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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맥과 중요 지맥 산행(완료)/팔공기맥(낙동·완)

팔공(위천북)기맥 제5구간 한티재에서 오로고개까지 산행후기

by 칠갑산 사랑 2015.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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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경상북도 칠곡군과 군위군의 팔공기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2015년 10월 24일 (토요일 당일 산행)

산행날씨 : 새벽에 약간의 안개 후 점심 때까지 흐렸다가 오후부터 맑게 개였지만 하루종일 박무로 조망이 전혀 없었던 산행 날씨

산행온도 영상 11도에서 영상 23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티재 휴게소(79번 2차선 포장도로)-안테나봉-이정표(동문 4.8 Km, 한티재 0.3 Km)-안전로프구간-783.6봉 삼각점-안전목책과 로프구간-바위 암봉-안전목책과 로프구간-783.9봉(부계봉)-이정표(동문 3.9 Km, 한티재 1.2 Km)-암릉구간-로프 암릉구간-806.1봉 이정표(동문 2.9 Km, 한티재 2.2 Km)-로프 암릉구간-암릉구간-치키봉(757.3봉, 삼각점) 이정표(동문 1.9 Km, 진남문 2.7 Km, 한티재 3.2 Km)-가산산성 시작점-안부-헬기장-할아버지와 할머니 바위 이정표(동문 1.0 Km, 한티재 4.1 Km)-752.4봉(현위치번호 164번)-동문 갈림 이정표(동문 0.3 Km, 용바위 0.8 Km와 유선대 0.9 Km, 한티재 5.1 Km)-동문 이정표(가산바위 1.4 Km와 용바위 0.8 Km, 한티재 5.4 Km)-가산산성 안내판-비포장 임도-능선진입-가산산성 복귀-가산 삼각점(901.8봉)-이정표(가산바위 1.4 Km, 용바위 0.1 Km와 유선대 0.2 Km, 동문 0.7 Km)-칠곡 가산산성 공해지 발굴조사현장-가산 정상석(902봉)-이정표(가산바위 1.1 Km, 동문 0.8 Km, 용바위 0.4 Km와 유선대 0.5 Km)-비포장 임도-중문 이정표(가산바위 0.5 Km, 동문 0.9 Km, 여릿재 2.6 Km와 남포루 1.1 Km)-팔공산 복수초 안내판-벤취 쉼터-가산바위 이정표(가산바위, 동문 1.4 Km, 학명리 계정사 2.6 Km, 서문 0.6 Km)-가산바위 설명판-이정표(학명리 3.8 Km)-서문 이정표(북문 0.7 Km, 모래재 2.7 Km, 가산바위 0.6 Km)-황학지멕 분기봉(846.5봉)-이정표(북문 0.4 Km, 서문 0.3 Km)-낙엽등로-전망바위-모래재(비포장 임도)-공기돌바위-치성바위-660봉-전망바위-726.9봉-바위 암릉지대-745봉(갈매기산, 돌탑)-희.준님의 응원판-720봉-710.5봉 무인산불감시카메라-악림홍공묘지-566봉-507봉-전망바위-438봉(금산)-잡목지재-간벌된 참나무지대-374.1봉 삼각점-신선님의 응원판-327.4봉-간벌된 소나무등로-경주최공과 전주이씨묘지-묘지들-철조망 묘지-갈비재(5번 4차선 포장도로, 다함과 알프스모텔)-소나무 등로-245봉 폐헬기장-묘지들-효령재(2차선 포장도로)-253.6봉 갈림 삼거리-257.9봉 칡넝쿨-폐헬기장-불난지역-김녕김공과 밀양박씨묘지-백미러-성황당 안부-375봉-간벌 소나무등로-묘지들-간벌된 소나무등로-응봉산(334봉)-군위터널 위-326봉-320봉 불난흔적-43번 송전탑-312봉-녹슨 철조망등로-46번 송전탑-공사중인 벌목지대-김해김공묘지-지하통로(중앙고속도로 통과)-공사지대-간벌지대-267.3봉-해평김공묘지-간벌된지대-비포장 임도-적라산 갈림 삼거리-적라산(352.1봉) 삼각점-적라산 갈림 삼거리 복귀-잡목지대-시멘트 수로-AT 면역사료와 철공소 공장-시멘트 포장도로-2차선 포장도로(중앙고속도로 통과)-178봉 우회-오로고개(무량사와 해피아일랜드 골프클럽)-산행종료

산행거리 : 새벽엔 약간 추위를 느꼈지만 오후에는 약간 무더위를 느꼈던 산행하기 좋은 날씨에 꾸준하게 진행해 30.12 Km (스마트 폰의 GPX 기준)

산행시간 : 암릉 구간을 오르고 내리며 후반부에 빨래판 등로를 어렵게 진행하여 12시간 06분 (03시 38분에서 15시 44분까지)

교통편 : 고속버스 서울에서 동대구행 23:05발 심야고속버스  탑승, 버스비 27,700.-

           동대구 택시 동대구고속버스터미널에서 한티재까지 동대구택시 010-2187-2558, 택시비 35,000.-(시계 외 5,000.- 원 포함) 

           오로고개(해피아일랜드 골프클럽 정문)에서 군위 목욕탕까지 군위콜택시 054-383-9988 택시비 10,000.-

           군위시외버스터미널에서 동서울 터미널까지 고속버스 17:30, 버스비 21,700.-(우등버스)

           강변역에서 집까지 2호선 지하철

 

팔공기맥(위천북 기맥) 또는 팔공지맥이란 ???

백두대간의 매봉산(태백)에서 시작한 낙동정맥은 주왕산과 통점재를 지나 가사령에 내려서기전 1.1 Km 지점에서 서쪽으로 큰 산줄기 하나를 가지치고 가사령으로 내려서 침곡산으로 간다.

서쪽으로 가지친 큰 산줄기는 베틀봉(934미터), 면봉산(1121미터), 보현산(1126미터)을 지나 석심산(750.6미터)에 이르러 다시 두갈래로 갈라진다(분기점에서 39.4 Km).

한줄기는 남서진하며 방가산(755.8미터)과 화산(828.1미터) 및 팔공산(1,192.8미터)을 지나고 가산(901.6미터)에서 북진하여 좌베틀산(369.2미터)와 청화산(700.7미터)을 지나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 새띠마을에 이르는 길이120.7 Km되는 산줄기다.

석심산(750.6미터)에서 또한줄기는 북서진하며 어봉산(634.2미터), 갈비봉(672미터), 산두봉(719미터), 구무산(676.3미터), 푯대산천제봉(359미터), 삼표당(443.7미터), 해망산(400미터), 삿갓봉(290.7미터), 골두봉(314.8미터), 곤지산(330미터) 및 비봉산(579.3미터) 등을 지나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에서 팔공산쪽으로 온 산줄기를 마주보며 끝을내는 길이 127.4 Km나 되는 산줄기다.

두 산줄기는 위천을 남과 북으로 애워싸고 서로 마주보고 달리다가 다시 위천이 낙동강과 만나는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에서 위천을 가운데 두고 마주보며 만나게 되는데 위천의 북쪽 울타리가 보현지맥이고 위천의 남쪽 울타리가 팔공기맥 또는 팔공지맥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가사령에서 석심산과 팔공산줄기를 팔공기맥(지) 또는 낙동내륙기맥과 금호북기맥등으로 부르고 있는 모양인데 박성태님의 신산경표에는 이를 각각 가사령에서 석심산과 서북쪽 산줄기 전체를 보현지맥으로 석심산에서 남서쪽 팔공산 줄기를 팔공지맥으로 이름을 붙였는데 나도 그렇게 부르는게 좋겠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인 산세로야 팔공산쪽이 더 크고 유명세도 있지만 우선은 길이가 단 6.7 Km이긴 하지만 긴쪽을 장자로 봐야 할 것 같고 석심산에서 북서쪽 산줄기만 따로 떼어내서 이름을 붙이자면 그쪽에서 제일 높은산인 산두봉(719미터)이름을 따야 할 텐데 이름없는 산이라 좀 어색하고 잘 알려진 보현산(1124.4미터)의 위상도 감안하여 가사령에서 석심산과 산두봉 줄기를 보현지맥으로 부르고 석심산에서 남서쪽 팔공산 줄기를 팔공지맥으로 부르는게 좋을 듯 싶다.

보현지맥 북쪽의 물은 용전천, 길안천, 미천이 되어 낙동강으로 흘러들고 보현지맥 남쪽의 물은 위천이 되어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위천의 남쪽 울타리인 팔공지맥의 북쪽물은 위천으로 흘러들어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에서 낙동강에 합류하고 팔공지맥의 남쪽물은 금호강으로 흘러들다 가산을 지나고부터는 낙동강에 직접 흘러든다.

 

 

안개와 박무로 인해 조망없이 빨래판 구간을 무사히 완주에 만족했던 아쉬웠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팔공기맥이나 팔공지맥 또는 위천북기맥이라 불려지는 이곳 마루금을 따라 진행하는 산행 중 가장 긴 구간인 이번 구간은 11월초 진행 예정일에 중요한 회사일이 있어 어쩔 수 없이 빠지게 되어 사전에 홀로 다녀오는 기회가 되었다.

대중교통 편을 알아 보니 서울에서 심야버스를 타고 동대구터미널에 내리면 근처에 김밥집과 24시 편의점도 있기에 간단하게 배낭 준비해 심야고속버스편으로 내려가기로 한다.

산행 후 귀경은 마침 군위읍과 가까운 오로리이기에 군위택시를 불러 군위읍에서 간단히 샤워 후 식사를 하고 올라올 수 있기를 바래보지만 산행 속도와 거리 그리고 산행 시간에 따라 모두 다르기에 몇가지 대안을 가지고 준비를 해 본다.

또한 다음달 진행될 종주대들에게 조금이라도 정확한 등로를 알려주기 위해 홀로 진행하는 속도보다는 함께 진행하는 속도로 걸어보지만 아무래도 홀로 걷다보니 쉬는 시간과 식사 시간이 짧아지고 오르막 등로에서는 쉬지 않고 걸었기에 함께 진행하게 되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리란 생각이다.

다만 산행 마지막에 적라산을 내려와 중앙고속도로를 통과한 후 다시 절개지 정상으로 이동해 178봉을 넘은 후 해피아일랜드골프클럽 방향에서 내려와야 하지만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2차선 도로를 타고 중앙고속도로 지하통로에서 해피아일랜드골프장 입구까지 진행을 하다보니 거리상으로 약 1.5 Km 정에 시간은 30여분 단축된 것 같다는 생각이다.

생각보다 편안하게 무사히 완주 후 서울로 귀경할 수 있어 즐거운 마음으로 산행후기를 정리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어두운 안개속에 약간은 한기를 느끼며 홀로 마루금을 따라 걷다보니 두려움이 엄습해 오고 그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큰 소리를 쳐보며 걷다보니 드디어 팔공산과 완전히 헤어져 황학지맥 분기봉을 넘어 낙엽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모래재이다.

아직 시간이 이르기에 다시 오르막 등로를 따라 오르니 큰 바위와 암릉이 연이어 나타나고 조심하며 그 암릉을 통과하니 눈 앞에 너무나 아름다운 동양화 한폭이 펼쳐져 있다.

바위 틈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있는 푸르른 소나무 두그루가 눈길을 잡으며 갈길 바쁜 산객의 발걸음을 붙잡고 잠시 쉬어가라 유혹하는 시간이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이곳만의 아름다운 풍경이기에 사진에 추억 한장 남기고 잠시 쉬어가는 시간은 이세상 모두를 가진듯 부자된 기분이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다녀오기로 하고 오후에 버스표를 예약해 놨는데 탑승시에 보니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만차가 되었다.

금요일 밤에는 반드시 예약이 필요할 듯 하고 그렇게 심야고속버스를 타고 깊은 잠에 빠졌다 동대구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을 하니 생각보다 이른 새벽 2시 20여분이다.

몇 번 이용했던 터미널 우측의 나드리 김밥짐에 들려 김치찌개로 아침식사를 하고 김밥 한줄을 사서 그 바로 옆 24시 편의점에 들려 음료수 두가지를 구매해 배낭에 넣은 후 택시에 오르는데 택시 기사가 시경계를 지나니 약간의 웃돈을 요구하는데 한티재를 잘 알기에 합의하고 출발을 한다.

생각보다 빨리 한티재휴게소에 도착을 하는데 택시비가 30,000.-원인데 5,000.-원을 더 요구해 지불하고 택시를 보낸 후 산행 준비를 하면서 주위 풍경을 담아 보지만 어둠속이라 사진도 잘 나오지 않는다.

이곳 한티재는 경상북도 칠곡군의 동명면 득명리와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를 잇는 고개로서 팔공산과 가산 사이에 있으며 79번 2차선 지방도가 통과한다.
과거에는 칠곡과 군위를 왕래하는 주민들이 주로 이용하였으나 현재는 팔공산을 찾는 관광객들이 많이 이용하며 팔공산의 경치와 굽이굽이 휘감아 도는 도로의 굴곡이 아름다워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되었다. 조선시대 문헌에는 한티재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으며 조선지지자료에 하북면 대현동에 있는 고개로 기록되어 있고 높고 큰 고개라고 한티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한자로는 대현이라고 표기하였다.

산행 준비 후 GPS를 확인하니 위치 확인이 불가능해 트랙 사용을 못하고 진행하다 150여미터 오른 지점에서 어렵게 정상 트랙을 작동해 사용하는 어려운 환경도 느꼈던 시간이었다.

 

 

산행 준비 후 한티재휴게소 좌측의 등로를 타고 화장실 가는 방향으로 들어가면 화장실 지나 곧바로 등산로가 나타나는데 그곳에는 주탐방로 안내판이 서 있어 산행 들머리 찾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방풍 자켓을 입고 출발을 하는데도 강한 바람이 불어오고 안개가 내려 앉아 약간의 한기를 느끼는 시간이기에 홀로 피식 웃어 본다.

이곳 한티재 아래에는 한티순교성지가 있는데 한티순교성지는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 5번지에 있는 천주교 성지로서 한티란 원래 큰 재를 말하며 해발 600미터의 깊은 산중에 1815년(순조 115) 을해박해 때부터 형성된 천주교 교우촌이다.
을해박해 때는 경상도에서 정해박해(1827년) 때는 전라도에서 수백 명의 신도가 수난을 당하였으며 신도들은 대구 인근의 산간 벽지로 피해 화전을 일구고 옹기와 숯을 구우며 한데 모여 살았는데 이때 정착한 곳이 바로 한티였다.
그러나 이곳에 정착한 후에도 몇 번이나 포졸들의 습격을 받고 많은 신도들이 순교하게 되어 오늘날 한티성지로 일컫게 된 것이다.
최근에 대구 대교구에서 성지 개발사업을 벌여 도로를 확장하고 1991년 9월 25일에는 대형 십자고각(높이 14m)과 피정의 집(지하 2, 지상 5층, 연 1,910평)을 준공하였다.
십자고각 뒤편으로 을해박해와 정해박해 동안 순교한 33기의 순교자 묘가 있으며 신나무골과 더불어 순교자의 정신을 되살리고 피정 연수를 위한 순례지로서 새롭게 인기를 얻고 있다.

무더위에 고통스런 산행을 했던 시간이 엊그제였었는데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한기를 느끼며 방풍의를 입고도 추위를 느끼고 있으니 아이러니함을 느껴본다.

 

 

이곳은 아직도 팔공산도립공원지역이고 특히나 가산에는 가산산성이 있어 많은 등산객들이 오르는 곳이다 보니 등로는 고속도로처럼 잘 나 있다.

뚜렷하게 반질거리는 등로를 타고 오르니 녹슨 안테나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무명봉에 도착을 하고 다시 진행을 하니 바위들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잠시 후 한티재에서 300미터 진행을 했다는 이정표가 눈길을 잡는다.

잠시 진달래 터널을 지나니 칼로 쪼개진 듯한 모양을 하고 있는 바위지대도 통과를 한다.

이곳 등로 우측의 군위군 부계면에는 제2석굴암이란 군위삼존석굴이 있는데 군위삼존석굴은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 산 16에 있는 석굴로서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09호로 지정되었는데 석굴의 높이는 4.25미터에 본존의 높이는 2.88미터이고 왼쪽 보살이 1.92미터이며 오른쪽 보살은 1.8미터이다.
동남향의 거대한 암벽에 조영된 석굴의 입구는 원형에 가깝고 굴 안의 평면은 대체로 정사각형이며 천장은 활의 등 모양이고 안쪽벽에 붙여서 원각의 삼존을 모셨다.
본존은 다른 돌로 만든 좌대 위에 안치하였으나 그 뒷부분이 안벽에 마련된 턱에 걸쳐 있는데 이 불상은 대좌에 결가부좌로 앉았고 소발에 육계는 큼지막하며 얼굴은 네모지고 풍만하여 단정한 위풍이 넘친다.
귀는 길고 목은 반듯하며 선 하나가 그어져 있고 어깨에 걸친 법의는 얇고 가슴은 딱 벌어져 당당하며 옷주름은 간결하면서 무릎을 거쳐 대좌를 덮은 상현좌를 이루었다.
본존을 중심으로 안쪽의 벽면에는 소박하고도 큰 광배를 조각하였으며 두광과 신광을 구별하여 광염 무늬로 나타냈다.
양쪽에 서 있는 협시보살은 거의 같은 양식이지만 왼쪽의 보살은 광배가 있으나 오른쪽의 보살에는 없어진 것으로 짐작되며 옷주름이 서로 다르다.
머리에는 관을 썼고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늘어졌으며 가슴과 팔에는 목걸이와 팔찌를 장식하였고 목에는 삼도를 둘렀다.
양 협시보살의 허리를 조금 돌려 본존 쪽으로 향하게 하여 자연스럽게 표현하려고 애쓴 점은 엿보이나 사실성은 부족하다.
석굴의 규모는 크지 않으나 중국 석굴양식이 한국으로 전래된 과정으로 보아 중요한 유적임에는 틀림없으며 따라서 이 석굴의 조영은 700년 전후로 추정된다.

 

 

그 바위를 지나니 계속되는 바위 암릉이 나타나고 잠시 후 우측으로 바위 암릉을 우회할 수 있는 로프등로가 나타난다.

크게 위험하지는 않지만 겨울 눈이 내린 등로에는 제법 위험한 느낌이 드는 등로이기에 로프가 설치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 로프 등로를 지나니 아기손을 닮아 있는 바위가 나타나 사진에 담아 보는데 어둠속에 보는 풍경이라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데 그 아기손을 닮아 있는 바위를 지나니 783.6봉의 삼각점이 등로에 박혀있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갑자기 나타난 삼각점을 사진에 담고 다시 출발을 하니 키 작은 억새가 바람에 한들거리고 짧은 잡목지대가 나타난다.

생각보다 강한 바람이 불어 와 산행에는 좋지만 약간의 한기를 느끼는 날씨에 안개가 있어 오늘 산행날씨가 어떨지 걱정도 되는 시간이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 좌측으로 화려한 야경이 나타나는데 안개로 인해 흐릿한 야경이 아쉽기만 한데 살펴보니 칠곡군 동명면쪽 마을 풍경이다.

좋은 날씨에 올라 다시 한번 여유롭게 산행을 즐기며 야경을 담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을지 기약이 없기에 더욱 안타까운 시간이기도 하다.

 

 

다시 나타나는 암봉을 우측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우회 등로를 따라 통과하고 다시 오르니 달팽이를 닮아있는 바위 암릉도 지난다.

그곳에서 진행 방향을 살펴보니 눈으로는 희미하게 실루엣이 보였는데 사진으로 담으니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다시 나타나는 암릉을 우측 안전목책과 로프구간으로 우회하며 통과하니 다시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올라 이어지는 바위 암릉을 따라 조심하며 걸어본다.

그 바위 암릉구간을 지나니 잠시 푹신하게 내려 깔린 낙엽 등로를 타고 걸어가고 좌측으로 우회하는 우회등로가 선명한 곳에서 우측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바위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783.9봉의 부계봉인데 부계봉이란 이름은 서래야 박건석님이 달아 놨으며 고증은 거쳤는지 궁금해지는 시간이다.

 

 

그 783.9봉을 넘어 좌측으로 내려가다 살펴보니 우측으로도 또 다른 등로가 이어지는 삼면봉으로서 군위군의 부계면과 칠곡군의 가산면 및 동명면이 만나는 봉우리로서 어떤 지도에는 삼면봉으로 표기된 봉우리이다.

다시 주등로로 내려가니 여전히 바위 암릉들이 줄지어 있고 잠시 후 한티재에서 1.2 Km 걸어 올랐다는 이정표를 만난다.

잠시 발목까지 빠지는 낙엽 등로를 따르니 너무나 많이 설치된 현위치번호 이정목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고 조금 더 세심한 이정목 설치가 아쉬운 시간이다.

그렇게 진행을 하니 통천문 비슷하게 생긴 바위가 좁은 문을 만들어 놓고 있는데 좌측 바위는 좀 특이하게 생겼으며 아래 주춧돌보다 위에 얹혀있는 바위가 더 커 가분수의 모습이다.

 

 

그 바위를 지나 계속 전진하니 낙엽 등로 위에 나뒹굴고 있는 쓰레기들과 빈병이 눈살을 찌뿌리게 만든다.

다시 나타나는 암릉을 우회하며 통과한 후 뒤돌아 보니 책처럼 생긴 바위들이기에 책바위라 이름을 불러 본다.

생각보다 많은 바위들과 암릉들로 인해 산행속도는 나지 않지만 생각보다 위험하지도 않아 진행하기에는 큰 어려움은 없다.

 

 

책바위를 지나 계속 이어지는 낙엽 등로를 따르니 짧은 로프가 설치된 바위 암릉구간이 나타나지만 어렵지 않게 오르고 잠시 바람불어 오는 등로에서 등로 좌측으로 빛나는 칠곡군 동명면쪽 흔들리는 야경을 살펴 본다.

여전히 박무로 인해 선명하지 못한 야경이 아쉽지만 그것이 자연이니 어쩔 수 없음을 알기에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출발을 한다.

출발 후 잠시 뒤 낙엽이 수북히 쌓여있는 등로에 이제 동문까지 2.9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서 있는 806.1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그 806.1봉 이정표를 지나 진행을 하니 다시 바위 암릉이 나타나고 등로는 우측 우회등로로 이어지는데 가느다란 로프 몇가닥이 설치된 곳이다.

진행하면서 어둠속에 등로 우측을 살펴보니 낭떨어지 구간이라 이곳을 진행할 땐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그곳을 지나 다시 다양한 형태의 바위들을 만나고 고인돌을 닮아 있는 바위 암릉구간을 통과하니 삼각점이 튀어 올라와 있는 치키봉 정상 이정표와 만난다.

치키봉(756.8봉)은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과 동명면에 걸쳐 있는 가산(902봉)의 동쪽 봉우리로서 해발고도는 756.8m이다.
산세가 곡식을 까부를 때 쓰는 키와 닮아서 치키봉이라고 불렀다 하는데 팔공기맥의 한 구간에 속하며 가산산성 동문에서 2.2 Km, 진남문에서 3 Km, 한티재에서 3.2 Km 거리에 있다.
서쪽으로 주능선을 따라가다 할아버지 할머니바위를 지나면 가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이곳에서 어렵게 셀카 놀이를 하면서 추억 한장 남겨 본다.

 

 

치키봉을 지나 계속 전진하니 등로는 이제 잠시 낙엽등로로 바뀌는데 그 깊이가 발목까지 올라온다.

그런데 살펴보니 오늘 새벽에 약간의 비가 내렸는지 아니면 안개 때문인지 등로에 깔려있는 낙엽이 축축히 젖어 있어 불빛에 반짝이고 있다.

잠시 더 낙엽 등로를 따르니 안부를 통과하고 억새가 자라고 있는 헬기장을 지나 다시 낙엽 등로를 타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바위가 서 있는 곳에 도착을 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닮아있는 바위라는데 어둠속에 아무리 찾아 봐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쉬운 시간이지만 선답자들의 사진을 보면 닮아 있는듯도 보인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바위에서 자세히 살펴보니 할아버지 바위 앞에는 손자 손녀들의 바위도 보이는듯 다가와 피식 웃어 본다.

다시 낙엽 등로를 잠시 따르니 현위치번호 164 이정목이 서 있는 752.4봉을 넘어 다시 바위와 낙엽 등로를 차례로 따라 본다.

이제 온 몸에 약간의 열기가 올라오기 시작하며 등줄기와 이마에선 땀방울이 흐르기 시작해 입었던 방풍 자켓을 벗어 배낭에 넣고 출발하니 동문 갈림 삼거리 이정표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에서 계속 가산산성을 따라 용바위와 유선대로 진행하지 않고 잠시 동문을 다녀 가기로 한다.

 

 

깊은 낙엽 등로로 뒤덮힌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마루금을 타고 걸어가니 잠시 후 거목들이 사라지고 잡풀이 자랐다가 말라 죽어가는 일반 평이한 등로를 만나 잠시 걷게되고 곧이어 동문에 도착을 한다.

동문은 외성 축조 이전까지 내성의 정문이었는데 개구부의 정면은 남동향을 향하고 있으며 입면 모양은 윗부분을 둥글게 한 홍예문 형식으로써 개구부의 폭은 2.75미터이다.

어둠속에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몇장의 추억을 남기고 그 동문을 통과해 산행을 이어가 본다.

 

 

 

가산산성 동문을 통과하니 칠곡 가산산성 안내판과 주 탐방 안내판 그리고 가산산성 안내판이 서 있다.

가산산성은 임진왜란의 치욕적인 국난을 극복한 다음에 국방에 대한 안보 의식이 고조되었을 시기에 국방 태세의 강화책으로 축성 되었으며 산성이 완성된 이후에 가산산성에서 왜적과 치루어 진 전투는 없었고 오히려 1950년 6·25전쟁 때 같은 민족끼리 가산 741고지 전투라는 현대식 전투가 이곳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어 축성 후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성벽이 무너지고 성내의 각종 건물과 민가는 불타 없어졌고 더구나 1954년 7월 26일에 폭우와 산사태로 남문 성벽과 수구문이 붕괴되었으며 외성 안에 있던 남창마을(진남문 윗편, 약 50호 200명)이 매몰(35호, 24명 사망)되었으나 국군과 미군부대의 지원으로 남원 2리에 새마을(신흥, 신남창)로 이주하였다.

칠곡 가산산성은 인조 17년(1639)에 내성의 축성 공사가 시작되어 약 100여 년간의 긴 세월을 거쳐 축성되었다.

따라서 가산산성은 17~18세기에 걸쳐 정상에 내성, 중턱에 중성, 하단에 외성을 쌓은 3중의 포곡식 석성으로써 금오산성 및 천생산성과 더불어 영남 지방을 방비한 그야말로 영남 제1관방이 되었다.

안내판을 읽어 본 후 다시 우측으로 나 있는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오르다 우측 능선으로 올라 가산산성으로 복귀를 한다.

 

 

이어지는 가산산성길을 따라 완만하게 오르니 드디어 가산 정상인데 선답자들의 산행후기에서 봤던 나무 정상판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고 아무 표식도 없는 정상에 삼각점 하나만 둥그런히 박혀있다.

가산산성에는 많은 수의 암문이 개설되어 있는데 암문은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은밀한 곳에 일반 성문보다 상대적으로 작은 개구부를 내어 출입한 성문의 일종이다.

암문은 아측에 필요한 병기와 식량 등 항쟁물자를 운반하거나 적에게 포위당했을 때 적의 눈에 띄지 않게 구원요청은 물론 원병을 받고 역습을 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암문은 암문 내측에 옹벽 또는 흙을 쌓아 유사시 옹벽을 무너뜨리거나 흙으로 메워 암문이 폐쇄될 수 있게 만들어 놓기도 하였으며 암문의 개구부 형태는 전부 평거식이며 장대석을 결구하여 천장을 만들고 있다.

목재 문비를 설치하여 개폐하였는데 기존 사료에는 가산산성 성벽을 돌아가며 모두 11개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지표 조사에서 밝혀진 암문의 수는 모두 15개로 증축 시 4개 처가 더 추가된 것으로 판단된다.
가산산성은 팔공산 서쪽에 자리한 가산산성은 해발 901미터의 가산에 쌓은 석축산성으로 가산면 가산리와 동명면 남원리의 일부에 걸쳐 있으며 골짜기와 능선의 지세를 적절히 이용하여 축조했기 때문에 포곡식(성곽 안에 하나 또는 여러 개의 계곡을 감싸고 축성된 것)과 테뫼식(산정식-성곽의 축조 지형이 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하여 산의 7에서 8분 능선을 따라 거의 수평이 되게 한 바퀴 둘러쌓은 것으로 산성의 모습이 마치 머리띠를 두른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혼합된 산성으로 내성과 중성 및 외성을 갖추고 있다.
현재 네 개의 문지와 암문, 수문, 건물지 등의 시설이 남아 있는 이 성이 수축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뒤였다.
인조 17년(1639) 경상도 관찰사에 제수된 이명웅은 왕에게 부임 인사를 하면서 경상도 60개 고을 산성 가운데 믿을 만한 곳은 진주와 금오 및 천생 세 군데밖에 없으므로 적당한 곳을 골라 산성을 쌓을 것을 요청하였다.
그해 4월 경상감사로 부임한 이명웅은 가산의 지리가 편리함을 다시 조정에 보고했고 9월부터 인근 고을의 많은 남정을 징발하여 험한 지형을 따라 성을 쌓기 시작해 이듬해 4월에 내성을 준공하였으나 이 성을 쌓기 위해 10만 명 이상의 엄청난 인력과 막대한 자금이 동원되었고 감사의 가혹한 독려로 공사 도중 많은 사람이 죽기까지 하여 민심의 동요가 심하였다.
여러 차례 탄핵을 받은 이명웅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1640년 7월 체직되고 말았다
1640년 성이 완성되면서 종3품 도호부사가 다스리는 칠곡도호부를 여기에 설치하고 군위, 의흥, 신녕, 하양 지방을 칠곡도호부에 예속하였으나 관아가 산성 안에 있다 보니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이 많았기 때문에 백성들은 다른 곳으로 이전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순조 19년(1819) 당시 경상감사로 있던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 김노경이 장계를 올려 칠곡도호부는 팔거현으로 옮겨졌으며 팔공산에는 동화사, 은해사, 부인사, 파계사, 송림사를 비롯한 유서 깊은 절들이 많다.

사진 몇장 남기고 가산 정상을 표기한 정상석이나 안내판을 찾아 보지만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 아쉬움을 남기고 그 가산 정상의 삼각점을 출발해 본다.

 

 

 

가산 정상 옆에는 나무 사다리가 보이고 그 사다리 끝자락인 나무 위에는 조망을 할 수 있는 인공 시설물이 보이는데 실제로 사용은 하지 못하고 사료로서 제작되어 설치된 것처럼 보인다.

이곳에서 용바위와 유선대가 100미터와 200미터 거리에 있는데 어둠속에 보이는 것이 없기에 포기하고 곧바로 가산바위 방향으로 출발을 한다.

잠시 내려가니 진행 방향의 등로에는 출입금지 로프가 설치되어 있고 칠곡 가산산성 공해지 발굴조사 제1차란 안내판이 보인다.

어쩔 수 없이 조심하며 그 로프를 지나 다시 나타나는 로프를 건너니 그곳 우측 한쪽에 커다란 가산 정상석이 서 있어 왜 정상이 아니고 이곳에 정상석이 서 있을까 하는 조금은 아쉬움을 남긴다.

가산(901.6봉)은 북쪽으로 가산리와 남쪽으로 남원리를 동쪽으로 옹추리 및 서쪽으로 학명리에 접하고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901.6미터로서 정상은 평탄한 분지이나 산 아래의 형세는 깎아지른 절벽이거나 급경사로 되어 있다.
중턱에는 가산바위와 덩굴식물로 뒤덮인 성안분지가 있고 가산바위는 가산산성 내성의 가운데 있는데 80평 규모로서 바위의 상단은 약 100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로 평평하고 넓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해 산골짜기를 따라 가산산성을 쌓았는데 내성, 중성, 외성으로 나뉘며 내성은 1640년(인조 18) 이명웅이 중성은 1741년(영조 17) 관찰사 정익하가 그리고 외성은 1700년(숙종 26) 관찰사 이세재가 쌓았으며 전체 길이는 약 7.6 Km이다.
지형이 험준해 축조에 어려움이 많았으며 이명웅은 백성들의 원성에 밀려 부임지를 옮겼다.
산행은 송림사를 지나 법성마을로 향해 성안분지를 지나 정상에 오른 후 하산길은 정상 서쪽의 가산바위 오른쪽 계곡길로 내려오면 동명리에 이르면 되는데 가산산성 휴양지는 취사장, 공연장, 운동장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보리수나무와 귀똥나무 등이 많이 자라며 유적 답사를 겸한 하이킹 코스로 대구광역시 근교에서 이름난 관광지로서 팔공산도립공원에 속해 있다.

 

 

가산 정상에서 잠시 셀카 놀이를 하면서 추억 한장 남기고 이제 비포장 임도같은 낙엽 깔린 뚜렷한 등로를 따르니 등로 좌측에 움막같은 것이 보이는데 문화재 발굴을 하는 사람들이 기거를 했던 움막은 아닐까 생각되어 지는 곳이다.

그곳을 지나 계속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를 따르니 가산바위까지 1.1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지나 잠시 후 중문에 도착을 한다.

중문은 내성의 중앙을 가로막아 내성의 반을 보호하기 위하여 1741년에 가산산성 중성 축조 시 만들어진 문으로 1954년 대홍수 때 유실되었으나 1977에서 1980년에 1차로 복원 및 중수하였고 1992년에 2차로 중문만을 다시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개구부의 입면 상태는 홍예식으로 정면의 폭은 2.2미터이고 바닥에서 홍예종석까지 높이는 2.55미터이다.

여릿재와 남포로로 갈 수 있는 방향과 거리 표시가 되어 있어 날이 밝았다면 다녀오고 싶은 곳이지만 아직도 짙은 어둠속이기에 포기하고 가산바위 방향으로 출발을 해 본다.

 

 

중문을 지나 넓은 낙엽 떨어진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팔공산 복수초 안내판이 보이고 곧이어 등로 좌측 위로 벤취 쉼터들도 보인다.

조금 더 걸어가니 가산바위 이정표가 서 있고 잠시 가산바위 방향으로 걸어 오르니 가산바위 설명판이 서 있다.

가산바위 방향으로는 철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올라 보지만 보이는 것이 없으니 그냥 내려 와 서문 방향으로 출발을 하는데 이곳 가산바위에 있는 전설을 생각해 본다.

가산산성 안에는 가산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으며 이 가산바위는 가산산성 북서쪽 성벽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바위 상면은 약 100여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은 평면으로 되어 있으며 사방을 훤하게 전망 할 수 있어 많은 등산객들이 이곳을 찾아들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바위 상면에는 커다란 구멍이 있는데 신라시대의 승려였던 도선이 산천을 다니다 바위를 둘러보니 땅의 기운이 너무 세어 이를 억누르기 위해 커다란 구멍에 철마와 철우를 넣었다고 한다.

1864년 제작된 칠곡지도에는 가산바위 중앙에 큰 구멍을 그려놓고 혈천심수십장이라 하였으며 칠곡지에는 철우철마재가암혈중유속전신라승도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가산바위는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 가산산성 서북쪽에 있는 바위로서 일명 가암이라고도 한다.
사면이 깎아지른 듯이 우뚝 솟아 있는 바위로 상면에 80평 정도의 넓은 평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평지 동쪽에 큰 구멍이 뚫려 있고 사방이 트여 있어 바위 위에 서면 남쪽으로 대구광역시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도선이 지기를 잡으려고 바위 위 구멍 안에 쇠로 만든 소와 말의 형상을 묻었는데 조선시대 관찰사 이명웅이 성을 쌓으면서 없애버렸다는 전설이 전한다.

 

 

 

가산바위에서의 조망 역시 멋지다고 알고 있는데 보이는 것이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내려 와 서문 방향으로 걸어가니 키 작은 잡풀과 잡목이 자라고 그 위에 새벽 이슬이 맺혀 산객의 등산화와 바지를 적시고 있다.

그 산성으로 이뤄진 등로를 따르니 등로 좌측으로 학명리 방향으로 내려 갈 수 있는 이정판이 보이고 멋진 소나무 한그루를 지나 길주의 구간인 서문에 도착을 한다.

학명리는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에 있는 가산으로 둘러싸인 구릉성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소규모의 경지가 분포하는 곳이다.
동명원, 삼학동, 두모동 등을 병합하면서 삼학과 동명의 이름을 따 학명리라 하였으며 자연마을로는 독명, 불당골, 칡골, 삼막골마을 등이 있다.
독명마을은 학명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며 불당골마을은 불당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칡골마을은 칡이 많은 곳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다.
삼막골마을은 독명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주막 셋이 있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 한다.

서문은 가산산성의 제일 북쪽 돌출된 부분에 위치한다. 동문·북문과 같이 1640년 내성 축조 시 만들어졌으며, 북문과 마찬가지로 평거식 개구부를 하고 있다. 성문의 바깥쪽으로는 성벽에서 돌출 된 적대 시설이 있고, 성문 안쪽으로는 육축부를 보호한 옹벽이 마련되어 있다. 개구부의 형태는 북문과 같이 좌우로 1매의 장대석을 세우고 상면에는 판상 석재 7매를 결구하여 천장석을 하고 있다. 개구부의 폭은 260㎝, 높이 180㎝로 북문과 크기가 거의 같다. 서문의 상면에는 원형 주초석이 유존하고 있어 문루를 두었다고 추정된다.

이곳 서문에서 서문을 통과해 좌측 모래재 방향으로 가지 말고 우측인 직진 방향의 북문 방향으로 진행을 해야 정상 마루금을 타고 진행을 할 수 있기에 모래재란 이정표 때문에 길주의 지점이기도 하다.

 

 

 

북문 방향으로 출발을 하니 낙엽 깔린 등로가 이어지고 잠시 더 완만하게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벌목된 나뭇가지들을 쌓아 놔 썩어가는 나뭇가지 가림막이 보인다.

잠시 그 벌목지대를 지나 오르니 그 정상에는 황학지맥분기점이란 안내판이 붙어 있다.

말도 많고 논의거리도 많은 팔공기맥 즉 위천북기맥 마루금이기에 조만간 저 황학지맥 마루금을 따라 걸으며 어느 설이 맞는지 직접 확인 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희망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황학지맥 분기점(852봉)이란 안내판이 붙어 있는 정상에서 황학지맥 방향을 살펴 보지만 여전히 어둠속 시간이라 보이는 것이 없어 아쉽기만 하다.
황학지맥이란 팔공기맥 상 가산산성의 851.5미터 봉에서 분기해서 서쪽으로 오계산을 지나 남쪽으로 실봉산과 백운산을 일으키고 북진하면서 황학산과 소학산에 이르러 남진하는 능선에는 좌봉산, 장원봉, 용산, 마천산, 죽곡산을 일으킨 후 금호강이 낙동강에 합수하는 달성군 다사면 죽곡리 강정마을에서 맥을 다하는 약41 Km의 산줄기를 황학지맥이라고 한다.

 

 

황학지맥 분기점에 도착을 하니 짙었던 어둠이 서서히 물러가며 여명이 밝아 오는데 안개로 인해 시야는 흐릿하기만 하다.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는데 등로에 쌓여있는 깊은 낙엽들로 인해 여간 미끄럽지 않아 조심하며 내려가 보는 시간이다.

잠시 내려가다 뒤돌아 보니 가산산성의 무너진 돌담이 올려다 보이고 잠시 더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깊은 골짜기 양쪽으로 거대한 바위벽이 보이기 시작한다.

잠시 더 걸어 내려가니 우측으로 400미터 거리에 북문이 있다는 이정표를 지나 멋진 낙엽 등로를 내려가니 등로 옆으로 예쁜 단풍이 보여 사진에 담아 본다.

 

 

계속되는 낙엽 쌓인 내리막 등로를 타고 조심스럽게 내려가니 아직 떨어지지 않은 단풍들이 마지막 가을을 아쉬워하고 그렇게 양탄자 같은 낙엽 등로를 타고 여유롭게 걸어가니 등로 좌측 앞으로 바위봉이 보이는데 등로는 그 바위봉을 지나지 않고 우측 사면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잠시 그 바위봉으로 오르니 바위전망대이고 그 바위 위로 올라 살펴보니 방금 전 올랐다 내려온 황학지맥 분기봉이 고운 단풍을 병풍삼아 아름답게 올려다 보이지만 앞으로 진행해야 할 모래재 넘어 745봉 방향은 안개인지 박무로 인해 그 모습이 흐릿하게 실루엣으로 다가와 아쉽기만 하다.

바위 바로 아래에는 모래재로 이어지는 비포장 임도가 내려다 보이는데 서문에서 모래재 방향으로 진행하면 저 임도를 만나 임도타고 우측으로 모래재로 올라와야 하는 길처럼 보인다.

 

 

전망바위에서 아쉬운 조망을 즐긴 후 내려 와 다시 등로로 복귀한 후 낙엽깔린 우측 우회 등로를 따르니 금새 비포장 임도가 지나는 모래재에 도착을 한다.

모래재(578미터)는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금화리에서 가산리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높이는 약 578미터이며 정상까지 험난한 비포장도로가 이어지는데 옛날부터 모래가 많아 모래재라고 하였다.
남쪽으로 4.3 Km 떨어진 거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축 산성 가산산성의 방어벽이 고개 아래 갈림길까지 이어지고 동쪽에 금화계곡이 서쪽에 저수지 가산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주변에 신라시대 사찰 대둔사와 금곡사가 있다.

하지만 살펴보니 기대했던 모래는 별로 보이지 않는 모래재가 되어 버렸다.

 

 

모래재에서 잠시 사진 몇장 남기고 좌측 넓은 공터쪽으로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곧바로 출발을 해 본다.

가파르게 올라 주능선에 도착을 해 좌측 등로를 따르고 낙엽진 활엽수와 소나무가 뒤섞인 등로를 타고 무심으로 걸어 보는 시간이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갑자기 눈 앞에 거대한 바위들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마치 공기돌이 바위 위에 올라가 있는 듯한 바위를 처음으로 만난다.

 

 

그 공기돌 같은 바위를 지나 계속 이어지는 바위 등로를 따르니 눈 앞에 거대한 바위 암봉이 나타나고 그 바위를 좌측으로 우회하며 진행하도록 되어 있다.

무심코 그 바위를 좌측으로 돌아 우회하며 통과를 하는데 바로 그 바위 뒷편에는 누군가가 치성을 드린듯한 그릇들과 생수병이 보이고 바위는 로프로 묶여 있는 풍경이다.

가까이 사는 마을 주민이 이곳까지 올라 정성드려 치성을 드린 듯한 풍경에 이 산객의 어린 시절이 반추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치성바위를 지나 칼등으로 이뤄진 낙엽 등로를 타고 한동안 걸어가니 등로는 이제 멋진 소나무 등로로 변하고 있다.

소나무 등로에는 작은 자갈들이 등로에 박혀있어 약간의 조심이 필요하고 그렇게 무명봉을 지나 내려가니 나즈막한 안부를 통과한다.

안부에서 등로 우측은 등로 자체가 보이지 않는데 좌측으로는 제법 사람들이 다닌 흔적이 있어 살펴보니 칠곡군 가산면의 금화리 마을이다.

금화리는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에 속하는 법정리로서 인근의 광산에서 사금과 중석이 많이 생산되어 금화라 이름 붙였다.
조선 시대에는 칠곡군 동북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진동과 소흘을 병합하여 금화라 하고 칠곡군 가산면에 편입하여 오늘에 이른다..
금화리는 오계산(466.3봉) 북쪽 산록에 자리한 마을로 갈정산(748봉), 소흘산(357.4봉) 등의 봉우리가 이어져 둘러싸인 곳에 금화지가 있으며 가산 산성을 오르는 북쪽 입구 가운데 하나로서 사금과 중석을 캐는 광산이 있었다.
가산로를 따라 자연 마을인 수청마을, 금화마을, 진번덕(진동)마을, 절골마을이 있는데 수청 마을은 금화리의 중심 마을로서 금화지가 조성되면서 마을이 크게 번창하였다.

금화 마을은 소화 광산 아래에 형성된 마을로 6·25 전쟁 이후 쇠퇴하였는데 금화 계곡은 피서지로 유명하며 금화지 주변에 방갈로와 식당 등을 갖춘 가산 금화 관광농원이 있다.

진번덕 마을은 갈정산 등마루에 있으며 2013년 현재 2가구만 사는 작은 마을로서 가산 산성을 오르는 북쪽 입구이다.

성문의 초소에 해당되며 병사의 무기가 번득이는 곳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진번덕 마을에서 모래재를 넘으면 가산리에 이른다.

절골은 갈매기산 골짜기의 금곡사 아래에 있으며 2가구만 사는 작은 마을이다.

안부를 지나 바위가 박혀있는 오르막 등로를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전망바위가 나타나고 그곳으로 오르니 지나온 마루금이 안개속에 희미하게 들어 온다.

 

 

 

등로 좌측으로는 지나온 가산산성과 황학지맥 방향으로 희미한 실루엣이 나타나는데 짙은 안개가 밀려 와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아쉬운 마음에 사진 몇장 남기고 전방바위를 내려 와 정상 등로를 타고 걸어 오르니 소나무 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무명봉을 지나 낙엽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이곳 역시 바위 등로가 이어지고 많은 돌들이 등로에 박혀있는 등로를 타고 오르니 멋진 조망처가 나타나지만 오늘은 박무로 인해 보이는 것이 없으니 안타까운 시간만 흐르고 있다.

지나온 방향의 마루금은 안개속에 희미하게 실루엣으로 다가오는 풍경이 전부이다.

 

 

눈 앞으로는 거대한 바위 암봉이 가로막아 조심스럽게 타고 오르니 다시 그 바위봉을 내려가 깊이 패인 안부로 내려가 본다.

안부를 지나 다시 나타나는 거대한 암벽을 좌측 우회 등로를 타고 어렵게 오르니 잠시 평이한 등로를 따라 이어지고 곧이어 작은 돌탑이 서 있는 745봉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에도 검증되지 않은 갈매기산이란 이름이 붙어 있어 고개를 갸우뚱 해본다.

잠시 쉬어 보지만 보이는 것이 없기에 물 한모금 마시고 곧바로 출발을 한다.

 

 

그 745 돌탑봉을 넘으니 희.준님이 붙여 놓은 응원판이 나타나는데 오랫만에 준.희님이 아닌 희.준님의 응원판을 만난다.

다시 나타나는 바위 암릉을 넘어 약간의 잡목이 있는 등로를 지나니 큰 바위가 있는 720봉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 정상판에는 준.희님이 아닌 여영님의 팻말이 붙어 있다.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출발을 한다.

 

 

720봉 지나 다시 나타나는 바위들이 박혀있는 소나무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낙엽 깔린 등로가 나타나고 잠시 더 걸어가는데 등로 우측으로 소리가 들려 살펴보니 암꿩인 카투리가 날아가지도 못하고 이 산객을 경계하며 걸어 도망을 가고 있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가니 저 멀리 산불감시카메라가 눈에 보이는데 그 아래에는 작은 콘테이너 박스가 있어 특이한 모습이다.

지도를 살펴보니 이곳이 710.5봉으로 표기된 봉우리로서 사진 한장 남기고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버려진 듯한 산불감시초소가 나뒹굴고 있다.

 

 

무인산불감시 카메라가 있는 710.5봉을 지나 내려가니 활엽수 등로가 나타나고 그 활엽수에서 떨어진 낙엽들이 쌓여 푹신거리는 양탄자를 걷는 기분으로 내려가 본다.

그렇게 한동안 걸어 내려가니 등로 주위에 많은 작은 구덩이들이 보이고 처음에는 의아하게 생각을 했는데 살펴보니 6.25때 사망한 이름없는 전사들의 유해를 발굴한 흔적들로 생각되는 구덩이들이다.

그렇게 멋진 낙엽 등로를 타고 무심으로 걸어 보는 시간도 나쁘지 않다.

 

 

그렇게 고도를 내리면서 아름다운 낙엽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마음까지도 정화되는 그런 기분으로 걸어 본다.

너무나 아름다운 낙엽 등로를 따라 걸어가다 보니 생각보다 산행속도가 무척 빠르다는 느낌이다.

그렇게 진행하다 보니 등로 한가운데에 악림홍공 묘지가 나타나는데 한자로 쓴 악자가 조금은 이상하여 인터넷을 통해 찾아 보니 악자가 맞는듯 하다.

그렇게 진행을 해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다시 오르니 566봉에 도착을 해 잠시 사진 한장 남겨 본다.

 

 

566봉을 지나서도 여전히 등로는 낙엽이 깔린 멋진 등로로 이어지고 잠시 더 걸어가니 바위 암릉이 나타나 그 암릉 좌측으로 우회하며 통과해 본다.

그 바위 암릉구간을 지나니 그림같은 낙엽 등로가 나타나고 아무 생각없이 무심으로 설어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제 이곳 팔공기맥 마루금에는 가을을 지나 겨울 준비가 한창인 듯한 그런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잠시 무명봉을 지나 나타나는 바위들을 통과하니 다시 멋진 바위들이 앞을 가로막아 좌측으로 우회하며 지난다.

 

 

그 바위구간을 지나서도 여전히 멋진 낙엽등로가 이어지는데 등로 좌측으로부터 굉장히 시끄러운 차량들이 통행하는 소음이 들리기 시작하여 지도를 살펴보니 중앙고속도로가 가까이 있기에 그곳을 달리는 차량들의 소음으로 생각된다.

제법 굵은 활엽수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도립공원을 알리는 시멘트 말뚝도 보이고 약간의 잡목 구간도 통과를 하니 등로 좌측으로 전망바위가 나타난다.

혹시나 하고 그 전망바위로 오르니 역시나 박무로 인해 보이는 것이 별로 없는데 중앙고속도로가 지나가는 방향으로 희미한 실루엣과 함께 차량 소음이 굉장히 크게 귓전을 때리고 있다.

 

 

등로 좌측인 중앙고속도로가 지나는 방향으로는 칠곡군 가산면의 천평리 마을로서 지역이 샘이 있는 들판에 해당되므로 샘들 또는 천평이라고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인동군 석적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신기와 복곡 및 동면 하지 그리고 칠곡군 동북면 소흘의 일부와 선산군 장천면의 석적 일부를 병합하여 천평이라 하고 석적면에 일시 편입하였다가 1916년 가산면에 편입하여 오늘에 이른다.
천평리 동쪽에 가산(901.6봉)에서 뻗어 나온 연화 바위산 줄기가 있고 서쪽에는 유학산(839봉) 줄기가 있으며 그 사이로 한천이 북류하며 계곡이 점차 넓어진다.
국도 5호선(경북 대로)을 따라 자연 마을인 샘들(천평) 마을과 웃천평 마을이 있는데 샘들 마을은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 군위군 그리고 상주시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이다.

삼거리(하천평) 마을에는 가산면사무소가 있고 한천의 상류 쪽에는 웃천평 마을이 있으며 교육 기관으로 가산 초등학교가 있다.

여기에서 금천교를 건너면 가산면 금화리가 나오고 마을 곳곳에 경원 전자와 이오스 테크놀로지 등의 산업체가 산재하고 있다.

중앙 고속 도로가 한천을 따라 달리며 일반 국도는 삼거리 마을에서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 안동시를 잇는 국도 5호선과 대구광역시와 구미시를 잇는 국도 25호선(낙동 대로)으로 분기한다.

다시 나타나는 멋진 낙엽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좌측으로 우회 등로가 나 있는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하고 우측 잡목을 헤치고 봉우리로 오르니 그곳 정상이 바로 438봉 정상으로 금산이란 띠지도 보인다.

시간을 보니 벌써 오전 8시 30여분을 지나고 있어 이곳에서 준비한 김밥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출발을 하기로 한다.

 

 

20여분간 438봉에서 아침식사를 즐기고 다시 좌측 우회 등로로 따라 내려가니 멋진 활엽수 등로가 끝이나고 잠시 약간의 잡목지대가 나타난다.

잡목을 지나 다시 낙엽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무명봉을 지나 칼날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그 칼날 등로를 지나자 마자 간벌된 등로가 이어지는데 그곳에서 등로 좌측을 살펴보니 가산면 천평리 마을쪽으로 아름다운 단풍 능선이 펼쳐져 있다.

오늘 처음이자 마지막일지 모를 그 풍경을 사진에 담고 여유있게 걸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조망을 즐긴 후 간벌된 등로를 타고 노란색으로 변화하는 자연의 가을빛을 만끽해 본다.

등로 좌측으로는 가산면 천평리와 석우리쪽 마을이 내려다 보이고 그 사이에 있는 이름없는 작은 저수지도 보이는 그림같은 풍경들을 감상도 해 본다.

그렇게 가산면 마을을 바라본 후 등로 뒷쪽을 살펴보니 오늘 지나온 팔공기맥 마루금이 희미한 실루엣으로 다가온다.

그 마루금 좌측 저 멀리 보여야 할 가산은 박무로 인해 보이지 않아 아쉬운 마음으로 조금 더 바라보고 출발을 해 본다.

 

 

노란색으로 물들어 가는 활엽수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오르니 금새 374.1봉 삼각점에 도착을 하고 추억 몇장 남겨 본다.

가을빛이 짙어가는 마루금에서 잠시 나뭇가지 사이로 드러나는 충경을 살펴보지만 오늘 따라 조망을 방해하는 안개인지 박무인지 그것도 아니면 미세먼지 때문에 조망과 풍경은 전혀 즐길 수 없으니 그저 아쉬운 마음만 한가득이다.

물 한모금 마시고 그 374.1봉 정상을 출발해 여유를 느끼며 걸어 본다.

 

 

완만하게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약간의 조망이 열리지만 박무로 인해 여전히 시야가 제한되어 있다.

아쉬운 마음을 남기고 다시 노란색으로 물들어가는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화려하지는 않지만 가을 정취를 마음껏 즐겨보는 시간이다.

진행 방향으로 올려다 보이는 봉우리도 살펴보며 그렇게 걸어가니 금녕김씨 묘지를 지나 더욱 환상의 가을빛이 산객의 앞길을 밝히며 반겨준다.

 

 

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오르니 신선님의 응원안내판이 반겨주고 정상에 올라 여유롭게 진행을 하니 이곳 역시 노란 가을빛이 환상으로 펼쳐져 있다.

그 환상의 노란 가을빛을 따라 걸어가니 등로는 다시 간벌된 소나무 등로로 바뀌는데 생각보다 등로가 잘 정리되어 있어 진행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한동안 멋진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약간의 잡목지대를 통과한 후 경주최공과 전주이씨 합동묘지를 만나고 곧이어 몇기의 묘지지대를 지나  5번 4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갈비재에 도착을 한다.

갈비재는 일명 석우재라고도 불려지는 고개로서 5번 4차선 지방도로가 군위군 효령면과 칠곡군 가산면을 이어주는 고개인데 다함과 알프스모텔 그리고 S-OIL 주유소가 있지만 모텔은 문을 닫은지 오래되었는지 거미줄만 가득하다.

차량 통행량이 많이 조심하며 어렵게 4차선 도로를 건너 알프스모텔 입간판이 서 있는 콘크리트 옹벽을 넘어 올라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능선으로 오르니 짧은 계단 등로가 끝이나고 멋진 소나무 등로가 이어지는데 완만한 오르막 등로이다.

리끼다 소나무처럼 생긴 등로를 따라 오르니 소나무 아래에는 키 작은 잡목과 싸리나무가 자라면서 노란빛 가을색을 펼쳐 놔 환상의 등로를 만들고 있다.

생각보다 잘 나 있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즐기면서 진행을 하는데 시간을 보니 이곳 갈비재까지 6시간 조금 더 걸렸기에 오늘 산행 시간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기 시작을 한다.

 

 

계속 이어지는 소나무와 잡목의 고운 빛깔을 친구 삼아 완만하게 오르니 240봉 지나 약간의 잡목이 있는 등로로 변하고 있다.

큰 고도 차이가 없는 잡목 등로를 타고 전진하니 리끼다 소나무에서 토종 소나무 등로로 변하면서 간벌된 나뭇가지들이 등로에 나뒹굴고 있는 곳도 지나간다.

그렇게 한동안 진행을 하니 싸리나무가 자라고 있는 폐헬기장이라 생각되는 공터를 지나 효령재를 향해 진행을 하게 된다.

 

 

싸리나무 공터를 지나니 다시 멋진 소나무 등로가 나타나 진행에 큰 어려움 없이 걸어가고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무명봉을 넘어 두기의 묘지들이 줄지어 있는 장소도 통과를 한다.

다시 잡목이 있는 낙엽 등로를 따르니 무명 묘지 한기가 나타나고 그 묘지를 지나 내려가니 금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효령재에 도착을 한다.

효령재는 경북 군위군 효령면과 구미시 장천면의 경계로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그리고 구미시 장천면이라고 써있는 장승이 3개 서 있는 경상북도 군위군 효령면에 있는 장군리에 있는 고갯마루로서 효령재에 관한 상세한 자료는 찾지 못했지만 예전에 효령면의 소재지였다 하여 붙여진 마을이름에서 유래된 고갯마을 이름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장군리는 경상북도 군위군 효령면에 있는 산으로 둘러싸인 구릉성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작은 하천이 흐르며 장군당이 있으므로 장군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장군당, 웃장군댕이, 못안, 구효령, 찬샘골마을 등이 있는데 장군당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신라 때 김유신 장군을 모신 사당이 있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고 웃장군댕이마을은 장군당의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못안마을은 구을지라는 못이 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다.
구효령마을은 효령면의 소재지였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고 찬샘골마을은 찬샘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효령재에서 좌측 고갯마루로 올라가니 도로 우측으로 구미시 장천면이란 커다란 도로 표지판이 보이고 그 표지판 뒤로 들머리가 보인다.

장승 3개가 있는 그곳 구미시 장천면 도로 표지판 뒤로 오르니 이곳 역시 잘 나 있는 소나무 등로가 열리는데 조금 더 오르니 간벌된 나뭇가지들이 나뒹굴고 있지만 오래된 벌목지대인지 진행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한동안 여유있게 소나무 등로를 타고 오르니 우측으로 253.6봉 가는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좌측 등로를 타고 걸어 본다.

다시 멋진 소나무 등로를 따라 잠시 걸어가니 물은 말라 있지만 멧돼지들이 목욕을 하며 즐겼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말라 있는 물웅덩이도 지난다.

 

 

그 멧돼지 목욕탕을 지나 계속 이어지는 아름다운 소나무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홀로 힐링되는 듯한 묘한 기분에 빠져 드는 시간이기도 하다.

등로 좌측으로는 간벌 후 잘려진 나뭇가지들이 썩어 나뒹굴고 있지만 산행에는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

새로 식재된 듯한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구불구불한 일반 소나무 구간도 나타나고 그렇게 한동안 걸어가니 등로가 갑자기 좌측으로 빙 돌아 오르게 되어 있는데 살펴보니 정상부에 자라난 지독한 칡넝쿨로 인해 똑바로 오르지 못하고 우회하며 오르는 등로처럼 보인다.

너무나 힘들게 그 칡넝쿨 지대를 좌측으로 크게 우회하며 오르니 드디어 257.9봉에 도착을 하는데 정작 그곳에는 아무 표식도 없이 선답자들의 띠지만이 나풀거리고 있어 허망한 생각이 든다.

 

 

그곳 257.9봉 정상에서 사진 한장 남기고 등로 좌측을 살펴보니 박무속에 희미하게 명곡리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데 좁은 들판이 길게 이어지고 그 끝자락에는 중앙고속도로가 지나는지 굉장히 큰 차량소음이 가깝게 들리고 있다.

조망을 보고 다시 출발을 하니 좁은 잡풀 구간을 지나 무명봉을 통과한다.

그 무명봉을 지나니 소나무 밑둥이 검게 그을린 흔적이 보이기 시작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많은 소나무 밑둥이 검게 그을린 불난 흔적이 있는 지역이다.

다시 소나무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등로 좌측으로 잠시 조망이 펼쳐져 있고 둘러보니 명곡리마을과 좁은 들판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명곡리는 경상북도 구미시 장천면에 있는 마을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당시 수명동과 부곡동을 합치면서 수명동의 명 자와 부곡동의 곡 자를 합쳐서 명곡동이라 이름 붙였다.
북쪽은 농경지이고 남쪽은 산림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자연마을로는 가마실, 서당뜸, 솔방재, 수명동 등이 있다.
가마실은 명곡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며 부락의 모양이 가마솥 같이 생겼다 하여 가마실 혹은 가매실이라 부르고 한자로는 부곡동이라 한다.
서당뜸은 가매실의 동쪽 마을로 서당이 있었다고 붙여진 이름이고 솔방재는 가매실 남쪽에 있는 마을이며 솔개가 날아가는 모양이어서 그러한 동명이 붙었다.
수명동은 고개 아래에 있는 동네인데 맑고 깨끗한 물이 많이 솟아나는 곳이어서 수명동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명곡리 마을을 조망하고 다시 걸어가니 소나무 등로가 여전히 반겨주고 그렇게 한동안 진행하니 잡풀이 우거진 묘지 한기를 발견하곤 안타까운 마음이다.

이 높은 곳까지 올라 묘지를 썼으면 관리도 정성드려 했으면 좋으련만 비석은 멀쩡한데 방치되다 시피하여 이제는 묘지인지 조차 분간이 어려운 상황이 되어 있어 후손들이 부끄럽게 생각을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도 해 본다.

그 묵묘를 지나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갑자기 등로 좌측 소나무 사이에 백미러 하나가 걸려있어 피식 웃으면서 사진 한장 남겨 본다.

 

 

거울을 지나서도 계속 이어지는 소나무 등로가 반갑기만 하고 한동안 평이하게 걸어가니 바위 하나가 박혀 있는 소나무 무명봉에 도착을 해 주위를 살펴 본다.

그 바위봉을 지나니 넓은 등로가 이어지는데 등로 양쪽으로는 곧게 뻗어 있는 소나무들이 도열하듯 늘어서 인사를 건네고 있다.

기분 좋게 걸어가니 잡목이 있는 소나무 등로로 바뀌는가 싶더니 금새 잘 정리된 무명묘지 한기를 만난다.

그 묘지를 지나 이어지는 소나무와 잡목 구간을 지나 내려가니 작은 돌무덤이 있는 성황당 안부에 도착을 한다.

산행을 하면서 자주 만났던 성황당에 관한 자료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보인다.

마을의 수호신으로 서낭을 모셔놓은 신당 또는 성황당이라고도 하는데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에 원추형으로 쌓아 놓은 돌무더기 형태로 그 곁에는 보통 신목으로 신성시되는 나무 또는 장승이 세워져 있기도 하다.
이곳을 지날 때는 그 위에 돌 세 개를 얹고 세 번 절을 한 다음 침을 세 번 뱉으면 재수가 좋다는 속신이 있다.
서낭당은 서낭신을 모신 신역으로서 신앙의 장소로서 이곳을 내왕하는 사람들은 돌, 나무, 오색 천 등 무엇이든지 놓고 지나다녔는데 물론 그곳의 물건을 함부로 파거나 헐지 않는 금기가 지켜짐은 말할 나위가 없다.
서낭이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서 또는 석전에 대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도 있으나 민간에서의 서낭은 종교적 의미가 농후하다.
우리 나라에 서낭신앙이 전래된 것은 고려 문종 때 신성진에 성황사를 둔 것이 서낭의 시초라 하며 그 뒤 고려에서는 각 주부현마다 서낭을 두고 이를 극진히 위하였는데 특히 전주서낭이 유명하였다.
고려 고종은 침입한 몽고병을 물리치게 된 것이 서낭신의 도움 때문이라 하여 서낭신에게 신호를 가봉하였던 일도 있었다.
수호신으로서의 서낭은 조선시대도 널리 신앙되었는데 조선시대의 서낭은 국행서낭과 민간에서의 서낭으로 나누어지며 국행서낭은 호국이라는 두 글자를 붙였다.
이성계는 즉위 후 여러 산천의 서낭을 제사하였으며 태종은 백악서낭과 송악서낭을 신도서낭으로 모셨으며 그 밖의 조선시대의 이름난 서낭으로는 해주, 괴산, 현풍, 양산, 신성, 밀양, 전주, 고성서낭 등이 있었다.
이러한 서낭에서는 정기적인 제사뿐만 아니라 국난이나 가뭄이 있을 때 서낭제를 거행하여 국태민안을 기하려 하였다.

어릴적 시골에서 자라면서 이런 성황당을 많이도 만났고 무서워도 했던 기억에 피식 웃어 보는 시간이다.

 

 

성황당 안부를 지나 오르니 과수를 식재한 듯한 과수원을 만나는데 이제는 관리를 하지 않는지 유명무실한 장소로 변해가는 곳도 지난다.

그 잡풀지대를 지나니 다시 멋진 소나무 등로가 이어지고 소나무 등로가 지나니 나무가 식재된 듯한 공터가 다시 나타난다.

그 공터를 지나니 이번에는 목욕물까지 남아 있는 멧돼지 목욕탕도 지나 소나무 등로를 타고 375봉에 도착을 한다.

 

 

375봉을 지나면서도 아름다운 소나무 등로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지만 이제 체력적인 문제가 서서히 대두되면서 조금은 힘이 드는 시간이다.

아름다운 가을빛을 바라보며 걸어가니 등로는 다시 간벌된 나뭇가지들이 널부러져 있는 등로로 바뀌는데 산행을 진행하는데는 큰 지장이 없다.

큰 특징이 없는 평이한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묘지지대를 지나고 나무를 식재한 듯한 장소도 통과하면 또 다시 나타나는 소나무 등로가 보인다.

그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이번에도 말라 있는 물 웅덩이가 나타나는데 멧돼지들이 목욕을 즐겼던 흔적들이 이곳저곳에 남아 있고 그렇게 다시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이번에도 간벌된 나뭇가지들이 남아 있지만 진행에는 큰 어려움이 없는 등로가 이어진다.

 

 

다시 평이한듯 한 소나무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등로가 서서히 오르막 등로로 이어지고 그 등로에는 간벌된 나뭇가지와 바위들이 흩어져 있어 조금은 불편한 산행이 이어진다.

그렇게 잠시 오르막 등로를 타고 땀방울을 흘리니 드디어 334미터인 응봉산 정상에 도착을 해 추억 한장 남겨 본다.

응봉산(334봉)은 경북 군위군 효령면과 구미시 장천면의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 군위군청에 들어가 자료를 찾아 봐도 제대로 된 자료를 찾지 못할 정도로 인적이 닿지않은 그야말로 오지중의 오지에 있는 산으로 팔공기맥 산행을 위해 들리는 사람이 아니라면 등산으로 오를 일이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산이다.

 

 

응봉산 정상에서 준비한 간식으로 허기를 달랜 후 다시 배낭을 둘러메고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 본다.

이곳 역시 멋진 소나무 등로가 열려있고 잠시 내려가니 경주손공 묘지도 만나 통과하는데 상석이 묘지 앞이 아닌 옆으로 있어 특이한 풍경이다.

그곳을 지나 안부를 통과하고 조금 더 완만하게 오르니 드디어 중앙고속도로가 지나는 군위터널 위를 지나는데 제법 큰 바위들이 널부러져 있다.

군위터널은 경상북도 구미시 장천면 금산리와 군위군 효령면 내리리를 잇는 터널이지만 군위군 소재지와 더 가까우며 한국도로공사 군위지사에서 관리하는 곳이기 때문에 군위터널라고 이름 붙였는데 중앙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터널 길이는 상행 610미터에 하행은 468미터이고 폭은 각각 10미터이고 유효 폭은 8.6미터이며 높이는 6.7미터로서 상행과 하행 각기 2차선 차도로 이루어져 있다.다시 나타나는 멋진 소나무 등로를 타고 나즈막한 봉우리와 안부를 오르락 내리락 걸어가니 다시 안부를 지나 완만한 오르막 등로로 이어지고 간벌된 나뭇가지들이 널부러진 등로를 따라 올라 고속도로 터널을 완전히 통과하여 326봉에 도착을 한다.

 

 

여전히 이어지는 멋진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이곳부터는 잡목과 잡풀들이 조금씩 더 늘어나기 시작하고 그렇게 전진하니 예전에 비포장 임도였던 길이 묵으면서 잡풀이 무성하게 자란듯한 소나무 등로를 따른다.

멋진 소나무 등로를 지나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기온이 올라갔는지 온몸에선 굵은 땀방울이 흐르기 시작하고 곧이어 묘지를 지나 물이 말라있는 멧돼지 목욕탕도 지난다.

그곳을 지나 계속 오르니 이제는 등로 우측으로 중앙고속도로가 박무속에 내려다 보이고 조금 더 걸어 오르니 이곳 역시 불난흔적이 있는 소나무들이 보인다.

 

 

그 소나무 봉우리를 지나 안부로 내려가고 다시 묵묘가 되어 버린 묘지 하나를 통과하니 잠시 평이한 안부를 지난다.

그곳을 지나 다시 완만하게 오르니 43번 송전탑이 나타나고 그 송전탑을 지나 진행을 하니 잡풀이 무성한 비포장 임도 앞 저 멀리 올라야 할 312봉우리가 올려다 보인다.

등로에는 가을을 알리는 하얀 억새가 피어 바람이 불때마다 서걱거리며 울고 있다.

 

 

바위가 있는 312봉에 올라 남아 있는 과일과 간식으로 다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내려가니 소나무 등로가 나타나고 이곳에도 역시 물이 남아 있는 멧돼지 목욕탕이 나타나고 목욕한 흔적이 이곳저곳 남아 있다.

그 멧돼지 목욕탕을 지나니 멋진 비포장 임도가 이어지고 잠시 뒤 등로 우측으로 녹슨 철조망이 있는 등로를 따른다.

한동안 그 녹슨 철조망 등로를 지나 진행을 하니 46번 송전탑이 나타나고 곧이어 공사중인 장소가 보이는데 그 공사장 앞으로는 중앙고속도로가 내려다 보인다.

 

 

벌목지대로 나가 살펴보니 중앙고속도로를 건널 수 있는 지하통로가 벌목지대 우측 앞으로 버이고 그 바로 앞에는 작은 저수지도 내려다 보인다.

그리고 직진 앞으로는 시원한 중앙고속도로가 보이고 그 좌측 저 멀리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인 적라산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 풍경도 눈에 들어 온다.

잠시 벌목지대를 내려가니 김해김공 묘지를 지나 저수지 옆으로 내려가고 넓은 비포장 임도를 따라 지하통로를 통해 중앙고속도로를 건넌다.

지하 통로를 통해 고속도로를 건너 후 곧바로 공사중인 좌측 능선으로 올라 지나온 마루금을 살펴보니 박무속에서도 지나온 송전탑과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조망된다.

 

 

다시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 등로를 타고 오르니 잠시 잡풀지대를 지나고 몇기의 묘지들이 등로 우측에 보이는 등로도 지난다.

다시 오르니 간벌된 나뭇가지들이 보이고 조심해 진행을 하니 267.3봉에 도착을 해 잠시 물 한모금 마시며 쉬어 간다.

이제 날머리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인지했는지 몸은 점점 더 무거워지며 산행 속도가 나질 않는데 마지막 적라산만 오르면 되기에 조금 더 힘을 내 본다.

 

 

약간의 잡목이 섞여 있는 소나무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해평김공과 부인 합동묘지가 나타나고 그 우측으로도 몇기의 묘지들이 있는 장소를 통과한다.

이제부터 최근에 간벌된 듯한 간벌지대가 나타나는데 다행스럽게도 걸어가는 기맥 마루금은 말끔히 치워져 있어 진행하는데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

한동안 그 간벌된 등로를 타고 조금은 여유를 찾아 보는 시간이지만 역시나 마지막 적라산 오르막 등로가 힘들고 쉽지 않음을 읽었기에 여전히 조금은 부담으로 작용을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제법 긴 구간 그렇게 간벌된 지역을 지나는데 중간에 너무나 멋진 소나무 군락지도 통과해 본다.

한동안 걸어가니 간벌지역이 끝이나고 멋진 리끼다 소나무 군락지가 나타나는데 진행에는 전혀 어려움이 없어 기분 좋게 걸어 본다.

다시 간벌지역이 짧게 나타나고 증정부인 묘지를 지나 잡풀이 우거진 비포장 임도를 따르니 저 멀리 올라야 할 적라산 전위봉이 아주 가깝게 다가와 있다.

아직까지는 저 적라산 오름길이 그렇게 힘들고 어렵다는 사실을 모르고 룰루랄라 걸어 보는 시간이다.

 

 

여전히 이어지는 비포장 임도를 따라 걸어가니 앞으로 적라산과 그 줄기가 더욱 가깝게 다가오고 그렇게 한동안 걸어가니 등로는 직진의 비포장 임도를 버리고 우측 능선으로 이어지고 있다.

희미해지는 등로를 찾아 오르니 바위지대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한숨을 내몰아 수며 잠시 뒤돌아 보니 지나온 마루금이 박무속에서도 너무나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깨끗한 조망이였으면 더 좋았을 것을 아쉬움이 남지만 그래도 이렇게 지나온 추억을 바라볼 수 있음에 감사하는 시간이다.

 

 

그렇게 조망을 즐긴 후 오르니 이제 코가 땅에 닿을듯 가파라지기 시작을 하고 온 몸에선 굵은 땀방울이 쉴새없이 흘러내려 등로를 적시고 있다.

잠시 더 오르니 두꺼비를 닮아 있는 바위를 지나고 힘들게 한발 두발 걸어 오르니 드디어 적라산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까지 올라오는 등로가 오늘 산행 중 가장 힘들게 올라온 등로처럼 느껴진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곧바로 직진의 적라산 정상을 향해 출발을 한다.

 

 

적라산 오르막 등로는 갈림 삼거리까지 올랐던 등로에 비하면 고속도로이다.

약간의 바위 암릉구간을 넘으니 무명묘지 한기가 나타나고 그 묘지를 통과하면 또 다시 바위 암릉이 나타난다.

그 암릉을 지나니 드디어 소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 적라산 정상에 도착을 해 잠시 휴식을 취해 본다.

적라산(352.1봉)은 경상북도 군위군의 군위읍 무성리와 효령면 불로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352.1미터인데 지명은 군위의 이칭이기도 하며 조선시대에 한적산으로 기록되고 통용되었다.
관련 지명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군위에 한적산은 현 남쪽 15리에 있다라는 기록으로 처음 등장하며 유사한 기록이 여지도서의 군위에 나타난다.
이후 표기자의 변화 없이 해동지도의 군위에 한적산이 기재되다가 대동여지도에서는 일부 표기자가 변화되어 한적산으로 표기되었다.
1872년지방지도의 군위에는 현재의 산지명인 적라산이 기재되기 시작하였고 조선지지자료의 군위에는 적라산이 남면 중무동 남록에 있다는 기록이 있어 산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한국지명총람의 적라산에는 군위군 군위면과 효령면 및 선산군 장천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군위군의 옛 이름을 땄음이라는 기록을 통해 구체적인 산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적라산에서 남아 있는 간식으로 배를 채우고 다시 올라갔던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등로 우측 앞 저 멀리 강물이 보이고 살펴보니 팔공기맥 산줄기를 가르고 있는 위천이다.

저 위천이 낙동강과 만나는 합수점에서 이 팔공기맥 일명 위천북기맥도 마무리가 될 것이기에 위천의 의미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조금 더 깨끗한 조망으로 위천과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남는 시간이다.

 

 

다시 적라산 갈림 삼거리로 뒤돌아 내려 와 이제는 우측 오로고개 방향으로 내려가 본다.

바위가 있는 소나무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공사중인 거대한 다리들이 보이는데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보니 상주영천간고속도로 공사현장으로 2017년 개통을 목표로 공사중이란 자료를 찾는다.

희미한 박무속에서도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어 더욱 뜻깊은 시간으로 남겨 보는 순간이다.

 

 

그곳 멋진 소나무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이제부터 잡목의 저항이 심해지고 등로도 희미해져 제대로 된 등로를 찾아 내려가기 힘이 든다.

잠시 비포장 임도를 만나 가로질러 능선으로 들어가니 등로는 더욱 복잡해지고 잡목이 우거져 진행에 어려움을 겪는데 특히나 등로조차 희미해 제대로 된 등로를 찾기도 힘들다.

나중에 확인을 해 보니 정상 등로로 진행을 하지 못하고 중앙고속도로를 건널 수 있는 지하통로가 있는 방향으로 진행을 해야 하기 때문에 종주대 마음대로 등로를 만들어 진행을 한 듯 보인다.

 

 

그래도 이 산객은 먼저 다녀 온 선답자의 트랙을 다운받아 진행을 하고 있기에 그 트랙을 따랐더니 정상 등로를 찾아 헤매고 어렵게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중앙고속도로 위 시멘트 수로위에 도착을 한다.

어렵게 그 시멘트 스로를 타고 우측으로 걸어가니 좌측으로는 중앙고속도로를 통해 많은 차량들이 빠르게 달리며 내는 굉음이 귓전을 때리고 있다.

잠시 그 시멘트 수로를 타고 우측 아래로 내려가니 좌측으로 바로 중앙고속도로가 보이고 사진 한장 남긴 후 좌측 앞으로 보이는 철가공 공장 안으로 들어가며 진행을 한다.

 

 

철 가공 공장은 토요일인데도 작업이 한창이고 거지 몰골을 하고 힘겹게 걸어 들어가는 이 산객을 보고 이상하다는 듯 바라본다.

괜시리 미안한 마음에 빠르게 그 공장을 나와 만나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진행을 하니 도로 우측 뒤로 AT 면역사료공장과 또 다른 공장 건물 하나가 올려다 보인다.

원래 이곳은 정상 마루금이 아니지만 중앙고속도로가 생기면서 그 고속도로를 건널 수 없어 우회하는 등로이다.

 

 

공장지대를 빠져 나와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완만하게 내려가니 이곳도 가을이 깊어가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하얀 억새가 한들거리고 예쁜 가을 야생화가 반겨주는 도로를 타고 내려가니 중아고속도로를 통과 할 수 있는 2차선 포장도로가 나타나고 그 도로를 타고 중앙고속도로를 통과한다.

고속도로를 통과하면 지나자마자 지하통로 좌측으로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타나느데 원 마루금은 그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 들어가 절개지 상단에서 우측 마루금을 타고 178봉을 넘어 해피아일랜드 골프클럽 방향으로 내려와야 되지만 특별한 봉우리도 없기에 그곳 등로를 포기하고 그냥 2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오로고개 방향으로 진행을 한다.

 

 

계속 이어지는 2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오로고개 방향으로 오르니 도로 좌측으로 종국이두마리치킨 광고판이 있는 건물을 지나고 곧이어 도로 우측으로 무량사 들어가는 도로 표지판을 지나 해피아일랜드 골프클럽 정문이 있는 곳에 도착을 해 만세를 불러 본다.

이곳에서 준비해 간 군위 개인택시에 전화를 하니 전화를 받지 않아 전위 콜택시에 전화를 하니 곧바로 답이 돌아 오고 10분 이내에 도착을 한다는 소식이다.

택시를 기다리며 오로고개로 조금 더 올라가 다음 구간 산행 들머리를 확인하고 해피아일랜드 골프클럽 정문으로 다시 내려 와 배낭 정리하고 있으니 택시가 도착을 한다.

오로리는 경상북도 구미시 장천면에 있는 대부분이 산지로 경지는 거의 없는 마을로서 자연마을로는 뚱절, 새마, 설곡, 오류실, 미륵당 등이 있다.
뚱절은 중평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부락이 커다란 밭뚝(밭둑)에 있고 뒷산이 절벽 같아 뚝절이라 부르던 것이 변음되어 뚱절로 불리고 있고 새마는 장구미기, 설골, 오로실에서 흘러내린 물이 합수하는 중간 평야에 있는 마을이므로 붙여진 이름이며 중평이라고도 한다.
설곡은 중평의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임진왜란 전에 설씨가 중심을 이루고 살았던 곳이라 해서 설곡이라 불리게 되었고 일제강점기 때에 설곡으로 바뀌었다.
오류실은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오금리에서 살던 노은 박준이 이곳에 피난와서 살게 되면서 고향을 그리워하여 고향 동리명 첫 글자와 자신의 호 첫 글자를 따서 오로실이라고 동네 이름을 지었다.
선생의 현손 5형제가 동네 입구에 느티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었고 동구의 다섯 나무 때문에 동네 이름이 오류실이라 불린다.
미륵당은 마을 뒤에 미륵불이 있어서 생겨난 동명이며 지금도 경북문화재자료 332호로 지정된 미륵당 석조 미륵입상이 보존되고 있어 불당리 또는 신기라 부르기도 한다.

 

 

다음 구간 올라야 할 산행 들머리까지 확인을 했으니 이제 마음이 놓인다.

오로고개는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 수서리에서 구미시 장천면 오로리를 이어주는 67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고갯마루로서 주위에는 중앙고속도로와 해피아일랜드 골프장이 있다.

택시를 타고 군위읍으로 가면서 목욕탕을 알아보니 목욕탕은 군위읍 초입에 있고 버스 터미널은 제일 마지막에 있어 그 거리가 제법 길다는 소식에 차표가 걱정이 되어 저녁 5시 30분 발 서울행 버스표를 확인하려 하니 택시 기사님이 차표 직원에게 전화를 해 버스표 하나를 예약해 준다.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목욕탕에 들려 샤워를 한 후 걸어 버스 터미널에 도착을 하니 저녁 4시 50여분을 지나고 있고 제일 먼저 표를 구입한 후 터미널 옆 식당에서 돼지국밥 한그릇으로 허기를 달랜 후 우등 버스에 올라 서울 도착까지 깊은 잠에 빠져 본다.

 

다음에 내려가 걸어야 할 종주대들도 대중교통을 이용해 다녀와도 큰 어려움이 없을듯 하며 효령재까지 7시간 이내에 도착을 할 수 있다면 여유롭게 진행을 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다.

다만 조금 더 시간이 지체된다고 해도 13시간이나 13시간 30분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예상되며 그것이 부담이라면 서울에서 출발하는 시간을 30여분 당겨 내려가면 좋겠다는 예상을 해 본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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