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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승지 자료/십승지 산행

십승지 산행 제1탄 우복동천 산행 자료들

by 칠갑산 사랑 2017.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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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승지 산행을 준비하며,


여기에 정리된 십승지 자료들은 네이버 지식백과와 경북일보 그리고 운해님의 산행지도를 참고하여 이 산객이 첨삭한 자료임을 알려 드리며 만약 지적 재산권에 저촉되는 내용이나 글이 있어 수정을 요구하면 그 즉시 수정 삭제할 예정임을 알리며 게재함을 알아 주시기 바랍니다.


오래전부터 오르고 싶어 준비를 하였지만 충분한 자료를 확보하지 못해 미루고 있던 십승지 산행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확인하다 보니 이제 제법 많은 자료들이 보이고 그 자료들을 하나 둘 정리하다 보니 정감록과 택리지 그리고 십승지에 대한 자료까지 알게 되었다.

그 십승지에 관한 자료들을 찾아 읽고 정리하다 보니 그곳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만 가고 이제 지맥 산행에 조금은 지쳐가는 시간에 십승지를 찾아 마음의 여유를 찾아 떠나기로 해 본다.

그중 가장 접근하기 편하고 또한 백두대간 산행을 하면서 몇 번인가 올랐던 속리산이 있는 우복동천을 가장 먼저 올라 십승지에 대한 산행에 대해 조금은 몸으로 체험한 후 나머지 십승지 산행도 이어갈 예정으로 계획해 본다.





정감록은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예언서로서 여러 가지의 감결류와 비결서의 집성이며 이본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정감록에 포함되는 문헌으로는 각종 이본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감결을 비롯하여 삼한산림비기, 화악노정기, 구궁변수법, 동국역대본궁음양결, 무학비결, 도선비결, 남사고비결, 징비기, 토정가장비결, 경주이선생가장결, 삼도봉시, 옥룡자기 등 수십 가지가 있다.

정감록의 저자나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밝혀진 것이 없고 정감록은 반왕조적이며 현실 부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조선시대 이래 금서에 속하였으며 민간에 은밀히 전승되어 왔다.

작자를 정감 혹은 이심이라고 보기도 하나 이는 정감록이 정감과 이심의 대화형식으로 서술된 까닭에 그렇게 보는 것이며 이들은 전설적인 인물로 보아야 하고 또한 정도전이 조선 왕조의 역성혁명을 합리화하고 민심을 조작하기 위하여 저술하였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정감록이 한 사람의 인물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내용이 다양한 수십여 편의 비결류의 집성이라는 점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형식면에서도 예언설, 참요, 역수의 풀이나 풍수지리설에 의한 해석 등이 다양하게 서술되어 있으며 사상도 유교의 외도나 도교 및 참위설·음양오행설의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정감록이 만들어지고 민간에 숨겨져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이른바 반왕조적 사회 구성원에 의하여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즉 사회 변동의 와중에서 몰락한 양반들이 풍수지리설이나 음양오행설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왕조 교체와 사회 변혁의 법칙을 우주론에 입각한 운세의 법칙과 결부시키려 하였다고 하겠다.

또한 정감록은 억눌림 때문에 공식적으로 인쇄된 것이 아니라 사본으로 수전되어 내려왔으며 그동안 이들에 의하여 첨삭이 가해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대체로 외적의 침입에 의하여 사회 혼란이 극심하고 개인적인 자기보전에 급급하였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로 보는 설이 가장 설득력있게 받아 들여지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서는 첫째 지명고적 관점에서 조선시대에 바뀐 지명이 많이 나타난다는 점, 둘째 세조와 성종 때의 분서목에 정감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셋째 인조실록에 있는 초포조입계룡건도라는 문구에 정감록의 계룡산천도설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 등이다.

내용은 난세에 풍수설에 따라 복정(점쳐서 정하는 것)된 피난처에서만 지복을 누릴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정씨 성의 진인이 출현하여 이씨 왕조가 멸망하고 새로운 세계가 도래할 것을 중심으로 하는 예언이다.

미래에 다가올 멸망에 대비한 피난처의 이상경에 대한 동경이 정감록 전반을 꿰뚫고 흐르고 있다.

따라서 자연지리적 조건을 음양오행설과 결부시켜 해석한 풍수지리설이 원용되고 있다.

표현기법상의 특징으로는 직설적인 표현을 피하고 은어, 우의, 시구, 파자를 사용하여 해석이 난삽하고 애매한 표현이 많다.

당초에는 병화를 피하는 소극적이고 은둔적인 사상이 정감록과 관련하여 민심에 크게 우합한 것이지만 조선 후기의 하대로 내려올수록 반왕조적인 색깔이 짙어져서 반란이나 대소규모의 민란은 모두가 정감록에서 우러나온 진인출현설이 압도하게 되었다.

더욱이 19세기의 민중운동이 모두 정감록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또한 동학을 기점으로 속출한 한국의 종교운동이 거의 모두가 정감록과 한 맥으로 통하고 있다고 할 만큼 민중의 의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므로 정감록은 신비하고 어떻게 보면 황당무계하기 그지없는 전통사회의 예언서에 불과할지도 모르나 실제는 조선시대의 사회사상사를 엮는 데 불가결한 사료로 평가된다.





이중환(1690 12 15 ~ 1756?)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이자 사상가이며 철학자로서 본관은 여주이고 자는 휘조이며 호는 청담과 청화산인이다.

이중환의 본관은 경기도 여주로 자는 휘조이며 호는 청담으로 청화산인 또는 청화자이고 이중환의 집안은 대대로 관직생활을 한 명문가로 당색은 북인에서 전향한 남인에 속한다.

이중환의 5대조 이상의(1560~1624)는 광해군대 북인으로 활약하였고 관직이 의정부 좌참찬에 올랐으며 할아버지 이영은 1657년(효종 8)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예산현감과 이조참판을 아버지 이진휴(1675~1710)는 1682년(숙종 6)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 안동부사, 예조참판, 충청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진휴는 남인 관료 집안의 딸인 함양 오씨 오상주의 딸과 혼인해 1690년에 이중환을 낳았으며 이중환은 사천 목씨 목임일(1646~?)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2명과 딸 2명을 두었고 후처로 문화 류씨를 맞이하여 딸 1명을 두었다.

사천 목씨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남인 집안으로 장인인 목임일은 대사헌을 지냈다.

실학자로 명망이 높은 이익(1681~1763)은 이중환에게 재종조부가 되지만 나이는 아홉 살 위였고 이중환은 일찍부터 이익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이익 또한 이중환의 시문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익이 택리지의 서문과 발문 그리고 이중환의 묘갈명까지 써 준 것에서 보듯 두 사람의 관계는 각별했으며 이익 또한 같은 남인인 목천건의 딸을 후처로 맞아 사천 목씨 집안과 혼인 관계를 맺었는데 사천 목씨와 혼맥을 형성한 것은 이중환이 당쟁에 깊이 연루되는 단서가 되게 된다.

1713년 이중환은 24세의 나이로 증광시의 병과에 급제하여 관직의 길에 들어섰으며 관직 생활은 비교적 순탄하여 1717년 김천도 찰방이 되었고 주서, 전적 등을 거쳐 1722년 병조좌랑에까지 올랐으나 1722년에 일어난 목호룡의 고변 사건은 그의 생애에 큰 시련을 안겨다 주었다.

이중환이 살았던 숙종과 경종 연간은 당쟁이 가장 극렬했던 시기로서 정권이 교체되는 환국의 형태가 여러 차례 반복되었는데 이중환이 속한 남인 세력은 1680년 경신환국 때 크게 탄압을 받았다가 1689년 기사환국으로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1694년의 갑술환국으로 다시 정치적 숙청을 당했다가 숙종 후반에는 서인 세력에서 분화한 소론 측과 연계하여 경종의 즉위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다.

경종이 즉위한 후 소론과 남인들이 정계에 진출하였는데 노론 세력은 경종이 허약하고 후사가 없음을 이유로 연잉군(훗날 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소론은 이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여 1721년(경종1) 김일경(1662~1724)이 노론을 역모죄로 공격하였고 뒤를 이어 남인 목호룡(1684~1724)이 고변서를 올려 노론 측이 숙종 말년에 세자(훗날 경종)를 해치려고 했다고 주장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노론의 4대신인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가 처형되고 노론의 자제들 170여 명이 처벌되는 큰 옥사(임인옥사)가 일어났지만 1723년(경종4)에 목호룡의 고변이 무고였음이 판정되면서 정국은 다시 노론의 주도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소론에 대한 노론의 강경한 정치 보복의 과정에서 이중환은 목호룡의 고변사건에 깊이 가담한 혐의를 받으면서 정치 인생에 위기를 맞았지만 다행히 이때는 혐의가 입증이 되지 않아 곧 석방되었으나 노론의 지원을 받은 영조가 즉위하면서 이중환은 다시 당쟁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임인옥사의 재조사 과정에서 김일경과 목호룡은 대역죄로 처형을 당하였고 이중환은 처남인 목천임과 함께 수사망에 올랐으며 특히 집안이 남인의 핵심이었고 노론 세력을 맹렬하게 비판하다가 처형을 당한 이잠(이익의 형)의 재종손이라는 점까지 불리하게 작용하여 1726년(영조2) 이중환은 유배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1727년(영조3)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하면서 이중환은 유배에서 풀려나지만 바로 그해에 사헌부의 논계로 다시 절도로 유배를 가게 되어 영조의 즉위라는 정국의 전환기에 이중환은 당쟁의 후폭풍을 고스란히 떠안게 되었던 것이다.

유배 후에도 이중환은 정치 참여를 포기할 만큼 당쟁의 상처는 컸다.

택리지에서 서울은 사색이 모여 살므로 풍속이 고르지 못하며 지방을 말하면 서와 북 삼도는 말할 것이 없고 동과 남 오도에 사색이 나뉘어 살고 있다거나 보통 사대부가 사는 곳은 인심이 고약하지 않은 곳이 없고 당파를 만들어 죄 없는 자를 가두고 권세를 부려 영세민을 침노하기도 하며 자신의 행실을 단속하지 못하면서 남이 자기를 논의함을 미워하고 한 지방의 패권 잡기를 좋아하며 다른 당파와는 같은 고장에 함께 살지 못하고 동리와 골목에서 서로 나무라고 헐뜯어서 측량할 수가 없다고 한 것은 이중환의 당쟁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중환은 당쟁으로 인한 정치적 좌절 속에서 전국을 방랑하게 되었고 30여 년 동안 전국을 방랑하는 불우한 신세였지만 우리 산천의 모습을 정리하고 시대를 살아간 인물과 대화를 하며 아픔을 달랬다.

그리고 불후의 저술 택리지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중환은 30대 후반에 유배된 후부터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30년 간 전국을 방랑하면서 보고 느낀 것을 택리지에 담았는데 택리지를 저술한 정확한 연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저자 자신이 쓴 발문에서 내가 황산강가에 있으면서 여름날에 아무 할 일이 없어 팔괘정에 올라 더위를 식히면서 우연히 논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말미에 신미년(1751년)이라고 기록하여 저자가 61세 되던 무렵에 정리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택리지는 크게 사민총론, 팔도총론, 복거총론, 총론의 네 분야로 나누어져 있는데 사민총론에서는 사대부의 신분이 농공상민과 갈라지게 된 원인과 내력, 사대부의 역할과 사명, 사대부가 살 만한 곳 등에 대해 설명하였다.

사민총론을 앞머리에 쓴 것은 이중환의 사대부적인 성향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이중환은 사대부는 살 만한 곳을 만드나 시세에 이로움과 불리함이 있고 지역에 좋고 나쁨이 있으며 인사에도 벼슬길에 나아감과 물러나는 시기의 다름이 있는 것이다라고 하여 본 저술의 주요 목적이 실세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면서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을 찾아보는 것에 있음을 암시하였다.

팔도총론에서는 우리 국토의 역사와 지리를 개관한 다음 당시의 행정구역인 팔도의 산맥과 물의 흐름을 말하고 관계있는 인물과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팔도의 서술 순서는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순이였는데 강원도에 관한 기록 중에는 누대와 정자 등 훌륭한 경치가 많다.

흡곡 시중대, 통천 총석정, 고성 삼일포, 간성 청간정, 양양 청초호, 강릉 경포대, 삼척 죽서루, 울진 망양정을 사람들이 관동팔경이라 부른다고 한 내용과 지역이 또한 서울과 멀어서 예로부터 훌륭하게 된 사람이 적으나 오직 강릉에는 과거에 오른 사람이 제법 나왔다고 한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경상도에 관한 항목에서는 좌도는 땅이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하여 비록 군색하게 살아도 문학하는 선비가 많으며 우도는 땅이 기름지고 백성이 부유하나 호사하기를 좋아하고 게을러서 문학을 힘쓰지 않는 까닭으로 훌륭하게 된 사람이 적다라고 하였다.

경상도는 낙동강을 기준으로 좌도와 우도를 나누었는데 이중환은 경상좌도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충청도에 대해서는 남쪽의 반은 차령 남쪽에 위치하여 전라도와 가깝고 반은 차령 북편에 있어 경기도와 이웃이며 물산은 영남과 호남에 미치지 못하나 산천이 평평하고 예쁘며 서울 남쪽에 가까운 위치여서 사대부들이 모여 사는 곳이 되었고 여러 대로 서울에 사는 집으로서 이 도에다 전답과 주택을 마련하여서 생활의 근본이 되는 곳으로 만들지 않는 집이 없으며 또 서울과 가까워서 풍속에 심한 차이가 없으므로 터를 고르면 가장 살 만하다고 하여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경기도에 관한 기록 중에는 강화부에 대한 내용이 자세한데 강화부의 자연적 조건을 서술한 다음 고려시대 원나라를 피해 10년간 도읍지가 되었던 것, 조선시대 바닷길의 요충이라 하여 유수부로 삼은 내력, 병자호란과 강화도와의 관계, 숙종대에 문수산성을 쌓은 사실 등을 기록하고 있다.

팔도총론 다음의 복거총론에서는 사람이 살 만한 곳의 조건을 지리, 생리, 인심, 산수의 네 가지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조건인 지리는 교통이 발달한 곳과 같은 현대적 의미의 지리가 아니라 풍수학적인 지리를 의미하는데 지리를 논하려면 먼저 수구를 보고 다음에는 들판과 산의 형세를 이어 흙빛과 물의 흐르는 방향과 형세를 본다고 기록하였다.

지리에 이어서는 생리를 살 만한 곳의 조건으로 들었는데 기름진 땅이 첫째이고 배와 수레를 이용하여 물자를 교류시킬 수 있는 곳이 다음이다라고 하였다.

기름진 땅으로는 전라도의 남원, 구례와 경상도 성주, 진주를 제일로 꼽았으며 특산물로는 진안의 담배, 전주의 생강, 임천과 한산의 모시, 안동과 예안의 왕골을 들었다.

세 번째로 인심을 들면서 팔도의 인심을 서로 비교하여 기록하였는데 특히 이 부분에서는 서민과 사대부의 인심이나 풍속이 다른 점을 강조하고 당쟁의 원인과 경과를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는 한편 인심이 정상이 아님을 통탄하였다.

택리지 이전의 지리책은 각 군현별로 연혁, 성씨, 풍속, 형승, 산천, 토산, 역원, 능묘 등으로 나누어 백과사전식으로 서술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택리지는 전국을 실지로 답사하면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지리적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자신의 관찰을 토대로 한 설명과 서술에 힘을 기울였다.

또 단순히 지역이나 산물에 대한 서술에 그치지 않고 사대부가 살 만한 이상향을 찾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지역구분 방식에서도 이중환은 각 지방이 지닌 개성과 질을 중요시하여 생활권 중심의 등질지역 개념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렇게 국토를 생활권 단위로 지역 구분할 때 가장 중요한 지표로서 생각한 것이 산줄기였다.

각 지역들은 하천을 통해 동일한 생활권으로 연결되지만 산줄기들은 이 하천유역을 구분 짓는 경계선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중환은 자연환경에 대한 인간의 적응과 이용에 대하여 자세한 관찰을 하고 있으며 또한 실생활에 이용될 수 있는 실용적인 측면을 강조한 면에서 종전의 지리지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또 각 지방의 토지 비옥도와 산물, 수운과 교역 등 상업과 유통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정치, 경제, 사회에 관한 폭넓은 식견을 피력하였으며 또한 누구나가 쉽고 흥미롭게 우리나라 방방곡곡의 사정을 파악할 수 있게 서술하였다.

이중환은 풍속이 아름답고 인정이 넘치는 곳을 강조하면서도 당쟁의 폐해에 따른 인심의 타락상을 경고하였다.

흔히 영조시대는 탕평책의 시행으로 당쟁이 어느 정도 종식된 것으로 이해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는데 특히 이중환은 전형적인 남인 학자로 영조대 노론 중심의 정치운영에서는 철저히 소외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고 택리지에서는 당쟁에 대해 부정적인 그의 시국관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택리지가 완성되자 여러 학자들이 서문과 발문을 썼으며 많은 사람들이 베껴서 읽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것은 책의 제목이 팔역지, 팔역가거지, 동국산수록, 진유승람, 동국총화록, 형가요람 등 10여 종이나 있는 것에서도 나타나는데 택리지를 필사하면서 제목을 자신의 취향대로 붙인 것이다.

동국산수록, 진유승람 등은 산수를 유람하기에 좋다는 의미에서 동국총화록은 우리나라의 물산이 종합되었다는 의미로 상인들이 붙인 이름으로 짐작되며 형가요람은 풍수지리에 익숙한 사람이 지은 제목으로 보인다.

다양한 제목은 택리지가 그만큼 여러 분야의 사람들에게 활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

택리지가 저술된 18세기 조선사회는 사회경제적 성장과 함께 국학 연구 분야에도 큰 발전이 있었던 시기로서 사대부 학자들 사이에서는 금강산 등 우리나라 산천을 여행하는 붐이 일고 각종 기행문이 기록되었다.

택리지는 바로 이러한 시기에 국토를 여행하는 시대 분위기와 맞물리면서 널리 유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시간이 되면 택리지를 들고 전국 답사에 나서기를 권하며 우리나라 전국의 산수와 풍물, 인심을 만나면서 역사와 전통의 멋을 음미하기를 바란다.




십승지지(십승지)는 조선시대에 사회의 난리를 피하여 몸을 보전할 수 있고 거주 환경이 좋은 10여 곳의 장소를 말하는데 한국인의 전통적 이상향의 하나이다.

정감록에 근거한 역사적 용어이며 십승지라고도 하는데 십승지지에 관한 기록은 정감록 중에 감결, 징비록, 유산록, 운기귀책, 삼한산림비기, 남사고비결, 도선비결, 토정가장결 등에 나타난다.

대체적으로 공통된 장소는 영월의 정동쪽 상류, 풍기의 금계촌, 합천 가야산의 만수동 동북쪽, 부안 호암 아래, 보은 속리산 아래의 증항 근처, 남원 운봉 지리산 아래의 동점촌, 안동의 화곡, 단양의 영춘, 무주의 무풍 북동쪽 등이다.

십승지지는 조선 후기의 이상향에 관한 민간인들의 사회적 담론이었는데 십승지 관념은 조선 중기와 후기에 민간계층에 깊숙이 전파되어 거주지의 선택 및 인구이동 그리고 공간인식에 큰 영향력을 주었다.

십승지지는 조선후기의 정치와 사회적 혼란과 민간인들의 경제적 피폐라는 역사적 배경에서 생겨났으며 십승지의 입지조건은 자연환경이 좋고 외침이나 정치적인 침해가 없으며 자족적인 경제생활이 충족되는 곳이었다.

사람은 이상적인 장소를 희구하며 살고자 했으며 이상향에 대한 관념은 동서양이 다르고 시대에 따라 달랐으며 문화속성에 따라 차이가 난다.

불교의 극락과 정토, 기독교의 천국과 에덴동산, 도교의 무릉도원, 삼신산, 청학동 등은 사후 아니면 관념적인 이상 세계를 일컫는 말이고 현실의 이상향을 표현한 말로서도 길지, 낙토, 복지, 명당, 가거지 등의 용어들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승지라는 말이다.

승지라는 말은 사전적 의미로 자연 경관과 거주 환경이 뛰어난 장소를 말하지만 역사적으로 조선 중기와 후기의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피폐로 말미암아 개인의 안위를 보전하며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피난지를 뜻하였다.

정감록에서는 그 여남은 장소를 십승지지라고 표현하였다.

십승지지는 정감록이라는 도참서의 키워드로 등장한 이래 조선시대 민간인들의 지리인식에 큰 영향력을 끼쳤는데 당시 민간인들은 정감록의 십승지지를 믿고 십승지를 찾아 나섰으며 실제 거주지를 그곳으로 옮긴 경우가 있었고 풍기의 경우처럼 지금까지 그 후손이 살고 있는 사례도 있다.

외침으로 인한 전란과 정치적 환란의 굴곡에서 살림살이가 피폐하였던 민간인들은 정감록을 믿고 피난과 보신의 삶을 일구어 나갔던 것이다.

십승지의 위치에 관해 정감록의 감결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오는데 몸을 보전할 땅이 열 있으니 풍기 금계촌, 안동 화곡, 개령 용궁, 가야, 단춘, 공주 정산 마곡 진천, 목천, 봉화, 운봉 두류산, 태백으로 길이 살 수 있는 땅이다.

이어서 열 곳 승지의 구체적인 지리적 위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는데 첫째는 풍기 차암 금계촌으로 소백산 두 물골 사이에 있으며 둘째는 화산 소령 고기로 청양현에 있는데 봉화 동쪽 마을로 넘어 들어갔다.

셋째는 보은 속리산 증항 근처로, 난리를 만나 몸을 숨기면 만에 하나도 다치지 않을 것이고 넷째는 운봉 행촌이며 다섯째는 예천 금당실로 이 땅에는 난의 해가 미치지 않으나 이곳에 임금의 수레가 닥치면 그렇지 않다.

여섯째는 공주 계룡산으로 유구 마곡의 두 물골의 둘레가 2백리나 되므로 난을 피할 수 있고 일곱째는 영월 정동쪽 상류로 난을 피해 종적을 감출만 하며 여덟째는 무주 무봉산 동쪽 동방 상동으로 피난 못할 곳이 없다.

아홉째는 부안 호암 아래가 가장 기이하고 열째는 합천 가야산 만수봉으로 그 둘레가 2백리나 되어 영원히 몸을 보전할 수 있으며 정선현 상원산 계룡봉 역시 난을 피할 만하다.”

십승지지는 정감록의 문헌에 따라 위치와 장소가 조금씩 달리 나타나며 추가되기도 하였다.

남격암 산수 십승 보길지지에는 감결에서 말한 열 곳 외에도 여러 장소가 더해졌는데 그 지역은 모두 태백산과 소백산의 남쪽으로서 풍기와 영주, 서쪽으로 단양과 영춘, 동쪽으로 봉화와 안동이 보신처라고 하였고 내포의 비인과 남포, 금오산, 덕유산, 두류산, 조계산, 가야산, 조령, 변산, 월출산, 내장산, 계룡산, 수산, 보미산, 오대산, 상원산, 팔령산, 유량산, 온산 등도 해당 장소로 들었다.

한편 정감록의 서계이선생가장결에는 황간 영동 사이에는 가히 만 가호가 살아나고 청주 남쪽과 문의 북쪽 역시 모습을 숨길 수 있다고 다시 몇 군데가 추가되었다.

십승지는 전란이 미치지 않아서 몸을 보전할 수 있는 입지 조건을 갖추어야 했다.

오늘날에도 정감록에서 지점된 십승지가 모두 지리적으로 내륙의 산간 오지에 위치하며 한양이나 고을로 이어지는 큰길에 인접하지 않은 것도 그러한 까닭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서계이선생가장결에 황간 영동 사이에는 만 가호가 살아나고 청주 남쪽과 문의 북쪽 역시 모습을 숨길 수 있으며 이런 세상을 맞아 남편은 밭을 갈고 아내는 베를 짜되 벼슬자리에 오르지 말고 농사짓는데 부지런히 힘씀으로써 스스로 살 길을 버리지 않도록 하라는 말의 표현으로 보아서도 조선시대에 십승지라는 이상향의 담론이 형성된 사회적 배경은 조선 후기에 내외의 전란 및 정치적 혼란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아시아의 이상향은 무릉도원(중국)과 청학동(한국)이라는 아이콘이 대변하듯이 자연경관이 심미적으로 뛰어나고 주거환경이 풍요로운 곳이라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했다.

십승지 이상향 역시 모두 산과 하천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는데 승지의 장소성을 이루는 기본적 요소는 취락을 이루어 농경할 수 있는 지리적 조건으로서 토지의 규모, 토양의 비옥도 및 생산성, 수자원 이용의 충족성, 온화한 기후 조건이 갖춰진 곳이었다.

십승지는 산이 높고 계곡이 깊어 수원이 충분하며 오랫동안 농경을 통한 자급자족이 가능한 경제적 환경조건도 요구되었으며 풍수적인 명당길지도 요청되는 조건 중의 하나였다.

풍수는 십승지 입지경관의 규정 및 공간적인 이데올로기로 영향을 미쳤으며 이러한 사실은 십승지가 대체로 풍수가 좋은 배산임수의 자연 입지조건을 지니고 있는 데서 짐작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십승지 관념은 청학동 이상향 관념과도 결합하였는데 정감록에서 십승지로 지점된 위치에서 지리산 청학동은 원래 포함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와 근대에 이르러 청학동과 십승지의 장소이미지가 상호 결합하여 십승지 청학동이라는 장소성을 이루게 되었다.

세상에서 이르기를 지리산 중에는 청학동이 있는데 십승지의 하나라고 한다(두류산유록)거나 청학동은 세상 사람들이 신선의 고향이니 십승지지니 하여 널리 전하던 바이라(개벽 제34호, 1923년 4월 1일)는 표현이 당시의 사회적 인식을 잘 말해준다.

십승지지 중에서 풍기 금계촌은 문헌에 첫 번째로 등장하여 정감록 비결을 믿는 민간인들의 거주지 정착과 인구 이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풍기에서도 소백산 아래의 금계동, 욱금동, 삼가동은 풍기 승지의 대표적인 장소로 꼽혔다.

1959년 기준의 조사연구에 의하면 풍기로 전입한 주민들의 이주동기 중에 8%가 정감록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하며 이주한 주민들은 대부분이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풍기읍 중심지에서 정착하여 인삼과 과수를 재배하거나 소백산 기슭에서 밭농사를 하며 은둔하는 부류들이 있었으며 풍기에는 근래까지만 해도 후손들이 살았는데 그 중 풍기의 십승지를 필사한 그림지도를 소장하고 있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지리산지의 십승지는 운봉 두류산(감결), 혹은 운봉 행촌(감결 십승지지), 혹은 운봉 두류산 아래 동점촌 100리 안(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운봉에 있다는 지리산 십승지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유교 지식인들과 지리산 주변에 거주하는 지역민들 사이에도 관심을 끌었던 것 같다.

운봉 두류산 아래에 동점촌이 있는데 100리 내에 영구히 거주할 만하지만 그 곳을 모르며 근래에 운봉 사람 곽재영이 비로소 찾았는데 말하기를 읍에서 거리는 25리이고 지리산 반야봉 괘협처이며 석벽의 높이가 몇 길이나 되는데 동점이라는 두 글자를 새겨놓았다고 한다.

글자의 획이 어지러이 소멸되어 분간하기 어려운데 예전에 구리를 제련하던 곳이기에 근방에 돌을 파내고 구리광을 캐는 흔적이 많다.

동점촌은 그 가운데에 있는데 평탄하지만 가운데에 앉아 있으면 사방이 보이지 않고 주위가 제법 넓어 30, 40호가 거주할 만한 농경지이다.

십승지지 중에 백두대간의 덕유산과 대덕산 지역으로 거론된 내용은 감결 외에도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가 있는데 여기서 무주 무풍 북쪽 동굴 옆의 음지이니 덕유산은 난리를 피하지 못할 곳이 없다고 구체적인 장소를 기록하면서도 덕유산 전체를 난리를 피하여 몸을 보전하는 승지로서 공간적 영역이 확대되어 표현되어 있다.

정감록의 감결이나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에서 말한 무풍은 현재의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의 영역이다.

백두대간의 덕유산과 삼도봉 자락에 둘러싸인 무풍은 조선시대의 도로 교통 조건에서 큰 길과 떨어져 있어 지리적 오지에 위치하고 있으나 큰 하천을 끼고 있고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분지 지형을 갖추고 있다.

실학자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말하기를 남사고는 무풍을 복지라 하여 골 바깥쪽은 온 산에 밭이 기름져서 넉넉하게 사는 마을이 많으니 이 점은 속리산 이북의 산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고 하였다.

이상적인 주거지의 위치와 모습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사회적으로 재구성 되는데 십승지지는 조선 후기 민간인의 이상향 담론이었다.

그들은 십승지로 지목된 곳을 찾아 삶터를 개척하고 미래의 희망을 꿈꾸며 생활을 일구었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가치의 지배로 생태환경의 위기와 거주의 진정성이 위협받는 사회 현실에서 승지의 문화전통과 생활사의 의미를 돌이켜볼 가치가 있다.



우복동(우복동천)

속리산은 이름 그대로 속세를 떠나는 곳으로 속리산 아래 골골은 하나같이 힐링처다.

승지로 꼽히는 이른바 우복동(경샹북도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으로 들어가는 입구 시루봉 아래 큰 바위엔 동천이라는 새김글이 아주 힘차게 갈겨져 있다. 전투에서 용맹한 장수의 칼놀림이 연상되는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로 시작하는 시조를 읊은 양사언의 행서체라고도 하고 도장산 심원사 수도승 개운의 글씨라고도 한다.

누가 이곳이 십승지임을 만천하에 밝히고 싶어 만든 암각서임에 틀림없는데 동천은 한국의 이상적인 명당촌인 승지의 중국식 명칭으로 대를 이어 살만한 새 땅을 의미함은 같다.

명촌이 있는 곳에 명산은 필수인 법으로 속리산은 백두대간의 허리이자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에 걸쳐있는 한국의 명산으로 경상북도에서 추진하는 한반도허리경제권에서 말하는 허리는 속리산 부근이라고 볼 수 있다.

경상북도, 충청북도, 대전시, 충청남도, 강원도, 전라북도를 비롯한 7개 시와 도는 정책협의회를 창립하고 상생협력과 공동발전을 위해 손을 맞잡았다.

속리산 주봉 천왕봉은 2개의 정맥을 낳는 분기점으로 천왕봉에서 충청북도 청주와 충주를 가로지르며 안성의 칠장산까지 이어져 남한강과 금강의 분수산맥을 이루고 칠장산에서 하나는 서북쪽으로 수원을 거쳐 김포시 문수산까지의 한남정맥이고 또 하나는 서남쪽으로 충남 태안의 안흥까지의 금북정맥이다.

속리산에서 비롯한 물은 금강 남한강 낙동강 세 줄기로 나뉘어 흘러 예부터 삼파수라고 했는데 삼파수는 오래된 명칭으로 조선중기 김극성의 문집에 문장대 위의 삼파수라는 글이 나오고 조선후기의 충청도 괴산군읍지에도 속리산 삼파수가 등장한다.

삼파수는 황해도 구월산에도 있다고 김정호는 대동지지에 기록했는데 속리산의 이러한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말미암아 신라 때부터 중사로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이지만 속리산도 수려한 봉우리가 35개(국립공원 경관자원 지정)나 되는데 설악산이 29개, 지리산은 25개다.

특히 속리산은 봉우리 아홉이 두드러져 구봉산이라는 이름도 가졌으며 경치가 빼어나 소금강산이라고도 불렀다.

속리산에 왕자와 황자를 쓰는 봉우리가 있다는 것만해도 범상치 않은 명산임을 말해 주는데 최고봉 이름이 천왕봉이었다가 일제 강점기에 천황을 상징해 천황봉으로 개악했다고 한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름은 천황봉으로 되어있었지만 조선시대 고지도와 문헌에는 모두 천왕봉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천왕봉은 지리산, 무등산, 비슬산, 장수산(황해도 재령), 천왕산(경남 고성)의 주봉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도 장수의 주산, 월출산의 주봉, 광양의 천황봉도 있었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다.

옛날부터 명산은 사람들이 신성시해 섬겨왔으며 속리산 정상에는 대자재천왕사라는 사당이 있었는데 산 속에 사는 사람들이 매년 10월에 신을 맞이하여 제사 지낸 후 45일을 머물다가 돌아간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기록하고 있으나 물론 지금은 맥이 끊어진지 오래다.

조선시대 선비들도 속리산을 보는 눈이 예사롭지가 않았나 본데 속리산은 기이하고 험준함이 금강산에 미치지 못하고 웅장하고 심원함은 지리산에 미치지 못하지만 왜 특별히 명산으로 일컬어지고 중국에까지 알려졌을까라는 박문호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이랬다.

한강 남쪽의 모든 산이 다 이 속리산을 종마루(조종)로 하며 신령한 기상을 품고 기르며 높고 넓고 깊고 두터움은 여러 산이 비교할 바가 아니다(유속리산기).
우복동으로 알려진 상주 용유리는 먹고사는데 필요한 물산을 짓는데 필요한 조건도 갖추었다. 

성해응의 동국명산기에 복천사 동쪽을 내산이라고 하고 법주사 위쪽을 외산이라고 하는데 내산에는 돌이 많고 외산에는 흙이 많다고 적었다.

흙이 많다는 외산은 농사 지을 수 있는 토양조건이 갖춰졌다는 뜻으로 잠시 머물렀다거 떠나는 것이 아니라 대를 이어 살만한 가거지의 조건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명산에 명촌이 없을리 만무한데 십승지 중 하나가 보은 속리산 아래 증항 근처에 있다는 것으로(정감록) 증항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학계에서도 합의되지 않고 있으나 충북 보은과 경북 상주에 걸친 속리산이니 그 언저리 어디에 있을 것이다.

조선후기 이규경은 우복동변증설, 우복동진가변증설 등의 글까지 써서 검토했을 정도다.

지금 행정구역으로는 대체로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화산, 광정마을), 견훤산성이 있는 장암리, 칠층석탑(보물 제683호)이 앉은 상오리 일대로 추정한다. 속리산(1058봉), 청화산(984봉), 도장산(828봉)의 삼각형 꼭짓점으로 둘러싸인 분지로서 보은군 속리산면 구병리도 그 하나로 추정되는 곳으로 이 두메산골에도 한 때 전국에서 뉴프론티어 정신으로 이주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우복동은 농사짓기에 알맞은 장수의 고장으로 여겨 속리산 동편에 항아리 같은 산이 있다.

정약용이 지은 우복동가라는 글귀에는 예전부터 그 속에 우복동이 있다고 한다네, 산봉우리 시냇물이 천 겹 백 겹 둘러싸서 여민 옷섶 겹친 주름 터진 곳이 없고 기름진 땅 솟는 샘물 농사 짓기 알맞아서 백 년 가도 늙지 않는 장수의 고장이라네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속리산의 수려한 경관과 삼재가 들지 않고 비옥한 농경지를 갖춘 삶 터 등이 하나로 뭉뚱그려져 우복동이라는 이상향으로 지목됐다.

조선시대에 우복동은 승지의 대명사로서 아울러 많은 인민들이 생활터전을 일구는 장소의 공간으로 알고 찾아왔다.

속리산 우복동과 지리산 청학동은 모두 깊은 산중에 있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우복동은 소의 배 속 같아 편안하고 기근이 들지 않는 곳으로 지형적으로도 차이가 난다.

우복동은 속리산 바깥 기슭의 분지에 있어 농경지가 있고 비옥하며 십승지의 땅, 우복동은 조선후기의 정감록촌이라는 이상향의 전형이다.

2010년 8월28일 한양대 동아시아건축역사연구실과 대한민국풍수지리연합회가 공동 주관한 우리나라 십승지의 재조명 학술세미나에서 상주 우복동과 변산 호암의 십승지를 발표한 채영석씨는 우복동은 용유리 화산 광정마을이라고 단언한다.

용이 즐겁게 논다는 뜻의 용유리는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병천과 함께 이상향 터로 묘사하고 있으며 그는 청화산 남쪽을 돌아 동쪽 용추로 들어가는 것이 병천이고 청화산과 도장산 사이를 용유동이라 부른다.

시루 항아리 단지의 뜻이 담긴 병천을 예찬했다.

시루는 먹을거리를 만드는 떡을 찌는 그릇으로 과거 삼재불입지 우복동이 현대에는 먹을거리와 힐링을 함께 꿈꾸는 자들의 안식처로 부상하고 있다.







정확한 산행 일정과 코스는 확정하지 못하였지만 가능하면 빠른 시일 내 실시하는 것으로 게획하는데 한가지 변수는 홀로 오르느냐 아니면 다른 산친구들과 함께 오르느냐에 따라 한방 종주로 될 것인지 아니면 두세번으로 나눠 진행될 것인지가 결정될 것이다.


멋진 산행을 기대하며 직접 두발로 그 십승지를 찾아 걸어 보는 재미도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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