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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맥산행(완료)/태행지맥(서봉·완)

태행지맥 제1구간 분기봉에서 은장고개까지 산행후기

by 칠갑산 사랑 2016.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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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경기도 화성시 태행지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2016년 03월 05일 (토요일 당일 산행)

산행날씨 : 흐리고 간간히 가랑비가 내렸던 산행 날씨

산행온도 영상 02도에서 영상 11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왕림휴게소 버스정류장-왕림휴게소-삼천병마골과 화성시 관광안내도-지하통로(43번 4차선 통과)-왕림휴게소 버스정류장-서거정 묘소 안내판-

                 44번 송전탑-정경부인전주이씨묘지-서거정묘소-서봉지맥 마루금 합류-묘지지대-태행지맥 분기점-묘지지대 복귀-해뜨는 GS 칼텍스 충전소-

                 43번 4차선 포장도로 통과-화인폴리머 입구-비포장 임도-콘테이너 민가-능선진입-녹색 그물망-168 무명 바위봉-163 갈림 삼거리-220봉

                 (벤취쉼터2개와 작은 돌탑)-통나무 계단-돌탑 2개 안부-225.3 삼각점봉-팔각점과 운동시설(삼봉산 유래판) 이정표(내리 1.8 Km, 상리 2.2 Km)-

                 바위-안전목책과 로프구간-상리 갈림삼거리 이정표(내리 지내산, 삼봉산 제1봉, 상리 1.5 Km)-삼봉산 2봉(213봉)-무명안부-234.1봉-무명

                 안부-헬기장(235미터)-무명안부-삼봉산(지내산, 270.5봉)-바위 암릉구간-삼봉산 삼거리 이정표(백학고개 300m, 능선쉼터 720m)-상기리 갈림

                 삼거리 이정표(태행산정상 1.65 Km, 등산로 입구 4.75 Km, 상기리 1.4 Km)-백학고개 이정표(태행산 630m, 삼봉산 삼거리 300m, 호연동,

                 쌍학리)-안전목책과 로프 계단구간-오두지맥 분기점 헬기장 이정표(자안리 2 Km, 백학고개 630m, 등산로없음)-벌목지대-태행산(266.7봉)-

                 태행산(294.8봉, 나무전망데크와 안내판)-민간인 출입금지 경고판-깃대들-짧은 너덜지대-군부대 출입금지 경고판-폭발물 위험 경고판과

                 철조망-불발탄 산재지멱 경고판-비포장 임도 안부-잡목지대-넓은 공터봉(159.4봉)-초소 및 이동통신탑봉-비포장 임도-군부대 후문(2차선

                 포장도로)-능선진입-갈림삼거리-초소 및 타이어봉(172봉)-갈림 삼거리 복귀-작은 돌탑봉-녹슨 안테나-그네봉(167.7봉)-타이어 등로-길주의

                 구간-무명 송전탑-27번 송전탑-자안리고개(39번 4차선 포장도로)-금탑휴게소(짬봉으로 점심식사)-39번 4차선 포장도로 통과-능선진입-25번

                 송전탑-108 무명봉-4차선 포장도로(도로 따라 우측으로)-(주)성일유화-(주)비봉폐차산업-푸른들판로(1차선 시멘트 포장도로)-양노4교

                 지하통로(서해안고속도로 통과)-녹슨 쇠철장-골재 채취후 식재지-남양개발 채석장-109 무명봉-2차선 포장도로(현대기아기술연구소)-절개지-

                 (주)우진프라임-(주)혜성복층유리-공사장-F&L 공장-시멘트 포장도로-명신인퍼스-엄마네식당매점-(주)엔진텍-미경특수강-(주)델코코-녹색

                 철조망-능선진입-박공묘지지대-북양산업단지-121.6봉-녹슨철조망과 콘크리트 말뚝지대-염티고개(염치고개, 313번 4차선 포장도로)-잣나무

                 등로-남양홍공 묘지지대-경주김공묘지지대-남양홍씨 종묘당-출입금지 경고판-118.1봉 갈림 삼거리-갈림삼거리-소나무 등로-자작나무

                 조림지-묘지지대-87.1 무명봉-소나무 등로-무명안부-107.6 삼각점봉-103.3 무명봉-101.4 무명봉-화성 퍼블릭골프장 철조망-밭 경작지-

                 1차선 시멘트 포장도로-과수원 철망-준.희님 응원판-85 무명봉-벌목 후 조림지대-93.2 무명봉-무명안부-지독한 잡목지대-잣나무등로-삼부실

                 고개(77번 2차선 포장도로)-거대한 도로 공사현장-108 무명봉-무명안부-111.4 무명봉-무명안부-지독한 가시나무지대-묘지지대-아카시아

                 나무지대-비포장 임도-시멘트 포장도로-밭 경작지-41 무명봉-자작나무 조림지-밤나무 조림지-비포장 임도-성고개(4번 2차선 포장도로)-

                 비포장 임도-능선진입-벌목후 잡목지대-지독한 잡모과 가시지대-1차선 포장도로(목장)-비포장 임도(우 목장)-106.8 삼각점봉-시멘트 포장

                 도로(절개지)-절개지(좌 K 금강 푸르뫼마을 아파트)-114.6봉 갈림 삼거리-114.6 무명봉-갈림 삼거리 복귀-117 무명봉-거대한 공사장-92.3

                 무명봉-대산공업-은장고개(322번 4차선 포장도로)-쌍송1리입구 버스정류장-행종료

산행거리 : 약 26.81 Km (테헹지맥 산행 약 25.00 Km와 왕림휴게소에서 태행지맥 분기점까지 접속구간 01.81 Km, 스마트 폰의 GPX 기준)

산행시간 : 미끄러운 등로를 타고 사라지는 마루금을 찾아 참으로 어렵게 진행하여 10간 19분 (06시 58부터 17시 17분까)

교통편 : 대중교통을 이용해 무탈하게 진행하였음

             봉천역에서 05시 41분 첫 지하철로 사당역

             사당역 4번 출구 밖에서 8155번으로 장안대학교 버스 정류장까지 이동

             장안대학교 버스정류장에서 38번 버스를 타고 왕림휴게소 버스 정류장까지 이동

             쌍송1리입구 버스정류장에서 330번 버스를 타고 남양사거리까지 이동

             남양사거리 버스정류장에서 1002번 버스를 타고 사당역 도착

             사당역에서 지하철 2호선에 탑승하여 귀가

산행횟수와 총 산행거리 : 2016-12, 224.75 Km

태행지맥이란 ???

태행지맥은 한남정맥 감투봉(185봉)에서 아산만으로 가는 서봉지맥의 화성시 봉담읍 장안대뒤에서 서쪽으로 가지를 쳐 화성시 송산면 와룡산(107.8봉)에서 선감도를 바라보며 그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41.4 Km되는 산줄기다.

지나는 곳은 삼봉산(271봉), 태행산(268봉), 염티고개, 성고개, 다락고개, 굴고개, 구봉산(159봉), 매봉산(109봉), 아지미고개, 천등산(146봉), 이봉산(106봉), 승학산(110봉), 와룡산(107.8봉)을 지나 서해바다에서 그 맥을 다하는 산줄기이다.





젖어있는 미끄러운 등로와 낙엽을 따라 파헤쳐지고 잘려진 마루금을 찾아 너무나 힘들게 걸었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간 태행지맥 산행을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토요일 생각지도 못한 겨울비가 많이도 내린다는 예보에 하루 종일 옆지기와 오랫만에 집에서 놀다 보니 운동을 안해서 그런지 소화불량에 의욕 상실이다.

하루 종일 기상청에 들어가 일기 예보를 살펴보니 다행히도 일요일은 서해안부터 일찍 날씨가 개인다는 소식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태행지맥 한구간을 걸어보기로 하는데 또 하나의 복병이 나타난다.

중국에서 불어오는 미세먼지가 예상된다기에 준비를 하고 새벽 일찍 누룽지 한그릇 먹고 점심은 진행하다 식당에서 매식을 하기로 하니 배낭이 줄어들 것이라 생각을 했는데 혹시나 몰라 준비한 스패츠와 체인젠 그리고 비옷으로 인해 도시락 없이 진행을 해도 배낭의 부피와 무게는 동일하다.

그래도 편안하게 대중교통을 이용해 다녀 올 수 있기에 마음 편히 집을 출발하는 시간이다.


봉천역에서 첫 지하철인 새벽 5시 41분 열차를 타고 사당역 4번 출구로 나가니 이제 새벽 6시를 넘기고 있는데 일요일 새벽인데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모습에 놀라는 시간이기도 하다.

20여분 기다렸다 들어오는 8155번 버스를 타고 잠시 깊은 잠에 빠졌다 일어나니 내려야 할 장안대학 근처에 도착을 하고 장안대학 버스정류장에 내리니 새벽 6시 45분을 지나고 있다.

배낭 정리하고 카메라까지 꺼내 완전 무장을 하고 있으니 6시 48분에 제일 먼저 38번이 도착을 하고 그 38번 버스를 타고 두어 정거장 더 가니 금새 오늘 산행 들머리인 왕림휴게소에 도착을 해 잠시 산행 준비 후 곧바로 산행을 시작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생각보다 춥지 않아 장갑과 귀마개를 벗어 배낭에 넣고 출발하니 채 아침 7시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오늘은 왠지 모르게 두 다리에 느껴지는 무게감이 묵직하기만 하다.

산행 시작한지 2시간 40여분만에 오늘 산행의 의미를 남긴 태행산 정상에 도착을 해 주위 조망과 풍경을 살펴보는데 약간의 박무와 미세먼지로 인해 조금은 아쉽기만 하다.

그래도 생각보다 좋은 조망을 즐기고 어렵게 셀카 놀이를 하면서 추억 한장 남기는 시간은 그래도 이렇게 오르기를 잘 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오늘 하루도 무탈하게 계획했던 날머리까지 진행을 해 다음 구간에 편안하게 마무리 할 수 있기를 빌어 보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왕림휴게소에 도착을 하니 막 새벽 07시를 넘어가고 있다.

큰 이정판 옆 공터에서 산행 준비 후 주위 풍경을 사진에 담다 보니 아직은 빛이 충분하지 않는지 맑지를 못하다.

왕림휴게소 주차장 우측에는 34번 버스가 몇대 보이고 그 앞으로는 아웃도어 매장들이 즐비하게 늘어 선 풍경도 들어오는 왕림리이기에 자료를 찾아 보니 왕림리는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에 있는 마을로서 마을의 많은 부분이 농경지로 사용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가마리, 독정리(독정이), 점촌 등이 있는데 가마리는 예부터 삼을 많이 재배하는 지역으로 부지런히 길쌈을 하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독정리는 극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우물이 있어서 지어진 이름이고 조선시대 말에는 마을을 둘러싼 산이 소나무로 무성하게 덮여 있어 왕림촌 또는 왕림리라고 불려졌다.
유적으로는 경기유형문화재 제136호인 서거정선생묘지석이 있다.


그곳 왕림휴게소에서 잠시 머물며 주위 풍경을 사진에 담고 지하통로 방향으로 걸어 내려가니 주차장 좌측으로 화성시 관광안내도와 그 좌측으로 삼천병마골이란 안내판이 보인다.

삼천병마골에 대한 자료를 찾다보니 다음과 같은 전설이 보이는데 화성문화원 자료를 인용해 본다.
수원에서 발안으로 가는 길 봉담읍 상리에 나지막한 고개가 있는데 이 산 고개를 예로부터 삼천병마골이라 불리고 있다.
삼천병마골은 이 고개를 중심으로 하여 동쪽으로 뻗어있는 현재의 장안대학 뒷산과 서쪽으로 연결되는 삼보광업소 산까지 합쳐서 삼천병마골이라 부르고 있다.
조선 선조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
선조가 의주까지 파천을 하게 되어 명나라에 병력을 요청하였고 명나라 장수 잉여송이 이끄는 군대와 연합하여 왜군에 의해 짓밟힌 국토를 회복하던 때였다.
전라도순변사였던 권율은 군대를 이끌고 오산의 독산성에 이르러 왜장 가등청정과 맞서 싸워 전승을 거두었다. 이 싸움에서 권율 장군의 기지가 돋보인 쌀로 말을 씻기는 모습으로 유래된 세마대 이야기도 전해 오고 있다.
왜병들은 이순신 장군에 의하여 제해권을 빼앗기자 육로의 타개책으로 독산성에서 권율 장군과 싸움을 벌였던 것인데 오히려 패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전세는 불리하고 소모전을 하다 보니 날짜가 걸리는 것도 문제려니와 우리 군대와 명나라 군대가 한양을 탈환하기 위한 작전을 계획한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양으로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왜군은 대로를 피해 한양으로 가는 소로 길로 접어들었다.
권율은 왜군을 섬멸하기 위한 작전으로 왜병이 지나갈 길을 예측하고 독산성에서 정남면을 지나 봉담읍으로 통행하는 길목을 지키기로 하고 삼천의 병마를 매복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마음 놓고 이곳을 지나던 왜병들은 뜻하지 않은 기습에 당황하여 혼비백산 모두 도주했다.
이때부터 이 고개를 삼천병마골로 불러오고 있다.
한편 삼천병마에 대해 고종 원년(1864) 탈고된 김정호의 대동지지에 보면 수원부편 전고조에 光海 三十年 十二月 忠全慶三道兵各三千留屯水原으로 기술되어 있다.
즉 광해군 13년(1621) 12월에 충청, 전라, 경상 3도의 병사 각 삼천을 수원에 유둔시켰다라는 말로 해석된다. 광해궁 13년이라면 임진왜란이 끝난 지 23년가량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천병마골의 유래가 임진왜란부터인지 또는 관해군 때부터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근방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수원과 화성 지방 일대에서는 이곳을 인진왜란 때부터 삼천병마골이라 불러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삼천병마골이란 안내판을 읽어 본 후 남쪽 수원 방향으로 걸어 내려가니 43번 도로 우측 밑으로 지하통로가 보이고 그 통로를 통해 43번 4차선 포장도로를 통과한다.

지하통로를 통해 43번 4차선 포장도로를 통과한 후 이제는 서울 방향으로 걸어 오르니 도로 우측으로 왕림휴게소 버스정류장이 보이고 곧이어 서거정 묘소 안내문이 보인다.

서거정(1420 세종 2에서 1488 성종 19)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학자로서 자는 자원, 강중이고 호는 사가정, 정정정이며 시호는 문충이다.
본관은 달성으로 호조전서 의의 증손이고 목사 미성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권근의 딸이고 최항이 그의 자형이며 조수와 유방선 등에게 배웠는데 학문이 매우 넓어서 천문, 지리, 의약, 복서, 성명, 풍수에까지 관통하였다.
문장에 일가를 이루고 특히 시에 능하였으며 일찍이 조맹부의 적벽부 글자를 모아서 칠언절구 16수를 지었는데 매우 청려하여 세조가 이를 보고 감탄하였다 한다.
1438년(세종 20) 생원과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444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재감직장에 제수되었고 그 뒤 집현전박사와 경연사경이 되고 1447년 부수찬으로 지제교겸세자우정자로 승진하였으며 1451년(문종 1) 부교리에 올랐다.
다음해 수양대군을 따라 명나라에 종사관으로 다녀와 1455년(세조 1) 세자우필선이 되고 이듬해 집현전이 혁파되자 성균사예로 옮겼다.
1457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우사간과 지제교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1458년 정시에서 우등하여 공조참의와 지제교, 예조참의를 역임하였으며 세조의 명으로 오행총괄을 지었다.
1460년 이조참의로 전임되어 사은사로 중국에 갔을 때 통주관에서 안남 사신을 만나 시재를 겨루어 탄복을 받았으며 요동 사람 구제는 그의 초고를 보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1465년 예문관제학과 중추부동지사를 거쳐 다음해 발영시에 합격하여 예조참판이 되고 이어 등준시에 3등으로 합격하여 행동지중추부사가 특별히 보태졌다.
1467년 형조판서로서 예문관대제학과 성균관지사를 겸하며 문형을 관장하였는데 국가의 전책과 사명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1470년(성종 1) 좌참찬이 되었고 1471년 순성명량좌리공신 3등에 녹훈되고 달성군에 봉하여졌으며 1474년 다시 군에 봉하여지고 좌참찬에 복배되었다.
1476년 원접사가 되어 중국사신을 맞이하였는데 수창을 잘하여 기재라는 칭송을 받았고 이 해 우찬성에 오르고 삼국사절요를 공편하였다.
1477년 달성군에 다시 봉해지고 도총관을 겸하였다가 다음해 대제학을 겸직하였고 곧이어 한성부판윤에 제수되었다.
이 해 동문선 130권을 신찬하였다.
1479년 이조판서가 되어 송나라제도에 의거하여 문과의 관시, 한성시, 향시에서 일곱 번 합격한 자를 서용하는 법을 세웠고 1480년 오자를 주석하고 역대연표를 찬진하였다.
1481년 신찬동국여지승람 50권을 찬진하고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1483년 좌찬성에 제수되었고 1485년 세자이사를 겸하였으며 동국통감 57권을 완성하여 바쳤다.
1486년 필원잡기를 저술하여 사관의 결락을 보충하였고 1487년 왕세자가 입학하자 박사가 되어 논어를 강하였으며 다음해 죽었다.


그 묘소 안내문을 읽어 본 후 우측 능선 방향으로 나 있는 넓은 비포장 임도와 송전탑 방향으로 올라가니 송전탑은 44번이고 곧이어 정경부인전주이씨 묘지를 지나 서거정 묘소를 만난다.

서거정은 여섯 왕을 섬겨 45년간 조정에 봉사하고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23년간이나 지낼 만큼 문장과 학식이 뛰어났고 23차례에 걸쳐 과거시험을 관장하여 많은 인재를 뽑았다.
수양대군뿐 아니라 김시습 등과도 두루 좋은 관계를 지녔다.
그의 문학은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성리학설은 대체로 경전의 의미를 강조하는 정통적인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저서로 사가집, 동국통감, 여지승람, 역대연표, 동인시화, 태평한화, 필원잡기 등이 있다.

자주 지나다녔던 도로인데 이곳에 이런 묘소가 있음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기에 새롭게 각인되는 곳이기도 하다.


서거정 묘소를 지나 조금 더 걸어 진행을 하니 금새 서봉지맥 마루금에 도착을 하는데 몇 년전 홀로 진행을 하며 고생한 기억이 있어 아직도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는 등로이다.

서봉지맥은 백두대간 상에 있는 속리산 천왕봉에서 북서쪽으로 분기한 한남금북정맥이 내려오다가 칠장산에서 다시 금북정맥과 한남정맥이 나누어진다.
 칠장산에서 북서쪽으로 분기한 한남정맥은 감투봉에서 수리산으로 이어지고 감투봉에서 또 하나의 산줄기가 남쪽으로 분기하여 구봉산(145m), 칠보산(239m), 고금산(87m), 서봉산(250m), 덕지산(138), 옥녀봉(82m), 계두봉을 거쳐 아산호에서 그 맥을 다하는 약72.4 km의 산줄기이다.

이제 그 서봉지맥 마루금을 타고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많은 묘지지대가 나타나고 그 묘지에서 등로 우측을 내려다 보니 저 멀리 왕림리 마을과 43번 포장도로 그리고 철로가 보이고 그 좌측으로 태봉산으로 이어지는 서봉지맥이 그리고 도로 건너 우측으로는 달보산과 건달산이 올려다 보인다.


묘지지대에서 왕림리 방향과 서봉지맥 마루금을 조망한 후 조금 더 걸어 오르니 금새 태행지맥 분기점에 도착을 하는데 그 뒤로 147봉까지 가 보지만 아무 표식도 없어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그 태행지맥 분기점으로 내려간다.

비에 젖어 축축한 낙엽을 밟으며 이곳 저곳 살펴본 후 셀카놀이를 하며 어렵게 사진 한장 남긴 후 멀고 긴 태행지맥 산행을 시작해 보는 시간이다.

아무도 두구간이면 마무리가 될 것으로 예상하기에 그 두구간에도 아무 사고없이 무탈하게 완주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보는 순간이다.


준.희님이 붙여 놓은 태행지맥 분기점 이정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기온이 올라 옷가지를 정리한 후 다시 올라 온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묘지지대를 지나 이제 우측으로 나 있는 내리막 등로를 따라 43번 도로 방향으로 내려가 본다.

낙엽을 밟으며 잠시 더 내려가니 GS 칼텍스 주유소가 나탄고 그 주유소 좌측 고갯마루 방향으로 올라가니 수원여자대학교 해란캠퍼스란 도로 표지판이 보이고 그곳에서 차량 통행이 뜸한 시간에 무단 황단해 그 43번 4차선 포장도로를 건넌다.

도로를 건너니 그곳에도 SK 주유소가 보이고 좌측으로는 화인폴리머 공장과 칠보산업 사이로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는데 이제 그 임도를 타고 43번 도로와 헤어져 본격적인 태행지맥 산행을 시작해 본다.


잠시 걸어 들어가다 뒤돌아 보니 방금 전 헤어져 올라온 43번 도로와 그 넘어 태행지맥 분기점이 올려다 보이는데 미세먼지 때문인지 시야가 좋지 못한 듯 하다.

다시 임도를 타고 걸어 오르니 임도 좌측 앞으로 콘테이너 위에 민가가 세워져 있는 특이한 주택을 만나고 잠시 후 공터를 지나 고갯마루에 오르는데 고갯마루 우측으로는 파란 그물망이 쳐져 있다.

그 파란 그물망 직전 우측 능선 방향으로 몇개의 선답자들 띠지가 펄럭이고 이제 이 산객도 선답자들의 띠지를 따라 능선으로 오르며 그 파란 그물망을 따라 걸어 올라 본다.


짧은 절개지를 따라 좌측에 파란 그물망을 두고 오르니 오늘 새벽까지 제법 많은 비가 내렸는지 낙엽은 완전히 물에 젖어 축축해져 있다.

나뭇가지에 물기가 남아 비산하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비산하는 빗방울은 없어 다행이다.

그렇게 잠시 더 축축한 낙엽을 밟으며 오르니 파란 그물망과 헤어지고 등로는 우측 봉우리를 오르지 않고 좌측 사면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우측 봉우리로 오르니 아무 표식도 없이 바위 하나와 오래되어 썩어 가는 나무 밑둥 하나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168봉에 도착을 한다.


그 바위봉을 지나 내려가니 짧은 잡목지대가 나타나고 곧이어 뚜렷한 등로를 만나는데 등로 좌측 위로는 다시 검정 그물망이 나타나는데 등로는 우측 아래 우회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 우측으로 176.1봉 가는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등로 좌측으로는 또 다시 검정 그물망이 따라 오고 있다.

그곳에서 우측 176.1봉은 포기하고 이제 등로 좌측에 검정 그물망을 두고 완만하게 내려가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잠시 내려가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다시 오르는데 갑자기 전봇대가 서 있어 의아한 생각을 하며 걸어 오르니 바위 암릉지대에 낙엽이 깔려있는 완만한 오르막 등로가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왕림리 마을이 희미하게 내려다 보이고 그 우측으로는 건달산과 265.5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완만하게 오르니 벤취쉼터 2개와 작은 돌탑 하나가 설치되어 있는 220봉에 도착을 한다.


그 벤취쉼터봉에서는 상기리로 내려갈 수 있는 좌측 직진의 등로를 버리고 우측 내리막 등로에 설치되어 있는 통나무 계단을 타고 걸어 내려가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잠시 더 걸어 내려가니 낙엽진 활엽수 가지 사이로 올라야 할 225.3봉과 저 멀리 삼봉산이 올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계단을 지나 계속 걸어가니 등로 우측으로 상리 하산 갈림삼거리가 나타나는데 그곳에는 제법 높은 돌탑 2개가 눈길을 잡는다.

 

큰 돌탑 2개가 서 있는 안부를 지나 완만하게 오르니 갑자기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그곳에는 작은 이정판이 보이고 다가 가 살펴보니 갈림 삼거리 주위의 식물들에 대한 설명판이 서 있다.

그 식물 설명판이 서 있는 갈림 삼거리를 지나 다사 오르니 정상에 몇개의 바위들이 서 있는 225.3봉에 도착을 하는데 지도에는 삼각점 표시가 되어 있어 주위를 찾아 보지만 삼각점은 보이지 않고 소나무 가지에 준.희님의 안내판만 걸려있다.

사진 한장 남기고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들어갔던 곳으로 뒤돌아 나와 정상 좌측으로 나 있는 등로를 따른다.


그 225.3봉을 좌측으로 돌아 내려가니 많은 운동시설들과 철봉들이 보이고 그 제일 뒤에는 높은 팔각 전망대도 서 있다.

그곳으로 잠시 내려가 주위를 살펴보니 등로 우측으로 삼봉산의 자생초본에 관한 설명판과 삼봉산유래 설명판이 서 있다.

잠시 그 앞에 멈춰서서 그 삼봉산유래를 읽어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

 삼봉산유래(225.3봉)에는 세 개의 봉우리로 이루워져 붙은 이름으로 봉담읍 내리에 위치하고 있는 산으로 봉담읍 상기리의 경계와 비봉면 쌍학리의 경계까지 산이 솟아 있다.
삼봉산의 지역 이름은 삼뱅이다.
바깥삼뱅이와 안쪽삼뱅이 등 삼봉산 주위의 지명들이 삼봉산을 중심으로 명명된 것이라는 점이 확인되었다.
화성상리유물산포지1은 삼봉산 북사면에 완경사지에서 삼봉산으로 이어진 등산로 주변에 형성되어 있는데 약간의 삼국시대 경질 타날문토기편과 조선시대 자기편이 채집되었다.
입지와 채집 유물의 양상으로 볼 때 삼국시대와 조선시대 분묘유적이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곳 225.3봉 뒤 안부에 설치되어 있는 운동시설들과 안내판 그리고 설명판을 둘러 본 후 잠시 제일 뒤에 서 있는 팔각정 전망대로 올라가 보는데 잡목들로 막혀 생각보다 조망은 좋지 않다.

그래도 등로 우측으로 오래 전 지났던 비산비야의 서봉지맥이 내려다 보이고 그 주위로는 새로 공사중인 상전벽해로 변해버린 수원 서부의 나즈막한 평야지대가 박무속에 희미하게 보이고 이제부터 진행해야 할 방향으로는 좌측으로 흐르는 태행산 방향은 잡목속에 묻혀 보이지 않고 그 우측으로 흐르는 산줄기 하나가 제법 그럴듯한 모습으로 펼쳐져 있다.


그렇게 한동안 그 225.3봉과 그 바로 뒤 팔각정 전망대에서 주위 풍경과 조망을 즐긴 후 내려 와 내리 방향으로 진행을 하니 등로에는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된 내리막 등로가 열려있고 그 등로 우측으로는 방금 전 올랐다 내려 온 팔각정 뒤로 커다란 바위가 서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 온다.

안전 목책과 로프를 타고 내려가니 잠시 후 등로 좌측에는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고 그곳에는 방금 전 내려온 봉우리를 삼봉산 제1봉이라 적어 놓고 진행 방향 우측으로는 상리 1.5 Km 그리고 진행방향 좌측으로는 내리(지내산)라 적혀있는 이정표가 서 있다.

그렇게 진행을 하니 잠시 후 무명봉에 도착을 하는데 지도에는 삼봉산 2봉이라 되어 있는 213봉이다.


그 삼봉산 2봉이라고 되어 있는 213봉을 넘어 다시 내려가니 낙엽진 활엽수 등로가 열리는데 잠시 후 나즈막한 안부를 통과한다.

안부를 넘어 조금 더 걸어가니 키 작은 활엽수에는 아직도 많은 빛바랜 활엽수 낙엽들이 남아 있는 특이한 등로가 나타나고 곧이어 제법 큰 안부가 나타나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도를 살펴보니 아무 표식도 없는 무명 안부이다.

좌측의 봉담읍 상기리 장안이 마을과 우측의 봉담읍 내리 장안마을을 이어주는 고갯마루이다.

봉담읍은 경기도 화성시의 북동부에 위치한 읍으로 현재의 봉담읍은 호구총수 기록 당시 모지면, 삼봉면, 갓등면, 정송면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모지면에는 오늘날의 수영리가, 삼봉면에는 오늘날의 동화리(역촌으로 기록됨, 즉 옛 동화역이 있던 곳)와 내리(내동리로 기록됨)가, 갓등면에는 오늘날의 세곡리(세리로 기록됨)와 마하리(마을리로 기록됨)가 각각 속해 있었고 또 정송면에는 오늘날의 분천리가 속해 있었다.
팔도군현지도나 팔도지도, 해동여지도 등 이 무렵에 제작된 고지도에서는 모지면, 삼봉면, 갓등면의 3개 면은 거의 한 곳에 붙어 있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었지만 정송면은 동국여도에만 모지면 아래쪽에 표시되어 있다.
1831년에 편찬된 화성지에 따르면 현재의 봉담면은 삼봉면과 갈담면 관할지역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갈담면은 이전의 정송면이 폐지되고 그 일부가 갈담면으로 되었다.
또 모지면은 삼봉면에 합쳐졌다고 화성지에 기록되어 있으며 갓등면의 통폐합에 대해 아무런 기록이 없지만
이 역시 갈담면에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에 제작된 1872년지방지도를 보면 현재의 봉담읍 왕림리 일대(삼천병마골로 표기)가 삼봉면과 갈담면의 경계인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삼봉면과 갈담면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봉담면으로 통합되었다가 1998년에 봉담읍으로 승격하였다.
봉담이라는 면 이름 중에 봉은 옛 면 이름 삼봉면에서 따온 것이고 이때 삼봉은 이곳의 산 이름 삼봉산에서 따온 것이나 담 글자를 따온 갈담의 이름 유래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 상기리와 상리를 이어주는 깊은 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오르니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멋진 소나무 등로가 열려 있다.

등로에는 약간의 바위들이 산재되어 있는 소나무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오르니 금새 나뭇토막들이 정상에 흩어져 있는 234.1봉에 도착을 한다.

잠시 지나온 방향을 살펴보니 낙엽진 활엽수 가지 사이로 225.3봉과 213봉이 벌써 저 멀리 멀어지며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건넨다.


잘린 나뭇토막들이 널부러져 있는 234.1봉을 지나 다시 걸어가니 잡목이 우거진 무명봉을 지나고 곧이어 등로는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잠시 내려가니 등로는 다시 깊은 안부를 지나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도를 살펴보지만 이곳 역시 아무 표식이 없는 무명 안부이다.

좌측으로 계속되는 상기리와 우측으로는 내리를 이어주는 안부처럼 보이는데 사람들의 왕래는 많지 않은 듯 희미하게 사라지는 고갯마루처럼 보이는 안부이다.

내리는 경기도 화성시 정남면에 있는 마을로서 본면의 동부에 위치하며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인데 산으로 둘러싸인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내리라는 명칭이 생겼다.
자연마을로는 사근절이, 안암, 창말 등이 있으며 사근절이는 절이 있었다 하여 붙은 이름으로 사근동이라고도 부른다.
안암은 내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고 뒷산에 큰 바위가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며 창말은 조선시대에 정부의 곡식을 보관하는 커다란 창고가 있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그 상기리와 내리를 이어주는 안부를 지나 완만하게 오르니 금새 헬기장에 도착을 하는데 그 헬기장 지나 저 멀리 삼봉산이 빤히 올려다 보인다.

그 삼봉산 좌측으로는 한남정맥 오두지맥 분기점이라 생각되는 봉우리도 올려다 보이는데 실제로 산행을 진행시켜 보니 보이는 봉우리는 태행지맥 좌측의 비켜있는 무명봉으로서 오두지맥 분기점은 저 산줄기에 막혀 현재는 보이지 않는다.

특별한 것이 없기에 사진 한장 남기고 그 헬기장을 지나 삼봉산 정상을 보고 출발을 서두른다.


그 헬기장을 지나 완만하게 내려가니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걸어 보는 시간이다.

잠시 걸어 오르다 힘이 들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지나온 태행지맥 마루금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지만 중간에 자라고 있는 활엽수 가지들이 그 조망을 방해해 아쉽기만 하다.

다시 조금 더 올라 활엽수가 사라진 곳에서 뒤돌아 보니 너무나 아름다운 마루금이 길게 펼쳐져 있다.

방금 전 지나온 234.1봉과 225.3봉 지나 우측 저 멀리 태봉산과 건지산이 너무나 아름답게 다가오며 헤어지는 아쉬움을 노래하고 있다.


그렇게 안개와 박무속에 아름다운 태행지맥 마루금과 그 주위 풍경을 살펴보며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금새 소나무와 참나무들이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삼봉산(270.5봉, 지내산) 정상에 도착을 해 사진 몇장 남겨 본다.

삼봉산(270.5봉)은 화성시 봉담읍 상기리와 내리, 비봉면 쌍학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영진지도에는 산봉산으로 화성시에는 지내산으로 국토지리원의 자료에는 삼봉산으로 기록되어 있고 높이도 자료마다 260미터에서 270.5미터로 달라서 상당히 혼란스런 산이지만 국토지리원의 자료에 따라 270.5미터봉이라 칭한다.
삼봉산의 유래는 세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붙혀진 이름으로 이 지역사람들은 삼뱅이라 부르며 바깥삼뱅이, 안삼뱅이 등 주위의 지명들이 삼봉산을 중심으로 명명됐다.
화성상리유물산포지는 삼봉산 북사면 완경사지에서 삼봉산으로 이루어진 등산로 주변에 형성되어 있는데 약간의 삼국시대의 경질 타날문토기편과 조선시대 자기편이 채집되었고 입지와 채집 유물의 양상으로 볼 때 삼국시대와 조선시대의 분묘유적이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지내산(260봉)은 화성시에서 이곳 정상을 부르는 산으로 표기해놨는데 각 관청마다 그리고 각 지도마다 다른 이름과 해발고도를 적고있어 했갈리기만 한데 지내산의 지명 유래는 임진왜란때 민관군이 이 산에서 왜병과 접전을 벌이다 불리한 상황에 처했는데 그때 홀연히 짙은 안개가 피어나 조선군을 돕고 왜군을 물리첬다 한다.
그런데 안개가 피어나는 모습이 마치 지네가 독을 품는 모습같다 해서 지네산이라 부른다고 전해진다.

맨발님이 달아 놓은 삼봉산 270.5미터봉이란 안내판 앞으로 고도 260미터의 지내산이란 이정판이 보이는데 지도에는 270.5미터 또는 268.2미터라 되어 있어 270.5봉을 따르기로 한다.

이곳에서 등로는 우측 등로는 버리고 좌측 능선을 따라 진행을 해야 한다.


삼봉산 일명 지내산을 지나 좌측 등로를 따르니 갑자기 바위 암릉 등로가 이어지고 조심하며 걸어가니 생각보다 길게 그 바위 암릉구간이 이어지고 있다.

그 바위 암릉구간을 지나니 등로 앞 좌측으로 진행해야 할 마루금 좌측 넘어 270봉이 보이고 그 우측 가운데 저 멀리 태행산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이 아름답게 눈에 들어 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바로 앞에 보이는 저 270봉을 한남정맥 오두지맥 분기점이라 생각을 했는데 직접 걸어 보니 저 봉우리는 태행지맥 마루금이 아닌 좌측 무명봉으로서 태행지맥 마루금은 저 270봉 오르기 직전 안부처럼 생긴 곳에서 보이지 않는 우측으로 내려가며 이어지고 있었다.


그 바위 암릉구간이 끝나고 내리막 ㄷ으로로 이어지는 곳 우측으로 조망처가 보여 잠시 들어 가 보니 비봉면의 드넓은 들판에 우후죽순처럼 솟아 오르고 있는 건물들과 수많은 도로들 그리고 서해안 고속도로 위로 굉음을 내며 달리는 차량들의 소음이 아주 가깝게 들려오는 풍경이 이채롭다.

좌측 내리막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다시 무명 안부를 지나 올라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그곳에는 이정표 하나가 서 있다.

우측으로 진행하지 않는 방향으로는 능선쉼터 표시가 되어 있고 좌측 내리막 진행 방향으로는 백학고개라는 표시가 되어 있는 이정표이다.


좌측 백학고개라 표시 되어 있는 방향으로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지금까지 오두지맥 분기점이라 생각했던 270봉이 바로 눈 아ㅓㅍ으로 올려다 보이는데 그 봉우리 가는 나즈막한 안부에 이정표 하나가 서 있고 그곳에서 태행지맥 마루금은 직진의 등로를 버리고 우측의 태행산정상 1.65 Km 방향으로 90도 꺽어 진행을 해야 한다.

직진 방향으로는 270봉 넘어 상기리로 이어지는 등로가 나타난다고 표기가 되어 있다.

상기리는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에 있는 마을로서 마을 대부분의 지형이 비교적 완만한 구릉성 지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쪽으로 기천저수지가 위치해 있다.
자연 마을로는 사반, 상기, 호연 마을 등이 있는데 사반 마을은 고려 때 사량부곡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며 상기 마을은 지형이 키처럼 생겼다 하여 이름 붙여지게 되었다.
호연 마을은 호수가 있었다는 의미에서 불리워진 이름이다.


등로 우측의 태행산 가는 내리막 등로를 타고 걸어 내려가니 쓰러진 나무들이 등로를 막아 진행에 방해를 주고 있지만 심하지는 않기에 조심하며 진행을 한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 내려가니 평이한 젖은 낙엽 등로를 타고 곧이어 백학고개 안부에 도착을 한다.

좌측으로 봉담읍 호연동과 우측의 쌍학리를 이어주는 고갯마루로서 백학고개라는 이름은 쌍학리의 백학동에서 유래된 이름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거리 표시가 아무래도 이상하다.

쌍학리는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에 있는 마을로서 학의 형상의 산세인 산간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학동, 동학동, 백학동 등이 있는데 학동은 쌍학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흰 학이 많이 깃들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고 동학동은 학동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백학동은 지형이 학처럼 생겼다 하여 붙은 이름으로 동학동과 백학동을 합하여 쌍학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방금 전 삼봉산삼거리에서는 1.65 Km거리라는데 그곳에서 단지 300미터 진행해온 이곳에서는 630미터라 되어 있으니 헷깔리기만 한데 이것은 아마도 이 백학고개 바로 위에 있던 오두지맥 분기점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 백학고개 안부를 지나 완만하게 오르니 다시 소나무 등로가 열리고 바위를 지나 너무나 호젓한 등로를 따른다.

잠시 더 그 평이한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다시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계단이 나타나고 그 계단을 타고 오르니 이정표 하나가 서 있고 등로 좌측으로는 헬기장이 우측으로는 태행지맥 마루금이 열려있는데 마루금을 타고 우측으로 조금 걸어 들어가니 소나무 가지 위에 준.희님이 오두지맥 분기점이란 이정판을 달아 놨다.

조만간 다시 내려 와 한번 더 올라와야 할 오두지맥 분기점이기에 눈으로 보며 가슴속에 남겨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한남오두지맥은 한남정맥의 수리산부근 감투봉에서 분기한 서봉지맥이 화성시 봉담읍 장안대뒤에서 서쪽으로  한 가지를 쳐 태행지맥을 분기하고 태행지맥은 다시 태행산(268봉)에서 남서쪽으로  또 한 기지를 쳐 화성시 매향리 서해바다에 이르는 도상거리 31.9 Km되는 산줄기를 오두지맥이라 한다.


오두지맥 분기점에서 헬기장 지나 오두지맥 마루금을 아쉽게 바라본 후 뒤돌아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267.6봉을 지나 소나무 등로 위에 264봉으로 이동을 한다.

잠시 더 진행을 하니 조망이 열리는 능선으로 오르고 그곳에서 지나온 방향과 진행 방향을 살펴보니 환상의 조망이 펼쳐져 있다.

이제 눈 앞으로 다가온 태행산 가는 벌목지대를 만나 평이하게 걸어 그 전망데크가 보이는 태행산 방향으로 오르니 그 전망대 직전 토사 방지포 위에서 뒤돌아 본 태행지맥 마루금과 조만간 올라야 할 오두지맥 마루금이 환상을 노래하고 있다.


이제 등로 좌측 앞으로는 비봉면 지나 화성시로 이어지는 드넓은 들판 위에 수많은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는 거대한 공사장과 그 공사장 사이마다 길게 뻗어 있는 도로들과 서해안 도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청요리는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에 있는 마을로서 태행산 동쪽에 있는 산간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청룡동, 요곡동 등이 있는데 청룡동은 청요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태행산의 청룡(왼쪽)이 된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요곡동은 청룡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용의 머리와 같다 하여 용두동 또는 용머리라 한데서 붙은 이름인데 청룡과 요곡의 이름을 따서 청요라는 명칭이 생겼다.

비봉면은 경기도 화성시의 북부에 위치한 면으로 북쪽 끝에 시화호가 있는데 8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현재의 비봉면은 조선 시대말 남양군 며지곶면(혹은 미지곶면)과 저팔리면 그리고 인천부의 월경지였던 이포면으로 나누어져 있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 3개 면을 합쳐 비봉면으로 하였다.
며지곶면은 현재의 면 북쪽 즉 구포리, 양로리, 쌍학리 일대에 있었고 저팔리면은 현재의 면 남쪽 자안리, 요곡리 일대에 있었다.
한편 이포면은 현재의 삼화리 배꽃지와 이화동 일대에 있었다.
저팔리면에는 원래 고려 시대 재양현 읍치가 있었는데 오늘날의 비봉면 자안리가 그곳으로 추정된다.
동국여지지에 재양현은 부의 동쪽 10리에 있고 옛날 안양현이었는데 고려 현종 때 재양현으로 바뀌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봉이라는 면 이름은 1914년 행정구역 때 붙인 것인데 비봉산에서 따온 것으로 비봉산은 예로부터 남양의 진산이었다.
이 때문에 옛 읍지나 고지도들에서 빠짐없이 기록되었으나 지금은 비봉산 대신에 구봉산으로 불리며 구봉산은 행정구역상 남양동에 속하는데 언제 이 이름을 붙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한편 비봉면의 북쪽 끝에 위치하는 구포리는 오래전부터 중요한 포구 중의 하나로 인식되었고 5일장이 섰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각종 고지도에 구포가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고 1872년지방지도에 구포장이 표시되어 있다.


그렇게 한동안 주위 풍경과 조망을 즐긴 후 다시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드디어 태행지맥 이름을 낳게한 태행산 정상의 나무데크에 도착을 해 태행산 안내도를 사진에 담아 본다.

다만 정상에는 정상석 하나 세워져 있지 않아 태행지맥이란 이름까지 만들어 놓은 산치고는 아쉬움이 남는 시간이다.

태행산(295봉)은 화성시 비봉면 쌍학리, 자안리, 청요리의 경계있는 비봉면의 진산으로서 정상에는 데크목 광장에 휴게용 의자가 있고 주위에는 산불이 난 흔적들이 많이 보인다.
태행산의 지명 유래는 조선 500년 내력의 풍수비기를 다룬 손감비결에 의하면 화성시 비봉면에 있는 태행산에는 이성계에 얽힌 전설이 있다.
이성계가 자기의 태를 묻기 위해 명산을 찾던 중 이산의 양지 바른곳에 태를 묻었다.
그후 이성계 태를 묻은 산이란 뜻에서 태행산이라 이름을 지였다.
태행산 기슭에는 재양현성이 있는데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태행산(292봉) 기슭에 있는 포곡식(성 내부에 계곡을 포용하고 있는 형태) 석축으로 태행산 남쪽 기슭의 해발 100∼110m 정도 높이의 경사면을 깎아내 정상부의 사용 면적을 넓히고 이를 최고점으로 하여 계곡을 둘러싸며 성벽을 쌓았다.
성벽 안쪽 계곡 부위에도 계단식으로 다시 경사면을 깎아 건물터를 두었다.
성내에는 가장자리를 돌로 쌓은 우물이 1곳 있으며, 건물지가 2동, 문터로 추정되는 곳이 1곳 있으며 문터 옆에는 주춧돌로 보이는 큰돌이 놓여 있다.
성 정상부의 면적은 300평 정도에 이르며 원래의 성벽 길이는 300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봉면 청요리에 있는 성곽으로 고려시대 속현인 재양현의 소재지를 둘러싸고 있던 성으로 추정된다.


다시 태행산 정상에서 시원하게 펼쳐진 주위 조망과 풍경들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하고 이제 진행 방향을 살펴보니 마루금 좌측으로 드넓은 군부대가 내려다 보이고 그 우측으로 이어지는 태행지맥 마루금이 흐르고 있는데 이제 제대로 된 산다운 산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더욱 주의 깊게 진행 방향의 마루금을 한번 더 살펴본 후 곧바로 그곳 태행산 정상을 출발해 나무데크를 내려선다.


나무데크를 내려서자 마자 직진으로 나 있는 뚜렷한 등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나무데크를 따라 90도 걸어 간 방향으로 진행하니 다시 멋진 소나무 등로가 반겨준다.

그 소나무 등로를 타고 걸어 내려가니 갑자기 등로 한가운데에 민간인 출입금지 팻말이 서 있는데 방금 전 태행산 정상에서 내려다 봤던 군부대에서 세워 놓은 경고판처럼 보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내려가야 하기에 그 민간인 출입금지 경고판을 지나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쓰러져 가는 깃대가 보이는데 아마도 사격 훈련시 사용하던 깃대봉이 아닐까 생각되는 것이다.


계속 이어지는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타고 걸어 내려가니 갑자기 급경사 내리막 등로로 변하면서 등로가 희미하게 사라지기 시작한다.

어렵게 사라진 등로를 찾아 내려가니 등로는 다시 좌측 잡목쪽으로 이어지는데 그 잡목을 헤치고 내려가니 다시 등로는 우측 사면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 사면 등로에는 작은 자갈들이 널려있는 짧은 너덜지대를 지나 잡목이 우거진 등로로 이어지고 있어 진행에 여간 어려움이 큰 것이 아니다.

어렵게 그곳을 지나니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 조금은 수월하게 내려가고 잠시 그 비포장 임도를 따르니 군부대 경고판이 서 있고 잠시 후 임도 우측으로 녹슨 철조망이 따라오며 폭발물 위험 경고판도 보인다.


그 경고판을 옆에 두고 계속 내려가니 갈림 삼거리 임도가 나타나는데 그곳에도 군부대 경고판 하나가 서 있고 좌측으로는 군부대 하산 임도처럼 보여 우측으로 올라가니 등로는 이제 그 고갯마루 좌측의 잡목이 우거진 능선으로 이어지고 있다.

잡목이 우거진 능선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오르니 부러진 깃대봉이 박혀있는 무명 140봉을 지나 잠시 후 넓은 공터가 보이는 159.4봉에 도착을 한다.

잡목 사이로 공터 좌측 앞으로는 군부대 건물들이 희미하게 내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공터봉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등로는 다시 완만한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고 이제는 등로 우측으로도 잡목 가지 사이로 군부대 건물이라 생각되는 건물들이 내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잠시 바위 지대를 지나 걸어 내려가니 등로에 떨어져 나뒹굴고 있는 나뭇가지와 낙엽 등로가 이어지고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오르니 초소가 서 있고 높은 깃발 하나와 이동통신탑이 보이는 초소봉에 도착을 한다.

잡목들이 막아 조망이 전혀 없기에 정상부만 사진에 남기고 곧바로 낙엽이 수북히 쌓여있는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 본다.


잠시 내려가니 등로는 넓은 비포장 임도 같은 낙엽 깔린 등로로 바뀌고 그 임도 옆으로는 전기줄이 걸려있는 전봇대도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 내려가니 갑자기 2차선 포장도로가 나타나는데 살펴보니 도로 좌측으로는 군부대 후문인 듯 위병소가 보이고 초병들의 모습도 보이는데 큰 마찰 없이 그 포장도로를 건너 절개지를 타고 다시 능선으로 오른다.

이 도로를 타고 우측으로 걸어가면 양노리가 나올 것이라는 지도가 보이는데 양노리는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에 있는 마을로서 산간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건로동, 미륵동, 백로동 등이 있는데 건로동은 양로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전에는 마을 앞까지 갯물이 드나들어서 널문으로 그 물을 막았다 하여 널문이라고도 부른다.
미륵동은 돌미륵이 있어 붙은 이름이고 백로동은 마을 뒷산에 노송이 우거져 백로의 서식지가 된 데서 붙은 이름이며 건로동과 백로동의 이름을 따서 양노라는 명칭이 생겼다.


군부대 2차선 포장도로를 건너 다시 능선으로 오르니 아카시아 가시가 격하게 반겨주고 희미한 주 등로를 찾아 오르다 등로 우측을 살펴보니 방금 전 내려온 초소봉과 우측 저 멀리 태행산 정상이 올려다 보인다.

어렵게 희미한 주능선을 찾아 이제 좌측으로 오르니 큰 웅덩이와 소나무 등로가 이어지고 잠시 후 작은 자갈들과 벌목된 나무들이 널부러져 있는 등로를 지나 우측으로 172봉 가는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172봉이 궁금해 올라가 보니 등로 우측으로 타이어 교육장을 지나 높은 2층 초소가 서 있는 172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그 초소가 서 있는 172봉을 내려 와 갈림 삼거리에서 이제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우측 희미한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큰 바위지대를 지나 작은 돌탑 하나가 서 있는 무명봉도 지난다.

그 무명봉을 지나 내려가니 녹슨 안테나 하나가 보이고 또 다른 바위 무명봉을 넘으니 소나무 등로를 지나 167.7봉에 도착을 한다.

이곳 정상에는 준.희님의 이정판이 나뭇가지에 걸려잇고 그 옆으로는 그네가 걸려있어 그네에 앉아 보고 출발을 한다.


그 그네가 걸려있는 167.7봉을 지나 걸어 내려가니 갑자기 타이어 등로가 나타나는데 무심코 그 타이어 등로를 따라 잠시 더 걸어 내려가니 등로는 이곳에서 좌측으로 크게 꺽어 진행하도록 되어 있다.

잠시 더 이곳에서 정상 등로를 찾아 왔다리 갔다리하며 어렵게 등로를 찾아 내려가고 잠시 후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113봉을 넘는다.

그 무명봉을 지나 내려가니 멋진 소나무 등로가 열려있어 편안하게 걸어 내려가 보는 시간이다.


안부 같지 않은 안부를 지나 걸어가니 송전탑 하나가 보이는데 아무리 찾아 봐도 송전탑 번호판이 보이지 않는다.

그 송전탑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또 다른 27번 송전탑이 나타나고 그 송전탑을 통과해 걸어가니 갑자기 높은 절개지가 나타나는데 그 절개지 위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어 곧바로 4차선 포장도로로 내려 갈 수가 없어 보인다.

이곳 절개지 정상에서 좌측 수로를 타고 걸어 내려가니 묘지지대를 지나 39번 4차선 포장도로에 도착을 한다.


시간을 보니 이제 오전 11시가 가까워진 시간으로 새벽 일찍 누룽지를 먹고 나왔더니 허기가 지기 시작하고 그 39번 도로 옆에 보이는 금탑편의점과 식당 건물로 들어가 간단히 해물 짬뽕 한그릇으로 점심을 해결하기로 한다.

생각보다 양이 적고 맛은 그저 그런 식당이었지만 산행 중 허기가 지는 시간이다 보니 국물까지 깨끗하게 비우고 물 한컵에 따뜻한 커피 한잔까지 마시고 나오니 다시 힘이 나기 시작한다.


금탑 편의점 식당에서 해물 짬뽕으로 점심식사를 마치고 차랴량 통행이 뜸한 시간을 이용해 그 39번 4차선 포장도로를 무단 횡단해 건넌다.

도로를 건너 절개지를 타고 오르니 가시나무가 발목을 잡지만 조심해서 진행해 25번 송전탑을 통과한다.

멋진 소나무로 이뤄진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108봉에 도착을 하고 사진 한장 남긴 후 다시 내려가니 간벌된 나뭇가지들이 널부러진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 4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도로의 철조망을 만난다.

어렵게 그 철조망이 끝나는 지점으로 내려가 그 4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이제 우측으로 그 도로를 따라 걸어간다.

이곳에서부터 새로운 도로와 고속도로 그리고 채석장으로 인해 정상 마루금을 타지 못하고 도로를 따라 한동안 걸어가야 하는 시간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 4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우측 고갯마루를 넘어 양노리 방향으로 걸어 내려가니 도로 좌측으로 성일유화 공장 건물과 이정석이 보이고 잠시 후 비봉폐차산업 공장과 광고판도 보인다.

그곳에서 이제 4차선 포장도로를 직진인 우측으로 보내고 좌측 1차선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양노4교 방향으로 걸어 들어가니 도로 우측으로는 비봉폐차산업 공장을 막고 있는 함석 철판이 담장을 대신하고 있다.

잠시 후 차량들이 주차되어 있는 지하통로를 통해 서해안고속도로를 통과해 본다.


양노4교란 지하통로를 통해 서해안고속도로를 통과하니 또 다른 지하통로 하나가 나타나는데 그 지하통로 앞에는 쇠철창살이 쳐져 있어 잠시 고민 후 그 쇠철창살 아래의 공간을 이용해 어렵게 통과를 해 본다.

그 지하통로를 지나니 이제 드넓은 공터 위에 소나무들이 식재된 지역이 나타나는데 지도마다 다른 골제채취장 이름들이 나타난다.

어느 지도에는 삼표산업골재채취장으로 다른 지도에는 남양개발골재채취장으로 나와 있는 그 공터를 지나 걸어가니 저 멀리 산 하나가 통째로 사라져 버린 골재채취장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이곳에서 소나무 식재지를 따라 걸어가다 좌측을 살펴보니 서해안고속도로 우측 절개지를 따라 잡목이 우거진 능선이 보이고 그 중앙부에 거대한 건물들이 보이는데 서해안고속도로가 생기면서 등로가 사라지고 절개지와 골재채취장이 자리잡고 있는 안타까운 풍경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등로 좌측 위로 사라지는 145봉이 올려다 보이지만 도저히 올라갈 수가 없어 소나무 식재지를 따라 걸어가니 고라니가 놀라 달아나고 곧이어 거대한 삼표골재채취장 안으로 들어가 걸어가며 앞을 살펴보니 명맥만 남아 있는 사라지는 태행지맥 마루금이 눈물겹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등로 우측으로는 거대한 골재채취장이 펼쳐져 있고 그곳으로는 깊은 절개지가 내려다 보이는데 현기증이 날 정도로 깊은 깊이를 보인다.

등로 좌측으로는 사라지는 태행지맥 마루금이 따라 오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곳으로 올라 보지만 가파른 절개지에 골재를 채취한 곳이라 돌과 흙이 솟아져 도저히 올라갈 수가 없다.

그 절개지 등로 우측으로 나 있는 비포장 임도를 타고 걸어가니 무명봉 지나 출입금지 그물망이 보이고 그곳을 지나 마지막 절개지를 타고 무명봉 정상의 잡목지대로 오른다.

등로 좌측으로는 북양동의 북양산업단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고 그곳에는 수많은 공장 건물들이 펼쳐진 풍경도 눈에 들어 온다.

어렵게 무명봉으로 오르니 잡목이 우거져 있고 이제 그 절개지를 우측에 두고 아슬아슬한 절개지 위를 따르니 109봉에 도착을 하는데 그곳에서 지나온 우회 마루금과 정상마루금 그리고 바로 발 아래로 펼쳐진 골재채취장이 빤히 내려다 보인다.


우측에 삼표산업골재채취장 절개지를 두고 조심스럽게 걸어가니 등로는 이제 그 골재채취장과 헤어져 좌측 낙엽진 등로로 이어지는데 잠시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북양산업단지 넘어 비봉산이 빤히 올려다 보인다.

그렇게 비봉산을 조망하며 걸어 내려가니 다시 가파른 절개지가 나타나고 조심하며 그 절개지를 따라 내려가다 앞을 살펴보니 이곳 역시 옛날 지도에 나타나 있던 저수지는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새로운 공단의 공장들이 들어서며 원 지맥 마루금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아슬하게 남아 있는 절개지의 지맥 마루금이 언제 사라질지 모를 안타까운 현실에 마음이 무거운 시간이기도 하다.

시간이 지나 후답자들이 오르게 되면 이 태행지맥 마루금이나 살피며 진행할 수 있을련지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렇게 조심하며 절개지를 내려가니 다시 2차선 포장도로와 만나는데 도로 좌측 저 멀리에는 현대. 기아 기술연구소가는 방향 표시와 318번 화성시청 그리고 좌측으로는 322번 도로를 타고 39번 도로와 만나는 봉담과 자안리 가는 방향이 우측으로는 322번 도로를 타고 송산과 남양으로 갈 수 있다는 도로 표지판이 보인다.

도로 옆으로는 비봉면과 남양읍을 가르는 고갯마루라는 사실을 알리는 도로 표지판들도 보이는 고갯마루인데 이름은 없는듯 보인다.


도로를 건너 절개지를 타고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는 다시 드넓은 공사 현장이 나타나고 그곳에도 몇동의 공장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옛날 지도에는 등로 우측 아래에 양노저수지가 있었다고 표기가 되어 있는데 현실은 저수지가 완전히 사라지고 수많은 공장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는 공장지대로 변하고 있다.

잠시 더 그 절개지로 걸어 오르니 능선 우측 사면으로 등로가 열려있어 따르지만 끝자락에서 절개지를 도저히 내려 갈 수 없어 뒤로 돌아 나와 우측으로 어렵게 그 절개지를 내려가 본다.


절개지 아래로 몇개의 공장 건물들을 지나고 그 절개지를 내려가니 지금도 한창 공사중인 공사장 가장자리로 떨어진다.

그곳에서 어렵게 콘크리트 옹벽을 올라 이제 우측으로 나 있는 신설 포장도로를 따라 90도 꺽어 걸어간다.

잠시 걸어가니 진행 방향으로 신설되는 공장 건물들이 도로 양쪽으로 들어서 있고 그 끝자락에는 또 다시 공사중인 절개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걸어가다 살펴보니 도로 좌측으로는 주)우진프라임이 우측으로는 주)혜성복층유리공장이 보이고 그 가운데를 통해 걸어가 본다.


그 공장 건물들을 통해 공사장 쪽으로 오르는데 오늘이 일요일이라 그런지 근무를 하는 직원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공사중인 절개지를 오르니 지나온 등로 뒤 저 멀리 비봉산이 보이고 이제 등로는 좌측 공장 건물이 있는 방향으로 꺽어 공장 마당 방향으로 걸어가 본다.

잠시 걸어가니 바로 앞에 보였던 공장 건물 앞에는 F & L 이란 커다란 이정석이 서 있어 이곳의 공장과 회사 이름을 알 수가 있다.

 

그 F&L 회사를 지나 1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완만하게 내려가니 도로 좌측으로 북양산업공단과 비봉산이 조금 더 선명하게 보이고 곧이어 도로 좌측으로 명신인퍼스란 회사를 지난다.

강아지 두마리의 격한 환영을 받으며 걸어 내려가니 도로 우측으로는 스테이션과 현대란 이정판이 보이는데 그 건물 꼭대기에는 커다란 광고판에 THERMAL MASTER란 글자도 보인다.

그곳을 지나 잠시 더 걸어가니 도로 좌측 공장 건물 담벼락 위에 엄마네식당매점이란 입간판이 보이는데 그 식당매점을 지나자 마자 좌측으로 나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 방향으로 걸어 진행을 한다.


좌측으로 걸어 들어가니 도로 우측으로 미경특수강이란 공장 건물을 지나 정면으로 한국아이엠이란 공장 건물이 보인다.

그 한국아이엠이란 건물 앞에서 우측으로 90도를 꺽어 걸어가니 주)델코코란 회사 이름이 붙어 있는 건물에 도착을 하는데 그 회사로 통하는 곳에 녹색 철망이 쳐져 있어 진행이 불가능 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지도와 트랙을 살펴 보지만 그곳을 통과하지 않으면 121.6봉을 오를 수 있는 방법이 없기에 아무도 없는 틈을 이용해 그 녹색 철망을 넘어 공장 건물 뒷편에서 좌측 능선 방향으로 빠르게 걸어 진행을 한다.


그 델코코란 회사 건물을 지나는데 살펴보니 이곳에 있는 공장 건물은 비어 있는 폐 건물처럼 보인다.

낙엽이 깊게 깔려 있는 능선으로 들어가니 희미한 등로가 나타나고 그 희미한 등로를 타고 오르니 주능선에 도착을 하는데 그곳에서 등로 좌측으로는 북양산업공단의 드넓은 공장지대가 한눈에 들어 오고 그 뒤로 여전히 비봉산이 올려다 보인다.

화성시 남양읍 북양동에 있는 북양공단은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마을로서 행정은 남양동이 관할하는데 문화유적으로 봉림사 목아미타불좌상(보물 980)이 있다.
북동쪽으로 비봉면, 서쪽으로 송림동, 남서쪽으로 남양동(법정동), 남쪽으로 무송동과 접하는 법정동으로서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매홀군, 통일신라 때는 수성군, 고려시대에는 수주, 수원부, 수원군에 속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수원도호부에 속하다가 1896년(건양 1) 수원군 고서미동이 되었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남양의 북쪽에 있다 하여 북양리라 하여 수원군 음덕면에 편입되었다. 1949년 화성군 남양면 관할을 거쳐 2001년 3월 화성군이 화성시로 승격하면서 행정동인 남양동의 법정동이 되었다가 시대에 따라 서미동, 서미동, 고서미동을 거쳐 지금의 북양동이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한말에 중석 광산이 개발되면서 생긴 광산동, 마을이 양지바른 남향에 자리잡았다 해서 이름 붙은 양지동, 옛날 절이 있었다 해서 불당골로 불리기도 하는 염치(염치동, 염지동) 외에 함박골, 갈메골, 작은갈메골 등이 있다.
동 전체가 도시개발구역으로 지정되어 있고 여러 개의 농원이 자리잡고 있으며 313번과 322번 지방도가 지나고 체육시설로 화성리더스골프장이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의 말사인 무봉산 봉림사와 봉림사 목아미타불좌상(보물 980)이 있다.


북양산업공단을 내려다 보며 잠시 더 걸어가니 많은 묘지지대가 나타나고 그 묘지들을 지나 걸어가니 등로가 사라지고 잡목과 좌측으로 절개지 아래로 펼쳐진 북양산업공단 사이로 너무나 힘들게 걸어 보는 시간이다.

잠시 그 절개지 위 잡목지대를 뚫고 걸어가니 다시 정상적인 등로가 나타나 그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오르는데 갑자기 몸이 무거워지며 진행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래도 한발 두발 조심하며 걸어 오르니 드디어 어렵게 121.6봉에 도착을 해 준.희님이 달아 놓은 이정판을 만난다.


잡목이 우거진 그 121.6봉에서 사진 한장 남기고 곧바로 출발하니 등로 좌측으로 또 다시 많은 묘지지대가 나타나는데 그곳으로 가 살펴보니 북양산업공단과 비봉산이 여전히 빤히 보이고 다시 정상 등로로 복귀해 걸어가니 등로 위에는 녹슨 철조망과 콘크리트 말뚝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잠시 더 낙엽 등로를 타고 걸어 내려가니 공장 건물로 사용되는 민가 옆으로 내려 와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가니 SK주유소가 보이는 313번 4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염치고개에 도착을 한다.

염치고개(북양1동 버스정류장 또는 양노3리 버스정류장)는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북양리에 있는 고개로 남양에서 비봉으로 이어지는 313번 4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며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가 있다.
지명의 유래는 북양리 염지동에 옛날 마을 뒷산에는 절이 있었으나 폐사가 된 후 한때는 불당골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주민들이 그 절을 잊지 말고 염두해 두라는 뜻에서 염티고개라 부르다가 다시 염치동 또는 염치로 불려졌다고 전해진다.


그 염치고개에서 313번 4차선 포장도로를 건너야 하는데 쉽지 않아 차량 통행이 뜸한 틈을 타 무단 횡단을 하는데 중앙 분리대에서 갑자기 차량 통행이 많아져 그 중앙분리대 정상에서 잠시 머무르는 웃지 못할 상황도 연출하면서 힘들게 통과를 한다.

313번 도로 좌측 아래에는 현대 OIL BANK 주유소가 보이는 곳에서 밭을 타고 올라 우측 주능선 방향으로 걸어 올라가 본다.

잠시 잣나무 등로를 따르니 많은 남양홍씨 묘지지대를 만나고 잠시 후 경주김씨와 부인 묘지를 지나 남양홍씨 종묘당을 통과한다.

그 묘지 뒤 잡목 구간으로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는 녹슨 철조망이 따라오고 그 철조망에는 개인사유지라 출입을 금지한다는 출입금지 경고판이 붙어 있다.


다시 계속 이어지는 소나무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등로 우측의 녹슨 철조망과 경고판은 등로를 따라 온다.

다시 완만하게 오르니 벗나무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96봉을 지나 멋진 소나무 등로가 열려있고 그 소나무 등로를 타고 계속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이제 등로 우측으로 118.1봉으로 오를 수 있는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한다.

이곳에서 우측 118.1봉은 포기하고 좌측 소나무와 잡목이 우거진 사라진 등로를 찾아 어렵게 걸어보는 시간이다.


그 118.1봉 갈림 삼거리에서 좌측 희미한 등로를 찾아 진행을 하니 금새 뚜렷한 등로를 만나 걸어가니 멋진 소나무 등로가 다시 열리기 시작한다.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오르니 103봉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하고 이곳에서도 우측의 등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90도 꺽어 진행을 한다.

다시 이어지는 멋진 소나무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갑자기 등로 우측으로 자작나무 식재지가 나타나고 이제부터 한동안은 그 자작나무 식재지대를 따른다.

등로 좌측으로는 소나무 군락지가 우측으로는 자작나무 군락지를 두고 걸어 오르니 생각보다 등로는 뚜렷하게 잘 나 있다.


한동안 그 자작나무 조림지를 타고 걸어가니 드디어 그 자작나무 조림지는 끝이나고 소나무 등로가 뚜렷한 마루금을 따른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 오르니 몇기의 잘 조성된 묘지지대들이 나타나고 그 묘지지대를 통과하니 또 다시 등로 우측으로 자작나무 조림지가 다시 나타난다.

그렇게 한동안 평이한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87.1봉에 도착을 하는데 정상에는 고사목 두어개가 널부러져 있다.

다시 뚜렷한 소나무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는데 좌측의 염티동에서 우측의 존의동으로 이어주는 고갯마루로서 현재도 사람 의 통행이 제법 있는지 뚜렷하기만 하다.

 

그 안부를 지나 다시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많은 묘지짇대가 나타나고 그곳으로 가 살펴보니 저 멀리 북양산업공단과 비봉산이 올려다 보인다.

그 묘지지대를 나와 다시 정상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키 작은 잣나무 등로가 짧게 이어진다.

그곳을 지나 오르니 107.6 삼각점 봉에 도착을 해 준.희님이 달아 놓은 이정판을 사진에 담아 본다.

지도를 보니 많이도 진행을 하였지만 다음 구간 산행을 위해 대중교통으로 접근이 편리한 곳까지 조금은 빠르게 진행을 해 마치기로 한다.


그 107.6 삼각점봉을 지나 걸어가니 평이한 등로가 이어지고 곧이어 아카시아 가시나무 지대를 지나 103.3봉에 도착을 한다.

그곳을 지나 낙엽진 커다란 활엽수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멀어진 북양공단과 비봉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다시 소나무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101.4봉에 도착을 하고 잠시 후 넓은 비포장 임도인지 아니면 넓은 공터 같은 곳을 지나 진행을 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우측의 뚜렷한 등로를 버리고 좌측의 잡목 등로를 따랐어야 했는데 무심코 진행하다 짧은 알바 후 정상 마루금으로 복귀를 한다.

잠시 더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녹색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는데 진행하다 살펴보니 좌측은 골프장인 듯 보이는데 화성퍼블릭골프장이다.


등로 좌측으로 화성 퍼블릭 골프장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설치된 녹색 철조망을 따라 걸어 내려가니 철조망에 많은 잡풀들과 잡목들이 우거져 진행하기 어려운 곳에서 등로는 이제 골프장 철조망과 헤어져 우측의 멋진 낙엽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한동안 그 등로를 따르니 등로 좌측으로 남양읍의 송림동 마을이 아름답게 다가와 있다.

남양읍 송림리는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법정동으로 행정은 남양동이 관할하는데 문화유적으로 남양홍씨 열녀 정려문(화성시향토유적 12)과 정원채 고가(경기민속자료 6)가 있다.
동쪽으로 비봉면, 서쪽으로 원천동, 남쪽으로 남양동(법정동)과 북양동, 북쪽으로 시동과 수화동과 접한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매홀군, 통일신라 때는 수성군, 고려시대에는 수주와 수원부 및 수원군에 속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수원도호부에 속하다가 1896년(건양 1) 수원군 관할이 되었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수원군 음덕면 송림리가 된 뒤 1949년 화성군 남양면 관할이 되었다. 그뒤 2001년 3월 화성군이 화성시로 승격하면서 행정동인 남양동의 법정동이 되었으며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에 소나무가 우거져 아름답다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송림으로 지었다고 한다.
자연마을로는 삼부실, 음부골, 송림골, 가운데골, 맨막골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삼부실은 한씨와 정씨 및 이씨 성을 가진 세 사람이 부유한 생활을 했다는 데서 유래하였으며 삼부실동이라고도 한다.
322번 지방도가 지나고 문화유적으로는 남양홍씨 열녀 정려문(화성시향토유적 12)과 정원채 고가(경기민속자료 6)가 있다.

그렇게 조망을 즐기며 걸어 내려가니 드넓은 밭 경작지가 나타나는데 그곳에는 우사 거름이 펼쳐져 있고 그 끝자락 좌측으로 아름다운 민가 한채가 보인다.


그 밭 경작지 우측 가장자리를 타고 한동안 그 밭이 끝나는 지점까지 걸어가니 밭 좌측의 민가에서 키우고 있는 강아지 두마리가 격하게 이방인을 반겨 준다.

다시 짧은 능선을 타고 걸어가니 등로 우측으로 인삼포가 내려다 보이고 곧이어 1차선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타나는데 이 고개는 송림리와 남전리를 이어주는 고개로서 그 주위에는 생활 쓰레기가 한가득이라 눈살이 찌푸려진다.

그 시멘트 포장도로를 건너 좌측에 매실과수원 철조망을 두고 다시 능선으로 오른다.


그 매실 철조망을 타고 오르니 등로는 다시 멋진 소나무 등로로 이어지는데 특이하게도 그 소나무 등로 양쪽으로는 벌목된 나뭇가지들을 쌓아 뚜렷한 등로를 만들어 놓고 있다.

그렇게 한동안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등로 좌측 소나무 가지에 준.희님의 응원판이 달려있는데 늘 감사한 마음으로 인사를 드리는 시간이다.

그 응원에 힘입어 조금은 빠르게 소나무 등로를 타고 올라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다시 간벌된 나무들이 널부러져 있는 등로를 지나 멋진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자꾸만 누가 이런 멋진 등로를 만들어 놨을까 궁금해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다시 계속 이어지는 소나무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오르니 소나무 밑둥이 불에 탄 흔적들이 나타나는데 살펴보니 이곳 주위 소나무 밑둥에는 모두 그을린 흔적들이 보인다.

아마도 산불이 났었던 지역이지만 재빨리 불을 껐는지 큰 피해는 없었던 듯 보이는 85봉 정상도 넘는다.

 

불난 흔적이 있는 85봉을 넘어 걸어가니 여전히 멋진 소나무 등로가 이어지는데 이제 평이한 등로를 따라 진행이 된다.

그렇게 조금 더 걸어가니 등로 우측으로 벌목 후 나무들을 식재한 조림지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진행 방향을 살펴보고 등로 우측을 살펴보니 저 멀리 비봉면과 화성비봉택지조성지구 넘어 서수원 방향의 건물들과 나즈막한 산줄기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곳의 한쪽에 서봉지맥 마루금도 보일 것이지만 잘 구분이 되지 않으니 그저 과거의 추억만 되새기며 걸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다시 계속 이어지는 뚜렷한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소나무가 자라는 93.2 무명봉을 넘어 다시 밤나무들이 자라는 안부를 통과하고 완만하게 오른다.

잠시 더 오르니 이제부터 뚜렷하던 등로는 사라지고 잡목과 가시나무들이 앞길을 방해하는 지독한 잡목 구간으로 들어서기 시작한다.

벌써 가시에 찔리고 잡목에 긁히며 어렵게 걸어가니 등로는 직진의 뚜렷한 등로를 버리고 우측의 지독한 잡목지대를 지나 묘지 방향으로 걸어 본다.


즉 정상 마루금으로는 지독한 잡목과 가시나무 등로로 인해 도저히 진행이 불가능 하기에 등로 좌측의 묘지지대로 내려가니 뚜렷한 등로가 열려있고 그 등로를 따르니 멋진 소나무가 식재된 비포장 임도가 나타난다.

그 비포장 임도를 타고 내려가니 삼부실 고개인 77번 2차선 포장도로에 도착을 한다.

삼부실 고개는 화성시 남양읍 송전리 삼부실마을과 송림동을 잇는 고개로 77번 도로가 지나가는데 기존의 2차선 도로 옆에 새로운 4차선 도로를 건설중이라서 주변이 엄청 지저분하다.
삼부실의 지명유래는 이 마을에 산 한, 정, 이씨 성을 가진 세 사람의 내시가 부유한 생활을 했다는 데서 삼부실 또는 삼부실동이라 불려졌다고 한다.


삼부실 고개인 77번 2차선 포장도로에 내려서니 도로 좌측 앞으로 거대한 공사장이 펼쳐져 있는지 공사 소음이 들리면서 함석 철판으로 가림막을 쳐 놨다.

아무 생각 없이 그 삼부실 고개의 77번 2차선 포장도로를 건너 나즈막한 시멘크 옹벽을 넘어 밭 경작지를 지나 절개지로 오르니 눈 앞에 거대한 도로 건설 현장이 나타나며 발 아래로는 거대한 절개지가 펼쳐져 있어 진행하지 못하고 좌측 공사장으로 걸어 내려가 반대쪽 절개지를 타고 능선 중앙으로 다시 올라야 하는 지독한 공사장 현장을 통과해야 한다.

그런줄 알았으면 삼부실고개에서 77번 도로를 타고 좌측으로 내려가 공사장으로 곧바로 진행했으면 좋았을 것을 아쉽기만 하지만 어짜피 운동을 한다고 생각하니 견딜만 하다.

 

77번 구 도로를 대신할 4차선 직선화 공사를 하고 있는 공사장을 지나 반대쪽 절개지를 타고 그 절개지 중앙으로 오르니 좌측 능선 방향으로 등로가 나 있다.

능선으로 들어가기 전 지나온 마루금을 살펴보니 저 멀리 오늘 이 산객이 걸어 온 태행지맥 마루금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능선으로 들어가니 108 무명봉을 넘고 다시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간벌된 나무들이 널부러져 있고 그 사이마다 잡목들이 지독하게 우거진 오르막 등로를 헤치며 어렵게 올라 111.4봉 이정판에 도착을 해 잠시 배낭 내려 준비한 간식과 과일로 허기를 달래 본다.


그 111.4봉에서 간식으로 허기를 면한 후 다시 올랐던 지독한 잡목과 간벌된 나뭇토막들을 헤치며 내려가니 이제 등로는 우측 커다란 활엽수 등로로 이어간다.

잠시 더 걸어 내려가니 다시 간벌된 나뭇가지들이 널부러진 등로를 지나 묘지지대와 안부를 지나고 완만하게 올라 나뭇토막들이 보이는 111 무명봉에 도착을 해 물 한모금 마셔 본다.


그 111 무명봉을 넘자 이제 등로에는 아카시아 가시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잠시 후 그 아카시아 나무 사이마다 악마의 이빨를 연상시키는 커다란 가시를 드러난 엄나무 밭이 이어지고 있다.

이리 저리 피해가며 어렵게 걸어 보지만 결국 몇군데 가시에 찔려 붉은 피를 흘리고 만다.

참으로 진행하기 어려운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지금까지 걸었던 산행 시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속도가 나질 않는다.


너무나 힘들게 그 아카시아와 엄나무 가시지대를 지나니 다시 멋진 소나무 내리막 등로가 이어지고 곧이어 많은 묘지들이 줄지어 있는 곳에 도착을 해 그 묘지 뒷쪽 능선을 타고 걸어 본다.

등로 좌측으로는 묘지를 지나 거대한 목장이 보이고 그 아래로 논 경작지 지나 저 멀리 송림동 마을이 아름답게 내려다 보이는데 간간히 높은 아파트 단지들도 보인다.

남양읍 송림리는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법정동으로 행정은 남양동이 관할하는데 문화유적으로 남양홍씨 열녀 정려문(화성시향토유적 12)과 정원채 고가(경기민속자료 6)가 있다.
동쪽으로 비봉면, 서쪽으로 원천동, 남쪽으로 남양동(법정동)과 북양동, 북쪽으로 시동과 수화동과 접한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매홀군, 통일신라 때는 수성군, 고려시대에는 수주와 수원부 및 수원군에 속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수원도호부에 속하다가 1896년(건양 1) 수원군 관할이 되었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수원군 음덕면 송림리가 된 뒤 1949년 화성군 남양면 관할이 되었다. 그뒤 2001년 3월 화성군이 화성시로 승격하면서 행정동인 남양동의 법정동이 되었으며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에 소나무가 우거져 아름답다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송림으로 지었다고 한다.
자연마을로는 삼부실, 음부골, 송림골, 가운데골, 맨막골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삼부실은 한씨와 정씨 및 이씨 성을 가진 세 사람이 부유한 생활을 했다는 데서 유래하였으며 삼부실동이라고도 한다.
322번 지방도가 지나고 문화유적으로는 남양홍씨 열녀 정려문(화성시향토유적 12)과 정원채 고가(경기민속자료 6)가 있다.


계속 이어지는 묘지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묘지지대가 끝이나고 완만하게 내려가는데 그곳에도 많은 아카시아 나무들이 식제가 되었는지 줄지어 자라고 있어 조심하며 통과를 해 본다.

그 아카시아 지대를 지나 다시 나타나는 잡목 구간을 넘으니 묘지가 다시 나타나고 곧이어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를 통과한 후 밭 경작지를 넘어 시멘트 포장도로에 도착을 한다.

이곳 시멘트농로는 남양읍 원천동 원막마을과  송림동 양지말을 잇는 농로이다.

선답자들의 산행후기에는 이 시멘트 포장도로를 건너 인삼포로 진행을 하라고 도어 있는데 이제 인삼포는 사라지고 빈 밭 경작지가 펼쳐져 있다.


그 고갯마루에서 우측 비어 있는 밭 경작지의 가장자리를 타고 걸어가며 등로 좌측을 보니 커다란 농장인지 목장 건물이 보이고 우측으로도 마을이 예쁘게 내려다 보인다.

넓은 밭 가장자리를 타고 걸어 들어가니 다시 등로는 능선으로 들어가고 무명봉을 지나 소나무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내려가 본다.

고사목이 쓰러져 있는 무명봉을 넘어 걸어가니 다시 멋진 소나무 내리막 등로가 이어지고 다시 자작나무 조림지가 나타나는데 이제 그 조림지를 타고 걸어 본다.


잠시 자작나무 조림지를 지나 내려가니 지독한 잡목지대를 지나 나무들이 식재되어 있는 비포장 임도를 만나 우측으로 조금은 편안하게 걸어 본다.

그 비포장 임도를 타고 걸어가며 등로 좌측을 살펴보니 송림동 마을이 환히 내려다 보이고 그렇게 길게 그 비포장 임도를 타고 걸어 보는 시간이다.

한동안 걸어가니 비포장 임도가 합류되는 갈림 삼거리를 만나 이제 우측으로 걸어 내려가니 간간히 차량들이 소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계속 이어지는 비포장 임도를 타고 걸어 내려가니 4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성고개에 도착을 한다.

성고개(원천동)는 화성시 남양읍 원천동에서 송림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2차선의 4번 군도가 지나고 있고 우측으로는 원막마을이 보이는데 도로를 가로질러 절개지로 올라선다.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원천동은 조선조 중엽부터 원실이라 불려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기왕의 마을 이름 곧 원모동의 원자와 천곡동(천곡동)의 천자를 따서 원천리라 했다고 한다.
원묘동은 옛부터 원실이라 불려 왔으나 일모가 되면 서쪽 산이 마치 병풍과도 같고 포장친 것처럼 장관을 이룬 다는 뜻에서 원실의 원자와 일모의 모자를 따서 원모동이라 했다고 한다.


4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성고개를 건너 보이는 비포장 임도를 타고 걸어 오르니 임도 좌측으로 묘지가 보이고 그 묘지 뒷쪽으로 등로가 열려있다.

잠시 잡목을 헤치고 올라가니 이장된 듯한 묘지지대를 지나 소나무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그곳을 지나니 등로 좌측으로 벌목지대가 나타나는데 벌목된 후 시간이 지나며 잡목들이 크게 자라고 있어 진행에 약간의 방해를 받고 있다.

그렇게 한동안 그 벌목지대를 따라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남양읍의 마을들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화성시 남양읍은 36개리로 이루어져 있는 법정읍으로서 북쪽은 군자만, 남쪽은 남양만에 열려 있으며 동쪽으로 비봉면과 팔탄면, 서쪽으로 마도면에 접한다.
북부지역은 화강암질 편마암, 남부지역은 반상변정질 편마암으로 되어 있으며 남양만의 장덕리 일대에는 편암이 나타난다.
북부에 해망산(125봉), 중부에 비봉산(117봉) 등이 있고 남부와 북부의 해안지대에는 약간의 경작지가 해안을 따라서는 염전이 형성되어 있다.
수원시에서 분기한 지방도가 지나고 있으나 북부지역이 그린벨트에 묶여 있어 발전이 지연되고 있다.
문화재로는 신빈김씨묘(경기기념물 153), 남양향교(경기문화재자료 34), 윤계선생 순절비(경기유형문화재 85) 등이 있다.


그렇게 멋진 조망과 풍경을 바라보며 벌목지대를 걸어가니 다시 지독한 잡목지대와 가시나무 지대가 번갈아 나타나며 진행을 방해하고 있다.

온몸을 가시에 찔려 피가 흐르는 가운데 그 지독한 잡목 등로를 따르니 그래도 간간히 선답자들의 띠지가 길라잡이를 해 주니 그저 감사한 마음 뿐이다.

다시 잡목을 헤치고 걸어가니 가시나무의 저항은 더욱 거세지고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며 그 어려운 등로를 통과하니 키 작은 소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생각보다 힘들게 그 잡목과 가시나무 지대를 통과하여 완만하게 내려가니 묘지지대를 지나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고 그 임도 건너로는 커다란 젖소 목장이 나타난다.

지도를 보니 잔다리 고개로서 고개 건너 목장에서는 주인이 트랙터를 이용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어 괜시리 미안하기만 하다.

이곳 잔다리고개는 화성시 송림리에 있는 잔다리마을에서 고개 이름이 유래되지 않았을까 생각되는 고갯마루이다.

그 잔다리고개로 내려선 후 비포장 임도를 건너 젖소 목장 뒷쪽 능선으로 오르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전봇대가 보이는 곳 좌측 능선으로 오르니 활엽수 낙엽이 깊게 깔려있고 기온이 오르고 햇살이 나면서 젖어 있던 낙엽이 말라 바스락 거리기 시작한다.

한동안 편안한 낙엽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오르니 무명봉을 지나 다시 완만하게 내려가고 잠시 후 또 다른 비포장 임도로 내려서는데 도로 좌측으로는 성주골이 있는 고갯마루이다.

성주골은 안부 좌측 아래는 성주골 마을이 보이고 그 아래로는 수작이 마을도 보이는데 우측으로는 축사가 있다.

성주골이란 고개의 지명은 바로 아래의 마을에서 따온듯 싶다.
수작마을은 남양 소재지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고 하여 북동이라고도 했고 이 마을에서 원님이 두 사람 나왔다고 해서 수작동 또는 수작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수작골 또는 성주골이 있는 비포장 임도를 건너 능선으로 오르니 등로 우측 아래 즉 성주골 우측 아래에 거대한 목장 건물이 내려다 보이고 곧이어 짧은 잡목 구간을 통과하게 된다.

다시 나타나는 아카시아 나무 지대를 통과하고 널부러진 나무토막을 이리저리 피하며 오르니 잠시 멋진 등로가 펼쳐져 있다.

완만하게 오르는 뚜렷한 등로를 따르니 106.8봉에 도착을 하고 준.희님이 달아 놓은 이정판을 사진에 남겨 본다.

사진을 남기고 돌아 서는데 이정판 아래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삼각점 하나가 보인다.


그곳 정상을 지나 내려가니 나브막한 안부를 통과하고 다시 무명봉으로 오르는데 78봉이다.

그 78봉을 넘어 걸어 내려가니 이제 등로 좌측 앞으로 거대한 아파트 촌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자세히 보니 K 금강 푸르뫼마을 아파트이다.

조금 더 걸어 진행을 하니 가파른 절개지가 나타나는데 미끌워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아주 조심하며 그 절개지를 내려가니 좌측 아파트 방향으로는 시멘트 포장도로가 되어 있고 우측 송정리 방향으로는 비포장 도로인 고갯마루에 도착을 한다.

다시 도로를 건너 반대쪽 절개지로 오르니 진행 방향 좌측으로 높은 절개지가 보이고 우측 능선으로 이어지는 마루금도 보이기 시작한다.


그 절개지를 타고 조심하며 걸어 진행을 하니 절개지가 끝나는 지점에서 능선으로 오르며 등로가 이어지는 데 그곳에서 잠시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어렵게 진행했던 마루금과 절개지가 빤히 보인다.

그리고 등로 좌측으로는 아파트 촌과 송정리 마을이 빤히 내려다 보인다.

송정리는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에 있는 마을로서 본면의 북서부에 위치하며 고드래 방죽과 부산 사람이 막았다 하는 부산방죽이 있는 농촌마을이다.
소나무 정자가 있으므로 송정이라는 명칭이 생겼으며 자연마을로는 박촌, 아래하일, 하일, 법동 등이 있다.
박촌은 박씨들이 많이 살았다 하여 붙은 이름이고 하일은 송정리의 원마을이며 아래하일은 하일의 아래 쪽에 있는 마을이다.
법동은 하일 동북쪽에 있는 마을인데 길마처럼 생겼다하여 길마재라 부르는 고개가 있다.


절개지를 지나 능선으로 오르니 다시 등로가 희미해지지만 능선 방향으로 오르면 쉽게 정상 등로를 만난다.

정상 등로를 타고 주능선으로 오르니 등로 우측 저 멀리 대부도와 시화호가 서산으로 기울어 가는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다.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에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며 많은 사진을 남겨 보는 시간이다.


그곳 114.6봉 갈림 삼거리에서 시화호와 대부도 방향을 조망한 후 그냥 진행하려다 시간이 되기에 우측의 114.6봉으로 올라가 본다.

짧게 올라 정상에 도착을 하지만 특별한 이정표나 이정판 하나 없이 커다란 참나무와 잡목이 우거진 정상이다.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올랐던 비포장 임도를 타고 갈림 삼거리로 뒤돌아 내려 와 이제 진행 방향의 좌측 넓은 임도를 따라 진행을 해 본다.


다시 갈림 섬거리로 뒤돌아 내려 와 우측으로 보이는 시화호와 대부도를 조망한 후 내려가니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뚜렷한 등로가 열려있고 그 등로 좌측으로는 커다란 상수리 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잠시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오르니 커다란 활엽수 나뭇가지 위에 117봉이란 이정판이 보이고 그곳에서도 사진 한장 남기고 출발을 한다.


준.희님이 달아 놓은 117봉 이정판을 사진에 담고 출발하니 곧바로 거대한 절개지 넘어 드넓은 공사장이 펼쳐져 있는데 남양리에 새롭게 건설되고 있는 산업단지가 아닐까 생각되는 곳이다.

그 거대한 공사장 좌측 가장자리를 타고 어렵게 내려가 진행을 하니 이제 공사장 좌측으로 출입을 금지하는 철판 벽이 설치되어 있는데 반대편 끝자락에 벽을 넘을 수 있는 공간이 보여 그곳으로 빠져 나가려고 한다.

남양동은 경기도 화성시의 서부에 위치한 동으로 북쪽에는 시화호가 있고 남쪽에는 화성호가 있으며 관내에 화성시청이 소재하며 15개 법정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양동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옛 음덕면 혹은 음덕리면, 화척지면, 둔지곶면을 합친 것으로 옛 화척지면은 현재의 남양동 북쪽 즉 신외동부터 송림동에 이르는 지역을 관할하였으며 고지도에 화리척면으로 표기된 경우가 많다.
옛 음덕면은 현재의 북양동, 남양동, 신남동 일대를 관할하였는데 이 음덕면에 옛 남양도호부 읍치가 있었고 옛 둔지곶면은 지금의 남양동 남쪽을 관할하였다.
무송동, 장덕동, 안석동, 활초동, 온석동 일대가 옛 둔지곶면 관할지역에 속한다.
북양동에 있는 무봉산은 예전에 비봉산으로 불렸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 비봉산을 부의 진산이며 또 봉림사가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지금도 이 산에 봉림사가 있다.
또 동국여도에는 매 2일과 7일마다 서는 읍장이 표시되어 있으며 남양동이라는 이름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옛 남양군의 읍치가 있던 자리라 해서 붙인 것이다.


공사가 완공되어 새로운 공단이 조성되면 후답자들은 또 어떻게 이 마루금을 찾아 걸어갈 수나 있을지 걱정이 앞서는 시간이기도 하다.

참으로 어렵게 그 공사장 좌측 가장자리를 타고 걸어가니 반대편 능선 위로 올라가고 그 능선 정상부에 처란 하나가 떨어져 통과할 수 있는 공간이 있기에 어렵게 그 공간을 통해 공사장을 빠져 나간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나가야 할 92.3봉은 완전히 사라져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으니 안타까운 시간이다.


다시 나타나는 평이한 등로를 타고 조금 더 걸어가니 소나무 등로를 지나 또 다른 절개지 위에 도착을 하는데 그곳에서 진행 방향을 살펴보니 이미 이곳은 드넓은 공단이 조성되어 있고 등로에는 많은 공장 건물들이 들어 서 있어 정상 등로를 타고 진행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두곡리로 이어지는 정상 등로는 공단지대가 완전히 자리를 잡고 있기에 포기하고 바로 발 아래 내려다 보이는 대산공업 방향의 절개지를 타고 조심하며 내려가니 드디어 대산공업 포장공터인 앞마당에 도착을 한다.

우측 두곡리 방향을 살펴보니 공단지대를 지나 잘려져 나가 흉물스럽게 남아 있는 절개지 봉우리가 애처롭게 남아 있는 풍경이 씁씁하게 다가온다.

 

대산공업을 지나 정문으로 빠져 나오니 322번 4차선 포장도로가 보이고 그 우측으로 편의점이 있어 그곳으로 가 등산화와 등산바지를 정리하고 배낭까지 정리를 하면서 따뜻한 두유로 목을 축여 본다.

깔끔하게 정리한 후 322번 도로를 타고 두곡리 방향의 원지맥 마루금을 향해 걸어 올라가니 은장고개에 도착을 하는데 원 지맥 마루금은 흉물스럽게 잘려 나가 뾰족한 절개지로 남아 있는 풍경만 눈에 들어 와 왠지 모르게 서글퍼지는 시간이다.

은장고개는 화성시 남양읍 남양동과 마도면 쌍송리와 두곡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버스 정류장이 있고 322번 4차선 도로가 지나가는데 주위의 공장들이 많아서 그런지 차량통행이 엄청 많다.
횡단보도를 건너니 우측으로 쌍송리로 통하는 도로옆에는 화성장례식장이 있고 지맥길은 바로 앞에 있는 GS주유소가 보이는 곳에서 올라서며 진행이 되는 것을 확인하고 오늘 산행은 이곳에서 마무리를 하기로 한다.



생각보다 어렵게 진행한 태행지맥이었지만 아무 사고 없이 이곳까지 진행할 수 있었음에 감사한 마음으로 산행을 정리한다.

이곳 쌍송1리입구 버스 정류장에서 배낭을 갈무리하고 방풍의를 꺼내 입은 후 버스를 기다리니 맨 먼저 330번 버스가 와 그 버스를 타고 남양사거리로 가 그곳에서 1002번 버스로 사당역으로 돌아 오니 약 1시간 약간 넘게 걸린 듯 싶다.

두곡리는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에 있는 마을로서 본면의 북동부에 위치하며 여사위 방죽이 있는 농촌마을이다.
본래 남양군 쌍수리면의 지역으로서 두일 또는 두곡이라 한데서 두곡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자연마을로는 고잔말, 구리골, 쉰돌, 중리 등이 있는데 고잔말은 곶으로 되어 붙은 이름이고 쉰돌은 흰 돌이 있으므로 붙은 이름이다.
중리는 두곡과 송정리의 중간이 된다하여 붙은 이름이다.


조만간 다시 대중교통을 이용해 쉽게 다녀 올 수 있는 곳이기에 깨끗하게 마무리를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산행 후기를 정리한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