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날자 : 2017년 09월 16일 (토요 당일 산행)
산행날씨 : 맑고 화창한 전형적인 가을 산행 날씨
산행온도 : 영상 13도에서 영상 25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소이산 산행입구-소이산평화마루공원-청성부대 홍보관-소이산(362미터, 전망데크)-교통호-전망데크-벤취쉼터2-1차선 포장도로-평화누리길-
87번 2차선 포장도로-대마사거리-대마리백마고지 표지석과 수준점-백마고지 전적비 갈림삼거리-백마고지 전적비-백마고지위령비-제승각-
백마고지 전적비 갈림삼거리-두루미평화관과 상허이태준문학비-대마리 버스정류장-묘장초등학교-철원성당 대마공소-대마리경로당과 대마1리
버스정류장-궁예조경농원-능선진입-군 삼각점봉-250 벙커봉-252 무명봉-무명안부-282 무명봉-282 교통호봉-307 벙커 굴뚝봉-그물망 안부-
비포장 임도-벙커 굴뚝-358 잡목봉-368 참나무봉-376 잡목임도 조망-무명안부-보개지맥 숙향봉 조망-369 참나무봉-바위-자작나무 군락지-
비포장 임도-331 교통호봉-낙엽송 군락지-비포장 잡목 등로-무명안부-비포장 임도-363 자작나무 군락지 삼각점-비포장 임도 조망(보개지맥)-
359 무명봉-자작나무 임도-비포장 임도 조망-시멘트 포장임도-비포장 임도-좌측 보개지맥과 고대산 조망-국유림숲가꾸기공공근로사업안내판-
낙엽송 잡풀 임도-지독한 잡목과 잡풀등로-콩 밭 경작지 가장자리-비포장 임도-군부대 지뢰제거 작업 등로-윗곰기 지뢰제거작업 안내판-평화
누리길 쉼터-용천교-대광리양어장버스정류장(3번 2차선 포장도로)-산행종료
산행거리 : 산행하기 좋은 날씨에 약간의 산들바람이 불어 와 조금은 빠르게 진행하여 17.92 Km (스마트 폰의 GPX 기준)
산행트랙 : 20170916 왕재지맥 제1구간 소이산-용천교.gpx
산행시간 : 산들바람과 함께 산행하기 좋은 날씨로 조금은 빠르게 진행하여 05시간 33분 (08시 46분에서 14시 19분까지)
교통편 : 대중교통을 이용해 다녀 옴
갈때 - 2호선 지하철로 봉천역에서 강변역까지
강변역에서 동송버스터미널까지 직행버스 이용
동송버스터미널에서 철원콜택시로 소이산 산행입구까지 이동
올때 - 용천교 앞 도로에서 신탄리역과 동두천역을 왕복하는 39-2번 버스로 소요산역까지 이동
소요산역에서 지하철 1호선으로 용산역까지 이동
용산역에서 옆지기의 도움으로 애마로 편안하게 귀가
왕재지맥이란 ???
왕재지맥은 한북정맥 장암산(1063봉)에서 분기하여 임진강과 한탄강 경계를 이루며 휴전선을 넘어 한탄강이 임진강에 합수하는 경기도 연천군 군남면 남계리 도감포에서 감악지맥과 마주보며 끝나는 도상거리 99.4 Km되는 산줄기인데 장암산 분기봉에서 보개지맥이 분기하는 소이산(362봉)까지 55 Km는 이북 또는 군사분계선부근이라 갈 수 없고 나머지 44.4 Km중 야월산(485.9봉)분기점 아래 고개부터 천덕산(476.7봉) 지나 376번도로 부령고개까지는 출입금지구역이라 갈 수 없으니 실제로 갈 수 있는 구간은 39.5 Km 정도된다.
왕재지맥에서 분기하는 지맥은 고성지맥(68.8 Km.이북)과 보개지맥(31.2 Km)이 있다.
현재 남한 산경도에서 전구간을 완주할 수 없는 산줄기는 백두대간 향로봉(1287.4봉) 북쪽 943.2 Km, 한북정맥 수피령 북쪽 73.2 Km, 도솔지맥 돌산령 북쪽 35.3 Km, 향로지맥 전구간(46.1 Km), 왕재지맥 소이산(362봉) 북쪽 55 Km, 적근지맥 분기점에서 1056.1미터봉까지 16 Km가 되겠다.
화창한 가을 날씨에 나즈막한 왕재지맥 마루금을 따라 분단의 아품을 마음속으로 느끼며 걸었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후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단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하늘이 높아지는 천고마비의 계절이 돌아오니 결혼식에 부고는 왜 그리 많이도 있는지 매주마다 한두건의 일들이 생겨 제대로 된 산행 한번 진행하기가 어려운 시기이다.
이번주에도 친척 결혼식이 한 건에 친구 아들 결혼시 그리고 부모님이 걱정되는 나이대이다 보니 친구 어머님 부고까지 겹쳐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 친구 두 건은 봉투로 대신하고 친척 결혼식은 어렵게 옆지기가 대신 다녀오는 것으로 결론을 내니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다음 산행지를 생각해 본다.
다만 일요일인 내일은 오랫만에 강원도 산친구들과 만나 진행하다 중단한 영월지맥 제4구간인 곧은치에서 싸리치까지 함께 진행하는 것으로 예정이 되어 있어 오늘은 짧은 지맥 한 군데 다녀오기로 하고 찾아보니 지난 주 올랐다 짙은 안개로 아쉬움만 남겼던 보개지맥 분기점이 있는 왕재지맥 첫 구간을 가볍게 다녀 오기로 한다.
이곳 왕재지맥 첫 구간은 길게 걷고 싶어도 민통선 지역이다 보니 더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갈마동고개 직전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비포장 임도에서 마무리하고 좌측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 방향으로 내려가야 하기에 접속구간 포함하여 총 산행 시간은 약 17 Km 전후에 산행 시간은 여유있게 걸어도 6시간에서 7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아 대중교통을 이용해 잠시 다녀 오기로 한다.
하지만 2호선 지하철 탑승에서 부터 문제가 일어 나 동서울터미널에서 동송버스터미널로 가는 첫차인 6시 20분 버스를 놓치고 6시 40분 발 버스에 어렵게 올라 동송까지 갈 수 있었는데 동송터미널에 도착을 하니 앞서 출발한 6시 20분 발 버스도 오늘 이 산객이 탑승한 40분 발 버스와 동일한 시간에 동송으로 들어 와 그것으로 위안을 삼아 본다.
자주 이용했던 지하철인데 최근에서야 지하철 2호선 진행 방향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탑승을 해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준비를 하였는데도 동서울버스터미널에서 동송가는 첫 차인 6시 20분 발 버스 시간이 애매해 봉천역보다 조금 일찍 출발하는 첫 지하철이 있는 서울대입구역까지 옆지기가 데려다 줘 고맙게도 그곳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내선으로 들어오는 지하철을 보고 낙성대역 방향의 지하철이 들어 온다는 안내 방송에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느끼지만 핸드폰만 만지작 거리다 지하철 운행 방향을 보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잠시 후 외선으로 들어 오는 지하철을 기다렸다 늘 했던 것처럼 당연하게 탑승을 하였는데 한 정거장 지난 후 낙성대역이 아닌 다시 봉천역으로 되돌아 가는 지하철이기에 당황해 내려서 확인을 해 보니 얼마 전 지하철 2호선 진행 방향이 바뀌었음을 인지하였을 땐 이미 시간이 지나 동송행 첫차는 불가능한 시간이기에 마음 편히 먹고 느긋하게 강변역으로 향하지만 역시나 잠실역에서 다시 잠시 헷깔려 내렸다가 다음에 들어 오는 지하철에 탑승해 참으로 어렵게 동서울버스터미널에 도착을 하고 가까스로 6시 40분 동송발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옆지기가 잠도 못자고 서울대입구역까지 태워다 준 보람도 없이 지하철에서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시간을 까먹고 어렵게 철원으로 이동할 수 있었던 새벽 시간이었다.
새벽에 지하철에서 약간의 해프닝이 있었지만 무탈하게 동송버스터미널에 도착을 해 금학산 전경을 사진에 담고 터미널 앞에 있는 김밥집에서 김밥 한줄 사서 배낭에 넣은 후 철원콜택시를 이용해 오늘은 노동당사가 아닌 소이산 등산로 입구쪽으로 이동해 소이산을 거쳐 왕재지맥 산행을 이어가 보기로 한다.
다행히 말씨는 맑아 평강고원의 황금빛 들판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그 좌측으로 끊어질 듯 이어지는 산줄기 가운데에 보이는 백마고지 전적비 지난 저 멀리 군사분계선 안쪽의 산줄기에 인공 구조물을 한아름 가득 안고 횡톳빛 맨살을 드러 낸 백마고지가 그 옛날 아픈 과거를 보듬은 채 무심하게 또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고 있다.
그 앞쪽으로는 삼자매봉 보이고 그 우측 저 멀리에는 하얀 암봉으로 이뤄진 김일성고지가 있는 고암산도 제법 당당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며 보는 이의 마음을 긴장시키고 있다.
너무나 아름다운 조망과 풍경 속에 감춰진 아픈 상처들이 6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완전히 치유되지 못한 채 분단이란 또 다른 슬품을 안고 살아가는 마음이 참으로 애석하게 다가오는 시간이다.
좌측 끝자락에 김일성고지가 있는 고암산을 지나 우측으로는 드넓은 평강고원이 펼쳐져 있는데 그 평강고원 지난 지점에는 황금빛 들녘 대신 제법 그럴듯한 잡목과 잡풀지대가 존재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민통선과 휴전선이 지나는 이북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우리나라 최전선의 비극이 숨겨져 있는 곳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보는 시간이다.
우측 산줄기가 시작되는 지점쪽으로는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6.25 전쟁중에는 드넓은 평강고원을 사이에 두고 백마고지와 함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아이스크림고지도 눈에 들어 오기 시작한다.
그 뒤로 박무속에 이북의 산줄기들이 보이는데 이렇게 눈에 보이는 산줄기를 두고 오르지 못하는 마음이 더욱 아프고 안타깝게 느껴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평강고원과 그 북쪽으로 펼쳐진 이북지역의 들판과 산들을 살펴본 후 고개를 돌려 남쪽을 살펴보니 지난 주 걸었던 보개지맥 산줄기가 나즈막하게 이어지고 그 산줄기를 가운데 두고 좌측으로는 철원의 진산인 금학산이 우뚝하고 그 우측으로는 엄마품처럼 넉넉하게 펼쳐진 고대산 자락이 아름답게 보인다.
고왔던 옛 추억을 상기시켜키며 다시 또 그보다 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라며 아쉬운 마음에 주위 풍경을 다시 한번 둘러보며 소이산과의 이별을 시작해 본다.
대마사거리를 지나 대마리백마고지 이정석이 있는 삼거리에서 잠시 우측의 백마고지전적비를 다녀오기로 하고 우측 도로를 따라 걸어본다.
잠시 후 황금빛 들녘으로 바뀐 가운데 도로를 따라 백마고지전적비로 들어가다 우측 농로쪽으로 오르니 바로 코 앞으로 백마고지전적비 넘어 백마고지가 빤히 올려다 보이고 그 우측 저 멀리에는 바위산으로 이뤄진 고암산이 김일성고지의 슬픈 역사를 말해주며 우뚝 솟아 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전쟁의 아품이 생각보다 가깝게 상존하는 현장을 바라보며 내 삶과 국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 시간이기도 하였다.
6.25 전쟁 당시 이름없는 395미터의 무명봉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전투를 벌여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그 중 이곳 백마고지 전투에서 희생당한 17535명의 영혼을 진혼하기 위해 건립된 백마고지전적비에 도착을 해 경건한 마음으로 조국과 국가을 위해 목숨바쳐 희생한 고귀한 영혼들에게 잠시 묵념을 해 본다.
젊었을 때 무관심하게 지나쳤던 이런 부분들이 나이가 들면서 조금 더 피부에 와 닿고 마음속으로 부터 진실되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뀌고 있음은 느끼면서 조금 더 일찍 찾아 오지 못한 미안함이 교차되는 시간이다.
먹고 살기 바빴다는 핑계가 아닌 진심으로 조국과 국가을 위해 작은 보탬이라도 될 수 있는 나머지 삶이길 바래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비산비야를 따라 많은 땀을 흘리며 진행하니 드디어 마지막 비포장 임도에 도착을 하지만 이미 그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되었는지 지독한 잡목과 잡풀들이 무상하게 자라며 걸어가는 산객을 자꾸만 붙잡고 늘어진다.
그래도 등로 좌측으로 보이는 고대산 줄기가 너무나 아름답게 빛나고 그 우측 저 멀리에는 진행하다 잠시 중단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 오면 오르려고 준비중인 보개지맥의 산줄기들도 보이기 시작한다.
조금은 낮설고 조금은 두려움도 있는 왕재지맥 등로이지만 이렇게 멋진 조망과 풍경을 만나면서 그동안의 고통과 지뢰에 대한 공포심을 조금은 잊어 버릴 수 있는 시간이 되기도 하였다.
철원 동송버스터미널에 도착을 하니 새벽 6시 20분 동서울버스터미널 발 버스가 거의 동시에 들어 와 들어 보니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도로가 막혀 많이 지체되었기에 40분에 출발한 버스와 거의 동일한 시간에 들어 왔다는 서식이다.
그렇게 마음의 위안을 삼고 김밥 한줄 사서 배낭에 넣은 후 택시를 이용해 지난 주 보개지맥 산행을 하면서 들렸던 소이산 들머리에 도착을 해 산행 준비를 하는데 햇살이 생각보다 뜨겁고 바람 한점 불지 않아 많은 걱정도 해 보지만 그 모든 것이 산행을 하는 동안에는 기우가 되었다.
지난 주 고생을 했던 보개지맥 들머리도 다시 한번 확인을 하고 우측 차량 출입을 금하는 봉이 설치된 시멘트 도로를 타고 새로운 왕재지맥 산행을 시작해 본다.
시멘트 포장도로와 비포장 임도를 번갈아 타며 가파르게 소이산 정상을 향해 오르니 등로 옆에는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이란 안내판이 눈에 들어 와 잠시 더 살펴보고 오른다.
소이산 정상을 다녀 와 내려가며 잠시 저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을 타고 걸어가야 되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살펴 보지만 하산길에 대한 확신은 갖지 못하는 시간이다.
그렇게 한동안 오르니 임도 우측으로 팔각정 전망대를 갈 수 있는 나무계단이 보이고 그곳을 지나자마자 소이산 평화마루공원 안내판이 서 있다.
옛날 미군부대가 상주했을 때 정문으로 사용했던 철문을 지나 오르며 지난 주 잠시 들렸던 추억을 상기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오늘은 다시 이곳 등로로 내려오지 않기에 지하벙커에 있는 창성부대 홍보관에 들려 벽면에 붙어 있는 6.25 전쟁 때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이 지역 고지들에 대한 설명들을 읽어 보고 진행한다.
가장 잘 알려진 철의 삼각지 전투와 백마고지 전투 못지 않게 아이스크림고지 전투도 읽어 보니 상당히 치열하게 교전하며 싸웠던 전쟁터이었다.
그 옆으로는 피의능선 전투와 저격능선 전투에 대한 설명과 함께 지뢰밭이 지킨 평화의 숲에 대한 설명도 함께 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통해 이 저격능선 전투에 관한 자료들을 살펴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들이 보인다.
저격능선전투는 전선이 교착되었던 1952년에 중부전선의 금화(현 김화)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국군 제2사단이 중공군 제15군과 맞서 주저항선 전방의 전초진지를 빼앗기 위한 공방전을 벌인 전투로서 작전기간은 1952년 10월 14일부터 11월 24일까지 42일간이었며 교전지역은 금화 북방 7 Km 지점에 위치한 저격능선이었다.
이 저격능선은 철의 삼각지대 중심부에 자리잡은 오성산에서 우측의 금화지역으로 향하여 뻗어 내린 여러 능선 가운데 남대천 부근에 솟아오른 돌출능선으로 해발고도는 580미터 정도이고 능선의 크기는 1 Km2 정도의 장방형 능선이다.
미 제8군은 공산군의 공세에 대응한 제한된 공격작전을 계획하게 되었고 이 작전의 일환으로 국군 제2사단이 오성산 남쪽의 중공군측 전초인 저격능선을 공격하게 되었는데 미 제9군단의 작전통제 하에 실시된 이 공격에서 국군 제2사단은 첫날 공격에 성공하여 저격능선을 탈취하였으자 오성산 일대에 배치되어 있던 중공군 제15군이 바로 그 날 밤부터 역습을 감행하여 끈질기게 대항함으로써 장장 6주 동안에 걸친 공방전을 치르게 된 것이다.
최초로 공격에 나선 국군 제2사단 제32연대 제3대대는 10월 14일 05:00에 공격을 개시하여 5만 발에 가까운 포병의 화력지원을 받아 가며 목표를 탈취하였으나 이 대대는 중공군 제15군 예하 제45사단 제133연대의 역습을 감당하지 못하여 고지를 점령한 지 다섯 시간 만에 저격능선을 빼앗기고 물러서게 되었다.
다음날 두 번째 공격의 임무를 띤 국군 제17연대 제2대대는 주간공격을 감행하여 목표를 탈취한 후 이 병력을 증강하고 밀집방어를 시도하였다가 이 대대 역시 중공군의 야간 역습에 밀려 다시 철수하게 되었다.
이렇게 전개된 접전이 하루도 빠짐없이 연속되어 10월 25일까지 거의 같은 양상의 공방전이 반복되고 있었고 이때 국군 제2사단은 미 제9군단의 작전지시에 따라 10월 25일부로 삼각고지의 미군 작전지역을 추가로 인수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의 반격이 끈질기게 이어져 11월 11일부터 17일까지 1주일 동안에 세 차례나 A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이 또다시 되풀이되다가 18일을 고비로 하여 이 고지를 국군이 완전히 확보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중공군의 공격 빈도가 점차 줄어들더니 11월 24일을 기하여 이들이 공격을 중지하고 방어태세를 취함으로써 저격능선전투를 종결짓게 되었다.
중공군은 빼앗긴 고지를 찾으려고 계속 공격해왔으나 한국군은 이 능선의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끝까지 지켜냈으며 2개 연대의 병력을 잃은 중공군은 오성산 북쪽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도 1개 연대 병력의 사상자를 내어 이 전투는 백마고지전투와 함께 6·25전쟁사상 2대격전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하여 금화에서 금성간의 도로망확보와 군사분계선 설정시 유리한 지형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전투가 끝난 후 중공군측에서는 저격능선전투와 삼각고지 전투를 합하여 상감령전역이라는 명칭으로 격전기록을 남겼고 국군측에서는 저격능선전투와 백마고지 전투를 치른 장소를 가리켜 6·25전쟁의 2대 격전지로 평가하게 되었다.
다시는 이땅에서 이런 참혹한 전쟁이 두번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드디어 소이산 정상부에 다시 올랐는데 지난주와 비교해 날씨는 쾌청하고 안개도 없어 주위 조망과 풍경을 살펴보기에는 최고의 날이었지만 그 넓은 소이산 정상부 나무데크를 점령한 텐트들로 인해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 시간이었다.
정상에서 하룻밤 지내고 일몰까지 보고 하산할 예정이라는 진사님에게 부탁해 어렵게 소이산에서의 아쉬운 사진 한장 남겨보는데 사진 뒤로는 평강고원과 삼자매봉 그리고 백마고지와 김일성고지가 있는 고암산이 빤히 보이는 전형적인 화창한 가을 날씨이다.
고암산(780미터)은 강원도 철원군의 서북부 북면 외학리 산악동에 위치한 산으로 해발고도는 780미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암산은 부의 북쪽 40리에 있고 궁예 때에 진산으로 하였다와 불우조에 적석암은 고암산에 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유래가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지도서에도 고암산은 부 북쪽 40리에 있는데 평강현 현산에서 뻗어와서 백악산의 주맥이 되었고 궁예 때에 진산으로 하였다고 수록되어 있으며 해동지도를 비롯한 고지도에는 부 북쪽 평강과의 경계에 고암산과 적석사가 빠짐없이 묘사되어 있다.
높은 바위산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유래한 지명으로 보이는데 궁예가 901년에 금학산을 진산으로 정하지 않고 고암산 아래 풍천원에 도읍을 정하였기 때문에 18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는 도선국사의 예언이 전해온다.
조선지지자료에는 고암산이 철원군 북면 녹은족리에 위치한 산곡명으로 되어 있으며 산 부근에는 군사훈련장을 설치한 흔적과 군마 사육장으로 전해지는 성모루성이라 불리는 옛 성터가 남아 있다.
지금은 휴전선 북쪽에 위치하며 김일성고지라고도 부른다.
잠시 고개 돌려 북동 방향을 살펴보니 역시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는 평강고원 뒷쪽으로 민통선과 이북의 산들이 보이는데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아 아쉬웠던 시간이다.
그 뒤 저 멀리 이름으로 제법 유명해진 오성산이 보여 잠시 살펴보고 간다.
오성산은 이북의 강원도 김화군 근동면과 근북면(현 근동리와 건천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1062 미터이고 김화 북쪽 5 Km 위치에 태백산군에서 분기된 광주산군의 고봉 중의 하나로 산세가 웅대하고 수려하다.
산은 사방 각 5 Km에 걸쳐 있으며 중앙에 오성산 본봉(1062미터)이 쌍두봉을 이루고 동봉(927미터)와 서봉(1050미터) 및 남봉(781미터) 그리고 북봉(920미터) 등이 둘러싸고 있으며 임진강의 지류인 한탄강이 이곳에서 발원한다.
지척에 두고도 갈 수 없는 분단의 현실을 몸으로 배우며 언제일진 몰라도 꼭 한번 저 오성산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소망해 보기도 한다.
이제부터 소이산을 내려가 진행해야 할 마루금과 그 마루금 뒷쪽으로 펼쳐진 민통선 그리고 이북쪽 산들을 살펴본다.
제일 먼저 백마고지전적비가 있는 나즈막한 산봉이 보이고 그 우측으로 삼자매봉이 연달아 줄지어 늘어서 있고 그 뒤 저 멀리 산길을 따라 정상에 군부대가 위치한 백마고지가 거대한 고암산에 맞서 당당해 보이는 모습도 눈에 들어 온다.
그 백마고지 우측으로는 뾰족한 바위산으로 이뤄진 김일성고지가 있는 고암산이 제법 높은 산세를 자랑하며 솟아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 온다.
이제 눈을 백마고지 좌측으로 돌리니 앞으로 진행해야 할 나즈막한 왕재지맥이 좌측으로 길게 이어지는 풍경이 눈에 들어 오고 그 뒤 저 멀리 이북의 산군들이 눈에 들어 오지만 이름도 불러볼 수 없는 아쉬운 풍경들이다.
집에 돌아 와 살펴보니 지금은 갈 수 없는 고성지맥의 산줄기들이 아닐까 싶은 곳들이에 그저 마음속으로만 담아 보는 아쉬움이다.
평강고원 지나 오성산을 가운데 두고 아쉬워 다시 한번 살펴 본다.
평강고원과 산줄기들이 교차하는 곳에는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격렬한 전투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를 냈던 아이스크림고지도 보인다.
얼마나 많은 포탄과 총알이 떨어져 마치 아이스크림이 녹아지듯 치열하게 싸웠다고 하니 다시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도 해 본다.
아쉬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소이산에서의 이별은 이제 언제 다시 이곳에 오를 수 있을지 기약조차 할 수 없기에 더욱 애잔한 시간이 되었다.
소이산 정상부에서 이제 조망 안내도 좌측으로 이어지는 교통호를 따라 지맥 등로로 하산을 시작한다.
잠시 뚜렷한 교통호를 타고 급하게 내려가니 교통호는 이 산객의 희망과는 다르게 좌측으로 자꾸만 멀어지고 잠시 후 지뢰밭을 일궈 세운 민북마을 대마리와 뿌리라는 시 그리고 DMZ 인근 최전방에 건설된 민북마을이란 안내판이 서 있는 전망데크에 도착을 해 평강고원 뒷편으로 보이는 대마리 마을을 살펴본다.
잠시 후 내려가 만나는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이란 넓은 비포장 임도에서 좌측 방향으로 걸어 내려가니 벤취2개가 있는 쉼터를 지나 금새 1차선 포장도와 만나고 그 포장도로를 타고 우측으로 길게 걸어 진행을 해 본다.
1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잠시 걸어가다 도로 우측을 살펴보니 방금 전 올랐다 내려 온 소이산 전경이 눈에 들어 와 소이산과 그 산상을 배경으로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소이산(362.3미터)은 북한이 1946년 지은 3층짜리 건물인 노동당사 건너편에 위치한 야트막한 산으로 민통선 밖에 있지만 주요한 군사시설이 많아 출입이 통제되어 왔기 때문에 전쟁으로 교란된 읍내 야산이 반세기 동안 스스로 변화해 온 모습이 간직돼 있는 산이기도 하다.
강원도와 한국관광공사 자료에 따르면 철원군 철원읍에 위치한 소이산은 해발 362미터의 낮은 산으로 고도는 높지 않아도 소이산 정상에 서면 백마고지, 철원역, 제2땅굴, 노동당사 등이 한 눈에 들어오며 지난 60여년 간 민간 통행이 금지되었던 군사지역으로 곳곳에 군사시설을 볼 수 있다.
해발고도가 낮기 때문에 정상까지 힘들지 않게 오를 수 있으면서도 정상에서의 전망이 빼어난 곳이며 전쟁이후에 지뢰지대가 설치되고 아이러니하게도 약 60여 년 간의 민간인 출입통제로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생태계와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다.
지뢰밭이 지킨 평화의 숲이라는 타이틀은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며 지뢰지대가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주의표시가 되어있는 곳으로는 절대로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
2012년에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이 조성되었고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은 지뢰꽃길, 생태숲길, 봉수대 오름길로 나뉘어 있으며 정상까지 가려면 봉수대 오름길을 지나야 한다.
각기 다른 지맥 산행을 위해 2번이나 올랐으니 앞으로 또 오를 수 있는 기회나 있을지 모르는 아쉬운 작별이기에 더욱 가슴속 깊이 간직해 보는 모습이다.
황금빛으로 물들어가고 일부는 벼베기가 끝이 난 들판 한가운데로 나 있는 1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도로 양쪽으로는 지뢰매설 경고판들도 보인다.
계속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벼베기를 하는 농부들도 만나고 평화누리길 안내판도 통과하여 다시 T자 갈림삼거리에서 이제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우측으로 걸어가며 도로 우측을 살펴보니 방금 전 올랐다 내려 온 좌측의 소이산 부터 보개지맥의 숙향봉 지나 금학산까지 시원하게 보이고 있다.
숙향봉과 금학산 우측으로는 어머니 품과 같이 넉넉한 고대산 산줄기가 또 다른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하고 있다.
오래 전 쌓았던 고운 추억을 되새겨 보며 오랫만에 환상의 조망과 풍경을 즐겨 보는 시간이다
들판에는 벌써 벼 수확을 끝내고 가축 사료나 퇴비로 이용할 볏짚을 하얀 비닐로 포장한 풍경이 또한 이채롭고 그 뒷쪽에서는 벼 수확이 한창인 전형적인 농촌 풍경도 만날 수 있어 좋았던 시간이었다.
시멘트 포장도로 끝자락을 빠져 나가니 드디어 정상적인 왕재지맥 마루금으로 진행되는 87번 2차선 포장도로와 만나 그 포장도로를 타고 좌측으로 걸어 간다.
잠시 더 걸어가니 사거리 도로 표지판에는 이곳을 대마사거리라 표기를 하였기에 대마리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들이 보인다.
대마리는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에 있는 리로서 고대산 밑의 비교적 넓은 평야가 펼쳐진 농촌이다.
자연마을로 방축말, 석사동, 절넘어 박씨촌이 있는데 방축말은 산명호 아래쪽에 방축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고 석사동은 돌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며 절넘어 박씨촌은 절 넘어서 박씨 집성촌이 형성되어 생긴 이름이다.
오늘 산행의 상당부분도 이곳 대마리를 중심으로 진행될 것이기에 다시 한번 확인을 해 본다.
잠시 후 그곳 대마사거리에 도착을 하니 도로 건너편에 커다란 대마리백마고지라는 표지석이 서 있고 그 한쪽에는 깨진 수준점 안내판과 수준점이 보인다.
수준점은 깨져 이곳의 해발고도를 확인할 수 없어 아쉬웠던 시간이다.
사진 몇장 남기고 다시 그곳 대마사거리를 지나 계속 이어지는 도로를 타고 진행을 한다.
잠시 더 그 87번 2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가니 갈림삼거리가 나타나는데 도로 우측으로는 백마고지전적비까지 500미터 거리라는 표지판도 서 있다.
오늘은 거리도 짧고 시간적인 여유도 있을 것 같아 고민 한번 없이 곧바로 도로 우측으로 나 있는 또 다른 포장도로를 타고 우측 백마고지전적비 방향으로 걸어 가 본다.
잠시 걸어가다 도로 우측의 농로 위에서 진행 방향을 살펴보니 커다란 백마고지 전적비가 보이고 그 뒷쪽으로 실제 백마고지가 존재하며 그 우측 뒷편으로는 김일성고지가 있는 바위산인 고암산도 올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황금빛 들판 넘어 백마고지와 김일성고지가 있는 고암산을 올려다 보고 다시 뜨거워지는 도로를 타고 조금은 빠르게 걸어가니 백마교가 나타나고 그 백마교를 넘어 여유롭게 걸어 진행을 하니 금새 백마형상이 조각되어 있는 넓은 주차장에 도착을 한다.
그 넓은 주차장 한쪽으로는 백마고지전승비와 백마고지 전적비 설명판 및 백마고지 전적지라는 커다란 이정석이 보인다.
백마고지 전투는 한국전쟁(1950년 6월 25일에서 1953년 7월 27일)기간인 1952년 10월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 3 Km 북방에 위치한 무명의 한 작은 고지를 놓고 한국군 보병 제
9사단(사단장 김종오)과 중공 제38군 3개사단이 전력을 기울여 쟁탈전을 벌인 끝에 우리 국군의 승리로
매듭지어진 전투를 말한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0일 동안 해발이 불과 395미터 밖에 되지 않는 고지 하나를 빼앗기
위해 아군과 적군 2만 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전투기간 중 발사한 포탄은 적측 5만5천발과 아군측 22만발이며 12차례의 공방전으로 24회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기도 했다.
혈전사투로 처절하게 변모한
산용이 흡사 백마가 누워있는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백마고지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백마고지 위령비는 백마고지 전투에서 희생된 아군과 중공군 등
17535명(아군 3146명, 중공군 14389명)의 영혼을 진혼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으로 회고의 장과 기념의 장 및 다짐의 장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
처절했던 격전의 현장을 기억하고자 건립되었다.
회고의 장에는 전사자를 추도하는 위령비와 분향소가 기념의 장에는 통일의 염원과 전승을 기념하는 전적비와 함께 당시 백마부대장이었던 김종오장군의 유품을 전시한 기념관도 배치하였다.
다짐의 장에는 전망대와 함께 자유의 종각이 건립되어 현재 국민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잠시 주위 풍경과 백마고지에 관련된 이정석들을 사진에 담고 시멘트 포장도로 양쪽으로 많은 자작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태극기들이 가깝게 촘촘히 세워져 있는 곳을 타고 전적비가 올려다 보이는 곳으로 천천히 오르명서 사진 몇 장 더 남겨 본다.
마치 독립기념관 건물 앞 광장에 세워져 있던 택극기를 연상시키는 많은 태극기의 호위를 받으며 오르는 기분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렇게 태극기의 호위를 받으며 오르니 백마고지위령비가 보이고 그곳으로 가 잠시 목숨을 던져 조국을 지킨 영령들에게 고개숙여 감사한 마음을 전해 본다.
백마고지 전투는 국군 제9사단이 1952년 10월 철원 백마고지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수차례 격퇴한 전투로서 백마고지전투는 휴전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들고 1952년 10월 초 판문점에서 포로회담이 해결되지 않자 중공군의 공세로 시작된 1952년도의 대표적인 고지 쟁탈전이었다.
백마고지(395고지)전투는 회담이 난항을 겪고 있던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철원 북방 백마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한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 제38군의 공격을 받고 거의 열흘 동안 혈전을 수행하였고 결국 적을 물리치고 방어에 성공한 전투이다.
백마고지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은 1952년 10월 6일 시작됐는데 이날 아침부터 사단의 전 지역에 집중적인 공격준비 사격을 퍼 부은 중공군은 북쪽 5 Km 전방에 있는 봉래호의 수문을 폭파해 아군의 후방을 관통하는 역곡천을 범람 시켰고 이에 따라 아군의 증원과 군수지원이 차단된 것으로 판단한 중공군은 집요한 공격을 감행했다.
중공군은 고지 주봉에서 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능선으로 1개 대대를 투입하고 1개 대대를 주봉으로 각각 투입하였으나 국군 제9사단은 이날 밤 적과 3차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적에게 많은 피해를 주면서 격퇴하였다.
그러나 며칠 동안 5차에 걸친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에서 제28과 제30 양 연대는 거의 재편성이 불가피할 정도로 많은 병력 손실을 보았다.
10월 11일 밤 고지는 다시 중공군의 수중으로 넘어갔으나 12일 아침 반격 제30연대가 제29연대를 초월 공격함으로써 이를 재탈환하였으며 다시 적의 반격을 받아 피탈되었다.
이에 제28연대가 다시 밀고 밀리는 육탄전을 10월 15일까지 계속한 끝에 마침내 탈환에 성공하였고 이어 제29연대가 기세를 몰아 395고지 북쪽 낙타능선상의 전초진지를 탈환하게 됨으로써 적을 완전히 격퇴하였다.
결과적으로 국군 제9사단은 10월 6일부터 중공 제38군의 공격을 받아 연 10일 간 12차례의 쟁탈전을 반복하여 7회나 주인이 바뀌는 혈전을 수행한 끝에 백마고지를 확보하였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제38군은 총 9개 연대 중 7개 연대를 투입하였는데 그중 1만여 명이 전사와 부상 또는 포로가 된 것으로 집계되었으며 국군 제9사단도 총 35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 전투로 국군 제9사단은 상승백마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백마고지전투는 1952년 10월 철원평야의 요충지인 395고지에서 벌인 전투로서 지역전투로서는 세계전사 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치열하였다.
이 전투에서 백마부대는 중공군 1만 3000여 명을 격멸하는 전과를 거둠으로써 한국군의 전투능력과 지휘관들의 부대지휘능력을 과시하게 되었고 이러한 전통을 바탕으로 국군 제9사단은 1966년 5월 맹호부대에 이어 파월부대로 선정되었으며 그해 8월 월남으로 이동하여 닌호아와 투이호아 및 캄란지역에서 부여된 작전임무를 수행하였다.
지난주와 오늘 이곳 철원의 최북방 지역을 걸으면서 지금까지 잘 몰랐던 역사에 대한 많은 공부를 다시 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위령비를 살펴보고 조금 더 오르니 백마고지 전투 기념관 전시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관을 지나 백마고지 전적비 앞에 서서 함께 오르던 관광객에게 부탁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북서쪽으로 약 12 Km 지점에 있는 해발 395미터의 고지로서 군사적 관례에 따라 395고지라고도 하는데 6·25전쟁 때 국군과 중공군이 이 고지를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심한 포격으로 산등성이가 허옇게 벗겨져서 하늘에서 내려보면 마치 백마가 쓰러져 누운 듯한 형상을 하였으므로 백마고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1951년 7월 정전회담이 시작되어 정전협정이 체결되는 시점의 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삼기로 정한 뒤 한국군과 유엔군 그리고 북한군과 중공군 양측은 조금이라도 유리한 지역을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백마고지는 중부전선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철의 삼각지대(철원, 김화, 평강)의 하나인 철원평야와 서울을 연결하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당시 김종오 소장이 지휘하는 국군 제9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다.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은 백마고지 일대에 2000여 발의 포탄을 투하하며 공격을 개시하였고 중공군은 제38군 예하의 제112, 113, 114사단의 약 4만 5000명의 병사를 동원하였으며 아군은 제9사단 예하의 제28, 29, 30연대를 비롯하여 경장비 제51연대, 53전차중대, 제1포병단 등의 국군과 제5공군, 제73전차대대, 제49와 제213 및 955 포병대대 등과 미군이 중공군에 맞서 싸웠다.
10월 6일에서 10월 15일까지 열흘간 24차례나 주인이 바뀔 정도로 혈전을 치른 끝에 제9사단이 중공군을 격퇴하고 승리하였던 이 전투에서 아군은 21만 9954발의 포탄을, 중공군은 5만 5000발의 포탄을 발사한 것으로 기록된다.
중공군은 1만여 명이 사상자 또는 포로가 되었고 제38군은 막대한 타격을 입고 후방으로 물러났으며 제9사단도 34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이 전투의 승리로 백마부대로 불리게 되었다.
이 전투의 대승으로 휴전을 앞두고 군사적 요지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유엔군은 정전회담에서 계속 유리한 입장을 지킬 수 있었다.
이 전투를 기념하여 백마고지 정상에 기념관과 전적비 및 호국영령 충혼비가 건립되어 있으며 해마다 10월 16일을 전승 기념일로 삼아 민, 관, 군 합동 위령제를 거행하고 있다.
너무나도 유명해진 백마고지 전투와 백마부대 이야기를 직접 확인하고 읽어 보는 시간은 개인적으로도 참으로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그렇게 백마고지 전적비까지 올라 가 살펴본 후 그 뒤로 나 있는 소로를 따라 조금 더 오르니 제승각 범종이 보인다.
그 범종 앞으로 가 살펴보니 황금 들녘 바로 뒤로 백마고지가 눈 앞으로 다가와 있고 그 우측으로 뾰족한 고암산이 더욱 가깝게 보인다.
조선일보 2004년 월간산 별책시리즈 202호의 박성태저 신산경표 부록 남한산경도에는 지금 우리가 백마고지라고 부르는 산의 고유명칭으로 효성산을 표기하고 있어 그 유명한 백마고지가 벌어진 능선 고지가 효성산임을 알 수 있다.
그 오른쪽으로 멀리 높게 보이는 이북의 바위산은 해발 780미터의 고암산으로 백마고지 전투 종료 후 김일성이 저 산에 올라 가 철원평야를 빼앗지 못하고 남한에 넘겨 준 것을 한탄하며 2박3일을 통곡하고 갔다 해서 속칭 김일성고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만약 효성산 즉 백마고지를 이북에게 빼앗겼더라면 지금의 휴전선은 훨씬 남쪽인 요도의 천덕산에서 야월산과 고대산 및 금학산을 연결하는 지역 이남으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나라 4대 평야 중의 하나로 불리는 철원평야는 고스란히 이북의 적 수중에 들어가거나 비무장지대가 되어 있어 현재 그 유명세를 타고 있는 철원의 오대 쌀밥은 언감생시 구경도 못했을 것이다.
지난 주 다녀간 후 인터넷을 통해 많은 자료를 읽어 보고 확인한 후 다시 찾은 철원과 백마고지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시간이다.
그렇게 잠시나마 백마고지 전적지를 둘러보고 내려가는 시간은 마음이 숙연해지는 시간이자 목숨을 걸고 조국과 국가를 지킨 혼령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의 시간이기도 하였다.
다시 도로를 타고 백마고지 갈림삼거리 방향으로 걸어 내려오니 87번 2차선 포장도로 지나 저 멀리 소이산과 숙향봉 그리고 금학산 라인이 파란 하늘에 떠 있는 하얀 구름과 묘한 조화를 이루며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다시 만난 87번 2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우측으로 조금 더 걸어가니 도로 좌측으로 두루미평화마을체험관과 상허이태준문학비가 서 있어 잠시 둘러보고 가기로 한다.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를 두루미평화마을 또는 오대미마을이라 하는데 두루미평화관은 이 두루미평화마을 입구에 있으며 2003년에 건립된 이 건물은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에 있는 노동당사(등록문화재 제22호)의 건물구조를 본떠 만들었다.
대지면적 약 3300 m2에 건물총면적 약 530 m2의 지상 2층 건물로 정면에서 보면 지상 3층으로 보이지만 3층은 정면 벽체만 설치된 것이다.
마을의 각종 행사와 회의를 여는 시설로 이용되며 농촌테마마을로 지정된 두루미평화마을을 찾는 이들을 위한 숙박시설 및 식당으로도 활용 가능한데 4개의 객실이 갖춰져 있으며 건물에 딸려 있는 부속건물에서도 숙박이 가능하다.
두루미평화관 옥상에 올라가면 대마리가 한눈에 들어오고 한국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백마고지와 백마고지 전적관도 보인다.
2004년 10월에 두루미평화관 앞 광장에 이 지역 출신의 현대소설가인 상허 이태준(1904~?)의 문학비와 흉상을 세우고 해마다 이태준문학제를 개최하고 있다.
두루미평화마을에서는 백마고지 오대쌀의 재배과정과 생산과정을 직접 체험하는 프로그램과 지뢰찾기, 천막, 병영체험프로그램 등이 진행되며 겨울철에는 두루미를 비롯한 겨울 철새 탐조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상허이태준에 관한 자료를 백과사전에서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보인다.
이태준의 호는 상허이고 강원도 철원 출생으로 아버지는 이문교이며 아버지 이문교는 개화파 지식인으로서 함경남도덕원감리서에 근무한 지방관원이었는데 당시 한말의 개혁파의 운동에 가담하였던 듯 수구파에 밀려 블라디보스톡 등지로 망명하다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가정형편으로 인하여 이태준은 어려서부터 어렵게 수학하였다.
1920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당시 그 학교의 교원이었던 이병기의 지도를 받아 고전문학의 교양을 쌓았는데 학교의 불합리한 운영에 불만을 품고 동맹휴학을 주도한 결과 퇴교를 당하였다.
1926년 일본 도쿄에 있는 조오치대학(상지대학) 문과에서 수학하다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1929년에 개벽사 기자로 일하였고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와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33년 친목단체인 구인회를 이효석과 김기림 및 정지용 그리고 유치진 등과 결성하였다.
이어 순수문예지 문장(1939.2∼1941.4.)을 주재하여 문제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역량 있는 신인들을 발굴하여 문단에 크게 기여하였고 단편소설 오몽녀(1925)를 시대일보에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또 아무일도 없소(동광, 1931.7.), 불우선생(삼천리, 1932.4.), 꽃나무는 심어놓고(신동아, 1933.3.), 달밤(중앙, 1933.11.), 손거부(신동아, 1935.11.), 가마귀(조광, 1936.1.), 복덕방(조광, 1937.3.), 패강냉(삼천리문학, 1938.1.), 농군(문장, 1939.7.), 밤길(문장, 1940·5·6·7합병호), 무연(춘추, 1942.6.), 돌다리(국민문학, 1943.1.) 등이 있다.
그리고 해방전후(문학, 1946.8.) 등 일제강점기 민족의 과거와 현실적 고통을 비교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작품을 썼으며 그의 간결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묘사적 문장은 독자의 호응을 크게 받았다.
그가 취택한 인물들은 가난하고 무력하지만 우리의 전통적 삶의식을 잘 드러내며 인간미가 풍기는 것이 특징으로 되어 있다.
초기작품 아무일도 없소에는 신출기자의 취재에 의하여 3·1운동 당시 대동단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망명한 애국지사의 딸이 생계가 어려워 창녀가 되었고 그 사실에 충격을 받은 지사의 아내가 자결한다는 내용이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비극적 사태가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당시대의 세속적인 삶의 궤도는 잘도 돌아간다는 반어적 인식이 제기된다.
이러한 민족의식의 주제는 상당히 많은 편수에 이르고 장편 사상의 월야(1946)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른 한편 소외된 인물들의 현실적 고난과 그 인물의 내면세계의 순수무구함을 드러내어 인간애의 의식을 촉구하는 주옥 같은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수필집 무서록(1944)과 문장론 문장강화(1946) 등도 그의 탁월한 문학적 저서로서 크게 공헌한 책들이며 광복 후 1946년에 월북하였다.
철원이 고향이다 보니 오래전부터 많은 문학인들이 이곳 철원에 상허이태준문학비 하나 세우려고 하였지만 월북했다는 이유로 인해 참으로 우여곡절을 겪은 후 10여년 전 어렵게 이곳 두루미평화관 앞에 문학비 하나 세웠다는 소식도 전하고 있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시간이다.
그렇게 두루미평화관과 상허이태준문학비를 둘러보고 나와 계속 이어지는 2차선 도로를 타고 걸어가니 강원도 철원과 경기도 연천을 이어주는 대마리 마을이 보이고 잠시 후 대마리 버스정류장도 통과한다.
도로 옆에 붉게 익어가는 대추를 살펴보며 조금 더 걸어가니 도로 우측으로 묘장초등학교 건물과 교정이 보인다.
어릴적 이 산객이 다녔던 시골학교도 어린이가 줄면서 이제는 분교를 지나 폐교 수준까지 갔다는 소식에 안타까워 했는데 이곳 묘장초등학교는 잘 유지는 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철원성단 대마공소를 지나 좌측 골목으로 들어가 대마리 경로당 앞을 통과하고 대마1리 버스정류장을 지나니 좌측으로 궁예조경농원이 있는 1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앞에 보이는 나즈막한 산을 보고 걸어 본다.
계속 이어지는 대추나무 밑에 떨어진 대추도 주워 먹으며 천천히 걸어가니 갈림삼거리가 나타나는데 그곳에서 주민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좌측 시멘트 포장도로로 진입하는 것을 잊고 우측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 들어가니 목장 하나가 보이는데 그곳에서 좌측 능선으로 치고 올라 정상 마루금과 만나 우측으로 걸어가니 깨진 군삼각점이 있는 259미터의 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최전방 지역이다 보니 다른 지역보다도 더 많은 교통호가 어지럽게 널려있는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못생긴 소나무봉을 지나 무명안부로 떨어지니 250미터를 가리키는 벙커가 있는 무명 안부이다.
트랙을 보니 우측 능선으로 몇미터 올랐다 그 벙커봉에서 좌측으로 내려와야 하는데 그곳 벙커봉 정상에서 직진을 하면서 알바들도 하는 것으로 트랙에는 표기가 되어 있다.
벙커가 있는 안부를 지나 등로를 타고 조금 걸어가다 등로 우측 앞을 바라보니 대마리의 나즈막한 야산들이 올려다 보인다.
생각보다 뚜렷한 등로를 타고 최전방에 대한 공포심이 조금은 사라질 쯤 252 무명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출발하니 제법 넓은 안부에 도착을 하는데 지도를 살펴보니 아무 표식도 없는 곳으로 좌우를 살펴봐도 사람들이 다닐만한 그런 흔적이 없어 불분명하다.
뚜렷한 무명안부를 지나 오르니 소나무와 교통호가 어지럽게 널려있는 트랙상 282 무명봉에 도착을 하고 잠시 물 한모금 마시고 출발하기로 한다.
약간의 바람이 불며 산행하기에는 나쁘지 않지만 여전히 무더위가 남아 있고 특히나 지난 주 보개지맥 산행을 하면서 부족한 식수로 고생하였기에 조금 더 많은 물을 가지고 와서 그런지 생각보다 많은 땀을 흘리며 물을 마시는 횟수 역시 늘어나는 시간이다.
다시 벙커를 만나고 잠시 특이할 것 없는 등로를 따르니 다시 굴뚝이 보이는데 그 아래쪽을 살펴봐도 벙커는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이런 굴뚝은 벙커 위에 설치하는데 벙커가 보이지 않으니 이상하다는 생각으로 통과한다.
잠시 후 등로 우측으로 파란 천막집이 있고 파란 그물망이 쳐져 있는 안부에 도착을 하는데 그 안부는 이제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듯 잡목과 잡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면서 산행만 방해를 하고 있다.
그곳을 지나 나즈막한 둔덕을 오르니 짧은 낭떨어지 앞에 잡목들의 저항이 거세 좌우로 살펴보니 등로 우측으로 희미한 족적들이 보이고 그곳으로 내려가니 제법 넓은 비포장 임도 위에 도착을 한다.
임도 좌측의 모호동과 우측의 대조동을 이어주는 비포장 임도로서 좌측 모호동 방향으로는 백마고지역쪽으로 갈 수 있는 비포장 임도처럼 보이는 곳이다.
백마고지역은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에 있는 경원선 철도역으로서 대한민국 최북단에 위치한는 철도역이며 2007년에 착공되어 2012년 11월 20일 개장되었다.
역 승강장의 구조는 1면 1선으로 단선으로 이루어진 역이며 역사 앞으로 3번 국도가 지나며 주변에는 농경지가 대부분으로 이용객이 많지 않다.
백마고지역은 현재 경원선의 종착역이자 출발역이지만 백마고지역에서 북쪽으로 철로를 연장하여 철원역과 월정리역이 개설될 예정이며 2017년 11월에 완공을 앞두고 있다.
백마고지역은 한국전쟁 중 철원 백마고지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며 당시 치열했던 공방전을 기념하기 위해 역이름으로 명명했다.
백마고지 전투는 북한군과 중공군 약 1만 명 및 국군과 연합군 약 3500명이 전사하였던 치열한 전투였으며 백마고지역 주변에 백마고지 기념탑이 있고 철원 노동당사도 인근에 있다.
비포장 일원동 임도를 건너 능선으로 오르니 지금까지 보다는 조금 더 많은 잡목과 잡풀들이 등로에 봉기 시작하고 그렇게 잠시 더 걸어 오르니 등로 옆으로 굴뚝이 다시 보이는데 트랙상 320미터이다.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등로를 타고 조금 더 걸어 오르니 잡목들이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358미터의 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잡목봉을 내려가니 벙커가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좌측으로 백마고지역 방향으로 하산할 수 있는 갈림삼거리로 보이는 지점이다.
다시 낙엽 깔린 평이한 등로를 따르니 커다란 참나무가 보이는 368 무명봉에 도착을 하고 다시 자작나무 등로를 따르니 잡목과 잡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난 비포장 임도를 만나는데 임도 우측으로는 황금빛 들판과 철원 최북단의 산들과 이북쪽 산들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조망을 구경한 후 진행하려는데 홀대모 방장님이신 에이원님 띠지가 보여 반가운 마음에 사진 한장 남겨 본다.
덕분에 외롭지 않게 잘 마무리하고 무탈하게 내려 와 감사한 마음을 전해 드리는 시간이다.
방장님 띠지 옆에는 백두사랑산악회 띠지 한장도 보인다.
다시 참나무들이 보이는 평이한 등로를 따라 잠시 걸어가니 등로 좌측 잡목 사이로 조망이 약간 터지고 그곳으로 몇 발자국 내려가 살펴보니 지난 주 많은 땀을 흘리며 올랐던 보개지맥의 숙향봉 헬기장이 시원하게 보인다.
생각지도 못한 조망에 잠시 발걸음 멈추고 몇장의 사진을 더 남기고 출발한다.
숙향봉을 조망한 후 잠시 더 걸어 오르니 참나무 하나가 서 있는 393 무명봉에 도착을 하고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출발하려는데 지도를 살펴보니 이곳이 바로 강원도와 경기도의 도경계 지점으로 이제는 도 경계선을 따라 진행을 하게 되는데 잠시 후 그동안 보이지 않던 바위 하나가 눈에 들어 온다.
바위를 지나 계속 걸어가니 자작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등로는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로 바뀌고 있다.
잠시 더 걸어가니 넓은 임도같은 등로에는 많은 소나무들로 수종이 바뀌는데 잠시 시원한 바람이 불어 와 그곳에서 배낭 내려 준비한 간식과 과일로 허기를 달래고 출발한다.
생각보다 바람은 조금씩 불어 오지만 습도가 높아서 그런지 많은 땀으로 고생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한동안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소나무 등로에서 쉬면서 젖어있는 등산복도 물기를 짜 입고 출발하니 조금은 살 것 같다는 느낌이다.
등로는 다시 교통호로 바뀌고 잠시 후 참나무와 교통호가 혼재되어 있는 331 무명봉에 도착을 해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 본다.
정상을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짧은 낙엽송 지대가 나타나고 잠시 후 잡풀이 사람 키보다 더 크게 웃자란 비포장 임도에 내려서는데 진행에 상당한 어려움을 느낀다.
힘겹게 잡풀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그 비포장 임도를 건너 다시 능선으로 오르니 붉은 물통 하나가 나뒹굴고 있다.
다시 자작나무들이 보이는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를 만나는데 등로에는 키가 큰 잡풀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다시 걸어 진행을 하니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소나무 등로가 나타나고 계속 그 등로를 따르니 수종이 소나무에서 활엽수로 바뀌고 있다.
조금은 편안하게 우측의 나즈막한 봉우리를 좌측으로 돌아가는 비포장 임도를 따라 걸어가니 봉우리에서 내려오는 등로와 만나는 곳에서 자작나무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잠시 짧은 자작나무 군락지를 따라 기분 전환도 시켜 보는 시간이다.
계속 이어지는 자작나무 등로를 따르니 등로 우측으로 나즈막한 봉우리가 올려다 보이는데 지도를 보니 그곳에 삼각점 표시가 있어 올라가 보니 자작나무 한가운데에 표식이 사라진 삼각점 하나만 덩그런히 정상을 지키고 있는 334.3봉이다.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방금 전 올랐던 등로로 되돌아 내려가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이제는 등로 좌측으로 자작나무가 우측으로는 잣나무가 보이는 등로를 따르는데 갑자기 아주머니 세분이서 등로 옆에 앉아 쉬고 있어 깜짝 놀라 이야기를 나눠보니 동네 주민들로서 밤과 도토리를 채취하기 위해 올라 왔다는데 소득은 별무 신통이라면서 이 무더위에 높지도 않은 이런 곳을 산행하러 왔다며 조금은 이상하게 생각을 하신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라 반갑게 인사 드리고 다시 출발하니 자작나무 군락지를 지나 잡목과 잡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비포장 임도를 만나 그곳에서 등로 좌측을 살펴보니 보개지맥의 숙향봉과 우측 고대산 라인이 아름답게 조망되고 있다.
비포장 임도를 따르니 다시 제법 굵은 잣나무 군락지가 보이고 잠시 후 비포장 임도를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오르니 커다란 참나무들이 자라는 359 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잠시 칡넝쿨과 싸리나무가 등로를 가로막는 곳을 지나니 멋진 자작나무들이 반겨주는 멋진 등로도 만난다.
자작나무와 잣나무가 보이는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등로 우측 저 멀리 김일성고지가 있는 고암산의 하얀 암봉이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이 보이고 잠시 후 잡목과 잡풀이 무성하게 자란 비포장 임도로 내려선 후 등로 우측을 살펴보니 왕재지맥 상에 잇으면서도 군부대가 점령하여 갈 수 없는 야월산이 바로 코 앞으로 다가 와 있다.
줌으로 당겨 살펴보니 정상에는 군부대가 주둔하는지 건물들도 보인다.
아쉬운 마음에 많은 사진으로 다녀올 수 없는 야월산을 대신해 본다.
또한 야월산에 관한 정보를 찾아 보지만 그 어디에도 제대로 된 정보가 없어 아쉽기만 하다.
야월산(487미터)은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도신리 민통선 북방에 있으며 우수한 산림식생 보존지이며 자연경관이 뛰어나다.
야월산을 살펴보고 뒤돌아 나오면서 칡넝쿨이 우거진 곳으로 살펴보니 저 멀리 이북의 김일성고지가 있는 하얀 암봉으로 이뤄진 고암산이 빤히 보인다.
기대하지 못했던 조망과 풍경에 흐르는 땀방울 닦으며 잠시 흐믓한 미소도 지어 본다.
이제부터 비포장 임도를 타고 진행을 하는데 그 임도에 자라고 있는 잡풀들이 이 산객의 키보다도 더 크게 자라 진행에 상당한 어려움을 느낀다.
그래도 기분 좋게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 좌측 아래에서 개 짓는 소리가 들려 살펴보니 민가 한채가 보이고 그 뒷쪽으로 나즈막한 야산을 넘어 저 멀리 고대산 라인과 그 우측 뒤로 보개지맥의 지장산 라인도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등로 우측으로 보이는 야월산을 살펴보고 계속 이어지는 비포장 임도를 따라 진행하니 임도 좌측으로 잣나무 군락지를 지나 앞으로 나즈막한 봉우리 하나가 올려다 보인다.
그 봉우리를 보며 진행하니 이제 비포장 임도는 시멘트 포장도로로 바뀌면서 방금 전 올려다 봤던 봉우리를 좌측에 두고 우측으로 휘감아 오르도록 되어 있다.
잠시 더 걸어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 오르니 도로 좌측 능선에서 부부인듯한 사람 둘이서 내려와 인사를 나누니 임산물을 채취하러 왔는데 오늘은 소득이 별로 없다면서 이 산객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이다.
다시 인사 나누고 계속 이어지는 시멘트 도로를 따르니 도로는 다시 비포장 임도로 바뀌고 있다.
이제부터는 등로 좌측으로 보개지맥과 고대산 라인이 계속해 따라 오고 있다.
그렇게 한동안 더 걸어 진행하다 등로 좌측을 살펴보니 바로 발 아래 산을 개간해 밭 경작지로 만들어 농작물을 가꾸는 풍경이 눈에 들어 와 담아 보니 그 밭 경작지 넘어 저 멀리 고대산 라인이 더욱 환상적으로 다가 온다.
다시 비포장 임도에 자라는 잡풀들의 키가 커지면서 진행에 어려움을 느끼고 잠시 후 칡넝쿨까지 늘어져 발 아래만 바라보며 걷는 시간이 참으로 길게만 느껴지는 시간이다.
그렇게 한동안 걸어가니 임도 우측으로 녹슨 안내판 2개가 보이는데 살펴보니 국유림 숲가꾸기 공공근로사업 안내판이고 그 좌측으로는 녹슨 원형 철조망이 쳐져 있어 능선으로의 진입을 통제하고 있는데 살펴보니 희미한 발자국들이 보인다.
이제는 이 산객의 키보다 더 커진 잡풀들이 비포장 임도를 완전히 점령한 등로를 타고 어렵게 걸어 내려가니 등로 좌우측으로는 낙엽송들이 자라고 있다.
생각보다 어렵게 그 비포장 임도를 따라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밭 경작지가 보이는 곳에서 비포장 임도는 잡목과 잡풀들 그리고 칡넝쿨로 인해 도저히 진행이 불가능 하기에 좌측 콩이 심어져 있는 밭 가장자리를 따라 조심스럽게 걸어 내려간다.
이제 오늘 산행도 막바지에 접어 들었지만 사실은 이제부터가 더 큰 고민이며 걱정이 되는 시간이다.
잠시 후 부터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용천교까지 걸어 내려가야 되기에 걱정은 되지만 그것은 그때가서 고민할 일이고 우선 이곳 콩밭을 조시하며 내려가는 것이 문제이다.
밭 가장자리를 따라 내려가니 다시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고 그 임도를 타고 계속 걸어 내려가니 임도에는 갑자기 군부대에서 지뢰제거 작업을 하고 있어 출입을 금지한다는 안내판이 서 있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지만 사람들과 차량들이 다져 놓은 비포장 임도를 따라 조심하며 걸어 내려가 본다.
잠시 더 내려가니 임도 우측으로 지뢰 제거 작업을 하다 중단한 작업 현장이 보이고 게속 내려가니 진군공병부대에서 쳐 놓은 천막있는 곳에서 임도 좌측으로 흐르는 게곡물에 얼굴과 손을 닦고 물 몇 모금 마셔보니 물 맛은 최고인 듯 하다.
그렇게 잠시 휴식을 취하고 내려가니 임도 좌측으로 민가가 보이고 사람들도 보이길래 인사를 했더니 별로 반가워하지 않는 듯 한 눈치이다.
잠시 더 내려가니 계속 이어지는 군부대 지뢰제거 작업 현장이 보이고 눈 앞에 보이는 능선 넘어 저 멀리 보개지맥의 지장산 라인이 얼굴만 내밀고 언제 다시 만날 수 있느냐며 물어 온다.
잠시 후 계속 이어지는 경고판을 살펴보니 실제로 지뢰가 매설되었던 지역으로 불법영농과 경작으로 인해 1미터 이상 굴착하게 되면 제거되지 않은 지뢰가 발견될 수 있으니 반드시 신고 후 사용하라는 경고판이었다.
그곳을 지나 민가 몇채를 더 통과 해 내려가니 갈림 삼거리와 만나고 이제부터는 웃곰기골 마을의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한동안 더 걸어 내려가야 한다.
뜨거운 햇살을 받아 많은 땀을 흘리며 시멘트 포장도로를 걸어 내려가는 시간은 참으로 고통의 시간이었다.
한동안 걸어 내려가니 연천 DMZ 불랙초코베리를 재배하는 영농조합법인을 만나고 난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 내려가니 발바닥은 불이 난듯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다시 지루한 웃곰기골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가며 하늘을 보니 하늘은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하고 있다.
웃곰기골은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의 마을로서 성트르골 위에 있던 아랫곰기골 북쪽에 있던 마을로서 한국전쟁 전에는 전주 이씨 20여 호가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곰기골은 큰 곰이 일어나서라는 뜻이나 본래는 신성하고 높으며 으뜸을 뜻하는 옛말이 크다는 뜻으로도 쓰이면서 곰으로 음이 변하여 단순히 크고 긴 골짜기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대광리 버스 정류장도 그리 멀지 않았기에 힘을 내 걸어 보는 시간이다.
그렇게 발바닥에 불이 난듯 빠르게 걸어 내려가니 드디어 용천교 앞 우측으로 평화누리길 쉼터가 나타나고 그곳 다리 밑으로 들어가 찌든 땀방울을 닦아 내고 옷을 갈아 입으니 조금은 살 것 같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호사다마라 했던가
그곳 계곡에서 올라 오니 눈이 흐릿해 살펴보니 안경을 두고 올라 와 다시 내려가 찾아 보지만 그 어디에서도 찾지 못해 아쉽게 눈 없이 귀가할 수 밖에 없었다.
옆지기에게 전화 해 안경점에 부탁을 해 어렵게 귀가 후 새로운 안경을 장만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옷을 갈아 입고 조금 더 걸어 용천교 위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내려다 보는 차탄천이 새롭게 다가온다.
차탄천은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을 흐르는 하천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연천 남쪽 5리에 있는데 물의 근원은 강원도 철원부 서쪽 고을파이고 남으로 흘러 양주 유탄으로 유입된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여지도서에도 이와 동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광여도, 여지도에는 연천 남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으로 표기되었으며 팔도군현지도, 조선팔도지도에서는 한탄강과 합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곡리에서 한탄강과 합류하는데 순 우리말로 수레 여울이라고 불린다.
드디어 3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대광리에 도착을 해 잠시 나무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며 버스를 기다리는데 생각보다 일찍 버스가 와 탑승하며 기사분에게 물어 보니 소요산역이나 동두천역에서 서울가는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할 수 잇다는 소식에 안도의 긴 한숨을 내쉬어 본다.
대광리는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에 있는 리로서 고대산 서사면에 근접하여 위치하고 있는 마을인데 본래 철원도호부의 외서면 지역으로 1895년 외서면이 신서면으로 개칭되면서 신서면으로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기존의 웅기리와 신탄리를 병합하여 대광리라 하였으며 1963년 강원도 철원군에서 연천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자연마을로는 신탄리(새숯막), 아랫곰기골(하웅기동), 윗곰기골(상웅기동), 윗소목개 등이 있는데 신탄리는 신탄리역 주위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이름 지어졌으며 현재 대광 2리 지역에 해당하고 경원선의 마지막 역으로 철도가 중단되는 곳이다.
예전부터 고대산의 풍부한 임산 자원을 목재, 숯으로 가공하여 생계를 유지했던 마을이다.
대광리에는 신탄리역에서 매바위 앞을 지나 철원군 철원읍 율리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갈고개가 위치하는데 고대산 북쪽 산줄기에 있는 이 고개를 기준으로 하여 마을이 나뉘어 진다고 해서 갈고개라 불린다.
웃곰기골은 크고 긴 골짜기라는 뜻을 갖는 성트르골 위에 있던 마을인 아랫곰기골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오래 전 군대 생활을 근처에서 했고 또한 첫 직장이 있던 근처이기에 눈에 익은 장소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새롭게 다가오는 연천이다.
39-2번 버스를 타고 돌고 돌아 감악지맥 마지막 구 간이었던 한탄강도 지나 달리다 보니 드디어 소요산역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떡볶기로 허기를 달래고 1호선 지하철로 용산까지 가니 거의 한시간 30여분이 걸린 듯 하다.
그래도 무탈하게 왕재지맥 첫 구간을 무탈하게 마무리하고 일찍 귀가해 안경 맞추고 식사 후 내일 새벽 영월지맥 산행을 위해 출발에 앞서 잠을 청하지만 잠이 오지 않아 뒹굴다 하룻밤을 그냥 지새고 말았다.
이제 남아 있는 구간은 다른 선답자들처럼 두구간으로 나눠 대중교통을 이용해 여유있게 걸어 볼 예정이지만 날씨가 덥다 보니 조금은 시원해지는 계절에 올라으면 좋겠다는 바램이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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