어 진행을 하니 눈 앞에 교통호와 군 벙커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그곳을 통과해 걸어 내려가니 내리막 등로에는 다시 안전목책과 로프들이 설치되어 있고 잠시 후 잘 관리되고 있는 묘지 2기 옆으로 진행이 되고 있다.

그 묘지들을 지나니 다시 눈 앞으로 제법 넓은 묘지지대들이 펼쳐져 있고 등로는 그 묘지들을 좌측에 두고 우측 사면 등로로 이어지는 듯 보인다.

 

 

묘지 뒤로 이어지는 등로를 타고 빠르게 걸어 전진하니 제법 귓전을 때리는 차동차 소음들이 들리기 시작하고 곧이어 눈 앞에 잡목 사이로 경부고속도로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제법 많은 차량들이 빠르게 달리고 있어 차량 소음도 장난이 아니다.

경부고속도로 방향으로 더 이상 진행을 못하기 때문에 등로는 우측으로 크게 우회하듯 걸어 내려가고 곧이어 안전목책과 로프구간을 지나 진행을 하니 평안 해오름길 종합안내판이 서 있다.

안성에서 이곳 길을 만들면서 평안 해오름길이라 이름을 붙힌 모양인데 왜 그런 이름이 붙었을까 궁금해지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잠시 후 비포장 임도를 만나 좌측으로 걸어 진행을 하고 곧이어 만나는 포장도로 옆 이정표가 서 있는 곳으로 보이는 하수도를 통해 경부고속도로를 통과해 본다.

 

 

가까운 곳에 경부고속도로를 통과할 수 있는 지하통로가 없기에 그 하수도관을 통해 통과를 하는데 바닥에는 뻘과 악취를 동반한 쓰레기들이 쌓여 있고 약간의 물이 보여 조심하며 걸어 통과를 해 본다.

어렵게 그 하수도 관을 통해 경부고속도로를 통과한 후 오르니 다시 2차선 포장도로가 나타나고 그 포장도로 위로 올라 도로 우측을 살펴보니 고속도로 건너 상행선 방향의 안성휴게소가 보이기 시작한다.

참으로 많이도 이용하고 쉬었다 간 안성휴게소이기에 기쁜 마음에 사진 몇장 더 남기고 도로 우측 능선 방향의 잡목과 잡풀을 헤치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잠시 오르니 잡목의 저항이 심해지고 옆으로는 시멘트 수로가 보여 잠시 그 수로를 타고 올라보지만 역시나 잡목으로 막혀 더 이상 진행이 불가능하게 보여 그 시멘트 수로를 빠져 나와 우측으로 휘돌아 오르니 94 무명봉을 지나 좌측 절개지 상단부로 이어지고 있다.

사람들이 다닌 흔적이 거의 없어 잡목이 우거진 등로를 헤치고 어렵게 오르니 드디어 고사목들이 누워있고 선답자의 띠지가 보이는 절개지 상단부에 어렵게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등로 좌측으로 경부고속도로와 그 뒤로 방금 전 내려 온 쌍령지맥 마루금을 살펴보는 시간도 가져 본다.

 

 

그렇게 조망을 즐기고 다시 진행을 하니 등로는 완만하게 내려가고 그곳에도 역시 시멘트 인공수로가 보인다.

잠시 그 시멘트 인공수로 우측 등로를 따라 걸어 내려가니 우측에서 올라오는 넓은 비포장 임도를 만나 그 비포장 임도를 타고 좌측 언덕쪽으로 걸어 올라 본다.

잠시 걸어 오르니 갈림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직진 방향으로는 방금 전 능선으로 오르기 전 헤어졌던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곳으로 이곳에서 등로는 우측으로 90도 꺽어 이어지는 비포장 임도를 타고 계속 진행을 해야 한다.

잠시 걸어 오르니 대부분 눈이 녹아 있지만 응달에는 아직도 하얀 눈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걸어 진행하는데엔 큰 지장을 주지 않는 정도이다.

 

 

계속 이어지는 비포장 임도를 타고 빠르게 걸어 진행을 하니 눈 앞에 몇기의 묘지들이 나타나고 그 묘지들 옆으로 돌아 오르니 이제는 등로에 솔갈비가 멋지게 깔려 있어 푹신하게 걸어 본다.

잠시 후 커다란 소나무와 잡목들이 보이는 115 무명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그 부드러운 솔갈비 등로를 따라 잠시 힐링도 해 보는 시간이다.

 

 

무명봉을 지나면서도등로는 여전히 멋진 솔갈비가 깔려 있는 부드러운 마루금으로 이어지고 있어 마음껏 속도도 내 본다.

잠시 후 무명 안부로 내려갔던 등로가 다시 평이하게 이어지고 곧이어 완만하게 올라 소나무와 작은 밤나무가 혼재되어 있는 123.4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생각보다 부드럽고 뚜렷한 등로로 인해 산행 속도가 상당히 빠르게 진행이 되고 있어 오늘 산행 역시 계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마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다.

 

 

한동안 소나무 등로를 타고 솔갈비를 밟으며 힐링의 시간을 갖다 보니 잠시 후 등로 위에는 그동안 보이지 않던 바위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잠시 그 바위 등로를 조심하며 통과하니 이정표들이 보이는데 은산리 진행 방향으로 부엉바위까지 200미터 거리라는 이정표가 눈에 들어 온다.

그 옆에는 이정목도 함께 서 있는데 이정목에도 역시 팔용산까지 3.2 Km에 부엉바위까지는 200미터 거리라는 방향과 거리표시가 보인다.

지도를 살펴보니 이곳이 직진 방향으로 부엉바위 갈림삼거리로서 원 마루금은 이정표 있는 곳에서 좌측으로 90도 꺽어 내려가며 진행이 되는 곳이다.

그리 멀지 않기에 잠시 부엉바위를 둘러보고 오기로 한다.

 

 

부엉바위 갈림삼거리를 지나 직진으로 걸어 오르니 등로는 가파른 오르막 등로에 바위들이 제법 보이기 시작하고 잠시 후 커다란 바위가 앞을 가로막아 우측으로 돌아 우회하며 오르니 이정표와 정상석이 앙증맞게 설치되어 있는 부엉바위 정상이다.

이곳 부엉바위(150미터)에 관한 자료를 찾아 보지만 찾을 수 없어 부엉바위가 위치한 동네인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산하리를 살펴보니 산하리는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에 있는 리로서 낮은 산이 많아 골짜기가 많으며 산하리는 덕암산 밑에 위치한다 하여 산하라 이름 붙였다.

자연마을로는 신촌마을과 평동마을이 있는데 신촌마을은 경부고속도로 개통시 산하리 평동마을로부터 독립하여 모양말, 청대골, 개골 등을 합하여 새마을, 신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평동마을은 산과 들의 경계이며 농사를 짓기 위한 거름으로 초목을 태운 재를 모아두는 곳이라 하여 재푸랑이라고 한다.

역시나 산하리를 찾아 봐도 부엉바위에 관한 시원한 답은 볼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부엉바위에서 추억 한장 남기고 곧바로 되돌아 내려 와 부엉바위 갈림삼거리에서 이제는 진행 방향의 우측 방향으로 90도 꺽어 내려가니 그곳에는 사각나무 계단들이 길게 설치되어 있다.

잠시 후 등로 좌측으로 발목 후 소나무들을 식재한 장소가 나타나고 곧이어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되어 잇는 등로를 만나 내려가니 제법 깊은 안부에 도착을 하는데 지도를 살펴보니 이곳 역시 무명 안부이다.

무명 안부를 지나 다시 이어지는 안전목책과 로프 및 나무 계단을 타고 한동안 계속 오르막 등로를 올라 본다.

 

 

오르막 등로에 설치된 안전목책과 로프를 타고 사각 나무 계단을 따르니 그 나무계단은 정상부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조금 지루할 정도로 이어지는 계단을 따라 계속 오르니 등줄기에서는 다시 땀방울이 흐르기 시작하고 잠시 후 덕암산까지 500미터 남아 있다는 이정목이 서 있는 170 무명봉에 도착을 해 셀카 놀이를 하면서 추억 한장 남겨 본다.

이곳으로 산책나온 지역 주민들이 이 산객을 힐끔힐끔 보면서 이런 산을 오르면서 복장은 뭐 그렇게 차려 입고 왔느냐며 바라보고 있는 듯 보인다.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그 이정목이 서 있는 170 무명봉을 넘어 갈림삼거리에서 직진의 좌측 등로를 버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우측 내리막 계단을 통해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다시 나타나는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나무계단을 따라 급하게 내려가니 등로는 다시 평이하게 변하고 잠시 후 덕암산정상까지 400미터 남아 있다는 이정목과 벤취쉼터 2개를 만난다.

그곳을 지나니 덕암산정상으로 향하는 등로는 두갈래 방면으로 변하는데 원 지맥 마루금과 최근에 새로 개설된 듯한 둘레길이 계속 번갈아 가며 헤어졌다 만나기를 반복하고 있다.

잠시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고 덕안산정상까지 300미터 남아 있다는 이정목을 지나 안전목책과 로프 구간을 오르니 131 무명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곧바로 출발한다.

 

 

다시 나타나는 원 지맥 등로와 우측으로 둘레길 갈림삼거리에서 가능하면 원 지맥 등로를 고수하며 진행을 하고 안전목책과 로프구간을 지나 오르니 커다란 바위 하나가 반겨 준다.

바위를 바라보며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덕암산 정상에 도착을 하는데 그 보였던 바위는 정상석 바로 뒤에 위치한 바위암봉이었다.

이곳 덕암산(164.5미터, 삼각점-용인 469)에 관한 자료를 찾아 보지만 그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아 그 대신 이 덕암산이 있는 산하리를 살펴보지만 그 역시 덕암산에 관한 자료가 제한적이라 아쉽기만 하다.

산하리는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에 있는 리로서 낮은 산이 많아 골짜기가 많으며 산하리는 덕암산 밑에 위치한다 하여 산하라 이름 붙였다.

자연마을로는 신촌마을과 평동마을이 있는데 신촌마을은 경부고속도로 개통시 산하리 평동마을로부터 독립하여 모양말, 청대골, 개골 등을 합하여 새마을, 신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평동마을은 산과 들의 경계이며 농사를 짓기 위한 거름으로 초목을 태운 재를 모아두는 곳이라 하여 재푸랑이라고 한다.

덕암산 정상에는 커다란 바위 앞에 앙증맞은 정상석이 서 있고 그 앞에는 삼각점이 보인다.

그 삼각점 앞 옆으로는 부엉바위에서 900미터 진행해 왔으며 이제부터는 부락산 방향으로 진행이 된다는 이정표도 보인다.

 

 

사진 몇장 남기고 그 덕암산정상부를 내려 와 빠르게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는 여전히 멋진 소나무 등로가 이어지고 그 소나무 등로 사이에 벤취 쉼터들이 설치되어 있어 주민들이 산책하며 쉬어가기 좋게 조성을 해 놨다.

그렇게 빠르게 걸어 진행을 하니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올라 사각정자와 운동기구들이 보이는 157 무명봉에 도착을 해 사진 몇장 남기고 우측 아래로 이어지는 등로를 따라 빠르게 내려가 본다.

 

 

빠르게 걸어 내려가니 다시 갈림삼거리가 나타나고 산불감시초소까지 1.3 Km 남아 있다는 이정목이 서 있는 곳에서 우측 원 마루금을 타고 오르니 통나무 계단을 지나 벤취 쉼터 하나가 보이는 139 무명봉에 도착을 해 잠시 심호흡 한번 하고 출발한다.

잠시 내려가다 뒤돌아 보니 등로 우측으로 벤취 쉼터 하나가 더 보여 2개의 벤취 쉼터가 있는 139 무명봉이었고 그곳을 지나 빠르게 걸어 내려가니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사각나무 계단이 이어지고 곧이어 당산나무와 나즈막한 돌탑이 쌓여 있는 사거리 안부에 도착을 한다.

예전에 서낭당 같은 구실을 했을 법한 그 안부를 지나 다시 맥 잇기 산행을 계속 이어가 본다.

서낭당 터 안부를 지나며 서낭당을 살펴보니 마을의 수호신으로 서낭을 모셔놓은 신당으로 성황당이라고도 하는데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에 원추형으로 쌓아 놓은 돌무더기 형태로 그 곁에는 보통 신목으로 신성시되는 나무 또는 장승이 세워져 있기도 하다.

이곳을 지날 때는 그 위에 돌 세 개를 얹고 세 번 절을 한 다음 침을 세 번 뱉으면 재수가 좋다는 속신이 있다.

서낭당은 서낭신을 모신 신역으로서 신앙의 장소이고 이곳을 내왕하는 사람들은 돌과 나무 또는 오색 천 등 무엇이든지 놓고 지나다녔으며 물론 그곳의 물건을 함부로 파거나 헐지 않는 금기가 지켜짐은 말할 나위가 없다.

서낭이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서 또는 석전에 대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도 있으나 민간에서의 서낭은 종교적 의미가 농후하다.

우리 나라에 서낭신앙이 전래된 것은 고려 문종 때 신성진에 성황사를 둔 것이 서낭의 시초라 하며 그 뒤 고려에서는 각 주부현마다 서낭을 두고 이를 극진히 위하였는데 특히 전주서낭이 유명하였다.

고려 고종은 침입한 몽고병을 물리치게 된 것이 서낭신의 도움 때문이라 하여 서낭신에게 신호를 가봉하였던 일도 있었다.

수호신으로서의 서낭은 조선시대도 널리 신앙되었고 조선시대의 서낭은 국행서낭과 민간에서의 서낭으로 나누어지는데 국행서낭은 호국이라는 두 글자를 붙였다.

이성계는 즉위 후 여러 산천의 서낭을 제사하였으며 태종은 백악서낭과 송악서낭을 신도서낭으로 모셨다. 그 밖의 조선시대의 이름난 서낭으로는 해주, 괴산, 현풍, 양산, 신성, 밀양, 전주, 고성서낭 등이 있었다.

이러한 서낭에서는 정기적인 제사뿐만 아니라 국난이나 가뭄이 있을 때 서낭제를 거행하여 국태민안을 기하려 하였다.

 

 

계속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따라 빠르게 진행을 하니 평이한 등로가 열리고 덕암산정상에서 500미터 내려왔다는 이정목을 지나 환상의 활엽수 등로를 걸어 본다.

너무나 아름다운 등로이기에 혼자 걷기 아깝다는 생각으로 진행하니 등로는 다시 아름다운 소나무 등로로 변하고 있다.

둘레길이 갈리는 갈림삼거리에 서 있는 덕안산에서 900미터 진행되어 왔다는 이정목을 지나 나무 목책을 타고 오르니 소나무 무명봉을 넘어 다시 완만하게 내려가고 곧이어 이정표와 키 작은 이정목이 서 있는 안부에 도착을 한다.

살펴보니 원균장군묘지 표시가 보이기 시작하고 이곳을 삼남길이라 표기된 이정목이었다.

 

 

삼남길은 조선시대 대로 중에서 최고 긴 길은 경기도에서 충청도를 지나 전라도의 삼남지방을 관통하는 길로서 그 길이 천 리에 달한다고 하는데 해남부터 강진, 나주, 광주, 완주, 익산, 논산, 공주, 천안, 평택, 수원을 지나 서울에 이른다.

기차, 자동차, 비행기 등 교통수단이 변하면서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했던 삼남길이 최근 재조명 받으며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며 수원시, 화성시, 오산시가 공동으로 옛 문헌과 지도를 활용해 경기권의 삼남길을 고증하며 국내 최장 도보 코스의 첫 문을 열었던 길을 말한다.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진행을 하니 눈 앞에 갑자기 사각정자와 산불감시초소 및 이정목들이 보이는 162.9봉에 도착을 해 정사에서 쉬고 있는 지역 주민들을 피해 사진 몇장 더 남겨 본다.

서래야 박건석님은 이곳을 작은 덕암산이란 종이 코팅지를 붙여 놨는데 믿을 수 없고 그 옆에 준.희님은 이곳을 쌍령지맥 상 162.9 미터봉이란 이정판을 매달아 놨다.

이곳에서 등로는 산불감시 초소 좌측으로 나 있는 마루금을 따라 진행이 되고 있다.

 

 

이제부터 등로는 조금 더 넓고 반질거리는 등로로 변하는데 그만큼 이곳 주민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덕암산 오르막 등로부터 마루금이 잘 정비되어 있다는 느낌이었고 주중인데도 중간에 연세 지긋한 마을 주민들도 자주 만나는 것을 보면 주말과 휴일에는 제법 많은 주민들이 올라 오는 등로처럼 보인다.

잠시 후 돌탑이 서 있는 144 무명봉을 지나 안전목책과 로프를 따르니 등로 우측으로 15번 송전탑도 나타난다.

송전탑을 지나 계속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나무목책이 설치되어 있는 무명봉을 지나 다시 완만하게 내려가고 이정목 하나를 통과한 후 해주정씨 삼옥공 정감묘라는 설명판이 보인다.

삼옥공 정감의 성은 정이고 이름은 감이며 호는 삼옥이다.
정도공의 6대손이며 영양위의 현손으로 해평부원군 휘 미수는 공의 증조부이며 해령군 휘 원희는 바로 공의 아버님이고
어머님 상주 김씨는 판서 광준의 딸이다.

정감은 명종 18년(1563)에 나서 선조 28년(1595)에 진사에 급제하여 통훈대부 호조정랑으로 있다가 인동부사로 나가 있었고 인조 8년(1630)에 세상을 마치니 그 때 나이 68세였으며 무덤은 수원 오타면 성두리 옥녀봉 아래 서북향터에 있는데 빗돌이 세워져 있다.

두 아들과 한 딸을 두었는데 맏아들 세준은 벼슬이 적순부위로 부인 경주이씨는 부사 승의 딸이었고 둘째 후준은 벼슬이 진잠현감으로 함열 남궁씨와 파평 윤씨에게 장가들었으며 딸은 군수 김정립에게 시집갔다.

큰조카 효준은 벼슬이 지돈녕부사에 이르고 해풍군의 칭호를 받았으며 시호가 제순공이었고 조카 승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다.
공의 호를 삼옥이라고 한 것은 문장도 구슬 같고 사람도 구슬 같고 집안 벼슬도 구슬 같았기 때문이며 공은 평소에 벼슬하기를 즐겨하지 않으며 몸을 조심하여 평생을 마치고자 하여 남이 부귀 누리는 것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내 스스로 힘쓰는 공부를 참되게 할 수 있다고 했다.

해주어씨의 자랑으로 삼을 만큼 위대한 분의 무덤으로 생각되지만 갈길이 머니 오늘은 이 설명판을 읽어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해주정씨 삼옥공 정감묘에 대한 설명판을 지나 계속 이어지는 평이한 뚜렷한 등로를 따르니 등로는 다시 완만하게 내려가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 역시 둘레길과 원 마루금이 만났다 헤어지는 갈림삼거리로서 그 옆에는 부락산쉼터와 원균장군묘에 대한 거리 표시와 함께 삼남길이란 글씨가 선명하다.

또 다시 커다란 이정목을 지나 평이하게 걸어 전진하니 운동기구와 사각정자가 있는 황덕산이란 곳에 도착을 해 준비한 떡과 과일 그리고 따뜻한 물로 허기를 달래고 출발한다.

이곳 역시 사각정자 한쪽 기둥에 한문으로 황덕산이란 종이 코팅지가 붙어 있는데 황덕산에 관한 자료를 찾아 보지만 찾을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허기를 달래고 그 사각정자를 내려 와 빠르게 걸어 진행을 하니 또 다른 이정목에 부락산쉼터까지 500미터 남아 잇다는 거리표시가 보이고 잠시 뚜렷한 등로를 타고 빠르게 걸어가니 벤취수미터 2개가 등로 옆에 설치되어 있다.

그곳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간 후 내려가니 등로 옆으로 백현원과 맹사성의 공당문답이라는 설명판이 보여 잠시 읽어 본다.

자료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백현원에는 조선 세종 때의 명재상이었던 고불 맹사성에 관한 고사가 전해오는데 세간에 널리 알려진 공당문답이 그것이다.

맹사성의 고향은 아산시 배방면이고 그곳에는 아직도 6백년이 넘는 그의 고택이 남아 있는데 맹사성은 고향에 갈 때나 한양으로 올라갈 때 이곳 삼남대로를 지나갔다.

평소 소를 타고 피리를 즐겨 불었다고 했으니 소걸음으로 느릿느릿 걸으면 배방면에서 백현원까지는 하루 길이었는데 하루는 맹사성이 고향에 갔다가 한양으로 가던 중 비를 만나 백현원에서 잠시 머무르게 되었고 그 주막 안에는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는 젊은이가 먼저 와서 자리잡고 있었다.

맹사성이 구석에 자리를 잡자 심심하던 젊은이는 장기 한판 두자고 제의했고 맹사성이 연거푸 몇 판을 이기자 부아가난 젊은이는 유명한 공당문답을 하자고 제안했다.

자신을 놀리기 위한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맹사성은 빙긋이 웃으며 응했다.

그래 젊은이는 어디로 가는 공?

한양으로 벼슬하러 간당

벼슬자리 내어줄 사람이라도 있는 공?

없당

그럼 내가 한자리 마련해주면 어떻겠는 공?

그러자 젊은이는 배꼽을 잡고 웃으며 바라지도 않는 당하고 대답했는데 바로 나이 먹은 늙은이의 실없는 농담쯤으로 여겼던 탓이다.
얼마 후 과거가 끝난 뒤 급제자들이 정승들에게 문안인사를 드리게 되었고 맹사성은 윗자리에 앉아 급제자들을 내려보고 있는데 그 중에 백현원에서 만났던 젊은이가 서 있어 장난기가 발동한 맹사성은
그래 과시는 잘 보았는 공? 하고 물었다.

깜짝 놀란 젊은이는 고개를 들어 맹사성을 바라보았고 정승이 앉는 자리에 백현원에서 자신이 놀렸던 꽤죄죄한 늙은이가 있는 것이 보였다.

맹사성이 다시 물어 급제한 기분이 어떤 공? 하자 젊은이는 땅에 코를 박고 주주주죽고만 싶당 하며 몸둘 바를 몰라했다.
젊은 급제자의 태도에 어리둥절한 대신들에게 맹사성이 내막을 이야기하자 방안은 웃음바다가 되었고 이 일로 자신의 교만함을 반성하고 크게 깨달음을 얻은 젊은이는 그 후 크고 작은 고을의 원님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백현원과 맹사성의 공당문답을 재미있게 읽어 보고  가파른 내리막 등로에 설치된 안전목책과 로프를 따라 내려가니 304번 4차선 포장도로 위 생태통로로 진입하기 직전 우측으로 평택을 거쳐간 이몽룡이란 설명이 보여 잠시 읽어 본다.

삼남대로는 조선시대 한양에서 삼남지방으로 가는 길인 데서 유래되었으며 삼남대로는 서울에서 충청과 전라 및 경상도 방향으로 가는 길로 조선 초 한양 도성에서 남대문을 지나 삼남지방으로 가는 간선도로의 하나였다.

즉 전국 각지로 가는 9개 노선 가운데 제6로로 동작진과 노량진을 건너 과천과 금천 및 수원을 지나 통영까지 이르는 986리 길이었고 제7로로 동작진을 지나 삼례와 금구 및 태인 그리고 정읍을 지나 제주에 이르는 970리 길이 되었다.

평택을 거쳐간 이몽룡이란 글을 읽어 보니 조금은 억지스런 글로서 삼남대로를 통해 이몽룡과 춘양이가 평택을 거쳐 다녔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글처럼 보였다.

 

 

평택을 거쳐간 이몽룡이란 글을 읽고 잠시 걸어 내려가니 금새 동물이동통로가 보이는데 그 아래로는 317번 4차선 포장도로가 지나고 있다.

좌측 아래의 안성과 우측 위의 용인을 이어주는 4차선 도로로서 차량 전용 도로처럼 보이는데 제법 차량들의 통행이 이뤄지고 있는 곳이었다.

그 동물이동통로를 통과하는데 과연 몇마리의 어떤 동물들이 이 이동통로를 이용해 건너 다닐 수 잇을지 의문이 되기에 이런 공사를 하려면 조금만 더 신경을 써 동물들에게 실제적인 이동통로로서 구실을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 317번 4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도로 위 동물이동통로를 통과하니 등로에는 다시 안전목책과 로프들이 설치되어 있고 잠시 가파르게 오르니 벤취수미터들이 설치되어 있는 좁은 공터에 도착을 한다.

공터를 지나 반질거리는 소나무 등로를 따라 빠르게 걸어 진행을 하니 평택의 하얀고개 설명판이 서 있고 삼남길 이정표와 부락산둘레길 이정표가 서 있는 희치휴게소 안부에 도착을 해 좌측으로 보이는 수돗가에서 시원한 식수 한모금 마시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고 출발한다.

흰치휴게소(3174차선 포장도로)는 삼남대로 지나는 길에 있는 고개로서 평택지방에서 가장 험하고 높은 고개였으나 지금은 고개턱을 절반이나 깎아 야트막해 졌지만 공사하기 전에는 무시 못할 만큼 높은 고개였다.

더구나 부락산과 덕암산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와 계곡에는 심심찮게 산짐승이 출몰하였고 그래서 삼남에서 올라오는 나그네는 고개를 넘기 전 도일동 감주거리(주막거리)에서 막걸리로 목을 축이며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이곳 흰치는 국한문혼용 지명이며 이 지명은 옛날 고개 봉우리가 석회질 토양이어서 희게 보였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흰치는 한자로 백현이다.

한자와 한글의 차이일 뿐 백현이라는 지명은 흰치 또는 흰고개와 같은 의미이다.

안성천을 건너 평택 땅으로 넘어온 나그네가 땀에 범벅이 되어 휘적휘적 흰치고개를 넘으면 동막과 우곡마을이 나왔고 나그네는 이 곳에서 땀도 식히고 출출한 배도 채워야 했으며 때로는 봉놋방에서 잠을 자야 할 때도 있었다.

더구나 공무로 지방을 여행하는 관원에게는 이곳이 진위객관과 갈원의 중간이어서 다리 쉼을 해야 하는 곳이었기에 그래서 조선은 이곳에 백현원이라는 역원을 설치하였다.

백현원은 설치 초기부터 나그네의 주요 쉼터 구실을 하였으며 조선시대 역원들이 옛 주막자리에 설치되었으므로 고려시대에도 이곳은 주요 쉼터였을 것이다.

살펴보니 등산이 아니더라고 여행으로 잠시 들렸다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 흰치휴개소이자 고개였다.

 

 

흰치 안부를 지나 계속 이어지는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된 사각나무 계단을 타고 오르니 생각보다 많은 지역 주민들을 만나게 된다.

그 나무계단을 다 올라 흐르는 땀방울을 닦으며 평이한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부락산정상까지 750미터 남아 있다는 이정목을 지나고 계속 반질거리는 소나무 등로를 타고 빠르게 걸어 본다.

이제 부락산정상까지 600미터 남아 있다는 이정목을 지나고 뚜렷한 등로를 따라 전진하니 등로 우측으로 사각정자가 보이는데 해발고도가 101미터인 곳이다.

 

 

그 사각정자를 지나면서도 계속 이어지는 뚜렷한 등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다녔는지 반질거리는 것이 마치 북한산이나 관악산과 닮아 있다.

벤취쉼터 2개가 설치되어 있는 평이한 등로를 지나 부락산정상까지 400미터 남아 있다는 이정목을 통과하니 눈 앞에 무명봉이 나타나는데 그 무명봉은 좌측 사면 등로로 우회하게끔 되어 있다.

그렇게 잠시 더 빠르게 걸어 완만하게 오르니 다시 사각정자와 운동기구들이 보이는 127 무명봉에 도착을 해 잠시 심호흡 한번 하고 출발한다.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부락산정상까지 200미터 남아 있다는 이정목을 통과하고 억새로 만든 마대포를 따라 완만하게 오르니 가파른 통나무 게단이 기다리고 있다.

그 통나무 계단을 타고 빠르게 걸어 오르니 제법 넓은 공터 위에 부락산 정상석과 이정목 그리고 산불감시초소와 벤취쉼터들이 보이는 부락산(불악산) 정상에 도착을 한다.

부락산(불악산, 150.5미터)은 경기도 평택시의 지산동에 위치한 산으로 해발고도는 149미터이며 여지도서에 불악산을 현의 남쪽 10리에 있고 양성현 천덕산에서 줄기가 이어져 온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양성 천덕산은 지금의 안성시 원곡면에 있는 천덕산이다.

진위읍지에는 부락산이라 표기하고 충청도 평택현이 바라 보인다 라는 설명이 덧붙여 있다.

이 부락산은 조선 시대 진위현과 평택현의 경계 역할을 하는 랜드마크였기에 불악산보다 해발고도가 더 높은 동쪽의 덕암산(164미터)에 대해서는 옛 문헌들이 잘 기록하고 있지 않는 반면에 불악산에 대한 기록은 쉽게 찾을 수 있다.

특히 대동여지도와 같은 옛 전국지도에서도 불악산이 표시되고 있다.

추억 한장 남기고 주위를 살펴보니 덕암산과 부락산에 대한 설명판이 보여 잠시 읽어 보고 출발한다.

 

 

잠시 더 그곳 부락산 정상에서 머물며 사진들을 남기고 다시 출발하니 등로 우측으로 캅이 하나 보이는데 무슨 용도인지는 모르겠다.

가파르게 내려가 우회등로와 만나는 곳에서 대화의광장과 덕암산 갈림 안내판을 통과하고 조금 더 빠르게 걸어가니 성불사와 은혜고 갈림사거리 안부에 도착을 하는데 잠시 직진의 전망대를 다녀 와 은혜고와 국제대학 방향으로 진행을 해야 하기에 사진에 담아 본다.

계속 이어지는 평이한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사각정자와 팔각정까지 550미터 남아 있다는 이정목을 지나고 다시 팔각정을 다녀 와 이곳까지 뒤돌아 내려와야 할 국제대학과 은혜고 600미터라는 철판 이정표와 벤취쉼터 하나가 설치되어 있는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직진의 팔각정 방향으로 진행을 이어가 본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이기에 빠르게 진행을 하니 운동시설이 설치되어 있는 공터를 지나 2층의 팔각정과 145.49미터의 표고 표시가 되어 있는 삼각점이 보인다.

그 팔각정 2층으로 올라가 주위 조망과 풍경을 살펴보지만 주위에 자라고 있는 나무들로 인래 조망은 전혀 없기에 조금은 실망하고 내려 와 아무 생각없이 직진방향으로 조금 더 걸어 나무데크를 타고 내려가며 짧은 알바를 경험하고 다시 팔각정 방향으로 뒤돌아 올라 온다.

팔각정을 세웠으면 주위 조망과 풍경을 볼 수 있도록 관리를 해 주면 좋은데 주위 나무가 어릴적엔 문제가 없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나무들이 자라면서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듯 보인다.

 

 

다시 국제대학과 은혜고 갈림삼거리 이정표가 서 잇는 곳으로 되돌아 내려 와 이제는 진행 방향의 우측 등로를 따라 빠르게 내려가니 이곳은 많은 주민들이 오르지 않는 등로인 듯 희미한 등로 찾기가 쉽지 않고 곧이어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곳으로 내려간다.

만나는 그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좌측으로 걸어 진행을 하니 도로 양쪽으로는 낙엽진 벗나무가 자라고 있어 벗꽃이 피는 봄이되면 제법 운치있는 도로가 될 듯 싶은 곳이다.

그렇게 한동안 도로를 타고 걸어 좌측으로 이동을 하니 도로 우측으로 민가가 보이고 공사구역 출입금지라는 위험 경고판이 서 있는 곳 능선으로 들어가며 어려운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좌측으로는 민가들이 보이는 작은 둔덕을 넘어 잡목을 헤치며 어렵게 걸어 진행을 하니 눈 앞에 절개지가 나타나고 그 절개지 앞으로는 드넓은 체육시설들이 펼쳐져 있는데 지도를 살펴보니 이곳이 바로 이충레포츠 공원이라 적혀 있는 곳이다.

이곳 이충레포츠 공원은 경기도 평택시 이충동에 있는 2001년 4월 21일 개원한 체육공원으로 넓이는 3만 2,332 m2이고 축구장, 테니스장(5개 코트), 농구장, 족구장 겸용 배구장, 풋살장, 배드민턴장(3개 코트) 등의 다양한 체육시설과 가족피크닉장, 산책로, 놀이터가 갖추어져 있다.

공원 옆에는 지하1층, 지상3층 규모의 실내체육관 겸 공연장인 이충문화체육센터가 자리하며 멀지 않은 곳에 이충분수공원도 있다.

이제 등로는 절개지를 내려가 눈 앞에 펼쳐진 드넓은 이충 레포츠 공원 가운데를 통해 진행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 추위에도 제법 많은 자ㅣ역 주민들이 나와 운동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 온다.

 

 

이충 레포츠 공원 인라인스케이팅장을 지나 축구장과 게이트 볼링장 사이로 나 있는 도로를 타고 걸어 진행을 하니 광장이라는 이정표 방향으로 등로는 이어지고 있다.

잠시 후 풋살장이라는 우측 방향으로 돌아 진행하니 넓은 공터를 지나 둔덕을 넘고 민가들이 보이는 2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 진행을 하게 된다.

잠시 후 돌판구이의 명가 돌구이라는 식당을 지나고 주님의교회 앞을 통과한 후 갈림사거리에서 리더스유치원 건물을 좌측에 두고 소로를 타고 어렵게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보는 시간이다.

 

 

리더스유치원 건물을 좌측에 두고 오르니 그곳은 바로 리더스유치원 내 시설물들이 있는 곳으로 그곳에서 등로는 우측 돌담 위 언덕으로 이어져 있어 도둑고양이가 담을 넘듯 조용히 올라 본다.

등로 우측으로는 잘 관리되고 있는 묘지들이 보이고 좌측으로는 커다란 건물들이 나타나는 그 가운데 등로를 따라 조심스럽게 전진하니 등로는 다시 4차선 포장도로에 도착을 하고 그 4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좌측으로 걸어가 본다.

 

 

그 4차선 포장도로 우측으로는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차 있고 그렇게 조금 더 걸어 진행을 하니 도로 우측으로 부락산 둘레길이란 안내판 아래 충의각에 대한 설명판도 보인다.

등로는 그 충의각 방향으로 나 있는데 이곳은 충의근린공원이라 불려지는 곳이기도 하였다.

경기도 평택시 이충동에 있는 충의각은 1991년 7월 11일 평택시향토유적 제5호로 지정되었으며 경기도 평택시 이충동 동령마을에 있는데 이충동이라는 지명은 두 명의 충신이 살았던 동네라는 뜻으로 두 충신이란 중종 때의 문신 조광조와 인조 때 3학사의 한 사람인 오달제를 지칭한다.

이곳은 조광조와 오달제의 집터가 있던 곳으로, 충의각은 정암 조광조와 추담 오달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각으로 각 안에는 유허비가 세워져 있는데 비의 규모는 비신 55×16×123㎝, 비대 67×49×15㎝이다.

유허비의 상부에는 송장이라는 글씨가 전서체로 장식되어 있으며 그 아래로 조광조와 오달제의 유허지임을 알리는 내용이 있다.

입석 당시 진위 유림에서 조광조와 오달제 선생의 자취가 있음을 길이 전하고자 나라에 청하여 허가를 얻었다고 전하며 비의 위치는 오달제 선생의 옛 집터가 있는 산 윗부분에 해당한다.

이 비는 1950년대까지 길 옆에 방치되어 있었으나 1960년대부터 동령마을 주민들에 의해 보호·관리되었으며 1990년에 문화원이 기와를 보수하고 단청을 다시 하였다.

     

 

등로는 이곳 충의각 뒷쪽으로 나 있는데 갈 수 있는 등로가 보이지 않아 충의각을 둘러 보고 충의근린공원안내판이 서 잇는 옆 등로를 따라 충의각 뒷편으로 돌아 가니 그곳에도 역시 낙엽이 깊게 깔려 있는데 작은 인공 다리를 건너며 좌측 충의각 방향을 살펴보니 충의간 바로 좌측 옆으로 넘어오는 등로도 보인다.

반질거리는 낙엽 등로를 따르니 벤취쉼터들도 보이고 잠시 후 등로는 능선을 지나 휴먼시아 추담마을이라는 아파트 촌 내부로 들어가며 이어지고 있다.

휴먼시아 추담마을이라는 아파트 촌 정문 입구 방향인 우측으로 걸어 진행을 하니 신호등이 있는 갈림삼거리 4차선 포장도로가 나타나고 그 도로를 횡단보도를 통해 건너 좌측으로 걸어 오르며 진행을 이어가 본다.

 

 

황단보도를 통해 4차선 포장도로를 건너니 우측은 이충중학교이고 좌측은 반지초등학교와 병설유치원인데 그곳에서 좌측의 반지초등학교 정문을 지나 계속 걸어 올라 갈림삼거리 안부에서 우측으로 도로를 따라 걸어 본다.

도로 우측 아래로는 반지초등학교 교정이 내려다 보이고 도로 건너 송탄고등학교 버스정류장도 통과하니 갈림삼거리 도로 이정표가 보이는데 좌측 원곡과 송탄IC 방향의 2차선 포장도로 방향으로 등로는 이어지고 있다.

 

 

도로 건너 오대감더덕오리 식당 입간판이 보이는 갈림삼거리에서 직진의 오산과 천안가는 방향의 4차선 포장도로를 버리고 좌측 원곡과 송탄IC 방향의 2차선 포장도로를 따르니 도로 좌측으로 장안동 도로 표지석도 보인다.

잠시 후 커다란 은혜의진리교회 건물을 바라보며 걸어 진행을 하니 2차선 포장도로 우측으로 게으쭈루와 정소반쭈꾸미 및 두부마을 식당 입간판들이 보이고 그 우측 방향으로 2차선 포장도로가 분기된다.

직진의 2차선 포장도로를 버리고 우측의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맥 잇기 산행을 어렵게 이어가는 시간이다.

 

 

잠시 2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 내려가니 도로 좌측 안으로 속초코다리조림 식당 입간판도 올려다 보이고 잠시 후 눈 앞으로 도로를 건널 수 있는 지하통로가 나타나는데 그 지하통로 앞에는 직진의 석정마을 표시와 우측으로 송탄출장소 도로 표지판도 올려다 보인다.

그 갈림삼거리에서 좌측 석정마을 방향으로 걸어 내려가 지하통로를 건너니 도로 맞은편에 돌우물(석정)이라는 커다란 표지석이 보이는 곳 우측으로 나 있는 1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 올라 본다.

돌우물(석정)은 이충동에 있는데 이충동은 경기도 평택시에 있는 법정동으로서 행정동인 중앙동 관할이며 평택시의 중동부에 위치하고 주위에 장안동, 장당동, 서정동 및 독곡동과 접한다.    

1914년 경기도 진위군 송장면의 이충동, 신리, 대동령리, 석정리가 합쳐서 진위군 송탄면 이충리가 되었으며 1963년 진위군 송탄읍 이충리, 1981년 송탄시 이충동이 되었다가 1995년 송탄시와 평택군이 평택시로 통합되어 평택시 중앙동 관할의 이충동이 되었다.  

평택시와의 통합 이전 송탄지역 마을이며 서쪽 서정동과의 사이에 경부선과 1번국도가 병행하고, 동쪽 장안동과의 사이에 317번지방도로가 지나간다.

은혜여중학교, 은혜여자종합고등학교, 이충문화체육센터 등이 있다.

 

 

1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도로 우측으로 방금 전 지하통로를 통해 통과했던 도로는 302번 4차선 포장도로로서 지나 온 방향으로는 원곡과 송탄IC 로 갈 수 있는 도로 표지판과 좌측으로 이충레포츠공원 및 장안동으로 빠지는 도로 표지판이 보인다.

잠시 후 도로는 좌측으로 크게 꺽여 올라가는데 도로 좌측으로는 린나이보일러 입간판과 건물이 보인다.

그 린나이보일러 건물을 좌측에 두고 우측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다시 갈림삼거리가 나타나는데 그 갈림삼거리를 지나자마자 좌측으로 멋진 민가 한채가 서 있다.

 

 

그 민가를 좌측에 두고 직진의 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포장도로가 비포장 임도로 바뀌고 곧이어 안부 갈림삼거리를 지나는데 임도 우측으로는 장당동이 내려다 보인다.

장당동은 경기도 평택시에 있는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중앙동 관할로서 평택시의 중동부에 위치하며 주위에 가재동, 이충동, 서정동 및 고덕면 여염리와 접한다.

1914년 경기도 양성군 소고니면의 광천리와 장당리가 합쳐서 진위군 송탄면 장당리가 되었으며 1963년 진위군 송탄읍 장당리, 1981년 송탄시 장당동이 되었다가 1995년 송탄시와 평택군이 평택시에 병합됨에 따라 평택시 중앙동 관할의 장당동이 되었다.

송탄시와 평택시가 통합하기 이전의 송탄지역 마을이며 서쪽 고덕면 율포리와의 사이에 경부선과 1번국도가 함께 지나가고 북쪽 서정동에 경부선의 서정리역이 있다.

광동제약, 대성중앙병원과 장당중학교가 있고, 자연마을로는 원장당이 있다.

안부 삼거리를 지나 계속 비포장 임도를 타고 빠르게 걸어가니 임도 좌측으로는 석정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그렇게 한동안 걸어가니 등로는 낡은 민가 한가운데로 나 있는데 사람이 살고 잇는 듯 보이는데 오늘은 사람이 없어 빈집인 듯 보이지만 그 한가운데로 갈 수가 없어 우측 밭 경작지 방향으로 우회하며 그 민가를 통과해 본다.

 

 

우측 밭 경작지를 통해 허름한 민가를 우회 통과하니 등로는 그 민가 뒷쪽의 절개지에 벌목 후 키 작은 소나무들이 식재되어 있는 능선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능선을 타고 소나무가 다치지 않토록 조심하며 걸어 오르니 등로는 점점 가파라지기 시작하고 어렵게 그 정상에 도착을 해 뒤돌아 보니 저 멀리 부락산에서부터 이곳으로 이어지는 도심의 쌍령지맥 마루금이 제법 그럴듯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개발로 인해 사라지는 비산비야의 마루금을 타고 걸어 진행하는 시간이다 보니 더욱 가슴이 애려오는데 그 사라지는 마루금이라도 오랫동안 보존되어 그 맥을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래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한동안 지나온 방향의 비산비야로 이뤄진 마루금을 살펴보고 다시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타고 걸어 오르니 우측에서 올라오는 뚜렷한 등로가 보이고 그 등로를 따라 좌측으로 걸어 올라 본다.

넓은 뚜렷한 등로를 타고 걸어 오르니 벤취쉼터 2개가 설치되어 있는 89.5봉에 도착을 해 주위를 살펴보니 그 벤취쉼터 2개 좌측 낙엽속에 ㅍ ㅏㄴ독이 불가능해 보이는 낡은 삼각점 하나가 박혀 있어 어렵게 사진에 담아 본다.'

 

 

삼각점과 정상부를 사진에 담고 다시 그 정상부를 걸어 내려가니 갈림사거리 안부가 나타나는데 동네 주민이 강아지 한마리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듯 보인다.

인사를 나누고 이 산객은 직진의 능선으로 오르고 그 주민은 좌측의 뚜렷한 임도를 따라 걸어가는데 그 주인을 따르던 강아지가 이 산객을 따르며 내려가지 않아 잠시 애를 먹으며 돌려 보낸다.

잠시 능선으로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녹슨 철조망과 콘크리트 말뚝들이 보이고 작은 당집 같은 콘크리트 건물이 나타난다.

그곳을 지나 66 무명봉에 도착을 하고 계속 이어지는 낙엽 등로를 따라 걸어 내려가니 잡목들의 저항이 심해 등로 우측 바로 아래로 보이는 넓은 비포장 임도로 내려가 그 비포장 임도를 따라 진행하기로 한다.

 

 

잡목들의 저항을 피해 우측 비포장 임도로 내려가 좌측으로 걸어가니 임도 우측으로 논 경작지 넘어 저 멀리 아파트 단지들이 눈에 들어 온다.

잠시 후 과수원도 지나고 그렇게 한동안 걸어 내려가니 개인소유라는 경고문이 서 있고 포도 주차장이라는 안내판도 서 있는 갈림사거리에 도착을 한다.

비포장 임도 좌측으로 철조망이 쳐진 비포장 임도를 타고 계속 걸어가 둔덕을 넘어가니 임도 좌측의 철조망은 사라지는 대신 우측으로 녹색 철망이 보인다.

그곳에서 진행 방향을 살펴보니 거대한 공장 건설 현장이 보이기 시작하고 살펴보니 삼성 반도체 고덕지구로서 쌍령지맥의 마루금은 그 건물들로 인해 완전히 사라져 버린 듯 보인다.

 

 

다시 비포장 임도는 1차선 포장도로로 변하고 도로 좌측으로는 민가들을 그리고 우측으로는 잡풀지대 지나 거대한 아파트 촌들을 살펴보며 진행을 하니 도로 우측으로 늘사랑교회가 보인다.

그 교회 건물과 주차장을 지나니 1번 6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광동제약사거리에 도착을 해 기다렸다 횡단보도를 통해 그 1번 포장도로를 건넌다.

 

 

도로를 건너 도로 좌측에 서정카센터를 두고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장당마을 표지석이 반겨준다.

그 장당마을 표지석을 지나 조금 더 걸어 진행을 하니 눈 앞에 거대한 삼성 반도체 공장 건설 현장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곧이어 이동통신탑 지나자마자 장당교가 보이는데 그 장당교는 아래에 서울지하철1호선이 지나는 철로가 있는 곳이다.

1974년 8월에 개통된 한국 최초의 지하철 및 광역철도 노선으로 노선색은 남색이고 지하구간은 서울메트로이고 지상구간은 코레일이 운영하며 통행방식은 좌측통행이다.

인천/신창부터 소요산까지 전동차가 다니는 곳을 전부 통틀어서 1호선이라고 한다. (지상구간은 국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상구간이 경부선, 경인선, 경원선이라는 별도의 이름을 가진것과 달리 지하구간은 정식으로 따로 지어진 것이 없으나 개통 당시에 서울시에서 비공식적으로 종로선이라는 별도의 이름을 사용했으며 지금도 철도 동호인들 중에 지하구간을 "종로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눈 앞에 다가온 서울 지하철1호선 철로 위에 건설된 장당교를 건너니 요즈음 전 세계적으로 가장 뜨거운 삼성 반도체 공장 건설 현장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 산객이 가지고 있는 산행지도가 완전히 변해있어 더 이상 그 기능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지형이 변해 버렸다.

이 근처를 지나는 학생들과 행인들 그리고 작업을 하는 공사 현장 사람들에게 좌우측 쪽 어느쪽이 더 우회하는데 가까운 거리인지 확인을 해 보지만 그 누구도 제대로 된 답을 해 주질 못한다.

직감적으로 좌측으로 조금 진행하다 우측으로 돌아 걸어 진행하며 참으로 어렵고도 힘든 삼성 반도체 공장 현장을 돌아 진행하는 시간이다.

도로 표지판에는 좌측으로 고덕산업단지 방향으로 진행하다 우측의 고덕국제신도시 방향으로 걸어 진행을 하며 우회를 한다.

 

 

우측으로 돌아 한동안 걸어 완만하게 내려가니 도로 좌측으로 삼성 반도체 공사장 현장으로 이어지는 좁은 통로가 보이는데 살펴보니 대부분 공사 현장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출입문처럼 보인다.

그곳을 통해 이 산객도 들어가니 제지하는 사람들이 없어 한동안 그 삼성 반도체 공장 현장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통해 사라진 쌍령지맥 마루금을 우회해 보는 시간이다.

이렇게라도 걸어가야 하는지 의구심도 들지만 그렇기에 더욱 세심하게 확인하며 그 남아 있는 산줄기를 확인하는 일이야말로 이 산객같은 산줄기 종주를 하는 사람들의 몫이 아닐까 하는 사명감도 가지는 시간이었다.

 

 

엄청나게 큰 공장건물이 하나 두개가 아닌 집단으로 건설중인 삼성 반도체 공장 사이를 통해 걸어가니 다시 섹션이 다른 철조망이 가로막고 옆으로 나 있는 쪽문을 통해 그 철조망을 통과하니 저 멀리 공사 현장의 휴게소와 식당 건물들도 보인다.

그렇게 한동안 더 걸어가니 바로 눈 앞에 경비초소가 보이고 그 뒷쪽으로 45번 왕복 8차선 삼성로가 보이는데 우측으로는 고덕국제신도시로 가는 방향이고 좌측으로는 안중과 안성으로 가는 방향 표시가 되어 있다.

그곳 경비초소를 지나는데 젊은 경비가 나와 삼성로를 차량 전용이라 사람이 걸어 갈 수 없다며 완강하게 막아서는데 지나 온 방향으로 걸어 되덜아 가라는 말에 울화통이 터져 한소리 하니 더 이상 제지를 하지 않아 그 삼성로를 타고 좌측 안중과 안성 방향으로 길게 걸어 이동을 해 본다.

 

 

그 삼성로 우측으로도 거대한 반도체 공장들이 건설중인데 과연 몇동의 거대한 공장 건물들이 세워지고 있는지 기늠조차 하기 힘든 거대한 삼성 왕국이었다.

한동안 그 삼성로를 타고 걸어가니 드디어 삼성 반도체 공장 건설 현장이 끝나가는 지점 가까이 도착을 하고 도로 좌측으로는 여염근린공원이 보인다.

그 근린공원을 지나 조금 더 이어지는 공사현장을 지나니 드디어 고덕산업단지 방향의 도로표지판이 걸려 있는 갈림사거리를 만나 그 거대한 삼성 왕국의 공사 현장을 벗어나는 시간이다.

도로 좌측으로는 한전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여전히 삼성 반도체 공장 건설 현장이 보이지만 이제 그 삼성 반도체 단지도 끝이나고 평택제천간 고속도로가 지나는 평택터널 방향으로 완만하게 걸어 올라가 본다.

 

 

평택진천간 고속도로 터널로 오르기 직전 좌측의 잔디밭에서 스틱을 접고 도로 좌측의 한전 공장을 살펴본 후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드디어 고속도로가 지나는 평택터널 위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은 차량들이 뒤엉켜 무법 천지를 이루고 있다.

조심하며 그 도로를 건너 진행 방향을 살펴보니 저 멀리 JS 프라자 건물이 보이고 그 좌측으로 지제교차로 갈림사거리 도로 표지판도 보인다.

이제 여염동에서 지제동으로 넘어가는 경계를 넘어가니 JS 프라자 건물로 가기 직전 우측으로 1차선 포장도로가 보이고 그 좌측 옆으로는 방축2리 마을입구인 원방축이라는 입간판이 서 있다.

 

 

원방축은 방축리의 자연마을 중 한곳으로 가장 먼저 생긴 마을 이라는 데서 유래한 방축 2리의 마을이며 방축리는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에 있는 리로서 향교저수지가 있는 평야지대의 마을로서 마을 앞에 방죽이 있으므로 방죽안 또는 방축이라 한데서 방축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자연마을로는 효학동, 새악들, 원방축, 방축안, 소시동, 활딱지 등이 있는데 효학동은 방축 서쪽에 있는 마을로 색돌이라고도 부른다.

원방축은 방축리의 원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그 1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 들어가니 갈림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좌측 도로를 버리고 우측의 한신뷔페 건물이 있는 곳으로 나 있는 도로를 타고 걸어 진행을 이어가 본다.

 

 

한식뷔페 건물을 우측에 두고 1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 들어가니 눈 앞에 태영금속이라는 거대한 공장 건물이 나타난다.

그 태영금속 건물 좌측 위로 보이는 송전탑을 바라보며 건물 뒷쪽으로 접근해 보지만 절개지에 잡목과 잡풀들이 자라면서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등로가 되어 있어 그쪽 송전탑 있는 곳으로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우측으로 돌아 건물을 좌측에 두고 진행을 해 본다.

좌측으로 돌아가니 태영금속 가장자리에 녹색 철망이 쳐져 있고 그 철망을 따라 오르니 짧은 절개지를 지나 오르도록 되어 있다.

그곳으로 오르니 태영금속 사람들이 나와 이상한 듯 바라보고 있기에 사정을 말해주고 등산하는 사람이라고 하니 그 전에도 몇 사람이 그렇게 진행을 했는지 이해가 된다며 들어가 버린다.

그 녹색 철망을 따라 능선 방향으로 오르니 정상에는 다시 지독한 잡목과 잡풀들이 자라면서 진행에 상당한 어려움을 주고 있다.

 

 

어렵게 좁게 나 있는 잡목 능선을 따라 걸어가니 등로 우측 아래로는 평택진천간 고속도로가 지나고 그 고속도로 넘어 저 멀리 드넓은 삼성 반도체 공장 건설 현장과 수많은 현장 사람들과 그곳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차량들이 빼곡하게 들어 찬 주차장이 보인다.
오늘 이 산객은 어찌하여 저 거대한 삼성 반도체 왕국을 넘어 진행을 해 왔지만 후답자들의 산행후기에는 또 어떻게 묘사가 될지 궁금하면서도 걱정이 앞서는 시간이기도 하다.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는 필요한 공사 현장이지만 산줄기 종주를 즐기는 사람 입장에서는 아쉽고 안타까운 현장이 아닐 수 없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조금 더 걸어 진행을 하다 잡목과 잡풀들로 인해 진행하지 못한 태영금속 옆에 솟아 잇는 송전탑과 태영금속 건물을 마지막으로 살펴보고 그 좁은 잡목 능선을 따라 걸어 진행을 하니 잠시 후 등로는 생각보다 뚜렷하게 나 있다.

그렇게 한동안 걸어 진행을 하니 잘 관리되고 있는 경주이공 묘지를 지나고 또 다른 무명묘지 한기를 통과해 칡넝쿨과 잡목이 지독한 53.1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어렵게 그 정상을 탈출해 본다.

 

 

지독한 잡목과 잡풀들 그리고 잘려진 나뭇가지들이 널부러져 있는 53.1봉을 지나 걸어가니 2기의 묘지를 지나 미니 골프 연습장으로 등로는 이어지고 있다.

날씨가 추워지며 그 미니 골프연습장 가장자리를 타고 걸어가니 3번 홀 41야드라는 안내판이 보이고 곧이어 9번 송전탑을 지난다.

그 송전탑 옆에는 미니 골프연습장을 관리하는 가건물들도 보이는데 겨울철이라 사람들이 사용을 하지 않는지 비어 있는 집들처럼 보인다.

 

 

그 미니골프 연습장을 지나 송전탑 앞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완만하게 내려가니 도로 좌측으로 인도어 골프연습장이 나타나고 그곳에서는 한사람이 골프 연습을 열심히 하다 이 산객을 보고는 놀랍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 인도어 골프 연습장을 지나 계속 내려가니 다시 1차선 포장도로와 만나는 갈림삼거리가 나타나는데 그곳에서 도로 좌측의 방금 전 지나 온 이스트힐 퍼브릭골프 연습장 건물을 두고 1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좌측으로 걸어가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민가와 공장 건물들이 도로 옆으로 보이고 잠시 후 거대한 과수언 단지를 지나 계속 그 1차선 포장도로를 따르니 또 다시 낡은 민가들 사이를 지나 평택중부교회 입간판이 걸려 있는 갈림사거리에 도착을 해 도로 건너로 보이는 민가 사이로 나 있는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 들어 간다.

방축리는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에 있는 리로서 향교저수지가 있는 평야지대의 마을로서 마을 앞에 방죽이 있으므로 방죽안 또는 방축이라 한데서 방축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자연마을로는 효학동, 새악들, 원방축, 방축안, 소시동, 활딱지 등이 있는데 효학동은 방축 서쪽에 있는 마을로 색돌이라고도 부른다.

원방축은 방축리의 원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게속 이어지는 1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마을로 들어가니 민가들과 고덕부동산이 나타나고 그 앞에는 갈림삼거리가 나타나는데 그곳은 지금 상수도 공사를 하는지 땅을 파헤쳐 공사를 하고 있다.

조심하며 그 공사현장 갈림삼거리에서 좌측 도로를 버리고 우측 도로를 타고 걸어 오르니 도로 우측으로 커다란 느티나무 한그루와 묘지지대들이 나타난다.

잠시 후 묘지지대를 지나 우측 위로 보이는 밭 경작지로 올라 걸어 진행을 하니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고 곧이어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뚜렷한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한동안 더 진행을 하니 지도상 38.3 삼각점봉이 있는 곳에 도착을 해 삼각점을 살펴보지만 그 삼각점은 좌측 아래로 도로가 개설되면서 망실됐는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그곳에서 잠시 지나 온 방향의 도로와 마을들이 내려다 보인다.

 

 

분실된 삼각점은 찾지 못하고 선답자의 띠지만 확인한 후 다시 그 소나무 등로를 벗어나니 등로 우측으로 사천사라는 절이 보인다.

그 사천사 마당을 통해 미로 같은 쌍령지맥 등로를 찾아 참으로 어렵게 진행을 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서천사는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 방축리 103-1번지 장안산에 있는 한국불교해동종 사찰로서 따스한 햇살이 드넓은 평택 평야를 뒤덮을 때 장안산 아래 골짜기에서 시원한 바다 바람이 불어 온다.

얼마 전 까지만해도 방축리를 보호하는 성황당이 있었으며 사명대사의 승병 주둔지로 평택의 호국사찰로 알려진 서천사가 위용을 뽐냈던 곳이다.
방축리는 일제강점기 때 까지만 해도 평택항을 내려 보던 어촌 마을로서 논 방죽을 만들어 농사를 짓던 곳이다.

또 이곳에는 나옹대사가 중건하고 사명대사의 승병 주둔지로 알려진 유서 깊은 호국사찰 서천사가 500여년의 법맥을 이어 오면 자리한 곳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앞으로 펼쳐진 도로와 뒤로 뚫린 고속도로로 그 옛날의 전경을 찾아볼 수 없다.

현재 서천사는 논방죽을 메운 들판을 앞으로 현지인들의 무관심 속에 폐허가 된 성황당을 뒤로 여법한 가람을 유지하고 있다.

수십 년 전 논 방죽을 개흙으로 메운 모습이 활이 휜 모습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활딱지 언덕 위에 서천사가 있으며 아이러니하게 서천사가 자리한 방축리 가람 역시 그 모습을 흡사하게 빼닮아 있다.

평택의 호국사찰이자 미륵도량의 보금자리인 법당에는 승병을 보호하던 하아얀 미륵이 백불이 되어 500여년 전 모습 그대로 국토를 수호하고 있다.

그 사천사 앞 도로를 따라 걸어 내려가니 또 다른 1차선 포장도로와 만나고 그 도로를 타고 좌측으로 방향을 바꿔 걸어 내려가 본다.

 

 

사천사 앞 1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 내려가니 갈림사거리가 나타나는데 그 사거리 앞에는 인공수로가 개설되어 있어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그 인공수로 양쪽으로는 녹색 철망이 설치되어 있고 거대란 공장 건물인지 아니면 창고같은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갈림사거리를 지나 직진의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가니 도로 양쪽으로는 논 경작지들이 펼쳐져 있다.

한동안 그렇게 논 경작지 사이로 나 있는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 진행을 하니 38번 4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고덕교차로 갈림사거리에 도착을 한다.

 

 

오늘 산행 완료 후 다시 이곳 38번 4차선 포장도로로 나와 버스를 타고 평택역으로 이동을 해야 되기 때문에 잘 확인한 후 도로를 건너 그 38번 도로를 타고 좌측으로 걸어 진행을 한다.

잠시 더 고독교차로 방향으로 걸어가다 보니 도로 우측으로 세븐일레븐 편의점이 보여 잠시 들어가 마시고 싶은 음료수 2병을 사서 단숨에 마시고 나니 조금은 살 것 같다는 느낌이다.

잠시 후 고덕교차로 직전 지하통로 앞에서 우측으로 나 있는 1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 좌측으로 크게 휘돌아 걸어 본다.

 

 

잠시 더 걸어가니 도로 우측으로는 논 경작지가 보이고 좌측으로는 고덕교차로 회전 차로가 지나는데 잠시 후 그 회전 차로 아래로는 굴다리도 보인다.

다시 만나는 갈림삼거리에서 좌측 도로를 버리고 우측의 논 경작지 지나 KTX 철로가 보이는 방향으로 걸어가니 동고리 원동고마을이 나타나고 그 마을을 지나 저 멀리 보이는 KTX 철로 방향으로 빠르게 걸어 본다.

 

 

논 경작지 사이로 나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빠르게 걸어가니 KTX 철로를 통과하고 통과하자마자 좌측으로 나 있는 또 다른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 진행을 하는데 그 철로 위를 달리는 KTX 열차가 1에서 2분 사이에 한대씩 달리는데 그 소음이 상상을 초월한다.

지축이 흔들린다는 말을 실감하며 그렇게 한동안 걸어가니 KTX 철로를 보수하기 위한 시설물을 지나 우측으로 기계화경작로 확포장사업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 우측으로 돌아 진행을 이어가 본다.

 

 

계속 걸어 진행을 하니 다시 갈림사거리가 나타나고 그곳에서는 좌측으로 꺽어 걸어 진행을 이어가 본다.

잠시 걸어가니 지방철도가 지나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통과하고 그 도로 우측 논 경작지 넘어로는 농업회사법인인 양지 공장들이 보이는데 부산물을 가공하는지 렌더링 냄새가 심하게 나는 공장이었다.

그 공장 갈림 삼거리를 지나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드디어 안성천 둑방에 도착을 하고 둑방 좌측으로 보이는 안성천을 바라보며 잠시 감회에 젖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안성천 둑방을 타고 우측으로 걸어가니 둑방 좌측으로 내려가는 길이 보여 그곳으로 들어가니 앞으로 작은 개울이 막아 더 이상 전진이 어려워 어렵게 갈대숲을 뚫고 둑방으로 다시 올라 안성천을 바라보며 진위천과 만나는 합수점으로 걸어 가 본다.

안성천은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과 보개면 일대에서 발원하여 평택시를 지나 아산만으로 흘러드는 하천으로 길이는 76 Km에 유역면적은 1722 Km2이고 옛날에는 안성남천이라 하였다.

하구 근처는 우리 나라에서 조차가 가장 큰 곳 중의 하나로 대조시 평균조차 8.5미터에 달한다.

유역의 기반암은 선캄브리아기의 변성암류와 이에 관입한 화강편마암으로 반상결정편마암과 흑운모편마암 및 각섬화강암이 대부분이다.

중요한 지류는 진위천, 입장천, 한천, 청룡천, 오산천, 도대천, 황구지천 등이고 안성천의 본류와 지류가 합류하는 곳 근처에는 넓은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이 하성퇴적평야를 안성평야라 하는데 안성평야는 대부분 충적토로 이루어진 평야로 예로부터 토질이 비옥하여 김포평야와 함께 경기미의 주산지를 이루고 있다.

안성천 하구에 방조제가 들어설 때까지는 하구로부터 16.5 Km 떨어진 평택시 팽성읍 신호리까지 조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타나며 이 방조제를 아산방조제라 하는데 방조제가 완공된 뒤 많은 간석지가 간척되어 농경지가 확대되었다.

안성천 상류인 안성군 금광면과 고삼면에는1956년에 금광저수지가, 1958년에 고삼저수지가 축조되었다. 이 저수지들은 본래 농업용으로 개발되었으나 현재는 낚시터로도 유명하다.

 

 

그렇게 진위천과 안성천이 만나는 합수점으로 가다보니 하늘에 새떼들이 날아가는데 살펴보니 기러기들이 V자 대형을 그리며 겨울 저녁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다.

어릴적 시골에서 자라면서 자주 봤던 풍경으로 왜 저 기러기들은 늘 V자 대형으로 날아가는지 궁금해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오늘 역시 같은 질문을 다시 한번 해 보는 시간이다.

이제는 바람의 저항을 줄여 멀리 날아가기 위한 대형이라 알고 있지만 어릴적엔 그 질문 하나로도 많은 상상력을 동원했던 시절이었다.

저 기러기 떼를 보다 잠시 어릴적 생각을 하다 문득 고향과 이제는 저 멀리 하늘로 소천하신 부모님 생각에 울컥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조금 여유를 가지고 계속 둑방을 따라 걸어가니 드디어 좌측의 안성천과 우측의 진위천이 만나는 합수점에 도착을 해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쌍령지맥 산줄기 종주를 마감하는 시간이다.

진위천은 용인시 이동면 송전저수지에서 흘러나와 아산만으로 유입되는 하천이고 상류 쪽에서 용인시 이동면의 송전천을 비롯한 여러 지천들이 송전저수지로 유입되고 이 송전저수지부터 진위천이 시작한다.

아산만으로 유입되는 도중에 용인시 남사면에서 시작된 원장천과 신갈저수지에서 시작된 오산천 그리고 수원 광교산에서 시작되는 항구지천 등이 합류한다.

진위읍지에는 장호천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장호천은 물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용인의 옛 속현인 처인 동쪽에서 나오고 하나는 양지현에서 나온다고 설명하였다.

처인 쪽에서 나온 물은 원장천을 지칭하며 양지현에서 나온 물은 송전천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1872년 지방지도에 장호천이 읍치 남쪽으로 횡단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고 장호천 하류 쪽 현재의 진위면 하북리와 견산리 일대의 넓은 들을 장호평으로 표기 하였다.

장호천 상류 쪽에 표시된 귀천은 현재의 동천리에서 무봉산 아래 진목리쪽으로 유입되는 소하천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합수점 넘어 저 멀리 두꺼운 구름속에 숨어 있는 햇살을 살펴보며 이틀동안 쉼없이 꾸준하게 걸어 온 마루금을 생각하니 길지도 않지만 짧지도 않은 산줄기 하나를 무탈하게 완주했다는 사실에 스스로에게 감사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잠시 더 그 자리를 지키며 주위 풍경과 사물들을 살펴보고 아쉬운 발길을 옮겨 보지만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안성천과 진위천이 합수되는 지점에서 많은 시간 보내며 쉬었다 진행해온 방향 반대방향으로 걸어가다 둑방 좌측을 바라보니 합수점 우측 위로 보이는 햇살이 진위천에 반사되며 떠나는 이 산객의 가슴속에 강하게 추억되는 시간이다.

언제 다시 이곳에 와 오늘을 추억할 수 있을 기회가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마지막 작별의 시간임을 알고 있기에 아련한 마음이 더욱 커지는 곳이자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한번 강렬한 햇살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며 그 합수점을 떠나 지방 철로가 위로 통과하는 아래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38번 4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곳으로 되돌아 걸어 나간다.

 

 

논 경작지 사이로 나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 나가니 드디어 동고2리 버스정류장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배낭 정리하며 평택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려 본다.

버스정류장이 있는 이곳 동고리는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에 있는 리로서 남쪽의 진위천과 동쪽의 동고천으로 둘러싸여 마을 전체에 충적평야가 넓게 발달하였다.

자연마을로는 정자동, 원동고, 뎅구리 등이 있는데 동고리는 고덕면 동쪽에 위치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지형이 동고리처럼 생겼으므로 동고리 또는 됭구리라고도 하였다.

정자동은 동고리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정자나무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배낭 정리하며 잠시 기다리니 98번 버스가 도착을 하고 그 버스를 타고 평택역으로 쉽게 이동을 해 지하철 1호선으로 이른 시간에 귀가를 하였다.

 

 

 

 

 

 

 

 

이제 이틀간은 동서들과 오랫만에 만나 술파티를 벌이고 성탄절에 또 다른 산친구와 3년 전 진행하다 중단한 수락지맥 마지막 구간을 다녀오면 이번주도 또 이렇게 지나갈 것이다.

다음주에는 일주일간 시간이 나기에 이틀간 여수지맥을 다녀오고 가족들과 잠시 시간을 보내다 보면 또 새로운 2018년이 다가올 것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세월이 더욱 빨라지고 있음을 느끼기에 조금 더 효과적인 시간 괸리가 필요하지는 않을까 생각도 해 보는 시간이다.

모든 산님들도 즐거운 성탄절과 뜻 있는 연말연시 보내시기 바라며 쌍령지맥 산행기를 마무리 한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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